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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가 지난해 한국산 부품이 들어간 ‘크라프’ 자주포를 우크라이나에 수출하는 것을 한국 정부가 승인했다고 로이터통신이 8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관련한 모든 서류와 문제들을 검토한 뒤 폴란드의 수출을 허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국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간접적이나마 무기 부품을 제공하는 것을 공식 묵인했다고 확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로이터통신은 논평했다. 폴란드 국영 방산기업 HSW가 생산하는 이 곡사포에는 한국 ‘K9’ 자주포의 포대(砲臺·섀시)를 비롯해 영국 방산기업 BAE시스템의 포탑, 프랑스 방산업체 넥스터의 포탄 등이 쓰인다. 폴란드는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에 크라프 자주포 18대를 보냈고 이후 수십 대의 공급 계약을 추가로 체결했다. 다만 군 당국은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직접 지원하지 않는다는 정부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크라프 자주포는 한국, 영국, 독일 등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에서 생산된 폴란드산 자주포”라며 “한국이 지원한 부분은 전체의 일부분이며 한국산 무기 체계가 우크라이나로 이전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로이터는 한국에 주재하는 서방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윤석열 정부에 정기적으로 전했다”며 이번 허가에 윤 대통령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공공 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어 재정 확충을 위해 ‘부자 증세’를 추진한다. 9일(현지 시간) 내년도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재정 지출 감축을 요구하는 야당 공화당에 사실상 선전포고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증세와 연방정부 부채 문제가 내년 대선 주요 쟁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7일 백악관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의 2024 회계연도 예산안에는 연간 40만 달러(약 5억3000만 원) 이상 소득에 부과하는 메디케어 세율을 기존 3.8%에서 5%로 인상하는 내용이 담겼다.주로 65세 이상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메디케어는 현재 6500만 명 이상 가입돼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매년 약 9000억 달러가 메디케어에 투입된다. 소득세와 의회 승인 기금으로 운용되는 메디케어 기금은 2028년경 바닥날 것으로 예측된다. 인구 고령화로 고갈 시점이 더 앞당겨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미 뉴욕타임스(NYT) 기고에서 ‘메디케어 부자 증세’가 담긴 이번 예산안을 통해 “메디케어 혜택을 줄이지 않고도 2050년까지 기금의 수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소득자가 공정한 몫을 부담하도록 요청하자. 그들이 부를 쌓을 수 있도록 도운 수백만 근로자가 메디케어 혜택을 받으며 존엄하게 은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 제안이 의회를 통과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백악관과 의회는 현재 31조4000억 달러(약 4경1476조 원)인 연방정부 부채 한도 증액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은 한도를 높이려면 재정 지출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화당 일각에선 사회보장제도와 메디케어도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들에게 “(바이든 대통령 제안은) 빛을 보지 못할 것”라고 말했다.한편 우파 성향 미 폭스뉴스가 2021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강성 지지자들의 ‘1·6 의사당 난입 사태’가 과장됐다고 보도해 정계에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폭스뉴스는 이날 공화당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으로부터 입수한 당시 의사당 내부 영상을 공개하며 “의사당에 들어온 압도적 다수는 평화롭고 질서정연했다. 이들은 폭도가 아니라 구경꾼”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평화로운 장면만 짜깁기한 영상을 사용했다”며 보도 취소를 요구하고, 영상을 제공한 매카시 의장에 대해서도 음모론 확산을 도왔다고 비판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할머니, 제가 지금 유치장에 갇혔는데 보석금이 필요해요. 지갑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어요.” 캐나다 중서부 서스캐처원주의 주도인 리자이나에 사는 루스 카드(73)는 수화기에서 손자 브랜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선 “친구 대니얼과 차를 타고 가다 급제동을 해서 추돌사고가 났다. 변호사인 대니얼의 아버지와 통화해 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드는 “수화기에서 나오는 음성이 손자 목소리와 섬뜩할 만큼 똑같아서 의심할 생각을 전혀 못 했다”고 현지 매체에 말했다.● 유튜브·SNS상 음성 샘플로 목소리 복제 카드는 ‘대니얼의 아버지이자 변호사’라는 사람에게 바로 연락했다. 그는 카드에게 “나중에 보험금으로 9400캐나다달러(약 900만 원)가 나올 테니 일단 현금으로 그 돈을 보내 달라”고 했다. 카드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남편과 함께 은행으로 달려갔다. 하루 인출 한도인 3000캐나다달러(약 300만 원)를 인출한 뒤 곧바로 다른 은행에 찾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돈을 뽑아주세요.”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지점장은 노부부를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어제도 어떤 부부가 와서 당신들과 똑같은 말을 했어요. 당신이 들은 그 목소리가 가짜일 수도 있어요.” 카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손자가 그런 사고로 유치장에 갇힌 것도, 보험금 액수가 그렇게 빨리 정해진 것도, 굳이 현금을 가져오라는 것도, 생각해 보니 모두 이상했다. 부부는 브랜던에게 전화를 걸었다. 브랜던이 되물었다. “저는 무사해요. 근데 대니얼이 누구예요?” 5일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카드 부부는 인공지능(AI)으로 음성을 복제하는 일명 ‘딥보이스’를 활용한 보이스피싱 피해를 볼 뻔했다. 경찰이나 검사 등을 사칭하며 돈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수법과 달리 피해자와 신뢰 관계에 있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복제하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WP는 “음색과 억양 등 말투를 재현하는 기술이 정교해지고 기술을 이용하는 비용도 싸지면서 범죄 피해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UC버클리의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인 하니 파리드 교수는 “1년 전만 해도 음성을 복제하려면 많은 샘플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유튜브나 틱톡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가져온 30초짜리 음성만 있어도 복제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벤저민 퍼킨(39)도 비슷한 피해를 당했다. 퍼킨의 부모는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고 “자동차 사고로 미국 외교관을 죽였다. 돈이 필요하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들의 음성을 들었다. 곧바로 은행 계좌에 있던 수천만 원을 비트코인으로 바꿔 송금했다. 얼마 뒤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을 깨닫고 당국에 신고했지만 돈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었다. 퍼킨은 자신의 음성이 어떤 경위로 합성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유튜브에 올렸던 스노모빌 관련 영상에 담긴 목소리가 샘플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리자이나시 경찰은 “의심스러운 전화를 받으면 메모를 하면서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물어본 뒤 전화를 끊고 공식 기관에 연락하라”라고 조언했다.● 한국 경찰 “발생 가능성 높아 예의주시 중” 전문가들은 AI 음성 복제 기능을 악용한 보이스피싱 범죄가 확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대비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WP는 “AI 음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법적 책임을 진 사례도 아직 없다”고 전했다. 올해 초에는 배우 에마 왓슨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낭독한 듯한 오디오클립 등 유명인의 목소리를 활용한 불법 복제물이 온라인에 확산되기도 했다. 국내에선 딥보이스를 활용한 보이스피싱 신고 및 검거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동아일보에 “현재 국내 범죄 조직이 딥보이스를 활용할 만큼의 기술력을 확보하진 못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범죄”라며 “대응책 마련을 위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할머니, 제가 지금 유치장에 갇혔는데 보석금이 필요해요. 지갑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어요.” 캐나다 중서부 서스캐쳐원주의 주도인 레지나에 사는 루스 카드(73)는 수화기에서 손자 브랜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선 “친구 대니얼과 차를 타고 가다 급제동을 해서 추돌사고가 났다. 변호사인 대니얼의 아버지와 통화해 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드는 “수화기에서 나오는 음성이 손자 목소리와 섬뜩할 만큼 똑같아서 의심할 생각을 전혀 못했다”고 현지 매체에 말했다.● 유튜브·SNS 상 음성 샘플로 목소리 복제 카드는 ‘대니얼의 아버지이자 변호사’라는 사람에게 바로 연락했다. 그는 카드에게 “나중에 보험금으로 9400캐나다달러(약 900만 원)가 나올 테니 일단 현금으로 그 액수를 보내 달라”고 했다. 카드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남편과 함께 은행으로 달려갔다. 하루 인출 한도인 3000캐나다달러(약 300만 원)을 인출한 뒤 곧바로 다른 은행에 찾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돈을 뽑아주세요.”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지점장은 노부부를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어제도 어떤 부부가 와서 당신들과 똑같은 말을 했어요. 당신이 들은 그 목소리가 가짜일 수도 있어요.” 카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손자가 그런 사고로 유치장에 갇힌 것도, 보험금 액수가 그렇게 빨리 정해진 것도, 굳이 현금을 가져오라는 것도, 생각해보니 모두 이상했다. 부부는 손주 브랜든에게 전화를 걸었다. 브랜든이 되물었다. “저는 무사해요. 근데 다니엘이 누구예요?”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카드 부부는 인공지능(AI)으로 음성을 복제하는 일명 ‘딥보이스’를 활용한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할 뻔했다. 경찰이나 검사 등을 사칭하며 돈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수법과 달리 피해자와 신뢰 관계에 있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복제하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WP는 “음색과 억양 등 말투를 재현하는 기술이 정교해지고 기술을 이용하는 비용도 싸지면서 범죄 피해의 위험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UC버클리대의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인 해니 패리드 교수는 “1년 전만 해도 음성을 복제하려면 많은 샘플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유튜브나 틱톡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가져온 30초짜리 음성만 있어도 복제가 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벤자민 퍼킨(39)도 비슷한 피해를 당했다. 퍼킨의 부모는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고 “자동차 사고로 미국 외교관을 죽였다. 돈이 필요하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들의 음성을 들었다. 곧바로 은행 계좌에 있던 수천만 원을 비트코인으로 바꿔 송금했다. 얼마 뒤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을 깨닫고 당국에 신고했지만 돈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었다. 퍼킨은 자신의 음성이 어떤 경위로 합성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유튜브에 올렸던 스노모빌 관련 영상에 담긴 목소리가 샘플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 한국 경찰 “발생 가능성 높아 예의주시 중” 전문가들은 AI 음성 복제 기능을 악용한 보이스피싱 범죄가 확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대비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WP는 “AI 음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법적 책임을 진 사례도 아직 없다”고 전했다. 올해 초에는 배우 엠마 왓슨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낭독한 듯한 오디오클립 등 유명인의 목소리를 활용한 불법 복제물이 온라인에 확산되기도 했다. 국내에선 딥보이스를 활용한 보이스피싱 신고 및 검거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동아일보에 “현재 국내 범죄 조직이 딥보이스를 활용할 만큼의 기술력을 확보하진 못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이른 시일 내에 충분히 발생 가능성이 있는 범죄”라며 “대응책 마련을 위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레지나 시 경찰은 “의심스러운 전화를 받으면 메모를 하면서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물어본 뒤 전화를 끊고 공식 기관에 연락하라”라고 조언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중국 권력서열 2위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에서 약 54분의 업무 보고를 끝으로 사실상 물러났다. 전국인대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를 합쳐 부르는 ‘양회(兩會)’가 13일까지 열리는 가운데 이 기간 중 이미 후임자로 내정된 리창(李强)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총리에 공식 취임하면 리 총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리 총리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 전 주석직을 놓고 경쟁했다. 시 주석이 집권 후 1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자 ‘유령 총리’로 불릴 만큼 10년 내내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특히 당국이 퇴임을 앞둔 그의 고별인사 영상까지 검열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마지막에도 초라한 퇴장을 하게 됐다.● 환대받는 리커창 영상 검열4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리 총리가 국무원, 재정부 등 정부 부처를 돌며 고별인사를 하는 각종 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삭제되는 등 검열을 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살아남은 영상은 당국의 검열 체제를 뜻하는 ‘만리방화벽’ 외부에서 가상사설망(VPN)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상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환대받거나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국가발전개혁위원회를 방문해 “최우선 순위는 발전이며 그 동력은 개혁이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고 말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리 총리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으로,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시 공청단 출신인 후진타오 전 주석의 총애를 받았고 경제통답게 ‘성장’을 중시했다. 그러나 ‘분배’를 우선시한 시 주석은 ‘공동부유(共同富裕·다 함께 잘살기)’ 등을 내세워 기업 활동을 사사건건 규제했고 리 총리의 존재감은 옅어졌다. 2020년 시 주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샤오캉(小康·의식주 걱정 없이 풍족) 사회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리 총리는 “6억 명의 월수입이 1000위안(약 19만 원)에 불과하다”며 섣부른 목표라고 맞섰다. 이처럼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던 리 총리지만 마지막 업무 보고에선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 등 시 주석을 14차례 입에 올리며 소신 발언을 자제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고별인사마저 검열 대상에 올랐다는 점은 ‘리커창 색채’를 완전히 지우려는 당국의 의도를 보여준다. 후 전 주석 또한 시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된 지난해 10월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폐막식 도중 진행요원에게 끌려나가듯 퇴장했다. 당국은 이 영상과 사진도 모두 삭제했다.● 中엘리트 ‘충성 경쟁’ 강화새 총리에 오를 리창은 시 주석의 측근 그룹 ‘시자쥔(習家軍)’의 대표 주자다. 시 주석과 마찬가지로 상하이 당 서기를 지냈다. 지난해 상하이가 중국 31개 지방정부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음에도 시 주석의 절대 신임을 바탕으로 2인자에 올랐다. 이에 따라 중국 엘리트의 시 주석에 대한 ‘절대복종’ 움직임 또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오직 시진핑의 부하만이 각광받는 시대가 왔다”고 진단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공산당이 사회경제적 자원과 기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체제의 내부자’가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다”고 분석했다. 양회 기간 중 수뇌부의 눈에 들려는 전국 대표위원들의 경쟁도 한창이다. 특히 저출산에 관한 각종 이색 제안이 넘쳐난다. 한 위원은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질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며 하루 근무시간을 8시간 이하로 제한하자고 했다. 다른 위원은 미혼 부모의 출생신고를 허용하는 제안서를 제출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100년 넘게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해온 명문 법조인 가문의 4대손인 유명 변호사가 가족 살해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았다. 2일(현지 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법원이 앨릭스 머도(54)에게 2021년 6월 부인 마거릿(52)과 둘째 아들 폴(22)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평결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머도 가문은 1920년 증조부 랜돌프 머도를 시작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2006년까지 주 내 5개 카운티를 아우르는 지역 검사장으로 활동하며 86년간 명성을 떨쳐 왔다. 해당 지역이 ‘머도 지구’로 불렸을 정도다. 앨릭스와 그의 형 역시 100여 년 전 증조부가 세운 법무법인에서 일했다. 그런데 2021년 6월 7일 앨릭스의 부인과 차남이 사냥용 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앨릭스는 이날 오후 10시경 911에 사건을 신고하며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이 숨져 있었다”고 했다. 이 사건은 한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석 달 뒤 앨릭스가 지인에게 의뢰해 자신에게 총을 쏘라며 자작극을 벌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의 그간 행각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경우 큰아들 버스터 앞으로 1000만 달러(약 119억 원)짜리 생명보험을 들어놓은 상태였다. 얼마 뒤 앨릭스가 2019년 차남 폴이 술에 취한 채 보트를 몰다 사고를 내 동승자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은 과실치사 사건을 덮기 위해 특권을 남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앨릭스는 아들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동승했던 친구들을 협박하고 지역 경찰을 압박해 사건 기록에서 폴의 이름을 지운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에는 앨릭스가 자신의 집에서 일했던 가정부가 석연치 않은 경위로 숨진 뒤 그 앞으로 나온 보험금 430만 달러(약 56억 원)를 편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자신의 로펌에서 수백만 달러를 횡령한 사실까지 줄줄이 드러나며 로펌도 사임했다. 앨릭스의 변호사는 “그가 유용한 회사 자금 대부분이 마약 구매에 쓰였으며 일주일에 최대 5만 달러(약 6500만 원)를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 사는 데 지출했다고 밝혔다. 결국 앨릭스는 지난해 7월 가족 살인 등 4가지 혐의로 기소됐고, 이후 대배심은 공개 재판을 결정했다. 그는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는 아내와 아들을 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살인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우선 앨릭스는 사건 당일 부인과 아들을 사건 현장인 개 사육장으로 불러들인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살해 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차남 폴의 휴대전화에 찍힌 사건 현장 영상에 머도의 음성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자 그는 거짓 진술을 했다고 시인했다. 검찰은 앨릭스가 횡령죄 등이 드러나는 것을 지연시키고, 각종 금융 범죄로 궁지에 몰릴 것에 대비해 자신에 대한 동정 여론을 만들기 위해 가족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앨릭스는 911 신고 당시에도 “폴의 보트 사고에 대한 보복인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앨릭스의 변호사 짐 그리핀은 최후변론에서 “검찰이 대배심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증거를 제시했다”며 살인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2일 배심원단은 약 3시간 만에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다. 미 CNN방송은 “이례적으로 빠른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앨런 윌슨 주 법무장관은 평결 후 기자회견에서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평결”이라고 밝혔다. 선고는 3일 이뤄질 예정이다. 판사는 배심원단이 유죄 평결을 할 경우 이를 받아들여 형량을 결정한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중국공산당은 미국의 선의를 이용하며 우리의 순진함을 비웃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중국과의 경제 기술 안보 경쟁을 주도하기 위해 만든 미국 하원 특별위원회가 지난달 28일 첫 청문회를 열고 본격 출범했다. ‘미국과 중국공산당 간 전략적 경쟁에 관한 특별위원회(미중 전략경쟁 특위)’ 마이크 갤러거 위원장은 “중국과의 경쟁은 실존적 투쟁”이라며 대중(對中) 경계 수위를 한껏 끌어올렸다. 미 하원은 이날 하루 이 특위를 포함해 중국 관련 4개 위원회를 열고 중국에 대한 긴급 대응을 정부와 의회에 촉구했다.● TV 황금시간대 열린 특위 청문회 미중 전략경쟁 특위는 평일 TV 시청률이 가장 높은 황금시간대로 꼽히는 오후 7시 첫 공개 청문회를 열었다. 이 특위는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을 차지한 118대 의회가 열린 직후인 올 1월 찬성 365 대 반대 65로 구성이 결정된 초당적 위원회다. 청문회에서도 민주 공화 양당은 한목소리로 ‘미국의 최대 도전은 중국’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미 해병대 정보장교 출신인 공화당 소속 갤러거 위원장은 “중국 기술력이 우리를 추월하도록 놔둘 수 없다”며 “미 의회가 분열됐다고 해서 향후 2년을 질질 끌며 허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갤러거 위원장은 중국 문화대혁명과 신장위구르자치구 인권 탄압 관련 영상을 틀면서 청문회를 시작했다. 이 영상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깡패 같은, 대량 학살 조직’이라는 영문 자막이 깔리기도 했다. 특위 민주당 간사 라자 크리슈나무르티 의원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중국의 무역과 투자 확대가 인도태평양 지역 민주주의를 장려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일이 일어났다”며 “중국 공산당이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군사력을 증강했다”고 비판했다. 이날 청문회에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를 이끈 허버트 맥매스터 전 보좌관과 대중 강경파 매슈 포틴저 전 부보좌관이 증인으로 나왔다. 포틴저 전 부보좌관은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진의를 숨기는 데 귀재”라며 “더 이상 베이징에 속아 넘어간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맥매스터 전 보좌관이 증언할 때 시위자 2명이 ‘중국은 미국의 적이 아니다’ ‘아시아 혐오를 중단하라’ 등이 적힌 종이를 들고 항의하다 쫓겨나기도 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중국 반체제 인사 웨이징성(魏京生) 비서 출신인 중국 인권운동가 통리도 증인으로 나와 “미국은 중국공산당이라는 ‘아기 용(龍)’이 자라도록 먹이를 줬다”며 “미국이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찾는 과정에서 중국도 부유해졌다”고 꼬집었다. ● 하원 금융위, ‘中 압박’ 법안 무더기 통과 이날 미 하원 금융위에서는 대만을 지원하고 중국을 압박하는 법안이 다수 통과됐다. 대만의 국제통화기금(IMF) 가입을 지지하는 법안, 중국이 대만에 위협을 가하면 중국 고위 당국자와 그 가족이 미 금융기관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하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 등에 중국 대표 참여를 배제시키는 법안이 포함됐다. 또 중국 금융부문이 국제경제에 미치는 위협을 보고서로 발행하도록 재무부에 요구하고 미국이 최대 주주인 IMF에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축소시키도록 압박을 가하는 법안, 중국에 환율 투명성을 요구하도록 하는 법안도 통과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중국 경제력을 통제하려는 10개 법안이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고 보도했다. 하원 외교위에서는 대통령에게 중국 소셜미디어 틱톡 사용을 전국적으로 금지할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심의했다. 또 중국 정찰풍선 사태에 중국이 책임지도록 하는 법안도 외교위에 상정됐다. 하원 과학우주기술위도 이날 청문회를 열어 중국과의 경쟁이 미국 연구개발(R&D)에 미친 영향 등을 논의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 연구소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미국 에너지부가 결론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각종 국립연구소를 관장하는 에너지부가 바이러스 기원이 불분명하다는 기존 시각을 뒤집으면서 ‘중국 책임론’이 다시 불거질 조짐을 보인다. 26일(현지 시간)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에너지부는 최근 백악관과 의회 주요 인사에게 제출한 기밀보고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야생동물을 통해 퍼진 것이 아니라 연구소에서 유출됐다고 밝혔다. 다만 그 이유는 공개하지 않았으며 이 결과에 대한 신뢰도는 ‘낮은 수준’이라고 부연했다. 또 WSJ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정부 생물무기 개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기존 합의를 재확인했다”고 전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미 CNN 방송에서 “정보기관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지금으로선 최종적 답은 없다”고 말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 및 다른 4개 기관은 ‘자연발생설’을 지지하고 중앙정보국(CIA) 등 두 기관은 결론을 못 내린 상태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중국에 대한 먹칠과 코로나19 기원 조사 문제의 정치화를 중지해야 한다”며 반발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 연구소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미국 에너지부가 결론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미 연방수사국(FBI)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각종 국립연구소를 관장하는 에너지부가 바이러스 기원이 불분명하다는 기존 시각을 뒤집으면서 ‘중국 책임론’이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26일(현지 시간)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에너지부는 최근 백악관과 의회 주요 인사에게 제출한 기밀보고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야생동물을 통해 퍼진 것이 아니라 연구소에서 유출됐다고 밝혔다. 다만 그 이유는 공개하지 않았으며 이 결과에 대한 신뢰도는 ‘낮은 수준’이라고 부연했다. WSJ는 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정부 생물무기 개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기존 합의를 재확인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미 CNN방송에서 “정보기관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지금으로선 최종적 답은 없다”고 말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 및 다른 4개 기관은 ‘자연발생설’을 지지하고 중앙정보국(CIA) 등 두 기관은 결론을 못 내린 상태다. 댄 설리번 공화당 상원의원은 미 NBC 방송에 나와 “의회가 광범위한 청문회를 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스위스는 공용어만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슈어 등 4개인 나라다. 정확한 소통을 위해 단순하고 명확한 시각적 디자인이 발달했다. 스위스의 기업들 역시 ‘미니멀리즘’을 구현하면서도 다양한 디자인을 위해 혁신적인 시도를 하는 것으로 손꼽힌다. 버려지는 트럭 천막을 업사이클링하는 것으로 유명한 패션기업 ‘프라이타크’가 가장 대표적이다.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공장에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 세밀하고 환경친화적인 생산 공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재단한 원단 조각들을 봉제하는 공정은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포르투갈,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유럽에 있는 협력공장에서 해결한다. 비가 많이 내리는 기후적 특성을 활용해 42만 L 규모의 빗물저장소에 빗물을 모아 트럭 천막을 세탁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다시 재활용한다. 공장 한쪽에는 유럽 각국에서 도착한 ‘수선 의뢰’ 상품이 쌓여 있었다. 한번 만들어진 제품은 모든 부분을 평생 수선할 수 있게 디자인 됐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 이세네거 프라이타크 홍보본부장은 “버려지는 소재를 재활용하는 것을 넘어 모든 분야에서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다”며 “제품을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수선과 폐기까지 먼저 내다본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초의 모듈형 디자인으로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는 디자인가구기업 USM 역시 ‘평생 쓸 수 있는 가구’를 철학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프레임과 패널로 다양한 용도와 형태를 구성할 수 있는 혁신적 디자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해마다 새로운 ‘트렌드 컬러’와 디자인이 쏟아지는 시장에 휩쓸리는 대신, 오히려 유행을 거부하고 1961년 창업 이후로 변치 않는 ‘14가지 컬러’만을 활용한다는 게 특징이 됐다. 알렉산더 셰러 최고경영자(CEO)는 “아이가 자라면 어렸을 때 쓰던 가구의 모듈을 재조립하거나 확장하며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에서 디자인은 단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용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잔예술대(ECAL·에칼)가 로잔연방공대(EPFL)와 함께 진행하는 제조업과 디자인의 맞춤형 협업 플랫폼 ‘디자인으로 만들다(Enabled by Design)’는 디자이너와 기업가를 유기적으로 융합하는 역할을 한다. 실험실에서 고안된 아이디어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2020년 출범한 뒤 이미 70여 개의 협업을 통해 제품이 탄생했다. 의료기기부터 미술품용 카메라까지 분야도 다양하다. 다프나 글라우베르트 에칼 전략기획관리자는 “디자인은 기술 스타트업들이 데스밸리(창업 초기에 겪는 어려움)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만드는 핵심 요소 중 하나”라며 기술과 예술의 협업을 강조했다.취리히·베른·로잔=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핵심 장비와 가구를 갖춘 ‘풀 패키지’ 연구 공간이라 입주 첫날부터 오직 혁신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세계 바이오·제약 분야의 심장부로 꼽히는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스위스혁신센터(SIP)바젤 캠퍼스 연구동. 14일 찾은 이곳은 마치 ‘빌트인’ 아파트처럼 주요 장비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데다 프린터 등을 갖춘 공용공간도 있었다. 카리네 모야 커뮤니티 매니저는 “이곳에 입주한 기업이나 연구진이라면 누구든 임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SIP바젤이 자리잡은 바젤 지역은 인구 56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다. 그런데도 노바티스와 ‘타미플루’로 유명한 로슈 같은 스위스 대표 제약회사는 물론이고 론자, 모더나 등 글로벌 바이오기업들과 한미약품 등 국내 업체들이 앞다퉈 진출하는 ‘혁신의 산실’이다. 이런 성공은 일부 도시나 대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대학, 그리고 중앙·지방정부가 이루는 생태계가 고루 튼튼하다. 한국처럼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협소한 국토와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탄탄한 교육, 유연한 규제와 산업진흥 정책 등으로 최근에는 스타트업 창업이 가장 활발한 국가로 꼽힌다. 스위스가 12년 연속 세계혁신지수 1위를 차지한 배경이다. 한국과의 수교 60주년을 맞아 12∼18일 방문한 스위스의 곳곳에서는 특유의 혁신을 가능케 한 여러 요소가 돋보였다.● 혁신 기반 되는 탄탄한 기초과학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이 찾은 취리히연방공대(ETH 취리히)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졸업한 곳이자 노벨상 수상자만 22명을 배출한 ‘명문 공대’다. 스위스 전체로는 27명이다. 로렌츠 후르니 연구부학장은 이런 성과에 대해 “기초과학이야말로 혁신의 중추”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제약회사들이 스위스에서 탄생한 것도 탄탄한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재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에서는 의대가 이공계 인재들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는 말에 그는 “이곳에선 오히려 자연과학과 공학의 인기가 더 커지고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ETH취리히의 지난해 신입생의 경우 물리학과 화학 전공을 선택한 학생 수가 각각 전년 대비 12%, 25% 늘었다.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면서 ‘전통적인 기초학문’을 선택하는 경향이 커진 것이다.● 규제는 유연하게, 보호는 확실하게혁신이 실제 싹을 틔우도록 장려하는 제도들도 눈길을 끈다. 스위스는 유럽 내에서도 규제 방식이 유연하고 느슨한 반면, 지식재산권 보호 법률은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젤의 경우 법인세 실효세율은 13.04% 정도다. 국경을 맞댄 독일(약 30%)의 절반 수준이다. 앙케 홀나겔 SIP바젤 아시아 디렉터는 “특허 등 지식재산권으로 발생한 소득에 대해 법인세를 최대 90%까지 감면해주기 때문에 혁신적인 성과를 내면 더 낮아진다”라고 말했다. 로봇공학이나 드론 등 떠오르는 정보기술(IT) 산업의 테스트베드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로잔에 위치한 기술 스타트업 유주플라이(UZUfly)는 드론으로 도시의 이미지를 입체 촬영한 뒤 초정밀 3차원(3D) 지도로 구현해 내 건축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항공 규제가 강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로메인 키르호프 최고경영자(CEO)는 “스위스는 공공 지리정보가 매우 개방돼 있다”며 이를 통해 도시개발은 물론이고 소방훈련 등 공공영역에서도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친환경 고려하는 지속가능한 혁신스위스 혁신의 또 다른 특성은 지속가능성과 친환경성을 우선순위로 고려한다는 것이다. 로잔연방공대(EPEL)에서 시작한 우주·해양기술기업 알마텍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여객선 ‘제스트’를 개발했다. 루크 블레샤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수소연료전지와 고밀도 배터리를 이용해 물 위에 떠 운행하기 때문에 시속 50km의 속도를 내면서도 기존 여객선들에 비해 연료 사용을 85%까지 줄일 수 있다”라며 “장기적으로는 경제성도 가장 높다”고 설명했다. 기후위기가 주목받으면서 ‘테크’를 생물다양성 보존에 접목하는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취리히대(UZH)는 세계 14개국 연구진과 협력해 멸종위기 동물들의 움직임을 분석한 ‘트리거드 바이 모션(Triggered by Motion)’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동물을 직접 포획해 태그를 다는 기존 방식과 달리, 카메라로 엄청난 양의 사진과 영상을 녹화한 뒤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하는 방식이다. KAIST 인류세연구센터 최명애 연구조교수와 협력해 비무장지대(DMZ)에서도 진행했다. 만서 마르타 동물행동학과 교수는 “다양한 시각 자료가 있기에 단순히 전문가들의 연구만으로 그치지 않고, 대중의 관심과 기여를 끌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취리히·바젤·로잔=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고작 몇 초면 만들어지는 인공지능(AI) 그림이었는데…. 손으로 그린 그림인 줄 알고 살 뻔했어요.” 종종 온라인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 그림을 구입한다는 중학생 신모 양(16)은 24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플랫폼에서 좋아하는 캐릭터 그림을 그려주겠다는 아마추어 작가가 있어서 5000원을 주고 부탁하려 했는데 예시 그림을 보니 손가락 모양이 부자연스럽고 윤곽선이 끊긴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신 양은 밑그림 등을 요구하며 공방을 벌인 끝에 “AI가 그렸다”는 실토를 받아내고 플랫폼 운영업체 측에 이를 신고했다. 이후 플랫폼 측은 “작가는 반드시 작업 과정을 인증해야 한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온라인 그림 시장까지 파고든 AI 챗GPT 등 인공지능(AI) 서비스를 일상에서 활용하는 시대가 된 가운데 온라인에서 AI가 그린 그림을 ‘손그림’이라며 판매하는 경우가 늘어 분란이 생기고 있다. AI의 그림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사람이 그린 그림과 구별하기 어렵게 되자 일부 누리꾼들이 아마추어 작가를 사칭하며 손그림 전문 플랫폼 등에서 꼼수를 쓰는 것이다. 실제로 동아일보 취재팀이 24일 트위터에서 관련 키워드를 검색해 찾은 아마추어 온라인 작가의 예시 그림 5장을 AI 판별 프로그램(정확도 96%)으로 감정한 결과 1장은 ‘99% 확률로 AI 그림’이란 결과가 나왔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그림을 자주 의뢰한다는 김태은 양(18)은 “AI 그림은 밑그림, 선화(색칠 전 선으로만 그린 그림) 등의 단계가 없기 때문에 작가와 단계별로 소통하며 원하는 그림을 얻어내기 힘들다”며 “일단 단계별 소통이 없는 경우 AI 작가인지 의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손그림을 자주 요청한다는 안모 씨(22)도 “AI가 그린 그림은 출처와 저작권이 분명치 않은 여러 그림이 짜깁기 돼 있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올릴 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AI가 그린 그림을 손그림이라며 판매할 경우 사기죄에 해당할 수 있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AI 그림을 거래하는 행위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라면서도 “관행적으로 손그림만 사고 파는 시장에서 정보를 밝히지 않고 AI 그림을 판매하는 건 사기죄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아마추어 작가들 생계 위협 AI로 손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아마추어 작가들의 생계는 위협받고 있다. 반려동물 그림을 그려주는 김루인 작가(29)는 지난해만 해도 한 달에 10건 안팎의 의뢰를 받았지만, 올해 들어온 주문은 5건도 안 된다고 했다. 김 작가는 “최근 한 고객으로부터 ‘AI 그림 아니냐’는 문의를 받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AI의 ‘그림 시장’ 공략은 이제 시작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장병탁 서울대 AI연구원장은 “앞으로는 (AI 그림과 손그림의) 경계가 모호해져 판별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AI가 그린 그림의 저작권을 둘러싼 논의도 본격화되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미국 저작권청이 이미지 생성 AI인 ‘미드저니’로 만들어진 만화 이미지에 대해 저작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놨다고 22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미드저니는 사용자가 단어나 문장을 입력하면 그에 맞춰 만화를 생성해주는 AI 서비스다. 한국 문화체육관광부도 AI가 만든 ‘작품’ 저작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24일 ‘AI-저작권법 제도개선 워킹그룹’을 발족했다.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제사회에서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떠올랐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내부 반발 등 국내 문제에 직면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단합의 물결 속에 잠시 묻혔던 고질적 병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서방 국가들을 설득해 대규모 지원을 얻어낸 대가로 자국 내 고위층의 부패와 일탈에 더 큰 책임을 요구받고 있다고 22일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주재 한 서방국 외교관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서구의 지원을 얻기 위한 추진력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부패 의혹이나 정쟁 등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선 정치적 경쟁자의 언론 노출을 통제하는 등 젤렌스키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차기 대선주자 1순위로 꼽히는 인물이자 ‘철의 장군’으로 불리는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승인을 얻지 못해 언론 인터뷰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내부 분열 조짐도 보이고 있다. 22일 러시아 관영방송 RT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러시아로부터 탈환한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의 이고르 테레호우 시장은 소셜미디어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해 국가언어법 위반 혐의로 과태료를 내게 됐다. 하르키우는 주민 다수가 러시아계다. 테레호우 시장은 지난해 11월에도 방송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해 과태료 처벌을 받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계 입문 전 함께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던 코스탼틴 페트루셰우스키는 “나는 대통령으로서 그가 잘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는다”면서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전쟁 장기화로 국민들의 피로감이 커지고 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오히려 더 강경해지고 있어 여론의 지지가 약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지난해 3월 국민들로부터 러시아군 관련 정보를 제보받기 위해 개발한 텔레그램 챗봇 ‘eVorog(E-에너미)’ 관련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 점령지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eVorog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면 보복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덮친 규모 7.8의 지진으로 숨진 사람이 10일 현지 시간 오후 4시(한국 시간 오후 10시) 기준 2만2375명으로 집계됐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사망자 수(1만9846명)를 훌쩍 넘겼다. 미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들은 지진 발생 닷새째인 이날까지 누적 사망자 수가 튀르키예에서 1만8991명, 시리아에서 3384명이라고 집계했다. 두 나라의 부상자는 8만768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주요 피해 지역에서는 야외 주차장과 체육관 등이 거대한 시신 안치소로 변하는 등 참담한 광경이 이어지고 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 등은 전했다. 튀르키예 하타이주의 한 병원 야외 주차장에는 시신 보관 가방(보디백) 수백 개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카라만마라슈의 한 공동묘지에는 제대로 된 묘비명도 없이 펜으로 이름을 적은 나무 조각들이 늘어섰다. NYT는 많은 사람이 재난이나 물 부족 상황에서의 이슬람식 장례 절차에 따라 모래와 흙으로 시신을 닦은 뒤 급히 매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망자수는 당분간 큰 폭으로 계속 늘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지진 전문가인 이스탄불공대 외브귄 아흐메트 에르잔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최대 20만 명이 무너진 건물 잔해 등에 갇혀 있지만,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추정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이날 사망자가 10만 명을 넘을 확률이 24%라고 추정했다. 지진 직후 나온 첫 보고서에서는 0%였고, 8일엔 14%였는데 이틀 만에 10%포인트 높인 것이다. 이번 세기 들어 사망자가 10만 명 이상 나온 지진은 2004년 인도양에서 벌어진 지진해일(약 23만 명)과 2010년 아이티 대지진(약 22만 명)뿐이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튀르키예·시리아를 덮친 규모 7.8의 지진으로 사망한 사람이 9일(현지시간) 2만1000명을 넘어섰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사망자 수(1만9846명)를 넘겼다. 미 CNN방송 등 외신들은 지진 발생 나흘째인 이날까지 누적 사망자수가 튀르키예에서 1만7674명, 시리아에서 3377명이라고 집계했다. 두 나라의 부상자는 7만8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주요 피해지역에서는 야외주차장과 체육관 등이 거대한 시신 안치소로 변하는 등 참담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 등은 전했다. 튀르키예 하타이주의 한 병원 야외 주차장에는 시신 보관가방(바디백) 수백 개가 줄지어 놓여있었다. 카라만마라슈의 한 공동묘지에는 제대로 된 묘비명·도 없이 펜으로 이름을 적은 나무 조각들이 늘어섰다. NYT는 많은 사람들이 재난이나 물부족 상황에서의 이슬람식 장례절차에 따라 모래와 흙으로 시신을 닦은 뒤 급히 매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망자 숫자는 당분간 큰 폭으로 계속 늘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지진 전문가인 이스탄불공대 오브군 아흐메트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최대 20만 명이 무너진 건물 잔해 등에 갇혀있지만, 생존해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추정했다.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이날 사망자가 10만 명을 넘을 확률이 24%라고 추정했다. 지진 직후 나온 첫 보고서에서는 0%였고, 8일엔 14%였는데 이틀 만에 10%포인트 높인 것이다. 이번 세기 들어 사망자가 10만 명 이상 나온 지진은 2004년과 2010년 일어난 두 차례의 지진해일뿐이다. 2004년에는 인도네시아, 인도, 스리랑카 등에서, 2010년에는 아이티에서 각각 2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연도(년)지역(규모)사망자(명)2004인도양(9.3)*22만8000 (인도네시아 인도 스리랑카 태국)2010아이티(7.0)*22만25702008중국 쓰촨성(7.9)8만76002005파키스탄(7.6)7만33382003이란(6.6)3만10002023튀르키예(7.8)2만1000(튀르기예 시리아)2001인도(7.7)2만2011일본(9.0)*1만98462015네팔(7.8)90002006인도네시아 자바(6.2)5778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8일 영국 런던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같은 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도 전격 회동했다. 9일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유럽연합(EU)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모두 사전에 공개하지 않은 ‘깜짝 일정’이다. 지난해 2월 러시아 침공 이후 처음 서유럽을 찾은 그가 유럽 주요국으로부터 탱크에 이어 ‘최종 병기’로 꼽히는 전투기까지 지원받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전투복 차림으로 런던에 도착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회담한 뒤 의회 연설에서 무기 지원을 촉구했다. 그는 린지 호일 하원의장에게 우크라이나 최고 조종사가 쓰던 헬멧을 선물했다. 이 헬멧 위에 “우리에겐 자유가 있다. 그걸 지킬 날개를 달라”라는 문구도 직접 썼다. 수낵 총리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다”며 “전투기 또한 대화의 일부였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 국왕을 만나는 등 숨가쁜 일정을 소화한 뒤 늦은 오후 파리로 이동했다. 파리 엘리제궁에서 마크롱 대통령, 숄츠 총리와 3자 회담을 가진 그는 “우리 조종사들이 비행기를 빨리 얻을수록 전쟁은 더 빨리 끝나고 유럽도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거듭 지원을 촉구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와 함께할 준비가 돼 있다”고 화답했다. 숄츠 총리도 “침공이 시작된 후 이어온 재정적, 인도주의적 지원과 무기 지원을 필요한 만큼 계속할 것”이라고 가세했다. 다만 영국 BBC방송 등은 두 정상이 전투기 지원에 대해선 확답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스푸트니크통신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런던 거리의 거지’라고 조롱했다. 그가 정권 지탱을 위해 서방을 순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또한 이날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관여한 것으로 간주한 미국 정·관계 인사 77명을 제재 명단에 추가했다.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 등 정치인들과 전직 미군 장성 등이 포함됐다.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6일(현지 시간) 오후 시리아 북부 진디레스. 규모 7.8 강진으로 5층 아파트가 무너져 내린 잔해에서 칼릴 알 샤미(34)는 형의 가족을 찾기 위해 손으로 콘크리트 더미를 파헤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출산 예정일을 하루 앞둔 형수와 태어날 아기가 걱정이었다. 시멘트 파편과 흙먼지 사이로 형수로 보이는 여성의 다리와 탯줄을 달고 있는 아기가 보였다. 차가운 폐허 속에서 조카가 태어난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재난의 한복판에 갇힌 조카는 팔다리가 축 처진 채 구조대원의 손에 들려 나왔다. 얼굴과 등이 멍투성이였지만 숨을 쉬며 팔다리를 움직였다. 아기가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은 앞다퉈 담요를 던졌다. 안타깝게도 산모 등 다른 가족들은 모두 숨졌다고 AP통신은 7일 전했다. 조카의 탯줄을 자른 샤미는 “형수가 다음 날 출산하기로 돼 있었는데 지진의 충격으로 분만한 것 같다”고 말했다. 6일 새벽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8일 오후 2시 반(한국 시간 오후 8시 반) 기준 확인된 사망자는 1만1200여 명에 이른다. 최대 3일까지인 구조의 골든타임이 끝나가고 있어 사망자는 더욱 가파르게 늘어날 수 있다. 유니세프는 어린이 사망자가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가까스로 구조됐지만 부모를 잃어 신원 파악이 안 되는 아이들도 많다. 숨진 아이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시신 수습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튀르키예 가지안테프 누르다으의 건물 잔해에서 숨진 자녀를 꺼낸 압두라흐만 겐차이 씨는 “아이를 빨간 담요로 말아 집집마다 다니며 묻어줄 사람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시체 안치소도 꽉 차서 수십 구의 시신이 앞에 방치돼 있다”고 7일 워싱턴포스트(WP)에 전했다.지진 사망 1만1200명 넘어 천으로 싸인 시신들 도로 곳곳 널려“생존 아동들도 큰 트라우마 겪을 것”이재민 2300만명… 동사 위험도 커 지진으로 도로 등 기반시설이 파괴된 데다 장비 부족 등이 겹치면서 현지에서는 주민들이 맨손으로 잔해를 파내며 구조에 나서는 실정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여기에 추운 날씨까지 겹치면서 생존 능력이 약한 어린이들의 희생이 빠르게 늘고 있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사태 수습에 사실상 손을 놓은 상황에서 구조 작업을 주도하는 반군 측 민방위군 ‘화이트 헬멧’의 한 대원은 “가족 내 사망자 중 대부분이 아이들”이라고 WP에 전했다. 다른 대원은 한 소녀가 건물에 깔린 것을 보고 나무토막으로 잔해가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막으며 4시간 동안 대화를 이어갔지만 다른 곳에서 지원 요청이 쇄도해 결국 떠나야 했다. 그는 “생존자가 있어도 구할 수 없는 지경”이라며 절망감을 드러냈다. 기적적인 생존 소식들도 간간이 전해졌다. 튀르키예 카라만마라슈에서는 콘크리트 지붕과 뒤틀린 철근 아래에 갇혀 있던 세 살배기 남아 아리프 칸이 지진 발생 이틀 만에 구조됐다. 칸보다 먼저 구조됐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구급차에 실리자 감격의 눈물을 터뜨렸다. 33세 여성과 두 살 난 딸이 지진 발생 44시간 만에 구조됐고, 소파 밑에 끼어 있던 2세 아이도 43시간 만에 구출됐다고 튀르키예 아나돌루통신이 전했다. 조 잉글리시 유니세프 대변인은 뉴욕타임스(NYT)에 “지진 피해 지역 어린이들 중 신체적·심리적으로 이번 재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는 없을 것”이라며 “아이들에겐 트라우마 중의 트라우마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회색 먼지를 뒤집어쓴 수십 명의 생존자가 유령처럼 절뚝거리며 (가족이나 지인을 찾기 위해) 아파트 잔해를 헤집고 있다”며 지진이 휩쓸고 간 현장의 참상을 묘사했다. 한 여성이 11세, 17세인 두 아들이 서로 껴안은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며 울먹이자, 어머니를 찾고 있던 이웃은 “시신이라도 찾은 당신이 부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해가 특히 심각한 튀르키예 하타이주의 안타키아에는 가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구급차량들이 접근하지 못해 혼란이 벌어졌다고 NYT는 보도했다. 하타이 현지에서 촬영된 사진에는 천으로 싸인 시신들이 도로 곳곳에 5, 6구씩 놓여 있었다. 피해 지역은 넓은데 당국의 구조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실종자 가족들은 자구책에 의존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는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알리며 구조를 요청하는 게시물이 이어졌다. 무너진 집에 갇힌 한 10대 소년은 영상 촬영 도중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리자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신이여, 저희를 도우소서”라고 말했다. 미국 지질조사국은 8일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대 10만 명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지진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이재민은 23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 튀르키예 주민은 “텐트도, 난로도,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들과 함께 비에 젖은 채 떨고 있다. 굶주림이나 지진이 아니라 추위로 죽을 것”이라며 지원을 호소했다. 튀르키예 시민들은 정부가 재난 예방과 응급 서비스 개선에 쓰겠다며 1999년 이른바 ‘지진세’(특별 통신세)를 도입해놓고 지진 대비에는 부실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AFP통신은 시민들이 “재난 발생 후 첫 12시간 동안 구조팀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쓰인 것이냐”며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앙카라=강성휘 특파원 yolo@donga.com}
6일(현지 시간) 새벽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규모 7.8 지진으로 이틀 만에 5000명 넘게 숨지는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한 배경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외신과 전문가들은 불안정한 단층선상 지역에 강도 높은 지진이 발생한 데다 구조가 부실한 건물들이 심각하게 무너져 내렸고, 잠이 든 새벽에 일어나 대피하기 어려웠던 점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고 분석했다.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대륙판(板) 경계에 자리 잡고 있어 역사적으로 지진이 자주 발생했다. 이번 지진이 발생한 튀르키예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도 아나톨리아판과 아라비아판이 만나는 동아나톨리아 단층선 위에 있다. 1882년 규모 7.4 강진 이후 큰 지진은 튀르키예 북부에 걸친 북아나톨리아 단층선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생했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스티븐 힉스 박사(지진학)는 “아라비아판은 매년 약 11mm씩 북쪽으로 움직여 아나톨리아판을 밀어낸다”며 “지난 100여 년간 큰 지진 발생이 적었던 만큼 에너지가 많이 쌓여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진 발생 위치도 상대적으로 얕았다. 대부분 지진은 깊이 수십∼수백 km에서 발생하는데 이번 지진 진원은 지표면에서 깊이 약 17.9km 지점이었다고 미 지질조사국(USGS)은 밝혔다. 강력한 진동이 지표면으로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다. 피해 지역 건물들이 내진(耐震)설계가 돼있지 않은 점도 지적된다. USGS는 자체 보고서에서 “이곳 건물들이 전반적으로 지진에 극히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철골 구조 건물은 지반이 흔들려도 철골이 휘어지면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 건물들은 대부분 벽돌을 쌓거나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어져 지진이 일어나면 치명적인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실제 피해 지역에서 종이상자가 뜯겨나가듯 산산이 부서지거나 쓰러진 건물들이 다수 목격되고 있다. 특히 12년간 내전 중인 시리아는 그동안 포격이나 총격을 받아 많은 건물들이 낡고 약해져 피해가 더욱 커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민들이 대부분 잠든 오전 4시를 좀 지나 지진이 발생한 데다 강한 여진이 곧바로 이어지면서 건물 밖으로 대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도 인명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지적된다. 진앙인 튀르키예 가지안테프의 경우 최저기온이 영하 6도 안팎이었고 지진이 일어난 날 비까지 내렸기 때문에 건물 잔해에 매몰된 사람들이 생존할 확률이 더욱 낮아지고 있다고 재난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6일(현지 시간) 새벽 튀르키예(터키)와 시리아를 강타한 규모 7.8 지진으로 이틀 만에 5000명 넘게 숨지는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한 배경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외신과 전문가들은 불안정한 단층선상 지역에 강도 높은 지진이 발생한 데다 구조가 부실한 건물들이 심각하게 무너져 내렸고, 잠이 든 새벽에 일어나 대피하기 어려웠던 점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고 분석했다.튀르키예와 시리아는 대륙판(板) 경계에 자리잡고 있어 역사적으로 지진이 자주 발생했다. 이번 지진이 발생한 튀르키예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도 아나톨리아판과 아라비아판이 만나는 동아나톨리아 단층선 위에 있다. 1882년 규모 7.4 강진 이후 큰 지진은 튀르키예 북부에 걸친 북아나톨리아 단층선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생했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대(UCL) 스티븐 힉스 박사(지진학)는 “아라비아판은 매년 약 11mm씩 북쪽으로 움직여 아나톨리아판을 밀어낸다”며 “지난 100여 년간 큰 지진 발생이 적었던 만큼 에너지가 많이 쌓여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지진 발생 위치도 상대적으로 얕았다. 대부분 지진이 깊이 수십~수백 km에서 발생하는데 이번 지진 진원은 지표면에서 깊이 약 17.9km 지점이었다고 미 지질조사국(USGS)은 밝혔다. 강력한 진동이 지표면으로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다.피해 지역 건물들이 내진(耐震)설계가 돼있지 않은 점도 지적된다. USGS는 자체 보고서에서 “이곳 건물들이 전반적으로 지진에 극히 취약하다”라고 지적했다. 철골 구조 건물은 지반이 흔들려도 철골이 휘어지면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 건물들은 대부분 벽돌을 쌓거나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어져 지진이 일어나면 치명적인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 실제 피해 지역에서 종이상자가 뜯겨나가듯 산산이 부서지거나 쓰러진 건물들이 다수 목격되고 있다. 특히 12년간 내전 중인 시리아는 그동안 포격이나 총격을 받아 많은 건물들이 낡고 약해져 피해가 더욱 커졌다는 분석도 나온다.주민들이 대부분 잠든 새벽 4시를 좀 지나 지진이 발생한 데다 강한 여진이 곧바로 이어지면서 건물 밖으로 대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도 인명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지적된다. 진앙인 튀르키예 가지안테프의 경우 최저기온이 영하 6~7도였고 지진이 일어난 날 비까지 내렸기 때문에 건물 잔해에 매몰된 사람들이 생존할 확률이 더욱 낮아지고 있다고 재난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북한이 선제적 핵공격을 법제화하는 등 핵 위협이 고조됨에 따라 한국과 미국이 확장억제(핵우산)를 강화하는 새로운 협정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기존 한미 원자력협정에 핵우산 강화를 공식적으로 담자는 것이다. 미국 외교 전문 싱크탱크 외교협회(CFR) 스콧 스나이더 선임 연구원은 6일(현지 시간) CFR 홈페이지에 실린 ‘새 한미 협정은 어떻게 북한 핵 위협을 억제하나’라는 글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자체 핵 개발과 전술핵 재배치 가능성을 시사한 것에 대해 “격랑을 일으키고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스나이더 연구원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구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제사회에서 멀어질 경우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며 이런 ‘비용’을 북한도 잘 알고 있다”면서 “북한의 오랜 목표는 한국이 미국 보호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미 간 틈새를 벌리려는 북한 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양국 정부가 기존 핵 협정을 확대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라며 한미 원자력협정을 거론했다. 1974년 체결돼 2015년 개정된 이 협정은 군사적 사안을 다루지 않고 있지만 스나이더 연구원은 “(미국이 구두로 약속해온) 핵우산, 즉 확장억제 강화를 공식적인 협정 문서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한미가 협력을 확대하고 북핵 위협에 대한 공조를 강화하는 것이 북한 도발에 효과적인 대응이자 한미 동맹이 북의 벼랑 끝 전술에 취약하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핵 협력이 확대되면 양국 원자력에너지 기업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원자력발전소 수출에 협력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