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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과소비한 것도 없는데….”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이모 씨(36)는 자신이 유치원생 아들(6)을 키우는 데 지금까지 2억1330만 원을 썼다는 분석 결과를 받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출산 후 조리원도 비싼 곳을 안 가고 각종 육아용품도 대체로 중고 물품을 사거나 물려받아 썼다. 요새 유행이라는 영어유치원도 안 보내고, 국공립유치원은 추첨에서 떨어져 일반 사립유치원에 보내고 있다. 동아일보가 만든 인터랙티브 사이트 ‘요람에서 대학까지: 2019년 대한민국 양육비 계산기’()를 통해 그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6억5994만 원을 더 쓰게 된다는 전망치를 받았다.○ 근로자 10년 연봉, 고스란히 아이 양육비로 동아일보가 10일 임산부의 날을 맞이해 구축한 양육비 계산기 사이트에 따르면 모든 소득 구간의 평균에 해당하는 한 가구가 아이 한 명을 낳아 대학을 졸업시킬 때까지 필요한 돈은 약 3억8198만 원으로 집계됐다. 미취학 양육비 6860만 원, 사교육 등을 포함한 교육비로 초등학교 9250만 원, 중학교 5401만 원, 대학교 8640만 원 등이다. 올해 2분기 기준으로 연 소득이 4003만 원인 처분가능소득 3분위 가구가 이 금액을 사용하려면 9.6년 동안의 소득을 고스란히 양육비에 쏟아 넣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이가 23세가 될 때까지 해마다 같은 금액을 쓴다고 가정할 때 연 소득의 41.5%가 양육비로 나가는 셈이다. 서울만 따로 빼면 4억254만 원으로 늘어난다. 10.1년 치 연 소득이다. 이는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조사(1170가구)와 통계청,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육아정책연구소 등이 발간한 가구 조사 데이터 및 통계분석 자료 등을 활용해 머신러닝(기계학습) 기법을 통해 분석한 결과다. 양육비 계산기를 활용하면 우선 소득의 차이에 따른 자녀 양육비 총액의 평균 금액을 토대로 △출산 △산후조리 △보육 △교육 방식 등 자녀 생애주기별 각종 변수에 따른 양육비를 산출할 수 있다. 정부와 민간 영역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소득이 비슷한 가구가 평균적으로 지출하는 출산과 육아비용, 초중고교 교육비와 사교육비 등을 입력해 두고 다른 이용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따라서 사이트 이용자가 입력하는 평균 소득이 늘어나면 양육에 수반되는 제반 비용이 늘어나고 총 양육비도 증가한다. 부부 합산 연 소득이 1억 원 정도인 이 씨의 경우 총 양육비가 8억7324만 원으로 소득구간 평균 가구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 씨는 “아들 출산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로 기쁨을 누리고 있다”며 “정부와 사회가 어떤 부분을 배려하고 신경 쓰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저출산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최근 10여 년간 저출산 예산 140여조 원이 투입됐지만 정작 부모들의 정책 체감도가 왜 낮은지에 대한 문제의식도 던진다.○ 전문가들 “보육 교육 부담 줄여야” 전문가들은 이런 경제적인 부담이 출산을 기피하게 하는 요인 1순위로 꼽히는 만큼 자녀의 생애 주기별로 맞춤형 보육 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사원 맞벌이인 이 씨 부부는 월 소득 600만 원 이상으로 그나마 아이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겨 보육비용(월 80만 원)을 다소 줄일 수 있었다. 이 씨와 달리 입주 도우미를 쓰는 가구는 대체로 월 220만∼260만 원의 비용을 지출한다. 출산 후 복직하며 입주 도우미를 들인 김효정 씨(35)는 매달 월급의 절반을 그대로 입주 도우미에게 주다시피 하고 있다. 어린이집 역시 오후 6시에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야 하기에 빨라도 오후 8시에 퇴근하는 부부의 근무 특성상 아이를 저녁에 계속 봐줄 도우미가 필요했다.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아이 돌보미 비용은 양육자가 떠안아야 하는 부담”이라며 “무상으로 지원하는 보육처럼 아이 돌봄도 정부가 포괄하는 공적 서비스로 확대하는 걸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소영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자녀 양육에 비용이 많이 들어 여성들이 원하는 만큼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고 있다”며 “일·가정 양립과 함께 출산과 양육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최우선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김유영 abc@donga.com·강은지·황규인 기자}
대기업 마케터인 A 씨(41)는 최근 사무실 컴퓨터 초기 화면을 구글로 바꾸고, 스마트폰에서 국내 포털 앱을 지웠다. 인공지능(AI)이 기사를 편집한 뒤로는 깊이 있는 기사는 왠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때론 입맛에 맞는 기사가 떴다. 하지만 맞춤형이라 자신과 입장이 다르거나 관심 없는 기사는 추천되지 않아 시각이 좁아질까 봐 걱정도 됐다. 최근 실시간 검색어를 특정 세력의 정치 구호나 기업 제품명이 점령하는 걸 보니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점은 의외로 없었다. 소셜미디어에서 관심 분야 전문가가 띄우는 뉴스나 e메일 뉴스레터 등을 통해 정보 갈증을 해결했다. 국내 콘텐츠도 ‘보여지는 것’만 소비하지 않고 필요한 정보를 능동적으로 찾게 됐다. 첫 화면에 검색창만 덩그러니 있는 구글을 쓰니 업무에 잘 집중될뿐더러 원본 자료도 잘 찾아진다고 했다. A 씨처럼 ‘디지털 이민’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민주주의 공론의 장이 되리라 기대했던 국내 포털이 상업주의나 정파성에 물들고 있는 것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특히 AI가 기사를 추천한 뒤 심층 기획보다 실시간 이슈 중심의 발생 기사 노출이 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조사 결과 AI의 기사 배치 이후 뉴스 이용이 불편해졌다는 응답자(38.4%)가 편해졌다는 응답자(12.4%)보다 훨씬 많았다. 예를 들면 네이버는 모바일 뉴스 탭에서 기사 5개를 내거는데, 해당 기사를 클릭하면 같은 기사 20∼50개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자동 클러스터링’ 기반이라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으로 대표 기사를 선정하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점에서 최근 최초 보도(original reporting)를 검색에서 우대하겠다고 한 구글은 눈여겨볼 만하다. 심층·탐사·단독보도 등 노력과 시간, 자원을 투입한 기사를 잘 보이게 하고, 실시간 어뷰징·짜깁기 기사는 걸러내도록 알고리즘을 바꾸겠다는 것. 기준을 어떻게 세울지 지켜봐야겠지만 양질의 저널리즘(quality journalism)을 응원하는 철학은 잘 읽힌다. 사실 검색만 하더라도 국내 포털과 구글의 철학은 확연하게 다르다. 국내 포털은 검색 결과를 자체 페이지에 담아 사람들을 가둬놓고 수익 대부분을 챙겨가지만, 구글은 검색 결과가 담긴 사이트로 연결만 해줄 뿐 콘텐츠까지 담지 않는다. 콘텐츠 생산자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이는 수익 배분 방식으로도 이어진다.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에서 ‘거부(巨富) 인플루언서’가 탄생하는 건 광고 수익 절반을 파격적으로 받아가는 이들이 콘텐츠에 공들이는 영향도 크다. 유튜버로 변신한 한 파워 블로거는 “블로그할 땐 재주는 내가 넘고 포털 배만 불려준 것 같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궁금한 걸 구글이나 유튜브에 물어보기 시작했다. 전문직 유튜버에게 댓글이나 채팅으로 직접 묻기도 한다. 유튜브가 커뮤니티로도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 함께 구글이 검색으로 1위에 못 오른 몇 안 되는 국가다. 하지만 올해 유튜브는 네이버를 제치고 한국인이 가장 오래 쓰는 앱이 되는 등 균열 조짐이 있다. 사람들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키는 콘텐츠 플랫폼들도 잇달아 생겨나고 있다. 광장이 걷기 불편하다면 사람들은 언제든 광장을 피해 다른 길로 갈 준비가 되어 있다.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스마트폰은 ‘21세기 슬롯머신’이다. 누르기 전엔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누르면 무언가 우르르 쏟아진다. 그게 유명인에 대한 뉴스 혹은 가십일 수도, 지인의 일상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한번 누르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다는 것.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선 쾌락 물질인 도파민이 더 많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루 너덧 시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주일이면 만 하루가 넘는다.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삶, 괜찮은 걸까. 대개는 스마트폰으로 내용 일부만 훑고 얼른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온갖 정보의 무한 루프 속에서 완결되지 못한 내용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이는 인지나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A 과제에서 B 과제로 휙휙 넘어갈 때 주의력이 100% 따라가지 못하고 주의 잔류물(attention residue)이 B 과제를 방해한다. 마치지 못한 일에 대해선 긴장감 등 불편한 감정도 이어진다(제이가르니크 효과·Zeigarnik Effect). 독일에서 주창된 ‘슬로 미디어 운동’을 떠올린다. 미디어를 접하는 대로 즉각 소비하는 것보다 양질의 콘텐츠를 선별해 집중하며 소화시키자는 취지다.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널드에 반기를 들고 몸에 좋은 음식을 엄선해 음미하자며 일어난 슬로 푸드 운동에서 착안했다. 패스트푸드는 만들기도 쉽고 먹기도 쉽고 그만큼 유혹적이지만 몸에 좋지 않다. 자극적인 미디어도 다르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슬로 미디어 운동은 양(量)보다 질(質)을, 빠름보다 느림을 추구한다. 좋은 콘텐츠를 골라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해 소비하는 게 핵심이다. 예컨대 주말 아침에 태블릿을 들고 카페에 가서 한 주간 저장해 놓은 기사를 꼼꼼히 읽는 것이다. 조금 늦더라도 정제된 콘텐츠로 새로운 생각을 접하거나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영감을 받기도 한다. 몰입에 대한 베스트셀러 ‘딥 워크’를 쓴 칼 뉴포트는 “온라인에 계속 접속해 있으면 정보를 많이 얻는 느낌을 받지만 다음 날 조간 기사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다. 속보 기사가 아닌 바에야 정보에 대한 노출을 의식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꼭 필요한 것만 선별하고 그렇지 않은 건 버려 최고에 집중하는 ‘디지털 미니멀리즘’을 제안한다. 소셜미디어도 마찬가지다. 해당 분야에 통찰력이 있는 사람을 엄선해 팔로하고, 팔로 수를 던바의 수(Dunbar‘s number·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숫자)인 150명 이하로 유지한다. 또 스마트폰에서 소셜미디어 앱을 삭제하고 PC로 소셜미디어를 해 스스로의 시간을 통제한다. 집중이야말로 21세기 가장 희소한 자원이 됐다. 세상과 단절되어 살 수 없지만,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다. 말과 행동이 다른 어느 장관 후보자의 이력이나 이혼 소송 중인 연예인의 가십, 얼굴 본 지 5년은 족히 넘었을 동창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느라 우리의 인지 자원과 정서 자원을 허비하기엔 억울하다. 패스트푸드는 가끔 먹으면 맛있지만 주식이 될 수는 없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보다 소중한 것에 시간을 쏟았으면 좋겠다. 죽으면서 “인터넷을 더 했더라면…”이라고 후회하지는 않을 테니.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더 오래 체류하게 왜곡돼 있다. 자극적 정보 등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광고 수익을 늘리게 설계돼 있다.’ 유튜브에서 알고리즘을 담당했던 엔지니어의 발언이다. 그는 영국 가디언과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 관한 유튜브 추천 시스템을 들여다본 것. 두 후보 이름을 번갈아 치면서 검색되는 영상과 추천되는 영상 상위 1000개를 분석한 결과 3분의 2는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거나 편향된 것으로 나타났다.기존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내용을 보여주거나 영상 자체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유튜브가 어느새 뉴스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재미와 정보 전달을 넘어 정치 사회 이슈와 관련된 현상에 영향을 줄 때다. 유튜브는 영상이 끝나면 바로 다른 영상을 추천해 자동 재생해준다. 구독자 이용 패턴을 분석해 추천한다는 이 알고리즘이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 행동·기술연구소는 검색 알고리즘 조작 실험을 통해 선거에서 부동층 20% 정도는 알고리즘 조작으로 투표 대상을 바꾸게 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런 기제가 통한 곳이 바로 브라질이다.최근 뉴욕타임스는 ‘유튜브가 브라질을 어떻게 극단주의로 치닫게 했는지’를 탐사 보도했다. 유튜브에서 구독자 100만 명을 거느리며 인종차별과 혐오 등 과격 언행을 하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경제난과 범죄에 시달리는 유권자 마음을 사로잡아 지난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특히 기타를 배우려는 소년이 기타 레슨 유튜브 영상을 접했다가 이 영상 운영자의 극단주의적인 사고에 빠져들면서 이 정치인의 열광적인 지지자로 바뀐 사례도 소개됐다.실제로 미 하버드대 버크먼클라인센터는 브라질 유튜브에서 중립적인 정치 영상이나 예능 영상을 봐도 이는 ‘미끼 영상’일 뿐 결국 혐오와 차별, 음모 등이 담긴 영상으로 치달았다고 밝혔다. 이용자가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으로 보는 영상이 전체 영상의 70%에 이르기에,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편견이 강화되는 필터버블(filter bubble)이 생기고 균형 있는 논의가 이뤄지는 숙의 민주주의가 위협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한국에는 아직 먼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 유튜브로 뉴스 관련 영상을 보는 비율은 40%로 조사 대상 38개국 평균(26%)보다 높다(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유튜브가 ‘정치의 장’으로 변모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가짜뉴스에 대한 정부 규제도 거론되지만 이는 표현의 자유와 상충될 수 있다. 트럼프가 CNN 등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언론을 가리켜 가짜뉴스를 생산한다고 몰아세우는 등 가짜뉴스 용어 자체가 무기가 되곤 한다. 오히려 지난해 발효된 유럽연합(EU)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의 ‘알고리즘에 대한 설명을 들을 권리’에 착안하면 어떨까. 인공지능(AI) 추천 호텔 예매 서비스를 수용하는 이용자들이 추천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려 하는 것이다.미디어도 다르지 않다. 이용자들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영상이 잘못된 정보(misinformation), 조작된 정보(disinformation), 악의적인 정보(malinformation)를 담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유튜브가 자동재생과 추천목록을 제공하는 알고리즘을 공정하게 운용하는지 설명해야 하는 등 ‘플랫폼의 책임’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지난 선거가 드루킹 댓글 공작으로 홍역을 앓았다면 영상의 힘이 커져가는 앞으로의 선거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한동안 여론을 달궜던 청와대 참모의 페이스북이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는 특정 주제에 대해 열흘간 총 40여 건의 글을 올리며 전면에 나섰다. 해당 이슈에 대한 찬반만큼이나 그의 ‘폭풍 페북’을 두고 찬반이 엇갈렸다. 논란이 점차 가열되자 청와대는 “개인 표현의 자유다. 청와대 공식 입장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공직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무슨 발언이든 해도 되는가. 청와대는 이번에 “SNS에서 특정 발언을 하라, 하지 마라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공직자의 SNS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게 가이드라인’이라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하지만 ‘공직자 SNS 사용원칙과 요령’이라는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 2011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와 행정안전부가 공동 마련해 국무회의에 보고까지 됐다. 과거 정부에서 만든 이 가이드라인을 참고하는 공직자가 지금 있을까 싶긴 하다. 소셜미디어 환경 역시 많이 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가이드라인에는 현 시점에서 다시 끄집어내서 읽어봄 직한 내용이 적지 않다. ‘SNS 글이 조직의 공식 입장 표명이 되지 않도록 유의하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면 사전에 관련 담당 조직의 전문가나 상관, 온라인 홍보팀에 조언을 구하라. 글이 정책 방향과 일치하지 않다면 혼동을 주고 기관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민감한 이슈라면 더욱 유의해야 한다. 20여 년간 위기관리 컨설팅을 해온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는 “과거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원칙은 ‘대응 창구 일원화’였지만 SNS는 ‘1인 미디어’라 창구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외교 문제의 경우 메시지 일원화가 안 되면 국가 간 오해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청와대 참모가 관련 이슈의 주무부처 등에 의견을 구했는지 모르겠다. ‘SNS 글을 작성할 때 언론 보도 단초가 될 정보나 언어 선택에 유의해야 한다’, ‘공직자의 SNS 활동은 적극적인 오프라인 소통과 병행할 때 효과적이다’. 이는 청와대 참모가 혹여 거칠거나 자극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는지, 온라인 소통에 치중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현장 의견 청취 등에 소홀하지 않았는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청와대 참모는 부처 내부 문서를 공식 발표 전에 본인의 페이스북에 먼저 올린 적도 있는데, 가이드라인엔 ‘SNS에 어떤 기밀도 유포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다. SNS 플랫폼도 공직자 발언의 적정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트위터는 공직자(팔로어 수 10만 명 이상)가 부적절한 발언을 하면 경고 표시문을 붙이겠다고 했다. 페이스북도 주요 인사의 콘텐츠를 조정하는 기구를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SNS 가이드라인 마련에 참여한 적이 있는 한정호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와 최근 나눈 대화를 ‘소셜 여론전’을 펴려는 공직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마땅하지만, 고위 공직자 발언은 선출직 공무원이나 정치인 발언과는 다릅니다. 첨예하고 민감한 사안에 키보드를 두드리기 전에 신중, 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다른 목소리를 가진 이들도 사회 통합의 대상인 우리 국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직장생활 20년 간 회사를 4차례 옮겼다. 첫 직장은 스타벅스코리아. 회사가 한국에 진출한 직후여서 스타트업에서처럼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후 삼성전자로 옮겨 휴대전화 해외 마케팅을 맡았고 CJ 외식사업 계열사인 CJ푸드빌과 이랜드파크 애슐리를 거쳐 현재 롯데시네마를 운영하는 롯데컬처웍스에서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다. 이미선 롯데컬처웍스 마케팅부문장(상무·45)이다. 지금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다시피하고 있지만 또래 직장인 중에서는 드물게 여러 회사를 거쳤다. 그는 스스로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경험하기 위해 이직하기도 했고, 삶의 중요한 가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또 다른 회사로 가기도 했다. 옮겨간 회사에서는 사소한 칭찬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배우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했다. 그를 만나봤다. ●크고 작은 성공 경험이 성장 거름 그가 스타벅스에 취직한 건 대학생 때 캐나다 어학연수 경험이 작용했다. 한국에서는 믹스커피가 대세였던 시절, 스타벅스에서 바닐라라떼를 먹고 충격을 받았다. 커피에 우유도 넣을 수 있고, 주문도 취향대로 할 수 있구나…. 마침 신세계가 스타벅스를 들여오면서 채용에 나서 지원했고 여기에 붙었다. 당시 마케팅 담당 직원은 딱 3명. 초창기라 업무 구분 없이 일이 생기는 대로 일했다. 좋아서 들어온 회사인만큼 주말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회사가 굉장히 잘 됐죠. 회사가 성장할 때여서 일하는 기쁨을 누리던 시절이었죠. 정신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기억에 남는 성과는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고안해낸 것. 스타벅스가 고객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Enrich customer‘s daily life)는 슬로건을 내건 데에서 착안했다. “고객 충성도를 높이려면 매일 오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저희가 고객을 매일 오게 할까를 고민하다 다이어리를 생각해냈어요.”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음료를 줄 때마다 스티커를 주고, 일정 개수 이상을 달성하면 이듬해의 다이어리를 주는 것. 고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본사에서도 베스트 프랙티스(모범 사례)로 꼽혀 동남아 일부 국가도 벤치마킹했고 한국에서도 다이어리 증정은 스타벅스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 상무는 “후배들에게도 크고 작은 성공경험을 꼭 해보라는 말을 한다”며 “회사에서 월급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성취감을 느끼면 일에 몰입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족함 채우고 삶의 가치 저버리지 않는 이직 롯데가 다섯 번째 회사인 그는 직장을 옮길 때마다 나름의 근거를 세웠다. 스스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옮기기도 했고, 때로는 직장에 ‘올인’하지 않고 개인을 돌보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로 이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직장에서의 만족도는 충분히 높았지만, 글로벌 회사였기에 상품을 내놓을 때마다 본사 전략을 받고, 이를 현지화(localization)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반대 업무도 해보고 싶었던 것. 글로벌 사업을 강화하면서 브랜드 마케팅 전문가들을 잇달아 뽑았던 삼성전자 휴대전화 사업부에 경력직으로 들어가게 됐다.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법, 미디어에 대한 이해, 미디어에 광고를 집행하는 방법 등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업무 영역을 넓힐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는 일에 다 걸기를 하지 않았다. 거쳐 간 회사 중 지방에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하루 네 시간을 출퇴근 시간에 써야 했고, 주말 출근도 더러 했다. 경제적인 보상은 충분했지만, 회사 근처에 집을 얻자니 내키지 않았다. 서울을 떠나면 마케터로서 감을 잃을 수도 있고 당시 미혼이었기에 결혼이 힘들어지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결국 그는 서울에 있는 회사로 다시 옮겼다. 그리고 이후 결혼했는데, 임신에 어려움을 겪었다. 병원까지 다니며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기를 맞이했다. 결국 회사를 관뒀다. 하지만 이 결정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저는 집에 있는데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났어요. 아이 키우는 엄마들은 엄마들의 커뮤니티가 있고 일하는 친구들 역시 그들의 커뮤니티가 있고. 혼자 사회에서 격리당하는 느낌이었죠.”●사소한 칭찬으로 마음의 문 열기 결국 그는 다시 구직 활동에 나섰고 마침 롯데쇼핑 시네마사업본부(현 롯데컬처웍스)가 경력직을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입사했다. 이 상무는 입사 첫날을 잊지 못한다. 당시 대표가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보라’고 했던 것. 회사를 평가하려고 하지 말고, 짧은 시간에 성과를 안내도 된다고 말했다. “대표님이 여기(롯데)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셨죠. 경력직인데도 저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조직 안에 흡수시키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덕분에 그는 다급함 없이 입사 1년 동안 동료들과 거리를 좁히는 데에 주력했다. 방법을 물었더니 사소한 칭찬에 주력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른이 되어서는 칭찬을 많이들 못 받잖아요.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고 칭찬을 하면 마음의 문을 열기가 더 쉽잖아요.” 외부 출신인 그는 처음에는 그룹 문화가 낯설 때도 더러 있었다. 동료들이 그룹 공채의 동기를 따질 때도 있었고 사내에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모른다는 것은 모른다고 밝혔다. “모르는 것은 빨리 물어 보는 게 상책이더라고요. 상대도 제가 모르는 걸 알기 때문에 빨리 물어보면 그만큼 거리를 좁힐 수 있죠.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안다고 전제하고, 저 스스로는 기존 조직원들과 더 거리가 멀어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죠.” 새 직장에서 그에게 떨어진 업무는 극장 매점 사업.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CJ 등에서 외식 사업을 했지만 극장 매점 사업은 또 다른 사업 분야였다. 극장에 와서 영화 보는 인구는 2013년부터 2억 명 안팎(연 인원)으로 제자리걸음하고 있었다. 신규관은 계속 생겨나 투자액은 늘지만 티켓 판매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힘든 상황. 매점을 새로운 캐시카우로 만들어야 하는 만큼 ‘매점=부가 사업장’이라는 고정관념을 바꿨다. 인력도 충원하고 극장에서도 좋은 지점에 두는 한편 대기 시간을 줄였다. 이전 직장에서의 경험도 적용했다. 바로 업그레이드 전략. 스타벅스의 경우 웬만해서는 할인을 하지 않는다. 프리미엄 전략을 펴기에 오히려 더 주는 것은 가능하다. 롯데시네마 매점 역시 팝콘이나 음료 사이즈를 더 주거나, 단품보다는 세트 메뉴에 집중하는 등의 방법으로 객단가를 높였다.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임원으로 승진했다. ●움츠러들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라 임원이 되고 나서 그가 중점 두는 분야는 직원 시절 느꼈던 크고 작은 성공의 경험을 직원들에게도 느끼게 해주는 것. “스스로 동기를 갖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새는 팀원을 통제할 수 없어요. 내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요. 동기가 부여되어야 하고요. 그 동기 부여는 크든 작든 일종의 ‘성공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것부터 시작해 동기 부여를 적절하게 하면 나중에 알아서 잘 하더라고요.”특히 여자 후배들에게는 스스로 거쳐 온 조직 생활의 노하우를 공유한다. 이전 회사에서 코칭 받을 때 ‘방어적’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직급이 올라가면서 일부 여자 후배들을 볼 때 스스로의 모습을 읽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을 주면 한 발 물러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체로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바를 완료하려는 경향이 큰 데에 따른 것이라 봐요. 다른 일을 하게 되면 일의 완성도가 떨어질까 버거워하는 거죠. 이럴 경우엔 지시를 존중하고 최소한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될 경우에는 ‘이거밖에 안 된다’고 보여주고 업무를 줄이는 게 낫죠.”마케팅에서 창의적인 사고도 중요한 만큼 주말을 보내는 원칙이 있다. 회사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안 간다. 일과 생활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하다못해 잠을 자든지 일과 무관한 공간을 찾는 등 영감을 찾는 데에 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회사 업무의 밑천으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와 개인 삶의 영역을 중요시하는 그지만,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생각은 조금은 남다르다. “요새 ‘워라밸’이 화두지만, 정확히는 워크(일)와 라이프(생활)가 정확히 같은 비중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선택과 집중을 통해 강약을 둬야 합니다. 라이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일에서 포기할 건 포기하되 워크가 중요하면 일에서 보람을 찾고…. 뭘 잘하고 싶은지 들여다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김유영기자 abc@donga.com}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5만여 명인 A 씨. 해외 화장품 브랜드 초청으로 유럽 본사에 간다. 비행기 비즈니스석 탑승하는 사진부터 시작해 유럽 본사에서 제품 설명을 듣고 공장을 둘러보는 사진까지 실시간으로 올린다. 브랜드 역사뿐 아니라 제품 장점, 사용법까지 자세히 덧붙인다. 뿐만 아니다. ‘인스타 공구(공동구매)’도 진행하며 제품을 직접 판다. 특별히 할인된 가격이라 강조하면서. 게시물은 광고임이 분명하지만 어디에서도 광고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막간에는 자신이 판매할 옷을 입고 거리에서 사진 찍는다. 게시물에는 “언니 너무 예뻐요. 마켓 언제 여나요(언제 판매하나요)” 등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귀국해선 ‘라방’(인터넷 라이브방송)으로 유럽에서 선보였던 옷을 판매한다. ‘완판’되는 경우가 많아 광고주가 많이 붙는다. 며칠 뒤 서울시내 호텔에서 럭셔리 시계 브랜드의 파티를 즐기는 사진을 올리며 제품 착용 사진을 보여주고, 이후에는 또 다른 브랜드 초청을 받아 해외로 가서 제품을 소개한다. 역시나 광고 표시는 없다. 최근 인스타나 유튜브 등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가 선망의 대상이 되면서 이들이 소개하는 제품을 눈여겨보는 이용자가 적지 않다. 실제로 국내 인스타 이용자 3명 중 1명은 인스타에서 실제 구매를 한다. 문제는 인플루언서들이 대체로 대가를 받고 제품을 소개하지만 대부분 광고 표시를 하지 않는다는 것. 믿고 샀다가 피해 보는 경우도 있음은 물론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에서야 실태 조사에 나섰지만 분위기는 미온적이다. 팔로어 수가 곧 권력인 인플루언서들은 광고 표시를 대놓고 하면 팔로어가 줄고, 업체 역시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다. 무엇보다도 이들을 규제할 근거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표시광고법의 하위 지침은 새로운 형태의 광고인 인플루언서 광고까지는 규제 못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4년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에 돈이나 제품 협찬을 받아 글을 올릴 때 이를 명시토록 하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지만, 인플루언서 광고는 사실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는 해외 움직임과 대조적이다. 영국 광고 규제 기관인 표준광고위원회(ASA)는 ‘광고가 광고임을 명확하게 하는 인플루언서 가이드라인’을 내놓고 금전적 보상이 따르는 게시물에 광고를 뜻하는 ‘AD’라는 단어를 꼭 넣게 했다. 이를 상단에 넣어 ‘미리 보기’에 나타나야 하고, 미리 보기를 누른 후에야 보이면 안 된다. 또 AD를 여러 단어에 섞어놓아 눈에 안 띄게 해도 안 된다. 심지어 AD 대신 ‘SP’(후원·sponsored)이나 ‘in collaboration with’(~와 협업해서) 등 다른 단어를 넣는 것도 금지했다. 꽤 구체적이고 꽤 엄격하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도 인플루언서가 광고성 게시물을 게재하면 광고임을 밝혀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광고임을 명시하지 않는 것은 이용자에 대한 엄연한 기만이다. 인플루언서나 광고주 모두 소셜미디어가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된다는 기본 명제를 무시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스타 속 아기가 예뻐서 팔로잉하면 어느 순간 아기 옆에 육아용품을 놓고 찍은 생뚱맞은 사진이 올라오고, 언니의 스타일이 멋있어서 팔로잉하면 이 언니는 다이어트 보조제나 화장품을 소개해 준다. 업체가 인플루언서 여럿을 한꺼번에 투입해 광고하는 경우도 있기에, 이럴 땐 같은 제품이 소셜미디어 담벼락을 점령한다. 인플루언서에게 보인 나의 호의가 돈으로 치환되는 건 이렇게나 한순간이다. 한국인의 소셜미디어 이용 시간은 하루 평균 한 시간에 육박하고 유튜브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이 됐다. 인플루언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지만, 광고와 광고 아닌 것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있다. 이용자가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게 관련 제도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용자 스스로 광고를 구별해내는 ‘애드 리터러시(AD Literacy)’ 교육까지 필요한 시대가 올는지도 모르겠다.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지금이야 미국에서 LG전자 냉장고나 세탁기는 쉽게 살 수 있는데다 글로벌 브랜드 제품과 견줘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건 불과 10여 년 전부터다. 이전에는 전자레인지나 청소기 등 소형 가전 위주로 팔리고 있었다. 노숙희 LG전자 H&A 마케팅커뮤니케이션 담당 상무(47)는 대형 가전 불모지와 다름없던 미국 시장을 뚫은 실무자로 꼽힌다. 그는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상무로 승진했다. 그는 성과를 언급할 때마다 ‘제가 혼자 한 건 아니고요’라는 말을 유독 많이 했고 상사라는 단어보다 선배라는 단어를 즐겨 썼다. 노 상무는 “선후배 간의 팀워크로 똘똘 뭉쳐 일하면서 조직의 성과에 기여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를 만나봤다. ●바이어 미팅 성사도 힘든 시절 1995년 LG전자에 입사한 노 상무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해외 시장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2002년 LG전자 미국 법인으로 발령이 났다. 맡은 일은 냉장고 프로젝트매니저(PM). 미션은 미국 시장에 냉장고를 갖다 파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LG전자 가전은 승승장구했지만 국내 시장 성장은 한계가 있었다. 거대 시장인 미국을 뚫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LG 브랜드 파워가 약해 초반엔 현지 브랜드를 달고 판매하되 LG전자가 제조해 납품해야 했죠. 미국 가전 점유율 40%에 이르는 가전 브랜드인 K사를 뚫는 게 목표였어요.” 거래업체 브랜드를 달고 팔되 LG전자가 납품하는 것. 다만 나중에 LG전자 독자 브랜드로 팔아야할 걸 염두에 두고, 제품 기획까지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담당자는 5분 만나줄까 말까였고, 다음 미팅은 1년 뒤에 하자는 식이었다.“어렵사리 성사된 미팅에서 LG전자가 품질 좋고 양산 잘한다는 것만으론 부족했죠. 거래 업체 바이어는 자꾸 ‘꼭 LG이어야 할 이유’를 물었죠. 그걸 하도 오랫동안 고민해서 바이어가 언급한 문구(compelling reason)가 아직도 그대로 생각날 정도에요.”●전쟁 치르며 동지애 다지다 제품 기획을 위해 노 상무를 비롯해 제품 개발(R&D)과 상품기획, 디자인, 영업 등 4개 부문 직원이 팀워크를 이뤄 미국 전역에 있는 매장 곳곳을 출장을 갔다. “낮에는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고 저녁에 호텔 방에 들어와 라면을 함께 끓여 먹으며 제품 아이디어를 냈죠.” 노 상무는 이들과 ‘전쟁’을 같이 치르면서 동지애를 다졌다. 그 결과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프렌치도어 냉장고를 개발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냉동식품 많이 먹는 미국인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냉동고가 아래에, 냉장고가 위에 있는 제품이었다. 또 얼음이 상단(냉장고)에서 나오는 방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냉동실이 아닌 냉장실에서 얼음 만드는 제품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프리미엄 제품’을 만들어 업체는 마진이 크고 혁신적인 제품으로 지불 여력이 있는 소비자들도 선호할 것 같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문제는 내부 설득. 새로운 제품이니 제품 개발 및 양산을 위한 투자가 집행되어야 했다. “좋은 경찰, 나쁜 경찰(Good Cop, Bad Cop) 전략을 펴기로 했어요. 보고 들어가기 전에 저희 중 한 명이 ‘투자비 많이 들어가지 않나’라는 반대 의견을 일부러 내면, 바로 다른 사람이 투자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치고 들어가는 식이었죠.” 이런 일은 조직에 대한 오너십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LG전자는 제품 생산을 결정했고 제품은 2004년 미국에서 출시됐다. 개발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완벽하게 보이려던 게 독이 될 수도 이번엔 당초 목표했던 거래업체를 뚫는 것. 담당자는 여전히 “왜 다른 브랜드의 냉장고가 많은데, 비싼 값을 주고 LG 냉장고를 공급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당시 그는 바이어가 쉽게 일하려 딴죽 건다는 생각에, 그럴수록 더 세게 맞대응했다. 2주일 간 말은 안하고, e메일만 오간 적도 있었다. 노 상무가 무려 A4 용지 세 장에 이르는 답변을 보낼 정도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품을 공급받는 것 역시 거래업체 바이어가 본사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LG전자의 논리에 무장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바이어 스스로도 준비되어 있어야 하기에 논리가 필요했던 건데, 사사건건 반대하는 걸로 비춰졌었죠.” 바이어가 더 많이 요구했기에 그도 더 치밀하게 준비했다. 미국 소비자들에게 경쟁사 소비자와 LG전자 소비자를 그림으로 그려보게 했는데, 경쟁사 소비자는 나이든 사람인데 지갑을 뒤로 숨기고 있고 LG전자 소비자는 젊은데 지갑을 들고 있는 식이었다. 브랜드 이미지 속에 잠재적으로 녹아난 의식이었다. 이런 노력 끝에 담당자도 설득이 됐고 마침내 2006년 LG전자 제품을 미국 공급할 수 있게 됐다.이때를 돌이켜보니 아쉬운 점도 있었다. 빈틈없이 보이려 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30대 초반으로 나이가 많지 않고 여성이라는 점을 의식해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고, 심지어 할머니들이 많이 쓰는 안경을 쓰고 다녔다. “완벽하게 행동하려할수록 바이어는 더 많이 요구했어요. 솔직하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거나 때로는 어리바리 전략을 쓰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었던 거죠. 알아듣지 못할 때 알아듣는 척 하면 안 됩니다. 알아도 오히려 되물어봐야 할 때가 있고, 전략적으로 불리하면 못 알아듣는 여유도 있어야 했는데, 곧이곧대로 다 잘하는 것처럼 행동했죠.”●고난의 시기, 다시 팀워크로 극복 노 상무는 회사 생활 중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2011년 미 상무부가 냉장고에 덤핑 예비판정을 내렸을 때를 꼽았다. 미국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국내 업체에 위협감을 느낀 미국 가전업체 월풀이 제소한 것. 당시 사내에서도 감사(監査)가 들어왔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이런 나를 못 믿나’라는 생각에 서운함과 회의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실무자로서 당장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획 영업 관리 등 관계된 각 부문 실무자가 세부적으로 샅샅이 들여다봤어요. 평소에는 서로 도와주지 않고 관리하려고만 한다, 관리할 생각은 안하고 예산만 쓸 생각만 한다 등 날 세웠던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예외였어요. 전투력이 충만해 똘똘 뭉치게 됐죠.” 이들은 덤핑 제소 관련 사항을 샅샅이 리뷰하고 소명 자료를 충분히 냈고, 결국 무혐의 최종 판정을 받았다. “그날도 바이어와 저녁 식사를 할 때였는데 무혐의 소식을 듣고 바로 소리 질렀어요. 당시 힘들었던 것도 싹 사라질 정도로 기뻤죠. 한 선배는 오히려 우리가 월풀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월풀 덕에 우리가 무역 분쟁 대응 역량도 높아졌으니까요.”회사 생활 내내 팀워크로 무장되어 일한만큼 임원이 되어서도 ‘공통의 목적’을 중시한다. 예컨대 상품기획과 영업 부문이 충돌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우리 모두 제품 개발을 잘 해서 많이 팔아야 한다는 목표가 있지‘라고 떠올리고,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방식이다. 팀원이 업무 분장이 모호한 일을 떠맡게 됐다고 들고 올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조직에서건 역할 책임 분담(R&R)이 불문명한 그레이 영역이 존재하게 마련인데, 이 부분을 끌어안고 가면 스스로에게 경험과 지식이 쌓인다고 생각해요. 그게 곧 실력이 되고요. 금을 그어놓고 하면 딱 거기까지 배우니까,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죠. 배움의 기회를 갖고 갈 것인지, 말거냐. 저는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하면 지원해주겠다고 해요.”●직원들에게 실패의 기회를 준다는 것 노 상무는 현재 초임 상무다. 25년간 여러 부문과 두루 일한만큼 소속 후배들에게 이들을 많이 소개시켜주려 한다. 당장 업무와 연관 없더라도 비공식적인 인맥(informal network)을 구축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는 “조직에서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할 수 없다”며 “(직원들이 하는 일이) 잘 굴러가게 기름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역점을 두는 건 후배들에게 ’실패의 기회‘를 주는 것. 좋은 리더는 직원을 어디에 내놓아도 프로페셔널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직원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처음 팀장이 됐을 때 후배들에게 잘해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칭찬하고 감싸주고….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게 하는 게 진짜 리더의 역할이더라고요.” 일부 리더는 구성원이 실수하지 않게 하려고 일일이 간섭(micro-management)하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리더는 직원이 실수 안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피드백을 제 때 잘 해주고, 일에 대한 오너십을 주고 실수도 해보고 성공도 해보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물론 위험하다 싶을 때에는 막아주지만, 옆에서 팁만 줘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직접 해보게 일을 던져줘야 한다는 것. 그래야 일련의 과정들이 직원의 역량으로 쌓이고 조직이 클 수 있다. “좋은 리더는 일 맡기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을 믿고 맡기고 주시하면서 적당한 실패 경험을 쌓게 만드는 거죠. ’이런 걸 시키면 직원들이 싫어하겠지‘라는 생각에서 일을 던져주지 않거나 반대로 일일이 코치하는 건 배려가 아닙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입사 5년차. 인사가 났는데 승진자 명단에 이름이 없었다. 남자 후배들이 먼저 승진했다. 지금 있는 부서에서는 재미도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기껏 이 일을 하려 대학 공부를 하고 회사에 들어온 건 아닌데…. 서러운 마음을 달래지 못해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 신한카드 빅데이터본부장인 김효정 상무(53)의 이야기다. 벌써 25년 전,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당시 아이가 있으면 그만 두는 게 관행이었으니, 승진에서 밀린 것도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랬던 그는 2015년 상무로 승진해 카드업계 1위인 신한카드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됐다. 김 상무는 현재 직원 70여 명의 빅데이터본부를 이끌고 있다. 카드사들이 수익성 악화로 저마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서비스에 골몰인 가운데 신한카드는 빅데이터 전담 최대 조직을 꾸리고 있다. 그를 만나봤다.●“어쩔 수 없다면, 환경을 바꾼다” 대학에서 소비자경제학을 전공한 뒤 1990년 LG신용카드(현 신한카드)에 입사했다. 당시 그에게 맡겨진 일은 채권추심. 한마디로 카드 빚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일이 힘들다기보다, 같은 업무가 반복됐다는 점에서 마음이 힘들었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이 되는 시점에 승진까지 밀린 것. 그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제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저를 둘러싼 환경을 바꿔보기로 했어요. 차별이 덜한 공기업에 다시 들어가려고 결단을 내렸어요. 사표를 낸 거죠.” 회사 반응은 예상 외였다. 여성 인력이 이런 일로 그만 두면 안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형성되며 다른 업무를 제안한 것. 당시 PC가 채권 관리 업무에 본격 적용되는 시기라 채권 관리 정보기술(IT) 시스템을 구축 작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는 회사에 남기로 했고 시스템 구축과 데이터 분석까지 맡아 일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는 꼭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선후배들과도 많이 어울렸다. 술자리를 피하지 않았고 바둑, 탁구, 볼링, 산악 동호회 등을 다녔다. 동료 생일을 기억했다가 선물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휴가 내고 학원 가서 실무 배워와 하지만 채권 관리 시스템 관련 업무도 넓게 보면 채권 업무였다. 그는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선배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았고 고객마다 맞춤형 서비스를 제안하는 등의 고객관계관리(CRM) 업무를 하게 됐다. 평소 사내에서 신뢰를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회사에서 주어진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일 욕심을 많이 냈습니다. 어떤 존재감을 드러낼 지는 제가 선택하는 거라 생각해요. 제가 여기서 일하기로 선택한거라 제 선택에 대해 불평불만이 있을 이유가 없죠.” 그러다가 또 한 번의 위기가 왔다. 이번엔 CRM을 관장하는 파트장이 됐는데 데이터 통계에 대한 지식의 거의 없었다. 소비자경제학을 전공했지만 통계 패키지 실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부서장이 실무를 모르면 위아래로 무시당하기 십상. 일주일 휴가를 냈다. 서울 강남역 인근 통계 학원에 가서 대학원생이나 취업준비생들과 SPSS, SAS 패키지를 배워왔다. 기본 개념을 알게 되니 후배들에게 업무 지시를 제대로 할 수 있었고 위에서도 ‘김효정, CRM 좀 아네’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후 핀테크 사업 부문을 맡아 온·오프라인 간편 결제 서비스뿐 아니라 고객·가맹점·사업자를 하나로 묶는 플랫폼인 ‘신한카드 판’을 맡게 됐다. ●아침 일찍 나와 그날 할일 그려보기 현재 김 상무는 햇수로는 29년째 일하고 있다. 회사 다니는 일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늘 긴장 상태다. 특히 아침 시간을 알뜰하게 쓴다. 오전 5시 기상, 오전 5시 반 출근, 오전 6~7시 운동을 거쳐 오전 7시 반 사무실에 온다. 직원은 없다. 아무도 없기에 집중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는 30분 동안 그날 할 일에 대해서 미리 그려보는 ‘미라클 모닝’을 가진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서 하루가 달라지고 일년이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거든요.”현재 그는 ‘초(超) 개인화 서비스’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는 넷플릭스처럼 빅데이터 분석과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사용해 고객의 시간 장소 상황 등을 예측해 고객이 필요한 혜택을 추천해 카드 사용을 유도하는 것이다. 한 고객 당 2만5000여 개에 이르는 소비 패턴이 추출되는만큼 방대한 데이터에서 진주를 캐내는 게 그의 역할이다. 예컨대 날씨가 좋아 한강 둔치에 놀러간 고객에게는 배달음식의 할인쿠폰을 띄우고, 야구장에 간 고객에게는 (야구장 근처의) 편의점이나 맛집 할인쿠폰을 보내는 식이다. 또 같은 메시지라도 맥락에 따라 할인마트 쿠폰을 보내면서는 ‘오늘 안 쓰면 손해입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가 하면 디저트 쿠폰을 제시할 때에는 ‘오후의 달달함을 부탁해’라고 보낸다. 이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신경 쓰는 부분은 소통. 개인 사무실은 사방이 유리로 트여 남산까지 보인다. 하지만 이 곳은 회의실로 내어주고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한다. 기존 사무실에서는 아침마다 그날 할 일을 빠르게 서로 공유하고 바로 흩어져 일한다. 조직 생활을 30년 가까이 한 김 상무에게 조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물었더니 ‘파리에서 뉴욕까지 빨리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답은 마음 맞는 사람이랑 가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거죠.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고 힘든 걸 나눌 수 있는 ‘친구 같은 동료’가 있다면 뭐든 이겨낼 수 있어요. 또 누군가는 성과가 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어요. 또 조직 전체로 볼 땐 당장 성과가 안 나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이 때 ‘제가 할 게요’라고 손을 드는 것도 중요해요. 당장은 내 성과로 이어지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요.” ▼ 워킹맘, 임원되기까지 ▼ 김 상무는 조직 생활에서 인간관계를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했다. 사내에서 각종 동호회 활동을 한 것도 대표적이다.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아들이 둘이라는 그가 이 모든 일을 어떻게 했을까.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시고, 아파도 입원할 지경이 아니라면 회사에 있는 저에게 전화를 안 하셨어요. 시어머니는 항상 ‘회사 일에 개인적인 일이 개입되면 안 된다고 했죠. 집에서 일하는 걸 지원해 줄테니, 회사에서 동료들 불안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었어요.” 의외였다. 친정어머니면 몰라도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회사 생활을 전폭 지원해주는 경우는 드문데…. “당신(시어머니)이 저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했는데, 그렇게 못사셨어요. 많이 배우지 못하기도 했고. 전업주부로 사셨거든요. 며느리가 일하는 것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이처럼 초년병 시절 시어머니가 육아를 전폭 지원해줬지만 회사는 그렇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채권 관리 시스템 구축 작업을 할 때에는 큰 아이를 임신했었는데 임신 8개월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 지금 같으면 임산부 야근과 임산부 장기간 근로는 모두 위법이지만 당시에는 공공연하게 임산부도 일했다. 아이 낳고 나서는 딱 60일 쉬고 복귀했다. 출산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계단에서 넘어진 적도 있을 정도였다. 모유가 멈추지 않아 한 달 간 고생하기도 했다. 워킹맘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시절을 견뎌낸 김 상무가 ’2019년의 워킹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는 “이제 육아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조직이,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아이가 아프다는 등 아이에 대해 부모가 불안한 부분이 있다면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없죠. 성과를 내려면 일차적으로 가정을 챙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지금은 아이가 힘들 때 조직이 가장 먼저 지원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상무 스스로도 개인적으로도 회사와 가정을 모두 동시에 잘 해 내기가 어려워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왔을 때에 아이 애착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게 아쉬웠죠. 일과 병행하느라 아이들한테는 맘 아프지 않게 하는 게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이 매주 읽을 책을 정하면 각자 읽은 책 내용을 가족끼리 서로 말하는 것을 리추얼로 삼았다. 아이들도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남을 설득하기 등을 연습할 수 있었고, 가족끼리도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도 남편이 주도해 대학생인 두 아들과 책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아이가 어린 워킹맘에게 전하는 김 상무의 사소하지만 중요할 수 있는 조언 하나. 그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항상 아이를 데리고 자라고 당부한다. “가정적으로 에너지를 내야하는 시기가 있고, 일에 몰입해야할 시기가 있죠. 모두를 병행하기란 힘들죠. 아이를 돌봐야 한다면,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자신을 위한 준비를 하는 거죠. 본인의 역량이 준비되어 있으면 됩니다. 여성들도 포기하지 말고 꿋꿋하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포기를 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이거 내 팔 근육이야. (식당에서) 쌀 나르고 설거지한 근육! 엿장사 꽃장사 떡장사 파출부…. 여자라고 나, 글도 안 가르쳐주고, 이름도 막내딸이라고 대충 지어놓고…. 막례가 뭐여?” 인기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72)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한껏 힘주며 이렇게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포스터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 do it)!’의 여자를 패러디한 장면. 평소 유쾌하고 호쾌한 할머니도 이때만큼은 울컥했다. 그는 전쟁 같은 삶을 살아냈다. 스무 살에 결혼하고 아이 셋을 뒀으나 ‘앙숙’(남편)은 집을 나가버렸다. 별수 없이 20대 중반 막노동에 뛰어들어 악착같이 버텼다. 낮엔 파출부 세 탕, 밤엔 식당일 나가면 자정에 들어오기 일쑤. 중년이 되어 쌈밥집을 차린 뒤엔 일흔 때까지 매일 오전 4시부터 일했다. 그러다가 의사에게 들은 한마디. “치매 올 가능성 있습니다.” 함께 살던 친손녀는 “불쌍한 우리 할머니,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며 퇴사하고 할머니와 호주 여행을 떠났고, 이를 영상으로 담아 유튜브에 올렸다. 그 뒤 할머니 인생은 ‘부침개처럼’ 뒤집어졌다. 유튜브 구독자 92만 명, 인스타그램 팔로어 30만 명에 육박하는 셀럽(유명인)이 됐다. 최근 이들이 펴낸 ‘박막례, 이대론 죽을 수 없다’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3위에 올랐다. 이달 7일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열린 할머니 사인회에서 대기표는 6분 만에 매진돼 인기를 실감케 했다. 젊은이들이 할머니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할머니는 꽃무늬 ‘몸뻬’나 뽀글이 파마, 계모임 화장 등 ‘한국 할머니’ 패션 화보로 해외에서까지 주목받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때론 무심하게, 때론 퉁명스럽게 삶의 내공이 녹은 말들을 툭툭 뱉어낸다. 최근 할머니 영상을 ‘정주행’(이어보기)한다는 젊은이들은 ‘박막례 어록’까지 만들어 확산시킨다. 한번은 할머니가 스위스 여행에서 산악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손등에 붕대를 감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친 것도 추억이여. 이런 건 영광의 상처다. 내가 도전하려고 했다가 생긴 상처라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홀로 아이를 키우며 거액을 사기당했다가 2시간 만에 평상심을 되찾았다는 ‘젊은 박막례’도 꼭 이랬을 것 같다. 그는 자식이 화를 입은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고 다시 일어섰다. 할머니는 새로운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호주에서 스노클링하려 바닷물에 들어가려던 찰나, 갑자기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가까스로 나왔다. 그런데도 한숨 돌리고 다시 잠수. 잠시 후 천연색 물고기들을 손으로 만져보고 나온 뒤 ‘오매, 오매’를 연발하며 “안 들어갔으면 후회할 뻔했다”고 말한다. 패러 글라이딩할 때에는 손녀가 “할머니 괜찮겠어?”라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으니 “나 탈 수 있어”라고 가뿐하게 답한다. 그리고는 하늘을 훨훨 난다. 주변 시선을 아랑곳 않고 즐거움을 찾아내는 점도 할머니의 매력이다. 옷 살 땐 “이쁜 것은 눈에 보일 때 사야 돼요. 내년에는 없어요. 뚱뚱하고 날씬해 뵈는 것에 집착하지 마세요. 내 맘에 들면 사는 것이니께”라고 당부한다. 옛날 사진 앨범에서 35세 박막례는 강가에서 세상에서 제일로 우울한 표정으로, 하필이면 검은 옷을 입고 강물을 응시하고 있다. 비참한 인생, 종친 인생이라 했다. 그는 ‘어떤 길로 가든 고난은 오는 것이니께, 그냥 가던 길 열심히 걸어가라’고 한다. 72세 박막례는 ‘저마다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 중인 지금의 청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박막례도 이렇게 살았는디 왜 희망을 버리냐. 니네들도 힘들면 이대로 죽을 순 없다 하고 버텨. 이 악물고 버티면 이날이 오더라. 느그들 이겨내고 힘내라. 희망 버렸으면 주워.”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전략마케팅팀 직원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e메일을 받는다. 발신인은 이 팀의 송명주 상무(49). 그는 주말 저녁 집에서 한 주를 정리하면서 e메일을 쓰고 예약 발송으로 걸어둔다. e메일에는 팀이 어떤 일을 하고 이 일이 회사 사업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등의 내용이 담겼다. 때로는 팀 업무를 돌아보기도 한다. 송 상무가 이처럼 e메일을 보내는 것은 어느 순간 업무 끝단에 있는 막내 직원은 ‘왜 위에서 같은 일을 시키지’라고 생각하는 일이 더러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어서 지시했는데 지시 내용이 여러 단계를 건너뛰면서 본래 취지가 바뀔 수도 있다. 조직에서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는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이 다들 제각기 열심히 하는데도 조직이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은 방향이 달라서이기 때문”이라며 “e메일을 주기적으로 보내 모두가 같은 목표를 지니고 일하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고 말했다. 송 상무는 삼성 여성 공채 1기(1993년 입사)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여성 임원이다. 삼성 여성 공채 1기는 139명. 중도에 관뒀거나 임원으로 승진해도 퇴직했다. 현재 임원 6년차인 송 상무는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외국인 동료들과 일할 때에나 주재원으로 일할 때에나 직원들을 집에서 소박한 밥을 해서 먹이는 ‘밥 푸는 리더십’을 펼쳤고, 후배 직원들에게는 무언가를 지시하기보다는 스스로 일하게끔 도와주는 서포터 역할을 자처했다. 이런 그 역시도 회사 생활에서 위기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진다 싶으면 사내(社內)에서 새로운 일을 찾아 도전했고 위기가 찾아올 때면 동료들에게 스스럼없이 도움을 구해 버텨냈다. 그는 “회사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기회가 있을 수 있다”며 “별 의미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일도, 지나칠 수 있는 사람도 꼼꼼히 살펴보면 나중에 뜻하지 않는 자산이 되어 돌아올 때가 많다”고 말했다. 송 상무를 만나 봤다. ●여대생 채용 기피 시절…PD지망생, 삼성으로 1992년 대학 졸업 이후 방송국 PD 시험에 응시했다가 미끄러진 그는 일반기업 취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만 해도 여대생의 대기업 입사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석 달 남짓 중소기업 취업을 준비하다가 좌절했다. 기업들은 대체로 여대생 채용을 기피했다. 설령 뽑아도 ‘용모 단정’이라는 조건을 내건 곳이 적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삼성의 공채 광고가 눈에 띄었다. ‘전문가에는 남녀가 없습니다. 지금, 프로비즈니스 우먼의 세계로 오십시오!’바로 원서를 냈고 다행히도 붙었다. 이듬해 입사해 삼성전자 생활 가전 부문으로 배치 받은 그는 가전 상품 기획을 맡게 됐다. 입사하고 보니 여자 선배들은 특채로 들어왔거나 디자인이나 비서 등 일부 분야에서 일했다. 당시 여성 화장실은 턱없이 부족했을 정도로 여성 직원은 낯선 존재였다. 선배들은 그를 가리키며 “요새 여사원도 공채로 뽑느냐”며 신기해했지만, 그는 웬만한 남성 직원 못지않게 일을 해냈다. 10년쯤 지나니 일이 손에 익었고 편해졌다. 하지만 이를 바꿔 말하면 호기심이 많았던 그에게는 흥미가 덜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침 사내 게시판에 구인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회사 핵심 부서로 꼽혔던 글로벌전략그룹(GSG)에서 일할 직원을 찾는다는 것. GSG는 이건희 삼성 회장 지시에 따라 1997년부터 미국 아이비리그 등에서 경영학석사(MBA) 출신 인재를 뽑아 삼성 계열사 컨설팅을 맡기던 곳. 그룹 미래전략과 사업방향을 수립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 공고를 보자마자 설¤다. 좋은 기회가 왔다는 판단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10년차, 일이 손에 익자 새로운 일에 손들고 도전 그는 바로 GSG에 지원했고, GSG의 인사·기획·총무 등 지원을 맡는 팀에 배치됐다. 안전지대(comfort zone)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이 곳은 같은 회사였지만 전혀 다른 세계였다. 외국인 동료들의 문화는 기존 한국 회사 문화와 생판 달랐다. 당시만 해도 ‘위에서 하라’고 하면 하던 시기였지만 외국인들은 달랐다. 지시 사항을 외국인들에게 전달하면 실행이 안됐다. “왜”라는 부분을 충분히 설명해야 실행(execution)이 뒤따라왔다.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절대 직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처음엔 외국인과 일하는 방식이 달라 힘들었지만 외국인들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법을 차츰 깨달으면서 이른바 ‘문화 적응력(cultural adaptiveness)’을 기르게 됐죠. 이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훗날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어려웠을 것 같아요.”송 상무는 외국인 동료들을 위한 하우스파티도 해봤다. 파티라고 해봤자 거창한 건 아니었다. 대형마트에서 와인 잔 30개를 사오고. 닭볶음탕 같은 음식을 내놓았다. 당시 삼성 다른 계열사에 다녔던 남편과 아들도 같이 파티를 준비하면서 외국인 동료들을 맞이했다. “세 시간 동안 외국인 동료들을 초대해 대접하고, 손님들이 나가자마자 온 식구가 뻗었어요. 치우지도 않고 바로 누워서 자버렸죠. 저희 가족에게는 재미난 경험이었어요. 당시 일했던 외국인 동료 중 아직도 저희 집 파티를 꺼내는 사람이 있죠.” 꼭 무얼 바라고 외국인 동료들과의 관계를 쌓은 건 아니었지만, 이들과의 관계는 성과로 돌아왔다. 2004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프랑스에서 권위 있는 훈장인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를 받았을 때다. GSG에 프랑스 직원이 있었는데, 이 직원의 친구가 다니는 프랑스 유력 언론인 르몽드를 통해 이 회장의 훈장 수상 소식뿐 아니라 GSG까지 소개할 수 있었다. 삼성이 해외 인재를 유치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GSG가 해외 유력 언론에 자세히 소개되면서 더 우수한 인재를 유치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니 송 상무 스스로가 커져 있었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자신감을 얻었다. ’하버드, MIT, 스탠포드를 나와도 사람은 같구나‘, ’피부 색깔은 달라도 사람은 같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당시 야간대학원 경영학석사(MBA) 코스도 밟으며 공부를 더 했다. “사람은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회사에는 생각보다 많은 기회가 있을 수 있죠. 매일 하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하면서 스스로의 기회를 넓히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많이 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나를 따르라‘보다 ’이거 해볼까‘ 리더십 송 상무는 GSG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초년병 시절, 부서장과의 간담회에서 한 여성 후배가 “남자 동기들은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는데, 왜 여자는 예외냐”고 물었다. 회사는 이게 여성 직원들을 위한 배려라고 하지만, 개인 선택의 문제인데 기회를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였다. 유리천정(glass ceiling)이 도처에 깔려 있었던 셈이었다. 송 상무도 함께 자리한 여성 직원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면서 언젠가 해외 주재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간담회 이후 사내 제도가 바뀌었다. 여성이라고 해서 해외 주재원에서 배제되지 않았고 송 상무 역시 2009년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파견갈 수 있게 됐다. 그는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 9개국을 지원·관리하는 지역프로젝트매니저(RPM)가 됐다. 조직원들의 역량을 잘 이끌어내야 하는 관리자(부장)가 되니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조직원 스스로 일하게 하는 것에 신경 썼다. 우선 각국 법인의 성과를 점검하고 모니터링하고 피드백 하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로컬 직원(현지 채용인)을 믿어주려 했다. 그래야 동기(motivation) 부여를 할 수 있다는 것. ’나를 따르라‘ 식의 리더십이 아니라, ’이런 게 있는데 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라고 제안하는 식을 선호했다. “상사가 처음부터 뭔가를 하자고 구체적으로 말해버리면, 실행되기 힘든 이상에 그치게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직원의 역량과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해서 직원 스스로 하게 해야, 그 일은 직원 ’자기 일‘이 되고, 스스로도 오너십을 갖고 몰입하더라고요.” 그 역시도 초임 부장 시절에는 직원들이 일을 했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하루에 한 번씩, 빨리 하라고 재촉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직원들이 스스로 하는 건 줄어들었다. 직원들 스스로 주도해나가는 게 없기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송 상무는 직원을 기다려 주지 못하는 게 스스로의 안달복달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게 됐다. 송 상무 특유의 ’밥 푸는 리더십‘도 동남아에서 발휘됐다. 에어컨은 직원들이 설치·유지·보수해주는 특성상 서비스의 질이 중요했다. 그는 각국에서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참석하는 워크숍을 싱가포르에서 열고, 집에서 한식을 대접했다. 본사에서 싱가포르에 출장 오는 후배 직원들을 맞이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식을 아주 간단히 만들어 밥을 먹였다.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성의가 전달됐고 신뢰를 얻었다. 목적을 갖고 대접한 건 아니었지만, 후배들은 훗날 송 상무가 업무상 필요한 일이 있어서 연락할 때면 기꺼이 지원에 나서주는 등의 보답을 했다. ●의사결정권자 설득은 각개격파 그는 동남아 시장에서 에어컨에 주목했다. 24시간 에어컨을 틀어놓는 현지 특성상 잘 키우면 효자가 될 제품이었지만, 현지 점유율 5~6위에 머물렀다. “당시 동남아에는 에어컨을 한국이나 중국에서 제조해 들여와 팔다보니 현지에서는 비싼 축에 속했어요. 또 사업을 키우려면 현지에 맞는 제품이 있어야 했지만, 제품 라인업이 다소 빈약했어요.” ’동남아 특성에 적합한 에어컨을 개발할 수 없을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설사 현지 특성에 맞춘 제품을 개발해도 매출을 늘리려면 적기 공급이 중요한데 한국에서 중국에서 공급받는 이상 일정 시간이 걸렸다.직원들과 고민해보니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난방 등 불필요한 스펙을 없애고 냉방만 할 수 있게 개발하면 재료비가 줄었다. 또 동남아 현지에서 생산하면 물류비와 재고비 부담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은 관문은 사업부 설득. 송 상무는 주요 의사 결정권자들을 일일이 연락하고 만나면서 각개격파를 했다. “싸리나무도 다발로 자르면 자르기 힘든데, 하나씩 자르면 잘 부러지잖아요. 일대일 커뮤니케이션에 역점을 뒀어요. 시간이 걸려도 다리품을 팔려고 했어요. 80% 이상의 대다수 마음이 기울어지면 원하는 바를 행할 수 있죠.” 직원들과 함께 설득해 현지에서 스펙을 낮춘 에어컨을 생산하기로 결정했고, 삼성전자 에어컨의 현지 시장 점유율을 3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그는 주재원 생활이 끝나면서 임원으로 승진해 2014년 한국에 들어왔다. ●직원들에게 매주 e메일 보내 비전 공유 현재 송 상무는 임원 6년차에 접어들었다. 임원이 되니 책임감도 더 커졌다.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성과에 따라 조직원들의 사내 위상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매주 월요일마다 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비전을 공유하면 직원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는 현재 냉장기 세탁기 등 생활 가전에서 다양한 시장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매 예상 정확도를 높이고, 회사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온·오프라인에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특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제품에 대한 소비자 의견 등을 수집·분석하는 소셜 리스닝(social listening) 기법을 마케팅에 체계적으로 적용해 영업 프로세스를 혁신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기존 소비자 조사는 반 년 정도 늦게 나와 제품이 이미 출시된 뒤 한 발 늦게 피드백을 받아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이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바로 적용하는 거죠. 제품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자에게 제품 특성이 잘 전달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죠. ’삼성 가전다움‘이라는 브랜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그는 “일 잘한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초긍정 마인드를 지녔다는 것”이라며 “긍정적인 사람은 기회가 왔을 때 새로운 변화와 성과를 만드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왜 하지 말아야하는지부터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거 없는 긍정은 안 되겠지만 합리적인 선에서 마음과 생각의 문을 열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부터 생각해 보면 스스로에게 기회가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워킹맘, 임원 되기까지 ▼ 송 상무는 아들을 한 명 둔 ’워킹맘‘이기도 하다. 자녀로 인해 회사 생활에서 위기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그가 출근할 때면 아들은 목 놓아 울어버렸다. 그럴 때면 현관문 앞에서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나도 전업 주부처럼 유모차 끌고 볕 좋은 따뜻한 공원에 나가봤으면….‘ 송 상무는 당시 과장, 차장 시절로 회사에서는 한창 일하면서 성과를 많이 올리고, 그 성과를 보여줘야 했을 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회사에선 일을 가장 많이 해야 하면서도 집에선 아이에게 부모의 손길을 많이 줘야 했던 시기. 그는 “일하는 여성은 가족이 생기면 회사 생활에서 위기를 더 자주 겪기 쉽다”고 말했다. 이런 위기를 그는 어떻게 넘겼을까. “저는 ’개인으로서의 나‘, ’아내로서의 나‘, ’엄마로서의 나‘, ’딸로서의 나‘ 등 네 가지 정체성을 지니고 사는데 그 밸런스를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생애 전반으로 걸쳤을 때에 엄마로서 중요할 때가 있고, 아내로서 중요할 때가 있고…. 시기에 따라 다르죠.” 송 상무는 이를 ’아메바 정체성‘이라 규정했다.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그 가운데에 스스로 밸런스를 잡고 있으면 위기가 생각보다는 쉽게 지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위기 시 그의 원칙은 이렇다. ’첫째, 한 순간에는 내가 힘들지만, 영원히 힘든 것도 아니다. 둘째 완벽하게 잘할 거라 생각지 말자. 셋째, 잠시 힘들지만 나는 가운데로 오게 되어 있다,‘ 아이에게도 ’다 걸기‘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출장 다녀와서는 숙제를 다 했는지 확인하고 아이한테 스트레스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다가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말로부터 실마리를 얻었다. 자녀에게 세 가지만 할 것. 사랑해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그는 “회사를 다니기에 어차피 불가능하지만, 저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아이한테 집중하면 아이한테도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면서도 아들과 함께 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아들에게는 놀이삼아 공부 내용을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해줬다. 교육 목적이라기보다는 송 상무 스스로도 공부해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경영학대학원이었기에 아이는 자신의 좋아하는 자동차의 경우 주요 회사들의 계보를 쭉쭉 외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른 집과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하다보니 아이와 대화도 많아졌다. 어느 순간 아들은 “엄마, 우리 반에 엄마랑 얘기를 많이 하는 얘가 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그는 완벽해지지 않으려 했고 그 위기의 파고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동시에 상사 등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를 돌보느라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시기다‘, ’아이가 유치원에서일이 있으니 일찍 가야겠다‘ 등을 미리 솔직히 알려놓으니, 이해하고 도와줬다. “회사 생활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혼자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본인은 힘들어도 혼자 머리 싸매고 고민만 하다보면 사람들이 오히려 몰라서 못 도와주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거든요. 고민은 나눠서 해결할 수 있어요. ’뜨거운 감자‘는 주변에 던지세요.” 단 전제는 있다. 평소에 신뢰를 쌓아놓아야 도움이 통한다. “SOS가 너무 잦으면 문제겠지만, 조직에서는 몇 개월만 같이 일해 봐도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구축되잖아요. 일의 기본은 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신뢰를 주고, 정말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는 거죠. 뺀들뺀들 일도 안하면서 남에게 모든 걸 맡기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김유영기자 abc@donga.com}
종이 매체의 글을 집중해 읽는다는 건 언제부터인가 사치재가 되어버렸다. 읽을 시간도 있어야 하고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 됐다. 스마트폰이나 PC 등 디지털 매체로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소비하면서 말이다. 인지학자들은 디지털 읽기가 확산되면서 인류의 읽기 패턴도 바뀔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글을 얼마나 잘 읽는지는 얼마나 깊이 읽는지에 달렸는데, 디지털 매체의 특성상 집중의 질(質)이 낮아지고 결국 ‘깊이 읽기’가 어려워질 확률이 크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디지털로 무언가를 읽으려다 보면 수시로 클릭 유도 글이나 팝업 창이 뜨고 사려고 망설였던 물건이 갑자기 번득인다. 쇼핑몰에 접속한 인터넷 기록(쿠키)이 남아 영악한 광고로 변신한 것. 밀려오는 글을 다 읽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의무감이 생기기도 한다. 결국 과다한 정보와 각종 자극 등으로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해야 해서 제대로 읽기가 힘들어진다. 문제는 글 자체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 디지털로 글을 읽는 사람의 시선을 추적하면 화면에 ‘F’자 형태가 나타난다. 처음 두어 줄을 지그재그로 읽다가 결론으로 휙 내려가는 방식이다. 띄엄띄엄 읽는 만큼 이해력도 떨어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실험도 있다. 노르웨이 연구진이 10대 학생들에게 이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의 단편 소설을 골라 절반은 디지털로, 절반은 종이책으로 읽게 했다. 실험 결과 종이책으로 읽은 그룹이 디지털로 읽은 그룹보다 시간순대로 줄거리를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런 F자형 읽기는 디지털로 기사를 읽은 뒤 댓글을 읽거나 댓글을 달 때에도 도드라진다. ‘댓글을 많이 다는 사람들은 정작 기사 본문을 많이 읽지 않는다. 제목만 읽거나 기사 일부만 보고 바로 댓글을 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댓글에도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쓰는 대신 다른 사람의 댓글에 집중적으로 의견을 달거나 상대를 비방한다.’ 이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자사의 댓글을 분석한 결과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기사 본문과 무관하게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편을 드는 정파적인 댓글이 넘쳐나고 특정 집단을 혐오하거나 일부 지역을 비하하는 댓글이 쏟아진다. 분열과 혐오로 민주주의가 후퇴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미국의 인지신경학자인 매리언 울프는 저서 ‘다시, 책으로’에서 디지털로 읽다 보면 비판적 분석적 사고가 약해지고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또 인지과부하로 우리 뇌는 정보를 단순화하거나 최대한 빠르게 선별해 훑어버리고 잊어버리는데, 이로 인해 가짜뉴스를 판별하는 능력도 취약해진다고 한다. 한국인 10명 중 8명은 이제 모바일로 기사를 접한다. 또 10명 중 4명은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참고서와 교과서 등을 제외하고 말이다). 깊이 읽는 습성은 시민들이 비판적인 사고와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충분히 토론하며 이뤄가는 숙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디지털로 읽더라도 허둥지둥 산만하게 읽는 것을 피해야 할 이유다. 이 글을 디지털로 읽고 있다면, 혹은 앞에 두어 줄 읽다가 이 부분으로 넘어왔다면 종이 매체와의 호사스러운 접촉을 한 번쯤은 꿈꿔 보시라. 책이든 잡지든 신문이든 무엇이든 좋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대기업 마케터인 김모 씨(34)는 출근길 가장 먼저 e메일을 확인한다. 업무 연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뉴스레터로 최신 트렌드를 살피기 위해서다. 기존엔 소셜미디어나 포털을 먼저 봤지만 올 들어 패턴을 바꿨다. 현재 구독하는 뉴스레터는 20여 개에 이른다. 주제도 경영,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여행 등 다양하다. 그는 “관심사에 맞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e메일 뉴스레터가 최근 젊은층을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 PC통신, 인터넷과 함께 등장한 뉴스레터가 기업이나 기관 광고를 싣는 고리타분한 스팸메일로 분류됐던 것과 대조적이다. 첨단 미디어가 잇달아 등장하는 2019년에 ‘구식의 뉴스레터’가 뜨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상 최대의 구독자(430만 명)를 확보하며 승승장구하는 뉴욕타임스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무려 60가지의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요리, 달리기, 인종, 젠더 등 관심사별로, 오전 오후 등 시간대별로, 칼럼 필진별로 쪼개 발행한다. 맞춤형으로 보내는 만큼 뉴스레터를 읽는 비율은 약 70%나 된다. 뉴스레터는 플랫폼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전략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가 최근 애플이 ‘뉴스판 넷플릭스’를 목표로 추진하는 애플뉴스에 기사를 안 주겠다고 선언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실제로 기업가치가 한때 1조 원으로 추산됐던 버즈피드는 뉴스 유통의 주요 채널인 페이스북이 뉴스 노출 알고리즘을 바꾸자 감원하는 등 휘청거리고 있다. 아예 뉴스레터가 주력인 미디어 기업도 인기다. 똑똑한 간결함(smart brevity)을 내세운 ‘액시오스’는 뉴스레터로 이슈를 정리해 준다. 2017년 출범해 매출액이 매년 2배 이상으로 늘고 있다. ‘더 스킴’은 친근한 말투에 간결한 방식으로 뉴스레터를 보내 구독자 700만 명을 확보했다. 국내는 초기 단계지만 ‘뉴닉’이라는 미디어 스타트업이 선전하고 있다. 예컨대 1분기 성장률이 발표된 날 ‘쉿, 이번 성적 비밀이야’라는 뉴스레터를 통해 ‘왜 그렇게 성적이 나빴대?’(성장률 하락 이유), ‘사람들의 반응이 어때?’(성장률 하락을 보는 여러 시각) 등을 각종 이모티콘과 함께 밀레니얼 세대의 언어로 풀어낸다. 작가들도 뉴스레터를 창작 배출구로 쓴다. 학자금 대출 2500만 원을 갚기 위해 지난해 2월부터 구독자에게 월 1만 원을 받고 ‘일간 이슬아’라는 뉴스레터로 수필을 보내는 이슬아 작가는 현재 대출금을 다 갚았고 글을 책으로 펴내 10쇄까지 찍었다. 뉴스레터 발송 앱인 ‘서브스택’ 가입 작가는 올 들어 매월 40%씩 늘고 있다. 뉴스레터의 인기는 어찌 보면 예견됐었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디지털 미디어의 부작용에 대한 반(反)작용으로 본다. 소셜미디어는 정보의 홍수를 이루고 광고가 범람하며 포털엔 팩트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기사나 낚시성 기사가 적지 않다. 주의력이 희소자원인 시대에 뉴스레터는 세분화된 개인 취향에 맞춰 개인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한다. e메일 우편함이라는 정제된 환경에 양질의 콘텐츠를 태워 보내는 전략이다. 결국 독자가 원하는 콘텐츠 본질에 집중해야 진화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21세기에 ‘새로운 미디어’로 변신한 20세기의 뉴스레터가 던진 교훈이다.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낙태죄_폐지, #낙태죄_여기서_끝내자 등 낙태 관련 해시태그가 유독 많았다. 임산부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잇달아 글을 올리며 이런 해시태그를 붙인 것. 이는 그동안 바뀐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기도 하고, 11일 낙태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를 이끌어내는 추동력이 되기도 했다. 해시태그는 #를 가리키는 해시(hash)와 꼬리표(tag)의 합성어. 문구 앞에 해시태그를 달면 동일한 해시태그를 붙인 게시물이 한꺼번에 나온다. 검색을 쉽게 하기 위해 쓰인 해시태그가 특정 주제에 관심과 지지를 표하는 식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국내에서 해시태그가 힘을 얻게 된 건 2015년. 한 방송인이 “이슬람국가(IS·이슬람 무장단체)보다 무뇌(無腦)아적 페미니즘이 위험하다”고 말하자 여자들은 즉각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를 붙인 글을 올리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여자에게 무시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생판 모르는 여자를 살해하자 여자들은 #살아남았다로 추모 운동을 벌였고 몰카 범죄가 드러날 때면 #디지털_성범죄_아웃으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런 ‘해시태그의 힘’은 #미투(MeToo·나도 당했다)에서 제대로 발휘됐다.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가 생성되며 연극 영화 방송 분야의 폭로가 잇따랐고 이는 #스포츠계_내_성폭력, #교회_내_성폭력, #회사_내_성폭력 등으로 확장됐다. 충북여중에서 촉발된 #스쿨미투(학내 성폭력 추방 운동)는 80개에 육박하는 중고교의 학생들이 목소리를 냈고 올해 9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의제로 다뤄질 정도로 국제사회의 관심까지 이끌었다. 일상의 편견에도 여자들은 해시태그로 응수했다. 여자는 잘 모른다는 걸 전제로 남자가 과하게 설명하는 맨스플레인(man+explain)에 ‘#오빤다알아ㅎ’로 맞받아치고 시군구별 가임기 여성 수를 표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제작한 정부에는 ‘#나는_가임여성이다’로 여성을 출산 기계로 보고 사회적 문제인 저출산을 여성 개인 탓으로 돌리는 시각에 집단 항의했다(사이트는 하루 만에 폐쇄됐다). 여자들은 왜 해시태그를 많이 쓰게 됐을까. 이는 익명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데다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즉각 연결될 수 있는 소셜미디어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 잭 도시 트위터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1박 2일의 짧은 방한 기간에도 여성단체를 만나 “한국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트위터에서 10, 20대 사용자가 절반에 이르는데, 공정함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일수록 일상의 차별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회적인 이슈에 의견을 표하려 하고,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다. 물론 소셜미디어에도 혐오가 만연하고 거짓뉴스도 확산되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숨겨져 왔던 폭력과 차별, 편견,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은 이에 공감과 지지를 표하며 무언가를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해시태그로 연결되고 해시태그로 묶이면서 그 연결은 더 강해졌다. 바로 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우리 딸이 더 잘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세상은 조금씩 나아가는 것 같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다음 달 초 9급 공무원 시험을 치르는 A 씨는 매일 ‘공부 생방송’을 내보낸다. 유튜브에서 반나절 이상 자신이 공부하는 모습을 실시간 스트리밍한다. 화면에는 제본된 두꺼운 책을 공부하는 손만 등장한다. 얼굴은 아예 안 나오고 책을 넘기는 장면이 이따금씩 나올 뿐이다. 대화도, 자막도, 편집도 없다. 밥 먹으러 자리를 비울 땐 ‘식사 중’이란 표지판을 놓고 사라진다. 그래도 방송은 쭉 이어진다. 극도로 단조로운 영상인데도 구독자는 4만 명을 넘는다. 2017년 개설 이후 누적 조회수도 400만 건을 넘었다. 일명 ‘스터디 위드 미(Study with me·같이 공부해요)’ 방송이다. 한때 북유럽 한 방송사가 해안가 철로를 달리는 열차 밖을 7시간 동안 찍어서 내보낸 ‘슬로 TV’가 인기를 끌었는데, 공부 생방송은 ‘한국판 슬로 TV’라고 할 법하다. A 씨는 관종(관심 종자)일까? 아니다. 그는 “남들이 지켜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그 나름의 합리적 이유를 갖고 방송에 임한다. 공부 생방송을 보는 수험생들의 심리도 비슷하다. 공부하려 앉으면 스마트폰으로 딴짓하고 싶어지는데,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켜놓으면 공부에 몰입하고 수험생을 보며 자극받는다는 것이다. 먹방을 보면 먹고 싶어지듯 ‘공방’을 보면 공부하고 싶어진다는 설명이다. 공부 생방송은 수험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사회적 지지 역할을 해준다. 화면 오른쪽 옆 채팅창에서는 ‘과도한 친목’을 금하기 위해 10분 이내의 대화를 권장하는데, 매일 500명 안팎이 접속해 ‘멘털 붙잡고 힘냅시다’, ‘졸리고 지치는데 방송 보니 힘이 나네요’ 등 응원 글을 쏟아낸다. 여럿이 24시간 공부 방송을 하는 채널도 있다. 세무사 시험 준비생이 운영하는 ‘내 옆자리 남자’에서는 운영자를 포함해 9명이 각각 공부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특정 링크를 클릭하면 자신이 공부하는 모습을 분할된 화면에 띄우는 방식이다. ‘올빼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에는 녹화한 공부 방송을 틀어 무한 방송을 이어간다. 언제나 같이 공부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이들 공부 생방송에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시험에서 못 벗어나는 ‘수험사회’ 한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무원 시험은 물론 교사 임용고시,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PEET) 등 다양하지만 수험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두고 판을 벌여 모여드는 이들에게 공부 생방송을 태운 유튜브는 고독(solitude)하게 공부할지언정 외로움(loneliness)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커뮤니티다. 설문조사 업체인 오픈서베이에 따르면 10, 20대는 유튜브를 하는 이유로 ‘댓글 등 다른 사람 반응을 보려고’(각각 56.1%, 48.6%)를 가장 많이 꼽았다. ‘궁금한 내용을 영상으로 보려고’ 유튜브를 하는 40, 50대(각각 61.5%, 70.7%)와는 다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하지 않거나 일하지 못하는 청년이 200만 명에 육박한다. 누군가는 청춘들이 수험 생활에 매달리는 것을 사회적 손실로 보고 누군가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도전적이지 않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민간에 좋은 일자리가 충분치 않고 때때로 채용 비리, 채용 갑질 등이 빚어지는 마당에 학력·학벌에서 차별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나마 공정한 절차에 도전하는 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북유럽 슬로 TV의 해안가 풍광이 비좁은 책상 화면으로 치환된 지극히 한국적인 슬로 TV를 보고 안쓰러움이 밀려오는 것도 잠시,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실에서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낸 청춘들의 건투를 빌기로 했다. 잘못은 수험사회가 했으니까 말이다.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14일 많은 사람들이 ‘간헐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식’을 강제로 하게 됐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갑자기 접속 오류가 발생한 데에 따른 것이다. 로그인이 안 되거나 화면이 아예 안 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이용자가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는 만큼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강박적으로 SNS에 매달리던 우리들에게 SNS 접속이 끊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면, 허망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는 정보를 찾고 싶은 마음에,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 답답해하기도 했지만 이는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이런 욕구를 해결할 만한 다른 수단도 얼마든 많았다. 오히려 주의를 분산시키는 SNS가 없으니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사실 추세적으로 페이스북은 노쇠해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인 에디슨 리서치에 따르면 페이스북 이용자 수는 3년째 감소세다. 특히 미국에서 지난해 젊은층(12∼34세) 이용자는 2년 전보다 1500만 명 줄었다. 국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설문업체인 오픈서베이의 조사 결과 올해 10∼50대의 페이스북 이용률은 전년 대비 23.8% 줄었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페이스북에 가짜뉴스가 유통되거나 원하지 않는 광고가 뜨는 등 ‘내 담벼락(피드)’에 원하지 않는 정보가 등장한다는 게 꼽힌다. 처음엔 모두가 뛰어놀 수 있는 광장이 조성돼 몰려갔지만,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을 점령해가니 정작 자신은 광장에서 빠져나가겠다는 심리다. 영국 데이터 분석회사인 케임브리지애널리티카(CA)가 페이스북 사용자의 개인 정보를 무단 도용했고 러시아 정부가 페이스북을 통해 가짜뉴스를 유통해 미국 대선에 개입한 흔적도 밝혀진 바 있다. 광고로 도배되는 상업주의는 인스타그램에서 더 심하다.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로 ‘있어 보이는’ 사진으로 상대에게 박탈감을 안겨주며 행복감을 떨어뜨린다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이제는 인스타그램을 멀리하고 싶은 이유가 적지 않다. 처음에는 호의를 갖고 특정인을 팔로하면서 그(그녀)가 매일 올리는 일상을 즐겨 보다가 느닷없이 “마켓해요”(물건 판매를 한다는 뜻)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인스타그램이 쇼핑몰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그런가 하면 아기 옆에 생뚱맞게 화장품 세제 등 각종 협찬품을 놓고 사진을 찍는 등 홍보에 열을 올리는 사람도 많다. 내가 보인 ‘선한 호의’와 ‘순수한 관심’이 고작 ‘그들의 돈’으로 치환되는 듯한 씁쓸함이 밀려오는 순간이다. 올 초 인스타그램에서 역대 최고의 좋아요(하트)를 받았던 달걀을 떠올려 본다. 단순한 달걀 사진을 올리는 계정으로 ‘좋아요 수로 신기록을 세워 보자’를 목표로 만들어졌다. 실제 5329만 개의 좋아요를 받은 달걀까지 나오면서 이전 최고 기록(미국 유명인 카일리 제너의 갓 태어난 딸·1800만 개)을 가뿐히 깼다. 달걀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하늘을 찌를 무렵인 이달 초 동영상이 올라왔다. “최근 들어 (달걀) 껍데기가 깨지기 시작했다. SNS의 압박이 나를 짓누른다. 만약 당신도 압박을 느낀다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라”라는 메시지였다. 이는 행복감을 높이는 등 정신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공익 캠페인이었다. 우리가 집착하는 SNS와 좋아요라는 버튼이 그토록 허망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많은 이들에게 찾아왔다. 그러하므로, 이번 간헐적 SNS 단식이 남긴 건 어쩌면 사람과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를 체험하게 해주는 순간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과학자들이 안데스산맥에서 유니콘 한 무리를 발견했다. 이 유니콘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황당무계한 이 문장을 글짓기 인공지능(AI)에 입력하니 AI는 천연덕스럽게 생물학자인 조지 퍼레즈 박사라는 특정인을 거론하며 그가 유니콘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과 유니콘이 영어를 구사하게 된 연유 등을 술술 풀어냈다. ‘재활용은 환경에 좋지 않다’는 상식을 뒤집는 문장에는 ‘쓰레기 줄이기가 더 중요하다’는 논리를 펼쳤고 일부 기사에는 사진 설명까지 스스로 써냈다. 미국 비영리 연구기업인 ‘오픈AI’가 최근 공개한 AI(GPT-2)의 얘기다. 이 AI는 인터넷 페이지 80만 쪽에 담긴 단어 15억 개를 학습해 한두 문장만 입력받으면 나머지 글을 스스로 완성할 수 있게 개발됐다. 연구진은 AI의 작문 실력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인류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모든 연구 결과를 공개했지만 이번엔 가짜뉴스 등에 악용될 우려가 있기에 핵심 기술을 예외적으로 비공개했다. 실제로 이 AI는 “핵 물질을 실은 열차가 신시내티에서 탈취됐다”라는 문장에 사고 발생 구간과 핵 물질 개발 장소를 담는 등 간담을 서늘케 하는 기사를 바로 만들어냈다. 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실수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러시아는 즉각적으로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문장을 받아들자 백악관이 러시아가 관련 국제조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는 등의 속보를 자동 생성했다. 이런 AI가 동영상을 조작하는 딥페이크(deep fake) 같은 기술과 결합되면 위력이 더 커질 수 있다. 딥페이크는 딥러닝(심층기계학습)으로 얼굴이 나온 동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조작할 수 있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를 비난하며 ‘정신 똑바로 차려. ××들아(stay woke, bit××es)’란 욕설 영상이 공개돼 파장이 일었다. 딥페이크에 경각심을 주려고 오바마 얼굴에 다른 사람의 음성을 덧입혀 제작됐지만, 대부분 깜빡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명제조차 무력해진다. 미국 비영리 언론재단인 나이트재단은 최근 발간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보고서에서 뉴미디어 신기술이 팩트와 거짓의 구분을 더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보다 감정이 여론을 주도하는 탈진실(post-truth)을 넘어서, 진실과 조작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진실의 종말(the end of truth) 시대가 올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이런 기술이 특정인 음해, 소수 집단 차별, 테러 집단의 선동 등에 악용될 경우 악의를 품고 조작된 뉴스가 소셜미디어 등을 타고 들불처럼 확산될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AI 앵커’까지 등장한 점을 감안하면 근거 없는 뉴스를 영상으로 제작·방송하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곧 다가올 미래를 ‘묵시록’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뉴스에 즉각 반응하기에 앞서 사실인지 명료하게 확인하고 뉴스 배경·맥락을 살펴보려는 의지를 우리는 발휘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가짜뉴스를 만드는 집단과 이를 유통하는 플랫폼에 책임을 묻고 AI가 윤리적이고 편견이 없는 양질(良質)의 글과 영상 등을 학습하고 있는지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사실과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적인 가치가 중요해짐은 물론이다. 기술은 계속 개발될 것이기에 그 부작용에 맞서려는 인간의 의지도 꺾이지 말아야 한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신문은 죽어 가는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자들은 때때로 도발적인 질문을 접한다. 독자 감소와 매출 하락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도 질문에 곁들여진다. 2019년 이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뉴욕타임스 얘기부터 꺼내야 할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망해간다(failing)”고 맹비난을 받았지만 지난해 사상 최대의 구독자(430만 명)를 확보하며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디지털 전략이 주효했다. 뉴욕타임스는 온라인에서 기사 10건을 공짜로 읽게 하지만 그 이상 읽으려는 독자에게는 ‘1년간 1주일에 1달러($1.00 a week for one year)’라는 구독 유도 메시지를 띄운다. 페이월(paywall·지불장벽)을 치는 방식이다. 뉴욕타임스의 디지털 구독자는 지난해 336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 급증했다. 광고의 질(質)도 달라졌다. 지난해 4분기(10∼12월) 디지털 광고액(1억300만 달러)이 사상 처음으로 지면 광고액(8800만 달러)을 넘어섰다. 하버드대 산하 니먼저널리즘랩은 “뉴욕타임스가 명실상부한 디지털 기업으로 가고 있다”고 평했다. 이는 디지털 미디어 선봉에 섰던 뉴미디어가 오히려 최근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때 기업가치 15억 달러에 달했던 버즈피드(Buzzfeed)와 밀레니얼 세대를 겨냥한 동영상으로 유명한 바이스(Vice)가 최근 대대적인 감원에 나섰다. 소셜미디어를 등에 업고 성장한 믹(Mic)과 매셔블(Mashable)이 헐값에 매각되다시피 했다. 미디어 전문가인 짐 밴더하이는 뉴미디어가 이용자 시간을 불필요하게 점유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무료지만 알맹이 없는 리스티클(목록을 뜻하는 리스트와 기사를 나타내는 아티클의 합성어로 ‘○○○하는 ○가지 방법’ 같은 콘텐츠), 자극적인 제목, 눈요기에 그치는 사진 등을 가리켜 똥구덩이(crap-trap)로 표현하기도 했다. 반면 뉴욕타임스는 168년의 전통을 바탕으로 강한 저널리즘(strong journalism)을 구현하고 있다. 지난해 120명을 신규 채용해 총 1600여 명의 기자 군단을 꾸리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닌 백악관 인사들의 익명 기고문을 실어 파장을 일으켰고 페이스북의 정보 유출 등 탐사보도로 이목을 끌었다. 다른 올드미디어도 선전하며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가 2013년 인수한 뒤 철저히 디지털 위주로 시스템을 바꿔 현재 디지털 구독자 비중이 70%에 이른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디지털 구독자 75만 명을 확보했다. 영화나 음악부터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일정 기간 사용료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구독경제’가 최근 각광받고 있는 가운데 구독의 원조 격인 신문이 21세기 디지털 구독으로 다시 살아나는 셈이다. 국내에서 디지털 구독은 초기 단계지만 올드미디어의 귀환은 일단 반갑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쓸데없거나 부정확하고 선전·선동·혐오 콘텐츠가 적지 않은 시대에 양질의 저널리즘을 갈구하는 독자라면 한 달에 커피 한 잔 값을 기꺼이 지불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리처드 징그러스 구글 뉴스부문 총괄 부사장이 “이제야 진정한 뉴스 비즈니스 시대가 왔다”고 단언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탈진실의 시대에 일부 집단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팩트가 가짜뉴스로 치부되거나 때때로 맹비난을 받아도, 우리 기자들은 취재원 발언 한마디를 더 듣기 위해 ‘뻗치기’(취재원을 무작정 기다리기)를 하고 팩트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며 오늘도 노트북을 연다. 신문은 죽지 않았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최근의 고용 참사를 의식해서일까. 정태호 대통령일자리수석비서관이 직접 나섰다. ‘현 정권의 어용지식인’을 자처해온 친여(親與) 인사가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에 최근 출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짜뉴스에 적극 대응하고 정책 홍보에 유튜브를 활용하라고 지시한 직후였다. 정 수석은 자신의 출연 이유에 대해 “대통령과 이심전심이 아니었을까”라고 설명했다. 그는 1시간여 이어진 대담의 상당 부분을 지난해 고용 성적표가 참사로 비칠 수밖에 없는 여건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했다. 해당 회차 제목은 ‘전지적 일자리 시점’이었지만, 해명에 가까웠다. 경제성장률 하락과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취업자 수 증가폭이 감소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고용 참사를 성장률 하락과 인구 탓으로 돌리기에는 일자리 수 감소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는 노동경제학자들의 비판을 말끔하게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그의 출연은 그 유튜브 방송에서의 반응만 보면 ‘성공’이었다. 5000건 넘게 달린 댓글 내용의 상당수는 칭찬과 응원 일색이었다. “1시간 넘게 모두 시청하고 갑니다. 이렇게 화면으로 만나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등등. ‘광고 건너뛰기’를 하지 말자는 운동마저 있었다. 광고를 끝까지 봐야 광고 수익이 나오고 그래야 이 유튜브 방송을 재정적으로도 후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식의 디지털 소통이 과연 성공적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20년 가까이 공공 커뮤니케이션을 해온 한 인사는 “디지털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뉴미디어 소통이 만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튜브 특성상 이용자들에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행태를 키울 수 있는 데다 출연자 역시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갈 수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에코 체임버(echo chamber·메아리를 만들어 내는 방) 효과’를 우려하는 것이다. 같은 성향의 사람끼리만 모여 있는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서 남의 소리는 안 들리고, 자신들의 이야기만 증폭돼 진리나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이다. 연초 대통령 말 한마디에 청와대뿐만 아니라 각 정부 부처들은 디지털 소통 방안을 다시 수립하기 위해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에도 정부 부처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소통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13개 정부 주요 부처들은 지난해 이미 카드뉴스나 웹툰, 동영상 등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고 SNS 관리 등을 위해 3명씩의 민간 전문가까지 채용했다. 정부 부처의 한 대변인실 관계자는 “디지털소통팀을 보강한 지 1년도 안 돼서 다시 디지털 소통을 강화하라니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지지자들과의 디지털 소통에만 만족하고, 일자리 창출의 직·간접적인 이해관계 당사자인 기업과 노조, 취업준비생, 은퇴자 등의 생생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면 내년 이맘때 정부의 누군가가 또 고용 참사에 대한 해명을 늘어놔야 할는지도 모른다. 현재 중국 경제가 감속(減速)기에 들어섰고 미국 등 각국과의 통상 마찰 우려도 여전하다. 국내 투자 전망도 어둡다. 이럴 때일수록 껄끄러운 상대와의 험한 오프라인 대면 소통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디지털 소통도 자기들끼리만 나누면 무엇보다 폐쇄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엔지니어들이나 썼을 법한 단어, 알고리즘이 우리 삶에 훅 들어왔다. 인공지능(AI) 스피커를 통해 AI가 추천하는 음악을 듣고 온라인 쇼핑몰 콜센터에서 AI 챗봇(채팅로봇)과 상담한다. 이런 AI를 작동하는 중심에 바로 그 알고리즘이 있다. 이런 알고리즘이 2019년 한국 사회에서 변곡점을 맞이할 듯하다. 한국인이 뉴스를 가장 많이 접하는 포털인 네이버는 올해 1분기(1∼3월)부터 AI가 뉴스를 본격 편집한다. 뉴스 조작 논란이 일자 사람이 편집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한국인이 하루 중 가장 오래 쓰는 앱인 유튜브는 정치 사회적으로도 논쟁적인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폭로한 곳도,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에 이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 정치인들이 1인 방송의 격전지로 삼은 곳도 유튜브였다. 올해 재·보궐선거와 내년 총선 등을 앞두고 이런 분위기가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플랫폼은 알고리즘이 이용자 취향과 선호도 등을 분석해 맞춤형 콘텐츠를 추천해 보여준다. 콘텐츠를 일일이 찾는 수고로움은 덜어주지만 과연 이게 공정할까. 알고리즘은 정보를 여과해 이용자를 특정 정보의 거품에 가두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을 만들 수 있다. ‘보고 싶은 뉴스’만 보다 보면 자신의 관심사나 정치적 성향과 다른 뉴스가 차단되고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특히 AI가 특정 성별이나 계층, 인종 등에 쏠린 데이터를 학습했을 경우 알고리즘 자체가 편향된 결과 값을 내놓을 수 있다. 미국 워싱턴의 조사기관인 퓨(Pew) 리서치센터는 ‘코드 의존: 알고리즘 시대의 명과 암’을 통해 알고리즘이 의견 분열을 심화시키고 숙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알고리즘이 필터 버블을 만들어 다양한 생각과 믿을 만한 정보를 우연히 접할 기회(serendipity)를 없앤다는 설명이다. 구글 엔지니어 출신인 기욤 샤슬로는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오래 체류하도록 왜곡돼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는 이용자의 클릭이 돈(광고 수익)으로 치환되는 만큼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며 극단적인 콘텐츠가 종종 오르는 현상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 가짜 뉴스가 개입할 때 더 심각해진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지지 단체(‘Vote Leave’)는 ‘EU 탈퇴로 누릴 천문학적 분담금의 혜택’ ‘난민의 대거 유입 가능성’ 등의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영국 통계청과 재정연구원이 공식 해명했는데도 여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국민투표 결과 EU 탈퇴 결정으로 이어졌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도 페이스북에서 가장 많이 공유된 뉴스 5개 중 4개는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발표했다’(1위) 등 가짜 뉴스였다. 인터넷 시대가 열릴 때 사람들은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고루 접해 사회가 균형 있게 나아갈 것으로 믿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셈이다. 문제가 불거지면 플랫폼들은 알고리즘에 책임을 돌리고, 알고리즘 공개는 영업 비밀이라며 거부하고 있다. 이미 우리 삶을 지배하는 플랫폼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인터넷 시대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렸다. 근거 없어 보이는 소문의 출처를 확인하고 의도를 의심하며 우리가 다는 댓글이나 우리가 누를 ‘좋아요’의 영향까지 고려하는 등 미디어 문해력(文解力)이 절실한 이유다. 믿었던 알고리즘에 배신당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플랫폼에 책임을 끈질기게 묻되 신경윤리학자 피터 라이너의 말을 떠올리는 것이다. “(알고리즘의 세계에도) 인지 편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앎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디지털) 면역력을 가질 수 있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