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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사태 68일째…. 아직도 정의(正義)는 실현되지 않았다. 고발장이 접수된 게 5월 11일. 검찰은 그새 21대 국회의원으로 신분을 갈아탄 윤 씨에 대해 소환 일정조차 못 잡고 있다. 수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개 시민단체의 회계부정 의혹 사건 수사가 이렇게 끌 만큼 복잡한가. 검찰 일각에선 워낙 근거자료 없이 주먹구구로 회계를 운영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단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기업 수사할 때 탈탈 털어내는 검찰의 능력으로 볼 때 엄살로 들린다. 이번 달 검찰의 대규모 인사를 앞두고 청와대와 추미애 법무장관 눈치를 보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더 바짝 조여 이른 시일 내에 결과물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윤미향 사태를 ‘된통 소나기 한번 맞고 지나간 일’로 치부하려는 작태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요즘처럼 이 명제(命題)에 회의가 드는 때가 없었다. 역사가 진보하는 방향이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권력을 분산하는 쪽이라면 거꾸로 가는 것만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무엇보다 기존 권위를 거부했던 좌파 집권세력이 훨씬 더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인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집권당 대표라는 사람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빈소 밖에서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의 대응 방침을 묻는 기자에게 ‘××자식’이란 욕설을 했다. 박 전 시장의 비극적인 선택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묻는 직업인 기자로서 못할 질문은 아니다. 고인과의 연(緣) 때문에 불쾌했다고 해도 욕설로 응대한 것은 저열하다. 질문한 기자와 욕설을 퍼부은 당 대표, 누가 더 욕을 들을 만한지 알 만한 사람은 안다. 권위적인, 너무도 권위적인 그의 언행은 문재인 정권 들어 두드러진 좌파 권위주의와 무관치 않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사반세기를 지나 등장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어느 전임자보다 제왕적인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다. ‘파출소 지나고 경찰서 만난다’고 했던가.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 부르짖으며 권력을 잡은 문 대통령은 박근혜보다도 더 제왕적인 대통령이 돼버렸다. 단적으로 현 여권에서 대통령 비판은 사실상 금기다. 누구라도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털끝이라도 건드렸다간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숨 막히는 분위기다. 박 대통령 때는 집권 3년차에 벌써 여당의 원내대표가 대통령에게 각을 세우기라도 했다. 민심을 청와대에 전해야 할 여당에서조차 감히 문 대통령을 비판할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 바로 역사의 퇴보가 아니고 뭔가. 그래도 집권 초기에는 인간 문재인의 소탈한 모습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경청의 달인’이라던 문 대통령은 기껏 경청하고 ‘내 맘대로’ 하는 새로운 통치 스타일을 선보였고, 그러면서 여권 내에서도 점점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어느덧 집권 후반기를 넘어서면서는 역대 권력자처럼 듣기보다 말하기를 앞세우는 모습을 보인다. 그 결과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다’ ‘때로는 광화문에서 대토론회를 열겠다’는 취임사의 약속은 모두 식언(食言)이 됐다. 결국 ‘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는 말도 공약(空約)이 돼버렸다. 누구보다 소탈할 것 같았던 대통령이 누구보다 권위적인 대통령이 된 것은 집권세력 특유의 운동권 문화와도 관련 있어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들은 실제 현실에 적용되는 민주주의는 배울 기회가 없었던 듯하다. 같은 학생들끼리 전대협 한총련 의장을 ‘의장님’으로 떠받들며 옹위하는 기이한 운동권 권위주의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채 ‘형’ ‘누나’ ‘동생’ 하며 자기편이면 무슨 짓을 해도 옳다는 시대착오적인 선민의식과 독선(獨善)에 빠져 있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행동은 집단주의 전체주의다. 그러니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이어 강민정 현 의원 사례에서 보듯, 털끝만 한 이견도 용납하지 않는 기류에 눌려 누구 하나 찍소리 못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무리하고 황당한 인사와 입법, 정책을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밀어붙이고 있다. 기차에 탄 사람들은 그 폭주의 끝이 어디일지 두렵지만, 폭주를 막을 이들도 그 사람들밖에 없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어떤 도시의 최고 실력자 T. 돈과 권력을 장악한 그에게 거칠 것이 없다. 다만 뒷골목의 황태자 K가 성가시게 하는 걸 빼곤. 걸핏하면 T의 집에 횃불을 던져 불을 싸지르겠다고 협박한다. 처음엔 흘려들었는데,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실행 준비를 착착 해나가는 품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럴 때 K의 이웃 M이 나섰다. 옆집에서 완력을 과시하는 K가 두렵기도 하고, 어떻게든 이웃끼리 잘 지내보려고. K가 가장 원하는 게 T에게 인정받는 것이란 점을 간파한 M은 T를 찾아갔다. “K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 무장해제 의사가 있다.” K를 찾아가선 이렇게 말한다. “T가 만나고 싶어 한다. 당신을 인정해줄 의사가 있다.” 결국 만난 T와 K. T는 K에게 “무장해제부터 하라. 그러면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K는 T에게 “먼저 인정부터 하라. 무장해제는 그 다음”이라며 버텼다. 결국 싸늘하게 돌아선 두 사람. 모두 ‘M에게 속았다’고 느낀다. 다급해진 M. 양쪽에 다시 한번 만나보라고 매달렸으나 이미 신뢰를 잃은 뒤. 화가 난 K는 M의 집 담장을 때려 부수며 “네 돈부터 내놓지 않으면 너부터 손볼 것”이라며 눈을 부라린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 드러난 한미북(韓美北) 3국 지도자의 협상과 중재 실패 과정을 단순화해봤다. 이런 일은 보통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왕왕 벌어지기 때문. 그럴 때 M 같은 중재자는 ‘여기서 이 말 하고 딴 데서 저 말 하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찍힌다. 볼턴 회고록을 곧이곧대로 믿느냐고? 대체로 믿는다. 볼턴은 북한에 유화적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실무안(案), 즉 ‘비건안’이 채택되지 못하도록 사전공작을 벌인 일까지 기술하는 등 비교적 자신에게 솔직했다. 그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출신으로 미국 지상주의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전형적인 매파다. 협상의 디테일을 ‘창작’할 스타일은 아니다. 그의 회고록을 통해 결코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김정은의 속내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비건안’이든 ‘빅딜안’ ‘스몰딜안’이든 실질적으로 북핵을 건드리는 어떤 제안도 거부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할아버지 대부터 몽매에도 원했던 ‘절대무기’를 자기 대에 완성했는데 그걸 포기할 리 만무다. 핵이 없는 북한은 아무리 한국과 국제사회가 도와준다고 해도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핵 보유는 굶주린 인민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하는 김정은 왕조의 통치 신화다. 그걸 포기했다간 권좌까지 위험해질지 모른다. 이 당연한 이치를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외교안보 수뇌부만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문 정부 외교안보·대북정책의 틀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에. 그러니 문 대통령이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북의 비핵화는 쏙 뺀 채 종전선언을 촉구하는 것 아닌가. 비핵화 없는 종전선언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차라리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한다, 그래도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핵보유국 북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건 한미동맹뿐이다. 그 동맹이 문 정권 출범 후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무엇보다 볼턴 회고록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950년대 한국전쟁에서 싸운 뒤 왜 우리(미군)가 아직도 거기에 있느냐”고 물을 정도로 한미동맹에 대해 무지하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며칠에 한 번씩 되물을 정도로 관심조차 없다. 트럼프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한국에 돈을 달라고 할 좋은 타이밍’이라고 했고, 방위비 분담금 50억 달러를 못 받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고 다그치기까지 했다. ‘보호해줄 테니 돈을 내라’는 조폭적 동맹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트럼프가 11월 대선에서 재선된다면 한미동맹의 명운(命運)은 벼랑 끝에 걸릴 것이다. 그 경우 한국도 자구책 마련을 위한 실존적 고민을 하는 게 마땅하다.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따지고 보면 핵을 막는 데는 핵만 한 것이 없다. 공포의 균형이다. 우리가 핵무장을 추진할 경우 미국 등 국제사회의 엄청난 제재와 일본 등 주변국의 핵보유 도미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러나 트럼프는 다른 나라를 보호하는 데 미국 돈을 쓰느니, 그 나라가 핵무장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큰 기류가 바뀔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당장 핵무장을 추진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이런 경우의 수를 포함한 국가의 생존과 영속 전략을 누군가, 어디선가 고민하고 있어야 나라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윤미향 사태 40일째다. 지난달 7일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그새 윤 당선인은 어엿한 21대 국회의원으로 ‘신분 상승’을 했고, 지금도 버젓이 여의도 국회를 드나들고 있다. 4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의(正義)는 실현되지 않았다. 조국 사태는 67일을 갔다. 법무부 장관 지명부터 장관직 사퇴까지. 윤미향 사태도 검찰 수사결과가 나오면 달라지려나. 하기야 드러난 팩트도 뒤집어 버리고, 당연한 비판에도 친일이니 토착왜구니 프레임을 씌워 비판자를 도리어 공격하는 사람들이니, 또 뭘 들고 나올지 모르겠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수사결과가 나오면 ‘이러니 검찰개혁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부터 윤미향 사태 한 달 동안 침묵하다 8일 처음 입을 열었지만, 윤미향 이름은 뺀 채 “이번 논란은 시민단체의 활동 방식이나 행태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시민단체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조국 사태 때 “(조국) 가족 논란 차원을 넘어서 대학입시 제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해 달라”고 한 것과 판박이다. 최고 권력자가 부정을 저지른 이들은 놔두고 제도나 단체의 문제점을 뭉뚱그려 지적하니 본질은 실종되고 주변에서 엉뚱하게 유탄을 맞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된다. 대입제도를 고치고 시민단체 투명성을 높이려면 먼저 반칙을 한 사람들에게 응당한 정의를 실현한 뒤에 해야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조국과 윤미향이야말로 문 대통령 취임사 ‘최고의 명구(名句)’를 단박에 조롱거리로 만든 사람들이다. 조국에서 보듯 기회는 평등하지 않았고, 윤미향에서 보듯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으니 결과가 정의로울 리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대통령의 태도는 한 가지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내 편이냐, 아니냐. 반면 내 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얼마나 독해질 수 있는지 이 정권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당은 국회를 무려 53년 만에 일방 개원했다. 집권세력이 그토록 혐오하는 박정희 철권통치 시대나 자행했던 일이다. 청와대가 대북전단을 처벌한다며 박정희 시대의 ‘7·4 남북공동성명’까지 끌고 나온 걸 보고 실소(失笑)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박정희 시대가 연달아 소환되는 것이 어떤 전조(前兆)는 아닌가. 거여(巨與)는 야당 혹은 제2당이 법제사법위원장을 맡는 국회 불문율을 깨려는 독재적 발상을 기어코 관철시키려 한다. 이미 여권은 ‘4+1’이라는 변종 협의체까지 만들어 사상 처음 제1야당을 빼고 선거법을 일방처리한 바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까지 강행처리했으며 추미애 법무장관을 앞세워 윤석열 검찰총장의 수족을 잘라내는 검찰장악 인사까지 해치웠다. 총선에 압승한 뒤에는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들 법안들을 무더기로 쏟아내고 언론자유를 옥죌 법안까지 다시 들고 나왔다. 이런 ‘일방’ ‘강행’ ‘독주’의 종착지가 어딘지는 누구나 안다. 독재다. 내 편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내 편이 아니면 한없이 독한 정책이 나라 안에 국한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국가의 안위가 걸린 외교안보 정책도 딱 그 모양이다. 일본에는 강퍅하기 이를 데 없으나 중국은 상전 모시듯 한다. 한 술 더 떠 북한에는 죄지은 사람처럼 갖은 수모를 참아가며 비굴한 태도로 눈치를 본다. 그럴수록 북한은 더 길길이 뛴다. 북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은 어제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됐다며 “북남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한국민의 세금으로 지은 개성공단의 남북교류협력협의사무소를 공동연락사무소로 바꾸느라 개보수하는 데만 100억 원의 혈세가 들어갔다. 누구 맘대로 폭파 운운하는가. 북한 정권은 미국을 짝사랑하고, 문재인 정권은 그런 북한을 짝사랑한다. 김정은 정권은 미국과의 연애가 안 풀리자 문(文) 정권에 화풀이하며 내부를 달래고 있다. 이 정권이 단 한 번이라도 일본을 대하듯 당당하게(?) 북한을 다뤘다면 이렇게까지 오만방자하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 정권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사선(死線)을 넘어 자유와 인권을 찾아온 탈북민들에게는 어찌 그리 잔인한가. 내치(內治)든 외교든 지나친 ‘편 가르기’ 정책은 분열을 조장하고 국익을 해친다. 현 정권은 지금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상태다. 그쯤 됐으면 ‘보수는 악(惡), 진보는 선(善)’ ‘미일(美日)은 악, 북중(北中)은 선’이라는 운동권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더 넓게 보고, 더 크게 국정을 운영할 때도 됐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윤미향 사태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윤미향 때문이 아니다. 공사(公私) 구분이라고는 없는 사람이 시민운동, 그것도 우리 역사의 가장 큰 아픔 중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활동가 역할을 하기엔 자격 미달이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도 건드리기 어려운 성역이 되고 여당 비례대표 의원까지 꿰차는 게 아직은 우리 시민운동과 정치문화의 수준이라고 본다. 다른 시민운동의 영역과 비정부기구(NGO)에 제2, 제3의 윤미향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윤미향 사태의 본질은 윤미향 개인의 일탈보다는 지난달 7일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이후 한 달 가까이 우리 사회가 보여준 상식의 마비와 가치의 전도(顚倒)에 있다. 되레 이 할머니를 모욕하고, 시대착오적인 ‘친일 프레임’을 들이대며, 여권(與圈)의 비호 아래 윤 당선자가 금배지의 방패를 달기 바로 전날 버젓이 기자회견까지 하는 이 사회…. 과연 정상인가. 자연스럽게 조국 사태의 악몽이 소환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법무부 장관 지명 한 달 만에 숱한 의혹에도 임명을 강행했고, 다시 한 달여 뒤 조 장관이 사퇴했다. 그 두 달여, 우리는 ‘조국 내전(內戰)’이라고 부를 정도의 진영 간 극한 대결은 물론 도덕과 양심, 상식과 정의의 도착(倒錯) 상황 같은 걸 경험했다. 조 전 장관의 차를 물티슈로 ‘세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태가 우리 사회 일각에 깊은 정신적 후유증을 남겼음을 봤다. 그래도 조국은 물러나기라도 했다. 윤 당선자는, 아니 윤 의원은 언제까지 21대 국회의 문을 당당하게 드나들면서 열일곱 분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들을 팔아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대모(代母)로 남을 건가. 민주화 이후 역대 어느 정권도 조국과 윤미향처럼 언행이 철저히 불일치하는 의혹덩어리 내로남불 인사들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장기적인 소모전을 벌인 일이 없다. 그 소모전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도 정의는 언젠가 실현된다는 믿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자 한국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정의는 어느덧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정의가 오염되면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내상(內傷)을 입는다. 반미(反美)를 외치며 자식은 미국 유학 보내는 이들, 반미는 생계고 친미(親美)는 생활인 사람들이 외려 정의를 외치는 사회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게다가 현재의 정의를 오염시키는 것도 모자라 과거의 정의까지 뒤집으려는 기도(企圖)마저 나온 지 오래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 재심, 1987년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건 재조사,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에 대한 현충원 안장 불가론에 조선시대 사화(士禍)를 연상케 하는 ‘현충원 친일파 파묘(破墓)’ 주장까지…. 언제까지 이럴 건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고,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은 물론 시민사회 노동 권력까지 사실상 장악했다고 과거의 정의를 뒤집고 역사를 다시 쓸 수는 없다. 역사는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팩트와 진실로 써지는 것이기에. 선거의 승자가 역사의 승자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이 정권의 지독한 과거 뒤집기와 역사 바꾸기의 근저엔 문 대통령의 ‘세상 바꾸기’ 집착이 있다고 본다. 친일→독재→보수로 이어지는 주류세력을 교체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래서 그 시발점인 친일 문제에 유독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일본의 경제보복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란, 대통령답지 않은 격정의 언사를 쓴 데서도 그의 세계관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광복 이후 75년. 일제 치하보다 두 배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친일’ ‘반일’ 하며 다툴 정도로 우리는 일제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무엇보다 ‘세상 바꾸기’를 위한 주류세력 교체도 이쯤이면 만족할 수준 아닌가. 대통령이 과거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앞으로 비리 의혹 당사자들은 친일 프레임을 만능의 갑옷처럼 두르고 정의를 오염시킬 것이다. 대통령은 역사의 심판자가 아니라 심판 대상이다. 그러니 문 대통령은 과거와 역사 문제에 좀 더 겸허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지금은 코로나 사태에 미중(美中)이라는 거인이 온 동네를 휘젓고 싸우다 우리 집 문을 발로 걷어차기 직전의 위기다. 집 안에서 우리끼리 복닥거리며 싸울 때가 아니다. 상식과 정의를 다시 세워 과거가 아닌 미래와 싸울 때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4·15총선은 향후 대한민국 선거의 양상을 바꿔놓을 것이다. 기록적인 여당 압승과 야당 참패의 요인은 복합적이다. 코로나19 사태와 주류 세대의 이동, 세상 바뀐 줄 모르는 야당의 ‘구악(舊惡) 공천’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들이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의 헬리콥터 살포식 현금 지원 또는 지원 약속이 표심을 흔든 것도 분명하다. 당정은 7세 미만 아동이 있는 가구당 40만 원, 총 1조여 원의 아동수당을 풀었다. 그것도 선거 이틀 전에.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1400억 원을 선지급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단기 일자리 예산으로 뿌려댄 노인 일자리 사업은 보수 성향이 강했던 60대 이상의 표심을 뒤흔들었다. “어떤 정부도 이렇게 번듯한 일자리를 준 적이 없다”는 노인도 있었다. 문 대통령까지 나서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안의 국회 통과를 기다리지 말고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자들에게 미리 통보해 주고 신청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그것도 선거 전날이다. 과거 같으면 관권·금권 선거 논란에 휘말렸을 현금 살포가 큰 잡음 없이 넘어간 건 코로나 위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는 뚜렷해졌다. 돈은 먹힌다는 것. 개발연대의 ‘고무신 선거’ 때도 그랬지만, 21세기 첨단산업 시대에도 선거에서 돈은 힘이 세다는 것이다. 김종인 전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재난지원금을 속히 지급하라’며 여당보다 한발 더 나간 건 그런 민심의 속성을 간파한 것이다. 사회가 첨단화할수록 첨단 쪽에 선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의 부(富)의 불균형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잘살아도 국민은 너도나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시대다. 포퓰리즘 현금 살포가 잘 먹힐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현금 살포로 이번 총선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여당이 향후 대통령선거든 지방선거든 그 수법을 안 쓸 리 없다. 선거에서 현금 살포의 위력에 된통 당한 야당도 따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금 살포가 선거 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14조3000억 원에 달하는 긴급재난지원금을 풀기 시작했다. 지자체들도 재난긴급생활비 등의 명목으로 돈을 풀고 있다. 문 대통령이 취임 3주년 연설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겠다’고 한 다음 날 국회 상임위는 예술인고용보험 법안을 통과시켰다. 저소득층 구직자에게는 최대 300만 원의 구직촉진수당도 지급된다. 또 1조5000억 원을 들여 93만 명에게 고용안정지원금도 준다. 코로나 여파로 4월 실업급여는 사상 최대치인 9933억 원이 나갔다. 이러니 슈퍼 예산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올해 슈퍼 본예산에 현금복지는 54조 원이나 된다. 현금복지나 다름없는 단기 일자리 예산은 27조 원에 달한다. 86조 원이 넘는 막대한 현금성 복지가 1200만여 명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아무리 코로나 사태로 위중하다 해도 너무 많은 현금이 뿌려지고 있다. 공짜 점심에 길들여진 국민은 더 많은 걸 원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나라 재정은 멍들어간다. 올해 늘어나는 국가채무만 120조 원가량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올해 말 국가채무는 849조 원으로 늘어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6년 말 36%에서 올해 말에는 45%를 넘을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북한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아낌없이 퍼주려다 재정건전성을 허물어 대한민국의 미래에 암운(暗雲)을 드리운 대통령으로 남고 싶은가. 하기야, 그런들 어떠하랴. 총선에서 압승했고, 지지율은 고공행진 중이며 태종 세종에 비유되는 ‘문비어천가’마저 쏟아지고 있다. 정치인이야 그렇다 치고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사람까지 나서 “지난 3년 동안 태종의 모습이 있었다면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참모로서의 바람”이라고 했다. 중앙일간지 기자 출신인 대변인까지 이렇게 닭살 돋는 멘트를 해대니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사실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현세대의 몫이 아니다. 마구 돈을 풀어 지금은 박수를 받더라도, 빈 나라 곳간을 물려받을지 모를 미래세대가 어떻게 평가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4·15총선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16일자 본란(本欄) 말미에 이렇게 썼다. “자유민주주의 ‘자유’란 두 글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문재인 정권이 확 달라지지 않는 한 4개월 뒤 총선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본다. 내년 4월 16일 아침, 우리는 어떤 대한민국을 맞을 건가.” 지난달 16일 어떤 아침을 맞았는지는 다 아는 대로다. 여당의 압승에 기고만장한 일각에서 ‘세상 바뀐 걸 확실하게 느끼도록 갚아주겠다’며 윤석열 검찰총장 끌어내리기에 개헌론까지 쏟아졌다. 그러자 여당 대표가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코로나 국난과 경제위기, 일자리 비상사태의 타개’라고 자제시킬 때만 해도 승자의 여유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계 은퇴를 앞둔 당 대표의 자제론을 깔아뭉개기라도 하듯,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지낸 당선자가 ‘토지공개념 개헌’에 불을 붙이더니 원내대표가 나서 국민발안제 원포인트 개헌론을 들고 나왔다. 국민발안제 개헌은 현재 ‘대통령’과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의 투 트랙으로 돼 있는 개헌 발의의 통로를 하나 더 늘리겠다는 뜻. ‘지금이 개헌할 때냐’는 반발이 거세지자 한발 물러섰으나 21대 국회 초반, 그것도 올해 안에 다시 터져 나올 공산이 크다. 이번 총선에서도 확인됐듯, 좌파의 정치술은 현란하다. 불씨를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불을 지피는 사람이 있고, 그 불을 들불로 확산시키는 세력이 있다. 얼핏 따로 따로 벌어지는 현상 같지만, 지나고 보면 작은 불씨를 들불로 키우려는 정교한 디자인이 있고, 그 디자인을 현실화하는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다. 총선 이후 분출한 개헌론도 그런 큰 그림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이 그리려는 큰 그림의 완성은 뭘까. 바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빼는 것이다. 그렇기에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자유’를 뺀 개헌안을 만든 바 있고, ‘토지공개념’과 ‘이익공유제’라는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개념을 개정헌법에 박으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권이 추진하는 국민발안제 개헌이 직접민주주의 방식의 개헌안 창출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문 정권은 직접민주주의를 통치 방식으로 표방하고 유용하게 써왔다. 오죽하면 진보좌파 이론가 최장집도 “현 진보세력의 직접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비슷하다”고 일갈했겠는가. 과도한 직접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포퓰리즘과 중우(衆愚)정치를 동반한다. 문 정권 들어 그 심각한 폐해를 충분히 목도해 온 터. 나라 망칠 포퓰리즘 헌법까지 등장하지 말란 법이 없다. 민의(民意)는 한국 정치를 실패의 무한궤도로 돌리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뜯어고쳐 달라는데, 정권은 자유 대한민국의 토양을 갈아엎으려는 것이다. 바로 총선 압승이 진보좌파 세력으로 하여금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나라의 틀을 바꿔 ‘보수우파 기득권 세력’을 교체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을 주었으리라. 이번 총선으로 문 정권은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사실상 장악한, 민주화 이후 가장 강력한 정권으로 거듭났다. 검찰도 윤석열 총장의 수족을 잘라내고 정권 말을 잘 듣는 예스맨들을 요직에 심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지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나마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할 보수야당마저 그 정도 깨졌으면 정신 차릴 법도 하건만, 연일 저열하고 추잡한 이기심의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며 견제 받지 않는 권력에 터보엔진까지 장착해주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권력의 열차는 벌써 ‘해고제한 법제화’ ‘전 국민 고용보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후속법안 처리’ 같은 정권의 어젠다를 밀어붙이며 질주의 경적을 울린다. 그 열차의 종착역은 자유보다 평등, 경쟁보다 분배, 능동보다 수동, 개인보다 국가, 민간보다 공공(公共), 안보보다 굴종(屈從)이 중시되면서도 되레 불공정과 불평등, 불의와 빈곤이 심화되는 중남미 저쪽의 어느 나라쯤이 될 것이다. 4·15총선에서 권력에 경고한 41%의 국민, 아니 그보다 많을 양식 있는 국민이 이 질주를 막아서지 않는 한….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록적인 압승으로 문재인 정권에 힘이 확 실리게 됐다. 그런데 과연 문 대통령 개인에게도 그럴까.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피할 수 없었던 5년 단임제의 수레바퀴가 문 대통령 앞으로 훅 굴러왔기 때문이다. 5년 단임 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치러지는 총선은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의 가속페달을 밟는다. 승패와 관계없이 여야에 새 진용(陣容)이 갖춰지면서 그동안 안갯속이었던 미래권력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집권 후반기인 1996년, 2000년, 2012년, 2016년 총선 이후부터 대통령의 권력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누수되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시간도 많지 않다. 차기 대통령 선거일이 2022년 3월 9일. 2년도 남지 않았다. 역대 정권 말에 그랬듯, 내년 초부터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대선 국면으로 빠져들 것이다. 문 대통령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간도 올해 말까지인 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레임덕을 곁에서 지켜본 문 대통령. 자신의 레임덕도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잘 알 터. 이 때문에 일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조급함에 올해 안에 남북 화해와 대중(對中) 밀착, 소위 검찰 개혁과 주류세력 교체라는 숙원사업의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을까 우려된다. 여당 압승에 대한 대통령의 일성(一聲). “국민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겠다”였다. 그 말이 독주의 방아쇠가 아니길 바란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은 총선 승리가 키울지 모를 휴브리스(권력자의 오만)를 경계해야 한다. 그 휴브리스 때문에 임기 말이나 그 이후, 질곡에 빠진 권력자의 모습을 우리는 충분히 봐왔다. 문 대통령, 나아가 문 정권이 오만해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번 총선 지역구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163석, 미래통합당은 그 절반가량인 84석을 얻었다. 그런데 전국 253개 지역구 총 득표율은 민주당이 49.9%, 통합당이 41.4%로 8.5%포인트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많은 경합지역에서 민주당 후보가 근소한 표 차로 승리해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비례정당 득표율도 비슷하다. 범진보진영이 50% 남짓, 범보수진영이 40% 남짓으로 10%포인트 정도 차이다. 즉 보수 정치세력은 궤멸됐어도 보수 표심이 궤멸된 건 아니라는 뜻이다. 문 정권은 아직도 40%가량의 비판적 국민이 엄존함을 새기고 향후 국정에 임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직접 견제를 해야 할 보수 정치는 무너졌다. 안 그래도 보수 정치, 너무 낡고 늙었다. 선거에서 미래통합당 후보를 찍은 많은 사람들도 그 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정권의 폭주가 싫어서였다. 민주당은 공천에서 청와대 출신 ‘문돌이’, 친문·친조국 성향의 청년과 기업인 판사 경찰 출신 등으로라도 물갈이가 있었다. 통합당에선 무슨 물갈이가 있었나. 개표 방송을 보면서 저런 구(舊)정치인도 통합당 공천을 받았나,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지역 표심이 워낙 유리해 당선된 사람들도 있지만, 수도권에서 통합당의 꼰대 이미지만 부각시켰을 뿐이다. 더구나 선거가 임박해 조급해지자 여든 살의 김종인 씨를 영입해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더니, 선거에 참패하자 이번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기자고 한다. 심지어 다른 당 대표인 안철수 씨가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여기에 지난 대선 참패의 주역인 무소속 홍준표 당선자는 벌써부터 ‘통합당 복당 후 대권 도전’ 의사마저 내비친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렇게 깨지고도 모르나. 이번 총선의 메시지는 자명하다. 통합당의 정책이나 비전보다 꼰대 이미지 풀풀 풍기는 사람이 싫은 것이다. 아니, 통합당 자체가 싫다고 해야 하나. 확 갈아엎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그러려면 먼저 비대위원장부터 눈길을 끌 만한 인물을 세우고 차기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 표심까지 확장성 있는 대선후보감을 올해 안에 키워야 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이번 총선을 통해 박근혜의 잔재를 털고 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탄핵의 과거를 털고 당명대로 ‘미래’와 ‘통합’으로 나갈 수 있는 새 인물, 그의 삶에 스토리가 있고 3040세대와 중도 표심에도 어필할 수 있는 참신한 대선후보를 키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망가진 보수정치를 하루라도 빨리 추스르는 길이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없는 자리에선 나라님도 욕한다’고 했다. 왕조와 독재를 거치며 신산(辛酸)을 겪어온 이 나라의 민중들. 그 고단한 삶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때론 고된 노동의 현장에서, 친지들과의 모임에서,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왕이나 대통령을 욕하는 건 우리네 삶의 다반사(茶飯事)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이게 어려워졌다. 특히 문재인 정권 들어서는 모임 자리에서 문 대통령을 비판했다가는 얼굴을 붉히기 일쑤고, 심하면 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이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까지 한 묶음이 돼 두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자리가 어색해지기 십상이다. 온라인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 때도 극단적인 지지 성향을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수의 국민이 문재인 조국 얘기만 나오면 발끈하는 건 전에 없던 현상이다. 누구나 특정 정치인을 지지할 수도 있고, 지지하다 보면 열렬히 좋아할 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그 정치인이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권력이 바로 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견제 기능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수준의, 다중(多衆)의 감정적 지지는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결국 그 권력자에게도 해가 된다. 국민의 과도한 지지에 올라타 전횡(專橫)했던 수많은 지도자의 말로가 어땠는지 고금의 역사가 말해준다. 문 대통령에 대해 ‘우리 이니 마음대로 해’ 식의 무비판적인 지지는 정치적 지지라기보다는 일종의 팬덤 현상에 가깝다. 대통령이라면 국정의 성과나 정책의 방향으로 평가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문재인은 무조건 옳다’는 대전제를 깔고, 문재인이 옳으니 그가 펴는 정책은 항상 옳고, 문재인이 ‘마음의 빚’을 느끼는 조국을 수호하겠다고 나서는 건 건강한 지지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무조건적 지지에는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할 도덕이나 양심, 이성이나 상식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대 정권이 축적해온 민간 의료의 역량으로 그나마 고비를 넘긴 방역의 성과가 문재인 정부의 성과로 둔갑돼도, 코로나19 사태 초기 중국에 문을 걸어 잠그지 못한 걸 합리화하느라 여태껏 외국인 입국을 허용하며 ‘개방 방역’이라는 희한한 소리를 해도 문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당인 민주당과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 공천에서 사상 최악의 공천이란 평가를 받았던 2016년 친박(親朴) 공천이 우습게 보일 만큼 대량으로 친문(親文) 후보를 꽂아 넣어도 여권이나 지지자들 사이에서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말조차 안 나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더구나 비례전용정당과는 담을 쌓을 줄 알았던 민주당에 비례정당 2중대까지 등장해 도덕적으로 문제 많은 사람들이 공천을 받고, 그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큰 문제를 안은 조국을 수호한다는데도 정당 지지율이 오르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정당 지지자들의 판단 기준에 도덕이나 상식보다 ‘우리 편’만 있다는 뜻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이 확 키운 진영논리는 피해의식을 먹고 자란다. 집권세력은 권력을 쥐고도 여전히 피해자다. 주류세력이라는 실체 없는 집단에, 기득권이라는 야당에, 보수라는 언론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 일쑤다. 그러니 무능해서 실패해놓고 툭하면 야당 탓, 언론 탓, 부자 탓, 재벌 탓, 심지어 윤석열 탓, 일본 탓까지 한다. 급기야 ‘코로나’라는 기막힌 핑곗거리까지 등장했다. 그런 정권의 피해의식이 개개인의 심리적 근저에 깔린 피해의식을 자극하고 조응(照應)한다. 어느새 정권의 피해자 코스프레와 남 탓에 순치된 사람들 사이에서 문 대통령과 조국은 피해자다, 그러므로 지켜주고 수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도그마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국민의 피해의식을 자극해 여론몰이와 편 가르기에 성공한 이 정권 사람들은 그 방식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4·15총선 이후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할 그런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하려면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판단의 기준이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는 진영논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도덕과 양심, 상식이어야 한다. 깨어 있는 국민만이 깨끗하고 합리적이며 유능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서울의 한 지역구. 4·15총선에서 대학 선후배끼리 6번째 대결을 벌여 화제다. 2000년 16대 총선부터 이번 21대까지 단 한 번도 대결상대가 바뀌지 않았다. 이건 미담(美談)인가. 아니라고 본다. 마흔 살 전후의 젊은이들이 예순 전후가 되도록 같은 지역구 국회의원 자리를 나눠서 차지하는 게 한국정치의 정체(停滯)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 분은 3선 의원이고 다른 분은 재선 의원 출신이니, 이번 총선 결과에 따라 4선, 혹은 3선 의원이 될 것이다. 두 사람 다 같은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 정치 외에 이렇다 할 직업을 가져본 일이 없다. 여기서 드는 의문. 정치인은 직업인가. 물론 선진국에도 지역구에서 장수하는 정치인들이 있고, 심지어 세습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다선 의원을 평가하는 기준은 자명하다. 그가 지역구를 위해, 아니 국가를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느냐다. 하여,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이때, 금배지를 향해 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근본적인 질문이 이것이다. 당신은 말로는 ‘공익’을 외치면서 정치를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직업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제1 야당의 대선후보를 지낸 분을 비롯해 공천에서 떨어지자 “살아서 돌아오겠다”며 무소속 출마를 준비 중인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도 같다. 왜 굳이 살아서 돌아오려 하는가. 정치를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직업으로 착각하는 건 집권세력이 5년도 못 갈 권력을 영원할 거라고 착각하는 것만큼 우매하다. 시대는 변화를 원한다. 낡은 정치,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정치인에 지쳤다. 그럼에도 미래통합당은 80세의 김종인 전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초빙하려 했다. 김 전 의원이 자타가 공인하는 ‘선거 기술자’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비례대표 5선이라는 전무후무의 기록을 가진 김 전 의원이 통합당 선대위원장이 됐다면 좌우파의 강을 4번이나 넘는 셈이었다. 그가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서울 강남갑 공천을 두고 ‘국가적 망신’이라고 폄훼하는 걸 보고 시대 변화에 대한 ‘감’이 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을 만하다. 한국 정치의 정체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도덕의 잣대까지 들이밀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야에서 벌어지는 공천 난장(亂場)을 보니 어떻게 한국 정치는 이다지도 거꾸로 갈 수 있나, 하는 허탈감마저 든다. 꼼수 선거법이 꼼수 비례정당을 낳고, 꼼수 비례정당이 꼼수 공천을 낳는 것이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이 변종을 낳는 듯하다. 미래통합당이 과감하게 TK(대구경북) 의원들을 비롯해 기득권 현직을 쳐낼 때는 혁신의 바람이 불 줄 알았다. 그런데 쳐낸 그 자리에 채워 넣은 사람들이 기대 이하인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시대 변화에 둔감한 통합당 공천관리위원회가 “공천이 아니라 인사를 했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미래한국당이라는 비례전용 위성정당의 모습은 더 가관이다. 통합당 입장에선 이름만 빌려 차명계좌를 열었더니, 이름 빌려준 이가 ‘계좌의 돈은 내 것’이라고 나선 꼴이었다. 차명계좌를 여는 것 자체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남의 돈을 내 돈이라고 우기는 건 더 뻔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야당 쪽은 여당에 비하면 양반이다. 총선 막장 드라마의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쪽이다. 미래한국당을 ‘쓰레기 정당’이라고 욕하며 비례정당 근처에도 안 갈 것 같던 민주당이 진보세력 비례연합정당을 만든다고 물타기를 하더니, 급기야 이름도 생소한 군소당들을 긁어모아 사실상의 ‘비례민주당’을 만들고 말았다. 한국 정치의 흑역사(黑歷史)에 남을 만한 일이다. 더구나 여당 쪽에는 대놓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칭송하는 ‘친문·친조국 비례정당2’까지 있다. 애당초 ‘4+1 연합’이라는 희한한 야합으로 선거법을 일방처리한 결과가 기형 비례전용 정당의 난립으로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비례대표 후보를 못 내는 당은 정당 홍보를 위한 TV 토론도 할 수 없어 원내 1, 2당의 TV 토론도 없는 기형 선거운동이 벌어질 판이다. 가뜩이나 코로나 사태로 심란한데, 한국 정치가 아무리 망가졌어도 이건 너무 창피하지 않은가.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약속 취소된 날 저녁, 집 앞 치킨집에서 치맥을 샀다. 닭을 잘 튀겨서 붐비던 집. 한 테이블 손님밖에 없었다. “프라이드 한 마리에 생맥주 1000cc요.” 전에는 항상 바빴던 주인, 너무 고마워해 오히려 미안했다. ‘두 마리 시킬 걸 그랬나….’ 그 옆 세탁소 사장의 비명.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굶어 죽겠다.” 사람들이 외출을 안 하니 세탁물이 확 준 탓이다. 코로나 태풍은 영세 자영업자, 일용직, 방문판매직, 아르바이트생 등 서민의 삶을 가장 먼저 직격(直擊)했다. 을씨년스러웠던 지난 주말, 거리는 한산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줄 서 있어 웬일인가 하면 마스크 판매처였다. 황량한 거리와 마스크 줄이 오버랩되면서 무슨 세기말적 풍경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구소련 말 빵 배급을 기다리는 긴 줄이 떠오르기도 했다. 정말이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이건가 싶다. 내가 ‘확진’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환자가 이렇게 몰리는데, 병원에서 치료는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둘째 치고, 내 가족은 어떻게 되나. 내가 다니는 회사는? 나와 만났던 사람들은…. 이즈음 대한민국 국민이 공유하는 일상의 불안, 아니 공포다. 코로나 초기 중국에 문을 걸어 잠그지 않은 패착은 전 세계 절반 이상의 국가, 100개국이 넘는 나라가 세계 10위 경제대국인 한국에 문을 걸어 잠그는 참혹한 대가로 돌아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란 말이 돌았는데, 지금처럼 맞아떨어지는 때가 없다.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고 했을 때, 지금 같은 나라를 상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 세력을 교체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남북이 화해해 평화가 정착되고 한반도 경제공동체가 구현되는 나라,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그런 나라가 되었나. 말하자면 입만 아프다. 오만해서 무능하고, 무능해서 오만한 집권세력이 멋대로 밀어붙인 결과가 지금의 참담함이다. 그만큼 어려운 게 국정(國政)이요, 통치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정신 승리’나 부르짖고 있으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가령 A라는 정책 목표가 있다고 치자. 이를 달성하려면 정교하고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데 운동권 집권세력은 의욕만 앞서고 전략이 없다. 직업 관료라도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코드를 맞추는 무능한 예스맨만 중용한다. 정책을 아는 유능한 각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게 의욕만 앞세워 정책의 화살을 날리니 A라는 목표가 아닌 B나 C, 심지어 멀리 떨어진 Z를 맞히는 것이다. 서민을 위한 정부가 서민을 가장 힘들게 하고, 부동산을 잡는다며 서울 부동산 가격을 역대 최고로 올렸다. 최저임금이나 주 52시간, 탈원전 정책 등에서 나타나는 헛다리 짚기도 모두 무능의 소치다. 대중(對中) 정책이 단적인 예다. 중국이 전 세계에서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나라는 미국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미국을 통해 중국을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미국과는 멀어지고 ‘한중(韓中) 운명공동체’ 운운하며 들이댄다고 중국이 알아주겠나. 사랑도 외교도 들이댄다고 능사가 아니다. 중국이 느끼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미국과 가까울수록 올라간다. 미국이 버린 한국은 중국에 주변 소국(小國)의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중국에 그런 실리 외교를 펼치는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다. 미일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중국과 전에 없이 가까워지고 있다. 일본의 중국인 입국 제한 조치에 대해 중국이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진전된 일중(日中) 관계의 반영이다. 결국 대중국 정책의 실패가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나라가 셧다운되는 듯한 미증유(未曾有)의 위기. 이제 믿고 의지할 데라곤 현명한 국민뿐이다. ‘대구 봉쇄’라는 말이 무안하게 자발적 봉쇄에 나선 대구 시민들, 그런 대구로 달려가는 의료진과 봉사자들, 그들에게 도시락을 보내는 상인과 시민들, 그리고 암울한 시기 국민의 삶에 실핏줄 역할을 해주는 택배기사들…. 이런 ‘선의(善意)의 연대’가 우리의 희망이다. 그리고 언젠가 마음 편히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되는 날. 반드시 백서(白書)를 남겨 이 정부의 기막힌 무능을 기록하고 징비(懲毖·앞의 잘못을 징계해 뒤의 환란을 조심)해야 한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일본이었다면 어땠을까. 코로나19의 발원지이자 확산국이. 그래도 감염자가 폭증한 날,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이라고 했을까. 세계 각국이 일본에 문을 걸어 잠가도 기필코 일본인 입국을 막지 않았을까. 가정이 부질없다는 건 잘 안다. 그래도 문 대통령과 이 정부가 중국을 대하는 각별한(?) 태도가 코로나 재앙을 키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 시진핑 주석이 “중국은 계속 공개적이고 투명한 태도로 한국과 소통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언사를 하는 것 아닌가. 중국이 코로나 대처에 공개적이고 투명하지 않았다는 건 세계가 다 안다. 코로나 사태가 중국인 혐오로 번지는 건 결단코 반대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자국민 보호는 다른 문제다. 한중(韓中) 정상 통화 후 중국은 발표하지도 않은 ‘시진핑 상반기 방한(訪韓)’을 기어코 못 박은 청와대의 중국 짝사랑이 향후 코로나 대응까지 영향을 미칠까 심히 걱정된다. 중국과 북한 정권에는 비굴할 정도로 수그리는 문재인 청와대는 시선을 국내로 돌리는 순간 고개를 뻣뻣이 쳐든다. 대북(對北)·대중(對中) 굴종외교를 비판받아도 대꾸조차 없다. 노무현 청와대는 비판 언론과 치열하게 논쟁하기라도 했다. 훨씬 오만하다. 자칫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는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해서도 대통령은 한마디 말이 없다. 이러니 ‘민주화 이후 가장 오만한 정권’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최근 미래통합당에 합류한 한 젊은이의 촌철(寸鐵)에 무릎을 치는 이가 많았다. 진보 진영 출신인 이 젊은이는 “보수 쪽에선 범죄가 드러났을 때 ‘우리가 철저하지 못해 들켰네’라는 느낌이라면, 진보는 ‘왜? 어때서? 우리가 좀 해먹으면 안 되냐?’는 태도다. 전자는 나쁜 놈이라고 욕할 수 있는데, 후자는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는 지경”이라고 했다. 아직도 조국이 뭘 잘못했냐며 ‘조국백서’를 내겠다는 사람들이 있질 않나, 그 사람을 공천하지 않으면 민주당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겁박하는 무리들이 있질 않나, 소위 집권당이라는 정당이 그 협박에 굴복해 전략공천 하겠다고 하질 않나…. ‘어이구 들켰네’ 하는 일말의 수오지심(羞惡之心)마저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러니 도덕과 양심, 상식의 기준이 무너질까 봐 무섭고, 아이들이 보고 배울까 봐 두렵다. 아니, 벌써 보고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한국의 진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두껍고 뻔뻔해졌을까. 우리는 조영래 김근태 등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양심적인 진보 지식인들을 기억한다. 진보 정권인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도 이렇지 않았다. 더구나 노무현은 회고록에서 “참여정부는 절반의 성공도 못했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실패와 좌절의 기억”이라고 토로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알았고, 그것이 비극적 선택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이유는 자명하다. 진정한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는 공산당 논리와 김일성 혈통을 신성(神聖)가족으로 여기는 주체사상, 홍위병을 앞세우고 학살을 자행한 마오쩌둥을 미화한 리영희류의 반미친중(反美親中) 세례를 흠뻑 받은 80년대 NL(민족해방) 운동권 좌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조건 옳다’는 무오류의 철갑을 두르고, 문재인-조국을 성역화하며, ‘문파 홍위병’이 날뛰는 행태의 연원(淵源)이 바로 거기에 있다. 문제는 이렇게 오만하고, 그래서 무능한 집권세력이 코로나 사태라는 초유의 시련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느냐다. 시중에는 벌써 이 사태를 특정 종교집단의 등장까지 엮어 박근혜 정권의 세월호 참사와 연결짓는 얘기가 돌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세월호든 메르스든 코로나든 재난의 발발 원인을 정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합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다만 세월호 참사 당일 박 전 대통령의 기민하지 못한 대응이 두고두고 논란을 부른 건 사실이다. 중국인 입국 여부를 둘러싼 문재인 정부의 초기 대응도 논란을 부를 조짐이나 그보다 중요한 건 향후 대처다. 문 정권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박근혜 정부 책임으로 몰아붙이던 때를 돌아보며 더 겸허해져야 한다. 오만의 장막을 열어젖히고 아집(我執)의 색안경을 벗어던져야 보다 유연하고 효과적인 대책으로 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그런 길로 간다면 국민도 힘을 모아줄 것이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황교안의 관상(觀相)은 정평이 나 있다.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허영만 화백의 만화 ‘꼴’의 감수자이자 작중 인물이었던 관상가 신기원이 극찬했을 정도다. 관상의 완성은 성(聲)인데 자유한국당 황 대표는 ‘목소리까지 갖춘 귀상(貴相)’이라는 것이다. 관상뿐이 아니다. 손금도 특이한 편이다. 가로로 한일자가 짙게 그어진 이른바 ‘막쥔 손금’이다. 두 손 다 그렇다. 본인도 한 손이 아니라 양손 모두 막쥔 손금은 드물다고 했다. 뜬금없이 웬 관상과 손금이냐고? 개인적으로는 관상이나 손금을 안 믿는 쪽이다. 다만 황 대표가 자신의 관상과 손금을 의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특출한 관상과 손금을 본인이 의식한다면 정체성 형성은 물론 정치를 하는 동인(動因)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관상과 손금 때문인 줄은 모르겠으나 관운(官運)은 타고난 듯하다.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에 이어 희귀한 대통령권한대행까지 해봤다. 무엇보다 황교안은 한국 정당사에서도 특이한 존재다. 꽃가마를 태운 영입 케이스가 아니라 제 발로 거대 정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 대표 자리까지 거머쥔 드문 경우다. 이 모든 게 갑자기 돌출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과 탄핵, 그 뒤 황폐해진 한국당의 내부 사정에 따른 것이나 그렇게 운때가 들어맞는 걸 세칭 ‘관운이 좋다’고도 한다. 단식만 해도 그렇다. 시작할 때는 “갑자기 웬 단식?” 소리를 들었지만 정치적 이벤트로서 성공을 거뒀다. 정치인의 단식에는 ‘불순물’이 끼기 십상이지만, 황 대표는 시쳇말로 ‘FM대로’ 8일을 해냈다. 이 단식으로 그는 박근혜 탄핵 이후 눈 가는 곳이라곤 없던 이 정당에서 황교안이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특히 한국당에 고질적으로 따라붙는 ‘웰빙’ 이미지를 자신에게서 떨어버리는 성과도 거뒀다. 일각에선 황 대표의 기독교 경도(傾倒)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갑작스럽게 단식에 돌입한 것도 그가 빼먹지 않는 새벽기도의 영향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반론도 나온다. 문재인 정권 들어서 집권 운동권 세력과 좌파 시민·사회·노동·문화단체, 아울러 소위 ‘문파’라는 극성 지지 세력이 사실상 조직적인 ‘좌파 공동체’를 구축한 터에 보수 쪽에서 그에 대항할 만한 조직력을 갖춘 곳이 기독교 말고 또 있느냐는 것. 어쨌거나 황 대표가 미래권력에 가까워진다면 그의 종교 문제 또한 검증과 국민적 판단 절차를 거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보수 통합이다. 보수 통합이 됐든, 앞으로 지붕을 더 넓혀 중도-보수 통합이 됐든 황교안이란 상수(常數)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게 작금의 정치 지형이다. 그럼에도 황 대표가 여태껏 보여준 행보는 실망스럽다. 통합의 대의(大義)에 저항하는 당내 보신주의 세력에 때로 휘둘렸으며 답이 나와 있는 종로 지역구 출마를 두고도 머뭇거렸다. 이낙연이라는 여권의 우두머리 장수가 싸움을 걸어온 마당에 다른 지역구로 가거나 불출마를 선택했다면 어떤 말로 분식(粉飾)을 해도 ‘등 돌린 장수’ 소리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장수가 나라의 명운(命運)이 걸린 4·15총선의 야당 사령관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명분 없는 일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상황은 제1야당 지도자가 자신의 안위를 따지며 계산기를 두드릴 정도로 한가롭지 않다. 1000일도 지난 문재인 정권은 무슨 폐쇄회로에 갇힌 듯하다. △북한 공산정권은 선(善), 남한 보수정권은 악(惡) △중국은 선, 미국은 악 △노조는 선, 대기업은 악이라는 선악 이분법과 강남과 부동산은 악의 화신이라는 프레임에 빠져 다람쥐 쳇바퀴 같은 정책과 선동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무슨 짓을 해도, 심지어 실정법을 어겨도 무사할 거란 위험천만한 믿음에 빠졌다. 문 대통령부터 1000일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도 없고, 바꿀 생각도 없는 듯하다. 그러니 대통령 주변에는 무능한 코드맨 예스맨만 포진해 ‘우리는 선(善)이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우리가 하는 건 무조건 옳다’는 집단사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폐쇄회로에 갇힌 세력의 집권이 길어지면 자칫 나라마저 자폐될 우려가 있다. 이럴 땐 밖에서 누군가 정권의 닫힌 문을 열어젖히고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 절호의 기회가 바로 이번 총선이다. 종로 출마로 야당의 사령탑이자 선봉장으로 나선 황교안. 과연 자신의 몸을 던져 폐쇄정권의 자물쇠를 부술 용기와 희생을 보여줄 수 있는가.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검찰 개혁’이라고 말하지 말라. 정부가 하는 개혁은 그 목적이 국리(國利)와 민복(民福)에 있어야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검(檢)의 칼로 상대편을 찌를 땐 박수치더니, 제 편을 찌르니까 수족을 잘라버리고 ‘항명’ 운운하며 정당한 수사를 봉쇄하는 걸 개혁이라고 한다면 개혁의 정명(正名)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그런 건 ‘검찰 장악’이라고 해야 바른 이름이다. 공자는 정치란 정명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권은 검찰 개혁의 정명을 망가뜨리면서 반드시 필요한 검찰 개혁의 대의(大義)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현 정권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또 어떤 걸 ‘개혁’이라고 쓰고 ‘장악’이라고 읽을지,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정명이 틀어지면 매사가 틀어지는 법. 청와대가 윤석열 검찰총장의 수족을 내치면서 연출한 뒤틀린 상황극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울산시장 선거공작과 조국 전 법무장관 아들 허위 인턴증명서 발급 사건으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현 법무장관과 청와대 민정, 공직기강비서관이 인사를 주도한 것 자체가 기막힌 부조리극이다. 이번 인사가 여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막 나간 건 인사 담당자들이 수사 대상인 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더구나 조국 아들 허위 인턴 사건에 연루된 그 공직기강비서관은 조국의 장관직 검증까지 맡았으니 말 다했다. 또한 서울중앙지검장이 된 사람은 바로 그 중앙지검의 수사 대상이다. 지난해 9월 조국 장관 취임 직후 “윤석열 검찰총장을 배제한 조국 수사팀을 꾸리자”고 제안한 의혹이 드러나 시민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했기 때문이다. 수사 대상이 수사 주체를 인사하고, 수사 대상이 해당 수사기관의 장(長)이 되는 이 막장 드라마를 어떻게 봐야 할까. 지난해 말 선거법 강행처리로 가속페달을 밟은 현 정권의 폭주에 브레이크가 없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까지 강행처리한 정권은 새해 업무가 시작된 2일 아침 추미애 법무 임명도 강행한 데 이어 6일 만에 속전속결로 검찰 장악 인사까지 해치웠다. 정권의 사활이 걸린 총선이 임박한 터에 앞으로도 ‘형식적 눈치’조차 보지 않고 마구 밀어붙일 것이다. 행정권력을 장악한 데다 사법권력을 사실상 장악했으며 입법권력까지 듣도 보도 못한 ‘4+1 협의체’로 비틀어 거머쥔 권력은 거침이 없다. 이런 정권은 없었다. 과거 3권을 장악한 독재정권도 정통성 콤플렉스 때문에 국민의 눈치를 보고 여론의 동향에 촉각을 세웠다. 그 독재권력과 현대사의 숱한 굴곡을 헤치며 대한민국이 이만큼 온 데는 현명한 국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현 정권 독주의 기반이 그 국민이다. 정권이 무슨 일을 벌여도 절반에 가까운 국민이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며 지지할 거란 자신감. 그게 바로 동력(動力)이다. 언제부터 많은 우리 국민이 조국류의 비상식과 비도덕, 심지어 불법까지 용인하고 정권의 폭주에 눈을 감아버리게 됐을까. 가짜뉴스 범람으로 판단 기준이 흐려진 데다 유시민류 선동가들의 궤변, 정권이 앞장서 계층 갈등을 불 지른 ‘편 가르기’에 속절없이 넘어간 걸까. 분명한 건 있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독재라는 점이다. 그리고 정치권력에 의한 독재보다 위험한 것이 포퓰리즘 독재다. 정치권력에 의한 독재는 국민이 현명하면 이겨낼 수 있다. 우리 역사가 이를 웅변한다. 그런데 포퓰리즘 독재는 달콤한 독(毒)과 같아서 한번 중독되면 헤어나기 어려운 늪이다. 한때 잘나갔다가 포퓰리즘 독재로 몰락한 남미 국가들을 보라. 4·15총선이야말로 대한민국이 포퓰리즘 독재의 길로 가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기로(岐路)가 될 것이다. 이 역사적 선택을 앞두고 그렇지 않아도 사분오열인 중도·보수세력이 소리(小利)를 앞세워 통합에 재를 뿌린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특히 민주화 이후 정당 사상 최악의 공천으로 무더기 금배지를 단 자유한국당 내 친박(親朴) 세력이 탄핵을 사상검증 잣대 삼아 통합의 걸림돌이 된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앞세워 호가호위(狐假虎威)하다가 정권을 말아먹고 폐족(廢族)이 돼야 마땅한 사람들이 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숨통이 트였다고 준동해선 안 된다. 전 정권 때 박 전 대통령과 친박의 일방독주가 그랬듯, 포퓰리즘 독재로 치닫는 문 대통령과 친문(親文)의 질주를 막아내야 하는 것도 결국 우리 국민의 몫이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내일이 지나면 경자년(庚子年)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이맘때면 습관적으로 ‘희망찬 새해’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마음이 무겁다. 과연 새해에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헤아려 보니, 오늘이 문재인 정권 출범 965일째 되는 날이다. 무려 10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정권은 무섭도록 집요하게 ‘대한민국 교체’를 기도(企圖)해 왔다. 입법 사법 행정 3권, 그중에서도 특히 권력기관 세력 교체에 골몰했으며 시민·사회·노동 단체를 바꿔 정권 옹위세력으로 만들고 있다.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뒤흔들고, 무엇보다 70년 동안 대한민국 안보의 보루였던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남북군사협력과 북-중-러 체제 편입으로 대체하려 한다. 기존 체제를 갈아엎어 새로운 체제로 교체한다는 측면에서 문재인은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2017년 5월 10일 취임한 문 대통령의 첫 외부일정은 12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방문. 그 일성(一聲)은 “임기 내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난 뒤, 민노총은 한국노총을 누르고 제1노총이 됐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에 따라 정규직이 된 비정규직 출신들이 대거 민노총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공권력이 민노총의 불법 과격시위에 눈을 감으면서 ‘민노총 세상’이 되자 세(勢)가 급속히 불어난 탓도 크다. 김영삼 정부 때 설립된 민노총이 한국노총보다 커진 건 이번 정부 들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집권과정에서 신세를 진 민노총에 가장 확실한 보은(報恩)을 한 셈이다. 노동권력 교체에서 보듯, 이런 식으로 2019년 말까지 ‘대한민국 교체’가 착착 진행돼왔다. ‘적폐청산’의 미명 아래 이루어진 행정권력의 교체는 그 서곡(序曲)이었다. 사법권력 교체는 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다. 문 대통령은 이미 대법원장과 대법관 9명을 임명했으며 남은 임기에 4명을 추가로 임명하게 된다. 합법적으로 14명 가운데 13명을 임명하게 되는 것이다. 전임 박근혜 대통령이 중도 하야하는 바람에 임기가 짧아진 탓이 크지만, 박 전 대통령은 4년 2개월여 임기 동안 5명의 대법관을 임명했을 뿐이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다. 재판관 9명 중 8명이 현 정권에서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묘사하고 악의적으로 왜곡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가 위법하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한 대법원 판결은 이런 사법권력 교체의 흐름 속에 나온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권력 교체의 ‘엔드(End) 게임’이 남아 있다. 입법권력 교체다. ‘4+1’ 협의체라는 ‘듣보잡’ 야합기구까지 만들어 국회의원 선거의 룰을 강행처리한 것은 그 마지막 게임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아빠 찬스’에 급급했던, 격(格) 떨어지는 국회의장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스포츠 게임에 비유하자면 경기진행요원(행정부)을 바꾸고 심판(사법부)을 바꾼 뒤 경기의 룰까지 바꾼 셈이다. 극렬한 응원단(민노총·문빠)까지 우군인 데다 불공정 게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감독관(검찰)을 옥죄다 못해 더 센 상위감독관(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까지 만들려는 형국이다. 한마디로 좌파 불패(不敗)의 그라운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중심을 잡아야 할 관중(국민)마저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확연히 둘로 쪼개졌다. 애초부터 국민통합이라고는 안중에 없던 좌파 집권세력의 편 가르기 정치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지향점은 오직 하나, 좌파의 장기집권이다. 그래야 대한민국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바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버리기만 한다면 불행 중 다행일 수도 있겠다.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의 안전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경자년 새해에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희망은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냐’는, 양식 있는 국민의 손에 달렸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 혹은 생각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보다 따뜻하고 안전한 새해가 되길 빈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오늘로부터 딱 4개월 뒤, 21대 총선 결과가 드러날 것이다. 내년 4월 16일 아침, 우리는 어떤 대한민국을 맞을 건가. 아직도 선거의 룰을 두고 지지고 볶고 있지만, 내일부터 예비후보자 등록이 시작되면 정국은 빠르게 총선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이번 총선 결과에 문재인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는 물론 이후 정권의 향방, 2022년 대통령 선거의 향배(向背)까지 걸렸다. 대한민국의 명운(命運)이 걸린, 말 그대로 ‘정초(定礎) 선거’다. 문재인 정권 출범 2년 7개월여, 우리는 나라의 근간(根幹)이자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목도한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국가원로는 “박정희 때부터 수많은 정권을 겪었지만 이런 정권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오랜 기간 역대 정부에 몸담았던 그는 문재인 정권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안전을 뒤흔들며 나라를 위험한 곳으로 끌고 간다고 우려했다. 단적으로, 집권 운동권세력은 대놓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을 표출해 왔다. 교과서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오죽하면 조국이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자”라고 당당하게 말했겠는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도 민주주의가 남으니 괜찮겠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상식으로 아는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민주주의는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다원주의(多元主義)의 바탕 위에 대의제(代議制)를 통해 구현된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도 다원주의와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한다. 그런데 집권세력은 민주주의의 기반인 다원주의를 사실상 부정한다. ‘우리만 옳다’는 서푼짜리 선민의식에 빠져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엔 민간인 사찰 DNA가 없다”는 둥 절대선(善)을 입에 올리곤 한다. 절대선을 입에 올리는 세력이야말로 위험하고 과격한 정치를 자행했음은 고금의 역사가 증명한다. 이 정권이 직접민주주의를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쓰는 것부터 진정한 민주주의를 할 생각이 없음을 드러낸다. 과도한 직접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을 창궐시켜 나라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 대통령 자신부터 촛불시위 이후 분출하는 직접민주주의를 방치, 아니 조장함으로써 우리 헌법의 근간인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만든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사석에서 “청와대와 엇나가는 소리를 했다가는 문빠들에게 ‘좌표’ 찍힐까봐 숨도 못 쉴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다원주의를 부정하고 직접민주주의가 판치는 토양에서 진영논리가 팽배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는 진영논리의 우산 아래선 실력이라곤 없고, 도저히 국정을 맡을 감이 안 되는 인사들도 안전하고 편안하다. 진영논리에 함몰되면 비상식과 비도덕, 심지어 범죄까지도 용인되는 비정상의 일상화를 우리는 조국 사태를 통해 충분히 목도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얼굴마담인 조국이 손으로 머리를 빗어 올리며 ‘검찰개혁’을 말할 때 이 정권의 ‘진짜 실세’들은 텔레그램 대화방까지 만들어 인사(人事)를 농단하고, 대통령 측근을 당선시키기 위해 독재 시대에나 벌였던 선거 공작까지 자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자신들이 옳다고 ‘착각’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합리화하는 80년대 운동권 논리에 푹 절어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그른 게 아닐까. 진보좌파 이론가 최장집은 최근 “현 진보세력의 직접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비슷하다”고 갈파했다.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를 부정하면 직접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로 이어져 전체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현 정권의 경제정책이 사실상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국가가 민간의 경제활동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국가주의, 정부만능주의 경향을 띠는 것도 결국 전체주의로 가는 길목일 것이다. 하여, 자유민주주의 ‘자유’란 두 글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문재인 정권이 확 달라지지 않는 한 4개월 뒤 총선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본다. 내년 4월 16일 아침, 우리는 어떤 대한민국을 맞을 건가.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때론 문재인 대통령이 안됐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순 없다. 특히 내정(內政)과는 달리 상대국이 있는 외교안보 문제에선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되거나,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외교안보 참모의 역할이다. 불행하게도 문 대통령 주변에는 눈을 씻고 봐도 그런 참모가 보이지 않는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정책의 대표적인 전례(前例)로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동북아균형자론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건데, 그럴 힘이나 실력이 없으니 사실상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노 전 대통령에게는 직을 걸고 간언하는 외교안보 참모들이 있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 평택 주한미군·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그 고언(苦言)을 수용한 노무현의 외교적 성과다. 물론 문 대통령 주변이 예스맨들로 둘러싸인 가장 큰 책임은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 있다. 국가의 안위(安危)가 걸린 한미 동맹과 북핵(北核), 동북아 외교의 베테랑들을 배제한 채 말 잘 듣고, 쉬워 보이는 비전문가들을 외교안보 핵심으로 중용(重用)한 탓이다. 그 결과 집권 전반기에 ‘외교적 사고(事故)’ 수준의 실책을 여기저기 내질러 놓았다. 이제 집권 후반기, 그 청구서가 날아올 시간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조건부 연장을 둘러싼 국격(國格) 추락은 그 시작일 뿐이다. 지소미아 소동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일본 아베 정권이 뜬금없이 경제보복의 칼을 빼든 데서 비롯됐다고 본다면 아주 좁게 보는 것이다. 그 아래 한일 두 나라 간의 오랜 불신, 특히 정권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깔아뭉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아베 정권의 깊은 불신이 깔려 있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아무리 부실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국가 간 합의를 그렇게 천덕꾸러기 취급하진 말았어야 했다.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이후 한일 양국이 보인 공치사(功致辭) 경쟁은 더 가관이었다. 일본에서 ‘퍼펙트게임’ 소리가 나온 것도 한심했지만, 차라리 그런 일본에 “국내 정치 때문에 그러는 걸 이해한다”고 여유 있게 받아넘겼으면 어땠을까. 하기야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보복을 한답시고 느닷없이 지소미아 종료를 갖다 붙인 게 우리 외교안보팀의 실력이다. 지소미아는 한일 군사정보 교류의 측면에서 보면 아직은 큰 의미가 없다. 미국의 아시아 양대 동맹인 한미, 미일 동맹을 묶어주는 연결고리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한미일 삼각 체제로 북-중-러 체제에 대응하려는 미국 세계전략의 일환이다. 거칠게 말하면 지소미아는 대일(對日) 문제라기보다는 대미(對美) 문제다. 그것도 모르고 대일 보복 카드로 꺼내들었으니 미국이 열 받은 것도 당연하다. 이런데도 문 대통령은 현 외교안보팀을 문책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문책이 곧 외교안보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인가. 아무리 아큐(阿Q) 식 ‘정신 승리’를 외쳐봤자 외교안보 정책 실패의 후폭풍이 몰아닥칠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당장 우리 안보의 안방 문을 열어준 9·19 남북 군사합의가 발등의 불이지만, 가장 우려되는 건 70년 혈맹(血盟) 미국을 이탈해 중국에 붙으려는 움직임이다. 모레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한국에 온다. 주한 대사라는 사람도 ‘후과(後果)’ 운운하며 사실상 한국을 협박하는 판이니, 왕이가 얼마나 위세를 떨지는 안 봐도 훤하다. 게다가 그가 5일 만나는 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주중 대사 시절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천자를 향한 충성’으로 해석될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문구를 남긴 사람 아닌가. 그런 중국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을 달랜답시고 ‘3불(사드 추가 배치 불가, 美 미사일방어체계 불참, 한미일 삼각동맹 불가) 약속을 해준 것은 문재인 외교의 최대 패착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사실상 안보주권의 포기이자 갈수록 미중(美中) 각축이 치열해질 동북아에서 우리의 발을 묶은 족쇄요, 한미 동맹을 갉아먹을 독소조항이다. 이런 식의 자해적 외교안보 정책이 지속되는 한 그 터널의 끝에선 주한미군 철수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문 정권 후반기에 그런 ‘둠스데이(doomsday·운명의 날)’가 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언제부턴가 ‘박근혜 사면=보수 분열’이란 등식이 정치권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석방된 박 전 대통령이 목소리를 내는 순간, 보수 세력은 찬탄(贊탄핵)과 반탄(反탄핵) 진영으로 쪼개진다는 것. 이에 따라 박근혜 사면(형 확정 시) 또는 형 집행정지가 다섯 달도 안 남은 총선에서 여권에는 필승카드로, 보수 야권에는 최대 악재(惡材)로 작용할 거란 얘기다. 그래서인지 자유한국당에서도 박근혜 사면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미약하다.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는 물론이고 친박(친박근혜)들조차 공개적으로 박근혜 석방을 말하길 꺼리는 분위기다. 황 대표는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보석으로 풀려났을 때와 그 다음 달에 여성인 박 전 대통령의 건강을 우려하며 ‘국민의 의견과 바람’을 빗대 우회적으로 석방을 요구한 바 있다. 전직 대통령의 사면 문제를 총선 유불리 카드로 보는 대한민국 정치권의 담론 수준이 참으로 실망스럽다. 더구나 박 전 대통령이 몸담았고, 개중에 적지 않은 사람이 박근혜 간판으로 금배지를 단 한국당마저 그의 석방을 입에 담길 주저하는 작태에 절망감마저 느낀다. 이러고도 제1야당인가. 물론 박근혜 탄핵이 잘못됐다는 얘기는 아니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위임한 대통령 권력을 사유화하고 사인(私人)에게 넘겨서 국민의 신임을 배신한 행위는 탄핵받아 마땅했다. 그에 따라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르는 것도 불가피했다고 본다. 더러는 박근혜 탄핵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했고, 그 결과 불과 2년 반 만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황당한 나라가 펼쳐졌다고도 한다. 하지만 돌아보라. 문 대통령은 국정농단과 탄핵 사태가 터지기 훨씬 전인 2016년 하반기부터 선거일까지 출마 후보 가운데 부동의 1위였다. 박근혜 탄핵이 문재인 집권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을 순 있어도 문 대통령이 박근혜 탄핵 때문에 집권했다고 보는 건 단견(短見)이다. 따라서 박근혜 탄핵이 부당했기에 석방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박근혜 석방은 총선 카드와 같은 정치공학으로 접근할 문제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격(國格)과 수준의 문제다. 굳이 한국 대통령의 비극사를 주워섬기지 않더라도 선진국 또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 가운데 전직 대통령이 2명이나 구속돼 재판을 받는 나라가 있을 리 없다. 더욱이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3월 31일 국정농단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뒤 올해 9월 16일 외부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2년 반가량이나 감옥에 있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하고 천문학적 비자금을 챙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2년 남짓보다 훨씬 긴 수형(受刑)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어깨 수술과 재활 과정이 끝나면 다시 구치소로 돌아가야 할 처지다. 67세 여성 전직 대통령을 얼마나 더 감옥에 두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무엇보다 박근혜가 감옥에 있는 한 대한민국 정치는 과거에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다. 내우(內憂)와 외환(外患), 안보와 경제 위기가 겹친 이 엄혹한 시기에 국격과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털고 미래로 갈 때가 됐다. 그러기에 한국당의 황 대표부터 본격적으로 박근혜 석방을 말해야 한다. 청와대가 박근혜 석방을 총선 카드로 쓸지, 말지 눈치를 보는 듯한 태도로는 여권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황 대표가 먼저 박근혜 석방의 기치를 높이 든다면 여권의 총선 카드로서의 효용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가 주장하는 보수 통합도 박근혜 문제를 피하고서는 온전한 합의를 이룰 수 없다. 먼저 박근혜 석방론이라는 끈으로 묶어서 연대하고 다가온 총선에 임할 필요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석방되면 그의 성격상 탄핵과 수감의 한풀이를 통해 보수 세력을 분열시킬 거란 관측도 많다. 과연 그럴까. 소위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근혜가 자칫 좌파 장기집권의 초석을 깔아줄지 모를 중차대한 총선을 앞두고 보수 필패(必敗)의 길로 갈까. 박 전 대통령도 ‘보수 분열의 원흉’으로 역사에 남으려 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만에 하나, 박근혜가 그릇된 선택을 하려 한다면 지금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심히 우려하는 대다수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공무원은 국민을 위한 봉사자라고 법에 정의돼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위에서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된 이유가, 그런 정의나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 펴낸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무원의 영혼이 실종된 이유가 우리 사회에서 정의나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두 달여 동안 나라를 뒤집어 놓은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검찰이란 공무원 조직의 영혼을 탈탈 털어버리려는 권력의 기도(企圖)를. 그 권력에 굴종하는 순간, 영혼이 증발하는 건 시간문제다. 검찰이나 되니까 그 정도 버텼지, 일반 공무원 같으면 권력의 바람이 불기 전에 풀잎처럼 눕는다. 그 선연(鮮然)한 실례를 우리는 문재인 정권 초반 적폐청산의 광풍(狂風)에서 봤다. 공무원의 영혼 없음을 개탄하면서 영혼 없는 공무원을 양산한 것이 누군가. 문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서 정의나 가치가 실종됐음을 안타깝게 여겼다면 애초부터 정의나 가치와는 담을 쌓은 사람을 ‘정의부(Ministry of Justice·법무부) 장관’ 자리에 기어코 앉히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통령의 임명 강행으로 정의와 가치 기준이 흔들리자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이 생전 나와 보지 않던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조적조(조국의 적은 조국)’ ‘조만대장경’이란 말이 있듯, 문 대통령도 대선 기간이나 취임사에서 쏟아낸 ‘공약(空約)’에 발목이 잡히고 있다. 선거운동 때인 2017년 2월 한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서는 “(대통령이 된 뒤) 만약 문재인 하야 시위가 일어난다면 광화문 광장에 나가겠다. 끝장토론이라도 하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문재인 하야’ 소리가 광장을 쩌렁쩌렁 울린 광화문 시위 때 그렇게 했던가. 애당초 지키기 어려운 약속임을 알지만, 적어도 그런 말을 했다면 광장에는 못 나와도 언론 등을 통해서라도 설득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대신 문 대통령은 이 말만은 분명히 지켰다. 대담집에서 “저하고 생각이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정말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대로 민심의 소리에 철저한 외면으로 일관했다. 그건 자랑할 성품도 아니고, 대통령이 돼서는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다. 아직도 비정상과 비상식을 정상과 상식으로 돌려놓으라는 국민 다수의 목소리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여기는지. 특정 세력이 아니라 절반이 넘는 국민과 소통의 문을 잠그려는 대통령의 미래….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다. 문 대통령은 같은 책에서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국민 편 가르기였다”고도 했다. 집권 2년 반을 돌아보면 기막힐 지경이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때 국민들이 이렇게 홍해 갈라지듯 좍 갈라져 심리적 내전(內戰) 상황까지 치달은 적이 있었나. 조국 사태건, 뭐건 내 탓보다는 남 탓으로 편 가르기를 하는 ‘문재인식 통치 방식’은 특히, 권력의 악력(握力)이 약해지는 집권 후반기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거센 역풍으로 돌아올 것이다. 문 대통령 집권 이후 돌이켜보고 싶지도 않은 복수혈전에 나라 전체가 빠져들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광화문과 서초동의 시위는 잦아들겠지만 마음속의 광화문, 가슴속의 서초동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 깊은 상흔(傷痕)을 남길 것이다. 가까웠던 사람들끼리 말을 꺼리고, 얼굴을 붉히며, 끝내 건널 수 없는 골을 파는 것이 문재인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인가. 극성 친문(親文)들에게 ‘좌표’라도 찍힐까 봐 말 한마디도 조심하게 되는 ‘심리적 독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단한 세상이다. 수의(囚衣)를 입은 두 명의 대통령에 이어 현직 대통령마저 외곬으로 치닫고 있으니, 참 대통령 복은 없는 국민들이란 생각마저 든다. 아직 남은 시간이 더 긴 만큼 문 대통령이 바뀌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어쩐지 희망고문이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대통령이 안 바뀌면 국민이라도 바뀌어야 한다. 차가운 머리로 5년 정권이 엇나가지 않도록 감시하되, 따뜻한 가슴으로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하지 않으며, 뜨거운 심장으로 필요할 땐 행동에 나서는 국민으로. 그래야 이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검찰 개혁? 당연히 해야 한다. 무려 4명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현 정권의 적폐청산 수사가 이를 웅변한다. 검찰 수사를 받다가 그렇게 참혹한 일이 벌어진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다. 도대체 한 인간이 어떤 정도의 모멸과 상실, 추락을 경험해야 그 막다른 선택을 할까. 사람마다 경우가 다르겠지만, 검찰 주변과 변호사 업계에 따르면 본인보다 가족을 건드리는 경우 그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는 것이다. 특히 피의자 자신의 혐의와 관련 없는 별건수사 등을 자행해 자식의 장래를 위협할 때가 위험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은 참으로 특이한 존재다. 검찰 개혁이 아니라 국가를 개조할 권력을 준다고 해도 가족에게 화가 미치거나, 무엇보다 내 자식의 장래에 재를 뿌린다면 거절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이자 가장(家長)의 모습이 아닐까. 그럼에도 조 장관은 법원의 확정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물러날 뜻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족사가 까발려지길 원하는가. 과연 조국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조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는 별건수사가 아니다. 청문회에 임하는 장관 후보의 도덕성 검증을 위해 가족의 부정·비리 의혹을 파헤치는 건 언론의 의무다. 검찰은 언론에서 제기한 의혹에 따라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을 때만이라도 조 장관이 사퇴했다면 국민들이 조국 가족의 막장 드라마를 시청하는 불편한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부터 법무장관이라는 달콤한 독(毒)사과를 베어 물지 않았다면 가족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의 장관 임명을 강행하지만 않았어도 조국은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을 거다. 모레가 조국을 장관 자리에 앉힌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이다. 이 한 달 가까이 우리는 정상적인 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국정 파행과 국론 분열의 기현상을 겪고 있다. 이른바 ‘조국 수호’를 위한 분식(粉飾)과 궤변이 일상화하고,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려 ‘광장의 내전(內戰)’을 치르는 세상. 시쳇말로 이건 나라도, 뭣도 아니다. 그래도 기어코 조국 장관을 끌고 가려는 대통령은 대체 무엇을 바라는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조국 내전’의 한쪽 진영 야전사령관이 되려는가. 이 심리적 내전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도덕과 상식이 무너지고,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며, 내로남불과 특권이 판치는 세상으로 가는 금단의 문을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국정(國政)을 망친 것보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무너뜨린 데 더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대통령의 잘못이 실정(失政) 수준이었다면 민심의 분노가 이렇게 거세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알던 대한민국이 아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암담함에 그 겨울 촛불시위 때도 나오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거리로 나오는 것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이럴 때인가. 일본에서는 TV 방송들이 연일 ‘양파남(男)’ 스토리를 생중계하다시피 한다. 일본에서 조 장관은 양파남으로 통한다. 까도 까도 의혹이 나온다는 뜻이다. 기분이 좋지 않다. 우리의 치부(恥部)가 다른 나라까지 알려지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연일 방송을 탈 정도로 일본인들이 이번 사태에 흥미를 느낀다는 점이 불편하기도 하다. 한 지한파 일본인은 “문재인 정권 들어서 내가 좋아하는 한국이 망국의 길로 가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한국 사정에 밝은 그가 조국 사태뿐 아니라, 현 정권의 외교·안보·경제 정책 등을 포괄해서 한 말이다. 그는 한일관계를 그르치고,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아베 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런 사람이 한국의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망국? 먼 나라,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경제는 동력(動力)을 잃었지만, 집권세력은 무능하다. 지도층의 내로남불이 횡행하면서 사회의 공정과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무엇보다 안보가 뿌리부터 흔들리는데 국민마저 극도로 분열하고 있다. 임기 절반도 안 돼 이런 나라를 펼치고도 방향 바꿀 생각이 없는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과연 문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자고나면 쏟아지는 조국 의혹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조국 법무부 장관은 언(言)과 행(行)이 유난히 따로 노는 특이한 성격인 데다 거짓은 거짓을 낳는 법이니까. 문재인 대통령의 장관 임명 강행도 내 예상대로였다. 장관 지명부터 임명까지 한 달 동안이나 나라가 어지러울 정도로 숱한 의혹과 비판 여론이 쏟아졌지만, 한번 정한 길로 가고야 마는 대통령의 불통 스타일을 아니까. 예상은 했지만 막상 임명 소식을 들으니 허탈하고 맥이 빠졌다. 한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조국의 장관 지명에 분노했던 많은 국민은 그런 사람을 기어코 임명한 대통령의 결정에 가슴 답답한 절망감을 느꼈다. 조국이 장관 후보자일 때는 아무리 의혹이 주렁주렁 달렸어도 개인적 일탈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장관 자리에 앉는 나라에 살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그가 장관이 되는 순간, 조국 문제는 정치의 영역을 벗어나 상식과 도덕의 영역으로 번진 것이다. 이 지경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이 조국 수사에 착수했을 때 지명을 철회했어야 했다. 검찰 수사가 ‘살아있는 권력’에 정면으로 칼을 들이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 대통령에게 지명 철회의 명분을 줘서 정치적 퇴로를 열어주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쯤 되면 지명을 철회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상식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문 대통령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민심 이탈을 불렀다. 조 장관 딸의 입시 부정 의혹에 남 얘기하듯 ‘대입제도 개선’을 말하는 대통령 때문에 숨이 턱 막힌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령 술 먹을 때마다 사고 치는 주폭(酒暴) 때문에 분노하는 이웃들에게 ‘다른 나라에 비해 술을 너무 쉽게 살 수 있는 우리나라 제도가 잘못됐다’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 기분이 어떨까. 문 대통령이 추석 메시지에서 “공정한 사회가 서로에게 믿음을 주며… 국민 모두에게 공평한 나라를 소망한다”고 한 것도 역효과를 낸 건 마찬가지다. 작금의 민심 이탈은 차고 넘치기 직전이다. ‘문 정권이 싫다’를 넘어서 한국이 싫다, 인간이 싫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런 나라에 세금 내기는 더더욱 싫다는 소리도 들린다. 국민이 국가와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해리(解離) 현상이다. 대통령이 현 상황을 위중하게 보지 않고 넘기려 한다면 더 큰 노도(怒濤)에 직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은 아주 위험한 함정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임기 중반 한국 대통령들이 곧잘 빠졌던 함정, 바로 권력 사유화다. 임기 초 권력을 조심스럽게 다뤘던 대통령도 임기 중반에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위임한 권력을 내 물건인 양 착각하곤 한다. 전임 대통령이 그 함정에 빠졌다. 권력을 내 물건처럼 사인(私人)에게 나눠줬다가 국민의 신임을 배신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민심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르며 조국 임명을 강행한 데서 그 불길한 그림자가 비친다. 대통령의 인사권이란 것도 아무렇게나 행사해도 되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아니다. 인사권 행사도 헌법정신에 부합하고 민의(民意)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 헌법 전문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와 기회의 균등,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완수를 규정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며, 남의 기회 빼앗기를 일삼고, 책임은 지지 않고 특권을 누린 사람을 법치의 보루인 장관 자리에 앉히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더 위험한 전조(前兆)는 외교안보 정책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한 나라의 외교 정책은 5년짜리 대통령이 멋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면허 운전자들을 중용해 역주행과 갈지자 운전을 한 결과는 참혹하다. 70년 안보의 둑인 한미동맹은 금이 쩍쩍 벌어져 위태롭기 짝이 없다. 윈윈 경제였던 한일관계도 무너졌다. 중국과는 과거의 조공(朝貢)관계로 회귀하는 느낌마저 준다. 북한에는 굴욕외교로 일관해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더니, 어느새 국민들은 북의 인질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처지가 됐다. 전임 정권에서 권력 사유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 사건 때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 3년 차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그때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은 국민에게 위임받은 것임을 깨닫고 겸허하게 처신했다면 오늘날 그렇게 비극적 운명을 맞았을까. 문 대통령은 조국 사태가 뿜어내는 권력 사유화의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경계하며 부디 자중하길 바란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