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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장 힘든 자리다. 나라 생각하면 되면 좋겠고, 사람 생각하면 떨어져도 좋겠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는데, 그런데도 고사하지 않는 까닭은 명예 때문이 아니라 소명 때문이라 나는 믿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진욱 초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처장 후보자를 지명하기 하루 전인 지난해 12월 29일 김 후보자와 가까운 한 목사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어렸을 때부터 김 후보자를 잘 알고 지낸 이 목사는 김 후보자에 대해 “예수를 진짜로 잘 믿고, 직업을 소명으로 알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다음 날 문 대통령은 최종 후보군에 오른 2명 중 검사 출신을 배제하고 김 후보자를 선택했다. 김 후보자는 판사와 변호사, 특검 파견 수사관, 헌법재판소 선임연구관 등 다양한 법조 경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공수처의 초대 수장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던 터라 김 후보자의 자질 등은 법조계에서도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김 후보자의 학창 시절 친구와 사법연수원 동기, 함께 일한 법조인, 그리고 김 후보자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김 후보자의 평판을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합리적인 보수 성향에 가깝고,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고집이 있다.’ 충북의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키웠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와 신앙생활에 집중해 ‘아주 완전한 모범생’으로 불렸는데, 말하자면 ‘개천용’에 가깝다. 경제학과 진학을 꿈꾸던 그는 고교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문화재를 연구할 수 있는 고고미술사학과로 진학했다. 경제학을 부전공하던 그는 대학 4학년 때 우연히 헌법학을 수강하다가 법학에 흥미를 느껴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1년 6개월 만에 초고속 합격했다. 3년 동안 판사 생활을 하던 그는 김앤장 법률사무소로 옮겼고, 거기서 하버드대 로스쿨에 연수를 갔다. 동시통역대학원도 다녔다. 헌재에 근무하면서 서울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일부 지인들은 검찰개혁 등에 관한 발언에서 보수 성향에 가깝다고 느꼈다고 한다. ‘옳다는 길은 죽어도 양보 안 한다’고 할 정도로 고집이 있다는 것도 주변의 일관된 평가다. 김 후보자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어록 중 하나인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올해 새해 인사로 건넨 것도 예사롭지 않다. 고집 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측면에서 여권과 마찰을 빚은 법관 출신의 최재형 감사원장을 떠올리는 법조인도 있다고 한다. 여권이 공수처 조기 출범만을 지상 과제로 삼으면서 처장 후보자 추천과 검증에 소홀했던 것 아니냐는 시각과 함께 “여권이 후회할 수 있다”는 전망도 법조계에서 나온다. 김 후보자를 최근 만난 한 지인은 “공수처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세팅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소명의식이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되려면 청와대, 검찰 등과 풀어야 할 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 후보자의 법조 경력 25년 중 수사 경험은 1999년 10∼12월 ‘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특검’ 수사관 파견 2개월이 전부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 등 70여 명을 이끌 리더십도 검증됐다고 보기 어렵다. ‘공수처의 처음과 끝은 처장’이라고 할 정도로 처장은 인사와 수사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공수처 운영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밝히고, 검증받아야 한다. 취임한다면 공수처 중립성을 훼손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단호히 맞서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저를 둘러싼 황당한 이야기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떠돌고 있다. 소도 웃을 가짜 뉴스, 모조리 처벌하겠다.” 지난해 10월 당시 오거돈 부산시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다. 부산시는 “개인을 넘어 350만 부산시민을 대표하는 시장과 부산시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는 별도의 입장을 냈다. 오 전 시장은 가짜 뉴스 척결을 위한 변호인단 8명을 구성하고 자신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유튜브 채널에 대해 강경 대응했다. 유튜브 채널 운영진을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형사 고소했고, 5억 원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제기했다. 이때만 해도 오 전 시장은 ‘가짜 뉴스의 피해자’처럼 보였다. 국회의원 총선거 약 일주일 뒤인 올 4월 23일 오 전 시장은 집무실에서 또 다른 부하 여성 공무원을 성추행했다고 시인한 뒤 자진 사퇴했다. 오 전 시장의 사퇴를 계기로 유튜브에서 제기된 성추행 사건도 다시 주목받았다. 부산지방경찰청이 올 8월까지 약 4개월 동안 관련 의혹을 내사했지만 오 전 시장이 시인한 강제추행 외에 추가 범행을 밝혀내지 못하고 사건을 검찰로 송치했다. 그런데 부산지검의 추가 수사 과정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오 전 시장에게 피해를 당한 또 다른 여성이 성추행 피해 사실을 어렵게 진술하고, 검찰이 증거 인멸과 관련한 녹취 파일까지 새로 확보한 것이다. 검찰은 강제추행 외에 무고 혐의를 추가해 오 전 시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했다. 신고자가 허위임을 알고서 다른 사람이 형사 처벌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수사기관 등에 신고했다면 무고죄가 성립한다. 오 전 시장 측은 18일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추가 추행 혐의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자가 맞다고 한다면 인정한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무고를 피하려고 형사 고소 당시 허위 사실인지를 몰랐다는 전략적 진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오 전 시장은 구속을 피했다. 오 전 시장의 두 번째 영장을 기각한 부산지법의 김경진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피의자의 지위와 피해자들과의 관계, 영장청구서에 적시된 구체적인 언동을 고려하면 피의자에 대한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올 6월 경찰이 신청한 첫 번째 영장이 기각됐을 때만 해도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는 짤막한 기각 사유만 나왔지만 두 번째 영장 때에는 ‘비난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더해진 것이다. 정당한 의혹 제기를 ‘부산시민에 대한 도전’으로 몰아세우면서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해 민형사상 소송전을 벌이는 것은 선출직 공직자의 도리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오 전 시장에 대한 두 차례 영장심사 과정은 상식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오 전 시장은 올 6월과 18일 두 차례 영장심사만을 위해 법원장 출신의 전관 변호사를 ‘원포인트’로 선임했다. 전관 변호사는 올 6월 1차 영장심사 때 “부산시장을 지낸 피의자가 자존심 등으로 자신한테 불리한 건 기억하고 싶지 않고, 실제 안 했다고 믿는 ‘인지부조화 현상’일 뿐 혐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로 오 전 시장을 방어했다. 2차 영장심사 때도 “기억나지 않지만 인정한다”는 방어논리를 폈다. “지병이 있는 73세의 고령”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변호인단의 도움을 받은 오 전 시장은 자진 사퇴 이후 8개월이 넘도록 아직 기소되지 않았다. 반면 피해자들은 평범한 일상을 잃었고,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제가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지금도 이해를 못 하고 있다”며 절규하고 있다. 피의자의 처지나 논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심정이나 입장도 헤아리는 재판을 기대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나는 지켜보았습니다. 아픈 우리 아이를 법정에 세워놓고 자기가 아니다, 어린아이라 기억이 잘못됐다, 진짜 범인이 밖에서 또 강력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며 협박하던 자입니다. … 11년 전에 정부에서 그랬습니다. 조두순을 영구히 격리하겠다고 국민께 약속했어요. 그 약속을 지켜주실 것을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2008년 12월 11일 조두순이 당시 8세 딸을 참혹하게 성폭행한 이후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최근 국회의원에게 보낸 호소문 중 일부다. 이런 기대와 달리 수감 중인 조두순은 12일 만기 출소해 자신이 살던 곳으로 복귀한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피해자가 도망치듯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이사를 갔다고 한다. 법무부와 여성가족부, 경찰청은 올 10월 조두순을 24시간 밀착 감독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부 공동 대응책을 내놨다. 국회도 성범죄자의 실거주지를 더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방향으로 관련법을 개정했다. 조두순이 되돌아오는 시점에 반드시 되짚어보고, 기억해야 할 지점이 있다. 사회적 관심이 덜한 수많은 사건들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허술하게 처리돼 왔는지, 또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사회적 비용이 막대하다는 것을. 아버지가 “끔찍하다” “기억하기도 싫다”고 하는 장면들이다. 우선 수사와 기소 과정이다. 검찰은 수술 후유증으로 조사받기조차 힘든 피해자를 장시간 조사했고, 영상녹화 장비를 제대로 조작하지 못해 피해자에게 반복적으로 진술을 요구했다. 가장 어이없는 것은 사건 발생 5개월 전 개정된 아동성범죄 특별법인 성폭력처벌법을 적용하지 않고, 검찰이 일반법인 형법상 강간상해죄로 조두순을 기소한 것이다. 형량 하한선이 더 낮은 강간상해죄로 기소된 조두순은 1심에서 징역 12년과 7년 동안의 위치추적기 부착, 5년 동안의 신상공개 명령을 선고받았다. 조두순은 항소를 했는데, 검사는 1심 선고 형량이 상해죄 기준선에 있다는 이유로 항소를 포기했다. 2, 3심에서는 ‘항소인에게 더 불리하지 않게’ 판단한다는 원칙 탓에 1심보다 더 높은 형량을 선고하지 못해 12년 형이 그대로 확정됐다. 잘못된 법 적용을 바로잡을 기회도 사라졌다.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더 보호한 것도 논란이 됐다. 피해자 측은 경황도 없고, 경제적 여건도 되지 않아 1심을 변호인 조력 없이 대응했다고 한다. 1심 형사재판의 변론 종결 전에 배상명령을 신청할 수 있었지만 그 시기를 놓쳐 배상을 받지 못했다. 반면 조두순은 1심에선 국선변호인, 2심에선 법무부 산하 법률구조공단 변호인의 도움을 받았다. 법률구조공단은 피해자 측의 변호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판이 정의 실현의 과정이었는지도 의문이다. 1심은 결심 공판을 포함해 3차례 공판이 열린 뒤 사건 접수 2개월여 만에 종결됐다. 전과 18범의 조두순은 그사이 6차례나 반성문과 탄원서를 제출했다. 결국 재판부는 무기징역형을 선택한 뒤 주취로 인한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경했다. 조두순 사건으로 드러난 사회 시스템의 오작동은 많이 개선됐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성범죄의 신상공개 제도와 전자발찌 제도, 피해자 인권 보호 대책 등이 보완되고 있다. 형법이 개정되면서 아동성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이 높아졌다. 만약 지금 조두순 같은 범죄가 발생한다면 감경을 하더라도 최대 징역 50년에 처할 수 있고, 성범죄에선 음주를 이유로 감경을 하지 않도록 법이 개정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쩌면 피해자에게 진 빚일 수 있다. 12년 동안의 시행착오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조두순 출소 이후 대책의 빈틈을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할 때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전날 밤에도 평의를 했다. 신속하게 위헌 여부를 판단하겠다.” 20일 유상범 등 국민의힘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4명이 헌법재판소를 항의 방문해 신속한 선고를 요구하자 헌재 박종문 사무처장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헌재는 유 의원이 올 5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공수처법)의 위헌 여부를 판단해 달라며 제기한 헌법소원 청구 등을 심리하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 올 10월까지 헌재는 일반 국민이 낸 공수처 관련 헌법소원 청구 17건을 “당사자 자격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모두 각하했다. 하지만 유 의원과 강석진 전 의원 등 야당 국회의원이 제기한 헌법소원 2건은 헌법재판관 9명으로 구성된 전원재판부에 회부해 심리 중이다. 헌재는 전원재판부 심리를 위해 올 6월부터 이달 7일까지 국무조정실과 법무부 등 관련 기관으로부터 공수처법에 대한 의견을 서류로 제출받았다고 한다. 박 사무처장 말대로라면 관련 기관의 회신과 헌재연구관의 검토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헌법재판관들이 본격적인 평의를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공개 심리여서 정확한 내용은 알기 어렵지만 헌법재판관의 구성상 공수처법의 위헌 여부를 놓고 대립이 큰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헌재 안팎에선 “헌법재판관들이 자주 밤늦게 평의한다. 곧 공개변론 여부를 결정하고, 그 뒤에 선고 일정이 잡힐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번 달 26일 선고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다음 달 이후 선고 공판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 공수처는 행정부 소속인 기존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수사기관이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기관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6부 요인, 국회의원, 판사와 검사, 3급 이상 고위공무원 등 7000여 명이 수사 대상이다. 하지만 수사 착수나 진행 상황 등을 청와대에 보고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현행 공수처법은 지난해 12월 30일 국회에서 공직선거법과 동시에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돼 처리되면서 숙의 과정을 거쳤다고 보기 어렵다. 본회의장에서 제1야당의 야유와 반대 시위 속에서 강행 처리됐다. 입법부의 재량권을 인정하더라도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조항은 없는지 헌재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위공직자범죄 등을 인지한 경우 그 사실을 즉시 공수처에 통보하여야 하고, 공수처장이 이첩을 요청하는 경우 다른 수사기관이 응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헌법 정신과 가치에 부합하는 수사기관 간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맞느냐는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헌재가 위헌 판단을 내린다면 독소 조항만 제거하면 된다. 거꾸로 합헌 판단을 내린다면 공수처 출범이 오히려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여당이 공수처장 추천 과정에서 야당의 비토권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는데, 야당이 공수처장 추천을 보이콧하게 되면 공수처가 어떤 수사를 하더라도 불복 시비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공수처 수사 대상의 절반인 3000여 명의 판사가 소속된 사법부는 현행 공수처법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의견을 내놓았다. 여기에 또 다른 헌법기관인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여당이 법 개정을 강행한다면 ‘정부 여당만을 위한 공수처’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 법이 시행된 지 5개월도 안 된 상황에서, 초대 공수처장을 임명하기도 전에 법을 다시 개정한다면 향후 정치적 환경이 바뀔 때마다 공수처법은 개정 대상에 오를 것이다. 적어도 헌재 선고 전까지는 개정을 유보해야 한다. 공수처의 성공을 바란다면 여권이 그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국회가 감사를 요구한 사항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 결과를 난센스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최재형 감사원장은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조기 폐쇄와 관련한 감사를 “난센스”라고 폄훼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발언을 최근 국회에서 강하게 비판했다. 감사원은 원전 감사를 왜 시작했을까. 지난해 9월 30일 국회 본회의장.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의 타당성에 대한 국회의 감사원 감사요구안에 대한 표결이 있었다. 1년 전 국정감사에서 해당 의혹을 처음 제기한 장석춘 당시 야당 의원의 제안 설명 직후 여당 의원의 반대토론 없이 곧바로 전자투표가 실시됐다. 203명의 투표 의원 중 162명이 찬성해 감사요구안이 통과됐다. 반대(16명)와 기권(25명)이 있었지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동의가 없었다면 감사 착수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 감사요구안에 찬성한 20대 국회의원은 문희상 정세균 추미애 이인영 최재성 박범계 전해철 등 여당 핵심 의원들이었다. 감사요구안은 국회의 감사 요구에 감사원이 3개월 안에 감사를 한 뒤 그 결과를 국회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제도다. 2002년 11월 국회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여야 합의로 제안해 2003년 1월부터 국회법 등에 관련 조항이 신설됐다. 당시 감사원은 “감사원의 독립성이 훼손될 소지가 다분하다”며 반대했지만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감사원이 국회 지시나 지휘를 받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 뒤 국회에서 사실상 만장일치로 해당 법안이 통과됐고, 감사원은 국회가 요구한 사행성 게임, 저축은행 비리, 4대강 사업 등의 감사를 진행해 왔다. 여당이 아무런 저항 없이 감사에 찬성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의 생각은 여당과 달랐던 것 같다. 감사원이 국회의 통보를 받고 감사에 착수하자 산업부 담당 공무원들은 대책회의를 열었다. 담당자의 이메일, 휴대전화에 저장된 원전 조기 폐쇄 관련 자료를 지우도록 했다. 감사원이 자료 제출을 요구하기 전날인 일요일 오후 11시 24분부터 다음 날 오전 1시 16분까지 약 2시간 동안 122개 폴더의 문건 444건을 삭제했다. 자신이 원전 업무를 담당할 때 사용하던 컴퓨터를 다른 직원이 사용하자 그 직원으로부터 비밀번호를 미리 받아 삭제한 것으로 단독 범행으로 보기도 어렵다. 청와대 보고 문건 등 민감한 자료부터 복구를 못 하게 삭제해 문건 120건이 복구 불능 상태다. 감사 방해 혐의는 1년 이하의 징역 등에 처할 수 있는 중대 범죄지만 감사위원회의 반대로 고발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감사원의 내부 지침은 범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으면 수사참고자료를 검찰총장에게 송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침상 수사참고자료에는 인적 사항, 죄명, 적용 법조, 범죄 혐의로 의심되는 행위, 자백 여부, 주요 증거, 증거 인멸 여부를 기재하고, 관련 증거자료를 첨부하게 되어 있다. 검찰은 이 자료를 근거로 거의 100%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강제 수사에 나섰는데, 여당은 “윤석열 검찰의 정치 개입”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감사원이 원전 감사에 나설 수 있도록 찬성표를 던진 곳은 여당이었고, 산업부 직원들의 증거 인멸이 없었다면 검찰 수사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검찰 수사가 멈춘다면 의혹이 사라질까. 진실은 언젠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그걸 감추려고 한 쪽이 몇 배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화 이후 정부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반복적으로 학습해 온 교훈이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2018년 상반기 더불어민주당 핵심 관계자에게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적 있다. 법조계 동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다음 검찰 인사 때 무조건 수사권이 없는 고검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부터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돼 여권의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이끌고 있었는데,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는 “제어가 안 된다. 우리한테 칼끝이 올 수 있다”고 했다. 한때 윤 지검장을 고검으로 보내는 방안이 검토됐지만 서울중앙지검장 자리를 2년 동안 지켰다. 지난해 상반기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의 차기 검찰총장 후보자로 윤 지검장이 하마평에 오르내릴 때였다. 한 검찰 고위 인사는 “윤 지검장에게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총장이 아니라 마지막 총장이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 인사는 “윤 지검장의 수사 스타일과 두 번째 검찰총장은 잘 맞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통상적으로 정권의 레임덕을 불러올 수 있는 검찰 수사는 두 번째 검찰총장 때 많이 불거졌고, 두 번째 총장이 2년 임기를 다 채운다면 세 번째 총장은 대통령의 잔여 임기가 1년이 남지 않은 내년 7월 시작한다. 여권 내 ‘윤석열 비토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6월 17일 두 번째 검찰총장 후보자로 당시 윤 지검장이 지명됐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 발동의 근거로 꺼낸 윤 후보자 가족과 주변 문제 의혹 등이 불거져 심야까지 이어졌다. 야당의 날 선 공격을 여당이 방어함으로써 윤 후보자는 인사청문회를 마무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명장을 주면서 “청와대든 정부든 여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공정한 자세로 임해주길 바란다”는 격려를 했다. 임명장을 받은 당일 오후 윤 총장이 직접 썼다는 취임사가 공개됐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언급하면서 “형사 법집행은 오로지 헌법과 법에 따라 국민을 위해서만 쓰여야 하고, 사익이나 특정 세력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직후 검찰 인사도 윤 총장의 뜻대로 단행됐다. “여권의 자신감이 이 정도였나”라고 할 정도로 놀랐다는 법조인들이 많았다. 22일 윤 총장의 임기 중 마지막 국회 국정감사를 보면서 가장 눈길이 간 답변은 권력형 비리를 수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법을 집행해야 살아 있는 권력 또한 국민들에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도 검찰의 엄정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살아 있는 권력을 전현직 대통령, 사법부, 국가정보원, 대기업 등 윤 총장이 지휘해 왔던 수사 아이템으로 바꾸면 윤 총장이 평소에 했던 말과 거의 일치한다. 총장 취임 이후 여권이 윤 총장을 다르게 보는 계기가 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등을 수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이번에 제대로 수사해야 ○○이 결과적으로 수혜를 입는다”며 직진(直進) 수사를 강조해 왔다. 인사권을 뺏고, 수사지휘권을 박탈하고, 감찰로 압박한다고 윤 총장이 달라질까. 둘러 가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상 아마 더 독을 품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국감에서 윤 총장이 무력시위 하듯 퇴임 후 봉사활동을 언급하면서 정치와는 선을 긋지 않은 이유 중 하나라는 게 윤 총장과 가까운 인사의 얘기다. 1996년 김도언 전 검찰총장의 국회의원 출마 이후 역대 검찰총장은 “총장보다 더 높은 직위는 없다”며 정관계에 진출하지 않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윤 총장에게 우호적인 검사들 중 절대다수가 지금은 정계 진출에 반대한다. 하지만 인사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수준의 윤 총장 강제 퇴임이나 그보다 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 불문율이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심증은 가지만 입증이 어려워 진범을 사법처리를 할 수 없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거나 무고한 사람을 기소 또는 처벌하여서는 안 된다.” 올 8월 11일 부임한 박순철 서울남부지검장의 취임사 중 일부다. ‘열 명의 범죄자를 놓쳐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언(法諺)을 연상시키는 문구 그 자체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다. 박 검사장은 직원들에게 “진술만 가지고 하면 안 된다. 진술은 이해관계인의 이익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부연 설명했다고 한다. 진술에 의존한 수사가 무죄로 이어져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역시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서울남부지검이 대규모 환매 중단 사태를 부른 라임자산운용의 사모펀드 사기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부 직원들은 박 검사장의 취임사에 “라임 사건 수사를 말하는 것 같은데…”라며 술렁였다고 한다. 박 검사장 부임 전인 올 6월 초 라임의 전주(錢主)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은 서울남부지검에서 금품 공여를 주장했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27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강기정 당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줄 ‘인사비’ 5000만 원을 이강세 전 스타모빌리티 대표에게 건넸다”고 처음 진술했다. 김 전 회장의 진술은 구체적이었다. “현금 5000만 원을 백화점 쇼핑백을 반으로 접어서 안이 보이지 않게 건넸다” “이 전 대표가 7월 24일 (금융감독원을 감독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여당 국회의원을 만났고, 7월 28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강 수석을 만났다”…. 지난해 6월부터 라임은 금감원의 사전조사를 받았는데, 김 전 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금감원 조사를 무마시키기 위해 청와대와 여당 인사에게 금품 로비를 시도한 것이어서 중대한 부패 사건이다. 검찰은 김 전 회장 진술의 신빙성을 검증하기 위해 이 전 대표를 체포했다. 이 전 대표는 호텔에 간 사실, 김 전 회장에게 돈을 받은 사실을 처음엔 모두 부인했다. 검사가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물증을 제시하고, 김 전 회장과의 대질 조사 끝에 1000만 원을 받은 사실만 인정했지만 그 돈의 명목은 강 전 수석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 전 대표의 배달사고인지, 강 전 수석의 금품수수인지를 신속하고, 철저하게 규명해야 할 갈림길에 선 검찰의 이후 수사 과정은 석연치 않다. 검찰은 이 전 대표에게 알선수재 혐의를 적용해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하지만 이 전 대표는 올 7월 초 알선수재가 아닌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영장 단계의 범죄 혐의가 기소 단계에서 종종 바뀌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알선수재는 돈의 전달 과정이 명확한 경우 돈을 받은 공무원까지 뇌물죄로 처벌된다. 하지만 변호사법은 알선한 부분, 그러니까 청탁을 받은 공무원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폭넓게 적용이 가능하다. 현직 청와대 수석의 수뢰 의혹을 입증해야 할 검찰이 기소 단계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볼 수 있다. 구속영장에는 강 전 수석의 실명이 기재됐지만 공소장에는 강 전 수석의 이름이 빠졌다. ‘청와대 수석 등에 대한 청탁’ 대신 ‘국회의원 등’으로 수사 상황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보고됐다고 한다. 강 전 수석은 박 검사장의 부임 전날인 올 8월 10일 청와대를 떠났는데 검찰은 첫 진술 이후 4개월이 넘도록 전직 수석에 대한 조사 없이 처분을 미루고 있다. 김 전 회장이 8일 법정에서 갑자기 강 전 수석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라임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상식적 수사가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몰려다니는 줄은 몰랐다.” 최근 동아일보 법조팀이 서울대 한규섭 교수 연구팀과 함께 2005년 9월부터 올 9월까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274건을 미국 연방대법관 분석 기법으로 조사한 판결 성향을 본 현직 판사들이 가장 많이 보인 반응이다. 김선수 박정화 김상환 민유숙 노정희 등 현직 대법관 5명이 전합 판결 38건 중 71.1%인 27건에서 같은 의견을 냈다는 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진보나 보수 성향 판사들에게 각각 물었는데, 가장 흥미로워하는 지점이 비슷해서 엑셀 파일로 정리한 분석 전(前) 데이터를 다시 한 번 열어봤다. 분석 결과 현직 중 진보 성향 톱3인 김선수 박정화 김상환 대법관의 동조 현상은 압도적이었다. 세 대법관은 전합 판결의 80%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이를 두 명씩 나눠봤더니 판결 일치 비율이 각각 김선수-박정화는 90.0%, 박정화-김상환은 87.5%, 김선수-김상환은 87.2%였다. 평균적으로 10번 중 9번을 같은 의견을 낸 것이다. 반면 보수 성향 이동원 안철상 이기택 노태악 등 대법관 4명은 진보 성향 대법관의 절반 정도인 약 40%의 판결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사회 변화와 국민의 뜻이 사법부 구성에 반영되는 거의 유일한 지점이 헌법에 명시된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과 국회의 인준, 대통령의 임명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집권당과 국회 의석 분포에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구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젠더법연구회 출신인 진보 성향 5명의 대법관은 모두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했다. 박정화 대법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제청했지만 나머지 4명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다양화를 위해 제청권을 행사했다. 5명의 대법관 모두 법원 안팎의 후보 추천 절차를 거쳤고, 현 여당이 절반 미만이었던 국회 본회의에서도 최소 64%, 최대 84%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15년이라는 긴 안목을 갖고 ‘김명수 코트’ 전반기 3년을 분석하면 부족한 점이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의 대법원은 양분되어 있다. 현역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분석 대상인 전체 46명의 전합 구성원 중 진보 1∼3위 김영란 전수안 박시환 전 대법관보다 진보 성향이 약하다. 전체 보수 1∼3위인 안대희 김황식 민일영 등 자신만의 법 논리로 중무장한 보수 성향 전 대법관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현직 보수 성향 대법관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과거 대법원들과 비교하면 대법관들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인데도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다수의견을,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반대의견이라는 예측 가능한 판결을 하고 있다. 대법원의 양극화는 사회적 울림이 큰 전원일치 전합 판결의 실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통계적으로 ‘김명수 코트’의 전원일치 전합 판결 비율은 11.1%로 ‘양승태 코트’(33.6%), ‘이용훈 코트’(36.8%)의 3분의 1 이하인 역대 최저 수준이다. 비슷한 성향의 대법관들이 모여 전원일치 전합 판결을 양산한다면 소수의견이 등한시되는 획일적인 사법부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양극단의 대법관들이 개방성과 포용성을 갖고 난상 토론을 한 뒤 첨예한 사회적 이슈를 만장일치로 판단한다면 어떻게 될까. 판결 불복을 줄이고,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이번 분석으로만 본다면 김 대법원장은 임기 후반기에 5명의 대법관 후보를 더 제청할 때 김선수보다 더 진보적이고, 노태악보다 더 보수적인 대법관을 뽑아도 된다. 지금 절실한 건 양 진영의 논리를 조정해 ‘국민 모두를 위한 하나의 판결’을 이끌어 내는 리더십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성폭력 의혹’이 제기됐던 이진동 전 TV조선 사회부장이 검찰에서 최종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 전 부장을 ‘피감독자 간음죄’로 고소했던 A 씨는 검찰의 불기소가 부당하다며 재정 신청을 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달 14일 A 씨가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불복해 낸 재정신청에 대해 “이유 없다”며 기각했고, 기각 결정은 지난달 28일 확정됐다. 앞서 서울중앙지검도 이 전 부장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이에 불복한 A 씨가 항고했지만 서울고검도 이를 기각했다. 정원수기자 needjung@donga.com}
“우리 ‘올드보이들’은 요즘 검찰을 후배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전직 검찰총장에게 서울동부지검이 수사 중인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서모 씨(27)의 군 복무 당시 특혜 의혹 사건에 대해 묻자 예상 밖 답변이 돌아왔다. “주역에 ‘사출이율(師出以律·출정하는 군대에 기율이 없으면 이겨도 분란이 온다)’이라는 말이 있다”면서 “누가 뭐라고 해도 국가 기강을 지탱한 건 검찰의 힘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관이 인사권을 갖고 있어도 검사가 사표를 낼 각오를 하고 수사를 해야 하는데, 그런 걸 기대할 수 있겠느냐”라고 후배 검사들을 질타했다. 특별수사 분야의 고위직을 지내고, 권력층 수사를 한 경험이 있는 또 다른 전직 검찰 고위 인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장관을 상대로 한 수사는 오버해서도, 모자라서도 안 된다. 경계선을 가야 한다. 검사장과 차장검사가 직접 챙겨야 하는데 이해가 안 된다.” 그동안 서울동부지검의 행보를 보면 선배 검사의 혹평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추 장관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관련 의혹이 해소되지 않자 나흘 뒤인 올 1월 3일 야당은 검찰에 추 장관 등을 고발했다. 일주일 뒤 서울동부지검장이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영전했다. 국방부로부터 휴가 연장과 관련한 자료를 처음 제출받은 것은 2월 25일이었다. 다시 두 달 뒤인 4월 28일 서울동부지검장이 법무부 차관으로 승진하면서 검사장이 한 번 더 바뀐다. 약 한 달 뒤인 5월 25일에야 첫 참고인 조사가 시작되고, 서 씨의 군 복무 당시 군 관계자 5명을 6월 26일까지 한 차례씩만 조사했다. 서 씨는 그때까지 조사하지 않았다. 전현직 검사들이 모두 “이번 고발 사건은 아무리 길어도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평가하는데, 수사가 서 씨 출석 앞에서 갑자기 멈춘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 등의 변명이 수사팀에서 나오지만 궁색해 보인다. 서 씨의 진료기록 등에 대한 첫 압수수색은 현 검사장이 부임하기 닷새 전인 8월 초순에야 실시됐다. 수사 속도보다 수사 과정은 더 석연찮다. “추 장관의 보좌관이 전화를 걸어 휴가 연장을 문의했다”는 군 관계자 2명의 핵심 진술이 조서에서 빠진 것이다. “어떤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고,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고 답변하면 그대로 적으면 되는 기본적인 책무를 어긴 것이다. 조서 누락은 검찰 수사에 대한 불신의 상징과도 같은데, 장관을 상대로 한 수사에서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은 수사 의지를 근본부터 의심하게 만들었다. 차일피일 수사 종결을 미루다가 늑장·부실 수사 의혹이 제기되자 조서 누락에 책임이 있는 검사를 다시 수사팀으로 불러들인 건 가장 황당한 일이다. “과거에는 조서 누락 경위가 허위공문서 작성인지를 수사하는 것으로부터 재수사가 시작됐다”는 선배 검사의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 서울동부지검이 뒤늦게 검사 수를 늘리고, 수사 속도를 내고 있지만 어떤 결과를 내놓더라도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검찰 안팎에서 특별수사팀과 같은 독립된 수사팀 구성에 대한 요구가 있지만 승인권자인 추 장관은 이를 자청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검찰개혁이 국민의 뜻이고, 저의 운명적 책무라고 생각한다. 기필코 검찰개혁을 완성하겠다”는 엉뚱한 얘기만 하고 있다. 선배 검사 중 한 명은 “검찰을 삼류(三流)로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라면 검찰개혁이 맞겠다”고 힐난했다. 흠결은 있었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아들과 대통령 등 살아있는 권력 수사에 두려움이 없었던 검찰이었다. 선배들의 고언을 현직 검사가 새겨들어야 한다. 국민적 의혹을 외면한 검찰에 미래는 없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100명의 시위를 허가해도 취소된 다른 시위와 합쳐질 것이라는 상식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기계적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내세운 무능은… 왜 그들의 잘못은 어느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가.” 광복절 당일 동화면세점 앞에서의 집회 2건을 허가한 서울행정법원 A 부장판사에 대한 해임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의 일부다. A 부장판사는 집회 전날 결정문을 통해 “8월 1, 7일 서울에서 2000명과 1만 명 규모의 집회가 각각 개최됐고, 각 집회로 인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확산되었다는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등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제일교회 교인 등을 포함한 광화문 집회발 감염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청원에는 34만 명 이상이 동의했다. A 부장판사뿐만 아니라 올 4월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담임목사의 조건부 보석을 허가한 서울중앙지법 B 부장판사의 프로필 등이 인터넷에 공개됐다. 두 부장판사는 요즘 동료 법관들의 위로 전화를 자주 받는다고 한다. 2017년 8월 청와대 국민청원이 생긴 이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이나 정치인, 기업인 등에 대해 판결한 법관 10명 이상이 해임 대상으로 거론됐다. 2018년 2월 청와대는 “사법권은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권력이다. 청와대가 해결사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답변했지만 해임 요구 청원은 그 뒤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여권에서도 법관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결과적으로 적절치 않은 결정이었고,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라고 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사법당국이 책상에 앉아서만 그럴 게 아니라 국민과 협조할 땐 해야 하지 않느냐.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한 여당 의원은 감염병예방법상 집회 제한이 내려진 지역의 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해당 판사의 이름을 붙여 발의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첫 제동을 건 것은 변호사 단체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달 31일 성명을 통해 “법원의 집회 허가 결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법관 개인에 대한 공격과 비난이 지속된다면 법관으로서는 소신을 지키기 어렵다”면서 “여론에 영합한 판단을 내리게 될 위험도 있다”고 밝혔다. 입장문을 공개해야 한다는 일부 회원들과 지방변호사단체의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법관들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침묵을 아쉬워하고 있다. 한 법관은 “법관의 독립 침해를 보호하는 것이 곧 사법부 독립 아니냐”고 했다. 법관이 린치를 당하고 있는데 방패막이 역할을 해야 할 대법원장이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판사 개인이 곧바로 여론에 노출되면 법관이 재판을 할 때 여론을 의식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사법부의 위기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대법원장으로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온몸으로 막아 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권의 법관 개인에 대한 공격에 김 대법원장은 아예 침묵하거나 한 박자 늦게 입장을 내놨다. 지난해 2월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실형을 선고한 1심 재판장에 대한 여권의 공격이 거세졌을 때 김 대법원장은 “개개 법관의 공격으로 나아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판결 내용이나 결과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은 허용돼야 한다”는 취지로도 말해 법관들로부터 너무 원론적인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5일 임기 절반인 3년을 넘기게 되는 김 대법원장이 사법권 독립에 대한 단호한 메시지를 내놓길 기대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다소 억지스러운 검찰 수사 결과 발표를 납득하기 어렵다.” 손혜원 전 의원은 지난해 6월 부패방지권익위법 및 부동산실명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자 강하게 반발했다. 두 달 뒤 1심 첫 공판에 출석한 손 전 의원은 “(부동산 매입에 활용된 문서들이) 보안자료가 아님을 재판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히겠다”고 했다. 그의 언급대로 재판의 핵심 쟁점은 손 전 의원이 국회의원 재임 시절인 2017년 5월과 9월 각각 전남 목포시에서 받은 도시재생사업 관련 자료 2건이 보안자료에 해당하느냐였다. 12차례의 공판기록과 판결문 등을 보면 1심 재판부가 12일 손 전 의원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대통령선거 사흘 뒤인 2017년 5월 12일. 손 전 의원은 목포시장을 시장실에서 만나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도시재생뉴딜사업에 목포시가 선정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손 전 의원은 같은 해 4월 9일부터 대선 전날인 5월 8일까지 약 한 달 동안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 홍보부본부장 자격으로 ‘내 삶을 바꾸는 정권교체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그 첫 번째가 도시재생사업이었다. 손 전 의원은 같은 해 5월 18일 목포시장을 커피숍에서 만나 간담회를 가진다. 이때 ‘목포시 도시재생 전략계획’이라는 문서를 처음 받는다. 사업구역이 명시된 자료였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목포시의 도시재생과 담당자로부터 ‘도시재생뉴딜사업’이라는 제목의 PPT 파일을 이메일로 받는다. 국토부에 제출할 예정이던 이 자료엔 구역계와 단위사업 내용 등이 들어 있었다. 손 전 의원이 보안자료 2건을 입수한 시점에 일반 국민의 정보 접근은 철저하게 차단됐다. 서울 거주 국민이 같은 해 6월 도시재생 관련 자료를 정보공개 청구하자 목포시는 “행정계획이 수립되고 있다”며 비공개했다. 2017년 9월∼2018년 2월 5차례의 도시재생사업 관련 자료 공개 요구에도 “투기와 매점매석 가능성이 있다”며 거부했다. 2017년 9월 목포시의 주민설명회에서는 관련 자료가 아주 예민하다면서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것을 금지했다. 2017년 11월에는 목포시가 외부 컨설팅 위원들에게 ‘일체의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으며 철저히 비밀에 부치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1심 재판부는 “2017년 12월 14일 국토부가 목포시를 포함한 도시재생사업 대상지 68곳을 선정해 발표하고, 거기에 사업의 내용과 구역계가 포함돼 있어 비밀성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했다. 손 전 의원은 2017년 6월부터 2019년 1월까지 보안자료 구역 안에 있는 토지 23필지 등을 재단과 지인 명의로 매입했다. 1심 재판부는 손 전 의원이 보안자료의 비밀성이 유지될 때 매입한 6필지 등을 의정 활동 중 입수한 비밀정보를 활용한 투기로 분류해 몰수 명령을 내렸다. 1998년부터 시행된 정보공개법 5조는 ‘모든 국민은 정보의 공개를 청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모든 국민에게 줄 수 없는 비공개 대상 8가지 중 하나가 ‘공개될 경우 부동산 투기, 매점매석 등으로 특정인에게 이익 또는 불이익을 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다. 국민이 받을 수 없는 자료라면, 국민의 대표도 예외 없이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1심 재판부는 “공직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한 사건”이라며 “수사가 개시된 이래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의 범행을 극구 부인하는 등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는다”며 손 전 의원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아직 불복 절차가 남아있지만 이율배반적인 행위에 대해 국민에게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특권적 국민 같은 모습에 국민들은 더 화가 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69)은 지난달 12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발인 전날이었다. 1991년 한국 최초의 성폭력 전문 상담기관인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만든 최 위원장은 2년 뒤인 1993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의 공동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미국에서 상원의원 비서의 성희롱이 이슈가 됐다”며 의욕을 보인 건 당시 변호인단 중 한 명이었던 박 전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최 위원장은 “탁월하면서도 헌신적”이라며 박 전 시장을 극찬했다. 최 위원장은 국가인권위원장을 맡기 전 박 전 시장의 서울시와 자주 교류했다. 2012년 10월엔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이사를, 2016년 2월엔 서울시 인권위원장을 지냈다. 최 위원장이 빈소를 다녀가고 이틀 뒤인 14일. 국가인권위 홈페이지에는 박 전 시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고소한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부르는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서울시와 여권 등에서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불러 ‘2차 가해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진 시점이었고, 특히 인권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인권위의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 다음 날 ‘피해 호소인을 피해자로 고쳐 달라’는 진정이 접수된 뒤에야 피해자로 용어를 바꿨다. 다시 보름 뒤인 지난달 30일 최 위원장과 상임위원 3명이 참석한 국가인권위 상임위원회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보도자료의 제목은 ‘박 전 시장의 성희롱 등에 대한 직권조사 실시’였다. 직권조사팀의 조사 대상도 △서울시장의 성희롱 등 행위 △서울시의 성희롱 등 피해에 대한 묵인 방조와 그것이 가능하였던 구조 △성희롱 등 사안과 관련한 제도 전반과 개선 방안 등이었다. 신체적인 접촉을 의미하는 성추행이란 말이 사라진 것이다. 국가인권위법상 성희롱에는 위력에 의한 성추행 등이 포함된다는 것이 인권위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63개 조항의 국가인권위법 전체를 읽어봐도 성희롱에 성추행이 포함된다는 구절이 없었다. 일련의 과정은 국가인권위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최 위원장뿐만 아니라 A 상임위원도 여성단체 활동가 출신이다. A 위원은 서울시의 인권위원을 지냈고, 실종 직전 박 전 시장과 통화한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 박 전 시장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처음 보고한 서울시 임순영 젠더특보 등과도 가깝다. 피해자들이 제출한 직권조사 요청서에 ‘고소 사실이 박 전 시장에게 유출된 경위’도 포함돼 있는데 남 의원과 임 특보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직권조사 결과를 A 위원 소관인 차별시정위원회가 검토할 경우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제척 얘기가 전혀 없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은 법원의 영장 기각으로 경찰 수사가 막혀 있고, 서울시의 자체 진상규명조사단은 출범조차 못 했다. 피해자 측이 고심 끝에 국가인권위를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진정을 낸 것이다. 1998년부터 국가인권위법 제정과 설립 과정에 참여하고, 국가인권위 초대 사무총장과 2기 상임위원을 지낸 최 위원장의 3년 임기는 국가인권위가 출범 20년을 맞이하는 내년 9월에 끝난다. 최 위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 때 친여권 성향이라는 공격에 “저는 성폭력 문제도 처음으로 제기하면서 굉장히 많은 사회적 비난 그리고 의심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해 소신껏 하겠다”고 답했다. 이 발언으로 피해자보다 권력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았던 인권위를 정상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이번에야말로 국가인권위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길 기대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근거가 약한 점이 있어 근거를 새롭게 만드는 등 개선할 필요가 있다.” 김창룡 경찰청장 후보자는 20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소 사실을 청와대에 당일 보고한 근거를 묻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서면으로 이렇게 답했다. 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도 “경찰청에 외부기관 보고를 명시적으로 규정한 규칙은 없다. 향후 외부 보고 관련 사항은 규칙 등을 명확하게 정비하겠다”고 했다. 피해자 A 씨가 8일 오후 4시 30분경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하고, 경찰 조사를 받던 당일 오후 7시경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관련 내용이 직보(直報)됐다. 박 전 시장은 같은 날 측근들과 대책회의를 했고, 그 다음 날엔 비서실장을 불러 “여성단체가 문제를 제기해 심각하다”고 언급한 뒤 실종됐다. 이 때문에 성추행 의혹의 본질보다 오히려 성추행 사건의 수사 기밀 유출 과정이 더 주목받고 있다. 김 후보자가 언급한 ‘약한 근거’는 정부조직법과 경찰청 훈령인 범죄수사규칙 등 두 가지다. 우선 정부조직법 제11조 제1항은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법령에 따라 모든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감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국정운영 체계에 따라 하급 기관장이 상급 기관인 청와대에 주요 사건을 보고했다는 것이다. 경찰의 업무는 경비와 교통, 정보, 수사 등 다양하다. 관계 기관과의 공동 대처가 필요한 사항을 보고한 것이라면 몰라도 이 조항이 밀행성이 필수인 수사 기밀까지 청와대에 실시간으로 보고하라는 규정이라고 해석하기는 무리다. 그 다음 경찰청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465쪽 분량의 범죄수사규칙을 아무리 뜯어봐도 청와대 보고 조항은 없다. 이 규칙은 주요 수사 정보를 상부에 보고해 신속 정확한 지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지휘 보고의 최종 종착지는 경찰청이다. 그런 측면에서 범죄수사규칙은 대검이 검찰 외부인 법무부에도 수사 내용을 보고하도록 하고 있는 법무부령인 검찰보고사무규칙과도 다르다. 검찰보고사무규칙은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당시인 1981년 12월에 생겼다. 법무부가 검찰로부터 보고받은 수사 정보가 그대로 청와대로 전달돼 정권에 의한 검찰의 통제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초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검찰을 지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이후 청와대는 검찰 수사 정보를 보고받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경찰은 어떤가. 여전히 매일 수많은 팩스가 청와대 국정상황실로 전송되고, 여기엔 경찰에서 수집한 수사 기밀이 들어있다. 이 수사 기밀이 사정기관의 업무를 총괄하는 민정수석실 산하 반부패비서관실이 아닌 현직 경찰이 파견 중인 국정상황실로 먼저 보고되는 것도 정상적이지 않다. 경찰이 수사 기밀을 관행적으로 청와대에 보고해 구설에 오르거나 결국 지휘부가 형사처벌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24일 취임할 예정인 김 후보자는 평소에 법과 규정을 유독 강조한다고 한다. 본인의 소신대로 청와대 보고 관련 규정부터 재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집회 시위나 민생 범죄 발생 등 치안 정보는 청와대와 공유하되 수사 기밀은 인사 검증 등 청와대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만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 경쟁 수사기관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검찰 등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국민 요구를 따라가고 있는데, 경찰만 뒤처져서도 안 된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경찰이 살 길은 청와대에 의존하지 말고, 국민의 편에서 수사해 국민의 신뢰를 더 얻는 것밖에 없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24일 대법원에서 열릴 예정인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에는 9월 8일 6년 임기가 끝나는 권순일 대법관(61·사법연수원 14기)이 참석한다. 선임대법관 자격으로 법원행정처장과 함께 당연직 대법관추천위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1년 7월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선임대법관이 당연직 대법관추천위원을 맡게 되면서 10년째 퇴임을 앞둔 대법관이 자신의 후임을 뽑는 독특한 전통이 생겼다. 이번에는 국민 공모 등을 통해 45세 이상의 현직 법관 23명과 변호사 5명, 교수 2명 등 후보군이 30명으로 좁혀졌다. 대법관추천위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한 인사는 “자신의 후임에 대해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인사는 “대법원의 사정을 잘 아는 비중 있는 전임자 얘기여서 추천위원들이 귀담아듣게 된다”고 했다. 회의석상에서 선임대법관은 자격 요건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법조인 이름을 거명하면서 적격과 부적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고 한다. 회의 막판에는 최종 후보군을 3∼5배수로 압축하는 과정에 투표권을 직접 행사한다. 이 때문인지 전임과 후임 사이에는 정통 법관, 고학생(苦學生) 신화, 여성 등으로 유사점이 적지 않은 경우가 많다. 권 대법관은 ‘민법의 대가’로 불린 양창수 전 대법관의 후임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했지만 보수와 진보 성향을 넘나들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 여부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는 다수의견이 아닌 소수의견에 섰다. 하지만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이라는 판결 기준을 새로 제시했고, 태어난 아이의 ‘출생 등록 권리’를 기본권으로 인정한 첫 판결도 했다. 2017년 9월 취임한 김명수 대법원장은 6년 임기 동안 13명의 대법관을 제청하게 된다. 김 대법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통령의 뜻에 어긋나더라도 제청권을 독립적으로 행사하겠다”고 했고, 그 이후 “청와대로부터의 제청권 독립”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 결과는 어떨까. 김 대법원장은 2017년 11월(안철상 민유숙), 2018년 7월(김선수 이동원 노정희), 2018년 10월(김상환), 2020년 1월(노태악) 등 모두 4차례 대법관 임명 제청권을 행사했다. 첫 번째는 비서울대와 여성 법관, 두 번째는 재야 변호사와 비서울대, 여성 법관, 네 번째는 비서울대 등이었다. 이른바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 출신인 김상환 대법관의 세 번째 제청만 예외였다. 이번에도 원칙과 예외 중 선택해야 한다. 우선 권 대법관의 후임인 만큼 정통 법관이 차지해야 한다는 법원 내부 여론이 있고, 재판 능력이 검증된 후보들이 몇몇 눈에 띈다. 김 대법원장이 사석에서 “내가 아는 판사 중 최고”라고 극찬했다는 우리법연구회 출신 법관, “김 대법원장에게만 사법부 개혁을 맡기지 말자”며 사법개혁의 새 주체를 자처한 진보 성향 법학자도 있다. 전체 법관의 30% 이상이 여성인 시대에 대법관 중의 여성 비율(23%)은 30% 미만이어서 여성 대법관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 대법원장은 제청 직후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기대를 각별히 염두에 두고 선정했다”는 입장을 자주 밝혔다. 하지만 상징적인 다양성이 아니라 실질적인 공정함과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판결을 하는 대법관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법원 안팎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올 9월 김 대법원장은 임기 반환점을 돈다. 공언했던 대로 이번에야말로 ‘좋은 (대법원) 재판’을 견인할 후보자를 선택해 대법원이 긍정적으로 바뀌길 기대한다.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검찰총장의 임기제를 채택하는 것만이 검찰의 준사법적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여러 각도로 검토해서 신중히 결정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1987년 5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 야당 의원이 검찰총장 임기제 도입에 대한 의견을 묻자 당시 김성기 법무부 장관은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야당 의원은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안 보고 소신껏 일한다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할 생각은 없느냐”고 했지만 김 장관은 “(임기제가 없는) 현행 제도는 (1949년) 검찰청법이 제정된 이래 40년 (가까이) 시행돼 온 제도”라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약 1년 6개월 뒤인 1988년 11월 여소야대 구도이던 제13대 국회에서 검찰총장의 임기를 2년으로 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이 제출됐다. 타자기체와 손 글씨가 빼곡한 20쪽 분량의 당시 법률 제출안을 보면 “검찰에 대해서 권력으로부터 독립이 강력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제안 이유가 기재되어 있다. “총장 임기제를 도입해 검찰이 정치권의 풍향에 좌우되지 않고 검찰권을 법대로 행사하도록 하라”는 재야 변호사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고 한다. 정부도 태도를 바꿔 검찰총장 임기를 2년으로 하되 중임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법률안을 뒤늦게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중임을 금지하는 의원 입법안을 수정안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본회의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한 수정안은 1988년 12월 말부터 30년 넘게 시행되고 있다. 이 법안 발의에 누가 참여했는지 궁금해서 명단을 확인해 보니 여야 국회의원 299명 중 60명이 정파를 떠나 발의자로 참여했다. 공동 발의자 명단엔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던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도 있었다.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검찰총장 임기제를 도입하자고 국회에서 제안하고, 이 법안의 통과를 주도한 정치인이 21대 국회 거대 양대 정당의 상징과도 같은 두 전직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만약 법안 발의자 이름으로 법안명을 정하는 미국 의회 스타일로 법률안을 다시 명명한다면 검찰총장 임기제 법안은 ‘김영삼법’이자 ‘노무현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른바 4대 권력기관으로 불리는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중 경찰은 검찰에 이어 두 번째로 경찰청장 임기제를 시행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12월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경찰청장의 2년 임기를 보장하는 내용의 경찰청법이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다음 달 23일 제도 시행 이후 역대 네 번째로 임기를 채울 것으로 보인다. 정권교체기에도 임기를 지킨 이철성 전 경찰청장에 이어 문재인 정부에서만 두 번 연속 경찰청장 임기가 보장되는 이례적인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민 청장을 제외하면 과거 10명의 경찰청장 중 3명만 임기제를 지켰다. 그런데 권력기관장 임기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검찰 쪽은 경찰과 사정이 정반대다. 일부 여권 인사가 지난해 7월 취임해 아직 임기가 만 1년이 안 된 윤석열 검찰총장의 조기 사퇴를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 대표까지 나서 “앞으로는 윤 총장의 거취를 당에서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진화에 나섰을 정도다. 임기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권력기관장의 임기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검찰의 잘못에 대해서는 정치권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인 1988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요구로 검찰총장 임기제가 도입된 취지와 배경 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시대를 앞서간 그 입법정신을 유지하도록 정치권이 경쟁해야지, 앞장서 훼손하면 되겠는가.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의원 아닌 사람 자꾸 의원이라고 하지 마세요.” 20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된 지 사흘 만인 이달 1일 서울남부지법의 형사법정. 선거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 통과를 위한 패스트트랙 지정을 저지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야당 의원의 변호인이 ‘○○○ 의원’을 반복하자 재판장이 힐난하듯 이렇게 말했다. 4·15총선으로 기소 당시 현직 의원이던 27명 중 18명은 재판 도중 전직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재판부와 변호인의 신경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 2월 17일부터 이달 1일까지 세 차례 공판준비기일이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다. 첫 기일에 변호인이 “총선 전까지 재판을 준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자 재판장이 “의원이라도 특권을 가질 순 없다”고 했다. 두 번째 기일에는 변호인이 “증거 영상을 분석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지만 재판장은 “공판준비기일이 피고인들의 재판 지연의 도구가 되어선 굉장히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한국 정치의 1번지 여의도를 관할하는 서울남부지법에선 요즘 판결의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말 그대로 ‘세기의 재판’이 열리고 있다. 재판 당일엔 검사 10여 명과 그 2∼3배의 변호사가 마스크를 쓴 채 법정을 가득 채운다. 규모는 작지만 약 10년 전에도 비슷한 재판이 있었다. 2009년 1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상정에 반대하는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을 국회사무처가 강제로 해산하자 민노당 강기갑 전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실을 찾아가 공중 부양을 하는 등 행패를 부린 사건이 있었다. 이듬해 1월 서울남부지법의 1심 단독 재판부는 “사무총장이 사무실에서 신문을 보는 행위는 공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경한 논리를 내세워 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강 전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과 대법원이 300만 원 벌금형의 유죄로 뒤집었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 약 한 달 전인 2011년 11월 22일에는 같은 당의 김선동 전 의원이 국회 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강 전 의원의 10년 전 재판과 올해 패스트트랙 관련 재판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단독재판부가 아닌 합의재판부가 재판을 맡았다. 형량만 놓고 보면 단독재판부에 맡겨도 되지만 국회법상 회의방해죄에 대한 판례가 없다는 이유 등으로 합의재판부에 사건이 배당됐다. 판사 1명이 재판을 하는 것보다는 3명이 모여서 숙의하다 보면 더 좋은 재판을 할 수 있다. 여당 의원들이 패스트트랙 충돌 당시 폭력 혐의로 기소된 사건도 다른 합의재판부가 재판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국회법이 완전히 달라졌다. 2012년 5월부터 시행된 국회법은 의장석을 점거하거나 회의를 방해하는 행위를 윤리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징계하도록 했다. 하지만 폭력국회 방지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에 2013년 8월부터 회의방해 조항이 국회법에 추가됐다. 벌금 500만 원 이상이 선고되면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등 형사 처벌을 강력하게 하도록 한 것이다. ‘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입법 논의 때 있었지만 ‘국회가 다시는 폭력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조치로 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돼 현재까지 시행 중이다. 지난해 4월 패스트트랙 충돌 사태는 회의방해죄 기소 첫 사례를 불러왔다. 올 1월 검찰 기소 이후 6개월가량 공판준비기일만 열릴 뿐 첫 공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지 국회 내에선 최후의 저항수단이 폭력이 아니라는 점이 법원 판결로 명확해졌으면 한다. 후진적인 정치 문화를 제대로 바꿀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법원의 재판은 투표만큼 중요하고, 강력하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제보자가 ‘내일 한강에 집채만 한 고래가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2013년 9월 4일 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징금 수사를 취재하던 후배 기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제보 내용을 알려왔다. 전 전 대통령의 차남 재용 씨가 그 다음 날 1672억 원의 잔여 추징금 완납 세부계획서를 들고 검찰에 출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7월부터 시행된 이른바 ‘전두환 특별법’(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으로 당시 검찰은 대규모 압수수색을 하며 전 전 대통령 측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어 못 낸다’며 1997년 확정 판결 이후 16년 동안 추징금 완납을 거부하던 전 전 대통령 측이 먼저 추징금 완납 의사를 밝히리라고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바다가 아닌 한강에 고래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반신반의했지만 같은 달 10일 장남 재국 씨가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공개하면서 이 제보 내용은 사실로 밝혀졌다. 재국 씨는 “추징금 환수 문제와 관련해 그간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해 가족을 대표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했다. 이어 “부친은 저희가 할 수 있는 한 당국 조치에 최대한 협조하라고 말씀하셨고, 저희도 그 뜻에 부응하고자 했으나 해결이 늦어진 데 대해 대단히 송구하게 생각한다”며 머리를 숙였다. 재국 씨가 당시 검찰에 제출한 추징금 자진 납부 목록에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사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입 자금이 전 전 대통령의 불법 자금인지를 직접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마지막에 목록에 넣었다고 한다. 당시 검찰 수사팀 관계자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아직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입장문 발표 이후에도 666억5000만 원의 추징금만 더 걷혔을 뿐이다. 지금까지 2205억 원의 추징금 가운데 54.4%인 1199억5000만 원만 추징됐고, 여전히 절반 가까운 1005억5000만 원이 미납 상태다. 시간을 끈다고 추징금 납부 의무에서 벗어날까. ‘전두환 특별법’으로 추징금의 소멸시효는 3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나 있다. 추징금이 1원이라도 집행되면 그 시점으로부터 자동으로 시효가 10년 더 길어지는 것이다. 검찰은 재국 씨가 주주인 출판사에서 2022년 10월 30억 원을 추징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최소 2032년 10월까지 추징금 납부 의무가 유효하다는 의미다. 올해 89세인 전 전 대통령이 101세까지 생존하더라도 추징금을 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국회에서는 전 전 대통령의 사후에도 추징금을 계속 환수하기 위한 ‘제2의 전두환 특별법’ 입법 움직임까지 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내용의 회고록을 2017년 4월 펴냈다. 이듬해부터 추징금 완납 약속을 뒤집고 부인과 며느리, 전 비서 등의 명의로 된 연희동 사저에 대한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는 불복 소송을 하고 있다. 궁지에 몰렸을 때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예전처럼 고개를 든다면 누가 그 진정성을 믿어주겠나. 지금이라도 23년 동안 해묵은 과제인 추징금 완납부터 해결하고, 5·18 명예훼손 관련 법정에서 광주 시민들에게도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접을 수 있었던 기회를 여러 번 걷어찼던 전 전 대통령에게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 자세를 더 낮추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다. 옛말대로 ‘높은 곳에서는 추위를 이길 수 없다(高處不勝寒)’.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부정부패를 엄정하게 수사하고, 청렴성과 공정성이 투철하며, 풍부한 법률 지식과 행정 능력을 갖춘….’ 대한변호사협회가 올 3월 16일 전국 2만3000여 회원들에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초대 처장 후보를 추천해 달라며 보낸 메일 내용 중 일부다. 이 문구만 보면 마치 전지전능한 법률 전문가를 찾는 것 같다. 게다가 임기 3년을 고려한다면 만 62세 미만, 15년 이상 경력의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조건이 까다롭다. 검사 출신 변호사는 퇴직한 지 3년이 지나야 한다. 추천 단계에서부터 “할 만한 사람이 고사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지난달 10일까지 1차 추천을 마감한 결과 변협에 접수된 명단은 두 자릿수에 불과했다. 변협은 7일 첫 회의를 했지만 아직 후보군의 면면은 베일에 싸여 있다. 당사자의 동의와 추가 추천, 검증을 거쳐야만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공수처장은 대통령과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6부 요인을 모두 수사할 수 있는 자리다. 행정부 소속인 검찰총장과 달리 공수처장은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또 대통령과 대통령비서실은 공수처장에게 수사에 관한 보고나 자료 제출 요구, 지시나 의견 제시를 일절 못 하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공수처장 인사가 공수처의 성패를 좌우할 준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공수처가 독립성과 중립성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공수처장 인사 과정에서 다음 두 가지 원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무엇보다 야당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공수처장 추천위원은 7명인데, 법무부 장관과 법원행정처장, 변협 회장 외에 여야 교섭단체가 각각 2명을 추천하도록 되어 있다. 추천위원 7명 중 6명이 동의해 후보 2명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면, 대통령이 그중 한 명을 임명하는 구조다. 야당 추천위원 2명이 반대하거나 야당 몫 1명과 전문가그룹 1명이 다수에 맞서면 인사 절차가 멈추게 된다. 처장의 제청으로 차장이 임명되기 때문에 처장이 없으면 공수처의 사무를 지휘할 1, 2인자가 없는 불임 조직으로 남게 된다. 법관 출신의 변호사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명박 정부 당시 김황식 전 대법관을 국무총리로 발탁할 때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반대 성향의 양승태, 김명수 대법원장 인사청문 당시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장을 맡아 인사 검증을 원만하게 해낸 경험도 있다. 야당의 비토권 인정이 아니라 추천권까지 주더라도 일방적인 인사를 고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변호사단체의 광범위한 추천과 자체 검증을 존중해야 한다. “누가 되든 변호사단체 회원 중의 한 명”이라고 하는데, 그 단체의 의견을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행히 변협 추천 과정에서도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은 후보가 일부 추천된다고 한다. 미국도 연방대법관 등 중립성이 요구되는 법률가를 추천할 때는 가장 먼저 변호사단체의 의견을 듣고, 그렇게 추천된 인사는 의회의 인사 동의로 이어지는 전통이 있다. 국회 규칙으로 공수처 추천위 세부 절차를 정할 예정인데, 변협의 후보 추천 절차를 존중해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1801년 존 마셜을 연방대법원장에 지명했다. 이후 마셜은 연방대법원의 위상을 정립한 인물로 추앙받았다. 애덤스는 숨지기 전 그 인사를 회고하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행동(the proudest act of my life)’이었다”고 했다고 한다. 검찰개혁과 공수처 설치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생 목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문 대통령이 훗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초대 공수처장 인사를 해야 공수처가 성공할 수 있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국내에서 처음 발생한 올 1월 20일 이후 11일로 113일째다. 수도 서울의 방역과 피해 대책 등을 지휘하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을 8일 서울시청의 6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이날보다 2일 전 이태원 클럽 방문자 가운데 처음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코로나19 방역 전선에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2011년 10월부터 8년 7개월 동안 서울시정을 맡고 있는 박 시장은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는 이 정도 되면 끝나는 분위기였는데, 코로나19는 언제 어디에서 집단 감염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이게 코로나의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감염증 확산이 한순간이듯 차단 또한 신속해야 한다. 서울이 뚫리면 대한민국이 뚫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역 감염 최소화와 함께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 시장은 “지금이야말로 전(全) 국민 고용보험 도입이 필요한 때”라며 “21대 국회의 1호 법안이 되도록 (가까운) 국회의원들과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메르스 때와 비교하면 이번 대처는 어땠나. “메르스의 교훈이 우리에게 하나의 교과서가 됐다. 선제적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과 투명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당시 제가 ‘과잉대응이 늑장대응보다 낫다’, ‘투명성은 감염병의 특효약이다’ 같은 말을 했다. 이러한 원칙이 이번에는 현장에서 제대로 관철됐다고 본다.” ―그 이후 개정된 관련법의 도움을 받았나. “일부 있었지만 더 중요한 건 큰 철학과 원칙이 바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가 좀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첫 환자부터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긴장해서 초기부터 대응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크게 세 가지라고 보는데 첫째는 선별진료소를 만들어 누구나 검사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둘째는 확진자가 발생하면 주변 접촉자를 확인해 자가 격리한 것이다. 마지막은 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시민들이 조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에선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 “밑바탕에는 국민건강보험이 있다. 민간보험에 의존하는 미국은 검사 한 번에 460여만 원을 내야 하기 때문에 검사를 함부로 못 한다는데 우리는 국민건강보험 덕분에 무료다. ‘K방역’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에는 선진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코로나19 피해 최소화를 위한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대책도 잇따랐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정부보다 서울시가 먼저 준비했다. 소상공인의 고용 유지를 위해 70만 원씩 두 달간 지급하는 자영업자 생존자금은 전국적으로 서울 외엔 하는 곳이 없다. 특수고용직이나 배달대행 등 ‘플랫폼 노동자’ 지원도 서울시가 먼저 내놨다.” ―자영업자나 소상공인 대책은 대출, 금리 인하 등 간접적 지원책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서울시의 자영업자 생존 자금은 기존 정책과 달라 보였다. “항공사나 여행사처럼 피해가 큰 대기업은 정부가 신용을 공급해줘야 한다. 건실한 회사들이 위기여서 부도나는 것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는 중앙정부가 일일이 도움을 주기 어렵다. 융자는 생명 연장에 불과하다. 그사이 고용 유지는 못 한다. 이들에게 고용 유지를 위해 70만 원씩 두 달 치를 지급하는 것은 지속적으로는 아니어도 생명 연장에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소외된 프리랜서나 특수고용노동자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정치권 등에서 나오고 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특별히 전 국민 고용보험을 도입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우리나라에 ‘나쁜 일자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 등은 고용보험도 안된다. 4대 보험이 보장되는 ‘좋은 일자리’와의 격차는 더욱 커진다. ‘당장 실현하기는 어렵다’는 반대 의견도 있지만 커다란 역사적 위기 속에서 기회와 변화의 에너지가 생긴다고 본다. 영국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유명한 최초의 전 생애를 포괄하는 복지 시스템이 나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복지 수준이 가장 열악한 수준인 우리나라도 이번에 복지국가를 완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핵심이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이다. 국민건강보험으로 K방역 모델을 만들었듯 사각지대에 있는 모든 계층을 끌어안는 ‘K고용’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재원 마련, 절차 등 난관이 많을 텐데….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우선 자영업자,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으로 대상을 확대하고 징수 기준을 임금에서 소득 중심으로 바꾸면 가능하다. 징수 주체도 근로복지공단에서 국세청으로 바꾸면 된다. 이 세 가지만 실행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회가 움직여야 한다. “저는 21대 국회가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을 1호 법안으로 추진했으면 한다. 이번에 들어간 저와 친한 의원들과 세미나도 하면서 밀어달라고 얘기해 보려 한다. 이번 총선의 민의는 ‘내 삶을 바꾸는 새로운 정치를 해 달라’는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광범위한 노동계층이 고용보험에서 배제된, 점점 더 차별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은 새로운 국회와 정부의 중차대한 임무라고 본다.” ―21대 국회에 ‘박원순계’로 분류되는 의원이 많다. “계라는 말은 구시대적 발상이고, 저와 서울시에서 비전을 가다듬었거나 그동안 삶의 궤적을 통해 함께한 의원이 많이 있다. ‘표준국가’를 향한 대전환의 길을 함께할 수 있는 분이 상당히 있는 것 같다.” ―지난달 27일 한 콘퍼런스에서 “민주화, 산업화를 넘어 표준국가의 시대로 가자”고 말했다. 표준국가론에 대해 설명해 달라. “몇 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의 사회는 어떠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했다. 표준국가는 우리가 표준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자는 의미다. 우리는 늘 영국, 미국 등 서양을 따라가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세상을 보자. 뉴욕에서는 코로나19로 하루에 수백 명이 사망하는데 서울의 치사율은 (사망자 2명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다. 중국은 도시를 봉쇄했고, 영국은 런던 지하철이 멈췄다. 하지만 우리는 개방적 체제와 민주주의 시스템, 시민들의 인식, 의료진의 실력이 아주 우수하다.” ―K방역 외에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가 표준이라고 말하기는 이르지 않나. “어떻게 마음을 먹고, 결심하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이 최근 ‘서양 우월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글을 썼다.(본보 4월 11일자 A30면 참조) 값싸고 깨끗한 지하철, 와이파이 수준, 영화 ‘기생충’이나 방탄소년단(BTS)까지…. 이게 하루아침에 생긴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이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방향을 인도하는 선진국이 돼야 한다.” ―올 10월이면 시장 취임 만 9년이 된다. 서울시는 바뀌었는가. “과거 서울은 개발 시대를 거치면서 주로 하드웨어에 투자해왔다. 이제는 우리 시대의 담론이 토목이나 거대 하드웨어보다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는 것에 있다고 본다. 빅데이터를 보면 소확행, 행복, 힐링, 치유 같은 단어들을 시민들이 많이 사용한다. 물론 제게도 개발주의 요구가 계속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 8년간 시민 삶의 질을 바꾸는 게 서울시정의 중심이었다. 복지 예산은 취임 전의 3배 이상 늘었고, 나무 3000만 그루를 심는 게 목표였는데 이미 2500만 그루를 심었다. 지속가능한 미래도시를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다. 시내를 걸어보면 안다. 다만 제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가 미세먼지다. 수천억 원씩 투자를 해도 아직까지 해결이 잘 안된다.”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어렵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지방 없이 서울이 있을 수 없고 농촌 없는 도시가 있을 수 없다. 균형 발전이 대한민국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가처분소득을 늘릴 필요가 있다. 그 소득으로 소비를 늘려야 내수시장이 돌아가고 중소기업, 지방경제 등이 살아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정부 못지않게 지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가의 귀환, 정치의 소환, 지방자치단체의 발견’이라는 세 가지를 다시 보게 됐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게 지자체는 주민들과 가까이 있고 현장에 있다. 무엇이 일어나는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문제가 무엇인지 간파하고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자치와 분권을 추진한다. 자치와 분권이 잘된 나라일수록 국가경쟁력이 높고 국민이 행복하다. 우리는 아직도 근본적으로 자치와 분권 실현이 잘 안되고 있다. 이것도 새 국회의 큰 과제 중 하나가 되리라고 본다.” 박 시장의 임기는 2022년 6월까지다. 다음 대선은 같은 해 3월에 치러진다. ‘만 10년인 내년 10월에도 시장 자리를 지킬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 위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서울시정을 이렇게 열을 토하면서 얘기했는데”라며 웃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경남 창녕 출생(64세)△ 경기고, 단국대 사학과 졸업△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검사, 변호사△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2011년 10월∼현재 서울시장인터뷰=정원수 사회부장정리=박창규 kyu@donga.com·홍석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