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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란 말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occupy는 군사 용어로는 점령이지만 시위 용어로는 점거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서구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퍼져 나갈 때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싸웠지 점거 같은 건 할 수도 없었다. 점거는 시위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되고 나서의 일이다. 미국 자동차회사 GM의 노동자들이 1936년 미시간 주 플린트의 공장에서 연좌농성을 한 것이 점거의 시작이라고 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점거는 불법이라고 본다. ▷대학 건물 점거는 1968년 전 세계적인 학생운동에서 두드러졌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프랑스 낭테르대, 일본 도쿄대 등으로 대학 점거 농성이 번져 갔다. 우리나라에서는 1986년 건국대 도서관 점거 농성이 사회적 관심을 끈 최초의 대학 점거 농성이었다. 시위가 과격화한 1980년대에 들어서도 1984년까지는 경찰이 대학에 상주하고 있어서 점거 농성은 드물었고 시위라고 하면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지는 바리케이드전(戰)식 시위가 주를 이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학 점거 농성은 점차 정치적인 것에서 학생 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변해 갔다. 이것도 유행처럼 확 일어났다가 잠잠해지는 패턴이 있는 듯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등록금 인상 반대를 외치며 총장실이나 본부를 점거해 농성을 벌인 대학이 많았다. 올해는 여름방학 전에 이화여대 학생들이 고졸 직장인을 위한 대학 신설에 반대해 시작한 대학본부 점거 농성이 동국대 등으로 번지더니 10일부터는 서울대 학생들이 시흥캠퍼스 신설에 반대해 대학본부를 점거했다. ▷점거는 그것이 불법인 것을 떠나 대학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위 방식이다. 소통 부재의 원인이 대학본부 측에 있는지 학생회 측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대학의 주인은 교수만도 아니고 학생만도 아니다. 대학만은 억지이더라도 소리만 크게 지르거나 끝까지 버티기만 하면 이긴다고 여기는 사회를 닮아가서는 안 된다. 토론해서 지는 쪽이 깨끗이 물러설 줄도 알아야 대학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바보야, 문제는 정치다’도 틀렸고 ‘바보야, 문제는 경제다’도 틀렸다. 지금 우리나라는 돈 많고 지위 높은 상류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외면하기 때문에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한 것이라고 원로 사회학자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79)가 일갈했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저서 ‘특혜와 책임’을 통해서다. 역사의 동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뿐 모든 국민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 상층(上層), 즉 부를 생산하는 기업가와 자원을 배분하는 고위직이 문제라고 송 교수는 지적했다. 고위직도 위세 고위직과 위신 고위직으로 나뉜다. 위세 고위직은 국회의원, 고위 관료, 고위 법조인, 장성급 이상 군인과 경무관 이상의 경찰을 말한다. 위신 고위직은 소위 말하는 저명인사들인데 위엄과 신뢰로 먹고사는 대학교수, 언론인, 의료인이 포함된다. ―민주화는 성공했는데 그 이후 성공했다는 정권이 없다. 정치의 실패는 왜 반복되는가. “더 이상 정치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우리나라 정치도 포퓰리즘으로, 다른 나라보다 더한 포퓰리즘으로 흘러가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국민도 등록금 반값으로 해주고 청년수당을 주겠다는 사람에게 표를 준다. 한국은 포퓰리즘에 저성장과 복지 확대가 결합하는 ‘치명적 3결합의 시대’에 있다. 헌법을 바꾸고 좋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으면 정치가 잘될 것이라는 기대는 오산이다. 앞으로 역사의 동력은 고위직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밖에 없다. 이들 고위직이 예전처럼 목숨을 걸고 모든 열정을 쏟아서 소명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 말고는 동력이 없다.” ―일류 대학 나오고 고시에 합격해서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 부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가 학교 다니던 1950년대는 절대 절망의 시대였다. 교수가 되기 전 기자 생활을 하던 1960년대 초 봄이면 보릿고개를 취재했다. 못 먹어서 얼굴이 누렇게 떠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속에서 1960년대,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정부에 들어왔던 고위직들은 국민이 안 굶어 죽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확고한 국가관, 엄격한 기강,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면서 배가 부르게 되자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볼까, 어떻게 하면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책임 안 지는 일을 해볼까만 궁리한다. 고위직이 거의 다 그렇게 돼 버렸다. 나라를 위한다는 생각, 공익에 열정을 다한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이것이 사라지니까 부패가 오고 그 끝자리에 김영란법이 온 것이다.” ―우리 상층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왜 없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내면화할 시간이 없었다. 내면화는 뼈와 살이 되는 것, 몸에 배는 것, 체질이 되는 것이다. 내면화돼 있으면 무의식중에 행동해도 과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서양의 상류층이 중시하는 게 절제(temperance)다. 우리는 그것이 안 된다. 할아버지와 그 윗대부터 여러 대에 걸쳐 내려온 상층을 누대(累代)상층이라고 해서 당대(當代)상층과 구별할 수 있다. 서구의 누대상층은 절제심에다 용기를 갖고 있다. 잘못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그렇다고 함부로 나서지도 않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결국 ‘희생’이다. 희생의 내용은 첫째 목숨희생, 둘째 기득권희생, 셋째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 헌신이다. 그러려면 문화와 윤리의 내면화, 즉 체질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가풍이 중요한 것이다. 당대상층을 졸부(猝富)라고 한다. 졸부의 졸자에는 개 견(犬)자가 붙어 있다. ‘갑자기 졸’자다. 논어에 졸부귀불상(猝富貴不祥)이라는 말이 있다. 갑자기 부유해지거나 갑가지 귀한 몸이 되면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졸부가 많다.”SKY 나와야 성공한다는 건 착각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중요한 것은 가풍. 영어로 family discipline이다. 아버지가 갑질하는 것만 본 자식은 갑질을 하게 돼 있다. 1980년대 초 미국에 1년간 방문교수로 갔다. 그때 우리 애들이 고등학교에 다녔다. 미국 학교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서 교사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교사는 가르치는 게 간단하다고 말하더라. 신상 카드가 있어 부모의 직업, 학력, 나이를 적는다. 우리는 그런 걸 기록을 못하게 하지만 그들은 아주 상세히 적는다. 신상 카드 밑에 절반은 가풍을 적는다. 애가 문제가 있으면 가풍을 보면 문제가 뭐고 어떻게 지도할 수 있는지 안다. 가족은 원초집단(primary group)이고 학교는 2차 집단(secondary group)일 뿐이다. 쇳덩이가 금덩이 될 수 없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가 아니라 부모 뒤에서 큰다는 말이 있다. 나이 들어서 엄마 안 닮은 딸이 있는가 보라.” ―우리는 왜 가풍에 관심이 없나. “부모들을 모아 놓고 가풍 강의를 20년 했다. 한 인간의 사회적 성공에 기여하는 세 가지 집단에 가족, 학교, 직장이 있다. 부모들에게 자녀를 성공시키는 데 가장 핵심적인 집단이 뭐냐고 물으면 학교라고 대답한다. 가족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 학교냐’고 물으면 우리 사회가 학벌 사회라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왜 학벌 사회냐’고 물으면 우리는 스카이(SKY) 대학, 즉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나와야 성공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서울대를 나와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나 될 것 같으냐고 물으면 적게 20%, 많이는 90%라는 답이 나온다. 그러나 사회적 성공을 사회에 대한 기여도와 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심으로 정의할 때 실제로 서울대 출신의 성공률은 2%도 안 되고 좀 더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5%밖에 안 된다. 나머지 95%는 지방대학,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자다. 내가 1950년대 후반에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녔다. 당시는 정치의 시대라 정치학과가 법대나 상대보다 점수가 높았다. 뛰어난 인재가 모인 곳이 정치학과이고 동기 중에는 고건 전 총리, 아웅산 사태 때 사망한 서석준 전 장관 같은 이들도 있지만 동기 전체를 볼 때 성공한 사람은 15%에 불과하다.”교육부가 없어져야 대학이 산다 ―학교가 가풍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은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가 있는 한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 미국에도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같은 명문대가 있고 잘하는데 우리나라는 왜 안 되는가 묻는다. 국가에서 교육에 관여하기 때문에 안 된다. 국가는 가능한 한 많은 규제를 만들어 공직자가 힘을 발휘하려고 하는 곳이다. 교육부부터 없애야 한다. 이웃 나라 일본도 문부과학성을 없애자는 얘기를 한다. 얼마 전 게이오대 총장를 만났더니 ‘당신들은 일본 것은 다 없애려고 하면서 일본식 교육은 왜 없애지 못하는가. 우리도 문부성을 없애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한국부터 솔선수범해서 없애 보라’고 말하더라. 교육은 미국식으로, 유럽식으로 가야 한다. 학교에 맡기고 지역사회에 맡겨야 한다. 교육의 다원화 다양화 자율화가 일어나야 한다. 국가가 교육을 관장하면 절대 제대로 교육이 안 된다.” ―우리 대학의 문제는 무엇인가. “과거 서울대에 문리대가 있을 때는 그래도 나았다. 문리대는 교양과목(Liberal Arts & Science)을 가르치는 곳이다. 하버드 등 세계 모든 명문대는 문리대가 있다. 서울대는 문리대 없애고 인문대 자연대 사회대로 쪼갰다. 왜 쪼개겠는가. 보직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고 한 것이다.”고위직 잘하면 북핵걱정 안해도 돼 ―류성룡에 관한 책을 여러 권을 낸 이유는…. “내 전공이 정치사회학이고 리더십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에 리더십을 연구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보니까 조선에 인물이 정말 없더라. 겨우 셋이 있는데 첫째가 류성룡이고 다음에 송시열, 대원군 이하응이다. 송시열과 이하응은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리더십이고, 나라를 구한 리더십은 류성룡밖에 없다.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육군에서 수군으로 바꿔 정육품에서 정삼품으로 일곱 계단 승진시킨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 짚 속에서 자다 치질에 걸려 온갖 고생하면서도 나랏일을 봤다. 명나라 장수에게 당한 수모도 나라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참아냈다. 그가 없었다면 한강 이남은 일본 말 쓰고, 이북은 중국 말 쓰는 곳이 되고 조선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북핵 위기를 임진왜란 위기에 비교하기도 한다. “북핵에 대해 위기감을 갖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북한이 제멋대로 핵을 쏠 수 있는 것처럼 여길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핵 억지력을 제공받고 사드도 배치할 계획이다. 일본에는 X밴드 레이더가 있고 괌도 잘돼 있다. 북한은 이미 나라로서는 끝났다. 국가는 도덕공동체인데 도둑 강도를 막으라고 만들어 놓은 국가가 밀수 밀매를 하고, 마약을 재배하고, 위조지폐를 만들고, 외국인을 납치하고, 자기 국민을 노예로 만든다. 남아있는 것은 몸은 마비되고 숨만 할딱거리는 정권밖에 없다. 남한은 남한대로 2% 정도 성장을 계속해 가고 고위직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하면 절대 걱정할 것은 없다. 국민 의식이 다 바뀔 필요도 없다. 고위직만 제 할 일을 다 하면 된다.”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인데…. “지식인이나 언론의 생리가 비판적이다 보니 그런 얘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처럼 살기 좋은 한국은 없다. 외국에서 보면 한국처럼 편리하며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별로 없다. 외국인들은 너희처럼 잘살면서 무슨 헬(지옥) 같은 소리 하느냐고 그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개그맨들은 자기들끼리 ‘짠다’는 말을 종종 한다. 개그맨들은 개그의 소재를 실제 경험에서 많이 얻지만 그런 경험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때로는 있지도 않은 경험을 실제 있었던 것처럼 짜내서 웃기기도 한다. 김제동이 방위병으로 복무할 때 장성들이 모인 한 행사에서 사회를 보면서 어느 4성 장군의 아내를 아주머니로 불렀다가 13일 동안 영창에 수감됐다는 얘기도 알고 보니 웃자고 짜낸 얘기였다. ▷개그가 웃기는 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일상 속의 비합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인 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개그는 웃음의 가면을 쓴 비판이다. 비판인 이상 허위냐 사실이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개그맨이 자신이나 친한 동료를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면 허위든 사실이든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개그맨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편을 웃음의 소재로 삼을 땐 얘기가 달라진다. 사실에 기초했다면 풍자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지만 허위에 기초할 때는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 영미법에서 이것을 명예훼손성 유머(defamatory humor)라고 한다. ▷군이 상명하복의 조직이다 보니 일반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웃기는 일이 많다. 여기서 웃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비합리적인 것을 말한다. 김제동이 정말 장군의 아내를 아주머니로 불렀다가 영창에 갔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다. 군대 갔다 온 남자치고 군대에서 웃기는 일 한두 가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얘기려니 하고 웃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김제동은 자신의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 증인 채택 논란이 일자 “웃자고 한 얘기를 죽자고 달려들면 답이 없다”고 받아쳤다. “방위가 퇴근 후 남아 회식 사회 본 것 자체가 군법 위배다. 국감장에서 얘기하면 골치 아파질 것”이라고 협박하듯 말했다. 웃자고 한 거짓 얘기보다 웃자고 한 얘기가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 보인 태도가 더 개그맨답지 못하다. 진짜 일류 개그맨이라면 짜낸 얘기임이 드러났을 때 깨끗이 ‘미안하다’고 하지 딴지 같은 건 걸지 않았을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언 톰린슨은 영국 런던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2009년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한 사람이다. 톰린슨은 당시 47세로 런던의 금융 중심지 시티오브런던 근처의 신문가판대 판매상이었다. 그는 퇴근길 시위대 때문에 경찰 봉쇄선에 갇히게 됐다. 그는 그날도 술을 꽤 마셨다. 그를 시위대로 착각한 경관이 허벅지를 곤봉으로 가격했다. 그는 쓰러졌다가 곧 사망했다. 나는 당시 런던 회담을 취재하다 이 사건을 접했고 이후에도 어떤 결론이 나는가 지켜봤다. 영국 검찰은 경관이 불필요한 무력을 행사했다며 과실치사(manslaughter)로 기소했다. 그러나 법원은 경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톰린슨은 알코올의존증으로 간질환 외에 다리 마비 증상이 있었다. 경관은 그의 나쁜 건강상태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이 무죄 선고 이유였다. 다만 런던 경찰은 그에게 직무수행에 적합하지 않은 ‘중대한 비행(gross misconduct)’이 있다고 봐서 파면했다. 영국인 중에 톰린슨이 경관의 곤봉에 맞는 동영상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인과관계와 부검을 통해 본 법의학적 인과관계는 좀 달랐다. 3차례 부검이 실시됐다. 세 부검의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원인 불명 사망사건의 사인(死因)을 조사하는 법정에 넘겨졌다. 법정에서 “톰린슨은 심각한 간질환을 앓아 왔고 그 때문에 내부 출혈이 생겼을 때 취약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경관은 이 결론에 따라 정식 재판에 넘겨졌지만, 역시 같은 결론에 따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부검 결과는 기소에서도 선고에서도 중요했다. 백남기 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도심 ‘민중 총궐기’ 시위에서 차벽을 뚫겠다고 경찰차에 밧줄을 묶고 그 밧줄을 잡아당기며 경찰이 쏘는 물대포에 맞서 버티던 중 변을 당했다. 317일간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 가족의 거부로 합병증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은 백 씨의 사망진단서에 서울대병원이 ‘병사(病死)’로 기재한 게 옳은지 아닌지는 의료인들의 기술적인 논란일 뿐이다. 백 씨가 물대포를 맞고 사망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지난해 백 씨의 나이는 70세였다. 요새 경로당에서 70세는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경로당에나 해당한다. 시위대의 쇠파이프와 각목, 경찰의 물대포가 난무하는 시위 현장은 건장한 청장년은 몰라도 70세가 서 있을 자리는 아니다. 법은 자초한 위험까지 보호하지 않는다. 경찰이 물대포 사용 준칙을 제대로 지켰는지 따져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백 씨는 경찰에 전혀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데도 곤봉에 맞아 사망한 톰린슨과는 다르다. 톰린슨이 사망할 때 런던 경찰은 영국식 차벽인 코랄링(corralling)이라는 시위 진압 방식을 사용했다. 코랄은 가축 우리라는 뜻이다. 시위대를 일정 구역에 가두고 단 한 곳의 출구만 열어둔다. 그곳으로 나가려면 사진을 찍고 이름과 주소를 대야 한다. 사방에 친 경찰 봉쇄선을 힘으로 돌파하려는 시도에는 가차 없는 곤봉이 가해진다. 당시 시위대에서 곤봉에 맞아 머리에 철철 피를 흘리는 사람을 여럿 봤다. 사인이 분명해 보여도 법적 다툼이 된 사망은 부검이 필수적이다. 백 씨 사망이 법적 다툼이 된 것은 바로 유족이 경찰 지도부를 살인미수로 고발하고 국가 배상을 청구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법적 다툼으로 만들어놓고 부검을 하지 말자는 건 모순이다. 유족이 경찰 부검을 신뢰할 수 없으면 경찰 부검 이후 따로 부검을 해서 그 결과를 제출하든가 해야지 경찰 부검 자체를 거부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 한 법관은 부검영장 발부를 거부하다 마지못해 영장을 발부하면서 유족과 협의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경찰이 영장 없이도 유족을 설득해서 부검을 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러나 영장은 설득이 안 됐을 때를 대비한 강제수사의 수단이다. 유족과 협의하라는 건 임의수사를 하라는 것이다. 임의수사를 할 것 같으면 영장은 왜 필요한가. 영장의 개념에 반하는 영장을 영장이랍시고 발부하는 법관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사인을 갖고 논란을 벌이면 부검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남들 다 하는 절차를 갖고 시비를 걸면 그 의도만 의심받는다. 절차는 절차대로 밟고 책임은 책임대로 묻자.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7년)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쉘 위 댄스’를 만든 수오 마사유키의 작품이다. 지하철 성추행범으로 오인받아 체포된 남자 주인공이 결백을 주장하며 법정 공방을 벌이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의 첫 번째 변호인이 그에게 형사 기소사건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질 확률은 99.9%라며 차라리 죄를 인정하고 벌금형을 받자고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99.9%는 영화 속에나 나오는 수치가 아니라 실제 수치다. ▷영화 속 1심 판사는 자기 직을 걸지 않고는 검사의 기소를 뒤집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가 무죄 판결을 내렸는데 상급심에서 뒤집어지면 그는 옷을 벗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1심 판사가 도저히 아니다 싶어 무죄 판결을 내리고, 그것이 상급심에서 받아들여지면 이번에는 기소한 검사가 옷을 벗어야 한다. 너무 심해서 탈이긴 하지만 기소든 재판이든 직(職)을 걸고 한다는 잇쇼켄메이(一生懸命)의 정신은 본받을 만하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판검사는 ‘아니면 말고’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어제 항소심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남긴 메모와 녹음 파일 중 이 전 총리와 관련된 부분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를 배제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똑같은 증거를 1심 재판부는 정반대로 판단했다. 판단이 달라진 이론도 뭐도 없다. 그냥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이래서 한국의 형사판결은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 나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달 전까지 총리였던 사람을 기소했는데 무죄 판결이 나면 기소한 검사는 일본 같으면 옷을 벗을 것이다. 총리를 유죄 판결했는데 항소심에서 뒤집히면 1심 판사도 옷을 벗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패소한 검사나 판결이 뒤집힌 판사가 승승장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항소심 판결은 또 대법원에서 뒤집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이러니 누가 기소에 승복하고 판결에 승복하겠는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할리우드의 미녀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63년 미남 배우 리처드 버턴과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찍다 사랑에 빠져 각자 배우자를 버리고 결혼하는 바람에 교황청에서 야단까지 맞았다. 오늘날 그들에 버금가는 완벽한 미남 배우와 미녀 배우의 만남은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 정도가 아닐까. 크루즈는 키드먼과 결혼해 10년 살다 2000년 헤어졌다. 피트는 최근 졸리와 12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졸리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섹시한 데다 지적이며 실천적인 여배우다. 졸리의 벌에 쏘인 것 같은 두툼한 입술은 커크 더글러스의 뺨, 베티 데이비스의 눈에 버금가는 시대에 남을 매력 요소로 꼽힌다. 졸리는 몸에 문신을 많이 새긴 것으로 유명한데 문신 중에는 라틴어로 된 ‘나를 키운 그것이 나를 망하게 하리라’는 경구도 있다. 졸리는 유엔난민기구의 특사로 16년째 활동하고 있다. 유방암 예방을 위해 2012년 양쪽 유방의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이를 당당하게 공개했다. ▷피트는 프랑스 여배우 마리옹 코티야르와 사랑에 빠져 졸리와 헤어졌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피트는 졸리와 살기 전에는 여배우 제니퍼 애니스턴의 남편이었다. 미남 배우라고 다 바람기가 많은 것은 아니다. 서부의 사나이, ‘하이 눈’의 게리 쿠퍼는 32년간 한 여배우와 같이 산 모범 남편이었다.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를 미남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멋진 배우는 여배우 로런 버콜과 결혼하고 충실한 남편이 됐다. ▷졸리는 결혼 전 입양해 키우던 아이 외에 피트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 3명, 그리고 결혼 중 입양한 아이 2명 등 모두 6명의 자녀가 있다. 입양아는 캄보디아 에티오피아 베트남 태생이다. 졸리는 아이들을 촬영장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졸리는 모든 아이들에 대한 양육권을 주장했다. 6명의 어린 자녀를 달고 사는 이혼 여배우는 할리우드에 거의 없던 일인지라 이 여배우가 보여줄 향후 모습이 자못 궁금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통스러운 후회의 시간이다. 우리는 왜 북한의 핵 보유를 막지 못했을까. 길을 잃었을 때는 높은 데 올라 먼 곳을 살펴봐야 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우리 쪽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놔두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만을 반대하기는 어렵다는 비핵화의 논리는 그럴듯하다. 비핵화 선언으로 북한의 핵 사찰 거부 명분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년 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했을 때 비핵화 선언의 일방성이 가진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비핵화 선언에 외교안보수석도, 국가안전기획부장도, 국방부 장관을 포함한 어느 각료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노태우의 회고록에 나온다. 모두 북방외교의 성과에 취해 북방외교가 초래한 북한의 고립이 더욱 핵에 집착하게 한 사실을 무시했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가 없었고 남한에는 핵무기가 있었다. 지금 북한은 핵무기가 있고 남한은 없다. 기막힌 역전이다. 북한의 NPT 탈퇴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 한 달 후 일어났다. 김영삼은 가장 중요한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그는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영변 원자로에 대한 폭격을 검토했을 때 반대했다. 이후 제네바 합의의 실패, 6자회담의 실패, 유엔 안보리 제재의 실패를 돌아보면 북핵을 저지할 유일한 방법은 협상도 제재도 아니고 폭격이었다. 한국이 희생을 감수할 마음이 없음이 분명해졌을 때 그 방법은 메뉴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는 의혹만으로 공격했지만 북한은 보란 듯이 WMD 실험을 해도 공격하지 않는다. 극동은 중동과 달리 미국에서 심리적으로 멀다. 한국이 하자고 해도 주저할 판에 한국이 하지 말자는데 나설 이유가 없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핵무기의 문제를 전력공급의 문제로 치환한 기만적인 것으로, 실패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제네바 합의를 믿고 감상적인 남북 정상회담에 매달렸다. 김대중이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등 뒤에서 북핵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2006년 북한의 첫 번째 핵실험 다음 날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해 조언을 구했다. 김대중 회고록에 따르면 김영삼은 “노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해 포용정책을 펴다가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고 비난했고 김대중은 “북한 핵실험은 조지 W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실패한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둘 다 틀렸다. 김대중 노무현의 햇볕정책이 없었더라도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했을 것이고, 공화당 부시 대신 민주당 고어나 케리가 당선됐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을 제어해 주리라는 헛된 기대에 9년 세월을 허비하며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핵무기는 김씨 세습정권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의 대통령들은 김씨 세습정권의 존립을 보장할 것은 핵무기 외에는 없다는 단순 명백한 사실을 자주 잊어버렸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주한 미대사관 전문(電文)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2008년 미국대사와의 대화에서 “돌아보면 1994년 미국의 폭격을 허락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 1994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미군의 폭격을 허락할까. 웬만해서는 북한의 핵 보유를 막을 수 없었는데 웬만한 이상의 노력을 할 자세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통령도 국민도 돼 있지 않다. 우리는 1994년 폭격을 반대했을 때 언젠가 다가올 북핵과의 불안한 공존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북핵이 현실화했다. 우리 앞에는 다모클레스의 칼을 머리 위에 둔 초(超)불안의 시대가 놓여 있다. 그러나 결국 우리 스스로 선택한 불안이다. 그 불안을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으로 섣불리 해소하려 하지 말자. 북이 핵을 가진 이제 와서 예방폭격을 하자는 식이어서도 안 되고, 굴종적으로 평화를 사자는 식이어서도 안 된다. 핵무기의 주 용도는 억지력이다. 북한도 핵무기를 실제 써서 스스로를 위기로 몰고 갈 이유가 없다. 김정은이 제 목숨 하나는 귀하게 여길 정도로 정상 상태이길 기도하되 당당히 맞서 북한 세습체제에 균열이 초래될 때까지 더 강한 스트레스를 가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대 인근에는 광장서점이란 곳이 있다. 1978년 이해찬 의원이 이 서점을 열었다. 처음에는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팔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주로 고시책을 파는 곳이 됐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값비싼 고시책까지도 할인 한 푼 안 해주고 팔아 수익을 올린 덕분에 많은 서점이 명멸하는 과정에서도 광장서점만은 계속 번창해 아직도 건재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때 이 서점의 직원으로 일했고 나중에는 이 의원의 보좌관이 됐다. ▷유 전 장관이 한 TV 프로그램에서 “세월호 사고 당시 대통령 일정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다 알 거라고 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우 수석에게 약점이 잡혀 우 수석을 경질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가 고발당했다. 제3자가 고발까지 할 발언은 아니지만 세월호 사고 당시 우 수석은 민정수석은 고사하고 민정비서관도 아닌 변호사였다. 나중에 민정수석이 돼 세월호 당시 일을 뒤늦게 알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먼저 그 사실이 증명돼야 한다. 정치적 상상력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장관까지 지낸 사람으로서는 경솔한 발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어제 무소속인 이 의원의 입당을 허용하기로 했다. 지역구가 세종시인 이 의원은 4월 총선에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친노(친노무현) 인사 물갈이 차원에서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바람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예상했던 대로 김 위원장이 물러나고 추미애 대표 체제가 되자 복당이 결정됐다. 얼마 전 이 의원은 자택 근처에서 퇴비 냄새가 난다고 ‘호통 민원’을 해 세종시 부시장이 출동하고 난리가 났다. ▷친노 인사라도 이해찬 유시민류와 안희정 이광재류가 느낌이 다르다. 더 나이가 많은 이해찬 유시민 쪽이 똑똑하지만 포용력이 부족하다. 교육부총리와 국무총리 시절 이 의원은 권위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유 전 장관도 나아졌다고 하지만 ‘싸가지 있는 말도 싸가지 없게 하는’ 물이 아직도 덜 빠졌다. 이 의원보다 일곱 살 적은 유 전 장관의 나이가 57세다. 둘 다 사소한 데 날을 세울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건국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보는 측은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와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의 엄연한 차이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망명정부는 원래 있던 정부가 외국으로 옮겨간 것이지만 임시정부는 정부가 생기기 전의 말 그대로 임시정부다. 헌법 전문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돼 있다. 임시정부의 법통은 나라의 혼이라고 해보자. 혼은 있으되 살이 없던 나라가 1945년 광복으로 살(국민과 영토)을 얻고 1948년 주권을 찾았으니 비로소 건국됐다고 함이 상식에 부합하는 헌법 해석이다. 건국을 1919년으로 보는 측은 이승만을 폄하하면서도 이승만과 그의 정부가 1948년에 ‘대한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들어 반대편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다. 임시정부에서 탄핵됐음에도 자신의 정통성을 임시정부까지 연결하고 싶었던 사람이다. 이승만식 연호는 결국 독재로 이어진 그의 개인적 야망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이승만과 달리 후대의 대통령들은 모두 건국 시점을 1948년으로 봤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도 의식적으로 억지를 부리지 않을 때는 1948년 건국설에 저도 모르게 동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2건국’이라는 분수를 모르는 욕심을 부리다가 199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 50년’이란 표현을 썼다. 한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본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3년과 200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1948년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이 나라를 건설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민주공화국을 말하면서 국민이 선거로 뽑지도 않은 임시정부를 건국이라고 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이승만이든 김구든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비판받아야 한다. 만약 꼭 건국절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날은 1948년 8월 15일이다. 그럼에도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만들겠다는 새누리당의 시도에는 찬성할 수 없다. 실은 건국을 1919년으로 보는 측도 그때 건국이 시작됐다고 여길 뿐이고 다만 그 완성이 1948년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통일)이라고 본다. 이런 견해에는 대체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국이 1948년에 이뤄졌다는 것도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 전체로 규정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한반도 전체의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한 결정적 전진이었지만 온전한 건국에는 이르지 못했다. 건국이 언제냐는 시점을 놓고 논란을 벌이다 보면 건국이란 말의 참된 의미를 놓치기 쉽다. 미국은 긴 세월에 걸쳐 50개 주로 확장됐기 때문에 언제 건국됐느냐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미국이란 나라가 건국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여전히 네이션빌딩(nation building)을 언급한다. 그는 “최근 다시 불거진 흑백갈등은 미국이 여전히 네이션빌딩의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낙후된 사회기반시설, 비효율적인 공교육 체제를 개선하는 것도 네이션빌딩이다”라고 말한다. 현대 국가는 국민국가(nation-state)다. 국민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이든 가난이든 어떤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는 영토와 주권이 있어도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다. 국민이 상당한 정도의 일체감을 가질 때까지 네이션빌딩은 계속돼야 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정착과 경제개발로 한반도 남쪽에서나마 네이션빌딩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민국도 여전히 네이션빌딩의 과정에 있다.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새로운 난제를 풀지 못하면 이 국가는 해체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언젠가 맞게 될 통일조차도 네이션빌딩의 완성이 아니라 더 큰 네이션빌딩의 시작이다. 건국절 제정 시도는 네이션빌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논란만 초래한다. 미국에는 독립기념일이 있고 프랑스에는 혁명기념일이 있지만 건국절은 없다. 제대로 된 나라치고 건국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통일 후에라도 광복절과 통일기념일이 있으면 되지 건국절은 없어도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김형준 부장검사(예금보험공사 파견)가 고교 동창 사업가 김모 씨에게서 수사 무마 대가로 1500만 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나와 대검찰청이 2일 감찰에 착수했다. 올해 4월 60억 원대 사기 혐의로 고소된 김 씨는 서울서부지검에 “김 부장의 스폰서였고, 1500만 원을 김 부장에게 빌려줬으나 받지 못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김 부장검사는 김 씨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자 4월 서부지검 수사 담당 검사 및 부장검사와 식사자리까지 마련했다. 김 부장검사는 김 씨에게 빌린 돈을 갚았다고 주장하지만 당당히 갚을 돈이라면 왜 올 2월과 3월 술집 종업원 계좌와 A 변호사의 부인 계좌를 통해 돈을 받았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보다는 사업하는 동창이 검사 동창에게 수시로 향응·접대를 하는 ‘스폰서’ 역할을 했고,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방패막이가 돼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서부지검은 자체 조사 결과 실제 청탁이 오간 것은 없다고 밝혔으나 이 역시 석연치 않다. 김 부장검사가 괜히 담당 검사와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6월경 또 개별 접촉을 가졌겠느냐 말이다. 대검찰청이 5월에 서부지검으로부터 김 부장검사의 비위를 보고받고도 석 달이나 감찰 착수를 미룬 것도 납득되지 않는다. 대검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더 명확히 조사할 것을 지시했고, 서부지검에서 2일 상세한 보고를 해서 감찰에 착수했다고 해명했지만 군색하다. 적당히 깔아뭉개려다가 지난달 영장이 청구된 김 씨가 ‘스폰서 검사’를 폭로하고 다니자 부랴부랴 감찰에 착수한 게 아닌가. 김 부장검사는 검사 출신인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외동사위다. 대검이 검찰 대선배인 박 전 의장을 의식해 감찰에 소극적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스폰서 검사는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만큼이나 고질적인 비리다. 2010년 스폰서 검사 사건 때문에 특임검사제가 도입됐고 천성관 당시 검찰총장 후보자는 낙마했다. 그런데도 스폰서 문화가 남아있다니 지난달 31일 대검이 발표한 ‘법조비리 근절 및 청렴 강화 방안’이 무색해진다. 이번 감찰도 돈을 준 사람의 폭로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김수남 검찰총장이 관련 보고를 못 받았다면 ‘바지저고리 총장’이고, 알고도 감찰을 미적거렸다면 개혁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란 말의 창시자는 프랑스의 생시몽이다. 그는 개인주의에 반대해 사회주의란 말을 사용했다. 후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반대해 공산주의란 말을 사용했을 때 이전의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로 격하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마중물로서 의미가 있다. ▷북한 조선노동당이 1946년 제1차 당 대회 이후 채택한 당 규약에는 공산주의란 말도 사회주의란 말도 없었다. ‘부강한 민주주의적 조선독립국가 건설’이 목표였다. 북한 정권을 수립한 뒤 처음 열린 1956년 제3차 당 대회 이후에서야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공산주의 사회주의란 말이 당 규약에 등장했다. 1970년 제5차 당 대회 이후 김일성 주체사상이 당 규약에 등장했지만 어디까지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나란히 함께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2010년 제3차 당 대표자 회의를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당 규약에서 삭제했다. 이로써 김일성 주체사상이 유일지도사상이 됐다. 김정은은 2012년 제4차 당 대표자 회의를 통해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새로운 유일지도사상으로 삼았다. ▷북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이 최근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전신은 사로청으로 불리던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이다. 북한 사회단체 및 조직 중 유일하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명칭에 쓰고 있는 조직에서 사회주의란 말이 사라졌다. 김일성-김정일주의가 있는데 따로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무슨 주의를 들먹이는 것 자체를 불손하다고 보는 것일 수 있다. ▷북한은 정권의 2인자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화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절대 왕조보다 더한 체제다. 김일성 주체사상이 당 규약에 등장할 때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조선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이라는 설명이라도 달렸다. 그러나 김일성-김정일주의가 무슨 다른 주의에 의해 정당화돼야 한다면 그 자체가 최고존엄에 대한 모독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체제 자폐증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우병우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진퇴를 둘러싼 기(氣)싸움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것이었다. 우 수석과 넥슨 사이에 정말 비리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속 의혹이 번져 논란이 되는 만큼 우 수석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옳다는 입장과 의혹만으로 물러나면 계속 의혹만으로 물러날 수 있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입장이 대립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잊고 있던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느닷없이 끼어들면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다툼은 법적 유무죄의 문제로 바뀌었다. 그것도 우 수석의 본건(本件) 의혹이 아닌 별건(別件) 의혹에 대한 법적 유무죄의 문제로 바뀌었다.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냐는 한쪽이 완전히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 법적인 문제가 되면 유죄이거나 무죄이거나 둘 중 하나다. 액체적인 정치적 사건을 고체적인 법적 사건으로 만든 것이 그의 어리석음이다. 법적인 유무죄만 다뤄온 상상력 부족한 검사가 제1호 특별감찰관에 임명됐다. 그는 자기 직무영역에 들어온 의혹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자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정작 진경준 인사 검증 실패나 진경준을 매개로 한 서울 강남땅 매매라는 본건은 감찰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자 그는 돈키호테처럼 본건이라는 괴물 대신 별건이라는 풍차를 향해 돌진했다. 어느 기자가 산초가 돼 ‘칼을 뺐다가 그냥 집어넣으면 당신이 다친다’며 부추겼을 수도 있다. 아니면 검사 시절부터 몸에 밴, 본건 수사가 안 되면 먼지떨이식 별건 수사를 해서라도 반드시 기소한다는 못된 습관이 발동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수사 의뢰한 이유가 뭔가를 밝혀내서가 아니라 밝혀내지 못해서라고 한다. 기상천외한 이유다. 특별감찰관은 범죄행위가 명백할 때는 고발을 한다. 수사 의뢰는 범죄행위가 명백하지 않고 수사해 봐야 알 수 있을 때 한다. 고발이 아니라 수사 의뢰에 그쳤다는 것은 여기저기서 나온 의혹을 모아서 검찰에 전달한 수준이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실제 이상의 어마어마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특별감찰관 수사 의뢰의 초라한 실상이다. 그는 감찰에 진전이 없었던 이유가 우 수석의 영향권 아래 있는 기관들의 비협조 때문이라는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다면 감찰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경찰부터 우 수석까지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감찰 방해 행위로 고발하는 것이 우선일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사실 압수수색도 계좌추적도 못 하는 특별감찰관이 얼마나 협조를 얻어야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에게는 우 수석이 혐의가 있다는 쪽으로도, 혐의가 없다는 쪽으로도 진상을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그것이 그가 감찰에 착수했을 때 빠져들었던 함정이다. 그는 고발도 무혐의 처분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출구는 ‘모르겠으니 검찰이 수사해 달라’는 길밖에 없었다. 그에 의해 우 수석의 의혹에 대해 완전히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본래 이 그림의 근경(近景)에는 우 수석 처가의 서울 강남땅 매매가 있고 의경 아들 꽃보직 특혜니 가족기업 ‘정강’의 회삿돈 유용이니 하는 것은 원경(遠景)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원경에 있던 것이 근경을 차지하고 근경에 있던 것이 원경으로 밀려났다. 우 수석이 꼭 물러나야 국정이 잘될 것이라는 주장도 아집에 불과하고, 우 수석이 꼭 있어야 국정이 잘될 것이라는 주장도 아집에 불과하다. 기싸움의 뒷면에서는 양쪽에서 다 음습한 공작의 냄새까지 풍긴다. 그래도 겉으로나마 정치적 올바름을 놓고 공방할 때는 서로 압박에 밀려 물러선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물러설 방법을 모색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제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또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특별감찰관이 끼어들면서 사태는 한쪽이 져야 끝나는 정면대결로 치닫게 됐다. 지난 대선에서 특별감찰관제를 공약으로 내건 것도, 특별감찰관법을 만든 것도, 이 특별감찰관을 1호 특별감찰관으로 임명한 것도 박근혜 대통령이다. 이 정권의 누구 하나 특별감찰관제가 어떻게 기능할지 예상이나 했던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우 수석이 자리에서 내려와 모든 의혹에 대해 결백을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아름답지만 속물적인 여인 데이지의 남편이자 개츠비의 연적인 톰 뷰캐넌이란 인물이 나온다. 뷰캐넌은 ‘매년 여름이 더 더워진다’고 불평하는데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뜨거운 여름은 살인의 클라이맥스로 끌고 가는 또 하나의 등장인물이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를 출판한 것은 1925년이다. 지구온난화라는 말도 생기기 전이지만 그때도 사람들은 세상이 매년 더 더워진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세계 평균 기온 관측을 시작한 1880년 이래 올 7월이 가장 더운 달로 기록됐다. NASA의 지표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자료로 인용되는 권위 있는 지표다. 이 지표는 1951∼1980년을 준거로 삼아 이 기간의 평균 기온으로부터 높은 쪽으로 0.01도씩 벗어날 때마다 1점, 낮은 쪽으로 0.01도씩 벗어날 때마다 ―1점을 부가한다. 올 7월의 지표는 84점으로 역대 최고다. 준거 기간보다 평균 기온이 0.84도 높았음을 의미한다.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된 1925년의 7월 지표는 ―29점이다. NASA가 관측을 시작한 1880년 이래 1939년까지 60년간 7월의 지표는 단 한 차례만 플러스였고 모두 마이너스였다. 1940년부터 플러스가 점차 늘기 시작하더니 1977년 이후로는 지금까지 40년간 단 한 차례만 마이너스였고 모두 플러스였다. 온난화의 원인이 자연적인 순환 과정인지 인간 활동인지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온난화 자체는 확실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7월은 우리의 7월과 비교하면 평균 기온이 1도 이상 낮았다. 그러나 당시는 뉴욕 가정에 에어컨이 보급되기 전이라 덥게 느꼈을 수 있다. 지난달 누진제로 인한 전기료 폭탄이 무서워 더워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여름이 더울 뿐 아니라 습한 데다 많은 사람이 대도시 아파트에 사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켜지 않고는 생활이 힘들어졌다. 에어컨 가동을 상수로 놓고 전력 발전과 요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작은 나라는 사대(事大)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사대를 현대적 용어로 큰 나라와의 동맹으로 정의한다면 작은 나라의 존립은 예나 지금이나 ‘자주국방’보다는 큰 나라와의 동맹에 의해 결정된다. 사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지만 나쁜 사대가 있다. 조선시대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권세를 누렸던 김자점이란 자가 있다. 친청(親淸)파인 그는 효종이 즉위 후 송시열을 중용해 북벌(北伐)을 추진하자 좌천됐다. 그러자 그와 아들 김식은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을 추진한다고 청에 밀고했다. 청을 움직여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하려 한 김자점 부자의 행태야말로 더러운 사대라고 할 수 있다. 북벌론은 실제 북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국내적으로 청에 대한 복수(復讐) 의식을 보존하면서 자강(自强)을 모색하는 슬로건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어찌 됐건 북벌론을 둘러싼 싸움은 조선 땅에서 조선인끼리 해야 할 것이었다. 북벌론이 또 다른 호란을 불러오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최소한 청에 고자질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에서 권세를 누릴 대로 누린 김자점 부자가 자기 살겠다고 한 짓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반대하는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 6명이 중국을 방문했다. 지금 중국에서 관변 학자의 뻔한 얘기를 듣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납득했을지 모르겠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와 자매지들이 일제히 사드 배치를 극렬히 비판하는 가운데 관영 매체인 환추시보는 더민주당 초선 의원들의 방중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것도 이용해 먹기만 했을 뿐이다. 의원들에 대한 접대 수준은 급을 못 맞춘 사신을 대하는 하대(下待)에 가까웠다. 겨우 초선이냐, 오려면 문재인 전 대표라도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민주당은 비겁하게도 사드 배치에 대한 당론을 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정당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중한 의원들은 중국에 갈 게 아니라 당을 움직여 사드 배치 반대 당론부터 정하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여론을 얻기 위해 싸워도 싸워야 한다. 사드 배치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결정은 우리가 한다. 중국의 힘을 이용해 우리 정부에 압박을 가하려는 태도는 김자점 부자의 행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더러운 사대가 어디 김자점뿐이었겠는가. 인조 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난이 실패한 후 후금(청의 전신)으로 피신해 광해군의 밀명으로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에게 “강씨 일족이 다 죽임을 당했다”고 무고하고 누르하치에게는 “민심이 인조를 떠나고 있다”며 조선 침략을 부추겼다. 한윤의 무고와 선동은 정묘호란의 원인이 됐고 기구한 운명의 강홍립은 오랑캐의 앞장을 서야 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조선이야 한 사람이 곧 나라인 왕조국가였다. 임금 눈 밖에 나면 목숨도 부지하기 힘드니까 자기들 살겠다고 그랬다고 치자.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한 사람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다. 더민주당 초선 의원들의 행태는 임금에 대한 배신행위도 아니고 종묘사직에 대한 배신행위도 아니고 국민 모두에 대한 배신행위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군주정은 명예, 독재정은 공포, 공화정은 덕성을 기초로 유지된다고 했다. 공화국의 덕성은 공화국에 대한 사랑, 애국심이다. 군주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통치하고 독재자는 공포를 이용해 통치하지 국민의 애국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화국은 애국심 없이 유지될 수 없다.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가 메달을 땄다고 기뻐하고 박수 치는 것은 값싼 애국이다. 그러나 군대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황금 같은 청춘 2년을 보내는 것은 비싼 애국이다. 성주 주민만이 아니라 돈 없고 백 없는 국민 대부분은 다 이런 애국을 해봤으니까 이해할 것이다. 한반도 어딘가에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는 데 찬성한다면 그 사드는 자기 집 뒷마당에도 배치될 수 있다고 각오해야 애국이다. 하필 성주로 결정돼 선조부터 살아온 고향 땅을 내놓아야 하는 성주 주민을 무엇으로 설득할 수 있겠는가. 돈을 퍼준다고 될까. 오직 애국심밖에 없다. 성주 주민이 그런 애국심을 보여준다면 공화국 대한민국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빅브러더(Big Brother)’와 ‘서바이벌(Survival)’이 성공을 거둔 이후 자리 잡았다. 오늘날 한국의 주말 프라임타임 TV 프로그램도 ‘무한도전’ ‘1박2일’ ‘런닝맨’ 등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대세다. 다만 한국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서구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리얼리티를 표방하지만 따져보면 드라마보다 연출이 좀 덜한 상황에서의 리얼리티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출연자도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에는 연애 리얼리티라는 분야도 있다. 미국 TV의 ‘총각들(The Bachelors)’ 같은 짝짓기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도 ‘짝’이라는 프로그램이 한때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한 일반인 여성이 짝을 이루지 못한 상심으로 녹화 중 자살하면서 폐지됐다. 이후 진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시들해지고 젊은 연예인들이 가상결혼을 하는 ‘우리 결혼했어요’, 나이 든 독신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불타는 청춘’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진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는 모르는 두 사람이 호감을 가져가는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 연예인이 등장하는 사이비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는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 안 하는 것도 아닌 불분명한 상태에 흥미를 느낀다. ‘불타는 청춘’에서 개그맨 김국진과 가수 강수지는 실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척하는 것 같기도 한 ‘썸타는’ 상황을 1년 넘게 끌어왔다. 그 두 사람이 어제 사귄다고 밝혔다. ▷진짜 커플은 ‘우리 결혼했어요’에선 불발에 그쳤는데 ‘불타는 청춘’에서는 나왔다. 일반인 남녀가 녹화 도중 호감을 느껴 사귀게 된 것 같은 리얼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나이가 들어 더 노골적으로 된 ‘청춘’들이 이것저것 잴 것이 많은 젊은 청춘보다 더 자기감정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연애가 리얼리티가 되면 시청자의 흥미는 사라지고 당사자는 퇴장해야 한다. 두 사람도 이 법칙을 피해 가기는 어려울 듯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 칼럼은 ‘본지를 포함한 대다수 언론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는 양해를 구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우병우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의 처가 땅 매매를 둘러싼 의혹이 돌아가는 꼴이 정윤회 문건 때와 비슷하다. 정윤회 문건은 액면 그 자체로 찌라시 수준이었으나 세상을 흔들었다. 문건은 ‘∼라고 한다’는 전문(傳聞)체로 돼 있는 데다 누구의 말인지도 나와 있지 않았다. 십상시 같은 비유적 표현에 10명의 인물을 짜 맞추려 한 흔적이 결정적으로 의심스러웠다. 문서 작성자가 경찰 조사에서 ‘(한눈에 띄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미행’ 운운했을 때는 실소마저 나왔다. 우 수석 처가가 상속받은 서울 강남땅을 넥슨에 팔았다는 보도는 의혹이 있다고 보기 시작하면 있고, 없다고 보기 시작하면 없는 그런 수준이다. 1000억 원대의 부동산 거래라는 게 대체로 복잡해서 이렇게 보면 이렇게,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인다. 우 수석 처가와 넥슨 사이에 매매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진경준은 ‘우병우-넥슨 거래’ 다리 놔주고, 우병우는 진경준의 ‘넥슨 주식 눈감아줬다’는 프레임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제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못하고 농지법 위반이니, 아들 꽃보직이니 하며 다른 의혹을 뒤진다는 것 자체가 강남땅으로는 역부족이라는 무언(無言)의 인식을 보여준다. 우 수석이 진경준의 검사장 승진 당시 넥슨 주식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못한 것을 두고 물러나라고 한다면 기꺼이 한 표를 던지겠다. 그의 안이한 판단으로 하마터면 130억 원 가치의 뇌물을 받은 범죄자를 놓칠 뻔했다. 특별감찰관의 감찰이 진행되고 있으니 결과를 지켜보자. 농지법 위반 등도 사실로 드러나면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 수석이 진경준을 매개로 넥슨과 뭔가 주고받은 게 있어서 물러나라고 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언론은 전지(全知)적 작가가 아니다. 언론은 아직 우 수석과 넥슨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 모른다. 진경준의 넥슨 주식 매입 자금 4억 원은 그가 자기 돈으로 마련했다고 했을 때부터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좋다는 주식도 전망만 보고 사는 이상 리스크가 큰 금융 상품인데 월급쟁이 공무원인 검사가 자기 돈 4억 원을 선뜻 투자하기 어렵다. 결국 이 돈은 넥슨에서 받은 돈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우 수석 처가의 땅 매매에는 진경준의 ‘4억 원’처럼 손에 확 잡히는 단초가 없다. 계약 당시 현장에 없었던 것처럼 말한 우 수석의 거짓말이란 것도 본(本)과는 거리가 먼 말(末)에 해당하는 것으로, 괜한 의혹을 불러일으켜 추가 설명을 하는 부담을 덜기 위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거짓말이다. 언론이 허구한 날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의견 대립을 보일 때는 그게 큰 문제인 것 같더니 이제 언론이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한 방향으로만 폭주하는 것을 보니 오히려 이게 더 무섭다. 설혹 내 판단이 틀려 망신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르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두고 싶다. 언론과 대통령은 지금 무용한 기 싸움을 하고 있다. 권력과 싸운다는 자체가 정의도 뭐도 아니다. 그러나 누가 원인을 제공했든 이 무용한 기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정도 되면 결국 진실이 무엇인지로 결판낼 수밖에 없다. 사실 대통령도 전지적 대통령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진실이 뭔지 모르는 것은 언론과 마찬가지다. 언론도 대통령도 모르는 진실 앞에서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우 수석으로서도 자신이 떳떳하다면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고 싶을 것이다. 지금 언론이 우 수석을 향해 물러나라고 하는 이유는 진경준 검증을 소홀히 했다는 점잖은 수준이 아니다. 진경준이 넥슨과의 거래를 다리 놔준 대가로 진경준의 넥슨 주식을 알고도 눈감아줬다는 파렴치한 의혹으로 물러나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물러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형(重刑)을 살게 해야 한다. 어차피 우 수석이 고소해서 시작된 수사다. 그가 수석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수사 결과를 사람들이 믿어줄 리도 없지 않은가. 우 수석과 박 대통령은 우 수석의 사퇴 자체가 나쁜 선례를 남긴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억울해도 지금의 순리는 우 수석은 사표를 내고 박 대통령은 처리하는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으나 선거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에 구로구청 선거부정 항의 농성사건이라는 그늘도 있었다. 1000여 명이 연행되고 200여 명이 구속됐다. 농성 진압 직후 구로구청 5층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하거나 구청 지하 기관실에서 질식해 사망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사실무근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서울대생이 투신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당했다. ▷사건의 발단은 1987년 12월 16일 대선 투표 당일 오전 서울 구로을 선관위원들이 수상한 부재자 우편투표함을 트럭에 싣고 구로구청을 나서려 한다는 제보에서 비롯됐다. 시민과 학생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투표함은 이들의 선관위 점거 44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선관위로 넘겨졌다. 이후 투표함은 봉인된 채로 지금까지 보관됐다. 한국정치학회는 내년 민주화운동 30주년을 앞두고 선관위의 협조를 얻어 어제 29년 만에 투표함을 열었다. ▷개표 결과 4325표 중 노태우 3133표(72.4%), 김대중 575표(13.3%), 김영삼 404표(9.3%) 순으로 나왔다. 당시 구로을 전체로는 김대중 6만6204표(35.7%), 노태우 5만2076표(28.1%), 김영삼 4만7078표(25.4%) 순으로 득표했다. 당시는 부재자 투표를 일반 투표와 혼합해 개표했기 때문에 부재자 득표율은 따로 집계된 게 없다. 이번 개표에서 노태우의 득표율이 너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구별로 비교해볼 수 없어 구로을 선관위원들이 우편투표함을 조작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디선가 부정투표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당시 군(軍)에서는 광범위한 부정이 자행됐다. 육군 모 사단 장교 3명이 이를 공개했다가 정보사로부터 린치를 당했다. 나도 당시 같은 부대에서 근무해서 사정을 안다. 선거부정은 중대장이나 대대장 앞에서의 사실상 공개투표로 행해졌고 대리투표도 있었다. 구로구청 농성사건 덕분에 당시 군 부대 선거부정을 증명해줄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남았다고 생각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결정의 순간’에는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부시 대통령은 2005년 12월 뉴욕타임스(NYT) 발행인인 아서 설즈버거 2세와 편집국장 빌 켈러를 백악관으로 불러 테러리스트 감시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 게재 보류를 요청했다. 백악관은 NYT의 기사 게재를 이미 한 번 막은 적이 있다. 멀리 1971년 국방부의 베트남전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 얘기가 아니다. 부시 대통령이 게재 보류를 요청한 바로 그 기사를 놓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 마이클 헤이든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나서 NYT를 설득해 한 번 보류시켰다. NYT가 다시 기사를 게재하려 하자 이번에는 부시 대통령이 설즈버거 발행인을 상대로 직접 설득에 나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NYT가 테러리스트 감시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면 적들이 안보와 관련한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설즈버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기사 게재를 보류해 달라고 촉구했고 설즈버거는 내 요청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고 썼다. 설즈버거와 켈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NYT는 열흘 뒤 기사를 게재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과 김시곤 KBS 보도국장 사이의 전화 통화 내용이 얼마 전 공개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전 수석의 전화를 받고 김 전 국장은 밤 9시 뉴스에 내보낸 기사 한 꼭지를 밤 11시 뉴스에서 뺐다. 기사는 ‘세월호 침몰 둘째 날 해군의 재투입이 해경 때문에 황금시간을 놓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NYT의 설즈버거는 자기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국가 안보와 직결된 기사의 게재를 보류해 달라고 촉구하던 부시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했다. KBS는 그러지 못했다. NYT는 백악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만 KBS는 청와대의 눈치를 봐야 하지 않느냐는 반박이 나올 만하다. 맞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김 전 국장이 이 전 수석과의 전화 통화 중 변명하듯 말한 것처럼 KBS 조직 내부의 성격상 정말 중요한 기사였으면 국장이라도 함부로 뺄 수 없다. KBS는 노조의 감시가 강한 조직이다. 이 전 수석의 요구는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사를, 그것도 이미 한 차례 보도가 된 기사를 빼달라는 것이었으니까 김 전 국장이 티 안 나게 빼줄 수 있었다. 둘이 짜고 몰래한 좀도둑 짓에 언론의 자유라는 거창한 자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우습다. KBS는 일방적으로 정권에 당하는 조직이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다만 KBS와 정권의 관계가 어떨 때는 가학적이고 어떨 때는 피학적일 뿐이다. KBS는 문창극 보도에서는 악마의 편집을 하며 가학적인 입장에 섰다. 이 전 수석과 김 전 국장의 통화를 듣고 있노라면 가학-피학 관계가 교차되는 두 남자를 보는 묘한 느낌이 든다. 이 전 수석은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계속 봐달라는 식으로 읍소를 하고, 김 전 국장은 수세적인 것 같으면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보도지침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일방통행식 관계는 없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밑에서 공보국장을 지낸 앨러스테어 캠벨은 ‘블레어 시대(The Blair Years)’란 책을 냈다. 이 책은 캠벨이 평소 쓴 일기를 발췌해 엮은 것이라 공보국장의 일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일기에는 캠벨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사나 방송사의 책임자들과 통화하면서 언론 보도에 대응하는 얘기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홍보수석이란 자리도 그런 일을 하는 자리다. 부시처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기사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이다. 그 예외적인 순간에 설즈버거는 대통령의 요청에 ‘고려해 보겠다’고 답했다. 예의상 한 말이든 진짜 고려해 보겠다고 한 말이든 큰 차이는 없다. 권력의 요청이 애초 터무니없다고 여기면 예의상으로 고려해 보겠다고 말하는 것이고, 일리가 있다고 여기면 그것까지 고려해서 판단하는 것이다. 이 ‘고려해 보겠다’는 말 속에 가학-피학 관계를 넘어선 권력과 언론의 정상적 관계가 들어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랠프 월도 에머슨은 19세기 중반 미국이 공업사회로 진입하던 시기에 활약한 시인이다. 그가 언급했다는 ‘더 좋은 쥐덫’은 혁신의 힘을 상징하는 은유로 널리 쓰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7일 청와대에서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하며 “어떤 시인의 유명한 글귀가 있다”면서 “‘더 좋은 쥐덫’을 만든다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취지로 에머슨의 시를 언급했다. 에머슨이 1882년 죽기 전에 실제로 ‘더 좋은 쥐덫’을 언급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상용 쥐덫은 그가 죽은 뒤에 사용됐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미국의 울워스라는 쥐덫 회사는 한번 걸린 쥐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 예쁜 모양의 플라스틱 쥐덫을 만들어 발전시켰다”라고 덧붙인 말이 화근이었다. 미국에선 에머슨이 했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발명가들이 앞다퉈 쥐덫을 개량하는 바람에 쥐덫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특허가 나온 상품이 됐다. 그중 대부분은 성공한 듯 보였으나 실패한 혁신이었다. 그 예쁜 쥐덫도 쥐와 함께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쥐만 버리고 씻어 쓰기는 찝찝한 상품이 되고 말았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더 좋은 쥐덫의 오류’라고 부른다. ▷많은 언론이 박 대통령의 잘못된 인용을 조롱했다. 실은 조롱한 언론도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다. 예쁜 쥐덫을 만든 것은 울워스사가 아니라 1928년 미국 동물트랩사(Animal Trap Co. of America)의 체스터 M 울워스 사장이다. 오늘날 생활용품 업체 울워스(Woolworth)사가 쥐덫을 만들긴 하지만 울워스 사장은 울워스사와는 관련이 없다. ▷LG CNS의 홍보 사이트에는 ‘더 좋은 쥐덫의 오류’를 설명한 글이 올라와 있었는데 거기에는 울워스사의 체스터 울워스 사장이라고 돼 있다. LG CNS는 현재 이 글을 삭제했다. 삭제 이유가 대통령을 곤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오류가 있어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대통령도 틀리고 LG CNS도 틀리고 언론도 틀렸다. 모두 다 잘 모르는 걸 아는 체하다 보니 일어난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로마 시민은 소득세를 내지 않는 대신 병역의 의무를 졌다. 국가는 군인들에게 봉급을 주지 않고 숙식만 해결해줬다. 시민은 전쟁에 필요한 칼 방패까지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로마의 정치인, 즉 원로원 의원은 봉급 같은 건 받지 않았다. 오히려 퇴역하는 군인의 연금을 위해 상속세를 냈다. 정치나 전쟁은 모두의 것(res publica·공화국)을 위한 일이어서 시민이 기꺼이 무보수로 해야 할 일로 받아들였다. ▷독일 학자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보면 두 종류의 정치인이 등장한다. 정치를 부업(副業)으로 삼는 정치인과 주업(主業)으로 삼는 정치인이다. 전자는 대개 무보수이고 후자는 유급이다. 베버는 보수가 별 의미가 없던 부유한 명사(名士)들 중심의 정치에서 리더를 중심으로 정당 조직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로의 변화를 우려와 기대가 함께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국회의원의 겸직 허용은 ‘부업으로서의 정치’의 잔재다. 프랑스에서는 의원들이 지방자치단체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고 영국 의원도 거의 모든 직업에 겸직이 허용된다. 반면 미국은 세비의 15% 이상을 외부에서 벌 수 없고 일본은 세비의 절반 이상을 벌면 신고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변호사 교수 사장 이사 등의 겸직을 아예 금지한다. 우리나라 세비는 연 1억4000만 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인당 국민소득 대비 3번째로 높다. 겸직 금지를 감안해도 높다.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가 어제 국회 연설에서 세비를 절반으로 줄일 것을 제안했다. 국민은 10%나 20%는 몰라도 절반 축소는 현실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박수를 보냈다. 사실 세비는 의원을 유지하는 데 드는 경비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반값 국회’를 만들려면 친인척까지 데려다 쓰는 보좌진을 7명에서 서너 명으로 줄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의당으로서는 세비 절반을 내놓을지언정 정치에 매달려 먹고사는 직업 보좌관들을 줄이기는 더 어렵다. 노 원내대표가 그 일에 앞장선다면 더 큰 박수를 받을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