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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친구로서의 충고가 아니다. 우리 쪽에서 정리해서 전달하는 입장이다. 네 답변은 사과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영화 ‘친구’의 대사 같은 이 말은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친문 핵심인 황희 장관이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한 말이다. 두 사람은 67년생 동갑내기로 친구처럼 지냈다. 당시 금 전 의원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표결에서 기권한 일에 대해 공개 사과를 요구받았다. 금 전 의원은 이를 거부했다. “민주당을 떠나라” “사퇴하라” 등 극성 지지층의 문자폭탄이 쇄도했다. 지역구에선 “당에서 금 전 의원을 찍어내기로 결정했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금 전 의원은 이후 치러진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금 전 의원이 지난달 말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한 이 사연이 새삼 떠오른 것은 최근 신현수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논란 때문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왜 우리 편에 서지 않느냐’는 취지로 신 수석을 몰아세웠다”고 한다. 금 전 의원과 신 수석 논란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우리 편’이다. 어느 정권이나 피아 구분을 안 할 순 없다. 하지만 지금 여권은 ‘내 편’ ‘네 편’을 지독하게 나눈다. 같은 편 안에서도 ‘우리’의 뜻과 다르다고 판단되면 찍어내기의 대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과거 소신파로 불렸던 한 재선 의원은 요즘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그는 “나도 좀 살자. 그리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는데, 나도 정치적으로 클 기회를 한번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쓴소리를 하려면 작게는 논공행상에서 제외되고, 크게는 집권세력의 비호에서 배제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 언뜻 대통령을 떠올리기 쉽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있고, 정치게임에 능숙하지 않다는 것이 여권 내부의 공통된 반응이다. 대통령을 둘러싼 몇몇 친문 핵심 의원들, 청와대 일부 인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정치전문가그룹이 코어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금 전 의원도 “황 의원이 얘기했던 ‘우리 쪽’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는 지금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뜻을 가늠할 방법은 있다. 이른바 ‘카톡 문파’로 불리는 극성 지지층의 목소리다. 이들이 카카오톡 대화방, 당 게시판 등 SNS상에서 내놓는 주장은 ‘우리’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좌표’를 찍고 문자폭탄, 항의전화를 퍼붓는 대상이 있다면 일단 ‘우리’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의심해 봐야 한다. ‘우리’와 공명하는 ‘카톡 문파’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낀 당 지도부와 의원들은 그들에게 끌려가고, 그들의 주장이 민주당 전체의 뜻으로, 다시 국민의 뜻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당 지도부가 머뭇거렸던 법관 탄핵소추안 처리나, 당내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중대범죄수사청(가칭) 설치안 등이 탄력을 받고 있는 것도 같은 흐름이다. 들여다보면 민주당이 강경 일색인 것은 아니다. 사석에선 이 같은 당의 행태에 분개하는 의원들이 많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다. ‘카톡 문파’의 표적이 되면 제2의 금태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토론과 비판정신을 강점으로 하던 민주당이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하지만 내심은 모두가 ‘우리’가 되고 싶을지 모른다. 적어도 말없이 웃고 따라주는 것이 권력이 주는 따뜻한 자리와 보호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민주당 의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기업들을 도우며 경제를 새로 도약시키겠습니다. 새해는 ‘회복’과 출발’의 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코로나를 넘어 더 큰 도약을 시작하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의 신년사는 미래를 주시했다. ‘공정’과 ‘개혁’을 강조했던 과거와 달랐다. ‘기업’과 ‘경제’를 앞세웠다. 여권은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과 ‘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 등 경제·사회 분야에서 나름의 입법 성과를 거뒀다. 이제는 ‘코로나 극복’을 위해 기업을 도와 경제 활성화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김태년 원내대표도 2월 국회를 앞두고 곳곳에서 “기업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규제 혁신을 해 나가겠다” “2월 임시국회에서 규제 혁신 입법을 대거 처리하겠다”며 친기업 행보를 예고했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새해 통화에서 “올해는 기업들의 애로 사항을 적극 반영해 규제를 풀어 나가겠다.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그랬던 민주당이 한 달여 만에 확 바뀐 모습이다. 2월 임시국회가 본격 활동을 시작한 3일, 민주당 최고위 회의는 지난해 12월 정기국회 한복판을 떠올리게 했다. 야당과 재계의 반발 속에 ‘경제 3법’과 노동조합법 등을 밀어붙였을 때의 그 모습이다. 이 대표는 이날 “개혁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후속 입법과 검찰 조직문화 혁신이 이어져야 한다”며 다시 검찰개혁을 강조했다. 노웅래 최고위원은 “재벌 대기업에 대한 부동산 과세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반(反)기업 프레임을 다시 꺼내 들었다. 다분히 4월 서울·부산시장 선거를 의식한 행보라고 생각한다. 최근 불거진 북한에 원전 제공 의혹, 판사 탄핵소추 후폭풍과 하락하는 민주당 지지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금은 지지층을 결집시켜야 할 때’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여권은 당초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보수의 분열, 어쩌면 남북 이벤트까지 더해져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남북 이벤트는 사실상 물 건너간 상태이고, 서울시장 선거는 여야의 일대일 대결 가능성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가뜩이나 어려운 판세 속에 여권엔 악재만 쌓이고 있다. 여권 인사들은 말한다. “촛불로 10년 만에 정권 교체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위태위태하다. 여유가 없다.” 위기감이 커질수록 민주당이 믿을 곳은 친문(친문재인) 지지층밖에 없다. 그래서 지지층이 좋아할 만한 정책과 발언들을 쏟아낸다. 일단 58일 앞으로 다가온 서울시장 선거에 ‘다걸기(올인)’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민주당을 향해 진영 감정이냐, 경제 도약이냐 또는 국민 통합이냐를 따지는 것은 이미 사치인 듯하다. 어느덧 4월 선거는 대선만큼 판이 커져 버렸다. 여권은 4월 서울시장 선거를 정권 연장의 길을 열어줄 마지막 승부처로 보고 총력전을 각오한 모습이다. 당내에서조차 상당한 반대 의견이 있었던 판사 탄핵 표결은 소추안을 공동 발의한 범여권 의원 161명을 훌쩍 뛰어넘는 179명의 찬성이라는 의외의 결과로 이어졌다. 범여권 전체가 똘똘 뭉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4월 선거가 끝일까. 올해는 정치의 해다. 2022년 3월 9일 예정된 차기 대선을 앞두고 1년 내내 여야의 사활을 건 공방이 이어진다. 순간순간 각 당의 희비가 엇갈릴 것이다. 경제 도약을 공언하고, 상황이 어렵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지층 심기 경호에만 집중하는 집권여당이 신뢰받을 수 있을까. 오락가락하는 민주당의 희망고문에 자영업자와 기업, 민심은 이미 지쳐가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는 말 그대로 전초전일 뿐이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지난해 말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측은 ‘새해 인사’를 명분 삼아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서울 자택을 예고 없이 찾아가는 방안을 검토했다. ‘야권 후보 단일화’에 대한 절박감이 깔려 있었다. 문전박대를 각오했다. 고민 끝에 계획을 변경한 안 대표는 1월 6일 서울 모처에서 김 위원장과 독대했다. 김 위원장은 “국민의힘에 입당할 게 아니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동은 20분 만에 끝났다. 김 위원장과 안 대표 간 신경전은 이후 진행형이다. 안 대표가 국민의힘에 통합 경선을 공개 제안한 이후 더욱 격해졌다. 안 대표가 “공당의 대표에게 입당하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하면, 김 위원장은 “그럼 공당의 대표가 다른 당에서 실시하는 경선에 무소속으로 이름을 걸겠다는 것은 정치 도의에 맞는 얘기냐”고 맞선다. 김 위원장은 ‘선(先)입당’ 방침에서 물러설 뜻이 없어 보인다. 그는 “국민의힘은 내년 대선까지 준비해야 하는 정당”이라고 했다. 4월 선거를 넘어 내년 3월 대선까지 내다봐야 한다는 뜻이다. 당 대표로서 서울시장 선거에서 후보를 뺏길 경우 뒤따를 지지층 이탈과 보수 재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안 대표가 입당 없이 야권 대표 후보가 되면 선거를 이겨도 이어지는 대선 국면에서 국민의힘은 그 역할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각종 여론조사 데이터도 중요하다. 김 위원장은 안 대표 지지율에 반영된 여권 지지층을 ‘거품’으로 본다. 동아일보가 서울시민 800명을 상대로 조사한 신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더불어민주당 혹은 열린민주당 지지자라고 밝힌 응답자들은 안 대표를 나경원 전 의원에 비해 두 배 이상 높게 지지했다. 이들은 결국 여권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라는 얘기다.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줄곧 뒤졌던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가 선거 결과 당시 안 후보보다 약 19만 표를 더 받았던 점도 그 근거로 꼽힌다. 김 위원장이 꿈쩍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다. 국민의힘은 예비경선과 본경선을 거쳐 3월 4일 서울시장 후보를 최종 결정한다. 이후 단일화 논의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경선으로 선출된 후보가 협상을 통해 후보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치권의 속설이다. 조직된 지지층의 기대를 저버리는 건 정당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후보가 안 후보에게 끝까지 ‘양보해 달라’며 내세운 논리 중 하나도 “지지층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였다. 안 대표도 김 위원장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안 대표는 최근 “3월에 단일화 협상을 시작하면 단일 후보를 못 뽑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안 대표는 2월 내내 홀로 뛰어야 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경선이 주목받기 시작하면 거대 양당의 싸움 속에 소외될 가능성도 있다. 단일화 논의가 3월 시작됐을 때 안 대표 지지율이 다른 후보들을 압도하지 못할 경우 입지는 지금보다 더 좁아진다. 연패에 빠진 보수야권엔 벼랑 끝 결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단일화 실패 후 여당에 또 패배한다면 김 위원장도 안 대표도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선택지는 국민의힘이 안 대표의 제안을 전격 수용하거나 안 대표가 ‘합당’ 또는 ‘입당’을 결단하거나 둘 중 하나다. 데드라인은 국민의힘이 본경선 후보 4명을 확정하는 다음 달 5일까지다. 안 대표와 김 위원장이 극적인 정치적 결단을 통해 안 대표와 국민의힘 후보들이 참여하는 ‘원샷’ 경선을 합의해 낼 수 있을까. 남은 열흘이 4월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1차 변곡점이 될 것이다.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부동산 가격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017년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장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집값 문제에 대해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고 했다. 이후 정부는 20차례가 넘는 대책을 쏟아냈다. 집값은 오히려 폭등했다. 지난해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문 대통령은며 목표를 수정했다. 그리고 이달 11일 신년사에서 문 대통령은 이라고 공식 사과했다. 대통령의 사과는 직무수행 지지율이 지난주 취임 이후 최저치로 떨어진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국갤럽 기준으로 문 대통령 지지율이 30%대로 내려앉은 것은 취임 이후 5차례뿐이다. 2019년 10월 조국 사태 때 39%, 그리고 지난해 8월 39%, 12월 1주차 39%, 2주차 38%였다. 그리고 올 1월 1주차가 38%다. 마지막 네 차례 모두 부정 평가의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정책’이었다. 사실 우리 사회의 모든 논쟁적 이슈엔 진영논리가 개입돼 있다. 코로나19 유행에 따른 정부 대응에 대한 평가도 진영에 따라 엇갈린다.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정부의 백신 도입 시기 논란에 대해 54.1%는 ‘정부가 잘했다’, 44.2%는 ‘잘못했다’로 팽팽히 맞섰다. 자신의 정치 성향이 보수라고 밝힌 응답자의 67.6%는 부정 평가를 했고, 진보 성향 응답자에서는 긍정이 76.5%로 나타났다. 전염병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여기에도 진영논리가 반영됐고, 결국 여론이 이분화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태극기부대는 문 대통령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반대나 비판을 하고, 강성 친문(친문재인) 지지자들은 여권의 비상식과 위선이 계속 드러나도 ‘문재인 대통령은 늘 옳다’는 식이다. 하지만 부동산 문제만큼은 예외다. 신년 여론조사에서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긍정 평가는 22.4%에 불과했다. 응답자 10명 중 7명가량인 69.5%는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대해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도층의 73.8%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현 정부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40대조차 부정 의견이 66.0%로 집계됐다. 정부 말을 믿고 아파트 매수를 미룬 30, 40대 직장인,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서민과 청년 등 문재인 정부의 핵심 지지층이 흔들렸다. 여권의 고민이 컸을 것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40% 아래로 떨어지면 다가오는 4월 재·보궐선거에서 대통령 마케팅이 힘들어진다. 당 지지율은 문 대통령의 지지율에 미치지 못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2022년 대통령 선거 전초전이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정치적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여야 모두 놓칠 수 없는 선거다. 여권이 뒤늦게 수요 억제 일변도 정책의 수정을 예고하고 나섰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다주택자의 양도소득세 완화를 거론했고,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토교통부 장관은 신년 벽두부터 ‘공급 확대’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공공주택 16만 호 공급’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를 앞두고 여권이 던지는 정치적 레토릭이나 공약(空約)이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다만 집권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시 선거고, 자신들의 지지층인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길진균 정치부장 leon@donga.com}
마치 탄핵정국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2016년 말 여의도 정가는 여야의 극단적인 대결정치로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본회의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당시 서로를 겨눴던 증오와 반목의 언어들이 4년 만에 반복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몰아내는 맨 앞자리에서 탄핵을 외쳤고,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대통령에 올랐다. 이 정부가 가고 있는 터널의 끝이 보인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14일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평소 온화한 언행이 돋보이는 정치인이다. 그답지 않은 원색적인 연설이었다. 주 원내대표는 최근 공개석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아닌 ‘문재인’이라고 지칭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모습이다. 앞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반문(반문재인) 연대를 언급하며 주 원내대표 등을 겨냥해 “분열, 증오의 정치를 선동하며 국격을 훼손하는 정치인은 시대의 부적응자”라고 했다. 협상 와중에 협상 파트너를 향해 “부적응자”라고 공개 비난한 것은 더 이상 협상할 생각이 없다는 뜻과 다름없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여야의 감정싸움에 이목이 쏠리고 있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득실은 천양지차다. 민주당은 갈등 이슈를 확대하며 권력기관 개편부터 사회, 경제, 노동 등 각 분야로 전선을 한 걸음씩 넓혀가고 있지만, 국민의힘은 정치적 실마리를 못 찾고 ‘강 대 강’으로 맞받아치는 데 그치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당이 연말 국회에서 힘으로 통과시킨 주요 법안들은 대부분이 사회적 갈등을 부채질하는 법안들이다. 정권 유지 목적과 민주당 지지층이 원하는 법안만 통과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은 물론이고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정보원법, ‘대북전단 금지법’으로 불리는 남북관계발전법 등이 대표적이다. 함께 통과시킨 노동조합법도 마찬가지다. 개정된 노조법에 따르면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가입이 허용되고, 5급 이상 공무원과 소방관의 노조 가입도 허용된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이 소속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세력을 더 키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노동법이 개정될 때마다 관행적으로 총파업 계획을 발표했던 민노총이 잠잠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야당을 향해 “분열, 증오의 정치를 선동한다”고 몰아붙이고 있지만 민주당은 정치적 실리를 차곡차곡 쌓고 있는 셈이다. 증오의 언어를 쏟아내며 정치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지지층을 결집시켜 이른바 ‘개혁’의 동력을 얻는 것은 친문(친문재인) 진영의 오랜 전술이다. 민주당은 “야당의 침대축구를 참을 만큼 참았다”며 억울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결속하면 상실감에 빠진 국민의힘 지지자들도 더욱 똘똘 뭉치게 된다.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친 극단의 증오 정치는 극심한 사회 갈등을 불러오고, 이에 불안감을 느끼는 중도층은 집권세력에 등을 돌리게 된다. 민주당의 최종 목표인 2022년 차기 대선의 문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증오 정치는 자신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내고 있는 양날의 검일지 모른다.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집권세력의 ‘역사와의 대화’가 부쩍 잦아지고 있다. ‘소명’ ‘맹세’ ‘레거시’ ‘백년대계’ 등의 화두가 최근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 더 자주 들린다. 검찰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은 ‘시대적 소명’이고, 가덕도 신공항은 ‘국가백년대계’, 종전선언 추진은 ‘역사’와 마주한 대통령의 결단이라는 식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9일 페이스북을 통해 “몸과 마음은 지치지만 검찰개혁은 내 소명”이라고 밝혔다. 또 “해방 이후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하고 좌절했던 검찰개혁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국민 염원을 외면할 수 없기에 제 소명으로 알고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썼다. 당장은 힘들고 어렵지만 먼 훗날 역사의 평가만 보고 가겠다는 취지다. 남들이 뭐라 하든 추 장관은 그렇게 생각한다. 16일 국회 법사위에서 “검찰개혁을 하기 전까지는 정치적 욕망, 야망을 갖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 바이든의 미 대선 승리로 빨간불이 켜졌지만, 종전선언 역시 ‘70년 남북 간 적대행위를 끝내는 역사적 결단’이 현 정권의 모범 수식어다. 적어도 종전선언은 ‘역사’와 떼어내기 어려운 이슈라는 점에서 공감 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여권은 이를 뛰어넘어 임기 말 주요 쟁점 사업에 대해 앞다퉈 ‘역사’를 끌어다 붙이고 있다. 여권 인사들이 주문 외우듯 반복하는 ‘시대적 소명이자 과업’인 공수처는 말할 것도 없고, 어느덧 ‘국가백년대계’로 격상된 가덕도 신공항 사업도 마찬가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총리실 산하 검증위원회가 김해신공항 사업의 사실상 백지화 발표를 한 직후 반대론자들을 향해 “국가백년대계인 가덕도 신공항 건설의 참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부디 신중하게 처신해 주시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여권은 또 “가덕도 신공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업(遺業)”이라고 외친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처럼 대놓고 이를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레거시로 연결하고 있다. 친문 핵심들이 가덕도 신공항을 ‘국가백년대계’이자 ‘레거시’로 규정한 이상, 신공항의 경제적 타당성을 차분히 따져보자는 지적이나, 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은 반문(반문재인) 진영의 불순한 정략적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여권 인사들은 “정부 5년 차에 접어드는 데다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확실한 레거시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정치적 계산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역사와의 대화’가 내포하고 있는 독선의 위험성이다. 집권세력이 임기 말 레거시 만들기에 몰두하면서 ‘역사와 직접 대화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대화, 설득, 타협 등 소통과 정치의 기능은 그 의미가 사라진다. 정권 내부에서도 직언은 없어지고, 핵심들은 정권 바깥의 목소리에도 귀를 닫는다. 오로지 멋 훗날의 역사와 나 홀로 대화하며 달성해야 할 목표만 되새기게 된다. ‘독선의 늪’에 빠져든 정권과 국민 사이의 벽은 더욱 높아진다. “정권이 가장 위험한 때는 임기 말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할 때”라는 여의도 속설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역사와 대화’하기 시작한 정권은 일방적이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2년 전 이맘때다. 오거돈 부산시장, 송철호 울산시장, 김경수 경남지사가 한데 모였다. 이들은 부산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취임 100일 합동 토크콘서트를 열고 “부산 울산 경남은 처음부터 하나였다”며 부산경남(PK)의 결속을 다짐했다. 그해 치러진 6·13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PK 지역 세 곳 광역단체장을 싹쓸이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구경북(TK) 다음으로 보수세가 강했던 PK에서 일어난 극적인 정치 지형 변화에 여권은 기대에 부풀었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20년 집권론’을 설파하기 시작한 것도 6·13지방선거 직후부터였다. ‘PK 수복’은 부산 민주화 세력에 뿌리를 둔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 진영의 숙원이자 정권 재창출의 핵심 키워드다. 문 대통령은 2017년 5·9대선을 앞두고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PK 지지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저와 영남 동지들의 원대한 꿈! 오랜 염원! 감히 고백합니다. 우리가 정권교체하면, 영남은 1990년 3당 합당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다 이룬 꿈, 제가 다하겠습니다. 다시는 정권 뺏기지 않고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여기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1990년 3당 합당과 민주자유당 소속 김영삼 대통령 탄생 전까지 PK는 진보세가 강한 야도(野都)로 분류됐다. 유권자 60%가량을 차지하는 수도권과 충청의 표가 대략 반으로 갈리고, 약 10%씩을 차지하는 TK와 호남이 보수와 진보로 각각 집중되는 한국의 선거 판세 속에서 15%가량을 차지하는 PK 표심의 보수화는 한동안 보수 정당에 유리한 정치 지형을 제공했다. 이 같은 PK 표심을 3당 합당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문 대통령 말처럼 여권의 오랜 염원이었다. 부산 출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정권 핵심으로 중용한 것도, 김경수 지사가 2018년 의원직을 버리고 지방선거에 뛰어든 것도 모두 ‘포스트 문재인’ 시대를 이어갈 여권 내 PK 대표 정치인을 키워야 한다는 절박감과 정권 재창출을 내다본 포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권의 구상은 지방선거 2년여 만에 그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오 전 부산시장은 직원 성폭력 사건으로 사퇴했고, 송 울산시장은 청와대 하명수사·선거개입 의혹에 휩싸여 재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드루킹 댓글 사건에 연루된 김 지사의 정치 생명이 걸린 항소심 선고는 6일 오후로 예정돼 있다. 재판 결과에 따라 여권의 ‘PK 수복’ 프로젝트는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PK 민심도 요동칠 것이다. 여권에선 이에 대비한 듯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4일 부산을 찾아 가덕도 신공항과 관련해 “부·울·경의 희망 고문을 빨리 끝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는 등 ‘PK 수복’ 프로젝트에 다시 시동을 걸고 나선 모양새다. 국민의힘이 여권의 이 같은 ‘PK 수복’ 의지를 모를 리 없다. 야권이 PK 표심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 정권 탈환은 더욱 멀어진다. 앞으로 1년여 동안 전국 곳곳에선 인물과 정책, 지역개발 공약 등을 둘러싸고 여야의 치열한 대선 전초전이 펼쳐진다. 그중 핵심 전장은 PK가 될 것이다.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1993년 말 치러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는 이례적으로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온건개혁 노선을 표방하고 나선 ‘21세기 진보학생연합’ 후보 강병원 군(23)이 민중민주(PD) 계열 후보를 837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선거 결과를 알린 1993년 11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온건파 후보가 민족해방(NL)과 PD 진영 후보들을 누르고 당선됐기 때문이다. 승자였던 ‘강 군’은 지금 더불어민주당 재선 강병원 의원이다. 837표 차로 패배한 PD 후보는 김종철 정의당 대표다. 90학번(경제학과), 70년생이다. 11일 취임한 김 대표는 진보진영의 ‘포스트 심상정’ 체제는 물론 원내정당 가운데 ‘첫 70년대생 당 대표’ 시대를 열었다. 우리 정치에서 97세대(90년대에 대학을 다닌 70년대생)는 세대 담론에서 투명인간에 가까웠다. 21대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40대는 38명(12.7%)에 불과하다. 50대는 177명(59%)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86그룹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일 뿐만 아니라 리더로 자리 잡은 인물도 찾기 힘들다. 특히 여권에서는 20년 넘게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86그룹의 그늘에 가려 있고, 심지어 일부는 ‘똘마니’로 치부되고 있다. 그랬던 70년대생을 야권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3일 취임 인사차 찾아온 김 대표의 “가르침을 달라”는 인사말에 즉석에서 노동법과 낙태죄 등 의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며 15분가량 공개 토론을 벌였다. 40년생인 김 위원장과 30년 나이 차를 건너뛴, 진보와 보수를 이끄는 두 야당 대표의 대화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국민의힘 안에서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김웅, 윤희숙 의원도 70년생이고, 김 위원장은 ‘70년대생 경제통’을 차기 대선 후보로 꼽기도 했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해 외면받은 야당으로서 선제적 세대교체를 통해 당의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는 절박감이 반영됐을 것이다. 다만 운동권으로 대표되는 86그룹과 달리 97세대 정치인들은 정치에 입문한 과정도, 계파도, 추구하는 가치도 제각각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97세대가 주축인 X세대를 두고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라고 했다. 정치인도 다르지 않다. 20대 국회 민주당 70년대생 의원 모임 ‘응칠(응답하라 1970)’에 참여했던 박용진 강병원 김병관 박주민 김해영 의원 등은 의정활동에서 뚜렷한 개성을 보였지만 세를 만들진 못했다. 참여했던 한 의원은 “세대교체를 선언할 용기도, 하나로 묶을 가치도 없었다”고 했다. ‘머릿수 싸움’이라는 여의도 정치에서 뭉치기 어렵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그렇지만 86세대의 민주화와 2030의 개인주의를 동시에 공감한다는 점에서 97세대는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86그룹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정치권 세대교체는 시간문제일 뿐 필연이다. 21대 국회는 여야 70년대생 정치인들에게 구시대의 막내가 될지, 변화를 이끄는 새 시대의 첫차가 될지를 결정짓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국회 역사상 최대, 최악의 이해충돌 당사자다. 국회 국토교통위에서 6년이나 활동하게 한 국민의힘 책임이다.”(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최고위원) 21일 오전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는 본인과 가족이 대주주로 있는 건설사가 피감기관으로부터 1000억 원대의 공사를 수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박덕흠 의원과 국민의힘에 대한 성토장에 가까웠다. 신 최고위원은 박 의원을 겨냥해 ‘부패방지법 위반’ ‘제3자 뇌물수수죄 해당’ 등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민주당은 비판의 속내를 감출 생각도 없었다. 노웅래 최고위원은 “전화로 휴가 승인을 특혜라고 장관직 내놓으라더니 부패정당, 적폐정당이 이름만 바꿨다고 정의와 공정을 논할 자격 생기는 것 아니다”라고 했다. 국민의힘을 정조준한 것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전화 한 통화 했을 뿐이고, 박 의원은 1000억 원대를 부당하게 챙겼다는 의혹이 있으니 ‘너희 국민의힘은 더했잖아’라는 얘기였다. 건설업체 대주주인 박 의원이 20, 21대 국회에서 5년 넘게 국토교통위원을 지낸 것은 다분히 이해충돌의 소지가 있다. 이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여당인 민주당이 늘 이런 식인 것은 다른 문제다. 민주당은 악재가 터지면 ‘깜도 안 되는 의혹’ ‘소설을 쓴다’며 의혹을 일단 부인하고 뭉갠다. 그러다가 실체가 하나둘 드러나면 ‘검찰 수사 또는 재판 결과를 보고 판단하자’며 한발 물러선다. 그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마지막엔 ‘국민의힘은 더했다’고 다시 치고 나온다. 이런 민주당의 ‘너희는 더했잖아’ 식의 정치는 핵심 지지층을 결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일시적으로 당 지지율 하락세도 멈추게 만든다. 하지만 겉으론 멀쩡하고 속으론 멍들고 있다는 것을 민주당은 잊은 듯하다. 2014년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싸가지 없는 진보―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이란 저서에서 진보 진영의 문제점을 ‘무례함, 도덕적 우월감, 언행 불일치’ 등 세 가지로 꼽은 적이 있다. ‘싸가지 없는 진보’에 대한 반성론은 당시 끊임없이 회자되던 화두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펴낸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덧 집권 4년 차에 접어든 민주당은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있다. 18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에서 ‘무당층’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33%로 4월 총선 이후 최대치였다. 갤럽 측은 “4월 총선 이후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라고 했다. 무당층은 20대가 55%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38%로 나타난 30대였다. 민주당의 주요 지지층이 점차 등을 돌리고 있는 셈이다. 민주당은 “너희는 더했잖아”라고 외치지만 대다수 국민 눈에는 ‘싸가지 없는 진보’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자해적 싸움에서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국정 운영의 책임이 있는 여당일 수밖에 없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4·15총선이 끝난 뒤 여권엔 ‘열린우리당 전철을 밟지 말자’는 주의보가 내려졌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말씀과 행동에 더욱 신중을 기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그 고삐가 확 풀렸다. 부동산 문제, 코로나19 재확산 등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부터다. 지난달 만난 여권 핵심 인사는 “고비다. 코로나 방역이 최우선이다. 정권 후반기 지지율은 물론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의 성패도 여기서 결정 날 것”이라고 했다. 정권 핵심부의 위기감이 크다는 얘기였다. 얼마 뒤 김원웅 광복회장은 고(故) 백선엽 장군을 향해 “사형감”이라며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냈고, 여권 인사들은 곳곳에서 ‘방역 방해 세력’을 향해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이후 민주당 지지율은 반등했다. 여권 지지층의 결집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제기된 ‘정권말 위기론’은 진화됐다. 정치인의 막말은 다분히 의도된 경우가 많다. 증오와 배제 프레임은 위기에 몰린 집권세력의 단골 메뉴다. 권위주의 시절 집권세력은 ‘색깔론’ ‘종북’을 앞세워 야권을 탄압했고, 여론의 반전을 유도했다. 지금 여권의 ‘친일파 척결’ 주장도 야당은 비슷한 논리로 바라본다. 하지만 최근 여권발 증오의 막말은 정치권 밖, 보통 사람들까지 겨냥하며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부동산 문제로 여권이 수세에 몰렸을 때는 다주택자가 제물이 됐다. 소병훈 민주당 의원은 국회에서 “범죄로 다스려야 한다” “국민의 행복권을 뺏어간 도둑들”이라고 했다. 집값 상승에 떠는 보통 사람들의 불안을 다주택자들의 탓으로 떠넘긴 셈이다. 요즘 여권의 주 타깃은 의료계다. 지난달 31일 열린 국회 예결위에서 김한정 민주당 의원은 최대집 의협 회장을 “제2의 전광훈”이라고 불렀다. 1일 예결위에선 허종식 민주당 의원이 사회부총리에게 “어차피 지키지도 않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대학병원에 권고해 다 폐지시키면 어떻겠냐”며 의사들을 비꼬았고, 최민희 전 의원은 2일 페이스북에서 “어느덧 의사선생님 호칭이 ‘의새’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했다. 일부 극성 지지자들은 “시원하다”고 환호한다. 김종민 민주당 최고위원이 1일 라디오에서 ‘조국 흑서(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두고 “흑서를 100권 낸다 해도 바뀌지 않는다. 40%는 (검찰 수사가) 문제 있다고 본다”고 자신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민주당은 그런 말들이 자신을 찌르는 칼이라는 것을 모른다. ‘국난 극복’에 동의하다가도 막말이 터져 나오면 “너희가 더 꼴 보기 싫다”며 고개 돌리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많은 초선 의원들은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냈고, 이는 ‘증오의 정치’로 비쳤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고립됐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 체제가 시작됐다. 그는 총선 직전 “미움의 정치를 청산하지 않는 한 막말은 계속된다”고 경고했다. “지도자들부터 마음에서 미움을 털어내야 한다. 저부터 더 노력하겠다”고도 했다. 그의 다짐이 ‘열린우리당 반성’처럼 잠깐의 레토릭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한다.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당명은 민주당이 괜찮은데 저쪽이 가져가 버려서….” 지난달 9일 미래통합당이 당명 개정 계획을 공식 발표한 직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기자들 앞에서 불쑥 던진 말이다. 언론의 조명을 많이 받진 못했다. 정치적 무게가 실린 발언이 아니라 김 위원장 특유의 시니컬한 위트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 뒤 김 위원장은 “백종원 씨는 어때요?” 한마디로 차기 대선 후보의 이미지에 대한 새 화두를 던졌고, 다른 주자들은 동요했다. ‘당명은 민주당이 괜찮은데’ 역시 그냥 웃고 넘길 발언은 아닌 듯하다. 대체 왜 민주당을 거론한 것일까. 김 위원장이 탐내는 ‘민주(民主)’라는 당명은 우리 정당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이름 중 하나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2028년이면 창당 200주년을 맞는 미국 민주당은 물론이고, 상당수 국가 정당에서 ‘민주’라는 당명을 단독으로 혹은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한다. 국민을 위한다는 당의 이상적 이미지와 ‘민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3김(三金) 시대 때 김영삼(YS)은 통일민주당, 김대중(DJ)은 평화민주당, 김종필(JP)은 신민주공화당을 만들어 한 시대의 정치를 이끌었다. 1990년 1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과 YS, JP가 3당 합당을 통해 탄생시킨 정당이 민주자유당이다. 통합당은 그 후신이다. 통합당의 변신 작업이 한창이다. 얼마 전 2년 만의 당사 여의도 복귀 계획을 발표했다. 다음 달 초 당사 이전과 맞물려 새 당명과 당색, 로고도 발표한다. 대통령 탄핵과 4차례에 걸친 전국 단위 선거 패배의 사슬을 끊어내고, 영광의 시대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게다. 하지만 비슷한 시도가 예전엔 없었던가. 새누리당 문을 닫고 2017년 출발한 자유한국당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올 2월 문을 연 통합당은 다음 달까지 6개월 시한부다. 본질적 변화 없는 잦은 포장 바꾸기는 ‘저 사람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겨도 될까?’ 하는 중도 진영의 불신만 더 키울 뿐이다. 김 위원장 리더십의 키워드는 ‘실용’ ‘변화’ ‘속도’다. 때때로 ‘반전’의 카타르시스가 더해진다. 보수정당이 위기에서 탈출하는 활로는 세상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 만큼 놀라운, 그런 ‘혁신적 변화’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겉모습은 물론이고 시대에 맞게 당의 골수까지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 당 내부를 관통하는 노선과 정체성까지 다시 정립해야 한다. 김 위원장이 당 정강·정책에 민주화, 5·18민주화운동 정신 계승 등의 내용을 넣으려는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역사적 평가와 별개로 구도의 관점에서 볼 때 3당 합당을 통한 민주자유당의 탄생은 반공과 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여겨 온 ‘구시대 보수’가 YS의 ‘중도 개혁’ 세력과 손잡은, 보수진영의 외연을 중도까지 확장시킨 놀라운 변신이었다. 김 위원장이 이끄는 보수정당의 새 당명에 다시 ‘민주’가 등장하면 또 어떤가. 분명한 건 우리 정치에선 보수건 진보건 외연을 더 넓히고, 의제를 선점하고, 상대 진영의 가치를 과감히 수용하는 쪽이 더 번성했다는 점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미래통합당이 7월 임시국회 첫날인 6일 국회에 복귀하면서 여야가 국회 정상화를 두고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야당 몫 국회부의장을 거부하던 미래통합당 정진석 의원은 이날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상황이 변했으니 (부의장 수락을)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부의장을 맡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 이에 따라 박지원 신임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맡은 국회 정보위원회도 조만간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법상 정보위원장 선출 등 정보위 구성은 국회부의장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 다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후속법안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 탄핵안,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해임건의 등을 둘러싸고 팽팽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여야는 이날도 의사 일정을 합의하지 못한채 공방전만 반복했다. 통합당은 이날 오후 국회 상임위원회에 강제 배정됐던 의원들을 다시 배정하는 보임계를 박병석 국회의장에게 제출하고 원내로 전격 복귀했다.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등에서 ‘원내 투쟁’을 통해 야당의 존재감을 보여주겠다는 당의 전략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위해 통합당은 청와대를 피감 기관으로 두고 있는 국회 운영위에 3선 김도읍 의원과 재선 곽상도 의원 등 핵심 ‘공격수’를 배치했다. 운영위에서 민주당 1호 당론인 ‘일하는 국회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후속 법안이 논의된다는 점도 고려했다. 법사위에도 20대 국회에서 간사였던 김도읍 의원을 다시 ‘위원장급 간사’로 내세우고 3선의 장제원 의원과 검사장 출신의 유상범 의원 등을 배치했다. 외통위에는 여권에서 안보 관련 상임위 불가론을 주장한 탈북민 출신 통합당 태영호 지성호 의원을 배정했다. 국회 18개 상임위는 가동 준비를 마무리했지만 여야는 7월 임시국회 첫 본회의 날짜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7월 임시국회에서 21대 국회 개원식을 열고 국회의원 선서와 문재인 대통령 연설 등 통상적 절차를 밟자는 여당과 단독 원 구성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개원식 없는 국회를 주장하는 야당은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네 탓 공방 속에 여야 지도부는 여론전에 집중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지금은 민생을 위해 일할 때”라며 “(야당은) 특검이니 국정조사니 무리한 정쟁거리만 말 할 것이 아니라 민생과 개혁을 위해 일하는 국회를 함께 해주시길 다시 한 번 부탁드린다”고 강조했고,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추진하는 이른바 ‘일하는 국회법’을 두고 “제목만 그럴듯하지 야당을 무력화하는 독재 고속도로 법”이라고 비판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박민우 기자 minwoo@donga.com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다들 그냥 착하고 성실한 공무원 같아.” 더불어민주당 중진 A 의원의 당 초선 의원들에 대한 평이다. 민주당 소속 의원 176명 가운데 초선은 82명으로 절반에 육박한다. 대대적인 물갈이 요구에 부응해 원내로 진입한 초선들을 바라보는 당 안팎의 기대가 컸다. 참신하고 개혁적인 마인드로 구습에 젖은 정치를 바꿔 줄 것 같았다. 개원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그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개혁적 정치모임이 꾸려졌다는 소식도 없다. 들리는 얘기는 그 반대다. 지난달 25일 민주연구원 주최 포럼 강연자로 나선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초선들에게 “(여러분들이) 야당 역할을 하면 안 된다. 장관 밀어내기, 두드리기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앞으로 행정부를 건드리지 말라는 훈계였다. 추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향해 “지휘랍시고 일을 꼬이게 만들었다”며 약 100분 동안 무용담 섞인 조언을 이어갔다. 초선들은 박수갈채를 보냈고, “국회의원 계속 하셨으면 최초의 여성 국회의장이 되셨을 것” “다음엔 총리를 하시라” “대통령을 하시라” 등의 덕담이 이어졌다. 전날 같은 자리에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초선 때는 자기를 죽이면서 전체를 위해 함께 가는 방법, 이런 것에 할애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직 장관의 노골적인 입법부 ‘군기 잡기’에 대해 초선들은 그때도 이후에도 일언반구가 없다. 여당 정치인은 정부가 잘못해도 일단 옹호해야 할 때가 있다. 양심과 원칙이 떠올라도, 쉽고 편한 길은 그냥 입 꾹 다물고 사는 것이다. 괜히 나섰다간 찍히기 십상이다. 금태섭 전 의원에 대한 징계는 그 본보기일 게다. 중진 의원 B는 “17대 열린우리당 때는 열정이 넘치는 초선이 많아서 걱정이었는데, 21대는 반대로 다들 무난한 정치를 하는 듯해 걱정”이라고 했다. 금 전 의원 징계, 윤미향 의원 관련 의혹, 정부의 잇따른 부동산대책 헛발질 등에 대해 초선들은 꿀 먹은 벙어리다. 심지어 21대 국회 들어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8번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초선 발언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금 전 의원은 최근 “토론과 비판정신을 강점으로 하던 민주당이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하지만 권력이 주는 따뜻한 자리와 보호를 누리기 위해선 그저 말없이 웃어주고 따라주는 것이 ‘슬기로운 의원 생활’이라는 것을 민주당 초선들은 이미 깨친 듯하다. 돌이켜보면 잇따른 선거 승리와 콘크리트 지지율이 보수정당에는 병세를 느끼지 못하게 막은 마취제였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4년 ‘천막 당사’와 함께 당의 전면에 나선 이후 보수정당은 총선·대선에서 12년 동안 승자의 자리를 누렸다. 당은 부지불식간에 고인 물이 됐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의원 153명 중 절반에 달한 초선 76명은 ‘존재감 제로’라는 평을 받았다. 2016년 20대 총선 이후 펼쳐진 상황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잇따라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과 이어지는 초선들의 침묵. 민주당은 예외가 될 수 있을까.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경제 부처 고위공무원은 국회 얘기가 나오자 분통을 터뜨렸다. 국회에서 의원입법 형태로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법안 중에 상당수는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법안 하나를 국회에 제출하려면 당정 협의, 공청회, 규제심사,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등을 거쳐야 하고 그 때문에 공무원들은 세종시에서 정부서울청사와 국회를 수없이 오가고 있는데 의원들이 뚝딱 만들어내는 황당한 법안들을 볼 때마다 맥이 탁 풀린다고 했다. 법을 만드는 일은 국회의원 본연의 업무다.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걸 탓할 수는 없다. ‘일하는 국회’가 강조되면서 의원입법 건수도 크게 늘었다. 20년 전인 16대 국회만 해도 1651건에 불과했던 의원입법은 20대 국회에선 2만1594건을 기록했다. 의원입법이 늘어나는 것은 다양한 입법 수요에 대한 국회 차원의 적극적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성과도 나쁘지 않다. 20대 국회 의원입법 가결 법안은 1437건이었다. 정부입법 가결 법안 305건의 네 배가 넘는다. 문제는 커지는 국회의 ‘규제 본능’이다. 정부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20대 국회에서 의원입법 형태로 발의된 법안 2만1594건 가운데 20%에 가까운 3924건이 규제 법률이다. 정부의 규제심사를 거쳤다면 발의 자체가 어려웠을 수 있는 법안들이다. 의원입법은 광범위한 의견수렴 절차를 밟아야 하는 정부입법과 달리 손쉬운 발의가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176명 전원이 참여하고 있는 법안 발의용 단체 텔레그램방도 운영하고 있다. 한 의원이 법안 요지서를 띄우고, 이에 다른 동료 의원 10명 이상만 동의하면 1시간도 채 안 돼 법안 발의가 가능하다. 이는 편리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졸속 입법 논란을 부르기도 한다. 20대 국회에서 통과된 ‘n번방 사건방지 후속법안’(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네이버 등 기업에 온라인상의 불법 촬영물에 대한 차단과 삭제 의무를 부과했다. 업계는 “마치 택배기사에게 배달 물건 중 폭탄이 있는지 확인해 폐기하라는 것과 같다”며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n번방 사건을 불러온 텔레그램과 같은 해외 사업자를 단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의원들도 입법 과정에서 이 같은 문제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폭발하는 민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단 규제부터 강화한 법을 통과시켰다. 앞으로가 문제다. 21대 국회 시작과 함께 11일까지 이미 340건의 의원입법이 제출됐다. 20대 국회 같은 기간 187건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된다. 여기에 176석 슈퍼 여당으로 거듭난 민주당은 개원과 동시에 ‘일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규제 혁파의 필요성을 연일 강조하고 있지만 의원입법만큼은 사각지대다. 의원입법에 대한 규제영향평가를 실시할 때가 됐다. 민주당은 국회법을 바꿔 법안의 체계·자구 심사를 국회사무처 또는 입법조사처 내 전문 검토기구에 맡기겠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법안에 대한 규제심사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법안 발의 건수가 많다고 ‘일하는 국회’라고 칭찬받기 어렵다. 일하는 국회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일하는 국회’다.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사람을 자를 때는 그래도 그럴듯한 이유와 예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총선 이후 오랜만에 만난 김모 보좌관이 울분을 터뜨렸다. 10년 넘게 국회에서 함께 먹고 자며 지내온 A 의원실 보좌관 친구가 선거 직후 하루아침에 백수가 됐다고 했다. 보좌진 자주 바꾸기로 유명했던 A 의원. 그는 낙선 직후 보좌진에게 일괄 사표를 요구했다. “선거 때 지역에서 신세진 사람들 챙겨줘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가까운 지인 또는 그 인척들에게 한 달 남짓 남은 임기 동안 보좌관 자리를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급여도 급여지만 4급 또는 5급 ‘국가직 공무원’ 타이틀에 목을 매는 이가 부지기수인 게 현실이다. 현재 의원회관 A 의원 사무실엔 전화 받는 보좌관 1명만 남아있다. 김 보좌관은 “선거 때 시골에서 다 같이 죽도록 고생했는데 선거 끝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준비할 시간도 안 주고 사표를 받습니까. 보좌진을 동료, 아니 사람으로 본다면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국회를 출입하다 보면 보좌진을 수시로 느닷없이 갈아 치우는 의원들을 여럿 만난다. “의원들에게 찍히면 다른 의원실도 못 간다”며 반드시 익명 처리를 부탁한 보좌진 대표자 단체의 한 보좌관은 “20대 국회 4년 동안 20명 이상 보좌진을 바꾼 의원이 30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전했다. 8명(인턴 제외)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해마다 4, 5명의 보좌진이 새로운 얼굴로 바뀌는 의원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일을 하다 보면 서로 안 맞을 수 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1년마다 스태프의 절반을 새로 바꾼다면 과연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의원들의 특징은 전형적으로 ‘남 탓’을 많이 한다. 본인 실력은 생각하지 않는다. 국회의원 보좌진은 사표 제출과 같은 면직 절차를 따로 거칠 필요가 없다. 법적으로 이들의 해임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보좌진 면직 30일 전에 통보하는 면직예고제 도입은 20대 국회에서도 의원들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폐기됐다. 심의 과정에서 의원들은 “굳이 법률로 만들어야 하느냐” “각 의원이 자율적으로 면직예고제를 운영하면 된다” 등의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자율적 시행과는 거리가 있다. 한 보좌관은 그동안 자신이 사표를 쓴 횟수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모시던 의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터질 때마다 ‘공동책임’이라며 보좌진에게 일괄 사표를 쓰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의원의 지시를 받고 대리점에서 새 휴대전화를 개통해 의원에게 가져다 줬는데 전화번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날 바로 잘린 보좌관도 있다. 좋은 정치인을 골라내기는 쉽지 않다. 10년 넘게 국회를 출입한 기자들도 국회의원 300명 개개인의 사무실 내부 속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다. 대개는 주변의 풍문이나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을 참고할 뿐이다. 어느 국회의원에 대한 인간적 평가가 궁금할 때는 임기 중에 보좌진을 얼마나 갈아 치웠는지 살펴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에이, 설마….” 4·15총선 기간 동안 보수 진영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다. 각종 언론사 여론조사는 물론 정치권의 자체 분석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함께 절반이 넘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오면 조건반사적으로 이런 말이 나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근거는 ‘여론조사를 믿을 수 없다’였다. 친문 성향 유권자가 ‘과대 표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래통합당의 한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여권 지지자들은 똘똘 뭉쳐 답변을 한다. 점잖은 노년층은 상대적으로 숨는다. 투표에서는 1인당 1표씩이니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요즘 여론조사는 젊은 층에게 익숙한 휴대전화 비율이 너무 높다.” 그래서 통합당이 제시한 대안은 노년층의 응답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질 가능성이 있는 유선전화를 조사 과정에 더 많이 섞는 것이었다. 이번 21대 총선부터 여론조사업계는 조사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안심번호’(특정 선거구에 사는지 확인된 사람들의 휴대전화번호)를 도입했지만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결국 통합당 여의도연구소의 여론조사는 유선전화 조사 비율이 30%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선거를 치러보면 실제 의석수는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같은 현실 부정, 다시 말해 믿고 싶은 것만 보는 인지부조화 현상은 투표 당일까지 이어졌다. 곳곳에서 통합당의 폭망 가능성이 제시됐지만 통합당 내부에선 ‘투표율 65%’가 승패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투표율 65%가 넘으면 여론조사에서 잡히지 않은 샤이 보수가 대거 투표장으로 나온다는 뜻’이라는 설명이었다. 투표율은 66.2%로 65%를 넘었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보수 일각에선 투개표 조작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보수 스스로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라고 했던 이번 총선에서 통합당이 이런 패배를 당한 것은 이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병폐가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보수 당 앞에 놓인 현실은 과거와 달리 보수 진영이 정치 지형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4년 전 20대 총선까지 여론조사 시 응답자 비율은 보수 35%, 진보 25% 정도였지만, 3월 2일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진보 28.7%, 보수 26.1%였다. 중도는 36.5%였는데 그 중도층에서 민주당과 통합당의 지지가 37.3% 대 18.8%로 두 배 정도 차이가 났었다. 하지만 선거 기간 일부 극우 유튜버들은 ‘빅 마우스’가 되어 보수 진영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양 목소리를 높였고 결과적으로 진영 전반에 ‘정치적 마취제’로 작용했다. 그러다보니 보수의 합리적 인사들도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는 노력보단 ‘우린 할 수 있다’는 ‘정신 승리’ 모드에 빠져들었다. 황교안 전 대표는 물론이고 ‘혁신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당 공천관리위원회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보수 진영에선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백가쟁명식으로 쇄신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우선 보수진영의 ‘정치 시력’을 현실에 맞게 교정하지 않으면 다음 선거도 제대로 내다 볼 수 없을 것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4·15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비례대표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함께 단독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국난 극복’에 힘을 실어 달라는 호소에 국민은 다시 한번 집권 여당의 손을 들어줬다. 개표가 87.4% 이뤄진 16일 오전 2시 현재 민주당은 전체 253개 지역구 중 159곳에서 1위에 올랐다. 미래통합당은 88곳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다. 또 비례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열린민주당은 각각 17석과 3석을, 미래한국당은 19석을, 국민의당은 3석을 가져가는 것으로 예측됐다. 정의당은 비례대표 5석과 지역구 1석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6일 비례대표 당선자를 최종 확정한다. 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 등 민주당 계열 3개 정당은 총 170석 이상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정의당과 진보 성향 무소속 의원을 포함한 범진보 진영이 총 180석 이상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모두 110석 안팎을 얻는 데 그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총선까지 네 번의 전국 단위 선거에서 4연승을 거두는 정치권 초유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됐다. 또 집권 후반기를 맞이한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까지 정국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원내 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범진보 진영이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할 수 있는 5분의 3 이상 의석을 확보하면 정부 여당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등 각종 쟁점 정책과 법안을 ‘일방통행’ 식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낙연 민주당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장은 “국민께서 코로나19가 몰고 온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고 세계적 위기에 대처할 책임을 정부 여당에 맡겼다. 국민의 명령을 받들어 집권 여당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통합당은 ‘폭주 견제론’을 띄웠지만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선거 막판 터진 김대호 차명진 후보의 ‘막말 논란’으로 수도권 중도층이 대거 이탈했다. 종로에서 패한 황교안 대표는 15일 오후 11시 40분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총선 결과에 책임을 지고 모든 당직을 내려놓겠다”며 당 대표직 사퇴를 선언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통합당은 각종 프레임 전쟁에 집중한 반면 여당은 긴급재난지원금 정책, 마스크 공급 안정화 등 문제 해결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승패를 갈랐다”고 분석했다.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안 해 본 사람은 몰라. 정말 다시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고민이야.” 2016년 4월 총선 직후다. 국회 입성에 성공한 관료 출신 초선 의원 A는 “유세는 할 만했느냐”는 질문에 너스레를 떨었다. “길 한가운데 서서 지나는 사람, 오토바이, 자동차를 향해 끊임없이 ‘90도 인사’를 하는데, 눈이라도 마주쳐 주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렇게 매일 수십 km를 걸었다.” 그는 당시의 당혹스러움과 고통을 이같이 전했다. 4·15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식 선거운동이 2일 시작됐다. 후보들은 이번 총선 유세를 두고 “조용하지만 가장 치열하고 힘든 선거운동”이라고들 한다. 여느 선거 때와 다름없이 후보들은 아침 출근길 인사로 일정을 시작한다. 다만 유세 분위기는 예전과 사뭇 달라졌다. 귀를 맴도는 선거 로고송이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마이크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떼로 줄지어 다니는 선거운동원들과 율동을 곁들이며 지지를 호소하는 젊은 응원단의 모습도 눈에 띄게 줄었다. 명함을 들고 조용히 후보를 따르는 한두 명의 수행원이 전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때문이다. 지역구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후보들은 대체로 오전 4∼5시에 일어나 그날 일정을 점검하고 오전 6∼7시 출근인사를 한다. 이후 시장 종교시설 등 지역구 주요 거점 돌기, 유세차 타기, 토론회 간담회 등 행사 참석의 일정을 반복한다. 다시 오후 6∼7시 퇴근인사 그리고 밤늦은 시간까지 지역구 거점 돌기의 일과가 이어진다. 이동 중 검은색 승용차 이용은 금물이다. 골목골목을 직접 걸어야 한다. 유세 과정에서 “먹고살기 힘들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상인과 취객의 면박은 일상이다. 과거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심리적, 물리적으로 느끼는 피로감이 예년보다 더하다고 후보들은 입을 모은다. 후보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유권자들과 1m 이상 거리를 둔 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경기 침체 속에서 선거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명함 한 장 나눠주는 것도 쉽지 않다. 길모퉁이에서 유권자들에게 둘러싸여 공약을 설명하며 주민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선거운동을 병행하지만 유권자도 수행원도 응원단도 없는 ‘3무 유세’ 속에 후보들은 웬만해선 힘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아침저녁으로 피켓을 몸에 두르고 샌드위치맨으로 변신해 쉬지 않고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후보들은 6g에 불과한 금배지만 달면 바뀔 것 같은 생활, 장관급 대우를 받는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의 신분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눈길 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내는 ‘90도 인사’, 상인과 주민들의 면박 등 유세 기간 동안 후보들이 겪는 이런 고통들이 의미 있는 결실로 맺어졌으면 한다. 다만 싸늘한 민심을 향한 수만 번의 머리 조아림의 의미와 그 초심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더불어민주당이 플랫폼 정당 ‘시민을 위하여’와 함께 4·15 총선에 내세울 비례대표 연합정당 ‘더불어시민당’을 18일 출범시켰다. 민주당이 ‘개싸움 국민운동본부’(개국본) 출신들이 주축인 ‘시민을 위하여’를 앞세워 연합정당이라기 보단 사실상 친문(친문재인) 성향 ‘비례민주당’을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민주당과 연합정당 창당을 논의했던 정치개혁연합(정개련)은 “민주당이 선거연합 정당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렸다”며 반발했고, 미래당과 녹색당은 결별을 선언했다. ‘시민을 위하여’ 우희종, 최배근 공동대표는 1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자환경당, 기본소득당, 시대전환, 평화인권당, 더불어민주당 등 6개 정당은 ‘단 하나의 구호, 단 하나의 번호’로 21대 총선 정당투표에 참여할 것”이라며 “21일까지 (후보 신청) 공모를 받고, 다음 25일까지 심사해 후보자 등록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시민당의 비례대표 후보는 시민, 소수정당, 민주당 추천 후보 등 세 축으로 구성된다. 민주당 추천 후보들은 비례대표 10번 이후부터 후순위에 7명만 배치된다. 우 대표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민주당 중진 의원 당 대표추대설에 대해 “그런 것은 없다. 당 기호 등 현실적 문제로 민주당 의원들이 파견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들이 대표 결정 권한에 들어올 순 없다”고 못 박았다. 이어 “민주당은 말 그대로 ‘원 오브 뎀(one of them)’”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시민당의 독립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민주당이 녹색당 미래당 등 기성 정당을 빼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신생 원외정당들로만 연합정당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더불어시민당은 사실상 ‘비례민주당’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시민을 위하여’ 최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연합정당 참여를 결정한 민생당에 대해서도 “최고위원회에서 공식 결정을 했다고는 못 들었다. 답변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이날 관훈토론회에서 “민주당이 함께 하겠다고 발표한 작은 정당들은 사실 이름도 이번에 처음 본 정당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하승수 정개련 집행위원장은 민주당 측 협상 채널이었던 양정철 민주연구원장과 이근형 전략기획위원장을 거론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미래한국당이란 꼼수를 막고 정치개혁 성과를 지켜내고자 만들어진 정개련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이용한 것”이라고 성토했다. 또 “친문, 친조국으로 불리는 ‘시민을 위하여’와 처음부터 위성정당을 계획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안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날 비공개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남인순 최고위원은 “왜 굳이 갈등 상황을 만드나. 민주화 운동 원로들과 충분히 얘기하고 결정했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이해찬 대표는 “정개련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 같이 가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민주당 중진의원은 “비례연합정당 창당 명분을 만들어 준 원로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진보진영 내 분열만 증폭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길진균 기자 leon@donga.com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여론조사 결과를 믿어도 될까?” 요즘 여야 의원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다. 체감하는 정부 여당에 대한 민심은 바닥인데 각종 조사에서 나타나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지난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는 민주당 지지율 39%, 미래통합당 22%. 다른 조사에서도 민주당은 통합당을 꽤 앞서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문파들이 여론조사에 적극 응답하고 있다”는 설을 자주 접한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의 답변이 과도 표집, 다시 말해 여론조사에 더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침묵의 나선 이론’ 등을 언급하며 야당 지지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감추려 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가능성 있는 얘기다. 다만 “매우 이례적이진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처음 나온 주장도 아니다. 박근혜 정부 때도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실제 박 전 대통령 득표율보다 꽤 높았다. 그렇다면 체감 민심과 다른 여권 지지 여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우선 이전과 정치 지형과 구도가 달라졌다. 20대 총선까지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비율은 대체로 보수 35%, 진보 25% 정도였다. 보수 성향 유권자가 10%포인트가량 더 많았다. 중도는 약 30%였다. 지금은 다르다. 3월 2일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진보 28.7%, 보수 26.1%, 중도 36.5%다. 목소리가 크지 않은 중도가 상대적으로 많이 늘었다. 극심한 진영 대결 구도 속에서 핵심은 중도층의 응답인데, 이 중도층에서 민주당과 통합당의 지지가 37.3% 대 18.8%로 두 배가량으로 벌어진다. 정치 현장에서 체감하기 어려운 두꺼운 여권 지지층은 또 있다. 30, 40대 화이트칼라 사무직이 대표적이다. 한국갤럽의 13일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는 ‘잘하고 있다’가 49%, ‘잘못하고 있다’가 45%로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화이트칼라는 ‘잘하고 있다’ 60%, ‘잘못하고 있다’가 36%로 차이가 벌어진다. 각종 데이터를 보면 화이트칼라 응답자는 전체의 20∼30%로 직군별 비중이 가장 크다. 자영업자(15% 안팎)의 두 배 수준.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조국 사태’ 직후에도 화이트칼라의 민주당 지지는 영남에서도 여전히 견고했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19일 한길리서치의 부산시민 1002명 상대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문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는 ‘부정’(46.2%)이 ‘긍정’(38.6%)보다 많았지만 화이트칼라의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32.4%, 통합당 10.5%였다. 이들은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등으로 문재인 정부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많이 본 계층. 여기에 과거보다 2배가량 높아진 여권에 대한 호남의 지지율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이 같은 데이터를 간과하게 만드는 건 보수층 일부의 집단사고가 아닐까 싶다. 특정 인터넷 포털의 댓글들과 극우 성향 유튜브 뉴스들은 현 정권을 거의 저주하다시피 하고 있다. 반문(反文) 정서가 대다수인 것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환경이다. 캐스 선스타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토론하고 나면 평소 생각보다 더 극단적인 생각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여든 야든 선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함정은 충성도 높은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전체의 여론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