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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학년도 한밭대 수시전형은 학생부종합전형과 학생부교과전형, 실기위주전형으로 단순화했다. 전체 모집인원 2060명 중 1414명을 수시모집으로 뽑는다. 학생부종합전형 628명, 학생부교과전형 786명이다. 학생부종합전형 지역인재전형 선발은 91명이다. 2017학년도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선발했던 학·석사통합과정은 올해 학생부교과전형(120명)으로 바뀌었다. 수능 최저학력 기준은 학생부교과전형과 실기위주 전형에만 적용된다. 학생부종합전형 제출서류는 학생부와 자기소개서로 간소화했다. 1단계(3배수 내외)에서 학생부와 자기소개서, 2단계에서 1단계 평가결과(50%)와 면접(50%)으로 최종 합격자를 뽑는다. 자기소개서는 공통 양식의 3개 문항을 한밭대 교시인 성실·인화·창조와 연계해 평가한다. 자율항목에선 지원 동기와 전공 분야의 학업계획을 평가한다. 학생부교과전형은 학생부 100%(교과 80%+비교과 20%)로 성적을 산출한다. 교과 영역은 자연계열의 경우 국어·수학·영어 교과 중 각각 상위 5과목과 과학 교과 상위 3과목을 합해 총 18개 과목의 평균 등급점수, 인문·경상계열은 국어·수학·영어 교과 중 각각 상위 5과목과 사회교과 상위 3과목을 합해 18개 과목의 평균 등급점수를 반영한다. 비교과영역은 출결 상황을 점수화한다. 디자인계열(일반 주간 기준) 전형은 학생부 60%(교과 48%+비교과 12%)와 실기 40%로 선발한다. 실기는 발상과 표현, 기초디자인, 사고의 전환 중 하나를 선택해 실시한다. 실기위주 전형에 적용되는 수능 최저학력기준은 영어 5등급 이내, 국어·수학·탐구(과학·사회) 중 2개 영역의 합이 10등급 이내다.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돌고 도는 데 9년이 걸렸다. 25일 새 간판을 내걸 행정안전부 이야기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만들어진 그 이름 그대로다. ‘도로 행안부’다. 같은 날 국민안전처는 간판을 내린다. 출범 2년 8개월 만이다. 정부 부처가 무슨 벤처기업도 아닌데 3년도 안 돼 문을 닫는다. 기업으로 치면 인수합병(M&A)의 결과다. 세월호 침몰 여파는 해양경찰청 해체와 안전처 출범으로 이어졌다. 당시 여야는 한목소리로 재난 컨트롤타워 강화를 요구했다. 문재인 정부가 안전처를 폐지한 건 그래서 아이러니다. 개별 부처가 아니라 청와대가 책임지겠다는 정부의 뜻은 옳다. 하지만 재난은 발생 후보다 발생 전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행안부가 최선의 답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물론 안전처 출범 후 내내 말도, 탈도 많았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는 무기력했고, 경주 지진 때는 뒷북을 쳤으며, 강원 산불 때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다. ‘폐업’을 자초했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박인용 안전처 장관은 졸지에 개업에, 폐업 신고까지 하는 ‘사장’이 됐다. 지난해 말 교체 직전 눌러앉은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역사에 유일무이한 국민안전처 장관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임기 중 하루도 집에 가지 않았다. 서울과 세종의 청사 근처 숙소에 줄곧 머물렀다. 통틀어 열흘이 채 안되는 휴가 기간에도 숙소를 떠나지 않았다. 회사가 부도난 게 모두 사장 잘못은 아닐 텐데 “안전처는 그동안 뭐 했느냐”는 비판만 받으니 그 역시 억울함이 있을 것이다. 퇴임을 앞둔 박 장관에게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감정을 물었다. 그는 말을 아꼈다. 전 정부 때 임명된 장관인 데다 문 닫고 물러나는 처지 탓일 게다. 떼었다 다시 붙인 안전은 이제 행안부 재난안전관리본부가 맡는다. 안전처라는 독립기관의 위상도 위태로워 보였는데 흡수된 안전조직이 전체 정부 안에서 과연 제 목소리를 낼지 걱정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안전업무에 얼마나 뛰어난 인력이 올지도 미지수다. 그래서 재난안전관리본부에 충분한 권한이 보장돼야 한다. 들리는 말로는 벌써 재난안전관리본부의 인사 및 예산권 독립을 놓고 적잖은 진통을 치렀다고 한다. 일단 실장급은 장관이, 국장급 이하는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이 권한을 갖는 걸로 정리됐지만 두고 볼 일이다. 재난안전관리본부는 기존 세종청사를 쓴다. 다만 장관이 서울청사에 있는 걸 감안해 서울의 종합상황실 근무인력이 대거 늘어난다. 행안부가 세종으로 내려갈 때까지 이처럼 불안한 두 집 살림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안전처 폐지와 행안부 출범이 확정될 무렵 안전 관련 전문가 몇 명과 나눈 말이다. 행자부에서 행안부를 거쳐 안행부로 바뀌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행자부와 행안부가 됐으니 순서(행자→행안→안행→행자→행안→?)대로면 다음 정부 때 안행부 아니냐고. 어쩌면 5년 뒤 ‘도로 안행부’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 우스갯소리였지만 썰렁했는지 아니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건지 듣는 이들의 웃음소리는 크지 않았다.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담긴 안전정책은 예상보다 진일보했다는 평가다. 개헌 때 국민안전권을 명시하고 국가위기관리센터의 역할도 강화하기로 했다. 주요 선진국처럼 독립적인 재난사고 조사위원회도 설치키로 했다. 교통사고 화재 승강기 등 일상 속 안전 문제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계획이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 등 굵직한 현안을 맡은 행안부가 추진동력의 균형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5년 뒤 도로 안행부를 할 수는 없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일단 드러누워.” 한국 운전자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흔히 듣는 ‘조언’이다. 머리 깨지고 뼈 부러지는 사고가 아니다. 아픈 것도 같고 멀쩡한 것도 같은, 그런 사고 때 듣는 말이다. 초보 시절만 해도 운전자들은 ‘이래도 되나’라며 망설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제 발로 병원을 찾는다. 병원 침대에 드러누운 이들의 속내는 딱 하나다. “어차피 보험사 돈인데….” 반대로 교통사고를 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운전자들은 자신의 과실로 발생한 교통사고 앞에서 유난히 당당하다. 누가 봐도 가해자인데 일단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내 탓이 드러나도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가벼운 접촉사고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죽을 정도 아니면 상대방이 다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가족과 지인 중에 가해 운전자의 사과 방문은커녕 전화 한 통 못 받아 본 경우도 다반사다. 사고 낸 운전자들의 속내는 모두 같다. “어차피 보험사가 처리할 텐데….” 교통사고 가해자들이 보험만 내세우면 전자와 같이 애매한 ‘나이롱환자’를 양산한다. 나이롱환자이길 선택하는 피해자가 많아질수록 가해자들은 점점 더 보험에 매달린다. 악순환이다. 대한민국 도로가 하이에나 우글거리는 정글로 변한 가장 큰 이유다. 주범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이다. 1981년 만들어져 이듬해부터 시행됐다. 요지는 이렇다. 교통사고 가해자가 손해배상금 전액을 보상하는 보험 또는 공제에 가입했으면 처벌하지 않는 것이다. 단, 사고 원인이 가해자의 신호위반 무면허운전 등 중대한 과실 8개에 해당되면 처벌이 가능하다. 그동안 몇 차례 개정으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위반 등이 더해져 11개가 됐고 차량 낙하물이 추가돼 올해 말 12개로 늘어난다. 그럴듯한 이유에 예외조항까지 뒀지만 결국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전무죄를 합법화한 셈이다. 물론 모든 교통사고 가해자를 전과자로 만들 순 없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경찰 검찰 법원을 쫓아다닌다면 그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을 것이다. 하지만 40년 가까이 지나면서 교특법의 적폐는 이런 긍정적 효과를 덮었다. 언제부턴가 평범한 운전자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헐크로 변하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죄 지은 사람들이 당연한 듯 큰소리친다. 수사기관은 “어지간하면 보험 처리 하시죠”라며 유전무죄 확립에 일조한다. 2015년 보험사 접수 교통사고는 114만 건인데, 경찰에 접수된 사고는 고작 23만 건인 이유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진짜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다. 아홉 살 어린이에게 전치 16주의 부상과 후유장애까지 안긴 한 운전자는 보험에 가입했고 중상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헌법재판소가 이를 바로잡아 뒤늦게 지난달 처벌이 이뤄졌다. 만약 헌재 결정이 없었다면 피해 어린이와 가족은 가해자의 사과도 못 받고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경찰에 접수되지 않거나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은 교통사고 중 이런 경우가 또 없지 않을 것이다. 교특법은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경제 활성화에 무게를 두고 만든 법이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규모 모두 지금과 비교할 수 없다. 이제 교특법의 수명은 다했다고 본다. 어쩌면 교특법 폐지가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물질만능주의와 인명경시 풍조를 해결할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7일 정부세종청사에 있는 국민안전처 중앙재난안전상황실은 평소보다 바빴다. 약간 과장하면 호떡집에 불난 듯했다. 이날 중앙재난안전상황실을 통해 긴급재난 문자메시지가 13차례나 발송됐다. 올 들어 가장 많았다. 오전 9시 22분 59초 전북 남원시를 시작으로 오후 4시 57분 22초 경기 평택시까지 전국 36개 지역에 발송됐다. 인구만 놓고 보면 약 800만 명이 직간접적으로 재난정보를 확인했다. 이날 긴급재난문자는 모두 조류인플루엔자(AI) 관련이다. “AI가 긴급재난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서울 같은 대도시 주민이야 덜 느끼지만 지금 닭과 오리를 많이 키우는 농촌은 비상이다. 겨울에나 발생하던 AI, 그것도 고병원성 AI가 여기저기 도깨비불처럼 발생해서다. 혈통 보존을 위해 31년간 대를 이어 키워온 재래닭 572마리가 죽어나간 제주도 상황은 그야말로 재난이다. 요즘 긴급재난문자 발송은 말 그대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무더위가 닥치고 바닷물 수위가 오르고 정전이 발생해도 긴급을 알리는 문자가 휴대전화에 뜬다. 문자 내용도 ‘경동시장 내 야채가게 화재 발생, 우회도로 이용’(5월 23일) ‘포천 장날 토종닭을 구입한 분은 신고하세요’(6일) 같은 식이다. 지역과 원인 대책을 콕 찍어 알려준다. 다른 지역에서 이런 문자를 받으면 금방 지우겠지만 해당 지역에선 많은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고 정보를 찾고 지인들에게 알린다. 긴급재난문자 발송의 긍정적 효과다. 별것 아닌 상황에 성급하게 긴급재난문자를 보내 사람 놀라게 한다는 말도 나온다. 4일 서울 관악구 삼성산 산불이 대표적이다. 일요일 오후인 데다 이틀 전 수락산에서 제법 큰불이 있었기에 놀란 사람이 많았다. 당시 산불 피해는 약 150m². 일부 누리꾼은 국민안전처의 ‘면피성 문자 쏘기’ 의혹을 제기했다. 강릉·삼척 산불 당시 긴급재난문자를 제때 보내지 않아 비난받자 이제 연기만 보여도 문자를 보낸다는 것이다. 이상권 중앙재난안전상황실장은 강릉·삼척 산불의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보낸다’는 지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산불 발생 때 명확한 긴급재난문자 발송 기준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그 대신 이제는 안전처 차원에서 실시간 영상을 보고 민가가 가깝거나 등산객이 많은 곳일 때 문자를 보낸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정확성을 높이겠지만 초기에 신속한 대응이 중요하기 때문에 긴급재난문자는 더욱 적극적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빠르면 다음 달 안전처가 해체된다.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다. 2014년 11월 19일 출범 후 1000일 가깝게 이어온 국민안전처 간판은 얼마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우리 사회에 안전의 가치를 다시 새겼다는 점에서 안전처 역할은 충분했다고 본다. 삼성산 산불 문자 발송에 대해 온라인에서 ‘이런 게 안전처의 역할’이라는 긍정적 반응이 많았던 게 단적인 사례다. 안전처 역할은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가 맡는다. 겉모습을 보면 안전처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청와대의 재난안전비서관 자리는 조용히 사라졌다. “재난 대책을 강화하자”며 장관이 나서도 힘 있는 부처들이 꿈쩍하지 않는 모습을 봤기에 차관급으로 격하된 컨트롤타워는 영 미덥지 않다. 대통령은 청와대가 모든 재난에 직접 대응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불안하다. 대통령이 모든 내용을 알 수도, 대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재난은 발생 후보다 발생 전이 훨씬 중요하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 나는 슈퍼 히어로의 존재를 믿었다. 우리 동네에 무슨 일이 나면 빨간 팬티를 입은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빰빠밤∼’ 음악과 함께 날아온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처럼 생각한 코흘리개들이 많았다. 빨간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화단이나 턱 높은 마루, 심지어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리 부러지고 머리 깨진 추억이 비슷한 이유다. 지금도 슈퍼 히어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아이언맨이나 캡틴아메리카 같은 슈퍼 히어로가 진짜 있다고 여기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 그런데 사람 목숨 살리는 슈퍼 히어로가 진짜로 있다. 한두 명이 아니다. 그들은 슈퍼 히어로답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다 위급한 상황과 마주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경기 평택시 수서고속철도(SRT) 지제역에 근무하는 역무매니저 이준구 씨(50)도 이 중 한 명이다. 9일 오전 그는 평소처럼 역사 곳곳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때 승강장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쓰러진 20대 청년을 봤다. 곁에 있던 친구는 사색이 됐다. 승강장에 사람들이 있었지만 겁이 났는지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이 씨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심정지 상태를 확인하고 곧바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두 손에 온 힘을 실어 환자의 가슴을 압박했다. 적어도 1분에 100회 이상 가슴을 눌러야 한다. 1초에 2회꼴이다. 3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300회가 넘는 CPR 끝에 청년의 호흡이 돌아왔다. 119 구급대가 청년을 병원으로 옮겼다. 이 씨의 신속한 조치가 없었으면 그 청년은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게 다른 ‘무용담’을 물었다. “처음이에요.”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알고 보니 이 씨가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도 처음 눈앞에서 본 상황이라 “덜덜 떨렸다”고 고백했다. 이날 그를 슈퍼 히어로로 변신시킨 건 바로 끊이지 않는 연습이었다. “1년에 4차례씩 교육을 받다 보니 몸에 배었나 봐요. 사람을 구하겠다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더군요. 평소 훈련했던 대로 손을 가슴에 대고, 속도를 맞춰 눌렀더니 어느새 심장이 다시 뛰었습니다.” 경기 과천시 장애인복지관에는 여성 히어로가 있다. 간호사 이경희 씨(47)다. 그는 지난해 12월 복지관 식당에서 갑자기 쓰러진 60대 남성을 CPR로 살렸다. 이 씨가 직접 CPR로 사람을 구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상태가 심한 환자는 처음 봤어요. 일반인보다 익숙하긴 해도 응급실 간호사가 아니라면 직접 CPR를 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솔직히 조금 당황했습니다.” 사람 목숨을 구한 슈퍼 히어로는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경기 중 발 빠른 조치로 동료의 목숨을 구한 축구선수, 하굣길에 쓰러진 여중생을 살린 환경미화원, 80대 승객의 숨을 되찾아준 버스 운전사 등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슈퍼 히어로가 있다. 이들의 사연을 접한 뒤 서울 동작구에 있는 서울시 보라매안전체험관을 찾았다. 1시간에 걸쳐 CPR 교육을 받았다. 슈퍼 히어로가 되는 건 보기보다 힘들었다. 단단한 갈비뼈를 4∼6cm 깊이로 누르려면 체력과 기술 그리고 집중력까지 필요하다. 하지만 불가능한 벽은 아니다. 꾸준한 연습만 있다면 남녀노소 누구나 CPR에 익숙해질 수 있다. 물론 1시간 교육으로 심정지 환자를 모두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같은 초보 히어로가 2, 3명 모여 힘을 합치면 적어도 1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주위를 찾아보면 CPR 교육을 하는 곳이 여럿 있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 나도, 여러분도 그 옛날 슈퍼맨과 원더우먼처럼 진짜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출근길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 내 머릿속 레이더가 본격 가동된다. 2, 3초 안에 좌우 10m 정도 파악해야 빈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다. 저질 체력에, 1시간 넘는 이동시간을 감안하면 ‘운동 삼아 서서 간다’는 말은 내게 사치다. 자리 빌 틈이 보이면 10m 밖에서 가방부터 던진다는 아줌마를 뭐라 할 게 아니다. 그래도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만큼은 반드시 비워 둔다. 보통 편도 2차로 도로의 바깥 차로는 직진과 우회전이 모두 가능하다. 종종 직진 차량이 유유자적 파란 신호를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절대 뒤에서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앞 차량은 양보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1, 2분 빨리 가려고 괜히 ‘경적질’ 했다가 삿대질이라도 주고받으면 기분만 상한다. 앞 차량이 비켜주다가 사고라도 나면 졸지에 원인 제공자가 된다. 상황이 바뀌어 뒤 차량이 경적을 울려도 끝까지 신호를 기다리는 이유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광역버스에 타면 꼭 안전띠를 찾아 맨다. 가끔 안전띠가 좌석 틈에 끼어 요지부동일 때가 있다. 야근에 지치고 술에 취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옆자리 여성으로부터 성추행범으로 몰릴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이 안전띠를 빼서 착용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운전하다 차량 통행이 드문 교차로에 멈춰 서는 건 흔한 일이다. 예전에는 적당히 눈치껏 지나는 게 도로 위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파란 신호를 느긋하게 기다린다. 신호를 어기고 내 차를 추월해 가는 차량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촬영해 신고하는 여유도 생겼다. 내가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 두는 건 투철한 양보정신의 발로(發露)가 아니다. 그저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몇 차례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경험했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는 아니다. 교통 신호등과 차로, 안전띠에 집착하는 건 정해진 약속이기 때문이다. 내가 약속을 지키면 다른 누군가가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몇몇은 조금 더 안전할 수 있다. 사실 익숙해지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몸과 마음이 피곤한 과정을 거쳐야 편해진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나의 이런 모습을 불편해한다. 이골이 날 법도 한데 아직도 “유난 좀 떨지 말라”고 말한다. “유난 떨다 제명에 못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웃으며 건네는 친구도 있다. “혹시 프로불편러 아니냐”는 질문도 받았다. 프로불편러는 특정 사안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일컫는 온라인 용어다. 하지만 이들은 법이나 사회의 약속보다 자신의 감정 상태에 충실한 사람일 뿐이다. 찾아보면 ‘유난’은 그저 언행이나 상태가 보통과 다르게 특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방을 비꼬고 무시할 때 손쉽게 쓰고 있다. 상황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비수처럼 찌를 수도 있지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는 유난스럽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오죽하면 그런 시선을 피하려고 뿌연 미세먼지 속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이 10명 중 6명이나 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나라가 바뀌기 위해서는 유난을 떠는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약속과 질서보다 제 한 몸 챙기는 게 더 중요해진 한국 사회에서 유난스러운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지하철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 놓고, 버스에서 안전띠를 찾아 매고, 한밤중 교차로에서 파란 신호를 기다리는 게 유난이 아닌 사회가 될 것이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나도 댓글 보고 고개 끄덕였으니 말 다했지.” 소래포구에서 횟집을 하는 A 씨(48)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아버지 때부터 30년 넘게 이곳에서 배를 타고 장사를 했다. 그가 격하게 공감한 건 18일 소래포구에서 불이 났을 때 누리꾼들이 보인 반응이다. ‘비싸고 불친절한 소래포구’ ‘악명 높은 소래포구의 바가지’ ‘횟감 바꿔치기 기억이 선명하다’. 화재 기사에 달린 수천 개의 댓글은 소래포구를 비난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인과응보’라는 취지의 과격한 표현이 줄을 이었다. 피해 상인을 걱정하는 댓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피해 복구와 상인 지원을 언급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면 안 된다는 말까지 나온다. 지난해 11월 대구 서문시장, 올 1월 전남 여수 수산시장 화재 때 시민들의 반응과는 딴판이다. 그때는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할 정도였다. A 씨는 “댓글에서 지적한 상인들 문제는 나 역시 똑같이 느끼던 것”이라며 “불이 나서 피해를 입었는데 동정은커녕 욕을 먹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A 씨의 횟집은 이번에 불이 난 곳과 거리가 있다. 허가받은 식당이다. 반면 불에 탄 가건물 내 좌판은 모두 무허가다. 가건물이 들어선 곳은 개발제한구역인 국유지다. 상인들은 이곳에 가건물을 세우고, 구역을 나누고, 좌판을 깔고, 수조를 들여놓았다. 상인들은 100만∼200만 원의 토지 점용료를 낼 뿐이다. 무허가 좌판을 상인들끼리 사고파는 불법도 관행처럼 내려온다. 좌판 한 개를 매매할 때 최고 1억5000만 원의 권리금이 오간다고 한다. 좌판 임대료가 매달 500만 원에 이르고 전전대(임차인이 다른 사람에게 또 임대하는 것)가 성행한다고 전해진다. 무허가 시설에 합법적인 관리가 이뤄질 리 만무하다. 상인들이 소방시설을 설치할 의무도, 소방당국이 이를 확인할 의무도 없다. 소화기 80여 대와 소화전이 있지만 사람 없는 새벽에는 무용지물이다. 누군가 나서서 스프링클러라도 설치해야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래포구를 바꿀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2010년과 2013년 소래포구에선 이번과 비슷한 화재가 났다. 그때도 판박이처럼 안전조치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그냥 불에 탄 시설을 치우고 얼기설기 가건물을 다시 세워 2주 만에 장사를 재개했다. 소방시설을 늘리는 것보다 그게 훨씬 빠르고 싸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소 잃고도 외양간을 못 고친 게 아니라 안 고쳤다는 게 맞다. 문제는 세 번째 화마를 겪은 뒤에도 과거와 똑같은 모습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상인들은 하루빨리 장사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30일 내 복구’로 화답했다. 정확한 원인도 나오지 않았는데 20일부터 화재 잔해가 치워지기 시작했다. 현장 정리에는 정부의 특별교부세가 투입된다. 바꿔 말하면 무허가 시설을 짓기 위해 세금으로 마련한 정부 예산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참에 소래포구 어시장을 합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상인들과 지자체의 분위기는 다급하기만 하다. 다음 달이면 꽃게철이기 때문이다. 지금대로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는 다시 비닐천막을 덮은 가건물이 들어설 것이다. 결국 경찰이 나섰다. 무허가 좌판의 불법 실태를 확인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상인들 사이에서도 “이번 기회에 합법화를 추진하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과연 소래포구 상인들과 지자체가 스스로 외양간을 고칠 수 있을까.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한때 대한민국이 이렇게 불렸다. 잘나가던 미국과 일본 제품을 베끼는 게 유행이었다. 품질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일등의 위상까지 베끼진 못했다. 기업도 한국도 카피캣, 즉 모방꾼의 이미지를 뒤집어썼다. 이제 세계시장에서 카피캣으로 불리는 한국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과거 한국기업에 따라붙던 카피캣 명성은 후발주자인 중국기업들이 넘겨받았다. 어느덧 한국은 혁신국가 1위(블룸버그 혁신지수)가 됐다. 과거 일본을 대놓고 따라하던 한국의 대중문화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넘본다. 이쯤 되면 카피캣 코리아라는 오명을 벗어던져도 될 법하다. 그런데 요즘 정부가 철 지난 카피캣 행태를 따라하고 있다. 내수 활성화를 위한다며 내놓은 블랙 프라이데이와 프리미엄 프라이데이가 그렇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11월 마지막 금요일 시작하는 미국 최대의 쇼핑행사,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는 24일 일본에서 시작된 ‘금요 조기 퇴근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아닌데 한국판이라는 이름이 붙어 국내에 도입됐다. 정책 신선도는 제로인 셈이다. 물론 모든 카피캣이 잘못은 아니다. 베끼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고치고 배우는 것이 있다. 삼성전자를 보면 안다. 한때 애플의 카피캣으로 불렸지만, 이제 삼성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정부의 역할이란 게 비슷하니 정책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2015년 가을 처음 실시한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는 그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마뜩잖은 기업들의 등을 떠밀어 참여시키면서 재고떨이 행사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소비절벽 직전에 반짝 효과가 있었다. 정부는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를 통해서도 적잖은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내수 활성화라는 목표만 같을 뿐 두 정책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기대만큼의 효과를 얻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정부와 국민의 시선 차이만 봐도 분명하다. 프리미엄 프라이데이 정책을 내놓으면서 정부는 금요일 2시간 조기 퇴근을 강조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로자는 월∼목요일 30분 연장근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연간 근로시간 2113시간(2015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위에 빛나는 근로자들이 평일 30분 야근 추가에 발끈한 건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억울할 수 있다. 정권 말, 게다가 탄핵정국 속에서 복지부동이 당연한 게 요즘 공직사회 분위기다. 이거라도 하는 게 어디냐고 항변할 수 있다. 나름대로 창의성을 가미한 ‘벤치마킹’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일본처럼 무조건 금요일에 조기 퇴근이 아니라 평일에 야근을 더 하는 걸로 바꿨기 때문이다. 어쩌면 근로자와 기업 모두를 만족시킨 정책이라며 자화자찬했을지도 모른다. 2월 임시국회에서 정부가 추진한 근로시간 단축안 통과가 무산됐다고 한다.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68시간에 52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이다. 여야의 이해관계 탓도 크지만 정부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 정권 초부터 밀어붙여도 쉽지 않은 정책이라 내심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근로시간 단축은 철저히 근무환경 개선과 생산성 향상이라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실현까지는 수많은 걸림돌이 있다. 법적 근거도 없이 여기저기에 선심 쓰듯 남발할 수단이 아니다. 내수 활성화에 끼워 맞춘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는 그저 근로자와 기업 모두에 칭찬도 욕도 먹지 않겠다는 정책으로 보인다. 차라리 법대로 ‘칼퇴(정시 퇴근)’나 잘 지키라고 하는 게 훨씬 낫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벌써 다음 달이면 4년입니다. 이름은 또렷한데 시간은 하릴없이 흘렀습니다. 고 김세림 양. 2013년 3월 26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통학버스를 타고 어린이집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만 세 살 때였습니다. 당시 세림 양 어머니의 오열이 눈앞에서 본 것처럼 지금도 선명합니다. “아저씨, 우리 아기 어디 있어요? 우리 아기 보여주세요.” 신문기사 첫 문장에 적힌 세림 엄마의 절규가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 세림 양 사고 후 이제 막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둘째 아이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세림 양과 같은 세 살이었습니다. 둘째 아이 역시 매일 아침 통학차량을 탔습니다. 25인승에 동승자가 있는 버스입니다. 세림 양 사고 때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한동안 아이가 배꼽인사를 하며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떠올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마 당시 어린 자녀를 둔 엄마 아빠의 마음이 다 비슷했을 겁니다. 하지만 새벽 출근과 한밤중 퇴근이 일상인 아빠가 아이의 통학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습니다. 주말마다 “어린이집 차 탈 때 꼭 안전벨트 매라”고 당부하고 다짐받는 게 전부였습니다. 스마트폰에 한눈을 팔며 듣던 세 살짜리가 제대로 이해했을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이라도 해놓아야 불안감이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딸을 떠나보낸 세림 양 부모는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통학차량 안전기준을 강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에 딸의 이름을 허락했습니다. 악몽이 들춰지는 고통을 감수하고 용기를 낸 이유는 분명합니다. 더 이상 안타까운 희생이, 다시는 자신들처럼 아파할 부모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겁니다. 마침내 법이 만들어지자 세림 양 아빠는 “하늘나라의 세림이에게 좋은 선물을 전해주게 됐다. 모든 어른이 세림이법을 잘 지켜 아이들이 안전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아마 그때 세상의 모든 엄마 아빠도 같은 소원을 빌었을 겁니다. 또 믿었을 겁니다. 이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태권도장 축구교실에 마음 편히 보낼 수 있다고…. 세림이법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5년 1월에야 시행됩니다. 더딘 출발도 마뜩잖은데 유예기간을 2년이나 뒀습니다. 15인승 이하 차량에 법 적용을 미룬 겁니다. 영세 학원의 준비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래,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까….’ 기자의 머리로는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가슴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광주와 전남 여수, 충북 청주 등 전국 곳곳에서 어린 생명들이 스러졌습니다. 찜통 버스에 8시간 넘게 방치됐다가 중태에 빠진 어린이도 있었습니다. 지난달 23일에는 전남 함평에서 여덟 살 여자아이가 합기도장 차량에 치여 숨졌습니다. 세림이법 전면 시행(1월 29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습니다. 세림이법은 이제야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당장 다음 달 초등학교에 입학해 축구나 농구 교실을 다니는 아이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체육시설 차량은 아예 세림이법 적용 대상이 아닙니다. 어른들은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겨우 제 힘으로 걸음마를 시작한 세림이법을 주저앉히려는 어른들도 있습니다. 통학차량에 안전장치를 늘리고 동승자를 태우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세림이법을 과도한 규제라고 몰아세웁니다. 부디 우리 어른들이 세림 양의 희생과 세림 양 부모의 용기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 생명을 더 이상 돈과 비교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수많은 세림이에게 너무 미안합니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나, 덴마크 가고 싶어.” 얼마 전 난데없이 아내가 던진 말이다. 뜨끔했다. ‘12월이 결혼 15주년인데 벌써 여행 가자는 건가.’ ‘혹시 결혼 10주년 때 어물쩍 넘어간 걸 다시 끄집어내나.’ 짐짓 태연한 척 답했다. “북유럽은 추운데, 따뜻한 곳으로 가는 게 어때?” 머릿속에서 복잡한 항공료와 호텔비 계산이 이뤄지고 있었다. “휘게를 느끼려면 덴마크에 가야 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당황했다. “휘게? 북유럽 디자인이 유행이라더니, 그거 뭐 이케아(IKEA·스웨덴 가구업체)처럼 무슨 가구 만드는 회사냐?” 이날 뜬금없이 덴마크로 시작된 부부의 대화는 늘 그렇듯이 아내의 핀잔으로 끝났다. 휘게(hygge)는 덴마크어다. 딱 맞는 우리말이 마땅치 않지만 굳이 찾는다면 ‘편안함’에 가깝다. 따뜻함 친밀함 안락함도 비슷하다. 좋다, 싫다처럼 감정의 ‘움직임’보다 관계나 상황의 느낌을 말하는 감정의 ‘상태’에 초점을 맞춘 단어다. 사회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사람들이 최근 주목한 표현 중 하나가 휘게다. 사전 펴내는 영국 출판사 콜린스는 2016년 올해의 단어 3위로 꼽았다. 전문가들은 덴마크가 전 세계 행복지수 1등(유엔 세계행복보고서)을 놓치지 않는 이유를 휘게에서 찾았다. 휘게가 주목받는 건 의미 때문만이 아니다. 덴마크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휘게가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휘게는 곧 덴마크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다. ‘나 살기 바쁜데 다른 나라 사람들 어떻게 사는지 굳이 알아야 하나’란 사람도 있겠지만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가 참고할 부분이 없지 않다. 덴마크 사람들은 일상에서 휘게를 찾는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며, 아이를 키우고 학교에 보내는 과정에서 작은 행복을 느낀다. 비싼 돈 들여 놀이동산 가거나 외식을 하는 게 아니다. 부모와 자녀가 TV나 컴퓨터, 스마트폰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대신 산책이나 보드게임을 즐긴다. 커피와 녹차 아무거나 상관없다. 단 10분이라도 좋아하는 차 한잔을 여유롭게 마시는 것 자체가 휘게다. 회식 자리에서 고주망태 되지 말고 마음 맞는 직장 동료, 친구와 맥주 한잔 기울이는 것이다. 억지로 모임에 참석해 감정 낭비하며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일상에서 행복 찾기’는 한국에서도 익숙하다. ‘저녁이 있는 삶’ ‘야근 없는 날’이 유행했다. 정부와 정치인, 기업들이 한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도 주변에 그런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건 아이러니를 넘어 비극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전국의 사장님들이 휘게스럽게 생각했다면 과연 이 지경이 됐을까 싶다. 개인은 어떤가. 많은 사람이 일상 속 행복을 꿈꾸며 조건을 단다. 최소한의 경제력으로 집 한 채와 자가용 유지비, 아이들 학원비 등을 기본으로 꼽는다. 직장 내 안정적 위치와 별 탈 없이 굴러가는 사업체도 슬쩍 조건에 넣는다. 하긴 성공을 위해 불법을 서슴지 않는 사회,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상대방을 짓밟는 사회, ‘부모 잘난 것도 능력’이라며 타인의 일상을 비웃는 사회에서 이 정도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것이다. 한국은 덴마크가 아니다. 행복지수 58등이 1등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공상과학(SF)이고 판타지다. 어쩌면 한 세기가 지나도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만의 휘게를 찾아보려 한다. 돈 대신 약간의 정성과 시간 그리고 넘치는 애정만으로 실현 가능한 휘게 말이다. 냄새난다고 뽀뽀를 거부하는 둘째를 위해 25년을 함께한 담배를 끊고 걸그룹에 환호하는 큰아이를 위해 음원도 찾아 들을까 한다. 이런 소소한 행복이라도 찾아야 2017년 한 해 대한민국에서 버텨 나갈 수 있을 것 같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살아남을까요?” 요즘 공무원이나 전문가를 만날 때마다 건네는 질문이다. 조류인플루엔자(AI)로 죽어 나가는 닭 얘기가 아니다. 정부 부처의 ‘생사’ 여부다. 바로 국민안전처다. ‘대선시계’가 빨라지면서 과연 차기 정부에서 국민안전처 간판이 그대로 유지될지 궁금해서다. 질문 받은 사람들의 답변은 대부분 비관적이다. 그 나름의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전문성이 부족하다’ ‘직원들의 소속감이 낮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등등.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은 자신이 보고 느낀 현실을 전했다. “공무원을 열심히 일하게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승진이다. 그런데 국민안전처는 여러 곳이 합치거나 여기저기서 파견 온 직원이 많다. 열심히 일하고 복귀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승진을 기대하기 어렵다. 버티고 잘 해낼 동기부여가 안 된다. 기간만 채우고 빨리 복귀하거나 아예 파견 오는 걸 꺼릴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출범 자체가 잘못’이라는 냉정한 의견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불거진 컨트롤타워 문제가 엉뚱하게 해양경찰청 해체를 낳았고 국민안전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마침 당시의 궁금증을 풀어줄 주장도 나왔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위원과 한 번도 상의 없이 혼자 (해경 해체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인력이 8000명이 넘는 정부기관의 명줄을 끊으면서 내각 논의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처럼 해경 해체 결정의 배경에 ‘비선 실세’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하지만 해경 해체 결정의 문제를 떠나 국민안전처까지 사생아 취급하는 건 반대다. 그동안 수많은 재해 재난이 발생했지만 역대 어느 정부도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를 만들지 못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가 있었지만 기존 재해 재난에 익숙해진 조직이었다. 세월호 참사처럼 초유의 재난에 적절히 대응할 조직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국민안전처를 반쪽짜리로 만들어 놓고 방치한 것이다. 과거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처럼 조직이나 인사 권한도 없다. 지방자치단체를 움직일 당근이나 채찍도 턱없이 부족하다. 비상사태 때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내리지 못하고 협조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허울뿐인 컨트롤타워인 셈이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안전은 걱정스럽다. 일터에서 죽거나 다치는 산업재해 피해자가 연간 9만 명이다. 또 한 해 4000명가량은 길 위에서 교통사고로 숨진다.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이다. 기존의 경험과 정책으로 대응 불가능한 재해 재난은 어찌할 것인가. 안전 전문가들은 미래사회의 ‘블랙 스완(Black Swan)’에 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상상하기 힘든 ‘검은 백조’처럼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위기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정부나 사회의 예측능력을 벗어난 재난 재해가 닥쳤을 때 지금의 국민안전처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다음 정부에서는 국민안전처의 간판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꿔 달아야 한다. 그리고 안전부총리를 신설해야 한다. 안전은 경제 사회 교육 등 특정한 어느 분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경제부총리나 사회부총리가 담당하는 영역 그 이상이다. 안전은 이것저것 다 처리하고 시간 남을 때 하는 나랏일이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대형 재해 재난이 정부의 실패까지 불러온 현실을 지금 우리는 생생히 보고 있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1만3429명. 한 해 발생한 교통사고 사망자 수다. 하루 37명이 길 위에서 죽어 갔다. 정확히 25년 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역대 가장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숨진 1991년이다. 13년이 지난 2004년 교통사고 사망자는 6563명. 절반으로 줄었다. 선진국은 이렇게 되기까지 보통 30년씩 걸렸다. 한강의 기적까지는 아니어도 이 정도면 ‘기적 같은 일’이라 평가할 만하다. ‘빨리빨리’ 문화의 후유증 탓일까,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탓일까. 성큼성큼 줄어들던 교통사고 사망자 감소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2004년 이후 1000명을 줄이는 데 6년이나 걸렸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사망자 감소율도 평균 2.2%에 불과했다. 전체 규모가 크게 줄었기 때문에 감소세는 어느 정도 둔화될 수 있다. 인구가 5000만 명이고 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2000만 대나 되니 어쩌면 이 정도 수준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특히 올해 사망자 추이에 각계의 관심이 높다. ‘6년에 1000명’이라는 감소세를 넘어설지, 내년에 3000명대 진입이 가능할지 때문이다. 다행히 현재까지 전망은 밝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 10월까지 사망자는 3433명이다. 아직 두 달이나 남았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76명(9.9%)이나 줄었다. 감소율로는 2002년(10.8%) 이후 14년 만에 가장 컸다. 올해는 유난히 교통사고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2월 음주운전 문제를 다룬 동아일보 보도 후 단속과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영동고속도로 봉평터널 등지에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의 충격적인 장면이 블랙박스를 통해 공개되면서 대형 차량의 위험성도 불거졌다. 음주운전 방조범 처벌, 암행순찰차 집중 투입 등 강력한 법 집행이 이어졌다. 여론의 변화가 정부기관의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사망자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연말까지 사망자를 400명 이상 줄일 거라는 기대가 조심스럽게 나온다. 만약 실현되면 2004년에 이어 두 번째 기적이라고 부를 만할 것이다. 비록 400명을 넘지 못해도 내년 3000명대 진입에 파란불이 켜지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상황이 녹록지 않다. 음주운전 단속기준 강화는 실제 법 개정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0.03%로 낮추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를 통과할 기미가 없다. 여전히 ‘규제’로 보는 시선 탓이다. 뒷좌석 안전띠 착용 의무화도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택시 등 사업용 차량 업계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승객이 안전띠 착용을 거부하면 운전사가 과태료를 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내년에도 여론이, 정부의 법 집행이 올해와 같을지 장담할 수 없다. 여론은 부침이 있고 법 집행은 강약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다. 선거일이 언제가 될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지만 2012년을 떠올리면 전망은 어둡다. 18대 대선이 치러졌던 그해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오히려 전년도를 넘어섰다. 2000년 이후 사망자 감소세가 역행한 유일한 해였다. 교통사고 사망자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게 더 이상 기적처럼 여겨지면 안 된다. 사망자를 줄이기 위한 생활과 정책이 우리 사회에 일상처럼 자리 잡아야 교통 후진국의 오명을 벗을 수 있다. 그러려면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개정안들이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 20여 일 남은 2016년 12월, 기적이 일어나기를 희망한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국정 농단의 몸통 최순실 씨(60·구속 기소)가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반 매주 청와대를 출입하며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47·구속 기소) 등 '문고리 3인방'과 회의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 평소와 다름없이 청와대 관저에서 혼자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서양요리 담당 조리장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올 7월까지 근무한 A 씨(44)는 여성동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A 씨는 "임기 초 이영선 전 제2부속실 행정관이 매주 일요일 최 씨를 픽업해 '프리패스'로 들어왔다"며 "최 씨가 온다고 하면 '문고리 3인방'이 관저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조리장도 3명이 대기했다"고 말했다. A 씨에 따르면 최 씨는 청와대에 오면 관저에서 정 전 비서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과 함께 회의를 했다. 박 대통령은 거의 동석하지 않았다. A 씨의 이 같은 증언은 최 씨가 박 대통령 임기 초반부터 검문 없이 청와대를 드나들며 국정에 개입했다는 그동안의 의혹들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A 씨는 회의가 끝난 뒤 최 씨가 조리장들에게 음식까지 주문해 먹고 갔다고 전했다. 최 씨는 늘 일본 요리 '스키야키'(일본식 전골요리)를 즐겼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집에 돌아갈 때면 늘 김밥을 싸달라고 요구했다고도 덧붙였다. '청와대 김밥'을 챙겨간 셈이다. '문고리 3인방'은 최 씨가 돌아간 뒤 한 명씩 돌아가며 저녁 식사를 해 모든 정리를 마치면 오후 10~11시쯤 됐다고 A 씨는 전했다. A 씨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이 평소처럼 관저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를 했다"고 밝혔다. 그는 "식사하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점심과 저녁 식사시간에 1인분의 음식이 들어갔고, 그릇이 비워져 나왔다는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A 씨는 당시 주방에서도 세월호 참사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박 대통령의 식사 일정에 갑작스럽게 변동이 있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예정대로 관저에서 1인분의 식사를 준비해 차려냈다고 설명했다. 식사 장소 등을 봤을 때 박 대통령은 평소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관저에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에서 A 씨는 박 대통령이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에는 이날처럼 관저에서 혼자 식사했다고 말했다.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 등이 있을 때만 본관으로 나갔다가 관저로 돌아오기 때문에 식사도 본관 주방 대신 관저 주방에서 주로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는 "(박 대통령은) 혼자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 분"이라며 "TV를 보며 혼자 식사하시는 게 일반적"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A 씨가 밝힌 내용에 대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7일 열린 청문회에서 "그런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고 말했다.김민경 holden@donga.com·김도형 기자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만만한 건 홍어 거시기가 아니었다. 진짜 만만했던 건 안전이다. 적어도 현 정부의 인사를 보면 그렇다. 2일 청와대가 국민안전처 장관 후보자에 박승주 전 여성가족부 차관을 ‘내정했던’ 것을 놓고 하는 말이다. 비록 그가 일주일 만에 사퇴했지만 이 정부가 얼마나 안전을 만만하게 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국민안전처 탄생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다. 세월호 참사 34일째인 2014년 5월 19일 대국민 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당시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와 해경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해경 해체와 안전행정부의 안전·인사 기능 분리를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고심 끝에’라는 전제를 붙였다. 돌이켜보니 그해 11월 초대 안전처 장관 인사 때도 고개를 갸웃했다. 현 박인용 장관은 군 장성 출신이다. 이렇다 할 방재(防災) 관련 경력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안전처를 재난안전 전문가 중심의 새로운 조직으로 만들겠다”는 박 대통령 발표에 걸맞은 인사인지 의문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다만 군에서 다양한 비상상황을 접해본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신속’과 ‘정확’이 재난 컨트롤타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지난 2년간 박 장관이 이끈 안전처에 A학점을 주기는 어렵다. 잘해야 평균 C학점이고 일부 분야에서는 낙제점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장관의 전문성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신설 부처로서의 한계가 더 큰 걸림돌이었다. 안전처가 올린 지진 등 방재 관련 예산은 건건이 삭감됐다. 핵심 사업 중 하나인 분야별 안전규제 강화는 예정보다 지체됐다. 각 부처의 비협조 탓이 컸다. 이 과정에서 안전처 실무자들은 급이 낮은 청 단위 기관에도 읍소하며 자료를 요청해야 했다. 안전처 안팎에서 “정부가 낳기만 하고 키우는 걸 포기했다”는 자조 섞인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박 전 차관의 안전처 장관 내정은 의외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국무총리와 경제부총리를 교체하는 건 당연하면서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안전처 장관을 바꾼다? “내무관료 출신으로 퇴직 후에도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했다”는 청와대의 인선 이유를 들을 때는 실소가 터졌다. “해군과 합참의 주요 보직을 역임한 해상과 합동작전 전문가”라는 현 박 장관 발탁 이유에 훨씬 공감이 갔다. 오죽하면 박 전 차관 내정 발표 후 현장 소방관 중 한 명이 기자에게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이란 말까지 했을까. 박 전 차관이 도심 한복판에서 열린 무속행사에 참석하고 자신의 책에서 전생 체험까지 주장한 부분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박 전 차관은 김병준 총리 후보자가 추천했다고 한다. 2003년 참여정부 때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에서 각각 위원장과 기획운영실장을 지낸 인연 덕분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손발이 맞는 관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부처 중에서 왜 하필 안전처를 선택했는지 의문이다. 안전처가 총리실 산하에 있다는 이유로 김 후보자가 선택한 것인지, 박 대통령이 현 박 장관을 문책성으로 경질하려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저 안전처 장관 정도는 언제든 갈아 치우고 아무나 앉혀도 된다는 판단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분명한 건 일주일 만에 실패로 돌아간 이번 인사가 주는 비극적 메시지다. ‘권력의 안전’을 위해 국가와 국민의 안전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은 지금 그 상황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1, 2년에 한 번 한국을 찾는 외국인 지인은 매번 남산에 오른다. 내가 바쁘면 혼자서라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남산을 찾는다. 그는 야경을 볼 때마다 감탄사를 터뜨린다. “서울 같은 대도시 한가운데 산이 있는 것도 놀랍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정말 환상적이다.” 가수 싸이의 글로벌 히트곡 ‘강남스타일’은 서울의 강남을 단숨에 지구촌 ‘핫플레이스’로 만들었다. 해외 유명 블로거들은 지금까지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끊임없이 강남 방문기를 올린다. 낮에는 축구장처럼 넓은 왕복 10차로 도로와 즐비한 고층빌딩에 놀라고 해가 지면 화려한 밤거리에 환호한다. 외국인 관광객뿐이랴. 젊은이들은 신사동 가로수길과 이태원 경리단길로 몰리고 있다. 개성 넘치는 식당과 카페 클럽은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서울의 정보기술(IT) 환경도 대단하다. 어지간한 곳에서는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 인터넷을 공짜로 펑펑 쓸 수 있다. 외국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서울은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시다. 세계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의 민낯은 어떨까. 화려함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서울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첨단 기술과 마천루에 현혹됐던 당신의 생각이 180도 바뀔 것이다. 서울의 민낯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당신이 매일 걸어다니는 출퇴근길이나 소중한 자녀들이 다니는 등하굣길 아래에 있다. 당신이 걷던 길이 당장 내일 무너져도 전혀 놀랄 만한 상황이 아니다. 서울의 기반시설은 대부분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30년 이상 된 ‘늙은 시설’이다. 사람으로 치면 60대를 넘겨 70대에 접어든 정도다. 이런 늙은 시설이 도로의 27.5%, 건축물의 46.5%다. 특히 하수관로는 절반(48.4%)에 가깝다. 길을 걷던 사람이나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나타난 싱크홀(도로 함몰)에 빠지는 건 십중팔구 물이 줄줄 새는 낡은 하수관로 때문이다. 땅속에는 걱정거리가 또 있다. 바로 지하철이다. 올 1월 지하철 4호선 당고개행 열차가 한성대입구역 근처에서 고장 나면서 승객 수백 명이 대피했다. 사고 전동차는 출고된 지 23년이 지났다. 이런 낡은 전동차가 서울 땅속에 3000량이나 다니고 있다. 서울메트로(지하철 1∼4호선) 전동차의 60%, 서울도시철도공사(지하철 5∼8호선) 전동차의 51% 이상이다. 선로나 전력설비, 터널 내 송수관 등 안전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설비들의 노후화도 심각하다. 우리보다 먼저 늙어간 선진국도 몸살을 앓았다. 1966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의 교량 약 1500개가 붕괴됐다. 일본도 1964년 도쿄 올림픽 전후에 지어진 기반시설이 수명을 다하면서 유지관리 비용이 치솟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2012년 미국의 MAP-21 법안과 2013년 일본의 시설물 장수명화(長壽命化) 계획이다. 공통점은 낡은 기반시설 문제 해결을 국가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꼽았다는 것이다. 서울의 기반시설은 갈수록 늙는다. 서울시에 따르면 앞으로 20년 뒤 도로 등 주요 기반시설의 80% 이상이 지은 지 30년이 훌쩍 넘어간다. 우리 사회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회색 코뿔소(Gray Rhino)’ 현상이다. 위험성을 뻔히 알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일상 속 재난을 무시하는 것이다. 위험 신호가 계속되는데도 애써 인정하지 않는 회색 코뿔소가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를 평범한 직장인이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숨지는 사고를 보면서 당장 내일 출근길이 걱정된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국가공무원 5급 공채시험 2차 합격자 명단을 인터넷에 유출시킨 20대 대학원생이 경찰에 자수했다. 대전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4일 국가공무원 5급(행정) 시험 합격자 명단이 담긴 인터넷주소(URL)를 유출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대학원생 박모 씨(23)를 조사했다고 7일 밝혔다. 경찰 조사 결과 박 씨가 해당 URL을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15분에 불과했다. 박 씨는 5급 공채 2차 시험자 합격자 명단이 통상 합격자 발표일 전날 오후 6시경 미리 올라간다는 점을 알고서 4일 오후 사이버국가고시센터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실제로 인사혁신처 채용관리 담당자는 이날 오후 5시 반경 합격자 명단을 올렸다. 다음 날 오전 9시에 해당 페이지가 공개되도록 사전 예약 기능을 설정했다. 박 씨는 가장 최근에 올라온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의 합격자 명단 파일의 소스 번호를 확인하고 5급 공채 합격자 페이지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판단해 숫자를 하나씩 바꿨다. 결국 이날 오후 5시 45분경 URL을 알아냈고, 이를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 게시했다. 박 씨는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심적 부담감을 느끼고 6일 자수했다. 경찰은 인사처가 합격자 파일을 예약 게시하면서 적절한 보안조치를 하지 않아 박 씨가 명단을 유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합격자 명단을 미리 유포해 시험 진행을 방해한 점으로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도 적용할 수 있다"며 "IP 사용자 최종 확인 및 법률검토 후 입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유원모 기자onemore@donga.com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얼마 전 TV에서 ‘임진왜란 1592’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임진왜란이야 영화와 TV에서 질리도록 다룬 이야기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 무렵까지 일본은 500회가 넘게 한반도를 침략했다. 임진왜란 발발 9년 전인 1583년 율곡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2명은 침략 가능성을 놓고 정반대 내용을 보고했다. 선조와 대신들의 선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과서 내용 그대로다. ‘설마 일어나겠느냐’는 불감증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3년 전 한반도 주변에는 유독 지진이 잦았다. 그해에만 93회의 지진이 발생했다.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지진을 관측한 이래 최다였다. 리히터 규모 4.9의 지진이 인천과 전남 앞바다에서 두 차례나 일어났다. 역대 한반도에서 관측된 지진 가운데 네 번째(2013년 기준)로 강한 것이었다. 동아시아에도 크고 작은 지진이 이어졌다. 전남 해역 지진 하루 전 중국 쓰촨(四川) 성에서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 북부 쿠릴 열도에서도 규모 7.2의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잦아지자 사람들의 불안감은 커졌다.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한국도 더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철저한 대비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규모 4.9 지진에 시끄럽던 여론은 얼마 뒤 잠잠해졌다. 2013년 한 해 동안 평년의 두 배에 육박하는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지만 수많은 통계자료 속에 묻혔다. 당시 기상청을 담당했던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고백하건대 지진은 보도 우선순위에서 뒷전이었다. 태평양 먼바다에서 태풍이 한반도를 향해 살짝 방향을 틀어도, 초여름 수은주가 33도에 육박해도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지진은 말 그대로 반짝이었다. 그때 기자는 “언젠가 한국에서 큰 지진이 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경고를 전했다. 하지만 그 언제가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국민안전처까지 만들었지만 지진 대책은 늘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전체 재정계획을 볼 때 ‘비효율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 예산안을 보면 우선순위를 거론하기도 민망하다. 2015년부터 2년간 국민안전처가 기획재정부에 제출한 지진 관련 예산은 총 91억 원. 최종 확정된 예산은 4분의 1도 안 되는 약 21억 원에 불과했다. 안전처가 처음 검토한 예산(약 1300억 원)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내년도 예산안에는 약 56억 원이 반영됐다. 안전처가 제출한 예산(251억 원)의 약 5분의 1이다. 정부는 손사래를 치겠지만 아직도 안전은 정부 정책 중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게 사실이다. 여성과 노인 등을 상대로 하는 강력범죄가 늘자 우범지역에 폐쇄회로(CC)TV를 집중 설치하려고 세운 예산 336억 원은 전액 삭감됐다. 보행자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회전 교차로 설치 등 교통환경을 개선하는 사업도 230억 원 중 절반가량(130억 원)만 반영됐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불세출의 영웅 덕분에 나라를 지키고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은 10명, 아니 100명의 이순신 장군도 막을 수 없다. 찰나의 순간을 덮치는 지진과는 어떻게 싸울 방법도 없다. 이제 10만 양병설 같은 지진 대책이 필요하다. 1592년의 아픔을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졸속 땜빵 뒷북…. 정부 정책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대통령이 누구든 정부가 내놓는 정책은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했다. 길게 돌아볼 필요도 없다. 당장 전 세계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한진해운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철 지난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처럼 반복되는 법조비리 대책도 마찬가지다. 돌다리 두들기듯 오랫동안 신중한 검토와 준비를 거쳐 시행한 정책을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하지만 20년 가깝게 공을 들인 뒤 시행한 정책이 있다. 이 정책은 1996년 논의가 시작돼 10년 후인 2006년 관련법이 만들어졌다. 시행은 이로부터 8년 후인 2014년에 이뤄졌다. 첫 논의부터 시행까지 18년이 걸렸다. 추진 기간만 놓고 보면 역대 정부 정책 중 ‘국보급’이다. 18년 산고(産苦)의 결실은 바로 ‘도로명주소’ 사업이다. 2014년 1월 본격적으로 시행됐으니 벌써 만 3년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정책으로 아는 사람도 많지만 실제 추진 역사는 이처럼 오래됐다. 시작은 김영삼 정부 때였다. 당시 청와대 정책 추진 과제로 기존 지번주소 체계의 개편이 다뤄졌다. 이어 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10월 ‘도로명주소법’이 제정됐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의 병행 사용이 시작됐다. 하지만 오랜 추진 기간이 정책의 질까지 담보하진 못한 것 같다. 여전히 도로명주소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경기연구원이 올 7월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지번주소에 비해 도로명주소가 불편하다는 의견이 56%를 넘었다. 실생활에서 도로명주소만 사용하고 있다는 사람은 10명 중 2명도 안 됐다(약 18%). 특히 지금 사는 집의 도로명주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은 58%였다. 바꿔 말하면 10명 중 4, 5명은 자신의 집주소조차 모른 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설문조사 결과까지 찾아볼 필요도 없다. 과거 집주소를 물어보면 바로 답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다. 인터넷에서 홈페이지에 가입하거나 쇼핑을 할 때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를 선택하라는 안내도 짜증스럽다. 정부와 전문가들은 ‘공식’만 외우면 편하다고 하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지간한 수학 공식보다 어렵다. 내가 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두뇌 기능이 떨어진 건지 고민이 들 정도다. 아직도 이렇게 낯설기만 한데 최근 3년간(병행 사용 기간 포함) 민원 등의 이유로 바뀐 도로명주소는 300건 가까이나 된다. 1918년 도입된 지번주소의 역사는 100년에 이른다. 암기 능력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주소 체계다. 그래서 도로명주소가 익숙해지는 데 100년이 걸릴 거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도로명주소가 이렇게 오래 생명을 유지할지도 의문이다. 처음 아이디어가 나온 건 스마트폰은커녕 내비게이션도 흔치 않던 때다(참고로 애플의 아이폰이 2007년 개발됐고 국내에는 2009년 처음 출시됐다). 이제 스마트폰 한 대면 걸리는 시간까지 계산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쪽지 한 장 들고 집 찾아가던 시절에 나온 아이디어가 18년 후 현실이 될 때까지 과연 공무원들은 이런 변화를 예측은커녕 감안이나 했을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도로명주소 시행에 들어간 정부와 지자체 예산은 약 4000억 원이라고 한다. 여기에 민간부문 비용과 국민들이 겪고 있는 ‘불편 비용’은 빠져 있다. 100년이 아니라 당장 20∼30년 뒤에 어떤 첨단기술이 등장할지 모르는데 도로명주소 사용을 고집하는 게 과연 타당할까. ‘그건 다음 세대가 고민할 일’이라며 밀어붙인 정책의 대가가 어떤 것일지 가늠조차 안 된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토요일인 13일 평택∼제천 고속도로. 앞서 가던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낮추더니 비상등을 깜박였다. 다행히 우리 가족을 태운 차량과는 거리가 꽤 있었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비상등을 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곧바로 내 시선은 룸미러를 향했다. 뒤에서 오던 차량이 제대로 멈췄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뒤따르던 승합차가 안전하게 멈춘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얼마 전부터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새로 생긴 습관이다. ‘전방 주시’와 ‘안전거리 확보’만으로는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을 지킬 수가 없다. 고속도로 위에서 아무리 기를 쓰고 교통법규를 지켜봤자 뒤에서 시속 100km로 들이받는 버스를 막아낼 재간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나와 비슷한 운전자가 많다. 고속도로에서 정체 구간에 이르면 앞보다 뒤가 무섭다는 운전자들이다. 그러면서 모두 “그 사고 때부터”라고 말했다. 바로 지난달 17일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봉평터널 앞에서 발생한 관광버스 연쇄 추돌사고다. 20대 여성 4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사고였다. 질주하던 대형 버스가 멈춰 선 승용차의 뒤를 그대로 들이받는 블랙박스 영상은 보는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줬다. 운전 공포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포는 지난달 31일 24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부산 해운대 교통사고의 영상으로 인해 최고조에 달했다. 여기에 일가족을 태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주차된 대형 트레일러에 부딪혀 4명이 숨진 사고 영상까지 공개됐다. 이쯤 되면 ‘블랙박스 쇼크’다. 블랙박스 쇼크가 공포만 불러온 건 아니다. 긍정적 효과도 상당했다. 모든 언론이 사고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대형 차량 운전자의 상습적인 졸음운전, 허술한 운전면허 관리, 흉기로 돌변하는 불법 주정차 차량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뉴스가 한 달 가까이 계속됐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교통사고 뉴스가 쏟아진 걸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블랙박스가 없었다면 아마 일회성 보도에 그쳤을 것이다. 블랙박스의 또 다른 긍정적 효과는 미궁에 빠질 뻔한 사고의 원인을 밝혀낸 것이다. “차로 변경 중 사고를 냈다”는 관광버스 운전사의 거짓말을 잡아냈고 뇌전증으로 기울었던 해운대 사고의 원인이 실은 뺑소니 운전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밝혀냈다. 무엇보다 음주운전 졸음운전 난폭운전 등 교통안전 전반에 걸쳐 우리 사회의 경각심을 높였다는 게 가장 크다. 4년째 교통안전 캠페인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는 걸 숨길 수 없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어지간한 교통사고 영상에 무덤덤해질 가능성이 높다. 더 충격적이고 더 끔찍한 블랙박스 영상에만 반응할 것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교통사고의 원인과 근본적인 문제점을 끈질기게 확인하는 대신 블랙박스 영상의 ‘수위’만 따질지도 모른다. 최근 한 지상파 방송은 블랙박스 영상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정규 프로그램을 신설하기로 했다. 다양한 블랙박스 영상을 보여주고 전문가 진단과 함께 원인과 예방법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취지만 놓고 보면 박수 받을 일이다. 하지만 교통사고 영상에 쏠린 관심이 높은 시청률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너무 큰 건 아닌지 걱정이다. 같은 충격이 잦아지면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블랙박스 영상은 인터넷에서나 찾아보는 자극적인 감상용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해결책은 분명하다. 정부가 제대로 된 교통안전 정책을 내놓고 뚝심 있게 추진해야 한다. 경제논리에 치이고 우선순위에 밀려 유야무야된다면 한국의 교통안전은 블랙박스 속에 갇힌 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75.1%. 현 정부의 정책 가운데 이만큼 높은 국민 지지를 이끌어 낸 것이 있을까? 올 5월 경찰청은 음주운전 단속 기준을 강화하기로 하고 설문조사를 벌였다. 핵심은 음주운전 단속 기준을 현행 혈중알코올 농도 0.05%에서 0.03%로 낮추는 것. 조사 결과 응답자의 75.1%가 찬성했다. 운전자와 비운전자,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찬성이 반대를 크게 앞섰다. 특히 20대의 찬성률은 전체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이 정부에 대한 젊은층의 인기가 시들한 걸 감안하면 놀랄 만한 수치다. 동아일보는 ‘시동 꺼! 반칙운전’ ‘시동 켜요, 착한 운전’ 등 2013년부터 교통안전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교통사고 사망자를 5년간 총 2000명 줄이자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내놓은 첫 번째 방안이 바로 음주운전 단속 기준 강화였다. 이제야 털어놓지만 사실 교통 관련 기관이나 전문가 중 상당수는 이 제언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음주운전 문제가 심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음주운전 대책이 실제 제도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낮게 봤기 때문이다. 이들의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술에 관대했다. 성폭행이나 살인 같은 강력범죄를 저질러도 만취상태라는 이유로 형량이 줄어드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술 먹고 운전하는 건 누구나 한두 번 경험하는 실수일 뿐 범죄가 아니라는 생각이 오랜 기간 우리 사회에 퍼져 있었다. 음주운전을 근절하겠다며 정부가 내놓는 대책이라고 해봤자 경찰의 일제단속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올해 본보 보도 후 정부가 단속 기준 강화, 동승자 및 업주 처벌 등 강력한 음주운전 대책을 잇달아 내놓자 전문가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전문가는 “정부 안에서조차 음주운전 단속이나 처벌 강화를 규제 강화로 보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정부가 획기적인 음주운전 대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고 솔직히 놀랐다”고 말했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혈중알코올 농도 조정 등 주요 대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대폭 줄어든 것이다. 지난해 상반기 329명에 이르던 음주운전 교통사고 사망자는 올해 171명으로 절반가량(48%) 감소했다. 검찰과 경찰 등 정부 기관이 단속과 처벌을 강화한 것만으로도 효과를 얻은 것이다. 이제 음주운전 대책을 완성할 마지막 단계를 남겨두고 있다. 바로 광복절 특별사면이다. 정부와 여당이 광복절 특사 추진을 밝힌 뒤 인터넷에서는 자신을 ‘생계형 음주운전자’라고 주장하는 누리꾼들이 “특사 대상에 포함시켜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는 기업인들과 비교하며 ‘형평성’ 문제를 꺼내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이번 특사에 음주운전 사범을 포함시키면 안 된다. 초범이라는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면해주는 관행을 이제는 없앨 때가 됐다. 만약 정부가 기업인 사면의 부담을 덜기 위해, 아니면 떨어진 인기를 조금이라도 올려보려고 음주운전 사범을 사면 대상에 포함시킨다면 모처럼 조성된 긍정적 분위기가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다. “단속돼도 어차피 사면될 텐데”라는 잘못된 생각은 영원히 고치지 못할 것이다. 음주운전 대책은 외교 정책처럼 이해관계를 복잡하게 따져볼 필요가 없다. 경제 정책처럼 불확실한 전망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정부가 의지를 갖고 추진한다면 다른 외부요인에 상관없이 확실한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게 확인된 정책이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나아가 국민 의식까지 개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책 중 하나다. 정부가 마지막 단추 하나를 잘못 끼우지 않기를 바란다.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