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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50년 넘는 정치 역정을 통해 선거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정치인이다. 부통령 8년, 상원의원 36년을 지냈다. 그런 그가 대통령 재선 도전을 선언했지만 위기에 처했다. 지난주 CNN 여론조사는 오히려 유권자들이 바이든을 ‘약체 후보’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줬다. 응답자의 48%는 “공화당에서 누가 나와도 바이든을 이긴다”고 답했다. 소속 정당인 민주당 지지층의 67%는 내년 11월 대선 때 바이든이 아닌 제3자를 후보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데도 이런 응답이 나왔다. ▷갈 길 바쁜 바이든을 괴롭히는 것은 80세라는 고령과 건강이다. CNN은 전화 조사에서 “바이든이 체력(stamina)과 정교한 판단력(sharpness)을 갖췄는가”라는 질문을 넣었다. 3월 처음 등장했는데, 굴욕적 질문이다. “갖췄다”가 26%, “못 갖췄다”가 74%라는 답변도 놀랍다. 올여름 상원 공화당 1인자인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81)가 회견 중에 30초간 멍하게 굳어버린 일이 건강 위기론에 불을 지른 셈이다. ▷공화당에선 트럼프가 과반 지지를 얻으며 1위를 달리고 있다. 플로리다 주지사, 30대 억만장자 사업가가 당내에서 10%대 지지로 2위권을 형성했지만 “트럼프는 좋은 대통령”이란 평가를 내놓는 ‘트럼프 아류’에 가깝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국 경제는 성장률, 물가, 일자리 지표가 좋아졌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는 오를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미국 대선은 2차대전 이후 경제가 승부를 갈랐는데, 내년에는 다를 수 있다는 전망도 생겨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50%를 오르내리는 시점에 미 대통령 기념재단·센터 13곳은 전에 없던 공동성명을 냈다. 1930년 전후 대공황기에 대통령을 지낸 허버트 후버 기념도서관부터 오바마 대통령 센터까지 참여해 “미국은 민주주의와 법치에 기반한 나라”라며 “정치에서 예의와 존중은 필수”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출된 공직자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름만 안 썼을 뿐 트럼프의 일방주의적이고 무례한 정치를 비판한 것이었다. ▷바이든의 위기는 트럼프에겐 기회다. 트럼프는 대통령 시절 미국이 왜 미국의 세금을 써가며 남의 나라 안보를 지켜줘야 하느냐고 질문해 왔다. 그런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을 포함하는 동맹·우방국들의 대외정책은 큰 혼선을 빚을 수 있다. 중국과 막 시작한 신냉전과 러시아의 침략전쟁은 어떻게 전개될지 점치기 어렵다. 4년 전 실패했던 북핵 ‘외교 리얼리티 쇼’를 시도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정례화한 한미일 3국 협의체와 미국의 핵협의그룹(NCG)은 기획한 대로 가동될 거란 보장이 없다. 우리 정부에는 바이든 외교에 집중하는 동시에 트럼프 ‘시즌2’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할 이중과제가 주어졌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조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한 2020년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TV토론이 열렸다. 사회자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백인 우월주의 단체나 무장단체를 향해 폭력 시위를 중단하라고 당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느 단체를 거론하라는 말인가”라고 운을 뗀 뒤 “프라우드 보이스여. 몇 걸음 물러나 기다리고 있으라(Proud Boys. Stand back and stand by)”고 말했다. 질문도 이례적이었고, 그런 질문에 단체 이름을 댄 답변도 매우 낯설었다. ▷미국 법원이 바로 그 트럼프 지지 그룹 ‘프라우드 보이스’의 지도부 2인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모두 30대 후반인 피고인 조 비그스, 재커리 렐은 2년 전 이 단체 소속원들의 의사당 난입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각각 징역 17년, 15년을 선고받았다. 난입 며칠 전 트럼프는 과격 지지자들을 향해 “1월 6일 워싱턴 시위에 오라. 매우 거칠(wild) 것이다”라고 선동했고, ‘프라우드 보이스’ 회원들은 “자유 미국인으로 살자. 네 무기를 갖고 와라”는 글을 돌렸다. ▷사건 수사와 재판이 2년을 넘기면서 미국 방송의 의사당 현장 촬영 영상, 경찰의 채증 촬영물, 두 피고인이 트위터에 올린 영상물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검색할 수 있다. 영상 속 두 사람은 확신범이었다. 바이든 당선을 의회가 선포하는 날에 맞춘 습격을 제2의 독립전쟁으로 불렀다. 난입 전날에는 “복면을 쓰고 가자. 트럼프는 역시 최고의 지도자다”라며 선동했다. 카메라에 찍힌 렐은 경찰 여럿의 얼굴에 화학물질 스프레이를 뿌렸다. ▷트럼프를 폭력적으로 지지했던 두 사람은 법정에서 후회한다며 흐느꼈다. 비그스는 “그날 군중심리에 휩쓸렸다. 평생 후회하면서 살겠다”며 선처를 호소했고 “나는 테러범이 아니니 딸아이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렐 역시 “정치에 질려버렸다. 나 따위는 관심도 두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 거짓을 퍼뜨리는 것도 이젠 마지막”이라고 쓴 최후 진술문을 읽었다. 읽는 도중 번번이 눈물을 훔쳤다. 1심 법원은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의사당 폭력엔 여러 트럼프 지지 단체가 개입했다. 전국에서 1100명이 체포됐고 630명이 기소됐으며 110명이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다. 최악의 민주주의 파괴 범죄였지만 이들을 이용한 트럼프는 건재하다. 4차례 기소되면서 머그샷을 찍는 굴욕을 겪었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공화당 대선 후보 1위를 지키고 있다. 판결 보도가 나온 뒤 하루가 지나는 동안 트럼프는 일절 반응이 없다. 이런 역설을 트럼프는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선동하는 정치인, 휩쓸려 추종하나 위기의 순간은 홀로 견뎌내야 하는 극렬 지지자. 이런 관계가 만드는 비극은 동서고금 어디서건 반복되지만 교훈은 잘 전파되지 않고 있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2주 가까이 불타고 있는 하와이는 ‘X의 섬’이 됐다. 8일 새벽 미국 하와이주 마우이섬에서 시작된 산불 3개가 휩쓸고 간 마을들을 소방·구조대원 수백 명이 수색하고 있다. 수색을 마친 주택과 건물 벽에 주황색 스프레이로 X 표시를 하나씩 하고 있다. 그 X 표시가 2000개를 넘어서 마을을 뒤덮었다. 20일 현재 사망자는 114명이다. ▷하와이주는 1인당 소득이 5만 달러를 넘는다. 하나의 국가로 간주한다면 독일과 네덜란드 사이쯤 되는 부국(富國)이다. 그런 곳에서 목격된 산불 초기 대응을 보면 미스터리(X)가 하나둘이 아니다. 제주도 크기인 마우이섬은 상주 인구 16만 명에, 고급 리조트를 찾는 관광객이 넘치는 휴양지다. 소방대원은 모두 65명. 소방차가 13대, 사다리차는 2대뿐이었다. 소화전 수압이 낮아 초기 진화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여기가 미국이 맞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화재 직후 대피 사이렌도 울리지 않아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악몽 이후 옥외 사이렌을 설치해 왔고, 지금은 80개나 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마우이섬 재난·방재 책임자는 “사이렌을 울렸다간 쓰나미 경보로 오인한 주민들이 (불이 난) 산 쪽으로 피할까 걱정해 그랬다”고 말했다가 하루 만에 물러났다. 홈페이지에는 “산불과 쓰나미를 위해 사이렌을 가동한다”고 적혀 있었다. 산불과의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꾼 것도,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 후임자 지명을 않는 것도 재난대응의 ABC가 맞는지 의문이다. ▷초기엔 미지수(X)였던 화재 원인은 발화 지역의 조류보호센터 보안 카메라 영상이 공개되면서 윤곽이 잡혔다. 어둠 속에 튄 섬광이 촬영된 것이다. 당시 하와이에는 허리케인 ‘도라’의 영향으로 시속 100km의 강풍이 불었다. 강한 바람에 나무가 쓰러져 송전선을 건드렸거나, 송전선이 바람에 끊기며 불똥이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 옮겨붙었을 것이란 추정이 유력해졌다. 매년 봄 우리가 겪는 백두대간 산불과 흡사하다. 더운 여름과 따뜻한 겨울만 존재하는 하와이는 지금(5∼10월)이 건기다. ▷하와이는 탄식의 섬이 됐다. 휴대전화가 되살아나면서 연락이 닿아 실종자가 줄었다지만 여전히 1000∼1200명이나 된다. 불에 탄 시체도 신원 확인에 애를 먹고 있다. 통상 치아나 지문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지만 치과 진료 기록도 불탔고, 시신 훼손이 심해 지문 채취도 어렵다고 한다. 현지에선 불에 탄 마우이를 두고 “9·11테러 직후 같다”고, 잿더미 때문에 “흑백사진 같다”고 말한다. 마우이섬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 마음도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는 우리가 아는 하와이는 없다. 자연이 만들고 인재(人災)가 키운 재난이 이렇게 무섭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202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4번째 기소됐다. 3년 전 대선 때 ‘조지아에서는 트럼프가 이겼다’는 허위 발표를 만들어내기 위해 조지아주 국무장관을 압박했다는 등 혐의만 13가지다. 조지아주 검찰은 마피아 소탕을 위해 만들었던 특별법(RICO법)을 꺼내 들었다. ▷이 특별법은 마피아 두목을 잡기 위해 1970년 처음 제정됐다. 범죄를 뒤에서 실제 조종하면서도 증거 부족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 범죄단체 두목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을 때였다. 특별법은 정식 범죄조직은 아니더라도 사실상의 결사체(enterprise)를 만든 1인자를 가중처벌하도록 했다. 근년 들어선 내부자 거래 등 금융인 여럿이 연루된 범죄에도 적용됐다. 조지아주 검찰은 트럼프와 그의 백악관 비서실장 등 19명을 조지아 대선에 개입한 결사체로 봤다. 유죄가 확정되면 5∼20년 형이 예상된다. ▷공소장에 따르면 트럼프는 2020년 대선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1만1780표를 찾아내라고 압박했다. “내가 1만1779표 차이로 졌다고 집계됐다지만 부정한 표가 많다. 가짜 서명이 수십만 개 나왔다”고 말했다.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국무장관은 “재검표를 3번 했다. 당신은 이기지 못했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결국 지지자들을 선동해 ‘바이든 당선 확정’을 발표하는 날 의사당에 난입하도록 했다. ▷4차례 형사재판에 회부됐지만 트럼프는 공화당 내 1위 후보다. 뉴욕타임스가 의뢰한 7월 조사에서 그가 54%를 얻었을 때 2위 후보는 17%에 그쳤다. 1급 핵 군사기밀 유출(두 번째 기소), 부정선거설 유포 및 부통령 회유·압박(세 번째 기소) 혐의가 심각해 보이지만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당선된다면 첫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에게 “두 번째, 세 번째 기소를 취소하라”고 명령할 것이란 예상이 요지부동 지지율의 배경이다. 하지만 네 번째 기소는 사정이 다르다. 연방 법을 적용한 앞선 기소와 달리 조지아주 법에 따른 것이어서 대통령에겐 사면권이 없다. ▷트럼프는 8월 말 조지아주 법원에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니 재판은 이미 시작됐다. 이렇듯 대선 유세지와 법정을 오갈 트럼프가 마주한 혐의들을 떠올리면 착잡하다. 그가 자유 진영의 리더가 다시 될 가능성이 작지 않아 그렇다. 트럼프는 유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쿼드(미국 일본 인도 호주) 등 다자안보 협력체에서 존중받을까. 오늘 시작하는 한미일 3국 정상회의는 어떻게 운용될 것이며, ‘마피아 두목’ 꼬리표에 중국 러시아 북한은 어떻게 반응할까. 지금의 바이든 대통령과 달리 글로벌 역할을 줄이는 고립주의가 트럼프 1기의 외교 기조였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오성규 애국지사가 오랜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그제 영구 환국했다. 마지막 재일(在日) 광복군이자 독립유공자인 그는 “일본에서 죽을 수는 없다. 자기 나라서 죽어야지”라며 조국행을 선택했다. 1923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오 애국지사는 10대 후반에 중국에서 광복군 제3지대(支隊)에 입대했다. 1945년 미군의 도움으로 한미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 진격을 준비하다 광복을 맞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생존하는 독립유공자 9명 가운데 1명이다. ▷귀국 소망은 해방 후 조국 땅을 밟지 못했던 아픔에서 시작됐다. 그는 해방 후 중국에 남아 광복군 상하이 특파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일본에 정착해 재일 교포를 위해 일했다. 2018년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환국의 뜻을 더 세웠다고 한다. 그의 귀국 과정은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어른에게 조국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기회였다. ▷그가 탄 귀국 항공기는 기내 방송으로 애국지사의 탑승 소식을 알리는 예를 갖췄다. 공항 입국장에서는 어린이 합창단이 “조국의 영예를 어깨에 메고…”로 시작하는 광복군 제3지대 노래를 불렀다. 청년 오성규가 중국 땅에서 배고픔 설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부르고 또 불렀을 노래다. 오 애국지사는 80년 뒤 이런 순간이 올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는 “감개무량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 애국지사는 제일 먼저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자신의 상관이었던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묘소에서 감격 어린 거수경례를 했다. 그는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안부를 전했다. 오 애국지사는 1940년대 베이징에서 광복군 창설 소식을 듣고 충칭까지 2000km를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짚신이 터져 발에서 피가 났다”는 회상도 했다. 그날 묘역에는 뜻깊은 태극기가 걸렸다. 통상의 태극기 옆에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병사가 1946년 이후 간직해 오던 태극기를 그대로 본뜬 것을 게양했다. 태극과 4괘 사이로 “피흘림 없는 독립은 값없는 독립이란 것을 자각하자” “백전백승” 등이 씌어 있다. 나라 없는 병사들의 피 끓는 다짐이 눈에 선하다. ▷오늘로 광복 78년을 맞았다. 힘없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어려움을 딛고 나라를 일으킨 것이 자랑스러운 세월이다. 힘을 되찾았기에 오 애국지사처럼 자기를 버릴 각오를 세운 어른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오 애국지사는 오늘 광복절 경축식에 귀빈으로 참석한다. 100세 나이에 조국의 품을 되찾은 그의 삶에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후대에게 알리고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이 그제 “미래가 짧은 (노인)분들이 왜 (청년들과) 1 대 1 표결을 해야 하느냐”며 평균수명까지 남은 생애에 비례해 투표권에 차등을 두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청년 좌담회 자리에서 “중학생이던 아들이 왜 나이 든 사람들이 우리 미래를 결정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며 꺼낸 말이다. 이어 “되게 합리적”이고 “맞는 말”이라고 했다. 청년 유권자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한 말이었고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부적절했다. 헌법 원칙에도 안 맞고, “1인 1표로 한다”는 공직선거법 146조와도 충돌한다. ▷숫자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평균연령을 80세로 가정해 보자. 여생이 30년인 50세 유권자에게 1표가 주어진다면 60년 남은 20세 청년은 비율대로 2표를 주자는 것이다. 15년 남은 65세에겐 0.5표만 주어진다. 청년들의 투표 참여를 강조한 것이라 해도 선뜻 납득하기 힘든 논리다. 재산 성별 종교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1표’ 원칙을 위해 희생을 치른 보통선거의 역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국민의힘은 물론이고 민주당 내에서조차 비판이 나왔다. “나이로 차별 말라는 것이 헌법 정신”(이상민) “지독한 노인 폄하”(조응천)라는 지적이었다. 주로 김 위원장의 ‘친명 행보’를 비판해온 비명계 의원들이 나섰다. 민주당이 걱정하는 데는 연원이 있다. 과거 정동영, 유시민, 김용민처럼 잘 알려진 당내 인사들이 고령층의 정치 참여를 비꼬는 말을 하는 바람에 당은 홍역을 치렀고, 선거에서 손해를 많이 봤다. ▷김 위원장은 이후 침묵을 선택했다. 그런데 친명계인 양이원영 의원이 “김 위원장의 말이 맞다”고 가세하는 바람에 논란이 더 커졌다. 그는 SNS에 “지금 투표하는 많은 이들은 미래에 살아있지도 않을 사람들”이라고 썼다. 김 위원장의 문제적 발언은 고령의 유권자들은 후손들을 위한 긴 안목 없이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동의할 수 없다. 행사장에 온 눈앞의 청년들만 생각했을 뿐 자기 발언의 파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발언 아닌가. ▷정당의 내부 선거는 1인 1표가 아닌 경우가 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와 달리 공직선거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정치 신인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에게는 평당원보다 투표권을 더 주는 경선 제도가 상당 기간 지속돼 왔다. 김은경 혁신위는 내년 총선에 적용할 당내 경선 룰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태다. 김 위원장은 청년 민주당원이 고령 당원보다 더 많은 표를 행사하는 ‘되게 합리적’인 경선 룰을 소신대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또 당내 토론이 시작됐을 때 양이원영 의원은 SNS 글처럼 고령의 민주당원에게 ‘청년과 달리 1표를 다 드릴 수 없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 ‘코리아’를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청춘을 바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의 노병을 만나보면 ‘자유의 가치’처럼 추상적인 말을 먼저 꺼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군화 속 땀이 얼면서 생긴 동상(凍傷), 기어다니던 논바닥,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민둥산처럼 몸이 기억하는 것이 먼저였다. 총알이 빗발칠 땐 1인칭 부조리극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한 인터뷰도 그랬다. 스탠 벤더 미 해병대 병장(당시 계급)은 적군을 처음 쏴 죽였을 때의 구토를 떠올렸다. 윌리엄 웨버 대위는 “부하가 총에 맞으면 눈이 뒤집혔고, 살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했다. 본능과 야수성에 압도당했던 기억이었다. 영국군 테드 로즈 이병은 임진강 전투 때 중공군에게 포위된 뒤 탄약 한 발, 빵 한 조각 남지 않은 보급 창고의 절망을 말했다. 한국전쟁은 크게 보면 냉전 초기 공산 팽창주의의 산물이지만, 자세히 보면 개인적 전투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우리 국군과 함께 사선을 넘었던 참전국 장병이 아니었다면 현대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해외 참전국 용사들이 27일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국가보훈부가 초청한 장병 64명과 가족들은 판문점을 방문하고, 동료 전사자를 모신 부산 유엔기념공원 묘역을 참배한다.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었다. 해외 참전국에서 3만7886명이나 목숨을 잃은 탓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이 됐다.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에 온 사회가 애통해하는 점은 그때라고 다르지 않았을 텐데, 참전국과 가족들은 조국의 부름에 응한 젊은 영웅들을 고통 속에 품어냈다. 한국에 온 노병들은 그렇게 지켜낸 대한민국의 오늘을 확인하고는 나의 작은 전투가 만든 결과에 감격하고 있다. 참전 명령을 듣고 지도를 펼쳐 보고서야 코리아의 존재를 알았을 그들 아닌가. 굶주리고 냄새나던 한국 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인천공항 도착 때부터 목격했다. ▷방문한 용사 가운데 가수가 된 2명은 아리랑을 함께 부른다. 80대 후반 나이에 영국 오디션대회(‘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최고령 1위를 차지한 콜린 새커리와 트리니다드토바고의 국민가수가 된 로버트 넬슨이 그들이다. 새커리는 한국군이 부르던 서글픈 아리랑을 한국의 국가로 알고 따라 부르며 배웠다고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중략)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한국전쟁은 자유진영과 함께 치른 전쟁이었다. 자유진영은 갓 태어난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았던 임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임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나라들이 생기고 있다. 70년 기적의 결과다.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폭침됐다는 걸 민주당은 왜 믿게 됐을까. 이래경 혁신위원장 파문이 빚어지자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북한의 소행이 맞다”고 했다. 공개발언을 해야 할 정도로 민주당은 의심받았다. 당직자들도 TV에 나와 “북한이 그랬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어떤 팩트 또는 정황 때문에 민주당이 생각을 새롭게 한 것인지는 들어본 적이 없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결론은 북한 소행이었다. 영국 스웨덴 등 해양강국의 해군까지 참여시킨 국제조사였다. 민주당 그룹은 인정하지 않았다. 박지원(“하필 1번 글씨가 뚜렷하게 나타나는지 의문”) 박영선(“미군 핵잠수함 오폭설이 있는데 대응책이 있느냐”) 박선원(“북한에 당했다기보다는 우리 사고가 아닌가”)의 발언이 있었다. 박근혜-문재인 대선 때 공보물에는 “천안함 침몰”이라고 인쇄했다. 어뢰 때문인지 좌초 때문인지 모호했다. 당 전체의, 대선후보 문재인의 선택이었다. (요즘 당 일각의 해명은 “선거 공보물을 일일이 확인 못 한 불찰”이었다.) 달라지는 데 5년 걸렸다. 문재인 대표가 2015년 ‘천안함 폭침’이란 말을 처음 썼다. 총선 1년 전으로 “문재인은 안보에 강하다”는 메시지를 만들 때였다. 피격 직후의 충격과 흥분이 가라앉은 그 시절 민심은 북한 소행을 의심하는 걸 용납지 않았고, 천안함 좌초설을 재판한 법원도 “북한 어뢰에 폭파됐다”고 결론 내리던 시절이었다. 이토록 민감한 사안이건만 민주당은 여론과 선거 이미지 전략에 따라 생각을 어물쩍 바꿨다. 사람의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대법원 확정 판결도 재심으로 뒤집힌다. 단, 새로운 증거나 진술이 나와야 그렇다. 천안함은 ‘사정 변경’의 사유가 없었다. 민주당 또는 진보 진영은 이제는 북한 소행임을 믿는지 궁금하다. 근년 들어 “북한이란 근거가 없다”는 식의 그들만의 서사를 공개 발언하는 이는 소수에 그친다. 이래경(“자폭했다”)이나 유시민(“뭐가 확인됐느냐”) 정도인데, 공교롭게도 선거에 나가 표로 심판받을 뜻이 없는 이들이다. 천안함이 공격받은 때 이명박 정부와 해군은 허둥댔다. 초기 여론은 “북한 소행인지는 합동조사 결과를 봐야겠지만 군은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쪽이었다. 민주당이 가해자인 북한 비판보다는 이명박 정부 공격에 집중한 것도 부정적인 여론이 있어 가능했다. 폭침 초기엔 조사에 따라선 “정부 발표를 신뢰 못한다”라는 답변이 40%가 넘게 나왔다. 민주당은 이제라도 생각을 바꾼 계기가 뭔지 밝히기 바란다. 이건 과거 들추기가 아니다. 자랑스러운 역사의 민주당이 국민 앞에 가져야 할 도리다. 또 지금은 뜨겁지만 언젠가는 식게 될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를 겹쳐서 보면 민주당의 천안함 인식은 현재와 미래의 문제다. 민주당 당 대표는 “방류는 방사능 테러”라고 단언한다. 방류를 걱정하는 소비자들이 많은 데서 이런 발언이 가능했을 것이다. (6월 말 갤럽조사/응답자 78%가 “걱정된다”) 천안함 초기의 혼돈과 비슷하지 않은가. 일본이 30년 방류를 시작하면 우리 정부는 3면 바다와 어시장을 세밀하게 측정해 방사능 수치를 공개할 것이다. 민감한 과학논쟁, 정치싸움이 불붙을 것이다. 방류 1년, 2년이 흐른 뒤 여야 정치인, 과학자, 언론인이 갖는 오염수 안전성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될까. 변함없이 유지될까. 아니면 방사능 실측치를 확인하고 생각을 바꿀까. 어떤 쪽이든 천안함 때처럼 아무런 설명 없이 넘길 순 없게 됐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양시양비론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은 과학과 정치가 뒤엉킨 국면을 흥미롭게, 날카롭게 지켜볼 것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3김 시대엔 고사성어 정치가 빛을 발했다. 독재와 싸우던 YS는 대도무문(大道無門·민주화로 가는 큰길에는 문이 따로 없다)을, 2인자 정치에 능한 JP는 상선약수(上善若水·물처럼 순리대로 사는 게 최고다)를 남겼다. 사자성어의 압축적 힘이 일상의 언어에서 사라져 가면서 고사(故事) 정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활용하는 정치인 수도 줄었고, 가끔 등장하더라도 제맛을 못 내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그제 밤 SNS에 아무 설명 없이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고 썼다. 한고조 유방의 대장군 한신이 젊은 시절 저잣거리 불량배에게 요구받은 대로 사타구니(袴) 밑으로 지나는 굴욕을 견뎠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굴욕은 참겠지만, 훗날 초왕이 된 한신처럼 일어서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쓴 듯하다. 하지만 지금이 사자성어 정치를 할 때인지, 또 과하지욕 자체가 적절한 비유인지 의문이 생긴다. ▷그가 주장하는 억울함의 시작은 토요 골프였다. 홍 시장은 충청·경북에 폭우가 쏟아진 지난주 토요일 오전 골프장을 찾았다. 대구시에는 큰 물난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고 대구시민 1명의 실종은 보고받기 전이었다고 본인은 해명했다. 전국 사망자가 40명을 넘어서자 홍 시장은 뭐가 문제냐던 태도를 접고 결국 사과했다. 국민의힘에선 ‘재해 중 음주·골프 금지’ 조항 위반 등을 이유로 징계위 날짜까지 잡았다. 당 지도부를 향해 “어이없다”며 훈계조로 말하던 홍 시장이 굴욕으로 느끼는 건 그의 자유다. ▷홍 시장은 어제 아침 8시간 만에 그 8글자를 지웠다. 늑장대처와 책임회피로 충북지사와 청주시장이 뭇매를 맞자 그도 버틸 힘이 빠졌을 것이다. 홍 시장은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간신문 6개를 읽고 그날의 이슈와 방향을 잡고 아침을 맞는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해왔다. 정치세력은 없지만, 정치감각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는 말이지만 이제 스스로 점검해야 할 때다. ▷먼저 경북을 포함한 중부지방에 ‘극한 호우’가 온다는 재난문자를 기상청이 발송한 후에도 빗속 골프를 강행한 점이다. 골프는 1시간여 만에 중단됐다. 하지만 골프장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지 ‘이래선 안 되겠다’고 스스로 복귀했다는 설명은 없었다. 또 이튿날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읽은 뒤 지울 정도였다면 전날 밤에도 절제했어야 했다. 특히 사과 회견을 마친 뒤 자신을 한신에 비유하며 ‘미래를 위해 참는다’는 식으로 글을 남긴 건 적절치 않다. 6년 전 대선에서 780만 표를 얻었던 홍준표 시장에게 진짜 굴욕이라면 어느 쪽일까. 국민에게 사과하고, 징계위에 불려가는 것일까. 아니면 민심에서 멀어져 가고, 실수를 잡아낸 뒤 제 위치로 돌아오지 못했던 무뎌진 정치감각일까.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지난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타계한 후 그가 이따금 던졌다는 질문이 회자됐다. “네가 하는 일, 그 업(業)의 본질은 무엇이더냐.” 기자로서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이 질문에 이재명, 윤석열 후보는 뭐라고 답할까. 두 후보는 오늘도 유권자들에게 “이렇게 돕고 저렇게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 꼭 필요한 대통령의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인 양 들린다는 게 문제다. 두 후보는 새 시대에 맞는 정치인·공직자의 상(像)을 찾고, 제시하는 것을 업의 일부로 여겼으면 좋겠다. “이런 인재들과 국정을 함께 하겠다”는 비전을 들을 권리가 유권자에겐 있다. 그 말을 듣고 부모들이 “내 아이도 저렇게 커갔으면 좋겠다”고 반응한다면 대선 승리에 한발 다가설 것이다. 현란한 말로는 안 된다. 용인술을 검증받아야 한다. 성남시와 경기도에서 10년 넘게 인사를 해 본 이재명 후보와 달리 윤 후보는 검찰총장 때 비로소 인사권을 가져봤다. 그의 솜씨가 궁금했는데, 선대위 구성 때 기회가 왔다.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다. 좋은 인물 영입을 위한 치열함이 없었다. 김성태 사태는 바깥 인물에게 양보할 뜻이 없다는 걸 보여줬다. 기회가 더 있기는 하다. 이번 대선은 대선 당일에 국회의원 5명 재·보궐선거도 치른다. 대선 후보가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책임지는 드문 사례다. 윤 후보는 서울 종로, 서초갑, 경기 안성, 충북 청주 상당, 대구 중-남 등 다섯 곳에 누구를 공천할까. 초기 선대위처럼 지명도 높은 기성 정치인, 측근을 배치할까. 김종인 이준석과 3인 정립(鼎立) 구도라며 공천권을 공동 행사할까. 연말쯤 윤 후보는 보수당 공천의 법칙을 깨주길 바란다. 보수정당에선 오랜 시간 ‘스펙 좋은 것이 인재’라는 생각이 압도했다. 보수정치는 기성 질서의 권위를 존중하는 곳이니 그럴 수 있겠다. 그렇더라도 좋은 대학 나오고, 판검사 지내고 미국서 박사 딴 것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한다. (국민의힘 경선 때 최종 후보 8명이 모두 위 기준에 부합했다.) 오죽하면 “선대위가 온통 판사 검사 출신들”이란 더불어민주당 비판에 반론을 펴지 못할까. 글로벌 기업의 임원들이 법조인 일색인 걸 상상할 수 없다. 고급 스펙이 즐비한 정당을 보고 보통 사람들이 ‘내 어려움에 공감해 줄 것’이라며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까. 지난 10년 총선 때마다 국민의힘 공천은 소수가 흔들었다. 2012, 2016년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편안한 사람들’을 발탁했다가 탄핵을 맞았다. 2020년엔 황교안 김형오 두 사람이 참패를 불러왔다. 올여름 국민의힘 경선 컷오프에 도전한 11명 가운데 지난 10년 동안 국회에 입성한 인물은 하태경 의원이 유일했다. 이건 대선주자급 정치인이 발탁되지 못했다는 뜻 아닌가. 공천이 아닌 사천(私薦)의 폐해는 오늘 선거도 망치지만 내일 정치에도 후과를 만든다. 좋은 스펙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공직 후보자가 좋은 학력과 경력에 더해 내 조직을 위한 ‘건강한 물의(物議)’를 일으킨 경험이 있다면 어떨까. 내부 승진보다 대의를 중시했던 인물이라면 다음 공천을 따내기 위한 몸조심 문화를 줄일 수 있다. 또 엘리트의 길을 걸었지만 ‘정책 겹눈’을 갖춘 인물을 더 찾아내란 주문이기도 하다. 효율을 중시하는 전문가의 눈뿐만 아니라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 따뜻한 겹눈 말이다. 5곳 공천은 양날의 칼이다. 대선을 이기는 손쉬운 방법일 수도 있고, ‘정치 신인’의 옛날 정치라는 부메랑일 수 있다. 김승련 채널A 취재윤리·멘토링 에디터 srkim@donga.com}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해 아들딸 스펙 쌓기에 집착한 조국-정경심 부부는 깨닫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마흔 살을 넘기면서 출신 대학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공부를 잘 못했던 친구가 훗날 성공하는 것이 이상할 게 없다.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학자를 인터뷰한 적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창의력을 가르치는 래리 라이퍼 교수다. 그는 인간이 정보를 흡수하는 방식을 2가지로 나눈다. ①칠판 강의 듣기 혹은 출판된 책 읽기와 ②친구들이 모여 앉아 어제 본 TV 드라마를 웃고 떠들며 복기하듯 대화하기다. 전자가 일방향 정보 전달이라면, 후자는 쌍방향이다. “둘 다 50 대 50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검증이 끝났으니 토 달지 말라”고까지 했다. 라이퍼 교수의 주장은 낡은 교육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육제도는 일방통행식인 ①번에 능숙할 때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그 바람에 소수만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박사 의사 변호사가 된다는 구조다. 지필고사에는 약해도 ②번처럼 쌍방향 지식 흡수 능력이 좋은 학생들은 저평가되기 십상이다. 객관식 수능시험은 ②번 능력을 평가해내기 힘들다. 동료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 협업에 능하고, 누가 적임인지 가려내는 안목은 문제 풀이로 가려낼 수 없다. ‘나는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패배감은 수십 년 반복됐고, 응어리가 됐다. 라이퍼 교수의 설명을 전해 듣고 눈물을 글썽인 학부모들도 있었다. “아이가 똑똑한 것 같은데, 시험 점수가 낮은 이유를 이제야 설명 들은 기분”이라고 반응했다. 뭔가 이상하다. 이런 걸 잘 아는 전문가와 당국자들은 왜 그동안 바꾸지 않은 걸까. 사교육비로 고통받는 유권자가 바라는 걸 정치인들이 놓칠 리가 없지 않나. 과문한 탓이겠지만, 정치인 가운데 이런 필요성을 거론한 이는 안희정 충남지사가 유일했다. 그는 2017년 대선 때 “언제까지 인-서울 아니면 루저냐”고 연설했다. 교육정책이라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자는 주문이었다. 선거 포퓰리즘이라면 유권자의 환심과 표를 사기 위해 필요 이상의 세금을 퍼붓는 걸 말한다. 기본소득(이재명), 반값 주택 50만 호(윤석열), 쿼터 아파트(홍준표)가 그런 쪽이겠다. 그렇다면 청소년과 학부모에게 안 가져도 될 열패감을 덜어주는 구상과 정책은 포퓰리즘일까. 환심과 표를 살 수 있어 대중영합적이긴 하지만 ‘착한’ 포퓰리즘으로 부르고 싶다. 교육과 평가의 개념을 바꾸는 과정은 지난하지만 현금복지 공약과 달리 큰돈이 들 것 같지 않다. 전문가의 깊은 궁리, 일선 교사의 장기적 관심과 노력이 훨씬 중요한 성공 열쇠다. 대장동과 고발사주라는 진흙탕을 헤매는 후보들이지만 대통령을 꿈꾼다면 달라진 세상을 읽어내야 한다. 칠판 앞 강의와 객관식 시험은 인류 역사에서 딱 100년쯤 먹혔던 제도다. 교육시장과 학부모의 마음을 잘 읽는 수능 1타 강사들이 한발 먼저 내다보고 있다. “수능은 죽었다”며 학생 평가 방식의 사망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은 쉽게 예산 쓰고, 즉발적 효과가 나오는 정책에 매달리고 있다. 그렇다 보니 오랜 시간 공들여 궁리하고 과정을 챙긴 뒤 그 결과는 퇴임 한참 뒤인 한 세대 후에야 나타날 아이들 미래정책은 뒤로 밀리고 있다. 손쉬운 포퓰리즘 앞에 착한 포퓰리즘은 설자리를 못 찾고 있다. 김승련 채널A 취재윤리·멘토링 에디터 srkim@donga.com}
수년 전 안희정 당시 충남도지사에게 “도청 공무원이 진실을 제대로 보고하느냐”고 물었다. 답변은 애매했다. “충남도 공직자들이 ‘됩니다-안 됩니다 보고서’를 둘 다 캐비닛에 넣어두고는 그때그때 꺼내오더라”고 설명했다. 준비가 잘돼 있다는 말로도 들리지만, 높은 분 입맛에 맞는 답이라면 만들어 낸다는 말이기도 했다. 대선 후보들은 요즘 내놓는 핵심 국정과제를 내용이나 절차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마칠 수 있을까. 대선 후보들에게 옛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의 공소장을 꼭 구해 일독하기를 권한다. 대통령의 탈원전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청와대, 산자부, 원전 공기업(한국수력원자력)의 뜻이 어떻게 일그러지고 타협되는지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미래 대통령으로서 내가 임명한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이 내 입맛에만 맞춰 캐비닛에서 정책보고서를 꺼내올지 궁금하다면, 또 걱정된다면 말이다.(7000억 원을 들여 수명을 10년 늘렸던 월성 1호기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계속 가동할 경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은 뒤 조기 폐쇄됐다. 현재 검찰은 회계법인의 경제성 평가보고서 조작 혐의를 수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초 청와대 보고망(이지원)에 댓글을 달았다. “월성 1호기 영구 가동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 형식만 질문이었을 뿐 강력한 지시였다. 대통령도 산자부가 100년 에너지정책을 이렇게 빨리 180도 바꿀 줄 몰랐을 것 같다. 공소장에 따르면 딱 이틀 걸렸다. 산자부의 정책전문가와 한수원의 기술전문가는 임기 초만 해도 의지가 굳었다. “월성 1호기를 가동중단하면 손실 1조8000억 원이 발생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신중한 탈원전 건의는 4차례 이어졌다. 청와대가 탈핵-탈원전을 밀어붙이자 독일 사례를 따라 국회의 입법이란 형식을 갖추자는 수정 제안도 실무선에선 내놓았다. 이랬던 공직사회도 대통령 댓글을 발견한 뒤론 신념을 접었다. 시인 김수영의 표현처럼 공직자라는 이름의 풀은 비를 몰고 온 동풍 앞에 누웠고, 울었고, 다시 누웠다. 산자부 출신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은 댓글 당일(월요일)에 “대통령 하문(下問) 내용을 빨리 산자부에 전달하고 장차관 생각을 반영한 보고를 해 달라”며 움직였다. 본인은 부인했지만 산자부 장관이 “너 죽을래”라며 담당 과장을 압박했다는 것이 화요일이다. 그리고 수요일, ‘조기 폐쇄’ 보고서가 장하성 정책실장의 손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런 구구한 과정이 공소장에 담겨 있고, 앞으로 대전지법 재판에서 다투게 될 것이다. 검찰은 관련자 발언, 메모를 인용해 공소장에 상세히 기록했다. 국정책임자에겐 절대 보고되지 않는 공직사회의 부끄러운 속살이다. 대선 후보들은 신문 제목 훑듯 넘어가선 안 된다. 또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시되는 지금, 절차를 못 갖춘 정책 밀어붙이기로 얼마나 아까운 공직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는지 리더라면 챙겨야 하지 않을까. 사족. 일독을 권하긴 했지만, 101쪽에 이르는 공소장은 대선 후보가 손쉽게 입수하지 못할 수 있다. 법무부는 국회가 요구하더라도 비공개 원칙을 바꿀 생각이 없다. 현재 원전 관련 단체가 ‘문제의 원전 공소장’을 갖고 있으나 입수 경위가 명확하게 밝혀진 적은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시민단체들은 ‘공소장 낭독회’라는 듣도 보도 못한 행사를 열어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진 뼈아픈 수사기록을 바깥에 알리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단면이다.김승련 채널A 취재윤리·멘토링 에디터 srkim@donga.com}
변호사 J의 말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변호사 M이 검찰청의 현실을 설명할 땐 무릎이 꺾였다. 대한민국 검사가 수사 자료를 안 읽고 결론짓는 경우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2000명 검사 가운데 상당수는 기록과 사건 관계인에 묻혀 산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고등검찰청에 올라온 ‘항고(抗告) 사건’ 때 두드러진다고 했다. 항고란 이런 것이다. △2000만 원을 빌려간 뒤 안 갚거나 △회삿돈 3000만 원을 빼돌렸다는 다툼을 떠올려 보자. 수사를 해 보면 혐의 없음, 증거 부족, 범죄 안 됨 등의 결론은 다반사다. 동의 못 한다면 고소인이 고등검찰청에 다시 판단을 요청할 기회가 있다. 그게 항고 제도다. 2019년 한 해 동안 “무혐의라니 억울하다”며 제출한 항고장이 3만 건이 넘는다. 이 가운데 “따져 보니 재수사가 맞겠다”고 내려보내는 것이 10% 정도다. 고검 검사가 수사 기록을 보는 둥 마는 둥 한다는 말은 나머지 90%에서 나온다. 고등검찰청은 부장검사급 이상만 배치되는 곳이다. 베테랑 검사의 집합소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형사부 검사였던 J의 문제 제기는 ‘다시 살펴봤지만, 수사할 필요 없다는 당초 결론이 옳다’는 불기소 결정문에서 극적으로 확인된다. 고검 검사가 중앙컴퓨터에서 양식을 내려받는데, 단 한 문장만 인쇄돼 있다.이 항고사건의 피의사실 및 불기소 이유의 요지는 불기소처분 검사의 불기소 결정서 기재와 같아 이를 원용하고, 항고청 담당검사가 새로이 기록을 살펴보아도 원 불기소처분이 부당하다고 인정할 자료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바로 이 문장에 한 글자도 추가하지 않은 채 도장 찍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인쇄된 표현처럼, 검사가 민원인이 애써 준비한 서류를 ‘새로이’ 확인해 봤는지 알 방법도 없다. 사기당했다면서 고소하고, 기각되자 다시 항고한 민원인들은 대체로 자기 돈 들여 변호사도 고용한다. 이들이 맹탕 문서를 받아 들고 승복할 것으로 검찰은 믿는 걸까. 억하심정에 무리한 형사 고소도 많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검찰에 한을 품는 이른바 사법 피해자가 매년 1만 명 넘게 생겨난다. 검사는 왜 기각 이유를 안 쓸까. J와 M의 생각처럼 수사 기록을 본 게 없으니 설명거리가 없는 걸까. 사실이라면, 검찰 지휘부는 바로잡아야 한다. 두세 문장이라도 구체적인 사유 작성을 의무화해야 한다. ‘한 문장 기각’은 지방검찰청 수사에서도 원칙이란 점에 한 번 더 놀랐다. ‘고소 사건 기각 땐 사유를 안 써도 된다’고 일찍이 YS 시절에 검찰총장이 결정했다고 했다. “검사 업무를 줄여주자”는 이유였다고 검사 경력 30년인 M은 기억했다. 국가의 일은 나라 전체를 살피는 것과 함께 개개인의 행복과 만족을 살피는 쪽으로 달라지고 있다. 검찰도 예외는 아니다. 기로에 선 검찰이 못 느끼고 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검찰도 ‘한 문장 결정’의 피해자다. 판사는 “도주와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한 문장으로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이번엔 수사검사가 분개하지만, 그때뿐이다. 검찰은 스스로 달라질까, 아니면 외부의 힘이 검찰을 바꿀까.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와 형사부 그리고 법무부 검찰국이 다뤄야 하는 사안이다. 국회 법사위도 자기 몫을 해야 한다. 김승련 채널A 취재윤리·멘토링 에디터 srkim@donga.com}
얼마나 어리석었기에 어리석을 우(愚)로 불렸을까. 그럼에도 내년 대선 후보로 우공(愚公)을 추천한다. 건넛마을로 가는 길이 산에 가로막히자 한 삽씩 떠내어 산을 옮기려 했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주인공 말이다. 2000년 전 우공에게서 좋은 리더의 자질을 본 건 (담대한 토목공사 구상이 아니라) 나이 때문이다. 과장된 숫자겠지만, 그는 90세 노인이었다. 생전에 결실을 못 볼 게 뻔한데, 그는 30년 역사(役事)를 도모했다. 삽 한 자루로 산을 옮기자 했으니 마을에서 인심을 얼마나 잃었을까. 우공이 어렵다면 ‘우공 같은’ 대선 후보가 나와야 한다. 우공답다는 건 두 가지다. 자기 임기 5년만 생각하는 근시안을 벗어나느냐. 여기에 미래의 예산까지 정직하게 설명하는 용기가 있느냐다. 이 시대에 사라져버린 우공은 조롱받기까지 한다. 청와대와 여의도에서 “다음 선거만 생각하면 정치꾼(politician)이요,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정치가(statesman)”라고 했다간 외계인 취급받기 십상이다. 우공은 선거 때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 해고를 쉽게 해 일자리를 늘린 노동개혁(독일), 튼튼한 재정을 위해 연금과 세금을 더 걷은 재정개혁(프랑스, 캐나다)을 주도한 총리들이 그랬다. 꼭 필요한 정책을 폈건만 예외 없이 다음 선거에서 졌다. ‘우공’의 부재는 정치인 탓만 할 건 아니다. 언론이 좀 더 우공다움을 높게 평가했더라면, 유권자가 좀 더 깨어 있었더라면 달랐을 수 있다. 올 초 채널A에 출연한 국민의힘 의원이 여당 때 예산을 매년 4%밖에 증액시키지 않은 점을 후회하는 걸 지켜봤다. 문재인 정부는 달랐다. 평균 9% 정도 정부 씀씀이를 키웠다. 필요한 사업일 순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써야 할까 싶은 사업들이 적잖다. 가덕도 공항이 4·7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되살아났고, 총선 땐 토목공사에서 예비타당성조사가 줄줄이 면제됐다. 우공의 정신은 정책의 포장 기술을 거부한다. 더 좋아 보이면서도, 돈 덜 드는 것처럼 만들지 않는 자존심이다. 우공이 산을 옮기는 데 30년간 금 30냥이 든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살날이 5년쯤 남았으니 금 5냥이면 된다. 그 후론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일은 벌어진다. 의료보장 혜택을 크게 늘린 문재인 케어는 임기 5년간 30조 원이 소요된다고 설명됐다. 그러나 고령화가 더 빠르게 진행되는 이후 10년, 20년 뒤 얼마나 더 부담이 필요한지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누리는 사람과 부담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데서 시작된다. 훗날 빚을 갚아야 할 2030세대는 관심도 부족하다 보니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다. ‘어리석을 리 없는’ 정책 입안자들은 슬쩍 넘어가곤 했다. 이제 36세 청년 당 대표가 뽑혔고, 25세 대학생이 청와대 청년비서관에 임명됐으니 달라질 수 있을까. 2030세대가 대선 후보를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로 우공다움을 제시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또래 청년 유권자들은 질문을 던지고, 후보들은 답해야 한다. △나랏돈이라고 허투루 쓰는 건 아닌지 △효과는 부풀리고 비용은 줄인 게 없는지 △임기 이후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수혜자이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지. 이 과정에서 어떤 후보가 먼 미래를 위한 비전을 지녔는지 우공다움이 드러날 것이다. 2000년 전 90세 촌로의 선택이 우리 2030세대의 표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김승련 채널A 취재윤리·멘토링 에디터 srkim@donga.com}
삶의 궤적이 너무나 달랐던 문재인-도널드 트럼프 두 대통령의 정부가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의 민낯을 드러내게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지난 몇 년 동안에도 서울과 워싱턴에선 권력이 정치적 상대를 손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건 아니다’라는 내부 논의가 있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내부 고발의 호루라기가 울렸다. # 내부자 1. 재심 전문으로 잘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는 4·7 재·보궐선거 직후 1249쪽 분량의 정부 문건을 언론에 제보했다. 이명박 박근혜 검찰이 끼리끼리 봐줬다는 적폐를 뿌리 뽑겠다는 검찰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자료였다. 민간 단원이었던 그는 “나를 포함해 조사단원 대부분은 창피할 정도로 무책임했다”고까지 고백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무혐의 과정을 조사한 것이 핵심이었다. 사실과 추정을 뒤섞어 재수사로 결론지었다. “윤석열도 건설업자에게 접대받았다”는 한 신문의 오보도 그 문서대로였다. 박 변호사는 중도 사퇴했고 고발 인터뷰를 이어왔다. 단단한 결기를 드러냈기에 조사단에서 진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폭로한 문건은 정부 문건이다. 훈령 위반에 따른 불이익을 각오한 양심고백이라고 봐야 한다. # 내부자 2. 알렉산더 빈드먼은 재작년 10월 미국 하원 트럼프 탄핵 청문회장에 섰다. 육군 중령으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러시아·우크라이나 국장이었다. 그는 트럼프-우크라이나 대통령 간의 전화 정상외교를 상황실에서 직접 듣고 귀를 의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미국 대통령이 “(대선 경쟁자인) 조 바이든의 아들과 관련한 기업을 우크라이나 정부가 조사해 달라. 그러면 군사 원조를 주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빈드먼은 즉시 NSC 상관에게 보고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의 일탈이 실무자 지적으로 바로잡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청문회 영상 속 빈드먼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가볍게 떨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오늘 진실을 말할 겁니다. (대통령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할 것이지만, 제겐 별일 안 생길 겁니다.” 안심시킨 말과 달리 그는 배신자로 공격받았다. 몇 달 뒤엔 백악관도, 군도 떠나야 했다. 오죽했으면 믿고 일을 맡긴 동료 조사단원을 비난하고, 얼마나 황당했기에 미국 대통령을 고발했을까. 그것도 이름과 얼굴을 다 공개하면서. 두 사람의 앞길이 궁금하다. 바라건대, 솔깃한 제안이 있더라도 정치권은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반대쪽에선 ‘그럴 줄 알았다’며 고발의 의미를 희석시키려 들 것이고, 미래의 내부 고발자는 좌절할 것이다. 마침 박 변호사는 어제 “사적 목적이 있다면 벼락 맞을 일”이라고 선을 그었고, 빈드먼은 안보학 박사 공부를 시작했다. 권력자들은 무엇을 교훈으로 삼았을까. 입단속이 가능한 우리 편을 더 써야 한다는 철 지난 논리 뒤로 숨을까 두렵다. 정치적 이득이 생긴다면 뭐든 용납되고 비밀까지 잘 지켜지는 조직의 앞날은 물어보나 마나 아닌가. 지시받은 일을 해도 좋을지 판단이 안 서는 공직자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금융위기를 다룬 미국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권하고 싶다. 백악관 근무 시절 멘토가 들려준 이야기라며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이 한 말이다. “뭐든 필요하다면 기획하고 추진하고 보고서를 써라. 단, 그 일이 내일 아침 자 워싱턴포스트 1면 머리기사로 보도된다고 가정하라. 그래도 자신 있으면 시작해라.”김승련 채널A 취재윤리·멘토링 에디터 srkim@donga.com}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4일 삼성물산의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짝 공시했다.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선언’이었다. 국민연금과 삼성SDI에 이어 단숨에 삼성물산 3대 주주로 올라선 엘리엇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 합병 절차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고 있다. 소액 주주들을 규합하기 위한 여론몰이에 나섰고 삼성물산을 상대로는 법적 소송도 제기했다. 엘리엇은 ‘피도 눈물도 없는’ 벌처펀드(Vulture Fund·수익을 위해 상식을 넘어선 공격적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투기자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엘리엇의 1인 지배자인 폴 엘리엇 싱어 회장(71)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그리 많지 않다. 오랜 기간 은둔의 투자자로 지냈기 때문이다. 싱어 회장의 개인자산은 얼마나 되고, 어떤 투자철학을 갖고 있기에 세상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는 무차별 자본 공세를 펴는 것일까. 현재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은 엘리엇을 9년간 취재해온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그레그 팰러스트(63)다. 25일 뉴욕 맨해튼의 개인사무실에서 국내 언론중 처음으로 그를 만나 싱어 회장과 엘리엇에 대해 들어봤다.》 ―엘리엇펀드가 헤지펀드 가운데서도 벌처펀드로 불리는 이유는 뭔가. “그는 국가건 기업이건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높은 이익을 요구한다. 그의 투자에는 늘 정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경제적 계산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자연재해(콩고), 정치적 암살(페루), 경제적 혼란(아르헨티나) 등을 이용해 돈을 번다. 추악한 정치의 힘을 빌려 돈을 버는 것이다. 상속 과정에 있는 삼성그룹의 합병에 개입한 것은 어찌 보면 특이한 사례다.” ―싱어 회장이 제3세계 국가들에서 어떻게 돈을 벌었기에 그런가. “엘리엇펀드는 콩고 페루 아르헨티나 등 위기에 빠진 나라가 발행한 정부 채권을 서방 은행에서 싸게 산다. 액면가가 100원이면 7∼15원에 사는 식이다. 그런 뒤 해당 정부를 상대로 ‘100원을 다 돌려 달라’고 소송을 낸다. 골드만삭스 등 대형 투자은행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소송 결과는 어떤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 일본계 이민 2세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 재임 시 페루 사례를 보면 엘리엇펀드의 행태가 보인다. 당시 페루 정부의 변호를 담당했던 미국인 변호사 마크 심롯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엘리엇펀드는 부도 위기에 몰린 페루 국채를 2000만 달러어치 샀다. 엘리엇펀드가 ‘원금과 이자를 100% 달라’는 소송을 낸 상황에서 후지모리는 암살 혐의 등으로 처벌을 받을 처지에 몰렸다. 그는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전용기까지 준비시켰다. 그러자 싱어 회장은 뉴욕법원에 소송을 내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얻어 냈다. 후지모리는 페루 재무장관에게 전화해 “5800만 달러를 다 줘버려라”고 지시했고 이후 페루를 떠났다.” ―제3세계 국가들이 그의 주요 공격 대상인가. “미국의 중견기업이나 대기업도 공격했다. 그는 놀랍게도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자동차부품회사인 델파이를 공격해 1조 원을 챙겼다.” ―미국 산업의 심장인 자동차 산업을 공격했다는 건가. “2008년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가 도산 위기에 빠졌다. GM은 자회사인 델파이가 파산하자 소수의 투자자에게 팔았다. 유명한 헤지펀드 매니저인 존 폴슨과 싱어 회장이 그들이다. 매각 이유는 종업원 3만5000명에게 퇴직 후 주기로 한 연금을 안 주려는 목적이었다.” ―싱어 회장의 수법이 왜 정상적 투자가 아니라 공격으로 불리나. “정상적 주식 매입이라면 그의 주식 매집 사실이 공개된다. 그는 주식으로 전환 가능한 전환사채를 몰래 사들였다. 그러다가 “우리가 경영하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그러곤 델파이의 미국 공장 29곳의 문을 닫거나 중국으로 보내려 했다. 당시 GM 사장은 ‘델파이의 부품 공급 없이는 하루 정도만 버틸 수 있다’고 토로했다. 싱어 회장은 ‘적정 가격을 줄 테니 되팔라’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곤 120억 달러를 요구했다. GM과 크라이슬러의 핵심 공급자를 싱어 회장의 손에 넘긴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자동차 산업 회생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어떻게 이런 요구가 가능했나. “싱어 회장은 권력의 생리를 잘 알고 이용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동차 산업을 살리는 기적을 만들어내길 원했다. 당시 오바마 정부의 자동차 구제 태스크포스(TF)를 이끌었던 스티브 래트너는 “정부를 상대로 인질(델파이) 몸값을 요구하는 거냐”라고 싱어 회장을 비판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자동차 산업 회생에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적 명운이 걸렸던 거다. 싱어 회장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회사를 청산하겠다’고 배짱을 부렸다.” ―결국 어떻게 결론이 났나. “싱어 회장은 델파이 공장 29곳 가운데 6개를 빼고 모두 문을 닫았다. 5개는 GM에 되팔았다. 대부분 중국으로 생산거점을 옮겼다. 일자리 3만5000개가 중국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부가 행정력을 발동할 수는 없었나. “2009년 취임 직후 오바마 대통령은 막강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 내 파산법원으로 끌고 가 상식에 기반을 둔 판단을 받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미국 언론은 지적하지 않았나. “공교롭게도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보수적 논조의 월스트리트저널만이 비판적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델파이가 모욕을 당했다. 엘리엇펀드가 GM을 제3세계 국가를 다루듯 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다른 매체는 조용했다. 최근엔 머독이 소유한 뉴욕포스트가 싱어 회장 전문 취재기자를 두고 보도하고 있다.” ―싱어 회장은 애국심을 강조하는 공화당의 주요 후원자다. 비판이 두렵지 않았을까. “그는 가혹한 경영자다. 그래서 벌처펀드 아니냐. 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이 망하건 말건 개의치 않을 사람이다. 죽음을 앞둔 미국 석면노동자의 궁핍한 처지를 압박해 보상금을 줄이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던 인물이다.” ―그를 탐욕적 인물로 묘사했지만 그는 ‘재산의 50% 이상을 기부한다’고 서약까지 하지 않았나. “그의 돈이 어디로 가겠는가. 공화당이나 억만장자의 이익을 유지하는 데 쓰이지 않을까.” ―그가 그토록 특별한 인물인가. “그는 벌처펀드 분야에서 단연 1인자다. 여러 명 가운데 한 명이 아니다. 그는 공화당 지원 정치자금 모금단체 ‘미래회복(restore the future)’을 주도하고 있다. 그가 움직이면 다른 억만장자들이 따라오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도 최근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미국에서 동성애자 권리를 위한 최대 후원자가 될 정도로 진보 이념을 위해서도 돈을 쓰고 있다.” ―왜 갑자기 달라졌나. “표면적으론 그의 아들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내 좌파와 민주당에 우호적인 분위기도 만들어야 했을 거다. 미국 케이블뉴스 채널 중 가장 진보적 성향을 가진 곳이 MSNBC다. 하지만 MSNBC조차 싱어 회장을 절대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막강한 싱어 회장이 삼성 합병에 반대하고 나섰다.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것일까. “나는 그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그의 과거 행적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제논리가 아니라 정치를 활용해 돈을 버는 천재다. 델파이뿐만 아니라 페루와 콩고 사례에서도 그랬다. 같은 이유에서 삼성물산 지분 확보도 경제적 논리로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삼성은 제3세계 기업도 아니고, 미국 자동차 산업처럼 파산 위기도 아니다. “한국적 기업문화에서는 노조도 허용하고, 고학력에 훈련이 잘된 노동자에게 월급도 많이 준다. 어찌 보면 한국식 사회계약인 셈이다. 왜 LG가 세탁기를 인도네시아나 멕시코가 아니라 한국에서 만드나. 우리 사무실에도 삼성TV가 있지만 마찬가지다. 한국식 기업문화에선 기꺼이 추가 비용을 부담하면서라도 한국 내 고용을 유지하려고 한다. 싱어 회장과 엘리엇펀드는 창조적 파괴를 믿는다. 주주 이익과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이유를 앞세워 한국식 경영 관행을 깨뜨린다면 가치가 생긴다고 믿는 사람이다. 자신들이 개입해서 삼성 측이 어떻게든 ‘특별한 보상’을 내놓도록 만들고 싶을 것으로 나는 추측하고 있다.” ―당신이 취재해 온 싱어 회장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나. “그는 자신을 ‘시장경제의 슈퍼맨’으로 여긴다. 그는 ‘내가 제일 똑똑해’라고 믿는다. 나도 동의한다. 그는 특별한 탁월함을 갖고 있는 동시에 도덕 가치와 무관한(supremely brilliant and amoral) 사람이다. 부도덕(immoral)한 게 아니라 아예 도덕 개념과 동떨어졌다는 뜻이다. 그가 불법행위를 저질러 조사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싱어 회장은 자신을 시장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철학자로 생각한다. 극단적 시장주의를 주창하는 맨해튼 인스티튜트 대표로 활동하면서 철학왕(philosopher king)을 꿈꾸고 있을 거다. 그는 이제 무대 막후에서 벗어나 무대 위로 오르려 하고 있다. 막후에서 공포의 대상이 됐던 점을 즐겼지만 언제부턴가 사상가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세계경제포럼(WEF) 패널 토론에 가끔 등장한다. 엘리엇은 아마 한국 기업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업지배 구조를 만들 기회’라고 말할 것으로 짐작된다. 콩고나 페루를 공격할 때도 그곳에 부패한 정치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타인으로부터 존경 받기를 원한다는 건가. “그렇다고 본다. 똑같은 헤지펀드 경영자지만 조지 소로스는 존경을 받고 있다. 독재국가에 민주주의를 불어넣기 위한 투자가 병행되기 때문이다. 싱어 회장은 아마도 ‘나도 비슷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겐 존경이 따라올 만한 투자 프로젝트가 없었다. 나는 순전히 욕심에서 비롯된 투자라고 믿는다. 오래 그를 관찰하고 공부하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직접 그를 만나 취재해봤나. “그의 맨해튼 저택에 찾아가 봤지만 절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홍보담당자는 나에게 ‘당신은 절대 그를 못 만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영국 BBC가 나와 함께 그를 비판적으로 다룬 방송물을 만들면서 반론 기회를 줄 테니 취재에 응하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이런 보도가 나가면 대체로 조작됐다거나 거짓말이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다. 어차피 어떤 투자건 투자는 그에겐 소액이다. 그 돈을 잃는 게 두렵지 않을 거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그의 삼성물산 주식 매집을 통한 합병 반대도 장기적으로 갈 공산이 크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다. 그는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소송을 걸 것이다. 부패한 제3세계 정부만을 상대로 소송을 건 게 아니다.” ―다른 소송 상대가 누구였나. “골드만삭스, 씨티은행, UBS증권과도 법정에서 싸웠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나에게는 내 이익을 지킬 최우선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오바마 대통령과 UBS 미국본부 대표가 골프를 함께 쳤다. 나는 그때 엘리엇펀드의 소송 걸기도 논의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백악관에서 만나면 대통령 대화는 모두 녹음된다. 하지만 골프카트에서라면 비밀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비난을 받으면서도 골프를 자주 치는 게 이런 이유 아닐까.” ―싱어 회장의 사생활은 어떤가. “그의 개인 재산은 2조 원이 넘는다. 개인 제트기를 갖고 있으며 맨해튼에는 최고급 빌라, 콜로라도 주 애스펀에는 70개의 방이 딸린 빌라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공식 석상 노출을 꺼린다. 구글 검색을 해보면 그의 사진은 3, 4개밖에 안 나온다. 대체로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토론장 모습뿐이다. 사교 파티에는 가지 않는다. 그만큼 그가 이미지 관리를 한다는 뜻이다.” 한편 국내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에 대한 엘리엇의 공세는 지배구조가 취약한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외국계 헤지펀드의 총공세 신호탄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폴 엘리엇 싱어 회장은 누구? ▼재산 2조원 유대계 미국인-공화당 최대 개인 기부자유대계 미국인 억만장자로 헤지펀드 엘리엇 어소시에이츠 경영자다. 정치운동가이자 기부활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로체스터대를 거쳐 하버드대 법대를 졸업했다. 투자은행에서 부동산 업무를 하다가 1977년 130만 달러로 헤지펀드를 설립했다. 38년 동안 2년만 손실을 봤고, 36년 동안 이익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연평균 수익률은 14%. 개인 재산은 2조 원으로 추정된다. 은둔해 오다가 최근 세계경제포럼(WEF) 등에 연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 공화당의 최대 개인 기부자이다. 피아노 연주가 취미다.▼ 그레그 팰러스트는 누구? ▼‘벌처의 피크닉’ 집필한 美탐사보도 전문기자프리랜서 작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겸 탐사보도 기자. 헤지펀드의 전횡, 에너지 재벌의 비밀주의와 환경 파괴를 주로 취재했다. 시카고대에서 경제학(학부)과 경영학(대학원)을 공부한 뒤 미국 정부에서 일하다가 만연한 대기업, 금융기관, 정치인의 불법행위를 목격하고 탐사 저널리즘에 나섰다. 저작 ‘벌처의 피크닉’은 한국어를 포함해 20여 개 언어로 번역됐다. 올 6월 글로벌 편집자 네트워크가 수여하는 탐사보도 분야 데이터 저널리즘상을 받았다. 늘 중절모자를 쓰고 다닌다.뉴욕=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부형권 특파원bookum90@donga.com}
“그는 경제적 계산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자연재해, 정치적 암살, 경제적 혼란을 이용해 돈을 번다. 추악한 정치의 힘을 빌려 돈을 버는 것이다.” 미국 탐사보도 전문기자 그레그 팰러스트는 25일 뉴욕 맨해튼에서 본보와 단독으로 가진 인터뷰에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폴 엘리엇 싱어 회장(사진)의 투자방식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싱어 회장의 행적을 9년간 취재하면서 얻은 결론이라고 했다. 특정 국가나 자국 산업이 망하건 말건 개의치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팰러스트 기자는 싱어 회장이 미국 제조업의 심장인 자동차산업이 궁지에 빠진 점을 이용해 1조 원을 챙긴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싱어 회장이 2008년 도산 위기에 빠진 제너럴모터스(GM)의 자회사인 델파이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거액을 챙겼으며, 그 여파로 일자리 3만5000개가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팰러스트 기자는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하고 나선 것에 대해 “경제적 논리로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닐 것”이라면서 “(고용 등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한국식 경영 관행을 깨뜨린다면 새로운 주주 가치가 생긴다고 믿고 있다”며 “자신들이 개입해서 삼성 측에서 어떻게든 ‘특별한 보상’을 내놓도록 만들고 싶은 것으로 추측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삼성물산 주식 매집을 통한 합병 반대도 장기적으로 갈 공산이 크다”고 경고했다. 엘리엇은 최근 다른 헤지펀드들의 표를 적극적으로 규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해외 헤지펀드인 메이슨 캐피털 매니지먼트도 최근 삼성물산 지분 2.2%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뉴욕=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부형권 특파원}
미국 버지니아 주 특목고인 토머스 제퍼슨 과학고 12학년(한국의 3학년) 재학생으로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로부터 동시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고 본보(A29면)를 포함해 4일자 언론에 일제히 보도된 ‘천재 수학소녀’ 김정윤 양(18)의 주장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 의혹이 커지고 있다. 중앙일보 4일자 신문에서 김 양이 “두 대학(하버드대, 스탠퍼드대)의 교수님들과 상의해 스탠퍼드대에서 첫 1, 2년을 공부하고 이후 하버드대에서 전공과 연구를 이어가 대학 생활을 하기로 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김 양은 아버지를 통해 기자들에게 두 대학의 합격증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버드대 애나 코웬호번 공보팀장은 9일(현지 시간) 이것이 사실인지를 묻는 본보의 e메일 질문에 “하버드대 합격증은 위조된 것(forgery)으로 하버드대는 김 양에게 입학 허가를 내준 적이 없다”며 “스탠퍼드대에서 2년 공부하고 하버드대에서 공부를 마치는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탠퍼드대 리사 라핀 대외홍보담당 부총장도 김 양의 입학 허가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 e메일에 “합격통지서를 발행한 적이 없다. (우리 역시)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를 동시에 다니는 프로그램은 없다”고 답했다. 김 양 측이 한국 언론에 하버드대 입학을 도와준 사람이라고 밝힌 조지프 해리스 하버드대 수학과 교수도 9일 본보 기자와 만나 “세라 김(김 양의 미국명)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 이름이 왜 등장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대학 입학은 학과에서 맡는 게 아니라 대학본부에서 맡는 것”이라며 황당해했다. 또 김 양 측이 스탠퍼드대에 있는 자신의 멘토 교수라고 밝힌 제이컵 폭스 수학과 교수도 한국 언론에 “그녀의 멘토였던 적은 없다. 앞으로도 그녀와 함께 연구하게 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일은 김 양의 양교 동시 입학 사실이 미주 중앙일보 및 국내 언론에 보도되자 워싱턴 일부 한국 학부모들이 의문을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의혹이 확산되자 전직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아버지 김정욱 씨(46)는 9일 워싱턴 한국 특파원들에게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e메일을 보냈고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가 보내온 합격통지서라며 사진 파일까지 첨부했다. 본보는 이를 하버드대에 보내 위조 사실을 최종 확인한 것이다. 김 양 측은 의혹을 해명하는 과정에서도 가짜 e메일 계정을 사용해 의혹을 키웠다. 한국 언론이 ‘세라 김이라는 합격자가 없다’는 하버드대 측 말을 재확인하려 하자 “하버드대 공보팀장이 합격자 명단에 ‘세라 김’이라는 이름은 없지만 한국명 김정윤은 있다며 정정해 왔다”며 공보팀장 e메일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 e메일 주소는 실제 공보팀장 e메일 주소 중간에 ‘g’자를 넣은 가짜였다. 하버드대 공보팀장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정 메일은 가짜”라고 했다. 한편 김 양의 동시 입학 제안을 최초 보도한 미주중앙일보 객원기자 전영완 씨는 10일 미디어오늘에 보낸 입장을 통해 “가족이 제시한 합격증서와 해당 대학교수들과 주고받았다는 구체적인 e메일 등을 의심 없이 수용해 기사 작성을 했지만 합격 대학과 교수 등에게 사실 확인을 끝까지 하지 않은 실수로 사실과 다른 보도를 하게 됐다”며 오보를 인정했다.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 김승련·노지현 기자 본보는 학생과 가족들의 주장을 믿고 검증하지 않은 채 4일 첫 기사를 보도해 혼란을 초래한 데 대해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 기자는 동아일보에서 채널A로 옮겨 근무한 지난 2년 동안 550회 정도 생방송을 진행했다. 1회 평균 70분 분량이었다. 기자의 음성은 상대적으로 톤이 낮고, 부드러운 편이다. 방송 초기엔 주위에선 ‘너무 차분해 지루하다’는 말을 들었다. 또 방송뉴스 리포트를 제작하면서 음성을입힐 때 지적을 자주 받았다. “폭탄이 터지는 군사훈련이 영상으로 나가지만 정작 나긋한 다큐멘터리 음성 같다” 는 평가도 들었다. 더 파워가 필요하고, 높은 톤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나름대로 찾아낸 해법은 방송에서 구호 외치듯 큰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분석적인 설명을 할 때도 목청을 무리하게 짜냈다. 그러는 2년 동안 목은 서서히 지쳐갔고, 쉰 소리가 느껴졌다. 어쩌면 자초한 일이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이때 누군가가 목소리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고 했다.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난달 9일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음성클리닉의 문을 두드렸다.○ “목소리 정상인데요?” 음성클리닉에서 가장 먼저 전자장비로 목소리를 평가받았다. 성량은 충분한지, 성대가 적절하게 접촉하면서 소리가 나는지 측정했다. 당초 예상했던 것은 “목 관리를 왜 이렇게 했느냐. 목소리 갈라졌다. 성대가 많이 상했다”는 답이었다. 하지만 임성은 언어치료사는 “(다른 환자와 비교할 때) 전 영역에서 정상 수치”라고 답했다. 의외였다. 임 치료사는 목소리를 주로 사용하는 직업의 기자에게 다양한 주의사항을 제시했다. 우선 속삭이는 언어습관도 좋지 않다고 했다. 성대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헛기침을 하거나 ‘흐흠∼’ 하면서 목청을 가다듬는 것 역시 성대가 과도하게 충돌해 큰 부담을 준다고 했다. 또 잠자기 전에 음식을 먹는 것도 안 좋다. 위산이 잔뜩 분비되는데 침대에 눕게 되면 위산이 목으로 올라와 성대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야식과 밤참은 목소리의 적이라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세 가지 모두 기자의 습관에 일치했다. 어쩌면 방송에서의 무리한 ‘샤우팅’만이 목소리 손상의 원인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이비인후과 최홍식 교수가 기자의 성대를 영상에 비췄을 때도 같은 결과를 목격했다. 위산 탓인지 성대 위쪽이 만성적으로 붓고 충혈돼 있었다.○ 복식호흡, 생애 첫 연습 약은 처방받지 않았다. 그 대신 클리닉에선 가슴이 아니라 배로 숨쉬는 복식호흡 훈련을 권했다. 발성량도 늘리고, 힘 있고 자신감 있는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성악가나 가수의 영역으로만 여겼던 복식호흡을 클리닉에서 남도현 교수의 도움으로 연습해 봤다. 잠깐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귀가한 뒤 큰 기대 없이 연습해 봤다. 손을 가슴에 얹고 코로 숨을 들이쉬면서 가슴이 아니라 배를 불룩 부풀렸다. 잠시 쉬었다가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1, 2분이 흘렀다. 이후 열흘 넘게 생각날 때마다 해 봤다. 사무실에서도 해 봤고, 잠자리에 들 때 누워서도 해 봤다. 번거로웠고, 반짝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한두 달 습관을 붙이면 새로운 호흡법이 내 몸과 체질을 바꿔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턱을 당기고 말하는 것 중요 남 교수와 마주 앉아 일대일 트레이닝을 받았다. 일반 환자가 클리닉을 찾으면 이런 치료는 통상 40분 지속된다. 건강보험 적용 없이 5만∼6만 원은 지불해야 한다. 기자는 20분 속성과정으로 경험했다. 남 교수는 “훈련하면 된다. 발성도 반복 연습으로 고칠 수 있고, 힘 있는 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허리와 턱의 바른 자세를 갖춰 내가 타고난 성대의 마찰과 울림을 최적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가장 큰 지적은 턱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남 교수는 “드라마 속 내시(內侍)의 전형적 자세는 우연이 아니다. 턱을 내밀면 음성이 가늘어지고, 턱을 당기면 장군 소리를 낼 수 있다. 턱을 당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주치의 한마디]“빨리 먹는 것도 인후두에 무리… 식습관 바꿔야”▼ 김승련 기자는 목소리가 쉽게 잠기고 목 안에 무엇이 걸려 있는 느낌이 있다고 했다. 후두내시경검사, 음향검사, 공기역학검사 등을 진행한 결과 ‘역류성 인후두염’이 의심됐다. 인후두염이 심하면 위산이 역류해 침에 스며들게 된다. 그 부위가 허옇게 부어 오르고 성대 점막도 부분적으로 충혈된다. 이 때문에 쉰 목소리가 나고, 침을 삼킬 때 목 안에 무엇인가 걸린 듯한 증상이 생겼던 것이다. 앵커를 하면서 목을 무리하게 사용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습관도 증상을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음식물을 넘길 때는 식도를 열고 닫는 ‘상하부 식도괄약근’을 사용한다.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천천히 먹어야 하는데, 빨리 먹는 식습관이 있을 경우 인후두에 무리를 줄 수 있다. 김 기자는 목소리 클리닉을 받는 동시에 음식양을 줄여나가야 한다. 그래야 위산 역류와 호흡기 점막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체중을 1∼2kg 줄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물은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게 좋고 고카페인 음료나 커피는 삼가는 것이 좋다.최홍식 강남세브란스 음성클리닉 소장김승련 채널A 기자 srkim@donga.com}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앞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으며 이 발언이 담긴 비공개 대화록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회담 배석자와 관계 기관은 이를 부인했다.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2007년 10월 3일 오후 3시 백화원초대소에서 남북 정상은 단독회담을 가졌다”며 “당시 회담 내용은 녹음됐고 북한 통일전선부는 ‘녹취된 대화록이 비밀 합의사항’이라며 우리 측 비선라인과 공유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통일비서관을 지냈다.정 의원은 “대화록에서 노 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라며 구두 약속을 해줬다”고 주장했다.노 전 대통령은 2007년 11월 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연설에서 NLL을 둘러싼 남북 갈등에 대해 “실질적으로는 거의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문제를 놓고 괜히 어릴 적 땅따먹기 할 때 땅에 줄 그어놓고 ‘니 땅 내 땅’ 그러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이 북한 최고지도자에게 NLL을 부정했다면 이는 ‘NLL은 불법’이라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또 정 의원은 “대화록에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이 ‘내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북한이 핵보유를 하려는 것은 정당한 조치라는 논리로 북한 대변인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북한이 나 좀 도와 달라’는 언급을 했다”며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통일 등에 대한 김정일의 발언에 노 전 대통령이 동의를 표하는 내용, 대규모 경제지원을 약속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고 말했다.이 같은 주장은 이명박 정부 초기에도 제기된 적이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2008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인수위 시절 국가정보원을 방문해 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은 ‘북한이 원하는 경제지원을 다 해주겠다. (한국의) 정치제도도 북한이 원하는 대로 해 바꿔주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핵개발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다. 핵무기는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것이다’라고 하자 노 전 대통령은 ‘그 말을 존중한다’고 했다”며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노 전 대통령은 참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만 들었다”고 말했다.그러나 당시 정상회담에 참여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2007년 10월 3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별도로 만난 적도, 노 전 대통령은 이런 내용을 언급한 적도 없다. 황당한 얘기다”라고 일축했다. 노무현재단도 “하나부터 열까지 허위 사실이며 비밀 합의도 없었고 발언도 날조된 내용”이라고 밝혔다.류우익 통일부 장관은 이날 국감에서 대화록의 존재 여부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도 “들어본 적 없다. 대화록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김승련 채널A 기자 srkim@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