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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후보 47.6%, 이재명 후보 46.6% 득표 예측.’ 채널A의 알고리즘 예측봇 ‘알파A’가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일 개표방송에서 발표한 득표율 예측조사 결과다. 당락은 물론이고 두 후보의 득표율 차를 1%포인트로 예측해 실제 득표율 차(0.73%포인트)에 근접한 결과를 내놓았다. 한국조사연구학회는 27일 춘계 학술대회에서 채널A가 득표율을 비교적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조사를 통해 ‘숨은 표’의 향방을 예측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출구조사 없이 예측조사만으로 비교적 정확한 득표율을 발표한 방송사는 채널A가 유일하다. 채널A와 함께 대선 예측조사를 진행한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임요한 서울대 통계학과 교수, 임종호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교수가 발표한 ‘채널A 예측조사 방법론’ 보고서에 따르면 채널A 조사팀은 2021년 1월부터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이 시작된 올 3월 2일까지 실시된 대선후보 지지율 조사 620개를 취합, 분석했다. 이를 통해 20, 30대 여성 등 이 후보 지지층의 응답률이 상대적으로 저조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한 교수는 “이 후보 지지층의 응답률이 저조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여론조사 결과는 윤 후보의 상대적 우위를 과대 추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3월 2일 여론조사에서 윤 후보가 이 후보를 3.7%포인트 앞설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실제 득표율 차와는 거리가 있는 수치였다. 채널A 조사팀은 올 1월 23∼25일 1만 명을 대상으로 전화 면접조사(응답률 8.96%)를 따로 진행했다. 대상자가 한 차례 전화를 끊으면 조사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 세 차례 통화를 시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 결과 윤 후보 지지율은 첫 번째 응답보다 세 번째 통화 시도 때 7.4%포인트 낮게 나타난 반면에 이 후보 지지율은 4.7%포인트 높았다. 한 교수는 “이 후보 지지자들이 판세를 지켜보며 판단을 유보하다가 막판에 지지를 확정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더 강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해석했다. 이에 따라 채널A 조사팀은 설문조사에 미처 반영되지 않은 이 후보 지지율을 상향해 두 후보의 득표율 차를 1%포인트로 정교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학계에서는 채널A의 예측조사 모델이 출구조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출구조사를 시행할 수 없는 사전투표율이 2017년 대선 26.1%, 2020년 총선 26.7%, 2022년 대선 36.9%로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는 출구조사의 이점이 줄고 있다. 채널A의 예측조사 모델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0대 소녀 미란다는 폭식증을 앓고 있다. 그는 가족이 문제라고 느낀다. 아버지는 물리치료사, 어머니는 사서로 쉴 틈 없이 일하느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시간이 없다. 부모는 맞벌이를 하지만 대출이자를 갚느라 늘 허덕인다. 미란다는 비싼 학비를 들여 대학에 진학해도 취업이 불투명하다는 걸 안다. 혹여 우리 집이 가난해질까, 내 미래가 없으면 어쩌나 불안하지만 부모에게조차 마음을 터놓을 수 없다. 도대체 이 가족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고 누구의 잘못일까. 미국 임상심리학자인 저자는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미란다 가족에게 병명을 붙이기보다 그들이 서로에게 닿으려 애쓴 노력을 들여다보라고 제안한다. 그의 부모는 알코올의존증 환자가 아니고 딸을 학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집에서 차로 8시간 떨어진 저자의 심리치료센터에 딸을 보내기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다. 어쩌면 부모는 일에 치여 딸에게 충분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딸을 지켜내려고 했다. “우리 부모는 불합리하다”고 여겼던 미란다는 저자와의 상담을 통해 안정을 되찾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거나 훗날 취업을 못 하더라도 언제나 내 편인 부모의 존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1994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미국에서 ‘10대 자녀를 이해하는 바이블’로 꼽힌다. 저자는 2019년 출간 25주년을 기념해 개정증보판을 내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독 등 요즘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를 추가했다. 아동 교육잡지 ‘익스체인지’ 편집장인 저자의 딸도 집필에 참여해 각각 1960년대와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자신의 경험은 물론이고 이들이 최근 만난 청소년들의 고민도 담았다. 196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저자는 자신의 세대는 ‘자신감’이 있고, 딸이 속한 1990년대 소녀들은 ‘반항적’이라고 표현한 반면 요즘 10대는 ‘조심스럽다’고 분석한다. 반백 년 동안 가장 크게 바뀐 건 경제 여건. 맞벌이 부모가 발버둥쳐도 거액의 빚을 지고, 취업 길은 막막하다. 아동과 청소년 인권이 강조되는 21세기에도 청소년들이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다. 이에 더해 SNS는 자녀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고립시켰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저자는 자신을 찾아온 청소년들에게 “북극성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풍랑이 치는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중심점을 찾으라는 것이다. 일례로 저자가 만난 27세 여성 준에게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북극성이었다. 준은 남들보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학창시절 내내 따돌림을 당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준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은 덕에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준은 강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딸을 둔 부모를 대상으로 썼지만 유년시절 아픈 상처를 지닌 이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사랑하고 신뢰할 만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건 한 사람의 인생을 지탱할 힘을 지녔다”는 저자의 조언은 다소 진부하게 여겨지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치유법이다. 어쩌면 가족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북극성이 아닐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역대 대통령과 가족이 생활한 사적 공간인 청와대 대통령 관저 내부와 대통령 집무실이 있던 본관이 26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대통령실과 문화재청은 일반 공개 하루 전날인 25일 오후 4시부터 4시간가량 취재기자를 대상으로 두 곳을 사전 공개했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90년 10월 완공된 사저가 32년 만에, 1년 뒤 건립된 본관은 31년 만에 속살을 드러낸 셈이다. 푸른색 카펫이 깔려 있는 접견실 복도를 지나면 생활감이 느껴지는 마룻바닥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역대 대통령 부부와 가족들만 지내던 가장 사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역대 대통령 부부가 머문 침실은 관저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왼쪽 끄트머리에 숨어 있다. 침실 문 앞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고, 침실과 연결된 욕실에는 프라이빗 사우나가 설치돼 있다. 거대한 크기만큼 가구도 압도적 규모를 자랑한다. 침실과 연결된 드레스룸에는 앞뒤로 짜인 옷장 18개가 3줄로 놓여 있다. 대통령실과 문화재청은 10일 청와대 경내가 개방된 뒤에도 대통령 관저와 본관 출입을 금지해 왔다. 하지만 청와대 개방 2주를 맞은 24일 기준 관람 누적 신청자 수가 543만 명에 달하는 등 관람 열기가 식지 않자 23일 국빈을 맞이하던 영빈관과 대통령 기자회견이 열렸던 춘추관 내부를 개방한 데 이어 추가로 26일부터 본관과 관저 내부를 개방하기로 했다. 다만 관람객들은 관저 내부에는 진입하지 못하고, 관저 뜰에서 창문 너머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1층과 지하층으로 이뤄진 관저는 연면적 6093m² 규모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관저는 역대 대통령들이 생활한 본채와 접견 공간인 별채, 사랑채와 뜰로 구성돼 있다. 특히 관저 곳곳에는 이달 초까지 이곳에 머물던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의 흔적이 묻어났다. 드레스룸 앞에는 문 대통령의 반려묘 ‘찡찡이’가 사용하던 밥그릇이 놓여 있다. 전체 면적 2761m²에 달하는 본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사용하는 용산 대통령실 청사의 집무 공간 면적(415m²)의 6배에 달한다. 이번에 공개되는 공간은 본관 1층 무궁화실과 인왕실, 2층 대통령 집무실과 외빈 접견실, 동쪽 별채 충무실 등 5곳이다. 대통령 부인의 집무실로 쓰이던 무궁화실 벽면에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부터 김정숙 여사까지 역대 대통령 부인 11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본관 벽면에 걸린 예술 작품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통령이 장관 등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던 충무실을 지나 외국 정상 방한 당시 공동 기자회견장으로 쓰였던 인왕실로 발걸음을 옮기면 가로 602cm, 세로 255cm에 달하는 화백 전혁림(1915∼2010)의 유화 ‘통영항’(2006년)을 만날 수 있다. 전 화백은 노무현 전 대통령(1946∼2009)이 사랑한 화가로, 2006년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인왕실 벽면에 전시할 작품을 그려 달라는 의뢰를 받고 3개월간 작품을 완성했다. 본관 1층에 깔린 붉은 카펫을 따라 2층으로 향하는 중앙 계단 벽면을 바라보면 대한민국 지도를 그린 김식 화백(70)의 ‘금수강산도’(1991년)를 만나볼 수 있다. 청와대 개방 기간은 다음 달 11일까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가가 국경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국경이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쑹녠선(宋念申) 중국 칭화대 역사학과 교수가 최근 번역 출간된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너머북스)에 쓴 서문이다. 이 책은 두만강 국경을 둘러싼 조선, 청, 일본의 쟁탈사를 다뤘다. 번역을 맡은 이원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45)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세기 말 벌어진 두만강 국경 쟁탈사에는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3국 간 국경 쟁탈전의 뿌리는 18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0년대 함경도에 극심한 자연재해가 들이닥치자 1881년 조선인 수천 명이 두만강 북쪽 황무지로 진출한 것. 이전에도 조청 국경에서 이주가 이뤄졌지만 러시아가 1860년대 두만강 인근의 만주지역을 차지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 일대로 주민을 이주시켜 국경을 획정하려고 했다. 만주를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한 일본은 1907년 이곳에 사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세웠다. 당시 조선인에게 간도는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이자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다. 이 교수는 “간도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근대국가가 형성된 동아시아 근대의 바로미터”라고 설명했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은 조선이 일제에 국권을 사실상 빼앗긴 뒤 1909년 청일 간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일단락된다. 앞서 1712년 조청은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4km, 해발 2200m 지점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정했다. 비석에는 ‘서쪽으로는 압록(鴨綠), 동쪽으로는 토문(土門)을 경계로 한다’고 새겼는데 토문강 위치를 놓고 두 나라의 입장이 갈렸다. 조선은 송화강 지류로 봤지만 청은 두만강이라고 주장했다. 간도협약 체결 당시 일제는 청으로부터 간도지역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신 청의 두만강 국경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간도는 청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귀속된다. 이 교수는 “두만강 국경 분쟁은 특정 국가 관점에서 보면 침탈사로 비친다. 신간은 두만강이라는 변경에서 동아시아 근대가 태동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달 28일 개막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는 조각상 ‘생각하는 여인’(1992년)과 6세기 국보 ‘일광삼존상(一光三尊像)’을 나란히 놓은 전시실이 있다.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여인상과 지그시 두 눈을 감고 묵상하는 불상은 묘하게 통한다. 1400년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사유의 순간을 인상적으로 담고 있다. 벽면에는 ‘모르는 것도, 두려운 것도 많은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본질을 사유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건희 컬렉션은 특정 시대나 문화로 묶기 힘들 정도로 종류나 양이 방대하다. 전시 관계자들이 수집가가 어떤 의도로 동서양의 문화유산을 모았는지를 고민한 이유다. 이들이 숙고 끝에 내놓은 전시 키워드는 ‘통(通)’. 옛 유물이 현대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었음을 보여 주기로 한 것이다. 보름달을 형상화한 조명을 비춘 벽면 아래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를 놓고, 김환기(1913∼1974)가 달과 달항아리를 그린 ‘작품’(1950년대)을 바로 옆에 전시한 게 대표적이다. 이현숙 박물관 전시디자이너는 “관람객에게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예술세계가 전해지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책가도(冊架圖·책장에 놓인 문방구와 골동품을 그린 그림) 전시실도 눈길을 끈다. 박물관은 단순히 그림만 걸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바로 옆 벽면을 책가도로 꾸며 이곳에 도자기 등을 빼곡히 올려놓았다. 18세기 후반 궁중 회화로 유행하기 시작한 책가도는 19세기 민화로 확산돼 사치스러운 골동품을 살 수 없는 서민들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었다. 관람객들은 벽면 전시물을 통해 책가도 그림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생생히 감상할 수 있게 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기증 1주년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발길을 멈추는 곳이 있다. 조각가 최종태(90)의 ‘생각하는 여인’(1992년)과 6세기 제작된 국보 ‘일광삼존상(一光三尊像)’이 한 데 놓인 전시실이다.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여인상과 지그시 두 눈을 감고 묵상하는 불상은 1400년의 간극을 초월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사유의 순간을 담았다는 것이다. 두 작품 사이 벽면에는 ‘모르는 것도 두려운 것도 많은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본질을 사유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2만3000점이 넘는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하는 건 난제로 꼽혔다. 특정 시대나 문화로 엮을 수 없을 정도로 기증품이 방대해서다. 난제를 받아든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디자이너 이현숙 씨(43)는 기증품을 보관한 수장고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고민했다. 왜 수집가는 시대는 물론 동·서양을 초월하는 방대한 문화유산을 모았을까. 13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고민 끝에 제작연대나 기법, 문화는 달라도 기증품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준 듯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가 꼽은 전시 키워드는 ‘통(通)’이다. 이 씨는 “관람객들에게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예술세계가 전해지길 바랐다”고 했다. 일례로 그는 보름달을 형상화한 조명을 비춘 벽면 아래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를 놓았다. 바로 옆에는 김환기(1913~1974)가 1950년대 커다란 달항아리와 달을 함께 그린 ‘작품’을 전시했다. 이 씨는 “과거의 유물이 현대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며 시대를 관통해왔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수집가의 마음이 관람객에게 통하길 바랐다. 이 씨는 “누구나 자신이 수집해온 문화유산을 누리길 바랐던 기증자의 뜻을 전하기 위해 1부를 수집가의 집처럼 꾸몄다”고 설명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동자석(童子石) 8점이 놓인 중정이 보이고, 중정 벽면에 난 작은 창문 너머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년)이 자태를 드러낸다. 전시장 초입부터 창 너머로 보여서일까. 모네의 작품이 지척에 있는 듯 가깝게 느껴진다. “제 의도가 통한 걸까요(웃음). 관람객들이 친구 집 마당에 온 듯 편안하게 전시장 의자에 앉아 창 너머 모네의 그림을 누릴 때 뿌듯합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엄마, 이제 엄마 인생을 시작해 봐.” 딸아이의 한마디에 늦깎이 문청(文靑)이 됐다. 한 번도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저자는 쉰넷의 나이에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무심코 켠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은 한 사이버대학의 입학전형. 오랜 세월 읽기만 했지, 글을 직접 쓰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글을 쓰고 싶어져 문예창작과에 지원했다. 종갓집 맏며느리에 두 남매의 엄마로 사느라 잊고 지냈던 꿈이었다. 선천적인 감각신경성 난청으로 청각장애가 있는 저자는 말보다 글이 더 편했다. 혹시나 잘못 들었을까 삼켜버린 말들을 컴퓨터에 빼곡히 쌓아나갔다. 62세에 취업 전선에 나선 경험을 담은 수필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된 저자의 유고 산문집과 시집이다. 저자는 당선 후 한 달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몇 달 뒤, 소셜미디어에 고인의 이야기가 알려지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고 산문집과 시집에는 “내 문학은 이제 시작”이라며 만학의 꿈을 꿨던 저자가 생전 써내려간 짧은 글 24편과 시 75편이 담겼다. 사이버대학에서 저자에게 시를 가르친 이문재 시인은 유고 시집의 서문에 이 시집을 ‘자서전’이라고 칭했다. 시 ‘유복자(遺腹子)’에는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요양보호일기’와 ‘독거노인의 자화상’에는 호스피스로 일하며 만난 환자들과의 일화가 담겼다. 산문집에는 동성동본이란 이유로 헤어진 첫사랑 이야기부터 청각장애인으로 평범한 세상과 동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생애가 녹아 있다. 남들보다 늦은 황혼에 글을 쓰기 시작한 저자는 결핍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담담히 기록했다. 가난, 장애, 이혼은 그에게 부끄럽거나 숨길 게 아니라 자신을 더 잘 알아가기 위해 직면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저자는 “몸도 마음도 아파봤기 때문에 고통받는 타인에게 품을 내어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시와 산문에는 타인을 대하는 저자의 사려 깊은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선천적 질병을 앓는 쌍둥이 손자를 돌보며 아들 부부의 고통을 나눠지고도 ‘고통을 잘 따라가 보면 꿀같이 다디단 열매가 거기 스윽 열려 있다’고 한다. 불쑥 남의 집에 드나드는 어르신들에게 거리를 두기보다 덥석 팔짱을 끼며 그들의 외로움을 끌어안는다. 호스피스로 암 병동에서 일할 때 환자에게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를 묻기보다 슬며시 다가가 퉁퉁 부은 발을 먼저 주물렀다는 일화는 시 ‘안녕히 주무세요’에 담겼다. 두 자녀의 엄마이자 호스피스이자 시인으로 한평생 타인을 끌어안은 저자를 닮아서일까. 딸은 수녀가 됐다. 산문집 서문에는 어머니의 유고집을 펴내는 딸의 편지가 실렸다. ‘사랑받지 못했기에 더 사랑할 줄 알았던, 가지지 못했기에 더 채워줄 줄 알았던 이 작은 이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외롭고 허기진 마음을 위로하리라 믿습니다.’ 시보다 더 넓고 컸던 시인의 삶을 읽다 보면 그의 넉넉한 품에 안겨 위로받는 듯하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엄마, 이제 엄마 인생을 시작해 봐.” 딸아이의 한마디에 늦깎이 문청(文靑)이 됐다. 한번도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저자는 쉰 넷의 나이에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무심코 켠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은 한 사이버대학의 입학전형. 오랜 세월 읽기만 했지, 글을 직접 쓰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글이 쓰고 싶어져 문예창작과에 지원했다. 종갓집 맏며느리에 두 남매의 엄마로 사느라 잊고 지냈던 꿈이었다. 선천적인 감각신경성 난청으로 청각장애가 있는 저자는 말보다 글이 더 편했다. 혹시나 잘못 들었을까 삼켜버린 말들을 컴퓨터에 빼곡히 쌓아나갔다. 62세에 취업 전선에 나선 경험을 담은 수필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된 저자의 유고 산문집과 시집이다. 저자는 당선 후 한 달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몇 달 뒤, 소셜미디어에 고인의 이야기가 알려지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고 산문집과 시집에는 “내 문학은 이제 시작”이라며 만학의 꿈을 꿨던 저자가 생전 써내려간 짧은 글 24편과 시 75편이 담겼다. 사이버대학에서 저자에게 시를 가르친 이문재 시인은 유고시집의 서문에 이 시집을 ‘자서전’이라고 칭했다. 시 ‘유복자(遺腹子)’에는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요양보호일기’와 ‘독거노인의 자화상’에는 호스피스로 일하며 만난 환자들과의 일화가 담겼다. 산문집에는 동성동본이란 이유로 헤어진 첫사랑 이야기부터 청각장애인으로 평범한 세상과 동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생애가 녹아있다. 남들보다 늦은 황혼에 글을 쓰기 시작한 저자는 결핍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담담히 기록했다. 가난, 장애, 이혼은 그에게 부끄럽거나 숨길 게 아니라 자신을 더 잘 알아가기 위해 직면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저자는 “몸도 마음도 아파봤기 때문에 고통 받는 타인에게 품을 내어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시와 산문에는 타인을 대하는 저자의 사려 깊은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선천적 질병을 앓는 쌍둥이 손자를 돌보며 아들 부부의 고통을 나눠지고도 ‘고통을 잘 따라가 보면 꿀같이 다디단 열매가 거기 스윽 열려 있다’고 한다. 불쑥 남의 집에 드나드는 어르신들에게 거리를 두기보다 덥석 팔짱을 끼며 그들의 외로움을 끌어안는다. 호스피스로 암 병동에서 일할 때 환자에게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를 묻기보다 슬며시 다가가 퉁퉁 부은 발을 먼저 주물렀다는 일화는 시 ‘안녕히 주무세요’에 담겼다. 두 자녀의 엄마이자 호스피스이자 시인으로 한평생 타인을 끌어안은 저자를 닮아서일까. 딸은 수녀가 됐다. 산문집 서문에는 어머니의 유고집을 펴내는 딸의 편지가 실렸다. ‘사랑받지 못했기에 더 사랑할 줄 알았던, 가지지 못했기에 더 채워줄 줄 알았던 이 작은 이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외롭고 허기진 마음을 위로하리라 믿습니다.’ 시보다 더 넓고 컸던 시인의 삶을 읽다 보면 그의 넉넉한 품에 안겨 위로받는 듯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청와대를 다 와보고….” 10일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대한민국 수립 이후 처음 청와대가 전면 개방돼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남편 서재석 씨(80)의 손을 꼭 잡고 청와대 본관으로 향하던 노미옥 씨(77)는 “TV에서나 보던 청와대에 직접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부축하던 서 씨는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쁘다”며 웃었다. 권위주의 시절은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며 74년 동안 일반인들에게 굳게 닫혀 있던 청와대 정문은 이날 오전 11시 37분 국민을 향해 활짝 열렸다. 사전 신청에서 당첨돼 1회 차 입장을 기다리던 시민 6500여 명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닫혀 있던 세월을 상징하는 국민대표 74명은 손에 매화를 들었다. 매화는 윤 대통령이 봄이 가기 전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한 약속의 실천을 뜻한다. 전날까지 대통령이 거주했던 관저도 정문인 ‘인수문(仁壽門)’을 개방했다. 전면 개방 전에도 청와대 관람 코스가 있었지만 관저 주변은 특히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된 ‘구중궁궐의 핵심’이었다. 이날 총 2만2354명이 청와대를 관람했다. 74년만에 靑전면 개방 첫날120여종 나무 심겨진 ‘녹지원’ 인기, 관저 정문이었던 ‘인수문’도 활짝담벼락 너머 서울 도심 풍경 펼쳐져… 21일까지 다양한 문화행사 개최보안 분류됐던 靑지도 온라인 공개 “역사적인 날이잖아요. 두 아이를 데리고 학교 대신 왔어요.” 10일 오전 11시 50분경 서울 종로구 청와대 본관 앞. 주부 최민혜 씨(46·서울 강남구)는 아들 오주한 군(12), 딸 유진 양(10)과 청와대에 왔다. 초등학교에는 체험학습 신청서를 냈다. 오 군은 청와대 본관 지붕의 기와를 가리키며 “지붕이 진짜로 파랗다. 책에서 보던 청와대에 와보니 신기하다”며 웃었다. 최 씨는 “역사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게 공부”라며 “다음에 건물 내부까지 공개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또 올 것”이라고 말했다. 74년 만에 개방된 청와대는 2시간 단위로 6500명씩 하루 총 6번, 모두 3만9000명이 관람할 수 있다. 진입이 차단됐던 대통령 관저로 향하는 길목도 열려 관저 뒤편 산책로의 문화유산과 건축물도 볼 수 있게 됐다. 이날 대통령 관저의 정문 ‘인수문(仁壽門)’이 활짝 열렸고, 대통령 관저 앞 정원은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관람객들은 북악산 정남향에 있는 본관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를 포함해 120여 종의 나무가 있는 녹지원을 따라 청와대를 자유롭게 거닐었다. 대통령 관저 앞마당의 담벼락 너머로 남산타워를 비롯해 서울 도심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현모 씨(64·경기 하남시)는 “등산을 다녀 봐도 서울 도심에 이렇게 좋은 터는 흔치 않다. 동네에서 장사하는 내게는 환상의 세계 같다. 이렇게 좋은 공간을 권력자들만 누렸다는 게 더 실감 난다”고 했다. 딸, 사위와 함께 온 이은재 씨(87·서울 서초구)는 “우리네 사는 세상 같지가 않고 꼭 깊은 산속 사찰 같다”고 했다. 본관에서 도보로 5분가량 떨어진 언덕 위에 있는 대통령 관저를 본 이 씨는 “조용하게 수행하기는 좋지만 대통령이 여기 살면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 관저 뒤편 산책로를 따라 오운정(五雲亭)에 오르면 청와내 경내가 내려다보인다. 홍성갑 씨(66·서울 강북구)는 오운정에 올라 “권력자들이 왜 그렇게 독재를 하고 욕심을 냈는지 이제야 알겠다. 자연이며 경치며 빠지는 게 없는 이 자리를 누군들 손에서 놓으려 하겠냐. 나 같아도 한번 들어오면 안 나가고 싶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이날 오전 6시 반경 청와대 개방을 기념해 춘추관 앞에서 열린 행사에서는 문정희 시인이 창작시 ‘여기 길 하나가 일어서고 있다’를 낭독했다. “여기 길 하나가 푸르게 일어서고 있다//역사의 소용돌이를 지켜본/우리들의 그리움 하나가/우리들의 소슬한 자유 하나가/상징처럼 돌아와/다시 길이 되어 일어서고 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21일까지 청와대 경내에서 문화행사를 선보인다. 국빈을 맞이하던 영빈관에서는 최고의 무사를 뽑는 공연이, 춘추관 앞에서는 줄타기 등 전통놀이가 각각 열린다. 임금의 산책을 재현한 행사도 개최한다. 다만 각 건물을 소개해 주는 안내판이 없어 아쉽다는 반응도 나왔다. 대통령 관저를 보던 최현민 씨(45·서울 마포구)는 “주변 사람들이 말해 주기 전까지 대통령 관저인 줄 몰랐다”며 “건축물의 이름과 의미를 설명한 안내판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보안 지역으로 분류돼 공개되지 않았던 청와대 주변 지도도 인터넷에 공개됐다. 이날 국토교통부는 청와대 주변 지도를 국가 공간 정보 플랫폼 브이월드에 공개했고 이후 네이버, 카카오 등 민간 기업에도 제공한다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
10일 청와대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대통령 관저 뒷길로 15분가량 오르자 듬직한 불상 하나가 보였다. 108cm 높이에 시원한 이목구비,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법의(法衣) 자락이 눈길을 끈다. 생김새가 수려해 일명 ‘미남불(美男佛)’로 불리는 보물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다. 출입이 금지됐던 관저 주변이 10일 74년 만에 전면 개방되면서 일반인들도 미남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이던 청와대 경내에는 석조여래좌상을 포함해 61점의 문화유산이 분포돼 있다. 청와대 권역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남경의 이궁이 있던 곳으로 예부터 풍수지리상 길지(吉地)로 꼽혔다. 실제 관저 뒤쪽에는 300∼400년 전 바위에 새긴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 각자가 있다. 청와대 권역에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까지 918년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청와대 경내 문화유산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석조여래좌상. 9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의 예술적 가치 못지않게 비운의 역사를 담고 있어서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경북 경주를 순시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에 의해 경주에서 경성 왜성대(倭城臺·현 서울 남산 일대)의 총독 관저로 옮겨졌다. 이와 관련해 일본인 도굴꾼 모로가 히데오는 “경주 이거사 절터에 있던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1913년 서울로 옮겨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불상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39년 총독부가 현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사를 신축하면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졌다. 이후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함에 따라 현 위치인 북악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내력으로 인해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불상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효율적인 문화재 보존을 위해 현 위치에 그대로 두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다. 수년 전 불상을 현장 조사한 임영애 동국대 문화재학과 교수(불교미술사)는 “2018년 확인된 사료 ‘신라사적고’를 통해 석조여래좌상이 본래 경주 이거사에 봉안돼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현재 이곳은 절터만 덩그러니 남아 보존이 어려운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 관저 너머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청와대에 남은 유일한 정자 ‘오운정(五雲亭·서울시 유형문화재)’을 볼 수 있다. 오운정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시 지은 건물로 1989년 대통령 관저 신축 때 이전됐다. 이곳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 ‘오색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 같다’는 뜻의 이름은 경복궁 후원에 있던 오운각에서 따온 것이다. 오운정에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1905년 8월 현 대통령 관저 자리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각 ‘침류각(枕流閣·서울시 유형문화재)’이 나온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을 지닌 이곳은 과거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다. 고종 때 경복궁 신무문(神武門) 밖 후원에 건립한 건물들 중 청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이 전각도 1989년 대통령 관저 신축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청와대 경내에서는 문화유산뿐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간직한 자연유산도 만나볼 수 있다. 본관 옆 ‘수궁(守宮) 터’에는 744년간 한자리를 지킨 주목(朱木)이 서 있다. 이 나무가 심어진 수궁 터에는 조선시대 궁궐을 방어한 군사들이 주둔한 건물이 있었다. 줄기가 붉다는 뜻의 주목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썩어서 천년, 합해서 삼천년을 간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산림학)는 이 나무가 고려 충렬왕 재위기인 1278년 무렵 심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 명예교수는 “땅의 주인은 물론 시대가 바뀌는 7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한자리를 지킨 유구한 역사의 자연유산”이라며 “많은 국민들이 찾아오는 만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적극적으로 수목 보호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살아서 청와대를 다 와보고….” 10일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대한민국 수립 이후 처음 청와대가 전면 개방돼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남편 서재석 씨(80)의 손을 꼭 잡고 청와대 본관으로 향하던 노미옥 씨(77·경기 부천시)는 “TV에서나 보던 청와대에 직접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부축하던 서 씨는 “죽기 전 아내와 함께 청와대에 꼭 와보고 싶었는데,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쁘다”며 웃었다. 권위주의 시절은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며 74년 동안 일반인들에게 굳게 닫혀 있던 청와대 정문은 이날 오전 11시 37분 국민을 향해 활짝 열렸다. 정문이 열리는 순간 사전 신청에서 당첨돼 1회차 입장을 기다리던 시민 6500여 명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닫혀 있던 세월을 상징하는 국민대표 74명은 손에 매화를 들었다. 개방행사 관계자는 “매화는 윤 대통령이 봄이 가기 전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한 약속의 실천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전날까지 대통령이 거주했던 관저도 정문인 ‘인수문(仁壽門)’을 개방했다. 시민들은 산책로를 따라 관저 내 ‘대통령의 정원’을 거닐었다. 전면 개방 전에도 청와대 관람 코스가 있었지만 관저 주변은 특히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된 ‘구중궁궐의 핵심’이었다. 이날 청와대 관람에 당첨된 인원은 2만6000명이다. 이날 오전 7시엔 청와대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전면 개방됐다. 서쪽 칠궁과 동쪽 춘추관 양쪽으로 진입할 수 있는 이 등산로는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 이후 54년 만에 일반인 출입이 허용됐다. 등산로는 청와대와 달리 사전 신청 없이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
1980년 5월 18일 그는 우연히 광주에 있었다. 지인의 결혼식이 광주에서 열린 터였다.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1978년부터 3년째 전남 영암군 보건소에서 일하던 당시 스물다섯의 데이비드 돌린저(66·사진)는 광주버스터미널에서 영암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도시 곳곳이 순식간에 최루탄 연기로 자욱해졌다. 시외버스마저 끊겼다. 하루 묵을 곳을 찾기 위해 지인 집으로 가는데 광주 시내의 모습은 전날과 달라져 있었다. 도청으로 가는 길목에 군용 트럭과 무장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음 날 버스 운행이 재개돼 영암으로 돌아간 뒤에도 광주에서 목격한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광주에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너무 위험하다고요. 하지만 가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광주에서 알고 지낸 한국 친구들이 너무 걱정스러웠습니다.” 그가 나흘 뒤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다시 광주로 향한 이유다. 일주일간 광주 시내 병원과 영안실을 뛰어다니며 유족들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그가 자신이 겪은 5·18민주화운동을 회고한 신간 ‘나의 이름은 임대운’(호하스)을 12일 펴낸다. 임대운은 그의 한국 이름. 그는 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게 ‘진실을 널리 알려 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광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전남대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영안실에 시신을 둘 자리가 없어 건물 밖 공터에 시신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식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거리의 임시 안치소를 찾아 헤매는 부모들을 봤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토로하는 부모들을 보고 광주의 증언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병원과 시신안치소를 찾아다니며 촬영한 필름을 독일인 선교사 하인리히 로스러 부부에게 건넸다. 이를 통해 1980년 7월 프랑스 통신사 AFP와 미국 AP통신, 스웨덴 신문 다겐스 뉘헤테르에 광주의 참상이 보도될 수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어요. 많은 이들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광주의 진실을 계속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1980년 6월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미국 템플대에서 미생물학과 면역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35년간 감염병 전문가로 일하며 많은 이의 생명을 구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1990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10주년 추모행사에서 자신이 목격한 걸 증언했다. 42년 만에 회고록을 낸 이유도 “광주 민주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증언할 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8일 별세한 김지하 시인을 기리는 추모 도서가 연내 출간된다. 2018년 등단 50주년을 맞아 고인이 발표한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펴낸 작가출판사가 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책을 내기로 한 것. 손정순 작가출판사 대표는 9일 “고인을 따르고 연구했던 학자 10여 명과 문인들이 모여 2018년부터 그의 문학세계를 연구한 논문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며 “생전에 내는 게 목표였는데 팬데믹으로 원고 작업이 미뤄지다 결국 추모집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손 대표를 비롯해 고인의 마지막 시집과 산문집을 편집한 홍용희 문학평론가, 임동확 시인이 집필에 참여한다. 손 대표는 “고인이 문학사에 남긴 족적을 온전히 담아보려고 한다. 고인과의 추억을 담은 추모 글도 실릴 것”이라고 덧붙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시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으로 잘 알려진 시인 김지하가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토지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날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김 시인이 8일 오후 4시경 강원 원주시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밝혔다. 고인과 함께 살던 차남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부부가 임종을 지켰다. 고인의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는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이름처럼 고인은 과거 독재정권에 맹렬하게 저항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41년 전남 목포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 참여했다. 당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대표로 활동했다.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서울대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4개월간 수감됐다. 한때 수배를 피해 항만 인부나 광부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고인은 참여시인이자 민중시인이었다. 1969년 시 ‘황톳길’과 ‘비’를 발표하며 등단한 후 1970년 월간지 ‘사상계’에 ‘오적(五賊)’을 발표해 구속됐다. ‘오적’은 300줄 남짓한 풍자시로 독재시대 부정하게 부를 축적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댔다. 고인을 비롯해 사상계 대표와 편집장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그해 구속됐다. 이어 고인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민주화 이후 2013년 민청학련 사건 재심에서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2014년 법원은 고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15억 원의 국가배상 판결을 내렸다. 1987년 제주 4·3사건을 다룬 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된 이산하 시인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적’을 읽고 이것이 진짜 시이고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꽁꽁 얼어붙은 유신시대에 뜨거운 피를 가진 문학청년들에겐 충격적인 영향력을 준 시를 쓴 분이다. 책상에 앉아서 글만 쓰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참여 시인”이라고 평했다.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지식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고인은 1970년대 저항운동을 하며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산 분”이라며 “자신이 터득한 사상을 글로 표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1980년대 이후 생명사상을 정립하는 데 몰두했다.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생명사상을 깨쳤다. 고인은 “처음에는 생태학을 파고들었는데 그것만 가지고서는 세계와 삶의 진화를 이해하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심오했다”며 “선(禪)과 불교에 관한 깊은 내면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혜를 갈구하게 됐다”고 했다. 1990년대에는 절제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줬다. ‘중심의 괴로움’(1994년), ‘비단길’(2006년), ‘새벽강’(2006년), ‘못난 시들’(2009년), ‘시김새’(2012년) 등 시집을 꾸준히 펴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고인은 많은 지인들과 후배들로부터 “데모대 선두에 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마다 “이제 정치가 아닌 다른 일을 찾고 있다. 더 이상 데모는 안 한다”고 거절했다. 변절, 배신, 반동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고인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진 사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한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고인은 “민중을 지도하겠다는 사람들이 목숨을 경박하게 버리는 반민중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으며 자기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민중을 선동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고인은 10년 뒤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이 칼럼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의 뜻을 표시했다.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계속 견지했다. 고인은 2008년 한 언론사 기고문 ‘좌익에 묻는다’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은 아예 읽은 일도 없고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자들이 정권을 틀어쥐고 앉아 왔다갔다 나라 경제를 몽땅 망쳤다”고 지적했다. 진보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근배 시인(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1970년대 시인뿐 아니라 논객조차도 군부세력을 비판하는 글과 시를 못 쓰던 시절, 고인은 시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오적’을 발표한 고인은 유신 시대의 지성이다. 정치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당시 고인만큼 폭발적인 문인은 없었다”고 말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은 “대시인이자 세계적인 시인이 떠나갔다”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 작가와 차남 세희 이사장이 있다. 고인의 부인으로 대하소설 ‘토지’를 쓴 고 박경리 선생의 외동딸 김영주 씨는 2019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강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발인은 11일 오전 9시. 김지하, 박경리 딸과 결혼… 朴 “글 잘쓰는 젊은이에 호감”朴, 金 민청학련 구속때 옥바라지고 김지하 시인은 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1926∼2008)의 사위로, 그가 걸어온 길뿐만 아니라 가족사 역시 한국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 ‘오적’을 사상계에 발표한 김 시인은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경찰과 중앙정보부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평소 종종 들렀던 서울 정릉 인근의 박경리 선생 집을 찾아 숨겨 달라고 청했다. 선생은 그의 부탁을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외동딸 김영주(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1946∼2019)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김영주는 “어머니가 혼자 살다 보니 성격이 그렇다. 이해해 달라”며 사과했다. 이후 김 시인이 숨어 있던 강원 원주시 집에 선생과 김영주가 찾아와 그를 돌려보낸 것을 미안해했다. 생전 선생은 김 시인과의 첫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현대문학’ 김국태 씨(편집장)가 지하와 함께 왔어요. ‘오적’을 읽고 싶었는데 구하질 못해 읽어보지는 못했던 때였죠. (글을 쓰는 내가) 글 잘 쓰는 젊은이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통한 김 시인과 김영주는 1973년 4월 서울 명동대성당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김 추기경은 부부간의 예절과 함께 김 시인의 앞길을 예감한 듯 비상한 결심과 각오를 강조했다. 부부는 두 아들 김원보(작가), 김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를 낳았다. 결혼 이듬해 김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자 선생은 직접 면회를 가며 그를 챙겼다. 6·25전쟁 때 부역자로 몰린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자 추위가 매서운 겨울 날마다 옷 보따리를 들고 흑석동 집에서 서대문까지 걸어 면회를 다닌 선생이 사위의 옥바라지까지 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시인을 살리기 위해 정권을 자극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 조용히 백방으로 뛰었다. 김영주는 “남편은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암 투병을 하다 2019년 눈감은 김영주는 김 시인이 20년간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두 아들 양육부터 집안 살림, 간호까지 모든 것을 책임졌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맞서 홀로 딸을 키운 선생의 삶과 겹쳐지는 부분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작별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올까. 인공지능(AI) 기술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작별은 구시대의 문화다. 애초에 이별이 필요 없다. 클라우드 서비스에 뇌를 백업해 두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다. 시스템에 스며든 정신은 네트워크를 따라 흐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몸이 없으므로 살아있다는 감각마저 느낄 수 없다. 당신이라면 고통도 기쁨도 없는 이 세계에서 영원불멸할 것인가. 저자가 ‘살인자의 기억법’(복복서가)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 품은 질문이다. 2019년 온라인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서 짧은 장편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200자 원고지 420장 분량으로 집필했던 소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전면 개작됐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집필을 끝낸 마지막 순간 초고에 붙였던 ‘기계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작별인사’로 바꿨다고 밝혔다. 초고의 제목처럼 기계의 이야기로, 인간을 빼닮은 휴머노이드 철이가 주인공. 유명한 정보기술(IT) 기업 연구원인 아버지와 평화롭게 살던 소년 철이는 ‘휴머노이드 등록법’이 실시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간다. 한평생 인간인 줄 알았던 자신이 미등록 휴머노이드였으며 존재 자체가 불법임을 알게 된 것. 해 질 무렵 노을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을 느끼던 몸은 수용소에서 거추장스럽고 고통스러운 짐이 된다. 팔이 잘려나가고 눈이 없는 로봇들…. 철이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고통받는 휴머노이드와 함께 수용소를 탈출한다. 하지만 미등록 휴머노이드를 제거하려는 인간 기동대의 습격에 휴머노이드의 몸은 산산조각 나고, 철이 일행은 근원적인 질문과 맞닥뜨린다. 조각난 휴머노이드의 뇌를 클라우드 서비스에 백업해 불멸할 것인가. 영원불멸하는 기계의 시대, 육체 없이 정신만 남은 휴머노이드는 모든 고통을 느낀대도 “몸을 달라”고 말한다. 여정 끝에 철이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 그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언젠가 부서질지 모를 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작별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누리는 특권일지도 모른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제 인생이 하나의 불화(佛畵)를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붓 손질, 선 하나에도 혼을 담을 수밖에요.” 국가무형문화재 불화장 보유자 임석환 씨(76)의 생애를 담은 신간 ‘붓을 든 수행자 임석환’(문보재)이 최근 나왔다. 그는 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를 불러주는 사찰이 있으면 지금도 재료값만 받고 불화를 그린다”며 “믿음 없이는 일하고 대가를 받는 노동에 불과할 뿐, 신심으로 그린 그림이야말로 불사(佛事)”라고 강조했다. 처음부터 불심(佛心)으로만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가난한 대목장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965년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일하던 사촌으로부터 “단청을 칠해주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 화원이 됐다. 그는 “먹고살려면 손 기술 하나는 익혀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진관사에서 국가무형문화재 단청장을 지낸 고(故) 혜각 스님을 만났다. 그는 “혜각 스님 문하에서 단청 작업을 하면서 혹시라도 누가 될까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 그림을 연습했다. 그땐 촛불 연기에 코가 검게 그을리는 줄도 몰랐다”며 웃었다. 1967년 혜각 스님을 따라 경북 김천 직지사 천불전 단청 작업에 참여한 날 일손을 돕기 위해 온 고 혜암 스님을 만났다. 경남 하동 쌍계사에서 불화를 그리던 혜암 스님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혜암 스님은 제게 붓 잡는 법을 일러주기 전에 기도하는 법부터 가르쳐 주셨다. 출가하는 스님처럼 머리를 깎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스승은 수개월이 지나서야 제자에게 붓을 건넸다. 손 기술만으로는 불화를 그릴 수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신심으로 그린다’는 신념을 이때 배웠다. “스승에게 붓을 받은 뒤부터 엉덩이에 주먹만 한 종기가 올라올 때까지 온종일 습화(習畵)를 그렸어요. 3000장을 그리고 나서야 불화의 밑그림이라고 불리는 불초 작업을 오롯이 혼자 할 수 있게 됐습니다.” 2006년 국가무형문화재 불화장으로 지정된 그는 부산 범어사, 강화도 전등사, 양산 통도사 등 전국 사찰을 돌며 단청과 탱화를 그렸다.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99년 경기 포천 법왕사에서 가로 10m, 세로 6m에 이르는 ‘삼천불탱화(三千佛幀畵)’를 완성한 순간이었다. 밑그림만 3개월이 걸려 총 1년에 걸쳐 탱화를 완성한 그는 “잔꾀를 부리지 않고 법도대로 붓선 하나하나를 칠해야만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예술뿐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국조폐공사와 국립중앙박물관이 국보 반가사유상을 지폐형 기념 메달로 만들어 4일 공개했다. 지폐형 기념 메달은 지난해 11월 1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반가사유상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사유의 방’이 문을 연 것을 계기로 기획됐다. 은행권 지폐를 본뜬 메달 앞면에는 반가사유상의 전체 모습을, 뒷면에는 반가사유상의 얼굴을 확대해 깊은 생각에 잠긴 따뜻한 미소를 담았다. 반가사유상 지폐형 기념메달은 순도 99.9% 중량 20g 금메달 200장과 순도 99.9% 중량 10g 은메달 2000장 등 총 2200장을 한정 수량으로 제작한다. 금메달은 264만 원, 은메달은 11만 원이다. 9일부터 27일까지 조폐공사 온라인 쇼핑몰과 현대H몰, 더현대닷컴 등에서 선착순으로 예약 판매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시대도 가족도 그에게 춤추지 말라 했다. 누이 넷을 둔 집의 외아들이었다. 부모는 귀한 막내아들이 판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한 끼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시절 한국무용가 조흥동 씨(81)는 다른 꿈을 꿨다. ‘춤추는 남자’라고 손가락질해도 아랑곳 않고 한량무 태평무를 춘 송범 한영숙 이매방 등 스승 17명에게 한국 전통 남성 춤을 사사했다. “언젠가 자서전을 내도 될 만큼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어요. 부모님 사진을 한쪽에 싣고 이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요. 판검사나 부자는 못 되었지만 부모님 사진 빛나게 해줄 정도로 최고의 무용수가 됐다고….” 꿈은 현실이 됐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5호 한량무 보유자인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조흥동류’ 한량무를 개척한 한국 전통 춤의 대가가 됐다. 남성적인 기백이 넘치는 조흥동류 한량무는 한국 무용 콩쿠르에서 남성 지원자들이 추는 대표적인 춤이다. 2017년 대한민국최고무용가상, 2018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월륜 조흥동 자서전’(댄스포럼)을 출간한 조 씨를 3일 서울 중구에 있는 그의 춤 전수관에서 만났다.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국악사 양성소에서 무용을 배운 지 올해로 67년이 됐다. 그는 “부모님에게도 춤을 배운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을 정도로 사회적인 시선이 곱지 않았다”며 “거리에서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다니다가도 연습실에만 들어서면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춤이 내 팔자였다”며 웃었다. 조 씨는 춤추는 남성에 대한 세상의 차별과 맞섰다. 1981년 국내 최초로 한국남성무용단을 창단한 그는 “위대한 남성 무용가들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다 같이 모여 춤추는 남성에 대한 차별에 맞서 보자고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자부했다. 한국남성무용단은 창단 직후 제3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출전했다. 여성 무용이 주류였던 무용계에서 파격적인 시도였고 변화가 일어났다. 이 대회에서 한국남성무용단이 안무상을 받은 것. 국내 1세대 무용 평론가 고 조동화 선생은 당시 “무용계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고 평했다. 1990년 국립무용단 상임 안무가에 이어 예술감독을 지낸 그는 지금도 제자들에게 직접 몸을 쓰며 춤사위를 가르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20년, 국민대 공연예술학부에서 22년간 강사로 제자를 양성했다. “내일 당장 무대에 올라가 춤추래도 90분 공연을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있어요. 여생 동안 제자들에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춤사위를 보여주고 싶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시대도 가족도 그에게 춤추지 말라 했다. 누이 넷을 둔 집의 외아들이었다. 부모는 귀한 막내아들이 판·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9살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한 끼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시절 월륜(月輪) 조흥동 씨(81·사진)는 다른 꿈을 꿨다. 유성기에서 아리랑 가락이 흘러나오면 누이의 치마저고리를 두르고 자신도 모르는 새 춤을 췄다. ‘춤추는 남자’라며 손가락질하는 세상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한량무 태평무 등을 추는 스승 17명에게 한국 전통 남성 춤을 사사받았다. 비평가들은 살풀이 무당춤부터 불교 무용까지 한국 전통 남성 춤을 섭렵한 그를 ‘백과사전’이라 부른다. “언젠가 자서전을 내도 될 만큼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어요. 부모님 사진을 한 쪽에 싣고 이 말을 하고 꼭 싶었거든요. 판·검사나 부자는 못 되었지만 부모님 사진 빛나게 해줄 정도로 최고의 무용가가 됐다고….” 최근 ‘월륜 조흥동 자서전’(댄스포럼)을 펴내며 어릴 적 꿈을 이룬 조 씨를 3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는 월륜 조흥동 춤 전수관에서 만났다. 14세 무렵부터 현재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국악사 양성소에서 무용을 배운 지 67년. 그는 “부모한테도 춤을 배운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을 정도로 사회적인 시선이 열악했다”며 “거리에서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다니다가도 무용 연습실에만 들어서면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춤이 내 팔자였다”며 웃었다. “남성 무용수들은 가슴 한쪽에 죄의식을 안고 살았어요.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춤을 춘 죄. 나는 떳떳해지고 싶었어요.” 조 씨는 춤추는 남성에 대한 세상의 차별과 맞섰다. 1981년 한국 최초로 한국남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조 씨는 “위대한 남성 무용가들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우리가 다같이 모여서 춤추는 남성에 대한 차별에 맞서보자고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자부했다. 한국남성무용단은 창단 직후 제3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출전했다. 출연자는 모두 남성. 여성 무용이 주류였던 무용계에서 파격적인 시도였지만 변화가 일어났다. 이 대회에서 한국남성무용단이 안무상을 받은 것. 이를 두고 국내 1세대 무용 평론가 고 조동화 선생은 당시 “무용계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고 평했다. 남성 무용수들이 무대 전면에서 조명을 받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1962년 국립무용단원으로 입단해 1990년 국립무용단 상임 안무가, 1993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등을 역임한 그는 아직까지도 제자들에게 직접 몸을 쓰며 춤사위를 가르친다. 혹여 몸이 녹슬까 주말이면 새벽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신당동의 무용연습실에 나와 조명 하나를 켜두고 몸을 움직인다. “올해 81세지만 내일 당장 무대에 올라가 춤추래도 90분 공연을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있어요. 여생 동안 제자들에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춤사위를 보여주고 싶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志士仁人殺身成仁(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이는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 그의 공판을 지켜본 일본인 기자 고마쓰 모토고(小松元吾)에게 남긴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이다. 이는 논어(論語) 위령공편에 나오는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이는 삶을 구하여 인을 해침이 없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 문구에서 따왔다.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조국을 지키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3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안 의사가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뤼순감옥에 투옥됐을 당시 일본인 간수와 경찰, 기자에게 건넨 유묵 5점이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안 의사가 쓴 유묵 중 현존하는 것은 70여 점. 이 중 국내에 남아있는 유묵은 37점으로 앞서 26점이 이미 보물로 지정됐다. 안 의사는 유묵을 남기고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유묵 5점의 왼쪽 아래에는 한자로 ‘경술년(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문구와 함께 그의 단지(斷指) 손도장이 찍혀 있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안 의사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며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유묵에는 안 의사의 학문적 소양과 품격이 오롯이 담겼다. ‘洗心臺(마음을 씻는 장소)’라고 쓴 유묵은 주역(周易) 계사상편의 ‘성인은 마음을 씻고 물러가 은밀히 간직해두며, 운수의 좋음과 나쁨을 백성과 더불어 함께 근심한다(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 吉凶與民同患)’는 문구에서 비롯됐다. 한때 일본인 소장가가 소유했던 이 유묵은 2017년 12월 미술품 경매에 출품돼 4억 원에 낙찰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인 세관원 가미무라 주덴(上村重傳)에게 써준 유묵에는 ‘人無遠慮必有近憂(사람이 멀리 내다보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는 논어 구절이 담겼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