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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코로나19 감염자가 폭증하고 있다. 어제로 중국이 우한의 바이러스성 폐렴을 세계보건기구(WHO)에 처음 보고한 지 2년이 됐지만, 미국 유럽 등 각국 확진자 수는 연일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바이러스 물결이 해일 수준을 넘어 쓰나미급이 됐다는 경보가 요란하다. 곳곳에서 새해맞이 행사들이 대거 취소됐고 항공편 취소나 대중교통 운행 중단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세계는 또다시 혼란과 불안 속에 팬데믹 3년 차를 맞았다. ▷감염병의 확산 속도는 인류의 이동 속도에 비례한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하나의 지구촌을 코로나19가 장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각국은 우선 국경의 빗장부터 걸어 잠그고 개인의 이동과 만남을 차단하고 나섰다. 바이러스는 개인의 일상은 물론이고 사고방식까지 바꿨다. 정보기술(IT)에 기초한 비대면 초연결 사회는 이제 뉴노멀(새로운 정상)이 됐다. 인간관계의 단절, 개인의 파편화로 인한 ‘코로나 블루’는 우리 정신건강마저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는 국가별 속성을 드러냈다. 폐쇄적 독재국가의 대응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북한은 국경선 1∼2km 안에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침입자는 무조건 사살하도록 했다. 중국은 방역에 드론이나 안면인식 기술까지 동원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코로나는 새로운 전체주의마저 양산하고 있다. 요즘 세계 정치학계에선 위기를 이용해 반대세력을 억누르는 ‘기회 억압(opportunistic repression)’이란 개념이 회자된다. 아프거나 약한 사람에 대한 감염병 유발을 뜻하는 의학용어 ‘기회 감염(opportunistic infection)’과 상통해서다. ▷팬데믹 2년은 부국과 빈국 간 격차로 인한 비극의 악순환을 확인해줬다. 각자도생의 자국 우선주의는 ‘백신 민족주의’에서 분명해졌다. 선진국은 넉넉한 백신을 확보하고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 회복)에 나서는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세계화가 낳은 양극화의 그늘을 파고들며 계속 진화했다. 백신은커녕 변변한 방역물품도 없이 방치됐던 빈국들에서 변이 바이러스가 속출했고 그 변이는 부메랑이 되어 선진국을 다시 위협하고 있다. ▷바이러스의 전염성과 치사율은 반비례한다고 한다. 오미크론 변이가 최초로 퍼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확산의 정점을 찍고 하락세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이다. 앞으로 나올 변이도 종국엔 유행성 독감 같은 계절병이 될 것이고, 만능백신이나 치료제 같은 인류의 대응 능력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그 방패를 뚫고 새로운 역병이 언제 어디서 창궐할지 알 수 없다. 결국 최선의 팬데믹 대책은 각자가 아닌 공동의 대응, 즉 지구촌 공존의식의 회복일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한 정보를 전문으로 다루는 미국의 인터넷매체 NK뉴스가 최근 김정은 집권 10년을 맞아 전 세계 북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6차례에 걸쳐 게재했다. 그 대표성이나 객관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전직 외교관이나 연구자, 활동가 등 오랫동안 북한을 관찰해온 각국 전문가 82명의 의견을 모은 결과인 만큼 북한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데는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0년 전 ‘과연 몇 주, 몇 달을 버틸까’ 관심의 대상이던 애송이 지도자가 지금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그걸 가능케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전문가 다수가 김정은이 2018년 중국과의 전략적 유대를 복원한 점을 꼽았다. 반면 최대 실책은? 2019년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 즉 ‘플랜B’를 준비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10년 뒤 북한은 어떨까? 식량난 같은 위기 속에서도 제재 완화를 얻어내든 중국에 기대서든 간신히 버티며 핵을 붙들고 있을 것이라고 대다수가 내다봤다. 미국의 북한 다루기는 어땠을까. 지난 10년 최고의 정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외교였다고 다수가 평가했다. 반면 최악의 선택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꼽혔다. 그렇다면 앞으로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비핵화는 가망 없다고 보고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 체결, 지속적 관여 정책을 추진할 때라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핵 포기 압박과 제재 강화를 주장한 응답자의 두 배가 넘었다. 어찌 보면 뻔할 수도, 보기에 따라선 의외일 수도 있는 내용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10년을 되짚어 보고 향후를 내다보는 것이니 그 나름 북한을 잘 안다는 전문가라 해도 지금 이 시간의 무게, 꽁꽁 가려진 북한 정보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더욱이 김정은은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나라 전체를 2년 가까이 봉인해 놓았다. 그럼에도 아직껏 내부의 동요 조짐은 노출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김정은의 권력 공고화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전문가 다수가 북한이 비핵화를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을 향해 북한을 포용하라는 의견을 내놓았다는 점이다. 북한 위협을 축소하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라는 주문이다. 물론 미국 행정부는 결코 내켜 하지 않겠지만, 김정은의 완강한 버티기와 대외 여론전이 최소한 북한 관찰자들에겐 깊은 인상을 심어준 셈이다. 하긴 문재인 정부의 종전선언 추진도 북한을 좀 안다는 이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다. 김정은은 오늘로 북한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등극한 지 10년을 맞는다. 며칠째 노동당 전원회의를 주재하며 ‘승리의 해’를 결산한다지만 뾰족한 현실 타개 방안이 나올 리 없다. 김정은은 또다시 허황된 자존감을 앞세운 미사여구를 쏟아낼 것이고, 대외노선에서도 대화와 대결이 뒤섞인 기회주의적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다. 당분간은 밀무역과 사이버 해킹으로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모진 권력자라도 배곯는 주민의 원성을 이길 수는 없다. 김정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진흙구덩이 참호에 처박힌 채 무한정 버티기는 어렵다. 다만 당장 나오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우선 코로나 공포부터 떨쳐내야 한다. 한국 대선도 지켜봐야 한다. 이런 북한에 한미 양국도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섣불리 나서기보다는 북한의 도발 유혹을 제어하며 비핵화로 유도하는 정교한 관리전략이 필요한 때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972년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비밀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김일성을 만나 그의 동생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을 답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난색을 표했다. “그는 사실 몹시 아픕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반나절밖에 일을 못 합니다.” 이후락이 “그럼 반나절이라도 좋으니 보내 달라”고 했지만, 김일성은 ‘식물성신경부조화증’이란 병명까지 대며 거절했다. 그래도 이후락은 확인해야 했다. 연회에서 김영주에게 집요하게 술을 권했다. 술을 마신 김영주는 그 자리에서 졸도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김영주 대신 서울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다녀갔지만 남북 최초의 공식 합의문인 7·4공동성명에는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과 김영주가 서명했다. 남측은 실무협상 때부터 이후락의 대화 파트너로 김영주를 지목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보부장이자 정권 2인자의 상대라면 마땅히 북한 실권자이자 후계 1순위자여야 했다. 하지만 김영주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외로 신병 치료를 다니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고, 조카 김정일과의 권력투쟁에서도 밀려 퇴장 수순을 밟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김영주를 후계자로 잘못 짚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 매체들이 15일 김정은의 종조부인 김영주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1920년생으로 김일성보다 여덟 살 아래인 김영주는 101세로 세상을 떴다. 일제강점기 땐 빨치산 형을 둔 탓에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형이 알선해준 덕에 모스크바로 유학도 갈 수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뒤 귀국해선 권력의 핵심인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시작해 부장까지 초고속으로 올라갔다. 형을 대신해 조카의 훈육도 맡았다. 군사훈련에 불참하고 영화 삼매경에 빠져 있던 김정일을 찾아내 두들겨 패선 훈련소로 복귀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김정일의 첫 근무지도 삼촌 아래의 조직지도부였다. ▷김영주가 후계자로 떠오른 것은 1967년 반종파투쟁이었다. 김일성 체제에 도전하는 갑산파를 숙청한 이 권력투쟁의 선두에 선 것이 김영주와 김정일이었다. 하지만 숙부와 조카의 합작은 거기서 끝났다. 원만한 성격의 지식인 타입인 김영주는 권력 의지가 약했고 충성경쟁에도 능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작은아버지가 주체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아들의 보고를 받고 동생을 지방으로 추방했다. 그렇게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권력에서 멀어진 이래 유배 생활을 전전했고 말년엔 실권 없는 명예직에 머물렀지만 그는 천수를 누렸다. 병 때문이든 천성 때문이든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선 철저하게 낮췄기에 가능했을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주재로 9, 10일 열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에 대한 중국의 반발이 격렬하다. 중국은 ‘민주: 인류의 공동가치’라는 주제로 맞불 형식의 국제포럼을 열었고, 중국식 민주 제도의 우월성을 내세운 ‘중국의 민주’ 백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폐해를 열거한 ‘미국의 민주 상황’ 보고서도 잇달아 냈다. 여기에 미국이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까지 발표하자 중국은 “결연히 반격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미국의 이념적 도발에 중국은 유례없이 전면적 공세를 펴고 있다. 과거 중국은 큰 나라를 이끌고 신속한 부강을 이루려면 강력한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방어논리를 내세웠다. 덩샤오핑은 “우리 체제의 강점은 효율성이다. 우리는 결정이 나면 바로 실행에 들어간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제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창의적으로 제기했다는 ‘전 과정 인민민주’를 내세우며 진짜 민주주의가 뭔지를 두고 미국과 한판 붙어 보자고 나섰다. 미중 대결은 이제 국제정치의 현실이 됐다. 쇠퇴하는 패권국과 부상하는 도전국의 대결이 평화로울 수 없었음은 과거 수많은 강대국의 명멸사에서 알 수 있다. 무역과 기술, 규범, 군사 분야로 확대돼 온 미중 대결은 이제 이념과 체제 경쟁에까지 이르렀다. 수십 년간 세계를 갈라놨던 미소 냉전의 재연, 신(新)냉전의 도래가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선 수십 년 냉전질서를 무너뜨린 봉쇄(containment) 정책의 재가동을 외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나온다.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중국 러시아 등 전제(專制) 국가에 맞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복원하겠다는 바이든의 대선 공약에 따른 것이다. 대만을 포함해 110개국이나 참여하는 화상회의에서 과연 어떤 성과가 나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전선은 선명하게 그어졌다. 하지만 정상회의 초대장을 받지 못한 오랜 동맹과 우방에선 불만이 터져 나왔고, 백악관의 초청 기준을 둘러싼 논란과 잡음도 적지 않다. 이번 정상회의가 오히려 역풍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현실주의 국제정치 학자들은 보편가치를 내건 자유주의 대외정책으로는 강고한 민족주의 노선을 이길 수 없다고 설파한다. 중국은 오히려 미국을 향해 ‘중병(重病) 든 난장판 나라’라며 손가락질하고 있다. 특히 대선 결과에 불복한 의사당 난입 사태를 들어 조롱한다. 이런 중국의 선전공세가 미국과 척을 진 권위주의 독재자들의 심정적 공감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게 바이든이 처한 국내 정치 현실이다. 바이든은 대외적으론 독재자들과 대결하면서 국내적으로 전임자의 포퓰리즘 그늘과 싸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차기 대선 출마를 벼르는 터에 바이든의 임기 1년 차 지지율은 벌써 바닥 수준이다. 당장 내년 중간선거에서 의회 권력을 공화당에 내주면 조기 레임덕에 허덕일 것이라는 위기감이 바이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바이든은 지금 트럼프와의 차별성을 놓고 분투하고 있다. 소름 끼치는 악행을 저질러 온 독재자들에게도 친밀감을 과시하던 트럼프다. 심지어 시진핑의 주석 임기 제한 철폐 소식을 듣고선 “그는 이제 종신 대통령(주석)이다. 훌륭하다”고 농반진반(弄半眞半) 부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라 안팎으로 2개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바이든이 국내에서 자신감을 얻기 전까진 민주주의와 인권을 앞세운 ‘편 가르기’식 대외정책 기조도 누그러지긴 어려울 것 같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자타 공인 ‘외교 대통령’이다. 특히 세계 지도자들과의 넓고 깊은 개인적 친분은 그의 자산이다. 바이든의 옛 측근은 말한다. “카자흐스탄이든 바레인이든 어디가 됐든 그를 떨어뜨려 놓아 보라. 거기서 그는 30년 전 만났던 누군가를 발견할 것이다.” 전직 상원의원도 거든다. “의회를 방문한 외국 손님에게 ‘여기는 스미스 의원, 여기는 존스 의원’ 소개하다가도 바이든 차례에선 늘 손님이 먼저 ‘안녕, 조’라고 인사한다.” ‘모든 정치는 개인적(personal)’이라는 게 바이든의 지론이다. 외교 현장에서도 그 얘기를 꺼내며 “모든 게 궁극적으로 신뢰에 기초하고 신뢰는 솔직한 관계에서 나온다. 그러면 상대의 의도가 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곤 했다. 박력도 결기도 없어 보이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경청, 타협의 리더십이 오늘의 바이든을 만들었다. 바이든은 시진핑 중국 주석과도 어떤 얘기든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관계를 맺었다. 2011년 베이징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함께 국수도 먹고 지방 여행도 했다. 당시 시진핑은 중동의 독재정권이 줄줄이 무너지던 ‘아랍의 봄’ 사태를 무척 궁금하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들의 실책은 인민과의 접촉을 잃고 자만에 빠져 고립됐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그런 길을 피해야 한다.” 그런 사이였기에 바이든은 그제 자신을 ‘오랜 친구(老朋友)’라 부르는 시진핑과의 화상회담이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앉아 모니터를 보면서 격의 없는 대화를 하기는 어려운 법. 게다가 시진핑은 10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바이든은 둘 사이에 대해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만 오랜 친구는 아니다.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다”라고 밝힌 바 있다. 미중 관계를 되돌아보면 바이든과 시진핑의 친분은 예외적이었던 한 시절의 얘기일 수 있다. 1979년 수교 이래 미중 사이는 늘 긴장 상태였다. 특히 미국 정치에서 중국은 목에 걸린 가시였다. 대통령선거 때면 늘 ‘중국 때리기’가 유행했다. 대만에 무기 수출을 주장한 로널드 레이건, ‘베이징의 도살자’라고 비난한 빌 클린턴,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한 조지 W 부시 등 역대 대통령들은 당선 뒤에야 비판 수위를 누그러뜨리곤 했다. 중국에 각을 세우지 않고 선거를 치른 것은 버락 오바마, 바이든 콤비의 2008년 대선이 유일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구원투수로 나선 중국을 껴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바이든은 러시아 지도자에겐 “당신 눈에선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바이든에게 시진핑은 말이 통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걸까. 시진핑의 ‘중국몽’은 이미 그때 시작됐다. 슈퍼파워를 쩔쩔매게 만든 금융위기를 시진핑은 미국 쇠퇴의 서막이라고 진단했다. 힘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던 시절을 끝내고 중국이 세계에 우뚝 설 시대가 왔다고 봤다. 주석에 오르자마자 아시아의 지역패권을 추구했고, 이제 공산당 100년 역사까지 다시 쓰며 글로벌 파워로 질주하고 있다.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친구는 없다. 사적인 친분이 국가 간 힘의 관계, 질서의 변화를 이길 수는 없다. 물론 영원한 적(敵)도 없다. 하지만 작년 대선 때 ‘베이징 바이든’ ‘조진핑’이라 공격받던 바이든에겐 당장 국내 정치도 힘겨운 상황이다. 그의 인맥외교가 미중 대결이 충돌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완충장치로나마 작동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핵무기는 그 존재 자체가 가공할 위협이다. 그 효용은 적의 핵 공격 의지를 사전에 약화시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억지(deterrence)에 있다. 실제 사용하지 않아도 사용 가능성만으로 적을 두렵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억지력이다. 1945년 일본의 두 도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래 많은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그 대열에 끼어들기를 열망하는 이유이자, 지난 76년간 한 차례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핵무기의 주술적 위력 때문에 그 사용과 관련해선 말을 아끼며 ‘의도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절대무기가 세계로 확산하는 것을 방치해야 하는가. 아무런 지침도 없이 위험한 사람에게 핵 버튼을 맡겨둬도 되는가. 적어도 핵 공격을 받지 않는 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원칙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연말에 내놓을 핵태세검토(NPR)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고민하는 문제들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이미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시작됐다. ‘핵 없는 세계’를 내세운 오바마 대통령은 선제 불사용 원칙 도입을 깊이 검토했지만 정책에 반영하지 못했다. 당시 부통령을 지낸 바이든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선제 불사용을 천명하는 대신 ‘미국과 동맹에 대한 핵 공격을 억지하는 것’으로 핵무기의 ‘단일 목적(sole purpose)’을 명시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대선 때도 그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핵정책 전환 검토에 당장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은 그것이 선제 불사용과 다를 게 뭐냐고 반발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이 동맹에 약속한 핵우산이나 확장억지 공약을 약화시켜 결국엔 러시아와 중국을 대담하게 만들 ‘적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강한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자체 핵개발을 촉발해 그 지역의 군비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고 한다. ▷핵 선제 불사용은 1964년 중국이 가장 먼저 세계에 공언한 원칙이지만 중국도 최근 핵 증강에 나서면서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러시아도 소련 시절 선제 불사용을 약속했지만 공산권 붕괴 이후 그 약속을 철회했다. 북한은 선제 불사용을 거론하면서도 ‘선제적 응징’을 위협한다. 커지는 안보 불확실성 때문에도 미국의 정책 전환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선제적인 핵무기 통제론도 만만치 않아 바이든 행정부의 고심은 깊을 수밖에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2014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반세기 넘게 적대시해 온 양국 간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1년 반 넘게 진행된 양국 간 비밀협상이 막판 벽에 부딪쳤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두 정상에게 개인적 서한을 보내 중재자로 나섰고 양국 대표단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듬해엔 쿠바와 미국을 연쇄 방문해 화해의 지속을 축원했다. ▷교황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다. 성속(聖俗)의 권력을 아우르던 중세시대에 비하면 그 영향력은 크게 줄었지만 초국가적 권위에 바탕을 둔 교황의 스마트파워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주요 사안마다 교황이 내놓은 한마디 한마디의 울림과 무게는 남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바티칸 교황청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예방한 자리에서 북한 방문을 거듭 요청한 것도 ‘하느님의 외교관’으로서 교황이 이뤄낼 수 있는 기적 같은 외교에 기대 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북한이) 초청장을 보내주면 기꺼이 가겠다”고 답했다. 3년 전 답변 그대로다. 문 대통령은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교황 방북 초청을 제안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교황이 오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고 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그 다음 달 교황청을 방문해 이런 뜻을 전했고, 교황은 그때도 “공식 초청장이 오면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북한은 바티칸에 초청장을 보내지 않고 있다. ▷북한도 한때 교황 방북을 추진한 적이 있다. 동구권이 우르르 무너지던 1991년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외무성에 교황 초청을 위한 상무조(TF)를 편성했다.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다급함에서였다. 북한 당국은 과거 독실했던 한 할머니 천주교 신자를 어렵사리 찾아내 바티칸에 데려가기도 했다. 교황청은 그 할머니의 눈빛만 보고도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온 진짜 신앙을 알아봤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이 일을 계기로 종교의 ‘무서움’을 절감했고, 상무조는 두 달 만에 슬그머니 해체됐다.(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교황 방북이 성사되려면 김정은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소탈하고 거침없는 프란치스코 교황인 만큼 절차와 형식을 따지지 않는 파격 방북을 추진할 수도 있다지만 초청도 없이 갈 수는 없다. 김정은이 할아버지처럼 궁여지책으로 교황을 초청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냉전기 두 차례 폴란드 방문이 자유노조 결성과 공산정권 붕괴로 이어졌던 역사를 김정은이 모를까. 그 공포감부터 이겨내야 가능한 일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중국이 비밀리에 핵무기 탑재용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을 했다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최근 보도는 전방위로 격화되는 미중 갈등이 본격적인 군사 경쟁으로 치닫고 있음을 시사한다.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중국의 극초음속활공비행체(HGV) 시험은 ‘물리학 법칙을 거스르는 기술적 성취’였고 이는 미국 정보당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로켓에 실려 지구궤도에 올라간 극초음속 미사일은 음속의 5배 이상 속도로 예측불가의 구불구불한 궤적을 그리며 표적을 타격한다. 남극을 돌아 미국 본토를 때리는 ‘궤도폭탄(FOBS)’이 될 수도 있다. 북극을 거쳐 날아오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맞춰 구축된 미사일방어체계(MD)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중국은 “우주비행기 시험일 뿐”이라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핵무기를 싣고 랜딩기어 없이 추락하는 우주왕복선을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중국의 핵 증강 야심은 대규모 ICBM용 지하격납고 건설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미국 전문가들은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중국 서북부 간쑤성과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각각 100여 개에 달하는 ICBM 격납고가 건설 중임을 확인했다. 중국은 수십 년 동안 격납고 20개만 운영하는 ‘최소 억지력’의 핵전략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중국은 이제 최소 핵전략을 걷어차고 본격적으로 ‘공포의 핵 균형’을 준비하는 징후가 뚜렷하다. 중국의 조용한 핵전력 증강이 장래의 일이라면 목전의 화약고는 대만이다. 중국은 ‘미수복 영토’인 대만에 대해 노골적인 힘자랑을 하고 있다. 이달 초 중국은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사상 최대 규모의 군용기 무리를 잇달아 진입시켰다. 최근엔 러시아와 함께 군함들을 일본 열도로 보내 해상 시위도 벌였다. 이 모든 게 지역적 군사 대결에선 미국에 밀리지 않는다는, 나아가 핵 대결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것이다. 이에 맞서 미국은 대만과 한층 밀착하고 있다. 그간 유지해온 ‘전략적 모호성’, 즉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지만 대만의 자력방위도 지원하는 모호한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행보로 중국을 발끈하게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이 방어에 나설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 우리는 그럴 책무가 있다”고 전혀 모호하지 않은 답변을 내놨다. 국무부는 대만의 유엔기구 참여를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대만은 이제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이 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내년 3연임을 결정지을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더욱 공세적으로 대만 통일의 열기를 북돋울 것이고 그럴수록 대만의 독립 움직임은 가속화할 것이다.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이 우발적 충돌을 낳고 미국의 개입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저 기우가 아닐 수 있는 이유다. 대만해협의 파고는 한반도에까지 미치고 있다. 미중 대결을 틈타 북한은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철도기동미사일 극초음속활공체 등 각종 신형 무기를 발사했다. 최신 무기들을 모아 전람회까지 열었다. 곧 집권 두 번째 10년에 접어드는 김정은이다. 중국의 뒷배를 믿고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미중 사이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운 줄타기 외교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북핵 해결은 고사하고 북한의 준동을 걱정해야 하는 데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차출, 전술핵이나 중거리미사일 배치 같은 선택의 쓰나미에 직면할 수 있다. 대만해협의 경보음에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2001년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김대중(DJ)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자신을 ‘디스 맨’이라고 칭한 부시의 결례 못지않게 DJ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회담에 배석했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이례적인 이석(離席)이었다. 부시가 대화 도중 갑자기 파월에게 눈짓을 하자 파월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파월은 전날 언론에 “새 행정부는 전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밖으로 나간 그는 기자들에게 “내가 앞서간 것 같다”며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다. 부시 행정부 초기 네오콘(신보수주의) 강경파에 둘러싸여 있던 파월의 처지를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자메이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파월은 학군장교(ROTC)로 임관한 이래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했다. 냉전 말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쳐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때 역대 최연소이자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에 올랐다. 그는 1991년 걸프전쟁을 이끌며 무력 개입은 분명한 목표 아래 압도적인 전력을 사용해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는 ‘파월 독트린’을 보여줬다. 그 명성 덕에 공화당 대선 후보로 심심찮게 거론됐다.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으로서 최고위 외교관이 된 것은 그에겐 큰 시험대였다. ▷파월은 군 출신으로 국무장관이 된 조지 마셜, 나아가 대통령까지 오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꿈꿨을지도 모르지만 부시 행정부에선 외롭게 분투해야 했다.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강경한 대외정책에 맞서 온건 실용파로서 목소리를 냈지만 역부족일 때가 많았다. 때론 원치 않는 ‘총대’도 메야 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전 유엔 연설은 그의 이력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됐다. 슬라이드까지 동원해 후세인 정권이 비밀리에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다. 훗날 그는 “그 일로 고통스럽다”고 털어놨다. ▷파월은 공직을 떠난 뒤 당파와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군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겐 넌더리를 냈다. 지난해 6월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엉겁결에 군복을 입은 채로 트럼프의 정치 이벤트에 등장해 구설수에 오른 뒤 군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사임해야 할까요?” 파월은 단호했다. “제길, 안 돼. 그 자리를 절대 받지 말라고 했건만. 트럼프는 완전 미치광이야.” 밀리는 사표를 내는 대신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있었던 실수’에 대해 공개 사과했다. 18일 파월의 별세에 애도와 헌사가 넘치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무거울 이들은 ‘영원한 선배’를 떠나보내는 군인들일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2017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초대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임명된 마이크 폼페이오. 야심만만한 하원의원 출신 폼페이오는 취임하자마자 트럼프 대통령의 최우선 어젠다에 맞춰 북핵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고자 했다. 그래서 찾은 인물이 막 은퇴한 한국계 CIA 요원 앤드루 김. 그의 조언은 이랬다. “CIA에 인재들이 꽤 있죠. 한데 정보 수집, 분석, 비밀작전 등 여러 부서에 흩어져 있습니다. 각 부서는 칸막이가 높아서 최고의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요. 이들을 하나의 텐트 아래로 데려와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합니다. 김정은이 누구인지, 무엇이 그를 움직이는지 알아내려면 뭔가 다른 시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CIA 분석가와 요원 수백 명이 ‘코리아미션센터’라는 텐트 아래 모였고, 앤드루 김이 초대 센터장을 맡았다. CIA 안에 중동 유럽 같은 지역이나 대테러 같은 임무가 아닌 특정 국가를 전담하는 첫 미션센터였다. 당초 코리아센터의 임무는 북한 정보의 수집과 분석보다는 비밀작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통령의 승인이 내려지면 언제라도 북한 지도자를 전복시키는 은밀한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보기관으로서 CIA의 명성은 추락할 대로 추락해 있었다. 특히 이라크전쟁 때의 비밀작전 실패는 ‘고장 난 장난감 집’이란 오명까지 안겼다. 코리아센터 창설은 그런 실패의 역사를 만회할 기회이기도 했다. ▷북한의 잇단 핵·미사일 도발과 북-미 정상 간 험악한 말폭탄이 오가던 시절, 코리아센터가 어떤 대북 비밀공작을 기획했고 뭐라도 실행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그러나 이후 북-미 간 정세가 급변하면서 코리아센터는 대북 협상의 막후 주역으로 부상했다. 특히 김 센터장은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폼페이오의 평양 방문을 매번 수행했고, 통역마저 배제된 김정은과의 회담에 배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래 북-미 관계가 장기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코리아센터는 다시 짙은 베일 속으로 들어갔다. ▷CIA가 7일 새 조직으로 ‘중국미션센터’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넘버1 과제인 중국 견제를 위한 개편인 셈이다. 이에 따라 코리아센터는 동아시아를 담당하는 부서로 흡수될 것이라고 한다. ‘은둔의 왕국’ 타이틀을 은근히 즐기는 북한으로선 자기네 정보를 캐고 지도부를 해치려는 조직의 해체를 반기겠지만, 그만큼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엔 섭섭할 수 있다. 특히 거듭된 대화 손짓에 짐짓 ‘일없다’면서도 도발이든 협상이든 한판 벌여야 하는 김정은 처지에선 자신의 속내를 읽어줄 이들을 못내 그리워할지 모른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중국 인민해방군 농구 선수 출신으로 홍콩에서 무역회사로 성공했다는 ‘붉은 자본가’ 쉬쩡핑. 1997년 초호화 빌라를 사들이고 거창한 곡예 이벤트를 벌이는 별난 거부(巨富)로 뉴스의 인물이 됐다. 우크라이나에 처박혀 있던 옛 소련의 미완성 항공모함 ‘바랴크’를 사서 해상 카지노로 쓰겠다는 그의 계획은 기발해 보였다. 거액의 뇌물과 중국산 독주를 동원한 향응 끝에 성사시킨 거래가는 2000만 달러. 하지만 그 뒤엔 몇 배 비싼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 45t 분량의 설계도 서류와 기름칠 잘된 새 엔진을 제공받는 것이었다. 축구장 3배 크기의 항모를 중국으로 옮기는 데만 4년이 걸렸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 터키를 지나기 위해선 중국 지도부가 나서 내밀한 외교적 거래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항모는 2002년 다롄 조선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국은 7년을 더 기다렸다. 미국과 주변국의 경계심을 우려한 시간 벌기였을까. 녹슨 선체를 닦아내고 페인트칠한 뒤 눈요깃거리로 방치해 뒀다. 마침내 2009년, 중국은 그때까지 남겨뒀던 바랴크함의 옛 깃발과 이름을 제거하고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012년 중국 최초의 항모 랴오닝함을 취역시켰다. 15년에 걸친 비밀 공작과 외교전, 오랜 기다림의 산물이었다. 그 이전까지 중국은 근해 방어에 주력하며 눈에 띄지 않는 비대칭 전력, 이른바 ‘암살자의 철퇴(殺手7)’ 개발에 주력했다. 세계 최대의 기뢰(機雷) 전력과 잠수함 함대, 세계 최초의 ‘항모킬러’ 탄도미사일 보유국이 됐다. 그러던 중국이 원거리 대양작전용 항모를 갖기로 한 것은 국가 전략의 근본적 수정을 의미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식 자본주의의 쇠퇴로 본 중국은 힘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던 전략에서 벗어나 이제 할 일을 적극 하겠다며 자기 억제의 고삐를 풀고 일대 전환에 나선 것이다. 이후 중국은 맹렬한 속도로 새 항모 제작에 나섰고 핵추진 항모까지 개발하고 있다. 대잠전과 대공전, 상륙전 능력도 키우며 해외 기지까지 건설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의 거침없는 군사굴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래 본격적인 견제에 나섰지만 그것은 중국의 경제적 팽창 억제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군사적 견제는 우발적 충돌 같은 위험 부담 탓에 장기 전략 차원의 조심스럽고 제한적인 대응에 그쳤다. 하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접근법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지난달 미국이 영국과 함께 호주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 기술을 제공하겠다며 ‘오커스(AUKUS) 동맹’을 출범시킨 것은 그 변화를 상징한다. 늑대외교라 불리는 중국의 강압적 행태에 분개한 호주의 요청에 따른 것이고 핵무기가 아닌 핵추진 기술에 한정됐다지만, 그간 미국이 고수해 온 핵확산 방지 원칙에 역행하는 이례적 조치다. 따지고 보면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의 탄도미사일 사거리 제한을 전면 해제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외신들은 핵무기 보유국도 아닌 호주의 핵잠수함 보유, 핵잠수함도 없는 한국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에 주목한다. 역내 국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나서 잠재적 패권국을 견제하게 하는 강대국의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전략이 가동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제정치 학자들이 꼽는 역외균형의 가장 효율적 수단은 핵무장 허용이다. 한국의 핵무장도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제라도 감당해야 할 미래일 수 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일본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은 당 자금을 관리하고 공천권과 인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넘버 2’다. 이 자리를 5년 넘게 지내며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킹메이커 역할도 했던 역대 최장수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82)가 1일 기시다 후미오 새 총재 체제를 맞아 물러났다. 니카이는 대표적인 친한파, 친중파로 꼽힌다. 주변국과의 관계가 험악해진 정냉(政冷)의 시기에 경제 교류를 통한 경열(經熱)을 주도하는 등 내각의 우경화 노선에 완충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국과는 장쩌민 주석 시절부터 최고위층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한국에는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의형제’의 연을 맺은 사이라고 한다. ▷니카이의 후임 간사장으로는 아마리 아키라 세제조사회장이 기용됐다. 아마리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아소 다로 부총리와 함께 자민당의 핵심 ‘3A’로 불리는 아베의 최측근이다. 아마리는 아소가 이끄는 아소파 소속이지만 이번 총재 선거에서 같은 파벌의 고노 다로 행정규제개혁상 대신 기시다를 지원했다. 특히 아베와 아소 간 소통 채널을 맡아 결선투표에서 기시다를 민다는 막판 합의를 이끌어냈다. 당의 정책을 담당하는 정무조사회장에는 총재 선거에서 아베의 공개 지원을 받았던 여성 극우파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이 발탁됐다. 아소는 부총재에 임명됐다. ‘3A 체제’의 재가동을 알리는 당직 인사가 아닐 수 없다. ▷기시다의 4일 총리 취임과 함께 발표될 내각 인선에서도 3A의 색채가 두드러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우선 내각의 핵심인 관방장관에는 2차 아베 내각에서 문부과학상을 지낸 마쓰노 히로카즈 중의원이 내정됐다고 한다. 당초엔 아베의 심복이자 우익 강경파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상이 떠올랐지만 ‘아베 일색이냐’는 비판 여론을 의식해 그나마 덜한 인물로 바뀌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3A, 특히 상왕(上王) 아베의 영향력이 부각되면서 정작 기시다가 이끄는 기시다파에선 내각에 얼마나 기용될지가 관전 포인트가 될 정도다. ▷자민당은 1993년과 2009년 두 차례 정권을 잠시 내준 것을 제외하곤 60년 초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는 정당정치란 없고 파벌정치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도 있다. 기시다는 내 편도 없지만 적도 없다는 무색무취의 정치인. 그가 국민적 인기가 높은 고노를 제칠 수 있었던 것은 파벌정치의 결과였다. 총재 당선 직후 일성도 “내 특기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한일관계를 고려하면 온건 성향의 기시다 선출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에게 드리운 3A의 그림자는 너무 짙어 보인다. 얼마 남지 않은 친한파마저 사라지고 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지난주 여당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정부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 역사는 문재인 정부를 해방 이후 75년 만에 일본을 넘어선 정부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 근거란 게 K방역 성공, 카불의 기적, 대일 무역전쟁 승리, 선진국 진입 등이다. 따지고 들면 하나같이 아이들의 유치한 자랑으로 들릴 얘기인데, 그걸 엮어놓으면 이런 ‘역사’가 만들어진다. 정치의 얄팍함이야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우리 정부의 대외전략에도 배어 있는 것은 아닌지는 짚어야 할 문제다. 그 자랑거리 하나하나는 정부에서 나온 것들이다. 높아진 국가 위상을 알려 국민적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실상과 달리 부풀려진 것이고, 나아가 고약한 비교의 기준으로 이용된다면? 그중 하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7월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바꿨다는 대목을 보자. 사실 한국은 오래전부터 모든 국제기구에서 선진국으로 활동해왔다. 그럼에도 UNCTAD에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한 것은 무역협상에서 일부 예외를 인정받기 위한 의도적 방치 또는 게으름의 소산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제자리 찾은 것을 멋쩍어해야 할 판인데,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에까지 등장하는 홍보 소재가 됐다. 한국이 일본을 넘어섰다는 주장은 어떤가.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과 국가경쟁력 순위, 국가신용평가 등급에서 앞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3배인 세계 3위이고, 한국이 손님으로 초대됐다고 자랑하던 주요 7개국(G7)의 멤버인 주인 국가다. 군사비도 여전히 한국보다 많이 쓴다. 그런 일본이 만만한 상대인가. 눈을 들어 미중 경쟁으로 격동하는 동북아 정세를 보면 한일 간 성쇠(盛衰)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입방아질인지 분명해진다. 중국의 급부상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은 사실 과장이 아니다. 중국 GDP는 이미 미국의 70%를 넘었고, 추월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1차 대전 때의 독일이나 2차 대전 때의 독일-일본 합산, 냉전 절정기의 소련까지 지난 100년간 그 어떤 미국의 적(敵)도 GDP가 미국의 60%를 넘은 적이 없다. 중국은 이제 미국의 패권을 끝낼 ‘100년 만의 대변혁기(百年未有之大變局)’를 맞았다며 국내 애국주의 열풍과 대외 팽창정책, 늑대외교로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과거 수십 년간 중국은 힘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며 와신상담했다. 그러던 중국의 노골적 변신은 내년 20차 당 대회를 앞둔 시진핑의 장기집권 구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중 패권의 향배는 당장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패권경쟁이야말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시험대라는 점이다. 중국의 거대한 경제 규모와 세계시장 확장, 나아가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같은 첨단기술 투자는 가히 위협적이다. 반면 미국의 군사력과 소프트파워는 중국을 압도하고, 특히 동맹 네트워크는 중국을 누르는 최대 무기가 될 것이다. 갈등의 한일관계지만 미중 패권다툼 속에선 동병상련의 처지이다. 정작 걱정해야 할 일은 갈수록 더 벌어지는 중국과의 격차다. 잘나가던 이웃의 부진을 고소해하는 것은 내려다보던 이웃의 성장에 눈을 치켜뜨는 것만큼이나 유치하다. 더욱이 정치라는 이름의 ‘정신승리’는 국가의 눈도 멀게 한다. 올해는 루쉰의 ‘아Q정전’ 주간지 연재 100년이 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미국의 3대 핵전력(nuclear triad)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전략폭격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로 구성돼 있다. 땅과 하늘, 바다에서 쏘는 다양한 핵무기 투발 수단을 갖춤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기습공격 능력과 함께 적의 선제공격에도 살아남아 보복하는 제2격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특히 SLBM은 바닷속 잠행의 은밀성 때문에 가장 안전하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핵전력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ICBM을 개발한 북한이 기를 쓰고 SLBM을 개발하는 것도 그 은밀한 파괴력 때문이다. ▷우리 군이 최근 SLBM 개발의 마지막 단계인 잠수함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SLBM 개발은 지상 시험발사에 이어 바지선을 이용한 수중 시험발사, 잠수함 장착 시험발사까지 3단계를 거치는데, 지난달 취역한 3000t급 잠수함에서 실시한 두 차례 시험발사를 성공시켰다. 특히 잠수함 발사관에서 공기압력으로 미사일을 물 밖으로 밀어낸 뒤 엔진을 점화시키는 핵심 기술인 콜드 론치(cold launch)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고 한다. 한 차례 더 시험발사를 마치고 양산에 들어가면 한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인도 중국 북한에 이은 8번째 SLBM 보유국이 된다. ▷북한은 2015년 ‘북극성-1형’, 2019년 ‘북극성-3형’ SLBM의 수중 시험발사에 성공했고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열병식에서 ‘북극성-4ㅅ’과 ‘북극성-5ㅅ’을 공개했다. 북한이 “강력한 선제타격 능력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배경이다. SLBM 개발에서 북한이 한발 앞선 듯하지만 정작 SLBM을 탑재할 3000t급 신형 잠수함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잠수함을 진수해 시험발사에 성공해야 완전한 전력화가 이뤄진다. 물론 북한 SLBM은 핵탄두 탑재 목적인 만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도 그 기술력은 충분히 입증한 셈이다. ▷한국의 미사일 개발은 1970년대 미국의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을 모방 개량하는 ‘백곰’ 사업으로 시작됐다. 백곰의 시험발사 성공에 놀란 미국이 ‘핵·미사일 확산 방지’를 내세워 개발 중단을 요구하면서 생겨난 것이 ‘미사일지침’이다. 그간 미사일 개발의 족쇄였던 이 지침이 5월 종료되면서 한국군은 탄두 3t짜리 전술핵급 탄도미사일도 개발한다. 인공지능(AI) 극초음속 무인자율 같은 미래 ‘게임 체인저’ 개발에도 나선다. 핵무기는 핵으로만 대항할 수 있는 절대무기지만, 자폭할 생각이 아니라면 사용하기 어려운 최종무기다. 핵무장은 아니더라도 북한의 섣부른 도발을 억제할 대항 수단 개발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무인항공기(드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특히 전투용 드론의 등장, 즉 무인기와 정밀유도폭탄의 결합은 수백∼수천 km 밖에서 아군의 희생 없이 표적을 타격하는 군사적 혁신이자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표적을 오인해 엉뚱한 희생자가 생기고 민간인까지 폭발에 휘말려 사망하는 부수적 피해로 인해 현지의 반미(反美) 감정을 확산시켰다. 미국은 그 해법도 밀리테크(군사·military와 기술·technology의 결합)를 통한 보다 정교하고 깔끔한 무기 개발에서 찾고 있다. ▷미군이 28일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주에서 이슬람국가(IS)의 한 분파인 IS-K의 고위급 표적 2명을 드론 공격으로 제거했다. 이틀 전 카불 공항에서 미군 13명을 포함해 2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자폭 테러의 기획자와 조력자를 보복 살해한 것이다. 미 국방부는 민간인 사망자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외신들에 따르면 이번 보복 조치에 사용된 드론은 ‘하늘의 암살자’로 불리는 무인공격기 MQ-9 리퍼, 타격 무기는 ‘닌자 미사일’로 불리는 헬파이어 미사일 특수개량형(AGM-114 R9X)이었다고 한다. 적국 수뇌부나 테러조직 지휘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는 ‘참수작전’의 핵심 전력이 동원된 것이다. ▷닌자 미사일은 기갑차량 파괴용인 헬파이어 미사일을 인간 표적용으로 개량한 비폭발성 운동에너지 미사일이다. 폭약이 든 탄두가 없고 그 대신 강철 칼날 6개가 표적에 충돌하기 직전 펼쳐져 내리꽂히면서 반경 50cm 영역을 파괴한다. 주변 피해를 최소화하고 목표만 확실히 해치우는 것이다. 그 칼날이 일본 자객 닌자(忍者)의 암살용 검처럼 생겼는데, 1970년대 미국에서 많이 팔린 주방용 식칼 브랜드 긴수(Ginsu)를 따서 ‘나는 긴수’라고도 불린다. 2017년 실전 배치된 이래 알카에다 등 테러 지휘부 제거에 사용됐다. 그 피격 현장 사진을 보면 주변에 폭발 흔적이 없고 차량만 갈가리 찢긴 모습을 볼 수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이번 보복작전 지침은 “그냥 진행하라(Just do it)”였다고 한다. 바이든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다. 끝까지 뒤쫓아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며 미군을 희생시킨 테러엔 철저한 응징으로 본때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미국은 일단 조기 철군을 통해 아프간의 수렁에서 벗어나더라도 테러와의 장기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 그것은 밀리테크를 더욱 앞세운 특수작전일 것이다. 하지만 깨끗한 전쟁은 없고, 뛰어난 기술적 우위도 잘못된 전략 아래선 승리할 수 없다. 실패로 끝난 20년 전쟁의 초라한 뒷모습이 보여주듯.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열흘 전 카불의 함락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슈퍼파워의 초라한 모습에 경악했다. 미국의 냉정한 변심에 동맹국들은 몸서리쳤다.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과 다른 동맹은 다르다며 철군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프간 이후’를 주목해 달라고 주문한다. “우리가 아프간을 떠나는 것에 누가 가장 실망하는가? 중국과 러시아다. 그들은 우리가 계속 아프간에 매달려 있기를 바란다.” 많은 이들이 카불에서 1975년의 사이공을 떠올렸다. 사실 베트남 패전이 던진 충격파는 훨씬 컸다. 미국의 시대는 끝났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미국 사회 전반에 도덕적 냉소주의가 만연했고 지도층 역시 비관론에 빠졌다. 세계는 그 다음 무너질 도미노가 어디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베트남의 굴욕 이후 15년, 미국은 동서 냉전에서 승리하며 세계 유일 슈퍼파워로 우뚝 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동구권 전체가 흔들리면서 소련 제국이 해체됐다. 이라크를 상대로 한 전광석화 같은 걸프전쟁 승리는 미국의 부활을 알리는 불꽃쇼였다. 미국은 어떻게 베트남의 치욕을 전례 없는 승리로 만들었을까. 베트남 종전 이후에도 미국이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야 온전히 소련과의 전방위 전략경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허수아비 군대라고 조롱받던 미군을 재정비하고 ‘더러운 전쟁’이란 딱지가 붙은 비밀작전도 벌였다. 특히 전략가들은 소련 군사력의 실체를 면밀히 분석해 미소 간 숨겨진 국력의 차이까지 알아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상대적 우위를 찾았고 그것으로 소련의 열세나 약점을 공략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가뜩이나 과도한 군비 지출로 허덕이던 소련에 전략 핵 증강과 전략방위구상(SDI) 같은 장기 경쟁전략을 들이밀면서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강요했다. 그 결과 소련을 경제적으로 탈진시켰다. 소련의 자업자득도 한몫했다. 베트남 이후 소련은 아프리카와 중미 지역에서 대리세력들의 전쟁을 지원하며 과도한 확장에 나섰다. 그 정점이 아프간 침공, 10년의 수렁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바이든이 제시한 ‘아프간 이후’가 카불의 치욕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미국은 더 큰 싸움에 집중하려 한다. 그 상대는 소련 같은 노쇠한 제국이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도전자 중국이다. 중국이라고 베트남 이후 소련의 교만이 낳은 역사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분명 달라졌다. 중국은 더 이상 힘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100년 만의 세력균형 대변동기’라며 자신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관영매체는 “아프간은 대만의 운명에 대한 전조”라며 ‘대만 흔들기’에 나섰다. 정작 놀라운 것은 대만의 차분한 반응이다. 이미 미국의 버림을 받았던 아픈 역사 때문일까. 정부는 물론 정치권 모두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프간 이후 격화될 패권경쟁 속에 한국은 더욱 괴로울 것이다.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의 조화’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이냐 중국이냐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정교하고 민첩한 생존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동맹이냐 자주냐는 부박한 주장만 횡행한다. 미국의 전략가들도 소련의 급작스러운 붕괴를 예측하진 못했다. 단지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 뒤엔 혜안을 채택한 지도자와 그를 뽑은 국민이 있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아프가니스탄에서 하늘은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폭격으로 존재가 소멸되는. 제가 재무장관이 됐을 때 3년 이상 살 가능성은 5% 이하라고 생각했죠. 아프간인 대다수가 하루 세 곳 이상의 라디오방송을 듣습니다. 세계(정세)가 중요하니까요. 그들의 가장 큰 걱정이 뭘까요. 버려지는 것입니다.” 세계적 명사를 초청하는 지식콘퍼런스 TED 강연에서 2005년 아슈라프 가니 당시 카불대 총장은 소련군 점령 이래 아프간이 겪은 공포의 삶을 이렇게 전했다. ▷가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10대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한, 사실상 절반은 미국인으로 산 인물이다. 소련 침공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그는 문화인류학자가 되어 세계은행과 미국 대학에서 근무했다. 미군의 탈레반 축출 이후에야 24년 만에 귀국해 재무장관으로서 정부개혁을 주도했다. 45년간 보유하던 미국 시민권은 2009년 첫 대선 도전을 위해 포기했다. 2014년, 2019년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그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일었고 선거에 불복하는 경쟁자와 권력을 나눠야 했다. ▷카불 함락 며칠 전까지 대통령으로서 가니는 미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를 비난하며 군벌과 국민에게 반(反)탈레반 저항과 봉기를 촉구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마지막 처신은 촌부보다 못 했다. 누구보다 먼저 줄행랑을 쳤다. 행선지조차 밝히지 않은 외국으로 도주했다. 카불 주재 러시아대사관 관계자가 전한 그의 탈출 행적, 차량 4대에 가득 찬 돈을 헬기에 실으려다 모두 싣지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버리고 떠났다는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가니는 사흘 뒤에야 아랍에미리트에 체류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페이스북 동영상을 통해 “더 많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거기 남았다면 25년 전 일이 되풀이됐을 것”이라며 1996년 탈레반이 카불 장악 직후 당시 대통령을 공개 처형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가 도망치며 먼저 떠올린 것은 좁은 하수구에서 피범벅이 돼 최후를 맞거나 수염이 덥수룩한 채 토굴에서 끌려나온 독재자들이었을지 모른다. 공포에는 지도자의 위신도 품격도 없다. ▷가니는 “아프간에 돌아가기 위해 상의하고 있다”며 귀국 의지도 밝혔다. “떠나올 때 내겐 옷 한 벌과 조끼, 샌들뿐이었다”며 자금 횡령 의혹도 부인했다. 하지만 국민을 버린 배신자, 실격(失格)한 지도자의 말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아프간에 남은 암룰라 살레 제1부통령은 가니의 부재에 따른 합법적인 임시 대통령을 자임했다. 가니의 귀국 가능성도 희박해 보이지만 설령 돌아간다 해도 아프간에 그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한 김여정은 2일 담화에서 통신선 복원에 대해 “단절됐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연결시켜 놓은 것뿐”이라며 그 이상의 의미를 달지 말라고 했다. 통신선 복원 소식에 “가뭄 깊은 대지에 소나기 소리”라던 여당 대표나 “천금과도 같은 남북 소통의 통로”라던 통일부 장관이 듣기 무색할 야멸친 언사지만, 사실 그것은 김정은이 올해 1월 노동당 8차 대회에서 밝힌 ‘대남 셈법’ 그대로다. 당시 김정은은 ‘3년 전 봄날’을 거론하며 그때로의 복귀 여부는 “전적으로 남조선 당국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가는 지불한 것만큼, 노력한 것만큼 받게 된다. 우리 요구에 화답하는 만큼, 합의 이행을 위해 움직이는 것만큼 상대해주면 된다.” 그 말대로라면 통신선 재연결은 남측이 그간 보여준 성의와 노력이 가상해서 내준, 딱 그만큼의 보상이다. 작년 6월 북한이 통신선을 끊으면서 이유로 들었던 대북전단 살포를 막기 위해 남측 정부는 국내외의 온갖 비판을 무릅쓰고 대북전단금지법을 만들었고 최근 그 법에 따라 경찰 수사와 검찰 송치까지 진행했다. 북한은 그에 상응한 셈을 치렀다는 얘기다. 사실 많은 이들이 통신선 복원 자체보다 더 주목한 대목은 7·27 정전협정 체결일에 맞춘 이벤트가 성사되기까지 남북 정상이 ‘여러 차례’ 친서를 교환했다는 점이었다. 당장 여권 내부에서 4차 남북 정상회담의 기대감에 들뜬 목소리가 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청와대는 ‘4월부터 여러 차례’라고 발표했고, 북한 조선중앙통신도 ‘최근 여러 차례’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그제 국가정보원은 국회에 ‘두 차례 교환’이라고 보고했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선 ‘10여 차례’라고도 전했지만, 친서는 4·27 판문점선언 3주년 전후와 5·21 한미 정상회담 이후 두 번에 걸쳐 4통이 오간 것이다. 한 차례가 아닌 ‘두 차례’여서 ‘여러 차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어감 차이는 엉뚱한 추측 또는 오해를 낳기 십상이다. 두 차례 친서 교환은 ‘충분한 소통’보다는 ‘기대의 확인’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할 것이다. 지금 김정은의 관심은 남한이 아닌 미국에 있다. 대북제재에 자연재해에 코로나19까지 3중고에 시달리는 처지에서 김정은은 자기 입으로 식량난을 시인했다. 어떻게든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이 턱밑까지 차올라 와 있다. 코로나 유입 공포감 속에서도 대외 행보를 서서히 준비하던 차다. 다만 남한이 아무리 남북관계에서 ‘자율적 공간’을 확보했다 한들 모든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음을 김정은도 모르지 않는다. 남측에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또 다른 숙제를 던진 것도 그 때문이다. 3년 전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대화할 만한 분위기 조성에 나서 달라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끊었던 통신선만 달랑 이어 놓고 그걸로 1차 계산은 끝났으니 다음 숙제도 해내면 다시 주판알을 튕겨 보겠다는 고약한 태도지만, 북한에 목매 온 문재인 정부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이 나섰고, 결국 청와대는 미국에 매달리는 형국이다. 미국으로선 동맹국의 뜻을 야박하게 무시할 수도 없지만, 불량국가의 못된 버릇을 그대로 받아줄 수도 없다. 물론 북한이 비핵화 대화에 나선다면 훈련 일정을 미루는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자면 북한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김정은이 한미 간 이간질 이후 입을 싹 씻는다면? 동맹 불신과 내부 갈등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누구겠는가.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961년 6월 말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기 사흘 전에야 중국 측에 방소 일정을 통보하며 그 목적은 ‘(북-소) 군사동맹조약 체결이 핵심’이라고 알렸다. 중국은 급박하게 움직였다. 우리와도 조약을 맺자며 서둘러 방중 초청장을 보냈고, 북-소 조약을 토대로 만든 조약문을 지도부에 회람하랴, 대대적인 환영행사도 준비하랴 분주했다. 김일성이 북-소 조약 체결 닷새 만에 북-중 우호조약까지 얻어낸 데는 이런 교묘한 ‘등거리 외교’가 있었다. 두 조약은 모두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하면 상대방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즉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군사적 맹약을 담았다. 차이가 있다면 북-소 조약이 10년 유효기간에 이후 5년마다 연장하도록 한 반면, 북-중 조약은 ‘쌍방 간 수정 또는 폐지 합의가 없는 한 계속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한 점이다. 중국이 소련보다 강한 보장을 해준 것은 소련과의 격한 갈등 속에 북한을 끌어안으려는 구애의 산물이었다. 김일성은 1960년대 초 공산권 내부의 균열을 십분 활용했다. 특히 사회주의 맹주 소련에 비해 고립된 처지였던 중국으로부터는 막대한 경제원조는 물론 유리한 국경조약까지 얻어냈다. 약소국이지만 강대국 사이에 경쟁을 부추기며 주도권을 쥐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尾巴搖狗·미파요구) 외교’의 결과였다. 이후 중국의 문화혁명과 개혁개방, 탈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그런 북한의 외교적 기교는 쉽게 통하지 않게 됐다. 7월 11일로 체결 60년이 된 북-중 우호조약도 중국 내에선 오래전부터 사문화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미중이 패권 대결로 치닫는 요즘, 죽었던 ‘북-중 혈맹’이 새삼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북-중 밀착이 가시화된 것은 5월 말 한미 워싱턴 정상회담 직후였다. 한미가 ‘동맹 업그레이드’를 과시한 지 닷새 만에 중국 외교부장은 북한 대사를 만나 ‘우호조약 60주년 기념활동’ 개시 의사를 밝혔다. 이후 양국의 기고문 교차 게재, 평양 기념연회 개최, 김정은 시진핑의 친서 교환이 이어졌다. 한미 동맹 강화에 맞선 북-중 동맹의 부활이었다. 한 달 가까이 모습을 감췄던 김정은이 기다렸다는 듯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다. 6월 4일 당 정치국 회의를 시작으로 중앙군사위 확대회의, 중앙위 전원회의, 정치국 확대회의를 잇달아 주재했다. 부쩍 살이 빠져 때꾼해진 눈으로 간부들을 노려보며 대대적인 문책인사도 단행했다. 북-중 화물운송 재개를 위한 방역장 건설이 지연되자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한다. 비빌 언덕이라곤 중국밖에 없는 김정은의 조바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전략적 지위와 능동적 역할을 높여 유리한 외부환경을 주동적으로 만들겠다”며 미중 대결구도에서 몸값을 높이겠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미국을 향해 “대화도 대결도 준비하겠다”며 넌지시 유화 제스처도 보였다. ‘대화 메시지’라는 해석에 여동생을 내세워 부인했지만 그건 중국의 지원부터 받고 나서 보자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게 북한은 비핵화를 외면하면서 당분간 중국에 기대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마냥 북한을 챙길 수는 없다. 중국은 북한의 붕괴를 방관하지 않겠지만 핵장난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김정은은 할아버지의 외교를 흉내 내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김일성이 외친 ‘자주외교’ ‘자력갱생’도 기실 줄타기용 허울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들 손자에게 물려준 것도 핵을 껴안고 굶주리는 나라일 뿐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태평양 연안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여름철에도 선선해 에어컨 없이 지내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곳곳에서 산불이 나고 있다. 최근 일주일간 719명이 돌연사했는데, 예년의 3배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 서북부 워싱턴주와 오리건주도 온열질환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폭염은 북미 지역만이 아니다. 중부 유럽과 러시아 시베리아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CNN은 “기후변화가 북반구를 태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살인적 폭염의 원인은 ‘열돔(heat dome)’의 발생에 있다. 열돔은 대기권에 발달한 고기압이 반구형 지붕을 만들어 뜨거운 공기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표면에 가두는 현상인데, 하강기류가 지상 공기를 누르면서 기온이 오른다. 이런 열돔은 찬 공기와 따뜻한 공기를 섞어주는 제트기류가 기후변화로 인해 약해지면서 더 빈번하고 더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 북미를 덮친 폭염은 기후변화가 없다면 수만 년에 한 번 일어날 만한 일이라지만 지금처럼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된다면 매년 나타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이제 폭염은 예고된 위협이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 폭염으로 대규모 사망 사태가 닥칠 수 있다는 묵시록 같은 경고가 예사롭지 않다. 최근 AFP통신이 입수한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의 보고서 초안은 지구의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0.4도 오를 경우 지구 인구의 14%가 5년마다 최소 한 차례 극심한 폭염에 노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대도시가 가장 큰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폭염을 폭풍이나 홍수와 달리 극적인 재앙 현장도, 막대한 재산 피해도 없지만 훨씬 많은 희생자를 낳는 ‘조용한 살인자’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장기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당장 폭염 예보에 따른 휴업이나 휴교, 실내 대피를 권고하는 경보 시스템 구축, 그늘막이나 무더위쉼터 같은 대피시설의 마련, 나아가 건물 외부를 흰색으로 칠하고 식물을 심는 조치들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난데없는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이 쨍쨍 쏟아지는 날씨가 이어지더니 이제 한반도는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듯하다. 하지만 이 장마가 끝나고 더운 공기가 한반도 상공에 갇히기라도 하면 우리나라도 언제든 최악의 폭염에 시달릴 수 있다. 111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뜨거웠다는 2018년 여름의 폭염을 압도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다만 폭염은 코로나19와 달리 충분히 예고된 만큼 철저한 대비로 재앙을 막아야 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