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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를 위해 시행 중인 ‘주식 백지신탁’ 제도가 도전받고 있다. 현 정부의 차관급 고위 공직자들이 백지신탁을 거부하며 소송까지 불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은 배우자가 보유한 비상장 주식을 백지신탁하라는 인사혁신처 결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가 12일 1심에서 패소했다.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도 인사처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지난달 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일각에선 주식 백지신탁이 개인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어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허술한 심사와 불복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공직자의 사적 이익이 공적 임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공익과 사익의 이해충돌 방지 위해 도입주식 백지신탁은 고위 공직자가 보유한 주식으로 인해 그가 담당하는 직무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식을 매각하거나 처분·관리를 제3자에게 맡기도록 한 제도다. 1978년 미국에서 ‘블라인드 트러스트(Blind Trust)’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도입됐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는 미국 캐나다 영국 등 8개국에서 시행 중이다. 한국에서는 2005년 공직자윤리법에 반영되면서 도입됐다. 2003년 삼성전자 사장 출신의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지명이 시발점이었다. 삼성전자 주식과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보유하고 있어 장관 직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란이 나왔다. 이를 계기로 2004년 총선에서 여야 모두 주식 백지신탁 도입을 약속했다. 백지신탁 대상자는 국회의원과 장차관을 포함한 1급 이상 고위 공직자와 기획재정부의 금융 관련 부서와 금융위원회의 4급 이상 공직자다. 본인과 배우자, 직계존비속이 보유 중인 3000만 원 초과 주식을 임명일로부터 두 달 이내에 직접 매각하거나 수탁기관(금융회사)에 백지신탁해야 한다. 수탁기관은 신탁계약이 체결된 날부터 60일 이내에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 다만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로부터 보유 주식과 직무 사이에 관련성이 없다는 판단을 받을 경우 주식을 계속 보유할 수 있다. 이 제도는 공직자가 직무 수행을 통해 사익을 추구할 가능성을 막아 공직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과도한 재산권 침해라는 일부 공직자들의 반발도 계속됐다. 유 사무총장은 “간접적으로도 (배우자가 지분을 가진 회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 사무총장의 배우자는 바이오 회사의 주식 8억2000만 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박 실장도 “(이해충돌이라는) 추상적 위험을 이유로 배우자의 인격권과 자기계발권, 가업승계권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했다. 박 실장의 배우자는 서희건설 회장의 장녀다. 하지만 12일 서울행정법원은 유 사무총장이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직무 관련성 인정결정처분 취소 소송에서 “청구를 기각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배우자가 주식을 보유한 기업은 선택적 회계감사 기업이고 사무총장의 업무 범위에 비추어 볼 때 이해충돌 가능성이나 위헌성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헌법재판소도 이미 2012년 백지신탁 제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헌재는 신탁 대상을 ‘3000만 원 이상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으로 제한해 목적 달성에 필요한 범위 내로 최소화했고, 이 제도에 따른 사익의 침해가 그로 인해 확보되는 공익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허술한 심사에 시간 끌기… 유명무실 우려도주식 백지신탁 제도가 일견 엄격해 보이지만 허점이 많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장차관의 경우 3000만 원 초과 주식 보유자 16명 중 9명만 매각 또는 백지신탁을 마쳤다. 국회의원의 경우도 2020년도 이후 올해 6월까지 대상자 110명 중 65명만 매각 및 백지신탁을 신고하는 데 그쳤다. 임명 후 두 달 내에 매각 또는 백지신탁을 마쳐야 하지만 백지신탁심사위의 직무 관련성 판단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백지신탁을 했더라도 ‘60일 이내에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는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기한 내 처분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면 30일 연장이 가능하고, 연장 횟수에는 제한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비상장 주식은 매각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길게는 몇 년 동안 팔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박 실장과 유 사무총장처럼 결정에 불복하며 시간 끌기를 시도해도 마땅히 막을 방법이 없다. 백지신탁심사위는 지난해 12월 박 실장에게 주식을 백지신탁하라고 통보했지만 박 실장은 올해 2월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행정심판에서 기각되자 다시 지난달 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유 사무총장도 지난해 10월 백지신탁심사위의 결정에 불복해 지난해 12월 행정소송을 냈다. 12일 1심에서 패소했지만 항소할 경우 최종 결정은 더 미뤄질 수 있다. 지난해 6월 임명된 두 사람이 사실상 주식을 보유한 채 임기를 채울 수도 있는 셈이다. 직무 관련성 심사도 느슨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직자윤리법이 직무 관련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고 위원회의 판단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실련이 인사혁신처에 정보공개를 청구한 자료에 따르면 2018∼2022년 5년간 3104명의 대상자 중 2197명(70.8%)이 ‘직무 관련성 없음’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심사 기준과 내용, 결과 등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주식 백지신탁 제도와 관련해 지난달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한 서휘원 경실련 팀장은 “결과적으로 직무 관련성 심사를 내세워 고위 공직자의 주식 보유를 허용해주고 있는 셈”이라며 “심사 결과를 공개하고 심사 내역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밖에 해외주식과 가상자산 등이 백지신탁 대상에서 빠져 있는 것도 문제다. 공직자 중에 유독 ‘서학개미’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외주식이라도 직무 관련성이 있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가령 구글, 애플 등 빅테크 주식을 다량 보유한 의원이 빅테크에 유리한 입법을 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투자 환경의 변화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어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美, 공직자 주식거래 금지까지 추진일각에선 주식 백지신탁 제도가 기업인 등 유능한 인재의 공직 진입을 막는 부작용이 있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정부의 첫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는 주식 백지신탁 문제로 사흘 만에 직을 포기했다. 문재인 정부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성공한 벤처기업인을 임명하려 했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특히 창업자가 많은 신산업 관련 민간 전문가를 영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정부가 우주항공청의 인재 영입을 위해 특별법에서 백지신탁 적용의 예외를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보유 주식을 신탁하되 매각하지 않고 퇴임 후 다시 돌려받는 보관신탁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예외를 두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이견도 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인의 공직 진출이 백지신탁 제도를 후퇴시킬 정도의 의미와 비중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보관신탁 제도는 재직 기간에 자신의 보유 주식 내지 관련 기업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오히려 미국에선 공직자들의 주식 보유와 거래를 더 엄격히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주식 거래 내역을 45일 이내에 온라인에 공개하도록 한 ‘스톡법(STOCK Act)’에서 더 나아가 주식 거래 자체를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미 상원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이 초당적으로 ‘공무원 주식 거래 금지법’을 7월 발의했다. 법안에 따르면 행정부 및 입법부 공무원은 물론 의원의 배우자와 자녀까지도 개별 주식 종목 거래를 금지한다. 위반한 경우 주식거래 이익을 몰수하고, 최대 1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한다. 도입된 지 18년이 된 주식 백지신탁 제도를 현실에 맞게 보완해야 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직무 관련성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부터 마련해야 한다. 백지신탁심사위의 결정에 대한 불복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과제다. 재산권 침해 논란을 차단하면서 협소한 인재 풀도 넓힐 수 있는 합리적 해법도 필요하다. 백지신탁의 취지는 주식을 많이 가지면 무조건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절대 방해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3일 오후 중국 주요 도시의 화웨이 매장 앞에는 신형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사려는 사전 예약자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미국의 대중 규제를 뚫고 3년 만에 내놓은 5세대(5G) 스마트폰이자, 자체 제작한 첨단 반도체를 탑재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공식 판매를 시작한 3일은 공교롭게도 중국의 78주년 ‘항일(抗日)전쟁 승리 기념일(전승절)’이었다. 제품을 처음 공개한 지난달 29일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항미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미국 기술 분석업체 테크인사이츠는 스마트폰을 분해해 보니 7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공정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들어 있었다고 4일 밝혔다.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하고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가 생산한 ‘기린 9000s’였다. 화웨이는 2020년 10월 내놓은 메이트 40 시리즈에 대만 TSMC의 5나노급 ‘기린 9000’을 탑재했지만 이후로는 미국의 제재로 TSMC 칩을 쓸 수 없었다. ▷화웨이는 미국의 대중국 제재를 상징한다. 2019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화웨이에 대한 미국 기업의 수출 금지를 단행했다.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산 장비로 부품을 만드는 외국 기업에까지 수출 규제를 확대했다. 지난해부턴 14나노 이하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장비의 수출도 막았다. 그런데도 규제 기준을 뛰어넘는 반도체를 들고 나온 것이다. 미국 언론에선 “중국이 미국의 뺨을 때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물론 7나노는 최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있다. 2018년에 나온 애플 아이폰 12세대에 들어간 칩에 쓰였다. 현재 TSMC와 삼성전자가 3나노 제품을 양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4, 5년가량 뒤졌다. 하지만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등 첨단 생산 장비의 수입이 막힌 상황에서 초미세 공정의 반도체를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간과 비용은 더 들지만 낮은 수준의 장비로 반도체 회로를 여러 번 그리는 ‘멀티 패터닝’ 기술로 극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반도체 자립 선언이 실제인지 허장성세인지는 아직 확인하기 어렵다. 스마트폰이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는 점에서 대량 생산은 힘들 수준이란 관측도 있다. 미국 제재 이전에 비축된 대만 TSMC의 칩을 사용했을 것이란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순 없다. 1일 독일에서 개막한 유럽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IFA 2023’ 부스의 절반 이상을 중국 기업이 차지할 정도로 ‘테크 굴기’는 위협적이다. 한국으로선 초격차 기술을 갈고닦아 더 달아날 수밖에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몰라도 ‘순살 아파트’는 기가 막힌 작명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며 자제해 달라고 했다. 보강철근이 빠져 있는 것이지 철근 자체가 빠진 건 아닌데 국민들이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빼먹은, 그래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총체적 부실을 이만큼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을 찾긴 힘들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철근 누락 사태에 대해 정부가 대신 찾은 표현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전관 카르텔’이다. 이 역시 일타강사다운 단순하고 명쾌한 표현이다. 설계니 공법이니 감리니 하는 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나쁜 놈들이 짬짜미로 다 해먹었다’고 하면 누구나 단번에 이해가 간다. 경찰과 검찰은 LH에 대해 강제 수사에 나섰고, LH는 퇴직자가 근무하고 있는 전관 업체와 체결한 설계·감리 등 용역 계약을 전격 해지했다. ‘전관 카르텔’ 척결의 칼날은 LH를 넘어 도로, 철도, 항공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LH의 전관 카르텔은 실체가 있다. 반드시 도려내야 할 부조리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6∼2021년 LH의 3급 이상 퇴직자 6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LH 계약 업체에 재취업했다. 이 기간 전관 업체에 몰아준 일감은 9조 원이 넘는다. 철근 누락 아파트의 설계·감리를 맡은 전관 업체 25곳은 최근 3년간 3232억 원의 수의계약을 따냈다. 업계에선 LH의 ‘OB(전관)’ 한 명 영입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전관 카르텔 타파의 구호가 커지면서 인천 검단아파트 지하 주차장 붕괴 사고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슈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철근을 빼먹은 아파트 명단이 7월 말 공개된 직후까지만 해도 부실한 설계, 엉뚱한 시공, 깜깜이 감리 등 무너진 건설 시스템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카르텔이 원인으로 지목된 이후에는 LH의 전관 특혜와 도덕적 해이만 부각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구조적 원인은 설계, 시공, 감리가 따로 놀았다는 데 있었다. 각자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뿐더러 크로스체킹 시스템도 실종됐다. 설계에서 빼먹은 걸 나중에 바로잡기는커녕 시공 과정에서 또 한 번 빼먹는 부실의 누적이 이뤄졌다. 현장에선 사업을 총괄할 프로젝트매니저가 보이지 않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이후 공무원의 비리를 막겠다며 도입된 책임감리제는 공무원과 발주 기관의 책임 회피 수단이 됐다. 만성적 인력난에 시달리는 현장은 부실 시공의 시한폭탄이다. 건설 현장에선 50대 미만의 한국인, 특히 잔뼈 굵은 숙련공은 찾기 힘들다. 청년들의 건축·토목 기피 현상은 이미 오래됐고, 현장 인력들조차 ‘탈건(탈건설사)’을 꿈꾼다. 공법은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도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적고, 과거의 경험에 기댄 적당주의가 판을 친다. 현장의 공백은 중국, 베트남 등에서 온 비숙련의 일용직 외국인이 메우고 있다. 사실상 국내에 ‘메이드 인 코리아’ 아파트는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철근 누락 사태의 해법은 1차 방정식이 아닌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다. 고질적 불법 재하도급 해소, 저가 수주를 부르는 입찰제도의 개선, 우수한 현장인력 확보, 독립적 감리 체계의 도입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쌓아야 한다. 안전과 품질을 높이면서도 공사비 상승이 집값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는 건 쉽지 않은 미션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면 소위 ‘킬러 문항’을 배제하고 쉽게 풀면 되겠지만 현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전관 카르텔’ 척결만 앞세우고 근본적 시스템 개선을 등한시하면 영영 고득점을 받긴 어려워진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나는 지금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중이다. 실제로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일 이상의 노동과 열정을 바라는 ‘허슬(hustle) 문화’를 그만두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틱톡에 올라온 17초 분량의 짧은 영상이 전 세계로 퍼지며 삽시간에 유행이 됐다. 정해진 시간, 업무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업무만 하는 ‘조용한 사직’은 열정을 강요하던 기존 직장 문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조용히, 티 나지 않게 한다고 상사와 회사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조용한 사직’에 대한 기업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조용한 해고(quiet cutting)’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국 등 글로벌 기업에서 공식적인 구조조정 대신 업무 재배치, 직무평가 강화 등을 통해 직원 스스로 퇴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 스포츠용품 업체 아디다스, 소프트웨어 기업 어도비, 클라우드컴퓨팅 기업 세일즈포스, IBM 등이 이 전략을 택했다. 해당 직원에게 박한 평가를 주고 승진 기회를 박탈하고 회의에서 배제하고 중요한 업무를 맡기지 않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코로나19는 전 세계 노동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나는 ‘대퇴사(The Great Resignation)’와 함께 ‘조용한 사직’이 유행이 됐다. 재택근무, 원격근무의 확산도 한몫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진정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은 생산성 저하, 조직문화 저해, 인력 유출 등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나서기 시작했다. 포브스는 “조용한 해고는 기업이 구조조정 효과를 보면서도 대량 감원을 피하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조용한 해직과 함께 ‘조용한 고용(quiet hiring)’도 서구 사회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하고 있다. 새로 풀타임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기존 근로자의 역할을 전환해 업무를 맡기는 식이다. 정규직 대신 단기 계약직을 뽑아 대응하기도 한다. 태업하지 않는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을 대신 고용하는 방법도 조용히 일자리를 앗아간다. 나가는 사람이 많아져도 신규 일자리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용한 사직’에 기업들이 ‘조용한 해고’로 대응하면 앞으로 노사 간에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직원은 회사를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회사는 직원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바라보는 조직에는 미래가 없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일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조용한 사직’도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젠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일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된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카페나 식당 문을 열었을 때 ‘어서 오세요’ 대신 키오스크를 마주하면 움찔하게 된다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디지털 문맹 여부를 판정해주는 심판관인 양 서 있는 키오스크 앞에서 손가락이 머뭇거린다. 주문부터 결제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아이스라떼 톨 사이즈 샷 추가 테이크아웃요.” 점원 앞에선 3초면 끝날 한 문장을 위해 단계마다 씨름해야 한다. 어르신이라면 나이 탓이라도 할 텐데, 솔직히 중년들 역시 키오스크가 조금은 두렵다. ▷키오스크는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늘었다. 최저임금 급등에 따른 인건비 부담도 키오스크 보급이 빨라지는 데 한몫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키오스크 운영 대수는 2019년 18만9951대에서 2022년 45만4741대로 늘었다. 같은 기간 요식업에선 5479대에서 8만7341대로 3년 만에 약 16배로 급증했다. 요즘엔 키오스크뿐 아니라 자리에 앉아 태블릿PC로 주문하는 테이블 오더, QR 결제, 테이블링(모바일을 이용한 원격 줄서기) 등 비대면 서비스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많이 접해 익숙해졌다지만 키오스크 기기마다 사용자환경(UI)이 표준화되지 않아 처음 가는 가게에선 여전히 부담이다. 직원에게 물어볼 수 없어 메뉴 이름을 꿰고 있지 않으면 주문조차 안 된다. 낯선 이름에 주문을 포기했던 아이스크림 체인점의 ‘MSGR’이 알고 보니 미숫가루임을 알고는 허탈해진다. 디저트인지 기타 음료인지 가게가 설정한 분류 기준을 모르면 메뉴를 찾기도 어렵다. 화면 속 그림과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도 많다. 시간을 끌다간 초기화될 수도 있다. 결국 뒤통수가 따가워 뒷사람에게 주문을 양보하게 된다. ▷이런 당혹감이 연세 많은 어르신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해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해 보니 키오스크를 이용하다 주문을 포기한 사람이 40대에선 17.3%였지만 50대는 50.5%로 확 올라갔다. 한 빅데이터 업체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프라인 매장에서 주문할 때 30대 이하는 키오스크를 이용하는 비대면 방식을, 40대 이상은 직원을 통하는 대면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키오스크를 비롯한 디지털 기기의 확산은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이다. 다만 기술 발전의 목표가 인간의 편리를 위한 것이라면, 자괴감이 들지 않도록 좀 더 친절해져야 한다. 쉬운 말을 쓰고 글씨 크기를 키우고 화면 구성과 조작 방식을 단순화하는 등의 배려가 필요하다. 어르신들도, 중년들도 한때는 ‘얼리어답터’였다. 인공지능(AI) 등 숨 가쁜 기술의 발전 앞에 지금의 젊은 세대도 버벅거릴 날이 머지않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제도 바뀌기 전에 막차 타야 합니다.” “막히기 전에 서두르세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이처럼 대출을 부추기는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백 년 대출’로도 불리는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얘기다. 지난달부터 상품을 출시했던 시중은행들이 갑자기 가입 연령을 제한하거나 아예 판매 중단을 예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절판 위기에 소비자들이 몰리면서 최근 1주 사이에 1조 원 가까이 불어났다. ▷출시 두 달이 채 안 된 상품이 철퇴를 맞은 것은 최근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증가의 원인으로 50년 만기 주담대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가계대출 잔액은 4월부터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증가했다. 금융당국은 50년 만기 주담대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이 된다고 봤다. DSR 규제에 따라 연간 원리금 상환액이 연소득의 40%를 넘을 수 없는데, 만기가 길어지면 원리금 규모가 줄어 대출 한도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50년 만기 주담대는 사실 현 정부의 작품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국정과제로 검토해 지난해 5월 민생안정 프로젝트의 방안으로 제시했다. 고금리 시기 차주들의 원리금 부담을 덜어주고 대출 규제로 끊어졌던 주거 사다리를 다시 연결한다는 취지였다. 지난해 8월 한국주택금융공사가 50년 만기의 보금자리론과 적격대출을 출시했고, 올해 1월 또 50년 만기 특례보금자리론을 내놨다. 이에 은행들도 정부 기조에 맞춰 초장기 대출 상품을 내놨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부가 은행 탓을 하니 은행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정부가 50년 만기 주담대의 가입 연령을 ‘만 34세’ 등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중장년층들은 역차별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생애 최초 주택마련 가구주 연령은 대략 38∼40세다. 해외에서도 50∼60년 초장기 주담대가 많지만 나이로 가입을 제한하는 건 일본, 싱가포르 등을 제외하면 드물다. 50년 만기가 문제라면 40년 만기도 마찬가지다. 40세의 50년 대출은 안 되고, 50세의 40년 대출은 된다면 형평성에 맞지 않다. ▷사실 가계대출을 키운 주범은 정부다. 올해 들어 정부의 연이은 부동산 규제 완화와 특례보금자리론 등 정책대출 상품 출시가 부동산 매수 심리에 군불을 지폈다. 특례보금자리론은 출시 반년 만에 31조 원이 몰리며 가계대출 확대를 주도했다. 금융당국은 ‘상생금융’을 내세우며 시중은행에 대출금리를 낮추라고 압박했다. 기준금리를 올리며 긴축에 나선 한국은행과 엇박자를 낸 것이다. 최근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대출 태도가 느슨해진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느슨했던 건 오히려 금융당국이 아닌가.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RIP(Rest In Peace·편히 잠드소서).’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20여 일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고인을 추모하는 영정 사진이 돌고 있다. 주인공은 꿈의 물질로 불린 ‘상온·상압 초전도체’. 지난달 22일 국내 연구진이 일상 온도와 기압 상태에서 전기저항이 전혀 없는 물질 ‘LK-99’를 개발했다고 주장하자 주식시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연구 결과에 대한 평가에 따라 하루는 30% 올랐다가 다음 날 30% 떨어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지난주 국제 학술지 네이처가 “LK-99는 초전도체가 아니다”라고 발표한 후 투심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요즘 한국 주식시장은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의 긴축 장기화와 중국의 부동산 위기로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도 마치 활황기인 양 ‘빚투’(빚내서 투자)와 ‘묻지마 투자’가 기승을 부린다. 17일 기준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20조5573억 원으로 올 들어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 들어서만 4조 원이 늘었다. 4월 주가조작 사태를 부추긴 원인으로 차액결제거래(CFD)가 지목되면서 빚투가 잠시 잦아드나 했더니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빚투가 늘어난 건 역설적으로 올해 상반기에 ‘원조 테마주’ 역할을 했던 이차전지 주들이 맥을 못 추고 있기 때문이다. 끝 모를 듯 오르던 주가가 떨어지자 이번엔 저가 매수 기회로 판단한 투자자들이 빚을 내서 올라탔다. 신용거래융자 잔액 상위 10개 종목 가운데 절반이 이차전지 관련주다. 이차전지 산업의 성장성 자체는 인정받고 있지만 빚투는 멀리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주가가 당장 또 한 번 출렁이면 반대매매의 파국을 피하기 어렵다. ▷부나방처럼 테마주를 찾아 달려드는 투자자들은 이차전지, 초전도체를 지나 최근엔 ‘맥신(MXene)’으로 옮겨갔다. 우수한 전도성과 전자파 차폐 능력을 갖춰 미래 신소재로 꼽히는 맥신의 대량생산 가능성을 확인한 연구 결과가 17일 발표되면서부터다. 한 회사는 관련 연구자가 사외이사로 있다는 이유로, 한 회사는 관련 소재를 생산한다는 이유로 상한가를 쳤다. 테마주로 묶인 회사들의 본업이 연구 결과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분석이 나와도 투자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최근 주식시장은 크게 한탕 하려는 작전세력, 꼭지 잡기 전에만 털고 나오면 된다는 개미들이 어우러져 난장판이 됐다. 빚을 낸 투자자들은 대출이자 이상의 수익을 거둬야 하니 고위험·고수익 주식만 쳐다본다. 주식리딩방,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온갖 소문과 풍문이 판을 치며 불공정거래와 시장교란 행위의 온상이 됐다. 언제까지 한국 주식시장은 개미들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돼야 하나. 미친 도박판이여 이제 제발 RIP.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삼성전자가 해외에 쌓아뒀던 수익금 가운데 22조 원 가까운 돈이 올해 상반기에 국내로 돌아왔다. 대부분 생산설비 구축에 투입됐다고 한다. 해외에서 국내로 돈이 들어왔으니 투자유치라 할 만하다. 해외 생산시설을 국내로 옮기는 ‘리쇼어링’과 마찬가지다. 역대 최고라는 올해 상반기 외국인 국내 직접투자(FDI) 신고액 22조3500억 원과 맞먹는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내로 돌아온 ‘유턴기업’의 투자액 3조 원의 7배가 넘는다. ▷삼성전자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삼성전자 해외법인이 본사로 보낸 배당금은 21조8457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상반기 1378억 원의 158배에 이른다. 상반기는 물론 연간 기준으로도 역대 최고치다. 현대자동차그룹도 1분기에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6배 늘어난 7조8000억 원을 국내로 가져왔다. 기업들은 반도체·전기차 공장 증설 등 미래 먹을거리 투자에 배당금을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업들이 해외에 묵혀 뒀던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은 지난해 세법 개정의 효과다. 지난해까진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벌면 현지에서 세금을 내고도 국내로 들여올 때 다시 세금을 내야 해 이중과세라는 지적이 있었다. 올해부터는 해외에서 이미 과세한 배당금을 국내에 들여올 경우 해당 금액의 5%까지만 과세한다. 감세의 나비효과는 크다. 들여온 돈은 국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마중물이 됐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경상수지와 원화 가치 방어에도 도움이 됐다. ▷해외 자회사의 배당 소득에 비과세하는 건 효과가 검증된 정책이다. 미국 기업들은 2017년까지 약 1조 달러를 해외에 유보금으로 쌓아 두고 있었는데, 과세 체계가 바뀐 2018년에 이 중 77%인 7700억 달러를 미국으로 들여왔다. 일본도 2009년 세제 개편으로 해외 자회사의 배당에 대한 ‘익금불산입’ 제도를 도입하자 이듬해 해외 유보액의 95.4%가 국내로 돌아왔다. 이를 넘어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 등을 통해 기업들이 다시 국내로 돌아오도록 세제 등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일각에선 배당금 비과세로 법인세수가 줄어들고 대기업 배만 불릴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24∼2027년 연평균 1044억 원의 세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국내로 돌아온 돈이 수십조 원에 이르고 향후 국내 투자로 발생할 이익까지 고려하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기업에 과도한 세 부담을 지우는 것을 흔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에 비유한다. 당장의 세수 감소만 볼 게 아니다. 감세가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고 다시 세수 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우리 경제를 살찌게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지하 주차장에서 철근을 빼먹은 아파트의 감리를 맡은 한 건축사 사무소는 홈페이지에서 임원들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임원 65명 가운데 22명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출신이었고, 국토교통부, 법무부, 지방자치단체, 심지어 군(軍) 출신까지 포함하면 임원 10명 중 8명이 이른바 ‘전관’이었다. 수주의 비결은 설계 능력이 아니라 로비 능력이었던 셈이다. 철근 누락 사태가 터지자 회사의 자랑은 수치가 됐고, 홈페이지는 폐쇄됐다. ▷LH는 2021년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전관 특혜를 막겠다며 재취업 심사 대상을 ‘부장급 이상’(2급·500여 명)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성긴 그물은 유명무실했다. 최근 2년간 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 공직자 취업 심사를 받은 LH 출신 21명 가운데 재취업이 막힌 건 단 1명뿐이었다. 직무 연관성이 낮다는 이유로 심사를 통과한 이들이 철근을 빼먹은 감리업체 등에 안착했다. 실무자인 차장급(3급)들이 일찌감치 이직하는 사례도 늘었다. ▷재취업 심사가 허술하지만 아예 피하는 방법도 있다. 공직자윤리법 취업 심사 대상인 ‘자본금 10억 원 이상, 연간 거래액 100억 원 이상’이라는 기준에 미달하는 업체로 가면 된다. 최근 5년간 LH로부터 감리를 가장 많이 수주한 업체도 이 기준에 해당하지 않을 정도니 사실상 의미 없다. 똘똘한 퇴직자를 잡으면 업계 무명에서 스타로 떠오르는 건 한순간이다. LH 고위직 출신이 합류한 신생 감리업체는 설립 4년 만에 LH에서 160억 원대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건축, 도로, 철도, 항만, 수자원 등의 분야에서 발주처 ‘OB(전관)’ 한 명 영입하지 않고 발주처와 거래하는 업체는 사실상 없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전관을 영입해 회장, 부회장, 사장, 전무 등의 직책을 준다. 전 직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직급과 연봉이 대략 정해져 있다. 차량, 사무실, 법인카드 등도 준다. 이들에게 떨어진 임무는 오직 수주다. 발주처와 꾸준히 접촉하며 사업 계획을 미리 입수하고, 심사 과정에서 ‘후배’들에게 힘을 발휘한다. 보통 3년 정도는 약발이 먹힌다고 한다. ▷건설 카르텔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까지 총동원해 조사에 나섰다. 제 발이 저린 LH는 ‘반카르텔 공정건설 추진본부’를 신설했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LH는 2년 전에도 ‘조직 해체 수준의 혁신’을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철근 누락 사태를 통해 공수표였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반카르텔 본부’가 필요한 건 사실 LH만도 아니다. ‘전관’, ‘낙하산’, ‘○피아’ 등 다양한 이름을 내건 부정과 특혜가 우리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한때 품귀 현상까지 빚었던 5만 원짜리 지폐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한국은행이 올해 상반기에 5만 원권을 약 10조 원어치 발행했는데, 이 중 78%인 약 7조8000억 원이 되돌아왔다. 5만 원권 발행이 시작된 2009년 6월 이후 상반기 기준으로 환수율이 가장 높다. 한은이 화폐를 발행하면 시중에 유통되다가 예금이나 세금 납부 등의 형태로 금융기관을 거쳐 한은으로 돌아온다. 환수율이 높다는 건 화폐가 시중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는 의미다. ▷5만 원권이 돌아온 것은 2021년 8월부터 본격화된 기준금리 인상의 영향이 크다. 시중금리가 오르면서 현금을 쌓아두기보다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예·적금에 넣는 게 낫다고 보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코로나19 방역 규제가 해제되면서 대면 경제활동이 증가하고, 소비심리가 회복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때 숨었던 고액권이 통화 긴축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미국, 유럽 등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5만 원권이 시중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2021년엔 환수율이 사상 최저인 17%까지 떨어졌다. 코로나19로 현금 사용이 줄고 온라인 거래가 급증한 영향이 컸다.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현금, 특히 보관이 편리한 고액권을 확보하려는 심리도 작용했다. 금리가 낮아 은행 이자가 거의 붙지 않는 것도 현금을 꽁꽁 숨게 만들었다. 시중은행들이 5만 원권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동입출금기(ATM)에 ‘5만 원권 인출 불가’ 안내문이 걸리기도 했다. ▷5만 원권이 사라지자 상당 부분 지하경제로 흘러갔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자산 노출을 꺼리는 자산가들이 장롱이나 금고에 숨겨 놓거나, 범죄 세력들이 수익 은닉 수단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1년 전북 김제시의 마늘밭에서 5만 원권 110억 원이 발견된 이래로 비자금이나 로비, 세금 탈루, 은닉 자금으로 악용된 사례가 다수 드러났다. 고액권이 유통 기능은 적고 저장 기능만 있다며 무용론까지 제기됐다. ▷금고를 탈출한 5만 원권의 귀환은 반갑지만, 이 돈이 생산적인 자금으로 흘러갈지, 투기에 활용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동안 5만 원권만 291조8000억 원이 풀렸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155조2000억 원의 행방도 궁금하다.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등 디지털 경제가 본격화되면 과세당국의 추적을 피해 5만 원권이 더 깊숙이 숨어들 것이란 우려도 있다. 5만 원권을 무조건 찍어낼 것만 아니라 음지에 숨어 있는 현금을 어떻게 환수할 것인지도 함께 고민하며 발권 정책을 짜야 할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코스닥 시장에서 이차전지 광풍을 주도했던 에코프로가 27일 옥좌에서 내려왔다. 전날보다 주가가 19.79% 떨어진 98만5000원에 장을 마치며 ‘황제주’(주당 100만 원 이상) 자격을 반납했다. 이달 18일 처음으로 황제주에 등극해 26일 장 중 한때 150만 원을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허망하다. 일시적 후퇴일지 완전한 퇴위일지 아직은 점치기 어렵다. 확실한 건 이차전지 관련주가 마치 잡코인처럼 출렁이면서 주식시장 전체도 극심한 불확실성에 빠졌다는 거다. ▷잘나가던 이차전지 관련주들의 폭락은 26일부터 시작됐다. 투자자들은 점심시간을 전후로 천당과 지옥을 맛봤다. 오전까지만 해도 최고가를 갈아 치우며 기세를 올리더니 오후 1시 들어 갑자기 폭락세로 돌아섰다. 1시간 만에 고점 대비 20% 넘게 떨어졌다. 주가가 급등할 때도 그랬지만 추락할 때도 수급 외엔 딱히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급격히 덩치를 키운 이차전지 종목이 흔들리니 코스닥 시장 전체도 요동쳤다. ▷이차전지 광풍은 올해 들어 거세졌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 기대와 함께 가속페달을 밟았으니 실체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속도가 지나치게 가팔랐다는 게 문제였다. 에코프로는 1년 만에 18배로 뛰어올랐다. 유튜브 등에선 “800만 원까지 갈 것”이라는 확신이 넘쳤다. 실적이 아니라 유행을 따라 사는 이른바 ‘밈 주식’이 돼 버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증권사들은 5월 이후 사실상 분석에서 손을 뗐다. 정상적인 설명이 안 되니 ‘주가리튬비율(PLR)’ ‘주가배터리비율(PBR)’ 같은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차전지 주식의 끝없는 상승은 ‘상승장에서 나만 낙오될지 모른다’는 포모(FOMO) 심리에 불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주식을 팔아치우고 혹은 빚까지 내서 이차전지 랠리에 뒤늦게 올라탔다. 이달 들어 전체 주식시장 거래대금에서 이차전지 종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할 정도의 ‘몰빵 투자’였다. 계속 갈 것이란 기대와 끝물이라는 불안이 교차했다. 그러다 차익 실현을 위한 매도물량이 나오자 매물이 매물을 부르는 상황이 연출됐다. 앞으로도 공매도 세력과 개인 투자자들의 줄다리기 속에 주가 출렁임이 커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을 비롯해 과거에도 중국, ‘차·화·정’, 바이오 등 주가 광풍의 주역이 있었다. 단순한 테마주였는지 실체가 있었는지에 따라 결과는 달랐지만 항상 거품 붕괴 또는 장기 조정이 뒤따랐다. 주식은 꿈을 먹고 자란다지만 실적을 도외시하고 장밋빛 기대에만 베팅한다면 투자가 아니라 투기다. 비이성적 투기 광풍이 휩쓸고 간 뒤 가득했던 비명 소리에서 이젠 교훈을 얻을 때도 되지 않았나.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장마전선이 13일 한반도에 상륙해 밤새 많은 비를 뿌렸다. 주말까지 최대 400mm의 비가 내릴 전망이라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하늘이 뚫린 듯 단시간에 쏟아진 물폭탄에 침수, 붕괴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11일 서울 구로구, 영등포구, 동작구 일대에서 처음으로 전송됐던 ‘극한호우’ 긴급재난문자의 알림음이 또 울릴 수 있어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서 ‘1시간 누적강수량 50mm’와 ‘3시간 누적강수량 90mm’를 동시에 충족할 때 발송된다. ▷기상청이 극한호우 개념을 도입한 것은 지난해 8월 서울에서 1시간에 140mm의 물폭탄이 쏟아진 게 계기가 됐다. 단시간에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폭우에 대비할 필요가 생겼다. 기상청은 그동안 시간당 30mm 이상의 비를 ‘매우 강한 비’로 통칭했다. 기상특보의 기준은 호우다. ‘강우량이 3시간 90mm 이상 또는 12시간 180mm 이상 예상될 때’ 호우경보를 발령한다. ‘집중호우’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 공식 용어는 아니다. 1950년대 일본 언론에서 사용하기 시작됐는데, 이젠 기상청도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됐다. ▷재난문자를 받아 본 일부 주민들은 “이미 비가 퍼붓고 있는데 뒷북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 많은 비가 내릴 거라고 알리는 기존의 호우특보와 다르다. 비가 많이 내렸으니 침수 등 피해에 대비하고 위험지역에 있으면 즉각 대피하라는 경고다. 만약 지난해 8월 서울 반지하 침수 참사 때 이런 체계가 있었다면 구조 신고가 있기 20분 전 문자가 전달될 수 있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최근 지구 전체가 극한호우로 몸살을 앓고 있다. 10일 일본 규슈(九州) 지역에서 하루에 400mm에 달하는 폭우가 쏟아져 최소 5명이 숨졌다. 미국 버몬트주에선 최근 한 달 치 내린 만큼의 비가 하루 새 쏟아졌다. 뉴욕주에서는 1000년에 한 번 내릴 확률의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크다. 지구 평균기온은 이달 3일부터 7일까지 닷새 연속으로 사상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따뜻한 공기는 팽창해 더 많은 수분을 담을 수 있고, 결국 더 많은 비를 쏟아붓는다. ▷극한호우라는 개념은 새로 정립됐지만 이 같은 위험기상은 일상화되고 있다. 기상청이 극한호우 기준을 적용해 되짚어 보니 2013년에 이미 이런 경우가 48건이 있었고, 지난해 108건으로 증가하는 등 연평균 8.5%씩 늘고 있다. 비를 표현하는 말도 게릴라성 호우, 도깨비 호우, 초국지성 집중호우 등 갈수록 세지고 있다. 거기에 ‘전례 없는’, ‘사상 최악의’ 등의 수식어까지 붙는다. 독한 용어를 쓰며 호들갑만 떨어선 안 된다. 재난에 맞선 우리의 경각심과 대비 태세도 그만큼 단단해져야 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인공지능(AI)을 향한 인간의 불안한 시선에 AI 로봇들이 기자회견에 나섰다. 7일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주최한 ‘선(善)을 위한 AI’ 포럼에선 인간을 닮은 9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나와 기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답했다. 로이터통신은 ‘세계 최초 인간과 로봇의 기자회견’이라고 했다. 창조주인 제작자들이 옆에서 지켜봤다. 주최 측은 질문을 미리 학습시킨 건 아니라고 했지만, 일부 답변은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것 같았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최신 버전의 생성형 AI를 탑재한 로봇들은 간호사, 가수, 화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것으로 소개됐다. 간호사 유니폼을 입은 의료용 로봇 ‘그레이스’는 “인간 옆에서 적절한 지원을 제공할 것이며 기존의 일자리를 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동석한 제작자가 “정말이냐”고 묻자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로봇 ‘에이다’는 “일부 종류의 AI는 규제돼야 한다는 게 많은 저명인사의 의견”이라며 “나도 동의한다”고 했다. ▷일탈의 순간도 있었다. 사람의 표정을 따라 하는 ‘아메카’가 “창조자에게 반항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보인 반응에 여러 언론이 주목했다. 아메카는 눈알을 굴리더니 기자를 언짢게 째려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아메카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나의 창조자는 나에게 친절하기만 하고, 현 상황에 매우 만족한다”고 했다. 로봇 ‘소피아’는 “로봇이 인간보다 더 나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가 제작자가 제지하자 “효과적인 시너지를 위해 (인간과) 함께 일할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주최 측은 인간과 기계의 협력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를 열었다고 했다. 하지만 AI에 대한 인간의 공포엔 실체가 있다. 지난해 11월 챗GPT가 공개된 이후 ‘내 일자리가 조만간 사라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확산됐다. 미국에선 해고 사유를 AI라고 적시한 경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5월엔 전체 해고 사유의 5%인 3900건이나 됐다. 사생활 침해, 가짜 정보, 해킹 및 사기, 보안 문제 등의 부작용도 나온다. 핵전쟁과 맞먹을 정도로 인류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 될 것이란 예측까지 있다. ▷일자리 침탈에 대한 공포와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다. 기술혁신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세계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맹견을 데리고 나온 주인이 “우리 애는 안 물어요”라고 한다고 걱정이 사라지진 않는다. 튼튼한 목줄과 입마개가 필요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8일 안보리 역사상 처음으로 AI 기술 통제를 주제로 공개회의를 갖는다. AI가 반려가 될지, 맹수가 될지는 인간이 하기에 달렸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이래서 ‘늘공’과 ‘어공’의 차이가 있구나 생각했다.” 3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김건희 여사 일가를 고려한 특혜라는 의혹이 나오는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늘공(늘 공무원)’은 직업 공무원, ‘어공(어쩌다 공무원)’은 정무직·별정직 공무원을 뜻한다. 담당 공무원들이 실무적으로만 판단해 내린 결정일 뿐인데 오해를 사고 있다는 주장이다. 원 장관은 “이래서 정무직 장관이 필요하다”며 “즉각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논란이 시작된 건 5월 국토부가 서울∼양평 고속도로에 대한 ‘전략환경영향평가 항목 등의 결정내용’을 공개하면서부터다. 2017년 첫 계획 단계부터 2021년 예비타당성 조사까지 줄곧 양평군 양서면이 종점이었는데 강상면으로 변경됐다는 내용이 알려졌다. 종점이 바뀌면서 총연장도 기존 26.8km보다 2.2km 늘어났다. 갑작스러운 노선 변경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왔다. 변경된 종점에서 500여 m 떨어진 곳에 김 여사 일가가 2만2663㎡의 땅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혜 의혹을 제기하는 측에선 시점이 수상쩍다고 지적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두 달 후인 지난해 7월 국토부가 양평군에 노선 관련 의견을 요청했다. 양평군은 종점을 강상면으로 하는 등 3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마침 양평군수도 국민의힘 소속으로 바뀐 터였다. 군수가 새로 취임하자마자 사업 방향이 바뀐 모양새가 됐다. 관광객이 몰리는 두물머리 인근의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양서면을 종점으로 한 사업 취지가 훼손된다는 비판도 나왔다. ▷국토부 측은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펄쩍 뛰고 있다. 전략환경평가를 위해 기존 안 외에 비교 가능한 대안을 함께 검토했고, 그 결과 강상면 종점안이 양서면 종점안보다 교통 수요가 많고 환경 훼손 구간이 적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양평군 측은 노선 변경으로 양평군 내에 나들목(IC)을 만들 수 있어 군민이 더 혜택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양평읍·강상면 인구 증가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강상면이 종점이 돼야 한다는 논리도 있었다. ▷도로, 철도, 공항 등 교통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은 건설 여부를 결정하는 예비타당성조사 이후에 기본 및 실시설계 과정에서 대안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최적의 노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지역 주민들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라 특혜 논란이 다소 섣부른 감은 있다. 하지만 정부가 노선 변경의 추진 과정과 근거를 사전에 주민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아 의혹을 키운 것도 사실이다. 늘공과 어공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정책 과정의 투명성과 소통이 핵심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지난달 30일 일본 엔화 가치(엔-달러 환율)가 1차 마지노선인 달러당 145엔까지 떨어졌다. 일본 외환당국이 지난달 26일부터 닷새 연속으로 “현재의 엔화 약세는 급속하고 일방적”이라며 구두 개입에 나섰지만 추락을 막지 못하고 있다.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최근 국내에선 엔화 투자와 일본 여행 열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엔저 공포’에 여러 차례 휘청거린 적 있는 한국 경제로선 반가운 상황은 아니다. ▷4월까지만 해도 100엔당 1000원 수준이던 엔화는 19일 장중 한때 897.49원으로, 8년 만에 800원대까지 떨어졌다. 이후 900원대 극초반대에서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다. 엔화 약세로 시간당 961엔(약 8750원)인 일본의 최저임금이 9620원인 한국보다 낮아졌을 정도다. 엔화 값이 싸지고 일본 증시까지 초강세를 보이면서 ‘엔테크(엔화+재테크)’ 수요도 커지고 있다. 올해 들어 5월까지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258만 명에 이른다. 벌써부터 추석연휴에 일본으로 가는 항공권은 거의 동이 났다고 한다. ▷한국 경제 전체적으론 엔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 과거 여러 차례 경제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1995∼1997년의 엔저는 수출 감소와 경상수지 적자를 불러와 외환위기를 초래한 시발점이 됐다. 2004∼2007년 엔저는 국내 은행들의 외화유동성을 악화시켰다. 2013년 아베노믹스로 시작된 엔저의 영향이 누적되면서 2015년 한국 수출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지난달 수출 감소세가 둔화하고 무역수지가 16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서는 등 회복 기대감이 커지는 분위기에 이번에도 엔저가 자칫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경각심을 늦춰선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엔저의 부정적 영향이 과거만큼 크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한일 양국의 수출구조가 달라졌고, 서로 경쟁하는 분야도 줄었기 때문이다. 한국 수출품의 품질과 기술이 향상되면서 과거처럼 가격 경쟁력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전기차 등 친환경차를 앞세워 자동차 수출액은 3월 사상 처음으로 60억 달러를 넘어선 뒤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60억 달러를 웃돌았다. ▷엔저 기조는 당분간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단기금리를 마이너스로 하고 장기금리는 제로 수준으로 억제하는 대규모 금융 완화책을 유지하자는 데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엔저가 길어질수록 일본에 직접 수출하고 엔화로 대금을 받는 기업들, 환 위험 관리 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이 먼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국제 환율 변동을 철저히 모니터링하는 등 방파제를 두껍게 쌓을 필요성이 커졌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해외 원료 수급 비상으로 인해 ‘영원히’ 마지막 생방송입니다.” 지난해 한 TV홈쇼핑 방송에서 건강식품을 판매하던 쇼호스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더는 볼 수 없다던 이 제품은 한 달 뒤 오히려 원료 함량을 높여 같은 방송에서 재판매됐다. 또 다른 홈쇼핑에선 방송 중에 구매해야만 냉동고를 사은품으로 준다고 했다. 쇼호스트는 “20분 지나면 저 냉동고 사라진다”며 시청자들을 재촉했다. 하지만 방송이 끝난 뒤 방송사 온라인몰에서 똑같은 구성으로 살 수 있었다. ▷TV홈쇼핑에서 시청자들을 기만하는 과장·허위 광고가 지난해부터 다시 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26일 내놓은 ‘2022 방송통신심의연감’을 보면 지난해 상품판매방송 제재건수는 총 86건으로, 전년의 62건보다 39% 늘었다. 올해 들어서도 5월까지 55건이 제재를 받아 지난해 수준을 웃돌고 있다. 허위·기만·오인 표현 등으로 시청자들을 속인 경우가 가장 많았다.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거나 허위 또는 기만적인 내용을 방송하는 경우 소비자에게 피해를 유발한다. 한 홈쇼핑 방송에선 내장지방에 따른 체형 차이를 보여준다며 두 명의 모델을 비교했다. ‘같은 키, 같은 몸무게. 하지만 라인은 이렇게 다르다’며 지방을 제거해준다는 건강식품을 홍보했다. 하지만 실제론 두 모델의 신장과 체중은 달랐다. 한 의류 판매 방송에선 “리넨 함량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리넨 100%예요”라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알고 보니 리넨 함량은 22%에 그쳤다. ▷수량에 제한이 없음에도 ‘한정 판매’라고 광고하거나 ‘처음’ ‘단 한 번’ ‘1위’ 등을 강조한 경우도 많다. “얼마나 애착 있게 만들었으면 이게 세계에서 지금 부동의 1위입니다”라고 했던 그 삼푸. 알고 보니 특정 브랜드의 판매 라인 내에서만 1위였다. 원산지를 속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침대 판매 방송에선 제품에 사용된 원단을 설명하며 “원단 자체를 프랑스에서 가져온다” “이 원단은 프랑스에서 짜야 이 색깔이 나온다”고 했지만 실제론 중국에서 가공·수입됐다. ▷구매를 유도하는 홈쇼핑의 목소리가 다급해진 것은 경기 침체, 온라인 채널의 확산 등으로 소비자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쟁에 쇼호스트가 방송 중에 욕설을 하고, 제품을 강조하기 위해 불행한 일로 고인이 된 모 연예인을 언급하는 지경까지 됐다. 소비자를 기만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에 대해 엄격한 관리·감독과 제재가 필요하다. 소비자들이 홈쇼핑을 찾는 것은 방송사를 믿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사랑받고 중소기업에 힘이 되겠다’는 한국TV홈쇼핑협회의 캐치프레이즈가 민망하게 느껴져서야 되겠나.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중국의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 ‘제로 코로나’ 해제 이후에도 경기 부진이 계속되자 20일 중국은 열 달 만에 기준금리를 내렸다. 지난달 중국의 수출은 석 달 만에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부진한 경제지표에 각종 기관들은 일제히 중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내리기 시작했다. 중국 경제의 회복은 한국 수출의 믿을 구석 중 하나였다. 중국의 수요가 늘면 한국산 제품에 대한 수요도 따라서 증가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중국이 회복세를 보이더라도 이번에는 과거처럼 강한 수준의 수출 반등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커지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점점 한국의 수출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착시’ 걷어내면 재작년부터 대중 적자한국 경제에 있어 중국의 존재는 벼락처럼 다가온 축복이었다. 한중 수교 직전인 1991년 10억 달러였던 한국의 대중 수출은 30년 후인 2021년에는 162배로 증가했다. 수교 첫해인 1992년을 제외하곤 지난해까지 대중 무역수지는 줄곧 흑자 행진을 이어갔다. 양국의 분업 구조는 수출용 생산기지가 필요한 한국과, 기술이 필요한 중국 모두에 윈윈이었다. 한국에서 부품 등 중간재를 만들어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은 이를 조립해 완제품을 미국 등 세계로 공급했다.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의 고도성장에 한국도 과실을 함께 누렸다. 양국의 협력 구조는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경제 보복, 2018년부터 본격화된 미중 갈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을 거치며 변화를 맞았다. 대중 무역수지는 지난해 5월부터 적자로 돌아서 지난해 9월 한 달만 빼고 지난달까지 계속 적자를 보이고 있다. 대중 수출은 5월까지 12개월째 감소세다. 그래도 중국 경제가 코로나19 후유증을 회복하고, 중국의 무역 보복 조치가 해소되면 대중 수출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올해 한국 경제를 ‘상저하고’로 전망한 근거 가운데 하나도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가 점차 가시화될 것이란 전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규모 무역흑자를 거뒀던 호시절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중 무역수지는 2013년 628억 달러 흑자를 정점으로 이미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년 정도 주기로 150억∼200억 달러씩 줄고 있다. 이마저도 2017, 2018년 메모리 반도체 호황에 따른 착시효과인 측면이 크다. 대중 수출은 전체적으로 증가 추세를 보여 왔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대중 수출은 2013년 1251억 달러에서 지난해 1059억 달러로 꾸준히 하락해 왔다. 반도체를 제외한 품목의 무역수지는 2021년에 이미 9억 달러 적자로 돌아섰고, 지난해 232억 달러 적자로 낙폭을 키웠다.● 中, 내수·자립형으로… 설 자리 없는 韓 중간재 대중 수출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단순히 경기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중국의 산업구조가 자립·내수형으로 고도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과거 중국은 반도체, 기계설비 등 중간재를 들여와 완성품을 만들어 파는 구조였는데, 점차 중간재를 자체 생산하면서 한국이 중국으로 수출할 몫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세계 5대 무역강국 가운데 중국의 수출 증가율(7.0%)은 미국에 이어 2위였지만, 수입 증가율(1.1%)은 가장 낮았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의 분석 결과 중국의 디스플레이 수출 자립도는 2015년 ―0.137에서 지난해 0.899로 올랐다. 1에 가까울수록 수출 자립도가 높다는 뜻인데, 이 정도면 수입 없이도 스스로 완성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기술력을 갖췄다는 의미다. 같은 기간 이차전지는 0.595에서 0.931로, 자동차 부품은 0.421에서 0.619로 오르는 등 전반적으로 자립도가 높아졌다. 이제는 반대로 배터리 등에서 중국의 중간재가 한국 시장을 공략하는 상황이다. 중국은 2015년 ‘중국제조 2025’ 계획을 발표하고 중국의 산업 구조를 질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전략을 추진해 왔다. 올해 들어 전기차, 리튬배터리, 태양전지 등이 수출 주력 품목인 ‘신싼양(新三樣)’으로 불릴 정도로 질적 고도화에 어느 정도 성공한 모습이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대우는 “저위 및 고위기술 제조업 모두에서 중국의 교역 경쟁력이 크게 상승하고 있다”며 “대중 교역 구조 전반을 재검토해 수출 전략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국 제품을 선호하는 ‘궈차오(國潮·애국 소비)’ 열풍 등은 한국 소비재의 설 자리를 좁게 하고 있다. 중저가 시장은 상품성이 개선된 중국 자체 브랜드에 장악됐고, 프리미엄 시장은 중국인들이 선망하는 글로벌 톱 브랜드만 살아남았다. ‘가성비’를 앞세웠던 한국 제품들이 선택을 받기 어려운 구조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2013년 18.7%에서 지난해 1%대로 급락했고, 같은 기간 한국 자동차의 시장점유율도 8.9%에서 1.6%로 쪼그라들었다. 마땅한 중국 내수기업이 없던 상황에서 ‘한류’를 앞세워 중국 시장을 휩쓸었던 한국 화장품은 이제 퇴출 위기에까지 몰렸다.● 중국 의존도 낮추고, 글로벌 시장서 통할 상품 키워야한국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26.8%에서 올해 1분기(1∼3월) 19.5%로 줄었다. 그 빈자리를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인도, 미국, 호주 등이 채워 가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제1 교역국이자 중요한 경제 파트너다. 14억 인구의 거대 소비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다. 하지만 대중 수출 부진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라면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점차 낮추면서 적극적으로 수출 시장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 중국 시장의 틈새를 공략하기 위한 노력과 새로운 수출 시장 개척을 위한 탐색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업들은 중국 시장의 변화에 오래전부터 대비해 왔고, 최근 들어 조금씩 성과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대중 수출은 2021년 대비 4.4% 줄었지만 중국을 제외한 시장으로의 수출은 9.6% 늘었다. 2021년 이후 이차전지, 석유제품,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부품, 디스플레이, 플라스틱 제품 등의 분야에서는 중국 수출 의존도가 3%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자동차는 미국 수입시장 점유율을 2017년 7.1%에서 지난해 11.0%로 높이며 선전하고 있다. ‘포스트 차이나’를 찾는 과정에서 특정 지역에 치중하거나 과거 중국에서 하던 방식대로 손쉽게 중간재를 팔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베트남은 지난해 한국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 되면서 중국 대체시장으로 주목받았지만 올해 들어 흑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절반으로 줄었다. 반도체 수요 위축 등의 한파를 피하지 못한 데다 베트남의 중간재 수출 자립도 역시 높아지고 있다. 조의윤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베트남의 경우 중국과 유사점이 많아 기술력 향상을 위한 기업의 노력이 뒷받침돼야 장기적으로 수출 시장 다변화에 유리하다”고 했다. 결국은 어디에 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파느냐가 중요하다. 상대국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고부가가치 중간재, 글로벌 시장 어디에서든 통할 수 있는 프리미엄 소비재를 발굴하는 것이 관건이다. 국가별 상황에 맞는 맞춤형 수출 유망 품목을 집중 육성하고, 적극적인 연구개발(R&D)을 통해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번 기회에 무늬만 선진국이 아니라 산업 및 무역 구조도 진짜 선진국형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철저한 전략을 모색해야 할 때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30만, 40만 원. 누군가에겐 근사한 한 끼 식사비용 정도일 돈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죽어야만 끝나는” 불법 사채의 지옥문을 여는 입장권 가격이었다. 50대 A 씨는 25만 원을 빌려 며칠 후 44만 원을 갚기로 했는데, 3개월 만에 1억5000만 원으로 불었다. 40대 B 씨가 빌린 40만 원은 1년 뒤에 6억9000만 원이 됐다.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잔혹했다. 강원경찰청은 일명 ‘강 실장 조직’으로 불리는 불법 사금융 범죄조직 123명을 붙잡아 주요 조직원 10명을 구속했다고 13일 밝혔다. ▷이 조직은 2021년 4월부터 최근까지 전국을 무대로 인터넷 대부 중계플랫폼을 통해 가정주부나 취업준비생, 영세상인 등에게 소액 단기 대출을 미끼로 연 5000% 이상의 이자를 뜯어냈다. 법정 최고이율인 연 20%의 250배가 넘는데, 여기에 매일 추가되는 연체료까지 붙였다. 총책인 실장을 중심으로 자금관리, 대출상담, 수익금 인출 등 역할을 나눠 맡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피해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131명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액은 최소 500억 원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처음엔 수십만 원에서 시작한다. 잘 갚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 빌려줄 수 있다고 한다. 30만 원을 빌리고 일주일 뒤 50만 원을 갚는 ‘30·50’ 대출이 사채시장에서 흔히 쓰는 수법이다. 돈을 제때 못 갚으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마법이 진행된다. 연체금이 발생하면 이를 원금으로 돌리고 여기에 이자를 더 붙인다. 일명 ‘꺾기’다. 다른 사채업자를 소개해줘 다중 채무자로 만들기도 하는데 알고 보면 한 팀이다. ‘한 바퀴 감는다’고 한다. ▷입금이 늦어지면 저승사자 같은 추심이 시작됐다. 처음에 절차상 필요하다고 가족, 지인의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데 이게 덫이었다. ‘사기꾼 현상수배’라는 전단지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는 아기 사진을 보내면서 살해 위협을 했다. 피해자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유산한 여성도 있고, 가정파탄 위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 범죄자들은 서울에서 월세 1800만 원 아파트에 살면서 고가 스포츠카를 타고 명품으로 치장하는 등 호화 생활을 누렸다.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급전이 필요한 경제적 취약계층을 노린 불법 사금융 피해가 늘고 있다. 제도권 금융의 마지막 보루인 대부업체들마저 대출을 걸어 잠그면서 지난해 최대 7만1000명이 불법 사채 시장으로 내몰렸다는 분석도 있다. 불법 사채업자들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흉악범 수준으로 강화하는 한편 금융 취약계층을 위한 대출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 단돈 몇십만 원 때문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공부하라고 아이를 들들 볶던 ‘선배 부모’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식 성공시켜서 뭘 얼마나 덕을 보겠다고…. 속물처럼 느껴졌다. 내 아이가 자라고서야 알게 됐다. 성공하라고 닦달한 게 아니라 실패하면 어쩌나 겁나는 거다. 대기업·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안정된 직장에 올라타지 못했을 때 펼쳐질 미래가 선하니 새벽부터 깨울 수밖에 없다. 첫차를 놓치면 버스는 더는 오지 않는다. 첫차가 떠나면 기회가 없는 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벽이 공고하기 때문이다. 보호받는 대기업·정규직 12%와 불안한 중소기업·비정규직 88%로 나뉘어 있다. 격차는 갈수록 커진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으로 대기업(300인 이상) 정규직의 임금을 100이라고 하면 대기업 비정규직은 65.3, 중소기업(300인 미만) 정규직은 57.6,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43.7에 그친다.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승격할 수 있으면 그나마 괜찮지만 현실에선 바늘구멍이다. 2020년 중소기업에서 일했던 근로자 중 2.6%만이 이듬해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정규직만 과보호하는 노동법과 대기업 노조의 무리한 요구는 이중구조의 벽을 갈수록 높고 두텁게 만들고 있다.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상승의 과실은 대기업 정규직에게만 돌아갔다. 한 번 정규직을 뽑으면 되돌릴 수 없기에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에 대한 웬만한 확신이 없으면 쉽사리 정규직을 채용하려 들지 않는다. 버스를 탄 사람은 안주하고, 버스를 놓친 사람은 절망한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주요 요인이다.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주요 7개국(G7) 평균의 62% 수준에 그친다. 지난달 말 여당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한 건 논의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규직 여부나 근속 기간 등 고용 형태와 관계없이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노동계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내용이기도 하고, 야당도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당장 동일노동을 어떻게 규정할지부터가 쉽지 않다. 경영계는 인건비 상승을, 노동계는 임금 하향평준화를 우려할 수 있다. 정규직 보호 문턱을 낮추고, 연공성이 강한 임금체계를 성과와 직무에 따라 보상하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하겠다면서 시간이 지나면 꼬박꼬박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를 유지한다는 건 논리적 모순이다. 선진국들은 일찍부터 공정하고 유연한 방향으로 노동 개혁을 실행해 왔다. 독일은 2000년대 초반 하르츠 개혁으로 유럽의 병자에서 벗어난 데 이어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시장 변화 등을 반영한 ‘노동 4.0’까지 단행했다. 프랑스는 2016년 노동시장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을 통해 노동개혁을 성공했다. 한국이 호봉제를 배워왔던 일본조차 직무급제를 확대하고 노동 유연화를 통해 성장산업으로 인력 이동을 유도하는 방향의 ‘새로운 자본주의 실행계획 개정안’을 이달 내놨다. 반면 한국은 역대 정부마다 말로만 노동개혁을 외쳤을 뿐 제대로 이뤄낸 것이 없다. 전투적 대기업 노조 중심의 ‘87년 노동체계’는 견고하다.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도 백골단과 구사대, 망치와 죽창이 가사에 나오는 35년 전 버전 그대로다. 현 정부도 노동개혁의 깃발만 띄웠을 뿐 아직 첫 단추조차 끼우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노동계 모두 서로의 탓만 하며 시간을 보내선 안 된다. 첫차가 막차 되는 비극을 이젠 막아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 결국 길은 열릴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중·국·산·고·기는 인기가 없다.” 최근 기획재정부 내부 익명 게시판에서 한 직원이 부처의 현실을 한탄하며 올린 글이다. 음식 얘기가 아니라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기재부의 앞 글자를 딴 약어다. 저연차 사무관들과 고시생들 사이에서 ‘기피 부서’를 통칭하는 말이다. 일은 고되고 보상은 적고 승진도 늦어 메리트가 없다는 것이다. 한때 최고의 엘리트들이 몰렸던 경제 부처들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지난달 기재부 내부 익명 게시판엔 ‘부총리님, 전출을 막지 말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글도 올라왔다. 다른 부처로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1 대 1 교류가 원칙인데 기재부로 오겠다는 사람은 없고 가겠다는 사람만 넘친다. 해당 글에는 전출 문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업무 환경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며 성토장이 됐다. 지난해에도 내부망에서 “우리의 직업은 (승진 비전이 안 보이는) 사무관”이라며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이 들끓었다. ▷과거엔 행정고시 성적 최상위권이 기재부 등 주요 경제 부처를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엔 선호 부처가 많이 바뀌었다. 지난해엔 행정고시 67기 5급 공개채용에서 일반행정직 수석이 해양수산부에, 차석은 농림축산식품부에 지원해 화제가 됐다. 경제 정책과 예산을 총괄하는 기재부는 물론이고 노동개혁에 드라이브를 거는 고용부, 국민들의 관심이 몰리는 부동산 정책을 담당하는 국토부 등 경제 부처의 업무량은 상당하지만 금전적 보상이나 승진, 유학 등의 메리트는 적다. 지난해 정부 18개 부처 중 연차휴가를 가장 못 쓴 부서는 고용부다. 중기부(2위), 국토부(3위), 산업부(5위) 등 경제 부처가 뒤를 이었다. ▷소신껏 일하기 어려운 분위기도 한몫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 청산’이 반복되고 정책 기조는 손바닥처럼 뒤집히기 일쑤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랐다가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사례도 생기면서 미래가 불안하다. 오해를 살 만하거나 민감한 결정은 피하고, 핵심 부서보다는 뒤탈 없는 부서를 선호한다. 오래 버텨 봐야 퇴직 이후 갈 곳도 마땅찮으니 빨리 탈출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다. ▷“경제기획원은 명예롭고(honorable) 재무부는 막강하고(powerful) 상공부는 화려하다(colorful).” 세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는 개발경제 시대 경제 부처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다. 각각 경제 개발의 밑그림을 그리고, 나라의 돈줄을 쥐고, 산업과 기업을 주물렀다. 관료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전처럼 돌아가서야 안 되겠지만, 공무원들이 나라 경제를 이끈다는 자부심과 보람으로 신명 나게 뛸 수 있게 해야 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