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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자기 시대의 예언자를 갖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몰락을 내다본 예언자 이사야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운명을 피해 보려 노력했으나 그 노력이 오히려 신탁의 예언대로 귀결됐다. 점을 보는 것과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크게 다를 것 같지만 과학의 목적도 결국 예측하는 것이라고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말했다. ▷하루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그래서 앞을 내다보려는 욕구는 더 집요하다. 미래학자는 현대판 델포이 신전의 사제들이다. 앨빈 토플러는 그 신전의 제사장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지식 정보 사회를 미리 내다보고 유전자 복제, 퍼스널컴퓨터(PC)의 파급력, 인터넷 발명, 재택근무 등을 예견했다. 한때는 모든 사람이 토플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의 책 ‘미래 충격’ ‘제3의 물결’ ‘부의 미래’ 등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토플러는 미국 뉴욕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공활(공장 활동)에 나섰다. 그는 5년간 알루미늄 제조 공장의 용접공으로 일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시와 소설을 써보려 했으나 소질이 없었다. 대신 노조가 후원하는 신문사에 자리를 얻어 경영과 기술 분야의 칼럼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나중에 경제전문지 포천에서도 일했다. 이후 IBM 제록스 AT&T에서 컴퓨터의 사회적 파급력 등을 연구하면서 이상한 운명에 의해 미래학자가 됐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이버 인프라 구축, 지식 기반 경제로의 전환, 생명공학 투자, 교육제도 개혁 등을 권고했다. 2006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는 바이오, 뇌과학, 하이퍼 농업, 대체에너지 등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제시했다. 그를 헨리 키신저나 새뮤얼 헌팅턴처럼 위대한 학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에게는 학자보다는 구루(guru·선생)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지혜로웠던 구루가 지난달 27일 별세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뭘 하겠다고 나서면 겁나는 사람들이 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1987년 학문적으로는 족보가 없는 ‘경제 민주화’란 말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람이다. 그가 얼마 전 국회 원내 교섭단체 연설에서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내각제 개헌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경제 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란 말은 있다. 그 말을 옛 유고 공산주의식 ‘노동자 자주(自主) 관리’의 의미로 쓴 과거 예일대의 로버트 달 같은 진보적 정치학자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경제 민주화를 이런 뜻으로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쓰는 사람 입맛대로 쓰고 있다. 의미의 과잉은 문학에서라면 몰라도 법에서는 곤란하다. 김종인은 과대평가된 주식과 같다. 경제학자 출신인 그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사이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쓴 책이라고는 신통치 못한 잡설을 모은 것 말고는 거의 없다. 체계적인 책은 1980년 ‘재정학’이 유일하다. 부자에게 세금을 많이 거둬 나눠 쓰자는 간단한 얘기를 700쪽 넘게 지루하게 늘어놓은, 아무도 인용하지 않는 책이다. 헌법은 기본권과 통치구조를 다룬다. 헌법은 공정거래법이 아니다. 제헌헌법부터 들어있던 ‘경제’라는 촌스러운 장은 87년에 이르러서는 없애야 마땅했다. 그것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더 장황하게 만든 장본인이 김종인이다. 그가 이번엔 87년 헌법의 문제점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 ‘승자 독식 권력 구조’를 들고나왔다. 이제 통치구조에까지 손을 대겠다니 난감할 따름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인식에 반발한 사람은 뜻밖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 “지금의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을 걱정하는 것보다 오히려 대통령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과 권력적 기반으로 인해 주어진 헌법적 기능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을 더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87년 헌법을 낳은 민주화 이후에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불법 정치자금을 움직여 국회에서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노무현 이후 이런 것은 사라졌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임기 전반에는 지지 기반을 유지하다가도 후반에는 지지 기반이 이탈하면서 레임덕에 빠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 건 대통령들의 인식일 뿐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런 경우에도 국회가 대통령을 향해 제왕적이라고 할 때는 조심해서 들어야 한다. 백낙청 전 창작과비평 대표는 2014년 창비 겨울호의 ‘큰 적공(積功), 큰 전환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국회의 개헌 논의에 대해 “오로지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87년 체제의 최대 기득권 집단 가운데 하나인 국회의원들끼리 추진하는 개헌이라면 기득권자의 담합 이상이 되기 어렵다”고 썼다. 국회에서 나오는 개헌 얘기는 내각제란 말이 앞에 붙어있지 않아도 내각제 개헌으로 새겨들어야 한다. 87년 헌법으로 최대 기득권 집단이 되고, 2012년 국회선진화법을 통해 여야가 기득권을 나눠 갖는 시스템까지 만들어 놓은 국회는 대통령령 수정권, 수시청문회 개최권 등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권한 강화를 추진해왔다. 내각제 개헌 추진은 이참에 국회가 아예 대통령을 해먹겠다는 것이다. 헌법이 정한 개헌 절차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국회가 직접 발의해 국민투표로 가는 경로와 대통령이 발의해 국회를 거쳐 국민투표로 가는 경로다. 국회 권한을 강화하는 데는 여야가 한통속이다. 대통령에 의해 거부된 국회의 대통령령 수정권, 수시청문회 개최권은 여당이 승인하거나 앞장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여당을 믿고 손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국회가 움직이면 대통령도 움직여야 한다. 대통령은 나라의 현자(賢者)들을 모아 독립된 기구를 만들어 헌법 개정안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협치(協治)라는 번드르르한 포장재로 내각제로 가는 길을 닦고 있는 국회에 개헌의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 국회는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바꾸는 대(大)변화를 감당할 전문성도 없는 데다 국회의 저열한 지적 수준과 책임 의식, 특권 집착과 갑질 관행을 고려하면 내각제는 우리나라에는 국가적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재명 성남시장이 “정부가 매년 성남시 돈 1051억 원을 뺏아가려 한다”고 주장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주일 넘게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정부가 지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재정이 넉넉해서 정부 교부금을 주지 않는 불교부(不交付) 지방자치단체가 기초단체 시군 중에는 경기 성남 수원 용인 화성 고양 과천시 등 전국에 단 6개가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니까 경기도가 지원할 필요도 없지만 실제로는 지원한다. 문제는 경기도내 다른 25개 시군보다 이들 6개 도시에 더 많은 돈이 지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은 이들 6개 도시에 경기도 교부금을 우선 배분한다는 경기도의 이상한 조례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경기도 교부금 2조6000억 원 중 52.6%인 1조4000억 원이 이들 6개 도시에 배분됐다. 이 조례가 없었다면 이 중 5244억 원은 다른 25개 시군에 배분됐을 것이다. 정부는 지금 이 조례의 근거가 된 지방재정법 시행령을 고치려 한다. 인구가 비슷한 성남과 부천을 비교해 보면 경기도의 교부금 배분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알 수 있다. 2015년 성남시의 자체 수입은 1조80억 원, 부천시의 자체 수입은 5799억 원이다. 인구는 성남시가 14% 많을 뿐이지만 자체 수입은 73%가 많다. 여기에 더해 경기도로부터 받는 돈은 성남이 2545억 원이고 부천이 982억 원이다. 성남은 ‘불교부’ 단체이니까 정부로부터는 한 푼도 받지 않고 부천은 1155억 원을 받는다. 정부와 경기도의 교부금을 합치면 성남은 2545억 원, 부천은 2137억 원을 받는다. 여전히 성남이 400억 원 이상 많다. 성남이 자체 수입도 훨씬 많은데 외부에서 지원받는 돈까지 많다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 정부 교부금은 정부가 국세(國稅)로 거둬들인 돈의 일부를 나눠주는 것이고, 경기도 교부금은 경기도가 도세(道稅)로 거둬들인 돈의 일부를 나눠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장이 정부가 뺏어간다고 주장하는 1051억 원은 굳이 뺏어가는 주체를 찾는다면 정부가 아니라 경기도다. 그렇다면 경기도가 뺏어간다는 건 사실인가. 그것도 아니다. 도세로 거둬들인 돈이니까 원래 경기도의 돈이다. 성남에 가서는 안 되는 돈이 잘못된 조례에 의해 성남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성남의 세수가 1051억 원이 줄어들면 성남시가 모라토리엄 시절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기업으로 치면 순이익에 해당하는 순세계잉여금(純歲計剩餘金)이 성남의 경우 2014년 7400억 원, 2015년 6500억 원에 이른다. 수원 용인 화성 고양 과천도 부러워하는 액수여서 성남시가 쉬쉬하고 있다. 엄청난 돈을 남기면서도 ‘1051억 원이 줄어들면 축소·폐지될 수 있는 시민을 위한 사업들’로 ‘청년배당 중단’ ‘산후조리비 지원 중단’ ‘중학교 무상교복 지원 중단’ 등 40여 가지 사업을 거론하며 시민을 협박하고 있다. 이 시장은 2010년 취임하자마자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그는 자기가 시정을 잘해서 모라토리엄을 극복하고 잉여금을 쌓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시장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이전 시장들을 깎아내리기 위한 쇼였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길어 시민단체인 좋은예산센터 김태일 소장이 쓴 책의 한 구절만 인용하겠다. “성남시에서 겨우 5000억 원 때문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은 성급했다. 성남은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기초자치단체이기 때문이다.” 성남에는 호화 신청사를 짓는다고 펑펑 써댄 5000억 원을 충분히 갚을 만한 세수가 이미 그때부터 있었다. 철거민의 도시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성남이 부자도시가 된 것은 성남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정부와 경기도가 세금 감면 혜택이나 인프라 확충 같은 지원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멀리 분당 신도시 개발부터 가까이 판교 테크노밸리 조성까지의 혜택을 성남시가 독차지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경기도 교부금을 조정하는 것은 개인으로 치면 부유한 사람에게 잘못 간 세금 혜택을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과 같다. 이 시장은 입만 열면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인 것처럼 말해온 사람이 아닌가. 이 시장이 자신과 성남의 가난했던 옛 시절을 잊어버리고 못된 스크루지 행세를 해선 안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현대적인 미국 백악관 시스템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때만 하더라도 참모라면 전화를 연결하는 비서이거나 타이프라이터였다. 루스벨트가 참모조직을 확대하고 직속기관을 늘려가자 우려가 나왔다. 그때 그가 참모들을 옹호하기 위해 한 유명한 말이 ‘익명의 열정(passion for anonymity)’이다. ▷우리나라에는 ‘익명의 열정’이 미 중앙정보국(CIA)의 모토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 말은 미국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든 직속기관의 비공식 모토나 다름없었다. 이 말에서 영감을 얻어, 1961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첫 수장을 지낸 김종필이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의 첫 원훈(院訓)을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원훈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꿨다. CIA의 공식 모토 ‘국가의 일, 정보의 중심(The Work of a Nation, The Center of Intelligence)’처럼 단순하지만 단단한 맛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원훈이 너무 무미건조하다고 봤는지 2008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으로 고쳤다. CIA의 비공식 모토라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에 나오는 용어를 교묘하게 뒤섞은 느낌이 든다. ▷박근혜 정부가 원훈을 다시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바꿨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은 학문적 종교적 뉘앙스까지 느껴져 정보기관의 공식 모토로서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소리 없는 헌신’은 ‘익명의 열정’을 현대화한 말로는 ‘무명의 헌신’보다 어감이 좋다. 다만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는 사족(蛇足) 같다. 국정원이 정권 아닌 대한민국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조하는 말 같기도 하다. 모토만 바꾼다고 실체가 바뀌지 않는다. 실체가 바뀌어야 CIA처럼 수십 년 지나도 바뀌지 않는 모토가 나올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대 이집트 무덤에서는 고양이부터 악어까지 갖가지 동물 미라가 나오지만 닭 미라는 없다. 닭은 남아시아의 밀림에서 인도를 거쳐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를 통해 유럽까지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시경(詩經)에서부터 닭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성경만 해도 양이나 소, 돼지 얘기는 많이 나오는데 그에 비해 닭 얘기는 별로 없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200억 마리의 닭이 산다. 닭이 없는 지역은 펭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살아 있는 닭의 반입을 금지하는 남극뿐이다. 닭은 알을 많이 낳고 해충도 많이 잡아먹는다. 닭은 ‘닭고기 수프’ ‘백숙’ ‘프라이드치킨’ 등 갖가지 형태로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식용되는 육류로 ‘지구의 단백질’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아직도 닭이 귀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 닭 10만 마리를 보내기로 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게이츠는 닭을 기르고 파는 것이 가난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이며, 하기는 쉽고 돈은 적게 드는 좋은 투자라고 강조했다. 5마리의 닭을 기르면 1년에 1000달러(약 116만 원) 이상을 벌 수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최저 수준의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빈곤선은 700달러(약 81만 원) 정도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선 국민의 41%가 빈곤선 아래에서 산다. ▷시간을 돌려 보면 먼 아프리카 얘기만도 아니다. 과거 우리나라도 닭은 장모가 사위나 와야 잡아 주는 귀한 음식이었다. 우리나라가 새마을운동으로 빈곤을 극복하는 데 양계사업이 큰 도움이 됐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은 아프리카에서 닭을 보급하고 사육을 지도하는 데 앞장서 왔다. 지금도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에는 부룬디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의 공무원들이 교육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 중 우간다에서는 아프리카 최초로 새마을운동 지도자 교육시설이 문을 열었다. 게이츠의 닭 기부와 우리의 사육 지도가 결합한다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 같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인도 출신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의 ‘논쟁적인 인도인’이라는 책을 보면 인도인은 천성적으로 말이 많다. 유엔에서 회자되는 얘기 중에 ‘국제회의에서 의장에게 가장 힘든 일은 인도인의 말을 그치게 하는 것과 일본인이 말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영어 실력의 차이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인도인은 너무 말이 많고 일본인은 너무 말이 적으니까 그런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말 많은 것과 논쟁과는 연관이 깊다고 본다. 프랑스나 독일만 해도 시내버스를 타면 조용한 편이다. 누가 떠들면 앉아 있던 노인들이 먼저 눈총을 보낸다. 영국의 시내버스는 상당히 시끄럽다. 프랑스나 독일만 해도 교사들이 영어권 국가와 비교하면서 학생들의 질문이 적다는 불평을 많이 한다. 우리나라는 질문이 더 없다. 수업은 질의응답이 아니라 주입식 강의 위주다. 강의에 대한 질문도 단순히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면 모르되 논리적 허점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남아 있어 더 그렇다. ▷과학전문지 네이처가 최근 ‘왜 한국은 세계 최고의 연구개발 투자국인가’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제목을 ‘한국은 세계 최고의 연구개발 투자국인데도 왜 노벨과학상을 못 타는가’로 바꾸는 게 나을 것 같다.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과 미국을 앞섰고 유럽연합(EU)과 중국에 비해서는 2배 수준이다. 그런데도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없다. 제시된 다양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연구실에서 토론이 활발하지 못하고, 이런 특징이 학교 교육에서부터 비롯돼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이 노벨문학상이나 노벨과학상을 타지 못해 안달이 난 게 세계에 널리 알려진 모양이다. 올 1월 미국 시사문예지 뉴요커는 “한국인은 책도 안 읽으면서 노벨문학상만 바라고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네이처는 활발한 토론도 하지 못하는 나라가 노벨과학상만 바라고 있다고 지적한 셈이다. 높은 데만 쳐다보지 말고 어디 서 있는지도 내려다 볼 필요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편집증을 가진 사람은 타인이 자신을 박해하거나 악의를 가지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에 시달리며 불안해한다. 편집증이 정신병적 단계에 이르면 조현병(調絃病)이라고 부른다. 강남 ‘묻지 마 살인’ 사건은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여성 혐오’로 규정하고 끝까지 억지를 부리는 것 역시 편집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살인자는 체포된 직후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가 정신병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럼에도 여성 혐오로 몰아가는 몰이는 계속됐다. 한 신문은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 붙은 포스트잇 1000여 건을 촬영해 일일이 문자화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추모공간을 만들어 기념하겠다며 포스트잇을 통째로 서울시로 가져갔다. 색깔이 붉은 훈제 청어(레드 헤링)는 냄새가 독해 사냥감을 쫓던 개가 그 냄새를 맡으면 혼란을 일으켜 사냥감을 놓치게 된다. 여성 혐오라는 잘못된 규정은 레드 헤링 효과를 일으켜 올바른 의제 설정을 방해했다. 정신질환자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처할 것인가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뒷전이 됐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문제로 보는 쪽을 여성 혐오 동조자로 몰아가는 태도다. 경찰은 “정신질환자의 범죄이지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한 뒤 여성 혐오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2년 한 정신질환자가 서울 광진구에서 교회 주차장을 통해 들어가 교회 부설 유치원의 아이들을 칼로 찌른 사건을 취재한 적이 있다. 유치원은 외부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허용돼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그 유치원은 길가에서 바로 교회 주차장을 통해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게 돼 있었다. 정신질환자는 김일성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숨을 곳을 찾아 교회로 들어갔고 준비해 간 칼도 아닌 유치원에 있던 과도로 아이들을 찔렀다. 그가 “아이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식으로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김일성으로 보였다면 이것은 아동 혐오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질환자 관리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근대화를 속성(速成)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도시’의 특징을 정확히 이해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도시는 익명적이다. 바로 앞집에 사는 사람이 뭘 하는지도 모른다. 그 익명성 때문에 지하철을 타면 자기 옆에 앉은 사람이 정신질환자나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는 곳이 도시다. 도시의 삶은 정신질환자나 범죄자의 적절한 격리를 조건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을 쓴 프랑스 학자다. 그가 독창적이었던 것은 서구에서 근대화 초기에 발생한 정신질환자나 범죄자의 격리에 주목하고 그런 격리를 서구 근대화의 한 주요한 특징(물론 그에게는 극복해야 할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에 취약한 것은 여성이 아니라 약자 일반이다. 약자에는 어린이와 청소년, 노인, 장애인도 포함된다. 어떤 경우에는 유치원생이 피해자가 됐고, 어떤 경우에는 여성이 피해자가 됐다. 서구 선진국의 대도시 도심에도 남녀 공용 공중화장실은 많다. 남녀 공용 공중화장실을 없애면 여성이 타깃이 된 범죄가 줄어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해답이 될 수 없다. 범죄는 여성 공중화장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해답은 여성이 아니라 정신질환자에 주목할 때 찾을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일간베스트(일베)와는 대척점에 있으면서 여성 일베라고도 불리는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유명해졌다. 메갈리아와 같은 사고방식에 동조한 여론이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단정했고, 더 이상 단정하기 어렵게 되자 경찰을 비판했고, 경찰도 비판하기 어려우니까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권 침해를 들고 나왔다. 편집증은 어떤 생각에 한번 사로잡히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증상이다. 살인자는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한번 여성 혐오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어떤 진실에도 귀 기울이지 않은 것 역시 편집증적인 증상이다. 누구나 망상은 갖는다. 그러나 정상인은 사실에 맞춰 망상을 수정할 줄 안다. 그래서 정상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를 직접 봤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본 것은 진짜 라스코 동굴도 아니었는데 그렇다. 1963년 프랑스 문화장관 앙드레 말로는 라스코 동굴의 폐쇄를 결정했다. 그러고 만든 것이 원래 위치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벽화는 물론이고 동굴을 통째로 본뜬 ‘라스코2’다. 눈을 가린 채 안내돼 동굴 안에 선다면 진짜 라스코인지 라스코2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말도 있다. ▷1만7000년 전 구석기 시대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에서 미술의 황금기가 펼쳐졌다. 선사학에선 마들렌 문화라고 부른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라스코 동굴 벽화가, 스페인 북부에서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가장 유명하다. 구석기시대 화가는 사냥꾼이었다. 사냥꾼은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석기시대 농사꾼에겐 더 이상 사냥꾼의 예리한 감각은 필요치 않았다. 구석기인의 재현 능력은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사라지고 근대 인상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완전히 회복된다. ▷라스코 동굴 벽화가 경기도 광명동굴에 전시되고 있다. 한국에 온 것은 ‘라스코3’다. 라스코3는 라스코2가 미처 복제하지 못한 부분을 복제했다. 진짜 라스코를 볼 수 있었던 때도 폐쇄돼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동굴의 깊숙한 부분이 있었다. 그곳에 ‘헤엄쳐 강을 건너는 다섯 마리 사슴’과 ‘들소 앞에 넘어진 새 얼굴을 한 사람’을 그린 유명한 벽화가 있고 그것을 라스코3가 복제한 것이다. 라스코2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라스코3가 국제 전시용으로 쓰인다. ▷광명동굴은 일제강점기 폐광을 개발해 테마공원으로 만든 곳이다. 다니엘 올리비에 전 주한 프랑스문화원장이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라스코3 전시 장소를 찾던 중 광명동굴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이곳에 전시를 제안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도 라스코 동굴에 가기는 쉽지 않다. 파리에서 자동차로 대여섯 시간 걸린다. 구석기인들이 돌도끼나 들고 왔다 갔다 하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지난달 총선 패배로 새누리당에서 다시 쇄신이 논의되고 있다. 새누리당이 뭘 개혁하겠다면 이제 겁이 난다. 4년 전인 2012년 대선 전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때도 새누리당은 쇄신에 나섰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 밑에서 황우여 원내대표가 한 대표적 쇄신이 국회선진화법이다. 이 법은 박근혜 정권을 말아먹었다. 앞으로는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말아먹는 법이 될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을 만들 때는 합의(合意)란 말이 유행했다. 이번에는 협치(協治)라는,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말이 본래의 사회과학적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유행하고 있다. 협치는 영어 거버넌스(governance)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의 거버넌스는 관(官)의 민(民)에 대한 일방적 통치(統治)와 구별되는 민과 관의 상호 대등한 협치를 말한다. 여야(與野)의 합의나 타협과는 카테고리 자체가 다르다. 그런데도 여야 정치인들은 여야의 협치 운운하며 새로운 시대정신인 양 내세우고 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국회선진화법이라는 비극으로, 한 번은 협치라는 소극(笑劇)으로. 협치를 한국식으로 해석해서 여야의 합의나 타협이라고 해보자. 협치가 결렬될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이 없는 협치는 무의미하다. 그렇게 최초의 협치 시도인 5·18 기념식에서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이 한 편의 웃지 못할 소극으로 끝났다. 과거 정치인들은 최소한 용어라도 정확히 썼다. 대통령제에서는 거국내각은 있어도 연립정부(coalition)는 없다. 박 대통령이 총리와 몇몇 장관 자리를 야당에 준다면 그것은 거국내각이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경기도에서 부지사와 몇몇 국장 자리를 야당에 주고 연정(聯政)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거국내각의 지자체판(版)이지 연정은 아니다. 연정은 의원내각제에서나 성립 가능한 개념이다. 심각한 용어의 혼란은 정치의 혼란을 그대로 반영한다. 국회선진화법은 남경필류의 비박 쇄신파가 주도해 통과시킨 것이다. 최경환 등 상당수 친박 의원들은 박근혜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이 법에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했다. 보수는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전통을 존중한다. 보수라면 합의가 되지 않을 때 과반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일상생활에 뿌리박은 민주주의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 국회의 의결정족수를 5분의 3으로 바꾸는 꼼수는 세상사의 엄중함을 아는 보수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비박은 쇄신, 친박은 반(反)쇄신으로 일률적으로 구별할 순 없다. 친박과 비박은 무엇이 쇄신인지를 놓고 싸워야지 서로를 향해 친박이니 비박이니 낙인찍는 것으로 쇄신을 대신하려 해선 안 된다. 다수의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지난달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등을 돌렸다. 친박 이한구의 공천 전횡이 꼴 보기 싫어 등 돌린 사람도 많지만 비박 김무성의 ‘옥새 나르샤’가 꼴 보기 싫어 등 돌린 사람도 많다. 진단이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올바른 처방이 나온다. 엉뚱한 얘기 같지만 수지는 왜 섹시하지 않을까. 현아는, 설현은 섹시한데 왜 수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섹시하지 않을까. 질문이 잘못됐다. 수지는 섹시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수지의 아름다움은 섹시한 데 있지 않고 우아하거나 다른 데 있다. 보수란 그런 것이다. 굳이 섹시해지려고 할 필요가 없다. 수지는 섹시해 보이려고 노력할수록 더 어색할 뿐이다. 협치니, 연정이니 하는 말로 겉멋을 부리지 않아도 보수는 아름답다. 그런 보수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보수의 혁신이다. 섹시한 보수를 원하는 의원들이 있다. 유복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내고 그 덕에 의원까지 됐다. 뼛속 깊이 보수적이면서도 보수적인 부모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고, 당을 뛰쳐나가지도 못하면서 꼰대로 보이기는 싫은 쇄신파들이 대개 그런 부류다. 그러나 보수의 가치는 시대의 유행을 좇지 않고 때로 역풍을 맞으면서도 지혜로운 원칙을 지키는 데 있다. 윈드서핑을 해보면 바람을 맞고 있는 돛을 그만큼의 힘으로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겨야 배가 나간다. 진보가 끄는 힘이 강할수록 보수는 더 당겨야 한다. 진보가 끄는데 보수가 끌려가면 배는 멈추고 곧 기운다. 정치는 길항(拮抗)의 힘으로 나아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아이는 지난해 막 중학교에 올라가 새 학기를 맞았으므로 사실 어린이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추운 3월, 아빠에게 맞아 살이 말 근육처럼 부은 아이가 티셔츠 차림으로 가출해 새벽 3시 반에 찾아간 곳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아파트였다. 아이는 정확한 호수는 알지 못했다. 경비원에게 선생님께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경비원은 늦었으니 다음 날 오라고 했다. 아이는 갈 곳이 없다며 경비실에서라도 재워 달라고 졸랐다. 아이는 이튿날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다시 ‘훔친 돈이 어디 있느냐’고 추궁했고 답하지 않자 다시 아이를 때렸다. 매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때리다가 제 손을 다쳤으나 그래도 또 때렸다. 새엄마는 아이가 달아나지 못하게 옷을 벗기고 문을 막아섰다. 아이는 5시간 동안 맞은 뒤 추운 방에 방치됐고 다음 날 아침 시신이 돼 있었다. 재판장은 격해져서 아빠에게 물었다. 아니 따졌다. “피고인, 인간인가요? 인간 맞나?” 방청석에서 흐느낌이 흘러 나왔다. 지난달 29일 인천지법 부천지원에서의 일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맞아죽은 아이는 아빠도 좋아하고 새엄마도 잘 따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기장에는 아빠에 대해 “신학대에서 교수(정확히는 시간강사)로 일하시고 독일어와 헬라어를 가르치십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썼다. 새엄마에 대해서는 “항상 저를 위해 영어 공부도 하게 해주시고 예쁜 옷도 사주셔서 감사해요”라고 적었다. 천성이 활달한 아이였던지 부모가 딸 학교 행사에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다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반장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아이에겐 도벽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게에서 껌을 훔치는 수준이었으나 친구들 가방에 손을 대더니 나중에는 돈도 훔쳤다. 부모에게는 아이의 도벽이 큰아들(19)의 도벽과 무관치 않아 더 심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축구부 합숙생활을 하면서 집 밖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못된 친구들에게서 절도를 배우고 동생에게도 가르쳤던 모양이다. 새엄마는 재판 내내 흐느꼈다. 아이는 남편의 세 자녀 중 자기를 가장 잘 따랐다고 했다. 남편이 때릴 때 말리지 않은 것에는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가 도둑질 안 하고 거짓말 안 하는 길이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후회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다만 “훔친 돈 있는 곳만 대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는데도 아이가 ‘그럼 그 돈 못 쓰죠’라고 답했을 때 나도 모르게 뺨을 때렸다. 예상치 못한 그런 반응을 보고 얘가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사고방식이 죽음에 이른 매질로 몰고 간 것은 아닐까. 누구나 이미 부부가 아이의 시신을 11개월간 집 안에 둔 데서 기괴함을 느꼈을 것이다. 새엄마는 “자고 일어나 죽은 애를 봤을 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애가 살아나서 밥도 먹고 걸어 다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성경에 부활이 있으니까 그런 기적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길 바랐다. 매일매일 옆에서 고대하며 지켜봤다. 그러나 깨어나기는커녕 몸에서 벌레가 나왔을 때 죽고 싶었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목사도 매일 시신 옆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그가 아이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어서 그랬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는 사이비 교단의 목사도 아니고 독일에서 제대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범죄가 발각돼 처벌받고 매장될 것에 대한 두려움, 버티면 얻을지도 모르는 신학대 교수 자리에 대한 욕망이 기괴한 심리로 포장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도 목사이기 전에 가장이다. 처갓집 식구를 포함해 교인 20명에 불과한 개척교회의 목사이고 47세의 나이에도 아직 시간강사다. 경제적 여력이 없다 보니 부인은 어학원에서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부부는 세 아이 중 하나도 직접 돌보지 않았다. 큰아들은 가출했고 큰딸(16)은 독일 지인에게 보냈고 죽은 딸은 장모와 처제에게 맡겼다. 아무리 어려운 가장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부부는 죽은 아이에게 마지막 말을 하라는 재판장의 주문에 “널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해 미안하다. 널 사랑한 건 틀림없는데… 용서해 다오”라고 말했다. 사랑했는데도 죽이다니,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한숨만 나오는 완전한 실패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올 3월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신랄하면서도 탄탄한 논리로 로스쿨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법무부가 사법시험 폐지 4년 유예안을 발표했을 때 서울대 로스쿨 교수 59명 전원 명의의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1인 성주(城主)들이 모인 교수사회는 의견이 난분분(亂紛紛)한 곳인데 최고 대학의 교수들이 군대나 회사처럼 일사불란한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서명한 어느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로스쿨이 이대로 가도 된다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노 코멘트’라고 답했다. 서울대만이 아니라 전국 25개 로스쿨 전체가 똘똘 뭉쳤다. 이 침묵의 카르텔을 깬 것이 신 교수의 책이다. ―왜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인가. “로스쿨 교수들은 과거 법학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환경에서 강의를 한다. 로스쿨 인가를 받기 위해 각 대학은 수십억 원의 돈을 들여 새 건물을 짓고 부대시설을 꾸몄다. 교수들은 1주일에 고작 6시간 수업을 하고 웬만하면 억대 연봉을 받는다. 반면 로스쿨 학생들은 로스쿨이 본래 예정한 실무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법률시장으로 나온다. 용케 법원 재판연구관이나 검사로 임용되거나 유명 로펌에 들어간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얼치기 변호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돼있다.”2류 변호사 만드는 로스쿨 ―다른 로스쿨 교수들 반응은 어떤가. “책 내용에 대해 전제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면 제가 반박을 하고 또 비판한 쪽에서 재비판을 하면서 논쟁을 벌일 텐데 그런 비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책 내용이 맞다는 것이다. 막연히 제 책이 로스쿨을 흠집 내기 위해 쓴 것이라는 비판은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신 교수는 판사 10년, 변호사 5년을 거쳐 법대 교수 재직 17년째를 맞고 있다. 판사 변호사 교수의 경력을 고루 갖춰 로스쿨 문제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로스쿨이 벌써 8년째인데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이제 와서 바꾸기 어려운 것 아닌가. “나는 로스쿨 교수로서 8년을 쭉 지켜봤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전혀 없다. 저처럼 실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법대도 잘 아는 입장에서 볼 때 로스쿨 제도는 절대로 그대로 가서는 안 된다. 하루빨리 지혜를 모아서 새로운 법조인 양성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도 로스쿨인데, 뭔가 법조인 양성에 새로 기여한 점이 있지 않겠나.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전공의 다양성만 해도 과거 사법시험에서 합격자를 50, 60명을 뽑을 때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타당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1000명씩 뽑으면서 그런 비판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1000명 시대에는 비(非)법학 인문계 출신만이 아니라 이공계 출신도 많이 들어왔다.” ―로스쿨은 부유층에 유리한가. “그렇다. 변호사가 되기 위한 진입장벽이 사법시험 때보다 부유층에 훨씬 낮아졌다. 로스쿨 교육과정은 소홀하지만 유력한 부모를 둔 학생은 나중에 좋은 로펌에 들어가 일하면서 제대로 된 실무교육을 받고 법조인으로 커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집 자녀들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채 2류 3류 변호사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야 한다.”친노가 금수저 돕는 아이러니 ―그런 제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나. “로스쿨은 노무현 정부하에서 이뤄진 사법개혁 중 하나다. 대륙법계 국가인 우리나라가 미국식 로스쿨을 모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지 논의는 있었으나 심각한 고민을 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당시 사법개혁위원회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공식석상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보다 먼저 미국식 로스쿨을 받아들인 일본의 경험에 관한 논의도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누가 주도했나. “1998년 진보정권이 들어선 뒤 기득권층에 재빨리 진입한 ‘진보귀족’들이 사법개혁을 주도했다. ‘한건주의’에 집착한 이들에 의해 미국식 로스쿨 도입 결정이 이미 굳어진 상태에서 이를 추종한 진보 성향 교수들이 운영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도입에 앞장섰다.” 로스쿨 입학에서부터 로펌이나 재조 취업에서 돈 많고 권세 있는 유력 인사들의 자제에게 유리하다는 의혹이 여전하다. 이런 금수저 논란을 무릅쓰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로스쿨 수호에 전투적으로 앞장서는 교수들은 대체로 친노(친노무현) 성향 교수들이다. 서울대의 한모, 조모 교수가 그렇고 경북대의 김모 교수가 그렇다. 신 교수의 책에 “‘○○○ 변호사 아들이 우리 로스쿨에 원서를 냈는데 꼭 합격시켜야 한다’며 동료 연구실을 찾아다니는 교수가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300여 쪽의 책에 나오는 이 한 문장이 거센 논란의 발단이 됐다. 불명예를 떠안게 된 경북대 로스쿨은 신 교수에게 학교의 명예를 위해 ‘청탁 교수가 누구인지’ ‘청탁 학부형과 학생을 밝히라’고 요구한 반면, 로스쿨 공격의 빌미를 잡았다고 여긴 사법시험 존치 모임 쪽은 경북대 로스쿨을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 조사를 받았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 나는 공공연한 청탁이 행해진다는 사실을 지나가듯 지적했을 뿐이다. 그것은 책의 큰 주제와도 별 상관이 없다. 경북대 로스쿨은 내가 실명을 밝히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징계 조치하겠다고 압박했으나 해당 학생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경찰 조사에서도 끝까지 익명을 지켰다. 그런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해당 학생과 학부모, 청탁 교수가 누구인지 알려지고 언론에도 이니셜로 보도됐다. 내가 공개한 것은 아니지만 실명이 밝혀진 학생과 학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느 교수가 청탁하고 다녔다는 것과 그 학생이 부정입학했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 일로 또 다른 모함에도 휩쓸렸다는데…. “한 언론이 로스쿨 변호사 모임이 받은 제보라며 ‘신 교수가 청탁 학생의 입학사정 당시 면접위원 3명 중 한 명이며 이 학생에게 변호사 자녀라고 밝히도록 유도하고 다른 면접위원 2명과 달리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준 것도 바로 신 교수’라고 보도했다. 내가 그 학생의 면접위원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느거 아버지 뭐하시노’라고 물은 면접위원은 따로 있다. 내가 현장에 있었으니 누가 물었는지 안다. 그러나 밝히지 않겠다.” 신 교수는 지난달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책을 내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 인생에 있어서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는 소회의 글을 올렸다. “휘슬블로어는 고통스럽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많은 판사가 당연하다는 듯 골프 칠 때도 난 골프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판사들에게 참 좋은 때여서 많은 것을 누렸다. 변호사를 하면서는 가족들이 무난히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 다음에 과거 법학부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진 로스쿨에서 나 역시 지금까지 그 혜택을 누렸다. 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향유했고 다른 미련도 없다. 이 싸움을 마지막 소명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 환갑을 넘겼다. 이 일이 끝나면 내 할 일은 다했다고 본다.” ―이번에 싸우는 조직은 대학인가. “그렇다. 법원 바깥에서 법원을 잘 모르듯이 대학 바깥에선 대학을 잘 모른다. 대학 바깥에서는 대학을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조직으로 보고 있지만 내가 본 바로는 그렇지 않다. 로스쿨은 3년 안에 법학이론과 실무수습의 과정을 거쳐 우수한 법조인을 양성할 수 있다고 했으나 거짓이다. 어느 나라도 이런 식으로 법조인을 양성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과중한 수업 부담과 빈약한 법 실무교육 끝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법률시장으로 밀려 나온다. 도대체 법조를 이토록 망가뜨려 놓고 어쩌잔 말인가.”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대학의 자율성이란 미명하에 로스쿨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방치나 다름없다. 교육부는 로스쿨 8년 동안 전혀 감독을 하지 않다가 로스쿨 금수저 논란이 생기니까 뒤늦게 입학과정을 전수(全數) 조사한다고 나섰다. 일본만 해도 법조인 양성제도 개혁회의에 관방장관이 의장, 법무상과 문부상이 부의장이 돼 계속해서 로스쿨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개입한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신 교수는 대법원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에 이어 서열상 넘버2, 넘버3인 이인복 이상훈 대법관과 서울대 법대 동기다. 얼마 전에 후배들이 두 대법관과 합동으로 자신의 환갑상을 차려준 사진을 보여주며 뿌듯해했다. 후배 중에는 유남석 광주고법원장, 이광범 변호사도 보인다. 지난겨울 두 대법관 중 한 명이 신 교수에게 “이번에 책을 낼 때는 다른 사람 마음 상하지 않게 하라”는 충고를 했던 모양이다. “당시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말이 계속 생각났다. 내가 공연한 일을 하는 게 아니냐는 자책이 터진 자루에 물 새듯 흘러내렸다. 하지만 내가 이 사회를 위해 꼭 해야 할 역할을 포기할 수 없다는 내면의 소리를 억제할 수 없었다.” 환갑이 지난 지긋한 나이에 신 교수는 내부를 향해 또 한번 휘슬을 불었다. 법원에서 첫 번째 그가 불었던 휘슬 소리는 나중에 법조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러 갈래의 목소리와 합쳐져 사법개혁에 힘을 보탠 바 있다. 로스쿨에서 두 번째 그가 분 휘슬은 과연 금수저 논란에 휩싸인 로스쿨 개혁이라는 결실로 이어질 수 있을까.▼신평 교수는▼1956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문사철’에 관심이 깊었다. 198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간 판사로 재직했다. 1993년 한 주간신문에 돈 봉투가 오가는 법원의 현실을 고발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1994년 대구경북 지역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대법원장과 싸우다 나왔다는 꼬리표가 붙은 그에게 개업 초기엔 사건 의뢰가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절치부심 노력한 끝에 대구경북 지역에서 사건 수임 1위를 기록했다. 변호사를 5년 남짓 했을 때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변호사 수입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교수의 길로 들어섰다. 한강 이남에서 판사를 지낸 사람으로 대학교수가 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2006년 경북대 로스쿨로 옮겼다.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2003년 열린우리당 경북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정무특보 이강철 씨와 갈등을 빚은 끝에 정치라는 짧은 외도를 접었다. 시집 ‘산방에서’를 낸 문인협회 회원. 고(故) 조영래 변호사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내부고발자’에서 ‘트러블메이커’까지. 그에 대한 재조(在曹) 내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에서 예수승천일은 공휴일이다. 일요일인 부활절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어서 늘 목요일이 된다. 그래서 다음 날을 징검다리 휴일로 만들어 4일 연속 쉰다. 프랑스 근로자는 국경일 휴일과 징검다리 휴일을 합해 모두 8일을 쉴 수 있다. 올해는 주말과 겹치지 않은 국경일 휴일이 8회여서 징검다리 휴일은 정해진 유급 휴가일수에서 빼야 한다. ▷일본에는 4월 29일 쇼와의 날, 5월 3일 헌법기념일, 5월 4일 녹색의 날, 5월 5일 어린이날 등 공휴일이 이어진 골든위크가 있다. 올해는 중간에 낀 평일 이틀을 쉬면 열흘 연속 쉴 수 있다. 관공서는 징검다리 날에 쉬지 않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쉰다. 다만 근로자는 연차나 월차에서 쉰 날을 제해야 한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내수 진작을 위해 금요일인 5월 6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 상의가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건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8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 어린이날부터 4일 연속 쉴 수 있다. 임시 공휴일이 되면 인건비는 그대로인데 생산일수는 줄어든다. 그러나 팔리지도 않는 상품을 생산만 하면 뭐 할 것인가. 다만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열리는 것도 아닌데 ‘내수 진작’ 같은 기준으로 임시 공휴일을 만들면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겨우 1주일여 남겨 놓고 임시 공휴일이 되면 기업이나 학교가 부랴부랴 연초 계획을 변경하는 혼란은 어쩔 것인가. ▷공(公)휴일은 말 그대로 또 법적으로도 관(官)이 쉬는 날이다. 기업은 단체협약을 통해 공휴일을 유급 휴일로 삼을 뿐이다. 기업은 공휴일이 아니라도 근로자를 쉬게 할 수 있다. 노동절이 그렇다. 선진국에서 징검다리 휴일에 쉬는 것은 먼저 기업이 근로자에게 휴가를 주고 그런 관행을 학교와 관공서가 가능한 범위에서 따라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관공서가 쉬어야 기업들도 따라 쉰다는 생각이 뿌리 깊다. 기업들이 새 관행을 만들어 본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모처럼 4일 연휴를 맞게 될 근로자들의 즐거움을 훼방할 뜻은 없지만 따질 것은 따져보자는 이야기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민주주의를 숫자로 표시한다면 1도 아니고 3분의 2도 아니고 5분의 3도 아니고 2분의 1이다. 언뜻 생각하면 만장일치, 즉 1이 가장 민주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만장일치를 추구하다 보면 논의가 길어져 제때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또 그 결정으로 손해 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 결정이 가져올 혜택보다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세상에는 애당초 합의 불가능한 일이 많다. 매사 만장일치는 천국이나 혹은 사이비 천국(공산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적시성과 효율성, 현실가능성을 고려해 따져갈 경우 민주주의의 숫자는 2분의 1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얼마 전 대선 결선투표를 제안했다. 결선투표는 과반의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이 어느 정도의 표를 얻어야 당선될 수 있는지 따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초등학교 교실에서 반장 뽑듯이 대통령 후보자 중 1위를 대통령으로 뽑고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민주적 정당성 확보에 문제가 있다. 영국 독일 일본 등 의원내각제 국가는 총선에서 제1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 연정을 통해 과반(過半)을 만들어 정부를 구성한다. 과반의 지지를 얻을 때에만 그 정부에 민주적 정당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 같은 대통령제 국가는 결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에게 과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1차 투표에서 1, 2위 득표를 한 후보자만 2차 투표에 진출해 최종 당선자를 가린다. 의원내각제 국가나 대통령제 국가나 실행 방식은 다르지만 사고방식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영어의 머조리티(majority)를 별생각 없이 다수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머조리티는 정확히 말하자면 1위 다수가 아니라 과반을 의미한다. 머조리티의 반대쪽, 즉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마이노리티(minority)다. 민주주의는 머조리티의 지배, 즉 머조리티가 마이노리티에 부과하는 강제다. 반대로 마이노리티가 머조리티를 강제하면 그것은 왕정이거나 귀족정이거나 소수당의 독재다. 국회선진화법처럼 5분의 3의 합의를 요구하는 것은 5분의 2보다는 많지만 2분의 1에는 미치지 못하는 마이노리티가 머조리티를 강제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5분의 3은 더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反)민주적인 것이다. 미국 상원에는 합법적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 절차가 있고 이를 중지시키려면 3분의 2의 합의가 필요하다. 미국만의 독특한 제도다. 이것은 미국 상원이 민주적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미국 와이오밍 주의 인구는 59만 명에 불과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인구는 3914만 명에 달해 약 67배 차이가 난다. 그러나 와이오밍 주도 캘리포니아 주도 상원의원은 똑같이 2명이다. 작은 주들이 연합해 과반을 만들어봐야 민주적인 과반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3분의 2를 요구한 것이다. 인구수에 따라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하원에는 이런 제도가 없다. 마찬가지로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우리나라 국회에도 적용돼서는 안 된다. 우리 헌법은 간혹 3분의 2의 합의를 요구한다. 헌법 개정 같은 몇몇 경우가 있다. 3분의 1보다는 많지만 2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마이노리티의 의사를 특별히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경우 그렇게 한다. 국회선진화법은 헌법처럼 미리 정해진 어떤 특정한 사안에 가중(加重) 다수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사안에나 두루 적용되는 일반 절차에서 가중 다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반민주적이다. 헌법재판소가 이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선진화법을 되돌리는 데 부정적이던 더불어민주당의 이종걸 원내대표가 전향적인 자세로 나왔다. 총선 결과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표를 합치면 과반이 된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정책 유사성도 높다. 더민주당이 국회선진화법으로 19대 국회 내내 국정의 발목을 잡아오다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자 돌아서니 염치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국회선진화법을 되돌리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이 이 망국(亡國)의 법을 고칠 절호의 기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KBS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목숨을 건 작전마다 생사를 함께한 송중기(유시진 대위 역)와 진구(서대영 상사 역)의 관계를 ‘브로맨스’라고 부른다. 브로맨스는 브러더(brother)와 로맨스(romance)의 합성어로, 통상적인 우정 관계를 뛰어넘은 남자들끼리의 관계를 말한다. 성적인 암시가 없다는 것이 동성애와의 차이다. 이 말은 1990년대 미국 스케이트보드 전문 잡지에서 처음 쓰였다고 한다. 많은 시간 함께 스케이트보드를 탄 남자들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요즘은 정치 기사에도 이 말이 쓰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5년 인도를 방문했을 때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의 관계가 언론에서 브로맨스로 표현됐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6일 미국 워싱턴 세계은행에서 김용 총재를 만나 “요즘 브로맨스라는 말이 있는데 저와 김 총재의 관계는 그보다 훨씬 깊고 넓다”라고 말했다. 서양인들에게 둘러싸인 국제기구에서 한국말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둘만의 각별한 사이를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브로맨스의 상대편에는 로맨스가 있다. 지금은 흔해 빠졌지만 로맨스가 문학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양 중세의 영웅 문학은 물론이고 코르네유의 비극까지만 해도 로맨스는 영웅 스토리에 밀렸다. 라신의 시대에 와서야 로맨스가 승리했다. 19세기 ‘에르나니’에서 ‘시라노 드베르주라크’까지 낭만주의 문학에서 로맨스는 신성시됐다. 20세기에 와서 로맨스는 ‘천국의 아이들’에서 ‘타이타닉’까지 영화를 통해 더 넓은 무대를 차지했다. ▷브로맨스는 새로운 가치다. 과거 영웅들은 서로 싸우는 영웅들이었지 협력하는 영웅들이 아니었다. 우정은 사랑보다 어렵다. 남자들은 상대를 제거할 대상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상명하복의 관계에 묶어두려는 경향이 강하다. 새누리당은 서로를 향해 배신의 말을 퍼붓다 함께 망했다. 남자들끼리도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협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우정의 정치가 힘들다면 제대로 된 선의의 경쟁이라도 해야 살아남는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 문학은 대개 영어를 잘 아는 한국인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다. 반면 영문학은 영어를 잘 아는 한국인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된다. 이런 비대칭성이 한국 문학을 외국에 소개하는 데 장애가 된 게 사실이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 박사과정 학생인 데버러 스미스 씨가 한국어를 배워 직접 영어로 번역했다. 영어권 독자들에게 가 닿는 감동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한강이 ‘The Vegetarian(채식주의자)’으로 영국 맨부커 국제상의 최종 후보 6명에 들었다. 최종 후보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도 포함됐다. 맨부커 국제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불리는 맨부커상의 자매상이다. 맨부커상은 영연방 작가에게, 맨부커 국제상은 비(非)영연방 작가와 번역자에게 주어진다. 수상자는 다음 달 16일 발표된다. ▷평범한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다. 아내는 구두조차 가죽 제품이라 해서 버릴 정도로 채식에 집착한다. 아내는 어린 시절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비참하게 도살돼 자신도 강제로 먹어야 했던 개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야수성을 감지한 그녀는 처벌의 한 형태로 자기파괴를 시작한다. 초식(草食)으로도 모자라 차라리 식물이 되기 원했던 아내가 병원에 실려가 (아마도 아내에 의해) 목덜미를 물어뜯긴 새를 쥐고 있는 장면은 인간의 근원적 야수성을 고발하듯 섬뜩하다. ▷2014년 5·18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온다’가 나왔을 때 한강의 작품을 처음 읽었다. 2011년 ‘희랍어시간’이 나왔을 때는 도입부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져 읽다 말았다. ‘채식주의자’는 훨씬 전인 2007년 나왔다. 읽지 않고 있다가 맨부커 국제상 후보에 올랐다고 해서 뒤늦게 읽었다. 이 작품의 가치를 진작 알아보고 고른 번역자의 안목이 놀랍다.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작가가 좋은 번역자까지 만났으니 상복도 따랐으면 좋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영향력이 큰 자리라는 말을 듣는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면 세계 자본시장이 요동친다. 물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자리는 대통령이다. 11일 미국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경제대통령 재닛 앨런 연준 의장이 만났다. 두 사람은 2014년 옐런이 의장이 된 해에도 한번 만났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과 중앙은행장이 독대하는 경우는 없다. 오마바 대통령과 옐런 의장의 회동은 우리로서는 낯선 장면이다. ▷지금 세계 경제의 관심사는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을 지속할지 여부다. 두 사람의 면담이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26∼27일)를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기준금리에 대한 언급이 오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기준금리 거론은 독립적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연준 의장의 권한을 침해한다”며 “비록 비공개 면담이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했다. ▷만일 박근혜 대통령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민감한 시기에 만났다면 한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졌을 것이다. 미국 언론은 “두 사람이 미국의 중·단기 경제전망과 세계 경제의 잠재 위험요인에 대해 논의했다”는 백악관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눈치다. 미국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믿음은 확고한 반면 우리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는 그만큼 확고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연준과 한은은 법이 설정한 목표에 차이가 있다. 연준법에는 ‘최대 고용’과 ‘물가 안정’이라는 상반된 목표가 동시에 주어져있다. 한은법에서는 ‘물가 안정’이 최우선 목표로 돼 있다. 한은의 목표가 이렇게 협소해진 것은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의 특수한 상황에서다. 물론 한은이 고용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법으로 명확히 목표가 주어져야 정부와의 갈등도 줄어들고 한은의 독립성도 높아진다. 그래야 미국처럼 대통령과 중앙은행장이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올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유권자들은 광복 후 처음으로 어느 정당을 과반으로 만들어줘도 의미 없는 총선을 앞두고 있다. 직전 2012년 총선만 해도 유권자들은 한 정당에 과반 의석(150석)을 부여한다는 현실 가능한 목표를 위해 투표했다. 국회선진화법에서는 5분의 3 의석(180석)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한 정당이 180석을 차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권력 분점이 사실상 예정된 상황에서 어느 특정한 정당의 후보를 지지한다는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지난 총선에서 복지를 둘러싸고 벌였던 치열한 정책 대결 같은 것은 사라졌다. 국회선진화법에서는 내가 새누리당의 정책을 지지해 새누리당 후보를 뽑아준다고 해서 그 정책이 국회에서 반영된다는 보장이 없다. 내가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을 지지해 더민주당 후보를 뽑아준다고 해서 그 정책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는 보장도 없다. 각 당의 각기 다른 정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총선을 치르고 있다. 총선이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평가라는 것도 옛날 얘기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실의에 빠지고 서민들은 전월세가 치솟아 더 먼 교외로 밀려나는데도 야당의 ‘경제실패론’에는 별 반향이 없다. 국회선진화법은 정책 실패의 원인을 대통령과 집권당에 돌리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대통령과 집권당은 야당 때문에 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야당은 합의할 수 없는 법을 만들어와 그랬다고 주장한다. 유권자로서는 법을 시행해보지도 않았으니 어느 쪽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책임정치 자체가 실종됐다. 의원은 세비 1억5000만 원 외에 보좌진 인건비 등을 포함해 연간 7억 원이 넘는 돈을 지원받는다. 의원이 되면 공항 귀빈석 이용 등 200여 개의 특전이 주어진다. 국회선진화법에서는 야당도 여당에 하등 뒤질 바 없는 영향력을 지닌다. 권한은 많고 국민에게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 친박이니 비박이니, 친노니 비노니 하면서 안면몰수하고 싸우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살다 살다 이런 막장 공천은 처음 본다고 말한다. 이런 총선에서 유권자는 의원을 뽑기 위해 동원되는 거수기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제 집으로 배달된 선거관리위원회의 후보자 관련 자료를 훑어보면서 의원들만 좋은 투표를 왜 해야 하는지 나 자신을 설득하기 힘들었다. 국회선진화법을 되돌리지 않고는 선거도 국회도 정상화할 수 없다.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180석 이상을 얻어 국회선진화법을 고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헌법재판소는 가능한 한 이번 국회 임기가 끝나는 5월 말까지는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결정을 내릴 계획이다. 그러나 헌재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는 말자. 몇몇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의장을 상대로 제기한 것은 헌법소원이나 위헌법률 심판이 아니라 권한쟁의 심판이다. 헌재는 권한쟁의 심판에서 위헌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 국회의장이 법률에 따라 거부한 직권상정을 국회의원에 대한 권한 침해로 결론 내리기도 어렵지만, 그런 결론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 전제가 된 법률을 위헌이라 하기는 더 어렵다. 하지만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국민의당의 분당을 이끌어낸 것도, 국민의당이 더민주당과의 단일화를 거부하게 만든 것도 국회선진화법이다. 국회선진화법은 뜻밖에도 제3당이 제2당보다 더 중요한 정당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국민의당은 정확히 이런 길을 보고 창당됐다.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이 합해서 180석 이상을 차지할 경우 국민의당이 더민주당을 제치고 새누리당과 국회 권력을 분점하게 된다. 국회선진화법은 당분간 고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실패로 판명난 새누리당과 더민주당의 조합보다는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의 조합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어쩌면 국민의당과 필사적으로 야권의 주도권을 다투는 더민주당이 국민의당을 무력화할 방법으로 국회선진화법의 일부 개정에 찬성하는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새누리당으로서도 잠재적 대권 후보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견제할 수 있어 좋다. 여러 전제가 충족돼야 할 얘기이지만 이번 총선에서 그래도 의미를 찾는다면 이런 희미한 가능성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유승민 의원이 지난해 ‘국회법 파동’으로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사퇴할 때 헌법 1조 1항을 들이대더니 그제 탈당 때는 헌법 1조 2항을 거론했다.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2항)로 구성된다. 2항은 국민이 대통령과 국회를 선출한다는 의미다. 유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국회의원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뽑는 것”이라며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기치를 들어 항의한 것이다. ▷헌법은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또 국민과 국회의원 사이에 반드시 정당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헌법에서 정당은 기본이 아니라 선택 사양이다. 정당은 프리미엄일 뿐이다. 대구 유권자들에게는 유 의원이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뽑을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라진 것은 유 의원이 지금까지 여당 텃밭에서 누렸던 다디단 프리미엄이다. ▷물론 프리미엄을 주거나 뺏는 것도 공정해야 한다. 유 의원이 지난해 원내대표 시절 대통령의 행정입법권을 제한하려고 한 것은 삼권분립을 훼손할 심각한 오류였다. 그렇다고 그의 정체성이 보수 정당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다고 보긴 힘들다. 그런 의원이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고 지역구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 공천하는 것이 상식에 맞다. 정당은 연대다. 도저히 함께하지 못할 만큼의 이념 차이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덧셈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거창한 구호는 후보가 부당하게 체포되거나 자택 연금되던 독재 시대에나 어울린다. 지금은 유권자가 후보를 뽑을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후보가 유권자에게 뽑힐 기회를 박탈당하는 시대가 아니다. 유 의원이 떼놓은 당상(堂上)을 뺏긴 것인지도 견해가 엇갈리는 데다 툭하면 헌법 운운하는 것은 ‘꽃신 신고 꽃길만 걸어온’ 사람이 운동권 흉내 내는 것 같다. 2008년 공천에서 ‘학살’된 친박은 거친 들판으로 뛰쳐나가 프리미엄 없이 당선됐고 결국 권력을 접수했다. 억울해도 ‘얼라’가 아니라 어른이면 그렇게 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친노(친노무현)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20일 분노로 달아올랐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비례대표 2번 셀프 공천이 밝혀진 날이었다. 친문(친문재인)으로 불리는 신(新)실세 친노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 글에서 “법정관리인으로 초빙된 김종인이 ‘대표이사’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던 그가 다음 날 오후 김 대표의 순번이 14번으로 조정된 지 몇 시간 뒤에는 돌변했다. 그는 “14번은 김 대표에게 모욕을 준 것”이라며 “순위는 그분에게 맡기는 것이 예의”라고 썼다. 원조 친노 문성근 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20일 김 대표의 “비례대표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과거 발언 기사를 링크하며 김 대표의 말 바꾸기를 비판했다. 이어 다음 날 오전 김 대표가 비대위 회의에 불참하는 등 당무를 거부하자 “후안무치도 유분수”라고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더니 그날 밤에는 “우리에게는 승리가 목표다. 김 대표의 비례 2번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며 돌아섰다. SNS로 이런 드라마틱한 표변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건 드문 일이다. 마치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21일 밤 12시 가까운 두세 시간 사이에 김 대표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존중으로 바뀌었다. 사실 김 대표에게 비례 2번을 제안한 것은 문재인 전 대표였다. 김 대표는 1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 전 대표가 1월 자신을 영입하러 왔을 때 비례 2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문 전 대표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저라도 김 대표를 상위 순번에 모셨을 것”이라며 앞서 그런 제안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친노가 문 전 대표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을 따름이다. 원로 친노 함세웅 신부는 SNS로 의견을 바꾸지도 못하고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함 신부는 21일 오후 재야 원로들과 함께 이례적으로 기자회견까지 열어 더민주당 중앙위를 향해 “김 대표의 셀프 공천을 취소하고 당선 가능성의 경계선으로 추정되는 15번 아래로 내려 보내라”고 요구했다. 비대위가 김 대표의 순번을 14번으로 조정할 때만 해도 함 신부의 압박이 먹히는 듯했다. 그러나 재야의 친노도, 비대위도, 중앙위도 지도자의 뜻을 잘못 읽었을 뿐이다. 지도자의 뜻이 전해지자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이 정도 되면 해방 정국에서 좌익이 모스크바삼상회의 신탁통치 소식을 전해 듣고 반탁에 나섰다가 하루아침에 찬탁으로 돌아선 것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과장된 연상이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당은 항상 옳다(Das Partei hat immer Recht). 칩거하고 있는 당 지도자이긴 하지만 당 지도자의 생각은 항상 옳다. ‘내’ 생각이 당 지도자와 달랐다면 ‘내’가 의견을 바꿔야 한다. 그래도 지식인이라면 최소한 자아비판이라도 하고 의견을 바꾼다. 그런 것도 없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같은 일부 친노는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 친노의 판단 착오 덕분에 4·13총선 이후 더민주당에서 전개될 사태의 예고편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당이 상영을 원치 않았던 예고편이라는 점에서 스포일(spoil)의 성격이 짙다. 물론 스포일이라고 해봐야 다들 예상하고 있는 뻔한 시나리오다. 적절한 때가 되면 오너가 다시 등장해 바지사장을 몰아내고 당을 장악한 뒤 대권에 도전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반항의 친노가 고개를 숙이자 바지사장의 기세가 등등해졌고 영화가 예상보다 흥미롭게 전개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기승전‘문(재인)’이라는 기본 플롯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 장제스의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마오쩌둥의 군대는 옌안으로 대장정에 올라 살아남았다. 안철수 분당의 파장이 당을 침몰시키기 직전에 문 전 대표는 경남 양산으로 후퇴해 침몰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막말 정청래 의원 등 몇몇이 희생됐지만 큰 손실은 없었다. 이해찬 의원은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살아 돌아올 것이다. 문희상 백군기 의원 등은 쳐내는 시늉만 하다가 복귀시켰다. 윤후덕 의원도 살아남았다. 공천도 다 끝나 간다. 끝내기 수순인데 형세 판단도 못 한 자들이 판을 망칠 뻔했다. 칩거하던 오너가 부랴부랴 올라왔고 바지사장을 간신히 설득해 봉합한 것이 지난 3일간의 해프닝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2014년 프랑스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정해졌을 때 일이다. 한국인 입양아 출신인 당시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문화장관은 카날플뤼스 방송과의 인터뷰 도중 “모디아노의 소설 가운데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펠르랭 장관은 모디아노의 소설을 하나도 읽은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장관으로 일한 지난 2년간 너무 바빠 독서를 못했다”고 말했다가 문화장관이란 사람이 책도 안 읽는다고 해서 오랫동안 구설수에 올랐다. ▷프랑스 파리에는 동네서점이 아직도 남아있다. 파리 15구는 한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다. 그곳 콩방시옹 거리의 ‘르 디방(Le Divan)’이란 서점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서점 사서들이 신간을 직접 읽고 소감을 짧게 손으로 적은 쪽지를 신간에 꽂아놓는다는 사실이었다. 서양의 서점은 독서클럽으로 시작했다. 우리의 짧은 근대사에는 독서클럽이란 부분이 생략돼 있다. 그래서 서점을 책을 파는 곳으로만 여기지 책에 대한 느낌을 주고받는 곳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가한 ‘2016 파리 도서전’이 17일부터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열려 나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그제 막을 내렸다. 공식 개막 전날인 16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전시장을 방문해 3시간 가까이 머물면서 작가, 출판인들과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마뉘엘 발스 총리도 찾았다. 주무장관인 오드레 아줄레 문화장관은 두 번이나 왔다. 서울국제도서전에는 대통령은커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근 영국 최고의 맨부커상 후보에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한강이 올랐다. 한강은 파리 도서전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한국 작가였다. 우리나라 김종덕 문체부 장관에게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를 읽어봤느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다. 미국 시사문예지 ‘뉴요커’가 올 1월 “한국인은 책도 안 읽으면서 노벨문학상을 원한다”고 지적했을 때 정말 뜨끔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읽지 않으면 파리의 K북도 없고 세계의 K북도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