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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경임 논설위원입니다.

woohaha@donga.com

취재분야

2025-01-18~2025-02-17
칼럼100%
  • [횡설수설/우경임]‘전세사기’ 반지하에 묶여 잠 못드는 피해 청년들

    “불안하지만 별수 있나요. 그저 버틸 수밖에요.” 동아일보가 장마철을 앞두고 전세사기 피해 건물을 돌아봤더니 임대인이 잠적해 방치된 탓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한 건물이 수두룩했다. 전국적인 전세사기 피해가 공론화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 보증금을 떼이고 빚더미 수렁에 빠진 피해자는 하루하루를 정말 어렵게 버티고 있다. 지긋지긋하지만 집을 떠날 수도 없다. 피해자 대다수가 관리되지 않는 부실 건물에서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인천 계양구 하모 씨의 반지하 집은 문을 열면 복도에 물이 찰랑거린다. 하루 3번 펌프를 돌리며 버티고 있다. 그는 전세사기로 보증금 8000만 원을 떼이고 투잡, 스리잡을 하며 빚을 갚고 있다. 돈이 드는 수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부산 수영구 정모 씨는 오피스텔 현관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놓고 산다. 지난해 장마 당시 배수시설이 미흡해 물이 넘쳤던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다. 그 역시 대출금을 고스란히 날리고 갈 곳이 없어 버티고 있다. 전국 곳곳에 소방관로가 터졌거나 외벽 마감재가 떨어졌는데도 임대인이 잠적해 관리가 중단된 건물이 있었다. ▷5월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는 1만6606명이고, 이들의 10명 중 7명은 2030 청년층이다. 사기를 당한 것도, 그래서 집주인 빚을 떠안은 것도 억울한데 누수, 균열, 승강기 고장 등 건물 관리 부실의 피해까지 감내하고 있다. 전세사기 전국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 절반 이상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번진 것은 제도적 맹점을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다가구의 경우, 등기부 등본을 봐도 선순위 대출이나 다른 전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전세보증보험도 허술하게 관리돼 피해를 키웠다. 나태한 행정으로 전세사기를 방치한 정부가 장마철 홍수 피해가 걱정되는 위험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17개 시도 중 피해자가 사는 건물에 대한 실태조사가 일부라도 이뤄진 곳은 5개 시도뿐이었다. ▷사회에 갓 진출한 2030 청년들이 저축을 깨고 대출을 받아 마련한 집이었다. 그 집은 이제 ‘전세 지옥’이라고 불린다. 반지하나 옥탑방을 벗어나 그저 조금 햇빛이 잘 들고 깨끗한 보금자리를 꿈꾼 대가로서는 너무 가혹하다. 피해자들은 “승강기, 소방시설, 전기 설비 등의 안전 관리를 지자체가 지원해 주거나, 비용 보조를 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혹시 무너질까, 물이 넘칠까 하는 걱정에 피해자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지 않도록 지자체가 최소한 시설 안전만큼은 지원에 나섰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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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SNS에도 술·담배처럼 경고문 붙여야

    올해 1월 미국 상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아동 성 착취물 확산에 대한 빅테크의 책임을 추궁하는 청문회를 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방청석을 향해서 “누구도 겪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날 방청석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우울증이 유발돼 자살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앳된 모습의 자녀 사진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었다. 기절할 때까지 숨을 참는 ‘블랙아웃 챌린지’ 영상을 찍다 사망한 자녀를 둔 부모도 있었다. 울음을 삼킨 채 방청석을 지킨 부모들은 SNS가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침묵으로 증언했다. ▷2010년대 들어 미국에선 10대 청소년의 우울, 불안, 자해가 급증했다. SNS가 대중화된 시기와 일치한다. SNS의 위험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며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미국 공중보건 최고책임자인 비벡 머시 의무 총감은 17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술과 담배처럼 SNS에 청소년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경고를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주치의’로 불리는 의무 총감의 이 같은 발언은 빅테크에 아동 보호 책임을 부과하는 법안 통과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청소년 정신 건강도 응급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그 원인 중 하나로 SNS가 지목된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우리 청소년 10명 중 7명이 SNS를 사용한다. 청소년기는 전두엽이 완성되지 않아 충동이나 감정 조절에 미숙하다 보니 SNS의 부정적인 영향이 극대화된다. 하루 3시간 이상 SNS를 사용하는 청소년은 우울증, 불안과 같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두 배로 늘어난다. 또래 압력에 취약해 마른 몸을 동경하며 거식증을 앓거나, 자해나 자살 같은 유해 콘텐츠에도 쉽게 중독된다. ▷3년 전 메타가 10대 여학생들에게 인스타그램이 악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내부 연구 보고서를 은폐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사실이 내부 고발로 폭로됐다. 청소년 정신 건강에 덜 해로운 알고리즘 모델을 적용하면 이용자 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는 미국 42개 주가 메타를 대상으로 ‘청소년 중독을 유도하도록 설계했다’며 소송에 나선 배경이 됐다. ▷SNS를 끊을 수 없는 건 개인의 의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알고리즘 탓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빅테크들이 돈벌이를 포기하고 스스로 알고리즘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머시 의무 총감은 “자동차 사망 사고가 늘자 안전벨트를 도입했던 것처럼, SNS에도 안전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SNS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할 방안을 공론화할 때가 됐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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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갈수록 ‘수포자’도 늘고 ‘국포자’도 늘어서야

    요즘 입학 대기 줄이 가장 긴 학원은 독서·논술 학원이다. 국어는 사교육비가 두 자릿수씩 증가하는 과목이기도 하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데도 문해력이 떨어지는 ‘국포자’(국어를 포기한 자)가 늘고 있어서다. 상수나 함수 같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를 만들기도 한다. 17일 발표된 지난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선 학생 10명 중 1명이 ‘국포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실시되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중3, 고2 학생을 대상으로 국어, 수학, 영어 과목별 기초학력 도달 여부를 측정하는 시험이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것이라 문제 자체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국어라면 비유법에 해당하는 문장을 고른다거나, 수학이라면 기본적인 인수분해를 하는 정도다. 따라서 ‘기초학력 미달’에 해당한다면 교실에 앉아 있어도 아예 수업을 이해 못 한다고 보면 된다. 그 위 단계로는 기초→보통→우수 학력 순으로 나눈다. ▷특히 고2 학생의 기초학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국어 8.6%, 수학 16.6%를 기록했다. 표집 조사가 시작된 2017년 이후 가장 높았다. 중3 학생은 국어, 수학, 영어 모두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약간 줄긴 했지만 덩달아 보통학력 이상인 중상위권 학생도 급감했다. 기초학력이 개선됐다기보다 하향 평준화에 가깝다. ▷교육 당국은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늘어난 건 코로나19 유행 동안 학교가 문을 닫은 탓이 크다고 분석한다. 그 기간 사교육 참여 시간, 스마트폰 사용 시간, 학습 공간 확보 등 개인적인 환경에 따라 학력 격차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지나가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음에도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되레 늘어났다는 점이다. 학교가 ‘코로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교육 사다리를 재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코로나 세대’의 학력 격차가 평생에 걸친 직업과 소득 격차로 이어질까 봐 우려스럽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이 학업성취도 평가를 시행한다. 학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진단해야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처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를 하고 학교별, 과목별 점수뿐만 아니라 성별, 인종별, 부모의 소득에 따른 점수까지 공개한다. 이 점수가 낮은 학교일수록 예산을 더 지원해 코로나19 학력 격차 해소에 나서고 있다. 국내서는 학업성취도 평가를 두고 ‘학교 줄 세우기’라는 교육계의 거부감이 큰 탓에 전국 학생의 3%만 표집 조사를 한다. 사실상 학교 간 비교는 불가능해 맞춤형 지원이 이뤄질 수 없다. 경쟁을 터부시하며 무기력증에 빠진 학교부터 바뀌어야 ‘국포자’ ‘수포자’ 학생도 줄어들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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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는 의대 증원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오늘과 내일/우경임]

    전국 의대와 의학전문대학원 40곳이 내년도 모집 요강을 발표하면서 의대 증원 절차가 사실상 마무리됐다. 그간 의료계가 ‘파업 카드’를 살짝 꺼내 들기만 해도 무산됐던 의대 증원이 27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정부는 정말 의대 증원에 성공한 것일까. “조속히 논의” “우선적 추진” 같은 타성에 젖은 관료적 언어만 들리는 걸 보면, “의료 파국은 정해진 미래”라는 의료계 예언이 실현될까 두려워진다. 2000년 의약 분업도 ‘반쪽 개혁’ 끝나 의대 증원처럼 의료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단행한 의료 개혁이라고 한다면 의약 분업이 있다. 2000년 7월 의약 분업 시행을 앞두고 의료계는 파업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의료 대란 와중에 의약 분업이 전격 도입됐고 환자들은 병원에 가면 의사가 없고, 약국에 가면 약이 없는 상황을 견뎌야 했다. 제도 안착 과정에서 혼란이 커지자 정부는 의약계를 번갈아 달래야 했고, 결국 원안과는 다른 ‘반쪽 개혁’이 됐다. 24년 전 의약분업은 약품 오남용 예방, 약제비 절감, 의약품 유통 구조 정상화 등을 목표로 했다. 의약분업이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의료 행태를 정착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당초 목표 달성에는 미흡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약 복용량이 많고, 의약품 유통 구조도 후진적이다. 병의원엔 진찰료를 올려주고, 약국엔 조제료를 신설해주다 보니 이듬해 건강보험 재정 지출이 폭증했다. 의대 증원은 의료 시스템 수술이 뒤따르지 않으면 ‘반쪽 개혁’ 정도가 아니라 퇴보로 끝날지도 모른다. 이미 의대 교육의 부실, 전공의 공백으로 인한 의사 수급 체계의 고장 등 의료 체계의 대혼란이 예고됐다. 의약분업 이후처럼 의료비도 증가할 수 있다. 의료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 늘어난 의사들이 필수-지역 의료로 가지 않고 지금처럼 서울에서 피부 시술이나 통증 치료를 한다면 결코 국민 의료비 부담이 줄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필수-지역 의료로 의사를 유인할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필수 의료에 대한 보상을 강화한다지만 무슨 예산으로, 어떻게 원가를 보상할 것인지 구체적인 밑그림이 없다. 지역 인재가 지역에 정주할 대책도 없다. 최근 경상국립대가 졸업 후 10년간 지역에서 일하도록 하는 지역 의사 전형을 신설하려다 보류했다. 현행법상 관련 규정이 없어서였다. 전투에서 이기고 의료 개혁 전쟁서 질라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중증-필수 의료에 대한 보상 강화, 의료전달체계의 정상화, 전공의 수련 국가 책임제, 의료사고 안전망 강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모두 우리 의료 시스템의 오래된 숙제고, 이미 해법이 나와 있는 사안이다. 정부는 2, 3년마다 의료계와 협의체를 만들어 이를 논의했지만 과감한 재정 투입이 필요하거나, 국민을 불편하게 만들어 표심을 등질 정책이라 여태껏 미뤄 왔을 뿐이다. 의사들은 의료개혁특위를 두고도 “병원 이용을 제한하면 다음 선거에 질지도 모르는데 의료 개혁이 되겠냐”며 시큰둥하다. 정부는 의료 공백 사태 동안 경증 환자가 응급실을 찾지 않고, 대학병원의 전공의 의존도가 줄어들자 ‘의료 정상화’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의료 시스템이 비정상이었고, 이를 방치해 왔음을 자인하는 셈 아닌가. 이번만큼은 요란스럽게 대책을 발표하고는 정권이 바뀌면,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 없던 일이 되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의사를 늘려 놓고 의료 개혁을 실기한다면 우리 의료 시스템은 정말 망가진다. 의대 증원 그 이후가 진짜 의료 개혁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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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연금 개혁’ 국회 아닌 대통령이 하면 된다

    국민연금 개혁안을 논의하던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문을 닫은 셈이 됐다.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21대 국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조급하게 하기보다 더 충실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언급했고 막판 여야 합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1년 10개월 동안 공전을 거듭한 국회 연금특위는 무용론이 나올 정도다. 보험료율(내는 돈)을 13%까지 올리는 데는 합의했으나 소득대체율(받는 돈)을 43%로 올릴지, 45%로 올릴지를 두고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단 2%포인트 차이. 그래도 여야 의견이 이렇게 근접한 적이 없었다. 극적 타결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지만 대통령 기자회견 이후 여야 협상이 중단됐다. 과거 연금 개혁 과정에선 정부가 엑셀을 밟고, 국회가 브레이크를 걸곤 했는데 이번엔 야당이 “재를 뿌렸다”고 반발했다.개혁 구호만 있고, 의지는 안 보여 이제 연금 개혁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진의가 헷갈린다. 2022년 2월 여야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대통령은 “정권 초기에 이걸(국민연금 개혁) 해야 한다”고 했고, 대선 공약으로는 “대통령 직속 공적연금개혁위원회를 설치해 연금 개혁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지금껏 어느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런 비판 탓인지 기자회견에선 “임기 내 국회가 고르면 될 정도의 충분한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약속드렸고 지난해 10월 말 공약을 이행했다”고 했다. 24개 시나리오를 담은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지칭한 것이라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의 발언 그대로 “6000쪽에 가까운, 책자로 30권 정도의 방대한 자료”일 뿐이었다. 역대 정부마다 연금 개혁이 실패한 것은 고양이 방울이 아니라,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사람이 없어서였다. 국회 연금특위에 참가한 한 전문가는 “이번 연금개혁만큼 온 우주가 응원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2018년 8월 문재인 정부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 각각 ‘11%-45%’, ‘13%-40%’인 두 개의 초안을 내놓았다. 여론이 들끓었고 연금 개혁은 없던 일이 됐다. 역대 정부마다 이처럼 연금 개혁 실패가 반복되자 연금기금 재정 고갈에 대한 국민적 학습이 이뤄졌다. ‘더 내는 안’에 대한 저항도 줄었다. 야당과 노동계가 보험료율 4%포인트 인상에 동의한 것은 상당한 진전이다.완벽한 개혁이냐, 신속한 개혁이냐 국회 연금특위안은 재정안정성 측면에서 분명 결함이 있다. 연금기금 소진 시점을 지금보다 8년 늦출 뿐이고, 재정 적자 감축 폭도 적다. 대통령이 우려한 대로 최소 70년을 끌고 갈 계획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국회에 사회적 합의를 의뢰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연금 개혁안을 제출하면 된다. 꺼져 가는 개혁의 불씨도 살릴 수 있다. 대통령 임기 내내 여소야대 정국일 텐데 다음 국회로 미룰 이유가 있나. 만약 정부안을 따로 낼 생각이 없다면, 남은 2주 동안 국회가 연금특위안을 합의해 처리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완벽한 개혁을 할 수 없다면 신속한 개혁이 차선이다. 이번에 보험료율을 13%로 올린다면 26년 만의 첫 인상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전부 은퇴하기 전에 보험료율을 올려야 연금 기금 적립액을 늘릴 수 있다. 이번에도 실기하면 선거 일정을 감안할 때 최소 2, 3년은 그냥 흘러갈 것이다. 윤 대통령은 14일 “개혁은 적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정부로선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 개혁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는데 연금 개혁까지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 부담일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개혁 과제 중 연금 개혁만큼 진척된 과제는 없다. 이조차 결단을 망설인다면 다른 개혁은 정말 수사(修辭)로 끝나고 만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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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4년 만에 재등장한 ‘디지털 교도소’

    주로 성범죄자 신상 공개로 응징에 나섰던 웹사이트 ‘디지털 교도소’는 2020년 n번방 사건으로 사회적 공분이 일던 당시 개설됐다. 협박에 시달리다 성착취물을 찍게 된 여성들은 얼굴을 가리고 숨어 지내며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성착취물을 제작, 유포 또는 구매한 범죄자들은 버젓이 거리를 활보했다. 도대체 법은 어디 있느냐는 여론이 들끓었고 이를 계기로 등장한 것이 디지털 교도소다. ▷디지털 교도소는 무고하게 신상이 공개된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엉뚱한 피해자가 생겨나자 폐쇄됐다. 그런데 4년 만에 다시 문을 열어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부산 유튜버 살인사건 피의자, 여자 친구를 살해한 의대생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추가 제보를 받는다고 한다. 범죄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처벌인 신상 공개를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겠다고 주장하지만 댓글을 통해 피해자의 신상이 유포되는 등 이미 그 부작용이 크다. ▷요즘 온라인에선 사적 제재를 다룬 콘텐츠가 넘쳐난다. 피해자는 보호하지 못한 채 가해자에게만 관대하다는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을 양분 삼아 확산되고 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의 개인 신상을 공개하는 등 언론에 보도된 범죄자의 신상을 낱낱이 공개한 일도 있었지만, 소액 사기범을 추적하거나 불륜 배우자와 그 상대를 찾아다니며 낙인을 찍기도 한다. 주차 악당이나 난폭 운전자 등도 쉽게 마녀재판에 오른다. ▷법이 주먹보다 멀고, 느린 건 인간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범죄 사실을 돌다리 두드리듯 검증해야 억울한 누명을 쓰는 피해자를 줄일 수 있다. 대전 교사 사망 사건에서 악성 민원 학부모의 신상이 공개되자 상호만 같은 다른 가게가 망할 뻔했다. 즉각적인 심판과 응징은 속은 후련하겠지만 엉뚱한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 특히 사적 제재가 돈벌이가 되면서 양산되는 측면이 있다. 최근 마약 운전으로 행인을 친 롤스로이스 뺑소니 사건 가해자에게 신상 공개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3억 원을 챙긴 유튜버가 구속됐다. 4년 전 디지털 교도소 운영자는 암호화폐로 후원을 받았다. 공익을 앞세웠던 그는 사실 성범죄에 연루된 마약 사범이었다. ▷교도소는 형량을 채우면 나올 수 있지만, 디지털 교도소에 신상이 공개되면 영원히 갇히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묻지 마 범죄로 인생이 무너진 피해자들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싶다. 국민 법 감정과 거리가 있는 낡은 양형 기준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사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자의적 기준에 따른 신상 공개는 의도와 달리 2차 피해를 부를 수 있는 범죄 행위다. 개인적인 단죄가 범람하면 우리 사회가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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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세 살 조기교육 아홉 살까지만 간다

    조기교육 나이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4세 고시’를 보면 알 수 있다. 4세 고시는 유명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한 레벨 테스트. 의대 입학이라는 종점을 향한 달리기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알파벳 읽고 쓰기, 간단한 영어 회화 등이 출제되다 보니 늦어도 3세부터 영유 입학을 위해 프렙(Prep·준비)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아야 한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초1 자녀 학부모 1만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0∼4세에 영어 사교육을 시작했다는 응답이 15.9%나 됐다. 국어는 15.4%, 수학은 13.3%였다. ▷세 살에 배운 영어, 수학 평생 갈까. 그런 믿음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팀이 유치원 입학 전 조기교육을 연구한 기존 논문들을 리뷰했더니 단기적으론 학업 성과가 올라갔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다. 미 테네시 유치원 조기교육에 참여한 3∼5세 유아들은 초등 3학년(9세)까지만 읽기, 쓰기 등에서 대조군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미 정부 유아 교육 프로그램 헤드 스타트(Head Start)에 참여한 3, 4세 유아들 역시 초3부터는 더 나은 학습 성취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를 설명하는 용어가 ‘페이드 아웃(fade-out)’ 효과다. 알파벳, 구구단 외우기 같은 인지적인 학습은 반복 훈련으로 금세 효과가 나타난다. 일찍 사교육을 받은 아이가 천재 소리를 듣는 이유다. 그런데 누구나 알파벳, 구구단을 외우는 나이가 되면 선행 학습의 효과는 빠르게 사라진다. ▷조기교육이냐, 적기 교육이냐. 교육계의 오래된 논쟁은 뇌과학이 발달하며 적기 교육으로 기울고 있다. 유아기엔 인성과 사회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발달하고, 초등학생 시기엔 언어를 담당하는 측두엽과 수학 등 논리를 담당하는 두정엽이 발달한다. 그래서 4∼7세 시기에는 인지 능력보다 정서 능력을 자극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앞선 논문에서 다룬 미 테네시 유치원 유아들의 경우, 학습적인 측면에서 조기교육의 긍정적 효과는 자라면서 사라졌다. 반면 학교에서 징계를 받는 등 사회성 측면에서 부정적 효과가 관찰됐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에게 전력 질주를 시켜봤자 소용없듯이 영유아기 과도한 학습은 오히려 뇌 발달에 해로울 수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 조기교육으로 단련돼 이른 나이에 재능을 꽃피우는 ‘천재 신화’를 동경한다. 하지만 마흔 넘어 첫 소설을 낸 고 박완서 작가나 시인을 꿈꾸며 고교 중퇴를 했다가 39세에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 등을 보라.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아이의 인생을 일찍 완성하려는 부모의 조바심이 자칫 아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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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필수 의료’ 붕괴의 또 다른 주범, 실손보험

    “실비(실손의료비 보험) 있으세요?” 동네 병원에 가면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꼭 묻는 말이다. 실손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자기부담금과 비급여 진료비를 보상해준다. 허리가 아플 때 받는 도수치료, 감기에 걸렸을 때 맞는 수액주사 등이 바로 비급여 진료다. 환자로선 실손보험이 없으면 치료의 질이 달라지는 건지, 돈이 안 돼서 반갑지 않단 건지 영 껄끄러운 질문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실손보험이 필수 의료 기피 현상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보고 개선을 논의한다고 한다. ▷건보가 가격을 정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는 병원이 부르는 게 값이다. 가격이 비싸면 수요가 줄기 마련이지만 의료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국민보험이 된 실손보험 때문이다. 실손보험 가입자 수는 2010년 2080만 명에서 2022년 3997만 명으로 늘었다. 그 사이 비급여 진료비는 32조 원으로 거의 두 배가 됐다. 건보가 부담하는 급여 진료비보다 환자 개인이 내는 비급여 진료비가 빠르게 늘어난 결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개인 의료비 부담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힌다. ▷실손보험이 창출한 고가의 비급여 시장은 필수 의료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소득과 워라밸 격차가 점점 벌어지면서 응급실과 수술실에서 사명감으로 버티던 의사들 중 상당수가 자괴감을 느끼고 개원을 선택했다. 2020년 진료과목별 연간 평균 임금을 보면 안과 의사 4억5837만 원, 정형외과 4억284만 원, 재활의학과 3억7930만 원 순이었다. 모두 실손보험에 기대 비급여 진료를 많이 하는 진료과목인데 의료비가 비싼 미국 의사보다 수입이 높다고 한다. ▷건보는 빈약한 재정에서 출발했다. 그렇다 보니 급여 보장 항목이 적고, 진료비는 원가에 못 미치도록 설계됐다. 병원은 ‘3분 진료’로 환자를 많이 보거나 비급여 진료를 늘려 이런 손해를 벌충해 왔다. 정부가 메스를 대려는 혼합진료가 대표적이다.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 의사로부터 진찰받고, 급여 물리치료와 비급여 도수치료를 섞어 받는 것이 혼합진료이다. 이를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데 개원가에선 의대 증원보다 더 반발 강도가 세다. ▷비급여 진료 시장은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가 만들어 낸 시장이다. 보험업계는 도수치료, 렌즈 삽입 백내장 수술 등을 보상하는 상품을 출시해 경쟁적으로 가입자를 늘려 왔다. 이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겨 과잉 진료를 하지 않는 의사나, 의료 쇼핑을 하지 않는 환자는 바보가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실손보험을 이대로 두면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 얼마나 불어날지 알 수 없다. 서둘러 바로잡지 않으면 필수 의료를 살리겠단 의대 증원의 효과도 반감될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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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의료 공백 탓이 아닌가[오늘과 내일/우경임]

    전공의 집단 사직 당시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보건의료 재난위기경보 ‘심각’을 발령했고 대한의사협회는 “의료 대재앙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료 공백 사태 두 달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 사회는 예상보다 조용하다. 그 사이 응급실을 표류하다 사망한 환자가 여럿이다. 11일에는 부산에 사는 50대 심혈관 질환자가 병원 10곳 이상에서 응급실 수용을 거절당한 끝에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충북 보은군에서 도랑에 빠진 3세 여야와 충북 충주시에서 전신주에 깔린 70대 여성이, 그보다 한 달 전에는 대전에서 80대 심정지 환자가 병원마다 이송을 거부당했다. 그리고 사망했다. 신문에 보도된 사례만 추렸는데 이렇다. 정부도, 의사도 “전공의 이탈 탓 아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전공의 이탈로 응급실 수용이 어려웠다며 울분을 토했다.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팽팽히 대치하던 정부와 의료계가 “전공의 이탈 탓이라 볼 수 없다”며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정부는 매번 전공의 이탈의 영향을 조사하겠다고 했지만, 공식적으로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없다. 의료계는 “이송이 됐더라도 살릴 수 없었던 환자”라고 주장한다. 정부와 의사가 ‘당연한 죽음’이라는데 환자가 이를 뒤집을 방법은 없다. 부산, 대전까지 의료 취약 지역이라 봐야 하나 싶지만, 지역일수록 응급 의료가 열악한 것은 사실이다. 수도권 대학병원보다 지역 중소병원이 전공의 비율이 낮아 이탈의 영향이 덜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죽음에 정말 의료 공백의 영향은 없는 것일까. 응급실이야말로 싼 인건비로 야근시킬 전공의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구조다. 가뜩이나 열악한 지역 의료 시스템에 전공의 이탈로 과부하가 걸렸을 수도, 응급 환자의 마지막 보루인 수도권 대학병원들이 응급실을 축소해 이송받을 여력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정부나, 의료계나 이런 가능성은 배제한 채 어쩔 수 없던 일이라고 한다. 환자들의 증언은 정부나 의료계의 주장과는 다르다. 15일 김성주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에게 A중소병원에 입원 중인 만성 신부전증 환자의 전화가 걸려 왔다. 혈액 투석에 문제가 생겼다며 대학병원에 가라고 하는데 진료받던 B대학병원에선 전공의가 없다며 응급실서 받아주질 않는다고 했다. 이 병원에선 나가라고, 저 병원에선 오지 말라 한다며 울먹였다. 김 대표는 전공의가 없어 수술이 밀렸다는, 입원이 안 된다는 전화를 날마다 받고 있다. 통계도 환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소방청에 따르면 전공의 이탈 이후 119구급차가 응급실까지 갔다가 수용을 거부당한 재이송 사례가 평소의 2.5배 수준으로 급증했다. 의료 공백 사태의 책임을 피하고 싶은 정부는 의료 체계에 탈이 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의료계는 행여 의대 증원의 필요성이 부각될까 응급실은 무탈하다고 강변한다. 언제는 세계 최고 의료라더니 사실은 응급실을 표류하다 죽는 일이 일상이라고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고작 숫자를 두고 정부와 의사들이 힘겨루기 하는 사이 환자들은 “살려 달라”고 절규한다. 전공의는 복지부 차관을 고소했지만, 의사에게 생명을 맡긴 환자들은 치료에 차질이 생길까 의사를 고소할 수 없다. 아픈 몸을 이끌고 시위를 할 수도 없다. 치료 시기를 놓쳐 죽은 환자는 더욱이 말이 없다. 오늘의 환자 희생 강요하는 내일의 개혁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의료 개혁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의료계 반응은 싸늘하다. 극적인 해결을 고대했던 환자들은 또 절망했을 것이다.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도, 무조건 철회만 외치는 의료계도 “환자를 위해서”라고 한다. 내일의 환자를 위해 오늘의 환자는 희생당해도 되는가. 우리 사회 강자끼리 싸우는 동안 정작 약자인 환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다. 의료 공백은,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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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따로 자야 금슬 좋다” 수면이혼 유행

    “나는 내 방에서 잔다. 남편은 남편의 방에서 잔다. 그 사이에 둘이 같이 쓰는 침실이 있다.” 2015년 음악가 벤지 매든과 결혼한 할리우드 배우 캐머런 디아즈는 남편과 각방을 쓰는 사실을 고백해 화제가 됐다. 그는 부부가 각방에서 자는 이른바 ‘수면 이혼’이 “수면의 질을 높이고 부부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고 했다. 코를 골거나 잠버릇이 심한 배우자를 억지로 참고 자느니 침대나 침실을 분리해 따로 자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에서 수면 이혼이 유행한다고 5일 보도했다. 미국 수면의학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성인 남녀 3명 중 1명은 수면 이혼 상태였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이 비율이 높아 밀레니얼 세대에선 43%에 달했다. 이어 X세대의 33%, 베이비붐 세대의 22%가 각방을 쓴다고 했다. 사실 부부가 한방을 쓰는 문화가 오래되진 않았다. 20세기 들어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난 문화일 뿐, 이전에는 부부가 각방을 쓰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부부의 속사정도 비슷하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부부간 수면 환경을 조사했더니 3명 중 1명이 각방을 쓰거나, 한방에서 자더라도 침대를 따로 썼다. ‘수면 궁합’이 상극인 부부들이 있다. 남편 코골이가 너무 심하다며 여행 가서 호텔 방을 2개 잡는 사람도 있다. 늘 에어컨을 켜는 남편과 온수매트를 안고 자는 아내는 같이 자기 힘들다. 잠귀가 밝은데 밤새 뒤척이거나 화장실을 자주 가는 배우자랑 자다간 잠을 설친다. 수면 리듬이 현저히 다른 부부도 있다. ▷잠을 잘 자야 배우자에게도 너그러워진다. 수면이 부족하면 사소한 일에 화가 나고 공감 능력이 떨어져 배우자와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건강에도 해롭다. 매일 밤 7, 8시간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당뇨병, 뇌·심혈관 질환 및 치매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 수면 이혼을 시작한 미국 부부의 52%가 수면의 질이 개선됐다고 보고했고, 매일 평균 37분을 더 잤다. 따로 자기를 추천하는 전문가들은 “수면 이혼이 아니라 부부끼리 수면 동맹을 맺는다고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부부 일심동체’라거나 ‘부부가 싸워도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는 결혼 주례사를 듣는 우리나라에선 부부가 각방을 쓰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부부 사이가 소원해진 것 아닌지 실눈을 뜨고 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돌연사 위험이나 심리적 고립감이 커지므로 같이 자는 것이 낫다는 반박도 한다. 하지만 핵가족을 넘어 핵개인이 출현한 시대다. 서로 억지로 맞춰 살거나 이를 견디지 못해 관계를 단절하느니, 개인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요즘 시대에 맞는 부부 관계인 것 같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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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배달비 0원’ 출혈경쟁, 그 끝은?

    배달앱 시장을 삼분하고 있는 배달플랫폼 간 점유율 전쟁이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쿠팡이츠는 지난달 ‘배달비 0원’을 선언했다. 업계 막내의 도전에 배달의민족은 “이달부터 우리도 0원”이라며 응수했다. 쿠팡이츠는 와우 멤버십(월 4990원) 고객을 대상으로 무료 배달을 하고, 배민은 동선이 겹치는 곳을 묶어 배달하는 알뜰배달에 무료 혜택을 준다. 지난달 업계 2위 자리를 뺏긴 요기요 역시 배달비 무료 혜택을 받는 멤버십인 ‘요기패스X’의 월 구독료를 2900원으로 2000원 내렸다. ▷지난해 배달 음식 온라인 거래액은 26조4326억 원. 2017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줄었다. 코로나19 특수가 끝난 데다 음식값 못지않은 배달비에 배달앱을 지워버린 사람이 늘었다. 한껏 콧대가 높아졌던 배달플랫폼들이 시장이 정체되자 ‘배달비 0원’을 선언하고 고객을 사수하는 생존 게임을 시작했다. 원래 배달비는 소비자와 음식점주가 절반씩 부담한다. 배달플랫폼에서 소비자 몫을 부담해 떠나는 소비자를 붙잡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출혈 경쟁의 원조는 미국 기업 아마존이다. 당장의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가격을 낮추는 ‘제로(0) 수익’ 전략으로 소비자와 판매자를 빠르게 흡수했다. 일단 사람이 모이도록 해 시장을 독점한 다음 비용을 회수하는 전략이다. 그 결과가 ‘빅테크’로 성장한 아마존이다. 지난해 10월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아마존을 상대로 반(反)독점 소송을 제기하며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남용해 경쟁자를 퇴출시키고, 소비자와 판매자에게 과도한 비용을 부담시켰다”고 했다. ▷배달앱 시장의 90% 이상을 배민, 요기요, 쿠팡이츠가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시장 지배력이 커지면서 음식점주들은 “팔면 팔수록 손해”라고 호소한다. 지난해 음식점주가 부담하는 건당 배달비는 평균 3473원이었다. 2015년 중개수수료 0원을 내세웠던 배민은 현재 음식값의 6.8%를 수수료로 받고 있고, 2019년 중개수수료 1000원으로 시작했던 쿠팡이츠는 음식값의 9.8%를 떼는 요금제를 내놓았다. 부가가치세를 포함하면 음식점주는 각각 7.48%, 10.78%를 부담해야 한다. ▷소비자도 ‘배달비 0원’ 경쟁 초기에는 참았던 야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달앱 삼국지가 소비자의 편익으로 결론 날지는 의문이다. 배달비는 슬금슬금 올라 기본이 3000원이고 2km가 넘어가면 7000∼9000원까지 뛴다. 음식점주들이 배달앱의 높은 수수료를 전가하기 시작하면서 외식 물가도 무섭게 올랐다. 앞으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배달앱이 출현하면 더한 횡포를 부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경쟁이 사라지는 시장에서 소비자는 ‘호갱’이 되기 마련이다. 그간의 혜택까지 곱절로 얹어서.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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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사과, 대파 이어 양배추… 두더지 잡기 된 먹거리 물가

    쌈직한 가격에 풍성한 밥상을 차리기엔 양배추만 한 채소가 없다. 크기도 큼직하고 절여 먹어도, 삶아 먹어도, 볶아 먹어도 맛있는 ‘만능 채소’다. 덕분에 흙대파가 금(金)대파가 되고 상추 낱장을 세면서 먹는 수상한 시절에도 듬직하게 밥상을 지켜 왔다. 그랬던 양배추마저 귀해질 모양이다. 지난달 30일 서울시 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양배추(특급) 8㎏당 가격은 1만6570원으로 일주일 전인 23일(8696원)에 비해 거의 두 배가 올랐다. 양배추 한 통당 소매 가격은 전국 평균 5300원. 양배추 한 통 값이 지난해 시간당 최저임금(9860원)의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2월 사과, 배 등 과일 물가가 3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차례상 차리느라 가계가 휘청했다. 정부가 할인쿠폰을 뿌리며 과일값이 겨우 진정되는가 싶더니 이번엔 채소값이 뛴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흙대파, 애호박, 적상추가 이달 초에 비해 11∼52%가량 올랐다. 작황이 부진해 올봄 출하량이 급감한 채소들이다. 덩달아 밀가루, 과자, 설탕, 소금 등 가공식품 가격도 오르고 있다.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듯하다. ▷인플레이션은 실질 임금을 감소시킨다. 그 고통은 서민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주부들은 장보기가 겁나고, 식당 주인들 사이에선 곡소리가 난다. 문제는 ‘비싼 채소’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장기적인 추세라는 점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채소값이 오르는 원인으로 기상 이변, 재배 면적 감소, 국제 유가 등 비용 상승을 꼽았다. 기상 이변으로 작황이 부진한 가운데 인건비며, 유가는 오르기만 한다.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고, 고령화까지 겹치면서 재배 면적 감소는 이미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다. ▷전 세계가 기상 이변으로 인한 ‘푸드플레이션’(음식+인플레이션)으로 떨고 있긴 하다. 코코아, 올리브유, 감자, 오렌지 등이 자고 나면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OECD 식품 물가상승률은 10.5%였다. 한국은 농업 생산 기반이 약해진 상태에서 기상 이변까지 덮쳐 밥상 물가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민심이 술렁이자 정부는 부랴부랴 세금을 투입해 할인 품목을 늘리고, 납품 단가를 지원하는 등 물가 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일회성 대책은 시장 가격만 왜곡시킬 뿐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속적인 농업 인구와 재배 면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생산기반 구축엔 별 관심도 없던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대형마트를 찾아다니는 ‘보여주기 행정’에 여념이 없다. 평소에 장을 볼까 싶은 정치인들이 ‘대파값 875원 논쟁’을 벌이더니 물가 안정에 역행하는 돈풀기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이쯤이면 누가 물가를 올리고 있는지 되묻고 싶어지는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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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부모에게 자녀란 ‘돈 많이 드는 인생의 기쁨’

    한국인은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그 이유야 차고도 넘치겠지만 한국인의 가치관 측면에서 이를 분석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가임기(20∼44세) 미혼과 기혼 남녀를 대상으로 출산과 자녀에 대한 가치관을 나열하고 동의하는 정도를 물은 것이다. ‘성장기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 동의한 비율(96%)이 가장 높았다. 이어 ‘자녀를 키우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자녀의 성장은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다’라는 데 각각 92%, 83%가 동의했다. 부모에게 자녀란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인생의 기쁨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자녀 양육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 동의하는 비율은 혼인 여부나 성별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의 성장이 인생의 기쁨’이라는 데는 기혼 남녀가 높은 비율로 동의했다. 반면 미혼 남성은 82%, 미혼 여성은 77%만 동의했다. ‘자녀=기쁨’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출산을 기피한다는 해석도, 자식을 낳아 봐야만 그 기쁨의 실체를 알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선후 관계는 알 수 없으나 자녀에 대한 가치관이 저출산의 변수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자녀가 기쁨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집단일수록 높았다. 미혼 여성의 21%가 자녀를 낳을 생각이 없었고, 이어 미혼 남성(13.7%), 기혼 여성(6.5%), 기혼 남성(5.1%) 순이었다. 이는 희망 자녀 수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혼 남성은 1.79명을 낳고 싶어 했고 미혼 여성은 1.43명을 낳고 싶어 했다. ▷한국에서 자녀가 주는 정서적 가치를 마음껏 누리기에는 출산과 양육에 드는 비용이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돈 먹는 하마’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녀를 만 19세까지 키우는 데 2억5200만 원이 들 것으로 예상한 최근 조사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경제적인 부담이 해소되더라도 자녀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출산율이 반등하진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2021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가 17개국을 대상으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을 물었더니 13개국에서 ‘가족’을 1위로 꼽았다. 한국만 ‘물질적 안녕’이라고 답한 것과 비교된다. ▷흔히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식은 부모의 지위나 배움에 상관없이 절대적인 사랑을 주고, 아무 조건 없이 미숙함을 용서한다.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나면 자녀가 인생의 기쁨이라는 데 동의하기 마련이다. 전례 없는 한국의 저출산은 아이를 낳고 기르기 힘든 환경을 개선해 나가되 자녀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도 다시 찾아야만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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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입 우회로’ 된 검정고시, 10대 응시생 역대 최대 [횡설수설/우경임]

    1950년부터 시행된 고졸 검정고시는 가난해서, 아파서 정규 교육에서 소외된 이들이 제2의 인생에 도전할 기회였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합격한 신문 배달 소년, 뒤늦게 만학의 꿈을 이룬 어머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장애인…. 역경을 극복한 검정고시 합격자들의 사연은 절절하고도 치열했다. 가난이나 여식(女息) 차별로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응시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 검정고시는 되레 서울 강남·서초 지역 고교 학생의 응시가 늘고 있다고 한다. ‘고교 자퇴→검정고시→수능’ 코스가 대학 진학의 우회로로 통하고 있어서다. ▷4월 고졸 검정고시에 응시한 10대 학생(13∼19세)이 1만6332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2022년 4월 1만2051명에 비하면 2년 새 35%가량 늘었다. 자퇴하고 수능에 올인한 고등학생들이 늘어난 때문으로 분석된다. 고졸 검정고시는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한국사 6과목과 선택 과목 1과목을 포함해 7과목이 출제된다. 학교 내신보다 공부할 과목이 줄고, 한 해 두 차례 응시가 가능하기 때문에 현역 고등학생이라면 어렵지 않게 합격한다. ▷특히 내신 경쟁이 치열한 서울 강남·서초 고교생들이 내신 성적이 부족하다 싶으면 검정고시를 보고 수능에 올인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2022년 전국 고교생의 학업 중단율은 1.9%인 데 반해 서울 강남·서초 지역 고교 중에는 5%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상대평가 과목이 몰려 있는 고교 1학년 성적을 2, 3학년에 뒤집기 어렵다 보니 대입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판단하면 고1에 일찌감치 자퇴하는 것이다. 이듬해 검정고시와 수능을 보고 성적이 잘 나오면 대학 진학을 앞당기고, 그렇지 않으면 1년 더 공부해 수능을 한 번 더 친다.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인성 교육이나 교우 관계를 포기하고서라도 오로지 대입을 위해서만 내달리는 것이다. ▷국내에서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홈스쿨링, 대안학교, 국제학교가 늘어난 이유도 있다. 이 학교들을 졸업한 학생들이 국내 대학에 진학하려면 검정고시를 치르고 고졸 학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반복 응시도 늘고 있다 한다. 대학마다 다르지만 검정고시 성적이 95점 이상이면 보통 내신 2, 3등급을 받을 수 있다. 중위권 학생들은 반복 응시로 성적을 올린 뒤 내신 위주 수시 전형에 도전한다. ▷그 덕분에 검정고시 전문학원이나 검정고시 코스를 개설한 재수종합학원이 붐비고 있다. 부모가 매달 300만 원에 달하는 재수종합학원 비용을 댈 수 있다면, 아이는 고학의 상징이던 검정고시를 대입에 활용해서라도 학교 밖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공교육이 포섭하지 못한 아이들이 사교육으로 몰려가는 동안, 여전히 학교가 전부인 아이들이 있다. 공교육이 따뜻하게 품고 제대로 가르쳐야 할 대상은 이런 아이들일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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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부디 환자 곁으로 돌아오라”

    “우리 의료 제도는 급속 성장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 불합리한 부분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면 제도를 바꾸는 과정도 냉철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부디 돌아오라.” 의대 입학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이른바 MZ 의사들이 일제히 병원을 떠났다. 부정적인 여론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1만 명 이상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자칫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와 통화를 한 건 그가 23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그는 “(전공의들이) 병원으로 돌아와 정책 대안을 갖고 정부와 대화하라”고 썼다. 전공의 파업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던 의료계의 침묵을 처음 깬 것이다. 가감없이 전달하기 위해 대화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공개적으로 전공의 복귀를 촉구했다. “SNS에 쓴 대로 ‘성급한 행동으로 개인에게 큰 피해가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 안타까워서다. 정부가 보건의료재난 위기 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한 것은 처음이고 그만큼 큰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데 후배 의사들이 이를 정확히 검토했는지 모르겠다.” 19일 처음 수련 포기를 선언한 박단 전공의협의회장은 “의료 소송에 대한 두려움, 주 80시간 근무, 최저 시급 수준의 임금 등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튿날부터 이에 공감한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내던지듯 제출했다.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수 있나. “전공의들이 많으면 절반까지도 영영 안 돌아올 수 있다고 본다. 의대 증원이 계기가 됐지만, 현재 의료 시스템에 절망한 나머지 떠나고 있다고 본다. 전공의가 없으면 병원이 마비되는 상황이야말로 우리 의료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떤 모순인가. “지금의 전공의 수련 시스템은 우리가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 만들어진 것이다. 정부도, 병원도 돈이 없으니 이들이 싼 인건비로 오래 일하도록 해서 병원을 운영하도록 했다. 2024년을 사는 전공의들에게 이 시스템을 강요한다고 통하겠나. 이런 시스템 개선은 미뤄 둔 채 대폭 증원한다고 하니 뛰쳐나간 것이다. ―그렇다고 환자를 두고 떠나는 것이 납득되진 않는다. “의사의 직업윤리라는 측면에서 환자 생사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는 행동은 용인되기 어렵다. 전공의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성급했다. 유럽 의사들도 파업은 하지만 정부와 충분한 협상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대형병원 응급실, 수술실부터 비우지도 않는다.” ―증원은 필요하지 않나. “의사 증원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건강보험의 근본적인 수술이 병행돼야 한다. ‘저부담-저수가’로 설계된 건강보험 내에선 의료 수요가 적은 필수-지역의료부터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내과 몫 뺏어 외과 챙겨 주는 식의 현행 수가제도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 권 교수는 정부와 의료계가 증원 숫자에만 매몰돼 싸울 것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보건의료 시스템을 제대로 개혁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라도 후배들이 돌아와 달라고 재차 당부했다. 정부는 어제 29일이라는 복귀 시점을 최종적으로 통보하면서도 2000명이라는 숫자는 고수했다. 앞서 대통령실은 “연간 3000명의 의사가 더 필요하다”며 “2000명은 최소 인원”이라고 했다. 공무원 책상 위에서 1000명이 줄었는데 2000명에 집착해 필수-지역 의료 개혁을 실기할 이유가 있나. 전공의 복귀의 길을 열어줘 더 이상 환자의 피해를 막는 것도 정부의 역할일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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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차라리 평교사로” 기피 보직된 교감 선생님

    평교사가 교감 되기는 대기업 평사원이 임원 되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 지난해 전국 초중고교 교원(교사·교감·교장) 수는 44만 명쯤 되는데 이 중 교감은 2.5%(약 1만100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감이 “평교사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해 화제가 됐다. 현행법상 학교의 교원 정원이 주는 등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교감 반납은 불가능하다. 자진 강등은 반려됐지만 이 교감을 다시 모셔 오는 데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요즘 “괜히 승진했다”라며 후회하는 교감이 많다. 과거에는 학교 살림을 총괄하던 ‘파워맨’이었던 교감의 위상과 보상이 예전 같지 않아서다. 학교 구성원이 교사뿐 아니라 강사, 행정직, 공무직 등으로 다양해지고 이들 사이 갈등이 늘었다. 연공서열이 무너져 영도 잘 서지 않는다. 중간 관리자인 교감 생활이 여간 고달파진 것이 아니다. 여기에 교감 업무는 점점 늘어나기만 한다. 지난해 7월 서울 서초구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대부분 학교에서 학부모 민원 창구가 교감으로 일원화됐고 올 1학기부터는 늘봄학교 지원실장도 겸임한다. 학교폭력대책위원회 등 27개 위원회도 당연직으로 참석한다. ▷교감들끼린 “무엇이든 하는 자”라는 자조가 나온다. 행정 업무는 갈수록 폭증하는 반면, 그에 대한 보상은 늘지 않았다. 올해부터 교사의 담임 수당이나 보직 수당이 대폭 인상됐어도 교감의 직급보조비(25만 원)는 그대로다. 실제 같은 호봉이면 담임 교사, 보직 교사보다 월급이 적어지는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교감은 방학 때도 출근해야 하고, 대체 수업을 해도 수당을 받지 못한다. 이러니 “평교사가 낫다”고 한다. ▷단지 수당이 낮다고 교감을 마다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평교사가 교감이 되려면 보통 20년 이상 걸린다. 연수도 받고 부장교사도 하고, 오지 근무도 하면서 승진 점수를 쌓아야 가능하다. 학교의 궂은일을 솔선하며 교감이 되었는데 존경받기는커녕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 시달리기 일쑤다. 온갖 민원을 감당하며 교권 추락의 현실을 절감한다고 호소한다. 교감 기피 현상이 확산하면서 승진 중간 코스인 보직교사도 구인난을 겪고 있다. 지난달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이 ‘올해 보직교사를 맡을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교사 10명 중 8명이 ‘없다’고 했다. ▷교감의 비애는 어느 조직에 있든 중간 관리자라면 공감할 것이다. 기업에서도 과거 업무 스타일을 고수하는 상사와 ‘워라밸’이 당연한 팀원 사이에 낀 중간 관리자의 업무가 폭증했고 스트레스 지수도 가장 높다. 고군분투하는 교감 선생님들의 사기를 올릴 다양한 방안이 나왔으면 한다. 교감의 살림 솜씨에 따라 교사와 학생이 행복한 학교가 빚어지는 법이니 말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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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급할 때만 찾는 ‘진료보조(PA) 간호사’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인한 의료 대란을 막기 위해 정부가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를 투입하겠다고 하자마자 대한간호사협회가 “사전 협의된 바 없다”며 이를 일축했다. 지난해 5월 간호법 사태 이후 의사와 간호사 간 골이 깊은데도, 간협이 의사 파업을 거드는 듯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2020년 전공의 파업 당시, 정부 지시대로 대체 인력으로 일했다가 “무면허 의료행위를 했다”고 의사들로부터 고발당했던 트라우마가 남아 있어서다. ▷현행 의료법상 의사를 대리하는 PA 간호사의 업무는 불법이다. 4년 전 환자 곁을 지켰다가 봉변을 당한 간호사들은 이번에는 “간호사에 대한 보호 약속이 선행돼야 한다”며 정부의 동원령에 발끈했다. 하지만 전공의가 떠난 병원에선 의사 업무가 간호사에게 물밀듯이 넘어오고 있다고 한다. 의료 현장에선 “지시를 거부할 수도 없는데 혹시라도 환자가 잘못되면 불법을 추궁당할까 두렵다”고 아우성이다. ▷PA는 주로 대학병원에서 전공의가 부족한 필수의료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1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사들조차 “PA가 없으면 수술실이 마비된다”고 할 정도로 관행이 됐다. 다만 존재 자체를 ‘쉬쉬’하다 보니 정확한 집계가 이뤄지진 않는다. 주로 의사들이 기피하는 외과나 흉부외과에 속해서 수술 내용을 설명하고 동의서를 받고 혈액 검사를 하는 등의 사전 준비부터 절개와 봉합까지 수술 전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부서 이동 없이 수술실에서만 일하다 보니 저연차 인턴·레지던트보다 숙련도가 높은 경우도 많다. ▷전공의를 뽑기 힘든 병원으로선 이들보다 비용이 덜 드는 PA 채용을 늘리지 않을 까닭이 없다. 2020년 보건의료노조 실태조사에 따르면 PA는 약물 처방, 검사, 수술 등 사실상 의사 업무 전반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PA를 제도화하면 될 터인데 의사들이 “간호사가 의사 가운을 입는다”며 반발해 논의조차 쉽지 않다. 석박사 수준의 과정을 밟고 면허를 따서 일하는 미국, 캐나다 등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체계적인 교육과 자격 검증 없이 현장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2010년부터 PA 제도화를 시도했지만 “환자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우는 의사 단체에 밀려 번번이 무산되곤 했다. 정부가 ‘PA 카드’로 의사를 달랬다, 간호사를 달랬다 하면서 환자 안전을 도외시한 탓도 크다. 불법인 PA가 관행이 된 것은 그만큼 수술실과 입원 병동의 의료 인력 부족이 심각해서다. 이번에 의대 정원이 늘더라도 의사 양성까지는 10년 이상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의사 단체의 벽을 넘지 못한 PA뿐만 아니라 비대면 진료, 응급구조사 업무 범위 확대 등도 논의를 서둘러 의료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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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의대 증원’ 지역전형 확대… ‘꼼수 지방 전학’ 판칠까 걱정

    올해 고3이 치르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늘어나는 의대 정원 2000명은 “SKY(서울·고려·연세대) 위 대학이 하나 더 생겼다”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숫자다. 의대 증원이 발표된 이튿날인 7일 한 대형학원의 ‘의대 재수, 반수 전략’ 온오프라인 설명회에는 4100여 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의대 증원에 따른 입시 전략을 세우려는 수요라는 것이 학원 측의 설명이다. 의대 합격이 아슬아슬했던 상위권 고3 학생과 N수생, 의대에 떨어지고 이공계로 진학한 반수생, 심지어 미래가 불안한 직장인까지 의대에 도전하고 있다. ▷정부는 지역 의료를 살리기 위해 지역 국립대와 정원 50명 이하 미니 의대를 중심으로 의대 정원을 늘리고, 신입생의 60%까지 지역인재전형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의대 지역인재전형 선발 인원이 기존의 두 배인 2018명으로 증가한다. 현재 입학 정원이 49명인 강원대 의대를 예로 들면, 두 배가량 늘어날 정원의 상당 부분을 강원 지역 고등학생으로 뽑아야 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춘천에 사는 고등학생이 강원대 의대에 합격할 확률이 올라간다. 지금도 지역 의대 수시 전형의 경쟁률은 수도권 의대의 3분의 1 수준인데, 이 경쟁률이 더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지역인재전형은 고등학교를 해당 지역에서 졸업해야 지원이 가능하다. 3년 뒤인 2028학년도부터는 중학교부터 지역에서 다녀야 한다. 이미 지역 공공기관의 ‘기러기 부부’들이 서울 살림을 접고 재결합했다거나 자녀의 지방 전학을 위해 KTX를 타고 아버지가 서울로 ‘역출근’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강남 학원가에는 아이만 지역 중고교로 진학시키는 ‘지방 유학’ 문의도 늘고 있다. 세종 천안 아산같이 수도권과 가깝고 도시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인기라고 한다. ▷지자체들은 의대 증원 효과로 인구 유입이 늘고 대학 상권에 활기가 돌 것으로 기대한다. 이들이 지역에 남아 의사로 일해준다면 ‘지역 의료 대란’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체리 피커’처럼 각종 보조금을 챙기고, 의대 입시 혜택만 누리는 ‘꼼수 전학’이다. 이를 우려한 지역 대학에선 “중학교가 아닌 초등학교부터 지역에서 졸업하도록 해야 사람들이 정주한다” “지역 의대를 졸업하면 지역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2006년 이후 의대 입학 정원이 동결되면서 의사는 높은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가장 안전한 직업이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를 홀로 지방 유학을 보내거나 온 가족이 이사를 감수할 만큼 의대 진학이 자녀 교육의 전부가 된 현실은 씁쓸할 따름이다. 의대의 지역인재전형을 확대하려는 본래 취지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인재를 키워 지역 필수 의료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똑똑한 제도 운영이 필요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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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간호사도 필러 시술… ‘무천도사’ 사라지나

    ‘프티 시술’은 보톡스, 필러 같은 주사나 레이저 시술처럼 수술의 통증 없이 살짝 예뻐지는 시술을 지칭한다. 미용·성형 카페에서 ‘프티 시술’ 잘하는 곳을 물으면 무조건 최근 출시된 제품이나 장비를 쓰는 곳으로 가라고 한다. 그다음이 시술 경험이 많은 의사다. 의료 기술의 발전이 의사 손 기술을 앞선다는 경험칙이 통하는 셈이다. 실제 피부과는 인턴·레지던트를 거치지 않은, 즉 임상 경험이 전무한 일반의가 많은 진료 과목이다. ▷일반의로 개원해서 미용 시술을 하는 의사를 ‘무천도사(無千都師)’라고 부른다. 전문의를 따지 않고도(無), 월 1000만 원 이상을 벌고(千), 도시에서 일하는(都) 의사(師)라는 뜻이다. 과거 의료계에선 전문의를 따지 못하면 낙오자로 여겼지만 요즘에는 그런 동료 압력도 사라졌다. ‘워라밸’을 포기하며 고되게 일해 봤자 개원의보다 소득은 낮은 대학병원 의사들이 되레 자괴감을 느낀다고 한다. 일반의는 최근 전체 의대 졸업생의 약 15%까지 늘어났다. ▷갓 의대를 졸업한 일반의뿐만 아니라 다른 진료과목 의사들의 개원 러시도 이어지고 있다. 2022년 기준 전국 성형외과 의원(1115곳)은 10년 전보다 34%, 피부과 의원(1387곳)은 33% 늘어났다. 지난해 6월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는 ‘바로 적용하는 보톡스’ ‘고지혈증 일타 강사의 족집게 강의’ 등 다른 진료과목을 배우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저출산으로 미래가 어두운 소청과 의사 800여 명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정부가 ‘프티 시술’ 일부를 의사 면허 없이도 할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을 1일 밝혔다. ‘프티 시술’의 의사 독점 구조를 깨서 레드오션 시장이 되면 의사들의 개원이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어려운 수술은 싸고, 미용에 가까운 피부과 시술은 비싸다. ‘프티 시술’은 건강보험의 가격 통제에서 벗어난 비급여 진료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의사 공급을 늘리더라도 이런 왜곡된 보상 체계로는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쏠림을 막을 수 없다. 의사들은 부작용 등을 이유로 반발하지만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프티 시술’뿐만이 아니다. 현재 의사만 할 수 있는 의료 행위를 보면, 의사가 꼭 해야 하나 싶은 것들이 있다. 문신, 피어싱, 제모 등이 모두 의료 행위다. 반면, 정작 의사가 진료해야 할 아토피 피부염, 건선 같은 피부질환 환자들은 동네 의원서 치료받기가 어렵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 뒤에는 낮은 수가를 벌충하고자 비급여 진료에 치중하게 되는 ‘풍선 효과’가 있다. ‘프티 시장’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의사는 의사가 할 일을 할 때 보상과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이참에 건강보험 수가 체계도 재설계해야 한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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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443조 빚더미 中 ‘부동산 공룡’ 몰락… ‘헝다’로 끝일까

    약 443조 원의 부채를 진 중국 2위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에 홍콩 법원이 청산 명령을 내렸다. 올해 우리 정부 예산이 657조 원이다. ‘부동산 공룡’으로 불리던 헝다의 부채가 얼마나 천문학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청산에 돌입한다면 중국 역사상 최대 파산이 된다. 2021년 역외 채권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지며 ‘중국 경제 위기론’의 진원지였던 헝다가 다시금 중국 경제를 흔들 수 있다는 비관론이 흘러나온다. ▷중국 경제는 ‘콘크리트 GDP(국내총생산)’라고 불린다. 그만큼 주택 및 인프라 투자에 기대 성장했다. 중국 정부는 매년 GDP의 40% 이상을 부동산에 투자했고, 이런 ‘건설 주도 성장’ 덕분에 토지를 소유한 지방정부도, 집을 산 개인도 부자가 됐다. 그런데 2년 전부터 헝다, 완다 계열사, 비구이위안 등 부동산 개발사들이 줄줄이 디폴트 위기에 처했다. 최근에는 이들 기업에 대출해준 중즈그룹이 파산하며 금융시장으로도 불똥이 튀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40년 고도 성장을 견인했던 중국의 성장 모델이 고장 난 것 같다”고 했다. ▷헝다그룹 회장 쉬자인은 허난성 빈민촌에서 태어나 중국 최고 부자가 됐다. 1996년 선전시에 ‘헝다 부동산’을 차린 그는 저리로 땅을 빌려 건설사에 외상 발주하며 기업을 키워 왔다. 미리 받은 분양대금으로는 축구 영화 생수 등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문제는 중국 정부가 과열된 부동산 시장 연착륙을 위해 대출을 조이면서부터다. 곧바로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가진 모든 것과 헝다그룹이 이룬 것은 당과 국가, 사회 전체가 준 것이다.” 쉬자인이 중국 공산당에 극진한 감사함을 표한 것이지만, 사실에도 부합한다. 중국에서 토지는 지방정부 소유이고, 은행은 국영이다. 헝다그룹은 정부로부터 토지도, 자금도 빌려 빚잔치를 벌인 셈이다. 헝다의 빚 폭탄을 넘겨받은 데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추가적인 부양 부담도 지게 된 중국 정부야말로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자일지 모른다. 지난해 9월 해외로 자산을 불법 유출한 혐의로 구속된 쉬자인과 그의 아들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이 때문에 창업주 개인 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헝다와 은행, 지방정부의 권력형 비리로 보고 중국 정부가 칼을 빼 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번 홍콩 법원의 결정을 중국 본토 법원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므로 중국 경제에 미칠 여파가 크지 않다고도 한다. 하지만 1위 부동산 개발사인 비구이위안의 ‘도미노 위기설’이 재부상했고, 이들 기업의 직원과 협력업체, 분양받은 집 주인까지 충격이 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 정부의 고심은 깊을 수밖에 없다. 미국과의 경제 전쟁 중에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부담이다. 여전히 중국과의 교역 규모가 큰 한국에도 결코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가뜩이나 세계 무역 질서의 재편으로 고전하는 우리 기업들에 숙제가 또 늘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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