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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구 방기환 정한모 한성기 한운사 홍구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인들이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이들을 조명하는 ‘2023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11, 12일 연다. 주제는 ‘발견과 확산’이다. 문학제 기획위원장을 맡은 우찬제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 단절됐던 모국어를 살린다는 소명감으로 글을 쓴 이들”이라고 했다. 시인 정한모(1923∼1991)는 문화공보부 장관 재임 중이던 1988년 월북 작가들을 해금 조치해 백석(1912∼1996)의 작품이 출판될 수 있도록 했다. 영화 ‘빨간 마후라’(1964년)의 각본을 쓴 소설가 한운사(1923∼2009)는 한국일보 문화부장 재직 당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이 문단을 비판한 평론 ‘우상의 파괴’(1956년)를 한국일보에 게재했다. 소설가 박용구(1923∼1999)는 계간지 ‘문예’의 편집자를 지내며 역사소설을 집필했다. 시인 한성기(1923∼1984)는 대전 문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소설가 홍구범(1923∼?)은 단편소설 ‘봄이 오면’ ‘농민’, 소설가 방기환(1923∼1993)은 소설집 ‘누나를 찾아서’ ‘소년과 말’을 남겼다. 심포지엄은 11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개최된다. 작품 낭독과 음악공연을 하는 ‘문학의 밤’은 12일 오후 7시 서울 마포구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열린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고등학교 1학년, 엄마가 보증을 잘못 선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났다. 엄마와 이혼했던 아빠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 언니는 밖으로 나가서 통기타를 치며 돈을 벌었고, 동생은 엄마와 언니 대신 아침저녁 밥상을 차리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시간이 흘렀다. 배우가 된 동생은 TV 드라마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부엌을 벗어나진 못했다. 잠을 줄여가며 일하고, 집에 돌아와 밥을 차리면서 서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생각을 바꿨다. “우리 집에 와 밥 좀 먹어”라며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밥을 해 먹고 놀았다. 부엌에서 지내는 시간을 긍정하니 요리가 일이 아닌 ‘놀이’가 됐다. 최근 에세이 ‘그냥 밥 먹자는 말이 아니었을지도 몰라’(달·사진)를 펴낸 배우 양희경 씨(69) 이야기다. 1일 전화로 만난 그는 “사실 요리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해서 시작한 일”이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집안이 무너진 뒤 언니(가수 양희은·71)와 제가 아빠 엄마 역할을 해야 했어요. 과거엔 밥하는 일이 지긋지긋했는데 50년을 하고 나니 좋아지더라고요. 연기가 아니라 요리가 천직인가 의심될 정도라니까요. 하하.” 1981년 연극 ‘자 1122년’으로 데뷔한 그는 드라마에서 주로 말썽을 일으키는 고모나 이모 역할을 맡아 ‘국민 고모’로 불린다. 연극 ‘늙은 창녀의 노래’(1995년) ‘자기 앞의 생’(2019년), 드라마 ‘딸 부잣집’(1994년)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년) 등 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연기자로 인정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두 아들의 밥을 챙겨야 하는 주부였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줄 수 없으니 밥이라도 잘해 주자 싶었거든요. 일과 가정일을 병행하는 건 투쟁이었어요.” 그는 신간에서 화려한 음식이 아닌 된장, 콩나물처럼 냉장고만 열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소개한다. 콩나물 무 생채, 시금치 카레 같은 집밥 레시피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 젊은이들이 배달 음식만 시켜 먹지 않았나요. 혼자 사는 이들이 스스로 집밥을 해 먹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담았어요.” 그가 집밥을 하는 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식당 음식을 먹으면 자주 탈이 나는 체질 탓에 촬영장에도 항상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다. 나이가 들수록 출연 섭외가 줄어들어 시간을 보낼 일도 필요했다. 3년 전부터 집밥 레시피를 소개하는 유튜브 ‘양희경의 딴집밥’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고추지름장’ 레시피를 소개한 영상은 조회 수가 60만 회에 이른다. “아들의 권유로 시작한 유튜브인데 요즘 집밥 그리운 사람이 많은가 봐요. 저는 언젠가 ‘동네 밥집’을 차리고 싶어요. 내고 싶은 만큼만 돈을 내면 집밥을 먹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요.” 양 씨는 2013년 영화 ‘고령화 가족’ 이후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다. 그러나 1일 통화 때 그는 “촬영차 전남 여수시에 머물고 있다. 10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고 귀띔했다. 무슨 역할인지, 일흔이 코앞인 만큼 역할에 제약이 생기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고모 역을 맡을 때도 골라서 한 게 아니듯, 전 제게 오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세상이 내 연기가 필요 없다고 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다 정말 섭외가 안 들어오면 집밥 해 먹으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어떤 영화인지는 아직 비밀!”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고등학교 1학년, 엄마가 보증을 잘못 선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엄마와 이혼했던 아빠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 언니는 밖으로 나가서 통기타를 치며 돈을 벌었고, 동생은 엄마와 언니 대신 아침저녁 밥상을 차리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시간이 흘렀다. 배우가 된 동생은 TV 드라마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부엌을 벗어나진 못했다. 잠을 줄여가며 일하고, 집에 돌아와 밥을 차리면서 서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생각을 바꿨다. 친구들에게 “우리 집에 와 밥 좀 먹어”라며 초대해 함께 밥을 해 먹고 놀았다. 부엌에서 지내는 시간을 긍정하니 요리가 일이 아닌 ‘놀이’가 됐다. 지난달 24일 에세이 ‘그냥 밥 먹자는 말이 아니었을지도 몰라’(달)을 펴낸 배우 양희경 씨(69) 이야기다.1일 전화로 만난 그는 “사실 요리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해서 시작한 일”이라며 유쾌하게 웃었다.“집안이 무너진 뒤 언니인 가수 양희은(71)이 아빠, 제가 엄마 역할을 해야 했어요. 과거엔 밥하는 일이 지긋지긋했는데 50년을 하고 나니 좋아지더라고요. 연기가 아니라 요리가 천직인가 의심될 정도라니까요. 하하.”1981년 연극 ‘자 1122년’으로 데뷔한 그는 드라마에서 주로 말썽을 일으키는 고모나 이모 역할을 맡아 ‘국민 고모’로 불린다. 연극 ‘늙은 창녀의 노래’(1995년) ‘자기 앞의 생’(2019년), 드라마 ‘딸 부잣집’(1994년)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년) 등 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프로 연기자로 인정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두 아들의 집밥을 챙겨야 하는 주부였다.“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줄 수 없으니 밥이라도 잘해주자 싶었거든요.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건 투쟁이었어요.”그는 신간에서 화려한 음식이 아닌 된장, 콩나물처럼 냉장고만 열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소개한다. 콩나물 무 생채, 시금치 카레 같은 집밥 레시피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하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젊은이들이 배달음식만 시켜 먹지 않았나요. 혼자 사는 이들이 스스로 집밥 해 먹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담았어요.”그가 집밥을 하는 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식당 음식을 먹으면 자주 탈이 나는 체질 때문에 촬영장에 항상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다. 나이가 들수록 연기 섭외가 줄어들어 시간을 채울 일도 필요했다. 3년 전부터 자신의 집밥 레시피를 소개하는 유튜브 ‘양희경의 딴집밥’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고추 간장 레시피를 소개한 영상은 조회수가 60만 회에 이를 정도로 인기다.“아들 권유로 시작한 유튜브인데 요즘 집밥 그리운 사람이 많은가 봐요. 전 언젠가 ‘동네 밥집’을 차리고 싶어요. 내고 싶은 만큼만 돈을 내면 집밥을 먹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요.” 그는 2013년 영화 ‘고령화 가족’ 이후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다. 그러나 1일 통화 때 그는 “촬영 차 전남 여수시에 머물고 있다. 10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고 귀띔했다. 무슨 역할인지, 고희(古稀)가 코앞 인만큼 역할에 제약이 생기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고모 역할을 맡을 때도 골라서 한 게 아니듯, 전 제게 오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다만 세상이 내 연기가 필요 없다고 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다 정말 섭외가 안 오면 집밥 해 먹으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어떤 영화인지는 아직 비밀!”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제헌국회 회의록은 대한민국이 태어나는 과정을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건국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선 회의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근 제헌국회 회의록을 분석한 책 ‘오늘이 온다’(소명출판·사진)를 펴낸 권기돈 씨(60)는 지난달 27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을 펴낸 건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논쟁의 근거 자체가 틀린 경우가 많은 걸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권 씨는 “행정부와 사법부가 구성되기도 전 세워진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의 뼈대와 근육을 만든 최초의 국가기관”이라며 “제헌국회를 구성한 5·10 총선거가 열린 지 75주년을 맞아 제헌국회 회의록을 읽으며 대한민국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디슨 위스콘신대에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했다. 그는 신간에서 1948년 5월∼1950년 5월 제헌국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여다봤다. 그는 특히 신생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미국과 각을 세웠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제헌국회의 행보에 집중했다.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인 1949년 5월 제헌국회 회의에서 이 대통령은 “세계는 공산당하고 민주주의 이 두 가지가 같이 기쁘게 평화롭게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발언하며 미국에 경고했다. 1950년 1월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일명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자 제헌국회도 즉시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은 우리 한국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란 성명을 발표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이 대통령의 제헌국회 연설도 흥미로운 점이 적지 않다. 이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할 때 총리는 의원들에게 “다들 일어나시오”라고, 발언이 끝난 뒤엔 “이젠 다 앉으십시오”라고 말했다. 대통령에 대해 국회가 존중의 의미를 표하는 관례가 제헌국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제1회 제헌국회 회의 땐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며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했다. 70년 넘은 사료를 지금 읽어야 할 이유는 뭘까.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 “이 대통령은 집권 말기 독재를 한 건 분명하지만, 제헌국회 회의록을 보면 단순히 친미 인물이 아니라 한국의 생존을 위해 미국이 못마땅해할 행동도 서슴없이 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공과(功過)를 명확히 알려는 노력이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의 시작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슈가(사진)가 첫 공식 솔로 앨범인 ‘디데이(D-DAY)’로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2위에 올랐다. 이는 지난달 ‘빌보드 200’에서 2위에 올라 한국 솔로 가수로 이 차트 최고 기록을 세운 BTS 지민과 같은 성적이다. 빌보드는 1일(현지 시간) 디 데이가 14만 장 팔려 2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슈가는 이로써 ‘빌보드 200’ 10위 안에 든 BTS 세 번째 멤버가 됐다. 앞서 지민은 ‘페이스(FACE)’로 2위, RM은 ‘인디고(Indigo)’로 3위에 각각 올랐다. 이번 주 1위는 미국 가수 모건 월런의 ‘원 싱 앳 어 타임(One Thing at a Time)’이다. ‘빌보드 200’은 실물 음반 등 전통적 앨범 판매량과 스트리밍 횟수를 환산해 순위를 매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나에게 말을 몇 필 다오/올해의 첫 배가 갖고 싶소/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의 말 중/가장 순결한 말을” 펼쳐진 흰 부채 오른쪽에 소설가 박완서(1931∼2001)가 직접 쓴 글귀가 검은 붓글씨로 새겨져 있다. 왼쪽엔 화가 김점선(1946∼2009)이 그린 붉은 말이 담겼다. 이처럼 ‘선면화(扇面畵·부채 그림·사진)’는 문학과 그림이 한 폭에 담긴 종합예술이다. 예술가의 선면화를 모은 전시 ‘바람 속의 글·그림 2023―영인 서화선 명품전’이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26일까지 열린다. 선면화엔 작가 박경리(1926∼2008) 김지하(1941∼2022), 화가 천경자(1924∼2015) 김병종(70) 등의 글과 그림이 담겼다.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이 “닭은 울지 않는다/다만 빛을 토할 뿐이다”라고 쓰고, 화가 이석조(78)가 닭을 그린 선면화도 눈에 들어온다. 4000∼6000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저를 쫓아다니는 남자 말인데, 실은 제 친오빠입니다.” 일본 도쿄의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바 ‘트랩 핸드’. 40대 여성 가즈미는 가게 주인 다케시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가즈미는 부자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병으로 죽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러자 평소 연을 끊고 지내던 오빠가 가즈미를 찾아와 돈을 달라고 협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숨을 쉬는 가즈미에게 다케시는 ‘마술’ 같은 해결 방법을 슬쩍 알려준다. 단편소설 ‘맨션의 여자’의 내용이다. 추리소설의 대가인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력이 뛰어난 마술사 다케시를 주인공으로 한 ‘블랙 쇼맨’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을 펴냈다. 전작인 장편소설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알에치코리아·2020년)에서 다케시가 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사건을 해결했다면, 신작에 담긴 3편의 단편소설에선 다케시가 자신의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의 고민을 들어주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준다. ‘환상의 여자’는 결혼해 가정을 이룬 남자와 유부남인 그를 사랑했던 여자의 이야기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남자가 세상을 떠나자 여자는 정말 연인이 자신에게 진실만을 말했을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고민을 다케시에게 털어놓고, 다케시는 여자가 진실을 찾도록 돕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진심이었을까. ‘위기의 여자’엔 바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하와이에 별장이 있다”며 슬쩍 여자의 술에 수면제를 탄다. 이를 알아챈 다케시는 남자와 여자의 술잔을 바꿔 오히려 남자를 잠에 빠지게 한다. 여자는 거듭 감사를 표하지만 다케시는 “다음에는 멋진 남성과 함께 찾아 달라”고 할 뿐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신작은 일본보다 한국에 먼저 출간됐다. 전작이 국내에서 10만 부가 팔린 덕에 작가가 국내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장편소설 ‘백야행’(재인·2000년), ‘용의자 X의 헌신’(재인·2006년) 등 작가의 대표작처럼 치밀한 속임수는 없지만 주인공이 매력적이고 흡인력이 강해 히가시노 게이고 팬에겐 더없는 선물이 될 것 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지난해 7월 재출간된 장편소설 ‘파친코’(인플루엔셜) 이후 오랜만의 대어(大魚)다.” 최근 출판계 관계자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74)의 장편소설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이 13일 일본에서 출간된 것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선인세가 20억 원 이상에 달한 ‘파친코’ 이후 국내에선 해외 작가 판권 경쟁이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무라카미의 신작인 만큼 국내 출판사가 출간을 두고 치열한 판권 경쟁을 벌일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처럼 ‘거리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무라카미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시 써야 할 때가 됐다”고 밝혔지만, 짧은 인터뷰에선 6년 만에 장편소설을 펴내는 그의 속마음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거리와…’의 국내 출간을 기다리며 그가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2017년·문학동네)를 탈고한 뒤 일본 여성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와 11시간에 걸쳐 대화한 대담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의 책장을 열었다. “(사람들이) ‘무라카미는 이제 틀렸어’라고 하지 않을까 상상하는 거예요. 항상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무라카미는 신작을 낼 때마다 기대와 비판을 함께 받았다. 1980년 문예지에 발표했으나 책으로 발간하지 않은 동명의 중편소설을 고쳐 쓴 ‘거리와…’를 두고도 그의 밑천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그는 항상 최악을 생각하며 버틴다. 그는 불안할 때도 “일단 쓴다. 오늘은 실컷 낮잠이나 자볼까, 이러지는 않는다”며 압박감을 이겨내는 비결이 근면함이라 강조한다. 무라카미는 상업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난 경제 시스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설’이라는 패키지 상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 중 하나일 뿐”이라며 “‘무라카미 인더스트리즈’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거위”라고 솔직하게 답한다. 무라카미는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소설을 써오면서, 독자가 절대 손해 보게 하진 않았다”고도 자부한다. 무라카미가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여성을 수동적으로 소비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거리와…’ 역시 고등학교 3학년인 17세의 주인공 ‘나’가 한 살 연하의 여고생과 교제하고, 이후 나이가 든 뒤에 여고생을 그리워하는 서사다. 무라카미는 “‘미안합니다’라고 순순히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며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가?”라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들여다보려 한다. 정치적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다는 비판엔 “논쟁에 말려들 바에야 혼자서 조용히 내 소설을, 이야기를 정면에서 부딪쳐 가고 싶다”고 소신을 드러낸다. ‘거리와…’가 무라카미의 전작들에 비해 크게 흥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다. 하지만 무라카미의 신작이란 이름값만으로 충분한 덕인지, 국내 주요 출판사 편집자들은 이미 ‘거리와…’ 일본판을 읽으며 시장성을 검토하고 있다. 벽 안쪽과 바깥이 병행하는 세계를 다뤘다는 황당한(?) 설정에도 ‘거리와…’가 다시 국내에서 ‘하루키 붐’을 일으킬 수 있을까 궁금하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구하기 어려운 책인데….” “이 책 제작 가능할까요?” 온라인 서점 알라딘이 지난달 28일 문을 연 ‘단한권 인쇄소’에 쏟아진 독자 요청이다. ‘단한권 인쇄소’는 절판된 책을 서점이 제작해 독자에게 배송하는 서비스다. 출판사에 재고가 없는 책에 대해 저자와 출판사의 승인을 받은 후 제작한다. 도서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절판 도서를 소장할 수 있어 서비스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5000건의 요청이 들어왔다. 조선아 알라딘 도서2팀장은 “중고로 사고 싶어도 책이 없거나 웃돈을 많이 줘야 해 난감해하던 독자들의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종이책을 찾는 이가 점차 줄면서 대형 서점들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교보문고가 1980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1일 희망퇴직을 시행할 만큼 악화된 출판계 상황이 이 같은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서점들이 중점을 두는 건 차별화된 콘텐츠다. 온라인 서점 예스24는 17일 인기 작가의 신작을 타 서점보다 먼저 판매하는 ‘예스24 오리지널’을 시작했다. 2020년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가 김훈 장편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 김영하 장편소설 ‘작별인사’(복복서가)를 선공개해 종이책 독자를 끌어들이려 했던 전략과 비슷하다. 다만 예스24 오리지널은 천선란 연작소설집 ‘이끼숲’, 김초엽 연작소설집 ‘파견자들’ 등 MZ세대(밀레니얼+Z세대) 독자가 많은 젊은 작가의 신작을 공략했다. 박수호 예스24 도서2본부장은 “젊은 독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선공개에 민감하고, 책 구매 서점을 옮기는 걸 별로 망설이지 않는 점에 주목했다”고 했다. 교보문고는 누구나 작품을 연재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창작의 날씨’를 지난해 5월 열고, 콘텐츠를 직접 발굴하고 있다. 영풍문고는 10∼19일 구매한 책값이 7500원 이상만 돼도 무료 배송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최근 물류비와 인건비가 오른 탓에 주요 서점이 무료배송 기준을 1만5000원으로 인상한 상황을 역이용한 것이다. 영풍문고는 이벤트가 끝난 뒤에도 책값이 1만 원이 넘으면 무료로 배송하고 있다. 출판계에선 불황을 타개할 베스트셀러가 연달아 나오지 않는다면 서점들의 노력은 단기 성과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2021년 오프라인 서점 매출 3위였던 서점 반디앤루니스가 부도 처리되면서 시작된 서점가 불안감이 최근 교보문고의 희망퇴직으로 더 거세졌다”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웹툰 등 다른 콘텐츠에 뺏긴 독자를 되찾지 않는다면 근본적 해법은 되지 못할 것 ”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장편소설 ‘고래’(2004년·문학동네)는 내가 읽은 소설 중 최고다. ‘고래’를 세계에 소개하겠으니 믿고 맡겨 달라.” 2016년 말 미국인 문학 에이전트 켈리 팰커너는 한국에 있는 천명관 작가(59·사진)를 찾아와 이렇게 설득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 5월 영국 런던 주영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서 잠시 이야기만 나눈 사이였다. 더군다나 천 작가는 당시 문학을 그만두고, 영화계로 돌아가려고 하던 차였다. 팰커너의 의지는 확고했다. 팰커너는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천 작가를 수차례 만나 “믿어 달라”고 설득했다. 결국 천 작가는 “정 원한다면 한번 해 보라”며 계약을 수락했다. 7년이 지나 ‘고래’는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천 작가는 2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사실 처음 팰커너의 제의를 받았을 때 아무 관심도 없었다. 다른 곳에서 제안도 없고 해서 일을 맡긴 게 부커상 최종 후보의 시작”이라며 호쾌하게 웃었다. “해외 에이전시가 한국 소설을 번역하려고 덤벼드는 게 이상하기도 했는데, 그냥 얼떨결에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해외에 책을 잘 소개하더라고요.”(천 작가) 팰커너는 남편과 함께 아시아 문학을 영미권에 소개하는 ‘아시아 문학 에이전시’를 운영한다. 천 작가를 비롯해 배수아 한유주 김이설 등 한국 작가를 해외에 소개하고 있다. 박색이라 신혼 첫날 소박 맞고 복수심을 지닌 노파, 집에서 도망쳐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금복, 말 못 하는 춘희까지 여성 세 명의 거친 삶을 그린 ‘고래’에 팰커너는 왜 빠졌을까. 팰커너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장난스러우면서도 창조적인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흔들렸다. ‘고래’는 현대 문학의 걸작”이라고 예찬했다. “전 ‘고래’의 유머 감각과 독특함이 너무 좋아요. 부커상이 ‘고래’에 주목한 것도 이런 소설은 세상에 없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책장을 덮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팰커너) ‘고래’는 2018년 영미권 출판사 아키펠라고북스와 출간 계약을 맺었다. 해외 출판사를 찾는 데 2년이 걸린 셈이다. 아키펠라고북스는 천 작가의 작품을 가장 잘 번역할 적임자로 김지영 번역가(42)를 낙점했다. 변호사 출신인 김 번역가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년·창비)로 2012년 맨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다. 한국 작품이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김 번역가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고래’ 특유의 구수함과 유머, 한국 근대 역사를 다루면서도 이야기를 박진감 있게 전개시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며 번역을 수락한 계기를 설명했다. 김 번역가가 번역에 가장 유의한 건 유머다. 그는 “유머는 문화적 차이 때문에 자칫 건조하게 번역될 수 있다. 원고를 다듬으면서 계속 검토했다”고 했다. 이어 “이렇게 쓰면 더 웃긴가, 아니면 저렇게 쓰면 더 웃긴가 고민을 많이 했다. 문체가 너무 웃겨서 컴퓨터 앞에서 혼자 낄낄 웃을 때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인물 이름 번역에도 신경 썼다. 등장 인물 ‘칼자국’은 직역이 아니라 ‘흉터 있는 남자(The man with the scar)’로 번역했다. ‘춘희(春姬)’는 발음과 뜻을 함께 써서 ‘CHUNHUI-or Girl of Spring-’이라고 썼다. 부커상 수상자는 다음 달 23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한다. 세 명은 어떤 마음일까.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에요.”(김 번역가) “수상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팰커너) “결과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봐야죠.”(천 작가)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장편소설 ‘고래’(2004년·문학동네)는 내가 읽은 소설 중 최고다. ‘고래’를 세계에 소개하겠으니 믿고 맡겨달라.” 2016년 말 영미권 문학 에이전트 켈리 팔코너는 한국에 있는 천명관 작가(59)를 찾아가 이렇게 설득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 5월 영국 런던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서 잠시 이야기만 나눈 사이였다. 더군다나 천 작가는 당시 문학을 그만두고, 영화계로 돌아가려고 하던 차였다. 반면 켈리의 의지는 확고했다. 켈리는 수차례 천 작가를 만나 “믿어달라”고 설득했다. 천 작가는 처음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고집스러운 요청에 점점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 원한다면 한번 해 보라”며 계약을 수락했다. 7년이 지나 ‘고래’는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천 작가는 2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사실 처음 켈리의 제의를 받았을 때 아무 관심도 없었다. 다른 곳에서 제안도 없고 해서 일을 맡긴 게 부커상의 시작”이라고 호쾌하게 웃었다. “당시 소설 써서 먹고 살긴 힘들다고 생각해서 삶의 방향을 영화로 틀어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어요. 해외 에이전시가 한국 소설을 번역하려고 덤벼드는 게 이상하기도 했는데, 그냥 얼떨결에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해외에 책을 잘 소개하더라고요.”(천 작가) 켈리는 남편과 함께 아시아 문학을 영미권에 소개하는 ‘아시아 문학 에이전시’를 운영한다. 천 작가뿐 아니라 배수아 한유주 김이설 같은 한국 작가를 해외에 소개하고 있다. 켈리는 왜 ‘고래’에 빠졌을까. 켈리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장난스러우면서도 창조적인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흔들렸다. ‘고래’는 현대 문학의 걸작”이라고 능청스럽게 예찬했다. “천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에요. 전 ‘고래’의 유머 감각과 독특함이 너무 좋아요. 부커상이 ‘고래’에 주목한 것도 이런 소설은 세상에 없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책장을 덮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켈리) ‘고래’는 2018년 영미권 출판사 ‘아키펠라고 북스’와 출간 계약을 맺었다. 해외 출판사를 찾는 데 2년이 걸린 셈이다. ‘아키펠라고 북스’는 천 작가의 작품을 가장 잘 번역할 적임자로 김지영 번역가(42)를 골랐다. 변호사 출신인 김 번역가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년·창비)로 2012년 맨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고, 20여 년 전 아키펠라고 북스 편집자로 일한 바 있다.김 번역가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고래’ 특유의 구수함과 유머, 한국 근대 역사를 다루면서도 이야기를 박진감 있게 전개 시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며 번역을 수락한 계기를 설명했다. 김 번역가가 번역에 가장 유의한 건 유머다. 김 번역가는 “유머는 문화적 차이 때문에 자칫 건조하게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원고를 다듬으면서 계속 검토했다”며 “이렇게 쓰면 더 웃긴가, 아니면 저렇게 쓰면 더 웃긴가 고민을 많이 했다. 문체가 너무 웃겨서 혼자 컴퓨터 앞에서 낄낄 웃을 때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김 번역가는 인물명 번역에도 신경 썼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 ‘칼자국’은 직역이 아니라 ‘흉터 있는 남자’(The man with the scar)로 번역했다. 등장인물 ‘춘희’(春姬)는 발음과 뜻을 함께 써서 ‘CHUNHUI-or Girl of Spring-’라고 썼다. 독특한 건 번역가와 작가가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 번역가는 “읽을 때도 술술 읽혔고 번역할 때도 원활하게 풀렸다. 번역이 끝난 뒤 비로소 천 작가에게 연락해서 인사했다”고 했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민담, 고전소설, 설화를 많이 이야기 해주셨어요. 외할머니가 아주 익살스럽게 말씀하셔서 배를 잡고 웃은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고래’의 유머스러운 문체가 익숙하게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김 번역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자는 다음 달 23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한다. 기다리는 마음을 묻자 3명은 각기 다른 답을 내놨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에요.”(김 번역가) “수상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켈리) “결과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봐야죠.”(천 작가)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불개미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위해 살아간다. 일개미들은 평소엔 번식에 특화된 여왕개미들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어느 때가 되면 일개미는 여왕개미를 극소수만 남기고 하나씩 제거한다. 일개미는 여왕개미의 다리를 활짝 펴게 해놓고 찔러 죽인다. 제거되는 여왕개미 중엔 일개미의 어미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눈물을 머금고(?) 집단을 위해 잔혹한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이후 살아남은 여왕개미가 알을 낳으면 일개미는 다시 새끼를 부양하기 위해 일을 시작한다. ‘다윈의 가장 위대한 20세기 후계자’로 불리는 미국 사회생물학자인 저자(1929∼2021)는 불개미의 이런 행태를 ‘진사회성(眞社會性)’이란 개념으로 해석한다. 진사회성은 사회성이 극도에 달해 높은 수준의 협력과 분업이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개체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사회성이 극단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개미는 부양에, 여왕개미는 번식에 집중하면서 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한다. 저자가 진사회성에 주목하게 된 건 인류 때문이다. 초창기 인류가 처음 지구에 등장했을 때 인류의 생물량은 전체 동물 중 1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인류와 인류가 길들인 가축의 생물량을 모두 합하면 전체의 99%에 이른다. 다른 어떤 동물도 아닌 인류가 지구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 건 사회성이 극도에 달한 ‘진사회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예를 들어 초창기 인류의 여러 집단에선 여성이 아이를 낳아 기를 때 출산과 육아를 돕는 ‘할머니 도우미’를 찾아볼 수 있다. 할머니 도우미 자신은 이미 폐경 후라 아이를 낳을 수 없지만 선의로 육아를 돕는다. 자신의 번식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다. 그 덕에 인류가 홀로 새끼를 키우는 동물보다 더 효율적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경우 일부 개체가 집단을 위해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집단 선택’ 이론도 진사회성에 힘을 실어주는 근거로 사용된다. 동물의 사회성은 여러 단계에 걸쳐 진사회성으로 나아간다. 사회성이 낮은 벌은 침을 쏘아 먹이를 잡은 뒤 먹이에 알을 낳는다. 이어 새끼가 태어나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그대로 놔둔다. 사회성이 발달하면 벌은 침을 쏘아 먹이를 잡은 뒤 이를 보금자리로 옮긴다. 이어 보금자리로 계속 기절한 먹이를 배달한다. 사회성이 극도에 달하면 벌은 어미와 딸이 군락을 이루며 산다. 딸들은 먹이를 잡아서 어미에게 배달한다. 딸이 일꾼, 어미는 여왕으로 역할을 나눌 정도가 되면 진사회성 집단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1978년)와 ‘개미’(1990년)로 각각 1979년, 1991년에 두 차례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의 주장은 개체가 각자 이기적인 선택을 내리고, 이 경쟁을 통해 번식과 유전이 이뤄진다는 진화론의 일반적 주장과는 결이 다르다. 인류사를 돌아보면 정말 저자의 말대로 인류가 이타적인지,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타심을 바탕으로 한 진사회성이 인류의 성공 비결이었다면 앞으로 인류가 나아갈 길도 이기심보단 이타심에 있는 것 아닐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방송인 서세원 씨(사진)가 20일(현지 시간) 캄보디아에서 사망했다. 향년 67세. 외교부에 따르면 서 씨는 이날 오전 11시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는 한인병원에서 링거를 맞던 중 사망했다. 서 씨는 평소 당뇨병을 앓았다. 서 씨의 가족은 시신을 한국으로 옮겨 장례를 치를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1979년 TBC(동양방송) ‘개그콘테스트’로 데뷔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MBC ‘청춘행진곡’과 ‘일요일 일요일 밤에’, KBS 2TV ‘서세원쇼’를 진행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고인은 제작에 참여한 영화 ‘긴급조치 19호’(2002년)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방송사 PD에게 홍보비 명목으로 뒷돈을 건네거나, 허위로 세금계산서를 발급해 제작비를 횡령하고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수사를 받으며 논란에 휩싸였다. 서 씨는 이 사건으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방송 활동을 중단한 서 씨는 목사로 활동했다. 고인은 모델 출신 방송인인 아내 서정희 씨(63)를 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2015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고인은 2015년 서 씨와 이혼했다. 서 씨와의 사이에 아들 종우 씨, 딸 동주 씨를 뒀다. 고인은 재혼한 후 캄보디아로 이주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문화체육관광부가 가짜뉴스를 퇴치하기 위해 기존 ‘가짜뉴스 퇴치 태스크포스(TF)’ 기능을 강화하고, 범정부적으로 대응하겠다고 20일 밝혔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제63주년 4·19 기념식에서 “가짜뉴스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고 언급한 지 하루 만에 나온 조치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이날 “가짜뉴스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고 신뢰를 파괴하는 악성 정보 전염병”이라며 “가짜·거짓 뉴스의 전파력은 의학적인 전염병보다 속도가 빠르며, 변종과 재가공 형태도 교묘하고 집요하다”고 했다. 문체부는 다음 달 초 한국언론진흥재단에 ‘가짜뉴스 신고·상담 센터’를 설치한다. 가짜뉴스로 피해를 본 국민의 신고를 접수하고 구제 절차에 대한 상담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언론진흥재단은 국민이 피해 신고를 했을 때, 구제 절차를 안내한다. 또 가짜뉴스를 유형별로 나누고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공개한다. 문체부 관계자는 “향후 피해구제 사례집과 대응 매뉴얼을 발간해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보급할 계획”이라며 “정부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허위·왜곡 보도에 대해선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내 ‘사실은 이렇습니다’ 코너를 만들어 정확한 사실을 알리는 기능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체부는 민간 자율심의기구를 포함한 민간과의 협력과 소통 시스템을 만들고, 가짜뉴스에 대한 자정 기능을 강화한다. 서울대저널리즘스쿨, 싱크탱크 준비위원회와 협의해 ‘인공지능(AI) 가짜뉴스 감지 시스템’ 개발을 지원할 방침이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과도 협력할 예정이다. 국민이 가짜뉴스를 판단할 수 있도록 미디어 교육도 강화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홉 살, 부모님과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시드니 북쪽 외곽의 작은 마을엔 동양인이 드물었다. 백인 친구들은 한국에서 온 남자아이의 어설픈 영어를 비웃었다.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자신감을 잃었다. 의견이 달라도 입에선 “예스” “오케이”라는 말만 나올 뿐이었다. 아이의 입을 연 건 토론이었다. 아이는 쉬는 시간엔 조용했지만, 토론이 벌어지는 강당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다른 아이들도 토론할 땐 영어가 어눌하다고 비웃지도, 동양인이라고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세계 유명 토론대회를 휩쓴 토론 전문가가 됐다. 논리적 사유와 합리적 말하기에 관한 책 ‘디베이터’(문학동네)를 14일 펴낸 서보현 씨(29·사진) 이야기다. 18일 화상으로 만난 서 씨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질문을 끝까지 듣고 오래 생각한 뒤 천천히 생각을 털어놨다. 그는 “다른 사람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명료하게 밝혀도 다툼이나 불화로 이어지지 않는 마법이 바로 토론”이라고 했다. 호주에선 교내 활동으로 토론을 장려한다. 11세에 학교 토론팀에서 토론을 시작한 그는 2013년 세계학생토론대회(WSDC), 2016년 세계대학생토론대회(WUDC)에서 우승했다. 호주 국가대표, 미국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로도 일했다. 그는 호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인문학부를 졸업했고, 현재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토론 비결을 묻자 그는 경청을 언급했다. “사람들은 말을 잘해서 상대방 기를 누르는 것이라고 토론에 대해 오해하는데, 사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게 더 중요해요. 잘 들어야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낼 수 있거든요. 토론은 웅변이 아닙니다.” 서 씨는 신간에서 누구든 토론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갈등을 회피하고 침묵하는 태도로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토론의 중요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2019년 IBM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토론형 AI ‘프로젝트 디베이터’가 세계 토론대회 최다 우승자와 토론을 벌였어요. AI가 논리적으론 우수했지만, 결과는 적절한 순간에 웃거나 인상을 쓰며 청중의 감정을 건드린 인간의 승리였죠.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건 AI가 잘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걸 제일 잘하는 건 사람입니다.” ‘침묵은 금’이라 여기는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자랐기 때문에 토론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는 “토론은 서양의 전유물이 아니고, 어느 나라든 서로 이견을 조율하는 일은 있었다”며 “특히 내 토론 스타일엔 경청이라는 한국 스타일이 짙게 묻어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토론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답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권에서 특히 말싸움이 난무한다. 서 씨는 “유권자들이 남을 이기려는 정치인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제대로 토론하는 정치인에게 환호한다면 정치 문화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이 이야기를 복사하는 것을 넘어서 창작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사피엔스’(김영사)를 쓴 세계적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47)는 19일 어린이·청소년책 ‘멈출 수 없는 우리’(주니어김영사)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에 머물고 있는 그는 이날 화상으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챗GPT에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며 “AI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로봇도, 총도 필요 없다. 이야기만 만들고, 인간이 이를 믿게 해서 서로를 쏘게 만들면 된다”고 했다. 하라리 교수는 지난해 10월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판 서문을 AI 자연어 처리 모델 ‘GPT-3’가 쓰도록 한 뒤 결과물의 수준에 “깜짝 놀랐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을 통해선 “AI가 인류를 장악하고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 AI 도입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라리 교수는 이날도 AI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알고리즘은 원시적인 형태의 AI”라며 “이용자가 플랫폼에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들기 위해 증오와 분노, 공포를 일으키는 콘텐츠를 배치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사회를 양극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최근 AI는 인간과 대화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며 “자라나는 세대가 AI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면 AI는 (특정한) 물건을 사게 하거나, 정치·종교적 신념을 주입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강력한 신약을 개발했을 때 긴 과정을 거쳐 안전성을 검사하는 것처럼 AI의 장단기적 영향을 확인하고 대중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가 대중에게 풀려나가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역사 교육이다. ‘멈출 수 없는 우리’를 시작으로 매년 1권씩 총 4부작으로 된 어린이·청소년책 시리즈를 펴내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큰 존재론적, 생존 위기를 맞닥뜨렸어요. 인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알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책을 썼습니다. 인류가 어떻게 사바나 초원의 동물에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는지, 그 과정을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AI의 이야기에 어떻게 대응할지 조금이나마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홉 살, 부모님과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시드니 북쪽 외곽의 작은 마을엔 동양인이 드물었다. 백인 친구들은 한국에서 온 남자아이의 어설픈 영어를 비웃었다.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자신감을 잃었다. 의견이 달라도 입에선 “예스” “오케이”라는 말만 나올 뿐이었다. 아이의 입을 연 건 ‘토론’이었다. 아이는 쉬는 시간엔 조용했지만, 토론이 벌어지는 강당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토론 땐 영어가 어눌하다고 비웃을 수도, 동양인이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는 커서 세계 유명 토론대회를 휩쓴 ‘토론 전문가’가 됐다. 14일 인문교양서 ‘디베이터’(문학동네)를 펴낸 서보현 씨(29) 이야기다. 18일 화상회의 시스템 ‘줌’으로 만난 서 씨는 생각보다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질문을 끝까지 듣고, 오래 생각한 뒤, 천천히 생각을 털어놨다.“제가 토론을 시작한 건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민자인 ‘아웃사이더’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말하기 위해선 토론장이 필요했습니다.” 호주에선 교내활동으로 토론을 장려한다. 그 역시 11세에 토론을 시작했다. 처음은 호기심으로 학교 토론팀에 가입했고 자신의 재능을 찾아냈다. 2013년 세계학생토론대회(WSDC), 2016년 세계대학생토론대회(WUDC)에서 우승했다. 그는 호주 국가대표, 미국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로도 일했다. 토론 비결을 묻자 그는 ‘경청’을 언급했다.“토론을 말을 잘해서 상대방 기를 누르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게 더 중요해요. 잘 들어야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낼 수 있거든요. 토론은 웅변이 아닙니다.” 그는 신간에서 누구든 토론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갈등을 회피하고 침묵하는 태도로는 현대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토론의 중요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역설한다.“2019년 IBM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토론형 AI ‘프로젝트 디베이터’가 세계 토론대회 최다 우승자와 토론을 벌였어요. AI가 논리적으론 우수했지만, 결과는 적절한 순간에 웃거나 인상을 쓰며 청중의 감정을 건드린 인간의 승리였죠.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건 AI가 잘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걸 제일 잘하는 건 사람입니다.” 그는 호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인문학부를 졸업했다. 현재도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당신은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토론 전문가가 된 것 아니냐고, ‘침묵은 금’이라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는 갈등을 토론으로 풀지 못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토론은 서양 것이 아니에요. 어느 나라든 서로 이견을 조율하는 일은 있었으니까요. 특히 제 토론 스타일엔 ‘경청’이라는 한국 스타일이 짙게 묻어나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전 토론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토론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치 진영 간의 공허한 말싸움, 우기기, 윽박지르기가 난무하기에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만의 온전한 생각을 드러내는 말하기 기술은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과 정반대의 의견을 명료하게 밝혀도 다툼이나 불화로 이어지지 않는 마법이 바로 토론이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천명관 작가(59·사진)의 장편소설 ‘고래’(2004년)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지난해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2017년)에 이어 한국 작가의 작품이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건 처음이다. 18일(현지 시간) 부커상 운영위원회는 ‘고래’를 포함해 6편의 최종 후보작을 발표했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고래’에 대해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믿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며 “등장인물들은 선하지 않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천 작가는 부커상과의 인터뷰에서 “‘고래’는 내 인생을 바꿨고, 여전히 인생의 추진력이 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고래’를 번역한 김지영 번역가도 최종 후보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2007년)로 수상했다. 한 작가는 2018년 ‘흰’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고래’는 박색이라 신혼 첫날 소박 맞고 홀로 살며 복수심을 지닌 노파, 집에서 도망친 뒤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금복, 말 못하는 춘희까지 여성 세 명의 거친 삶을 그렸다.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으로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수상자는 다음 달 23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한다. 상금 5만 파운드(약 8000만 원)는 작가와 번역가가 반반씩 가진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집에 내려달란 말이야!” 한강을 달리는 심야버스 안. 취객이 기사를 협박하며 난동을 부린다. 승객인 기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불안해한다. 그때 한 여자가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기준에게 다가온다. 여자는 작은 치약 통처럼 생긴 플라스틱 튜브를 건네며 “이걸 짜서 아저씨 코에다 바르라”고 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시키는 대로 한다. 그러자 아저씨가 갑자기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 빨려 들어가듯 앉는다.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던 건 9개의 꼬리고 여자는 요술을 쓰는 여우였던 것. 기준은 홀리듯 구미호와 사랑에 빠진다. 전자책(e북)으로 17일 먼저 출간되고, 다음 달 1일 종이책이 나오는 장편소설 ‘호’(읻다·사진)는 정보라 작가(47)가 구미호 설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로맨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유쾌한 장면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코미디, 주인공을 위협하는 귀신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선 공포 장르처럼 느껴진다. 평범한 남자가 구미호와 연애하며 겪는 사건을 정 작가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으로 재치 있게 풀어냈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4일 만난 정 작가에게 정말 사랑 이야기를 쓴 게 맞냐고 묻자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연애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깔깔 웃다가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거요. 독자 생각은 모르겠지만 전 진짜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하하.” 그가 처음 ‘호’를 쓴 건 15년 전이다. 2008년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당시 러시아에 머물던 그는 급히 귀국했다. 외할머니를 돌보던 그는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와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을 보던 기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공포 설화를 현대적인 로맨스로 바꿔 쓰면 어떨까 싶었다. 외할머니가 눈을 뜨길 바라는 마음도 담고 싶었다. 학원 강사인 기준과 구미호의 결혼을 반대하는 할머니가 쓰러지고, 할머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준이 고군분투하는 서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외할머니 사망신고도 제가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죠. 소설 속에서나마 외할머니가 퇴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썼던 만큼 제겐 애틋한 작품입니다.” 그는 ‘호’로 2008년 제3회 디지털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선인세 500만 원을 받고, 계약서까지 작성했지만 출간은 되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 처음 상을 받았지만 책은 내지 못한 ‘미발표 등단작’인 셈이다. “당시 박사(미국 인디애나대 슬라브 문학) 논문을 써야 했고, 여러 장르문학 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출간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어요. ‘호’가 15년 만에 발표되는 만큼 꼼꼼히 고쳤는데 독자들이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네요.” 정 작가는 지난해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래빗홀)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올해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천명관 작가(59)의 ‘고래’(문학동네)가 올랐다. 이에 대한 의미를 묻자 그는 곰곰이 생각한 후 답했다.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한국 작가가 선정될지 몰랐어요. 한국 문학의 품질이 일정 수준 보장된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는 집필과 번역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교정지를 보다 왔어요. 해외 장편소설 3권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해양수산물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집을 쓰고 있고요. 올해 목표는 ‘마감을 잘하자’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집에 내려달란 말이야!” 한강을 달리는 심야버스 안. 취객이 기사를 협박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버스 승객인 ‘기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기준에게 다가왔다. 여자는 작은 치약 통처럼 생긴 플라스틱 튜브를 건네며 “이걸 짜서 아저씨 코에다 바르라”고 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아저씨가 갑자기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늦게 알았지만,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던 건 9개의 꼬리고 여자는 요술을 쓰는 여우였다. 그런데도 기준은 홀리듯 구미호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17일 전자책(e북)으로 먼저 출간되고, 다음달 1일 종이책이 나오는 장편소설 ‘호’(읻다)는 구미호 설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호’는 로맨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유쾌한 장면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코미디, 주인공을 위협하는 귀신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선 공포 장르처럼 느껴진다. 14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정보라 작가(47)에게 정말 사랑 이야기를 쓴 게 맞냐고 묻자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연애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깔깔 웃다가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거요. 독자 생각은 모르겠지만 전 진짜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하하.”그가 처음 ‘호’를 쓴 건 15년 전이다. 2008년 그의 외할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당시 러시아에 머물던 그는 급히 귀국했다. 외할머니를 돌보던 그는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와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을 보던 기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공포 설화를 현대적인 로맨스로 바꿔 작품을 쓰면 어떨까 싶었다. 또 외할머니가 눈을 떴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도 싶었다. 학원 강사인 ‘기준’과 구미호의 결혼을 반대하는 할머니가 쓰러지고, 할머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준이 고군분투하는 서사는 그렇게 탄생했다.“외할머니 사망신고도 제가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죠. 소설 속에서나마 외할머니가 퇴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썼던 만큼 제겐 애틋한 작품입니다.”그는 ‘호’로 2008년 제3회 디지털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선인세 500만 원을 받고, 계약서까지 작성했지만 아쉽게도 출간은 이뤄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외부 상을 수상했지만 책은 펴내지 못한 ‘미발표 등단작’인 셈이다. “당시 박사(미국 인디애나대 슬라브 문학) 논문을 써야 했고, 여러 장르문학 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출간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어요. ‘호’가 15년 만에 발표되는 만큼 꼼꼼히 고쳤는데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줄지 궁금하네요.” 정 작가는 지난해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래빗홀)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올해도 부커상 인터내셔널 1차 후보에 천명관 작가(59)의 ‘고래’(문학동네)가 지명됐다. 의미를 묻자 그는 곰곰이 생각한 뒤 이렇게 답했다. “저 역시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에 한국 작가가 선정될지 몰랐어요. 부커상 심사위원회의 관심은 한국 문학의 품질이 일정 수준 보장된다는 의미 아닐까요. 올해도 좋은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