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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회장 이동일)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이 이달 초 통권 400호를 발간했다.‘순국’은 독립운동가 등 애국지사들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한 취지로 1988년 창간됐다. 매달 130쪽 안팎의 분량으로 4000부가 발간돼 전국 주요 공공기관과 도서관, 독립유공자 및 보훈단체, 주민자치센터 등에 보급되고 있다.‘순국’은 2021년부터 국가보훈부 발간 지원을 받고 있으며, 2022~2024년 3년 연속으로 한국잡지협회로부터 ‘우수콘텐츠 잡지’로 선정됐다. ‘순국’은 명사나 전문가들의 시사 칼럼, 화제 인물 인터뷰, 학술 에세이, 이달의 순국선열 및 독립운동가, 국내외 독립운동 현장 탐방기 등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400호를 맞은 5월호에는 ‘명사칼럼’으로 김두식 전 주콜롬비아 대사의 ‘독도 영유권 문제와 우리의 대응전략’,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전 동아일보 사장)의 ‘베트민의 디엔비엔푸 함락이 불러 일으킨 식민지 해방전쟁 : 그 역사적 사변 70주년을 맞이해’가 실렸다. 또 ‘순국 특별 초대석’에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인터뷰가 실렸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년∼기원전 19년)가 쓴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그리스 고전의 ‘창조적’ 짜깁기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아이네이아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처럼 한동안 지중해를 방랑하며 신들에게 모진 괴롭힘을 당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호메로스의 또 다른 작품 ‘일리아스’에서 싸움을 포기하고 불타는 트로이에서 도망치는 아이네이아스를 로마를 건국하는 주인공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이다. 트로이를 멸망시킨 오디세우스가 아닌, 패배한 트로이인을 굳이 로마의 시조로 삼은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문화사학자 마틴 스푸너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로마가 그리스를 그저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리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로마가 원형(原型)에 해당하는 그리스 문화를 금과옥조처럼 지킨 게 아니라, 자기 것으로 창조적 변용을 가했다는 것이다. 최근 국가유산청의 ‘퓨전 한복’ 개선 방침을 둘러싼 논란은 문화 원형의 고수와 변용이라는 오랜 대립항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경복궁 앞 한복대여점에서 취급하는 퓨전 한복은 속치마에 철사 후프를 넣어 부풀리거나, 금박 무늬를 빼곡히 집어넣는 등 화려함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젊은층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앞다퉈 퓨전 한복을 입고 고궁에서 사진을 찍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하는 게 유행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16일 언론 인터뷰에서 “(퓨전 한복이) 실제 한복 구조와 맞지 않거나 국적 불명인 경우가 많다”며 “국가유산청이 앞장서 우리 고유의 한복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고 개선할 때”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경복궁 주변 한복점의 현황을 조사하고 있다”며 한복 착용자의 고궁 무료 관람 조건 변경, 우수 한복 대여업체 지원, 궁중문화축전 등을 통한 한복 고유성 유지 등의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온라인에서는 “전통 한복의 고유성을 지키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과 더불어 “개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춰 개량한 한복을 국가가 나서서 왈가왈부하는 건 문제”라는 반론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국가유산청 주최 ‘궁중문화축전’에 참여한 젊은 무형유산(무형문화재) 전승자의 목소리를 참고할 만하다. 다니던 은행을 관두고 3대째 방짜유기장(불에 달군 놋을 망치로 때려 기물을 제작하는 장인) 가업을 잇고 있는 이지호 씨(38)는 요강이나 대야 등 전통 유기제품 수요가 급감하자 현대적 디자인을 접목한 유기 식기와 수저, 테이블을 만들고 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무형유산이 계속 살아남으려면 ‘전통의 현대화’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메로스의 원작을 변용해 로마에 적용한 ‘아이네이스’를 짝퉁 취급하며 폄하하는 평론가는 거의 없다. 오히려 문화 접목과 변용을 통해 로마의 위대한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물론 전통 한복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하지만 젊은층의 기호가 가미된 퓨전 한복도 전통의 현대화 혹은 문화 변용의 또 다른 사례로 볼 여지도 있지 않을까.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을 계기로 문화유산 보존에 치우친 기존 정책 방향을 활용으로 확장하겠다고 발표한 국가유산청의 열린 자세가 아쉽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정경화의 바이올린 연주는 야구로 치면 ‘공을 끝까지 잡고 있는 투수’를 연상시킨다. 마지막 한순간까지 소리가 손가락을 떠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61 연주를 듣고 쓴 평이다. 스물아홉 살 때 야구 경기를 보다 문득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하루키다운 문장이다. 당시 재즈 카페를 운영하던 그는 그날부터 글쓰기를 시작해 첫 장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년)를 써내 군조 신인문학상을 받게 된다. 이 책은 덕질의 끝판왕 격인 하루키의 클래식 음반 에세이다. 그의 팬이라면 하루키가 음악(재즈, 클래식)과 야구에 얼마나 진심인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1Q84’(2009년)는 레오시 야냐체크(1854∼1928)의 ‘신포니에타’가 울려퍼지며 시작된다. 여자 살인청부업자인 주인공 아오마메가 ‘작업’을 하러 가면서 듣는 비장한 음악이다. 하루키는 약 60년에 걸쳐 소장한 클래식 레코드 1만5000여 장 가운데 전작(1권)에서 486장을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이보다 많은 590장을 다뤘다. ‘힘주는 걸’ 싫어하는 하루키 특유의 스타일로 명반에 대한 상찬뿐 아니라 ‘이런 게 왜 우리집에 있을까’라는 식으로 가볍게 접근한다. 자신이 수집한 티셔츠만으로 멋진 에세이를 완성한 ‘무라카미 T’(2021년)와 함께 보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해외여행에서 현지인과의 만남 만으로 그 나라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스위스인 남편을 만나 스위스 현지에서 거주 중인 저자는 스위스 사회와 문화를 체감하며 이 책을 썼다.한국인의 시선으로 스위스인들의 일상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일까. 저자는 이를 ‘엄격한 듯 따뜻한 매력’이라고 정의한다. 아이에게도 악수를 건네는 정중함, 눈비가 쏟아져도 외출하는 단순함, 노년이 돼서도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 등에서 그런 모습이 느껴진다는 것.저자는 딸을 키우면서 경험한 스위스 공동체의 배려 방식을 소개한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사람을 아끼는 문화가 스위스의 출생률이 떨어지지 않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저출생 문제가 심각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새로 이사온 사람에게 먼저 다가와 이름을 묻고, 친해지면 서로 품앗이해주는 문화도 인상적이다. 자연과 동식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스위스를 동경하는 내용만 있는 건 아니다. 촘촘한 줄 알았던 복지 및 육아정책 속에서 벌어진 어려움 등 저자가 겪은 여러 일화도 소개한다. 기존 여행서에서는 보기 힘든 보통의 일상을 통해 스위스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선 영조 대 양반 집안에 ‘묘마마(猫媽媽)’가 있었다. 길고양이를 여럿 키우면서 이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였다. 그가 죽었을 때 고양이 수백 마리가 고인의 집 주위에서 며칠 동안 울부짖었다. 조선 후기 문인 이규경(1788∼1856)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고양이 항목에서 다룬 묘마마는 지금의 ‘캣맘’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 시대에도 보금자리 없는 ‘길냥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캣맘이 있었던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 특별전에는 묘마마를 비롯해 고양이와 인간의 특별한 관계를 다룬 다양한 옛 문헌들이 소개돼 있다. 조선 숙종(1661∼1720)도 고양이의 묘한 매력에 빠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조선 후기 문신 김시민(1681∼1747)은 자신의 문집(동포집)에서 숙종의 고양이 사랑을 전하고 있다. 숙종은 부친의 묘소에서 우연히 발견해 궁으로 데려와 키우던 고양이 금덕(金德)이 새끼를 낳자 금손(金孫)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숙종은 수라상 고기를 남겨 두었다가 금손이에게 던져주고, 잠자리에 들 때도 자기 곁에 두었다. 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금손이는 숙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곡기를 끊는 등 주인에게 끝까지 충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을 뒤따르듯 20일 만에 죽은 금손이는 숙종의 무덤(명릉) 근처에 묻혔다. 그런가 하면 딸의 지극한 고양이 사랑을 걱정하는 부정(父情)도 눈길을 끈다. ‘너는 시댁에 정성을 다한다고 하거니와 어찌 고양이는 품고 있느냐. 행여 감기에 걸렸거든 약이나 지어 먹어라.’ 조선 효종(1619∼1659)이 셋째 딸 숙명공주(1640∼1699)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막 혼인한 어린 딸이 눈치 없이 고양이만 끼고 돌아 시댁 눈 밖에 날까, 감기로 고생할까 염려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읽힌다. 이번 전시에선 고양이를 그린 조선 시대 그림들도 선보인다. 조선에서 고양이는 장수를 상징해 자주 그려졌다. 고양이를 뜻하는 한자인 ‘묘(猫)’와 70세 노인을 뜻하는 ‘모(耄)’의 중국어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조선 화원 변상벽의 해학적인 그림이 눈길을 끈다. 전시는 8월 18일까지 열린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선 영조대 양반 집안에 ‘묘마마(猫媽媽)’가 있었다. 길고양이를 여럿 키우면서 이들에 비단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였다. 그가 죽었을 때 고양이 수백 마리가 고인의 집 주위에서 며칠동안 울부짖었다.조선 후기 문인 이규경(1788~1856)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고양이 항목에서 다룬 묘마마는 지금의 ‘캣맘’과 다를 바가 없다. 조선시대에도 보금자리 없는 길냥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캣맘이 있었던 것이다.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 특별전에는 묘마마를 비롯해 고양이와 인간의 특별한 관계를 다룬 다양한 옛 문헌들이 소개돼 있다. 조선 숙종(1661~1720)도 고양이의 묘한 매력에 빠진 이들 중 하나였다. 조선 후기 문신 김시민(1681~1747)은 자신의 문집(동포집)에서 숙종의 고양이 사랑을 전하고 있다.숙종은 부친의 묘소에서 우연히 발견해 궁으로 데려와 키우던 고양이 금덕(金德)이 새끼를 낳자 금손(金孫)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숙종은 수라상 고기를 남겨두었다가 금손이에게 던져주고, 잠자리에 들 때도 자기 곁에 두었다.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금손이는 숙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곡기를 끊는 등 주인에게 끝까지 충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을 뒤따르듯 20일 만에 죽은 금손이는 숙종의 무덤(명릉) 근처에 묻혔다.그런가 하면 딸의 지극한 고양이 사랑을 걱정하는 부정(父情)도 눈길을 끈다.‘너는 시댁에 정성을 다한다고 하거니와 어찌 고양이는 품고 있느냐. 행여 감기에 걸렸거든 약이나 지어 먹어라.’조선 효종(1619~1659)이 셋째 딸 숙명공주(1640~1699)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막 혼인한 어린 딸이 눈치 없이 고양이만 끼고 돌아 시댁 눈밖에 날까, 감기로 고생할까 염려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읽힌다.이번 전시에선 고양이를 그린 조선시대 그림들도 선보인다. 조선시대 고양이는 장수를 상징해 자주 그려졌다. 고양이를 뜻하는 한자인 묘(猫)와 70세 노인을 뜻하는 모(耄)의 중국어 발음이 같았기 때문. 이 중 조선시대 고양이를 특히 잘 그린 것으로 유명했던 변상벽의 해학적인 그림이 눈길을 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본을 둘러싼 사방의 바다는 모두 동포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에 왜 이런 풍파가 일고 소란이 일어나는 것인가.’ 태평양전쟁 직전 히로히토 천황(1901∼1989)이 지은 이 짧은 와카(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가 육군의 강력한 전쟁 의지에 맞서기 위해 시를 읊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전쟁 결의를 늦추려고 했을 뿐인지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이렇듯 천황제 국가 일본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론은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일본 황족으로 태어났지만 전후 미 군정에 의해 황적이 박탈돼 평민이 된 저자의 자서전이다. 전쟁 당시 15세로 일본 해군에 징집된 저자는 전후 도쿄 전범 재판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강경파 육군이 주도한 내각에 의해 전쟁 발발이 사실상 결정됐지만 이를 막지 못한 데에는 황실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시킨 결정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해운업계에서 퇴직한 후 일본 신사의 본거지인 이세신궁에서 대궁사(大宮司·신궁을 지키는 우두머리)를 지낸 저자의 발언인 만큼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원전 1세기 초기 신라(사로국) 수장급 무덤에서 중국 전한(前漢)시대 청동거울과 청동그릇이 출토됐다. 국내 초기 철기시대 무덤에서 두 유물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학계에선 이 시기 중국 전한과 사로국, 왜를 잇는 교역망을 보여주는 중요 자료라는 평가가 나온다. 8일 한국문화재재단에 따르면 경북 경주시 사라리 130호분 인근에서 발굴을 통해 덧널무덤(목곽묘) 2기와 널무덤(목관묘) 2기, 청동기 및 삼국시대 생활유구가 발견됐다. 이 중 덧널무덤 한 곳에서 청동거울 및 청동그릇 조각, 칠초철검(漆鞘鐵劍·옻칠을 한 칼집에 철검을 끼운 것), 칠기 등이 나왔다. 모두 초기 철기시대 당시 수장급 이상이 가질 수 있는 사치재다. 특히 피장자의 가슴 쪽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조각에서는 ‘承之可(승지가)’라고 적힌 한자 명문이 확인됐다. 이 같은 명문이 적힌 청동거울은 일본 후쿠오카의 다테이와 유적 무덤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다. 이로 미뤄 발굴팀은 이번에 발견된 청동거울이 중국 전한에서 제작된 청백경(淸白鏡)으로 보고 있다. 동경의 명문은 초나라 굴원이 쓴 책인 초사(楚辭)의 한 문장으로 분석된다. 무덤에서는 다른 청동거울인 성운문경(星雲文鏡) 조각도 나왔다. 발굴팀은 출토된 청동거울 조각의 형태와 곡률 등을 감안할 때 원래 지름이 약 17cm에 이르는 대형 거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정도 크기의 청동거울은 고대 중국의 왕이나 제후가 쓸 수 있는 예물이다. 이에 따라 기원전 1세기 사로국 수장이 철기 교역을 바탕으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청동거울을 받아온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 발견된 무덤과 앞서 1996년 확인된 사라리 130호분(기원후 1세기 추정) 모두 묘제가 덧널무덤으로 같은 데다 거리가 가깝고 부장품이 청동거울, 철검 등으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두 무덤의 시차는 30∼60년 정도로 이번에 발견된 덧널무덤의 조성 연대가 조금 앞선다. 이에 따라 사로국 수장의 권력 승계가 이뤄진 흔적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양수 국립청주박물관장(청동기 고고학 전공)은 “사라리 130호분에서 나온 청동거울은 한반도에서 자체 제작된 방제경(倣製鏡)”이라며 “사로국 수장이 중국 청동거울을 수입해 사용하다가 권력을 이어받은 수장대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으로 청동거울을 제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재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첫 회고록인 ‘변방에서 중심으로’(김영사)가 20일 발간된다.8일 김영사 출판사에 따르면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의 예약판매가 온라인에서 이날부터 시작됐다. 김영사 측은 “문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직접 쓴 책이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신간은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안보실 평화군비통제비서관, 평화기획비서관, 외교부 제1차관을 역임한 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구성됐다. 최 교수가 질문을 던지면 문 전 대통령이 답변하는 형식인 것으로 알려졌다.신간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도보다리 회동,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남북미 정상 판문점회동 등 문 전 대통령 재임기에 있었던 주요 외교 사안을 다룬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일본 수출규제 대응, 코로나 방역 과정에서 정책 결정 과정도 담겼다. 김 위원장, 트럼프 전 대통령,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등과의 물밑 협상 과정과 이들에 대한 문 전 대통령의 평가도 소개된다.회고록은 1장 ‘미국의 손을 잡고’, 2장 ‘균형외교’ , 3장 ‘평화 올림픽의 꿈을 이루다’ 등 총 13개장으로 구성됐다. 김영사는 “외교안보 성과뿐 아니라 아쉬움과 한계, 성공과 실패 요인, 정책에 대한 공과 판단을 솔직하게 기록해 외교안보의 교과서이자 사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높였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對中) 수출통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한 결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수준은 미국에 비해 수 년 뒤쳐졌다.”최근 지나 러몬드 미국 상무장관이 CBS와의 인터뷰에서 대중 수출제재 강화를 시사하면서 덧붙인 말입니다. 미국 반도체 제재의 핵심 타켓인 화웨이가 작년 8월 7나노 칩이 들어간 최신 스마트폰(메이트 60 프로)을 출시해 미국을 놀라게 한 ‘화웨이 쇼크’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됩니다. 미국은 화웨이가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며 미국산 기술이 포함된 부품, 장비의 중국 유입을 틀어막았지만, 화웨이는 보란듯이 미국의 예상보다 앞선 기술이 적용된 칩을 생산했죠.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는 미중 ‘반도체 전쟁’은 대만 이슈와도 얽혀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만 TSMC가 양안전쟁으로 가동을 멈추면 글로벌 경제에 치명타를 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중국 고립은 실현 가능하며, 중국의 기술발전 속도를 정말 늦출 수 있을까요.中 ‘글로벌 공급망’ 분리 어려운 이유요즘 미국의 대중 고립화 전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냉전시대 블록경제가 연상됩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각자 자신의 진영 내에서 무역을 벌이는 폐쇄적 경제구조를 운영했습니다. 예컨대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서유럽의 경제부흥을 이끌자, 소련은 코메콘(COMECON)을 중심으로 공산권 국가간 원조경제 체제를 구축합니다(북한은 자립경제 노선을 추구하면서 코메콘 가입을 거부)2차대전 직후 경제복구가 막 이뤄지는 시점부터 블록경제가 형성됐기에 미소 양 진영의 경제 분리는 역사적 뿌리가 깊었습니다. 이에 비해 중국은 1970년대 경제개방부터 시작해 2001년 WTO 가입에 이르기까지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 오랫동안 참여했기에 ‘디커플링(공급망 등의 분리)’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실제로 세계 경제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고도성장으로 나아간 배경에는 거대 생산지이자 시장 역할을 해 온 중국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만큼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미중은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는 얘기죠.美-동맹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그런데도 미국이 중국에 대해 ‘반도체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얼까요. 그것은 극소수의 기업들이 부품이나 소재를 독과점으로 공급하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반도체 제조 공정의 역사를 잠깐 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1947년 월터 브래튼과 존 바딘의 실험을 계기로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낸 반도체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최대한 많은 수의 트랜지스터를 올리기 위한 분투의 과정을 밟게 됩니다. 이른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개념인데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하는 트랜지스터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면서 정보(0 혹은 1의 2진수)를 전달하기에 얼마나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느냐에 따라 비용 대비 성능이 결정됩니다.이에 따라 최근에는 트랜지스터의 크기를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절반 정도까지 줄이면서 웨이퍼 위에서 이들을 잇는 미세 회로를 그리는 첨단기술(리소그래피·노광)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문제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이 미세 회로를 그리려면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10~100나노미터의 파장을 지닌 극자외선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려면 태양의 표면 온도보다 뜨거운 섭씨 50만 도의 플라스마 상태를 만드는 초고난도 공정을 거쳐야하기에 그 진입장벽이 매우 높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독점 생산하고 있습니다.이외에도 반도체 제조 소프트웨어는 미국과 독일에 소재한 3개사가 시장을 분점하고 있고,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는 삼성과 TSMC가 양분하는 구조입니다. 이처럼 반도체 장비, 생산, 소재 등에서 극소수의 기업들이 독과점 지위를 갖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 모두가 미국이나 그 동맹국(한국, 대만, 일본, 서유럽 등) 소속이라는 겁니다. 이는 미국이 동맹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 기술통제를 가할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실제로 최근 SK하이닉스가 중국 우시 생산공장에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를 배치하려고 하자, 미국 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압력을 넣었죠. 이는 생산성과 직결되는 문제였지만,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굴복해 SK하이닉스는 결국 장비 반입을 포기했습니다.이것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무기화 된 사례입니다. 일반적으로 각국이 경제교류를 통해 상호의존이 심화되면 전쟁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사국 간에 갈등이 생기면 경제, 기술적 상호의존을 오히려 상대를 압박하는 카드로 이용할 수 있죠. 현재 미중 간에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전쟁이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공급망 상호의존 美에 부메랑될 수도그런데 문제는 이 무기화된 상호의존이 미국에도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갖고 있는 최대의 무기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세계 최대 소비시장과 대만 침공 카드입니다. 트럼프 집권기부터 본격화 된 미국 정부의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해 미국 기업들이 우려를 표하며 규제 완화를 요구한 건 중국에서 당장 거둘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회사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는 정부 규제를 어기고 중국 기업(SMIC)에 제품을 판매한 혐의로 미 법무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죠.사실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있느냐는 고전적인 질문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꽤 있습니다. 아무리 미국 정부가 반도체 규제를 전방위로 가해도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가 얽혀있는 글로벌 공급망을 100% 통제하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 2020년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화웨이를 안보의 적으로 규정하고 각국 통신망 사업에서 화웨이 배제를 요구할 당시 영국 정부가 이를 거부한 게 대표적입니다. 당시 로버트 해니건 정부통신본부(GCHQ·영국 정보기관) 국장은 “서구가 중국의 기술발전을 억누를 수 있다며 스스로를 속이는 대신에, 우리는 미래에 중국이 기술강국이 되는 걸 받아들이며 그 위험을 지금부터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피력했죠.마치 미국이 2차대전 말기에 핵보유국이 되고서 혈맹인 영국에도 핵기술 통제를 실시했지만, 결국 소련은 물론 최근 북한까지 핵개발에 성공한 것처럼 기술개발을 영원히 틀어막을 순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겁니다.반도체 강국 연 ‘美 기술이전’하지만 미국과 동맹국들 간에 균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근미래에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미국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는 미국에 이어 반도체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 한국, 대만의 역사적 사례를 훑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국가들 모두 정부와 기업의 부단한 노력이 빛을 발했지만, 미국의 기술이전 없이 퀀텀 점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죠.예컨대 삼성전자가 D램 시장의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미국 반도체업계가 일본의 덤핑 판매로 위기에 처하자, 그 대항마로 한국으로 기술이전을 수용한 영향이 컸습니다. 실제로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1983년 2월 8일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할 당시 미국 마이크론과 64K D램 설계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죠.미국 반도체업계 대부인 고든 무어 인텔 CEO가 “가치 있는 반도체 기술을 외국에 쉽게 넘겨준다”고 우려했지만, 일본의 공세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마이크론의 기술이전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미국 정부의 반(反)덤핑 압박에 1986년 일본 정부가 D램 대미 수출량을 제한한 것도 삼성이 반도체 신화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습니다.여기에서 흥미로운 건 미국의 대대적인 수출통제로 화웨이의 스마트폰 출하량이 2020년 2분기 세계 1위(5580만 대)에서 이듬해 2분기 8위(980만 대)로 급락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중국 정부가 제대로 된 보복에 나서지 않았다는 겁니다.중국 정부는 자국 안보를 해치는 외국기업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기업 명단(unreliable entity list)’에 올리겠다고 공언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벗어나 중국 기업들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결국 정리하면 ①냉전시기 소련과 달리 중국은 1970년대부터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에 편입된데다 ②중국이 세계 최대 소비시장을 갖고 있는 점 ③이로 인해 미국 반도체 업계 내에서 혹은 미국과 동맹국 간에 대중 제재를 둘러싼 균열이 일어날 경우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하지만 ①극소수 기업들이 독과점을 유지하고 있는 반도체 공정의 특성 ②이들 독과점 기업들이 모두 미국과 동맹국들의 수중에 있다는 점 ③일본, 한국, 대만 등의 사례에서 보듯 반도체 기술발전을 위해선 미국으로부터 기술 이전이 필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미국의 수출통제를 뚫고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됩니다.단, 이는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동맹의 가치를 경시하는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예상 외의 변수가 생길 지도 모를 일입니다.[참고 문헌]-크리스 밀러, 노정태 역 〈칩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2023년, 부키)“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원전 15세기 나일강 범람기의 테베 한 마을. 어느 농부가 집에 들어가려다가 순간 멈칫한다. 피라미드 공사에 농부들을 징발하려고 가가호호 방문하던 관리를 멀리서 발견한 것. 그는 본능적으로 길을 우회해 집에 몰래 들어간 뒤 자신의 아내에게 속삭인다. “남편이 요양차 먼 친척 집에 갔다고 말하시오.” 고대 이집트에서 1년은 나일강의 범람을 기준으로 세 시기로 구분됐다. 그중 나일강이 넘쳐 밭이 물에 잠기는 7월 중순에서 11월 중순까지는 힘든 농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파라오의 나라는 백성들을 마냥 놀리지 않았다. 농사 대신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나 신전을 건설하는 노역에 이들을 동원한 것. 백성들은 파라오와 귀족들의 착취에 불만을 품었겠지만,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도 신으로 군림하는 파라오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순종했다. 이 책은 미국 고고학자인 저자가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년∼기원전 1069년)를 배경으로 평범한 민초들의 삶을 1년 단위로 재구성한 팩션 역사서다. 독자들에게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농부, 어부, 옹기장이, 미라 제조 장인 등 다양한 직업의 가상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지배층의 정치와 문화, 인식 등 주류 질서에 천착해온 기존 역사·고고학계의 연구가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관과 문화 등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최근 바뀌고 있는 것과 맞물려 주목할 만한 책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중국의 경제개방 정책으로 고도성장을 이끈 덩샤오핑부터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 지도자들의 정체성을 형성한 공통 요소를 하나만 꼽는다면 문화대혁명일 것이다. 이들은 문혁의 틈바구니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살아남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덩샤오핑의 무력진압 결정에는 문혁 당시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학생운동의 트라우마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를 계기로 문혁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로 중국 정치와 문화의 상관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문혁이 중국 역사와 문화에 끼친 심대한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문혁은 부유한 자본주의보다 가난한 공산주의를 선호한 마오쩌둥의 이상주의가 낳은 집단광기였다.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은 행정을 이끌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온건한 시장주의 개혁이 진정한 공산주의 혁명과 유리돼 있다고 봤다. 이때 대중 동원의 천재였던 마오의 눈에 10대 청소년들이 들어 왔다. 이들은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이 별로 없었기에 행동주의에 쉽게 경도될 수 있는 세대였다. 결국 마오의 조반유리(造反有理·모든 반항에는 나름의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는 뜻) 선동에 고무된 어린 홍위병들이 들고일어나 덩샤오핑 등 온건파 지도부를 축출한다. 저자는 당시 서구에서 들불처럼 번진 68세대의 반항적 대중문화가 마오쩌둥주의 광풍과 유사했다는 흥미로운 견해도 덧붙였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나폴레옹은 해외 원정을 떠날 때도 전담 사서가 딸린 ‘이동식 서고’를 끌고 다녔다. 교전국의 군사뿐 아니라 역사, 지리, 종교, 법제 등을 다룬 수백 권의 책을 전장에서 틈틈이 읽기 위해서였다. 영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앤드루는 “나폴레옹의 천재적 상상력은 책에서 나왔으며, 이것이 그가 비밀 정보보다 책에 더 집중한 이유”라고 말한다.(‘스파이 세계사’·2021년·한울) 나폴레옹 전쟁으로부터 약 200년이 흐른 요즘 유튜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의 시청이 늘면서 책을 외면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텍스트가 주는 상상력은 여전히 심오하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는 23일 국내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모든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삶을 조금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고,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독서율이 떨어지는 건 세계적 추세지만 유독 한국의 하락 속도는 가파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성인 독서율(1년간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을 1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은 2015년 67.4%에서 2019년 55.7%로 4년 새 11.7%포인트 급락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같은 기간 72.0%로 변동이 없었다. 급기야 지난해 한국의 성인 독서율은 역대 최저인 43.0%로 떨어졌다. 주요국 중 한국의 독서율이 유독 낮은 데에는 워라밸, 스마트폰 보급 속도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정부와 출판계의 분발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예컨대 정부의 ‘독서문화 진흥 기본계획’이 도서 보급 등 출판사, 작가 지원에 치우쳐 독서문화 조성과 같은 수요자 중심의 정책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이와 관련해 지자체들의 ‘한 도시 한 책’ 운동을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서울 성북구는 지역 도서관들을 중심으로 독서 동호회를 활발히 운영하는 한편, 온라인 독서 플랫폼을 통해 작가와의 만남이나 전시회 등 다양한 도서 추천 행사를 벌이고 있다. 책장 펼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줄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정부 못지않게 출판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잠재력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독자층을 넓히려는 노력을 더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 요즘 한국 소설 시장이 2030 여성 독자층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 세태와 무관치 않다.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고 새로운 책을 만들어 내면서 이 사회의 지성과 문화를 선도하는 희열을 느꼈다”고 자서전에 쓴 고(故) 박맹호 민음사 창립자의 고백을 곱씹어 봐야 하지 않을까.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떨어뜨리는 ‘인세(판매량 정보) 투명성’ 문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021년 출판계의 불투명한 인세 정산을 놓고 논란이 불거졌지만, 여전히 작가들은 자신이 쓴 책의 판매량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출판유통통합전산망 추진을 놓고 문체부와 출판계가 갈등을 벌이면서 온전한 집계가 이뤄지지 못해서다. 최근에는 출판 예산 삭감을 놓고도 양측의 갈등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독서율 역대 최저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정부와 출판계가 소모적 논란을 멈추고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이란의 이스라엘 직접 공격은 중동지역의 판도를 뒤흔들 ‘게임 체인저’다.”수전 멀로니 브루킹스연구소 부소장이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지금껏 하마스, 헤즈볼라 등 이스라엘 주변 무장세력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때린 이란의 ‘그림자 전쟁’이 직접 공격으로 바뀌면서 중동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우려한 겁니다.보복, 재보복에 나선 이스라엘과 이란이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갔지만 공격 양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언제라도 확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핵심 원유 공급지인 중동지역 전쟁은 세계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한국도 강건너 불구경할 순 없는 상황이죠.세계 전사(戰史)에서 대표적인 확전 모델로 꼽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과 비교 분석함으로서 향후 전개를 예상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겠습니다.‘세력균형’의 지각 변동1차대전은 당사국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낳은 전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간 전쟁으로 시작됐지만 불과 1주일도 안 돼 세계대전으로 확전된 전무후무한 사례입니다.1차대전의 원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3국동맹) vs 영국-러시아-프랑스(3국협상)의 세력균형이 발칸 반도에서 깨지면서 발발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그 발단은 1871년 통일 이후 독일제국의 부상이었죠. 독일의 부상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안보위협을 키우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됐던 세력균형이 무너진 겁니다.물론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구슬려 프랑스를 고립시켰던 비스마르크의 절묘한 외교술이 빌헬름 2세 집권과 더불어 무력화된 영향도 있었습니다. 독일 국민들의 제국주의 열망에 영합한 빌헬름 2세의 팽창주의 외교 노선이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 공세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최근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도 사우디, 이집트, 튀르키예, UAE 등 수니파 vs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예멘 등 시아파 국가들의 세력균형이 깨졌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로 사우디-이스라엘 수교가 추진되면서 중동에서 두 적대적 블록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 겁니다. 이란으로서는 철천지 원수이자 군사강국으로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이 사우디에 가세하면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다고 본 거죠.실제로 미국과 사우디는 이란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수니파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국교 수립을 지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2020년 9월 UAE, 바레인과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국교를 수립한 데 이어 수단, 모로코와도 수교했죠. 1차대전을 촉발시킨 세력균형 붕괴가 중동에서도 이미 진행 중이며,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을 계기로 수니파 vs 시아파 국가들 간의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겁니다.소수민족 변수의 개입1차대전의 서막을 연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전쟁은 그보다 앞서 벌어진 두 차례의 발칸전쟁으로 부각된 민족주의가 핵심 변수였습니다. 오스만터키 제국의 약화로 발칸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슬라브계 민족이 살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 게 화근이었죠. 슬라브계 국가였던 세르비아, 러시아가 독일을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를 축출하고자 한 겁니다.이번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도 이란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지원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1차대전의 경로와 유사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영토, 민족의 문제는 21세기에도 강한 휘발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분쟁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됩니다.더구나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은 이슬람의 반유대주의나 수니파-시아파 갈등과 같은 종교갈등의 구조까지 안고 있다는 점에서 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패권국의 애매한 태도로이드 조지(1863~1945) 영국 총리는 1차대전 후 펴낸 전쟁 회고록에서 외무상이던 에드워드 그레이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전쟁을 일으킨 요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전쟁 관련국들 간에 갈등이 점차 높아지던 1914년 7월 위기 국면에서 영국이 프랑스, 벨기에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게 독일의 오판을 불러왔다는 겁니다. 만약 1차대전 당시 패권국 위치에 있던 영국이 단호한 개입 의지를 밝혔다면 독일이 공세적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라는 얘깁니다.지금 중동에서의 확전 여부도 사실 패권국 미국의 움직임이 중요한 변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란이 지금껏 눈엣 가시 같은 이스라엘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고, ‘그림자 전쟁’을 수행한 건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죠.그런데 문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미중전쟁에도 대비해야하는 미국이 중동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비 지원을 위해 미 의회를 가까스로 설득할 수 있었죠. 얼마 전 바이든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이란 공격을 도울 수 없다”고 선을 긋기도 했죠. 향후 미국의 수세적 입장이 이란의 군사 모험주의를 자극할 수도 있을 겁니다.신호에 대한 오인1차대전이 1주일도 안돼 세계대전으로 확산된 데에는 1914년 7월 위기 막바지에 러시아가 실시한 군 동원령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1914년 7월 25일 러시아 황제와 군수뇌부는 독일에 대한 무력시위 의도로 ‘예비 동원령’을 발동했는데 이것이 3국동맹의 위협인식을 크게 높인 겁니다.실제로 바로 다음 날 오스트리아가 동원령을 내리고 이틀 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격합니다. 이에 러시아가 다음 날인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내리자, 8월 1일 독일과 프랑스가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번지게 되죠.사실 빌헬름 황제 등 독일 수뇌부는 러시아의 군사력이 더 커지기 전에 전쟁을 벌이자는 군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동원령 소식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이처럼 국가간 갈등에서 신호에 대한 오인이 확전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거듭된 상호 보복 공격도 어느 순간 오판을 불러와 자칫 확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힘들 겁니다.국내 정치적 압력1차대전 당시 독일과 러시아 모두 국내에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팽창주의 여론의 압박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1890년 독일이 영국과 ‘헬고란드-잔지바르’ 조약을 맺고 전략 요충지인 헬고란드(함부르크 북서쪽의 섬)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 식민지(잔지바르)를 양보하자,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반발 여론이 빗발쳤습니다.현재 중동도 국내정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반미 이슬람혁명이 국시인 이란은 이스라엘의 보복을 외면할 경우 체제 정당성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퇴진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경론에 치우칠 가능성이 높죠.결국 정리하면 ①사우디-이스라엘 수교 추진으로 중동지역 패권을 둘러싼 세력균형이 깨진 상황과 ②소수 민족(팔레스타인)을 둘러싼 개입 ③우크라이나 전쟁, 미중갈등 등 여러 전선을 앞둔 패권국 미국의 한계 ④보복-재보복의 악순환이 낳을 수 있는 신호에 대한 오인 ⑤이스라엘과 이란의 국내정치 압력 등이 1차대전이 발발해 확전된 과정과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다행히 이스라엘, 이란 양측의 무력대응이 현재 소강 상태로 들어갔지만 이런 변수들이 한꺼번에 맞물리면 확전 국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상황을 예의주시해야할 듯 합니다.[참고 문헌]-박건영 〈국제관계사〉 (2020년, 사회평론아카데미)-이내주 〈제1차 세계대전 원인 논쟁: 피셔 논쟁 이후 어디까지 왔는가?〉 (2014년, 영국연구 32호)-이장훈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의 이면에 담긴 국제정치 함수〉 (월간중앙 2023년 11월 17일)“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금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까. 미국은 타이베이를 지키기 위해 워싱턴에 대한 핵공격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까. 역으로 대만 정치권에서 반중세력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을 중국은 계속 묵인할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이란 공습이 이어지면서 ‘전쟁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극심한 미중 갈등과 맞물려 양안전쟁 발발 시 한반도에 미칠 영향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현재 세종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신간에서 태평양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양안전쟁이라는 세 가지 전쟁을 들여다보며 강대국의 현실주의 논리를 분석하고 있다. 수많은 전쟁 중 이 세 가지를 꼽은 건 강대국 간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이 전쟁 발발의 원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진에 따른 러시아의 위협 인식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양안전쟁의 성패는 미중의 결의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어느 쪽이 더 많은 고통과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느냐가 전쟁 수행의 의지를 결정한다는 것. 결국 대만을 영토 문제로 접근하는 중국이 물러설 가능성이 낮다고 볼 때, 미국이 대만을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각오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얘기다. 이에 따라 미국이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란 현실주의 논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일본 등 적성국 출신 거주자들을 강제 수용할 수 있는 행정명령에 서명한다. 이에 따라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 혹은 일본인 체류자들이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애리조나 등에 건설된 수용소로 이주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 중이던 저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미국을 속속들이 잘 알던 그는 자신의 조국이 패전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전쟁의 명분도 옳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일본으로 귀환선 탑승과 종전까지 안전한 미국 수용소에서의 거주”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주저없이 귀국을 결정했다. 일본의 가족과 친구가 자신의 ‘나라’이기에 그 나라가 패배한다면 자신도 그쪽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이 책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반전 운동가였던 저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본 회고록이다. 그는 종전 후 마루야마 마사오 등과 함께 1946년 ‘사상의 과학’을 창간하고 반전 운동을 벌였다.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9조 모임’에 이어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도 나섰다. 그랬던 그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징집돼 해군 군속으로 신문을 제작해야 했다. 그는 “62년이 지난 지금 돌아봐도 (귀국을) 후회하지 않는다. 희미하지만 그 자체로 흔들림 없는 사상이란 것도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미일 양국이 중국의 안보위협에 맞서 주일미군 사령부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주일미군 사령관을 4성 장군으로 격상하고, 주일미군의 작전지휘 기능을 강화해 일본 자위대와의 일체화를 가속화하겠다는 겁니다. 얼핏 보면 한미 연합사령부를 지휘하면서 전시 작전통제권을 쥔 주한미군사령부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주한·주일미군이 동아시아에 주둔한 미국 군사력의 양대 축임을 감안할 때 주일미군 지휘체계의 변동은 주한미군에도 직접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주한·주일미군의 변화는 한반도 안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죠. 한국전쟁 이후 약 70년에 걸친 주한·주일미군의 역사를 통해 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의 파장을 짚어보겠습니다.주한미군 철수 둘러싼 한미갈등의 역사한국전쟁을 계기로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제4조(‘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에서 주한미군 주둔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전쟁에 연루될 걸 우려한 미국은 당초 동맹조약 체결에 극히 부정적이었지만, 미소 냉전 국면에서 첫 열전으로 발화한 한국전쟁이 이런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었죠.이승만 대통령이 집요하게 요구한 북한 침략시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이 조약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전방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가 인계철선(引繫鐵線·수류탄 등을 폭발시키는 철선) 기능을 발휘했습니다(이는 노무현 정부에서 동두천 등 전방의 주한미군 기지를 후방으로 이전하면서 약화되기는 했습니다)주한미군은 1950년대에 32만5000명에 달했지만, 미중 데탕트와 탈냉전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규모가 줄었습니다(2020년 기준 약 2만8500명) 중국과의 데탕트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가 가능해졌다는 판단과 더불어 막대한 재정적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죠. 문제는 1960~70년대 북한의 안보위협을 둘러싼 한미 간 인식이 서로 달라 주한미군 감축을 놓고 양측이 적지 않은 갈등을 벌였다는 겁니다.예컨대 1960년대 초 존슨 행정부는 주한미군을 9000명가량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한국 정부와 협의에 들어갔습니다. 안보불안에 휩싸인 박정희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했는데, 1965년 예기치 않은 베트남전 확전이 숨통을 틔워주게 됩니다. 존슨 행정부가 지상군 증원을 위해 한국군 파병을 요청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막을 수 있는 지렛대가 한국에 생긴 거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열흘간 미국을 방문해 베트남 파병을 조건으로 주한미군 병력 유지와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중요한 경제적 토대가 마련된 겁니다.미국의 주한미군 감축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특히 중국과 데탕트를 추진한 닉슨 행정부는 한국의 강한 반발에도 1970년 5월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철수는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이고, 1개 사단 이하 병력부터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6월 말까지 주한미군 1만8000명이 감축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절치부심 끝에 핵개발을 포함한 자주국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소련 붕괴에 따른 탈냉전도 주한미군 감축의 요인이 됩니다. 1990년 4월 미 국방부는 10년에 걸쳐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의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을 의회에 제출합니다. 13만5000명의 아시아 주둔 미군 중 1단계로 3년간 최대 1만5000명을 줄이기로 했는데,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주한미군 6987명, 주일미군 4773명이 각각 본토로 철수했습니다.‘주일미군-자위대 일체화’ 추구한 일본노무현 정부 들어 ‘자주파’의 득세와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 변화가 맞물리면서 한반도 방위에 주력하던 주한미군의 성격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한미동맹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높이겠다는 자주파의 주도로 주한미군의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을 추진하는 동시에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있던 전방 미군부대를 평택, 대구 등 후방으로 이전하면서 미군의 인계철선 기능이 약화된 겁니다이는 주한미군을 한반도 붙박이에서 벗어나게 해 동아시아 전역에서 ‘작전 기동군’으로 활용하고자 한 미국의 국방전략에 부합했죠. 미국의 가려운 등을 한국이 알아서 긁어준 셈입니다.이 과정에서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미군 훈련 과정에서 여중생 2명이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팽배하진 반미감정이 전작권 전환 논의에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미국은 2004년 주한미군 전력의 3분의 1과 주독미군 2개 사단을 철수한 결정에 한국과 독일 내 반미정서가 한 요인이었음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주한미군의 성격이 동아시아 역내의 작전 기동군으로 바뀌면서 2011년부터 해외 연합훈련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그해 3월엔 동일본 대지진 지원을 위해 U2 정찰기를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이어 2015년부터는 다연장 로켓(MLRS) 대대와 미 2사단 여단전투단, AH-64 공격헬기 대대 등 주한미군 주요 전력이 순환배치 형태로 한반도와 미국 본토를 드나들기 시작하죠.반면 일본의 대응은 한국과는 반대였습니다.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일체성(통합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 겁니다. 한국과 달리 자율성보다는 안보를 택한 것이죠. 이는 ‘글로벌 전략 기동군’으로서 주일미군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미국의 군사전략과 맞물리게 됩니다.사실 전후 평화헌법에 따라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하도록 규정한 자위대의 전수방위 원칙이 오랫동안 주일미군과의 일체화에 걸림돌이 됐습니다. 실제로 1978년 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에선 소련의 군사위협에 맞서 자위대와 주일미군 간 역할 분담에 중점을 뒀죠.그러다 소련이 무너지고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면서 하나의 전환점이 마련됩니다. 1997년 미일이 ‘신(新)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발표하고 양국의 작전 영역을 한반도, 대만 등 주변지역으로 확대한 겁니다.2000년대 들어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자, 미일은 2006년 ‘주일미군 재편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합니다. 이에 따라 미 워싱턴주에 있던 육군 1군단사령부를 일본 자마기지로 옮겨 유사시 아태지역에서 미일 육군의 공동 작전사령부로 임무를 수행토록 합니다. 이어 미일 공군의 통합작전 능력을 높이기 위해 일본 항공자위대를 주일미군 5공군사령부가 있는 요코다 기지로 이동시키죠.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미일 통합 미사일방어사령부 격인 ‘공동통합운용조정소’도 새로 만듭니다. 이는 주일미군을 중앙아시아부터 동해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는 광역사령부로 격상시키고자 한 미국 국방전략의 일환이었죠.미국과의 안보동맹에서 자율성을 추구하며 전시작전권 반환을 추구한 한국과는 반대로 일본이 주일미군과의 일체화를 추진한 차이는 왜 발생했을까.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자주파 득세 등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 정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이와 함께 한국전쟁 발발로 미군 주둔이 이뤄진 한국과,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해 전수방위에 국한된 일본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한일은 역사적으로 국방정책의 논리적 근거가 서로 달랐다”며 “애초부터 한미연합사 체계를 갖춘 한국은 자주파가 등장해 주한미군과의 분리를 고민한 반면, 일본은 보수파가 집권할 때 주일미군과의 통합을 고민했다”고 분석했습니다.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 향후 파장은주일미군사령부 강화 방침은 주한·주일미군의 ‘상호 보완성’이란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군 병력 위주로 구성된 주한미군(2만8500명)과 해·공군 위주의 주일미군(5만5600명)을 결합하면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갖춘 완전체가 되기 때문입니다.이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에서 중복에 따른 비효율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편제라고 봐야합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역내에서 군사위협이 발생할 때 주한·주일미군이 함께 운용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실제로 미국은 탈냉전 이후 주한·주일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대하기 위해 작전지역을 확장하며 연합훈련의 강도를 높여왔습니다. 육해공 합동훈련부터 인도주의 지원, 재난재해 및 테러 대응,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훈련을 망라하고 있죠. 미국의 전통 우방인 호주, 캐나다까지 끌어들여 중국을 포위하는 형국입니다.이와 관련해 미국의 관점에서 주일미군의 역할 내지 전략적 위상이 주한미군보다 사실상 상위에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해외 미군기지는 ‘전력 투사력’ 기준으로 ▲대규모 전력을 원거리로 보낼 수 있는 1급 전력투사 근거지(PPH·Power Projection Hub) ▲장기 주둔 사령부가 있는 2급 주작전기지(MOB) ▲소규모 부대나 순환부대를 위한 시설이 있는 3급 전진작전기지(FOS·Forward Operating Sites) ▲상주시설은 없고 유사시 병력 배치의 법적 근거만 있는 4급 협력적 안보지역(CSL·Cooperative Security Locations)으로 나뉘는데 주일미군은 1급 PPH로 주한미군은 2급 MOB로 각각 분류됩니다.이에 따라 중국의 대만 침공과 같은 역내 안보 위기가 발생할 때 주일미군이 전투부대로, 주한미군은 지원 혹은 증원 부대나 병참기지로 활용될 거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일미군 사령부 강화는 한반도나 대만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미군과 자위대의 일체성을 강화해 신속히 전력을 이동 배치하는 등 대응력을 높이려는 포석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선 동맹에 비용 전가를 앞세운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주일미군 강화를 주한미군 감축의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대만 위기 등과 맞물려 미일의 주일미군 강화 움직임을 우리가 면밀히 살펴봐야하는 이유입니다.[참고 문헌]-임기훈 〈탈냉전기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역할 변화〉 (2021년, 한국과 국제정치 37권 4호)-마상윤 〈미완의 계획: 1960년대 전반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 (2003년, 한국과 국제정치 19권 2호)-FT 〈US and Japan plan biggest upgrade to security pact in over 60 years〉 (2024. 3. 24)“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수련의를 갓 마친 영국 청년이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떠난다. 그는 유럽대륙과 중동을 거쳐 남아프리카로 향하더니 이내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한다. 그러곤 호주와 동남아시아, 인도를 찍고 중국으로 향한다. 장장 6년에 걸쳐 75개국, 8만6000여 km를 자전거로 내달린 저자의 장구한 여정이다. 그 사이 자전거는 타이어 26개, 체인 14개, 페달 12세트를 갈아치워야 했다. 이 책은 런던 세인트토머스병원 응급의인 저자가 쓴 여행 에세이이자 의학 에세이다. 단순히 여행지에 대한 감상이나 고생기만 나열한 게 아니라, 의사로서 바라본 세상의 풍경이 그득 담겼다. 세계 각처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만난 병자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치안이 불안하다며 초라한 행색의 그에게 다가와 에스코트를 자청한 경찰관, 아무 조건 없이 음식과 방을 내준 주민 등 풍경만큼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영국인으로서 서구의 제3세계 착취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1990년대 후반 탈레반이 하자라족을 고문하고 강간한 데 대해 서방 평론가들이 ‘부족 간 갈등’으로 간단히 정리하는 건 비겁하다는 것. 저자는 “그런 해석은 강대국들이 아프가니스탄 내 일부 세력만을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증오를 부추기고 분쟁을 격화한 문제를 슬쩍 피해 간다”고 썼다. 여행을 끝내고 병원에 돌아온 그가 의사의 역할은 단지 질병을 진단하는 게 아니라, 환자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고 언급하는 대목은 최근 의대 정원 갈등과 맞물려 곱씹게 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세기 중후반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 멜버른, 남아공 트란스발에서는 골드러시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금광 개발의 이면에는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중국인 노동자 착취가 있었다. 중화를 자처한 청나라가 갑자기 반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서구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 중국인들이 급속도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인 저자는 신간에서 19세기 골드러시에 동원된 중국인 이주자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당시 앵글로색슨 백인들은 중국인 이주자들을 ‘쿨리’라고 부르며 낮은 임금으로 혹독하게 부렸다. 그러면서 호주 정부가 이른바 ‘중국인 보호지’를 지정한 것처럼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분리주의 정책을 폈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유색인종을 분리해야 불필요한 갈등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초대 주지사를 지낸 존 비글러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중국인들이 백인 광부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며 선동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 같은 시노포비아(sinophobia·중국 혐오)가 최근 미중 갈등과 맞물려 새로운 형태로 부활했다고 말한다. 단, 19세기 중국이 반식민지 상태였다면 21세기 중국은 주요 2개국(G2)로 부상하며 서구의 우려를 자아냈다는 차이점이 있다. 서구와 다른 문명의 부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는 19세기 ‘중국인 문제’를 다룬 서구인들의 차별적 인식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본이 과거를 사과하지 않는다는 기성세대의 인식을 젊은 세대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 12일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이 기자간담회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박 이사장은 “50대 이상 기성세대는 살아온 길이 굉장히 험악했기 때문에 자기 연민, 한(恨)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인 영국과 아일랜드를 거론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든 걸 영국 탓을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는 것. 그는 “그런데 아일랜드가 경제 발전을 하더니 2000년대 초반 여론조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잘 통하는 나라가 영국’이라고 답할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아일랜드의 경제가 발전하고 민도(民度)가 성숙하면서 영국과 화해했듯, 10대 경제대국이 된 한국도 일본에 사과를 강요하지 말고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역사학계는 박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해 이를 반박할 수 있는 학술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의 수장이 “일본에 사과를 그만 강요하자”는 식의 역사 인식을 공개적으로 밝힌 건 재단 설립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단 설치의 근거법인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조는 ‘이 법은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 문제 및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장기적·종합적인 연구 분석과 체계적·전략적 정책 개발을 수행함으로써 바른 역사를 정립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 및 번영의 기반을 마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박 이사장은 간담회에서 자기주장의 근거로 이 조문 뒷부분의 ‘평화 및 번영’만 내세웠을 뿐, 앞부분의 ‘동북아 역사 문제 및 독도 사항에 대한 정책 개발’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22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종군위안부’ 표현을 없애고 ‘강제징용’ 피해를 희석시키는 내용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회고록에서 “일본은 과거 몇 번이나 사과해왔다. ‘여러 차례 사과를 시켰으면 이제 됐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썼다. 일본 주류의 과거사 인식은 여전히 사과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학문의 자유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장으로 장관급 예우를 받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공적인 발언은 다르다. 사실 이번 논란은 석 달 전 뉴라이트 성향이 강한 박 이사장이 임명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앞서 박근혜 정부 때도 뉴라이트 학자가, 문재인 정부에선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 선언을 한 진보계열 학자가 각각 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돼 ‘코드 인사’ 논란이 일었다. 미중 갈등, 북핵 위기와 맞물려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서 한미일 3각축이 중요하다는 현 정부의 방침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 인식은 국제 정세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역사나 인권 등의 이슈에서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갈릴 수 없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