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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인명진 목사는 나이브하다. 친박(親朴) 핵심 몇 명만 후퇴시키면 새누리당이 깨끗해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깨끗하게 보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새누리당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 목사만 나이브한 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진짜 보수’로 차별화하고 싶어 안달이 난 바른정당도 그렇다. 이들은 박 대통령을 탄핵하고 김기춘과 우병우를 잡아넣고 새누리당과 결별하면 새 보수의 기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착각이다. 보수는 그런 과정에서 결정적인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 최근 안희정이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을 협상 대상으로 삼는 ‘대(大)연정’론을 들고나오자 바로 문재인은 새누리당이나 바른정당은 청산 대상이라고 못 박았다. 안희정이나 문재인의 인식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새누리당이나 바른정당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한쪽은 그럼에도 두 당을 다 협상 대상으로, 다른 한쪽은 그렇기 때문에 두 당을 다 청산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새누리당과 다르다는 자기 인식은 바른정당의 착각일 뿐이다. 바른정당이 새누리당을 향해 ‘너희는 청산 대상이야’라고 할 때 뒤에서 문재인은 바른정당을 향해 ‘너희는 뭐가 다른데’라고 묻고 있다. 못난이 형제의 한쪽이 다른 한쪽을 향해 ‘너 참 못났다’라고 하는데 제3자가 보면 둘 다 못난이다. 자기 집안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남의 집안에게 존중받겠다는 생각이야말로 어리석다. 문재인은 이미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뒤에 “국민이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라 정권을 탄핵했다”며 ‘대(大)청소’론을 들고나왔다. 인명진이나 바른정당은 자신도 모르게 그 프레임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러나 탄핵은 그 제도의 본질에 있어서 비리에 연루된 대통령 개인을 중심으로 한 탄핵이지 정권에 대한 탄핵이 아니다. 박 대통령의 정책 추진은 권위적이었다. 정치적 포용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권위적인 정책이나 포용력 없는 정치를 도운 사람을 청산 대상, 심지어 부역자라고 부르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들이 다 최순실의 남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도 박근혜와 최순실의 비밀스러운 관계의 피해자인 측면이 있다. 가학증(加虐症)과 피학증(被虐症)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른정당의 자기편을 향한 과도한 가학은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피학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런 가학-피학증은 콤플렉스에서 온다. 군사정권 시절 집권당 의원이나 사학재벌이나 기업가나 언론사주로 잘나가던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아버지 덕분에 정치의 길에 성공적으로 들어섰으나 아버지 편이 받는 비난은 받기 싫고 반대편으로부터도 평가받고 싶다는 분에 넘치는 욕심이 자신에게는 피학으로, 자기편에게는 가학으로 표출된다. 차라리 제3지대로 가라. 솔직히 제3지대를 표방하고 나오는 사람들은 매력적인 면이 있다. 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과오는 단호히 바로잡아야 한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보수라고 말할 수 없다. 대통령 측근에 대한 구속도 필요하면 해야 한다. 다만 그 이유가 타당해야 한다. 최순실 국정 농단과 관련도 없고,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처럼 취업을 제한하는 것도 아닌, 지원금을 배제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로 김기춘 등 고위관료 5명을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구속한 것은 지나치다.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헌법 위반이라면 처벌할 법률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잘못된 지원금 배제는 행정적으로 취소할 사안이지 인신을 구속할 사안은 아니니까 직접적으로 처벌할 법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금 법을 만드느니 어쩌니 한다. 처벌할 법률이 없으니까 기업의 배임죄처럼 공무원에게 걸면 걸리는 직권남용죄를 적용한 것이다. 바른정당은 보수 개혁을 한다고 여겼는지 몰라도 그들이 실제 한 것은 보수의 자폭이었다. 반기문 낙마 이후 유의미한 지지율을 가진 보수 대선 주자는 나타나지 않고 결국 야야(野野) 대결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그나마 문재인 안희정을 바짝 쫓고 있는 보수 후보는 새누리당 쪽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사실이 아이로니컬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국 정치사상가 로크는 ‘통치론’에서 국가 기능을 입법권 집행권 연합권으로 나눈다. 삼권(三權) 중 사법권이 없고, 연합권이 따로 있다는 점이 생소하다. 연합권은 전쟁과 동맹, 즉 외교에 관한 권한이다. 외교가 중요하기 때문에 따로 분류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리슐리외,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각각 자기 시대 최고의 정치인이자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최고의 외교관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최고의 외교관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헨리 키신저는 영원한 외교관으로 불린다. 키신저가 미국 정치에 뛰어든 적은 없지만 뛰어들었다고 해서 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키신저는 귀곡자의 책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귀곡자의 제자인 소진과 장의는 춘추전국시대 합종연횡의 현란한 외교를 펼쳤다. 소진과 장의도 통치자를 위해 봉사하는 외교 책사였을 뿐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전형적인 외교관이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에서 쭉 공직을 하고 외교부 장관에 올라 유엔 사무총장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교부 장관을 주로 외교관 출신이 하지만 서구 선진국에서는 대통령이나 총리에 이은 2인자 정치인이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외교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외교를 잘 안다고 정치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반 전 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다음 날 “정치는 배타적이면 안 되고 모든 국민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외교관 출신으로 처음 대권에 도전했다가 좌절한 사람의 회포를 그렇게 표현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독일 사회철학자 베버는 “정치란 열정(Leidenschaft)을 가지고 단단한 판자에 강하게 조금씩 구멍을 뚫어가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열정이란 말에는 고통(Leiden)이란 단어가 들어있다. 반 전 총장은 고통 없이 꽃가마 타고 대통령이 되려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바로 내려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도 보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제 국가 중에서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나라는 드물다. 대통령제는 주로 미국과 중남미 국가의 제도다. 거기서 탄핵은 의회가 맡는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헌재가 탄핵을 맡지만 의원내각제 국가다. 그 나라들의 실권자는 대통령이 아니라 총리로, 총리 경질은 사법적 탄핵이 아니라 정치적 불신임을 통해 이뤄진다. 헌재는 정치적 사법기관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말은 정치적으로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치적 사안을 대상으로 한다는 뜻이다. 헌법재판관에 법률 전문가를 임명하지 정치 전문가를 임명하지 않는다. 사법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면 굳이 법률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기관인 의회가 탄핵하는 미국의 경우 탄핵심판장은 연방대법원장이 맡고 탄핵 사유는 ‘반역죄 수뢰죄 또는 그 밖의 중대한 범죄와 비행’이라고 못 박고 있다. 정치기관이 탄핵을 맡는 만큼 탄핵 사유만은 형법적으로 규정해 사법적 심판이 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정치적 불신임을 하듯 정치적으로 대통령을 탄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대통령이 실권자인데도 헌법상 탄핵 사유인 ‘헌법과 법률을 위반할 때’는 독일 기본법을 베꼈다. 헌법 기안자들은 한국 대통령은 의회에서 간접 선출하는, 실권도 없는 독일 대통령과 다르다는 사실까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결국 문제가 생겼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때 헌재는 ‘법률 위반’이 아니라 ‘중대한 법률 위반’이 탄핵 사유가 된다고 결정해버렸다. 한 대법관은 ‘중대한’이라는 수식을 제멋대로 집어넣은 헌법 개정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비판도 틀리진 않았지만 헌재도 어쩔 수 없었다. 독일 대통령은 경미한 법률 위반으로 탄핵해도 별 문제가 없지만 우리나라처럼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을 그런 정도의 법률 위반으로 탄핵할 수는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는 ‘헌법 위반’이 관건이다. 국회는 헌법 위반을 앞세워 탄핵소추했다. 그리고 법률 위반으로 가장 중대한 뇌물죄의 성립이 불투명해지자 애초에 법률 위반이라고 했던 것까지 다 예비로 돌리고 헌법 위반으로 고치겠다고 한다. 우리나라 헌법에 대통령은 국회해산권이 없다. 그런데도 국회를 해산하려 한다면 분명 헌법 위반으로 탄핵 사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여성 법학자 유타 림바흐가 저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 썼듯이 헌법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직접 적용 가능한 규정이 아니다. 헌법은 해석의 여지가 많은 개방적 규범이다. 그래서 위헌 시비는 숱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위헌이라 하더라도 다 처벌 가능한 위헌이 아니다. 어떤 행정조치가 헌법소원을 통해 헌재에서 위헌으로 결정돼도 그 조치가 취소될 뿐 조치를 취한 공무원이 처벌받지는 않는다. 처벌을 해서라도 지켜야 할 헌법의 가치는 대개 법률로 구현돼 있다. 법률 위반이 되지 않는 헌법 위반은 탄핵할 정도로 중대한지 일단 의심해 봐야 한다. 막연히 헌법 위반으로 대통령을 탄핵하면 대통령은 국회에서 지지 기반을 잃는 순간 탄핵될 위기에 처한다. 헌법에 탄핵 사유로 나와 있는 헌법 위반이 탄핵 사유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헌법 위반은 최소화해서 적용해야지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적용하면 사법적 탄핵이 정치적 불신임처럼 변질될 수 있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 헌법 위반으로 탄핵됐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 같은 찌라시에 연루돼 언론의 자유 위반으로 탄핵된다면 세계가 부러워할까 비웃을까. 대통령이 비선(秘線)에 집착한 것은 한심하지만 대통령이 결정권을 행사한 이상 국민주권 위반인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세월호 7시간은 그런 억지를 진지하게 다뤄주는 헌재가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헌재는 대통령의 강요죄 등 법률 위반 혐의를 검토하기에도 벅차다. 탄핵심판에 형사소송절차를 준용하라는 법조문이 있어서가 아니라 법관의 입장에 서서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결정의 근거들이 법원에서 ‘탄핵’될 수 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아니라 소명 부족으로 기각된 사실이 그런 위험을 보여준다. 헌재도 역사에서는 최종심이 아니다. 대통령을 탄핵하더라도 ‘인민탄핵’했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더불어민주당 초·재선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와 그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가 5급 공채시험인 행정고시를 없애고 7급 공채시험과 합치는 개편안을 19일 제안한 뒤 행정고시 수험생들이 발끈하고 있다. 더미래연구소의 제안은 물론 민주당의 당론은 아니다. 그러나 행시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우리도 사법시험 준비생들 같은 처지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합격자 비율이 가장 높은 서울대에는 행시 폐지를 반대하는 대자보까지 붙었다. ▷더미래연구소의 최지민 선임연구원은 개편 이유로 “7급, 9급 공무원 합격자 대부분이 대학 졸업자인 만큼 행시 합격자와의 능력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을 들었다. 7급은 말할 것도 없고 9급만 하더라도 ‘9급=고졸’ 등식이 깨진 지 오래다. 9급도 국가직 지방직 할 것 없이 거의 다 대졸이다. 다만 같은 대졸이더라도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 대학 사이에 주로 준비하고 합격하는 공무원 채용시험이 달라 대졸이라는 공통분모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프랑스에서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공무원은 주로 국립행정학교(ENA) 출신이다. ENA 같은 학교를 그랑제콜이라 한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이 프랑스처럼 전국 국공립대학을 통합하자는 제안을 했다. 프랑스가 대학을 통합해 파리1대학, 2대학 식으로 평준화한 이후 우수한 고교 졸업생은 대학을 가지 않고 2년을 더 공부해 그랑제콜을 간다. 기업만 해도 간부직 사원은 대부분 경영 관련 그랑제콜 출신이다.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하위직 공무원이나 기업 평사원이 된다. ▷공직을 민간에 개방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그러나 민간 개방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고위직의 책임 의식이다. 프랑스 공직이든 기업이든 간부는 스스로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나와 일한다. 그래서 프랑스가 굴러간다. 요즘 한국 군대에 장교도 사병도 다 대졸이다. 그렇다고 사병 중에서 장교를 뽑지는 않는다. 간부가 되는 별도의 길을 없애려면 간부의 책임의식을 확보할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보고 제안을 해도 해야 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주장이 공분을 자아낸 것은 군이 시민을 향해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을 쐈다고 봤기 때문이다. 1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탄흔 감식 결과 탄흔은 5.56mm 정도 구경의 총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과수는 M-16 소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18 당시 사용된 UH-1 기종과 500MD 기종의 헬기에는 7.62mm 구경 이상의 기관총이 장착돼 있다. 헬기에서 기관총이 아니라 소총을 쐈다고 하면 본래 문제가 된 이유와는 거리가 좀 멀어진다. ▷검찰은 1995년 5·18 수사 당시 헬기 기총 사격의 목격자라는 조비오 신부와 아널드 피터슨 선교사를 소환해 조사했다. 그러나 조 신부가 피해자로 지목한 홍란 씨는 건물 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해 다친 것으로, 또 다른 피해자인 심동선 씨는 검시조서를 확인한 결과 M-16 소총에 의한 관통상으로 판명됐다. 피터슨 선교사가 찍은 헬기 아래쪽 불빛 사진은 기관총 사격 불빛이 아니라 충돌방지등 불빛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헬기 기총 사격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국과수는 전일빌딩 10층 사무실과 외벽에서 발견된 탄흔은 총탄 흔적 각도가 수평에 가까운 점, 1980년 당시 주변에 고층 건물이 없었던 점 등을 근거로 헬기에서 사격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요동이 심한 헬기에서는 호버링(공중정지) 상태라 해도 소총으로는 목표를 맞히기 어렵다. 헬기에 기관총이 거치돼 있는데 쏠 생각이라면 기관총이 아니라 소총을 쏜다는 것도 어색하다. ▷물론 소총이라고 해도 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쏜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아 보면 헬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대항군의 헬기가 한 대 뜨면 ‘땅개(보병)’는 어디 숨을 데가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계엄군이 고층에서 저항하는 시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헬기를 띄우고, 만약 공중에 무방비로 노출된 길바닥 시민을 향해서도 총을 쐈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인륜적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처음 설치된 것은 2011년 12월 14일이다. 소녀상이 설치된 도로(인도 포함)는 국가나 광역시가 아니라 구 관할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설치를 허가했다. 본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비석 같은 형태를 구상했으나 그는 예술 작품으로 하면 법적인 문제를 피할 수 있다며 소녀상을 제안했다고 한다. 일개 구청장이 트집 잡힐 일을 해서 한일 관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걸 보고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비슷한 일이 부산이나 제주의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벌어질 때를 대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한국 정부가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거쳐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기로 한다”는 내용을 집어넣었다. 서울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새로 소녀상이 설치됐다.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도 소녀상이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은 예측가능한 일이었다. 지난해 3월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광장에 소녀상이 처음 세워졌다. 당시도 시민단체들이 그 소녀상을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하겠다고 해서 부산시가 간신히 달래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겼다. 지난해 12월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하려는 시도가 다시 있었다. 부산시가 인근 정발장군공원 쪽으로 설치를 유도하던 중에 시민단체들이 기습적으로 설치했다. 공원은 부산시 관할이지만 일본총영사관 앞 도로는 동구 관할이다. 소녀상 설치 허가권은 박삼석 동구청장이 갖고 있다. 새누리당 소속의 그는 기습적으로 설치된 소녀상을 강제 철거했다가 이틀 만에 허용으로 급선회했다. 그는 “극심한 비난여론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항의 전화가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부산 지역 언론들이 한일 관계에는 아랑곳없이 무책임하게 동구를 비난하고 나서자 언론에 민감한 박 구청장이 굴복한 것이라고 사정을 잘 아는 부산시 고위 관계자는 전했다. 일본총영사관 앞에 소녀상 설치를 주도한 당사자들조차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1주년을 맞아 행위예술의 차원에서 설치를 시도한 것인데 정말 설치되는 것을 보고 놀랐을 것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는 부산시나 동구에 전화로 사정이나 알아보려 했지 근거가 남는 어떤 협조 요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능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데는 발 빠른 정부다. 서울 일본대사관 소녀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한일 위안부 합의상의 조항은 단지 노력한다는 것이지 철거를 약속한 것은 아니라는 우리 정부의 해석을 따르고 싶다. 그러나 그 조항은 최소한 같은 사안으로 갈등이 확산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국가, 광역단체, 기초단체로 나눠 관할하는 도로 관리의 대(大)원칙을 고칠 수 없었다면 아예 그런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중앙정부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한 셈이다. 그런 약속 없이 위안부 합의가 불가능했다면 아예 합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상황을 관리하지 못한 궁극적 책임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있다. 신문사에 앉아서도 부산에서 소녀상 설치와 강제 철거 소식이 들려왔을 때 심상치 않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단순히 총리였다고 하더라도 꼼꼼히 챙겼어야 할 사안이다. 설치 허가권이 중앙정부가 아니라 부산 동구에 있지만 재설치까지 이틀간의 여유가 있었고 동구청장이 집권여당 소속이니까 어떻게든 설득하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황 권한대행의 자기 인식에 큰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 고건 권한대행은 곧 돌아올 대통령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소극적인 국정운영이 타당했지만 황 권한대행은 사실상 정권교체기를 맡고 있고 기간도 상대적으로 길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흔들기도 우려스럽지만 공정한 대선 관리도 해야 한다. 부산 소녀상 설치는 현상 유지도 하지 못한 것이다. 대통령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갖고 국정을 운영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현상 유지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레온 트로츠키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트로츠키의 집 주위에는 이중 콘크리트 벽이 설치돼 있었고 총을 든 지지자들이 24시간 경계를 했다. 스탈린은 몇 차례 트로츠키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한 스탈린주의자가 백만장자의 아들 행세를 하며 트로츠키 여비서의 여동생에게 접근한 뒤 트로츠키의 ‘요새’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1940년 8월 트로츠키는 서재에 있다 그의 등산용 손도끼에 맞아 사망했다. ▷김옥균은 1884년 조선 명성황후 정권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다. 명성황후 정권은 몇 차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하려 했다. 김옥균은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다 1894년 중국 청나라 이홍장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해 12월 조선 자객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그는 프랑스 요리 솜씨로 김옥균의 환심을 산 뒤 그를 권총으로 쏴 죽였다. ▷북한에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지내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씨는 북한 정권에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2010년 4월 황 씨를 살해할 목적으로 남파된 북한군 소좌 김명호와 동명관이 검거됐다. 두 사람은 한 해 전 탈북자로 위장해 국내에 들어왔으나 정보기관의 감시로 암살 실행 전에 발각됐다. 2010년 10월 사망한 황 씨는 생전에 경찰의 보호하에 방탄유리를 한 집에 살았고 침대 머리맡에 늘 30cm 길이의 칼을 놓고 잤다고 한다. ▷북한 주영국 공사를 지내다 올 7월 망명한 태영호 씨는 황 씨 이후 최고위급 탈북 인사다. 그는 19일 국회 정보위에 출석해 신변 위협을 감수하더라도 공개 활동을 하겠다고 밝힌 뒤 그제 정부서울청사에서 통일부 출입기자단과 기자회견을 했다. 태 씨는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 암살된 거 다 안다”면서 “통일이라는 건 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 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생명의 위협이 평생 따라다닐 것을 생각하면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앨릭스 존스는 ‘뉴스의 상실(Losing the News)’이란 책에서 정보의 ‘강철 코어(iron core)’가 사라지면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저자는 현재 미국 하버드대 언론 관련 연구소인 쇼렌스타인센터 소장으로 있다. 정보의 강철 코어는 팩트에 기반을 둔 뉴스를 말한다. 이런 뉴스에 근거해 신문의 논평이 이뤄지고, 시사 프로그램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담론이 펼쳐지며, 식사 자리에서 대화가 오간다. 나로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정보의 강철 코어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다. 국회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장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과 최 씨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가 향우회에서 만나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이 위증교사 의혹의 증거로 거의 모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디지털 사진 시대에 촬영 시점이 없는 사진에 의심을 갖는 데 기자의 감각까지 필요하지도 않다. 신문에 난 사진을 자세히 보니 몇몇 참석자는 여름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사진은 최 씨 사건이 터지기도 훨씬 전에 찍혔다. 이런 사진을 믿고, 아니 믿는 척하고 일부 신문에서는 심각한 논평을 냈고 시사 프로그램의 패널들은 흥분해 떠들었다. 네이버와 다음은 이런 뉴스일수록 더 많이 더 오래 포털에 띄운다. 이렇게 잘못된 여론이 형성된다. 그런 여론에 비위를 맞추려고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의원이 국정조사 위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최 씨 아들은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아니 아들 자체가 없다. ‘길라임’이라는 가명은 박 대통령이 아니라 차움병원의 한 직원이 임의로 만든 것이다. ‘통일 대박’은 최 씨가 만든 말이 아니라 신창민 교수의 책 ‘통일은 대박이다’에서 나왔다. 최 씨의 언니 순득 씨는 박 대통령의 성심여고 동창이 아니다. 포털은 찌라시를 닮아가고 언론은 그런 포털을 닮아가고 있다. 명백한 오보들만으로도 신문 지면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다. 나는 현장을 취재할 수 없어서 국정조사 청문회만은 빼놓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최근 언론 보도 중 믿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직접 당사자들의 말을 듣고 싶었다. 당사자들이 거짓말도 하겠지만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표현이나 표정에서 뭔가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청문회를 다룬 뉴스의 내용이 내가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기자는 취재할 때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기사는 가설이 아니라 사실을 써야 한다. 정윤회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전 경정은 비선 실세를 느꼈다. 그 문건이 폭로됐을 때 비선 실세에 주의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왜 최순실이 아니라 정윤회를 중심에 놓고 문건을 만들었을까.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정윤회가 최순실에 이은 권력서열 2위인지도 의문이다. 그는 최순실 게이트에서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언젠가 정윤회가 등장할 것이라고? 그래 기다려 보자. 그러나 첩보 보고가 아니라 기사라면 그때나 가서 써야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도청 현장팀에서 중간 관리자를 거쳐 백악관 참모와 대통령에게로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최 씨의 국정 농단은 박 대통령과 최 씨의 직접적이고 비밀스러운 관계로 출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공식 라인에서 중간 단계의 조력자가 꼭 필요한 구조가 아니다. 그런데도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최 씨와 잘 알았을 것이라는 가설에 매달린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일부는 우 전 수석 처가와 넥슨의 부동산 거래를 다룬 의혹 기사 이후 이를 어떻게든 합리화해 보려는 바이어스(bias)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밝혀내고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를 이끈 것은 언론의 개가(凱歌)다. 그러나 대통령 관련 보도에 대한 견제가 한번 무너지자 언론은 가장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돌변해 이 나라를 ‘아니면 말고’ 뉴스 공화국으로 만들어버렸다. 탄핵 정국에서만의 일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계속된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인에게 올해 크리스마스는 좀 특별하다. 크리스마스 인사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지지한 도널드 트럼프가 해피 홀리데이스(Happy Holidays) 편에 선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당선됐기 때문이다. 해피 홀리데이스는 의도는 좋으나 너무 작위적이다. 유럽은 미국보다 더 무신론적이지만 크리스마스 인사를 갖고 논란을 삼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주아이외 노엘(Joyeux No¨el)이고, 스페인에서는 펠리스 나비다드(Feliz Navidad), 독일에서는 프로헤 바이나흐텐(Frohe Weihnachten)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공식적으로 성탄절이라 칭하고 ‘즐거운 성탄’이나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한다. 최근 발표된 10년 만의 인구통계에서 아무런 종교도 없는 사람이 56.1%로 국민의 절반을 훨씬 넘지만 크리스마스 인사가 문제된 적은 없다. 서양과 달리 크리스마스가 신년까지 이어져 한 해를 마감하는 긴 명절도 아닌 데다 성탄절과 부처님오신날이 공평하게 휴일로 지정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성탄절은 경기도 좋지 않은 데다 정국이 뒤숭숭해서인지 분위기가 영 나지 않는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은 20일까지만 해도 온도가 23.5도(844억 원)로 지난해 같은 시기의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기업들의 기부로 22일 41.7도(1495억 원)까지 올라갔으나 여전히 예년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사랑의 온도도 케인스 식으로 부양해야 할 것 같다. 어려운 이웃까지 모두가 즐거운 성탄이 되려면 좀 더 노력해서 나누는 자세가 필요하다. ▷올해는 하필 성탄 전야가 주말이다. 오늘 ‘하야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촛불집회가 열린다고 한다. 가수들이 출연해 캐럴을 부르는 축제로 진행한다지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성탄 전야에 그 집 100m 앞에 몰려가 물러나라고 외치는 게 성탄의 정신에 맞는지 모르겠다.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다. 적이 괴로우면 내가 즐겁다는 말이지만 그것이 정의의 즐거움일지 몰라도 성탄의 즐거움은 아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가 3년 남은 전효숙 헌법재판관을 사직하게 한 뒤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하는 절차를 밟았다. 사법시험 동기인 그에게 새로 임기 6년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소장을 외부에서 데려와 재판관과 동시에 소장으로 임명하면 모르되 재판관을 사직하게 한 뒤 소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소장은 헌법재판관 중에서 임명한다’는 헌법 조항을 어기는 꼼수였다. 결국 노 대통령은 103일 만에 지명을 철회했다. ▷박한철 현 소장은 헌법재판관 재직 중 소장으로 지명됐다. 헌법에는 헌법재판관의 임기만 있을 뿐 소장의 임기는 따로 없다. 그래서 박 소장은 소장 재임 기간까지 포함해 헌법재판관 6년 임기를 채우는 내년 1월 말 임기가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소장이 된 2013년 4월 임기가 새로 시작됐다고 봐서 2019년 4월 끝나는 것인지 논란이 됐다. 지명 당시 박 소장은 내년 1월 말 퇴임하겠다고 밝혀 스스로 논란을 정리했다. ▷21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박 소장의 임기가 또 논란이 됐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이“내년 1월 말 박 소장 임기가 끝나는데 후임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질의하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본인이 임박해서 다시 의사 표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황 권한대행과 박 소장은 사법시험 동기다. 그러나 법적 논리를 떠나 대통령 탄핵을 눈앞에 두고 박 소장이 2019년까지 자리를 계속 맡겠다고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제 박 소장은 내년 1월 말 퇴임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논란을 일축했다. ▷야권은 황 권한대행이 새 소장을 지명하는 데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내년 1월 말까지 새 소장이 나오지 않으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은 소장 없이 8인의 헌법재판관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소장이라고 해봐야 결정에서는 9분의 1의 권한을 갖는 재판관 중 한 명에 불과하지만 탄핵은 6명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통계적으로는 재판관 수가 줄어들수록 탄핵이 인용될 확률은 낮아진다. 야권으로서도 골치 아픈 문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과학서적은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프린키피아’의 1687년 첫 번째 유럽판이 370만 달러(약 44억 원)에 낙찰됐다. 제임스 2세에게 헌정된 영국판이 2013년 250만 달러(약 30억 원)에 낙찰돼 최고가를 기록했는데 이번에 다시 최고가를 경신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한 이 책은 1859년 나온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함께 서적으로 출간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로 꼽힌다. ▷미국에서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이 1978년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과학책으로는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이어서 화제가 됐다. 이듬해인 1979년 최재천 교수의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가 과학책으로 연달아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세이건은 다시 이듬해인 1980년 ‘코스모스’라는 TV 프로그램을 13부작으로 제작하고 이를 책으로 출간했다. ▷대중적 과학의 시대는 사실 영국에서 먼저 열렸다. 리처드 도킨스는 1976년 ‘코스모스’에 필적하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기적 유전자’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이타적인 행위조차도 이기적 유전자가 자연선택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냉혹한’ 설명을 한다. 나는 유럽특파원으로 있을 때 2010년 신년 인터뷰를 위해 그와 국제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는데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기회를 얻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근 도킨스의 자서전 2권이 번역 출간됐다. 영어로는 지난해 완간됐지만 우리로서는 ‘이기적 유전자’ 출간 40주년에 맞춰 나온 셈이다. 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 속 인물이 길쭉한 것은 화가의 시력 이상 때문일까. 도킨스가 교수로 있던 옥스퍼드대에서 학생들의 과학적 추리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거론되는 질문이다. 대답은 ‘아니다’다. 인물을 길쭉하게 보는 시력 이상이 있다면 화가는 그림 속 인물을 오히려 납작하게 그려야 한다. 과학은 학문으로만이 아니라 과학자의 삶을 통해서도 배울 게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아시아 국가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나 여성 총리는 대부분 권력자였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이나 총리가 됐다. 인도의 인디라 간디 전 총리,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대통령, 미얀마의 실권자 아웅산 수지, 방글라데시의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그렇다. 반면 서양에서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인 마거릿 대처나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은 이런 식의 배경이 없다. 2012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당선된 것은 여성의 유리천장 깨기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한국이 상당히 민주화가 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민주주의의 수입국인 아시아 국가들의 낙후된 정서를 알게 모르게 공유했음을 의미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기업에서 돈을 거두고 기업에 민원을 하는 것쯤은 영애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보던, 별거 아닌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는 권력자의 딸이었다. 박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대통령의 2선 후퇴’와 ‘즉각 하야’를 놓고 빚어진 혼란 역시 아시아적 정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법 혐의를 받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미국만이 아니라 브라질처럼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까지도 탄핵으로 퇴출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만 처음에는 야당이, 나중에는 여당이 나서 ‘대통령 2선 후퇴’라는, 헌법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길을 모색하다 결국 항거할 수 없는 헌법의 힘에 의해 탄핵의 길로 이끌려 갔다. 몇몇 원로들은 박 대통령이 마지막 애국심을 발휘해 즉각 하야해야 한다는 자못 도덕적인 호소를 했지만 대통령의 즉각 하야는 한다고 해도 말려야 할 일이다. 미국과 브라질 같은 나라는 대통령 궐위(闕位) 시 부통령이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채운다. 이런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즉각 하야한다고 해서 정치 일정에 아무런 혼선이 없다. 그러나 부통령이 없는 우리 정치 체제에서 대통령이 탄핵심판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의도야 무엇이든 그나마 혼선을 줄이는 길이다. 대통령 탄핵이란 위법에 오염(汚染)된 대통령을 집어내 제거하는 것이지 정권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부통령이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채우건 권한대행이 임시로 대신하건 정권 심판은 선거 때까지 연기된다. 박 대통령을 끌어내렸으니 황교안 국무총리도 끌어내리자는 소리나, 국무회의장에 들어가 “왜 당신들은 누구 하나 사퇴하지 않느냐”고 따진 박원순 서울시장의 행동은 탄핵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내는 아시아적인 현상이다. 황 대통령 권한대행은 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처럼, 장관들은 더 장관답게 행동하는 것이 대통령 없는 국가를 지키는 방법이다. 최순실의 비선 활동은 청와대 참모들도 다 알고 친박계 의원들도 다 알았으니 동반 책임을 지라는 것도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비서실장에게조차 최순실에 대해 솔직한 얘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원종 전 비서실장이 “최순실이 청와대를 들락날락한다는 것은 중세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국회에서 답변했을 때 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얘기를 듣고 있었을까. 김기춘 전 비서실장도 기껏해야 희미하게밖에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무섭다면 그런 게 무서운 진실이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은 탄핵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것과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을 죄다 쓸어 담아 놓았다. 닉슨 때 미국 하원 법사위는 수개월간의 검토 끝에 닉슨의 3개 혐의(사법방해, 권력남용, 의회모독)를 추려낸 뒤 각각의 혐의를 놓고 하루 하나씩 표결에 부쳐 사흘에 걸쳐 본회의에 상정할 혐의를 결정했다. 우리 국회는 무려 5개의 위헌 혐의, 8개의 위법 혐의를 법사위 검토 한 번 거치지 않고 확정했다. 혐의는 쌓으면 쌓을수록 좋다는 식의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헌법재판소의 검토 기간만 불필요하게 늘렸다는 데서 드러난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을 쥐어짜면 박 대통령이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압박했느냐가 핵심으로 남는다. 이것만이라도 혐의가 입증된다면 대통령은 탄핵되고도 남는다. 추상적인 혐의를 아무리 모은다고 해서 무슨 혐의가 되지 않는다. 헌재는 정밀 타격하듯 콤팩트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탄핵다운 탄핵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발성 박수 거수 기립 표결은 일반적인 투표와 달리 비밀이 보장되진 않지만 간단히 찬반을 따져볼 수 있어 많이 이용된다. 발성이나 박수 표결은 찬성 측과 반대 측 중에서 소리가 큰 쪽이 이기는 표결이다. 하지만 압도적 차이가 나지 않을 경우 어느 쪽이 우세한지 구별하기 힘들다. 거수나 기립 표결은 일일이 찬반을 셀 수 있어 발성이나 박수 표결보다 훨씬 정확하다. 그리고 거수보다는 기립이 더 의식성(儀式性)이 강해 국회만 해도 예전엔 기립 표결이 원칙이었다. ▷일상에서는 거수 표결이 가장 많이 이용된다. 회사에서는 상사가 부하 직원들에게 찬반 의사를 종종 거수로 묻는다. 그러나 부하 직원이 상사들을 앞에 놓고 거수해 보라고는 하지 않는다. 상하관계를 떠나 연소자와 연장자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손을 드는 행위(거수)나 일어서는 행위(기립)가 별것 아니긴 하지만 그것도 능동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에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주문할 때는 무례하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다. ▷그제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장에서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기업 총수 9명을 쭉 앉혀놓고 전국경제인연합회 해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주문했다. 총수들은 처음에는 어색해서 쭈뼛쭈뼛 눈치를 보더니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먼저 손을 들자 몇몇이 따라 들었다. 어제 신문을 보니 동아일보를 비롯해 조선, 중앙, 한겨레신문이 대기업 총수들이 안 의원의 ‘강요’에 따라 거수하는 사진을 1면에 실었다. 그제 국정조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안 의원은 50세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78세, 손경식 CJ 회장은 77세, 구본무 LG 회장은 71세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3명은 60대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빼고는 모두 연장자다. 군대 신병교육대에서 새파랗게 나이 어린 조교가 나이 든 신참병들의 군기를 잡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전경련 해체 여부가 정말 궁금하면 한 사람씩 따로 물어보는 수고 정도는 하는 게 기본적인 예의다. 28년 전 일해재단 청문회에서도 이런 무례한 장면은 없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낸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등이 1974년 8월 7일 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방문해 “의회에서 당신에 대한 지지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하원 본회의의 탄핵소추 의결을 앞둔 상황이었다. 닉슨은 이틀 뒤인 8월 9일 사임을 발표했다. 새누리당 친박계 중진 의원들이 그제 박근혜 대통령에게 요구한 사임이 일견 미국 공화당 중진 의원들이 닉슨에게 요구한 사임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다. 미국 공화당 중진 의원들이 닉슨에게 요구한 것은 즉각적인 사임이고, 새누리당 중진 의원들이 박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은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이다. 박 대통령은 어제 자신의 진퇴와 임기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질서 있는 퇴진’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말로만 질서이지 실제로는 혼란이 시작됐다. 여야는 우선 대통령의 사임 시점을 합의해야 한다. 가능한 한 사임을 앞당기고 싶은 쪽이 있고 가능한 한 늦추고 싶은 쪽이 있다. 차기 대선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사임을 가능한 한 앞당기고 싶을 것이고 적절한 대선 후보가 없는 새누리당이나 유력한 대선 후보의 지지도가 낮은 국민의당은 가능한 한 사임을 늦추고 싶을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등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이 대선에 출마하려면 선거법을 바꾸지 않는 한 최소한 3개월이 보장돼야 한다. 3개월이란 시간은 사실상 대통령을 탄핵 절차에 따라 퇴출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과 엇비슷하다. 여야는 국회 추천 총리에 대해서도 합의해야 한다. 지금 결정되는 총리는 차기 대선 과정에서 사실상의 국가수반 역할을 맡는다. 당마다 자기한테 유리한 후보를 추천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박 대통령의 어제 발표를 탄핵을 모면하려는 꼼수로 규정하고 탄핵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발표로 새누리당의 비박계 일부가 탄핵소추에 찬성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겼다. 비박계가 전원 가담하지 않으면 야당만으로는 탄핵소추 의결에 필요한 3분의 2를 채우지 못할 수 있다. 그동안 야권으로서는 탄핵소추가 의결되면 박 대통령의 권한을 즉각 정지시킬 수 있어서 좋고, 부결되면 국민의 분노를 부를 것이기 때문에 좋은 꽃놀이패였다. 반대로 여권으로서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결정으로, 탄핵소추가 부결된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나 새누리당이 받게 될 후폭풍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탄핵소추가 부결되면 야권은 어쩔 수 없이 박 대통령이 제안한 ‘질서 있는 퇴진’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고 상황은 여야가 대통령의 사임 시점과 국회 추천 총리를 놓고 고심해야 하는 알고리즘의 첫 단계로 돌아온다. 탄핵소추가 통과돼도 박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될 뿐 상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어제 특검 후보가 결정됐다. 앞으로 있을 특검 수사나 국정조사도 박 대통령이 버텨야 기세가 오르는데 어제 결정으로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여야가 질서 있는 퇴진에 박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포함시킬 것인가. 예측하기 어렵다. 대통령 사면이 포함되면 특검 수사는 의미가 축소된다. 물론 여야가 합의해도 사면은 안 될 수 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퇴임 후 기소되면 법원에서 유무죄를 다투게 된다. 탄핵 공방을 벌일 때야 ‘제3자 뇌물죄’니 하며 마구 질러댈 수 있었지만 법원에서 유무죄를 다투게 되면 특검 수사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결정은 신의 한 수였다. 물론 그 신의 한 수는 대통령직을 사실상 포기한 대가로 둘 수 있었던 값비싼 신의 한 수다. 당장 야권에서는 대통령이 왜 스스로 사임 일자를 정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야권이 ‘질서 있는 퇴진’을 감당할 자신이 없음을 내비친 것이다. 여야는 어찌 됐든 앞으로 대통령의 진퇴와 임기를 놓고 합의해야 한다. 국회가 그토록 주장해 왔던 합의 정치의 장(場)이 주어졌다. 국회가 처음으로 사실상 대통령 없는 정치를 하게 된다. 잘하면 국민이 내각제로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겠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합의하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면 그래도 대통령제가 낫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다. 여야는 공 대신 골칫거리를 넘겨받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피델 카스트로 하면 카키색 군복을 입고 턱수염을 기르고 아바나 시가를 물고 있는 모습이 트레이드마크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카스트로의 리더십이 턱수염에서 나온다고 믿은 나머지 턱수염을 잘라버릴 계획을 세운 적도 있다. 스포츠맨인 그는 다른 쿠바인들처럼 열렬한 야구광이었다. 북한 김일성의 취미는 뭐였나. 총 쏘기? 잘 떠오르지 않는다. 둘 다 독재자였지만 김일성은 경외심으로 체제를 유지했고 카스트로는 친근감으로 체제를 유지했다. ▷김일성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동상을 세웠지만 쿠바에는 어디에도 카스트로의 동상은 없다. 그 대신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의 동상이 있다. 쿠바는 가톨릭의 전통이 깊어 권력자의 우상화가 쉽지 않았던 것일까. 다만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가톨릭의 성부 성자 성령 삼위(三位)일체처럼 이위(二位)일체였다. 이상주의자 게바라는 현실주의자 카스트로 덕분에 불멸을 얻었고 현실주의자 카스트로는 이상주의자 게바라 덕분에 90세 천수를 누렸다. ▷카스트로는 체제에 불만을 가진 주민에게 갈 테면 가라는 식으로 나왔다. 1980년 몇몇 쿠바인이 아바나의 페루대사관 정문을 트럭으로 부수고 들어가 망명을 요청한 이후 12만5000명이 쿠바를 떠났다. 카스트로가 마리엘 항구를 개방하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고 하자 미국은 오히려 항구를 봉쇄하라고 압력을 넣어야 했다. 1994년 경제위기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카스트로는 김일성과 달리 체제에 가해지는 압력을 눌러서가 아니라 풀어서 조절할 줄 알았다. 그것이 쿠바를 북한보다는 덜 공포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카스트로를 ‘야만적 독재자’라고 불렀다. 그러면 김일성 일가를 어떤 독재자라고 부를까. 카스트로는 쿠바를 개미에, 미국을 코끼리에 비유하면서 “개미는 코끼리가 결심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국가의 처지를 한탄한 적이 있다. 카스트로 생전에 그 개미가 코끼리의 코앞에서 57년간 살아남았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우리가 북한을 떠올리면 썩 기분 좋은 기적은 아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최근 일각에서 정치적 해법(解法)으로 제기하는 ‘헌법 71조 대통령 권한대행 수용’은 반(反)헌법적이다 못해 억지에 가깝다. 헌법 71조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事故)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가 그 권한을 대행한다’고 돼 있다. 박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된 상황을 사고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도대체 이런 견해를 몇 명의 헌법학자가 지지할지 모르겠으나 다수설(多數說)이 될 수는 없다. 헌법은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하면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탄핵소추를 사고로 본다는 의미다. 뒤집어 보면 탄핵소추 전 수사 단계는 사고에 이르기 전 단계로, 사고가 아니라는 의미다. 미국 대통령은 탄핵소추를 당해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본다. 말할 것도 없이 수사를 받을 때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본다. 리처드 닉슨도, 빌 클린턴도 그랬다. 대통령의 실질적 2선 후퇴 주장 역시 반헌법적이다. 당장 대통령은 군 통수권 등 국가원수의 자격에 부여된 권한을 총리에게 양보할 수 없다. 행정을 말하자면 국회가 결정한 총리가 들어선다 해도 총리는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命)을 받도록 돼 있다. 대통령은 명시적으로 2선 후퇴를 선언하는 순간 스스로 위헌 상황을 초래한다. 다만 대통령이 총리에게 암묵적으로 총리의 뜻에 반하는 명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겠다. 이것이 아마도 박근혜 대통령이 위헌적 상황을 피하면서 양보할 수 있는 2선 후퇴의 최대치다. 그러나 그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대통령을 뭣 때문에 월급을 주고 청와대의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지원하면서 놔두는가. 탄핵하라는 요구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하야 주장은 헌법적이다. 누구든 대통령이 하야하라고 주장할 수 있다. 대통령이 그 주장에 귀를 기울여 자진 하야하면 헌법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 된다. 그래서 대통령 2선 후퇴나 대통령 권한대행 같은 반헌법적 주장을 할 바에야 하야 주장을 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의 실질적 2선 후퇴를 주장하다가 하야 주장으로 돌아선 것은 그동안 대통령을 봐준 것이 아니라 뒤늦게 논리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대통령 권한대행이니 설레발을 치면서 하야 주장을 숨기고 있는 위선적인 논평가들만 남았다. 다만 하야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권리다. 대통령이 스스로 생각해 봐서 ‘고의로’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여기면 검찰이나 특검의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지금이라도 당장 하야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수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대통령이 범죄의 ‘고의’와 ‘심각성’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여긴다면 하야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이런 대통령을 국민이 용납할 수 없다면 탄핵 절차를 밟아야 한다. 지금은 1987년 6·10항쟁 같은 상황이 아니다. 6·10 당시 서울과 서울 인근 군부대는 연일 충정훈련이라는 시위진압훈련을 하고 있었고 투입될 지역에 대한 도상(圖上)연습까지 끝낸 상태였다. 총칼의 위협을 무릅쓰고 거리로 뛰쳐나온 100만 명은 민의를 대변하는 100만 명이었다. 그들이 청와대 문을 부수고 들어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끌어내린다고 해도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여론이 분분한 오늘날, 주말 시위 100만 명의 하야 함성은 아무리 자발적 참여자가 많다 해도 무작위 추출된 1000명의 여론조사보다도 민의를 더 정확히 대변하지 못한다. 하야와 탄핵을 분리한 여론조사에서 하야가 절반을 넘긴 적도 아직 없다. 그런데도 민의 운운하며 차벽을 뚫고 청와대로 쳐들어가 박 대통령을 끌어내린다면 그런 반헌법적 상황을 나부터 가만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쓴, 박근혜도 문재인도 아닌 제3후보를 지지하는 수편의 칼럼이 그걸 증명할 것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박 대통령의 문화융성, 국정교과서 정책에 누구보다 명확한 논조로 반대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박 대통령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박 대통령은 헌법적 절차에 따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다. 이런 대통령을 퇴진시키는 것도 헌법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 선출만 아니라 퇴출도 제대로 해야 민주 국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샤머니즘이라는 용어가 종교 분석이 아니라 정치 분석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시기에 박승주 국민안전처 장관 후보자가 올 5월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열린 굿판에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개인을 위한 굿판은 아니고 ‘대한민국과 환(桓)민족 구국(救國) 천제(天祭) 재현’이라는 행사의 일부로 벌어진 굿판이었다. 박 후보자는 이 행사를 주최한 정신문화예술인총연합회의 부총재 자격으로 참석했다. ▷정신문화예술인총연합회의 총재는 안소정 씨다. 하늘빛명상연구원장이라고 한다. 박 후보자는 2013년 펴낸 ‘사랑은 위함이다’라는 책에서 안 씨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혔다. 안 씨의 하늘빛명상은 환단고기(桓檀古記)류의 사상과 국선도 식의 명상을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안 씨가 재현하고자 한 것은 고구려의 동맹이나 부여의 영고 등 제천행사였으나 실제로는 재현이라고 부르기에도 조잡한 수준이었다. 사물놀이 지신밟기 등 식전행사를 시작으로 천제, 기도명상, 국태민안(國泰民安) 기원굿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박 후보자는 ‘사랑은 위함이다’란 책에서 “안 원장 밑에서 명상 공부를 할 때 이 지구 땅에 47회나 다른 모습으로 왔었다”고 자신의 전생을 언급했다. 또 “명상을 하는데 상투를 하고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는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 장군이었다”며 “그가 내게 조선 말기 왕의 일기인 일성록(日省錄)을 건넸다”고 썼다. 굿을 하건 명상을 하건 자유지만 이런 황당한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 국민의 안전을 맡긴다는 게 께름칙하다. ▷박 후보자는 한국시민자원봉사회 이사장이다. 한국시민자원봉사회는 옛 행정자치부의 인가를 받아 만들어진 비영리 단체다. 그가 행자부 관료이던 1995년 설립 때부터 이 단체를 맡았다. 시민자원봉사와 천제 재현은 기묘한 결합이다. 박 후보자는 노무현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차관을 맡았고, 같이 노 정부에서 일했던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가 안전처 장관으로 제청했다. 국민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굿이 아니라 전문가적 식견인데, 박 후보자는 방재 관련 부서에서 일한 경험이 전무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확정되지 않은 작품 중에 ‘아름다운 공주(La Bella Principessa)’가 있다. 2010년 영국 옥스퍼드대 미술사 명예교수 마틴 켐프는 이 작품이 다빈치 것임을 고증하는 긴 책을 써서 거의 다빈치 것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위작 화가 숀 그린헐이 2015년 회고록에서 ‘아름다운 공주’는 1978년 자신이 그린 것으로 모델은 슈퍼마켓 계산대 여종업원이었다고 주장해 위작 논란에 휘말렸다. ▷다빈치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와 ‘아름다운 공주’를 보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미인도가 1991년 처음 전시됐을 때 본인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미술관은 감정 절차를 거쳐 진품이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1996년 검찰에서 수사를 받던 위작 화가 권춘식 씨가 이 미인도를 자신이 위작했다고 자백하면서 다시 긴 위작 논란에 빠졌다. ▷프랑스의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다빈치 그림 ‘모나리자’를 분석해 그림 아래 숨겨진 밑그림을 밝혀내는 개가를 올린 회사다. 이 회사의 창립자 파스칼 코트는 ‘아름다운 공주’에 대해 1978년 그려진 게 아니라 최소한 250년은 된 작품이라고 주장해 진품 쪽에 무게를 실어줬다. 이 회사가 천경자의 미인도에 대해 천경자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진품일 확률이 0.0002%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 위작 결론을 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위작이 미술계를 혼탁하게 하는 건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안이한 작품 수집과 감정 체계에 긴장을 불어넣는 메기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다. 1930년대 등장한 산드로 보티첼리의 ‘베일 쓴 성모’를 미술계의 권위자들은 진짜 보티첼리의 작품으로 찬탄했지만 당시 20대의 미술학도로 나중에 저명한 미술사학자가 된 케네스 클라크는 “어딘지 1920년대 영화배우 같은 분위기가 난다”며 위작임을 간파했다. 그런 눈썰미가 우리 미술계에도 필요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대통령은 내란 외환의 죄를 제외하고는 재임 중 형사 소추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위법 행위에 연루됐는데 가만둘 수는 없다. 그 위법 행위가 대통령의 정당성을 심각히 훼손한 경우 헌법이 예정한 절차가 탄핵이다. 대통령을 기소해서 처벌하는 것은 재임 후에 하더라도 당장은 대통령직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독단이 정치의 세월호 사태를 빚었다. 또 다른 독단을 막기 위한 청와대참모와 내각의 인적 쇄신은 꼭 필요한 조치이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최순실이라는 비선은 김현철이라는 비선과는 다르다. 김현철의 비선 활동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묵인이 아니라 무지 아래서 이뤄졌다. 최순실의 비선 활동은 박 대통령 자신에서 비롯됐다. 참모와 각료들이 최순실의 비선활동을 알았다 한들 대통령이 허용하거나 묵인한 비선활동을 어떻게 하겠는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 수사가 대통령 주변 인물만 기소하고 마는 수사라면 의미가 없다. 수사가 의미가 있으려면 최종적 책임자인 대통령을 향해야 한다. 대통령을 강제 수사할 순 없지만 임의수사나 주변인을 통한 간접수사는 할 수 있다. 대통령을 형사 소추할 수 없으므로 수사 결과는 대통령을 형사 소추할 근거는 되지 못하지만 탄핵 소추할 근거는 된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제 “대통령은 총리에게 국정의 전권을 주고, 국회가 총리를 추천해야 한다”며 “새 총리의 제청으로 새 내각이 구성되면 대통령은 국정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야권에 권력을 이양하라는 요구나 마찬가지로 헌법의 근거 없이 통치권을 가져가겠다는 발상이다. 대통령에게 하야란 말만 안 했지 하야 주장이나 다름없다. 이런 식의 거국내각으로 허수아비 신세가 된 대통령을 둬서 뭣하겠는가. 그럴 바엔 탄핵절차를 거쳐 새 대통령을 뽑는 게 낫다. 국민은 대통령의 하야를 거론할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정치인은 함부로 대통령의 하야를 거론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정말 크다면 정치권은 그 목소리를 헌법에 맞게 탄핵절차로 소화해야 한다. 탄핵절차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다. 민주당의 주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 소추됐을 때 그런 억지를 부렸다. 탄핵이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탄핵을 건너뛰어 대통령에게 사실상 하야나 다름없는 요구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이다. 새누리당도 탄핵을 금기어 취급해서는 안 된다. 모 아니면 도인 탄핵절차에 이르기 전에 다양한 정치적 해법을 모색하려는 노력은 중요하지만 그런 노력이 실패할 경우 결국 탄핵절차에 이를 수밖에 없다. 탄핵절차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현 대통령을 쫓아내 새 대통령을 뽑는 길을 열고, 다른 한편으로는 탄핵에 이르지 못할 경우 현 대통령에게 다시 정당성을 부여한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으로 탄핵 소추된 뒤 탄핵이 예상되자 표결 전에 사임했다. 반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인턴과의 부적절한 성관계로 탄핵 소추됐으나 탄핵을 모면하고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쳤다. 노 전 대통령도 탄핵을 모면하고 임기를 마쳤다. 민주당이 사실상 하야 요구를 하면서 탄핵을 입밖에 올리지 못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탄핵절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처럼 박 대통령에게도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핵으로 인한 국정 혼란을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노 전 대통령이 탄핵 소추됐을 때 당시 고건 총리가 성공적으로 대리 대통령 임무를 수행했다. 책임총리, 책임총리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짜 책임총리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이 탄핵되거나 암살된 뒤 집권한 부통령이 거의 대부분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다만 박 대통령을 탄핵절차에 부치기로 한다면 탄핵 소추가 될 때까지는 박 대통령에게 대통령제에 걸맞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들은 그 사이 냉각기를 갖고 어디까지가 불법적 국정 농단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적 국정 수행인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을 탄핵하지 않고 여야가 해결책을 찾으면 가장 좋다. 다만 반(反)헌법적 거국내각 구성을 할 바에야 탄핵절차를 밟는 것이 낫다는 게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까지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쓴 노래의 가사들은 문학상은 아닐지라도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는 사실이다. 고작 ‘Blowin' in the wind’나 ‘Knocking on heaven's door’나 듣고 딜런을 안다고 해선 안 된다. 물론 이런 간단한 곡에서도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대답은 바람 속에 불고 있다)’ 같은 문장은 ‘The wind is blowin'(바람이 불고 있다)’이라는 진부한 문장을 비틀고 그 대답은 듣는 사람의 판단에 맡김으로써 충분히 시적이다. 딜런의 음악가로서의 소질은 동시대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에게 훨씬 못 미친다. 작곡자이자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매카트니의 ‘She's leaving home’은 클래식의 현악 4중주곡을 뛰어넘는다는 찬사를 보냈다. 딜런의 곡은 대부분 단조로운 코드 진행을 반복한다. 가령 ‘Knocking on heaven's door’는 ‘G-D-Am-G-D-C’의 무한 반복이다. 그의 곡은 가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몇몇 곡을 빼고는 썩 들을 만한 곡이 못 된다. 시인 딜런의 모습은 ‘The times they are a-changin'’ 같은 긴 가사의 곡에서 더 잘 찾을 수 있다. 이 곡의 가사는 스티브 잡스가 절망에 처할 때마다 되뇌면서 스스로 용기를 북돋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펜으로 예언하는 작가와 비평가들이여/눈을 크게 뜨라/수레바퀴는 아직 돌고 있다. 섣불리 논하지 말고/섣불리 규정하지 말라/지금의 패자들이 나중에 승자가 될 것이니/시대가 변하고 있으므로.’ 가사의 마지막은 성경의 유명한 구절을 멋지게 차용하고 있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니/시대가 변하고 있으므로.’ 노래의 가사는 노래 없이 읽어봐야 시라고 할 만한지 알 수 있다. 김민기는 고교 시절 함께 물놀이를 갔다가 죽은 친구를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이것은 그 자체로 시다. 김민기는 여기에 멜로디를 실어 시를 직접 쓴 시인의 느낌으로 시를 노래했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사람의,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재능이다. 고은의 시가 딜런보다 못하겠는가. 딜런에게 주어진 상이 무슨 의미가 있다면 시와 음악의 융합에 바치는 찬사일 것이다. 딜런이 단순히 시를 잘 쓰고, 음악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했다고 해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그 이상의 정신, 시인의 정신이 있었다. 1960년대 미국 저항문화를 상징할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딜런이다. 그러나 그는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구속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저항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일 때나 의미 있는 것이지 정치적으로 조직될 때는 진부한 선동일 뿐이었다. 그는 1966년 인기 절정의 시기에 돌연 공연 현장에서 사라졌다. 딜런에 대한 노벨 문학상 수여는 문학의 완고한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김민기 같은 이에게 문학상을 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의 ‘늙은 군인의 노래’나 ‘상록수’ 같은 노래도 시적인 가사를 갖고 있다. 예술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이라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정년퇴임하는 선임하사를 위해, ‘상록수’는 동료 직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만든 곡이지만 시위에서 널리 불려 한국의 저항문화를 대표하는 곡이 됐다. 그는 알고 보면 ‘공장의 불빛’에서 ‘지하철 1호선’까지 음악극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만 문학의 영역을 계속 좁게 묶어둘 게 아니다. 요새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뛰어들고 있는 웹툰은 어떤가. 소설이 아니라 웹툰이 TV 드라마와 영화의 원작이 되는 시대다. 치열한 작가 정신만 있다면 웹툰의 말풍선이 소설이나 희곡보다 훌륭한 문학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딜런과 김민기의 노래가 시와 음악의 융합이라면 웹툰은 산문과 그림의 융합이다. 문학상 심사위원들은 더 바빠져야 한다. 펜으로 예언하는 자들이여 눈을 크게 뜨자. 시대가 변하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