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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 성깔도 대단하구나/…/티격태격 싸움질 잠깐 새/숨이 막혀 영영 죽고 말았네/무당이 방울을 흔들며/…/우는 듯 너울너울 춤추며” 조선 후기 작가 강이천(1769∼1801)이 남대문 밖에서 가면극을 보고 1789년 지은 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의 일부다. 세월 풍파에 찌든 ‘할미’ 가면을 쓴 이가 첩을 질투해 영감과 싸우다 죽자, 무당이 진혼굿을 펼치며 할미의 원혼을 달랜다. 이처럼 한국 전통 가면극은 가면을 쓴 이가 일상에서 하지 못한 백성의 말을 대신 쏟아내며, 한(恨)을 풀어주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MASK―가면의 일상, 가면극의 이상’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의 가면 195점을 선보인다.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온 ‘하회별신굿탈놀이’ 등 한국 전통 가면의 원형을 보여주는 102점과 중국(45점), 일본(48점)의 전통 가면을 비교하며 닮은 듯 다른 삼국의 가면극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한국 가면극의 독특한 특징은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가면극이 전하는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일례로 경남 고성 지역에서 전승되는 ‘고성오광대’는 상놈인 말뚝이를 고귀하게, 양반을 미천하게 그린다. ‘양반과 말뚝이’ 서사엔 신분제도를 뒤집고, 신분의 경계를 지워 함께 어우러지려는 이상이 담긴 것. 반면 중국의 가면극 나희(儺戲)는 무대에서 역사 속 영웅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풀어낸다. 당나라의 승려 현장(600∼664)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온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 ‘서유기(西遊記)’가 대표적이다. 소설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가면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가면극 가구라(神樂)에 나오는 귀신 ‘오니’ 등 다채로운 일본 가면도 선보인다. 가면극을 놀이로 여기는 한국과 달리 가구라는 신사에서 엄숙하게 행하는 제의다. 가면을 신처럼 모시는 것이 특징이다. 내년 3월 3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경기 하남시 사충서원에서 28일 열린 ‘사대신 초상 기증식’에서 김기섭 경기도박물관장(왼쪽)이 이상혁 사충서원 이사장(가운데)에게 기증서와 감사패를 전했다. 사단법인 사충서원은 ‘노론의 사대신’ 충헌공 김창집, 충문공 이이명, 충익공 조태채, 충민공 이건명의 초상 4점을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했다. 하남=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 정치사에서 중요한 ‘노론의 사대신’ 초상 4점을 기증해주신 사충서원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귀한 보물을 보물답게 보존해 나가겠습니다.”경기 하남시 사충서원에서 28일 열린 ‘사대신 초상 기증식’에 참석한 김기섭 경기도박물관장이 이상혁 사충서원 이사장(88)에게 감사패를 전하며 말했다. 사단법인 사충서원은 ‘노론의 사대신’ 충헌공 김창집, 충문공 이이명, 충익공 조태채, 충민공 이건명의 초상 4점을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들은 조선 경종 때인 1722년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추대하다 소론이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음을 맞은 충신들이다.경기도박물관에 따르면 사대신의 초상은 영조(1694~1776)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1726년 이들을 정치적으로 복권하며 사충서원을 건립했을 때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786년 건립된 ‘사충서원묘정비(四忠書院廟庭碑)’에 나오는 “병오년(1726년) 가을 사충서원이 비로소 이뤄져 사공을 모셨다. (사대신의) 진상(眞像)은 모두 사묘(祠廟)에 봉안했다”는 기록 때문이다. 화가의 이름은 그림에 적혀 있지 않지만, 화풍 등으로 미뤄 숙종의 어진을 제작한 조선 후기 궁중 화가 진재해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족자 형태로,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 그렸다.조준호 경기도박물관 수석학예사는 “사충서원 창건 이후 약 300년 가까이 원형을 간직해 역사적 의미가 크고 유물로서 가치가 높다. 예술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조선 시대 서원 문화사를 보여준다”고 했다. 박물관은 초상의 보존 처리를 마친 뒤 보물 지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 이사장은 “(박물관이) 초상 보존과 관리에 힘써 그 가치를 빛내주길 바란다”고 했다.사충서원은 기증식에 앞서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을 올렸다. 제향에는 김 관장이 초헌관, 조관호 양주조씨 대종회 회장이 아헌관, 경주이씨 상서공파를 대표해 이원희 앰배서더 호텔그룹 이사가 종헌관으로 참례했다. 초헌관은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제관이며 아헌관 종헌관은 각각 두 번째, 세 번째 술잔을 올린다.사충서원은 영조가 1726년 왕명을 내려 종묘를 짓고 남은 재목을 하사해 건립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전국에 있는 서원이 철폐될 때에도 존속된 47개 서원 중 하나다.하남=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자연과 어우러진 절경을 간직한 보물 강원 ‘삼척 죽서루(竹西樓)’와 경남 ‘밀양 영남루(嶺南樓)’가 국보로 승격된다고 문화재청이 27일 밝혔다. 죽서루는 고려 때 창건돼 조선 전기인 1403년 재건됐다. 죽장사(竹欌寺)라는 절 서쪽에 있어 죽서루라 불렸다. 조선 후기 여러 차례 증축되며 현재와 같은 대형 누각이 됐다. 정철(1536∼1594)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겸재 정선(1676∼1759)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등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시와 그림에 담았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영남사(嶺南寺)에 있던 작은 누각이 시초다.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년 밀양부사 김주(1339∼1404)가 중창해 영남루라 칭했다. 조형미와 함께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소프라노 조수미 씨(61·사진)가 세계 무대에 한국의 위상을 높인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7일 서울 서대문구 모두예술극장에서 ‘2023년 문화예술발전 유공자’ 시상식을 열고 조 씨 등 15명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은관문화훈장은 황을순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 보유자, 국악 작곡가 고 이해식 씨, 전통무용가 정승희 씨가 수훈했다. 보관문화훈장은 대한민국 장애인 국제무용제를 창설한 최영묵 빛소리친구들 대표,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를 설립한 표미선 표갤러리 대표, 현대 화가 오수환 서울여대 명예교수, 공예가 강석영 전 이화여대 명예교수, 박광웅 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등 5명이 받았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은 박선자 강릉예총 회장, 윤후명 소설가, 이배 작가, 박창수 더하우스콘서트 대표, 최용훈 극단 작은신화 대표 등 5명이 받았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은 피아니스트 임윤찬, 시인 유희경 씨 등 7명에게 돌아갔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귀하가 점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경매가 신청되어….” 2021년 7월 5일, 여느 때처럼 취업 면접을 본 뒤 밤늦게 귀가한 취업준비생 앞으로 법원의 안내문 한 통이 날아왔다. 안내문은 그의 집뿐 아니라 빌라 층마다 모든 집의 현관문에 붙어 있었다. 책상 서랍 깊이 넣어둔 전세계약서를 꺼내 문서에 기재된 건물주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알고 보니 건물주가 아닌 건물 관리소장이었다. 관리소장으로부터 진짜 건물주 전화번호를 받았지만 수십 통을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날 이후 청년은 ‘전세사기 피해자’가 됐다. 생애 첫 대출을 받아 5800만 원짜리 전셋집을 마련했던 한 평범한 청년(32)이 전세사기 피해자가 된 뒤 2년 3개월간 기록한 일기를 토대로 쓴 에세이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기숙사에서 벗어나 ‘집 같은 집’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한 청년의 일기 속엔 한국 부동산중개업 제도와 부동산 시장의 허점이 낱낱이 담겨 있다. 책엔 ‘알고 보니’란 말이 자주 나온다. 알고 보니 저자에게 집을 소개해 준 공인중개사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없는 단순 영업인이었다. 알고 보니 공인중개사법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없어도 부동산에서 일하고 매물을 소개할 수 있게 했다. 2금융권에서 받은 근저당 대출 33억 원을 안고 있던 빌라를 취업준비생인 저자에게 권했던 그 사람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며 계약을 부추겼다. 공인중개업소 사장은 자신이 건물주의 대리인이라며 집주인과의 만남도 주선하지 않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공인중개업소 사장이 “사고가 터져도 1억 원 내에서 공제받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공제증서는 공인중개사 과실이 인정될 때만 효력이 있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간 건 공인중개사의 과실이 아니었다. 건물주가 소유한 다세대주택이 경매로 넘어갈 경우, 낙찰금으로 은행 근저당을 먼저 갚고 입주일이 빠른 순서대로 배당 우선순위를 갖는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입주일이 다른 입주자들보다 늦었던 저자는 전세자금 중 단 한 푼도 끝내 되돌려 받지 못했다. 저자에게 남은 건 전세자금대출로 받은 빚 4640만 원이었다. 빚은 더 큰 빚을 낳았다. 2년간의 대출 기간이 만료된 2022년 7월, 저자는 전세사기 피해 후 헝가리의 한 기업에 취직해 일하며 모아뒀던 돈에 더해 카드론 3300만 원을 받아 전세자금대출을 갚아야 했다. 연 이자율은 10.6%에 달했다. 급여가 적은데다 환차손까지 나자 다시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퇴사를 결심했다. 매달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 300만 원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헝가리에서 만난 연인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상황만큼은 마지막까지 가슴 아팠다. 나는 빚쟁이가 됐고, 결혼은 물론 연애까지 포기하기로 했다”고 썼다. 저자는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주 6일 매일 12시간씩 아르바이트 두 탕을 뛰며 그 빚을 갚아나갔다. 5개월 새 빠진 체중은 13kg에 달했다. 조종사가 되고픈 저자는 꿈을 이룰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올해 12월 15일부터 원양상선에 오를 거라고 한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조종사 훈련비를 지원해주겠다는 부모의 제안을 거절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최소한 나에겐 젊음과 건강이 있다. … 전세사기를 당한 지금도 꿈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사기 피해로 전세자금은 모두 잃었지만, 꿈은 잃지 않기 위해 분투했던 한 청년의 일기에서 생의 의지가 느껴진다. “잠시라도 잊고 싶어 애써 묻어뒀던 기억”을 저자가 애써 기록한 이유는 자신의 글을 읽고 자신과 같은 현실에 놓인 이들이 살아갈 힘을 얻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책 서두에 저자는 이렇게 썼다. “절대 죽지 말자고. 이런 일로 세상을 등지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절도범이 일본에서 훔친 뒤 국내로 밀반입한 고려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불상·사진)의 소유권이 일본 사찰에 있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26일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불상 인도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불상이 2012년 일본 쓰시마섬 간논지(觀音寺)에서 도난당해 한국에 밀반입된 지 11년 만이다.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받는 이 불상은 높이 50.5cm, 무게 38.6kg으로 고려시대인 14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3년 일본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는데, 2012년 10월 김모 씨 등 한국인 절도범 4명이 간논지에서 훔쳐 부산항으로 밀반입한 후 처분하려다 검거됐다. 간논지와 일본 정부는 사건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도난품인 만큼 일본에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부석사 측은 “왜구에 의해 약탈당한 문화재”라며 정부를 상대로 인도 소송을 냈다. 2017년 1월 1심 재판부는 “도난이나 약탈 등의 방법으로 일본으로 운반돼 봉안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부석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심 법원은 올 2월 “고려시대 부석사와 현재의 부석사가 같은 권리주체로 보기 어렵고 이미 간논지가 20년 이상 소유하며 소유권이 넘어갔다”며 판단을 뒤집었다. 이날 대법원도 원심의 결론이 정당하다며 부석사의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타인의 물건이라도 일정 기간 점유했다면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는 ‘취득시효’ 법리에 따라 불상의 소유권이 간논지에 있다”고 판단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판결 직후 입장문을 내고 “빼앗긴 약탈 문화재에 대한 소유자의 정당한 권리를 가로막은 반역사적 판결”이라며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반면 무라이 히데키 일본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불상이 간논지에 조기 반환될 수 있도록 한국 정부를 설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상은 현재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판결에 따라 조만간 문화재청과 검찰이 실무를 맡아 반환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지현 건국대 세계유산대학원 겸임교수는 “문화유산은 절도 등 불법적인 방식으로는 되찾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판결”이라고 설명했다.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절도범이 일본에서 훔친 뒤 국내로 밀반입한 고려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불상)의 소유권이 일본 사찰에 있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왔다.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26일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불상 인도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불상이 2012년 일본 쓰시마섬 간논지에서 도난당해 한국에 밀반입된 지 11년 만이다.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받는 이 불상은 높이 50.5cm, 무게 38.6kg으로 고려시대인 14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3년 일본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는데, 2012년 10월 김모 씨 등 한국인 절도범 4명이 간논지에서 훔쳐 부산항으로 밀반입한 후 처분하려다 검거됐다.간논지와 일본 정부는 사건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도난품인 만큼 일본에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부석사 측은 “왜구에 의해 약탈당한 문화재”라며 정부를 상대로 인도 소송을 냈다.2017년 1월 1심 재판부는 “도난이나 약탈 등의 방법으로 일본으로 운반돼 봉안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부석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심 법원은 올 2월 “고려시대 부석사와 현재의 부석사가 같은 권리주체로 보기 어렵고 이미 간논지가 20년 이상 소유하며 소유권이 넘어갔다”며 판단을 뒤집었다.이날 대법원도 원심의 결론이 정당하다며 부석사의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타인의 물건이라도 일정 기간 점유했다면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는 ‘취득시효’ 법리에 따라 불상의 소유권이 간논지에 있다”고 판단했다.대한불교조계종은 판결 직후 입장문을 내고 “빼앗긴 약탈 문화재에 대한 소유자의 정당한 권리를 가로막은 반역사적 판결”이라며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반면 무라이 히데키 일본 관방부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불상이 간논지에 조기 반환될 수 있도록 한국 정부를 설득할 것”이라고 말했다.불상은 현재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판결에 따라 조만간 문화재청과 검찰이 실무를 맡아 반환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지현 건국대 세계유산대학원 겸임교수는 “문화유산은 절도 등 불법적인 방식으로는 되찾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판결”이라고 설명했다.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소설이나 시, 연극이 역사의 흐름을 멈출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일 겁니다. 학살, 노예무역, 세계대전…. 그 어느 것도 문학으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저는 예술과 문학이 문화 제국주의와 전쟁의 해악에 대한 해독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기 파주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 24일 개막한 ‘DMZ평화문학축전’의 기조연설을 맡은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83)가 말했다. ‘문학이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24∼26일 열리는 이번 축전은 올해 정전 70주년을 맞아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처음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니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르 클레지오는 “나는 전쟁이 가져온 끝없는 굶주림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였던 그에게 전쟁은 ‘외출 금지’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 ‘창문 밖을 보지 않기’ 등 금지의 언어로 다가왔다. 폭격이 시작되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몇 시간을 숨어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암울했던 시절 외할머니의 이야기 덕분에 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며 이야기가 지닌 힘을 강조했다. “외할머니는 저희 형제들을 위해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원숭이 ‘자코’는 어떤 위기 상황도 민첩하게 빠져나가곤 했죠. 외할머니의 목소리 덕분에 슬픔과 분노, 심지어 배고픔까지 잊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문학에 대해선 “잔혹한 전쟁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평했다. 6·25전쟁이라는 비극적인 현대사에서 비롯된 어두운 상상력을 통해 ‘한(恨)’의 감정을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은 어쩌면 치유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문학은 평화를 향한 멀고도 험난한 길을 열어가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지한파 작가로도 유명한 그는 신작 ‘아이와 전쟁’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전쟁이 남긴 폭력의 잔해를 기록했다. 이 작품은 또 다른 신작 ‘브르타뉴의 노래’와 묶어 ‘브르타뉴의 노래·아이와 전쟁’(책세상)으로 10일 국내에 출간됐다. 이날 르 클레지오와 함께 기조연설자로 나선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우크라이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75)는 “우크라이나를 보호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모두를 보호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푸틴은 2022년 2월 24일 밤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했고 전쟁은 1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항복하지 않는다”고 힘줘 말했다. 벨라루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시예비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만난 관련자들의 목소리를 인터뷰로 풀어낸 작품을 써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보여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다룬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대표작이다. 한국 문인을 대표해 기조연설자로 나선 현기영 소설가는 “(작가는) 전쟁에 대한 집단기억이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망각에 저항하는 파수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 출신인 현 소설가는 제주도4·3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창비)와 중편소설 ‘순이삼촌’(창비) 등을 펴냈다. 이번 행사에는 해외 작가 12명과 한국 작가 43명이 참여했다.파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 일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입니다. 저는 계속 글을 쓸 뿐입니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시블리(49)는 최근 독일 프랑크푸르트 리트프롬협회가 그의 시상식을 취소한 데 대해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는 계속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시블리는 1949년 이스라엘 군인들의 팔레스타인 소녀 집단강간·살해 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사소한 일(Minor Detail·2017년)’로 올해 리트프롬협회가 주관하는 ‘리베라투어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예정대로라면 20일(현지 시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시상식이 열려야 했지만, 주최 측은 일방적으로 시상식을 취소했다.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여파로 일각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반(反)유대주의’라는 비판이 나온 탓이다. 시상식 취소에 대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 올가 토카르추크를 비롯해 1000명이 넘는 작가가 도서전 주최 측에 항의해 논쟁이 벌어졌다. 시블리는 경기 파주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 25일 열린 ‘DMZ평화문학축전’에 참석해 ‘전쟁·여성·평화’를 주제로 한 포럼에서 “글쓰기의 소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가로서 독일 베를린에 살며 고향에서 벌어지는 전쟁 앞에 패배감을 느꼈던 순간을 털어놓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저는 글 쓰는 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고립을 더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세계가 계속해서 무너지는 동안 홀로 앉아 글을 쓰는 것 말이죠.” 결국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시블리는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의 비르제이트대 초빙교수 자리를 수락한 이유에 대해 “팔레스타인이라는 현실과 만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했다. 그는 “무감각한 채로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마주했다”고 고백했다. 대학 밖의 폭력은 강의실뿐 아니라 그의 일상을 침범했다. 2014년 7월 어느 날, 친구가 안전을 위해 전해준 비상용 휴대전화로 이스라엘군이 공습경보 전화를 건 것. 그는 “전화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쪽(이스라엘군)에 상황을 다시 물어볼 수 있었는데, 온몸이 마비되고 얼어붙어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고 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날 이후 그에게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해 12월 베를린의 집에 머물 때였다. 새벽 1시 반경 어둠 속에서 깨어난 그는 벽면에 드리운 거대한 정육면체 그림자를 마주했다. 당시를 떠올린 시블리는 “거리 가로등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빛이 유리창 주변에 놓였던 책더미를 비춰 벽면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든 것이었다”며 “그 희미한 빛이 그 방에 몰래 조용히 그 흔적을 남긴 까닭은 내게 글쓰기를 다시 배우라는 교훈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어쩌면 단어들이 이런 것일지 모릅니다. 그것들은 아무리 작더라도 가로등에서 뿜어져 나온 이 희미한 빛처럼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비참함의 진부함 앞에서 글쓰기의 소명은, 다시 한번 가로등을 켜는 사람의 그것과 같습니다.”파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우리에게 ‘수리수리 마수리’로 유명한 다라니(불교 주문) 중 하나다. 속세에 더러워진 입을 깨끗이 해준다는 이 주문처럼, 다라니를 종이에 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 수구다라니(隨求陀羅尼)’ 2점이 처음 공개된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4일부터 열리는 특별전 ‘수구다라니, 아주 오래된 비밀의 부적’에서다. 경주 남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유물은 가로 8.8cm, 세로 6.2cm, 높이 3.9cm 금동 경합(經盒·경전을 넣어 두는 함)에서 나왔다. 경합의 제작 방식과 기법이 8, 9세기 것과 유사해 경합에 담겼던 수구다라니 2점 역시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국내 현존하는 수구다라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3년간 과학적 조사를 거쳐 불교 주문을 적은 종이가 닥나무로 만든 한지(韓紙)임을 밝힌 박물관의 연구도 국내에서 제작된 사실을 뒷받침한다. 가로세로 약 30cm 크기 한지 2장엔 한자와 범자(梵字·고대 인도 문자)로 쓴 다라니가 각각 적혀 있다. 그중 범자로 주문을 새긴 종이 중앙엔 금강저(金剛杵·불교에서 적을 무찌르는 무기)를 든 불교의 수호신 ‘금강신(金剛神)’이 그려져 있다. 수구다라니 제작법을 담은 경전 ‘불설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신주경(佛說隨求卽得大自在陁羅尼神呪經)’에 따르면 이 같은 도상(圖像)은 주로 승려들이 소지한 수구다라니에서 엿볼 수 있다. 한자로 적은 수구다라니는 고대 인도 문자로 된 불교 주문을 한자로 음차해 기록한 것이다. 같은 시기 인도와 중국 등 불교문화권에서 제작된 수구다라니는 20여 점이 현존하지만, 한자 수구다라니가 함께 나온 건 처음이다. 한자는 총 2143자가 쓰였다.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졌던 수구다라니는 신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삼국유사엔 신라 신문왕(?∼692)의 아들 보천태자가 경북 울진의 성류굴에서 수구다라니경을 외워 동굴의 신을 감화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신명희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문헌으로만 전해졌던 통일신라 수구다라니의 실체를 확인한 사례”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조선총독부는 금동 경합과 수구다라니 2점을 각각 20엔에 사들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다가 2020년 경주 남산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 조명됐다. 100여 년 만에 수장고에서 잠 깬 이 유물은 3년간의 복원을 거쳐 내년 1월 28일까지 관람객을 맞는다. 무료.경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에 동참했기에 국격이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10만 회원’을 달성할 때까지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서울 중구 덕수궁 석조전 앞마당에서 23일 열린 문화유산국민신탁의 ‘2023 회원의 날’ 행사에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84)이 말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창립 16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날 행사엔 회원 700여 명이 석조전 앞마당을 가득 채웠다. 2007년 창립 당시 300여 명이었던 회원 수는 현재 약 1만6000명에 이른다. 내년 회원 수 2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2만, 3만을 넘어 10만 회원을 이루는 것이 나의 최종 목표”라고 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월 1만 원 후원금을 낸 회원들의 기금으로 문화유산을 지키는 특수법인이다. 김 이사장은 문화유산국민신탁 설립위원장을 맡아 2007년 창립에 기여했고, 2009년부터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1964∼2005년 삼성출판사에서 이사 및 회장을 지낸 그는 1990년 국내 처음으로 출판·인쇄 박물관인 삼성출판박물관을 설립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2012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을 매입해 지켜냈다. 시인 이상(1910∼1937)이 살았던 서울 종로구 통인동 옛집 터를 사들여 2011년부터 ‘이상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윤경렬 선생(1916∼1999)의 옛 거주지도 매입해 ‘경주 윤경렬 옛집’을 보존해 오고 있다. 이날 무대에 오른 소리꾼 장사익 씨(74)는 “나 역시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이라며 웃었다. 그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등 10여 곡을 불렀다. 김 이사장은 이날 “인촌상 상금 1억 원 중 절반(5000만 원)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부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 지킨 공로로 올해 제37회 인촌상 언론·문화 부문을 수상했다. 김 이사장은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보탠 회원들이 인촌상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며 기부 이유를 밝혔다. 나머지 상금도 문화유산 보존 사업 등에 기부할 계획이다. “상금을 기부하는 것도 하나의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씨앗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에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요즘 쓰고 있는 작은 시집이 있는데 그 책은 네가 내주어야겠다. 너를 보면 겨우 참았던 미련들이 다시 무장무장 일어날 것 같아.” 2018년 3월 23일 새벽, 암 투병 중이던 허수경 시인(1964∼2018)이 출판사 ‘난다’의 대표인 김민정 시인(47)에게 보낸 e메일이다. 허 시인은 그해 10월 3일 세상을 떠나며 생전 쓴 원고가 들어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김 시인에게 남겼다. 김 시인은 이 원고로 이듬해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난다)을 펴냈다. 허 시인은 김 시인을 보고 마지막 순간까지 시심(詩心)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99년 등단한 김 시인은 12일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와 만나 “나는 시인이기보다 편집자”라고 했다. 등단 한 해 전부터 잡지사에서 일을 배운 그가 25년간 여러 출판사를 거치며 편집자로서 만든 시집은 약 400권에 이른다. 2011년 1월 첫선을 보인 ‘문학동네시인선’이 대표적이다. 규격부터 디자인, 구성까지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난 이 시리즈는 파격적인 디자인과 눈에 띄는 제목, 참신한 시인 발굴 등을 통해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김 시인은 신인부터 중진까지 시인 50명의 신작을 모아 16일 출간되는 이 시리즈의 200번째 시집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를 마지막으로 이 시인선의 편집과 기획에서 물러난다. 그는 “뒷발에 힘이 생긴 ‘문학동네시인선’은 이제 나 없이도 잘 달린다”며 웃었다. 밤낮없이 원고를 붙들고 살았던 12년을 돌아본 그는 “나를 믿고 원고를 맡겨준 시인들에게 내가 한 약속은 단 하나뿐”이라고 했다. “큰돈 벌어다 주겠단 약속은 못 한다. 다만, 내 것처럼 읽고 또 읽어서 끝내 시인의 마음이 되어 시집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시인과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 그는 “머리가 아니라 몸에 기댄다”고 했다. 원고를 들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창가에 앉아 햇볕을 쬐고, 땅바닥에 앉아 보는 식이다. 김 시인은 “뜨거움과 서늘함, 땀과 눈물이 몸으로 느껴지는 순간 원고에 한 줄기 빛이 내리듯 시집의 제목이 될 문구 하나가 내게 온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온 제목 중 하나가 ‘언니의 나라에선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던 때였다. 문학동네에 첫 시집 원고를 맡겼던 김희준 시인(1994∼2020)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26세의 젊은 시인은 제목도, ‘시인의 말’도 짓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김 시인은 앞서간 후배의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차가운 병실 바닥에 원고를 펼쳐놓고 달달 외우듯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원고를 7번째 읽던 때였어요. 찬 바닥 위에 놓인 원고가 훈훈한 내복 같아 보였죠. 그때 희준이가 쓴 시 ‘친애하는 언니’의 한 구절(‘언니의 나라에선 시들지 않기 때문,’)이 종이 인형처럼 일어서듯 제게 왔어요. 시인이 이 세상에 있든 없든, 시들지 않는 것이 시의 언어라고 말하듯이요.” 한 줄 제목이 이토록 간절한 이유는 뭘까. “시는 가장 외롭고 슬플 때 슬그머니 일어나 곁에 있어 주는 친구 같은 것이에요. 모든 것을 잃고 무너져 내린 한 사람이 어느 날 시집을 찾을 때, 제목만 보고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길 바랐어요.” 김 시인은 앞으로도 난다 대표로 계속 책을 만들 예정이다. 그는 “내 시를 쓰는 시간보다 무명 시인을 찾아내 그들의 원고를 읽는 시간을 더 사랑한다”고 했다. 김 시인은 2019년 자신의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문학과지성사)에 쓴 ‘시인의 말’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앞으로도 나보다 이름 없는 시인들을 더 사랑하겠다”는 편집자로서의 다짐일 것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화문 현판을 가리고 있던 흰색 천이 걷히자 검정 바탕에 금색으로 ‘光化門’이라고 쓰인 새 현판이 드러났다. 기존 현판은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쓰여 있었다. 시민 500여 명이 환호했다. 13년 동안 ‘부실 복원’ 논란을 빚은 광화문의 얼굴이 제 모습을 찾은 순간이었다. 복원된 광화문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도 이날 함께 공개됐다. 광화문이 일제가 훼손하기 전의 모습을 약 100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광화문은 경복궁의 얼굴”이라며 “월대와 현판 복원을 통해 2010년부터 추진한 광화문 복원 사업이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광화문 현판, 200년 넘은 적송 위에 글자판 붙여광화문 현판 복원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화재청은 2010년 광복절에 새 현판을 복원해 걸었지만 3개월 만에 목재 표면이 갈라졌다. 학계에선 흰 바탕에 검정 글자로 만든 현판이 제대로 된 고증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2016년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된 광화문 사진을 찾아내 공개하면서 현판이 원래 검정 바탕에 밝은 글씨로 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경복궁 영건일기’에서 광화문 현판이 ‘黑質金字’(흑질금자·검정 바탕에 금색 글자)라는 기록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현판의 옛 모습 복원이 추진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8년부터 5년간 전문가 고증을 거쳐 현판을 제작했다. ‘경복궁 영건일기’ 기록을 토대로 도금한 동판에 글자를 오려 현판 위에 붙였다. 기존 현판은 글자를 새겨 넣었다. 새 현판은 강원 양양 등에서 확보한 수령 200년 넘는 적송을 건조해 만들었다. 배경 칠엔 아교와 전통 안료를 사용했다. 현판 제작에는 장인 6명이 참여했다. 한글 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이 1865년 경복궁을 중건했을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필체를 사용하기로 결정됐다. 크기는 가로 427.6㎝, 세로 113.8㎝로 기존 현판(가로 390.5㎝, 세로 135.0㎝)보다 가로 길이는 조금 더 커지고 세로는 줄었다. ● 난간석 서수상, 월대 복원 맞춰 발견돼월대는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았던 경복궁을 중건하며 정문인 광화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 쌓았다. 1923년 일제가 전차선로를 설치하며 철거됐다. 복원 과정에선 전차 선로가 발굴됐다. 지난해엔 일제가 철거한 월대의 난간석 40여 점이 경기 구리시 동구릉에서 발견됐다. 올해 8월엔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야외에 1982년 개관 때부터 전시됐던 서수상(瑞獸像·상상 속 상서로운 동물상) 1쌍이 원래 월대의 어도(御道) 앞을 장식했다는 사실이 시민의 제보로 밝혀졌다.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유족이 문화재청에 서수상을 기증했다. 난간석과 서수상은 복원된 월대에 옛 모습대로 배치됐다. 일각에서는 월대의 역사가 깊지 않고, 광화문 앞을 지나는 사직로를 직선에서 ‘U’자로 바꾸면서까지 복원할 만한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광화문이 복원돼 우리의 살아 있는 역사가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여러 사업을 마무리하는 화룡점정”이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폐경을 겪는 동물은 인간을 비롯해 몸집이 거대한 코끼리와 이빨고래 등 단 6종뿐이다. 다른 종들은 죽을 때까지 임신할 수 있다. 번식을 통해 집단의 몸집을 불리는 능력은 자연에서 생존에 이로운 결정적 능력으로 꼽힌다. 이 능력을 잃으면 생존에 불리하다. 그런데 어째서 여성은 폐경 후에도 오래 사는 걸까. 그 답은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할머니는 자녀는 물론 손자녀를 돌보고, 돌봄의 지식을 후대에 전함으로써 자신보다 더 큰 공동체를 지켜왔다. 더딘 성장을 거쳐 어른이 될 아이를 함께 키우기 위해 인간 여성은 폐경 후에도 긴 수명을 살도록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진화생물학에선 이를 ‘할머니 가설’이라고 일컫는다. 스페인 소설가 후안 호세 미야스가 고생물학자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와 인류의 죽음과 노화에 관해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이다. 진화 생물학의 여러 이론들을 대화하듯 알기 쉽게 풀어냈다. 마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돼 두 사람의 만담을 듣는 것 같다. 인간을 넘어 인류, 인류를 넘어 생태계 차원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고생물학자의 시선은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죽음을 사유해 온 소설가를 일깨운다. 자연에서 불멸이 존재하느냐는 소설가의 물음에 고생물학자는 이런 답변을 내놓는다. “변하는 것은 개체인 셈이죠. … 생태계는 변함이 없으므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생명은 불멸의 존재예요. 개체가 대체될 뿐이지 생태계는 전혀 변하지 않아요. 따라서 죽음은 없어요.” 고생물학자는 반대의 시각을 제안한다. “우리가 왜 죽는지 묻지 말고, 왜 이렇게 오래 사는지 물어보라”고. 포유류를 제외한 종에선 평균 수명이 50세를 넘기는 것이 꽤 있지만, 포유류 중 인간은 코끼리 등과 더불어 50년 이상 사는 몇 안 되는 종이라는 점에서 ‘아웃라이어’다. 자연에서 다른 종은 경험 못 할 여분의 시간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 폐경 이후에도 여성이 공동체에 남아 함께 아이를 길러냈듯 “인간이 오래 사는 데엔 이유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늙어가는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우리에게 삶의 이유가 될 것 같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현대 서울의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장독대와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장독대 없애기’ 운동을 벌여왔지만, 여전히 도심 한복판 작은 마당엔 장독대가 남아 있습니다. 장독대는 농촌과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이 부딪히는 ‘문명의 충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2(북트리거)를 최근 펴낸 김시덕 작가(48·사진)는 11일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국 곳곳의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한국 사회를 포착해 온 그는 전날에도 서울 서초구 말죽거리를 답사하며, 어느 다세대주택 마당에서 오래된 장독대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그 장독대는 1966∼1970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추진했던 ‘장독대 없애기 운동’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이라며 “농촌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무수히 많은 이들은 여전히 도시에서의 삶과 충돌하며 농촌에서의 생활방식을 지켜왔다는 증거”라고 했다. 재개발을 앞둔 지역에 걸린 플래카드도 그에겐 사료가 된다. 그는 “한편엔 재개발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다른 한편엔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며 재개발을 반대하는 벽보가 걸려 있다”며 “상반된 이 풍경은 현대 한국 사회가 세입자와 건물 보유자 중 누구를 진정한 주민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갈등을 보여줄 핵심 사료”라고 했다. 정부 문헌뿐 아니라 이 같은 벽보도 훗날 21세기를 보여줄 것이라는 얘기다. 폐간판에서도 도시의 생멸사를 읽어낸다. 2020년 강원 정선군 신동읍 예미리에선 ‘은하미장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상가를 만났다. 문을 닫은 채였지만, 간판 하단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부 화장’이라는 손 글씨가 보였다. 그는 “그 폐간판은 한때 광공업으로 번성했던 작은 마을에 수많은 청춘 남녀가 살았다는 걸 통해 산업의 변천사를 드러낸다”고 했다. 원래 김 작가의 연구 분야는 동아시아 전쟁사였다. 임진왜란부터 1945년 종전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역사를 분석해 지난해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메디치미디어)를 펴내기도 했다. 현대사 연구에 대한 갈증이 있던 차에 눈에 들어온 것이 거리였다. 손 글씨로 쓰인 옛 간판부터 곧 철거될 상가 건물 출입구에 적힌 이름 모를 사장의 작별인사까지, 모두가 현대 시민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 작가는 “현대 시민의 문헌은 거리에 있다”며 “당대를 살아낸 피지배계층의 생생한 목소리를 사료로 남겨야 훗날 풍부한 미시사를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21세기 문헌학자로서 저는 날것의 목소리가 드러난 거리의 문헌들을 수집해 이름을 붙이고 기록할 뿐입니다. 먼 훗날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증거 자료가 없단 이유로 시민의 역사를 공백으로 남겨 두는 일이 없도록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37회 인촌상 시상식이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11일 열렸다. 인촌상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민족 지도자 인촌 선생의 유지를 이어 나가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이사장 이진강)와 동아일보사는 인촌 선생의 탄생일인 10월 11일에 맞춰 매년 시상식을 열고 있다. 이날 수상자는 △이대봉 서울예술학원 이사장·참빛그룹 회장(교육)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언론·문화) △최순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물리학과 교수(과학·기술)로 각각 상장과 메달, 상금 1억 원을 받았다. ▶수상자 공적은 본보 9월 18일자 A8면 참조 이진강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인촌상은 인촌 선생의 나라 사랑 외침이 무엇이었는지 되새기고, 미래로 나가고자 하는 역사 인식의 표상”이라며 “수상자들이 더 밝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 나갈 마음을 다지길 바란다”고 했다. 김도연 인촌상 운영위원장은 수상자 선정 경위를 보고했다. 운영위원회는 외부 심사위원 16명을 위촉하고 후보군을 추린 뒤 6∼8월 수차례 회의를 열고 최종 수상자를 확정했다. 이대봉 이사장(82)은 36년 전 촉망받는 성악도였던 아들이 서울예고 2학년 때 선배들에게 맞아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폭력 없는 학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2010년 서울예술학원(서울예고, 예원학교) 재단을 인수한 뒤 지금까지 사재 약 550억 원을 출연했다. 올해 5월 서울예고에 1084석 규모의 공연장(도암홀)을 갖춘 서울아트센터를 개관했다. 학교 인수 후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발레리나 박세은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하며 올해 개교 70주년을 맞은 서울예고를 국내 최고 예술 명문고로 키웠다. 이 이사장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며 교육을 강조했던 인촌 선생의 뜻이 담긴 상을 받게 돼 영광”이라며 “아들을 떠나보낸 후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고 참으려 애썼다. 여러분도 큰일이 닥쳤을 때 원수를 용서하시면 좋을 것 같다. 상금은 미혼모를 위한 시설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김종규 이사장(84)은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서 지키고 가꾸며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헌신했다. 1990년 국내 최초 출판·인쇄 박물관인 삼성(三省)출판박물관 설립을 주도했다. 박물관은 초조대장경 등 국보를 비롯한 문화재 10만여 점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다. 2009년부터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은 2012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대한제국공사관 매입에 나서 1910년 일제가 강제 매각한 지 10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김 이사장은 “인촌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는 물론 광복 후 우리나라, 우리 시대를 이끌어주신 큰 어른”이라며 “더 열심히 하라는 주마가편으로 알겠다. 수상의 영광을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과 박물관·미술관인들에게 돌린다”고 했다. 최순원 교수(36)는 양자시뮬레이션, 양자계측, 양자인공지능, 양자계산 및 알고리즘 개발 등 양자과학기술 전 분야에 걸쳐 최첨단 연구 결과를 낸 세계적인 석학이다. 다이아몬드 인공 원자를 활용해 양자시뮬레이션으로 시간 결정(Time Crystals)을 구현하는 방법을 세계 최초로 고안했다. 최 교수는 “국가·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인생과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10년 넘게 깊이 고민하다가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양립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며 “대한민국 출신의 초일류 과학자가 되겠다. 그 과정에서 저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이웃과 조국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헌신하는 삶을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엔 오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유종하 전 외무부 장관, 장석영 대한언론인회장,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축하 공연은 서울예고 학생들이 펼쳤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박완서 작가(1931∼2011)의 애장품이었던 투박한 바가지엔 작가의 생명관이 깃들어 있다. 아들딸을 차별하던 시절 박 작가의 시어머니는 딸을 낳은 며느리를 위해 정갈한 바가지를 마련했다. 그 바가지로 쌀을 씻고 미역을 불려 따뜻한 한 끼를 지어줬다. 시어머니는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바가지로 새 생명을 반겼던 것. 이 바가지는 박 작가의 단편소설 ‘해산 바가지’의 모티브가 됐다.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은 이 바가지를 비롯해 작가들의 애장품과 육필 원고 등 9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 ‘문인들의 일상 탐색 2023’을 31일까지 연다. 백석 시인(1912∼1996)이 1938년 원고지에 육필로 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소설가 황순원(1915∼2000)의 ‘움직이는 성’ 초고 원본을 볼 수 있다. 김훈 소설가(75)의 애장품 몽당연필에선 연필이 닳을 때까지 정제된 글을 쓰는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의 육필 노트도 선보인다. 이 전 장관이 생전 사용했던 서재가 매주 화, 목요일 오후 2시 예약자를 대상으로 공개된다. 4000∼6000원.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49)가 한글날을 맞아 배우 송혜교(42)와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홈페이지에 ‘한글 지도’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9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서 이같이 밝히며 “약 14만9000점의 미술품을 소장한 미국 서부 최대 규모의 미술관에서 영어와 스페인어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어 지도를 확인할 수 있게 돼 뜻깊다”고 했다. 서 교수는 올 6월에도 송혜교와 함께 LACMA에 한국어 안내서를 제작해 관람객들에게 제공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재건하는 여정이 꼭 최종관문을 깨는 게임의 여정 같았습니다. 이거다, 싶었죠.”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이 쓴 ‘난중일기’로 보드게임을 창작한 김범승 씨(26)의 말이다. 현재 보드게임 카페를 운영하는 김 씨는 숭실대에 재학 중이던 2020년 보드게임 ‘명량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김 씨는 이 콘텐츠로 그해 한국국학진흥원이 주최한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게임은 12척의 배와 수군, 군 물자를 상징하는 카드를 먼저 손에 넣는 자가 승리하도록 구성했다. 고문헌에서 새 이야기를 찾는 이들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2012년부터 매해 ‘전통 기록문화 창작 콘퍼런스’를 열고, 고문헌에서 이야깃거리를 발굴해 온라인 데이터베이스(DB)에 공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고문헌 252종에서 찾아낸 이야기는 모두 7320건이다. 2015년부터는 이 같은 소재를 토대로 창작 콘텐츠 공모전을 열어 왔다. 최근 영화화를 앞둔 ‘헬조선: 노비신분사기극’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창작 콘텐츠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다. 김소영 씨(30) 등 3명이 함께 기획한 이 이야기는 1862년 단성민란을 주도했던 단계(端磎) 김인섭(1827∼1903)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김인섭이 23세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록한 ‘단계일기(端磎日記)’에서 백성을 수탈한 현감과 아전을 농민과 함께 힘을 합쳐 쫓아낸 저항정신을 포착한 것. 시나리오를 기획한 김소영 씨는 “역사 속에서 오늘날의 현실이 보였다”고 했다. 부당한 현실에 직면한 조선 후기 현실이 오늘날 청년이 처한 현실과 닮았다는 얘기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올해에도 ‘제9회 창작 콘텐츠 공모전’을 열고, 다음 달 11일 최종 수상작을 발표할 계획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