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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광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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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2~2024-11-21
칼럼100%
  • 美 반도체보조금 받는 기업… 중국내 증산 5% 제한 확정

    미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법(CHIPS Act)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범위를 5%로 제한하는 방안을 확정해 22일(현지 시간)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이 같은 ‘보조금 가드레일(안전조치)’ 조항을 완화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확장 기준을 두 배인 10%로 늘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 상무부는 자국의 반도체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10년간 중국 등 우려 국가에서 반도체 생산을 ‘실질적으로 확장(material expansion)’하는 중대 거래를 할 경우 보조금 전액을 반환하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이날 상무부가 발표한 ‘실질적 확장’은 첨단 반도체의 경우 5% 이상, 이전 세대의 범용 반도체는 10% 이상이다. 對중국 반도체 투자 10만달러 상한은 빠져 美, 中 반도체 규제장비 반입 규제 유예는 언급 안해산업부 “국내기업 中사업 문제없어” 미국 정부는 앞서 3월 가드레일 조항 초안을 발표한 뒤 한국 등 관련 국가와 기업들로부터 의견 수렴을 진행해 왔다. 우리 정부는 중국 내 생산 확장 기준 확대와 함께 범용 반도체의 기준도 완화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날 발표에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미 상무부는 로직 반도체는 28nm(나노미터), D램은 18nm, 낸드플래시는 128단 이하를 범용 반도체로 분류하고 있다. 상무부는 다만 초안에서 10만 달러의 한도를 넘는 중국 투자를 중대 거래로 분류해 규제 대상에 포함시켰으나 최종안에선 빠졌다. 블룸버그통신은 “10만 달러 투자 상한 폐지는 삼성전자와 인텔, 대만 반도체 기업들을 대표하는 정보기술산업협의회가 반대 목소리를 낸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날 발표에 중국 내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제 유예 관련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지난해 10월 중국에 첨단 반도체 장비를 반입할 수 없도록 규제안을 마련했지만 한국 기업에 대해 1년간 규제를 유예했다. 우리 정부는 이 규제의 유예 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미 정부에 요청한 상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미 상무부의 최종안을 분석해 협상 전략을 마련할 계획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 수준으로 중국 내 생산 능력 확장 기준이 정해져도 국내 기업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지속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며 “보조금 한도가 늘어난 부분 등 일부 달라진 내용이 있어 각 기업들이 보조금을 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

    •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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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반도체보조금 받는 기업, 중국내 증산 5% 제한 확정

    미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법(CHIPS Act)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범위를 5%로 제한하는 방안을 확정해 22일(현지 시간)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이 같은 ‘보조금 가드레일(안전조치)’ 조항을 완화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확장 기준을 두 배인 10%로 늘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미 상무부는 자국 반도체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10년 간 중국 등 우려 국가에서 반도체 생산을 ‘실질적으로 확장(material expansion)’하는 중대 거래를 할 경우 보조금 전액을 반환하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이날 상무부가 발표한 ‘실질적 확장’은 첨단 반도체의 경우 5% 이상, 이전 세대의 범용 반도체는 10% 이상이다.미국 정부는 앞서 3월 가드레일 조항 초안을 발표한 뒤 한국 등 관련 국가와 기업들로부터 의견수렴을 진행해왔다. 중국 내 생산 확장 기준 확대와 함께 범용 반도체의 기준도 완화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날 발표에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미 상무부가 로직 반도체는 28나노미터(nm), D램은 18나노, 낸드플래시는 128단 이하를 범용 반도체로 분류하고 있다.상무부는 다만 초안에서 10만 달러의 한도를 넘는 중국 투자를 중대 거래로 분류해 규제 대상에 포함시켰으나 최종안에선 빠졌다. 블룸버그 통신은 “10만 달러 투자 상한 폐지는 삼성전자와 인텔, 대만 반도체 기업들을 대표하는 정보기술산업협의회가 반대 목소리를 낸 결과”라고 분석했다.이날 발표에 중국 내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제 유예 관련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가동 중이다. 미 상무부는 지난해 10월 중국에 첨단 반도체 장비를 반입할 수 없도록 규제안을 마련했지만 한국 기업에 1년 간 규제를 유예했다. 우리 정부는 이 규제의 유예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미 정부에 요청한 상태다. 방한 중인 돈 그레이브스 미국 상무부 부장관은 21일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한미 첨단산업 기술협력 포럼’에서 유예 기간 연장 여부와 관련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내 합법적인 사업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다. 미국과 협력하는 국가들의 반도체 기업들을 불필요하게 옥죄고 싶지 않다”면서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미 상무부의 최종안을 분석해 협상 전략을 마련할 계획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 수준으로 중국 내 생산 능력 확장 기준이 정해져도 국내 기업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지속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며 “보조금 한도가 늘어난 부분 등 일부 달라진 내용이 있어 각 기업들이 보조금을 최대로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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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민주주의가 최고의 내진 설계

    “정부를 비판하면 저희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데 그러자니 여기서 벌어진 일이 없었던 일이 될까 봐 무서워요.” 대지진이 덮친 모로코 중부 아미즈미즈의 한 산간 마을 주민은 일본 아사히신문에 이런 말을 했다. 그의 마을에선 주민 400∼500명 중 최소 8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가 5명 중 1명꼴이다. 아직 수십 명이 잔해에 갇혀 있는 이곳에 지진 발생 3일이 지나도록 구조대는 오지 않고 있다. 구급차가 없어 오토바이로 중상자를 이송하고, 거리에서 노숙하는 주민들은 밤마다 전갈과 뱀의 공격을 걱정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어디 있느냐’는 목소리는 좀처럼 울려 퍼지지 않는다. 모로코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다. ‘어떤 공무원도 국왕보다 앞설 수 없다’는 원칙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620여 명이 숨졌던 2004년 지진 때도 모로코 총리는 왕이 먼저 현장에 갈 때까지 기다리느라 사고 한참 뒤에야 피해 지역을 방문했다. 이번 지진 때도 국제사회가 구조대 파견을 제안하고 나섰지만 모로코 정부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다. 그나마 구조대를 받기로 한 4개국인 스페인 영국 카타르 아랍에미리트는 모두 왕실이 있는 나라다. 국가적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국왕이지만 모로코 왕실의 태도는 ‘골든타임 사수’라는 기본 수칙과 거리가 멀다. 무함마드 6세 국왕은 지진 4일째가 되도록 대국민 연설을 하지 않았다. 지진 당시 프랑스 파리 호화 저택에 머물고 있었던 국왕은 지진 다음 날 내각 회의를 주재한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이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중동 전문가들은 “왕은 대중 앞에 서기 전 신중하게 이미지를 계산하고 모든 상황에 철저히 대비한다”고 한다. 왕실 통치가 참사 대응에 얼마나 취약한지 이번 지진으로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지만 모로코에서 왕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왕이나 정부를 비판하면 처벌할 수 있는 왕실모독죄가 공고히 유지되고 있어 국민들의 숨통을 쥐고 있다. 모로코가 2004년 큰 지진을 겪고도 재난 대비 시스템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배경에는 권력에 대한 심판과 검증을 할 수 없는 구조 탓도 클 것이다. 올 2월 5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도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 재난이 닥쳤을 때 국민의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70여 개 국가에서 구조대를 지원받았던 튀르키예와 달리 시리아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루트가 차단됐다. 자국민을 독가스 등으로 학살해 ‘시리아의 도살자’로 불리는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 이후 북서부 반군을 압박하기 위해 외부 구호단체가 오갈 수 있는 국경을 한 곳만 남기고 모두 폐쇄했다. 그런데 지진으로 이 국경 도로가 파괴되자 해외 구조대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히게 된 것이다. 시리아는 오랜 내전으로 자체 구조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고 의료진마저 대부분 해외로 떠난 상태였다. 독재 치하에 있는 폐쇄 국가의 치명적 약점은 재난 속에서 더욱 여실히 드러나고 국민들이 그 대가를 치른다. 민주주의는 일상에선 피부에 와닿지 않는 모호한 관념이지만 국민의 생명이 위태로운 참사가 벌어지면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로 그럴 때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는 치열하게 묻게 된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박근혜 정부 붕괴의 시작점이 됐고, 지난해 이태원 압사 참사가 윤석열 정부의 중대한 위기로 번질 뻔했던 것도 사고 현장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생생히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재난에 대비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점검하고 상황이 벌어지면 정권의 명운을 걸고 대응에 나서게 된다. 민주주의의 미덕은 집권 세력이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국민의 생명을 중시하게 만드는 데 있다. 모로코 대지진을 취재하며 눈에 띄는 부분은 사상자 규모가 제때 갱신되지 않고, 구조 상황에 대한 정부 발표도 거의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선 정치인들이 재난 현장에 앞다퉈 얼굴을 비치고 당국자가 (때로는 부풀려서 문제인) 구조 상황 브리핑을 수시로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소 2800여 명이 숨진 지진에 ‘정부 실종’ 사태까지 겹친 모로코 이재민들을 보면서 민주주의가 최고의 ‘내진 설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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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기습키스 분노 확산… “女선수들 상습 성차별 정점”

    20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 시상식 무대에 스페인 여자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올라섰다. 조금 전 결승에서 잉글랜드를 1-0으로 꺾고 스페인 여자 축구 사상 처음으로 우승컵을 거머쥔 순간이었다. 공격수 제니 에르모소 선수(33)가 스페인 레오노르 공주와 인사를 나눈 뒤 스페인왕립축구연맹(RFEF) 루이스 루비알레스 회장(46) 앞에 섰을 때였다. 루비알레스 회장은 에르모소 선수를 양팔로 껴안더니 두 손으로 에르모소의 얼굴을 잡고 1, 2초가량 입을 맞췄다. 이 ‘기습 키스’ 사건으로 스페인 여자 축구계는 월드컵 우승이란 경사를 만끽할 틈도 없이 대혼란에 빠졌다. 이번 사건으로 최근 급성장하는 여성 스포츠계에 여전히 만연한 성차별 실상이 드러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치 6명 항의성 사퇴…FIFA도 직무정지사건 후 일주일 새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사건 직후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했던 에르모소 선수는 25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루비알레스 회장의) 당시 행위를 정당화하는 발표를 하라는 지속적인 압력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어떤 직장에서도 동의 없는 행동으로 피해자가 나와선 안 된다. 이런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 스페인 여자 축구 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밝혔다. ‘기습 키스’가 논란이 된 직후 루비알레스 회장은 “다들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이에 22일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까지 나서서 “우리가 본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제스처였다”고 비판했다. 빅토르 프랑코스 스페인 체육장관도 루비알레스에 대한 업무 정지 절차에 착수하며 “스페인 축구를 위한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의 순간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루비알레스 회장은 “내가 실수를 했다. 악의 없이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고 중요 기관 수장인 만큼 더욱 조심할 것”이라고 뒤늦게 사과했지만 사퇴 여론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영국 BBC방송 등은 이번 우승 주역 23명을 비롯해 81명의 선수가 루비알레스가 회장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스페인 여자 축구 대표팀에서 경기하지 않겠다는 서명을했다고 전했다. 26일에는 여자 대표팀 코치진과 다른 연령별 대표팀 코치 6명이 루비알레스 회장을 규탄하며 사퇴했다. 같은 날 FIFA도 루비알레스 회장에게 90일 직무정지 징계를 내린 뒤 조사에 착수했다. 스페인 남자 축구 대표팀의 루이스 데 라 푸엔테 감독 역시 “축하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女 선수들에 대한 상습 차별의 정점”스페인 여자 축구팀의 위상을 올려놓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루비알레스 회장이 ‘기습 키스’ 논란으로 축구계의 공적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는 2018년 취임 때부터 “남녀 모두를 위한 협회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여자 선수들에게도 2027년까지 월드컵·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등 주요 대회 참가에 따른 포상금을 남자 선수들과 동등하게 지급하는 협정에 지난해 서명했다. 이 때문에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6일 “루비알레스의 행동은 (개인의 일탈이 아닌) 여성 선수들에게 이뤄진 수년간 차별(mistreatment)의 일환이자 그 정점”이라고 분석했다. NYT에 따르면 스페인 여자 축구 대표팀은 체계적인 훈련시설이 부족한 환경에서 연습해왔고 유니폼도 여성의 신체에 맞춰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지난해 대표팀 선수 15명은 호르헤 빌다 감독의 훈련과 선수 관리가 권위주의적이라며 RFEF에 해임을 요구했다. 20일 잉글랜드와의 결승전에서 스페인이 선취 득점에 성공하자 빌다 감독이 옆에 있던 여성 코칭스태프를 끌어안으며 가슴을 만지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스포츠계의 성폭력과 성차별이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스페인에 패해 탈락한 잠비아 여자 축구 대표팀에서도 감독이 선수들의 몸을 만지는 등 성추행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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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칵테일 홀짝이던 사람들 뒤로 산불이 다가왔다

    8일 오후 4시경 하와이의 유명 휴양지인 마우이섬 리조트 로비에는 줄지어 캐리어를 든 사람들이 체크인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 체크인을 했던 덴턴 퓨콰 씨는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상한 연기를 보고 리조트에서 나오던 중이었다. 그가 야외 수영장을 지나쳐 갈 때 한 젊은 부부는 자녀들과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바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무언가에 경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칵테일 잔을 홀짝였다. 몇 분 뒤 리조트에 닥쳐올 일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퓨콰 씨가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올 때였다. 리조트를 향해 불기둥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태풍에 올라탄 산불은 폭주기관차처럼 해안가로 맹렬히 하강했다. 불에선 거대한 엔진 소리가 났다. 공기 중 산소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며 덩치를 키우는 소리였다. 그는 황급히 시내로 통하는 해안가 도로로 들어섰다. 좁은 도로에 이제 막 대피에 나선 차량들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차량들 위로 불이 뿌려졌다. 곳곳에서 연료통이 폭발했다.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땅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는 것 같았다”고 한 생존자는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사람들은 차에서 뛰쳐나와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노약자들은 차에서 잠시 망설이는 사이 불길에 갇혔다. 반려동물과 함께 해변에 닿은 사람들은 물속에까지 동물들을 데려갈 수 없어 그냥 놔줬다. 어리둥절해하던 강아지들은 주인을 따라 바닷물로 몸을 던졌다. 물도 피난처가 되진 못했다. 하늘에서 축구공만 한 불씨와 불타는 파편들이 떨어졌다. 머리를 물속에 담갔다 다시 들기를 반복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면 짙게 내려앉은 연기가 숨통을 조여 왔다. 질식과 저체온증으로 사람들은 기력을 잃어갔다. 강풍은 널빤지나 나뭇조각에 의지해 겨우 떠 있던 이들을 먼바다로 밀어냈다. 하와이 산불 2주째인 22일 현재, 실종자는 850여 명에 달한다. 확인된 사망자는 114명. 이 중 27명만 신원이 확인됐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신이 훨씬 많고, 발견되더라도 신원 확인이 어렵다는 얘기다. 지금 하와이에는 9·11테러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했던 퇴역 군인들이 활동 중이다. 러시아의 폭격에 희생된 우크라이나인들의 시신을 조사한 법의학자들도 투입됐다. 고고학자들도 참여해 잿더미에서 사람 뼛조각을 찾고 있다. 건물이나 차량 잔해를 채로 걸러서 그 안에 사람이 있었는지를 식별한다. 화재 당시 집이나 호텔, 차에 있었던 가족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쏟아지지만 흔적조차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테러 못지않은 이 참사가 ‘기후의 역습’이라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지구온난화로 공기가 뜨거워지면 식물은 급격히 건조해지고, 땅에서 증발한 수분을 듬뿍 빨아들인 태풍은 더욱 강력해진다. 그 결과 더 쉽게 불붙고, 더 빠르게 확산된다. 하와이는 지구온난화가 가장 빠른 지역 중 하나다. 산업화를 거치며 지구 온도가 1.1도 오를 때 하와이는 2도 상승했다. 이번 산불은 태풍에 전신주 전선이 흘러내렸고, 바싹 마른 풀과 마찰하며 불이 붙어 강풍을 타고 퍼져 나갔다는 분석이 많다. 최근 10년 새 하와이에선 비슷한 패턴의 산불이 자주 났다. 이번 역시 어느 정도 예상된 산불이었다. 하지만 불이 산만 태우지 않고 섬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것이란 상상은 하지 않았다. 지난해 하와이의 9∼18세 청소년 14명은 “산불과 폭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며 주(州)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주 정부가 고속도로 개발을 촉진하는 등 화석연료 사용을 부추기고 있으니 막아 달라는 호소였다. 미국 전역에서 청소년들의 이 같은 기후위기 소송이 여러 번 제기됐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돼 기각되기 일쑤였지만 이젠 법원도 달라지고 있다. 하와이주 법원은 올 4월 “기후변화가 미래 세대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어 이에 대비하는 것은 주 정부의 헌법적 책무”라며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몬태나주 법원 역시 14일 “석탄·석유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량 조사를 면제해 준 주 정책은 위헌”이라며 청소년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와이 소송에 동참한 칼리코 테루야(13)는 이번 산불로 집이 모두 탔다. 불이 날 당시 훌라(하와이 전통 춤) 수업을 받던 중이어서 목숨을 건졌다. “어른들은 얼마나 더 큰 비극을 겪어야 저희처럼 절박해질까요”라고 테루야는 NYT에 말했다. 그동안 많은 기후재난이 그랬듯 이번 하와이 산불도 곧 기억에서 무뎌져 갈 것이다. 하지만 등 뒤에서 불기둥이 다가오는 걸 모른 채 칵테일을 홀짝이는 사람이 바로 우리였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쯤 해 볼 필요가 있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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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칵테일 홀짝이던 사람들 등 뒤로 산불이 다가왔다

    8일 오후 4시경 하와이의 유명 휴양지인 마우이섬 리조트 로비에는 줄지어 캐리어를 든 사람들이 체크인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 체크인을 했던 덴턴 퓨콰 씨는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상한 연기를 보고 리조트에서 나오던 중이었다. 그가 야외 수영장을 지나쳐 갈 때 한 젊은 부부는 자녀들과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바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무언가에 경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칵테일 잔을 홀짝였다. 몇 분 뒤 리조트에 닥쳐올 일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덴튼이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올 때였다. 리조트를 향해 불기둥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태풍에 올라탄 산불은 폭주기관차처럼 해안가로 맹렬히 하강했다. 불에선 거대한 엔진 소리가 났다. 공기 중 산소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며 덩치를 키우는 소리였다. 그는 황급히 시내로 통하는 해안가 도로로 들어섰다. 좁은 도로에 이제 막 대피에 나선 차량들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차량들 위로 불이 뿌려졌다. 곳곳에서 연료통이 폭발했다.“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땅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는 것 같았다”고 한 생존자는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사람들은 차에서 뛰쳐나와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노약자들은 차에서 잠시 망설이는 사이 불길에 갇혔다. 반려동물과 함께 해변에 닿은 사람들은 물속에까지 동물들을 데려갈 수 없어 그냥 놔줬다. 어리둥절해하던 강아지들은 주인을 따라 바닷물로 몸을 던졌다.물도 피난처가 되진 못했다. 하늘에서 축구공만 한 불씨와 불타는 파편들이 떨어졌다. 머리를 물속에 담갔다 다시 들기를 반복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면 짙게 내려앉은 연기가 숨통을 조여 왔다. 질식과 저체온증으로 사람들은 기력을 잃어갔다. 강풍은 널빤지나 나뭇조각에 의지해 겨우 떠 있던 이들을 먼바다로 밀어냈다.하와이 산불 2주째인 22일 현재, 실종자는 850여 명에 달한다. 확인된 사망자는 114명. 이 중 27명만 신원이 확인됐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신이 훨씬 많고, 발견되더라도 신원 확인이 어렵다는 얘기다. 지금 하와이에는 9·11테러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했던 퇴역 군인들이 활동 중이다. 러시아의 폭격에 희생된 우크라이나인들의 시신을 조사한 법의학자들도 투입됐다. 고고학자들도 참여해 잿더미에서 사람 뼛조각을 찾고 있다. 건물이나 차량 잔해를 채로 걸러서 그 안에 사람이 있었는지를 식별한다. 화재 당시 집이나 호텔, 차에 있었던 가족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쏟아지지만 흔적조차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전쟁이나 테러 못지않은 이 참사가 ‘기후의 역습’이라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지구온난화로 공기가 뜨거워지면 식물은 급격히 건조해지고, 땅에서 증발한 수분을 듬뿍 빨아들인 태풍은 더욱 강력해진다. 그 결과 더 쉽게 불붙고, 더 빠르게 확산된다. 하와이는 지구온난화가 가장 빠른 지역 중 하나다. 산업화를 거치며 지구 온도가 1.1도 오를 때 하와이는 2도 상승했다.이번 산불은 태풍에 전신주 전선이 흘러내렸고, 바싹 마른 풀과 마찰하며 불이 붙어 강풍을 타고 퍼져 나갔다는 분석이 많다. 최근 10년 새 하와이에선 비슷한 패턴의 산불이 자주 났다. 이번 역시 어느 정도 예상된 산불이었다. 하지만 불이 산만 태우지 않고 섬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것이란 상상은 하지 않았다.지난해 하와이의 9~18세 청소년 14명은 “산불과 폭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며 주(州)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주 정부가 고속도로 개발을 촉진하는 등 화석연료 사용을 부추기고 있으니 막아 달라는 호소였다. 미국 전역에서 청소년들의 이 같은 기후위기 소송이 여러 번 제기됐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돼 기각되기 일쑤였지만 이젠 법원도 달라지고 있다. 하와이주 법원은 올 4월 “기후변화가 미래 세대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어 이에 대비하는 것은 주 정부의 헌법적 책무”라며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몬태나주 법원 역시 14일 “석탄·석유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량 조사를 면제해 준 주 정책은 위헌”이라며 청소년들의 손을 들어줬다.하와이 소송에 동참한 칼리코 테루야(13)는 이번 산불로 집이 모두 탔다. 불이 날 당시 훌라(하와이 전통 춤) 수업을 받던 중이어서 목숨을 건졌다. “어른들은 얼마나 더 큰 비극을 겪어야 저희처럼 절박해질까요”라고 테루야는 NYT에 말했다. 그동안 많은 기후재난이 그랬듯 이번 하와이 산불도 곧 기억에서 무뎌져 갈 것이다. 하지만 등 뒤에서 불기둥이 다가오는 걸 모른 채 칵테일을 홀짝이는 사람이 바로 우리였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쯤 해 볼 필요가 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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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양한 몸들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장애, 테크로 채우다/에필로그]

    동아일보 특별기획 [장애, 테크로 채우다] 시리즈가 7월 29일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기획의 에필로그는 각 회별 주인공들이 직접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일상’입니다. 삶은 이렇게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펼쳐집니다. 지면 제약으로 미처 전하지 못했던 ‘손끝으로 세상을 보는 마케터’ 고미숙 씨의 이야기도 만나보세요.다양한 몸들의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김예솔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릴라 엘리펀트 창업)‘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의 힘은 커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그 주변을 바꾸기도 합니다.어렸을 때부터 장애를 갖고 살아오면서 밥을 먹고 자고 놀고 싶은 욕구는 친구나 저나 비슷했는데, 세상은 저를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좋을 텐데, 자꾸만 다른 게 마치 결점인 것처럼 인생의 성적표에 감점을 주는 것 같았어요. 그 성적의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한 걸까요?스웨덴에는 ‘얀테의 법칙(Jantelagen)’이라는 오래된 사회적 규범이 있습니다. 당신이 남보다 특별하다거나, 똑똑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 법칙이 현대에 와서는 개인주의와 상반되고 구시대적인 사상이라는 의견도 있긴 합니다.하지만 이런 규범 덕분인지 스웨덴에서는 저의 장애가 그렇게 신기한 일로 비쳐지지 않는 것 같아요. 저처럼 휠체어를 타며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스웨덴 사회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신념아래 만들어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식 때문인지 장애학생이 학교에 입학한 뒤에야 편의시설이 마련되는 게 아니라, 장애학생의 재학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학교는 장애인이 접근가능하게 지어져야 합니다. 교육 시스템 역시 장애 학생 개별의 요구에 따라 모든 지원을 국가와 지자체가 무상으로 제공합니다.반면, 제가 성장기를 보냈던 한국에선 아빠가 저를 일반고에 보내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했어요. 저를 ‘받아준‘ 유일한 학교는 건물에 엘레베이터가 없었는데요. 학교 측은 기존 계단 위에 임시로 나무 경사로를 만드는 비용을 저희 부모님이 학교 발전기금 차원에서 부담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조건을 받아들인 뒤에야 저를 입학시킬 수 있었어요.저의 중고교 시기 6년 간의 통학 역시 부모님의 몫이었습니다. 당시에(현재도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는 아닙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는 휠체어로 탈 수 있는 대중교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미술을 하겠다는 저를 위해 여름방학이면 엄마는 생업을 뒤로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미대 입시를 위해 서울 홍대 앞 미술학원에 다니겠다는 저를 따라서 홍대 앞 월셋집에서 같이 살면서 활동 보조 겸 공부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어쩌면 한국 사회는 개인의 노력과 열정으로 무언가 성취를 이루는 데에는 환호하지만, 그런 가시적인 성공의 대가로 치러야했던 보이지 않는 희생에 대해선 당연시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운영되는 장애인 활동 보조 서비스가 저의 성장기에도 있었다면, 엄마는 친구들도 만나고 취미 생활을 즐길 여유가 있었을 거예요. 또 지금처럼 장애인 이동 지원 차량이나 저상버스 같은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 인프라가 있었더라면 아빠는 저의 ‘365일 운전기사’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그런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준 부모님이 없었다면 저에겐 배움의 기회가 애초부터 없었을지 모릅니다.2007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을 때 디자인과 건물에 편의시설 개선을 요청했던 적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학과 교수님들과 조교님들을 포함해 학교 구성원들이 한 마음으로 제 요구에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그 요구가 대학 총장님께 전달되어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난 후, 학과 조교님이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연히 있었어야 했던 편의시설이지만, 그럼에도 총장님께는 감사를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그 조교님의 말은 제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어요. 엘리베이터가 장애 학생 단 한명을 위해 1억원을 투자한 시설로 해석되는 게 아니라,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편적인 접근성을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담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스웨덴에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배움의 기회를 갖습니다. 그 결과 장애인 역시 직업 능력을 갖추게 되고, 고용시장에서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며 다시 사회에 환원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데 저의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자유를 저는 비로소 타국에서 누리고 있습니다.저는 이제 많은 에너지를 창작에 쏟고 있어요. 평소 휠체어를 타면서 필요했던 일상 도구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능적일 뿐만 아니라 집안 한 켠에 두고 보기에도 아름다운 물건들입니다. 집안의 다른 물건들과도 조화를 잘 이루는, 튀지 않는 미감을 추구합니다.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곁에 두고 싶은 가구이면 좋겠거든요. ‘릴라 엘리펀트’에서 만드는 저의 가구들이 세상에 나와 훈훈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봅니다. 얀테의 법칙처럼 말이죠. 겸손하게 자기 할일을 묵묵히 하는 ‘믿음직한 사람’같은 가구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다양한 몸을 가진 저와 우리가 여전히 아름다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 가구들이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나에게 걷는다는 것의 의미김승환 (‘입는 로봇’ 연구원·KAIST 기계공학과 웨어러블로봇 연구실)아침에 눈 뜬 뒤 침대에서 내려와 디디는 첫발, 은은하게 흙냄새가 나는 여유로운 산책길, 시끌벅적한 음식점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때의 설렘… 일상 속에서 내딛는 수많은 걸음은 많은 이들에게 당연한 일상의 일부입니다. 제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하지만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된 뒤 ‘걷기’가 지니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다시 걸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때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서서히 ‘가능’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산책하고,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가고 싶은 곳을 아무런 걱정 없이 언제든 갈 수 있는, 한때는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꿈과 희망도 더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이고요. 웨어러블 로봇은 아직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애인들이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장애인들의 자립과 사회 참여를 증진시킬 통로가 될 것이며, 휠체어를 타던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에도 혁신을 가져올 것입니다. 장애인이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장애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발전한 기술은 장애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공경철 교수님을 필두로 한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엑소랩(Exoskeleton Laboratory)에서 저를 포함한 20명의 연구진들은 더 나은 로봇 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운 로봇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연구실 속 일상을 SNS 등을 통해 여러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웨어러블 로봇이 우리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싶습니다.저희는 2024년에 열리는 로봇·장애인 융합 국제 올림픽인 사이배슬론(Cybathlon) 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보면, 언젠가 로봇이 휠체어를 대신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요? 내가 이래서 음악을 못 끊나보다임채섭(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뮤직프로듀싱팀 ‘티스푼’ 소속)30년 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매미의 강렬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침 오늘도 30년 전 그런 강렬한 매미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를 매개로 과거를 회상해봅니다. 혼자서 뭔가를 가지고 놀고 관찰하기 좋았던 저는 그 때 리코더를 불고 있었습니다. 30년이 흐르며 그 리코더는 이제 건반과 컴퓨터로 바뀌어있습니다.음악을 시작하게 된 시점부터 음악을 연주하고, 만들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 알기 어렵지만 각각의 매력이 다르기 때문에 음악 안에서 직업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요즘은 아침이 되면 산책 때 메모 했던 음원 수정사항을 반영해 음악적인 스케치를 조금 더 구체화시킵니다. 이런 수정 작업은 시력이 남아있던 예전에도 했던 일이지만 이걸 보이스 오버(화면을 읽어주는 서비스) 기능으로 하려고 하니 새로운 훈련처럼 느껴집니다. 컴퓨터가 발전해도 아직은 가상 악기의 여러 가지 값을 정확하게 딱 일치시켜서 읽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어떤 기술이 좀더 편하고 적응할 수 있는 대안인지를 계속 찾아가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컴퓨터로 음악 작업을 하다보면 화면 확대를 했을 때 건반 일부가 안 보이기도 합니다. 음의 높낮이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죠. 강약 조절이 잘 되는지 보기 위해 화면 아래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음표를 보기 위해 화면 위로 올라가다보면 커서가 엉뚱한 곳에 가 있기도 합니다. 다행히 요즘 저는 PC를 활용해 음악을 만들 때 ‘logic remote’라는 앱을 활용해 아이패드를 컨트롤러로 사용하는 대안을 발견해가고 있어요.예전에는 건반으로 음표를 입력했던 방법을 썼지만 지금은 시각장애인 음악인에 맞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죠. 작업 속도는 과거보다 조금 느릴 수 있지만 마우스로 음표를 일일이 찍고 강약을 수정하거나 가상 악기 등을 걸어줄 수 있어 할 수 있는 작업의 범위가 계속 넓어지고 있어요. 이런 방법을 쓰면 좀더 객관적인 모니터링이 되기도 하고, 특이한 화성이나 리듬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좋기도 합니다.제가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들은 이 순간에도 계속 새롭게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기술들을 가까운 분들의 도움을 통해서 익혀나가고 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저에게 맞는 멋진 기계나 프로그램들을 꼭 찾게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중에 전맹이 오더라도 이런 기술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요즘은 틈틈이 점자 공부를 하고, ‘한소네’라는 점자 단말기를 익히고 있어요.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진행성 장애로 인한 분노들이 저에게는 젊은 날의 혈기였던 거 같기도 합니다. 이런 분노들은 어찌 보면 열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살고 싶은 열정, 음악을 하고 싶은 열정, 칭찬받거나 뽐내고 싶은 열정 같은 거 말이죠. 이런 것들이 가라앉고 있는 부표가 기적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듯, 저를 다시 떠오르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게임을 즐기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게임의 세계에선 ‘켠 김에 왕까지’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 이 말을 듣고 ‘무조건 끝까지 가서 엔딩을 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잘 살든 못 살든, 제게 주어진 지금 이대로의 인생을 끝까지 즐겨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이런 의미에서 음악은 미우나 고우나 저의 친구입니다. 사람 속은 알 수 없고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지만, 음악은 노력의 영역이므로 저에게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아마도 그래서 제가 음악을 못 끊나봅니다.첫 발은 천근만근이지만… 내딛고 나면 어떻게든 나아가는 것이 삶이규환 (중증장애에 맞선 치과의사·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교수)다치고 나서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 담당 의사는 제게 “더 좋아지지 않는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전신마비가 된 몸으로 뭘 하다가 죽을까’ 만 번을 생각해도 치과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반대했고 미쳤냐고 욕했지만, 정말 0.1초라도 치과의사로 살아보고 싶었어요.그래서 재활원을 나와 1년 만에 치대에 복학했습니다. 재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겁쟁이가 되고, 사회로 나오는 게 더 두려워질 것 같아서요. 복학 후 처음엔 휠체어로 문턱을 못 넘어서, 문 앞에서 눈치 보며 하루 종일 계속 버텼습니다. 교수님들은 한숨만 쉬셨죠. 그러다 예방치과 교수님, 방사선과 교수님께서 처음으로 “들어와, 해보자”라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자료를 줄 테니까, 여기서 판독을 해”라면서요. 그렇게 시작했습니다.가장 힘든 건 첫 발이에요. 저는 강연을 할 기회가 있을 때면 “장애인은 비장애인만큼 노력해선 안 된다”고 늘 이야기합니다. 그냥 버티는 것도 힘들겠지만 거기서 한 발짝씩만 더 나아가라는 거죠. 그 과정에서 보조기기와 기술, 최신 장비를 활용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인 거 같아요.사실 한 발 내미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 한 발이 수만근의 무게입니다. 근데 그것만 내딛으면 어떻게든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요. 삶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한 번뿐인 인생, 진짜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어야죠. 최중증 장애인인 저도 이렇게 해냈잖아요.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래서 보여드리는 거예요. 0.1%의 희망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시라구요. 저도 중환자실에서 누워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해낸 분들의 기사들을 읽고 희망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때의 저처럼,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고 있는 분들께서 제 이야기를 보고 “그래, 까짓 거 나도 한번 해보자”라는 희망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 색으로 그려진 하루하루지만 예쁜 꽃처럼 피어나게 가꿀 거예요고미숙 (손끝으로 세상을 보는 마케터·소셜벤처 ‘닷’ 커뮤니케이션 매니저)저의 하루는 한 가지 색으로 그려진 그림이에요. 하지만 사랑을 받는 날엔 몽글몽글해지고, 시선을 집중받는 날엔 스크래치가 생겨서 하루하루가 모이면 드라마처럼 다채로운 스케치북이 만들어진답니다. 그날을 떠올려볼까요. 살랑 부는 봄바람에 기분도 설렜던 날이었어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보러 흰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섰는데요. 점자 블록이 없는 길을 ‘초집중’하며 걷다가 앞에 오던 사람과 부딪치면서 지팡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거예요. 친절한 그분은 흰 지팡이를 손에 쥐여 주며 사과도 해 주셨죠.‘역시 세상엔 좋은 분들이 많아’ 흐뭇해하며 지하철역에 도착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며 걸었지만 주말이라 붐비는 통로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니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소심한 저는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죠. “저… 제가 눈이 안 보여서요. 지하철 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돌아오는 건 대답 대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터벅터벅’ 하는 발소리뿐이었습니다. 혼자서라도 길을 찾으려 기억을 더듬고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같은 곳만 빙빙 돌 뿐이어요. 시간이 흐르며 다급해진 마음에 다시 용기를 내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쪽으로”라며 제 옷을 냅다 잡아당기는 거예요. 약속장소에서 만나 제 이야기를 들은 다른 시각장애인 친구는 말했습니다. “난 내 흰 지팡이에 걸린 사람이 오히려 나한테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고 하던걸?” 시각장애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마음부터 더 단단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하루였죠. 제가 시력을 잃기 전에 좋아했던, 비 오는 날도 떠올려봅니다. 눈이 보일 땐 빗방울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스며드는 모습이나 창문에 맺혀있는 빗방울을 보는 게 좋았죠. 우산을 쓰고 걸을 때면 들려오던 ‘토독토독’하고 떨어지던 빗방울의 소리도요. 그런데 지금은 비 내리는 날이면 걱정을 먼저 하게 돼요. 비 내리는 소리로 인해 주변 소리가 가려지고, 길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를 피하기도 힘들거든요. 사설제 인생의 책갈피는 이렇듯 행복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언제나 상처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고, 좋아하던 것들도 즐기기를 망설이게 되죠. 저뿐 아니라 누구나 크기가 다른 고민과 걱정의 씨앗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씨앗이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건강하게 자라서 예쁜 꽃을 피우는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저는 긍정의 물과 사랑의 햇살로 잘 키워 보려고요.<특별취재팀>▽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전체 시리즈와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 202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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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도 쉽게 탈 수 있게… 차 의자 90도 돌아갑니다[장애, 테크로 채우다]

    노인이 되면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해지지 않는 때가 온다. 집 안에서 혼자서 앉고 일어서거나 밖에 나가 지인을 만나는 것조차 버거워지는, 신체적·정신적 제약이 본격화되는 때 말이다. 노쇠로 인한 ‘장애’를 안고 살아갈 인생의 황혼기는 모두에게 예정된 미래다. 이 때 기술은 노인들이 기존 삶의 질을 유지하고 존엄한 삶을 사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4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2023 베리어 프리’ 박람회장. 미야자키현에서 여동생을 태우고 10시간을 운전해 이곳까지 온 모리시타 야스나리 씨(65)가 자동차기업 토요타 부스 앞을 서성였다. 야스나리 씨는 차량 왼편에 있는 조수석이 ‘윙’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90도 회전해 차량 밖으로 나오는 광경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그는 부스 직원에게 물었다.“이 회전 좌석을 쓰면 동생을 차에 태우는 게 좀 수월해질까요?”“고령자나 장애인이 허리나 다리에 힘을 덜 쓰고도 차에 탈 수 있게 한 거예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 조수석에 타는 게 가능해질 겁니다.”(직원)흰머리가 거뭇거뭇한 야스나리 씨는 “휠체어를 타는 여동생을 차에 태우는 게 늘 나의 몫이었는데 좌석이 회전하면 제가 몸을 조금만 굽혀도 돼 허리가 덜 아플 것 같다”고 했다.이 박람회는 고령자와 장애인, 그리고 야스나리 씨처럼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을 위한 첨단기술이 소개되는 장이었다. 주최 측은 “박람회가 시작된 28년 전만 해도 이런 기술이 있다는 것 자체를 사람들이 몰라서 아주 작게 시작했는데 그 사이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요즘은 수만 명이 찾아오는 대형 이벤트가 됐다”고 했다.삶의 질의 핵심은 ‘마음껏 움직이기’토요타 부스의 또 다른 인기 제품은 휠체어 이동장치였다. 고령이 되면 노쇠나 질환 등의 이유로 전동휠체어를 타는 경우가 많은데 휠체어가 무거워 차 트렁크에 싣는 게 큰 부담이다. 부인이 휠체어를 타는 60대 일본인 부부는 토요타 직원이 휠체어 이동장치를 시연하는 내내 눈을 떼지 못했다.직원이 차 트렁크를 연 상태로 이동장치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휠체어를 고정시킬 수 있는 장치가 차량 밖 바닥까지 내려왔다. 휠체어를 올려놓고 다시 버튼을 누르니 트렁크 안으로 쏙 들어갔다. 사람이 힘을 쓸 일이 없었다. 담당 직원은 “평균 30kg 정도인 전동휠체어를 들어 올릴 수 있고 모든 차량에 설치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말했다. “지금 아내가 타고 있는 휠체어가 전동이라 엄청 무겁거든요. 올해 저희 부부 나이가 69살이라 힘이 부치는데 이런 게 있으면 휠체어를 차에 싣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 같네요.”김영선 경희대 디지털뉴에이징연구소장(노인학과 교수)은 “국내에선 휠체어를 실을 수 있게 차를 개조하려면 약 1500만 원이 들 정도로 부담이 큰데 (토요타 제품은) 차량을 개조하지 않고 간단히 설치만 하면 되는 방식이어서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고 했다.‘고령자를 위한 스쿠터’ 부스도 인파로 북적였다. 이 스쿠터는 혼자 힘으로 걷을 수는 있지만 먼 거리를 다니긴 힘든 고령자들을 위해 개발됐다. 기자가 운전면허가 없는데 시승이 가능한지를 묻자 직원은 “이 스쿠터 자체가 면허를 반납한 고령자들이 밖에 다니기 편하도록 개발된 것”이라며 기자에게 스쿠터를 내밀었다.스쿠터에 타보니 1~6단계까지 속도 조절이 가능했다. 코너 구간을 통과하며 핸들을 살짝 돌리자 속도가 자동으로 느려졌다. 다른 관람객이 스쿠터를 탄 기자 앞으로 지나가려 할 땐 경보음이 울렸다. 외관은 상아색의 깔끔한 바탕에 검은색으로 약간의 포인트만 줬다. 토요타 관계자는 “고령자가 스쿠터를 타고 밖에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도록 세련되고 젊은 느낌을 주는 디자인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했다. 당연하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을 때“와, 자전거를 정말 오랜만에 타보네요.”오사카에 사는 카와치 케이스케 씨(75)는 부스에 전시된 ‘고령 친화 자전거’를 타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 리츠코(71)는 “남편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집에 자전거를 두고도 타기를 주저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는데 오늘은 다르다”고 했다. 이 자전거는 일반 자전거와 다른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세발 자전거여서 안정감이 있다. 안장에는 허리 받침대가 있어 몸을 기댈 수 있다. 페달 쪽에는 잠시 다리를 올려놓고 쉴 수 있도록 발판도 부착돼있다. 고령자들이 근력 저하로 균형을 잡기 어렵고, 발목과 무릎 등 관절이 약해지며 체중 부하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었다. 케이스케 씨는 “몇 년 전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온 뒤부터는 집에 있는 자전거를 한 번도 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이 자전거는 발판이 있어 발을 올리기가 쉽고, 허리 받침대가 몸을 고정해 주니 페달에 힘을 싣기도 쉬웠다”고 했다. 김 교수는 “노인들은 신체 기능이 저하되면서 밖으로 잘 안 나오게 되는데 이렇게 고령 친화형으로 디자인된 자전거가 보급되면 무엇보다 외부 활동을 지속하게 해주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초고령자 돌보는 고령자를 위한 기술 박람회에서는 고령자와 장애인을 돌보는 기족 등 주변인을 위한 기술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거동이 어려운 사람을 집안 내부에서 옮기는 장치인 전동 리프트가 그 중 하나다. 자동차 엔지니어 히로시 씨(59)는 차를 만드는 기술을 접목해 이 리프트를 개발했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와상 노인들을 휠체어로 옮긴 뒤 화장실, 주방 등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 쓰이는 기구다. 와상 노인들은 근력과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데 최소한의 움직임을 통해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신체적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김 교수는 “영국 호주 등에서는 ‘들지 않기 정책(no lift policy)’을 도입해 돌봄 인력이나 의료진이 환자를 직접 드는 대신 기기의 도움을 받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히로시 씨는 “10년간 이 제품을 제작해오면서 91세 남성이 88세 부인을 돌보려고 제품을 보러 왔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본인도 노쇠해 집안에서 부인을 옮기는 게 어려웠는데 이 리프트 덕에 수월해졌다며 기뻐했다”고 전했다.또 다른 전동 리프트 업체인 ‘카네타 코포레이션’은 의자형 리프트를 개발했다. 기존의 전신형 리프트는 부피가 커서 가정집에서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를 보완해 부피가 작고 조작이 쉬운 의자형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 업체 직원은 기자에게 한 부녀 고객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아버지를 홀로 돌보는 딸이 의자형 리프트를 이용해 침대에 누워만 지내는 아버지를 부엌으로 옮기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었다. 딸은 “예전엔 온전히 팔 힘으로 아버지를 침대에서 꺼내드려야 했는데 이젠 한층 편해졌다”고 했다.기자가 박람회장을 둘러보는 동안 혼자 구경 온 고령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들은 ‘개인 자격’이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여러 기술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고이즈미 유타카 씨(73)는 “인터넷에서 간병 용품을 찾다가 이 행사를 알게 됐다. 6, 7년 전부터 빼놓지 않고 매년 방문하고 있다”고 했다. 93세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유타카 씨는 휠체어를 타는 어머니를 위한 제품을 찾고 있었다. 어머니가 집의 방과 방 사이를 다닐 때 문턱에 걸려 휠체어에서 튕겨나갈 뻔한 경우가 잦았는데 자신도 고령이라 일일이 돌볼 수가 없어 낙상 방지용 휠체어를 찾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가 휠체어를 처음 탄 8년 전만 해도 제가 60대라 괜찮았는데 저도 이젠 70대가 되니 어머니를 돌보기가 점점 버거워지네요. 저의 빈자리를 채워줄 기술을 잘 찾아보려 합니다.”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기획·취재: 오사카=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전체 시리즈와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오사카=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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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테크(low-tech)로 인생 바뀐 전신마비 치과의사[장애, 테크로 채우다]

    “제가 조금 느립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제일 꼼꼼하고 안전하게 봐 드리겠습니다.” 분당서울대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클리닉 이규환 교수(44)가 환자들에게 건네는 첫인사다. 그냥 인사치레는 아니다. 그는 손을 쓰지 못하는 의사다.손을 쓰지 못하는 ‘중증장애 치과의사’규환은 어깨와 손목을 약간 움직일 뿐, 목 아래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장애 치과의사다. 그의 진료실은 두 가지가 다르다. 의사가 전동휠체어에 앉아 있고, 치과 도구를 잡을 때 손가락에 투명한 플라스틱 기구를 끼운다는 점이다. “3단으로 부탁드립니다. 한 단만 더 올릴까요? 네, 감사합니다.”규환의 요청에 따라 간호사가 페달을 밟자 환자가 앉은 진료 의자가 기계음을 내며 올라갔다. 간호사는 규환의 검지손가락에 끼워진 플라스틱 기구에 동전만 한 치과용 거울을 고정시켰다. 규환은 어깨와 손목을 천천히 움직이며 거울에 비친 환자 입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치석 관리를 아주 잘하셨네요. 훌륭합니다.”이 병원에서 일한 지 올해로 19년 차인 규환은 검사와 판독, 상담, 예방클리닉을 주로 맡는다. 규환은 농담처럼 “저도 이제 연차가 좀 쌓여서요. 잘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는 거죠”라며 웃었다. 2005년부터 여기서 일했으니, 벌써 20년차가 다 되어간다. 초반에는 일반 진료도 직접 했지만, 이제는 전문분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를 찾는 진료 예약은 대부분 꽉 차 있다.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가슴에 강철을 깔다규환은 늘 웃는 인상이다. 무표정일 때에도 그렇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철벽으로 무장돼있다. 치대 본과 3학년이던 2002년, 중환자실에서 읽은 무협지에 나온 말이다.“‘네 가슴에 강철을 깔아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야 사람이 살아간다고.”키 188cm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그는 병원 실습을 마치고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 목뼈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됐다. 늘 하던 대로 물에 뛰어들었지만, 그날은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목이 꺾였다. 한동안 스스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중상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간신히 어깨까지 감각이 돌아왔지만 그뿐이었다. 담당의는 규환에게 “평생 이렇게 살 준비를 하라”고 했다.밤낮으로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했던 중환자실에서 버티기 위해 간호사들에게 부탁했다. 정말 바쁘겠지만, 혹시라도 짬이 나면 제게 책을 보여주실 수 있느냐고, 무슨 책이든 상관없고, 한 장씩 넘겨만 주시면 된다고. 중환자실에서 지낸 한두 달 동안 그렇게 100권 가까이 책을 읽었다. 성경부터 시작해 일본만화 ‘슬램덩크’ 시리즈, 소설 ‘갈매기의 꿈’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인생 한 줄’이 된 문장들은 무협지에서 나왔다. 앞으로의 삶은 분명 상처로 가득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일도 많을 것이었다. “그들이 네게 상처를 내지 못하게 가슴에 강철을 깔아라.” 그는 이 문장을 가슴에 품고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으로 ‘강해지기’를 택했다.모두가 말린 ‘1년 만의 복학’규환은 사고 1년 만에 치대에 복학했다. “전신마비 치과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모두가 말렸다.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라는 설득도 많았다. 하지만 규환은 사고를 당했다고 가던 길을 틀고 싶지는 않았다.“중환자실에서 ‘내가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만 번은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정말 0.1초라도 치과의사로 살아보고 싶더라고요.”당시 교내에는 장애인 시설이 거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선 동기들이 규환이 탄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교수 연구실이나 실습실에도 문턱이 하나씩 있었다. 혼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누군가 도와줄 때까지 무한정 ‘뻗치기’를 했다.손을 쓸 수 없으니 필기도 할 수 없었다.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챙겨준 필기와 교과서를 눈으로만 보고 외웠다. 그는 “원래도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다치고 나서 더 좋아진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남들처럼 밤늦게까지 실습을 하고, 하루종일 필기를 노려보며 공부하다가 욕창이 생겼다. 그래도 버티다 정신까지 잃었다.진료 실습 땐 치과용 기구를 손가락에 고정시키기 위해 고무줄로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동여맸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기구가 많아 손에서 빠지면 환자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진료를 하며 환자의 입안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다 보면 손가락이 기구에 찔리고 베이는 일이 많았다. 그의 손은 늘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렇게 부딪히며 기회의 문을 하나씩 열어갔다.맨땅에 헤딩 대신 ‘헬멧 쓰고 헤딩’어렵게 중증장애 치과의사의 길을 개척해 온 규환이 모두에게 ‘무식하고 지독한’ 방법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그가 늘 후배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헬멧 쓰고 헤딩’하는 건 천지차이”라는 것.가만히 앉아 더 좋은 신기술과 첨단장비가 개발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가진 것을 총동원하고 없는 것을 직접 만들어내며 한 발짝씩 나아갔다. 아무 정보도 없이 ‘맨땅에 헤딩’을 너무 많이 하다가 문자 그대로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의사를 꿈꾸는 후배들뿐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앞선 ‘선배 장애인’들의 경험과 노하우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한다. ‘헤딩’을 망설이지 말되, 가능한 좋은 ‘헬멧’을 쓰라는 것이다.특히 든든했던 헬멧으로 그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국립재활원을 꼽았다. 전동휠체어와 욕창방지용 방석 등을 지원받았고, 무엇보다 치과 진료에 필요한 기구를 맞춤 제작할 기회도 얻었다.국립재활원에서 보조기기를 맞추는 경로는 보통 두 가지다. 하나는 규환처럼 국립재활원 부속 재활병원에 입원하는 경우, 또 하나는 외래로 방문해서 직접 의뢰하는 경우다. 수요자의 상태와 생활패턴 등을 고려해 만들고 사후관리까지 해준다. 기존에 없던 기기를 신규 제작하는 경우엔 길면 수개월까지 소요된다.규환은 이곳에서 치과 도구들을 간편하고 빠르게 손가락에 고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세상에 없던 기구’를 국립재활원 전문가들과 함께 개발했다. 투명한 플라스틱을 원통처럼 말고, 끝엔 도구를 꽂을 수 있도록 고정용 고무를 장착했다. 고무 부분이 도구를 단단하게 고정시켜주는 강도를 세 단계로 구분해 각각 색깔을 달리 했다. 또 폴리염화비닐(PVC) 소재로 만들어 끓는 물에 살짝 담그면 모양을 손쉽게 다시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첨단 하이테크는 아니지만 장애인마다 각기 다른 수요에 딱 맞게 제작한 로테크(low-tech), 미들테크(middle-tech) 기기들은 가볍고 저렴하면서도 큰 효과를 낸다. 서울 강북구 국립재활원에서 만난 재활병원부 김온유 척수손상재활과장과 보조기기제작실 김지민 주무관은 그동안 개발한 보조기기들을 제작실 작업대에 한가득 펼쳐 보였다. 두 사람은 규환의 보조기구 제작에도 참여했다. “팔과 손이 마비된 분이 계셨는데 자신의 손으로 물을 마시고 싶어해 전용 컵 홀더를 만들어 드렸어요.”“비슷한 장애가 있는 다른 분에겐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할 수 있도록 손가락을 끼워서 쓸 수 있는 터치펜을 만들어 드렸고요.”장애를 갖는다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조차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일상’은 각자 다르다. 컵을 잡거나 물을 마시거나 화면을 터치하는 것은 비장애인에게는 엄청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맞춤형 기구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잃어버렸던 일상을 하나씩 되찾을 때마다 삶이 한 뼘씩 확장되는 것 같다”고 전한다. ● “장애인에게 진료받기 싫다” 화내던 환자들을 넘어규환은 힘겹게 치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곧바로 의사가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을 받아주는 병원을 찾기가 힘들었다. 서류를 통과해도 휠체어를 타고 가 면접을 보고 나면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병원장, 부원장, 기조실장 등 각종 ‘실장님’들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전화했어요. 단 10분이어도 좋으니 진료를 보여 드릴 기회를 달라고요.”오랜 두드림 끝에 수화기 너머에서 긴 한숨과 함께 “한번 와 보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규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휠체어를 탄 상태로 시험 진료를 하던 날, 병원 의료진들이 우르르 구경을 와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치과의사가 된 뒤에도 고비는 남아있었다. “진료실에 들어와서 저를 보고는 재수 없다고 ‘퉤’ 하며 침을 뱉는 환자분도 있었어요. ‘내가 왜 병신한테 진료를 받아야 하느냐’고 병원에 컴플레인(항의)하는 분도 많았고요.”환자 열 명 중 일곱 명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나머지 두세 명은 쭈뼛대며 진료 의자에 앉았다. 규환은 그들에게 “보시다시피 제가 몸이 불편하고 좀 느립니다. 근데 실력은 최고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꼼꼼하고 안전하게 봐 드리겠습니다”라며 다가갔다.점차 그를 다시 찾는 환자들이 생겨났다. “그때 깔끔하게 진료해줘서 시원했다” “꼼꼼하게 설명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거친 손에 새겨진 20년의 흔적다치기 전, 규환은 위만 보고 살았다. 부족함 없는 가정형편, 어디 가서 밀리지 않았던 두뇌와 건강한 신체를 가진 그였다. 치대에 진학한 것도 사명감 때문은 아니었다. 공부를 잘 하면 의사가 되어야 하나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좋은 집, 좋은 차를 사고, 돈 많이 벌며 편하게 살지 않을까 짐작했다. 다친 뒤, 그는 스스로 ‘바닥’이라고 생각한 곳에 닿았다. 처음으로 위 대신 아래와 옆을 보게 됐다. 중환자실에 누워 순간마다 기도했다. 제 몸을 다시 예전처럼 돌려놓아주신다면, 이 몸을 정말정말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쓰겠노라고. “울면서 수없이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다 주진 않고 팔만 이렇게 조금 돌려주셨네요.”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이며, 규환은 말했다. ‘조금’ 돌려받은 팔로 의사가 된 뒤, 중환자실 침대에서의 약속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사고 때문에, 절망 때문에, 후유증 때문에, 규환은 수차례 거의 죽어봤기 때문에 오히려 하루하루의 최선과 진심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아이를 낳은 뒤, 규환은 육아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육아 철학도 “넘치게 사랑하고 부족하게 키우자”로 정했다. 잔소리 대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6살배기 딸은 아빠의 무릎과 어깨 위로 기어올라가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장난을 친다. 조그마한 손가락으로는 아빠의 굳은 손을 쥐고 흔들며 “아빠 손은 괴물 손!”이라고 놀린다. 그의 두 엄지와 손마디는 큼직한 굳은살이 뒤덮어 얼룩졌다. 근육이 빠져 가늘고 긴 팔과 어울리지 않게 울퉁불퉁한 손을 보며 “영광의 상처”라고 말했다. 20년도 더 전부터 도구에 베이고 찔리고 진물이 나도록 끈과 고무줄로 동여맨 흔적이다. 이제 규환이 진료 때마다 손가락에 끼는 투명한 플라스틱 기구는 간단해 보이지만 그에겐 간단치 않다. 그의 손에 더 이상 피와 진물이 흐르지 않게 해주고, 치과의사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냥 주저앉지 않고, 0.1%의 가능성에도 포기하지 않고 20년 넘게 싸워왔다는 증거가 그 손에 담겨있다.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기획·취재 :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 송은석 기자▽디자인 :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홍정수기자 hong@donga.com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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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배 확대기, 보이스오버…기술로 ‘작곡의 길’ 찾다[장애, 테크로 채우다]

    “중2 때였어요. 당시 선생님이 쪽지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만큼 머리채를 잡고 칠판에 얼굴을 들이박았거든요. 저도 불려나가서 칠판에 여러 번 세게 부딪혔는데 갑자기….” 작곡가 임채섭 씨(41)는 과거 교사의 체벌로 왼쪽 눈을 실명했다. 권투선수들이 시합 중 눈을 정통으로 맞았을 때 종종 발생하는 망막 박리가 심하게 왔다. 채섭은 남은 한 쪽 눈에만 의지하다보니 오른쪽 시력도 서서히 악화됐다. 사고 후 27년이 지난 지금, 그는 진행성 시각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어제까지 보이던 게 오늘은 보이지 않고,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이 오늘은 어려워지기도 한다.그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작곡 경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올해로 17년차다. 드라마 OST, K팝 등 다양한 작업에 참여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여러 번 음악을 단념하려 했다. 피로가 누적된 날은 잔존 시력이 거의 나오지 않아 악보조차 보이지 않았다. 건반에 닿는 손의 기억에 의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만하면 해볼 만큼 해봤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어떻게든 음악을 계속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보니 눈을 대신해 줄 기술과 장비들을 발견하고 익히게 되더라고요. 시력을 잃는 속도보다 기술에 적응하는 속도를 더 높이면 나중에 완전히 못 보게 되더라도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안내견과 전철역 가는 길지난달 1일 아침 채섭이 함께 사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호연’이와 서울 도봉구 집을 나섰다. 지방 공연에 가는 날이다. 채섭이 인근 전철역인 창동역까지 가려면 횡단보도가 3군데를 건너야 한다. 세 곳 모두 신호등이 없어 건널 때 차가 오는지 잘 살펴야 한다. “진행성 시각장애가 있다보니 횡단보도 건너는 게 갈수록 조심스러워져요. 호연이에게 50%는 의지하지만 저 역시 안내견의 안전을 지켜줘야 하니까 횡단보도 앞에 서서 귀를 최대한 기울입니다. 차 소리가 완전히 안 들리고 사람들 건너는 소리가 들리면 그 때 움직이죠.”채섭이 호연이와 함께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서자 마침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선로에 멈춰선 열차 문이 닫히기까진 4, 5초의 여유가 있었지만 채섭은 열차에 바로 타지 않고 탑승구 앞에 멈춰 섰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다음 열차가 도착하면 문이 열리자마자 타야 안전하거든요.”호연이는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수시로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동자로 ‘형아(채섭)’를 살폈다. ‘앉아’ ‘일어서’ 같은 구령을 듣기 위해 귀도 쫑긋 세웠다. 채섭과 호연이가 열차에 오르자 승객들의 시선이 이 래브라도 리트리버 안내견에게 온통 쏠렸다. “호연이를 예쁘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 감사하긴 한데 눈으로만 봐주시면 좋겠어요. 가끔 말없이 사진을 찍거나, 제가 시각장애인인 걸 알고 제 얼굴 바로 앞에서 찍는 분도 있거든요. 만지시는 분들도 있고요. 근데 안내견이 낯선 자극을 계속 받게 되면 평소 훈련받은 역할을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어요.”장애인마다 ‘장애 MBTI’가 있다 채섭이 이런 일상을 갖게 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교사의 폭력으로 시력을 잃고 집에서만 채섭은 방 유리창 너머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낙오자가 된 것처럼 너무 위축이 되고 중2병까지 겹쳐서 그랬던 거 같아요. 마음의 블랙홀이 쉽게 메워지진 않더라고요.”그는 가해 교사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사춘기를 보냈다. 하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드라마 ‘더글로리’ 보셨나요. 복수를 하고나면 결국엔 허무해지지 않던가요. 저는 이미 너무 큰 것을 잃어버렸는데 남은 삶마저 미움과 분노로 채우면서 더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눈 수술 후 중학교를 휴학한 채섭이 하루 일과를 보낸 곳은 동네 피아노학원이었다. 당시 좋아하던 게임을 할 수도 없었고 책을 읽기도 어려워, 대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위치는 손끝으로 선명히 느껴졌고, 귀에 들려오는 소리로 악보를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피아노 학원이 그에겐 학교이자 놀이터였다. “당시 라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하루하루 보내곤 했는데 음악이 마음속 빈 공간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이 곡을 만들었던 사람과 소통하는 것 같아서 혼자 남겨진 기분도 덜 느껴지고, 나 역시 누군가를 위해 이런 걸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채섭의 할머니는 음악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려는 손자에게 전자피아노를 마련해줬다. 할머니는 “너한테 가장 필요한 것을 사라”며 매달 몇 만원씩 십수 년간 모아온 쌈짓돈을 내준 것이었다. 채섭은 그 전자피아노로 독학을 해 부산대 음대에 입학했다. 집에 손을 벌릴 형편이 아니었던 채섭은 음대 시절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다. 주중에는 화장품과 정수기 방문 판매를 하고, 주말엔 결혼식 축가 연주를 다니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다. 가장 쏠쏠했던 알바는 노래방에 들어갈 곡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음원을 디지털로 자동 변환하는 기술이 없어서 사람이 한 곡 한 곡 귀로 듣고 음표와 박자를 그려가며 노래방 버전으로 수동 전환했다. 그렇게 수백 곡의 노래를 완전히 해부해서 재조립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채섭에겐 ‘실전형’ 작곡 공부이기도 했다.그는 “장애인도 성향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일종의 ‘장애 MBTI’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노가 커 공격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과 협조적으로 살아가려는 부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건 매일 매순간 의식하게 돼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장애와 친해지긴 어렵죠. 그렇다고 장애라는 거대한 돌덩이를 어디로 보내버릴 순 없어요. 보낼 때마다 기어이 반송돼서 오더라고요. 어차피 같이 가야할 존재라면 예쁘게 포장하고 부피를 최소화해서 마음 속 ‘냉장고’ 깊숙이 넣어두는 수밖에요.”시력의 빈틈을 메워준 기술들지난달 21일 채섭의 집을 찾았을 때 신곡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의 집은 곡을 함께 만드는 멤버들과의 작업실이기도 하다. 편곡과 믹싱 전문인 채섭은 작곡가 겸 보컬리스트인 서재윤 씨, 피아노 베이스 등 재즈 연주가인 황영훈 씨와 2년 전 ‘티스푼’이란 밴드를 결성했다. K팝이나 드라마, 뮤지컬 등에 쓰일 곡을 만들기 위해 각자 장기를 티스푼으로 모아보자며 힘을 합쳤다. 재윤이 기본 멜로디에 작사, 보컬을 담당하고 영훈은 여러 악기로 선율에 살을 붙인다. 채섭은 신디사이저 등을 이용해 믹싱과 편곡을 하며 완성도 높은 곡으로 버무려낸다. 한 때 음악을 포기하려던 채섭을 잡아준 게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20년 넘게 해온 음악이지만 도저히 못 하겠다 싶더라고요. 근데 두 분이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며 힘을 줬죠. ‘이렇게 곡 잘 만드는 사람이 포기하면 국가적 손실을 넘어 우주적 손실’이라고 농담도 해주고….”채섭을 일으켜 세운 건 사람이지만 그가 힘겹게 되살린 용기를 실현하도록 해준 건 기술이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시력의 한계를 메워주는 여러 기술이 모여 있다. 그는 아이맥(iMac) PC 앞에 앉아 능숙하게 작곡 프로그램을 다뤘다. 커서의 위치 등 모니터 화면을 설명해주는 ‘보이스 오버’와 화면을 크게 확대해주는 기능을 자주 썼다. 악보를 집중적으로 봐야 할 땐 ‘조디’라는 특수 확대기기를 머리에 쓴다. 이걸 쓰면 눈앞의 사물이 30배 정도 확대돼 보인다.채섭이 PC에 아이패드를 연결하자 태블릿 화면이 전자 피아노 건반으로 바뀌었다. 그가 믹싱을 할 때 즐겨 쓰는 로직 리모트(Logic Remote)라는 애플리케이션(앱) 덕분이었다. “이 앱은 음악을 만드는 일종의 스케치북이에요. 10년 넘게 써와서 익숙하고, 화면도 크지 않아 웬만한 버튼이 어디 있는지 제 손이 다 알죠. 그래서 섬세한 정밀 작업도 가능해요.” 그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피곤할 날에는 점자 단말기를 PC에 연결해 작업한다. 이런 첨단기기들은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 등에서 지원을 받았다.시력을 잃고 마음의 시야를 넓히다채섭과의 인터뷰가 무르익어 가는데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기자와 마주 앉은 채섭이 손으로 식탁 아래를 가리켰다. 호연이가 긴 몸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코를 골며 숙면 중이었다. 호연이는 채섭의 다리 맡에 머리를 두고, 통통한 엉덩이로는 기자의 두 발등을 깔고 앉은 상태였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발등의 낯선 온기는 그 엉덩이에서 전해져온 것이었다.“호연이는 제가 평소 식탁에 혼자 있으면 적적할까봐 제 옆에 착 붙어 앉아요. 제가 밥을 다 먹거나 일을 마치면 호연이도 그제야 같이 일어나죠. 오늘은 비도 오는 와중에 ‘형아’랑 멀리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거예요.”비 내리는 날이면 채섭과 호연은 외출할 때 평소보다 신경이 곤두선다. 주변에 차량이나 사람이 있는지를 귀로 살펴야 하는데 빗소리 때문에 소리의 간섭이 많아진다. 채섭의 구령 소리가 호연이에게 잘 안 들리기도 한다. 호연이가 비옷을 입고 있어 ‘도그 토일렛’의 영문 약자인 DT1(소변), DT2(대변) 상황이 생기면 이 역시 만만치 않다.평소에는 호연이가 길가에서 대변을 볼 땐 엉덩이 쪽에 비닐봉지를 고정시켜 처리한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는 호연이에게 입혔던 비옷을 벗기고 하네스(반려동물의 몸을 고정하는 벨트)를 해체한 뒤 엉덩이 쪽에 비닐을 걸어야 한다. “안내견의 변이 아예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어요. 변이 땅에 떨어지면 시각장애인들은 어디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안 보여서 줍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엉덩이에 비닐을 잘 채워야 하는데 비 오는 날에는 좀더 난이도가 높죠.”채섭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호연이와 동네 공원을 산책할 때다. 함께 걸으며 작업해놨던 음원을 다시 차분히 들어본다. 그러다 수정할 게 떠오르면 스마트폰에서 카카오톡 보이스 기능을 켜서 또렷한 발음으로 혼잣말을 한다. 그 음성은 바로 문자로 전환돼 ‘나와의 채팅방’에 전송된다. 집에 가선 이 문자를 다시 음성으로 전환해 들으며 곡을 고친다. 이런 기능이 있어 채섭은 지인들과도 활발히 카톡을 주고받는다.그는 요즘 점자 공부에 어느 때보다 열심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전맹(완전히 보이지 않는 상태)’의 삶을 지금부터 대비하려는 것이다. 14살에 실명해 ‘장애 나이’로 치면 올해 27세인 그는 “시력을 잃어가며 오히려 마음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차라리 처음부터 전맹이었다면 더 나았겠다 싶을 때도 있어요. 눈이 더 안 보이는 상황에 매번 적응해야 하는 게 평생의 숙제거든요. 하지만 뒤집어보면 감사한 일이에요. 제가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 거니까요.”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임채섭 작곡가가 속한 뮤직프로듀싱 팀 ‘티스푼’ 유튜브 채널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 202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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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kg 견디는 모터로 인간 관절·근육 구현”[장애, 테크로 채우다]

    “경수야, 내 다리 한 짝 어디 있어?” 모터 소리로 웅웅대는 연구실. 김승환 씨(35)가 건너편에 앉아있던 박사과정 시경수 연구원을 불러 묻는다.“이거요?”경수가 선반에서 꽤 커다란 금속 물체를 꺼내온다. 언뜻 보면 씨름선수의 굵직한 종아리도 넉넉히 들어갈 보호대 같다. 승환이 자기 ‘다리 한 짝’을 들고 설명한다.“꽤 크죠? 이게 제가 지난번에 입었던 로봇의 다리에요. 다 분해해서 어디로 가고 이거 하나 남은 걸 겨우 찾았어요.”이곳은 대전 과학기술원(카이스트) 본원 기계공학동 3층에 있는 웨어러블 로봇 연구실, 일명 ‘엑소(exo)랩’이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해주는 로봇을 만드는 곳에 올해 1월 연구원으로 정식 합류했다. 여기에서 승환이 환한 얼굴로 ‘과거의 다리 한 짝’을 붙들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내년에 직접 입고 뚜벅뚜벅 걸을 ‘미래의 두 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다.‘사이보그 올림픽’을 향해연구실에 들어서자 어른 키만 한 로봇 4대가 기자를 맞았다. 천장 레일에 주렁주렁 매달린 웨어러블(착용형) 로봇 네 대 중 가장 압도적이었던 것은 영화 ‘아이언맨’을 연상시키는 ‘워크온수트4’. 허리와 다리 전체를 튼튼한 몸체로 감쌌고, 관절 부위엔 큼직한 구동기(모터)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가슴팍에는 태극마크까지 붙어있었다.“2020년 사이배슬론에 나가서 금메달을 딴 로봇이거든요.” 승환이 팔을 들어 로봇을 만지며 말했다.‘사이보그 올림픽’으로 불리는 사이배슬론은 신체장애인들이 첨단 보조 장비를 이용해 누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 겨루는 국제대회다. 4년마다 수십 개 국가 참가팀들이 스위스에 모여 진검승부를 벌인다. 2020년 대회 당시 카이스트 연구팀이 참여한 ‘엔젤로보틱스’팀은 하반신 완전마비 장애인이 보행 로봇을 입고 겨루는 경주에 출전했다. 장애물을 피하고, 앉았다가 일어나고, 경사로와 계단을 걷는 등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경기였다. 첫 출전인 2016년엔 동메달, 2020년엔 금메달을 따며 전 세계의 이목을 단번에 끌어모았다.▶2020년 대회 결승전 영상 보기승환은 내년 10월 스위스에서 열리는 사이배슬론 2024에 출전해 자신이 직접 입을 새 로봇을 연구 중이다. 그는 배꼽 아래로는 움직이는 것은 물론, 아무 외부감각을 느낄 수 없는 ‘하지 완전마비’ 장애를 가졌다. 비장애인에게 ‘걷기’는 본능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행위지만 하반신 마비 장애인들에겐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어렵다. 이들이 걸을 수 있도록 로봇은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지난 두 번의 사이배슬론에 모두 출전했던 김병욱 선수가 2020년 대회 때 사용했던 로봇을 착용하고 걷기 시범을 보였다.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동작이 아닌, 수많은 과정의 연속체다. 먼저 다리를 정렬하고, 몸을 45도 앞으로 기울인 뒤, 목발로 단단히 땅을 짚으면서 일어서 균형을 잡아야 비로소 완성된다.몸을 앞뒤로 조금만 움직여도 중심을 잃기 일쑤다. 목발을 바닥에서 떼고 두 다리로만 버티는 것에도 첨단 기술이 동원된다. 걷는 것은 더욱 복잡하다. 다리를 얼마나 들어올려야 하는지, 무릎을 언제 굽혀야 하는지, 발이 바닥에서 언제 떨어지고 닿는지, 그 무엇도 본능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로봇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구현해야 한다.연구실 한쪽에선 벽면 거치대에 매단 로봇 다리가 기계음을 내며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푸른색과 붉은색 그래프가 물결 모양을 그렸다. 파란 선은 ‘이렇게 움직여라’라고 미리 입력해둔 가동 계획이고, 빨간 선은 실제로 다리가 움직인 궤적을 기록한다. ‘랩장’을 맡고 있는 박사과정 김형준 연구원은 “빨간 선이 파란 선에서 많이 멀어지지 않아야 목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비어있는 로봇이 혼자 움직이게 하는 건 비교적 쉽다. 하지만 몸무게가 수십kg인 사람이 착용한 상태에서 수시로 바뀌는 무게중심을 실시간으로 보정하는 것은 복잡하다. 이때 휠체어 발판에 놓인 승환의 다리가 갑자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익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비 환자들에게 자주 오는 일반적인 증상이에요. 로봇에 탔을 때 이렇게 예고 없이 다리가 떨려도 저 ‘빨간 선’이 함께 흔들리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잡아줘야 제대로 걸을 수 있어요.”관절에 달린 모터는 200kg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만에 하나 오작동한다면 관절과 근육을 다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모든 동작은 극도로 정교하게 계산해야 한다. 그냥 로봇이 아닌, 사람이 입는 로봇이기 때문이다.수많은 ‘관절’과 ‘근육’의 기능을 특수 설계하기 위해 자재를 직접 공수한다. 견본도 종이를 오리고 점토를 붙여 만든다. 승환의 표현에 따르면 “전선과 볼트, 너트 빼고는 ‘톱니 하나까지’ 전부 직접 설계하는” 수준이다. 연구실 구석엔 착용부를 만들 때 쓰는 재봉틀까지 있다.걷겠다는 갈망, 두 번의 고비원래 승환은 공학이나 연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회사원으로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1년에 자가용 주행거리가 6만km를 훌쩍 넘겼다. 그 시절 집은 ‘잠자는 곳’이자 ‘씻고 옷 갈아입는 곳’에 불과했다. 그러다 교통사고가 났다. 그해 스물아홉 살이었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승환은 하반신을 내려다봤다. 멀쩡해 보였지만 감각이 없고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그는 마취가 안 풀렸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상처 봉합수술을 받던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 마취는 영영 풀리지 않았다. 척수 완전 손상이었다. 2년 넘는 재활 기간 내내 좌절과 희망이 번갈아 승환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의 중심을 굳건하게 잡아준 것은 여자친구였다. 자꾸만 입원실로 찾아오는 여자친구에게 몇 번씩이나 헤어지자는 말을 건넸지만, 여자친구는 못 들은 척을 했다. 주말에는 승환의 어머니와 간병을 교대했다. 다치기 전엔 한 번도 뵙지 못한 여자친구의 어머니도 병실로 찾아와 첫인사를 나눴다.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결국은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불호령’을 내렸다. 수화기 너머로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어떤 방식이든 좋으니, 식장에는 걸어서 들어와라.”결혼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승환의 몸 상태를 정확히는 모르고 있었기에 했던 말이다. 하지만 ‘예비 장인’의 말에 승환은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든 걷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수화기에 대고 되물었다.승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로봇’이었다. 보행 로봇을 타볼 방법, 도와줄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다. 얼마 뒤 ‘2020년 사이배슬론 참가자 모집 공고’를 발견하고선 단숨에 지원했다. 여러 관문을 통과해 최종 후보 7인에 선정됐다. 예비용 로봇도 맞췄다. 난생처음으로 ‘김승환’ 석 자를 써 붙인 로봇을 타고 걸음을 내디뎠다. 고지가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이튿날이었다. 갑자기 손발이 차가워지고 고열이 몰려왔다. 처음 간 병원은 ‘독감’을 의심하며 약을 처방해줬지만,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의료진은 ‘욕창’에 패혈증까지 진행됐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몸에 뾰루지 같은 것이 난 걸 하나 보긴 했다. 그런데 패혈증이라니… 중환자실로 실려 가면서도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근육까지 전부 녹인 거대한 피고름집을 긁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 자리에 남은 건 텅 빈, 주먹보다도 큰 구멍이었다. 대회 출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김승환’ 이름표가 붙었던 로봇은 낱낱이 분해돼 최종 출전자용 로봇 두 대의 예비부품으로 사용됐다. 현재 남은 것은 연구실 구석에서 겨우 찾아낸, 연구원인 경수가 승환에게 갖다준 다리 한 짝뿐이다. 퇴원에는 거의 반년이 걸렸다. 회사에 복직했고, 결혼을 했다. 아이도 생겼다. 삶은 꽤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커다란 공허함과 허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그러다 지난해 말, 마침내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카이스트 웨어러블 로봇 연구실이 낸 ‘장애인 채용’ 공고를 발견했다. 당시에도 재활을 위해 병원을 다니며 보행로봇 훈련을 놓지 않고 있던 그는 곧바로 지원했다.두 번째 도전에서도 역시나 고비가 찾아왔다. 재활 치료 과정에서 꼬리뼈 쪽에 손바닥만 한 물집이 생겨버린 것. 물집이 터져서 옷이 젖은 걸 알아차린 순간, 아찔함이 몰려왔다. 치료에 전념한 결과, 다행히 상처는 점차 회복됐다.다니던 회사에 망설이며 새 도전도 알렸다. “합격하면 여기를 그만둬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표는 “가야지! 지금 안 하면 언제 할래?”라며 단박에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마침내 카이스트 채용이 확정됐다. 회사 일을 마무리하고 사흘 만에 대전으로 향했다. 오전 9시, 첫 출근의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마음으로 들어선 연구실은… 텅 비어있었다. 한 남자만이 긴 앞머리를 머리띠로 밀어 넘긴 채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밤을 지새우다 여태 못 들어간 경수였다. 엑소랩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무에서 유’를 넘어, ‘유에서 완성’으로하반신 마비 장애인을 걷게 하는 로봇을 연구하는 이곳에서 승환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내놨다. 스무 명 가까운 연구원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장애 정도부터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하는지까지 낱낱이 브리핑했다.키가 180cm인 승환은 어깨끈을 매고 천장 레일에 매달리기도 했다. 근육이 빠져 가늘어진 장딴지와 허벅지를 연구원들이 직접 만져보게 하기 위해서다. 비장애인이라면 옷이 잘 맞지 않으면 불편함을 바로 알아채지만 하지마비 장애인은 다르다. 몸에 딱 맞게 착용하지 않으면 로봇 안에서 몸이 흔들려 균형을 잃거나 본체와 마찰하면서 화상을 입을 수 있다. 3D스캐너로 신체 치수를 재는 것만으론 마비된 몸에 맞는 로봇을 설계할 수 없다.사실 기존 연구원들은 승환과 거의 접점이 없었다. 대부분이 20대 비장애인이었고, 평생을 학교 안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지내왔다. 연구실을 이끄는 공경철 교수가 연구원들에게 “장애인을 채용하겠다”며 의견을 물었을 때, 적잖은 이들이 이메일로 부담을 표했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장애인 동료까지 잘 챙길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걱정과 달리, 이제는 많은 것들이 물 흐르듯 이뤄진다. 함께 일한 지 2, 3달 만에 연구원들과 승환은 스스럼없이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 휠체어에 탄 승환이 앞서가자 한 연구원이 성큼성큼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밀면서 말했다. “자율주행~!” 휠체어가 알아서 식당으로 갈 테니 몸을 맡기라는 농담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갈 때에도 굳이 누군가 뒤에서 뛰어나와 ‘승환을 위해’ 문을 대신 밀어주지 않는다. 그저 앞에 있던 승환이 문을 열자 다른 연구원들이 뒤따라 나왔다. 승환이 합류하면서 연구의 속도와 효율성도 껑충 뛰었다. 상상 속 몸이 아닌, 실제 장애가 있는 몸에 테스트하고 의견을 나누며 바로바로 수정할 수 있게 되면서다. 승환이 엑소랩의 ‘경쟁력’이 된 셈이다. 밤샘을 밥 먹듯 하는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승환은 아직까진 가능한 6, 7시 퇴근 원칙을 지키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 몸이 자산이자 자원이니까, 건강관리를 잘하는 것도 제 중요한 역할이에요” 그는 덧붙였다.다시 걸어보니 ‘걷는 로봇’ 포기 못 해내년 사이배슬론 경기 난이도는 4년 만에 훌쩍 높아진다. 아직 보행로봇의 ‘필수품’인 목발 없이 박스를 든 채 걸어야 하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높은 부엌 찬장에 있는 물건도 꺼내야 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겨루는 수준이다.2016년 첫 도전을 앞두고 연구팀과 출전자들은 사실상 미완의 로봇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합숙까지 불사한 결과, 경력과 자본으로 무장한 해외 팀들을 상대로 두 번 연속 기적을 일궜다.그때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면, 지금은 ‘유’를 ‘완성’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박사과정 박정수 연구원은 “이제 다음 목표는 장애인이 도움 없이 스스로 착용할 수 있는 로봇”이라고 했다.“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거예요. 지금은 완전히 ‘일대일 맞춤’이라 대당 1억 원이 넘거든요. 입는 것도 두세 명이 도와야 간신히 3분 걸리고요. 이젠 본체는 공유하고, 몸에 밀착되는 ‘착용부’만 3D프린터로 정교하게 맞추는 방법을 연구하는 거예요.”가격이 내려가고 입기도 간편해지니까 누구나 로봇을 입을 수 있는 단계로 한 걸음 더 앞서간다는 것. 정수는 “대회에서는 금메달이라는 최대 성과를 거둬봤잖아요”라며 “이번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걸 만들어서 더 큰 ‘임팩트’를 주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물론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로봇만 입으면 비장애인과 같은 일상을 즐길 정도의 상용화가 단숨에 이뤄지기는 어렵다. 상용화는 기술 발전뿐 아니라 사회 인프라와 법률, 문화까지 복잡하게 얽힌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이동성이 좋은 휠체어를 넘어서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승환이 보행 로봇 개발에 매달리는 이유는 다시 걸어봤기 때문이다. 로봇을 처음 탄 순간 ‘걸었던 삶’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가족과 산책하고,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맛집에도 문턱 걱정 없이 드나들던 예전의 일상이 눈에 선했다. 승환은 “어떻게든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걸 느껴보니, 더 포기할 수가 없어졌다”고 그는 말했다.하반신 장애인에게 걸음은 그 자체로 도전이자 스포츠다. 휠체어가 몸의 일부라면, 로봇은 극한에 도전하려 서킷을 달리는 스포츠카다. 승환이 덧붙였다. “자동차도 100년 전에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였잖아요. ‘걷는 로봇’이 지금은 스포츠카처럼 소수를 위한 고도의 기술이지만 10년 뒤에는 달라지지 않을까요.”대회까지 남은 일정을 설명하는 승환의 휠체어 등받이에 노란색 호랑이 모양 뜨개 인형이 달랑거렸다. “아들이 호랑이띠거든요. 태명이 ‘빅토리(승리)’ 할 때 토리였어요.”얼마 전 돌을 앞두고 가족사진을 찍을 때, 토리는 카이스트의 마스코트인 ‘넙죽이’ 인형을 작은 손으로 꼭 붙잡았다. 마치 이곳이 아빠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했다.승환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들이 언젠가 “아빠는 왜 못 걸어?”라고 물어 올 때 “아빠는 다쳤지만 로봇을 만들어서 이렇게 걷잖아”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들이 친구들에게 “너희, 로봇 타봤어? 우리 아빠는 탄다!”라고 자랑하는 얼굴도 상상하곤 한다.6년 전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굳어졌을 때 승환을 일으켜 세운 건 가족이었다. 이제는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서고 싶다는 무수한 꿈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재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로봇을 처음으로 타 봤을 때, 연구실에 들어온 지금, 승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승환은 호랑이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저한테는 로봇을 타다가 다쳐도 그 자체가 과정이에요. 설령 제 다리가 부러져도 로봇만 탈 수 있다면 괜찮아요. 아팠던 적, 절망했던 적은 많지만 걷겠단 생각을 포기한 적은 없으니까요.”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기획·취재: 대전=홍정수 hong@donga.com 신광영 이채완 기자▽사진: 대전=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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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올 3월 미국 미니애폴리스 공항 입국장에 군복 차림의 남성 10여 명이 휠체어를 타고 들어섰다. 군복 어깨 부분에 우크라이나군을 상징하는 삼지창 표시가 있었는데, 길게 늘어뜨린 팔소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허벅지까지 말아 올린 바짓단 아래로는 둥글게 봉합된 무릎이 드러나 있었다. 이들은 헤르손, 바흐무트, 마리우폴 등 죽음의 격전지에서 팔다리를 잃은 우크라이나 군인들이었다. 그중 한 명인 필로넨코(22)의 사연이 뉴욕타임스(NYT)를 통해 전해졌다. 그는 지난해 부상당한 전우를 옮기던 중 지뢰를 밟아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군 입대 전 오른쪽 다리에 새겼던 ‘신(God)’이란 문신은 전쟁터에 남겨졌다. 함께 입국한 다른 군인들 역시 포격을 당하거나, 지뢰를 밟거나, 부상병을 부축하다가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 비영리단체의 지원으로 미네소타주 재활센터에서 첨단 의수와 의족을 맞춘 뒤 생애 첫걸음을 떼는 아기처럼 걷는 법을 배운다. 미 메릴랜드 재활센터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절단 장애’ 미군들로 가득했던 이곳에 우크라이나 군인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퇴역 미군들이 기증한 의족들은 이들 신규 입소자들의 다리가 되고 있다. 정찰 임무 중 포탄에 맞아 두 다리를 잃은 페둔(24)은 그렇게 지원받은 의족을 우크라이나 국기 색인 노랑과 파랑으로 칠했다. 미국에는 이들을 공항에서 픽업해 재활센터로 데려다주거나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어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적지 않다. 한 자원봉사자는 NYT에 “미국에 도착할 땐 영혼이 부서진 듯 보였던 이들이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 새로 태어난 듯 다른 사람이 된다”고 했다. 지난해 2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사망한 우크라이나 군인은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수십만 명의 부상자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민간인 부상자까지 합하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이들 중 해외에서 재활 기회를 얻는 건 소수에 불과하다. 전쟁이 나면 재활 수요가 폭증하지만 재활 인프라는 취약해진다. 병원이 공격을 받게 돼 병상은 줄고, 의료 인력은 흩어진다. 약품이나 보조기구도 귀해진다. 전력난까지 겹친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정확히 이런 상황이다. 팔다리를 잃거나 영구 척추손상 등 장애를 입은 군인과 시민들이 응급수술만 받고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30대 여성 나탈리야는 지난해 4월 딸과 기차역에서 피란 열차를 기다리다가 러시아의 포격을 받았다. 잠시 기절했다가 눈을 떴을 때 11세 딸의 두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자신의 한쪽 다리도 사라져 있었다. 그날 기차역에선 50명이 숨지고 두 모녀처럼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피소에서 잠시 물을 구하러 나왔다가 포탄에 다리를 잃은 16세 소녀, 아파트 잔해 속에서 팔 없이 구조된 임신부 등 수많은 민간인이 장애를 갖게 됐다. 이제 우크라이나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장애인 인프라가 절실해지고 있다.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의 핵심은 인적자원의 복구다. 다르게 말하면 무너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유럽연합(EU)이 회원국 재활병원에 우크라이나 중상자 2000여 명을 나눠 수용한 것도 이런 취지가 반영된 것이다. 일본도 매년 10∼20명의 부상병을 받기로 했다. 첨단 의료와 기술을 갖춘 우리 역시 재활 지원에 적극 동참할 필요가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전장에서 두 팔과 두 눈을 잃은 남편을, 부인이 따뜻하게 끌어안은 사진이다. 이 20대 부부는 눈과 팔의 빈자리를 채워줄 기술과 재활기관을 애타게 찾고 있다. 1년 반이 되어가는 전쟁은 언젠가 끝날 테지만 장애인으로 다시 삶을 시작하는 그들은 앞으로도 자신과의 전투를 치러야 한다. 잘 디자인된 보조기구들이 몸의 일부로 채워진다면 그들의 전투가 조금은 덜 외로울 것이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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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올 3월 미국 미니애폴리스 공항 입국장에 군복 차림의 남성 10여 명이 휠체어를 타고 들어섰다. 군복 어깨 부분에 우크라이나군을 상징하는 삼지창 표시가 있었는데, 길게 늘어뜨린 팔소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허벅지까지 말아 올린 바짓단 아래로는 둥글게 봉합된 무릎이 드러나 있었다. 이들은 헤르손, 바흐무트, 마리우폴 등 죽음의 격전지에서 팔다리를 잃은 우크라이나 군인들이었다.그중 한 명인 필로넨코(22)의 사연이 뉴욕타임스(NYT)를 통해 전해졌다. 그는 지난해 부상당한 전우를 옮기던 중 지뢰를 밟아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군 입대 전 오른쪽 다리에 새겼던 ‘신(God)’이란 문신은 전쟁터에 남겨졌다. 함께 입국한 다른 군인들 역시 포격을 당하거나, 지뢰를 밟거나, 부상병을 부축하다가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 비영리단체의 지원으로 미네소타주 재활센터에서 첨단 의수와 의족을 맞춘 뒤 생애 첫걸음을 떼는 아기처럼 걷는 법을 배운다.미 메릴랜드 재활센터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절단 장애’ 미군들로 가득했던 이곳에 우크라이나 군인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퇴역 미군들이 기증한 의족들은 이들 신규 입소자들의 다리가 되고 있다. 정찰 임무 중 포탄에 맞아 두 다리를 잃은 페둔(24)은 그렇게 지원받은 의족을 우크라이나 국기 색인 노랑과 파랑으로 칠했다.미국에는 이들을 공항에서 픽업해 재활센터로 데려다주거나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어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적지 않다. 한 자원봉사자는 NYT에 “미국에 도착할 땐 영혼이 부서진 듯 보였던 이들이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 새로 태어난 듯 다른 사람이 된다”고 했다. 지난해 2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사망한 우크라이나 군인은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수십만 명의 부상자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민간인 부상자까지 합하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이들 중 해외에서 재활 기회를 얻는 건 소수에 불과하다. 전쟁이 나면 재활 수요가 폭증하지만 재활 인프라는 취약해진다. 병원이 공격을 받게 돼 병상은 줄고, 의료 인력은 흩어진다. 약품이나 보조기구도 귀해진다. 전력난까지 겹친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정확히 이런 상황이다. 팔다리를 잃거나 영구 척추손상 등 장애를 입은 군인과 시민들이 응급수술만 받고 집으로 돌려보내진다.30대 여성 나탈리야는 지난해 4월 딸과 기차역에서 피란 열차를 기다리다가 러시아의 포격을 받았다. 잠시 기절했다가 눈을 떴을 때 11세 딸의 두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자신의 한쪽 다리도 사라져 있었다. 그날 기차역에선 50명이 숨지고 두 모녀처럼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피소에서 잠시 물을 구하러 나왔다가 포탄에 다리를 잃은 16세 소녀, 아파트 잔해 속에서 팔 없이 구조된 임신부 등 수많은 민간인이 장애를 갖게 됐다. 이제 우크라이나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장애인 인프라가 절실해지고 있다.향후 우크라이나 재건의 핵심은 인적자원의 복구다. 다르게 말하면 무너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유럽연합(EU)이 회원국 재활병원에 우크라이나 중상자 2000여 명을 나눠 수용한 것도 이런 취지가 반영된 것이다. 일본도 매년 10~20명의 부상병을 받기로 했다. 첨단 의료와 기술을 갖춘 우리 역시 재활 지원에 적극 동참할 필요가 있다.최근 우크라이나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전장에서 두 팔과 두 눈을 잃은 남편을, 부인이 따뜻하게 끌어안은 사진이다. 이 20대 부부는 눈과 팔의 빈자리를 채워줄 기술과 재활기관을 애타게 찾고 있다. 1년 반이 되어가는 전쟁은 언젠가 끝날 테지만 장애인으로 다시 삶을 시작하는 그들은 앞으로도 자신과의 전투를 치러야 한다. 잘 디자인된 보조기구들이 몸의 일부로 채워진다면 그들의 전투가 조금은 덜 외로울 것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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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cm 낮은 눈높이로 ‘無장애’를 디자인하다[장애, 테크로 채우다]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김예솔 씨(35)가 바라보는 세상은 걷는 사람들보다 50cm가 낮다. 그의 눈높이에선 걷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올해로 스웨덴 생활 6년 차. 예솔이 다니는 공공도서관에는 도서 검색대의 높이가 제각각이다. 스웨덴인 평균 신장에 맞춘 것부터 키가 작은 사람, 어린이 등에 맞춰 다양한 높이의 검색대가 나란히 있다. 옷가게에서 쇼핑을 하다 휠체어 리프트를 발견하기도 한다. 매장 내 단 높이가 달라 두 걸음만 올라가면 되는 계단인데 말이다. 시내버스를 타면 내리는 문 앞에 휠체어 공간이 널찍하게 있다. 그곳은 유모차를 가지고 버스에 탄 부모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스웨덴에선 마치 누군가의 상황을 미리 헤아려보고 빈틈을 채워준 것처럼 배려가 곳곳에 녹아 있어요.”철저히 ‘걷는 사람’에 맞춰진 가구들하지만 스웨덴에서도 집에 들어오면 한국과 다를 게 없다. 인테리어, 특히 가구는 철저히 걸을 수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설계돼 있다. 휠체어 이용 경력 28년 차인 예솔에게도 하루하루가 도전이다. 휠체어에 앉아 가스레인지 불을 켜면 바로 눈앞에서 불이 타오른다. 싱크대가 높아 재료 손질이나 칼질도 만만치 않다. 수도꼭지에도 손이 잘 닿지 않는다. 찌개가 잘 끓고 있는지 냄비 안을 들여다보기도 어렵다. 휠체어를 탄 채 뜨거운 요리를 거실 식탁으로 옮기려면 외줄타기를 하듯 묘기를 부려야 한다. 식탁이나 책상은 휠체어 탄 사람에겐 너무 높거나 낮을 때가 많다. 다리 사이 간격도 좁아서 사람들과 같이 테이블에 앉으려면 바퀴에서 딱 걸린다.예솔은 “장애인이어서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장애가 있으면 혼자 일상을 꾸려가기 어렵게 디자인된 환경 탓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의 가구 디자인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다른 몸’을 가진 사람에게도 안전하고 편안한 가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예솔은 한국의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엔 KT에 입사해 온라인서비스 화면을 디자인했다. 일은 적성에 맞았지만 모니터 화면이 아닌, 현실의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그가 4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택한 것이 바로 가구였다. 2018년 스웨덴 가구기업인 이케아(IKEA)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길에 올랐다. 스웨덴 남서부에 있는 룬드대에서 산업디자인 석사과정을 마쳤다.예솔이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가구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된 일화가 있다. 그날은 스웨덴인 친구 안나(52)의 초대로 저녁식사 자리에 간 날이었다. 50년 가까이 ‘걷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는 2년 전 하반신이 마비된 후에도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 요리해주는 걸 여전히 즐겼다. 그날도 안나는 평소처럼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직접 음식을 날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를 쟁반에 담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렸다. 바퀴를 밀 때마다 쟁반 위 접시가 달그락거렸다. 예솔과 친구들은 거실 식탁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안나를 바라봤다. 장애인이 도와 달라고 하기 전까진 나서지 않는 게 스웨덴식 매너였다.“안나가 왜 직접 음식을 나르려 했는지 이해가 돼요. 휠체어를 탄다고 의존적일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우아해 보이지 않았어요. 안나는 친구들에게 근사하게 대접하는 게 중요한 사람인데 그러려면 안나에게 뭐가 필요할까 생각하게 됐어요.”그녀를 자유롭게 해준 가구들기자가 3월 말 스웨덴 룬드에 있는 예솔의 집에 들어섰을 때 크림색 벽면에 원목 가구들이 배치된 세련된 북유럽 인테리어가 눈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현관에 들어서자 허리 높이에 손바닥만 한 정사각형 버튼이 있었다. 휠체어에 탄 상태로 버튼을 눌러 현관문을 자동으로 여닫을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각 방 문에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긴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방은 물론이고 욕실까지 문턱이 모두 제거돼 있었는데 턱을 제거한 곳을 벽 색깔과 같은 톤으로 마감해 눈에 잘 띄지 않았다.가구들도 자세히 살펴봐야만 미세한 차이를 드러냈다. 휠체어 타는 1인 가구로 스웨덴에서 매년 이사를 다니면서, 휠체어 타는 친구들의 불편을 보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예솔이 직접 구현해낸 가구들이었다. 우선 주방에 바퀴가 달린 원목의 푸드 트레이가 있었다. 안나와의 저녁식사에서 모티브를 얻은 바로 그 가구였다. 휠체어에 탄 채 가볍게 밀기만 하면 음식이나 무거운 물건을 옮길 수 있게 했다. 구멍 뚫린 직물로 사이드바를 만들어 휠체어에 앉아서도 안에 뭐가 놓여 있는지 잘 보였다.거실의 원형 테이블은 다리가 3개였다. 보통 4개인 테이블 다리를 3개로 줄이고, 대신 다리 사이 간격을 넓혔다. 테이블 다리 사이가 좁아 휠체어 바퀴가 걸리는 문제를 개선한 것이었다. 옷장을 열자 위쪽에 있는 옷걸이 봉에 긴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이걸 잡아당기면 옷걸이 봉이 아래로 내려와 휠체어에 앉아서도 옷을 쉽게 걸고 꺼낼 수 있었다.“이 가구들이 제겐 자유의 첫걸음이에요. 자유가 대단한 게 아니에요. 원할 때 문을 여닫을 수 있고, 옷 걸고 싶을 때 옷 걸고, 요리한 음식을 식탁에서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집에서 이런 걸로 고민하지 않잖아요. 휠체어 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야 해요.”예솔은 휠체어 이용자들도 쓰기 편한 가구를 만들기 위해 스웨덴인 목수인 페더 칼슨과 힘을 합쳤다. 페더는 예솔의 룬드대 재학 시절 목공예 실습 강사였다. 예솔이 디자인을 그려서 넘기면 페더가 시제품으로 만들었다. 예솔은 시제품을 써보며 설계를 보완했고, 어느 정도 완성품이 나오면 휠체어를 타는 지인들에게 보내 피드백을 받았다.두 사람은 2021년 ‘릴라 엘리펀트(작은 코끼리)’라는 가구회사를 차려 제작을 시작했다. 1년 사이에 5점의 가구가 세상에 나왔고, 푸드 트레이 ‘클룸픽(Klumpig)’은 한국에도 진출해 판매되고 있다. 페더는 “저 역시 장애인의 삶을 잘 몰랐는데 예솔과 작업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됐다”고 했다.‘장애 초래하는 환경’ 바꾸는 디자인의 힘예솔은 스웨덴에서 틈틈이 가구 디자인을 하면서 직장 생활도 병행하고 있다. 전 세계 주요 여행지의 숙소나 박물관, 각국의 대형마트, 백화점 등의 장애인 접근성 정보를 제공해주는 정보기술(IT) 플랫폼 회사에 다닌다. 휠체어용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시각장애인용 점자나 청각장애인용 보조 장치가 구비돼 있는지 등을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을 디자인하는 게 예솔의 업무다.회사 이름은 ‘장애인들 세상을 발견하다(Handicap people discovers the world)’란 말을 줄인 ‘핸디스커버’다. 이 회사 창업자 세바스티앵에겐 근육병으로 다섯 살 때부터 휠체어를 타온 아들이 있다. 그는 고향인 프랑스를 비롯해 여러 나라로 가족여행을 갈 때마다 휠체어 바퀴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에 수없이 부딪혔다. 장애인 시설이 없으면, 없다고 알려만 줘도 헛걸음을 줄여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런 서비스가 없었다.세바스티앵(사진)은 고령화 등으로 신체 기능에 제약이 생긴 인구가 늘고 있고, 장애를 갖게 된 후에도 여행과 쇼핑을 즐기며 삶의 질을 유지하려는 수요가 많아진다는 점에 착안했다. “경제력을 갖춘 은퇴자들이 많고, 장애인들은 만족스러운 서비스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는 성향이 강해 시장성이 있습니다. 기업들도 유럽연합(EU) 정책에 따라 장애인 시설 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를 알리고 싶어 해 양쪽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거죠.”장애 후에도 삶이 우아하도록3월 말 스웨덴 룬드는 연일 비가 내렸다. 기자는 룬드대 안 카페에서 인터뷰를 위해 예솔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창문 너머로 예솔이 비를 맞으며 캠퍼스를 가로질러 오는 게 보였다. 휠체어 앞에 동력장치를 결합해 마치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로 들어온 예솔은 오토바이 앞부분처럼 생긴 동력장치를 분리해 구석에 ‘주차’했다. 그러곤 빗방울이 맺힌 바람막이 잠바를 탈탈 털어 휠체어 의자에 건 뒤 기자와 마주 앉았다.―스웨덴에 살아보니 어떤가.“한국과 비교하자면 장애인이 살기에 스웨덴은 제도가 좋고, 한국은 사람이 좋다. 스웨덴은 돌봄 시스템이 탄탄하지만 스웨덴 사람들은 장애인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먼저 손 내밀지 않는다. 장애인이 도움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나서면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제도에 빈틈이 많지만 그 틈을 사람들이 메운다. 한국에선 휠체어를 타고 가다 문제가 생기면 꼭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왜 가구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나.“휠체어를 타다 보면 세상이 내 얼굴에 대고 ‘너는 여기 들어오지 마’라면서 밀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배타적인 환경을 만드는 첫 장벽이 가구인 것 같다. 가구는 신체가 환경과 맞닿는 첫 지점이니까. 집에 있는 가구마저 장애인에게 차별적인 경우가 많다. 일부 장애인용 의료기구가 있긴 하지만 입원할 때만 일시적으로 쓴다. 퇴원 이후 집에서 보내게 될 여생을 위한 디자인이 필요하다.”―가구도 상품인데 많이 팔려야 하지 않나.“물론이다. 휠체어 장애인에게 최적의 디자인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인 디자인을 하고 싶다. 스웨덴에서 유모차를 가지고 시내버스에 탄 부모들이 휠체어용 공간을 애용하듯 장애인을 우선 고려한 디자인은 보편적으로도 유용할 수 있다. 요즘 스마트폰 화면 배경을 검은색으로 설정하는 다크모드도 마찬가지다. 원래 시각장애인들이 휴대전화를 볼 수 있도록 도입한 기능인데 간호사들이 많이 쓴다. 야간에 입원 환자들 점검할 때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을 다크모드로 하면 환자들이 덜 방해받기 때문이다.” (예솔이 만든 푸드 트레이 ‘클룸픽(Klumpig)’을 제작·판매하는 ‘아이엠히어’ 정혜원 대표는 “구매 고객들 중 상당수가 40, 50대 비장애 여성들이다. 본인들이 써보시고 부모님께 드리려고 재구매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어떤 가구를 지향하나.“아름답고 우아한 가구를 만들고 싶다. 삶의 어느 순간 장애를 갖게 되더라도 만족스러운 환경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저 역시 그랬고, 장애를 갖게 되면 그동안 추구했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좌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디자인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사고를 당할 수 있고, 여성들은 출산을 한다. 삶의 일정 기간은 몸이 불편한 상태로 살아간다. 장애가 장애로 느껴지지 않게 해주는 가구는 많은 사람에게 필요할 수 있다.”―디자이너란 어떤 사람인가.“디자이너가 세상을 보는 눈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 디자인이다. 그래서 평소 타인의 삶을 섬세하게 관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그들의 눈이 되어줄 수 있다.”내 몸의 소중한 일부, 휠체어기자는 예솔의 집으로 옮겨 사진 촬영을 하며 조심스럽게 제안을 하나 했다. 평소에 휠체어에서 내려와 쉴 때는 어떻게 하는지 찍고 싶다고 하자 예솔은 거실의 그네 의자에 옮겨 앉았다.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예솔이 말했다.“저기 휠체어 좀요.”기자가 무심코 카메라 앵글 밖으로 옮겨놨던 휠체어를 갖다 달라는 말이었다. 예솔은 휠체어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사진기자는 휠체어의 검은색이 주변 크림색 배경에 비해 너무 색감이 강해 잠시 빼놓고 찍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예솔은 휠체어가 사진에 함께 담겼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기자는 다음 날 예솔과 인터뷰를 하며 휠체어가 사진에 담기길 원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저는 척수염이 찾아온 일곱 살 때부터 28년간 휠체어를 타온 사람이에요. 제 몸의 자연스러운 일부죠. 특별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촬영을 하는데 휠체어가 옆에 없어서 순간 가까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날 인터뷰에서 예솔은 “장애라는 것을 안타깝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저의 장애를 진솔하게 대하고 싶다”고 했다. “누구나 자신의 민낯을 마주보는 게 힘들지만 용기 내서 직시하고 나면 그때부턴 괜찮아지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끌어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젠 몸에 있는 하나의 점처럼 느껴져요.”가구로 스웨덴 뒤흔들다예솔은 4월 말 기다리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가 만든 가구들이 룬드시가 속한 스웨덴 스코네주(州) 주관 ‘2023 디자인 어워드’ 대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예솔은 스웨덴의 디자인 공모전에 여러 번 도전했지만 낙방을 거듭했다. 마침내 디자인 선진국 북유럽에서 진가를 인정받은 것이다. 주최 측은 “어떤 신체 조건을 갖고 있든 충만한 일상을 보낼 가치가 있다는 접근법은 스웨덴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통념을 뒤흔들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가구 디자인을 계속하려면 아직은 지속적인 펀딩이 필요해요. 그래서 공모전 때마다 계속 냈는데 이번엔 진짜 될 거라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번번이 떨어졌어요. ‘이 작업을 세상이 과연 알아봐 줄까’ 하는 자기 의심이 들 때도 많았죠. 제가 너무 실망하니까 페더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의자 하면 딱 떠오르는 디자이너, 조명 하면 생각나는 그 디자이너… 그 스타 디자이너들이 알려지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고요. 제가 너무 빨리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예솔은 4월 16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열린 ‘걸즈온휠즈’라는 토크콘서트에 참석했다. 휠체어를 타는 2030세대 여성들이 모여 각자의 일과 일상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초등학생부터 3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이 탄 휠체어 50여 대가 무대 앞을 가득 메웠다. 행사 초대를 받고 스웨덴에서 날아온 예솔이 무대에 올랐다. 휠체어들 사이로 한 20대 여성이 자신의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예솔은 유심히 바라봤다. 예솔은 그 여성의 귓가에 펼쳐놓듯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여러분, 제 소개를 해볼게요. 지금 저는 휠체어를 타고 있어요. 짙은 회색의 수동 휠체어예요. 제 머리는 검은색에 단발머리이고, 위아래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었습니다. 오늘 좀 밝은 느낌을 내보고 싶어서요. 자 그럼, 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특별취재팀>▽기획·취재:룬드(스웨덴)=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룬드(스웨덴)=송은석 기자▽디자인: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김예솔 디자이너 유튜브 계정룬드(스웨덴)=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 202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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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 대신 로봇팔로 라이딩 “세상에 한발짝 더”[장애, 테크로 채우다]

    “그날 사이클 트랙에 들어서는데 컨디션이 최고였어요. ‘이래도 나를 국대(국가대표)로 안 뽑아?’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죠. 신기록을 낼 거 같아서 경기 전에 주최 측에도 얘기해놨어요. 원래 뒤에서 출발한 선수가 앞 선수를 따라잡으면 시합이 도중에 끝나는데 제가 앞 선수 따라잡더라도 흐름을 끊지 말아달라고요.”지난해 10월 전국체전 사이클 경기가 열린 강원 양양 벨로드롬에 장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번 경기는 추월 승부가 아니고 기록경기입니다. 심판진은 경기 중단 없이 끝까지 진행해주세요.’장애인 사이클 국가대표 상비군인 나형윤 선수(39)는 이날 자신감에 부풀어있었다. 출발선에 선 형윤은 한바퀴가 333m인 달걀형 트랙을 찬찬히 살폈다. 승부를 겨룰 다른 선수는 반 바퀴 앞인 맞은편에서 출발대기 중이었다. 이 트랙을 12바퀴(총 4km) 도는 경기였다. 형윤은 몇 주 전 비공식 4km 경기에서 기존 신기록을 훌쩍 넘겼다. 국가대표 선발전인 이번 체전에서 그때처럼만 달려준다면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다.형윤은 출발선 옆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려 두 사람과 눈을 맞췄다. 딸 하나린(8)과 부인 박미선(39) 씨였다. 하나린은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딸아이는 이날 아침에도 평소처럼 형윤에게 ‘로봇팔’을 건네며 “아빠, 오늘도 일등 해”라고 말했다. 두 팔이 없는 형윤은 딸이 로봇팔이라고 부르는 전자의수를 착용하고 사이클을 탄다. 팔뚝 절단 부위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의수의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할 수 있다.“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린, 아빠 팔 좀 갖다 줘’ 이렇게 말하곤 해요. 경기 있는 날 아침엔 드라이기나 손 선풍기로 의수를 꼼꼼히 말려요. 의수와 피부 접촉면에 땀이 차면 오작동이 날 수 있어서요.”국가대표 선발전 그날출발 신호가 울리자 형윤은 ‘댄싱’을 시작했다. 안장에서 엉덩이를 뗀 채 사이클을 좌우로 흔들며 매섭게 치고 나갔다. 사이클 선수들은 속도를 빠르게 끌어올리기 위해 핸들 손잡이를 몸 쪽으로 잡아당기며 춤을 추듯 좌우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이 때 페달을 힘껏 구르면서 동시에 핸들을 강하게 잡아당길수록 속도가 빨리 붙는다. 형윤에겐 전자의수가 빠지지 않도록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 때만 해도 경기는 순조로운 듯 했다.댄싱으로 반 바퀴쯤 달려 속도가 붙자 형윤은 안장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사이클 바퀴에서 나는 ‘쐐’ ‘쐐’ 소리가 고요해진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이제 형윤은 핸들 손잡이에서 손을 떼서 핸들 가운데 세로로 뻗어있는 티티바(TT바·Time Trial Bar)로 옮겨 잡을 타이밍이었다. 티티바를 잡아야 몸이 공처럼 모아져 공기 저항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왼손부터 티티바로 옮겨 잡으려고 하는데 핸들을 쥔 손이 펴지지가 않는 거예요. 손이 그 상태로 잠겨버린 거죠. 댄싱할 때 팔을 살살 당긴다고 당겼는데 힘이 들어갔는지 의수가 살짝 들려서 배터리 접촉 불량이 된 거 같더라고요. 급한 마음에 배터리가 단자와 잘 맞붙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오른팔을 핸들에서 떼서 왼팔을 막 때렸어요. 근데 왼손이 움직이기는커녕, 오른손마저 충격 때문에 오류가 나서 손이 벌려진 채로 말을 듣지 않더라고요.”응원석에 있던 미선은 비틀비틀 트랙을 달리는 남편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봤다. 승부욕이 강한 형윤에게 미선은 “욕심 내지 말고 다치지 말자”는 말을 자주 해왔다. 미선에게 남편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를 들려왔다.“손이 망가졌어! 손이 안돼!”형윤은 오른손이 공중에 들린 채로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사력을 다해 페달을 구르고 있었다. 사이클 전용 경기장인 밸로드롬은 트랙 양끝에 있는 반원 모양 곡선주로의 경사가 40도 정도로 가파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선수들이 트랙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형윤은 파도 꼭대기에 선 서퍼처럼 아슬아슬하게 곡선주로를 달렸다. 몸이 부서지고 난 뒤 형윤이 두 팔을 잃던 날 저녁은 강풍이 불었다. 그가 강원도 최전방인 22사단 GOP 부대 중사로 근무하던 2006년 11월이었다. 강풍에 고압선이 끊어져 북쪽을 비추는 철책 경계등이 모두 꺼져버렸다. 야간에 북한군의 동태를 살피기 어렵게 된 비상사태였다. 상급부대에서 전기 기술자를 급파했다. 그 기술자는 바람이 계속 불어 위험하다며 복구 작업을 포기했다.그러자 부대장은 형윤에게 작업을 청했다. 형윤은 부대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봇대에 올랐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고압전기가 양팔과 겨드랑이, 허벅지 등을 관통해 몸 곳곳이 터져나간 상태였다. 8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두 팔은 절단해야 했다. 이듬해 전역할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형윤은 중고교 동창이자 동갑인 미선이 처음 문병을 왔던 날 짓궂게 인사를 건넸다. “야 이 기집애야, 오빠가 다쳤는데 이제야 오냐.” 미선은 응수했다. “여자 동창들 중에 나 혼자 왔거든. 고마운 줄이나 알아.”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5년간의 연애 후 2014년 결혼했다. 결혼식 날 형윤은 실리콘으로 된 의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지켜봐온 하객들은 저마다 눈물을 쏟았지만 신랑 신부는 예식 내내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이듬해 딸이 태어날 때만해도 형윤은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팔을 잃은 청년 장애인이 생계를 위해 마련한 나름의 대안이었지만 결국 처분했다. “아이에게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아빠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서 복지시설에 취업했어요.” 형윤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태권도와 철인3종을 하는 장애인들을 알게 됐고 그들의 권유로 운동을 시작했다. 금세 소질을 보인 형윤은 철인3종 가운데 하나인 사이클 선수가 됐다. 그는 “제가 (사이클을) 잘은 못 타도, 할 수 있는 거라서 도전하게 됐다”고 했다.전자 의수를 착용하면 자전거를 타는 게 가능했다. 브레이크는 안장 바로 밑 프레임에 옮겨 달아 허벅지를 오므리면 잡을 수 있게 개조했다. 또 고개만 숙이면 물을 마실 있도록 긴 투명 빨대를 물통에서 핸들 앞까지 연결했다. 포스코1%나눔재단 등에서 지원받은 보조기구들도 ‘빈틈’을 메워줬다. 형윤은 마음이 답답한 날이면 친구들과 집이 있는 가평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로 다녀오기도 했다. 자전거는 장애를 갖게 된 뒤 움츠려드는 형윤이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준 친구였다.장애인 사이클은 장애 정도에 따라 5등급으로 나뉘고 1등급에 가까울수록 중증인데 형윤은 4등급으로 분류됐다. 등급에 따라 가중치를 적용하기 때문에 경증인 선수가 중증 선수보다 순위가 높으려면 기록이 월등히 좋아야 한다. 형윤은 지난 4년 간 한 단계씩 올라서며 국가대표 상비군이 됐다.장애인이 운동선수를 직업으로 유지하려면 국가대표가 돼야 한다는 게 형윤의 생각이었다. 그래야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고 거기서 포인트를 쌓아야 패럴림픽에도 나가며 후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부서지고 난 뒤 비로소 시작한 사이클은 그에게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게 해줬다.멘탈이 터지고 딸의 목소리만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인 스피드로 승부하는 사이클 트랙 경기에선 몸을 최대한 낮춰 공기저항을 줄여야 한다.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달리던 형윤은 균형을 잡으려 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페달을 굴러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번 경기를 통해 국가대표가 되고자 했던 형윤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정말 중요한 순간에 오작동이 와버리니까 멘탈이 터져버렸어요. 코치는 ‘그냥 달려!’ 이러는데 저는 그냥 멘탈이 나가버리더라고요.”관중석에 있던 8살 딸이 미선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 오늘 왜 그래?”“아빠가 손이 고장 나서 넘어질지도 몰라. 하나린이 아빠 잘 타라고 응원해줄래.”네 살 때부터 아빠 경기를 따라다녔던 딸은 형윤이 질주할 때면 자그마한 몸으로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응원했다. 꼬마의 우렁찬 목소리에 다른 관중들도 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는 일이 많았다.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수줍음을 느끼게 됐는지 응원소리가 작아졌지만 이날만큼은 예전처럼 온 힘을 다했다. ‘쐐~’ ‘쐐~’ 소리만 나던 경기장에 여리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아빠!”, “아빠 파이팅!”, “아빠 이겨라!” 시합을 계속해야 할지, 포기할지 정신이 혼미했던 형윤은 이 소리를 바로 알아챘다. “딱 그 소리밖에 안 들렸어요. 아이가 꼬맹이 때처럼 목이 터져라 외치는….” 형윤은 다시 세차게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오래 달리지는 못했다. 딸아이의 눈앞에서 상대 선수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이기는 건 당연하고 신기록을 목표로 시합에 나섰던 형윤은 추월 패를 당해 트랙에서 내려왔다. 의기소침해진 그는 경기 후 양양 앞바다에서 돌 틈에 숨은 꽃게를 같이 잡자는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고배를 마신 형윤은 “그래도 로봇팔이 있어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의수는 제 몸의 일부인데 어떻게 원망하겠어요. 더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제 잘못이죠.”결혼 전에 형윤은 의수를 밖으로 내놓고 반팔 차림으로 외출하곤 했지만 딸이 태어난 뒤부턴 여름에도 밖에 나갈 땐 긴팔을 입는다. 의수를 낀 아빠 때문에 아이가 불편한 시선을 받을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다.형윤은 딸의 학교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나누던 대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한 친구가 “애들이 교실에서 ‘하나린 아빠는 장애인’이라면서 웃고 떠든 적이 있다”고 하자 딸이 “나 그 때 교실에 없었는데…”라며 말을 흘렸다. 그러자 친구는 “너 그때 교실에 있었잖아”라며 천진하게 말했다. 형윤은 딸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봤다.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친구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빠 장애인인데 그게 뭐가 어때서. 우리 아빠, 나라 지키다가 다친 거야. 장애인이 창피한 거 아냐.”몇 주 뒤 미선은 딸 담임교사와 면담하며 이 일화를 꺼냈다. 교사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다”고 미선을 안심시켰다. “하나린이 반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 팔은 로봇팔이야. 군대에서 다쳐가지고 국가유공자이고 사이클 선수야’라고 자랑하듯 얘기하더라고요.”엄마는 똥손, 아빠는 금손미선이 출산 이후 혼자 외출을 해본 건 딸이 태어난 지 952일만이었다. ‘독박육아’를 각오하긴 했지만 팔이 자유롭지 않은 남편의 빈자리는 컸다.“처음으로 혼자 외출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할 정도로 독박육아를 했어요. 제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면 신랑은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거예요. 눈앞의 아기를 얼마나 안아보고 싶었겠어요. 다른 아빠들처럼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싶었을 거예요. 다행히 아이가 몸을 가눌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신랑이 기저귀를 갈았어요. 사회복지사로 일할 때 어르신들 기저귀 갈아드리는 일을 한 적이 있어서 맨손으로 곧잘 하더라고요.”딸을 맘껏 안아주기 어려운 형윤은 배낭처럼 메는 캐리어에 아이를 태우고 틈만 나면 나들이를 다녔다. “신랑은 몇 시간이고 아이를 어깨에 메고 산에 가고 바다도 가고 전국을 다녔어요. 물고기도 같이 잡고, 스키도 같이 타고, 부루마블 게임도 하고…. 요즘은 신랑이 아침에 누룽지 끓여서 아이 밥 먹이고 등교까지 시켜서 저는 많이 편해졌어요. 다른 어떤 아빠들보다 아이와 많은 걸 함께 해요. 하나린은 아빠의 장애를 느낄 겨를이 없을 거예요.”형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의 그림 친구이기도 하다. 의수에 연필을 끼워 쓱쓱 그려낸다. “신랑이 옛날에 학교 다닐 때부터 판화 같은 걸 엄청 잘 했었거든요. 나비 한 마리를 그려도 저는 유치원생처럼 그리는데 신랑은 호랑나비도 거의 똑같이 그려줘요. 그래서 하나린이 저한테 만날 그러죠. 엄마는 똥손이고 아빠는 금손이야.”금메달도 메우지 못한 빈자리형윤은 지난해 4월 네델란드에서 열린 세계 상이군인 체육대회인 ‘인빅터스 게임’에 출전해 남자 사이클 부문(개인독주 로드바이크1)에서 우승했다. 세계 각국 상이군인 출신 선수들이 모이는 이 대회에선 메달 수여식이 독특했다. 금·은·동 메달리스트가 높이 차가 없는 연단에 나란히 서고, 자녀나 배우자 등 가족이 선수에게 메달을 걸어줬다. 한 여자선수에겐 남자친구가 메달을 걸어준 뒤 무릎을 꿇고 청혼하기도 했다. 형윤은 딸아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휠체어에 탄 아버지에게 메달을 걸어주며 목을 끌어안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가족들 동행은 지원이 안 된다고 해서 저 혼자 오긴 했는데 딸과 아내가 함께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한국에선 상이군인이라고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여기 선수들과 가족들은 정말 자랑스러워하더라고요. 제가 딸에게 아빠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다쳤다고 얘길 해주긴 했지만 아이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수 있잖아요. 금메달 딴 거 많이들 축하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사실 남들 평가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내 가족이, 내 딸이….”형윤은 말을 잠시 멈추고 촉촉하게 붉어진 눈동자를 깜박였다. 기자와 인터뷰할 때마다 개구쟁이 같은 눈빛으로 거침없이 말하던 평소와는 다른 눈동자였다.그는 인빅터스 대회에 함께 출전한 동료 선수들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군 간부가 공무 중 부상으로 장애를 얻으면 상이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제대 후 15년이 지났지만 형윤은 늦게나마 상이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 국방부에 문의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장애 발생 5년 내에 연금을 신청해야 한다는 규정 탓에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5년 시효’가 지났더라도 장애가 악화된 경우 신청이 가능했지만 형윤은 이미 가장 중증인 장애1급으로 전역해 해당될 수 없었다.“제 권리에 무지했다는 것에 자책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전역 당시 상이연금에 대한 안내가 전혀 없었고, 5년 내 신청해야 한다고 하는데 23살에 양팔을 절단하고 어떻게 살지 막막하던 시기여서 다른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아빠 가슴에 왜 내가 있어?”올해 첫 전국 대회가 열린 5월 6일 전남 영암국제자동차경주장 선수 대기실은 ‘쐐’ 소리로 가득했다. 경기 시작 30분을 앞두고 몸 풀기가 한창이었다. 사이클 뒷바퀴를 거치대에 올려놓고 페달을 구르는 형윤의 허벅지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형윤은 핸들 위에 깔아놓은 흰 수건 위에 맨 팔뚝을 기댄 채 페달을 굴렀다.조금 뒤 사이클에서 내려온 그는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냈다. 이제 출발선으로 이동할 차례였다. 형윤은 젖은 훈련복을 벗고 맨 팔뚝으로 유니폼 상의를 꺼내들었다. 옷 아래쪽을 입으로 물고 능숙하게 한 팔 씩 소매에 집어넣는데 그의 가슴팍에 주먹만한 문신이 살짝 비쳤다. 딸의 앳된 얼굴이 왼쪽 가슴에 새겨져있었다.“아빠 가슴에 왜 내가 있어?”라고 아이가 물을 때면 형윤은 “하나린이랑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서”라고 말해준다.유니폼 지퍼를 올린 그는 사이클 옆에 놓아둔 때 묻은 로봇 팔을 한 짝씩 꼈다. 이어 오른손으로 왼손을 한 번 툭, 왼손으로 오른손을 한 번 툭 쳤다. 그래야 두 팔에 전원이 켜진다. 형윤은 안장에 몸을 실으며 이제 한 몸이 된 두 손으로 사이클 핸들을 굳게 쥐었다. 그러곤 탁 트인 트랙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특별취재팀>▽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사진: 송은석 기자▽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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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술로 장애를 극복한 5人… 삶은 이렇게 다시[장애, 테크로 채우다]

    우리 누구든 삶의 일정기간은 장애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꼭 사고나 질병을 겪지 않더라도 급속한 고령화로 어느 정도의 장애는 언젠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장애를 갖게 됐다고 해서 그동안 누려온 삶을, 또는 앞으로 추구하려는 삶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장애를 초래하는 환경을 바꾼다면 꽤 괜찮은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취재팀은 올 1월부터 6개월에 걸쳐 이들의 조금 특별한 일상에 동행했습니다.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7월 24일 특별기획 [장애, 테크로 채우다] 첫 회가 시작됩니다.[장애, 테크로 채우다] 티저 영상 보기(https://youtu.be/qCMY9GIN5a4)신광영기자 neo@donga.com}

    • 20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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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커버그의 스레드, 흥행공신은 머스크”… 트위터 인수뒤 탈퇴 확산

    페이스북 모회사인 메타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가 5일 선보인 새로운 소셜미디어 ‘스레드(Threads)’가 출시 사흘 반 만인 9일 오전 8시 현재(현지 시간) 가입자가 95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폭발적인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 벌써 트위터 이용자 수 2억3780만 명(지난해 7월 기준)의 40%를 확보할 만큼 추격세가 빠르다. 업계에서는 ‘트위터 킬러’라는 평가가 나온다. 저커버그는 이날 자신의 스레드 계정을 통해 “가입자 증가세가 우리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했다.● 스레드 성공의 ‘일등공신’ 머스크올 1월 스레드가 개발될 때부터 트위터 소유주인 일론 머스크와 저커버그 간 한판 승부가 벌어질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텍스트 길이가 280자(한국은 140자)로 제한되는 트위터와 유사하게 스레드도 한 게시물당 500자까지 작성할 수 있는 단문 소셜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좋아요’ ‘공유’ 등의 기능도 트위터와 흡사하다. 스레드가 탄생하고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역설적이게도 트위터 소유주 머스크였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CNN 등에 따르면 스레드는 애초부터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후 불만을 느껴 트위터를 떠난 이용자들을 흡수하기 위해 탄생했다. 머스크가 이용자 1인당 게시물 열람 횟수를 제한하는 등 트위터를 유료화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등 과거 차단됐던 극우 인사들의 계정을 풀어주면서 대규모 이용자들과 광고주들이 트위터를 떠났다. 기술적 문제도 빈번해져 접속 장애 같은 오류도 많아졌다. 머스크는 또 지난해 10월 트위터를 인수한 뒤 8000명이던 직원을 대량 해고해 1500명 수준으로 줄였다. 해고자 중 일부가 메타로 옮겨가며 ‘기술의 씨앗’이 된 셈이다. 트위터는 6일 “메타가 트위터 전 직원들을 채용해 스레드 개발에 참여시켰고, 이 직원들은 여전히 트위터 영업 비밀이나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며 소송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트위터 안팎에선 메타를 비판할수록 스레드에 대한 시장의 주목도가 높아져 역설적으로 가입자 수만 늘려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있다.● 머스크 vs 저커버그 신경전 격화머스크는 스레드 출시를 앞두고 주짓수를 하는 저커버그에게 미국 라스베이거스 UFC 경기장에서 ‘옥타곤 결투’를 신청했다. 그러나 양측 간 온라인 설전은 되레 스레드 출시를 홍보해주는 ‘역효과’를 냈다. 머스크는 스레드 출시 직후 트위터를 통해 “스레드는 (메타가 운영하는)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을 뺀 것에 불과하다” “저커버그는 인스타그램 이용자를 스레드 가입자로 둔갑시켰다”며 날을 세웠다. 저커버그 역시 스레드 출시 다음 날인 6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11년 만에 게시물을 올렸다. 똑같은 복장을 한 두 스파이더맨이 마주 보고 서로를 손가락으로 겨냥하는 그림이었다. 외신은 “넌 뭐야”라고 정체를 따지는 밈(meme·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글이나 그림)이라고 전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머스크가 저커버그를 다시 멋지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고 8일 보도했다. 메타는 최근 자사의 대표적 소셜미디어인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거짓 정보의 온상으로 악용되고 있고 개인정보를 상업화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에게 수면장애나 우울증을 유발하는 등 악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하지만 스레드의 성공적 출시로 모처럼 긍정적인 여론이 커지고 있어 이 같은 비판이 희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스레드 가입자 수가 폭증할 경우 당국의 규제가 강화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스레드는 유럽연합(EU)에선 거대 플랫폼의 시장 지배력 남용 등을 막는 ‘디지털 시장법’의 문턱에 걸려 출시가 보류된 상태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이청아 기자 clearlee@donga.com}

    • 202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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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지중해 난민선의 소금 눈물

    난민을 실은 밀입국선이 섬에 도착하면 의사인 피에르토 바르톨로(67)는 갑판에 오른다. 살아서 온 사람을 검진하고, 시신으로 도착한 이들은 검시하는 게 그의 일이다. 일터는 이탈리아 최남단의 휴양지 람페두사섬이다. 그가 나고 자란 이곳은 북아프리카 앞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대표적인 환승지다. 바르톨로가 검진하는 난민들의 몸에는 그들이 배에 오르기 전 어떤 지옥들을 경유했는지가 새겨져 있다. 칼로 베인 흉터나 담뱃불로 지진 자국은 어딘가에서 붙잡혀 고문을 받은 흔적이다. 배에서 거친 수술 자국이 목격되기도 한다. 수백만 원의 승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한쪽 신장을 팔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성폭행에 대비해 승선 전 독한 피임주사를 맞는 10대 여성들도 있다. 조기 폐경 등 치명적 부작용을 그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바르톨로는 아이를 데리고 탄 여성들의 엉덩이와 다리에서 심각한 화상을 자주 본다. ‘고무보트 병’이라고 불리는 화학적 화상이다. 인신 밀수업자들은 배가 이탈리아 해안에 가까워지면 단속을 피해 허름한 고무보트에 난민들을 옮겨 태운다. 남자들은 도넛 모양의 테두리에 걸터앉지만 여성들은 아이를 품에 안고 바닥에 앉는다. 숱한 파도를 지나며 기름통에서 새어나온 휘발유가 짠물과 섞여 살인적인 혼합물이 된다. 그게 여성들의 옷을 적시고 살갗을 파고든다. 바르톨로는 몇 년 전 봤던 젊은 시리아 부부의 넋 나간 눈동자를 기억한다. 부부는 배가 뒤집혀 800여 명이 모두 바다에 빠진 날 구조돼 온 사람들이었다. 남편은 바다로 뛰어들기 전 생후 9개월 된 아기를 가슴팍 옷 안에 집어넣었다. 물에선 배영 자세로 몸을 뒤집어 한 손에 아내를, 다른 한 손에 세 살배기 아들을 잡았다. 그 자세로 등헤엄을 치며 구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녹초가 되어 갔다. 물살도 거세졌다. 탈진하면 네 가족 모두 물에 잠길 상황이었다. 남자가 아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들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고 했다. 그러고 몇 분 뒤 구조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바르톨로에게 “저는 평생 저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와 함께 난민들의 최대 경유지인 그리스 해안에서도 그런 비극이 자주 벌어진다. 13일 그리스 연안을 지나던 밀입국선에는 약 750명이 타고 있었다. 길이 25m의 갑판에 빼곡히 탄 사람들은 큰 파도가 치면 언제든 쏟아질듯 위태로워 보였다. 몇 시간 뒤 이 배가 침몰해 최소 600명이 숨지던 때 인근에는 그리스 해안경비대 구조선이 있었다. 경비대는 침몰 18시간 전에 이 배를 발견하고도 항해 상황을 지켜만 봤다. 경비대는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선원들이 ‘우리는 이탈리아로 간다’며 거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영국 BBC와 가디언이 전한 생존자 진술과 무전 내용,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항로 추적 결과는 다른 정황을 보여준다. 당시 배는 침몰 전 7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엔진도 고장난 상태였다. 그러다 갑자기 배가 격렬하게 흔들렸고 순식간에 우측으로 기울어 침몰했다. 이 때문에 해안경비대가 침몰에 대비해 안전조치를 취하거나 구조에 적극 나서야 했는데 방관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일고 있다. 이번 사건은 난민 밀입국선을 대하는 유럽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난민을 수용할 의사도 여력도 없다 보니 전략적으로 구조를 지연시키며 배가 자국 영해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밀어내기’를 하는 것이다. 유럽이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다. 2010년 아랍의 봄, 2016년 시리아 내전 등을 거치며 난민선이 급증하자 유럽은 침몰 위험이 높은 지중해 한복판에서 물러섰다. 그 전에는 ‘국경없는의사회’ 등 난민단체 구조선과도 정보를 공유하며 힘을 합쳤지만 지금은 민간 구조 자체를 불법화했다. 그 대신 난민선이 떠나온 리비아, 튀니지 당국에 배의 위치를 알려 강제송환 시키는 방식으로 난민 관리와 책임을 외주화하고 있다. 그 결과 난민들은 어떻게든 ‘지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죽음의 항해에 몸을 던진다. 사람에겐 안전한 곳에서 살 권리, 더 나은 삶을 찾을 권리가 있지만 난민 신청이 모두 수용되긴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바다에서 목숨이 위태로울 때 적절한 구조를 받는 것은 국제법이 규정한 기본권이다.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생명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톨로가 부두에서 만난 난민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하얬다고 한다. 며칠간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소금기가 들러붙은 탓이다. 이들은 마침내 섬에 닿으면 살았다는 안도감에, 또는 항해 중 잃어버린 가족들이 떠올라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얼굴을 타고 내려오며 하얗게 서린 소금을 녹인다. 바르톨로는 25년의 ‘난민 주치의’ 경험을 책으로 썼는데 그 책 이름이 ‘소금 눈물’이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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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의 ‘구조 지연’ 전략에…죽음의 바다 떠도는 난민선

    난민을 실은 밀입국선이 섬에 도착하면 의사인 피에르토 바르톨로(67)는 갑판에 오른다. 살아서 온 사람을 검진하고, 시신으로 도착한 이들은 검시하는 게 그의 일이다. 일터는 이탈리아 최남단의 휴양지 람페두사섬이다. 그가 나고 자란 이곳은 북아프리카 앞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대표적인 환승지다. 바르톨로가 검진하는 난민들의 몸에는 그들이 배에 오르기 전 어떤 지옥들을 경유했는지가 새겨져 있다. 칼로 베인 흉터나 담뱃불로 지진 자국은 어딘가에서 붙잡혀 고문을 받은 흔적이다. 배 부위에 거친 수술 자국이 목격되기도 한다. 수백만 원의 승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한쪽 신장을 팔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성폭행에 대비해 승선 전 독한 피임주사를 맞는 10대 여성들도 있다. 조기 폐경 등 치명적 부작용을 그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바르톨로는 아이를 데리고 탄 여성들의 엉덩이와 다리에서 심각한 화상을 자주 본다. ‘고무보트 병’이라고 불리는 화학적 화상이다. 인신 밀수업자들은 배가 이탈리아 해안에 가까워지면 단속을 피해 허름한 고무보트에 난민들을 옮겨 태운다. 남자들은 도넛 모양의 테두리에 걸터앉지만 여성들은 아이를 품에 안고 바닥에 앉는다. 숱한 파도를 지나며 기름통에서 새어나온 휘발유가 짠물과 섞여 살인적인 혼합물이 된다. 그게 여성들의 옷을 적시고 살갗을 파고든다. 바르톨로는 몇 년 전 봤던 젊은 시리아 부부의 넋 나간 눈동자를 기억한다. 부부는 배가 뒤집혀 800여 명이 모두 바다에 빠진 날 구조돼 온 사람들이었다. 남편은 바다로 뛰어들기 전 생후 9개월 된 아기를 가슴팍 옷 안에 집어넣었다. 물에선 배영 자세로 몸을 뒤집어 한 손에 아내를, 다른 한 손에 세 살배기 아들을 잡았다. 그 자세로 등헤엄을 치며 구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녹초가 되어 갔다. 물살도 거세졌다. 탈진하면 네 가족 모두 물에 잠길 상황이었다. 남자가 아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들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고 했다. 그러고 몇 분 뒤 구조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바르톨로에게 “저는 평생 저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와 함께 난민들의 최대 경유지인 그리스 해안에서도 그런 비극이 자주 벌어진다. 13일 그리스 연안을 지나던 밀입국선에는 약 750명이 타고 있었다. 길이 25m의 배에 빼곡히 탄 사람들은 큰 파도가 치면 언제든 밖으로 쏟아질듯 위태로워 보였다. 몇 시간 뒤 이 배가 침몰해 최소 600명이 숨지던 때 인근에는 그리스 해안경비대 구조선이 있었다. 경비대는 침몰 18시간 전에 이 배를 발견하고도 항해 상황을 지켜만 봤다. 경비대는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지만 선원들이 ‘우리는 이탈리아로 간다(No help, Go Italy)’며 거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영국 BBC와 가디언이 전한 생존자 진술과 무전 내용,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항로 추적 결과는 다른 정황을 보여준다. 당시 배는 침몰 전 7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엔진도 고장 난 상태였다. 그러다 갑자기 배가 격렬하게 흔들렸고 순식간에 우측으로 기울어 침몰했다. 이 때문에 해안경비대가 침몰에 대비해 안전조치를 취하거나 구조에 적극 나서야 했는데 방관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일고 있다. 이번 사건은 난민 밀입국선을 대하는 유럽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난민을 수용할 의사도, 여력도 없다 보니 전략적으로 구조를 지연시키며 배가 자국 영해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밀어내기’를 하는 것이다. 유럽이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다. 2010년 아랍의 봄, 2016년 시리아 내전 등을 거치며 난민선이 급증하자 유럽은 침몰 위험이 높은 지중해 한복판에서 물러섰다. 그 전에는 ‘국경없는의사회’ 등 난민단체 구조선과도 정보를 공유하며 힘을 합쳤지만 지금은 민간 구조 자체를 불법화했다. 그 대신 난민선이 떠나온 리비아, 튀니지 당국에 배의 위치를 알려 강제송환 시키는 방식으로 난민 관리와 책임을 외주화하고 있다. 그 결과 난민들은 어떻게든 ‘지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죽음의 항해에 몸을 던진다. 사람에겐 안전한 곳에서 살 권리, 더 나은 삶을 찾을 권리가 있지만 난민 신청이 모두 수용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바다에서 목숨이 위태로울 때 적절한 구조를 받는 것은 국제법이 규정한 기본권이다.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생명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톨로가 부두에서 만난 난민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하얬다고 한다. 며칠간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소금기가 들러붙은 탓이다. 이들은 마침내 섬에 닿고 나면 살았다는 안도감에, 또는 항해 중 잃어버린 가족들이 떠올라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얼굴을 타고 내려오며 하얗게 서린 소금을 녹인다. 바르톨로는 25년간의 ‘난민 주치의’ 경험을 책으로 썼는데 그 책 이름이 ‘소금 눈물’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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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영국이 실세 장관의 ‘과속스캔들’을 다루는 방식

    수엘라 브래버먼(43)은 속도위반을 한 검찰총장이었다. 지난해 6월 과속 통지서가 그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영국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2년 전 발탁한 인도계 여성 검찰 수장이었다. 과속으로 걸린 영국인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단체 안전운전교육을 받거나, 벌점 3점과 함께 범칙금을 내야 한다. 벌점이 12점까지 누적되면 운전이 금지된다. 브래버먼은 안전교육을 받기로 했다.석 달 뒤 브래버먼은 새로 출범한 리즈 트러스 내각의 내무장관에 임명됐다. 치안과 이민정책을 총괄하는 중책이었다. 그는 보수당 내 강경 보수의 아이콘이었다.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하고 불법 이민자를 르완다로 사실상 추방하는 새 이민정책에 앞장섰다.브래버먼은 장관에 취임하자 비서실에 안전운전교육을 강사에게 일대일로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통상 20여 명이 모이는 단체 교육에 갔다간 정체가 탄로 날 게 뻔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갓 취임한 장관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장관이 사적인 문제 해결에 공무원을 동원하면 장관은 물론이고 해당 공무원도 처벌받는다는 윤리담당 부서의 판단을 제시했다.브래버먼은 멈추지 않았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장관 보좌관을 시켜 안전교육 담당업체에 일대일 교육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업체 측은 온라인 수강도 가능하지만 ‘집체 교육’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보좌관은 화면에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하거나 가명이라도 쓰게 해 달라고 했지만 이 역시 거부됐다. 과속 운전자들이 서로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수치심을 느끼는 것도 경각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과속 딱지’ 해결이 난관에 부닥친 가운데 브래버먼에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이민정책 관련 기밀을 개인 이메일로 보수당 의원에게 보낸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기밀 유출 논란이 일자 그는 트러스 내각이 44일 만에 무너지기 하루 전 장관에서 사퇴했다. 흠집이 나긴 했지만 브래버먼은 여전히 보수당 내 유력 주자였다. 뒤이어 집권한 리시 수낵 총리는 사퇴한 지 6일 된 그를 다시 내무장관에 기용했다.장관실로 돌아온 브래버먼은 넉 달 넘게 끌어온 과속 문제를 마침내 매듭지었다. 안전교육을 포기하고 ‘벌점+범칙금’을 택했다. 이때만 해도 6개월 뒤 찾아올 ‘과속 스캔들’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수낵 총리는 21일 일본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기자들에게 물었다. “G7 회담에 대한 질문은 없나요?”외교 성과를 알려야 할 이날 회견에서 영국 기자들은 온통 브래버먼 장관 거취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그날 영국에선 브래버먼이 과속 사실을 숨기려 장관 지위를 이용해 공무원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한 의혹이 폭로됐다. ‘장관이 사적 목적을 위해 공적인 지위를 이용하거나 그렇게 보일 만한 행동을 해선 안 된다’는 장관 윤리강령(Ministerial code) 위반이므로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었다.게다가 영국은 교통 법규를 어긴 고위층에게 예외를 허용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최근 찰스 3세 국왕 대관식을 집전한 영국 국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는 시속 32㎞ 구간을 40㎞로 달리다 과속으로 적발됐는데 범칙금 납부를 미루다 최근 85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수낵 총리 역시 운전하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15만원 범칙금을 낸 적이 있다.한 실세 장관의 ‘과속 딱지’로 시작된 파문은 이제 어느덧 수낵 총리를 국정운영의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가 진상조사를 지시해야 할지를 두고 노동당과 보수당은 찬반으로 팽팽히 맞섰다. 국민은 당에 투표하고,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되는 영국에선 당내 입지가 탄탄한 핵심 참모가 총리에게 등을 돌리면 정권이 흔들린 사례가 많다.수낵 본인이 당사자였다. ‘파티 게이트’로 위태롭던 존슨 내각이 무너진 것은 수낵이 재무장관직을 내던진 게 결정타였다. 트러스 내각 붕괴 땐 브래버먼의 내무장관 사퇴가 시발탄이었다. 브래버먼은 수낵의 주요 공약인 ‘불법 이민자 제한’을 밀어붙일 핵심 참모이자 당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거물이었다.수낵은 브래버먼을 내치지 못했다. 24일 총리실 홈페이지에는 그가 브래버먼 장관에게 쓴 편지가 공개됐다. “당신의 해명 등을 검토한 결과 더 이상의 조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윤리고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장관 윤리강령에 위반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나의 결정”이라고 했다. 앞서 내무부도 브래버먼이 수낵에게 관련 경위를 상세히 적은, 반성문 같은 편지를 공개했다.수낵 총리의 면죄부 결정에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비판이 나오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논란은 잦아들고 있다. 수낵의 결정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고려한 것일 테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국민에게 공개하는 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의혹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인사권자가 결정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면 최소한 책임 소재가 분명해져 추후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생길 때면 소모적인 정쟁 끝에 기어이 수사와 재판으로 가는 우리와는 조금 다른 문제 해결 방식이다.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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