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

서영아 본부장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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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100세 시대를 생각합니다.

sya@donga.com

취재분야

2024-10-22~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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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는 정말 숫자일 뿐”…글쓰는 71세 환경미화원 할머니의 행복론[서영아의 100세 카페]

    ‘새벽에 일어나 정적을 깨기 위해, 더 솔직히 말하자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TV를 켠다. 귀가 아직 가지 않았다. TV 속 말소리, 음악소리 다 들린다. TV를 끄고 글을 쓴다. 손가락도 아직 가지 않았다. 혼자 피식거리며 때로는 눈물 찔끔거리며 노트 여백을 채워간다. 잘하고 있어, 연홍아! 셀프 칭찬도 하면서.’(‘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에서)1952년생 정연홍 씨는 현역 환경미화원이다. 매일 오전 8시 반까지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로 출근해 오후 3시 반까지 청소 일을 한다. 이곳에서만 10년 넘게 일했고 얼마 전 소속 용역업체로부터 10년 근속상과 상금도 받았다. 일은 생계를 위한 것이지만 일상의 기쁨과 감사의 원천이기도 하다.“내 손길과 발길로 깨끗해지는 아파트는 제 성역 같아요. 20층 넘는 건물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돈도 벌고 운동까지 하니 얼마나 좋아’라며 웃곤 하지요.”이뿐인가. 오가며 마주하는 동료, 동네 사람들과 건네는 가벼운 인사, 웃는 얼굴은 삶이 그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첫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대경북스)를 냈다. 갑자기 듣게 된 ‘작가’ 호칭이 쑥스럽지만 행복하다. 책 서두에 본인이 표현했듯 ‘71세 나이에 글 쓰고 일을 하니 제법 찬란한 삶을 살고 있는 할머니’다. 책은 소박한 분량과 내용의 에세이집인데, 묘하게 힐링과 격려를 전해준다. 정 씨의 인생 2막 스토리를 듣기 위해 17일 대구의 일터로 찾아갔다. e메일로 책 출간 소식을 알려준 딸 김현아 씨(46)가 인터뷰를 돕기 위해 경기 수원에서 달려왔다.55세 전업주부의 가출, 홀로서기정 씨의 인생 무대는 17년 전 그날 밤 전과 후로 나뉜다.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왔던 삶을 내려놓고 오롯이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했다. 딸 김 씨의 회상이다. “새벽 2시쯤에 엄마가 좀 와달라고 연락을 했어요. 남편과 함께 가봤더니 집을 나가겠다고 하셔서 반대했어요. 이기적인 얘기로 들리겠지만 ‘지금껏 참아왔는데 조금만 더 참아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했지요. 한편으로는 ‘잠시 이러다가 그만두시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결국 정 씨는 집을 나왔다. 처음 한달은 여관방에서, 그뒤 1년은 딸 내외의 18평 신혼집에서 지낸 뒤 월세방을 얻어 독립했다. ―그런데 왜 집을 나가신 건가요. 책 내용만으로는 도무지 모르겠던데요.‘그냥 부부간 성격이 맞지 않았다’며 넘기려는 정 씨 대신 딸 김 씨가 답한다.“집에서 엄마는 존중받지 못했어요. 옛날 분들 그런 경우 많잖아요. 가족을 위해 헌신만 하셨죠. 엄마는 늘 표정이 굳어 있었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9명 대식구의 살림을 해야 했으니 삶의 부담이 너무 심하셨죠. ” 가족에겐 갑작스러웠지만 정 씨로서는 오래 생각했던 거사였던 듯하다. “딸 시집도 보냈고 나머지 식구들도 모두 제 갈길 찾아갔어요. 남은 건 아들 둘인데 막내가 20대 중반이었으니 다 컸죠. 제가 할 일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어요.” 당초 엄마의 가출을 반대했던 딸은 이후 서서히 달라지는 엄마의 삶을 지켜보며 생각이 바뀌었다.“엄마가 10년 간 살았던 월세방은 곰팡내가 심했어요. 엄마가 안쓰러웠지만 그게 싫어서 자주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가끔 보는 엄마 표정은 환했어요. 세상 편하고 자유롭고 좋다고요. ‘어, 엄마가 웃네….’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던 엄마가 자기 의견을 말하네….’ 다른 사람처럼 변한 엄마를 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죠. 과거 대가족 속에서 자신을 지워버렸던 엄마였는데, 요즘은 친구 같아요. 한 인간으로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존재감을 경험하고 있어요.”나아가 김 씨는 “지금도 우리 엄마 연령대 분들 중에 자신을 지우고 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며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좀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씨는 지금은 막내아들(42) 집에서 살고 있다. 다른 지방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막내 아들은 주말이면 집에 돌아와 엄마와 함께 지낸다. 무한 긍정의 힘정 씨의 일터는 947가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다. 환경미화원 8명이 관리한다. 정 씨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은 뒤 남은 30분 남짓 동안 떠는 수다가 세상 제일 즐겁다고 한다. ‘안 되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는’ 이야기꽃이 핀다. 월급 받으면 1인당 1만 원씩 모아놓은 돈으로 피자도 시켜 먹고 찜닭도 시켜 먹는다. 일터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고, 울어도 예쁘고 똥을 싸도 예쁘고 떼를 써도 예쁜 꽃같은 아이들’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도 그저 즐겁고 감사한 일이 넘친다. 책에서 한 대목을 뽑아 오자면 이런 식이다. ‘주민은 택배기사님께 드리고 기사님은 나에게 주시고 나는 택배 총각에게 주고/박카스 한 병이 돌고 돌아 서로에게 행복이 되어 주었다/조그마한 박카스 한 병이 사랑을 싣고 여기저기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행복이 뭐 별건가/이렇게 우리는, 박카스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행복 전도사가 된다.’ 정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글을 쓴다. 글을 잘 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중요한 대목은 베껴 써보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100번 쓰면서 자기 암시와 다짐을 하는 100번 쓰기를 실천 중이다. 봄이 오면 아직도 설렌다. 인생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젊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너희들이 부러워. 그리고 부러운 것을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살면서 제대로 느끼고 있으니 이 또한 행복해.” 딸 김 씨의 얘기. “엄마의 장점은 무한 긍정이에요. 엄마랑 차 타고 가다가 누군가가 매너 없이 끼어들어 제가 화를 내면 엄마는 옆에서 ‘거, 똥 마려운가 보다’라고 해요. 풋 하고 웃게 되죠. 그 뒤로는 같은 상황에서 ‘하, 그 사람 똥 많이 마려운갑네’라고 생각하면 화가 안 나요.”(웃음) “딸아, 엄마는 이 나이에도 다시 시작할 거야”2019년 정 씨는 10년간 모은 돈으로 수원에 집을 샀다. 정확히는 전세를 끼고 딸과 공동명의로 샀고, 최근 자신의 지분을 딸에게 넘겨줬다. 수중의 돈을 박박 긁어모으다 못해 걸치고 있던 귀고리까지 빼서 팔았다.‘서울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로망’이라는 딸이 부동산 투자에 실패해 우울증을 앓던 시기였다. “엄마는 이제 가진 게 하나도 없어. 하지만 다시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시작해 봐.” 김 씨가 독서 모임에서 이런 얘기를 하자 멤버들이 나이든 엄마가 딸에게 용기를 주고 목표에 다가서도록 돕는 모습이 좋다며 한번 모셔보자고 했다. 이렇게 만든 자리에서 몇 사람이 ‘책을 써서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라’고 했는데, 정 씨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어느 틈엔가 2022년 신년 목표를 ‘책 쓰는 것’으로 잡았다.“2021년 12월초에 엄마랑 다음해의 목표에 대해 얘기했어요. ‘내년 엄마 목표는 뭐야?’했더니 ‘난 책 쓰기야. 책 쓸 거야’라며 빵 터지며 웃으세요. 엄마가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난 이걸 목표로 정했어. 너는?’ 하시길래 ‘난 이사가기’라고 답했죠. 그런데 2022년도에 두 사람 모두 목표를 이뤘어요. 허황된 목표라 생각했는데, 간절히 바라고 노력한 덕이겠죠.”(딸 김 씨)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김 씨는 수소문을 통해 책 쓰기 코칭을 하는 백미정 작가를 정 씨에게 연결해 줬다. 백 작가는 매일 정 씨가 쓴 글을 사진 찍어 보내면 타이핑을 하고 책의 틀을 잡아줬다. 출판사는 마케팅에 불리하다는 백작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즐거울 것같다’며 흔쾌히 책을 내줬다. ―올해 목표는 뭐로 잡았나요.“직업 바꾸기. 노후를 위해 작년에 치매 예방 지도 자격증을 땄는데 그걸로는 생활비를 벌 수가 없더군요. 그냥 나중에 양로원 들어가 자원봉사할 때 쓰려고요. 마침 70세였던 환경미화원 일은 정년이 없어져 계속 일하고 있어요.”―조금 더 연세가 들면 몸이 힘들어질 수 있을 텐데요.“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일은 손을 놔야죠. 그 뒤 일을 생각은 해보지만 제 의지로 딱 부러지게 정할 수는 없잖아요. 다만 연명치료 거부 의사는 등록했어요. 내가 정신이 있을 때 등록해 놔야 애들이 나중에 마음 쓸 일도 없겠다 싶어서요.” “다시 그러고 싶다”명색이 100세 시대라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으로서는 처음 맞는 나이대가 낯설다. 70여 년 살아본 정 씨는 ‘뒤돌아보면 모든 길이 꽃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정 씨가 스스로 ‘평생 가장 잘한 일’로 꼽는 건 뭘까.“19세 때 아버지 환갑은 놓쳤지만 2년 뒤 어머니 환갑은 제대로 하고 싶어서 공장 다니며 적금을 들었어요. 이웃 어르신들을 불러 잔치 국수를 대접했는데, 잔치를 준비하는 어머니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죠. 시집간 언니는 간간이 눈물을 훔쳐가며 어르신들을 대접했고요. 아버지에게 손목시계를, 어머니에게는 3돈짜리 금반지를 끼워 드렸어요. 금반지는 생전 처음 끼어본다며 보고 또 보고 만져보는 엄마가 어린아이 같았죠. 그게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에요. 잠시만이라도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더 반짝이는 시계, 더 큰 금반지 해드리고 싶어요. 그러고 싶어요.”묻히고 잊혀진 수많은 우리네 할머니들의 소박한 기억과 한(恨)을 엿본 느낌이 들었다.※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대구=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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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 71세에도 글쓰는 환경미화원 할머니의 ‘꽃길 인생’[서영아의 100세 카페]

    1952년생 정연홍 씨는 현역 환경미화원이다. 매일 오전 8시 반까지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로 출근해 오후 3시 반까지 청소 일을 한다. 이곳에서만 10년 넘게 일했다. 일은 생계를 위한 것이지만 일상의 기쁨과 감사의 원천이기도 하다. “내 손길과 발길로 깨끗해지는 아파트는 제 성역 같아요. 20층 넘는 건물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돈도 벌고 운동까지 하니 얼마나 좋아’라며 웃곤 하지요.” 이뿐인가. 오가며 마주하는 동료, 동네 사람들과 건네는 가벼운 인사, 웃는 얼굴은 삶이 그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첫 책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대경북스)를 냈다. 갑자기 듣게 된 ‘작가’ 호칭이 쑥스럽지만 행복하다. 책 서두에 본인이 표현했듯 ‘71세 나이에 글 쓰고 일을 하니 제법 찬란한 삶을 살고 있는 할머니’다. 책은 소박한 분량과 내용의 에세이집인데, 묘하게 힐링과 격려를 전해준다. 정 씨의 인생 2막 스토리를 듣기 위해 17일 그의 일터로 찾아갔다. e메일로 책 출간 소식을 알려준 딸 김현아 씨(46)가 인터뷰를 돕기 위해 경기 수원에서 달려왔다.●55세 전업주부의 가출, 홀로서기 정 씨의 인생 무대는 17년 전 그날 밤 전과 후로 나뉜다.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왔던 삶을 내려놓고 오롯이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했다. 딸 김 씨의 회상이다. “새벽 2시쯤에 엄마가 좀 와달라고 연락을 했어요. 남편과 함께 가봤더니 집을 나가겠다고 하셔서 반대했어요. 이기적인 얘기로 들리겠지만 ‘지금껏 참아왔는데 조금만 더 참아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했지요. 한편으로는 ‘잠시 이러다가 그만두시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결국 정 씨는 집을 나왔고 처음 한 달은 여관방에서, 그 뒤 1년은 딸 내외의 18평 신혼집에서 지낸 뒤 월세방을 얻어 독립했다. ―그런데 왜 집을 나가신 건가요. 책 내용만으로는 도무지 모르겠던데요. ‘그냥 부부간 성격이 맞지 않았다’며 넘기려는 정 씨 대신 딸 김 씨가 답한다. “집에서 엄마는 존중받지 못했어요. 옛날 분들 그런 경우 많잖아요. 엄마는 늘 표정이 굳어 있었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9명 대식구의 살림을 해야 했으니 삶의 부담이 너무 심하셨죠.” 가족에겐 갑작스러웠지만 정 씨로서는 오래 생각했던 거사였던 듯하다. “딸 시집도 보냈고 나머지 식구들도 모두 제 갈 길 찾아갔어요. 남은 건 아들 둘인데 막내가 20대 중반이었으니 다 컸죠. 제가 할 일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어요.” 당초 엄마의 가출을 반대했던 딸은 엄마의 삶을 지켜보며 서서히 생각이 바뀌었다. “엄마가 10년간 살았던 월세방은 곰팡내가 심했지만 엄마 표정은 환했어요. 세상 편하고 자유롭고 좋다고. 어, 엄마가 웃네….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던 엄마가 자기 의견을 말하네…. 다른 사람처럼 변한 엄마를 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죠. 과거 대가족 속에서 자신을 지워 버렸던 엄마였는데, 요즘은 친구처럼, 한 인간으로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존재감을 경험하고 있어요.” 한술 더 떠 김 씨는 “지금도 우리 엄마 연령대 분들 중에 자신을 지우고 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며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좀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씨는 지금은 막내아들(42) 집에서 살고 있다.●무한 긍정의 힘정 씨의 일터는 947가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다. 환경미화원 8명이 관리한다. 정 씨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은 뒤 남은 30분 남짓 동안 떠는 수다가 세상 제일 즐겁다고 한다. 월급 받으면 1인당 1만 원씩 모아놓은 돈으로 피자도 시켜 먹고 찜닭도 시켜 먹는다. 이곳에서도 그저 즐겁고 감사한 일이 넘친다. 정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글을 쓴다. 글을 잘 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중요한 대목은 베껴 써보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100번 쓰면서 자기 암시와 다짐을 하는 100번 쓰기를 실천 중이다. 봄이 오면 아직도 설렌다. 인생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젊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너희가 부러워. 그리고 부러운 것을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살면서 제대로 느끼고 있으니 이 또한 행복해.” 딸 김 씨의 얘기. “엄마의 장점은 무한 긍정이에요. 엄마랑 차 타고 가다가 누군가가 매너 없이 끼어들어 제가 화를 내면 엄마는 옆에서 ‘거, 똥 마려운가 보다’라고 해요. 풋 하고 웃게 되죠. 그 뒤로는 같은 상황에서 ‘하, 그 사람 똥 많이 마려운갑네’라고 생각하면 화가 안 나요.”(웃음)●“딸아, 엄마는 이 나이에도 다시 시작할 거야” 2019년 정 씨는 10년간 모은 돈으로 수원에 집을 샀다. 정확히는 전세를 끼고 딸과 공동명의로 샀고, 최근 자신의 지분을 딸에게 넘겨줬다. 수중의 돈을 박박 긁어모으다 못해 걸치고 있던 귀고리까지 빼서 팔았다. ‘서울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로망’이라는 딸이 부동산 투자에 실패해 우울증을 앓던 시기였다. “엄마는 이제 가진 게 하나도 없어. 하지만 다시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시작해 봐.” 김 씨가 독서 모임에서 이런 얘기를 하자 멤버들이 나이 든 엄마가 딸에게 용기를 주고 목표에 다가서도록 돕는 모습이 좋다며 한번 모셔보자고 했다. 이렇게 만든 자리에서 몇 사람이 ‘책을 써서 젊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라’고 했는데, 정 씨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어느 틈엔가 2022년 신년 목표를 ‘책 쓰는 것’으로 잡았다. 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김 씨는 수소문을 통해 책 쓰기 코칭을 하는 백미정 작가를 연결해 줬다. 백 작가는 매일 정 씨가 쓴 글을 사진 찍어 보내면 타이핑을 하고 책의 틀을 잡아줬다. 출판사는 마케팅에 불리하다는 백 작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즐거울 것 같다’며 흔쾌히 책을 내줬다. ―올해 목표는 뭐로 잡았나요. “직업 바꾸기. 노후를 위해 작년에 치매 예방 지도 자격증을 땄는데 그걸로는 생활비를 벌 수가 없더군요. 그냥 나중에 양로원 들어가 자원봉사할 때 쓰려고요. 마침 70세였던 환경미화원 일은 정년이 없어져 계속 일하고 있어요.” ―조금 더 연세가 들면 몸이 힘들어질 수 있을 텐데요.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일은 손을 놔야죠. 그 뒤 일을 생각은 해보지만 제 의지로 딱 부러지게 정할 수는 없잖아요. 다만 연명치료 거부 의사는 등록했어요. 내가 정신이 있을 때 등록해 놔야 애들이 나중에 마음 쓸 일도 없겠다 싶어서요.”●“다시 그러고 싶다”명색이 100세 시대라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으로서는 처음 맞는 나이대가 낯설다. 70여 년 살아본 정 씨는 ‘뒤돌아보면 모든 길이 꽃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정 씨가 스스로 ‘평생 가장 잘한 일’로 꼽는 건 뭘까. “19세 때 아버지 환갑은 놓쳤지만 2년 뒤 어머니 환갑은 제대로 하고 싶어서 공장 다니며 적금을 들었어요. 이웃 어르신들을 불러 잔치 국수를 대접했는데, 잔치를 준비하는 어머니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죠. 시집간 언니는 간간이 눈물을 훔쳐 가며 어르신들을 대접했고요. 아버지에게 손목시계를, 어머니에게는 3돈짜리 금반지를 끼워 드렸어요. 금반지는 생전 처음 끼어본다며 보고 또 보고 만져보는 엄마가 어린아이 같았죠. 그게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에요. 잠시만이라도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더 반짝이는 시계, 더 큰 금반지 해드리고 싶어요. 그러고 싶어요.” 묻히고 잊혀진 수많은 할머니들의 소박한 기억과 한(恨)을 엿본 느낌이 들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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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떠나 여유로운 귀촌타운서 웰 에이징 어떠세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65)는 매주 이틀은 서울에서, 나머지는 전남 구례에서 지낸다. 이른바 ‘2도(都)5촌(村)’ 생활이다. 환갑을 맞은 2018년, 5년 뒤 정년퇴직에 대비해 서울 강남의 집을 팔고 구례로 이사했다. 그 뒤로는 매주 화·수요일에 수업을 몰아놓고 화요일 아침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수요일 오후 내려가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에 오면 결혼한 아들의 집에 묵는다.“때가 되면 적당히 자리를 내줘야 후세들이 자라날 수 있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평소 자식들에게 조기에 자산 일부를 물려줘서 30대 초부터 자립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환갑 때 실천했지요. 제 집을 팔아 자식들에게 증여해서 주택 구입의 길을 터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은퇴까지는 아들 집 한 칸을 활용하기로 하고 구례로 갔어요.”퇴직 뒤에는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부모 세대가 서울을 비워줘야 청년들이 도시에 정착해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미래 생존에 자신이 없다는 거죠. 이건 나라의 미래가 없어지는 거나 매한가지입니다.”언젠가 기사를 보고 연락해온 그와 두차례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문제의식도 많았고 세대 간에 대결과 착취가 아닌 연결과 융합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곤 했다. 서울로 올라온 정 교수를 7일 정식인터뷰를 위해 만났다. 얼마 전 그가 베이비부머 귀촌타운 구상안을 보내온 것이 계기였다. “베이비부머 가정에 ‘자가 전세’ 허용을” 1958년 개띠인 그는 경남 하동에서 학창 시절 상경해 수십 년을 산, 향도이촌(向都離村) 세대다. 700만 1차 베이비부머(1955년~1963년생) 중 상당수가 지방 출신으로 서울과 수도권에 집을 장만했다. 그는 이들의 집만 다음 세대에게 합리적으로 이전돼도 청년들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업에서 은퇴한 베이비부머 아버지는 더 이상 복닥대는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지만 아이들은 서울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내 집을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게 현실이지요. 기성 세대가 모두 자기 집을 갖고 수도권에서 버티고 있으니 집값은 좀체 내리지 않고요. 하지만 기성세대 대다수는 전 재산의 70%가 집에 묶인 채로 노후자금 부족으로 쩔쩔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 출신이라면 귀촌의 로망을 갖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한 편이 아닙니다.”이 경우 귀촌을 하려면 집을 팔아 일부를 자녀들에게 나눠주고 본인도 일부 가지고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 여기에 각종 세금까지 내고 나면 가족 전체의 자산은 줄어들고 자녀들은 내집마련의 기회에서 영영 멀어진다.그래서 그는 2년 전 낸 책 ‘핏팅 코리아’에서 자가(自家) 전세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부모 세대가 집을 자녀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그 집 전체, 또는 일부에서 세를 사는 개념이다. 자금이 부족한 자녀 세대에게 내 집 장만의 길을 제공해주고 부모 세대는 얼마간 받은 돈으로 지방에 살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전세금은 사망한 뒤 상속 처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하면 ‘증여’라며 세무조사가 들어오기 십상이다. -말씀하시는 자가전세 제도라는 게 결국 증여세를 감면해 달라는 얘기가 되지 않을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해서 한국의 중산층을 튼튼하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대로라면 중산층은 은퇴와 동시에 하류층으로 편입되기 쉬워집니다. 그 자녀 세대는 안심하고 결혼출산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요. 악순환의 반복이지요. 전 세대가 불행합니다.”-부의 대물림, 빈부격차 심화라는 문제도 지적될 수 있겠는데요. “그건 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겠지요. 전 국민의 빈곤화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베이비부머의 귀촌으로 지방 소멸 막아보자”지방이 소멸된다고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인다. 지방에 미리 자리잡은 그로서는 피부로 느끼는 일상이다. 그가 자신뿐 아니라 또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후 살 곳에 대한 여러 조건을 생각해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구상은 기성세대의 귀촌으로 지방소멸을 막는 동시에 질 높은 노후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 이 고민은 은퇴를 앞두고 인생 후반전을 생각하는 시기, 상당히 오래전부터 진행됐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베이비부머의 귀촌타운(그는 이를 ‘베부쉼·베이비부머 쉼터’라 부른다) 구상이다.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다.먼저 귀촌타운은 입지가 중요하다. KTX역과 병원이 15분 거리 내에는 있어야 한다. 주변에 놀 곳인 문화시설이 있고 쇼핑몰과 극장, 관광지와 숙박시설 등 남성과 여성이 수요가 다른 여러 조건이 부합돼야 한다. 그가 노후 거주지로 고향인 경남 하동 대신 전남 구례를 택한 이유도 KTX역이 있고 30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는 등 여기 딱 부합하는 구례의 조건 때문이다.단지 규모는 최소한 100가구 이상은 돼야 한다.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느껴지는 일상은 도시인에게는 매우 부담스럽다. 각 층 5가구씩 25평(방 2개) 정도의 주택을 5층 높이로, 4~5개의 주거동을 만든다. 고령자 주거시설이니만큼 엘리베이터는 필수다. 주거동 한 가운데에 공동식당과 복지관, 도서관, 문화시설, 편의점 등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간 건물이 하나 들어간다. 이 건물 위로는 10층 정도로 청년 임대주택을 넣어주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100세대 이상 규모면 어느 정도 수요 창출이 되니 지역 분들에게 질은 높지 않더라도 약간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밖에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보건소 지소를 주 1~2회 여는 등 생각해야 할 것은 많지요. 이곳에서 입주자들은 웰 에이징과 웰 다잉까지 추구할 수 있습니다.” 정 교수의 이 모든 플랜의 주인공은 철저히 베이비부머에 맞춰져 있다. “이런 일을 실현가능하게 해줄 세대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베이비부머였습니다. 베이비부머는 한국 역사에서도 특별한 세대입니다. 전체의 10%가 대학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자 1인당 GDP(국내총생산)를 1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이끈 중추 세대입니다. 대다수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세대이자 제대로 연금을 받는 첫 세대이기도 합니다. 대략 일 인당 150만 원 정도 되니 이 돈으로 시니어타운에서 생활이 가능하죠. 의식도 있고 돈도 있고 체력도 있고 사회 공헌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이분들이 지금 대거 은퇴중이잖아요.”“돈이 넘쳐나는 지방, 먼저 보는 자가 임자” -이런 타운을 무슨 돈으로 짓는지요? “민관합작 투자 형태로 해서 입주자들은 건축비를 내고 정부는 부지를 제공해주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주자들은 영구 임대주택 개념이죠. 건축비는 다음 사람이 들어올 때는 보증금 역할을 하면 됩니다. 공용 부분인 상가와 청년임대 주택 부분은 지자체가 복지사업 개념으로 지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입주자들은 건축비 1억5000만 원 정도, 월 생활비로 1인당 100만 원 정도 지출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런 것을 지방에 있는 폐교 부지 같은 곳을 활용해 시범 운영을 해봤으면 하는 거지요.”서울 기준으로 보자면 토지 무료 제공에 복지 시설이 설치된다면 엄청난 특혜처럼 여겨지지만 지방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자체들이 가진 공공 부지가 많아요. 제가 아는 지역은 지금도 예산을 들여 청년 복지주택이라며 20호를 짓고 있는데, 20호로는 수요 창출이 안 되니 이미 실패가 예견되죠. 지방소멸방지기금이 전국에 해마다 1조 원씩 뿌려지지만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지방에 정착하는 도시민을 위한 인프라 마련에 지원하는 게 현실적이 아닐까요.”항간에서는 지방소멸 방지기금은 제안서 잘 쓰는 곳으로 몰린다고 한다. 그래서 제안서 예쁘게 써주는 홍보대행사들이 전부 지방으로 가 있다는 말까지 나도는 현실이다.“문제는 목적의식과 개념입니다. 지방에는 지금 돈이 철철 넘쳐요. 대부분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지요. 50m 도로 만드는데 3년간 지지고 볶고 하는 걸 보고 있자면 ‘도대체 왜? 누굴 위해?’라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는지, 지역 발전에 기여할지 여부보다 자신의 업적, 자리보전이 더 중요하죠. 온갖 토목사업을 보면서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작동했겠지’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인이 살지 않는 텅 빈 예술인촌, 아이들이 외면하는 테마파크, 관광단지라는 명목으로 90억 들여 지은 텅 빈 건물 등 지방에서 피 같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흉물만 남기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업에 대한 예시는 끝없이 이어진다.안도 다다오의 ‘나오시마’처럼… 30년 프로젝트 각오정 교수는 중국경제 전문가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근무하던 2011년부터 2년 반, 주중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다.요즘 구례에서의 생활은 하루 2시간 천은사 둘레길을 산책하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멍때리기’를 한다고 한다. 부인과 함께 하는 활동이 갈수록 늘고 있다.“귀촌타운이 전국에 보편화돼 지방의 미관을 새롭게 바꾸고 ‘내가 살고 싶은 동네’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군 단위에 들어서는 흉물스런 고층 아파트 대신 야트막한 귀촌타운이 퍼지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한 군데부터 성공해야 하겠지요.”그는 일본의 지역재생 성공 사례를 예로 들었다. 20년 전 안도 다다오 등 건축가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를 통해 폐허였던 섬이 예술의 섬으로 재탄생한 일본 가가와현의 나오시마(直島)나 쓰러져가던 오지 온천마을이 일본 최고 관광지로 거듭난 구마모토의 구로카와(黑川) 사례가 그것이다. 그는 귀촌타운을 자신의 후반생 30년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성공한다면 자신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도 있다. 이런 계획을 말하면 주변 지인들 중 참가하겠다는 사람이 10여 명은 된다고 말한다. “제 눈에는 구례가 귀촌타운을 만들기엔 천혜의 후보지인데, 지자체에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네요(웃음). 구례나 하동, 강원도의 한군데 더 해서 세군데쯤 선정해 모델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제 후반생을 바쳐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바꿀 수 있다면 인생 전체가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궁극적으로는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한 거죠.”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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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년 앞둔 서울대 교수가 전남 구례에 집 산 까닭은[서영아의 100세 카페]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65)는 매주 이틀은 서울에서, 나머지는 전남 구례에서 지낸다. 이른바 ‘2도(都) 5촌(村)’ 생활이다. 환갑을 맞은 2018년에 그는 5년 뒤 정년 퇴직에 대비해 서울 강남 집을 팔고 구례로 이사했다. 그 뒤로는 매주 화·수요일에 수업을 몰아놓고 화요일 아침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수요일 오후 내려가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에 오면 아들 집에 묵는다. “평소 자식들에게 조기에 자산 일부를 물려줘 30대 초부터 자립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환갑 때 실천했죠. 제 집을 팔아 자식들에게 증여해 주택 구입의 길을 터 줬습니다. 그러고 나서 은퇴까지는 아들 집 한 칸을 활용하기로 하고 구례로 갔어요.” 퇴직 뒤에는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부모 세대가 서울을 비워줘야 청년들이 도시에 정착해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미래 생존에 자신이 없다는 거죠. 이건 나라의 미래가 없어지는 거나 매한가지입니다.” 마침 서울로 올라온 정 교수를 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얼마 전 그가 베이비부머 귀촌타운 제안서를 보내온 것이 계기였다.●“베이비부머 가정에 ‘자가 전세’ 허용을” 1958년생 개띠인 그는 경남 하동에서 학창 시절 상경해 수십 년을 산, 향도이촌(向都離村) 세대다. 700만 베이비부머(1차 1955∼1963년생) 중 상당수가 지방 출신으로 서울 및 수도권에 집을 장만했다. 그는 이들의 집만 다음 세대로 합리적으로 이전돼도 청년들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업에서 은퇴한 베이비부머 아버지는 더 이상 복닥대는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지만 아이들은 서울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내 집을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게 현실이지요. 기성세대가 모두 자기 집을 갖고 수도권에서 버티고 있으니 집값은 좀체 내리지 않고요. 하지만 이들 대다수는 전 재산의 70%가 집에 묶인 채로 노후자금 부족으로 쩔쩔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 출신이라면 귀촌의 로망을 갖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한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2년 전 낸 책 ‘핏팅 코리아’에서 자가(自家) 전세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부모 세대가 집을 자녀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그 집 전체, 또는 일부에서 세를 사는 개념이다. 자금이 부족한 자녀 세대에게 내 집 장만의 길을 제공해주고 부모 세대는 얼마간 받은 돈으로 지방에 살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전세금은 사망한 뒤 상속 처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하면 ‘증여’라며 세무조사가 들어오기 십상이다. ―말씀하시는 자가전세 제도라는 게 결국 증여세를 감면해 달라는 얘기가 되지 않을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해서 한국의 중산층을 튼튼하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대로라면 중산층은 은퇴와 동시에 하류층으로 편입되기 쉬워집니다. 그 자녀 세대는 안심하고 결혼, 출산을 할 엄두를 내기 어렵지요. 악순환의 반복이라고 할까요. 전 세대가 불행합니다.” ―부의 대물림, 빈부격차 심화라는 문제도 지적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겠지요. 전 국민의 빈곤화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베이비부머의 귀촌으로 지방 소멸 막아보자지방이 소멸된다고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자신뿐 아니라 또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 후 살 곳에 대한 여러 조건을 생각해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구상은 기성세대의 귀촌으로 지방 소멸을 막는 동시에 질 높은 노후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고민은 은퇴를 앞두고 인생 후반전을 생각하는 시기, 상당히 오래전부터 진행됐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베이비부머의 귀촌타운(그는 이를 ‘베부쉼·베이비부머 쉼터’라 부른다) 구상이다.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다. 먼저 귀촌타운은 입지가 중요하다. KTX 기차역과 병원이 15분 거리 내에 있어야 한다. 주변에 놀 곳인 문화시설이 있고, 단지 규모는 최소한 100가구 이상은 돼야 한다.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고향인 경남 하동 대신 구례에 정착한 이유도 이 같은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 각 층 5가구씩 25평(방 2개) 정도의 주택을 5층 높이로 4, 5개의 주거동을 만든다. 고령자 주거 시설이니만큼 엘리베이터는 필수다. 주거동 한가운데 공동 식당과 복지관, 도서관, 문화시설, 편의점 등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간 건물이 하나 들어간다. 이 건물 위로는 10층 정도로 청년 임대주택을 넣어주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100가구 이상 규모면 어느 정도 수요 창출이 되니 약간의 일자리도 생겨납니다.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보건소 지소를 주 1, 2회 여는 등 생각해야 할 것은 많지요. 이곳에서 입주자들은 웰 에이징과 웰 다잉까지 추구할 수 있습니다.” 정 교수가 구상한 모든 플랜의 주인공은 철저히 베이비부머에게 맞춰져 있다. “이런 일을 실현 가능하게 해줄 세대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베이비부머였습니다. 베이비부머는 한국 역사에서도 특별한 세대입니다. 전체의 10%가 대학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이끈 중추 세대입니다. 대다수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세대이자 제대로 연금을 받는 첫 세대이기도 합니다. 대략 1인당 150만 원 정도 되니 이 돈으로 시니어타운에서 생활이 가능하죠. 의식도 있고, 돈도 있고, 체력도 있고, 사회 공헌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이들이 대거 은퇴 중이잖아요.”●“돈이 넘쳐나는 지방, 먼저 보는 자가 임자” ―이런 타운을 무슨 돈으로 짓는지요? “민관 합작 투자 형태로 해서 입주자들은 건축비를 내고 정부는 부지를 제공해주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주자들은 영구 임대주택 개념이죠. 건축비는 다음 사람이 들어올 때는 보증금 역할을 하면 됩니다. 공용 부분인 상가와 청년임대 주택 부분은 지자체가 복지사업 개념으로 지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입주자들은 건축비 1억5000만 원 정도, 월 생활비 1인당 100만 원 정도 지출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런 것을 지방에 있는 폐교 부지 같은 곳을 활용해 시범 운영을 해봤으면 하는 거지요.” 서울 기준으로 보자면 토지 무료 제공에 복지 시설이 설치된다면 엄청난 특혜처럼 여겨지지만 지방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자체들이 가진 공공 부지가 많아요. 제가 아는 지역은 지금도 예산을 들여 청년 복지주택이라며 20채를 짓고 있어요. 하지만 20채로는 수요 창출이 안 되지요. 지방소멸방지기금이 전국에 해마다 1조 원씩 뿌려지지만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지방에 정착하는 도시민을 위한 인프라 마련에 지원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항간에서는 지방소멸방지기금은 제안서 잘 쓰는 곳으로 몰린다고 한다. 그래서 제안서 잘 쓰는 홍보대행사들이 전부 지방으로 가 있다는 말까지 나도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목적의식과 개념입니다. 지방에는 지금 돈이 철철 넘쳐요. 대부분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지요. 50m 도로 만드는 데 3년간 지지고 볶고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도대체 왜? 누굴 위해?’라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는지, 지역 발전에 기여할지보다 자신의 업적, 자리 보전이 더 중요하죠. 온갖 토목사업을 보면서 ‘누군가의 이해 관계가 작동했겠지’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예술인이 살지 않는 텅 빈 예술인촌, 아이들이 외면하는 테마파크, 관광 단지에 90억 원이나 들여 지은 텅 빈 건물 등 지방에서 피 같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흉물만 남기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업에 대한 예시는 끝없이 이어진다. ●안도 다다오의 ‘나오시마’처럼… 30년 프로젝트 각오정 교수는 중국경제 전문가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근무하던 2011년부터 2년 반, 주중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다. 요즘 구례에서의 생활은 하루 2시간 천은사 둘레길을 산책하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멍 때리기’를 한다고 한다. 부인과 함께하는 활동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귀촌타운이 전국에 보편화돼 지방의 미관을 새롭게 바꾸고 ‘내가 살고 싶은 동네’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군 단위에 들어서는 흉물스러운 고층 아파트 대신 야트막한 귀촌타운이 퍼지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한 군데부터 성공해야 하겠지요.” 그는 일본의 지역재생 성공 사례를 예로 들었다. 20년 전 안도 다다오 등 건축가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를 통해 폐허였던 섬이 예술의 섬으로 재탄생한 일본 가가와현의 나오시마(直島)나 쓰러져가던 오지 온천마을이 일본 최고 관광지로 거듭난 구마모토현의 구로카와(黑川) 사례가 그것이다. 그는 귀촌타운을 자신의 후반생 30년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성공한다면 자신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도 있다. 이런 계획을 말하면 주변 지인들 중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10여 명은 된다고 말한다. “제가 보기엔 구례가 천혜의 후보지인데, 지자체에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네요(웃음). 제 후반생을 바쳐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바꿀 수 있다면 인생 전체가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거죠.”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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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모님 케어도 ‘템빨’” 20년차 선후배의 돌봄용품 창업 스토리[서영아의 100세 카페]

    50대쯤 되면 지인들 모임에서 부모님 건강이 화제가 되는 일이 부쩍 늘어난다. 세월에 떠밀려 고령이 된 부모 세대가 어느 틈에 보살핌의 대상이 된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부모님은 요즘 어떠셔? 우리 아버지는 이번에….”왕년의 직장 선후배였던 이준호 그레이스케일 대표(53)와 박진호 이사(51)가 5년 만에 만나 의기투합한 계기도 이런 대화였다. 2021년 봄쯤 우연히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 게 지금의 회사 창업으로 이어졌다. 회사 설립 취지는 돌봄이 필요한 부모님과 돌보는 자녀들이 그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덜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 지난해 3월 경기 부천시에 복지용구 매장 ‘그레이몰’을 열고 4월 온라인 사이트(www.greymall.co.kr)도 오픈했다. 16일 매장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발단은 3년 전, 박 이사의 아버지(84)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일이다. 골든타임 내에 조치를 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아버지는 다리 한쪽을 끄는 듯한 걸음걸이를 보였고 말도 어눌해졌다. 얼마 뒤 심장 스텐트 시술도 받았다. 불행은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던가. 비슷한 시기 어머니(83)가 치매 전단계인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다. 보행이 불안정해 집안에서도 자꾸 넘어지고 다치셔서 한시도 눈을 떼기 어려워졌다. 기러기아빠로 혼자 지내던 박 이사는 결국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두 분만으로는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계신 집은 지뢰밭같아요. 전깃줄 하나, 양탄자 끝자락에 걸려 넘어져도 큰 부상으로 이어집니다.”달라진 삶에서 부모님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겠고 물건들도 시원찮았다. 예컨대 지팡이. 까다로울 정도로 멋쟁이였던 아버지는 지팡이가 필요했지만 시판되는 지팡이를 마뜩지 않아 했다. 과거 완구수입회사를 운영했던 박 이사는 자신이 지팡이를 만들어볼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반 지팡이를 알아보다가 복지용구 지팡이를 알게 됐고, 복지용구 전반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로 확장돼 갔다. 제도를 알고 시장을 알수록 소비자가 아닌 공급자 위주의 세상이었다.“이렇게 살면 안될 것같은데…”그 무렵 직장 선배였던 이 대표를 만났다. 이 대표는 삼성물산, 현대홈쇼핑, 오케이몰 등에서 일해온 유통과 이커머스 전문가다. 두 사람은 2000년대 초반 스포츠용품 회사에서 3년가량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이 대표도 마침 인생 2막을 고민하던 차였다. “몇 년 전 가까운 선배가 나이 50에 회사에서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이 대표)두 사람은 또래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민과 너무도 준비가 안 된 현실을 공유했다.“부모님은 늙어가고, 편찮아지시고, 많은 게 필요해질 텐데 자녀들은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가면서부터 더듬고 헤매는 간병생활이 시작되겠구나….”(박 이사)다음 날부터 이 대표는 ‘숫자 검토’에 들어갔다. 노인인구와 제품들의 시장 규모, 관련 제도를 조사했다. “이거 할 만하겠다. 구체화해 보자.” 두 사람이 만난 지 반년 만인 2021년 9월에 그레이스케일 법인을 설립했다.“부모는 나이가 들고, 자녀는 철이 들고…” 부천의 한 오피스텔상가 2층에 자리한 매장은 총 140평 규모. 건물바깥 휘장에는 커다랗게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부모는 나이가 듦, 자녀는 철이 듦, 부모님 마음에 쏙 듦, 그레이몰’. 15평의 판매 공간에는 휠체어와 전동 침대부터 성인용 기저귀까지 복지용구들이 전시돼 있고 넓은 창고 한켠에는 물품 촬영을 할 스튜디오가 마련돼 있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그레이몰 상품 가격표에는 정가와 할인가 두 가지가 적혀 있다. 예컨대 60만 원짜리 독일제 보행기의 할인가는 9만 원이다. 장기요양보험 복지용구 지원을 활용하면 본인부담 15%로 건강보험공단이 지정한 18개 품목 400여 종을 구매할 수 있다.“이걸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장기요양보험 등급을 받을 수 있는데 모르는 사람, 장기요양 등급이 있어도 복지용구 지원이 되는지 모르는 사람, 자신이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용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모르면 눈앞이 깜깜하고 돈도 많이 쓰게 됩니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많이 하시게 되지요.”이 대표는 시니어용품은 자녀들이 사고 부모가 쓰게 되는 특성상 더욱 정보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 장기요양 등급을 받은 어르신들은 어차피 치매나 거동 불편으로 오프라인 매장에 갈 수 없는 상태예요. 자녀들이 대신 사줘야 하는데 온라인으로 충분히 정보를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당초 이커머스 위주의 복지용구몰을 구상했지만 건강보험공단의 지원을 받으려면 지자체로부터 ‘복지용구사업소’ 승인을 받아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오프라인 매장이 필요했다. 현재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된 복지용구사업소는 전국에 1977곳(지난해 말 기준). 대도시에 쏠려 있고 대부분 영세하다. 장기요양보험 이용이력과 회원이력 연동시켜비록 50대 창업이지만 스타트업으로 인정받아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그레이몰 홈페이지와 건강보험공단 사이트를 연동시키는 시스템을 개발한 덕이다.공단에서 복지용구를 사려면 1인당 연간 한도 160만 원, 상태에 따라 구매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나뉜다. 보행기는 5년에 2개, 안전손잡이는 1년에 10개 등 품목마다 한도가 제각각이다. 문제는 이런 규정이 너무 복잡해 일반인은 자신이 뭘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 알려면 복지용구 사업소에 가서 공단 시스템에 들어가 자신의 복지용구 구매 이력 5년 치를 확인해야 한다.이들은 이걸 회사 사이트와 연동시켜 장기요양인증번호와 이름을 넣고 회원 가입을 하면 장기요양보험 사용 이력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회원 가입 뒤 마이페이지로 로그인하면 18개 품목이 다 나오고 ‘구매 가능’ ‘구매 불가능’ ‘언제 샀으니까 언제 다시 살 수 있다’는 안내가 품목마다 나온다. 연간 한도 160만 원 중에 얼마를 썼으니 얼마를 쓸 수 있다는 것도 안내된다. -규제가 너무 많은 건 아닌가요.“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문제예요. 편법와 위반이 생겨나면 규제는 거미줄처럼 늘어나지요. 장기요양보험이 실시된 2008년 당초에는 제한이 없었다고 해요. 그랬더니 어떤 사람들이 미끄럼 방지양말을 160만원 어치 사서 길거리에서 팔다가 적발됐어요. 이러면서 규제가 하나둘 만들어졌다는 거죠. 몇만 원 안전손잡이, 수백만원 수술비와 고령자의 고통 막아줘프로그램이 완성된 12월 이후 회원은 960여 명. 장기요양등급자가 100만여 명인 것에 비하면 극소수다. 지난해 5억 원 적자를 기록했지만 올해 안에는 수지균형을 이루는 달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다만 너도나도 장기요양보험 혜택을 받으면 가뜩이나 어렵다는 건보 재정에 더 부담을 주지 않을까. “제도를 적극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가 그런 거라면 난센스입니다. 장기요양보험 연간 11조 원 중 복지용구는 3000억 원 정도 들어갑니다. 복지용구의 예방 기능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침대 옆 안전손잡이 설치에 만 원 돈이 들지만 설치하지 않아 낙상사고를 당하면 치료비로 수백만 원이 들지요. 어느 쪽이 경제적일까요.” 고관절 골절 방치하면 2년 내 사망률 70%…예방이 중요 특히 낙상으로 인한 피해는 돌이킬 수 없이 크다. 고관절 골절을 방치하면 2년 이내 사망률이 70%이고, 수술해도 2년 이내 30%가 사망한다. 그레이몰에서는 자체 유튜브 제작을 통해 낙상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낙상, 순간에 대한 영원한 후회’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제작했다. “고관절은 다치면 온전하게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중요한 부위죠. 뼈와 근육이 정상적이라면 엉덩방아를 찧어도 부러지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면 근육이 줄고 유연성도 부족하고 대부분 골다공증이 와 있어 작은 충격에도 부러지게 됩니다. 골절도 골절이지만 충격, 마취, 수술 등을 겪고 나면 보행등력이 떨어지고 절뚝이는 걸음을 거쳐 지팡이, 워커, 휠체어 순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 활동량이 갈수록 줄고 다른 질환들도 악화되다가 합병증까지 겹치면 사망에 이르는 거죠.”그래서 이들이 만든 유튜브에서는 “차라리 손목을 포기하시라”는 조언도 나온다. 여차하면 넘어질 때 손으로 짚어 손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고관절을 지키라는 조언이다. 집이 안전해야 어르신들도 안전하다 “다들 다치신 다음에 뭘 하려 하잖아요. 사실 그 전에 해야 적은 돈으로 안전을 추구할 수 있는데 누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정작 위험이 현실이 되면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고.” -예방효과의 맹점이죠. 예방한 덕에 사고가 막아진 건지 본래 문제가 없었던 건지 분간하기 어려우니까요. “다치기 전에는 안전손잡이 하시라, 미끄럼 방지 매트 깔고 지팡이 짚고 다니시라고 하면 ‘내가 그걸 왜 하냐’ 이러시니까요. 그게 참 어려운 것같아요.” 일찌감치 초고령사회에 돌입한 일본의 경우 의료정책을 고령자가 돌봄이 필요없는 상태, 즉 스스로 생활하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돌봄 예방’으로 중점을 옮긴 지 오래다. 시니어상품 정보 서비스의 플랫폼 꿈꾸다 만 2년 전 어느 봄날의 한끼 식사 이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인생 2막을 연 두 사람의 꿈은 크다. 일단은 사업이 수요자들에게 알려지는 게 급선무다. 장기적으로는 건강보험공단 지정이 아니더라도 추천할 만한 상품들도 함께 취급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일부 상품은 직접 제작도 계획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NH가 스타트업 지원을 위해 연 오픈 비즈니스데이 행사에서 우수 테마상을 받았는데, NH의 전국망을 활용해 지방 노인 단독가구의 집을 안전하게 바꾸는 낙상 방지 비즈니스를 제안하려는 계획도 있다.“궁극적으로는 시니어를 위한 상품과 정보 서비스의 플랫폼으로 만들고 싶어요. 저희는 이 업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젊고 유통을 잘 아는 편입니다. 시니어 시장은 커질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지금 부모님 때문에 회원이 되신 분들이 앞으로 10여 년 뒤면 본인이 고령자가 됩니다. 일종의 미래세대에 대한 ‘유스(youth) 마케팅’ 개념도 있는 셈이죠.” 서영아기자 sya@donga.com}

    • 202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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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상-치매 노부모 돌봄요령 몰라 발동동… “복지용구-요양정보 미리 준비를”[서영아의 100세 카페]

    50대쯤 되면 지인들 모임에서 부모님 건강이 화제가 되는 일이 많다. 세월에 떠밀려 고령이 된 부모 세대가 어느 틈에 보살핌의 대상이 된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부모님은 요즘 어떠셔? 우리 아버지는 이번에….” 왕년의 직장 선후배였던 이준호 그레이스케일 대표(53)와 박진호 이사(51)가 5년 만에 만나 의기투합한 계기도 이런 대화였다. 2021년 봄쯤 우연히 만나 사는 이야기를 나눈 게 창업으로 이어졌다. 회사 설립 취지는 돌봄이 필요한 부모님과 돌보는 자녀들이 그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덜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 지난해 3월 경기 부천시에 복지용구 매장 ‘그레이몰’을 열고 4월 온라인 사이트도 오픈했다. 16일 매장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갑자기 닥쳐온 부모님 돌봄발단은 3년 전, 박 이사의 아버지(84)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일이다. 골든타임 내에 조치를 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아버지는 다리 한쪽을 끄는 듯한 걸음걸이를 보였고 말도 어눌해졌다. 얼마 뒤 심장 스텐트 시술도 받았다. 불행은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던가. 비슷한 시기 어머니(83)가 치매 전단계인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다. 보행이 불안정해 집안에서도 자꾸 넘어지고 다쳤다. 기러기아빠로 혼자 지내던 박 이사는 결국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두 분만으로는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계신 집은 지뢰밭같아요. 전깃줄 하나, 양탄자 끝자락에 걸려 넘어져도 큰 부상으로 이어집니다.” 달라진 삶에서 부모님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겠고 물건들도 시원찮았다. 예컨대 지팡이. 까다로울 정도로 멋쟁이였던 아버지는 지팡이가 필요했지만 시판되는 지팡이를 마뜩지 않아 했다. 그렇게 일반 지팡이를 알아보다가 복지용구 지팡이를 알게 됐고, 복지용구 전반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로 확장돼 갔다. 제도를 알고 시장을 알수록 소비자가 아닌 공급자 위주의 세상이었다. 그 무렵 직장 선배였던 이 대표를 만났다. 이 대표는 삼성물산, 현대홈쇼핑, 오케이몰 등에서 일해온 유통과 이커머스 전문가다. 두 사람은 2000년대 초반 스포츠용품 회사에서 3년가량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이 대표도 마침 인생 2막을 고민하던 차였다. “몇 년 전 가까운 선배가 나이 50에 회사에서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이 대표) 두 사람은 또래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민과 너무도 준비가 안 된 현실을 공유했다. “부모님은 늙어가고, 편찮아지시고, 많은 게 필요해질 텐데 자녀들은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가면서부터 더듬고 헤매는 간병생활이 시작되겠구나….”(박 이사) 다음 날부터 이 대표는 ‘숫자 검토’에 들어갔다. 노인인구와 제품들의 시장 규모, 관련 제도를 조사했다. “이거 할 만하겠다. 구체화해 보자.” 두 사람이 만난 지 반년 만인 2021년 9월에 그레이스케일 법인을 설립했다.●“부모는 나이가 들고, 자녀는 철이 들고…”부천의 한 오피스텔상가 2층에 자리한 매장은 총 140평 규모. 15평의 판매 공간에는 휠체어와 전동 침대부터 성인용 기저귀까지 복지용구들이 전시돼 있고 넓은 창고 한편에는 물품 촬영을 할 스튜디오가 마련돼 있다. 상품 가격표에는 정가와 할인가 두 가지가 적혀 있다. 예컨대 60만 원짜리 독일제 보행기의 할인가는 9만 원이다. 장기요양보험 복지용구 지원을 활용하면 본인부담 15%로 건강보험공단이 지정한 18개 품목 400여 종을 구매할 수 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장기요양보험 등급을 받을 수 있는데 모르는 사람, 장기요양 등급이 있어도 복지용구 지원이 되는지 모르는 사람, 자신이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용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모르면 눈앞이 깜깜하고 돈도 많이 쓰게 됩니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많이 하시게 되지요.” 이 대표는 시니어용품은 자녀들이 사고 부모가 쓰게 되는 특성상 더욱 정보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장기요양 등급을 받은 어르신들은 어차피 치매나 거동 불편으로 오프라인 매장에 갈 수 없는 상태예요. 자녀들이 대신 사줘야 하는데 온라인으로 충분히 정보를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초 이커머스 위주의 복지용구몰을 구상했지만 건강보험공단의 지원을 받으려면 지자체로부터 ‘복지용구사업소’ 승인을 받아야 했고, 이를 위해 오프라인 매장이 필요했다. 현재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된 복지용구사업소는 전국에 1977곳(지난해 말 기준). 대도시에 쏠려 있고 대부분 영세하다.●장기요양보험 이용이력과 회원이력 연동시켜이들은 비록 50대 창업이지만 스타트업으로 인정받아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그레이몰 홈페이지와 건강보험공단 사이트를 연동시키는 시스템을 개발한 덕이다. 공단에서 복지용구를 사려면 1인당 연간 한도 160만 원, 상태에 따라 구매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나뉜다. 보행기는 5년에 2개, 안전손잡이는 1년에 10개 등 품목마다 한도가 제각각이다. 문제는 이런 규정이 너무 복잡해 일반인은 자신이 뭘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 알려면 복지용구 사업소에 가서 공단 시스템에 들어가 자신의 복지용구 구매 이력 5년 치를 확인해야 한다. 이들은 이걸 회사 사이트와 연동시켜 장기요양인증번호와 이름을 넣고 회원 가입을 하면 장기요양보험 사용 이력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회원 가입 뒤 마이페이지로 로그인하면 18개 품목이 다 나오고 ‘구매 가능’ ‘구매 불가능’ ‘언제 샀으니까 언제 다시 살 수 있다’는 안내가 품목마다 나온다. 연간 한도 160만 원 중에 얼마를 썼으니 얼마를 쓸 수 있다는 것도 안내된다. 프로그램이 완성된 12월 이후 회원은 960여 명. 장기요양등급자가 100만여 명인 것에 비하면 극소수다. 지난해 5억 원 적자를 기록했지만 올해 안에는 수지균형을 이루는 달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너도나도 장기요양보험 혜택을 받으면 어렵다는 건보 재정에 더 부담을 주지 않을까. “제도를 적극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가 그런 거라면 난센스입니다. 장기요양보험 연간 11조 원 중 복지용구는 3000억 원 정도 들어갑니다. 복지용구의 예방 기능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침대 옆 안전바 설치에 만 원 돈이 들지만 설치하지 않아 낙상사고를 당하면 치료비로 수백만 원이 들지요. 어느 쪽이 경제적일까요.” 특히 낙상으로 인한 피해는 돌이킬 수 없이 크다. 고관절 골절을 방치하면 2년 이내 사망률이 70%이고, 수술해도 2년 이내 30%가 사망한다. “다들 다치신 다음에 뭘 하려 하잖아요. 사실 그 전에 적은 돈으로 안전을 추구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보험재정이 문제라면 본인부담비율을 좀 더 늘려도 좋지 않을까요. 일본의 경우 10∼30%인 것으로 압니다.” 일찌감치 초고령사회에 돌입한 일본의 경우 의료정책을 고령자가 돌봄이 필요없는 상태, 즉 스스로 생활하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돌봄 예방’으로 중점을 옮긴 지 오래다. 인생 2막을 연 두 사람의 꿈은 크다. 일단 알려지는 게 급선무다. 장기적으로는 건강보험공단 지정이 아니더라도 추천할 만한 상품들도 함께 취급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일부 상품은 직접 제작도 계획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NH가 스타트업 지원을 위해 연 오픈 비즈니스데이 행사에서 우수 테마상을 받았는데, NH의 전국망을 활용한 지방 노인 단독가구의 집을 안전하게 바꾸는 낙상 방지 비즈니스를 제안하려는 계획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시니어를 위한 상품과 정보 서비스의 플랫폼으로 만들고 싶어요. 저희는 이 업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젊고 유통을 잘 아는 편입니다. 시니어 시장은 커질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지금 부모님 때문에 회원이 되신 분들이 앞으로 10여 년 뒤면 본인이 고령자가 됩니다. 일종의 미래세대에 대한 ‘유스 마케팅’ 개념도 있는 셈이죠.”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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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급여 깎이고 대우 나빠져도 감내… 佛 “죽을 때까지 일할 순 없어” 시위[서영아의 100세 카페]

    정년 연장과 연금개혁. 초고령사회의 인구 문제와 연동된 해묵은 숙제들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정해진 미래’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지이자 복잡한 사회구조 변화를 내포하는 이슈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사회에 들어선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정년 연장, 해? 말아?” 어느 일본 직장인의 고민일본의 비즈니스 평론가 구스노키 아라타(楠木新)가 2017년 낸 책 ‘정년 후(定年後)’에는 친구 S 씨의 사례가 나온다. 고교를 졸업한 뒤 바로 유통서비스 회사에 들어가 40년 넘게 근속 중인 S 씨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정년퇴직 뒤에도 65세까지 회사에 다닐 생각이었다. 그런데 회사가 내놓은 조건은 충격적이었다. 주 3일, 총 20시간 근무에 사회보험도 없는 촉탁사원직. 근무 장소는 3개 매장에 걸쳐 있어 각 매장에서 인력을 요청하면 그때그때 출근하는 방식이었다. 회사는 정년을 맞은 고용 연장 사원을 두 갈래로 나눴다. 상위층은 급여는 내려도 나름의 대우를 해줬지만, 나머지는 사회보험이 보장되지 않는 촉탁사원이 됐다. 자신이 상위층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던 S 씨는 서운한 마음에 상사에게 “회사에 남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전문가인 친구를 찾아온 것이었다. 구스노키의 조언은 어땠을까. S 씨는 양가 부모를 모시고 자녀까지 있는 3세대 가족의 가장이었다. 무조건 회사 측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은 비록 마음은 불편하더라도 부담 없이 해낼 수 있다. 한 군데라도 확실한 일자리를 확보한 것이니 추가로 파트타임이나 주말 일자리 등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S 씨는 회사에 다니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녹록지 않은 정년 연장의 실상일본에서 70세까지 고용이 보장된다는 뉴스를 접하면 나이 먹어서도 예전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대우를 받는 직장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실상은 S 씨처럼 쪼그라든 급여와 업무 내용, 낮은 대우를 감내하고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법정 정년 연령은 60세다. 하지만 2013년 고령자고용안정법을 개정해 퇴직하는 직원이 ‘원할 경우’ 기업이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하도록 의무화했다. 국가가 기업에 고령자 복지 부담을 떠넘긴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지만, 생산가능연령(만 15∼64세) 인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고통 분담이란 뜻도 있었다. 65세 고용 보장은 연금 재원을 확보하고 연금 지급 시작 연령을 늦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연금개혁으로 60세였던 후생연금(직업연금·일본의 3층 연금 중 가운데층) 지급 연령이 남성은 2013∼2025년, 여성은 남성보다 5년 늦게 단계적으로 65세까지 늦춰진다. 60세 퇴직에 따른 소득 공백을 메울 정년 연장이 필요해진 것이다. 기업들이 고용을 보장하는 방법으로는 △정년 연장 △계속 고용(재고용) 제도 도입 △정년 폐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급여 수준이나 업무 방식 등은 기업 측에 일임한 것이다. 후생노동성의 2021년 ‘고령자 고용 현황’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99.9%가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하고 있다. 이 중 76.4%는 계속 고용 제도를 시행 중이다. 일단 정년퇴직을 한 직원을 촉탁 또는 계약직으로 재고용하는 형태다. S 씨 경우처럼 급여는 절반 이하로 줄고, 사회보험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노느니 일하는 게 낫다”며 재고용 계약서에 사인을 한 퇴직 당사자들도 별로 행복하지는 않다. “그간 쌓아온 경험과 역량을 전혀 살릴 수 없다”거나 “이런 일 하려고 이 나이에 회사에 나오라는 거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일부 회사에서는 “(정년) 전과 하는 일이 똑같은데 급여가 절반 이상 깎였다”고 분개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래서 65세까지 꽉 채워 일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 뒤로도 일손 부족이 여전하자 일본 국회는 2021년 3월 다시 고령자고용안정법을 개정해 기업들에 고용을 70세까지 늘리기 위해 ‘노력’할 것을 의무화했다. 기업의 ‘노력 의무’에는 다른 회사에 재취업을 알선하거나 창업을 지원해 주는 등의 노력까지도 포함해 부담을 줄여줬다. 기업의 30%가량이 이런 의무를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왜 빠른 정년을 원할까최근 프랑스의 연금개혁 반대 시위를 보면 한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4세로 올리려는 정부 개혁안에 대해 시민과 청년들까지 나서 ‘죽을 때까지 일할 순 없다’고 외친다. 프랑스에서 ‘정년’이란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년 연장도 1971년 고령자고용안정법이 제정된 이래 60세→65세→70세로 고용 연한을 높여 가면서 단계마다 ‘노력 의무’→‘법적 의무화’ 과정을 20여 년에 걸쳐 밟아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연금개혁을 통해 연금 수급 연령을 단계적으로 올리며 사회안전망을 유지했다. 특징은 먼저 ‘노력 의무’를 통해 사업장에서 개혁이 이뤄지고 나면 법적 의무화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2013년 65세까지 고용 확보가 의무화된 시점에는 거의 모든 사업장에 이 제도가 정착돼 있었다. 국내 생산연령 인구는 2017년 3757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은 계속 앞당겨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현실에 떠밀려 2013년 국회에서 법정 정년을 60세로 정한 뒤 2016년(300인 이상 사업장)과 2017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민연금 수급 연령은 2014년 60세부터 단계적으로 늘어나 2033년이면 65세가 된다. 애초부터 ‘정년=연금 개시일’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법적 정년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현실이다. ‘주된 일자리 퇴직 연령’은 평균 49.3세(통계청)에 불과하지만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실질 은퇴 연령은 2018년 기준 72.3세(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이른다. 한국인들이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뒤에도 노동시장에 계속 머물며 생활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65세, 70세… “뭐야, 남은 날이 그렇게 짧아?”앞서 소개한 ‘정년 후’에 등장한 예비 퇴직자들의 술자리 대화를 들어보자. “건강을 위해 회사에 다니겠다”거나 “집에 있기엔 눈치가 보여 회사에 가겠다”는 식의 얘기가 무르익다가 한 사람의 말에 모두 조용해진다. “잠깐…, 우리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돌아가셨는데? 그럼 65세 정년 뒤에 살아 있을 시간이 몇 년 없다는 얘긴데….” 통계청의 2020년 생명표를 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2020년생 기준)은 83.5세다. 하지만 건강수명은 73.1세에 그친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해도 건강하지 못하다면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건 쉽지 않다. 회사에 매달려 익숙한 일을 반복하며 자신에게 남은 건강수명을 바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늦기 전에 과감히 박차고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설 것인가. 정년 연장 논의에는 이런 함정도 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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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50에 시작하는 ‘우리 동네와 함께 나이들기’ 프로젝트[서영아의 100세 카페]

    새해 3일 저녁 강남구 선릉역에 자리한 공유 오피스. 20대에서 60대까지의 남녀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우리동네좋은사람들(대표 김종훈)’의 신년 모임이다. 이 날은 꼭 일주일전인 지난 달 27일 몇몇 멤버가 대표로 수상한 한국주거복지문화대상 최우수상 시상식 보고대회도 겸했다.모임은 한국IBM을 퇴직한 김종훈(50) 씨가 지난해 봄 만들었다. 멤버 11명은 모두 강남구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이다. 퇴근 후 격주로 서로의 빈 사무실에서 ‘고령자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주제로 하는 도시락 모임을 가져왔다.멤버들은 연령대도, 직업도 다양하다. 공통점은 김 대표의 동선 속에 있다가 픽업됐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 동창인 건축가 신수진 씨는 처음부터 모임에 초대된 경우다. 이밖에 김대표가 사무실 임대를 알아보다가 친해진 20대의 공유오피스 회사 직원, 외제차매장에서 마주친 30대 판매 부장, 시니어타운 실습에서 그를 감동시킨 60대 요양보호사, 회사 시절 후배가 있는가 하면 30대 위워크 청년은 이들이 정기 모임을 갖는 것을 지켜보다가 합류한 케이스다. 여기에 강남구청이 지정해준 50대의 일본인 마을활동가 미야자키 다다시 씨도 있다. -픽업의 기준이 뭔가요.“‘좋은 사람’이냐 여부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겪어보면 알 수 있어요. 어르신들을 모셔야 하니 그냥 일 잘하는 사람 말고, 좋은 사람이어야 해요.”지난 연말 시상식에 참석한 신수진 건축사의 말이다.“어느 날 불쑥 새로 시작하는 활동을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뭔가를 한다면 제대로 할 친구라는 걸 아니까 일단 힘을 보탰죠. 그런데 활동을 함께 하면서 오히려 제 쪽이 많이 배웠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다음 20년을 준비하라’ 돌이켜보면 지난해 초 김종훈 씨에게서 첫 e메일이 왔었다. 자기 소개와 더불어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1월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끝나고 연락드리겠다’고 답장을 보내고는 까맣게 잊었다. 그의 e메일은 온갖 스팸메일에 묻혀 뒤로뒤로 밀려났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 쯤 다시 e메일이 왔다. 그동안 진행해온 고령자 주거 개선 사업을 소개하며 조언을 듣고 싶다고 했다. 지난달 21일 광화문에서 만나 3시간 반 가량 얘기했다.김 씨는 2020년 말 20년간 일한 한국 IBM을 퇴직했다. 회사에서는 총괄전무로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등 1000억대 사업부문을 책임졌다.-만 48세에 퇴직을 결심한 이유는 뭘까요?“늦기 전에 2막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입사 20주년이 되던 해, ‘다음 20년을 준비하라’고 마음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적어도 20년은 더 일할 곳이 필요한데, 더 늦어지면 시작하기 어려워질 것 같았죠. 아내에게 3년간 충전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년 일할 준비에 3년 정도는 투자해야죠.”그가 그리는 인생 2막은 한국의 초고령사회 문제에 대응하고 시니어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삶이다. 특히 ‘살던 곳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를 돕는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꽂혀 있다. 지난 2년간 그 준비를 위해 참 바쁘게 살았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평생교육원을 통해 행정학사에 도전했다. 다가오는 2월에 졸업할 예정이다. 서울대 웰에이징 시니어산업 최고위과정도 이수했다. 동시에 ‘우리동네좋은사람들’을 만들어 강남구의 마을공동체사업 주민공모에 도전했다.“3월에 제안서 내고 심사 과정을 거쳐 6월에 강남구청과 협약을 체결했어요. 구청은 사업비 500만 원과 일본인 마을공동체 전문가를 지원해줬습니다. 타인에게 대문을 열어줘야 하는 세대 방문의 특성상 ‘관(官·구청)’이라는 배경은 큰 도움이 됐습니다.”‘초고령사회’, 우리 동네에도 곧 닥칠 이슈나이가 들면 꼭 이사를 가야 하나? 일찌감치 고령자가 많아진 서구에서 떠올랐던 화두다. 언젠가 타인의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정든 집을 떠나 어딘가에서 의존적 여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그곳이 시니어타운이든 요양원이든, 아니면 요양병원이든 말이다. 반대로 고령자 입장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살던 집과 동네에서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주거와 마을 공동체의 돌봄 기능이 뒷받침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지난 2년간 관련 공부를 하거나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느낀 겁니다.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무료에 가깝거나 아주 싼 표준화된 공공 서비스는 저소득 취약계층 위주로만 돼 있어요. 그밖의 분들은 정보 접근성이 아주 나빠요. ‘알아서 하겠지’라는 방치 속에 오히려 소외돼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또 노인이 겪는 여러 불편이나 필요한 지식들이 많은데, 당사자들도 그 자식 세대인 저희도 너무 모르고 있더라구요.”예컨대 아들이 큰 맘 먹고 바꿔준 최신 휴대전화 탓에 과거 사용하던 기능을 쓸 수 없게 돼 울먹이던 시니어타운에서 만난 할머니, ‘마음 같아서는 휴대전화 매장에 다시 찾아가 예전 전화로 바꿔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 매장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아들이 알면 서운해할까봐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고령자 낙상사고는 침실에서 가장 많아 침대에서 내려올 때 상체를 따라가지 못하는 하체 때문에 낙상 사고가 많은 고령자의 현실 등 돈이 많고 적음과 별개로 모든 시니어가 유의해야 할 일들은 넘쳐난다.“고령자 낙상사고가 가장 많은 곳은 뜻밖에도 침실입니다. 욕실이 아니예요. 고령자의 안전, 편의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너무 없더라구요.”‘우리동네좋은사람들’은 지난해 8월 3주간 강남구의 2개 아파트단지 총 3807세대를 대상으로 주거 환경 개선 사업에 참여할 신청자를 모집했다. 최종적으로 38세대가 신청했다. 이들이 고령자 가정을 방문해 할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낙상 위험 방지. 미끄럼 위험 요소를 진단하고 조치를 통해 낙상 위험을 줄인다. 둘째 가구 가전 등의 재배치를 통한 동선 효율화, 셋째 불필요한 물품의 재활용, 기부 및 폐기를 통한 사회공헌. 이를 위해 ①사전 진단 방문(개인별 행동 관찰 및 인터뷰)→ ②개선 방안 협의 → ③외부 전문가 자문→ ④세대별 솔루션 선정→ ⑤국내외 우수 제품 리서치→ ⑥구매→ ⑦사전 설치 및 사용성 테스트를 꼼꼼히 거쳤다.“별거 있나, 내가 살던 곳이니 계속 사는 거지….”“고령자의 집은 고가 아파트라도 내부는 옛날 그대로인 경우가 많아요. 왜 여기서 사시느냐고 여쭈면 ‘내 집이니까’, ‘살던 곳이니까’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30~40대에 입주해 자녀들 길러내고 출가시킨 뒤에도 여전히 그 동네에서 살고 계신 거죠.”수 십 억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가족의 돌봄이 없다면 생활이 제대로 자리잡기는 어렵다.“부인을 여의고 혼자 사는 78세 어르신은 냉장고 정리를 부탁했어요. 부인 사망 후 몇 년간 한번도 손 대지 않았다며. 모든 끼니는 밖에서 해결하고 자녀들도 집안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고령자에게는 낙상 사고 하나가 치명적일 수 있다. 가볍게 넘어져도 골절 등 심각한 피해를 입는 데다 한번 자리에 누우면 근육이 줄어 좀체 원상 회복이 되지 않는다.이들은 고령자의 침대와 욕실에 안전바를 설치하고 침실과 욕실 사이에 LED 센서등을 달아줬다. 욕실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고 샤워 의자를 제공했다. 고령자 부부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짐들을 정리해 처분한 것도 반응이 좋았다. 이런 일을 하며 구청의 지원금보다 더 많은 비용을 자비로 썼다.침대와 욕조에 안전바를 설치받은 69세 어르신은 “3개월 전 욕조에서 넘어져 무릎 슬개골 골절로 수술을 해야 했다”며 좀더 빨리 만났더라면 다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몇차례의 방문을 마무리하던 날 그녀는 “낙상 이후 생활이 집과 병원만으로 바뀌어 우울증이 왔는데 여러분 덕분에 힐링이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인생 2막 준비에 3년 투자, “마음은 급해지지만….”요즘 그는 약간 속도를 내고 있다. 부인에게 약속한 3년의 유예기간 중 딱 1년이 남았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해나갈 사회적 기업 창업을 생각하고 있지만 누구와 어디서 일을 시작할지는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다.-‘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가요.“노인 관련 일은 모두 공짜, 무료 봉사라는 시선이 너무 강합니다. 할 일은 여기저기 보이고 질적으로 한 단계 높은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데 어디서 출발할지 그림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큰 성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지속 가능성은 담보돼야 하지요. 멤버들과 함께 하고 싶지만 번듯한 직장인인 그들에게 급여도 보장 못하는 창업을 함께 시작하자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겠더라구요.”그는 혼자 힘으로 어떻게 건 창업을 해내고 자리가 잡힌다면 멤버들에게도 손을 내밀어볼 생각이라고 한다. 당초 그의 동네가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여기서도 못한다면 어려운 지역에서는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돈이 많든 적든 나이는 사람을 약하고, 외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부자들의 여유를 빌어 우리 사회를 선도하는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 아닐까.“남은 1년, 뭔가 만들어내야죠. 3년을 쏟아붓는데 뭔가 돼 있겠지요. 전 어렸을 때부터 어르신들이 좋았어요. 그 분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기쁩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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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령자는 침대낙상도 치명적… “살던 곳서 편안한 여생 보내는 데 힘 보탤것”[서영아의 100세 카페]

    새해 3일 저녁 강남구 선릉역에 자리한 공유 오피스. 20대에서 60대까지의 남녀 10여 명이 모여 들었다. ‘우리동네좋은사람들’(대표 김종훈)의 신년 모임이다. 이날은 지난해 12월 27일 몇몇 멤버가 대표로 수상한 한국주거복지문화대상 최우수상 시상식 보고대회도 겸했다. 모임은 한국IBM을 퇴직한 김종훈 씨(50)가 지난해 봄 만들었다. 멤버 11명은 모두 강남구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이다. 퇴근 후 서로의 빈 사무실에서 ‘고령자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주제로 하는 정기 도시락 모임을 가졌다. 멤버들은 연령대도, 직업도 다양하다. 대학 동창인 건축가 신수진 씨는 처음부터 모임에 초대된 경우다. 김 대표가 사무실 임대를 알아보다가 친해진 20대의 공유오피스 회사 직원, 외제차 매장에서 마주친 30대 판매 부장, 시니어타운 실습에서 그를 감동시킨 60대 요양보호사, 여기에 강남구청이 지정해준 50대의 일본인 마을활동가 미야자키 다다시 씨도 있다. ―픽업의 기준이 뭔가요. “‘좋은 사람’이냐 여부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겪어 보면 알 수 있어요. 어르신들을 모셔야 하니 그냥 일 잘하는 사람 말고, 좋은 사람이어야 해요.”●화두는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돌이켜보면 지난해 초 김종훈 씨에게서 첫 e메일이 왔었다. 자기 소개와 더불어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1월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끝나고 연락드리겠다’고 답장을 보내고는 까맣게 잊었다. 그런데 지난해 말쯤 다시 e메일이 왔다. 그동안 진행해 온 고령자 주거 개선 사업을 소개하며 조언을 듣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21일 광화문에서 만나 3시간 반가량 얘기했다. 김 씨는 2020년 말 20년간 일한 한국IBM을 퇴직했다. 회사에서는 총괄전무로 인공지능과 클라우드 등 1000억 원대 사업부문을 책임졌다. ―만 48세에 퇴직을 결심한 이유는? “늦기 전에 2막을 준비하기 위해서죠. 입사 20주년이 되던 해 ‘다음 20년을 준비하라’고 마음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적어도 20년은 더 일할 곳이 필요한데, 더 늦어지면 시작하기 어려워질 것 같았죠. 아내에게 3년간 준비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년 일할 준비에 3년 정도는 투자해야죠.” 그가 그리는 인생 2막은 한국의 초고령사회 문제에 대응하고 시니어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삶이다. 특히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aging in place)’를 돕는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꽂혀 있다. 지난 2년간 준비를 위해 참 바쁘게 살았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평생교육원을 통해 행정학사에 도전했다. 다가오는 2월에 졸업한다. 서울대 웰에이징 시니어산업 최고위과정도 이수했다. 동시에 ‘우리동네좋은사람들’을 만들어 강남구의 마을공동체사업 주민공모에 도전했다. “3월에 제안서 내고 심사 과정을 거쳐 6월에 강남구청과 협약을 체결했어요. 구청은 사업비 500만 원과 일본인 마을공동체 전문가를 지원해 줬습니다. 타인에게 대문을 열어줘야 하는 가구 방문의 특성상 ‘관(官·구청)’이라는 배경은 큰 도움이 됐습니다.”●‘초고령사회’, 우리 동네에도 곧 닥칠 이슈나이가 들면 꼭 이사를 가야 하나? 일찌감치 고령자가 많아진 서구에서 떠올랐던 화두다. 그곳이 시니어타운이든 요양원이든, 아니면 요양병원이든 말이다. 반대로 고령자 입장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살던 집과 동네에서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주거와 마을 공동체의 돌봄 기능이 뒷받침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 2년간 관련 공부를 하거나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느낀 겁니다.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무료에 가깝거나 아주 싼 표준화된 공공 서비스는 저소득 취약계층 위주로만 돼 있어요. 그 밖의 분들은 ‘알아서 하겠지’라는 방치 속에 오히려 소외돼 있는 것 같아요. 또 노인이 겪는 여러 불편이나 필요한 지식을, 당사자들도 그 자식 세대인 저희도 너무 모르고 있더라고요.” 예컨대 아들이 바꿔준 최신 휴대전화 탓에 과거 사용하던 기능을 쓸 수 없게 돼 울먹이던 시니어타운의 할머니, 침대에서 내려올 때 상체를 따라가지 못하는 하체 때문에 낙상 사고가 많은 현실 등 돈이 많고 적음과 별개로 모든 시니어가 유의해야 할 일들은 넘쳐난다. “고령자 낙상 사고가 가장 많은 곳은 뜻밖에도 침실입니다. 욕실이 아니에요. 고령자의 안전, 편의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너무 없더라고요.” 지난해 8월 3주간 강남구의 2개 아파트단지 총 3807가구를 대상으로 주거 환경 개선 사업에 참여할 신청자를 모집했다. 최종적으로 38가구가 신청했다. 고령자 가정을 방문해 할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낙상 위험 방지. 미끄럼 위험 요소를 진단하고 조치를 통해 낙상 위험을 줄인다. 둘째, 가구 가전 등의 재배치를 통한 동선 효율화. 셋째, 불필요한 물품의 재활용, 기부 및 폐기를 통한 사회공헌. 이를 위해 ①사전 진단 방문(개인별 행동 관찰 및 인터뷰)→②개선 방안 협의→③외부 전문가 자문→④가구별 솔루션 선정→⑤국내외 우수 제품 리서치→⑥구매→⑦사전 설치 및 사용성 테스트를 꼼꼼히 거쳤다.●“별거 있나, 살던 곳이니 계속 사는 거지….”“고령자의 집은 고가 아파트라도 내부는 옛날 그대로인 경우가 많아요. 왜 여기서 사시느냐고 여쭈면 ‘내 집이니까’, ‘살던 곳이니까’라고 답합니다.” 수십억 원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가족의 돌봄이 없다면 생활이 제대로 자리 잡기는 어렵다. “부인을 여의고 혼자 사는 78세 어르신은 냉장고 정리를 부탁했어요. 부인이 사망한 후 몇 년간 한 번도 손 대지 않았다며. 모든 끼니는 밖에서 해결하고 자녀들도 집안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령자에게는 낙상 사고 하나가 치명적일 수 있다. 가볍게 넘어져도 골절 등 심각한 피해를 입는 데다 한번 자리에 누우면 근육이 줄어 좀체 원상 회복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고령자의 침대와 욕실에 안전바를 설치하고 침실과 욕실 사이에 LED 센서등을 달아 줬다. 욕실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고 샤워 의자를 제공했다. 고령자 부부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짐들을 정리해 처분한 것도 반응이 좋았다. 이런 일을 하며 구청의 지원금보다 더 많은 비용을 자비로 댔다. 침대와 욕조에 안전바를 설치받은 69세 어르신은 “3개월 전 욕조에서 넘어져 슬개골 골절로 수술을 해야 했다”며 “좀 더 빨리 만났더라면 다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몇 차례의 방문을 마무리하던 날 그녀는 “낙상 사고 이후 생활이 집과 병원만으로 바뀌어 우울증이 왔는데 여러분 덕분에 힐링이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인생 2막 준비에 3년 투자, “마음은 급하지만….”요즘 그는 약간 속도를 내고 있다. 부인에게 약속한 3년의 유예 기간 중 딱 1년이 남았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해 나갈 사회적 기업 창업을 생각하고 있지만 누구와 어디서 일을 시작할지는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다. ―‘좋은사람들’과 함께하지 않나요? “노인 관련 일은 모두 공짜, 무료 봉사라는 시선이 너무 강합니다. 할 일은 여기저기 보이고 질적으로 한 단계 높은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데 어디서 출발할지 그림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큰 성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지속 가능성은 담보돼야 하지요. 멤버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번듯한 직장인인 그들에게 급여도 보장 못하는 창업을 함께 시작하자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겠더라고요.” 당초 그의 동네가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여기서도 못한다면 어려운 지역에서는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돈이 많든 적든 나이는 사람을 약하고, 외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부자들의 여유를 빌려 우리 사회를 선도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남은 1년, 뭔가 만들어내야죠. 3년을 쏟아붓는데 뭔가 돼 있겠지요. 전 어렸을 때부터 어르신들이 좋았어요. 그분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기쁩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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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향-노하우 전수-연금 연기… 베이비부머들, 손주 위해 ‘양보의 보따리’[서영아의 100세 카페]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부모님 세대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 같아요.” 저녁 식사 중 20년 이상 어린 후배 입에서 나온 얘기가 귀에 꽂혔다. 명문대생들에게 부모의 적정 사망 연령을 묻자 ‘63세’가 가장 많았다는 우스개가 고령자들 커뮤니티에서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도 여느 청년들처럼 30세를 훌쩍 넘겼지만 결혼도 내 집 마련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저출산 고령화, 부동산 폭등, 연금과 건강보험의 재정 고갈 위기, 일자리 문제 등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고민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답이 없고, 이런 결론에 도달하더란다. 이들에게 100세 시대가 논해지는 요즘 현실은 얼마나 숨이 막힐까. 알코올 기운에 나온 ‘아무 말 대잔치’ 중 하나였지만 계속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한국에서 1차와 2차를 합한 베이비붐 세대는 1955년부터 1974년까지 매년 100만 명가량 태어났다. 이들은 고도 경제성장과 의학 발전 등에 힘입어 자산을 모았고 평균수명도 늘었다. 반면 이들의 2세들은 부모 세대보다 수가 적고, 경제의 성장동력이 줄어들면서 취업이나 투자 기회 등의 측면에서도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것으로 점쳐진다. 연금과 고용 등 희소한 경제자원과 기회를 둘러싸고는 세대 갈등 조짐마저 엿보인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공존할 길은 없을까.○은퇴 세대의 귀향으로 지방 소멸 막자“향우회를 해보면 알아요. 잘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 진출해 살고 있죠. 이런 식으로 고향이 비어간다면 머잖아 대한민국은 공멸할 수밖에 없습니다.”(강보영 대한민국시도민회연합 이사장) 인구의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출산율 저하는 닭과 달걀의 관계다. 지난해 10월 행정안전부가 전국 89곳(기초단체)을 인구 감소 지역으로 지정한 가운데, 고향을 떠나 서울에 뿌리를 내린 재경 지방향우회들이 고향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섰다. 은퇴 세대의 귀향을 유도해 고향의 기사회생을 도모하겠다는 것. 이를 위해 2019년 재경 향우회들의 연합인 대한민국시도민회연합을 결성하고 지난해 말 ‘지방 소멸 위기대응을 위한 특별법안 초안’을 내놓았다. 법안에는 지방 소멸 위기 특별지역으로 이주하는 개인과 기업에 파격적인 특혜를 준다는 내용이 담겼다. 예컨대 특별지역에 전입하는 주민에게는 양도소득세 취득세 상속·증여세 감면 혜택을, 기업에는 법인세 취득세 감면과 기업 상속 요건 완화 혜택을 주도록 했다. 건강보험료나 관내 문화 관광시설 입장료 인하 등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위한 지원책, 노년 지방살이에 가장 큰 걸림돌인 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 의료 인프라에 대한 폭넓은 지원책도 담겼다. 강 이사장은 “관건은 실효성”이라며 지방에 이사 갈 결심을 할 정도가 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혜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도 저서 ‘베이비부머가 떠나야 모두가 산다’에서 지방을 살릴 주역으로 은퇴를 맞는 베이비부머에 주목했다. 마 교수에 따르면 1차와 2차 베이비붐 세대 약 1680만 명 중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그중 절반인 약 440만 명이 지방 출신이다. 다양한 조사에서는 이들이 적게는 30%, 많게는 50∼60%가 귀향 의사를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10%(44만 명)만 귀향해도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지방 쇠퇴를 막고 국토균형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이비부머에게도 귀향은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 지방에는 중노년층이 인생 2막을 시도할 일거리가 상대적으로 많고 조금 덜 벌더라도 생활비를 아낄 수 있다. 익숙한 지역이라면 옛 친구나 동료들과 더불어 여가를 즐기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며 살던 곳에서 늙어가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도 가능하다.○부모-청년 세대, ‘윈윈’하는 일자리와 부의 이전한쪽에서 청년 취업을 걱정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중노년 취업과 노인 빈곤을 거론한다. 일자리는 세대 간 ‘제로섬 게임’일 수밖에 없는가. 경제학자인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의 청년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를 가장 큰 전략자산으로 꼽고 이들의 힘을 결합시키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그는 최근 저서 ‘핏팅(fitting) 코리아’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도 진귀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베이비부머들을 소환해 이들이 ‘조연’급 사회적 기여와 역할을 하되 주연인 청년들을 돕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은 경제력과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감을 갖고 있습니다. 희생과 양보로 청년 세대를 돕는다면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성숙한 어른 세대가 될 수 있어요.” 구체적으로는 대기업이나 기술인력 출신 베이비붐 세대가 중견·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 기술 멘토나 상담역으로 재취업해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을 주고, 청년들은 ‘공공서비스 의무제’를 통해 직장 경험을 쌓으며 노하우를 전수받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 그는 베이비부머들이 가칭 ‘세대 승계 기금’을 만들어 후계 세대가 쓸 재원을 확보해주는 한편 자녀에게 집을 넘겨주고 일부를 전세로 사는 ‘자가(自家)전세’ 등 부의 이전 방법도 적극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는 2년여 전 아들에게 서울의 집을 증여하고 자신이 부분전세로 들어갔다. 은퇴를 앞두고 노후의 터전은 전남 구례에 마련했다. 은퇴하면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고령자가 먼저 양보연금과 건강보험에서도 세대 간 이해관계는 대립 양상을 보인다. 고령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 제도는 젊은이들에게 불리하게 작동된다. 고령자들의 표의 힘이 크기 때문이다. 웬만한 정치인들이 노인 관련 법안에 손대지 못하는 이유다. 고령자가 먼저 나서 청년 세대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조금은 손해 보거나 희생하는 길을 자처한다면 어떨까. 노년의 삶과 자세에 대한 저작을 많이 내고 있는 일본의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91)는 85세에 낸 저서 ‘혐로(嫌老)사회를 넘어서’에서 “유럽에서 보이는 난민이나 이민에 대한 증오가 일본에서는 노인 혐오가 될 가능성이 있다”며 노인들 스스로 현명해질 것을 주문했다. 그의 경우 한때 스포츠카 마니아였지만 65세에 면허증을 반납했고 의료보험이나 사회복지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며 스스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이기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나눈다는 자세가 본인도 세상도 편하게 한다는 것. 올 9월 동아일보 취재팀 조사에서 “연금을 3년 늦게 받자” “보험료 10만 원 더 내자”는 제안에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각기 ‘손주들도 연금 받게’ ‘아이, 청년들을 위해’라는 문구를 붙이자 고령층 과반이, 청년층 절반 이상이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에는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각박함도 있지만 뿌리 깊은 공동체 의식도 있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남을 위하는 게 곧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고령자 지하철 무임승차 논란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84년 65세 이상 고령자 무료 정책이 도입될 때 고령인구는 4%에 불과했다. 하지만 베이비부머들이 순차적으로 고령자가 되면서 고령인구 비율은 2025년 20%, 나아가 2045년이면 37%를 넘기게 된다. 이런 제도가 지속가능할 수는 없다. 해외에서도 고령자들의 외출은 건강에 도움이 되므로 적극 권장하지만, 대중교통 요금은 할인제나 쿠폰제 등을 통해 제한을 두고 있다. 베이비부머 사이에서 스스로 무료 승차를 양보하자는 주장이 나온다면 바뀔 수 있다. 기성세대와 미래세대의 공존을 위해 각자 선 자리에서 그 나름의 모색들이 이뤄지는 가운데 2022년이 저물고 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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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자, 기후변화 대응하려면 지속가능 제품-브랜드로 바꿔야”

    기후위기에 대한 세계인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방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프린터 및 프로젝터 제작업체인 세이코 엡손(이하 엡손)이 세계 28개국 2만6205명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2022 기후현실 바로미터(Climate Reality Barometer)’ 조사가 그것이다. 같은 조사는 지난해에도 실시됐다. 소비자들은 기후위기(20%)를 경제 안정화(22%)나 물가 상승(21%)과 비슷한 수준의 관심사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기후재앙 우려가 비관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2021년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6%가 ‘자신은 평생 기후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답했는데, 올해 조사에서는 같은 답변이 48%로 2%포인트 늘었다.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선진국과 신흥경제국에서 극명하게 갈렸다. 기후위기를 낙관적으로 보는 주요 7개국(G7) 응답자는 미국(39.4%), 캐나다(36.6%), 영국(28.4%), 이탈리아(25.2%), 독일(23.8%), 프랑스(22.5%), 일본(10.4%) 순으로 세계 평균을 밑돌았다. 반면 빠르게 성장하고 있거나 개발이 진행 중인 인도(78.3%), 중국(76.2%), 케냐(76%), 필리핀(71.9%), 멕시코(66%), 인도네시아(62.6%)는 낙관적이었다. 이 같은 인식과는 별도로 많은 소비자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지속가능한 제품으로 사용을 전환했거나 사용을 고려 중이라는 소비자는 전체 응답자의 86.4%로 지난해보다 4%포인트 늘었다. 이 중 1년 이상 지속가능한 제품을 사용 중인 소비자는 27%였다. 지속가능성이 없는 브랜드를 불매하거나 피하고 싶다는 응답자는 63%였고, 이 중 16%는 1년 이상 불매 중이라고 답했다.1009명의 한국인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7월 29일∼8월 4일 온라인)에서는 응답자의 26.9%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기후위기를 꼽았다. 반면 응답자의 33.2%는 자신의 일생 동안에는 기후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2021년의 24.9%에 비해 8.3%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특히 25∼34세 응답자의 37.8%가 기후위기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다만 한국 소비자들도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걷기 또는 자전거 타기(61.4%), 재활용 습관 개선(59.8%),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55.4%) 등을 실천하고 있었다. 엡손은 이번 조사 결과는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정부의 규제 △기업의 지속가능한 기술개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 변화 등 다각적인 노력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고 지적했다. 엡손 유럽 지속가능성 책임자인 헤닝 올손은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지역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며 “엡손은 자사 제품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솔루션 마련에 집중할 것이며, 이는 많은 소비자의 행동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가와 야스노리(小川恭範) 세이코 엡손 대표는 “엡손의 기업 목표는 더 나은 삶과 지구를 만드는 데 있다”며 “지속가능한 브랜드가 되기 위해 엡손은 2030년까지 친환경 기술 개발에 1조 원을 투입하고 2023년까지는 그룹 전체 RE100을 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RE100은 기업이 제품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100% 재생에너지로 조달한다는 글로벌 캠페인이다. 실제로 한국엡손은 문서 출력 시 열을 사용하지 않는 ‘히트프리(Heat-Free)’ 기술을 활용해 친환경 프린팅 솔루션을 개발하는 등 친환경 기술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엡손 글로벌은 소모품에 의한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는 제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데, 헌 종이를 새 종이로 재활용할 수 있는 사무용 제지 시스템 ‘페이퍼랩(PaperLab)’이 대표적인 예다. 이 시스템은 현재 일본에서 상용화돼 약 20개 회사에서 사용 중이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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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퇴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의 끝 없는 인생 2막[서영아의 100세 카페]

    그의 인생 2막은 유난히 빨리 시작됐다. 30대 후반에 10여 년간 해온 기자 생활을 접고 맥주집을 내겠다고 나섰다. 어릴 적 꿈이 기자였고 나름 재미있게 일했지만, 큰 사건 하나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1998년 독일연수 막바지에 영국에서 당한 교통사고로 아내가 중증 장애인이 됐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59)는 평범한 기자에서 산하기관을 포함해 연간 670억의 예산을 다루는 비영리단체의 경영자로 변신했다. 동년배들의 은퇴 시즌, 그의 인생2막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9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재단사무실을 찾았다.‘피와 맥주로 세워진’ 재단사고 직후 아내는 응급수술로 왼쪽 다리를 잘랐지만 염증 때문에 사경을 헤맸다. 최후의 수단으로 두 번 더 절단수술을 받은 뒤에 의식이 돌아왔다. 이후로도 힘든 치료와 재활훈련이 이어졌다. 영국과 독일에서 접한 유럽의 재활병원은 철저히 환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3년 반 만에 돌아온 한국은 낯설었다. 장애인이 치료받기도, 생활하기도 너무 힘든 나라였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부부는 언젠가는 환자가 주인이 되는 작은 재활병원을 만들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당시 집사람이 재활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로 제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갔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왜 따로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병원은 의사 만나기도 힘들고, 환자가 아닌 의료진이 주인이더군요. 유럽에서는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가족처럼 보살폈죠. 더 늦기 전에 유럽 같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병원을 만들려니 먼저 재단이 필요했고 재단을 만들려면 ‘재산’이 있어야 했다. “재산을 마련하자!”마침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주세법이 바뀌면서 소규모 양조가 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에서 양조학을 전공했던 후배가 떠올랐다. 월드컵 전에 독일식 하우스 맥주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2001년 말 회사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7월 독일의 맥주축제 이름을 딴 ‘옥토버훼스트’ 1호점을 강남에 열었다. 2005년 드디어 푸르메재단이 출범했다. 8년에 걸친 소송 끝에 아내의 교통사고 피해보상금을 받았고, 아내는 이중 절반인 10억 7000만 원을 재단에 내놓았다. 여기에 백 씨의 옥토버페스트 지분 10%가 더해져 재단의 ‘기본재산’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농담삼아 푸르메를 피와 맥주로 이뤄진 재단이라고 말해요.”(백 씨) 국내유일 어린이 재활병원-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죠. 손꼽아 본다면.“푸르메가 어린이의료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분, 이철재 사장님이 가장 고맙죠.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줬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장애어린이들이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어요. 이철재 사장은 미국 유학 시절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지만 벤처창업에 성공한 사업가인데, 먼저 연락을 해오셨어요. 부자라면 현금을 기부했겠지만, 그 분은 자신이 가진 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10억 원을 마련해주셨어요.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고 그걸 보고 감동한 김정주 NXC(넥슨의 지주회사) 대표가 더 큰 기부를 해주셨지요.”2월 말 미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김정주 대표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2016년 서울 상암동에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재활병원 건립에 일찌감치 200억 원을 기부해 마중물 역할을 했다. 재단은 ‘푸르메재단 넥슨 어린이 재활병원’이란 병원이름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기부는 근근히 먹고 살만한 분들이 실천한다’는 말이 있다. 부자들은 세금감면이니 사회적 명예 등을 따지지만, 조건없이 기부하는 것은 대부분 보통사람들이라는 것. 재활병원 건립에는 시민 1만 명, 200개 기업이 정성을 모아줬다.“불치병으로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한 부부는 보험회사에서 받은 보험금을 기부했고 이해인 수녀님은 시집 인세를 내주셨어요. 재단 홍보대사인 가수 션 씨는 한 해 20개가 넘는 마라톤을 뛰면서 기금을 모아줬어요. 이렇게 나머지 230억 원이 기적같이 모금됐습니다.”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준 김성수 성공회 주교는 그의 평생 스승이 됐다. 대기업에 기금을 부탁하러 갔다가 성과없이 돌아서며 어깨가 처진 백 씨에게, “본래 성직이나 사회사업이나 앵벌이”라며 “계속 두드리다보면 사람들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고 위로해주곤 했다. ‘구조적 적자’라는 숙명하지만 어린이 재활병원은 ‘구조적 적자’라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수익을 내려면 비싼 검사와 수술을 많이 해야 하는데 재활병원은 그런 게 있을 수 없다. 유수의 대형병원들이 재활병원을 운영하지 않는 이유다.“우리 병원이 자리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지속가능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 재활치료의 기본이 물리치료와 작업치료인데 수가가 굉장히 낮거든요. 치료할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예요.” 푸르메 재활병원은 애초에 연간 30억 원 정도의 적자요인을 안고 있었다. 일부는 서울시와 마포구의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모금 등으로 메우려 각오했던 터였다. 그런데 코로나19사태로 환자가 크게 줄면서 2020년 53억, 2021년 51억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병원 설립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정주 대표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해 도움을 받기도 했다.이처럼 어려울 때면 늘 선한 사람들이 나타나 힘을 보태줬지만, 정부나 지자체는 그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어린이재활병원은 꼭 필요한 곳이죠. 공공이 할 일을 우리가 앞장서서 하는 것이니 만큼 때가 되면 지원을 해줄 거라고 내심 믿었어요. 그런데 도와주지 않더라구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5월 ‘약자와의 동행’을 내세우며 2026년까지 6000억 원을 들여 공공병원 2개를 짓겠다고 했다. 백 씨 생각은 그럴 돈으로 현재 잘하고 있는 공공병원 성격의 민간병원 10개를 지원해주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중증 어린이치료에 대해 보험 수가를 1.5배 정도 올려주는 ‘시범수가’만 적용해줘도 당장의 적자 고민은 해소된다.“정부는 우리 재활병원이 사회복지시설 용지에 지어졌으니 요양병원이라며 어린이 재활병원에 적용되는 시범수가를 적용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국내 유일한 어린이재활병원을, 마포구가 내준 땅이 의료시설용지가 아니란 이유로 인정해줄 수 없다는 논리죠. 그럼 부지의 용도를 바꿔달라고 마포구에 요청했지만 힘들다는 입장입니다.”공무원들의 무책임과 관료주의는 21세기를 사반세기나 지나가는 시점에도 여전한가 보다.그때 그 사고가 없었다면?사실 그와는 대학시절부터 아는 사이다. 그는 기사를 통해 사회를 고발하고 바꿔보겠다는 꿈을 가졌고 현재도 계속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평생의 노력과 재산을 투여해 아내와 같은 장애인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길을 뚫어왔다. 인간,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길 아니었을까. 후배에게 이런 얘기 했더니 ‘뼈 때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고통, 그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자신은 피하고 싶다’고.-만약 그날의 사고가 없었다면 지금 백경학 씨는 어디서 뭘하고 있을까요?“그냥 기자생활 했을 것 같아요. 정치부나 사회부보다 문화부 종교담당 기자를 재미있게 했을 것 같아요.”-지금 나이(59세)면 언론계에 남았다 해도 곧 정년일 텐데요.“음…. 그래도 다른 것 하지 않고, 기자로서 살았을 거예요. 굳이 돈을 만들겠다며 맥주집을 열려는 모험은 안했겠죠. 그때 그 사고로 인해 격랑과 파고에 맞서 싸우게 됐죠. 아내가 세상을 살아가야 하니 더 강해져야 했고, 겨우 7살인 딸아이 붙잡고 살아나가야 했으니까. 어떤 게 최선이고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주위 분들이 늘 힘을 보태 주셨어요. 하지만 돌아보면 참 힘들었어요.”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부인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깨비 통증’이라는 환상통(phantom pain)에 시달린다. 절단장애인에게 많은 증세로, 없어진 발등과 발목을 수백개 바늘로 주기적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다고 한다. 갈수록 자주, 오래 지속되는 통증에 시달리는 아내를, 그는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재활에서 자활로 -장애청년들의 일자리가 될 농장 사업그의 관심은 재활에서 자활(自活)로 뻗어가고 있다.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은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면 평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가 농장 짓는 일에 나선 이유다. 우연히 농사가 자폐나 발달장애 청년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직원들과 함께 네덜란드 스마트팜을 둘러보며 해답을 찾았다. “오래된 작은 농장들을 개조해 암 뇌졸중 치매 정신장애환자, 발달장애 청년을 보호하는 ‘케어팜’을 만들었더군요. 병원에 누워있는 것보다 자유롭게 농사짓고 닭 모이주고 자연을 호흡하는 게 비용도 적게 들고 행복하다는 확신이 들었죠.” 이런 농장을 만들겠다고 캠페인을 시작하자 발달장애 아들(33)을 둔 이상훈 장춘순 부부가 경기도 여주시 오학동의 농장 부지 3800평을 기부했다. 재단에서 장애청년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농장을 잘 만들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이 땅에 건축비 130억 원을 들여 1200평 유리온실과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 프로그램실 등을 짓고 9월에 오픈식을 했다.인근 SK하이닉스에서 건축비와 운영비를 도와줬고 농장에서 생산된 토마토와 버섯은 모두 사주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종종 농장을 방문한 분들이 장애청년들이 하루 4시간 일하고 월급 100만 원씩을 받는다고 하면 ‘외국인 노동자 4명 고용하면 될 텐데’라며 혀를 차세요. 하지만 우린 생산성이 아니라 이 청년들의 행복을 원하는 거예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거죠.”현재 장애청년 53명이 일하고 푸르메 직원 13명이 이들과의 가교역할을 해준다. 4시간 일하고 회사에서 밥 먹고 2시간은 돈쓰는 법 수업을 듣는 농장은 장애청년들에게는 꿈의 직장인 셈이다. 그래서 53명은 나름 ‘엄격한 선발시험’을 거쳤다. “토마토와 저울을 주고 500g을 달아 보라고 해요. 400g만 달았더라도 개념 이해한 거면 합격. 하지만 아예 그런 개념을 모른다면 곤란하지요. 또 ‘저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 정도의 자기표현, 의사소통은 돼야 합니다. 부지를 기부한 부부의 아들 덕희 씨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농장에 출근하고 있어요.”-농장에 가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행복하죠. 아이들이 참 이뻐요. 처음엔 눈도 안 마주치던 친구들이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하지요. 과자 같은 걸 내밀며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라고. 청년들은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게 됩니다. 일자리와 월급이 그들에게 자존감을 높여줘요. 어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인데, ‘너 이거 왜 또 샀어? 하니 ’내가 번돈이니 내가 알아서 쓸거에요‘하는 대답을 듣고, 너무 행복하다고 하세요. 조금씩 자립하는 아들이 대견한 거죠.”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서울 종로구 효자동 사거리 모퉁이에 4층짜리 푸르메재단 건물이 서 있다. 320평 건평에 1층은 장애인치과, 2층은 어린이재활의원, 3층 장애인복지관, 4층 재단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1층 로비 구석에는 발달장애 청년들이 운영하는 카페도 있다. 종로구 땅을 빌려 재단이 75억 원을 들여 새 건물을 지은 뒤 기부체납했다. 푸르메재단은 이곳과 상암동의 어린이재활병원, 여주의 푸르메 소셜팜 등 여러 장애인을 위한 시설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인구 10%가 장애인’이란 표현은 정확한 건가요.“선진국은 그보다 높습니다. 한국은 등록장애인 264만명(2021년)이니 5~6% 정도인 셈인데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장애인이 많습니다. 발달장애 아이 엄마들은 아이가 나아질 거라고 믿죠. 장애인 등록이 낙인효과를 가져오거나 형제자매가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합니다.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기능부전도 모두 장애예요. 암 수술 받은 뒤 누워 지내게 되면 외국에서는 장애인 등록을 합니다. 장수사회에서 장애인은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일이 궤도에 올랐는데, 은퇴를 생각해본 적 있나요? “65세 정도면 물러나려고요. 어느 틈에 ‘쉰세대‘가 됐다고 느껴요. 저는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나이든 기부자들이 뭘 원할까를 생각하죠. 이게 20년 전 사고방식이예요. 젊은 세대는 현금 기부도 있지만 페이스북에 있는 재단관련 기사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도 기부라고 생각해요. 이런 감각을 아는 새로운 사람이 꾸려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저는 뒤에서 밀어주고 돕는 일을 해야지요.”-재단의 최초 출자자인데, 회사라면 주식을 팔거나 배당을 받을 텐데 재단은 어떤가요.“재단은 만들어진 순간 사회의 것이지요. 자체 생명력을 갖고 꾸려질 거라고 봅니다. 딸아이는 공무원으로 취직해 스스로 살아갈 힘을 기르고 있어요. 아이가 대학에 입학한 뒤 푸르메재단에서 자원봉사를 하겠다기에 다른 곳에서 하라고 했어요. 상임이사 딸이라고 하면 직원들이 신경쓰지 않겠어요.” 10년 후를 바라보며 그에게는 꿈이 몇 개 더 있다. 푸르메 병원과 농장 모델을 가난한 동남아국가에 세워보는 일, 북한 장애어린이 재활을 돕는 일 등이다. 언젠가 그의 날개가 더 넓은 곳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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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와 맥주로 시작한 재단사업, 어린이재활병원-청년자립 농장으로 결실”

    그의 인생 2막은 유난히 빨리 시작됐다. 30대 후반에 10여 년의 기자 생활을 접고 맥줏집을 내겠다고 나섰다. 어릴 적 꿈이 기자였고 나름 재미있게 일했지만, 큰 사건 하나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1998년 독일 연수 막바지에 영국에서 당한 교통사고로 아내가 중증장애인이 됐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59)는 평범한 기자에서 산하기관을 포함해 연간 670억 원의 예산을 다루는 비영리단체의 경영자로 변신했다. 그의 인생 2막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9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재단사무실을 찾았다.○ ‘피와 맥주로 세워진’ 재단사고 직후 아내는 응급수술로 왼쪽 다리를 잘랐지만 염증 때문에 사경을 헤맸다. 최후의 수단으로 두 번 더 절단 수술을 받은 뒤에 의식이 돌아왔다. 이후로도 힘든 치료와 재활훈련이 이어졌다. 3년 반 만에 돌아온 한국은 낯설었다. 장애인이 치료받기도, 생활하기도 너무 힘든 나라였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부부는 언젠가는 환자가 주인이 되는 작은 재활병원을 만들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 “당시 집사람이 재활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로 제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갔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건데 왜 따로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병원은 환자가 아닌 의료진이 주인이더군요. 유럽에서는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가족처럼 보살폈죠. 더 늦기 전에 유럽 같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병원을 만들려니 먼저 재단이 필요했고 재단을 만들려면 ‘재산’이 있어야 했다. 마침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주세법이 바뀌면서 소규모 양조가 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에서 양조학을 전공했던 후배가 떠올랐다. 월드컵 전에 독일식 하우스 맥주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2001년 말 사표를 내고 이듬해 7월 ‘옥토버훼스트’ 1호점을 강남에 열었다. 2005년 드디어 푸르메재단이 출범했다. 8년에 걸친 소송 끝에 아내의 교통사고 피해보상금을 받았고, 아내는 이 중 절반인 10억7000만 원을 재단에 내놓았다. 여기에 백 씨의 옥토버훼스트 지분 10%가 더해져 재단의 ‘기본 재산’이 되었다. “그래서 저희끼리는 농담 삼아 푸르메를 피와 맥주로 이뤄진 재단이라고 말해요.”(백 씨)○국내 유일 어린이재활병원―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죠. 손꼽아 본다면…. “저희가 어린이의료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분, 이철재 사장님이 가장 고맙죠.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줬어요. 미국 유학 시절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지만 벤처 창업에 성공한 사업가였는데, 먼저 연락을 해오셨어요. 그분은 자신이 가진 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10억 원을 마련해 주셨어요.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고 그걸 보고 감동한 김정주 NXC(넥슨의 지주회사) 대표가 더 큰 기부를 해주셨고요.” 2월 말 미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김정주 대표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2016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일찌감치 200억 원을 기부해 마중물 역할을 했다. 병원은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란 이름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 뒤 병원 건립에는 시민 1만 명, 200개 기업이 정성을 모아줘 2년 만에 나머지 230억 원이 기적같이 모금됐다. 하지만 어린이재활병원은 ‘구조적 적자’라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수익을 내려면 비싼 검사와 수술을 많이 해야 하는데 재활병원은 그런 게 있을 수 없다. 유수의 대형 병원들이 재활병원을 운영하지 않는 이유다. “병원이 자리 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지속 가능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요.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는 수가가 굉장히 낮아서, 치료할수록 적자죠.” 푸르메 재활병원은 애초에 연간 30억 원 정도 적자 요인을 안고 있었다. 일부는 서울시와 마포구의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모금 등으로 메우려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환자가 크게 줄면서 2020년 53억 원, 2021년 51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병원 설립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정주 대표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해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울 때면 늘 선한 사람들이 나타나 힘을 보태줬지만, 정부나 지자체는 그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어린이재활병원은 꼭 필요한 곳이고, 공공이 할 일이다, 우리가 앞장서지만 때가 되면 지원해 줄 거라고 내심 믿었죠. 그런데 도와주지 않더라고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5월 ‘약자와의 동행’을 내세우며 2026년까지 6000억 원을 들여 공공병원 2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백 씨 생각은 그럴 돈으로 현재 잘하고 있는 공공병원 성격의 민간병원 10개 정도를 지원해 준다면 적은 비용으로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중증 어린이 치료에 대해 보험 수가를 1.5배 정도 올려줘도 당장 적자 고민은 해소된다. “정부는 푸르메 재활병원이 사회복지시설 용지에 지어졌으니 요양병원이라며 어린이 치료에 적용되는 1.5배의 ‘시범수가’를 적용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국내 유일 어린이재활병원을, 마포구가 내준 땅이 의료시설용이 아니란 이유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죠. 이번에는 부지의 용도를 바꿔 달라고 마포구에 요청했지만 힘들다는 입장입니다.” 공무원들의 무책임과 관료주의는 21세기를 사반세기나 지나가는 시점에도 여전한가 보다. ○장애 청년들의 일터가 될 농장 사업그의 관심은 재활에서 자활(自活)로 뻗어가고 있다.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은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면 평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가 농장 짓기에 나선 이유다. 우연히 농사가 자폐나 발달장애 청년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장애 청년 일자리를 위한 농장을 만들겠다고 캠페인을 시작하자 발달장애 아들(33)을 둔 이상훈 장춘순 부부가 경기 여주시 오학동의 농장 부지 3800평을 기부했다. 이 땅에 건축비 130억 원을 들여 1200평의 유리온실과 카페 식당 등을 짓고 9월 오픈식을 했다. 현재 장애 청년 53명이 일하는데, 인근 SK하이닉스에서 건축비와 운영비를 도와줬고 농장에서 생산된 토마토와 버섯을 모두 사주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종종 농장을 방문한 분들이 장애 청년들이 하루 4시간 일하고 월급 100만 원씩을 받는다고 하면 ‘외국인 노동자 4명 고용하면 될 텐데’라며 혀를 차세요. 하지만 우린 생산성이 아니라 이 청년들의 행복을 원하는 거예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거죠.” ―농장 분위기는 어때요? “행복하죠. 처음엔 눈도 안 마주치던 친구들이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하지요. 청년들은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게 됩니다. 일자리와 월급이 그들에게 자존감을 높여줘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4층짜리 푸르메재단 건물이 서 있다. 320평 건평에 1층은 장애인치과, 2층은 어린이재활의원, 3층 장애인복지관, 4층에는 재단 사무실이 있다. 종로구 땅을 빌려 재단이 75억 원을 들여 새 건물을 지은 뒤 기부채납했다. 재단은 이곳과 상암동 어린이재활병원, 여주 푸르메 소셜팜 등 여러 장애인을 위한 시설 운영을 책임진다. ―‘인구 10%가 장애인’이란 표현은 맞는 건가요. “선진국은 그보다 높습니다. 한국은 등록장애인이 264만 명(2021년)이니 5∼6% 정도인 셈인데,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가 많아요. 엄마들은 아이의 발달장애가 나아질 거라고 믿죠. 장애인 등록이 낙인 효과를 가져오거나 형제자매가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합니다.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기능부전도 모두 장애예요. 장수사회에서 장애인은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10년 후를 바라보며 그에게는 꿈이 몇 개 더 있다. 푸르메 병원과 농장 모델을 가난한 동남아국가에 세워 보는 일, 북한 장애 어린이 재활을 돕는 일 등이다. 그의 날개가 더 넓은 곳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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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과 소통하는 즐거움…은퇴자도 ‘갈 곳’이 필요하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오늘은 뭐하지’, ‘오늘 어디 가지’….”은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현실 고백 중 하나는 ‘갈 곳’이 없다는 거다. 출퇴근에서 해방된 즐거움은 잠시, 여행이건 등산이건 친구만나기 건, 언제까지나 이어지긴 어렵다. 건강하려면 많이 움직이라는데, 현실은 ‘집콕’ 신세. 거실 소파에 앉아(혹은 누워) TV리모콘이나 돌리다가 ‘삼식이’ 소리 듣기 십상이다.이처럼 ‘갈 곳’은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시니어들에게도 여전한 고민이자 노년 고독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알고보면 이 고민은 전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어른들을 위한 학교많은 나라에서 19세기 말만 해도 40세이던 평균수명이 1970년대에는 두 배로 늘었다. 숫자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젊고 건강한 중노년 층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이 은퇴 후 무엇을 할지는 인류의 고민이 됐다.유럽에서 가장 앞서 고령화가 시작된 프랑스(1865년에 고령화사회, 1979년에는 고령사회에 도달)가 이들에게 대학을 개방해 공부와 소통의 장을 제공했다. 1973년부터 지자체와 대학 등이 나서 은퇴자를 위한 대학 U3A(University of 3rd Age)를 만든 것. 인생주기를 크게 만 24세 이하의 제1기(학령기), 25~49세의 제2기(사회활동기), 50~74세 제3기(은퇴후), 75세 이상의 제4기(임종기)로 구분할 때, U3A는 보다 풍요로운 제 3기를 위한 대학인 셈이다. 돈벌이와 육아 부담에서 벗어난 은퇴자들을 재교육해 인생후반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취지였다.시민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율대학이 물결은 1980년대 영국으로 옮겨가면서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학교 운영 주체가 지자체에서 시민으로 바뀐 것. 은퇴 전후의 시니어들이 자율적으로 서로를 가르치고 교류하는 지역 대학 개념이다. 정부 보조 없이 회비만으로 다양한 강좌가 이뤄지고 학교 운영과 강사는 모두 자원봉사자가 맡는다. 1982년 창립된 U3A 홈페이지에는 ‘인생에서 자신의 세 번째 나이(their 3rd age)에 접어들어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는 40대 이상이 모여 즐겁게 배우는 기회와 동기를 제공하는 국제적인 자선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Learn, Laugh, Live(배우자, 웃자, 인생을 즐기자)’가 슬로건으로 현재 영국 전역의 1057개 대학에서 43만 명이 공부중이다. 회비는 연간 20파운드(약 3만 1600원)인데, 학비가 아니라 공간임대료나 비품비로 쓰인다. 캠퍼스는 커뮤니티 시설이나 교회, 도서관, 대학 강의실을 빌려 쓰기도 하고 개인의 집이 되기도 한다. 다루는 과목은 그야말로 삼라만상. 예술, 언어, 신체활동, 토론, 게임 등 가르칠 수 있는 강사가 있고 배우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강좌가 개설된다. 코로나19 탓에 한동안 온라인수업이 활성화됐는데 장애나 질환 등으로 집밖에 나가기 어려운 회원들의 참여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전수경 한국노년학회 총무(남서울대 교수)는 “U3A는 자기 돕기(self help), 즉 자조(自助)의 개념이 강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학이란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비형식적 학습조직에도 대학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이유”라고 일깨워준다. U3A 홍보영상은 “회원의 91%가 새 친구를 만들었고 동료들로부터 든든한 지원을 받는다고 느낀다”고 전한다. 이렇게 U3A는 시니어들이 공부를 매개로 이웃과 소통하고 고독을 치유하며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장소로 자리매김됐다. 함께 작업하며 소통… ‘남자들의 작업실’영국사회에서 고독에 대한 고민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으로 연결돼 있다. 영국 정부는 2018년 1월 ‘고독은 국가가 나서서 대처해야 할 사회문제’라며 아예 내각에 고독부(Ministry for Loneliness)를 신설했다. 외로움과 고립이 건강과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방치하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고독에는 남성이 더 취약하다는 점에 착안한 활동도 펼쳐지고 있다. 은퇴남성들을 위한 ‘남자들의 작업실’(men‘s shed)이 2013년 이후 영국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것. 이름에서 드러나듯, 퇴직한 중년남성들이 모여 공구를 손질하고 전기제품이나 자동차 수리, 목공 원예 등을 함께 하며 은퇴 이후의 무기력과 외로움, 정신적 소외 등을 이겨나가자는 운동이다. 멘즈 쉐드는 1990년대 호주에서 먼저 태동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멘즈쉐드는 영국에서 현재 571개소가 운영되고 있고 1만 3700여명이 이용 중이다. 운영취지에 대해서도 꽤 섬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중년 남성들은 대체로 여성보다 사회적 유대를 맺는 데 서툴고, 남에게 잘 도움을 청하지 않으며 그래서 사회적 고립에 취약하다. 은퇴와 함께 정체성 혼란이나 목적 상실감도 커져 있다”며 작업실을 통한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멘즈 쉐드에서도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다반사. U3A와의 차이는 공동작업이라는 매개를 활용해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들의 작업이 학교나 공원, 교회 등 지역사회와 공공시설에 기여하면서 남을 돕는 보람까지 맛볼 수 있다. 간판과는 무관하게 점차 작업실 참가를 원하는 젊은이나 여성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한국의 U3A, 인생학교도 성황한국에도 U3A의 철학을 표방한 학교가 있다. 2013년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문을 연 ‘분당 아름다운 인생학교’가 그것. 설립자이자 첫 교장을 맡았던 백만기 씨는 ‘서드 에이지 대학’이란 어려운 이름대신 인생학교란 이름을 붙이고 이런 학교 100개를 세우겠다는 평생 목표를 세웠다. 분당 인생학교는 현재 약 150여 명의 회원들이 25개의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회원들은 월 회비 1만원을 내면 강좌 세 개까지 듣는다. 시간표를 보면 하루 5~6개씩 강좌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강좌 중에는 무상급식 시설인 안나의 집에서 배식 봉사하는 팀도 있다.백 교장은 분당 인생학교가 궤도에 오르자 교장직을 후임에게 넘기고 2020년 성남시 수정구 위례신도시에 두번째 인생학교를 세웠다. 이 곳은 지난해 10월 100세 카페에 소개한 바 있는데 불과 1년만에 괄목할 정도로 성장해 있다. 강좌는 당시 10개에서 21개로 늘었고 수강생은 올해 봄학기 110명, 여름학기 150명, 가을학기 203명으로 분기마다 40~50명씩 불어나고 있다.위례인생학교의 특징은 회원층이 조금 젊다는 것. 은퇴를 준비하는 40대에도 문호를 개방했고 5060세대가 주축을 이루는데, 외국어나 경제금융 공부 등 학구적 열의가 가득하다고 한다.“매일 놀이터 가는 기분으로” 최근 백 씨가 짧은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군 출신 분당인생학교 회원이 촬영을 배운 뒤 영화입문학 강의를 열었는데, 수강생들에게 ‘나에게 인생학교란’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회원들은 저마다 “인생학교 없는 노후는 상상할 수 없다”거나 “인생학교는 나의 놀이터”라고 답하며 즐거워했다. 한국석유공사 사장을 역임한 서문규 현 분당인생학교 교장은 “은퇴 후 무위도식하던 내게 시니어들과 어울리는 바람직한 삶을 배우는 장이자 놀이터”라고 답했다. 이밖에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고,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인생 후반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곳”, “내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곳” 등의 답변도 있었다. 역시 가장 좋은 놀이는 공부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타인과의 소통인 듯하다.한국에서는 왜 U3A가 확산되지 못하나지난달 11일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열린 한국노년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는 분당과 위례 인생학교의 현황소개에 이어 ‘한국에서는 왜 U3A가 확산되지 못하는가’를 놓고 토론이 있었다. 한국의 노년교육이 대부분 관에 의해 주도되면서 강의 위주에 멈춰 있고 참여자들도 수동적이라거나,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인 시니어들이 좀더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등 의견이 나왔다. 분당과 위례에서의 성공에 대해 “그 지역이니까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역사회의 수준이 반영됐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시니어 연조쯤 되면 누구나 남을 가르칠 정도로 잘하는 것 한가지씩은 있다”거나 “학력이 부족한 할머니가 손뜨개 교실을 열어 인기를 얻는 등 지역 회원들의 수요에 맞는 강의는 얼마든지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 맞섰다. 백만기 교장은 좀더 시급하고도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바로 공간문제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도 인생학교를 만들고 싶다며 많은 분들이 찾아오는데, 공간 마련이 어려워 좌초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공간만 확보된다면 시니어들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는 시스템을 통해 자아실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지방자치단체도 강사료나 인건비 등 예산을 내줄 필요가 없으니 부담이 훨씬 가벼울 겁니다.”공간확보의 어려움이 걸림돌그에 따르면 지자체나 공공기관, 구청, 도서관 등에는 시민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줄 여력이 있어 보이는 곳이 적지 않다. 학령인구 감소로 남아도는 교실이나 비어가는 지방대학, 나아가 전국에 산재한 6만여 개소의 경로당 중 극히 일부라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다.백 씨는 “인생학교는 출범은 어렵지만 조금만 기틀이 잡히면 자립할 수 있다”며 위례 인생학교를 예로 들었다. 내년 말이면 현재 이용 중인 공간(위례스토리박스) 사용기한이 끝나지만 학교는 그 사이 월회비만으로 사무실 임대료와 관리비를 감당할 수 있게 성장했다는 것. 출범 2여년 만에 자립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이처럼 공공이 지역주민의 자발적인 교육사업이 자립할 수 있도록 1~2년 정도만 인큐베이팅 공간을 제공해주는 방안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올해 한국의 고령자는 900만 명(17.5%)을 넘어섰고 연간 100만 명씩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매년 고령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은퇴를 바라보는 4050세대를 더하면 그 숫자는 더 커진다. 이들 급증하는 시니어들의 삶의 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우리 사회 전체의 행복도와 성숙도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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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가르치는 ‘어른 놀이터’ 갈수록 절실… “공간 확보가 당면과제”[서영아의 100세 카페]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오늘은 뭐하지’, ‘오늘 어디 가지’….” 은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현실 고백 중 하나는 ‘갈 곳’이 없다는 거다. 익숙했던 출퇴근에서 해방된 즐거움은 잠시, 여행이건 등산이건 언제까지나 이어지긴 어렵다. 건강하려면 많이 움직이라는데, 현실은 ‘집콕’ 신세. 거실 소파에 앉아(혹은 누워) TV 리모컨이나 돌리다가 ‘삼식이’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이처럼 ‘갈 곳’은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시니어들에게도 여전한 고민이자 노년 고독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알고 보면 이 고민은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어른들을 위한 학교많은 나라에서 19세기 말만 해도 40세이던 평균수명이 1970년대에는 두 배로 늘었다. 숫자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젊고 건강한 중노년층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은퇴 후 무엇을 할지는 인류의 고민이 됐다. 유럽에서 가장 앞서 고령화가 시작된 프랑스(1865년에 고령화사회, 1979년에는 고령사회에 도달)가 이들에게 공부와 소통의 장을 제공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프랑스는 1970년대에 지자체와 대학이 나서 은퇴자를 위한 대학 U3A(University of 3rd Age)를 만들었다. 인생주기를 크게 만 24세 이하의 제1기(학령기), 25∼49세의 제2기(사회활동기), 50∼74세 제3기(은퇴 후), 75세 이상의 제4기(임종기)로 구분할 때, U3A는 보다 풍요로운 제3기를 위한 대학인 셈이다. 이 물결은 1980년대 영국으로 옮겨가면서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학교 운영 주체가 지자체에서 시민으로 바뀐 것. 은퇴 전후의 시니어들이 자율적으로 서로를 가르치고 교류하는 지역대학 개념이다. 정부 보조 없이 회비만으로 다양한 강좌가 이뤄지고 학교 운영과 강사는 모두 자원봉사자가 맡는다. 1982년 창립된 영국 U3A 홈페이지에는 ‘더 이상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는 40대 이상이 모여 즐겁게 배우는 기회와 동기를 제공하는 국제적인 자선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Learn, Laugh, Live(배우자, 웃자, 인생을 즐기자)’를 슬로건으로 현재 영국 전역의 1057개 대학에서 43만 명이 공부 중이다. 회비는 연간 20파운드(약 3만1600원)인데, 공간 임차료나 비품비로 쓰인다. 캠퍼스는 커뮤니티 시설이나 교회, 도서관, 대학 강의실을 빌려 쓰기도 하고 개인의 집이 되기도 한다. 예술, 언어, 신체활동, 토론, 게임 등 가르칠 수 있는 강사가 있고 배우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강좌가 개설된다. 이런 개념의 U3A는 호주 캐나다 등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전수경 한국노년교육학회 총무(남서울대 교수)는 “영국의 U3A는 자기 돕기(self help·自助)의 개념이 강하다. 당초 대학(university)이 형성될 때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고 일깨워준다. U3A 홍보 영상은 “회원의 91%가 새 친구를 만들었고 동료들로부터 든든한 지지를 받는다고 느낀다”고 전한다. 이렇게 U3A는 시니어들이 공부를 매개로 이웃과 소통하고 고독을 치유하며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영국 정부는 2018년 1월 ‘고독은 국가가 나서서 대처해야 할 사회문제’라며 내각에 고독부(Ministry for Loneliness)를 신설했다. 외로움과 고립이 건강과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방치하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매일 놀이터 가는 기분” 한국의 인생학교한국에도 U3A의 철학을 표방한 학교가 있다. 2013년 문을 연 ‘분당 아름다운 인생학교’가 그것. 설립자이자 첫 교장을 맡았던 백만기 씨는 ‘U3A’ 대신 ‘인생학교’란 이름을 붙이고 이런 학교 100개를 세우겠다는 평생 목표를 세웠다. 분당인생학교는 현재 약 150명의 회원이 25개 강좌를 운영하는데, 월 회비 1만 원을 내면 세 강좌까지 수강할 수 있다. 하루 5, 6개씩 강좌가 빼곡히 있는데, 이 중엔 무상급식 시설 ‘안나의 집’에서 배식 봉사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백 씨는 분당인생학교가 궤도에 오르자 2020년 교장직을 후임에게 넘기고 위례에 두 번째 인생학교를 세웠다. 이곳은 지난해 10월 100세 카페에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사이 괄목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강좌는 당시 10개에서 21개로 늘었고 수강생은 올해 봄학기 110명에서 여름 150명, 가을 203명으로 분기마다 40∼50명씩 불어나고 있다. 은퇴를 준비하는 40대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5060세대가 주축을 이루는데 외국어, 경제금융 공부 등 학구적 열기가 가득하다고 한다. 최근 백 씨가 짧은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군 출신 분당인생학교 회원이 촬영을 배운 뒤 영화입문학 강의를 열었는데 수강생들에게 ‘나에게 인생학교란’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회원들은 저마다 “인생학교 없는 노후는 상상할 수 없다”거나 “인생학교는 나의 놀이터”라고 답하며 즐거워했다. 한국석유공사 사장을 지낸 서문규 현 분당인생학교 교장은 “은퇴 후 무위도식하던 내게 시니어들과 어울리는 바람직한 삶을 배우는 장이자 놀이터”라고 답했다. 이 밖에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고,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인생 후반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곳” “내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곳” 등의 답변도 있었다. 역시 가장 좋은 놀이는 공부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타인과의 소통인 듯하다.○ 한국에는 왜 U3A가 확산되지 못하나지난달 11일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열린 추계 한국노년교육학회에서는 분당과 위례인생학교의 현황 소개에 이어 ‘한국에는 왜 U3A가 확산되지 못하는가’를 놓고 토론이 있었다. 한국의 노년교육이 대부분 관에 의해 주도되면서 강의 위주의 수준에 멈춰 있고 참여자들도 수동적이라거나,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인 시니어들이 좀더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등의 의견이 나왔다. 분당과 위례에서의 성공에 대해 “그 지역이니까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역사회의 수준이 반영됐다는 얘기다. 백 씨는 좀더 시급하고도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바로 공간 문제다. “자신의 지역에도 인생학교를 만들고 싶다며 많은 분들이 찾아오는데, 공간 마련의 어려움 때문에 좌초하는 경우가 많다. 공간만 확보된다면 시니어들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는 시스템을 통해 자아실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지자체도 예산을 내줄 필요가 없으니 부담이 가벼울 것”이란 얘기다. 그에 따르면 지자체나 공공기관, 구청, 도서관 등에는 시민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줄 여력이 있어 보이는 곳이 적지 않다. 학령인구 감소로 남아도는 교실이나 비어가는 지방대학, 나아가 전국에 산재한 경로당 6만여 곳 중 극히 일부라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 백 씨는 “인생학교 모델은 출범은 어렵지만 조금만 기틀이 잡히면 자립할 수 있다”며 위례인생학교를 예로 들었다. 내년 말이면 현재 이용 중인 공간(위례스토리박스) 사용기한이 끝나지만 월 회비만으로 사무실 임차료와 관리비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출범 2년여 만에 자립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이처럼 공공이 지역주민의 자발적인 교육사업이 자립할 수 있도록 1∼2년 정도 인큐베이팅 공간을 제공해주는 방안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올해 한국의 고령자는 900만 명(17.5%)을 넘어섰고 연간 100만 명씩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매년 고령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은퇴를 바라보는 4050세대를 더하면 그 숫자는 더 커진다. 급증하는 시니어들의 삶의 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우리 사회 전체의 행복도와 성숙도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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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70에 이런 일자리 다시 없죠” 경비원 장두식 씨의 좌충우돌 일과 행복[서영아의 100세 카페]

    14일 찾은 경기 고양시 백마역 인근의 한 아파트 단지. 지하 탁구장 옆에 간판 없는 작은 방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벽에는 플래카드와 자격증, 수료증이 빼곡하고 선반에는 아코디언, 하모니카 등이 쌓여 있다. 장두식 씨(69)가 운영하는 음악연습실이다. “창고로 쓰던 공간을 얻어 연습실로 사용합니다. 시끄러우니 상가 안에는 못 들어가죠.” 오후 5시 반이 되자 60~70대 여성 4명이 모여들었다. ‘하모니카 중급’ 수업시간이다. 장 씨가 하모니카 교실 강사, 부인 한상희 씨(67)는 학생 겸 총무 역할을 한다. 시시때때로 까르르 웃음이 터지는 게 여고 교실 같다. “지난주 어디까지 했죠? 다들 연습들은 해왔나요?” 코로나 탓에 2년 넘게 문을 닫았다가 연초에 다시 연 음악연습실은 동네사랑방 분위기다. 71세 동갑내기 동네친구 3명이 하모니카를 배우는 곳에 석 달 전 인근 지역에 사는 이모 씨(64)가 찾아와 합류했다. 장 강사에 대한 회원들의 자랑과 지지가 대단하다. “여기 나오면 활력이 느껴지고 너무 재밌어요. 선생님이 모르는 게 없으세요. 저 자격증들 좀 보세요. 저희도 처음에 깜짝 놀랐다니까요.” (수강생 양모 씨) 이렇게 주 1회 정기적으로 오는 수강생이 13명. 이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비를 충당한다. “나는 행복한 경비원입니다” 수업은 매주 요일이 바뀐다. 장 씨가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근무가 12시간->24시간->휴무의 3일 단위로 돌아가니 비는 시간에 맞춰 수업을 잡는다. 장 씨는 경비 3년차다. 은퇴 후 경로당이나 복지관, 요양원 등을 돌며 실버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일해 왔는데 코로나19 탓에 일이 뚝 끊겼다. 고육책으로 찾은 일자리가 경비였는데 의외로 좋은 직업이라고 느꼈다. 지난 3년간 여러 아파트를 옮겨다니다 7번째인 지금의 아파트에 정착했다. 7월에는 그간의 에피소드를 엮은 책 ‘나는 행복한 경비원입니다(생각나눔)’를 펴냈다. “일할 곳이 있고, 열심히 일하면 주변의 인정도 받고, 적지 않은 보수도 받으니 너무 좋습니다. 아파트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완근(完勤)하면 대체로 180~230만 원 정도 월급을 받아요. 이 나이에 어디 가서 그런 돈을 벌겠어요. 3일에 하루는 낮에 쉬니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충분히 할 수 있고요. 평일 내내 일만 했다면 행복하지 않았을 텐데, 일과 휴식의 조화가 이뤄지니 딱 좋아요.”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K-apt)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공동주택 관리종사자는 30만 명이 넘는다. 관리사무소 인력이 10만 800여 명(33%), 경비인력이 10만 5800여명(36%), 청소 미화 인력이 9만 4000여 명(31%)이다. 우리 일상 가까운 곳에 있지만 존재감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경비원이 최근 몇 년간 부쩍 주목을 받았다. 주민의 갑질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비원 이야기가 사회에 충격을 던졌고 고령경비원의 현실을 다룬 책들이 잇달아 출간돼 사회적 조명을 받았다. 2020년에 나온 ‘임계장 이야기’(조정진 저·후마니타스)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인 말인 임계장이 상징하듯 공기업 퇴직 후 경비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애환이 그려졌다. 2021년에는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최훈 저·정미소)가 나와 60대 이후 일하고자 하지만 일할 곳이 마땅치 않은 노년의 설움을 그려냈다. 두 책이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살짝 가미한 자전적인 서적이라면 장 씨는 경비원 눈높이에서 아파트 단지 주변 이야기를 정리했다. 어찌보면 경비원 지침서 비슷하다.-제목에 굳이 ‘행복한’이란 수식어를 넣은 이유가 있을까요. “두 분 책을 모두 읽어봤어요. 잘 쓰셨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그 책들은 싹 잊어버리고 제 스타일로 썼어요. 저는 긍정적인 측면을 많이 생각합니다. 경비원 일이 제게 일하는 기쁨을 주거든요. 경비 일을 하면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부지런해집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니 생활에 절제가 생기고 사회활동을 하니 약간의 긴장감을 통해 활력도 얻습니다. 나가서 빗자루질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물청소하면 운동이 되고요. 손주들 용돈을 척척 주니 며느리들도 좋아하죠.”내가 옛날에 본 그 할아버지 경비원? -속칭 ‘갑질’을 느낀 적은 없는지요. “사람사는 세상인데, 이런저런 일이 있겠지요. 6군데나 옮겨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경비는 3개월마다 근로계약서를 갱신합니다. 주민과 트러블이 생기면 무조건 잘린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출근할 때는 오장육부를 빼서 집에 두고 간다고 생각해야 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입니다. 일터에서는 밝고 예의바르게 처신하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주민들과도, 동료와도 절대 속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기기 쉽거든요. 주민이건 동료건 제 쪽에서 바라는 게 없으니 서운할 것도 없지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 또한 초연달관하지는 못한 듯하다. 한밤중에 초소에서 취침하려 누웠는데 택배 온 것 없느냐며 문을 두드리는 주민에게 “없는데요”라고 대답하니 그 주민은 “왜 신경질을 내느냐”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질 안 냈다”고 설명하고는 며칠간을 그 주민이 그 일로 클레임을 걸까 조마조마해 했던 기억이 있다. “젊은 시절 본 아파트 경비는 구부정하고 쭈글쭈글한 할아버지들이었는데, 제가 그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만 과거엔 60대만 되도 영락없는 노인이었지만, 요즘 경비원들은 70대 후반이라도 젊어 보여요. 실제 직전에 일하던 단지의 경우 경비 32명 중 80%가 70대였습니다.” -정년이 따로 없다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마지노선은 대략 몇세일까요. “75세 정도 아닐까요. 일부 아파트 관리규약에 그렇게 정해놓은 곳이 있었어요. 다만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경비 자리 하나 나면 10~20명씩 지원자가 몰려옵니다. 그렇다보니 기존에 일하던 사람들은 어떻게건 그 자리에서 버티려 하고요. 장기적으로는 연령대가 조금씩 낮아질 것같습니다.”60세 이후 딴 자격증만 15개 그가 말하는 60세 이전 삶은 파란만장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어렵게 성장하면서 내세울만한 학력을 갖지 못했다. 군대에서는 맹호부대에서 군인극장 간판을 그리다 제대했고 한때 방송국 미술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학습지 영업사원으로 뛰어다닌 적도 있고 노점상을 한 시절도 있었다. 한때는 일본을 오가며 미술 오퍼상을 하다가 망하기도 했다. 환갑 때까지는 캐피탈 회사에 근무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작은 성취들도 있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요. 그때그때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지금와서 보면 왜 그렇게 갈팡질팡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마지막 직장에서 퇴직한 뒤로는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고, 노인들에게 기쁨을 주는 레크리에이션 강사 일을 시작했죠. 고양시 파주시 김포시의 경로당을 오가며 하루 3타임씩 주 5일을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일했다. 수입은 교통비를 충당하는 정도였지만 찾아가면 기뻐하는 어르신들의 반응이 가장 큰 보상이었다. 강사 일을 제대로 하고 싶어 노래와 아코디언, 하모니카, 마술을 배웠고 레크레이션 지도사, 실버 운동 지도사, 웃음 치료 지도사, 스피치 지도사, 요양보호사 등 새로 딴 자격증이 하나둘 쌓여 15개가 넘었다. “제가 가진 자격증 중 운전면허증 빼고는 전부 60세 넘어 딴 겁니다. 대부분 민간자격증이구요.” 그는 많은 것을 종로 3가에서 배웠다고 한다. 60세에 낙원상가에서 ‘도레미’부터 시작해 하모니카와 아코디언을 배웠고 스피치학원, 마술 동호회 등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을 섭렵해갔다. “정식 학원이나 학교는 아니었지만 배우는 기쁨이 있었어요.” “꿈은 치매예방연구소장, 자신감 사관학교 교장” 2017년 첫 책 ‘노래하는 인생’을 낸 뒤 매년 한권꼴로 모두 6권을 냈다. 제목만 소개하자면 ‘언제나 청춘으로 살기’ ‘요양보호사’ ‘나의 인생노트’ ‘스피치를 재미있게 잘하기 위한 이런저런 상식 이야기’ ‘나는 행복한 경비원입니다’ 등이다. 모두 같은 출판사를 통해 자비출판했는데 거의 팔리지 않았다고 머리를 긁적인다. -앞으로도 계속 낼 계획인가요? “아, 그게…. 옹색하게 살다보니 집이 좁거든요. 출간 때마다 500부씩 찍는데 안 팔린 것 전부 받아와 집에 쌓아놓다보니 좀 곤란해지네요.“ 그에게 “죄송하지만 전에 주신 그 6권, 다 읽어보지 못했다”고 하자 “괜찮아요. 저도 잘 안보는데요, 하하”하며 웃는다. 책 열심히 써서 나오면 숙제 다 한 것같이 후련하긴 한데, 책 자체는 본인도 잘 안 읽는다는 얘기였다.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를 보면 한국치매예방연구소 소장, 자신감 사관학교 교장 등의 직함이 있는데요. 이런 단체가 있습니까?“그건 제 꿈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학교 설립해 교장이 되겠다는 꿈이죠. 사람이란 꿈이 있어야 살지요. 제 비슷한 나이의 분들에게도 뭔가를 하는데 주저하지 말라. 일단 자신감을 갖고 시작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차피 시간은 흘러갑니다. 아무 것도 안해도 흘러가고, 해도 흘러가는 게 인생이에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요.” 100세 시대의 교육과 직업은 얼마 전 세줄짜리 간단한 자기소개를 메일로 보내온 그가 몇시간 뒤에는 회사로 전화를 해왔다. 봉사, 경비일, 유튜브, 책 출판 등을 얘기했다. 심지어 영미의 역사와 한국의 경제발전 등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간 100세카페에 소개된 유형들과 너무 달라서 망설였다. 한다는 일이 너무 많고 그 방향에도 일관성이 없다고 느껴졌다. 보통은 70세쯤 되면 어느 정도 인생의 가닥이 잡히는데 그는 탐색기에 있는 10대 20대처럼 이것저것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찌됐건 최근 냈다는 책을 한권 보내달라고 부탁하니 두시간 만에 자신이 낸 책 총 6권을 들고 회사로 달려오셨다. 깜짝 놀란 것은 그의 밝은 분위기. 70세 나이에 눈빛이 반짝반짝했다.‘100세 인생’의 저자 린다 그래튼 런던경영대학원 교수는 100세 시대에는 직업과 교육이 송두리째 달라진다고 일찌감치 예고했다. 3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30년 노후를 즐기는 게 20세기 식 인생 주기였다면, 100세 시대에는 한 사람이 평생 서너 가지 직업을 갖게 되고, 그 사이사이에 이를 위한 재교육(평생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득 장 씨의 60세 이후 삶의 스타일이야말로 100세 시대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찾아 스스로 공부하고 변화하는 모습. 불우한 환경에서 많은 실패를 맛봤지만, 그런 좌절의 경험이 노후에는 오히려 눈빛 반짝이는 생명력이 된 건 아닐까. 그는 변화의 과정마다 상처받을까봐 몸을 사리지 않았다. 좀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그 열매를 주변과 나누려 했다. 하모니카 수업을 통해 동네 중 노년층의 취미활동 공간을 만들고 본인이 잘 하는 것을 이웃에게 가르쳐주며 재미나게 사는 것. 나름 좋은 인생 아닐까.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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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갑 넘기고도 자격증 줄줄… 일하는 기쁨 가르치는 ‘인생 홍반장’[서영아의 100세 카페]

    14일 경기 고양시 백마역 인근의 한 아파트 단지. 지하 탁구장 한 편에 간판 없는 작은 방이 하나 있다. 벽에는 플래카드와 자격증들이 빼곡하고 선반에는 아코디언, 하모니카 등이 쌓여 있다. 장두식 씨(69)가 운영하는 음악연습실이다. “창고로 쓰던 공간을 얻어 연습실로 사용합니다. 시끄러우니 상가 안에는 못 들어가죠.” 오후 5시 30분이 되자 60, 70대 여성 4명이 모여들었다. ‘하모니카 중급’ 수업 시간이다. 장 씨가 강사, 부인 한상희 씨(67)는 학생 겸 총무 역할을 한다. 시시때때로 까르르 웃음이 터지는 게 여고 교실 같기도, 동네 사랑방 같기도 하다. “지난주 어디까지 했죠? 다들 연습들은 해왔나요?” 연습실은 코로나19 탓에 2년간 문을 닫았다가 연초에 다시 열었다. 71세 동갑내기 동네친구 3명이 하모니카를 배우던 팀에 석 달 전 근처에 사는 이모 씨(64)가 찾아와 합류했다. 강사에 대한 수강생들의 자랑과 지지가 대단하다. “너무 재밌어요. 선생님이 모르는 게 없으세요. 저 자격증들 보세요. 저희도 처음에 깜짝 놀랐다니까요.”(수강생 양모 씨) 이렇게 주 1회씩 정기적으로 오는 수강생이 13명. 이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비를 충당한다.○“나는 행복한 경비원입니다”수업은 매주 요일이 바뀐다. 장 씨가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근무가 12시간→24시간→휴무의 3일 단위로 돌아가니 비는 시간에 맞춰 수업을 잡는다. 장 씨는 경비 3년 차다. 은퇴 후 경로당이나 복지관, 요양원 등을 돌며 실버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일했는데 코로나19 탓에 일이 뚝 끊겼다. 고육책으로 찾은 일자리가 경비였는데, 의외로 좋은 직업이라고 느꼈다. 지난 3년간 여러 아파트를 옮겨 다니다 7번째인 지금의 아파트에 정착했다. 7월에는 그간의 에피소드를 엮어 ‘나는 행복한 경비원입니다’(생각나눔)를 펴냈다. “일할 곳이 있고, 열심히 일하면 인정도 받고, 적지 않은 보수도 받으니 너무 좋습니다. 완근(完勤)하면 200만 원 전후로 월급을 받아요. 이 나이에 어디 가서 그런 돈을 벌겠어요. 3일에 하루는 낮에 쉬니 하고 싶은 일도 충분히 할 수 있고요.”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K-apt)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공동주택 관리 종사자는 30만 명이 넘는다. 관리사무소 인력이 10만800여 명(33%), 경비 인력이 10만5800여 명(36%), 청소 미화 인력이 9만4000여 명(31%)이다. 가까이에 있지만 존재감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경비원이 최근 부쩍 주목을 받고 있다. 주민의 갑질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이야기가 사회에 충격을 던졌고, 고령 경비원의 현실을 다룬 책들이 잇달아 나와 조명을 받았다. 2020년 나온 ‘임계장 이야기’(조정진·후마니타스)는 공기업 퇴직 후 경비가 된 작가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애환을 그려냈고, 2021년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최훈·정미소)도 일하고 싶지만 일할 곳이 마땅치 않은 노년의 설움을 다뤘다. 두 책이 사회 고발적인 성격을 살짝 가미한 자전적인 것이라면 장 씨는 경비원 눈높이에서 주변 이야기를 정리했다. 어찌 보면 경비원 지침서 비슷하다. ―제목에 굳이 ‘행복한’이란 수식어를 넣은 이유는…. “경비원 일이 제게 일하는 기쁨을 주니까요. 일을 하니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부지런해집니다. 생활에 절제가 생기고 약간의 긴장감을 통해 활력을 얻습니다. 비질이나 쓰레기통 세척은 운동이 되고요. 손주들 용돈을 척척 주니 며느리들도 좋아하죠.” ―속칭 ‘갑질’을 느낀 적은 없는지요. “경비는 3개월마다 근로계약서를 갱신합니다. 용역회사로부터는 주민과 트러블이 생기면 무조건 잘린다고 교육받죠. 그래서 출근할 때는 오장육부를 집에 두고 가야 해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많이 배웠는데, 가장 중요한 건 제 마음가짐입니다. 일터에서는 밝고 예의 바르게 처신하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주민들과도, 동료와도 속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제 쪽에서 바라는 게 없으니 서운한 것도 없지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 또한 달관하지는 못한 듯하다. 그가 쓴 책에는 주민과 있었던 약간의 트러블이라도 혹시 말이 날까 봐 걱정하는 경비원의 일상이 담겨 있다. “젊은 시절 제 기억 속 경비는 구부정한 할아버지들이었는데, 제가 그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만 과거엔 60대만 되어도 영락없는 노인이지만 요즘 경비원들은 70대 후반이라도 젊어 보여요.”○ 60세 이후 딴 자격증만 15개그가 말하는 60세 이전 삶은 파란만장 좌충우돌 자체였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어렵게 성장하면서 내세울 만한 학력을 갖지 못했다. 맹호부대에서 군인극장 간판을 그리다 제대했고, 한때 방송국 미술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학습지 영업사원으로 뛰어다닌 적도 있고, 노점상을 한 시절도 있다. 한때는 일본을 오가며 미술 오퍼상을 하다가 망하기도 했다. 환갑 때까지는 캐피털 회사에 근무했다. “그때그때 열심히 살았는데, 왜 그렇게 갈팡질팡했는지 모르겠어요. 마지막 직장에서 퇴직한 뒤 봉사하는 삶을 생각했고, 노인들에게 기쁨을 주는 실버 레크리에이션 강사 일을 택했습니다.” 고양시 파주시 김포시의 경로당들을 오가며 하루 3타임씩 주 5일을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일했다. 수입은 교통비를 충당하는 정도였지만 찾아가면 기뻐하는 어르신들의 반응이 가장 큰 보상이었다. 강사 일을 제대로 하고 싶어 노래와 아코디언, 하모니카, 마술을 배웠고 레크리에이션 지도사, 실버 운동지도사, 웃음치료 지도사, 스피치 지도사, 요양보호사 등 자격증이 하나둘 쌓여 어느덧 15개가 넘었다. “운전면허증 빼고는 전부 60세 이후에 딴 거예요. 대부분 민간 자격증이죠.” 이 중 많은 것을 서울 종로3가에서 배웠다고 한다. 낙원상가에서 ‘도레미’부터 시작해 하모니카와 아코디언을 배웠고 스피치학원, 마술동우회 등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들을 섭렵해갔다. “정식 학원 학교는 아니었지만 배우는 기쁨이 있었어요.” 2017년 첫 책 ‘노래하는 인생’을 낸 뒤 매년 한 권꼴로 모두 6권을 펴냈다. 제목만 소개하자면 ‘언제나 청춘으로 살기’ ‘요양보호사’ ‘나의 인생노트’ ‘스피치를 재미있게 잘하기 위한 이런저런 상식 이야기’ ‘나는 행복한 경비원입니다’ 등이다. 모두 같은 출판사를 통해 자비로 출판했는데 거의 팔리지 않았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면 ‘한국치매예방연구소 소장’, ‘자신감 사관학교 교장’ 등의 직함이 있던데…. “그건 제 꿈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학교를 설립해 교장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란 꿈이 있어야 살지요. 제 또래분들께도 뭘 새로 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일단 자신감 갖고 시작해보라고 말해드리고 싶어요. 어차피 시간은 흘러갑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흘러가고, 해도 흘러가는 게 인생이에요.”○100세 시대의 직업과 교육‘100세 인생’의 저자 린다 그래턴 런던경영대학원 교수는 100세 시대에는 직업과 교육이 송두리째 달라진다고 일찌감치 예고했다. 3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고 30년 노후를 즐기는 게 20세기식 인생 주기였다면, 100세 시대에는 한 사람이 평생 서너 가지 직업을 갖게 되고 그 사이사이에 이를 위한 재교육(평생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득 장 씨의 60세 이후 삶의 스타일이야말로 100세 시대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찾아 스스로 공부하고 변화하는 모습. 불우한 환경에서 많은 실패를 맛봤지만, 그런 좌절의 경험이 노후에는 오히려 눈빛 반짝이는 생명력이 된 건 아닐까. 그는 변화의 과정마다 상처받을까 봐 몸을 사리지 않았다. 좀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그 열매를 주변과 나누려 했다. 하모니카 수업을 통해 동네 중·노년층의 취미활동 공간을 만들고 본인이 잘하는 것을 이웃에게 가르쳐주며 재미나게 사는 것. 나름대로 좋은 인생 아닐까.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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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 농업 이끌 정예 청년農 육성

    농사는 미래를 짓는 일이다. 농업에서 미래를 담보할 청년들의 존재가 긴요한 이유다. 농협이 청년농부사관학교를 통해 한국의 미래 농업을 선도할 청년 농부를 육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년농부사관학교는 농협 자체 예산으로 운영되는 6개월 장기 귀농교육 과정이다. 2018년 1기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총 8기, 46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갈수록 고령화되는 농촌에 젊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농촌에서 미래 그려 나갈 청년농부 육성청년농부사관학교 입학 대상은 만 39세 이하 창농(創農)을 계획하는 청년들. 연간 2기수, 약 100명을 합숙 교육한다. 6개월간 농업 기초교육에 7주, 농가 현장에서 진행되는 인턴 8주, 창농 계획과 농기계 자격증 취득 등 비즈니스 플랜을 세우는 데 다시 8주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교육 과정은 2022년 정부가 인정하는 귀농 교육 과정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올해 졸업생부터는 청년후계농 지원 사업을 신청하거나 귀농정책자금을 대출받을 때 요구되는 귀농 교육 시간 250시간을 인정받게 된다. 청년농업인 육성에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교육 과정의 특징은 필수 이론 교육뿐 아니라 농촌 현장에서 바로 필요한 작물 재배 실습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노지 재배는 물론이고 스마트팜 교육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해 첨단 디지털 농업인을 양성한다. 청년농부 후보생들은 희망 작목별로 선도 농가에서 2개월간 현장 인턴 실습을 통해 농촌 현장의 분위기를 익히고 작목 재배 기술을 심화할 수 있다.이를 위해 농협은 홍성군농업기술센터와 영농 정착 상호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드론, 굴착기 등 농기계 위탁 교육을 통해 농기계 자격증 취득도 지원해준다. 졸업생 안정적 사후 관리로 영농 정착 지원청년농부사관학교 졸업생은 졸업 후에도 안정적인 영농 정착을 위한 사후 관리를 받을 수 있다. 우선 청년농업인과 농협 계통 사무소가 협력해 지역별 네트워크를 운영한다. 중앙회 차원의 온·오프라인 판로 지원, 정부 정책자금 지원 일대일 코칭, 융복합 농업으로 성장을 위한 브랜드와 마케팅 등 종합 컨설팅, 그리고 농식품 분야 투자설명회(IR) 참가 지원을 통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청년농부사관학교 졸업생들이 농협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는 하나둘이 아니다.뮤지컬 무대 디자인 기획자로 100여 편의 무대를 만들었던 조성훈 씨는 2020년 청년농부사관학교(4기)를 졸업했다. 이듬해 장성농협 조합원으로 등록한 그는 전남 장성의 1만4200㎡(약 4300평) 규모 축령농원에서 사과를 재배하는 동시에 사과주스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농협은 조 씨에게 브랜드 개발과 로고 등 상품 디자인, 가공 공장 설계 및 운영을 종합적으로 컨설팅해 줬다. 농협 크라우드 펀딩에 참가해 자본금을 지원받고 농협몰과 하나로마트에 입점하는 데도 도움을 받았다. 조 씨의 꿈은 자신의 농장을 6차산업화하는 것이다. 사과 생산과 주스 가공을 거쳐 농가 카페를 운영하고 사과 수확 체험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농업을 지속가능한 첨단 산업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계획이다. 중소농과 청년농 위한 스마트농업 지원센터청년농들의 농촌 정착과 농업의 스마트화는 실과 바늘의 관계다. 농협은 청년농업인의 안정적인 영농 정착을 위해 지난해부터 스마트농업 전(全) 생애 주기 통합 지원 플랫폼(NH octo·농협형 스마트팜)을 구축하고 있다. 스마트팜 창업을 희망하는 농업인을 위해 전 생애 주기별 4대 맞춤형 지원을 해준다. 즉, 농사 준비 단계에서는 교육 및 컨설팅을, 농사 시작 단계에서는 시설 구축 및 금융 지원을, 판매 유통 단계에서는 판로 지원 및 홍보를, 경영 지원에서 분석 및 신기술 도입을 지원한다.이 중 농사 준비, 농사 시작 단계의 스마트농업 경작 및 기술 교육의 거점으로, 농축협 주도의 ‘스마트농업지원센터(옥토팜)’를 연차별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1월 충남 동천안 농협에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2024년까지 전국 시도 권역별로 확대한다고 한다.애그테크 투자 생태계 구축농협은 6월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스마트 목장 관리 플랫폼인 ‘NH하나로목장’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내놓았는데, 4개월 만에 전국 한우농가 3000호가 가입해 이용 중이다.목장 앱은 축산물이력제 등 공공데이터와 농협 자체 데이터를 연결해 농가가 별도의 자료 입력 없이 본인 소유의 축우 현황과 이력을 자동으로 불러올 수 있다. 특히 사료 구입 내역과 소 출하 실적 등이 자동으로 조회돼 농가 스스로 경영 진단을 할 수 있고, 사료 주문 등 부가 기능을 통해 한우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발정탐지기, 폐쇄회로(CCTV) 등 ICT 장비와도 연동이 가능해 노동력 감축 효과도 누릴 수 있다.농협은 이 밖에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응하는 디지털 혁신으로 범(汎)농협 차원의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고 범농협 애그테크 상생혁신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조성 펀드를 재원으로 농협 주도형 애그테크 투자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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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2세 손공 수예가 첫 개인전

    손공(데마리·手毬) 수예가 박재숙 씨(92·사진)의 첫 개인전이 11∼20일 경기 하남시 ‘갤러리 보나르’에서 열린다. 박 씨가 평생 만들어온 손공 100여 점을 선보인다. 손공은 일본에서 주로 여성들의 공놀이에 사용된 전통적 장난감. 솜으로 된 심(芯)에 흰 실을 감아 공(毬)을 만들고, 그 위에 아름다운 색실을 감아 기하학 무늬를 표현해낸다(사진). 수작업이라 같은 작품이 없다. 장난감을 넘어 전통공예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박 씨는 1960년대에 일본인 전통기술 전승자를 사사한 뒤 독학으로 손공의 아름다움을 연구해왔다. 본격적으로 손공 만들기에 나선 계기는 1981년 부군이 의료사고로 입원해 12년간 투병했던 일. 이 기간 좁은 병실에서 남편을 간병하는 인고의 시간을, 그는 실과 바늘을 놓지 않으며 견뎌냈다. 난생 첫 개인전을 열게 된 기쁨을 “100살까지는 손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표현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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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드는게 두렵지 않은’ 노후 삶의 터전은…어디서 누구와 늙어갈까[서영아의 100세 카페]

    지난달 23일자 디지털 100세 카페 ‘실버타운에 꽂힌 50대 한의사 부부’ 기사는 조회수(63만 회)도 상당했지만 비판적인 댓글이 무척 많았다. 무엇보다 주인공 부부가 말하는 실버타운과 독자들이 저마다 머릿속에 그리는 실버타운이 너무도 달랐다. 장기요양등급을 받아 입소하는 요양원과 혼동되거나 미인가 시설들과 헷갈리는 듯한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이 기회에 한국의 노인주거복지 현황을 점검하고 노후 주거의 요건에 대해 생각해보자.●실버타운에 대한 법적 규정 없어‘실버타운’이란 용어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주거복지시설은 △양로시설 △노인공동생활가정 △노인복지주택의 세 가지가 전부다. 양로시설은 다시 유료와 무료로 나뉜다. 법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실버타운’은 없는 것이다.한국에서 속칭 실버타운이라고 하면 고령자를 위한 아파트 혹은 레지던스 같은 시설을 뜻한다. 100세대 이상 규모에 각자 자기 집에서 살면서 공동식당과 피트니스센터 사우나 도서관 등 커뮤니티시설을 이용하고 의료 인력이 상주하며 주민들의 건강을 돌본다. 자립생활이 가능한 건강한 시니어(부부중 한사람이 60세 이상)들이 입주하며 모든 비용은 입주자들이 부담한다. 공동식당이 있지만 각자 집에서도 취사가 가능하다. 이런 시설은 전국에 약 40곳인데, 대부분은 노인복지주택으로, 일부는 유료 양로시설로 등록돼 있다. 엄밀히 말해 실버타운은 관련 통계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계통체계 없이 방치돼 있었다. 예컨대 명실상부한 최고급 시설인 ‘클래식 500’은 유료 양로시설로 등록돼 있다. 수원 유당마을과 경기 용인 노블카운티는 당초 유료 양로시설로 등록됐다가 노인복지주택으로 변경했다. 국내 첫 시니어타운인 유당마을이 생긴 1988년 당시 노인복지주택이란 개념이 없고, 유료 양로시설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분양형’과 ‘임대형’ 노인복지주택이 생겼지만 부실운영으로 문닫는 곳이 속출해 사회문제화하자 2015년을 기준으로 분양형이 폐지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인복지주택으로 인가받았지만 실제로는 아파트로 변질된 실버타운도 여럿 있다. 커지는 관리비부담을 이유로 식당이나 커뮤니티 시설 운영을 반대하는 일부 주민과 실버타운 기능을 기대하고 입주한 주민들 사이 갈등을 빚고 있다. ●실버타운과 요양원은 다르다여기에 작은 요양시설들이 너도 나도 ‘실버타운’이란 이름을 쓰고 있어 혼란을 부추긴다. 개중에는 미인가 시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보건복지부가 낸 2022년 노인복지시설 현황을 찾아보니 정원 10인 이하 작은 양로시설 이름에 ‘실버타운’이 붙은 곳이 무척 많았다. 독자들이 각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준으로 실버타운에 대해 정의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참고로 흔히 요양원이라 불리는 요양시설은 ‘의료’복지시설에 속한다. 장기요양 1~2급과 3급 일부에게 입소자격이 주어지고 장기요양보험의 지원을 받는다. 거주자가 모든 비용을 내는 실버타운과는 완전히 다르다.전국노인주거복지시설협회 이지희 사무국장은 “일정 규모를 갖춘 유료 양로시설과 노인복지주택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시니어타운(실버타운)만의 법적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단체는 나아가 혼란의 근원이 되는 실버타운이란 호칭 대신 ‘시니어타운’이라 부르자고 주장하고 있다.●건강 그 이후에 대비하는 美은퇴자 커뮤니티, 日 유료 양로원 사실 실버타운을 직역하면 고령자(silver) 소도시(town)로, 미국의 은퇴 커뮤니티를 가리킨 말이다. 1960~70년대 건설업자들이 기후 좋은 지역에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춘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하고 은퇴자들을 모집했다. 이런 은퇴자 커뮤니티가 2만개 넘게 생겨났다. 이중 1960년대에 아리조나에 세워진 은퇴 커뮤니티 ‘더 선 시티(인구 2만 6000명)’나 이를 본따 플로리다에 조성된 ‘더 빌리지(인구 12만 여명)’는 ‘타운’을 넘어 ‘도시’ 규모로 몸집이 커지고 있다. 이런 곳들은 중산층 정도의 자산과 현금흐름만 있으면 ‘평생 수고한 은퇴자가 백만장자처럼 여생을 즐기는 공간’이라 불린다.시니어타운은 건강할 때 입소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미국의 은퇴자 커뮤니티에는 지속적 돌봄(Continuing Care and Retirement Community: CCRC)이라는 개념이 작동 중이다. 시니어들이 건강하게 입주해 일정 수준의 헬스케어 서비스를 받으며 건강을 지키고, 건강이 악화되면 타운 내에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노화 정도에 따라 △자립생활형 △직원이 가사를 돕는 형 △24시간 간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형으로 주거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빈 곳 많은 한국의 노인주거복지주택 정책미국만큼 땅이 넓지 않은 일본에서는 유료 노인홈이 발달했다. 과거에는 건강이 나빠지면 노인홈을 퇴소하고 간병이 가능한 시설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개호(돌봄과 간병)가 지원되는 ‘특정시설생활개호’ 지정 시설이 늘어나고 있다.같은 노인홈에서 살면서 개호가 필요해지면 그 시설 직원에게 서비스를 받는 방식인데, 이 경우 개호 비용은 개호 보험에서 지원해준다. 입소자 입장에서는 비용 부담을 줄이고 질 높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시니어타운은 건강할 때에만 활용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일부 요양시설을 갖춘 시설들(유당마을 더시그넘하우스 삼성노블카운티 시니어스타워계열)이 있지만 장기요양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용이 많이 든다. 장기요양급여 중 시설급여는 노인의료복지시설(요양원, 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에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부터 시니어타운에서도 방문요양 방문목욕 방문간호 등의 재가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장기요양 3~5등급이 여기 해당된다. 하지만 1~2등급을 받아 집중적인 요양이 필요하면 시니어타운을 나와 요양원으로 옮겨야 한다.●최초 입주연령 80세 이하로 제한하는 곳 늘어공빠TV의 문성택 씨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 웬만한 시니어타운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고 한다. ‘삼성 노블카운티’ ‘더시그넘하우스’ 등 최고급 시니어타운들이 올해부터 최초입주 연령을 80세 이하로 제한하고 있으며 대기 기간 2년을 감안해 78세 이하까지만 대기 리스트에 올려준다는 것. 내년부터는 모든 실버타운이 이런 원칙을 도입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일단 들어간 뒤에는 100세가 넘더라도 다른 문제가 없다면 생활할 수 있다). 2014년 실버타운 현황을 망라한 저서 ‘실버타운 간 시어머니, 양로원 간 친정엄마’를 펴냈던 이한세 스파이어 리서치 앤 컨설팅 대표는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실버타운이 여유가 있었는데 최근 서울경기 지역은 꽉 찬 상태다. 그렇다보니 연령제한이나 인터뷰를 강화하는 등 입주 문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배경에는 고령화의 진전, 시니어 타운에 대한 인식 변화도 있지만 아파트가격 급등도 한몫한 듯하다고 그는 지적했다.“삼성 노블카운티가 문을 연 2000년대 초만 해도 서울 압구정동 30평대 아파트를 팔아야 입주보증금을 냈는데, 아파트가격이 10배 오르는 동안 입주보증금은 거의 제자리를 지켰다“는 것.서울 웬만한 지역에 아파트를 가진 고령자라면 집을 전세주기만 해도 그 돈으로 시니어타운 보증금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지희 사무국장은 중산층을 위한 시니어타운이 늘어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저소득층은 무료 양로시설이나 고령자 임대주택도 늘어나고 있지만 중산층은 사회적 부양(扶養)에서 소외된 감이 있다”며 “다양한 주체가 시니어타운 사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 중산층 고령자들의 요구를 충족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시니어타운은 노후를 생각하는 시니어에게 여러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한국 고령자 절반 이상, “거동 불편해져도 내 집에서 살고 싶다” 실제로 고령자들이 원하는 것은 내 집에서 늙어가는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3년마다 실시하는 ‘노인실태조사(2020년)’에 따르면 한국 노인의 79.8%는 ‘내 집’에서 살고 있다. 또 78.2%가 독거나 부부만인 노인 단독가구였다. 응답자 대다수(83.8%)는 건강할 때까지는 현재 집에서 거주하기를 원했고, 56.5%는 거동이 불편해져도 재가 서비스를 받으며 현재 집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했다. 31.3%는 노인을 위한 요양시설 등을 이용하고 싶다고 했는데, 가족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정든 집에서 최후까지 지내겠다는 바람은 다른 많은 선진국 노인들에게서도 확인된다. 정부도 사회적 부담을 고려해 시설이 아닌 가정이나 소규모 지역사회에서의 케어를 권장한다. 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지역포괄케어’라 해서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의료와 복지 서비스를 받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퇴직 즈음해서 고령자가 살기 좋은 형태로 대대적인 주택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유행이다. 집안에서 휠체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애고(배리어 프리), 욕실 바닥에 미끄럼 방지 시공을 하고 손잡이를 여기저기 다는 등. 일본 정부는 고령자주택 리모델링 비용을 개호보험에서 지원해준다.●세계적 추세는 ‘내 집에서 늙어가기(Aging in place)’살던집에서 이웃과 소소한 도움 주고 받으며 늙어가는 길을 택한 사람들도 있다. 미국 보스턴에서 태동한 ‘비컨힐 마을(Beacon Hill Village)’ 모델이 그것이다. 진짜 ‘마을’이 아니고 2000년대부터 미국 베이비부머가 만들어가는 도심 속 느슨한 공동체다. 처음에는 이곳에 사는 은퇴자 10여 명이 만나 “더 나이를 먹더라도 은퇴자 공동체나 노인전용 요양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자기 집에 머물면서 정든 친구들과 교류하며 힘닿는 데까지 살고 싶다”는 데 생각을 모았다. 늙어서 겪는 소소한 불편을 서로 돕기 위해, 이들은 비영리단체 ‘비컨힐 마을’을 만들고 사무직원을 고용했다. 과거라면 가족이 해오던 일을 이웃들을 통해 해결하자는 것. 2002년부터는 일반 회원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연회비(소득과 가입 형태에 따라 110~675달러)를 받았다. 회원들은 큰일을 할 때 필요한 일손을 찾도록 서로 돕는다. 회원과 젊은이로 구성한 자원봉사자들에게 장보기나 가정 방문, 반려 동물 돌보기, 가벼운 집안일, 간단한 수리 등을 부탁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이웃들과 교류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을 즐긴다. 홈페이지 구석구석에는 “병원에서 퇴원해 돌아오니 모르는 사람이 내 저녁식사를 만들어 가져다줬다”거나 “60대 이웃이 공항까지 태우러 와줘 무사히 귀가했다”는 80대의 감사인사 등이 넘쳐난다.●‘나이드는 게 두렵지 않은’ 노후 삶의 터전은 노후라 해도 건강하고 활력 있는 시기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건 무리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움이 필요해지는 시기가 온다. 지금은 별 부담 없는 세 끼 식사준비가 버거워질 수도 있고 간병이 필요해지는 시기도 온다. 배우자와 사별해 어느 한쪽만 남게 되는 경우 등 예기치 않은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나 또는 배우자의 인지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일본 최고의 노후설계사로 꼽히는 요코테 쇼타는 저서 ‘노후의 연표(나이드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중앙북스)’에서 노후 주거에 대해 어디에서(도시, 시골, 해외) 누구와(부부, 자녀와, 혼자) 어떤 집(주택, 아파트, 임대, 노인홈 등 돌봄시설)에서 살지 생각하고 늦기 전에 실행에 옮기라고 권한다. 그의 추천은 자녀와 살던 큰 집은 정리하고 병원 쇼핑 외출을 고려해 교통이 편리한 작은 아파트로 옮기되 자녀와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형태다. 고령이 될수록 시간이 남고 활동 폭이 적어짐에 따라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기 쉬워진다는 점에서 이웃과 친구, 갈 만한 장소 등도 염두에 둬야 한다. 노년기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반드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화두다.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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