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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일본도로 주민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뒤 도검류 관리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도검을 이용한 살인이 잇따른 와중에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누구나 도검류를 쉽게 살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포류와 달리 도검은 소지 허가 갱신 의무 및 보관 장소에 제한이 없어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경찰청은 31일 긴급 화상회의를 열고 도검관리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 쇼핑몰에서 누구나 도검 구입할 수 있어 31일 기자가 살펴본 복수의 온라인 쇼핑몰에는 길이, 소재 등이 다양한 도검류 수십 종류가 판매 중이었다. 가격은 20만∼400만 원대로 다양했다. 판매 업체들은 ‘장식용으로 적극 추천한다’, ‘소지 허가 발급은 무료로 대행해 드린다’고도 안내했다. 상당수는 사람을 해치는 데 쓰인다면 매우 위험해 보였다. 현행법상 도검은 총포 도검 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이 적용된다. 칼날 길이 15cm 이상인 칼, 검, 창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가정집에서 쓰는 주방용 식칼은 식품위생법 및 수입식품안전관리특별법 적용 대상이라 도검류 규제는 적용되지 않는다. 도검은 정부 허가를 받아야만 살 수 있다. 판매처에서 먼저 결제를 한 다음 주소지 경찰서를 방문해 신체검사서 또는 운전면허증을 제출해야 한다. 알코올·마약 중독이나 정신질환 병력, 특정강력범죄 등의 전과 기록이 없어야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이후 판매처에 허가증을 제출하면 도검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 허점이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달 29일 일본도로 주민을 살해한 백모 씨(37)가 범행에 쓴 일본도는 칼날 길이 75cm, 손잡이 길이 25cm다. 그는 소지 허가 승인을 받을 당시 소지 목적을 ‘장식용’으로 기재했다. 그러나 백 씨는 평소 자주 일본도를 차고 동네를 돌아다녀 주민들이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진단서 필요 없고 허가 갱신 의무도 없어 총기류를 구입하려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견서가 필요하지만 도검은 필요없다. 경찰은 도검 소지 승인 여부를 심사할 때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된 정신질환 치료 전력 등을 살피는데, 백 씨는 치료 전력이 없었다. 그러나 백 씨의 아파트 주민들은 그가 최근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치료 전력은 없는데 이상 증세는 보이고, 도검류 소지 승인을 받을 때 새 진단서는 떼올 필요가 없으니 관리 체계에 구멍이 생긴 셈이다. 게다가 백 씨는 경찰이 연 1회 실시하는 도검 소지자 일제 점검 대상에서도 올해 빠졌다. 경찰 관계자는 “매년 상세히 점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해명했다. 도검은 한 번 소지 허가를 받으면 이후엔 갱신이 필요 없다는 점도 문제다. 총포류는 3년마다 소지 허가를 갱신해야 한다. 또 총포류는 원칙적으로 관할 경찰서에 보관하고 사용할 때만 잠시 꺼내 쓸 수 있지만, 도검은 집이나 회사 등 아무 데나 보관할 수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도검 신규 소지 허가 건수는 2020년 1854건에서 지난해 2118건으로 14.2% 증가했다. 올 1∼6월 1226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검, 칼에 대한 관리 체계가 허술한 탓에 소지자가 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도검 관련 범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6월경 경기 광주시에서는 70대 남성이 101cm 길이의 장검으로 이웃을 살해했다. 2021년 9월에는 서울 강서구에서 50대 남성이 별거 중인 아내를 길이 100cm 장검으로 죽였다. 지난해 8월 국민의힘 김용판 의원이 도검 소지 자격 갱신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도검도 갱신 의무화 대상에 포함시키고 정기적인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며 “근본적인 범죄 발생 이유 등을 범정부적 차원에서 진단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경찰은 31일 백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경남의 한 다문화 가정에서 한국인 아버지가 네 살 친딸을 성폭행해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사건은 올해 초 벌어졌지만 경찰 신고는 6개월여 지난 뒤에야 이뤄졌다.● 다문화 가정에서 아버지가 딸 성폭행 30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이달 9일 “네 살 여아가 아버지한테 성폭력을 당한 것 같다”는 신고가 경남 지역 경찰에 접수됐다. 해당 가정은 한국인 아버지가 외국인 어머니와 결혼해 자녀를 낳은 다문화 가정이었다. 남성은 자녀 4명 중 셋째 딸에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수사 중이다. 이 사건은 1, 2월 사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피해 아동의 어머니가 해외 출신이었던 점 등 때문에 신고가 뒤늦게 이뤄졌다. 아동 대상 친족 성범죄는 매년 평균 300건 이상 발생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올 5월 발표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발생 추세 및 동향 분석’에 따르면 2014∼2022년 9년간 총 2813건의 친족 성범죄가 발생했다. 21일 국회입법조사처 발표에 따르면 미성년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79%는 13세 이하, 36%는 10세 이하였다. 현재 피해 아동과 어머니는 지방자치단체가 마련해 준 임시 숙소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가 시작된 뒤 어머니가 주민센터에 연락해 임시 쉼터를 구해 달라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해자인 아버지와는 분리된 상태라고 한다. 친족 성폭력 피해 아동의 경우 정부의 ‘특별지원 보호시설’을 이용할 수 있지만 그 사이 지자체가 임시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특별지원 보호시설의 정원이 다 차서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상태다.● 피해자 위한 특별지원 시설 태부족 2010년부터 운영된 ‘특별지원 보호시설’은 수도권에 1곳, 비수도권에 3곳 등 총 4곳에 불과하다. 자세한 위치는 가해자의 추적 및 보복 등을 우려해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시설의 총 수용 인원은 66명에 그친다. 이 때문에 피해 아동 보호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가부 관계자는 “지자체 측에서 시설 확충 요구가 없고 다른 보호시설에서 수용할 수 있어 시설을 확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가정학대 피해자 등이 이용하는 일반 쉼터는 입소한 지 3개월이 지나면 다른 시설로 옮겨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친족 성범죄 사건은 피해 아동에 대한 안정적인 상담과 지원, 거처 마련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반 쉼터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미숙 숙명여대 아동복지학부 명예교수는 “친족 성폭력은 인간에 대한 기본 신뢰감을 잃게 만드는 범죄”라며 “보호시설이 전국에 네 곳뿐이면 아이들이 타 지역으로도 갈 수 있는데 피해자를 더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는 “친족 성범죄는 장기간에 걸친 전문가적인 케어가 필요한데 일반 쉼터는 주로 단기이고 프로그램도 열악한 편”이라며 “시설을 더 확충하고 치료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경남=도영진 기자 0jin2@donga.com}
조지호 경찰청장 후보자(사진)가 29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세관 마약수사팀 외압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경무관을 인사 조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해당 경무관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의 진원지가 된 ‘멋쟁해병’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승진이 거론됐던 인물이다. 이날 행정안전위원회 청문회에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서울 영등포경찰서의 세관 마약수사팀에 부당한 외압을 가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조병노 경기 수원남부경찰서장(경무관)을 인사 조치하겠느냐고 조 후보자에게 물었다. 이에 조 후보자는 “(경찰청장이 되면)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답했다. 조 경무관은 이날 국회에 출석해 “(외압이 아닌) 단순한 (사실) 확인 차원이었다”고 주장했다. 앞서 임 전 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의 핵심 당사자인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가 “별 2개(치안감) 달아줄 것 같다”며 조 경무관의 인사를 챙겨줬다는 취지의 녹취록이 공개된 것에 대해 조 후보자는 “무슨 경위로 그런(녹취록의)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실제 일어난 것과는 정반대이지 않느냐”고 답했다. 박정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조 경무관이 이 전 대표에게 징계 상황을 설명하고, 누군가에게 말해 징계를 무마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조 후보자는 “이 정도 의혹만 갖고 수사에 착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윤명진 기자 mjlight@donga.com}
전문가들은 10대 청소년의 온라인 도박 중독 문제를 막으려면 부모와 교사가 자녀와 학생의 일상 징후를 세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최삼욱 진심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아이가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거나 물건을 사달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면 의심해 봐야 한다”며 “도박 중독이 심해지면 고리대금을 찾기도 한다”고 말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공부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평소와 다르게 멍하거나 집중하지 못하면 연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임미선 한국도박문제치유원 상담사는 “엄마 가방과 아빠 노트북을 내다 팔거나, 부모가 자는 동안 휴대전화 잠금을 풀어 400만 원가량을 이체해 도박을 한 중학생도 있었다”며 “이상 징후를 빨리 인지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자녀를 나무라고 빚을 갚아주는 식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최 원장은 “대화를 통해 금전적 피해, 중독 정도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도박을 했을 경우 교사와 학부모들 간에 협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도박이 2차 범죄로 이어지는 상황도 유의해야 한다. 전종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성인 인증을 하려고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불법 사채를 쓰는 경우도 있다”며 “법적, 금전적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부모들이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경찰, 은행 등 관계 기관의 대책도 필요하다. 서민수 경찰인재개발원 교수는 “지금은 계좌 동결 절차가 복잡해 사이버도박 업체들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며 “개인 계좌 동결과 대포 계좌 단속을 ‘투트랙’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호연 시민단체 도박없는학교 교장은 “금융당국이나 수사당국이 도박 의심 계좌를 발견하면 이를 신속히 동결한 뒤 수사, 조사를 통해 검증하는 식으로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팀장 이상환 사회부 기자 payback@donga.com▽팀원 이수연 손준영 이채완 서지원 사회부 기자}
중학생 김지환(가명·16) 군은 2022년 12월부터 바카라, 룰렛 등 도박 게임이 가능한 온라인 도박장을 개설해 회원을 모집했다. 그는 베팅(판돈 걸기)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온라인 메신저와도 연결시키고, 돈을 온라인 도박 머니로 바꾸는 환전 채널까지 만들었다. 김 군이 만든 사이트에서 초등학생과 여중생 2명을 포함한 10대 청소년 96명이 도박을 했다. 부산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올해 4월 김 군을 붙잡았다. 10대 청소년들이 도박을 하는 정도를 넘어 직접 도박 사이트를 만들고, 도박 프로그램까지 판매하고 있다. 중학생, 고등학생들은 사이트를 만들 코딩 지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지만 유튜브 등 온라인에는 ‘도박 사이트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콘텐츠가 넘친다.● 10대에게도 “도박 사이트 만들어 드려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지난해 9월부터 6개월간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이버 도박 특별단속을 한 결과 1035명이 검거됐다. 이 중 12명은 도박 사이트를 직접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도박 사이트 제작법’ 등의 자료가 여럿 올라와 있다. 영상으로 도박 코딩 프로그램 무료 설치 등 상세한 제작 과정을 가르쳐 주는 식이다. 해당 영상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인데 덕분에 사이트를 잘 만들었다”는 댓글들이 달려 있다. 박성호(가명·19) 씨는 “나를 포함해 도박에 빠진 주변 친구들이 도박 자금을 벌려고 직접 (도박 사이트를) 만들어 팔았다”며 “도박 사이트를 만드는 데 건당 1만 원 정도가 들었고 파는 건 5만 원에 팔았다”고 취재팀에 설명했다. 그는 과거 도박에 빠졌다가 손을 씻은 뒤 돈을 벌 길이 막히자 도박 사이트 제작에 손을 댔다고 했다. 10대 청소년이 도박 사이트 제작을 의뢰해도 기꺼이 만들어 주겠다는 업체들도 많았다. SNS에 ‘도박 사이트 제작’이라고 내건 업체 6곳에 취재팀이 문의했더니 이들 모두 나이도 묻지 않은 채 “제작 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냈다. 텔레그램을 통해 연락이 온 한 제작업체는 “100만 원짜리 토토나 카지노 데모(시연) 사이트는 3시간 내로 만든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다른 제작업체는 도박 사이트 샘플 9개를 보여주며 “사이트 이름과 원하는 디자인만 알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보내온 샘플은 이미지, 화면 구성 등이 조금씩 달랐지만 ‘카지노’ ‘슬롯’ 등 도박의 종류는 비슷했다. 취재팀과 접촉한 한 제작자는 “더 이상 도박 사이트를 제작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쪽으로 연락해 봐라”며 디스코드 아이디(ID)를 알려줬다. 디스코드는 최근 게임을 하는 청소년 등이 주로 쓰는 온라인 메신저의 일종이다. 디스코드를 통해 연락이 닿은 제작자는 “도박 게임 하나당 50만 원”이라며 “제작 경험이 있어 구현은 확실하다”고 했다. 도박 사이트를 만들 수 있는 코딩 프로그램을 8000원에 파는 업자도 있었다. 돈을 보내면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있는 링크나 압축 파일을 보내준다. 실제 이 프로그램으로 도박 사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텔레그램 등으로 거래… 상반기만 3만4000여 건 도박에 문외한인 동아일보 특별취재팀도 유튜브 몇 개를 참고하자 30분 만에 온라인 도박장을 개설할 수 있었다. ‘가위바위보’ 등 비교적 단순한 도박 게임을 만들기로 하고, 유튜브에서 가르쳐 준 무료 코딩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원하는 메뉴와 디자인을 설정한 후 ‘돈줘’ ‘도박’ 등 특정 키워드를 넣자 판돈을 걸고 내기에도 참여할 수 있는 사이트가 만들어졌다. 온라인 도박 머니 1만 원을 걸고 베팅을 해봤더니 불과 10초도 안 걸려 ‘졌다’ ‘이겼다’ 등 결과가 나왔다. 여기에 따라 앞서 베팅했던 온라인 머니를 잃거나 더 딸 수 있었다. 이런 도박 사이트들은 주로 텔레그램 등을 통해 거래되고 있다. 과거 도박 사이트를 만들어 팔았던 박모 씨는 “텔레그램이나 디스코드 채팅을 통해 익명으로 거래하면 누가 사고팔았는지 정체를 모른다”고 했다. 박 씨는 도박 사이트 판매로 두 달간 200만 원을 벌었다. 올해 부산에서는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만들어 판 혐의로 10대 청소년 2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불법 도박 사이트로 의심돼 폐쇄 등 조치가 이뤄진 건수는 3만3956건이다. 2021년 4만1685건, 2022년 5만3177건, 지난해 5만5610건으로 매년 증가 추세다. 하동진 서울경찰청 청소년보호계장은 “도박 사이트는 서로 주소만 다르게 하면 몇 초 만에 복사할 수 있을 정도여서 공급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팀장 이상환 사회부 기자 payback@donga.com▽팀원 이수연 손준영 이채완 서지원 사회부 기자}
그것은 겨울방학이 끝난 교문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학생들 사이에 조용히 퍼졌다. 교실에서 옆 교실로, 또 그 옆 교실로. 그것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학생이 점점 늘었지만, 교사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팬데믹(대유행) 같았다. 올해 3월부터 서울의 A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사이에선 은밀한 유행이 돌았다. 쉬는 시간이면 교실 뒤에 삼삼오오 모여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던 것. 이들이 함께 접속한 건 한 온라인 도박 ‘바카라’ 사이트였다. 시작은 단 한 명이었다. 최승현(가명·18) 군은 방학 동안 바카라를 시작했다. “터치 몇 번, 클릭 몇 번이면 돈을 벌 수 있다”는 한 유튜브 영상 때문이었다. 호기심에 시작한 도박은 점점 판돈이 커졌다. 종국에는 2400만 원을 쏟아부었다. 궁지에 몰린 최 군은 만회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이 도박 사이트는 친절하게 팁을 안내하고 있었다. ‘신규 회원을 추천해 가입시키면 온라인 머니 2만8000원을 드립니다!’ 이거다. 개학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던 최 군은 새 학기 바빠졌다. 교실마다 돌아다니며 친구들에게 도박 사이트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최 군의 솔깃한 유혹을 친구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최초의 ‘슈퍼 전파자’였다.● 학교 집어삼킨 ‘도박 다단계 유혹’ 이용자가 ‘다단계’처럼 지인들을 꼬드겨 가입시키게 만드는 도박 사이트의 계략은 적중했다. 최 군은 먼저 같은 반 친구 3명을 사이트에 가입시켰다. 그 뒤에는 다른 반 친구 4명도 추가로 가입시켰다. 인당 2만8000원, 7명이니 총 19만6000원의 사이버 머니가 입금됐다. 최 군은 이 돈으로 다시 베팅했다. 최 군이 끌어온 7명의 학생은 다시 다른 학생들을 끌어와 가입시킨 뒤 사이버 머니를 입금받았다. 최 군이 끌어온 신규 회원이 늘어날수록 학교는 점점 ‘도박 왕국’으로 변해 갔고, 학생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이 학교 권준우(가명·18) 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권 군은 바카라에 손을 댔다가 불과 몇 달 새 560만 원을 잃었다. 그래도 손을 털지 못하고 도박 자금을 마련하려고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한 판에 적게는 수십만 원부터 많게는 수백만 원을 썼다. 총 3600만 원을 판돈으로 탕진한 학생도 있었다. “10초면 수십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70만 원을 베팅했다가 잃은 저소득층 학생도 있었다. 4월이 지나자 3학년 총 9개 반 중 5개 반 이상의 학생들이 도박에 빠져 있었다.● 수사로 드러난 ‘도박 왕국’ 학교 실태 “쟤들이 왜 맨날 모여 있지?” 의아하게 여기던 3학년 상담교사가 어느 날 현장을 덮쳤다. 학생들이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에는 도박 게임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건 학교가 감당할 수준을 넘었다. 교사는 경찰에 신고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단체로 도박을 하고 있어요.” 경찰은 학교전담경찰관(SPO) 6명을 학교에 보냈다.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3학년 전체 학생 233명 중 23명이 바카라, 스포츠토토 등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입시가 코앞인 고3 교실마다 도박 중독자가 2, 3명씩 있다는 사실에 학교는 경악했다. 경찰이 적발한 23명에게 도박 중독 평가를 실시한 결과 8명은 중독 ‘고위험군’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는 1000만 원대의 판돈을 쓴 학생도 있었다. 경찰은 부모들에게 자녀의 도박 중독 상담 치료를 권했으나 “그냥 재미 삼아 한 것뿐일 거예요” “내 아이한테 도박 중독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냐” 등의 반응이 돌아왔다. 경찰이 소개해 준 도박 치료 상담센터가 “너무 멀다”며 치료를 거절하는 부모도 있었다. 그 센터는 학교에서 지하철로 불과 54분 거리에 있었다. ● “전 부처 차원의 대책 마련 시급”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도박으로 붙잡힌 10대 청소년은 올해 1∼5월 사이 217명이다. 이미 지난해 전체(184명) 규모를 훌쩍 넘었다. 현 추세대로라면 연말에는 400∼500명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자료를 분석한 결과 검거된 217명 중 138명(64%)은 비수도권 학생들이었다. 10대는 오프라인 도박장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도박을 하다 보니 수도권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도박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검거 인원이 가장 많은 지역은 부산 30명, 서울 22명, 대구 21명 순이었다. 전남 무안군은 소도시인데도 불구하고 19명이 검거됐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검거된 10대 도박 사범 471명 중 92명(19.5%)은 재범 이상이었다. 올해 1∼5월 적발된 194명 중에서는 41명(21.1%)이 재범 이상이었다. 하지만 도박 중독 청소년을 감당할 수 있는 치료, 상담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다. 총 45개 시군에서 청소년 도박 사범이 검거됐는데, 이 중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산하 상담센터가 있는 곳은 11곳(24%)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일남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는 “청소년들은 도박 문제를 스스로 통제하거나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며 “도박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 부처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과거 일부 학생이 일탈 성격으로 사이버 도박을 했다면, 지금은 상당히 많은 청소년들이 도박을 하는 시대가 됐다는 증거”라며 “체계적인 도박 예방 교육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팀장 이상환 사회부 기자 payback@donga.com▽팀원 이수연 손준영 이채완 서지원 사회부 기자}
온라인 도박에 빠져 빚까지 지게 된 10대 중학생, 고등학생 등 청소년들은 빚 독촉과 폭력, 협박을 피해 학교를 옮기고 아르바이트로 내몰리는 등 일상이 무너졌다. 경남의 한 고등학교 2학년 최승민(가명·17) 군은 지난해 6월 친구를 따라 카드 게임형 온라인 도박 ‘바카라’에 우연히 손댔다. 최 군은 실력이 좋지 못해 승률이 절반에도 못 미쳤고 돈을 잃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김모 군(17)에게 “벌써 50만 원이나 잃었다”고 토로했다. 김 군은 다른 도박 사이트를 알려주며 “‘내가 돈을 빌려줄 테니 여기서 해봐라. 쉽게 딸 수 있다”고 제안했다. 솔깃한 제안에 최 군은 김 군에게 도박 자금을 빌렸다. 처음 빌린 것은 실제 돈이 아니라 도박 사이트에서 통용되는 사이버 머니 ‘1만 원’권이었다. 일종의 가상화폐 같은 것. 이후 최 군은 계속 돈을 잃었고 그때마다 김 군은 계속 돈을 빌려줬다. 빌리는 돈이 3만 원, 5만 원, 10만 원씩 점차 불어나 한 번에 200만 원까지 빌리기도 했다. 한 달 뒤 도박 빚은 총 500만 원 이상으로 불어 있었다. 갚아야 할 금액이 커지자 최 군은 두려운 마음에 김 군에게 “이젠 돈을 빌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군은 “그러면 지금까지 빌려간 돈을 내놔라”라며 화를 내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올해 4월에는 김 군이 최 군의 교실로 찾아와 주먹을 휘둘렀다. 현금이 4만 원밖에 없던 최 군은 이를 김 군에게 준 뒤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김 군은 심지어 최 군의 부모도 협박했다. 5월에는 김 군이 최 군의 부모에게 “제 돈 받아내기 위해 뭔 짓이든 하겠다. 웃으면서 기다려주는 것도 이번까지다”라는 협박 문자를 보냈다. 최 군의 아버지는 김 군에게 20만 원을 줬다. 계속되는 협박과 독촉에 견디다 못한 최 군은 5월에 경남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갔지만 ‘도박에 빠졌던 애라더라’는 소문이 나버려 결국 자퇴했다. 최 군은 지난달 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무섭고 후회된다”며 “최근까지도 김 군의 협박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김 군과 관련해 현재 내사 중이다. 특별취재팀▽팀장 이상환 사회부 기자 payback@donga.com▽팀원 이수연 손준영 이채완 서지원 사회부 기자}
“나는 ‘16세 도박 총판’이었다”… 검은 돈의 악마가 된 청소년들《10대 청소년들이 온라인 도박에 빠지고 있다. 즐기는 정도를 넘어 도박 조직 ‘총판’으로 일하고 불법 사채까지 손댄다. 동아일보 사건팀은 3개월간 도박 청소년 37명을 취재했다. ‘온라인 도박, 교문을 넘다’ 3부작의 첫 번째는 10대에 ‘도박왕’이 된 김동현(가명·22)과 박성호(가명·19)의 이야기다.》“당신 아들 도박 빚, 학교에 알려줄까?” 동현(2019년 당시 17세)은 수화기 너머 40대 여성에게 쏘아붙였다. 오늘은 꼭 받아내야겠다. “아드님이 도박한다면서 나한테 돈을 빌렸다고요. 우리 학생부장이 알면 안 좋아할 텐데. 어머니가 갚으셔야죠.” 동현은 안다. 아주머니는 떨고 있다. 당신의 고등학생 자녀가 도박 빚이 있고 갚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부모들은 사색이 됐다. 판검사들도 똑같았다. 동현도 같은 10대였고 부모의 자식 사랑을 잘 알았다. 달랐던 것은 동현은 이미 ‘도박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전화를 받은 여성의 아들은 동현의 같은 반 친구였다. 친구는 동현이 권한 온라인 도박 ‘바카라’에 빠져 500만 원을 빌렸고 이자가 붙어 3000만 원으로 불어 있었다. 도박 자금이 필요한 아이들은 동현을 찾아왔다. “이자는 하루 10%, 이틀 20%, 사흘 30%.” 살인적인 이자율에도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돈을 빌렸다. 도박 빚을 안 갚으면 동현은 그들의 부모에게 전화했다. 이날 통화가 끝난 뒤 동현의 휴대전화에는 ‘3000만 원이 입금됐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사이 카카오톡 메시지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나 10만 원만 빌려줘.” “다음 주에 갚을게.” 중3이 될 때까지만 해도 동현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그는 대구 일대 중학교, 고등학교를 도박으로 주름잡고 있었다. “당신 아들 도박빚, 학교에 알릴까” 친구 엄마에게도 전화했다‘16세 도박 총판’ 김동현 씨1만원 무료 사이버머니가 늪의 시작학교 친구들 온라인 도박 가입 유혹‘하루 10%’ 고리로 도박자금 빌려줘동현이 도박에 발을 들인 건 2017년 중3(당시 15세) 때였다. 하루 종일 접속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에는 “돈 벌 수 있다”는 도박 광고 콘텐츠가 넘쳤다. 몇몇 친구는 “바카라로 10만 원 땄다”고 자랑했다. “나도 만 원만 넣어볼까.”그게 시작이었다. 친구가 알려준 온라인 도박 ‘바카라’ 사이트에 가입했다. 신규 회원이라며 무료로 ‘1만 원’ 사이버 머니가 지급됐다. 동현의 실력이 제법 좋았는지 며칠 새 사이버 머니 지갑에는 200만 원이 쌓였다. 돈의 맛은 황홀했다. 그날부터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동현은 구석에서 친구들과 휴대전화를 쥐고 도박을 했다. 판돈은 수백만 원으로 커졌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는 ‘베터(bettor·도박 고객)’에 불과했다.● 도박 고객에서 홍보 총판으로2018년(당시 16세). 동현이 고1에 올라가자 ‘잘나가는 형들’이 다가왔다. “꼬맹아.” 이미 온라인 도박에 깊게 손댔던 형들은 동현에게 사이트 홍보를 담당하는 ‘총판’ 자리를 제안했다. “수입이 꽤 쏠쏠할 거야.” 그들은 젊은 나이에 BMW를 몰았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는 건가. 망설임 없이 ‘총판’ 직함을 달았다.동현이 처음 잠재적 고객으로 겨눈 건 같은 학교 친구들이었다. “한 판이 10초면 돼.”, “너도 돈 벌 수 있어.” 동현의 유혹에 친구들이 사이트에 가입해 돈을 쓰면 동현은 판돈의 1%를 수수료로 챙겼다. 친구들은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까지 탕진했다. 그사이 동현의 돈벌이는 점점 늘었다. 다른 학교 총판을 관리하는 ‘총판들의 총책’이 됐다. 아래 총판들이 신규 회원을 물어오면 동현은 한 사람당 100만 원을 인센티브로 챙겨줬다.● 불법 사채를 시작하다동현은 고1 가을쯤 새 사업에 눈을 떴다. 친구들에게 도박 자금을 빌려주고 고리(高利)의 이자를 받았다. 불법 사채. 그전까지 벌어온 돈이 ‘종잣돈’이 됐다. ‘하루 이자 10%’라는 말도 안 되는 이자율에도 고등학생들은 해맑게 돈을 빌려갔다. 영악한 동현은 그때마다 친구들 얼굴 사진, 학생증 사본, 부모들 연락처를 받아뒀다. 돈을 갚지 않으면 ‘도박 빚 안 갚은 놈’이라고 낙인찍어 얼굴 사진을 온라인 여기저기 뿌렸다. 부모에게 전화해 빚 독촉도 했다. 그래도 못 갚을 땐 수족으로 부렸다. 추심팀. 즉, 다른 학생들의 빚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일을 잘해오면 받은 돈에서 얼마를 떼어줬고 그럴수록 추심팀원들은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빚을 받아왔다.“돌이켜보면 그때쯤부터 죄의식이란 게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내 손으로 험한 일 안 해도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동현이 뿌린 도박의 씨앗은 착실히 학교에 뿌리내렸다.● 갑자기 온 몰락… 남은 건 빚 1억몰락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2019년 고2에 올라갈 무렵 동현은 대구의 한 상가에 홀덤펍으로 위장한 불법 도박장을 차렸다. 동현보다 나이가 많은 20대 대학생 누나들을 면접 봐 딜러로 고용했다. ‘어른의 세계’에 진출한 듯했다. 하지만 어느 날 동네 건달 무리가 찾아왔다. “너 누구 허락 받고 장사하냐.” 그들은 다 때려 부쉈다. 6개월 만에 도박장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번 돈은 모두 잃었다. 만회하려고 손을 댄 도박으로 1억 원이 넘는 빚까지 졌다.동현과 함께 도박을 하던 무리 중 한 명은 작년에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다. 현재 스물두 살 동현은 도박 중독 치료를 받으며 지낸다. 요즘도 여전히 그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좋은 건이 있는데, 같이 해볼래?”도박 사이트 만들어 파는 박성호 씨중 3때 도박 총판 月 2000만원 벌어아버지에 들킨 뒤 도박사이트 제작과거로 돌아가도 또 도박할 것 같아눈을 뜨니 숙취 탓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요즘 성호(가명·19)의 일상은 매일 잠, 일, 친구, 술, 잠의 반복이다. 주섬주섬 차키를 챙겨 집을 나섰다. 잠시 학교 앞을 지날 때 운동장에 친구들 모습이 보였다. 체육 시간인가 보네. ● “너도 해볼래?” 3년 전인 2021년. 평범한 중3 학생이었던 성호(당시 16세)에게 “너도 해볼래?” 물으며 다가온 것은 동네 고등학생 형들이었다. “뭔데요?” “그냥 게임. 돈 버는 게임.” 성호가 온라인 도박에 흥미를 보이자 형들은 얼마 뒤 다른 제안을 했다. “적당히 기프티콘 뿌리면서 회원들 관리만 해. 돈이 쏟아질 거야.” 온라인 도박 사이트에서 ‘회원 관리’를 해보겠냐는 권유였다. 해보지 뭐. 딱히 다른 일도 없는데. 성호는 도박 사이트 ‘총판’이 됐다. 신규 회원을 끌어와 가입시키고 유지, 관리하는 게 일이었다. 끌어온 친구들이 도박을 하는 걸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돈을 잃어 도박을 그만두려는 친구들에게는 “한 번만 더 해봐” 기프티콘을 뿌리며 판을 못 떠나게 붙잡았다. 성호가 친구들을 회원으로 끌어올 때마다 형들은 인센티브를 줬다. 말 그대로 다단계였다. ● 늪에 빠져든 친구들 성호가 학교를 돌며 “너도 해봐”, “내가 챙겨줄게” 하며 친구들을 끌어모을 때마다 학생들은 조금씩 변해갔다. 온라인 도박에 빠지는 이들이 늘어갔다. 학교를 마치면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도 찾아갔다. 그러는 동안 성호의 은행 계좌에 어느 날에는 600만 원, 어느 날에는 4800만 원씩 거금이 입금됐다. 성호는 회상한다. “그때 매달 평균치로 치면 한 2000만 원씩 벌었던 것 같아요. 총 2억에서 3억 원 정도 되려나. 중학생이 만진 돈이라는 게 상상이 되세요?” 당시 성호의 주변에는 총판 일을 하는 친구들이 열댓 명 있었다. 이들은 도박 사이트로 번 돈을 ‘저금할 수 없는 돈’이라고 불렀다. 은행 계좌에 넣어두면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이를 잘 몰랐던 성호는 번 돈을 계좌에 넣어놨다가 2021년 12월 보이스피싱 의심 계좌로 신고, 정지됐다. 60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은행에 직접 가야 묶인 계좌를 풀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의심을 사고 결국에는 경찰로 가게 될 텐데. 6000만 원 그냥 잊자. 성호는 그 대신 페이스북, 텔레그램 등에 ‘대포통장을 구한다’는 광고를 올려 300만 원씩 주고 통장을 사들였다. 그렇게 불린 통장만 수십 개.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명품 매장에 뛰어갔다. 시계도 사고 옷, 모자, 신발……. 교복 차림의 친구들과는 다른 계급이 된 것만 같았다.● 도박을 못 하면 도박 사이트를 만들자 꼬리가 길면 밟힌다. 성호가 고2이던 지난해 아버지가 알았다. 휴대전화 단도리를 잘했어야 했는데. 가족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성호의 휴대전화에 ‘650만 원이 입금됐다’는 문자가 날아들었고 아버지가 이를 봤다. 장난기 많던 아버지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딱 한마디 말했다. “그 일, 그만둬라.” 화수분처럼 벌던 돈이 끊기자 성호는 금단 현상을 겪듯 안절부절못했다. 돈을 벌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올해 고3에 올라간 성호는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만들어서 파는 새 일을 시작했다. 건당 1만 원 정도 들이면 만들고, 파는 건 5만 원씩. 제법 잘돼서 벌이가 쏠쏠하다.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아무 문제가 없잖아. 내가 뭐 징역을 간 것도 아니고. 난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아마 도박을 할 것 같아요.” 성호는 올해 5월 학교를 자퇴했다.특별취재팀▽팀장: 이상환 사회부 기자▽팀원: 이수연 손준영 이채완 서지원 사회부 기자 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서울 지역에 설치된 전체 가드레일(방호울타리)의 80% 이상이 차량과의 충돌 사고에서 보행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행자가 차에 치여 다치거나 숨진 일부 지역에는 사고 전후로 바뀐 게 없었다. 앞서 1일 9명의 사망자를 낸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를 계기로 가드레일 체계를 점검하고 보행자 안전을 보호하는 쪽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서울 가드레일 80% 이상은 보행자용… 충돌에 취약 10일 서울시가 서울시의회 박유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서울 가드레일 설치 현황’에 따르면 서울에 가드레일이 설치된 곳은 총 1만2614곳이다. 이 중 1만509곳(83.3%)이 보행자용, 2105곳(16.7%)이 차량용이다. 보행자용은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고 무단횡단을 막고 자전거 넘어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다. 차량 충돌 시험 등을 거치지 않아 충돌 사고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하기 힘들다. 시청역 사고 현장의 가드레일이 바로 2012년에 설치된 보행자용이었다. 반면 차량용은 차량 충돌 시험을 거치고 9단계로 나뉘는 성능 기준을 충족한다. 차량이 돌진해도 그 충격을 일정 부분 상쇄하거나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다. 10일 동아일보 취재팀이 살펴본 서울 영등포구 7호선 보라매역 5번 출구 인근 차도와 인도 사이에는 보행자용 가드레일 8개가 설치돼 있었다. 앞서 5월 이곳에서는 70대 운전자가 몰던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인도로 돌진해 운전자, 동승자, 보행자 2명이 다쳤다. 사고 이후에도 보행자용 가드레일은 바뀌지 않았다. 특히 이곳은 오전에도 30분간 100여 명이 다닐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지만, 가드레일이 일부 구간만 설치되어 있어 무단횡단하는 사람을 모두 막지도 못했다. 차와 버스가 쌩쌩 달리는 와중에도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3명 있었다. 지난해 8월 약물에 취한 남성이 롤스로이스를 몰다 인도로 돌진해 여성을 치어 숨지게 한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4번 출구 인근에는 사고 이후에도 가드레일이 새로 설치되지 않았다. 취재팀이 둘러본 현장은 인도와 차도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사고 위험이 높아 보였다. 10여 분간 현장을 지켜보는 동안 보행자 40여 명 중 5명은 차도로 내려가 걸었다. 가드레일이 없다 보니 인도와 차도에 걸쳐 차량 5대가 일명 ‘개구리 주차’돼 있어 시민들이 지나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시민들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압구정역 현장에서 만난 직장인 김모 씨(34)는 “사고가 났던 곳인 줄 몰랐다. 인도로 차량이 돌진해 사람이 죽었는데 바뀐 게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말했다. 보라매역 인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나모 씨(36)는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많이 하고 차량도 불법 유턴을 많이 해서 사고가 잦은 편”이라며 “약한 가드레일을 튼튼한 걸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당시 사고를 목격했다는 한 식당 주인은 “단순한 무단횡단 방지용 말고 시민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민 최모 씨(42)는 “시청역 때도 보행자용 가드레일이 쓸모없었는데 여기 있는 것도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 “위험 지역 전수조사 필요” 전문가들은 보행자 교통사고 위험지역을 전수조사를 통해 우선 파악한 뒤 차량용 가드레일을 설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염건웅 유원대 경찰소방행정학부 교수는 “보행자가 많은 곳, 사고가 잦은 곳 등 위험 지역들을 파악해 보호 강도가 높은 가드레일을 설치해야 한다”며 “내 집 앞이나 매일 걷는 길이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정부는 긴급 예산이라도 편성해 가드레일을 설치하거나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준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어떤 지역이 더 위험한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며 “시속 30km로 달려오는 차라도 견디는 방호울타리 설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수범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인공지능(AI) 기법 등을 도입해 도로 특징들을 파악한다면 전수조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 가해 운전자 차모 씨(68)가 4일 첫 경찰 조사에서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딱딱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차량의 사고기록장치(EDR)에 저장된 5초의 상황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기록이 없는 점을 확인하고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4일 오후 3시 차 씨가 입원한 서울대병원에 조사관 4명을 보내 피의자 조사를 진행했다. 최 씨에 대한 정식 조사는 이날이 처음이다. 경찰에 따르면 차 씨는 “사고 당시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딱딱했다”며 차량 상태 이상에 따른 급발진을 주장했다. 다만 차 씨 차량 EDR엔 가드레일 충돌 5초 전 기록만 저장됐는데, 경찰은 이 시간 동안 브레이크가 밟힌 기록이 없는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에 경찰은 운전자 과실 또는 급발진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은 “출석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거나 체포의 필요성 단정이 어렵다”며 차 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기각했다. 경찰이 사고 당시 음주 측정을 뒤늦게 한 점도 뒤늦게 알려졌다. 당초 경찰은 사고 당일인 1일 오후 9시 30분경 현장에서 차 씨를 체포해 음주 여부를 측정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약 1시간 30분 뒤인 오후 11시 3분 서울대병원에서 측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참사 나흘째인 4일 오전엔 희생자 발인식이 차례로 열렸다. 서울시 사무관 사망자 김인병 씨(52)의 운구차는 오전 5시 40분경 국립중앙의료원을 출발해 근무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시청 직원 80여 명이 나와 동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김 씨의 셋째 형 김광병 씨(57)는 “동생이 중학생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눈을 잃었고, 고등학교를 마친 직후에는 약 5년간 외판원으로 일하며 책과 도장을 팔았다”며 “노력 끝에 공무원으로 입신양명했지만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갔다”고 비통해했다. 김 씨는 둘째 딸이 대학에 합격하자, 그 대학의 석사 과정에 등록할 정도로 딸을 사랑했다고 한다. 이날 다른 사망자들의 발인도 진행됐다. 사망자 신한은행 직원 이모 씨(54)의 어머니는 불편한 다리 탓에 보행보조기에 몸을 의지하며 발인을 지켰다. 그는 “네가 ‘엄마한테 고기를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한번 다녀갈까’ 하더니,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보냈냐고 내가 그랬는데…”라며 울었다. 병원 용역업체 직원 박모 씨(39)의 발인식도 열렸다. 친구 이상훈 씨(39)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사망자 명단을 계속 살펴보고 폐쇄회로(CC)TV 영상도 수백 번 돌려봤다”며 울먹였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1일 발생한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 당시 인도에 서 있었던 사상자들과 가해 차량 사이의 가드레일(방호울타리)이 충돌 사고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가드레일은 단순 무단 횡단 및 자전거 추락 방지용이었다. 성능 기준이 취약한 탓에 애초부터 보행자 보호 역할을 할 수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서울 중구에 따르면 이 가드레일은 2012년에 설치됐다. 현행법상 가드레일은 ‘차량용’과 ‘보행자용’으로 나뉜다. 차량용은 차량이 도로를 이탈해 인도 등을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사고 위험 구간, 교차로, 고속도로 등에 설치된다. 차량 충돌 시험도 거쳐 일정한 성능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반면 보행자용은 무단 횡단이나 자전거 쓰러짐 사고를 막기 위한 목적이다. 충돌 성능 시험도 거치지 않는다. 사고 현장 폐쇄회로(CC)TV를 보면 가해 차량은 순식간에 가드레일을 부수고 시민들을 덮쳤다. 전문가들은 보행자용도 차량 충돌을 버틸 수 있도록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호주에선 내년 1월 1일부터 모든 도로에서 새 가드레일을 설치할 경우 MASH 3등급(TL3) 이상을 충족하도록 했다. 이는 무게 2270kg 차량이 시속 100km로 충돌해도 버티는 정도의 성능이다. 이번에 가해자가 몰던 제네시스 G80은 공차(빈차) 중량이 1930kg이었고, 시속 100km로 역주행했다. 더 튼튼한 가드레일이 있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거라는 지적이 나온다. 조준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현재의 보행자용 가드레일은 차가 들이받았을 때 엿가락처럼 휘어질 수밖에 없다. 내구성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행로 가드레일, 손으로 흔들어도 덜컹덜컹… “기준 강화해야”[서울 시청역앞 역주행 참사]사고 대비용 아닌 사람-차도 분리용… 성능-관리 규정 모호해 곳곳 방치시속 85km 충돌 견디게 강화 검토… 美-호주선 차량 충돌시험 의무화1일 역주행 참사가 벌어진 서울 중구 시청역 뒤편 인도에는 사고 당시 부서진 가드레일의 잔해가 3일까지도 그대로 있었다. 가해 운전자 차모 씨(68)의 제네시스 G80 차량이 질주한 세종대로18길 100여 m 구간에는 같은 규격의 가드레일이 인도에 설치돼 있었다. 가드레일 곳곳은 과거에도 충격을 받은 듯 휘어져 있었다. 일부 가드레일은 고정 장치가 헐거워서 기자가 손으로 잡고 흔들자 통째로 덜컹덜컹 흔들릴 정도였다. 근처를 지나가던 직장인 손모 씨(28)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가드레일 덕분에 안전하다고 느꼈는데 이번 사고 영상을 보곤 생각이 바뀌었다”며 “앞으로는 차도에서 멀리 떨어져 걸어야겠다”고 말했다.● 법 규정 미비… 충북, 경남서도 유사 사고현재 가드레일 유지, 보수, 성능과 관련된 법 기준은 취약하다. 보도 설치 및 관리 지침에 따르면 인도에 설치된 가드레일은 명확한 교체 주기가 없다. 도로 표지병(도로 바닥에 설치하는 불빛 장치)은 3년, 시선유도표지는 5년마다 교체하도록 규정한 것과 다르다. 이 탓에 가드레일은 심각하게 훼손됐을 때를 빼면 교체하지 않고 있다. 서울시 차원의 점검도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시 관계자는 “가드레일은 보행자 무단횡단 방지 등이 목적이기 때문에 별도로 전체 조사를 실시한 적이 없다”며 “미관상 문제가 되는 부분을 개선하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관계자는 “사고 현장에 있던 가드레일은 사람과 차도를 구분하고, 사람이 차도로 뛰어들거나 무단횡단하는 것을 방지하는 분리시설”이라며 “차량 사고에 대비한 방어 울타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인도를 덮친 차량을 가드레일이 막아주지 못해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여러 번이었다. 지난해 5월 충북 음성군에서 70대 운전자의 차량이 인도를 침범해 10대 두 명이 숨졌다. 가드레일이 있었지만 피해를 막지 못했다. 지난해 9월에는 경남 양산시에서 덤프트럭이 가드레일을 뚫고 근로자 2명을 덮쳐 그중 1명이 숨졌다.● 서울시 대책 마련… 전문가들 “설치 기준 강화해야” 가드레일을 둘러싼 우려가 커지자 서울시는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시 관계자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 있어 차량에 의해 상해를 받을 수 있는 곳들을 점검하고 (가드레일의) 강도를 보완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시속 85km로 돌진하는 차량에도 보행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가드레일의 안전성을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유동 인구가 많거나 차량이 빨리 달리는 구간, 사고 위험이 큰 구간을 먼저 조사한 뒤 가드레일을 ‘핀셋 보강’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가드레일의 성능을 강화하고 관련 기준도 명확히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명훈 한국교통안전공단 교수는 “돌진하는 차량을 밀어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야 한다”며 “아랫부분은 차량용 가드레일, 윗부분은 기존 보행자용으로 된 ‘겸용 방호울타리’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염건웅 유원대 경찰소방행정학부 교수는 “보행자용 가드레일 설치 기준이 정부 차원에서 마련돼야 한다”며 “기술 개발도 지원하면 설치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호주와 미국 일부 주(州) 등에서는 가드레일을 설치할 때 차량 충돌 시험을 의무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미국 연방고속도로관리국(FHWA)은 2016년경부터 공사 현장 인근 등에는 충돌 시험을 통과한 제품만 사용하도록 했다.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이소정 기자 sojee@donga.com}
서울 시청역 역주행 참사가 일어난 다음 날(2일) 이 지역 상인들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추모에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음식점이나 상점에 손님 발길이 끊어지진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2일 오후 6시 기자가 찾아간 서울 중구 북창동 먹자골목 일대는 전날 가해 차량이 들이받아 망가진 가드레일이 그대로 방치돼 있는 등 사고 여파가 남아 있었다. 사고 지점과 가까운 곳의 커피전문점 등 일부 점포는 평일 퇴근 시간대인데도 불이 꺼진 채 문이 닫혀 있었다. 노랫소리가 가득했던 상점 거리도 적막이 감돌았다. 이곳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30대 장모 씨는 “평소에 크게 틀어놓던 가요도 모두 껐다”며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퇴근 직장인들로 만석을 이뤘어야 할 술집, 식당들과 행인들로 붐벼야 할 먹자골목도 텅 비다시피 했다. 한 식당 주인은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인근의 몇몇 큰 회사들은 직원들에게 ‘당분간 밥을 나가서 먹지 말고 구내식당을 이용하라’고 했다더라”고 말했다. 이어 “가게 운영이 어렵지만, 안타까운 일이 발생해 추모하면서 이 기간을 버티려고 한다”고 밝혔다. 5년째 고깃집을 운영하는 정모 씨(55)는 “평소 점심시간에 20팀 정도가 오는데 오늘은 5팀밖에 오지 않았다”며 “저녁 예약도 다 취소됐다”고 했다. 그는 “시청 직원들도 ‘어제 사고로 당분간 조심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예약을 취소한다’며 연락을 해왔다”고 말했다. 족발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 씨(52)는 “평소 저녁 시간대면 100석이 넘는 테이블이 꽉 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데 오늘은 10명도 오지 않았다”며 “저녁 예약도 모두 취소됐다”고 말했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어제까지 손주랑 같이 밥도 먹었다고 했는데….”2일 새벽 서울 중구 국립장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서울시 직원 김모 씨(52)의 어머니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말을 잇지 못했다. 빈소를 찾은 김 씨의 딸인 고등학생 김모 양은 장례식장 계단에 걸터앉아 어머니의 어깨에 기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1일 밤 서울 중구 시청역 인근 사거리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해 보행 중인 시민 9명이 사망한 가운데, 장례식장에는 사망자들의 유족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사망자 대다수는 30~50대 남성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빈소에서 눈물을 터뜨리며 참담한 심정을 나타냈다. 이날 새벽 1시 50분경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병원 장례식장에 들어선 한 여성은 “아빠 아니라고 해, 우리 아빠 아니라고 해”라고 외치며 주저앉아 오열했다. 곧이어 도착한 모친은 여성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내기도 했다. 새벽 시신을 인계받은 다른 유족들도 이날부터 빈소를 마련했다. 시청역 일대는 퇴근 후 저녁자리를 하고 집으로 향하는 직장인들이 몰리는 곳이라 희생자 대다수 이러한 상황에서 봉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자 중 4명은 한 시중은행 동료들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퇴근 후 시청역 일대에서 회식을 즐기다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청역 인근이었던 만큼 서울시 소속 공무원 2명과 병원에 근무하는 직장인 3명도 희생됐다. 이날 시청역 7번 출구 인근 교차로에는 출근길 사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한 시민은 사고 현장에 두고 간 국화꽃 두 송이를 놓여 있었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내용의 추모 문구도 붙어 있었다. 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서지원 기자 wish@donga.com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폭탄 떠넘기기’ 아닌가요. 옆 건물에 사는 것만으로도 싫었는데 여기로 이사를 보낸다니요. 제가 이사를 가야 할까요.”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A오피스텔 주민 김모 씨(29)는 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원 발발이’로 알려진 연쇄 성폭행범 박병화(40)가 A오피스텔로 이사를 올 수도 있다는 소식 때문이다. 반면 박병화가 한 달째 살고 있는 이 동네 B오피스텔의 주민들은 그를 A오피스텔로 이사 보내려 관련 절차를 밟고 있다. 불과 30여 m 떨어진 두 오피스텔 주민이 박병화의 이사 문제로 최근 갈등을 빚고 있다.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 제도 도입 이후 이들이 사는 거주지 주변 주민들은 비슷한 갈등을 겪지만, 정부는 뾰족한 대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병화 이사 보내자” vs “절대 받을 수 없다” B오피스텔 소유자들의 대표 겸 건물관리인 김모 씨(54)는 “내가 A오피스텔에도 한 채를 소유하고 있는데, 박병화를 그곳으로 이사보내자”고 B오피스텔 입주민들에게 제안했다. 입주민들이 찬성하자 김 씨는 지난달 23일 ‘박병화 전입 관련 통지문’이라는 제목의 내용 증명을 A오피스텔 소유주 대표 겸 건물관리인 지모 씨(68)에게 보냈다. 통지문 요지는 ‘박병화를 A오피스텔에 있는 김 씨 소유의 방으로 전입시키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1일까지 답장이 없으면 박병화가 앞으로 4년간 A오피스텔에 사는 데 이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법적으로는 김 씨가 자기 소유의 방을 박병화에게 월세 주는 형태이기 때문에 사인 간의 부동산 계약에 해당한다. A오피스텔 대표나 입주민들이 이 계약을 거절하거나 반대할 법적 권리는 없다. 김 씨의 통지문은 “B오피스텔은 주거용 건물이라 여성 입주자들이 박병화의 존재를 불안해한다. 반면 A오피스텔은 사무실 위주라 박병화가 이사를 와도 주민들의 불안 문제가 적다”는 취지였다. 김 씨는 박병화에게 이사를 가면 향후 2년간 월세를 대신 내주고, 4년간 A오피스텔에 살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조건을 제안했다. 박병화는 답변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A오피스텔 주민들은 반발했다. A오피스텔 주민들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는 “우리도 대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절대 반대합니다!” 등의 글이 계속 올라왔다. 반면 B오피스텔 주민들은 환영했다. B오피스텔 주민 이모 씨(21)는 “박병화가 이 건물에서 나갈 수 있다니 다행”이라고 했다.● 성범죄자 거주지 공개만 해놓고 손 놓은 정부 정부는 성(性)범죄자가 사는 주소지를 공개하면서, 이로 인해 벌어질 갈등과 주민들의 불안에는 아무런 대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보호 감호 확대와 같은 적극적인 조치들을 고려하는 등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갈등은 악질 성범죄자들이 출소할 때마다 반복됐다. 초등생을 성폭행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2020년 12월 출소한 조두순(72)은 집을 월세 계약했다가 신원이 드러나 주민들이 반발하면서 계약이 파기됐다. 2022년에는 미성년자 12명을 성폭행한 김근식(56)이 출소해 경기 의정부시로 이사를 가려 하자 의정부시장과 주민들이 반발했다. 일부 국가는 성범죄자 주거지를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미국은 2005년 ‘제시카법’을 제정해 아동 대상 성범죄자는 출소 이후 학교 등 아동이 많은 곳으로부터 약 610m 이내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했다. 국내에서도 ‘한국형 제시카법’ 논의가 있었지만 법제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21대 국회에서는 임기 만료로 폐기됐고 이번 22대 국회에서는 아직 발의된 법안이 없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제시카법이 도입되더라도 형기를 마친 사람을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시킬 수는 없다”며 “보안처분 등 재범 방지를 위한 정부 예산과 인력을 늘리고 지속적 교육을 통해 교화와 감시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주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수원=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정부가 경기 화성시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로 가족을 잃은 외국인 유가족들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다. 비자가 없는 유족들이 입국할 방법을 찾지 못해 본국에서 발만 동동 구르자 화재 발생 나흘 만에 법무부가 이런 조치를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외국인 사망자 유족은 ‘무비자 입국’ 28일 법무부와 화성시 등에 따르면 정부는 비자가 없는 유족들이 입국할 경우 공항에서 바로 입국을 허가해 주는 무비자 입국 조치를 27일부터 시행했다. 중국과 라오스 등 무비자 협약국이 아닌 국적의 사람은 한국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야 입국할 수 있다. 당초 법무부는 유족들에 한해 비자 발급 서류를 줄이고, 수수료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유족들이 대사관에 방문하기 어렵고 비자 발급까지 시간이 소요되는 점 등을 감안해 무비자 입국까지 허용하기로 했다. 다만 대상은 화재로 사망한 중국인 17명과 라오스인 1명 등 18명의 직계존비속과 형제자매로 한정했다. 유족들은 28일부터 입국하기 시작했다. 딸을 잃은 채성범 씨(73·중국 국적)의 아내와 아들도 그동안 비자가 없어 애를 태우다 이날 오후 3시 30분경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채 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몸도 아픈 아내가 이제야 딸을 보러 한국에 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라오스 국적의 아내를 잃은 이재홍 씨(51)도 “아내의 가족이 비자가 없어 못 오고 있었다”며 “이제 한국행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28일 경기 시흥의 한 병원 장례식장에는 한국인 사망자 A 씨의 빈소가 마련됐다. 사망자 23명 중 빈소가 마련된 것은 A 씨가 처음이다. 사망자 신원 확인과 유가족 입국이 지연되면서 다른 사망자들은 빈소가 아직 차려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망자 전원에 대한 장례 절차가 끝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유가족들은 28일 협의회를 구성하고 장례와 보상 절차 등을 함께 대응하기로 했다. 협의회 측은 “사용자(회사) 측이 불쑥 찾아와 생색 내기식 사죄를 했다”며 “유족 전체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사망자 전원의 신원이 파악된 가운데 이날도 안타까운 사연이 이어졌다. 경찰 등에 따르면 한국으로 귀화한 40대 남성 B 씨와 중국 국적 여성 C 씨는 부부인 것으로 확인됐다. 50대 여성과 40대 여성 두 사람은 일곱 살 터울의 중국인 자매였고, 두 살 터울의 20대 이종사촌도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다.● 화재 4시간 40분 후 유해물질 측정 노동 당국은 아리셀의 불법 파견 의혹에 대해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고용노동부 민길수 지역사고수습본부장(중부고용노동청장)은 28일 브리핑을 갖고 “경기지청에 수사팀을 꾸려 조사 중”이라며 “법 위반 여부를 철저하게 확인해 엄중 조치하겠다”고 했다. 한편 화재 발생 4시간 40분 후에야 화재 현장의 일부 유해화학물질 유출 측정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부는 화재 발생 후 현장의 유해화학물질 유출 농도를 측정한 결과 “검출이 되지 않았거나 기준치 이하로 파악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유해화학물질로 꼽히는 염화티오닐의 유출 측정은 24일 오후 3시 11분경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화재 발생 4시간 40분이 지나서야 이뤄진 것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한강유역환경청(경기 하남시)과 화학물질안전원(충북 청주시) 모두 현장과 거리가 먼 데다 염화티오닐 측정이 고성능 장비를 요해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화성=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화성=서지원 기자 wish@donga.com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정부가 경기 화성시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로 가족을 잃은 외국인 유가족들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다. 비자가 없는 유족들이 입국할 방법을 찾지 못해 본국에서 발만 동동 구르자 화재 발생 나흘 만에 법무부가 이런 조치를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외국인 사망자 유족은 ‘무비자 입국’28일 법무부와 화성시 등에 따르면 정부는 비자가 없는 유족들이 입국할 경우 공항에서 바로 입국을 허가해주는 무비자 입국 조치를 27일부터 시행했다.중국과 라오스 등 무비자 협약국이 아닌 국적 사람은 한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야 입국할 수 있다. 당초 법무부는 유족들에 한해 비자 발급 서류를 줄이고, 수수료를 면제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유족들이 대사관에 방문하기 어렵고 비자 발급까지 시간이 소요되는 점 등을 감안해 무비자 입국까지 허용하기로 했다. 다만 대상은 화재로 사망한 중국인 17명과 라오스인 1명 등 18명의 직계존비속과 형제자매로 한정했다.유족들은 정부의 조치를 환영했고, 28일부터 입국하기 시작했다. 딸을 잃은 채성범 씨(73·중국 국적)의 아내와 아들도 그동안 비자가 없어 애를 태우다 이날 오후 3시 30분경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채 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몸도 아픈 아내가 이제야 딸을 보러 한국에 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라오스 국적 아내를 잃은 이재홍 씨(51)도 “아내의 가족이 비자가 없어 못 오고 있었다”며 “이제 한국행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28일 경기 시흥의 한 병원 장례식장에는 한국인 사망자 A 씨의 빈소가 마련됐다. 사망자 23명 중 빈소가 마련된 것은 A 씨가 처음이다. 박순관 아리셀 대표가 이날 빈소를 찾아왔지만 유족들이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해 돌아갔다.사망자 신원 확인과 유가족 입국이 지연되면서 다른 사망자들은 빈소가 아직 차려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망자 전원에 대한 장례 절차가 끝나려면 최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유가족들은 28일 유가족 협의회를 구성하고 장례와 보상 절차 등을 함께 대응하기로 했다. 협의회 측은 “사용자(회사) 측은 진정성 있는 설명이나 보상안 마련 없이 불쑥 찾아와 생색내기식 사죄를 했다”며 “이런 시도에 유족 전체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협의회를 구성했다”고 밝혔다.사망자 전원의 신원이 파악된 가운데 이날도 안타까운 사연이 이어졌다. 경찰 등에 따르면 한국으로 귀화한 40대 남성 B 씨와 중국 국적 여성 C 씨는 부부인 것으로 확인됐다. 50대 여성과 40대 여성 두 사람은 7살 터울의 중국인 자매였고, 두 살 터울의 20대 이종사촌도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다.● 불법 파견 의혹 본격 수사노동당국은 아리셀의 불법 파견 의혹에 대해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고용노동부 민길수 지역사고수습본부장(중부고용노동청장)은 28일 브리핑을 갖고 “불법 파견 문제는 경기지청에 수사팀을 꾸려 조사 중”이라며 “법 위반 여부를 철저하게 확인해 엄중 조치하겠다”고 했다.외국인 근로자의 산업재해 인정 여부에 대해선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산재 처리에는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산재보험 규정에 따르면 사업장의 가입 여부나 고용 형태, 국적 등과 관계없이 모든 근로자는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다.한편 공장에 남아 있던 폐전해액 1200L는 이날 수거가 완료됐다. 전해액은 전지 내 리튬이온의 이동통로 역할을 하며 인체 노출 시 유해하고 화재 위험도 있다.화성=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화성=서지원 기자 wish@donga.com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아내가 ‘인력업체(메이셀)가 근로계약서도 안 써준다’고 자주 하소연했습니다. 업체 측에서 ‘(계약서를) 독촉할 거면 그냥 나가라’고 했다네요. ” 27일 오전 11시 10분경 경기 화성서부경찰서 앞. 사흘 전 경기 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로 사망한 라오스 국적 주이(본명 숙사완 말라팁·33) 씨 남편 이재홍 씨(51)가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이같이 말했다. 주이 씨는 사고 직전 한국으로 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24일 화재 사고 날 뇌수술을 받은 이 씨는 여전히 이마 두 곳과 왼쪽 귀에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아내의 신원 확인을 마쳤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무덤덤하게 “그렇다”고 답한 이 씨는 이어 “(아내 시신이) 함백산(장례식장)에 있다고 한다”며 눈물을 쏟았다. 이날 이 씨는 딸 이모 양(11)과 함께 아내의 신원 확인 결과를 들으러 경찰서를 찾았다. 라오스에 있는 아내의 어머니와 동생은 여전히 한국으로 오지 못했다. 이 양은 “엄마가 날 많이 사랑했다”며 소리 없이 울음만 삼켰다.● “포장 일로 불러 놓고 용접 일까지” 주장도 아리셀은 외국인 노동자를 불법 파견 형태로 고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아리셀은 올 5월부터 인력파견업체 메이셀로부터 외국인 인력을 공급받았다. 또 메이셀의 등기상 주소는 화재가 발생한 아리셀 공장 3동 2층으로 나타났다. 다만 아리셀 측은 27일 취재진 앞에서 “엄연한 (도급) 계약서를 가지고 있다”며 반박했다. 이 씨는 아내가 2년 가까이 일자리를 받던 메이셀에 최근까지 근로계약서를 써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고 주장했다. 업체가 매번 “다음에 써주겠다”며 미뤘다는 것이다. 사고 발생 2주 전인 이달 10일까지 근로계약서 작성을 완료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씨는 “아내가 또 한번 요구하니 업체에서 ‘그런 식으로 재촉할 거면 그만두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씨는 인력업체 지원 당시 주이 씨가 포장 등의 업무를 택했으나 업체에서는 용접 업무까지 맡겼다고 주장했다. 이 씨는 “아내가 ‘용접 업무를 못 하겠다’고 해서 내가 대신 용역업체 직원한테 항의했다”며 “업체(메이셀) 측에서 ‘우리는 관여 안 하고, 업무 지시는 아리셀 공장에서 하는 거다’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파견은 용역업체와 계약을 맺은 원청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업무 지시를 내릴 수 있다. 도급은 용역업체에 지휘 권한이 있다. 파견법상 제조업 직접 생산 공정 업무는 원청 사업주가 파견 근로자를 쓸 수 없다.● “우리 애들 왜 대피 못 시켰냐” 유족 오열 유족들은 이날 오후 3시 반경 화성시청 모두누림센터를 찾은 박순관 아리셀 대표와 회사 관계자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유족은 오열하다 쓰러지기도 했다. 한 중년 여성 유족은 박 대표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겨우 스물네 살밖에 안 된 애다. 어떻게 할 거냐”며 바닥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센터 2층 세미나실을 찾은 박 대표에게 유족들은 “사흘밖에 일 안 했다. 안전 교육을 똑바로 한 것은 맞냐” “모르니까 소화기 들고 뿌리다 죽은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전 교육을 모두 마쳤다”는 사측 답변에 또 다른 유족은 “애들 대피 좀 시키지 그랬느냐. 아침에 ‘엄마 출근해요’ 라고 말했던 애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며 오열했다. 박 대표는 연신 유족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유족들은 전날부터 이어진 유전자(DNA) 채취 및 신원 확인 결과를 들으러 경찰서를 오갔다. 26일 오후 신원 확인을 마친 뒤 나온 한 유족은 “우리 딸 어떡해, 다 키웠는데”라며 연신 가슴을 내리쳤다. 27일 오후 5시 기준 사망자 23명(내국인 5명, 외국인 18명)의 신원은 모두 확인됐다. 화성=서지원 기자 wish@donga.com화성=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화성=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공장 화재로 23명의 사망자를 낸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이 외국인 근로자를 불법 파견 형태로 고용했다는 의혹이 커지는 가운데, 과거 이곳에 인력을 공급했던 업체 대표가 “안전교육을 한 적이 없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아리셀이 적법한 인력 도급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사실도 고용노동부 조사로 드러났다. 고용부는 이처럼 부실한 외국인 근로자 인력 관리 행태가 안전교육 등에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 중이다. 인력업체 한신다이아 관계자는 2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리셀에 보낸 외국인 근로자는 얼굴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신다이아는 올 4월까지 아리셀에 외국 인력을 도급 형태로 공급해 온 업체다. 이 관계자는 “인터넷 구인 사이트에 올린 광고를 보고 (외국인 근로자가) 여권과 계좌번호를 보내면 (도급 업체는) 통근버스를 어디서 탈지 안내했다”라며 “안전 교육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아리셀 측은 모든 근로자에 대해 안전 교육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또 ‘적법한 도급이었다’는 아리셀 측 주장과 달리 사실상 파견이었다고 주장했다. 도급 업체는 반드시 현장에 사무실이 있어야 하는데, 이조차 어기고 아리셀 측에 월세를 낸 것처럼 꾸몄다는 것. 제조업 직접 생산 공정에선 파견 근로가 금지돼 있다. 고용부 등에 따르면 아리셀은 올 5월부터 인력업체 메이셀로부터 외국 인력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고용부는 아리셀과 메이셀 사이에 도급 계약서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고용부 관계자는 “두 업체가 구두 계약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메이셀은 외국인이 주로 이용하는 구인 사이트에 이달 19일까지도 채용 글을 올려 아리셀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단순업무’ ‘면접 없음’ ‘바로 출근 가능’ 등 문구를 강조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불법 파견에서 흔히 보이는 행태로 보인다”며 “불법 파견에선 통상 안전교육이 미비한데, 언어가 어려운 외국인 근로자(의 안전 교육은)는 더 허술하다”고 말했다. 이규용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정책본부장은 “고용주가 있으면 그나마 안전교육이 실시된다”며 “반면 파견업체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안전교육 의무 주체가 불분명한 상황이 많아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아리셀과 같은 제조업 분야의 파견 외국인 근로자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고용부에 따르면 국내 유료 직업소개사업소(인력사무소)는 2019년 1만3332개에서 올 5월 1만5893개로 19.2% 늘었다. 올 1분기 제조업 분야 종사 외국인 근로자 수는 20만9670명으로, 처음으로 20만 명을 넘겼다. 고용부는 26일 오전 9시부터 아리셀 공장 전체에 대해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다. 또 유사 사고를 막기 위해 전지 제조업 사업장 500여 곳에 리튬 취급 안전 수칙 자체 점검표를 토대로 긴급 자체 점검을 시행하도록 했다. 화성=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김예윤 기자 yeah@donga.com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게 1년 전이에요. ‘너도 다 컸으니 이젠 돈 벌러 가야지’라며 떠나셨는데….” 26일 오후 1시 반경 경기 화성시 화성서부경찰서 본관 1층 앞. 전날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중국에서 한국에 왔다고 밝힌 중국 국적 A 양(18)은 덤덤한 듯 말하다가 경찰서 안쪽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24일 경기 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사망한 23명 중 한 명이다. 아직 신원도 특정되지 않았다. 이날 A 양은 어머니의 신원 조회에 필요한 유전자(DNA)를 채취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경찰서를 찾았다. 한국어가 낯선 부녀(父女)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경찰서 바깥 한쪽에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유족들, 신원 특정 기다리며 눈물 경기남부경찰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시신을 이송해 DNA 채취 작업을 하고 있다고 26일 밝혔다. 이번 화재로 사망한 23명 중 신원이 특정된 14명을 제외한 9명은 시신이 심각하게 훼손돼 지문 감정조차 불가능한 상태다. 이날 한국인 여성 1명과 중국인 9명(남성 2, 여성 7), 라오스 여성 1명 등 총 11명의 신원이 추가로 확인됐다. 전날 발견된 마지막 실종자의 시신에 대한 부검도 이날 오전 내 국과수에서 진행됐다. 아리셀 화재 유가족지원실이 마련된 경기 화성시청 모두누림센터 3층에서는 이날 오전부터 DNA 채취를 마친 유족 10여 명이 모여 혹시 모를 ‘신원 특정’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DNA 채취를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작정 시청으로 온 유족들도 일부 있었다. 전날에 비해 비교적 차분해진 분위기였으나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다른 유족들 역시 눈물을 훔쳤다. 일부 유족들은 “부검과 관련해 들은 이야기가 없느냐”며 오히려 취재진에게 물어오기도 했다. 이날 오후 1시 30분경 센터 옥상에서 만난 한 유족은 “(담당 기관으로부터) 부검했다는 얘기조차 못 들었다. 언제, 왜 부검을 했느냐”고 했다. 사인 확인이 필요해서 부검했다는 설명에는 “부검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데 왜 막아서는 거냐”며 연신 줄담배를 피웠다. 한 유족은 “사고 당일 뉴스에서 (화재 소식을) 보고 (사망자에게) 문자메시지를 계속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영정사진 없이 국화만 덩그러니 놓여 전날 오후 5시부터 화성시청 본관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는 추모대가 설치돼 있었지만, 영정사진 한 장 올라와 있지 않았다. 위패도 없이 오직 국화와 백합꽃으로 장식했다. 희생자 신원이 완전히 특정되지 않아 위패를 모시기 어려운 탓이다. 분향소 운영이 시작된 26일 오전 9시경 가장 먼저 분향소를 찾은 이들은 유족이었다. 사진 하나 없는 빈 추모대 앞에서 엎드려 오열하는 유족들도 있었고, 일부는 떨리는 손으로 추모대 위에 국화꽃을 놓았다. 이번 사고로 딸을 잃고 중국에서 온 한 유족은 “어떻게든 딸만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며 “불쌍한 우리 딸”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침부터 이어진 시민들의 추모는 오후 6시 넘어서자 100명 가까이 달했다. 이날 퇴근길 분향소에 들른 직장인 박모 씨(31)는 “타지로 돈을 벌러 온 분들이 대부분일 텐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죄스러운 마음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위패가 있는 공식 합동분향소 설치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신원 확인은 물론이고 유족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화성시는 화성시 서신면체육관 2층, 동탄역, 병점역에 추가로 합동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화성=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화성=서지원 기자 wish@donga.com화성=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공장 화재 참사로 23명이 사망한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의 박순관 대표(사진)가 25일 “깊은 애도와 사죄를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아리셀이 사망한 외국인 근로자를 불법 파견 형태로 고용했다는 의혹이 협력업체에서 제기돼 향후 수사로 진위가 가려질 전망이다. 25일 오후 2시 경기 화성시 서천면 공장 앞에 화재 발생 28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 대표는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박 대표는 아리셀의 모회사 에스코넥의 대표도 맡고 있다. 그는 화재 이틀 전에도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회사 측이 묵인했다는 의혹에 대해 “(화재가 발생은 했지만) 자체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신고하지 않은 채 작업을 재개한 것”이라고 했다. 아리셀이 사망한 외국인 근로자를 불법 파견받은 상태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제조업 직접 생산 공정에선 파견 근로가 금지돼 있다. 아리셀 측이 “(합법적인) ‘도급 인력’이었다”며 외국인 근로자 인력을 공급한 업체로 지목한 A업체 관계자는 이날 동아일보와 만나 “현재는 B업체가 인력을 공급한다”면서 “아리셀은 파견이라고 하면 (불법이어서) 모든 책임을 자기들이 뒤집어쓴다고 생각해서 자꾸만 도급(합법 공급)으로 얘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아리셀과 맺었던 계약에 대해 “전형적인 파견 근로인데 위장한 것”이라고도 했다. 고용노동부는 “아리셀에 인력을 파견한 B업체는 파견업 허가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직업소개소로 등록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B업체의 법인등기상 주소지는 이번에 화재가 난 공장이었다. 화성=서지원 기자 wish@donga.com화성=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화성=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