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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대형 서점에 밀려 힘겨워하던 지역 동네책방들이 출판기업 온라인 플랫폼과 손잡고 새로운 상생을 꿈꾼다. 1990년대 온라인서점이 등장한 뒤 서점가는 대형서점 중심으로 개편된 지 오래다. 이로 인해 큰 자본이나 유통망 없는 중소 규모 동네책방들은 줄곧 역경을 겪어왔다. 최근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2003년 3589곳이던 국내 지역서점은 2021년 2528곳으로 약 30%나 줄어들었다. 지역사회의 동네책방 활성화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른 지금, 한 출판유통기업이 중소형 서점들과 상생을 도모하는 온라인서점을 만들어 눈길을 끈다. 출판도매유통사업의 절대강자인 웅진북센이 올해 1월 지역서점과 연계한 플랫폼 ‘바로보네’를 출범한 것. 관련 업계에선 바로보네가 미국에서 동네서점과 힘을 합쳐 아마존 대항마로 떠오른 ‘북숍’의 한국식 모델로 성장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도서 판매 수익의 최대 100%를 지역서점으로 웅진북센이 바로보네를 론칭한 건 누구보다 지역서점의 위기를 체감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국내 서점 2000여 곳과 거래하며 시장점유율이 약 70%(2021년 기준)에 이르는 웅진북센은 동네책방의 몰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웅진북센 관계자는 “최근 지역서점들이 ‘우리도 온라인 사이트가 절실한데 매장 운영조차 버겁다’는 토로를 많이 했다”며 “지역서점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진다는 마음으로 바로보네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전국 145개 중소형 서점이 참여한 바로보네는 수익 배분부터 남다르다. 현장에서 지역서점을 통해 회원으로 가입한 소비자가 온라인으로 결제한 뒤 매장에서 책을 받으면 수익의 100%(결제수수료 및 적립금 제외)를 해당 서점이 갖는다. 집에서 배송받아도 50%는 서점에 돌아간다. 게다가 바로보네 홈페이지에서 가입한 회원이 책을 매장에서 수령해도 수익의 절반을 지급하기로 했다. 서점 입장에선 바로보네를 통해 홍보 효과도 누릴 수 있다. 홈페이지와 앱을 통해 지역서점들을 알리고 영업시간이나 연락처, 위치 등의 정보도 제공한다. 바로보네 관계자는 “매달 입점한 서점 가운데 ‘이달의 서점’을 선정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며 “어떤 추가 투자도 없이 온라인서점을 무료로 운영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전했다. 출범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소비자 반응은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로보네 회원으로 현재 4660명이 가입했는데, 2375명(약 51%)이 지역서점을 통해 등록했다. 고객 입장에서도 바로보네는 매력적인 요소가 상당하다. 책 가격과 관계없이 무료로 배송해주는 데다, 지역서점이 보유하지 않은 책도 바로보네를 통해 주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 안양시에서 ‘평촌문고’를 운영하는 김경진 대표(61)는 “바로보네 얘기를 듣고 무조건 찬성했다. 서점으로선 온라인서점을 따로 내주는 것과 같아 마다할 이유가 없다”며 “웅진북센은 대형 물류유통망도 가지고 있어 바로보네의 전망이 매우 밝다고 본다”고 말했다.열악한 지방·독립서점들이 더 반색…종합 서점문화 플랫폼으로론칭 이전에 바로보네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시장조사 당시 몇몇 서점은 “대기업에 이용당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한다. 바로보네 측은 “이정훈 대표가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실무자들과 함께 직접 서점을 돌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 오해를 풀어 나갔다”고 전했다. 오픈 직후부터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특히 지방에 있는 서점들과 소규모 독립서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현재 가입 현황을 보면 서울은 33곳이고, 나머지 지역이 112곳으로 훨씬 많다. 제주와 강원도 각각 4곳, 3곳에 이른다. 유형별로 보면 독립서점이 70곳으로 48.3%에 이른다. 바로보네 측은 “기획 초기엔 여건상 수도권 중대형 서점 위주로 진행을 계획했으나, 열악한 상황의 지방·독립서점들이 더 큰 성원을 보내줬다”고 귀띔했다. 시장 반응이 긍정적인 만큼 바로보네도 지역서점을 위한 중장기적인 마케팅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내년까지 서점 큐레이션 등 지역서점 커뮤니티를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2024년까지 실시간 재고 연동 시스템도 구축하려 한다. 이정훈 대표는 “향후 3년 안에 고객이 주문 뒤 1시간 내에 서점 픽업이 가능하고 4시간 이내로 배송받는 서비스를 마련할 계획”이라며 “바로보네가 지역서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다양한 소식도 제공하는 종합적인 서점문화 플랫폼으로 커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류의 또 다른 열풍, 이제는 ‘K안마의자’ 시대다.” 국내에서 안마의자의 대표로 자리 잡은 ‘바디프랜드’(대표이사 지성규 김흥석)가 적극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해외에서도 글로벌 가정건강제품(홈 헬스케어)의 선두주자로 우뚝 서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프로스트 앤드 설리번’은 “바디프랜드가 세계 안마의자 시장에서 2020년 상반기 매출액 기준 7.5%의 점유율을 차지해 세계 1위에 올라섰다”고 최근 밝혔다. 지금껏 안마의자 종주국으로 불렸던 일본 파나소닉(2위)과 이나다패밀리(3위)를 앞지른 놀라운 성과다. 바디프랜드는 이를 바탕으로 2년 연속 ‘세계 일류 상품 및 생산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 일류 상품 및 생산기업은 수출 활성화에 기여한 상품과 생산기업을 산업통상자원부가 선정하고 KOTRA가 인증하는 제도. 세계시장 규모가 5000만 달러 이상인 품목에서 시장 점유율이 5% 이상으로 5위 이내에 들어야만 자격이 주어진다. 해당 업계에선 바디프랜드가 글로벌 무대에서 인정받은 배경으로 차별화된 연구개발(R&D) 투자를 주요인으로 꼽는다. 특히 바디프랜드 ‘헬스케어메디컬R&D센터’는 전문의를 포함한 연구 인력들이 건강관리와 관련된 기술력 제고에 적극 매진하고 있다. 바디프랜드 측은 “지난해 전체 매출액 대비 4.8%에 이르는 249억 원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했다”며 “최근 5년 동안 소비가 위축되고 가전시장 매출이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약 1000억 원을 R&D에 쏟아부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 앤드 마케츠에 따르면 세계 안마의자 시장 규모는 2021년 33억 달러에서 2027년 46억 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바디프랜드는 이에 발맞춰 ‘의료기기 안마의자’로 세계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겠다는 포부다. 실제로 2021년 선보인 뒤 국내 누적 매출액 3500억 원을 기록한 ‘팬텀 메디컬 케어’는 최근 미국식품의약국(FDA) 등록을 마쳐 현지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바디프랜드 측은 “올 4월에 허리디스크 치료도 받을 수 있는 ‘메디컬팬텀’도 새로 출시했다”며 “현재 전체 매출의 30% 수준인 의료기기 제품의 비중을 올해 50%까지 늘려 글로벌 홈 헬스케어로 입지를 다지겠다”고 전했다. 바디프랜드는 이런 성과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세계인의 건강수명 10년 연장’이란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서겠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바디프랜드 관계자는 “올해 미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3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했다”며 “국내외 고객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끄는 기업이 되도록 기술 개발과 경영 혁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여전히 끝내주는, 그 맛 그대로다. 진득한 무게와 경쾌한 리듬이 어우러진 수작. 딱히 흠 잡을 대목을 찾기도 어렵다. 근데 왜 ‘뻔한’ 식사를 마친 기분이 들까.명불허전. 신카이 마코토(新海誠)는 역시 신카이 마코토였다. 3월 8일 국내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은 4일 현재 누적 관객 518만 명. 지금까지 일본 만화영화가 500만 명을 넘은 건 처음이란다. 분명 앞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460만 명)가 분위기를 띄워준 덕도 봤다. 허나 흡입력과 폭발력을 한데 갖춘 신카이 감독 작품이 아니라면 어림없는 흥행이다.볼 사람은 웬만큼 봤겠지만, 줄거리는 간명하다. 한 여고생이 잘난 남정네에 혹해 문 열어뒀다가 사고 치는 얘기다(이리 말하니 80년대 ‘토속 에로영화’가 떠오른다). 언제나 대도시와 시골 마을이 이어지는 신카이 작품답게, 규슈 소녀 스즈메는 도쿄 청년 소타에 이끌려 폐허 속 낡은 문을 열었다가 뭔가를 깨우며 마을에 참사를 가져올 뻔한다. 이후 일본 전역에 큰 위기가 닥친 걸 알고 두 사람(한 명은 의자로 변한 채)은 모험을 떠난다.‘신카이 표 미장센’이라 불러야 할 낯익은 설정은 이번 작품도 여전하다. 감독이 “재난 영화 3부작”이라 한 ‘너의 이름은’(2016년) ‘날씨의 아이’(2019년)를 함께 떠올려보자. 앞서 말한, 도쿄와 지방에 사는 남녀. 그 중 하나는 무당처럼 영험한 능력의 소유자다. 어김없는 항공 샷과 낙하 씬, 담배 피우는 조연, 아이폰, NTT 도코모 요요기 빌딩은 그러려니 치자. 뜬금없는 환상의 나래가 펼쳐져도 곧장 “우연일지라도 널 믿을게”(신승훈 노래 ‘그 후로 오랫동안’) 태세 전환과 그 굳건한 사랑으로 어떻게든 연인을 구해내는 결말은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물론 이런 반복성이 작품의 질을 해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밀푀유처럼 켜켜이 쌓여가며 더 화려하고 풍성한 맛을 담아낸다. ‘너의 이름은’이란 찰진 쌀밥 위에 ‘날씨의 아이’ 소스와 고기를 올리니 ‘스즈메의 문단속’ 같은 훌륭한 부타동이 탄생한 모양새다. 특히 천재지변 앞에서 인간은 하잘것없음을 상기시키면서도,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길이 있으니 버티고 살아가자는 호소를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이는 참으로 드물고 귀하다.3부작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이 가장 세계적으로 성공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흐름에 군더더기가 없고 메시지가 분명했다. 일단 전작의 다소 복잡한 갈등 해결(너의 이름은)이나 그늘진 열린 결말(날씨의 아이)을 피했다. 개인적으로 ‘날씨의 아이’가 가장 맘에 들긴 하나, 그 거친 에너지는 호불호가 갈릴 터. 뭣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동일본대지진을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상처와 치유에 대한 공감이 훨씬 깊숙하고 강력하게 와 닿았다. 다녀오지 못한 ‘다녀오겠습니다’란 인사말의 울림. 그걸 비껴가기란 누구라도 쉽지 않다.그런 뜻에서 감독은 재난 시리즈라 했지만, ‘상실의 시대’ 연작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주연이나 조연이 다들 누군가를 잃은 아픔을 지녔으며, 사회적 약자에 가까운 경계 밖 사람들이란 점은 또 다른 신카이 표 미장센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들이 이런 결핍을 극복하는 과정은 언제나 세상이 이해해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별 상관은 없다. 그저 나와 닮은 상대가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이 보듬어주면 족하다.다만 다음 작품에선 신카이 마코토의 새로운 ‘도전’이 보고 싶긴 하다. 물론 3부작을 비롯해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빼어나다. 별 다섯 개 만점에 4개 이하가 없다. 허나 다섯을 꽉 채우긴 망설여진다. 근사한 유명 식당에서 만족스런 한 끼였지만, 예의 딱 알던 그 맛은 큰 바뀜이 없다. 당연히 이런 지속성도 훌륭한 덕목이다. 허나 예상을 뛰어넘는 신박함은 떨어진다. 언젠가부터 세간에선 그를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를 이을 명장감이라 부른다. 솔직히 그 의견에 정색하고 반박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런 수식언에 떳떳하려면 이젠 ‘붉은 돼지’(1992년) 같은 낭중지추(囊中之錐)의 걸작이 한번 나와 줄 때다. 아마 그건 그리 먼 미래가 아닐 게다. 혜성은 이미 다가오기 시작했으니까.[P.S] 어쩌면 이런 설레발조차 신카이 감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뜬금없긴 한데, K팝 K무비 K드라마 K웹툰…. 케이만 붙이면 뭐든 대단한 듯 착시현상이 만개한 세상에서, K만화영화의 가뭄에 허덕이는 우리로선 이런 풍성한 텃밭이 부러울 따름이다. 얼른 국내에도 소타와 히나(날씨의 아이), 미츠하(너의 이름은) 같은 작가들이 늘어나길. 스즈메와 호다카, 타키가 되어줄 팬들은 목이 마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에서 이어집니다.“과학적 시선을 통해 해상도가 달라진 또렷한 눈으로 세상을 좇으며 매일매일 가슴 뛰는 과학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인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학자 궤도의 책 ‘궤도의 과학 허세’에서) 인공지능과 기후변화, 자율주행 자동차…. 우리의 삶에 과학이 끼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져가는 건 자명하다. 그런데 정확한 정보를 고르는 선구안은 왠지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진다. 정부의 과학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이는 국립과천과학관 연구사인 강성주 박사(42)가 지향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복잡한 세상의 최신 과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어느 때보다 나침반이 필요한 시대다. 유튜브 인기 채널 ‘안될과학’(활동명 항성)에서 과학을 통한 소통에 매진하는 강 박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2020년 하반기 ‘안될과학’에 합류하셨죠.“한국천문연구원을 관두고 잠시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시행하는 과학융합 강연자 저술가 과정 등을 다녔어요. 거기서 여러 좋은 분들을 만나며 일종의 ‘과학 인맥’이 늘어난 거죠. 그 덕에 우연찮게 ‘안될과학’의 대표적 과학자인 궤도 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원래부터 안될과학과 궤도 님의 열렬한 ‘찐 팬’이었거든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 롤 모델이기도 했고요. 근데 궤도 님과 얘기를 나누며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저랑 너무 똑같은데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바로 게스트 제안을 해주셔서 신나서 출연했는데, 시청률도 잘 나오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나 봐요. 그때부터 정식으로 합류하게 됐습니다.”-안될과학이 이렇게 인기 많은 이유가 뭘까요.“재밌잖아요, 하하. 뭣보다 과학으로 대중과 소통한다는 원칙을 잘 지키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해외 대학이나 연구기관은 ‘아웃리치(outreach)’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만큼 한국말로 대체어를 찾기 마땅치 않지만, 일반 시민들을 위한 봉사 지원 활동 같은 걸 뜻하죠. 안될과학은 최신 과학정보를 시청자 눈높이에 맞춰서 편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죠. 아시겠지만, 한국인은 과학에 대한 기본 지식도 많고 이해도도 상당히 높아요. 때문에 이런 채널에 대한 갈증이 존재해왔고, 이를 안될과학이 채워주고 있는 게 아닐까요.”-‘편하게 전달한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을 텐데요.“맞아요. 단순히 좀 안다고 해서 가르치려 들었다면, 이렇게 호응이 크진 않았을 거예요. 함께 정보를 나누며 유쾌하게 대화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려 애쓰죠. 저희도 그렇지만, 전문가들을 모실 때도 재밌게 설명할 분을 선정하려 고심을 많이 합니다. 채널을 보시는 분들이 과학에 친근하게 다가오도록 돕는 게 주목적이니까요.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님이나 천문학자 이명현 박사님 같은 분들이 먼저 길을 잘 닦아 오신 덕도 크죠. 아울러 저희가 ‘학계’를 절대 놓고 있지 않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예요.”-학계를 놓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전문성을 유지하며 흐름에 뒤처져선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안될과학 같은 유튜브 채널은 어떤 정부나 대학 기관이 아니잖아요. 때문에 구독자 수가 늘어나면 영향력은 커지지만, 그게 어떤 신뢰성이나 위상을 보장하는 건 아니거든요. 최신 동향과 새로운 연구 성과를 계속 파악해야, 정통 학계도 수긍하고 대중도 인정하는 거죠. 저 역시 한국천문학회와 국제천문연맹, 한국천문올림피아드 등에 소속돼 활동하는 이유가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자격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으로 안될과학에 참여한 뒤로 연구원으로 재직할 때보다 논문을 더 많이 읽는 거 같아요, 하하.”-과학관 연구사이기도 한데,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나요.“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요. 잠 좀 줄이면 다 가능합니다. 과학관 퇴근 뒤에 안될과학 출연하고 집에 가면 보통 새벽 1, 2시쯤 돼요. 논문 보고 자료 정리하다 보면 하루 서너 시간 정도 잡니다. 물론 피곤하고 지칠 때도 있죠. 하지만 정신건강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살짝 버겁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거 못해서 스트레스받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나요.”-좋은 채널인데 재정 지원 같은 걸 받으면 어떨까요.“아…, 그건 저희가 제일 피하고 싶은 거예요. 실은 지금도 여러 곳에서 프로젝트 제안을 많이 해주고 있으세요. 감사한 일이지만, 저희로서는 아주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저도 공무원인지라 다소 민감한 부분이 있고요. 뭣보다 정부건 기업이건 어디에 얽매이면 안될과학의 근본정신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요. 자유롭게 과학을 탐구한다는 본질이 변한다면 저희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사라지는 거죠.”-한국의 과학 수준이 높다고 했는데, 노벨상은 언제쯤 나올까요.“어려운 질문이네요. 조심스럽긴 한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 이대로는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긴 힘들다고 봅니다. 한국인은 교육 수준도 높고 과학에 대한 이해도가 훌륭해요. 미국만 해도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거든요. 안될과학이 이렇게 인기 있는 것도 그걸 증명하죠. 문제는 시스템이에요. 우리나라 정부나 대학 연구기관은 1년 회계연도에 맞춰서 ‘실적’을 내놓아야 해요. 그렇다 보니 연구자들이 장기적인 실험을 지속하기 어려운 구조예요. 연구 결과를 담은 보고서 제출을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를 바꾸지 않는 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성과를 얻기란 요원할 것 같아요.”-외국도 연구자가 성과를 내놓긴 해야 하잖아요.“맞습니다. 그런데 그 성과를 무엇으로 판단하는가에서 결정적 차이가 납니다. 첫째로 해외에선 ‘과정’도 실적으로 받아들여져요. 10년 프로젝트가 있다고 칠게요. 미국이나 일본은 1, 2년 때 실험을 통해 이런저런 오류를 발견했다는 것도 값진 소득으로 여겨요. 우리는 아니죠. 작게라도 ‘진전’이 있어야만 그 프로젝트를 지속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과학에서 오류를 제거하는 건 절대 정체나 답보가 아니거든요. 여기서 두 번째 중요한 차이가 나오는데, ‘실패’도 성과로 본다는 겁니다. 어떤 연구에서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도 뭔가를 배운 거니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거죠. 그래야 다음 연구에선 그 방식을 배제하고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정책적 인식이 바뀌어야 우리도 과학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그런 와중에 나로호 발사 같은 큰 성공도 거뒀잖아요.“네, 정말 대단하죠. 해외의 1/10쯤 되는 인력과 재원으로 그걸 해냈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근데 생각해보세요. 우린 언제까지 이런 행운만 바라며, 현장의 희생과 사명감에 기대야 할까요. 그리고 과연 이런 기적이 계속 이어질까요. 외국 과학자들을 만나면, (한국의 성과에) 놀라는 게 아니라 걱정부터 합니다. 괜찮으냐고. 그러다 큰 사고 나는 거 아니냐고요. 당장 지원을 외국만큼 늘리자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잖아요. 다만 이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식으로는 과학 발전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차근차근 쌓아가는 거잖아요.”-이런 구조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아주 조금씩이지만, 나아질 거란 희망은 보입니다. 이전보다 정부나 학계도 많이 바뀌고 있어요. 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들은 여전히 ‘성과’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단 느낌이에요. 과학을 대하는 자세가 너무 경직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대중들이 과학에 애정을 많이 가져주는 게 중요합니다. 요즘 한국 언론이나 국민이 ‘나사(미 우주항공국) 제임스웹 우주망원경 관측 결과’에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국내 과학정책 등에 큰 영향을 끼치거든요. 안될과학도 그렇게 분위기를 바꾸는데 기여하려고 노력해야죠.”-예전보다 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이 줄지 않았나요.“그건 일종의 착시현상이라고 봅니다. 여전히 과학을 좋아하고 흥미로워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적지 않아요. 20세기에는 아이들이 꿈꾸는 직업이 몇 개 없었죠. ‘로봇 태권V’ 같은 공상과학(SF) 만화가 큰 인기를 끌다 보니, 과학자가 매력적이었죠. 지금은 세상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해졌잖아요. 웹툰 작가나 유튜버 같은 새로운 직업이 눈에 들어오니, 과학자가 잘 눈에 띄지 않을 뿐이죠. 오히려 요즘 만나본 아이들은 질문 수준이 엄청 높아요. 구체적이고 예리합니다. 과학 인력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부모들도 자녀들이 과학자가 되길 바랄까요.“문제는 바로 그 대목이죠. 사회적으로 과학자를 선호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요. 아마 경기도 나쁘고 살기가 팍팍하다 보니 과학자란 직업이 전망이 어둡다고 보는 게 아닐까요. 정부 정책 같은 걸 봐도 과학자를 귀하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긴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돈 많이 버는 과학자들도 꽤 있어요, 하하. 게다가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막는 분위기는 아니잖아요. 긍정적인 요소와 불안한 요소가 뒤섞여 있지만, 그럴수록 어른들이 더 잘해야겠죠. 과학의 매력에 빠진 어린이들이 그 꿈을 자연스레 이어갈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과학현황지수(SOSI·State of Science Index)’라는 게 있다. 글로벌기업 3M이 2018년부터 17개국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인식 조사인데, 나라마다 사람들이 과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수치로 보여준다. 지난해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은 86%가 “과학이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는 세계 평균 52%보다 무려 34%포인트가 높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우려 역시 다른 나라보다 높다. 한국인은 약 80%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잘못된 과학정보가 퍼지고 있다고 봤으며, 76%가 기술의 변화에 따른 고용시장의 변화를 걱정했다. 과학현황지수를 봐도 한국인처럼 과학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나라는 드물다. 그런데 그 관심만큼 과학정책을 중시하고 과학자를 우대해왔는지는 자신하기 어렵다. 케이팝 같은 한국의 소프트 콘텐츠가 세상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지금, 나라의 근간이 되어줄 기초과학을 우리는 얼마나 잘 보살피고 키워가고 있을까. 일단 ‘안될과학’ 등을 통해 과학을 향한 관심부터 다시 한번 환기시켜보자. 분투하는 청년들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실어줄 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메르세데스-벤츠 모바일 아카데미는 글로벌 기술을 직접 체험하고, 여러 직군 선배들에게서 생생한 조언을 듣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우수한 엔지니어로 성장해 글로벌 자동차 산업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싶어요.”(대림대 재학생 이예신 씨) 메르세데스-벤츠 사회공헌위원회(의장 토마스 클라인)와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미래재단(이사장 이훈규)이 10일 경기 용인에 있는 AMG 스피드웨이에서 대학생들을 초청해 ‘메르세데스-벤츠 모바일 아카데미 16기 경력개발 워크숍’을 개최했다. 경력개발 워크숍은 메르세데스-벤츠 모바일 아카데미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 메르세데스-벤츠의 우수한 기술력과 글로벌 교육 노하우를 바탕으로 미래 인재를 육성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실시하는 산학협동 프로젝트다. 메르세데츠-벤츠 측은 “이번 워크숍에는 국내 자동차 관련 학과 학생 110명에게 이론적인 기술 교육을 비롯해 현업에서 해당 기술이 활용되는 다양한 직군을 소개했다”며 “본인에게 맞는 직종 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16기 워크숍에는 전국 11개 대학 교수와 학생들을 위해 ‘멘토링 프로그램’과 ‘리더와의 대화’ ‘AMG 스피드웨이 드라이빙 체험’ 등 다양한 커리큘럼이 마련됐다. 특히 리더와의 대화는 메르세데스-벤츠 공식 딜러사인 더클래스 효성의 이철승 대표이사가 참여해 큰 호응을 얻었다. 사회공헌위원회 부의장도 맡고 있는 이 대표는 “1박 2일 워크숍을 통해서 미래 자동차 역군들이 자신의 역량을 향상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다”며 “차세대 자동차 전문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육성해 국내 자동차 시장의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메르세데스-벤츠 모바일 아카데미는 2014년부터 국내 관련 대학에 현장 실습 교육 및 온라인 교육을 제공하고, 실습용 차량도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아카데미에서 배출한 수료생들은 대다수가 자동차 산업으로 진로를 이어가 모범적인 산학협력 프로그램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4년 출범한 사회공헌위원회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약속’이란 공식 슬로건 아래 한국 사회에 기여하는 5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모바일 아카데미 외에도 △어린이 교통 안전을 위한 ‘메르세데스-벤츠 모바일 키즈’ △임직원 참여형 봉사활동 ‘메르세데스-벤츠와 함께’ △스포츠와 기부를 결합한 ‘메르세데스-벤츠 기브’ △탄소중립 기후행동 실천을 위한 ‘메르세데스-벤츠 그린플러스’ 등이다. 사회공헌위원회 관계자는 “11개 대학과 협약을 맺어 해마다 기초 과정 275명과 심화 과정 110명에게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며 “1년 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에겐 최대 10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며, 16기 우수 성적자들에게는 독일 본사 견학 기회도 제공할 예정”이라고 전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역사를 돌아보면 자연은 인간을 놀라게 하는데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해왔다. 지금보다 더 먼 곳을 관측하고 더 작은 영역을 들여다봤을 때 무엇이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할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한다면, 우주의 조리법을 발견하는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해리 클리프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책 ‘다정한 물리학’에서)흐드러지게 피고 지기론 벚꽃 못지않다. 요즘 유튜브 채널들 얘기다. 알고리즘과 자극이란 밀물 썰물에 휩쓸리다 보면, 뭘 따라가는지 정신 차리기도 버겁다. 그 와중에도 힐끗 보기엔, 다소 민숭민숭한 채널이 하나 있다. 과학 전문 채널 ‘안될과학.’ 간판에 달린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박사급 아재들이 만든, 될 과학 안 될 과학 다 만드는 본격 과학 채널”이란 설명에도 왠지 문턱 넘기 망설여진다.하지만 2018년 시작한 안될과학은 현재 구독자 수가 77만 명(19일 기준)에 이르는 탄탄한 인기를 구축했다. 천문학 물리학 생명과학 등 정통 과학정보에 열광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채널 주인장들인 궤도와 항성, 약, 공진(모두 예명) 등도 이제 온라인 안팎에서 상당한 대중적 인지도를 자랑한다.특히 ‘항성’으로 활동 중인 강성주 박사(42)는 현재 국립과천과학관에 소속된 연구사. 학자이자 공무원으로 공사다망한데도, “잠 잘 시간 쪼개가며” 안될과학에 매진해왔다. 평탄하게 실적 쌓으면 그만인 그가 왜 굳이 ‘돈 안 되는’ 가욋일에 이리도 진심인걸까.(※강 박사는 안될과학에서 단 한 푼도 출연료를 받지 않는다)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해드릴”(안될과학 시그니처 인사법) 과학자 항성을 만나봤다.-유튜브 스타를 만나 영광입니다.“에구, 무슨 말씀을요. 국립과천과학관 천문우주팀에서 일하는 공무원 신분의 연구사(硏究士)일 뿐입니다. 물리 천문 기상 등을 담당하고 있고요, 교육이나 전시 등을 기획 운영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안될과학은 ‘과학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에 워낙 관심이 많았고, 공부할 때부터 꿈꿨던 일이라 즐겁게 하는 거예요.”-과학 커뮤니케이터란 게 뭔가요.“말 그대로 과학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될 거 같아요. 우리말로는 적당한 대체어가 없긴 한데…, 흔히 대중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거 아니냐고 오해하는데, 그건 좀 달라요. 전문성을 갖고 있되 일반인 눈높이에서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삼키기 편하게 만들려 노력하지만, 어떻게 소화하는가는 각자 받아들이는 이가 편하게 선택하는 거죠.”-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되고 싶으셨나요.“네, 신기하게도 한 번도 장래 희망이 바뀐 적이 없어요. 일곱 살 때쯤 과학만화를 좋아했는데, 거기서 마주한 보이저 2호가 우주에서 찍은 사진에 반해버린 뒤 언제나 천문학자를 꿈꿨어요. 무작정 졸라서 아버지가 천체망원경을 사주셨는데, 처음엔 어떻게 보는지 방법도 몰랐죠. 며칠을 만지작거려서 드디어 목성을 처음 봤을 때의 그 희열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근데 저뿐만 아니라, 천문학자들은 어릴 때 우주나 별에 빠져서 그대로 이어진 경우가 많아요.”-첫사랑과 그대로 결혼한 셈이네요.“다 부모님 덕분입니다. 언제나 제 꿈을 지지해주시고, 얘기를 경청해주셨어요. 어릴 때 제가 정말 말이 많았거든요. 어른들이 보기엔 쓸데없는 얘기인데도 절대 막지 않고 귀 기울여 주셨어요. 한번은 어머니가 라면을 끓여주셨는데, 수다 떠느라 하나도 못 먹고 국물이 없어질 정도로 탱탱 불어터졌어요. 근데 제 앞에 앉아 조용히 다 들어주신 뒤 ‘걱정 마. 다시 끓여줄게’ 하셨을 정도예요. 아이 입장에선 너무 고마운 대화 상대가 되어주신 거죠. 전 지금도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려면 그 아이의 얘기를 들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부모님 속 썩인 일은 없으셨나 봐요.“아, 웬걸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진 괜찮은 아들이었을 수도 있는데, 대학 가면서 큰 사고를 쳤죠. 실은 연세대를 수시로 붙어놓고, 시간이 남아서 취미를 찾다가 마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한국에서 마술이 그리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시절은 아닌데, 우연히 마술 동호회 모임에 갔다가 은결이를 만났는데….”-세계적인 마술사 이은결 씨 말인가요.“흐흐. 네, 저랑 동갑이에요. 그 친구 만나서 완전히 빠져서는, 대학이고 뭐고 필요 없고 무조건 마술사 되겠단 생각밖에 없었어요. 은결이가 마술 쇼하면 보조 역할도 하고. 용품 비용 대느라 대학 등록금으로 받은 돈도 다 갖다 썼어요, 부모님 몰래. 입학금만 내고 등록은 안 했으니, 결국 1학기 끝나고 집에 통보가 온 거죠. 매일 신촌에 간다기에 학교 가는 줄 아셨던 부모님이 정말 충격이 크셨어요. 실은 마술 아지트가 신촌에 있었거든요.”-놀라시는 게 당연하죠.“그죠. 뭣보다 자식이 그간 당신들을 속인 셈이잖아요. 은결이까지 덩달아 불려 가서 엄청 혼났어요. 아버지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셨을 정도니까요. 은결이도 억울했죠. 제가 등록금까지 갖다 쓴 줄 몰랐거든요. 근데 혼나고 나와서 은결이가 그러더라고요. ‘솔직히 말할게. 너 마술에 진짜 소질 없어. 머리는 똑똑하니 공부 다시 해라.’ 그때 뭔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어요.”-친구를 위해 쓴소리한 게 아닐까요.“맞아요. 덕분에 정신 차렸죠. 지금도 제일 소중한 친구 중의 하나예요. 근데 그대로 한국에 있으면 도저히 마술의 유혹을 떨칠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결심하고 이리저리 알아보니 천문학과로 유명한 미국 텍사스대학이 딱 저한테 맞을 거 같았어요. 다행히 토플이나 SAT 점수도 나쁘지 않아서 입학도 받아들여졌고요. 운 좋게 2001년 9·11테러 직전에 입학해서 학비도 미국학생과 동일했어요. 그 이후론 텍사스대도 국제학생은 미국 학생보다 서너 배는 학비가 비싸진 걸로 알고 있어요. 여러모로 운이 따랐죠.”-유학 가선 사고 치진 않으셨나요.“하하, 아버지랑 똑같은 반응이네요. 눈앞에서도 그러는 놈을 뭘 믿고 보내주느냐고 하셨거든요. 다행히 마음 잡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원래 꿈이 천문학자이기도 했으니까요. 학부 때는 천문학 물리학 등을 전공했고요. 석박사 학위는,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요. 간단하게 말해서 별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유형으로 탄생하는가를 연구했어요. 그리고 뭣보다 미국 유학은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되겠다는 진로를 결정하는 소중한 시간이 됐습니다.”-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봐요.“원래도 조경철 박사님(1929~2010)을 선망하기도 했지만, 학부 때 지역주민 행사에 참여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한 아버지가 설명을 정말 집중해서 들으시는 거예요. 사실 한국 부모님들은 그런 곳에 오시면 아이들은 참여시키고 뒤로 살짝 빠져서 좀 쉬시는 경향이 있거든요. 괜한 궁금증이 생겨서 물어봤더니, ‘우리 애 하나가 자폐스펙트럼인데, 내가 알아들어야 우리 가족의 언어로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그 아버지가 가족의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거네요.“네, 맞아요. 그게 바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사실 과학 용어나 개념이 대중에겐 낯설고 어려울 수 있잖아요. 근데 쉽게 설명하면, 관심 있는 분들은 대부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 다리를 놓는 일이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운 좋게 세계적인 천문학자 닐 타이슨(65)을 사석에서 뵌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위대한’ 칼 세이건(1934~1996)의 제자답게 제 꿈을 적극 응원해주셨어요. 너무 멋진 일이라며 그럴수록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죠.”-한국행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인가요.“네, 실은 박사를 딴 뒤에 진로 고민을 좀 했어요. 아직 한국에선 과학 커뮤니케이터란 게 생소하기도 하고,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에서 그런 업무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한국천문연구원에 지원했다가 합격해서 갈지 말지 결정을 내려야 했죠. 나사에 대한 열망이 커서 망설였는데, 그때 지도교수님이 ‘조국에서 네 꿈을 펼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언하셔서 귀국하기로 맘먹었습니다.”-천문연구원에 5년 정도 계셨더군요.“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연구직 인턴을 거쳐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었습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한데…. 좋은 연구와 프로젝트도 많이 했지만, 저랑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기분이 들었어요. 연구원은 아무래도 연구 중심이거든요. 국책기관이니 실적이 우선시되고, 외부 활동을 장려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건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 보급이나 대중화 쪽 일인데, 그럴 기회나 여지가 거의 없었어요. 안정된 직장이지만 꿈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거든요.”-국립과천과학관으로 옮긴 게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여길 오겠다고 확정하고 이직한 건 아니고요. 일단 연구원을 관두고 나와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다행히 와이프도 ‘꿈을 포기하지 마라’고 응원해줬고요. 국립과천과학관은 그 이후에 저랑 잘 맞겠단 생각에 들어온 거죠. 그리고 엇비슷한 시기에 ‘안될과학’에도 참여하게 된 거고요. 드디어 꿈에 다가가는 ‘성덕(성공한 덕후)’이 된 기분이었습니다.”(하편에서 계속)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에서 이어집니다.“아무것도 없는 빈 바둑판에 돌이 하나하나 추가되면, 다 내 것 같던 넓은 땅이 쑥쑥 줄어든다. 경계가 흐릿해 다 내 것 같다가, 경계가 드러나며 내 땅인지 네 땅인지 알게 된다.”(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에서) 바둑은 어찌 보면 참 간명하다. 희고 검은 돌을 나눠 잡고 승부를 가린다. 5000년 역사를 지녔다는데, 예나 지금이나 땅(집)을 더 차지해야 이기는 건 변함없다. 그래서 바둑은 더 오묘하기도 하다. 수천 년 같은 방식인데 둘 때마다 천변만화한다. 이젠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낫다지만, 그건 계산의 영역이지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여전히 바둑판 위에선 삶의 묘리가 살아 숨 쉰다. 명지대 자연캠퍼스에서 만난 고영훈 씨(25)도 그런 ‘반상(盤上)의 법칙’을 깨쳐가는 청년이다. 현재 아마 5단인 그는 7살 무렵 돌을 잡은 뒤 바둑고등학교를 나와 2017년 바둑학과에 입학했다. 현역으로 전역한 뒤에도 19줄 바둑판은 영훈 씨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말 명지대가 바둑학과 폐지안을 통과시키며 자신이 몸담은 과가 사라지는 걸 목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최종확정은 아니고 재학생들의 졸업도 보장된다지만, 이미 “가슴이 뻥 뚫린” 쓰디쓴 상처는 누가 메워줄까.-폐과 소식을 처음 들은 건 언제인가요.“지난해 10월쯤이었어요. 밤 10시쯤인가, 갑자기 예술체육대학 학생회장단 단톡방이 시끄러웠어요. 다들 ‘에타(대학생 커뮤니티)’ 봤냐며. 누군가 학교 통합안을 몰래 올렸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거예요. 내용이 복잡했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바둑학과가 다른 단과대로 옮기고 일반 학생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어요. 이게 뭔가 싶어 교수님들께 여쭤보니 이건 폐과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해주시더군요.”-학교 측에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겠네요.“네, 당연하죠. 바로 공식적으로 문의했습니다. 그랬더니 면담 자리에서 ‘단순한 초안이 누출된 거다. 최종안은 학생들 의견 다 수렴해서 만든다. 우려할 정도의 개편은 없을 테니 걱정마라’고 하더군요. 근데 저도 그렇고, 만나고 나온 학생들이 다들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왠지 일단 무마하려고 둘러댄다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공청회라는 걸 열었는데, 의견을 들어주거나 상의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뭔가 이미 다 결정됐고 그저 통보하는 식이었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12월에 학교 측 통합추진위원회라는 게 열렸는데, 거기서 바둑학과 폐지가 통과됐죠.”-학생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겠습니다.“솔직히 처음엔 너무 황당해서 화도 안 났어요.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1997년 창설해 25년이 넘은 학과가 이렇게 쉽게 없어진다는 게 이해가 안 갔습니다. 바둑학과는 한국 바둑계의 산실 같은 곳이고, 입학 경쟁률도 지난해 3 대 1 정도로 나쁘지 않았거든요. 아니 백번 양보하더라도, 학생들 교수들하고 논의는 해야 하는 거잖아요. 문제가 있다면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은 해본 뒤에 결론 내도 늦지 않은 거 아닌가요.”-소통이 부족했다고 느끼는 거군요.“네, 그게 가장 아쉬워요. 학교 측도 사정이 있을 테죠. 시스템을 바꾸는 일인데 고민도 많았겠죠. 요즘 대학들이 갈수록 힘들단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양해도 구하지 않는 건, 학생들을 학교의 구성원으로 대해주지 않은 거라고 봐요. 물론 저희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연히 폐과에 찬성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니까 더 대화했어야 하는 거잖아요. 서로 합의점을 찾으려고 더 열심히 노력했어야죠. 힘을 가졌다고 권한이 있다고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면, 그걸 보고 학생들이 뭘 배울 수 있을까요.”-학생회장이 아닌, 개인적으로도 상심이 컸겠어요.“평소 바둑 말고도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어요. 실제로 회장을 맡기 전엔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단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일이 터지니까 알겠더라고요. 저도 뼛속까지 ‘바둑인’이었어요. 바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어요. 어떤 분들은 바둑학과가 왜 필요하냐고 하시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 과는 그저 프로기사만 배출하는 곳이 아니에요. 바둑 전문 TV 등 관련 산업 전반으로 진출하고, 해외 바둑 보급에 힘쓰는 선배들도 많아요. 한국 바둑 문화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자신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국내는 물론 해외 바둑계에서도 이렇게 한목소리로 페과에 반대하지 않았겠죠.”-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나요.“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미 결정된 사안이 쉽사리 바뀌진 않겠죠. 하지만 저를 포함해 대다수 학생들은 할 수 있는 건 다해보고 싶단 마음이에요. 몇몇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하기도 해요. 벌써 전과나 편입을 고민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그들 마음도 충분히 이해해요. 학생들은 아무래도 을의 입장이고, 이번 일로 더욱 약자라는 걸 많이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그냥 주저앉아 포기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잖아요. 다행히 바둑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겠다는 연락을 많이 주세요. 쉽게 지치지 않아야 할 거 같아요.”-이번 학기 휴학했던데, 이번 사건 때문입니까.“음…(한참 망설이더니), 꼭 그것 때문은 아닌데 아예 없다고도 못하겠네요. 다만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휴학은 했어도 과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적극적으로 할 거예요. 학생회장 임기는 끝났지만, 후배한테 떠넘기고 떠났다는 얘긴 듣고 싶지 않거든요. 다만 이번 일로 ‘세계관’이 좀 바뀌었어요. 그전까진 어떤 일이든 바둑 관련해서, 일단 취직을 염두에 뒀었거든요. 그런데 학교도 구조조정을 이유로 과를 내쫓는데, 사회에서 회사는 더 심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식으로 내 인생이 누군가의 결정에 좌지우지된다는 게 너무 속상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취직보단 제가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보고 싶어요.”-뭔가 삶의 방향이 바뀌어버린 거네요.“진짜 세상의 어려움을 감내하는 어른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로선 큰 갈림길에 선 기분이 들어요. 그냥 다들 가는, 기존에 있는 길을 찾아갈 수도 있겠죠. 근데 그랬다가 또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을까요.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바둑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되 어디에 묶여있고 싶진 않아요. 예를 들어 창업 같은 걸 하더라도, 나만의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단 생각이 들어서 그런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쉬운 길은 아닐 텐데요.“사실 지금 바둑계가 전체적으로 막 흥하는 분위기는 아니잖아요. 갈수록 바둑 인구도 줄고 있고, 사양산업이란 소리도 듣고 있죠. 바둑계도 반성할 부분이 많다고 봐요. 진입장벽도 높은 편이고,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서질 못했으니까요. 어쩌면 바둑으로 ‘먹고 살겠다’고 한 순간부터, 이런 어려움은 어떤 식으로건 닥쳤을 거 같아요. 바둑학과 폐지 논란도 그런 상황의 연장선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 전 이미 바둑과 연을 맺은 사람이니 끝까지 함께 가야죠.”-바둑학과 나왔다고 바둑 관련 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맞아요. 그런데 제가 그러고 싶은 거죠. 평생 바둑을 둬왔으니 이쪽 일을 하겠다가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바둑이 좋으니 계속하겠다는 겁니다. 여전히 바둑으로 하고 싶은 게 무궁무진하거든요. 그거 아세요? 이번 큰일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왜 하필 바둑을 선택했지’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흔히들 바둑에는 인생이 들어있다고 하잖아요. 전 아직 그런 경지는 아니지만, 바둑은 언제나 제게 말을 걸어주는 존재였어요. 아직 전 바둑과 해야 할 얘기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명지대 홈페이지에는 여러 소속 학과에 대한 친절한 소개 글들이 실려 있다. 바둑학과도 마찬가지인데, 상세한 설명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1997년 사상 최초로 창설된 바둑학과는 바둑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바둑은 귀중한 문화의 하나로 간주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너무 기술적인 측면에 치우침으로써 과학적인 접근법에 의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 바둑학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다양한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바둑문화의 발전에 공헌하려 한다.” 영훈 씨가 학문적 성취를 얼마나 쌓았는지는 모르겠다. 바둑학과가 사라지는 게 ‘바둑문화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허나 이번 사태로 바둑을 사랑한 한 청년은 자신의 인생이 나아갈 선로를 틀려 하고 있다. 또한 바둑학과를 꿈꾸던 고교생들은 당장의 진학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어떤 일에도 대가는 따른다지만, 막 날갯짓하는 젊은 꿈에 생채기 내는 결과를 낳진 말길. 그게 어른들의 몫 아닐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200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카페인 ‘포지티브스페이스566’이 세계에서 가장 큰 카페로 공식 인정받았다. 포지티브스페이스566은 “영국에 본부를 둔 기네스 월드레코드에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카페’로 등재됐다”고 6일 밝혔다. 경기 김포시에 있는 포지티브스페이스566은 연면적 1만1900㎡(약 3600평)에 이르는 호텔식 카페로, 지난해 문을 연 뒤 엄청난 규모와 다양한 부속 시설로 줄곧 화제를 모아 왔다. 실내 좌석 수도 2190개로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카페로 알려졌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마사 카페(1050석)보다 2배 이상 고객을 받을 수 있다. 지하 1층∼지상 5층으로 이뤄진 내부는 높은 천장과 엄청난 샹들리에, 레트로한 인테리어 소품들로 MZ세대 등으로부터 소셜미디어에 사진 올리기 좋은 ‘핫플’로 관심을 끌고 있다. 카페 외에도 식사나 주류를 즐길 수 있는 여러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1층부터 4층까지는 다양한 콘셉트를 가진 공간으로 꾸며져 어느 위치에서 촬영해도 근사한 포토 존이 된다. 이 밖에 야외 테라스와 이벤트 홀도 있으며, 크고 작은 예약 룸도 19개나 있어 4명부터 100명까지 참여하는 행사나 모임이 가능하다. 특히 5층에 있는 ‘포지티브 아트센터’는 예술 전시 공간으로 방문객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 현재 ‘포지티브 아트센터 영 아티스트 프로젝트’ 제1회 대상 수상자인 SINA 작가의 개인전을 열고 있는데, 해당 프로젝트는 아트센터에서 국내 젊은 작가를 지원하고 육성하는 뜻에서 올해부터 시작한 공모전이다. 이은순 포지티브스페이스566 대표는 “기네스북 등재를 통해 김포에 새로운 랜드마크를 선보였다는 기쁨이 무척 크다”며 “한국에도 이런 카페가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고 전했다. 포지티브스페이스566은 기네스북 등재를 기념해 조만간 다양한 특별 메뉴와 이벤트를 선보일 예정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바둑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집이 더 많은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에요. 그래서 끝에서부터 가운데로 자기 집을 잘 지으며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해요.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넷플릭스 드라마 ‘글로리’에서) 드라마 ‘글로리’의 세계적인 히트로 또 한번 주목받은 스포츠(혹은 게임)가 있다. 바둑이다. 해당 작품에서 바둑은 주인공 동은(송혜교)의 복수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장치였다. 온라인쇼핑몰에 따르면 글로리 방영 뒤 바둑 관련 상품은 지난해보다 134%나 판매량이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인기는 ‘반짝 거품’에 그칠 공산이 크다. 실제 바둑은 지속적으로 위기에 봉착했단 평가를 받아왔다. 그 흔했던 기원도 이젠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 특히 지난해는 바둑계가 심각하게 술렁인 해였다. 1997년 세계 처음으로 바둑학과를 개설한 명지대가 폐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국내외 바둑계 안팎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내후년부터 바둑학과는 신입생을 받지 않을 예정이다. 바둑학과 폐지가 옳은지 그른지는 잠깐 판단을 미뤄두자. 어느 쪽이건 각자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바둑의 위기’란 거대담론이 오고가는 와중에, 정작 제일 중요한 뭔가가 빠진 기분이 든다. 현재 바둑학과를 다니는 학생들, 바로 당사자들의 목소리다. 어릴 때부터 흑돌 백돌과 사랑에 빠져 전공마저 바둑으로 선택한 젊은이들. 그들은 자신이 몸담은 학과가 없어진단 통보를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였을까. 명지대 바둑학과 ‘17학번 복학생’ 고영훈 씨(25)를 만나 속내를 들어봤다.―자기소개부터 부탁드려요.“네, 안녕하세요. 명지대 바둑학과 고영훈이라고 합니다. 2017년 입학했고, 2018년 10월에 군대 갔다가 2021년 1학기 때 복학했어요. 지난해는 1년 동안 과 학생회장을 맡았었습니다. 원래 올해 4학년이 되는데, 따로 준비하는 게 있어서 지금은 휴학 중입니다.”―대학생다운 소개네요. 바둑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7, 8살 때부터였어요. 2000년대 초반인데 그땐 산만한 아이들에게 바둑 가르치는 게 자연스러웠나 봐요. 부모님 말로는 제가 워낙 까불까불하고 어디 가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대요. 집중력이라도 키우라고 연년생 형이랑 같이 학원에 보냈답니다. 형은 2, 3년 다니다 관뒀는데 전 지금까지 이어졌네요.”―그때부터 재능을 드러낸 거군요.“에구, 진짜 기재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프로기사들은 네댓 살 때부터 시작하니 늦기도 했고, 그냥 광주의 조그만 동네 학원에서 잘 두는 정도였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상급학원으로 옮겼는데, 이미 그때 ‘벽’을 좀 느꼈어요. 저보다 어린 데 훨씬 실력있는 친구들이 많았죠. 근데 이상하게 낙담하기보단 바둑이 더 재밌어졌어요. 왠지 도전의식이 샘솟았다고나 할까요. 중학교 올라간 뒤엔 진지하게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계속 바둑을 두고 싶었어요. 프로기사가 되긴 어렵더라도 바둑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싶단 생각을 했죠.”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요. 쉽지 않은 선택인데.“감사하게도 제 뜻을 존중해주셨어요. 현실적으로 프로기사가 되긴 어렵다는 걸 부모님도 아셨지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라고 격려해 주셨죠. 그래서 그때부터 명지대 바둑학과를 목표로 준비했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중3 때 전남 순천에 한국바둑고등학교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2회 졸업생인데, 지금은 경쟁률이 치열하지만 그때는 신설이라 입학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요. 기숙사까지 있는 학교라 집중해서 바둑 실력 쌓기에 좋은 조건이었어요.”―바둑고등학교는 교과과정이 어떻게 되나요.“하하, 사람들은 그게 제일 궁금한가 봐요. 하루 종일 바둑만 두냐고 묻더라고요. 다른 학교랑 똑같이 국영수 등 정규 과목 다 그대로 배워요. 다만 주 10시간 바둑이 정규 수업에 포함돼있죠. 자유시간엔 바둑도 두고 축구도 하고 각자 하고 싶은 거 하고요. 대신 교내에 ‘리그전’이라는 게 있어요. 학생들끼리 바둑 둬서 그 성적으로 1군부터 6군까지 등급이 매겨져요. 아무래도 바둑이 주 목적인 학교니까, 바둑 실력이 중요하죠.”―영훈 씨는 주로 몇 군이었나요.“1, 2군을 들락날락했어요. 바둑은 특성상 4, 5군인 친구가 1,2군으로 가는 건 거의 드물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실력이 갑자기 늘지 않는데다, 상급자들일수록 더 열심히 하기 때문에 비집고 올라가기가 엄청 어렵죠. 다만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한번씩 등급이 요동쳐요. 나이 어린 후배여도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면 선배들이 밀려날 수밖에 없죠.”―요즘 드라마 ‘글로리’가 화제잖아요. 바둑고등학교는 학폭과는 거리가 멀겠어요.“아무래도 바둑 특성화 학교다보니 그런 면이 있죠. 바둑을 제일 잘 두는 학생이 가장 인정받는 곳이니까요. 바둑 두는 사람들이 대체로 성격이 차분하기도 하고요. 제가 알기론 심각한 폭력이나 따돌림은 없었어요. 하지만 저희 학교도 서울을 포함해서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기숙사 생활을 하거든요. 혈기왕성한 아이들이 모였으니 시끄러울 때도 없진 않죠.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다들 잘 지냈던 거 같아요.”―바둑고등학교를 나오면 바둑학과 진학이 쉬운 편인가요.“전혀 아니에요. 바둑고등학교라서 무슨 가산점이 있는 건 아니고, 각 지역 연구생들을 포함해 전국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해요. 저 때도 입학 경쟁률이 3 대 1 정도 됐었어요. 게다가 바둑학과 지망생들은 여기가 아니면 대안이 없어요. 바둑학과 떨어졌다고 뜬금없이 다른 과를 갈 순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만약에 대비해서 고3 때 체대 입시를 같이 준비했어요.”―체대 준비까지 병행했으면 정말 힘들었겠어요.“다행히 바쁘게 사는 게 제 성향에 잘 맞았어요. 사실 바둑학과만 준비할 땐 오히려 고민도 많고 답답할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체대 입시 학원도 다니니까 시간은 빠듯했어도 뭔가 스스로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를 1분 1초까지 쪼개가며 열심히 사는 게 저를 단련시키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거든요. 그래서 체대 학원 다니던 도중에 바둑학과 합격 통보를 받았는데도 끝까지 계속 다녔어요.”―이미 합격했는데 왜 굳이 학원을 계속 다닌 건가요.“어…, 제가 합격했다고 중간에 관둬버리면 괜히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잖아요. 같이 열심히 준비하던 친구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요. 누가 빠져나가 버리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도 있고요. 나중엔 가까운 몇 명한테는 말했지만, 학원 쪽에는 아예 얘길 꺼내질 않았어요. 저로선 체력도 단련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어요.”―책임감이 무척 강한 편인가 봐요.“주어진 일이 있으면 피하지 않는 성격이긴 해요. 근데 그보다는 바둑에만 매몰돼서 외골수로 살지 않고 싶었어요. 바둑인이라고 하면 왠지 그런 이미지가 있잖아요. 물론 실력이 좋아서 프로기사로 나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죠. 하지만 바둑을 매개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었기 때문에 뭐든지 열심히 경험해보려 했습니다. 대학 와서도 여기저기 정말 많이 참여했어요. 물론 바둑학과다보니 바둑에만 집중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지만, 전 이런 스타일이 잘 맞았어요.”―군대 다녀와서 학생회장을 한 것도 그런 성향의 연장선인가요.“일단 당시 학생회장 선배가 선거에 나가보면 어떠냐고 추천을 했어요. 원래는 제대 뒤에 교환학생을 목표로 토플 공부를 열심히 했었고, 코딩이나 영상 촬영 같은 것도 배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학생회장이 돼서 과에서 학생들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거죠. 저로서는 바둑학과가 좀더 나아지고 한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럼 한번 해보자’ 싶더라고요. 그런데 학생회장 하면서 (바둑학과 폐과라는) 그런 엄청난 사건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죠.”―하필 학생회장 때라 더 힘들었겠어요.“충격이 컸죠. 학생들을 위해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과가 없어진다니… 정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죠. 뭔가 낌새라도 느꼈으면 대비라도 했을 텐데, 정말 갑작스러웠거든요. 아시다시피, 저희 과는 좀 특별한 학과잖아요. 세계에서 유일하기도 하고. 한국 바둑계의 인재를 키워내는 산실 같은 곳인데, 처음엔 이게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인지 믿기지가 않았어요. 평생 쌓아온 뭔가가 타인에 의해 무너지는 기분마저 들었어요.”(하편에서 계속)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맥퀸은 말했다. 제 옷을 입은 여성을 보세요. 제 옷에는 여성이 강해 보이도록 하는 어떤 강인함이 있어요. 그 강인함 덕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죠.”(을유문화사 평전 ‘현대 예술의 거장-알렉산더 맥퀸’에서) 패션업계 종사자들을 만날 때마다 느껴지는 게 있다. 대체로 상냥하고 부드럽지만, 문득문득 예리한 칼날을 품은 기세가 배어난다. 언제든 전쟁터로 뛰어들 차비가 된 장수처럼. 지난달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재석 작가(36)도 그랬다. 세계적인 패션일러스트레이터답지 않은 소탈한 말투에다 차분한 미소도 보드라웠지만, 가끔씩 번뜩이는 눈빛이 서늘하면서도 강렬했다. 뭣보다 “타협하진 않되 문을 닫아두지도 않는다”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때는 청년 아티스트의 패기 넘치는 신념도 묻어났다. 김 작가는 2010년 미국 뉴욕의 유명백화점 블루밍데일스와 협업을 시작으로 구찌 카르티에 불가리 피아제 등 수많은 브랜드와 작업해왔다. 이젠 그와 작업하지 않는 패션브랜드를 골라내기 힘들 정도다. 그가 작업마다 선보이는 캐릭터 ‘수수걸’은 어떤 매력을 지녔기에 이토록 많은 브랜드들이 앞다퉈 찾는 걸까.-수수걸의 정체성은 뭔가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일단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패션모델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패션디자이너마다 선호하는 모델이 있듯, 제 의도를 가장 잘 실현해주는 캐릭터였던 거죠. 스트리트 패션부터 오뜨 꾸뛰르(맞춤제작의상)까지 소화하는. 그러다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며 소셜미디어에서 나름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됐고요. (※작가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현재 약 26만 명에 이른다) 뭣보다 저의 또 다른 자아를 대변하는 존재이기도 하고요.”-눈도 코도 없는 캐릭터를 왜 이렇게들 좋아할까요.“보시는 분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기 때문 아닐까요. 물론 제가 그릴 땐 분명한 ‘의도’가 들어가 있어요. 모든 작품 속 수수걸은 다 각각의 다른 감정을 지니고 있죠. 얼굴에서 드러나지 않는 기분이 자태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어요. 전 그게 훨씬 ‘패션스럽다’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어떤 느낌을 받느냐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니까요. 자기만의 선(線)을 지니고 있지만, 항상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는 셈이죠.”-동양적인 분위기가 짙다는 인상도 받았어요.“애초에 어떤 피부색이나 특정 문화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는 아니지만, 제가 한국인이니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배어나긴 하겠죠. 그런데 그런 점도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최근 워낙 세계적으로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크잖아요. 세계적인 명품브랜드들이 케이팝 뮤지션들을 서로 모셔가려고 하니까요. 아무래도 패션은 서구사회가 주류다 보니 과거엔 묘한 우월감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그쪽에서도 우리를 ‘리스펙트(존중)’하는 게 확실히 느껴져요.”-지금까지 함께 한 협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브랜드는 어딘가요.“아무래도 이쪽 일을 하는 계기가 된 블루밍데일스죠. 첫 문을 열어준 곳이기도 하고, 일도 참 깔끔하게 했죠. 좀 다른 이유로 화장품 브랜드인 ‘끌레드뽀 보떼’와의 협업도 기억에 남습니다. 미 로스앤젤레스 공항 면세점에서 일러스트를 그려주는 행사를 했는데, 한 중국인 소녀가 찾아왔어요. 자긴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은 의사가 되라고 강요한다며. 제 작업을 보면서 다시 한번 꿈을 향해 도전하겠다는데 좀 뿌듯했어요.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열정이면 뭘 해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과일이나 음식 재료로 만든 수수걸 드레스도 놀라웠어요.“신세계와 협업한 캘린더 프로젝트였죠. 사실 꽃을 좋아해서 생화를 주로 쓰는데, 신세계는 백화점 브랜드니까 ‘계절과 식탁’이란 이미지를 만들기엔 그런 소재들이 유용하다고 봤어요. 뭔가를 표현할 때 주제가 중요하지, 작업 방식이나 형식엔 구애받지 않는 편이에요. 직접 손으로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디지털 작업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 때도 있거든요. 요즘은 개인적으로 세라믹(자기)에 관심이 많아서, 이를 통해서 수수걸을 형상화하기도 해요. 아직 준비 단계지만, 조만간 개인전도 선보일 계획입니다.”-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게 여기는 가치는 뭘까요.“음…, 딱 한 가지를 고르기는 무척 어렵네요. 일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어야겠죠. 아까 수수걸이 눈코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실제로 활동 초기에 수수걸의 생김새를 바꾸길 요청하는 업체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 그게 수수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본질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걸 이해해주시는 회사와만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결국 이건 커머셜한(상업적인) 협업이기도 하잖아요. 때문에 커뮤니케이션도 무척 중요합니다. 제 고집만 피우지 않고 의견을 잘 청취하고, 또 제 생각을 긍정적으로 잘 전달해야 최선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런 다양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지 궁금하네요.“트렌드를 읽어내는 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단순히 패션 유행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일러스트레이터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각광받던 소셜미디어를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어, 지금 유튜브가 유행이라면 그걸 즐기는데 그치지 말아야 해요. 이걸 이용해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거죠. 무조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란 얘기는 아니에요. 자신이 가진 걸 어떻게 새로운 방식과 결합시켜서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한국의 경직된 사회문화가 그런 창의성을 가로막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 같아요. 분명히 사회적 분위기가 그런 면이 있긴 하죠. 젊은 사람들이 회사 관두고 창업하겠다고 하면 다 말리는 분위기잖아요. 외국에선 오히려 해보라고 응원하는 분위기인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면 한발도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뭐든 해봐야 결과도 나오는 거니까요. 다만 그 도전이 뭘 위한 것인지는 잘 판단해야 할 거 같아요. 회사생활 힘드니까 관두고 싶다 같은 것이어선 안 돼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준비 없는 도전은 용기가 아니라 무책임한 거죠. 그런 면에서 사회적 분위기만 탓해서도 안 된다고 봐요.”-작가님이 자신의 일을 찾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요.“돈이죠, 돈. 하하. 농담입니다. 물론 프리랜서로 나설 땐 어느 정도 수익 창출이 가능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요.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지만, 꾸준하게 노력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꾸준함이에요. 왜 공부도 계속하는 사람이 결국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세상에 하는 것마다 성공하는 천재가 몇이나 되겠어요. 천재도 그렇게 운이 따르진 않을 거 같아요. 저도 가방 사업을 포함해 실패한 게 많죠. 하지만 그걸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봐요.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가 되든 계속해봐야죠.”-앞으로 수수걸 앞에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요.“글쎄요. 앞일은 정해진 게 없으니까요. 다만 최근엔 파크 하얏트 같은 호텔이나 롤스로이스 같은 자동차, 삼성전자 등 패션 이외의 브랜드와도 협업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이제는 패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트렌드 세터(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로 자리 잡은 거죠. 아, 조만간 수수걸의 남자친구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수수보이쯤 되겠죠? 그간 팬데믹 탓에 해외에 많이 나가질 못했는데, 다시 저와 함께 세상 곳곳을 돌아볼 계획입니다.” 김 작가를 만난 뒤 ‘부캐(부 캐릭터)’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봤다. 사실 부캐란 말이 아니어도 사람은 원래 여러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MBTI(성격유형검사)도 할 때마다 결과가 조금씩 달라지듯, 우린 굳이 ‘부(副)’를 붙이지만 실상은 어느 게 본질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허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게 본캐이든 부캐이든, 자신이 원하는 게 있다면 끈기 있게 버틸 수 있어야 한다. 김 작가는 “패션광고회사에 다닐 때 기술적으로 실력 있는 작가들을 여럿 봤는데,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이는 많지 않아 아쉬웠다”고 했다. 물론 그게 줏대가 될지 아집이 될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신마저 소중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대신 귀하게 여겨줄까. 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가 꾸는 것이다. 그걸 깨달아야 비로소 꿈을 향한 출발점에 설 수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당신이 열정의 대상이라면 창문을 박차고 뛰어내려라. 열정을 느낀다면 그것에서 도망쳐라. 열정은 지나고 지루함은 남는다.”(패션디자이너 가브리엘 ‘코코’ 샤넬) MZ세대에게 ‘부캐’는 이제 일상용어다. “부(副) 캐릭터”의 줄임말인 부캐는 원래 게임에서 주로 쓰지 않는 보조적 캐릭터를 일컫는 신조어. 이게 TV예능 등에서 기존 정체성과 다른 두 번째 인격이란 의미로 쓰이더니, 개그맨 김경욱의 ‘다나카’처럼 부캐가 도드라지는 경우도 잦아졌다. 요즘은 일반인도 유튜브 등에서 부캐로 활동하는 이가 적지 않다. 패션업계에도 이런 부캐와 함께 세계적 관심을 받는 젊은 한국인 아티스트가 있다. 패션일러스트레이터 김재석 작가(36)다. 패션 일러스트란 카메라로 찍는 패션사진처럼 그림으로 그린 화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 ‘수수걸’은 일종의 부캐이자 페르소나라 할 수 있다. 수수걸은 불가리 까르띠에 피아제 같은 명품브랜드는 물론 삼성 현대 신세계 등 국내외 기업과 협업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패션 전공도 아니고 취미 삼아 그림을 그렸던 김 작가는 어떻게 글로벌 패션·광고계가 주목하는 특급 패션일러스트레이터가 됐을까.-패션업계에선 유명하지만, 아직 생소할 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려요.“하하, 당연하죠. 모르는 분들이 훨씬 많죠.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는 김재석이라고 합니다. 열 살 때 호주로 이민 가서 UTS(시드니공과대학)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우연히 한국에서 작게 여성가방 사업을 시작했는데, 브랜드 이름이 ‘수수(SUSU)’였어요. 가방 홍보하려고 일러스트를 그렸는데, 당시 그림에 등장한 여성캐릭터가 수수걸의 모태가 됐습니다. 지금은 수수걸과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디지털 크리에이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원래 전공이 패션은 아니군요.“네, 어릴 때부터 디자인에 관심 많았지만, 호주는 패션 분야가 발달한 나라는 아니에요. 그땐 본격적으로 패션에 뛰어들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 인테리어 쪽을 선택했어요. 하지만 졸업 뒤 1년 정도 호주 인테리어 회사를 다녔는데 저랑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죠. 그래서 패션 선진국인 한국에 왔어요. 지금도 부모님은 ‘너 하는 일 계속 하면 밥 먹고 살 순 있는 거니’라고 하시죠, 하하.”-부모님은 패션 작가가 될 거라 생각하진 않으셨나 봅니다.“워낙 미술을 좋아해서 비슷한 계통의 일을 하리라 짐작은 하셨던 것 같아요. 다만 패션 쪽으론 문외한이시라, 제가 아니었다면 이쪽에 관심은 없으셨겠죠. 그래도 자식이 하고 싶은 걸 막거나 강압하시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좋아하는 거라면 하고 살아야지’라고 믿고 지켜봐주시는 분들이에요.”-왜 호주가 아닌 한국에서 가방브랜드를 론칭한 건가요.“호주에선 10대 남자라면 럭비 같은 스포츠가 가장 큰 관심사예요. 근데 전 스포츠는 젬병이었고, 패션 특히 가방에 관심이 컸어요. 가방을 시험 제작하고 싶은데, 호주는 디자인이 있어도 제작업체를 구하기 어려워요. 회사 관두고 한국에 놀러왔다가 시장조사를 좀 해보니, 한국은 동대문도 있고 관련 인프라가 워낙 잘 돼 있었어요. 적은 비용으로 창업하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죠.”-그때 탄생한 게 수수걸이군요.“정확하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어요. 가방은 어떻게든 만들었는데, 가진 돈은 없고 펀딩도 어려우니 광고할 방법을 찾기 힘들었어요. 패션 화보 찍을 예산조차 없었죠. 그래서 차라리 직접 그림을 그려서 세상에 알려보자. 여성가방이니까 거기에 맞는 모델을 창조하자는 의도였어요. 가상의 인물인 수수걸이 가방을 매고 생활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브랜드 스토리를 알려보고 싶었습니다.” -가방사업은 그리 성공을 거두진 못했습니다.“네, 역시 돈이 없으니…, 하하. 첨부터 모험이라 여겼기 때문에 크게 낙담하진 않았어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해보자하는 마음이었죠. 물론 잘 됐으면 브랜드를 키워 갔겠지만, 패션 쪽으로 경력이 없으니까 큰 기대는 하질 않았거든요. 당시엔 거창하게 ‘도전’한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내게 맞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겼죠. 그걸 계기로 패션 일러스트란 또 다른 문이 열린 거니까요.”-자신의 천직을 찾는 계기는 된 거군요.“그렇죠. 뭔가를 좋아하는 것과 그걸 직업으로 하는 건 전혀 다른 거니까요. 하지만 그때도 패션 일러스트가 ‘돈’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사실 패션을 일러스트로 표현하는 건 1950, 60년대 방식이에요. 실제 모델과 사진, 영상이 대세니 그림은 한물 간 취급을 받았어요. 그래서 전업 작가는 꿈도 못 꾸고, 한국에서 패션 관련 회사에 취직을 준비했죠. 다행히 디자인 전공에 가방브랜드 론칭 경험이 있고, 영어가 가능하다는 게 플러스 점수를 받아서 패션광고회사에서 일자리를 구했어요.”-5년 정도 회사를 다녔다던데 당시엔 작품 활동은 안 한 겁니까.“정말 그땐 취미생활에 가까웠어요. 한국에서 회사생활은 어디라도 힘들겠지만, 패션광고 쪽은 장난 아니거든요. 평일엔 거의 매일 야근이어서, 짬 낼 시간은 주말에 잠깐 뿐이었어요. 대신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보니 맘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죠. 수수걸의 아이덴티티(정체성)는 이때 어느 정도 완성된 거 같아요. 그렇게 만든 작품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며 지인들과 공유하는 수준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미국 백화점체인 ‘블루밍데일스’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진짜 깜짝 놀랐죠.”-경력도 없는 신인을 해외의 유명회사가 어떻게 알아봤을까요.“그게 소셜미디어의 무서운 점인 거 같아요. 블루밍데일스가 협업했던 게 2010년인데, 이미 그때 외국에선 소셜미디어를 통해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방식이 꽤 자리 잡고 있었어요. 블루밍데일스도 그해 크리스마스 캠페인 프로젝트를 기성작가가 아닌 신선한 아티스트와 하려고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운 좋게 저한테 기회가 온 거였죠. 경력이 부족한데도 작품 그 자체로 평가하고 작가의 창의성을 적극 반영해줘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걸은 겁니까.“전혀 아니에요. 회사를 몇 년은 더 다녔어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블루밍데일스와의 작업 결과물이 반응은 좋았지만, 그렇다고 신데렐라처럼 인생이 바뀌진 않았어요. 여전히 아직 검증 안 된 신인작가인 건 그대로였죠. 다만 근사한 프로젝트를 해냈으니, 제 커리어에 좋은 주춧돌 하나를 잘 놓은 거죠. 제 입장에서도 이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단 걸 배웠고, 그때 다니던 회사에서 ‘넥스트 스텝(다음 단계)’을 준비할 무기를 마련한 셈이었고요.”-요즘 세대 표현처럼 ‘노예 탈출’을 꿈꾼 건가요.“하하, 어느 정도 맞는 말이네요. 아시겠지만 패션 쪽이 유명 디자이너나 모델이 아닌 이상, 엄청난 박봉이거든요. 일개 사원은 거의 ‘열정 페이’만 받고 일하는 수준이죠. 근데 매일 새벽에 녹초가 돼서 집에 들어가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이러다 빨리 죽겠구나 덜컥 겁도 났어요. 호주에서 직장을 다녀봐서 더 크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사회생활은 정말 영혼을 갈아 넣는 수준인 거 같아요. 물론 장점도 있지만, 의사결정 구조 같은 것도 좀 답답한 부분이 많고요. 패션 일러스트라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게 회사를 관둔 첫 번째 이유지만, 일이 편했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네요.”-지금도 여러 기업과 협업을 하잖아요. 한국과 외국 회사들이 많이 다릅니까.“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한데, 각자 장단점이 있긴 해요. 한국 회사들은 정말 일처리가 시원시원하죠. 일을 우선해서 휴일에도 의사소통이 잘 되고요. 해외 기업은 마감 직전인데도 연락이 안 되는 일이 허다하니까요. 다만 한국은… 윗선의 입김이 너무 세다고 할까요. 담당자들과 다 합의해서 진행하던 일도 임원 같은 분들이 틀어버리면 다 ‘리셋’되는 경우들이 생겨요. 물론 결정권자의 의견이 중요하지만, 현장 목소리가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전업 작가가 된 뒤엔 그런 스트레스는 줄었겠네요.“그 역시 장단점이 있죠. 확실히 수입은 회사 다닐 때보다 낫고, 스스로 일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건 큰 매력이죠. 하지만 업계 트렌드를 꼼꼼히 체크하면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는 건 적지 않은 부담이에요. 게다가 이젠 기업이 저의 고객이잖아요. 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클라이언트가 뭘 원하는지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야 해요. 오히려 시키는 대로 할 때보다 더 조심스러울 때도 많아요. 다행히 좋아서 하는 일이고, 협업을 하는 쪽도 제 작품이 맘에 들어 제안하는 거니까 직장인처럼 답답한 상황을 많이 겪진 않죠.” (하편에서 계속)정양환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넘어지고 쓰러져도 꺾이지 않는 청년’ 진도진 씨(상)▶‘넘어지고 쓰러져도 꺾이지 않는 청년’ 진도진 씨(하)“제가 원래 그리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내성적인 편이죠. 그런데 페리블루와 함께 하며 인생의 껍질 하나를 깨고 나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뭔가를 향해 노력하는 게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할까요. 그건 어디서도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멤버 슬) 청계천을 가끔 걷는다. 뚜벅거리다보면 광장시장 언저리에서 드문드문 마주치는 어르신이 한 분 있다. 지금껏 말을 건네 본 적은 없다. 다만 그때마다 혼자 지은 별명을 슬쩍 속으로 불러본다. ‘호루라기 봇짐 할배.’ 이유는 간명하다. 항상 괴나리봇짐 같은 걸 지고 입엔 호루라기를 문 채여서다. 지난달 말 서울 백암아트홀 연습실에서 걸그룹 ‘페리블루’를 만났을 때, 뜬금없이 그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왜였을까. 뭐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데. 그저 별명까지 지어놓고 얼굴 한 번 제대로 쳐다본 적 없구나 싶었다. 왜 그리 호루라기를 불어대는지 알아볼 맘도 없이. 그냥 성가셔서, 얼른 지나치고 싶었을 뿐. 우린 다들 서로에게 그러고 사는구나.어쩌면 페리블루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수없이 쏟아지는 걸그룹 보이그룹들. 스쳐지나가기도 버거울 정도다. 물론 그들이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지 귀를 기울여야할 의무는 없다. 누군들 수없이 피고 지는 세상의 꽃들을 어찌 일일이 챙겨보겠나. 어쩌면 페리블루도 그걸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물론이죠. 우리 미래가 장밋빛만 가득하지 않다는 건 저희가 더 잘 알아요. 소속사도 없이 활동하다보면 한계를 느낄 때도 적지 않고요.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각자 생계도 꾸려야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월세 감당하는 것도 만만치 않죠. 근데 그게…, 꿈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되나요?”(멤버 선아) 실제로 페리블루 멤버들은 삶을 꾸려가는 게 만만치 않다. 만화카페 알바, 일반 사무직 직장인, 보컬트레이너, 온라인 패션모델…. 그러다보니 함께 연습하러 모이는 건 일주일에 1, 2번 밖에 짬을 낼 수 없다. 그것도 퇴근한 뒤에야. 그렇게 보통 오후 10시쯤 모인 멤버들은 다음달 오전 5시에야 안무와 노래 연습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하룻밤 잠을 포기한 채 새벽버스가 다닐 때까지.“당연히 피곤하고 힘들죠. 근데 그거 아세요? 끝내고 아침 찬바람을 맞을 때 오히려 머리가 더 또렷해져요. 그날 연습이 잘 됐으면 만족스러워서, 뭔가 좀 잘 안 됐을 땐 어떻게 부족한 걸 채워야할지. 그 상쾌함은, 제가 뭔가 한발 더 다가서고 있다는 기분 같은 거예요.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멤버 혜영)페리블루 멤버 중에는 큰언니 진도진 씨처럼 아이돌 기획사 연습생 시절을 보낸 이들이 여럿 있다. 그들 역시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기고 소속사를 나왔다고 한다. “죽을 만큼 힘들었죠. 근데 지금 버티고 있는 거 보면, 진짜 죽을 만큼 힘든 건 아니었던 거예요. 그러니 남은 힘을 더 집중해서 쏟아 부어 봐야죠.”(멤버 시호) 꽤나 다부지고 야무진 말투였지만, 실은 직접 마주한 페리블루 멤버들은 대부분 아직 ‘솜털도 덜 가신’ 친구들이다. 올해 백제예술대 K-POP과를 졸업했으니 대부분 20대 초중반. 놀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들인데, 너무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저희가 페리블루를 ‘취미 활동’으로 여겼다면 그래도 되겠죠. 근데 그렇게 대충 즐기는 거라면 보시는 분들도 금방 알지 않을까요. 멤버들이 음악을 시작한 이유는 각자 다를 거예요. 그런데 함께 땀을 흘리는 이유는 하나예요. 진짜 제대로 끝까지 해보자. 그 앞에 성공이 기다릴지 실패가 기다릴지는 누구도 모르죠. 그런데 결국 원했던 걸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쉬움은 남기지 말아야 하니까요.”(멤버 선아)“인생 전체로 봤을 땐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죠. 하지만 걸그룹으론 그리 많은 기회가 남아있는 건 아니에요. 언제까지 춤추고 노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얘들이 해봐야 어디까지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대중의 마음을 얻는 게 그리 쉬울 리도 없고요. 하지만 언젠가는 ‘페리블루는 진심을 다해서 노력하는 친구들이야’라는 얘길 듣고 싶어요.”(멤버 시호)늦은 시간 연습실을 나서며 버스정류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켰다. 페리블루 네 글자를 치고 뮤직비디오를 다시 찾아봤다. 연습실에 오기 전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2가지 생각이 떠올랐었다. ‘기대보다 음악이 좋다’와 ‘주변 여건이 지금보다 나았다면.’어둔 밤 여전히 불 켜진 연습실을 다시 올려다봤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페리블루를 관심 깊게 바라볼진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을 만나기 전 떠올렸던 생각에서 한 가지, ‘기대보다’는 빼기로 했다. 페리블루는 ‘음악이 좋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청계천 봇짐 할배는 누군가 가까이 있으면 절대 호루라기를 불지 않았다.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졌을 때 홀로 단발마처럼 빽 하고 불었다. 남들에게 불편을 끼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듯. 어쩌면 어르신에게 호루라기는 힘든 봇짐을 이겨내는 자신을 위한 응원도구가 아니었을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남들이 뭐라건 가야할 길을 가기 위해. 그렇게 걸어가는 인생은 절대 누추하지 않을 테니.페리블루는 그 소중한 호루라기를, 이미 찾았는지도 모르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은 세계 호텔업계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나라입니다. 관광지로서도 매력적이지만, 특히 한국인 여행객은 좋은 안목을 지녀 호텔 입장에서 특별한 고객일 수밖에 없죠. 우리가 한국과의 사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호텔·리조트 연합인 ‘더 리딩 호텔 오브 더 월드(LHW)’가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팬데믹으로 3년 동안 중단했던 ‘코리아 쇼케이스’를 개최했다. 1928년 유럽에서 38개 호텔이 합심해 출범한 LHW는 현재 ‘리츠 파리’ ‘카펠라 싱가포르’ 등 80여 개국에서 엄선한 최고급 럭셔리 호텔 400여 개가 회원사인 세계 최고의 호텔 체인 브랜드이다. 국내에선 신라호텔과 시그니엘 서울 등 단 2곳만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이날 쇼케이스에선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총괄하는 크레이그 애덤슨 전무가 참석해 LHW의 한국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쇼케이스에 앞서 동아일보와 단독으로 만난 애덤슨 전무는 “개인적으로 첫 방한인데,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서울에 오게 돼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팬데믹으로 모두가 어려운 와중에도 LHW에 40개가 넘는 호텔이 신규 회원으로 가입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LHW는 호텔들이 각자의 독립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지역에서 가장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길 요구합니다. 지난해 한국인 여행객도 미국 하와이와 스위스, 프랑스에 있는 LHW 호텔들을 많이 방문하셨죠. 세계 어느 곳에서도 LHW 투숙객이 ‘친절한 환대(Kind hospitality)’를 경험하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애덤슨 전무는 특히 “한국인 여행객이 LHW 호텔에 투숙한 비율이 2021년 대비 지난해 약 240% 증가한 건 매우 고무적”이라며 “이는 팬데믹 이전 수준의 약 83%를 회복한 수치”라고 설명했다.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 187%, 인도 154%, 싱가포르 150%와 비교하면 월등히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그는 “올해 코리아 쇼케이스는 ‘포숑 호텔 교토’(일본) ‘에스파시오 더 주얼 오브 와이키키’(하와이) 등 세계적인 호텔이 참여해 한국인의 세련된 취향에 맞는 여행지를 소개했다”고 전했다. 팬데믹 이후 회복세를 타고 있는 호텔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애덤슨 전무는 “최고의 호텔은 단지 하룻밤 묵어가는 숙소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행객이 호텔에 머무는 건 그 지역사회의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가 돼야 한다”며 “최근 LHW는 세계 여러 곳에서 성과를 거둔 다양한 경영 테크놀로지를 회원사들이 공유해 함께 발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전했다. “LHW는 800개 항목으로 이뤄진 체크리스트를 마련해 해마다 세계의 모든 회원 호텔들을 일일이 점검합니다. 그만큼 가입도, 자격 유지도 까다롭지만 회원 호텔들의 퀄리티를 믿을 수 있죠. 당연히 한국의 또 다른 호텔들도 신규 회원으로 영입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산과 제주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한국의 아름다운 바다와 가까운 도시에서 조만간 LHW 회원 호텔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3] 드라마 ‘웬즈데이’“절대 그걸 잃지 마. 타인이 널 규정하게 두지 않는 거. 그건 재능이야. …가장 흥미로운 식물은 그늘 밑에서 자라는 법이지.”(넷플릭스 드라마 ‘웬즈데이’에서) 괴짜 감독 팀 버튼이 빚어낸 화려한 진수성찬. 하지만 거기엔 지지리도 바뀌지 않는 세상의 법칙 하나가 화인(火印)처럼 새겨져 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그 ‘정상’과 ‘보통’에 대한 집착이. 넷플릭스가 지난해 말 선보인 ‘웬즈데이(Wednesday)’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친숙한 ‘아담스 패밀리’의 스핀오프(외전)다. 기괴한 호러를 사랑하는 비정상 가족의 장녀인 웬즈데이(제나 오르테가)가 부모가 다녔던 네버모어 아카데미에 입학해 겪는 좌충우돌 모험담이 시즌1에서 펼쳐진다. 지금까지 넷플릭스에서 개봉 3주 만에 누적 시청 10억 시간을 넘어선 건 웬즈데이와 ‘기묘한 이야기 시즌4’ ‘오징어 게임’뿐이라 한다. 이런 성공엔 원작 ‘아담스 패밀리’가 지닌 독특한 질감도 한몫했다. 1938년 미국 월간지 뉴요커에 한 컷 만화로 세상에 등장한 이 작품은, 찰스 아담스(1912~1988)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아담스는 어린 시절부터 밀실공포증을 겪으며 무덤에 갇힌 시체의 처지를 상상했다고 한다. 어른이 돼서도 버터 칼을 사형집행인 도끼 형태로 만들어 친구들에게 “미친 X” 소릴 들었다는데, 이런 고상한(?) 취향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아담스의 친구 중엔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도 있다.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엔 “찰스 아담스나 그릴 그림”이란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아담스는 회당 35달러밖에 못 받았지만, 작품은 연재 당시에도 엄청난 화제였다. “소수의 정서를 대변해 ‘정상적인 미국인(normal American)’이란 가치를 비꼰 수작”(온라인웹진 코믹북)이란 평가다. 이후 TV시트콤과 영화 등으로 줄기차게 부활한 것도 이런 ‘주류적 시선의 전복’이란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관습 비틀기에 대한 열광이 이 작품에 국한되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근사한 설정임은 틀림없다. 드라마 웬즈데이도 그런 ‘경계 밖 정서’를 잘 물려받았다. 적당히 삐딱한, ‘요즘 갬성’에 딱 맞는 종합선물세트다. 포장을 뜯으며 고대했던 먹거리가 빵빵하다. 해리 포터가 다닌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별종 버전쯤 되는 네버모어를 배경으로 ‘청춘물+추리물+공포물+코믹물+기타 등등’이 우아하고 유려하게 버무려졌다. 80년 넘은 클래식을 ‘레트로’한 노포(老鋪)처럼 차려내되,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없는 10대 소녀의 정정당당한 솔직함을 앞세워 청년세대의 까다로운 입맛마저 사로잡았다. 웬즈데이는 왠지 한국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도 닮은 구석이 많다. 장애든 마법이든 보통사람과는 다른 여주인공. 사회적 약자이면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로 난관들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 뼈대. 쉽지 않은 역할을 찰떡같이 소화한 박은빈과 오르테가의 연기가 극의 짜임새를 확 끌어올렸단 점까지. 다만 이들이 사랑스러울수록, 혀끝이 더 시금털털해지기도 한다. 과연 현실에서 만났다면 그들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기나 했을까. 우리가 소송에 얽혔을 때 젊은 자폐스펙트럼 변호사에게 흔쾌히 의뢰를 맡길지. 내 자식이 사회가 외면하는 정신세계를 가진 아이와 친구가 되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 확신이 들지 않는 스스로가 부끄럽기만 하다. 지난해 출간된 ‘편향의 종말’에서 작가 제시카 노델은 “혐오가 나쁘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사회적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어쩌면 웬즈데이는, 그리고 우영우는 넌지시 일러주고 싶은 게 아닐까. ‘당신이 날 바라보고 있는 건 이게 드라마에서나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야’라고. TV 밖에선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적대시하는 세상이 이어지는 한, 우린 그저 그들을 방패삼아 자기위안만 챙긴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진짜 삐뚤어진 건 어쩌면 웬즈데이가 아니라 우리네일지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 ‘넘어지고 쓰러져도 꺾이지 않는 청년’ 진도진 씨(하)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상편(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483243?sid=103)에서 계속“지금의 내가 돌아가 그때에/ 너에게 해주고픈 말/ 너는 나아간 거야/ 길을 잃은 게 아니야… 포기한 게 아니야/ 잠시 숨을 쉰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진도진의 노래 ‘지금의 내가 그때에 너에게’에서) 한류의 바람은 어마무시하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 아이돌 지망생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허나 보통 한 해에 데뷔하는 건 1000명 안팎에 그친다. 한 방송국 PD는 “산술적으로 그런 거고, 실제 얼굴을 알리는 건 100명도 안 된다. 0.01%의 확률보다 낮은 것”이라며 “데뷔도 하늘의 별 따기지만, 데뷔 뒤에도 그냥 사라지는 이들이 훨씬 많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걸그룹 ‘페리블루’ 진도진 씨(29)는 이미 2번 데뷔했으니, 겉으로 보자면 하늘의 별을 따냈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연습생과 걸그룹으로 겪은 우여곡절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기를 당한 거나 다름없던 그 시기를 떠올리며 도진 씨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제 다신 안 울겠다고 다짐했는데…”라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그렇게 끝내려했던 걸그룹 생활을 그는 왜 다시 시작하게 된 걸까. -도진 씨도 힘들었겠지만, 부모님도 속상하셨겠네요.“네, 항상 죄송하죠. 아빠 엄마는 언제나 딸자식을 믿어주는 분들이었어요. 당연히 연습생 때도 걱정은 하셨지만, 제가 가는 길을 반대하지 않고 묵묵히 응원해주셨죠. 그런데 돈까지 뺏겨가며 두 번째 그룹을 끝낸 뒤엔 ‘이젠 다른 일 찾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씀하셨어요. 저도 벌써 20대 후반인데 면목도 없었고요. 친구들은 이미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냥 죽으란 법은 없나 봐요. 아는 분 소개로 운 좋게 한 회사에 취직하게 됐어요. 솔직히 절 받아줄 이유도 없는데 감사한 일이었죠.”-어떤 직종이었나요.“웹툰 관련 회사였는데, 직함은 막내 프로듀서였어요. 뭐 그냥 시키는 건 다 해야 하는 자리예요. 주로 작가들 만화 관리하는 업무였습니다. 초기엔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출근은 했는데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창피한 얘긴데, 그땐 e메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도 잘 몰랐어요. 노래하고 춤추라 그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할 수 있는데, 그런 일들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남들에겐 쉬운 세상살이가 저에겐 너무 낯설고 힘겨웠어요.”-드라마로도 나온 만화 ‘미생’의 장그래 같네요.“네, 진짜 그랬어요. 아, 또 하나 닮은 게 있어요. 회사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프린터 하나 다룰 줄 모르는데도, 선배나 상사들이 구박하지 않고 차근차근 알려주셨죠. 회식 같은 거 하면 뭘 준비하면 좋을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그래서 저도 진짜 열심히 배웠어요. 집에 가서도 잠 줄여가며 공부하고요. 이젠 포토샵이나 영상편집 같은 것도 잘해요! 첫 월급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세금 떼고 180만 원 정도 됐는데, 기분이 정말 묘했어요. 살면서 직접 벌어본 제일 큰 돈이었으니까요.”-잘 다니던 직장은 왜 관둔 건가요.“1년 넘게 회사 다녀보니까 알겠더라고요. 한국에서 사회생활하려면 대학 나와야 한다는 걸. 어찌 보면 이력서에 ‘한 줄 추가’인데도, 연봉과 대우 등 모든 게 달라지더군요. 물론 제 탓도 있으니 감수해야 하지만, 그보다 제 ‘전공’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평생 해온 게 연습생과 걸그룹이니 그걸 활용할 방법은 뭘까. 그때 백제예술대학 K-Pop과를 알게 됐어요. 이거다 싶었죠. 거기서 뭔가 나의 길을 찾아볼 수 있겠구나. 하지만 직장 다니며 수능을 준비할 능력은 없고, 회사에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어요.”-거기서 지금의 ‘페리블루’ 멤버들을 만난 거죠.“처음 입학할 땐 걸그룹 할 생각은 1도 없었어요. 그 가시밭길을 다시 가고 싶지 않았죠. 그저 제 목표는 하나였어요. 무조건 장학금! 훨씬 어린 친구들이 동기라 미안하긴 했지만, 더는 부모님 도움 받기가 민망했거든요. 공부하고 알바해서 등록금 생활비 모두 제 손으로 마련하자는 생각뿐이었어요. 근데 과에서 수업의 일환으로 프로젝트 그룹을 만드는 오디션을 본다는 거예요. 특히 플러스 점수까지 준다니, 저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는 기회였죠. 그게 페리블루의 시작이었습니다.”-그렇게 처음 내놓은 노래가 2021년 ‘Call My Name’이군요.“교수님 등 주변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지만, 저희 멤버가 하나하나 만들고 결정해가며 내놓은 곡이에요. 그걸 준비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이전 걸그룹 때는 무조건 정해준대로 시키는 것만 해야 했었잖아요. 근데 이번엔 우리 뜻대로, 우리 의견을 적극 반영할 수 있었죠. 물론 프로들이 만진 것에 비하면 부족한 게 많죠. 하지만 댄스 능력 있는 멤버가 안무 짜고, 보컬 좋은 친구가 노래를 다듬고. 의상부터 메이크업, 뮤직비디오까지 모든 걸 저희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1회성 프로젝트였는데 계속 팀을 유지하게 된 게 그런 이유인가요.“맞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멤버들이 하나같이 착하고 열정이 가득했어요. 실은 저를 포함해 대부분 올해 2월 졸업했거든요.(※도진 씨는 수석 졸업했다.) 근데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아쉬웠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하고 하루라도 더 함께 하고 싶단 맘이었죠. 물론 저희도 의견이 안 맞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언제나 서로 속을 터놓고 얘기하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나가요. 팀을 이어가기로 한 것도 6명 모두 함께 상의해서 결정했어요.”-소속사도 없는 ‘인디 걸그룹’이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물론이죠. 학교에서 연습실도 빌려주고, 교수님들과 인디음악레이블 ‘미러볼뮤직’도 지원해주지만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죠. 그래서 멤버들 모두 알바나 직장을 다니며 번 돈을 모아서 꾸려가고 있어요. 저도 온라인 패션모델 등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감사하게도 제가 걸그룹 활동하며 알게 된 분들도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세상엔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좋은 분들도 정말 많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안타깝지만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진 못하고 있습니다.“어렵다는 건, 처음부터 각오했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춰도 주목받기가 쉽지 않는데 저희는 아무 것도 없는 ‘흙수저’니까요. 하지만 이쪽 일 하면서 세상일은 모른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모두에게 인정받던 능력 있는 연습생이 데뷔조차 못 하는 경우도 있고, 정말 재능도 인성도 별로라고 했던 친구가 빵 뜨는 것도 봤죠. 그렇다고 모든 걸 운에 걸겠단 얘기는 아니에요. 최선을 다해 가진 걸 쏟아 붓고 기회가 생기길 간절히 바라는 거죠. 그리고… 행여 실패하더라도,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진 말자는 게 페리블루의 모토입니다.”-아이돌이란 도대체 뭘까요. 한때 관두려 했는데 다시 도전하고 있는 이유는.“음…,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한테는 ‘불꽃놀이’ 같은 거예요. 저도 잘 알죠. 어쩌면 금방 사라진다는 거, 덧없다는 거. 하지만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미 마음을 빼앗겨 버린 걸요. 그 불꽃이 제 눈에 탁 하고 박힌 뒤엔 가슴에 새겨져 지워지질 않는.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요. 닿을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진 않지만, 그냥 사랑에 빠져버린 거죠.”-만약 친척동생이나 훗날 자식이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하면요.“(단숨에) 무조건 응원하고 적극 도와줄 거예요. 물론 진심인지, 정말 열심히 할 건지는 지켜봐야겠죠. 하지만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잖아요. 제 부모님이 절 믿어준 것처럼 저도 그들을 믿어주고 싶어요. 아, 딱 한 가지는 꼭 확인할 거예요. 계약서는 제가 한 줄 한 줄 밑줄 쳐 가며 다 읽어볼 겁니다. 아는 지인과 변호사 다 동원해서 꼼꼼히 체크할 거고요.”-의외네요. 힘든 시간을 보내서 말릴 줄 알았거든요.“사람이 꿈을 가진다는 건 나쁜 게 아니잖아요. 제가 아픔을 겪었다고 그들도 그럴 거란 법도 없고요. 제가 지금 페리블루를 하는 이유도 그거예요. 실패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뭣보다 하고픈 일을 시도조차 못해본다면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모두가 성공할 순 없지만, 모두가 꿈꿀 수는 있는 거잖아요. 먼 훗날 돌아봤을 때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지요. 그게 제 인생, 제가 가는 길이니까요.” 아마도 도진 씨는 이런 답을 얻기까지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걸그룹을 탈퇴했을 당시, 그는 꽤 오랫동안 “길에서 ‘카니발’(연예인들이 업무용으로 주로 타는 차)만 마주쳐도 속이 울렁거렸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 깊숙이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는 다시 ‘정면승부’를 벌이기로 했다. 그래서일까. 페리블루로 만난 진도진은 무척 빛나 보였다. 다만 ‘꼰대’스럽지만 어쭙잖게 전할 말이 있다. 아이돌 연습생을 ‘상품’이라 지칭하는 것에 대해서다. 그쪽 업계가 어떤 세계인진 잘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그것도 어린 청년을 물건 취급하는 건 결코 옳지 않다. 그건 어떤 경우라도 수긍하고 받아들여선 안 된다. 물론 우리도 연예인들을 바라보며 자주 잊곤 한다. 그들 역시 하나의 고귀한 인격체라는 걸. 페리블루는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뮤지션이 되어주길. 폭죽으로 사그라지지 않는 밤하늘의 별처럼.정양환기자 ray@donga.com}
“가까운 이들에게 따뜻한 그림이 담긴 카스 맥주잔으로 마음을 전하세요.” 최근 오비맥주 카스가 온라인으로 선보인 이벤트 ‘카스 초대잔’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카스 초대잔에는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에게 전하는 진심 어린 메시지를 담은 일러스트가 그려졌다.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122만 명이 넘는 이규영 작가, 캐릭터 일러스트레이터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영이 작가와 협업했다. 이 작가는 소중한 이들과 맥주 한 잔이란 친근한 분위기를 특유의 감성이 넘치는 그림으로 표현해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평을 듣는다. 카스 소셜미디어 채널이나 맥주병·캔에 있는 QR코드를 이용해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다. ‘귱 스튜디오(Gyung Studio)’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이규영 작가를 만나봤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맥주 브랜드와 처음 협업한 소감은 어떤가. “그간 게임이나 영화관, 패스트푸드 등 여러 업체와 작업해 왔다. 그런데 카스는 ‘국민 맥주’ 아닌가. 카스에서 제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협업을 제안해줘 너무 기뻤다.” ―일러스트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정말 좋아했다. 아버지가 그림을 잘 그리셔서 옆에서 배우기도 했다. 이후 애니메이션학과에 진학하고 디자인 회사를 다니며 자연스레 그림을 직업으로 삼았다. 본격적인 일러스트는 와이프와 연애할 때 그리기 시작했다. 함께한 순간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며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 같다.” ―‘카스 초대잔’ 일러스트 작업에서 가장 고려한 건 뭐였나. “평범한 사람들이 보통 맥주를 마시는 건 주로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닐까. 그래서 맥주 한 잔을 통해 느끼는 ‘기쁘고 즐거운 긍정적인 순간’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개인적으로 맥주 한 잔을 떠올리면 친구들이 떠올랐다. 평소 성격이 좀 예민하거나 별날 때도 있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작가에게 ‘맥주 한 잔’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루의 일과를 마친 뒤 집에 와서 씻고 와이프와 밥을 먹고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보며 맥주 한 캔을 마신다. 그때 ‘오늘 고생했다, 열심히 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한다. 맥주 한 잔은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산, 스스로를 위한 보상이 아닐까. 동시에 함께 열심히 산 와이프에게 전하는 응원과 격려이기도 하다.” ―카스 초대잔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요즘 주변을 보면 다들 힘들고 어려운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우리들에게 맥주 한 잔이란 소소하지만 행복한 순간을 전하는 선물이 되어 주지 않을까. 제 그림이 그런 분들에게 맥주 한 잔을 더 맛있게 느껴지게 만드는 안주 같은 역할을 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진심으로 빌게. 너는 더, 행복할 자격이 있어”(아이유의 노래 ‘이런 엔딩’에서) 까만 밤, 길을 가는 건 쉽지 않다. 때론 무섭기도 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뭐가 기다릴지 모른다. 돌부리에 걸려 생채기가 날 수도. 어쩌면 더 깊은 낭떠러지 앞에 다다를지도. 허나, 그래도 기어코 걷는 이들이 있다. 파리한 손전등 불빛에 기대서라도 발을 내딛는다. 이미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데도, 기어코 무릎을 세운다. 그게 가야할 길이라 믿으며. 걸그룹 ‘페리블루’ 멤버 진도진 씨(29)는 13년째 그 ‘길’ 위에 선 청년이다. 페리블루는 2021년 데뷔한 6인조 아이돌. 포탈사이트에 프로필이 뜨지만, 100명에게 물으면 100명 모두 “누구?”라 반문할 정도로 생소하다. 그도 그럴 게, 소속기획사는커녕 홍보담당자나 매니저도 없이 모든 걸 그들끼리 꾸려가는 ‘자생(自生)’ 걸그룹이다. 게다가 도진 씨는 1994년생. 걸그룹 치곤 적지 않은 나이다. 본인도 “우리나이로 벌써 서른”이라며 “근데 스물부터 (데뷔하기엔) 나이 많단 소릴 들어 별 타격도 없다”며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잘 나간다는 걸그룹 ‘뉴진스’ 막내는 2008년생이다. 각오는 했겠지만, 그들에게 현실의 벽은 높고 두텁다. 활동 3년째지만 인지도는 제로에 가까운 상황. 인기도 수익도 안개처럼 가리어져 있다. 그런데도 도진 씨는 인터뷰 내내 “페리블루라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그저 “조금만 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길, 조금만 더 세상에 인정받고 싶을 뿐”이라며. 어느 시린 겨울 날, 가슴에 소중한 불씨를 품은 진도진 씨를 만나봤다.-걸그룹한테 실례일 수 있지만, 자기소개부터 부탁할까요.“아유, 무슨 말씀을요. 원래 아이돌은 첫째도 둘째도 ‘인사’예요. 안녕하세요! 페리블루 진도진입니다! (웃음) 실은…, 인터뷰 요청 들어왔을 때 놀랐어요. 저희를 알리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전 여러 번 ‘넘어졌던’ 사람이잖아요. 별로 이룬 게 없는데 기사거리가 될지 걱정됐어요. 그런데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해주셔서 용기를 얻었습니다.”-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죠. 언제부터 아이돌을 꿈꿨습니까.“원래는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어요. 중학교 때 우연히 뮤지컬을 본 뒤 홀딱 빠져버렸죠. 학원에 다닌 건 중3때부터였습니다. 그때 눈여겨 보시던 학원 선생님께서 걸그룹 도전을 추천하셨어요. 바로 뮤지컬 배우가 되는 건 진입장벽도 높고, 제가 그쪽으로 재능이 있다고 봐주신 것 같아요.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아이돌이 되면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단 점도 끌렸고요.”-그 뒤 진로를 바꾼 건가요.“결정적인 계기는 고등학교 올라가 댄스동아리를 하면서였어요. 제가 서울여고 나왔는데, 우리 팀이 꽤 유명하거든요. 인근 학교는 물론 여의도나 강남에 있는 학교도 초대받아 공연 다닐 정도였어요. 중앙고 축제에 갔던 것도 기억나네요. 무대에 오른다는 게 얼마나 ‘끝내주는’ 일인지 온몸으로 깨달았죠. 본격적으로 관련 학원도 다니고 오디션도 보러 다녔어요.”-기획사 오디션도 정말 통과하기 어렵다면서요.“맞아요. 어렵게 준비해 갔는데, 1분도 안 돼 ‘수고하셨습니다’라며 퇴짜놓는 경우도 많아요. 다행히 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작곡가 분과 협업하는 기획사에 고2 때 들어가게 됐어요. 거기 1년 반 정도 있었나? 기약 없는 연습생 생활이 시작된 거죠. 그 당시엔 스물세 살에나 데뷔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때부터 6년이나 여기저기 옮겨 다녔네요.”-연습생 생활은 어땠습니까.“요즘은 꽤 알려지기도 했지만, 상상을 초월하죠. 일단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오전 9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끝납니다. 학생 때도 수업 끝나자마자 가서 10시까지 있고요. 휴일도 없어요. 1년에 설날, 추석 하루씩 쉬었나? 짜여진 시간대로 계속 보컬 연습, 안무 연습…. 중간에 휴식시간도 거의 없어요. 가끔 우리끼리 연습할 때, 화장실에 숨어서 좀 쉬려고 해도 바로 연락이 와요. (어떻게 알고요?) 연습실 여기저기 CC(폐쇄회로) TV가 달려서 금방 알아요.”-카메라로 감시한다고요. 일부에서나 벌어지는 일 아닌가요.“음…, 제가 있었던 곳은 전부 다 그랬어요. 몰래 뭐 먹진 않는지, 늘어져 쉬진 않는지 체크하는 거죠. 삼시세끼 다 연습실에서 해결할 때가 잦은데, 동네 편의점도 함부로 못 가게 해요. 연습실이 대부분 지하에 있는데, 하루 종일 있다 나오면 핑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요. 갑갑하고 힘들었지만, 기획사 입장도 이해는 가요. 투자자나 업계 관계자들이 언제 방문할지 모르니 항상 스탠바이 하는 거죠. ‘상품’을 잘 준비했다가 언제든 선보일 수 있어야 좋은 결과로 이어지니까요. 기획사로선 돈을 투자한 건데 상품에 하자가 있으면 안 되잖아요.”-상품이요? 아이돌 연습생을 그렇게 부르나요.“어…, (잠시 뜸들이다가) 네, 그쪽 업계에선 다들 그렇게 불러요. 잘 만들어서 팔아야 하는 상품. 저희한테 직접 얘기하는 분도 많았어요. ‘너희를 어떻게 좋은 상품으로 만들까 고민한다’ 뭐 이런 식으로요. 하도 익숙해서 그땐 그게 당연한 거라 여겼어요.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게 옳진 않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스트레스 받으면 그 세계에선 못 살아남죠.”-그런 시간을 버텨내고 23세 때 데뷔한 거네요.“네. 오래 걸렸죠. 이러다 데뷔도 못 하는 게 아닌지 두렵기도 했죠. 스무 살 때부터 걸그룹하기엔 나이가 많단 소릴 지겹게 들었거든요. 그러다 스물세 살 때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당시 3대 대형기획사 가운데 한곳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아서 연습생으로 들어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작은 기획사에서 ‘바로 데뷔할 멤버를 찾는다’며 걸그룹 영입을 제안했어요. 스스로 생각해봐도 나이도 적지 않고, 또 연습생 생활을 한다는 게 두려웠어요. 지금이면 그래도 대형기획사를 갔을 텐데, 그땐 데뷔라는 유혹이 너무 컸습니다.”-왠지 후회하는 것처럼 들립니다.“너무 힘들었거든요. 데뷔는 했는데 꿈꿨던 생활과 너무나 달랐죠. 정말 그때 멤버들끼리 ‘우리 이러다 지리 선생님 해도 되겠다’는 푸념도 했어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행사들을 뛰러 전국에 안 가본 데가 없거든요.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를 당일치기로 돌고.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김밥이라도 챙겨주면 감사할 정도였죠. 그 와중에 재연프로그램 출연도 했어야 했습니다. 근데 2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활동했는데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아, 초기에 용돈이라며 30만 원 받은 게 한번 있네요.”-말도 안 돼요. 보통 가수는 활동하면 정산을 해주잖아요.“정산은 꿈도 못 꿨죠. 그건 이해해요. 뜨질 못했으니. 근데 쉬는 날도 없이 일했는데, 심지어 행사를 하루 서너 개씩 했는데 돌아오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심지어 녹초가 돼서 밤에 숙소에 돌아가다가 저녁 사주는 것도 아까워하더라고요. 대놓고 그런 기색을 내비칠 땐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이었나 허망했어요. 매일 편의점 김밥 도시락 먹으며 일했는데 과연 나아지긴 하는 걸까.”-그래서 2년 만에 관둔 건가요.“네, 앞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마침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한 분이 새로운 4인조 걸그룹 제안을 해주셨어요. 방송 쪽에선 꽤 알려진 분인데, 그분이 저희를 음악프로그램에 꽂아주신 적도 있어요. 제 사정도 잘 아시고 인간적으로 믿음이 갔던지라, 기존 회사와 합의 하에 계약을 끝내고 옮겨갔어요. 근데 그분이 기획사를 차려 모든 걸 새로 셋팅하다보니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니 각자 돈을 좀 마련해 와라….”-네? 걸그룹 멤버한테 돈을 내라고 했단 말입니까.“(한참 머뭇거리다가) 제3자가 보면,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거 잘 알아요. 그런데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좋은 분이라 믿었고, ‘같이 함께 만들어보자’는 청사진에 희망을 품었어요. 당시 너무 지쳐있기도 했고, 지금이면 하나하나 따져본 뒤 결정했겠지만…. 일단 기존 그룹에서 미래가 암울해서 탈출구가 필요했어요. 꽤 큰돈이라 결국 부모님한테 도움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게 죄송할 따름이에요.”-왠지 결말을 알 듯한 기분이 듭니다.“처음엔 나쁘지 않았어요. 공중파 음악방송도 출연하고, 나름 기대가 컸죠. 근데 데뷔 두세 달이 지나고 큰 반향이 없어서인지 분위기가 급변했어요. 사장님은 갈수록 얼굴을 비추는 일이 줄었고, 이상한 지방행사들만 가게하고. 하루 종일 숙소에 갇혀있다시피 한 적도 있고. 정신교육 시킨다며 몇 시간씩 운동장 뜀박질 시킨 적도 있었네요. 그 와중에 자꾸 돈이 더 필요하단 얘기만 하고, 말도 점점 거칠어지고…. 점점 첫 그룹 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어요. 그러다보니 멤버들끼리도 관계가 나빠졌고요. 결국 모든 걸 그만하고 싶단 맘이 들었죠.”-그렇게 2번째 걸그룹도 나오게 된 건가요.“그것도 참 쉽지 않았어요. 사장님이 계약을 안 풀어주는 거예요. 만나서 상의하자 해놓고 약속장소에 나가면 다른 일이 생겼다며 일방적으로 취소하길 여러 차례였어요. 자기한테 왔던 것처럼 또 다른 데 갈까봐 그랬는지, 아예 만나주질 않았어요. 몇 달을 끌다가 다른 관계자가 얘기를 전해주는데, 빙빙 돌려 말하더니 ‘돈을 좀 주면 계약해지해줄 거 같다’고….”-계약을 끝내는데 또 돈을 요구했단 말입니까.“상식적으로 어이없죠.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법적으로 대응하면 몇 달 몇 년이 걸릴 수 있다더군요. 저로선 지금 1분1초가 아깝고 아쉬운데, 그걸 버틸 재간이 없었어요. 결국 또 부모님이 나서서, 적지 않은 돈을 주겠다고 하니 그때서야 만나주더라고요….”(※이미 그렁그렁하던 도진 씨는 결국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추스를 시간을 갖고자 인터뷰를 한동안 멈췄다.) “죄송해요. 이제 눈물은 다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그 일 이후로 절대 안 울겠다고 다짐했는데도 가끔씩 컨트롤이 안 되네요. 하여튼…, 돈 주고 ‘앞으로 연예계 생활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쓴 뒤에야 계약해지했어요.”-각서를 왜 쓰게 한 건가요. 법적 효력도 없을 텐데.“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자기 평판에 나쁜 영향을 끼칠까봐 그랬던 게 아닐까요. 뭔가 제 잘못으로 계약이 파기됐단 기록을 남기려는 것 같았어요. 당시엔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냥 다 관둘 생각뿐이었니까.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걸그룹은 내 인생에서 끝났다고 여겼으니까요.”(하편에서 계속)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떠올려보면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이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이니까요. ※상편(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480149?sid=103)에서 계속“순덕 님은 ‘사는 게 너무 고달팠어요’라고 말한 뒤 ‘그래서 더 힘든 사람을 생각했어요’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 두 문장이 나란히 이어지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이슬아의 ‘새 마음으로’에서) “식사는 하셨어요? 커피 향이 몰려오니 괜히 허기지지 않나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이슬아 작가(31)를 만나고선, 속으로 두 번 적잖이 놀랬다. 그간 공개된 프로필 사진들을 보면 대체로 무표정해 다소 도도할 거란 인상을 받았다. 근데 막상 마주한 뒤엔 이리도 편안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이란 걸 알게 된다. 두 번째는 마음 쓰는 방식이었다. 지난해 첫 소설 ‘가녀장의 시대’는 작금의 청년 정서를 옴팡지게 담아냈단 평. 특히 가부장제나 남성중심사회를 유머러스하면서도 대차게 꼬집었다. 하지만 실제 만나본 작가는 이를 결코 ‘투쟁’의 영역으로 풀려 하지 않았다. 분명 문제점은 개선하고 나아가되, ‘우정’이란 이름 아래 소통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러 사회갈등세력이 선긋기에 골몰하는 시대에, 그의 우정론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했다.-작가 이전에 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았더군요.“별의별 알바를 다했죠. 결과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됐지만, 당시엔 생계를 위해서였어요. 대학 때 학비는 대출 받았지만, 월세나 생활비는 직접 벌어야했거든요. 수업 들으며 알바 뛰면 그걸로 일주일이 쉴 틈 없이 다 가버리죠. 누드모델을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어요. 시간 대비 고소득이니까요. 그때로선 합리적인 선택이었기에 지금도 혼란스럽거나 부끄럽지 않아요.” (※이 작가는 2011년부터 3년 동안 한국누드모델협회에 소속돼 정식 모델로 활동했다.)-어머니가 모델 때 입을 좋은 가운을 사주시는 대목이 책에 나옵니다.“부모님은 언제나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셨어요. 누드모델도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여 주신 거죠. 부모님은 열심히 사셨지만 집안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열아홉부터 손 벌리지 않고 직접 벌었습니다. 물론 전세금 생활비 걱정 안 하는 친구들이 부럽긴 했죠. 하지만 사회구조 자체가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건데, 부모님을 원망하진 않았습니다. 직접 돈을 벌며 누리는 자유도 있거든요. 스스로 꾸려나가니까 선택도 제가 하고 책임도 제가 지는 거죠. 다시 떠올려보면 버티는 쪽에 가까웠지만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부모님께는 아니어도 세상에 대한 원망이 생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음…, 그땐 그리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던 거 같아요. 오히려 요즘에 더 세상살이에 대해 고민하죠. 사회에 ‘경제적 계급’이 존재한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기후위기든 젠더갈등이든 모든 문제가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고민하지 않고서는 풀어내기 힘들다고 봐요.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먼저 정치나 법 등 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요즘 젊은 세대는 정치나 사회에 무관심하다고들 하잖아요.“제가 젊은 층을 대변할 순 없지만, 그런 말엔 동의하지 않아요. 주변을 보면 선거도 열심히 참여하고 정치 사회 문제에 적극 의견을 개진하는 청년들이 많거든요. 물론 이 역시 일반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청년들이 세상에 관심 없다는 선입견은 잘못됐다고 봐요. 단지 기성세대보다 목소리를 낼 기회가 덜 주어지는 게 아닐까요.”-그간의 작품들도 그런 의식이 잘 묻어났어요. 자전적 색채가 강한 첫 소설 ‘가녀장의 시대’ 역시 그렇습니다.“지금 이 시점에서 ‘나의 얘기’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거든요. 처음부터 전혀 익숙지 않은 캐릭터를 새로 창조할 필요성을 못 느꼈죠. 물론 ‘가녀장의 시대’는 소설이라, 책에 등장하는 슬아나 복희 웅이(부모님 실명) 등은 실제 인물과 이런 저런 차이점이 많죠. 부모님이 불편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흔쾌히 받아주셨어요.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지만 ‘심리적 유복함’은 넘쳐났거든요. 언제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항상 비빌 언덕이 돼 주셨습니다.”-소설은 형식도 독특했어요. 기승전결이 딱히 없고, 여러 짤막한 에피소드가 이어집니다. “처음부터 시트콤 형식을 염두에 두고 썼어요. ‘순풍산부인과’처럼 각 에피소드에서 얘기가 마무리되는 문법을 따랐어요. 아마 올해 ‘가녀장의 시대’가 드라마화 될 텐데, 처음부터 구상했던 거였어요. 방송국이랑 마무리 조율 중인데, 각본 작업에도 참여할 예정이라 이래저래 바쁠 것 같습니다.”-2021년 출간한 대화집 ‘새 마음으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청년 작가가 60대 이상인 보통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게 신선했어요.“작가로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의 많은 중요한 사실들이 의외로 덜 알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평생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노동에 오랫동안 헌신한 분들도 그렇죠. 병원응급실 청소 노동자라든가 수선가게 사장님, 농업인 등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를 겪으며 그걸 더 뼈저리게 느꼈어요. 난 농사짓는 법도 모르는데, 지금 내 앞에 차려진 밥상의 음식 재료들은 누구 덕에 여기까지 온 걸까. 그런 분들의 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겼어요.”-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뻘이셨는데 대화하기 어렵진 않았나요.“어릴 때 조부모 밑에서 자라서 그 세대 어른들과 얘기 나누는 게 두렵진 않았어요. 세상에 무척 중요한 노동을 꾸준히 해 오신 분들이라, 내용도 남달랐고요. 근데 ‘새 마음으로’는 제가 낸 책 가운데 가장 덜 팔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호응이 커서 놀랐어요. 유명하신 분은 하나도 없어서 관심 없을 줄 알았거든요. 역시 사람들은 소중한 얘기를 알아보는 힘을 갖고 있구나, 이 분들과 닮은 어른들이 우리 모두의 주변에 있기에 공감하는구나 싶었습니다.”-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와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까.“글쓰기 수업할 때 아이들에게 꼭 내는 과제가 있어요. 자기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인터뷰해보라고 하죠. 윗세대의 생애를 알면 자연스레 우리 근현대사도 배우는 거잖아요. 그걸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하나의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거죠. 물론 당연히 대화하기 싫은 어른들도 존재하죠. 그런데 말하기 싫은 또래 역시 있잖아요. 어쩌면 세대갈등은 사회가 만들어낸 ‘가상의 틀’이 아닐까요. 서로 소통하려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채, 그냥 저들은 저렇다며 단정 지어 버리는 거죠.”-다른 사회적 갈등도 마찬가지라 여기는 건가요.“네. 원인이 뭔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무슨 무슨 갈등이라 말하는 자체가 그걸 더 양산하고 조장한다고 봅니다. 그런 갈등론이 유효한 구석도 있겠죠. 하지만 대체로는 그런 시각을 가진 이들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 아닐까요. 예를 들어, 최근 젠더갈등 논란이 많은데 필요 이상으로 논쟁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어요. 젠더(성) 자체가 문제는 아니잖아요. 좀더 생산적인 논의가 주목받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와 다른 생각이나 입장을 가진 이들과 어떻게 ‘우정’을 나눌 수 있는지가 중요하겠죠.”-‘우정’이란 표현이 신선하네요. 서로를 부정하는 극단주의는 안 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맞아요. 타인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요. 세상은 복잡하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잖아요.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가부장적인 태도가 무척 싫었어요. 하지만 그분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정서적 유산도 무시할 수 없죠. 그걸 무 자르듯 나눠서 얘기할 순 없지 않나요. 다소 예의 없어 보이지만, 할아버지와 우정을 맺는다는 건 관계를 끊지 않고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거죠. 누구와도 대화를 이어가며 서로 공감을 찾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하지만 모바일이 세상을 지배하고 코로나19까지 겪으며, 각자 자기 삶에만 관심 갖는 세상이 됐다고들 합니다.“그게 가장 슬픈 대목이에요. 최근에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과거엔 정보라는 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구분됐대요. 하지만 인터넷 시대가 온 뒤 내가 아는 정보와 아직 검색 안 했을 뿐인 정보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이런 시각은 결국 남의 지식이나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아요. 타인은 우리에게 배움을 주는 존재여야 하는데, 그런 접점이 점점 희미해지는 거죠. 정신 차리고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알게 되는 세상’이잖아요. 유튜브 알고리즘이 대표적인 사례죠. 그런 의미에서 책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녔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관계 맺기의 한 가지 방식이니까요.”-그런 시대에 책을 쓰는 이슬아는 어떤 작가로 남을까요.“음…, 어려운 질문이네요. 일단 장수하는 작가? 하하. 오래 살고 싶어요. 그래야 오래 쓸 수 있으니까. 운동 열심히 하는 이유도 긴 호흡으로 길게 쓰고 싶기 때문이죠. 박경리 박완서 선생님이나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처럼 할머니가 돼서도 왕성하게 글 쓰고 싶거든요. 그 속에서 독자에게 얘기를 건네고 저 역시 그들 말에 귀 기울이는 작가이길 바랍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서평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아, 시만 빼고요. 이슬아의 가슴 속에 시인은 살지 않거든요.” 소설 ‘가녀장의 시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폴 발레리가 그랬대요.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대요.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래요.” 어쩌면 삶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지위나 부를 얻는다고 결승선에 다다르는 게 아니다. 인생의 종착역은 그저 시간이 정해줄 뿐. 하지만 여기서 포기는 체념이 아닐 것만 같다. 욕심 비우기. 노력은 하되 스스로 만족할 지점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이슬아 작가에게선 분명 그런 여백이 내비쳤다. ‘일간 이슬아’에 운을 다 썼노라 웃었지만, 실은 성급하게 굴지 않는 걸음걸이가 단단했다. 그저 자신의 길에 힘껏 쏟아 부을 줄 아는 글쟁이. 완성이란 결과보다 그걸 찾아가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청년. 겨울 짙은 정릉동 골목길을 내려오며, 조만간 봄볕처럼 다가올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글 싣는 순서〉 1. 259개 상품 어떻게 정했나2. 직장인의 상품 선택 기준3. 세대별 맞춤 구성 전략 올 하반기부터 선택이 가능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은 은퇴 시점에 맞춘 퇴직연금이기 때문에 운용 기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형(DC)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적립금 운용 방법을 따로 지시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해둔 방식대로 사업자(운용사)가 대신 운용해주는 제도. 가입자의 나이에 맞는 상품을 잘 선택해야 만족스러운 수익률을 거둘 수 있다. 물론 같은 나이대라도 가입자의 성향은 다를 수 있다. 원금 보장을 더 선호하는지, 수익 추구에 더 초점을 맞출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또 적극적으로 금융상품을 찾고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길 원하는지, 크게 신경 쓸 여력이 없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국내 디폴트옵션 상품에 가장 많은 펀드를 편입시킨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부터 세대별 상품 구성 전략을 들어봤다.●20대: TDF 기준으로 은퇴 시점 고려20대 퇴직연금 가입자는 상대적으로 은퇴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때문에 기대수익률(투자에 따라 실제 실현될 것으로 기대되는 수익률의 평균)이 높은 디폴트옵션 상품을 선택하는 게 좋다. 이때는 디폴트옵션에 가장 많이 편입된 ‘타깃데이트펀드(TDF)’를 선택 기준으로 삼는 걸 추천한다. TDF는 은퇴 시점에 맞춰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투자 비율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자산배분펀드. 지난해 미국의 퇴직연금 연구기관인 ‘칼란 인스티튜트’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미 퇴직연금 사업자의 92%가 가입자에게 TDF가 편입된 디폴트옵션 상품을 제안했다고 한다. TDF 투자를 맘먹었다면 ‘빈티지(vintage)’를 정해야 한다. 와인에서 포도 수확 시기를 일컫는 빈티지는 TDF에서도 가입자가 퇴직연금을 수확할 시기인 ‘은퇴 예상 시점’을 뜻한다. 가입자가 1996년생이고 은퇴 예상 시점이 60세라면 2056(1996+60)이 적당한 빈티지다. 다만 TDF의 빈티지는 5년 단위로 정해지므로 TDF2050이나 TDF2055를 선택할 수 있다.●30대: 옵트인 제도 활용도 적극 모색금융업계에 따르면 국내 30대 연금 가입자들은 적극적으로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 성향을 가진 이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20대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2045∼2050 빈티지의 TDF가 편입된 디폴트옵션이 적합하다. 이때 가입자는 사업자들이 디폴트옵션 상품에 어떤 TDF를 많이 넣었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현재 TDF가 편입된 디폴트옵션 상품은 모두 165개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DF가 점유율 43%로 가장 많다. 보다 공격적인 투자 성향이라면 ‘옵트인(Opt-in) 제도’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옵트인이란 DC형이나 IRP 가입자가 사업자에게 운용을 맡기지 않고 직접 디폴트옵션 상품을 매수하는 방식이다. 옵트인은 판매 수수료가 비교적 낮은 편이며, 가입자는 포트폴리오에서 주식 등 위험자산의 편입 비중을 높일 수 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적립금의 70%까지만 위험자산에 투자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디폴트옵션 상품엔 적용되지 않는다.●40대 이상: 수익률보다 위험 관리에 신경 써야40대 이상은 퇴직연금 자산 규모가 20, 30대보다 크기 때문에 신중하게 자산을 운용해야 한다. 때문에 만약 현재 퇴직연금 사업자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사업자로 옮기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앞으로 홈페이지에 디폴트옵션 상품의 적립 금액이나 운용 현황, 수익률 등의 정보를 분기별로 1회 이상 공시할 예정이니 꼼꼼히 살펴보자. 퇴직연금을 디폴트상품으로 운용하다가 시장 상황이 급변하면 다른 상품으로 바꾸는 방법도 가능하다. 일정 기간 동안 의도적으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고 현금으로 보유할 수도 있다. 50대 중반 이후의 가입자라면 지나치게 위험자산에 투자하면 손실을 회복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원금이 보장되는 초저위험 디폴트옵션 상품을 가입하는 것도 방법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떠올려보면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정신이란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 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람 사는 곳이야 거기서 거기라지만, 서울 성북구 정릉동은 왠지 눅진한 운치를 머금었다.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貞陵) 탓일까. 북한산 자락을 흘러내리는 고풍스런 기세. 인근에 유독 사찰이나 점집도 잦다. 1월, 간만에 찾은 정릉동은 코끝 얼얼한 정초의 스산함도 배어났다. 봄꽃이 멀기 만한 메마른 나뭇가지 아래 좁디좁은 골목길. 판잣집과 신축건물이 어영부영 뒤섞인 풍경은 세월을 가늠키 어려웠다. 저기 길모퉁이 어디쯤에서 오징어게임이라도 한판 벌어질 법한. 그래서일까.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이슬아 작가(31)의 작업실은, 마주하고서도 한참을 기웃거렸다. 요즘 20, 30대에게 가장 ‘힙한’ 작가의 일터라기에 반짝거림을 떠올렸던 게 괜스레 겸연쩍었다. 직접 운영하는 ‘헤엄출판사’ 간판만 아니었다면, 옛 동무의 고향집 앞에 선 착각마저 들었다. 한데 되짚어보면, 그래서 더 ‘이슬아’답다. 무명작가가 소셜미디어에서 글을 “팔겠다”며 구독자를 모은 충격적 데뷔. ‘일간(日刊) 이슬아’는 기존 문단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무너뜨렸다. 책도 대부분 자신이 차린 출판사에서 펴냈다. 그렇게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자기만의 공간도 마련했다. 뭣보다 그는 쓰고 싶은 글을 쓰며, 먹고 산다. 살짝 시샘을 품은 채 초인종을 눌렀다. 작업실 내부는 바깥 향취와 또 달랐다. 슬쩍 찻잔을 밀어주는 작가 앞에 앉으니 진득한 통유리 햇살이 눈부셨다. 빌 에반스의 달곰한 재즈 피아노 선율을 품은 공간은 담박하지만 빼곡했다. 책과 카메라, 그림들은 있어야할 곳에 맞춤했다. 과한 구석이 없는 그의 문장처럼. 대화도 그랬다. 차분하되 조곤조곤 이어가며 딴 길로 새질 않았다. 질문에 “맞아요” “그렇죠” 공감을 전하면서도, 생각이 다르면 분명하게 짚어냈다. ‘아름다운 아저씨가 되기 위해 애독 중’(뮤지션 장기하)이란 이슬아 작가의 얘기를 들어봤다.-어릴 때부터 꿈이 작가였나요.“원래는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구체적으로 인터뷰 전문 기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도 하나의 소중한 장르라고 봐요. 데뷔 뒤 인터뷰집도 여러 권 냈는데, 그저 질문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진정성을 갖고 얘기를 나눠야 하잖아요. 글로 옮길 때는 상대의 진의를 제대로 담아 정갈하게 정리해야 하고요. 중고교생 때 근사한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마음을 빼앗기곤 했어요. 신문방송학과(성공회대)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작가의 길로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대학을 다니면서 창작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달았죠. 자유로운 글쓰기에 더 흥미를 느꼈다고 할까요. 어느 쪽이건 ‘글쟁이’인 건 마찬가지긴 하고요. 요즘은 글이나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저에겐 언제나 글이 제1의 관심사였어요.” -‘글 쓰는 직업’이 인기 있는 나이대도, 그런 시대도 아니지 않나요.“맞아요, 하하. 그래도, 그냥 언제나 글이 좋았어요. 근데 이쪽 일을 하다보니 이상한 점도 눈에 들어와요. 확실히 책이건 신문이건 읽는 이는 줄어든다는데, 반대로 글을 쓰고자하는 욕망들은 갈수록 커지는 것 같아요. 실제로 신간 출간 종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고요. 다른 이의 글을 읽진 않는데, 자기 얘긴 쓰고 싶은 이들이 많아지는 건지…. 듣지는 않되 말은 하고 싶은 시대인 걸까요.”-작가님 본인은 책을 많이 읽는 아이였나요.“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뭔가 읽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유튜브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도 아니고. 책을 보는 게 자연스러운 환경이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아니죠. 지금도 글쓰기 교사를 병행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왜 글을 읽어야 하는지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아요. 사실 어른들도 넷플릭스를 더 선호하는 세상이니까요.”-대안학교를 다닌 것도 ‘읽고 쓰는 습관’에 도움이 됐을까요.“그럼요. 실은 부모님이 자식들은 자기들처럼 입시지옥을 겪지 않길 바라셨대요. 그렇다고 유복한 환경은 아니라서 비싼 학교는 아니고…. 당시 살던 경기 남양주에 있는 곳인데, 생태주의 대안학교였어요. 거기선 학생들이 자기 시간표를 스스로 짤 수 있어요. 저로선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을 풍족하게 가질 수 있었죠. 건강하게 몸 많이 쓰며 하고 싶은 걸 모색하는 청소년기를 보내기에 딱 맞는 학교였습니다.”-청소년 학습 공간 ‘하자센터(서울시립 청소년미래진로센터)’도 다니셨죠.“네, 열여덟 살부터 스물셋 때까지 다녔어요. 거기 소모임인 ‘어딘글방’에서 글쓰기 훈련을 열심히 받았습니다. 이길보라, 양다솔, 하민아 등 좋은 동료 작가들도 많이 만났어요. 지금도 큰 가르침을 주는 친구들이죠. 실은 거기서 전 가장 글 잘 쓰는 학생이었던 적이 없어요. 문장이 뛰어난 이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편이었죠. 하지만 하나 내세울 수 있는 게 있어요. 모임에서 매주 1편씩 글쓰기 과제를 주는데, 한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이슬아가 안 썼으면 숙제가 없었던 것’이라 말할 정도였죠.”-일종의 개근상이네요. 말처럼 쉬운 게 아닐 텐데요.“가끔 쓰기 싫을 때도 있었죠. 잘 쓴 글만 공개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보다 더 잘 쓰고 싶다’는 목표의식이 강했어요. 매주 글을 평가받으면 조금씩이라도 분명 나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때 글 실력이 부쩍 성장한 거 같아요.”-‘일간 이슬아’를 해낸 끈기가 거기서 비롯됐나 봅니다.“음…,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제가 ‘상인의 딸’이란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서울 답십리에 있는 작은 자동차부품 가게를 운영하셨어요. 장사하는 집안에서 자라서, 뭔가에 값을 매기고 그걸 팔아 셈을 치르는 ‘거래’가 낯설지 않았어요. 글쓰기도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자영업이라 보거든요. 누군가 읽고 싶은 글을 만들어서 잘 팔아 보겠다는 개념이었죠.”-2018년 ‘일간 이슬아’는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학자금 대출을 갚겠다며 구독자를 모은 발상 자체가 획기적이었습니다.“학자금 대출 2500만 원 벌기가 목적이었던 건 맞아요. 대학 학비를 대줄 집안 형편은 아니었거든요. 뭣보다 안정된 ‘맛’을 지닌 글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며 빠르게 ‘납품’하는 건, 정당한 장사라 믿었어요. 물론 당시 월정액을 내면 글을 보내준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크나 큰 도전이긴 했죠. 기존 작가님들이 보시기엔 천박하다 여길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부끄럽진 않았습니다.”-등단 같은 기존 데뷔 방식은 고려하지 않았나요.“아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작가에게 등단은 훌륭한 타이틀이 돼주니까요. 사회생활하면 그런 거 있잖아요. ‘어느 대학 나왔어’ ‘무슨 회사 다녀’하면 자기소개하기 편하거든요. 등단작가란 수식을 달면 여러모로 유리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하지만 워낙 신춘문예 자체가 바늘구멍인데다, 제가 정형화된 제도에서 간택된 기억이 별로 없어서…. 솔직히 붙을 자신이 없었네요, 하하.”-‘일간 이슬아’로 화제를 모으니 기분이 어땠습니까.“당연히 기뻤지만, 솔직히 무섭기도 했어요. 구독자 30명 모아서 1명당 만 원씩 한달에 30만 원만 벌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일이 커져버렸죠. 근데 이게 돈이 걸린 문제잖아요. 금전이 오고 간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거니까. 부담감과 책임감이 막중했죠. 이젠 진짜 진검승부구나 싶기도 했고요. 제가 만든 방식이지만, 글이 흥미롭지 않으면 당장 비난이 거셀 테고 구독도 취소할 테니.”-‘이슬아식 데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셈이에요.“그리 거창한 건 아니고, 얼떨결에 그렇게 된 거죠. 그 시절엔 스스로 천운이 따랐다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사람에게 평생 운의 총량이란 게 있다면, 전 ‘일간 이슬아’에 왕창 써버린 거잖아요.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아도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주식을 안 하는 이유도…, 하하.”-겸손하게 말했지만, 매일 연재를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제가 글 쓰는 ‘근육’은 좀 지닌 거 같아요. 대학과 하자센터에서 글쓰기 체력도 잘 길렀고요. 제일 어려운 건 구독자 반응이었죠. 매일 글에 대한 평가가 메일 등으로 거침없이 오거든요. 칭찬도 있지만 비난도 상당했어요. 책을 통해 독자와 만나는 작가라면 겪지 않아도 될 힘겨움이죠. 근데 저도 그렇지만, 구독자들도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잖아요. 그래서인지 ‘선’을 지키지 않는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욕설은 둘째 치고, 시궁창 같은 표현들도 서슴지 않았어요.”-젊은 작가가 감당하기에 충격이 컸겠습니다.“처음엔 그랬죠. 지금이면 적당히 거리 조절하며 현명하게 넘기련만, 그땐 그 집중포화를 온몸으로 다 받아냈어요. 모든 메일을 다 열어보고 쇼크로 덜덜 떨곤 했어요. 왜 이렇게까지 끔찍한 말을 쏟아 붓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죠. 몸에도 타격이 와서 응급실에 실려 갔던 적도 있어요. 연재 첫 해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루 말로 하기 힘듭니다. 돌이켜보니 잘 버텼다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네요. 이후로는 몸도 마음도 너무 상해서, 연재 간격도 늘리고 휴식기도 가지곤 해요.”-그런데도 지금껏 ‘일간 이슬아’를 유지하는 이유는 뭔가요. 작가로 충분히 입지를 다져서 그런 험한 길은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물론 경제적으로는 학자금 대출도 다 갚았고 책만 내더라도 먹고 살 수 있죠. 하지만 여전히 열심히 쓴 가장 ‘따끈따끈한’ 글을, 일간 이슬아 구독자에게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분들이야말로 이슬아가 빚어낸 상품을 가장 사랑해주는 고객이니까요. 게다가 글 쓰는 입장에서 마감은 무척 중요하잖아요? 힘들어도 약속을 지키려고 더 집중하게 되거든요.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일간 이슬아로 얻는 수익도 꽤 큽니다, 하하.” (<하>편에서 계속)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