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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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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2024-11-23
칼럼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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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출판3%
  • [횡설수설/송평인]누가 헌법을 유린하는가

    한겨레신문이 어제 1면에 ‘누가 헌법을 유린하는가’라는 통단 제목으로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5일 2차 집회를 불허한 경찰을 비판했다. 이 신문 기사대로 집회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헌법 제21조). 그러나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도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헌법 제37조). 경찰의 집회 불허는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집회는 금지할 수 있다’는 집시법 제5조에 따른 것이다. 경찰 조치는 집회를 허가제로 하느냐 마느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평화롭게(peaceably) 집회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독일 헌법도 집회의 자유에 평화롭게(friedlich) 무장 없이(ohne Waffen)란 수식어를 달아놓았다. 프랑스 헌법에는 집회의 자유가 규정돼 있지 않고 영국은 성문헌법이 없다. 종합하면 집회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이 중요한 수식어가 빠져 있지만 ‘집회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할 때 그 집회는 평화로울 것을 전제한다. ▷민노총의 지난달 14일 1차 광화문 집회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런 단체가 2차 집회를 주최할 경우 이보다 더 공공질서에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집회가 또 있을까. 어떤 나라 경찰도 폭력시위 전과가 있는 단체가 주최하는 또 다른 집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올해 폭력시위 집회의 90% 이상이 민노총이 주최한 집회다. 경찰은 민노총 집회에 너무 관대했다. 진즉 법대로 했어야 할 것을 뒤늦게 하니까 ‘헌법을 유린한다’는, 듣지 않아도 될 비난까지 듣는 것이다. ▷집회 참가자가 복면을 쓰든 안 쓰든 현행법상 자유다. 그러나 복면시위자가 폭력에 가담했을 경우 끝까지 추적해 엄단하는 것은 경찰의 자유다. 정확히 말하면 의무다. 물감을 뿌려서든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색출해 엄벌해야 한다. 우리보다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가진 프랑스와 독일은 아예 법으로 복면시위를 금지한다. 그렇다면 복면시위가 헌법 유린일 수 있어도 복면시위 금지가 헌법 유린일 수는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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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종교적 치외법권은 없다

    누구든 종교에 의해 차별받아서도 안 되지만 우대받아서도 안 된다. 헌법은 차별이라는 부정적 방향만 언급한 듯이 보이지만 헌법학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누구든 종교에 의해 우대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먼저 불교라 해서 기독교보다, 기독교라 해서 불교보다 우대받아서는 안 되고 나아가 종교집단이라고 해서 비(非)종교집단보다 우대받아서는 안 된다. 경찰이 법원이 발부한 구속영장을 갖고도 조계사에서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을 끌어낼 수 없다면 조계사는 종교시설이라고 해서 다른 시설에 비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민주 국가의 원칙은 무너진다. 우리나라 헌법은 어느 나라 헌법보다 세속적이다. 대한민국은 태국처럼 부처님의 가호로 세워진 것도, 미국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부처님이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고사하고 ‘하늘이 부여한(천부·天賦) 인권’이란 개념도 없다. 인권도 그냥 인권일 뿐이다. 이 세속적인 공화국에서 종교가 종교라고 해서 우대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서구의 민주화는 신분상의 특권만이 아니라 종교의 특권을 없애는 과정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후자에 대한 이해가 불철저하다. 그래서 오늘날 정치인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데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종교적 특권에는 둔감한 것인지 모른다. 신기남 의원이 아들이 다닌 로스쿨을 찾아가 사실상의 압력을 행사하고 노영민 의원이 의원실에 카드기까지 설치해놓고 공기업에 시집을 강매하는 행동은 격렬히 비판하지만 종교적 특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만큼 온갖 사회문제에 전문성도 없는 종교인들이 개입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나라도 없다. 이번에도 조계종 화쟁(和諍)위원회가 중재를 자청하고 나서 ‘노동 관련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대화기구’를 제안했다. 이미 노사정 회의가 있는 데다 또 다른 회의가 필요하다면 세속의 현자들에게 맡길 일이지 종교인이 나설 일은 아니다. 4대강이라면 수자원 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얘기해야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건드리는 것조차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부들이 얘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가 과거 경찰의 대학 진입을 불허한 법을 가진 적이 있다. 그 결과 그리스 대학들이 극좌파들이 모여 화염병 제조 등 불법을 저지르는 온상이 되고 그것이 그리스가 망하는 데도 일조했다는 그리스 기자의 외지 투고를 본 기억이 있다. 민주 국가를 공간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평평한 세상(flat world)이다. 주권은 모든 공간에 똑같이 미쳐야 한다. 한 군데라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불법이 그곳으로 몰리고 법질서는 흐트러진다. 유일한 예외가 외교공관에 대한 치외법권이다. 그것도 국가의 호혜에 따른 것이므로 양국 전체로 보면 평평한 것이다. 종교적 치외법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과거 독재 시절에 천주교 명동성당이 정권의 공권력 행사에 저항하는 보루 역할을 한 적이 있다. 민주화 이후 명동성당은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올린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별세로 민주화를 이끈 김대중 김영삼 양김의 업적이 새로 조명받았다. 1987년 민주화는 불완전했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5년 뒤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다시 5년 뒤 김대중에 의해 여야 정권교체도 이뤄진 후 국회와 법원의 권력 교체까지 경험하면서 한국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이제 더 이상 종교적 치외법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조계사 일부 신도들조차 그런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2년 전 철도노조 불법파업 주도자들이 조계사로 숨어들었다. 박근혜 정권이 그때 그 일을 방치한 결과 유사한 사태가 재발했다. 첫 번째 사례와 두 번째 반복되는 사례는 그 무게가 다르다. 한 위원장이 5일로 예고된 민노총 집회 때까지 조계사에 머문다면 그 이후 자발적으로 체포되든 도망가든 조계사는 치외법권의 공간으로 굳어질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앞으로 며칠 사이에 이 굳어져 가는 선례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단지 현 정권이 부담을 안고 가는 문제가 아니라 차기 정권들에까지 두고두고 부담을 주는 관행이 될 수 있다. 최소한 그런 무책임한 정권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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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창비 50년, 백낙청의 문학과 정치

    한국에서 집안 재산에서나 지식에서나 가장 귀족적인 좌파를 꼽는다면 백낙청 씨일 것이다. 백 씨의 부친 백붕제는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를 지낸 사람으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백붕제의 형은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새 시장 공관으로 삼으려다 논란 끝에 철회한 북촌 한옥이 백인제가 소유했던 가옥이다. ▷백낙청 씨의 명석함은 학생 때부터 유명했다. 경기고 3학년 때 미국 뉴욕 세계고등학생토론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사실이 당시 언론에 보도됐다. 1959년 6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그가 미국 브라운대 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전체 졸업생을 대표한 연설을 해 한국 학생의 우수함을 과시했다는 소식이 사회면 톱기사로 실렸다. 그는 하버드대 박사학위 과정 중 귀국해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백 씨는 1966년 ‘창작과 비평(창비)’을 창간했다. 창비는 ‘문학과 지성’과 더불어 문예지의 두 축을 이뤘다. 그는 분단을 주제로 삼은 문학을 높이 평가했다. 그 배경 이론으로 한국 사회의 온갖 왜곡을 초래하는 원인은 분단이라는 ‘분단모순론’을 들고 나왔다. 남북이 팽팽한 체제 대결을 벌일 때만 해도 분단모순론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분단모순론은 길을 잃었다. 그는 새로 ‘이중극복론’을 들고 나왔다. 분단을 극복해 통일로 가야 하지만 통일은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이중의 극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씨와 창비는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자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진보적 흐름이 끊겼다고 보고 적극적인 현실 개입을 시작했다. 광우병에 대해 거짓을 늘어놓고 천안함 폭침은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우겼다. 백 씨의 2013년 체제는 ‘이중극복론’식 통일로 가기 위한 체제다. 그는 원탁회의를 통해 통합진보당의 의회 진출을 도왔다. 백 씨가 오늘 창비 편집인에서 은퇴한다. 50년 창비를 떠나는 것이다. 그의 문학평론은 훌륭했는지 모르지만 정치적 주장은 서구의 무책임한 극좌파나 다름없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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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끝까지’ 정신의 도쿄대첩

    야구에는 ‘어게인 1982’라는 구호가 있다. 야구팬이라면 1982년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한일 결승전을 잊지 못한다. 7회까지 0-2로 끌려가던 한국은 8회 김재박의 ‘개구리 스퀴즈번트’로 동점을 만든 뒤 한대화가 통쾌한 3점 홈런을 터뜨려 5-2로 역전했다. 그제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프리미어12’ 준결승 한일전의 감동도 결코 그때 못지않다. 한국은 8회까지 0-3으로 뒤지다가 9회초 4-3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야구 세계랭킹 상위 12개국 국가 대항전 프리미어12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일본이 야구의 올림픽 종목 부활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올해 처음 열렸다. 개막전에서 한국을 0-5로 이긴 일본은 준결승전이 열리기도 전 이미 결승에 진출한 듯 들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올해 일본 저팬시리즈에서 한국인 최초로 MVP를 차지한 이대호가 역전 2타점 적시타를 터뜨리자 도쿄돔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한국팀은 역대 최악의 상황에서 출범했다. 단기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투수진은 도박 스캔들이 겹쳐 최약체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해도 선수들은 병역 혜택도 못 받는다. 주최국 일본은 준결승 날짜를 갑자기 하루 앞당기고 일본인 선심까지 배정했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은 일본의 이런 꼼수를 선수들이 승부욕을 불태우는 계기로 반전시켰다. 무엇보다 “사람이 던지는 건데 왜 못 치겠어, 한번 해봐”라는 말로 침묵의 한국 타선을 끝까지 믿고 격려했다. ▷한국의 한 누리꾼이 “야구를 왜 인생이라고 하는 줄 알겠다. 이 경기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준 스포츠 이상의 드라마다. 힘든 일 겪는 분들 경기 보고 모두 희망을 가지시길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난 그제 9회초 경기가 막 시작된 뒤 친구들과 함께 한 호프집에 들어섰다. 호프집은 순식간에 열광의 부산 사직구장처럼 달아올랐다. 청년들 사이에서 ‘헬조선’(지옥의 한국)의 자조가 나오던 우울한 분위기를 모처럼 날려 버리는 순간이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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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프랑스와 벨기에서 본 이슬람의 두 얼굴

    벨기에 브뤼셀 기차역은 유럽에서 절도범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다. 2011년 브뤼셀에서 프랑스 파리행 열차를 탔다가 선반에 올려놓은 손가방을 잃어버렸다. 파리에 도착해서야 분실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 기차가 출발하기 전 자기 물건을 올려놓는 척하면서 갖고 내린 것이다. 손가방에 둔 휴대전화도 함께 잃어버렸다. 휴대전화에는 잠금 코드를 걸어놓지 않았다. 귀국해서 통화 기록을 조회해보니 알제리로 전화한 기록이 많이 나와 있었다. 절도범은 알제리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브뤼셀은 유럽에서 이슬람계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다.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이 도시가 2030년경이면 이슬람계 인구의 비율이 유럽 최초로 절반을 넘는 도시가 된다고 한다. 브뤼셀 인근에서도 이슬람계가 가장 많은 도시가 몰렌베이크다. 몰렌베이크가 파리 테러범들의 근거지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파리 교외의 생드니에 비춰 보면 그곳이 어떤 곳일지 대략 짐작이 간다. 2009년 파리 특파원 시절 생드니에 갔다가 이슬람계 청년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생드니도 이슬람계가 많고 우범지대로 악명 높다. 내 카메라가 우연히 불량스러워 보이는 청년들을 향했는데 날이 저물어 플래시가 자동으로 터졌다. 그쪽에서 나를 쳐다보는 낌새가 이상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30초쯤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손의 카메라를 확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꽉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등 뒤에서 내 발을 걸어 쓰러뜨리고 내 눈에 휴대용 스프레이 최루가스를 뿌렸다. 안경을 끼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한동안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주변에 있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바로 앞이 중국인 상점이니 들어가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나를 중국인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상점으로 들어가 중국인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다. 주인은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불량배들이 상점으로 들이닥쳐 주인에게 전화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고 주인은 포기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불량배들도 고객들 눈치가 보여서인지 나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눈치였다. 도움은 예기치 않은 곳으로부터 왔다. 그 상점은 여성용품을 파는 곳이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이슬람계 여성 2명이 내게 다가와 제안하기를 자신들이 나를 에워싸고 매장을 나가 택시를 태워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경찰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이 구역은 경찰도 잘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며 달랬다. 서너 명의 다른 여성들도 도와주겠다고 동참했다. 그들 말이 맞았다. 불량배들은 이 여성들을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지 나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에서 한 살인자가 피해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휴대용 스프레이 최루가스를 사용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런 물건은 범죄자의 세계 속에 있지 않으면 구하기 힘든 것이다. 프랑스나 벨기에는 총기 휴대가 금지된 나라다. 그러나 테러범들은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난사했다. 경찰도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치안 부재의 게토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슬람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나를 도와줬던 고마운 젊은 이슬람계 여성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파리 테러와 같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테러에 분노할 것이다. 이슬람국가(IS)의 잔혹한 행태는 인간 심성에 거슬리는 것으로 이슬람 신자라도 구역질 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소수의 폭력주의자들이 휘두르는 전횡에도 신물을 느낀다. 이 싸움을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로 보면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 이것은 문명과, 어느 문명에나 남아 있는 야만과의 충돌이다. 서구 문명에서도 지난 세기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야만이 출현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이슬람 문명 역시 그 저류에서 돌출하는 야만을 극복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이슬람 문명이 야만을 이기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우리도 서구인들과 함께 궁리해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슬람 테러가 언제까지나 남의 일로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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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앙드레 글뤽스만, 우리 시대의 카산드라

    프랑스 68혁명 세대를 대표하는 앙드레 글뤽스만만큼 지적 용기를 가진 철학자도 드물다. 그는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1991년과 2003년의 이라크전쟁을 지지했고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세르비아 사태 개입에도 찬성했다. 그는 친미주의자나 친나토주의자로 오해받을까 봐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지성인은 아니었다. 독재에 희생당하는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라면 그런 정도의 오해는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돼 있었다. ▷글뤽스만은 1956년 프랑스공산당(PCF)의 당원이었으나 소련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침공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이후 좌파그룹 ‘악시옹’에 들어가 마오주의자로 68혁명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러나 그는 1974년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읽고 지적 전환을 감행한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함께 반(反)전체주의적 철학인 신(新)철학의 양대 기수가 돼 스탈린 공산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라고 비판했다. 그에게는 좌파 지식인 사이에 만연한, 자기 패거리에서 낙인찍히는 데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애초 없었다. ▷글뤽스만은 반스탈린주의를 거쳐 반공산주의자가 됐지만 우파로 돌아섰다기보다는 좌우를 넘어섰다. 그는 1979년 좌파의 사르트르, 우파의 레몽 아롱이 만나는 엘리제궁 모임을 주선해 함께 베트남 보트피플을 위한 대의(大義)에 참여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알카에다의 9·11테러를 새로운 니힐리즘으로 규정하고 “세상에 신이 없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도스토옙스키적 질문을 던졌다. 이후 그는 이슬람에 대해 할 말을 하는 몇 안 되는 서구 지식인이 됐다. ▷글뤽스만은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에 진솔한 응답을 한 철학자였다. 그는 지성인을 “도성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카산드라”라고 정의했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 카산드라는 비록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더라도 할 말을 하는 예언자였다. 우리 시대의 카산드라가 10일 세상을 떠났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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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박근혜 한정판’

    요즘 한정판 마케팅 열풍이 뜨겁다. 며칠 전 서울시청 옆 맥도날드 매장 앞을 지나다 보니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맥도날드 상표가 붙은 헬로키티 인형 한정판을 사려는 줄이었다. 그날 밤 귀가해 TV 뉴스를 보니 서울 명동의 패스트패션 의류 매장 H&M 앞이 노숙까지 하면서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명품 브랜드 ‘발맹’과 합작해 만든 한정판 의류를 구입하려고 모두 난리였다. ▷‘박근혜 시계’도 한정판이라면 한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통령 시계는 판매용으로 제작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계를 손에 넣은 사람들이 인터넷 중고경매 사이트에 내다 팔기도 해 가격이 형성된다. ‘박근혜 시계’는 구하기가 어려워 매물이 나오면 박 대통령이 현직인데도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팔린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가는 물건이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싫어해 시계 증정을 제한한다고 한다. 전임 대통령들이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시계를 마구 뿌려댄 것과 대조적이다. ▷대통령 조화(弔花)가 국가에 별 기여한 것도 없는 망자(亡者)의 빈소에 놓이는 것을 박 대통령은 더 질색한다고 한다. 그래서 전임 대통령들에 비해 조화도 훨씬 적게 보낸다. 이 때문에 서운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조화까지 대통령이 체크하느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박 대통령이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의 부친 유수호 전 의원 빈소에 대통령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 많다. 이것이 한정판 정책 때문인지, 국회법 개정을 둘러싸고 충돌했던 유 의원이 아직도 괘씸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한정판 마케팅은 브랜드에 대한 아우라(신비한 분위기)와 그에 상응하는 충성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한정판 마케팅도 지나치면 부작용을 낳는다. 박 대통령은 저녁에 사람 만나는 것도 한정판이고, 장관 대면보고도 한정판이다. 유 의원 부친상의 경우 상주 측이 ‘조화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안 보냈다고 청와대는 해명한다. 하지만 참모들 중 누구도 조화를 보내는 게 좋겠다고 아우라가 강한 박 대통령에게 감히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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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박근혜 대통령의 3번째 실수

    박근혜 정부가 기어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다. 출발한 버스 뒤에 대고 소리치는 격이긴 하지만 국정화는 박 대통령의 3번째 결정적 실수가 될 것이다. 그는 이미 두 가지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2009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을 막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국회선진화법을 막지 못한 것이다. 1년 뒤에나 나올 국정 교과서를 보지도 않고 결정적 실수라니 지나치다고 반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선진화법은 통과 전부터 다수의 지배라는 원칙을 훼손한다는 점이 지적됐고 실제 그렇게 됐다. 청와대와 국회는 서울, 행정부처는 세종시에 존재함으로써 초래되는 공무의 비효율성도 충분히 예상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역사인식을 둘러싼 싸움의 성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싸움은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단숨에 끝나는 전격전이 아니라 진지를 하나씩 점령해야 비로소 이기는 진지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 국사학계의 좌파는 우파가 무관심한 사이 현대사의 거점을 하나씩 점령했다. 현대사 분야의 교수직이 신설되는 족족 그 자리를 차지했고 그들로부터 배운 학생들이 교사가 됐다. 그렇게 현대사 교육 환경은 좌편향됐다. 그러나 국정화는 전격전의 방식으로 달랑 고지만을 점령하는 것이다. 국정 교과서는 아무리 올바른 교과서가 된다 하더라도 주변의 수많은 적대적 진지를 우호적 진지로 돌려놓지 못하는 한 동떨어진 무력한 고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설득으로 빼앗긴 진지는 설득으로 되찾아와야 한다. 나는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긴 유신체제’의 국정 교과서로 한국사를 배웠다. 대학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으면서 여운형의 이름을 처음 알았을 정도로 내 현대사 지식은 공백에 가까웠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을 때는 6·25 남침을 북침처럼 바꿔놓은 논리가 억지인 줄 느꼈지만 반박하기 어려웠다. 벌써 10년 전에 나온 책이 됐지만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도 쉽게 극복이 안 된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나 김기협의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고약한 저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지식의 부족도 함께 느꼈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싸움은 논리를 무기로 싸우는 싸움이다. 좌파 사가들이 끊임없이 대한민국 건국을 폄훼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동안 우파 사가들은 수적으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방어 논리도 개발하지 못했다. 사실 우파 사가가 써낸 읽을 만한 현대사 책 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 결과가 학교 교실과 교과서를 좌파에게 내준 꼴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이 국정화로 이런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착각이다. 박 대통령은 국정화 이전에 이미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만드는 실수를 저질렀다. 누가 박 대통령의 귀에 대고 속삭였는지 짐작되는 역사학자가 있다. 나는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로서 내 자녀가 배우면 배울수록 대한민국이 부끄러워지는 교과서로 한국사를 배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 두 딸은 국정화를 해서라도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될 나쁜 교과서로 수능을 준비하고 있다. 무슨 일 처리를 이렇게 하나.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검정제로는 교과서 왜곡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한 것은 제 할 일 못해 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한 말이다. 교과서 집필진이 수정을 거부해 소송을 내면 수년이 걸려서라도 바로잡으면 된다. 말을 안 들으면 검정에서 탈락시키면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교육부는 편수(編修)기관으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다. 교과서 집필진은 교육부의 머리 위에서 논다. 교육부 집필기준이 집필을 유도하기는커녕 집필을 따라가지도 못한다. 그런 주제에 아무 생각 없이 덜컥 한국사를 수능 필수화해 놓고 보니 교과서를 고치는 게 발등의 불이 된 것이 국정화의 진짜 원인이다. 진지전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싸움이다. 역사인식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나라가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안에 따라 잘못을 바로잡는 다른 방법이 있다. 시간을 두고 점진적이지만 집요하게 다뤄야 할 사안을, 시급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자초해 놓고 시급하게 취급한 것이 국정화에 이른 잘못된 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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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액체 상태로서의 진실

    국회의원 출신 강용석 변호사와 루머에 휘말렸던 유명 블로거 ‘도도맘’이 자신의 실명(김미나)과 얼굴을 공개했다. 그는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강용석은) 남자로는 외모부터가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는 말로 불륜설을 부인했다. 그는 지난해 홍콩의 호텔 수영장에서 자신이 찍은 강 씨 사진이 공개되자 “조작됐다”고 거짓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각자 다른 이유로 홍콩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우연’이라는 해명보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도 자신의 말을 사람들이 쉽게 믿어줄 거라고 여기고 인터뷰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김 씨는 “사람들은 내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숨어 있다는 표현 자체가 불륜을 인정하는 것 같아 ‘아니다’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부인(否認)의 말이나 그것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라 더 이상 숨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불륜이 있었고 그래서 여자는 숨어 있는 것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의 인식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다. ▷진실은 흔히 고체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액체에 가깝다. 많은 진실이 사람들이 공유하는 인식일 뿐이다. 김 씨가 침묵하고 숨어 있으면 불륜은 진실로 굳어져 간다. 김 씨의 전략은 이런 고체화 과정에 개입해 그것을 다시 액체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어주든 안 믿어주든 ‘보지 않고서야 불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라는 유동적 상황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것으로 성공한 셈이다. ▷불륜은 내밀한 것이어서 그것이 범죄로 규정되고 국가가 개입해 증거를 찾아주지 않는다면 불륜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간통죄가 더 이상 처벌 대상이 아닌 사회에서 많은 불륜은 심증(心證)은 있으나 물증(物證)이 없는, 다시 말해 불륜인지 아닌지 확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된다. 남편과 이혼소송 중인 김 씨의 자기 공개는 당당한 것도 뻔뻔한 것도 아니고, 간통죄 폐지 이후의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계산한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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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익명이 집필하는 국정 교과서

    1996년 국정으로는 마지막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펼쳐보니 집필진 9명의 이름이 똑똑히 기재돼 있다. 1974년 최초의 국정 국사 교과서가 발행된 이후 국정이라고 해서 집필진을 밝히지 않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23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위에서 “교과서 집필진이 거부하면 명단 공개를 할 수 없다”고 말해 논란이 되고 있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바람직한 해법은 아니지만 정부가 밀어붙이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나 집필진을 알 수 없는 국정 교과서만은 절대 안 된다. 국정 교과서도 집필진이 양심에 따라 쓰는 것이다. 집필진 공개는 국정화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장치다. 유신 시절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유신을 찬양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당시 근현대사를 집필한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그런 내용을 쓴 적이 없다고 한다. 그것을 쓴 것은 익명 뒤에 숨은 국가다. 국정화를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발언이 고육지책(苦肉之策)임을 모르지 않는다. 국정화 발표 직후 일부 대학과 학회를 중심으로 역사학 교수들의 집필 거부 선언이 잇따랐다. 집필을 부탁받지도 않았는데 집필 거부라니 우습다. 집필을 거부한 학자 중에 지금까지 교과서 집필에 참여해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면 따돌리겠다는 위협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누구보다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교수들이 해선 안 될 유치한 행동이다. ▷국정화로 간다면 실제 집필진 명단이 공개되지 않는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발상이 나왔다는 그 자체가 일정 부분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다. 자기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쓸 수 없는 역사라면 아예 쓰지를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식인 사회만 놓고 보면 국정화에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다. 찬반이 비등했던 일반인의 반대도 찬성보다 많아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정화를 최종적으로 못 박기 전에 다시 한 번 국정화 여부를 깊이 고민해 보기 바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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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안희정의 4대강

    우리나라에 특징적인 몬순 기후는 해마다 장마와 태풍이 한 번쯤은 와줘야 하는데 올여름 장마와 태풍이 한반도를 비켜가는 바람에 충청권에 가뭄이 심하다. 강수량으로는 40년 만의 최저다. 체감 정도로는 노인들도 태어나서 처음 겪는다고 할 만큼 심각하다. 예산의 예당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보령댐도 내년 3월이면 완전히 마를 것이라고 한다. 다만 4대강 사업으로 보(洑)를 만든 금강에는 물이 찰랑거리고 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2010년 처음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 4대강 사업을 중단하고 그 돈을 교육과 복지에 쓰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친노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상징과도 같은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 그가 결국 가뭄 끝에 금강 4대강 보의 물을 활용하기로 했다. 안 지사는 중앙정부에 금강 백제보에서 보령댐 간 25km 관로 건설을 요구한 데 이어 다시 금강 공주보에서 예당저수지 간 30km 관로 건설을 요구했다. 진실은 궁해서야 드러나는 법이다. ▷저수지 바닥을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기우제밖에 지낼 수 없는 상황보다는 가뭄에도 어딘가 쓸 물이 남아 있는 상황이 백배 천배 희망적이다. 4대강 사업 비판론자들은 ‘끌어다 쓰지도 못할 물 있으면 뭐하느냐’고 비아냥거렸지만 막상 관로를 통해 끌어다 쓸 궁리를 하니 그런 비아냥거림이 무색해졌다. 다만 몇 달 내로 수십 km에 이르는 긴 관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왜 지천과 지류 정비 작업은 빨리 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4대강 사업에도 벌써 어떤 기시감이 든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건설 때도 강력한 반대가 있었으나 후일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됐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앞에 닥칠 일을 못 내다보고 후회할 선택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인간이다. 그러나 고지식하게 끝까지 반대해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에 맞닥뜨려서 과거의 판단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안 지사가 후자라야 더 큰 자리를 바라볼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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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한국사 자습서는 더 위험하다

    고등학생 딸이 보던 한 베스트셀러 한국사 자습서를 훑어보다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김원봉이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 사흘 동안 모진 취조를 당해요. 누구한테요? 고문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노덕술한테 당합니다. 그에게 뺨을 얻어맞고 엄청난 모욕을 당해요… 자신을 고문하던 사람이 일제강점기 동안 자신을 잡으려고 그토록 발광했던 고등계 형사 노덕술입니다… 김원봉은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그 뒤 김원봉은 북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노덕술이 고문 경찰관인 것은 분명하지만 설마 김원봉 같은 당대의 정치 거물을 고문까지 했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근거를 찾아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 김원봉 연구서는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김원봉 연구’(1993년)가 가장 상세하다. 어디에도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고문을 당했다는 말은 없다. 다만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중 “김원봉이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정정화의 회고록은 부정확한 데가 많은 데다 이 말은 전해 들었다는 것이어서 신뢰도에 문제가 있다. 그것을 믿는다 하더라도 모욕적인 처우가 고문이었다면 고문이라고 하지 모욕적인 처우라고 에둘러 말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염 교수는 또 한상도 건국대 교수의 ‘김원봉의 생애와 항일 역정’(1990년)을 인용해 “김원봉이 묶이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사무실로 끌려가자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화를 내며 ‘모셔 오랬지, 누가 이래라 했느냐’고 짐짓 황망해하면서 묶인 것을 풀어줬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본래 1984년 당시 길진현 중앙일보 기자가 쓴 ‘역사에 다시 묻는다’에 김원봉의 의열단 동지였던 전 광복회장 유석현의 증언으로 나와 있던 것이다. 이 증언은 증언 날짜나 장소가 나와 있지 않아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된다. 그래서 염 교수는 길 기자의 1차 자료를 인용하지 않고 교묘히 한 교수의 2차 자료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증언을 좀 더 보면 “김원봉은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 나(유석현)에게 와서 사흘을 꼬박 울었다”고 돼 있다. 증언을 사실로 믿는다 해도 김원봉이 당한 수모라는 것이 기껏해야 수갑에 채워져 끌려갔다는 정도다. 김원봉이 뺨을 맞거나 고문당했다면 그런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하는데 없다. 증언에서 알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김원봉이 수갑에 채워져 끌려갔으며 당대의 정치 거물이었던 그가 그것을 몹시 수치스럽게 여겼다는 정도다. 그럼에도 이 증언은 김삼웅 등 언론인 출신 아마추어 역사가들에 의해 김원봉 고문설로 확대 재생산되는 데 이용됐다. 김원봉은 당시(1947년) 김구와 결별하고 좌익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들어가 있었다. 그 전해 정판사 화폐 위조 사건 이후 공산당의 박헌영이 미군정의 체포를 피해 사라진 자리를 김원봉이 메우고 있었다. 김원봉은 대구 폭동의 민전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경상도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원봉은 미군정의 요(要)주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김원봉은 일시 체포됐다 풀려난 후에도 1년 가까이 남쪽에 남아 있다가 북쪽으로 갔다. 그의 월북은 체포보다는 여운형의 암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봐야 한다. 광복이 됐는데도 친일파 경찰이 왕년의 항일 운동가를 고문한다는 만평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노덕술의 김원봉 고문설보다 더 극적인 사례는 찾기 어렵다. 노덕술은 고문 경찰관으로 악명이 높아서 그를 악마화해도 견제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런 데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이 갖고 있는 좌편향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사 교과서도 문제지만 자습서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 자녀들이 이런 교과서와 자습서로 공부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분명 옳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러나 문재인 대표도 국정화는 안 된다고만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사에서 현대사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것은 노무현 정권 때다. 문 대표가 현대사 분야를 과감히 축소하는 대신 검정제를 유지하자는 식의 건설적인 제안을 한다면 국정화 고시 전에라도 불필요한 국론 분열을 막을 합의가 가능하지 않을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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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월드컵 키드’가 황금축구 세대로

    U-17 월드컵은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으로 2년마다 열리는 17세 이하 청소년 축구 대회다. U-17 월드컵 위로 20세 이하가 참여하는 U-20 월드컵이 있고 그 위로 월드컵이 있다. 한국은 월드컵에서 4강, U-20 월드컵에서 4강, U-17 월드컵에서 8강까지 진출해 봤지만 어느 월드컵에서건 브라질을 이겨본 적은 없다. 올해 칠레에서 열리는 U-17 월드컵에서 18일 처음으로 브라질을 이겼다. ▷스페인 프로축구 FC 바르셀로나 유소년팀 출신인 이승우 선수(17)는 공수를 오가는 맹활약으로 승리를 견인했다. 그 또래는 2002년 월드컵 당시 네 살에 불과했지만 진정한 ‘월드컵 키드’라고 할 수 있다. 이승우는 2011년 초등학생 때 누구의 지원도 없이, 순전히 자기 실력으로 FC 바르셀로나에 스카우트돼 유소년팀에 입단했다. 박지성 선수(34) 때는 해외 축구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손흥민 선수(23)만 해도 대한축구협회 지원으로 2008년 고교생으로 독일 함부르크 유소년팀에 입단할 수 있었다. ▷유학파만 뛰어난 게 아니다. 프로축구 K리그 울산 현대 유소년팀의 이상헌 선수(17)는 브라질 수비 2명을 상대로 현란한 개인기를 보여줬고, 장재원 선수(17)는 브라질 골망을 흔들었다. 이들 세대는 유학파건 국내파건 고교 때부터 프로축구와 연계한 고도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이 이전 세대와 다르다. 축구협회는 ‘월드컵 긴장돼? 축구 왜 시작했어? 결과는 나중이야! 그냥 한번 즐겨봐!!’라는 메모를 방문에 붙여주며 이들을 ‘즐기는 축구’로 이끌었다. ▷‘월드컵 키드’는 러시아 월드컵이 열리는 2018년 20세 안팎이 된다. 실력만 인정받는다면 러시아 월드컵에서부터 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국가대표팀의 중추가 될 세대다. 청소년 시절부터 유학해서 축구를 배운 첫 세대인 손흥민 선수 등과 이들이 힘을 합한다면 2002년 월드컵 때의 4강을 넘어서는 새로운 신화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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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여왕’ vs 찌질한 남자들

    제 잘못으로 승부에서 진 남자들이 패배를 인정하기 싫으니까 상대방을 절대 권력을 가진 ‘여왕’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해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 개헌 얘기를 꺼냈다가 꼬리를 내렸다. 가만 보니 그의 ‘특기’가 자신도 모르고 국민도 모르는 얘기를 꺼냈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접는 것이다. 추석 연휴에 느닷없이 들고나온 안심전화 공천제도 없던 일로 됐다. 그는 앞서 오픈프라이머리에 정치생명을 건다고 했다. 오픈프라이머리가 물 건너간 듯하자 ‘안심전화 공천제는 전화로 하는 오픈프라이머리’라고 우겼다. 오픈프라이머리도 안 되고 안심전화 공천제도 안 되자 그는 ‘그래도 전략공천은 없다’고 나왔다. 그러면서 ‘우선공천은 가능하다’고 한다. 전략공천은 우선공천과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사고가 뒤죽박죽이어서는 여왕이 아니라 여종과 싸워도 진다. 오픈프라이머리는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이나 그의 정치생명은 그대로다. 그 정도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말에 무게가 없는 건 사실이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국회법 개정안이 대통령에 의해 거부됐을 때 대통령을 향해 공개적으로 ‘사죄합니다’ 한마디를 한 것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여당의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거부권 예고에도 불구하고 입법을 강행했으면 재의(再議)를 추진해 다시 통과시키든가, 그럴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사퇴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내대표를 계속 하겠다는 모습이 구차했다. 묘한 점은 김 대표나 유 전 원내대표가 이런 사태를 자신들의 잘못으로 보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을 여왕으로 만들어 그쪽으로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것이다. 유 전 원내대표가 사퇴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친 것은 젊은 사람들 말로 피해자 코스프레(피해자인 척하기)다. 김 대표가 황당한 의제를 불쑥 꺼내 당내 분란을 만들어 놓고는 대통령과의 분란은 당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참는다는 식으로 거둬들이는 것 역시 ‘피해자인 척하기’다. 김 대표는 얼마 전 ‘오늘까지만 참는다’고 했는데 그 뒤로도 계속 참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참게 될 것 같다. 사실 그것은 여왕 대 공화국의 대립이 아니라 여성 대통령 대 찌질한 남자들의 대립이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에서 대통령이 당권까지 쥐고 있으면 제왕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친박(親朴) 의원들은 원내에서 소수파다. 당권도 쥐고 있지 못한 대통령을 여왕으로 부르는 것은 희화화에 가깝다. 최근 정치사를 보면 당권을 쥐지 못한 대통령은 언제든지 당에서 축출될 위기에 놓였다. 실제 여러 대통령이 임기 후반에 자기 의사에 반해 당에서 나왔다. 박 대통령은 단지 자신의 높은 지지율 때문에 이런 위기를 피하고 있을 뿐이다. 김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의 ‘피해자인 척하기’가 먹혀든 것은 언론의 프레임과 무관치 않다. 언론은 정당이 대통령과 싸울 때 대통령이 강자라고 여기고 비판하는 관성이 있지만 이 경우는 정당 쪽이 허술했다. 친박의 행태도 박 대통령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것 같아 꼴사납다. 전략공천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 현실에서 국민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려면 전략공천을 폐기하는 것이 옳다. 전면 폐기가 힘들다면 최소한 나가기만 하면 당선되는 서울 강남권과 대구 등에서 전략공천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사는 곳은 경기 성남시 분당갑 지역이다. 이곳도 새누리당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곳이다. 지난 총선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이종훈이라는 사람이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나중에야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의 경제학 박사로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측의 국가미래연구원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 후보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김창호 씨가 나왔다. 청와대에서 국민 세금으로 이름을 알리다가 나와서 의원 출마하는 사람도 맘에 들지 않았다. 어느 쪽도 찍고 싶지 않았다.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집권할 때 ‘보수당에 남자는 대처뿐’이라는 농담이 오갔다. 지금 우리나라 집권여당이 꼭 그런 꼴이다. 당당한 남자들이 안 보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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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송평인]“노년에 외롭지 않으려면 이성 친구와 ‘우정의 동거’ 하세요”

    《 올해 95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답변은 흠잡을 데 없이 또박또박했다. 1시간 반의 인터뷰 동안 전혀 지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건강한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더욱 놀라운 것은 지적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달에만 40회의 강연을 했다. 강연만이 아니다. 매일 평균 원고지 40장을 집필하고 있다. 최근의 글을 모은 책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가 이번주에 나온다. 다음 달에는 최근 강연 내용을 담은 ‘희망과 사랑이 있는 이야기’(가제)가 나온다. 95세의 현역이라니 경이롭다. 김 교수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정년 은퇴했다. 그렇지만 나 같은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까지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도 중고교 시절에 사촌형들의 책꽂이에 있던 그의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었다. 》 ―선생님의 대표작은 역시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죠. “1961년 출판사에 원고를 맡기고 미국으로 나가 있었습니다. 대학에서는 본봉밖에 나오지 않아 생활에 보탬이 될까 해서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그해 출판 연감을 보니 출판 역사의 2가지 신기록을 세웠더군요. 소설보다 비소설이 더 많이 팔린 것과 단행본으로는 최초로 한 해 60만 부 이상 팔린 겁니다.”95세 건강 비결은 일 ―왜 그렇게 많이 읽혔을까요. “충북 영동에 강연을 갔더니 어느 나이 드신 분이 오셔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1960, 70년대는 경제적으로만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황무지에서 살았다고요. 당시 안병욱 선생과 저의 책을 읽고 마음의 안정을 얻고 희망도 가졌다고 했습니다.” 1960, 70년대 철학자가 쓴 인생에세이로 이름을 떨쳤던 김형석 안병욱 김태길 교수는 모두 1920년생으로 동갑이고 마지막 길까지 친구로 지냈다. 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가 2009년 89세로 가장 먼저 세상을 떴다. 2013년 별세한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는 2009년부터 몸져누웠기 때문에 사실상 89세에 활동을 중단한 셈이다. 김 명예교수만 지금도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다. ―100세까지 거뜬하실 듯합니다. “제 나이에 5년 후를 기약하지 않습니다. 2년 앞만 내다보고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년 정도는 더 살 자신이 있습니다.” ―도대체 비결이 뭡니까. “일이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30년 전 65세로 연세대에서 은퇴하고 15년간 사회교육 활동을 했습니다. 80세가 됐을 때 이제는 쉬어 볼까 하고 외국으로 여행도 다녔습니다. 돌아다녀 보니 일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에서 일로 옮겨 다니다 보니 정신적 에너지가 계속 충전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운동은 하십니까. “50대 중반부터 수영을 시작해 지금도 이틀에 한 번 30분 정도 합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글쓰기같이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은 힘들지 않나요. “매일같이 긴 일기를 씁니다.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도 글을 쓰면 또렷해집니다. 일기를 쓸 때 꼭 재작년과 작년의 오늘 날짜 일기를 읽어보고 나서 씁니다. 그래야 제 생각이 후퇴하고 있지 않나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글 쓸 때의 집중력을 물었는데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95세 나이에도 낡은 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얘기까지 했다. 그는 단정히 차려입은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타났다. 선비도 이런 선비가 없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지만 그의 경우는 흐트러지려는 정신력을 끊임없이 다잡기에 건강을 유지하는 것 같다. ―선생님의 인생론식 철학에 불만인 사람도 있습니다. “전 한국 사람의 문제가 철학이지 칸트나 헤겔 그 자체가 우리 철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칸트를 읽고 나오고 헤겔을 읽고 나오고 하면서 이게 내 문제에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 찾으려고 하니까 건방지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공감한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이 서울대의 박종홍, 김태길 교수였습니다. 대개는 칸트나 헤겔 소개하다가 끝나고 말았습니다.”인생 아는 60… 75세가 좋을 때 ―철학을 한 사람이 어떻게 선생님처럼 종교적(기독교적)일 수 있습니까. “철학자들 가운데 겸손한 사람, 즉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철학자니까 철학과 종교의 한계를 넘어가지는 않지만 종교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칸트는 읽어보면 하나님 얘기도 않고 예수님 얘기도 않지만 결론을 낸 것을 보면 기독교입니다. 그의 ‘실천이성비판’의 기본은 예수가 말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원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칸트와 같이 경건한 이성을 가진 사람은 결국 요청적(要請的) 유신론자가 되고 맙니다.” ―가장 힘든 때는 언제였나요. “김태길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1년간 참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 안 선생마저 떠났을 때 혼자만 남았다는 생각에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95세 무렵의 진짜 문제는 외로움이다. 어떻게 해서 95세의 나이까지 산다 해도 주변에 친구가 남아 있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는 아내와 10년 전 사별했다. 아내는 20년 동안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30년간 혼자였다. 공백을 달래주던 벗들마저 잇달아 세상을 떴다. “아내와 사별했을 때 제 나이가 85세였습니다. 80대 중반을 넘어서면 애욕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남녀 관계에 애정을 넘어선 우정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 나이가 되면 가능합니다. 이번 주 나오는 신간에 ‘누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누님은 나이가 많아 남편과 사별하고 다른 남자를 만났는데 그 선택이 옳았습니다. 무슨 애욕이 있어서가 아니라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같이 살아야 합니다. 새로 결혼하는 것이 재산 문제 때문에 어렵다면 동거 선언이라도 하고 살면 됩니다. 기독교인입니다만 교리를 떠나 저부터 먼저 여자친구를 사귀는 모범을 보였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몇 살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제일 좋은 나이가 60세에서 75세가 아닌가 합니다. 60세 이전에는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면 자신이 없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이 뭔지 알고 행복이 뭔지 알면서 발전하는 시기가 60에서 75세라고 생각합니다.”청춘이여 낮은 데서 출발하라 ―요새 청춘들 취업도 잘 안 되고 불쌍합니다. “일거리가 정말 없어서인가요, 자신에게 맞는 일거리가 없어서인가요. 대학을 너무 많이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는 직장을 찾다 보니 어려운 건 아닐까요. 제가 보잉사의 아시아 지역 간부들을 모아놓고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참석자들의 프로필을 봤는데 매사추세츠공대(MIT) 같은 명문 공대 출신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우리는 기술자들을 뽑아서 낮은 데서부터 키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명문 공대생은 다 어디 있느냐 했더니 ‘연구소 같은 데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제도를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김 명예교수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사용해본 적도 없다. 지금도 종이신문만 읽고 원고지에 글을 쓴다. 그래도 그는 최신 뉴스를 잘 알고 많은 강연에 초청받을 만큼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저명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2008년 100세 생일을 맞았을 때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직접 집으로 찾아가 축하해줬다. 그와 헤어지면서 “100세까지도 건강하고 총명하셔서 그때 다시 한번 인터뷰할 기회가 온다면 좋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김 명예교수가 본 인촌 김성수 선생 ::사랑과 지혜로 대하신 선생… 그분 밑에서 있던 교단시절 가장 많이 배우고 행복했죠김형석 명예교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어보면 인생에서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승만 박사와 인촌 김성수 선생을 비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박사는 언제나 친구가 없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정치 역량을 지녔다 해도 마침내 친구를 못 가졌기 때문에 고독했다. 그러나 인촌 같은 분은 항상 좋은 친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일생을 보냈다. 두 분 중에 누가 더 우리 사회에 업적을 남겨주었는가는 오늘(4·19혁명 직후)에 와서는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김 교수는 연세대로 옮기기 전에 중앙고에 근무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1947년 가을 학기에 중앙고에 부임해서 교사로 3년, 교감으로 3년 있으면서 인촌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셨다”며 “당시 인촌 선생은 중앙고의 교주(校主), 오늘날로 말하자면 이사장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생에서 직접 보고 배운 두 명의 은사로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선생을 꼽았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부하를 사랑하고 지혜롭게 대해 주는 데 인촌 선생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며 “인촌 선생 밑에서 있었던 때가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행복했으며, 그 이후에 그런 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고려대에서 영국사를 가르쳤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까지 이름이 올랐던 고 김성식 교수로부터 ‘인촌이 살아있을 때 야당은 분열한 일이 없었는데 인촌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야당이 한 번도 합쳐본 적이 없다’는 평가를 직접 들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인촌 선생의 인덕은 늘 제1선이 아니라 제2선에 있으면서 한번 믿고 쓴 사람을 끝까지 믿고 썼다는 데 있다”며 생전에 인촌을 알고 지낸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면서 인촌이 일각에서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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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미국 ‘菊花 클럽’도 실망한 아베 담화

    일본 왕실의 꽃은 벚꽃이 아니라 국화(菊花)다. 루스 베네딕트의 저명한 일본문화 연구서 ‘국화와 칼’의 국화는 거기서 나왔다. 실제로 존재하는 클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지일파(知日派) 지식인들을 뭉뚱그려 ‘국화 클럽’이라고 부른다. 하버드대 교수로 1960년대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가 국화 클럽의 원조쯤 된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첫 국가정보국(ONI) 국장을 지내고 은퇴 후 사사카와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데니스 블레어도 국화 클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사카와평화재단은 워싱턴 정가의 주요한 싱크탱크로 각종 일본 관련 세미나와 콘퍼런스를 주관하거나 후원한다. 과거 사사카와재단으로 불렀던 닛폰재단과의 관계로 보면 닛폰재단의 워싱턴 사무소 격이다. 닛폰재단은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 혐의자로 3년간 수감됐다 풀려난 사사카와 료이치가 경정(競艇)사업을 시작해 그 수익금으로 설립한 재단이다. 자선단체이지만 사상적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였던 극우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의 이념을 추종한다. ▷블레어 이사장이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를 ‘책임 회피로 일관한 실망스러운 문서’라고 비판한 ‘이사장 메시지’를 최근 사사카와평화재단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그는 20년 전 무라야마 담화는 주어가 분명한 능동태를 사용한 반면 아베 담화는 빈번하게 익명의 수동적 표현을 사용한 데다 장황하고 두서가 없어 책임 소재를 찾기 어려웠다고 일갈했다. 그는 “아베 총리 자신의 사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아베 총리는 지지자들을 교육시키고 다른 나라를 안심시킬 큰 기회를 놓쳤다”고 실망감을 나타냈다. ▷블레어 이사장의 소감에 특별한 것은 없다. 일본의 침략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베 담화를 듣고 느꼈을 만한 당연한 소감을 말했을 뿐이다. 한국인이나 중국인만 피해의식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다.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조차 아베 담화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됐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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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50세 이상만 스포츠 영웅?

    김연아 선수가 대한체육회가 진행한 2015년 스포츠 영웅 인터넷 투표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지만 최종 선정 과정에서 탈락했다. 그 대신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84), 양정모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62), 박신자 전 농구 국가대표 선수(74)가 올해의 스포츠 영웅으로 꼽혔다. 대한체육회는 지난해까지 있던 50세 이상이라는 나이 제한을 없애고 ‘스포츠 영웅을 국민이 직접 뽑아 달라’고 홍보했는데 결국 국민을 기만한 셈이다. ▷김 선수가 나이가 어려 스포츠 영웅에서 탈락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투표 결과 반영률이 10%에 불과했다는 게 대한체육회 측 해명이다. 그러면서 스포츠 영웅을 선정하는 취지는 스포츠 발전에 생애를 바친 원로를 대우하고 후배 스포츠인들의 귀감으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50세 이상이란 나이 제한을 없애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말든가 처음부터 국민에게 스포츠 영웅이 아니라 ‘생애공로상’ 수상자감을 뽑아 달라고 했어야 한다. ▷김 전 IOC 부위원장은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서울 올림픽 유치,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 등 스포츠 외교 분야에서 공헌한 바가 크다. 하지만 한때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을 평생 까먹지 않고 살기는 쉽지 않다. 김 전 부위원장은 2005년 세계태권도연맹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추징금 7억8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가 귀감이 되는 인물인지 의문이다. 국제사회에서도 IOC와 국제축구연맹(FIFA) 위원 부패 연루자에 대한 비난이 높다. ▷대한체육회는 젊은이들과의 소통에도 실패하고 오히려 구태(舊態)만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나이 제한을 없앴다고 했다가 사실상 나이 제한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경기 도중에 규칙을 바꾼 것과 다름없다. 다른 건 몰라도 스포츠 영웅만은 대부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김정행 현 대한체육회장은 대한체육회장도 지낸 김 전 부위원장의 직계로 꼽힌다. 어느 모로 보나 공정한 선정이라고 하기 어렵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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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유엔 제70차 총회와 한국

    영국 역사학자 존 키건은 이렇게 말했다. “근대 이후 세상을 바꾼 4차례의 회의가 있었다. 30년 전쟁 후인 1648년의 베스트팔렌 회의, 나폴레옹 전쟁 후인 1815년의 빈 회의,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의 파리 베르사유 회의,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의 샌프란시스코 회의다.” 1945년 6월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열려 유엔헌장이 채택되고 이에 따라 그해 10월 24일 유엔이 창설됐다. ▷올해가 유엔 창립 70주년이다. 우리에게는 광복도, 분단도 70주년인 올해 박근혜 대통령이 28일 유엔 제70차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한다. 유엔 없이 대한민국을 생각하기 어렵다. 해방 정국에서 미소(美蘇)공동위원회에 의해 추진되던 독립 절차가 미소의 충돌로 진전되지 못하고 결국 유엔으로 이관됐다.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하의 선거를 통해 탄생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침공을 받아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것도 유엔군이었다. ▷우리나라는 한때 유엔 창설일을 공휴일로 삼을 정도로 유엔을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유엔 회원국이 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1976년 북한의 유엔 산하 기구 가입이 허용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유엔의 날을 공휴일에서 빼버렸다. 1991년 우리나라는 단독이 아니라 북한과의 동시 가입이라는 조건하에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으로서는 기분 상하는 일이었지만 국제 평화를 위해 감수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전쟁이었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유엔이 창설됐다. 지난 70년을 돌아보면 유엔은 베트남전 등 지역 규모의 전쟁을 저지하지 못했지만 제3차 세계대전을 예방하는 데는 그런대로 잘 작동했다. 하지만 베스트팔렌 체제도, 빈 체제도, 베르사유 체제도 결국 무너졌다. 다만 유엔은 핵폭탄의 위협 속에 태어났다. 핵전쟁을 막지 못한다면 인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유엔을 지켜온 힘이라고 할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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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날치기, 한국과 일본의 차이

    일본 의회의 안보법 처리 과정에서 여야 의원이 뒤엉켜 몸싸움하는 사진이 한국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우리 국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언론은 날치기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아니 일본 의회의 일인데도 날치기라고 보도한 한국 언론이 적지 않았다. 일본은 자기 나라 일인데도 날치기라고 쓰지 않지만 우리는 남의 나라 일인데도 날치기라고 쓴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다. 일본은 강행채결(强行採決)이란 말을 쓴다. 우리에게도 강행채결과 비슷한 강행처리란 말이 있지만 날치기라는 용어가 더 선호된다. 본래 날치기는 피해자가 보는 앞에서 물건을 빼앗아 가는 범죄 행위다. 일본에도 범죄 행위로서 날치기를 뜻하는 갓바라이 같은 용어가 있다. 하지만 법안의 강행처리를 지칭하는 말로는 쓰지 않는다. 강행채결이든 강행처리든 강행이란 말 속에 어느 정도 비판적인 뉘앙스가 들어 있다. 소수당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지 수적 우세만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강하게 비판하면 다수(多數)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과 모순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날치기 같은 용어는 쓰지 않는다. 법안의 강행처리를 범죄를 연상케 하는 날치기로 지칭하는 것은 순전히 한국적인 언어 습관이다. 한국 정치에서 날치기란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거 독재정권에서 정당성이 부족한 다수당의 전제를 견제하려는 시도에서 야권과 언론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87년 이후 민주헌법에 따라 정당한 정권과 의회가 탄생하고 두 차례의 정권 교체와 한 차례의 의회권력 교체까지 이뤄진 뒤에도 날치기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일본 의회에서는 이번 안보법안만이 아니라 1999년 통신감청법안, 2003년 이라크 조치법안, 2004년 국민연금 개혁법안이 야당의 방해 속에 질의와 토론도 없이 강행처리됐다. 강행처리 때마다 야당으로부터 무효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언론은 그 말을 정치적 비판의 용어로 받아들이지 법적 효력을 다투는 용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서 안보법에 반대하는 여론이 50%를 넘고 의회에서의 처리 방식이 좋지 않았다고 보는 여론은 70%에 가깝지만 안보법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언론은 없다. 다만 헌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헌법 9조의 평화조항을 고치지도 않고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만든 데 대해 위헌법률소송이 추진되고 있을 뿐이다. 일본 헌법이 다수결을 전제로 하는 이상 강행처리로 입법된 것이라 하더라도 법률의 효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관념이다. 한국에서는 2009년 언론관련법이 당시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강행처리로 통과됐을 때 어느 신문은 ‘용납할 수 없는 의회 쿠데타’라는 제목을 달고 ‘원천 무효’를 주장했다. 당시 민주당은 의안 상정을 방해해 강행처리의 원인을 제공하고도 강행처리는 무효라며 헌법재판소로 끌고 갔다. 헌재는 민주당의 무효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회가 스스로 판단할 일로 돌려보냈어야 할 사안을 심사한 끝에 ‘위법하나 무효로 할 수 없다’는 황당한 결정을 내렸다. 날치기 공세는 직전 국회에서 가장 극성이었다. 민주당은 각종 쟁점 법안에 날치기 공세를 편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는 매년 내는 예산안까지 날치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날치기 공세와 그로 인한 몸싸움을 막는다고 만든 것이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이다. 그러나 국회선진화법은 잘못된 처방이다. 그것은 물 버린다고 물통에 든 아이를 함께 버린 것과 같다. 날치기 공세도 몸싸움도 사라졌지만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칙도 함께 사라졌다. 그 대신 소수가 다수의 의사 관철에 일상적으로 제동을 걸고, 그 제동을 풀어주는 대가로 소수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체제가 등장했다. 국회선진화법은 실은 뒷문으로 몰래 진짜 날치기를 불러들였다. 다수가 관철시킨 법안은 소수파의 저지 때문에 불가피하게 강행처리되는 형식을 취한다 해도 여전히 다수의 의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을 강행처리라고 부를지언정 날치기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수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법안이 어떤 꼼수를 통해 통과된다면 그것은 날치기라고 불러 마땅하다. 60년 전 그 꼼수는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이었다. 오늘날 그 꼼수는 법안연계처리라고 불린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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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프랑스에서도 뜬 K뷰티

    세포라(Sephora)는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화장품 전문 매장이다. 루이뷔통 계열의 화장품 판매 체인인 세포라가 이달 초부터 한국산 화장품을 전면에 진열해 판매하고 있다고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가 16일 전했다. 르 피가로는 ‘한국이 피해갈 수 없는 화장 패션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는 내용의 기획기사에서 랑콤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최근 수년간 화장품 업계의 큰 성공 사례는 BB크림, 흐림효과용 블러(Blur), 티슈마스크까지 대부분 한국에서 나왔다”고 평가했다. ▷아모레퍼시픽이 중국발(發) K뷰티 열풍으로 코스피 시장의 황제주로 등극했다. 아모레퍼시픽이 세계적으로 통하는 브랜드의 가능성을 처음 인정받은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 현지 법인을 설립해 1997년 내놓은 향수 ‘롤리타 렘피카’가 샤넬의 ‘No.5’나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자도르’ 등과 당당히 겨루는 향수가 됐다. 하지만 일반 화장품 분야에서는 프랑스 시장을 쉽게 뚫지 못했다. 이제 그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로 TV에서 스타일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아이린 김(27)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전 세계 55만 명의 팔로어에게 자신의 뷰티 팁(tip)을 전했다. 올 7월 미국 화장품 업체 에스티로더가 아이린을 ‘글로벌 뷰티 컨트리뷰터(global beauty contributor)’에 발탁했다. K뷰티의 노하우를 글로벌 트렌드와 연결해줄 사람으로 아이린을 뽑은 것이다. 에스티로더가 한발 앞서 K뷰티에 주목한 것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프랑스 화장품 업계에도 영향을 줬다. ▷프랑스 사람들은 과거 동양 여성의 특징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여주인공 뮬란 같은 찢어진 눈(les yeux brid´es)을 많이 거론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같이 부드러운 피부에 더 주목하고 있다. 특히 한국 여성이 일본이나 중국 여성보다 더 좋은 피부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섬세한 화장에 의해 유지된다고 여긴다. 화장품의 원조 국가 프랑스까지 관심을 갖게 한 K뷰티의 잠재력이 어디까지일지 궁금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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