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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UAE)에서 온 A 씨는 4년간 두통에 시달렸는데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지난해 8월 한국을 찾아 B병원에서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하고 나서야 뇌수막종임을 알게 됐다. 바로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고 후유증 없이 건강을 회복했다. A 씨같이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환자 수가 지난해 20만 명을 넘어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주춤했던 국내 의료 관광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는 것.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환자 수는 약 50만 명이다. 2009년 외국인 환자 유치 사업이 시작된 이래 약 8.3배 늘었다. 한국 병원의 의술과 서비스를 경험하고 주위에 추천을 하거나 재방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19년 외국인 환자들은 국내에 머무는 동안 3조331억 원을 썼고, 이로 인한 생산 및 부가가치 생산유발액은 8조1000억 원, 취업유발 인원은 약 4만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코로나19 유행으로 2020년 외국인 환자 수는 약 12만 명, 2021년 약 15만 명으로 급감했고, 최근에야 다시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유행에도 병·의원의 해외 진출은 늘어나고 있다. 병·의원의 해외 진출 건수는 2020년 25건, 2021년 34건, 2022년 37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한국 의료의 역량이 주목받으면서 ‘메디컬 코리아(Medical Korea)’의 브랜드 가치가 제고됐기 때문으로 진흥원 측은 분석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와 진흥원은 2020년부터 45개국 486명의 외국 의료인을 대상으로 온라인 연수를 진행하기도 했다. 23, 24일에는 세계 각국의 글로벌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헬스케어 학술회의 ‘메디컬 코리아’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 수석연구원으로 보건·외교전문가인 제이미 메츨과 황희 카카오헬스케어 대표가 기조연설을 하고 4개 포럼, 6개 세미나에 65명의 연사가 참여한다. 모든 포럼과 세미나는 현장에서 등록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지난달 18일 튀르키예 강진 피해 현장에 파견돼 생존자 수색·구조 활동을 벌였던 한국 긴급구호대가 아다나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예고에 없던 “한국팀이 귀국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더니 공항에 있던 튀르키예 국민들이 긴급구호대원을 둥글게 둘러싸고 박수를 쳤다. 왼손을 가슴에 올리는 튀르키예 감사 인사를 하거나, 부랴부랴 기념품을 사와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다.그 자리에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절정일 때 대구로 파견됐던 국군대전병원 소속 김혜주 대위(32)도 있었다. 당시 방역 마스크를 오래 쓰다 보니 콧등이 헐어 반창고를 붙인 김 대위의 모습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개됐고,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은 그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지난달 23일 인터뷰차 만난 김 대위에게 재난 현장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부터 물었다.》―대구 코로나19병원에 이어 튀르키예 구조 활동도 자원했다. “2020년 코로나19 초기에는 신종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대구 길거리에 사람은 없고 구급차만 다닐 정도였다. 누군가는 반드시 대구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동료 1명은 임신을 했고, 다른 1명은 자녀가 있었다. ‘내가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튀르키예 파견은 아주 급박하게 이뤄졌다. 2월 7일 오후 5시 긴급구호대 튀르키예 파견이 결정됐는데 4시간 안에 인천공항에 집합해야 했다. 구조 활동에 골든 타임이 있는데 그 안에 떠날 준비를 마칠 수 있는 자원자가 많지 않았다.” ―가족들의 걱정이 컸을 것 같다. “병원에서 짐을 싸서 바로 공항으로 갔다. 카카오톡으로만 가족에게 알렸다. 이튿날 튀르키예 공항에 도착해 보니 ‘갑자기?’ ‘진짜로?’ 하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더라. 가족이 말릴 시간도 없었다. 다만 항상 마음의 준비를 당부한다. ‘엄마, 우리는 전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에요.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고, 언제 죽을지도 몰라요. 그렇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고 한다. 그래도 엄마는 TV에서 튀르키예 현장을 보며 9일 내내 우셨다고 한다. 처참한 피해 현장을 보고 ‘우리 딸 괜찮을까’ 걱정이 되어서…. (담담한 김 대위 눈가로 잠시 눈물이 차올랐다) 집에 왔더니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며 소고기를 구워 주셨다.” ―실제로 본 튀르키예 지진 현장은 어떠했나. “11시간 비행 끝에 가지안테프 공항에 내렸다. 안전한 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리려고 이동하는데 도로가 망가진 상태라 차가 기어가듯 움직였다.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주 안타키아 현장은 건물이 마치 쿠크다스 과자가 부스러진 것처럼 보였다. 과연 사람이 깔려 있을 공간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위태롭게 남은 건물도 가스, 수도, 전기 등이 모두 끊겨 있었고 가스가 새어 곳곳에 화재가 났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집을 잃고,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찾아 흐느끼며 거리를 헤매는 사람이 많았다. 이산가족도 많다. 수습한 시신은 한곳에 뉘어 드렸는데…. 신분증이 없으면 누군지 확인이 어려워서 이름 모를 주검이 많았다. 부모를 잃기도 하고, 아이를 잃기도 하고…. 전쟁이 난 것처럼 오랫동안 상처가 남을 것 같다.” ―여진이 계속돼 고등학교에 겨우 베이스캠프를 차렸다고 들었다. “하타이주의 셀림 아나돌루 고등학교는 내진 설계가 되어 있어 건물이 남아 있었다. 교실에는 학생들 사진도 걸려 있고, 교과서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일상은 완전히 파괴됐다. 학교를 찾은 학생은 대입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당장 생계를 꾸려야 할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또래와 웃고 떠들던 학생이었을 텐데 모든 걸 잃은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구조 활동 중에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언제였나. “구조 활동 첫날 5명의 생존자를 구출했다. 그중에 손이 구조물에 끼여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엄마가 우리를 보자 방 안에 남아 있는 아이부터 구조해 달라고 애원했다. 엄마는 손을 많이 다쳤는데도 아이 생각에 아픈 줄도 모르더라. 엄마 요청에 따라 아이를 구하러 갔지만 이미 숨진 뒤였다. 엄마가 절규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쏟아졌다. 감히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튀르키예와의 ‘형제의 정’이 감동을 줬다. “베이스캠프를 차리려 이동하는 중간에 튀르키예군 위병소에 들렀다. 한국군인데 화장실을 쓸 수 있는지 물었더니, 화장실도 개방해주고 식사도 내어줬다. 만나는 튀르키예군마다 항상 웃어주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가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주민이 다가와 ‘고맙다’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튀르키예 국민들이 보여준 따뜻한 ‘형제의 정’은 구조 활동 내내 힘을 북돋아 줬다.” ―2020년 대구 코로나19 사태 당시 ‘콧등 반창고’로 화제가 됐다.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해 두꺼운 레벨-D 방호복을 입고 교대 근무를 했다. 방호복을 입으면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덥다. 화장실도 자주 갈 수 없다. 신체적으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방호복으로 행동이 굼떠지니 평소보다 주사를 놓는 것이 힘들어 (환자를 아프게 하니) 속상했다. 당시 28일 동안 병원과 숙소만 왕복했다. 무엇보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다.” ―방호복보다도 예쁜 옷을 입고, 사투의 현장보다는 좋은 곳에 가고 싶을 나이인데…. “20대 초반에는 저도 그랬다. 간호사 생활을 하는 11년 동안 삶과 죽음, 그 경계의 순간을 많이 봤다. 그러면서 ‘언제 죽음을 맞을지 모른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을까’ 스스로에게 묻게 됐고 ‘건강하게 움직일 때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답에 이르렀다. 무기력에 빠지기보다는 따뜻한 집, 사랑하는 가족, 씻을 수 있는 샤워기의 물, 스위치를 누르면 켜지는 전등 같은 사소한 것에 감사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어떻게 간호장교의 길을 걷게 됐나.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그 꿈을 이루고 싶어 간호장교로 임관했다. 간호장교는 전시도, 평시도 부상자를 돌볼 수 있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에 재난 상황에서 대처가 가능하다. 이번 튀르키예 구조 활동 중에 건물 더미에 하반신이 깔린 주민이 있었다. 갑자기 움직일 경우 전해질 불균형으로 심정지가 올 수 있다. 꺼내기 전에 수액을 공급해 줘야 한다. 문제는 너무 비좁아 남자가 들어갈 수 없었다. 체구가 작은 동료 간호장교가 포복으로 기어 들어가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 수액 바늘을 꽂았다. 결국 살려서 병원으로 이송했다.” ―재난 현장은 남을 구하려다 내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도 갈 것인가. “갈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 내가 매몰됐을 때 팔과 다리 다친 게 무서울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못 찾을 것 같은 공포가 더 무서울까 생각해 봤다. 누군가 나를 찾아주기를, 그래서 살 수 있기를 바랄 것 같다. 힘들어도 구조 활동을 쉴 수 없던 이유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다시 갈 것 같다.”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인가, 원래 이타적인 사람인가. “한국행 전날 동갑내기 튀르키예 여성을 호텔서 만났다. ‘도와주러 와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더라. 집도, 가족도 모두 잃어서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런 슬픔 속에서도 연신 고맙다고 하기에 ‘70년 전에 튀르키예도 한국을 도왔다. 우리가 돕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국이 지진을 겪었어도, 우리는 다시 도왔을 것’이라고 답하더라. ‘나라 대 나라’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돕는다는 보편적인 인류애 같은 의미였다. 그런 비슷한 느낌이다. 긴급구호대 사이에서도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어 힘듦을 견딜 수 있었다. 누군가를 돕는 뿌듯함이 힘듦을 잊게 한다.”김혜주 대위(32)△2014년 육군전문사관 16기 임관△2015∼2017년 육군 제35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 간호장교△2017∼2019년 육군훈련소 지구병원 응급간호장교△2019∼2021년 국군춘천병원 내외과간호과 응급간호장교△2020년 2∼4월 코로나19 대구 감염병전담병원 파견△2022년∼ 국군대전병원 내과간호과 중환자선임간호장교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대학의 위기.’ 더 이상 수사어가 아니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국내 대학교육 경쟁력 순위는 46위로 하락했다. 평가 대상 국가(63개국) 중 하위권이다. 대학이 등록금 동결로 인한 재정 압박과 교실 크기까지 정해주는 정부 규제로 경쟁력을 잃고 표류하는 사이 학령인구 감소라는 파도가 덮쳐오고 있다.지난해 12월 28일 만난 홍원화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경북대 총장)은 “국회서 고등교육 지원을 호소하면서 부끄럽지만 눈물이 났다. 대학 총장을 맡고 나서 울분이 북받칠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적 자원밖에 없는 나라에서 언제까지 대학을 ‘공공의 적’으로만 대할 건가”라고 했다.》 ―정부는 올해 신설되는 고등·평생교육 지원 특별회계를 통해 9조7400억 원을 대학에 투입하기로 했다. “대학은 정말, 정말 아사(餓死) 직전이다. 수액을 맞는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원래 고등교육 예산(7조7000억 원)에다 국세로부터 1조7000억 원을 가져왔다. 고등교육 재정의 마중물이 마련된 것이다. 기존 예산은 국립대 운영비, 연구개발 지원비 등 재정이 투입될 곳이 일일이 정해져 있다. 대학 마음대로 1원도 쓸 수 없단 얘기다. 이번에 추가된 1조7000억 원은 대학이 혁신사업에 자율적으로 쓰도록 설계됐다. 이 점이 중요하다.” ―‘아우 돈 뺏어서 형님 먹여 살린다’며 교육감들이 반발했다. “이번에 확보한 고등교육 재정은 내국세의 20.79%에 연동된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아니다. 논란이 된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감히 손 댈 생각도 못 했다. 국세인 교육세로 충당한 것이다. 지난해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65조 원이고 올해 77조 원이 걷힌다고 한다. 이미 교육청 통장에 19조 원이 쌓여 있다. 반면, 대학은 적금은커녕 매년 적자가 난다. 요즘 초중고교 중에 재래식 변기 있는 곳 본 적 있나. 대학은 수두룩하다. 화장실 가려고 집에 다녀오는 학생도 있다. 학생들이 대학 실험실 보고 중·고교보다 열악하다고 한다.” ―교육청이 통장에 돈을 쌓아 두면서도 대학에 줄 수 없다는 건가. “교육감들은 미래를 대비해 아껴 둔 돈이라고 한다. 실상은 다르다. 초중고교 시설 개선을 한다고 치자. 예산이 있어도 1년 안에 수백 곳을 공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교육청 공무원이 관리·감독을 나가야 하는데 그만한 인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노트북을 척척 사 주고, 코로나 지원금을 나눠 주며 예산을 쓴다. 남아도는 돈이라도 대학에 한 번 양보하면 계속 뺏기게 될까 봐 여지도 주지 않는다. 안정적인 수입을 뺏기기 싫은 것 아니겠나.” ―대학의 재정난이 얼마나 심각한가. “초중고교 교육에는 1인당 연간 15만 달러, 대학 교육에는 연간 11만 달러가 투입된다. 이런데도 초중고교와 대학 교육에 칸막이를 높게 치고 재정을 배분하는 게 합리적인가. 2009년 이후 등록금이 동결됐다. 14년 동안 교수 월급은 거의 동결됐고 인건비가 싼 강사 수업이 늘었다. 대학마다 도서관 도서구입비부터 줄였다. 대학 교육의 질이 낮아지는 게 당연하다.” ―교육부 규제가 얼마나 세기에 대학이 문을 닫을 상황에도 등록금을 올릴 수 없다는 건가. “국가장학금이 4조 원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3조6000억 원(유형1 장학금)이 간다. 나머지 4000억 원(유형2 장학금)이 지역인재 또는 대학이 선발한 학생에게 간다. 경북대의 경우, 자체적인 기준으로 장학금을 줄 수 있는 금액이 16억 원 정도 된다. 사실 16억 원이야 등록금 10만 원만 올려도 해결된다. 그런데 정부 지침을 어기면 교육부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 한계대학으로 퇴출시키거나 학자금 대출이 안 되는 대학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등록금도 학생들이 와야 올리는데 신입생 모집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대학이 철저히 순응할 수밖에 없다.” ―교육부가 대학 규제 완화 방안을 내놓았다. 학과 신설과 정원 조정을 대학 자율에 맡겨 기업 인수합병처럼 대학 간, 단과대 간 통폐합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앞서 ‘대학규제개혁국’을 신설하는 조직개편안도 발표했다. “정부의 (규제 완화) 의지는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공무원이 바뀌지 않는 한 도루묵이다. 관행대로 안전하게 일하려는 관성을 쉽게 바꾸기 힘들다. 반도체 학과 신설한다고 요란한데 규제만 없었어도 진즉 설치할 수 있었다. 반도체 인력은 학과를 만든다고 인력 양성이 뚝딱 되는 게 아니다. 팹시설(Fablab), 클린룸 같은 시설이 있어야 하고 전문성 있는 교수도 필요하다. 다 돈이 든단 얘기다. 그런데 등록금을 올릴 수도 없고, 재정 지원도 초중고교보다 못하다. 반도체 인력 삼성은 2억 원, 구글·아마존은 4억 원 주고 데려간다. 경북대 조교수로 오면 5000만 원 받는다. 과거 애교심 애향심 애국심에 호소해서 고급 인력을 데려올 수 있었지만 요즘은 안 통한다.” ―등록금 자율화가 대학 위기의 해법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등록금 동결이 낳은 폐해는 대학의 하향평준화다. 교육부가 대학의 생명줄을 쥐고 교수 수와 월급, 교실 수와 크기 등을 통제한다. 모든 대학을 똑같이 묶어 놓는다. 경쟁력 있는 대학이 탄생하려면 우수한 교수도 모셔 오고, 고가 실험 장비도 들여놓고 이래야 한다. 그 과정에서 등록금이 오른다 하더라도, 내 미래를 위해 투자할 만하다고 판단하면 학생들이 입학한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원하면 된다. 만약 학생이 ‘아니다’ 판단하면 해당 대학은 도태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옥석을 가리는 구조조정이 이뤄진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 구조조정이 갑자기 진행될 거다. 폐교되면 인근 지역경제도 무너진다. 이제는 사회가 치를 비용이 너무 커졌다.” ―등록금 자율화에 대한 공론화가 시작된 것 같다. “내년 총선 앞두고 아직은 현실성이 없다. 장상윤 교육부 차관도 지난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총회에 와서 등록금 자율화를 꺼냈다가 바로 철회했다. 부모들한테 표가 나오는데 누가 그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자고 하겠나. 결국 정치가 문제다.”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2042년이면 현재 대입 정원(47만 명)보다 대학 입학 가능 인구가 31만 명이나 부족하다. “전국에 대학이 400여 곳인데 지금도 문 닫고 싶은 대학이 있다. 대교협에 ‘문 닫게 해주세요’라고 찾아온다. 대학이 문을 닫으면 사학재단의 땅은 국가에 환수된다. 그러니 학생 1명이라도 데려와 문을 닫지 않으려고 한다. 학생 충원율을 맞추려고 교직원 아내를 학생으로 등록하는 꼼수를 쓰더라. 3개월 다니고 휴학하고 등록금을 다시 받아 가는 식이다. 야당에선 대학을 20∼30년 운영하며 재정 지원을 받고 세금 혜택도 받았으니 당연히 환수해야 한다고 한다. 일리 있지만 현실을 보자. 부실 대학이 연명할수록 학생들이 피해를 입는다. 대학에 퇴로를 만들어줘야 구조조정이 된다.” ―수도권에 비해 지방대 사정이 더 어렵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운동을 하고 있다. 거점국립대학을 서울대처럼 만들자는 거다. 서울대 학생 1명당 4800만 원, 연·고대 학생 1명당 2800만 원 투입한다. 경북대 부산대 등 거점대학이 1명당 2400만 원이다. 이 격차를 줄이려면 결국 지방대를 육성할 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2025년부터 대교협이 대학 평가를 담당한다. 평가 내용이 어떻게 바뀌나. “교육부와 별개로 대교협이 5주기 평가를 해 왔다. 교육부 대학기본역량진단과 항목이 80% 정도 겹친다. 다만 대학 재정 지원과 연계하지 않는다. 교육부 평가에선 1점 차이로 재정을 끊어버리기도 하니까 대학에선 억울한 측면이 있고 서류 작업에 불필요한 역량을 쏟게 된다. 통과와 탈락으로만 나누고, 탈락 그룹은 1년 유예기간을 두고 다시 본다. 일종의 컨설팅 개념이다. 앞으로 대학평가 지표 개발을 위한 TF 팀을 꾸려 연구를 할 예정이다. 지표는 교육의 질에 집중될 것이다.”홍원화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경북대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경북대 건설환경에너지공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대외협력처장, 산학연구처장 등을 지냈고 2020년부터 경북대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현재 26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가운데 실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인 나라는 한국뿐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0개국은 실내외 마스크를 모두 벗었다. 이들 나라에선 마스크 착용 의무가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자유를 침해한다고 본다.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기 어려운 문화다. 마스크를 쓰고 나가면 되레 바이러스를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 아픈 사람으로 여긴다. 나머지 18개국은 집단 감염 우려가 큰 곳에 국한해서 쓴다. ▷정부가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감소와 의료대응 역량 등을 따져보고 유행의 정점이 지났다고 판단하면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권고로 전환할 예정이다. 이르면 다음 달 설 연휴 이후로 예상된다.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지 꼭 3년 만이다. 마스크 수급 대란이 진정되던 그해 10월부터는 전국적으로 실내외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됐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는 석 달 전 해제됐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벗은 사람을 보기 어렵다. 반면 옹기종기 모여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먹을 때만 벗도록 했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사실상 마스크 규제가 유명무실해졌단 얘기다. 마스크 착용의 비용이 효과를 상쇄한다는 연구도 축적되고 있다. 특히 영유아의 경우, 언어와 사회성 발달이 지연되고 면역력을 기를 기회를 빼앗긴다. ▷한국 일본 대만 등은 마스크 착용으로 코로나19 초기 대응에 선방했다. 마스크를 쓰라는 집단적 압력이 강한 한국, ‘가오판쓰(顔パンツ·얼굴팬티)’라 부르며 마스크를 벗기 싫어하는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선 마스크 수용도가 높았다. 덕분에 바이러스가 델타로, 오미크론으로 변이를 거듭하며 치명률이 낮아질 때까지 시간을 벌었다. 그사이 백신도 개발돼 접종이 시작됐다. 마스크 의무화가 늦었던 미국 유럽 등은 팬데믹 초기 치명률이 높았다. 2020년, 2021년 미국의 사망 원인 3위는 코로나19였다. 앓을 만큼 앓고 집단면역이 형성된 셈인데 안타까운 희생이 많았다. ▷마스크를 벗은 나라들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치솟는 경험을 했다. 백신 접종률과 항바이러스제 처방률부터 끌어올려야 한다. ‘위드 코로나’를 선언한 중국의 환자 폭증도 부담스러운 변수다. 마스크를 벗으면 사회·경제적 약자, 건강 취약계층부터 피해를 본다는 우려도 있다. 다행히도 최근 설문조사를 보면 실내 마스크 착용이 해제되더라도 10명 중 2명만 마스크를 즉각 벗겠다고 응답했다. 코로나19를 지혜롭게 헤쳐온 국민을 믿고 자율에 맡길 때도 됐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020년 우리나라 중산층은 전체 인구의 44%다(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 30년 전만 해도 70%가 넘었던 중산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평생 계층 연구에 천착해 온 구해근 하와이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중산층은 몰락한 것이 아니라 분화했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특권중산층이 새로 등장했다”고 했다. ‘20 vs 80의 사회’ 저자 리처드 리브스가 상위 20%를 상류중산층으로, ‘부당 세습’의 저자 매슈 스튜어트가 상위 10%를 신흥귀족으로 정의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특권중산층이 등장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특권중산층은 어떻게 형성됐나. “부유한 전문직·관리직 엘리트가 특권중산층의 대다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기술·자본 집약적 산업으로 이행했고 대기업은 고급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그 이후 대기업·정규직 위주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비정규직 위주 2차 노동시장에 줄이 그어졌다. 신분제와 다름없다. 부동산 버블도 특권중산층의 형성 요인이다. 자산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글로벌 시장에 한국 경제가 깊이 편입된 것도 특권적인 기회를 부여했다. 엘리트는 해외 유학부터 명품 소비, 웰빙 상품 등에 접근성이 높았다. 일반 중산층과 구분 짓기를 할 기회가 됐다.” ―최근 불평등 연구는 일관되게 부유한 전문직·관리직 엘리트를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주범으로 보고 있다. “중산층의 분화는 서구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소득 상위와 하위 계층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한국은 공격적인 세계화를 추진한 나라다. 과거에도 상위 10%는 존재했다. 부동산으로 부자가 됐으나 교육 수준은 다소 떨어졌다. 현재 상위 10%는 명문대를 나와 유학을 한 전문직·관리직 엘리트로 구성된다. 이들은 경제 자본 외에 사회·문화 자본도 독점하고 있다. 능력주의를 앞세워 특권을 공고화한다.” ―계층 이동이 어려워지면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중산층은 국가와 사회 계약을 맺어 왔다. 한국의 경우 중산층이 경제 발전에 협조하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릴 것이라고 했다. 이런 암묵적인 계약이 성립되면 중산층은 사회 안정의 기반이 된다. 1980, 90년대는 사회 계약이 충실히 이행됐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계층 이동의 길이 막혀 버렸다. 상대적 박탈감은 사회를 향한 분노를 자극한다. 사회적 신뢰에도 금이 간다. 사회 안정 세력이던 중산층이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포퓰리스트의 판에 동원되기 쉬워진다. 경제 양극화가 정치 양극화로 이어지는 원리다.” ―미국 유럽 등과 달리 한국의 중산층은 계급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유럽과 미국 등의 중산층은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 도덕 문화 등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유럽은 혁명을 통해 자생적으로 중산층을 쟁취했고, 미국은 청교도 윤리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다. 한국은 국가가 중산층을 키워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동산 투기 등 자산 축적 과정도 도덕적이지 않다. 문화적, 도덕적 우월성이 없는 특권중산층은 과시적인 소비로 다른 계층과 차별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 특권중산층이 명품, 외모, 웰빙 등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인가. “여기에는 수요와 공급,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특권중산층이 신분을 소비로 과시하려는 욕구는 수요 측면이다. 고급 소비시장의 성장은 공급 측면이다. 고급 소비시장은 가방과 구두 같은 ‘지위재’뿐만 아니라 얼굴, 건강, 몸매 같은 ‘비지위재’까지 팔고 있다. 후발국의 신생 부유층이 새 고객으로 발굴된 것이다. 특권중산층의 욕구와 글로벌 기업의 수요 창출이 맞물린 결과다.” ―특권중산층을 강남스타일 계급으로 정의했는데…. 거주지가 계층 정체성이 되는 현상은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인가. “처음에는 강남을 진지하게 보지 않았는데 연구를 할수록 강남의 역할이 중요했다. 계층별로 주거지역이 분리되는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난다. 강남이 독특한 건 그 규모가 다르다. 강남 서초 송파 3구의 아파트에 150만 명이 모여 산다. 공간적으로 밀집되고 계층적으로 균질한, 이만큼 대규모의 특권중산층 지역은 없다. 규모로만 보면 특권중산층을 강남중산층으로 대체해도 될 정도다. 미국에도 도시마다 부촌이 있다. 하지만 인구가 적고, 고급 주택은 고립돼 숨어 있다.” ―강남이 경제적·문화적 준거집단이 되는 전국의 ‘강남화’도 우려했다. “강남은 개발 초기부터 교육과 부동산이 결합한 특권적인 기회가 주어진 곳이다. 명문 고교 이전으로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다시 대치동 학원가가 들어서며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나와 비슷했던 이웃들이 벼락부자가 됐다. 그러니 승복이 어렵고 강남이 도달해야 할 준거집단이 된다. 강남을 준거집단으로 삼으면 체감 중산층은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온 국민이 불행해진다.” ―어느 부모도 자식이 본인보다 못살길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한국 특권중산층의 불안감이 큰 것 같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일류대 관문을 통과해 대기업에 취직하는 단선적인 서열 정하기 게임을 하고 있다고 본다. 게임에서 첫 번째 규칙은 교육이다. 우리 사회 모든 자원이 교육적 성취에 따라 배분된다. 두 번째 규칙은 한번 지면 끝이다. 명문대 진학에 실패하면 좋은 일자리를 얻거나 자산을 축적할 기회도 놓치게 된다. 한국은 6·25전쟁을 겪으며 계급과 신분이 해체된 나라다. 평등의식과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할 수밖에 없다. 공정한 게임이 아니어도, 이길 가능성이 없어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기회 사재기(리처드 리브스)나 기회 세습(매슈 스튜어트)처럼 특권중산층이 교육 기회를 독점하는 건 세계적인 현상이다. 반면, 한국에선 모든 계층에서 사교육 열풍이 분다. “굉장히 특별한 현상이다. 유교 문화권의 교육열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역시 수요와 공급을 같이 봐야 한다. 고교평준화가 의도와 달리 사교육을 자극했다. 부와 지위를 물려주려는 계층이 공교육에 만족하지 못해 사교육 시장을 창출했다. 공급도 충분했다. 운동권 출신 학원 강사처럼 취업이 어려웠던 유능한 인재들이 유입돼 우수한 사교육 시스템을 발달시켰다. 미국 내 한국 아이들도 방학이면 학원에 다니러 나오더라.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경쟁에서 탈락하기 쉽다.” ―이 책은 한국인은 왜 불행한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한국은 다양한 기준의 성공이 존재하지 않는 일직선 사회다. 지위가 높아도, 가진 게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 정경심 씨는 교수인데도 ‘내 목표는 강남에 빌딩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가질 만큼 갖고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사회 지도층이라는 장관 후보자도 다를 바 없다. 자칫 추락할까 가진 것을 움켜쥐고 불안에 떤다. 특권중산층의 성찰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구조인데, 모른다. 모든 기회를 독식하며 과도한 경쟁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그는 “한국에 살았다면 사교육을 시키고 부동산 투자를 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특권중산층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 국민이 문화와 스포츠에서 펼치는 역량을 보라. 보통 재주가 아니다. 이런 힘을 과도한 경쟁으로 소모시키는 건 정치인이나 지식인 등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자성할 부분이다. 지식인들은 이 정권, 저 정권 오가며 특권을 즐기고 있지는 않나. 정치인은 사회 전체의 발전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나. 특권중산층의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사회를 불필요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결과적으로 자식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든다. 도덕·윤리의 파괴자가 되어선 안 되고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성숙함을 보여야 한다. 준거집단이 되는 특권중산층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구해근 美하와이대 명예교수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하와이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계급·계층 연구에 집중해 왔다.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노동계급을 분석한 그의 저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2003년 미국 사회학회의 ‘아시아 부문 최우수 저서’로 선정됐다. 최근 세계화 이후 한국 중산층의 변화를 다룬 ‘특권중산층’을 출간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 50, 60대면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사회적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다. 그런데 고독사의 절반이 50, 60대 남성에게서 발생한다. 평생 일만 하다 가족과 유대감을 쌓지 못한 데다 식사 빨래 같은 집안일에 미숙한 50, 60대 남성은 실직하거나 이혼하면 급격히 무너진다. 나약하다는 낙인이 두려워 고독감을 토로하지도 못한다. 질병과 가난을 안은 남성은 ‘삼식이’(세끼 모두 집에서 먹는 남편) 대접조차도 받지 못하고 가족과 영영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고독하지 않은 죽음은 없다지만 법적으로 정의되는 고독사는 존재의 본질로서 외로움과는 다르다. 가족 친척 등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 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시신이 발견되는 죽음을 말한다. 정부가 처음으로 고독사 통계를 발표했다. 지난해 3378명으로 집계됐는데 5년 전보다 40%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사망자(31만여 명)의 1%를 넘어선다. 남성이 여성보다 5.3배나 많다. ▷고독사의 대부분은 가족과 연락이 끊기거나 아예 주민등록이 말소된 무연고자들의 죽음이다. 이런 고독사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가족 해체 및 1인 가구의 증가, 이웃 공동체 붕괴, 플랫폼 노동과 같은 ‘나 홀로’ 일자리 증가 등으로 사회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개인이 많아지고 있어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극단적인 고립 상태가 이어지는 것도 문제다. ▷2018년 영국은 고독부(Ministry for Loneliness)를 신설했다. 전체 인구 중 약 900만 명이 고독을 느끼는데 600만 명은 고독을 감춘다는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고독은 개인이 아닌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만성화된 고독은 건강을 해치고 생산성을 저하시키므로 의료·경제 등에 부담을 주는 사회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들의 고독사가 심각한 일본도 내각관방 내 고독·고립담당 장관을 임명했다. 지난해 두 나라 고독장관은 양자회담을 열고 “고독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며 정책적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단 하나의 연결된 관계도 없이,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한 이들. 그 고독한 죽음의 현장을 1000번 이상 청소한 유품정리사 김새별 전애원 씨는 저서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고독사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고독사는 그가 얼마나 고독하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고독하게 살았는가를 말해준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살아생전 이들을 버린 건 아닌가 하는 물음이면서, 서로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제안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2시 정각 우르르 점심 먹으러 떠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꿋꿋이 자리를 지킨다. 민원대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생 공무원이 콘텐츠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한 ‘공무원 표류기’를 보면 점심시간에 민원대를 지키는 고충이 잘 그려져 있다. 빈자리를 메우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하고, 일부러 시간을 냈는데 긴 줄에 발을 동동 구르는 민원인의 항의도 거칠다. 차라리 도시락을 싸오는 게 편하다. 직장인의 하루 중 점심시간만큼 귀한 시간은 없다. 민원대 공무원의 고달픔이 공감되는 까닭이다. ▷내년 4월부터 대구시 8개 구군이 시범적으로 공무원 점심시간 휴무제를 도입한다. 그런데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당장 내년 1월부터 전면 시행하라고 압박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공무원의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1시이고 근무시간에 포함되진 않는다. 지금도 점심을 거르는 공무원은 없다. 시군구청과 읍면동 행정복지센터 공무원은 민원 응대를 위해 교대로 점심을 먹을 뿐이다. 전공노는 “공무원도 밥 먹을 권리가 있다”며 점심시간에 아예 민원실을 닫자고 한다. ▷공무원 점심시간 휴무제는 2017년 경남 고성군에서 처음 시행됐다. 현재 전국 시군구 50여 곳으로 확대됐다. 이 지자체 공무원들은 되레 업무효율이 높아졌다고 주장한다. 점심시간이면 근무 인원이 줄어 민원처리 속도가 느리고, 담당자가 없는 업무 처리에 애를 먹는 현상이 사라진 덕분이다. 무인민원발급기나 전자민원서비스가 보급돼 실제 민원인들의 불편함이 크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점심시간만 쉬지 말고 쭈욱 쉬세요.” 무인발급기가 점심시간에만 작동하는 것도 아닌데 결국 잉여인력 아니냐는 반응이다. 이참에 공무원을 줄이라는 여론이 들끓는다. 특히 직장인은 점심시간이 아니면 민원서류를 발급하기 어렵다. 무인발급기나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어르신들도 헛걸음을 해야 한다. 게다가 전공노는 무인발급이 되지 않는 여권·세무 부서까지 점심시간에 업무를 중단하자고 한다. ‘워라밸’이 중요해진 사회적 문화를 감안하더라도 점심시간 교대근무조차 어렵다는 데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공무원들은 마음 편히 점심 한 끼 먹자는데 냉정한 여론이 야속할 터다. 그러나 공무원에겐 개인의 안락함을 희생하는 공복(公僕)으로서의 직업윤리가 요구된다. 점심시간에 민원실을 직접 찾는 사람들일수록 사회적 약자일 가능성이 높다. 회사에 매여 있거나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기껏해야 점심을 거르고 짬을 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직접 상담을 받아야 하는 복지 수요자들, 무인발급기 앞에서 문맹이 되는 고령자들이다. 이들의 점심시간도 귀하긴 마찬가지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지난달 24일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를 요구하며 시작된 화물연대 파업(집단운송거부)이 장기화되고 있다. 정부는 시멘트 분야에 첫 업무개시명령을 내렸고, 민노총은 이에 반발해 6일 행정소송과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민생고를 외면한 파업에 대해 여론이 돌아서면서 그 동력이 약해지곤 있지만 ‘강 대 강’ 대치가 쉽게 해소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넉 달 전 화물연대 파업 당시, 연말 재발을 예고했던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을 2일 만나 봤다.》 ―7월 화물연대가 파업을 끝냈을 당시, 연말로 파업이 미뤄졌을 뿐이라고 예상했는데…. “정부가 연간 업무계획을 세우듯, 민노총도 일 년 파업시리즈를 기획한다. 이번에 화물연대가 선봉대로 나섰고, 지하철 철도 등이 연속으로 파업을 하며 수위를 높여가려 했을 것이다. 새 정부 길들이기다. 다만 경제가 어렵다 보니 기대만큼 동력이 생기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사태의 단초는 정부가 제공한 측면이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화물연대가 집단운송거부에 돌입했다. 아직 조각(組閣)도 끝내지 못한 정부가 대응을 서두르다가 마치 안전운임제 일몰제 3년 연기를 약속한 것처럼 됐다.” ―안전운임제의 효과를 두고 논란이 계속된다. 정부는 화물차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30명)와 교통사고 건수(745건)가 시행 이전보다 늘었다고 한다. 과로·과속·과적 건수가 줄었다는 화물연대의 주장과 배치된다. “안전운임제는 화물차주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최저임금제다.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일터가 저절로 안전해지나. 사고 원인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운임과 안전이 정비례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주무 부처가 안전운임제의 비용과 효과를 추적하고, 그 데이터를 갖고 협상에 나서야 하는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화물연대는 왜 안전운임제를 고집하나.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로 업무개시명령이 도입됐다는 점만 부각이 되는데, 그 이면이 있다. 바로 화물차 등록제를 허가제로 바꿨다. 원래 이윤이 남는다 싶으면 화물차주가 늘어나고 운임이 내려가는 구조였는데, 허가제로 진입 장벽을 높여 독과점 시장이 형성됐다. 허가제와 업무개시명령을 주고받은 것이다. 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는 안전운임제가 도입됐고 이번에 영구적으로 시행하자고 한다. 독과점 기업이 소비자를 무시하고 물건값 올리듯이, 독과점 시장에서 운임을 올려달라고 하는 것이 이번 집단운송거부의 본질이라고 봐야 한다.” ―화물차주의 근로자성을 두고도 정부와 민노총의 입장이 다르다. “화물연대는 개인사업자와 고용근로자가 9 대 1 정도다. 기본적으로 화주와 차주 간 계약관계이지 노사관계로 볼 수 없다. 화주는 계약 파기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개인사업자인 차주들이 7월 파업 당시 대거 화물연대에 가입했다. 사실상 ‘○○협의회’ 같은 이익단체나 마찬가지다. 안전운임제는 일정 수입을 보장해 달라는 것인데 경기가 어렵다고 자영업자의 생계를 보장해주나. 택배기사가 수입의 하한선이 있나.” ―꼬일 대로 꼬인 파업의 실타래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일단은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게 중요하다. 화물연대는 집단운송거부를 철회하고 협상에 임해야 하고 정부는 일몰제 연장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파업에 대응한 것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다. 안전운임제의 3년 연장을 약속했으니 이제라도 면밀한 분석을 통해 실증적인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 데이터를 바탕으로 화주와 차주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표준계약서를 보급하고 자율적으로 안전운행을 유도해야 한다. 안전 속도를 준수했을 때 운행 거리와 시간, 연료 등을 계산해 산출된 비용을 표준계약서에 반영하면 된다. 운임을 법으로 강제할 이유가 없다. 운임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되 과적·과로·과속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 이번 사태가 끝난다고 저절로 안전해지지 않는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면서 오히려 대화와 양보가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 같다. “건전한 노사정 관계를 위해서는 정부가 중립적인 입장에 있어야 한다. 경제개발 시대에는 정부가 사용자와 유착했고, 민주화 이후에는 그 반동으로 노동자 이익 보호에 치우치게 됐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고 최후의 중재자 역할을 할 만큼 정부가 신뢰를 쌓지 못한 것이다. 정부가 섣불리 개입해서 노사관계가 노정관계로 치환되는 것도 문제다.” ―민노총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지고 있다. “노조는 법으로 보장된 권리다. 이를 귀족노조라 부르면서 노조 자체를 부정하고 없애려고 하면 안 된다. ‘귀족노조’가 아니라 ‘노조 귀족’이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 노조 간부는 회사에선 월급을 받고, 정치권과 결탁해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한다. 이런 상황에선 노동시장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기업별 노조보다 산업별 노조로 가는 것이 낫다. 그런데 기업은 노조의 힘이 커질까 봐, 노조는 유급 전임자 자리가 줄어들까 봐 산별노조를 거부한다.” ―산별노조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해결책이 될 수 있나.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동전의 앞면이라면, 노사관계 이중구조는 뒷면이다. 우리나라 노조조직률이 14%에 불과하다. 거의 대기업과 공공부문 근로자로 구성돼 있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은 완전히 소외돼 있다. 그런데도 민노총이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나. 대기업 노조는 사측과 대등한 지위에서 교섭을 한다. 노조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도 높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은 교섭력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이런 양극화된 노사관계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고착시키고 있다. 결국 노조가 기업 내 비정규직이나 하청과 연대해야 해결된다. 대기업·정규직 노조들이 하청의 몫을 빼앗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노조 주장과 달리 산별노조 전환에 법적 걸림돌은 없다. 노조가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 없이 연대를 말로만 하는 거다.” ―2004∼2006년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지난 20년 동안 노동 현장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지난 정부 내내 노조의 불법 행위를 방조하다시피 했다. 표가 된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으나 산업현장의 질서가 엉망이 된 것 같다. 노조 내부 거버넌스가 취약하다 보니 정치권과 결탁해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합법과 불법파업을 구분해 원칙대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장관으로서 불법파업을 용납해선 안 되고, 합법파업이라도 불법행위는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일단 파업이 발생하면 인사고과가 감점되니 공무원들이 노조를 달래려고만 했다. 2004년 공무원 평가기준을 파업 예방이 아니라 사후 관리로 바꿨다. 그해 파업 건수가 늘다가 이듬해부터는 줄었다. 진통이 있더라도 원칙대로 대응해야 산업현장 질서도 자리 잡고 노사관계도 발전한다.” ―이번 정부의 노동개혁이 진전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노동개혁을 언급했지만 그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개혁은 단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개혁 방향을 정하고 점진적으로 사회가 움직이도록 공감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대통령이 개혁에 앞장선다는 건, 지엽적인 지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적 동의를 얻어 나간단 뜻이다. 노동개혁의 핵심은 당연히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완화여야 한다.”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참여연대 창립 멤버로 노무현 정부 시절(2004∼2006년)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을 맡아 2015년 9·15 노동시장구조 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현재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학계 법조계 청년들이 모인 ‘일자리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최근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 생존 광부 박정하 씨를 만났다. 그가 일했던 아연광산은 원청업체가 하청업체 3곳에 도급을 주고 있다. 광산업에선 오래된 관행인 ‘도급제 막장’이다. 박 씨는 “사고 위험이 워낙 크다. 산재보험료율이 올라가고 중대재해법 대상이 되기 쉬우니 쪼개서 하청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윤은 적지만 사고 위험은 큰 일터, 이런 곳에서 하청과 재하청이 일어난다.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서 일하려는 사람들은 나이 지긋한 광부처럼 노동시장의 약자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중대재해법이 올해 1월부터 시행됐다. 사망 사고와 같은 중대 산업재해가 일어나면 경영자를 1년 이상 징역 등에 처하거나, 법인에 50억 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핵심이다. 법이 효과가 있었다면 박 씨가 당한 매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9월 전국에서 산재 사망사고 483건이 발생해 510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502명)에 비해 오히려 늘었다. 날림 입법의 당연한 귀결이라 본다. 2021년 1월 국회가 중대재해법을 통과시키기까지는 고작 보름이 걸렸다. 서울지하철 구의역 김모 씨(19),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씨(24), 광주 재활용처리업체 김재순 씨(25)의 잇단 사망으로 앳된 청춘을 갈아 넣는 노동 환경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다. 국회 속기록에는 단 이틀 만에 정부 합의안을 만들어 오라는 호통도, “국민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며 부실한 심사를 우려하는 발언도 모두 남아 있다. 여론을 달래려던 국회는 입법을 밀어붙였다. 처벌의 상한이 아니라 하한을 명시한 것은 반드시 감옥에 보내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입법 속도전으로 모호한 규정이 남발된 데서 생겼다. 경영자의 공포를 노린 로펌이 대거 등판했고 고용부 퇴직 공무원의 취업 시장도 열렸다. 무서운 형벌로 경영자를 위협해 산재를 막자고 했다면 적어도 처벌받는 경영자는 누구인지, 안전·보건 의무는 무엇인지 명확히 했어야 한다. 더욱이 산재 사망사고의 80%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는데 이들 사업장에 대한 적용은 4년 유예됐다. 과잉입법이 우려돼서다. 50인 미만 사업장서 산재가 발생하면 99% 이상 경영자가 기존 법으로 이미 처벌받고 있다. 처벌만으로 산재가 줄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조성일 전 서울시설공단 이사장은 저서 ‘아픔을 딛고 안전 사회로’에서 중대재해법이 처벌이 아니라 예방에 있다는 설명은 사실상 거짓말이라고 했다. 법의 실효성을 담보하려면 산재 처리비용이 예방비용을 넘어서도록 해야 한다. 경영책임자의 징역만으로는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소 비율이 낮은 데다 재판에 가더라도 형이 확정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린다. 사망 사고만 나지 않으면, 책임을 다했다는 서류만 있으면 피해갈 수도 있다. 이 비용이 안전에 투자하는 비용보다 싼 것은 물론이다. 박 씨가 일하던 광산에는 작업중지명령이 내려졌다. 경찰이 수사를 하고, 산업통상자원부가 광산안전법 위반 혐의, 고용부가 중대재해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한다. 요란하게 사후약방문을 쓰는 동안 박 씨의 동료들은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는 “동료들은 배운 일이 광산일밖에 없어서, 조사가 신속하게 되면 좋겠다”고 했다. 근로자의 생명과 안전이 경영자 안위보다 뒷전으로 밀려나는 중대재해법, 손봐야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처음에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을 보고 미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바뀐다.” 바이오벤처 테라노스 창업자인 엘리자베스 홈스(39)는 그의 기술을 의심하는 시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달랐다. 피 한 방울이면 250개의 질병을 진단한다는 키트는 엉터리였고, 최근 유죄 판결을 받았다. 홈스가 ‘여자 스티브 잡스’로 추앙받았다면 샘 뱅크먼프리드(30)는 ‘코인계의 워런 버핏’으로 불렸다. 그가 창업한 FTX가 파산을 신청했다. 한때 천재로 불렸던 두 기업가의 몰락이 실리콘밸리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이들이 쓴 성공 신화에는 공식이 있다. 우선 ‘천재’로 포장할 수 있는 명문대 간판을 달았다. 홈스는 스탠퍼드대를 중퇴했고 뱅크먼프리드는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했다. 젊은 혁신가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해 미디어 달링(Media Darling·미디어가 선호하는 유명 인사)으로 불린 것도 같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젊은 여성인 홈스는 잡스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중저음의 목소리를 냈다. 알고 보니 금발은 염색이었고, 목소리는 연기였다. 부스스한 곱슬머리에 후줄근한 반바지 차림을 한 뱅크먼프리드는 정보기술(IT) 업계 괴짜 천재의 전형이다.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정계와 문화계 슈퍼스타와 밀착했던 행보도 공통점이다. 테라노스의 이사회는 헨리 키신저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와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등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거물들로 구성됐다. 공교롭게도 홈스의 사기행각은 슐츠 전 국무장관의 손자이자 전 직원이었던 타일러 슐츠의 내부 고발로 드러났다. 뱅크먼프리드는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 농구선수 샤킬 오닐 등과 공개적으로 친분을 과시했다. 포장을 벗겨낸 이들의 모습은 악독했다. 홈스는 회사의 문제를 제기하는 직원들을 위협하거나 해고했고, 뱅크먼프리드는 털털한 이미지와 달리 미팅에서 욕설을 참지 않았다는 폭로가 이어진다. ▷홈스와 뱅크먼프리드의 대범한 사기극은 성공에 집착했던 개인적 특성과 성공을 강요하는 실리콘밸리 문화가 결합한 결과다. 지난해 재판에서 홈스의 변호사는 “테라노스는 실패로 끝났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홈스에게 사기 혐의를 인정해 11년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뱅크먼프리드의 FTX는 내부 회계 부정 사실이 속속 드러나 ‘제2의 엔론’ 사태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실상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사기)나 다름없는 데다 피해자도 많아 홈스에 비해 죄가 가볍지 않다. 미국의 사법 시스템이 뱅크먼프리드에게는 어떤 단죄를 할지 주목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정하 형님!” 4일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에 매몰됐던 광부 박정하 씨(62)를 발견한 동료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암흑 속에 고립된 지 221시간 만이었다. 살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로 엉엉 울었다. 사고가 났던 지난달 26일, 박 씨는 땅 밑으로 곧게 파내려간 수직갱도 190m 부근 수평갱도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르르 쾅.’ 굉음이 들린 시간은 오후 5시 38분. 하늘에서 쏟아지던 돌과 흙이 잠잠해진 건 그 후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철제H빔과 나무가 엉킨 슬러지(광물 찌꺼기)가 병목현상으로 낙하를 멈춘 것이다. 기적처럼 박 씨가 있던 곳으로부터 약 20m 위에 지붕이 생겼다. 그 아래서 쓴 생존일기를 16일 박 씨를 만나 들어봤다.》 ―지하갱도에 고립된 9일 동안 ‘생존 교과서’ 같은 대응이 화제가 됐다. “내가 나 자신한테 놀랐을 정도로 침착했다. 살려고 그랬나 싶다. 상황을 보니 구조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더라. 생존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철제H빔으로 기둥을 세우고 둘둘 말린 비닐을 찾아서 움막을 지었다. 갱도 안이 습해서 춥거든. 누가 갖다 놓은 비닐인지, 그게 없었다면 체온 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무판이 20여 장 쌓여 있어서 톱으로 잘라 30cm 크기 장작을 만들었다. 산소 절단기를 이용해서 젖은 나무판에 불을 붙였다. 그 불에 철통만 남긴 전기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였다. 첫날은 커피믹스 두 봉으로 났다.” ―나흘 동안 밖으로 나갈 길을 계속 찾으셨다고…. “갈 수 있는 갱도는 전부 가 봤다. 이튿날은 ‘여기서 겁을 먹으면 몸도 말을 안 듣는다’며 불안해하는 동료를 달래면서 수평갱도를 탐색했다. 지상 주차장과 연결된 덤프트럭이 드나드는 넓은 갱도가 생각나서 괭이 2개로 사흘을 팠다. 겨우겨우 10m 남짓 올라갔는데 붕락(崩落)이 막고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단 철수를 했다. ‘저녁 먹자’ 그러면서 커피믹스를 끓여 마셨더니 좀 진정이 되더라. 나흘째에는 발파작업에 쓰고 남은 화약 25개로 지붕처럼 얹어진 슬러지 폭파를 시도했다. 10개씩 묶어 두 차례 발파시켜 봤는데 꿈쩍도 안 했다. 결국 출구를 못 찾았다.” ―‘정말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구조되셨다고 들었다. “마지막 날, 헤드램프를 켜니까 불이 깜박거리는 것이 방전되기 직전이었다. 꺼지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장작은 6개 남았다. 추위가 찾아올 것이었다. 커피믹스는 진즉에 떨어졌고. 같이 있던 동료에게 ‘미안하다,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이제 대비하자’라고 했다. 말을 뱉는 순간, 두려움 서러움 무서움 등 온갖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더라. 그때부터 시계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나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도 같았다. 안 들린다는 동료에게 ‘야야, 그래도 모자 써라. 분명히 들었다’고 말하고는 손을 잡고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10m쯤 가니 옆에서 ‘펑’ 불빛이 들어오고 ‘형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료가 뛰어오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느낄 때 무슨 생각을 하셨나. “아내. 아내한테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새도 없이 죽는다는 것 자체가 정말 미치겠더라. 미안하다고 말할 1분도 허락이 안 되니까, (전할 수가 없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내에게 왜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으셨나. “우리 일찍 만나서 아들 둘 낳고 살았다. 고생 안 시킨다고 했는데 뭐, 헛말 됐다. 동원탄좌에서 일할 당시 노조활동을 10년간 했다. 1987년부터 5년간 노조위원장 하면서 가족에게 많이 소홀했다. 내 욕심 차리지 않고 광부 권익 향상에 헌신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가족이 희생해 준 덕분이었다. 동원탄좌가 문 닫고 폐광근로자협의회에서 활동하는 15년 동안 아내가 가장으로 살았다. 자꾸 못 해 준 것만 생각나서, 잘못 살았구나 후회가 됐다. 두 번째 삶은 아내한테 잘하고, 아들, 며느리 손도 한번씩 잡아주고 그러고 싶다.” ―갱도 속에서 “광부들의 동료애는 다른 직종의 동료들보다 굉장하다”며 동료들이 구조해 줄 거란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광산은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터다. 1982년 처음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출근길 배웅을 나오면 광부 앞을 질러 지나가지도 않았다. 미신 같은 것이다. 요즘에도 젊은 친구들이 일하러는 오는데 하루, 이틀이면 도망간다. 배우고 배부른 사람,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들다. 오죽하면 막장이라고 하겠나. 낮에 한 발은 죽음에 걸치고 함께 일하고, 밤에 숙소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나눠 먹으면 진짜 형제가 된다. 이번에 나를 처음 발견한 동료 신 씨도 ‘쉬란 말 하지 마소’ 하면서 하루 12시간씩 구조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힘든 광부의 길에 어떻게 들어서게 되셨나.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 동원탄좌에서 일하고 있던 장인 따라 일을 배웠다. 당시만 해도 도시근로자 평균 임금의 1.5배를 받았다. 나라에서는 ‘산업전사’로 불렀다. 땅속에서 괭이질하는 광부들이 땅 위 세상이 바뀌는 걸 알 수가 있나. 점점 연탄 수요가 줄어들자 정부가 1987년 석탄산업합리화산업단(현 한국광해광업공단)을 출범시켰다. 광산이 무더기로 폐업했다. 광부들이 일자리 잃고 지역 경제가 죽으니 여기에 강원랜드가 들어왔다. 막장에서 벗어나나 했다가 실직하고 도박하고 고향 떠난 사람이 많다. 폐광 광부 고용 승계를 약속했는데 청소 용역으로나 몇 십 명 일했을 거다. 그 과정을 다 지켜보며 여태껏 일했다.” ―앞으로 광부들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감시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던데 1982년 처음 출근한 날이나, 40년 지난 오늘이나 광물 채광하는 방식이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사양산업이다 보니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적은 인원으로 이윤을 뽑아내는 구조다. 광물 1t 생산 원가와 수입 원가 비교하면 사다 쓰는 게 낫다. 채산성이 맞아야 사람도 더 고용하고 시설도 투자하고 할 텐데…. 안전 비용은 말할 것도 없다. 폐갱도에 갖다 버린 슬러지가 흘러나온 이번 사고만 해도 갱도 입구를 이중 삼중으로 막았으면 예방할 수 있었다. 철제H빔을 딱 하나만 쓰니까 위에서 쏟아지고, 옆에서 밀려나오니 못 버틴다. 힘들어도 언론 인터뷰를 하는 것은 광산의 취약한 부분을 알리고 싶어서다. 평소라면 광부의 삶에 누가 관심이 있겠나. 회사와 대화 창구도 만들고 싶다. 옛날 방식은 안 된다는 경각심이 있어야 한다. 미약하나마 광부들의 안전에 힘을 보태는 것, 그게 살아 돌아온 이유 같다.” ―올 8월에도 봉화 광산에선 붕괴 사고가 있었고 광부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안전 점검을 나온 공무원이 “흙탕물도 묻히지 않고 돌아갔다”고 했다. “사고 이후 우리 큰애가 현장에 입갱했었다. 아내 앞에서 ‘이런 데서 아버지가 평생 일하셨냐’ 하고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고 한다. 광산안전사무소에서 안전 점검을 나오는데 흙이 묻어 더러워질까 봐 흉내만 내는 것처럼 보였다. 안전점검이라면 흔들어도 보고, 두드려도 보고 닫힌 갱도도 들어 가봐야 하지 않나. 회사야 당연히 돈을 아끼려 할 테고 이를 감시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 아닌가. 공무원의 가족이 일한다고 해도 서류만 챙겼을까 싶다.” 그는 11일 병원을 나서며 “즐겁게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둠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신체는 많이 회복됐는데 심리적 외상이 남았다. ―집에 돌아오신 후 건강은 어떠신가. “근육이 소실돼서 바지가 헐렁헐렁해졌을 뿐 신체적 건강은 거의 회복됐다. 다만 어두워지면 방에 불을 전부 켜 놓게 되고, 밖에 나가기가 무섭다. 다시는 컴컴한 갱도로는 못 돌아갈 것 같다. 의사가 권한 대로 사람들 만나서 대화하고, 활동하려고 노력한다. 급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질 수도 있다고 해서 꾸준히 심리 치료를 받을 계획이다.” ―정말 살아있구나 느끼신 순간은 언제인가. “아내가 끓여준 청국장 먹을 때,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 오늘은 힘내라고 아침부터 소고기 불고기를 해줬다. 큰애는 회사도 휴직하고 옆에 와 있고, 가족들이 애틋한 마음에 자주 모이게 됐다. 살아남은 게 감사한 순간들이다. 새로 얻은 삶은 가족과 동료를 위해 살고 싶다.”정선=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원으로 일주일 살기, 냉파(냉장고 파먹기) 요리법, 무지출 데이트…. 요즘 인터넷상에는 ‘무지출 챌린지’ 성공기와 실패기가 넘쳐난다. 치솟는 물가에 생활비를 줄이려고 아예 지갑을 닫아버린 청년 자린고비들이다. 웬만하면 걸어 다니고 식사는 회사에서 해결한다. 보고 싶은 친구는 온라인으로 만난다.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 치맥(치킨과 맥주)을 시키려다가도 “내 마음만 상하고 내 돈만 쓰는 일”이라며 꾹 참고 화를 다스리는 영상도 있다. ▷유독 궁상맞아서가 아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올해 상반기(1∼6월) 세대별 체감경제고통지수를 산출했더니, 20대가 25.1로 모든 연령대 가운데서 가장 높았다. 체감실업률과 체감물가상승률을 합산한 체감경제고통지수는 그 숫자가 커질수록 경제적으로 궁핍하다는 뜻이다. 주된 원인은 인플레이션이다. 20대 체감물가상승률은 5.2%였는데 유일하게 5.0%를 넘긴 연령대였다. 청년들의 지출 비중이 높은 음식·숙박, 교통, 식료품의 물가가 평균보다 많이 올랐다. ▷경제위기에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체감경제고통지수는 60대(16.1)가 20대 다음으로 높았고, 모든 연령대에서 코로나19 사태 이전보다 경제적인 고통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자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소득이 적을수록 부담이 된다. 취업 준비 중이거나 이제 막 취업해 소득이 적은 청년들은 생활비 상승이 더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세계적으로 청년 세대에 인플레이션 고통이 집중된다는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20대가 겪는 경제난이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더 문제다. 20대 체감실업률은 19.9%에 달한다. 고학력자는 늘었는데 그에 맞는 일자리는 줄어들어 일자리 미스매치가 심각해서다. 노동개혁 같은 구조적인 해법이 있어야 이 문제가 해소될 것이다. 20대의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은 29.2%로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높다. 주로 전세나 월세 보증금인데 고금리의 직격탄을 맞게 생겼다. ▷‘인턴 신분의 황은채와 나는 백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매일 아홉 시 반부터 이르면 저녁 여덟 시, 늦으면 열한 시 정도까지 일했다. … 점심과 저녁 식대가 따로 나오지 않아 식비나 출퇴근 교통비를 제외하면 남는 돈이 없었지만, 괜찮았다.’ 박상영의 소설 ‘요즘 애들’은 사회초년생인 20대에게 매몰찬 노동시장의 실상을 그렸다. 주인공은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다. 20대가 겪는 경제적인 고통은 결국 일자리 문제에서 비롯된다. 노동시장의 진입 장벽을 높이고 올라서는 사다리를 차버리면서 ‘요즘 애들’ 탓만 해선 안 될 일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지난달 29일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주말 이태원을 찾았던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함께 울고 웃던 친구를 잃은 사람들은 짐작조차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구조에 참여했던 소방관 경찰관 의료진은 “생전 겪어보지 못한 참혹한 현장”이었다고 토로한다. 참사 이튿날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영상 유포와 혐오 발언을 자제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트라우마를 예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여론이 성숙하게 흘러가는 계기가 됐다. 4일 만난 오강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은 “이태원 참사의 트라우마가 여느 참사보다 심각할 수 있다”고 했다. 도심 한복판서 발생한 이태원 참사는 직접 목격한 사람이 많고 영상을 찍은 사람도 많다. 그는 “제2, 제3의 피해가 발생해 트라우마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 사회에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재난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따른 국민의 집단 트라우마도 상당한 것 같다.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뿌리는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가족을 불의의 사고로 잃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만 세상은 위험하다’ 같은 인지 왜곡이 발생한다. 어떤 측면에선 재난으로 인한 신체적 외상보다 심리적 외상이 더 크고 깊다. 이태원 참사 조문을 왔다가 쓰러진 세월호 유가족이 그런 경우다. 우리 사회가 재난 이후 PTSD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다. 2018년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생겨 재난 상황에 대응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집단 트라우마는 우리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이번 참사는 유독 “귀신 놀이 하러 갔다” “가족이 왜 안 말렸나” 등 피해자를 비난하는 혐오 발언이 많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간신히 버티던 사람도 무너진다. 핼러윈은 축제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젊은이들이 그 나름대로 만든 또래 문화다. 그게 나쁜 짓인가. 희생자를 함부로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기 안의 불안과 공포가 되레 큰 사람이다. 충격을 받았을 때의 방어기제라고 볼 수 있다. ‘잘못했으니 벌 받은 거야’ 하면 이 사고가 덜 무섭다. 아무 잘못 없이 희생됐다면 내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 된다. ‘토끼 머리띠’ 남자 같은 희생양을 찾기도 한다. 나쁜 사람만 없애면 사고는 없을 테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반응임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비난이나 혐오 발언은 절대 용납해선 안 된다. 생존자와 유가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야 하나. “첫째, 소통이 중요하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공포심이 줄어든다. 둘째, 가짜 정보를 주의해야 한다. 불안하면 음모론에 현혹되기 쉽고, 음모론은 공포 반응을 더욱 자극한다. 사고 원인이 번복되면 피해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셋째,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지진 같은 재난을 겪은 사람들 중에 빨리 회복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먹고 자고 일상을 유지한 사람이 PTSD를 극복한다. 물리적인 지원, 심리적인 지원이 모두 중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구성원의 심리적 외상이 치유되고 사회 전체가 건강해진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양극화나 사회 갈등도 트라우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가. “야구를 좋아하면 야구 뉴스만 듣는 것처럼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에 집중한다. ‘주의 편향’ ‘해석 편향’이라고 한다. 이런 편향성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정치인이 이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지지받고 공감받는다고 느낄 때 심리적 안정을 찾아간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고통받는 국민을 국가가 돕겠다’고 말해줘야 한다. 그런데 갈등이 많은 사회는 이런 기능을 할 수 없다. 이런 재난을 어떻게 봉합하느냐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참사 당일 주저 없이 구조에 나선 사람이 있고, 술을 더 마시러 가자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뛰어들어 돕고, 누구는 외면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건가. “인간의 본성 중에 이타성이 더 발달한 사람은 뛰어든다. 반면, 본능적으로 자기가 편하고 자기의 목적이 우선인 사람도 있다. 모두 이타주의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단순히 ‘성선설’ ‘성악설’ 차원이 아니라 공포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각기 반응이 다르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도망가거나(도피) 맞서 해결하려 하거나(투쟁), 완전히 얼어붙어 멈춰버리는 사람이 있다. 과거 트라우마의 기억과도 관련이 있다.” ―트라우마를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는 시각도 여전하다. 정부가 심리적 지원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건강할 때 우리 사회 전체가 건강해진다. 불과 70년 전 전쟁을 겪었다. 그 PTSD를 극복하는 데 한 세대, 두 세대가 걸렸다. 몸도 건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있듯이 정신도 건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있다. 취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게 국가의 역할 아닌가. 국가가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유가족과 친구, 부상자, 목격자 등에 맞는 적절한 심리적 지원을 반드시 해줘야 한다. 미국은 9·11테러 20년이 지난 지금도 PTSD 환자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이태원 참사를 차례로 겪은 20대에게 집단 트라우마가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부나 사회적 차원에서는 어떤 지원이 도움이 되나. “먼저 정부나 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을 돕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국가애도기간은 시의 적절하게 선포됐다. 국민이 비탄에 빠졌다는 걸 정부가 인정해준 거다. 물리적·심리적인 정부 지원의 ‘신속성’도 중요하다. 재난 상황에선 식사와 수면 같은 일상을 잘 유지해야 회복이 빠르다. 일상 회복을 돕는 실질적인 지원과 함께 PTSD에 대한 심리적 개입이 빨리 이뤄져야 한다. PTSD는 성격장애, 불안장애, 우울장애, 알코올 남용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 급성기 치료가 중요하다. 자원봉사가 확산되는 것도 의미 있다. 우리 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을 지원하는 건 ‘세상은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는 안정감을 주는 것과 같다. 구호품을 보내고, 자원봉사를 함으로써 연대감을 보여줄 수 있다. 의인과 미담 사례를 많이 보도해야 한다. 그런 뉴스를 보면 세상은 안전한 곳이라고 느끼게 되고 마음이 덜 괴롭다.” 오 교수는 올해부터 임기 2년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사장으로 출마하게 된 계기를 그는 애도 반응으로 설명했다. 강북삼성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고 임세원 교수는 2018년 12월 조울증 환자를 진료하던 중에 피살됐다. 오 교수는 “병원 안에서 일어난 사고라 그렇게 황망히 떠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며 잠시 말을 멈췄다. 의사인 그도 아끼는 후배의 상실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한다. 임 교수 추모사업과 정신질환자의 입원을 어렵게 한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그가 상실로부터 회복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와도 같다. ―옆에 생존자나 유가족이 있다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나. 위로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상처를 덧나게 할 때가 있다. “억지로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너무 무서웠다’ ‘너무 힘들다’ 이렇게 얘기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충격이 커서 쉽사리 말을 못 할 수도 있다. 그럴 땐 그냥 기다려야 한다. 만약 내 친구라면 ‘언제든지 전화해라’ ‘밥은 먹냐. 만나서 밥 먹자’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주변의 지지가 없으면 마지막 단계까지 갈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성급히 충고하는 건 상황을 악화시킨다. 그리고 위기상담 핫라인(1577-0119)을 꼭 안내드리고 싶다. 본인의 심적 고통을 설명하면 그에 맞는 지원을 받을 수 있다.”오강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1992년부터 강북삼성병원(성균관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1996∼1997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연수를 받는 동안 본격적으로 불안장애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한불안의학회 회장과 이사장, 대한노인정신의학회 이사장,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우리 가족 마인드 클리닉’ ‘불안한 마음 괜찮은 걸까’ 등이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당신 회사는 해고를 통보하고 있나요’ ‘부서를 줄였나요’.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선 데이터 엔지니어들이 서로 안부를 물으며 각 회사 사정을 파악하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정보기술(IT) 기업 직원들로 해고될까 봐서 떨고 있는 이들이다. 출근이 취소됐다는 신규 직원부터 아내가 임신 중인데 해고를 당했다는 기존 직원까지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팬데믹 동안 승승장구했던 빅테크들이 경기 침체에 대비해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빅테크들은 지난해 최대 실적과 넉넉한 현금 주머니를 바탕으로 고용과 투자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2분기 실적이 기대를 밑돌고 3분기 실적이 ‘어닝 쇼크’로 이어지자 구조조정에 나섰다. 아마존은 직원들에게 고용 동결을 공지했고 애플 역시 연구개발 부서 외에는 채용을 중단했다. 최악의 실적을 낸 페이스북의 모기업 메타는 앞서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넷플릭스는 올해 들어 500명 가까이 해고했다.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FAAMG)의 주가는 올해 무려 34.7%가 하락했다. “2000년 닷컴 버블 붕괴와 닮은꼴”이라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 3월 정점에 이르렀던 나스닥 지수는 거품이 사그라진 2002년 10월까지 약 78% 하락했다. 당시 아마존 야후 구글 등 IT 기업들이 과열된 주가에 비해 형편없는 실적을 냈고, 투자자들이 이탈하며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은 직원을 내보내고 월급을 깎기 시작했다. ▷금리 인상 속도와 소비 감소 추세를 볼 때 빅테크들은 당분간 저조한 실적을 회복시킬 계기가 없다고 보고 있다. 앤디 재시 아마존 CEO는 “일부 사업을 정리하고 침체에 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경기 침체가 2024년 봄까지 갈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인수한 트위터는 전체 직원의 절반(3700명)을 감원한다. 지난주부터 문자와 이메일로 ‘날벼락’ 해고가 통보됐다. 특히 윤리경영 부서부터 해고하면서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트위터에 “인권이 경영의 중심이어야 한다”며 이례적 경고를 할 정도다. ▷빅테크의 대규모 감원은 곧 사업 재편을 의미한다. 닷컴 버블 붕괴의 상징이었던 아마존이 그 시련을 딛고 빅테크로 성장한 것처럼, 기업들은 사업의 옥석을 가려가며 생존 전략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다만 IT 산업은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글로벌화된 것이 특징이다. 미국 빅테크의 경영 한파는 경쟁 격화든 위기 전염이든, 어떤 형식으로든 곧 한국으로 전파될 가능성이 높다. 추운 겨울을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인구위기로만 보면 일본은 한국의 미래나 다름없다. 대략 20년의 시차가 난다. 2005년 일본은 초고령사회(인구 5명당 1명이 65세 이상 노인)에 진입했다. 2010년부터 거주 외국인을 포함한 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2025년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총인구는 예상보다 7년 앞선 지난해부터 감소했다.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과 최고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일본보다 극심한 인구위기를 겪게 될 것이 자명하다. ▷지속가능한 사회보장제도는 인구위기를 겪고 있는 일본의 최대 숙제다. 최근 일본 정부는 국민연금의 납부 기간을 현행 59세에서 64세로 5년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2040년이 되면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40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이 스스로를 부양하지 않고서는 아래 세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다. ▷현행 일본의 연금제도는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과감한 개혁 내용이 반영된 것이다. 매년 내는 돈을 인상해 현재 국민연금과 후생연금을 합친 보험료는 한국의 2배인 18.3%다. 받는 돈은 점진적으로 깎고 있다. 인구와 경제지표에 연동해 연금지급액을 자동 삭감하는 ‘거시경제 슬라이드’도 도입했다. 당시 개혁으로 100년간 연금 재정이 안정될 것으로 봤다. 그런데 노인 인구가 30%에 육박하면서 연금기금 고갈 시기가 예상을 앞질러 버렸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연금개혁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의 연금제도는 연금개혁이 논의될 때마다 참고할 만한 모델로 자주 거론된다. 일본의 공적연금은 3층 구조다. 모든 국민이 가입하고 보험료를 똑같이 납부하는 국민연금이 있다. 한국의 기초연금과 유사한데 개인과 정부가 절반씩 부담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번 개혁은 이 보험료의 납부기간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위에는 후생연금을 쌓는다. 우리로 치면 국민연금과 직역연금을 통합한 형태다. 마지막으로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을 얹는다. 이처럼 촘촘하게 노후안전판을 마련한 뒤 연금 개시 연령과 정년을 맞췄다. ▷일본은 법적으로 65세 정년을 보장하고 있고, 2020년부터 70세 정년을 권고하고 있다. 연금개혁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이는 대신 은퇴 시기를 단계적으로 늦춰왔다. 더 늦게 타더라도 더 오래 벌도록 해서 개혁의 고통을 분산시킨 것이다. 한국에선 경직된 노동시장 탓에 정년 연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지난해 보인다. 하지만 일본과 인구구조가 꼭 닮은 한국으로선 참고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정년 연장과 병행한 일본 연금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해 미리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바꿀 수 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5일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지하 25cm, 세로 15cm 크기 배터리서 불꽃이 일었다. 정전이 돼도 데이터가 정상 가동되도록 전력을 공급하는 무정전전원장치(UPS)와 연결된 배터리였다. 단 한 개의 배터리가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카카오 먹통 사태를 불러온 셈이다. 카카오의 모든 서비스가 복구되는 데는 나흘이나 걸렸다. 이번 사태로 2018∼2019년 빈발했던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가 다시금 소환됐다. UPS는 용도는 다르지만 ESS 같은 이차전지의 일종이다. 당시 민관합동 ESS 화재사고 조사를 주도했고, 이번 UPS 사고 조사에도 참여하는 노대석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로부터 배터리 화재의 원인과 안전 대책을 들어봤다.》 UPS와 ESS 화재 원인을 이해하려면 공통적으로 리튬이온배터리를 쓰는 장치에서 불이 났다는 점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UPS는 ESS와 같은 이차 전지이지만 그동안 납축전지를 주로 썼기 때문에 사고가 뜸했다. 그런데 데이터센터처럼 대용량의 전기를 사용하는 곳이 늘어나면서 리튬이온배터리가 납축전지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판교 데이터센터 역시 납축전지를 쓰다가 2016년 리튬이온배터리로 교체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튬이온배터리 사용이 계속 늘어나는데 안전성 우려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리튬이온배터리는 사실 환상적인 기술이다. 납축전지에 비해 작고 가볍다. 같은 부피당 저장되는 전기에너지 밀도가 납축전지의 3배나 된다. 자동차 배터리가 바로 납축전지인데 그 크기를 생각해 보라. 납축전지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려면 건물이 몇 개 더 필요하다. 배터리 수명은 10배 길다. 그만큼 비싼 것이 단점이다. 화재가 나면 1000∼1500도까지 올라가는 ‘열폭주’ 현상이 일어난다. 리튬이온배터리 내부에서 산소가 계속 발생하므로 전소될 때까지 불을 끌 수가 없다. 물을 뿌려 온도를 낮추면서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을 뿐이다. 이번 카카오 사태에서 전원을 차단한 채 8시간이나 화재를 진압한 이유다.” ―2017년 8월 전북 고창풍력발전 ESS 화재가 처음 보고되면서 리튬이온배터리의 안전성에 대한 경고음이 울렸다. 지금까지 38건의 ESS 화재가 발생했다. 정부의 조사 결과 그 원인은 무엇이었나. “2019년 정부가 1차 민관합동 ESS 사고 원인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 결과 네 가지 화재 원인을 밝혀냈다. 첫째, 배터리를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가 부실했다. 둘째, 배터리와 배전반 등 주변 설비를 통합·제어하는 시스템이 서로 충돌했다. 셋째, ESS를 설치한 장소가 엉망이었다. 주로 산지나 해안가에 조립식 건물로 지어지는데 현장조사를 나가 보니 뱀도 기어 다니고 풀도 자라고 있더라. 이 세 가지 원인, 배터리 외부 원인은 ESS 제조·설치·운영 기준을 만들어 해결했다. 당시 ESS가 설치된 1500곳을 점검했고 새로운 기준을 충족시킬 때까지 모두 가동을 중단시켰다. 2020년 사고가 2건으로 급감했다. 마지막으로는 배터리 자체 결함이 의심됐다. 배터리를 해체해 보니 결함의 흔적은 발견했으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입증하진 못했다. 조사 기간이 반년이라 사고 배터리와 사용 기간을 똑같이 맞춰 실험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배터리 불량률이 ‘0’에 수렴하고 있어 예외적인 경우라고 봤다.” ―카카오 먹통 사태를 야기한 UPS 화재 원인도 ESS 화재 원인과 동일한 것인가. “UPS 사고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라 ESS 조사 결과에 근거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 UPS와 ESS는 운전하는 방법이 다르다. ESS는 생산한 전력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태양광에너지를 낮에 저장했다가 밤에 쓰는 식으로 충전과 방전을 반복한다. 반면에 UPS는 100% 충전을 해 뒀다가 비상시에만 대체 전력으로 사용한다. ESS는 2차 화재사고 조사 이후 충전율을 90%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배터리 손상을 막기 위해서다. UPS는 항상 100% 전압이 걸린 상태인데 혹시 이 차이가 배터리에 가혹한 환경인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휴대전화를 오래 충전하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번 판교 데이터센터의 경우 건물 준공 시 인가를 위한 검사 대상에 UPS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UPS는 사용한 지 60∼70년 정도로 ESS보다 훨씬 오래됐다. UPS가 전기안전법상 사각지대에 있었지만 납축전지를 사용해 그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최근에야 법상 특수설비로 등록해 안전기준, 성능기준을 마련했고 국무조정실 사전 규제 심사에 올라가 있다. 리튬이온배터리를 쓰는 UPS를 사용하는 곳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데이터센터 자동화공장 등 데이터를 쓰는 곳은 다 들어간다. 다행스럽게도 이를 관리할 근거가 마련됐다.” ―리튬이온배터리는 휴대전화와 노트북, 전기차 등 충전이 필요한 모든 전지에 사용되고 있다. 이런 제품 사용도 위험한 것인가. “리튬이온배터리는 상용화된 지 30년이 지나지 않았다. 기술이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 있다. 그러나 일상 속 기기들은 아주 작은 용량의 배터리라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문제는 MW(메가와트·100만 W)급 대용량 전기가 필요한 곳들이다. 현재 리튬이온배터리를 쓰는 UPS가 설치된 사업장이 전국에 241곳이다. 발전소에는 거의 들어가 있다. 야외에 설치하는 ESS와 달리 UPS는 건물 안에 설치한다. 이번 화재에서는 인명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열폭주 현상이 일어나고 유독가스가 배출되면 건물이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배터리 안전성을 개선할 대책이 있나. “배터리는 아는 만큼 성능이 나고 아는 만큼 안전하다. 휴대전화 배터리만 봐도, 사용자에 따라 오래 쓰기도 하고 금방 닳기도 한다. 배터리는 전기·통신·반도체·화학 분야가 융합된 기술이다. 이에 정통한 전문가가 다뤄야 한다. ESS 현장 조사를 갔더니 옷 공장을 운영하다가, 임대사업을 하다가 ESS 사업에 뛰어든 분도 있었다. 그래서 배터리 렌털 서비스를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정수기를 빌리면 정기적으로 필터를 갈아주는 것처럼 전문가가 유지·보수를 하도록 하는 거다. 배터리 사고가 나기 전에 반드시 징조가 있다. 하루 전날도 아니고 한두 달 전부터 가스가 배출된다거나 하는 신호를 보낸다.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채기 힘들다. 잠수함 안에도 UPS가 설치되지만 사고 난 적이 없다. 매일 전문가가 점검하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화재 진압 기술도 개발해야 한다. 기존 소화약제로는 진압이 어렵다.” ―대책이 있는데도 실행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안전하게 유지·관리하면서 쓰는 것이 최선인데 여기에는 비용이 수반된다. 기업이 이 비용을 감수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2013년 일론 머스크가 ‘ESS는 세상이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기술’이라고 했다. 전기는 생산하자마자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전력예비율을 10∼15% 둔다. 과잉 생산하고 버린다는 얘기다. 그런데 ESS가 생기면서 전기를 저장할 수 있게 됐다. 우리 같은 자원 빈국에선 꼭 필요한 기술이다. 세계 시장의 약 3분의 1을 점유한 성장 산업이기도 하다.”노대석 한국기술교육대 교수훗카이도(北海道)대학원 전기공학 박사로 한국전기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2013년부터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전기에너지저장시스템(ESS) 국제표준화회의 환경 분야 의장으로서 ESS 기술 표준 개발에 참여한 배터리 전문가다.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안전전문위원으로 1∼4차 민관합동 ESS 화재사고 조사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산학기술학회 회장과 대한전기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천안=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빛이 밝으면 그늘이 짙다. 요즘 ‘빙하기’가 도래한 부동산 시장이 딱 그렇다. 최근 3, 4년간 전례 없이 폭등했던 아파트 가격이 뚝뚝 떨어지더니 급매, 급급매에 이어 반값 아파트까지 등장했다. 지난달 서울 마포구 염리삼성래미안 전용면적 84m²가 8억 원에 거래됐는데 1년 전 가격의 절반 수준이다. 이 단지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힐 만하다. ▷강남 불패 신화도 깨졌다. 8월 서울 강남구 디에이치자이개포 전용면적 84m²는 8개월 전보다 9억 원 떨어진 15억 원에 팔렸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헬리오시티 전용면적 84m²는 지난달 13억8000만 원에 거래됐다. 한 달 만에 무려 8억 원이 빠졌다. 이들 거래 중에는 직거래가 섞여 있어 집값 폭락의 전조인지, 세금을 아끼려는 증여 거래인지는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집주인들은 반값 아파트를 막기 위해 똘똘 뭉쳤다. 반값 아파트 거래를 성사시킨 공인중개업소를 공개하고 보이콧하거나 매도인의 신상을 공개하겠다고 압박한다. 하지만 집값 하락의 추세를 거스르긴 역부족이다. 서울 강동구 한 아파트(전용면적 84m²)를 5억 원가량 낮춰 판 아파트 매도인은 유튜브에 직접 출연해 “매달 대출 이자 내줄 것도 아니면서 사유재산에 대해 왜 팔았느냐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고 했다. 싸게 팔고 싶어 싸게 팔았겠느냐는 호소다. ▷현재 부동산 시장은 집을 사겠다는 수요가 사라진 까닭에 꽁꽁 얼어붙었다. 금리가 가파르게 인상되면서 이자 부담이 임계점을 넘어섰다. 집을 살 엄두를 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연말이면 주택담보대출 최고 금리가 8%가 넘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거금이 필요한 전세 거래 역시 실종됐고 경매와 청약시장까지 마비됐다. 반값 경매가 유찰되고 청약에 당첨돼도 잔금을 치르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급매 위주로 거래되다 그 가격이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거래가 기준으로 서울 아파트 3.3m²당 중위가격은 이미 2년 전 아래로 내려섰다. ▷금리에 따라 집값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아파트 가격의 변동성이 지나친 것은 문제다. 실수요보다 갭 투자 같은 투자 수요가 집값을 올려놓고 집값이 떨어지자 투매한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미국 댈러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은 팬데믹 동안 집값 버블현상이 심각했던 나라에 속한다. 거품이 사그라지는 과정에서 시장의 고통이 커질 것이다. 그래도 집값은 차츰 정상화돼야 한다. 청년들은 “내 집 마련에 따라 인생의 난이도가 달라진다”고 자조한다. 난이도가 높은 문제는 풀기를 포기하게 되듯이 인생의 난이도가 높아지면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다. 결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단단히 (대통령실에) 밉보인 것 같다.” 국립대 사무국장 파견 금지로 발칵 뒤집어진 교육부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해석이다. 지난달 국립대 사무국장으로 파견됐던 교육부 공무원 10명이 일제히 대기 발령이 났다. 공석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국정감사가 끝나면 교육부로 복귀한다고 한다. 국·과장급인 사무국장 자리 21곳이 순식간에 증발한 것인데 이들의 자리를 찾아주고 나면 수년간 인사 적체를 피할 수 없다. 해고가 없는 공무원 조직에선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동안 교육부는 국립대서 재정·인사 등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국장 자리를 독점해왔다. 이를 통해 국립대를 통제하는 한편, 인사에 숨통을 틔워 왔다. 국립대의 민원 창구로도 기능했다. 교육부와 국립대의 가교를 단번에 끊어낸 것. 일반 국민들이 체감하기 어려운 이슈지만 교육부 개혁이 맞다. 다만 장관이 공석인 상태에서 단행됐다는 점에서 대통령실의 결정이 아니고는 설명이 어렵다. 교육부 안에서 “제대로 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교육부는 왜 이렇게 밉보였나.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던 교육계 인사들은 “현행 교육제도와 교육부에 대한 인식이 기본적으로 비판적”이라고 전했다. “사학비리가 터졌던 그 학교를 다녔던 이야기, 사학재단을 수사한 이야기를 주로 하더라”거나 “후보자 시절 교육계 인사가 들고 온 교육 공약은 대개 퇴짜를 놓았다”고도 했다. 사실 윤 대통령의 공식 발언만 봐도 교육부를 개혁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드러난다. 6월 윤 대통령이 반도체 인력 양성을 주문한 국무회의 발언을 복기해 보자. 수도권 대학 증원이 어렵다는 장상윤 차관에 대해 “웬 규제 타령이냐”고 면박을 줬다. “교육부도 경제부처처럼 해야 한다” “시대에 뒤처진 일을 내세운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교육부는 폐지해야 한다”는 질책이 이어졌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 지명도 교육부에 대한 경고라는 해석에 힘을 싣는다. 이 후보자는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K-정책플랫폼 보고서에서 대학을 교육부 산하에서 떼어내어 총리실로 편제(編制)할 것을 주장했다. 교육부 등 정부 관료의 국립대 파견을 금지하는 방안 역시 이 보고서에 담겨 있다. 이 후보자는 “교육부 산하에 대학을 그대로 둔 채 교육부가 대학 규제 개혁을 주도하는 것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꼴”이라고 했다. 대통령실은 이 후보자 지명 이전 20여 명의 인사를 검토했으나 스스로 고사하거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교육계 내에서 경제학자 출신인 이 후보자만큼 대통령 생각에 근접한 인사는 찾기 어렵다. 대다수 교육계 인사는 국정과제인 ‘100만 디지털 인재 양성’을 두고도 기업 이익이 반영된 경제 논리라고 볼 것이다. 교육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 부처로 거론된다. 하지만 교육부는 ‘학생의 학력과 안전을 위한 규제’라는 명분을 방패 삼아 용케 개혁의 칼날을 피해 왔다. 교육부가 교실 크기부터 강사 수업 시수까지 획일적인 규제를 하는 동안 공교육은 붕괴했고 대학 경쟁력은 추락했다. 타성에 젖은 교육 행정의 틀 안에 학생들을 구겨 넣은 결과, 교실은 잠을 자는 곳이 됐다. 대학은 교육부의 재정 지원에 길들여진 나머지 어떤 혁신도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느니 교육부 폐지가 낫다는 인식이 과연 대통령만의 인식일까. 교육부가 지금처럼 낡은 규제를 움켜쥔 채 군림만 한다면, 그 누구도 교육부의 우군이 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하루가 멀다 하고 마약 투약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과거 일부 부유층과 연예인의 일탈로 여겨지던 마약이 직장인 학생 주부 등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했다. ‘마약의 일상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전국 하수처리장 27곳에서 잔류 마약류의 종류와 양을 분석했더니, 한 곳도 빠짐없이 필로폰(메트암페타민)이 검출됐다. 엑스터시(MDMA)는 21곳에서 검출됐다. 농도로 추정한 마약 사용량은 외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지만 마약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일 마약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정희선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석좌교수를 만나 우리나라의 마약 실태와 대책을 물었다.》 ―우리나라 마약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가. “유엔은 마약 사범이 인구 10만 명당 20명을 넘으면 급격한 확산 위험이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2015년 이를 넘어섰다. 그해부터 단속된 마약류 사범이 정확히 1만 명을 넘었고 매년 급증해 지난해 1만6000여 명에 달했다. 최근 마약 사건을 보면 두 가지 점에서 심각하다. 첫째, 젊은 마약 중독자가 많아지고 있다. 다크웹을 통해 마약을 사고 비트코인으로 지불한다.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마약에 접근하기 쉽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마약 사범 중 35%가량이 10, 20대이다. 30대를 포함하면 60%에 달한다. 특히 19세 이하 청소년 마약류 사범이 450명인데 이는 5년 새 3.8배가 늘어난 것이다. 둘째, 상습 투약자가 늘고 있다. 최근 검거된 돈 스파이크의 차에서 필로폰이 30g 발견됐다. 1회 용량이 쌀 한 톨만큼인 30mg 정도라 1000명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 많은 양을 구해 싣고 다니는 것도 놀랍고, 평소 상습적으로 투약해 왔음을 보여준다.” ―마약이 급속히 퍼지게 된 이유가 있나. “디지털화, 글로벌화의 영향이 크다. 다크웹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개인이 소량으로 사는 게 가능해졌다. 집 앞에 택배로 마약을 배달해 준다. 외국으로부터 직접 구매하는 소량의 마약은 세관이 일일이 걸러내기 어렵다. 국내에서 유학·취업하는 외국인이 많아졌고, 그 반대로 외국에 유학·취업하는 한국인이 많아진 것도 원인이다. 나라마다 마약류로 지정된 것이 다르기 때문에 왕래하면서 들여오곤 한다. 미국, 캐나다에서 합법화된 대마가 대표적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마약은 어떤 종류인가. “현재 우리나라 마약류는 △마약(146종) △향정신성의약품(291종) △대마(3종) △임시마약(97종)으로 규정돼 있다.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향정신성의약품은 습관성, 중독성이 특징이다. 우리나라는 마약 사범이 향정신성의약품에 속하는 필로폰에 70% 집중돼 있다. 각성 효과가 있어서 과거에는 집중력을 높이거나 잠을 안 자야 하는 경우에 약으로 쓰인 적이 있다. 이른바 2019년 ‘버닝썬’ 사건에서 성범죄에 이용된 물뽕(GHB)도, 강력한 환각 작용이 나타나는 LSD도 향정신성의약품에 속한다. 2017년 멀쩡하던 고3 학생이 이모와 어머니가 스파이로 보인다며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다. 미국에서 온 친구와 함께 50μg(마이크로그램·1μg은 100만분의 1g), 아주 소량의 LSD를 복용했을 뿐인데 가족을 살해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신종 마약이 얼마나 자주 생겨나나. “아직까지 신종 마약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하지만 종류가 많고 화학구조를 살짝 바꾸고 바꾸고 해서 변종이 계속 나온다. 유엔에 보고된 신종 마약이 무려 1145종이다. 1971년 마약 및 향정신성의약품에 관한 단일협약으로 규제된 물질이 200여 종이었고, 50년간 거의 변화가 없다가 근래 들어 5배가 넘게 늘어났다. 이를 관리하는 법적인 틀은 마련돼 있다. 어떤 약물을 임시 마약으로 정한 뒤 3년 동안 남용 여부를 살펴본 뒤 마약이나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해 관리 체계에 편입시킨다. 다만 매년 신종 마약 수십 개가 등장하고 수십 개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 속도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불법 합성·제조되므로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 미국에선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중독으로 5분마다 1명씩 사망한다. 펜타닐은 비슷한 구조의 유사체가 40가지나 된다. 그러다 보니 변종 펜타닐이 쉽게 제조돼 빠르게 유통된다. 순도도 일정치 않아 부작용이 크다. 특히 다른 약물과 섞일 경우 낮은 농도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어 ‘죽음의 약물’이라고 불린다.” ―사회 전반적으로 마약에 대한 경각심이 낮아진 것 같다. “마약 범죄는 제조, 유통, 소지와 사용으로 나뉜다. 우리나라 마약 범죄의 80%는 마약 소지나 사용이다.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아예 시도할 생각을 못 하게 해야 한다. 마약을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마약김밥’ ‘마약떡볶이’를 전수 조사해야 한다. 최근 구속된 돈 스파이크는 ‘마약스테이크’를 팔았다. 마약 성분이 나오면 판매를 금지하고, 안 나오면 이름을 못 쓰게 해야 한다. 마약에 얼마나 관대해졌으면 맛있는 음식과 연결될까 싶다. 더욱이 이런 간판은 어린이,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 마약이 주는 순간의 쾌락이 지나가면 시공간 개념을 잃고 환각에 시달린다.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금단 증상으로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찾아온다. 최선의 대책은 예방이다.” ―마약 중독은 자신을 파괴할 뿐,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마약이 유도하는 범죄가 심각하다. 최근 골프장에서 마약 음료를 먹인 뒤 내기 골프를 치고 돈을 뺏거나, 마약에 취해 환각 상태에서 강도나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많이 발생했다.” ―현재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 국제과학수사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 마약 검사 수준은 어떠한가. “UNODC는 특정 마약을 전 세계 300개 실험실에 보내고 테스트 결과를 수집한다. 그 결과를 보고 검사를 잘하는 나라가 못하는 나라에 분석기술을 알려주는 식으로 각국의 검사 역량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UNODC 국제과학수사 자문위원은 각국 마약 실험실이 검사 역량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1980년대 후반 소변으로 마약을 검출하는 검사법을 개발했다. 불과 15년도 지나지 않은 2001년에 마약 검사의 기준이 되는 국제 기준 실험실로 정해졌다. 1ng(나노그램·1ng은 10억분의 1g) 단위의 신종 마약까지 잡아낸다. 국과수 인적 파워는 최고다.” ―최고 수준의 검사 역량이 마약 수사 현장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나. “경찰청 의뢰를 받아 일반 국민용과 경찰용으로 마약 진단키트를 개발하고 있다. ‘버닝썬’ 사건이 계기였다. 일반인이 음료에 마약을 탔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가방에 부착 가능한 스티커형 진단키트를 만들었다. 현장 출동한 경찰이 증거를 확보하기 쉽게 리트머스형 진단키트도 개발하고 있다. 곧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일반인이 진단키트를 이용하면 마약 범죄에 휘말리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마약 사범 검거 외에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 “국내 유통되는 마약을 모니터링하는 조기경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지금은 경찰 세관 대검찰청 국과수 식품의약품안전처 병원 등에 정보가 흩어져 있다. 각 기관이 정보를 공유하고 실시간으로 전파하게 해야 한다. 조기경보 시스템을 통해 마약 유통을 막을 수 있고 남용 정도를 판단해 법적 규제를 할 수 있다. 그다음은 담배나 술처럼 중독 치료 시스템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마약 사범의 출소 3년 이내 재복역률(40%)은 일반 형사 사범 재복역률의 2배에 달한다. 마약 사범의 치료·재활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약 중독을 범죄로 보느냐, 질병으로 보느냐에 따라 나라마다 정책이 다르지만 우리나라는 마약 사범의 처벌에만 집중돼 있다. 사실 마약 사범이 한 명 나오면 집이 망한다고 한다. 치료할 병원도 없고 취직도 안 된다. 전국에 운영되는 마약 중독 치료 병상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고, 지정병원인데도 환자를 받지 않는 곳도 있다. 마약 투약 연령이 낮아지고 있어 치료와 재활이 더욱 중요해졌다.”정희선 성균관대 석좌교수·前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1978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들어가 약독물과장, 마약분석과장, 법과학부장을 거쳐 11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을 지냈다. 2010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2014년 아시아인, 여성 최초로 국제법독성학회(TIAFT) 13대 회장에 당선됐고 현재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 국제과학수사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국제법독성학회가 이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앨런 커리상(Alan Curry Award)을 수상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폰트가 뭐꼬?” “비누 뭐 이런 거 만드는 거라예?” 폰트가 뭔지도 몰랐던 할머니들의 손글씨를 문서 작성용 글꼴로 만든 칠곡 할매 글꼴 5종이 MS오피스에 탑재된다. 지난해 먼저 탑재된 한컴오피스에 이어 MS워드와 파워포인트에서도 곧 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칠곡 할매 글꼴은 경북 칠곡군 성인문해교실에서 한글을 깨친 김영분 권안자 이원순 이종희 추유을 할머니가 각각 필사를 한 1만 장의 손글씨를 바탕으로 2년 전에 개발됐다. ▷칠곡 할매 글꼴은 한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의 글씨처럼 손으로 꾹꾹 눌러 또박또박 쓴 글씨체다. 가독성이 좋으면서도 정겹게 느껴진다. 요즘 동영상 자막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에 종종 등장하고, 전자책 텍스트를 칠곡 할매 글꼴로 바꿔 읽기도 한다. 할머니 글씨가 주는 투박하고 따뜻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디지털 세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옛것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복고 열풍과도 결을 같이한다. ▷폰트에 담긴 스토리도 감동적이다. 칠순, 팔순이 넘은 칠곡 할머니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을 겪고 고도성장의 시기를 헤쳐 왔다. 시대가 주는 아픔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묵묵히 견뎌 왔을 터다. 어린 시절 학업을 묻는 질문에 권안자 할머니는 “학교 댕겼으면 좀 낫지. 근데 다 어렵게 살아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원순 할머니는 “집에서 아들 공부시키고 (나는) 들에 밭 매러 다니고, 공부가 뭐라”고 했다. 그런 할머니들이 글자 한 자, 한 자를 쓰면서 깔깔깔 웃는다. 억울할 법도 한데 “내 인생 참말로 괜찮네”라고 한다.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공부시간이라고/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소화자 할머니의 ‘시가 뭐고’). 2015년부터 칠곡군 성인문해교실의 할머니들은 자작시를 모아 시집을 내고 있다. 할머니들의 간결하고 솔직한 시는 짧은 글이 대부분인 SNS 감성과도 맞아떨어진다. ‘칼의 노래’ 김훈 작가는 할머니들의 시에 대해 “우리같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도저히 쓸 수가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질감이 실려 있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시처럼, 할머니들의 글씨 역시 삶의 무게와 질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난해 국립한글박물관은 “정규 한글교육을 받지 못한 마지막 세대가 남긴 문화유산으로, 한글이 걸어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새 역사를 쓴 것”이라며 칠곡 할매 글꼴을 휴대용저장장치(USB)에 담아 유물로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자칫 잊힐 수도 있었던 할머니들의 역사를 시공간을 뛰어넘어 공유하게 됐다. 디지털 기술이 주는 선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