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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별명 중에서는 이런 것도 있다. 말이 안통하네트(마리 앙투아네트의 변형). 어제 기자회견을 본 사람 중에는 콘크리트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 든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라며 체념을 토로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저희 백성들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라는 자조 섞인 반응도 나왔다. 예전에는 좌파정권이면 우파매체가 비판하고 우파정권이면 좌파매체가 비판했는데 이번 정권에는 좌우 매체가 합심해서 비판했는데도 씨도 안 먹혔다. 박 대통령이 고집이 세서 안 먹혔다고 볼 수도 있고 ‘카더라’ 소문만 물고 늘어진 부당한 공격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내칠 수 없다고 못박음으로써 공격자들에게 후퇴의 명분이 될 전리품도 남겨주지 않았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이명박 전 대통령도 광우병 시위에 밀려 청와대 뒷산에 올라 훌쩍거렸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고집 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를 두고 ‘영국 안의 유일한 남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박 대통령도 ‘청와대 안의 유일한 남자’로 불릴 만하다. 다만 유연성이 떨어지는게 문제다. 박 대통령은 모두 발언이 끝나고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딴 사람이 된 듯 어눌해졌다. 모두 발언에서 스마트팜, 할랄시장 같은 전문 용어를 수두룩하게 나열하던 어휘력도 크게 떨어졌다. 그런 식으로라면 면접시험은 100% 낙방이다. 저녁에 보고서는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지 모르지만 대화가 부족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수다와 같은 대화다. 여성의 수다는 남성의 술자리 같은 것이다. 대처는 다우닝가의 총리 관저에서 회의가 길어지면 보좌관들을 위해 손수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수다’를 나눴다고 한다. 그것은 각계각층 국민을 청와대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나 장관들의 대면보고를 필요하면 조금 더 늘려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박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 등 예민한 질문에 답변할 때 억울해하는 감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박 대통령은 “정윤회 씨와 이재만 등 세 비서관이 잘못이 없는 줄 진작 알았지만 이번에 검찰이 샅샅이 털어보니 정말 잘못이 없는 게 드러난 게 아니냐”고 말했다. 억울함이 근거가 없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이 억울하다고 해서 그 억울함이 국민에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대통령답지 못하다. 영국 타블로이드판 신문 선이 휴양 중 옷을 갈아입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엉덩이 사진을 찍어 보도한 적이 있다. 독일 타블로이드판 신문 빌트는 “스타킹 차림의 영국 여왕 사진을 실으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분개했다. 그때 메르켈 총리는 “보도는 고상한 영국적 취향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고 소송제기는 하지 않고 끝내버렸다. 이런 총리의 반응에 대해 독일 신문들은 “진정한 위정자다운 면모”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도 진정한 위정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산케이 신문에 대해서는 외교문제도 있고 하니 대통령 본인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 좋겠다. 세계일보에 대해서도 사과문 정도로 타협을 봐야 한다. 박 대통령이 ‘드물게 보는 사심 없는 분’이라고 언급한 김기춘 비서실장은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는 만큼 청와대가 안정되는 대로 사직을 허하는 것이 좋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민정계 최창윤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된 뒤 영남 출신인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노이긴 했지만 바른 소리 잘하는 유인태를 정무수석으로 뒀다. 박 대통령도 이제 생각이 좀 다른 사람을 써보면 어떨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자살하는 사람은 머뭇거린다. 대부분 한 번에 목숨을 끊지 못하고 여러 번 시도하다가 실패하거나 마지막으로 치명상을 가해 죽는다. 이때 치명상이 아닌 자해로 생긴 손상을 주저흔(躊躇痕·주저한 흔적)이라고 한다. 서초 세 모녀의 살인범 강모 씨(48)의 손에도 자살을 머뭇거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내와 두 딸을 목 졸라 죽였으나 제 손으로 자신을 죽일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강 씨는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컴퓨터 3D 디자인 업체 부장, 강남 11억 원대 아파트 보유, 혼다 어코드 보유’라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던 모양이다. 3년 전 사오정의 나이에 실직한 뒤 아파트를 담보로 5억 원을 대출받아 매월 400만 원씩 아내에게 생활비로 준 것도, 고시원을 오가며 출근하는 행세를 한 것도, 아내가 실직을 눈치챈 뒤에도 딸들에게 계속 비밀로 한 것도, 동창회비로 매년 30만 원을 낸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그는 실직을 만회해보려고 주식투자를 했으나 2억7000만 원을 날렸다. 그의 진짜 위기는 주식투자 실패로 직장을 계속 다니는 척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상황에서 왔다. 딸들에게도, 양가 부모들에게도, 동창들에게도 숨길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유서에 ‘막판에 왔다’고 썼다. 실직 상태에서의 2억7000만 원 손실은 대단히 큰 것이지만 막판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다. 11억 원의 아파트를 팔아 5억 원의 대출을 갚고 통장 잔액 1억3000만 원을 보태면 그에게는 아직도 7억3000만 원이 남는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을 죽인 뒤 차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충북 청주에 도착한 뒤 119안전센터에 전화해 “아내와 딸을 죽였다”고 자진 신고하고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 목적지도 없이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경북 문경에서 검거됐을 때 자신이 어디에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의 억새풀 같은 가장과는 판이한, 유리잔같이 깨지기 쉬운 이 시대 한 가장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몹시 씁쓸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경제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논쟁은 19세기 초반 영국 곡물법 폐지를 둘러싼 리카도와 맬서스의 논쟁이다. 리카도의 자유무역과 맬서스의 보호무역이 맞붙어 자유무역이 승리했다. 20세기에 다시 큰 논쟁이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에 벌어졌다. 케인스는 국가의 적극적 시장 개입을, 하이에크는 가능한 한 시장에 맡길 것을 주장했다. 처음에는 케인스주의가 승리한 듯 보였으나 결국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가 승리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논쟁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폴 크루그먼,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한편에, 그레고리 맨큐가 다른 한편에 있다. 지난해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영역되면서 전선은 크루그먼의 지지를 받는 피케티와 맨큐 사이로도 번졌다. 피케티와 맨큐가 최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경제학회 연차학술총회에서 맞붙었다. 피케티는 주요 선진국의 300년 조세 자료를 분석해 부의 소수 집중을 증명했지만 맨큐의 응답은 “그래서 어쩌라고?”였다. 부의 불균형은 경제적 기여의 당연한 대가라는 것이다. ▷피케티 훨씬 이전에, 피케티보다 훨씬 유명한 경제학자가 프랑스에 있었다. 장바티스트 세이다. 세의 법칙은 공급이 이뤄지면 수요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므로 공급 과잉은 없다는 것인데 리카도와 맬서스 논쟁에도, 케인스와 하이에크 논쟁에도 세에 대한 입장이 깔려 있다. 맬서스와 케인스는 세의 법칙을 부인한다. 자본주의는 놔두면 공급 과잉으로 위기에 빠진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고 이 점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마르크스다. ▷피케티의 책 제목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패러디했지만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부유세 부과 같은 정치적 개입으로 부의 소수 집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부유세는 한 나라에서만 부과하면 부자가 다른 나라로 갈 수 있어 그가 주장한 것이 글로벌 부유세다. 반면 맨큐는 한 개인의 부는 세대를 거치면서 분산되고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평균치에 접근한다고 본다. 쉽게 어느 쪽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그래서 논쟁은 계속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성욕에는 정년이 없다는 말이 있다. 노인도 성욕이 있다. 그러나 노인의 성욕이 아니라 노인을 향한 성욕은 적응이 잘 안 된다. 노인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을 노인성애증(gerontophilia)이라고 한다. 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소아성애증(pedophilia)과 마찬가지로 병적인 증상이다. 남자 노인을 향한 성욕을 알파메가미아, 여자 노인을 향한 성욕을 아닐릴라그니아라고 부른다. 노인성애증이라는 말은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이 만들어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정신의학자다. ▷인천의 가방 시신 살해범 정형근이 할머니를 성폭행하려다 할머니가 저항하자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정형근은 할머니와 술을 마시다 욕정이 생겨 성폭행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가 저항하자 옆에 있던 사기 물컵으로 할머니를 폭행해 쓰러뜨렸으며, 이후 할머니가 숨진 줄 알고 가방에 담으려다 숨지지 않은 사실을 알고 흉기로 살해했다. 살해범은 55세이고 피해자 할머니는 71세다. ▷그러나 가해자의 병적 도착으로만 노인 대상 성범죄를 설명할 수 없다. 깁스를 하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 성애를 느끼는 것을 보행장애인 성애증(abasiophilia)이라고 한다. 병적 도착이라기보다는 저항이 어려운 상대를 골라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가깝다. 노인도 자력으로 스스로 보호할 힘이 약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노인이 쉽게 강도 절도의 피해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도착적이지 않은)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2년 전 경기 평택시의 한 병원에서 62세 여성 환자가 33세 남자 간호조무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으나 가족한테 알리지도 못했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지만 “먼저 유혹하지 않았으면 그랬을까”라는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인천 살해 사건도 성폭행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71세 할머니가 쉽게 신고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범인은 이런 점을 노린 건지 모른다. 여성 노인의 성범죄 피해에 사회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월 29일자 사설 ‘이석기 내란죄인지도 모르고 구명 나선 카터센터’ 중 이 씨가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내란 음모가 아니라 내란 선동입니다. ◇29일자 A6면 ‘광고총량제, 지상파방송만 살찌워’ 기사에서 방송협회가 광고총량제에 따른 지상파방송 매출 증가액을 연간 2759억 원으로 보고 있다는 내용은 올 9월 한국방송학회 세미나에서 나온 것으로 방송협회와는 관계없습니다.}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박탈당한 이상규 전 의원과 나는 대학 동기다. 동기라고는 하지만 학과 인원이 너무 많아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다. 그가 정치 활동을 시작한 후에야 간혹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소탈한 성격이지만 진지하면서도 실천력이 느껴지는 친구다. 그는 2012년 총선 때 서울 관악을에서 후보단일화 여론 조작에 연루돼 물러난 이정희 전 대표의 자리를 이어받아 의원이 됐다. 운이 좋았지만 그의 격의 없음과 부지런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는 의원이 된 후에도 밤늦게 귀가할 때는 버스 종점 주변에서 삼삼오오 어울리는 주민들의 술자리에 끼어들어 한잔씩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그는 정무위에 배치된 걸 못마땅해했다. 대학 졸업 이후 해온 게 노동운동밖에 없기 때문에 환경노동위에서 활동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정무위 소관인 금융을 잘 알 턱이 없다. 한번은 그가 ‘자본시장연구원’이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해 청중석 맨 뒷자리에 앉아 경청하는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 자본시장연구원장이 내 고교 동기라 어느 술자리에서 물어보니 행사 전에 그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고, 행사 때 직원이 보고 알려와 가서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공부를 해서라도 의원 일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의원이 되고 난 뒤 지역구인 난곡 꼭대기에 2억9500만 원짜리 아파트를 2억7500만 원 빚을 내 샀다. 오십 나이에 부인과의 사이에 두 살과 여섯 살짜리 자녀를 두고 있다. 난생처음으로 집도 장만하고 가정다운 가정을 꾸려보려 했는데 의원직 박탈로 다시 실업자가 됐다. 어쩌면 집을 팔고 의원이 되기 전에 하던 건설현장 배관공 일을 다시 해야 할지 모른다. 그는 김선동 전 의원처럼 국회에서 최루탄을 터뜨리지도 않았고, 이 전 대표처럼 여론 조작에 연루된 적도 없고, 무엇보다 이석기 김미희 김재연 전 의원의 RO(혁명조직) 모임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그 모임은 경기도당의 모임이어서 서울시당 소속인 그는 거기에 갈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철거민 동네인 성남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기도당은 예전부터 수뇌부를 정점으로 규율이 강한 조직이다. 통진당은 지역 운동권의 연합체인 전국연합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같은 당이라도 경기 서울 울산 광주·전남 등 시도당별로 조직과 활동 방식은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 내가 그의 면전에서 통진당 해산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도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말도 하지 않겠다는 식의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을 비판했지만 이런 말을 덧붙였다. “통진당이 해산 이전에 이미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 국민의 마음을 거론한 데서 우리가 그동안 이념이 다름에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공통의 기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과거 주사파 대부 김영환 씨가 밀입북해 받은 돈 중 500만 원을 1995년 그에게 줬다는 증언을 완강히 부인한다. 그는 이적단체에 연루돼 처벌받은 적은 없지만 검찰에 따르면 일심회의 대북보고서에 ‘주체사상의 중심이 확고히 선 동지’로 표현돼 있다. 그의 비밀을 내가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다만 약 20년 전 그 일은 김 씨의 말 이외에는 지금 와서 증명할 방법이 없다. 이런 식의 주장은 매카시즘만 조장할 뿐이다.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그 결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 통진당은 역사의 패배자가 됐다. 경기도당의 RO 모임은 일반 국민만이 아니라 다른 시도당의 통진당원들에게도 충격적이었을 수 있다. 이제 해산을 당한 쪽에도 스스로를 돌아봐서 변화를 모색할 여지를 줘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과거 왕조 시대에는 왕의 이름을 피하는 기휘(忌諱)의 풍습이 있었다. 임금님 같은 높은 분의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휘는 사라졌지만 기휘를 낳은 심리는 남아 있다. 대통령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처음 나왔을 때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여전히 현직 대통령을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북한에서 김정은은 최고 존엄이라 불린다. 존엄은 라틴어로 아우구스투스다. 고대 로마에서 최초의 황제가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얻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교부철학자다. 프랑스에는 존엄한 필리프(필리프 오귀스트)로 불린 위대한 왕이 있었다. 북한은 존엄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최고라는 수식어를 덧붙였다. 최고 존엄은 우리 식으로 지존(至尊)인데 그런 말은 기독교적 신 아니면 무협지 속의 비현실적 영웅에게나 붙이는 말이다. ▷북한 최고 존엄의 암살을 다룬 미국 코미디 영화 ‘인터뷰’의 극장 개봉이 무산됐다. ‘평화의 수호자(GOP)’라는 정체불명 집단이 얼마 전 “2001년 9월 11일을 기억하라”고 위협하자 영화관들이 상영을 포기했고 결국 영화제작사 소니픽처스가 개봉 계획을 철회했다. 지난달 GOP의 소니 해킹 당시 해킹에 쓰인 악성 소프트웨어에서 한글 코드가 발견돼 북한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고 존엄 앞에서 입을 가리고 웃는 황병서, 양손을 공손히 포갠 최룡해가 보였을 반응이 짐작이 간다. ▷이름과 이미지는 오늘날도 묘한 주술적 힘을 갖고 있다. 어느 나라든 자국 지도자가 암살되는 영화에 거부감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제작된 이상 테러 위협에 굴복해 상영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유럽에서 무함마드 캐리커처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독일은 덴마크 만평가 쿠르트 베스테르고르에게 언론상을 수여해 유럽에서 자유의 지표로 삼았다. 미국 작가 티머시 스탠리는 “완전히 쓰레기 같은 평가를 받은 영화가 미국의 표현의 자유를 중대한 시험대에 올려놨다”고 논평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재미교포 신은미 씨가 종북 논란 토크 콘서트에 대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면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지난해 문화부 우수 문학도서로 선정된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에 나온 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흔히 문화부 우수도서로 알고 있는 것은 우수 학술·교양 도서다. 우수 문학도서는 좀 다르다. 우수 학술·교양 도서는 좋은 책 출판을 진흥한다는 목적이 크지만 우수 문학도서는 책을 널리 읽힌다는 독서 진흥의 성격이 강하다. ▷우수 문학도서 선정은 2012년까지 한국도서관협회가 담당했다. 그러나 한국도서관협회가 도서관 이용률만 고려해 베스트셀러처럼 잘 읽히는 책 위주로 책을 선정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지난해 선정권이 시민단체인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으로 넘어갔다. 이 재단 홈페이지에는 재단과 연대한 시민단체로 문화연대, 한국작가회의(옛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주로 좌파 성향의 단체들이 소개돼 있다. ▷우수 문학도서는 5개 분야로 나뉘어 선정되는데 신 씨의 책은 수필 분야에서 뽑혔다. 수필 분야 선정위원장은 문학평론가 황광수 씨였다. 그는 한국작가회의 문화정책위원장, 민족문학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신 씨의 책이 우수 문학도서가 된 것은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이 지난해 선정 작업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어렵다. 올해부터는 우수 문학도서 선정 작업이 우수 학술·교양 도서 선정을 주관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합쳐졌다. 그러나 우수 학술도서와 우수 교양도서의 각각 11개 분야에 이미 문학이 한 분야로 들어가 있는데 우수 문학도서를 또 따로 선정한다는 건 우습다. 우수가 너무 많으면 우수의 격이 떨어진다. 문화부가 우수를 남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재미교포 신은미 씨의 종북 논란 강연에 항의해 일명 ‘로켓 캔디’를 던진 전북 익산의 고3 학생 오모 군은 범죄자이긴 하지만 청소년이다. 그런데도 입만 열면 관용을 외쳐온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어느 사회든 가장 기본적인 관용의 대상인 청소년에게 정작 털끝만큼의 관용도 보이지 않는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SBS 라디오의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오 군의 행위를 ‘전형적인 테러범의 방식’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적 기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불렀다. 오 군의 행위는 테러임에 틀림없지만 성인이 아니라 사리분별이 흐린 청소년의 행위다. 그가 직접 만들어 양은냄비에 담은 폭발물이 얼마나 대단한 살상력을 가졌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도 다 큰 성인이 엄청난 성능의 폭발물을 지니고 테러를 시도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균형감을 현저히 상실한 태도다. 프랑스에는 아프리카계의 위험한 청소년들이 많다. 말만 청소년이지 성인이나 다름없이 키가 크고 힘이 센 그들이 약한 여성이나 노인, 아시아계를 상대로 하는 갈취행위나 이유 없는 방화 및 손괴행위를 직접 당해보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이 청소년들의 범죄행위로 골머리를 앓은 지 수십 년이 됐다. 이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보려고 수차례 시도했지만 매번 청소년을 성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진보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하고 만다. 진보는 원래 그런 것이다. 오 군은 일간베스트저장소나 네오아니메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이런 커뮤니티에 극우적이라고 볼 만한 주장도 적지 않다. 오 군도 그런 성향을 일부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 군처럼 이런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상당수가 넓은 의미의 청소년이다. 이들이 잘못된 길을 간다면 어른들이 계도해야지 조롱이나 할 일은 아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나이 오십이 넘은 어른이, 그것도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사람이 애들을 상대로 일베충이니 찌질이니 성적 루저(loser)니 하는 말을 서슴없이 퍼붓는다. “일베는 사회의 낙오자들이 권력에 대한 좌절된 욕망에서 자신을 권력과 환상적으로 일체화한 후 그 환각에 빠져 권력이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권력의 주구(走狗)가 되어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라는 식의 독설도 주저하지 않는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는 한겨레신문에 “(오 군 등의 행위는) 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자기보다 힘센 자들을 공격하는 대신 약하고 만만한 희생양을 골라 불만을 배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 군이 파시스트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겨우 고3인 학생이 무슨 사회적 낙오자여서 사회에 불만을 배설할 필요를 느꼈을까. 또 고3 학생이 권력에 대한 무슨 좌절을 맛보았다고 권력과 환상적 일체화를 추구했을까. 오 군은 단순히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제 눈에 엉망인 사회를 자신이 나서 바로잡겠다는 영웅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힌 것인지 모른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좋은데 폭력으로 해결하겠다는 데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난 진보주의자가 아니라서 청소년도 잘못했으면 단단히 혼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다만 청소년기는 인생에서 젤(gel)과 같은 시기다. 실수는 하지만 아직 굳어지지 않은 그들을 확신범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많이 배운 어른들이 사고도 단순하고 글도 서툰 청소년들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웃고 조롱하는 것은 더 위험한 심리 상태로 몰고 갈 뿐이다. ‘싸가지 없는 진보’의 저자 강준만 씨가 책 속에서 공감 가는 말 한마디를 했다. “일베는 싸가지 없는 진보의 부메랑일 수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재미 작가 수키 김이 쓴 북한 여행기 ‘Without you, there is no us’(한글판 제목 ‘평양의 영어선생님’)가 작가 윤리에 관한 미묘한 논란에 휩싸였다. 이 책은 그가 2011년 평양과학기술대에서 6개월간 학생을 가르친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김진경 평양과기대 총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수키 김의 태도와 책, 거짓말로 정말 화가 난다. 그가 우리를 속였다”며 “특히 대학교수들이 선교사라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김 총장도 평양에서 대학을 꾸려나가자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수키 김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변호했다. “기자로서 북한을 3차례 다녀왔을 즈음 그곳에 정착하지 않으면 선전만 해줄 뿐 의미 있는 얘기를 쓸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평양과기대에서 가르칠 기회가 났다. 난 실명을 사용했고 대학은 내가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비밀 준수 계약에 서명한 적도 없고 글을 쓰지 않기로 약속한 적도 없다. 평양과기대 교수들이 선교를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목표는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황석영은 1989년 한 달 남짓 북한을 다녀와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황당한 방문기를 썼다. 북한이 보여주는 것만 둘러본 황석영의 글에 비해 수키 김의 책은 ‘잠입 저널리즘(undercover journalism)’의 사실 추구 정신이 빛난다. 그는 영리하게도 북한의 유일한 사립대인 평양과기대의 특수성을 이용할 줄 알았다. 다만 선교사 운운한 것은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소련 작가 솔제니친이 1956년 ‘수용소 군도’를 써내면서 스탈린 체제에 침묵했던 서구의 지식인들을 부끄럽게 했다. 우리에게는 1990년대 이후 탈북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수용소 군도’ 같은 역할을 했다. 아직도 재미교포 신은미 씨처럼 북한을 몇 번 여행하고 와서는 북한은 활기찬 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수키 김은 북한의 엘리트 계층 자녀에게조차 억압적 체제가 가져오는 무지와 불안을 예리하게 잡아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허니버터칩이 8월 처음 출시됐을 때는 두 개 사면 한 개 더 주는 ‘2+1’ 행사까지 했다는데 요즘은 허니버터칩 먹어봤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가게에 갔다가 허탕 치고 돌아왔다는 얘기만 한다. 다들 허니버터칩만 찾으니까 물량을 확보한 일부 가게들은 팔리지 않는 다른 과자를 묶어서 팔기도 하는 모양이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는 2일 “허니버터칩 같은 인기상품을 비인기상품과 같이 구입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법이 금지하는 끼워 팔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과자의 유행 같은 것에 별로 민감하지 않은 나도 지난주부터 이곳저곳에서 허니버터칩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조사인 해태가 일부러 생산량을 줄여 품귀 현상을 빚는 신종 상술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해태가 공장을 풀가동하다가 기계가 멈춰 어쩔 수 없이 생산량이 줄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어제 해태는 해명을 내놓았다. “강원도 원주 문막의 공장에서 3교대 24시간 생산체제를 갖추고 라인을 풀가동하고 있으나 주문량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유행이란 게 구름과 같아서 어떻게 일어나고 흩어질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허니버터칩이 인기를 끈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학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고 일부 인기 연예인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경쟁적으로 언급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는 게 그럴듯해 보인다. 유튜브를 통한 입소문으로 세계적 히트를 친 싸이의 ‘강남스타일’ 정도는 아니더라도 SNS 시대에 입소문이 무섭다는 걸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다. ▷올해의 유행 상품에 허니버터칩이 추가될 수 있을까. 감자칩이 짠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마는 허니버터칩은 감자칩은 짠맛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했다. 출시 직후 허니버터칩을 먹어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약간 달콤하고 고소한 감자칩이라고 한다. 과자 이름 그대로 감자칩에 꿀(허니)과 버터를 가미했다. 서양식 감자칩이 한국 사람 입맛에는 너무 짠 게 사실이다. 허니버터칩의 인기가 거품인지 어떤지는 아직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많아 좀 더 지켜봐야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기자도 기사만 쓰는 것이 아니라 정보 보고를 한다. 보고하는 정보는 기사화하기에는 설익은 단편적인 팩트일 수도 있고,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을 뿐이어서 확인이 필요한 얘기일 수도 있다. 전해 들었으면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함께 보고해야 신뢰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세계일보가 청와대의 정윤회 씨 동향 보고 문건을 공개했다. 문건 중 정 씨가 2013년 송년 ‘십상시’ 모임에서 지시한 내용을 다뤘다는 두 문장은 각각 ‘한다 함’과 ‘하였다 함’이란 말로 끝난다. 보고자가 직접 확인한 게 아니라 전해 들었다는 얘기다. 보고자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보고서에는 ‘제시하고 있음’처럼 직접 확인한 듯 끝맺은 내용도 없지 않다. 청와대는 그것까지 포함해서 “풍문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 해명을 믿든 안 믿든 보고자가 직접 확인한 사항과 전문(傳聞)을 의식적으로 구별해 쓴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전문에 출처가 없어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그것이 다시 직접 확인한 것처럼 쓴 내용의 신빙성까지 떨어뜨린다. 보고서에서 정작 흥미로운 것은 그 속에 나타난 ‘찌라시’에 대한 인식이다. 정 씨의 지시 사항을 담은 두 문장이 모두 “정보지(속칭 찌라시) 관계자들을 만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정보 유포’를 지시…” “정보지 및 일부 언론에서 ‘바람 잡기’를 할 수 있도록 유포를 지시…” 운운하고 있다. 내게 이것은 찌라시에 관한 액자(額子) 구조의 보고서로 읽힌다. 정 씨 관련 내용은 정 씨 모임의 성원을 ‘십상시’의 10명에 맞춰 현실을 역사적 사실에 끼워 넣은 듯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 찌라시를 모아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찌라시적이라고 볼 만한 구석은 많다. 그 내용이란 것도 찌라시를 가지고 뭔가 해보겠다는 것으로, 이 경우는 찌라시로 여론을 조작해 VIP를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찌라시가 지배하는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진실은 찌라시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결국 찌라시에 의해 움직입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만이 아니라 이제 엄밀해야 할 청와대의 보고서에조차 찌라시의 문체가 섞여들었다. 출처 표기 없이 ‘한다 함’이라고 쓴 ‘믿거나 말거나’ 문체 말이다. 언론도 찌라시에 의해 움직인다. 일본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전 지국장은 찌라시를 토대로 선데이서울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기사를 썼다. 그보다 앞서 찌라시에서 본 정 씨 소문을 무슨 대단한 것을 들은 양 쓴 한국 기자도 있었다. 찌라시는 매력적이다. 찌라시는 외딴 섬처럼 떨어진 사실의 조각들을 단번에 연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물속의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아 들어가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물 밖에서 상상한 것과 다른 현실이 있다. 찌라시에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는 저항 언론의 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는 아니다. 찌라시는 다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찌라시에는 내가 몰랐던 내 회사 얘기도 종종 있었고 나중에 보면 그게 사실인 것도 있어서 놀란 적도 있다. 찌라시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거짓은 진실이란 양념이 적절히 뿌려져 있을 때 더 효과적인 거짓으로 작동한다. 정보를 다루는 데는 맥시멀리즘(maximalism)적인 방식과 미니멀리즘(minimalism)적인 방식이 있다. 전자는 가능한 한 많이 믿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는 것만 빼는 것이고, 후자는 가능한 한 적게 믿고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는 것만 더하는 것이다. 전자는 신중하지 못해 보이고 후자는 한가해 보인다. 하지만 찌라시가 세상을 흔들수록 미니멀리즘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배심은 대(大)배심과 소(小)배심으로 나뉜다. 대배심은 기소 여부를 결정하고 소배심은 유무죄 평결을 내린다. 배심제는 영국에서 시작돼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로 퍼져나갔는데 오늘날은 미국에서 가장 발달했다. 대배심으로 말하자면 영국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미국에만 남아있다.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비무장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을 사살한 백인 경찰 대런 윌슨에게 대배심의 불기소 결정이 내려지면서 다시 폭동이 일어났다. ▷대배심은 소배심보다 중요해서 대배심이 아니다.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소배심과는 달리 과반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배심원 숫자가 소배심보다 많아 대배심이다. 브라운 사건의 대배심은 백인 9명, 흑인 3명 등 12명으로 구성됐다. 흑백 구성만 보면 인종적 편견이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고 의심할 수 있지만 배심 자체는 선거인 명부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것이어서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검사 혼자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면 더 심각한 폭동이 일어났을 수 있다. 그나마 대배심 결정이라 이만한 정도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대배심은 없지만 검찰은 기소 여부 결정에 논란이 예상될 경우 대배심처럼 구성된 시민위원회에 의견을 묻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 여고생한테 들키는 바람에 붙잡힌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에 대해 최근 검찰이 시민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기소유예했다. 검찰의 제 식구 봐주기라는 비판이 없지 않지만 시민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한 덕분에 비판의 강도가 덜하다. ▷배심은 사법절차에 민주성을 강화한다. 우리나라 법원은 2008년 국민참여재판, 검찰은 2010년 시민위원회를 도입했다.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이든 시민위원회든 그 결정이 권고적 효력밖에 없어 소배심과 대배심에 이르지는 못한다. 시민위원회는 검사 요청이 있을 때만 열린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법원과 검찰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어 사실상 소배심과 대배심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시는 다음 달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을 맞아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여기에 동성애 차별 금지 조항이 들어간다고 해서 떠들썩하다. 논란을 떠나 이런 헌장은 왜 만드는 건지 궁금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인권변호사로 불려 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자신의 주특기인 토건 분야의 청계천 공사로 일어선 것처럼 박 시장이 인권을 트레이드마크 삼아 대선 도전의 자락을 까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유엔에는 세계인권선언이 있고 유럽에는 유럽인권협약이 있다. 모두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유엔 세계인권선언은 우리나라가 승인한 국제법으로 이미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고 있다. 각 지역이나 국가는 여기에 더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담은 인권선언을 할 수도 있겠다. 유럽 지역의 유럽인권협약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가 국가를 뛰어넘어 인권선언이니 뭐니 한다는 건 어딘지 제격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박 시장은 군사독재 시절 정치적 피해자들의 인권 보장에 앞장섰다. 그는 민주화 이후에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인권 보호에 관심을 기울였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시절 ‘친구사이’와 같은 동성애 단체에 많은 지원을 했다. 그가 얼마 전 미국 방문 중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인 ‘이그재미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아시아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됐으면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연장선에서 나온 발언이다. ▷박 시장은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인권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은 나라지만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해서만큼 많겠는가. ‘∼하는 만큼 ∼한다’는 말이 있다. 서울시민의 인권은 굳이 박 시장이 나서지 않아도 국가 전체와 보조를 맞춰 점진적인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 박 시장이 동성애 등 서울시민의 새로운 인권에 관심을 갖는 만큼 북한 인권에도 관심을 보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권 활동에 동조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힘깨나 쓰는 사람을 ‘주먹’이나 ‘어깨’라고 부르는 것은 신체의 한 부분을 통해 어느 사람을 가리키는 제유법(提喩法)적 표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깡패란 말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김두한은 어깨 혹은 일본어로 ‘가다’ 정도로 불렸다. 깡패는 광복 후 사회 혼란을 틈타 정치권력과 결탁해 폭력을 휘두르던 동대문파 ‘이정재’ 같은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 쓰였다. 깡패는 영어 갱스터(gangster)에서 온 깡과 한자어로 무리를 뜻하는 패(牌)를 결합한 말이라고 하지만 이런 말의 어원은 늘 그렇듯이 정확하지는 않다. ▷양아치는 깡패와는 계보가 다르다. 양아치는 거지를 뜻하는 동냥아치를 줄인 말이라고 한다. 불쌍한 거지에 못된 거지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것은 19세기부터다. 세도정치로 피폐해진 일부 극빈자들이 장터에 떼로 몰려다니면서 장사를 방해하는 수법으로 먹을 것을 뜯어냈다. 떼거지란 말이 이때 생겼다. 근대화 이후에도 떼거지는 넝마주이 형태로 살아남았다. 이런 거지를 양아치라고 불렀고, 오늘날 체격으로나 뭐로나 깡패도 못되는 주제에 깡패 짓 하고 다니는 불량배를 양아치라고 부르게 됐다. ▷그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조정소위에서 박근혜표 창조경제 예산의 한 항목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책상을 내리치며 “그만하세요”라고 언성을 높이자 새정치민주연합 강창일 의원이 “왜 얘기하는데 시비를 걸고 그래? 저 ×× 깡패야. 어디서 책상을 쳐. 저런 양아치 같은…”이라고 받아쳤다. ▷누가 시비의 원인을 제공했는지 따지자면 끝이 없다. 강 의원의 욕은 김 의원이 책상을 내리친 데서 비롯됐고, 김 의원이 책상을 내리친 것은 새정치연합 간사인 이춘석 의원이 불필요하게 정회를 요청하며 태업하는 태도를 보여서 그런 것이고, 이 의원은 새누리당이 무리한 예산을 요구해 그랬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비교해볼 수 있겠지만 국민의 눈엔 누가 깡패고 누가 양아치냐 따지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3 문과생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지난주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국어 영어 한국사 문제를 풀어봤다. 이들 과목에 대한 지식은 기자 직업을 수행하는 데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다만 32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내 직업 경험으로 봤을 때 수능이 측정하는 지식이 적절한가라는 관점에서 풀어봤다. 영어는 45개 문제 중 한 개만 틀려도 1등급을 받지 못할 정도로 출제됐다. 그렇다고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더 어렵게 낼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어 시험 시간 70분 중 50분은 읽기 평가 28개 문제에 할애된다. 2분도 안 되는 시간에 결코 짧지 않은 1개의 지문을 읽고 답해야 한다. 나 자신도 푸는 데 시간이 빠듯했다. 지문은 아주 까다롭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시간에 그 정도 수준의 지문을 읽고 답할 수 있다면 내 경험상 원서를 읽는 데 무리 없는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중학생만 돼도 학원에서 가르치는 영어 지문이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중학생에게 이런 지문이 어려운 것은 영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문 지식이 없어서다. 영어는 영어를 평가해야지 전문 지식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영어의 변별력을 더 높이려 한다면 읽기 평가의 수준을 더 높일 것이 아니라 듣기 평가의 수준을 높이거나 쓰기 평가를 새로 도입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국어는 어렵게 출제됐다. 1등급의 커트라인이 91점 이하로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내가 풀어본 느낌은 단지 어렵다는 점을 넘어 ‘그 어려움이라는 게 굳이 극복하려고 노력할 가치가 있는 어려움인가’라는 회의가 들었다. 나 역시 기자로서 25년 가까이 글과 씨름해 왔지만 의미 자체가 애매모호한 문제를 여러 개 발견했다. 예를 들어 어떻게 보면 오리이고 또 어떻게 보면 토끼인 그림(오리 토끼)을 제시하고 이 그림을 통해 배운 바를 ‘비유를 활용해 한 단락으로 써보자’는 문제가 있다. 정답에는 비유법이 쓰여져 있다. 그렇다면 ‘비유법을 활용하라’고 써야 한다. 비유를 활용하라고 해서 나는 ‘오리 토끼’라는 비유를 꼭 거론하라는 뜻인가 오해했다. 문제 풀이는 어렵더라도 문제의 뜻은 명확해야 한다. 요즘 국어에는 문학 외에 비문학 문제도 나온다. 기자도 비문학에 해당하는 글은 많이 보고 쓰는 직업이다. 비문학 문제의 지문을 보면 고교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지문인지 의문이 든다. 헤겔과 뒤르켐의 시민사회론을 비교하는 지문에 대해 말하자면 헤겔의 시민사회론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뒤르켐은 그 자신이 시민사회란 말을 쓰지 않았고 그의 이론을 시민사회론의 관점에서 보는 것도 생소하다. 칸트의 미감적 판단력을 설명하는 지문은 용어(주관적 보편성 등) 자체가 독일 관념 철학에 특수한 것이어서 비전공자는 이해할 수 없는 글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정도는 몰라도 실천이성비판이나 판단력비판의 문제를 고3 수준에서 다루는 것은 무리다. 한국사는 20개 문제 중 14개가 근현대사, 그것도 개화 이후의 역사에서 출제됐다. 한국사 교과서 체제가 그렇다고 하지만 직업상 다른 직업보다는 근현대사를 더 많이 다루는 기자의 관점에서 봐도 근현대사의 비중은 지나치다. 근현대사 문제 중에서는 강한 경향성이 느껴지는 것도 적지 않았다. 신탁통치란 말은 한마디도 없이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로 임시정부 수립 전망이 밝았던 것처럼 묘사하고 그것이 반탁 운동 때문에 중단됐다는 암시를 준 문제와 김원봉의 레닌주의적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룬 문제 등이 그렇다. 한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비중 문제와 경향성이 수능에도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는 느낌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전당포는 항구다.’ 어느 시인의 시 제목이다. 문학의 비유(比喩)는 결합하는 두 관념의 거리가 멀수록(멀다고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긴장감이 커져 기억에 남는다. 뉴스도 문학의 비유와 비슷한 데가 있다. 어떤 일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 어떤 일을 했을 때 화제가 된다. 1997년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이진영 씨가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올해 수석 합격의 영광은 현직 경찰이 차지했다. 경찰대 출신의 김신호 경위는 “3년 4개월 동안 매일 오전 5시에 경찰서에 출근해 업무시작 전까지, 업무가 끝난 뒤 다음 날 오전 1시까지 하루 평균 9시간씩 책과 씨름했다”고 말했다. 경찰대 출신은 경위로 시작해 빠르면 4, 5년, 늦어도 7, 8년이면 경감으로 승진한다. 2002년 임용된 김 경위는 12년째 경위다. 사시 공부를 시작한 남모를 사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법시험이 끝나면 훈훈한 화제의 인물이 나오곤 한다. 10년 전인 2004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장승수 씨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막노동판 일꾼 출신의 그는 1996년 서울대 법대에 수석 합격했다는 소식을 공사판에서 들었다. 장 씨는 합격 소감으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말해 공부가 힘들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다. 그는 세 차례의 도전 끝에 사시에 합격했고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고시로 인생역전을 꿈꾸던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 신림동 고시촌이 시들해졌다. 한때 한 해 1000명이 넘던 사시 합격자가 점점 줄어 올해는 204명이다. 2017년이 되면 사시 자체가 폐지된다. 2008년부터 신입생을 뽑지 않은 서울대 법대도 2017년 말 사라진다.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은 등록금이 비싸고 다른 일과 병행하기도 어렵다. 인생역전의 꿈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사시 존치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사시를 남겨 두려는 변호사시험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지만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기요틴은 프랑스 혁명 당시 죄수의 목을 자르던 형벌 기구다. 공포 정치의 상징물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은 파리 의대의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가 인도적인 처형을 위해 고안한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잔인한 참수형을 떠올려보면 날카로운 칼날로 단번에 목을 자르는 사형이 당시 얼마나 인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죽음도 두렵지만 죽음에 이르는 고통도 두렵다. ▷현대 의학은 생명을 연장시켰으나 어떻게 살 것인가 외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새로운 숙제를 던진 것도 사실이다. 말기 암 환자가 가족이었던 사람들은 암 환자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지 알고 있다. 고통이 증가함에 따라 모르핀 투여량은 늘어나고 환자는 비몽사몽 상태가 돼 지내다 어느 순간 인사불성이 되고 결국 마지막 남은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다. 이런 환자의 모습을 봤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대신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누구나 ‘존엄한 죽음’을 한 번쯤 생각해볼 것이다. ▷미국 여성 브리타니 메이너드(29)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예고한 날에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삶을 살던 메이너드는 증인 입회하에 수차례 안락사에 동의하고 복수의 의사 진단을 받아 극약을 처방받았다. 그는 ‘버킷 리스트’대로 그랜드캐니언 여행을 다녀온 뒤 잠시 상태가 호전돼 죽음을 연기할 생각도 있었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예정대로 결행했다.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을 결심할 때, 또 침대에서 약을 삼키려 할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 ▷존엄사는 엄밀한 개념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연명 조치를 하지 않는 소극적 안락사만 존엄사로 본다. 미국 캐나다의 일부 주와 네덜란드 등 몇몇 나라에서는 환자의 동의하에 환자의 생명을 적극적으로 끊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발적 안락사까지 존엄사에 포함시킨다. 우리나라도 존엄사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하는 문제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취향이란 본래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다. 신해철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그에 대한 칭송이 아무리 죽음 직후라고 해도 어딘지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 과도함에는 정치적 동기도 없지 않아 보인다. 신해철보다 4, 5년 윗세대인 나는 넥스트 시절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록을 한 신해철부터 기억이 난다. 내 또래는 음악적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중학교 시절을 유신 말기에 보냈다. 그때는 유신의 영향으로 트로트 고고라는 비정상적 장르가 유행했다. 한국 가요는 들을 게 없었다고 생각했다. ‘박원웅과 함께’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1960, 70년대 서구 록을 음악 공부하듯이 찾아 들었다. 그런 세대에게 이미 록의 시대가 가버린 1990년대 신해철이 들려주는 록은 음악적으로 뛰어났는지는 몰라도 전혀 프로그레시브하게 들리지 않았다. 넥스트(next)가 아니라 한물간 프리비어스(previous)의 철지난 모방이었다. 그가 2002년 뜻밖에 노무현 지지 연설에 등장했다. 그가 스스로 소개한 것처럼 정치에 거리를 두고 산 자신의 기존 가치를 버리고 나선 것이다.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전대협이 만들어진 1987년 서강대 철학과에 들어간 그는 1988년 강변가요제, 1989년 대학가요제에 잇따라 출전한 것으로 봐서 당시의 학생 대중과도, 종로 파고다의 메탈계와도 다른 정서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저항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성 체제의 사다리에 올라타려고 노력했던 이 음악가가 세상을 향해 “남을 밟고 일어서고, 내가 남을 밟지 않으면 내가 밟히는 맹수 우리”라고 공격하며 노무현을 지지하니 어리둥절했다. 2009년 노무현 추모 콘서트의 신해철을 유튜브에서 봤다. 그가 관객을 향해 묻는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요?” 관객석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등 갖가지 대답이 튀어나온다. “이명박? 한나라당?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적들을 탓하기 전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건지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씹××들 욕을 해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대 뒤로 움직이다가 갑자기 돌아서며 (아마 적들을 향해서겠지만) “개 × 같은 ××들”이라고 소리 지른다. 인텔리겐차 양아치, 그가 스스로를 규정한 말이다. 위대한 아티스트라는 칭송은 신중현과 김민기 같은 음악가를 위해 남겨둬야 한다. 신중현의 록은 지금 들어도 세련됐지만 어느 곡이나 ‘지금 여기’의 한국이 느껴진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음악이라는 것, 결코 철학이 돼서는 안 된다. 무슨 철학이라도 하는 듯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것은 대중음악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은 모든 록 가수가 새겨들었어야 할 말이다. 김민기는 말로 저항적이지 않았다. 최고의 데모가였던 ‘늙은 군인의 노래’는 그가 군대 시절 전역하던 상사를 위해 만든 곡이고 ‘친구’는 물에 빠져 죽은 후배를 그리워하며 만든 곡이다. 다만 그 곡에 담긴 감정이 무엇과 연결해도 통하기 때문에 시대를 뛰어넘는 저항가요가 됐다. 신해철이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그는 포도 품종으로 치면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사람이다. 보르도의 최고 등급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들어진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강력한 타닌 성분은 다루기는 힘들지만 잘 다루기만 하면 최고의 와인 맛을 선사한다. 아마도 신해철의 타닌은 너무 강해서 더 숙성이 돼야 가수로서 완성되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50세 혹은 60세의 신해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네덜란드 하면 풍차와 튤립 말고도 떠오르는 게 많다. 제방 구멍을 온몸으로 막아내 나라를 구했다는 동화 속 아이부터 철학자 에라스뮈스, 화가 렘브란트와 반 고흐를 거쳐 안네 프랑크, 헤이네컨(하이네켄) 맥주까지. 우리 역사에도 조선시대 박연이라 불린 벨테브레이와 하멜이 있었다. 둘 다 대양을 떠돌다가 표류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ander)’이었다.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든 히딩크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얀 뤼프 오헤르너 씨도 우리에겐 기억해둘 네덜란드인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서 태어났으나 그곳을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 수용소에 끌려갔다. 2007년 미국 의회 사상 처음 열린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에게 첫 경험이 갖는 의미는 큽니다. 그 첫 경험이 성폭행, 그것도 군위안소에서의…. 내 인생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일본을 방문 중인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이 아키히토 일왕 앞에서 “우리 민간인과 병사가 포로로 노동을 강제당하고 자부심에 상처받은 기억이 여러 사람의 생활에 상흔으로 남아 있다”며 두 나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도, 아픈 역사도 모두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네시아를 점령해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가한 고통을 언급한 것이다. 그중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이 오헤르너 씨 같은 여성일 것이다. ▷400년 전 일본에 근대 문명을 전해준 네덜란드는 일본인에게 최초의 서양인 교사나 다름없다. 네덜란드 국왕의 발언은 아픈 과거는 없었던 것으로 묻어버리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기억할 때 넘어설 수 있다는 의미다. 안네 프랑크는 정확히는 네덜란드인이 아니다. 독일에서 박해를 피해 넘어왔으나 결국 나치에 잡혀 희생된 유대인 가족의 딸이었다. 나치에 유화적이었던 네덜란드는 이 일을 큰 수치로 여긴다. 수치를 아는 네덜란드가 수치를 모르는 일본에 한 훈계였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