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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뒷면에 천이나 여러 겹의 종이를 발라 꾸미는 표구(表具)는 일제강점기 이래 예술의 바깥 테두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표구는 ‘장황(裝潢)’ ‘배접(褙接)’이라 불리며, 이 또한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작업으로 대접받았다. 2006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류(紙類) 작품을 복원해온 김미나 학예연구사(39·왼쪽 사진)도 표구에 대한 사회적 대접이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최근 ‘표구의 사회사’(연립서가·오른쪽 사진)를 펴낸 그는 “눈에 보이는 테두리는 표구의 일부일 뿐”이라며 “보존에 취약한 지류 작품을 100년 이상 버티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표구의 진정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2006년 차병갑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고문(69)을 만나 사제의 연을 맺으며 표구에 빠져들었다. 차 고문은 1997년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복원한 지류문화재 복원전문가다. 김 학예연구사는 “스승님은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전통 배접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며 “충무공 영정 복원 때도 일본 비단으로 덧댄 표구를 전부 제거하고 우리 전통 비단으로 단장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렵더라도 우리나라 비단을 고수하셨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여러 겹의 종이를 덧대는 전통을 지키셨고요. 당장은 효율이 떨어져 보여도 전통 원칙을 지켜야 작품을 100년 넘게 보존할 수 있다고 하셨죠.” 그가 표구를 책으로 정리한 것도 스승에게 배운 가르침을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족자와 병풍, 액자 등의 표구 제작 과정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김 학예연구사는 “요즘은 표구의 보존성보다 비용과 디자인을 중시해 베니어합판에 덧대는 방식이 각광받고 있다. 겉보기에는 값싸고 편리하지만 종이가 변색돼 보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여러 겹의 종이를 작품에 덧대는 전통 방식은 한두 단계를 거르면 당장은 티가 나지 않아도 언젠가 작품에 탈이 나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에서 바라보는 외형이 아니라 단단한 내면에서 나온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진가가 보인다. 충남 공주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이번에 전시한 ‘귀걸이’들은 특히나 그렇다. 길이가 최소 2cm부터 최대 10.1cm. 크고 화려한 유물에 가려 눈이 잘 가지 않았던 귀걸이 유물들이 전시의 주인공으로 돌아왔다. 공주박물관이 27일 시작한 특별전 ‘백제 귀엣-고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귀걸이 1021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국내 귀걸이 유물 전시로는 최대 규모다.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백제 귀걸이 216점이 포함돼 관심을 모은다. 귀걸이라고 하면 공주박물관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이기도 한 국보 ‘무령왕 금 귀걸이’를 떠올리는 이가 많다. 길이 10.1cm에 한쪽 무게만 54.7g. 금의 순도가 99%에 이르는 이 유물은 언제 봐도 영롱하다. 역시 국보인 ‘무령왕비 금 귀걸이’도 바로 옆에 전시됐다. 백제 왕족 귀걸이는 고유한 특징이 있는데, 모두 검붉은 색 안료를 덧입혀 놓았다. 나선민 학예연구사는 “반짝이는 금과 대비를 이루는 흑색, 적색을 칠해 일부러 금빛을 덜 노출시키는 ‘절제된 화려함’을 추구하는 게 백제의 미학”이라고 설명했다. 무령왕 귀걸이만큼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귀걸이도 있다. 충남 부여 응평리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백제 사비시대(538∼660년) 추정 금 귀걸이 한 쌍이다. 금이긴 해도 왕족이나 귀족이 착용하던 화려한 장식품이 아니다. 평범한 우리네 금반지마냥 소박한 고리 형태로 푸근함이 느껴진다. 재밌는 건 해당 귀걸이는 발굴 당시 머리뼈 관자놀이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것. 당시는 불교가 보편화돼 부장품 매장 문화가 거의 사라진 시기. 하지만 돌아가신 분이 애용하던 귀걸이는 함께 묻을 정도로 백제에서 귀걸이는 모두가 즐기는 ‘핫 아이템’이었다. 4∼6세기 백제와 신라, 고구려, 가야의 귀걸이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백제 사비시대와 고구려의 귀걸이는 중간 장식을 매달지 않고 하나로 이어붙인 일체형으로 제작된 공통점을 지녔다. 나 학예연구사는 “정치적으로는 서로 적대적 관계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적극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내년 2월 26일까지. 무료.공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윷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우리 민족이 즐겨온 전통놀이인 윷놀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26일 밝혔다. 윷가락 4개를 던져 판의 말을 옮기는 윷놀이는 주로 정초와 정월대보름에 하다가 1년 내내 즐기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동양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음(陰)과 양(陽), 천체 28수 등 고유한 형식을 갖췄다. 한반도에서 윷놀이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역사서 ‘북사(北史)’ 등에는 부여에서 비슷한 형식의 놀이를 즐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김문표(1568∼1608), 이규경(1788∼1856)이 윷놀이의 의미와 방법을 기록으로 남겼다. 문화재청은 “윷놀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며 “다만 누구나 즐기는 문화인 만큼 특정한 보유자와 보유단체는 두지 않고 ‘공동체종목’으로 지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국가무형문화재 공동체종목으로 지정된 건 ‘김치 담그기’ ‘장 담그기’ ‘한복생활’ 등 15건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울 도심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이게 학교라고?” 지난해 3월 개교한 서울 영등포구 신길중학교를 보면 누구나 절로 감탄이 나온다. 주변은 신길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2017년부터 아파트가 4000채 넘게 들어섰다. 아파트가 숲을 이뤘지만 학교 풍경은 삭막하지 않다. 한적한 전원에 세워진 미술관도 이만큼 어여쁠까 싶다. 신길중은 최근 ‘서울특별시 건축상’에서 완공부문 대상을 받았다. 학교에서 24일 만난 이집건축사사무소 대표인 이현우 건축가(54)는 2018년 서울시교육청 주최한 설계공모전에 참가할 때부터 “집보다 더 집 같은 학교”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당시 아파트는 재건축이 한창이었죠. 거대한 단지 아래 아이들이 ‘덩어리의 일부’로 살아가겠단 우려가 생겼어요. 위압적인 건물 틈에서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란 얼마나 어렵겠어요. 학교라도 반대로 가보자 싶었죠.”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인 신길중은 하나의 건물이지만 얼핏 보면 옹기종기 집들이 모인 마을처럼 보인다. 실제 22구역으로 공간이 나눠져 있으나, 앞마당을 서로 맞댄 채 연결돼 있다. 이 건축가는 “크게 전체 3개 동으로 구분된 구역도 기다랗게 이어져 있다”며 “각 동은 층수를 달리 해 한 동의 건물 옥상이 다른 동 마당이 돼 준다”고 설명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옥상을 포함해 곳곳에 배치된 중정(中庭·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이다. 무려 19군데에 중정을 지었고, 모든 마당은 교실에서 통유리창으로 보인다. 문을 열고 나서면 곧장 따사로운 볕도 쬘 수 있다. 이 건축가는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에 운동장까지 나가 햇살을 즐기긴 무리”라며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면 가슴이 뻥 뚫리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런 설계는 의외의 선순환도 낳았다. 학교에서 종종 문제의 온상이 되곤 했던 옥상이 모두에게 개방된 놀이터이자 쉼터가 됐다. 층마다 여러 곳에 중정이 있다 보니 특정 무리가 공간을 독점하는 일도 사라졌다. 개방적인 장소라 사각지대도 없다. 이 건축가는 모든 중정의 생김새를 달리했다. 1층 도서관 앞은 단풍나무를 심어 야외에서 독서를 즐길 수 있고, 벽돌 바닥으로 지은 테라스는 학생들이 둘러앉아 수다 떨기에 맞춤이다. 이 건축가는 “크고 작은 중정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공간을 활용하는 법을 찾길 바랐다”고 했다. 교실을 포함한 22채의 독립공간은 막힌 곳 없이 모든 길로 통한다. 재밌는 점은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한 동에서 다른 동으로 갈 때, 바쁘면 곧장 계단과 복도로 가면 된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나무와 잔디가 심어진 중정 등으로 산책하듯 돌아갈 수 있다. 이 건축가는 “삶의 목적지로 가는 길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걸 몸으로 이해하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건물 외형도 뾰족한 박공지붕과 평평한 지붕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었어요. 교실 천장도 그에 맞춰 서로 다르게 했고요. 학생들이 다름이란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거든요. 아이들이 학교에 애정을 가지고 직접 가꾸며 학교의 진짜 주인이 되면 좋겠어요.” 이 건축가의 소망은 이미 상당히 이룬 듯했다. 아이들이 직접 가져다놓았다는 앙증맞은 화분들이 교실 옆을 수놓았고, 잔디밭 중정 난간엔 손수 만든 바람개비들이 알록달록 돌아갔다. “요즘은 학생들이 중정 잔디밭에서 씨름도 한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데, 하하. 역시 아이들은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대단해요. 어떻게 하든 그건 학생들 마음이죠. 그게 진짜 학교 아닐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4000세대가 넘는 29층 높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서울 영등포구 신길재정비촉진지구. 빽빽한 아파트 숲 사이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 키 작고 자그마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이 지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흡사 도심 속 전원주택단지 같아 보이는 이 건물은 바로 ‘신길중학교’다. 지난해 3월 개교한 신길중은 14일 열린 ‘제40회 서울특별시 건축상’ 시상식에서 완공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 학교를 설계한 이집건축사사무소 대표 이현우 건축가(54)는 2018년 서울시교육청이 주최한 설계 공모전에 참가하기 전 아파트 재건축이 한창인 학교 부지를 찾았다가 “집보다 더 집 같은 학교”를 상상했다고 한다.“거대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덩어리의 일부로 살아갈 아이들을 떠올렸어요. 위압적인 건물들 속에서 아이들이 상상력을 키우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학교는 아파트와 정반대로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죠. 아이들에게 집보다 더 집 같은 학교를 지어준다면 아이들이 제 집처럼 학교를 가꿔나갈 테니까요.” 24일 이 건축가와 함께 둘러본 학교는 여러 채의 집을 잘게 나눈 작은 마을과 같았다. 4층짜리 통 건물이 아니라 22채의 조그마한 집들이 앞마당을 서로 맞댄 채 이어져 있다. 3개 동으로 기다랗게 연결된 동시에 각 동의 층수를 달리 해 앞 건물 옥상이 뒤편 마당이 되어주는 식이다. 연면적이 9858㎡인 학교에 마련된 중정이 무려 19곳. 중정과 교실로 통하는 문이 통유리 창으로 연결돼 있어 아이들이 교실 문을 나서면 어디서든 볕을 쬘 수 있다. 이 건축가는 “아이들이 운동장까지 걸어 나가 햇볕을 쬐기에는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은 너무 짧다. 교실 앞에 작은 정원이 있다면 그 짧은 시간에도 아이들이 햇볕을 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덕분에 학교의 사각지대이자 골칫덩이였던 옥상이 아이들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 특히 각 층마다 옥상 중정을 덕분에 특정 무리가 공간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아이들이 쉼터를 두루 나눠 쓸 수 있게 됐다. 이 건축가는 “일부러 중정마다 생김새를 다 다르게 설계했다. 1층 도서관 앞에는 단풍나무를 심어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야외에서 책을 읽고, 벽돌 바닥으로 만든 테라스에서는 아이들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 수 있다”며 “크기는 작을지라도 중정을 19곳으로 쪼개 다양한 아이들이 쉼터를 누리길 바랐다”고 했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앞 동과 뒷 동이 쪼개진 듯 보이지만 모든 길은 서로 통한다. 교실과 중정이 서로 연결되고, 중정과 건너편 건물이 유리문을 통해 이어지는 식이다. 이 건축가는 “다른 목적지로 이동할 때 한 방향으로만 길을 내지 않고 여러 갈래의 길을 내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바쁘면 건물 내 계단과 복도를 통해 건너편으로, 시간이 넉넉하다면 푸른 잔디와 나무가 심어진 중정을 가로질러 이동할 수 있다.“아이들이 삶의 목적지로 나아갈 때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는 걸 몸소 깨달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뾰족한 박공지붕과 평평한 지붕 등 다양한 건물 외형에도 건축가의 철학이 담겼다. 이 건축가는 “교실의 천장이 제각기 다르듯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다름이라는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 건축가는 “아이들이 제집처럼 학교를 가꾸고 바꿔나가며 학교의 진정한 주인이 되길 바랐다”고 강조했다. 이날 교실 곳곳에는 아이들이 직접 가꾼 화분이 보였다. 잔디밭이 심어진 중정에는 해바라기 꽃들이 줄을 지어 피었다. 중정 난간에는 아이들이 손수 만들어 붙인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손수 가꿔놓은 정원을 바라보던 이 건축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준 것뿐이에요. 요즘 학생들이 이 잔디밭에서 씨름을 한대요.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활용법인데(웃음). 역시 아이들은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대단해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위성이 궤도 진입에 실패했습니다.” 2009년 8월 25일 오후 5시.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가 역사적인 첫 비행을 시작한 지 9분 만이었다. 나로호가 보내오는 데이터를 분석하던 연구원들에게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로호 2단에 설치된 부품이 고도 177km 상공에서 분리되지 않은 탓에 속도가 떨어지며 위성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다. 안타깝고 속 쓰린 순간이었지만 현장을 지키던 저자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1989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창립멤버인 조광래 전 원장(사진)과 당시 연구원이었던 고정환 현 항우연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은 곧장 원인 분석에 착수했다. “로켓맨에게 포기란 없다”며. 올해 6월 21일.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자적인 기술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를 우주로 띄워 보냈다. 전 국민을 환호하게 만든 크나큰 성과였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힘겨웠다. 1993년 한국 최초의 과학로켓 ‘KSR-Ⅰ’을 거쳐 나로호와 누리호 개발 책임을 맡았던 저자들은 이 책에 그 값진 ‘실패담’을 담담히 풀어냈다. 바깥에서 보기엔 실패였는지 몰라도, 사실 이들의 여정은 ‘대한민국 항공우주연구개발사(史)’ 자체다. 1990년대 한국은 항공우주 분야에서 미국, 일본은 물론 북한에도 뒤처진 후발주자였다. 처음 발사대 가동 연습 당시, 알맞은 장소를 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대전에 있는 항우연 기숙사 옆 주차장에서 로켓 점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연구원들은 휴일에도 경북 영주와 울진, 경남 통영과 남해, 제주 모슬포 등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 했다. 미지의 영역을 향한 도전은 순간순간이 위기였다. “첫 발사를 시도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결함이 보고된 것만 1000건이 넘었다”고 한다. 1993년 6월 4일 한국 최초의 과학로켓 ‘KSR-Ⅰ’을 발사할 때도 성공보다 실패의 시간이 훨씬 길었다. 특히 첫 발사를 앞두고 추진기관의 결함을 확인하는 ‘X선 비파괴검사’는 저자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해당 검사에서 추진기관 내부에 딱 “달걀 1개 크기인” 기포가 발견됐다.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우니 그냥 발사하잔 의견도 있었지만, 연구원들은 결국 모두 갈아엎고 다시 시작했다. 과학에서 실패는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의 잣대는 냉혹했다. 저자들은 “발사를 실패한 뒤엔 ‘형벌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털어놓았다. 1997년 7월 9일 이륙 20.8초 만에 과학로켓 ‘KSR-Ⅱ’의 통신이 끊겼을 때다. 곧장 과학기술처 소속 조사단이 항우연 연구실에 들이닥쳤다. 당시 조사단은 로켓 시스템에 대해 이해하려 들진 않고 그저 연구원들을 ‘무능력한 죄인’으로 몰아세웠다고 한다. 2013년 1월 30일 나로호 발사 성공 뒤 조광래 당시 나로호발사추진단장이 “너무 늦어 죄송하다”며 고개부터 숙였던 것도 그런 압박감 때문이었다. 역경이 끊이지 않았지만 로켓맨들은 굴하지 않았다. 패배자란 낙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실패가 잇따랐지만, 그저 시도하고 연구하고 준비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값진 항공우주기술로 이어졌다. 하지만 저자들은 현재의 성과에 결코 안주할 생각이 없다. 누리호의 성공조차 “우리에겐 반드시 가야 할 누리호 그 다음이 있다”고 다짐할 뿐이다. ‘우리는 로켓맨’은 고맙고 미안한 책이다. 머리로야 고생하는 걸 알았지만, “또 실패냐”며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예산도 인원도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묵묵히 한길을 가는 그들이 놀랍기만 하다. 책은 어느 한 구석 버릴 게 없지만, 가장 감동적인 건 마지막 페이지다. 항공우주 개발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 234명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진 못해도, 그들이 대한민국이 우주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던 개척자란 사실은 잊어선 안 되겠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위성이 궤도 진입에 실패했습니다.”2009년 8월 25일 오후 5시.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가 역사적인 첫 비행을 시작한 지 9분 만이었다. 나로호가 보내오는 데이터를 분석하던 연구원들에게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로호 2단에 설치된 부품이 고도 177㎞ 상공에서 분리되지 않은 탓에 속도가 떨어지며 위성이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못했다. 신간 ‘우리는 로켓맨’의 두 저자. 현장을 지키던 그들은 안타깝고 속 쓰린 순간이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1989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창립멤버인 조광래 전 원장과 당시 연구원이었던 고정환 현 항우연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은 곧장 원인 분석에 착수했다. “로켓맨에게 포기란 없다”며.올해 6월 21일.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자적인 기술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를 우주로 띄워 보냈다. 전 국민을 환호하게 만든 크나큰 성과였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힘겨웠다. 1993년 한국 최초의 과학로켓 ‘KSR-Ⅰ’을 거쳐 나로호와 누리호 개발 책임을 맡았던 저자들은 이 책에 그 값진 ‘실패담’을 담담히 풀어냈다.바깥에서 보기엔 실패였는지 몰라도, 사실 이들의 여정은 ‘대한민국 항공우주연구개발사(史)’ 자체다. 1990년대 한국은 항공우주분야에서 미국, 일본은 물론 북한에도 뒤처진 후발주자였다. 처음 발사대 가동 연습 당시, 알맞은 장소를 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대전에 있는 항우연 기숙사 옆 주차장에서 로켓 점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연구원들은 휴일에도 경북 영주와 울진, 경남 통영과 남해, 제주 모슬포 등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했다. 미지의 영역을 향한 도전은 순간순간이 위기였다. “첫 발사를 시도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결함이 보고된 것만 1000건이 넘었다”고 한다. 1993년 6월 4일 한국 최초의 과학로켓 ‘KSR-Ⅰ’을 발사할 때도 성공보다 실패의 시간이 훨씬 길었다. 특히 첫 발사를 앞두고 추진기관의 결함을 확인하는 ‘X선 비파괴검사’는 저자들에게 오래토록 기억에 남았다. 해당 검사에서 추진기관 내부에 딱 “달걀 1개 크기인” 기포가 발견됐다.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우니 그냥 발사하잔 의견도 있었지만, 연구원들은 결국 모두 갈아엎고 다시 시작했다.과학에서 실패는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의 잣대는 냉혹했다. 저자들은 “발사를 실패한 뒤엔 ‘형벌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털어놓았다. 1997년 7월 9일 이륙 20.8초 만에 과학로켓 ‘KSR-Ⅱ’의 통신이 끊겼을 때다. 곧장 과학기술처 소속 조사단이 항우연 연구실에 들이닥쳤다. 당시 조사단은 로켓시스템에 대해 이해하려 들진 않고 그저 연구원들을 ‘무능력한 죄인’으로 몰아세웠다고 한다. 2013년 1월 30일 나로호 발사 성공 뒤 조광래 당시 나로호발사추진단장이 “너무 늦어 죄송하다”며 고개부터 숙였던 것도 그런 압박감 때문이었다. 역경이 끊이지 않았지만 로켓맨들은 굴하지 않았다. 패배자란 낙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실패가 잇따랐지만, 그저 시도하고 연구하고 준비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값진 항공우주기술로 이어졌다. 하지만 저자들은 현재의 성과에 결코 안주할 생각이 없다. 누리호의 성공조차 “우리에겐 반드시 가야 할 누리호 그 다음이 있다”고 다짐할 뿐이다.‘우리는 로켓맨’은 고맙고 미안한 책이다. 머리로야 고생하는 걸 알았지만, “또 실패냐”며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예산도 인원도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묵묵히 한길을 가는 그들이 놀랍기만 하다.책은 어느 한 구석 버릴 게 없지만, 가장 감동적인 건 마지막 페이지다. 항공우주개발연구에 참여한 연구원 234명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진 못해도, 그들이 대한민국이 우주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던 개척자란 사실은 잊어선 안 되겠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신문에 연재되며 독자에게 따사로움을 전했던 그림들이 전시를 통해 관객을 만난다. 김수진 동아일보 뉴스디자인팀 기자의 개인전 ‘안녕, 마음씨!’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21~26일 열린다. 김 기자가 “오늘의 이 그림이 따뜻한 위안이 되길 바라며 나의 마음 조각들을 건넸다”며 동아일보 오피니언 면에 게재했던 그림들을 중심으로 모두 30점을 선보인다. 전시에는 밤하늘 별을 품에 안은 이를 형상화한 ‘나의 우주’(사진), 밤거리에 홀로 선 사람을 비추는 달빛을 담은 ‘달 등대’ 등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소를 짓게 하는 작품이 많다. “때로는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 때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는 김 기자의 속내가 묻어난다.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중국 베이징국가박물관이 최근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展)’에서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한 전시 연표에서 무단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삭제해 논란이 이는 가운데, 중국 정부가 박물관을 통해 자국 중심주의 역사관을 전파해 왔다는 지적이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지난달 30일 출간한 ‘동북아역사포커스’ 9월호에서 김현숙 연구위원은 논문 ‘박물관 전시를 통해 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김 위원은 “2017∼2019년 중국 동북 지역 주요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가운데 고구려와 관련된 전시를 분석한 결과, 고구려를 중국 관할로 소개했다”며 “중국은 박물관 교육을 통해 중화문명의 위대성을 주창하며 자민족 중심주의에 치우친 자의적 역사인식을 전파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린(吉林)성에 있는 지안(集安)박물관이다. 이곳은 전시장 입구부터 고구려의 종속성을 강조하는 안내문을 설치했다. 여기에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할 때 고구려인 구역에 고구려 현을 설치해 현도군 관할에 뒀다”며 해당 현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취지의 문장이 실렸다. 현도군은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등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하나. 랴오닝(遼寧)성과 톄링(鐵嶺), 번시(本溪), 선양(瀋陽)박물관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담은 소개글들이 발견됐다. 김 위원은 이를 고구려가 한나라에 속해 행정적 지배를 받았다는 중국의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와 후한서 등을 살펴보면, 주몽의 고구려는 기원전 75년 현도군을 공격해 쫓아낸 뒤 기원전 37년에 건국했다”며 “고구려는 한나라의 행정적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적인 국가”라고 반박했다. 지안과 톄링, 번시, 랴오닝 등 4곳에서는 한나라와 고구려를 “조공과 책봉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고구려가 중원 왕조에 종속됐다는 ‘속국론’을 펼치기도 했다. 김 위원은 “조공과 책봉의 개념은 한나라가 멸망한 뒤 남북조 시기에 완성됐다”며 “고구려가 한나라에 예물 등을 보낸 것은 강대국인 중국과 우호적인 외교 무역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뿐”이라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퍼커셔니스트(타악기 연주가) 공성연 씨(22)와 김지연 씨(31)가 독일에서 18일(현지 시간) 열린 ‘제7회 슈투트가르트 세계 마림바 콩쿠르’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다. 공 씨는 ‘위촉곡 최고 해석 특별상’도 수상했다. 일본의 이시다 마치가 공 씨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랐다. 1위에게는 1만2000유로(약 1670만 원), 3위에게는 5000유로 상금을 수여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 입학한 공 씨는 2015년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했다. 현재 슈투트가르트국립음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2014년 금호영아티스트콘서트로 데뷔한 김 씨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국립음대 석사 및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쳤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문화재청이 경북 영덕군에 있는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喜庵齋舍·사진)’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19일 밝혔다. 무안박씨 희암재사는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의 승장인 무의공(武毅公) 박의장(1555∼1615)을 기리는 분암(墳庵·묘소 주변에 세우는 불교 암자) 형식의 1730년대 건축물이다. 경주부판관이던 무의공은 왜군에게 빼앗겼던 영천성과 경주성을 되찾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문화재청은 “불교식 묘 제사에서 유교식 묘 제사로 넘어가는 시점의 의례복합공간으로 당시 사회의 변화상을 볼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행을 다닐 수 없다니…. 저 원주 소녀 김금원,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이렇게 남장을 한 채 관동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16일 강원 강릉역에서 출발하는 바다열차 안. 한 유랑객이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열차에 올랐다. 강원 원주에서 나고 자란 조선시대 여성 시인 김금원(1817∼?)의 복장을 한 엄미정 해설사였다. 김금원은 ‘산천을 유람하는 여성은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경국대전에 따라 여성에게 여행을 금하던 시대에 살았다. 그는 14세에 남장을 하고 관동팔경(關東八景·강원을 중심으로 동해안에 있는 8개 명승지)과 금강산을 유람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16∼18일 김금원으로 변장한 해설사와 강릉 일대를 여행하는 ‘관동풍류의 길’ 행사를 처음 열었다. 일일 프로그램으로, 사전신청을 받았다. 한 회차당 30명씩, 하루 세 차례 프로그램을 운영해 사흘간 총 270명이 참가했다. 참가비는 없고 바다열차는 문화재재단에서 제공했다. 강릉을 오가는 교통비와 식사비는 각자 부담했다. 강릉역에서 삼척해변역으로 이어지는 동해를 감상하는 ‘바다열차 관동풍류’와 효령대군 11세손 이내번(1703∼1781)이 터를 잡은 300년 고택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선교장 달빛방문’까지 연결되는 코스다. 엄 해설사는 정동진, 묵호항을 지나 열차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를 보며 “고성 청간정과 삼일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울진 망양정, 통천 총석정, 평해 월송정까지, 관동팔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에 동해는 없다. 하지만 바다야말로 관동팔경의 중요한 조연”이라고 강조했다. 김금원은 1851년 펴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동해를 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바다는 끝없이 깊고 넓도다. 비로소 하늘과 땅 사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나니 그 품 안에 모든 것 다 안았구나.’ 오후 7시 반부터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선교장 달빛방문’ 프로그램에서는 박광일 해설사(51)가 선교장 곳곳에 담긴 얘기를 전하고,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관람객을 안내했다. 선교장 여정의 첫 길목, ‘달빛이 내리는 문’이란 뜻의 월하문(月下門) 앞에서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외쳤다. “이보시오. 내 관동팔경을 유람하러 강릉을 찾았소. 이 집이 손님을 대하기가 신선 같다고 하여 내 며칠 지내고자 하오.” 선교장은 유람하던 양반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주던 아량 넓은 고택으로 이름을 떨쳤다. 박 해설사는 선교장 초입에 있는 활래정(活來亭)을 가리키며 “관동팔경을 여행하는 손님들에게 내어주던 이곳 이름은 ‘늘 새 샘물이 솟아올라 맑은 연못’을 뜻한다. 선교장이 손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가옥에서 펼쳐지는 대금산조와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걷다 보니 ‘신선이 머무는 높고 그윽한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고택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올해 시범사업으로 진행한 ‘관동풍류의 길’ 행사는 내년부터 운영기간과 참가 인원을 확대해 운영할 예정이다. 강릉=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행을 다닐 수 없다니…. 저 원주 소녀 김금원,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이렇게 남장을 한 채 관동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16일 오후 2시 반경 강원 강릉역에서 출발해 삼척해변역까지 이어지는 바다열차 안. 한 유랑객이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열차에 올랐다.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나고 자란 조선시대 여성 시인 김금원(1817~?). ‘산천을 유람하는 여성은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경국대전에 따라 여성에게 여행은 그림의 떡이던 시대 남장을 하고 집을 떠나 관동팔경(關東八景·강원을 중심으로 동해안에 위치한 8개 명승지)과 금강산을 유람한 당찬 14세 소녀다. 그는 자신의 여행기를 담아 1851년 펴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처음 여행에 나선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마치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을 나와 끝없는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고, 좋은 말이 굴레와 안장을 벗은 채 천리를 달리는 기분이로다.’ 물론 ‘진짜’ 김금원은 아니다. 이날 열차에 오른 이는 김금원의 복장을 한 엄미정 해설사.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16일부터 18일까지 김금원으로 변장한 해설사와 함께 강원 강릉에서 동해 풍경을 만끽하고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관동풍류의 길’ 행사를 열었다. 강릉역에서 출발해 삼척해변역으로 이어지는 바다 풍경을 감상하는 ‘바다열차 관동풍류’와 만석꾼 이내번(1703~1781)이 터를 잡았던 300년 고택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선교장 달빛방문’으로 관동의 낮과 밤, 바다와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한번에 느낄 수 있다. 이날 엄 해설사는 정동진, 묵호항을 지나 열차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고성 청간정과 삼일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울진 망양정, 통천 총석정, 평해 월송정 등 관동팔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에 동해는 없지만 이 푸른 바다야말로 관동팔경의 보이지 않는 조연”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김금원은 동해를 바라보며 호동서락기에 ‘이 강, 저 강이 동쪽으로 다 흘러들어 바다는 그지없이 깊고 넓도다. 비로소 하늘과 땅 사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나니 그 품 안에 모든 것 다 안았구나’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김금원과 함께 떠나는 관동 여정은 밤에도 이어졌다. 오후 7시 반경 1시간 동안 진행된 ‘선교장 달빛방문’ 프로그램에서는 박광일 해설사(51)가 이야기를 풀어주고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관람객들을 안내했다. 특히 김금원을 연기하는 배우와 동행하는 재미가 있다. 선교장 여정의 첫 길목, ‘달빛이 내리는 문’이란 뜻을 지닌 선교장 월하문(月下門) 앞에서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내 관동팔경을 유람하러 강릉을 찾았소. 이 집이 손님을 대하기가 신선 같다고 하여 내 며칠 지내고자 하오.” 실제 조선시대 선교장은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랑하던 옛 양반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주던 아량 넓은 고택으로 이름을 떨쳤다. 박 해설사는 선교장 초입에 지어진 활래정(活來亭)을 가리키며 “관동팔경을 여행하는 손님들에게 내어주던 이 곳의 이름은 ‘늘 새 샘물이 솟아올라 맑은 연못’을 뜻한다. 선교장이 먼 길을 떠나온 손님을 얼마나 새 샘물처럼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달빛이 내려앉은 선교장의 밤은 ‘신선이 머무는 높고 그윽한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가옥에서 펼쳐지는 대금산조와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옛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박 해설사는 선교장 너머 어둠이 내려앉은 밤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옛 선비들은 따스하게 손님을 품어주는 선교장에 머물며 더 넓은 세상을 유람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길을 열면 저 어둠 너머 14세 소녀 김금원이 꿈꿨던 드넓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겁니다.”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나쁜 놈을 죽일 땐 바보가 돼야 한다.” 미 해군 출신인 마흔네 살 청부살인업자, 빌리 서머스는 그 나름대로 지켜온 신념이 있다. 그간 17번의 암살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그는 언제나 ‘죽여도 되는’ 명분을 찾았다. 대상의 직업이나 나이 등은 다양했지만 모두 똑같은 이유가 있었다. 죽어도 쌀 만큼 나쁜 사람. 그렇게 생각해야 자신도 마음이 편했다. 빌리는 그간 의뢰인들 앞에선 멍청한 척 행세했다. 조지 오웰과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길 정도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지녔지만 그게 훨씬 낫다고 여겼다. 조만간 바보 연기를 관두고 이 업계에서 은퇴하리라 마음먹었을 무렵, 18번째 의뢰가 들어왔다. 암살 대상은 그와 같은 청부살인업자. 당연히 죽어도 되는 인물인 데다 200만 달러라는 거금까지 주어진다. 의뢰를 수락하고 당분간 주변에서 은신한 채 지내야 할 빌리에게 의뢰인 측은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들이 만들어준 가짜 신분은 바로 ‘작가’였다. 스티븐 킹이란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저자가 하드보일드 스릴러로 돌아왔다. 영화 ‘캐리’(1976년) ‘샤이닝’(1980년) ‘미저리’(1990년) 등 걸작 호러 장르의 원작 소설가로도 유명한 그가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초자연적 현상이 주를 이뤘던 전작들과 다르게, 청부살인업도 하나의 직종으로 본다면 빌리 서머스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이다. 마지막 임무 완수를 준비하며 작가로 위장한 빌리. 기왕 하는 김에 그는 자신의 얘기를 한번 써보기로 한다. 그 어떤 초현실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지만, 빌리의 마음속에선 초능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 버렸던,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여동생이 숨을 거뒀던 순간. 이라크전쟁에 파병돼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 영혼 깊이 내재됐던 깊은 상처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깨어난다. 당황스럽지만 빌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 순간 나는 어떤 기분을 느꼈었는지. 임무를 제대로 끝내려면 여전히 어수룩하게 굴어야 했지만, 빌리는 더 이상 이전처럼 행동하기 어렵다. 뭣보다 우연히 은신처 인근 길거리에서 성폭행을 당한 채 쓰러져 있던 앨리스를 마주하며 그의 인생은 돌변한다. 누군가를 보살필 상황이 아니지만, 폭력으로부터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던 과거가 되살아난 그는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결국 집 안에 들인 앨리스는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가 되는데…. 청부살인업자로 살던 빌리에게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겨버리고, 그에겐 더 이어가고 싶은 이야기도 생겨버렸다. 모든 게 기존 계획과는 어긋난 빌리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해 8월 미국에서 책이 출간된 뒤 저자는 현지 인터뷰에서 “빌리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의식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글을 써내려가며 방어기제가 무너져 결국 누군가를 암살하는 자신 역시 나쁜 사람이란 걸 깨닫는 것”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자의식이 과연 그에게 약일까 독일까. 빌리와 앨리스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지에선 영화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2020년)를 연출한 거물 제작자이자 감독인 J J 에이브럼스가 이 소설을 드라마 시리즈로 만드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나쁜 놈을 죽일 땐 바보가 돼야 한다.” 미 해군 출신인 마흔네 살 청부살인업자, 빌리 서머스는 나름 지켜온 신념이 있다. 그간 17번의 암살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그는 언제나 ‘죽여도 되는’ 명분을 찾았다. 대상의 직업이나 나이 등은 다양했지만 언제나 똑같은 이유가 있었다. 죽어도 쌀 만큼 나쁜 사람. 그렇게 생각해야 자신도 마음이 편했다.빌리는 그간 의뢰인들 앞에선 멍청한 척 행세했다. 조지 오웰과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길 정도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지녔지만 그게 훨씬 낫다고 여겼다. 조만간 바보 연기를 관두고 이 업계에서 은퇴하리라 마음먹었을 무렵, 18번째 의뢰가 들어왔다. 암살 대상은 그와 같은 청부살인업자. 당연히 죽어도 되는 인물인데다, 200만 달러라는 거금까지 주어진다. 의뢰를 수락하고 당분간 주변에서 은신한 채 지내야할 빌리에게 의뢰인 측은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들이 만들어준 가짜 신분은 바로 ‘작가’였다.스티븐 킹이란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저자가 하드보일드 스릴러로 돌아왔다. 영화 ‘캐리’(1976년) ‘샤이닝’(1980년) ‘미저리’(1990년) 등 걸작 호러 장르의 원작 소설가로도 유명한 그가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초자연적 현상이 주를 이뤘던 전작들과 다르게, 청부살인업도 하나의 직종으로 본다면 빌리 서머스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이다. 마지막 임무 완수를 준비하며 작가로 위장한 빌리. 기왕 하는 김에 그는 자신의 얘기를 한번 써보기로 한다. 그 어떤 초현실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지만, 빌리의 마음 속에선 초능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여동생이 숨을 거뒀던 순간. 이라크 전쟁에 파병돼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 영혼 깊이 내재됐던 깊은 상처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깨어난다. 당황스럽지만 빌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 순간 나는 어떤 기분을 느꼈었는지.임무를 제대로 끝내려면 여전히 어수룩하게 굴어야 했지만, 빌리는 더 이상 이전처럼 행동하기 어렵다. 뭣보다 우연히 은신처 인근 길거리에서 성폭행을 당한 채 쓰러져있던 앨리스를 마주하며 그의 인생은 돌변한다. 누군가를 보살필 상황이 아니지만, 폭력으로부터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던 과거가 되살아난 그는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결국 집안에 들인 앨리스는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가 되는데…. 살인청부업자로 살던 빌리에게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겨버리고, 그에겐 더 이어가고 싶은 이야기도 생겨버렸다. 모든 게 기존 계획과는 어긋난 빌리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지난해 8월 미국에서 책이 출간된 뒤 저자는 현지 인터뷰에서 빌리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의식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글을 써내려가며 방어기제가 무너져, 결국 누군가를 암살하는 자신 역시 나쁜 사람이란 걸 깨닫는 것”이란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자의식이 과연 그에게 약일까 독일까. 빌리와 앨리스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지에선 영화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2020년)를 연출한 거물 제작자이자 감독인 J. J. 에이브럼스가 이 소설을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기로 결정됐다고 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스승과 제자의 작품은 닮은 듯 달랐다. 이스라엘의 국립 베짤렐예술디자인학교에서 사제로 연을 맺은 현대미술 작가 데이비드 걸스타인(78)과 한국 설치미술 작가 에덴 박(52)의 2인 기획전 ‘커팅 에지(CUTTING-EDGE)’가 14일 서울 광진구 프린트베이커리 워커힐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개막했다. 전시에서는 올해 작품부터 2000년대 대표작까지 총 54점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같은 기법으로 제작된 사제의 작품이 한데 전시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 벽면에 나란히 소개된 걸스타인의 ‘공존’(2014년)과 에덴 박의 ‘혼돈’(2022년)이 대표적이다. 에덴 박이 “스승에게서 ‘컷 아웃’ 기법을 유전자처럼 물려받았다”고 밝히듯 이들의 작품은 외형적으로 닮았다. 종이 위에 그린 드로잉대로 철재나 나무를 오려내 그 위에 형형색색의 패턴을 칠한 뒤 겹겹이 쌓아올린 형태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르다. 걸스타인은 수십 마리의 나비가 뒤엉킨 모습을 겹겹의 철재 위에 그려 조화로운 자연을 형상화했다. 에덴 박은 타원형 패턴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뒤 ‘혼돈’이라고 이름 붙였다. 스승이 나비, 새, 자동차 등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사물과 동물을 주로 다룬다면 제자는 추상적인 감정을 담아낸 것. 에덴 박이 2019년부터 최근까지 선보이고 있는 ‘Secret Prayer’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기저귀 천을 수백 개 조각으로 잘라 염색한 뒤 격자로 된 나무틀에 겹겹의 매듭을 지어 완성한 이 시리즈는 무한히 연결되는 매듭처럼 끝없이 자식을 걱정하며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상징한다. 11월 15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나라 밖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위해 써주시면 좋겠어요.” 지난해 7월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는 신분을 밝히지 않은 남성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문화예술 종사자”라고만 소개한 그는 “한국 바깥에 있는 문화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가 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써 달라”고 했다. 약 3개월 뒤 기부 확약을 맺으며 재단이 알게 된 남성의 본명은 김남준(28). 방탄소년단(BTS)의 리더인 RM(사진)이었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BTS의 RM이 지난해 1억 원을 기부한 데 이어 올해도 ‘해외에 있는 한국 문화재 보존 및 복원에 써 달라’며 추가로 1억 원을 기부했다”고 15일 밝혔다. 지난해는 RM이 기부 사실을 공개하길 바라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재단 측은 “지난해 RM이 기부한 1억 원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활옷’을 보존할 길이 열렸다”고 설명했다. 활옷은 조선 왕실의 공주나 옹주가 가례(嘉禮) 때 입던 궁중 공식 의복이었으나, 점차 민간으로 널리 퍼지며 신부가 혼례 때 입는 예복으로 자리 잡은 전통 옷이다. 현재 조선 활옷은 국내에 30여 점, 국외에 10여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돼 그 가치가 크다. 그중 RM이 복원에 힘을 보탠 LACMA 소장 활옷은 20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은 “이달 말 LACMA에서 해당 활옷을 들여와 보존 처리 작업을 진행한다”며 “예정대로 6개월 작업을 마치면 다시 소장 미술관으로 돌아가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 의복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기부한 1억 원은 “세계에 한국 회화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다”던 RM의 바람대로 사용된다. 문화재청과 재단은 해외에 소개하는 한국 회화 도록을 제작하는 데 기부금을 쓸 계획이다. RM은 2020년부터 매년 자신의 생일(9월 12일)에 맞춰 9월에 문화 예술 분야에 1억 원씩을 기부해왔다. 2020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단에 기부했다. 미술관 측은 “미술관에 접근하기 어려운 소외계층 아이들을 위한 도록을 만들어 달라는 RM의 뜻을 존중해 근현대 한국 작가의 작품을 담은 도록을 제작해 전국 도서관 등에 전달했다”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남미 국가 수리남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수리남’으로 인해 마약 국가로 비친다며 제작사인 넷플릭스에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14일 수리남헤럴드에 따르면 알베르트 람딘 수리남 외교·국제협력장관은 12일(현지 시간) 기자회견에서 “수리남은 수년간 마약 운송 국가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이젠 아니다.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넷플릭스의 ‘수리남’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이 됐다”고 주장했다. 넷플릭스를 상대로 법적 조치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넷플릭스는 “별도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 수리남을 겸임하고 있는 주베네수엘라 한국대사관은 13일 ‘수리남 한인 사회 대상 안전공지’를 통해 “드라마 여파로 많이 곤혹스러울 것”이라며 “안전에 주의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즉시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중국이 한중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행사에서 한국 고대사를 소개하며 고구려와 발해를 삭제한 것으로 드러나 한국이 즉각적인 수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중국 정부는 오히려 “고구려 문제는 토론이 가능한 학술 문제”라고 맞받았다. 양국 우호협력을 증진하자는 행사에서 중국이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한중 간 외교 갈등으로 비화될 조짐이다. 베이징 중국 국가박물관은 한중 수교 30주년, 중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7월부터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展)’을 열고 있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전시회에 한국 고대사 연표와 여러 유물을 제공했다. 문제는 13일 현재 전시장에 게시된 ‘한국고대역사연표’에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건국·멸망 연도를 표기하면서 고구려와 발해를 아예 뺐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연표 하단부에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했다’고 표기했다. 한국이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로 인정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다. 중앙박물관 측은 이날 “중국 측에 제공한 연표에 고구려와 발해 건국 연도가 포함돼 있었다. 중국 측이 임의로 편집했다”며 “즉각 수정과 함께 사과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통상 전시 때 제공 기관의 자료를 성실히 반영하는 것이 국제적 관례”라고 비판했다. 한국 외교부는 “역사 문제는 우리 정체성과 관련된 사안인 만큼 역사 왜곡 동향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는 브리핑에서 “고구려 문제는 학술 문제”라며 “학술 영역에서 전문적인 토론과 소통을 할 수 있으며 정치 이슈화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베이징=김기용 특파원 kky@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경북 경주 불국사 대웅전, 충남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등 고건물의 단청을 칠하는 데 쓰였던 전통 안료 ‘동록(銅綠·동으로 만든 녹색안료)’은 연잎처럼 짙은 녹색을 띠어 하엽(荷葉·연꽃의 잎)이라 불렸다. 하지만 19세기 말 근대로 접어들면서 잃어버린 색이 되고 말았다. 화학 안료 시장이 커지면서 비싸고 오랜 공정 과정을 거치는 전통 안료는 전수의 맥이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동록은 한중일 전통 안료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에서조차 복원하지 못한 ‘미지의 색’으로 남았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동록을 지난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이 복원해냈다. 2019년부터 한중일 고문헌을 토대로 제조법을 찾아내 전통 안료 강국인 일본과 중국보다 먼저 동록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것. 7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원 복원기술연구실에서 만난 이선명 학예연구사(40)는 “한중일 고문헌에 단 두 줄로 설명된 동록의 제조법을 알아내기까지 4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말하며 웃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동록 제조법은 659년 당나라 의학서인 ‘신수본초(新修本草)’에 나오는 “동 분말과 광명염(光明鹽·염화나트륨), 요사(B砂·염화암모늄) 등을 이용해 제조한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옛 선조들은 녹슬어 부식된 동 그릇 표면이 녹색을 띤다는 데서 착안해 동이 부식됐을 때 나오는 물질을 이용해 녹색 안료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문헌 속에는 재료에 대한 힌트만 나와 있을 뿐 정확한 성분 비율이 전해지지 않아 제조법은 미궁 속에 있었다. 복원기술연구실 소속 강영석 연구원(44)은 “수수께끼를 풀듯 원료인 구리와 부식제인 염화나트륨과 염화암모늄의 비율을 조금씩 조정하며 수백 번이 넘는 실험 과정을 거쳤다”며 “2년간의 실험 끝에 동 분말과 부식제의 비율이 1 대 2일 때 가장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록을 갈아 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무 표면에 채색해 보니 고르게 발리지 않았다. 게다가 빛에 노출될 경우 3년 안에 녹색이 어둡게 변색될 거라는 예측 결과도 나왔다. “‘아, 이제 됐다’고 끝내려는데 다시 난관에 봉착한 거예요. 알고 보니 동록 속에 남아 있는 염 성분 때문에 변색된 거였죠. 동록에서 염 성분을 완전히 제거하기까지 6개월이 더 걸렸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는 끝이 없다는 걸 말이죠.”(강 연구원) 어렵사리 얻어낸 동록의 빛깔은 화학 안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 학예연구사는 “천연안료로 색칠한 표면은 알갱이가 살아 있는 듯 입체적으로 느껴진 반면 화학 안료가 칠해진 표면은 평면적이었다. 이게 바로 전통 안료를 복원하는 이유”라며 웃었다. 옛 단청을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복원할 길도 열렸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전통고건축문화재 44곳에서 녹색 안료로 칠해진 668곳의 성분 분석을 실시한 결과 226곳에 동록이 쓰인 것으로 확인됐다. 갈아 만든 천연 녹색 안료 ‘석록(石綠)’이나 ‘뇌록(磊綠)’보다도 동록의 사용 비중이 더 높은 셈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은 앞으로 단청을 칠하는 장인에게 동록이 가진 특성을 전수해 전통 안료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계획이다. “우리는 시간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하나의 전통 안료가 복원되고 세상에 쓰이기까지 10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 몰라요. 구닥다리 같아 보여도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에는 원칙을 지켜야죠.”(이 학예연구사) 대전=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