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재

이호재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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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틈틈이 소설을 쓰며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숨소리까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내러티브 기사가 넷플릭스 영상보다 가치 있는 컨텐츠라 믿는다.

hoho@donga.com

취재분야

2024-10-24~2024-11-23
문화 일반40%
음악30%
인사일반17%
문학/출판13%
  • “75년 살아보니 섬진강이 내 선생… 고향서 글쓰며 늙어갈 것”

    김용택 시인(75)은 요즘 매일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를 걷는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나무 그늘에 숨어 흐르는 땀을 식힌다. 나무 곁에 서면 그네 타고, 씨름하고, 낮잠 자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겨 세상의 이치를 다 알게 된 것처럼 우쭐하다가도, 평생 자신을 지켜본 나무 아래에서 그는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김 시인은 나무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이제 생각하니/나는 작고 못났다/그런데다가/성질도 못됐다/나무야/근데 내가 인자/어찌하면 좋을까”(‘나무에게’에서) 김 시인이 14번째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문학동네·사진)을 최근 펴냈다. 그가 시집을 낸 건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2021년·문학과지성사) 이후 2년 만이다. 22일 전화로 만난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탓에 외부 강연을 못 다녀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했다. 2년 동안 쓴 글이 500편인데 이 중 55편을 골라 신작에 담았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1948년 섬진강 변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살았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39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는데, 이 중 31년을 진메마을 덕치초에서 근무했다. 시집 ‘섬진강’(1985년·창비)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 보라’(1994년·한양출판) 등으로 널리 알려진 ‘섬진강 시인’이지만, 젊은 시절엔 교사로 일하고 은퇴 후엔 시인으로 강연을 다니느라 섬진강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기도 했다. “섬진강 변을 이렇게 자주 걸은 적이 어릴 적 빼고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코로나19가 저를 섬진강과 다시 가깝게 만든 거죠.” 신작 시집엔 그가 섬진강에서 길어 올린 시로 가득하다. 그는 “아침 이슬을 달고 있는 산앵두꽃의/앙증맞은 저 집중은/나를 바꿀 만하다/지금을”(‘산앵두꽃’에서)이라고 자연에 감탄한다. 또 “떨어진 꽃잎을/주우며 생각한다/누구나 다 견디지 못할/삶의 무게가 있다고”(‘조금 더 간 생각’에서)라며 삶을 돌아본다. “자연은 정체되지 않아요. 꽃은 피고 지고, 바람은 불다가도 멈추고, 새는 나무에 앉아 있다가도 곧 날아가죠. 시집 제목을 ‘모두가 첫날처럼’이라 지은 것도 독자가 자연처럼 모든 걸 새롭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일을 첫날처럼 생각하면 삶이 지루하지 않거든요.” 그는 나비를 바라보며 시인의 삶도 성찰한다. “나비는 날개를 펼 때/권력을 이용하지 않는다”(‘시인’에서)라고 생각하고, “나비는 시에서 태어났다/말로 날개를 단 것들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 그 나비는/다시는 시에 앉지 않는다”(‘다시는, 다시는’에서)라고 고백한다. “나비는 바람(권력)을 타고 날기보단 스스로 바람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 같아요. 저는 나비를 보며 시를 쓰지만, 나비는 제가 쓴 시(말)와 상관없이 날아다니기도 하고요.” 김 시인은 낮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옛집을 개조한 진메마을 ‘임실 김용택 시인 문학관’에 머물며 글을 쓰고, 밤엔 문학관 뒤편 자택에서 잔다. 고향을 떠날 계획이 없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40년 가까이 학교 선생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섬진강이 저의 선생이더라고요. 전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글 쓰며 늙어가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이에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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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5년 살아보니 섬진강이 내 선생이었다”…열네번째 시집으로 돌아온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75)은 요즘 매일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를 걷는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나무 그늘에 숨어 흐르는 땀을 식힌다. 나무 곁에 서면 그네 타고, 씨름하고, 낮잠 자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겨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것처럼 우쭐하다가도, 평생 자신을 지켜본 나무 아래에서 그는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김 시인은 나무에게 고해성사한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작고 못났다/ 그런데다가/ 성질도 못됐다/ 나무야/ 근데 내가 인자/ 어찌하면 좋을까”(시 ‘나무에게’에서)김 시인이 이달 10일 14번째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문학동네)을 펴냈다. 그가 시집을 펴낸 건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2021년·문학과지성사) 이후 2년 만이다. 22일 전화로 만난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탓에 외부 강연을 못 다녀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했다. 2년 동안 쓴 글이 500편인데 이중 55편을 골라 신작에 담았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는 1948년 섬진강 변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살았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39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는데, 이중 31년을 진메마을 덕치초에서 근무했다. 그는 시집 ‘섬진강’(1985년·창비)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 보라’(1994년·한양출판)로 알려진 ‘섬진강 시인’이지만, 젊은 시절엔 교사로 일하고 은퇴 후엔 시인으로 강연을 다니느라 섬진강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기도 했다.“섬진강 변을 이렇게 자주 걸은 적이 어릴 적 빼고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코로나19가 저를 섬진강과 다시 가깝게 만든 거죠.”신작엔 그가 섬진강에서 길어 올린 시로 가득하다. 그는 “아침 이슬을 달고 있는 산앵두꽃의/앙증맞은 저 집중은/나를 바꿀만하다/지금을”(시 ‘산앵두꽃’에서)이라고 자연에 감탄한다. 그는 또 “떨어진 꽃잎을/주우며 생각한다/누구나 다 견디지 못할/삶의 무게가 있다고”(시 ‘조금 더 간 생각’에서)라며 삶을 돌아본다.“자연은 정체되지 않아요. 꽃은 피고 지고, 바람은 불다가도 멈추고, 새는 나무에 앉아있다가도 곧 날아가죠. 시집 제목을 ‘모두가 첫날처럼’이라 지은 것도 독자가 자연처럼 모든 걸 새롭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일을 첫날처럼 생각하면 삶이 지루하지 않거든요.”그는 나비를 바라보며 시인의 삶도 성찰한다. 그는 “나비는 날개를 펼 때/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다”(시 ‘시인’ 에서)라고 생각한다. 그는 또 “나비는 시에서 태어났다/ 말로 날개를 단 것들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 그 나비는/ 다시는 시에 앉지 않는다”(시 ‘다시는, 다시는’에서)라고 고백한다.“나비는 바람(권력)을 타고 날기보단 스스로 바람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비를 보며 시를 쓰지만, 나비는 제가 쓴 시(말)와 상관없이 날아다니기도 하고요.”그는 낮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옛집을 개조한 진메마을 ‘임실 김용택 시인 문학관’에 머물며 글을 쓰고, 밤엔 문학관 뒤편 자택에서 잔다. 고향을 떠날 계획이 없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40년 가까이 학교 선생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섬진강이 저의 선생이더라고요. 전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글 쓰며 늙어가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이에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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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라딘 전자책 100만권 해킹” 35억 상당 비트코인 요구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전자책(e북)이 해킹됐다. 해커는 35억 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라딘은 22일 “e북 상품이 유출돼 경위와 피해 규모를 파악 중이다”라고 밝혔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알라딘 e북 100만 권을 탈취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출판계에 따르면 해커는 알라딘을 해킹해 e북을 가로챘고, 알라딘에 100BTC(비트코인의 화폐단위·약 35억 원)를 요구했다. e북이 불법 유통되면 저자와 출판사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박용수 대한출판문화협회 상무는 “e북이 온라인에 무분별하게 유통되면 저작권 침해가 급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알라딘은 “무단 배포된 불법 e북을 신고할 경우 포상금을 지급하고 e북의 불법 배포와 다운로드를 모니터링하겠다”고 밝혔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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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가 출판-번역에 미치는 영향은… 25, 26일 포럼-심포지엄 행사

    인공지능(AI)이 출판 산업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한국출판인회의는 25일 서울 마포구 마포중앙도서관에서 ‘2023 출판 인사이트 포럼’을 연다. 주제는 ‘대화형 AI 챗GPT가 출판에 미치는 영향’이다. 김대식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전미정 마이크로소프트(MS) AI 개발자가 강연한다. 한국문학번역원은 26일 ‘AI 번역 현황과 문학 번역의 미래’ 심포지엄을 연다. AI가 문학 번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논의한다. 정과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신중휘 네이버클라우드 파파고 이사가 각각 문학, 법, 기술적 관점에서 강연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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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보다 더 재밌는 콘텐츠 제공할 것”

    “넷플릭스, 유튜브보다 더 재밌는 콘텐츠를 제공해 고객의 ‘시간’을 가져오는 것이 목표입니다.” 온라인서점 예스24의 최세라 대표(50·사진)는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1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다른 서점이 아니라 콘텐츠 회사와 경쟁하겠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누구나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게 될 때 찾는 것이 책”이라며 “책을 파는 게 어려운 상황이지만 예스24는 책을 접점으로 한 ‘문화 플랫폼’이 되겠다”고 했다. 2003년 예스24에 입사한 최 대표는 올해 3월 대표에 선임됐다. 예스24에서 사원 출신으로 대표까지 오른 첫 사례다. 예스24를 포함해 교보문고, 알라딘까지, 3대 서점 중 여성이 대표가 된 것도 처음이다. 최 대표는 지주사인 한세예스24홀딩스의 김석환 부회장(49)과 각자대표다. 최 대표는 온라인서점만 운영하던 예스24가 2016년 서울 강남구에 중고서점을 내며 오프라인으로 확장하는 것을 주도했다. 최 대표는 “일하면서 유리천장을 느끼지 못했다”면서도 “2018년 도서사업본부장을 맡을 당시 사내 유일한 여성 본부장이라 회의에 참석했을 때 (생소함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숙명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올해 창립 24주년이 된 예스24는 3월 ‘예스24 오리지널’을 출범하고 정보라, 천선란 작가의 신작을 먼저 공개하며 콘텐츠 확보에 나섰다. 최 대표는 “이르면 올 9월 독자가 서평과 평점을 쓰고, 독자끼리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애플리케이션을 선보일 계획”이라며 “독자의 만남을 주선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겠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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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동물도 ‘질풍노도의 시기’ 건너야 어른이 된답니다

    미국 서부에 주로 서식하는 ‘캘리포니아 해달’은 종종 일탈을 즐긴다. 무시무시한 백상아리 수백 마리가 가득한 바다에 놀러 가는 것이다. 이 바다엔 먹이가 많지 않다. 백상아리에게 목숨을 잃을 확률도 높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위험천만한 놀이를 즐기는 해달은 모두 태어난 지 8개월∼4년 6개월 된 개체였다. 인간으로 치면 청소년기에 해당했다. 언뜻 보기엔 쓸모없는 짓 같지만 살아남은 ‘청소년’ 해달은 독립성이 뛰어난 어른 해달로 자라났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홀로서기도 무사히 성공했다. 미국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부 교수인 바버라 내터슨 호러위츠와 미국 과학 전문기자인 캐스린 바워스는 모든 동물이 청소년기인 이른바 ‘와일드후드’를 겪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동안 동물의 유년기와 성년기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청소년기는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동물의 청소년기와 인간의 청소년기를 비슷한 선상에 두고 비교한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동물이 청소년기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안전이다.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험준한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가젤은 생후 9개월부터 치타가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배운다. 태어난 지 1년 6개월이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어엿한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를 알지 못하면 야생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무리 지어 행동하는 동물이라면 지위를 얻는 방법도 습득해야 한다. 대표적인 동물이 하이에나다. 하이에나 집단은 철저히 모계사회다. 태어날 때부터 서열이 높은 암컷이 어미의 지위를 물려받는다. 사람으로 치면 출생과 함께 ‘흙수저’와 ‘금수저’가 나뉘는 셈이다. 하지만 지위는 영원하지 않다. 다른 무리와 싸울 때, 사냥할 때 앞장선다면 지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지위가 높아지면 좋은 음식을 먹고, 짝짓기를 할 때 우선권을 가진다. 생존 수업엔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태어난 지 4년이 지난 수컷 혹등고래는 이른바 ‘수컷 합창단’에 들어간다.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노래를 선배 수컷에게 배우기 위해서다. 혹등고래가 훌륭한 가수가 되려면 몇 년이 걸린다. 합창단에선 어른 혹등고래가 종종 텃세도 부린다. 하지만 연애의 기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청소년 혹등고래는 이를 참는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동물은 자립한다. 수명이 가지각색인 만큼 독립 시기도 모두 다르다. 평균수명이 50일밖에 안 되는 초파리는 태어난 지 14일 만에 청소년기를 벗어난다. 400년을 사는 그린란드 상어는 180세에 독립한다. 물론 모든 동물이 성공적으로 자립하는 건 아니다. 양육자의 보호에서 벗어나려다가 다치거나 동료끼리 싸우다 죽는 동물이 적지 않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지만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동물은 청소년기에 홀로 서는 연습을 해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된다. 인간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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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챗GPT, 작가 문체까지 살려 번역… 기존 AI번역기는 직역 위주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올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장편소설 ‘고래’(2004년)의 첫 문장이다. 이를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에게 ‘천명관 작가(59)의 문체를 반영해 영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챗GPT는 이렇게 번역했다. “In the days to come, it was the architect, the mastermind behind the grand theater, who unveiled her existence, introducing her to the world as the oft-revered ‘Queen of Crimson Bricks.’ Her name, 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 is Chunhee(春姬).” 번역문에는 천 작가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묻어난다. 원문의 ‘붉은’은 색깔 ‘진홍색’뿐 아니라 ‘피비린내’라는 뜻을 함께 지닌 ‘Crimson’으로 번역됐다. ‘이름은 춘희이다’를 번역할 땐 원문에 없던 ‘황홀하게 울려 퍼지는’(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이란 수식을 더했다. 이름을 번역할 때 한자 ‘春姬’를 병기한 점도 눈길이 간다. ‘고래’의 번역자인 김지영 번역가(42)가 춘희의 뜻인 ‘봄의 여자’(girl of spring)를 병기한 것만은 못하지만, 고유명사를 고려했다. 최근 출판계에서 문학 번역가를 AI가 대체할 수 있는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이달 26일 관련 심포지엄을 열 정도다. 본보는 번역가들 사이에서 종종 쓰인다고 알려진 3대 AI 번역기와 챗GPT를 활용해 유명 문학 작품 일부를 번역해 봤다. 한국의 ‘파파고’, 미국의 ‘구글번역기’, 독일의 ‘딥엘’을 사용한 결과 직역은 나쁘지 않았지만, 문학적 표현은 살리진 못했다. 이민진 작가(55)의 장편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에서 ‘fail’은 2018년 문학사상 판에선 ‘망쳐 놓다’, 2022년 인플루엔셜 판에선 ‘저버리다’(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번역됐을 정도로 함축적인 문맥을 담은 표현이다. 하지만 구글번역기 등 AI 번역기 3개는 ‘실망’ ‘실패’ 같은 직역을 내놓는 것에 머물렀다. 챗GPT의 번역 수준은 개중 높아 보였다. 번역할 때 추가적인 요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에 실린 단편 ‘저주토끼’의 첫 문장을 정보라 작가(47)의 문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자 챗GPT는 ‘더’(The more)를 2차례 사용하며 대구법을 썼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원문)가 “The more cursed an object, the more beautifully it should be crafted”(챗GPT)로 번역된 것. 챗GPT는 ‘파친코’의 첫 문장에서 ‘fail’을 ‘배신’이라고 그럴듯하게 번역하기도 했다. 정과리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AI를 거부하기보단 인간 번역가와 AI 번역기가 공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며 “다만 AI의 저작권과 역할을 어디까지 인정할지는 논의할 과제”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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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비린내’ ‘황홀하게 울려 퍼지는’… 작가 문체 담아 부커상 최종 후보 ‘고래’ 번역한 챗GPT

    “In the days to come, it was the architect, the mastermind behind the grand theater, who unveiled her existence, introducing her to the world as the oft-revered ‘Queen of Crimson Bricks.’ Her name, 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 is Chunhee(春姬).” 올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장편소설 ‘고래’(2004년)의 첫 문장을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가 영어로 번역한 결과물이다. 원래 문장은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챗GPT에게 ‘천명관 작가(59)의 문체를 반영해 번역해달라’고 요청한 덕인지 문장에서 문학성과 천 작가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묻어난다. 원문의 ‘붉은’은 색깔 ‘진홍색’뿐 아니라 ‘피비린내’라는 뜻을 함께 지닌 ‘Crimson’으로 번역됐다. ‘이름은 춘희이다’를 번역할 땐 챗GPT가 스스로 ‘황홀하게 울려 퍼지는’(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이란 수식을 더해 감칠맛을 더했다. 이름을 번역할 때 한자 ‘春姬’를 병기한 점도 눈길이 간다. ‘고래’를 영어 번역자인 김지영 번역가(42)가 춘희의 뜻인 ‘봄의 여자’(girl of spring)를 병기한 것만은 못하지만, 챗GPT는 고유명사를 고려했다. 챗GPT는 자신의 실력이 못 미더웠는지 의견도 함께 내놓았다. “참고: 특정한 예시나 추가적인 맥락 없이 천 작가의 독특한 스타일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최근 출판계에서 문학 번역가를 AI가 대체할 수 있는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이달 26일 심포지엄을 열고 AI가 번역가를 대체할 수 있을지를 논의할 정도로 관심이 모이고 있다. 본보는 번역가들 사이에서 종종 쓰인다고 알려진 3대 AI 번역기와 챗GPT를 활용해 유명 문학 작품 일부를 번역해봤다. 한국의 ‘파파고’, 미국의 ‘구글번역기’, 독일의 ‘딥엘’을 사용한 결과 직역은 나쁘지 않았지만, 문학적인 표현은 살리진 못했다. AI가 1차 번역을 하더라도 인간 번역가의 손을 다시 거쳐야 할 정도로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한 예로 이민진 작가(55)의 장편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에서 ‘fail’은 2018년 문학사상 판에선 ‘망쳐 놓다’, 2022년 인플루엔셜 판에선 ‘저버리다’로 번역됐을 정도로 함축적인 문맥을 담은 표현이다. 하지만 구글번역기 등 AI 번역기 3개는 “실망” “실패” 같은 직역을 내놓는 것에 머물렀다. 그러나 챗GPT의 번역 수준은 비교적 높았다. 번역할 때 추가적인 요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에 실린 단편소설 ‘저주토끼’의 첫 문장을 정보라 작가(47)의 문체로 번역해달라 요청했다. 이에 챗GPT는 ‘더’(The more)를 2차례 사용하며 대구법을 사용했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원문)가 “The more cursed an object, the more beautifully it should be crafted”(챗GPT)로 번역된 것이다. 챗GPT는 ‘파친코’의 첫 문장 중 하나인 ‘fail’을 ‘배신’이라고 그럴듯하게 번역하기도 했다. AI는 이미 일부 번역가의 초벌 번역을 돕고 있다. 정과리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AI를 거부하기보단 인간 번역가와 AI 번역기가 공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며 “다만 AI의 저작권과 역할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작품명원문인간 번역파파고 번역챗GPT 번역천명관 장편소설 ‘고래’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chunhui-or girl of spring-was the name of the female brickmaker later celebrated as the Red Brick Queen upon being discoverd by the architect of the grand theater.Later, the woman bricklayer, whose existence was first known by the architect who designed the large theater and introduced to the world as the “Queen of Red Bricks,” was named Chun-hee. In the days to come, it was the architect, the mastermind behind the grand theater, who unveiled her existence, introducing her to the world as the oft-revered ‘Queen of Crimson Bricks.’ Her name, resonating with a whisper of enchantment, is Chunhee(春姬).정보라 단편소설 ‘저주토끼’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When we make our cursed fetishes, it’s important that they’re pretty.The more things used in curses, the prettier they should be.The more cursed an object, the more beautifully it should be crafted.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역사는 우리를 실망시켰지만, 상관없습니다.역사는 우리를 배신했지만, 아무 상관 없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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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두환, 5·18 진압에 자기 정당성만 부여, 잘못 인정 안하는 ‘특별한 가벼움’에 빠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이코패스라고 의심했지만 그건 아니더라고요. 전 전 대통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잘하고 가족을 대단히 아끼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대면하고 과오를 성찰해 ‘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정아은 작가(48)는 16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사이드웨이·사진)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을 분석한 논픽션인 이 책의 부제는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신간에서 그는 전 전 대통령이 1980년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을 ‘특별한 가벼움’이라고 정의했다. 정 작가는 “핵심을 파고들어 진상과 대면하며 괴로워하는 대신, 현상의 표면에 머물다가 내상을 입기 전에 철수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전 전 대통령은 소탈하고 친화력이 좋았지만 5·18민주화운동이 폭동 혹은 북한 소행이라는 식으로 아이처럼 (잘못을 회피하고) 자신의 행동에만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정 작가는 2013년 등단해 ‘맨 얼굴의 사랑’(민음사) 등 장편소설 5권을 냈다. 이번 책을 쓴 건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으로만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이 퇴임한 1988년부터 사망한 2021년까지 33년 동안 정치적 논란은 많았지만 학술적으로 분석한 책은 별로 없었어요. 왜 객관적 평가가 안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정 작가는 참고문헌 100여 권을 읽고, 육군사관학교 출신 등 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인물들을 수소문해 인터뷰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 전 대통령이 1979년 12·12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건 군사정권을 용인하던 시대상과 관련돼 있다고 분석한다.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서든 우격다짐으로 하던 시대였잖아요. 자기 성찰보단 카리스마가 강한 리더를 선호하는 시대상이 전 전 대통령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겁니다.” 정 작가는 또 전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 씨(27)가 최근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고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족을 만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점에 주목했다. 33년 동안 이뤄지지 않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단죄가 후손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추징금 환수처럼 제도적인 영역에서 불충분했던 단죄가 전 씨의 고백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큽니다.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일에 대한 관련자의 고백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전 전 대통령이 생존했을 때 이뤄지지 않은 연구가 이제라도 진행돼야 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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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험에 ‘노출’된 인류… 발가벗는 ‘노출’로 저항”

    세계적 생태문화학자로 꼽히는 스테이시 얼라이모 미국 오리건주립대 교수가 2016년 펴낸 환경정치학 연구서 ‘노출―포스트휴먼 시대 환경 정치학과 쾌락’(사진)이 최근 번역 출간(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됐다. 이 책은 몸과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을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을 우위에 놓는 사고는 인간 종(種)이 지구를 지질학적 규모로 변형시킨 이른바 ‘인류세’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 기후 위기 등의 문제에 직면한 인류에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몸, 장소, 통제 불능의 물질이 서로 횡단하는 교차로에 거주한다’는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또 모든 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조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노출’은 인류가 위험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과 동시에 위험에 저항하는 나체 시위 등을 의미한다. 나체는 존재의 취약함과 자연과의 친밀성, 감각과 쾌락의 회복을 상징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야생이 숨 쉬는 마당 만들기 같은 소박한 활동도 인류세를 바로잡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김명주 김정숙 충남대 교수, 이연숙 CNU 여성젠더연구소 연구원, 지명훈 동아일보 기자(철학 박사)가 함께 번역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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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베리아에서 얼어 죽으려 도망쳤는데… 반복적이고 가혹해 보여도 그게 인생”

    “도망치고 싶어요.” 지난해 초 이묵돌(필명·29) 작가는 마감을 재촉하는 출판사 편집자에게 이렇게 토로한 뒤 러시아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반복되는 일상, 기계적인 원고 마감, 나아지지 않는 경제 형편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그해 2월 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처 없이 서쪽으로 나아갔다. 설원에서 얼어 죽으면 어떠랴 싶었다. 그러나 여행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택시기사에게 사기당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일주일간 격리됐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28일 출간된 여행 에세이 ‘여로’(김영사·사진)의 이야기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8일 만난 이 작가는 “지난해 3월 8일 귀국했다. 한 달 만에 멀쩡히 살아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저는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절 말릴 가족도 없었거든요.” 이 작가는 2013년부터 페이스북에 ‘김리뷰’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영화 게임 책 등 주제와 형식에 제한이 없는 독특한 리뷰는 큰 인기를 끌어 구독자가 한때 45만 명에 달했다. 2016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리뷰 리퍼블릭’을 만들었으나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실패했다. 이후 이묵돌이라는 이름으로 에세이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메가스터디북스·2020년) 등 10권 이상의 책을 냈지만 그에게 글쓰기는 점점 노동으로 변해갔다. “먹고살려고 책을 썼어요.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기 낯부끄러웠죠.” 여행 중 그의 마음을 바꾼 건 ‘사람’이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던 도어맨, 서류를 잃어버려 허둥지둥하던 그를 관공서에 데려다준 중년 여성,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을 좋아하던 숙소 주인 등 낯선 이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모습에 그는 삶의 이유를 조금씩 찾게 됐다. “횡단열차에서 만난 중년 남성 안드레이가 ‘더 배워야 한다. 그래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9년 전 자퇴했던 대학에 재입학했습니다.” 여행이 무엇을 바꿨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느 새벽, 시베리아 한복판의 간이역에서 끊임없이 눈을 치우는 한 남자를 봤어요. 그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여행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적이고 가혹해 보이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다신 삶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도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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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베리아에서 얼어 죽을 계획이었으나 살아 돌아왔다”… 러 여행기 펴낸 이묵돌 작가

    “도망치고 싶어요. 기왕이면 아주 먼 곳으로요.” 지난해 초 이묵돌 작가(필명·29)는 자신에게 마감을 재촉하는 출판사 편집자에게 이렇게 토로한 뒤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반복되는 일상, 기계적인 원고 마감, 나아지지 않는 경제 형편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2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처 없이 서쪽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도 경유지도 정하지 않았다. 설원에서 얼어 죽으면 어떠랴 싶었다. 공들여 쓴 유서도 남겼다. 그러나 여행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낯선 택시기사에게 사기를 당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일주일 격리됐다.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처럼 이름 낯선 도시를 거치며 별별 사람을 만났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로로 핀란드 헬싱키에 간 뒤 비행기를 타고 급히 귀국했다. 지난달 28일 출간된 여행 에세이 ‘여로’(김영사)의 이야기다. 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 작가는 “지난해 3월 8일 한국에 돌아왔다. 약 한 달 만에 멀쩡히 살아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젊은 사람이 죽을 생각을 했다고 하면 보통 삶이 너무 고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 살 이유가 없어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해야할 지도 몰랐고, 절 말릴 가족도 없었거든요.” 이 작가는 2013년부터 페이스북에 ‘김리뷰’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영화 게임 책 등 주제와 형식에 제한이 없는 그의 독특한 글은 인기를 끌어 페이스북 구독자가 한때 45만 명에 달했다. 2016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리뷰 리퍼블릭’을 만들었으나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처절하게 실패했다. 이후 이묵돌이라는 이름으로 에세이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메가스터디북스·2020년) 등 10권 이상의 책을 냈지만, 그에게 글쓰기는 점점 노동으로 변해갔다.“먹고 살려고 책을 썼어요.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기 낯부끄러웠죠. 도망치고 싶었던 곳이 왜 시베리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흔적도, 살아갈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죽음을 찾아 떠난 그의 마음을 바꾼 건 사람이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던 도어맨, 서류를 잃어버려 허둥지둥하는 그를 관공서에 데려다준 중년여성,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을 좋아하던 숙소 주인 등 낯선 이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모습에 그는 삶의 이유를 조금씩 찾게 됐다.“횡단열차에서 만난 중년남성 안드레이가 제게 ‘더 배워야 한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땐 인생의 선배라도 되는 것처럼 훈계하는 안드레이의 태도가 싫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죠. 결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9년 전 자퇴했던 대학에 재입학했습니다.” 여행이 무엇을 바꿨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느 새벽, 시베리아 한복판의 간이역에서 끊임없이 눈을 치우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모두가 동경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그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전 이번 여행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적이고 가혹해 보이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다신 삶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도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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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인류-영장류 운명 가른 진화의 마지막 퍼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340만 년 전 깨진 돌조각으로 짐승의 고기를 잘랐다. 최초의 직립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먹 도끼를 사용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9만 년 전엔 송곳 작살 등 간단한 도구, 4만 년 전엔 바늘 같은 정교한 도구를 만들었다. 이제 인간은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처럼 복잡한 도구를 사용해 문명을 발달시킨다. 반면 인간과 유전자가 98.5% 같은 침팬지는 거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돌로 견과류를 쳐서 깨 먹거나 나무 막대기를 개미집에 쑤셔 넣었다 뺀 뒤 개미를 훑어 먹는 정도에 불과하다. 일부 도구를 사용하는 다른 동물도 수준이 지극히 낮다. 왜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엔 이런 차이가 발생한 걸까.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 진화생물학과 교수인 저자는 다른 개체가 서로 영향을 끼치며 진화하는 ‘공진화(共進化)’를 인간이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은 동물이 기후, 포식자, 질병에서 강한 자만 살아남는 ‘자연 선택’에만 의존해 진화했다고 봤지만, 인간의 공진화는 간과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랑이들 사이에선 빨리 달리고 힘이 센 호랑이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비해 인간은 힘이 부족하거나 지능이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 타인에게 생존 비결을 물어 배우거나, 여럿이 함께 뭉쳐 다니며 서로 도우면 생존하고 후손을 낳을 수 있었다. 저자는 특히 공진화에 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책을 집필하고, 언어로 소통하는 문화적 능력을 바탕으로 인간이 지식을 공유하고 축적해 왔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인간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문화를 만든 게 아니라, 문화 덕에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인공지능(AI) 시대, 인간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적지 않다. 어쩌면 ‘자연 선택’에서 인간은 빅데이터를 학습한 AI에게 밀릴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빚어내는 독특한 종”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소통할 줄만 안다면 인간은 다시 한번 ‘자연 선택’을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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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챗GPT가 표절했다면, 배상 책임은 누구에게[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이 소설에는 내가 쓴 문장도 있고 챗GPT가 쓴 문장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소설가 정지돈은 최근 단편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발표하며 이렇게 썼다. ‘끝없이…’는 정지돈이 챗GPT를 활용해 썼다. 챗GPT는 혼자 단편소설을 완성할 능력은 되지 않았다. 다만 챗GPT가 만든 짧은 문장을 정지돈이 연결하고, 배열해서 소설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정지돈은 챗GPT와 자신이 쓴 문장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쓴 것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건 ‘원고료’의 주인이었다. 정지돈이 소설을 잡지에 기고한 만큼 원고료를 받았을 텐데 챗GPT는 원고료를 받았을까. 만약 ‘끝없이…’가 책으로 묶여 출간된다면 인세는 정지돈이 다 가져가는 게 맞을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창작자를 위한 챗GPT 저작권 가이드’를 읽게 됐다. ‘창작자를…’은 현직 변리사가 저작권법 측면에서 인공지능(AI)의 창작을 들여다본 책이다. 저자는 먼저 챗GPT가 ‘저작권자’가 될 수 있는지 들여다본다.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저작권자로 인정돼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한국에선 챗GPT가 저작권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현행 저작권법은 저작권자가 권리를 지니는 저작물의 범위를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끝없이…’의 원고료를 챗GPT가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런데 정말 인간만 저작권자가 될 수 있을까. 2020년 중국 법원은 세계 최초로 텐센트사의 AI ‘드림라이터’가 쓴 기사에 대해 저작권을 인정하면서 해당 기사를 무단 사용한 상하이잉쉰과학기술이 텐센트사에 1500위안(약 29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올해 2월 미국 저작권청은 만화 작가 크리스 카슈타노바가 AI를 활용해 만든 만화의 저작권을 판단할 때, 작가가 그림을 선택하고 배치한 부분에 대해서만 저작권을 인정했다. AI를 활용했다면 인간이 모든 권리를 다 가져갈 수 없다는 해석이다. 문제는 창작 윤리 문제가 생겼을 때다. 만약 챗GPT가 다른 인간의 창작물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난다면 누가 책임져야 할까. 또 표절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된다면 인간과 AI 중 누가 배상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현 법률상 챗GPT는 권리가 없기에 배상 의무도 없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챗GPT에 속은 챗GPT 이용자와 작품을 표절당한 소설가 모두 손해를 보지만 누가 이를 책임져야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셈이다. 저자는 저작권법에서나마 AI를 인간으로 인정하거나, AI 개발자에게 표절을 막는 기술을 포함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식으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한다. 다만 법 개정 전까진 챗GPT를 사용해 소설을 썼다고 명시해야 윤리적 논란이 없을 것 같다. 인간도 종종 표절했는지 헷갈린다고 말하는데, AI라고 표절을 스스로 인정할까 싶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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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세상서 고군분투… 어른과 아이의 고민 다를게 있나요”

    “처음으로 내 편이 생겼어.” 어느 날 떠돌이 개 메피스토는 소녀와 친구가 된다. 본래 악마였으나 인간 세계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메피스토에게, 청각장애로 소리가 들리지 않아 외톨이였던 소녀에게 서로는 첫 ‘내 편’이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된 소녀는 조금씩 기억을 잃어간다. 치매에 걸린 소녀는 없었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일을 잊어버린다. 자신을 잊어가는 소녀를 향해 악마는 온 힘을 다해 기억을 되돌리는 금지된 마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과연 메피스토는 친구를 지킬 수 있을까. 지난달 28일 출간된 그림동화 ‘메피스토’(비룡소·사진)는 루리(필명) 작가가 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전작인 ‘긴긴밤’(2021년·문학동네)은 어른과 어린이 모두에게 인기를 끌며 30만 부 이상 팔렸다. 루리 작가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신작은 독일 문호 괴테(1749∼1832)의 희곡 ‘파우스트’(1831년)를 재해석한 작품”이라며 “‘파우스트’에서 신은 인간의 영혼은 구해주지만, 메피스토는 구해주지 않는다. 왜 메피스토는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지가 궁금해 책을 쓰게 됐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친구와 치매에 걸린 친구 엄마의 이야기가 모티브라고 들었다. “어느 날 친구가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몇 권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엔 친구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쉽지 않은 하루가 분명했을 텐데도 일기는 ‘오늘은 좋은 날이다’라고 끝맺어 있었다. 친구가 창문으로 출근하는 엄마를 불러 윙크를 해줬다거나, 김밥을 너무 많이 싸서 아홉 줄이나 먹었다는 게 그날을 좋은 날로 만든 이유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비극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비극을 받아들이고 때때로의 ‘좋은 날’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닐까.” ―‘긴긴밤’이 2018년 아프리카 케냐의 자연보호구역에서 45세로 영원히 잠든 마지막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을 모델로 삼아 사회적 성찰을 담았듯, 신작에서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기억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았다.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사회적 이슈나 철학적 논쟁을 읽어내는 분들도 계신 것 같다.” ―전작에 비해 글이 대폭 줄어들고 그림 위주로 구성됐다. “그림책을 작업할 때는 최대한 그림으로 서사를 이끌어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나 역시 그림책을 읽을 때는 그림 하나하나를 세세히 보면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다.” ―당신의 작품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도 좋아한다. 특히 관계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성찰은 어른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어린이들의 고민과 어른들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다들 같은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으니까.” ―다음 작품 계획이 궁금하다. “전쟁과 집에 대한 작품을 작업하고 있다. 편지와 앨범으로 구성된 형식이다. 100년 동안 집을 지켜온 개들과 그곳을 거쳐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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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른과 아이 고민 다를게 있나요”…동화책 ‘메피스토’ 펴낸 루리 작가 인터뷰

    “처음으로 내 편이 생겼어.” 어느 날 떠돌이 개 ‘메피스토’는 소녀와 친구가 된다. 본래 악마였으나 인간 세계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메피스토에게, 청각 장애로 소리가 들리지 않아 외톨이였던 소녀에게 서로는 첫 ‘내 편’이다. 둘은 할아버지의 슬리퍼를 훔치고, 자동차에 낙서하는 등 짓궂게 장난치며 우정을 쌓는다. 소녀가 어른이 돼 설거지하고, 바닥 쓸며 일을 할 때도 메피스토는 늘 곁에서 소녀를 지킨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된 소녀는 조금씩 기억을 잃어간다. 치매에 걸린 소녀는 없었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일을 잊어버린다. 자신을 잊어가는 소녀를 향해 악마는 온 힘을 다해 기억을 되돌리는 금지된 마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과연 메피스토는 친구를 지킬 수 있을까. 지난달 28일 출간된 동화책 ‘메피스토’(비룡소)는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인기를 끌며 30만 부 이상 팔린 동화책 ‘긴긴밤’(2021년·문학동네) 이후 루리(필명) 작가가 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루리 작가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신작은 독일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희곡 ‘파우스트’(1831년)를 재해석한 작품”이라며 “‘파우스트’에서 신은 인간의 영혼은 구해주지만, 메피스토는 구해주지 않는다. 왜 메피스토는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지가 궁금해 신간을 쓰게 됐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친구와 치매에 걸린 친구 엄마의 이야기가 모티브라고….“어느 날 친구가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몇 권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엔 친구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쉽지 않은 하루가 분명했을 텐데도 일기는 ‘오늘은 좋은 날이다’라고 끝맺어 있었다. 좋은 날로 끝나는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친구가 창문으로 출근하는 엄마를 불러 윙크를 해줬다거나, 김밥을 너무 많이 싸서 아홉 줄이나 먹었다는 게 그날을 좋은 날로 만드는 이유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비극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비극을 받아들이고 때때로의 ‘좋은 날’을 만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메피스토를 구원하는 소녀는 ‘엄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엄마의 삶은 뜨거운 냄비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누구나 조금의 뜨거움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손을 놓아버렸을 거다. 그런데 모처럼의 요리가 아까워서, 아니 먹고 살아야 해서 그냥 그렇게 쉽게 손을 놓아버릴 수가 없게 된 거다. 그러다 보니 점점 뜨거운 냄비를 좀 더 오래 잡고 있을 수 있게 됐고, 그렇게 어느샌가 뜨거운 것을 잘 만지는 엄마가 돼 있었을 거다.”―‘긴긴밤’이 2018년 아프리카 케냐의 자연보호구역에서 45세로 영원히 잠든 마지막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을 모델로 삼아 사회적 성찰을 담았듯, 신작에서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기억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았다.“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사회적 이슈나 철학적 논쟁을 읽어내 주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다. 이야기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같은 이야기라도 모두가 그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 다 다르다는 점이다.”―전작에 비해 글이 대폭 줄어들고 그림 위주로 구성됐다.“그림책을 작업할 때는 최대한 그림으로 서사를 이끌어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나 역시 그림책을 읽을 때는 그림 하나하나를 세세히 보면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다.”―당신의 작품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좋아한다. 특히 관계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성찰은 어른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다.“어린이들의 고민과 어른들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다들 같은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으니까.”―필명으로 활동하는 이유가 뭔가?“내가 쓰는 이야기가 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할머니가 되면 좀 더 내 이야기를 잘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내가 쌓아온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다음 작품 계획이 궁금하다.“전쟁과 집에 대한 작품을 작업하고 있다. 편지와 앨범으로 구성된 형식이다. 100년 동안 집을 지켜온 개들과 그곳을 거쳐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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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청스럽게 풀어가는 천명관, ‘돈키호테’ 쓴 세르반테스 같아”

    “천명관 작가를 보면 장편소설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가 생각납니다.” 천명관 작가(59)의 장편소설 ‘고래’(2004년)를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지난달 선정한 이 상 심사위원회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심사위원회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소설을 능청스럽게 풀어 나가는 천 작가의 서술 방식에 매료됐다”며 “‘고래’는 훌륭한 피카레스크 소설(악당소설)이라는 점에서 러시아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장편소설 ‘죽은 혼’(1842년)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인터내셔널 부문은 5명이 심사한다. 심사위원 가운데 201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말레이시아 작가 탄 트왕 엥(51),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동유럽문학과 교수이자 번역가인 울럼 블래커(43)가 인터내셔널 부문 심사위원회를 대표해 답변을 보내왔다. 심사위원회는 ‘고래’를 최종 후보로 고른 이유에 대해 “기괴한 등장인물, 기이한 음모, 마법적 요소가 뒤섞인 롤러코스터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노파, 춘희, 금복 등 다양한 등장인물이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우린 왜곡되고 뒤틀리고 불안해하는 인물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소설을 읽으며 한국의 역사와 풍경을 마주했어요. 소설엔 옛 한국의 어촌과 마을 풍경이 자세히 묘사됩니다. 또 현대화된 한국 도시 모습도 담겨 있죠. ‘고래’를 읽는 건 한국의 문학적, 역사적, 정서적 지형을 관통하는 광범위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2016년 한강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2007년·창비)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지난해 정보라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가 이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만큼 올해 부커상에 대한 출판계의 기대는 낮았다. 그런데 ‘고래’가 최종 후보에 선정되면서 처음으로 한국 작가의 작품이 2년 연속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에 대해 심사위원회는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한국 음악 영화 드라마는 물론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특히 유럽의 젊은 독자들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문학 작품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 그룹 방탄소년단(BTS) 등 대중문화의 인기가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심사위원회는 또 “최근 영어로 번역되는 한국 소설이 많아진 덕에 더 많은 한국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한국 문학 번역의 양적 성장을 언급한 것. “‘고래’는 한국에선 19년 전 처음 출판됐어요. 그러나 해외 독자들은 이제야 영어로 ‘고래’를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번역이 세계에 한국 문학을 알리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부커상 수상자는 23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된다. 6편의 최종 후보에 노벨 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꼽히곤 하는 프랑스 여성 소설가 마리즈 콩데(86)의 작품이 포함되는 등 경쟁작도 쟁쟁하다. 수상 가능성을 묻자 조심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수상 가능성은 최종 후보에 오른 다른 소설 5편과 마찬가지로 6분의 1이죠. ‘고래’ 수상 여부와는 별개로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들에 한국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길 바랍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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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래’ 천명관 보면 ‘돈키호테’ 세르반테스 생각나”

    “천명관 작가(59)를 보면 장편소설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 문학의 거장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가 생각납니다.” 지난달 18일(현지 시간) 장편소설 ‘고래’(2004년)를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선정한 심사위원회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천 작가를 이렇게 평가했다. 심사위원회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소설을 능청스럽게 풀어나가는 천 작가의 서술 방식에 매료됐다”며 “‘고래’는 훌륭한 피카레스크 소설(악당소설)이라는 점에서 러시아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장편소설 ‘죽은 혼’(1842년)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5명이 심사한다. 영어로 작품을 써 201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말레이시아 작가 탄 트왕 엥(51),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동유럽문학과 교수인 영국 번역가 우일람 블레이크(43)가 인터내셔널 부문 심사위원회를 대표해 답변을 보내왔다. 심사위원회는 ‘고래’를 최종 후보로 고른 이유에 대해 “기괴한 등장인물, 기이한 음모, 마법적인 요소가 뒤섞인 롤러코스터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노파, 춘희, 금복 등 다양한 등장인물이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우린 왜곡되고 뒤틀리고 불안해하는 인물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소설을 읽으며 한국의 역사와 풍경을 마주했어요. 예를 들어 소설엔 옛 한국의 어촌과 마을 풍경이 자세히 묘사됩니다. 또 현대화된 한국 도시 모습도 담겨있죠. ‘고래’를 읽는 건 한국의 문학적, 역사적, 정서적 지형을 관통하는 광범위한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은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2016년 한강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2007년·창비)가 수상했다. 지난해 정보라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가 최종 후보에 올랐던 만큼 올해 출판계의 기대는 낮았다. 그런데 ‘고래’가 최종 후보에 선정되면서 처음으로 한국 작가의 작품이 2년 연속 최종 후보에 오른 이례적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심사위원회는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음악 영화 드라마는 물론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특히 유럽의 젊은 독자들은 한국 영화 드라마를 보다가 문학 작품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그룹 방탄소년단(BTS) 등 대중문화의 인기가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평가다. 심사위원회는 또 “최근 영어로 번역되는 한국 소설이 많아졌다. 그 덕에 더 많은 한국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됐다”고 양적 성장을 지적했다.“‘고래’는 한국에선 19년 전 처음 출판됐어요. 그러나 해외 독자들은 이제야 영어로 ‘고래’를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번역이 세계에 한국 문학을 알리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부커상 수상자는 23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된다. 6편의 최종 후보엔 노벨 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꼽히는 프랑스 소설가 마리즈 콩데의 작품이 포함되는 등 경쟁작이 쟁쟁하다. 수상 가능성을 묻자 조심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수상 가능성은 최종 후보에 오른 다른 5권의 소설들과 마찬가지입니다. 확률은 6분의 1이죠. 다만 ‘고래’ 수상 여부와 별개로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들에 한국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길 바랍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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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아이 키우며 성장”… 육아휴직 아빠, 이렇게 삽니다

    “회사 그만두려고?” 회사원 심규성 씨가 2020년 8월 태어난 아이를 돌보기 위해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자 주변에선 응원보다 걱정을 내비쳤다. “육아휴직 하는 남자는 처음 봤다” “회사가 괜찮다고 하느냐”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도 심 씨가 육아휴직을 한 건 아이와 함께 누워 낮잠을 자고, 밥을 먹는 삶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지옥이었다. 매일 밤 아이의 “으앙” 울음소리에 잠을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아이의 입에 사탕을 물리고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틀어주며 달래야 했다. 아이에게 맞지 않는 기저귀를 잘못 샀다가 동네 마트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맞는 기저귀를 찾았던 일도 있었다. ‘아버지 세계’의 신입사원인 심 씨는 6개월간의 육아휴직을 이렇게 평가했다. “멀리서 볼 때 모든 게 쉬워 보인다. 독박 전업 육아의 세계에서 상상했던 호사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아빠 5명이 육아 경험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다. 회사원, 프리랜서 등 다양한 직업을 지닌 아빠들은 어느 날 자신의 육아 고민을 주변과 나누고 싶어졌다. 지인끼리 이야기를 나눈 끝에 뉴스레터를 돌아가며 써보기로 했다. 지난해 2월부터 매주 일요일 밤 발송하기 시작한 뉴스레터의 구독자는 현재 1600명에 이른다. 책은 뉴스레터를 다듬어 묶은 결과물이다. 육아일기를 가장한 아빠들의 성장기로도 읽힌다. 육아휴직 중인 손현 씨는 “육아에 해방은 없다”고 했다. 손 씨는 아침밥을 차릴 때면 복권을 긁는 심정이다. 아이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음식을 잘 먹는 날도 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밥을 거부할 때도 많다. 특히 평일의 한가운데인 수요일에는 ‘수요병’이 도진다. 주말이 될 때까지는 직장에 다니는 아내가 육아를 함께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좌절한다. 세 아이의 아빠인 박정우 씨는 자신만의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전 누워 스마트폰을 보는 시간은 사치다.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샤워기 밑에 서 있는 일도, 밥 먹고 설거지할 때까지 잠시 쉬는 일도 상상하기 힘들다. 그는 틈날 때마다 유튜브를 빨리 감기로 보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삶을 살아간다. 마흔 살에 아빠가 된 강혁진 씨의 아침은 육아와 함께 시작된다. 아내가 오전 6시에 출근하면 프리랜서인 강 씨는 분유를 만들어 아이에게 먹인다. “잠깐만 기다려”라며 우는 아이를 달래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솜씨가 엄마에게 밀리지 않는다. 능숙한 강 씨를 보면 ‘육아는 엄마가 해야 하는가’를 되묻게 된다. 배정민 씨는 아이를 키운 지 10년이 넘은 ‘프로 아빠’다. 아이와 비디오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할 때면 아이와 아빠의 처지가 바뀐다. 게임 속에서 아이는 “여기로 오라”며 아빠를 이끌고, 어떻게 게임을 잘할 수 있는지 친절히 알려 준다. 그때 그는 현실에서 능숙하지 못한 아이를 혼냈던 자신을 되돌아본다. “아이는 내가 서툴러 버벅거려도 절대 열 내지 않는다. 나는 보호자로서의 태도를 거꾸로 아이에게 배운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처음으로 0.7명대로 떨어졌다.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아이 수인 합계출산율이 1명을 밑도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출산의 이유 중 하나가 ‘독박 육아’ 아닐까. 만약 저자들처럼 아이와 친근한 아빠가 더 많다면, 육아휴직 하는 남자가 많다면 아이를 낳고 싶은 부부가 늘어날 것 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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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김지하 시인, 그는 화가로도 뛰어났습니다”

    “지하를 시인으로만 아는 분이 많지만, 그는 화가로도 뛰어났습니다.” 4일 서울 종로구 백악미술관. 고 김지하 시인(1941∼2022) 추모 서화전 ‘꽃과 달마, 그리고 흰 그늘의 미학’ 총괄을 맡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말했다. 이에 임진택 연출가와 이근배 시인(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염무웅 문학평론가 등 고인의 친구 50여 명이 손뼉을 치며 화답했다. 유 전 청장이 “나도 그림을 그리지만, 지하처럼 재능이 없었다”고 농담을 건네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 시인의 1주기(8일)를 앞두고 열린 이번 전시에서는 고인이 생전 친구들에게 선물한 그림 40여 점을 볼 수 있다. 고인은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 시로 유명하지만 1980년대부턴 붓글씨와 그림에도 몰두했다. 매화, 난초를 그린 것은 물론이고 달마도와 인물화에도 능숙했다. 대표적 작품이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를 그린 그림(1982년)이다. 유 전 청장은 “박현채가 파리채를 들고 파리(잘못된 근대화)를 내쫓는 모습을 캐리커처처럼 그린 화법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고 했다. 서화전은 9일까지 이어진다. 6, 7일엔 경기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인의 문학과 생명 사상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과 추모 공연이 열린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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