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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자국 통화로 무역할 수 없는가. 달러가 세계 무역을 지배하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 지난달 중순 중국을 국빈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상하이 신개발은행에서 이같이 말했다. 중국과 브라질의 ‘탈(脫)달러’ 밀착을 보여주는 상징적 연설이었다. 두 나라는 양국 간 교역과 금융 거래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와 헤알화를 이용하고, 달러 결제망인 ‘스위프트’ 대신 중국이 만든 금융결제망을 쓰기로 했다. ▷브라질처럼 중국과의 거래에서 위안화를 사용하는 국가가 늘면서 미국의 달러 패권에 맞서 중국이 추진해온 ‘위안화 출해(出海·국제화)’가 가시적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3월 중국의 대외거래에서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48%로 집계됐다고 블룸버그 산하 경제연구소가 분석했다. 2020년 사실상 0%였던 위안화 결제 비중이 급속도로 늘어 사상 처음 달러를 추월한 것이다. 이 기간 달러 결제 비중은 83%에서 47%로 고꾸라졌다. ▷위안화 몸값을 높인 결정적 계기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금융 제재로 고립된 러시아가 달러, 유로 대신 택한 게 위안화였다. 전쟁 이전만 해도 러시아 수출대금에서 위안화 결제 비중은 1%도 안 됐지만 이제 16%에 달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월 중-러 정상회담 직후 “러시아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와의 결제에서도 위안화 사용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인 중국은 특히 중동 국가들과 손잡으며 ‘페트로 위안’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3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은행에 첫 위안화 대출을 내줬고, 아랍에미리트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대금 결제를 처음 위안화로 했다. 반대로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중국 룽성석유화학의 지분 인수를 위안화로 결제하기로 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제안한 대로 사우디와 중국 간 석유 거래마저 위안화로 결제된다면 1975년 이후 원유 결제는 달러로만 한다는 ‘페트로 달러’ 체제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는 셈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달러 중심 국제통화 체계에 의문을 제기한 중국은 2009년 위안화 국제화를 국가 정책으로 삼았다. 최근 미중 패권 전쟁이 심화되고 팬데믹 이후 이어진 ‘킹달러’에 신흥국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위안화 국제화가 가속화되는 분위기다. 위안화가 달러를 대체하는 수준으로 지배력을 키우기엔 갈 길이 멀지만 ‘출해’ 속도만큼은 예사롭지 않다. 한국도 말로만 ‘원화의 국제화’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경제와 외교가 일체가 된 종합전략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같은 재앙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도 ‘원화’의 힘을 키워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요즘 대학가에서 ‘천 원의 아침밥’이 인기다. 학생식당 문을 열기 전부터 수십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오픈런’이 벌어질 정도다. 순천향대가 2012년 시작한 1000원의 아침밥 캠페인은 대학들의 자발적 참여로 확산되다가 2017년부터 정부가 가세했다. 학생이 1000원을 내면 쌀 소비 확대를 위해 농림축산식품부가 1000원을 보태고, 나머지 비용은 대학이 부담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2017년 10개 학교에서 시행된 아침밥 사업은 올해 41개 대학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고물가 시대에 1000원 아침밥이 연일 화제가 되자 여야 정치권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당정이 지난달 지원 예산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더불어민주당은 모든 대학을 지원해야 한다고 맞섰다. 여야 대표들도 앞다퉈 대학 식당을 찾아 아침밥을 시식하며 ‘보여주기식’ 경쟁에 시동을 걸었다. 이달 들어 국민의힘이 희망하는 모든 대학을 지원하겠다고 나서자 야당은 ‘방학에도 적용’ ‘하루 두 끼 제공’ ‘전문대 포함’ 등의 방안을 쏟아냈다. 이러다가 대학생 무상급식 주장까지 나올 판이다. 주머니 사정이 팍팍한 대학생들에게 단돈 1000원으로 해결하는 한 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렇지만 마냥 박수를 보내기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재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대학의 학생들은 1000원 아침밥이 그림의 떡이다. 기부금을 두둑이 내는 동문이나 지자체의 별도 지원이 없는 대학들은 아침밥 사업에 참여하고 싶어도 돈을 댈 수 없어 못 한다. 더군다나 고물가로 고통받는 이들이 대학생만이 아니다. 비슷한 또래의 대학 밖 청년들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소외감을 키우고 있다. 이 같은 논란에도 정치권이 1000원 아침밥에 매달리는 것은 1년이 채 남지 않은 총선을 앞두고 청년들에게 손쉽고도 직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대책이기 때문이다. 아침밥으로 청년 표심을 잡을 수 있다면 가중될 세금 부담이나 대학 재정난은 안중에도 없는 셈이다. 청년층을 겨냥한 선심성 정책은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주 국회 교육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에서 야당은 일명 ‘대학 학자금 무이자 대출법’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을 받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취업 전에 발생한 대출 이자를 면제해주는 게 핵심이다. 현재는 취업 이전 기간에도 이자를 매겨 취업 후 함께 갚도록 하는데 이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의 이자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건 긍정적이지만 중졸·고졸 취업자에겐 혜택이 없어 형평성 논란이 제기된다. 학자금을 무이자로 빌리게 되면 대학생의 무분별한 대출을 부추길 우려도 있다. 무엇보다 연간 860억여 원이 투입되는 재원 조달 계획이 없다. 내년 총선이 다가올수록 정치권의 청년용 ‘퍼주기’ 대책은 더 경쟁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20대 무당층이 절반을 넘어선 상황에서 더 그렇다. 여당은 청년층 교통비 지원, 통신비 인하를 준비하고 있고 야당은 지난 대선 때 2030세대부터 우선 적용하겠다고 했던 ‘전 국민 1000만 원 기본대출’을 다시 꺼내 들었다.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연금·노동개혁은 뒷전으로 미룬 채 시혜성 대책들로 MZ세대의 환심을 사려는 건 기만이다. 정치인들이 국민 세금을 축내서 쓴 선심의 대가가 미래 세대가 갚아야 할 빚임을 청년들이 더 잘 알고 있다. 1000원짜리 아침밥을 더 주느니 마느니 경쟁할 게 아니라, 청년층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고 제때 취업해 당당히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치권이 진짜 할 일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삼성전자가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 스마트폰은 2010년 4월 나온 갤럭시A다. 구글의 안드로이드(Android)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한다고 해서 A가 붙었다. 이때부터 갤럭시 스마트폰엔 구글의 검색엔진이 기본으로 장착됐다. 독자적 운영 생태계를 구축한 애플에 맞서 두 회사의 동맹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안드로이드를 위해, 구글은 갤럭시를 위해 각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최적화하며 손을 잡아 왔다. ▷그런데 13년간 이어져 온 두 회사의 밀월 관계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기본 검색엔진을 구글 대신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빙’으로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한 것이다. 삼성 측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NYT도 “교체가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생성형 인공지능(AI)을 등에 업고 구글의 독주를 위협하고 있는 MS의 존재는 확인된 셈이다. ▷요즘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 시장을 주도하는 건 한때 혁신과 멀어 보였던 MS다. MS는 챗GPT 개발사 ‘오픈AI’에 120억 달러(약 16조 원)를 투자해 사실상 경영권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오픈AI와 손잡고 사나흘에 한 번꼴로 신규 AI 서비스를 선보일 정도다. 최근엔 자사 검색엔진 빙에 챗GPT를 탑재한 AI 검색 서비스를 내놨다. 새로운 빙은 1시간 전에 올라온 소식까지 분석해 최신 정보를 제공하도록 설계됐다. ‘뉴 빙’을 공개한 날 MS 최고경영자는 “검색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린 날”이라고 자평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혁신의 아이콘 구글이다. 구글은 토종 포털이 장악한 한국 중국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 국가의 검색시장을 지배하며 20년 넘게 1위 자리를 지켜 왔다. 하지만 MS의 추격에 견고했던 검색엔진 시장에도 균열이 생길 조짐이다. 한 달 새 빙 방문자는 15% 이상 늘어난 반면 구글 검색 방문자는 1%가량 줄었다고 한다. 매출 상당수를 검색 광고에 의존하는 구글에 위협적인 일이다. 구글은 새 빙에 맞설 카드로 대화형 AI ‘바드’를 내놨다가 시연회에서 오류를 드러내며 망신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 검색엔진마저 빙으로 교체될 경우 검색시장의 절대강자가 뒤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구글이 포털의 대명사였던 야후를 대체하고 애플 아이폰의 등장으로 노키아, 모토로라가 몰락한 것처럼 AI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나는 기업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다. 삼성전자가 검색엔진 사용료로 구글에 매년 지불하는 돈이 30억 달러(약 4조 원)라고 한다. 생성형 AI가 글로벌 빅테크의 판도를 뒤흔들면서 이를 둘러싼 ‘쩐의 전쟁’도 시작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전국 금은방에서 1g짜리 순금 돌반지를 팔기 시작한 건 2011년 6월부터다. 찾는 손님이 많아서라기보다 정부와 귀금속 업계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정부는 일제 잔재인 ‘돈’ 대신 국제 표준인 ‘그램(g)’을 정착시키고자 했고, 업계는 치솟는 금값 때문에 손님이 뚝 끊긴 돌반지 시장을 살리고 싶었다. 그해 동일본 대지진, 유럽 재정위기, 미국 국가신용등급 강등 같은 온갖 악재가 겹치면서 국제 금값은 역사적 고점을 찍었다. 국내에서도 순금 한 돈(3.75g)이 25만 원을 뚫었다. ▷정부가 당시 소비자물가지수 대상에서 금반지를 제외하자 물가 상승률이 0.2%포인트나 낮아질 정도였다. 물가를 마사지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결국 금반지는 물가 산정 품목에서 빠졌다. 그렇게 1g 반지 제작용 금형이 전국에 보급됐고, 겉모습은 한 돈짜리와 똑같지만 두께는 얇은 6만 원대 돌반지가 등장했다. 그래도 1g 반지는 낯간지럽다며 현금 봉투를 준비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부와 업계의 노력에도 시큰둥했던 1g짜리 돌반지의 인기가 요즘 뜨겁다. 10만 원이 든 현금 봉투보다 1g 금반지가 훨씬 더 비싸졌기 때문이다. 10만 원 봉투는 부담되고 5만 원은 약소하다며 0.5g짜리 돌반지를 선물하는 젊은층도 많아졌다. 2011년의 고점 이후 오랜 세월 암흑기를 거쳤던 금값이 다시 천정부지로 뛰면서 나타난 변화다. 세공비를 더하면 요새 금반지 한 돈은 40만 원이 넘는다. ▷금은 ‘불안 심리’를 먹고 산다. 팬데믹 위기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쳐 최근 미국, 유럽발(發) 은행 위기까지 불거지면서 금 가격은 사상 최고가를 새로 쓰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지정학적, 경제적 불안이 일상화되자 그야말로 신(新)골드러시가 펼쳐진 모습이다. 이에 힘입어 세계 중앙은행들도 공격적으로 금 사재기에 나서고 있다. 국내 편의점에는 최대 열 돈짜리 골드바를 구입할 수 있는 ‘금 자판기’까지 등장했는데 인기가 많아 돌반지, 금 모양 카네이션 등 판매 상품을 늘린다고 한다. ▷고공비행하는 금값에 장롱에서 잠자던 금붙이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요즘 서울 종로3가 귀금속 거리에는 금을 사는 손님보다 파는 사람이 더 많고,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하루 10건 안팎의 돌반지 판매 글이 올라온다. 금니를 팔기 위해 폐금업체를 찾는 사람도 늘었다. 한 돈 금반지를 팔면 당장 30만 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으니 고물가, 고금리로 한 푼이 아쉬운 서민들에겐 적지 않은 돈이다. 불황이 불러온 역(逆)골드러시라 할 만하다. 치솟는 금값을 보는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은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gapjil(갑질), mukbang(먹방)처럼 외신이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옮겨 쓰는 단어가 꽤 있다. 영어로 풀어 쓰면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서다. 로이터통신이 2020년 택배노동자 사망 사건을 전하면서 처음 쓴 kwarosa(과로사)도 마찬가지다. ‘death from overwork’라고 하면 불안정한 고용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오래 일해야 하는 한국의 근로문화를 담을 수 없다는 거다. 그제 호주 ABC방송이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보도하며 kwarosa를 또 언급했다. ▷고용노동부가 6일 발표한 근로시간 개편안은 현행 주 52시간 근무를 유연화해 일이 몰릴 때는 주당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다. 1주일 단위의 근로시간 산정 기준을 월 단위 이상으로 확대해, 일이 많으면 몰아서 일하고 그만큼을 더 쉬게 한다는 것이다. 초과 근무시간을 적립해 한 달씩 장기휴가를 쓸 수 있고, 노사에 근로시간 선택권을 넓혀줬다고 정부는 홍보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있는 휴가도 못 쓰는데 장기휴가가 웬 말이냐” “사실상 주 69시간 근무가 굳어질 거다” “공짜 야근이 더 심해질 거다”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MZ세대 노조인 ‘새로고침’도 “역사적 발전에 역행한다. 장시간 노동과 과로 탈피를 위한 제도적 기반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어 시기상조”라며 반대를 공식화했다. 한국인의 평균 근로시간은 연 1915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199시간이나 많다. 주 38시간제가 도입된 호주의 언론이 kwarosa를 꺼낼 만하다. ▷예상보다 거센 반발에 MZ세대를 노동개혁의 우군으로 삼았던 정부는 화들짝 놀란 모양이다. 그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재검토를 지시했다.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 특히 MZ세대 의견을 면밀히 청취해 법안 내용을 보완하라”고 하자, 고용부 장관이 하루 만에 새로고침 관계자들을 만났다. 정부는 결국 69시간 근무를 백지화하고 여론조사 등을 거쳐 주당 최장 근로시간을 다시 정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개편안은 불쑥 나온 게 아니다. 대선 때부터 대통령이 진두지휘해 온 노동개혁 1호 정책이며, 정부는 지난해 6월부터 주 69시간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동안 현장의 제도 보완 목소리가 많았는데, 지금까지 뭐하다가 이제야 의견을 청취하고 여론조사를 하겠다는 건지 의아할 뿐이다. 업종과 산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경직적으로 운영돼 온 주 52시간제에 노사 가릴 것 없이 불만이 컸다. 근로시간 유연화를 두고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노동개혁의 시계가 멈춰 설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들린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10단지 상가 앞은 일요일을 빼고 매일같이 수십, 수백 명이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대기 줄이 길 땐 아파트 단지를 에워쌀 정도라 한다. 상가 1층의 편의점이 로또 1등 당첨자를 49명이나 배출한 국내 1위 ‘로또 명당’이기 때문이다. 2002년 첫선을 보인 로또는 작년에만 5조4000억 원가량 팔렸다. 숫자 1부터 45 중 6개를 맞히는 1등 당첨 확률은 814만분의 1. 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지만, 전국의 로또 명당들은 대박의 기운을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문전성시다. ▷로또를 포함해 전체 복권 판매액은 코로나19가 확산된 2020년 처음 5조 원을 돌파했다. 주식·코인 투자 열기만큼이나 인생 한 방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이어 작년에는 6조 원도 가뿐히 넘었다. 지난해 설문조사에서 성인 절반 정도가 복권을 산 적 있고, 4명 중 1명은 매주 복권을 산다고 했다. 전체 성인 인구를 대입하면 600만 명 가까이가 인생 역전을 꿈꾸며 한 주도 빠짐없이 ‘행복 티켓’을 사는 데 지갑을 연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소득 하위 20%에 속한 저소득층의 월평균 복권 구매 비용이 30% 가까이 급증했다. 상위 20% 고소득층의 복권 구매가 7% 늘어나는 데 그친 것과 비교된다. 치솟는 물가와 금리로 허리가 휘는 와중에도 저소득층이 복권을 사는 데 기꺼이 돈을 썼다는 얘기다. 그만큼 서민들이 기댈 데라곤 복권의 요행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복권은 술·담배처럼 경제가 어려울수록 잘 팔리는 불황형 상품으로 꼽히는데, 금융위기 직후에 그랬고 이번에도 속설이 입증됐다. ▷흔히 ‘빈자의 세금’, ‘희망 세금’이라고 하지만 복권만큼 손쉬운 세수 확보 수단도 없다. 정부가 헛된 희망을 부추겨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복권 당첨금은 기타소득으로 잡혀 5만 원이 넘으면 22%를, 3억 원을 초과하면 33%를 세금으로 거둬 간다. 당첨금을 지급하는 NH농협은행 복권 담당자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 놈의 세금을 이렇게 많이 떼느냐”는 것이다. 당첨금이 20억 원이라면 실제 통장에 찍히는 돈은 13억7300만 원 정도다. ▷복권 판매액의 절반은 당첨금으로 나가고, 40% 정도는 복권기금으로 적립돼 취약계층 복지 사업 등에 쓰인다. 그래서 혹자는 당첨되면 큰돈이 생겨서 좋지만 당첨이 안 되더라도 생활 속 작은 기부를 실천한 셈 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팍팍해지고 일자리는 위태로워진 서민들이 지갑 속 로또 한 장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현실은 위태롭다. 복권이 희망인 사회는 미래가 어둡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요즘 취업준비생들에게 ‘인공지능(AI)전형’ 대비는 필수다. 통상 서류전형에 이어 AI역량검사와 AI면접이 진행되는데, 사실상 1차 면접과 다름없다. 모니터를 보고 짧게 자기소개를 한 뒤 인·적성검사 같은 객관식 문답을 거쳐 분석력, 집중력, 순발력 등을 테스트하는 각종 게임을 해내야 한다. 뒤이은 심층대화에서는 표정·음성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지원자의 신뢰도, 자신감, 친화력 등을 평가한다. 국내 대기업, 금융사, 공공기관 800여 곳이 이런 전형을 도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취준생들 사이에선 ‘깜깜이 전형’이라는 불만이 높다. AI면접과 역량검사가 어떻게 이뤄지고, 어떤 기준으로 당락을 결정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한 시민단체가 AI면접을 도입한 공기업을 상대로 정보공개 소송을 냈더니, AI업체에 전형을 맡긴 탓에 해당 기업도 관련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AI가 뭔데 나를 떨어뜨리냐”는 하소연이 이어지고 ‘카메라와 시선을 맞춰 연습하라’, ‘조명을 밝게 하라’ 같은 온갖 팁이 쏟아진다. ▷채용부터 평가, 승진까지 기업 인사(人事)에 이미 AI가 깊숙이 개입했지만 공정성과 평가 기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마존은 일찌감치 AI 채용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가 여성보다 남성 지원자를 선호하는 오류를 발견하고 폐기한 적 있다. AI가 과거 채용 데이터에서 성차별 편견까지 학습한 결과였다. 이제 미국에서는 인사 발령의 최후로 꼽히는 해고 단계에서도 AI가 직원을 골라낼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구글이 직원 1만2000명을 내보냈는데, 전직 직원들 사이에서 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AI 알고리즘이 해고자를 가려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물론 구글은 AI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하다. 채용, 승진 과정에서 AI가 우수 직원과 고성과자를 골라내는 현재의 시스템을 역이용하면 해고 명단을 만드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기업의 인사담당자 98%는 올해 감원 직원을 정할 때 알고리즘을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 ▷국내 은행들이 영업점 직원 수천 명의 지점 배치와 인사에 AI 알고리즘을 도입했는데, 말 많고 탈 많던 학연·지연 논란이 사라져 직원들 만족도가 높아졌다. 이처럼 AI가 결정한 해고 커트라인이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혼 없는 AI가 사람 일자리까지 박탈할 수 있다는 전망이 달갑지 않다는 반응이 많다. 편향된 데이터로 학습한 AI가 그릇된 해고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AI 인사의 공정성 시비를 없애고 제대로 인재를 가려내는 것도 결국 AI를 쓰는 인간의 몫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2009년 봄 시중은행엔 ‘청약 헬프 데스크’라는 별도의 상담 창구가 마련됐다. 새 주택청약종합저축 출시를 앞두고 빗발치는 고객 문의를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사전 예약으로 가입을 신청한 사람만 200만여 명. 청약예금·부금·저축으로 나뉘어 있던 청약통장의 기능을 모두 더한 데다 누구나 조건 없이 가입할 수 있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자율 또한 연 4.5%로 높아 자녀 이름으로 통장을 만드는 이들이 많았다. 기존 청약통장 3인방과 새 통장은 2015년 9월 통합됐고 이듬해 가입자 2000만 명을 돌파했다. ▷아파트 청약통장은 신상품이 나오거나 집값이 급등할 때면 가입자가 눈에 띄게 몰렸다. 청약 당첨만으로 수억 원대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을 때는 특히나 그랬다. ‘로또 아파트’ 원조로 꼽히는 2006년 판교신도시 3330채 동시분양에서는 청약통장 46만여 개가 쓰였다. 지난 정부에선 청약제도가 20차례나 바뀌어 전문가조차 헷갈릴 정도였지만 청약통장 가입자는 역대 최대인 2800만 명을 넘겼다. 치솟는 집값을 잡겠다며 분양가 상한제를 확대한 탓에 시세의 반값도 안 되는 ‘로또 청약’ 단지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정점을 찍었던 청약통장 가입자는 줄곧 내리막을 걷고 있다. 7개월 새 86만 명이 줄었다. 작년 초만 해도 통장을 해지하는 사람이 월간 25만 명 정도였지만 연말로 갈수록 갑절로 불었다. 새로 들어오는 이는 없고, 통장을 깨는 사람만 있으니 청약통장 예치금도 반년 만에 5조 원 넘게 빠졌다. 전체 예치금은 조만간 100조 원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동산 침체로 청약시장에도 한파가 몰아닥친 여파다. 집값이 떨어지고 미분양 아파트가 급증하면서 청약통장이 내 집 마련의 필수조건이라는 인식이 사라진 것이다. 정부가 지난해 11월 청약통장 금리를 1.8%에서 2.1%로 높였지만 일반 예·적금에 비해 쥐꼬리 수준인 것도 해지를 부추기고 있다. 고금리, 고물가에 경기 침체까지 겹치자 무용지물이 된 청약통장을 깨서 빚부터 갚거나 급전을 마련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청약에 당첨되려면 통장을 오래 갖고 있는 게 중요하지만 이 같은 충고도 이탈 행렬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부동산 규제 완화에 힘입어 최근 아파트 거래가 반짝 살아나긴 했지만 청약 지표들은 집값 추가 하락에 힘을 싣고 있어서다. 지난달 청약에 나선 아파트 대부분이 미달됐고, 수도권 대단지에서도 분양가보다 낮은 마이너스 프리미엄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집값은 여전히 비싼 수준이다. 로또 사는 심정으로 청약통장에 가입하는 시절을 이제 끝낼 때가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요즘 ‘카카오T’ 앱으로 택시를 부르면 가격이 비싼 벤티나 블루, 블랙 등이 먼저 표시된다. 추가 요금이 없는 일반택시 호출은 그 다음 순서다. 이마저도 대기시간이 길거나 잡히지 않을 때가 흔하다. 카카오모빌리티의 가맹택시인 ‘블루’는 대형 밴이나 고급 차량이 아닌데도 승차 거부 없이 쉽게 잡힌다는 명분으로 호출료를 최대 5000원 받고 있다. 지난해 심야 택시 대란을 해결하겠다며 정부가 최대 3000원이던 호출료를 이만큼 올렸다. ▷팬데믹 직전까지 카카오T로 들어오는 택시 콜(호출)은 하루 평균 165만 건을 넘어 택시기사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2020년 9월 택시단체 4곳이 카카오의 콜 몰아주기가 의심된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카카오T로 호출하면 빈 택시가 코앞에 있어도 멀리 있는 블루택시가 먼저 배차된다는 주장이었다. 때마침 경기도가 이런 의심이 일부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이어 서울시도 실태조사를 했더니 손님 골라 태우기와 콜 몰아주기 정황이 포착됐다고 밝혔다. ▷그러자 카카오 주도로 조직된 전문가위원회는 이 같은 의혹을 반박하는 결과를 공개했다. 외부의 교통 빅데이터·인공지능(AI) 전문가들이 작년 4월 이뤄진 17억 건의 콜 데이터를 전수 분석했더니, 가맹·비가맹이나 단거리·장거리 간의 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카카오T의 배차 알고리즘은 가장 가까운 택시 중 과거 배차 수락률, 승객의 평점, 운행횟수 등을 따져 콜을 받아들일 확률이 높은 기사를 추천한다고 했다. ▷14일 나온 공정위 조사 결과는 전혀 달랐다. 카카오는 가맹사업을 시작한 2019년 3월부터 1년여간 일반 호출이 들어와도 블루택시가 6분 이내 거리에 있으면 더 가까이 있는 일반택시보다 먼저 배차했다. 돈이 안 되는 초단거리 콜은 가맹택시에 주지 않았다. 가맹택시를 키우기 위해 배차 알고리즘을 은밀히 조작한 것이었다. 콜 몰아주기 의혹이 제기된 직후에야 알고리즘을 바꿨지만 이 역시 가맹택시에 유리했다. 덕분에 가맹 기사의 월수입은 일반 기사보다 최고 2배 이상 많았다. 직원들이 “우선 배차가 알려지면 공정위에 걸린다”는 대화를 나눈 것도 확인됐다. ▷공정위는 과징금 257억 원을 부과했지만 카카오 측은 “승객 편의를 높인 결과는 반영되지 않았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하지만 카카오가 혁신보다는 알고리즘 왜곡이라는 반칙으로 택시 시장을 장악하게 됐다는 사실에 소비자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타다, 우버 같은 경쟁사 진입을 가로막고 카카오의 독과점을 사실상 방치한 정부와 정치권에도 비판이 쏟아진다. 더 많은 모빌리티 혁신 서비스가 등장하도록 장벽을 낮추고 경쟁을 다그쳐야 플랫폼의 불공정을 없애고 소비자 편익도 높일 수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최근 미국 경매 사이트에 예상 밖 물건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트위터 본사에서 쓰던 책상, 소파, 커피머신, 오븐 등 630개 물품이다. 이 회사를 상징하는 파랑새 조형물도 포함됐다. 직원 절반을 단칼에 해고한 트위터가 비용 절감을 위해 돈 되는 건 다 내다판 것이다. 트위터를 비롯해 지난해 미국 테크기업에서 잘린 직원은 15만여 명.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으로 불리던 대표주자가 모두 동참했다. 올해도 MS가 1만 명 감원에 나서는 등 빅테크 해고 대란이 계속되고 있다. ▷구조조정 칼바람은 실리콘밸리에 이어 월가로 번졌다. 지난달 골드만삭스는 금융위기 이후 가장 많은 3200명을 해고했고 블랙록, 모건스탠리, 씨티그룹도 줄줄이 감원 계획을 내놨다. 통상 경기 침체가 오면 생산직 근로자인 ‘블루칼라’부터 타격을 입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 대량 해고는 사무직 ‘화이트칼라’에 쏠려 있다. 미 자동차 기업 포드마저 사무직 중심의 대규모 감원을 알렸다. 이를 두고 2000년 닷컴버블 때 2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에 빗대 화이트칼라 불황의 서막이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오히려 미국 블루칼라 시장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요즘 물류·소매업체 등에 지원서를 내면 면접도 없이 30분 만에 채용된다고 한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던 여가·접객 같은 블루칼라 중심의 서비스업이 리오프닝 이후 일손이 크게 달리기 때문이다. 보잉이 올해 재무·인사부서 직원 2000명을 줄이면서도 엔지니어링과 생산직 1만 명을 충원하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여행 수요가 되살아나자 밀려드는 항공기 제작 주문을 감당하기 위한 조치다. ▷이 때문인지 지난달 미국 실업률은 54년 만에 가장 낮았고, 취업자도 52만 명이나 급증해 시장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한쪽에선 감원 칼바람이 매서운데, 전체 노동시장은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의 호황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팬데믹 기간 고연봉 화이트칼라 인력이 과잉 채용된 탓도 크다. 해고가 집중된 정보기술(IT), 금융은 코로나19 수혜를 입어 급성장한 대표 업종이다. 비대면 특수와 저금리 유동성 잔치가 끝나자 기업들 실적이 악화되고 역대급 구조조정에 나선 것이다. ▷대규모 감원까지는 아니지만 채용 한파가 몰아치고 희망퇴직이 잇따르는 국내 IT 업계나 금융권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미국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상황이 뒤바뀐 가운데 ‘고용 있는 침체(Jobful Recession)’를 걱정하지만 우리는 고용도, 성장도 담보하기 어려운 처지라는 게 차이 난다. 올해 국내 취업자 증가폭은 지난해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성장률 전망치마저 나 홀로 뒷걸음질치고 있어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빚을 끌어다 패닉바잉에 나설 만큼 주택시장이 들끓었을 때 2030세대 사이에서 ‘청무피사’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다. ‘청약은 무슨, 피 주고 사’의 줄임말이다. 청약가점이 낮은 20, 30대는 바늘구멍 같은 청약 대신 차라리 프리미엄(웃돈)을 주고 아파트 분양권이나 입주권을 사는 게 낫다는 뜻이다. 청무피사에 나선 청년, 신혼부부 덕에 2, 3년 전 미분양이 쌓였던 수도권 일대 아파트들은 빠르게 남은 물량을 털어내며 최고가를 갈아 치웠다. ▷하지만 청무피사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프리미엄은커녕 분양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분양권·입주권을 내놓는 ‘마피(마이너스 프리미엄)’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가장 먼저 마피가 나온 건 수백 대 1의 청약 경쟁률을 보였던 오피스텔, 도시형생활주택이다. 분양·대출 규제 같은 겹겹의 주택 규제를 피할 수 있어 틈새 투자처로 각광받던 상품들이다.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도시형생활주택에선 분양가보다 1억∼2억 원씩 낮춘 마피 매물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비(非)아파트와 지방 부동산 시장을 거쳐 서울 아파트에서도 마피가 속출하고 있다. 입주를 1년 남긴 송파구 오금동의 A아파트는 전용면적 65㎡ 매물이 13억 원대에 나와 있다. 분양가보다 1억5000만 원가량 낮다. 지난해 초 2600 대 1의 경쟁률로 청약을 마쳤을 때만 해도 웃돈이 1억 원 넘게 붙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불과 2년 새 마피가 됐다. 서울에서도 입지가 떨어지거나 단지 규모가 작은 아파트는 더 심각하다. 강북구 수유동 B아파트의 59㎡는 초기 분양가보다 2억5000만 원가량 싸게 나왔지만 여전히 거래가 안 된다. ▷집값 하락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전셋값도 가파르게 떨어지면서 ‘억 소리’ 나는 마피가 쌓이는 추세다. 입주를 앞두고 세입자 구하기가 어려워진 데다 대출이자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집주인들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분양권을 처분하려는 것이다. 고금리 한파로 전세를 찾는 사람이 끊기고, 세입자가 면접 보듯 집주인을 심사하는 역전세난이 마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마피 매물이 안 팔리는데 올해 전국에서 35만 채 넘는 아파트 입주 물량이 쏟아져 역전세난과 마피 증가세가 동반 가속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특히 강남 4구의 입주 물량은 지난해보다 3배 이상 많아 전세계약을 갱신하려면 집주인이 5억 원 안팎의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침체가 장기화됐을 때 마피 매물을 브로커를 통해 넘기는 탈법이 성행한 적 있다. 역전세든, 마피든 그 고통이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점에서 더 세심하고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종잣돈 3000만 원으로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어 100억 원대 자산가가 된 환경미화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서울 구도심 빌라가 투자 발판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빌라왕’으로 소개하며 TV 방송에 출연하고 책도 여러 권 썼다. 청소차 대신 고급 캐딜락을 몰게 된 성공담에 많은 이들이 혹했다. 하지만 이 원조 빌라왕도 인터넷카페 회원들에게서 투자금을 받아 자기 빚을 갚은 게 들통나 4년 전 법정구속 신세가 됐다. 한때 빌라 자산가를 뜻했던 빌라왕이 요즘 전세 사기꾼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거북한 별칭이지만 빌라왕부터 건축왕, 빌라왕자, 빌라의 신까지 세입자를 등친 사기범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사망한 빌라왕 김모 씨가 1139채, 인천 건축왕이 2709채, 빌라의 신 권모 씨가 3493채를 보유했다니 사기 수법도 대담해졌다. 왕과 신으로 불리는 이들이 몸통인 경우도 있지만 조직 범죄단의 깃털인 사례가 적지 않다. 조직적 전세사기는 법망을 피해 교묘하게 이뤄진다. 대체로 건축주, 분양업체, 공인중개사, 명의를 빌려주는 빌라왕 등이 한 팀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시세 파악이 쉽지 않은 신축 빌라의 전세를 집값보다 비싸게 내놓는다. 중개사가 세입자를 구해 오면 명의를 빌라왕에게 넘겨 계약한다. 사기 일당은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수백 채 빌라를 사들여 수익을 나눠 갖지만, 세입자는 만기가 돼서야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같은 수법으로 100억 원대 피해를 입힌 빌라왕이 현재 밝혀진 것만 5명이다. 피해자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것은 전세 확정일자를 받고 전세금 보증보험에 드는 등 각종 안전장치를 마련하고도 사기에 노출됐다는 점이다. 사기꾼들은 세입자가 전입신고를 한 다음 날부터 법정 대항력이 생긴다는 걸 노려 매매와 전세를 동시에 하는 수법을 썼다. 임차인 보호를 위해 마련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보험은 공시가격의 150%까지 시세를 인정해 줬는데, 오히려 이 기준은 사기 일당이 전세금을 끌어올리는 한도로 악용됐다. 2021년 8월부터 모든 임대사업자의 보증보험 가입이 의무화됐지만 신고에 의존하는 데다 관리감독이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임대사업자로 등록한 빌라왕 김 씨도 1139채 중 보증보험에 가입한 주택은 44채뿐이다. 집주인의 세금 체납 같은 불리한 정보도 세입자들은 알 길이 없다. 이런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뒤늦게 제도 개선에 나섰지만 세입자들의 공포는 여전하다. 지난해 12월 서울의 빌라 전세계약은 1년 전보다 40% 급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10명 중 7명이 2030세대다. 자금이 부족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빌라 전세를 첫 보금자리로 택하다 보니 쉽게 사기꾼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계약 전 꼼꼼히 확인해도 중개업자가 시세라고 하면 믿을 수밖에 없는 빌라 사기 생태계에서 전 재산을 날리는 청년들이 속출하고 있다. 고금리 한파에 전세사기 공포까지 더해져 청년층은 공공임대로 내몰리는 처지다. 서울에서 최근 마감된 청년공공임대 청약 경쟁률은 400 대 1을 웃돌며 역대 가장 높았다. 치솟는 대출이자 걱정도 모자라 제2, 제3의 빌라왕을 만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현실에서 청년들은 미래를 꿈꾸기 힘들다. 악질적인 전세사기를 뿌리 뽑아야 하는 이유다. 전세사기나 전세제도의 맹점이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닌데도, 이제야 수습하는 뒷북 대응으로는 피해를 막을 수 없다. 전세사기로 피눈물 흘리는 청년과 서민들이 없도록 정부와 국회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야 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통상 인기 있는 분양 아파트들은 10만 명이 청약할 수 있다고 해서 ‘10만 청약설’이 돈다. ‘올림픽파크 포레온’ 이름으로 분양에 나선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아파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송파구로 이어지는 준강남권 입지에 1만2000채가 넘는 미니 신도시급 대단지여서 예비 청약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일찌감치 ‘분양시장 최대어’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곳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결과는 초라했다. 지난해 12월 청약에서 10만 명은커녕 2만 명이 신청해 경쟁률은 평균 5.45 대 1에 그쳤다. 청약 가점은 84점이 만점인데, 전용면적 49㎡에선 20점으로도 당첨되는 사람이 나왔다. 저조한 청약 성적은 가뜩이나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한때 23억 원을 넘었던 인근 대단지 아파트 전용 84㎡의 호가가 16억 원 안팎까지 떨어졌다. 둔촌주공 84㎡ 분양가는 발코니 확장 등을 포함해 14억 원 정도다. ▷미분양 공포를 막아세운 건 ‘1·3 부동산 대책’이었다. 분양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와 중도금 대출 규제를 없애고, 전매제한 기간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들이 대거 담겼다. 소급 적용도 해주기로 했다. 강남·서초·송파·용산구만 남겨 놓고 규제지역도 모두 풀었다. 당장 둔촌주공 청약 당첨자들이 혜택을 보게 되자 이번 대책이 ‘둔촌주공 일병 구하기’라는 얘기가 돌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엔 “둔촌주공 청약 다시 해야 한다”는 글이 이어졌다. ▷하지만 17일 계약이 마감되자 “소문난 잔치에 역시나 먹을 게 없다”는 말이 나온다. 둔촌주공 계약률은 70% 수준으로 일반분양 4786가구 중 1400여 가구가 계약을 포기했다. 특히 전용 29∼49㎡ 초소형에서 계약 포기가 속출했다. 기대 이하의 청약 경쟁률과 공급 물량을 감안하면 선방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전방위 규제 완화에도 인기 단지에서 이만큼 미계약이 발생한 것은 흥행 참패라 할 만하다. 정부의 규제 대못 뽑기도 집값 하락 우려와 금리 인상의 위력을 넘어서지 못한 셈이다. ▷높은 분양가도 미달 사태에 한몫했다. 비슷한 때 분양한 ‘강동 헤리티지 자이’는 100% 계약을 끝냈는데, 입지는 조금 떨어지지만 분양가가 4억 원 이상 낮다. 둔촌주공의 넓은 원룸, 투룸을 누가 7억∼8억 원 주고 사겠냐는 것이다. 전국에 쌓인 미분양 주택은 7년 만에 6만 채를 넘어섰고, 지난해 수도권에서 생애 처음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은 16만여 명에 그쳤다. 1·3대책으로 숨통이 트이나 싶던 부동산 시장은 열흘 만에 닥친 기준금리 인상에, 둔촌주공의 미달까지 덮쳐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게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돌아가신 아버지가 30억 원의 재산을 세 자녀에게 남겼을 때 상속세를 매기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려준 30억 원’에 대해 과세한 뒤 자녀들이 이를 3분의 1씩 나눠 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세 자녀가 ‘물려받은 10억 원’에 각각 세금을 물리는 것이다. 전자를 유산세, 후자를 유산취득세라고 한다. 우리는 1950년 상속세법이 처음 제정된 이후로 73년째 유산세 방식을 쓰고 있다. ▷뭐가 다를까 싶지만 현행 상속세는 재산이 많을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누진과세 구조여서 과세 대상이 30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낮아지면 세금이 대폭 깎인다. 위 사례의 세 자녀가 현행 유산세 체계에선 1인당 2억7200만 원을 내지만, 유산취득세가 적용되면 1억8400만 원을 부담하면 된다. 자녀공제 같은 각종 공제를 늘려주지 않아도 세금이 30% 정도 감소하는 것이다. 누진세제의 특징 때문에 형제자매가 많을수록 세금이 줄어드는 폭은 더 가팔라진다. ▷상속세가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 회원국 중 유산세 방식을 채택한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4곳이다. 독일, 일본, 프랑스 등 20개국은 유산취득세를 쓴다. 유산세는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 기준으로 세액이 결정되다 보니 물려받는 자녀들의 세 부담 능력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집과 주식을 팔고 대출까지 받는 국내 상속자들이 그래서 많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이 50%로 일본의 55%보다 낮지만 실효세율이 더 높은 것도 유산세와 유산취득세의 차이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해 정부가 상속세 과세 방식을 유산세에서 유산취득세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전문가 간담회, 해외 제도 연구 등이 한창이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서 유산취득세로의 전환이 불필요하다는 응답은 10% 정도에 그쳤다. 현재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라고 같은 세법에 묶여 있고 세율 체계도 동일한데, 증여세는 유산취득세 방식을 적용하고 상속세는 유산세 방식을 고수하는 건 문제가 있다. ▷과거 상속세는 재벌처럼 유명한 사람이 내서 ‘유명세’, 세금을 내면 바보여서 ‘바보세’로 불렸다. 하지만 요즘은 금수저가 아니어도 어쩌다 보니 상속세를 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시세 10억 원 넘는 집 한 채만 물려줘도 과세 사정권에 들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고령층 후기에 진입하는 2030년이 되면 부(富)의 이전이 본격화된다고 한다. 지금은 ‘어쩌다 상속세’일지 몰라도 몇 년 후 ‘상속세 쓰나미’로 닥칠 수 있는 것이다. 유산취득세 전환과 함께 23년째 그대로인 상속·증여세법을 손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카카오톡으로 친구들에게 선물을 자주 보내는 사람은 단순히 ‘인싸’를 넘어 은행에서 대출받기도 수월한 시대가 됐다. 요즘 인터넷은행과 카드사들이 다양한 비(非)금융정보를 활용해 고객의 신용도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대형서점 회원 기간이 길수록, 여행 앱을 많이 이용할수록 신용도를 올려준다. 전통적인 대출·카드 정보가 담아내지 못한 고객들의 소비 패턴과 빚 갚을 의지를 읽어낸 결과다. ▷과거 1∼10등급으로 매겼던 개인 신용등급은 2년 전부터 1∼1000점의 신용점수로 변경됐다. 점수에 따라 대출 한도와 금리가 천양지차여서 ‘점수 올리는 법’, ‘1000점 달성 비결’이 다양하게 공유되고 있다. 카드 한도를 최대한 늘려 30∼40%만 사용하고, 신용·체크카드를 함께 쓰고, 아파트 관리비나 공과금을 연체하지 않는 방법들이다. 대출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보다 대출을 제때 꼬박꼬박 갚아온 사람이 더 유리하다. ▷신용도가 곧 돈인 시대에 신용점수를 되레 낮추는 자영업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올해 신설된 ‘소상공인·전통시장 자금’ 신청을 앞두고서다. 정부가 신용점수 744점 이하인 소상공인과 전통시장 상인에게 연 2%의 낮은 이자로 최대 3000만 원을 대출해 주는 제도다. 은행 신용대출 금리가 연 7%를 넘어선 상황에서 5년 만기에, 연 2% 고정금리로 지원되니 신용도를 일부러 떨어뜨려서라도 정책자금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달 중 신청 날짜가 공지될 예정인데 자영업자 온라인 커뮤니티엔 “현금서비스 두 번 받았는데 며칠 지나야 점수 떨어지나”, “저축은행 소액대출 최대한 받으면 100점 정도 떨어진다” 등의 글이 잇따르고 있다. 이 같은 기현상은 정부가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직접대출 프로그램을 가동한 뒤 반복되고 있다. 지난해 초에도 신용점수 744점 이하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연리 1%, 1000만 원 한도의 ‘희망대출’을 개시하자 자발적 저신용자가 늘었다. ▷고물가, 고금리에 극심한 경기 침체까지 겹쳐 자영업자 10명 중 4명꼴로 폐업을 생각 중이라고 한다. 평년과 달리 새해 들어서도 금융권의 대출 문이 열리지 않으면서 정책자금에 기대보려는 절박한 자영업자는 더 많아졌다. 정부의 금융 지원 조치마저 사라지면 자영업자들이 갚지 못하는 부실 위험 규모가 최대 40조 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제가 나빠질 때 자영업에 가장 먼저 한파가 닥친다. 저신용자와 고신용자를 나누는 차단막 정책 대신 550만 자영업자를 아우를 수 있는 세밀한 지원이 필요하다. 자영업자 잔혹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요즘 국내 주식 투자자 가운데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의 이름과 성향까지 꿰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식당에서 “제임스 불러드는 강성 매파니 가려들어라”라는 대화가 오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매년 8차례 FOMC 정례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결정하는데, 여기서 제롬 파월 의장 외에도 11명의 위원이 투표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결정에 따라 주식·외환시장이 요동치고 대출금리도 오르내린다. ▷지난해 3월부터 숨 가쁘게 금리를 올려온 연준이 속도 조절을 시사한 건 11월 말이다. 파월 의장이 “지나친 긴축은 피하고 싶다”, “금리 인상 속도를 낮추는 게 합리적” 등의 발언을 내놓자 시장에선 피벗(정책 방향 전환) 기대감이 커졌다. 연준이 금리 인상 폭을 축소한 12월에는 “인상이 거의 막바지”라는 전망도 나왔다. 월가 투자은행들은 대체로 연준이 올해 1분기까지 금리를 올린 뒤 2분기 인상을 멈추고 이후 금리를 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FOMC 위원 12명 가운데 파월 의장을 비롯해 기준금리를 최대 7%까지 제시한 불러드 등 6명이 통화 긴축을 선호하는 매파로 분류된다. 절반은 중도파와 비둘기파로 꼽힌다. 취임 때만 해도 매파도 비둘기파도 아닌 중립 성향이었던 파월 의장은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거치면서 ‘인플레 파이터’로 변신했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12월 FOMC 회의 의사록을 보면 올해 금리 인하가 적절하다고 본 비둘기파는 한 명도 없었다. 위원들은 “물가 상승률이 목표치인 2%로 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제약적 정책 기조를 유지하는 게 적절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12월 FOMC 의사록에는 인플레이션이 103번이나 언급된다. 연준은 41년 만에 최고로 치솟은 물가를 잡기 위해 작년 말 기준금리를 4.25∼4.50%까지 끌어올렸는데, FOMC 위원들이 예측한 올해 말 금리 수준은 5.0∼5.25%로 더 높다. 의사록은 “대중의 오해로 금융 여건이 부적절하게 완화되면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연준의 노력이 복잡해질 것”이라며 시장의 금리 완화 심리에 대한 은근한 경고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시장은 여전히 연준의 경고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예상보다 더 빠르게 가라앉고 있기 때문이다. ‘위드 코로나’를 선언한 중국의 코로나19 확산세도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다. 극심한 경기 침체와 미국의 확고한 긴축 의지 사이에서 올해 첫 기준금리 결정을 앞둔 한국은행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한은이 정부에서는 독립했지만 연준으로부터는 독립하지 못했다”는 이창용 한은 총재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독일의 연금개혁을 이끈 발터 리스터 전 노동사회부 장관은 와인 1병을 21년째 따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2002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연금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을지를 두고 내기해 받은 와인이라고 한다. 리스터 장관을 필두로 독일 정부는 2001년 공적연금을 덜 주고, 정부 보조금이 결합된 사적연금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개혁에 나섰다. 가입자에게 줄어든 연금 수령액을 매년 공지하는 법안도 이듬해 못 박았다. 현지에서 동아일보 취재진을 만난 리스터는 이 와인을 소개하며 “당시 개혁 반발을 떠안고 물러나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연금개혁이 답”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15일 생중계된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개혁은 인기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반드시 해내겠다”며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을 본격화할 뜻을 밝혔다. 156분 회의에서 1시간을 3대 개혁안에 대해 설명할 정도로 확고한 의지를 내비쳤다. 3대 개혁과제는 시급하고 중요한 국가적 현안이지만 역대 정권마다 폭탄 돌리기를 하듯 미뤄 왔다. 특히 국민연금을 포함한 공적연금 개혁은 역대 정부마다 야심 차게 추진하다가 용두사미로 끝났다. 그나마 땜질식 처방을 해오던 것도 문재인 정부에선 아예 사라졌다. 이러다 보니 월급에서 떼는 국민연금 보험료 비율은 24년째 9% 그대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보험료율(18.3%)의 절반에 불과하다. 소득대체율(생애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비율)도 2007년 7월 이후 줄곧 40%다. 이대로라면 2039년부터 국민연금은 적자가 나고 2055년이면 적립금이 바닥나 1990년생 이후로는 연금을 한 푼도 못 받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저출산 고령화 속도를 보면 이보다 더 빨라질 수도 있다. 국민연금 개혁은 지금의 ‘낸 것보다 더 받는’ 구조에서 ‘더 내고 덜 받는’ 방식으로 바꾸는 답이 뻔한 문제다. 관건은 실행력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 연금개혁 완성판이 나오도록 지금부터 시동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도 내년 3월 나올 국민연금 장기재정추계 결과를 토대로 10월 정부 개혁안을 확정하겠다고 했다. 이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밝힌 추진 일정보다도 한참 늦다. 연금특위는 민간자문위원회에 의뢰해 복수 개혁안을 만든 뒤 내년 4월까지 단일안을 확정할 방침이다. 국민연금 개혁은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인 2027년까지 미룰 일이 아니다. 2018년 4차 국민연금 재정추계가 나온 이후 정부가 토론회와 공청회만 이미 수십 번 열었고,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연금개혁에 대한 국민 공감대도 커졌다. 독일 리스터 장관은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연금제도가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1998년 ‘낸 만큼 돌려받는’ 식으로 연금개혁에 성공한 스웨덴은 실무작업단을 꾸려 최종 개혁안을 도출하기까지 2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에겐 내후년 총선까지가 골든타임이다. 총선·대선 등 선거가 닥치면 더 어려워지는 만큼 집권 초기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속도전에 나서야 한다. 미래세대를 위해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
요즘 주식 투자자들과 금융투자업계 종사자들은 혼란스럽다. 2023년이 4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가 내년 1월 시행되는지, 안 되는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투세 시행을 둘러싼 여야 간 대립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현재 정부와 국민의힘은 2년 더 늦춰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내년 강행을 고수하던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신중한 접근” 발언을 계기로 며칠 전 조건부 유예안을 내놨다. 금투세는 주식, 펀드, 파생상품 등 금융투자로 얻은 수익이 연간 5000만 원을 넘어서면 22∼27.5%(지방세 포함)의 세율로 원천징수하는 세금이다. 2020년 여야 합의로 내년부터 금투세를 도입하는 세법을 통과시켰다. 현재는 상장 주식을 종목당 10억 원 이상 보유하거나 지분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대주주로 분류해 주식 매매 차익에 20%의 세금을 매기고 있다. 주식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주주를 제외한 일반투자자에게 사실상 면세 혜택을 준 것이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 기본 원칙과 형평성을 감안하면 부동산이나 은행 예금처럼 금융투자 소득에 대해서도 적정한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도 금투세를 이미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도입 시기가 꼭 내년이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2년 전 여야 합의 당시는 초저금리에 따라 주가가 치솟던 대세 상승기였다. 이와 달리 현재 주식시장은 고금리와 고환율, 글로벌 경기 침체 여파로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한미 간 금리 역전으로 자본 유출 우려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금투세가 시행되면 가뜩이나 얼어붙은 투자 심리가 더 악화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정부가 추산한 금투세 과세 대상자는 약 15만 명, 전체 주식 투자자의 1% 남짓이다. 민주당은 금투세 유예는 극소수 고액투자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기 때문에 ‘부자 감세’라며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 1%의 큰손이 국내 증시를 외면하면 99%의 개미 투자자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개인투자자 단체가 민주당사 앞에서 ‘주식시장 대재앙’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금투세 유예 요구 시위를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예 기간 동안 미흡한 금투세 제도를 보완하는 게 자본시장과 금융 세제 선진화에 도움이 되는 길이다. 금투세를 도입한 선진국은 주식을 장기 보유한 투자자에게 절세 혜택을 주지만 우리는 이런 지원 없이 과세에만 초점을 맞췄다. 투자자가 지정한 기본계좌를 제외하고 다른 계좌에서 생긴 소득은 일단 세금을 뗀 뒤 이듬해 확정신고를 해야 더 낸 세금을 돌려주는 원천징수 방식도 손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8월 금투세 유예 방침을 밝힌 뒤 금융투자업계는 관련 시스템 구축을 늦췄다. 준비가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에 들어가면 큰 혼란이 예상된다. 자산시장이 흔들리고 기업 자금 조달마저 막힌 상황에서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민주당이 강행한 임대차법이 의도와 다르게 전월세 대란을 불러온 것처럼 금투세도 1%를 겨냥하려다가 99%에게 피해를 주는 정책 실패가 돼서는 안 된다. 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
10월 27일 열린 ‘11차 비상경제민생회의’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80분간 이어진 회의가 통째로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종전까지 대통령 모두발언만 공개됐지만 이날은 윤석열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 대통령실 참모들이 모여 경제 현안과 대책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노출됐다. 엄중한 경제위기 상황을 맞아 정부의 위기 극복 의지를 보여주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준비하는지 알려 국민의 공감을 얻으려는 취지였을 것이다. 이날 부동산 규제 완화책이 발표되고 수출·투자 확대를 위해 다양한 지원 방안이 논의된 것은 의미가 있었다. 대통령 주재 회의를 실시간 공개할 만큼 국민과 적극 소통하겠다는 태도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생중계 회의가 기대에 못 미쳤다는 반응이 많다. 비상경제회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비상한 경제 인식이나 비상한 대책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복합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했지만 발전된 논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일부 장관은 원전·방산 수출, 2차전지 수주 실적 등 호황을 누리는 일부 업종의 성과를 설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현안인 자금시장 안정에 대해선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추 부총리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로 시장 변동성이 확대됐다”고 지적하고선 수출 활성화 대책만 강조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대출 규제 완화 방안만 집중 보고했다. 생중계 내내 온라인에는 “왜 레고랜드 사태는 언급이 없느냐”는 댓글이 넘쳐났다. 민간에선 기업 돈줄이 막혀 아우성인데 원론적인 산업 정책을 논하고 있으니 국민들 눈에는 한가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금리 급등과 부동산 경기 침체로 살얼음판을 걷던 자금시장은 강원도가 레고랜드와 관련한 채무보증을 철회하면서 마비 상태가 됐다. 정부가 지난달 23일 ‘50조 원+α’ 규모의 시장 안정 대책을 내놨지만 실기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금융당국이 뒤늦게 연일 대책 회의를 열고 채권시장안정펀드 추가 조성, 예대율 규제 완화, 은행채 발행 최소화 등을 쏟아내고 있지만 시장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주에도 공기업들이 발행한 트리플A 등급의 초우량 회사채는 2008년 금융위기 수준의 금리를 제시하고서야 겨우 투자자를 찾았다. 경기 침체 우려 속에 자금줄까지 막혀 현대차, SK하이닉스 등 대기업도 투자 계획을 축소하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만기 3개월 이내 단기사채를 찍어 기존 빚을 갚는 돌려막기 악순환에 내몰리고 있다. 1년 안에 기업이 갚아야 할 단기차입금만 사상 최대인 532조 원에 이른다. 돈줄이 마른 상황에서 실물경기 침체가 겹치면 정상적인 기업도 버티지 못할 수 있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건실한 기업이 일시적 자금난으로 흑자 도산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윤 대통령이 27일 “쇼는 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비상한’ 위기의식을 갖고 금융과 실물경제의 동반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는 메시지는 분명히 줘야 한다. 당장은 자금 경색을 막되 구조 개혁과 규제 혁파에도 나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
내년 편성된 기초연금 예산은 18조5304억 원이다. 빈곤층 사회안전망의 핵심인 기초생활보장제도 예산(16조4059억 원)보다도 많다. 물가 상승을 반영해 연금액이 4.7% 인상된 측면도 있지만 수급자가 빠르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만 65세 인구 중 소득 하위 70%에 속한 628만 명이 매달 30만8000원을 받는데, 내년엔 665만 명이 32만2000원을 수령한다. 그나마 18조 원대 예산은 예외 조항이 있어 줄어든 규모다. 현재 소득 상위 30%의 노인은 아예 배제하고 부부가 동시에 기초연금을 받으면 20%를 감액한다. 또 기초생활보장 급여와 연계해 생계급여를 받는 고령자에겐 사실상 기초연금을 주지 않고, 국민연금을 많이 받아도 최대 절반을 삭감한다. 그런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국회 대표 연설에서 ‘기초연금을 월 40만 원으로 올려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겠다’며 입법 추진을 선언했다. 지난주 대한노인회중앙회를 방문해서 “부부가 같이 살면 기초연금을 깎는데 패륜 예산에 가깝다”고 성토했다. 민주당은 관련 법안을 ‘7대 민생법안’에 포함시켜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할 태세다. 그러자 국민의힘도 “기초연금을 40만 원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하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가세했다. 기초연금 40만 원은 윤석열 대통령 공약이라며 ‘원조’를 자처했다. 야당의 기초연금 확대법을 두고 “무책임한 선심성 정책”이라며 비판하던 게 얼마 전이다. 하지만 대선 공약을 뒤집는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노인 지지층 이탈이 우려되자 부랴부랴 수습에 나선 모양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올 4월 처음 900만 명을 돌파했고 2024년 1000만 명을 넘어선다니 고령층 민심을 의식한 여야의 행태가 새삼스러울 건 없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는 점에서 고령층 지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막대한 비용이다. 기초연금은 연금으로 불리지만 국민연금과 달리 전액 세금으로 운영된다. 현행 제도를 유지하더라도 2030년 37조 원, 2050년이면 120조 원의 재정이 필요하다는 게 보건사회연구원의 추계다. 노인 70%에게 40만 원을 지급하면 2030년 49조3000억 원, 2050년 160조 원을 투입해야 한다. 민주당 주장대로 노인 전체로 확대하고 각종 감액 규정을 없앤다면 재정 부담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데도 여야 모두 재원 마련 방안엔 입을 닫고 있다. 나라 곳간은 뒷전인 채 노인 표를 잡으려는 정치권의 포퓰리즘 속에 기초연금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10만 원씩 점프했다. 2008년 월 10만 원으로 출발한 지 15년 만에 40만 원이 될 상황에 놓였다. OECD가 10년째 “재정 부담을 낮추고 저소득층에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선별 지급해야 한다”고 권고하지만 이번에도 여야 모두 거꾸로 가고 있다. 국회는 공적연금 개혁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노인 빈곤 해소라는 본래 취지를 되살려 기초연금의 역할과 기능을 재조정해야 한다. 표심만 노린 여야의 퍼주기 경쟁은 재정도, 복지도 모두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