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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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4-10-24~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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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츠 2024년식 & 여름철 야외 텐트 : 수재민 앞에서 애민 지도자 모습 과시한 김정은 사진의 이면[청계천 옆 사진관]

    토요일 아침 북한 노동신문은 44장의 김정은 사진을 북한 내부와 국제 사회를 향해 뿌렸습니다.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8월 8일과 9일 평안북도 의주군 큰물(홍수)피해지역을 또다시 찾으시고 재해복구를 위한 중대조치들을 취해주셨다”는 내용을 증명하는 사진들입니다. 현대 사회의 정치인들은 시민을 만나고 재해 지역을 둘러보는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북한 김정은의 최근 사진은 ‘자극적’이거나 오버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띕니다. 대체 북한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김정은과 참모들이 뭔가에 쫓기듯 과한 이미지를 쏟아내는 이 상황은 무얼 의미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요일 북한이 공개한 사진은 너무 현란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북한 내부에서 외부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사진을 본다면 김정은과 참모들이 의도했던 ‘애민(愛民)의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사진의 배경은 크게 두 곳입니다. 하나는 열차를 세울 수 있는 철길 옆 공터입니다. 김정은의 전용 열차가 수해 물품을 싣고 와서 멈춰섰습니다. 두 번째 배경은 약 70개의 수재민 텐트가 설치된 어느 관공서 건물의 공터입니다. # 1호 열차 앞에서 선물을 받는 수재민 사진김정은 전용 열차의 한 칸이 즉석 연설무대로 변했습니다. 지상에서 1미터 가량 떠 있는 열차의 높이는 연단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공기가 서 있고 연설용 포디움이 설치되었습니다. 스피커는 6개가 설치되었습니다. 천정에는 노란 불빛의 조명이 설치되어 주인공을 비추고 있습니다. 연단 아래에는 천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김 위원장을 우러러 보며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제일 앞줄에는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많이 배치되었습니다. 당국이 준비한, 우리로 따지면 관광버스를 타고 온 수재민들이 선물을 한 세트씩(과자류를 채운 종이박스 + 쌀로 추정되는 투명 비닐 봉지 + 대성백화점 쇼핑백)을 받은 후 공터에 앉아 김 위원장의 연설을 듣고 있습니다.# 텐트촌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는 수재민 사진2층짜리 건물 2개가 ‘ㄱ’자 형식으로 서 있습니다. 담 안에 공터가 있고 거기에 노란색과 검정색 계통의 텐트 70개 정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오와 열을 맞춰 당국이 수재민들을 위해 텐트를 설치하고 그 안에 선풍기와 TV 등을 넣어주었는데 이곳을 김 위원장이 찾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김 위원장이 어느 텐트로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한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어른들이 하늘을 향해 손뼉을 치며 울먹입니다. 어른들의 반응에 놀랐는지 안에 있던 아이들은 김 위원장이 건네주는 과자를 무표정하게 받아서 입에 넣습니다. 사진기자의 눈으로 보면 두 상황 모두 사진 찍기 좋은 환경입니다. 포토제닉합니다. 완벽한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진을 보며 불편한 점이 있었습니다. 연설하는 김 위원장 왼쪽편으로 고급 승용차가 보입니다. 차번호가 휴전협정을 의미하는 727 1953 이길래 지난번 푸틴에게 받았다는 러시아제 아우르스인가 하고 봤더니 다른 모양입니다. 구글 이미지 검색 결과 이 차는 2024년식 벤츠 마이마흐 GLS600 이었습니다. 앞 범퍼에 마이바흐 문양이 반복되어 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절대 권력자로서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호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북한의 인민들의 생활 수준과는 너무 큰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불편한 점은, 텐트촌의 환경입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텐트 행렬은 이재민을 상징하기에는 좋은 요소입니다만 여름철 폭염에 적절한 대응이 맞는지 의문입니다. 동영상을 보더라도 뒤편의 건물 두 동에서 창문 밖으로 김위원장의 방문 모습을 지켜보는 인기척이 없습니다. 수재민이 건물 안에도 있었다면 창문을 통해 손을 흔드는 게 북한의 퍼포먼스 공식에 맞을 것입니다. 공간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림을 만들기 위한 설정’ 때문에 야외에 텐트를 설치하고 김 위원장 일행을 기다린 것인지 궁금합니다. 2011년 방콕에서 수해가 났을 때 태국 정부가 텐트를 쳤던 사진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런 방식으로 수재민을 대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요?북한 내부와 국제 사회를 향해 ‘자극적인 화면’을 만드는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가뜩이나 힘든 수재민을 동원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1만5천명의 수재민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보호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약속이 어떤 식으로 지켜질지 궁금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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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청동에 있었다는 수영장 이야기[청계천 옆 사진관]

    고급 한옥과 카페거리로 유명한 서울 삼청동에 수영장이 있었다는 걸 아시나요? 100년 전 신문에서 삼청동에서 물놀이하는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줄기 아래에서 한 소녀가 더위를 식히고 있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 모습이 지금의 사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련된 풍경입니다. 1924년 8월 8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이곳 주변은 나중에 수영장이 들어섭니다. 삼청동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많고 골짜기도 아름다워 옛날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학자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서울 안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제일이다. 인왕동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라며 서울의 첫번째 명소로 삼청동을 꼽았습니다. 이이 선생도 [율곡전서]에서 “돌 사이 샘물은 그윽한 곳에서 울음 우는 듯하고, 해질 무렵 구름은 깊은 골짜기에서 생겨나니, 이를 따라 도리어 산의 문을 잠그는 듯 하네”라며 삼청동을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삼청동은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에게는 놀이와 감상의 대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삼청동의 이미지는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져서 각종 야유회가 열리고 자유연애를 하는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특히 삼청동을 가로지르는 삼청동천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여름이면 쏟아져 내리는 물을 이용한 목욕장소이자 물놀이 장소였고, 겨울에는 얼어있는 삼청동천 위에 스케이트장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출처: 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삼청동 수영장의 역사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소녀의 환한 웃음 사진과 달리 신문에 실린 삼청동 물놀이장 관련 뉴스는 어두운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신문이라는 게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사람들의 안전과 관련한 뉴스를 많이 다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수영장 풍경부터 보시죠. 1922년 삼청동 계곡 모습입니다. 꽤나 넓은 곳에서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924년 6월 30일자 동아일보에는 삼청동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 12살 아이가 물에 빠져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내 인사동(仁寺洞) 29번지에 사는 윤보인(尹報仁)의 장남 순보(順甫) 열두살된 아이는 재작일 오후 세시경에 삼청동(三淸洞) 세균시험실 뒤에 있는 개천에서 여러 아이들과 목욕을 하다가 빠저 죽었다더라.자연 계곡에서만 물놀이를 할 수 있었던 삼청동에 사업가들이 수영장을 만든 것은 1930년대 초입니다. 위의 소녀 사진 이후 7년이 흐른 1931년 7월 19일자 기사(아래)를 보면 삼청동 계곡에 풀장을 만들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사업가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부내 팔판동(八判洞) 김용계(金容偰)와 삼청동(三淸洞) 재등창장(齋藏倉藏)등의 15명은 산좋고 물맑은 삼청동 삼청천에『뻬비、풀』을 설치코저 얼마 전에 그의 원서를 경성부에 제출하얏든 바 부당국에서도 그를 시인하야 불일간 허가하리라한다그 설계의 내용을 보면 삼청동 삼청천의 지류(支流)를 막고 그 위에 저수지(貯水池) 2개소를만들어 수심(水深) 6척의 류영장(遊泳塲)을 만든다는 것이다이의 총면적은 1100 평으로 길이가 50미돌 넓이(幅)가 13미돌이라한다그런데 삼청동 계곡의 익사 사고는 풀장이 설치된 이후에도 가끔 발생했습니다. 1933년 6월 23일 기사입니다. 고등학생이 죽었다는 뉴스입니다.부내 중학동(中學洞) 23번지 미곡입자 함영열(咸英烈)의 둘째 아들인 제일고보교(第一高普校)1년생 함홍식(咸鴻植)(14)은 작 21일 오후3시경에 동무들로 더부러 부내 삼청동(三淸洞)수영장에 목욕을 나갓다가 잘못하야 물에 빠저 죽엇다 한다.같이 수영 나갓든 그의 동무는 제일고보교 3년생 윤건로(尹健老)(16)와 그의 아우 윤강로(尹强老)(14)등의 두 명으로 그들은 전기 함흥식과 목욕을 하다가 먼저 돌아왓다.그후 전기 함홍식은 물이 깊지도 아니한 곳에서 그만 빠저 죽은것인데 이를발견하기는 22일 오전 1시 10분경이라한다.그같이 늦게야 발견한 까닭은 그의 집에서도 늦게야 찾기 시작하고 종로서에서도 밤11시경에야 그의 입엇든 교복이 삼청동『풀』언덕에 잇다는 말을 듯고 출동한 까닭이라 한다.● 지금이야 삼청동으로 물놀이를 가는 경우가 없지만 삼청동 계곡은 한 때 군부대의 휴양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1987년 7월에 가로 7m, 세로2.5m, 최대 수심 2.7m의 군인 수영장이 준공되었습니다. 청와대 뒷산을 가로지르는 북악 스카이웨이가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관리되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다 청와대 뒷길이 개방되면서 등산하는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하여 영구 폐쇄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북악산(백악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 (삼청안내소를 지나 삼청휴게소로 가는 길)에는 군부대 수영장으로 쓰였던 시절의 콘크리트가 파란색 페인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계곡을 복원하면서 일부러 남긴 건지 실수로 덜 치운 것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시민들이 삼청동 계곡으로 수영을 다니는 것이 언제 끝났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1932년 한강 인도교에 큰 수영장이 개장하면서 인기가 좀 시들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1932년 7월 21일 기사입니다.한강 수영장, 비 개면 개장일찍이 경성부(京城府)가 공사중의 한강수영장은 공사가 완료되어 19일 오전 10시에 현장에서 관계자와 용산서 입회로 인계를 마친바로는 위험방지의 경계선 22본과 감시원임치, 다이빙대(飛込), 휴게실, 탈의장에 새로 남녀별 세면소를 설치하였다. 우기가 그치는 데로 곧 일반 부민의 수영장으로 개장할 터이라 한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여름철 물놀이를 하고 있던 소녀의 사진을 통해 삼청동 물놀이장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삼청동 수영장에 대해 여러분의 추억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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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철창에 갇힌 듯…

    철창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건…. 시골 마을 자가펌프장의 계기판과 버튼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이네요.―경북 의성군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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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반가운 마주침

    가파른 계단에 접이식 의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작은 휴식을 선사하는 배려가 돋보이네요.―서울 성북구 369마을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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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계자설’ 北김주애, 80일만에 미사일행사 등장 [청계천 옆 사진관]

    지난 달 29일 국정원이 북한이 김주애를 현시점에서 유력한 후계자로 암시하며 후계자 수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힌 가운데 김주애가 아버지 김정은과 함께 군 관련 행사에 참석해 눈길을 끈다. 김주애는 5일자 북한 노동신문에 등장했다. 지난 5월 이후 80일 만에 처음 등장했다. 신형전술탄도미사일무기체계 인계인수기념식에서다. 김주애는 이전과 달리 드러내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행사관계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다른 인물에 몸이 가려진 채 다리 부분만 보이는 장면도 있다. 또한 노동신문의 1면 기사에서는 이름도 보이지 않아, 후계자로 지목된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 또는 수해로 민심이 좋지 않은 내부 상황에서 설득 과정을 로우 키이(low key)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가능하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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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회색서 솟구친 초록

    돌담 빈 틈 사이로 작은 풀 하나가 솟아나 있습니다. 시멘트보다도 단단한 생명력에 햇살이 잎을 쓰다듬으며 격려합니다. ―서울 홍익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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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의 얼음을 팝니다 – 여름을 시원하게 만든 특별한 장사[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사진으로 현재를 되돌아보는 백년사진입니다. 무더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더위를 버티는 방법은 지금이 훨씬 다양합니다. 이번 주 고른 사진은 얼음을 뜻하는 빙(氷)자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가게 사진입니다. 1924년 8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얼음을 파는 가게가 더운 여름을 만나 장사가 잘 된다는 소식입니다. 가게를 ‘임시로 만든 집’이라는 의미에서 ‘가가’로 표현했었군요. 철 만난 얼음 가가(假家)도매값은 싼데 소매값은 작년과 같다.중복허리가 되니 날도 무던히 덥다. 일기가 더워 갈수록 세월이 좋은 사람은 어름장사들이다. 대체 경성 시내에서 한 여름 동안에 소비되는 얼음은 보통 2만 돈은 넘어간다하며 이 가격은 금년 도매 시세로 보도라도 일 돈에 13원 50전 식으로 이만 돈 가격이 17만원 안에 들지는 않는다 하니 이것을 소매 가격으로 환상하면 적어도 2,3배는 넉넉하리라 한다. 그런데 작년 겨울 일기가 전에 없이 따뜻하여서 한강(漢江) 채빙(採氷)이 여의치 못하였던 고로 경성 시내에 있는 얼음도가 이십여호 중에 경성천연빙과 조선천연빈의 두 회사를 제한 외에는 저장한 얼음이 전혀 없을뿐더러 앞의 두 회사에서도 경성 시내에서 일년 동안 소비되는 2만돈(돈)의 얼음은 가지지 못하였는 고로 금년 여름 어름 값이 좀 비싸리라고 일반은 기우(杞憂)를 마지 않하였더니 사실은 그와 반대로 소매값이 작년보다 오히려 싸다는 기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그 이유인 즉 리(利)에 밝은 일본 사람의 얼음 장사들은 경성에 얼음이 부족한 것을 짐작하고 안동현(安東縣) 평북백마(平北白馬) 함남서호진(咸南西湖津) 등지로부터 얼음을 이입(移入)하여다가 경성시내에 퍼트려놓고 싸게 소매상에게 넘기기 때문에 이것을 본 조선, 경성의 두 천연빙(天然氷) 회사에서는 경쟁적으로 더 싸게 팔기를 시작한 까닭이라 한다. 그러나 소매값은 여전히 작년에 얼음이 비쌀 때와 같이 2백 여개의 소매상들은 ‘이찌고’ 같은 것에 별미만 조금씩 붙이면 의례히 한 ‘컵’에 20전 혹은 25전을 받는다.●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여름에 사용하던 시절, 일본인들이 얼음 사재기에 나선 이유냉동으로 인공 얼음을 만들 수 없던 시절, 서울 한강은 여름철에 쓸 얼음을 제공하는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한강 채빙은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얼음 장사는 조선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겨울을 지탱한 중요한 산업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채빙은 주로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채취한 얼음은 궁중과 관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왕실에서는 더운 여름에 차가운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얼음을 애용고 왕실의 빙고는 철저히 관리되었으며, 얼음의 공급이 끊기지 않도록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채빙 산업은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얼음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한강 일대에서는 대규모로 얼음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얼음 장사꾼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겨울철 한강이 얼면 강에 나가 얼음을 채취하고, 이를 잘라 운반하여 도심으로 공급하였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100년 전에 겨울 날씨가 포근해서 한강에서 얼음 채취가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돈에 밝았던 일본 상인들이 얼음 부족과 그에 따른 가격 폭등을 미리 계산해 추운 안동 지방(중국 심양) 등에서 미리 얼음을 채취해서 서울로 옮겨다 놓았는데 막상 여름이 되니 가격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이 운영하던 얼음 가게에서 할인 행사를 한 덕분이라는 기사 내용입니다. ● 위생 문제를 핑계로 얼음 산업을 규제한 일제. 조선 상인들의 대책은 조합 설립1925년 1월 16일 기사도 한번 보시겠습니다. 얼음 사업에 대한 위생 규제 때문에 힘들다는 호소를 담고 있습니다. 한강을 생업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많은 노동자들의 생존 문제를 정치가 간섭해서야 되겠느냐는 내용입니다. 수백 년 이래로 조선인 전래의 유업인 빙고업(氷庫業)은 심동에 한강이 결빙하면 그 부근에 빙고를 건축하고 채빙 저장하였다가 그 다음해 7,8월이 되면 각 방면 수요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채빙시에 비용은 빙괴 한 개에 불과 3,4전의 운임이 있을 뿐이요, 별로 큰 자본을 필요치 아니하고 그 다음해에 상당한 시세를 만나면 빙괴 한 개가 70, 80 전 내지 1원 이상의 가격으로 매매되여 상당한 이익이 있는 영업일 뿐만 아니라 연강( 沿江)에서 어업은 빙에 대하여 여름철의 신선을 보호하나니 그럼으로 이제 이 빙고업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 따라서 어업을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겨울철을 당하여 노동자 실직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즉 빙괴채취로 연강에 유통되는 재화는 적어도 일 년에 7,8만원 내지 10만원에 달하는 까닭에 노동자는 이 시기를 소작인의 추수 시기와 같이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2,3년 이래로 당국이 그 허가를 아니하는 관계로 연강노동자들에게는 형언키 어려운 가련한 생활을 파급하게 되었다. 위정당국자가 위생이란 점에 치중하여 그 업에 간섭하는 것은 호의로 해석하여 이이를 제출할 여지가 없거니와 그러나 간섭에도 정도가 있지 아니한가. 반드시 거금을 투자하여 저장고를 설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종래의 빙고가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오적물의 침입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소호의 개량을 가하면 충분히 쓸 수 있고 또한 어떠한 창고에 저장한다 할지라도 4,5삭(朔) 후에 꺼내는 것은 일반인즉 종래의 사정과 일반의 정형을 참작하여 각 기업에 안(安)하고 원한이 없게 하는 것이 정치의 요강이라한다면 당국자의 좀더 반성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끝으로 조선빙고업자에 향하여 일언으로 원하노니, 목전의 작은 이익에 현혹하여 경쟁의 길을 취하지 말고 각기 자본을 구합(鳩合)하면 상당한 사회나 조합을 성립하여 완전히 경영할 수 있으니 이리하여 선조부터 이어온 유업을 유지하고 실업에 우는 노동동포를 구하기를!● 한강 얼음 채취의 흔적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냉장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게 됩니다. 전기 냉장고가 보급되면서부터 얼음을 자연에서 채취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냉장고는 집집마다 설치되었고, 이에 따라 한강에서의 채빙 산업은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각 가정에 냉장고 한 두 대씩 있는 요즈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60년 대까지만해도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보관해뒀다가 여름에 판매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동아일보 DB를 살펴보니 1980년대 초 거리에서 리어커로 얼음을 실어 나르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때의 얼음은 자연빙이 아니라 인공빙이었습니다. 지금도 대형 식당 등에서는 얼음 공장으로부터 얼음을 납품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얼음 가게 사진을 시작으로 한강에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팔던 시절 풍경 사진 몇 장을 함께 감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얼음과 관련한 여러분의 추억은 어떤 것이 있나요? 댓글로 남겨주세요. 이제 조금만 고생하면 장마와 무더위도 끝날 것입니다.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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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규모 수해 상황에서 北김정은은 어떻게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나? [청계천 옆 사진관]

    수해 현장에서 고무 보트를 띄우고 직접 점검하는 정치지도자 사진. 북한 김정은의 최근 사진이 눈에 띈다. 60년 만에 온 가장 큰 폭우로 압록강이 범람하면서 북한 신의주 일대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지난 달 30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북한 신의주와 마주 보는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의 이재민은 3만 명에 달한다. 중국 단둥시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 북한 신의주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압록강단교로 신의주와 단둥시가 마주 보고 있다. 단둥은 중국의 변방 도시라도 현대적 건물과 그에 상응하는 치수시설들이 있지만 워낙 많은 비가 한꺼번에 내리면서 피해가 컸다. 중국이 저 정도라면 건물이 낡고 배수 시설이 빈약한 압록강변 북한 지역은 더욱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은 분명하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7일 폭우로 압록강 수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서면서 평안북도 신의주시와 의주군에서 5000여 주민이 침수 피해를 당해 고립됐다고 전했다. 북한 언론은 인명 피해를 아직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다. 다만 북한은 평안북도, 자강도, 양강도 압록강 인근 지역을 ‘특급 재해 비상 지역’으로 선포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8일부터 30일까지 평안북도 신의주시에 머무르며 현장을 둘러봤다. 재해를 당한 주민들을 헬기로 구출하는 한편, 당 중앙위원회 제 8기 제22차 정치국 비상확대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에서는 수해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우리의 경찰청장격인 사회안전상과 해당 지역 도지사격인 도당위원회 책임비서를 경질했다. 김 위원장은 회의 첫날 “당과 국가가 부여한 책임적인 직무수행을 심히 태공함으로써 용납할 수 없는 인명피해까지 발생시킨 대상들에 대하여서는 엄격히 처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다음날 경고대로 문책성 인사가 즉시 이뤄졌다.김 위원장은 또 국가단위 비상재해 위기대응 체계가 부실하게 작동했다고 지적하며 재해방지사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그는 비상 재해용 비축물자 보장, 복구 건설 규모와 예산 파악, 기상 부문의 철저한 예보사업, 필수 구조장비 비축 등도 요구했다고 노동신문은 밝혔다.통일부에 따르면 북한은 1995년과 2010년에도 여름 압록강이 범람하면서 신의주 지역이 큰 수해를 입은 바 있다. 김정일 사망이 2011년 12월이니까 김정은이 권력을 완전 장악한 후 압록강 범람은 처음 있는 셈이다. 김정은으로서는 자칫 수해로 인해 민심의 이반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위기 관리와 책임자 처벌이라는 숙제 앞에서 김 위원장과 참모들은 이미지를 활용했다. 수해 현장을 챙기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시각적으로 잘 정리해서 보여주었다. 또한 국제 사회를 향해서도 ‘최고 지도자가 나설 정도로 심각한 피해 상황’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복구에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노동신문이 보도한 사진을 보면, 김 위원장은 28일 평안북도 신의주시와 의주군의 홍수 현장을 직접 방문해 공군 헬기로 수재민들을 안전지대로 옮기는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9일과 30일 중 어느 시점에서 현장을 보트로 직접 둘러보았다. 홍수로 초토화된 신의주 일대 모습과 김 위원장의 모습을 노동신문을 화보 형식으로 보도했다. 재난 현장에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직접 등장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김 위원장의 사진은 특이했다. 헬기와 보트라는 소재는 북한 내부 뿐만 아니라 세계의 시선을 끌 만한 사진이다.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사진이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을 보니 당시 촬영상황이 이해가 된다. 우선 현장에는 최소 7대의 보트가 떴는데 그 행렬 가운데 김위원장의 보트가 있다. 김위원장의 모습을 망원 렌즈로 촬영한 것은 바로 앞에 가는 보트에서다. 여기에는 구명조끼를 입고 보트를 운전하는 2명의 군인과 1명의 사진촬영가가 타고 있다. 비가 오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촬영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가리는 것도 없었다. 김위원장의 보트에는 마찬가지로 구명조끼를 입은 2명의 군인과 김 위원장, 현송월 부부장, 김덕훈 내각 총리, 조용원 당 조직비서 등 3명의 최측근이 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1명의 사진촬영가가 망원 렌즈가 아닌 작은 렌즈를 들고 탔다. 그는 김 위원장의 표정을 클로즈업 할 수 있을 정도의 1,2미터 내외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사진 이외에 동영상도 찍을 수 있는 ‘고프로’를 카메라에 달고 있다. 하늘에는 드론이 날고 있다. 드론은 육지 어디선가 ‘1호 사진가’가 조종기를 들고 촬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체를 보여주고 그 아래에서 현장을 살펴보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 보트 시찰이 먼저 있은 후 곧바로 이어진 회의 장면을 공개한 것도 김위원장의 책임보다는 실무자에 대한 문책이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인재(人災)’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존재로 김 위원장과 참모들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반쪽인 북한 주민들이 입은 수해에 깊은 아픔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70년간 남북한이 홍수에 대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국가 예산은 적절하게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사용되었는지 마음 속으로 비교해보니 안타깝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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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무더위 이기며 국토 사랑 키우는 대학생들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무더위 속에서도 아름다운 국토를 걷는 행사를 열었다. 학생들은 ‘2024 킹고대장정 in 해파랑길’ 행사를 지난 7월 23일부터 7월 30일까지 7박 8일간 동해안 일대에서 진행하고 있다. 재학생 100여명이 참여한 이번 행사는 23일 강원도 울진에서 출발하여 삼척을 거쳐 강릉까지 7박 8일간 약 170km를 걷는 코스로 구성됐다. 6일 차인 28일에는 유지범 총장과 학교 관계자, 강원지역 각계 동문들이 격려 방문차 합류하여 강릉 심곡항 해파랑길 일대를 걸으며 화합을 다졌다. 유지범 총장은 이 날 “무덥고 궂은 날씨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우리 성대 학생들이 자랑스럽다”며 “자신을 이겨내는 뜻깊은 행사를 통하여 성대다움을 기르고 미래를 향한 담대한 도전에 나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행사를 준비한 김민기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총학생회장은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서 새로운 학우들을 만나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게 해주고 싶었다. 한 학기 동안 쌓인 학업, 취업 스트레스를 날리고 스스로를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2000년대 초반 시작된 이 대장정 행사는 해마다 많은 재학생들이 참여 의사를 밝혀 올해는 약 4대 1의 경쟁률을 뚫은 학생들이 참가했다. 학생들은 대장정 외에도 총학생회에서 준비한 다채로운 화합과 교류 프로그램(캠프파이어, 레크리에이션 등)의 일정을 마치고 오는 7월 30일(화) 캠퍼스로 복귀할 예정이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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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수해에 몸살 앓던 한반도…물난리 났던 곳은 어디?[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한반도는 수해에 몸살 100년 전 파리 올림픽이 열렸다고 해서 당시 신문을 찾아보았는데 사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5월부터 진행된 올림픽은 1924년 7월 27일 폐막했습니다. 하지만 신문에서는 그걸 즐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전국은 물난리로 어수선한 모습이었습니다. 100년전 한반도 수해 사진을 모아봤습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특히 대구 지역 피해 상황이 컸던 모양입니다. 기사를 한번 보겠습니다.7월 25일자 2면에 실린 단신 기사경기 各郡 피해그저께 이래의 호우로 인한 경기도 내의 피해는 아래와 같더라◇ 수원수원과 성안을 관류 하는 수원천은 증수(增水)가 12척으로 교량과 도로의 유실이 많고 제방의 제방의 증수는 약12,3척, 오산천의 증수는 10여척인데 피난민이 다수하고 수원과 남양 사이는 교통이 두절되었으며◇용인용인은 금도천 신갈천 삼계천을 비롯하여 각 처의 냇물이 각일각으로 증수되여가는데 신갈리에는 길위로 약 일 책 이상이 덮혔으며 침수가옥이 10여 호이고 교통은 대개 두절되었으며 주민은 피난 준비에 급급하는 중이더라 (23일 오후 9시)7월 26일자 2면한강 연안에 침수 370호재작일(그저께) 오후 1시까지에 26척이나 증수된 한강은 그 후로도 더욱 물이 늘어가서 작일 오전 한시에 최고 30척에 달하였으므로 재작일 오전부터 증수에 대하여 비상경계를 하고 있는 용산경찰서에는 마침 경찰서 안에 예비하고 있던 순사 이십여명을 즉시 한강 연안 각처로 파견하고 또다시 연안 각 파출소에 즉각으로 증수의 시급한 것을 전화로 알리는 등 일시는 비상한 소동을 일으켰으나 그 후 한 시간 동안의 물은 또다시 일촌 가량 감수가 되었으므로 겨우 안심을 한 모양이었으며 이촌동(二村洞) 주민들은 이제야 말로 면할 수 없는 수해를 또다시 당하게 되리라고 최후의 굳은 결심을 하고 모두 세간과 의복 등 속을 묶어놓고 피난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작일 오전 10시경에는 29척5촌의 감수가 되어 점차로 물은 감하여 가는 중이라는 데 그 당시에 침수된 가옥들은 총계 372호인데 침수 가옥들은 전부 동막 관내 뿐이며 이외에도 구룡산 원정 사정목에 60호가 침수되고 이촌동에 40호 마포에 130호 가량이 물이 잠기게 되었으나 그 정도는 다행히 모두 마루 위와 마루 밑까지 물이 들어오고 말았다는데 이와 같이 위험이 박도하여 매일 용산 경찰서에서는 부 당국과 힘을 합하여 가지고 마포에는 마포 보통학교와 용산에는 용산 소학교를 각각 피난소로 정하여 놓고 쌀과 나물 반찬 등을 준비까지 하여 두고 또다시 용산서에서는 한강, 서빙고 인도교, 원정 사정목, 마포 동막 공덕리 제방 8곳에 부장 한 명에 순사 3,4인씩 배치를 하고 비상 경계를 하였다는데 이와 같은 물 소동이 생긴 후로 별로히 인축(人畜)의 손해는 없으나 이촌동에서 다만 어린 아이(4세) 한 명이 물가에 그만 떨어져서 죽었다더라.7월 26일자 2면각지 피해 - 전 조선을 음습한 수해상황◇ 수원: 지난 17일부터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여 연 8일간이나 계속하여 가옥에 침수가 되기 시작하였는데 우량은 3년 전 수원 명승고적인 화홍문 구간수 매향교가 파괴 유실될 때보다 많으나 그 때보다 내가 심히 넓고 시민의 방비로 많은 손해는 없으나 유실 가옥이 1호, 파회가옥이 2호 침수 가옥이 20여 호요 문안문박시장 가가이 10여처가 파괴되였고 전답의 손해가 많으며 선로도 서호 부근 둑이 무너졌으나 20여 평이나 무너진 둑을 인부 50여명을 드려 주야로 공사중이더라.◇경상 각군의 피해연일 내리는 호우로 말미암아 경북 관내의 수해에 대햐여는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그후 24일 까지 계속하여 내리며 지난 23일까지 경북도청에 도착된 보고에 의하면경산 하양면 금락동 동산천에 4척의 물이 불어 영천과 하양 사이 교통 두절성주 군내 각 냇물이 증수되어 대구 성주간 자동차 불통영덕 군내 냇물이 불어서 영덕 영양 사이 자동차 불통대구에는 이미 보도한 신정외에 23일에 마당에만 침수 되었다가 빠진 데가 동성정(동성동) 50호, 달성정(달성동) 54호, 봉래정(봉래동) 60호, 시장정(시장동) 5호, 덕산정(덕산동) 40호 등이었다.함안에서는 지난 22일 아침부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니 그것이 점점 큰 비가 되어 종일 퍼붓는 비는 큰 가뭄 속에 있던 일반인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더니 22일부터 시작한 비는 그치지 아니하여 가야면 말산은 그 넓은 벌판이 바다로 변하였더라◇전남 각군의 피해전주에는 22일 밤중부터 다시 큰 비가 오기 시작하여 23일 오전 10시까지 비가 와서 전주천은 증수 7척에 그쳤으나 완산교 일부가 파손되어 소방조는 만일을 경계 하였으며 전주역과 동산역 사이에는 오전 10시 55분 전주역 발차부터 운전되지 못하였더라.◇충남 각군의 피해공주 금강은 23일 정도까지 18척6촌이 증수되어 증수되여 도선은 중지.예산은 교량 도로의 파손으로 인하여 덕산 대천 또는 당진 사이의 교통 두절서산은 도로 파손으로 인하여 태안까지의 교통 두절천안은 병천의 증수로 인하여 충북진천 사이의 자동차가 통하지 못하고 성황 가는 길은 교량이 무너져서 자동차가 통하지 못하며연기는 대평리 도선장의 불통으로 인하여 대전 사이의 우편 두절.● 치수 정책의 발전이 가져온 변화: 100년 전과 현재신문에 실린 수해 사진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원시적이고 불완전한 형태였습니다. 당시 사진 기자들은 무거운 대형 카메라를 사용하여 현장으로 나가야 했고, 필름 현상 과정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거로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의 신문 기자들도 수해 현장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사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기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해의 심각성을 국민에게 알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을 겁니다. 특히,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비해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둑(제방) 수준이 형편없어서 피해가 크다는 기사에서는 기자들의 울분도 느껴집니다. 100년 전의 신문 사진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치수 정책이 얼마나 미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좁은 제방과 부족한 배수 시스템으로 인해 비만 오면 쉽게 범람하는 강과 하천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치수 상황은 매년 반복되는 수해로 이어졌고,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야기했습니다. 그 결과, 수해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의 필요성이 점점 커져갔을 겁니다. 지금의 수해 취재는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고해상도의 이미지를포착하고 드론을 이용해 공중에서 찍은 사진, 실시간 영상 스트리밍까지 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수해 현장의 생생한 상황을 즉시 전파할 수 있게 해주며, 국민들에게 더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현재의 치수 정책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입니다. 정부는 홍수 예방을 위해 대규모 제방 건설, 저수지 확충, 하천 정비 등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상 예측 기술의 발달로 홍수를 미리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체계적인 대처가 가능해지면서 수해로 인한 피해도 크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100년 전 기사와 비교하면 확연하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치수 정책이 발전했기 때문에 옛날같은 수해 사진은 이제 드물어졌습니다.지난 주와 이번 주 폭우가 내린 지역을 취재다니면서 만난 시민들의 이야기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비만 오면 불안에 떨던 주민들이 이제는 큰 비가 와도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사전 대응에 많이 안심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특히 배수 펌프가 많이 설치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도 올라가고 있는 것이겠죠? 물론 완벽한 대책은 없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예측 불가능한 폭우가 내릴 때도 있고,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1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치수 정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고, 이는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가 더 지속되어 더 안전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폭우 현장에 출동한 사진기자들이 찍을 사진이 없어 지더라도 말입니다.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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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님들 잠시 쉬었다 가세요

    서울시의 한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에서 시민들이 무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서울시는 여름철 무더위 속에서 일하는 배달라이더, 퀵서비스 기사, 대리운전 기사 등을 위해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를 10월까지 운영한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혹한기에만 운영했던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를 올해부터 확대 운영하기로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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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서 발견된 고래 사진 전시회… 현상금 1000만원 걸린 귀신고래 사진은 언제쯤? [청계천 옆 사진관]

    해양수산청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이 8월 12일까지 ‘동해, 독도 그리고 고래’ 사진전을 개최 중이라고 23일 밝혔습니다. 우리 땅 독도와 고래에 대한 국민 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합니다. 전시회에는 고래연구소, 독도수산연구센터 등 3개 기관에서 촬영한 이 사진들은 포항수협 활어 회센터(19~29일)와 포항여객선터미널(30일~8월 5일), KTX 포항역(8월6일~8월 12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한번 감상해 보시죠.이번 전시회에는 없는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귀신 고래 사진입니다. 귀신고래는 오호츠크해와 한국 연안을 회유하는 수염고래류에 속하는 고래로 1912년 미국 탐험가 로이 앤드루스에 의해 ‘한국 귀신고래’로 명명돼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몸길이 14m, 무게 30t가량이고 회갈색 몸체에 따개비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77년 1월 3일 울산 방어진 앞 5마일 해상에서 귀신고래 두 마리가 남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선원들이 발견한 것이 마지막 목격이었습니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는 2003년 이후 동해안에서 귀신고래를 찾으려고 목시(目視) 조사를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습니다. 고래연구소는 2008년 1월부터 연안 어구에 혼획(混獲·우연히 그물에 걸려 잡히는 것)되거나 생존 또는 죽은 귀신고래를 발견해 신고하면 1000만 원을, 귀신고래가 유영하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고래연구소에 제공하면 포상금 500만 원을 각각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2024년 현재 아직 현상금을 타 간 사람은 없습니다. 2011년 1월 저도 귀신 고래를 찍으러 배를 탔던 적이 있습니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와 함께 ‘한국계 귀신고래’를 찾기 위한 항해였습니다. 결국 귀신고래는 못 찍고 참돌고래 무리만 찍을 수 있었습니다. 돌고래는 호기심이 많아 사람들이 탄 배를 잘 따라 온다고 하더군요. 고래 사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그 때 절감했습니다. 몸집이 커서 카메라로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물 위로 숨을 쉬러 나오는 순간이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숨을 쉬러 나왔다 들어가면 한참 있다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 들어간 곳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에서 올라오더군요. 미국 캘리포니아 등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해안에 무려 1만8천여 마리 이상이 산다고 하니 언젠가는 동해에서도 발견되겠죠? 눈앞에 나타나면 꼭 찍어보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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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지갑 하나 살까

    영롱한 구슬 지갑 앞에 선 여성분이 급히 휴대전화를 검색합니다. 갑자기 구매욕이 발동하셨으려나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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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격 후 주먹 쥔 트럼프 사진, 왜 한국 신문과 미국 신문은 다른 사진을 썼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 트럼프의 포효 모습, 한국과 미국 신문에서 쓴 사진이 달랐다이번 주 한국을 뜨겁게 달군 사진은 미국 시간 13일 선거 유세 도중 총탄을 맞은 트럼프가 손을 들어 지지자들에게 포효하는 장면이었습니다. 1초를 4000로 쪼갠 찰나로 카메라의 셔터 스피드를 설정한 사진기자는 이 장면을 트럼프 바로 앞 연단 아래에서 찍었습니다. 필요한 모든 요소와 감정이 집약된 순간입니다. 이 사진은 미국에서 최소한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사고 나흘 뒤인 17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전광판에도 이 사진이 크게 비치고 있습니다. AP통신의 백악관 출입 사진기자인 Evan Vucci(1977년생)는 한국에서도 갑자기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보도사진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방송카메라 기자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은 그 사진을 찍은 사람에 대해 ‘사진 천재’라고 표현했다고 하더라구요. 덩달아 “美 사진기자들은 어떻게 트럼프가 총 맞는 순간을 찍을 수 있었을까”라는 제목으로 동아닷컴의 [청계천옆사진관] 코너에 올린 저의 글도 꽤 많은 댓글이 달려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주중에는 신문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 사진기자입니다. 그리고 1주일에 한 번씩 매주 토요일, 100년 전 우리나라 신문에 실렸던 사진 중 한 장을 골라 여러분에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게재된 사진을 소개할 에정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지난 주 트럼프 피격 사진을 쓴 한국신문과 미국신문의 차이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일하고 있는 한국 신문의 7월 15일자 1면 사진입니다. 완벽한 3분할(3각형) 구도의 사진으로 뒤에 성조기까지 완벽하게 보이는 사진입니다. 우리나라 독자와 네티즌 대부분이 그날 사건을 이 사진으로 기억하실 거 같습니다. 다음은 미국 신문의 1면을 모은 사진입니다. 우리와 같은 사진을 쓰기도 했지만 조금은 다른 느낌의 사진을 쓴 신문이 꽤 있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사진적으로 완벽한 사진은 우리나라 신문이 쓴 사진일 겁니다. 미국의 사진기자들과 편집기자들도 아마 사진적으로 완벽한 사진을 꼽으라면 그 사진을 선택할 겁니다. 그런데 미국 신문의 편집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완벽하고 힘이 좀 없는 사진을 골랐습니다. 트럼프의 손이 완전히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고 성조기도 잘 보이지 않는 사진을 썼습니다. 한국 신문과는 분명 뉘앙스가 다릅니다. 왜일까 생각해보고 옆에 있는 사진기자 선후배들에게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트럼프를 싫어하는 것 아닐까?”라는 결론에 조심스럽게 도달했습니다. 위대한 트럼프라는 이미지를 주기 싫어한, 미국 주류 언론들의 사진 선택이었을 거라는 겁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진이 너무 선전효과가 크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트럼프의 사진은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대협이나 민노총 집회에서 의장이나 위원장을 기록하는 방식에 아주 가깝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연단 아래에서 위를 보며 찍음으로써 독자들이 주인공을 우러러보게 하는 동시에 배경이 하늘이 되어 피사체가 도드라져 보이는 사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사진 표현법입니다. AP통신 Vucci 기자가 찍은 사진이 트럼프를 대선에서 아주 유리한 고지에 도착시켰고 그 사진은 아마 퓰리처상을 받을거라고 예측하는 우리의 정서와는 달리 미국 신문사 기자들과 편집자들은 냉정하거나 아니면 평범한 느낌의 사진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손도 별로 안 올라가고 성조기도 덜 보이는 사진을 고른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100년 전 노동조합 결성식 사진에서는 왜 노조원들이 주먹을 들지 않았을까그럼 본론으로 들어와 이번 주 백년사진을 소개합니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관련 기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경성 인쇄직공조합 창립총회 印刷工組合創立인쇄 직공 조합을 조직하여로동운동에새 기치를 세워시내에 있는 인쇄직공(印刷職工)삼천 여 명이 모여 단결기관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중이라 함은 이미 본보에 보도한 바인데 지난 13일 오후 8시에 경성 인쇄 직공 조합 창립총회(京城印刷職工組合創立總會)를 시내 견지동 시천교당(堅志洞侍天敎堂)에서 열고 임시의장 리응종(李應鍾)씨의 열렬한 창립취지 설명이 있은 후 의사를 진행하였는데 경성에 있는 인쇄 직공은 전부 이 조합에 가입하게 할 일과 또 지방 인쇄직공 단결을 원조할 일과 또 조합비로 매월 10전씩을 받기로 결의한 후 위원 100여 명을 선정하고 위원장과 상무위원은 오는 21일에 열리는 제1회 위원회에서 선정하여 발표하기로 하고 인쇄 직공 친목회를 인계한 후에 폐회하였는데 조선에서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계급의식(階級意識)을 가지고 모이는 모임으로는 새 기치를 세웠으며 조선노동운동의 발전과 장래를 위하여 매우 기꺼운 일이라고 일반 노동운동자들은 기뻐한다더라. 경성 시내에서 일하던 인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아무리 흑백사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밋밋한 느낌입니다. 요즘의 노동자 집회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수막이 붙어 있고 그 앞에서 위원장이 주먹을 들어 구호를 외치고 연단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집단적으로 주먹을 들어 결의를 보여주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익숙한 노동조합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궁금증은 사실, 트럼프 사진을 보면서 든 생각이지만 우리는 언제부터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고 팔을 펴는 사진에 익숙해졌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역대 사진을 모아 둔 데이터베이스에서 ‘집회’ ‘구호’ ‘시위’ 등의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동아일보 DB에서 팔을 들어 구호를 외치는 장면은 1974년 8월 27일이 처음으로 검색됩니다.물론 그 전에도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는 사진은 있지만 팔을 들어 하늘을 향하는 사진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1980년도 이후에 그런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보였습니다. 1950, 60년대는 손으로 쓴 프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어깨동무하고 스크럼을 짜서 행진하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그 전의 시위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손을 들어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현장에 있었다면 사진기자들은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밋밋한 장면 보다는 동작이 있는 장면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노동자들의 집회 사진에서 손을 허공에 올려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아닌 것과 트럼프의 포효 모습 사진을 보면서 언제부터 우리는 팔을 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진에 익숙하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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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잉어들은 좋겠다

    한여름 운동하는 시민 옆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네요. 물속은 물 밖보다 시원하겠죠? ―서울 성북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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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중한 생명 구할 장비 점검”

    15일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성동구 직원들이 자동심장충격기(AED)를 점검하고 있다. 성동구는 다음 달 6일까지 관내 아파트 등에 설치된 AED를 점검한다고 밝혔다. AED는 심정지가 된 환자에게 초기에 전기 충격을 가해 심장 박동을 소생시킬 수 있는 장비로, 성동구에 총 159대가 설치돼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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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복엔 역시 삼계탕”

    초복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삼계탕 전문점 앞에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길게 줄 서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15일 중부지방은 체감온도가 최고 33도를 넘어서는 등 찜통 더위가 예상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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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사진기자들은 어떻게 트럼프가 총 맞는 순간을 찍을 수 있었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올해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을 4개월 앞둔 14일 일요일 오전(현지 시간 13일 오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펜실베니아주 버틀러에서 유세를 위해 무대에 오른 지 10분도 안 돼 발생한 사건입니다. 다행히 트럼프는 SNS에 올린 영상을 통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며 안전한 곳으로 복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세 현장 주변 건물 위에서 총을 쏜 범인은 현장에서 경찰과 특수기동대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사진기자들이 총격 순간을 거의 완벽하게 포착했다는 점입니다. 현직 사진기자로 국내 정치 현장을 취재해 본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런 상황은 아주 돌발적이라 동영상이 아닌 사진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피격 직후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을 불끈 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진은 이번 대통령 선거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으로 기록될 거라는 분석이 벌써부터 나옵니다. 공화당 지지자인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이미 자신의 엑스(X·트위터)에 이 사진을 공유했고, 지지자들도 퍼 나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국내로 들어온 사진의 촬영 정보 메타데이터와 현장에 있던 사진기자들의 바이라인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 상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우선 사진을 찍는 사진기자들과 연단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망원렌즈를 끼고 트럼프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험한 말을 하는 트럼프의 얼굴을 촬영하기에는 적당한 렌즈인거죠. 주먹을 불끈 쥔 트럼프 사진은 AP통신 Evan Vucci 기자가 촬영한 사진인데 1977년생인 그는 2003년부터 AP통신에서 일하고 있는 베테랑 사진기자입니다. AP통신 Evan Vucci 기자는 소니에서 나온 알파 1 미러리스 카메라에 400미리 망원렌즈를 장착했습니다. 거기에 렌즈를 1.4배 좀 더 길게 기능할 수 있게 하는 텔레컨버터를 장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진기자들이 프로야구를 찍을 때 사용하는 600미리 렌즈 정도의 효과를 주는 세팅입니다. 오른쪽 어깨에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메었다면 반대편 왼쪽 어깨에는 소니 알파9 카메라에 24-70렌즈를 끼고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도 찍을 수 있는 세팅이라 연단에 쓰러진 트럼프 후보를 경호원들이 몸으로 감싸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고 곧바로 주먹을 쥔 채 연단을 내려오는 트럼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AP통신은 Evan Vucci 기자 이외에 한 명의 기자를 더 현장에 배치했습니다. Gene J. Puskar 기자 역시 소니 알파 1 미러리스 카메라에 400미리 망원렌즈, 그리고 1.4배 텔레컨버터를 장착했습니다. Vucci 기자가 연단 가까이서 촬영하고 Puskar 기자는 떨어져서 촬영했습니다.현장의 사진기자는 또 AFP 통신의 Rebecca DROKE, 로이터통신의 Bredan McDemid, 게티이미지의 Anna Moneymaker가 있었습니다. 게티이미지의 Anna Moneymaker 기자는 총성 직후 연단으로 접근해 고개 숙인 채 피를 흘리는 트럼프의 얼굴을 경호원들 발 사이로 찍었습니다. 빅클로즈업이었습니다. 이밖에 통신사 기자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이들이 전 세계 주요 통신사 소속들입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인원이 현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신문사 기자로는 뉴욕타임스의 더그 밀(Doug Mills) 기자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더그 밀 기자는 트럼프의 연단 바로 밑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찍은 사진은 트럼프의 오른쪽 귀를 스친 탄환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의 배경으로는 트럼프 뒤의 임시 계단에 앉은 청중들의 모습입니다만 더그 밀 기자가 찍은 사진의 배경에는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연단 아래에서 트럼프를 밑에서 위로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60년생인 더그 밀 기자는 미국 백악관을 1983년 로널드 레이건 시절부터 출입한데다 한미 정상회담 등도 커버했기 때문에 백악관 스탭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사진기자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합니다. 그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는 최근에도 바이든 대통령 국정 운영 모습과 트럼프 후보의 유세 모습 사진이 올라왔었습니다. 사전에 사진기자들이 현장을 잘 촬영할 수 있도록 연단과 동선을 계획해서 행사를 준비하는 미국 정치 현장의 관행과 현장을 오랫동안 지켜온 기자들이 찰나를 기록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해서 테러가 유도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해는 없으시겠지만요. . 지지자들의 감정을 흔들어버린 이 사진들이 올해 미국 선거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사진기자로서 무척 궁금해집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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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익선동 ‘줄행랑’을 아시나요 [청계천 옆 사진관]

    안녕하세요. 여러분 줄행랑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도망간다는 말을 할 때 ‘줄행랑을 치다’라고 하잖아요. 행랑은 옛날 양반집의 하인들이 먹고 자던 조그만 방을 말하는데요 여기에 ‘줄’을 붙여 길게 이어진 행랑, 그러니까 하인이 아주 많은 부잣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1924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양반이 출타할 때 하인들이 끌었을 인력거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뒤로 커다란 한옥집이 보입니다. 익선동 줄행랑 사진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지난 주 백년사진에 실렸던 “청군 백군 머리띠는 언제 사라졌을까” 에 대해 독자분이 보내 주신 메일이 있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과거 청백전이고, 일본은 홍백전입니다. 일본은 지금도 모든 게 홍백전입니다. 기원은 아시다시피 건페이 전쟁에서 왔습니다. 그럼 우리 청백전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을텐데, 언제부터, 왜 바뀌었는지 제가 알아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학교를 다닌 노인분들에게 물었더니 분명한 기억으로 그때는 홍백전이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는데 해방되고 청백전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럼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왜색 문화 척결이란 의미에서 바뀌었거나, 반공(反共) 차원에서 적색을 사용 못하게 하려고 흰색으로 바뀌었을 겁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독자분의 메일로 인해 새로운 맥락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번 주 ‘익선동 줄행랑’ 사진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1924년 6월 25일자부터 1924년 8월 15일자까지 50일간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었던 “사진기사 – 일백동정(一百洞町) 일백명물(一百名物)” 기사 중 하나입니다. 우리 동네 명물 소개라는 코너입니다. ◇익선동에는 별로 명물이랄 것이 없습니다. 내외주점이 많고 밀매 음녀가 어지간하니 이것으로나 명물을 삼을런지? 그러나 내외주점으로는 청진동만 못하고 매음녀로는 내놓코라도 병목정 갈보에야 머리도 못들터이니 이것도 저것도 다 명물감이 못됩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행랑 많은 루동궁(樓洞宮)이나 들추어 보려합니다.“익선동 줄행랑”이라하면 그 동리 사람은 어느 집 행랑인줄 다 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지금부터 7,80년 전에 철종대왕의 백씨되는 곰배대군의 별명을 듣는 영평군(永平君이 홍판서의 집을 사고 든 때부터 루동궁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데 지금 주인 조선귀족 후작 리해승 각하는 곰배대왕의 오대손이라고 합니다.곰배대군의 후손으로 리해승 양반도 한때는 세력이 빨래줄 같았겠지요. 그러나 요새는 조선총독이라는 대감에게 세력을 빼앗기고는 영락하기가 가이 없답니다. 닥쳐오는 운명에야 임금의 형님이든 곰배대군의 후손인들 어찌하겠습니까. 남종 여종이 드나들던 행랑방에는 인연도 없는 뭇사람의 차지한 바가 되었고 오직 빗물이 고여 있는 앞마당에 놓인 인력거 한 채가 그래도 후작댁의 체면을 보존하는 듯합니다. 정해자(正解者)라는 원래 문제나 퀴즈 따위를 제대로 푼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기사를 쓴 시민이라는 의미입니다. 방관생 선생님이라는 분이 이날 신문에서 익선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대뉴스()를 운영하는 송종훈 선생님의 해석으로는 방관생이라는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고 익명일 수 있습니다.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방관(傍觀)하는 서생(書生)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익선동에는 술집과 사창가가 있었는데 청진동이나 병목정(지금의 쌍림동 부근이라고 합니다)에 비해 규모가 작아 내세울게 아니라 그나마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익선동 줄행랑’을 소개한다고 운을 떼고 있습니다. 익선동에는 루동궁(樓洞宮)이라고 하는 큰 한옥이 있었는데 이 집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철종의 큰형인 영평군이 살던 집인데 지금은 영평군의 5대 손인 조선귀족 후작 ‘이해승’의 집입니다. 한때 권력을 누렸는데 일본의 조선총독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보잘 것 없어졌다고 합니다. 행랑채에 있던 하인들도 이제는 다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빗물이 고여도 닦을 사람이 없는 인력거 한 대만이 이 한옥집이 옛날 권력자의 집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가 이해승이라고 하는 양반의 쇠락을 비꼬는 듯 합니다. 이해승과 그가 살던 루동궁이란 장소가 어떤 곳인지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았습니다. 1974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에 “한양도읍 이후 살펴본 동네 명칭의 변화”라는 시리즈에 익선동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사실(史実)속의 우리동네- 한양도읍(漢陽都邑)이후 살펴본 동명연혁(洞名沿革)] 익선洞 - 강화도령(江華道令) 철종(哲宗)때의 ‘익랑골’을 개명(改名)익선동(益善洞)은 현재 행정동인 종로구 권농동(勸農洞)관할에 속해있는 법정동 이름이다. 익선동은 1914년 일제총독부가 이른바 경성부제(京城府制)를 실시할 때 궁동(宮洞) 익동(益洞)돈 녕동(敦寧洞)의 일원과 니동(泥洞) 한동(漢洞)등의 일부를 합하여 만든 새 동네다.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네이름은 대부분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만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 동네이름은 후세에 와서 지나치게 미화(美化)가 된 나머지당초의 동명(洞名)의미를 상실해버린 경우도 있다. 익선洞이 바로 그와 같은 예다.익선(益善)이란 글자그대로「더욱 착하다」또는「더욱 잘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옛날 중국의「楚」「漢」시대의 명장 韓信은 漢高祖가『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면 잘싸울수 있겠는가』고 물었을때 자신있게「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즉『군사가 많을수록 좋다』는 뜻으로 한 명언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익선(益善)洞은 그러한 군사를 잘 쓴다든지 또한 모든 일을 더욱 잘하고 더욱 착하게한다는 등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益善」이란 이름은 이 지역에「익랑골」이라는 동네가있었던데서 비롯됐다고한다.「익랑골」의 유래는 바로 이곳에 李씨조선의 제25대 哲宗의 장형(長兄)인 永平君이 거처하던 누동궁(樓洞宮)이란 궁궐이있어 그 궁궐주위에 익랑(翼廊)、즉 대문 좌우쪽으로 줄행랑이 늘어서 있었던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왔다 한다.李씨 조선 제24대 헌종(憲宗)이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한 다음 대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어 全溪君(璜)의 제3대인 속칭「江華道令」으로 왕통을 계승케한 것이 철종왕(哲宗王)인데 그는 친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묘(廟)도 이「누동궁」안에 모시고 장형인 영평균(永平君)을 살게 해 그후 永平君의 5대손인 이해승(李海昇)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궁에 거주하였다고 한다。哲宗은 즉위와 함께 이곳에「누동궁」을 지었는데 그는「江華道令」으로 통칭될만큼 왕실의 분쟁이 심한중에 서울에도 있지 못하고 멀리 강화島로 들어가 농부생활을 하는등 고생을 했던터라 같이 고생하던 실형(實兄)을 위하고 또 친부모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도 올릴수있게하기위해「누동궁」을 지었던 것으로 전해온다。哲宗은 그건문양식도 특별히 공을들여 궁궐대문앞에 동서로 익랑(翼廊)을 광대하게 짓게하고 시종들이 살도록 했는데 그후부터 이지역은「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을 얻게 됐다。그런데 이러한 연유에서 생긴「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은 어느사이엔가 익랑동(翼廊洞)에서 익동(益洞)으로까지 변천을 했으며 또 부근의 일부 지역은 역시「누동궁」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궁동(宮洞)으로 불려졌다。그후 일제 총독부가 동네를 폐합、새로운 행정구역을 정할 때 예전보다 더 좋은 이름을 붙인다는 뜻에서 익동(益洞)에 선(善)자 하나를 더 추가해 익선동(益善洞)이라는 새 동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렇듯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동네이름이 후에 와서 전혀 의미가 다른 이름으로 바뀜에 따라 본래의 역사적 사실은 아득히 망각돼가고 있다는 것이 서운한 점이다。두 기사를 종합해 보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익선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행랑이 많아 마치 새의 날개를 펼친 것처럼 보이는 대궐같은 집(누동궁)에서 유래한 익랑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랑’이 빠지고 좀 더 좋다는 의미의 선(善)을 넣으면서 익선동으로 변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행랑이 많다는 것은 권력과 돈이 많은 누군가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100년 전 익선동에 살던 주민의 이야기로는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의 주인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다 알았다는 설명입니다. 홍판서 →영평군 →리해승(영평군의 5대 손)으로 변했는데 리해승과 관련한 검색을 해보니 “1910년 10월 16일 21세의 나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侯爵)작위를 받았고 일본의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본 정부에 협조했던 왕족의 추락을 에둘러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줄행랑을 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원래 하인들이 묵는 행랑이 길게 이어진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도망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행랑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 마치 꽁무니를 빼며 도망가는 모양과 비슷해서 생겨난 관용적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권세가 있던 양반가가 몰락하면서 줄행랑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라는 설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줄행랑이라는 표현이 100년 전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이해승의 집과 하인들의 도망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검색을 통해 줄행랑을 치다에 대한 다른 해석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조항범 교수(충북대 국문과) 교수는 줄행랑이 갖는 의미를 행랑을 죽 이어서 쌓는 것을 보통 줄행랑을 치다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치다는 벽 따위를 둘러서 세우거나 쌓는다는 의미로 담을 치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텐트를 치다는 표현도 같은 어원일 것 같습니다. 행랑을 길게 치는 것이 줄행랑을 친다는 건데 마치 꽁무니를 뺀 채 줄달음을 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이서 도망치다 = 줄행랑을 치다 로 관용적 의미가 생겨났다고 추정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익선동에 있던 행랑 사진으로 ‘줄행랑’의 의미를 유추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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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날 좀 보소

    정면 사진을 찍고 싶은데 모델이 영 비협조적이네요.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 고양이에게 닿기를.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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