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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을 꼽는다. 이 관점에서 열흘 뒤 막을 내리는 문재인 정권을 평가한다면 1987년 민주화 이래 민주주의로부터 가장 멀어졌다는 게 필자의 주관적 결론이다. 내 편 심기를 통한 사법부 장악, 인사권을 이용한 감사원·검찰·선관위 장악 시도가 5공 이래 가장 노골적이었으며, 입법폭주도 지난 35년간 목도하지 못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국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이처럼 실종된 시절은 없었다. 그 대미를 검수완박이 장식하고 있고 문 대통령은 자화자찬으로 임기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얼핏 무관해 보이는 두 진행 상황은 서로 호응하는 봉화(烽火) 관계다. 문 대통령이 퇴임 인터뷰를 자화자찬과 자기합리화로 도배한 것이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는 능력이 결핍된 결과인지, 아니면 실제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옳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낯 두꺼움의 산물인지 애써 구분할 필요는 없다. “역대 정부 중 가장 소통을 잘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폭이 가장 작은 편” 등 삼척동자도 아는 객관적 사실의 정반대 주장을 펴는 것을 보면 간신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이 가장 자랑으로 내세우는 게 전쟁 위기를 해소하고 대화 국면으로 전환시켰다는 논리다. 물론 2017년 하반기 한반도 위기론이 고조되다 2018년 대화 국면으로 급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변화의 동력은 미국의 최고 수위 압박의 결과 탈출구가 필요해진 김정은의 급선회다.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에서 “겨울올림픽 참가”와 “남북대화”를 명백히 밝혔다. 누가 대통령이었어도 그 변화 모드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협상 국면으로 전환됐을 것이다.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당선인의 안보 관련 발언을 놓고 “적절치 않다”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국민이 보기에 정말 위험하고 부적절한 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대신 보증해주다 핵·미사일 고도화 시간만 벌어준, 팩트와 객관적 조건에 희망사항을 뒤섞어 반죽하는 주관적 판단, 연락사무소 폭파 같은 도발과 중국의 안하무인 패권주의에 한마디 못하는 굴종외교다. 필자는 문 대통령이 국내외 정책에 도입했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난 좌파적 접근 방법들을 성공한 것인 양 계속 자화자찬하고, 대통령 당선인을 비판하는 바탕에는 명확한 목적의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즉 좌파 핵심과 지지층에 “나는 끝까지 우리 진영을 배신하지 않는다. 당신들도 나를 끝까지 보호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추진했다가 지지층 내 핵심 그룹에게 외면당한 노무현 학습효과로 내 편에 외면당하면 퇴임 후 안전보장이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 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언행만 골라 하는 것이다. 민주당 강경파도 검수완박으로 호응하고 있다. 현재의 검수완박은 수사-기소권 분리에 대한 찬반을 떠나 추진 주체들의 의도 시기 절차 등 모든 면에서 상식과 민주주의 원칙의 관점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선 어떤 수단도 정당화시키는 뇌구조를 갖고 있는 강경파들은 180석을 신탁(神託) 보검처럼 휘두르는데 이는 여권의 절대다수 의석이 평상적인 선거의 결과물이 아님을 망각한 행태다. 총선이 치러진 2020년 4월은 전시를 방불케 했던 코로나 위기 상황이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확진·사망자가 무더기로 쏟아진다는 뉴스들을 접하며 국민은 ‘우리는 저 거대한 태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아야 할 텐데…’라는 위기감속에서 선장(여당)에게 힘을 몰아줬다. 6·25전쟁 중에 치러진 1952년 지방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압승을 거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정책·이념 지향점에 국민들이 압도적 지지를 보내준 건 아님을 알면서도 그에 맞게 절제하는 상식과 염치는 잊은 것이다. 해결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먼저 윤 당선인이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 국민은 문 정권의 패악을 심판하고 정의를 되찾을 적임자라고 여겨 정권을 맡겼다. 광화문과 서초동에 군중이 모이는 그런 극한 대립은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문 정권이 이를 자초하고 있고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가 될 것이다. 검수완박 사태가 없었다면 새 정부가 전임 정권 문제를 건드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의구현을 바라는 국민들 마음속엔 통합·화해를 통해 미래로 가야한다는 상충된 바람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차 민주당의 분열 움직임이 커질 수 있는데 사정 국면이 전개되면 야권을 단결시켜 분열을 막아주는 효과도 생길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민주당 스스로 전임 정권 문제를 국민적 어젠다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국민들은 자기들의 보신을 위해 멀쩡한 교량을 부수고 치외법권의 소도(蘇塗)를 만든 심보가 괘씸해서라도 문 정권 패악의 규명을 요구할 것이다. 5년 내내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더니 임기 마지막까지 자기들끼리의 벌거숭이 임금님 놀이에 취해, 나라를 다시 거대한 대립의 골짜기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제가 윤석열 후보님 경선 때 유승민 후보가 (언급한) 항문침 장본인입니다. 윤 후보님 좀 도와드리다 외곽으로 빠져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 보니까 윤 후보님이 당선되시고….” 최근 유튜브에서 접한 경남 한 기초자치단체 군수 선거 출마자의 연설 내용이다. 자신이 지난해 10월 국민의힘 경선 때 논란이 됐던 항문침 당사자라고 당당히 자기소개를 한다. 지역 신문을 찾아보니 최근 인터뷰 기사들이 있다. ‘이번 대선에서 모종의 큰 역할을 했다던데?’라는 기자 질문에 그는 “예,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합당을 위해 분주히 뛰었다”고 했다. ‘김건희 여사와의 인연은?’ 질문에는 “허허 노코멘트”라고 했다. 윤 후보는 토론 당시 “만난 적 없다. 모른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무속인 논란을 비롯해 윤 후보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관계의 상당수는 상대방의 일방적 친분 과시의 결과물이었다. 이제 더 많은 이들이 친분과장, 호가호위로 떡고물을 주우려 할 것이다. 단호히 차단하지 못하고 측근과 사적 인연에 휘둘리면 정권의 기둥을 갉아먹게 된다. 그렇게 몰락한 대표적 사례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측근인 유영하 후보의 후원회장을 자임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저를 알던 거의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심지어 저와의 인연을 부정할 때에도 흔들림 없이 묵묵히 제 곁에서 힘든 시간을 함께 참아냈다”고 유 후보를 추켜세웠다. 박 전 대통령의 설움은 이해되지만,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주변 사람들은 어디 좋은 데로 떠난 게 아니라 무려 100여 명이 옥고를 치르고,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대착오적 이념세력에게 정권을 선물한 것은 측근의 늪에 함몰된 결과물이다. 보수 정권의 성공을 위해선 낡은 보수를 청산하고 새로운 중도-보수 시대가 열린다는 인상을 줘야 하는데 반대 이미지의 현상들이 곳곳에서 꿈틀댄다. “그럼 그렇지, 보수가 어디 가겠냐…”는 소리가 나오게 해선 안 된다. 새 정부의 위기는 부인과 처가에서도 싹틀 수 있다. 김건희 씨가 지난주 종이컵을 절약한 직원에게 준 손글씨 상장 사진을 SNS에 올린 의도가 친문들이 주장하듯 조민 학위박탈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는지, 환경과 동물보호 부문에서 나름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였는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다. 분명한 것은 대통령 부인의 SNS 등 모든 대외 메시지는 내용·시점 모두 엄밀한 데스킹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 한 언론에 김 씨가 전시·기획 일을 계속 하고 싶어 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추측성 기사라 믿고 싶다. 그 정도까지 해이해졌을 거라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김 씨 오빠 등 처가 관련 소문이 들린다. 과장된 내용으로 보이지만, 파리 떼들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하다. 윤 당선인은 한동훈보다 더 날카롭고 더 확실한, 국민들이 “저 정도까지?”라고 놀랄 정도의 의지를 실어, 특별감찰관을 조속히 임명해야 한다. 당선인 본인이 신뢰도 점수를 잃는 것도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서툴고 말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에게 표를 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의 삶이 보여준 신의 의리 정직성에 대한 높은 평가가 있었다. ‘안철수 공동정부’ 약속을 저버린다면 지지자들 마저 윤 당선인을 다시 쳐다보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이중성과 표변을 국민은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문재인 정권 내내 넌더리 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검수완박 시도는 그 대하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정권 초반엔 역대 정권 중 최대 규모로 검찰을 동원해 재미를 보더니, 칼이 자신들을 겨냥하자 검찰 죽이기에 나섰고, 서울·부산시장 보선을 앞두고 LH사태가 터지자 “검찰이 나서라”고 다시 매달렸다. 애완견 체제를 구축하고는 잠잠하더니 대선에서 지니까 또 시작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선 수단 방법 염치를 가리지 않는 이런 행태는 레닌 이후 좌파든 우파든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은 정치집단이 공통적으로 보여 온 특질이다. 민주주의의 운용의 핵심인 권력의 자제, 숙의민주주의를 전혀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수준의 집단이 코로나 덕분에 180석을 갖고 있다. 촘촘히 구축해놓은 좌파 이권네트워크도 여전하다. 보수 정부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온갖 정보가 흘러가 공격거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낡은 보수의 준동, 진짜 인재와 감별하기 쉽지 않은 파리 떼들, 처가 리스크, 상식과 절제를 팽개친 거야(巨野)…. 윤 당선인의 발목을 잡을 지뢰는 도처에 널려 있다. 온갖 불길한 징후들을 기우(杞憂)로 만들기 위해선 대선 당시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의 겸허한 마음을 항상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게 보수역사상 최초의 전략적 선택으로 똘똘 뭉쳐 독립운동하듯 정권교체를 이뤄낸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2018년 7월 초 필자는 진보 장기집권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는 칼럼(‘진보 장기집권론에 끼는 먹구름’)을 썼다. 당시는 집권 세력이 진보 20년 집권, 영구집권을 장담하던 시기였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70, 80%를 웃돌았고, 한 달 전 지방선거는 여당의 싹쓸이 수준 압승이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필자가 좌파의 재집권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당시 칼럼 표현을 인용하면 이랬다. “△최고 권력자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법치·합법적 절차는 형식적으로만 준수하는 외피에 불과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수십 년 전에 멈춰 있는 인물들을 자꾸 요직에 등용한다. 자기들끼리의 끈 때문이다….” 실패한 정권들의 공통된 특질들이 정권 초기부터 싹이 보였는데 실제로 그런 퇴행적 특질들은 그후 열대 덩굴처럼 뻗어나 정권을 휘감았다. 집권 세력 스스로 침몰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선 표차는 0.73%p에 불과했다. 만약 좌파가 5년 더 연속 집권했다면 투표로는 정권교체가 불가능한 사회구조가 됐을 수 있다. 포퓰리스트 좌파 권력이 교육·문화 부문과 SNS 세상을 장악하고, 친정권 행정·시민사회 조직망을 밑바닥까지 뿌리내리게 해 촘촘한 이권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으면 정권이 아무리 실정(失政)해도 선거에선 매번 승리하는 현상을 이미 전 지구적으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구조에서 만약 윤석열 정부가 실패해 정권을 뺏기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으로부터 다시 정권을 되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행히 윤 당선인 앞엔 명확한 나침반이 있다. 바로 문 대통령이다. 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으면 어려운 선택마다 답이 보인다. 민주국가 지도자라면 마땅히 해야 될 선택, 즉 △당장은 손해여도 원칙·가치를 택하기 △검찰 경찰 권력기관들을 손아귀에 넣고 싶지만 독립시키기 △공영방송을 내 편으로 만들고 싶지만 그래도 완전히 독립시키기 △내 사람·우리 진영의 허물을 감싸주고 싶지만 추상같이 단죄하기…. 문 정권은 당장은 불편해보이고 손해처럼 보이는 그런 선택을 하나도 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택함으로써 결국 좌파 장기집권의 호기를 스스로 차버렸다. 윤 당선인은 달랐기 때문에 호출됐고 선택됐다. 원칙과 가치보다 현실 권력의 이익을 좇았던 대다수 공직자·정치인과 달랐다. 그러나 이 장점은 국정 경험이 없다는 약점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특히 인사에 정권의 성패가 달렸다. 친구, 선거공신을 중용하다 헛발질하면 정권 전체가 미끄러진다. 입안의 혀처럼 편한 사람이 아니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말 하는 사람을 옆에 둬야 한다. 첫 조각에서 과연 진짜 과거 권력자들과 다른지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요즘 거론되는 총리 후보들은 하나같이 흘러간 시대의 필름들이다. 디지털플랫폼 정부 같은 새로운 미래 약속과는 괴리가 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5년 후 보수 재집권을 목표로 그랜드플랜을 갖고 임하면 선택의 기준이 분명해질 것이다. 윤 당선인은 선거 때 국정 각 분야를 잘 몰라도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고 강조했는데, 인사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청탁·눈치도 보지 않고 정말 사심 없이 인재를 찾아낼 인사 전문가를 옆에 둬야 한다. 그렇게 천거된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지도자의 몫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회고록 ‘약속의 땅’에서 2009년 1월 새 정부 조각 비화를 밝혔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유임시키고 싶다고 제안하자 게이츠는 오바마에게 국방예산과 조직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등을 꼬치꼬치 묻는 질문서를 보냈다. 임명권자가 면접을 당한 셈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국무장관에 경선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임명하기 위해 거듭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맥을 동원해 삼고초려했다. “당신은 내게 너무 귀중하기에 노라는 대답은 감당할 수 없어요”라는 호소에 힐러리는 일주일 만에 장관직을 받았다. 만약 문 정권이 진보 장기집권을 위한 그랜드플랜을 갖고 있었다면 스스로에게 훨씬 더 엄격하고, 사람을 널리 쓰고, 외연을 확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국 사태, 캠코더 인사, 최근의 옷값 논란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에겐 느슨한 잣대를 들이대며, 당장의 이익만을 좇은 후과가 정권재창출 실패다. 이렇게 선명한 반면교사는 없다. 윤 당선인은 5년 후 성공한 정권으로 떠나겠다는 목표, 즉 보수정권 재창출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매일의 선택에 임해야 한다. 취임 당일 집무실과 침실 문에 D-1826일(365일×5년)로 시작해서 한 장씩 뜯어내는 달력을 붙이길 권고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당선은 단순한 정권교체를 뜻하지 않는다. 대한민국호(號)가 거대한 제동음을 내면서 항로를 바꾼 역사적 사건이다. 지난 5년간 나라의 골조와 진로를 바꾸려 한 좌파진영이 재집권을 통해 굳히기를 하려던 찰나 국민이 제동을 걸며 항로 정상화를 명령한 것이다. 그 의미의 심대함만큼 윤 당선인에게 닥칠 저항과 도전도 거셀 것이다. 좌파 운동권은 장기집권 몽상에서 깨어나는 탈환각 고통의 강도만큼, 5년간 찰지게 구축한 이권 네트워크의 점도만큼, 질기고 강렬하게 대반격을 준비할 것이다. 이미 좌파 언론들은 당선인 측근들의 초중고교 동창들까지 쑤시고 다니고 있다. 퇴임할 정권도 초유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정권’의 사례를 추가하는 데 있어 문재인 대통령에겐 마감이 없다. 대선 막바지엔 “첫 민주정부는 김대중 정부” “여성가족부의 중요성” 발언 등 역대 어느 대통령도 엄두 내지 못했던 수준의 개입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호남과 2030 여성들 중에 차마 이재명은 내키지 않아 하는 샤이진보들을 정교하게 겨냥한 전략적 발언들이었다. 그 발언들은 상당한 효과를 거뒀지만 승패를 뒤집지는 못했다. 그래도 전혀 거침이 없다.임기 말 알박기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당당하게 “내 인사권”이라고 주장하는 낯 두꺼움도 전례가 드물다. “겨우 0.73%P짜리가”라는 심리, 내 뒤엔 180석이 있다는 자신감, 지방선거 이전에 정권 견제 심리를 불붙여야 한다는 정치공학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깔려 있다. 윤 당선인은 이런 현실에서 통합과 진실 규명을 동시에 이루는 고차방정식을 풀어가야 한다. 정권교체를 택한 민의는 문 정권 5년간의 거짓을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통합과 화해가 아무리 중요해도 불의를 그냥 덮고, 진실이 무엇인지 모른 채 갈 수는 없다. 참고할 수 있는 게 국제사회에서 준용되는 규범, 즉 진실을 바탕으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진실 규명을 목표로 정교하게 진행해야 한다. 대장동, 울산시장 선거, 탈원전 등 거대한 사안부터 추미애 아들 휴가처럼 작지만 진실이 덮였을 가능성이 있는 사안들까지 모두 포함돼야 한다. 자칭 언론 유튜버들이 마구 퍼뜨린 온갖 녹취록과 음해성 보도의 날조 편집 여부, 팩트 조작 여부도 밝혀져야 한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장모 비리 의혹, 고발사주 의혹도 진실이 명확히 밝혀질 수 있도록 중립적이고 철저한 사법적 절차가 보장돼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는 통합과 화해가 불가능하다. 민노총을 비롯한 떼법 세력들에 대한 대응도 정권 교체를 택한 민심의 요구다. 새 정부는 이런 국가 정상화의 철학을 견고히 공유하되, 실행은 차근차근 공정하게 진행해야 한다. 바로 그런 신중함, 오만하지 말라는 경고가 대선 민의에 담긴 두 번째 메시지다. 현재까지 당선인은 신중하고 정제된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주변에선 벌써 경솔한 행태들이 나온다. 특히 세 ‘불알친구’의 행보가 대비된다. 첫 친구는 절친 중 절친인 초등학교 동창 이철우 교수다. 윤 당선인이 지난해 총장직을 물러난 직후부터 옆에서 도와 온 그는 친구의 당선 직후 “임기 끝나고 다시 연락하자”며 5년간의 결별을 통보했다. 반면 역시 초등 동창인 김성한 교수는 당선인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통화할 때 김 교수의 개인 스마트폰을 쓴 사실이 알려지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보안이 필수인 정상급 통화를 개인 폰으로 한 것은 적절치 않지만, 워낙 갑작스레 조율된 통화여서 어쩔 수 없었다 치자. 그런데 굳이 개인 폰으로 통화한 사실 같은 시시콜콜한 내용이 유포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만약 김 교수의 영향력과 기여를 과시하려 누군가 유포했다면 외교의 외자도 모르는 행태다. 윤 당선인의 강릉 외가를 매개로 어릴 적 인연이 있다는 권성동 의원은 방송에 나가 김오수 검찰총장의 퇴진을 주장했다. 필자의 주관적 의견으로도 김 총장은 물러나는 게 맞다고 본다. 임기제는 중요하며 존중돼야 하지만 그 취지는 정치적 독립·중립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김 총장은 그 취지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 왔다. 그럼에도 새 권력이 공개적으로 나설 일은 아니다. 가만 놔둬도 전직 총장 등 검찰 안팎 양식 있는 사람들의 공론이 모일 텐데, 핵심 측근이라 불리는 인사가 설치는 바람에 당선인이 총장 임기제를 깨려는 사람처럼 비난받게 만들었다. 국민은 친구와 측근들에게 표를 준 게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친(親)자(字)로 인해 망가졌다. 친형, 친구, 친인척…. 당선인은 살얼음판 위에서 조심조심 새 길을 열어가려는데 친자 돌림들이 지근거리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발을 쿵쿵대면 당선인의 발밑도 금이 갈 수 있다. 대선 승리는 자신들의 공훈이 아니라, 정권교체를 간절히 열망해온 과반수 국민이 힘겹게 빚어낸 집단 창작품임을 망각해선 안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자민련분들 보면 무조건 먼저 인사하고 고개 숙이세요.” 1997년 11월 초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가 국민회의 당직자들을 불러 모았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DJP 연합을 성사시킨 직후였다. 국민회의 사람들이 지지율 3%에 불과한 자민련을 얕잡아 보는 듯한 언행을 할 경우 단일화 효과가 반감될 것이란 우려에서 겸손 또 겸손을 지시한 것이다. 그 DJP 연합을 비롯해 2002년의 노무현-정몽준 등 대부분의 단일화는 이념·정책방향이 이질적인 세력들의 선거 공학적 결합이었다. 그런 점에서 어제 새벽의 윤석열-안철수 단일화는 상대적으로 가장 명분이 뚜렷한 단일화로 평가될 것이다. 두 사람은 문재인 정권의 불의·실정에 대한 심판과 무너진 대의민주주의 복구라는 대의를 공통적으로 추구해왔다. 게다가 보수와 중도의 결합은 대선이 아니어도 한국 정치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돼온 과제였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효과도 예상되는 결합이다. 사실 윤 후보 지지자 중에는 투표함에 표를 넣으면서도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을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문 정권에 분노한 사람들이 윤석열을 불러내 일관되게 지지해 왔지만, 국정경험이 없는 데다 측근논란, 부인과 처가 논란 등을 보며 내심 불안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안철수의 합류는 안정감을 보강하는 데 큰 효과를 낼 것이다. 그의 개혁지향적 중도 성향은 국민의힘의 낡은 기득권세력 이미지를 덜어내 줄 것이다. 무속에 휘둘리는 청와대, 부인전횡 등 여당이 집요하게 가공해온 상상도(圖)도 힘을 잃게 됐다. 정치력과 포용력 테스트에서 일단 득점을 한 윤 후보에게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이번 결합을 화학적 결합으로 한 단계 높이는 것이다. 국민의힘 사람들이 지지율 7%, 의석수 3석에 불과한 정치인을 껴안은 것이라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안철수 개인이 아니라, 안철수 지지로 표상되는, 도덕적으로 문제없고 통합 지향적인 정치를 기대하는 많은 국민을 끌어안기로 한 것이다. 부동층과 안철수 지지자들은 국민의힘이 얼마나 진실되게 행동하는지를 냉철하게 지켜볼 것이다. 겸손한 자세로 단일화를 보수정당의 환골탈태, 부패 기득권 정당 이미지 탈피의 계기로 삼아야한다. 명실상부하게 공동정부를 이루겠다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선거 열흘을 앞두고 다당제 연동형비례제 개헌 등 미끼를 던지며 ‘반윤연대’에 매달렸던 여당은 윤-안 단일화를 막기 위해 혈안이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호남 출신인 안 후보 부인과 끈이 닿을 학연 지연까지 동원해 접근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안철수는 명분과 원칙, 가치를 택함으로써 행정능력·국정능력을 입증해 보일 기회의 문 앞에 다가섰다. 선거 코앞에 무대에 급조해 올린 여당의 집단 변신 연극은 뻘쭘해지게 됐다. 얕은수는 결국 자충수가 됨을 보여준다. 여당이 4년10개월간 자신들이 찍어온 족적을 아무리 부랴부랴 부정하고 반성해봤자 거기에 진정성을 느낄 만큼 국민이 어수룩하지 않다. 이제 대선은 ‘민주정부 4기 출범’ vs ‘정권교체’라는 양측의 시대정신이 명확히 대비되는 구도가 됐다. 후보들의 인성과 이념적 실체를 직시할 때다. 미국의 성공한 역대 대통령 10명의 전기를 쓴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뽑은 가장 중요한 대통령의 자질은 품성(Character above all)이었다. 후보를 떠받치는 세력들, 즉 집권할 경우 어떤 세력이 득세하게 될지도 내다봐야 한다. 대선은 대통령 한 명만 뽑는 게 아니다. 거대한 두 그룹의 새(鳥)떼 가운데 어느 그룹에 논을 내주느냐의 선택이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경우 추미애 등 문 정권 내내 득세했던 인물들이 검찰장악·사법훼손 등의 비행이 면죄부를 받은 듯 활개치고, 더 거친 좌파 인사들이 5년을 다지기(콘크리트 타설) 기간으로 삼으려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후 윤 후보와 부인 주변에 몰려든 파리떼들, 검찰주의자들, 보수 몰락을 자초한 옛 기득권 부패인사들이 방앗간에 득실대는 상황이 펼쳐지면 국민은 더 크게 분노할 것이다. 국민은 5년 전 투표의 결과로 민생과 상식이 무너지고, 냉전시대의 굳은 머리로 대한민국 흠집내기에 몰두해온 좌파 인사들의 세상이 열리는 현상을 목도했다. 워치독 기관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기본 원칙과 질서가 무너지고, 외교는 신뢰와 자존심 모두 잃었다. 법치의 근간인 절차적 정당성, 견제와 균형은 5공 이래 가장 밑바닥 수준까지 떨어졌다. 우리는 어린 시절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고 배운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다고 배운다. 그런 믿음은 보통사람들의 평생 삶과 공동체를 지탱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 믿음은 수시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필자 세대의 삶에서 역사적·사회적 차원에서 그 믿음이 시험대에 올랐던 것은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이었고, 결국 믿음이 승리했다. 그 후 35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믿음은 다시 거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이번 대선은 그런 선거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김혜경 씨 법인카드 의혹을 과잉의전 논란이라 표현하는 건 적확하지 않다. 과도한 의전, 갑질 차원이 아닌 공금횡령 의혹 사건이다. 이재명 후보는 부인의 법인카드 사용 실태를 몰랐을까. 정말 몰랐다면 시청·도청 화장실에는 ‘부패지옥 청렴천국’ 스티커를 붙였지만 정작 자기 안방 부패에는 후각마비였음을 자인하는 셈이다. 대장동 비리와 무관하다는 해명이 ‘코밑에서 측근과 민간업자들이 천문학적 인허가 비리를 조직적으로 벌이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방치했다’는 치명적 무능을 자인하는 셈인 것과 마찬가지의 딜레마다. 만약 다른 대선 때 이런 사건들이 터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혜경이라는 이름에 과거 대선 후보 부인들의 이름을 넣고 상상해보라. 대장동을 용산개발로, 이재명을 오세훈으로 바꿔 상상해보라. 선거는 진작 결판났을 것이다. 그런데 2022년 대선은 다르다. 법인카드 파문에도 1, 2위 격차는 좁혀졌다. 이 후보에 대한 지지는 업무능력에 대한 기대치의 비중이 크고 정직성 도덕성에 대한 기대치는 워낙 낮은 탓도 있겠지만, 더 큰 원인은 윤석열 후보가 다시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자책골로 상쇄해준 덕분이다. 적폐청산 발언은 실제 전하고자 했던 콘텐츠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과잉 표현들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은 한 달 전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하자 가까스로 회복했던 진중함을 다시 잃어버리는 징후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선거가 다가올수록 ARS 보다는 면접조사의 정확성이 높아진다. 대표적인 면접조사인 갤럽에서 선두 1, 2위간 격차는 거의 없다. 더구나 선거 막바지는 여당 프리미엄이 최대치로 작동한다. 돈풀기는 차치하고라도 전국 통리반장이 9만5000명이고 기초 단체·의회도 여당이 장악하고 있다. 설령 윤 후보가 다소 앞선다 해도 우쭐은커녕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문재인 정권 5년간의 숱한 실정과 내로남불, 부정의에 분노한 정권교체 민심이 일관되게 압도적 과반수를 유지하고 여당 후보가 초대형 악재들에 허우적이는데도 윤 후보는 30%대에서 맴돌지 않았나. 얼마나 많은 국민이 실망하고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지 안다면 반성하고 더 고개 숙여야 한다. 그래야 단일화의 해법도 보인다. 단일화의 공(球)이 넘어온 지금이야말로 윤 후보가 초심으로 돌아갈 때다. 정치에 뛰어들며 밝힌 소명은 정권교체와 새로운 정치 아니었던가. 설령 단일화 없이 이긴다 해도 180석 거대 민주당과 국민의힘 내 기득권 세력의 벽에 부딪혀 새 정치 구현은 난망이다. 게다가 6월 지방선거와 내후년 총선도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이 각각 후보를 내 표가 분열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안철수 후보를 끌어안는 것은 중도보수 지평 확대, 보수 개혁, 성공한 정권의 디딤돌을 놓는 것이다. 안철수 총리 인준을 국회에 요청하면 최근 그를 끌어들이려고 여권이 쏟아낸 칭송의 수사(修辭)들이 자승자박이 돼 민주당도 비토하기 어려울 것이다. 광역선거 공천 등 여러 조합도 있을 수 있는데, 더 중요한 건 자리보다 신뢰다. 윤 후보는 10분 내에 담판으로 끝내겠다고 했는데 성공을 위한 준비작업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이준석 대표와 김기현 원내대표가 단일화에 부정적인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들이 안철수 진영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못하게 제어하고 설득하는 게 정치력이고 리더십이다. “아쉬우면 들어와라. 그러면 상응한 대접을 해준다”는 태도는 하급의 막돼먹은 정치다. 우리 국민들은 강자가 약자를 무릎 꿇리는 걸 가장 싫어한다. 내각을 나눠 갖는다 해도 후보로선 손해 볼 게 없다. 수십 년 생사고락을 나눠 신세를 갚아야 할 정치적 동지들이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손해 보는 건 한자리 노려 몰려든 이들과 당내 기득권자들뿐이다. “우리끼리 다 먹을 수 있다”고, “단일화 안 해야 보수가 긴장해서 열정투표한다”고 귀에 속닥일 때마다 2002년 이회창 측근들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를 어떻게 폄하하고 “숨은 5%” 운운하다 이회창을 패배로 몰아넣었는지 상기해야 한다. 담판이 성사 안 될 경우 여론조사도 못 받을 이유가 없다. 상식과 이치를 따지면 지지율 4분의 1 수준 후보의 여론조사 단일화 요구는 과도하다. 하지만 이걸 받는 통 큰 자세를 보이면 그 자체가 막대한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다. 더 큰 집이 굽히고 양보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안철수에게 굽히는 게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수백만 국민에게 굽히는 것이다. 눈앞의 산술적 손해를 감수하고 다 던진 정치인들이 항상 큰 싸움에서 이겼다. 안 후보도 상식에 입각해 자신이 위치를 봐야 한다.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양당구조 타파가 아니다. 만약 3등에 그칠 경우 의미 있는 제3지대 실험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정권교체 훼방꾼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이다. 도덕성 자질 면에서 가장 낫다고 평가해주는 사람이 많다 해도 이를 지지율로 연결시킬 드라마틱한 히스토리와 업적을 아직까지는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대선까지 불과 19일. 윤, 안 앞에는 정권교체와 더불어 새로운 중도보수 시대를 열 기회의 문과 동반몰락의 문이 다 열려 있다. 욕심이나 아집에 사로잡히면 함께 광화문에서 돌팔매를 맞지 결코 어느 한쪽 책임만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불과 33일 남았는데도 안갯속인 이번 대선에서 명확해진 건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국민 과반수가 생각하는 대선의 시대정신은 정권교체이며, 둘째는 그 시대정신이 구현될지를 판가름할 최대 변수는 단일화라는 점이다. 상식의 세계에서 생각하는 단일화는 윤석열-안철수, 이재명-심상정 후보 간의 단일화다. 그런데 요즘 여권은 상식을 깨는 그림을 스케치하고 있다. 며칠간 여권 물밑에서 이재명-안철수 단일화론이 피어나더니 마침내 송영길 대표가 책임총리제를 공식 제기했다. 안철수 후보가 ‘정치적 자살’을 결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 황당한 얘기를 여권이 꺼낸 것은 고도의 정치적 심리전이다. 이재명이 안철수와 접목이 가능한 수종(樹種)인 것 같은 이미지를 확산시켜 중도층을 흔들고 안철수 지지층 빼오기를 노린 것이다. 박스권에 갇혀 있는 이재명 후보 입장에서 ‘야권 단일화 무산’은 절체절명의 과제다. 더 나아가 만약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성사 가능성이 10%만 보인다 해도 대통령 자리 빼고는, 모든 걸 내주겠다고 나설 것이다. 여권 인사들도 “내가 도마뱀 꼬리가 되겠다”며 힘을 실어줄 것이다. 반면 국민의힘엔 그런 절박성이 없다. 만약 윤석열이 단일화를 위해 다 던지려 하면 윤핵관들은 “4자 구도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을 펼 것이다. 물론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윤-안 간에 단일화 얘기가 전혀 오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옛 YS 계열 인사들이 양측을 오가며 말을 전한다고 한다. 하지만 거간꾼의 중량이 신통치 않고, 후보들은 힘을 실어주지 않은 채 자강론, 안일화만 내세우고 있다. 자강론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효과가 있지만 선거 막바지까지 자강론을 얘기하는 건 치킨게임에 다름 아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협상은 투표일 34일 전에 타결됐다. 곧이어 D-28에 양자 TV토론, D-26에 여론조사, D-25에 단일후보 발표로 이어졌다. 1997년 DJP연합이 성사된 것은 대선 48일 전이었다. 달력상으로는 이번엔 이미 막차 출발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후보 등록이 14일, 재외투표소 투표가 23일, 투표용지 인쇄 배포가 27일 마감이다. 혼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단일화를 외면한다면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다수 국민의 간절한 열망, 대한민국의 미래를 베팅하는 것이다. 들쭉날쭉 여론조사에서 일부 우위로 나타난다 해도 야권은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선거 막바지에 힘을 쓰는 건 돈과 조직이다. 이재명은 추경 14조 원도 성에 안 찬다며 35조 원을 내걸었고 여당은 동조 농성까지 들어갔다. 지방정부가 소리 없이 뿌릴 수 있는 선심성 복지도 부지기수다. 합법적 금품살포가 코로나 핑계로 가능해졌는데 야당은 심각성을 모른다. 좌파진영이 바라는 문재인 정권의 발전적 계승과 우파진영이 바라는 정권교체 중 어느 쪽이 더 진정한 국민의 뜻인지 굴절 없이 확인하려면 단일화는 후보들의 의무이며 당위다. 특히 이번 대선의 단일화는 역대 어느 단일화와 비교해도 명분이 있다. 정책·이념이 이질적이었던 김종필-김대중, 정몽준-노무현과 달리 윤-안은 지향점을 공유한다. 심상정 후보도 진보 재집권에 동의한다면 이-심 단일화 논의의 문을 여는 게 마땅하다. 단일화 협상은 밀실이 아니라 공개리에 투명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다. 단일화 훼방 세력의 장난질도 제한된다. 후보들이 현재 지지율이 자신의 역량과 매력 덕분이 아니라 정권교체 민심의 반영임을, 자신의 소명이 대통령 자리 자체가 아니라 정권교체임을 명심한다면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권교체 민심은 대선 때마다 존재했지만 이번 선거만큼 뜨거운 온도는 1987년 이후 처음일 것이다. 그 열망은 정권교체 실패 시 나라의 미래에 대한 걱정·불안과 동의어다. 그들은 김혜경 씨의 공무원 심부름과 법인카드 사용 논란을 보며 만약 이번 폭로가 없이 김 씨가 청와대에 입성했을 경우 2부속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를 걱정한다. 전임 정권에서 임명된 KBS 이사가 법인카드로 김밥 한 줄 결제한 것을 물고 늘어지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기어코 쫓아낸 좌파권력의 악착같음도 환기된다. 권력은 제도상 허용 범위 내에 있다 해도 최대한 신중하게 행사돼야 한다는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라는 민주주의 기본 규범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지도자, 복마전 산하단체 실태, 천문학적 뇌물이 오간 개발사업…. 수년간 지방자치단체에서 벌어진 일들이 대한민국 중앙정부 차원의 본편 예고편이 될까 봐 우려하는 보수층이 많다. 이런 걱정과 열망을 외면한 채 혼자 다 먹겠다는 욕심으로 유불리만 재다 단일화 막차를 놓친다면 그 죄과는 결코 씻을 길이 없을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제 딸은 인간광우병(vCJD)으로 사망한 게 아닙니다. MBC 팀이 왔을 때도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CJD)으로 사망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고도비만을 치료하기 위해 위장절제수술을 받았는데 예후가 좋지 않아서 사망에 이른 것입니다.” 이번 주 발간된 신간 서적들을 뒤적이다 전직 외교관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37년간 통상외교 현장에서 꼼꼼히 기록한 메모들을 토대로 정리한 ‘최석영의 국제협상 현장노트’다. 책에는 2007년 한국에서 광우병 파동이 휩쓸고 지나간 뒤 당시 주미 대사관 공사였던 저자가 MBC PD수첩에서 인간광우병 사망자인 것처럼 소개됐던 아레사 빈슨의 모친 로빈 빈슨 씨와 나눈 대화록이 담겨 있다(책 204쪽). 모친의 발언은 MBC팀이 고의로 팩트를 왜곡했음을 입증한다. 그 후 15년이 흐른 지금 좌파 진영 자칭 언론의 행태는 원하는 쪽으로 몰고 가려고 팩트를 왜곡·짜깁기했던 PD수첩의 행태를 차라리 원시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젠 장기 공작을 벌여 함정을 파고 지상파 방송이 넘겨받아 틀어주는 수준까지 치달았다. 김건희 녹음 공개가 예고됐던 지난주 이런 상상을 해봤다. 이재명 후보가 “목적은 물론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 저런 방식은 진보의 가치를 먹칠하는 것”이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목적 달성을 위해선 수단의 정당성을 개의치 않는 586정권과는 DNA가 다르다. 그러므로 이재명 당선도 정권교체’라 주장할 근거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예상대로 상상은 공상으로 끝났다. 그게 이 후보의 본질이며 한계다. 김건희 녹음 파문은 윤석열 후보가 헤어나지 못하는 덫, 즉 부인과 처가 리스크의 심각성을 재확인시켜 준다. “결정적 한방은 없었다”며 희희낙락하는 야당 분위기는 보수정당의 수준을 보여준다. 안희정과 피해자 중 어느 쪽을 편드는 사람이 많은지와 관계없이, 평생 법을 집행해 왔으며 법치의 총책임자가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당장의 유불리보다는 원칙과 보수의 품격을 중시해야 한다. 물론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한 건 MBC 등 좌파언론이지만 혼잣말로 욕한 게 상대방 귀에 들어갔다면 미안하다고 하는 게 상식이다. 김건희 발언이 기름을 끼얹은 무속 논란에 대해 이준석 대표 등은 정치인들의 묫자리 이전, 신문 오늘의운세 운운하는데 판단착오다.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면 상당한 감표 요인이 될 것이다. 필자는 지난달 관훈토론회 때 윤 후보와 이 문제를 토론한 적이 있다. “평생 법을 구현하며 살아온 제가 무속에 의지하겠느냐”며 억울해하는 그의 말대로 오해와 억측, 흑색선전의 산물일 수 있다. 하지만 검찰총장 사퇴 후 첫 공개행보인 지난해 6월 9일 독립운동가 이회영선생기념관 개관식 참석 때 역술인 동행 논란부터 손바닥 왕(王)자, 이번 건진법사 건까지 빌미를 만들어왔고 대응도 석연치 않았다. 손바닥 글자를 이웃 할머니가 써준 게 진실이라면 그 할머니를 찾아서, 출입기자 대표단을 구성해 신분 비노출을 철저히 약속받고 비공개 대면을 시켜주면 됐다. 건진법사가 김건희 씨와 무관하다면 그를 추천한 인사를 공개해야 한다. 그제 김의겸 의원의 주장, 민주당의 신천지 압수수색 관련 고소 내용 등을 보면 거의 이성(理性) 실종 수준이다. 가죽 벗긴 소 제물 사진 등 자극적 요소도 총동원된다. 그 끔찍한 행사를 주관한 단체의 핵심 간부가 민주당 4050위원회 종교본부에서 임명장을 받았다는 보도는 여당의 확성기와 김건희의 도사 발언이 어우러진 사운드 임팩트에 묻혀 버린다. 무속·역술인들의 측근 행세, 손바닥 글자 등 자살골의 씨앗을 누가 뿌린 건지, 부인이 얼마만큼 관련돼 있는지 정확한 진실은 윤 후보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녹취록에는 오빠도 언급된다. 야권에서 오래전부터 우려가 제기됐던 존재다. 정치권에는 “장모가 (사위의) 20대 지지율이 낮아 속상해한다”며 장모에게 내밀 전략을 묻고 다니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부인이나 처가 끈을 잡으려는 파리떼가 여전한 것이다. 이런 종양들을 도려낼 방법은 명료하다. “5년간 아내는 배우자로서의 역할 이외 그 어떤 것도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처가 식구들은 퇴임 때까지 청와대 출입을 일절 금지시킬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실상 폐업시킨) 특별감찰관을 대폭 강화해 처가 식구들의 호가호위는 물론 이들에게 접근하거나 편의를 봐주는 행위에 철퇴를 가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그리고 부인과의 연결고리로 들어온 모든 인사를 쳐내야 한다. 이재명 앞의 장벽 중 욕설, 전과, 대장동 등은 본인이 어쩌기 힘든 절대적 조건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장애물인 ‘정권교체 여론’은 586정권과의 본질적 차별화 의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윤석열이 마주한 부인과 처가 리스크도 의지와 결단에 달렸다. 어느 쪽이 더 단호하게 자기 내부의 장벽을 넘어설지에 승패가 걸렸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장면 1. 2021년 11월 5일 늦은 밤 서울 송파구 홍준표 의원 집 앞. 덩치 큰 남자 한 명이 벨을 눌렀다. 그날 낮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윤석열이다. 검은 비닐봉투에서 소주와 마른 오징어를 꺼낸 윤 후보는 입을 굳게 다문 홍 의원에게 다가앉는다. “형님, 도와주십시오. 제가 국정을 뭘 알겠습니까. 형님이 함께 끌어가 주십시오.” ##장면 2. 2021년 12월 26일. 김건희 씨의 사과 회견 몇 시간 후 윤 후보가 기자들과 만났다. “그 정도 사과로 국민들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모든 잘못에 대해 엄정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물론 더 큰 매를 맞아야 할 대상은 접니다. 제 주변 허물에 무른 잣대를 들이대며 변명하려 했습니다.” 물론 허구의 장면들이다. 현실 속의 윤 후보는 반대로 행동했다. 이런 사례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 후보 교체론이 거론될 만큼 벼랑 끝에 섰다. 정권교체에 실패하면 윤석열의 정치생명은 소멸한다. 물론 김종인 이준석도 마찬가지다. 자멸의 낭떠러지로 뒤엉켜 내달렸다. 사실 김, 이의 소멸은 국민 입장에선 별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윤의 정치적 소멸은 국민 과반의 정권교체 열망을 좌절시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앞날을 불확실성 속으로 밀어 넣고, 좌파권력이 저지른 온갖 부도덕과 무능이 정의로 둔갑해 정의와 불의가 거꾸로 되는 엄청난 결과를 뜻한다. 윤석열이 새 출발을 외쳤는데 그것만으로 회복이 가능할지 선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다들 회의적이었다. 흔히 거론하는 윤의 추락 요인은 당 내분, 가족 리스크, 비전 제시 부재, 말실수 등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세 가지를 추가했다. 첫째, 용인(用人)술이다. 그러지 않아도 특수부 검사 이미지가 약점인데 계속 검사 출신을 중용하고 주변엔 강성들을 포진시킨다. 이준석과 윤 측근 갈등은 지방선거 공천이라는 잿밥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사무총장 등 당의 요직을 차지했지만 대표의 결재권이 껄끄러운 측근들과, 리더십의 ‘ㄹ’자도 체화하지 않고 내분(內紛) 생중계 능력만 과잉 섭취한 대표 간의 이전투구다. 그래도 자기 애와 이웃집 애가 싸우면 일단 자기 애를 먼저 혼내는 게 문제를 푸는 상수(上手)다. 김종인 및 이준석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상반된 방향의 의견이 난무한다. 나름대로 다 논거가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게 리더가 정확한 나침반을 갖는 거다. 선거전에서의 나침반은 승리라는 북극을 정확히 향해야 한다. 그것은 외연의 확장, 덧셈의 정치다. 필자는 김종인이나 이준석의 득표력을 대단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표를 깨는 ‘감표력’은 상당하다. 돈 풀기와 네거티브를 앞세운 좌파진영이 진군해 오는데 굴 밖과 굴 안에 내부 저격수까지 생겼다. 둘째, 정치조직을 잘 모른다. 갈퀴로 긁듯이 사람을 모아 자리를 나눠줬다. 쇼윈도에 마네킹 내거는 방식으로 외연이 확장되고 캠프가 굴러갈 거라 착각한 것이다. 셋째, 정치판을 잘 모른다. 그동안 국민의힘 일선 조직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파다했다. 그 원인 중 하나였던 최측근 사무총장 체제는 일단 해체됐지만, 또 하나의 원인이 김한길 새시대준비위원회에 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김한길 영입은 대선 승리 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빼오는 정계개편 구상의 산물이라는 게 진실 여부와 전혀 상관없이 정치권에 팽배한 분석이었다. 대선 승리 후 다른 당 현역의원이 합류하면 지역구를 뺏길 수 있다는 우려가 드는 순간 당협위원장들이 뛰고 싶겠는가. 당선 후 해야 할 일을 선거 때 꺼낸 정무감각 결핍의 소치다.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이재명 후보와의 무제한 맞짱토론이다. TV가 시간이나 다른 후보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제한이 있다면, 유튜브 등을 통해 매일 저녁 주제별 토론을 하는 것이다. 외교안보 경제 복지 권력구조개혁 등 세세한 주제 단위로 시간제한 없이 토론해야 한다. 지금 같은 추락 상황에선 번지르르한 공약 발표나 행사장 발언만으로는 ‘무식’ ‘준비 안 된 후보’ 이미지를 탈피하기 어렵다. 소극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실수하고 콘텐츠가 달려도 진정성과 방향성으로 승부하면 승패는 어찌 될지 모른다. 더불어 성사시켜야 하는 카드가 안철수 후보와의 공동정권이다. 그냥 단일화가 아니라 반반씩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어느 쪽이 단일 후보가 되든 국정을 함께 운영하는 것이다. 그냥 단일화로는 서로 양보를 얻어내기도 난망하지만, 설령 단일 후보가 된다 해도 ‘자질 회의론’등에 빠진 중도층이 쉽게 따라오지 않을 수 있다. “함께 끌어가겠습니다” 외치며 공동유세를 다녀야 한다. 1997년 대선 당시 김종필의 지지율은 투표일 54일 전 조사에서 3%에 불과했지만 DJ는 총리와 경제부처를 다 내줬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21일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와 화상 대담을 했다. ‘샌델 카드’는 사실 윤석열 캠프 내부에서 올 6월 논의됐던 것이다. 독일 노동개혁의 상징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카드도 거론됐다. 우물 안 개구리 586정권과의 대비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윤 캠프에서는 이런 구상이 흐지부지됐고, 아이디어가 새 나간건지 우연의 일치인지, 이재명이 선점했다. 두 캠프의 실행 능력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후보의 민첩함도 차이가 크다. 이재명의 ‘변신 쇼’는 처절할 정도다. 오락가락 행보, 매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에도 개의치 않는다. ‘어, 그래도 문재인처럼 꽉 막히지는 않았네’ ‘생각보다 유연하네’ 이미지의 확산을 노리는 것이다. 세금을 줄여주고 현금을 안긴다 해서 문 정권에 대한 분노가 변하지는 않지만 문재인에서 이재명이 차츰 분리되는 효과가 생길 수 있다. 반면 윤석열은 허우적이며 벼랑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 10%포인트 이상 앞서도 여권의 돈 풀기, 네거티브가 계속되면 선거 때는 박빙이 될 텐데 벌써부터 역전당하는 추세다. 특히 자영업 계층 지지율이 급속도로 뒤집혔다. 윤은 11월 3주 54%에서 한 달 만에 35%로 떨어지고, 이재명은 30%에서 45%로 치솟았다(한국갤럽). 역대 대선에서 자영업 지지율 1위 후보가 항상 이겼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윤이 급락한 원인은 삼척동자도 안다. 부인 리스크와 내부 갈등으로 헤매느라 정책적 어필을 못 하고 한 달을 보냈다. 대장동 핵심 실무자들의 자살은 ‘그 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암시하는, 여당 후보를 그로기로 몰고 갈수 있는 대형 이슈인데도 전투력을 상실한 야당은 다 놓쳐버린다. 자영업 지원 50조는 윤석열이 먼저 꺼냈는데 실제 열매는 이재명이 챙겨가고 있다. 윤 후보가 회복 불능의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해법은 단순명료하다. 측근 논란의 핵심들을 상징적으로 퇴진시키고 비공식 라인을 없애 모든 힘을 선대위에 몰아줘야 한다. 김종인이 그립을 더 세게 쥐고 가기로 했다는 정도로 이준석 사태가 정리 됐다 여기면 오산이다. 불씨를 그대로 안고 가다가 추태가 재발되면 정당이 스스로 정권탈환을 걷어차고 국민을 배신한 대표적 사례로 훗날 정치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윤 후보 옆에서 힘을 얻은 얼굴들을 나열해 보라. 하나같이 공격형이다. 동시에 날렵하게 윗사람이 원하는 것을 미리 준비해서 논리 정연하게 보고할 것 같은 이미지다. 입의 혀는 주인에겐 싹싹하고 날렵하지만 타인에겐 칼이 되어 결국 주인에게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특히 대선, 지방선거를 앞둔 시기 당 사무총장에게 어떤 힘이 실릴지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더더욱 암탉이 병아리 모으듯, 남의 집 병아리도 내 새끼 하며 품고 조직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 자리에 검사 출신 불알친구를 앉혔다. 아무리 유능한 인재여도 최전방 돌격수, 저격병, 전략참모, 지휘관 등등 최적의 쓰임새는 다 다르다. 유신말기의 차지철, 이회창의 7인방 등 최측근 논란을 방치하면 결과는 항상 참담했다. 윤 후보 주변은 그러지 않아도 초등학교 동창들이 포진해 있다. 게다가 수십 명의 전직 법조인들이 역할 분담까지 해서 움직인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사조직이 움직이면 선대위가 유명무실해진다. ‘김건희 리스크’ 대응의 혼선도 다 연결되는 문제다. 당장 부인 장모 문제 대응의 모든 권한을 선대위에 100% 줘야 한다. 그리고 부인이 직접 국민 앞에 나서서, 세간의 예상을 몇 배 뛰어넘는 진솔한 강도로 사과해야 한다. 남편이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비즈니스는 물론 배우자에게 요구되는 필수적 역할 이외에는 절대 나서지 않을 것임을 약속해야 한다. 조국 정경심과는 질적 양적으로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사안이라고 억울해해선 안 된다. 조국을 비롯한 좌파들과 달리 윤석열에게 있어 공정·정직은 거의 유일한 자산이다. 티끌만 한 흠이라도 감싸는 모습을 보일 때 다른 이의 중범죄보다 더 큰 실망을 안겨줌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이 회초리 5대 때리고 싶을 때 스스로 100대를 때려야 리스크를 탈출할 수 있다. 이번 사태로 이준석은 그릇의 크기를 드러냈다. 전략팀장 깜인지 CEO 깜인지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준석과 함께 가는 것 외엔 정권교체에 방법이 없다. 모든 결정은 선대위에서만 이뤄진다고 선언하고 후보와 김종인이 매일 대면이든 원격이든 머리를 맞대야 한다. 후보 의견인지, 김종인 의견인지 구분이 안 되는 통일된 전략, 통일된 입장만 세상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 어제 이재명과 이낙연이 만났다. 원팀 분위기가 점점 공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야당은 누가 우승 상패 수상자로 나설지 다투면서 자살골만 넣고 있다. 다른 대선 때는 패자에게 동정론이 일었지만, 만약 사적 관계의 수렁에서 허우적이다 패한다면 만고의 역적으로 지탄받을 것이다. 한 개인의 패배로 끝나지 않는다. 국가 운영의 본질과 무관한 어이없는 덫에 걸려 나라의 미래가 바뀐다면 이렇게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정말 현 집권세력 사람들은 낯이 두껍다. 조국과 추미애 시절을 겪었기에 후안무치에는 웬만큼 면역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대선이 다가오면서 펼쳐지는 제2막 역시 점입가경이다. 안타까운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합류다. 문 대통령이 6일 무역의날 기념식에서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역의 힘으로 선진국이 됐다”며 “이런 소중한 성과마저도 부정하고 비하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것은 그나마 집권세력 내에서 상대적으로 온화한 풍모를 지녀온 이미지를 훼손하는 발언이었다. 우리 기업들이 국제경쟁에서 처절히 분투하는 동안 문 정권이 어떤 일을 했는지 국민들은 안다. 4년 반 동안 반기업 정책과 발언들을 쏟아낸 것이 민망해서라도 숟가락을 얹지 못할 것이다. 위정자가 자화자찬에 빠져 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책임이 크다. 무역의날 다음 날 주요 기업들을 상대하는 로펌 관계자들에게 분위기를 물어봤다. “경제 현장은 불안 그 자체다. 과거 정권 때도 불만이 있었지만 특정 이슈나 정책에 대한 전술적 불만 성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포괄적인 정책 방향 자체가 잘못 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한쪽 눈만 뜨고 정책을 시행한 4년 반의 결과 기업들은 좌절감 속에서 입 다물고 있다. 말 잘못 했다간 시민단체한테 인민재판식 십자포화를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자화자찬과 낯 두꺼움에 관한 한 이재명 후보도 뒤지지 않는다. 8월 말 대장동 사건이 터진 이래 여권이 특검을 한사코 거부해 왔음을 국민 대다수가 기억하는데도 6일 “특검 거부자가 범인”이라며 특검 신봉자 행세에 나섰다. 이 후보는 처음엔 특검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여론에 밀려 지난달 10일 조건부 특검·쌍특검으로 입장을 변경하면서도 “특검 만능론은 안된다. 검찰 수사를 지켜보고 미진하면…”이라고 했었다. 이 후보가 말과 입장을 바꾸는 데 아무리 능하다 해도 이번만큼은 자신의 발언에 속박돼야 한다. 당장 야당의 협상 요구에 응해야 한다. 특별검사 선정을 놓고 시간 끌지 말고 대장동 특검은 야당이,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여당이 추천하면 된다. 자화자찬은 뒤끝작렬로 이어진다. 문 대통령이 기념식장에서 “부정하고 비하만 하는 사람들”을 비난한 것은 남양주시에 대한 경기도의 보복감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 후보는 계곡 정비를 대표적 치적으로 자랑해 왔지만 사실은 남양주시가 그에 앞서 2018년 시행해 성과를 거둔 사업이다. 그런데도 2020년 6월 경기도가 이재명 지사 취임 2주년 보도자료에서 경기도가 전국 최초로 하천·계곡 정비사업을 시작했다고 발표하자 남양주시 일부 직원들이 “우리 시가 최초”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러자 “경기도가 댓글을 단 남양주시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별조사 명목하에 보복성 감사를 하고 이를 여론조작으로 몰아갔다”는 게 조광한 남양주시장의 항변이다. 집권세력의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적으로는 “대의(大義)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투쟁 시절 사고방식, 전술적으로는 자화자찬 선전전이 뉴스를 단편적·부분적으로만 접하는 부동층에겐 먹힌다는 계산의 산물이다. SNS와 유튜브를 통한 확증 편향적 뉴스소비가 만연한 상황에서 부동층을 겨냥해서 “우리가 잘해 왔다”고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인 만큼 정권을 뺏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을 것이다. 우선 막대한 돈 풀기다. 이 후보가 연일 기획재정부를 압박하는 것은 준비작업이다. 기재부가 안 된다 안 된다 하다 내년 초 이 후보가 “너희들 뭐 하냐” 소리치며 청와대를 찾아가든, 기재부 장관을 부르든 ‘쇼’를 할 것이다. 기득권 관료들을 후보가 굴복시켜 선물을 쟁취하는 스토리라인이다. 동시에 좌파 유튜브·인터넷 언론을 총동원한 네거티브 대공세를 펼칠 것이다. 돈 풀기나 네거티브가 먹혀들던 시대는 지났다고 얘기하지만, 대다수 국민에겐 안 먹혀도 부동층 몇 프로는 끌어당길 군불 효과는 있다. 막대한 현금을 풀면 정권에 대한 반감이 누그러지고 “그래도 없는 사람 생각하는 건 쟤들밖에 없어”라는 정서가 확산된다. 지역 구도도 적극 이용할 것이다. 이재명은 최초의 대구경북(TK) 출신 민주당 후보고, 윤석열은 이회창에 이어 두 번째 비(非)영남 출신 보수진영 후보다. 갤럽 조사에서 TK 지역 이 후보 지지율은 11월 16~18일 9%에서 11월 30일~12월 2일 28%로 세 배나 뛰었다. 윤석열에게 호남 공략과 TK 지지층 결집은 제로섬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이재명은 TK 지지율이 올라가면 호남 지지세의 결집력도 함께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정권 재창출 가능성에 대한 기대 효과 때문이다. 이 지사는 “(TK는) 제 고향이자 태를 묻은 곳이고, 세상을 떠나면 육신을 묻을 곳”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남의 이목, 상식의 눈, 역사의 눈을 의식할 만큼 낯가림을 하고 염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 그들이 남은 3개월간 대선판을 어떤 수렁으로 끌고 갈지 걱정이 앞선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예상대로 이재명 후보가 변신에 나섰다. 연일 정권의 실정을 사과하고 눈물을 흘린다. 큰절까지 등장했다. 선거철 후보의 변화가 진정한 변신인지 산토끼를 노린 코스프레인지 판단하려면 두 가지를 살펴야 한다. 첫째, 그의 본질이다. 표 앞에선 누구나 반짝 변할 수 있지만 수십 년간 쌓여온 가치관과 이념,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둘째, 비근한 사례들이 어땠는지다. 2017년 초 지지율 30%대 박스권에 갇혀 있던 문재인 후보는 통합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 덕에 40%를 돌파했지만 통합 약속은 어떻게 됐는가. 문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통합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족적을 걸어왔음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지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 진영의 숙원 사항들을 대부분 실행에 옮겨 나라의 틀을 바꾸려했고, 비판론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국가 지도자가 아닌 진영의 수장, 부족전쟁 시대 족장처럼 오로지 지지자들만 바라보며 편가르기 통치를 한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21일 국민과의대화에서 고용 등 최악의 성적을 낸 분야마저 스스로를 극찬한 것도 오로지 지지자들에게 ‘우린 성공했다’ ‘회의(懷疑)하지 말라’는 확신을 끊임없이 주입·세뇌시키려는 전략의 산물로 봐야한다. 김대중 후보는 DJP연합으로 공동정부를 약속했지만, 초창기 반짝하다 곧 DJ본색으로 돌아갔다. 박근혜 후보도 경제민주화를 내세웠지만 집권 후 경제정책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모두가 안다. 이재명이 변신 모드로 접어들자 그동안 홍위병 시대가 무색하게 설치던 강경파 초선들도 바짝 엎드리는 모드다. 하지만 상습 과속 운전자가 무인단속기 앞에서 잠깐 속도를 줄인다고 운전습관 자체가 변한 건 아니다. 완장 차고 설치다 국군이 수복하자 바짝 엎드려 살아남은 이들이 그 후 빨치산이 마을을 차지하자 더 극악하게 날뛰던 모습을 기억하는 어른들이 많다. 강경파들은 곧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좌파 운동권에게 전술적 변신·연대는 생존 본능처럼 자연스러운 DNA다. 진정이든 코스프레든, 그래도 이재명은 지지율 한계를 뚫기 위해 동물적 감각으로 변신하며 ‘새민주당’ 1일 차, 2일 차를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윤석열 후보는 ‘새누리당’을 연상케 하는 흑백필름을 돌리고 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등장한 ‘3김’ 논란에 정권교체 열망층은 기가 막히고 여당은 미소 짓는다. 1985년의 ‘3김 낚시론’이 바로 지금을 내다보고 나온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김종인 김병준 김한길을 간판으로 내세워 누구를 감동시킬 수 있다고 보는 걸까. 그들이 무용하거나 무능하다는 차원이 아니다. 꾀돌이 김한길의 지략과 김병준의 정책이 필요하다면 고문으로 모셔 수시로 상의하면 된다. 김종인에 매달리는 것은 중도파 공략 때문일 텐데, 여기서 착각은 중도파의 실체에 대한 것이다. 정확히는 중도파라기보다는 소극적 보수와 소극적 진보라 보는 게 맞다. 보수지만 후보가 싫은 사람들, 진보지만 대통령이나 후보가 싫어 부동층이 된 사람들이다. 경제민주화 같은 단일 그물망으로 포획할 수 있었던 과거 중도파와 달리 지금의 부동층은 경제 안보 사회문제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이슈마다 이해관계와 이념적 포지션이 각각이다. 윤석열이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막연한 중도가 아니라 정권교체를 바라지만 윤석열은 싫다는 비호감층이다. 윤석열 지지율은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 비율보다 10% 이상 낮다. 정말 매달려야 할 상대는 3김이 아니라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인 것이다. 홍, 유와 원팀을 이뤄 그들에게 쏠렸다가 부동층으로 옮겨간 정권교체 지지층을 잡아야한다. 끝내 거절당해도 손해 볼 게 없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은 광양까지 찾아가 박태준에게 4시간이나 매달렸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망신을 당한 덕택에 지지층을 상당수 흡수했다. 2002년 대선 전날 밤 정몽준 집 앞에서 돌아서는 노무현의 모습은 다음 날 젊은층의 투표소 행렬을 불러왔다. 윤석열이 받는 지지 속에는 보수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 새로운 보수를 만들어달라는 기대도 담겨 있었다. 정치 새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쇄신은커녕 설상가상으로 선대위 직능본부장에 자녀 채용 비리 혐의로 1심 무죄, 2심 유죄를 받은 옛 원내대표가 포진하고, 사무총장은 비록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공기업 채용 비리로 구설에 올랐던 절친이다. 그러니 국민적 신망과 기대가 큰 새 인물, 갑남을녀의 이익을 대변할 인물들을 찾는 발품을 팔지 않고 눈과 귀가 벌써부터 정치권에만 갇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양정철의 말처럼 민주당은 지지부진하다. 하지만 이재명은 카멜레온보다 교묘하고 도마뱀보다 민첩하게 변신을 꾀하고 있다. 예상대로 검찰은 대장동을 조기 마무리 국면으로 몰고 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위기 앞에서 윤석열은 조용하지만 간절히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이 가슴속에 담고 있는 질문을 듣지 못하는 걸까. 당신을 지지하지 않는 비호감층이 누구인지, 그들이 왜 당신을 꺼리는지 파악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2030에 대해 내놓은 정책이 뭐가 있는가, 집권 후 비전을 제시한 건 뭐가 있는가, 뉴보수의 청사진이나 쇄신 의지를 보여준 게 있는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요즘 지지율만 보면 이재명 후보는 큰 위기고 윤석열 후보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한 형국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론 반대다. 이 후보는 내부적으로 불안했던 후보 지위를 공고히 하며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다. 친문그룹은 후보교체 미련을 다 버린 듯하다. 그제 관훈토론에서 이 후보가 조건부 특검 수용을 들고나온 것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그동안 특검은 시간만 길게 끈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하더니, 이젠 시간이 더 길게 소요될 ‘검찰 수사 완료 후 특검’ 카드를 꺼낸 것은 자기모순이고 뻔한 꼼수지만, 그 속에 담긴 계산은 의미심장하다. 검찰 수사로 일단 면죄부를 받고 특검 논의가 선거일까지 계속 진행되면 중도층의 일부 포션은 설득 가능하므로 문 정권은 더 이상 고민 말고 ‘협조’하라는 것이다. 대장동 핸디캡을 안고 임하는 여당 전략은 세 가지 정도가 될 것이다. 첫째, 막대한 돈 뿌리기다. 일단은 총리가 반대하지만 금방 오케이 할 경우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밀당 쇼 차원에 그치고, 수십만 원의 현금 선물을 오롯이 이재명의 추진력 설득력의 결과물로 포장할 것이다. 둘째, 윤 후보에 대한 집요한 추가 네거티브전이다. 병역·김만배 누나 집 등 온갖 소재를 놓고 희한한 주장들을 들고나올 수 있다. 셋째, 거물급 중도 인사를 영입하고, 대형 공약을 들고나올 것이다. 이에 맞설 윤 후보 쪽은 항공모함처럼 커져 가는데 전단(戰團) 내 군기는 허접하다. 특히 많은 이들은 ‘불알친구’들과 배우자 등이 조성하는 병풍효과를 우려한다. 상징적인 사례가 최근 외교안보계를 놀라게 한 A 씨의 이재명 캠프 합류다. A 씨는 북핵, 한미동맹 등 정통 외교 분야에서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국익의 관점에서 객관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좌파들로부터 친미파라고 공격받았고, 문 정권의 외교노선을 엄정히 비판해왔던 그가 이종석 문정인 등이 선점한 캠프에 합류한 것이다. 막후 사정을 알아보니, 정치 참여 자체 보다는 차기 정권이 누가 되든 외교안보만은 냉엄한 현실과 국익을 기준에 놓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A 씨에 대해 윤 캠프 내에서도 추천이 있었지만 후보 옆을 선점한 인사들에게 막혔다고 한다. 캠프 내 외교안보 그룹의 실세는 윤 후보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외교분과 간사인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도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보 쪽은 달랐다. 이 후보는 그제 비공식 석상에서 “(A 씨) 영입에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고 했다. 과격·좌파 이미지를 탈색하고 실용 외교 노선을 추구한다는 방향지시등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윤 캠프의 위기를 드러내는 또 다른 사례가 ‘민지(MZ)야 부탁해’다. 8월 말 MZ세대 공략을 위해 내놓은 캠페인 동영상인데 허접한 수준이 글로 옮기기도 민망하다. “야”라고 반말을 서슴지 않는 윤석열 앞에서 얼어붙은 참모들…. 영상을 보며 궁금했던 건 왜 캠프 내 누구도 “이건 안 된다”고 말하지 못했을까였다. 캠프 관계자는 “다른 그룹이 만들고 후보가 추인한 것에 문제 제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 소통 수준의 윤 캠프는 마침내 ‘개 사과 사진’으로 실력의 맨 밑바닥을 보여줬다. 평생 우리 사회의 담론, 논쟁과는 담을 쌓고 지내온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나 나올 법한 허접하고 표피적인 상상력이다. 여기에 후보 부인 쪽이 관여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심각하다. 선거에서 가족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그 역할은 치밀한 전략과 판단력·정무감각이 요구되는 대국민 메시지 작업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이재명 캠프는 머잖아 거물급 중도 실용노선 인물들을 대거 영입해 불안정성·과격성 이미지를 상쇄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윤 후보 주변에 포진한 권성동 장제원 등의 실세들은 참신함이나 새로운 보수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이미지다. 캠프에 몰려든 낡은 보수 인사들은 대세를 잡은 듯 착각하며 자리 꿈에 부풀어 있다. 가게 전면부를 개혁적이고 젊고 새로운 인물들로 전면 리모델링하지 않으면 추락을 피할 수 없다. 옛 시대 배경 단막극이 떠오른다. 가족과 온 산골 마을 사람들이 굶고 아껴 마련해준 노잣돈으로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던 장남이 응원하러 따라나선 친구들을 보내기 미안해 주막에서 한잔하고, 고갯길에 쓰러진 처자를 도와주느라 돈과 시간을 다 쓴다. 의리나 의협심의 발로라 해도 가족과 마을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배신이다. 여든 야든 대선 후보는 자신의 인생만을 걸고 나선 게 아니다. 각자 진영 수백만 지지자들이 나라를 구해달라며 국가의 운명을 후보의 어깨에 맡겼다. 그 열망을 배신하지 않으려면 주변을 듣기 싫은 말 하는 사람들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이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대장동 게이트에 대해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은 무엇일까. 이를 파악하려면 현 상황을 청와대와 친문 핵심 그룹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문재인 정권 핵심 그룹은 올봄 거액을 들여 심층면접 여론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결과는 여당의 누가 나가도 윤석열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걸로 나왔다. 유시민까지 대안으로 넣어봤지만 큰 차이의 패배였다. 대선은 어차피 어려우니 여당 후보가 누가 되든 큰 상관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당권이라도 확실히 쥐자는 생각에서 4월 원내대표 선거 때 외연 확장 대신 친문 후보에게 표를 몰아 줬다. 그런데 윤석열이 정치 입문 후 실점만 거듭하는 걸 보며 이러면 대선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재명 대세론을 뒤집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화천대유 의혹이 처음 제기된 것은 8월 31일 경기지역 인터넷 신문이었고 열흘 뒤 시사주간지가 크게 보도했다. 당시 필자가 만난 여론분석 전문가는 “너무 늦게 터졌다. 일주일만 일찍 터뜨렸어도…”라고 했는데 실제 그렇게 진행됐다. 이재명 후보가 15라운드에 휘청이다 종이 울려 공식 후보가 됐지만 퇴임 후 안전 보장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친문 핵심에게는 여전히 껄끄러운 존재다. 청와대는 많은 대장동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이 수상한 돈 흐름을 포착해 경찰에 알린 게 4월 초다.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은 ‘3철’로 불리는 문 대통령의 측근이며, 2018년 이재명과 경기지사 공천을 놓고 맞붙었다. 청와대는 대장동을 봉합한 채 대선에 임하면 너무 타격이 클 테고, 그렇다고 끝까지 파헤치다 여당 후보 낙마 위기가 오면 대혼돈이 벌어질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 딜레마에서 어정쩡한 메시지가 나왔는데, 일단은 빨리 매듭짓고 여기서 벗어나자는 쪽에 무게중심이 실린 것으로 보인다. 만약 철저한 진상·책임 규명을 목표로 설정했다면, “조금이라도 미진한 결과가 나오면 국민적 특검 여론에 부딪힐 테니 검경은 철저히 파헤치라”는 식으로 지시했어야 마땅하다. 그런 정도의 확약이 없는 상태에서 친여 성향 검찰·경찰 간부들이 미래 권력의 목에 칼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 등 현 정권에 불리한 사안들을 파헤친 검사들을 무더기로 좌천시킨데서도 볼 수 있듯,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인사권 칼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게 좌파권력의 속성임을 일선 검사들도 알고 있다. 일정한 수준에서 대장동을 매듭지으면서 하루빨리 제3의 거대한 모멘텀을 찾는 게 청와대가 모색하는 해법일 것이다. 남북 관계 등의 카드를 동원하려 할 것이다. 이재명도 그런 해법에 기댈 수밖에 없다. 대통령 도움 없이는 대장동 늪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당내 지지를 유지해 가기 어려운 처지다. 임기 말 대통령과 여당 후보의 역학 관계가 과거와 달라지고 퇴임 후 안전 보장 약속도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문-이 면담이 이뤄진다면 그런 수준에서 딜이 이뤄질 수 있다. 이는 문 대통령도 자칫 공멸하는 길이다. 대장동 게이트로 이재명 본인은 무능과 부패의 양쪽 덫 사이에 걸렸고, 주변에 포진했던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지들의 수준도 드러났다. 정권이 대충 덮고 가려면 삼척동자의 눈에도 보이는 사건 본질을 호도해야 하는데, 이는 외연 확장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친문그룹이 후보 교체라는 극단적 상황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걸 알기에 이재명은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감으로 임하고 있다. 만약 후보 교체 상황까지 수사가 진행될 경우 정권은 윤석열 낙마도 함께 밀어붙일 것이다. 사건의 성격상 ‘고발 사주 의혹’도 결코 진상이 덮여서는 안 될 사안이다. 그런데 야권은 사즉생의 자세로 선거전에 임하고 있는지 지지자들은 우려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해법은 특검밖에 없다. 현 검찰을 통해서는 어떤 결론을 내놓는다 해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재명이 정말 결백하다면 특검이라는 도장을 통해 로켓을 얻게 될 것이다. 2014년 제정된 상설특검법을 적용하면 후보 추천 5일, 임명 3일, 준비 기간 20일 등 법이 허용한 최장 기한을 다 채울 만큼 느릿느릿 움직여도 28일 내에 본격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 이번 달 내에 본격 수사 착수가 가능하고 연내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명료한 정도(正道)를 외면한 채, 대충 봉합해서 진실이 미궁인 채로 대선을 치르게 만든다면, 문 대통령은 국민 선택권을 오염시킨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진실을 모른 채 치러진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반대편은 ‘가상 범죄자’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나라는 임기 내내 갈가리 찢길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2002년 대선의 병풍(兵風)은 거짓 폭로가 나라의 진로를 바꿔놓은 사건이다. 희대의 사기꾼을 앞세운 공작이 관영방송, 좌파언론들의 광적인 보도를 등에 업고 선거의 승패에 영향을 미친, 민주주의의 흑역사다. 며칠 전 필자는 당시 병풍 조작의 진상을 밝혀냈던 수사 관계자로부터 흥미로운 증언을 들었다. 김대업의 폭로로 대선판이 출렁이던 2002년 여름 검찰은 8월 초 서울지검 특수1부에 병역비리수사팀을 구성했다. 수사팀은 한 달 반 만에 수사를 마무리지었다. 놀랍게도 김대업의 조작극이 드러났다. 그가 제시한 핵심 물증, 즉 이회창의 부인으로부터 아들 병역 면제 청탁과 함께 1000만 원을 받았다는 병무청 직원의 진술이 녹음된 테이프의 공장 출시 시기가 녹취가 이뤄졌다는 시점보다 훨씬 뒤였다. 이를 포함해 김대업의 주장들은 대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수사팀장인 김경수 부부장검사는 수사 결과 발표를 건의했다. 그런데 박영관 특수1부장은 “미진하다. 아직 더 할 게 많다”며 거부했다. 김학재 대검 차장도 반대했다. 대선(12월 19일)은 다가오는데 수사를 사실상 끝내고도 한 달가량을 더 끌다가 결국 ‘10월 25일 발표하되, 브리핑룸은 사용할 수 없고, 카메라 동원도 안 된다’는 조건이 붙은 타협안이 만들어졌다. 나라를 뒤흔든 사건의 수사 결과를 지검 3차장 사무실에서 티타임 형식으로 발표한 것이다. 김학재 차장, 박영관 부장은 목포고 출신으로 당시 김대중 정권의 검찰 파워맨으로 불렸다. 김대업의 조작극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대선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고 병풍은 이미 이회창을 만신창이로 만든 뒤였다. 법원은 2004년 판결문에서 이회창의 지지율이 (김대업의 폭로로) 11% 빠졌다고 적시했다. 수사결과가 발표되자 여당과 좌파진영은 보수정당의 압력에 굴복한 정치검찰, 기득권 수구 세력의 야합 프레임으로 몰고 가 진을 빼버렸다. 병풍이 조작이라는 사실이 국민에게 확실하게 각인된 것은 2005년 대법원판결까지 나온 뒤였는데 이미 그를 의인(義人)으로 칭송했던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지 2년이나 된 시점이었다. 누가 김대업을 사주해 공작을 벌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병풍 수사는 검찰이 여야 유불리와 관계없이 진실을 밝혀낸 수사로 평가받는데, 실제론 내부에서는 발표를 최대한 늦추려는 친정권 간부들의 마사지 압력이 횡행했던 것이다. 그래도 요즘 친정권 검사들의 진용·행태와 비교해 보면 애교로 여겨진다. 과거엔 검찰 내부 견제와 반발을 의식해 핵심 요직에 최소한의 안전판만 심어두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거의 모든 길목에 친정권 인사들을 포진시켰다. 정권교체를 악몽으로 여길 이런 간부들이 직업윤리에 투철한 일선 검사와 수사관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사안의 핵심을 흩뜨리는 등 장난을 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손준성 보냄 고발장’ 사건의 핵심은 윤석열 관련 여부를 신속히 밝혀내 국민이 명확히 판단하게 해주는 것인데, 시간만 질질 끌면서 이미지에 상처를 입히려 할 수 있다. 대장동 게이트의 핵심은 희대의 특혜 구조가 설계된 과정의 전모다. 곽상도 아들 50억 원을 비롯해 부패 실상도 반드시 밝혀야 하지만, 본질은 고수익이 뻔히 예상되는 리스크가 거의 없는 사업에서 소수 지분의 민간업자들이 이익을 대부분 가져갈 수 있게 구조를 짠 사람, 묵인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도시개발법 제22조에 따라 개발공사가 100분의 50을 초과해 출자하면 사업에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다. 성남개발공사는 50%+1주를 출자했다. 토지 강제수용부터 인허가까지 다 해결해주는 원스톱 서비스 구조를 갖춘 것인데 성남개발공사는 확정 이익만 보장받고 나머지 이익은 화천대유(지분 0.9999%), 천화동인(6%)이 가져갈 수 있게 설계됐다. 하남, 안산, 의왕시의 경우 지분에 비례해 공공이 수익을 가져가는 구조로 진행한 것과 대비된다. 사업비 1660억 원 규모였던 하남 풍산지구 아파트형 공장 사업의 경우 ‘사전확정수익 공공 우선 배정 후 초과 수익은 지분 비례보장’으로 설계됐다. 더구나 대장동은 노른자위라고 누구나 인정하던 요지다. 산간오지에 아파트를 짓는 도박성 높은 투자사업이 아니었다. 이 지사는 “민간업체가 다 가져갈 수익을 공영개발로 돌려 절반을 환수했다”고 자랑하지만 이는 현관 비밀번호를 1234로 설정해 장롱 속 거액을 도둑맞은 가장이 “내가 사다놓은 금고 덕분에 금고 속 돈은 안 털렸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집권세력은 특혜 구조의 설계와 실행에 대해선 절차적으로 뚜렷한 위법은 찾아내지 못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면서, 거물급 인사들이 뇌물 혐의로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요란하지만 단순한 뇌물사건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크다. 이에 맞서 특검을 관철시켜야 할 야당은 지리멸렬하다. 장제원 곽상도 문제에 대한 구태의연한 대응은 특권·부패 세력 정당의 이미지를 다시 강화시키고 있다. 이준석 돌풍을 만들어준 국민이 염원했던 건 이런 모습이 아니다. 즉각 곽상도 문제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연루된 인사들이 더 나오면 나오는 즉시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당내의 부패·특권층 요소를 정리하는 인적 쇄신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여야 유력 후보의 도덕성·윤리성이 걸린 핵심 사건들의 진실을 모른 채 나라의 미래가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막으려면 특검 도입에 명운을 걸어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이번 대선만큼 국민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맞는 선거가 있었을까. 어느 대선이든 정권유지를 바라는 국민과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이 있지만, 이번엔 그 갈구의 심도가 과거 어느 선거와도 비교가 안될 만큼 절실한 것 같다. 특히 문재인 정권에 비판적인 국민들에게 이번 대선의 의미는 각별하다. 식민 치하의 연장이냐 독립이냐를 선거로 결정하는 나라가 있다고 상상해 볼 때, 혹독한 식민 통치에 치를 떨어온 피지배국 백성들이 선거에 임하는 절실함이 이 정도 되지 않을까(마찬가지로 문 정권 지지자들은 독립유지냐 식민치하 회귀냐를 선택하는 심정일 것이다). 그렇게 절실하기에 야권에 이렇다할 대선 후보감이 보이지 않던 지난해까지는 절망감이 그토록 컸고, 올 상반기엔 희망도 그만큼 부풀어 올랐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데는 윤석열의 공이 컸다. 올 초 모든 여론조사에서 여당 주자들을 압도하는 윤석열의 등장은 보수층이 무기력을 떨치는 동력이 되었고, 정권교체행 열차(黨)를 업그레이드하라는 국민명령, 즉 ‘이준석 현상’을 창출할만큼 열정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그러나 어느새 기대는 불안으로 바뀌고 있고, 윤석열을 지팡이 삼아 기운 냈던 이들이 윤석열을 걱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6월 29일 이후 윤석열의 지지율은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 정권의 네거티브가 큰 원인이지만, 그건 윤도 진작 예상했던 상수(常數)다. 지지자들의 더 큰 걱정은 윤석열이 밖에 내놓으면 내놓을수록 스스로 점수를 깎아먹고, 본인만의 ‘장점’들에서 멀어져간다는 점이다. 그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 중 상당수는 좌파 특유의 꼬투리 잡아 비틀기의 탓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먹잇감을 제공하는 건 대중정치인에겐 부끄러운 일이다. 윤석열은 고시 준비 시절, 책 한 권을 읽으면 후배들을 앉혀놓고 몇 시간씩 ‘썰’을 풀 만큼 ‘지식 소화력’이 좋은 다변가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선후보의 청중은 소줏집에서 다소 과한 비유나 부적확한 표현이 튀어나와도 다 감안하고 들으며 핵심을 소화해주고 감탄해주는 호의적인 후배들이 아니다. 다변가들은 세상사를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 설령 사안의 핵심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주제를 놓고 대중에게 재미있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인데 이를 간과한다. 후보 본인이 해야 할 말과 캠프 관계자의 몫을 구분 못 하다 보니, 검수완박에 맞선 ‘부패완판’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 같은 특유의 간결했던 메시지는 사라졌다. 이런 마이너스 행보들은 캠프 내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소통 분위기가 사라진 탓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겸손 이미지를 강화하지 못하면 검사라는 직업적 배경이 겹쳐지면서 ‘평생 죄인만 다뤄온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라는 부정적 스테레오타입에 갇혀버릴 것이다. 이런 실점들에 추가해 ‘손준성 보냄 고발장’ 사건이 터졌다. 핵심은 윤석열의 개입 여부다. 집권세력은 “검찰 조직이 개입한 건 맞는데 윤석열의 지시 여부는 아직 물증을 찾고 있다”는 식으로 질질 시간을 끌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서 ‘손준성이 자발적으로 혼자서 그런 일을 벌였겠느냐’는 논리를 확산시킬 것이다. 공수처, 검찰은 계속 요란한 수사로 최대한 법석을 떨며 피의자, 범죄자 이미지를 확산시킬 것이다. 충성 지지층은 별 영향이 없을지라도, 온건 중도층에겐 두고두고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불과 몇 퍼센트로 승부가 갈리는 선거다. 조작이든 윤의 지시든 신속하게 명명백백한 결론이 나와야 한다. 윤석열은 이 사건을 피해가려 해선 안 된다. 결백하다면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적극적 대응을 해야 한다. 홍준표는 중도 확장력을 넓히고 집권세력과 맞섬으로써 안정감과 경쟁력을 높이기보다는 윤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강경 친문세력 표에 매달려야 하는 여당 예선과 달리 야당 예선은 정권교체 경쟁력이 주요 판단 잣대임을 간과한 행태다. 누가 본선에 올라가든 야당 후보 앞에는 악재들이 예고돼 있다. 첫째, 집권세력의 시리즈식 네거티브 공세다. 예선 단계에선 다 쏟아내지 않고 본선에 올라오면 온갖 편법을 동원해 총공세를 펼 것이다. 둘째는 정권의 막대한 돈 풀기다. 셋째는 정책과 비전을 내놓을 준비도 여건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넷째는 예선만 끝나면 여당 후보가 문재인 정권과의 교묘한 차별화로 ‘여당 내 야당’ 이미지를 강화해 정권교체 민심을 잠식할 것이다. 다섯째는 야당 후보가 약세를 보일수록 권력기관 공무원들이 180석을 가진 집권세력의 요구에 순응해 사냥개처럼 달려들 것이다. 물론 정권의 계산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야당 후보들의 전투력도 남다르다. 윤석열은 반기문 고건 등과 다르다. 윤석열이 2년간 혈혈단신으로 정권에 맞선 것은, 앞서의 식민 치하 선거 비유를 들자면, 혁혁한 독립투쟁 경력이나 마찬가지다. 홍준표도 사막에서 혼자 생존하며 물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익힌 정치인이다. 백신만 제때 확보했으면 이미 상반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접종완료율을 기록했을 국민들에게 사죄는커녕, 세계에서 가장 공동체 참여의식이 높은 국민 덕분에 가능했던 1차 접종 속도를 마치 자신의 치적인 양 세계 1위라고 자랑하는 몰염치, 김만복의 선글라스 파동보다 더 고개를 젓게 만드는 국정원장… 불과 한 주 동안에만도 국민을 분노케 하는 일들이 이처럼 쏟아진다. 이런 한 주가 4년간 계속됐다. 지치고 절망한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야당 후보들은 모든 걸 던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 정권교체를 위해 피 흘리다 쓰러져 자양분이 될 각오까지 해야 한다. 이전투구, 객관적 상황을 외면한 주관적 자기평가에 함몰돼 대사를 그르친다면, 개인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그토록 절실한 정권교체 열망을 짓밟은 만고의 역적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압승한 지 5개월이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김어준은 서울시민 세금 375억 원(2021년 기준·전체 예산의 72%)을 지원받는 교통방송에서 황금시간대 마이크를 쥐고 있다. “김어준이 무슨 궤변을 늘어놓든 그건 자유다. 다만 민영방송에 가서 해라. 당신들 주장대로 그렇게 경쟁력이 있다면 민영방송들이 앞다퉈 모셔갈 것 아닌가. 왜 내 세금이 특정 진영의 프로파간다 자금으로 쓰여야 하느냐”는 게 오세훈을 지지한 시민들(최종 득표율 57.5%)의 생각일 것이다. 물론 그런 비판적인 생각과 동시에 김어준류의 방송이 결국은 종기가 썩어가는 걸 잊게 해주는 마취제 역할을 해 좌파진영의 자정 능력을 상실시키는 술잔 속의 달콤한 독약이 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어차피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세뇌와 자기기만의 상호작용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이 들며 눈을 돌려버리고 마는 시민도 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유불리를 떠나 공영방송이 특정 이념진영 프로파간다 도구로 공개적으로 이용되는 비정상적 상황이, 그런 불공정에 분노한 시민들의 투표로 시(市)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정의와 상식에 부합하는 일은 아니다. 아무리 김어준 애청자라 할지라도, 박원순 이름에 이명박 오세훈을, 김어준 이름에 민경욱 강용석 전광훈 등을 넣어서 역지사지해보면, 지금 상황의 불합리성을 부인하진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의 지속은 오세훈의 무능과 상상력 부족의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좌파권력의 알박기 구조 때문에 새 시장이 움치고 뛸 여지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교통방송 재단이사회는 박원순 시장 시절 구성됐다. 박 시장이 2020년 2월 임명한 교통방송 대표는 임기가 2023년 2월까지 남아 있다. 게다가 올 1월 초 당시 시장 권한대행이 임기 3년의 재단 새 이사장을 임명해 버렸다. 새 시장 선출이 3개월밖에 안 남았으므로 기다리는 게 상식인데 이를 깼다. 시장대행이 좌파진영에 충성하기 위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이사회가 지난해부터 채근한 결과로 해석된다. 시장에게 대표나 이사장 해임권한이 있지만 임원추천위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데 추천위 7석 중 시의회와 재단이사회가 5명을 임명하므로 현 인적 구성상 불가능하다. 권력 교체에 대비해 미리 빗장을 걸어 잠근 것이다. 물론 그들은 교통방송은 산하기관이 아니라며 방송독립성을 주장하지만, 한쪽 이념 진영의 인사들이 정치권력의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공영 전파를 이념의 도구로 전락시켜 놓았으면서 방송독립을 내세우는 건 염치가 없다. 상식과 순리를 짓밟는 행태지만 좌파진영에겐 전범(典範) 같은 방식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주 3년 임기의 KBS 이사 11명을 추천했다. 새 이사회가 뽑을 새 사장은 12월부터 3년 임기가 시작된다. MBC도 임기 3년의 방문진 이사진이 새로 선임됐는데 친여 성향이 오히려 더 강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성제 사장의 임기가 2023년 2월까지인데 후임 사장도 이번에 선임된 이사들이 뽑게 된다. 연합뉴스는 1일 임기 3년의 새 사장이 선임됐다. YTN도 이명박 정부 때 해직됐다 복직한 기자 출신이 임기 3년의 사장에 선임돼 이달 중순 취임한다. 이런 선출과정이 형식상은 재단, 이사회 등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청와대나 여권실세들의 의중이 관철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대선까지 반년밖에 안 남았는데, 거의 모든 공영방송·통신사 경영진을 문재인 정권이 최소 3년 찜해 놓는 셈이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문 대통령이 야당이던 시절 제출해 놓고도 막상 정권을 잡자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해 버렸다. 정권의 재임 중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단죄는 ‘언론의 추적 취재를 통한 의혹제기→검찰수사’ 순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문 정권이 애완견 검사들을 요직에 박아넣는 데 성공함으로써 검찰에서 권력비리 수사 소식은 거의 들려오지 않는다. 이제 공영방송 경영진을 확실한 자기편으로 포진시키고, 언론징벌법의 힘으로 민영 언론들의 권력비리 추적·의혹 제기 기능까지 위축시켜 버리면, 퇴임 후를 안전가옥에서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친문들의 계산일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의 실력자들은 물론이고, 눈먼 돈과 사업권을 따내온 자칭 진보인사들, 노조간부들, 영세한 택배 대리점주를 자살로 몰아넣을 만큼 떼법 권력을 휘둘러온 이들이 모두 정권 종료를 걱정하고 있다. 이들 모두의 집단적 안전을 위해 검찰 언론 등 핵심 포스트들에 알박기를 가속화할 것이다. 국회의장에게 GSGG를 날린 초선의원의 행동은 마지막 안전판 참호를 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박감을, “GSGG는 Governer…” 운운하는 변명은 지난해 봄 코로나와 황교안 등의 뻘짓 덕택에 어떤 수준의 인사들이 금배지를 달게 됐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단선적 사고방식은 언론중재법에 언론계가 반대하자 “파리 모기약 팔지 말라고 파리 모기들이 약국 앞에서 집단 항의 시위한다면 파리 모기를 편들어 줘야 하나”는 논리를 들이댄 정청래 의원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자신들이 만든 모기약이 정작 모기 잡는데 필요한 성분은 다 빠지고, 아내와 아이들의 호흡기에 치명적인 독성물질이 든 불량품이라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수준을 보면 기대난망이긴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임기제 자리를 놓고 온갖 비정상적 수단이 동원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문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 이념적 스펙트럼이나 조직 내 스탠스에서 한쪽 극단에 서 있는 인사들 등용을 이젠 멈추고 중도적·중립적 인사를 선임해 누가 새 정권을 잡아도 계속 함께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대선과 퇴임 후를 겨냥해 자기편들을 알박는 인사를 계속한다면, 정치보복의 악순환은 반복되고, 퇴임 후는 더 위태로워질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이달 11일 정경심 항소심 유죄 판결은 어쩌면 여권 대선주자들에겐 호재가 될 수도 있었다. 1, 2심 일관된 법원 판결을 핑계 겸 무기 삼아 마침내 조국과 손절하고, 2년 가까이 허우적대 온 억지와 궤변의 내로남불 늪에서 빠져나오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나 여권은 정반대로 치달았다. 방향이 틀린 정도가 아니라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어버렸다. 친(親)조국 의원들의 사법부 비난이야 예상했지만, 이재명 이낙연 등 주요 대선후보들이 나서서 판결을 사실상 부정한 건 놀라운 일이었다. 민주공화국의 리더가 되겠다고 나선 이들이 공화제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막나갔던 독재 정권 때에도 “노코멘트”라며 불편한 심사를 표출하는 정도였지, 대놓고 판결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설령 본심이 아니라 강경 친문세력을 의식해 마음에 없는 발언을 했다 해도 심각한 문제다. 정략적 이익을 위해서는 국가와 공동체의 핵심 가치와 객관적 사실마저 무시하고 억지를 강변할 수 있는 인성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조국 가족의 비리라는 엄연한 사실에 저항하는 논리는 의외로 단순하고 조악하다. 요약하면 ①조국 가족은 전무후무한 방대한 수사에 탈탈 털렸다 ②수사의 핵심은 사모펀드였는데 무죄가 되고 별건만 유죄가 됐다는 것이다. 특히 ①을 강변하기 위해 수많은 논리가 동원돼 왔다. 가장 최신판은 이재명 캠프 대변인이 항소심 판결 직후 “12·12 군사반란 사건에 투입된 검사보다 훨씬 많은 검사를 (조국 수사에) 투입했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 논평을 듣고 필자도 ‘엄청난 규모의 검사가 투입됐었구나’라고 생각했다. 2019년 조국 사태 당시 논설실장으로 매일 조국 뉴스를 다뤘지만 검사 숫자 같은 디테일은 기억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기록을 찾아봤다.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SNU팩트체크센터가 YTN 연합뉴스 등의 확인 보도를 종합한 바에 따르면 조국 수사 투입 검사는 최소 15명으로 추산된다(15~19명). 1995년 12·12 수사 때는 14명, 2005년 안기부 도청 사건에는 14명, 2019년 김학의 전 차관 수사에는 13명의 검사가 투입됐다. 1995년 말 12·12 수사는 반란의 실체를 규명하는 첫 수사가 아니라 1994년 기소유예 처분된 사건을 다시 수사한 보강수사였다. 조국 사건은 안기부 도청 사건보다는 최소 1명, 김학의 재수사보다는 2명 이상 많은 검사가 투입된 것인데, 조국 의혹은 어느 한 분야에 한정된 사건이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숫자 단순 비교는 곤란하다. 당시 논문 공동저자, 표창장 조작, 장학금 수령, 사모펀드, 웅동학원 등 숱한 의혹들이 쏟아졌다. 일선 기자들의 검증 취재와 관련자들의 폭로로 세상에 드러나고 고소 고발된 숱한 의혹들 가운데 검찰이 한두 개만 추려 부분 수사만 벌였다면 봐주기, 덮어버리기 작전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더구나 조국은 당시 정권 내 비중이 단순 장관 후보자를 넘어서는 위치였다. 만약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조국 같은 위치를 점하는 이가 있어 장관에 임명됐는데 언론검증이 시작되자마자 평소 언행과 정반대의 다종다기한 비리 의혹이 쏟아졌다고 가정하자. 검찰이 침묵하거나 의혹 한두 개만 소극적으로 손댄다면 당시 야당(민주당)은 가만히 있었을까. ②번 주장, 즉 수사의 본건은 사모펀드였고 다른 비리는 별건이었다는 주장도 해괴한 논리다. 조국 사태 당시 언론이나 검찰, 국민 누구도 입시비리 의혹을 곁가지라고 여긴 적이 없다. 게다가 사모펀드 관련 혐의 11건 중 무려 6건에 대해 유죄가 나왔는데 수사가 부당하고 무의미했다는 건가. 대선주자들의 태도는 ‘잘못 인정, 사과, 반성이 존재하지 않는 문재인 정권 DNA’의 연장선상에서 나온다. 한번 밀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지지층을 묶어온 허구의 교리 기둥이 무너진다고 여긴다. 아무리 불리한 사건이 닥쳐도 맹신적 지지자들의 신념을 다져줄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주입시키면 결집력이 깨지지 않고 ‘성공한 정권’ 신화가 지속 가능하리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화는 유지될 수 없다. 야당일 땐 억지스러운 주장이어도 서사구조만 완벽히 만들어내면 지속 가능했지만 집권세력이 되면 다르다. 결과가 뒤따르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자신들이 내세운 것의 결과에 책임지는 경험이나 훈련 없이 권력을 잡은 이들이다. 인사권을 휘둘러 권력기관을 장악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내는 전술적 능력은 뛰어나지만, 정치인의 기본 덕목인 객관성과 책임성은 결여된 집단인 것이다. 그런 이들의 마음속에 권력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뒤섞이니, 객관적 사실에 눈감은 채 범죄를 비호하고 심판을 향한 삿대질을 계속 해대는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지난주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를 봤다.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수도 모가디슈에 고립된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필사의 탈출을 하는 스토리다. 영화에는 무장세력들이 총기를 난사하며 힘자랑을 해대는 장면이 숱하게 등장했다. 광기와 폭력성의 극치를 보다 보니 크메르루주, 중국 홍위병, 6·25전쟁 당시 완장들의 행태가 연상됐다. 이념의 이름으로 야만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현대사에서 낯선 장면이 아니다. 극장을 나와 뉴스를 검색하니 ‘쥴리 벽화’ 소식이 줄을 이었다. 쥴리 벽화도 적(敵)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야만성의 산물이다. 과거엔 좌든 우든 금도는 있었다. 과거 선거 때도 후보 배우자를 놓고 누구와 동거했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이 돌았지만, 그건 하수도에 해당되는 ‘찌라시’의 세계에 국한됐다. 그러나 요즘 일부 세력에겐 금도가 없다. 그 결과 하수도가 상수도로 역류해 범람한다. 가짜뉴스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부터 천착해야 하는데,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언론중재법을 밀어붙이는 여당은 유튜브와 1인 미디어는 적용 대상에서 슬그머니 빼버렸다. 한국의 권력 주변 좌파집단은 어쩌다 이렇게 저질로 전락한 것일까. 첫째, 친문세력 내 운동권 출신들은 진정한 진보 가치의 맥을 이어온 주역이라 보기 어렵다. 80년대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독재정권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따듯한 마음의 청년들이었다. 그중에는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무명으로 노동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말기 학생운동의 실질적 지휘부는 구국학생연맹 같은 지하조직이었다. 구학련 총책이었던 서울대생 김영환은 수년 후인 90년대 초 북한 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난 뒤 주체사상의 몽상에서 깨어나며 북한인권 운동가로 거듭 태어났다. 반면 현재 학생운동권 출신의 대표처럼 인식된 정치인 중 상당수는 총학생회 같은 공개조직에서 활동하다 투옥 생활을 겪은 뒤 상당수는 군 면제를 받고 현실 정치인의 휘하로 들어갔다.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이는 송영길 대표 등 소수에 불과하다. 조국 교수에 대해선 김영환은 “운동권 축에도 못 낀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아랫세대인 40대 좌파 인사들은 반독재투쟁이나 노동현장은 거치지 않은 세대다. 그들에게 진보 활동은 자기희생이나 헌신과 직결된 게 아니다. 기득권을 내놓는 손해를 볼 필요도 없이, 일상에선 기득권층으로서의 특혜는 다 누리면서 공개적으로는 약자의 대변자 행세를 할 수 있는 꿩 먹고 알 먹기다. 이런 이들의 상당수는 신독(愼獨), 가난한 이웃에 대한 미안함에서 나오는 검소함과 절제 등 과거 진정한 진보인사들이 실천했던 생활 특성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암울했던 시절 기득권을 버린 채 헌신했고, 그 대가로 어떤 권력이나 명예, 보상도 바라지 않았던 사람들의 열정과 겸손을 알기나 할까. 저들이 저열해진 두 번째 원인은 문 정권의 행태다. 반대론을 설득하고 내용을 보완하는 과정 없이 독주하다 보니 반대론자들이 승복하지 못하는 대립 구조가 고착됐다. ‘의로운 목적’을 위해선 절차와 수단의 정당성은 양보할 수 있다‘는 운동권적 사고(思考)의 발현이다. 그 결과 정권을 증오하며 정권교체가 필생의 소원인 국민이 늘어나고, 여기에 맞서 정권 지지자들은 부족전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원시인들처럼 그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악순환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들을 진보는커녕 좌파라 부르는 것도 적절치 않다. 좌든 우든 가치관을 지향한다면 제도와 질서의 불합리한 것들을 유불리와 상관없이 고쳐야 하는데 정반대다. 단적인 예로 나팔수 방송, 검찰권 남용, 코드 낙하산 인사 같은 구시대의 폐습들은 이 정부 들어 더 적극 활용됐다. 그러다 나중에 그 칼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으면 뒤늦게 개혁을 부르짖는데 대표적인 예가 검찰개혁이다. 이들의 머릿속엔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돈과 선전선동술을 잘만 활용하면 권력을 영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각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그 환각이 온갖 무리수로 발현되고 있으며 강도가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하지만 민도가 낮은 제3세계와 달리 시민층이 두텁게 발달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궤도를 이탈한 권력은 결코 영속할 수 없다. ’차벨스(괴벨스+차베스)‘의 할아버지가 나선다 해도 성숙한 민의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서 ’평화적·단계적 진화‘가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이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단절 없이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진화론의 새로운 이론인 단속평형이론(斷續平衡理論·Punctuated Equilibrium)처럼 각 단계마다 마침표를 찍듯이, 정권마다 격렬한 단절과 부정(否定)이 이뤄지는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 결과 광신적 지지·반대 집단이 더 양산되고, 심리적 내전이 지속될 것 같아 안타깝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문재인 정권 들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행태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최근 빈도가 더욱 잦아지고 있다. 최근 보름간 사례 몇 개만 추려봤다. #사례 ① KDI(한국개발연구원)가 6, 7일 대규모 국제콘퍼런스를 열었다. 주제는 ‘문재인 정부 4년의 여정’인데 세션 제목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세션 1-한국판 뉴딜과 ‘미래를 여는 정부’ △2-포용사회와 ‘복지를 확장한 정부’ △3-공정사회와 ‘권력을 개혁한 정부’ △4-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평화를 유지한 정부’. 복지 개혁 평화 등의 과제들이 다 이뤄졌다고 결론을 지어버린 셈인데, 낯 뜨겁지 않았을까? 설령 문 정부가 그런 업적을 이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를 제목으로 붙인다는 것은 정상적인 염치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국가 최고 싱크탱크 두뇌들의 판단력이 흐려진 걸까? #사례 ② 문 대통령은 20일 청해부대 집단감염 사태에 대해 군 당국만 질책했을 뿐 사과는 하지 않았다. 유체이탈 화법에 비난이 쏟아질 것이라는 판단을 못할 정도로 청와대가 정무 감각을 잃은 걸까? #사례 ③ 정부와 경찰은 역시나 민노총 집회에 이중잣대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보수단체나 자영업자 집회 봉쇄와 극명히 대비될 걸 모를 정도로 경찰 수뇌부가 우둔할 걸까?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사례를 들여다보면 관통하는 키워드가 보인다. 즉 ‘오로지 지지 세력에만 집중하는 진영정치’의 파생물이라는 점이다. 지지 세력만을 염두에 둔 채, 그들의 머릿속에 ‘성공한 정부’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만을 목표로 삼으니 안면몰수하고 용비어천가를 불러댈 수 있다. ‘성공 정권’ 스토리라인의 핵심 소재가 방역이므로 사과는 안 한다. 민노총 같은 핵심 고객을 화나게 할 행동도 결코 안 된다. 이 대목에서 많은 이들이 의아해하는 임기 말 40%대 지지율의 비밀도 풀린다. 이는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 가능하다. 첫째는 지지 세력에 영합해온 진영정치의 효과이고, 둘째는 한국 사회 구성의 변화 덕분이다. 진보좌파 네트워크는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졌다. 민노총은 2016년 65만9000명에서 2019년 105만 명을 넘어섰다. 전교조를 비롯해 거대 노조들의 조직력은 2000년대 초반을 가내수공업시대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강화됐다. 시민·민주 등의 수식어를 붙인 단체도 급팽창했다. 서울의 경우 2016~2020년 3339곳의 단체가 공모사업 수주, 위탁운영 등 다양한 외피로 7111억 원의 예산을 박원순 서울시로부터 지원받았다(국민의힘 박성중 의원실 자료). 가족까지 합치면 ‘대깨좌’(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좌파정권 지지) 고정표가 수백만은 될 것이다. 집권세력은 이들만을 대상으로 ‘허구의 성(城)’ 쌓기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 가공의 시나리오 속에서는 소주성도, 경제도, 외교도 모두 성공작이며, 조국도 한명숙도 김경수도 모두 결백한 희생자다. 지지자들만 그렇게 믿으면 된다. 이를 위해 통계를 화장(化粧)하고, 별자리 잇듯이 유리한 팩트만 갖다 쓴다. 미온적인 통계청장을 바꿔버리고, 정권비리를 파헤치려 한 검사들은 죄다 좌천시킨다. 독재정권 시절에도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 영역의 자율성이 존중돼 왔던 보루 기관들마저 다 망가뜨린다. ‘성공한 정권’ 시나리오의 당초 핵심 소재는 남북 관계였으나 연락사무소 폭파 등으로 엉켜버려 이제 남은 유일한 소재는 K방역이다. 청와대가 4차 대감염을 불러온 판단 미스. 백신 부족, 청해부대 집단감염 등 그 어떤 사태에 대해서도 오류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 대통령은 정권의 성공과 안녕이 지지세력 결집에 달려 있다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는 듯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했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핵심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김대중은 노동개혁과 구조조정으로 IMF 이후 기업 경쟁력 회복의 길을 열었고, 노무현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기지를 밀어붙였다.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그들은 대통령이기에 국가와 미래를 택했다. 문 정권 앞에도 국민연금, 노동시장, 면세 축소, 호봉제 개혁 등 비(非)인기 개혁 과제들이 수두룩했지만 다 팽개쳤다. 남은 임기에도 돈 풀기와 선거 승리용 인프라 구축에만 전념할 태세다. 정연주 씨를 방심위원장으로 밀어붙이고,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을 조기 교체하려는 것도 그런 일환으로 읽힌다. 통합 대신 지지세력만 바라보고, 나라 곳간과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들을 망가뜨린다면 이는 통치도 정치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다 한들 역사에선 패자가 될 뿐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