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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안동 우함양’은 영남 선비문화를 말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서울을 기준으로 왼쪽의 안동은 중앙 권력에 진출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했고, 오른쪽의 함양은 주로 재야에서 활동하는 기개 높은 선비들로 유명했다. 도학(道學)과 의리 사상으로 무장한 재야 선비들은 절대왕정 체제에서도 꺾이는 법 없이 바른 목소리를 내왔다. 영남 사림(士林)의 본향임을 자부하는 함양의 선비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행장을 꾸렸다.》○정자마다 깃든 조선 선비의 향기경남 함양에는 조선시대 누각과 정자가 많이 남아 있다. 주로 서하면 화림동 계곡을 따라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다. 누정(누각과 정자)은 자연을 벗 삼아 수양하던 선비들의 휴식처이자 만남의 광장이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뜻의 화림동 계곡이 ‘선비문화 탐방로’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배경이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을 따라 펼쳐지는 화림동 계곡, 즉 선비문화 탐방로는 2구간으로 나뉜다. 상류 쪽 거연정에서 시작해 농월정까지의 6km 구간(1구간)과 농월정에서 오리숲까지의 4.1km 구간(2구간)이다. 이 중 1구간은 정자가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어서 ‘정자 탐방로’로 불리기도 한다. 거연정에서부터 탐방을 시작했다. 거연정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가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국치를 당한 후 낙향해 서산서원과 함께 지은 정자다. 1640년경 억새로 처음 지어졌다가 1872년 재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거연정은 울퉁불퉁한 천연 암반 위에 주초석(柱礎石)과 누하주(樓下柱)를 굴곡에 맞춰 깎아 절묘하게 높이를 맞춘 형태를 하고 있다. 마치 정자와 암반이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듯하다. 금천 가운데에 터를 잡은 이 정자는 옥빛 계곡수가 내려다보이는 구름다리를 통해 연결되는데, 조선 선비들의 극찬을 받은 명소이기도 하다. 연암 박지원 등은 거연정을 중심으로 바위와 담수와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광경을 보고 감탄의 글을 남겼다. 거연정에서 군자정, 영귀정을 거쳐 선비문화 탐방로 이정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갑자기 엄청난 너럭바위 지대를 만나게 된다. ‘해를 가리는 천막처럼 넓고 큰 바위’를 뜻하는 차일암(遮日巖)과 수정처럼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옥녀담(玉女潭) 등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곳이다. 바로 이 기운을 즐기기 위해 세운 정자가 동호정이다.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면모를 자랑하는 정자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의주 피란길에서 왕을 등에 업고 환란을 피한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1895년 그의 9대손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옥녀담에서 탁족(濯足: 발을 씻음)을 즐겼다고 한다. 탁족은 무더운 여름을 보내는 놀이이자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한다는 철학적 의미도 담겨 있다. 술통으로 사용됐다는 차일암 곳곳 움푹 팬 바위 웅덩이에서는 선비들의 호방한 풍류도 느껴진다. 때마침 동호정에서 흘러나오는 국악 연주가 운치를 더해 주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국악인 진막순 선생(한국국악협회 함양지부장)의 가야금 연주가 차일암에 새겨진 ‘금적암(琴笛岩·악기를 연주하는 바위)’ ‘영가대(詠歌臺·노래를 부르는 곳)’ 글씨와도 잘 어울린다. 가야금 반주와 함께 불러보는 민요 체험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끄는 여행 상품 중 하나다. 선비문화 탐방로 1구간 중 가장 하류에 있는 곳이 농월정(弄月亭)이다. ‘달을 희롱한다’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농월정은 고요한 밤 물 위로 달빛이 흐르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농월정 바로 앞 넓게 펼쳐진 반석 지대를 ‘월연암’ 혹은 ‘달바위’라고 부르는 이유다. 농월정은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1571∼1639)가 즐겨 찾던 곳이라고 한다. 달바위 한쪽에 ‘지족당(박명부)이 지팡이를 끌고 거닐던 곳’이라는 뜻의 ‘知足堂杖구之所’(지족당장구지소)라는 한문 글씨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그는 옳고 그름, 나아감과 물러감을 분명히 하는 선비였다. 그는 선조 때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곽재우, 김성일 휘하에서 군무(軍務)를 도왔고, 광해군 때는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 유폐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 파면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맞아서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되자 낙향해 이곳에 서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했다. 현재 농월정은 인기 TV 드라마 ‘환혼’의 촬영지로 소문난 이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남계서원의 유생 체험 함양에는 왕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13개나 된다. 안동의 11개보다 많은 숫자다. 함양 서원 중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일두 정여창 선생(1450∼1504)을 모신 남계서원이다. 스스로를 한 마리의 좀벌레(일두·一두)라고 낮춘 정여창은 동방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에 들 정도로 빼어난 인품과 학식을 지닌 군자였다. 화림동 계곡의 군자정도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201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은 서원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입구에서부터 차례로 풍영루, 동재·서재, 강당, 경판고, 사당으로 이어지는 건물 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이 따르는 공간 배치로 활용됐다. 입구 누각인 풍영루의 2층 마루는 기운이 밴 명당터인데, 서원 풍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저 멀리 강당(명성당)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제례와 예절 체험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례복을 걸친 관광객들이 제례 순서를 배운 후 서원 맨 뒤 사당으로 나아가 직접 제를 올리는 모습이 자못 경건하게 보였다. 선비문화 체험은 이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남계서원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개평한옥마을에서도 즐길 수 있다. 60여 채의 크고 작은 고택이 옹기종기 들어선 개평한옥마을은 영남의 대표적인 선비촌 중 한 곳이다. 정여창고택(일두고택)을 비롯해 하동정씨고가, 오담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등 명망가가 들어서 있다. 1570년대에 건축된 일두고택은 솟을대문부터 범상치 않다. 솟을대문 홍살문에는 임금이 네 명의 효자와 한 명의 충신이 난 곳임을 인증해주는 5개의 정려편액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치니 ㄱ자 모양의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바깥주인이 머무는 사랑채의 추녀 밑으로는 ‘忠(충) 孝(효) 節(절) 義(의)’라는 4개의 한자 글씨가 문짝 크기처럼 걸려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허백련 화백이 이곳 사랑채에서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사랑채 뒤편 안주인이 거처하는 안채 역시 빼어난 기운을 가진 명당터다. 특히 안채 중 한 방은 무조건 갓 시집온 여성이 머물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일두고택을 안내한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방의 기운을 받아서 집안을 빛낼 자손을 낳도록 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일두고택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은 조선시대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일두고택은 TV 드라마 ‘토지’ ‘다모’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여서 애청자들의 드라마 체험 코스로도 유명하고, 고택 바로 맞은편 ‘솔송주 문화관’에서는 일두고택의 전통주인 솔송주(솔잎술) 체험을 할 수 있다. 조선 정종의 손녀이자 일두 선생의 부인이 창안한 솔송주는 53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주조 비법을 전수받은 박흥선 명인이 이곳에서 직접 솔송주 빚기와 칵테일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노참판댁의 고추장 만들기, 압화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함양군 한옥숙박시설에서 3박 4일간 머물며 여행과 체험을 동시에 즐기는 ‘함양 ON데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된다. 글·사진 함양=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중소기업협동조합이 우리 경제에 뿌리내린 지도 60년이 훌쩍 넘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사에서 협동조합이라는 나이테가 그만큼 켜켜이 새겨져 있다. 1962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현 중소기업중앙회)가 설립되면서 36개 조합이 발기인으로 창립에 참여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창립 전후로 설립된 후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합은 모두 60개다. 이후 협동조합은 우리 경제의 주요 업종과 산업을 대표하는 중소기업단체로서 그 위상을 자랑하기도 했고,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도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업종별 협동조합 설립이 꾸준히 늘어나 175개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 이르러 협동조합은 신규 설립이 둔화하면서 정착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어 1980년대에는 중소기업이 양적·질적 측면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단체수의계약 등 중소기업 육성 시책이 제정돼 효과를 거두면서 협동조합도 양적·질적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한 결과 조합수가 무려 451개가 됐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 경제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협동조합의 자율성과 공동사업이 확대됐다. 2000년대에는 업종별 조합의 복수 설립 허용, 현실에 맞는 업무구역 조정 허용 등 많은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그러나 2007년 단체수의계약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조합의 재정 여건이 악화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10년대부터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양극화 완화 등 대안적 경제 모델로서 협동조합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고조됐다. 우리 정부도 협동조합을 정책지원 대상으로 선정하고 2016년부터 3년마다 협동조합 활성화 계획을 수립해 지원해오고 있다.최근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새 시대에 맞추어 협동조합은 중소기업 혁신의 플랫폼으로서 자주적 성공 모델을 만들기 위해 또다시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갈수록 삶이 팍팍해지는 듯한 세상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고 싶을 때면 즐겨 찾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남짓한 거리의 충남 서산과 태안이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백제 시기 마애불상의 그윽한 미소에서 시름을 덜어내고, 서해안에서 만나는 절경들에서는 지친 육체가 힐링됨을 느낄 수 있다.》○ ‘백제의 미소’에서 ‘세계의 미소’로 ‘백제의 미소’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해안고속도로를 탔다. 서산시 운산면의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서산마애불)은 오전에 불상의 미소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해서다. 과연 그랬다. 계곡을 가로질러 비탈길을 타고 올라가니 커다란 자연 암벽에 새겨진 3기의 불상이 오전의 햇빛을 받아 은은한 미소를 드러내고 있었다. 불상은 햇빛의 방향,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독특한 표정과 미소를 짓는다. 현재를 의미하는 여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의 보살상과 오른쪽의 반가사유상은 각각 과거와 미래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그 모습에서 천진스러운 보살들의 웃음소리도 묻어나는 듯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안하고 푸근해지는 느낌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문화관광해설사는 “서산마애불은 동짓날(올해는 12월 22일) 해가 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날 동이 틀 때 여래불상의 입술이 가장 붉게 빛나면서 아름다운 미소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는 백제인들이 해가 가장 낮게 뜨는 날이자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를 중요시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선조들은 동지를 매우 신성시했다. 동지가 지나면서부터 낮이 점차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동지는 음(陰·밤) 기운에 가려졌던 양(陽·낮) 기운이 비로소 회생해 새롭게 시작하는 날인 것이다. 동짓날을 작은 설날(아세·亞歲)로 부르는 이유다. 그래서 동지에는 태양(낮)을 상징하는 붉은색 팥죽을 먹기도 한다. 얼굴이 복스럽게 통통한 느낌을 주는 서산마애불은 당시 백제인들을 닮았다고 한다. 이 불상은 백제가 서울에서 충청도로 수도를 이전한 뒤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모습에서 언뜻 6세기경 백제 성왕(재위 523∼554년)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성왕은 수도를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백제의 중흥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는 태안반도를 통해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 양나라와 친선을 맺어 대중 서해 루트를 확장하는 등 백제를 해상강국으로 거듭나게 했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백제 문화 융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1400년 남짓 한결같은 ‘백제의 미소’를 보여주는 서산마애불은 동아시아의 찬란한 백제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서산마애불에 대해 매우 ‘속세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점도 흥미를 끈다. 1958년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 이 불상은 산신령으로 통했다. “바위 위에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가운데 석가여래상)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 작은마누라(미륵반가사유상)가 다리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며 ‘용용 죽겠지’ 놀리니까 왼쪽 본마누라(제화갈라보살상)가 짱돌을 쥐고 집어던지려 하고 있슈!” 현지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런 말을 듣고 불상을 바라보면 유쾌한 미소가 피어오르며 고개가 끄덕거려지기도 한다. 이는 서산마애불이 K컬처의 해학적 감각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백제의 미소’가 시대와 국경과 종교를 뛰어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세계인의 보편적 미소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절로 힐링되는 서산 절경 코스 서산시가 선정한 서산 9경 중 제2경인 서산마애불을 감상한 뒤 가을 산 풍경을 즐기고 싶다면 제4경인 개심사(운산면 신창리)로 가볼 일이다. 서산마애불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개심사는 그 초입에 넓게 펼쳐진 목장 초지부터가 이국적인 풍경을 물씬 풍기는 곳이다. 봉긋봉긋한 야산의 초록색 초지에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절로 느긋해진다. 21km²(약 638만 평)에 달하는 이 초지는 ‘축협 한우 개량사업소 농장’으로 불리고 있다. 1969년 정치인 김종필 씨에 의해 조성됐다가 이후 정치적 이유로 국가에 헌납된 곳이라고 한다. 목장길을 드라이브 코스로 삼아 돌다 보면 이정표를 따라 개심사로 진입하게 된다. 개심사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14년(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개심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보존돼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웅전 기단만 백제시대 것이고, 나머지는 조선 성종 때 산불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것이다. 개심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고아한 절집 자태로 명성이 높다. 다듬지 않은 채로 굽어진 나무 기둥을 그대로 사용한 건물,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계단 등이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썩 어울린다. 좀체 보기 힘들다는 청벚꽃과 왕벚꽃, 배롱나무, 단풍나무 등도 절집 인테리어로 한몫을 하는 곳이다. 서산에서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즐기고 싶다면 서산 제7경인 황금산 해변(대산읍 독곶리 일원)을 추천한다. 해송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숲길과 몽돌로 이루어진 해안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황금산은 해발 156m로 그리 높지 않다. 서쪽이 바위 절벽으로 서해와 접해 있고, 금을 캤다고 전해지는 2개의 동굴이 남아 있는 곳이다. 잘 다듬어진 등산로(약 1km)를 이용해 30여 분 산을 타고 넘어가면 장엄한 서해 바다가 펼쳐진다. 서산 사람들이 주로 여름에 해수욕을 즐기는 몽돌 해변이다. 이곳에서는 바닷물에 빠진 코끼리도 볼 수 있다. 거대한 코끼리가 긴 코를 바다에 들이밀고 바닷물을 마시기 위해 뒷다리를 접고 앉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코끼리바위’다. 코끼리바위를 만나기 위해서는 물때를 잘 맞춰야 하므로 미리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 ○태안의 이국적 가을 정취서산에 서산마애불이 있다면 태안에는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태안마애불)이 있다. 백화산(284m) 8부 능선쯤에 자리한 태안마애불은 서산마애불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국보급 마애불상이다. 산 정상 부근에 있지만, 바로 인근의 태을암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어 찾아가기가 쉽다. 서산마애불보다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태안마애불은 독특한 구도로 주목을 받는다. 거대한 바위 동쪽 면에 감실을 마련한 뒤 삼존불을 새겨놓은 형태인데, 불상 배치가 일반적인 삼존불 구도(중앙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와는 확연히 다르다. 태안마애불은 부처보다 아래 서열로 치는 보살이 가운데에 배치돼 있고, 좌우로 여래불이 보좌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것도 중앙의 보살은 1.8m로 크기가 작은 반면, 좌우의 부처상은 2.4∼2.5m 크기로 큼직하게 새겨놓은 등 파격적인 구도다. 이러한 도상은 전 세계에서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그 통통한 얼굴에 잔잔한 ‘백제의 미소’만큼은 서산마애불과 비슷하다. 태안군 남면의 청산수목원과 소원면의 해변길(태배길)에서는 이국적인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청산수목원은 10만 m² 부지 규모에 조성한 수목원인데, 요즘 서양억새로 불리는 팜파스그래스 축제(11월 중순까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아르헨티나가 원산지인 팜파스그래스는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에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은백색 꽃무리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팜파스그래스는 9, 10월에 절정을 이루는데, 이곳은 웨딩 촬영 명소로도 입소문이 났다.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태안의 해변길 2코스(태배길)는 갯벌과 독특한 해안절벽 등으로 절로 힐링이 된다. 글·사진 태안/서산=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논다는 뜻의 ‘구룡농주(九龍弄珠)’. 여의주에 해당하는 알 명당 쪽으로 9개 산봉우리가 다투듯 둘러싼 형상을 묘사하는 풍수 용어다. 실제로 제주도에는 ‘알(새끼)오름’을 향해 9개 봉우리가 서 있는 지형이 있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의 거문오름이다. 한라산 백록담보다 무려 4배나 큰 분화구 가운데에 알오름이 치솟아 있는 거문오름은 ‘용이 불을 토해 놓은’ 듯한 화산체다. 이곳에서 흘러나온 용암은 만장굴, 김녕굴 등 세계적인 천연기념물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 제주도에서는 거문오름에서 흘러나온 ‘용암의 길’을 따라 축제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다.》 ○ ‘용암의 길’을 따라 체험하는 용의 기운 거문오름(해발 456.6m)은 제주도의 오름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거문’이라는 말은 삼나무, 편백나무, 소나무 등 수림이 울창해 거무스레한 빛깔을 띤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편으론 신령스러운 공간(黔·검)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데, 그 뜻답게 아무 때나 출입할 수 없다. 방문 시 온라인 사전 예약을 거쳐야 하며, 주 1회(매주 화요일) 자연 휴식일제로 운영된다. 탐방객 수도 엄격히 제한한다.(하루 450명) 출발 지점인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경사진 길을 따라 50분 정도 걸으면 거문오름의 정상인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에서는 화산 폭발 때 생긴 분화구 주위를 둘러싼 봉우리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제주의 360여 개 오름 중 3분의 1이 이곳에서 보인다고 한다. 분화구 가운데로는 볼록하게 솟아오른 작은 알오름이 보인다. 1만 년 전 거문오름이 폭발한 뒤 다시 또 화산이 터져서 110m 정도의 오름이 분화구에 생긴 이중화산체 구조다. 바로 이 알오름, 즉 여의주에서부터 ‘용암의 길’이 시작된다. 용암은 너비 80∼150m, 깊이 15∼34m 규모로 거문오름의 북동쪽으로 긴 협곡을 이루어 놓았다. 그리고 직선거리로 월정리 해안가까지 약 14km 흘러가는 동안 지질학적 가치가 높은 화산 지형과 20여 개의 크고 작은 용암 동굴을 탄생시켰다. 만장굴(7.4km), 김녕굴(700m), 벵뒤굴(4.5km), 용천동굴(3.4km)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동굴들이 바로 거문오름의 ‘자식’들이다. 이를 ‘거문오름용암동굴계’라고 부른다. 지금 이 용암의 길에서 다양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행사가 ‘2022 세계유산축전―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10월 1∼16일). 제주도 세계자연유산마을보존회가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하다가 2년 만에 대면 행사로 돌아왔다. 주최 측이 마련한 여러 프로그램 중 ‘세계자연유산 워킹투어―불의 숨길’이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생성 전 과정을 직접 걸으며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거문오름 분화구에서 용암이 분출되기 시작한 ‘시원의 길’(1구간), 용암이 흐르며 빚어낸 거대 협곡인 ‘용암의 길’(2구간), 용암이 굳어 가며 만들어낸 ‘동굴의 길’(3구간), 용암이 바다로 뻗어가며 생성된 ‘돌과 새 생명의 길’(4구간) 등 총 4개 코스(총 26km)로 이뤄져 있다. 용암을 통해 ‘용의 기운’을 느껴볼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이기도 하다. 이 프로그램은 9월 초부터 사전 예약(세계유산축전 제주 홈페이지)을 받았는데, 이미 4000명 선에서 예약이 완료됐을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다만 3구간의 평지 일부와 4구간인 ‘돌과 새 생명의 길’(만장굴 주차장∼구좌읍 월정리 구간·6.9km)은 행사 기간 중 제주를 방문한 모든 이들도 참여할 수 있다. 행사 진행자인 강경모 총감독은 “용암이 흘러가면서 협곡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월정리 바다를 만나면서 식어가는 과정과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과 생활까지 확인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고 말했다. 이번 축전에서는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비공개 구간도 개방해 주목을 끌고 있다. △만장굴(비공개 구간)과 김녕굴, 벵뒤굴을 탐험하는 ‘세계자연유산 특별탐험대’ △만장굴 전 구간을 탐사할 수 있는 ‘만장굴 전 구간 탐험대’(12명) △거문오름용암동굴계를 비롯해 한라산, 성산일출봉 일대를 걸으며 체험하는 ‘세계자연유산 순례단’(30명·5박 6일) 등은 평소 접근이 어려운 곳까지 프로그램에 담고 있다. 강 총감독은 “비공개 구간은 사전에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코스여서 지원자들 간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다”고 밝혔다.○신비한 모습 드러낸 비공개 동굴 구간거문오름동굴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만장굴(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3입구. 세계유산축전 언론 현장 브리핑에서 취재진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다. ‘만장굴 전 구간 탐험대’에 선발된 12명의 대원만이 축전 기간(15일) 중 탐사할 수 있는 비공개 구간(1, 3구간) 중 일부다. 만장굴의 3입구는 지상에서 15m 정도 아래에 있어 래펠로 내려가야 한다. 해설을 맡은 김상수 운영단장은 “동굴 3입구에 햇빛이 비치면 웅장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말했다. 박쥐가 서식하는 구멍과 배설물들을 만나면서 진입한 비공개 구간 동굴의 내부는 바닥과 벽면 곳곳에 용암이 흘러간 흔적이 선명했다. 새끼줄처럼 꼬이거나 거친 물결이 굽이치는 듯한 모습의 용암 흔적, 브이(V)자 협곡처럼 길게 뻗어 있는 동굴 형태 등을 통해 용암류가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안전상의 이유로 개방하지 않고 있던 김녕굴과 벵뒤굴도 축전 기간 중 열린다. 김녕굴은 모양이 꾸불꾸불하고 뱀과 관련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사굴’이라고도 불린다. 동굴 입구에 바람을 타고 날아온 고운 모래가 덮여 있는 게 인상적이다. 조개껍데기와 산호가루로 된 모래라고 한다. 벵뒤굴은 용암이 뚫고 갈 곳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헤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가장 복잡한 미로형 동굴로 손꼽힌다.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 때문에 제주4·3사건 때 토벌대를 피하려는 주민들이 이곳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축전 기간에는 제주 마을 주민들과 함께 7개의 세계자연유산마을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돼 있다. 특히 ‘덕천리 자연유산 스테이’(제주시 구좌읍 덕천리) 프로그램에서는 ‘모산이 연못’을 낀 넓은 잔디밭에서 진행하는 캠핑과 제주의 전통 떡으로 불리는 ‘기름떡’을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양영선 덕천리 사무장은 “봄가을로 신혼부부들이 웨딩 촬영을 하러 찾아올 만큼 예쁜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김녕리 마을의 경우 ‘제주의 문화 해녀 그리고 어머니’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요트 체험, ‘태왁’(해녀가 물질을 할 때 가슴에 받쳐 몸을 뜨게 하는 뒤웅박) 만들기를 직접 해볼 수 있다. 해녀 고영희 씨(72)는 “해녀들이 직접 태왁 만드는 법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만든 태왁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서 체험도 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축전 기간 중 제주의 자연 친화적 분위기를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페스티벌 사이트’, 뮤직 페스티벌, 정크아트 등이 진행된다.글·사진 제주=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어진 이(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知者)는 물을 좋아한다”는 게 2500여 년 전 공자의 말이다. 지자가 좋아하는 물은 과거부터 물류와 교역 등 경제 활동이 왕성하게 펼쳐지는 생활 공간이었다.‘물은 재물을 주관한다’(水管財物)는 풍수 논리, 그리고 지자를 잇속이 바르고 빠른 사람으로 풀이하는 경제적 관점도 이런 배경과 함께한다. 전북의 곡창지대를 적시며 서해로 흘러가는 만경강 물길은 지자의 슬기와 풍요의 기운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곳이다. 물길 여행에서 만나는 절경은 덤이다.》○만경강에서 만난 전설적 예언전북 완주군을 휘둘러 서해로 빠져나가는 만경강(약 80km)은 발원지에서부터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물길 탐사 코스다. 현재 발원지인 밤샘(동상면 사봉리 밤티마을)에서 비비정(삼례읍 후정리)까지 이어지는 44km 구간이 ‘완주 만경강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돼 있다. 본래 있던 산길과 마을길, 둑길과 자전거길을 이은 도로다. 만경강의 살아 있는 생태계를 만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난해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환경을 지키는 착한 발걸음’ 테마 추천 관광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도 쉽게 발원지를 구경할 수 있다는 완주군 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을 듣고 밤샘으로 향한다. 밤티마을에서 계곡의 밤샘까지는 약 1.5km의 임도로 이어진다. 길이 급하게 경사지지 않아 어린이를 동반한 뚜벅이 여행도 좋고, 시간이 급하면 밤샘 앞까지 승용차로도 갈 수 있다. 계곡 끝부분에서 만난 밤샘은 조그만 웅덩이에 물이 고인 샘이다. 사계절 물이 마르지 않는 이곳은 샘 주변을 돌로 쌓은 것을 제외하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실처럼 가느다란 물줄기가 불고 불어서 큰 만경강을 이룬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밤샘을 오가는 임도에서는 새소리와 물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고, 길가에 수줍게 핀 다양한 야생화들도 눈을 맑혀 준다. 밤샘에서 시작한 물길은 큰 인물이 난다는 거인마을(동상면 신월리)을 지난 뒤 동상호와 대아호라는 큰 호수를 이루게 된다. 둘 다 자연 호수가 아니라 인간의 기술이 적용된 인공 저수지다. 1966년에 완공된 동상호 주변은 인도가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그 대신 저수지를 낀 아름다운 길은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높다. 동상호를 낀 마을 이름은 수만리(水滿里)다. 지금이야 ‘물이 가득하다’는 뜻의 마을 이름이 어색하지 않지만, 희한하게도 조선시대부터 그렇게 불려 왔다.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전국 8대 오지에 들어갈 만큼 첩첩산중인 데다 개울 같은 만경강 물줄기만 흐르던 이곳이 왜 수만리로 불리게 됐을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조선 영·정조 때의 문신인 이서구(1754∼1825)가 전라감사로 부임해 이곳을 지나면서 “장차 물이 가득 찰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전라감사를 두 번이나 지낸 이서구는 유가(儒家) 계열의 도학자로 천문과 지리에 능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수만리 일대에는 풍수 명당들이 도처에 똬리를 틀고 있다. 마을 뒷산에 ‘비학귀소형’(飛鶴歸巢形·날아가던 학이 둥지로 돌아오는 형상) 명당이 있다고 해서 유래한 학동마을,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목마른 말이 물을 들이켜는 형상) 명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음수마을 등이 유명하다. 그중 백미는 근처 대부산 정상 쪽의 수만리 마애석불(전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 자연 암벽에 새겨 놓은 거대한 마애불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상은 1000년을 훨씬 넘겼으면서도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기운이 출중한 명당 터에 석상을 조성한 선인들의 안목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정상을 향해 1∼2km 등반의 수고로움은 이 터에서 기운을 누리는 것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을 정도다. 만경강을 가두는 또 다른 저수지인 대아호는 동상호와 달리 차에서 내려 빼어난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기암절벽을 거느린 운암산과 우아하고 부드러운 동성산이 양옆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호수의 반영(反影)이 매우 아름답다. 이른 새벽의 물안개는 신선세계를 연출하는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저수지 안쪽으로는 전주 최씨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자라가 물속으로 들어가려는 지형을 하고 있어 인상적인 곳이다. 이 묘역에 대한 안내판을 보면 풍수 명당이란 자부심이 넘쳐난다. 운암산 장군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무학대사가 묘소를 잡아주면서 “자라혈(鰲穴)이라서 물에 잠길 때가 되면 자손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실제로 일제강점기인 1922년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대아저수지가 생기면서 현실화됐다는 내용이다. 대아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만경강의 도도한 물줄기는 완주군 곳곳에서 멋진 강변 풍경을 연출하다가 삼례읍 비비정(飛飛亭)에서 절정을 이룬다. 비비정은 조선 선조 때 무인 최영길이 지은 정자인데, ‘비비낙안’(飛飛落雁·강변 백사장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에서 따온 말이다. 지금의 비비정은 1998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옛 선비들은 비비정에 올라 백사장을 오르내리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때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한내’라 불리는 삼례천이 유유히 흐르고 주변으로 드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지는 장면은 장쾌한 느낌을 준다. 물길을 가로지르는 옛 만경강 철교도 눈에 띈다. 일본이 호남평야의 농산물을 반출하기 위해 세운 다리다. 한강철도에 이어 두 번째로 긴 나무로 만들어져 당시 관심을 모았던 다리다. 그러다 2011년 근처에 호남선 철교가 세워지면서 폐철교가 됐다. 폐철교 위에는 비비정예술열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마을열차 객차를 개조해 레스토랑, 카페, 수공예품 가게, 갤러리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맨 마지막 객차 칸의 카페에서 바라보는 만경강의 노을은 그야말로 예술 작품이다. ○BTS 추억 여행 프로그램 풍성완주 가을맞이 여행은 완주군이 마련한 관광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먼저 완주군은 고산자연휴양림에서 완주와일드&로컬푸드축제(9월 30일∼10월 2일)를 개최한다. 고산자연휴양림은 친환경 숙박 시설, 카라반을 갖춘 오토캠핑장, 각종 체육시설, 체험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데다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완주군은 가족 휴양지인 고산자연휴양림의 특징을 살려 완주 ‘자연 친환경 체험과 건강한 로컬푸드 맛 체험’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와일드한 음식과 볏집 놀이터, 메뚜기 잡기, 수상한 놀이터 등 자녀들과 함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전통 축제”라고 말했다. 조금은 불편할 수 있겠지만 친환경 캠핑을 즐길 수 있는 캠핑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도 한다. 완주군이 마련한 가을 시티투어 버스도 이용해 볼 만하다. 11월 19일까지 매주 토요일 방탄소년단(BTS)의 화보 주요 촬영지 중심으로 투어가 진행된다. 투어를 예약한 후 코레일 열차(5∼10% 할인)를 이용해 익산역에서 내려 삼례문화예술촌, 위봉산성, 오성한옥마을 등을 둘러보는 코스다. 특히 방탄소년단이 5일간 머문 오성한옥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 가옥과 현대식 갤러리가 조화를 이뤄 관광객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글·사진 완주=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지는 아홉 곳의 빼어난 경치를 ‘구곡(九曲)’이라고 한다.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주자가 푸젠(福建)성 우이산(무이산) 계곡에서 노래한 ‘무이구곡’에서 따온 말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도를 존숭하는 의미로 우리나라 산중 계곡에 110개가 넘는 구곡을 설정했다. 그중 화양구곡(화양동계곡)으로 유명한 괴산군에만 무려 7개의 구곡이 존재한다. ‘자연산수’인 계곡이 구곡이란 인문학적 이름을 얻으면 ‘문화산수’로 변신하게 된다. 8월 하순 늦무더위를 식힐 겸 괴산에서 ‘구곡 산수문화(山水文化)’를 즐겨본다.○ 산막이옛길로 둔갑한 연하구곡괴산 구곡 문화의 중심점은 군자산(948m)이라고 할 수 있다. 군자산자락 남쪽 계곡으로는 선유구곡과 화양구곡이 음양 짝처럼 펼쳐져 있고, 북동쪽으로는 쌍곡구곡이, 서쪽으로는 연하구곡(산막이옛길)과 갈은구곡이 연달아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곡 산수문화의 주창자인 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와 함께 군자산 서쪽 괴산호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했다. 괴산호는 1957년 남한강 지류인 달천에 괴산댐이 완공되면서 형성된 호수다. 경치가 아름다운 데다 협곡을 끼고 도는 산막이옛길로 최근 유명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이 조선 선비들이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연하구곡(煙霞九曲)의 현장이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연하구곡의 존재를 밝혀낸 이 전 교수는 “괴산댐과 함께 수몰된 연하구곡은 노성도가 남긴 ‘연하구곡가’를 통해 실체가 확인됐다”고 말한다. 노성도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선조 노수신(조선중기 문신)을 기리기 위해 구곡을 조성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제1곡 탑바위(탑암·塔巖)와 제9곡 병암(屛巖)이다. 탑바위는 마치 탑을 쌓아놓은 듯 바위가 층층이 쌓여 있는 형태이고, 병암은 천장봉 아래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인데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록 수몰 현장이지만 연하구곡의 아름다운 절경은 달천을 오가는 배를 이용하거나 산막이옛길을 거닐면서 즐길 수 있다. 차돌배기선착장에서 유람선이나 보트를 이용하면 제5곡에서 제9곡까지 물굽이가 태극선으로 휘돌아 흐르면서 자아내는 강변 풍경이 일품이다. 산막이옛길은 2011년 괴산군이 연하구곡 구간 일부를 개발해 지은 둘레길(칠성면 외사리 사오랑마을∼산막이마을 약 4km 구간)이다. 이 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산막이’는 산막(山幕)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곳 산에서 분청사기를 굽던 도공들이 가마의 불을 관리하기 위해 지은 임시 집, 즉 산막에서 마을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현재도 산막이나루터에서 산기슭 쪽 도랑가에는 당시의 가마터 흔적이 여러 곳 남아 있고 도자기 파편 등도 쉽게 발견된다. 괴산호를 끼고 도는 산막이옛길은 옛 정취가 흠씬 묻어난다. 괴산호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인 연하협구름다리(167m)에서 자동차로 불과 10분 정도 거리에 갈론계곡(칠성면 갈론리)이 있다. 갈은구곡(葛隱九曲)으로 불리는 이곳은 ‘칡뿌리를 캐먹으며 숨어 지내는 곳’이라는 이름처럼 외진 곳이어서 최근에야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다. 갈론마을 끝에서 계곡 길을 따라 1km 정도 가면 오른쪽에 ‘갈은동문(葛隱洞門)’이라고 새겨진 바위 절벽이 있다. 갈은구곡의 신선세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라는 뜻이다. 갈은구곡은 계곡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차례로 구곡 이름이 붙여져 있다. 괴산 출신 전덕호(1844∼1922)가 만들었다는 이곳은 아홉 개의 바위 절경마다 각각 다양한 서체의 한시가 새겨져 있는 점이 독특하다. 구곡시가 바위에 빠짐없이 새겨진 유일한 구곡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던 구한말 시대를 살아가던 조선 선비가 이상세계(선계)를 그리워하는 애잔한 정서도 느낄 수 있다. 신선이 내려온 강선대(降僊臺·제3곡), 신선을 상징하는 일곱 마리 학이 사는 칠학동천(七鶴洞天·제8곡),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바위인 선국암(仙局암·제9곡) 등이 그렇다. 선국암에는 실제로 바둑판도 새겨져 있다. 2015년 9월 선국암에서는 바둑으로 입신의 반열에 오른 김인과 유창혁의 대결이 벌어졌다. 두 입신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음각된 바둑판에서 신선놀음을 했다. 한낮 무더위에 찾은 갈은구곡에서는 뒤늦게 피서를 즐기는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계곡의 승경과 맑은 물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갈은구곡을 소개하는 안내판 하나도 없는 게 옥에 티라고나 할까. ○자동차로 즐기는 화양구곡과 선유구곡군자산 남쪽의 화양구곡과 선유구곡은 자동차를 이용해 구곡을 즐길 수 있다. 먼저 화양구곡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한때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2014년 전국의 구곡 중 최초로 명승(국가지정문화재)으로 등록된 화양구곡은 보통 주차장 옆에 위치한 제1곡인 경천벽을 출발점으로 해서 제9곡인 파천까지의 3.1km 거리를 가리킨다. 구름이 맑게 비치는 옥빛 연못 같은 제2곡 운영담을 지나면 동그란 구멍이 무늬처럼 새겨진 제3곡 읍궁암, 제4곡 금사담이 나타나는데 이 일대가 바로 송시열 유적지다. 금사담 건너편에는 송시열이 후학을 길렀다는 암서재가 운치 있게 자리 잡고 있다. 인근에 복원된 만동묘와 화양서원도 송시열과 관련이 깊은 유적지다. 이곳이 조선 성리학의 정신적 중심 역할을 한 때문인지 일제강점기에 박아놓은 쇠말뚝이 유독 많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전 교수는 “읍궁암 암반에서 5개, 금사담 암반에서 6개의 쇠말뚝이 나왔다”면서 “조선 유교문화의 도맥을 이어가는 성소(구곡)에다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것은 일제의 용서받지 못할 범죄 행위”라고 말했다. 계곡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큰 바위가 첩첩이 쌓인 제5곡 첨성대, 구름을 찌를 듯 높다는 제6곡 능운대가 나온다. 암벽마다 구곡 이름을 새긴 각자(刻字)를 찾아보는 즐거움도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는 화양동 탐방지원센터에서 능운대까지 친환경 무공해 전기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버스는 15명이 탑승할 수 있고, 운행 횟수는 하루 8회로 무료다. 용이 누워 꿈틀거리는 모습을 닮았다는 제7곡 와룡암부터는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청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는 제8곡 학소대를 지나면 최종 목적지인 제9곡 파천(혹은 파곶)이 나온다. 파천은 흰 바위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위로 흐르는 물결이 용의 비늘을 꿰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계곡의 물 흐름이 ‘巴’ 형상으로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도 보인다. 파천에는 수백 년 전부터 자신이 다녀갔음을 인증하는 이름과 벼슬명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다. 화양구곡이 송시열로 상징된다면 선유구곡은 퇴계 이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퇴계는 이녕이 설정한 선유8경의 시를 지어주었다. 그 후 1700년대 노론계열 4명의 선비가 제1곡인 선유동문을 비롯해 경천벽, 학소암, 연단로, 와룡폭포, 난가대, 기국암, 구암, 은선암 등 선유9곡을 지었다고 한다. 계곡 입구에 대규모 주차장이 있고 승용차를 이용해 계곡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때는 구곡 길이 일방통행이므로 반드시 입구인 제1곡에서 제9곡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구곡 중간중간에 쉼터가 있어 잠깐씩 멈춰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글·사진 괴산=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합천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황강에서 늦더위를 보낸다.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수상 레저를 즐길 수도 있고, 강변을 따라 우리 근현대사 자취를 만나는 흥취도 있다. 황강 변에는 북악산자락 실물 청와대를 68% 크기로 재현한 청와대세트장을 비롯해 근현대의 유명 건축물과 거리 등을 조성해 놓은 합천영상테마파크가 있고, 합천이 고향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가도 있다. 마치 그의 전기인 ‘황강에서 북악까지’가 이곳에서 재현된 듯하다. 최근 600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 해인사 장경판전의 팔만대장경도 6·25전쟁과 빨치산 때문에 소실될 뻔했던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현장이다.》 ○황강 명물 카누 타고 함벽루 감상역대 대통령들을 배출한 생가는 대체로 관광 명소가 된다. 작년 11월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는 별개로 그가 태어난 합천의 생가(율곡면 내천리) 역시 사람들이 즐겨 방문하는 곳이다. 좋은 터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정서 때문일 것이다. 황강 물줄기가 감싸주듯 휘둘러가는 지형에 있는 그의 생가는 조촐한 규모와는 달리 강한 권력과 무(武) 에너지를 내뿜는 터로 평가받는다. 생가 마루에 앉아 있다 보니 강력한 천기(天氣)에 어질어질 취하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다. 소년 전두환이 즐겨 씨름을 했다는 황강 변 모래사장을 기점으로 합천호 쪽으로의 물길은 수상 레포츠를 즐기는 명소다. 먼저 합천 문화재인 함벽루(고려시대 누각) 인근에는 정양레포츠공원이 있다. 황강의 명물인 카누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안전교육과 패들 젓는 요령을 간단히 익힌 후 카누를 타면 은빛 백사장과 잔잔한 강물, 그리고 함벽루가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풍광을 만나게 된다. 황강카누체험교실을 운영하는 김일상 씨는 “수심이 얕고 잔잔해 자녀를 둔 부모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더 다양한 수상 레포츠를 즐기고 싶으면 황강 물길을 막아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인 합천호로 가면 된다. 이곳에서는 모터보트, 수상스키, 웨이크보드, 바나나보트, 제트스키, 하늘을 나는 플라이피시 등 짜릿한 수상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7억9000만 t의 저수량을 자랑하는 합천호는 호수를 둘러보는 둘레길이 아름답다. 초록빛 산허리를 끼고서 약 40km에 걸쳐 호반을 돌아보는 드라이브 코스가 인기를 끈다. 합천호는 이른 새벽 산안개와 물안개가 서로 섞이는 장면이 백미로 꼽힌다. ○시공간을 초월한 시간여행 명소‘수(水)려한 합천’에서 물놀이를 즐긴 후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합천호 인근의 합천영상테마파크(용주면 가호리)는 ‘시간 여행’을 즐기려는 이들이 찾는 국내 시대물 오픈 세트장이다. 테마파크 내에서는 각 시대의 정취가 느껴지는 건물과 간판들이 눈길을 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경성(서울) 거리 및 건물들에서부터 1980년대 서울의 거리 등이 정교하게 재현돼 있다. 2004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천영상테마파크는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함께 유명해졌다. 이후 ‘암살’ ‘써니’ ‘고지전’ ‘택시운전사’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한 지상파 방송에서 세트장 한쪽 구간을 임차해 드라마를 촬영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합천군 관계자는 영화 및 드라마 촬영용 세트장 임대 수입이 짭짤하다고 밝혔다. 합천영상테마파크의 세트장은 작품 스토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게 특징이다. 관람객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 명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과 소품 등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드라마에서 가게로 선보인 일부 건물들은 실제로 관람객들을 상대로 식음료 등을 팔기도 한다. 당대의 의상을 빌려 입고 적극적으로 시간여행을 즐기는 MZ세대들도 눈에 띄었다. 영상테마파크 뒤편의 정원테마파크에는 실물 청와대를 재현해놓은 촬영세트장이 있다. 높은 지대에 있기 때문에 영상테마파크에서 모노레일(5000원)을 탑승해 올라가면 된다. 청와대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대통령 집무실 의자에 앉아보거나 청와대 대변인 역할 놀이 등을 해볼 수 있다.○화마에도 팔만대장경만 멀쩡한 이유 최근 해인사는 꽁꽁 숨겨두었던 팔만대장경을 전격적으로 국민에게 공개했다. 사전 예약을 통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20명 한정으로 해인사 장경판전 ‘팔만대장경 순례’를 할 수 있다. 해인사 홈페이지에서 월요일에 예약 접수를 하면 금세 마감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강화도에서 만들어졌다. 불심으로 몽골군을 물리쳐 나라를 지키고자 한 고려인들의 염원이 담긴 작품이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이후 지금의 해인사로 옮겨졌다. 팔만대장경과 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조성된 건물이 장경판전이다. 장식이나 기교가 보이지 않는 15세기 목조 건물이지만, 팔만대장경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는 과학적 건축 기술과 풍수적 조치가 담겨 있는 곳이다. 먼저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장경판전 내 법보전은 최고의 명당 터로 꼽힌다. 건물 바닥은 60∼90cm 깊이로 숯, 소금, 황토와 회로 다져놓았는데, 마치 시멘트를 깔아놓은 것처럼 단단한 모습이다. 이렇게 하면 장마철에 습기를 빨아들이는 등 적절한 습도가 유지되고 벌레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건물 벽 위아래에 크기가 다른 창틀을 만들어놓은 것도 특징적이다. 서남향 구조의 건물 남쪽 벽은 아래쪽 창틀이 위쪽 창틀보다 더 큰 반면, 반대편 북쪽 벽은 거꾸로 돼 있다. 이는 건물 지형과 바람 방향을 계산해 밤낮으로 바깥바람이 건물 내부로 들어와 공기를 잘 순환시키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 바람이 별로 없는 한낮의 땡볕 날씨임에도 남쪽 벽 창틀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수시로 불어왔다. 오늘날의 첨단 건축 기술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선조들의 지혜가 놀라웠다. 살기나 흉한 기운을 막기 위해 지붕에 결계(結界) 장치를 한 장경판전은 오래된 풍수 비방도 간직하고 있다. 불기운이 드센 지형의 해인사에서는 매년 소금 묻기 행사를 한다. 1년 중 양기가 가장 강한 단옷날에 바닷물(소금)로 화기를 누름으로써 화재 예방을 기원하는 행사다. 그런 원력 때문일까, 해인사는 1695년부터 모두 7차례 화재를 겪었지만 장경판전은 단 한 번도 화마(火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장경판전은 6·25전쟁의 폭격에서도 살아남았다. 당시 가야산 자락 해인사는 빨치산의 주 활동무대였다. 아군은 이 일대를 초토화시키려 폭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공군 조종사 김영환 대령은 소중한 문화자산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명령을 어기고 폭격 대신 기관총으로 적들을 소탕했다. 해인사 앞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실 해인사 주지(현응)의 과감한 결단으로 공개하긴 했지만, 일반인이 팔만대장경을 쉽게 만나기는 아직도 어렵다. 관리와 안전상의 이유로 건물 내부 사진 촬영도 엄격히 금지된다. 팔만대장경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사찰을 둘러본 후 대장경테마파크를 찾아가보길 추천한다. 대장경의 전래와 결집, 경판의 제작 과정, 장경판전의 숨겨진 과학 등을 영상과 미니어처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대장경테마파크에서 해인사까지는 ‘해인사 소리길’로 유명하다. 가을 단풍이 떨어지면 ‘흐르는 물조차 붉다’고 해서 홍류동이라 불리는 계곡을 따라가는 6.2km(2시간) 구간이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바람·새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내면의 소리도 듣게 된다는 길이다. 여름철 힐링 명상코스로 좋다.글·사진 합천=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
《경남 창녕에는 ‘메기가 하품만 해도 물이 넘쳐나는’ 우포늪과 ‘큰불이 나야 이듬해 풍년이 든다’는 속설로 유명한 화왕산이 있다. 우포늪 물기운과 화왕산 불기운이 조화를 이뤄 부곡온천 같은 온천수가 풍성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리고 더 먼 시절에는 이곳에서 가야의 신비한 역사가 펼쳐졌는데….》○비화가야의 순장 소녀 ‘송현이’길 아담한 키(153.5cm), 가느다란 허리(21.5인치), 동그스름하며 귀여운 얼굴의 소녀. ‘송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녀는 16세 나이에 주인과 함께 순장됐다가 1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부활한 가야 여성이다. 창녕 송현동고분군에서 발굴된 인골을 이용해 첨단기술로 복원해낸 송현이의 국적은 ‘비화가야’. 옛날 불사국(不斯國), 비사벌(比斯伐) 등으로 불리던 창녕 지역의 가야 소국이다. ‘불’ 혹은 ‘빛’을 연상시키는 옛 이름답게 창녕의 주산은 불기운이 왕성한 화왕산(火旺山·756.6m)이다. 창녕읍에서 바라보면 산 정상이 불꽃처럼 솟구친 모습이어서 ‘불뫼’라고도 불린다. 비화가야 지배층은 주산(화왕산) 서쪽 여러 산등성이를 따라 200여 기의 무덤을 조성했다. 교동(창녕읍 교리) 쪽 산줄기엔 교동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고, 송현동(창녕읍 송현리) 쪽 산줄기를 따라서는 송현동고분군이 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사적 제341호)은 현재 다른 6개 지역 가야 고분군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송현이는 송현동고분군 15호분 주인공의 시녀로 추정된다. 잘 다듬어진 고분 산책로를 따라 송현이의 ‘고향집’에 다다랐다. 송현동고분군은 낙타 등처럼 생긴 크고 작은 고분들이 창녕 시내 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들어선 형태다. 전망 포인트에 올라서니 봉긋한 무덤 윤곽선을 따라 창녕읍 시내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무덤이 망자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평지에 조성된 경주 고분들과는 다른 느낌과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사진 촬영 명소인 이곳은 가야 사람들의 터 잡기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가을 억새초원과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지키던 산성으로 유명한 화왕산 정상을 오르지 않더라도 이곳 쉼터에 앉아 화왕산의 맑은 기운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송현동고분군 지척에 있는 교동고분군도 가야인들의 독특한 풍수적 안목이 도드라진 곳이다. 대형 무덤을 중심으로 중소형급 무덤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선 모습인데, 왕릉 규모의 큰 무덤은 대체로 명당 혈(穴)에 둥지를 틀고 있다. 교동고분 바로 옆에 위치한 창녕박물관에는 고분 축조 과정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와 금공예품 등 각종 유물, 왕릉급 무덤을 재현해 놓은 전시 공간 등이 있다. 창녕군에서는 창녕박물관을 기점으로 송현이를 기리는 ‘송현이길’(약 4km)까지 조성해 놓았다. 창녕박물관∼송현동고분∼송현동 마애여래좌상∼만옥정공원(창녕객사 및 진흥왕척경비)∼창녕석빙고∼명덕수변공원∼창녕향교∼교동고분∼창녕박물관의 순환 코스로 짜인 역사 산책길인데 2시간 정도면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시내 중심에 석굴암과 고분들이 들어서 있는 게 마치 경북 경주와 비슷한 분위기다. 이 때문에 창녕을 ‘제2의 경주’라고도 부른다. 무더위에 송현이길을 산책할 때는 명덕수변공원을 빼놓을 수 없다. 규모가 비록 크지 않지만 호수 위를 걷는 덱, 호수의 반영(反影), 멋스러운 카페 등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풍광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창녕 우포늪에서 만난 초록 융단화산 폭발로 생성된 화왕산과 짝을 이루는 우포늪(2.505km²)은 1억4000만 년 전에 생긴 국내 최대의 내륙 습지이자 대표적인 철새 도래지다. 우포늪은 화왕산에서 발원한 토평천이 낙동강으로 유입되기 전 쉬어가는 늪지대다. 서울 광화문의 해태상이 관악산의 화기를 막는 역할을 하듯이, 우포늪은 화왕산의 불기운을 제어하는 자연 방호벽이라는 풍수설도 있다. 우포늪은 국제적으로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8년 람사르 협약에 따라 보호습지로 등록된 데 이어, 2018년에는 세계 최초로 람사르 습지도시로 인증받았다. 우포늪은 여러 곳의 늪지를 합쳐 놓은 곳이다. 가장 큰 면적의 우포(소벌)를 비롯해 목포(나무벌), 사지포(모래벌), 쪽지벌, 복원습지인 산밖벌로 이루어져 있다. 각 늪지는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우포는 겨울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고, 사지포는 연꽃이 출중하고, 목포는 늪에 뿌리를 내린 버드나무가 운치 있고, 쪽지벌은 가시연꽃이 신비한 자태를 연출한다. 우포늪을 산책할 수 있는 둘레길도 잘 조성돼 있다. 우포늪생태관∼제1전망대∼숲 탐방로 1길∼생태관으로 되돌아오는 1km(30분) 짧은 코스를 비롯해, 우포늪 생명길을 탐방하는 8.4km(3시간) 코스, 우포 출렁다리와 산밖벌까지 탐방하는 9.7km(3시간 30분) 코스가 있다. 보통은 남녀노소 부담 없이 우포늪을 즐길 수 있는 우포늪 생명길을 많이 찾는다. 보도로 뚜벅뚜벅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해 쉽게 둘러볼 수도 있다. 여름 무더위에 찾은 우포늪은 흘린 땀을 충분히 보상해줄 만큼 멋지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그간 모습을 감추었던 마름, 자라풀, 생이가래, 개구리밥 등 수생식물들이 깨어나 늪 전제를 초록 융단으로 깔아놓은 듯하다. 그 위로 새들이 유유히 날아다니는 모습도 운치 있다. 운이 좋으면 국제적 보호종인 따오기를 만날 수도 있다. 아이들과 함께 우포늪을 찾았다면 잠자리를 테마로 한 곤충체험학습관인 우포 잠자리나라를 들러볼 일이다. 잠자리 우화 장면, 수중에서의 잠자리 유충의 먹이 활동 등을 관찰할 수 있다. 한반도에는 총 11과 58속 123종의 잠자리가 있는데, 우포늪에만 10과 41속 73종의 잠자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오후 4시까지 입장해야 한다. 어른 8000원 어린이 5000원.○화왕산 불기운으로 데운 부곡온천화왕산 불기운과 우포늪 및 낙동강의 물이 만나 생겼다는 부곡온천에서 여행의 피로를 풀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부곡온천은 국내 최고 온도의 유황온천으로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후 1970, 80년대 최고 호황을 누렸던 온천 관광지다. 2017년 국내 1호 워터파크 부곡하와이가 폐업한 이후에도 고품질의 온천수가 나와 여전히 성업 중인 곳이다. 부곡온천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동국여지승람’(영산현조)에 “온천이 현의 동남쪽 17리에 있더니 지금은 폐했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온천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곡(釜谷)’이라 불린 마을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우물이 있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옴 환자와 나병 환자 등 피부질환자들이 찾아와 치료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말하자면 화왕산의 왕성한 불기운으로 가마솥(부곡)을 데우니 국내에서 가장 높은 수온인 78도의 온천수가 펑펑 솟아나와 환자들을 치료했다는 스토리다. 지금의 부곡온천은 고(故) 신현택 옹이 1972년 부곡면 거문리(원래 이름은 온정리·溫井里)에서 온천수(지하 63m)를 찾아낸 후 하루 6000t의 유황온천을 채수하면서부터다. 부곡온천 관광특구에는 호텔과 콘도, 골프장, 온천 분수대 등 온천을 기반으로 한 종합 휴양 시설과 다양한 온천장이 들어서 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가족만이 오붓하게 즐길 수 있도록 가족탕을 갖춘 객실들이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글·사진 창녕=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한양(서울)도성을 하루 만에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을 ‘순성(巡城)놀이’라고 한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해 도심을 둘러싼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조성된 18.6km의 성벽을 하루에 완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순성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믿음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조선의 과거 응시자 사이에서는 순성을 해야 급제한다는 소문이 번졌고, 서울 종로 상인들도 복을 받기 위해 순성에 도전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 전통은 유지됐다. 최근 대통령 집무실이 북악산 자락에서 남산 자락의 용산으로 이전해 오면서 서울도성 남산 구간(광희문∼남대문) 코스가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남산 기운을 느껴보는 순성놀이는 어떨까.》 ○ 서울 주산(主山)이 바뀌었다? 한양을 상징하는 산을 놓고서 여러 산이 다투었다. 1394년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후 궁궐의 뒷산 즉, 주산을 어디로 정할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주장했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은 인왕산을, 그리고 민간에서는 회룡고조(回龍顧祖) 명당 형국을 이룬 남산을 꼽았다는 얘기가 회자된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이 채택돼 북악산이 한양의 주산으로 등극했다. 최근 북악산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남산 자락으로 옮겨간 후부터다. 국가 최고 통치자가 한양도성을 벗어난 곳에서 집무실을 마련한 것도 한양 정도 628년 만에 처음 벌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서울의 주산도 남산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남산의 변화된 위상을 느껴보기 위해 남산 구간(5.4km) 순성 길을 밟아 보았다. 남산 구간은 숭례문∼백범광장·안의사광장∼한양도성유적전시관∼목멱산(남산)봉수대∼국립극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장충체육관∼광희문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물론 거꾸로 밟아도 된다. 숭례문에서 출발해 남산공원임을 알리는 출입구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광장이 펼쳐진다. 백범광장과 안의사광장이다. 광장에 조성된 김구, 이시영, 안중근 등 애국지사 동상 앞에서 참배한 후 성벽을 따라 더 올라가면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2013∼2014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도성 성벽 유적을 전시하는 야외 시설이다. 그 옆으로는 조선신궁 배전(拜殿) 터가 일부 복원돼 있고, 맨 끝단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방공호도 보인다. 일제가 도성 성벽을 무너뜨리면서 참배 시설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일제는 1920년 5월 3·1운동이 일어난 지 1년 만에 조선신궁을 착공해 1925년에 완공했다. 이후 조선인들도 이곳에서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한국인들의 독립과 저항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술책이었다. 1945년 일제 패망과 함께 철거된 조선신궁은 남산에서도 터 기운이 강한 곳 중 하나다. 남산의 천기(天氣)를 받은 조선신궁은 북쪽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조선총독부(경복궁 터)와 함께 한국인들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장악하고자 했다. 광복 후 조선신궁 터에는 백범광장과 안중근기념관 등이 들어섰다. 독립운동가의 정신으로 일제의 침략 기운을 지우기 위한 상징적 조치로 해석된다. ○남산으로 옮겨간 서울의 중심점봉수대와 N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정상으로 올라서니 팔각정에서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며 앉아 있다. 조선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 중 하나였던 국사당이 있던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12월에 세워진 국사당은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한 후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다. 500년 넘게 남산을 지키던 국사당은 1925년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간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조치였다. 국사당이 조선신궁을 굽어보는 위치에 있는 데다 터 기운마저 조선신궁 못지않으니 일제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지금도 팔각정 일대는 명당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땀 흘리며 정상을 찾은 이들에게 좋은 에너지로 ‘보상’을 해준다고나 할까. 팔각정 광장에는 남산의 ‘위엄’을 알려주는 표지돌도 있다. 광장 동쪽 끝 외진 곳에 있는 ‘서울의 중심점’ 표지돌이다. 둥근 원형의 표지돌에는 25개 자치구가 명기돼 있다. 2010년 서울시가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남산 정상이 서울의 중심점임을 표시한 것이다. 행정 경계로 서울의 중심이 되는 남산은 대통령 집무실도 품고 있다. 남산의 한 줄기인 둔지산(65.5m) 자락에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남산 남측 ‘소나무 숲 탐방로’ 인근의 전망대에서는 이런 지형 및 지세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남산에서 불거져 나온 산줄기가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일대를 거쳐 용산공원 쪽으로 내려가면서 자그마한 야산을 이루는 모양새다.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해 전쟁기념관, 국립박물관 등이 둔지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둔지산은 대한제국 시기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남교(南郊)가 설치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원단, 풍운뇌우단, 영성단, 노인성단 등 중요한 국가 의례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이런 이유로 남산에서 둔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남산의 주맥(主脈)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처럼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남산은 고려 때 인경산(引慶山)으로 불렸다. 경사를 끌어들이는 산이라는 뜻이다. 대통령 집무실이 기운 세찬 북악산에서 부드러운 남산으로 이전한 게 경사스러운 일이 되기를 기대한다.○조선 미래 ‘예언’한 광희문남산 정상에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장충단 방향이다. 남산 동편에 해당하는 이 순성 길은 태조 시기에 지은 초성(初城·처음 쌓은 성)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남산을 상징하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서 남산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길로 통한다. 이 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충원이라고 할 수 있는 장충단과 광희문 등을 만나게 된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순국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장충단은 원래 국립극장, 반얀트리호텔, 남산자유센터, 신라호텔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제향 공간이 식민통치를 치켜세우는 행사장으로 쓰이더니 급기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공원으로 격하됐다. 1923년에는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博文寺)까지 세워졌다. 광복 후 박문사(영빈관 터)는 철거됐고, 공원에는 이준, 유관순 열사 동상, 3·1운동 기념탑 등이 들어섰다. 코스의 마지막인 광희문(光熙門)은 한양도성 네 개의 소문 중 하나로 1396년에 창건된 건물이다. ‘시구문(屍口門)’이란 별칭도 있다. 시신을 도성 밖으로 운구할 때 통과하던 문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광희문 명칭과 관련해 흥미로운 참언이 있다. 광희문의 ‘광’은 광무(光武) 연호를 쓴 고종을 가리키고, ‘희’는 융희(隆熙) 연호를 쓴 순종을 의미한다는 것. 따라서 고종과 순종 대에 이르러 시구문 이름처럼 조선이 사망 선고를 받는다는 거다. 이는 정도전이 광희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점에서 그럴싸하게 유포됐다. 정도전은 겉으로는 유학자였지만 주역과 역학 등에 밝았던 이로 알려졌다. 이성계 집권 후 왕권(王權)보다는 신권(臣權)을 꿈꾸던 그가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남향으로 틀어 왕실 약화를 꾀했다는 ‘음모설’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북악산 자락 경복궁은 조선 내내 풍수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청와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구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남산 대통령 시대를 맞아 참언이 사그라들길 바란다.글·사진 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
신한금융그룹이 실천하고 있는 사회공헌 사업이 주목받고 있다. 신한금융은 최근 한 ESG 조사전문기관의 평가 결과 4대 금융지주사 가운데 가장 높은 최우수 등급(AA)을 받았다. 2019년부터 지금까지 ESG 최우수 등급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는 사회공헌 사업에 대한 조용병 회장의 강한 의지와 실행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조 회장은 취임 직후인 2017년 말부터 금융권 최대 규모의 ‘희망사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희망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뜻의 ‘호프 투게더(Hope Together)’라는 슬로건 아래 선도적으로 사회공헌 사업에 앞장서온 것이다. 이는 고객과 사회의 가치를 함께 높임으로써 ‘미래를 함께하는 따뜻한 금융’이라는 그룹의 미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신한금융이 그간 실천해온 사회공헌 사업은 광폭 횡보라고 부를 만하다. ‘희망사회 프로젝트’의 원년인 2018년에는 신한금융희망재단이 출범해 그동안 그룹사가 개별적으로 추진해 오던 여러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새롭게 조직화하는 등 통합 체계를 마련했다. 2019년에는 청년 실업, 신용 위기 등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한금융희망재단의 사업 영역을 청년층으로 확장했다. 2020년에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통해 글로벌 기준에 맞는 유의미한 사회적 가치를 도출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등 ‘희망사회 프로젝트’의 가치를 높였다. ‘희망사회 프로젝트’ 3개년 두 번째 시즌을 맞은 2021년부터는 ‘호프 투게더 S.F.G.’를 추진해 오고 있다. 이는 스타트업(Start up) 생태계 구축, 금융 취약계층(Financial Literacy) 지원 사업 강화, 지역사회 상생(Group of Community)을 위한 노력 등을 뼈대로 하는 새로운 사업이다. 미래 짊어진 청년·청소년들을 위한 금융교육조용병 회장은 특히 대한민국의 미래인 청년과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에 적극적이라는 게 그룹 관계자들의 얘기다. 조 회장은 미래 세대가 금융을 쉽게 이해하고 금융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이 같은 조 회장의 의지에 따라 2022년 1월 은행, 카드, 금투, 라이프 등 계열사별로 진행하던 금융교육을 그룹사 통합으로 운영하는 플랫폼인 ‘신한이지(easy)’를 출범했다. 신한이지는 현재 어린이 금융체험 교실, 청소년 진로 직업 체험 교육, 금융 소외계층 생활금융교육 등 연령별·학력별 맞춤 금융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도 금융사기 보호 등 최근 대두되고 있는 주요 이슈와 관련해 금융소비자들이 알아야 할 필수 금융정보를 제공하는 금융체험관 운영, 신한금융의 주요 오프라인 금융교육 신청 및 후기 등록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한다. 신한금융은 청년부채 문제 해결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청년부채 토털케어’ 프로젝트에 선발된 청년들을 대상으로 생활비 지원, 직업 역량 강화 지원금 등을 통해 부채 탈출을 돕고 있으며 한편으론 신한금융의 글로벌 경쟁력을 활용해 청년들의 해외 구직활동을 돕고 있다. 특히 신한금융은 5년간 모두 1000여 명의 글로벌 청년 인재 양성을 목표로 국내외 연수, 현지기업 실무 교육, 선배 기업인과의 멘토링 서비스 등을 지원하고 있다. 신한금융은 이와 같은 청년 고용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고용노동부로터 ‘2021년 일자리 창출 유공 포상’을 수상했다. 사회취약계층에 희망의 빛을!초등학생 돌봄 공동육아 나눔터인 ‘신한 꿈도담터’는 맞벌이 가정으로부터 호응이 높은 사회공헌 사업으로 꼽힌다. ‘신한 꿈도담터’는 초등학생 자녀들의 방과후 돌봄 공간을 개보수하는 사업으로 현재 123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신한금융측은 “지금까지 누적 89만4000명이 꿈도담터를 이용했으며 2023년까지 200개소가 개소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장애청년드림팀 사업 역시 신한금융이 장기간 후원해온 사회공헌 활동이다. 신한금융은 국내외의 유능한 장애청년 발굴과 훈련(해외 연수, 취업 인턴십, 창업 교육) 등을 실시해왔다. 장애 청년과 비장애 청년이 스스로 팀을 이뤄 해외 연수를 통해 국제 사회로의 진출을 지원하거나 해외의 유능한 장애 청년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주는 등 장애인 인식 개선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신한금융은 지난 17년간 약 1000명의 장애청년들을 대상으로 약 97억 원을 지원했다. 신한금융의 희망사회 프로젝트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이 있는 곳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스스로 힘으로는 회생 불가능한 가정을 대상으로 경제적 지원을 통해 자립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희망사회 프로젝트의 대표 사업 중 하나다. 위기 상황에 놓인 취약계층 맞춤형 재기 지원, 학대 피해를 입은 아동들의 재기 지원, 사회적 의인에 대한 ‘희망영웅’ 포상 등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신한금융 사회공헌사업 관계자는 “희망사회 프로젝트를 통해 매년 300억 원씩 사회적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함께 나누며 모두가 잘 사는 ‘따뜻한 희망사회’를 위한 프로젝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청와대를 외면하는 무정(無情)한 북악산서울의 상징적인 중심축이 바뀌는 초유의 일을 맞이했다. 북악산자락 청와대 대통령집무실과 관저가 용산의 남산자락으로 옮겨갔다. 한양 정도 630년만에 서울의 상징적 주산(主山)이 바뀌게 된 셈이다. 이와 관련 경복궁·청와대와 용산의 입지 등을 집중 조명하는 학술 세미나가 주목을 받고 있다. 풍수, 명리 등 동양학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는 학술단체인 한국풍수명리철학회는 ‘공간 의식, 그리고 운명’이라는 주제로 7월9일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대강당(203호)에서 이를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관련 논문을 바탕으로 한 저자들의 발표 내용이다. 지종학 박사(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는 경복궁과 청와대의 입지에 대해 풍수지리학적 시각으로 진단했다. 그는 “경복궁과 청와대는 주산과 청룡, 백호 등 지형적 조건이 같기 때문에 한묶음으로 볼 수 있다”라고 전제한 뒤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통치한 조선의 역대 임금(16명)과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12명)의 행보를 볼 때 좋은 터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광복 이후 청와대 주인들이 유난히 시련을 많이 겪다보니 국가신인도 추락과 연계되고, 풍수학의 신뢰성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태까지 불러오게 됐다는 것이다. 지 박사는 청와대·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이 무정(無情)한 게 가장 큰 풍수적 결함이라고 진단했다. 북악산은 힘 있게 우뚝 솟은 모습이지만, 산의 머리 부분이 동쪽을 향하면서 경복궁·청와대를 외면함으로써 무정한 주산이 돼버렸다는 주장이다. 이는 조선 초기 경복궁 입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정도전, 권중화 등 유학자 그룹이 풍수지리학에서 중시하는 산의 면배(面背·앞면과 뒷면)와 유·무정(有無情)을 따지지 않고 넓은 명당터만을 고집하다보니 현재와 같은 배치가 됐다는 것이다. 산세(山勢)만 그런 게 아니다. 재화, 즉 경제력과 경쟁력을 상징하는 물길도 경복궁을 외면하고 있다. 주산인 북악산이 경복궁(청와대)을 외면하다보니 뒷산에서 감싸주듯이 내려오는 안정적인 물 공급을 받지 못한 채,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인왕산의 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됐다. 비유하자면 내 집 안에 우물이 없어서 이웃집 우물을 눈치보며 길어 마시는 격이다. 이는 한나라의 주권과 경제적 자립 측면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가 된다. 지박사는 경복궁 터가 좋지 않다고 해서 서울의 풍수지리적 가치가 부정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서울은 북한산과 한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대단한 풍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는 청와대의 대안으로 삼청동과 용산이 좋다고 주장했다. ○ 천제(天祭) 지내던 둔지산 품에 안긴 대통령집무실이덕형 박사는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선 용산의 둔지산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둔지산은 남산(목멱산) 줄기에서 뻗어내린 지룡(支龍)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둔지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던 둔지산 자락은 이후 일본군 병영기지, 미8군 주둔지, 국방부 및 한미연합사령부 등 군 관련 권력기관이 들어서게 됐다. 둔지산은 원래 국가적인 의례를 행하던 제단이 설치됐던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원단(圓壇) 노인성단(老人星壇)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등 조선시대 국가적인 의례를 지내던 곳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남교(南郊)가 설치되기도 했다. 그런데 둔지산은 사실 ‘용산(龍山)’이라는 지명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산이다. 서울에서 원래 용산으로 불리던 곳은 천주교 용산성당(산천동)을 중심으로 효창동, 원효로동 일대와 지금은 마포구로 변경된 도화동과 공덕동 등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용산은 또한 산 이름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동국여지지’에서는 “무악산의 남쪽 줄기가 한양을 감싸며 돌아나가다 한강변에서 끝나는데, 이를 용산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즉 인왕산에서 기원하는 무악산 줄기가 만리동 고개(만리재)와 효창공원을 거쳐 한강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춰선 지형을 표현한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용처럼 보인다고 해서 용산이 됐다. 반면 둔지산은 경복궁의 안산에 해당하는 남산에서 기원한다. 산의 계보가 엄연히 다른 셈이다. 원래의 용산 일대는 수로를 통해 한양으로 물류가 집적되던 풍요로운 공간이었다면, 신용산(이태원동, 한남동 등)의 무대인 둔지산자락 일대는 신령스러운 터가 된다. 이 박사는 대통령집무실이 둔지산에 들어선 것과 관련해 “고종이 조선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의지로 대한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하면서 하늘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었던 둔지산에서 역사적 정신적 의미가 후대에도 이어져 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세미나는 경복궁과 용산의 풍수적 입지 외에도 ‘조선시대 산림정책과 풍수의 상관관계’ ‘현대 한국 명리학의 발전과정 연구’ ‘절기시간에 따른 일진의 변화 연구’ 등 동양학 관련 심도 깊은 논문들이 발표된다. 이 학술 세미나를 기획한 박정해 한양대 교수는 “동양학이 그간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상황을 외면해 스스로 고립되는 측면이 있었던 점을 반성하고, 풍수와 명리에 관한 학술적 논리체계를 구축해 적극적으로 사회의 흐름을 읽고 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고 말했다. 안영배 기자 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배부른 황소가 한가로이 엎드린 채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와우형(臥牛形) 터에서 지내봤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전남 강진에서 첫 유배 생활을 했던 ‘사의재’ 옆 한옥체험관, 바로 황소 얼굴에 해당한다는 터다. 이름 그대로 넉넉한 터 기운 때문일까. 다산의 자취가 밴 강진을 여행하는 동안 몸이 평안해지고 마음은 여유로웠다.》 ○ 강진 황소 명당에서 기운 차린 정약용 221년 전인 1801년 겨울, 전남 강진 땅을 밟은 다산은 깊은 나락에 빠져 있었다. 임금(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다가 졸지에 ‘천주쟁이’라는 역적으로 낙인찍혀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강진읍내 동문마을에 사는 주막집 주모만이 다산에게 음식을 내주었다. 허겁지겁 아욱국에 밥을 말아먹는 다산을 가엽게 여긴 주모는 골방까지 내주며 머물도록 했다. 주모는 지혜도 깊었다.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비수 같은 충고를 던졌다. 다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마음을 다잡아 후학을 양성하며 ‘경세유표’ 등 위대한 실학 저서들을 집필하게 된 것은 주막집에서의 이런 사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다산은 주모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4년간 머문 주막집 당호를 ‘사의재(四宜齋)’라고 지었다.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문구이기도 했던 ‘사의재’는 후대에 역사적 명소로 탄생하게 된다. 강진군이 오랜 고증 끝에 복원해낸 사의재는 다산과의 인연, 고풍스러운 초가, 수국이 활짝 핀 연못 등으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답사 코스가 됐다. 사의재 터에서 흘러나오는 풍요로운 지기(地氣)는 주막집 주모의 넉넉한 마음씨까지 전해주는 듯하다. 사의재 바로 옆으로는 숙박이 가능한 사의재 한옥체험관(9개 객실)이 운영되고 있다. 사의재를 낀 동문마을에는 명당임을 알려주는 표식이 있다. 한옥체험관 입구에 있는 ‘동문샘’이라는 우물이다. 푯말은 샘을 풍수적으로 설명해놓았다. 이에 따르면 보은산 우두봉(牛頭峰) 자락 아래 강진읍성으로 둘러싸였던 강진읍은 전체적으로 와우형 터에 해당한다. 읍성 4대문 중 하나인 동문 쪽 샘(東門井), 즉 바로 이곳은 소의 왼쪽 눈이라는 설명이다. 소의 오른쪽 눈인 서문 쪽 샘(西門井·서성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다산은 1805년 겨울 사의재를 떠나 우두봉 기슭의 고성사(高聲寺·당시는 고성암)에서 머물게 된다. 친분을 맺은 백련사 주지 혜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강진 시내가 굽어보이는 이곳에서 다산은 ‘보은산방’이란 간판을 내걸고 장남(학연)과 강진읍 6제자를 대상으로 ‘주역’ 등 학문을 가르쳤다. 사의재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의 고성사는 현재 ‘수국 길’ 산책 코스로 유명하다. 그런데 현지 사람들은 고성사의 저녁 종소리(高庵暮鐘·고암모종)를 더 높게 친다. 고성사가 황소의 귀밑 혹은 목방울을 매다는 부위에 해당하는데, 이곳에서 소리가 울려 퍼져야 강진이 발전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높은(高) 소리(聲)’라는 뜻의 고성사는 실제로 ‘소리 명당’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남도의 판소리 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득음(得音) 장소 중 하나로 꼽혔다. 다산은 겨울 한철을 고성사에서 보낸 후 제자의 집을 전전하다가 1808년 만덕산 자락 아래 다산초당(도암면 만덕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방대한 저서를 완성했다. 사실 다산은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풍수지리를 강하게 부정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와우형 명당에서 기운을 차리고 마침내 자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가우도 개발과 황소의 멍에 강진읍의 주요 건물들은 풍수적으로 ‘소 판’으로 배치됐다고 말할 만하다. 강진군청과 강진경찰서는 소의 콧등에 해당하고, 강진군 도서관은 소의 콧구멍 명당으로 불려왔다. 강진읍 들머리에 있는 강진의료원과 강진고교 일대는 예전부터 소의 ‘혀 끝’이란 뜻의 ‘새끝’이라고 불렸다. 또 옛 이름이 초지(草地)인 목리마을은 소가 풀을 뜯어 먹는 장소라고 한다. 강진 풍수의 백미는 가우도(駕牛島)에 있다. 바닷물이 강진읍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강진만의 섬 가우도는 지형이 소(牛)의 멍에(駕)처럼 생겼다.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마소의 목에 얹는 나무 막대다. 그러니 강진읍내에 한가롭게 누워 있는 황소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가우도의 멍에를 씌워야 한다는 논리도 생겨난다. 2013년 육지와 가우도를 잇는 다리가 준공됐다. 대구면 저두리와 이어지는 청자다리(438m)와 다산초당이 있는 쪽인 도암면 망호리와 이어지는 다산다리(716m)가 생김으로써 가우도는 강진군의 대표적 관광 명소로 부상했다. 해상보도교 2개가 생김으로써 가우도의 멍에가 활짝 펴진 형국이 되고, 이어 멍에가 씌워진 강진읍 황소가 벌떡 일어나 밭을 갈기 시작했다는 풍수적 해석도 뒤따랐다. 실제로 가우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났다. 가우도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덱과 후박나무, 곰솔이 우거진 숲길을 이용해 섬 한 바퀴를 돌아보는 일명 ‘함께해(海) 길’(2.5km)은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높다. 또 섬의 정상부에 설치된 청자타워까지 태워주는 모노레일과 타워 전망대에서 펼쳐지는 해상 풍경도 핫플레이스다. 높이 25m 청자타워에서 바다를 훌쩍 뛰어넘어 저두리로 건너가는 ‘하늘길’(집트랙)은 짜릿함을 선사한다.○강진 월출산의 숨겨진 보물 강진읍 서쪽, 즉 월출산 남쪽 산자락 아래 성전면의 월남사지 일대도 강진의 빼놓을 수 없는 비경이다. 최근 완전히 복원된 월남사지 삼층석탑(보물 제298호)으로 유명한 월남사는 고려 진각국사(1178∼1234)가 차를 마시며 수행했던 절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전후에 폐사된 이후 현재 3만3057m²(약 1만 평) 규모에 달했던 절터를 복원하고 있다. 삼층석탑 주변에 형성된 터의 기운도 출중할뿐더러 석탑과 어우러지는 월출산의 풍경은 북쪽 영암에서 바라다본 월출산 경치와는 또 다른 맛을 자아낸다. 산에도 앞면과 뒷면이 있다. 영암 쪽 월출산은 산의 뒷면으로 장중하고 무겁게 느껴진다면 강진 쪽 월출산은 산의 앞면으로 밝고 따뜻한 느낌을 받게 된다. 월남사지 주변의 백운동 원림, 강진 차밭(다원) 등도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백운동 원림은 조선 중기 이담로(1627∼1701)가 꾸민 별서정원이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이곳은 담양 소쇄원, 완도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별서정원으로 꼽힌다. 백운동원림은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인기 있는 방문지였다. 다산 역시 1812년 이곳을 다녀간 후 백운동원림의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인 ‘백운첩’을 남겼다. 현재의 정원은 백운첩에 남겨진 ‘백운동도(白雲洞圖)’를 바탕으로 재현해놓은 건물이다. 안내판이 없으면 진입하기가 힘든 ‘비밀의 정원’ 백운동원림을 둘러본 후 강진다원의 유명한 차밭 풍경을 즐기거나 ‘이한영차문화원’에서 차 한잔 마시는 것으로도 여행의 한 코스가 될 수 있다. ‘이한영차문화원’은 백운동원림 5대 주인이자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 이시헌의 후손(이현정)이 차를 만들고 다도 교육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월출산 정기도 쬘 수 있다. 글·사진 강진=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지리산 토끼봉 자락 해발 800여 m에 둥지를 튼 칠불사에서 작설차를 맛본다. 도응 주지스님이 하동군 화개면의 야생 찻잎으로 우려낸 차는 입안에 달짝지근한 향미를 남긴다. 이곳이 우리나라 차 시배지이자 초의선사에 의한 다도 중흥지라는 점도 차 맛을 북돋워준다. 초의선사는 칠불사에서 참선하면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했고, 또 다른 저술인 ‘동다송(東茶頌)’에서는 하동의 차밭을 찬탄했다. 칠불사는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 성불 설화가 있는 고찰이자, 세계 건축사에서 유례가 드문 아자방(亞字房) 온돌 문화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칠불사를 기점으로 하동 지리산 여행을 떠나본다.》○선승들이 탐내는 아자방 칠불사 주지가 객을 맞아 차를 따라준 방은 매우 독특했다. 방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높이 40cm 남짓한 나무 단이 디귿 자 형태로 마주보게 한 모양새(ㄷコ)다. 나무 단 아래쪽 방바닥은 자연히 열십(十)자 형태가 된다. 방 밑의 온돌 또한 독특한 구조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대형 아궁이로 한번 불을 때면 아(亞)자 형태의 온돌을 따라 방 안 온기가 며칠간 유지되는 구조라고 한다. 바로 칠불사 벽안당(아자방)을 재현해 놓은 아자방 온돌체험관이다. 도응 스님은 “나무 단 위에서 좌선이나 명상을 한 뒤, 방바닥에서 차를 마시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의스님이 참선을 한 원래의 아자방은 현재 발굴 및 복원 공사 중이어서 개방되지 않고 있다. 아자방에 대한 학술 조사 결과 고려시대 유물 등이 나와 학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고려 때 이미 최고의 온돌 건축물이 운영되고 있었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사실 아자방의 전설과 기록은 훨씬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년) 때 ‘구들도사’로 명성이 높은 담공선사가 이중 온돌방인 아자방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고, 심지어 ‘칠불선원사적기’엔 신라 지마왕 8년(119년)에 금관가야 출신 담공선사가 지었다고 씌어 있다. 아자방 온돌은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 혹은 49일간 온기가 지속됐다고 해서 중국 당나라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아자방은 겨울에 눈이 와도 쌓이지 않고 녹아버린다는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풍수비결서(도선국사비기)에도 등장한다. “하동 땅에서 북쪽으로 100리 가면 와우형(臥牛形) 명지가 있는데, 이곳에 집을 지으면 부(富)는 중국의 석숭 못지않고 백자천손(百子千孫)이 번창할 것이며, 기도처로 삼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득도할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누워 있는 소(와우)’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칠불사다. 칠불사 경내에는 소의 젖으로 해석하는 샘물인 ‘유천’이 있고, 소의 몸통에 해당하는 운상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칠불사는 서산대사, 부휴선사 등 유명한 선승들의 일화가 남아 있고, 이곳에서 득도한 고승들도 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칠불사가 9km 아래쪽의 쌍계사 말사임에도 ‘동국제일선원’이란 현판이 당당히 걸려 있는 이유다. 도응스님은 “아자방에서 수행하신 스님들이 잘 풀리셨기 때문에 이곳에서 참선하고 싶어 하는 스님들의 민원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허왕후가 ‘강남 맹모’의 원조? 칠불사에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운상선원은 가야국 김수로왕의 7왕자 설화와도 이어지는 곳이다. 김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 난 7왕자들은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김해에서 수행 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야산, 화왕산, 와룡산 등지로 옮겨 다니다 마침내 기원후 101년 지리산 자락 운상선원 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7왕자의 성불(成佛)을 기념해 칠불사(칠불암)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칠불사 대웅전에는 이를 기리는 7부처가 모셔져 있고, 자식을 그리워한 김수로왕 부부가 연못 물에서 부처가 된 7왕자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영지’도 있다. 칠불사에서 계곡을 따라 화개장터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수로왕이 7왕자를 만나기 위해 임시 궁궐(태왕궁)을 지었다는 범왕(凡王)마을, 허왕후가 머물렀다는 대비마을(大妃洞·화개면 정금리)도 있다. 또 지리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산청에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피라미드형 무덤도 있고, 북쪽의 함양에는 구형왕대에 쌓았다는 추성도 있다. 이에 따라 지리산은 역대 가야왕실이 수시로 들락거린 산이었으며, 칠불사는 지리산권 가야불교의 중심무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동의 차꾼들은 우리나라 차 문화 역사 역시 가야에서 찾곤 한다. 허왕후가 자신의 고향 인도에서 차 종자를 가져옴으로써 차 문화가 지리산까지 퍼졌다는 주장이다. TV 휴먼다큐에도 소개된 지리산 ‘차도사’ 송화정 씨는 “아들들의 수행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지리산까지 찾아와 차를 공양한 허왕후야말로 ‘강남 맹모’의 원조”라고 말할 정도다. ○하동의 숨은 도사들하동에는 숨은 듯 자리 잡은 명소가 적잖다. ‘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이 생전에 즐겨 찾은 곳으로 유명한 화개장터의 다우찻집은 수제차 전문점이다. 다우찻집의 이승관 사장은 손맛으로 차를 덖는 ‘덖음 도사’로 유명하다. 그는 법정 스님이 자신이 덖은 차 맛에 반해 직접 ‘청심아’라는 차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말했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정성을 다해 차를 덖으면 덖을수록 차 맛이 다르다”는 게 그의 차 철학이다. 화개장터에서 차 한잔을 마신 후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도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바로 악양면 정서리의 ‘화사별서’다.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의 후손 조재희(1861∼1941)가 조성한 고택인데, 200m²(약 60평)에 이르는 수려한 연못은 한때 식솔만 40여 명이던 이 집안의 가세를 짐작케 한다. 고택을 관리하고 있는 조덕상 박사는 “소설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길상’은 6·25전쟁 때 사망한 육촌 장형의 실제 이름이고, 고향을 떠나 만주를 돌아다니는 스토리는 우리 집안 이야기를 차용한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세계 100인 공학자’에 선정된 기술사인 조 박사는 화사별서의 원형 보존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현재 화사별서의 안채와 행랑채는 원형 그대로이고, 조 박사의 부친인 조한승 옹(97)이 살고 있다. 지금도 안채 마루에 앉아 유교 경전인 ‘서전 서문’을 끝까지 암송해내는 노옹의 모습에서 도인의 풍모도 느껴진다. ‘서전 서문’을 열심히 외면 도에 통한다는 얘기가 유림 일부에서는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칠불사처럼 해발 850m 고지대에 있는 지리산 청학동 삼성궁(청암면 묵계리)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묵계 출신의 강민주 도사(한풀선사)가 1983년부터 ‘청학이 깃드는’ 이 터에다 고조선 시대의 소도(蘇塗)를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건국전을 비롯해 1000개가 넘는 돌탑, 한반도와 만주 고토를 상징하는 듯한 연못 등은 사진 촬영 명소로도 인기가 높다. 화개장터에서 삼성궁 가는 길이 벅차다면 하동읍에 있는 송림공원을 추천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 군락지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힐링이 된다. 글·사진 하동=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제주도는 한민족이 별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알려주는 증표들을 많이 간직한 곳이다.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을 상징하는 여신(女神)이 있고, 삼태성(三台星)을 상징하는 세 명의 건국시조가 등장하고, 세상 만물을 관장한다는 북두칠성도 존재한다. 하늘의 강인 은하수를 상징하는 듯한 물도 있다. 제주의 별 신화와 기운을 느껴보는 것은 이국적인 제주 풍광만큼이나 색다른 체험이다.》○ 제주도지사가 주재하는 한라산신제 제주대 후문 근처, 소산오름 기슭에 위치한 산천단(제주시 아라일동 392). 곰솔 군락지인 이곳은 제주 사람들이 특별히 신성시하는 공간이다. 매년 한라산의 산신을 모시는 제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한라산신제에서는 제주도지사가 초헌관(제향 때 첫 잔을 올리는 제관)을 맡도록 조례에서 규정하고 있을 정도다. 한라산신제의 역사는 깊다. 제주가 독립된 나라이던 탐라국 시절부터 시작돼 고려 후기인 1253년(고종 40년)에는 국가 차원의 제례로 발전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제주목사는 매년 산신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라산신제는 원래는 음력 정월 한라산 백록담 북쪽 기슭에서 봉행됐다. 한라산이 제주의 중심이자 하늘의 별 기운이 지상에 뻗어 내리는 신령스러운 터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한라(漢拏)’라는 산 이름이 “은하수(은한·銀漢 혹은 운한·雲漢)를 끌어당김”의 뜻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즉, 한라산 백록담의 물이 바로 은하수가 흘러내려온 하늘의 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제주목사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백록담까지 올라가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제물을 지고 험한 길을 올라가다가 얼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조선 성종 1년(1470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약동은 결단을 내렸다. 백록담에서의 산신제 폐단을 임금에게 고한 뒤 지금의 산천단에서 천제를 지내도록 했다. 산천단은 풍수의 눈으로 보아도 범상치 않은 터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곰솔 숲 한가운데에 차려진 돌 제단은 푸른 이끼가 덕지덕지 끼어 있고, 높이 솟은 곰솔 8그루가 제단을 수호하듯 배치돼 있다. 이약동은 산천단이 한라산신이 머무르기에 적당한 터라고 판단한 듯하다. 산천단은 커다란 곰솔들이 그늘을 만들어 줘 더운 여름날에도 산책과 힐링하기에 좋은 명소다. ○제주 원도심에 출현한 북두칠성제주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처인 한라산은 제주도 창세신화에 등장하는 설문대할망과도 연결된다. 제주의 1만8000여 신들 중 가장 으뜸 신인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라는 섬을 만들어낸 주인공이자, 나중에 한라산신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또 제주 오백(500)장군을 길러낸 설문대할망은 사실상 제주판 마고(삼신)할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창세 신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제주돌문화공원(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023)이다. 330만 m²(약 100만 평) 대지 위에 제주의 희귀한 돌들을 전시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설문대할망과 그 자식들인 오백장군 이미지를 형상화한 돌 기념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한편으로 공원 내 돌박물관 옥상에 마련된 대형 연못(하늘 연못)은 물 위를 걷는 포토존으로 유명한데, 저 멀리 한라산이 연못 위로 비치는 반영(反影)은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하나임을 상징하는 듯하다. 설문대할망, 즉 마고할미는 별로 치면 북극성에 해당한다. 북극성은 삼태성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세 쌍의 별로 이루어진 삼태성은 제주도에 나타난 세 명의 신인(神人)에 해당한다.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인 삼을라(고을라, 양을라, 부을라)는 삼태성의 기운이 밴 삼성혈에서 출현했다. 이들이 바로 탐라국 개국시조가 된다. 삼성혈(사적 제134호·제주시 이도1동 1313)은 제주시 구도심인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근처에 있다. 지반이 꺼져 움푹 팬 넓은 터에 품(品) 자 모양으로 세 개의 구멍이 난 곳이다. 세 신인이 각각 세 구멍에서 불쑥 솟아올랐다고 한다. 신성한 구멍들 앞에는 삼성혈이라고 쓰인 돌 비석이 있고, 그 앞으로 돌로 만든 제단 세 개도 나란히 있다. 이곳은 폭우가 쏟아져도 고이지 않고 폭설이 내려도 쌓이는 일이 없다고 한다. 명당에서 목격되는 현상이 이곳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바다 저 멀리 벽랑국에서 온 세 명의 공주들과 혼인을 했다. 세 공주를 맞이한 곳이 연혼포(황루알)이고, 세 공주가 목욕재계한 곳이 혼인지이고, 그들이 신방을 차린 곳이 신방굴이라고 불린다. 특히 혼인지와 신방굴(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은 남녀 간 인연을 맺어주는 기운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인기를 끄는 곳이다. 설문대할망과 세 성인이 출현하는 제주 신화는 김수로왕의 도읍 설화와도 묘하게 연결된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이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신답평에 행차해 사방의 지형을 살펴본 후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만드니 7성인이 머물 만한 곳”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제주 신화에서도 하나(설문대할망과)에서 셋(삼성)이 나오고 또 일곱이라는 수도 등장한다. 제주도 원도심의 칠성단(북두칠성 상징물)이 바로 7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주목’에서는 “삼성이 처음 나왔을 때 삼도로 나눠 차지하고, 북두(칠)성 모양으로 대를 쌓아 살았기 때문에 칠성도(七星圖)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또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고도 했다. 이를 근거로 제주시에서는 2011년 칠성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7개의 칠성단 표지석을 세워두었다. 그 배치된 곳이 하늘의 국자 모양 북두칠성과 같다. 제주시 중앙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에 있는 칠성단은 제주 원도심을 구경하면서 하나하나 그 위치를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뿐만 아니다.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의 불탑사 오층석탑도 삼태성 및 북두칠성과 관련 있는 곳이다. 중국 원나라 순제의 부인인 기황후는 삼태성과 북두칠성의 기운을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모국 제주도에서 삼첩칠봉(三疊七峰)의 명당을 이룬 원당봉에 오층석탑을 세운 후 마침내 아들(소종 황제)을 얻었다. 실제로 오층석탑은 명당 에너지가 충만한 터이고, 지금도 자식을 얻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불탑사 주지 스님의 얘기다. 제주도에서 별의 흔적을 찾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하늘의 별세계를 구경한 듯한 뿌듯함도 느껴진다.카페 200곳 자유이용권부터 환경 지키는 포인트기부까지… 비용 줄이고 보람은 두 배 통합 예약 플랫폼 ‘제주패스’제주도 여행을 알차고도 보람되게 즐길 수 있도록 고안한 플랫폼이 최근 젊은 여행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항공, 숙박, 맛집, 이동수단, 여행 콘텐츠 등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예약할 수 있는 통합 예약 플랫폼인 제주패스(JEJUPASS)다. 스마트폰 앱으로도 선보인 이 플랫폼은 ‘제주도 카페 자유이용권’(1만 원)을 구입하면 제주 지역 인기 카페 200곳에서 아메리카노를 3일간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카페패스’ 등 실속 기획 상품으로 여행객들의 호평을 얻고 있다. 국내 여행업계 최초로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개념을 도입해 가치중심 여행을 추구하고 있는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제주패스 이용자가 가입하는 ‘그린 앰버서더 멤버십’ 제도가 대표적이다. 멤버십 여행자는 상품 구매 시마다 지출한 비용의 5%까지 적립금(포인트)으로 돌려받게 되며, 이 중 1%는 기부 포인트로 전환돼 제주패스 ESG 캠페인(환경, 동물, 복지 등 6개 분야) 중 기부자가 지정하는 캠페인에 자동 적립되는 시스템이다. 제주패스 설립자인 윤형준 ㈜캐플릭스 대표는 “5월 기준으로 총 기부액이 1000만 원을 돌파했고, 6개 캠페인 중 환경보호 캠페인은 목표 금액의 78%를 달성했을 정도로 여행객들의 호응도가 높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여행객들이 사회에 공헌하는 가치중심 여행에 눈을 뜨게 됐다는 설명이다. 글·사진 제주=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KB손해보험은 일찌감치 고령화 사회에 대비해 헬스케어 시장에 진출했다. 2016년 금융업계 처음으로 자회사인 KB골든라이프케어를 설립해 노인요양 사업에 진출한 후 지난해 10월에는 헬스케어 자회사인 KB헬스케어를 만들었다.‘업계 최초’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신사업 진출과 디지털 전환에 선도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회사 측은 올해부터는 ‘업계 최고’에 도전하기 위해 사업의 본격화에 매진한다는 방침이다. KB헬스케어, 서비스·커머스·데이터를 아우르는 통합 헬스케어 플랫폼 제공헬스케어 신시장 진출과 산업 활성화를 위해 설립된 KB헬스케어는 ‘헬스케어 플랫폼을 통한 서비스중개업’을 주된 사업으로 확정했다. 기존의 헬스케어 솔루션과는 다른 서비스·커머스·데이터를 아우르는 통합 플랫폼을 만들어 차별적인 가치를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 이름은 ‘오케어(O-Care)’로 지었다. 헬스케어 서비스 공급자들과 소비자가 플랫폼에서 자유롭게 만나 공정하게 거래하며 함께 성장하는 상생의 생태계를 만들어가자는 취지다. 회사 측은 이를 위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다양한 헬스케어 전문기업들과 협업해 남다른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플랫폼은 고객이 필요로 하는 헬스케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즉, 맞춤형 건강관리와 개인화된 경험 제공을 통해 플랫폼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1분기 KB금융그룹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헬스케어 서비스 사업도 돋보인다. 국민은행에 근무하는 40대 직장인 이 씨는 “오케어의 맞춤형 루틴을 계단 걷기, 식사 사진 촬영하기, 명상하기로 정해놨는데 루틴 완료 여부가 스마트워치로 자동으로 이뤄지고 오케어에서 받은 포인트로 주말에 아내와 커피를 같이 즐긴다”고 말했다. KB헬스케어는 2분기 이후부터는 임직원 건강관리를 원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건강관리서비스와 금융상품 연계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순차적으로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플랫폼을 통해 국내 헬스케어 산업이 본격적으로 활성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KB골든라이프케어, 내년 하반기 서울 은평구 일대 신규 요양시설 오픈KB손해보험의 또 다른 자회사인 KB골든라이프케어도 요양 시설 사업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KB골든라이프케어는 2017년 서울 강동구에 ‘강동케어센터(주야간 보호시설)’를 오픈한 데 이어 프리미엄급 노인요양 시설을 속속 설립하고 있다. 2019년 3월 서울 송파구에 설립한 ‘KB골든라이프케어 위례빌리지’와 2021년 5월 서울 서초구에 세운 ‘KB골든라이프케어 서초빌리지’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주택가에 위치한 KB골든라이프케어 서초빌리지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클린존’이라는 글씨가 부착된 엘리베이터가 눈에 띈다. 방호복을 입어야 탑승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로 시설 내 직원이 코로나에 확진된 경우 일정 기간 직원들은 방호복을 착용하고 근무해야 한다. 코로나19 등 전염성 질환 전파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다.서초빌리지에는 5개의 마을이 있다. 입소자들이 유닛(마을)별로 모여 생활하는 구조다. 1인실과 2인실 중 선택할 수 있고, 병환(病患)이 비슷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 건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정(中庭)과 옥상 정원이 있고, 지하에는 넓은 재활치료실을 갖췄다. 방 구조는 물론 건물 인테리어와 동선 하나 하나 어르신들이 생활하기 편하도록 맞춤형으로 꾸몄다. 식사는 아워홈에서 밥과 죽, 미음 등 맞춤형 식단으로 제공한다. 이미숙 서초빌리지 원장은 “시설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요양 서비스 인력 또한 남다르다”고 말했다. 간호 인력과 요양보호사는 물론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사회복지사 등을 법정 인력보다 충분히 확보했다고 한다. 회사 측은 프리미엄 노인요양 시설에 대한 고객 반응이 좋다고 밝혔다. 위례빌리지는 개소 1년 만에 입소 대기자만 1300여 명을 넘어섰고, 서초빌리지는 정원 80명 시설에 오픈 전 사전 접수에 신청자 300여 명이 몰렸다. KB골든라이프케어는 서울 은평구 일대에 새로운 프리미엄 노인요양 시설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회사 관계자는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준비 중인 은평빌리지(가칭)는 서울 강동과 강남 지역에 이어 강북 지역으로 사업장을 확장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이를 계기로 수도권 및 주요 광역시로의 서비스 확대 기반이 마련될 것”으로 내다봤다. 회사 측은 2030년까지 국내 1위 요양사업자로 발돋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KB손해보험의 신사업 행보도 속력이 붙고 있다. 금융과 비금융을 연결하는 플랫폼 구축 등을 선도해 고객의 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행보가 주목된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굳이 산을 타지 않아도 산을 감상하는 맛이 나는 곳이 있다. 전남 장흥에서는 비상하는 학의 형상을 한 산, 묵직한 산세가 위풍당당하게 보이는 사자산, 정상에 멋진 바위 관을 두른 임금 산 등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다. 빼어난 산의 형상과 함께 양념처럼 버무려진 스토리는 여행의 맛을 더해준다.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등 필담 좋은 소설가들을 유독 많이 배출한 문인의 고장답다. 어디 그뿐이랴.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갑오징어, 키조개 등 싱싱한 횟감은 봄철 입맛까지 북돋워준다.》○‘천년학’의 무대, 선학동 유채마을 전남 장흥군 득량만의 작은 포구. 바닷가 마을은 물이 차오르고 달이 뜰 때면 서양의 늑대인간 변신 전설처럼 모습이 확 바뀐다. 마을 뒷산인 관음봉은 양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의 모습으로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을은 변신한 학의 품에 포근히 안긴 형상이 된다. 이 마을이 선학동(仙鶴洞)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선학동에서 2.5km가량 떨어진 진목마을에서 태어난 소설가 이청준이 이 마을의 풍광을 보고 스토리를 불어넣었다. 그는 ‘선학동 나그네’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선학동에 밀물이 차고 산이 학으로 변신할 무렵, 남도의 소리꾼인 늙은 아비가 눈먼 어린 딸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어느덧 소리꾼 부녀가 날아오르는 듯한 학과 함께 소리를 하게 되자 선학이 소리를 불러내는 것인지, 소리가 선학을 날게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계에 이른다. 이른바 득음(得音)의 경지다. 목적을 이룬 부녀는 마을을 떠났다. 이후 포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들판으로 바뀌게 되고, 물을 잃은 관음봉은 더 이상 학으로 변신할 수 없게 됐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눈먼 딸이 다시 선학동에 나타났다. 관음봉 명당에 묻어달라는 아비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득음한 딸은 학을 부르는 소리로써 명당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을 홀린 다음 아비 유골을 암장하고 떠났다.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학이 되살아났다는 믿음을 선물처럼 남겨두고서…. 실제로 옛 모습을 잃은 선학동은 외지인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명소로 변신했다. 2006년 임권택 영화감독이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삼아 만든 영화 ‘천년학’이 상영되면서부터다. 이 마을 갯가 둑에는 ‘천년학’ 세트장(방앗간 겸 선술집)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인데, TV드라마 촬영지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학동은 이후 유채마을로 더욱 유명해지고 있다. 마을 주변 논밭과 산자락이 봄만 되면 노랗게 물든 유채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유채꽃밭은 3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는 규모인데, 길이 산책하기 좋도록 잘 다듬어져 있고 중간에 쉬어 갈 수 있는 정자도 마련돼 있다. 정자에서 바라보면 유채꽃밭이 득량만의 쪽빛 바다와 어울려 몽환적인 풍경을 빚어낸다. ○장흥 지키는 스핑크스 산 장흥 남쪽 선학동이 노란 유채꽃으로 사람들을 유혹할 무렵이면 북쪽 제암산(807m) 능선에서는 철쭉이 진분홍빛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바로 제암산 곰재 능선을 중심으로 펼쳐진 철쭉평원이다. 곰재 능선에서 간재삼거리를 거쳐 사자산까지 이어지는 평원에는 30년 수령의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까지 펼쳐지는 진분홍빛 꽃밭 길을 거닐다 보면 이곳이 ‘천상의 화원’이라고 불린다는 데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올해는 철쭉이 일찍 만개해 지금 방문하면 진하디진한 꽃빛깔을 놓친 아쉬움이 있을 수 있지만, 주변 경관이 충분히 보상해준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곰재 능선까지 걸어서 올라가면 북쪽으로 1.5km 남짓 떨어진 거리에 제암산의 정상이 보인다. 정상은 임금 제(帝)자 모양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가 30m 정도 되는 바위가 3단 형태로 서 있는데, 널찍한 바위 꼭대기는 수십 명이 너끈히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크기다. 이 바위를 향해 주변의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과 봉우리들이 공손히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임금바위, 즉 제암(帝巖)이라고 부른다. 천기(天氣)가 뭉친 바위는 신령한 기운이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의미로 ‘제암단’이라고 부른다. 가뭄 때면 바위 기운에 기대 비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곰재 능선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사자산(666m)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사자산은 제암산, 억불산과 함께 장흥의 삼산(三山)으로 불린다. 사자산은 위엄 서린 표정으로 장흥읍을 굽어보고 있는 형상이어서 ‘장흥을 지키는 스핑크스’라고 불리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일본 후지(富士)산을 빼닮았다고 해서 일본인들 사이에 ‘장흥 후지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사자산은 산 아래에서는 방향에 따라 여러 형상으로 보이지만, 곰재 능선에서 바라보면 우람한 사자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정상 서쪽의 사자 머리(사자두봉)에서 능선의 사자 등을 따라 사자 꼬리(사자미봉) 모습이 펼쳐지는데 마치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보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두봉에는 산신제를 올리는 큰 바위가 제단처럼 마련돼 있고, 가을에는 사자 갈퀴처럼 산등성이가 누런 억새로 우거져 더욱 장관을 이룬다. 결과적으로 곰재 능선에서는 철쭉 축제를 즐기면서도 북쪽의 임금바위와 남쪽의 사자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기(氣) 체험 스폿(spot)’이 되는 셈이다. ○피톤치드 향과 장흥삼합 건강식 북쪽 제암산과 남쪽 선학동 중간 지점에 있는 천관산 역시 정상에 솟은 특이한 바위들로 명산의 반열에 오른 산이다. 여기저기 늘어선 여러 기의 입석(立石)들이 마치 머리에 쓰는 관처럼 보인다. 천관산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봉우리들과 바위들이 불꽃 형상으로도 보인다. 동양의 음양오행론으로 분류하면 화(火) 기운이 강한 산에 해당한다. 이러한 산은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기운 때문일까,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장흥 출신 문인만 60명이 넘는다. 천관산 기슭에는 이를 기념하는 천관문학관(대덕읍 천관산문학길 301)이 있다.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청준, 한승원 작가를 비롯해 송기숙, 김녹촌, 이승후 등 장흥 출신 작가들의 흔적이 전시돼 있다. 전남 남해에 있는 장흥을 여행하려면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최소 1박 2일은 잡아야 한다. 건강을 고려한 숙박지로는 억불산 자락의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가 있다. 장흥군이 운영 중인 이곳은 통나무주택, 황토주택, 삼나무 한옥 등 건강 체험이 가능한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은 40년생 이상의 아름드리 편백나무 숲이 조성돼 몸에 좋은 피톤치드가 가득하고, 편백소금찜질방에서는 힐링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약은 필수다. 장흥의 먹거리 또한 건강 보양식으로 즐길 수 있다. 장흥 하면 장흥삼합과 갑오징어를 빼놓을 수 없다. 장흥삼합은 영양소 풍부한 갯벌에서 자란 키조개 관자, 참나무에서 키운 표고버섯, 장흥산 한우가 어우러진 보양 음식이다. 세 가지 음식물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맛이 매우 좋다. 장흥 갑오징어는 신선한 회로 먹거나, 진한 먹물과 함께 먹는 먹찜으로 유명하다. 몸통에 큰 뼈를 가지고 있는 갑오징어는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봄철에 가장 맛있다. 일반 오징어에 비해 식감이 매우 좋아 미식가들의 식단에 자주 오르는데, 약으로도 쓰이는 갑오징어의 먹물과 함께 먹으면 고소함이 배가된다. 글·사진 장흥=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
《돌벼랑 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누각에 서니 아래로는 바람 따라 일렁이는 물결 위로 녹색 풍경화가 펼쳐진다. 오솔길을 따라 산새 지저귀는 산사에 오르다 보면 이곳이 도심 한가운데라는 사실마저 잊게 된다. 수려한 경치뿐이랴. 이곳은 한민족 시조인 단군을 모신 사당, 조선의 빼어난 목조 건축물,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 등 내력 깊은 유적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전설의 고향’에서나 등장하는 설화 같은 실화(實話)가 전해져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바로 경남 밀양 시내에 있는 영남루(보물 제147호)다. 종교와 역사와 민속의 종합전시장인 영남루는 하루 온종일 노닐어도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는 도심 여행지다.》○거북 명당 누각엔 유불선이 한자리에! 사방이 탁 트인 누각인 영남루는 그 규모와 입지 환경이 빼어나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밀양강을 굽어보고 있는 영남루는 지형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영남루 건너편 강변에서 바라보면 거북의 머리처럼 불룩하게 생긴 둔덕 위에 영남루가 서 있다.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신령스러운 거북이 산에서 내려와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부를 만한 터다. 거북 머리인 둔덕에서 시선을 옮겨가면 거북의 목 부위인 잘록한 고개가 살짝 보이고, 바로 이어서 거북 등에 해당하는 아동산(88.1m)도 보인다. 이 일대가 모두 영남루 권역에 해당한다. 이 신령스러운 자리에 처음 터를 잡은 쪽은 불교다. 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영남루 명칭도 이 절 이름에서 빌렸다고 한다. 영남사가 폐사된 이후 고려 공민왕 때(1365년) 누각 규모를 크게 중수했고, 조선시대에 병화(兵禍)나 실화(失火)로 불타버렸다가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현재의 건물 형태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관청 건물(밀양도호부 객사)로 변신한 영남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의 2층 누각이다. 건물 좌우로는 능파당과 침류각이 본채를 호위하듯 배치돼 있다. 마치 새가 양 날개를 펼쳐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보이는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풍채가 빼어난 외관만큼이나 누각 안의 단층 역시 창의적이면서도 화려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특히 유학을 신봉하던 관료 집단이 조성한 누각임에도 불구하고 도교를 상징하는 코드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누각 네 귀퉁이에 배치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는 도교적 성격이 짙고, 난간 끝의 빼곡한 구름 문양은 신선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영남루는 밀양을 방문한 신분 높은 사람들을 접대하거나 그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이 때문에 누각은 당대 명필과 문장가들이 남긴 현판들로 가득하다. 누각 안에는 현판 글씨마다 누가 언제 쓴 작품인지를 친절히 설명해 놓고 있어 감상하기가 좋다. ○아랑 전설과 밀양의 4대 신비 영남루 돌벼랑 아래 강변 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다. 가파른 계단길을 따라 대나무 숲 사이를 걷다 보면 ‘아랑각’이라는 사당을 만나게 된다. 정절을 지키다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넋을 위로하는 제단이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아랑의 사연은 이렇다. 조선 명종(재위 1545∼1567년) 때 밀양부사의 외동딸 아랑낭자(윤동옥)가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을 나왔다가 치한의 습격을 받았다. 아랑은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고, 시신은 유린돼 울창한 대나무 숲에 버려졌다. 졸지에 딸을 잃은 부사는 실의에 빠져 자리를 옮겼고 이후 새로 부임하는 부사들마다 첫날 밤 의문의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다 담력이 센 부사가 부임해 낭자의 원혼으로부터 사연을 듣고서는 범인을 잡아들인다. 낭자의 혼이 나비가 돼 치한의 어깨 위에 앉았기 때문에 범인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그 후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낭자의 원혼을 달래려고 세운 아랑각에서는 매년 음력 4월이면 밀양아리랑축제 때 뽑힌 규수가 제관이 돼 제사를 지낸다. 영남루 앞 밀양교 가로등에는 나비를 상징하는 조명등도 설치돼 있다. 밤이 되면 밀양교의 무지개 조명과 함께 발광다이오드(LED) 나비 조명이 환상적인 야경을 펼친다. 영남루엔 ‘아랑 나비’뿐만 아니라 ‘태극 나비’ 얘기도 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어느 날 춘삼월이 아닌데도 태극 문양의 날개가 달린 나비 떼가 사방에서 날아와 영남루 일대 아동산을 뒤덮었다. 나라가 혼란스럽던 시절 사람들은 태극 나비가 길조일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과연 고려가 건국돼 나라가 안정을 되찾았다. 그 후에도 태극 나비가 나타날 때마다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다.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국성접(國成蝶)’이라고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태극 나비는 그 후 보이지 않다가 1945년 8·15광복 때 아동산 중턱에 있는 무봉사에서 연달아 출현했고,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54년 4월 태극 나비를 우표로까지 제작했다. 영남루와 무봉사의 태극 나비 전설은 밀양의 4대 신비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밀양은 기이한 자연 현상이 나타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재약산의 얼음골 결빙지,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각과 신비한 모습의 향나무, 바위에서 종소리가 난다는 만어사 경석 등이 밀양의 대표적 신비물로 꼽힌다. ○어깨춤 들썩이는 놀이 공연 영남루 일대가 평범한 터가 아니라는 점은 천진궁(天眞宮)이라는 건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남루 맞은편에 자리한 천진궁은 조선시대 객사 건물이던 요선관을 새롭게 단장해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 및 역대 건국 시조를 모셔놓은 곳이다. 단군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가운데를 중심으로 왼쪽 동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야, 고려의 시조 위패가 있고 오른쪽 서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조선의 시조 위패가 있다. 천진궁 건립에는 사연이 있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조선을 장악한 일본 헌병대는 영남루를 강점하고 요선관 건물을 옥사로 사용했다. 1910년 경술국치 때는 이곳의 전패(왕을 상징하는 위패)가 일제에 의해 땅에 묻히는 수난을 겪었고, 1940년에는 영남루 뒷산인 아동산 중턱에 일본 신사가 설치되면서 영남루 경관이 크게 훼손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압살하려는 일제의 간계였다. 그러다 광복 이후 밀양 유지들이 뜻을 모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천진궁의 원래 이름은 대덕전(大德展)이고, 그 출입문은 만덕문(萬德門)이다. 큰 덕을 의미하는 ‘대덕’과 만 가지 덕을 의미하는 ‘만덕’은 단군의 통치를 상징하는 코드다. 지금도 단군숭녕회가 매년 음력 3월 15일에는 어천대제를, 음력 10월 3일에는 개천대제를 이곳에서 봉행하고 있다. 영남루를 방문한 4월 말, 때마침 천진궁과 영남루 사이 널찍한 마당에서는 민속 공연이 신바람 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6월 26일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에 민속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국가 무형문화재인 밀양백중놀이를 비롯해 밀양법흥상원놀이(경남도 무형문화재), 감내게줄당기기, 무안용호놀이 등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인다. 풍경을 즐기고, 역사를 음미하며, 더불어 전통 놀이까지 더해지니 어깨춤이 저절로 추어지는 듯했다. 영남루를 뒤로하고 아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무봉사가 있다.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출발한 무봉사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으로 유명하고, 운치 있는 풍광 때문에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무봉사는 밀양 출신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는 표충사와도 인연이 깊어서 인근에 사명대사 동상을 세워놓고 있다. 사명대사 동상을 지나면 밀양읍성과 밀양관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산책로 코스가 전개된다. 특히 밀양읍성의 망루에 올라서면 밀양강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이렇게 영남루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저물고, 밤이면 영남루 야경이 또다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글·사진 밀양=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귀양살이 중인 두 형제가 자신이 살고 있는 유배지가 더 좋다고 뽐냈다. 동생은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겨울 해가 한양에 비해 길고 여름 해는 짧다”며 강진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으스댔다. 형은 이에 질세라 “흑산도의 여름날엔 갈옷과 삼베옷 입을 일이 드물고 겨울날엔 서리가 내리거나 얼음 어는 것을 보기 힘들다. 강진이 이처럼 좋은가” 하고 응수했다. 동생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고, 형은 손암 정약전(1758∼1816). 귀양살이하기가 고약했던 곳으로 소문난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난 정약전은 이곳 사람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다. “세상과 격리된지라 무릇 세속의 교만, 사치, 음란, 도적질 따위의 악습에 물들지 않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정약전이 예찬한 흑산도를 만나러 바닷길 여행에 나섰다.》○산 정상에 나타난 철마(鐵馬) 흑산도는 과거부터 서남단의 어업 전진기지이자 해상 교통로였기 때문에 해적 혹은 왜구가 늘 들끓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무장 군인들이 수색과 토벌로 땅을 지키는 주요 수토(搜討) 지역 중 한 곳이었다. 수토는 군인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조선 선비들은 역사적 유적지나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땅을 관찰하고 돌보는 등으로 수토 행위를 했다. 정약전이 흑산도 일대 생물 생태계를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긴 것도 땅을 지키는 수토였다. 정약전의 ‘흑산도 수토’를 쫓아 뱃길에 몸을 실었다. 목포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2시간 남짓 높은 파도에 흔들거리면서 흑산도에 도착했다. 관광용 택시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해안일주도로(25.4km)를 따라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상라산 정상의 제사 터. 흑산도에서 가장 북쪽 지대인 이곳은 고대에 산 정상에서 노천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다. 풍수적으로 하늘의 천기(天氣)가 하강하는 터에다 제사 단을 마련해 놓은 것을 보면 신성한 공간이었음은 분명한 듯하다. 이런 터에서 명상이나 기도 등을 통해 자연과 교감해 보는 것도 수토에 해당한다. 제사 터에서는 철제마 3점을 비롯해 주름무늬병, 줄무늬병편 등 제의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곳을 조사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은 “철제마는 큰 바다를 오가는 무역선이나 사신선이 하늘에 무사 항해와 운수대통을 빌던 신앙적 행사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이 일대가 봉수대로도 활용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 인종 1년(1123년) 7월 4일, 흑산도를 지나가면서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 왕성(王城·개경)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했다(‘고려도경’). 한편 상라산 정상은 흑산도 제1경이라 할 만큼 전망도 수려하다. 이곳 전망대는 일출과 일몰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뱀이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듯 생긴 12굽이길이 장관을 이루고, 길 아래로는 예리항의 평화로운 풍광이 펼쳐진다. 상라산 정상에서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와 일주도로와 만나게 곳에 다다르니 비로소 흑산도를 상징하는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눈에 들어온다. 노래비를 뒤로 하고 일주도로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면 읍동마을 뒤편 무심사지(无心寺址) 석탑과 석등을 만나게 된다. ○ 흑산도 신들을 부르는 초령목 ‘무심사’는 신라 말인 9세기경 창건돼 14세기까지 운영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최근 학술조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역사적으로 흑산도는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는 중간 거점지대였다.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해 해상왕으로 활동하던 시절 흑산도는 산성과 관청, 사찰이 들어서는 등 중요한 해양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이 흘러 절은 폐사됐지만 이곳 읍동마을 사람들은 석탑을 ‘수탑’, 석등을 ‘암탑’이라 부르며 매년 정월 초하루 당제를 지냈다. 지금은 전승되지 않고 있지만, 석탑 옆 오래된 팽나무(당산나무)가 이곳이 마을 주민들의 신앙지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무심사지에서 빠져나와 시계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면 흑산도 신들이 노니는 정원을 만나게 된다. 흑산도에서 가장 성대하게 당제가 열렸던 ‘진리당’이 바로 ‘신들의 정원’이다. 마을 숲속 서낭당과 이곳에서 150m 정도 떨어진 해변의 용왕당으로 구성된 진리당은 매년 정월 초부터 3일간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뱃길의 무사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던 곳이라고 한다. 풍수적으로 서낭당은 숭어의 꼬리 부분 명당에다, 용왕당은 숭어의 머리 부분 명당에다 세워졌다는 게 이 마을 사람들의 얘기다. 이 일대가 ‘신들의 정원’으로 불리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진리당 주변으로 당집을 보호하는 성황림이 우거져 있는데, 그 안에 귀신들을 부른다고 해서 ‘귀신나무’로 불리는 초령목(招靈木) 자생지가 있기 때문이다. 초령목은 제주도와 흑산도 권역에서 자생하는 멸종위기 보호수이기도 하다. 현재 수령 300년인 초령목은 1994년에 고사했고, 대신 어린 초령목 4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초령목 자생지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신들과 만나는 색다른 체험을 원한다면 한번 걸어볼 만하다.○ 흑산도의 짝꿍 홍도 비경 흑산도 북쪽 권역이 역사적이고 토속적 문화의 보고라면, 흑산도 남쪽 권역은 조선 시대 유배 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1801년) 당시 천주교도인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형을 받았다. 정약전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도록 처벌하는 ‘절도안치’라는 종신형으로 흑산도에 오게 됐다. 이후 정약전은 흑산도 남동쪽 사리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사촌서당’을 꾸렸고, 섬 주민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집필했던 것. 현재 사리마을에는 1998년에 복원한 사촌서당 건물이 있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듯 먼바다를 바라보는 정약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안군은 아예 이 일대를 유배문화공원으로 꾸몄다. 고려 시대부터 흑산도로 유배된 이들을 추모하는 비석과 유배인 안내 비문, 유배문화체험장(유배인 안치 가옥) 등이 조성돼 있다. 한편 사리마을 인근의 천촌마을 입구에는 최익현 유적이 있다. 조선 고종대의 문신이자 항일의병장인 최익현(1833∼1906)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됐다. 그는 “흑산도를 거쳐 간 명사들은 많은데, 이를 기억할 만한 유적이 하나 없다”고 한탄하면서 천촌마을 바위에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기자가 봉한 강산이요, 명나라 주원장의 세월이여)’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흑산도 여행을 마친 후 뱃길로 30분 남짓한 거리의 홍도로 가볼 일이다. 흑산도가 여성적인 섬이라면 그 짝꿍인 홍도는 남성적인 섬으로 비교된다. 경치를 우선시한다면 흑산도를 거쳐 홍도로 가는 게 감흥이 훨씬 크다. 다양하고도 기이한 형상을 한 홍도의 기암괴석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장관이다.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홍도는 땅에서는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서 섬을 돌아봐야 그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다. 독립문바위, 부부탑 등 홍도 10경 외에도 33경 등 섬 전체가 황홀한 비경을 이룬다. 글·사진/흑산도·홍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봄꽃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지리산까지 행진하고 있다. 전남 광양 매화마을에서 한바탕 꽃잔치를 벌인 매화는 섬진강변을 울긋불긋 수놓더니 전남 구례 지리산까지 파고든다. 매화에 뒤질세라 지리산 자락 구례군 산동면에서는 산수유가 또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중이다. 광양과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이어지는 봄꽃 길은 그 옛날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의 길’이기도 하다. 1597년 8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궤멸되다시피 한다. 이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돼 섬진강변을 따라 북상하며 수군 재건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때 그 육로는 이순신의 희생과 고뇌로 얼룩진 길이었지만, 4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화사한 꽃길로 변신했다.》 ○ ‘노오란 열꽃’이 핀 산수유마을 전남 구례는 이순신이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곳이다. 이순신이 육지에서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한 군량미를 처음으로 확보했던 곳이 바로 곡창지대 구례다. 백의종군으로 남하했을 때도 구례 현감과 백성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구례의 이순신 백의종군 길목은 지금은 산수유마을로 변신했다. 역사를 밟고 가는 길은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지만, 봄날 봄꽃길만큼은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은 설렌다. 노란색 꽃이 봄의 합창을 하고 있는 구례 산수유마을은 산동면 상위마을, 반곡마을, 계척마을 등 산수유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마을들을 가리킨다. 산수유마을 중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상위마을은 아래로 굽어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정자 ‘산유정’에 올라서면 산수유꽃을 ‘마른 가지에 번지는 노오란 열꽃’으로 묘사한 오세영의 시가 떠오른다. 상위마을은 지리산 만복대 자락을 따라 형성된 다랑논과 계곡 사이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시내가 정취를 더해준다. 산수유는 노란 꽃잎 때문에 흔히 개나리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두 꽃은 빛깔 분위기가 다르다. 개나리의 샛노란 빛이 해맑은 어린아이와 같다면 산수유의 ‘노오란’ 파스텔톤 빛은 고아한 여성 같은 느낌을 준다. 상위마을 아래로는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로 유명해진 반곡마을의 산수유 꽃담길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꽃담길을 따라 더 아래로는 산수유문화관과 산수유사랑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언덕배기에 조성된 사랑공원에는 산수유를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과 함께 산수유 정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포토존이 여러 군데 있다. 평일임에도 빨간 산수유즙을 파는 좌판들이 들어섰고, 이곳에서 맛보는 산수유 막걸리 한잔은 봄꽃 향연의 흥취를 더욱 돋워준다. 한편 전북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는 계척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있는 곳이다. 중국 산둥반도가 원산지로 알려진 산수유나무는 1000년 전 산둥성 여인이 지리산 자락으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 산수유나무의 약 65%(10여만 그루)가 이 일대에서 자라고 있는 이유다. 흥미롭게도 이 마을에는 ‘남도 이순신길-백의종군로’라는 푯말도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이 구례를 오갈 때도 이 산수유나무를 보았을 게다. ○구례 매화엔 스토리가 있다 꽃나무는 임자를 만났을 때 그 향기가 더욱 진해진다. 꽃나무가 사람을 만나 ‘스토리’라는 보이지 않는 물감으로 채색되기 때문이다. 흐드러지게 핀 산수유 사이로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는 구례 매화들이 그렇다. 구례의 매화나무는 저마다 스토리 빛깔이 다르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암향(暗香)도 독특하다. 먼저 구례 화엄사엔 홍매화와 들매화가 있다. 홍매화는 1702년 계파선사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기념으로 심은 매화나무다.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 귀퉁이에 서 있는 이 홍매화는 금강송처럼 꽃송이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형태다. 해마다 봄만 되면 장엄하면서도 위풍당당한 이 매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화엄사로 몰려든다. 화엄사 측은 아예 ‘화엄 천년의 공간, 향기에 취하다’는 주제로 2022년 ‘홍매화·들매화 전문 사진 및 휴대전화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홍매화 주변은 전문 사진작가들과 일반인들의 사진 촬영으로 야단법석이다. 홍매화는 꽃색이 매우 고혹적이다. 햇살 방향과 날씨에 따라서도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구름이 낀 흐린 날은 분홍빛, 약간 밝게 흐린 날은 선홍빛, 아주 쾌청한 날 역광을 받았을 때는 검붉은 빛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화엄사 홍매화는 ‘흑매’로도 불린다. 홍매화와 함께 화엄사를 대표하는 또 다른 매화나무는 화엄사 뒤편 구층암 근처(길상암 입구)에 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저절로 자란 야생 매화인 들매화(천연기념물 제485호)다. 원래 4그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 그마저도 노쇠해 절정의 개화기인데도 활짝 핀 꽃송이를 보기가 어렵지만 올곧게 수행한 노승(老僧)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뿐이랴. 산사에서 벗어나 속세로 내려오면 매천사(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의 매화를 빼놓을 수 없다. 매천사는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를 남기며 자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1855∼1910)을 기리는 사당이다. 사당 이곳저곳에 심어놓은 매화나무는 지조 있는 조선 선비 정신을 상징하는 듯, 맑고도 서늘한 향기가 감도는 것 같다. 그 향기에는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하는 매천의 절규가 담겨 있는 듯했다. 매천의 발자취는 그 이웃인 운조루(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도 나타난다. 경부 최부잣집과 곧잘 비교되는 호남의 대부호 집이 운조루다. 이곳 류씨 주인들은 매천과 가까이 교류했다. 매천은 칠언시로 운조루의 풍광과 정취를 노래했을 정도로 이 집을 좋아했다. 또 운조루의 주인 류형업(1886∼1944)은 매천의 자결 소식을 듣고서는 “이것은 가히 의로운 죽음이라 할 것이니 유방백세(流芳百世·향기가 100대에 걸쳐 흐름)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글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운조루 사랑채와 연결되는 정자는 매천 등 구례의 선비들이 즐겨 모여 담소를 나누던 현장이다. 이 정자에서는 마당 쪽으로 오래된 매화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운조매’라고 불리는 이 매화나무는 1776년 운조루를 지을 당시 이식했던 나무가 고사한 뒤 뿌리 부근의 가지 하나가 되살아나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의 역사와 함께해 온 운조매는 부자이면서도 나눔을 적극 실천해온 집주인들을 닮은 듯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분위기를 내는 게 인상적이다. 운조루 바로 인근에는 또 다른 부자 명당인 곡전재가 있다. ‘금가락지가 떨어진 땅’이라는 의미로 금환낙지(金環落地) 명당터로 불리는 이곳은 금가락지처럼 둥글게 돌담을 두른 형태가 특징적이다. 2.5m 정도의 돌담장 사이로 홍매화, 백매화, 산수유꽃이 동시에 피어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현재 한옥 체험 민박으로 운영되고 있는 곡전재에서 봄꽃을 감상하면서 부자 터 기운을 덤으로 쐬어보는 것도 좋다. 구례 산수유마을처럼 온 동네가 매화로 치장한 곳을 보고 싶다면 광양 매화마을로 가볼 일이다. 매천의 고향이기도 한 광양은 해마다 매화축제가 열리는 다압면 매화마을이 유명한데, 특히 16만5000m²(약 5만 평) 이상의 산자락에 10만 그루의 매화나무들이 들어선 홍쌍리 청매실농원의 풍경이 빼어나다. 아득한 구름숲처럼 보이는 매화꽃밭 사이로는 평일임에도 인파가 넘쳐나고 주차장은 차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화사한 홍매화와 맑고도 깨끗한 백매화 숲 너머로 펼쳐지는 섬진강변 풍경을 즐기기 위해 봄이면 전국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봄꽃 나들이에는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섬진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나는 벚굴이 제철이다. 성인 남성 손바닥만 한 엄청난 크기에 오동통하면서도 쫄깃쫄깃한 굴 속살이 일품이다. 바다에서 나는 굴과 달리 담백한 맛도 난다. 글·사진/구례·광양=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동양학과 서양학, 인문학과 빅데이터 등 다양한 학문 분야 간 접합을 통해 창의적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융합학문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일부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운영되던 융합학문이 수도권 대학 4년제 학사 과정에서도 선보였다. 한양대 에리카(ERICA)캠퍼스 사회교육원에서 교양 과목으로 개설한 학점은행제다. 한양대는 2022학년도부터 일정 기준 학점을 이수할 경우 한양대 총장 명의의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학점은행제를 대폭 확대 개편하면서 일부 융합학문 과정을 도입했다. 심리학 전공 코스에 9개의 동양문화학을 교양과목으로 편성한 것이다. 교양과목은 순수 인문학 4과목(동양문화사, 동양사상의 전개, 유교문화의 이해, 동서문화교류사), 한국학 3과목(한국민속문화사, 한국민중생활사, 한국의 유학사상), 동양의 인문응용학 2과목(생활풍수, 생활역학)으로 구성돼 있다. 한양대 사회교육원 관계자는 “기존 심리학 과목(전공필수 8과목+전공선택 12과목)에 동양문화학을 교양 과목으로 배치한 것은 동양 인문학을 습득함으로써 21세기 미래사회를 선도해 나갈 지혜와 능력을 갖춘 실용인을 배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를테면 동양의 역학이나 풍수학에서 수천년간 쌓아온 빅데이터는 현대 심리학에서도 응용이 가능하며, 나아가 동양인의 정서와 사유체계를 다루는 동양 인문학은 심리학 연구 및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9개 동양문화학 교양 과목은 프로그램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경우 심리학 전공뿐만 아니라 경영학·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체육학·평생교육사 전공 등으로 확대 적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명리학과 풍수학 등 동양문화학은 수도권 일부 사이버대학에서 교과 과정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 사회교육원에서 최초로 학위를 인정하는 학점은행제로 개설되면서 본격적인 제도권 편입이 기대되고 있다. 한양대 융합산업대학원 박정해 교수는 “학점은행제를 통해 심리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장학금 혜택 등을 부여해 본교 융합산업대학원의 동양학 석사 과정까지 이수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융합산업대학원에서는 풍수학과 명리학 등 동양학 석사 과정이 운영되고 있으며 융합학문 체계로 교과목을 편성해 놓았다고 말했다. 풍수학과 IT기술을 접목시킨 ‘IT기반풍수연구’, 풍수학과 미학이 결합된 ‘풍수미학연구’, 명리학과 사회학 혹은 심리학이 연결된 ‘명리학과 인간관계론’과 ‘명리학과 직무특성’ 등은 기존 교과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코스다. 특히 풍수학은 최근 건축, 부동산, 조경, 도시공학,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용되면서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으로부터 큰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한다. 만학의 꿈을 키우거나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학점은행제는 토요일과 일요일, 에리카 캠퍼스에서 수업이 이루어진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