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재

이호재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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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틈틈이 소설을 쓰며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숨소리까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내러티브 기사가 넷플릭스 영상보다 가치 있는 컨텐츠라 믿는다.

hoho@donga.com

취재분야

2024-10-24~2024-11-23
문화 일반40%
음악30%
인사일반17%
문학/출판13%
  • “개념 정리보단 ‘감정’ 표현에 집중”…4년만에 에세이 낸 신형철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이할꼬.’ 신형철 문학평론가(46)는 지난달 31일 4년 만에 펴낸 에세이 ‘인생의 역사’(난다)에서 고대 가요 ‘공무도하가’를 문헌이 아닌 시로 읽는다. 문헌 연구자들은 보통 주인공 백수광부를 무당으로 해석하지만, 신 평론가는 백수광부를 삶이 힘들어 자주 강가에 서 있는 남성이라고 상상한다. 백수광부의 처가 남편을 말리려 강가로 달려간 적도 여러 번 있었을 거라 짐작한다. 백수광부의 죽음을 목격한 뱃사공은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공무도하가’를 불렀을 거라 상상해본다. 신 평론가는 “나는 수천 년 전의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들어본 적 없는 그 먼 노래가 환청처럼 들린다”고 고백한다. 1일 전화 인터뷰로 만난 신 평론가는 정확한 표현을 고르기 위해 신중히 단어를 고르는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무도하가는 현대 예술가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현재성이 풍부한 시”라고 꾹꾹 눌러 말했다.“가수 이상은(52)은 노래 ‘공무도하가’를 불렀고, 작가 김훈(74)은 장편소설 ‘공무도하’(2009·문학동네)를 썼으며, 진모영 감독(52)은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찍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끊임없이 감동을 주는 만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는 문학이란 뜻이죠.”신작엔 25편의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시 25편과 이에 얽힌 작품이 담겨 있다. 황동규(84), 최승자(70), 나희덕(56) 등 한국 유명 시인의 작품뿐 아니라 미국 가수 밥 딜런(81)과 한국 가수 윤상(54)의 노랫말을 시로 해석한다. 대중에겐 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한강(52)의 시를 다룬 것도 눈길이 간다.“잘 모르시는 분도 있지만 한강은 등단을 시로 먼저 했어요. 소설조차 시적으로 쓰는 경계가 없는 작가죠. 시집은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문학과지성사) 단 한 권이지만 의미 있는 시를 골라 넣었죠.” 그는 에세이 ‘느낌의 공동체’(2011·문학동네)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마음산책)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문학평론이 힘을 잃은 시대에도 책이 꾸준히 팔려 ‘스타 문학평론가’로 불린다. 신작은 예약판매만으로 온라인 서점 알라딘 종합 2위에 올랐고, 출간 1주일 만에 2만 부가 팔렸다. 이유를 묻자 그는 부끄러워하며 답했다.“평론가로서 ‘개념’을 정리하는 훈련도 받았지만, 문학작품을 따로 읽으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배운 것 같아요. 저 역시 문학작품을 읽은 뒤 이를 개념화하기보단 제가 느낀 감정을 문장으로 쓰는 데 성취감을 느끼고요. 작가적인 색채가 강한 걸 독자들이 좋아해주신 것 아닐까 싶네요.”“인생은 시처럼 행과 연으로 이뤄져 있다”는 그에게 ‘문학’의 의미를 물으니 담담한 답변이 돌아왔다.“가족과 보내는 시간 외에 거의 모든 시간을 문학작품을 읽고 글을 쓰는데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게 문학은 그야말로 ‘직업’이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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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해야하는 일은 아픔에 공감하는 일[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힘든 분들에게 조그마한 위로라도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달 31일 나태주 시인(77)은 시 ‘못다 핀 꽃들이여… 어여쁜 영령이여’(동아일보 1일자 A1면)와 함께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시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 피해자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 시인이 슬픔을 참아가며 꾹꾹 눌러썼다. ‘아, 우리의 청춘들이 넘어지고 엎어지고/그 자리에서 그렇게 많이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애달픈 시구에선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문학의 본질이 느껴졌다. ‘미안하오 미안하오/우리가 미안하오/그대들보다 우리 나이 많은 사람들’에선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는 참된 어른의 진정성이 배어났다. 피해자를 향한 혐오와 비난이 고개를 내밀던 인터넷 공간에선 쉽사리 만나볼 수 없는 깊이였다. 임동식 화가가 그린 그림과 나 시인이 쓴 시를 담은 시화집(詩畵集) ‘그리운 날이면…’ 역시 그런 품격과 정감이 느껴지는 책이다. 나뭇잎 두 장을 귀 옆에 꽂은 남성의 모습이 담긴 그림 ‘산토끼’에 나 시인은 ‘토끼야 두 눈을 감고/나하고 놀자’라고 해맑게 외친다. 노란 수선화가 가득 찬 평원에서 한 남성이 고개를 숙인 그림 ‘고개 숙인 꽃과 마주한 인사’도 인상적이다. ‘친구들 향해/인사를 해야지//오늘 하루 우리 서로/잘 부탁해요/허리 숙여 공손히!’라고 천진난만하게 썼다. 여름밤 비가 쏟아지는 풍경을 담은 그림 ‘1975 여름의 기억’을 보고서는 ‘어떻게 어둠 속에서 빛을/데리고 나올 수 있었을까’라고 신기해한다. 시와 그림도 훌륭하지만 또 하나 감동적인 대목이 있다. 나 시인이 자신과 임 화가는 “인생의 궤적이 전혀 다르다”고 고백한 글이다. 평생 초등학교 교사로 살다가 정년퇴직을 한 시인과 달리, 화가는 그림이 관련되지 않으면 전혀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시인은 부인과 자녀가 있지만 화가는 평생 독신. 서로 닮은 점을 찾기 어렵지만 시인은 화가의 그림에서 시를 읽어내고 싶었다고 한다. “지구라는 별, 그 가운데서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만나 한 세상을 함께 살았으니 서로는 어떤 실로도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 시인은 1일 오후 열린 한 강연에서 시 ‘못다 핀 꽃들이여… 어여쁜 영령이여’를 직접 낭송했다. 희수(喜壽)의 시인이 떨리는 목소리를 부여잡고 시를 읽어 내려가자 수강생 40여 명은 하나둘씩 훌쩍거렸다고 한다. 그날 강연 참석자들 가운데 이태원 핼러윈 참사 피해자와 직접 연관이 있는 사람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시인의 낭송을 듣고 마음 깊이 아파했다.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별, 그 가운데서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건 혐오가 아니라 ‘조그마한 위로’다. 나 시인의 조시(弔詩)를 읽으며 다시 한 번 삼가 조의를 표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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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후변화 종말론, 환경운동가 주장은 과장”

    “인간 때문에 지구에 기후변화가 벌어진 건 사실입니다. 다만 기후변화로 지구가 끝장날 거라 단언하긴 어려워요. 일부 환경운동가의 종말론은 과장됐어요.” 세계적인 미국 환경운동가 마이클 셸런버거(51)가 3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하는 ‘2022 산업계 탄소중립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한 그는 지난해 4월 국내에 출간된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부키)과 관련해 3일 서울 종로구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2008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환경 영웅’으로 뽑혔던 그는 열여섯 살에 환경운동에 뛰어들었다. 미 시민단체 ‘환경진보’를 이끌며 과학적 수치를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해 ‘환경 운동의 구루(현자)’라 불리기도 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탄소 배출량은 줄어들고 있어요. 예를 들어, 비료 기술이 발달하며 좁은 경지에서 많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더 이상 나무를 베어내 농경지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고 벌목 현상도 줄어들고 있어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국내 출간 직후 5만 부 이상 팔렸다. 극단적 환경운동가들의 주장을 뒤집은 셸런버거의 지적은 반향이 컸다. 그는 책에서 “기후변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은 기술 발전으로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라며 “1920년대 자연재해로 숨진 이는 540만 명이었지만 2010년대는 40만 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일부 환경운동가는 지구온난화와 자연재해의 위험성을 과도하게 엮고 있어요. 지구는 뜨거워졌지만 에어컨이 발달해 폭염으로 사망하는 이들은 줄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에도 화재로 없어지는 숲의 면적은 점점 작아지고 있죠. 기후변화로 30년 내에 지구가 거주 불가능해질 거란 주장을 믿기 힘든 이유입니다.” 셸런버거가 극단적 환경운동가를 지적하고 나선 것은 오랜 세월 환경운동에 몸담으며 갈수록 의문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부에서 환경운동을 정치적 의도로 사용한다는 회의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스웨덴 출신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9)는 자본주의가 환경을 망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의 탄소 배출량은 1970년대에 정점을 찍은 후 떨어지고 있어요. 기업들이 돈이 되는 천연가스 개발에 앞장섰기 때문에 탄소 배출량이 줄었습니다.” 셸런버거가 환경을 위해 제시하는 방안은 바로 “효율적인 에너지 생산”이다. 그는 “풍력이나 태양광 발전소는 투입되는 노력에 비해 에너지 생산량이 적어 석탄과 석유의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원자력발전소(원전)를 더 세우고 천연가스 개발에도 더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전에 대한 안전성 논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는 저개발 국가들을 방문했을 때마다 절망감을 느꼈어요. 원전이 없으면 그 나라들은 땔감을 찾으려 벌목하고 환경이 더 망가지겠죠. 원전의 위험을 두고 무작정 공포에 떨기보단 함께 논의해서 현실적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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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돌 세계관에 협업”… 순수문학 작가들, K팝과 잇단 ‘콜라보’

    “‘푸른 반딧불이 섬’의 저주를 풀어라.”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어느 미래. 외부의 위협을 막는 거대한 장막으로 둘러싸인 ‘레퓨지아’란 도시가 있다. 이곳에 사는 소녀들은 어느 날 도서관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한다. 도시 밖 미지의 땅에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소녀들은 책에 나오는 ‘푸른 반딧불이 섬’을 찾아 떠난다. 갖은 모험 속에서 여러 역경을 극복하며 소녀들은 성장해 나가는데…. 10월 17일 발매한 걸그룹 르세라핌의 2집 미니앨범 ‘안티프래자일’에는 자그마한 책자 하나가 들어있다. 공상과학(SF) 판타지 소설인 ‘크림슨 하트’의 프롤로그. 이 앨범 속 소설엔 다소 생경한 이름이 하나 등장한다.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소설가인 김초엽 작가(29)다. 실제 크림슨 하트의 설정은 지난해 8월 김 작가가 펴낸 SF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에서 위험에 처한 지구에서 살아가는 소녀들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 김 작가처럼 순수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아이돌 그룹과 협업하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웹소설·웹툰 출신 작가들의 참여가 낯설지 않은 가운데, 한류의 중심으로 꼽히는 가요 시장과 문학의 ‘콜라보’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받고 있다. 르세라핌과 김 작가의 만남은 이들의 소속사인 하이브의 요청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안인용 하이브 스토리사업본부 스토리텔링실장은 “한계에 도전하며 나아가는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김 작가의 작품과 크림슨 하트는 공통점이 적지 않다”며 “등장인물에 입체감을 더하고 싶어 협업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드라마로도 화제를 모은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쓴 정세랑 작가(38)도 걸그룹 아이브가 올 8월 발표한 영상 ‘아이브 서머 필름’ 작업에 참여했다. 2분 10초짜리 영상에서 멤버들의 내레이션을 정 작가가 집필했다. 영상을 제작한 노상윤 감독은 “소설에서 다정하면서도 용감한 여성 캐릭터를 그려낸 정 작가가 아이브 멤버들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잘 표현할 것 같았다”고 했다. 작가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정 작가는 “아이브 팬이자 케이팝 마니아라 제안을 받아들였다”며 “다른 분야와의 협업이 신선했다. 앞으로도 비슷한 제안이 오면 계속 도전하겠다”고 했다. 김 작가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새로운 도전이 제 스펙트럼을 넓혀주지 않을까 생각해 다양한 제안을 열린 마음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을 만든다기보다 ‘스핀오프’ 같은 느낌을 소설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웹소설·웹툰 작가들의 협업은 아이돌 그룹에선 이미 꽤 익숙하다. 하이브는 올 1월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을 모티브로 한 ‘세븐페이츠: 착호’를 웹소설과 웹툰으로 공개했다. 이 작품은 웹툰 전문제작사 레드아이스 스튜디오가 만들었다. SM엔터테인먼트도 소속 가수들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드는 ‘SMCU 프로젝트’를 준비하는데, 웹소설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정상희 SM엔터테인먼트 홍보수석은 “초기 단계라 지금은 공개하기 어렵지만, 세계관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작가들을 섭외했다”고 전했다. 가요업계에 따르면 대형 기획사들이 웹소설·웹툰 작가들에게 협업을 의뢰하는 경우 1년에 작품 100∼200화를 기준으로 1억∼2억 원 정도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지명도가 있는 작가들은 이보다 더 높은 수익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협업이 늘며 잡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웹소설 업계에 따르면 몇몇 기획사는 작가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집필만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웹소설 작가는 “유명 아이돌 기획사에서 웹소설 기획을 제안했는데 거절한 적이 있다”며 “작품을 검수하고 자극적인 내용을 다뤄 달라는 기획사의 요구가 무리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소설가들의 아이돌 시장 진입은 계속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아이돌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은 이상, 문학적 상상력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작가들의 활동 영역이 영화, 드라마를 넘어 가요계까지 확대됐다”며 “지식재산권(IP)이 무궁무진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업계로 작가들이 진출하는 사례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최원영 인턴기자 고려대 미디어학부 졸업}

    •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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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헤미안처럼, 자연인처럼… ‘월든’ 속 삶을 꿈꾸다[책의 향기]

    미국 매사추세츠주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았던 미국 문인이자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소로 같은 삶을 꿈꾼 적이 있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 불필요한 소비가 가득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숲과 호숫가에서 자연과 어울려 사는 삶 말이다. 프랑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저자는 어느 날 소로의 ‘월든’을 읽고 감명 받아 21세기의 소로들을 찾아다닌다. 은둔자의 조용한 일상에 스며들기로 한 것. 저자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5년에 걸쳐 이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온갖 신호가 범람하는 도시를 떠나 어떤 신호도 없는 자연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21세기의 소로들은 한겨울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핀란드에서 썰매 개들과 눈밭을 달리고, 이란의 거대한 산맥에서 말을 타며 페르시아 전통 궁술을 연습한다. 영국 북쪽의 시골 마을에서 보헤미안처럼, 이탈리아의 울창한 숲속에서 자연인처럼 산다. 어른뿐 아니라 아장아장 걷는 아이도 자연에서 인생의 충만함을 느낀다. 누군가는 일탈이나 객기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인터넷이나 전기가 없는 생활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몇 개월만 지나면 지겨워져서 다시 도시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진에 찍힌 21세기의 소로들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코를 간질이는 이파리 냄새, 철썩철썩 들려오는 파도 소리, 손을 따뜻하게 데우는 모닥불의 온기가 가득한 삶을 살기 때문일 것이다. 올가을, 떠날 수 없다면 이 책을 펼쳐 보는 건 어떨까. 잠시나마 다른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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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픔 응시한 작품, 독자 뇌리에 오래 남아… 우리의 삶과 닮았기에”

    “6·25전쟁 때 헤어진 언니를 꼭 찾고 싶단다.” 김금숙 작가(51·사진)의 어머니는 어느 날 프랑스 파리에 사는 딸을 찾아와 오래도록 간직한 소망을 털어놓았다. 1933년생인 어머니는 평양에 살다가 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평소 북에 두고 온 가족 얘길 잘 하지 않았지만, 평생 통일부 이산가족찾기 등을 통해 백방으로 찾으려 애써 왔다. 김 작가는 어머니의 사연을 녹취한 뒤 다른 이산가족들도 만나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가슴 아픈 이산가족들의 사연이 쌓여서 나온 결과물이 2020년 선보인 그래픽노블 ‘기다림’(딸기책방)이었다. ‘기다림’은 올해 8월 ‘만화계의 오스카 상’이라 불리는 미국 하비상의 최고국제도서 부문에 최종 후보로 올랐다. 김 작가는 14일 출간한 에세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남해의봄날·작은 사진)에서 이런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인천 강화도에 있는 작업실에서 25일 전화 인터뷰에 응한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오래 지켜봤다. 가족의 이야기와 삶의 경험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됐고, 그게 작품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래픽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지점쯤에 있는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작화 실력 못지않게 주제와 이야기가 무척 중요합니다. 그림을 다소 못 그리더라도 진정성이 담긴 작품이라면 좋은 그래픽노블이 될 수 있어요. 제 곁에 있는 진정성 있는 얘기들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죠.” 김 작가와 하비상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그린 2017년 작 ‘풀’(보리)로 2020년 하비상 최고국제도서 부문을 수상했다. ‘풀’은 당시 미 뉴욕타임스(NYT)가 ‘올해 최고의 만화’로, 영국 가디언지가 ‘올해 최고의 그래픽노블’로 각각 선정했다. “그리 먼 옛날이 아니라 우리네 어머니가 살던 시대잖아요.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은 대한민국과 여성의 슬픔 그 자체이지 않을까요. 2017년 이옥선 할머니를 만나 대화도 나눴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세웠던 중국 상하이와 하얼빈을 직접 찾아다녔어요.” 에세이에는 1994년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스트라스부르 미술학교를 다녔던 시절, 2010년 귀국한 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작가의 인생 궤적도 담겨 있다. 작가는 “힘든 역사를 직시하는 작품에 매진하는 이유”를 ‘차(茶)’에 빗대 설명했다. “마시고 난 뒤에도 향이 떠나지 않는 차 같은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슬픔을 응시한 작품은 독자들 뇌리에도 오래도록 남거든요. 왜냐고요?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사실은 더 우리의 삶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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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픈 역사를 그리는 이유는…“외면하고 싶은 것이 더 삶을 닮아”

    “6·25전쟁 때 헤어진 언니를 꼭 찾고 싶단다.” 어느 날 김금숙 작가(51)의 어머니는 프랑스 파리에 사는 딸을 만나러 왔다가 이렇게 말했다. 1933년생인 어머니는 평양에 살다 전쟁 때 피란 왔다. 상처 때문인지 가족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KBS TV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엉엉 눈물을 흘리곤 했다. 통일부 남북이산가족찾기를 통해 언니를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김 작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녹취하고, 다른 이산가족을 찾아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사연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 이산가족의 슬픔을 그린 그래픽노블 ‘기다림’(2020·딸기책방)이다. ‘기다림’은 미국 하비상 2022년 최고 국제도서 부문 후보에 올 8월 올랐다. 하비상은 저명한 만화가이자 편집자인 하비 커츠먼(1924∼1993)을 기려 ‘만화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린다.최근 에세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남해의봄날)을 펴낸 김 작가는 25일 통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오래 지켜봤다”며 “가족의 이야기와 삶의 경험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됐고 작품으로 이어졌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만화와 소설의 중간 지점에 있는 그래픽노블엔 작화 실력 못지않게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림을 못 그려도 진정성이 담긴 작품이라면 좋은 그래픽노블이에요. 제 곁에 있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죠.”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그린 ‘풀’(2017·보리)로 2020년 하비상 최고 국제도서 부문을 수상했다. ‘풀’은 미국 뉴욕타임스(NYT) ‘최고의 만화’, 영국 가디언지 ‘최고의 그래픽노블’ 등을 휩쓸었다. 그가 먹과 붓으로만 그린 한국의 그래픽노블이 세계를 감동시킨 것이다. “먼 이야기가 아닌 우리 어머니가 살던 시대의 이야기잖아요. 우리가 직접 피해자는 아닐 수 있지만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이 대한민국과 여성의 슬픔 그 자체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2017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어요. 위안소가 있었던 중국 상하이, 하얼빈을 직접 가기도 했죠.” 신간엔 1994년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스트라스부르 미술학교에 다니다 2010년 귀국해 작품활동을 하는 그의 인생 궤적도 담겼다. 왜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는 만화가 아닌 힘든 역사를 직시하는 작품을 그리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슬픔을 응시한 작품은 독자 뇌리에 오래 남아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것이 더 삶을 닮았거든요. 마시고 난 뒤에도 향이 떠나지 않는 차(茶) 같은 작품을 계속 그리고 싶습니다.”이호재기자 hoho@donga.com}

    • 202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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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교 34명 모두가 ‘책의 바다’에 흠뻑”[작은 도서관에 날개를]

    “역사책을 제일 좋아해요. 앞으로 도서관에서 엄청 더 많이 읽을 것 같아요!” 경기 포천시 창수초등학교의 ‘창수학교마을도서관’에서 21일 만난 김명찬 군(12)은 새로워진 도서관을 둘러보며 기뻐했다. 이주아 양(11)도 “도서관이 너무 깨끗해졌다. 놀이터만큼 많이 찾아올 것 같다”며 신나했다.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리모델링한 창수학교마을도서관이 이날 문을 열었다.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은 1987년부터 산간벽지와 농어촌, 섬마을 지역 어린이와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 건립을 이어왔다. 창수학교마을도서관은 신규 및 재개관을 합쳐 전국에서 262번째로 문을 연 도서관이다. 1946년 개교한 창수초등학교는 한때 학생 수가 400명을 넘었다. 지금은 학생이 34명뿐이다. 맞벌이부부의 자녀들이 많아 학생들은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길고 도서관도 자주 이용한다. 하지만 도서관이 워낙 낡아 교사도 부모도 걱정이 많았다. 리모델링한 120m² 규모의 도서관은 새로 지은 것처럼 완전히 탈바꿈했다. 곰팡이가 피었던 벽지는 다 뜯어낸 뒤 하얀색 페인트를 칠했다. 고급 원목으로 만든 대형 책장 47개와 책상 11개, 의자 39개도 새로 놓았다. 정필원 창수초등학교 교장은 “도서관이 낙후돼 고민이 많았는데 정말 기쁘다. 아이들의 꿈이 쑥쑥 자라날 것”이라며 “어른을 위한 책도 많은 ‘마을도서관’이라 주민들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창수학교마을도서관은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 한국사무소의 후원을 받았다. 맥킨지가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을 통해 후원한 도서관은 이로써 10곳이 됐다. 이날 개관식에선 맥킨지 임직원들이 창수초등학교 학생 34명에게 각자 장래희망에 맞는 책을 선물했다. 축구선수가 꿈인 김시윤 군(11)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손흥민(30·토트넘)의 에세이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브레인스토어·2019년)을 가슴에 꼭 품은 채 연신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영록 맥킨지 이사는 “2011년부터 후원했다. 직원들이 기부한 돈으로 후원금을 조성해 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김수연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대표는 “주민과 학생 모두가 행복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계속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포천=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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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훈 문체까지 흉내 내는 AI… 소설은 ‘합격’, 시-가사는 ‘낙제’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늙은 어부와 아내는 가욋돈을 얻을 요량으로 하숙을 치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영도라는 어촌에서 나고 자랐다.’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첫 세 문장이다. 이다음 내용을 인공지능(AI)은 어떻게 쓸까? ‘어느 날 두 사람이 하숙을 치고 있던 집의 주인이 급사했다. 얼마 뒤 부둣가에 새로 생긴 가건물이 하숙집으로 등장했다. 어느 날 밤 그 가건물에 불이 났다.’ 카카오브레인이 13일 일반에 공개한, 글을 창작하는 AI ‘코지피티(KoGPT)’가 쓴 내용이다. 최근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특별판 서문엔 AI ‘GPT-3’가 쓴 서문이 실려 화제를 모았다. 하라리는 AI의 글에 대해 “잡동사니가 섞인 잡탕”이라면서도 “우리가 알던 방식의 인류 역사가 끝났다는 신호”라며 놀라움을 표했다. 동아일보는 국내 AI의 글짓기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코지피티로 실험해봤다. 코지피티는 사피엔스의 서문을 썼던 GPT-3에 한글을 학습시킨 AI. 컴퓨터 언어 단위인 ‘토큰’을 2000억 개 학습했고 다양한 결과를 도출할 ‘매개변수’도 60억 개를 배웠다고 한다. 코지피티에 소설과 시, TV드라마 대사, 영화 대사, 대중가요 가사 등을 입력해봤다. 일단 산문은 만족스럽진 못해도 ‘합격점’을 줄 수준은 됐다. ‘파친코’ 다음 문장처럼 뜬금없어도 뭔가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부 부부에게 벌어질 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상상해냈다. 김훈의 장편소설 ‘하얼빈’은 더 놀라웠다. ‘1908년 1월 7일, 일본 제국 천황 메이지는 도쿄의 황국에서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을 접견했다. 이은은 열두 살이었다.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황태자의 보육을 책임지는 태자태사의 자격으로 작년 말 이은을 서울에서 도쿄로 데려왔고 이날 메이지의 어전으로 인도했다’를 넣었다. 코지피티는 ‘이은은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의 딸 마사코와 결혼했다. 이은은 일본 황족과 결혼한 첫 한국인이 됐다’고 썼다. 작가와 작품명은 물론이고 ‘소설’이란 힌트도 주지 않았는데, 영친왕(1897∼1970)을 이은이라 부르며 김훈의 간결한 문체를 어느 정도 흉내 냈다. 백운혁 카카오브레인 오픈리서치 조직장은 “소설을 창작했다기보다는 수많은 데이터에서 이런 문장이 등장할 빈도가 높다는 결과를 내놓은 것”이라며 “하얼빈이 역사소설이라 ‘말이 되는’ 문장을 추출하기 쉬웠다”고 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나쁘지 않았다. 우영우(박은빈)의 법정 대사를 넣자 코지피티는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다음 기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사는 피고인에 대한 신문을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반면 시, 노래 가사처럼 의미가 함축적인 글에는 ‘오류’에 가까운 결과를 내놓았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를 입력하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이어갔다.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의 가사 ‘한 번도 못했던 말/ 울면서 할 줄은 나 몰랐던 말/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어떡해’를 넣었다. 그러자 마지막 문장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어떡해’만 세 번 반복했다. 이에 대해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AI가 인과관계는 잘 파악해도 어린아이보다 창의력은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이민영 카카오브레인 사업개발팀 매니저도 “AI 학습 데이터에 운문이 적고, 줄 바꿈 등 형식이 바뀌면 변수가 늘어나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만 광고 문구 작성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공기청정기’ ‘필터식’ ‘숯탈취 필터’ 등 관련 단어 몇 개를 넣으니 ‘강력한 공기청정 기능은 기본이고 스마트폰 제어와 이동식 바퀴 기능도! 집 안 공기 걱정 끝!!’이라는 어디서 봤음직한 문장이 쏟아졌다. 온라인에 광고 문구가 워낙 많아 학습량도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AI가 제대로 된 창작자가 되긴 힘들어도 ‘창작 도우미’는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매니저는 “AI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내용을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에 인간 창작자와 경쟁자는 못 돼도 동반자는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지용 문학평론가는 “인간이 비슷한 플롯과 패턴을 반복해 뻔한 작품만 만들면 AI에게 밀려날 수 있다는 경고”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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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훈 문체까지 흉내내 글쓰는 AI… “산문은 합격, 운문은 아직”

    “이은은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의 딸 마사코와 결혼했다. 이은은 일본 황족과 결혼한 첫 한국인이 됐다.” 이 문장은 인공지능(AI)이 창작했다. 올 8월 출간된 김훈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의 첫 세 문장을 입력하자 이에 이어지는 소설을 내놓은 것. 작가와 작품명은 물론 이 문장이 ‘소설’이라는 힌트도 주지 않았는데 AI는 그럴듯한 글을 써 내려갔다. 영친왕(英親王·1897∼1970)을 이은이라 부르고, 역사적 사실을 나열해 소설의 배경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김훈의 문체도 쏙 빼닮았다. 이 문장을 창작한 건 ‘코지피티(KoGPT)’다. 코지피티는 현재 AI 가운데 최고 수준의 자연어처리 모델로 꼽히는 영어 기반의 ‘GPT-3’을 카카오브레인이 한국어로 학습시킨 AI다.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최소 언어 단위인 ‘토큰’ 2000억 개와 다양한 결과를 도출하도록 돕는 ‘매개변수’ 60억 개를 학습해 ‘똑똑한 작가’가 됐다. 백운혁 카카오브레인 오픈리서치 조직장은 “AI가 소설을 창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데이터 중 이같은 문장이 등장할 빈도가 높다는 결과를 내놓은 것”이라며 “‘하얼빈’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 한 작품이라 이른바 ‘말이 되는’ 문장을 추출하기 쉬웠던 것 같다”고 했다. 최근 예술 창작 분야에서 AI가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사피엔스’(김영사)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판 서문에 GPT-3이 쓴 글을 실었다. 미디어아트그룹 슬릿스코프는 올 8월 코지피티를 활용해 AI 시집 ‘시를 쓰는 이유’(리멘워커)를 펴냈다. 이지용 문학평론가는 “창작하는 AI는 공상과학(SF) 소설 속 미래가 아닌 현재”라며 “AI를 동반자이자 경쟁자로 여기는 예술가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AI 창작의 가능성을 확인해보기 위해 카카오브레인이 이달 13일 대중에 공개한 코지피티로 창작을 해봤다. 유명 소설, 드라마, 영화, 시, 노래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실험은 카카오브레인의 조언을 받아 기자가 이달 14일부터 23일까지 진행했다. AI 창작 문장은 실험 시점에 따라 매번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코지피티는 산문에서 합격점이었다. 예를 들어 동명의 애플TV드라마로 화제를 끈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인플루엔셜) 첫 세 문장을 넣자 코지피티는 “어느 날 두 사람이 하숙을 치고 있던 집의 주인이 급사했다. 얼마 뒤 부둣가에 새로 생긴 가건물이 하숙집으로 등장했다. 어느 날 밤 그 가건물에 불이 났다”는 소설을 만들어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파친코의 첫 문장처럼 감칠맛은 나진 않았지만, 늙은 어부와 아내가 하숙을 치면서 벌어질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상상해냈다.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인 우영우가 법정에서 한 자기소개도 입력해봤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다음 기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사는 피고인에 대한 신문을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결과가 나왔다. 변호사의 발언이라는 점을 인식해서 검사를 향한 발언을 만든 듯 했다. 다만 말을 더듬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캐릭터의 특성은 살리지 못했다.운문 창작은 아직 초보 단계였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을 넣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뻔한 문장을 내놓았다.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 가사를 넣자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어떡해”만 반복했다. 시적인 대사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 대사를 넣었더니 오류가 난 것처럼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만 되풀이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예술 창작은 논리력도 필요하지만 기존 틀을 비트는 창의적인 시도가 중요하다”며 “AI가 인과관계 파악은 잘하지만 어린아이보다 창의력은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카카오브레인이 서비스 적용 범위를 넓혀갈 것이라고 계획을 밝힌 광고 문구 활용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공기청정기와 관련된 키워드를 넣었더니 “강력한 공기청정기능은 기본이고 스마트폰 제어와 이동식 바퀴 기능도!”라는 광고 문구를 만들어냈다. 이민영 카카오브레인 사업개발팀 매니저는 “AI가 창작자를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창작자가 옆에 두고 활용할 수 있는 보조도구는 충분히 될 수 있다”고 했다.이호재기자 hoho@donga.com}

    • 20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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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그 모든 걸 가능케 한 것… “깡, 응집력, 고집”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일본 업체들이 TV, 냉장고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집적회로(IC) 물량과 가격을 통제하며 횡포를 부리자 자체 반도체 사업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습니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신동아 2005년 10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이 회장은 “당시 미국, 일본에서는 이미 반도체 산업을 대표적인 미래 하이테크 사업으로 보고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었다”며 “10년 남짓한 기술 격차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베테랑 현직 기자인 저자는 지난해 10월 출간한 ‘경제사상가 이건희’(동아일보사)에서 인간 이건희의 다양한 측면을 입체적으로 포착했다. 신간에선 고인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이유와 과정을 촘촘히 파고든다. 고인이 생전 “망할 뻔했다”고 했던 반도체 전쟁사를 폭넓게 다룬다. 삼성은 1977년 국내 최초의 반도체 공장인 한국반도체의 지분을 100% 인수했지만 제대로 된 실적을 내지 못했다. 이 전 회장이 “일본, 미국을 직접 다니면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나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사정하는 ‘기술 보따리 장사’를 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인은 꾸준한 투자를 통해 반도체 시장에서 자리를 잡는다. 1983년 최첨단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한 뒤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 1986년엔 1M(메가) D램 개발에 성공한다. 1990년대 개인용 컴퓨터(PC) 열풍이 불었고, 1995년 3조5000억 원의 이익을 내면서 고인의 고집은 대성공을 거둔다. 삼성 전직 임원들은 이 전 회장의 ‘자율’과 ‘위임’ 리더십을 성공 비결로 꼽는다. “회장의 키워드는 ‘깡, 응집력, 고집, 용기, 겁 없음’”(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 “체어맨 리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는 평가를 보면 고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달 25일은 고인의 2주기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의 위세가 거센 요즘, 고인의 도전정신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는 건 어떨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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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 써보니 알것같다 왜 그리 쪼들렸는지[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절약이 미덕인 시대다. 배달 음식을 시키려다 집에서 밥을 해 먹고, 과일은 사치라 여기며 장바구니에서 슬쩍 뺀다. 물가가 치솟는 이때 자린고비 정신만이 보릿고개를 버틸 방법. 지독한 짠돌이가 쓴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소비단식 일기’는 경영학 박사 출신인 저자가 자신의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인 경험을 담은 에세이다. 어느 날 저자는 신용카드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알림을 받는다. 신용카드 한도의 90% 이상을 사용했으니 한도를 올리라는 통지였다. 저자는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내역을 살펴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 필요해서 산 것뿐이다. 저자를 바꾼 건 책이다. 저자는 전자책(e북)으로 에세이 ‘나는 빚을 다 갚았다’(2016년)를 읽게 된다. 미국의 평범한 직장인이던 애나 뉴얼 존스는 무분별한 소비로 빚더미에 앉았다. 카드 대금을 제때 내지 못해 이월해 막은 리볼빙 서비스를 쓰다 빚을 갚지 못한 것. 필수품을 제외하곤 자신을 위한 돈은 쓰지 않는 이른바 ‘소비단식’으로 빚을 다 갚은 존스를 보고 저자는 결심한다. 자신도 한번 소비단식을 해보자고.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저자의 결심은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 저자는 결심한 다음 날에 8만9000원을 쓴다. 부업을 해보겠다는 핑계로 온라인 강의 사이트에서 결제한 것. 둘째 날엔 케이크와 커피를 사느라 6만 원을 썼다.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바뀌자 선물을 사 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려 보려고 결제했던 포토숍 프로그램 비용을 전액 환불하고 대신 무료 앱을 쓰기로 했다. 휴대전화 요금제는 저렴한 것으로 바꾸고 와이파이를 자주 사용했다. 버터, 치즈, 와인을 사 먹는 게 취미였지만 이를 내려놓는다. 집에 쌓여 있는 줄무늬 티셔츠와 청바지는 더 이상 사지 않았다. 저자의 삶은 조금씩 바뀌었다. 2년을 노력한 끝에 저자는 신용카드 대금 500만 원, 학자금 대출 200만 원, 마이너스 통장 100만 원 등 총 1600만 원에 달하는 빚을 모두 청산한다. 주목할 만한 건 저자가 왜 자신이 돈에 쪼들리기 시작했는지 돌아보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게 정말 필요할까?’를 넘어 ‘내가 이렇게나 소비를 했던 이유는 뭐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 결과 자신이 우울과 불안으로 빈 마음을 소비로 채우려 했음을 깨닫는다. 육아와 일로 받은 스트레스를 돈을 쓰며 해소했던 것이다. 요즘처럼 물가가 오르는 때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저소득층에 물가가 오르는 건 치명적이고, 이에 대응하는 정부 정책이 중요하다. 다만 개인으로선 자신이 여태까지 한 소비가 옳았는지 한번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건 어떨까. “소비단식을 하는 조심스러운 생활 속에도 행복한 순간들이 곳곳에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인플레이션이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갈 수 없도록.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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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원치않는 일 겪기 마련… 어떻게 살아남는가 그리고 싶었다”

    “휴가라고 생각해. 그동안 쉬지 않고 일했잖아.” 한 광역시 시장의 측근인 황선호는 6개월 동안 한국을 떠나라는 지시를 받는다. 유력 대선 후보로 꼽히는 시장은 건설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를 무마하려 황선호에게 죄를 뒤집어쓰라고 지시한 것. 시장은 “부탁한다”고 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비리의 주도자가 되거나 시장 곁에서 쫓겨나거나.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결국 황선호는 머나먼 아프리카에 있는 ‘보보민주공화국’이란 곳으로 간다. 14일 출간된 장편소설 ‘이국에서’(은행나무·작은 사진)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고국을 떠난 한 남성의 고독한 여정이 담겨 있다.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받은 이승우 작가(63·큰 사진)의 신작. 그가 장편을 선보인 건 2019년 8월 ‘캉탕’(현대문학) 이후 3년 만이다. 18일 전화 인터뷰를 한 이 작가는 “현실 정치가 떠오른다”고 하자 특정 사건을 모티브로 쓴 건 아니라고 했다. “황선호가 겪는 일이 한국 정치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라 생각되긴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원치 않은 선택을 강요받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를 그리고 싶어서 정치적인 사건을 (보조 장치로) 택했죠.” 황선호는 도시 3개를 경유해 26시간 만에 보보민주공화국에 도착한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으려 낡은 호텔에서 오랫동안 은신한다. 이따금 거리를 걷긴 하지만 시장에게 피해를 줄까 봐 한국에는 연락도 하지 않는다. 상당히 무거운 주제지만 내밀한 심리 묘사와 유려한 문장 덕에 소설은 술술 읽힌다. 어딘지 모를 이국에 갇혀버린 그의 상황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갇혀 지낸 우리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18, 2019년 문학잡지 ‘악스트’에 연재한 걸 3년에 걸쳐 틈틈이 고쳤어요. 코로나19가 심각하던 시기에 개작한 만큼 단절과 폐쇄에 대한 정서가 짙게 묻어 있죠. 완벽한 고립 상태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것. 황선호와 우리 모두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보보민주공화국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정치적 혼란이 거세지며 외국인에 대한 제재도 엄격해진다. 황선호는 쫓겨나지 않으려 여러 방편을 찾는다. 그러다 우연히 이 머나먼 땅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어떤 사건’을 마주하게 되는데…. “개개인의 인생도 결국은 집단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다만 5·18민주화운동을 다룰 때는 혹시나 도구적으로 소비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그 사건은 황선호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과거로 이어지며 소설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는다. 황선호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서사는 작가의 1982년 장편소설 ‘생의 이면’(문이당)이 떠오른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담았던 당시처럼, 이번에도 그의 삶이 투영된 걸까. 그는 망설이다 긴 침묵 끝에 말했다. “전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잃었어요. 그 뒤로 고향(전남 장흥)을 떠나 한참 동안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쓴 건 아니지만, 작품에 어릴 적 제 경험과 기억이 어쩔 수 없이 담기는 것 같아요. 태어난 곳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서사를 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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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은, 손에 뭘 들었느냐에 따라 달라져

    그림책 양 페이지에 사내가 한 명씩 섰다. 살짝 벗겨진 머리, 바지 아래 맨발…. 둘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기다란 막대기를 든 포즈마저 같다. 그런데 왼쪽 남성이 든 막대기는 끝이 뭉뚝한 삽이다. 그 삽에 빵을 올려 화덕에 넣고 있다. 반면 오른쪽 남성의 막대기 끝은 뾰족하고 빨갛다. 뭔가를 찌른 뒤 붉게 물든 창(槍)이다. 7일 출간된 그림책 ‘우화’(비룡소)는 비슷하지만 다른 인간의 상반된 모습들이 묵직하게 이어진다. 17일 화상으로 만난 폴란드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62·사진)도 그림처럼 사뭇 진지해 철학자나 인문학자 느낌이 물씬했다. “유럽인에게 주식인 빵을 굽는 건 사람을 먹여 ‘살리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같은 자세인 남성의 손에 창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죽음과 맞닿아 있죠. 인간은 ‘손에 뭘 쥐고 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걸 보여줍니다.” 흐미엘레프스카는 세계 3대 아동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을 3차례나 받은 유명 작가다. 올해 3월 이수지 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어린이책의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에도 3차례 오를 정도로 그의 작품은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다. ‘우화’는 기획 때부터 비룡소와 협업해 이번이 세계 첫 출간이다. 흐미엘레프스카는 평소 한국에 관심이 많아 2005년 한글 자모를 형상화한 ‘생각하는 ㄱㄴㄷ’(논장)을 이지원 작가와 펴내기도 했다. 그는 “한국은 열정적이고 시스템이 체계적이라 함께 일하기 좋다”고 했다. ‘우화’를 그린 계기는 최근 유럽에 불어닥친 혼란이었다. 흐미엘레프스카는 “지난해 난민을 둘러싼 벨라루스와 폴란드의 갈등이나 올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그림책에서 우산을 쓴 여성과 총을 겨눈 여성, 꽃다발 든 남성과 수갑이 채워진 남성이 “대비된 평화와 폭력”을 줄곧 떠올리게 한다. “저는 폴란드의 작고 조용한 동네에 삽니다. 그런 마을에도 우크라이나 난민이 많아요. 여성들은 먹고살기 위해 거리에서 음식을 팔고, 아이들은 발버둥치죠. 폴란드인도 러시아가 쳐들어올까 봐 두려워해요. 폭력과 전쟁의 비극이 그림책에 가득한 걸 부정할 수 없네요.” 그림책 속 수많은 인물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어딘가를 응시한다. 눈빛을 볼 순 없지만 뒷모습에선 절망과 긴장감이 배어난다. 글이 없어 생각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그들은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 걸까. “(글을 쓰지 않은 건) 보여주고 싶은 것만 전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설명하지 않을 때, 독자들은 뭔가 다른 것을 찾아냅니다. 제 목소리는 작아서 폭력과 전쟁을 멈출 수 없어요. 하지만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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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은 손에 뭘 쥐었느냐 따라 달라져”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에 사내가 각각 한 명씩 있다. 살짝 벗겨진 머리,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셔츠, 바지 아래로 드러난 맨발…. 두 사내의 생김새는 쌍둥이처럼 유사하다. 양손으로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는 포즈마저 똑같다. 그런데 왼쪽 사내가 든 막대기는 끝이 뭉뚝한 삽이다. 왼쪽 사내는 삽 위에 빵을 올린 뒤 오븐에 넣고 있다. 반면 오른쪽 사내가 든 막대기의 끝은 뾰족하고 빨갛다. 누군가를 찌른 직후 붉게 물든 창(槍)이다. 7일 출간된 그림책 ‘우화’(비룡소)는 이처럼 누군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인간의 상반된 모습이 담겨 있다. 17일 화상으로 만난 폴란드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62)는 어둠이 짙게 서린 표정으로 이 그림을 설명했다. “유럽 사람들에게 빵을 굽는 일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같은 포즈를 한 사내의 손에 창이 들려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느냐에 따라 그림이 전혀 달라지죠.” 이보나는 세계 3대 아동문학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을 3차례 수상한 국제적인 그림책 작가다. 올 3월 한국인 최초로 이수지 작가가 수상해 널리 알려진 ‘어린이책의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에도 3차례 올랐다. 그가 신작을 집필한 건 유럽에 닥친 혼란 때문이다. 지난해 말 그가 책을 그릴 땐 중동 난민을 둘러싼 벨라루스와 폴란드의 갈등이 러시아와 유럽연합(EU)의 힘겨루기로 번지고 있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집필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작에서 평화와 폭력을 대비시킨다. 한 페이지에서 왼쪽 여자의 손엔 우산이, 오른쪽 여자의 손엔 총이 쥐어져있다. 다른 페이지에서 왼쪽 남자의 손엔 꽃다발이, 오른쪽 남자의 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다. “제가 사는 곳은 폴란드의 작고 조용한 동네에요. 그런 동네에도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많습니다.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음식을 팔고, 아이들은 낯선 상황에 적응하려 발버둥치죠. 폴란드 사람들도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요. 이 책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비극으로 읽히는 건 부인할 수 없네요.” 신작에서 등장인물들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뒷모습에선 절망과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책엔 글자가 하나도 없어 그들이 무엇에 떨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왜 설명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차분히 답했다.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전달하고 싶지 않았어요. 설명하지 않을 때 독자들은 그림에서 다른 것을 찾아내죠. 제 목소리는 작아서 폭력과 전쟁을 멈출 수 없어요. 다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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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쉬운 문장, 공감 소재로… 에세이 작가들, 잇달아 소설가 데뷔

    30세 여성 슬아는 생활형 작가이자 “출판계는 불황”이란 말에 항상 짓눌리는 소규모 출판사 대표. 매일 업무와 강의 등에 쫓기며 고군분투한다. 그런 슬아가 가족 생계를 위해 엄마 아빠를 출판사 직원으로 채용한다. 가부장이 아닌 ‘가녀장(家女長)’이 된 슬아는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7일 출간된 ‘가녀장의 시대’(이야기장수)는 경계가 애매모호한 소설이다. 지은이는 출판사 대표이며 에세이 시리즈로 주목받은 이슬아 작가(30). 소설도 이게 실제 경험담인지 픽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실제로 이 작가는 가족과 함께 출판사를 꾸린 경험이 있다고 한다. 최근 출판계에서 이 작가처럼 에세이나 교양서로 화제를 모은 작가들이 소설가로 데뷔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미 탄탄한 팬덤을 구축하고 있어, 책 판매량은 기존 정통 소설가들을 넘어서는 분위기다. 집안의 경제권을 쥔 주인공 슬아의 좌충우돌을 그린 ‘가녀장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출간되자마자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이달 둘째 주 종합순위 5위에 오르더니, 벌써 1만 부 이상이 팔렸다.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는 “이 작가는 유료로 제공하는 에세이 시리즈 ‘일간 이슬아’로 20, 30대 여성들 사이에 엄청난 팬덤이 형성돼 있다”며 “별다른 비유나 수사가 없는 간결한 문체와 현학적이지 않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같은 날 출간된 단편소설집 ‘언러키 스타트업’(민음사)도 에세이 작가인 정지음이 펴낸 첫 소설집. 정 작가는 지난해 6월 자신의 정신질환을 털어놓은 첫 에세이집 ‘젊은 ADHD의 슬픔’(민음사)이 약 2만 부가 팔리며 ‘핫한’ 작가로 떠올랐다. 단편소설집도 여러 온라인서점에서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박혜진 민음사 문학2팀장은 “정 작가가 자신이 겪은 황당한 에피소드를 자신의 블로그에 에세이로 써뒀다가 이를 모아 소설로 개작해 출판했다”며 “현실에 바탕을 둔 소재라서 그런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란 공감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문교양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도 관심을 끌고 있다. 작가 채사장은 2014∼2020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로 300만 부 이상을 판매한 파워작가. 지난해 12월 출간한 장편소설 ‘소마’(웨일북)는 문학적 평가는 다소 엇갈리지만 꾸준하게 잘 나가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올해 5월 리커버북이 출간될 정도로 팬층이 두껍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소설을 범접하기 어려운 예술 장르가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웹툰처럼 여러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커졌다”며 “과거보다 소설의 문학성에 대한 잣대가 덜 엄격해지면서 문장을 쉽게 쓰고 기획력이 좋은 에세이·교양서 작가들의 소설 집필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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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라리 “AI가 이걸 썼다니… 깜짝 놀랐다”

    “정말 인공지능(AI)이 이 글을 썼단 말인가?” ‘사피엔스’(김영사) 저자인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46)는 최근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판 서문을 보고 놀랐다. 해당 글은 AI 가운데 최고 수준의 자연어처리 모델로 꼽히는 ‘GPT-3’가 하라리의 책, 논문, 인터뷰를 모아 작성한 것. 수정이나 편집은 하지 않았다. 하라리는 글을 읽는 동안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며 “정말 깜짝 놀랐다”고 그 역시 ‘사피엔스’ 특별판 서문에서 고백했다. “글 자체는 잡동사니를 조합해 만든 잡탕이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글이 다 그렇잖은가? 내가 ‘사피엔스’를 집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책, 논문, 인터뷰 글을 다 끌어모아서 서로 다른 아이디어와 사실을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언뜻 보면 AI가 쓴 글은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파고드는 ‘사피엔스’의 요지를 담은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 우리는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상상 속의 질서 덕분에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전례 없는 번영과 복지도 이뤘다. 하지만 그 상상 속의 질서가 오늘날 우리를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다만 하라리는 AI가 쓴 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나라면 결코 글로 쓰지 않았을 아이디어가 많이 포함됐다. 납득하기 어렵거나 명백하게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보였다. 그 결과물은 문학적이면서 지적인 잡탕처럼 보인다. 일단 안심이 된다. 적어도 몇 년간은 GPT-3이 내 일자리를 빼앗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AI가 앞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AI 혁명은 ‘우리가 알던 방식의 인류 역사가 끝났다’는 신호”라며 “역사상 처음으로 힘의 중심이 인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한편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김영사) 2022년 특별판 서문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밝혔다. 그는 “만일 푸틴의 도박이 성공한다면 결국 세계 질서가 붕괴하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이라며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를 위해 써야 할 돈이 탱크, 미사일, 사이버 무기에 쓰일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새로운 지옥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는 것을 미루다 보면 출구 없는 곳에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며 “우리 인간이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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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AI가 썼단 말인가”… 하라리, ‘사피엔스’ 서문 읽고 놀라

    “정말 AI가 이 글을 썼단 말인가?” ‘사피엔스’(김영사) 저자인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46)는 최근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판 서문을 보고 놀랐다. 해당 글은 AI 가운데 최고 수준의 자연어처리 모델로 꼽히는 ‘GPT-3’가 하라리의 책, 논문, 인터뷰를 모아 작성한 것. 수정이나 편집은 하지 않았다. 하라리는 글을 읽는 동안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며 “정말 깜짝 놀랐다”고 그 역시 ‘사피엔스’ 특별판 서문에서 고백했다. “글 자체는 잡동사니를 조합해 만든 잡탕이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글이 다 그렇잖은가? 내가 ‘사피엔스’를 집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책, 논문, 인터뷰 글을 다 끌어 모아서 서로 다른 아이디어와 사실을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언뜻 보면 AI가 쓴 글은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파고드는 ‘사피엔스’의 요지를 담은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 우리는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상상 속의 질서 덕분에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전례 없는 번영과 복지도 이뤘다. 하지만 그 상상 속의 질서가 오늘날 우리를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다만 하라리는 AI가 쓴 글에 대해 부족한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나라면 결코 글로 쓰지 않았을 아이디어가 많이 포함됐다. 납득하기 어렵거나 명백하게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보였다. 그 결과물은 문학적이면서 지적인 잡탕처럼 보인다. 일단 안심이 된다. 적어도 몇 년간은 GPT-3이 내 일자리를 빼앗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AI가 앞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AI 혁명은 ‘우리가 알던 방식의 인류 역사가 끝났다’는 신호”라며 “역사상 처음으로 힘의 중심이 인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한편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김영사) 2022년 특별판 서문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밝혔다. 그는 “만일 푸틴의 도박이 성공한다면 결국 세계 질서가 붕괴하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이라며 “교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를 위해 써야할 돈이 탱크 미사일 사이버 무기에 쓰일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새로운 지옥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는 것을 미루다 보면 출구 없는 곳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며 “우리 인간이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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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간 열흘 만에 1만 부…에세이 교양서 작가들의 ‘소설 전성시대’

    30세 여성 ‘슬아’는 생활형 작가이자 “출판계는 불황”이라는 말을 수시로 듣는 작은 출판사 대표다. 매일 출판사 업무, 글쓰기 강의, 언론 인터뷰에 쫓기면서 고군분투한다. 그런 슬아가 어느 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엄마 아빠를 출판사 직원으로 채용한다. 집안의 경제권을 쥔 슬아는 좌충우돌 여러 사건을 마주하게 되는데…. 가부장이 아닌 ‘가녀장’(家女長) 슬아는 과연 가장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7일 출간된 장편소설 ‘가녀장의 시대’(이야기장수)는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이 작품을 쓴 이는 에세이 작가이자 헤엄 출판사 대표인 이슬아(30)다. 가족들과 함께 일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처음 소설을 썼는데 반응이 폭발적이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 10월 둘째 주 종합 순위 5위를 차지했고, 출간 열흘 만에 1만 부가 팔렸다.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는 “한 달 1만 원에 매일 글을 받아보는 에세이 시리즈 ‘일간 이슬아’로 팬덤을 형성한 이슬아 작가에게 20, 30대 여성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며 “비유나 수사 없는 간결한 문체, 현학적이지 않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쓰는 에세이 작가의 장점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고 말했다.최근 에세이나 교양서로 화제를 끈 작가들이 펴낸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이들은 신춘문예 등 정식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유명 소설가들 못지않은 팬덤을 바탕으로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7일 출간된 단편소설집 ‘언러키 스타트업’(민음사)은 에세이 작가인 정지음이 펴낸 첫 소설집이다. 정 작가는 지난해 6월 자신의 정신질환을 고백한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민음사) 펴냈는데 이 책이 2만 부 팔려 ‘핫한’ 작가로 떠올랐다. 올 2월 에세이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빅피시)까지 단 2권의 에세이를 출판한 신인이지만 ‘언러키…’는 출간 직후 각종 서점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언러키…’ 역시 에세이 작가의 특성이 짙게 묻어난 작품. 박혜진 민음사 문학2팀장은 “작가가 자신이 겪은 황당한 에피소드를 블로그에 에세이로 써뒀던 것을 소설로 개작해 출판했다”며 “진짜 현실에서 벌어질법한 사건이 담겨서인지 독자들에게 와 닿는 것 같다”고 했다.2014년부터 2020년까지 펴낸 인문교양서 시리즈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지대넓얕)이 300만 부 팔려 화제에 오른 작가 채사장은 지난해 12월 자신의 첫 장편소설 ‘소마’(웨일북)를 펴냈다. ‘소마’에 대해 문학적인 평가는 엇갈리지만, 가독성이 높고 일상적인 언어로 쓰인 점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올 5월 리커버북이 출간됐을 정도로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소설을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여러 ‘이야기’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커지면서 과거보다 ‘문학성’에 대한 잣대가 덜 엄격해졌다”며 “읽기 쉬운 문장과 시대 흐름을 파고드는 기획력을 지닌 에세이, 교양서 작가들의 소설 전성시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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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0년 족쇄’ 벗은 그녀들은 왜 행복해지지 않았을까[책의 향기]

    1860년 중국의 항구도시 샤먼(廈門). 영국 선교사 존 맥고언 목사의 부인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웃집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뛰어가니 어머니가 딸의 발을 조여 매고 있었다. 발을 헝겊으로 싸매 인위적으로 작게 만드는 전족(纏足)이었다. 맥고언 부인은 말리려 했지만 어머니는 크게 화를 냈다. “전족은 우리가 과거부터 물려받은 기구한 운명”이라며 “만약 전족을 하지 않는다면 딸은 비웃음을 당하고 경멸의 대상이 된다”고 강변했다. 충격을 받은 부인은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이를 알렸다. 15년 뒤인 1875년 맥고언 목사는 이른바 ‘반(反)전족 운동’을 펼쳤다. 전족은 낡은 관습이고, 여성을 옭아맨다며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전족은 중국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았고 차츰 사라져 갔다. 물론 1999년에야 중국에 전족 신발을 생산하는 마지막 공장이 폐쇄됐을 정도로 그 고통의 역사는 길고 지난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버나드칼리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초점을 맞춘 건 바로 이 시점부터다. 홍콩계 미국인인 그는 전족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되, 1000년 가까이 보편화됐던 전족 문화가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담담하게 추적한다. 고전문학은 물론이고 신문이나 정부 문서, 서양인의 회고록 등을 두루 훑으며 퍼즐을 맞춰 간다. 전족은 참혹한 전통이지만, 반전족 운동이 성공한 배경에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 아편전쟁 후 문호를 개방한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세력이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며 전족을 대표적인 중국의 악습으로 규정한 것이다. 반전족 운동에 앞장선 선교사들은 전족의 반대 개념으로 ‘천족(天足)’이란 신조어도 만들어낸다. “하느님이 준 자연스러운 발”이란 뜻으로 자신들의 기독교적 가치가 옳다는 의도다. 이 과정에서 전족에 반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행동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보기에 그들은 서양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대표적 중국 개혁운동가였던 캉유웨이(1858∼1927)는 1898년 상소문을 올려 전족을 국가에서 금지하길 촉구해 다른 지식인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족의 진짜 피해자인 여성들의 목소리는 배제됐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전족을 옹호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작은 발이 아름답다는 그릇된 환상은 권력자였던 남성들이 만든 ‘에로티시즘’이라 정의했다. 옛 중국의 남성 문인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할 때 늘 애첩의 작은 발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양갓집 규수들도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소족회(小足會)’를 운영했을 정도다. 모든 게 남성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반 전족 운동 이후 여성들의 삶이다. 중국 명절인 청명절(淸明節)이면 정성껏 작은 발을 단장해 내보이는 게 당연한 줄 알았던 이들. 전족이 폐지되며 그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갑자기 전족을 없애자 이미 작아진 발은 기형적으로 변했다. 전족을 할 땐 힘들어도 걸을 수 있었지만 전족을 풀자 걷기 힘들 정도로 발이 뒤틀려 버려 더욱 고통을 받았다. 전족이란 관습도, 반전족 운동도 여성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제인 ‘신데렐라의 자매들(Cinderella‘s Sisters)’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왕자는 예쁜 구두를 찾은 뒤 거기에 ‘발이 맞는’ 신데렐라를 찾아 헤맨다. 이젠 발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왕자의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아야 할 때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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