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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2분만 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2시간이 지나 있다.” 짧은 동영상 ‘숏폼(short form)’에 중독된 것 같다는 한 사용자가 인터넷에 올린 하소연이다. 숏폼을 시청하다 며칠 연속 밤을 꼴딱 새웠다는 어느 대학생은 “귀신에 씐 것 같았다”며 혀를 내두른다.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또 반복하는 나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집중력이 점점 짧아져 이젠 책 반 권도 못 읽어 낸다” 등의 고백이 이어진다. ▷숏폼은 10분 이내의 짧은 영상을 의미하지만 대다수 콘텐츠의 길이는 15∼60초에 불과하다. 툭툭 끊어지는 자투리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짧고 굵은’ 콘텐츠다. 화제가 된 드라마나 영화의 명장면부터 메이크업, 패션, 요리법 등이 요약 편집돼 있다. 빵 터지는 개그와 아이돌 스타, 반려동물은 빠지지 않는 킬러 콘텐츠다. 시청이 끝나면 자동으로 다음 영상이 연결되는데, 알고리즘이 관심 주제를 알아서 찾아주니 선택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젊은 세대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휙휙 넘기는 손가락질로 무한 재생되는 숏폼은 ‘디지털 마약’ 같은 중독성을 발휘한다. 해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숏폼이 어린이 발달에 미치는 영향’ 같은 유해성 관련 연구가 본격화하고 있다. 기억력과 집중력, 독서력 저하는 물론 강렬한 영상에 반복 노출된 이후 느끼는 일상의 지루함과 삶의 질 하락 같은 문제들에 대한 위기의식이 커진 결과다. ‘팝콘 브레인’ 증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두뇌가 즉각적인 자극에 반복 노출될 경우 팝콘이 터지듯 더 큰 자극만 계속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로벌 숏폼 플랫폼인 ‘틱톡’은 18세 미만 청소년의 사용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1일 발표했다. 틱톡의 원조 국가인 중국은 ‘어린이들의 짧은 동영상 중독’ 방지를 위한 관리 강화 방침을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정희원 교수 같은 국내 전문가들은 “합성마약이나 다름없는 숏폼의 시청 시간을 줄이기는 어려울 테니 아예 끊어라”는 단호한 조언도 서슴지 않는다. 실제로 중독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10, 20대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우려와 경계 속에서도 숏폼은 대세다. 페이스북이 ‘릴스’, 유튜브가 ‘쇼츠’를 선보였고 국내 SNS 업체들도 속속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쇼츠는 출시 1년도 되지 않아 일간 접속 수가 150억 뷰를 넘어섰다. 영상제작 강의가 넘쳐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더 자극적인 영상들이 쏟아진다. 사용 시간을 정해두는 등의 자율적 규제가 병행되지 않으면 ‘디지털 좀비’가 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숏폼이 주는 재미와 정보에는 결국 대가가 따른다는 말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읽지 않은 SNS 메시지 101개, 휴대전화 메시지 254개, 이메일은 4만6252개…. 이 중에서도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그룹 채팅방이다.” 영국의 방송 진행자이자 언론인인 시린 케일은 칼럼에서 와츠앱 같은 SNS의 단체 채팅방을 ‘독재’라고 비판한다. 원치 않는 채팅에 사람을 끌어들인 뒤 감정노동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란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관계의 부담을 지고 나가버릴 용기도 없다”는 고백도 한다. 한국인들이 받는 ‘단톡방 스트레스’가 해외에서도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카카오톡 단톡방을 조용히 나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다른 멤버들에게 알리지 않고 탈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최대 2000만 원의 과태료를 내도록 규정해놨다. ‘이런 것까지 법으로 규제하려 하느냐’는 일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발의 단계에서부터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부장님이 계시는 회사 단톡방’부터 시댁 단톡방까지 각자가 억지로 속해 있는 각종 단톡방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가 그만큼 쌓여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톡방에서 ‘조용히 떠날 권리’는 결국 SNS에서의 프라이버시 문제로 귀결된다. 원치 않은 정보나 논의 참여를 부담 없이 거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채팅방을 나가면 된다지만 ‘○○○님이 나갔습니다’라는 알림이 남은 멤버들에게 불러일으킬 관심과 억측, 실망감, 불만은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기 십상이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와츠앱에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도입하면서 ‘비대면 프라이버시를 대면에서와 같은 수준으로 보호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조용한 탈퇴’는 현재 국내에서는 유료 서비스에만 제공되고 있다.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온라인에서도 보장돼야 할 ‘자유롭게 들고 날 권리’를 돈으로 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반 프로그램에도 적용해 달라”는 사용자들의 요구에도 침묵하던 카카오톡은 법안까지 발의되고 나서야 뒤늦게 서비스 확대를 검토 중이다. 어물쩍대다 결국 법안에 등 떠밀리는 모양새가 됐다. ▷SNS를 이용하는 성인 5명 중 4명은 단톡방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카톡’ 알림에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단톡방에서 쏟아지는 정치적 주장이나 과도한 공격, 음담패설 등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이도 적지 않다. ‘카톡 감옥’, ‘카톡 지옥’으로 불리는 사이버 학교폭력도 문제다. 이런 단톡방의 횡포에서 자유롭게 탈출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버리고 떠나는 자’라는 꼬리표부터 떼 줘야 한다. 이런 일에 국회까지 나서야 되겠는가.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바로 지금, 여기 우크라이나에서 국제질서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20일 대국민 방송연설은 비장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는 그 국제질서가 ‘규범과 인간성, 예측 가능성’에 기반을 둬야 한다며 “필요한 것은 결의뿐”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나 전투기 지원 등을 요청한 직후였다. ▷러시아가 침공 사흘 만에 끝날 것으로 믿었다던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곧 1년(24일)이 된다.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이 전쟁은 국제 정세의 판을 완전히 흔들어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유럽에 맞서 러시아와 중국이 밀착하는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구도가 공고해졌다. 중-러의 밀착 속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아시아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 오커스(AUKUS) 등과의 협력으로 태평양까지 연대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블록화를 바탕으로 전선(戰線) 재편이 급속히 진행 중이다. ▷세계 2위의 군사대국인 중국의 대러시아 무기 지원은 향후 판도를 뒤흔들 변수다. 중국은 부인하지만 미국은 관련 움직임을 일부 포착했다는 게 외신의 보도다. 중국의 군사 지원이 현실화할 경우 진영 대결은 이념 전선을 넘어 유혈 충돌로 번질 수도 있다. 자칫 대규모 국제전으로 비화할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 장기화의 피로감 속에 러시아가 핵무기를 꺼내 들 가능성도 다시 제기됐다. 종신집권을 노리는 푸틴 대통령이 내년 3월 대선 승리를 위해 무리수를 쓸 수 있다는 우려다. ▷에너지난과 식량난 같은 지리경제학적 리스크도 현실화하고 있다. 제재로 막혀버린 기존 시장과 공급망의 대안을 찾느라 각국이 분주하다. 그렇다고 모든 국가가 진영 싸움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불리는 제3국가들 중에는 선뜻 편을 들지 않은 채 전세를 봐가며 합종연횡을 모색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념보다는 각국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끝나고 다극체제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이르렀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측 사망자 수 22만 명, 난민 등 인도적 지원 대상자 1800만 명, 물적 피해 1145억 달러(약 149조 원)…. 처참한 현실 앞에서도 전쟁은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의 ‘3월 대공습’을 앞두고 양측 모두 전방에 병력과 무기를 다시 집결시키고 있다. 이 파국적인 소모전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새 국제질서는 어떻게 정착될지,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를 비롯해 수많은 숙제가 던져질 것이다. 한국도 비켜 갈 수 없는 질문들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최근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성장률 전망치에 가장 충격을 받은 나라 중 하나가 영국이다. 서방의 주요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전망치가 기존보다 하향 조정되면서 올해 ―0.6% 역성장이 예고됐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각종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보다도 낮았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3주년을 맞아 리시 수낵 총리가 “브렉시트로 얻은 자유 덕에 엄청난 진전을 이뤄냈다”고 자찬한 기념 성명은 빛이 바랬다. ▷‘정치적으로는 대혼란, 경제적으로는 참사.’ 영국 일간 가디언을 비롯한 언론의 평가는 냉혹하다. “브렉시트는 망상”, “국가적 자해” 같은 노골적 비판이 쏟아진다. 브렉시트를 후회한다(Brexit+regret)는 의미의 ‘브레그렛(Bregret)’이라는 신조어도 퍼졌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EU로 되돌아가기 위한 재투표 의향이 있다”는 답변이 57%로 절반을 넘었다. 영국 여론이 단순히 후회의 감정을 넘어 실제적인 복귀 요구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 중앙은행에 따르면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의 무역거래 규모는 15% 줄었다. 각종 통관, 승인 절차 등 무역 장벽이 높아진 탓이다. 자동차 생산량부터 외국인 투자까지 각종 수치는 하락세다. 동유럽 노동자 행렬이 끊기면서 인력난이 심화했고, 물자 공급망 또한 적잖게 훼손됐다. 국가적 생산성 손실 규모는 290억 파운드(약 45조 원), 가구당으로 따지면 1000파운드(약 155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파업과 시위 횟수는 1970년대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영국이 다시 ‘유럽의 병자’가 됐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브렉시트를 결정한 것은 영국인들 본인이었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51.9%로 반대(48.1%)보다 높게 나왔다. 관료적 EU의 통제와 100억 파운드가 넘는 분담금 부담, 몰려드는 불법 이민자 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던 때다. 그러나 찬성표를 던졌던 이들조차 이제는 “정부에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돈이 많아질 거라고 했는데, 완전히 속았다”는 자영업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다. 국민투표 당시 EU의 작동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표를 던진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렉시트를 외쳤던 정치인과 선동가들은 침묵하고 있다. 책임을 따져 물으면 “정부가 탈퇴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거나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세계 경제 5위의 대국이었던 자국의 추락 앞에 속수무책이다. 시행착오 과정이라는 항변을 받아주기엔 사회적, 경제적 손실이 막심하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결정을 변덕스러운 여론에 맡겼던 포퓰리즘 정치가 부른 결과일 것이다. 그 대가를 얼마나 더 오래, 더 크게 치러야 할지 모른다는 게 더 문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요즘 서점이나 인터넷에는 퇴직 관련 정보가 쏟아진다. “평균 1년 단위로 6번 퇴직했다”는 ‘프로이직러’의 경험담부터 퇴직급여 계산 같은 구체적인 준비 노하우를 담은 지침서까지 그야말로 퇴직 콘텐츠의 홍수다. 지난해 한 리서치업체 조사에서 입사 1년 이내에 퇴사한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60%에 달했다. 직장인들이 유목민처럼 회사를 옮겨 다니는 ‘잡 노마드(job nomad)’ 시대의 단면이다. ▷‘입사 3년 안에 퇴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년 직장인이 전체의 86%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3년이면 회사 입장에서는 기본기를 닦아 본격적으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는 시기다. 이때쯤 사표를 던지려는 ‘퇴준생’(퇴직준비생)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한국만 유별난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는 “3∼6개월 안에 회사를 옮길지도 모른다”는 답변이 66%나 됐다. 미국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4세의 경우 평균 근속기간이 1년 3개월에 불과했다.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잦은 이직은 과거 부적응의 근거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는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분위기다. 보상과 근무환경 등에서 최적화 조건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N잡러’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이직 기간의 공백에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연봉만큼이나 근무 유연성과 자기 계발 기회를 따진다. 특히 Z세대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올리버와이먼의 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85%는 재택근무나 최소한 하이브리드 근무를 원하고 있다. ▷문제는 잇단 이직 시도가 자칫 발전 없이 퇴사와 재취업을 반복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CNBC 등 언론 인터뷰나 설문조사에 응한 국내외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이직 전력이 많은 지원자를 “책임감과 인내심이 모자라고 일에 전념하지 않으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언제라도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다수가 채용을 검토하겠다는 ‘이직러’의 조건은 “전 직장에서 최소 3년 이상은 근무한 사람”이었다. 조직 내 협업과 네트워크, 선배의 가르침 등에서 얻는 경험을 쌓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다.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데다.”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한 드라마에서 명대사로 뽑혔던 이 한 문장은 아직 유효하다. 불합리한 조직문화나 보상체계를 견디라는 게 아니다. 그 개선과 변화는 인재를 붙잡기 위해 회사가 감당해야 할 몫일 것이다. 개인은 스스로의 성장에 필요한 시간 확보를 위해서라도 회사와 호흡을 맞추는 기간을 더 늘려 보면 어떨까.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는 프로 선수가 이적을 도전하는 시기는 오랜 훈련을 거쳐 일류 선수로 성과를 냈을 때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법인용 차량 번호판 색깔이 이르면 7월부터 연두색으로 바뀐다. 업무용 차량이라는 것을 알게 해 이를 사적으로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제도 시행 이후 새로 등록할 것으로 추산되는 연간 15만 대가량의 법인차가 대상이다. 현재 법인 명의로 등록돼 있는 344만 대에 대해서는 세제 감면 등 혜택으로 번호판 교체를 유도하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요즘 고가 수입차 매장에는 구매 문의를 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늘었다. 법인차 전용번호판제가 예고된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미 나타난 흐름이다. 번호판 색깔이 바뀌기 전에 미리 사두자는 것이다. ‘연두색 번호판’으로 불필요하게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법인차는 회삿돈으로 구매, 운용되고 감가상각 등에 따른 세금과 보험 혜택을 볼 수 있다. 업무용 자산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어지는 혜택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악용한 탈세 행태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3년 전 탈세 혐의로 세무당국에 적발된 한 사업가는 슈퍼카를 6대나 법인차로 등록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가족들이 각자의 자가용처럼 타고 다녔다. 당시 그를 포함해 집중 세무조사 대상이 된 9명이 법인차로 등록한 슈퍼카는 모두 40대가 넘었다. 차량 가격을 모두 합치면 100억 원대였다. ▷대당 가격이 4억 원에 이르는 맥라렌은 한 해 팔린 차량이 전부 법인차로 판매되기도 했다. 롤스로이스, 페라리, 람보르기니, 벤틀리 같은 고급 슈퍼카들도 법인차 비율이 모두 80%를 넘는다. 이런 차량을 회사 비용으로 사들여 사적으로 쓰는 얌체족들의 일탈행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를 잡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선의의 피해자들이다. 개인 사업자들은 사실상의 사회적 낙인찍기라고 반발한다. “돈 많이 벌어 세금 많이 내는 기업의 법인차에는 골드나 플래티넘 번호판을 달아 사회적으로 존경받도록 하자”는 역제안도 들린다. ▷슈퍼카를 굴리며 탈세를 일삼는 부도덕한 사업가는 마땅히 찾아내서 엄벌해야 한다. 심각한 경우는 횡령 등의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법인차에 연두색 번호판을 달도록 일괄적 행정조치를 내리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편법과 불법에 대한 ‘핀셋’ 단속과 처벌 강화 같은 정공법은 놔둔 채 자칫 법인차 전체에 ‘주홍글씨 낙인’을 찍어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인차 구매 시 기준과 조건을 강화하고, 일정 금액이 넘는 고가 차량에 대해서는 법인세 혜택을 없애버리는 것 등도 같이 검토해 볼 만한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은 아닌지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국내 주요 대기업의 한 센터장은 최근 신년 보고서 작업을 하다 주변을 둘러보곤 격세지감을 느꼈다. 같은 층 사무실의 다른 센터에 센터장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같이 야근을 하고 있던 40대 팀장은 “저라도 남아 있으니 너무 고맙죠?”라며 농담 섞인 생색을 냈다고 한다. 젊은 직원들은 정시 퇴근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팀장급 이상만 남아서 일을 마무리하는 요즘 사무실 풍경이다. ▷국내 100대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의 첫 번째 기준으로 ‘책임의식’을 꼽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5년 단위로 시행하는 인재상의 올해 조사 결과다. 2018년에는 5위에 그쳤던 책임의식이 1위로 올라온 것이 눈에 띈다. ‘도전정신’과 ‘소통·협력’, ‘창의성’, ‘열정’을 모두 제쳤다. 업무 현장에서 책임의식 강화가 그만큼 절박했다는 의미다. 대한상의는 결과를 분석하면서 Z세대를 콕 찍었다. “보상의 공정과 자아실현을 요구하는 Z세대에 기업들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식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회사가 요구하는 인재상은 시대와 트렌드에 따라 변한다. Z세대가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하는 시기인 만큼 이들의 특징이 인재상의 조건과 기준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Z세대가 받는 만큼만 일하고, ‘워라밸’을 챙기며, 조직 논리를 거부한다는 게 기업들이 갖고 있는 인식이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 퇴사를 20번 했다는 ‘프로퇴직러’가 소개되는 등 1, 2년 안에 회사를 옮기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개인 역량보다는 근무 태도에 비중이 더 실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Z세대가 가져온 기업 현장의 변화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은퇴하는 베이비부머들의 자리를 속속 채우고 있는 Z세대 인력은 향후 10년 안에 지금의 3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해외의 채용 컨설팅 회사들은 ‘Z세대 고용을 위한 10가지 노하우’ 같은 자료들을 쏟아내고 있다. “메뚜기처럼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직장을 옮겨다니고(job hopping)”, “침대 속에서 클릭 한 번으로 일하기를 원하는” 신입 직원들을 보는 기업들의 불안한 시선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런 기업과 그 속에서 일하려는 젊은 직장인의 동행은 만국 공통의 과제인 셈이다. ▷기업의 ‘꼰대 문화’를 거부하는 신세대 직원들의 항변에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바뀐 근무 특징이 업무의 완결성을 해치거나 협업을 저해하는 경우까지 정당화하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주인’이라는 자세로 일하는 것은 기업을 위한다기보다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동력이기도 하다. 기업들이 앞으로 발굴, 투자하고 키워갈 미래 인재를 찾는 기준도 이것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5년 전 2위였던 ‘전문성’은 올해 6위까지 밀렸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뭔가 수상한데….’ 중국 반도체 소재 회사인 D사로 이직한 40대 연구원의 이상 동향이 국내 정보기관에 포착된 것은 지난해 초였다. 이직 전 회사의 업무용 노트북을 “바이러스에 걸렸다”며 폐기해버린 과정도 석연치 않았다. 기존 회사의 서버 등에서 찾아낸 이메일 기록에서는 민감한 기술 정보가 외부로 빠져나간 흔적이 발견됐다. 그와 비슷한 시기 D사로 옮긴 다른 한국인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있었다. ▷반도체 핵심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린 연구원 6명이 최근 재판에 넘겨졌다. 주도적 역할을 한 50대 연구원은 2018년 임원 승진에서 탈락한 뒤 중국 회사로의 이직을 결심했다고 한다. 승진 탈락에 앙심을 품은 상태에서 “연봉의 3배 이상을 주겠다”는 중국 측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는 중국 회사와 동업을 약속하고도 태연히 기존 회사에 근무하며 반년 넘게 기밀자료들을 빼돌렸다. 그 기간에 동종업계 연구원들을 스카우트해 먼저 중국에 들여보냈다. 장시간에 걸친 치밀한 준비 작업이었지만 끝내 덜미가 잡혔다. ▷반도체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군사, 항공우주, 바이오 등 타깃이 되는 첨단기술 중에서도 가장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반도체 분야에서 빠져나간 주요 기술은 100건을 훌쩍 넘는다. 해킹과 내부자 매수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지만 주된 루트는 결국 인력 자체의 이동이다. 승진 누락자나 퇴직자 등 보안 관리가 느슨해진 이들의 빈틈을 노린다. 기술 유출 사건으로 검거되는 혐의자의 46%가 퇴직 인력이다. ▷치열해지는 글로벌 산업기술 확보전 속에서 특히 중국의 기술 탈취 시도는 집요하다. 반도체 기업 TSMC가 있는 대만은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관련 업계 주요 인사들의 중국 여행을 사전 심사·승인하는 절차까지 만들었다. 중국과 기술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경우 FBI가 추적 중인 기술 탈취 사건만 1000여 건에 이른다. 세계 최대 반도체 노광장비 기업인 네덜란드 ASML도 실리콘밸리의 자회사를 앞세워 기술을 빼내려 한 중국 회사를 고소했다. ▷첨단 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는 것은 특정 기업이나 산업을 넘어 국가 이익을 훼손하는 매국적 범죄 행위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적발된 기술 유출 건만 해도 피해 규모가 25조 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막겠다고 연구원 개개인의 애국심이나 도덕성에만 기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핵심 인력을 붙잡을 인센티브와 유출 시 엄벌하는 시스템을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해외로 기술을 유출한 산업스파이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지금 같은 솜방망이 처벌로는 “수백억 원 받고 팔아넘길 만하네” 같은 소리만 나올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기념일이다. 미국인들은 연방 공휴일인 이날 킹 목사 기념관을 찾고, 그의 연설문을 자녀들에게 들려주며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를 가르친다. 올해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 60주년이라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킹 목사가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주일 연설을 하며 그를 “비폭력의 전사”로 기렸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 살게 되리라는 꿈… 노예의 후손들과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킹 목사의 연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 중 하나로 꼽힌다. 학자들이 뽑은 ‘20세기 최고의 미국 정치연설’에 올라 있다. 반복되는 표현의 단순함이 평등을 부르짖는 메시지의 강력함을 증폭시킨 명문장이다. 킹 목사를 두고 “한 문장만으로 제퍼슨과 링컨 같은 역사적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도 나왔다. ▷1963년 8월 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아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 대행진 기념행사에서 킹 목사의 연설 순서는 18명의 초청 연사 중 16번째였다. 워싱턴포스트는 “연설이 막바지에 달할 때쯤 부산하던 뉴스룸이 조용해지고 기자들이 멈춰선 채 TV 속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반면 25만 명이 운집한 현장의 열기는 여름 무더위를 무색하게 할 만큼 뜨거워졌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FBI는 킹 목사를 선동에 앞장설 ‘위험인물’로 지목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0년이 지났지만 킹 목사의 연설은 여전히 살아 있다. 2020년 백인 경찰에게 목이 눌려 흑인이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미국인들은 전역에서 터져 나오는 인종차별 철폐 외침을 다시 들어야 했다. 흑인이 인구의 13%를 차지하지만 범죄 혐의를 받는 수감자의 비율은 35%로 가장 높은 게 미국의 현실이다. 경찰 체포 과정에서 사망하는 흑인의 수는 백인의 3배에 달한다. 첫 흑인 대통령의 기록을 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마저 “인종 간 격차는 더 벌어졌다”고 했다. ▷불평등 혹은 차별의 문제가 어디 피부색뿐일까. 여성을 짓누르는 유리천장에서부터 종교, 학벌, 가난 등으로 받는 차별의 문제는 국제사회 도처에 존재한다. 그 누구도 이런 조건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 지금도 누군가는 계속 싸우고 있다. 현실적 한계의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는 꿈”을 꾸는 우리 옆의 전사들이다. 우리 모두 꾸어야 할, 그리고 실현시켜야 할 꿈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고도 800km 안팎의 지구 저궤도에는 현재 7000개가 넘는 인공위성이 작동하고 있다. 수십 년 전 발사돼 수명이 다했거나 고장 난 채 방치된 위성도 3000개에 육박한다. 쓸모없어진 이들 위성과 그 잔해물은 이른바 ‘우주 쓰레기’가 된다. 최근 한반도 상공을 지날 것으로 예측됐던 미국 지구관측 위성도 이 중 하나였다. 다행히 알래스카 인근 해역에 추락해 피해는 없었지만 한때 경계경보까지 발령되면서 적잖은 이들을 긴장시켰다. ▷하늘에서 떨어진 우주 쓰레기에 사람이 맞은 첫 사례가 나온 것은 1997년 미국 오클라호마시티에서였다. 시커먼 운석처럼 생긴 15cm 크기의 금속 물체가 느닷없이 로티 윌리엄스 씨의 어깨를 때렸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이 물체가 델타2로켓의 잔해임을 공식 확인했다. 작은 파편이었기에 망정이지 수 t짜리 대형 위성 잔해가 떨어졌다면 대형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주 쓰레기에 대응할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한 게 이때다. ▷우주를 떠도는 위성 잔해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파편을 만들어낸다. 2009년 미국의 이리디움 통신위성이 러시아의 위성 쓰레기와 충돌했을 때는 대형 파편만 1800개가 쏟아져 나왔다. 반복된 충돌로 파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케슬러 신드롬(Kessler Syndrome)’ 이론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크기가 1cm보다 작은 우주 쓰레기는 지금도 무려 1억3000만 개에 이른다는 게 유럽우주국의 추산이다. ▷우주 쓰레기의 대부분은 대기권 진입 과정에서 대기와의 마찰로 불타 없어진다. 그래도 스테인리스나 티타늄처럼 고온을 견디는 재질은 지상까지 도달 가능하다. 파편 크기가 작은 경우에도 속도가 붙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주에서 낙하하는 잔해는 최대 초속 7km의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총알의 10배 속도다. NASA는 “지구로 추락하는 잔해 때문에 사람이 피해를 볼 확률은 9400분의 1 수준”이라고 했지만 하나라도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재앙이 따로 없다. ▷인공위성이 많아지는 만큼 우주 쓰레기의 양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미중 간 우주 개발 경쟁이 가열되는 때다. 스페이스X가 쏘아올린 스타링크 위성만 이미 3500개, 아마존이 위성통신 사업 ‘카이퍼 프로젝트’를 위해 발사하겠다고 밝힌 위성 수도 3000개가 넘는다. 인공위성의 수명은 15∼20년. 다음 세기에는 우주 쓰레기가 저궤도 상공을 덮을 정도로 불어나 위성 발사가 불가능해질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지구 바깥의 환경오염에 대비해 우주 쓰레기 종량제라도 실시해야 할 판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미국과 핵전력 ‘공동 연습’을 하겠다고 한 윤석열 대통령 발언의 여진은 외신들로부터 적잖은 주목을 받은 듯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과 공동 핵 훈련을 하느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한 내용이 아시아와 유럽, 중동 지역 매체에까지 온라인 기사로 보도됐다.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의 요청을 ‘거부(reject)’했다거나 ‘무시했다(snub)’고 제목을 단 곳들도 있었다. 미국이 동맹국에 어떤 수준의 확장억제를 제공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는 때이긴 했다. 핵탄두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라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가 새해 꼭두새벽부터 나온 터다. 러시아의 핵 위협도 다시 노골화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바이든 대통령의 “노(No)”는 다른 나라들에 일종의 시그널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다. 핵무기 운용의 독점권에 미국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미 양국이 부랴부랴 진화에 나서면서 해프닝처럼 마무리되긴 했지만 뒤끝이 개운치 않다. 대통령실이 “미국 핵전력 자산의 운용에 관한 공동 기획과 공동 실행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해명한 부분은 지난해 한미안보협의회의(SCM) 성명 문구와 똑같다.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인데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기대만 부풀린 셈이 됐다. 대외적으로 한국이 핵 공동 훈련을 요청했다가 퇴짜를 맞은 모양새로 비친 부분도 아쉽다. 당초 북핵 대응의 해법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대안을 짜내려니 이런 논란은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나토(NATO)식 핵 공유나 전술핵 재배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국에 남은 선택지는 미국의 확장억제책에 기대는 것뿐이다. 핵보유국들끼리만 한다는 핵 공동 훈련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한미 공동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테이블톱 연습(TTX)’ 등의 모의훈련에 한정돼 있다. 미국이 핵 훈련을 함께 하는 상대는 유럽의 나토 동맹국들이 유일하다. 나토는 ‘스테드패스트 눈(Steadfast Noon)’으로 불리는 미국과의 합동 훈련을 매년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4개국 60개 전투기가 미국의 B-52 전투기와 함께 핵전쟁 시나리오에 따른 훈련을 펼쳤다. 러시아가 자국 핵 훈련인 ‘그롬(Grom)’을 진행한 시기에 맞대응하는 구도를 연출했다. 미국은 “동맹의 핵억지력이 안전하게 확보되고 효율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 뿐 대외적 상황과는 관련이 없다고 했지만, 러시아는 그래도 긴장했을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북핵 공동 대응 논의는 아직도 초기 단계다. 북한의 핵개발이 고도화하면서 미국의 태도에도 일부 변화는 나타나고 있다고 군 관계자들은 말한다. 핵 운용의 공동 기획 등을 통해 한국이 관여할 여지를 늘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의 간극은 여전히 커 보인다. 입장 차가 오해나 혼선을 부르는 상황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자체 핵개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강경론자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한국핵자강전략포럼’ 같은 자체 핵무장론자들의 연대가 조직을 갖추고 본격 활동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미국의 확장억제 전략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이들의 요구는 더 커질 것이다. ‘동북아 핵 도미노’를 부추기는 뇌관이 될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양국 정부는 협의 과정에서 공동 대응의 세부 내용을 사실상의 핵공유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가능한 선에서 최대치까지 끌어올려도 억제 효과를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북핵 위협은 커져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심하게 찌그러진 채 뒤집어진 차량에서 사람이 생존하긴 어려워 보였다. 험준한 바위 협곡 밑으로 90m 넘게 굴러 떨어진 차였다. 15초간의 낙하 충격으로 타이어까지 튕겨 나갔다. 그런데 차량 안에 타고 있던 미국인 커플은 뼈 하나 부러진 곳이 없었다. 이들은 소셜미디어에 사진과 함께 기적과 같은 생존 사실을 알렸다. “현대 엘란트라(국내 모델명 아반떼) N은 훌륭한 차”라면서. ▷이달 중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났던 차량 사고의 생존자 커플은 뒤늦게 진행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백만분의 1 확률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요즘 한국 자동차의 안전성을 따져보면 사실 그 확률을 확 올려서 말해도 무리가 없다. 지난해 2월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가 제네시스 GV80를 타고 가다 벌어진 충돌 사고에서 살아남았고, 올해는 유명 아이스하키 선수 야로미르 야그르가 기아 EV6를 몰다 트램에 부딪혔지만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그는 당시 “기아가 나를 구했다”고 했다. ▷교통사고 시 생존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내부 안전공간 확보와 충격 완화다. 충격을 받아도 비틀리지 않고 버티는 힘이 좋은 초고장력 강판의 사용 비중이 높을수록 안전성이 커진다. 반대로 충격 흡수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아코디언처럼 잘 구부러지게 만드는 기술도 필요하다. 용접 기술과 접착제, 내부 보강재 성능도 영향을 미친다. 최대 10개에 이르는 에어백 중에는 탑승자들끼리 머리가 부딪혀 깨지지 않도록 중간 히터에서 터지는 것도 있다.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의 안전성 강화 경쟁은 치열하다. 현대차의 경우 국내에서만 연간 700여 회의 충돌 테스트를 진행한다. 영하 40도의 혹한에서부터 데스밸리 사막의 혹서까지 다양한 환경을 설정해 실험용 차량을 떨어뜨리고 굴리고 처박는다. 사람 모양의 실험용 더미도 나이와 성별 등 특성에 따라 160개가 넘는다. 더미의 몸 곳곳에 부착된 센서도 150개에 이른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별도의 시뮬레이션 테스트까지 1만5000회를 거치고, 볼보는 교통사고 데이터를 분석, 누적해 연구에 반영하고 있다. ▷눈부신 기술 발달 덕에 “이제 웬만한 자동차 사고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말도 나온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에서 안전성 최고 등급인 ‘TSP+’를 받는 국산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가 3000명에 육박한다. 하드웨어 안전장치에만 기대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음주운전 근절, 안전벨트 착용, 상대방을 배려하는 신중한 운전 같은 기본이 지켜져야 한다. 자동차 안전성의 핵심 키도 결국 사람이 쥐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2020년 테슬라의 한정판 굿즈로 숏팬츠(Shorts)를 내놨다. 빨간색 새틴 원단에 금색으로 테슬라 전기차량의 모델명을 모은 ‘S3XY’를 박아 넣은 제품이었다. 머스크는 이 소식을 트위터로 알리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는 공매도(Short) 투자자들에게 몇 개 보내주겠다”고 했다. 테슬라의 주가 하락에 베팅했던 이들을 조롱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머스크는 공매도 투자자들을 향해 “테슬라가 죽기를 바라는 얼간이들”, “가치 파괴자”라고 맹공해 왔다. 테슬라에 대해 수억 달러의 공매도 포지션을 취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나 ‘공매도의 전설’ 마이클 버리를 상대로 노골적인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테슬라 시가총액이 1조 달러를 넘어서며 ‘천슬라’의 기록을 쓴 2020년은 머스크에게 ‘복수의 해’였다. 당시 공매도 투자자들은 38조 원의 손해를 봤다. 올해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주가가 1년간 60% 넘게 가파르게 추락하면서 공매도 투자자들이 20조 원 가까운 이익을 낸 것이다. ▷적으로 여겨온 공매도 세력의 배를 불려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머스크 자신이다. 트위터 인수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불안한 리더십과 충동적, 일방적인 경영 행보에 광고주와 이용자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 중이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주요 언론사 기자들의 계정을 일방적으로 정지시킨 것은 SNS 사유화 논란을 불렀다. 인수자금 확보를 위해 40억 달러어치의 테슬라 주식을 팔아치운 것도 투자자들의 실망감을 키웠다. 머스크는 ‘트위터의 늪’에 빠진 채 밉상 CEO가 되어가는 처지다.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테슬라의 가치 산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토로한다. 테슬라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던 ‘괴짜 천재’ 머스크의 자유분방함이 점점 리스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팟캐스트에 나와 마리화나를 피우고, 테슬라의 비상장 전환 계획을 전격 발표하는 등의 소동으로 수차례 입길에 올랐던 그다. “머스크의 트위터 한 줄에 휘둘리는 상황에 지쳤다”고 하소연하는 투자자가 적지 않다. 유독 격하게 진행돼온 테슬라와 공매도 세력과의 전쟁은 ‘CEO 리스크’에 베팅한 이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공매도 세력들은 “머스크 광대극의 끝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머스크의 실체를 드러내 주가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라며 공매도를 옹호한다. 이에 맞선 주주들은 머스크의 트윗에 “당신이 자동차와 주행에 대해 이야기하던 옛날이 그립다”며 핵심 역량에 집중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치열해지는 전기차 경쟁,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 중국을 비롯한 주요 시장에서의 실적 부진 등 테슬라가 부딪힌 난관은 결국 머스크가 뚫어내야 하는 숙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우주는 엄청난 힘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경기장이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해 인사 청문회에서 중국, 러시아의 우주 선점 시도를 경고했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우주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며 “장관이 되면 향후 전략적 검토에서 우주 공간도 세밀히 들여다보겠다”고 밝혔다. 폐지 논란이 불거지던 우주군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하는 순간이었다. ▷우주군을 독립된 군 조직으로 운영하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2019년 창설 당시 예산 부담, 공군과의 업무 중복 등 문제로 펜타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로고가 SF 시리즈 ‘스타트렉’ 것과 비슷하다는 논란이 벌어졌고, 제복 디자인과 군가 등은 “우주와 동떨어졌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코미디 드라마 ‘우주군(The Space Force)’에는 “스타워즈 광선검으로 햄버거를 데워 먹느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대사가 곳곳에 등장한다. 미션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희화화되는 경우가 적잖았다. ▷우여곡절 끝에 창설된 우주군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존속 의사를 천명한 이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6번째 군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치적 쌓기용 아니냐는 의구심은 쑥 들어갔다. 러시아, 중국의 우주굴기를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해 견제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500기가 넘는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린 중국은 이른바 ‘스파이 위성’을 추가로 쏘아 감시, 정찰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유인 우주선인 ‘선저우 15호’를 발사한 데 이어 이르면 이달 말 우주정거장 ‘톈궁 3호’의 건설을 완료할 계획이다. ▷미 우주군이 당장 중국, 러시아 군대와 레이저빔을 쏘아대는 우주전쟁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8400명의 우주군 인력은 현재 위성통신과 GPS 운용, 이를 통한 미사일 감지 역량 강화 등에 집중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 미 본토를 겨냥한 ICBM 발사는 우주군이 대응해야 할 주요한 안보 위협의 최우선 순위에 올라 있다. 미국이 주한미군사령부 예하에 우주군 부대를 창설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방증이다. 북한은 올해만 30여 차례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며 전례 없는 빈도의 무력시위를 이어가는 중이다. ▷주한 미 우주군의 부대 마크에는 88개 별자리 중 하나인 용자리가 그려져 있다. 북극성 주위를 돌면서 변함없는 위치를 지키는 용자리가 우주군 ‘가디언스’의 준비태세를 뜻한다고 한다. 그 아래 가로 경계선은 남북을 갈라놓는 비무장지대(DMZ)를 의미한다는 게 우주군의 설명이다. 북한의 도발에 맞서기 위해 육해공군은 물론이고 우주군까지 전방위로 힘을 합치겠다는 미군 의지의 상징이다. 평양이 똑똑히 알아들어야 할 메시지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일본 망가(漫畵·manga)들은 한국 웹툰에 가려져 빛이 바래고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한국과 일본의 만화 산업을 비교한 최신호의 기사 내용이다. 이 문장 그대로 제목이 된 기사는 만화의 원조이자 아시아의 만화 강국이었던 일본의 아성을 한국 웹툰이 무너뜨리고 있다고 전한다. 드래곤볼과 슬램덩크, 시티헌터, 베르사유의 장미…. 인기작들을 쏟아내며 ‘망가’를 해외에서 통용되는 고유명사로 만들었던 일본으로서는 자존심을 후벼 파는 보도다. ▷한국 웹툰의 시장 규모가 37억 달러를 돌파하며 급성장하는 반면 일본의 망가는 19억 달러 규모로 감소 추세다. 일본 디지털 만화 플랫폼의 양대 축은 한국 회사인 네이버 라인망가와 카카오의 피코마로, 두 회사의 시장점유율은 80%에 육박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100만 점 이상의 작품 중 상당수가 일본어로 번역된 웹툰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를 중심으로 일본 문화를 해외에 확산시키려던 ‘쿨 저팬’ 전략도 초라해진 지 오래다. ▷모바일 중심으로 급속히 전환하는 글로벌 만화 시장에서도 일본 작가들은 흑백의 단행본 출판을 고집해 왔다. 주인공의 땀방울까지 세밀하게 그려내는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은 신세대 독자층이 즐기는 속도감을 따라잡지 못했다. 시선을 사선으로 움직이게 하는 만화책의 화면 분할 방식은 스마트폰의 스크롤로 쭉쭉 내릴 수 있는 웹툰의 세로 읽기보다 답답하다. 탄탄한 국내 마니아층이 유지되다 보니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작가도 많았다. 과거의 강점들이 망가 산업의 혁신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웹툰은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되는, 한류의 새로운 킬러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글로벌 판권 경쟁은 물론이고 각종 굿즈 생산에 방송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작품 속 간접광고(PPL)까지 비즈니스의 확장성도 어마어마하다. 인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웹툰을 새로운 학문으로 평가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프랑스 명문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 산하 연구소에서 연구 사례로 등장할 정도로 위상도 높아졌다. ▷웹툰의 성공은 모바일에 최적화된 제작 기법, 누구나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개방형 게재 시스템, 독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반영할 수 있는 상호작용 등의 강점이 종합적으로 밀어올린 결과다. 상상력 가득한 한국 작가들의 경쟁력이 첨단 정보기술(IT) 플랫폼 위에서 한껏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일본 작가들도 뒤늦게 웹툰 스타일의 디지털 만화 제작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령화된 옛 독자층에 매달린 채 만화책을 한 장 한 장 스캔해서 올리는 방식으로는 이미 날개를 달아버린 한국의 웹툰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외교부 출입기자 시절 한중 언론인 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해 베이징을 방문한 적이 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과의 간담회 도중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둘러싼 중일 간 영토 분쟁에 대해 질문했다. 중국명이 아니라 일본명 ‘센카쿠’로 열도를 언급해놓고 ‘아차’ 하는 순간, 그는 “우리의 친구 한국의 기자가 어찌 그런 단어를 쓰느냐”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펑유(朋友)’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던 그의 답변이 기억에 남아 있다. 10년 전 장면이 새삼 떠오른 건 최근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공화당 의원들이 발간한 ‘중국공산당의 악성 영향력 폭로’ 보고서를 들여다보면서였다. 보고서는 중국이 대외적으로 ‘악성(malign) 영향력’의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며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침투 방식을 나열했다. 국가별 사례도 구체적으로 거론돼 있는데 한국의 경우 미디어 투어 등 ‘언론 협력을 가장한 프로파간다 주입’이 시도된 것으로 나온다. 이 기준에 따르면 기자는 그때 이미 중국의 악성 영향력에 노출된 셈이다. 해외 언론이 중국 인사의 인터뷰 기사나 기고문을 싣는 것도 중국이 악성 영향력을 시도하는 방식이라는 게 보고서의 주장이다. ‘공공외교’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는 사실상의 모든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 의회 내에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의원들이 있고 이들이 만드는 보고서가 보란 듯이 발간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마이클 매콜 의원은 의회 내 대표적인 대중 강경파다. 수년 전부터 반복된 그의 중국 공격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가 하원 외교위원장이 될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뒤 가장 유력한 위원장 후보로 거론되는 이가 매콜 의원이다. 그의 매파적 대중 관점이 하원 전체의 입법 활동에 고스란히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공화당 의원들은 벌써부터 대중 압박 강도를 높이겠다고 벼르고 있다. 다음 달 하원 내에 중국 문제를 전담하는 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겠다며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민주당과 조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정책은 “너무 약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백악관이 중국의 백지시위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낸 성명에 대해서는 “톈안먼 광장에 탱크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훨씬 더 세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식이다. “민주당은 중국공산당 앞잡이”라는 비난도 거침없이 내놓는다. 경제, 기술 분야에서 가시화할 이들의 대중 압박은 한국에 직격타가 될 것이다. 반도체 등 핵심 전략물자의 대중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무역거래에서 중국의 최혜국(MFN) 자격을 박탈하는 방안이 하원에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년 뒤 대선을 앞두고 대중 정책의 선명성 경쟁이 벌어지는 분위기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반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 대관식을 끝낸 중국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면 미중 갈등은 전례 없는 수준과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 미국 의회가 대중 견제를 목표로 내놓는 법들은 외부 국가가 협상을 통해서 풀 여지가 많지 않다. 이미 ‘반도체·과학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목격한 바다. 주로 행정부를 상대로 해온 기존의 외교적 협상만으로는 한국에 미칠 부정적 여파를 막아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의미다. 악성이든 양성이든 미중 양국의 영향력 모두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입법 동향까지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전방위 대응 수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부자들은 자산을 취득한다. 그렇지만 가난한 이들과 중산층은 부채를 얻으면서 그것을 자산이라고 여기지.” 베스트셀러였던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저서에서 자산과 부채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해야 제대로 투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집을 사기 위해 얻은 대출금은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나쁜 빚’이며 그렇게 구한 집은 자산이 아닌 부채라는 게 그의 관점이었다. ▷10여 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그의 주장은 최근 빚 폭탄에 직면한 한국의 영끌족들에게 다시 소환되고 있다. 수억 원씩 대출을 받은 뒤 치솟는 금리에 허리가 휘는 이들이 새삼스럽게 부채의 무거움을 곱씹고 있는 때다. 돈 굴리는 법을 안다는 부자들의 부채 대응 움직임을 일찍 알았더라면 이들에게 도움이 됐을까. KB금융그룹이 발간한 ‘2022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부자들은 금융부채 비중을 크게 낮췄다. 전례 없는 봉쇄, 방역 조치로 경제가 타격받는 상황에서 빚 관리에 우선순위를 뒀다는 의미다. ▷한국 부자의 61.8%는 ‘부채는 자산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부채는 자산이다’는 회계학의 기본 공식과는 거꾸로 가는 인식이지만, 그만큼 부채의 레버리지 효과보다는 위험성이 커진 시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들이 향후 자산 운용의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꼽은 것도 금리 인상(47%)이다. 최소 내년 말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고금리 기조로 볼 때 빚부터 줄이는 게 부(富)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게 부자들의 현재 판단인 셈이다. ▷비트코인 같은 디지털자산에 투자했다는 부자들이 많지 않은 것 또한 눈에 띄는 특징이다. 앞으로도 투자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60% 가까이 된다. 디지털자산 가치의 변동률이 너무 높고(36.1%), 내재가치가 없기 때문(29.6%)이라는 게 이들이 댄 이유다. 가상화폐 등으로 대박을 터뜨린 성공 스토리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실물 위주의 보수적 투자에 집중한 부자들의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국 부자들이 ‘부자’로 인정하는 총자산의 기준은 100억 원.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 보유자를 부자로 분류한 보고서의 기준보다도 훨씬 높다. 한국 부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으며, 3040 신흥 부자 중 상당수는 부모로부터 종잣돈을 물려받은 금수저들이라고 한다. 집 1채를 마련하기도 빠듯한 영끌족으로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 내용도 보고서에는 적지 않다. 그래도 핵심은 ‘어떻게 부자가 될 것인가’일 터.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 부채 관리에 집중하며 다음 투자 기회를 노리는 부자들의 촉을 읽어내는 게 먼저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미국 백악관에서 1일 진행된 국빈 만찬 테이블을 장식한 꽃은 ‘피아노 장미’였다. 국빈으로 초청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라는 점에 착안해 선택한 품종이었다. 버터에 구운 랍스터와 캐비아, 마멀레이드를 올린 소고기 스테이크, 수제 치즈 등 메뉴는 셰프들이 6개월 전부터 준비한 것들이다. 프랑스를 상징하거나 양국 인연을 강조하는 청·백·홍의 소품들이 만찬장 곳곳에 등장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해 “너무 공격적”이라며 불만을 쏟아낸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백악관의 극진한 대접이 무색할 만큼 직설적이었다. 대면 회담에서 담판을 짓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작심발언이었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이 IRA의 결함을 인정하며 수정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놨으니 마크롱 대통령으로서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 셈이다. 지난해 미국의 오커스(AUKUS) 결성 과정에서 77조 원에 달하는 자국의 디젤 잠수함 수출 프로젝트가 허공에 날아간 것에 격분했던 그로서는 쌓인 앙금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IRA는 한국에 전기차 보조금 문제로 알려져 있지만, 법 전체로 보면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된 부분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 그린수소 생산시설 등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 총 369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찌감치 탄소중립 목표를 설정하고 녹색에너지 기업들을 육성해온 유럽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아우디와 폴크스바겐 등을 다 합쳐도 미국 시장 점유율이 5%에 못 미치는 전기차를 넘어서는 문제인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나선 것은 유럽연합(EU)을 대신해 총대를 멘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가뜩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난, 인플레이션 등으로 유럽 전체가 경제 문제에 민감해진 시점이다. IRA로 인해 프랑스에만 100억 유로의 투자 손실이 발생하고 1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으니 유럽 전체로는 말할 것도 없다. EU 내에서는 대미 경제보복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동맹끼리 ‘무역 전쟁’이 날 판이다. ▷프랑스보다도 먼저 IRA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나라가 한국이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들이 잇따라 워싱턴을 방문해 줄기차게 수정을 요구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바이든 대통령과 이 이슈를 논의했다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마크롱 대통령이 앞장서는 모양새가 됐지만, 강력한 대미 압박으로 힘을 보태는 유럽의 우군을 얻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IRA 수정 발언이 립서비스로 끝나지 않게 주요국이 단단히 힘을 모아야 할 때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요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업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혹은 ‘미국에서 만드는 미래’ 같은 글귀가 카메라에 잡힌다. 제너럴모터스와 지멘스, IBM 등의 생산 현장이 모두 그랬다. 연설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뒤로 이 글귀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어김없이 걸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메릴랜드주 볼보자동차 공장에서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두 번 연속 외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29일(현지 시간) 미시간주에 있는 SK실트론CSS 공장을 방문한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첨단기술 기업의 생산 시설을 돌아다니며 미국 제조업의 부활과 일자리 창출 성과를 강조해온 행보의 연장선상이다. 그렇다 해도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 공장을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날 일정은 참모들의 아침 브리핑만 빼면 SK실트론CSS 방문 및 비행기 이동으로 하루가 채워졌다. 짧게는 10분 단위로 짜여지는 빡빡한 대통령 스케줄을 감안하면 상당한 시간 투자다. ▷미시간주는 한때 활발했던 자동차, 철강 산업이 쇠락해 버린 ‘러스트 벨트’ 중의 하나다. 주요 선거 때마다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이런 최대 경합지의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그레천 휘트머 주지사는 공화당 후보를 두 자릿수 차이로 누르며 재선에 성공했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준 미시간주를 찾아 격려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녹슬었던 지역을 미래의 첨단 산업 도시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반도체 공장은 최적의 연설 장소다. ▷SK가 공들여 높여온 백악관 내 인지도는 이번 방문 성사의 또 다른 배경이었다고 한다. SK그룹이 현재까지 밝힌 대미 투자 규모는 520억 달러에 달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SK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 회장들에게 공개적으로 “생큐”를 연발했고, 특히 최태원 회장에게는 영어 이름인 “토니”라고 부르면서 수차례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올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0주년을 맞아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방문한 곳이 SK실트론CSS 공장이다. ▷이렇게 쌓인 신뢰는 ‘21세기의 쌀’이라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미 간 경제안보 협력을 다지는 바탕이 될 것이다. 점점 빡빡해지는 미국의 대중 기술 규제와 투자 제한 속에서도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숨 쉴 여지가 생길 것이란 기대감도 커진다. 제조업 시설을 빨아들이는 미국의 ‘아메리카 퍼스트’가 동시에 만만치 않은 도전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양국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협력의 최적점을 찾는 숙제가 남았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즐겨 읽는다. 왕좌의 권력 다툼 과정 등에서 부딪힌 역경을 이점으로 바꾸는 방법을 고전 병법서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늘상 자정 넘어서까지 일한다는 그는 경제부터 외교안보, 문화까지 전방위로 발휘하는 영향력 때문에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린다. 일부다처제 국가에서 부인을 한 명만 둔 이유도 “삶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네옴시티’ 건설은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사우디의 핵심 사업이다. 야심 찬 30대 개혁군주가 추진하는 지구 역사상 최대 도시 프로젝트다. 그는 네옴시티를 구상하면서 “나만의 피라미드를 갖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사막 위 도시의 하이라이트는 100% 친환경 에너지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이다. 더 이상 원유에만 의존하지 않고 미래 에너지 개발에 나서겠다는 젊은 지도자의 뜻은 확고해 보인다. 한 외신 인터뷰에서는 “유가가 30달러든 70달러든 신경쓰지 않는다”며 “그 싸움은 내가 나설 싸움이 아니다”라고 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야심 찬 프로젝트에는 한국 기업들이 대거 참여한다.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도심항공교통(UAM) 같은 첨단기술이 요구되는 수조 원대 사업들이다. 그린수소 등 신재생 에너지 분야의 협력도 눈에 띈다. 한-사우디 ‘수소 동맹’이라는 표현이 벌써 등장했다. 1970, 80년대 ‘1차 중동 붐’이 한국 건설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일군 것이었다면, 이제는 기술과 사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업그레이드된 ‘2차 중동 붐’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사우디는 최고 60도의 더위 속에서 모래바람과 싸우며 자국의 고속도로와 항만을 지어준 한국 노동자들을 잊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건설 사업들이 줄줄이 지연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사우디의 고위당국자들이 “한국인들이 다시 와서 마무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 사실이 현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빈 살만 왕세자의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한국 기업들을 극찬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우디는 신도시 계획을 세우면서 판교 테크노밸리를 참고 사례로 검토했다. ▷사우디가 2019년 해외 가수들의 콘서트를 처음으로 허용한 이후 가장 먼저 초청한 그룹이 BTS다. 빈 살만 왕세자의 자녀들이 K팝에 갖고 있는 관심이 작용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자국에 노동자들을 파견했던 자원 빈국 한국이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한 저력을 높이 사고 있다고 한다. 경제 협력에 더해진 사회, 문화적 관심이 50년 만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의 문을 더 활짝 열어줄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