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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평평하고 넓으며 건물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하며, 풍경은 이른 아침 또는 늦은 오후에 특히 아름답게 보인다.” 단편소설 ‘텅 빈 도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에 대한 세밀한 묘사로 시작된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미문은 아니지만, 표현력이 꽤 탄탄하다. 글을 쓴 건 놀랍게도 ‘챗GPT’다. 함께 작품을 쓴 김달영 작가가 “챗GPT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쓰는 것 같다”고 토로할 만하다. 7명의 인간 작가가 ‘챗GPT’로 창작한 단편소설집이다. 인간이 챗GPT에게 지시를 내리고, 문장과 구성을 다듬었지만 인공지능(AI)이 큰 역할을 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신조하 작가는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하는 소설을 써달라고 챗GPT에게 요청했다. 챗GPT는 논리적으론 나쁘지 않은 결과를 내놓았다. “인류에 해를 끼칠 의도가 전혀 없다”는 문장 등을 뚝딱 만들어낸 것이다. 다만 미묘한 문맥은 살리진 못했다. ‘음흉한 분위기를 반영해 달라’는 요구에 “장담하건대 폭력적인 수단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단순한 문장을 내놓은 것이다. 결국 단편소설 ‘매니페스토’를 쓸 때 신 작가는 자주 문장을 다듬어야 했다고 한다. 챗GPT 활용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나플갱어 작가는 챗GPT에게 지구에 가장 위협적인 기후위기가 무엇인지 물어 바다에 잠긴 도시가 등장하는 ‘희망 위에 지어진 것들’을 썼다. 윤여경 작가는 챗GPT에게 인기를 끌 만한 주제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해 AI가 인간의 무의식을 읽는 ‘감정의 온도’를 집필했다. “얼개만 주면 살을 붙여준다”(‘그리움과 꿈’의 오소영 작가), “결말을 손댈 필요가 없다”(‘오로라’의 전윤호 작가) 같은 고백을 읽다 보면 창의력이 정말 인간만의 것인지 의심되기도 한다. 인간과 AI가 쓴 문장이 헷갈리는 시대, 이제 문학에도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서두에 챗GPT 사용 여부를 밝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마치 조미료를 넣지 않은 식품을 따로 표기하는 것처럼.”(‘펜웨이 파크에서의 행운’의 채강D 작가)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설마 올해도?’라고 생각했는데 올해도였다. 지난달 14일(현지 시간) 발표된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천명관 작가(59)의 장편소설 ‘고래’가 오른 일 말이다. 영국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2016년 한강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2007년·창비) 수상을 시작으로 한국 작품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오른 건 이번이 5번째다. 후보 선정이 이례적인 사건은 아닌 셈이다. 다만 지난해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가 최종 후보에,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2019년·창비)이 1차 후보에 각각 올랐던 만큼 올해 한국 출판계의 기대는 낮았다. 그런데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왜 ‘고래’에 주목한 걸까. 먼저 심사위원회의 평가 중 “한국의 풍경과 역사에 대한 탐구”라는 대목에 눈길이 갔다. 실제로 ‘고래’는 한국 여자들의 고달픈 삶을 담았다. 박색이라 신혼 첫날 소박을 맞고 홀로 늙어가며 세상에 복수심을 지닌 노파,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집에서 도망친 뒤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금복 등 등장인물의 여정은 우리 할머니 세대가 겪은 일 자체다. 천 작가와 함께 후보에 오른 번역가 김지영이 부커상 심사위원회 인터뷰에서 “작품을 번역하며 어린 시절 온갖 설화와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할머니가 생각났다”고 한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심사위원회는 또 ‘고래’를 “사악한 유머로 가득 찬 소설”이라고 했다. 등장인물 춘희가 여성임에도 14세가 되기 전 이미 100kg을 넘었다고 능청스럽게 풀어내고, 춘희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땡볕을 뚫고 벽돌공장으로 향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대목은 농담인지 헷갈릴 정도로 초현실적이다. 심사위원회가 ‘고래’에 대해 ‘카니발레스크’(Carnivalesque·전통적인 문학을 유머와 무질서로 전복시키는 양식)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 이해된다. 무엇보다도 부커상 심사위원회를 놀라게 한 건 양면성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생생한 인물들은 어리석지만 현명하고, 끔찍하지만 사랑스럽다”는 심사위원회의 말처럼 인간은 선하면서 동시에 악하다는 사실을 직시한 글쓰기가 이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고래는 책의 폭동”이라는 심사위원회의 평가에서 부커상이 얼마나 이 작품을 신선하게 느끼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함께 오른 다른 작품들도 쟁쟁하다. 우크라이나 ‘국민작가’로 불리는 안드레이 쿠르코프, 노벨 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꼽히는 프랑스 소설가 마리즈 콩데의 작품 등 12개국 13개 작품이 올라와 있다. 다만 ‘고래’ 심사평을 읽으며 ‘설마 올해도?’라는 희망을 품게 됐다. 18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될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고래’가 포함될지 기대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22개 소책자가 담겨 있다. 꺼내서 읽어보려 했더니 제본되지 않은 소책자들이 손 위에서 ‘떠다닌다’(Float). 쪽수도 없어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알 수 없다. 겨우 표지를 찾았더니 이렇게 쓰여 있다. “정해진 순서도 없고 주제도 제각각인 스물두 권의 소책자 모음. 읽기는 자유낙하가 될 수 있다.” 13일 출간된 캐나다 시인 앤 카슨의 에세이 ‘플로트’(봄날의책)는 실험적인 책이다. 카슨은 2001년 여성 최초로 T S 엘리엇상을 받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노벨 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도 언급되는 그가 독특한 시도를 한 건 독자들이 책을 능동적으로 읽기 원하기 때문이다. 수필, 비평, 희곡, 축사 등 다양한 글 중에 어떤 것을 먼저 읽을지 독자가 고르라는 것이다. 책은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시도다. 지난해 8월 출간된 카슨의 에세이 ‘녹스’(봄날의책)는 책의 모든 면을 하나로 이어 붙여 아코디언처럼 펼쳐지게 했다. ‘녹스’는 정가가 5만5000원이나 됐지만 3000부가 팔려 출판계에서 화제를 모았다.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플로트’의 정가가 3만8500원으로 높은 편이지만 카슨 책을 찾는 마니아들을 겨냥해 초판으로 2000부를 인쇄했다”며 “독자들이 스스로 글을 분류하고 선택해 읽으며 책의 의미를 확장해 나가면 좋겠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강원 강릉시에서 11일 발생한 산불로 경포호 인근 정자 2곳이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포호 근처에 있는 정자인 ‘상영정’이 이날 전소됐다. 1886년 향토유림인 상영계가 건립한 상영정은 비지정문화재지만, 관광객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상영정이 있던 자리엔 까만 기와 조각만 남은 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방해정’은 가옥 형태만 남긴 채 대부분 소실됐다. 방해정은 조선 철종 10년(1859년)에 통천 군수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관청 건물 일부를 헐어 지은 정자다. 방해정에 살고 있는 권천수 씨(62)는 “어머니가 애지중지 관리하시고 문화재로도 지정된 집인데 한순간에 타버려 절망스럽다”고 말했다. 관동팔경 제1경으로 꼽히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경포대, 국가민속문화재인 선교장 인근까지 한때 불이 번지자 문화재청은 경포대 현판 7개를 떼어 인근 오죽헌박물관으로 옮겼다. 강릉시는 이 문화재들 인근에 물을 뿌려 불이 옮겨붙지 않게 했다. 경포호 주변 사찰 ‘인월사’는 불에 타 전소됐다. 인월사는 문화재는 아니다. 경포대 일대는 불길이 진압된 뒤에도 나무 타는 냄새로 가득했다. 정자 인근 소나무들은 밑동이 새까맣게 그을렸고 나무 주변의 풀과 꽃도 모두 타버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강릉=최미송 기자 cms@donga.com}
베트남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중학생 도훈이는 힘들 때면 마을 언덕에 있는 느티나무를 찾는다. 둘레가 10m가 넘는 느티나무 안엔 자그마한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학원에 가지 못하는 다문화가정 출신 아이들이 모여 공부한다. 아이들은 느티나무의 정령과 함께 논다. 어느 날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돈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느티나무가 서 있던 언덕을 없앤다는 말까지 나온다. 도훈이는 친구들과 함께 ‘레인보우 크루’를 만들고, 느티나무를 보호하는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는데…. 도훈이와 친구들은 느티나무를 지켜낼 수 있을까. 김중미 작가(60·사진)가 최근 출간한 장편소설 ‘느티나무 수호대’(돌베개)는 다문화 아이들의 성장기를 그린다. 청소년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2001년·창비)로 유명한 김 작가는 지난해 4월 장편소설 ‘너를 위한 증언’(낮은산)을 냈다. 신작은 가상의 마을인 대포읍이 배경이다. 대포읍에 사는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다문화가정 출신이다. 아이들은 자주 편견에 가로막힌다. 중국에서 온 엄마 아빠가 마라탕 가게를 하는 금란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중국으로 꺼지라”는 말을 듣는다. 베트남에서 온 민용이는 ‘동남아 울보’로 불린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뒤 검은 피부색 때문에 놀림받던 니카는 친구들에게 “속상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 판자촌 아이들이 절망하지 않았듯, 이번 책에서도 아이들은 희망을 찾는다. 김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희망은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슬픔과 절망을 거름 삼아 싹을 틔운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올해만 장편소설 2권, 단편소설집 1권을 출간합니다. 정신없이 바쁘네요.” 지난해 4월 단편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아작)’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47)는 4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 작가는 “올 상반기엔 구미호 이야기를 재해석한 호러 장편소설 ‘호’(가제·읻다)와 단편소설집 ‘아무도 모를 것이다’(가제·퍼플레인)를, 하반기엔 중독 가능성이 없는 진통제 개발을 다룬 공상과학(SF) 장편 ‘고통에 관하여’(가제·다산북스)를 펴낼 계획”이라며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 전에 썼지만 출간되지 못한 작품도 이제야 빛을 보게 됐다”고 했다. 올해 출간되는 문학책 중엔 최근 장르문학계 ‘핫한 작가’들의 작품이 눈에 띈다. 2021년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민음사)로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한 윤고은 작가(43)는 올 6월 SF 장편 ‘불타는 작품’(가제·은행나무)을 출간한다. 말하는 개가 세운 재단의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예술가가 겪는 기묘한 이야기를 다룬다. 장편소설 ‘설계자들’(2019년·문학동네)이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된 김언수 작가(51)는 올 하반기 스릴러 장편 ‘빅 아이’(가제·문학동네)로 돌아온다. 김 작가는 원양어업을 둘러싼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을 쓰기 위해 6개월간 원양어선을 탔다. 거장과 중견 작가들도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윤흥길 작가(81)는 일제강점기 한 가족의 엇갈린 삶을 다룬 대하소설 ‘문신’(문학동네) 4, 5권을 올봄 동시에 펴내며 대장정을 끝낸다. 2019년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국제부문, 2021년 스웨덴 시카다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68)은 에세이 ‘김혜순의 말’(마음산책)에서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다. 이인성 작가(70)는 연작소설집 ‘돌부림’(가제·문학과지성사), 이기호 작가(51)는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가제·문학동네)으로 돌아온다. 하성란(56) 정이현(51) 작가는 장편소설을, 김연수(53) 김금희(44) 작가는 에세이를 각각 준비 중이다. 장편소설 ‘파친코’(인플루엔셜)를 잇는 이산(디아스포라) 문학 작품도 나온다. 마음산책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헬레나 로가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메리칸 서울’을 선보인다.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선보인 연상호 영화감독(45)과 최규석 만화가(46)는 만화 ‘계시록’(문학동네)을 올 6월 출간할 계획이다. 살인을 저지른 목사와 그를 쫓는 형사가 등장하는 스릴러다. 해외 작품으론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83)의 ‘표면의 삶’과 ‘아니 에르노 자서전: 이브토로 돌아가다’(가제), ‘외면 일기’(가제)가 열린책들에서 잇따라 출간될 예정이다. 비문학 장르에서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100)이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평가한 ‘리더십’(민음사)이 눈에 띈다. 올해 상반기 국내 출간될 예정이다. 스웨덴 출신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20)가 환경 문제를 다방면으로 짚은 ‘기후 책’(김영사)도 올해 3월 독자를 만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올해만 장편소설 2권, 단편소설집 1권을 출간합니다. 요즘 정신없이 바쁘네요.” 지난해 4월 단편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아작)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47)는 4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 작가는 “올 상반기엔 구미호 이야기를 재해석한 호러 장편소설 ‘호’(가제·읻다)와 단편소설집 ‘아무도 모를 것이다’(가제·퍼플레인), 하반기엔 중독 가능성이 없는 진통제 개발을 다룬 공상과학(SF)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가제·다산북스)를 펴낼 계획”이라며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 전에 썼지만 출간되지 못한 작품도 있는데 이제야 빛을 보게 됐다”고 했다. 올해 문학 신간 중엔 최근 장르문학계의 ‘핫한 작가’의 신작이 눈에 띈다. 지난해 김훈작가(75)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 은희경 작가(64) 연작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문학동네)처럼 순수문학계 원로작가 활약이 이어졌다면 올해는 한층 젊은 작가의 활약이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민음사)로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한 윤고은 작가(43)은 올 6월 SF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가제·은행나무)을 출간한다. 말하는 개가 세운 재단의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예술가가 겪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를 다룬다. 장편소설 ‘설계자들’(2019·문학동네)이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김언수 작가(51)는 올 하반기 스릴러 장편소설 ‘빅 아이’(가제·문학동네)로 돌아온다. 김 작가는 원양어업을 둘러싼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을 쓰기 위해 6개월간 원양어선을 탔다. 지식재산권(IP) 시대인 만큼 영상화의 흐름이 반영된 작품도 출간된다. 2021년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을 선보인 연상호 영화감독(45)과 최규석 만화가(46)는 만화 ‘계시록’(문학동네)을 올 6월 출간할 계획이다. 살인을 저지른 목사와 이를 쫓는 형사가 등장하는 심리 스릴러다. 지난해 3월 동명의 애플TV플러스 드라마로 공개된 뒤 출판계까지 이어진 이민진 작가(55)의 장편소설 ‘파친코’(인플루엔셜)의 영향일까. 한국계 미국인 작가 헬레나 로가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에세이 ‘아메리칸 서울’(마음산책)처럼 이산문학(디아스포라 문학)도 나온다. 거장들도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윤흥길 작가(81)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한 가족의 엇갈린 삶을 다룬 대하소설 ‘문신’(문학동네) 4·5권을 올 봄 동시에 펴내며 대장정을 끝낸다. 2019년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국제부문, 2021년 스웨덴 시카다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68)은 에세이 ‘김혜순의 말’(마음산책)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털어놓는다. 이인성 작가(70)는 연작소설집 ‘돌부림’(가제·문학과지성사), 이기호 작가(51)는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없는 삶’(가제·문학동네)으로 돌아온다. 하성란(56) 정이현 작가(51)는 장편소설, 김연수(53) 김금희 작가(44)는 에세이를 준비 중이다. 해외에선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83)의 국내 미출간작 ‘표면의 삶’, ‘아니 에르노 자서전: 이브토로 돌아가다’(가제), ‘외면 일기’(가제)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비문학에선 ‘위기’를 다룬 해외 저작이 눈에 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100)이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지도력에 대해 평가한 ‘리더십’(민음사)을 올 상반기 출간한다. 스웨덴 출신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20)는 환경문제를 다방면으로 짚어낸 ‘기후 책’(김영사)을 올 3월 펴낸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영화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국 콘텐츠 붐이 이젠 게임으로 이어질 겁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에서 일하다 최근 게임 회사로 이직한 이가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OTT를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간 한국 콘텐츠의 미래가 게임에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영화 드라마 업계에선 서사가 탄탄한 웹소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의 성공이 눈에 띄었다”며 “게임 업계도 지식재산권(IP) 발굴 가능성을 지닌 원천 콘텐츠를 찾고 있다”고 했다. ‘한계선을 넘다’는 판타지 장편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전 4권·황금가지)를 게임과 영상으로 만들기 위한 삽화를 담은 책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영도 작가(51)가 2002년 PC통신 하이텔에 연재했고, 2003년 종이책으로 출간돼 60만 부 이상 팔렸다. 현재 국내 게임업체 크래프톤이 ‘눈물을 마시는 새’를 게임과 영상으로 만들고 있는데, 시각화 작업의 초안을 담은 게 ‘한계선을 넘다’다. 책에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삽화 300여 점이 담겼다. 눈에 띄는 건 한국적 색채가 짙다는 점이다. 도깨비 남성 캐릭터인 ‘비형 스라블’의 옷은 흰색이다. 비형 스라블은 짚신을 신고, 머리엔 상투를 튼 후에 풀어지지 않도록 위에 꽂는 장식인 ‘동곳’을 달았다. 설화에서 방금 툭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다. 인간이 신을 모시는 종교적 집결지인 ‘하인샤 대사원’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스님들은 회색 승복을 입고 돌아다니고, 암자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모습은 경남 합천 해인사를 떠올리게 한다. 끈에 매단 뒤 공중에 돌려 소리를 내는 독특한 피리인 ‘무릿매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은 쥐불놀이의 한 장면 같다. 영화 ‘스타워즈’ ‘해리포터’ 시리즈에 참여한 미국 할리우드의 디자이너 이언 매케이그가 시각화에 참여해서 그런지 서양에서 익숙할 만한 그림도 보인다. 중세 유럽의 성 같은 왕국의 옛 수도, 도끼나 단검 등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전투용 무기는 영미권 판타지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한계선을 넘다’를 시작으로 내년엔 그래픽노블이 출간되고, 이르면 2025년엔 롤플레잉게임(RPG)이 나온다니 반응이 어떨지 기대된다. 지난해 출판계는 영화 드라마가 몰고 온 열풍의 수혜를 단단히 받았다. 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2022년)의 각본집인 ‘헤어질 결심 각본’(을유문화사), 드라마 ‘그 해 우리는’ 대본집 ‘그 해 우리는’(전 2권·김영사)이 인기를 끌었다. ‘한계선을 넘다’가 출간 직후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종합 1위에 오른 것을 보니 게임업계와 출판계도 이미 동떨어진 시장이 아니다. 이젠 한국 문학을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 콘텐츠 붐을 일으킬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해외 유저들이 한국 게임을 즐기고, 이 인기 덕에 한국 작가가 쓴 원작 소설이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북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상상을 해본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보르비콩트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하게 만들어라.” 프랑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 궁전 정원엔 ‘태양왕’ 루이 14세(재위 1643∼1715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 녹아 있다. 당시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1615∼1680)가 세운 보르비콩트 성의 정원을 보고 질투를 느낀 루이 14세는 더 멋진 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보르비콩트 정원을 설계한 정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1613∼1700)를 불러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긴다. 1682년 완성된 정원은 어마어마했다. 14개 정원엔 50개의 연못 분수와 500개가 넘는 조각상이 배치됐다. 정원 중앙에 자리 잡은 신들의 분수는 조각상의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만들어졌다. 영국 에식스대에서 조경학을 공부하고 국내에서 정원설계회사를 운영하는 저자는 베르사유 정원이 “자신을 태양이자 절대 권력으로 투영한 루이 14세의 상징”이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세계 수많은 정원 중 독특한 특징을 지닌 정원 30곳과 이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미국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 같은 해외 유명 정원뿐 아니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후원, 강원 강릉시 오죽헌의 정원 등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도 소개한다. 깊이 있는 분석보단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책장을 넘기며 방구석에서 정원 산책을 해보는 건 어떨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 날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전직 에투알(수석무용수) 스텔라가 6층 자택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 경찰은 스텔라가 발코니에서 화분에 물을 주다가 추락사한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종결한다. 그러나 스텔라의 딸 루이즈는 경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루이즈는 어머니의 죽음 뒤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며 전직 강력반 반장 마티아스를 찾아가는데…. 과연 스텔라는 왜 사망한 것일까.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49)가 지난해 12월 21일 국내에 출간된 19번째 장편소설 ‘안젤리크’(밝은세상·사진)로 돌아왔다. 지난해 1월 장편소설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밝은세상) 이후 11개월 만이다. 책장을 술술 넘기게 하는 ‘페이지 터너’ 장인의 녹슬지 않은 실력을 증명한 신작을 내놓은 그를 서면으로 단독 인터뷰했다. ―반전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추리소설로 돌아왔다. “서스펜스야말로 내 전매특허다. 다만 신작은 추리소설이자 등장인물의 비밀과 추억이 담겼다는 점도 생각하며 읽어줬으면 좋겠다.”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꿈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원한을 갖게 된다. “신작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파고든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한 때문에 엇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는데 실제로는 그런 삶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할까. 원한에 사로잡힌 인물이 끔찍한 일탈을 저지르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책 맨 앞에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년)의 원작자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말을 인용했다. “그저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는 불만에 흥미를 갖는다”라는 문장은 인간의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담은 것 같다. “신작을 쓰는 데 하이스미스가 영감을 줬다. ‘안젤리크’를 읽으면서 독자는 등장인물이 가면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비밀을 숨기고 있고, 그 비밀이 등장인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동력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등장인물을 평가하거나 규정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영혼이 지닌 복잡한 미로를 탐구하려고 애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인간을 깊이 이해하려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지구에서 살며 가장 끔찍한 건 모든 사람이 그 나름의 이유를 지니고 행동한다는 점이니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에 어떻게 지냈나. “코로나19가 시작되고 나서 6개월 동안 아예 글을 쓸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자 마치 히말라야 등반을 마친 산악인 같은 기분을 느꼈다. 히말라야에 다시 올라가라고 하면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신작의 첫 장을 꾸역꾸역 쓰고 났더니 다시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한국 영화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 박찬욱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하나같이 독창적이고 특별하다. 최근에 영화 ‘헤어질 결심’(2022년)을 봤는데 역시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 ‘부산행’(2016년)의 연상호, 영화 ‘곡성’(2016년)의 나홍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년)의 김성훈 감독도 좋아한다.” ―새해를 맞아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말이 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한국 독자들이 줄곧 내게 보여준 변함없는 열광에 깊이 감사드린다. 2010년 한국에 처음 갔다. 한국에 가서 한국어로 번역된 내 책들을 다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 날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전직 무용수 스텔라가 6층 자택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 경찰은 스텔라가 발코니에서 화분에 물을 주다가 추락사한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종결한다. 그러나 스텔라의 딸 루이즈는 경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루이즈는 스텔라의 죽음 뒤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며 전직 강력반 반장 마티아스를 찾아간다. 과연 스텔라는 왜 사망한 것일까.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49)가 지난달 21일 번역 출간된 19번째 장편소설 ‘안젤리크’(밝은세상)로 돌아왔다. 국내 출간은 올 1월 장편소설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밝은세상) 이후 11개월 만이다. 책장을 술술 넘기게 하는 ‘페이지 터너’의 장인의 녹슬지 않은 실력을 증명한 신작을 내놓은 그를 서면으로 만났다.―반전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추리소설로 돌아왔다. “서스펜스야말로 내 전매특허다. 다만 신작은 추리소설이자 등장인물의 비밀과 추억이 담겼다는 점도 생각하며 읽어줬으면 좋겠다.”―등장인물은 저마다의 꿈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원한을 갖게 되는데…. “신작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파고든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원한 때문에 엇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는데 실제로는 그런 삶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할까. 원한에 사로잡힌 인물이 끔찍한 일탈을 저지르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책 맨 앞에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의 원작자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말을 인용했다. “그저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는 불만에 흥미를 갖는다”라는 문장은 인간의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담은 것 같다. “신작을 쓰는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영감을 줬다. ‘안젤리크’를 읽으면서 독자는 등장인물이 가면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비밀을 숨기고 있고, 그 비밀이 등장인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동력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등장인물을 평가하거나 규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영혼이 지닌 복잡한 미로를 탐구하려고 애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인간을 깊이 이해하려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지구에서 살면서 가장 끔찍한 건 모든 사람이 나름의 이유를 지니고 행동한다는 점이니까.”―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어떻게 지냈나. “코로나19가 시작되고 나서 6개월 동안 아예 글을 쓸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자 마치 히말라야 등반을 마친 산악인 같은 기분을 느꼈다. 히말라야에 다시 올라가라고 하면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신작의 첫 번째 장을 꾸역꾸역 쓰고 났더니 다시 글쓰기가 가능해졌다.”―한국 영화의 광팬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 박찬욱이다. 박찬욱 영화는 하나같이 독창적이고 특별하다. 최근에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을 봤는데 역시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 ‘부산행’(2016)의 연상호, 영화 ‘곡성’(2016)의 나홍진,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2019)의 김성훈 감독도 좋아한다.”―새해를 맞은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국 독자들이 줄곧 내게 보여주신 변함없는 열광에 깊이 감사드린다. 한국에 가서 한국어로 번역된 내 책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영도 작가(51)가 2003년 출간한 판타지 장편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전 4권·황금가지)가 유럽의 한 출판사로부터 선인세 약 3억 원을 받고 판매됐다. 이는 단일 국가에서 받은 한국 출판물 선인세 중 최고액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번 계약을 포함해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12개 국가 출판사와 총 6억 원의 선인세 계약을 맺었다. 앞서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2020년·놀)가 일본 출판사와 2억 원, 김언수 작가의 ‘설계자들’(2010년·문학동네)이 미국 출판사와 1억 원의 선인세 계약을 각각 맺은 바 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웹소설, 웹툰, 게임 시나리오…. 언제나 상업적인 글을 썼다. 먹고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가벼운 글을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찾아오면 조금 허전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깊게 공감하는 주제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럴 때면 홀로 방에 앉아 자판을 두드렸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써 내려갔다.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자 김혜빈 씨(29)는 포부를 묻자 자신감 있게 답했다. “7년 동안 웹소설, 웹툰, 게임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런데 주위에선 저를 ‘진짜 작가’로 인정하지 않더군요. 신춘문예를 계기로 웹소설 작가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싶어요. 어떤 이야기를 쓰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작가라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였다. 중편소설, 단편소설, 시, 시조, 희곡, 동화, 시나리오, 문학평론, 영화평론까지 모두 9개 부문에서 김혜빈 공현진(36) 권승섭(21) 김미경(57) 임선영(29) 김서나경(본명 김나경·43) 장희재(30) 민가경(29) 윤성민 씨(39)가 당선됐다. 당선자들은 직업도 나이도 각양각색이라 처음에는 서로 어색해했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 덕에 금세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날 영하 14도의 한파가 몰아쳐 몸은 꽁꽁 얼었지만 당선자들의 표정은 이른 봄이 찾아온 듯 해맑았다. 단편소설 당선자 공현진 씨에게 신춘문예는 닿을 듯 닿지 못했던 꿈이었다. 공 씨는 학사, 석사, 박사 모두 국문학을 전공하며 작품을 꾸준히 써 왔다.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가 본심까지 진출했지만 끝내 당선되지 못했다.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매일 고민했다. 올해 단편소설을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도 마음을 비웠지만 마침내 등단의 꿈을 이뤘다. “‘신춘문예 장수생’이어서 불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습니다.” 시 당선자 권승섭 씨는 올해 최연소 당선자. 권 씨는 7세 때 하늘을 훨훨 날아가다 꽃에 앉은 배추흰나비를 그린 시를 썼다. 대학생인 그는 시뿐 아니라 소설, 동화, 희곡 등 다양한 작품을 쓰고 있다. 소감을 묻자 권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당선이 된 것 같아 기쁨보단 걱정과 불안이 앞섭니다. 제가 행복하게 시를 썼을 때 반응이 좋더라고요. 즐겁게 쓰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시조 당선자 김미경 씨는 올해 최고령 당선자다. 어릴 적부터 시인을 꿈꿨던 문학소녀였지만 결혼 후 아이를 키우느라 글쓰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2017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펜을 잡았다. 당선 전화를 받은 건 미국에 있는 아들의 대학 졸업식을 마치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던 때였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김 씨를 향해 아들이 “축하한다”고 나직이 말했다고 한다. “자연과 사물에 귀가 열린 사람이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흔들리는 바람의 말도 귀담아듣겠습니다.” 각자 상황이 달랐던 만큼 준비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수년간 투고 끝에 당선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첫 도전에 당선된 이도 있다. 영화평론 당선자 윤성민 씨는 올해 처음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됐다. 윤 씨는 대학생 때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평론을 제대로 써본 적은 없다. 올해 신춘문예 공고문을 보고 동아일보에만 응모해 당선됐다. 중앙일보 기자인 윤 씨는 “기자 업무가 명확한 글쓰기 훈련을 하는 데 도움을 줬다”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해 평론을 쓰겠다”고 했다. 희곡 당선자 임선영 씨는 대학생 때부터 10년 가까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번번이 낙선한 탓에 회사원으로 생업을 이어갔지만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임 씨는 “취업 준비를 하면서 작가가 못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다”며 “신춘문예 당선은 이루지 못했던 꿈에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라고 했다. 당선자들은 등단이라는 첫발을 뗐다. 이들에게 작가는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다가 자기만의 글을 쓰고 싶어 신춘문예에 응모한 동화 당선자 김서나경 씨는 “내 이야기가 세상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과 좋은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며 “글을 잘 쓸 수 있을지 두려움도 있지만 더 나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며 웃었다. 매일 8시간씩 카페에서 일하며 작품을 쓴다는 시나리오 당선자 장희재 씨는 “아직 남들만큼 이뤄놓은 게 없어 잃을 것도 없다”며 “사람들을 한바탕 울리거나 위로를 주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문학평론 당선자 민가경 씨는 문학을 동경했지만 생계를 위해 6년 동안 항공교통관제사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퇴직 후 뒤늦게 꿈을 찾아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당선의 기쁨을 맛봤다. 배수의 진을 친 그의 도전은 시작일 뿐이다. 민 씨는 힘찬 목소리로 고백했다. “신춘문예 당선은 꿈을 외면하고 살았던 제게 문학이 ‘꿈꿔도 좋다’고 허락해준 것 같아요.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난 순간입니다. 문학이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말하는 평론가가 되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지나온 삶에는 여러 성공과 실패가 섞여 있다. 내 낚싯줄에 어떤 물고기가 걸릴지 알 수 없듯, 성공도 실패도 내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저자는 소설책을 읽을 때 밑줄을 잘 긋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1952년 발표한 중편소설 ‘노인과 바다’를 읽을 땐 달랐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장을 넘기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밑줄을 그으며 문장을 음미했다. 삶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라는 사실을 단단한 문장으로 전하는 헤밍웨이의 글을 읽으며 저자는 “나이를 먹고 보니 삶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저자가 50대에 50권의 책을 읽은 감상을 담은 에세이다. 저자는 대학에서 시인 김수영(1921∼1968) 연구로 석사 학위를, 소설가 최인훈(1936∼2018)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사로도 잠시 일했다. 하지만 결혼 후 육아와 살림을 하느라 청춘을 보냈다. 나이가 들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던 저자에게 다가온 것이 책이었다. 그가 먼저 찾은 건 고전이다. 독일 철학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희곡 ‘파우스트’(1831년)를 읽고 “이제는 성찰하는 열정의 삶을 살고 싶다”고 다짐한다. 러시아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5년)를 탐독하곤 “모두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다”고 외친다. 어려운 책만 읽은 건 아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여성 작가 김혼비의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2018년)에 감동받고 “하마터면 동네에 여자축구팀이 있는지 찾아볼 뻔했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지리학자 최영준의 에세이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2010년)을 통해 “주말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어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경남 진주시 경상대 GNU컨벤션센터에서 청소년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친구야! 문화예술과 놀자―나도 케이팝 스타’가 26일 열렸다. 이 프로그램은 동아일보와 경남도교육청, 진주시 반성중학교가 공동 주최하고 K공연예술비전연구소가 주관했다. 이날 열린 56회 행사에선 반성중학교 학생 47명과 유성준 동덕여대 방송연예과 교수 및 재학생으로 구성된 멘토단이 뮤지컬 ‘우리읍내’(사진)를 무대에 올렸다. 미국 극작가 손턴 와일더(1897∼1975)의 희곡 ‘아워 타운’을 각색한 작품으로, 가상의 마을에서 의사와 신문편집장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그렸다. 동아일보는 청소년이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2007년부터 지금까지 전국 50여 개 지역을 돌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공연에 참여한 김성재 군(16)은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아신 양(15)도 “부담감도 없진 않았지만 배울수록 발전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고 밝혔다. ‘친구야! 문화예술과 놀자―나도 케이팝 스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뒤 비대면으로 진행해왔고, 약 3년 만에 관객 앞에서 대면으로 열렸다. 하만흥 반성중학교 교장은 “연습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열정을 불태웠다”고 말했다. 뮤지컬 총괄감독을 맡은 김춘경 동덕여대 방송연예과 교수는 “학생들이 자기 삶을 이야기하며 서로 공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동아일보에 27년 동안 연재했던 네 컷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시사만화가 이홍우 화백(사진)이 23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고인은 올해 9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된 뒤 합병증으로 장기간 입원해 치료를 받아 왔다. 유족은 23일 “‘나는 죽을 때까지 나대로였다’, ‘후회 없이 멋지게 살았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밝혔다. 부산 출신인 고인은 어렸을 때부터 시사만화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무작정 상경해 당시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연재하던 김성환 화백(1932∼2019)의 전시회를 찾아갔던 일은 유명하다. 고교 때부터 학생 잡지에 고정적으로 만화를 그렸으며, 1967년 서라벌예술대 2학년 때 대전 중도일보에 ‘두루미’를 연재하기도 했다. 고인은 ‘고바우 영감’의 바통을 이어받아 1980년 11월 12일부터 동아일보에 ‘나대로 선생’을 연재했다. 평범한 중산층 가장인 나대로는 당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나대로 선생은 대중에게 해우소(解憂所) 같은 쾌감을 줬지만, 정치인이나 공직자 등에게는 쓰라린 촌철살인(寸鐵殺人)이었다. 1991년 당시 정부를 ‘외교 굽신, 경제 망신, 치안 불신, 정책 등신, 날치기 귀신, 국민 배신’이라며 ‘6공 6신’이라 부른 건 오랫동안 회자됐다. 비판에는 성역이 없었다.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폭력 사건에 대해 “맞고 나니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하더군”이라고 해 보안사로 끌려갔다. 하지만 검열을 뚫고 할 말은 했다. 1986년 11월 건국대 시위 때 학생 1290명이 구속되자 그는 수북이 쌓인 낙엽을 치우고 돌아오니 다시 낙엽이 쌓여 있는 내용의 만화를 그렸다. 시위대를 잡아넣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 것. 고인은 “매일 권력에 맞서 작업하며 단두대에 올라가는 심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협박과 항의를 받는 건 다반사였다. 1997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를 다루며 “대쪽 집안이라 속이 비어 몸무게가 안 나간다”고 그려 항의를 받았다. 읍소도 적지 않았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1992년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 시절 얼굴에 있는 검버섯을 빼 달라고 요청했다. 세상에 대한 그의 눈은 날카롭고 정확해 풍자가 현실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6대 국회에서 자민련이 17석으로 교섭단체를 못 만들자 “3명 꿔오면 되지”라고 그렸는데, 그해 말 실제 국민회의 의원 3명이 자민련으로 이적했다. 그는 숱한 유행어도 만들었다. 2005년 참여정부의 경제 실정(失政)을 지적한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를 비롯해 조기 퇴직을 풍자한 ‘삼팔선’(38세도 선선히 사표를 받아준다)은 큰 화제를 모으며 유행어가 됐다. 고인은 “해학과 재치, 그리고 발상의 전환과 반전의 묘미가 있어야 좋은 시사만화”라고 말했다. 그는 재기 발랄한 풍자, 유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을 챙겨 봤고, 항상 책 신문 영화 등을 통해 동시대 이슈를 섭렵하려 애썼다. 늘 긴장하다 보니 하루에 담배를 3갑이나 피웠다. 27년 동안 사랑받은 나대로 선생은 2007년 12월 26일 제8568회로 마무리됐다. 2011년부터 2년간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 만화영상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시사만화가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2015년 상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석좌교수로 임명됐다. 제1회 고바우 만화상, 제16회 대한언론인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최근까지도 한 매체에서 시사만화 ‘도두물 선생’을 그려온 고인은 코로나19 확진 뒤에도 마감을 지킬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날은 1년에 며칠 안 됩니다. 정말 미치지 않았으면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사만화가 미치도록 좋습니다.”(2007년 11월 5일 동아일보 인터뷰) 유족으로는 부인 이경란 씨와 아들 상민 시공사 만화팀 편집자, 딸 지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강사가 있다. 빈소는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 발인은 26일 오전 8시. 070-7816-0349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 해라고 힘들지 않았겠습니까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태원 핼러윈 참사 등 국내외에서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 많은 한 해였습니다. 책에서 삶에 대한 위로와 공동체의 나아갈 길을 찾고픈 열망 때문일까요. 출판인, 학자 등 30명이 뽑은 ‘2022년 동아일보 올해의 책’은 소설과 시, 과학서, 평론집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고루 뽑혔습니다. 그리고 유독 ‘애도’를 다룬 책이 여럿 눈에 띕니다. 선정위원마다 3권씩 추천을 받아 그 가운데 상위 10권을 추려 소개합니다.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각계 전문가들이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책’은 김훈 작가(74)의 장편소설 ‘하얼빈’과 미국 과학전문기자 룰루 밀러의 교양과학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뽑혔다. 각각 6표를 얻었다. 독자에게 익숙한 한국 대표 작가와 생경한 해외 작가의 책이 동시에 선택됐다는 게 한국 출판시장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척도로 읽힌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저격하는 운명적인 역사를 다룬 작품이다. 안 의사가 거사를 실행하기 약 일주일 전인 1909년 10월 19일 무렵부터 이토를 저격한 26일 전후까지로 초점을 맞췄다. 안 의사와 이토가 각자 하얼빈으로 가는 행로와 과정을 3인칭으로 풀어내, 이순신 장군의 1인칭 시점으로 썼던 장편소설 ‘칼의 노래’(2001년·문학동네)보다 더욱 절제된 화법이 돋보인다. 출판인과 학자들은 고루 ‘하얼빈’을 역작이라 꼽았다. 안병현 교보문고 대표는 “위인 안중근에 대해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안중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신선하다”고 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안중근이 살아있는 인간으로 다가오고, 그래서 오히려 진정한 영웅으로 느껴진다”고 평했다. “2022년에 안중근의 삶을 김훈의 소설로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와 겹쳐 마음을 괴롭게 했다”(김형보 어크로스 대표)는 의견도 있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밀러가 미국 어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풀어나간 책이다. 교양과학서지만 인간 자체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인문에세이로도 볼 수 있다. 밀러는 ‘미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보디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지만 국내에선 비교적 낯선 편. 중소 출판사가 별다른 마케팅 없이 출간한 책이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점도 주목받았다.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는 “베스트셀러의 상식을 뒤엎는 책이다. 우리가 자연에 선을 긋고 종(種), 과(科)로 나누고 가르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며 편견일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고 말했다. 정지혜 블러썸크리에이티브 IP사업팀장은 “관념은 뒤집힐 수도 있다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했다. “잔인한 혐오에 대한 명철한 질책,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뭉클한 탐사”(박상준 민음사 대표)라는 평가처럼 책이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다.■H마트에서 울다미셸 자우너 지음·정혜윤 옮김·408쪽·1만6000원·문학동네“엄마와 딸, 음식과 정체성, 사랑과 애도에 대해 담담하고 섬세하게 풀어낸 멋진 에세이.”(권은희 까치글방 편집팀장) 미국 팝 밴드의 보컬로 활동 중인 한국계 미국인 저자가 쓴 자전적 에세이로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의 추천 도서로도 화제를 모았다. 다른 친구들의 엄마와 다른 자신의 한국인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저자는 엄마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뒤 한국마트를 드나들며 추억을 되짚는다. “올해 본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울었던 책”(박성열 사이드웨이 대표)이란 평처럼 섬세하고 감동적인 글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지음·268쪽·1만5000원·창비“2022년 한국 문학의 최대 수확. 우리도 이제 ‘남쪽으로 튀어’(오쿠다 히데오)에 버금가는 작품을 갖게 됐다.”(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빨치산의 딸’(1990년)을 쓴 소설가가 32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사흘 동안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놀랍도록 흥미롭게 엮어냈다. 묵직한 현대사의 질곡을 짚어내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한 흐름을 잃지 않아 “오랜만에 만난 모든 것을 갖춘 소설”(김기중 더숲 대표)이란 극찬도 나왔다. MZ세대에게는 생경한 작가가 묵직한 시대적 배경을 다룬 소설임에도 소셜미디어에서 큰 화제를 모은 점도 눈길을 끌었다. ■녹스앤 카슨 지음·윤경희 옮김·192쪽·5만5000원·봄날의책캐나다 시인이자 번역가, 고전학자인 저자가 22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하고 헤어져 지내던 오빠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하기 위해 만든 책. 고대 로마 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빠의 부재에 대한 상념을 자신의 수첩에 쓰고 그리고 오리고 붙인 것을 책으로 완성했다. 국내판 역시 “원본의 고유성을 잘 유지한 물성의 예술품”(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으로서 소장 가치가 높다는 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흔적을 어루만지고 그의 손때와 온기, 사라짐까지 남기는 애잔한 틀로서의 비망록”(박상준 민음사 대표)이 이만한 결과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인간은 결국 홀로 떠나지만, 결코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일깨운다. ■인생의 역사신형철 지음·328쪽·1만8000원·난다문학평론집이 이례적으로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시 25편과 이에 얽힌 작품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평론집. 10월 출간 일주일 만에 2만 부가 넘게 판매되며 저력을 과시했다. 문학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와 에세이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등을 통해 탄탄한 독자층을 구축한 저자는 이번에도 “전통 시화를 21세기 문학 형식으로 되살린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다)’의 표본”(안대희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을 선보였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진은영 지음·140쪽·1만2000원·문학과지성사“시집은 천천히 읽어야 좋겠지만 그의 시집은 하룻밤 새 다 읽어버렸다.”(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문제의식을 철학적 사유로 풀어낸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시인이 10년 만에 선보인 시집이다. 작품 활동의 공백기가 “시가 지녀야 할 사회적 역할을 돌아본 시간”이었다는 저자의 신작은 시집으로는 드물게 한 온라인 서점 종합순위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어쩌면 “아무도 끝낼 수 없을 것 같은 미움의 시대에 비춰준 가느다란 빛”(황서현 휴머니스트 편집주간)처럼 와닿았기 때문일까. 2014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고 유예은 양(단원고 2년)을 위한 시 ‘그날 이후’도 함께 실렸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나다 도요시 지음·황미숙 옮김·232쪽·1만5500원·현대지성일본 영화전문지에서 일했던 독립 칼럼니스트가 영화를 영화관이 아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관람하는 현 상황을 고찰했다. 저자는 특별한 공간에서 수동적으로 감상하던 영화를 이제 안방이나 카페에서 자유롭게 건너뛰며 보는 현상에 대해 “길고 어려운 콘텐츠 대신 짧고 이해하기 쉬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김홍민 북스피어 대표)라고 짚어낸다. 저자가 볼 때 이 같은 효율성의 극단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콘텐츠의 공급 과잉과 ‘가성비’ 지상주의가 만연한 시대상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사회의 트렌드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안병현 교보문고 대표)한다. ■정상은 없다로이 리처드 그린커 지음·정해영 옮김·600쪽·3만3000원·메멘토미국 조지워싱턴대 인류학과 교수인 저자가 역사적으로 정상이란 허구에서 비켜난 이들에게 인류사회가 어떻게 낙인을 찍어 왔는지를 짚었다. “올해 큰 화제를 모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신드롬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박성열 사이드웨이 대표)에게 추천한다는 평이 나왔다. 자본주의와 전쟁, 의료화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정신질환과 장애에 대한 낙인의 역학을 탐구한 책은 문화인류학적 고찰을 통해 낙인이란 한계를 극복하려는 진정성이 묻어난다.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에 대한 상식을 뒤엎는, 성숙한 한국 사회를 위한 모두의 필독서.”(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한청훤 지음·304쪽·1만7000원·사이드웨이패권적인 ‘제국의 길’을 선택한 중국이 왜 세계 여러 나라와 마찰을 거듭하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10년 넘게 중국 산업현장에서 일한 저자는 중국과 관련된 다양한 현안을 다뤘다. “학문적 중국 전문가는 적지 않으나 중국 관련 비즈니스에 종사하며 중국의 겉과 속을 정확하게 풀어낸”(표정훈 출판평론가) 글이기에 더욱 시사하는 바가 컸다. 산업 굴기와 첨단산업 및 반도체 기술, 미국과의 패권 경쟁, 농촌 문제와 정치 리스크 등 중국이 당면한 주요 현안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한다. 진지한 통찰력이 돋보이면서도 “쉽고 설득력 있으며, 경험을 밑천으로 필력까지 갖춰”(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더 흥미롭게 읽힌다. 다양한 장르 사랑받은 한 해… 애도 속 ‘그리움’ 담은 시집 눈길 그 외 눈여겨볼 책들12위는 없었다. 올해는 1표씩을 받은 책 51권이 함께 ‘공동 11위’를 차지했다. 소설과 에세이, 교양서뿐 아니라 시집과 각본까지…. 올해의 책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두루 사랑받은 ‘거의 올해의 책’이 유난히 많았다. 특히 유난히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시집들이 눈길을 끌었다. 올해의 책에 포함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진은영 지음·문학과지성사) 외에도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고명재 지음·문학동네) ‘파울 첼란 전집 1∼5’(문학동네) ‘슬픔이 택배로 왔다’(정호승 지음·창비) 등 시집의 약진이 눈부셨다. 시집이 올해의 책에 든 것도 최근 10년 만에 처음이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멍든 가슴이 여전히 시퍼렇게 남아 있어서일까. 루마니아 시인 ‘파울 첼란 전집’을 추천한 김민정 난다 대표는 “참사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눈물자국의 가장자리에서 배우렴/ 사는 것을’이란 구절이 눈에 밟혔다.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눈물과 자국과 가장자리와 삶이란 단어를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고세규 김영사 대표도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를 추천하며 “그저 허무에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길을 찾아 우리를 위로해주는 시인의 맑은 마음”을 주목했다. 과학책은 5권이 공동 11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 가운데 해리 클리프 영국 케임브리지대 물리학과 교수가 펴낸 ‘다정한 물리학’(다산사이언스)에 대해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어려운 이론물리학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며 추천했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닐 슈빈 지음·부키)와 ‘과학은 어떻게 세상을 구했는가’(그레고리 주커만 지음·브론스테인) ‘빙하여 안녕’(제마 워덤 지음·문학수첩) ‘내 생의 중력에 맞서’(정인경 지음·한겨레출판사)도 비슷한 공통점을 지녔다. 과학정보는 물론이고 인문학적 사색도 담아 ‘과포자’(과학포기자)도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책들 덕분에 우리는 과학이라는 일상을 더욱 다채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신지혜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는 평처럼 진입장벽을 낮추고 편안하게 다가온 교양과학서가 내년에도 많아지길 기대해본다.올해의 책 선정위원(30명·가나다순)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강인욱(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세규(김영사 대표) 권은희(까치글방 편집팀장) 김기중(더숲 대표) 김민정(난다 대표) 김영민(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형보(어크로스 대표)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김효형(눌와 대표) 박상준(민음사 대표) 박성열(사이드웨이 대표) 박윤우(부키 대표) 박정재(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백지숙(서울시립미술관장) 신지혜(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안병현(교보문고 대표) 안지미(알마 대표)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장) 이구용(KL매니지먼트 대표) 이기진(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장은수(출판평론가)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정지혜(블러썸크리에이티브 IP사업팀장) 조성웅(유유출판사 대표) 주연선(은행나무 대표) 표정훈(출판평론가) 황서현(휴머니스트 편집주간)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산타 할아버지가 책 읽어주는 버스가 왔어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21일 경기 양평군 원덕초등학교. 운동장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눈싸움하던 아이들이 노란색 이동식 도서관 ‘찾아가는 책읽는 산타버스’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책을 든 산타 할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곧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크게 외쳤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찾아온 깜짝 선물에 아이들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45인승 버스를 개조해 만든 이동식 도서관 ‘찾아가는 책읽는 버스’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한다. 책읽는 버스는 농어촌이나 지역 축제 현장을 방문해 책 읽기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연동화, 체험 활동, 신나는 OX퀴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겨울에 도서관을 찾기 쉽지 않은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책읽는 버스는 올해 ‘찾아가는 책읽는 산타버스’로 변신했다. 이날 산타버스를 찾은 건 원덕초등학교 학생 22명과 이 학교 병설유치원 원생 11명이었다. 아이들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내부를 가득 채운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산타 할아버지 분장을 한 구연동화 선생님이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뒷이야기를 상상한 동화책 ‘슈퍼 거북’(책읽는 곰·2014년)을 읽자 아이들은 토끼와 거북이 흉내를 내며 즐거워했다. 차예린 양(8)은 “친구들과 함께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 신기했다. 재밌는 시간이었다”며 웃었다. 동화 구연이 끝나자 아이들은 스스로 원하는 책을 골라 읽었다. 만화책을 집중해 읽던 김민성 군(8)은 “버스 안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게 돼 있어서 신기하다”며 “앞으로 책을 더 많이 읽고 싶다”고 했다. 이지안 양(6)은 동화책을 양손에 꼭 쥔 채 “내가 좋아하는 책이 가득한 책의 나라에 놀러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아이들은 배지 만들기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원덕초등학교는 전교생이 70명인 작은 학교다. 병설유치원도 있지만 학교도서관이 낡고 작아 아이들이 책을 읽기 쉽지 않았다. 권은정 원덕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교사는 “가장 가까운 양평어린이도서관에 가려면 차로 10분 이상 걸려 독서 교육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산타버스가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고 말했다. 최민희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기획국장은 “산타버스는 2일부터 23일까지 강원 양구군 비봉초등학교, 경기 여주시 오학초등학교 등 17곳을 방문하고 있다”며 “내년에도 산타버스로 아이들에게 특별하고 기억에 남는 하루를 선사하고 싶다”고 말했다.양평=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산타 할아버지가 책 읽어주는 버스가 왔어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21일 경기 양평군 원덕초. 운동장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눈싸움하던 아이들이 노란색 이동식 도서관 ‘찾아가는 책읽는 산타버스’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책을 들고 있는 산타 할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곧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크게 외쳤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찾아온 깜짝 선물에 아이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45인승 버스를 개조해 만든 ‘찾아가는 책읽는 버스’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한다. 1987년 설립된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은 이동식 도서관으로 농어촌을 찾거나 지역 축제 현장을 방문해 책 읽기 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책 읽기는 물론이고 구연동화, 체험활동, 신나는 OX퀴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찾아가는 책읽는 버스’는 올해 처음 ‘찾아가는 책읽는 산타버스’로 탈바꿈했다. 겨울에 도서관을 찾기 쉽지 않은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다. 이날 ‘찾아가는 책읽는 산타버스’를 찾은 건 원덕초 학생 22명과 원덕초 병설유치원 원생 11명이다. 아이들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내부를 가득 채운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어 흰 수염과 빨간 옷으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분장을 한 구연동화 선생님이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뒷이야기를 상상한 동화책 ‘슈퍼 거북’(2014·책읽는 곰)을 읽자 아이들은 토끼와 거북이 흉내를 내며 행복해했다. 산타 할아버지와 신나게 논 차예린 양(8)은 “친구들과 함께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 신기했다. 재밌는 시간이었다”고 웃었다. 동화 구연 후에 아이들은 스스로 원하는 책을 골라 읽기도 했다. 만화책을 골라 집중해 읽던 김민성 군(8)은 “학교 도서관과 달리 버스 안이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게 있어서 신기하다”며 “앞으로 책을 더 많이 읽고 싶다”고 했다. 이지안 양(6)은 동화책을 양손에 꼭 쥔 채 “내가 좋아하는 책이 가득한 책의 나라에 놀러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아이들은 배지 만들기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원덕초는 전교생이 70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다. 병설유치원까지 함께 있지만 학교도서관이 낡고 작아 아이들이 책을 읽기 쉽지 않았다. 권은정 원덕초 병설유치원 교사는 “가장 가까운 양평어린이도서관이 자차로 10분 이상 걸려 독서 교육이 쉽지 않다”며 “‘찾아가는 책읽는 산타버스’가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고 했다. 강현주 원덕초 교사는 “‘찾아가는 책읽는 산타버스’엔 학교에 없는 새로운 동화책이 많아 아이들이 더 즐거워했던 것 같다”고 했다. 최민희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기획국장은 “강원 양구군 비봉초, 경기 여주시 오학초 등 이달 2~23일 17곳을 방문한다”며 “내년에도 ‘찾아가는 책읽는 산타버스’로 아이들에게 특별하고 기억에 남는 하루를 선사하고 싶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방인의 시선이 담긴 디아스포라문학(이산문학)으로 한국 역사를 세계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15세기 초 조선의 18세 소녀 환이는 남장을 하고 제주로 향한다. 제주의 한 마을에서 소녀 13명이 실종된 사건을 조사하다 사라진 아버지 민제우 종사관을 찾기 위해서다. 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하던 환이는 수상한 점을 여럿 발견한다. 사라진 소녀들은 모두 가난한 집 출신에다 아름다웠다. 게다가 사람들은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면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체 소녀들은, 그리고 아버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국내에 14일 출간된 ‘사라진 소녀들의 숲’(창비)은 고려·조선 시대에 중국 원·명나라의 요구로 여성을 바치던 공녀(貢女) 제도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슬픈 역사를 영어 소설로 쓴 허주은 작가(33)는 한국 국적이지만 두 살 때 이민 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20일 만난 그는 서툰 한국어와 유창한 영어를 섞어 쓰며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했다. “1989년 인천에서 태어나 1991년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떠났어요. 토론토대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했는데 그때까진 영미 소설만 읽었어요.” 허 작가가 한국 문학에 빠져든 건 2015년 우연히 여성 소설가 한무숙(1918∼1993)의 작품들을 영어로 읽은 게 계기가 됐다. 캐나다 도서관에 중국과 일본 문학책은 많은데 왜 한국 문학책은 찾기 힘들까, 고민하던 끝에 자신의 ‘뿌리’를 소설로 다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는 온라인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찾아 읽으며 역사 공부를 했다. 그가 2020년 처음 펴낸 작품이 조선시대 살인 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뼈의 침묵’(국내 미 출간)이었다. 이 작품은 2021년 미국 3대 미스터리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에드거상의 최종 후보에 올랐다. 지난해 4월 북미에서 출간된 ‘사라진 소녀들의 숲’도 올해 에드거상 최종 후보로 선정돼 주목받았고, 올해 전미도서관협회와 미청소년도서관조합의 추천 도서로 뽑혔다. “최근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 덕에 북미에서도 한국을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에 관심이 커졌어요.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파친코’는 토론토에 있는 도서관에선 예약이 밀려 대출이 힘들 정도입니다. 한국 문화의 인기가 제 소설에 대한 주목으로도 이어진 거 같아요.”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역사소설의 틀을 갖췄지만 추리적인 요소가 강해 술술 읽힌다. 고국을 떠나야만 했던 공녀들의 마음을 세밀하게 묘사해 이주자의 삶과 정체성을 그린 디아스포라문학의 매력도 돋보인다. 허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연산군(재위 1494∼1506년)에 대한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젠가 어머니가 ‘네가 한국말을 할 때면 너만의 악센트가 느껴진다. 네 작품도 그렇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이가 한국의 역사에 대해 쓸 자격이 있는지를 자문하며 괴로워했던 저에게 구원과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더 열심히 한국 역사를 공부해 더 좋은 작품들을 선보일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