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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뒤 진행된 배니티 페어 오스카 파티. 영국의 배우 겸 가수 리타 오라가 검은 드레스 위에 산과 소나무, 사슴이 장식된 흰 가운을 입고 등장했다.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가운 위에는 한국 전통 민화(民畵)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 드레스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패션 디자이너 박소희 씨(26)가 돌체앤가바나의 후원으로 제작한 2022 F/W 컬렉션 제품이다.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와 카디비가 선택한 디자이너로 꼽힌 박 씨는 지난달 1일 인스타그램에 컬렉션을 소개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민화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이름 없는 평범한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이죠. 한국 민속예술의 멋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18~20세기 초 조선시대 서민층에서 주로 유행한 민화가 21세기 젊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디자이너 양해일의 브랜드 해일(HEILL)은 ‘22-23 F/W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에 선보일 컬렉션에서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해와 달,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그림) 등 민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지난해 9월 디지털 아티스트 ‘해더림’은 삼성가전과 협업해 십장생도(十長生圖·장수를 염원한 민화)를 형상화한 배경에 가전을 배치한 일러스트를 제작했다. 젊은 예술가를 매료시킨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전문가들은 민화가 내재하고 있는 ‘모더니티’가 현대예술과 조응한다고 분석한다. 민화는 백성의 그림이라는 뜻처럼 태생부터 사대부의 예술이라 불리는 문인화(文人畵)와 달랐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민간 화가들이 조선 후기 평민 등으로부터 돈을 받고 맞춤제작한 그림이다. 문인화가 수묵으로 색을 절제하며 조선의 예사상인 충효(忠孝)를 표현했다면 민화는 백성의 욕망을 담았다. 파랑, 빨강, 노랑, 검정, 흰색 등 오방색(五方色)을 자유롭게 활용했고, 거창한 사상이 아닌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는 개인의 욕망을 드러냈다.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은 “19세기 상업 발달로 부를 축적한 평민사회에서 민화를 소장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한 번도 예술의 수요자가 되지 못했던 평민이 예술의 향유 주체가 됐다. 자연스럽게 그림의 주제도 평범한 개인의 욕망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선임연구원은 “문인화와 정반대로 색을 자유자재로 표출하는 저항성을 내재하면서도 오방색만을 사용한 점도 매력적”이라며 “민화는 미니멀리즘과도 맞닿은 모던아트”라고 풀이했다.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민화가 각광받는 이유는 민화 본연의 개방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모란, 까치, 호랑이 등 유사한 소재를 활용하되 틀에 갇히지 않는 표현으로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분석이다. 일례로 책장에 진열된 사물을 그린 ‘책거리’는 당대 흔히 볼 수 있는 민화 양식이지만 그림 속 사물은 제각각 다르다. 책장에 반짇고리와 은장도, 비단신 등 여성의 물건만을 배치한 작품은 가부장사회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여성주체의 존재를 암시한다. 정 교수는 “창작자가 자신만의 관점으로 피사체를 재해석하는 것이 민화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외국 미술계도 민화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뉴욕 찰스왕센터, 캔자스대 스펜서미술관은 2016년 9월부터 1년 넘게 조선민화 특별전을 열었다. 시카고미술관은 2017년 발간한 도록에서 폴 세잔의 정물화와 민화 ‘책거리’를 나란히 배치하며 “한국의 정물화”라고 소개했다. 뉴욕 패션공과대(FIT) 미술관에서 2020년 ‘한국 민화전’을 기획한 변경희 뉴욕FIT 교수는 “민화는 한류를 이끌 K아트의 선두주자”라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인 김정숙 여사가 2018년 프랑스 순방 때 착용하고 기증해 현재 인천국제공항에 전시 중인 것으로 알려졌던 샤넬 한글 자켓이 당시 김 여사가 입었던 옷과는 다른 샤넬의 별도 제작 제품인 것으로 나타났다. 샤넬이 재킷을 별도로 제작한 이유나 시점이 석연치 않아 논란이 커지고 있다. 샤넬은 5일 “김정숙 여사가 2018년 10월 프랑스 방문 시 착용한 자켓은 샤넬 측이 대여한 옷으로 김 여사가 착용 후 바로 샤넬 측으로 반납됐다”며 “이후 지난해 11월 국립한글박물관 요청에 따라 별도 자켓을 제작해 기증했다”고 밝혔다. 기증이 이뤄진 건 시점은 김 여사가 이 재킷을 입은 시점보다 3년 1개월 뒤다. 샤넬 측은 실제 김 여사가 착용했던 제품의 보관 여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이 자켓은 지난달 17일부터 인천국제공항 T1 3층 출국장에서 전시 되고 있다. 샤넬은 당초 인천공항에 전시된 제품이 김 여사가 착용했던 것과 동일한 제품이라고 밝혀왔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재킷 색상과 한글 문양 등이 확연히 다른 옷이라는 지적이 커지자 입장을 번복했다. 이에 대해 국립한글박물관 측은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에서 지난해 5월 샤넬이 김 여사 착장 자켓을 기증하고 싶어 하니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며 “샤넬 본사와 협의해 지난해 11월 기증 확정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물관 측은 “샤넬 본사로부터 김정숙 여사가 2018년 프랑스 순방 당시 실제 입은 옷이라고 알고 기증을 받았으며 (발언의) 진위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 여사가 프랑스 방문시 착용한 샤넬 자켓은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한글을 수놓은 원단을 이용해 직접 제작한 옷으로 알려졌다. 이 자켓을 포함해 김 여사 의상에 특수활동비가 쓰였다는 의혹이 커지자 청와대는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김 여사가 샤넬 재킷을 2018년 프랑스 국빈 방문 당시 사용 후 반납했고 이후 샤넬 측에서 국립한글박물관에 재킷을 기증해 전시 중”이라고 밝혀왔다.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넷플릭스 프랑스에서 한국 콘텐츠를 이용하는 시청자의 경우 미국 할리우드나 유럽 콘텐츠보다 ‘K콘텐츠’를 더 많이 추천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비슷한 분량으로 일본 콘텐츠를 이용하는 이에게 미국 콘텐츠가 가장 많이 추천된 것과 비교된다. 추천된 K콘텐츠로는 ‘미스터 션샤인’ ‘태양의 후예’ ‘별에서 온 그대’ 등 드라마가 많았다. 서울대 한류연구센터와 프랑스 파리1대학 문화다원주의·디지털윤리연구소 공동연구팀은 8, 9일 ‘넷플릭스와 한류’ 국제학술대회에서 ‘넷플릭스 프랑스의 한국 콘텐츠 추천 경향 연구’ 논문을 발표한다. 논문에 따르면 연구팀은 매일 3시간씩 넷플릭스 프랑스의 한국 콘텐츠와 일본 콘텐츠를 각각 무작위로 시청하는 봇(Bot·특정 작업을 반복 실행하는 프로그램)을 5개씩 열흘간 돌렸다. 넷플릭스 프랑스에서 콘텐츠 비중이 5∼6%로 비슷하고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한일 콘텐츠를 비교한 것. 넷플릭스는 이용자의 시청 목록을 반영한 다양한 추천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올 1월 실시한 실험 결과 한국 콘텐츠 시청 봇 5개에서 가장 많이 추천된 건 한국 콘텐츠(3만4103회)였다. 이어 미국(2만6444회), 일본(5441회), 영국(4724회), 프랑스(3481회) 콘텐츠 순이었다. 넷플릭스 프랑스에서 한국 콘텐츠 비중은 5%(263개)에 불과하지만 추천 횟수는 1위를 차지한 것. 반면 일본 콘텐츠 시청 봇 5개의 경우 미국(3만1713회), 일본(2만6963회), 한국(6728회) 콘텐츠 순으로 추천 횟수가 많았다. 한국 콘텐츠 시청 봇의 경우 추천 콘텐츠 상위 10위 중 미국 드라마 ‘아웃랜더’를 제외한 9개를 K드라마가 휩쓸었다. 추천 콘텐츠 1위는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95회)이었고 이어 ‘신입사관 구해령’(272회), ‘고요의 바다’(268회), ‘태양의 후예’(267회), ‘별에서 온 그대’(265회)가 뒤를 이었다. 넷플릭스 프랑스 홈페이지에 ‘연애에 대한 모든 것: 한국 드라마’나 ‘적이었다가 애인이 되는 한국 드라마’라는 분류 체계가 따로 있을 정도로 한국 로맨스 드라마가 강세다. 홍석경 서울대 한류연구센터장(언론정보학과 교수)은 “넷플릭스 추천 시스템의 목적은 이용자에게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공해 계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라며 “넷플릭스는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차지할 역량이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추천 시스템에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한류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강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홍 센터장은 “연구 결과에서 드러나듯 현재 세계시장에서 한국 콘텐츠의 경쟁자는 타국이 아닌 과거에 잘 만든 한국 드라마”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3개월간 손수 쪽빛으로 물들인 명주예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통 방식을 지켜야죠.”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 ‘유물의 병원’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17년째 근무 중인 서화 복원 전문가 장연희 학예연구사(44)가 명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로 8m, 가로 30cm 명주 위에 산수화 4점을 올려놓고 직접 쑨 풀죽으로 장황(裝潢·서화에 비단을 발라 꾸미는 것)을 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작자 미상의 19세기 산수화는 미국 플로리다주 새뮤얼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새뮤얼한 박물관은 2019년 이곳에 복원을 의뢰했다. 현지 전문가가 번들거리는 노란색의 중국식 장황으로 복원해 원형이 훼손됐기 때문. 국립중앙박물관은 2009년부터 외국 박물관 내 한국실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까지 미국, 프랑스 등 8개국 30개 기관이 도움을 요청했다. 특히 서화는 한국 전통 방식으로 장황을 해야 해 매년 한 건 이상 의뢰가 들어온다. 지금까지 복원한 해외 소재 서화는 51점. 장 연구사는 이 중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대 앨런기념관에 소장된 병풍 ‘출행도(出行圖·왕의 행차를 그린 그림)’를 잊지 못한다. 도화서 화원이 그린 이 병풍은 국내 첫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미국 선교사 달젤 벙커(1853∼1932)가 산 뒤 1933년 오벌린대에 기증했다. 2000년대 초 일본 전문가가 장황을 복원하며 고유의 빛깔을 잃었다. 2018년부터 2년간 이를 복원한 장 연구사는 “조선을 위해 희생한 벙커 선교사를 위해 작은 보답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며 웃었다. “제 손을 거친 작품이 외국 박물관에 걸린 모습을 떠올려요. 외국인에게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을 알릴 때 보람을 느낍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고통을 없애는 모든 것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 중독치료센터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일하는 저자가 환자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20년간 수만 명의 환자를 만난 저자는 쾌락과 고통이 한 저울 위에 올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뇌는 큰 자극을 받을 때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해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 수평저울처럼 쾌락을 느끼면 반작용으로 고통이 따라오는 식이다. 중독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자극적인 쾌락을 찾아 헤맬 때 시작된다. 고통에서 벗어나면 행복해질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오히려 고통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대의학을 비판한다. 17세기 영국 의사 토머스 시드넘은 “적당한 고통은 자연이 가장 현명한 용도로 사용하는 치료 수단”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고통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약간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수많은 약물을 처방해왔다. 미국에서는 2013년 신경안정제 처방을 받은 성인 인구가 1996년에 비해 67%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단 약물뿐일까. 인스타그램, 유튜브, 넷플릭스…. 고통을 잊게 해주는 쾌락은 도처에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중독에 포위된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자를 찾아온 10대 소녀 델릴라는 한 달간 대마를 끊으면서 대마 없이도 스스로 불안감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성 통증을 경감시키려 10년간 진통제에 의존해온 한 환자는 약을 줄인 뒤부터 아플 때 음악을 듣는다. 고통을 견디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쾌락을 찾아 헤매는 순간이 있다. 그때 자신을 찾아온 마약중독 환자에게 저자가 남긴 말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고통을 견뎌내는 것은 어렵지만 당신에게는 기회예요. 생각, 감정, 고통 등 당신을 들여다볼 기회요.” 저자의 조언을 따르다 보면 고통을 견뎌낼 힘이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89년부터 33년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 범종을 연구해 온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63·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가 최근 ‘한국의 범종’(미진사)을 펴냈다. 29일 서울 마포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만난 그는 “이 책은 일본, 중국 등 전 세계에 있는 한국 범종 363구를 기록한 아카이브”라고 말했다. 그는 책에 범종 41구의 종소리를 녹음한 QR코드를 담았다. ‘일승원음(一乘圓音·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한국 범종의 미학을 온전히 전하고자 종이책에 종소리까지 담아낸 것이다.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한국 범종 48구를 직접 찾아낸 그는 1995년 후쿠이(福井)현 조구(常宮)신사에서 통일신라 833년에 만들어진 ‘연지사종’을 마주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연지사종은 경남 진주 연지사에서 보관해 오다 임진왜란 때 왜구에 약탈당했다. 현재까지 조구신사가 소장 중이다. 일본은 1953년 연지사종을 국보로 지정했다. 최 교수는 “종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필름만 100여 통 챙겨갔다”며 “하지만 보관고의 문을 연 순간 설렘은 탄식으로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종 표면이 녹슬어 푸르뎅뎅했고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어요. 어떤 국가가 국보를 이렇게 방치합니까.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죠.” 최 교수는 수차례 일본을 찾아가 연지사종의 실태를 파악했다. 2018년 8월에는 학술대회를 열어 보존 처리를 촉구했다. 결국 일본 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5월부터 연지사종을 보존하고 있다. 책에는 한국 범종 363구를 소장 국가와 제작연대별로 분류한 31쪽 분량의 목록도 담겼다. 최 교수는 “저와 후학들이 목록에 새로운 사료를 더해 나갈 것”이라며 “이 책은 범종 연구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05년 4월 5일, TV에서 강원 양양군 낙산사에서 큰 불이 나 보물 ‘낙산사종’이 소실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연구관으로 근무하던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63·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는 불과 3개월 전 낙산사를 찾아가 종을 직접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낙산사종은 영롱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얼마 뒤 다시 찾은 낙산사에는 높이 1.56m에 이르는 거대한 종은 사라지고 불에 녹아 쪼그라든 흉물만 남은 채였다. “낙산사 종이 자아내던 아름다운 소리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때 결심했죠. 언젠가 종소리까지 담아낸 한국 범종 아카이브를 구축해야겠다고.” 1989년부터 33년간 전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 범종을 연구해온 최 교수가 그간의 연구를 총망라한 신간 ‘한국의 범종’(미진사)을 최근 펴냈다. 29일 서울 마포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만난 그는 “이 책은 일본, 중국 등 전 세계에 있는 한국 범종 363구를 기록한 아카이브”라고 말했다. 책에는 범종 41구의 종소리를 녹음한 QR코드도 담았다. ‘일승원음(一乘圓音·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한국 범종의 미학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종이책에 종소리까지 담은 것이다.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한국 범종 48구를 직접 찾아낸 최 교수는 “아직까지도 1995년 후쿠이현(福井縣) 조구신사(常宮神社)에서 연지사종을 만난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소재 한국 범종을 연구하기 위해 1년간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소속 연구원으로 지내던 때였다. 통일신라 833년 만들어진 연지사종은 경남 진주 연지사에서 보관해오다가 임진왜란때 왜구에 약탈당했다. 현재까지 조구신사가 소장중이다. 일본은 1953년 연지사종을 국보로 지정했다. 최 교수는 “종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필름만 100여 통 챙겨갔다”며 “하지만 보관고의 문을 연 순간 설렘은 탄식으로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종 표면이 녹슬어 곰팡이 쓴 듯 푸르뎅뎅했고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어요. 어떤 국가가 국보를 이렇게 방치합니까.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죠.” 최 교수는 연구를 마친 뒤에도 두 차례 조구신사를 찾았다. 특히 2018년 다시 만난 종의 상태는 처참했다. 종을 천장에 걸어두는 고리가 부식돼 천장에 매달지 못하고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것. 최 교수는 2018년 8월 연지사종의 실태를 알리는 학술대회를 열어 보존처리를 촉구했다. 결국 일본의 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5월부터 연지사종 보존처리에 나섰다. 그의 휴대전화 배경화면은 아직까지도 1995년 촬영한 연지사종의 필름 사진으로 설정돼 있다. “녹슨 채 방치돼 있던 종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의 연구 덕분에 한국 범종의 약탈 증거를 찾기도 했다. 최 교수가 일본 아이치현(愛知縣)에 있는 ‘만다라지종’에 새겨진 글자를 분석한 결과 ‘천정(天正)’이라는 연호가 확인됐다. 일본에서 사용한 연호로 1593년을 뜻한다. 최 교수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의 어느 절에서 약탈한 뒤 일본에서 새롭게 연호를 새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에는 한국 범종 363구를 소장 국가와 제작연대별로 분류한 31쪽 분량의 목록도 담겼다. 최 교수는 “앞으로도 저와 후학들이 목록에 새로운 사료를 더해나갈 것”이라며 “이 책은 33년 범종 연구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그가 가는 길이 곧 미국 장애 인권사였다. 이 책은 미국 장애운동가 주디스 휴먼의 자서전이다. 1970년 당시 23세였던 저자는 교사를 꿈꿨다. 성적은 우수했고 실무 경험도 갖췄다. 하지만 뉴욕시 교육위원회는 그의 교사 면허를 불허했다. 그가 생후 18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에서였다. 멈출 것인가 싸울 것인가. 그는 꿈을 지키기 위해 후자를 택했다. 1970년 5월 연방법원에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년간의 법정 싸움에서 승리해 교사 면허를 받아낸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교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용기 있는 첫걸음이 세상을 바꿨다. 얼마 뒤 뉴욕주는 장애인의 교직 접근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저자와 장애운동가 60명은 1989년 9월 공공·민간 모든 영역에 걸쳐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장애인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찾았다. 정문 앞에 83개의 계단이 있었지만 이들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휠체어에서 뛰어내린 이들은 하룻밤을 새워 몸을 끌고 계단을 올랐다. 미국 언론은 이날의 사건을 ‘시민권 투쟁’으로 대서특필했고 1년 뒤 법안은 통과됐다. 꿈을 지키기 위해 차별과 맞서온 저자는 “장애가 나를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성취하게 했다”고 말한다. 훗날 저자는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발탁돼 장애 인권제도의 기틀을 다지는 행정가가 된다. 차별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 왔기에 찾은 길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저자와 같은 길을 걸은 국내 장애운동가 박찬오 씨의 감상평이 나온다. 20년 전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무작정 세계은행 빈민구제팀에서 일하던 저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당시 저자는 그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힘껏 문을 열어 보자”고 말했다. 이 말에 힘입어 박 씨는 2002년 서울시 지원을 받아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세웠다. 저자의 발자취를 묵묵히 쫓은 그는 20년이 흘러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때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났다’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분단국가의 사회학자로서 북한 사회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대 독일에서 10년간 유학한 이희영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59·사진)는 북한 사회가 궁금했다. 독일에서는 통일 이전부터 장벽을 넘나드는 연구가 진행됐다. 서독 사회학자들은 동독 정부의 허가를 받아 동독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결과 동독 주민의 삶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현실이 괴리돼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70년의 분단 역사를 지닌 한국에도 필요한 연구라는 판단에 이 교수는 탈북 여성의 생애를 2006년부터 추적했다. 이로부터 13년간 다양한 연령대와 신분의 탈북 여성 수십 명을 만났다. 이 중 1990년대 대기근 이후 탈북한 여성 8명과, 2015∼2018년 탈북한 신세대 여성 12명에 대한 연구기록을 담아 신간 ‘경계를 횡단하는 여성들’(푸른길)을 최근 펴냈다. 그는 23일 전화 인터뷰에서 “탈북여성의 삶에는 격변하는 북한 사회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그가 2006∼2008년 만난 탈북여성 8명은 1990년대 북한 대기근 이후 오직 살아남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남한에 오려고 탈북한 이는 없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돈벌이를 할 방법 자체가 없었다. 국경을 넘은 이들은 장사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같은 공산권 국가인 중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교수가 2019년에 인터뷰한 신세대 여성들은 달랐다. 1987∼1997년생으로 MZ(밀레니얼+Z)세대인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남한행을 택했다. 신세대 탈북 여성 12명 중 11명은 북한에서 공장에 다니거나 장사를 하며 적극적으로 경제 활동을 했다. 탈북 후 남한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최선숙 씨(27)는 “간부가 될 필요 없다. 평로동자(일반 노동자)라도 장사해서 돈 버는 게 낫다”고 강조한다. 최 씨는 북한에서 상업에 종사한 아버지를 찾아와 “도와 달라”고 손을 벌리는 고위 간부를 보며 “‘공화국 영웅’보다 장사꾼의 삶이 낫다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깨달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지금 북한 여성들은 정치체제가 개인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구세대 북한 여성들이 경험한 삶은 천지차이예요. 이들의 삶을 따라가면 북한 사회의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복 입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24일 한복 입기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발표하며 “한복 입기는 우리 민족의 중요 자산인 만큼 문화재로 지정해 지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올해 2월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복을 둘러싸고 ‘문화 공정’ 논란이 불거진 후여서 눈길을 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중국과의 갈등 관련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한복은 신라시대 토우(土偶·흙으로 빚은 사람이나 동물의 상) 등 삼국시대 유물에서도 확인되는 우리 민족의 전통복식이다. 삼국시대 때 하의와 저고리로 이뤄진 한복의 복식구조가 완성됐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는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활을 쏘는 남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어 조선시대 때 한복의 복식 전형이 확립됐고, 1879년 개항 후 서양 복식과 구분하기 위해 ‘한복’으로 불렸다. 19세기 말 서양 의복이 도입돼 평상복에 큰 변화가 생겼지만 한복의 근간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망자에게 입히는 수의(壽衣)나 갓 태어난 아이에게 입히는 배냇저고리, 명절에 입는 설빔이 대표적이다. 문화재청은 이번 지정 과정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온 국민이 전승하고 있는 문화라는 이유에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대문감옥(옛 한성감옥)에는 진귀한 보물이 있다.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동지들과 같이 투옥됐을 때 옥중 도서관을 만들어 죄수들에게 나라 구하는 길을 가르쳤다. 나는 이곳에서 그의 손때와 눈물자국이 얼룩진 책을 보았다.’ 백범 김구(1876∼1949)가 1911년을 회고하며 백범일지에 쓴 글이다. 당시 그가 투옥된 서대문감옥의 종로구치감은 구한말 한성감옥의 후신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개혁운동을 벌이다 한성감옥에 갇힌 우남 이승만(1875∼1965)을 포함한 지식인들은 옥중 도서관을 세우고 밤새 책을 읽었다.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선 이들은 감옥에서 어떤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을까.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월남 이상재(1850∼1927) 서거 95주기를 맞아 그의 후손인 이공규 씨가 올 초 기증한 ‘한성감옥 도서대출 장부’를 공개했다. 1903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수감자와 간수의 책 대출내역이 기록된 143쪽짜리 장부에는 우남, 월남 등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이름도 담겼다. 대출목록에는 근대국가 정치체제와 사상을 담은 책들이 눈에 많이 띈다. 1903, 1904년 대출순위 1위(45회)에 오른 ‘유몽천자(유蒙千字)’는 미국 독립운동사를 소개한 책이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쓴 이 책은 우남과 백범, 월남 모두 읽었다. 2위는 프랑스 혁명 등 19세기 근대국가를 형성한 유럽사를 다룬 ‘태서신사(泰西新史)’.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의회정치 체제가 확립된 과정을 그린 저자 불명의 이 책도 우남과 백범, 월남이 탐독했다. 백범은 백범일지에 “태서신사를 읽을 때마다 이승만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한 느낌이 일었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월남은 서구 관점에서 유학(儒學)을 비판한 ‘경학불염정(經學不厭精)’을 수차례 읽었다. 이 책은 독일인 선교사 에른스트 파버가 썼다. 서구 근대국가의 정치체제를 소개한 ‘자서조동’(自西조東·에른스트 파버 지음)은 이동녕이 1903년 출옥하며 따로 챙겨갈 정도로 즐겨 읽은 책이다. 훗날 이동녕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의장으로 ‘대한민국의 정체는 민주공화정’임을 선포하며 “우리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군주제를 부활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요, 국민이 국가가 되는 민주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1899년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돼 한성감옥에 투옥된 20대 청년 이승만은 1902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250여 권을 소장한 옥중 도서관을 만들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수감시설로 바뀐 한성감옥에 ‘수감자 중 서적 보는 것을 청한 자가 있으면 필요한 것만 허락한다’는 규칙이 신설된 데 따른 것. 1902년 6월 투옥된 월남은 도서관 서기가 됐다. 임정 초대의장 이동녕,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종일도 장부에 이름을 올렸다. 한성감옥이 근대개혁 정신을 싹틔운 배움의 장이 된 것이다. 윤소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당대 지식인들은 감옥에서 서구 근대사상을 탐닉하며 건국의 뼈대를 구상했다”며 “한성감옥은 구한말 근대국가 수립을 모색하던 지식인들의 지적 탐구의 장이자, 독립운동가의 배출 통로로 기능했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해 미국 동부지역은 17년 만에 수백만 매미 떼의 습격을 받았다. 일명 ‘17년 주기 매미’는 2004년 알에서 깨어나 땅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견딘 뒤 2021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왜 하필 17년일까. 이 책 저자는 매미가 17이란 숫자를 선택한 건 합리적 셈법이라고 말한다. 비둘기, 쥐 등 천적이 많은 매미는 포식자의 성장주기를 비껴가는 소수(素數·1과 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수)를 선택해 생존율을 높였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천적의 성장주기가 3년이고 매미의 주기가 17년이면 매미는 51년 뒤에야 천적을 마주친다. 자연에서 소수는 포식자를 피하는 생존전략인 셈이다. 독일 수학자이자 세계 최초 수학박물관 마테마티쿰을 세운 저자는 전작 ‘스파게티에서 발견한 수학의 세계’(21세기북스)에서처럼 수학의 문화사적 의미를 일상사에서 흥미롭게 풀어냈다. 책에는 1, 2, 3처럼 작은 숫자뿐 아니라 원주율, 무한대 등 수와 얽힌 39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수학 원리를 풀어내려는 수학자들의 고군분투도 소개했다. 1903년 10월 31일 미국 수학자 프랭크 넬슨 콜은 2^67-1의 약수를 증명하는 강연을 열었다. 해당 숫자가 소수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증명됐지만 어떤 수학자도 이 수의 약수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칠판에 자신의 계산식을 증명해낸 콜은 “이 문제를 풀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3년 동안 매주 일요일마다.” 무한한 수를 탐닉한 인간의 역사에는 숫자를 뛰어넘는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책에는 1965년부터 2011년 8월 6일 세상을 떠난 날까지 매일 캔버스에 숫자를 써내려간 폴란드 화가 ‘로만 오팔카’의 이야기가 나온다. 46년간 233점의 숫자 연작을 남긴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그린 수는 560만7249.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기록한 가장 큰 수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녔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죽는 날까지 무한에 닿기 위해 쓰고 또 쓴다는 것. 어쩌면 인간의 의지야말로 가장 경이로운 이야기가 아닐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이 조선시대 무신 이기하(1646∼1718)의 묘지석(墓誌石·고인의 행적을 기록해 묘소에 묻는 돌판)을 지난달 자진 반환한 것을 계기로 국외로 반출된 묘지석을 환수하기 위한 협상이 본격화되고 있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해외 박물관들과 묘지석 환수 협상을 추진하고 있는데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며 “클리블랜드미술관의 반환 이후 윤리적 결정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박물관들이 속속 생기고 있다”고 17일 밝혔다. 재단에 따르면 유럽, 미국 등 해외 박물관들에 소장된 국내 묘지석은 최소 170여 점에 이른다.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이 55점으로 가장 많고 메트로폴리탄미술관 34점, 프랑스 세르뉘시미술관 21점, 영국 대영제국박물관 14점 등이다. 이 중 브루클린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시대 문인 박은(1475∼1504)의 묘지석에는 그가 생전에 쓴 한시가 적혀 있다. 1504년 갑자사화 당시 박은이 사형을 당한 후 행적과 사료가 남아 있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재단은 2013년부터 묘지석 반출과 기증 경로를 추적해 도굴 등 불법성이 입증될 경우 환수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재단은 2017년 일본인 소장자로부터 조선 전기 고위관직에 오른 이선제(1390∼1453)의 묘지석을 환수했다. 이 묘지석이 무덤에서 도굴된 뒤 1998년 한국 고미술상에 의해 일본에 밀반출된 경로가 확인된 것. 재단 실무자가 일본인 소장자 도로키 다카시 씨를 찾아가 불법 반출 증거를 제시하며 환수를 설득했다. 묘지석은 인물의 생애를 통해 그 시대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은 환수 1년 만인 2018년 ‘이선제 묘지석’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해당 묘지석은 그동안 생몰연도조차 알려지지 않은 조선 전기 문인의 생애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 사료”라고 밝혔다. 문화재계에서는 서구 박물관들이 제국주의 시절 약탈한 문화재를 자진 반환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도 묘지석 반환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 로텐바움박물관은 19세기 나이지리아의 베닌 왕국에서 서구 열강이 약탈한 왕실 예술품 5000여 점의 출처를 밝히고, 올해부터 소장 유물 1000여 점을 나이지리아에 반환하기로 했다. 차미애 재단 실태조사부장은 “독일의 베닌 프로젝트가 해외 박물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박물관의 윤리경영을 강조하는 추세가 이어져 해외에 밀반출된 국내 유물 환수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년 전 딸이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말할 때 나섰어야 했는데…. ‘중학교 졸업 때까지 견디자’고 한 게 너무 후회됩니다.” 지난해 3월 경기도 학교전담경찰관(SPO) 장석문 경감(53)에게 고교생 딸을 둔 엄마가 찾아왔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싫다”며 눈물을 흘리던 중학교 2학년 딸에게 엄마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가면 해결될 것”이라며 달랬다. 하지만 딸과 같은 고교에 진학한 가해학생들의 폭력은 3년째 이어졌다. “난 언제쯤 지옥에서 벗어나느냐”는 절규에 뒤늦게 학교폭력을 신고했지만, 딸은 부모에 대한 마음의 문을 이미 닫아버렸다. 장 경감은 최우성 경기도교육청 학교폭력전담 장학사(50)와 함께 ‘올 어바웃 학폭’(가치창조)을 10일 출간했다. 장 경감은 17일 전화 인터뷰에서 “학교전담경찰관으로 지낸 8년간 학교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자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학부모들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최 장학사는 2012년부터 매주 1건 이상의 학교폭력 사안을 심의하고 있다. 그는 “피해 학생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해하는 사건을 2개월에 한 건씩 접하고 있다”고 했다. “부모로부터 아픔을 외면받은 아이들은 자해를 해요. 마음에 난 상처는 보이지 않으니 제 몸에 생채기를 내는 겁니다.”(최 장학사)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내놓은 해법은 조기 대응. 최 장학사는 “학교폭력 피해 학생 상당수가 부모에게 이를 알리지 않는다. 학교폭력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만큼 부모가 먼저 자녀의 신호를 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녀가 휴대전화 알림에 불안해하거나 수면장애를 앓고 있다면 학교폭력을 의심해보는 게 좋다. 급격한 체중 감소나 잦은 지각과 결석도 유심히 살펴봐야 할 피해 징후다. “자녀가 어느 날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면 부모에게 지금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일 수 있어요. 아이가 내민 손을 외면하지 않아야 구할 수 있습니다.”(장 경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가상화폐 투자자 모임인 헤리티지 DAO(탈중앙화 자율조직)가 최근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으로부터 구입한 국보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의 소유권을 간송 측에 돌려주기로 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16일 입장문을 내고 “헤리티지 DAO가 금동삼존불감의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51%의 지분을 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23일 금동삼존불감의 소유주는 전 관장에서 헤리티지 DAO로 바뀌었다. 헤리티지 DAO에 투자한 금융업체 크레용의 레온김 대표는 최근 미국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국보를 활용한 대체불가토큰(NFT) 상품 지분을 확보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간송재단 관계자는 “헤리티지 DAO는 금동삼존불감을 활용한 NFT 상품화 등의 조건 없이 국보를 기증했다”며 이를 부인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의 후손인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이 올 1월 경매에 내놓았던 국보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을 가상화폐 투자자모임 ‘헤리티지DAO(탈중앙화 자율조직·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가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가상화폐 투자자모임이 국보를 매입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15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헤리티지DAO의 외국계 법인은 전 관장이 소장하던 금동삼존불감을 사들인 뒤 소유자 변경 신고서를 접수했다. DAO란 가상화폐로 돈을 모아 미술품 등을 공동 구매하는 온라인 투자자 모임을 일컫는다. 앞서 1월 27일 전 관장은 간송미술재단의 재정난을 이유로 소장하던 국보를 케이옥션 경매에 내놨지만 유찰된 바 있다. 케이옥션은 지난달 중순부터 헤리티지DAO 측과 거래를 타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낙찰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금동삼존불감의 경매 시작가는 28억 원이었다. 금동삼존불감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켰던 간송이 생전 아꼈던 애장품으로도 손꼽힌다. 헤리티지DAO는 지난달 23일 문화재청에 소유자 변경 신고서를 제출하며 “간송재단에 해당 국보를 기탁한다”는 내용의 ‘관리자 선임 신고서’도 함께 제출했다. 소유자는 바뀌지만 국보 자체는 간송재단이 보관 및 관리해 나가기로 협의한 것. 더 나아가 헤리티지DAO는 최근 미국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간송의 국보를 일반 대중이 볼 수 있도록 기증하겠다”며 “다만 국보를 활용한 대체불가토큰(NFT) 상품의 지분을 확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따라 케이옥션에 출품됐던 금동삼존불감은 서울 성북구에 있는 간송미술관이 현재 보관하고 있다. 간송재단 관계자는 15일 “DAO로부터 유물을 기탁받았으며 기증을 위한 협상은 아직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협상이 성사되면 국보의 실소유자인 헤리티지DAO는 국보를 활용한 NFT 상품 지분만 확보하고, 실제 국보는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나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소속 연합군 포로감시원이었다. 그때 쓴 원고를 남기니 언젠가 한 번 읽어다오.” 다리가 서서히 썩어가는 폐색성 말초 혈관병을 앓던 외할아버지 최영우 씨(79)는 2002년 별세 직전 외손자 최양현 씨(43)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그의 기억 속 할아버지는 늘 원고지와 볼펜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글만 써내려갔다. 할아버지는 200자 원고지 1000여 장에 이르는 육필원고를 남겼다. 언젠가 한 번쯤 누군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봐주기를 바라며. 이로부터 10년이 흐른 2012년 최 씨는 자신의 자취방에 보관하던 원고 보따리를 풀었다. 영화 제작사를 세우고 이야깃거리를 찾던 때였다. 볼펜으로 빽빽이 눌러 쓴 할아버지의 원고에는 전쟁의 기억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경기 파주시 효형출판사에서 15일 만난 최 씨는 “식민지 조선인이 겪은 비극의 역사가 뉴스에서만 보던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가족의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10년간 일본과 네덜란드의 국가기록물을 뒤져 할아버지 이름이 적힌 조선인 포로감시원 명단을 확보하고 할아버지의 생애를 재구성해 신간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효형출판)를 11일 펴냈다. “포로감시원으로 꿈과 젊음을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일제강점기 발명가를 꿈꾸던 20세 청년은 “군속(군대 소속 공무원)으로 자원하면 맏형과 막냇동생이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친지 얘기를 듣고 1942년 5월 군속에 지원했다. 일본군이 점령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에서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는 감시원으로 발령이 났다. 이것이 그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안길 줄은 몰랐다. 무더운 날씨에 쓰러져가는 포로들을 바라보며 그는 ‘이곳은 죽음의 철도다, 나는 이곳에서 무얼 하는가’라고 썼다.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조선인 여성들을 마주한 뒤 그는 ‘그들의 고통이 나의 뼛속까지 사무친다’고 기록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직후 그에게는 전쟁범죄자 낙인이 찍혔다. 식민지 조선인이던 그가 일본의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를 받게 된 것. 광복의 기쁨을 누릴 새 없이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 1년 6개월간 갇힌 그는 “나는 전쟁범죄자인가 아닌가”를 수없이 되뇌며 창살 너머 민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 순간을 기록했다. 할아버지의 원고를 읊던 최 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고작 22, 23세 된 청년이 어떻게 홀로 견뎌냈을까요. 창살 밖 밥 냄새 나는 평범한 일상이 할아버지에게는 간절한 꿈이었어요.” 1947년 연합군으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고 귀향했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를 가족도 몰라봤다. 극도로 쇠약해져 가정을 꾸린 뒤에도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최 씨는 “펌프를 직접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던 할아버지는 귀향 후 발명가라는 꿈을 포기한 채 말없이 살다 가셨다. 마음속 깊은 곳에 포로수용소 경험이 그늘로 자리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처절하게 기록하셨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자식들이라도 당신의 응어리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었을까요.” 원고에 담긴 고인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책을 가장 먼저 읽어본 외삼촌 최성두 씨(62)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이 인생을 바꿔놓기 전까지 아버지도 나처럼 꿈 많은 청년이셨어. 우리 아버지가 가슴 속에 이런 이야기를 끌어안고 사셨구나.”파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 도시에 결단코 전염병은 없소!” 1901년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 에게해에 연접한 가상의 섬 ‘민게르’에 페스트가 퍼진다. 제국에서 파견된 무슬림 총독은 페스트보다 이후 격변할 세상이 더 두렵다. 인구 8만 명의 자그마한 섬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반반씩 살아간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페스트로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성전에 소독제를 뿌리는 건 신성모독이라고 여긴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의 무지한 행태가 섬을 전멸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부자들이 모두 떠나버린 섬에는 빈민들만 남는다. 해묵은 종교분쟁을 피하려고 총독이 페스트를 방관하는 사이 전염병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거장 오르한 파묵(70)의 11번째 소설은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쓴 현실과 조응한다. 2020년 5년간의 집필을 끝낼 무렵 코로나가 확산됐다고 한다. “현실이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는 저자의 말처럼 방역에 대한 불신이 횡행하는 소설 속 풍경은 현실과 닮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전염병은 세계화 이후 이슬람 사회 깊숙이 퍼진 서구 문명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저자는 페스트로 위기에 빠진 민게르섬을 통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유지할 것인지, 서구화로 회귀할 것인지 갈림길에 선 터키의 현실을 녹여냈다. 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분열이 퍼져 나가는 과정을 세밀히 그려낸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섬에 파견된 기독교인 의사 본코프스키 파샤는 방역 조치를 시행하기 하루 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배후로 이슬람 성직자 일가가 지목되지만 진범이 아니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된다. 하루 사망자 수가 50명대로 늘자 제국은 섬을 봉쇄한다. 죽은 자와 죽을 자만 남은 섬….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종교를 떠나 무차별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섬을 하나로 결속시킨다. “신 앞에서 죽음을 거역할 수 없다”며 방역에 불복한 이슬람 성직자마저 페스트로 목숨을 잃자, 무슬림 마을에서는 우리를 지키는 건 신이나 제국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믿음이 싹튼다. 페스트의 밤을 밝힌 건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민게르섬 출신 장교 콜아아스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이들을 향해 “우리는 민게르인”이라고 외친다. 제국에 버림받고 절망하던 이들은 그의 한마디에 각성돼 방역 선을 구축하고 섬을 독립시킨다.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 만들어낸 힘이다. 이후 페스트가 종식되기 전까지 정권 교체로 혼란을 겪지만 종교를 떠나 모두가 민게르인이라는 믿음은 이어진다. 이슬람 근본주의 혹은 서구화의 갈림길에 선 민중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주체적 독립 국가를 세우는 길로 나아간다. 저자가 소설의 화자로 민게르섬 출신의 여성 사학자 ‘미나 민게를리’를 택한 것도 뜻깊다. 그의 증조부모는 “교리를 어기고 살아남는 건 무의미하다”는 이슬람 성직자를 향해 “살아남아 미래를 지켜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이들이 끝내 살아남은 덕분에 사학자로 성장한 증손녀가 섬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서로를 저버리지 않고 함께 살아남았기에 삶과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메시지는 2년 넘게 ‘코로나의 밤’을 지나온 우리를 위로하는 듯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 도시에 결단코 전염병은 없소!” 1901년 오스만제국의 속주로, 에게 해에 연접한 가상의 섬 ‘민게르’에 페스트가 퍼진다. 제국에서 파견된 무슬림 총독은 페스트보다 이후 격변할 세상이 더 두렵다. 인구 8만 명의 자그마한 섬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반반씩 살아간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페스트로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성전에 소독제를 뿌리는 건 신성모독이라고 여긴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의 무지한 행태가 섬을 전멸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부자들이 모두 떠나버린 섬에는 빈민들만 남는다. 해묵은 종교분쟁을 피하려고 총독이 페스트를 방관하는 사이 전염병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거장 오르한 파묵(70)의 11번째 소설 ‘페스트의 밤’(민음사·1만9000원)은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쓴 현실과 조응한다. 2020년 5년간의 집필을 끝낼 무렵 코로나가 확산됐다고 한다. “현실이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는 저자의 말처럼 방역에 대한 불신이 횡행하는 소설 속 풍경은 현실과 닮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전염병은 세계화 이후 이슬람 사회 깊숙이 퍼진 서구 문명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저자는 페스트로 위기에 빠진 민게르섬을 통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유지할 것인지 서구화로 회귀할 것인지 갈림길에 선 터키의 현실을 녹여냈다. 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분열이 퍼져나가는 과정을 세밀히 그려낸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섬에 파견된 기독교인 의사 본코프스키 파샤는 방역조치를 시행하기 하루 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배후로 이슬람 성직자 일가가 지목되지만 진범이 아니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된다. 하루 사망자 수가 50명대로 늘자 제국은 섬을 봉쇄한다. 죽은 자와 죽을 자만 남은 섬….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종교를 떠나 무차별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섬을 하나로 결속시킨다. “신 앞에서 죽음을 거역할 수 없다”며 방역에 불복한 이슬람 성직자마저 페스트로 목숨을 잃자, 무슬림 마을에서는 우리를 지키는 건 신이나 제국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믿음이 싹튼다. 페스트의 밤을 밝힌 건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민게르섬 출신 장교 콜아아스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이들을 향해 “우리는 민게르인”이라고 외친다. 제국에 버림받고 절망하던 이들은 그의 한마디에 각성돼 방역 선을 구축하고 섬을 독립시킨다.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 만들어낸 힘이다. 이후 페스트가 종식되기 전까지 정권교체로 혼란을 겪지만 종교를 떠나 모두가 민게르인이라는 믿음은 이어진다. 이슬람 근본주의 혹은 서구화의 갈림길에 선 민중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주체적 독립 국가를 세우는 길로 나아간다. 저자가 소설의 화자로 민게르섬 출신의 여성 사학자 ‘미나 민게를리’를 택한 것도 뜻 깊다. 그의 증조부모는 “교리를 어기고 살아남는 건 무의미하다”는 이슬람 성직자를 향해 “살아남아 미래를 지켜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이들이 끝내 살아남은 덕분에 사학자로 성장한 증손녀가 섬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서로를 저버리지 않고 함께 살아남았기에 삶과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메시지는 2년 넘게 ‘코로나의 밤’을 지나온 우리를 위로하는 듯 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충남 아산시 온양민속박물관은 ‘똥바가지’ 같은 화려하지 않은 민속유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주목받고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박물관에 다녀간 이들이 올린 사진이 줄을 잇는다. “소박한 민속유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참신하다”는 평이 나온다. 온양민속박물관은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거북 흉배(조선시대 관복의 가슴 부위에 새기는 자수)’를 비롯해 약 3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44년 된 박물관의 변신을 이끈 이는 김은경 관장(68). 2006년 관장이 된 그는 계몽사 창립자인 아버지 고 김원대 관장의 뒤를 이었다. “값비싸고 아름다운 작품보다 닳고 사라질 것들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그는 사진·공예작가들과 협업했다. 그는 “2018년부터 박물관 소장 유물과 함께 사진·공예작품을 한 공간에 전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9년에 작품 ‘달항아리’로 유명한 구본창 사진작가에게 박물관에 와서 똥바가지를 촬영해달라고 했어요.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유물을 찍어 달라고요. 낮은 이들이 쓰던 손때 묻은 물건이 지닌 소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충남도 지정문화재 22점이 있지만 김 관장은 이보다 ‘하찮아 보이는’ 유물들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2020년에는 놋그릇과 갓 등의 소장품을 촬영한 김경태 사진작가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는 시구처럼 낡고 오래된 놋그릇도 다르게 볼수록 아름답더라”고 했다. 김 관장은 옛 유물을 품은 박물관을 넘어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을 꿈꾼다. 2018년부터 봄, 가을마다 박물관 정원을 야간에 개장해 지역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박물관 부지에 아산공예창작지원센터를 열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공예 수업을 하고 있어요. 주변에 멀티플렉스 같은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 저희 박물관이라도 즐길 거리를 드려야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