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미국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 겸 ‘국무부 2인자’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74)이 6월 30일자로 사임한다고 뉴욕타임스(NYT) 등이 12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초대 국무부 부장관이자 미 최초의 여성 국무부 부장관인 그는 북한의 잇단 도발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자 한미, 한미일 외교차관 회담 등을 여러 차례 개최하며 동맹 간 대응 조율과 단합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셔먼 부장관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1993년 국무부에 입부한 지 30년이 흐른 오늘 은퇴를 발표한다. 그간 세 명의 대통령(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바이든) 밑에서 미국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특권을 누린 것에 감사하고 싶다”고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인도태평양에서의 도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에 대처하고 동맹국과 파트너를 규합한 일 등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그의 상관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또한 “미국은 그의 리더십 덕분에 더 안전해졌고 동맹과의 파트너십 또한 견고해졌다. 부서를 대표해 그의 봉사에 감사한다”고 치하했다. 한때 그의 카운터파트였던 조현동 주미 한국대사는 NYT에 “그는 미 외교에서 ‘철의 여인’ 같은 존재”라며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돕는 데 건설적인 역할을 했다”고 호평했다. 셔먼 부장관은 사임 발표 직전 조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임을 알린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지난달 말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 때도 긴밀히 협력했다. 셔먼 부장관은 1949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미 보스턴대 사회학 학사, 메릴랜드대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에 첫발을 내디뎠다. 1999∼2001년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냈고 당시 미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때 동행했다. 오바마 행정부 때는 국무차관 자격으로 이란 핵개발 중단 협상 등에 관여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당시 국무장관 후보로도 거론됐다. 이에 일각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면 그가 국무장관에 기용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지난해 1월 미국 최대 도시 뉴욕의 5개 자치구 중 가장 부유한 맨해튼의 지방검찰 수장으로 하버드대 출신의 흑인 검사 앨빈 브래그가 취임했다. 검사 500명, 연 예산 1억6900만 달러(약 2197억 원)의 공룡 조직을 이끌게 된 그는 취임하자마자 “대중교통 무임 승차, 체포 저항, 대마 소지, 성매매 같은 범죄는 또 다른 강력 범죄와 연계되어 있지 않다면 기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피의자의 재판 전 구금을 피하고, 이들의 형량 단축에 집중하고, 법정에서 성인으로 간주되는 재판을 받는 미성년자의 수를 줄이겠다고도 했다. 최근 ‘뉴욕선’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취임 후 총 1119건의 강력 범죄를 기소하지 않았다. 살인, 강간, 강도 등 응당 강력 범죄로 다룰 사안을 경범죄로 낮춰준 비율 또한 52%에 달했다. 그의 전임자 시절 이 수치는 40%를 넘긴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이런 행보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고 주장한다. 범죄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수 인종은 인종 불평등이 만연한 미국의 사회 체계 탓에 실제 죄보다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재기 기회 또한 적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맨해튼 빈민가 할렘에서 자란 그는 미성년자 시절 경찰의 이유 없는 탄압을 수차례 겪었고 무고한 지인이 경찰의 총에 숨지는 사건도 목격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인종 차별이 기득권 백인 개개인의 편협함 때문이 아니라 비백인에게 불공정한 사회 제도에 기인한다는 ‘비판적 인종 이론(CRT·Critical Race Theory)’, 소수 인종에게 가혹한 사법 체계가 인종 차별을 강화했다는 ‘비판적 법률 연구(CLS·Critical Legal Studies)’에 빠졌다. 재임 내내 인종 차별 정책 및 발언으로 비판받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은 그가 CRT와 CLS에 더 천착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성향에 민주당원인 그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한 것이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됐을 뿐 아니라 법적 근거 또한 빈약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뉴욕 토박이 기업가 출신의 전직 대통령이 집권 전 회사 장부의 허위 기재를 통해 혼외정사 무마용 돈을 준 것은 그가 공소장에 적시한 대로 문서 조작이다. 그러나 이 지급과 2016년 대선에서의 트럼프 승리 사이에 어떤 명확한 인과 관계가 있는지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 자금을 쓰지 않았다. 당시 대선에서 그의 승리 일등공신이었던 백인 노동자층 또한 불륜 스캔들이 알려졌다 해도 트럼프를 찍었을 가능성이 높은 집단이다. 애초에 ‘도덕’ ‘윤리’ 등을 기대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가 몇이나 될까. 주법인 문서 조작과 연방법인 선거법 위반을 모호하게 결합시킨 그의 주장의 법적 타당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공소가 기각된다면? 설익은 논리로 초유의 대통령 기소를 단행했다 망신만 당한 지검장으로 남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그가 취임한 후 맨해튼 지검이 기소한 범죄가 유죄 판결을 받은 비율이 뚝 떨어졌다.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2019년 53%였던 경범죄 유죄 판결률은 지난해 말 28%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강력 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률 또한 68%에서 51%로 하락했다. 기소를 안 하거나 중범죄를 경범죄로 낮춰주는 건 검사의 ‘재량’이라 치자. 기소한 범죄가 유죄 판결을 받지 못한 건 ‘실력 부족’이다. 무엇보다 그는 기소가 결정된 지난달 30일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할 판을 깔아줬다. 일각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이 무의미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보수 유권자를 상대로 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고공 행진 중이다. 이를 바탕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본선에서도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까. 원치 않아도 역사는 그를 ‘트럼프를 백악관으로 복귀시킨 일등공신’으로 기록할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조국이 없었다면 자유의 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2018년 12월 캐나다에서 미국의 대이란 제재 위반 혐의로 체포된 뒤 1029일간 억류됐던 멍완저우(孟晚舟·51) 중국 화웨이 순회회장 내정자가 2021년 9월 말 선전공항에서 밝힌 귀국 소감이다. 당시 그는 “오성홍기가 있는 곳에 신념의 등대가 있다”며 중국공산당에 무한 충성을 맹세했다. 중국 또한 이런 그를 “무역 분쟁의 순교자”라며 홍보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중국의 동영상 플랫폼 ‘틱톡’ 이전에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갈등을 상징했던 화웨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멍완저우는 다음 달 1일부터 6개월간 ‘화웨이 2인자’ 순회회장직에 오른다. 화웨이는 3명의 부회장이 6개월씩 돌아가면서 순회회장을 맡는데 이번이 그의 차례다. 그의 부친 겸 창업자인 런정페이(任正非·79) 최고경영자(CEO)는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딸의 승계가 머지않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자 발찌를 차는 등 약간의 불편을 제외하면 억류 기간 동안 멍완저우가 많은 것을 얻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93년 화웨이에 입사한 그가 창업자의 딸임이 알려진 시기는 20년이 흐른 2013년. 회사 내에서도 한때 부친의 비서였던 쑨야펑(孫亞芳) 전 부회장이 더 잘나갔다. 억류 후 상황이 달라졌다. 각국 언론은 그가 집에서도 샤넬 가방을 들고 마놀로블라닉 구두를 신었다는 등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보도하며 그를 세계적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중국은 그를 최고위 관료급으로 대우하며 줄기차게 석방을 요구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2021년 9월 초 통화에서도 그의 석방이 주요 의제였다고 중국 외교부가 직접 밝혔을 정도다. 그가 귀국한 뒤 관영 언론은 입을 모아 칭송했다. 미중 갈등에 따른 벼락을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혼자 받아낸 ‘피뢰침’ 같은 존재이며 서방에 굴복하지 않고 개선 장군처럼 귀국했다는 낯간지러운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 달 회장에 취임한 뒤에도 비슷한 보도가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 런정페이의 세 자녀 중 그가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멍완저우는 첫 부인 멍쥔(孟軍)의 소생. 런정페이는 창업 전부터 멍쥔의 부친 멍둥보(孟東波) 전 쓰촨성 부성장의 덕을 많이 봤다. 국공 내전 당시 국민당을 위해 일했던 부친을 둔 탓에 런정페이의 가족은 문화대혁명 시기 ‘반동’으로 몰려 모진 탄압을 받았다. 장인을 통해 일종의 신분 세탁을 한 뒤 인민해방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창업으로도 이어졌다. 런정페이는 이혼과 관계없이 멍둥보를 존경하며 그래서 딸에게 외조부의 성을 붙였다고 줄곧 언급했다. 군 재직 시절 런정페이가 근무했던 부대는 현재 법률전, 여론전, 심리전, 즉 삼전(三戰)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정보부대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1987년 화웨이를 창업한 뒤에도 군, 국영기업 등에 집중적으로 납품하며 중국 최대 통신장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22년 추정 매출이 926억 달러(약 120조 원)가 넘지만 아직 상하이, 선전, 홍콩 증시 등 어느 곳에도 상장하지 않았다. 런정페이 또한 일종의 ‘바지 사장’이며 실질적인 지배자는 일부 당, 군 간부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비상장 기업으로 남아 있다는 설이 제기된다. 애초에 화웨이라는 기업명 자체가 ‘중화유위(中華有爲·중화민족을 위한다)’의 줄임말이다. 미국 등 서방이 화웨이를 민간 기업의 외피를 두른 사실상 중국의 정보기관으로 보는 이유다.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5세대(5G) 이동통신 등 21세기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계속될 것이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 대만 등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 또한 언제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에 다다랐다. 원했건 아니건 한 개인을 넘어 신냉전의 상징이 된 멍완저우. 이 위험한 시기에 그가 어떤 경영 능력을 보여줄지 관심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3남 1녀를 뒀다. 1977년 권좌에 올랐을 때 장남과 차남은 이미 가정을 꾸렸고 삼남도 25세였다. 유일한 미성년 자녀는 43세에 얻은 에이미(당시 10세). 세계 최고 권력자의 고명딸이 어떤 학교를 다닐지 모두가 주시했다. 그의 선택은 ‘태더스스티븐스스쿨’이란 공립학교였다. 그는 취임 전부터 “엘리트 자녀가 대다수인 사립학교의 폐쇄성이 ‘공립학교는 열등하고 위험하다’는 인식을 강화시킨다”고 비판했다. 백악관이 위치한 수도 워싱턴은 ‘초콜릿 시티’로 불릴 만큼 흑인 인구 비율이 높다. 1970년대는 70%에 달했고 지금도 약 절반이 거주한다. 대학 진학률, 학업 성취도 지표 등도 미 평균을 밑돈다. 거의 모든 백악관 주인도 자녀를 고급 사립학교에 보냈다. AP통신에 따르면 카터는 190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75년 만에 공교육에 자녀를 맡긴 현직 대통령이었다. 이 선택은 땅콩 농장주 출신으로 ‘보통 사람’을 외치며 집권한 그가 자녀 문제에서도 ‘내로남불’을 시전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표였다. 워터게이트 도청으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미국인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겠다”던 공약을 지킨 것이다. 반대 지점에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있다. 집권 전 공교육 개혁을 외쳤지만 취임하자 두 딸을 연 학비가 약 5만 달러(약 6500만 원)인 명문 사립 ‘시드웰프렌즈’에 보냈다. ‘당신의 딸들도 공립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자 “노(No)”라고 했다. “대통령 이전에 아버지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으면 솔직하다는 말이라도 들었겠지만 “워싱턴 교육당국이 애쓰지만 부족하다”는 군색한 변명만 내놨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두 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외동딸도 이 학교를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후 첫 6개월간 부인 멜라니아 여사 없이 지냈다. 멜라니아 여사는 뉴욕의 명문 사립 ‘컬럼비아그래머스쿨’을 다니는 아들 배런을 돌본다며 백악관에 오지 않았다. 이 학교의 학비 또한 약 6만 달러(약 7800만 원). 즉 자녀 교육에 관해서는 당적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대통령이 비슷한 선택을 했다. 공교육 중시 약속을 지켰지만 카터는 집권 중 무능한 정치인의 표본으로 불렸다. 이란 혁명세력이 수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에 52명의 미국인을 444일간 억류한 ‘인질 사태’로 최강대국의 자존심이 박살났다. 오일쇼크 등에 따른 고물가와 저성장도 만연했다. 대내외가 다 말썽인데 도덕, 인권만 중시한다는 비판만 가득했다. 결국 ‘강한 미국’을 내세운 로널드 레이건에게 밀렸다. 자연인으로 돌아간 카터는 다른 전직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세계 각국을 돌며 민주주의, 인권, 기아 퇴치 등을 외쳤다. ‘다이소’와 유사한 ‘달러제너럴’에서 물건을 사고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취미인 목공 기술을 활용한 ‘해비타트’ 집짓기 봉사 또한 홍보 용도로 쓰지 않았다. 2017년 7월에는 93세 고령임에도 캐나다로 건너가 불볕더위 속에서 집을 짓다 탈수로 쓰러졌다. 가뭄으로 땅콩 농장이 파산했지만 고액 강연, 기업 이사회 활동 또한 마다했다. 대통령직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고 했다. 오바마 부부와 클린턴 부부가 강연과 저술 등으로 각각 최소 1억3500만 달러(약 1755억 원), 1억2000만 달러(약 1560억 원)를 모은 것과 대조적이다. 죽음마저 남다르게 준비하고 있다. 백수(白壽·99세)의 암환자인 그는 지난달 18일 “연명치료 중단”을 선언했다. 현직 때의 공과 논란에 관계없이 전직 대통령의 모범 사례를 보여줬다는 것만으로 그가 세계 정계에 남긴 유산은 차고 넘친다. ‘위대한 전직 대통령’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평안하기를 바란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간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대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시리아 벨라루스 등 ‘권위주의 진영’으로 양분됐다. 전쟁 당사자인 두 나라를 제외하면 어떤 나라도 지상군을 파병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직접 참전 못지않은 혈투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 미 정치매체 더힐 등이 각국이 각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편에 서서 치열한 ‘대리전(proxy war)’을 벌이고 있다고 진단한 이유다. 현재까지 양 진영의 ‘명분’과 ‘돈’ 싸움에서는 자유 진영이 앞선다는 평이 우세하다. 러시아는 침공 직후부터 민간인을 집단 학살하고 살인으로 복역 중인 재소자까지 전쟁에 투입했다. 이로 인해 곳곳에서 러시아 혐오 여론이 조성됐다. 러시아의 뒷마당 정도로 여겨졌던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인근 국가에서도 ‘탈(脫)러시아’ 바람이 거세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정상이 잇따라 포탄이 쏟아지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하고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는 것 또한 명분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 자유 세계의 지도자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이번 사태를 자국산 최신 무기의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로이터통신 기준 최소 7500억 달러(약 920조 원)로 꼽히는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참여해 실리를 챙기려는 목적도 빼놓을 수 없다.●‘명분과 돈’ vs ‘반미 연대’독일 ‘킬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11월 기준 자유 진영의 46개국은 우크라이나에 군사, 경제, 인도주의적 지원을 합해 최소 1088억 유로(약 146조8800억 원)를 지원했다. 각국 정상 또한 우크라이나를 속속 방문했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는 집권 중 3회, 올 1월에 개인 자격으로 1회 등 총 4회 찾아 지지 의사를 밝혔다. 리시 수낵 현 총리 또한 집권 3주가 채 안 된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를 찾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해 6월 같은 날 방문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4번 갔다.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는 지난해 5월 방탄조끼를 착용한 채 키이우, 민간인 학살지 부차를 누볐다. 두 달 후 마그달레나 안데르손 당시 스웨덴 총리가 키이우에 갔다.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킨 두 나라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기로 하고 우크라이나에 갔다는 점은 명분 싸움의 승자를 보여준다. 캐나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 폴란드 체코 슬로베니아 등 동유럽 3국 정상도 키이우를 찾았다. 러시아는 침공 후 북한, 이란 등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았지만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준은 아니었다는 평을 얻고 있다. 특히 침공 후 줄곧 러시아의 조력자 노릇을 해온 벨라루스조차 아직 참전은 하지 않고 있다. 지난달 캐나다 언론 ‘내셔널포스트’는 역시 소련에 속했던 조지아에서도 반러 여론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수도 트빌리시의 식당에는 “푸틴이 죽으면 보르시 수프(동유럽인이 즐기는 수프)가 무료”란 간판이 등장했다. 다만 중국 이란은 물론 베네수엘라, 중남미 최대 경제대국 브라질 등도 서방의 대러 제재를 반대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맞서려는 권위주의 진영과 제3세계의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14∼16일 중국을 찾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회담하는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행보 또한 반미 연대의 결속력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중국 북한 등 권위주의 진영에 ‘침공의 문턱’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지난달 펴낸 논문에서 “대만은 아시아의 우크라이나로 주목받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중국이 군사적으로 대만을 합병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고 평가했다. ●韓, 무기 지원 고심 깊어져침공 초 우크라이나에 방어용 무기를 제공했던 서방이 최근 전차, 미사일 등 공격용 무기 지원을 늘리자 군수품만 지원했던 한국 또한 무기 지원을 고심하고 있다. 4월 중 취임 후 최초로 미 워싱턴을 방문해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회담을 가질 것이 유력한 윤석열 대통령의 고민 또한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12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지난해 무기 지원의 예상 효과와 후폭풍 등을 검토했고, 북한과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에 지원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한국을 찾은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독일 스웨덴 등 일부 나토 회원국은 교전국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바꿨다”며 한국 또한 무기를 지원하라고 압박했다. 이를 감안할 때 윤 대통령이 미국의 요청에 의해 방미 중 무기 지원 의사를 밝힐 가능성도 있다. 다만 러시아의 거센 반발이 불가피한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간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대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시리아 벨라루스 등 ‘권위주의 진영’으로 양분됐다. 전쟁 당사자인 두 나라를 제외하면 어떤 나라도 지상군을 파병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직접 참전 못지않은 혈투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 미 정치매체 더힐 등이 각국이 각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편에 서서 치열한 ‘대리전(proxy war)’을 벌이고 있다고 진단한 이유다. 현재까지 양 진영의 ‘명분’과 ‘돈’ 싸움에서는 자유 진영이 앞선다는 평이 우세하다. 러시아는 침공 직후부터 민간인을 집단 학살하고 살인으로 복역 중인 재소자까지 전쟁에 투입했다. 이로 인해 곳곳에서 러시아 혐오 여론이 조성됐다. 러시아의 뒷마당 정도로 여겨졌던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인근 국가에서도 ‘탈(脫)러시아’ 바람이 거세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정상이 잇따라 포탄이 쏟아지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하고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는 것 또한 명분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 자유 세계의 지도자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이번 사태를 자국산 최신 무기의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로이터통신 기준 최소 7500억 달러(약 920조 원)로 꼽히는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참여해 실리를 챙기려는 목적도 빼놓을 수 없다.● ‘명분과 돈’ VS ‘반미 연대’독일 ‘킬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11월 기준 자유 진영의 46개국은 우크라이나에 군사, 경제, 인도주의적 지원을 합해 최소 1088억 유로(약 146조 8800억 원)를 지원했다. 각국 정상 또한 우크라이나를 속속 방문했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는 집권 중 3회, 올 1월에는 개인 자격으로 총 4회 찾아 지지 의사를 밝혔다. 리시 수낵 현 총리 또한 집권 3주가 채 안 된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를 찾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해 6월 같은 날 방문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4번 왔다.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는 지난해 5월 방탄조끼를 착용한 채 키이우, 민간인 학살지 부차를 누볐다. 두 달 후 마그달레나 안데르손 당시 스웨덴 총리가 키이우에 왔다.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킨 두 나라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기로 하고 우크라이나에 왔다는 점은 명분 싸움의 승자를 보여준다. 캐나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 폴란드 체코 슬로베니아 등 동유럽 3국 정상도 키이우를 찾았다. 러시아는 침공 후 북한, 이란 등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았지만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준은 아니었다는 평을 얻고 있다. 특히 침공 후 줄곧 러시아의 조력자 노릇을 해온 벨라루스조차 아직 참전은 않고 있다. 지난달 캐나다 언론 ‘내셔널포스트’는 역시 소련에 속했던 조지아에서도 반러 여론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수도 트빌리시의 식당에는 “푸틴이 죽으면 보르시 수프(동유럽인이 즐기는 수프)가 무료”란 간판이 등장했다. 다만 중국 이란은 물론 베네수엘라, 중남미 최대 경제대국 브라질 등도 서방의 대러 제재를 반대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맞서려는 권위주의 진영과 제3세계의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14~16일 중국을 찾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회담하는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행보 또한 반미 연대의 결속력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중국 북한 등 권위주의 진영에 ‘침공의 문턱’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지난달 펴낸 논문에서 “대만은 아시아의 우크라이나로 주목받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중국이 군사적으로 대만을 합병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고 평가했다. ● 韓, 무기 지원 고심 깊어져침공 초 우크라이나에 방어용 무기를 제공했던 서방이 최근 전차, 미사일 등 공격용 무기 지원을 늘리자 군수품만 지원했던 한국 또한 무기 지원을 고심하고 있다. 4월 중 취임 후 최초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회담을 갖는 윤석열 대통령의 고민 또한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12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지난해 무기 지원의 예상 효과와 후폭풍 등을 검토했고, 북한과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에 지원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한국을 찾은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독일 스웨덴 등 일부 나토 회원국은 교전국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바꿨다”며 한국 또한 무기를 지원하라고 압박했다. 이를 감안할 때 윤 대통령이 미국의 요청에 의해 방미 중 무기 지원 의사를 밝힐 가능성도 있다. 다만 러시아의 거센 반발이 불가피한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하정민기자 dew@donga.com이채완기자 chaewani@donga.com윤다빈기자 empty@donga.com}
미국 시가총액 1위 기업 애플을 비롯해 구글, 아마존 등 주요 정보기술(IT) 업체가 동시에 실망스러운 지난해 4분기(10~12월) 실적을 발표했다. 특히 애플의 매출과 순이익은 모두 2021년 4분기에 비해 큰 폭 감소했다. 최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 등이 대규모 감원 계획을 밝힌 가운데 IT 업계의 실적 악화가 추가 감원으로 이어져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애플은 2일(현지 시간) 지난해 4분기 매출이 1171억5000만 달러로 2021년 4분기보다 5.5% 줄었다고 공개했다. 같은 기간 순이익 또한 13.3% 감소한 299억9800만 달러에 그쳤다. 애플의 분기별 매출이 감소한 것은 2019년 1분기(1~3월) 이후 15개 분기만에 처음이다. 주력 상품인 아이폰, 맥 컴퓨터를 생산하는 중국 내 주요 공장이 당국의 엄격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규제로 생산 차질을 빚었다. 고금리, 강달러 등도 겹쳤다.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고용을 줄이고 있고 신규 고용 또한 신중하다”고 밝혔다.같은 날 구글 모회사 알파벳 역시 지난해 4분기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33.9% 감소한 136억2000만 달러에 그쳤다고 공개했다. 매출 역시 760억5000만 달러로 월가 전망을 하회했다. 유튜브 광고 감소,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과의 경쟁 등이 실적 부진으로 이어졌다. 아마존의 지난해 4분기 순이익 또한 한 해 전보다 19.2% 줄었다. 올 1분기 매출 예상치 또한 월가 예상보다 낮게 제시했다. 미 인사컨설팅업체 ‘챌린저그레이&크리스마스’(CG&C)는 올 1월에만 미 기업이 10만2943명을 해고했으며 이중 40.6%(4만1829명)가 IT 업계에서 일자리를 잃었다고 분석했다. 월간 감원 규모로는 2020년 9월 이후 가장 많다. 1월 감원 규모로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1월 이후 14년 최고치다.지난달 구글이 전세계 직원의 약 6%(1만2000명)를 줄이겠다고 발표하자 알파벳 노조는 1일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의 알파벳 사옥, 2일에는 뉴욕 사무실 앞에서 각각 시위를 벌였다. 워싱턴포스트(WP)는 “IT 업계의 황금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진단했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2012년 리비아 벵가지에서 무장 세력이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를 살해했다. 미 여론이 들끓었다. 곧 주무 장관인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을 포함한 관련자의 의회 조사가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클린턴 전 장관이 관용 이메일이 아닌 보안에 취약한 사설 메일을 사용했음이 드러났다. 그는 “편의를 위한 개인 메일 사용은 관행이었고 보안 위험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장관 재직 4년간 최소 6만 건의 개인 메일을 주고받았음이 밝혀졌다. 전체 메일의 제출을 요구받자 “사생활이라 안보와 무관하다”며 그중 3만 건을 자의로 삭제했다. 사설 서버도 한 대라고 했다. 모두 거짓이었다. 연방수사국(FBI)의 추가 조사 결과, 삭제 메일에 기밀 자료가 대거 포함됐고 서버도 여러 대였다. 2016년 7월 FBI와 법무부는 “부주의했지만 고의는 없었다”며 불기소했다. 법적 제재는 피했지만 ‘거짓말쟁이’ 이미지가 굳어졌다. “백악관 주인이던 남편이 ‘위증’으로 탄핵 직전까지 간 걸 보고도 거짓말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을 어찌 대통령으로 뽑느냐”는 여론이 형성됐다. ‘이메일 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은 그가 넉 달 후 대선에서 패한 주요 이유로 꼽힌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상황도 비슷하다. 부통령 시절 소홀히 취급한 기밀 자료가 당시 개인 사무실과 사저에서 속속 발견됐는데도 석연치 않은 해명으로 비판받고 있다. 최초 유출을 지난해 11월 초 인지했음에도 이달 9일에야 공개했고, 이후 21일까지 채 2주가 안 되는 기간에만 총 네 차례의 유출이 발견됐으며, 상원의원 시절에도 유출이 있었다는 점 등이 특히 그렇다. 야당 공화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퇴임 당시 사저로 기밀문서를 불법 반출했을 때 매섭게 비판한 바이든 대통령의 적반하장이라며 공세를 편다. 유출 문건 중 바이든 대통령이 미 정보당국으로부터 보고받은 우크라이나 관련 내용이 있다는 점도 문제다.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에너지 업계와도 무관한 그의 변호사 아들 헌터는 우크라이나에 친미 정권이 들어선 2014년 현지 가스사 ‘부리스마’의 이사로 뽑혔다. 이후 5년간 월 5만 달러(약 6000만 원)도 받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2016년 우크라이나에 압력을 행사해 부리스마에 대한 비리 수사를 중단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후 바이든 대통령이 헌터의 사적 이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바이든 부자(父子)의 수사를 압박했다. 이를 정적의 2020년 대선 출마를 저지하는 용도로 쓰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민주당은 2019년 트럼프 당시 대통령을 외세 결탁 혐의로 하원에서 탄핵 소추했다. 상원 부결로 최종 탄핵은 불발됐지만 트럼프 지지층은 아직도 바이든 부자가 우크라이나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고 본다. 바이든 대통령은 부리스마를 감싼 건 아들 때문이 아니라 당시 친미 정권을 위한 정책적 판단이라고 맞선다. 양측 대치가 여전한 상황에서 만일 바이든 대통령 측이 헌터에 관한 부정적 내용을 감추려고 기밀문서를 부적절하게 취급했음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을 넘어 국제사회에도 큰 후폭풍이 예상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이를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관련 없음이 밝혀진다 해도 확정될 때까지의 정쟁과 혼란이 불가피하다. 어느 쪽이든 다음 달 7일 국정 연설을 전후로 재선 도전을 공식화하려는 바이든 대통령에겐 악재다. 많이 망가졌다지만 청교도 윤리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는 정치인이 아닌 미성년자의 거짓말에도 엄격하다. 10대 학생의 표절과 베끼기 등도 중범죄로 취급한다. 즉, 현직 대통령의 정직과 도덕성이 위협받는 상황은 그 자체가 국가 위기로 여겨진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49년 전 ‘워터게이트’ 도청 때의 위증과 사법 방해로 하야했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애플과 테슬라를 주축으로 한 미국 ‘빅테크’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 경기 둔화의 직격탄을 맞은 탓이다. 지난해 테슬라와 빅테크 5대 기업(FAANG·메타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의 시가총액은 총 4조 달러(약 5087조 원) 증발했고 새해에도 이 기조가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높다. 미국 뉴욕 증시의 새해 첫 거래일인 3일(현지 시간) 세계 시총 1위 기업인 애플 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3.7% 떨어졌다. 종가 기준 2021년 말 한때 3조 달러에 육박했던 시총 또한 2조 달러(약 2547조 원) 아래로 내려앉았다. 애플은 세계 주식시장이 급락한 지난해에도 시총 2조 달러 선을 지킨 유일한 기업이었지만 침체 우려를 피하지 못했다. 이날 테슬라 역시 12.2% 급락했다. 테슬라 시총은 2021년 11월 1조2300억 달러에 달했지만 3414억 달러로 줄었다. 이날 뉴욕 증시의 3대 지수 또한 모두 내려 우울한 새해를 예고했다. 애플과 테슬라는 모두 중국에 대한 생산 및 판매 의존도가 높다. 중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각국 금리 인상이 촉발한 수요 둔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일본 닛케이아시아는 애플이 수요 둔화를 이유로 지난해 12월부터 각 부품업체에 에어팟, 애플워치, 맥북 노트북 등의 부품 생산량을 줄이라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테슬라는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의 트위터 인수 등에 따른 리더십 위기 또한 겪고 있다. 주가는 지난해 전체로는 65%, 지난해 12월에는 44% 떨어져 ‘테슬라 쇼크’란 말이 나왔다. 지난해 차량 인도 대수가 131만 대로 전년 대비 40% 늘었지만 시장 전망치(50%)보다 낮아 전기차 시장의 비관론에 불을 질렀다. JP모건 등은 테슬라의 목표 주가를 낮췄다. 세계 경기 침체의 전운이 드리운 가운데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침체가 온다면 ‘부자(Rich)’와 ‘경기 침체(Recession)’의 합성어인 ‘리치세션(Richcession)’이 될 것”으로 진단했다. 대규모 감원이 빅테크, 투자은행 등 고소득 직종을 중심으로 확산됐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경기둔화에 애플-테슬라 휘청… 삼성-LG 등 납품기업 긴장 새해 시작부터 빅테크 주가 급락아이폰 1분기 출하 22% 감소 전망… 테슬라, 작년 생산량 목표치 미달‘빅2’ 생산거점 中, 코로나 리스크… 美-中제조업 지수 하락세 이어가 ‘주식회사 미국’을 대표하는 정보기술(IT) 기업인 애플과 테슬라 주가가 새해 첫날부터 큰 폭 하락해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미국과 중국, 주요 2개국(G2)의 경기 전망이 좋지 않고 중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에 생산 거점을 보유한 두 기업의 생산 및 판매 부진이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가 고조됐다. 애플과 테슬라에 부품을 제공하는 LG이노텍과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등 국내 전기차 배터리 업계에도 악영향이 예상된다.○ 애플 시총, 약 2년 만에 2조 弗 하회미국 주식시장의 새해 첫 거래일인 3일(현지 시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애플 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3.74% 낮은 125.07달러로 마쳤다. 시총 2조 달러(약 2547조 원) 선도 무너져 약 1조9900억 달러를 기록했다. 애플 시총이 2조 달러 밑으로 떨어진 것은 2021년 3월 이후 약 2년 만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애플 주가는 2020년 8월 시총 2조 달러를 돌파했고 지난해 1월 장중 한때 3조 달러도 넘었다. 이후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거듭된 금리인상,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중국 내 생산 차질 여파 등으로 계속 하향세다. 한때 180달러를 넘었던 주가 또한 120달러대로 내려왔다. 미 시장정보업체 ‘트렌드포스’는 올 1분기(1∼3월) 애플의 아이폰 출하량이 전년비 22%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애플 또한 최근 부품업체에 생산량을 줄이라고 통보했다. 테슬라 주가 또한 12.2% 급락한 108.10달러로 마쳤다. 장중 한때 14%까지 떨어진 후 막판 낙폭을 조금 줄였다. 이날 테슬라는 지난해 전체 판매 대수가 2021년보다 40% 증가한 131만 대라고 밝혔다. 연 50% 성장을 자신했던 회사 목표치에 미달했다. 이후 JP모건, 웨드부시증권 등 월가 투자은행이 목표 주가와 향후 이익 전망치를 속속 낮췄다. 두 빅테크 공룡의 주가 급락에 국내 관련업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4일 한국 증시의 삼성SDI 주가는 전일 대비 0.33% 하락했다. 삼성SDI는 테슬라에 차세대 원형 배터리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은 기업으로 꼽힌다. 이미 테슬라에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의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다. 애플에 3차원(3D) 센싱 모듈, 카메라 모듈 등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LG이노텍 또한 애플의 실적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LG이노텍의 전체 매출에서 애플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6년 36.9%에서 지난해 3분기(7∼9월) 74.8%로 급증했다. ○ 美-中 제조업 경기도 위축미국과 중국의 경기지표가 향후 더 나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이 3일 발표한 미 12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기준점(50)보다 낮은 46.2를 기록해 경기 위축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2020년 5월 이후 2년 7개월 만의 최저치이며 지난해 11월(47.7)보다 낮았다. 시언 존스 S&P 글로벌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수요 둔화와 경제 불확실성이 올해 미 제조업계의 도전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財新)이 같은 날 발표한 중국의 12월 제조업 PMI 또한 49.0으로 지난해 11월(49.4)보다 하락했다. 중국의 제조업 PMI는 지난해 8월부터 5개월 연속 기준점인 50을 밑돌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 급증 등으로 중국 제조업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최근 한국 미국 일본 등 세계 주요국이 속속 중국발 여행객에 대한 입국 규제를 강화하면서 중국의 내수 경기는 물론이고 여행, 외식 등 세계 서비스업계의 빠른 회복 또한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중국 경제전문 연구소 ‘차이나베이지북인터내셔널(CBBI)’은 지난해 4분기 중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중국 주요 기업의 실적 또한 지난해 3분기보다 나빠졌다고 2일 진단했다.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하정민 기자 dew@donga.com곽도영 기자 now@donga.com}
2007년 9월 이라크 바그다드 니수르 광장. 미국 민간 군사기업(PMC·Private Military Company) ‘블랙워터’ 직원들이 총기를 난사해 민간인 17명이 숨졌다. 비판이 들끓자 주범들은 미 법정에 섰고 회사는 수차례 이름을 바꿨다. 이때만 해도 PMC 업계의 주 업무는 전투 가담이 아닌 경호, 경비 수준이었다. 15년이 흐른 지금 PMC와 정규군의 구분은 모호해졌다. 독일 정보당국이 우크라이나 부차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고 명시한 러시아 PMC ‘바그너그룹’이 대표적이다. 북한이 우크라이나전에 쓰일 로켓과 미사일 등을 이들에게 인도했으며 우크라이나에 5만 명의 바그너그룹 용병이 있다는 미 백악관의 22일 발표는 이 회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사병(私兵) 수준을 넘어 러시아군의 중추가 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21일 미 외교매체 포린폴리시(FP) 또한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창업자가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그너그룹이 S-300 미사일, 수호이(Su)-25 전투기 같은 최신 무기에 러시아군보다 더 쉽게 접근한다고도 전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서 고전을 거듭하는 정규군 대신 바그너그룹에 더 의존한다는 백악관 발표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피’로 ‘돈’을 버는 PMC가 활개를 칠수록 세계는 더 위험하고 무자비한 곳이 된다. PMC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한다. 바그너그룹 용병의 대부분은 재소자 출신이다. 살인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및 C형 간염 환자도 받는다. 모두 모집이 쉽고 몸값도 싸다. 니수르 광장의 민간인 학살은 고작 차가 밀린다는 이유로 자행됐다. 교전 수칙과 인명 중시, 군법 회의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PMC를 부리는 각국 정부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들이 전쟁 범죄를 저질러도 “일개 PMC의 독단 행동”이라며 꼬리 자르기에 급급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퇴임을 한 달 앞둔 2020년 12월 종신형 등을 선고받은 블랙워터 용병 4명을 사면했다. 러시아 역시 정부와 바그너그룹의 연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2014년 바그너그룹 창설 후 자신이 창립자란 사실조차 부인하던 프리고진은 올 9월에야 이를 시인했다. 바그너그룹에 대한 탐사 보도를 했던 러시아 언론인 막심 보로딘은 의문의 추락으로 숨졌다. 세계 곳곳의 분쟁과 권위주의 통치는 PMC가 몸집을 키울 토양을 제공한다. 블랙워터 창업자 에릭 프린스는 민간인 학살에 따른 비판 여론으로 블랙워터를 떠났다. 이후 홍콩에 프런티어서비스그룹이란 회사를 세우고 2019년 중국과 신장위구르에 군사훈련 기지를 세우는 계약을 맺었다. 신장위구르 내 소수민족 탄압에 쓰일 가능성이 높다. 이 회사는 미얀마 군부와도 협력한다. 정규군이 부실하고 내전이 잦은 아프리카 저개발국 또한 PMC에 의존한다. 바그너그룹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말리, 수단 등에서 군경을 대신해 치안을 유지한다. 주요국의 군비 경쟁도 빼놓을 수 없다. 2023 회계연도에 8580억 달러(약 1115조 원)의 국방예산을 확정한 미국은 곧 ‘1조 달러 국방예산 시대’를 맞는다. 중국 또한 미국에 뒤지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숨죽였던 일본과 독일도 군사대국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국내외 비판 여론을 쉽게 무마할 수 있고 의회의 견제도 없는 PMC의 활용은 정규군을 늘리는 것보다 빠르고 간편한 길이다. 각국 정부와 권위주의 지도자가 PMC를 곁에 둘수록 분쟁이 더 늘고 후폭풍도 커지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살인 기계나 다름없는 이들의 폭주를 제어할 길이 현실적으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의 ‘외주화’와 ‘민영화’가 가속화할수록 부차와 니수르 광장의 참극 또한 되풀이될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77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을 통치한 5명의 대통령 중 4명은 모두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 가장 중요한 경력이 주지사였다. 지미 카터(조지아), 로널드 레이건(캘리포니아), 빌 클린턴(아칸소), 조지 W 부시(텍사스)가 다 그랬다. 이 기간 중 주지사 출신 최고 권력자가 아니었던 이는 하원의원, 유엔 주재 미국대사 등을 지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유일했다. 이후 등장한 3명의 대통령은 달랐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의원 경력을 앞세워 백악관 주인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정치 경험이 전무했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 미 정계에 주지사 출신 잠룡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달 중간선거에서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고 현재 야당 공화당의 대선 후보군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대표적이다. 역시 3선에 성공한 그레그 애벗(텍사스·공화), 모두 재선한 개빈 뉴섬(캘리포니아·민주), 그레천 휘트머(미시간·민주), 제이 프리츠커(일리노이·민주) 주지사 등도 지천타천으로 하마평에 오르내린다. 취임도 안 한 유대계 조시 샤피로 주지사 당선인(펜실베이니아·민주)도 거론된다. 워싱턴포스트(WP), 폴리티코 등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치열하게 맞붙은 격전지 펜실베이니아에서 14%포인트 차로 낙승한 그가 최초의 유대계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주지사들이 각광받는 이유로 당파성이 짙은 워싱턴 중앙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는 신선한 이미지, 현직 대통령과 맞서는 강단 있는 모습 등이 꼽힌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를 맞아 각 주의 방역 정책과 이에 따른 찬반 논란에 이목이 쏠린 덕을 봤다는 평이 많다. 지난해 1월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는 강력한 거리 두기, 마스크 의무화, 백신 접종 정책을 폈다. 드샌티스 주지사는 “효과가 의문이고 개인의 자유 또한 중요하다”며 ‘맞짱’을 떴다. 일각에서 그의 이름과 ‘죽음(death)’을 합쳐 ‘데스샌티스’라 비판해도 주법으로 규제를 속속 해제했다. 보수 텃밭 텍사스를 이끄는 애벗 주지사 또한 비슷한 행보로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다. 반대 지점에 휘트머 주지사가 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강력한 셧다운 정책 및 백신 의무화를 주도했다. 불만을 가진 일부 극우세력이 그를 납치하려다 체포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 또한 지지층에게 “휘트머를 감옥에 가두라”고 선동했다. 이를 통해 지명도를 얻었고 이번 중간선거에서도 공화당 후보를 쉽게 눌렀다. 이들의 개인사도 흥미롭다. 호텔체인 하이엇 가문의 상속자인 프리츠커 주지사는 포브스 추정 36억 달러(약 4조6800억 원)를 보유한 억만장자다. 이번 선거와 4년 전에 쓴 돈의 대부분은 사재다. 재선 직후 자신을 ‘전사(戰士)’로 지칭했고 “트럼프 및 공화당과 싸우겠다”며 사실상 출마 선언을 했다. 누나 페니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상무장관을 지냈다. 뉴섬 주지사의 첫 부인은 유명 방송인 킴벌리 길포일이다. 언론은 매력적인 외모의 둘을 ‘새로운 케네디 부부’라고 했지만 5년도 못 가 헤어졌다. 길포일은 전남편과 정반대 정치 성향을 지닌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와 연인이 됐고 2020년 약혼했다. 무엇보다 전대미문의 전염병 시대를 맞아 대규모 조직 관리, 예산 집행, 이해관계 조율 등을 해본 이들의 경험이 백악관 주인이 되기 위한 최고의 사전 학습으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캘리포니아(3900만 명), 텍사스(2900만 명), 플로리다(2150만 명), 펜실베이니아와 일리노이(각 1300만 명), 미시간(1000만 명) 등 이들이 속한 주의 인구와 경제력 또한 어지간한 국가와 맞먹는다. 60대인 애벗 주지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주지사 모두 4050의 ‘젊은 피’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과연 몇 명이 당내 경선과 본선 경쟁에서 살아남을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의 행보만 지켜봐도 차기 미 대선의 향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지난달 25일 인도계 겸 힌두교도 리시 수낵이 최초의 비백인계 영국 총리에 공식 취임했다. 같은 날 바다 건너 미국 워싱턴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어머니가 인도계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인도 명절 ‘다왈리’를 축하하는 의식을 갖고 “수낵을 환영한다”고 했다. 미 백악관과 행정부 요직에도 인도계가 여럿이다. ‘바이든의 입’으로 꼽히는 비나이 레디 백악관 연설담당 국장, 경제 및 의료 개혁을 주도하는 니라 탠던 백악관 선임 고문, ‘코로나 차르’로 불리는 아시시 자 백악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조정관, 공중보건 정책을 총괄하는 비벡 머시 공중보건서비스단 단장 등이다. 수낵 내각과 영국 집권 보수당에도 인도계 인재가 많다. 수엘라 브래버먼 내무장관, 그의 전임자 프리티 파텔 전 내무장관, 알로크 샤르마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의장 겸 전 에너지산업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영미권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2015년부터 집권 중인 안토니우 코스타 포르투갈 총리는 부친이 인도계다. 넷플릭스 드라마로 친숙해진 중남미 수리남, 그 옆 나라 가이아나 역시 모두 인도계 찬 산토키 대통령, 모하메드 이르판 알리 대통령이 각각 이끌고 있다. 8일 치러진 미 중간선거에서도 인도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주목받았다. 4일 워싱턴포스트(WP)는 바이든 행정부가 이번 선거에서 인도계 공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집권 민주당과 야당 공화당 후보 중 누가 이겨도 0.5%포인트 미만의 격차로 당락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은 펜실베이니아, 조지아, 미시간 등 경합 주에서 민주당 지지 성향이 높은 인도계의 표심이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고 바이든 행정부의 인종다양성 성과 등을 널리 홍보하고 있다고 했다. 하원의원에 도전하는 5명의 인도계 정치인 또한 많은 관심을 모은다. 특히 친한파 의원 모임 ‘코리아스터디그룹(CSGK)’의 공동 의장으로 6선을 노리는 아미 베라 하원의원(캘리포니아)은 이미 민주당의 핵심 중진으로 꼽힌다. 이 외에 니키 헤일리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 미 최초의 인도계 주지사 보비 진덜 전 루이지애나 주지사 등 공화당의 인도계 잠룡 또한 언제든 당 대선 후보에 도전할 수 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인도계의 이런 행보는 악착같은 교육열로 경제적 성공을 거둔 후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정계에도 입김을 행사하는 유대계의 판박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지난해 인도계 미국인 가정의 평균 소득은 11만9858달러(약 1억6780만 원)로 미 인종집단 중 가장 많았다. 각각 백인(6만7937달러)과 흑인(4만1511달러)의 약 2배, 3배에 이른다.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도 25세 이상 인도계 미국인의 각각 72%, 40%가 학·석사 이상 학위를 지녔다. 모두 미국인 평균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IBM, 스타벅스 등 ‘주식회사 미국’을 대표하는 공룡 기업의 수장도 모두 인도계다. 1990년대만 해도 미 대기업에서 인도계 경영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30여 년 만에 실리콘밸리를 접수했고 워싱턴 정계까지 좌지우지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인도계 미국인은 미국인 3억3000만 명의 1%가 조금 넘는 약 400만 명에 불과하다. 사실상의 공용어인 영어, 다인종 다언어 다종교 사회에서 자란 경험에 기인한 갈등 조정 능력과 치열한 경쟁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국제사회에서 점점 입지가 강화되고 있는 14억 인구의 모국 등에 힘입어 단순 인구로 환산할 수 없는 힘을 뿜어내고 있다. 과거 미 시사매체 타임은 “인도의 최고 수출품이 인도계 경영자”라고 했지만 ‘경영자’가 ‘정치인’으로 바뀔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은 “하늘의 절반은 여성이 떠받친다”고 했다. 헌법에도 성평등을 명문화했다. 그러나 73년이 흐른 지금 정치권력의 두꺼운 유리천장을 보노라면 현재의 중국이 당시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의문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과 차기 지도부가 확정되는 제20차 중국공산당 당대회가 16일 개막하지만 차기 지도부 물망에 오를 만한 여성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건국 후 지금껏 국가주석과 총리를 포함한 최고지도부 7인을 뜻하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 여성은 없다. 상무위원은 ‘형불상상위(刑不上常委)’, 즉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지만 어떤 여성도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상무위원 7인과 차기 상무위원이 될 수 있는 18명의 후보군을 합한 25명의 공산당 정치국 위원이 된 여성도 이제껏 6명에 불과하다. 마오 시절에는 그의 네 번째 부인으로 막강한 베갯머리 권력을 휘두른 장칭(江靑), 마오 시절의 2인자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 마오의 측근이었으나 정적이 된 린뱌오 전 국방부장의 아내 예췬(葉群)이 정치국원이 됐다. 셋 다 혁명에 가담했으나 남편 후광 없이 오롯이 본인 능력만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보긴 어렵다. 이후 오랫동안 여성 수뇌부가 없다가 2002년 우이(吳儀) 당시 대외무역담당 부총리가 등장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에 역할을 담당했고 미국과의 각종 협상에서 대쪽같은 태도를 유지해 ‘철의 여인’으로도 불린 그는 자력으로 정치국원에 오른 최초의 여성으로 꼽힌다. 2007년에는 칭화대 출신의 전형적 기술관료 류옌둥(劉延東) 전 부총리, 2012년 시계공장 여공 출신의 입지전적 인물 쑨춘란(孫春蘭) 부총리가 25인에 포함됐다. 현재 72세로 방역 정책 등을 관장하는 쑨 부총리는 지도부의 암묵적 정년인 68세 제한에 따라 이번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에서 물러날 것이 확실시된다. 그의 후임자가 여성이 될지 알 수 없고 후보군이 많지도 않다. 소수민족 바이(白)족이며 31개 성(省) 당서기 중 유일한 여성인 천이친(諶貽琴) 구이저우성 서기 등의 발탁 가능성이 거론되나 설사 다른 여성이 쑨 부총리를 대신해도 정치국 25명 중 1명, 즉 4%라는 지도부의 낮은 여성 비율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번 당대회에서 25명 중 여성이 전무한 정치국이 출범할 수 있으며 유리천장 논란 또한 불거질 것으로 예상했다. 시 주석의 거센 반대파 탄압과 여론 통제, 깊어지는 경기 둔화의 그림자, 격화하는 미중 및 양안 갈등 등 중차대한 현안과 비교하면 지도부의 성비 불균형이 다소 한가로운 의제로 보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중국을 좌지우지하는 공산당 수뇌부의 극심한 남성 편중은 각계의 유리천장 강화로 이어져 사회 전반의 활력과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리청(李成)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이사는 1950년대 초 11.9%였던 여성 공산당원의 비중이 지난해 28.8%로 대폭 늘었고 여성이 중국 인구와 노동력의 각각 48.7%, 44.5%를 차지하는데도 모든 부문에서 여성이 심각하게 과소대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만에서는 최초의 여성 총통 차이잉원(蔡英文)이 2016년부터 집권 중이고, 영국 이탈리아 유럽연합(EU) 등이 모두 여성 최고권력자를 뒀거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미국의 권력서열 2, 3위인 부통령과 하원의장이 모두 여성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9세기 영국 정치인 겸 역사가 존 액턴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는 말을 남겼다. 종신집권을 꿈꾸는 시 주석은 물론이고 남성 일색인 중국공산당에도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까지 문맹이었고 금속 공장에서 일하던 열아홉엔 사고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스물여섯엔 임신 8개월인 첫 번째 부인이 간염에 걸려 태아와 같이 숨졌다. 비참한 현실을 타개하겠다며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 달변을 앞세워 수십만 명의 노조원을 거느린 금속노조 위원장에 뽑혔고 의원 배지도 달았다. 2003년 건국 후 최초의 좌파 대통령에 올랐고 4년 후 연임에 성공했다. 철광석 등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호황이 이어지자 빈민층에게 현금을 주는 화끈한 복지 정책을 폈다. 2010년 퇴임 때 지지율이 80%를 넘었지만 자연인이 되자 집권 시절 비리 의혹이 속속 터졌다. 직접 고른 후임자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은 국가 재무제표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탄핵됐다. 보호막이 사라지자 뇌물수수 등으로 네 차례 기소됐고 580여 일간 옥에 갇혔다. 지난해 3월 대법원은 수사가 적법하지 않았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곧바로 대선 재출마를 선언했다. 다음 달 2일 대선 1차 투표를 앞둔 현재 십여 명의 후보 중 지지율 1위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의 삶이다. 드라마로 쓴다면 작위적이고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을 정도다. 12년 전 물러난 77세 노(老)정객이 중남미 최대 경제대국을 다시 뒤흔들 줄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그와 ‘브라질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 중 누가 1차 투표 혹은 다음 달 30일 결선 투표에서 승리할지 아직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승자가 누구건 국민 통합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브라질 사회가 극심하게 분열됐다는 사실이다. 두 진영 간 반목은 우려할 만하다. 올 7월에 이어 이달 9일에도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지지자가 다툼 끝에 룰라 전 대통령의 지지자를 살해했다. 지지율에서 밀리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전자투표 체계의 허점을 운운하며 불복 가능성을 심심찮게 내비친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층이 2020년 미 대선 결과에 불복해 지난해 1월 미 의회에 난입한 수준의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거론한다. 보우소나루 측은 대법원이 수사 과정의 적법성을 문제 삼았을 뿐 룰라 전 대통령의 부패 혐의 자체가 벗겨진 건 아니며 그가 집권 중 국영 석유사 페트로브라스의 비자금으로 브라질은 물론이고 중남미 전역의 정치인을 돈으로 매수했다고 비판한다. 룰라의 재집권은 고질적 부정부패의 반복을 의미할 뿐이란 주장이다. 룰라 진영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3800만 명의 누적 감염자와 68만 명의 누적 사망자를 낳은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보우소나루 정권의 인종차별, 성소수자 및 외국인 혐오, 총기 소유 지지 등이 브라질을 더 위험하고 낙후된 곳으로 만들었다고 맞선다. 양측 갈등은 종교 및 문화 전쟁의 양상도 띠고 있다. 브라질은 한때 2억1500만 명 인구의 65%가 가톨릭인 세계 최대 가톨릭국가였지만 최근 오순절파 등 복음주의 개신교 종파가 급속히 세를 키우고 있다. 국가와 기존 가톨릭교회의 손이 미치지 못했던 빈민가에서 음식, 의료, 교육 등을 제공한 영향이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코로나19 이후 100만 명 이상의 브라질인이 개신교로 개종했으며 올 7월 기준 브라질의 가톨릭 인구가 인구의 절반 이하로 감소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개신교도가 주류인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지지층은 가톨릭 지지가 두터운 룰라 전 대통령이 과거 아프리카 전통 종교의식에 참여한 영상을 공유하며 그를 ‘미신 숭배자’라고 공격한다. 대립이 격화할수록 먹고사는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세계 5위인 851만km²의 광대한 국토를 보유했고 철광석 목재 옥수수 콩 등 천연자원도 넘쳐나지만 국민의 13.1%는 아직도 하루 5.5달러 미만의 수입에 의존하는 절대빈곤 상태다. 소득 불평등의 척도인 지니계수 또한 0.534로 언제든 폭동이 발생할 수 있다는 0.5를 넘어섰다. 천연자원을 닥치는 대로 사들여주던 중국의 고도성장이 멈췄는데도 “재집권하면 첫 집권 때의 복지 정책을 강화하겠다”는 룰라 전 대통령, 본인이 대통령인데 “투표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보우소나루 대통령 모두 이 난국을 타개할 만한 지도력을 갖춘 것 같진 않아 안타깝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다음 달 5일 탄생할 새 영국 총리를 뽑는 집권 보수당의 대표 경선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장수 총리인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열풍이 불고 있다. 최후의 2인으로 남은 리즈 트러스 외교장관과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은 물론이고 탈락한 페니 모돈트 국제통상부 부장관, 나딤 자하위 재무장관 등도 모두 자신이 대처의 후계자라며 정책, 노선, 옷차림, 말투 등을 모방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대처의 유령이 돌아다닌다”고 평했을 정도다. 트러스 장관과 수낵 전 장관은 대놓고 아바타를 자처한다. 대처(1979∼1990년 집권), 테리사 메이(2016∼2019년 집권)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총리를 꿈꾸는 트러스는 감세, 작은 정부, 반중·반러 외교 등 대내외 정책뿐만 아니라 복장까지 따라 한다. 그는 최근 공식석상이나 TV토론 등에서 짙은 색 정장 재킷에 큰 리본이 달린 흰색 블라우스를 유니폼처럼 입고 있다. 대처의 집권을 가능케 한 1979년 4월 총선 당시 대처가 선거 방송에 입고 나왔던 옷과 똑같다. 현재 지지율 선두인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올 2월 중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러시아를 찾았다. 이때 대처가 1987년 옛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모피 코트와 털모자를 착용했다. 그가 지난해 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에스토니아를 찾아 탱크에 오른 모습도 냉전이 한창이던 1986년 당시 대처가 서독을 방문해 탱크를 탔던 것과 유사하고, 농가를 찾아 갈색 점박이 어린 소와 포즈를 취하며 서민 이미지를 강조한 모습도 판박이다. 언어 전문가들은 그가 대처 특유의 길고 느린 말투도 따라 한다고 평한다. 인도계인 수낵 전 장관은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대처주의자로 총리직에 도전하고 있으며 집권 후에도 대처주의자로 영국을 이끌겠다”고 했다. ‘나’는 없고 ‘대처’만 있다. 인도 정보기술(IT) 대기업 인포시스를 창업한 나라야나 무르티의 사위인 그는 장인이 44억 달러(약 5조7200억 원)의 재산을 지닌 대부호인데도 그의 딸인 자신의 부인이 비(非)거주 비자를 이용해 푼돈의 세금을 탈루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 반서민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어린 시절 약사 모친을 도우며 용돈을 번 경험이 잡화상 딸인 대처와 유사하다고도 주장한다. 나름 잔뼈가 굵은 두 정치인이 이렇듯 노골적으로 무덤 속 대처를 소환한 이유는 보수당 대표 선출이 전 유권자가 아닌 당원 16만 명, 즉 ‘집토끼’를 대상으로 한 선거이기 때문이다. 보수당원은 영국 평균에 비해 고연령 고소득의 백인 남성이 많아 우파 색채가 강하다. 대처의 대표 정책인 공공주택 민영화, 금융업 활성화 등으로 집을 소유하고 자산 증식의 혜택까지 입은 대표적 계층이다. 이들에게 ‘정치적 남편’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아르헨티나와벌인 포클랜드전쟁까지 승리로 이끈 대처는 잘 먹고 잘살게 해 줬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자긍심까지 높여준 유일한 지도자인 것이다. 그의 탄광 및 철도 노조 탄압 등으로 피해를 본 노동자 계급, 이들이 주로 거주하며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된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등에서는 아직까지도 대처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공과(功過) 없는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으며 대처 또한 집권 당시 식민지 상실,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빚투성이 정부를 물려받은 상황에서 경제를 살려놨다는 점에서 ‘과’보다 ‘공’이 큰 정치인이 분명하다. 대영제국의 후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국제사회에서 저물어만 가던 영국의 위상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처의 업적이다. 타계 9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가 끊임없이 회자된다는 점이야말로 정치인 대처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케 한다. 트러스 장관과 수낵 전 장관 중 누가 승리할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이 대처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것 못지않게 집권 후에도 대처 같은 지도력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8일 유명을 달리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는 원래 3연임만 가능한 집권 자민당 당규를 고쳐 전무후무한 4연임 총리가 되려 했다. ‘아베 1강’으로 불릴 만큼 경쟁자도 없었다. 그러나 2019년 7월 참의원 선거 승리 14개월 만인 2020년 9월 중도 사퇴했다. 그 시발점이 바로 모리토모(森友) 학원 비리다. 거짓 해명으로 일관하다 추가 의혹이 속속 터지자 버티지 못했다. 2017년 2월 아사히신문은 모리토모가 초등학교를 짓기 위해 오사카 인근 도요나카의 역세권 국유지를 감정가보다 85% 싼 1억3400만 엔(약 13억 원)에 사들였다고 폭로했다. 헐값에 금싸라기 땅을 차지했는데 당국이 이유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는 한때 이 학교 명예 교장이었다. 당시 이사장 가고이케 야스노리(籠池泰典) 또한 아베와 내각 인사 대부분이 가입한 극우단체 ‘일본회의’의 핵심 인물이다.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칙어를 외우게 하고 혐한, 혐중 정서를 부추기는 극우 교육도 내내 논란이었다.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아베 전 총리는 보도 직후 의회에서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나나 아내가 연관이 있다면 총리와 의원을 다 그만두겠다”고 했다. 공개석상에서의 직설적인 언급을 자제하는 일본 관행으로 보면 상당히 센 발언이었다. 천문학적 돈이 오간 것도 아니고 인명 피해도 없으니 ‘잘 모른다’ 정도로 답할 법한데 총리직 사퇴를 거론해 더 큰 의혹을 샀다. 한 달 후 그의 골프 친구 가케 고타로(加計孝太郞)가 이사장인 가케 학원이 총리 덕에 52년 만에 수의학부 신설을 허가받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일본은 의사의 무분별한 증가를 막기 위해 의·치·수의학부의 신설을 제한한다. 아키에 여사는 이 학원 어린이집의 명예 원장도 맡았다. 논란이 고조됐지만 모조리 부인했다. 다음 해 의회에 제출된 재무성과 모리토모 간 토지거래 문서가 계약 원본과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단순 특혜가 아닌 공문서 위조 및 증거인멸이란 대형 비리로 번졌고 이에 관여한 재무성 말단 직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는데도 관련자 전원이 불기소됐다. 가케 비리 역시 당초 해명과 달리 아베와 이사장이 수차례 수의학부 신설을 논의했음이 드러났다. 사태 초기 의혹을 폭로한 전 문부과학성 차관은 사찰을 당했다. 2019년에는 매년 4월 세금으로 도쿄에서 열리는 정부 주최 벚꽃 관람 행사에 그의 지역구 야마구치 주민이 대거 초청됐으며 아키에 여사가 참가자 선정에 관여했음이 밝혀졌다. 주무부서 내각부는 야당이 자료를 요청한 날 모든 문서를 파쇄했다. 정부 행사를 지역구 관리 목적으로 쓴 것도 모자라 증거까지 없애자 민심이 돌아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80%가 넘는 국민이 “총리 해명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집권 중 아베를 ‘내각 2인자’ 관방장관으로 발탁한 정치적 스승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까지 “거짓말을 그만하고 사퇴하라”고 나무랐다. 이 와중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발발하자 한때 70%를 넘던 내각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 4연임은커녕 원래 임기도 지킬 수 없었다. 그의 사망 전날 사퇴 의사를 밝힌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또한 방역 수칙 위반, 측근의 성비위 감싸기 등에서 거짓말을 거듭했음이 드러나 사실상 쫓겨난 처지다.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이 각각 탄핵 위기를 맞거나 하야했을 때 미 국민이 가장 분노한 지점은 불륜과 도청이 아니라 위증 및 위증 교사였다. 어떤 이를 계속 속이거나 모든 이를 잠시 속일 순 있어도 모든 이를 계속 속일 순 없는 것이다. 세 차례의 연이은 의혹 때 아베 전 총리가 단 한 번이라도 진심 어린 사과와 솔직한 해명을 했다면 어땠을까. 변변한 반대파가 없고 퇴임 후에도 사실상 상왕 노릇을 한 점을 감안하면 권좌를 지켰을 가능성이 높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폭력에 스러진 그의 명복을 빈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해 2월 일찌감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각종 부양책이 경험해보지 못한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욕조에 너무 많은 물을 부으면 넘칠 수밖에 없듯 넘쳐나는 유동성이 미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당시 미 소비자물가는 1.7%로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물가 관리 목표치 2.0%를 밑돌았다.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적었다. 특히 현 경제사령탑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고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적극 반박했다. 이후 미 소비자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 5%대로 뛰더니 같은 해 12월 7%대로 올라섰다. 올해 3월부터 5월까지는 3개월 연속 41년 내 최고치인 8%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급기야 옐런 장관은 1일 CNN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 추이를 잘못 이해했다”며 사실상 공개 사과했다. 자신의 오판으로 정책 실기(失期)가 나타났음을 뒤늦게 시인한 셈이다. 물가를 잡지 못한 1차적 책임은 물론 중앙은행 수장인 제롬 파월 연준 의장에게 있다. 그러나 1977년 연준에 처음 입사한 후 연준 이사, 샌프란시스코 연준 총재, 연준 부의장, 연준 의장 등을 지내며 통화정책에 잔뼈가 굵은 주무장관 옐런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를 향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신뢰도 예전 같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은 20일 서머스 전 장관과 미 경제의 침체 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침체 가능성이 낮다고 본 옐런 장관과 달리 서머스 전 장관은 내내 “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두 사람의 논쟁에서 사실상 서머스 전 장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최초의 미 여성 재무장관, 최초의 여성 연준 의장 등 각종 ‘여성 최초’ 기록을 쓰며 성공 가도만 달려온 엘리트 경제학자 출신의 옐런 장관이 인플레 대응과 관련해 체면을 구긴 이유가 뭘까.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물가 소방수’보다 ‘고용 투사’ 역할에 치중했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의 대처 방식을 고수하는 데 집착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당시 연준은 천문학적인 돈을 풀어 경기 부양에 나섰다. 특히 일자리 800만 개가 증발한 상황에서 실업률이 떨어지지 않자 물가 안정만을 통화정책 목표로 제시한 주요국 중앙은행과 달리 “완전 고용과 물가 안정이라는 ‘이중 책무(dual mandate)’하에서 통화정책을 운영하겠다”고도 밝혔다. 그런데도 2009년 한때 10%에 달했던 미 실업률은 2014년에야 5%대로 내려왔다. 반면 코로나19 초기였던 2020년 초 14%대에 달했던 미 실업률은 지난해 6%대로 떨어졌고 올해 5월에는 50년 내 최저 수준인 3.6%에 머물고 있다. 이렇듯 고용 상황이 안정적이고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 등이 정착됐는데도 이번 사태에서도 물가보다 고용을 중시하다 인플레 위험을 키웠다는 의미다. 서머스 전 장관과 옐런 장관의 뒤바뀐 처지 또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이 옐런을 최초의 여성 연준 의장으로 발탁했을 때 당시 오바마의 1순위는 서머스였다. 오바마는 자신의 경제 과외교사 격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 서머스를 선호했지만 하버드대 총장 시절의 여성 비하 발언, 독선적 성격 등으로 서머스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옐런을 택했다. 이후 옐런은 재무장관까지 올랐고 서머스는 요직을 맡지 못했지만 인플레 대응에 관해서는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개인이건 조직이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옐런 장관에게 금융위기 극복의 공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당시와 지금의 경제 여건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점을 조금만 빨리 인지했더라면 미국과 세계 경제 또한 지금 같은 수준의 인플레 공포에 휩싸이지는 않았을 것이란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지금의 실패를 속히 만회하고 물가 소방수 역할까지 훌륭하게 수행한 장관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가 19일 최초로 국가부도를 맞았다. 그 이면에 라자팍사 일가와 중국이 있다. 2019년 11월부터 집권 중인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은 1949년 남부 함반토타 지구의 싱할라족 유력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를 포함해 9남매가 있는데 이 중 샤말(80), 마힌다(77), 고타바야, 바질(71) 등 4형제가 대통령, 총리, 장관 등을 주고받으며 부도를 촉발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2005∼2015년 재선 대통령을 지낸 마힌다는 집권 중 동생 고타바야를 국방장관에, 형 샤말을 관개부장관에 발탁했다. 마힌다는 3선에 실패했지만 2019년 고타바야가 권좌에 올랐다. 고타바야는 전직 대통령인 형 마힌다를 총리로 들이고 동생 바질을 재무장관에 앉혔다. 바질의 별명은 ‘미스터 10%’. 국책 사업을 허가할 때마다 최소 10%의 이권을 챙긴다는 뜻이다.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마힌다는 집권 직후부터 가문의 정치적 기반인 함반토타 일대 개발에 주력했다. 문제는 함반토타의 인구가 8300명에 불과하고 미국의 주(州)에 해당하는 함반토타 지구 전체의 주민도 60만 명 미만이라는 점이다. 변변한 산업도 특산품도 없는 허허벌판 어촌을 최대 도시 콜롬보항에 맞먹는 물류 허브로 키우겠다는 막무가내식 계획을 세운 후 인도, 일본 등에 투자를 요청했지만 사업성이 낮다며 퇴짜를 맞았다. 마힌다 정권은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개발도상국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해 각종 인프라를 건설해주고 그 과정에서 중국이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에 참여하겠다며 제 발로 뛰어들었다. 중국은 함반토타의 항만 개발, 철도 및 공항 건설에만 11억 달러가 넘는 돈을 들였고 이 외에도 스리랑카 곳곳에 차이나머니를 뿌렸다. 2014년 스리랑카를 찾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개발된 함반토타항에는 입항하는 배도, 찾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항만 운영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가운데 중국이 빌려준 돈은 이자까지 붙어 눈덩이처럼 불었다.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자 스리랑카는 2017년 함반토타항의 운영권을 99년간 중국에 넘겼다. 사실상의 영토 할양이다. 중국 건설사가 중국 노동자를 데려와 인프라를 건설하고 이들이 임금을 중국으로 송금하는 일대일로의 본질을 감안할 때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중국이 돈을 빌려준 이유 또한 함반토타, 파키스탄 과다르항, 아프리카 지부티 등을 묶어 서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를 영향력 하에 두려는 목적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200만 명의 스리랑카 국민이라고 이를 모를 리 없다. 마힌다가 집권 중 각종 축재를 통해 9000만 달러(약 1170억 원)의 부를 쌓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런데도 왜 마힌다의 동생 고타바야를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어줬을까. 라자팍사 일가가 극우 민족주의, 경제성이 전무한 함반토타항 개발 같은 대중영합정치를 앞세워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탓이다. 다민족 다종교 국가인 스리랑카에서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불교도 싱할라족은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 말레이계 이슬람, 기독교도 등 소수파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특히 1983년부터 26년간 이어진 타밀족과의 내전을 마힌다 정권이 2009년 승리로 끝내면서 그가 ‘싱할라족과 불교도의 수호자’ 이미지를 굳힌 것이 결정적이었다. 즉 라자팍사 일가가 인종 및 종교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데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진 오랜 식민지배, 내전 등으로 스리랑카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경제 발전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 와중에 일대일로에 섣불리 가담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스리랑카의 물가상승률은 34%를 넘나들고 연료, 식품 등 각종 생필품이 부족해 민생 경제가 파탄 지경이다. 국가부도 선언 3일 전인 이달 9일 마힌다가 총리에서 물러났지만 고타바야의 동반 퇴진까지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리랑카 부채 70억 달러 중 최소 20%가 중국에 진 빚이다. 일대일로와 차이나머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함반토타항 정도가 아니라 더 많은 국가 기간시설을 중국에 내줘야 할지 모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97년 중국에 반환된 ‘아시아의 진주’ 홍콩은 이후 4명의 행정장관을 맞았다. 캐리 람 현 장관과 2대 도널드 창 전 장관은 관료, 초대 둥젠화(董建華) 전 장관은 정치인, 3대 렁춘잉(梁振英) 전 장관은 기업가 출신이다. 하나같이 중국공산당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지만 민간인인 이들의 치하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음 달 8일 중국이 지정한 1454명의 선거인단이 간선제로 선출하는 행정장관 선거에 단독 출마한 존 리 전 정무사장은 45년 경력의 경찰 출신이다. 1977년 경찰 배지를 단 그는 홍콩판 마피아 삼합회 척결, 마약 소탕 업무에서 성과를 냈고 2017년 장관급인 보안부장에 올랐다. 이때만 해도 그가 740만 홍콩인을 대표하는 행정장관에 오를 것이라곤 그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의 운명이 바뀐 시점은 2019년. 중국 본토로 범죄인 인도를 가능케 한 소위 송환법을 제정하려는 당국의 시도에 거센 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그는 홍콩인을 머리가 나쁜 ‘타조’로 비하하고 “외국 테러 세력과 결탁해 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강경 진압을 주도했다. 200만 명의 시위대가 송환법을 반대하자 놀란 람 장관은 이를 철회했다. 중국은 람이 유약하다 여겼고 무력으로 홍콩을 다스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이후 홍콩은 사실상 중국이 직접 통치하는 국가로 바뀌었다. 2020년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반중 활동을 한 사람을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개정된 선거법에 따르면 중국이 소위 ‘애국 인사’로 부르는 친중파가 아니면 출마조차 할 수 없다. 이 모든 과정에 리 또한 깊숙이 개입했다. 특히 그는 반중언론 핑궈일보가 탄압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 6월 자진 폐간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데 실력을 발휘했다. 걸핏하면 수백 명의 경찰을 동원해 핑궈일보 본사를 급습한 뒤 자산 동결, 수뇌부 체포 등을 거듭했다. 언론인을 조직폭력배 다루듯 때려잡자 버티지 못한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이후 3개 언론이 추가로 문을 닫았는데도 “국가 안보를 해치는 저널리즘에는 무관용으로 대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리가 행정장관에 이은 홍콩 2인자 정무사장에 취임한 날은 핑궈일보가 폐간한 지 불과 3일 후. 정무사장에 경찰 출신이 취임한 것도 처음이어서 당시에도 홍콩의 경찰국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상당했다. 그랬던 그가 채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중국의 낙점을 받아 행정장관에까지 오른다. 행정이나 경제금융 경험이 전혀 없는 인물이 국제금융 허브 홍콩의 새 수장이 되는 것이다. 그가 취임할 7월 1일이 홍콩 반환 25주년, 중국공산당 창당 101주년, 국가보안법 시행 2주년이 겹치는 날이라는 점도 공교롭다. 중국의 행보 또한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다. 리의 전임자 4명은 모두 단독 출마가 아니라 두어 명의 경쟁자를 뒀다. 아무리 간선제고 그 나물에 그 밥인 친중 후보끼리의 경쟁이라 해도 최소한의 구색은 갖췄다. 리는 이번에 단독 출마했고 13일 후보 등록을 하면서 선거인단의 절반이 넘는 786명의 동의 내역을 제출했다. 이미 과반의 지지를 받아 굳이 선거라는 형식조차 필요 없는 상황이 펼쳐진 셈이다. 리의 최근 행보 또한 중국의 입맛에 쏙 맞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집권 후 “결과지향적인 정부를 원한다”며 중국이 제정한 국가보안법과 별도로 홍콩 자체의 보안법 또한 만들겠다고 밝혔다. 현 보안법에서 처벌할 수 없는 항목에 대해서도 법의 잣대를 가해 반중 활동의 싹을 잘라내겠다는 의미다. 그는 24일 유세 때도 경찰을 대동했다. 수많은 경찰이 인(人)의 장벽을 만들었고 그가 시민과 만나는 현장은 7시간 후 공개된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신임 장관 리가 만들어갈 홍콩의 모습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이 세계 곳곳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갈수록 지구촌의 자유민주주의 또한 위기에 처할 것이란 우려가 과장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1989년 8월 23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잇는 675km의 길에 세 나라 국민 200만 명이 손을 맞잡고 인간 띠를 만들었다. ‘발트의 길(Baltic Way)’로 불린 이 사건은 옛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약소국의 독립 열망과 비폭력 저항 의지를 만방에 보여줬다. 당시 200만 명 중 절반은 발트 3국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리투아니아 국민이었다. 7개월 후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속했던 나라 중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가 뒤따랐고 소련도 무너졌다. 세 나라는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에 모두 가입하며 완전히 서유럽으로 편입됐다. 30년이 흐른 2019년 8월 23일 홍콩의 반중 시위대는 ‘발트의 길’을 모방한 50km의 인간 띠를 만들어 중국의 탄압을 규탄했다. 동병상련을 느낀 리투아니아인 역시 곳곳에서 홍콩 지지 집회를 열었다. 중국이 빌뉴스 주재 중국대사관 직원 등을 동원해 폭력까지 써가며 이 집회를 방해하자 국민들의 반중 정서가 불타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는 지난해 5월 중국이 유럽 주요국과 맺은 경제협력체 ‘17+1’을 탈퇴했다. 넉 달 후 “샤오미, 화웨이 등 중국제 스마트폰에서 검열 기능이 발견됐다. 이미 샀으면 당장 버리라”고 했다. 같은 해 11월 빌뉴스에는 사실상의 대만대사관 격인 ‘대만대표처’도 들어섰다. 발끈한 중국은 리투아니아산 럼주 등 각종 제품의 통관을 금했고 외교 관계 또한 대사급에서 대리대사급으로 격하했다. 관영매체는 중국이란 ‘코끼리’에 도전하는 ‘파리’로 비하하며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질 것”이라고 독설했다. 리투아니아는 굴하지 않고 이달 26일 “대만 타이베이에도 리투아니아대표처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리투아니아의 이런 행보 뒤에는 대국의 횡포와 공산당의 강압 통치에 대한 극도의 반감,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역사가 있다. 중세시절 잠시 번성했지만 18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혹독한 민족말살 정책을 겪었다. 고유 언어와 역사 교육이 금지됐고 수많은 국민이 숙청당했다. 세계 모든 나라를 조공국 취급하며 힘으로 찍어 누르는 중국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의 최대 위협이던 러시아를 비판하는 데도 열심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당일인 지난달 24일 리투아니아 또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고 각종 제재에도 발 벗고 나섰다. 미국에는 발트3국 주재 미군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또한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재블린’ 미사일을 리투아니아에도 판매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인구 280만 명(세계 137위), 국가총생산 560억 달러(세계 80위)에 탱크와 전투기조차 없다. 외형적 조건만 보면 도저히 15억 인구를 가진 세계 2위 경제대국과 맞설 수 없는 나라다. 그런데도 연일 중국에 날을 세우자 중국 또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리투아니아의 반러 행보가 소련 붕괴의 시발점임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이 이번에는 이 나라가 전 세계에 반중 정서를 확산시킬까 우려하고 있다며 “작은 나라도 ‘슈퍼 파워’의 두통거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평했다. 중국에 최악의 상황은 다른 나라가 리투아니아를 본받는 것인데 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슬로베니아 또한 대만대표처 설립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인간이 돈으로만 움직이지 않듯 국가 대 국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국격과 국가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반드시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이 필요한 것도 아님을 리투아니아의 결기가 보여준다. 세계 6위 군사력에 11위 경제력까지 보유했음에도 중국을 ‘큰 봉우리’라 칭하고 “우크라이나가 코미디언 대통령을 잘못 뽑아 러시아의 침략을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