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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일으킨 몇몇 설화 중에 대표적인 게 ‘120시간 노동’ 발언과 ‘전두환식 위임 정치’ 발언이다. 최근 주52시간제 개편 방향을 둘러싼 고용노동부 장관과 윤 대통령의 엇박자 논란을 보며 두 발언이 겹쳐 떠올랐다.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니다”는 말은 120시간 발언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노동부 개편대로라면 주92시간 노동도 가능하다는 식의 보도가 나오자 “보고받지 못했다”고 한 게 장관의 발표 자체를 부인한 것처럼 비치고 말았다. 그간의 말실수 등까지 소환돼 “도어스테핑을 없애야 한다” “질문 개수를 줄여야 한다” 등등 논란으로 비화했지만, 필자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대통령이 아침마다 TV 앞에서 국정 현안에 대해 즉석 문답을 하는 소통 방식은 장막 뒤로 숨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당당해 보인다. 잘 지속하길 바란다. 문제는 매일같이 국정 이슈가 대통령 1인으로 집중되는 게 바람직하냐다. 이는 또 전두환이 아닌 ‘윤석열식 위임 정치’는 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축소, 책임 총리, 책임 장관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지금 모든 길은 용산으로 통한다. 집무실 현관에서 그날 한국 사회의 여론 시장이 가동된다. 장관이 챙길 만한 구체적인 정책 현안까지 대통령이 일일이 답변하곤 한다. 모두 대통령 입만 쳐다보는 형국이 됐다. 총리는 뭘 하는지, 장관은 뭘 하는지 알 수 없다. 검찰총장 역할까지 겸하는 듯한 한동훈 장관, 경찰국 신설 속도전을 펼치는 이상민 장관 정도만 확실한 ‘위임’을 받은 듯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대통령은 수시로 수석 등에게 전화를 걸어 현안을 물어본다고 한다. 새벽 1시에 전화를 받은 이도 있다고 들었다. 온갖 일이 걱정이 돼 밤늦게까지 뒤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정대(黨政大)’ 시스템은 허술해 보인다. 대통령실은 돌아가는 현안 챙기기에 급급하고, 내각은 대통령 한마디에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여당은 윤심 운운하며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싸우고 있다. 정권이 출범한 지 50일 지났다. 아직 세팅 기간으로 볼 수도 있지만 곧 100일이 되고, 1년 차가 지나간다. 벌써 암울한 경제 뉴스가 신문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권과는 다르다는 걸 어떻게 보여줄 건가. 민심은 변덕스럽고 심술궂다. 대통령은 뭘 집중적으로 챙길 건지, 뭘 내각 등에 위임하고 어떻게 조율할지의 국정 시스템 정비와 ‘전략’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얘기다. 클라우제비츠는 “전략에는 승리가 없고 성공만 있다”고 했다. 정치에도 적용될 만한 경구다. 선거는 ‘승리’가 목적이지만 국정은 ‘성공’이 목적이 돼야 한다. 모든 승리가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전략(戰略)에는 ‘생략하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생략하고 꼭 해야 할 것만 실행하는 것, ‘위대한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바로 전략인 것이다.(이교관 ‘한국의 대전략’) 최고 권력자는 외롭다. 그 고독의 기저엔 국가 명운을 책임진 데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본다. 전임자들보다 잘할 수 있을지, 더 망치는 것은 아닌지…. 늘 뒤에 숨는 비겁함도, 지나친 자신감도 두려움의 또 다른 표출일 수도 있다. 인사나 정책 추진에서 개인적 경험과 식견을 과하게 내세우진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일이다. 앞으로 50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른바 신(新)적폐 청산의 시간, 어디까지 싸우고 어디서 멈출 건가. 정교한 ‘성공 전략’을 세울 때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1년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이 있다. 지난해 이맘때 ‘30대 0선’ 돌풍을 일으킨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다. 착시(錯視)든 아니든 꼰대 정당 이미지를 확 걷어냈다. 숱한 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대선과 지방선거를 연거푸 이긴 대표로 자리매김된 건 분명하다. 이 대표가 5선 중진 의원과의 설전 등을 계기로 또 여론의 중심에 섰다. 당내 의견도 분분하다. 누구는 “정치 괴물을 키웠다”며 손절을 주장하고, 누구는 “선거 때 쪽쪽 빨아먹고 내치려 한다”고 반발한다. 또 다른 이는 “젊은 층 지분이 있으니 잘 안고 가자”고 한다. 흥미로운 건 이 대표의 태도다. 이런 갈등 상황을 게임처럼 즐기는 듯하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거나 비판할 때 “한판 붙자”며 눈이 반짝거리고 신이 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치 게이머’ 같은 그의 면모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1월 초 대표 탄핵 얘기가 나왔을 때도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절대 나를 자르진 못할걸”이라며 오히려 수십 명 의원들과의 일전에 빠져들었다. 30분 즉흥 연설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대남’ 지지를 등에 업고 있으니 사실 예견된 결과이긴 했지만 “대단하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정치 대선배’를 겨냥해 육모 방망이까지 소환한 그의 대응이 황당하지만 ‘개소리’ ‘싸가지’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성상납 및 증거인멸 교사 의혹과 관련한 윤리위 회부 결정이 대표 끌어내리기인지 아닌지의 논란도 지금 필자의 관심사는 아니다. ‘윤핵관’이나 신주류 등과의 알력 다툼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보다는 정치 경력 10년이 넘는 이 대표의 정치 철학은 무엇인지, 대체 왜 정치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그가 내심 롤 모델로 삼고 있을 법한 마크롱은 “정치는 ‘통제된 직업’이 아니다”고 했다. 기존 질서, 기존 권위에 순응하지 말고 도전하란 얘기다. 다만 마크롱은 정치를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조국에 대한 빚” “국가 미래에 대한 근심”…. 즉 프랑스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자기 해법을 갖고 있었다. 정치는 냉엄한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나라가 처한 각종 위기와 딜레마 상황에 대한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고 국민을 설득하며 지지를 확보해가는 과정이다. 이 대표는 이대남과 관련된 몇 가지 이슈에 대해 논쟁을 주도한 건 있지만 그뿐이다. 능력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꾼다는 실력주의를 내세운 것 외엔 숱한 국가 의제에 대해 뭘 말했는지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우크라이나를 찾은 이 대표의 모습에서 다소 어색함이 느껴진 건 그런 이유다. 30대 원외 대표로 어떤 설움을 겪었는지, 실제로 윤핵관 측에 부당하게 휘둘렸는지는 세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새 정부 출범 1년이 가장 중요하다. 민주당 자중지란의 반사이익도 8월 전당대회가 끝나면 점점 사라질 것이다. 민주노총 등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로 움찔했던 세력들은 서서히 정권 흔들기에 나설 태세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당 대표가 혼자 따로 노는 듯한 상황이 우려될 뿐이다. 지금은 새 정부의 성공, 보수의 미래, 국가적 난제에 대한 해법 등을 놓고 심도 깊은 논쟁이 오가야 할 때다. 이를 주도하는 게 이 대표가 할 일이다. 독설과 조롱, 키배(키보드 배틀) 수준의 말재간만으론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정권 후반이면 40대에 접어든다. 보수혁신의 아이콘인지, 계륵인지의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나이 많은 게 벼슬은 아니지만, 젊은 것도 벼슬은 아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전통 미디어에선 어감 탓인 듯 자주 인용되지 않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개딸’이 화제가 된 지 좀 됐다.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20, 30대 여성들을 말한다. ‘개혁의 딸’이란 뜻이란다. 개이모 개삼촌 개할머니란 말도 등장했다. 양아들도 있다. ‘양심의 아들’의 줄임말이다. 며칠 전 홍익대 앞 거리유세에 이 전 후보가 송영길 서울시장 후보와 함께 나타났다. 유튜브로 당시 현장을 봤다. 이 전 후보가 연단에 오르자 젊은 여성들이 “귀여워”를 외친다. 이 전 후보가 “잔인한 현실이 있다. 제가 내년이면 환갑이다”라고 하자 이들은 “아기다, 아기”라고 했다. ‘잼파파’로 불리는 그가 송 후보를 ‘영기리보이’로 지칭하며 “귀엽지 않으냐”고 하자 이들은 “귀여워”를 연발했다. 정치인 팬덤의 원조는 노사모다. 바보 노무현을 향한 순수한 부채의식 같은 뭔가가 있었다. 그 정치적 에너지를 바탕으로 그는 대통령이 됐다. 개딸 현상은 차원이 다르다. 어느 대학생이 자신이 개딸이 된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젊은 여성들이 사회를 바꾸는 정치적 주체로 등판하는 계기가 됐다.” 따지고 보면 페미니즘 등 젠더 갈등 이슈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이 전 후보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행태” 운운했지만 특정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서로를 아빠와 딸로 부르는 것 자체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누구누구에 대한 ‘사모’ 차원을 넘어 혈연 수준에 버금가는 감정적 유대로 얽히면 이는 무서운 정치 형태로 변질될 수 있다. 성희롱 발언 논란에 휩싸인 최강욱 의원에게 “앞만 보고 달려. 뒤는 개딸들이 맡는다” 등의 리본이 달린 화환이 민주당사 앞에 등장한 게 단적인 예다. 개딸 여론이 국회의장 경선에 영향을 미칠 정도다. 장난기 어린 표현이나 놀이로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어느 의원은 “지금 ‘개딸’에 환호하는 민주당의 모습은 슈퍼챗에 춤추는 유튜버 같다”고 일갈했다. 팬덤은 자발적인 듯하지만 특히 정치 영역에선 그리 돌아가지 않는다. 팬덤의 심리를 끊임없이 살피고 구미에 맞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관리하는 정교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얘기다. 극성 팬덤을 동원하고 조종해 여론을 조성하고 당내 의사결정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다. 극성 지지층 역시 열혈 지지자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며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개딸을 자처하고 나선 2030세대 일부 여성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이들을 포함해 점점 극단화하는 정치 팬덤 문화의 위험성이 우려되는 것이다. 여기에 정치권이 휘둘리고 정치도 난장(亂場)으로 치닫는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궁극적으로 망치게 할 수도 있다. 말 없는 다수 시민의 반감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반(反)지성주의’를 말했다. 탈진실의 시대에 대한 경고인지, 점점 왜곡되는 팬덤 정치 문화를 지적한 건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윤 대통령 역시 팬덤 정치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빠에 이어 윤빠도 서서히 목소리를 키워 가고 있다. 정치인들에게 팬덤은 마약과도 같다. 협치(協治)와 법치(法治)의 조화를 모색해야 하는 윤 대통령도 국정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통합의 정치와 팬덤 정치의 딜레마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극성 팬덤, 이에 편승한 정치는 당장은 득이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치명적인 독이 된다. 여든 야든 늘 사리분별을 따지는 집단지성을 추구해야 궁극적인 국민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고독’을 언급했다. 출연 논란을 빚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다.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당선되고부터는 숙면을 잘 못한다” 등등. 최고 권력자가 무한 책임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 책임감이 꼭 좋은 판단과 행위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분명한 건 고독의 감정조차 사치로 여겨질 정도로 당선인이 처한 사정이 열악하다는 점이다. 171석 민주당과 지지 세력은 점점 노골적으로 ‘식물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가동에 나선 듯하다. 한덕수 총리 후보자를 낙마 리스트 상단에 올려놓은 것도 엄포용만은 아니다. 질질 끌다 기진맥진해 있을 때 인준을 해줄지, 아예 끌어내릴지 주판알을 두드릴 것이다. 총리 인준을 고리로 장관 후보자들 몇 명의 목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다. 정호영은 기본이고 궁극의 칼날은 한동훈을 겨냥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진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통령 간의 성공 기원은 인지상정이다” “퇴임 후 잊혀진 삶을 살고 싶다” 등의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야당 후보로 당선은 아이러니한 일” “저는 한 번도 링에 올라가지 못했다” 등 후임 대통령을 깎아내리고 5년 만에 정권을 내준 데 대해 자기 책임은 없다는 식의 낯 두꺼움을 보여줬다. 그런 문 대통령 지지율이 윤 당선인 직무 수행 평가를 앞서기도 하니 지금 상황은 꼬일 대로 꼬여 있는 형국이다. 윤 당선인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려는 의도는 뻔하다. 새 정부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려는 것이다. 대선에서 1600만여 표를 준 지지층을 향해 지방선거에선 이길 수 있으니 기죽지 말고 다시 뭉치라는 거다. 검수완박 입법 독주도 ‘문재명 구하기’ 차원을 넘어선 다목적 카드다. 당선인의 검찰 기반을 와해시키고 지지층의 전의를 북돋우려는 의도다. 대선에 비해 투표율이 15∼20%포인트가량 낮은 만큼 똘똘 뭉치기만 하면 지방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심산이다. 2024년 총선, 5년 뒤 대선까지 겨냥한 정권 탈환 로드맵이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판국인데도 서울 부산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국민의힘은 자신할 수 있을까. 윤 당선인이 올라선 성루 자체가 흔들흔들하고 있다. 원조 윤핵관 출신 원내대표는 황당한 검수완박 자책골로 경기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30대 당 대표는 성상납 및 증거인멸 교사 의혹에 휘말린 채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윤 당선인의 첫 내각 인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오면서 정권교체를 위해 닥치고 찍었던 이들 중 일부는 벌써 냉랭한 태도로 돌아서고 있다. 윤 당선인은 ‘일정 과부하’로 정작 어떻게 새 정부를 이끌고 갈지, 어떤 인물을 주변에 둘지를 차분히 정리할 시간조차 없어 보인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이 일정 저 일정 쫓아다니며 여전히 대선 후보인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 하다가 한 달 후딱 지나가고 지방선거 성적표를 받아들 시점이 된다. 취임 후 한 달을 어떻게 보낼지는 당선 후 한 달보다 더 중요하다. 당분간 윤 당선인에겐 ‘정책’보다는 ‘정무’가 더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국민의힘도 이쯤이면 지도부를 다시 세우는 방안을 검토하거나 속히 선대위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원내대표의 중대 실책도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새 정권의 권력을 누가 더 쥘지의 우물 안 싸움에 함몰돼선 안 된다. 안철수 측과의 공동정권 기반을 공고히 하고 편향된 인사를 바로잡아 중도 민심을 얻어야 한다.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부터 비틀대는 것은 국가의 불행이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대선이 끝나고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봄은 온 듯한데 진정한 봄은 느껴지지 않는다. 물러갈 정권은 ‘모래알 권력’이나마 끝까지 움켜쥔 채 활로를 살피고 있다. 6월 지방선거에서 대선 패배의 반전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 소리냐 했던 이재명 조기 등판설까지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윤석열 당선인의 국정수행에 대한 기대감이 그리 높지 않다는 ‘빈틈’을 노리는 것 같다. 혹자는 대통령 집무실의 무리한 용산 이전 추진으로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쎄다. 용산 이슈가 없었다면 국정운영 기대감이 높아졌을까. 아니라고 본다. 우리의 정치 지형은 이미 뒤틀려 있다. 쌍봉낙타의 등처럼 둘로 갈라진 채 봉우리처럼 굳어진 지 오래다. 윤 당선인의 한 달은 그럼에도 아쉽다. 청와대 해체, 용산 이전 이슈가 새 정부의 1호 과제인 양 너무 부각됐다. 무엇보다 떠날 권력에 반격의 빌미를 주면서 신구(新舊) 권력 충돌로 비화되고 말았다. 몽니, 발목잡기 등 온갖 비판을 들어도 떠날 권력은 잃을 게 없다. 어차피 5월이면 새 정부가 들어서고 시간은 윤 당선인 편인데, 왜 이리 서두르지 하는 의구심을 키웠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윤 당선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지배’라는 표현은 좀 과하지만…. 역대 대통령이 모두 실패한 청와대 해체를 실현하려면 누군가 결단하고 무리수를 둘 수밖엔 없다는 뜻도 이해는 된다. 이젠 무를 순 없다. 새벽에 출근하고 심야에 퇴근하든, 야전천막에서 업무를 보든 가긴 가야 한다. 다만 용산 이전에 반대했던 전직 합참의장들의 침묵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대통령 의식에 영향을 주는 건 공간만이 아니다. 결국 그 공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다. 용산 이전 자체보다는 윤 당선인의 ‘작은 청와대’ 구상이 어떻게 구현될지, 어떤 사람이 주변에 포진할지가 관건이다. 하드웨어만 바꾸고 소프트웨어는 그대로 두면 국민을 현혹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선인 주변에 지나치게 MB 정권 인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건 우려된다. 국정 경험이 있고 실력 있는 인사 중에서 옥석을 가려 다시 중용하는 걸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그런 차원을 넘어 누구누구를 중심으로 한 ‘비선 라인’이 당선인 주변을 에워싸고 있고, 이쪽으로 줄을 대려는 이들이 많다는 소리가 공직사회 등에 파다한 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니체는 “전쟁의 승리는 승자를 어리석게 만들고, 패자는 심술궂게 만든다”고 했다. 우리 정치판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윤 당선인에겐 허니문이 없다. 민주당이 발목잡기 역풍을 감안하겠지만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준을 호락호락 해줄 것 같은 분위기는 결코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DJP 정권 이래 역대 가장 어려운 정치 환경에서 임기를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윤 당선인은 여전히 정치인으로선 원석(原石)에 가까운 듯하다. 청와대 권력을 해체하고 용산 시대를 연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지, 좌충우돌하다 5년 만에 다시 정권을 넘겨주는 불행한 대통령이 될지는 오롯이 그의 몫이다. 왕도가 뭐가 있겠나.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성채”라는 말이 있다. 정직한 대통령, 정직한 머슴이 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고슴도치처럼 우직하되 여우처럼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에겐 5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제왕적 대통령제 탈피는 5년의 성과로 평가받을 것이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지난 대선은 고대 원형경기장의 검투사 대결 비슷했다. 어느 쪽이든 한번 지면 살아나오기 힘든…. 어퍼컷과 발차기 퍼포먼스는 관중을 향한 눈요기 서비스였다. 참 험했고, 서로에게 치명적인 선거였다. 허나, 한국 대선은 그리 단순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패자에게 ‘0.73%포인트’의 숨통을 틔워놓은 것이다. 24만여 표로 승부가 판가름 날 것이라곤 솔직히 예상 못했다. 그날 새벽 패배가 확정된 뒤 민주당사에 나타난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모습은 의외로 차분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는 “모든 책임은 오롯이 제게 있다”며 머리를 숙였다. 깔끔한 승복이었다. 그날 오후 선대위 해단식에서도 “모든 책임은 부족한 후보에게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알 듯 모를 듯한 대목이 추가됐다. “이재명이 부족한 0.7%포인트를 못 채워서 진 것이다.” 이 한마디에 패자 이재명의 불안한 심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진 것은 진 것이지만, 역대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했으며, 자신은 “딱 0.7%포인트가 부족했던 후보였다”고 포장하려 한 다분히 의도된 발언일 것이란 얘기다. 대선 패배와 함께 자신에게 몰아칠 암울한 미래,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 등에 대한 정치적 복선도 깔려 있다고 본다. 선거에서 지면 100개도 넘는 이유들이 난무한다. 민주당 패배에 대한 진단은 더 복잡해 보인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이 더 큰 원인이었는지, 이 전 지사의 여러 흠결이 더 큰 원인이었는지 보기에 따라 다르다. 민주당에서도 “그 정도면 선전했다” “이재명이 아니었으면 이길 수도 있었다”로 의견이 갈린다. 이 전 지사가 내심 주목한 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민주당 안팎에서 ‘이재명 조기 등판론’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현상이다. 더 눈여겨볼 부분은 이 전 지사의 움직임이다. 비대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건의에 아무 말 없이 듣고 있기만 했다는 전언도 있었다. 낙선 사례 행보에도 슬슬 나서고 있다. 지방선거는 코앞에 닥쳤고 당의 리더십은 흔들리고 있다. 당장은 아니라도 정국 상황 전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8월 전당대회 등 활로를 암중모색하는 듯한 분위기다. 왜 그럴까. 결국 그의 신상 문제, 즉 검경 수사 문제로 연결된다. 그는 대선 때 “제가 지면 없는 죄로 감옥 갈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의 숨은 심리가 은연중 드러난 대표적인 발언이다. 실제로 대장동 의혹, 부인 법인카드 유용 의혹, 옆집 합숙소 의혹 등은 이미 수사가 진행 중이다. 누가 억지로 중단시킬 수도 없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 잊혀지는 순간 망망대해에 홀로 서게 된다. 172석 거대 정당의 우산 속에서 함께 움직이는 게 그에겐 절실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문재인의 적자(嫡子)인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사면을 받아 민주당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부상하는 시나리오도 상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현실화되면 그의 입지는 더 줄어든다. 과거 대선 낙선자들처럼 1, 2년 장기간 자숙 모드로 지내며 기회를 엿볼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정치 활동에 나설 수도 있는 이유들이다. 이 전 지사에게 봄은 올 것인가. 아니면 혹한 겨울이 닥칠 것인가. 분명한 건 이 모든 게 윤석열 당선인이 어느 정도 국민 지지를 얻으며 국정을 잘 수행해 가느냐의 문제와 맞물려 돌아간다는 점이다. 0.7%포인트의 작은 숨통이 조금씩 열릴지, 영영 닫힐지 향후 몇 달이 관건이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윤석열 대선 후보에게 이준석 대표는 ‘병 주고 약 주는’ 존재다. 지난 한 달 이 대표의 처방전은 적절했고 유효했다. 올 초 낭떠러지 일보 직전의 윤 후보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대표의 대선 전략인 이른바 ‘세대포위론’이 상당 부분 먹혔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윤 후보가 주춤하는 사이 17%까지 찍었던 안철수 후보 지지율이 20%대로 진입했다면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김건희 씨 녹취파일 공개 후 이준석류의 젊은 2030 젊은 세대가 SNS상에서 조직적으로 방어벽을 구축하고 역공에 나서주지 않았다면 여론은 어디로 흘렀을까. 부모 세대에 자녀 세대를 결합시켜 4050세대를 공략하자는 세대포위 전략으로 2030 지지율을 반등시켜 안 후보의 상승세를 꺾고 이재명 후보와 박빙 구도를 형성했다는 점, 그것만으로도 윤 후보가 승리한다면 이 대표를 공신록의 상단에 올려놔야 할 이유는 된다. 세대포위 전략의 효험은 이젠 한계에 봉착한 듯 보인다. 윤 후보 지지율이 회복되긴 했지만 여전히 4자 구도에서 30%대 중후반을 확 뚫고 올라가지 못하고 정체돼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2030 지지율도 기대한 정도만큼은 아니다. 이 대표는 호남 공략을 결합시키고 있지만 효과를 장담하기 힘들다. 세대포위 전략만으론 중도 확장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도층 10%를 안 후보가 붙잡고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안 후보가 완주할 경우 사표 방지 심리를 감안해도 6, 7% 정도는 얻을 것으로 예측된다. 투표율 75%일 경우 200만 표 정도는 가져갈 수 있는 셈이다. 대선 향배에 큰 변수가 될 정도는 된다. 2007년 이회창 후보가 15%를 얻었음에도 MB가 승리하긴 했지만, 그땐 민주당 세력이 사실상 대선에 손을 놓았었다. 안 후보가 진퇴양난의 외통수에 빠진 형국인 것은 맞다. 막대한 선거비용 문제를 떠나 한 자릿수 득표율로는 정치적 소멸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을(乙)의 딱한 처지에 놓인 것만도 아니다. 민주당과 손잡는 일은 100%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다만 자신이 단일 후보가 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위험한 거래’를 하기보다는 윤 후보와 하는 게 그나마 명분이 있고 성공 확률도 훨씬 높은 ‘남는 장사’가 될 것이란 계산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안 후보 발언의 행간을 읽어보면 윤 후보 측에 내심 두 가지 조건을 발신하고 있는 것 같다. 공동 정권의 실질적 보장책, 그리고 “소값 잘 쳐줄게” “돈 때문에 포기할 것”이라며 자신을 끊임없이 조롱해온 이준석 문제다. 윤 후보가 말했듯 단일화는 전적으로 후보 간 문제다. 대표의 직인(職印)이 필요하지 않다. 단일화 논의가 얼핏 물 건너간 듯 보이지만, 6월 지방선거 공천이나 합당 이슈 등만 제쳐두면 합의서는 하루 만에 나올 수도 있다. 이 대표의 어깃장이 간단한 사안은 아니다. 둘 사이의 사감을 넘어 안 후보가 차기 대선의 경쟁자가 되는 상황부터 마뜩지 않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선거 중독자”라고 했다. 컴퓨터 게임처럼 승부 자체를 즐기는 듯하다. “이게 나라냐”에서 “이건 나라냐”의 혼란을 겪었다. 이번 대선은 “바로 이게 나라다”는 걸 둘러싼 싸움이다. 이 후보와 윤-안 단일 후보 간 맞대결이 이뤄져야 정확한 표심이 대선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세대포위 도그마를 뛰어넘지 못한 채 홀로 ‘일등공신’이 되려다 자칫 대사(大事)를 그르치고 만 대표가 될지도 모른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우리 젊은 세대가 단군 이래 처음으로 부모보다 못살 게 되는 세대라는 말이 자조(自嘲)가 아니라 현실로 굳어지고 있다. 실로 암울하다. 한국인 60%는 자식이 부모보다 못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미국 여론조사 결과도 지난해 나왔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증가 속도가 유독 빠르다. 문재인 정권은 절망의 급류를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희망의 물꼬는 텄어야 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성장 동력, 초격차 기술의 토대를 뭐 하나라도 닦아놓지 못하고 5년을 허무하게 날려 보낸 것에 분노한다. 원전 초격차 기술은 팽개치고 소득주도 성장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험만 하다 천금같은 시간을 허송하고 말았으니…. 눈 가리고 귀 막은, 4개월 남은 정권에 말해 뭣하랴. 대선에 영향을 주려는 어떤 관권 금권 시도도 말고 조용히 물러나길 바랄 뿐이다. 이재명 후보에게 한때 전쟁론을 탐독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전을 다룬 책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후보의 캠페인은 포퓰리즘과 게릴라 전술의 교묘한 결합 같다. 삼프로TV를 봤다. 이 후보는 “코스피 5000은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다”고 했다. “선진국에 비해 너무 저평가된 불투명성, 그 점만 정상화해도 4500 정도는 가뿐히 넘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래놓고 ‘임기 내 달성’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게 MB의 ‘747’ 공약이랑 다르다는 거다. 주식 시장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2030세대를 숫자로 현혹시키는 포퓰리즘이자 치고 빠지기 아닌가. 천만 탈모인을 흥분케 한 탈모제 건강보험 적용 ‘검토’도 마찬가지다. 공식 공약이라는 건지 아닌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잊을 만하면 전 국민 재난지원금 얘기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는다. 대장동 이슈, 부동산 이슈를 덮거나 전환시키려는 치밀한 계산도 맞물려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소확행 공약 시리즈를 결합시킨다. 한 푼 두 푼 모아 목돈 만들자는 마이크로 타깃 저인망 전법이다. 윤석열 후보는 한 손엔 공정, 다른 손엔 상식의 검을 들고 기세 좋게 원형경기장에 들어섰다가 휘청대는 검투사의 모습 같다. 관중의 호통에 뒤늦게 투구를 고쳐 쓰고 칼날을 벼리고 나섰지만 아직 굼떠 보인다. ‘병사 봉급 200만 원’ 등 포퓰리즘 따라하기를 하는 듯한 정도의 형국이다. 2030이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른다고 하는데, 두 후보의 접근법은 환심 사기에 급급하다. 또 지나치게 미시적이다. 젠더 갈등 조장 논란을 빚기도 한다. 소확행 공약, 심쿵 공약과 같은 맞춤형 공약 경쟁은 달라진 대선 트렌드의 한 단면으로 볼 수도 있다. 경쟁과 차별, 불평등이 복잡하게 얽힌 상처 입은 세대인 만큼 마방진을 풀 듯 정밀하게 접근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본질을 잊어선 안 된다. 선거기술이 미래담론을 삼키는 것은 곤란하다.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을 묻는다면 젊은 세대가 부모만큼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대 강국을 만들겠다” “잠재성장률을 4%로 끌어 올리겠다” 등과 같은 말잔치만 벌일 일이 아니다. 위기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우리 수준에 맞는 핵심 성장동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지부터 내놔야 한다. 우리 젊은 세대는 장차 밥벌이는 하고 살 수 있을까, 10명 중 3명꼴로 줄었다는 중산층에 진입은 할 수 있을까, 스펙만 갖추려 애쓰다 번듯한 직장 한번 갖지 못한 채 낭인(浪人)이 되진 않을까. 20대 초반의 자식 둘을 둔 아비의 심정으로 지켜보는 대선…. 답답하고 우울하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요즘 유튜브에선 ‘왕망치 스테이크’로 불리는 토마호크 스테이크 굽기 영상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조회수가 수백만에 달하는 유튜버들도 있다. 티본, 엘본 스테이크 굽기 영상도 많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트렌드까지 형성되며 우리나라가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최대 수입국에 올랐다. 2020년까지는 일본이 최대 수입국이었는데, 지난해 역전됐다. 2008년 ‘뇌 송송 구멍 탁’의 광우병 파동을 겪은 지 13년 만이다. ▷우리나라가 지난해 1∼11월 미국에서 수입한 쇠고기는 25만 t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6% 증가했다. 금액으론 21억 달러를 넘어 39% 증가했다. 미국산의 국내 수입 쇠고기 점유율도 54%에 달한다. 2000년대 초 한때 ‘LA갈비’를 내세워 국내 시장을 점령했지만 광우병 파동 등 곡절을 겪으며 호주산에 1위를 내줬다가 다시 시장을 장악하고 물량도 크게 늘린 것이다.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MBC PD수첩은 그해 4월 “한국인이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먹으면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94%”라는 보도로 한국 사회를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려 죽는다” “공기로도 감염된다” 등 괴담이 번졌고, 유모차 부대 등까지 광화문으로 쏟아졌다. 그 뒤 광우병 사망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미는 그해 6월 추가 협상을 통해 30개월이 안 된 소에서 나온 쇠고기만 수입하기로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광우병 집회를 ‘검역 주권’을 바로세운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괴담이 판을 치고, 과학에 근거해 팩트를 보도하던 언론사와 기자들이 무차별 공격을 당했던 사실엔 침묵한다. 당시 광화문은 민주주의 광장으로 보기 어려웠다. 가짜뉴스와 괴담, 선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현혹돼 거리를 메운 현대판 대중조작 정치의 한 장면이었다. ▷요즘 미국산 쇠고기를 사 먹으며 “혹시 광우병?”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미국산 쇠고기를 찾는 이들은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층이 많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가성비다. 요즘은 냉동육이 아닌 냉장육의 비중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갈비 중심이던 수입 부위는 안심, 등심 등 전통적 부위를 넘어 토마호크, 티본, 포터하우스와 같은 고급 스테이크 부위로 확대되고 있다. 2026년엔 관세가 폐지돼 수입 물량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호주산과의 품질 경쟁도 치열하다.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의 주요 식자재가 된 사실은 근거 없는 괴담이 시장의 합리적 선택을 끝까지 가로막거나 왜곡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새삼 알려주고 있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한 사건….” 1895년(을미년) 10월 8일 자행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 영사관의 한 젊은 외교관이 본국 외무성에 보고한 내용이다. 어쩌면 이 젊은 외교관은 시해 음모를 제대로 몰랐거나 좀 양심적이었을 순 있겠다. 시해 사건에 실제 가담했던 다른 외교관이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며 당시 정황을 밝힌 편지가 최근 발견된 것이다.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라는 이 외교관은 사건 다음 날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입은 내가 맡은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썼다. 또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는 심경도 밝혔다고 한다. 오쿠고텐은 경복궁 후원 건청궁의 왕비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을 말한다. ▷명성황후 시해범은 민간인 신분의 ‘일본 낭인(浪人)’이란 것이 통설로 굳어져 왔다. 낭인의 본래 뜻은 ‘불법적으로 다른 곳을 유랑하는 부랑인’이지만,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군인이나 관료가 아니라 재야에서 ‘지사(志士)’인 체하며 정치 활동을 하는 패거리들이 스스로를 낭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들은 “민비를 죽이자”는 여론을 형성했고,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도 부임하자마자 “‘여우사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며 실행에 나선 것이다. ▷명성황후 실제 시해범은 ‘일본 낭인’이 아니라 ‘일본군 소위’임을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도 발굴됐다. 일본은 사건 직후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라고 보고했다.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 그 다음에 나카무라(낭인)도 하수(손을 대어 사람을 죽임)했는데…”라는 보고도 있다. 그러다 “어느 일본인이 살해”라고 시해범을 흐리기 시작했다. 시해범은 경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라고 한다.(이종각 저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명성황후 시신은 ‘홑이불로 싸서 송판 위에 올려’ 녹원으로 옮겨져 다른 궁녀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두 개의 칼날인 것 같다는 증언이 있다. 일본의 한 신사엔 한 낭인이 살해도구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히젠도’가 보관돼 있는데, 칼집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었다’는 뜻의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고 새겨져 있다. 낭인들은 서로 자신이 명성황후를 베었다며 ‘공(功)’을 내세우려 혈안이었다. 군인이든 외교관이든 낭인이든 무죄 혹은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다 풀려났다. 이번 편지 발견을 계기로 126년 전 참혹했던 시해 사건의 전말, 특히 일본 정부가 어떻게 개입했는지가 소상히 밝혀지길 기대한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위임의 정치’라는 말을 했다. 전두환 얘기를 다시 꺼내려는 건 아니다. 전두환은 싹 걷어내고, 그가 말하는 위임의 정치란 게 뭔지 타당한 건지 따져보고 싶은 것이다. 발언 전문을 보면 우선 솔직하다. “국정이 굉장히 어렵다는데, 경제권력 정치권력 수사하면서 조금 아는 거 가지고 할 수 있겠느냐.” 또 화끈하다. “저는 시스템 관리나 하면서 법과 상식이 짓밟힌, 이것만 딱 바로잡고….” 요컨대 잘 모르는 건 최고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전공을 살려 ‘진보정권의 신적폐 청산’ ‘부패와의 전쟁’ 등 공정과 법치를 직접 챙기겠다는 논리다.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취지는 알겠다. 대통령이 되면 최고 인재를 등용하고 적재적소 인사를 하고 권한을 위임하고 시스템 국정 운영을 하겠다는 생각에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그 정도만으로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아가 윤 전 총장의 긴 발언에서 “정치 대충 그렇게 하면 되는 것 아냐” 하는 지나친 자신감이 느껴져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최고 권력자가 만기친람하고 모든 걸 좌지우지해선 안 된다는 점에서 위임의 정치는 맞는 방향이다. 특정 현안에 대한 개인 생각을 섣불리 드러내는 걸 삼가는 게 훌륭한 지도자의 덕목일 수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탈원전 등 대통령의 개인 소신이 일선 부처의 정책 수립 과정을 왜곡하고, 요직을 꿰찬 얼치기 전문가들에 의해 부동산 등 민생이 망가지는 사례를 우린 여러 차례 목도했다. 다만 위임의 정치는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 스타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청와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의 구조적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당장 그가 말하는 위임의 정치에선 청와대와 내각, 수석과 장관의 미묘한 역학관계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복잡한 주요 정책 사안을 놓고 실세 수석과 장관의 의견이 충돌하면 어찌할 건가. 대통령이 아니면 누가 조율하고 최종 판단을 내릴 것인가. 자신은 잘 모르고 다 챙길 시간도 없으니 경제든 외교든 전문가에게 맡기겠다는 정도의 얘기라면 그건 권위주의 시절의 편의적 ‘위임 통치’에 가깝다. 바야흐로 대전환의 난세다. 미중 패권 경쟁은 과거 탈냉전 시기 국제질서 변동에 버금갈 정도의 국가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산업 인프라 구축 등 지원만 하고 기업 활동은 간섭하지 않는 게 상책일 수 있지만 극심한 취업난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 마련 및 사회적 합의 도출은 대통령 몫이다. 노동 개혁, 연금 개혁 등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뒤엉킨 난제의 실타래도 풀어야 한다. 남다른 통찰력을 갖고 ‘위임하되 위임하지 않는’ 고도의 국가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이란 얘기다. 어쩌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신의 경지’를 요구받는 치명적인 자리일지도 모른다. 여당에 이어 야당 대선 후보도 곧 확정된다. 국민들까지 나서 정권교체냐 아니냐의 4개월 대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누가 잡아도 나라는 시끄러울 것”이라고 걱정을 키울 것이다. 윤 전 총장은 정치에 입문한 지 4개월 됐다. 여러 말실수 등 좌충우돌하며 지지율 등락이 있었음에도 야권의 유력 주자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배짱(guts)도 보여줬지만 정권교체 프레임에서 맴돌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어제 그는 “오늘 윤석열은 부족하지만, 내일 윤석열은 더 나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인 윤석열의 1차 운명이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아프리카에서는 헬리콥터에 거꾸로 매달린 채 다른 서식지로 옮겨지는 코뿔소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공중에 거꾸로 한참 매달려도 몸에 문제는 없을까. 이런 문제를 연구한 코넬대 연구진이 괴짜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그노벨상(Ig Novel Prize)의 올해 교통부문상을 수상했다. ▷코넬대 연구진이 검은 코뿔소 12마리를 마취시켜 크레인에 매달아 신체 변화를 측정한 결과, 거꾸로 매달릴 때가 엎드린 자세보다 심장이나 폐 기능에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이 물구나무를 설 때 혈액 순환이 좋아진다는 논리와 유사하다. 연구진은 “아무도 거꾸로 매달린 자세가 동물의 심장과 폐 기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연구하지 않았다”면서 “‘웃고 나서 생각하게 한다’는 게 상의 메시지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맞는 상인 것 같다”고 했다. 코뿔소로선 난데없이 마취된 채 거꾸로 매달리는 ‘학대(?)’를 당하긴 했지만 유의미한 결과인 것 같기도 하다. ▷생물학상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담긴 메시지를 분석해낸 스웨덴 룬드대의 주자네 쇠츠 교수에게 돌아갔다. 고양이가 사료를 원할 때는 울음소리 끝을 올리고 동물병원에 가는 날에는 스트레스를 받아 울음소리 끝의 음조를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이쯤이면 쉴 새 없이 나무를 쪼아대는 딱따구리가 왜 두통을 앓지 않는지에 대한 연구 등 과거 수상자들의 엉뚱함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일 듯하다. ▷프랑스의 몽펠리에대 연구팀은 정치인의 비만 정도와 부패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로 경제학상을 받았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15개 나라 장관들의 사진 약 300장을 수집해 체질량지수를 측정한 뒤 국제투명성기구가 매년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와 비교했더니 체질량지수가 높을수록 부패가 더 심한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대선 부정 의혹으로 반정부 시위가 극심해진 벨라루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비만’을 꼬집으려는 주최 측의 의도가 깔린 게 아닐까 싶다. ▷1991년부터 미 하버드대의 유머 과학잡지(AIR)가 선정하는 이그노벨상은 올해로 31번째를 맞았다. ‘진짜’ 노벨상 못지않게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자기장으로 개구리를 공중 부양시킨 실험으로 이그노벨상 물리학상을 먼저 받은 데 이어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해 그래핀을 발견한 공로로 진짜 물리학상을 받은 인물도 있다. 이그노벨상 수상자에겐 짐바브웨 화폐로 무려 10조 달러를 준다. 그러나 휴지 조각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돈으로 4500원 정도다. 창의의 원천은 엉뚱함과 유머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도 수상자가 4명 나왔지만 올해는 없다. 우스개 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외 토픽에 나올 만한 기발한 수상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영미권 5개국 기밀정보 동맹체인 ‘파이브아이스(Five Eyes)’에 한국과 일본, 인도, 독일을 포함시키는 방안이 미 하원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참여 희망 및 가능성이 간간이 보도된 적은 있지만, 한국이 구체적으로 거명된 건 처음이다. 파이브아이스에 참여하면 영미권 5개국과 고급 정보를 공유할 길이 열리고, ‘정보동맹’을 더 폭넓게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중국의 반발이 뻔해 사드 배치 이상의 고난도 외교 이슈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파이브아이스는 원래 ‘투아이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정보 교환 경험을 쌓은 미국과 영국이 1946년 공식 ‘정보공유협약’으로 발전시킨 것.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가세하면서 5개의 눈이란 틀을 갖췄다. 이름은 미국 기밀문서 등급 분류의 ‘AUS/CAN/NZ/UK/US EYES ONLY’에서 나왔다. 애초 소련 등 동구권과의 냉전에 대응하기 위해 출범했지만, 냉전 붕괴 후 산업기밀 획득이나 테러 예방 등으로 목적이 옮겨갔다. 5개국 이외의 주요국 정치인이나 민간 영역도 감시 대상에 오른 사실이 2013년 내부 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파이브아이스는 세계 최대 통신감청 시스템인 ‘에셜론(ECHELON)’을 개발, 운용하고 있다. 위성 활용은 물론이고 해저광케이블에 특수 감청기기를 부착하기도 한다는데, 기술 수준은 베일에 가려 있다. 특정 지점의 해저광케이블에 특수 감청기기를 설치하려면 해당 국가의 협력이 필요하다. 미국이 중국 인접 국가인 한국을 참여시키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파이브아이스는 조 바이든 정부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중국에 맞서 동맹국들을 규합할 수 있는 잠재적 플랫폼이다.” 올 초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분석이다. 미 하원의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이고 상하원 각각의 군사위 및 본회의 심사와 표결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바이든 정부의 전략을 일찌감치 내다본 것이다. 중국 환추시보가 파이브아이스를 “미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인종주의적 색채가 강한 조폭 행동 공동체”라며 맹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문재인 정부, 또는 다음 정부에 파이브아이스 참여 협의를 공식 요청해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특히 내년 2월 중국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하노이 노딜’ 이후 멈춰 선 북핵 문제 진전의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보고 있는 문재인 정부로선 그리 반길 만한 이슈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 정보 등을 공유하는 유용한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정보강국으로의 위상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 국익 관점에서 파이브아이스 참여의 득실을 미리 고민할 때가 됐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유럽 해전의 전설인 넬슨 제독에 가장 처음 비교한 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메이지 유신 때인 1892년 측량 기사로 알려진 세키 고헤이라는 사람이 쓴 ‘조선 이순신전’이라는 소책자다. “당시 영국을 굳게 지켜 나폴레옹의 전화를 입지 않게 한 것은 영국의 이순신이라 할 수 있는 넬슨의 전공이요, 또 조선을 지켜 국운의 쇠락을 면하게 한 것은 조선의 넬슨이라 할 수 있는 이순신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충무공을 ‘내리손(乃利孫)’, 즉 넬슨 제독에 비교하며 “20세기 금일에 내리손이 리충무와 바다에서 서로 마주친다면 필경 아이에 불과할진저…” 등의 글을 쓴 것은 그로부터 16년 뒤다.(‘일본인과 이순신’·이종각 저) ▷1960년대 말 이후 일본 국민작가로 불리는 시바 료타로가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동양이 배출한 유일한 바다의 명장”이라고 충무공을 소개하고 다녔다. 이순신이란 이름 석 자가 군인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된 계기다. 메이지 시대 일본이 충무공을 군신(軍神)으로 떠받든 이면에는 충무공에게 패배한 원인을 직시하자는 뜻이 담겨 있을 것 같다. 일본 해군력 증강의 명분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충무공은 존재 자체가 일본엔 콤플렉스인 셈이다. ▷대한체육회가 도쿄 올림픽 한국 선수촌 아파트에 걸었던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는 현수막이 사흘 만에 철거됐다. 이 문구는 충무공이 명량해전(1597년)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배가 열두 척 있나이다)’에서 따왔다. 이를 일본 측이 ‘반일 메시지’라며 정치 행위를 금지한 올림픽 헌장 50조 위반이라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측에 입김을 행사한 것이다. 대한체육회는 ‘범 내려온다’ 글자 밑에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현수막을 대신 내걸었다. ▷IOC는 “전투에 참가하는 장군을 연상시킬 수 있다”며 철거를 요구하면서 욱일기 사용에 대해서도 같은 조항을 적용하기로 약속했다는 게 대한체육회의 설명이다. 그러나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는 “욱일기 디자인은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며 경기장 반입을 허용할 방침이라고 한다. ▷욱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이 사용한 군기다. 일본 군국주의와 침략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국제 경기가 열릴 때마다 욱일기 반입이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곤 했다. 충무공의 ‘금신전선상유십이’에는 일본의 침략으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가 된 조국을 방어하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시간적으로도 424년 전의 일이다. 이것을 트집 잡으면서 침략을 상징하는 욱일기는 ‘디자인’이라 괜찮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이처럼 허망한 말도 없을 것이다. 친문 진영에 갇힌 대통령…. 역사는 문재인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하지 않을까 싶다. 뭐가 문제였나. 무능 논란은 차치하고, 궁극적으론 ‘철학의 부재’에 기인한다. 편협한 이념과 역사의식, 집단 도그마를 옳은 철학인 양 착각했다. 천하는 신기(神器), 신령스러운 기물이라는 말이 있다. 작은 생선을 구울 때 조심스레 뒤집듯 세상을 함부로 다뤄선 안 되는 것이다. 문 정권은 너무도 오만하게 자신들만의 도덕 기준, 선악 기준으로 마구 재단하려 했으니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건 당연한 결과다. 편 가르기 이념으로 접근해 부동산시장을 감당 못 할 정도로 헤집어놓은 것은 더 말하기엔 입이 아프다. 최근 코로나 지원금 문제를 놓고 여당 의원들이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질타한 논리에선 실소가 나왔다. “전 국민 위로금이라는 게 대통령의 철학인데, 철학이 다른 것 같다.” 대통령이 한마디하면 그게 지고지선의 철학인가. 모두에게 나눠주고 퍼주고 하자는 게 문 정권의 철학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집권세력의 철학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야권의 ‘정치 초보’ 대선주자들이 ‘정치철학’을 언급하고 나선 건 그런 점에서 관심을 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최근 대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다”며 “정치철학 면에선 국민의힘과 생각을 같이하고 있다”고 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새로운 시대가 안고 있는 다양한 과제를 푸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 정치철학에 달린 문제다”라고 했다. 한 사람은 다소 거친 듯하고, 다른 사람의 정치철학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둘 다 검찰총장, 감사원장을 중도에 그만둔 만큼 ‘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게 됐는지에 고민의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윤 전 총장 발언에선 ‘어떤 정치를 어떻게?’에 대한 생각이 명료하지 않으니 허전함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한 최 전 원장은 “정권교체 이후 국민의 삶이 더 나아져야 한다”며 ‘변화와 공존’을 언급하긴 했지만 아직 모호하다. 윤 전 총장에 대해 “여전히 검사”라는 지적이 적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 전 원장의 정치적 역량도 뚜렷하지 않다. 이는 최고 명문대 출신의 두 사람이 검사, 판사에서 정치인으로 제대로 변신하고 질적으로 승화할 수 있느냐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검사와 판사는 과거를 수사하고 심판하지만 정치는 미래를 다루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장자에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나를 장례 치렀다는 우화다. 두 사람도 자기 살해의 정신적 성찰이 있어야만 ‘검사의 틀’ ‘판사의 틀’을 깨고 더 넓고 높은 눈으로 정치를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철학이 없는 정치공학은 사상누각이다. 대통령의 권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포함해 어떤 정치를 어떻게 할지의 철학부터 굳건히 세워야 한다. 반문 쪽에선 누가 후보가 되든 정권만 교체하라는 분노가 팽배해 있다. 반문재인 깃발 아래 모두 뭉치자는 식의 접근을 넘어 박근혜, 문재인 정권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정권을 세울지가 중요하다. 정권교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꿰뚫어봐야 한다. “국민의 부름을 받았다”는 말은 그만 거둘 때가 됐다. 시대를 보는 열린 통찰력, 정치 그릇이 누가 더 큰지의 경쟁은 지금부터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8부작 다큐 시리즈인 ‘쿠바 리브레(Cuba libre) 스토리’의 마지막 회는 ‘뗏목 이민’ 물결을 다룬다. 1994년 8월 5일, 젊은이들이 “쿠바를 떠나게 해 달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충돌했다. 든든한 뒷배였던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자 쿠바 경제가 몇 년째 극도로 피폐해진 탓이었다. 1959년 혁명 이후 첫 시위였다. 최고 권력자인 피델 카스트로의 대응이 의외였다. ▷시위 현장에 나타난 그는 “원하는 사람은 떠나도 좋다”고 했다. 가스가 꽉 찼으니 밸브를 잠깐 열어주자는 전략이었다. 카스트로는 중세 의사 같아서 그런 식으로 몸(권력)에서 ‘나쁜 피’를 빼낸다는 것. 고무 튜브와 드럼통을 얼기설기 엮은 엉성한 뗏목을 타고 145km 떨어진 미국 플로리다를 향하는 뗏목 행렬이 줄을 이었다. 뗏목 젓는 쿠바인을 ‘발세로’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익사한 이들도 많다. ▷쿠바는 낭만의 나라다. 특히 시가를 빼놓을 수 없다. 윈스턴 처칠은 “나는 쿠바를 물고 있다”며 쿠바산 시가를 즐겼다고 한다. 쿠바는 속으론 결핍의 나라다. 수도 아바나는 올드카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1940, 50년대 제작된 미국산 뷰익 쉐보레 등이 돌아다닌다. 60, 70년 된 차가 멀쩡히 굴러다니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이면엔 수십 년 지속된 미국 경제 봉쇄의 그늘이 깔려 있다. ▷2017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분노의 질주―더 익스트림’의 자동차 대결 장면에 아바나의 명소 말레콘 방파제가 나온다. 오바마 정부 시절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영화 촬영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때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가 복원됐고, 현 바이든 정부도 쿠바 출신 유권자들의 마음을 살피며 제재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며칠째 쿠바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1994년 이후 27년 만이다. 지역별로 수백, 수천 명의 시위대가 “자유를 달라” “독재 타도” 등 정치 구호도 외치고 있다고 한다. 트위터를 중심으로 ‘#비바쿠바리브레(자유 쿠바 만세)’ ‘#SOS 쿠바’ 등의 해시태그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미국의 경제 제재에 따른 경제 사정 악화와 코로나19 확산 등이 겹쳐 민심이 악화됐다고 한다. ▷반정부 시위에 놀란 쿠바 공산당은 전국의 인터넷을 끊었다. 올 4월 권력을 승계한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미국이 소셜미디어로 시위를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스트로 형제 등 혁명세대가 모두 물러나고 혁명 이후 세대로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에서 62년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쿠바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북한도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영웅호색, 권력자의 주변엔 항상 여자가 있다.” 요즘 이런 말을 잘못 꺼냈다간 경을 칠 수 있지만 수십 년 전 요정정치가 성행하던 시절만 해도 ‘허리 아래 불문(不問)’을 금언처럼 떠들곤 했었다. 사형수 김재규에게 변호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여자관계에 대해 물었더니 “남자의 허리띠 아래는 말 안 하는 겁니다. 그만 물으세요”라고 일축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세상은 바뀌었고, 성적 도덕성 문제는 정치인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시대가 됐다. 이재명 경기지사의 ‘여배우 김부선 씨와의 스캔들’ 의혹을 놓고 5일 민주당 경선 후보 TV토론회에서 신경전이 벌어졌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자 이 지사는 “제가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라고 맞받았다. 정 전 총리는 “그거하고는 다른…” 하며 어이없어했고, 이 지사도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라고 따졌다. 사회자가 다른 주제로 전환하면서 언쟁이 이어지지 않았을 뿐 양측 모두 불쾌한 기색이었다. ▷이 지사의 바지 발언이 돌발적으로 나온 것인지, 준비된 답변인지는 알 수 없다. 불륜 관계가 사실이 아니라면 여차여차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면 될 일인데, 너무 나갔다는 지적이 나온다. “듣기 민망하다”는 의견도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느냐는 반론도 있다. 이 지사는 6일에도 “‘당신 마녀지’라고 해서 ‘아닌데요’ 했더니 ‘아닌 거 증명해 봐’라고 한다”며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는 논리를 폈다. ▷이 지사의 바지 발언은 연원이 있다. 2018년 김부선 씨가 “특정 부위에 점을 봤다”고 주장하자 이 지사는 ‘신체 검증’으로 응수했다. 직접 아주대병원을 찾아가 “언급된 부위에 점이나 이를 제거한 흔적이 없다”는 의료진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김 씨는 의혹을 부인하는 이 지사를 검찰에 고소했고, 검찰은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앞서 김 씨는 바닷가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고 했지만, 그의 딸이 사진을 다 폐기했다고 한 바 있다. 말뿐인 진실 공방이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2008년 여배우와의 풍문으로 곤욕을 치른 가수 나훈아 씨가 기자회견 도중 갑자기 테이블에 올라 허리띠를 풀고 “직접 5분간 보여주면 믿겠느냐, 아니면 내 말을 믿겠느냐”며 바지 지퍼를 내리려는 동작을 취했던 장면이 생생하다. 이 지사는 지난해 나훈아 콘서트를 본 뒤 “외로운 시간에 가황 나훈아님의 깊고 묵직한 노래가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저의 우상이다”고 했다. 이번 바지 발언이 ‘나훈아 패러디’라는 말도 있다. 난데없는 바지 공방에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희화화되고 있는 것 같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비밀의 화원(Secret Garden)…. 정치학에선 공천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랜 역사의 서구 정당들도 공천 과정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점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너무 점잖은 것 같다. 특정 소수가 공천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거나 계파 나눠먹기, 줄 세우기가 횡행해온 우리 정치판에선 차라리 ‘살생(殺生)의 화원’ 정도가 더 적확한 표현 아닐까 싶다. ▷이런 공직 후보자 선출 과정에 한국 정당사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이 도입될지도 모른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공천 자격시험’을 내년 지방선거 때부터 적용하겠다고 밝힌 것. 이 대표는 “공천을 받으려면 기초적인 자료해석 능력, 표현 능력, 컴퓨터 활용 능력, 독해 능력 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국가직무능력표준(NCS)과 비슷한 자격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일부 아프리카 나라 정당이 “교육 수준 미달 및 문맹인 자는 후보 자격이 없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고 하지만, 직무 능력을 테스트하는 공천 자격시험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NCS는 National Competency Standards의 약자. 산업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지식, 기술, 태도)을 국가가 표준화한 것이다. 취업준비생들의 필수 코스다. 이를 원용해 공직 후보자가 갖춰야 할 기본 능력에 대한 문항을 설계해 필기와 실기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게 이 대표 구상이다. 다만, 성적순이 아니라 운전면허 시험처럼 커트라인만 통과하면 된다는 것. 서너 차례 응시 기회를 주고 그래도 통과하지 못하면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얘기다. 현직 단체장이 다시 출마하는 경우에도 예외 없이 시험을 봐야 한다. 컴퓨터 활용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의 ‘컴맹’ 후보들 사이에선 당장 “정치와 컴퓨터 시험이 뭔 상관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 대표는 일단 자질 논란이 끊이질 않는 지방의원 등을 정조준한 것으로 보인다. 공적 역할을 하기보다는 지역 유지로 행세하기 위해 지역 국회의원이나 당협위원장에 줄을 대 공천을 받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을 걸러내고 젊을 때부터 정치권에 진입할 의지가 있는 2030세대에게 길을 터주자는 취지라면 이 대표가 주창한 공천 자격시험 논의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자격시험이라는 용어가 거부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해 서울과학고를 거쳐 미 하버드대를 졸업한 이 대표의 ‘실력 지상주의’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다. 정의당에선 “시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반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이 대표의 발상은 관심을 끌 만하다.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되든, 지금까지 해오던 관행 그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각국 정보기관의 모토엔 ‘혼’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모사드의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가 대표적이다. ‘4000년 디아스포라’의 고통이 스며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을 본부 벽에 새겨놓았다. 10일로 창설 60주년을 맞는 우리 국가정보원 원훈(院訓)이 5년 만에 또 바뀌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다. ▷1961년 ‘한국형 CIA’를 표방하며 출범한 중앙정보부의 모토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은 “응달에서 묵묵히 일하는 걸 몰라줘도, 국정 책임자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쓰면 그게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다”는 취지였다고 했다. 애초 최고권력자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JP는 뒤늦게 회고록에 “음지와 양지 정신이 훼손됐다”며 책임을 느낀다고 했지만, 태동할 때부터 나쁜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이종찬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은 CIA 분석국장을 지낸 셔먼 켄트의 ‘정보란 지식이다’라는 정의를 본떠 ‘정보는 곧 국력이다’로 원훈을 바꾸겠다고 보고했다. DJ는 ‘곧’을 빼고 휘호를 써주었다고 한다. 또 휘호 아래 ‘대통령 김대중’이라는 글을 새기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실제 원훈석에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고 당장 지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름은 빠졌지만,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원훈이 바뀔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DJ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교체된 데 이어 2016년 박근혜 정부 때 또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바뀐다. 딱히 바뀐 원훈에 심오한 메시지가 담긴 것 같지도 않다. DJ 정부의 원훈석도, MB 정부의 원훈석도 모두 폐기됐다. ▷이번에 바뀐 원훈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 바로 국정원의 본령”이라고 한 발언을 압축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간 복역한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이른바 ‘신영복체(어깨동무체)’를 썼다고 한다. 문 대통령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과 같은 서체다. 스파이 활동을 ‘비밀절도’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이중 스파이를 ‘두더지’라고도 한다. 목숨을 걸고 일한다. 또 그래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원훈이 바뀌니 사명감을 주기보다 묵묵히 일하는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권력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고 믿는 곳에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권력은 살아 움직이는,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치명적 생물체와도 같다. 권력 2인자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위협하거나 역린을 건드려 죽임을 당한 사례는 숱하다. 허수아비 통치자를 세워놓고 실질적 권력을 행사한 인물도 적지 않지만,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주역에 ‘임금을 보필하는 건 호랑이를 동반하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다. 2인자의 가장 큰 덕목이 절대적인 충성심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 개국 초 정도전과 달리 천수를 누린 하륜처럼 말이다. 최고의 한 자리를 향한 권력 의지, 즉 발톱이 아예 없거나 이를 끝까지 숨겨야 한다. 김종필 전 총리가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을 홍곡(鴻鵠)으로 치켜세우고 자신은 연작(燕雀)으로 낮췄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회자되지만, 끝내 팽을 당한 것을 보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북한은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권력 2인자들의 부침이 심하다. 아니, 2인자가 있긴 했나 싶기도 하다. 장성택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조카 김정은의 집권 후 2인자 행세를 하던 장성택은 “건성건성 박수치며 오만불손하게 행동했다”는 등 불충에 대한 책임으로 전격 처형됐다. 이후 김정은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당시 미 대통령이던 트럼프에게 참수된 시신을 전시해 간부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져 또 한번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북한이 1월 8차 노동당 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당 총비서로 추대하면서 총비서 바로 밑에 ‘제1비서’ 직책을 신설했다고 한다. 특히 당 규약에 “제1비서는 노동당 총비서의 대리인”이라는 내용이 추가됐다는 것. 북한 노동당 규약에 ‘대리인’ 조항은 처음 등장한다. 이를 놓고 “2인자 자리를 공식화한 것이다” “‘잠재적 후계자’ 지명 근거를 마련한 것일 뿐이다” 등 갖가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장성택 처형 후 확고한 권력을 구축한 김정은 체제에서 그나마 2인자 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인물은 여동생 김여정이다.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상징적 수반이었고, 이 자리를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이어받았지만 역시 공식 서열 2위일 뿐이다. 백두혈통 김여정을 위한 자리라는 관측과 함께 조용원 당 조직담당 비서를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조용원은 최근 김정은을 밀착 수행하며 새로운 실세로 떠올랐다. 통치 스트레스 분산용인지, 향후 정책 실패를 전가시키기 위한 희생용인지 전문가들 해석이 분분하다. 아직 공석이든, 누가 자리를 맡았든 분명한 건 그 대리인에겐 ‘신기(神技)의 처세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