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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평양과 남포 사이 42㎞ 구간에 왕복 10차선의 청년영웅도로가 건설됐다. 북한은 이 도로를 ‘위대한 장군님 시대의 청춘 서사시’라고 찬양했다. 북한은 약 2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동원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력만으로 완공한 고속도로’라며 격찬했다.도로가 완성된 지 한 달 뒤 김정일은 현장을 둘러보고 “청년영웅도로는 우리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이 낳은 위대한 창조물이다”라는 장문의 담화를 발표했다. 일부만 언급하면 이렇다.“청년들이 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강성대국 건설의 대통로라고 하였다는데 그럴 만합니다. 이렇게 넓고 시원한 고속도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입니다. 청년영웅도로는 우리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이 낳은 위대한 창조물입니다. 당의 청년 중시 사상은 청년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 당은 언제나 청년들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청년들을 믿고 내세워 어려운 과업들을 수행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당은 고속도로공사 전 기간 여기에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청년 건설자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습니다.”지금은 다니는 차도 거의 없고, 관리도 안 돼 여기저기 패인 이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노예노동을 강요 당했던 청년 중에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서 자란 16세 김연희(가명)도 있었다.● 2000년 청년영웅도로김 씨는 2000년 3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 2명과 함께 이 도로 공사장에 차출됐다.그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열차를 타고 10여일 만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소속된 중대는 100명 정원 중 33명만 남아 있었다. 자고 나면 도주자가 속출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눈이 휑하게 들어간 채로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냉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흙벽돌로 쌓은 임시 숙소에서 잠이 들자마자 기상소리가 울렸다. 그날부터 그는 새벽 5시30분에 일을 시작해 저녁 6시까지 흙 마대를 날랐다. 이틀에 한 번씩은 야간작업이라며 1시까지 일했다.100㎏짜리 마대에 흙을 담은 뒤 두 명이 번쩍 들어 김 씨의 어깨에 얹어주면 수십m 떨어진 도로까지 가서 퍼부어야 했다. 흙이 쌓이면 큰 망치를 들고 땅을 내리쳐 다졌다.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시키면서도 하루 식사 정량은 400g에 불과했다. 집에서 옥수수를 볶아 넣어간 주머니는 한 알, 한 알 세면서 먹었어도 금방 바닥이 났다.겨울에는 추워서 고생했고, 여름엔 모기에 뜯기며 더워서 고생했다. 샤워실도 없었다. 며칠에 한 번씩 어둑어둑해지면 인근 저수지에 사람들을 인솔해 간 뒤 씻으라고 했다. 이쪽엔 여성들이, 건너편엔 남자들이 단체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김 씨는 너무 굶주리면 부끄러움 따위는 없어진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호수에 들어간 누구나 머리 속에 먹을 생각만 가득할 뿐 이성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공사장엔 사고도 잦았다. 그의 작업장에서도 한꺼번에 7명이 차에 치여 죽은 대형 사고도 발생했다. 실제 북한은 나중에 도로 건설과정에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음을 직간접으로 인정하기도 했다.그래도 무서워 도망갈 생각도 못했다. 허약해져 겨우 걸을 수 있는 상태에서 도망을 쳐봐야 얼마 안 돼 잡힐 것이다. 지휘관들이 사람들 앞에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때렸다. 매 맞는 도주자들의 비명이 도로 공사장 어디에서나 매일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얼마쯤 지나니 그와 함께 차출돼 온 공장 동료 2명도 보이지 않았다. 도주에 성공한 것이다.그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난 왜 태어났을까?”다행히 그는 2개월 뒤 중대 식당 식모로 발령이 났다. 식모들도 다 달아나니 밥을 지을 여성이 부족했던 것이다.밥을 짓는 일이다보니 배고픔에선 일단 벗어났다. 금방 원망하던 마음이 달라졌다.“집에서 배곯는 것보다 여기서 일하는 게 차라리 낫구나.”● 1990년대 고향김 씨는 태어나서 배고픈 기억밖에 없었다. 그는 13살 때부터 고향에서 빵 장사를 시작했다. 빵을 만드는 집에서 외상으로 받아와 팔면 얼마쯤 남았다. 그것으로 자기 배를 채우기도 버거웠지만 학교를 다니며 굶주리는 것보단 나았다.그가 태어난 고향은 두만강 국경도시인 함북 회령 시내에서 걸어서 3시간쯤 떨어진 농촌마을이었다. 탈북민들에게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가 걸어서 3시간쯤 거리에 있었다.김 씨가 1984년에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광산 광부였다. 김 씨가 인민학교 4학년 때인 1995년 고난의 행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정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졌다. 산에 올라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지만, 절반은 도둑을 맞고 절반만 겨우 건져오면 다행이었다. 집도 세 번이나 도둑을 맞아 건질 것이 없었다.그는 학교에 가면 12개 과목을 공책 한 권에 받아 적었다. 책 살 돈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학교에 나오면 다행이었다. 학교에 오는 학생들은 갈수록 줄어들었다.“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어요. 한 번은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아버지가 쥐가 들어온 줄 알고 어둠 속에 파리채를 들고 나가 휘둘렀는데, 등잔을 켜고 보니 앞집에 살던 6살짜리 아이가 들어와 밥을 훔쳐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영양실조가 심하니까 울지도 못하는 겁니다. 감자밥이라도 먹여서 보냈는데 이틀 뒤에 죽었어요.”김 씨의 집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고향이 중국이어서 연변에 친척들이 살았다는 것이다.가난한 집안 형편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는 1995년 몰래 중국에 건너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서 왔다. 그러나 그걸로 밀린 빚을 갚고 나니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1997년 아버지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려 할 때 13살 김 씨는 무조건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가겠다고 졸랐다. 중국에 가면 며칠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딸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두만강을 몰래 넘었다. 중국에 가서 닷 새 동안 머물며 난생 처음 행복하게 살았다. 연변에 사는 친척들은 가난했다. 김 씨 부녀가 나올 때 170위안을 모아 주었는데, 그걸 갖고 오다 그만 국경경비대에 체포됐다. 다행히 김 씨의 기지로 20위안만 빼앗기고 150위안은 숨길 수 있었다. 안전부에선 그래도 아이를 데리고 조국으로 돌아왔다며 큰 처벌을 하지 않았다. 150위안으로 빚을 갚고 나니 딱 한 끼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시간은 흘러 그는 2000년 중학교를 졸업해 시멘트공장 노동자로 발령이 났다. 공장에 가자마자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끌려가 6개월 동안 고생을 했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2005년 두만강김 씨는 공장에서 21세 때인 2005년까지 일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몰래 건너갔다. 그가 중국에 간 동기는 어머니에게 치아를 해줄 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너무나 고생을 한 어머니는 이가 하나둘 빠지다가 이때쯤 남은 이가 없게 됐다. 음식을 씹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그는 추운 겨울 두만강을 넘었다.12월 말이 돼도 두만강은 가운데가 얼지 않았다. 몰래 강을 넘던 그는 중간쯤에서 물에 풍덩 빠졌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옷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관절을 굽힐 수가 없으니 펭귄처럼 엉큼엉큼 움직여 겨우 중국에 갔다.그렇게 찾아갔지만 중국 친척들에게선 도움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 다시 나오다가 또 강에 빠졌다. 기어서 북한 기슭에 도착했지만 지쳐서 얼음판 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침 순찰을 돌던 경비대가 그를 발견하고 업고 갔다. 북한에서 발견됐기에 큰 처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얻은 소득은 없었다.집에서 얼마쯤 있다가 다시 중국으로 넘어갔다. 이번엔 중국에서 취직해 직접 돈을 벌려고 생각했다. 집에는 장사를 간다고 말하고 떠났다. 중국에서 일자리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때는 연변에서 탈북민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고 있었고, 더구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앞둔 터라 경계도 삼엄했다.그렇게 중국에서 제대로 된 직업도 못 구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는 가운데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친척의 친구 언니 집에 가서 아이를 봐주며 몇 달을 보내고 있을 때, 그 언니가 “그러지 말고 남친이라도 사귀라”며 한 남자를 소개해주었다.그 남자는 자기 사무실에 와서 밥을 해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남자 사무실에는 컴퓨터 여러 대가 있었고 직원 여러 명이 상주했다. 드디어 컴퓨터 업종에 종사하는 남자를 만나 중국에서 자리를 잡나 싶어 기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공안이 들이닥쳤다.그는 뒷문으로 도망쳐 체포되진 않았지만, 남친을 포함해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친의 직업은 보이스피싱범이었다. 그는 그때 처음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 수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 씨는 중국에 있을 때 한국에 가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치아를 해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공안의 추적을 받는 막다른 골목에 빠지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친구 언니가 소개한 한국의 탈북민 모임 사이트에 접속해 여기저기 도움 요청을 보냈다. 그렇게 연락한지 사흘 만에 브로커를 만나게 됐다.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다른 탈북민 16명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던 때가 2009년 5월이었다. ● 2009년 평택인천공항에 내릴 때 그는 많이 무서웠다. 인솔자가 너무 무섭게 통제하다보니 “내가 납치당해 가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있었고, 공항에 내려서 기자회견을 할까봐 걱정도 됐다. 그때까지 그는 한국에 가면 무조건 기자들이 달라붙어 물어보는 줄 알았다. 그러면 고향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 우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합동조사는 비교적 쉽게 끝났다. 그는 고향에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 줄 몰랐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조사는 비교적 빠르게 진행된다.2009년은 탈북민들이 가장 많이 한국에 입국한 해이다.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이동이 차단됐던 탈북민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그해에만 3000명 가까이 입국했다. 그가 하나원에 갔을 때 같은 기에 여성만 무려 245명이나 됐다. 하나원에선 매달 4만 원씩 용돈을 주었는데, 그는 사회에 나가면 돈이 없을 것을 우려해 먹고 싶은 것도 먹지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그해 9월 그는 하나원을 나와 평택에 정착했다. 먼지가 뽀얀 임대주택을 청소하고 있을 때 브로커가 맨 먼저 찾아왔다. 그래도 그 브로커는 착한 사람이었다.초기 정착금으로 300만 원이 나왔는데, 중국에서 맺은 브로커 비용 계약이 300만 원이었다. 브로커는 “내가 다 가져가면 먹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며 280만 원만 받아갔다.20만 원으로 그의 첫 한국 정착이 시작됐다. 돈이 없어 초기 3개월은 먼저 한국에 온 친구가 준 옷을 입고 지냈다. 나흘 만에 그는 벼룩시장을 뒤져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휴대전화 부품에 땜을 하는 작업이었는데, 그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금방 적응했다. 그런데 그 일자리에서도 텃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신입이 너무 빨리 컨베이어에 섰다”며 매일같이 온갖 구박을 하는 한 중년 여성 때문에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엑셀 자격증을 따고 한 회사 경리로 입사했는데 이곳에서도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용어도 잘 모르는 그에게 산더미 같은 일감을 들이밀며 무작정 혼을 내는 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직장 경리가 매일 같이 산책로에 나와 우는 그에게 “이곳에서 버틴 사람이 없다”고 슬그머니 귀띔을 해주었다. 결국 그 일도 3개월 뒤 그만두었다.일을 그만둘 때마다 앞길이 막막했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의 머리 속에선 13살 때 빵을 팔려 다니던 일, 16살 때 흙 마대를 메고 달리던 시절이 떠올랐다. ● 2024년 예천어느덧 14년이 흘렀다. 김 씨는 안동에 있는 경북도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예천군의 한 거리 도심에 피부 관리실을 운영하고 있다. 정성스럽게 서비스를 한다고 소문이 나 고객들도 많아졌다.그는 이제 뷰티 전문가로서 한국 사회에 당당히 자리 잡았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2011년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오누이를 낳아 키우던 전업주부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집에서 마냥 놀고만 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생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수소문하다가 피부 미용을 선택했고, 이왕 시작하려면 제대로 배우고 시작하겠다는 결심으로 2017년부터 4년제 대학 과정을 마쳤다. 졸업 직후 피부관리실을 연 뒤에도 2년제 석사과정까지 내처 마쳤다. 석사과정을 마칠 때는 매주 3일을 왕복 3시간씩 차를 몰아 수업을 듣고 왔다.“피부미용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5년 동안은 하루도 휴식한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9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일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 피부 관리실을 열면서 받았던 대출도 이미 다 갚았습니다. 요즘은 주변에서 하도 말려서 일요일엔 가끔 쉬긴 합니다.”서비스직에 종사하는 탈북민들은 보통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북에서 온 사람이 잘하면 얼마나 잘 하겠냐”는 편견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을 시작한 뒤로 자신의 고향을 숨긴 적이 없다. “처음엔 저도 무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 잘해주려 노력하니 어느 순간부터 고객들도 인정하고, 다른 고객을 소개해 데려오기도 합니다. 한국은 노력한 것만큼 이룰 수 있는 사회라서 만족합니다.”그는 요즘 사이버대를 또 다니고 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다.“사회가 고령화되면서 고령 인구가 늘고 있고, 노년에도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느끼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인 피부 미용을 전문으로 하려는데, 그러자면 사회복지도 꼭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그가 노인 피부 미용을 전문으로 하려는 것은 단순히 시장이 확대돼서만은 아니다.“북에 사시던 부모님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돈을 벌어 어머니에게 치아를 해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려 탈북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제 마음 속에 평생의 한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 하지 못한 효도를 이제 부모님 또래의 어르신들에게 하고 싶습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태풍을 맞는 곳이다. 제주 사람들에게 이곳에서도 가장 바람이 센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주저없이 남서쪽 송악산과 산방산 아래에 위치한 대정과 안덕면을 꼽는다.몇 년에 한 번 큰 태풍이 오면 숱한 나무들이 꺾여 쓰러지는 이곳 산방산 아래에 한 탈북 여성이 꿈을 꾸고 살고 있다.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안덕면에서 감귤농장인 ‘복희네농장’을 운영하는 김복희 씨는 1978년 남포에서 태어나 2018년 한국에 정착했다. 제주도 토박이인 남편을 만나 2020년 제주로 옮겨와 현재 4000평 규모의 감귤농장을 운영하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저는 잠잘 때도 늘 꿈을 꿉니다. 머리 속에 앞으로 해야 할 일만 가득한 것 같아요. 친구도 안 만나고 놀려 다닐 시간도 없습니다. 돈을 벌면 모두 식물과 장비를 사는데 씁니다.”제주 정착 3년 만에 김 씨는 이미 감귤 재배를 위한 일반 기술을 모두 습득했고 조경수 사업도 성공시켰다. 주변에서 모두 “귤 농사나 잘 짓지 뭘 엉뚱한 일을 벌이냐”고 할 때 그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고, 지금은 조경수 판매로만 일반 농가의 소득이 나온다. “뭘 몰라서 그런다”고 하던 주변의 시선은 이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냐. 머리가 참 좋다”라는 감탄으로 변했다.“저는 5개년 계획이 있어요. 복희네종합테마농장을 만들 겁니다. 산방산에 놀려오면 꼭 들리게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해요. 지금의 귤 농장은 누구나 무료로 와서 돌아볼 수 있고, 실비로 과일을 따는 관광체험농장으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이 주변에 누구나 와서 사진을 남기고 싶은 예쁜 야자수 숲을 만들고요, 동물농장도 만들 겁니다. 그러면 아담한 돌담을 두른 민박집도 있어야겠죠. 그 집은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정원으로 둘러싸게 될 겁니다. 이곳을 머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름다운 정원과 과수원은 제주에 와서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어린 시절 머리 속 어딘가에 저장된 아득히 먼 추억이기도 하다.● 평범했던 학창시절김 씨가 태어난 고향은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 옆에 복숭아꽃, 살구꽃, 사과꽃이 만발한 마을이었다.부지런한 어머니와 중국에 있는 아버지 친척들의 도움 덕분에 형제가 여럿이었어도 배고픔을 몰랐다. 학창시절 김 씨는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엔 큰 관심이 없었던 학생이었다. 1994년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라고 권했다. 군에 나가 노동당에 입당해야 출신성분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그의 부친은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연변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1960년대 북한으로 넘어와 정착했다. 그러나 출신성분 때문에 노동당원이 될 수가 없었다.아버지는 자신의 굴레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김 씨의 두 오빠는 졸업과 동시에 주저 없이 군에 나갔고, 언니도 총을 메는 보위대에 입대했다.김 씨는 군에 나가 청춘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군대에 가지 않으면 사회에 진출해야 했다.북한 당국이 김 씨에게 임명한 직장은 한 연합기업소의 선반공이었다. 막상 가서 일하고 보니 그곳도 진저리나게 싫은 일터였다. 뜨겁게 가열된 쇳밥이 얼굴에 튀어 오르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선반에 말려들어가 신체가 잘리는 사고가 수시로 발생했다.그가 사회에 나갔던 1994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저기서 배급을 못 받았다는 아우성이 터지더니 급기야 1995년엔 김 씨의 직장에도 배급이 끊겼다.직장에선 어린 노동자들을 선발해 서해 바다에 조개잡이를 내보냈다. 특히 어린 여성 직원들이 대거 발탁됐는데, 김 씨도 17세에 조개잡이 조에 차출돼 나갔다. 바다에 나가 조개를 잡으면 먹을 것은 주기 때문에 가정의 식량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지옥의 조개잡이조개잡이는 큰 배에 50~60명을 태우고 나가 진행했다. 바다로 한동안 달려 어디인가 정박하면 썰물 때 물이 빠져 배가 갯벌 위에 올라앉게 된다.그러면 배에 탔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갯벌을 열심히 파고 대합이나 백합과 같은 조개를 양동이에 주워 담는다. 밀물이 들어오면 다시 배에 올라간다. 이 생활이 3개월이나 반복됐다. 조개를 판 돈은 모두 당국에서 걷어갔다. 석 달을 작업했지만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예 생활이었다.“그때는 정말 지옥이었어요. 여름에 나갔는데 석 달 동안 배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목욕을 하지도 못하고 소금에 쩐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살아야 했습니다. 추운 밤에도 물이 빠졌다고 추운 갯벌에 내몰았어요. 한 배에서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데,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이 나도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어요.”김 씨가 북한을 떠올리면 가장 몸서리치게 기억되는 악몽이다. 김 씨는 멀미를 심하게 해 물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악몽 같은 조개잡이 동원을 마치고 돌아오니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되니 모두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그즈음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다. 김 씨도 뭔가 집안에 도움이 될 것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장사를 하지는 못했다. 장마당은 밑천도 경험도 없는 17세 소녀가 뛰어들기 너무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김 씨는 조개를 잡아 팔면 식량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언니도 갓난아이를 부모에게 맡기고 동생과 함께 서해바다로 향했다.1995년 12월 두 자매는 장화도 없어 맨발로 살얼음이 낀 갯벌에 뛰어들었다. 배가 없으니 해변에서 조개를 캘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면 굶주린 사람들이 너도나도 바다에 나와 조개를 잡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전쟁터였다.20일 남짓 바다에서 헤맸지만 벌어들인 밀가루는 2~3㎏ 밖에 안 됐다. 김 씨 자매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돈이 없어 추운 날에 차도 잡아타지 못하고 하루 종일 걸어와야 했던 일도 김 씨에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다.봄이 되자 김 씨는 인근 밭에서 시래기와 이삭줍기를 하면서 끼니를 유지해야 했다.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종자를 살 돈도 없었다.이런 일을 겪으며 김 씨는 더는 북한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1996년 겨울 김 씨는 가족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북부 국경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동상을 입고 탈북김 씨는 중학교 졸업반 때 중국에 가본 일이 있었다.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형제들이 살고 있는 중국으로 가서 도움을 받았다. 어떤 때는 합법적인 증명서를 떼고 가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두만강을 도강해 갔다. 김 씨의 고모가 사는 집과 사촌오빠가 사는 아파트는 두만강 건너편 북한 쪽에서 빤히 바라보였다. 1990년대 중반까진 두만강에 국경경비대가 거의 없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손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김 씨가 컸을 때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함북 온성으로 가 중국 고모네 집으로 몰래 넘어갔다. 아버지는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그곳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김 씨가 직접 가보니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식량과 고기, 간식, 과일이 풍부했고, 각종 채널을 통해 신기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중국을 한 번 다녀온 북한 사람들은 절대로 그 경험을 잊지 못한다.중학교 졸업 후 지옥 같은 삶을 2년이나 살다보니 김 씨는 중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떠날 때는 탈북을 결심하진 않았다. 중국에서 도움을 받고 오자는 마음이었다.집에 말을 하지 못하니 여비를 받을 순 없었다. 대신 그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가져온 예쁜 옷들을 잔뜩 껴입고 떠났다. 가다가 옷을 팔면, 먹을 것은 살 수 있다고 타산한 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이 오산이었음은 얼마 안 돼 알게 됐다. 남포에서 온성까지 무려 한 달이나 걸렸던 것이다. 기차는 며칠에 한 번씩 다녔고, 정전 때문에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기차 천정에까지 사람들이 새까맣게 매달렸다. 허허벌판에 기차가 서면 옷을 팔 곳도 없었다. 기차가 서면 주변 농촌 동네에서 이때라 생각하고 각종 음식을 만들어 달려 나와 승객들에게 비싸게 팔았다. 농촌 사람들에겐 옷은 사치품이었다. 김 씨는 눈물을 머금고 터무니없이 싼 값에 옷을 넘기고 먹을 것을 사먹었는데 며칠도 되지 않아 팔 옷도 떨어졌다.이때부터 그는 꽃제비가 됐다. 어린 소녀라고 불쌍하게 여겨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적진 않았다. 발 디딜 틈도 없는 기차 안에서 여기저기 치이며 잠을 잤지만, 추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발이 얼어들어가 동상을 입었다.그 한 달의 여정은 김 씨에게 또 하나의 악몽이었다. 마침내 함북 온성역에 내렸을 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어느 농가의 나무 울바자 밑에서 어두울 때까지 기다렸는데 동상을 입은 다리는 더 얼어 감각이 없었다.그 다리를 끌고 그는 두만강으로 나갔다. 그리고 무작정 기어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아버지와 강을 건널 때도 밤에 강에 나가 기어갔다. 그가 겨울에 떠난 이유도, 지금쯤 떠나면 얼어붙은 강을 기어가기 쉬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두만강을 건너 고모가 사는 마을에 들어갔지만, 쉽게 찾을 것이라 생각했던 고모의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집들이 늘어선 동네를 서너 시간 헤맨 끝에야 마침내 고모의 집을 찾았다. 갑자기 나타난 조카의 행색에 고모는 깜짝 놀랐다. 처음엔 움직일 수도 없어 대소변도 받아내야 할 상태였다. 그러나 가지를 다린 물에 다리를 씻으며 각종 약을 쓰고 나니 한 달이 되자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는 1997년 설날을 고모집에서 맞았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보낸 슬픈 설날이었다.● 중국에서의 삶김 씨가 회복되자 고모는 “조선에선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그런 곳에 너를 다시 내보낼 수가 없다”고 집에 돌아가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나 중국 국경 통제도 강화됐기 때문에 그곳에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고모는 그를 하얼빈에 사는 친척집에 다시 보냈다. 그곳에서 김 씨는 친척집 아이를 봐주는 보모로 3년을 지냈다.하지만 아무리 친척이라도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22살 때인 2000년 친척들의 소개로 조선족 남성과 결혼했다. 남자 쪽에서 합법적인 호구(신분증명서)를 위조로 만들어줘 북송될 걱정도 덜었다. 그해 딸도 태어났다. 나가서 일을 해야 했기에 중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주변 사람들이 다 한족이라 언어 실력도 쑥쑥 늘어 몇 년 지나서 어디에 취직을 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2018년까지 무려 21년을 살았다.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일당직 노동을 하는 남편이 워낙 말이 없어 둘 사이 소통이 잘 되지 않아 너무 답답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갈 곳도 없어 모든 불만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했다. 그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그는 한 직장에 취직해 10년 동안 매니저로 살기도 했고, 식당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1년에 많이 쉬어야 1주일을 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만 하고 살다보니 돈도 적잖게 벌었다. 물론 그래봐야 한족 동네의 평균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짐을 가장 많이 갖고 온 탈북자어느덧 딸이 17살이 돼 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됐다. 그런데 딸이 한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결정했다. 김 씨는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던 터라 더 공부하겠다고 하는 딸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중국에서 버는 돈으로는 딸의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김 씨는 결단을 내렸다.“내가 서울로 가서 돈을 벌어 딸의 뒷바라지를 하자. 딸 때문에 억지로 살았는데, 딸이 중국을 뜨면 이걸 기회로 희망이 없는 이 삶도 청산하자.”2017년 말 김 씨는 한국 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저는 사실 탈북자인데 한국에 가도 되나요? 한국에 가서 북한말을 하게 되면 간첩으로 잡힐지 몰라서요.”그는 그때까지 한국에 수만 명의 탈북자가 사는 것도 몰랐다.대사관에선 “당연히 한국에 가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딸이 서울에 들어온 지 1주일 뒤 김 씨도 비행기표를 끊고 하얼빈 공항을 떠나 인천공항에 내렸다. 중국 호구가 있기에 비행기를 타고 직접 오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으로 떠날 때 김 씨는 “저기는 물가가 비싸니 아무 것도 사지 말고 여기서 다 챙겨가자”고 생각했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그는 커다란 캐리어를 서너 개 갖고 내렸는데 마중 나온 요원들이 “이렇게 짐을 많이 갖고 온 탈북자는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김 씨를 태운 버스는 합동조사센터에 들어갔는데, 모든 물품은 물론 휴대전화도 압수된 채 독방에 들어갔다. 김 씨는 한국에 가면 조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몰라 체포된 줄로만 알았다. 며칠 동안 김 씨는 “왜 이런 곳에 잡아넣지?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겠구나. 바보처럼 내가 발등을 스스로 찍었구나”하는 생각에 끝없이 홀로 자책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것이 통상적인 과정임을 알았다.하나원을 거쳐 김 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행운도 따랐다. 이전까진 중국에서 10년 이상 산 탈북민에겐 집을 주지 않았는데, 그가 올 즈음엔 법이 바뀌어 임대주택을 주었다. 2018년 3월 김 씨는 인천에 집을 받고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제주도에 새 둥지를 틀다사회에 나오자마자 김 씨는 한 식당에 취직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도 쉽지 않았지만, 한국어 소통도 어려웠다. 중국의 한족 동네에서 20년 넘게 살다보니 한국어도 많이 서툴렀다.중국에서 새벽 2시에 출근하며 식당까지 운영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한국 식당 서빙의 강도는 훨씬 더 높았다.돈을 아끼려고 겨울에 난방도 틀지 않고 살았지만 남는 돈이 없었다.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눈을 뜨자 지인이 동탄에 있는 골프장 식당이 더 좋다고 소개해주었다. 그 식당에서 그는 먹고 자면서 열심히 일했다. 쉬는 날엔 다른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식당일을 계속하니 다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파오기 시작했다.“내가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이렇게 허망하게 살다 죽는 건 아닐까”이렇게 회의하던 순간 지인이 “아직 나이도 젊은데 여기서 혼자 열심히 살기보단 서로 의지해 사는 것이 좋다”며 오래 전에 상처한 한 남성을 소개해주었다.둘은 몇 달 동안 전화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남자는 서울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 해외에서 회사를 운영했는데, 코로나로 여건이 악화돼 모든 것을 접고 부모가 사는 제주도로 내려가 귤 농사를 하며 새롭게 살려고 결심하던 차였다. 남자의 다정다감한 풍모에도 끌렸지만, 김 씨의 마음을 무엇보다 끌어당긴 것은 ‘과수원’이란 단어였다. 나무를 키우며 사는 삶은 김 씨의 오랜 소원이기도 했다.둘은 여생을 함께 하자고 언약을 하고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둥지를 틀었다.“남편이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제주도에 오자마자 그게 이뤄질 수 없는 약속임을 알았습니다. 물론 남편은 절대 힘든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디 그렇게 되나요. 내려와서 과수원 정리를 하면서 돌을 옮기다가 허리 디스크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참 잘해주니 힘든 것들을 잘 넘깁니다.”남편은 귤 농장에 ‘복희네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 씨는 드디어 뭔가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취미로 시작한 조경식물 사업4000평의 귤 밭을 가꾸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꽃과 열매솎기, 가지치기, 수확 등의 일정이 365일 동안 쳇바퀴처럼 돌아갔다.열심히 농사일을 하는 와중에도 예쁜 농원을 만들고 싶은 김 씨의 꿈은 지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꽃과 식물을 좋아한 그는 5일장에 가면 다른 가게에 가지 않고 식물을 파는 곳에만 가서 시간을 보냈다. 꽃나무들은 생각보다 비쌌다. 그가 식물 가게에서 웅크리고 앉으면 남편이 비싼 식물을 사서 키우는 것은 낭비라며 자꾸 잡아끌었다.그런 속에서도 그는 한라봉, 레드향, 천혜향, 황금향 등의 귤 묘목들과 레몬나무, 낑깡나무, 금목서, 은목서, 동백나무 등 수십 종류의 정원수 묘목을 사와 키우기 시작했다. 과일 밭에 사계절 꽃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김 씨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주변에서 “시골에 왔으면 농사나 잘 하지 쓸데없는데 시간을 팔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식물들이 너무 많아지자 김 씨는 작년 10월부터 남는 식물을 인터넷에 올려 팔았다. 그런데 너무 잘 팔렸다. 이유를 알아보니, 제주도에선 주택이나 숙박시설 등을 지어 허가를 받으려면 나무를 얼마 심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인근에서 건설공사들이 많이 벌어지는데, 조경수나 꽃나무를 판매하는 곳이 주변에 없었던 것이다.처음에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뜻밖에 취미로 시작한 식물 재배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김 씨는 이제는 조경수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귤을 판매한 돈보다 조경 식물을 판 수입이 더 많아지자, 이젠 남편도 아내를 적극 응원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이제는 “초보농부가 머리가 좋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돈을 버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식물을 가꾸고 키우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사는 제주도 여기저기서 이 손으로 키운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숲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구슬땀을 흘리며 키운 식물이 아름다운 정원도 만들고, 지구도 살리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제주도에 남길 삶의 흔적조경 식물 사업을 하면서도 본업인 귤 농사도 놓치지 않고 있다. 감귤 재배 방법도 열심히 배워 지난해엔 당도 16브릭스의 고품질 감귤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제주도에서 나는 평균 귤 당도보다 2브릭스나 높았는데, 이런 우수한 감귤을 생산하는 농장은 많지 않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김 씨는 올해 ‘장한 안덕면민상’ ‘서귀포시 시장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다음 목표는 제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우수한 감귤을 생산하는 것이다.과원 주변에 아름다운 정원수들을 심고, 제주도 전통의 아담한 민박집을 갖춘 ‘복희네종합테마농장’을 만들려면 아직 할 일이 태산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처럼 구원을 안겨주는 농장이 그가 그리는 꿈이다.“제가 자꾸 일을 만들어서 남편도 덩달아 고생이죠.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요. 내년에는 더 바빠질 거니까요.”김 씨는 친구도 만나지 않고, 놀려 다니지도 않으며 꿈을 실현하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남들이 버린 가구나 가전제품을 가져다 쓰고, 옷도 거의 사지 않는다. 그렇게 아낀 돈은 모두 장비와 식물을 사는데 쓴다.“예전에 삶의 목표가 없을 때는 ‘사람이 잘 먹고 즐기면서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꿈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의 족적을 제주도에 남기고 죽는 것이 목표입니다. 언젠가 통일도 되겠죠. 그때가 되면 북한 사람들도 제주도로 놀려올 겁니다. 그들이 산방산 아래의 아름다운 농장이 남포에서 온 김복희 씨가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평생을 바쳐 가꾼 것이라고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그 꿈을 위해 오늘도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올해 설날은 김정은에게 예년보다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일주일 뒤면 김정은은 만 40세 생일을 맞이한다. 공자는 마흔을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했지만, 그가 2500여 년의 세월을 지나 현대 사회에 온다면 분명 자기 말을 수정했을 것이다. 요즘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문명을 따라가느라 여든이 돼도 여전히 정신없이 사는 게 당연하다. 공자라고 예외일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자가 세상을 다니다가 북한에 이른다면 너무 익숙한 풍경들이 많아 분명 크게 반길 것 같다. 거기선 소가 밭을 갈고, 논에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손으로 잡초를 뽑는다. 여인들이 얼음을 깨고 손빨래를 하며 물동이를 이고 다닌다. 밤엔 등잔 기름도 없어 관솔(소나무 옹이)불 아래서 옥수수밥을 허겁지겁 먹는다. 공자가 사회주의란 요상한 이름을 대하고 갸웃거릴 순 있어도, 거기엔 분명 ‘왕족’이 살고 있고 이에 반항하면 멸문지화를 당하는 시스템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존재해 낯설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이 김정은이 다스리는 북한의 현실이다. 김정은은 이미 인생의 절반을 살았고, 자식들도 두었다. 설날에 김정은은 아버지로서 딸 주애의 미래를 생각하길 바란다. 김정은에게도 인민을 잘살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조금이라도 있을 것이다. 가끔이긴 하지만 인민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며 보인 눈물이 모두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통치 12년 동안 인민들의 생활 형편은 더 어려워졌고, 스스로 문을 걸어 잠가 세계 최악의 고립 지역을 자청했다. 김정은은 지금까지 자신의 안녕과 인민의 행복이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동안 수많은 숙청으로 통치 기반을 공고히 했음에도, 여전히 ‘제로섬(Zero-Sum)’ 통치를 고집하고 있다. 내가 안전해지려면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더 많이 뺏어야 하고, 인민이 부유하고 행복해지면 내가 위태로워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통치의 결과로 북한이 점점 파멸의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보인다. 마흔을 넘긴 김정은에게 이제 ‘윈윈’의 통치 방식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찾으면 방법은 분명히 있다. 한때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이웃 나라들만 봐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중국을 보라. 거의 반세기 전에 개혁 개방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공산당은 여전히 굳건하다. 수천 년 동안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중국 인민은 지금 배고픔이 뭔지 모르고, 외국 여행도 마음대로 다니고 있다. 러시아를 보라. 경제 개방은 물론이고 다당제까지 허용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은 20년 넘게 권좌를 지키고 있고, 아마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할 것이다. 러시아 인민들의 삶도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다. 쿠바를 보라. “원하면 언제든 쿠바를 떠나라”는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피델 카스트로는 반세기를 통치했고 동생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그 동생이 13년을 통치하다가 혈통이 아닌 사람에게 권력을 물려주었지만, 비극적인 결말은 맞지 않았다. 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권력을 유지하면서 세습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한 싱가포르의 리콴유도 있다. 그 외에도 세계를 돌아보면 김정은이 참고할 나라는 참으로 많다. 김정은이 발상만 바꾸면 북한에 비해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진 한국도 적극 도울 것이다. 한국은 위협이 아니다. 남쪽의 대다수 사람들은 가난한 북한을 먹여 살리는 책임을 떠안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남북은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윈윈할 수 있다. 북한이 매년 10%의 경제성장만 이루면 인민은 ‘김정은 만세’를 부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선전으로 이러한 북한의 급속한 번영은 오직 김정은만 이룰 수 있다고 세뇌시킬 수도 있다. 강력한 리더십이 없으면 나라가 분단돼 비극이 온다는 공포를 끊임없이 주입해 장기 집권에 성공한 중국과 러시아를 본받아도 된다. 그러나 경제가 끝없이 추락해 인민이 빈궁의 원인을 오로지 김정은 집권에서 찾게 된다면 강력한 철권통치도 더는 안 먹히는 날이 온다. 이미 북한은 임계점으로 가고 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버지의 미덕이 아니던가. 주애에게 비극의 말로를 물려줄지, 밝은 미래를 물려줄지는 오로지 김정은에게 달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남조선은 월급을 잘 줍니까?”치료하던 환자의 딸이 자신에게 탈북을 권했을 때 김성희 씨가 했던 첫 질문이었다.환자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석 달 뒤 한국에 도착한 뒤에도 김 씨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인천공항에서 조사기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김 씨는 생각했다.“이제 고문을 어떻게 견뎌야 하지? 제대군인 출신에 노동당원이고 의사까지 한 나는 악질 빨갱이라고 고문을 더 받을 수밖에 없겠구나.”조사기간 내내 김 씨는 언제 고문장으로 끌려갈지 두려웠다. 밥을 먹을 때도 독약이 들어있진 않는지 걱정했다. 건강검진 받으러 간 날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주사약에 독약을 넣어 평생 고통 속에 살게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조사기관을 퇴소해 하나원을 갈 때도 ‘여긴 새로운 형태의 감옥인가’라고 생각했다. 하나원을 나올 땐 강원도 강릉으로 거주지를 정했다. 전쟁이 나면 얼른 배를 타고 바다로 탈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남조선에 도망가면 고문을 해 비밀을 뽑아낸 뒤 죽인다고 끝없이 주입했던 노동당의 세뇌는 그만큼 오래갔다.그랬던 김 씨가 지금은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내가 만든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취하게 만들까”를 고민하는 주류회사 사장으로 변신했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다.● 김천 출신의 아버지김 씨는 1974년 함경북도 두만강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신성분이 좋은 집안은 아니었다.아버지의 고향은 경북 김천이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북간도로 가서 콩 농사를 짓겠다고 가족을 끌고 떠나는 바람에 중국에서 컸다. 그러다 20대 중반인 1960년대 초반 ‘조선 사람은 조선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결심해 친구 3명과 함께 북한으로 나왔다.아버지는 북한에서 운전 관련 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의 지시로 ‘농촌기계화운동’이 벌어질 때 농촌으로 자원해 진출했다. 그곳에서 토박이 여성을 만나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남조선 출생에 중국에서 성장한 아버지는 더는 출세하지 못했다. 북한에선 이런 사람들을 ‘동요계층’으로 구분하고 간부로 쓰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는 ‘동요’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뚜렷한 소신의 소유자였다. 누군가 “고향이 남쪽으로 돼 있으면 절대 출세할 수 없으니 고향을 중국으로 바꾸라”고 권고했지만, “내가 태어난 고향을 어찌 바꾸겠냐”며 경북 김천 출생임을 당당하게 여겼다. 아무리 높은 간부 앞에서도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살면서 자기보다 훨씬 못한 간부들의 지시를 받으며 인생이 꼬여가고, 자식들까지 자신 때문에 출세길이 막히자 점점 성격이 괴벽해지고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김 씨는 자라면서 아버지보다는 두 오빠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컸다. 아래 남동생까지 합쳐 6명이나 되는 식구의 생계는 어머니 몫이었다. 함북은 1980년대 말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은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산을 개간해 밭을 만든 뒤 거기서 농사를 지었다. 콩과 옥수수를 재배해 두부와 술, 엿을 만들어 팔았다. 두부를 만든 찌꺼기는 돼지를 먹여 키웠다. 버리는 것이 없었다.김 씨는 어렸을 때부터 밭에 가서 돼지에게 먹일 세투리(씀바귀)를 뜯어 오는 일을 맡았다. 체육을 좋아해 학교에선 태권도와 농구 특기생(선수)으로 뛰었다. ● “오빠, 나 대신 공부해”김 씨는 1991년 군에 입대했다. 원래는 전문학교 추천을 받았지만, 가정형편을 생각하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김 씨의 두 오빠는 출신성분을 바꾸려면 노동당에 입당을 해야 한다며 모두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갔다. 김 씨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그 해에 공교롭게 군에 갔던 맏오빠가 제대해 도 소재지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두 명의 대학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뻔히 아는 김 씨는 군 입대를 택했다.군에 입대해 가던 중 도 소재지에 열차가 한동안 멎었다. 이때 맏오빠가 기차역으로 찾아왔다. 그가 열차에서 내렸을 때 오빠는 아무 말도 못했다.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백만 마디의 말이 눈물을 타고 땅에 흘러내렸다.열차가 떠날 때 오빠는 열차를 따라 한참을 달려오다가 자갈에 걸려 넘어졌다. 훗날 집에 와보니 오빠의 손바닥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그때 생긴 것이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오빠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험한 고생이 기다리는 군에 가서 청춘을 바치려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빠는 밤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열차에서 오빠가 넘어지는 모습을 봐야 했던 기억은 김 씨의 일생에서 가장 마음 아픈 순간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그 순간만 떠오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다행인 점은 김 씨가 학교 때 체육 선수였던 점을 인정받아 군단 체육단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군단 태권도 선수 겸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그가 군 복무를 했던 1991년부터 1999년 사이는 고난의 행군 기간이었다. 군단에서 영양실조 환자와 아사자가 무리로 발생할 때였다. 그러나 체육단은 허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나마 밥은 주었다.군단 대항 경기는 1년에 몇 차례씩 열렸다. 김 씨가 속한 농구팀은 군 복무하던 8년 동안 4번 정도 우승을 했다. 최상위급의 농구팀이었던 것이다.원래 여성은 군에서 5~6년만 복무하면 됐다. 하지만 1997년 김정일은 군 병력이 모자란다며 남성은 기존 10년에서 13년으로 군 복무 기간을 늘였다. 여성도 8년으로 늘었다.김 씨는 17세에 입대해 만 25세를 꽉 채우고서야 제대증을 받았다. 군단 체육단에서의 활약이 인정돼 제대할 때 그는 3년제 의학전문학교 추천서를 받았고 내친 김에 입학까지 성공했다.● 술을 만드는 처녀의사8년이나 공부를 하지 않던 김 씨가 전문학교 학업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출신성분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의전을 졸업하면 준의사 자격을 받았다. 북한에선 준의사를 준의라고 하지만, 환자들은 의사 선생님이라고도 한다.준의는 의사와 간호사 중간쯤에 위치한, 이를테면 보조 의사라고 볼 수 있는 직제다. 집집마다 찾아가 진료를 하는 왕진 의료 시스템을 표방하는 북한에선 의사들이 힘들어 모든 담당구역을 커버할 수가 없다. 그리 심하지 않은 병은 준의가 맡는다. 준의도 왕진을 다니고, 처방을 내줄 수 있다.2002년 김 씨는 고향으로 가 병원 준의로 일했다. 그동안 두 오빠 모두 대학을 졸업해 자리를 잡았다. 대학 및 전문학교 입학률이 15~20%에 그치는 북한 실정에서 3남매가 모두 대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병원에 가보니 약이 없었다. 의사가 하는 일은 진찰을 하고 처방을 떼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환자가 장마당에 가서 처방대로 중국제 약을 사고, 다시 병원에 오면 의사가 주사를 놔주었다.병원에 입원실이 있긴 하지만, 입원하려면 환자가 먹을 것을 모두 집에서 가져와야 했다. 겨울엔 입원실 난로의 땔감도 보장해야 했다. 병원은 침상을 빌려주고, 관찰하고, 환자가 가져온 약을 주사하는 일만 했다.의사라고 해도 배급도,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출근하지 않으면 처벌하니 어쩔 수 없이 출근은 해야 했다.점점 의사들은 돈 많은 집 가정 의사처럼 변했다. 지금은 돈을 낼 수 있는 집에서 의사를 부르면 찾아가 진단을 내린 뒤, 의사가 직접 장마당에서 약을 구해 매일 찾아다니며 치료를 한다. 이 과정에 용하다는 소문이 나면 저마다 해당 의사를 찾게 된다. 그러면 의사 몸값도 높아져 잘 살 수가 있게 된다.반면 의사를 부를 수 없는 가난한 집은 기존처럼 병원을 찾아 처방을 받는다. 병원에서 자리를 지키는 의사는 능력이 없어서 불려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2023년 현재의 북한 의료 제도의 실태다.김 씨가 준의로 일했던 2008년까지는 의료 제도가 위처럼 변해가는 과도기적 단계였다. 아무리 열심히 치료해봐야 보상도 없으니 의사들은 왕진을 나가기 싫어했다. 점점 김 씨에게 왕진 부담이 전가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의사로 왕진을 다니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야 했다. 김 씨는 명색이 의사였지만, 퇴근 뒤에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돼지를 먹일 뜨물을 걷어오는 것이 일과였다. 늦은 밤엔 단속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술을 빚었다.● 고향에서 받은 충격들의전을 졸업하고 고향에 온 그는 여러 번 충격을 받았다.첫 번째 충격은 11년 만에 고향에 오니 가까운 친구들이 거의 다 사라진 것이다. 물어보니 중국에 시집갔다고 했다.두 번째 충격은 위생검열을 가다가 길에서 본 여인들이었다. 북한 당국은 수십 명의 여성들에게 수갑을 채워 거리를 행진하게 했다. 중국에 갔다 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다.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 여인들을 보며 그는 같은 여성으로서 참을 수 없는 수치와 분노 한편으로는 공포도 느꼈다.세 번째는 왕진을 갔다가 본 북송 여인이었다.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산 미라가 누워있는 줄 알았다. 북송돼 전거리 수용소에서 1년을 복역하다가 죽기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났는데, 해골에 눈만 붙어있는 줄 알았다. 매일 가서 수액을 놔주었는데 한 달 뒤 또 한번 놀랐다. 미라가 여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옥수수죽에 된장국만 먹었는데도 놀랍게 달라졌다. 치료를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충격의 연속이었다.북한 보위부에서 고문받던 일, 전거리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차마 인간의 짓이라고 할 수 없는 학대들…. 특히 임신한 여성들은 배를 걷어차 어떻게 하든 유산하게 만든다는 말에 치를 떨었다. 전거리에 가면 1년을 버티기 어렵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치료를 끝내고 얼마쯤 있다가 그 여인은 다시 중국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김 씨는 2005년 31세에 결혼했다. 북한 여인들은 20대 중반에 결혼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늦은 나이였다. 남편은 제대군인이었고, 대학을 나왔는데 직업은 약초 관리사였다. 매일 병원을 찾아와 고백하는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이듬해 딸도 태어났다.그러나 신혼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8년 3월 산에 갔던 남편은 도벌꾼들이 벤 나무에 깔렸다. 한국 같으면 목숨까지 잃지 않았겠지만, 산에서 업어 내려오고 달구지에 태워 병원에 오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숨을 거두었다.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김 씨는 두 살이 된 딸을 안고 울었다. 더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린 딸을 위해 결행한 탈북아무런 삶의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던 때 왕진을 다니던 집의 딸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선생님 함께 남조선에 가요”라고 제안했다. 딸의 여동생이 이미 한국에 가 있는데 어머니와 자기도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우리 어머니가 아픈데 의사 선생님이랑 가면 치료도 해줄 수 있으니 좋잖아요. 여기에 무슨 미련이 더 있어요. 함께 가요.”김 씨는 그들과 함께 떠나기로 결심했다. 김 씨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 드라마 같은 것은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남조선이 어떤 곳인지 알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남들이 다 그렇게 가려고 애쓰는 곳이니 당연히 북한보다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내 운명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린 딸은 나처럼 살지 않겠지.”2008년 11월 김 씨는 두만강을 넘었다. 서울에 있는 환자의 딸이 브로커를 포섭하는 등 모든 준비를 했다.두만강을 넘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고향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던 아버지처럼 나도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야겠구나. 과연 살아서 다시 고향에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를 땐 울컥 했지만 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11월의 두만강 물은 몹시 차가웠고, 깊은 곳은 가슴까지 왔다. 두 살 남짓 딸을 목마 태우고 비틀거리며 강을 건널 때 아이가 울까봐 제일 걱정이 됐다. 건너는 지점의 경비대 초소는 돈으로 매수했지만, 아이가 울면 인근 초소에서 군인들이 달려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 딸도 위급한 순간임을 감지했는지 찬물에 잠겨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김 씨는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강을 건너니 서울 딸이 보낸 브로커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때부터 동남아 모 국가까진 불과 20일 만에 빠르게 이동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면서 김 씨는 “내가 지금까지 우물 안에 갇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중국은 정전되는 일도 없었고 어딜 가나 먹을 것이 풍부했다. 옷 사러 시장에 나가니 보지 못한 온갖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악어강’을 넘어 간 동남아 국가에서 3개월을 기다린 끝에 김 씨는 2009년 3월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와선 고문을 받을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사기관에 들어갔을 때 “당연히 딸과 나는 따로 가두고 심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딸도 함께 지내게 했다.“남조선은 고마운 일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지어주는 조사관들의 웃음이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음을 그는 한국 사회에 나와서야 알았다.강릉에서 만난 첫 신변보호 담당관은 여형사였는데, 사심없이 너무나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여형사 덕분에 한국 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마음도 열게 됐다.● 충북 음성에 자리잡다강릉에선 3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딸이 문제였다. 식당 보조로 첫 직업을 얻었는데 어린이집은 일찍 문을 닫았다. 아이를 데려와 식당 구석에 앉히고 일을 하면서 늘 마음이 내려가지 않았다.이때 충북 음성에 사는 동생이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북한 한 동네에서 컸던 3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그가 고향에 왔을 때는 중국에 가서 없었다. 김 씨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 한 일행과 합세했는데, 거기서 동생을 만났다. 몇 년 동안 동생은 중국에서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살다가 뒤늦게 한국으로 떠난 것이다.음성의 한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동생은 “우리 둘이 같이 살면 아이를 번갈아가며 볼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했고, 그 말에 김 씨는 선뜻 짐을 싸고 음성에 왔다. 공장에서 일하니 퇴근 시간이 있어 아이를 돌보긴 좋았다.동생에겐 중국에 남겨둔 아들이 있었는데, 김 씨의 딸과 동갑이었다. 둘은 돈을 벌어 제일 먼저 아들을 데려왔다. 15평짜리 집에서 두 가족의 동거가 시작됐다. 나중에 김 씨가 집을 받아 분가하려 하니 이미 남매처럼 살던 아이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 난리였다.그래서 조금 더 큰 18평 아파트로 이사가 방 하나씩 쓰면서 공동주택처럼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13년 동안 이렇게 살고 있다. 아이들은 커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동생 아들은 서울의 한 대안학교에 입학했는데 얼마 전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한다. 딸이 이 소식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진짜 축하해. 여친한테서 머리털 뽑히지 않으려면 정말 잘해야 해.”김 씨가 창업한 뒤 동생도 함께 옮겨왔다. 지금도 둘은 같은 회사에서 함께 회사를 키워가고 있다.● “내가 술을 만들어 팔자”음성에 와서 김 씨는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창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주말마다 창업교육을 받으러 가서 많은 직업을 알아봤지만 음성이란 지역에서 토착민들과 경쟁해선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생각한 것이 술 공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본 것이 술독이었고, 탈북하기 전까지 했던 것이 술을 만드는 일이었다. 탈북민들 중에 술을 만들어 성공한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보니 없었다.“그래, 그럼 내가 술을 한번 만들어보자.”하지만 결심에서 실행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선 술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보기 위해 술 공장에 취직하려 했지만 여직원을 받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김 씨는 집에 술독을 들여놓고 북에서 만들던 방식으로 계속 시험 제조를 해봤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술 빚는 방법은 김 씨의 집에서 3대째 내려오는 방식이었다.김 씨의 외가는 나름 지역에서 오래 산 토착민이었다. 다른 북한 가정은 공장에서 만든 술로 제사를 했지만, 김 씨 외가는 제사술은 꼭 집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전통을 고수했다. 그 집에서 자란 어머니가 제사술을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았다. 엄마가 만든 술은 술맛이 좋기로 유명해 만들기만 하면 동네에서 부리나케 팔렸다. 그 방법을 김 씨가 배운 것이다. 술 공장으로 목표를 세운 김 씨는 차곡차곡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2016년 사이버대에 입학해 경영학을 전공했다. 술 공장을 만드려니 자격증들도 많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술을 만들려면 술 종류마다 자격증이 다 달랐다. 알코올이 나오게 발효하면 탁주, 탁주에서 앙금을 가라앉힌 맑은 술은 약주, 찌꺼기를 짜서 증류하면 증류주, 약주와 증류주를 섞으면 기타 주류에 속했는데 각각의 면허가 다 달랐다.열심히 노력해 술 전문가를 찾긴 했지만 면허를 따려면 400만 원씩 달라고 했다. 4개를 따는데 1600만 원이 들었는데, 창업자금을 억척스럽게 모으던 김 씨에겐 여간 큰 돈이 아니었다.이럴 바엔 내가 진짜로 공부해 자격증을 따겠다고 생각해 서울의 가양주연구소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다. 부품공장에서 퇴근해 두 시간 넘게 운전해 서울에 가서 7시 반부터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넘었다. 그리고 아침 6시 반에 다시 출근길에 나섰다. 이런 생활이 매주 2회씩 반복됐다.그는 끝내 술 제조 면허 4개를 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2019년 마침내 건물을 임대해 술 공장을 만들었다. 한국에 온지 10년 만에 목표를 이룬 것이다. 동네의 종친회 회장이 북에서 와서 딸을 키우며 힘들게 사는 그를 눈여겨봤다가 자신의 건물을 싸게 빌려주었다.건물을 술 공장으로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전문 시공업체를 부르려니 너무 비쌌다. 그래서 직접 에폭시 시공을 배워 바닥부터 깔았다. 어린 딸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함께 엄마를 도왔다. 바닥을 칠하고 천정을 수리하고, 증류기와 발효조 등 설비를 사서 들여오는 등 갖은 노력 끝에 2019년 4월 마침내 첫 재료를 발효조에 채웠다. 이것을 6개월 동안 숙성시켜 10월에 마침내 첫 제품을 출시했다.● 코로나 위기를 이겨낸 힘첫 술을 뽑던 그날 밤 김 씨는 정말 많이 울었다.“북에서 엄마가 술을 뽑아 우리 자식들을 키웠는데, 이젠 내가 남쪽에서 딸을 키우려고 술을 만드네요.”집에서 술을 뽑을 때마다 처음으로 마셔보며 술맛을 평가했던 아버지 생각도 났다.김 씨는 처음으로 생산된 술에 ‘태좌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북에서 술을 만들 때는 브랜드라는 것을 몰랐다. 그냥 제사술이라고 불렀는데, 한국에서 그렇게 팔 순 없는 일이었다.김 씨는 제사 때마다 하던 외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렸다. 외할아버지는 일가 남자들이 모여 앉으면 늘 “남자는 술을 마실 때 올방자(책상다리)를 크게 틀고 앉아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착안해 김 씨는 태좌주란 브랜드를 술에 붙였다.술을 만들었으니 이젠 판매처를 찾아야 했다. 김 씨는 각 지역 축제장을 타켓으로 정했다. 술을 싣고 가 어르신들에게 맛보시라고 권하며 “제가 북에서 왔는데 술을 만들어봤습니다. 한번 드셔보십시오”라고 열심히 권했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는 체질이지만, 술 공장 사장이 술도 못 마시냐는 소리를 여러 번 듣고 나서 혼자 술도 많이 마시며 단련했다.“탈북자가 만들었으면 독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하고, “어디서 이따위 술을 마시라고 하냐”며 면전에서 술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맛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그러나 모두가 그를 박대하진 않았다.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이 훨씬 많아 힘이 났다. 전화를 해서 자기 동네 매장에 가져다 팔게 해주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렇게 2019년 석 달 동안 행사장 등을 돌면서 1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너무 기뻤다. 첫 해에 “100만 원만 벌어도 내가 이기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팔린 것이다. 자신감이 솟구쳤다.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호락호락하게 성공을 선물하지 않았다. 2020년 본격적으로 술을 만들어보려 했는데 그만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노인들이 많이 사는 음성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축제도 다 취소됐고, 슈퍼에 입점해도 슈퍼를 찾는 사람들이 없었다.임대료와 전기세, 수도세 등 고정비는 계속 나가는데 어떻게 팔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장 문을 닫을 수도 없었다. 술은 6개월 또는 1년간의 숙성기간을 거치는데,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술을 계속 빚어 발효조에 채워야 했다.이 기간 그는 무작정 알바를 뛰었다. 한 번에 새벽 배송과 사무보조, 학교 급식 배송 등 다섯 가지 알바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하루 1시간도 자지 못하고 일했다.고마운 도움도 많이 받았다. 남북하나재단에서 그의 술을 받아 명절 선물로 돌렸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판매해주겠다고 승인했다. 충북은 텃세가 심한 동네로 알려졌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대견하게 여겨 일부러 술을 사서 주변에 선물했다.가장 힘든 시절을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이겨냈다.매출은 조금씩 성장했다. 2021년 매출 3900만 원을 기록했고, 2022년엔 6000만 원, 2023년엔 9000만 원을 기록했다. 많이 남지는 않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태좌주로 시작한 브랜드도 농태기, 삼팔주, 과하주 등으로 확대됐고 ‘하나도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 판매도 하고 있다. 김 씨는 내년에는 한국에 없는 77도짜리 술도 출품해 시장을 개척하려 한다. 하나도가의 목표는 40대 이상이 집에서 마실 수 있는 묵직한 각종 전통주를 만드는 것이다.● “통일건배주는 우리 술이 최고입니다”김 씨는 지역사회에서 받은 도움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령자가 많은 동네엔 농사 때마다 일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2019년 무작정 딸을 데리고 농사 봉사를 나서기 시작했다. 딸에게 너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봉사가 제겐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북에서 의사로 일했던 6년이 저에겐 봉사였어요. 돌봐줄 사람이 없이 중병으로 앓는 환자를 업고 강으로 나가 목욕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그렇게 시작한 봉사는 이후 ‘소금봉사회’라는 탈북민 봉사단으로 성장했다. 현재 봉사단원은 20명인데, 이중 18명이 탈북민이다.“한국에 정착하는 초기 ‘너희는 우리 세금으로 정착금을 받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받은 세금을 지역 사회에 돌려준다는 의미로 봉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동네 어르신들 농사일을 돕다가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정기화했어요. 우린 ‘주말 하루는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께 바치는 날이다’고 생각하고 봉사해요.”소금봉사회의 스케줄은 나름 정교하다. 매월 첫 번째 토요일은 노인복지센터에서 마사지 봉사를 하고 마지막 주 월요일은 인근 이천에서 치킨집을 하는 탈북민의 기부로 ‘학교밖 청소년센터’에 가서 치킨 봉사를 하는 식이다. 농번기엔 매주 토요일에 농사일을 도우러 나간다. 이들의 노력으로 음성에선 탈북민에 대한 시선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김 씨는 300명이 소속된 대한적십자봉사회 음성지구 협의회 사무부장도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삶을 인정받아 김 씨는 2023년 남북한 사회통합사례 발표대회에서 대상인 국회의장상을 받았다.김 씨는 술 공장으로 성공하면 탈북한 한부모 가족을 돕는데 힘을 쏟을 계획이다.“제가 한국에 와서 아무런 연고 없이 혼자 애를 키우니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저는 애를 다 키웠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애를 키우며 힘들게 사는 탈북 여성이 너무 많아요. 제가 겪어봤으니 형편이 되는 한 이런 탈북 여성들을 물심양면으로 키우고 싶습니다.”술 제조업체 대표로서의 그의 꿈은 무엇일까.“우선은 인정받는 술을 만드는 거죠. 한국이 아닌 세계에서 칭찬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술이 맛있어 알아봤더니 북에서 온 탈북 여성이 만들었다 이렇게 알려지길 원해요. 그리고 제일 큰 소원은 통일이 되면 우리 하나도가에서 만든 술이 통일건배주가 되는 겁니다. 우리 술은 재료는 남쪽의 것이지만, 제조방법은 북쪽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훌륭한 통일건배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허수현은 한반도 최북단 탄광마을이 낳은 수재였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직전 북한 전체에서 700명에게만 수여하는 ‘7.15 최우등상’을 수상했다. 7.15최우등상은 김정일이 평양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한 날인 1960년 7월 15일을 기념해 1987년에 만들어진 상이다. 지금은 이 상이 특권층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한 발판이 돼 각종 비리와 뇌물로 얼룩져 있지만, 상이 제정된 초기 몇 년은 정말 공부 잘하는 사람에게만 수여됐다. 상을 받게 되면 곧바로 중앙급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북한에선 고등중학교 졸업생 중 20% 미만이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특혜였다.허 씨도 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공대)에 입학해 8년이나 공부했다. 그리고 그때 배운 지식을 활용해 지금은 한반도 최남단인 경남 마산의 해저터널 공사장에서 시공품질을 관리하는 공사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책공대 졸업생이 네 번의 탈북을 반복한 뒤 건강이 악화돼 남의 등에 업혀 동남아 정글을 넘어 한국까지 오게 되고, 이후 남과 북에서 동시에 측량기사 자격을 받은 최초의 기술자가 돼 해저터널 공사장에서 일하게 되기까지 삶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 신분 상승의 꿈그가 태어난 한반도 최북단 온성군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종 22년인 1440년에 김종서 장군이 이곳을 평정한 뒤 군을 설치하고 온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온성에는 평안남도 안주 탄전에 이은 북한 최대의 갈탄 탄전이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온성에는 연간 50만 톤 이상의 갈탄을 생산하는 탄광이 여러 개 있었다. 허 씨는 이런 대형 탄광 중 하나인 주원 탄광마을에서 1974년에 태어났다.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개 출신성분이 나빴다. 허 씨의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부친은 1960년대 후반까지 중국에서 살다가 문화대혁명 등의 격변기를 거치며 북한으로 넘어왔다.부친은 늘 허 씨에게 “너는 공부를 잘해 꼭 신분 상승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 씨가 13세 때 부친은 갱이 붕괴돼 사망했다. 탄광마을에선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아버지가 사망하자 허 씨는 1년 정도 방황했다. 학교에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부친의 소원대로 신분 상승을 하기로 결심했다. 3년을 열심히 공부해 고등학교 졸업반이 됐을 때 허 씨는 7.15 최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게 됐다. 북한도 대도시의 교육 환경이 매우 좋기 때문에 외진 탄광마을에서 수상자를 배출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하지만 상을 받아도 문제였다. 평양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가족들에겐 엄청난 희생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김책공대에 입학한 1992년엔 탄광마을에 배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평양에서 대학을 다닐 돈이 나올 리 만무했다.허 씨는 대학 대신에 군대에 가려고 시도했다. 대학을 갈 사정이 못되니 군에 입대해 노동당원이 되면 신분이 그나마 좀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하지만 7.15 최우등상 수상자는 군대에 보내지 않는다는 지침이 있어 결국 갈 수는 없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김책공대 지질탐사학부에 입학했다.그해 온성에서 중앙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허 씨 외에 이과대학 입학생이 한 명 더 있었다. 온성군은 그런 동네였다.● 돈에 성적을 뺏기던 시절북한의 다양한 산업현장에서 활약하는 인재들을 키우는 김책공대는 학제가 길어 7년을 다녀야 졸업증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며 각종 공사현장에 끌려 다니다 보니 진도가 밀려 7년 안에 졸업하기가 어렵다. 허 씨도 학제보다 1년을 더 다녀 2000년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그가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 중반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라 사방에서 아사자가 속출할 때였다. 대학 기숙사에서 주는 밥을 먹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탄광마을에서 태어나 김책공대에 입학한 허 씨와, 어촌마을에서 태어나 김일성대에 입학한 기자는 평양에서 대학을 다닌 시기가 정확히 겹친다. 그래서 인터뷰 내내 떠올리기 싫은 추억들이 소환됐다. 몇 개를 소개하면 이런 식이다.“1993년 공화국 창건 행사 때 김일성대 학생들은 깃발을 들고 김일성광장을 통과했습니다. 그 연습만 3개월 하면서 너무 힘들어 죽을 뻔 했죠.”“김책공대는 촛불을 들고 김일성대를 따라갔죠. 저도 죽을 뻔 했어요.”“제대군인인 학급 소대장, 청년단체비서 이런 사람들은 가난한데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곁에 한둘씩 끼고 있죠. 그리곤 시험 때마다 자기 것도 좀 써달라고 사정하죠. 그걸 거절하기 어려워 저는 시험 칠 때마다 시험지 3개를 써주었어요. 다양한 볼펜을 준비해서 한 장은 정자로 쓰고, 다른 장은 흘겨 쓰고, 이런 식으로 답을 적어 교수가 뒤돌아서 있을 때 공부 못하는 제대군인들에게 몰래 건네주었죠. 대신 그들은 각종 비용을 걷을 때 나를 빼주기도 했고, 가끔 도시락도 두 개를 갖고 와서 허기진 배도 채워주었습니다.”“저도 그랬어요. 국가졸업시험 때까지 남의 시험지를 작성해주었어요. 대신 저는 돈을 받았습니다. 방학 때 집에 가지도 않았지요. 온성까지 기차로 일주일 넘게 걸리는데 왔다갔다 시간 낭비가 크고, 또 가봐야 집에서 보태줄 수도 없으니 방학 때는 제대군인들 과외를 해주고 돈을 받았습니다.”“저는 졸업장을 받고 나니, 3점짜리 과목이 몇 개 있었어요. 저는 대학 내내 3점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5점 만점에 3점은 낙제를 겨우 면한 수준인데, 대학 교무부에 찾아가 싸우지도 않았어요. 어차피 이 체제가 싫어서 탈북하려 결심한 마당에 3점이 대수냐고 생각했죠.”“저도 졸업증에 받지 않은 3점들이 있었어요. 권력자 부모를 둔 학생들은 좋은 곳에 가기 위해 대학 교무부 직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컴퓨터에서 점수를 바꾸었어요. 5점 최우등생과, 4점 우등생, 3점 보통생의 전체 비율을 바꿀 수 없으니 5점으로 조작하려면 누군가의 점수를 빼앗아야 했죠. 제일 힘이 없는 우리가 점수를 빼앗긴 거였죠.”최우등을 하고도, 돈과 권력이 없으면 3점 졸업증을 받아야 했던 시대. 허 씨와 기자는 그 시대에 평양에서 대학을 다녔다. 기숙사에서 밥을 몇 숟가락만 주던 때라 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배고팠던 기억밖에 없다. 졸업증을 받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뇌물로 성적을 조작하고, 남의 졸업논문을 베껴 써서 제출하는 상황은 지금도 별반 나아지진 않았다.● 북한의 측량기사들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탄광마을 출신의 김책공대 졸업생에게 좋은 직업이 기다릴 리 만무했다. 북한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다. 대학을 졸업하면 중앙에서 어디로 가라고 임명한다.권력과 부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면 대학 때 실컷 놀고도 중앙당이나 외화벌이 업체, 보위부 등 권력기관에 발령을 받는다. 가난한 자들의 운명은 그와 반대이다.허 씨는 2000년 3월 대학을 졸업하면서 졸업증과 함께 측량기사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평양 인근 대동군 시정노동자구에 있는 중앙측량단으로 발령을 받았다. 모두가 기피하는 직업이었다.측량기사는 20㎏이 넘는 장비를 메고 매일 같이 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1000분의 1 오차 범위 내에서 지도에 점 하나를 찍는데 사나흘이 걸렸고, 한 구역을 측량하는데 2~3개월이 걸렸다. 깊은 산속에 천막을 치고 야인생활을 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현장기사는 배급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북한은 측량을 하는 기관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중앙측량단이고, 다른 하나는 인민무력부(군) 측지국이다. 그런데 진짜 좌표는 측지국이 갖고 있다. 중앙측량단의 좌표는 일부러 정확한 좌표와 다르게 작성한다. 좌표가 고급 비밀이기 때문에 외부에 정보가 새나가면 안된다는 이유 때문이다.허 씨는 한국에 온 뒤 큰 허탈감을 느꼈다. 위성으로 GPS를 찍는 시대를 보니 그 무거운 장비를 메고 다니며 점 하나를 찍겠다고 며칠씩 바친 과거가 너무 허망하게 생각됐기 때문이다. 북한도 2005년경부터 러시아 위성항법체계인 ‘글로나스’의 도움을 받아 위성 측량을 시도했다고는 알려졌지만, 어느 정도 활용되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원시적 석탄채굴허 씨는 2001년 말에 온성으로 돌아왔다. 뇌물이 없으면 이직도 힘든 세상이지만, 아버지도 없는데 어머니마저 아파서 쓰러졌다고 하니 집으로 보내준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를 간호할 사람은 허 씨 밖에 없었다.새로 발령받은 직장은 풍인탄광 기술과였다. 그러나 할 일은 없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온성 탄광들은 모두 침수됐다. 전기가 없어 물을 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을 방치하다보니 갱을 다시 사용할 수가 없었다.탄광에 다니던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일제 때 했던 방식대로 얇은 탄층 채굴을 시작한 것이다. 삽과 곡괭이로 수직굴을 파들어 가는데, 운이 좋으면 8m에서 탄층을 만나기도 하지만, 운이 나쁘면 25m까지 파들어 간다. 탄층을 만나면, 그걸 따라 이번엔 가로로 파 들어간다. 탄층의 두께는 보통 0.8~1.2m였다. 양동이를 매단 도르래를 타고 수직굴에 들어가 몸을 돌리기도 어려운 좁은 공간에서 석탄을 파서 다시 양동이로 끌어올렸다. 도무지 현대인이라고 볼 수 없는 원시적 채탄방식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석탄을 캐서 팔아야 장마당에서 먹을 것을 사올 수 있었다. 이런 수직굴을 온성에선 ‘노두’라고 불렀다. 온성에는 이런 노두가 수없이 많았다. 노두당 가족, 친척, 친구 등 5~7명이 팀을 이뤄 작업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노두공’이라 불렀다. 북쪽은 날씨가 춥기 때문에 먹는 것 못지않게 석탄도 귀하다. 캐내면 파는 것은 큰 문제가 안됐다. 노두도 1년 내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땅이 어는 1~3월에만 할 수 있었고, 봄이 와서 땅이 녹으면 수직갱이 버틸 수 없기 때문에 버려야 했다. 구멍을 방치해서도 안됐다. 단속기관 사람들이 찾아와 갱을 다시 메웠는지 조사한다. 단속할 권한이 있다는 것은 뇌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온성 전체에 이런 노두가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겨울이면 할 일이 없는 농민들도 이 일에 매달렸다. 안전은 뒷전이라 붕괴와 추락, 가스질식 등으로 죽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났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어차피 굶어죽기 때문이다.허 씨가 소속된 기술과는 늘 각종 공사에 동원됐다. 도로 공사, 발전소 공사 등등 인력을 차출하는 공사는 끊이질 않았다. 김책공대에서 배운 지식을 쓸 곳은 없었다.이렇게 살다가 어느새 결혼할 나이가 됐다. 그래도 허 씨는 명색이 탄광마을이 배출한 수재이고, 평양에서 김책공대까지 나왔던 터라 여성들에게 나름 인기가 있었다.32살 때인 2006년 그는 10살 어린 여성과 결혼했다. 아내는 탄광 선전대 가수로 나름 인기가 좋았다. 이성적인 지식인과 감성적인 예술인의 조합이었다.그렇지만 매력과 결혼생활은 별개였다. 결혼한 직후부터 둘은 다투는 일이 많았다. 서로가 서로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4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둘은 이혼하기로 합의했다. 어린 딸은 아내가 키우기로 했다. 이때부터 그는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두만강을 넘나들다강 건너 연변 왕청에는 아버지의 삼촌과 사촌 등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국경 근처라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드나들 때도 허 씨는 명색이 김책공대 졸업생인데 조국을 배반하면 안 된다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혼 후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눈치 볼 일도, 무서울 일도 없었다.2010년 겨울 그는 국경경비대에 돈을 쥐어주고 두만강을 넘었다. 탈북한 것은 아니고, 친척에게 도움만 받자는 목적이었다. 저녁에 넘어가서 친척에게 전화를 하고 새벽이 되기 전에 다시 북으로 넘어왔다.2012년 2월 그는 두 번째로 중국으로 갔다. 당시는 김정일이 사망한지 얼마 안됐던 때라 경계가 매우 심했다. 그는 북한군 군복을 입고 길을 떠났다. 군인은 초소에서 잘 단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을 따라 난 도로로 한참을 가다가 어둠이 내릴 때 바로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 부락의 아무 집이나 들어가 왕청 친척에게 전화를 좀 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하고 몇 시간 정도 머물렀는데 갑자기 공안이 들이닥쳤다. 집주인이 그를 도와주는 척하고는 신고를 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중국은 그즈음부터 탈북자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군 국경경비대가 수시로 건너와 사람까지 죽이며 노략질을 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북한군은 최고의 기피대상이었다.탈북자들이 북송 전 대기하는 도문변방수용소에 끌려갔는데 며칠 뒤 보위부에서 차를 갖고 건너와 그를 싣고 갔다.그렇지만 그는 예상과는 달리 20일 정도 가수감됐다가 석방됐다. 서류를 보니 중국에 친척이 다 있는 것도 확실하니, 도움 좀 받으려 넘어갔을 뿐이라는 그의 말이 인정됐다. 탈북은 배반이지만, 그의 경우엔 일탈 정도로 간주됐다.보위부라고 해봐야 어차피 한동네 사는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지역이 배출한 인재의 경력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는지 그다지 혹독하게 대하진 않았다.하지만 허 씨 입장에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잡혀오니 화가 났다. 보위부 감방에서 그는 강 건너편에서 일하다 잡혀왔다는 사람을 알게 됐다. 그는 자기가 일했던 중국 훈춘의 한 슈퍼의 이름을 알려주면서, 다시 건너가 자기 이름을 대면 사장이 고용해 줄 것이라고 했다.감방에서 나온 허 씨는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세 번째 탈북이었다. 그는 감옥 동기가 알려준 슈퍼로 갔다. 왕청에 가지 않은 이유는 친척들은 별로 도와줄 의향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슈퍼는 중국과 나진선봉을 연결하는 도로 옆에 있었는데, 두만강 건너 허 씨네 동네가 약 10㎞ 밖에 빤히 바로 보였다. 허 씨가 내륙 깊이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딸을 데려오고 싶어서였다. 고향 가까이 있어야 집과 연락이 수월하다고 판단했다. 허 씨가 일하는 슈퍼에는 북한을 오가는 운전기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들을 통해 그는 전처에게 휴대전화를 전달할 수 있었다. ● 자수해 감옥에 가다그렇게 1년쯤 지났는데 사고가 생겼다. 중국 휴대전화를 받은 전처가 그걸 이용해 돈 벌려고 브로커 일을 하다가 보위부에 체포된 것이다. 전 남편마저 실종되니 보위부는 그녀에게 한국행을 기도했다는 누명을 씌웠다.그 소식이 허 씨에게도 전달됐다. 그래도 4년 간 살았던 정도 있고, 어린 딸까지 있으니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북에 나가기 위해 자수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나타나야 전 남편이 한국에 갔다는 누명을 벗길 수 있을 것 같았다.슈퍼 주인은 전과자 출신이었는데, 그가 북으로 가겠다고 하자 감옥에서 나오는 자기의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폐 주변에 황산철을 주사하면 고열이 나고, 염증이 생긴다면서, 자신은 그 방법으로 병원에 호송됐다가 도망쳤다고 했다. 단 이 방법의 단점은 한 달 안에 황산철을 세척하지 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허 씨는 그의 조언에 따라 폐에 황산철을 네 군데나 주입했다. 그리고 스스로 공안에 자수한 뒤 2014년 4월 13일 북송됐다. 그런데 이번은 보위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그가 자수한 뒤 공안이 그의 숙소를 뒤져 소지품을 북송할 때 함께 보냈던 것이다. 그 속에는 한국 영사관, 한국인 전도사 등의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이 있었다. 이게 화근이 됐다. 고문이 시작됐다.중국 사장이 알려준 방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폐가 곪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염증으로 심한 열까지 나 거동을 못할 정도가 됐다. 보위부는 감방에서 죽이긴 싫었는지 그를 가석방으로 집에 보냈다.그때가 5월 말이었다. 중국 사장이 당부한 폐를 씻어야 하는 한 달이 지난 것이다. 집에 가서 이러저런 치료를 해봤지만 점점 악화됐다. 이렇게 지내다간 죽을 것 같았다. 그는 황산철 주사를 맞은 지 네 달이 지난 8월 23일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이번엔 하얼빈에 들어가 식당에 취직해 치료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몸은 점점 더 쇠약해졌다.몸을 운신하기 어려워지자 허 씨는 죽더라도 고향에 가서 죽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11월말 그는 다시 연길에 왔다. 연길에서 혹시나 도움을 받지 않을까 싶어 처음으로 교회에 찾아갔는데, 거기서 집도 제공하고 치료도 해주었다. 12월 말 허 씨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쇼크도 수시로 왔다. 교회에선 한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살 수 있다며 한국행선을 주선해주었다.● 최초로 남북 측량기사 자격 모두 획득2015년 2월 그는 여러 탈북민들과 함께 한국으로 떠났다. 동남아 정글에서 일행을 따라갈 수 없을 때 친한 동생이 그를 업고 산을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다음날 적십자병원에 실려갔다. 이곳에서 4개월 동안 치료를 받다보니 하나원도 나오지 못했다. 허 씨는 인천에 거주지가 배정됐다. 건강이 너무 악화돼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 2016년말까지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받았다. 하나원을 나온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취직해 일자리를 얻는 것을 보고 조급한 마음에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건강이 악화돼 다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한국의 의술은 역시 대단했다. 2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끝내 허 씨를 완치시켰다.치료 받는 기간에 허 씨는 목회자의 길을 걸어볼까 싶어 1년 남짓 성경공부도 했고, 화장품 회사에 취직해 일도 해봤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많은 고민 끝에 북에서 배운 측량기사 일을 다시 해보려 알아보니, 남쪽도 측량기사는 일도 힘들고 보상도 적었다. 그렇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자신있는 분야를 파보자는 생각에 2018년 한 엔지니어링 회사에 취직했다. 취직은 했어도 아무런 건설기술인 등급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가장 많은 나이임에도 허드레 일만 해야 했다. 연봉은 2300만 원이었다. 그는 앞으로 살아가려면 자격증이 필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자격을 갖고 있고, 어떤 경력을 쌓는가에 따라 연봉도 결정됐다.허 씨는 회사에 다니며 1년 동안은 토목계측에 대한 용어부터 수첩에 적어 기본적인 지식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 대구과학대에 입학했다. 일도 하면서 대학 공부까지 하려니 야간반을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전국의 측량 관련 야간반 중에 대구가 그나마 가까웠다.가깝다고 해도 당시 일을 하던 포항의 건설현장에서 150㎞나 떨어져 있었다. 일주일에 서너번씩 왕복 300㎞를 달려 수업을 듣고 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너무 피곤해 졸음 쉼터에서 쪽잠을 자기 일쑤였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잔적도 있다.허 씨는 대학 공부와 병행해 자격증 시험도 준비했다. 3년 동안 주경야독의 삶을 끈질기게 이어나간 끝에 그는 2022년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동시에 측량 및 지형공간정보기사와 토목기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허 씨는 남과 북에서 측량기사 자격을 각각 받은 최초의 사례다.이러한 자격증과 경력을 인정받아 현재 허 씨는 건설기술인협회에서 고급기술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300억 원 규모 이상의 토목공사를 책임지고 할 수 있다. ● “배워야 살 수 있다”허 씨는 김책공대에서 무려 8년이나 공부를 했지만 여기선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남쪽에 오니 용어는 물론, 장비나 자재 등 모든 것이 북한과 달랐습니다. 비유하면 북에서 통나무로 집을 짓는 법을 배웠는데, 남쪽에 오니 시멘트로 아파트를 짓는 격이죠. 그럼 집 짓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하죠. 물론 북한 김책공대 과정이 전혀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에선 가장 기본적인 것, 즉 공부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그는 남북은 통합성에서도 차이가 크다고 했다.“여기는 한 가지를 하려면 열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것들이 서로 연결돼 있어 전체적으로 진행되죠. 반면 북한은 직무가 매우 세분화돼 있고, 맡겨진 것만 하면 됐어요.”자격증과 경력을 쌓고 나니 연봉도 빠르게 올라갔다. 김책공대까지 입학했던 북한 시골 수재가 다시 자신의 두뇌와 재능을 발휘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300만 원에서 시작했던 연봉은 6년 만에 3배 이상 높아졌다.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올해 3월 다시 대구대 공간정보전문기술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토질 및 기초기술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다. 다른 자격증과는 달리 이 자격은 받기가 매우 어렵다. 허 씨의 계획은 향후 5년 안에 석사와 함께 기술사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다.그렇다고 공부만 할 수는 없는 일. 요즘 허 씨는 마산만에서 스팀배관 부설을 위한 해저터널을 뚫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직책은 공사차장. 터널 시공 품질을 총괄하는 중요한 자리다. 건설 현장은 매우 거칠고 다툼도 많다.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아 의사소통의 문제도 많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허 씨는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나가고 있다.“거친 현장이라서 그런지 북에서 왔다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직도 저는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력은 남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 곳에서 이직 제안도 많이 받습니다.”2023년 남북하나재단이 주관한 정착사례 발표대회에서 그는 최우수상인 통일부 장관상을 받았다. 하지만 허 씨는 지금은 정착의 첫 발자국을 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어 키우는 것을 다음 목표로 정했다. 그 목표가 달성되면 또 할 일이 있다. 나아가 통일이 되면 할 계획도 미리 생각해두었다.“저는 북에 돌아가 여기서 배운 기술을 북에 전수할 겁니다. 한국은 토목 공사를 할 때 측량, 시공, 품질까지 다 알아야 합니다. 통일 되면 교통인프라를 다시 정리해야 할 것인데, 북한에서 대학을 다녔던 동창들은 통합성에 있어 크게 떨어집니다. 이런 것을 가르쳐야죠. 그리고 남북에서 모두 측량기사 자격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니 다른 꿈도 있습니다. 남북공간정보 통합지도체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목표입니다.” 꿈을 말할 때 그는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글로벌 기술 기업 다이슨의 창업자이자 수석 엔지니어인 제임스 다이슨의 자서전 ‘제임스 다이슨: 5,126번의 실패에서 배운 삶(사람의집)’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이번 자서전에는 제임스 다이슨이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혁신의 아이콘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담았다. 영국의 노퍽주에서 예술을 사랑하며 자라온 유년 시절과 영국 런던의 왕립 예술학교에 입학해 디자인의 매력에 빠지게 된 청소년기, 대학을 졸업한 후 고속 상륙정인 시트럭 개발을 계기로 엔지니어링 세계에 입문하게 된 이야기가 서두에서 펼쳐진다. 이어 1993년 사이클론 기술을 적용한 진공청소기로 첫 성공을 거두기까지의 숱한 실패의 경험이 상세히 소개된다. 다이슨의 ‘베스트셀러’ 먼지 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는 5127번째 시제품이었다. 1993년 작은 창고에서 출발한 다이슨은 전체 직원 1만4000명 중 절반가량이 엔지니어인 ‘기술 기업’이다. 청소기 선풍기 헤어드라이어 등 고가 가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온 다이슨은 이제 농업, 의학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제임스 다이슨은 본 자서전에서 교육, 멘토링,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현 시대의 엔지니어 및 과학자의 중요성에 대해 서술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태도와 불굴의 기업가 정신에 대해 역설한다. 저자 제임스 다이슨은 “이 책이 젊은이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은 그들의 독창성을 절실히 필요로 하며, 디자인, 엔지니어링,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창의성을 발휘할 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일성종합대학 2학년 때인 1994년 겨울, 나는 평양고사포병사령부 122여단 5대대 1중대 대원이 됐다. 북한 대학생들은 2학년 때 대공포 부대에서 6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하고 예비역고사포병지휘관 자격을 받는다. 내가 간 중대엔 57mm 대공포 8문이 있었다. 첫 보직은 장탄수였다. 4발이 든 탄약상자를 들고 뛰는 훈련부터 받았는데 여간 무거운 게 아니었다. 다음은 포탄 외부의 ‘그리스’(윤활유)를 벗기고 신관을 끼우는 훈련이었다. 그리스가 어찌나 두꺼운지 벗겨 내는 데 시간이 참 많이 들었다. ‘전쟁이 나면 포탄 그리스 벗기다 시간 다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 옆에 포탄 몇백 발을 보관한 포탄창고가 있었다. 야간 근무 때 추우면 그리스가 녹아 흘러내린 포탄창고에 들어가 잠을 잤다. 포탄상자와 벽 사이 공간은 약 80cm 정도 됐는데 그 틈에 들어가 동창들과 휘발유 곤로로 찌개를 끓여 먹었던 일도 있다. 술까지 마시고 취해서 자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탄약상자에 불이 옮겨붙었다면 온 중대가 날아갈 뻔했다. 그만큼 탄약 관리가 허술했다. 교도대엔 제일 낡은 포가 배정된다. 그걸 감안해도 우리 중대 대공포 중엔 1942년에 생산돼 6·25전쟁 때 참전했던 것도 있었다. 포탄은 당시 기준으로 생산연도가 약 30년 정도 된 1960년대 초반 제품이었다. 포탄창고는 겨울이면 냉기 때문에 허연 성에가 벽에 두껍게 끼는데, 과연 전쟁이 나면 이 포탄들이 제대로 발사될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 얼마 전 구글어스로 살펴보니 그때의 중대 포진지는 물론이고 병실과 돼지우리까지 그대로였다. 80년째 같은 포를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있을 때 포신 청소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과연 그 포신은 온전할지, 포판은 돌아갈지 의문이다. 2010년 연평도 포사격 때 북한이 발사한 포탄의 절반이 바다에 떨어지고, 섬에 떨어진 것들 중에도 불발탄들이 대량 발생한 것을 보고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포와 포탄 관리가 한심한데 제대로 날아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북한 포탄은 러시아에 가서도 망신살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북한산 포탄을 해체해 봤더니 부품이 빠져 있고, 충전된 화약의 색깔도 달랐으며, 밀봉돼야 할 부분이 훼손돼 습기에 노출돼 있었다고 한다. 북한산 포탄을 사용하다 포신과 포탑이 완전히 날아갔다는 러시아 자주포 사진도 공개됐다. 러시아에 준 포탄이 재고품인지, 신품인지에 대해 논쟁도 있지만 내가 볼 땐 의미 없는 짓이다. 확실한 것은 북한 포탄은 불량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북한 포탄은 1994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생산한 것과 이후에 생산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94년 이전 것은 그나마 생산 지도서대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30년 넘게 보관 관리가 안 되면서 불량이 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은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대량 아사부터 시작됐다. 그게 1994년 가을이었다. 이때부터 생산은 둘째고,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당연히 누구도 품질 같은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럼 고난의 행군이 끝난 뒤엔 제대로 생산될까. 이때부턴 간부들과 노동자들이 원자재들을 빼돌려 팔기 시작했다. 위에서 요구하는 것은 수량이지 품질이 아니다. 수량 과제를 못 하면 처벌받지만, 질 때문에 처벌받는 일은 거의 없다. 품질 검사원들도 다 한통속이라 대충 넘어간다. 이건 군수공장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 전체의 문제다. 게다가 상부에선 설비와 자재도 제대로 주지 않고 무조건 자력갱생하라고 한다. 할 수 없다고 하면 조건타발을 앞세운다고 처벌한다. 그러니 간부라면 수량부터 맞추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러시아에서 큰 망신을 당했으니 아마 포탄 공장 간부들은 처벌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은 수십 년에 한 번 있는, 운 나쁜 천재지변에 해당한다. 수량 때문에 처벌받을 확률이 여전히 수십 배 더 높으니 앞으로도 계속 불발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에선 중국산의 품질이 한심하다고 비난하지만, 내가 볼 땐 북한산은 그보다 열 배는 더 조악하다. 김정은이 열병식 때마다 한두 개씩 선보이는 신상 무기도 한두 번은 굴러가거나 날아가긴 하겠지만, 품질이나 내구성은 형편없다고 확신한다. 솔직히 난 김정은이 핵무기를 쏘면 그게 제대로 폭발할지도 의문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하철 역사에서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은 젊은 여인이 쓰레기를 잔뜩 담은 밀차를 밀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 뒤를 몇몇 노인들이 따라 탔다. 그녀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한 여성 노인이 끝내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아니, 그쪽은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곱상한데 여기서 왜 이런 일을 하세요?”“네,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습니다.”그런데 말투가 많이 이상하다. 노인이 재차 물었다.“고향이 어디세요?”“저, 북한입니다.”노인은 머리를 끄덕였다.“아, 그래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구먼.”서울지하철 5~8호선 청소 및 방역 소독업을 담당하는 ‘서울도시철도그린환경’ 소속 환경미화원 전명숙 씨가 2019년 입사 초기 심심치 않게 겪었던 일이다. 서울 지하철 환경미화원은 입사 나이 기준이 50세 이상이다. 그래서 보통 나이가 많은 미화원들이 대부분인데, 전 씨가 입사했을 때 나이는 44세였다.매일 새벽 취객들이 남긴 토사물과 씨름하는 전 씨는 북한 전문학교에서 피복디자인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밖을 나서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던 매력이 넘치던 처녀 선생 시절도 있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서울 지하철에서 청소를 하게 됐을까.● 소리없이 울던 어머니전 씨는 1975년 양강도 혜산에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김책공업대학 1기 졸업생이지만, 출신성분이 나빠 혜산에서도 약 20㎞ 떨어진 산골에서 전기기사로 일했다.북한에서 출신 성분이 나쁘다는 의미는 해방 전에 잘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 씨의 할아버지는 함북 무산군에서 잘 나가는 의사였다. 그런데 6·25전쟁이 터진 뒤 실종이 됐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인민군 복장을 한 병사들이 와서 부상자가 있다며 할아버지를 데려갔는데 그 이후 사라졌다는 것이다.북한에서 실종자은 ‘미해명자’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출신 성분상 하위그룹에 속한다. 아버지가 실종되면 아들은 간부가 될 수가 없다. 거기에 더해 삼촌까지 ‘처단자’로 기록이 됐다. 군함을 만드는 공장인 청진조선소에서 일하던 삼촌은 어느 날 갑자기 보위부에 연행됐고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성분 문건에 처단자로 기록됐다는 것은 보위부에서 처형됐다는 의미다.이런 가정 이력 때문에 전 씨의 아버지는 외진 농촌마을의 기계공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국가적인 발명을 해도 성과는 늘 간부들이 가로챘다.전 씨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마당 구석에서 홀로 우는 모습을 정말 많이 보고 자랐다. 아버지에게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홀로 서러운 눈물을 닦아냈다.그렇다고 어머니가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친척들이 모두 중국에 있는, 출신성분이 나쁜 계층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어머니의 오빠는 중국에서 살다가 6·25전쟁 때 중공군에 차출돼 한반도에 나왔다. 같은 마을에서 5명이 입대했는데 치열한 전투가 거듭되면서 4명이 죽고 오빠만 살아남았다. 오빠는 고향으로 가서 마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중국에서 성장한 어머니는 나중에 오빠를 만나겠다고 북한에 나왔다가 국경이 막혀 돌아가지 못했고 이후 전 씨의 부친을 만나 결혼했다.● 22살에 여선생이 되다무시당하는 부모를 보면서 전 씨는 “나는 남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각종 교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덕분에 학급반장도 하고, 초급단체 비서도 하는 등 학교에서 알아주는 우등생이 됐다.중학교를 졸업하던 17세에 전 씨는 꼭 군대에 입대해 노동당원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선발되지 못했다. 1년 뒤 다시 군에 지원했는데 또 떨어졌다.자신이 왜 군인이 될 수 없는지 항의하러 혜산의 군사동원부에 찾아갔는데 우연히 간부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됐다. 일부러 들으라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문을 열어놓은 채 “명숙이는 토대가 걸려 군에 입대하지 못하는데, 저렇게 자꾸 찾아와 보내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을 보면 안쓰럽다”고 하는 것이었다.그 이야기를 들은 전 씨는 살면서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눈물을 닦으며 집까지 50리 길을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나라에 대한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는 마을 인근의 탐사기능공학교에 이름을 걸어놓고,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개간해 밭을 만들고 곡식을 심었지만, 식구가 많은 탓에 늘 배고프게 살았다.이런 전 씨의 가족이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혜산에 사는 친척 여인이 찾아와 “명숙이는 우리 집에 데려가 일도 시키고 먹여주겠다”고 제안했다. 선뜻 제안에 응해 혜산으로 가 친척집에서 먹고 자며 사실상 가정부처럼 일했다.친척 여인은 북한에서 식량을 다루는 배급소 책임자여서 권력이 있었다. 친구 중에 경공업전문학교 교장도 있었는데 하루는 교장에게 “우리 명숙이를 그 학교에 좀 입학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교장이 힘을 쓴 덕분에 전 씨는 3년제 경공업전문학교 피복과에 입학하게 됐다.그때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 학교까지 하루 왕복 5시간씩 걸어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1997년 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간부학교의 피복 디자인 교원으로 임명됐다. 당시엔 많은 여인들에겐 옷을 만들어 장마당에서 파는 것이 중요한 생계수단이 됐던 터라 피복과 교원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도 친척이 나서서 힘을 쓴 덕분에 50대 1의 경쟁을 뚫고 교원으로 임명됐다. 3년제 전문대 졸업생은 교원이 될 수가 없어 6개월 동안 평양에 있는 김보현대학 교원 양성반을 또 다녀야 했다.● 실패한 결혼, 그리고 탈북한창 예쁜 나이인 22살에 교원이 되니 주변에서 모두가 부럽게 바라봤다. 사귀자며 다가오는 남자들도 많았다.하지만 그는 뜻밖의 선택을 했다. 평범한 군인과 결혼했던 것. 남편은 고향 마을에 주둔했던 정찰중대 분대장이었다. 정찰중대는 10년 동안 격술 훈련을 하는 특수부대였다. 명절이면 군인들은 주둔지 주민들 앞에서 격술 시범을 했다.“그때는 왜 그렇게 그 남자가 멋있어 보였는지 몰랐어요. 1대9 격술 대련도 하고, 배에 기합을 준 뒤 차가 지나가게도 했고, 벽돌을 주먹으로 부수고. 정찰중대에서도 제일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것 같아요. 제가 군대에 가려다 못 갔던 한이 있어서 더욱 군인을 선호했던 것 같기도 해요.”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전 씨는 그 군인을 남편으로 선택했다. 그가 제대한 뒤엔 혜산에 남게 했고, 2002년 결혼식을 올렸다.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것을 아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폭력성을 드러냈다. 걸핏하면 마을 사람들과 싸웠고, 급기야 아내에게도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원이라는 직업 탓에 동네가 떠나갈 듯 소란을 피울 수도 없었다. 당시 북한은 제도적으로 이혼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참으니 남편은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 2004년 딸이 태어났다.술주정뱅이 남편 때문에 점점 어려워지던 가정 형편은 급기야 2005년을 기점으로 더 기울었다. 그때부터 중국에서 기성복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체 제작해 장마당에서 파는 옷이 더 이상 팔리지 않았다. 피복 디자인과의 인기도 급격히 하락했고 지원자도 거의 없었다. 제자들이 없으니 선생도 먹고 살기 어려운 사정에 내몰렸다.그 즈음부터 주변에서 한두 명씩 사라지고 이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말이 돌았다. 전 씨는 압록강 옆을 지날 때마다 중국을 바라보았다. 압록강 바로 건너편에 외사촌 고모가 하는 큰 공장이 있었다. 고모는 장공장을 운영했는데 가끔 북한에 친척을 만나려 왔다.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돕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너희가 교대로 와서 우리 집에서 일해라”고 제안했다. 장공장 제작 비법을 남에게 알려주기도 싫으니 북한 친척이 와서 해주면 자기도 든든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전 씨의 언니들이 교대로 건너가 일해주고 돈을 벌었다.전 씨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교원 신분이라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학생들이 사라지고 중국으로 갔다는 말이 나오면 저는 선생님이니까 조국을 배반해선 안 된다고 교육했거든요. 그런 제가 어떻게 탈북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딸이 크면서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딸을 안고 지나다니는 마을 입구에 작은 시장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어린 딸이 사탕을 사달라고 떼를 썼다. 어떤 날엔 사탕을 쥐고 놓지 않아 그걸 빼앗느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딸의 고사리 같은 손에서 사탕을 뺐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사탕 한 알 사줄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나도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와야겠다.”마침 그때는 그가 다니던 학교도 학생이 없어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선생이 나오지 않으면 알아서 잘됐다고 하는 눈치였고 찾지도 않았다. 2007년 12월 31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전 씨는 국경경비대에 뇌물을 주고 압록강을 넘었다. ● 집을 팔아 마련한 탈북 비용 전 씨가 국경경비대에 준 뇌물은 집을 팔아 마련한 것이었다. 사실 그의 집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였다. 이유가 있었다.2000년대 초반 북한은 삼수발전소를 건설한다면서 졸지에 전 씨의 고향마을 사람들을 내쫓았다. 인근 3개 동네가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고 심지어 살 집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산중턱에 토굴을 만들고 살아야 했다.선생인 전 씨는 다행히 학교 기숙사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살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살았는데 어느 날 북한 당국이 갑자기 수몰 마을 주민들에게 집을 지어준다고 나섰다. 삼수발전소 건설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이 토굴에서 사는 것이 미국 인공위성에 포착돼 뉴스가 되기도 했다.돌격대가 들어와 몇 달 만에 날림식으로 집들을 지었다. 집을 지을 마땅한 부지가 없어 집을 지으면 안 되는 땅에 주택들을 지었다. 습기가 많은 그곳은 겨울에는 땅이 얼었다 봄에는 땅이 녹으면서 움푹 들어가는 곳이었다.전 씨도 집을 받았는데, 다음해 봄부터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보면 멋지게 새로 지은 마을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을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언제 무너질지 몰라 가슴을 조이고 있던 참인데 마침 인근 국경경비대 장교가 제안을 해왔다. 북한돈 80만 원에 집을 사겠다는 것. 사실 혜산에서 그 정도 면적의 집이면 가격이 10배는 됐지만, 붕괴 위험 때문에 헐값을 부른 것이다. 그 장교는 집을 사서 창고로 쓰겠다고 말했다. 탈북해야 할 처지에서 그렇게라도 집을 판 것이 다행스러웠다. 눈을 감아줄 경비대원의 손에 그가 집을 팔아 마련한 돈이 고스란히 넘어갔다.● “우린 왜 이리 못살까”강을 건너 고모네 공장에 당도하니 고모가 반가워했다. 친척이라고 돈을 더 주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 직원들의 월급은 1200~1800위안이었지만 전 씨에겐 월 600위안만 주었다. 먹여주고 숨겨주는 비용을 차감한 것이었다.그것도 북한의 기준에선 엄청 큰 돈이었다. 중국에서 잘 먹어도 딸 생각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돈을 모아 북한으로 보냈다.숨어 사는 처지라 외출도 거의 하지 못했다. 아주 가끔 밤에 몰래 거리에 나갈 때도 있었다. 혜산에서 중국을 건너다 볼 때는 그냥 잘 살 것이란 막연한 생각만 들었었는데, 거리에 직접 나가 쇼핑도 하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못살지”하는 생각이 매번 들어 서러웠다.그렇게 1년 반쯤 살았는데 북한에서 연락이 왔다. 황해도에 살던 시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래도 며느리로서의 도리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2009년 가을 다시 강을 넘어 북한으로 돌아왔다.남편과 어린 딸과 함께 황해도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기차가 며칠에 한 번씩 다녔다. 도를 지날 때마다 열차 안전원들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안전원들은 매번 전 씨에게 눈을 부라리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너무 억울해 열차원에게 왜 그런지 아냐고 물어보자 열차원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중국 여자처럼 생겼잖아요.” 중국에 사는 동안 전 씨는 저도 모르게 ‘때깔’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다가 평양 인근 평성에서 또 발이 묶였다.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번 열차를 타지 못하면 또 언제 기차가 올지 알 수 없었다. 급박하게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아지미(아줌마를 뜻하는 북한말) 중국에서 왔지요? 중국 가는 선을 좀 알려주면 제가 차표를 구해드릴게요.”급한 상황이라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전 씨는 그녀에게 혜산에 오면 중국으로 넘어가는 선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주소도 적어주었다. 여인은 약속대로 열차표를 구해왔다.며칠이 지난 뒤 여인이 혜산에 왔다. 전 씨의 집에 찾아와 실제로 중국에 넘겨 보낼 수 있는지 파악한 뒤 “다시 나가서 넘겨 보낼 사람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소식이 없었다.● 졸지에 인신매매범이 되다그동안 전 씨는 많은 일을 겪었다. 북한 체제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길을 갈 때마다 서른 살이 넘은 아줌마가 생머리를 하고 바지를 입고 다닌다고 규찰대가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정말 다시 나온 것을 죽도록 후회했어요.”그가 북에 있을 때 마침 화폐개혁이 단행됐다. 2009년 11월 30일 북한 당국은 화폐개혁 조치를 공포하면서 “앞으로 외국돈을 쓰다 잡히는 경우 총살에 처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전 씨는 북한에 나와서도 몰래 갖고 온 중국 전화로 고모와 통화를 했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 보위부원이 두 명 찾아왔다. 전파탐지기에 걸린 것이다. 그는 휴대전화를 이불에 둘둘 말아 숨겼다.보위원 한 명은 양강도 보위부 소속이었지만, 다른 한 명은 평양에서 파견 나온 보위원이었다. 서로를 감시하게 지방과 중앙이 합동조를 짠 것이다.보위원들은 집에 들어와 다짜고짜 휴대전화를 찾는다고 뒤졌다. 그런데 휴대전화를 찾지 못한 대신 전 씨가 벌어서 갖고 온 중국돈 6000위안과 수백 달러의 달러가 발각됐다. 양강도 보위원이 먼저 중국돈을 찾아냈는데, 온갖 상욕을 퍼부으며 돈을 빼앗더니 내일 보위부에 와서 경위를 해명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사이에도 계속 집을 뒤지던 평양 보위원이 이번엔 달러를 찾아냈다. 전 씨는 양강도 보위원이 보지 못하게 평양 보위원의 손을 꽉 잡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달러를 슬며시 놓고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나갔다.평양 보위원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전 씨는 아직도 알지는 못한다.동정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조용히 찾아와 다른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 눈을 감아준 대가로 뇌물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성 상납까지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때였다.보위부에 돈을 빼앗기고 졸지에 조사까지 받게 된 전 씨는 달러를 갖고 집을 나가 숨었다.그런데 화는 한꺼번에 닥쳐왔다. 전 씨 대신 중국 고모의 집에 가서 일하던 언니가 체포돼 신의주 세관으로 북송된다는 소식이 또 날아왔다.전 씨는 신의주로 언니를 구하러 떠났다. 쉽지 않았지만 갖고 간 달러를 다 뇌물로 쓴 덕분에 언니를 꺼낼 수 있었다. 언니를 구하고 한숨 돌리려던 찰나 혜산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엔 평성 보위부에서 그를 잡으려 왔다는 것.알고 보니 몇 달 전 도와주었던 여인이 탈북할 여인을 데려오다가 잡혔다고 한다. 탈북할 여인은 이미 북송 경험이 있어 현지 평성 보위부에서 집중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기차에 탔다가 체포된 것이다.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끝에 이들은 모든 것을 실토했다. 평성 보위부는 즉시 탈북 방조자로 지목된 전 씨를 잡으려고 사람들을 파견했다.졸지에 전 씨는 양강도와 평성 보위부에서 쫓기는 몸이 됐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동네에서 선망 받던 여선생은 총살형에 처할 수 있다는 불법 외화 보유 죄와 사람을 중국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인신매매죄가 동시에 해당되는 수배자가 됐다. 집에 갈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무너졌다”다시 탈북했던 날은 2010년 2월 28일이었다. 강을 넘을 때 전 씨는 돈을 좀 벌어 살 곳을 마련한 뒤 딸을 데려오려고 생각했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 한밤중에 몰래 집에 갔을 때 6살 딸은 뭔가 예감한 듯 엄마에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엄마, 다시는 사탕 사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가지 마세요.”그렇게 우는 딸을 겨우 떼어내고 나왔다. 수배범의 처지라 먼저 중국에 가서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가 강을 넘고 3일이 지난 3월 3일 집에서 전화가 왔다. 딸이 사라졌다는 것. 200m 정도 떨어진 사촌 집에서 놀다가 6시경 다시 할머니집에 간다고 나섰는데 어느 집에도 오지 않았다. 번화가도 아닌데다 두 집이 직선거리로 보이는 곳이어서 어른들은 방심했다.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혜산에서 유아 납치가 일어난 일도 없었다.딸의 실종 소식에 전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당장 북한으로 다시 나가고 싶지만, 자신이 나가봐야 결과는 뻔했다. 중범죄자로 수배가 떨어진 그는 북에 나가는 순간 체포돼 감옥에 가야 할 몸이기 때문이다.그는 중국에서 북한의 가족들을 닦달질했고, 번 돈을 모두 보내 딸을 찾게 했다. 그렇게 전국의 고아원들을 다 돌아봤지만 끝내 딸은 찾지 못했다.딸이 사라진 뒤로 전 씨는 밥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더는 살 생각이 없었다. 9개월쯤 지나니 60㎏이 넘던 몸이 42㎏가 돼 뼈만 남았다. 하루 종일 눈물만 흘리는 전 씨를 보다 못한 고모네 식구가 “이대로 더 있다간 네가 죽겠다”며 그를 강제로 베이징에 피신시켰다. 그곳에 갔다고 해도 마음이 안정된 것은 아니지만, 건너편 혜산이 보이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전 씨는 이듬해가 돼서야 정신을 차렸다. 문뜩 내가 죽으면 더는 딸을 찾을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든 것이다.베이징에서 몇 년 정착하고 사는데, 어느 날 불쑥 아는 언니가 찾아왔다. 중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간 탈북민었다. 그는 전 씨에게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 있지 말고 한국에 가서 살자고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 점점 신분이 노출돼 불안했던 터라 선뜻 응했다.언니의 도움으로 전 씨는 2015년 4월 한국행 길에 올랐고, 동남아를 경유해 5월 말 한국에 입국했다.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2015년 11월 서울 양천구에 임대아파트를 받아 정착했다.● 환경미화원이 되다다른 탈북민들처럼 그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을 다녔고 자격증도 땄다. 첫 직장은 장애인들과 함께 운영하는 가게였다. 탈북민과 장애인이 조를 짜서 물건을 파는 일이었는데 월급이 너무 적었다.2018년엔 가구를 파는 회사로 옮겨갔다. 월급이 140만 원에서 190만 원으로 늘었다. 그런데 이번엔 양천에서 경기도 용인까지 매일 출근해야 했다. 다른 일자리를 열심히 찾아보던 찰나 남북하나재단 취업담당자가 연락을 해왔다.“서울도시철도그린환경이란 곳에 탈북민 모집 공고가 떴는데 한번 지원해봐. 공기업이고 공무직이라고 하니 좋을 것 같아요.”그곳에 지원하려는데 담당자가 다시 전화가 왔다.“알아보니 지하철 청소하는 일이래요. 북한에서 교사를 했던 영숙 씨가 하기엔 적합지 않아 보이네요.”그런데 당시 전 씨는 용인까지 출퇴근할 힘이 더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아닙니다. 북에서 교사였던 걸 누가 알아주나요. 제가 지원할게요.”2019년 설날 입사 첫 출근을 하기 전까진 잠깐 기대감도 있었다.경쟁률이 무려 10대 1이나 됐고, 체력시험까지 치는 것을 보니 좋은 직장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 월급도 220만 원이었고, 65세 정년이 보장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정작 다녀보니 후회도 많이 들었다. 객차를 청소를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역사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새벽에 출근하면 역사 구석구석에 토사물과 대소변이 남아있었다. 매일 오물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감도 많이 들었다. 동료 언니들도 거들었다.“아니, 명숙 씨는 나이도 젊은데, 여기서 왜 이런 일을 해? 그 얼굴에 참치 집에 가서 팁만 받고 살아도 30~40만 원은 벌겠네….”입사 당시 전 씨는 44세로 회사에서 가장 어렸다. 서울도시철도그린환경은 입사 연령 기준이 50세 이상이었다. 50세 미만 입사는 탈북민이나 장애인 등 사회취약계층에게만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회사 소속 환경미화원 1700여 명 중 60세 이상만 63%나 됐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청소일을 하는 전 씨를 다들 안쓰러워할 법도 했다.청소를 마친 뒤 쓰레기를 배출하려 산더미 같은 쓰레기 봉투를 옮기고 있으면 지하철을 타던 사람들이 다들 불쌍하게 바라보는 듯했다.결단이 필요했던 때 오기도 생겨났다. 6개월쯤 지났을 때 전 씨는 사장을 찾아갔다.“사장님. 북한이탈주민도 팀장이 될 수 있나요?”25명~30명 정도의 직원을 관리하는 팀장이 되면 현장 청소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장이 대답했다.“자격증도 따고 능력도 인정받으면 될 수 있지요. 그런데 명숙 씨는 어려서 5년은 지나야 해요.”규정에는 현장 경험이 2년 이상 되면 팀장으로 지원할 수는 있지만, 전 씨의 경우 나이가 많은 팀원을 관리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의 목표는 팀장이 되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꿈만 갖고 삽니다”2년이 지났을 때 전 씨는 팀장 지원서를 냈다. 그러나 결과는 탈락이었다. 면접관들은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지만 임원들이 반대했다는 것이다.임원들의 논리는 “너무 어려서 팀장을 달면 다른 사람이 팀장을 할 기회를 여러 번 뺏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원이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점수가 좋았던 터라 그는 첫 지원 이후 부팀장으로 임명됐다.2022년 전 씨는 다시 팀장에 지원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면접을 마쳤다. 이때엔 운도 따랐다. 사장이 새로 오면서 나이와 상관없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팀장으로 임명하자는 것으로 방침이 바뀌었다. 전 씨는 입사 3년 만에 마침내 팀장이 됐다. 회사가 창립된 이래 최연소 팀장이기도 했다.2023년엔 내친 김에 총괄팀장 자리에 지원했는데, 역시 최우수 성적을 받아 임명이 됐다. 현장 최고직급인 총괄팀장은 4개 팀을 관리하는데, 현재 122명의 환경미화원이 소속됐다.총괄팀장이 되니 작지만 자기 사무실도 생기고, 월급도 올랐다. 그러나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팀원들이 다 나이가 많다보니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현장 순회를 나갔다가 더러운 곳을 보면 먼저 가서 청소해야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북에서 온 탈북민이 5년 만에 총괄팀장이 된 것을 시기하는 사람도 있고, 지시를 내려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50~60대 여인들의 상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매일 체감하고 있지만, 전 씨는 포기할 생각은 없다.“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는 꼭 버틸 겁니다. 스트레스가 많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살면 살수록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전 씨는 2023년 남북하나재단이 주관한 정착사례발표 대회에 지원해 정착 우수사례로 선정해 상도 받았다.그는 통일을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란다.“저는 딱 한 가지 꿈만 갖고 살아갑니다. 하루빨리 고향에 돌아가 딸을 찾아야죠. 지금 18살이 됐겠네요. 제 딸 이름은 김순정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남북 사이엔 군비경쟁이란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경쟁은 비슷한 상대끼리 하는 것이다. 지난해 무역액 1조4151억 달러를 기록하고, 국방비로도 500억 달러 가까이 쓰는 대한민국과 지난해 무역액 15억 달러를 기록한 북한은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북한은 여전히 한국을 도발하기 위해 자신들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돈을 국방비로 쓴다. 정찰위성이 대표적이다. 그게 얼마나 쓸모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김정은은 앞으로 여러 기를 더 쏘겠다고 호기를 부린다. 북한 정찰위성이 아무리 허접하다고 해도 그들의 형편에선 어마어마한 지출을 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9·19 군사합의 파기를 선언한 김정은은 전방에 강력한 무력과 신형 군사 장비들을 전진 배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사단 하나만 재배치해도 병영과 진지, 신형 장비를 숨길 갱도를 수없이 지어야 한다. 백성들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겨우 1년에 1만 가구 아파트를 짓는 북한에는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도 뒷짐만 지고 있진 않는다. 내년 국방예산은 59조5885억 원으로 4.5% 증가했다.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2.2%의 두 배를 넘는 수준이다. ‘한국형 3축 체계’ 강화에만 7조1565억 원을 투입하며 그 외 각종 무기 도입과 유·무인 복합전투체계 구축 등에 막대한 투자를 한다. 스텔스 전투기 F-35A 20대 추가 도입에도 3조3010억 원을 쓰는데, 단순 계산으로 1대에 1650억 원씩 주고 사오는 셈이다. 강력한 국방력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국방 예산을 보면 한 가지 크게 간과하는 것이 있다. 죽이고 부수는 것에만 골몰하다 보니 신형 무기를 사 오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북한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공략하는 데는 소홀하다. 북한군은 그들의 고물 장비보다 더 치명적인 약점 두 가지를 갖고 있다. 우선 지휘 체계이다. 모든 부대에 부대장과 그 부대장에 대한 해임 권한을 가진 정치위원이 각각 있다. 그리고 이 둘을 다 자를 수 있는 보위부장도 있다. 이렇게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한군은 쿠데타를 막는 데는 최적이지만 전쟁을 치르기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다. 비유하면 사장 3명을 둔 회사가 위기 상황에서 절대 잘 굴러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 치명적인 약점은 따로 있다. 바로 군인들의 심리이다. 북한군은 수령을 위해 죽는 게 구호인 김정은의 가병 집단이다. 세계 어느 나라나 전쟁에서 패배하면 잃을 게 많다. 그런데 북한은 김정은과 측근 몇 명만 잃을 게 많다. 북한군은 장마당 세대가 주축이다. 키가 142㎝만 넘어도 8년 이상 군에 끌려가야 하는 북한 청년들은 통일되면 자신들이 배불리 먹고살 수 있으며,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항복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아는 세대다. 그들은 겉으론 충성하는 듯 보여도, 실제론 김정은을 위해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건 탈북해 온 사람들만 인터뷰해도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북한군을 죽이는 데 집중하기보단 이들을 투항하게 만드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 저항하면 죽음뿐이지만, 항복하면 당 간부보다 더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유사시 “투항하면 중대장 30만 달러, 소대장 10만 달러, 병사 5만 달러씩 포상금을 준다”는 전단을 수없이 뿌린다면, 수십만 달러짜리 미사일로 진지를 부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밤에 경계진지에서 흰 발싸개(북한군 양말)만 흔들어도 당신들 진지를 내려다보던 무인기가 즉각 안전한 귀순 루트로 안내할 것이다”라는 식의 구체적인 안전보장책도 세워야 한다. 북한과의 전쟁에선 동족 청년들의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호를 점령하기보단 ‘사면초가’를 불러주어 손을 들고 투항하는 병사들을 맞는 게 최선이다. 국군의 피도 훨씬 적게 흘리고, 통일 이후의 적개심도 최소화해 진정한 마음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 북한군의 심리를 정밀 연구해 가장 효과적으로 마음을 움직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에 탈북민이 3만5000명이나 와 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국방예산에서 심리전 예산은 찾아보기 어렵다. 스텔스 전투기 하나를 사오는 돈만 심리전에 쓸 수는 없을까. 전쟁은 무기로만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이달 20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중소기업 산업디자인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소형 인공지능 드론, 자율주행 기술을 활용한 발레주차 로봇, 반려인과 반려동물의 동행을 지원하는 용품 등 이색상품들은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의 중소기업 산업디자인 개발 지원 사업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이다. 이날 전시된 제품들은 ‘반려동물에게 편리하게 간식을 줄 수 있다면?’ ‘흥미를 유도하고 안전을 고려한 사용자 친화적 코딩 완구를 만들 수 없을까?’ ‘어렵게만 느껴지는 의학 용어를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할 수는 없을까?’ 등 일상과 연관된 질문을 통해 개발이 시작됐다. 개발 과정에서 서울시와 디자인재단의 역할이 컸다. 시와 재단은 지원 기업을 선정해 5월부터 공동 프로젝트의 역할과 목표 수립, 제품화를 위한 디자인 개발 과제 수행, 디자인 개발비 지원, 역량 강화 교육, 일대일 멘토링을 통해 기업 간 협력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모두 120개의 기업이 참여해 최종 60개의 디자인 결과물이 나왔는데, 바이오·의료 관련이 15개, AI·지능형 정보통신기술(ICT) 관련이 7개, 라이프스타일 관련이 38개이다. 우수과제로 선정된 니어스랩(대표 최재혁)과 디파트너스(대표 이영재)는 공공 및 산업용 드론의 디자인을 고도화했다. 접이식 형태로 개선해 편의성을 높이고, 부품의 생산 및 조립 공정을 간소화하여 제작 원가의 비용을 절감했다. 코보블록스(대표 이영숙)와 아이디앤(대표 강상훈)은 코딩 교구로 활용되는 로봇카의 디자인을 개선했다. 유아 친화적인 디자인을 고려해 곡선형으로 바꾸고, 텍스트 대신 아이콘으로 코딩 명령어를 기입하도록 개선하여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뉴아인(대표 김도형)과 유니체스트(대표 조성환)는 편두통 치료 기기와 연동되는 앱을 일반인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을 직관적으로 개선했다. 또 자율주행 발레주차 로봇, CD음반 대체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 앨범, 스마트 원적외선 항문케어 시트, 반려동물 간식 디스펜서, 브랜드 및 패키지 디자인 개발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출시됐다. 올해 참여한 120개 기업은 서울시와 디자인재단의 지원 사업을 통해 디자인을 고도화하고 생산 효율성을 대폭 개선했으며, 제품 앱 서비스 출시, 특허 출원, 어워드 출품, 전시·박람회 참가, 해외 시장 진출 등의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최인규 서울시 디자인정책관은 “중소기업 디자인 개발 지원 사업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디자인 산업 활성화, 시민 삶의 질 제고 등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디자인 개발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비즈니스의 핵심 요소로 정착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추가적인 사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내 고향은 한반도 최북단 바닷가 마을이다. 약 50m 너비의 백사장이 끝나는 곳에 고향 집이 있었다. 파도 소리를 자장가로 알고 자랐고, 매일 문을 열면 탁 트인 바다가 맞아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이 바다 건너에는 무엇이 있을까.’ 성장하면서 세계지도를 통해 바다 건너에 일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여름에 태풍이 오면 어린 소년의 피는 끓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 해변엔 쓰레기가 가득했다. 그런 날 아침이면 맨 먼저 바닷가 해변에 나가 천천히 걸으며 간밤 해변에 도착한 색다른 쓰레기를 주워봤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소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남에겐 쓰레기일지라도 소년에겐 바깥세상의 비밀을 푸는 퍼즐이었다. 쓰레기는 일본에서 밀려온 것이 가장 많았고, 남조선에서 온 것도 있었다. 주로 빈 페트병, 캔 등이 많았지만 가끔은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쓰레기도 있었다. 일본 슬리퍼 한 짝을 들고 ‘이런 건 왜 신고 다니지’ 궁금했던 적도 있고, 의족 하나를 들고 어떻게 발에 붙이고 다닐까 한참 상상했던 적이 있다. 파란색 일제 플라스틱 파리채를 주워 와 몇 년 잘 썼던 적도 있다. 그 동네에서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바다 건너 세상. 그곳에서 매년 꼬박꼬박 건너오는 쓰레기들을 소년은 연애편지를 바라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커갈수록 해변에 앉아 건너편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 많았다.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결국 피 끓는 20대에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 중국과 북한에서 여섯 번이나 감옥을 옮겨 다녔어도 바깥세상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2002년 마침내 한국에 왔고, 하나원을 나와 4개월 뒤부터 기자가 돼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꿈은 늘 가슴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내 고향 건너편엔 무엇이 있을까.’ 2005년에 구글어스 서비스가 시작됐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고향과 위도가 분초까지 똑같은 일본 해변을 찾는 것이었다. 찾아보니 그곳엔 검은 해변이 있었다. 어렸을 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꿈도 꾸지 못했던 그 해변에 서서 이번엔 맞은편 고향을 바라보는 것이 오랜 세월 나의 버킷리스트 1번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보름 전 드디어 그 꿈을 이뤘다. 삿포로에서 니가타까지 일본 북서부 해변 도로를 5박 6일 동안 차로 달렸다. 고향 집과 정확하게 위도가 일치하는 해변은 콩알처럼 작은 검은 몽돌이 깔린,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외진 해변이었다. 그곳에 서서 고향 하늘을 바라볼 때 만감이 교차했다. 어렸을 땐 바다 건너 일본은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꿈을 마침내 이뤘지만, 이번엔 바다 건너 고향이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어찌하여 이 바다는 이렇게도 건너기 힘든 것이 됐을까. 1300년 전 발해인들은 열악한 목선으로도 일본을 오갔는데, 지금의 북한은 그 어떤 배를 타도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발해인들이 타고 왔던 계절풍과 해류를 타고 부서진 북한 목선들만이 백골을 실은 채 일본 해안에 도착할 뿐이다. 발해 사신 양태사는 계절풍을 기다리는 반년이 너무나 길어 ‘한밤의 다듬이소리’라는 애달픈 시를 남겼는데, 니가타항에서 떠난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 서해에 머물렀던 엿새 동안 나는 점점 더 외부와 고립돼 가는 북한 동해의 도시와 마을들을 헤아릴 수 없이 떠올렸다. 북한 바닷가 마을 어디에선가 40년 전의 어린 나처럼, 외부 정보가 담긴 쓰레기를 들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두 눈으로 살펴보는 소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검은 몽돌 해변에서 나는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다시 저 건너에 서리라. 어쩌다 보니 나는 또 바다를 건너는 것이 목표인 인생을 살게 됐다. 그것은 바다 건너 북한 인민들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땅에서 태어난 우리가 같은 꿈을 꾸다가 문득 그 꿈이 이뤄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고향에 누구보다 먼저 찾아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저 바다 건너편엔 풍차가 가득한 아름다운 해변이 있더구나. 나는 평생을 바쳐 다녀왔지만, 이제 너희들은 배를 타고 한나절 만에 갔다 오거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북한 땅굴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무력화해야 할 하마스의 땅굴이 북한의 기술로 건설됐다는 보도도 나온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북한이 기술을 수출할 정도로 대단한 땅굴 건설 실력을 갖고 있는지 착각할지 모른다. 현실은 어떤가. 공교롭게 북한은 최근 지하터널을 자랑했다. 지난달 노동신문은 평양 지하철이 개통 50주년을 맞았다며 “온 세계가 부러워하는 인민의 지하궁전, 지하 평양을 일떠세워 준 어버이 수령들의 하늘 같은 은덕을 잊지 마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 지하궁전의 확장은 36년 전에 멈췄다. 1967년부터 1987년까지 20년 동안 총연장 34km의 2개 노선과 17개 역을 만들었는데 이후엔 더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평양 지하철은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는 반쪽짜리다. 대동강 남쪽의 동평양 사람들은 자신들이 교통에서 소외된 2등 시민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북한은 대동강 관통 노선을 만들려 노력했지만 하저터널이 붕괴돼 100여 명이 죽는 참사를 포함해 다섯 차례의 시도에도 끝내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이 없어 평범한 지하철 연장 작업도 못 하는 지금 실정에선 하저터널의 꿈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국에는 북한이 서울 지하철까지 연결하는 비밀 땅굴을 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면 서울과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개성공단 인근에서 시작해도 약 40km나 남쪽으로 조용하게 파고 들어와야 한다. 대동강 하저도 뚫을 기술이 없는 북한이 한강이나 임진강 바닥을 폭약도 안 쓰고 삽과 마대로 파서 넘었다는 이야기다. 난제는 그뿐이 아니다. 숱한 버력은 어떻게 처리하며, 수십 km 밖에서 땅굴의 물을 퍼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양수기는 어떻게 감출 수 있을까. 군사분계선 이북을 손금 보듯 하는 우리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1983년 탈북해 땅굴 관련 증언을 남긴 신중철 대위 이후 3만 명이 넘는 탈북민이 더 왔지만, 땅굴을 파는 데 동원됐거나 또는 사돈의 팔촌 중에 관여했다는 증언은 없다. 한국에서 발견된 북한 땅굴 4개는 모두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1990년에 발견된 마지막 땅굴도 굴착 형태로 봐서 다른 땅굴과 건설 시기가 같은 것으로 판명됐다. 김일성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땅굴 때문에 고전하자 적의 배후에 침투할 수 있는 땅굴을 파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이 판 땅굴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남방한계선조차 넘지 못하고 발각됐다. 가장 많이 내려온 것이 군사분계선에서 1.5km 내려왔다. 땅굴의 용도는 선제공격용이다. 북한이 남침으로 한국을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1970년대 중반까지였다. 이후엔 한미연합군과 격차가 너무 벌어져 선제공격으로 남침한다는 꿈을 접은 지 오래다. 금강산발전소 건설을 위해 45km의 도수터널을 판 것이 마지막 대규모 땅굴 건설이었는데 군단급 병력이 1996년까지 10년 동안 동원돼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겨우 완성했다. 북한의 땅굴 기술은 수십 년 전 수준에 멈춰 있다. 지난해 10월 김정은은 동서 대운하를 파겠다고 전 세계에 큰소리를 쳤지만, 실제론 엄두가 나지 않아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이게 귀신도 모르게 서울 지하철까지 땅굴을 연결했다고 일각에서 두려워하는 북한의 진짜 실력이다. 오히려 최근까지 열심히 땅굴을 판 하마스가 북한에 땅굴 건설 비법을 전수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북한의 땅굴을 대단하게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실 세계 최고 수준의 땅굴(터널) 건설 능력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다. 세계를 돌아보면 우리나라처럼 면적당 터널이 많은 나라도 없다. 서울처럼 인구 밀집도가 높고 고층건물이 꽉 찬 도시의 하부에는 지하철 터널이 겹겹이 거미줄처럼 건설돼 있다. 고속터미널역처럼 이미 있던 지하 노선들까지 땅속에서 엮어 하나의 역으로 재창출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50km가 넘는 철도 터널도 건설사 한 곳만 들어가 41개월 만에 완공한다. 지금도 서울 지하 40∼50m 깊이에 최고 시속 200km로 열차를 달리게 하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터널이 3개 노선이나 뚫리고 있다. 이런 우리가 아직도 망치와 정으로 갱도를 파는 북한에 신비감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땅굴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공군을 찬양하는 전면 기사가 14일 노동신문에 게재됐다. 불과 한 달 반 전인 8월 28일 김정은은 “앞으로는 육해공이 아니라 해육공이라고 불려야 한다. 해군이 자주권 수호에 제일 큰 몫을 해야 한다”며 해군을 격찬했다. 공군이 불만을 가질 수 있으니 부랴부랴 공군을 다독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조국의 영공을 목숨으로 지켜가는 공군 장병들의 열화 같은 애국심을 따라 배우자’는 제목의 기사는 “오직 당중앙 결사옹위의 항로만을 나는 공군 장병들의 결사의 각오와 실천이야말로 누구나 본받아야 할 참다운 애국의 귀감”이라고 치켜세웠다. 이 기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비장한 죽음’이다. 결사, 육탄, 자폭 등 죽음과 연관된 단어들이 이어졌다. 비행 중 목숨을 잃은 조종사들이 본받아야 할 사례가 나열됐다. 기사를 읽으면 북한에선 비행 자체가 목숨을 건 결사적인 행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을 각오가 없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는 것이 북한 공군의 실제 현실이기 때문이다. 북한 공군의 최신 전투기는 1980년대 중반 생산된 미그-29로 불과 10여 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1967년 전력화된 미그-23이 40여 대, 1959년 전력화된 미그-21이 120여 대인데 이 중 몇 대나 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나머지는 비행기라고 해야 할지조차 민망한 고물들이다. 북한 공군의 주력인 미그-21은 ‘환갑’이 지난 비행기다. 1950년대에 전력화된 비행기가 주력인 공군은 세계에서 북한이 유일하다. 그나마 인도가 올해 초까지 31개 비행대대 중 3개 대대가 미그-21 50대를 운용했지만 지금은 폐기 수순에 들어갔다. 인도가 미그-21을 운용한 것은 소련에서 기술을 이전받은 생산 공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조달 및 수리가 가능한 공장까지 갖고 있음에도 인도에서 미그-21은 ‘날아다니는 관’이라고 불렸다. 인도 신문 힌두스탄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60년간 400대 이상의 미그-21이 각종 사고로 추락했고, 약 200명의 조종사가 숨졌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우크라이나 전쟁 1년 반 동안 격추된 전투기 수보다 더 많이 추락하고, 더 많은 조종사를 죽게 한 것이 인도의 미그-21이다. 생산 공장이 없는 북한은 인도보다 사정이 더 나쁠 것이다. 인도가 미그-21 운용을 중단하면서 이제 북한 조종사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날아다니는 관’을 타게 됐다. 사고 사례는 노동신문 기사에도 묘사된다. 지난해 10월 북한이 포토숍 복사 붙이기 기능까지 동원해 150대가 떴다고 과장선전한 대규모 항공공격종합훈련에서 이륙 후 고장이 난 비행기가 있었다고 한다. 비행사는 귀대 명령을 거부하고 명령을 관철하기 전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면서 그대로 날아가 폭격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 비행사를 결사의 각오를 가진 귀감이라 내세웠지만 그의 생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전투기는 개발 시기가 20년 정도 차이만 나도 학살 수준의 격차가 벌어진다. 당장 북한 조종사들부터 1947년에 생산돼 아직도 북한에서 운용 중인 미그-15로 1967년에 생산된 미그-23과 전투를 하라고 하면 “미쳤냐”는 소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몇 세대 이상의 격차를 가진 한미 공군과 싸워 이긴다고 큰소리를 친다. 북한이 침투용으로 운용하는 AN-2기는 개발된 지 75년이 지났고, 특수부대 12명을 태우면 시속 150㎞도 나지 않는다. 이걸 타고 북한은 유사시 남쪽 곳곳을 기습 점령한다고 큰소리를 친다. 하지만 노동신문이 아무리 열심히 결사의 각오를 주문해도 군인들이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북한군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장마당 세대’가 주력이 됐다. 국가의 혜택이란 걸 받아 보지 못한 이들이 김정은을 위해 진심으로 결사의 각오를 가질까.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침 어제까지 서울공항에선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가 열렸다. KF-21, F-35A, E-737 등 65대의 최신 항공기와 전차, 자주포 등 한미 연합군의 핵심 자산들이 전시됐다. 북한군에 전시회 영상을 보여준다면 없었던 결사의 각오도 진심으로 생기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우리는 중국 정부에 강제송환 금지 원칙(principle of non-refoulement)을 준수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방한 중인 줄리 터너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18일 “최근 있었던 (중국의) 탈북민 강제북송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임기 중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터너 특사는 서울 용산구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중국 정부의 탈북민) 추가 북송이 없도록 하는 데 방점을 찍겠다”며 “(중국 정부와) 양자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 유엔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이날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지난달 항저우 아시안게임 참석차 방중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면담에서 탈북민 북송 문제와 관련해 “우리로선 중요한 문제이고 걱정되는 문제라서 (탈북자 북송에 대해) 말한 게 맞다”고 밝혔다.● “中정부에 강제송환 금지 원칙 준수 촉구” 이달 13일(현지 시간) 취임한 한국계 미국인 터너 특사는 첫 공식 해외 일정으로 한국 방문을 택했다. 6년 9개월 공석 끝에 임명돼 방한한 터너 특사는 이날 간담회에서 “오랫동안 북한 인권 분야에서 일한 경력을 활용해 인권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하는 증폭기(amplifier)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와 협력해 북한 인권 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추진자 역할을 하겠다”고도 했다. 터너 특사는 미 국무부에서 탈북민 강제북송 등 북한 인권 침해 문제를 주로 다뤄온 전문가다. 북한 인권특사실 특별보좌관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남아시아 담당도 지냈다. 최근 중국이 탈북민 600여 명을 강제북송한 것과 관련해 터너 특사는 “중국 정부에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지고 있는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했다”며 “앞으로도 촉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터너 특사는 북한인권특사 임무로 한국계 미국인 이산가족들의 방북 등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노력하는 책임도 더해졌다고 이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에 돌아가면 미국에 있는 한국계 미국인 납북자나 국군포로 가족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납북자 송환 문제와 관련해서 터너 특사는 “북한 정권이 자행하는 인권 침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임기 중 “북한의 끔찍한 인권 상황에 대해 책임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도 했다. 책임을 묻는 구체적 방법으론 “북한 내 인권 침해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수집해 문서화하는 노력” 등을 언급했다.● “유엔총회서 北에 납북자 송환 요청” 터너 특사는 이날 간담회에 앞서 주한 미대사관에서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 피해자 가족 등도 면담했다. 면담 참석자들은 “(터너 특사가) 다음 주 유엔총회에서 납북자들의 송환 및 생사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달 23일부터 유엔총회 3위원회에서 북한인권특별보고관 등과 만나 납북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이날 면담에서 터너 특사에게 전후 납북자 516명의 명단을 전달했다. 터너 특사는 명단을 확인한 뒤 “미 국무부가 매년 발간하는 연례 보고서에 납북자들 이름을 적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 피해자 가족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달라”는 피해자 가족 대표들의 요청에도 터너 특사는 “그렇게 하겠다”고 흔쾌히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8일 오전 8시부터 1시간 가까이 진행된 면담에는 최 대표를 포함해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 이성의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황인철 대한항공(KAL) 여객기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 북한에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 씨 등이 참석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고도예 기자 yea@donga.com}
“우리는 중국 정부에 강제송환금지 원칙(principle of non-refoulement)을 준수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다.”방한 중인 줄리 터너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18일 “최근 있었던 (중국의) 탈북민 강제북송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임기 중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터너 특사는 서울 용산구 주한 미대사관 공보관에서 열린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중국 정부의 탈북민) 추가 북송이 없도록 하는데 방점을 찍겠다”며 “(중국 정부와) 양자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 유엔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이날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지난달 항저우 아시안게임 참석차 방중 당시 시진핑 국가 주석과의 면담에서 탈북민 북송 문제 관련해 “우리로선 중요한 문제이고 걱정되는 문제라서 (탈북자 북송에 대해) 말한 게 맞다”고 밝혔다.● “中정부에 깅제송환금지 원칙 준수 촉구” 이달 13일(현지 시각) 취임한 한국계 미국인 터너 특사는 첫 공식 해외 일정으로 한국 방문을 택했다. 6년 9개월 공석 끝에 임명돼 방한한 터너 특사는 이날 간담회에서 “오랫동안 북한 인권 분야에서 일한 경력을 활용해 인권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하는 증폭기(amplifier)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물론 한국 정부와 협력해 북한 인권 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추진자 역할을 하겠다”고도 했다. 터너 특사는 미 국무부에서 탈북민 강제북송 등 북한 인권 침해 문제를 주로 다뤄온 전문가다. 북한 인권특사실 특별보좌관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남아시아 담당도 지냈다. 최근 중국이 탈북민 600여 명을 강제북송한 것과 관련해 터너 특사는 “중국 정부에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지고 있는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했다”며 “앞으로도 촉구할 예정”이라고 했다.터너 특사는 북한인권특사 임무로 한국계 미국인 이산가족들의 방북 등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노력하는 책임도 더해졌다고 이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에 돌아가면 미국에 있는 한국계 미국인 납북자나 국군포로 가족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납북자 송환 문제 관련해선 터너 특사는 “북한 정권이 자행하는 인권 침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임기 중 “북한의 끔찍한 인권 상황에 대해 책임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도 했다. 책임을 묻는 구체적 방법으론 “북한 내 인권 침해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수집해 문서화하는 노력” 등을 언급했다.● “유엔총회서 北에 납북자 송환 요청” 터너 특사는 이날 간담회에 앞서 주한 미대사관에서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 피해자 가족 등도 면담했다. 면담 참석자들은 “(터너 특사가) 다음주 유엔총회에서 납북자들의 송환, 생사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달 23일부터 유엔총회 3위원회에서 진행되는 북한인권특별보고관 등과 만나 납북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이날 면담에서 터너 특사에게 전후 납북자 516명의 명단을 전달했다. 터너 특사는 명단을 확인한 뒤 “미 국무부가 매년 발간하는 연례 보고서에 납북자들 이름을 적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 피해자 가족들을 미국으로 초청해달라”는 피해자 가족 대표들의 요청에도 터너 특사는 “그렇게 하겠다”고 흔쾌히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8일 오전 8시부터 1시간 가까이 진행된 면담에는 최 대표를 포함해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 이성의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황인철 대한항공(KAL) 여객기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 북한에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 씨 등이 참석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고도예 기자 yea@donga.com}
올해 ‘공공데이터 제공 및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공공데이터법)이 제정된 지 10주년을 맞았다. 공공데이터법은 국민의 공공데이터 이용권을 보장하고, 공공기관의 데이터 제공 의무 준수와 이용 활성화를 지원하기 위해 2013년 제정됐다. 챗GPT로 널리 알려진 생성형 인공지능이 주목받고, 구글과 넷플릭스 등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다국적 기업이 데이터 기반의 새로운 전략들을 쏟아내는 디지털 심화 시대에 공공데이터는 우리나라가 데이터 분야에서 세계무대를 선도할 수 있는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부터 행정전산망 사업, 국가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 전자정부 사업 등을 통해 정부 문서·자료 등 다양한 국가 지식자원을 디지털화하는 데 성공했다. 2010년 이후 데이터 생성·수집의 본격화와 함께 빅데이터 개념이 등장하며 전 세계적인 데이터 산업 육성 기조가 시작되자 우리 정부는 2013년 공공데이터법 제정을 통해 공공데이터 개방 정책을 적극 시행하였다. 그 결과 2013년 5272개에 불과하던 개방데이터는 10년 만에 8만7033개로 1550%가량 증가했다. 주요 국가들에 비해 데이터 관련 법 제정이 다소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선진국을 크게 앞질러 나가고 있는 것. 2023년 기준 프랑스의 개방데이터는 4만7740개, 영국은 5만7853개에 불과하다. 한국은 특히 개방의 효과성, 시급성 등이 높은 부동산종합정보, 기상정보, 상권정보 등의 데이터를 국가 중점 데이터로 지정하여 개방하고 있다. 공공데이터는 민간 혁신을 촉진하고 많은 경제·사회적 가치를 창출했다. 공공데이터법 시행 이후 공공데이터를 활용한 민간의 서비스 개발 건수는 2800여 개에 달한다. 카카오 지도와 같은 교통정보 제공 앱 관련 기업이나 국내 최대 부동산 플랫폼인 ‘직방’이 데이터를 활용해 성장한 대표적 기업이다. 핀테크 분야의 대표 유니콘 기업 ‘토스’도 숨은 정부 지원금 찾기와 같은 공공 연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공공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많은 민간 서비스에 공공데이터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코로나 기간에도 공공데이터는 큰 역할을 했다. 마스크 부족 사태가 벌어졌을 때 공공데이터를 활용해 민간이 100여 개의 공적마스크 재고 알림 서비스를 개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개방된 백신 데이터를 통해 어느 약국과 병원에 백신이 있는지 확인할 수도 있게 됐다. 이런 노력을 통해 대한민국 공공데이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공공데이터 평가에서 3회 연속 1위를 달성했다. 정부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데이터 생성부터 활용까지 데이터 생태계 전반을 더욱 고도화하려 한다. 대한민국 공공데이터가 앞으로도 계속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도록 네거티브 방식의 개방 정책 강화와 수요자 중심의 개방 패러다임 전환, 민관 공동 협력 체계 구축 및 혁신적 협업 기반 강화, 스타트업에서 중소기업까지 성장 단계별 맞춤 지원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탈북민 3000여명이 서울에 모여 어울림 한마당 ‘모이자‧손잡자‧힘내자’ 행사를 개최했다. 14일 서울 중구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남북하나재단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코로나 확산으로 중단됐던 대규모 탈북민 행사가 5년 만에 재개됐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남북하나재단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탈북민이 주인공인 ‘남북 어울림 한마당’ 행사를 진행했지만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중단됐다.이날 행사에서는 다양한 배경과 정착 사연을 가진 탈북민이 한자리에 모여 소통·교류·지지할 수 있게 화합의 장을 마련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고향음식 나눔, 추억의 놀이 및 운동회, 글짓기 및 노래자랑, 문화·체험 부스 운영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진행됐다.탈북민들은 ‘모이자팀’, ‘손잡자팀’, ‘힘내자팀’, ‘하나되자팀’ 등 4개의 팀으로 나뉘어 문화예술공연, 체육대회, 가요제를 진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특히 체육대회 종목 중 ‘병 끼고 달리기’ ‘공 끼고 달리기’ 등은 일반 주민들에겐 생소하지만 탈북민들은 오랜만에 접해보는 북한의 경기 방식이다.이날 ‘병 끼고 달리기’에서 우승한 ‘힘내자’ 팀의 윤향숙 씨(46세·경기)는 북한 시절의 체육대회를 떠올리며 “그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생활하다보니 체력도 왜소하여 ‘병 끼고 달리기’에서 3등을 했지만, 오늘은 건강한 체력과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하여 1등을 하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또 다른 참가자인 박영남 씨(52세·서울 노원구)는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외롭고 때론 힘든 시간도 많았는데 오랜만에 하나원 동기와 고향 친구도 만나 고향 음식도 함께 먹었다”며 “앞으로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의 활력소를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남북하나재단 조민호 이사장은 “그동안 코로나로 만남이 쉽지 않았던 탈북민들이 풍요로운 가을의 계절에 한자리에 모여 소중한 추억과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오늘의 어울림을 통해 탈북민 모두가 더 큰 하나가 되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통일의 선발대로 당당하게 살아가길 늘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행사 개막식에는 김영호 통일부 장관, 지성호 국민의힘 의원, 김의승 서울시 행정1부시장 등이 참석했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이용선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훈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이 축사 영상을 통해 응원을 보냈다. 통일부, KB국민은행, 미래를 위한 사랑나눔협회, (주)명인에듀, 금융산업공익재단, 희망을 나누는 사람들, 타이어뱅크 등 여러 기관과 기업이 이번 행사를 후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에서 한국 축구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자랐다. 월드컵 녹화 중계 때에 3개 팀만 공개되는 조가 늘 있었는데, 미국 일본도 공개하면서 한 개 나라만 못 한다면 당연히 남조선일 게 뻔했다. 자라는 내내 월드컵엔 늘 3개 팀만 공개되는 조가 꼭 있었다. 매번 월드컵에 나갈 정도면 축구 수준이 매우 높을 것이라 짐작됐다. 16강 대진표에 16개 팀이 모두 공개되면, 남조선 팀이 예선 탈락한 것이어서 매우 아쉬웠다. 돌아오는 월드컵마다 이번엔 남조선이 16강을 통과하라고 속으로 응원했다. 아마 북한 사람들 모두가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2002년엔 탈북해 한국에 와 있을 때라 한국의 4강 진출을 목청껏 응원할 수 있었다. 마침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라 북한도 한국의 4강 소식을 굳이 머리를 짜내지 않고 공개했다. 이후 한국의 16강 진출은 빈번해졌다. 북한은 16강전 8경기 중 7경기만 방영했다. 그러니 북한 사람들도 한국의 16강 진출을 당연히 알 수 있다. 북한과 하는 경기가 아니라면 북한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한국팀을 응원한다. 그게 북한의 정서다. 그런데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선 ‘괴뢰’ 팀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나도 놀랐지만 북한 사람들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괴뢰든 남조선이든 이름 때문에 같은 민족을 응원하는 북한의 정서가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TV에 괴뢰라는 단어가 뜨는 순간 아마 대다수 북한 사람들은 ‘남조선과의 관계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괴뢰는 대북 지원이나 개성공단 재개와 같은 타협 정책이 윤석열 정부 기간엔 절대 없다는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선언이기도 하다. 아시안게임 직전 북한은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북한 보도들엔 “앞으로 무기를 러시아에 팔아 잘살 수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깔려 있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지금 ‘남조선 지원은 당분간 기대할 수 없지만, 대신 러시아에서 뭘 좀 많이 받아오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주는 양이 시원치 않거나 또는 지원이 국방 분야에 한정돼 주민들이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일이 당연히 있을 수가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속은 내가 바보지’라고 생각하며 김정은을 한심한 무능력자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1년 안에 이런 전개가 벌어질 수 있다. 오랜 경험상 이럴 때가 남북 관계가 가장 악화될 때이다. 북한이 주민 시선을 돌리기 위해 도발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취약한 곳을 포착해 빨리 보강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디가 취약할까. 김정은의 입장으로 빙의해 고심해도 한국의 빈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랜 경제난으로 북한의 작전 실행 능력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고, 반대로 우리 군은 연평도 해전이나 천안함 도발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북한은 까딱하면 한 대 때리려다 열 대를 얻어맞을 수가 있다. 하지만 취약점도 분명 있다. 김정은이 반년 내내 매달리고 있고, 러시아까지 가서 기술을 구걸한 정찰위성이 그것이다. 정찰위성은 가격도 비싸고,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려면 최소 다섯 개는 가동해야 해서 북한 입장에선 운영 실익이 낮다. 그런데 김정은은 왜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다. 위성을 특정 궤도에 올리는 기술을 획득하면 우주에서의 공격이 가능하다. 가령 정찰장비 대신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교란 장비를 올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큰 기술이 필요 없고, 수십 kg 무게의 장비로도 한국 전역의 통신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미 북한은 한국을 향한 GPS 교란 작전을 수없이 진행한 전과가 있다. 지상 공격은 범위의 한정으로 큰 힘을 쓸 수 없지만, 500km 미만의 우주에서 내려쏘는 전파 방해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다. 우리는 정찰위성이라니까 진짜 정찰위성인 줄 알고 있다. 우주에서의 전파 공격은 대응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반격은 할 수 있다. 가령 북한이 전파 교란을 일으키면 우리는 전파 송신을 통해 북한 모든 가정의 TV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할 수 있다. 그런 능력 정도는 확보해 놓아야 북한이 함부로 도발을 못 하게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대북방송 송출 예산 60억 원이 내년에는 전액 삭감되는 게 현실이다. 획기적으로 늘려도 모자라는데 거꾸로 간다. 이번에도 또 당한 뒤에 정신을 차릴 것인가.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양강도 혜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기슭에 앉아 있던 인민군 대위가 별안간 강물에 뛰어들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던 시각이었다.빨래를 하던 30명 남짓의 여인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가만히 보다가 대위가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자 한꺼번에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국경경비대가 달려 나와 온갖 욕설을 퍼붓더니 총을 쏘기 시작했다.대위는 총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강을 건넜다. 추워서 이빨이 덜덜 떨렸다. 중국 땅에 접근하면서 그는 군복에 붙은 계급장을 뜯어버렸고 군모도 강에 던져넣었다.중국 쪽은 45도 경사의 가파른 제방이었다. 미끄러워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조선족 청년이 머리를 내밀었다. 도와달라고 하자 그는 어디선가 나무 막대기를 찾아와 내밀었다. 1996년 9월 3일에 일어난 일이다.나중에 이 청년은 탈북하는 인민군 군관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북한에 유인 납치돼 6개월 동안 고문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왔다.그로부터 약 4년 뒤 휴전선 대북 심리전 확성기를 통해 절규하듯 외치는 목소리가 두 달 넘게 북한으로 퍼져갔다.“나는 620훈련소 선전대 작가 대위 김진(김성민 씨의 개명 전 이름)이다. 620훈련소 정치위원, 선전부장 너희들은 무고한 전우를 반역자로 몰아가 결국 나를 남조선까지 오게 만들었다.”확성기 방송이 시작된 뒤 북한군에선 비상이 걸렸다. 그로부터 다시 6년 뒤 그가 복무했던 부대에서 한 군관이 탈북해 왔다.그 군관은 “그 사건 대단했죠. 소문이 퍼지자 총정치국에서 직접 김진 대위는 억울했다는 것을 부대에 통보했습니다”라고 전했다.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대낮에 인민군 현직 군관이 압록강을 넘자 양강도 보위부에선 다음날 즉시 체포조를 장백에 파견했다.체포조가 넘어오던 시각, 김 씨는 산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부대를 탈출해 꼬박 8일이나 기차를 타고 혜산으로 왔고, 다시 혜산에서 3일을 헤맸다. 온몸의 긴장이 강을 넘자마자 풀렸다. 하루 밤, 하루 낮을 자고 깨어나니 배가 고팠다. 태어나 네 끼를 처음 굶어봤다.배가 고픈 그는 산 아래 십자가 불빛을 찾아갔다. 북한군 복무 시절에 읽었던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신부를 기억해냈던 것이다.여성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를 보더니 대뜸 “어제 강 넘어온 분이죠. 오늘 북에서 체포조가 와서 인민군 군관 찾겠다고 돌아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고프고 지쳐서 어디 갈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집사는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먹고 나니 또 졸렸다. 교회의 작은 방에 들어가 쓰러졌는데 깨어보니 다음날 저녁이었다.“여기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저랑 연길에 갑시다. 거기엔 도와줄 분들이 있을 겁니다.”여집사와 함께 12시간을 달려 연길에 갔다. 1996년엔 도로에 검문이 없었다.연길에서 한 조선족 목사를 만났다. 목사는 교회에서 먹고 자도 좋다고 했다. 그로부터 6개월 남짓 그는 교회 안에서 먹고 자고 지냈다. 새벽기도를 오는 신도를 위해 아침마다 불을 피우는 게 그의 일이었다.그 교회에선 ‘월간조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작가 출신인 그는 탈북한 전 북한군 대위의 스토리를 스스로 써서 잡지사에 보냈다. 그가 보낸 기고문은 월간조선 1996년 10월과 12월호에 두 차례에 거쳐 실렸다. 각각 60만, 80만 원씩 원고료도 도착했다.“당시엔 엄청난 돈이었는데, 아마 잡지사가 넉넉히 보내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걸 바꾸니 중국돈 6000위안, 8000위안이 됐는데, 당시 중국 노동자 월급이 2~300위안에 불과했거든요. 거액이 생긴 거죠.”잡지 기고 후 적십자사 명함을 든 한국 남자가 찾아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한국에 있는 삼촌을 찾아 거기에 가는 게 목표입니다. 일단 삼촌부터 찾아주면 생각해볼게요.”적십자사 남자는 1000위안을 주고 가면서 기다려보라 했다. 하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이듬해 2월 한국에서 백두산 견학을 가는 목사 일행이 교회에 도착했다. 김 씨는 이들에게 사정했다.“저는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한국으로 가려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500만 원이 있으면 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부산 동래제일교회에서 왔다는 조완주 목사가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조선족 현지 선교사에게 부탁해 일단 500만 원을 구해 그에게 준 것이다.돈이 생기자 그는 돌봐주던 조선족 목사와 함께 대련으로 떠났다. 목사가 대련에 가면 500만 원을 받고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미국 국적의 한인 목사가 있다며 주선했기 때문이다.● 공안에 넘겨준 한국 선장1997년 2월 대련에 도착하니 풍채 좋은 한인 목사가 약속장소인 카페에 나타났다. 500만 원이 든 봉투를 넘기자 그는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저 사람을 따라가면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말했다.그날 밤 김 씨는 청년과 함께 택시를 타고 대련항으로 갔다. 항을 둘러싼 철조망 앞에서 청년이 “이제 철조망을 넘어 남조선 배를 찾은 뒤 거기에 몰래 올라가면 됩니다”고 말했다.“아니 500만 원이나 받고 항에 데려와서 아무 배나 타고 가라는 게 말이 돼요?”“저는 그 사람 잘 몰라요. 그냥 대련항에 데려가주면 2000위안 준다고 해서 심부름한 것뿐입니다.”김 씨 머리에선 포기할까, 그냥 진입을 시도할까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청년을 잡고 사정했다.“그럼 내가 들어가 남조선 배를 찾아볼 테니 제발 여기서 좀 기다려주시오. 난 중국말을 하나도 몰라서 어딜 갈 수도 없어요.”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철조망을 넘어 대련항에 들어갔다.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항구 쪽으로 갈수록 불은 더 밝아졌다. 보초병의 눈을 피해 바닷물에까지 뛰어들며 끝까지 살펴봤지만, 선박들은 모두 영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북한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그는 남조선 배를 끝내 찾지 못했다. 젖은 옷이 얼기 시작했다. 덜덜 떨며 다시 항구 밖으로 나오니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청년은 “아무래도 그 목사는 사기꾼 같으니 내가 천진에 사는 친구들을 통해 남조선 배를 찾아주겠다”고 했다.김 씨는 청년과 함께 이번엔 천진으로 갔다. 조선족 청년은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천진항에 ‘후션프랜드’라는 남조선 광석 운반선이 들어와 있으니 밤에 그걸 타는 걸 돕겠다”고 했다. 김 씨는 다시 천진항으로 갔다.청년이 “저기 끝에 있는 배가 남조선 배니 몰래 접근해 타라”고 알려주었다. 김 씨는 어둠을 타고 항에 들어가 몰래 선박에 접근했다. 그 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공안이 세 명이나 뛰쳐나왔다. 김 씨는 배 선원인데 술을 마시러 나갔다 오는 길이라고 손짓발짓을 동원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자 공안은 배 선장을 불렀다.선장이 나왔다. 김 씨는 선장에게 말했다.“나는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여기서 선장님이 선원이 아니라고 하면, 저는 공안에 끌려가 북송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공안의 앞이라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선장의 말 한마디에 그의 생사가 달린 순간이었다.선장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이것 보시오. 탈북자를 도와주면 우린 공안이고 안기부고 다 끌려다녀야 해요. 우리도 먹고 살자고 일을 하는데 도울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김 씨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선장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리 말하면 난 죽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라고 다시 말했다.하지만 선장은 단호하게 “노”를 외쳤다. 공안에게 “노스코리아 아미”라며 잡아가라고 손짓했다. 공안들이 달려들어 김 씨에게 수갑을 채웠다.나중에 한국에 온 뒤 김 씨는 그 선박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런데 후션프랜드라는 선박을 찾지 못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다짐했던 복수의 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졌다.●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쁘냐?”천진 감옥에 끌려간 그는 통역을 구하지 못해 40일이나 수감돼 있었다. 나중에 김일성대에 유학을 다녀왔다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한국말을 너무 못해 겨우 의사소통을 했다.“저는 인민군 군관입니다. 중국에 정치망명을 하겠습니다”고 하자 여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우린 그딴 거 몰라”고 대답했다. 1차 조사를 받은 그는 도문 변방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를 이송하는데 무려 7명이 호송원으로 따라왔다.도문에서 다시 조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조사관이 2명씩 계속 바뀌었다. 조선족 공안이 그에게 회유를 했다.“너 가면 죽는다. 우린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북에 보내지 않고 중국에 있는 ‘로개농장(로동개조농장)’으로 보내겠다.”북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김 씨는 솔직하게 대답했다.하루는 새로 나타난 조사관이 “김정일 체제가 싫어서 왔다”는 그의 답변을 듣고 “그럼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설명해보라”고 했다. 김 씨는 북한 체제를 맹비난했다.9일째 되는 날 조사를 받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여럿이 달라붙어 그의 팔을 꺾고 수갑을 채운 뒤 봉고차에 실었다. 차 안에서 처음 보는 탈북 남성과 수갑을 한 쪽씩 나눠차고 짐짝처럼 구겨진 채 북한으로 호송됐다. 현직 군관으로 탈북한 그는 북에 돌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그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의 심정을 그때 알 수 있었다.함경북도 남양의 국경다리를 건너 도착하자마자 중국 공안이 두 사람을 북한 보위부에 인계했다. 중국에서 차고 온 반짝반짝한 새 수갑이 풀리고, 피로 변색된 듯한 시꺼먼 북한 수갑이 덜커덩 채워졌다. 중국 쪽에서 남양을 바라보면 국경다리 바로 앞에 ‘영생탑’이란 것이 있다. 보위부에선 두 사람을 그 탑 주변을 돌게 했다. 주변에서 장사하던 아줌마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을 조국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침을 뱉고 신발을 집어던졌다. 죽음을 앞둔 순간임에도 그는 이때 인생 최고의 수치심을 느꼈다.영생탑을 돌게 한 보위부원들은 다시 이들을 싣고 온성 보위부로 끌고 갔다. 김 씨는 중국이 자신에 대한 자료를 북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산악기공장 노동자라고 열심히 거짓말을 했다. 처음에는 보위부가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듯했다.온성 보위부에서 조사 7일째 되는 날 조사실에 들어간 그는 온몸이 굳어져버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조사관은 도문에서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설명해보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북한 보위부가 중국에 건너와 직접 탈북민의 심문에 동참했던 것이었다. 중국에서 북한 체제를 비난했던 그의 답변이 고스란히 북한 보위부 책상에 올라와 있었다. 사형 당해야 할 이유가 추가된 것이다.다음날 군관 4명이 온성에 나타났다. 그가 복무했던 부대와 인민무력부 소속 보위사령부 군관들이었다.“김진. 이제 가야지. 우선 평양에서 조사를 받고, 다시 부대에 가서 조사를 받을 거야.”“조사가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임마, 그건 네가 판단해야지 우리가 어케 알갔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호송원 4명과 함께 그는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사람들로 빼곡한 일반 객실이 아닌 열차 호송원과 승무원들이 타는 특별 객실이었다. 기차는 느릿느릿 평양을 향해 가고 또 갔다. 4명이 돌아가며 감시하는 바람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가는 내내 그는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희망은 있었다. 천진감옥과 도문감옥에서 50일 넘게 수갑을 차고 수감생활을 하다보니 고무줄이 들어있는 속옷 혼솔 부분의 살이 온통 벌레에 물어뜯겨 피고름 투성이었다. 도저히 수갑을 찰 지경이 아니어서 호송원들은 솜옷 위에 수갑을 채웠다. 그러다보니 손을 살살 움직이면 수갑에서 손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3일이 지났다. 깊은 밤 창밖을 내다보니 기차는 평성을 지나 평양으로 달리고 있었다. 평양에 도착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그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화장실은 온갖 오물로 가득 차 더럽기 그지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 서있던 호송원은 냄새가 싫은지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김 씨는 3일 동안 머리 속으로 연습한대로 수갑에서 한쪽 손목을 뽑아냈다.동시에 벌떡 일어나 유리창을 발로 차 깨뜨린 뒤 시속 80㎞ 정도로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차피 평양에 가서 온갖 고통을 겪다가 죽을 운명이라면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100m에 하나씩 있는 열차 전봇대만 피하면 살 수도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호송원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몸을 던진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정신을 차려보니 선로 옆 작은 밭에 쓰러져 있었다. 봄을 앞두고 마침 밭을 갈아서 땅이 푹신했다. 3년간의 특수부대 훈련이 무의식중에 그를 땅에 제대로 착지시킨 듯싶었다.주변을 돌아보니 멀리 기차가 멈춰서 있었고, 수십 개의 손전등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도망가려고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움직여지지 않아 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로에 있다간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기 시작했다. 마침 수십m 옆에 산이 있었다. 그가 산자락에 붙어 몇 미터 올라가지 않았을 때 선두의 손전등이 그가 뛰어내린 자리에 도착했다. 자세히 보면 사람이 쓰러졌던 자리나 깨어진 유리창을 발견할 수도 있었겠지만, 열차에서 뛰어내린 호송원들과 안전원, 경무원(헌병)들도 당황했는지 정신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손전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김 씨는 다시 산을 기어올랐다. 몇 시간 뒤 산중턱에서 바라보니 손전등들은 주변 마을 집집마다 분주히 오가며 돌아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추운 산등성이에서 김 씨는 탈영병으로, 조국 배반자로, 사형수로 전락한 자신의 운명을 처량하게 되돌아봤다.● 남조선 혁명시를 쓴 아버지김 씨는 1962년 자강도 희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는 평양에서 희천공작기계공장 노동자로 혁명화 대상이 됐던 신세였다.아버지 김순석은 북한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었다. 해방 후 함경북도 작가동맹 지부장을 역임한 그는 북한 최고 권위의 문학잡지에 여러 편의 시를 실었고, 이것이 인정받으면서 평양창작실 작가로 발탁됐다. 6·25전쟁에는 종군작가로 참전했고, 전후엔 잡지 ‘조선문학’ 편집부장, 조선작가동맹 시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하지만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 종파 숙청 바람이 불 때 아버지도 좌천돼 노동자로 지방에 쫓겨났다. 어떤 이유였는지 김 씨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에 할머니가 맏이이자 청년이 된 아버지만 함경북도 청진에 남겨둔 채 김 씨에겐 삼촌인, 아들 두 명을 데리고 서울로 간 것이 좌천의 중요 이유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지 10대의 어린 두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고 떠난 것뿐이지만, 북한 당국은 월남자로 판단한 것이다.수년 간의 혁명화 끝에 아버지는 1964년에 김일성대 어문학부 교원으로 평양에 복직했다. 김 씨는 희천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평양 중구역에서 북한 최고의 명문 유치원으로 치는 경상유치원과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세상을 떴다. 김일성대 교원을 하던 아버지는 김정일이 1970년대 초반 대남사업을 하겠다며 ‘3호 청사(노동당 대남담당 기관만 모아놓은 건물 명칭)’를 만들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갔다. 아버지가 맡은 일은 구국전선 등 남조선 지하조직의 작가가 쓴 것처럼 시를 지어내는 것이었다.아버지가 쓴 시는 ‘남조선 혁명가들이 보내온 시’로 둔갑돼 대남방송으로 나갔다. 나중에 김 씨는 아버지가 썼던 시를 찾아봤다. 서울로 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구절구절 역력했다. 아버지는 이 일을 얼마하지 못했다. 김 씨가 12살 때인 1974년에 타고 가던 차가 평양의 한 고가다리에서 전복돼 세상을 뜬 것이다.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쓰러져 누웠다. 어머니는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국제연감 담당 기자였는데, 하루도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계속 누워만 있다가 1년 뒤 돌아갔다. 김 씨는 “어머니가 세상을 살기 싫어 자살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외아들인 김 씨는 출가하지 않은 막내 누나와 함께 살았다.● ‘창작조 병사’가 되다1978년 중학교를 마친 김 씨는 만 16세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부모를 잃고 빽도 없는 그는 황해남도 태탄군에 주둔한 28사 경보병대대에 배속됐다. 경보병대대는 북한에서 특수부대로 간주된다. 게다가 그가 입대했을 때 “일반 병사도 벽돌 한 장은 거뜬히 깨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경보병대대는 아침 기상 직후부터 내복바람으로 3000번 타격 훈련을 한 뒤 밥을 먹었다. 엄동설한 산골짜기로 타고 내리는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타격 훈련을 하다보면 손에서 흐르던 피고름이 얼음이 돼 달라붙었다.하루도 빠짐없이 24㎏짜리 군장을 메고 평일 50리(20㎞), 토요일은 100리(40㎞)씩 행군 훈련을 했다.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김 씨는 인민군 협주단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제자들에게 부대를 좀 옮기게 해달라고 거듭 사정했다.3년 만에 마침내 김 씨는 경보병대대에서 82미리 박격포부대로 이동됐다. 포부대의 삶은 경보병부대에 비해선 천국이었다.여유를 찾은 그는 짬짬이 시를 써서 인민군 신문사에 기고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시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신문사에 약 10편의 시를 기고하면 1편은 신문에 실렸다. 5편 정도 실렸을 때 인민군 신문사에서 어떤 병사인지 궁금해 기자가 찾아왔다. 사단에서도 그를 주목했다. 입대 4년차가 됐을 때 사단 선전부장이 찾더니 “사단 창작조에 들어오라”고 명령했다.이곳에서 1년 정도 활동하다가 입대 5년차엔 군단 선전대로 옮겨갔다. 북한군은 군단별로 정규 선전대를 운영한다. 그가 속한 4군단 선전대는 당시 120명 편제였는데 200명이나 근무했다. 대좌인 선전대장 산하에 문학창작조는 물론 성악, 기악, 화술, 무용, 조명 등 각 분야별 특기자들이 소속돼 있었다. 군단 선전대에 소속되면 군관들이 입는 군복을 입히는데, 선전대를 구분하는 견장도 따로 있었다. 먹는 것도 일반 군부대와 훨씬 나아서 배고픈 걱정이 없었다. 그가 속한 문학창작조는 소좌 편제의 작가 밑에 8~10명의 병사가 소속돼 있었다. 책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선전대의 가장 큰 목표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군무자축전과, 역시 4년 주기로 열리는 군단별 선전대축전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것이다.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축전을 위해 군인 200명이 복무하는 것이다.가령 군무자 축전의 경우 23개 군단급 선전대(정규군단 12개, 공군, 해군 및 군단급 훈련소 포함)에서 고른 작품들로 2시간 반짜리 공연을 진행하는데, 군단에서 작품이 하나라도 뽑히면 우수한 성과를 냈다고 본다. 각 군단 선전대는 성악이나 기악은 물론 합창이야기, 합창과 시, 노래이야기, 중창이야기, 독연 등 다양한 장르를 내놓고 최종적으로 공연에 선정되기 위해 애쓴다.김 씨는 군단 선전대에 들어간 첫 해부터 전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병사의 자서전’ ‘중대의 기타수’라는 제목으로 그가 쓴 가사가 군무자축전에 오른 것. 김 씨는 “가수가 노래를 잘 불렀던 탓이 컸다”고 회상했지만, 23개 군단 작가들이 경쟁하는 자리에 일반 병사가 쓴 가사가 두 개나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중앙 축전에 올라가면 “김진이 너냐”는 질문을 받게 됐다.창작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책이었다. 북한에서 발간된 고리타분한 서적밖에 없었는데, 외국 명작도 보고 싶었다.한 번은 창작조 병사 한 명이 “해주도서관에 가면 과거 출판됐다가 회수했던 책을 한 부씩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는 정보를 갖고 왔다. 그에게 시간을 주니 도서관에 들어가 1950~60년대 출판됐다가 김일성 독재체제가 공고화되면서 회수한 뒤 한 부씩 남겨 창고에 두었던 금서를 무려 6마대나 훔쳐왔다.그 덕에 김 씨는 안나 카레리나, 레미제라블 등 세계 명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세계 명작 중 일부를 다시 출판했지만 당시엔 이런 책이 금서였다.● 김형직사범대학에 가다입대 7년차가 되자 김 씨는 창작조 조장으로 발탁됐다. 조장이 되니 1년에 6개월씩 평양시 송신구역에 있는 인민군창작실에 올라가 ‘창작조장 강습’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입대 8년차인 1986년에 그는 송신에 갔다. 전군에서 온 30명의 군단 창작조장이 모였는데, 그해와 이듬해 그는 이 창작조장 강습단의 조장으로 발탁됐다. 이때 그는 북한 체제의 부조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됐다.저녁이 되면 30명 중 20명이 넘게 사라졌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평양의 고위 간부집 자식들이었다. 창작실 군관들은 이들에게 ‘과제’를 주어 외출을 허용했다. 가령 정무원 무역부장의 아들은 6개월 내내 며칠에 한 번씩 식용유 통을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이 기름은 군관들과 군관 식당에 배정됐다. 무역부장 아들은 기름통만 전달하고 집으로 귀가했다.군관 결혼식 준비 임무 명목으로 나가는 병사, 쌀을 갖고 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가는 병사, 부식물을 해결하라는 과제를 받고 나가는 병사 등 사유는 다양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평양 간부집 자식들은 뇌물을 주고 군 복무 기간을 집에서 자유롭게 지냈다.김 씨도 집이 평양이지만, 부모가 없어 물자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와 몇 명만이 실력으로 창작조장으로 발탁됐을 뿐 나머지는 뇌물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그런 김 씨도 군 생활 말년에 뇌물을 엄청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김정일이 군단 산하 선전대와 체육단이 혼자만 잘 산다고 화를 내면서 해산하라고 한 것. 물론 이 지시는 3년쯤 지나 번복되긴 했다.선전대가 해산되면서 그는 박격포부대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가니 중대에선 그가 가장 고참이었다. 중대장과 소대장도 그보다 늦게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못하고 어려워하자 대대장이 그를 불러 “지금 너 하나 때문에 부대 규율이 어지러워지니 무력부 감 밭에 가서 경비나 서라”고 지시했다.황해남도 용연군에는 인민무력부 호방총국이 소유한 무려 2만 정보 면적의 감나무 밭이 있었다. 경비 움막에 올라가 바라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몇몇 병사들과 감 경비를 서게 된 김 씨는 살면서 처음으로 호화생활을 누리게 됐다. 규율생활도 없는데다, 감을 따서 고기와 실컷 바꾸어 먹을 수가 있었다. 안면을 익힌 인민군 창작실에 감을 한 트럭 가득 따서 보내도 흔적도 나지 않았다. 북한에선 귀한 과일인 감으로 창작실에 계속 뇌물을 보내니, 창작실이 보답을 했다.인민군 창작실은 3년에 한번씩 김형직사범대학에 위탁생을 모집해 보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위탁생은 기존 신분은 유지한 채 대학에 파견하는 학생을 의미하는데, 졸업하면 파견한 조직으로 돌아가야 한다.1988년 10년차를 맞아 제대할 나이가 된 김 씨는 인민군 전체에서 3명을 뽑는 김형직사대 작가양성반 위탁생으로 발탁됐다. 인민군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부, 보위부, 각도 문학창작실, 중앙 영화문학 창작실 등에서 위탁생을 뽑는데 이들은 한 개 학급을 구성해 3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한 뒤 졸업장과 작가 자격증을 받고 파견 기관으로 돌아간다.그가 입학했을 때 이렇게 모집된 위탁생은 19명이었다. 작가동맹 문예창작실 실장 정열(대좌)이 창작지도 교수였고 노동당 작전부장 오극렬의 딸로, 북한에선 유명한 영화문학 작가로 알려진 오혜영도 교수진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군단 작가, 대위로 승진김 씨는 대학을 1년 반밖에 다니지 못했다. 새로 생긴 620훈련소에서 작가를 뽑으려고 수소문하다가 학생 신분인 김 씨에게 제안을 해왔다. 소위를 달고 훈련소 작가로 일하면 3년 뒤에 졸업증을 받아주겠다고 한 것. 김 씨의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황해북도 신계군에 지휘부를 둔 620훈련소는 항간에 자주포군단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말에 생겼는데, 이때만 해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군단이라며 비밀주의를 고수했다.김 씨는 제안에 선뜻 응했다. 사실 병사 시절 그의 꿈은 군관이었다. 하지만 남들은 군관학교에 잘만 가는데, 그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추천해주지 않았다.그런 그가 안쓰러웠는지, 제대 전 뇌물을 주어 친분이 두터워진 군단 간부지도원이 부르더니 책상에 서류를 두고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웠다.서류를 펼쳐본 김 씨는 아연실색했다.‘할아버지 일제 때 뽕밭 4000평 보유, 도박으로 탕진. 삼촌 2명 월남. 아버지 기독교 신우회 총무 출신. 어머니 일본군 나남헌병대 타자수’ 등 그의 가족 내역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북한에서 나서 자란 김 씨가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간부지도원은 그에게 알아서 단념하라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특히 어머니의 일본군 경력이 가장 걸렸다. 나중에 그는 어머니의 지인들에게 물었다.“어머니는 어떻게 돼 나남헌병대 타자수를 하게 됐나요?”돌아온 대답은 허무했다.“진이야, 중앙당이나 군단에 가면 예쁜 여자들이 근무하는 걸 많이 봤지? 딴 이유는 없어. 너희 엄마가 처녀 때 청진에서 제일 예뻤어.”군관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던 김 씨에게 군단 선전대 작가 제안이 왔으니 대학을 더 다닐 이유도 없었다. 그가 군단에 가니 작곡가, 연출가 등을 각 부대에서 스카웃하면서 선전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이곳에서 그는 1996년 9월 탈북할 때까지 7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군복을 입을 사이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을 썼다.장성인 훈련소 정치위원은 북한에서 유명한 구호인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를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인데, 수시로 창작실을 찾아왔다. 당을 찬양하는 척하면서 자기를 부각시키는 내용을 교묘하게 끼워넣는 작품을 만드느라 1년 반 넘게 함께 고생했고, 친분도 두터워졌다.원래 군단 작가 편제가 소좌라 진급도 빨랐다. 소위로 부임했지만 대위까지 거침이 없었다. 1991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김일성에게서 군권을 넘겨받은 김정일은 그해 모든 군인의 계급을 한 계급씩 올려주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중위로 승진하기도 했다. 약속대로 김형직사대에선 졸업 학년이 되자 졸업장도 주었다.● 한국에서 날아온 편지김 씨는 1996년 8월까지 탈북이란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과거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겹치면서 탈영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첫 번째 사건은 1994년에 있었다. 그의 휘하 창작실에 두만강 옆 함북 새별(경원군)이 고향인 병사가 있었다. 이 병사가 휴가로 집에 다녀오면서 떡을 가득 메고 왔다. 그런데 떡을 싼 종이가 북한에선 볼 수 없는 고급 종이였다. 자세히 보니 ‘월간조선’의 화보였는데, 거기에 ‘사람찾기란’이 있었다. 병사에게 물어보니 중국에 있는 친척이 뭘 포장해 보낸 종이인데, 종이가 좋아 떡을 포장해 왔다는 것이었다.김 씨는 갑자기 삼촌을 찾고 싶었다. 1980년대 초반 북한이 남조선 각계 인사들에게 보낸 호소문 명단에 삼촌과 같은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병사에게 “중국 친척에게 이 주소로 사람찾기를 부탁할 수 있냐”고 물으니 가능하다고 했다. 김 씨는 삼촌 2명의 인적사항을 적어 병사에게 주었다. 특히 노동신문에 나왔던 삼촌 이름과 같은 사람은 모 기독교 단체 총무 목사인 것 같은데, 알아봐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몇 달이 지나 병사가 중국 친척을 통해 월간조선이 보낸 회답을 갖고 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김관○ 목사는 알아보니 당신의 삼촌이 아닙니다.”그런데 이 병사가 보위부에 포섭된 스파이였다. 병사는 김 씨가 준 편지와 회답을 고스란히 보위부에 가져다주었다. 현직 군관이 한국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는 매우 중대한 범죄였다.보위부 조사가 시작되던 찰나 군단 정치위원이 나섰다. 자기를 홍보하는 작품을 한창 만들고 있는 작가를 굳이 잡혀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김 씨를 불러 “뭐, 내용을 보니 별 것도 아니던데 내가 잘 처리해줄거니 창작에만 집중하라. 이제부터 이 일은 당신과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했다. 군단 정치위원이 힘을 쓴 덕에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두 번째 사건은 1993년에 시작됐다. 당시 군단의 신생 선전대의 고민은 관악기가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북한제 관악기를 들고 축전에 올라가면 외제 악기를 쓰는 다른 군단의 선전대에 계속 밀렸다. 군단 선전부에 외화벌이를 한 돈으로 관악기를 좀 구해달라고 계속 요구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1993년 축전을 앞두고 선전대장은 이 문제를 두고 계속 속을 썩였다. 하루는 선전대장이 김 씨를 불렀다. 당시 김 씨는 선전대 노동당 세포비서를 맡고 있었다.“비서 동무, 우리가 알아보니 개성학생소년궁전에 재일교포가 기증한 악기 세트가 쓰지도 않고 보관돼 있다고 하오. 우리 이거 훔친다 생각 말고, 잠깐 빌리고 다시 갖다 준다는 마음으로 가져오면 안 될까.”“대장 동지가 알아서 하시죠.”비서와 상의를 마친 선전대장은 때마침 선전대에서 아코디언 강습을 받고 있던 포종심정찰 대대 강습생 5명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인솔해 석탄트럭을 타고 수백 리 떨어진 개성으로 떠났다.침투와 기습 훈련에 특화된 정찰병들은 이틀 만에 새까만 석탄더미에 악기를 숨겨 부대로 돌아왔다. 나팔은 물론, 일본산 드럼세트와 전자바이올린 등 없는 것이 없었다.훔쳐온 일제 악기로 그해 선전대는 군무자축전에서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시 가져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악기에 대해 물어보면 외화벌이를 한 자금으로 사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다.그런데 1996년에 이 사실이 발각됐다. 누군가 군 총정치국에 투서를 보낸 것이다. 군단 선전대장은 출당된 뒤 강제 제대됐다. 훔쳐온 악기를 사용한 작곡가는 당원 자격이 박탈당하고 후보당원으로 강등됐다. 김 씨는 이 사건에 가담한 적이 없어 처벌을 피했다. 두 지휘관이 처벌을 받으면서 세 번째로 직급이 높았던 김 씨가 선전대장 대리를 맡았다.이때부터 부대에 김 씨가 대장이 되려고 총정치국에 투서를 보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졸지에 그는 출세를 위해 조직과 동료를 배신한 사람이 돼버렸다.● 탈영, 그리고 탈북김 씨는 처음에 자신이 배신자로 지목된 줄 몰랐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외면하고 피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은 받았다.마침내 그는 부하를 통해 진상을 알게 됐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군단 정치위원이라면 억울한 심정을 알아줄 거라 믿었다. 군단 지휘부에 가니 보초병들이 정치위원의 명령이라며 정문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는 담장을 뛰어넘어 보초병들의 눈을 피해 정치위원 방으로 찾아갔다.그가 억울하다고 토로하자 정치위원이 “너 아니면 됐어, 가봐. 일 열심히 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자루 속의 송곳이야 언제든지 드러나지 않겠어.”방을 나오면서 그는 정치위원도 자신을 배신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총정치국이라도 시원하게 투서를 누가 했는지 밝혔으면 좋으련만, 북한도 제보자의 신상은 나름 보호해 준다.선전대로 돌아온 그는 이 누명을 어떻게 벗을지 고민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샜다. 그러다가 친구인 여단 보위지도원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던졌다.“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 남조선에 편지를 쓴 적이 있다면서?”순간 김 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편지 사건은 친구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위원 등 몇 명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상관을 배신한 사람으로 지목되자 정치위원도 그를 제거하려 약점을 꺼내든 것이다. 이때는 정치위원을 띄우는 작품 창작도 끝난 뒤라, 김 씨의 활용도도 사라졌다.친구에게서 편지 이야기를 듣자마자 김 씨는 방으로 돌아왔다. 남조선에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다시 들추면 정치범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이럴 바엔 남조선으로 가자.”그는 지도를 펼쳤다. 철도를 따라가 보니 양강도 혜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간단히 짐을 챙겨 부대를 빠져나와 기차에 올랐다. 1996년은 고난의 행군으로 경제가 마비됐던 때라 기차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열차 안에서 8일이나 고생한 끝에 혜산에 내렸다.혜산역에 내렸지만 압록강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몰랐다. 군관복을 입고 “압록강으로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면 수상하게 볼 것이 뻔한 터라 그는 무작정 헤맸다. 그런데 하필 방향이 반대였다. 무려 3일이나 헤매다가 압록강에 도착했다. 나중에 보니 혜산역에서 강까지는 5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압록강 기슭에 앉아 그는 하염없이 중국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되면 물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변수가 생겼다. 지나가던 국경경비대 두 명이 다가와 증명서를 보자고 했다. 군관이 오전부터 강가에 목석처럼 앉아있으니 수상해보였던 것이다.증명서를 받아본 한 군인이 갑자기 반색을 했다.“820훈련소 김진 작가 동지군요. 저는 인민군 신문으로 통해 작가 동지 잘 압니다. 심지어 대위 동지에게 편지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작품 하나 쓰려고 현장 답사 왔어.”상대는 기뻐서 주절거렸지만, 신분을 들킨 김 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들이 부대로 가서 보고하면 체포조가 올 가능성이 컸다. 군인들이 헤어져 얼마쯤 갔을 때 그는 압록강에 뛰어들었다.● 수배를 피한 9일간의 탈출북송돼 평양으로 끌려가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한 김 씨는 산에서 하루를 더 은신해 있다가 주변 기차역을 찾아갔다. 그런데 벌써 기차역에 그의 수배 사진이 붙어있었다.그는 다시 돌아가 숨어 있다가 밤 12시에 담장을 넘어 역에 몰래 들어갔다. 북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잡아타고 가다가 새벽이면 무조건 내려 주변에 은신하고 다시 밤마다 화물열차를 탄다는 것이 계획이었다.그렇게 9일 동안 북으로 계속 올라갔다. 중국에서 겨울에 옷을 여러 벌 입고 있다 잡혔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호송될 때까지 그 옷들을 여전히 입고 있었는데, 그는 탈출 후에 옷을 한 벌씩 기차역 앞 상인들에게 넘겨주고 먹을 것과 바꾸었다.때는 1997년 3월 말이었다. 낮에 산에 은신해 있다보면 산나물 캐려 올라오는 남루한 사람들, 나물이라도 캐먹고 살려고 산 밑에 비닐로 대충 막사를 만들고 사는 가족들을 수없이 만나게 됐다.지금까지 부대 밖 세상은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김 씨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 나라는 망했구나. 이런 걸 내가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했고, 찬양을 하다니”라고 수없이 자책했다.9일째 되는 날 기차 옆에 두만강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날은 날이 밝아도 계속 기차를 타고 갔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9시쯤 되자 함북 회령과 학포 사이 구간을 가던 기차가 고개에서 속도가 급격하게 늦춰졌다.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논밭을 가로 질러 두만강을 향해 달렸다. 민가나 도로와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라 그런지 막아서는 경비대도 없었다. 아직 두만강은 3분의 1 정도 얼어있었다. 그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흙탕물로 변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쑥 들어갈 것이란 예상을 했는데 의외로 물이 무릎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냅다 뛰어 중국땅에 도착한 그는 갈대밭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중국에 다시 온 것이다.아는 곳이 지난번 머물던 연길의 교회인지라 그곳을 찾아갔다. 대련까지 안내해주었던 태중원 목사는 그가 남조선에 이미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에 잡혀갔다 왔다고 해도 믿지 않고, 안기부에서 다시 임무를 받고 왔냐고 물었다.● 연길에서 올린 결혼식연길에서 김 씨는 1999년 2월 한국에 올 때까지 계속 머물렀다. 연길에 오자마자 그는 사기꾼 목사를 수소문했다. 그가 베이징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목사는 “네가 목사냐”고 울부짖는 그를 보고도 침착한 목소리로 “정말 미안합니다. 목사도 사람이라 실수합니다”고 하며 500만 원을 돌려주었다.나중에 그 목사는 속죄한다며 탈북민 구출활동에 뛰어들었고 수십 명의 탈북민을 한국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북한이 요원을 보내 그를 납치한 뒤 살해했다.김 씨는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란 말만 되풀이해 들었다.연길에 있을 때 가장 큰 변화는 그를 보호해주던 태중원 목사의 처제와 결혼을 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연변병원 의사로 있었는데, 아프리카 선교사가 꿈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언제 잡혀갈지도 모르는 김 씨를 남편으로 선택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지만 그녀는 이 남자를 보호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사람을 좋아하는 김 씨는 한국에 온 뒤에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집에 끌고 왔다. 명절이면 주변 탈북민들을 다 불러 모으는 바람에 집이 넘쳐나 아파트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앉아 고기를 굽기도 했다. 김 씨의 집을 거쳐 간 탈북민은 수없이 많은데, 그때마다 부인은 불평 없이 남편과 손님들에게 상을 차린다. 탈북민 사회에서 김 씨 부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해먹인 사람은 없다.그는 한국에 와서 20년 넘게 살면서 자기 집도 마련하지 못하고, 돈이 생기면 계속 엉뚱한데 써버리는 남편이지만 지금도 김 씨와 뜻을 같이하며 믿음직하게 곁을 지킨다. 이들은 부부가 아닌 동지가 된지 이미 오래다. 연길에서 태어난 딸은 벌써 20대 중반이 넘었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연길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태중원 목사는 탈북민을 도와줬다는 죄로 박해를 받아 외국으로 망명했다.결혼하고 얼마쯤 지나 김 씨는 한국에 있는 삼촌을 찾았다. 연길에 있는 내내 여러 선을 통해 수없이 알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백두산 관광을 왔다가 교회에 들린 한국 사업가가 자신이 알아본다며 돌아가더니 3일 만에 찾았다고 연락을 해왔다. 한국에 사는 할머니와 작은 삼촌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큰 삼촌 한 명만 남아있었다. 둘은 통화를 하면서 금방 서로를 알아봤다. 큰 삼촌의 목소리가 아버지와 똑같았다.삼촌은 성공한 사업가가 돼 있었고, 자식들 또한 잘 나갔다. 조카가 왔다는 소식에 삼촌은 연길로 날아왔다. 처음 봤지만 보자마자 “형님 아들이 맞구나”고 부둥켜안았다. 피는 물보다 진했다.삼촌은 몇 만 달러를 주고 갔다. 당시 연길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김 씨는 이 돈 일부로 중국 호구를 사서 신분을 세탁한 뒤 한국식 당구장을 하나 차렸다. 삼촌은 한국으로 오라고 거듭 권했지만,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살기 싫었다.당구장을 운영하면서 그는 갈 데 없는 탈북 청년 수십 명을 그곳에 숨겨주고 먹여주었다.● 연변의 치열한 남북 정보전1990년대 후반 연변은 남북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보위부와 안기부 요원들이 신분을 숨기고 맹활약했다. 이때는 탈북민이 연변에 가장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탈북민 속에서 북한을 붕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지하조직들도 생겨났다. ‘북한인민해방전선’ ‘피로써 북조선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연합(피민련)’ ‘진달래회’ 등 알려진 것만 5개의 비밀조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김일성 동상을 폭파시키겠다며 러시아 암시장에서 휴대용 대전차 유탄발사기(RPG)를 사오기도 했다.보위부는 이 조직들을 적발하기 위해 탈북민으로 위장한 요원들을 계속 잠입시키며 혈안이 돼있었다. 보위부의 공작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1990년대 말 혜산에선 김일성동상을 폭파시키려던 비밀조직 수십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동지들을 밀고한 배신자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보복이 두려워 원산에 이주해 살다가 얼마 뒤 앓아 죽었다.북한 체제를 겨냥한 수많은 공작을 분쇄시키며 맹활약을 한 지휘관은 함경북도 보위부 윤창주 대좌였다. 북한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수백 명을 납치 살해하며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던 그의 운명은 비참했다. 2011년 처형된 류경 보위부 부부장의 심복으로 낙인돼 함북 보위부 심복 10여명과 함께 처형됐다. 그들의 가족은, 그들이 수없이 사람들을 잡아 보냈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외에도 탈북민 공작에 가담한 북한 보위부 간부와 요원들의 말년은 대개 다 비참했다. 북한에서 사냥개에게 차려진 운명은 토사구팽뿐이었다.1990년대 후반 연변에서 활약하던 안기부 요원들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라졌다. 적십자 명함을 들고 다니던 사람들도 사라졌다.이 시기에 연변에서 성공한 탈북민 출신 사업가로 활동했던 김 씨는 수많은 공작의 전모를 직접 보았다. 하지만 아직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 많기에 나중에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다.연길에서 많은 탈북민과 연계를 하면서, 그의 신분도 점점 노출되기 시작했다. 언제 체포조가 들이닥쳐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중국 호적을 갖고 있던 김 씨는 중국 여권을 만들어 한국의 삼촌에게 두 번 놀러오기도 했다. 1999년 2월에도 한국에 와서 강원도 등을 놀려 다니고 돌아가려는데,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 공항 직원이 조선족 같지 않은 그의 행동을 심상치 않게 여겨 북한 간첩으로 의심한 것이다. 그는 탈북한 북한 군관 출신이라고 순순히 시인하고 조사기관에 이송됐다.당시엔 북한군 자주포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때였다. 그는 하나원에도 가지 않고 무려 10개월을 조사받았다. 그리고 1999년 12월 사회에 나와 정착을 시작했다. 2002년엔 중국에서 가족도 데리고 왔다. 한국에서 그는 새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김성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 대북 라디오의 역사그가 입국하자 삼촌은 조카에게 자기 회사 부장 직함을 달아주고 사무실까지 내주었다.하지만 회사에 나가도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출근해 책상 먼지를 털어내고 앉아있는 날이 반복됐다. 그의 성격과 조금도 맞지 않았다.그는 주변의 탈북민들과 어울리며 1년 넘게 보냈다. 그러다가 이렇게 탈북민이 많으니 뭉쳐서 뭔가 해보자고 제안했다. 2001년 첫 자생적 탈북단체 ‘백두한라회’가 만들어졌다. 김 씨는 30여명의 회원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다녔는데 매달 두 집씩 독거노인의 집을 찾아 도배를 해주었다.그렇게 살던 중 2003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게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삼촌 회사를 나와 그는 황 전 비서를 보좌하는 일을 시작했다. 2006년엔 탈북자동지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2004년 그는 첫 민간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만들었다. 2004년 6월 4일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남북은 선전 활동을 중지하고 선전 수단을 철거하기로 합의했다는 6·4 합의가 방송에 나오던 날 그는 10여명의 전직 외교관 등 탈북 선배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방송을 보던 누군가 “정부에서 대북 방송을 끊으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동석자들의 눈은 일제히 김 씨에게 향했다.“대북 방송을 할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중에서 김 씨의 나이가 제일 어린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를 방송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당시 김 씨는 KBS ‘남북의 창’, KBS 라디오 ‘출발동서남북’ 등에서 MC로 활약했고 국정홍보방송에서 ‘서울말 평양말’ 코너를 3년째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방에 나가 확성기로 북한 지휘관들을 단죄했던 용기도 있었다. 나중에 귀순한 620훈련소 출신 군관은 김 씨에게 그 방송 때문에 620훈련소 정치위원 등이 해임될 뻔 했지만 “변절한 사람의 말을 믿고 해임시키는 것은 억울하다”는 하소연이 인정돼 살아남았다고 했다. 군 총정치국은 그때에야 투서를 보낸 사람의 신원을 밝혔다. 알고 보니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제대했던 선전대 창작조장 출신의 병사가 악감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부대에선 악기를 훔쳐온 비밀을 선전대 간부 몇 명만 알고 있다고 생각해 제대해 간 사람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선전대장 대리가 돼 가장 큰 수혜자로 여긴 김 씨를 투서자로 확신했던 것이다.그날 술자리에 참석한 12명이 김 씨에게 대북라디오 방송을 하라며 100만 원씩 모아주었다. 한국의 민간 대북라디오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6·4 합의가 발표된 날에 시작됐다. 하지만 방송인과 라디오 방송 운영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1200만 원으로 라디오 방송국을 차리기엔 어림도 없었다. 이때 삼촌이 3억 원이란 거액을 건네주었다.한 북한 관련 연구소의 건물을 빌려 방송국을 차리고 첫 방송을 시작했을 때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총련 통일선봉대 30여명 등 온갖 단체들이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매일 같이 시위에 시달리자 김 씨는 없던 오기가 생겨났다.“내가 대북방송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구나.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시위대에 시달리던 연구소 측은 나가달라고 했다. 그는 방송국을 서울의 한 작은 빌딩으로 옮겨왔다. 협박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죽은 쥐, 칼을 꽃은 인형 등이 수시로 배달됐다. 팩스에 딸 이름까지 적어 보내며 협박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협박을 견디며 그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자유북한방송을 운영해 오고 있다. 그 기간 수없이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2005년 10월 그는 다른 탈북 여성 3명과 함께 미 하원 탈북자 청문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날 한성렬 유엔대표부 차석대사와 북한 외교관 몇 명이 같은 건물에 왔다. 북한 외교관들이 왔다는 소리에 증언하러왔던 탈북 여성 3명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김 씨는 화가 났다. 급히 종이판을 구해 ‘한성렬, 한반도 평화의 길은 김정일 타도!’라고 적고 한 대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한반도 평화의 길은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는 것”라고 구호를 외치자 한 대사는 험한 표정으로 “너 이 새끼, 죽을래?”라며 고함을 질렀다. 김 씨는 “너도 죽을거야”라고 맞받았다. 북한 최고의 대미 라인으로 알려진 한성렬은 2018년 진짜로 처형됐다.김 씨는 북한 주민의 인권과 존엄성 증진을 위해 미국과 한국에서 번갈아 매년 열리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도 20년째 진행하고 있다. 미국의 단체들과 연합해 열리긴 하지만, 한국에서 모든 업무를 담당해 처리하는 김 씨가 없다면 이 행사는 열릴 수가 없다.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 공적으로 그는 ‘2009 아시아 민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구글에서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를 검색하면 수많은 기사들이 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북한의 협박도 많아졌다. ● “세 번째 삶을 삽니다.”2017년 3월 어느 날, 그날도 김 씨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밤늦도록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페이지만 마무리하면 되는데 도무지 자판을 칠 수가 없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작업을 마친 그는 마지막 마침표를 누른 뒤 쓰러졌다.병원에 가보니 뇌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뇌에 생겨난 시꺼먼 구멍이 보였다.즉시 수술이 잡혔다. 뇌에 있는 종양을 도려내고 입원해 있는데, 의사가 다시 찾아왔다.“사진을 판독하니 뇌종양보다 더 심각한 것이 폐암입니다. 암이 폐에서 전이됐어요. 폐암 말기입니다.”찾아온 가족에게 의사는 “더는 손 쓸 수가 없으니 마지막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나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아직 김정은 정권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내가 먼저 죽을 수는 없다. 이젠 살아남는 것이 나의 투쟁이다.”김 씨는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주사 한 번 맞고 나니 머리가 다 빠졌다. 그의 삶을 아는 지인들이 적극 나서서 수천만 원의 치료비를 모아 후원해주었다. 또 연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암세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치료를 포기하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끝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기적이 일어났다. 신약 임상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최신 항암제를 투약했다. 임상대상자가 되면 새로 나온 비싼 항암제를 무료로 맞을 수 있다.이 약의 효과가 너무 좋았다. 폐암 말기에서 치료를 시작한 뒤 5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암 투병 중에도 그는 여전히 자유북한방송 대표로, 북한자유주간의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작년 8월 타자를 치다가 또 같은 증세를 느꼈다.병원에 가보니 이번엔 반대쪽 뇌에 종양이 생겨났다. 다시 수술을 했는데 예후는 나쁘지 않다. 그는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 미국에서 효과가 뛰어난 항암제가 또 나왔다고 한다.“사실 삶에 대한 애착은 크게 없어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살았고, 폐암과 뇌암 말기도 이겨냈으니 이미 두 번을 죽었다 살아났다고 봐야죠. 남은 생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져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살자. 그리고 자유북한방송은 중단돼선 안 된다. 지금 저의 목표는 이 두 가지로 단순하게 좁혀졌어요.”아버지는 남조선을 해방한다며 평양에서 대남방송을 하다가 숨졌다. 지금은 아들이 서울에서 북한을 해방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목숨 걸고 대북방송을 진행한다. 그는 이미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북한 인권 중시로 바뀌면서 탈북민 정착 지원을 담당하는 국내 유일의 공공기관인 남북하나재단의 어깨도 무거워졌다. 3월 취임한 조민호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은 “탈북민을 취약계층으로 바라보는 것은 단견적 시각”이라며 “탈북민은 북한의 변화를 추동할 소중한 국가적 자산이자 통일을 견인할 전사”라고 강조했다. “탈북민은 남북한을 직접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며, 이들이 한국에서 잘살게 되면 북한 간부와 주민에게 ‘한국은 저런 사회구나’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과거엔 남북 대화나 교류 협력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이끈다는 생각에만 치중돼 있어 북한의 변화를 이끄는 탈북민의 역할에 대해선 간과했습니다. 탈북민은 통일 이후에도 북한 주민에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학습시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조 이사장은 탈북민을 통일의 주역으로 내세우기 위해 남북하나재단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탈북민의 삶이 안정되어야 그들의 사명감도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 이사장은 취임 이후 대한민국 기업들이 탈북민을 한 명씩 고용하자는 취지의 ‘일사일인(一社一人)’ 캠페인을 제안하고 성과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탈북민을 고용하는 기업은 통일 준비에 동참하는 미래가 있는 기업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와 함께 그는 여러 부처 및 공공기관 등과의 업무협약(MOU)을 통해 남북하나재단을 알리는 데 역점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시와 이북5도청,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등 이미 많은 곳과 MOU를 맺고 재단의 존재를 알리면서 탈북민 정착의 훌륭한 조력자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탈북민의 마음을 치유하고 스스로 어울리며 단합을 통해 갈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것도 그의 중요한 관심사다. “이런 취지에서 재단은 9월 18일 인천에 ‘마음소리공감상담센터’를 개소합니다. 탈북민들이 북한 독재정권 치하에서, 또 탈북 과정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빨리 털어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10월 14일, 서울에서 수천 명의 탈북민이 함께하는 ‘탈북민 어울림 한마당’ 행사를 열려고 합니다.” 현재 탈북민들은 한국 사회에 빠르게 녹아들고 있다는 것이 조 이사장의 진단이다. “고용률, 경제활동 참가율, 실업률 등의 통계를 보면 지난해에 비해 많이 좋아졌고, 한국 사회 평균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뛰어난 인재를 키우기 위해 재단이 적극 지원할 생각입니다. 최근 로스쿨에 진학한 탈북민 청년들은 장학금 가점을 주기로 했는데, 통일 이후를 생각하면 북한 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재를 대한민국 사회가 적극 키워야 합니다.” 조 이사장은 1980년대 말부터 10년 넘게 남북 관계 현장을 누빈 1세대 북한전문기자 출신이다. “북한 인권 문제와 탈북민 정착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노력이 결실로 이어질 수 있도록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것이 재단과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엔 특종을 위해 남북을 오가며 치열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탈북민을 위한 1호 영업사원’이란 각오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