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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6·25전쟁 때 적의 포로가 됐던 조창호 소위가 43년 만에 귀환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불렀다.그로부터 4년 뒤인 1998년 12월 15일. 국군포로 박동일, 김복기 씨가 동시에 한국에 입국해 기자회견을 했다. 국군포로 2호 귀환자들이었다. 언론들은 다시 위대한 인간 승리라고 박수를 보냈다.하지만 그 위대한 인간 승리를 위해 그들의 자녀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다. 국가가 이들의 귀환이라는 영웅 신화를 만들기 위해 국군포로와 가족들을 속여 결과적으로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젊음을 조국을 위해 바쳤고 45년 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찾아왔건만, 그 조국은 그들에게 거짓으로 회유하였고 평생 치유되지 않을 단장의 아픔을 본인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남겼다.박동일 씨의 막내아들인 박정철 씨는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자이기도 하다. 박동일 씨의 귀환 뒤 북에 남겨진 2남4녀의 자녀 중 1남3녀, 또 이들이 남긴 어린 자식들까지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국군포로 자녀의 삶박정철 씨는 함경북도 회령군 세천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두만강을 낀 이곳 사람들은 대다수 학포탄광에 다녔다. 그가 태어났을 때 1959년생 누나를 시작으로 자신까지 2남4녀의 형제자매가 있었다.박 씨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지만, 중학교 3학년인 14살 무렵 학습 열의를 잃었다. 자신의 가정환경을 알게 된 것.아버지 박동일은 1926년 한반도 땅끝마을인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에서 태어났다. 결혼해 1남1녀를 낳고 살던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국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종전을 코앞에 앞둔 1953년 7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돼 평양 승호리 포로수용소에 억류가 됐다가 종전 뒤 여러 국군포로와 함께 한반도 북단 학포 탄광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중국에서 살다가 나왔다는 이유로 출신성분에 꼬리표가 붙은 여성과 결혼했다. 여성도 두 번째 결혼이었다.박 씨는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대학은 고사하고 군에도 입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크면서 알았다. 당시 학포탄광에는 많은 국군포로 출신들이 끌려와 있어 세천중학교에도 국군포로 자녀들이 많았다. 박 씨의 학급에도 2명이 있었다.“저는 자랄 때 추석이나 한식에 맛있는 음식을 해가지고 산소에 가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친척이 하나도 없어서 놀러다닐 데도 없었어요. 북에 있을 때 아버지의 친한 지인이 살고 있다는 강원도에 한번 다녀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아버지랑 같이 싸우다가 함께 포로가 됐고 수용소에서도 생사고락을 했던 전우였더라고요. 같은 부대 출신이라고 한 명은 강원도 광산에, 한 명은 함북 탄광에 갈라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분은 오랫동안 친형제처럼 서로 의지하고, 연락하며 살았어요.”국군포로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탄광에 배치돼 막장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으로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졌다.하지만 박 씨의 운명은 살짝 더 좋았다. 군에는 입대할 수 없었지만, 1년제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탄광에서 석탄을 실어가는 철도노동자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 박 씨는 학포탄광에서 좀 떨어진 작은 철도 분기초소에서 근무했다. 초소 근무자는 2명이었는데, 24시간을 기준으로 서로 교대근무를 했다. 근무자 두 명의 집이 한 지붕 아래 얇은 벽으로 칸막이만 구분한 것이라 옆집에서 하품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그동안 형과 누나들은 모두 결혼해 분가를 했고, 박 씨 혼자 나이든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1997년 박 씨도 고등학교 동창인 탄광노동자의 딸과 결혼했다. 어려운 살림이라 결혼식도 못 올리고 그냥 한 집에서 동거하기 시작한 것. 다행히 그들이 사는 곳은 주변에 민가가 없는 외진 곳이라, 그를 포함한 네 식구는 산비탈을 개간해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래도 먹고 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종박 씨의 집에서 두만강까지는 걸어서 35분 정도 거리였다. 그 동네 국경경비대는 겨울이면 그의 초소근처에 벌목하러 올라와 박 씨 가족의 신세를 졌다. 그래서 경비대 군인들은 그의 얼굴을 다 알고, 신세를 갚으려 했다.1997년 여름 어느 날, 친한 군인과 잠복 초소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중국에 가면 대접을 잘 받는다며 자기와 함께 강 건너에 다녀오자고 했다. 군인은 군복을 벗더니 총도 수풀에 숨겨놓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두만강을 건너 맞은편 중국 마을에 들어가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리고 배고파서 북에서 왔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고 과일까지 권했다.불과 몇 시간의 나들이였지만, 중국이 잘 사는 곳이라는 것을 박 씨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를 데리고 중국으로 갔던 군인도 제대 후 탈북해 한국에서 만났다.그해 겨울 그는 중국에 살았던 어머니가 적어준 사촌형제들의 주소를 적은 쪽지를 품고 두 번째로 두만강을 넘었다. 현지 국경경비대와 잘 아는 사이라 넘는 것 자체는 별로 위험하지 않았다. 연길에 가니 여러 친척들이 모여 십시일반 도와주었다. 누구는 50위안을 내놓았고, 누구는 100위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모은 400위안을 들고 북에 가니 몇 달은 굶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1998년 봄 세 번째로 중국에 갔다. 이번에는 대접이 달라졌다. 몇 달 전에 도와주었는데 또 왔느냐는 눈빛이 역력했다. 이번엔 200위안을 받아 왔다.그의 운명이 바뀐 사건은 1998년 초가을에 시작됐다. 어느 날 밤 그의 외딴집에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밖으로 불러내더니 한참 뭔가 얘기를 하고 돌아갔다.며칠 뒤 아버지가 중국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겠다며 길을 나섰다. 형도 같이 간다고 했다. 뭔가 이상했다.얼마 전 자신이 갔을 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또 가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중국 친척의 도움이 필요하면 중국이 고향인 어머니가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간다는 것도 이상했다.아버지가 떠나고 일주일정도 지났을 때 형님만 사색이 돼서 돌아왔다. 그는 연길 친척집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박 씨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요시찰 대상이다. 사라지면 가뜩이나 반동 가족의 낙인이 붙은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가야 한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어머니에게 무슨 사연이냐고 재촉하니 그제야 어머니가 실토했다.“사실은 네 아버지가 한국에서 결혼했던 사람이다. 아들이 하나 있고, 딸은 전처의 뱃속에 있을 때 군에 입대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지난 번에 집에 왔던 사람이 ‘한국에서 딸이 아버지를 찾는다’고 전해주더라. 그래서 아버지가 강을 건너간 것이다.”박 씨는 아버지가 결혼했던 사람이라는 것, 자신들 말고 다른 자식이 또 있다는 것을 그때에야 알았다. 물론 어머니는 결혼해서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자녀들에게 터놓지는 않았던 것이다.● 보위원의 힌트아버지를 찾을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리면 돌아오지 않을까 속절없이 가슴을 조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10월 초경 담당 보위지도원이 박 씨 집에 나타났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박 씨를 불러내어 수갑을 채웠다. 무작정 끌려가니 보위부 구류장에 처넣었다. 그 외엔 아무 말도 없었고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20시간 정도 구류장에 앉아있는데 구류장 철문이 열렸다. 보위지도원은 수갑을 풀어주며 처음으로 한마디 해주었다.“네 아버지가 없어진 것을 아는데, 일주일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너희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알지? 집으로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집으로 돌아왔더니 가뜩이나 막대기 휘저어도 걸릴 것이 없는 살림에 뭔가 더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전날 저녁 식량을 비롯한 집안 전 재산을 싣고 보위지도원을 찾아가 “일주일만 찾아볼 시간을 달라”고 사정했던 것.급히 전갈을 띄워 근처에 살고 있던 온 남매가 그날 저녁 그의 집에 모였다. 남편이나 부인은 부르지 않고 오로지 박 씨 남매들만 모인 것.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던 넷째 누나는 연락을 할 수 없어 참가하지 않았다. 심각한 토론 끝에 어머니가 결론을 내렸다.“나는 정철이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친척들을 통해 아버지를 찾아보겠다. 보위원이 일주일을 시간 준 것은 그동안 도망치라는 신호다. 그러니 만약 1주일이 지나도 찾지 못하면 너희들도 모두 준비하고 있다가 탈북을 해라. 우리는 아버지가 없어지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형은 어머니의 말을 십분 이해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누나들은 “여자들은 출가외인인데, 남의 집에 시집가서 애까지 키우는 우리까지 잡아갈까요. 우린 좀 더 고민해볼게요”라며 수긍하지 않았다.박 씨는 그날 밤 어머니를 모시고 두만강을 넘었다. 어떤 반응일지 몰라 부인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부부 사이엔 그해 4월에 태어난 아들도 있었다.중국 친척집에서 열흘 정도 지내며 수소문했지만 아버지는 찾을 길이 없었다. 이제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박 씨는 어머니에게 가족을 데리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막아섰다. “너는 아들이라 이제 갔다가 잡히면 무조건 죽어.”“어머니는 제가 아들이라 걱정해서 그러지만, 그럼 제 아들은 어떻게 합니까. 저도 아들을 지켜야겠습니다.”박 씨는 막아서는 어머니를 끝내 뿌리치고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이번 길은 국경경비대와 약속이 돼 있지 않아 무작정 넘어가야 했다.한반도의 최북단인 회령지역은 9월말부터 눈이 내린다. 11월초 경이라 강에는 살얼음이 졌다. 신발을 신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려니 밤에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신발을 벗었다. 두세 걸음에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넘다 보니 50미터 남짓한 두만강을 건너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넘자마자 집으로 냅다 달렸다. 아내와 아들은 집에 있었다.“아버지를 찾지 못했어. 그러니 우린 수용소로 끌려가야 해. 너는 살겠지만, 우리 아들은 수용소에 끌려갈 거야. 어떻게 할래. 나 따라 지금 떠날 거야?”아내는 아무 말도 없이 포대기에 애를 업고 박 씨를 따라 나섰다.“그때 저를 믿고 따라 나선 아내가 지금도 너무 고맙습니다. 그때 그가 부모형제 때문에 망설였다면 엄청 위험해졌을 겁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하니 ‘우리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새벽에 박 씨는 가족을 데리고 다시 두만강에 나왔다. 지형지물도 눈에 훤하고, 단속초소 위치도 잘 알고 있어 걱정이 없었지만 7개월밖에 안 된 아들이 울까봐 제일 걱정이었다.“하늘이 살라고 도왔는지 두만강을 건너는 동안 아들은 울지 않더군요. 그런데 강을 다 건너 중국 땅에 첫 발을 딱 내딛는 순간 아들이 울었어요.”아침에 연길 친척집에 들어오니 귀가 쓰렸다. 만져보니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발이 근질거리기 시작하더니 검게 변했다. 맨발로 두 시간동안 얼음 위를 걷느라 동상에 걸린 것. 그런데 사선을 넘나들 당시에는 그런 사실도 몰랐다.며칠이 지나자 형이 혼자 중국에 들어왔다. 형수는 교원의 딸이었는데 “절대 따라갈 수 없다”고 해서 혼자 왔다는 것. 누나들도 “우리는 남편도 자식도 있어 따라가지 않겠다”고 생각을 돌렸다고 형이 전해주었다.● 아버지만 한국으로아버지가 머물렀던 중국 친척집에서 한 달 정도 있었을 때 가방을 옆구리에 낀 남자가 나타났다. 중국 친척들이 그를 알아봤다.“저 사람이 너희 아버지 데려간 사람이야.”그러자 남자가 실토했다.“사실 저는 한국 모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버님은 저희가 잘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가족을 한국에 데려가려 왔습니다.”다음날 그는 온 가족을 데리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단장을 시키고 사진관에 데리고 가 여권사진까지 찍었다.그런 다음 남자가 박 씨만 따로 불렀다.“실은 아버지가 여권도 나왔고 비행기로 한국으로 모셔가려고 하였는데, 내가 가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이 죽는다며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가서 아버지를 좀 설득해주세요. 가족 모두 중국에 왔고, 여권 사진도 찍고 한국 갈 준비를 하는 중이니 아버지가 먼저 한국에 가면 우리가 한달안에 따라간다고 말입니다.”박 씨는 가방 낀 남자를 따라 모 호텔로 갔다. 정말 아버지가 있었다.박 씨는 남자가 시킨 대로 말을 했다. “어머니랑 형이랑 중국에 와있어요. 여권 사진도 찍었고, 우리도 한 달 내로 한국으로 갈 수 있대요. 아버지 먼저 가세요.”아들이 와서 말을 하자 그제야 아버지도 한시름을 놓은 표정이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한다. 1998년 12월 15일 한국 언론에는 일제히 국군포로 2명의 귀환소식이 실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국군포로 2명,가족2명 함께 北탈출 귀환국가안전기획부는 14일 한국전쟁 중 포로가 돼 북한에 끌려갔던 김복기(67) 박동일 씨(71)와 이들의 가족 2명이 최근 북한을 탈출한 뒤 제삼국을 통해 귀환했다고 밝혔다. 안기부는 이들이 53년 7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납북된 뒤 평양 승호리 포로수용소를 거쳐 함북 회령의 학포탄광에서 광원으로 함께 생활해왔다고 말했다.안기부는 이들과 함께 입국한 김 씨의 차남 영구 씨(31)와 박씨의 4녀 정심 씨(30)는 91년 4월 결혼한 부부라고 덧붙였다. 한기흥 기자”박 씨 가족의 탈북은 위 기사 속 김복기 씨의 차남 김영구 씨로부터 시작됐다. 박 씨의 넷째 누나가 김영구 씨와 결혼했던 것. 까치는 까치끼리 만난다는 속담처럼, 출신성분이 매우 나쁜 국군포로 가족끼리 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생활형편이 어려워진 김영구 씨는 중국으로 탈북했다.한국에 살고 있다는 아버지의 친척을 찾기 위해 한국 방송의 가족 찾기 라디오 프로그램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안기부에 포착됐다. 안기부가 김 씨와 접촉해 아버지의 국군포로 여부를 조사하던 중 김 씨가 장인도 국군포로라고 밝혔다.그러자 안기부는 박 씨의 집에 사람을 보냈다. 그가 1998년 늦여름에 찾아왔던 사람이다. 한국에서 유복녀로 남겨놓은 딸이 아버지를 찾는다는 이야기도 실은 박동일 씨를 중국에 데려오기 위해 꾸며낸 말이었다. 안기부는 김복기 씨와 박동일 씨를 한국에 데려가 조창호 중위에 이은 ‘국군포로 2호의 귀환’에 대한 보도 자료를 자랑스럽게 언론에 배포했다.● 수용소로 끌려간 혈육들아버지의 귀환 소식이 한국 언론에 보도되자 중국에 남겨진 박 씨 가족은 그날부터 불안에 떨어야 했다. 아직 북에는 누나들이 남아 있었고, 또 중국에 숨어사는 자신들에게도 북한의 추적이 들어올 수 있었다. 체포돼 북송되면 꼼짝없이 죽어야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가족을 한국에 데려간다던 가방 낀 남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기다려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박 씨의 형이 체포됐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의 등록서류에 중국에 사는 친척 주소들도 올라 있었던 것이다.북한 보위부는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납치조를 파견했다. 당시 박 씨 가족은 친척집에 흩어져 지냈는데, 납치조가 첫 번째로 들이닥친 친척집에 형이 있었다. 이들은 형을 차에 싣고 곧바로 북한으로 나갔다.형과 함께 있던 친척이 급히 도망치라고 전화가 왔다. 박 씨 가족은 양말도 신지 못하고 집을 나와 택시에 올랐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들은 무작정 한족이 많은 동네로 가서 숨었다. 그곳은 연길 옆 왕청이라는 지역이였다.박 씨 가족은 이곳에서 5개월을 지냈다. 아버지가 자신이 받은 정착금을 보내와 그걸로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중국에 남겨진 가족들도 데려와 달라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하소연했지만, 이미 귀환을 정치적으로 써먹은 사람에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국군포로의 귀환 뒤에 남은 건 또 다른 이산가족이었다. 박 씨 가족도 한국으로 가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했다. 탈북 후 8개월 뒤 위조여권을 통해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브로커가 나타났다. 4명을 보내는데 6000만 원을 불렀다. 아버지가 귀환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보냈다. 그 덕분에 이들은 중국의 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입국했다.국군포로 박동일 씨만 귀환시킨 후 중국에 남겨진 그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던 안기부는 이들이 입국하자 또 생색을 냈다. 1999년은 안기부에서 국정원으로 명칭을 바꾼 때였다. 1999년 8월 16일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작년 귀환 국군포로 일가족 4명 입국국가정보원은 16일 지난해 12월 귀환한 국군포로 박동일 씨(72)의 부인 허순영 씨(65) 등 일가족 4명과 최철규씨(37) 등 모두 5명이 15일 제삼국을 통해 밀입국, 귀순을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허씨 일가족은 지난해 11월, 최씨는 지난해 8월 각각 북한을 탈출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어 현재 자세한 탈북동기 등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 5명을 포함, 북한을 탈출해 올해 한국에 도착한 북한이탈주민은 모두 65명이다. 한기흥 기자’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가방 끼고 다니던 남자가 나타났다. 박 씨의 어머니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자식들을 살려내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남자는 “정말 미안하다. 나도 공무원이라 위에서 지시가 없어 어쩔 수 없었다‘고 사과했다. 박 씨는 이렇게 말했다.“그때 나도 그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요. 그러나 한국에 와서 공기업에서 20년을 일해 보니 그 사람이 이해가 됩니다. 위에서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겠죠. 결국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정부와 안기부 고위급들이 문제였던 것이죠.”박 씨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북에 남은 누나들이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이 왕청에 숨어살 때 아버지가 보내준 돈을 쪼개 인편을 통해 북에도 내보냈다. 그러면서 빨리 중국으로 탈출하라고 했다.세 누나들은 “우리가 결혼을 했는데 설마 잡아갈까”라며 반신반의하면서도 자식들 때문에 쉽게 뜰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재촉이 심해지자 김일성의 생일로 북한 최고의 명절로 치던 4월 15일에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며칠 내로 떠나기로 자신들끼리 약속했다.그런데 보위부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4월 16일 새벽에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남편과 자식은 두고, 누나들만 싣고 갔다. 형의 집에도 트럭이 들이닥쳐 아내는 놔두고 생후 1년 반이 된 어린 아들을 빼앗았다. 이미 트럭에 태운 누나들이 조카를 받아 안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동네 사람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형과 누나들의 소식은 이후 영영 알 수 없었다.생떼 같은 자식 4명과 장손을 잃은 박 씨의 어머니는 한국에 들어올 때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가방 낀 남자를 잡고 화풀이를 해도 시계를 돌릴 수는 없었다.“그때 네 아버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네 형제들이 죽지 않았겠는데….”그게 어머니의 평생의 한이었다. 또 박 씨의 평생의 한이기도 했다.한국에 온 이후 그는 고향이 바라보이는 중국 땅에도 몇 번 가봤다. 그러나 다시 가지 않은지 꽤 됐다.“통일되면 남들은 다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곳엔 남은 가족도 없을뿐더러 너무 아픈 추억들만 남겨주어 지우고 싶은 곳입니다. 그냥 가족이 그리울 때면 맞은편에서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철도공사의 탈북민 역장2000년 1월 박 씨 가족은 서울 지역에 17평 영구 임대주택을 받아 정착을 시작했다.나와 보니 아버지는 고향인 해남에 가 있었다. 그곳은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했고, 전쟁 때 남겨둔 본처와 아들딸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중에 박 씨의 어머니도 남편을 찾아 해남에 가서 살았다. 박 씨 아버지는 2014년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박 씨의 어머니는 지금도 해남에 살고 있다. 정이 든 곳에서 남은 여생을 살겠다는 것.아버지가 해남에 남겨둔 전처의 아들은 박 씨 가족을 만나길 거부했다. 딸은 몇 번 정도 만났지만 아버지가 돌아간 뒤 남남이 돼 다시 본 일은 없다. 박 씨에겐 배다른 형이고, 누나이지만 전혀 다른 추억을 공유한 이들이 접점이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 씨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그 분들도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가 전사자로 인정돼 현충원에 묻히고, 그 분들의 어머니는 재혼도 하지 않고 자식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아버지 없는 설움 속에 크면서 얼마나 원망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문뜩 아버지가 북에서 다른 처와 자식들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1년 넘게 받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로 박 씨의 몸무게는 43㎏에 불과했다.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었다.첫 직업은 건물 리모델링을 하는 회사였다. 새벽 5시에 나가 밤 10시까지 일했다. ‘함마(해머)’로 벽을 하루 종일 부수고온 날은 손이 떨려 숟가락을 들 수조차 없었다.그렇게 몇 달을 일하다가 우연히 벼룩시장에서 철도공무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봤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처럼 북한에서 철도원으로 일했던 사람은 경력을 인정받아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그는 통일부에서 5년 6개월의 북한 철도원 경력 인정서를 들고 시험장에 갔고 결국 8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엔 철도청에 입사하면 공무원 자격을 받았는데, 지금의 철도공사로 바뀌었다.입사 후 서울 동대문구 이문역(현 폐역) 수송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했다. 당시 이문역 주변에는 연탄공장들이 많아 화차가 많이 들어왔는데, 그는 화물열차를 떼고 붙이는 일을 주로 했다. 해보니 한국 철도와 북한 철도는 비슷한 것이 많아 적응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24시간 맞교대도 같았고, 철도 규정이나 열차 연결 방법 등도 비슷했다.하지만 언어는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역장이 조회시간에 그에게 “열중 쉬어”를 외쳤는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네”하고 멀뚱멀뚱 쳐다만 봤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역장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화가 나 다시 소리쳤다. 그도 목소리를 높여 “네”하고 또 쳐다봤다. 화가 나 목청을 높이는 역장과 천연스럽게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조회시간이 폭소 바다가 됐다. 마침내 역장도 같이 웃고 말았다.학연, 지연, 인맥이 없이 직장 생활에 적응하긴 쉽지 않았다. 24시간 근무시간에 사표 쓸 생각을 24번은 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렇게 20년을 근무하고 역장으로 2020년에 명예퇴직을 했다. ● 매출 180억 원을 이뤄내다퇴직하고 그는 무역회사 대표로 취임해 사업을 시작했다. 공공기관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 철저히 ‘을’로 살아야 했다. 운영하는 회사는 대기업의 대리점에서 물품을 받아다 해외에 파는 일을 했는데, 그가 대표로 부임할 당시 월 매출이 3억 원 정도였다.이런 방식으로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물품을 받기 위해 대기업 본사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가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그가 가장 품을 들인 회사는 해외 거래처들이 요구하는 아모레퍼시픽이었다. 그런데 갈 때마다 좋은 제안이라고 하면서도 ‘티오(자리)’가 없다고 마냥 기다리라고 했다.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다른 여러 회사들이 분명 새로 계약을 맺었지만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회사에 가서 항의를 했더니 지난해 5월에야 마지못해 6개월 계약을 체결해주었다. 이런 계약은 최소 1년 단위로 맺어주지만 그에겐 6개월이 한계였다.그래도 이것을 기회로 삼고 그는 공격적으로 사업을 벌여 지난해 매출 180억 원을 기록했다.그런데 올해 맺은 계약 역시 6개월짜리였다. 상반기에 그는 통일형 사회적 기업 인증도 받았고 회사 직원도 6명으로 늘어났는데,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 대출을 끼고 양평에 새 회사 건물도 장만했다.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그의 회사 매출의 80%가 현재 아모레퍼시픽 생활용품에서 나오는데, 올해 하반기엔 절망적인 계약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회사에 주던 물품의 브랜드 종류가 5건에서 1건으로 줄어들었고, 내년엔 재계약이 없다는 조항까지 계약서에 박혔다. 해외에서 주문은 여전히 많이 들어오지만, 그가 본사에서 물건을 받지 못하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한다.지난해 본사 영업담당자 3명이 거래처에 상품을 공급하고 대금을 빼돌리는 방식 등으로 30억 원을 횡령해 기사까지 났다.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던 사람들이었다.“지금 시한부 인생을 사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삽니다. 이젠 직원들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탈북할 때와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코로나도 큰 위기 없이 넘겼는데, 지금 이런 위기에 닥칠지는 몰랐습니다. 저는 북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형과 누나들의 인생까지 대신 산다는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 하나 이겨낼 겁니다.”남한강변을 따라 집으로 퇴근할 때 어둠에 잠긴 강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강물은 흐르고, 아침이면 태양이 뜬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신의주의 압록강변에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앉았다. 중국 단둥을 건너다보며 남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나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어?”“영남 동지가 조국을 배반하지 않는 이상 어디든 가겠습니다.”결혼 뒤 남편은 아내에게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듣게 했다. 두 달이 지나자 아내가 말했다.“우리가 속고 살았습니다. 남조선에 갑시다.”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중국에서 3년 동안 마음을 졸이며 숨어살아야 했고, 미얀마 감옥에서 1년 3개월이나 수감생활을 했다.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남자는 음악가라는 꿈을 쫓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아코디언 교본이 단 한 권밖에 없던 한국에서 9권의 아코디언 편곡집을 펴냈고 탈북민 1호 작곡가로 성장했다.올해 6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제1회 김영남 음악회’를 열었다. 서울로망스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음악회에선 그가 작곡한 노래 6곡이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인생이 녹아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NK예총 회장 김영남 씨는 걸어온 60년의 삶을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봤다.● 병사 작곡가김 씨는 1962년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도 인민위원회 보건처장이었다. 부친은 노동당 간부였다. 1948년에 입당해 전쟁 때엔 면당위원장, 전후엔 도당 조직부에서 일했다. 하지만 전쟁 전에 형이 남쪽으로 간 사실이 밝혀져 당 간부에서 행정 간부로 좌천됐다. 그럼에도 보건처장이란 직책은 꽤 권한이 있어서 가족들은 부친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살 수 있었다.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김 씨는 학교에 다닐 때 아코디언 소조에 뽑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 1978년 황해남도 주둔 4군단에 입대할 때만 해도 음악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숨겨진 재능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었다.당시 북한군은 2년에 한 번씩 군무자축전이라는 것을 열었는데, 중대별로 음악 재능을 가진 병사들을 뽑아 훈련을 시킨 뒤 평양에서 최종 경연을 가진다. 김 씨는 1983년 열린 21차 군무자축전에서 직접 작곡한 중창으로 전군 2등을 했다.그러자 군단에서 바로 소환했다. 4군단 선전대 소속으로 전문적으로 작곡을 하게 한 것. 군단 선전대는 상좌 계급의 선전대장과 대위 또는 소좌 계급의 작곡가가 지휘관으로 있었다. 그 아래 글을 잘 쓰는 병사들로 구성된 문학창작조와 음악을 잘 하는 병사들로 구성된 음악창작조가 있었다.선전대에서 그는 너무 행복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가 혁명임무가 됐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피아노가 원한다고 아무나 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다.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반을 치고 또 쳤다. 얼마 뒤 그는 군단 음악창작조장으로 임명됐다. 물론 작곡한 음악에 대한 최종 승인권한은 군관 신분의 작곡가가 쥐고 있었지만, 병사들도 마음껏 작곡을 할 수는 있었다.1988년 군 복무 10년을 마치고 제대할 때 그는 평양음악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 음악대학 학생은 제대군인을 받지 말고 유학생 출신으로 받으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 10년 동안 군 복무를 하고 오면 기량이 딸려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어쩔 수 없이 김 씨는 신의주 제2사범대학 예능학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가니 제대군인들은 의무적으로 예비과 1년을 다니게 했다. 군에서 10년 있다 보면 머리에 녹이 쓸 수밖에 없다며 중학교 졸업한 학생들보다 1년 더 대학을 다니게 한 것이다.이때 그는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했다. 대학에 가보니 수준이 너무 맞지 않았다. 예비과를 다녀야 할 학생들은 군에서 5년 동안 작곡까지 하다가 온 자신이 아니라 어린 친구들이었다. 특히 그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 10년 어린 친구들이 몰려와 황홀하게 구경했다. 당시 북한에서 피아노를 마음대로 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뿐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그가 자퇴하지 않은 이유는 뜻밖에도 대학에서 배우는 정치경제학이나 철학, 심리학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음악만 했던 그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정일 집안 가정교사1993년 대학 5년 과정도 끝나갈 즈음 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그를 찾았다. 평안북도 사로청 청년기동해설대 대장(단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청년기동해설대는 성악, 기악, 화술, 무용 등으로 구성된 25명 안팎의 미혼 전문예술인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사로청에서 발급한 배우라는 신분증을 가지고 있고, 주로 공장이나 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에 나가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 그런데 대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장은 엄연하게 북한에서 간부 직책이다. 간부가 되려면 제대군인 출신의 당원에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으면 또 음악을 몰랐다. 그런 점에서 김 씨는 사로청이 찾은 대장 적격자였다. 대학 졸업 전에 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첫해부터 ‘사고’를 쳤다. 1993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각도 사로청 청년기동해설대 경연에서 당당하게 1등을 한 것이다. TV 5대, 6000달러어치의 음향설비, 각종 악기 세트를 우승 상품으로 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를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상품을 받아가지고 내려오자마자 그보다 직책이 높은 사로청 고위 간부들이 다 나눠가졌던 것. 그는 환멸을 느꼈다.하지만 최고의 환멸을 느낀 사건은 이듬해에 찾아왔다. 김 씨는 날짜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94년 10월 3일 토요일에 한 농장에서 선전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도당 조직부에서 연락이 왔다.“동무, 오후에 정장을 입고 도당 조직부로 찾아오시오. 좋은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오후에 도당에 가니 중앙당 부부장이 앉아있었다.“우리가 찾던 동무가 이 동무나? 동무는 당이 부르면 어디든 갈 수 있어?”북한에서 간부로 살려면 이럴 때 답변해야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제가 당의 배려로 이렇게 살고 있는데, 당이 부르면 어디든 마다하겠습니까.”“좋소. 집사람은 무슨 일을 하오?”“도 지방총국 자재상사 통계원을 하고 있습니다.”“그것도 참 좋은 직업이네. 우리가 동무를 평양으로 소환하려 하는데, 평양에 가면 좋은 집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아무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가서 기다리고 있소.”김 씨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얼떨떨했다. 마침 도당 조직부에 먼 친척이 있어 그를 찾아가 중앙당 부부장이 찾아온 이유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며칠 뒤 친척이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큰 비밀을 알려주는 듯이 속삭였다.“네가 장군님 집안 음악 가정교사 후보로 뽑혔어. 신원조회가 끝날 때까지 몇 달 기다려봐. 그동안 사고치지 말고 모범적으로 살아야 돼.”“아니, 나 같은 사람을 왜 장군님 집 가정교사로 뽑아요?”“외국 유학 다녀오고 실력 있는 애들이야 당연 있겠지. 그런데 그들은 제대군인도 아니고 노동당원도 아니야. 제일 중요하게는 사범교육도 못 받았단 말이지. 너는 당 간부가 될 조건을 다 갖추고 있고, 게다가 기동선전대장으로 실력도 인정받았잖아. 자제분들 음악 가르치는 게 국제 콩쿠르 입상자 만드는 일도 아니니 충분히 할 수 있어.”김 씨는 부푼 꿈을 안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했다.당시 어머니는 암 투병으로 사경을 헤매느라 말을 못할 때였는데, 온힘을 짜내 간신히 한마디 남겼다.“꿈 깨라. 너는 큰아버지가 월남해서 안 돼.”어머니는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당에선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유언처럼 남긴 말이 실감이 됐다. 북한 체제에 대한 배신감이 점점 커졌고, 내가 이 사회에서 한계가 있다면 내 자식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절망도 들었다.● “오늘도 꿈길을 가네”김 씨의 부친은 1948년에 노동당에 입당한 당원이었고, 모친도 1950년에 입당한 당원이었다. 이 정도 경력이면 북한에선 ‘48년 당원’ ‘50년 당원’이라고 부르며 노당원 대접을 해주었다. 믿을 수 있는 충성계층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정환경에 ‘티’가 있으면 절대 어느 정도 이상 승진할 수 없었다.부모님들은 일찍이 그 현실을 깨달았다. 김 씨가 제대돼 돌아오니 어머니가 저녁마다 한국 라디오를 몰래 듣고 있었다. 김 씨도 호기심에 듣다가 아예 중독됐다.1989년 결혼해 이듬해에 아들이 태어났고, 4년 뒤 딸도 태어났다. 가정을 이뤘어도 그는 저녁마다 몰래 라디오를 들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는 아내는 그가 라디오를 들을 때면 다른 방에 건너가 모르는 척했다.라디오를 통해 그는 6.25전쟁이 북한이 선전하는 대로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고, 주체사상에서 선전하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점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눈물 같은 건 전혀 흘리지 않았다.김정일 가정교사 탈락 이후 그는 북한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는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청년기동해설대 대장 노릇도 더는 하기 싫어 도 직맹위원회 창작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1995년부터 북한에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아내도 직장을 잃었다. 출근할 곳이 사라지고 장사를 해야 먹고 사는 삶이 시작되지 아내도 변했다. 남편의 권유하자 한국 라디오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김 씨는 자신의 결심을 근처에 사는 작은 누나에게도 터놓았다. 작은 누나도 오래 전부터 한국 라디오를 들었다. 그의 속셈을 들은 누나 가족도 같이 가자고 의기투합했다.하지만 한집에 모시고 사는 아버지가 걸렸다. 아버지는 천식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해 함께 데리고 떠나기는 무리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났는데, 탈북을 무한정 미룰 수도 없었다.라디오를 통해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소식까지 듣자 마음은 더 다급해졌다. 1998년 설을 쇠자마자 그는 마침내 떠나기로 결단을 내리고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아버지, 저의 가족은 남조선에 가기로 했습니다. 작은 누나 가족도 함께 갈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걸립니다. 이제부터 동생네 집에 가서 사시면 안 될까요.”아버지는 이미 예감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네 결심이 그러하다면 그대로 하라고 지지해 주었다.김 씨는 한국에 오고 나서 자신들이 떠난 지 1년 뒤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남동생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온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통일되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남동생에게 주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다.하지만 2년 전 남동생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날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참 뒤 아내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그만 울어요. 지금 8시간째 울고 있는 거 알아요?”밖을 내다보니 새날이 밝고 있었다. 그는 불효로 우는 자신의 심정을 담아 노래를 작곡했다.오늘도 꿈길을 가네(김성민 작사. 김영남 작곡)그리움의 저 하늘 노을보다 불타는 당신의 그 미소는내 삶의 안식처 내 어린 마음에 이 세상 전부이셨던사무치게 그리운 사랑하는 내 아버지기약없이 떠난 자식 가슴깊이 묻어두고기다리실 당신 그리며 오늘도 꿈길을 가네아픈 매도 들었고 미운 정도 쌓였던 당신의 그 마음은내 삶의 안식처 내 가는 이 길이 고향에 닿아있기를걸음걸음 손잡아 이끄시는 내 아버지고향으로 가는 그 길 마음으로 열어가리못다 드린 사랑 바치며 오늘도 꿈길을 가네 ● 7명이 함께 탈북1998년 1월 21일. 김 씨는 마침내 탈북길에 올랐다. 그와 아내, 8살 아들과 4살 딸. 그리고 작은 누나와 매형, 9살 난 누아의 딸까지 모두 7명이었다.탈북 경로는 신의주를 떠나 양강도 혜산까지 간 뒤 그곳에서 압록강을 넘을 생각이었다. 그와 작은 누나 가족 모두 너무 가난하게 살지 않았던 터라 점차 몰래 처분했던 재산도 달러로 환전해 품속에 두둑하게 챙겼다.떠난 순간부터 사고가 터졌다. 체구가 가장 건장한 김 씨가 일행이 가면서 먹을 쌀을 가득 채운 배낭을 멨다.김 씨는 신의주역에서 일행을 사람들이 빼곡한 기차에 억지로 밀어 넣고 맨 마지막에 열차 승강대에 매달렸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뒤를 돌아보니 젊은 꽃제비들이 쌀 배낭 밑을 면도칼로 짼 뒤 마대에 담고 있었다. 이들은 보통 몇 명씩 함께 움직이는데, 일부러 주변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역할이 있고, 배낭을 찢은 뒤 담는 역할이 있으며, 배낭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배낭끈을 손으로 꽉 잡아당기는 역할이 있었다. 만약 들켜도 여럿이기 때문에 피해자를 때리고 달아나면 그만이었다.졸지에 떠나자마자 식량을 다 잃었다. 그럼에도 돈이 남아 있기에 믿을 구석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강도 희천에 도착해 혜산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려 하니 20일에 한 번씩 다닌다는 것이었다. 일행은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전식당에 짐을 풀었다. 이곳은 국영식당이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종업원들이 먹고 사는 터전이 됐다. 음식도 팔지만, 숙박을 제공하고 1인당 1시간에 북한돈 2원씩 받았다. 일행이 내야 할 돈은 한 시간에 14원, 하루에 336원이었다. 336원은 옥수수 8㎏ 정도 살 수 있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식당에 있으면서 식당 종업원들과 친해졌다. 이들 중 한명의 고향이 자강도 위원군이었다. 만포 아래에 위치한 위원엔 압록강을 막은 댐이 있는데, 압록강 옆 도로는 호수를 끼고 구불구불 길어졌다. 겨울이면 위원 사람들은 얼어붙은 호수를 질러가는데 이럴 때 중국 땅도 경유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듣자 김 씨는 굳이 혜산까지 힘들게 가지 않아도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노선을 변경했다. 언제 올지 모를 혜산행 열차를 포기하고 만포행 열차를 타기로 했다.며칠 만에 들어온 열차는 지붕까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비닐도 쳐있지 않은 열차 창문엔 군인들이 걸터앉아 돈을 준 사람을 안으로 끌어올려주었다. 아이들이 있는 김 씨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고 열차에 탔다.열차 내부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해 일단 타면 서있는 자세조차 바꾸기 어려웠다.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어 생리적 욕구는 선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열차엔 악취가 가득했다. 이들이 타고도 8시간이 지나서야 열차는 서서히 만포로 떠났다.● 심양에 정착하다만포에 도착하자마자 했던 일은 위조 공민증(주민등록증)을 사는 것이었다. 압록강 옆 도로에는 단속 초소들이 많아 외지 공민증으로는 통과할 수 없었다. 당시엔 국경 옆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위조한 공민증도 장마당에서 1000원에 팔렸다. 공민증을 사다가 안전원에게 걸려 끌려갈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마침 안전원이 고향사람이라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위조 공민증 2개를 품고 이들은 위원으로 향했다. 만포에서 위원까지는 70리였는데, 중간에 얼어붙은 호수에 올라가 중국으로 간다는 것이 계획이었다.여러 초소를 어찌어찌해 통과했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인 오후 6시쯤 다시 단속초소와 맞닥뜨렸다. 앳돼 보이는 군인 한 명이 공민증을 보자고 요구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살갑게 다가가 위원 사람이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주자, 그 병사는 총을 옆에 놓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한참을 먹는데, 소대 초소 쪽에서 밥 먹으러 오라는 고함소리가 날아왔다. 6시부터 7시까지 식사 시간이었는데 이때는 경비대원 모두가 철수해 밥 먹으려 간다. 밥이 적으니 교대 식사라는 법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경비가 나오는 7시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김 씨 일행은 군인이 사라지자마자 압록강으로 내려가 얼음 위를 내달렸다. 마침 날이 어두워져 발각되지 않았다. 한참을 내달리니 벌거벗은 북한 민둥산이 아닌 울창한 산이 앞에 나타났다. 중국에 도착한 것이다.일행은 산에 올라가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밤을 꼬박 새고 일어나 주변을 살피니 바로 위에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다. 집에 가서 살피니 젊은 한족이 나무를 패고 있었다.몇 년 동안 열심히 배워둔 중국어가 이때 요긴했다. 북에서 왔으니 좀 재워달라고 하자 한족 청년은 100달러를 요구했다. 다음날 그는 일행을 마을로 데리고 가 조선족 할머니 집으로 안내했다.말이 통하는 노인을 만나니 눈물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할머니는 “김정일을 압록강에 처넣고 오지 왜 그냥 왔냐”며 인민들을 굶겨 죽이는 북한 당국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그 할머니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들은 3일 뒤에 심양에 도착했다.심양에는 찾아갈 사람이 있었다. 신의주에 살 때 한 친척이 무역거래를 했는데, 그 대방이 심양에 살았다. 김 씨는 떠나기 전 그의 주소를 외워두었다.그 사람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자, 잠시 당황했던 그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한국 목사를 찾아 연결했다. 당시 선교로 중국에 파견돼 있던 주계명 목사가 이들을 맞았다. 그는 이들 가족에게 숨어 살 집도 찾아주고, 한국 기업에서 일감도 따올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 미얀마에서 1년3개월 감옥 생활그렇게 심양에 정착한 이들은 3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주 목사가 생활비와 집세, 아이들 학비까지 대주는데다, 어른들이 어느 정도 일도 하니 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 수는 없는 법. 목적지인 한국으로 가려니 길이 없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게 돼 마음도 안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불안한 신분으로 중국에 있을 수는 없었다.김 씨는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지도 한 장에만 의지해 동남아에 가서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면 방법이 생길 것이라 판단했다. 당시엔 동남아나 몽골을 거쳐 한국에 오는 탈북 루트가 없을 때였다. 그만큼 국경 경비도 허술했다. 쿤밍을 경유해 미안먀 북부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돼 구치소로 끌려가게 됐다. 그 지역은 군수, 도지사까지 모두 군인이었다.김 씨는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는 미얀마 북부는 세계 아편 재배의 주요 산지였다. 이곳을 25년 동안 장악하며 한때 미국 헤로인 공급량의 70%를 차지한다는 말이 나왔던 마약왕 쿤사가 1995년에 항복하면서 이곳엔 정부군이 들어왔다.몇 년 뒤부터 쿤사의 잔존 세력이 중국 삼합회와 손을 잡고 다시 골든 트라이앵글을 지배하고 아편을 재배하면서 이곳은 탈북자를 잡아먹는 ‘버뮤다 삼각지대’가 되고 말았다. 극소수 목격자에 따르면 미얀마 북부를 통해 중국을 빠져나오다 범죄조직에 체포된 탈북민은 이곳에서 노예가 됐다. 이들은 깊은 웅덩이에 갇혀 있다가 낮에는 족쇄를 차고 총구 앞에서 아편재배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직접 들어가 조사해 본 사람이 없어 알 수가 없다.김 씨가 체포될 때는 다행히 군부가 일시적으로 북부를 다스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시스템이 제대로 되지 않아 김 씨 가족은 남녀가 따로 갈라져 구치소에서 9개월을 보내야 했다.이들은 중국의 주 목사에게 도와달라고 연락했고, 주 목사가 미얀마 주재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하는 등 여기저기 뛰어다녀봤지만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9개월 뒤 이들은 다시 감옥으로 옮겨가 7개월 남짓을 더 보냈다. 김 씨는 감옥에 갇힌 아이들이 미얀마 말을 알아듣고 군인들과 대화가 되자 큰 불안감을 느꼈다. 이러다가 여기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한국대사관에서 이들을 데리려왔다. 대사관에 연락을 한지 8개월 만이었다. 2002년 5월 마침내 김 씨 가족 7명은 한국에 도착했다.● “선생님을 초빙합니다”2002년 8월 김 씨는 가족과 함께 서울 양천구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모든 탈북민들이 그러하듯이 김 씨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이었다.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우유대리점에 취직해 6개월 동안 일했다.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그는 북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피아노를 쳤던 경험을 되살려 피아노 수리공이 되려고 조율학원에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낙원악기상가 피아노대리점에 취직했다.악기상가에는 그가 구경도 못했던 악기들이 즐비했다. 어느 날 아코디언 매장에 들려 연습 삼아 연주를 했는데, 여사장이 그의 연주를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선생님. 그 정도 실력이면 피아노 수리하지 말고 아코디언만 가르쳐줘도 돈을 벌 수 있어요.”그 말에 희망을 가진 김 씨는 한국 아코디언 실태를 연구해보기 시작했다. 그가 봤을 때 한국 아코디언의 수준은 북한의 1960년대 수준보다 못했다. 교본도 전국에 단 한 권밖에 없었다.“한국은 다 발전된 줄 알았는데 아코디언은 정말 인기가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아코디언이란 시장을 한번 개척해보자.”그는 큰맘을 먹고 6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이탈리아제 아코디언을 샀다. 두 달 정도 열심히 훈련을 하니 10여년 전 전성기 시절의 기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저기 광고를 해 아코디언 교습을 시작한다고 알렸다.열심히 노력한 끝에 두세 명의 학생이 아코디언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그의 연주를 찍어 자주 인터넷에 올렸다.2005년 어느 날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여기는 뮤직필드라는 연주 강의 사이트인데요. 선생님을 초빙하고 싶어 전화했습니다.”그것이 김영남을 한국에 알리는 시작이었다. 뮤직필드에서 김 씨는 76개의 아코디언 연주 강의를 제작했다. 강의를 하려니 교본이 없어, 스스로 각종 곡을 아코디언 연주에 맞게 편곡해야 했다.각각 100곡씩 수록된 김영남 아코디언 명곡집 1,2권이 그렇게 나왔다. 그걸 시작으로 그는 수백 곡의 가요를 아코디언에 맞춰 편곡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9권의 편곡집을 냈다.뮤직필드를 보고 전국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그에게 아코디언을 배운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른다.● 성공한 인생아코디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면서 그의 목표도 점점 높아졌다. 2006년 그는 북에서 25명으로 구성된 도급 청년예술단을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 2006년 평양예술단을 만들었다. 이듬해엔 사회적 기업인 NK예총도 만들었다.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그는 18명의 단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북한 예술을 알렸다. 동시에 그와 가족들도 한국에 잘 정착했다. 서울에 번듯한 집도 장만했고, 아내는 재가요양복지센터 센터장이 돼 노인복지에 전념하고 있다. 아들도 올해 경력 7년차의 회사원이 돼 성실하게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됐고, 딸도 공기업의 정규직 조리사로 성장했다.작은 누나 가족은 2010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탈북민 신분이 아닌 한국인 신분으로 당당하게 영주권을 받고 현지에 잘 정착했다. 좋아하는 음악으로 잘 정착했지만, 김 씨의 마음에는 늘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있었다.“어찌되다 보니 아코디언 연주가로 알려졌지만, 실은 작곡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코로나로 활동이 중단되자 그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꿈, 작곡에 매진할 시기라고 판단한 그는 예술단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그렇게 만든 6개의 곡으로 올해 6월 제1회 김영남 음악회를 열었다. 탈북 예술인들이 아닌 서울대 음악대학과 유수의 해외 음악 대학을 나온 인재들과 함께 연 음악회였다.그는 죽을 때까지 품고 살 3가지 꿈이 있다고 말했다.“우선 죽을 때까지 아코디언 편곡을 계속 할 겁니다. 한국 아코디언의 기술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이는 그가 지금도 종로에 허름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딴 아코디언 학원을 유지하며 제자들을 키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칠맛 나는 김영남만의 주법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 수많이 찾아볼 수 있다.“두 번째 목표는 세계가 인정하는 곡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제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탈북자라는 신분을 넘어 세계에 대한민국 음악을 알리는 당당한 음악인이 되고 싶습니다.”그것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음악회를 연 이유였다. 앞으로 그는 음악회를 2회, 3회로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세 번째 목표는 탈북민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정말 행복했고, 후회가 없었고, 또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탈북민은 정착에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저는 잘 살았지만 저만 잘 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도우면서 살고 싶습니다.”유치원 시절부터 김 씨는 해외에 음악 유학을 떠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삶을 돌아보면 그는 K팝의 원조 대한민국에 유학이 아닌, 음악인으로 당당히 정착했다. 그의 인생은 성공이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폭염 속에도 통일부엔 칼바람이 분다. 소속 공무원의 4분의 1을 줄일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등 내부는 이미 꽁꽁 얼어붙었다.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통일부를 없애려는 정부조직법은 통과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통일부는 존치보다는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통일부가 어떤 일을 하는가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통일을 하지 말자는 여론이 해마다 높아지기 때문이다. 통일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통일 의식 조사에서 ‘선호하는 남북의 미래상’으로 통일된 단일국가를 선택한 비율은 17%였다.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2국가를 선호한 사람은 52%였다. 또 응답자 중 17.6%만 통일 비용 조달을 위한 세금 인상에 찬성했고, 9.7%만 통일을 위해 현재보다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감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만큼 돈 문제는 현실적이고 민감하다. 아마 올해 조사에선 분단을 선호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눈물 흘리던 세대는 이제 소멸됐다고 봐도 된다. 여론을 중시하는 정치인이 국민이 원하지 않는 통일을 굳이 추진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국민 의식이 잘못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합리적이다. 가족, 친척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빡빡한 현실에서 얼굴도 보지 못한 북한 동포를 위해 내 지갑을 선뜻 열기는 어렵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소말리아와 동일하게 빈곤국가로 분류된 북한은 얼마나 도와줘야 잘살지 가늠조차 안 된다. 여론이 이렇게 바뀌는데도 한국의 통일교육은 여전히 쌍팔년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학교 통일교육안을 보면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을 극찬한다. 이건 교육을 빙자해 아이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다. 지하자원이 풍부하면 북한이 저 꼴로 살 리 만무하다. 통일돼 해외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진 세상에서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개성공단처럼 150달러 남짓 월급을 받으며 일할까. 통일되면 처음은 힘들지만 나중엔 훨씬 더 이득이란 논리도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란 성경 구절과 다를 바 없다. 망할지 창대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이쯤 되면 통일교육을 하지 말자는 말이냐는 반론도 나올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통일교육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화해야 한다. 다만 이젠 통일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통일 의식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통일은 국민의 소원이나 의무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통일이 된다면 그건 아마 대다수 국민들에겐 소원 성취가 아니라 ‘원치 않은 사고’일 수 있다. 문제는 이 사고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란 점이다. 준비 없이 당할 때 그 재앙은 상상할 수 없이 파괴적일 것이다. 당장 내년에 북한 체제가 붕괴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에게 대책이 있는가.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휴전선을 뚫고 내려올 때 우리가 그걸 막을 능력이 있는가. 한반도 정세 불안으로 한국에 투자했던 외국 자본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 우리는 외환위기 사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불행한 시절을 맞게 될 것이다. 북한 같은 반인륜적 퇴행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다만 사람이 죽는 것은 확실하되 언제 죽는지 알 수 없듯이, 김정은이 언제 죽고 북한 체제는 언제 붕괴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웃 나라 일본은 언제 닥쳐올지 모를 대지진의 공포를 안고 산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말, 한 번 오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통일이란 공포를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통일교육과 준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 통일은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 됐다. 사고에 대비해 보험을 드는 자세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통일을 하지 말자는 여론이 높은 젊은 세대도 더는 통일에 무관심해질 수가 없다. 북한 체제의 붕괴가 현실화되면 경제활동을 하는 젊은 세대야말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야 남북이 함께 망하지 않을지, 어떻게 해야 북한 붕괴의 충격을 최소화할지를 연구해야 한다. 그게 21세기의 통일 준비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삼성카드가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건강 특화용 카드 ‘삼성 iD VITA 카드’를 출시했다. 이 카드는 의료비, 보험, 헬스·뷰티 등 건강 특화 영역에서 높은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할인점, 이동통신 등 일상 영역에서도 혜택을 제공한다. ‘삼성 iD VITA 카드’의 가장 큰 장점은 병원, 의원, 약국 등 의료 영역에서 20% 결제일 할인을 제공한다는 것. 전월 실적에 따라 최대 2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보험과 헬스·뷰티 분야에선 생명보험, 손해보험 등 보험 이용 시 10% 할인 혜택을 월 최대 1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아모레몰, 초록마을, 삼성카드 쇼핑의 ‘헬스케어관’을 이용하는 고객에게도 20% 할인 혜택을 월 최대 1만원까지 제공한다. 일상에서도 해외 가맹점 및 해외 직접구매 건에 대해 월 이용금액 관계없이 1%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또 할인점, 이동통신·렌털·멤버십에서 10%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할인점 10% 할인 혜택은 이마트, 트레이더스홀세일클럽, 롯데마트, 홈플러스, 농협하나로마트 이용 시 제공되며, 전월 이용금액에 따라 월 최대 1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이동통신, 코웨이, SK매직, 웰스 등의 렌털, 쿠팡 로켓와우 멤버십, 네이버 플러스 멤버십 정기 결제 시에도 10% 할인을 월 최대 5000원까지 받을 수 있다. 삼성카드는 ‘삼성 iD VITA카드’ 출시를 기념해 삼성카드 쇼핑 홈페이지에 ‘헬스케어관’을 구축했다. 건강보조식품, 건강보조기구 등 고객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물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한다. ‘삼성 iD VITA카드’ 연회비는 2만 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농협은 팜스테이와 ‘국민과 함께하는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침체돼 가고 있는 농촌을 살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올해로 24년차를 맞고 있는 팜스테이 사업은 전국에 283개 마을이 참여하면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2020년부터 시작한 ‘국민과 함께 하는 농촌 봉사활동’은 매년 참가자 숫자가 꾸준히 늘어 지난해 5만 명을 돌파했다.팜스테이는 국민들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팜스테이는 농가(Farm)에 머무는(Stay) 여행을 의미한다. 농가 또는 농촌 지역에서 숙식하며 농산물을 수확하고 시골 문화도 체험하는 일종의 ‘농촌 체험 여행 프로그램’이다. 아이들과 함께 인근의 계곡이나 강에서 물놀이와 레포츠를 즐길 수도 있다.팜스테이, 코로나 딛고 재도약팜스테이사업은 도시와 농촌이 함께하는 ‘도농상생’을 위한 취지에서 1999년 농협에서 처음 시작했고, 현재 전국 283개 팜스테이 마을이 운영 중이다. 이용객은 410만여 명을 돌파하는 등 지속적 증가 추세였으나 최근 코로나 여파로 이용객이 크게 줄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농협은 코로나 종식 이후 움츠러들었던 여행 수요가 크게 늘어 올해부터 팜스테이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인플레이션과 높아진 항공권 가격에 해외여행 경비도 만만치 않게 들고, 성수기 주요 피서지의 숙박시설도 동이 나면서 북적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팜스테이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의 푸근함과 함께 고요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농촌 팜스테이다.팜스테이 마을에서 숙박하면 크게 일곱 가지 체험이 가능하다. 인근의 계곡, 강, 해변, 섬 등을 찾는 생태문화관광, 전통 주거방식인 황토온돌방 숙박과 현지에서 즐길 수 있는 농산물 직거래, 벼 베기, 옥수수 따기 등 영농 체험, 치즈 만들기, 떡메치기 등 음식 체험, 활쏘기, 널뛰기 등 전통 놀이 체험, 물고기 잡기, 뗏목 타기 등 야외 체험, 장승 만들기, 솟대 만들기 등 전통 공예 체험이다. 마을마다 다른 자연환경과 지역문화를 가진 만큼 할 수 있는 체험도 각각 달라 선택하는 재미가 있다.농협은 엄격한 과정을 거쳐 팜스테이 마을을 선정하고 청결한 위생 관리에 힘을 쏟고 있다. 팜스테이 마을로 선정되려면 주민 4분의1 이상이 동의하고 농가 5가구 이상이 참여해야 하며 운영 실무자는 농촌관광 관련 교육을 수료해야 한다. 친환경 농법을 통해 우수 농산물을 재배해야 하며 방문객을 맞을 편의시설과 농촌·농업 체험 프로그램도 갖춰야 한다.팜스테이 마을들은 휴가철 성수기에 찾아도 바가지요금을 부르지 않으며 황토 온돌로 이뤄진 민박집부터 한옥, 게스트하우스, 펜션 등 숙소 형태도 다양하다. 농협 팜스테이 홈페이지에서 각 마을의 위치와 특징, 체험 프로그램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사전 예약은 필수다.‘돌아온 농활’은 대학생에게 인기농협은 또 ‘돌아온 농활’이라는 이름으로 농촌과 젊은 인력을 연결시키는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이미 농협은 2020년에 ‘국민과 함께하는 농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올해엔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단절된 대학문화 중 하나인 ‘여름방학 농촌봉사활동’을 다시 살리고, 미래 세대에게 농업·농촌을 알린다는 취지에서 ‘돌아온 농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국민과 함께하는 농촌봉사활동은 영농인력 부족 등 어려움에 처한 농촌과 농업인을 돕기 위해 시작됐다. 일반인에게 직접 농촌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농업·농촌 가치 확산에 기여할 수 있게 해준다. 2020년에 약 1만8000명이 참여했고, 2021년엔 3만9000명, 지난해엔 5만 명으로 참가 인원이 늘고 있다. 코로나가 끝난 올해는 참여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농협은 농가 선정 및 활동계획 수립을 통해 농촌 일손 돕기를 하고 싶어도 기회나 창구가 없었던 일반인들에게 통로를 만들어주고 있다. 또 전국 네트워크망을 활용하여 일손이 필요한 곳과 봉사활동을 희망하는 수요처를 원활하게 이어주며, 활동에 필요한 교통수단, 중식비, 단체 여행자 보험 등 지원을 통해 참여자가 하루 온전히 농촌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돌아온 농활’은 대학생들에게 농업·농촌을 알린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이 사업은 여름방학을 맞이한 대학생들이 일정 기간 농촌마을에 머물며 농업인의 일손을 돕고 주민들과 교류활동을 통해 농업·농촌에 대해 배우고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느껴보는 것이 취지이다. 대학생들은 직접 3∼5일간 농촌마을에 머물며 작물수확, 환경정비 등 농작업을 돕고 함께 식사하면서 농업·농촌의 가치를 느끼고 농업인과 소통하는 기회를 가진다. 대학생들은 단체 활동을 하며 자립심과 협동심을 키울 수 있으며 자원봉사 실적도 얻게 된다. 농협은 제반 활동에 드는 예산도 일부 지원한다. 올해 경희대, 동국대, 성균관대 3개교가 시범사업에 참여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6·25전쟁 정전 협정일인 27일 대규모 열병식을 준비 중이다. 북한은 이날을 ‘전승절’이라고 부르며 공휴일로 지정했다. 수백만 동족을 죽게 하고, 국토를 황폐화시킨 전범이 선제공격을 하고 이기지도 못한 전쟁을 승리했다고 자축한다. 어이가 없지만 북한은 조작이 아닌 게 오히려 이상한 곳이다. 사흘 뒤면 김일성광장을 지나는 고물 군용 장비를 향해 만세를 외치는 눈물 글썽한 평양 시민들을 화면에 띄워놓고, 남녀 방송원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무적의 강군’ ‘최강의 정신력’을 몇 시간 동안 찬양할 것이다. 쭉정이가 허세는 더 지독하다. 세계에서 매년 열병식을 하는 곳은 북한과 러시아인데, 북한은 올해만 열병식을 두 번째 한다. 가히 ‘열병식용 군대’라 할 수 있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은 그래도 등장하는 무기 스펙이 북한보다 월등히 앞선다. 세계 군사력 2위라는 후광까지 더해져 러시아군은 정말 강한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전쟁이 터지니 러시아군이 얼마나 허약한지 세계가 알게 됐다. 지독한 부패가 수십 년 동안 파먹은 러시아군은 신병이 군모와 군화, 방탄조끼, 배낭, 침낭, 상비약 등 필수 물품을 돈 주고 구입해야 한다. 유효 기간이 20년은 지난 전투식량을 들고 참전한 군인들은 약탈을 하면서 서로 총을 겨누고, 전리품을 차에 실어 러시아로 보낸다. 군대가 아니라 마피아다. 국방비 상당 부분이 호화 요트 구입에 사용됐다고 전직 외교장관이 실토할 정도다. 러시아가 자랑해 온 최신 무기들은 뚜껑을 여니 ‘뻥스펙’이었다. 누구도 못 막는다며 장담하던 극초음속 미사일 ‘킨잘’은 쏘는 족족 미국산 패트리엇 미사일에 요격된다. 흑해함대의 기함 ‘모스크바’ 순양함은 순항미사일 두 발에 침몰한다. 세계 최강이라며 열병식까지 나왔던 T-14 전차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러시아가 이 정도면 북한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부정부패는 북한이 단연 세계 최강이다. 군인들이 전차 배터리를 가정용 배터리로 사용하고, 빼돌린 항공유가 등잔 연료로 팔린 게 30년이 넘었다. 배고픈 군인들의 약탈은 일상화된 지 오래다. 장비가 고물이면 정신력은 뛰어날까. 국방장관의 아들딸이 전쟁 중에 두바이에서 돈을 쓰느라 정신이 없는 러시아는 이런 측면에서도 북한과 유사하다. 변방의 가난한 사람들, 심지어 죄수까지 전선에 투입되지만, 핵심 계층이 많이 사는 모스크바엔 징집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북한으로 비유하면 평양은 빼고 삼수갑산 산골에서 농사짓던 사람들만 모아 전선에 보내는 식이다. 변방은 여론이 악화돼 봐야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정부패로 사라진 국방비 공백을 가난한 집 자식들이 목숨을 갈아 넣어 메운다. 북한은 군 장성은 물론 고위 간부들의 자녀들은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민들은 다 아는 상식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다. 인민은 수십만 명씩 굶어 죽어도 지도자의 자식들은 해외에서 호화롭게 사는 게 북한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이후 인민은 밀수도 못 하게 꽁꽁 국경을 막아놓고, 김정은은 호화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세심하게 사 간다. 북-중 무역통계를 보면 ‘코코아가 들어 있지 않은 사탕 2kg, 피아노 1대, 접이식 의자 5개’ 등으로 김 씨 일가를 위한 사치품은 핀셋처럼 집어간다. 이러면서 김정은은 인민에겐 “설탕, 식용유, 조미료가 없다고 불평하지 마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런 체제를 위해 누가 목숨을 바치겠는가. 허세는 상대를 얕잡아 봐야 완성된다. 미군은 6·25전쟁 때 142명의 장성 아들이 참전해 이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의무 입대가 아니라서 굳이 참전하지 않아도 되지만, 명예를 걸고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은 연인원 180만 명에 사상자 비율은 약 8%였다. 미 장성 아들들의 사상 비율은 일반 병사의 3배 이상인 25%였다. 이런 미군을 북한은 겁쟁이들뿐이라고 교육한다. 북한을 보면 한 세기 전 중국 대문호 루쉰이 묘사한 아큐식 정신승리법을 국민교육헌장으로 도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 열병식에서 방송원이 떠드는 정신력은 현장 시찰도 귀찮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회의장에 나타나는 김정은에게서 먼저 보고 싶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엄마, 딱 한 번이라도 밥을 실컷 먹고 싶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린 딸이 부르튼 입술을 애써 놀리며 말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인 것을 서로가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은 비수가 돼 엄마의 가슴 속 깊이 아픔으로 박혔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너를 위해 엄마가 목숨 한 번 걸어보지 못했구나.” 엄마는 가족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12년 뒤인 2014년, 엄마는 한국소설가협회가 주관하는 ‘제41회 한국소설 신인상’에 당선됐다. 탈북민이 한국 문학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선작 제목은 ‘밥’이었다. 그가 쓴 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자서전이었다. 20세기 초반 최서해의 ‘탈출기’가 우리 민족의 비참한 삶을 고발하는 빈궁 문학의 대표작으로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면, 단편소설 ‘밥’은 북한 실상을 고발하는 21세기 ‘탈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탈출기는 완성형이 아니다. 단편소설 밥은 10년 전 북한을 탈출한 모녀가 한국에서 배불리 먹고 살면서 북에 남겨진 남편과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내용이다. 딸은 밥알을 씹을 때마다 행복에 겨워 “밥이 참 맛있다”고 감격한다. 그리고 북에 사는 아버지에게 함께 와서 살자고 연락을 하지만, 아버지는 북한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한다. 비참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장군님을 배신할 수 없다며 울먹이는 아버지는 끝내 지옥의 땅에 남았다. 이들은 이산의 아픔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엄마는 이후 연달아 소설과 시집을 발표했다. 2019년엔 서울시인협회 추천신인상 공모전에 ‘장마당에서’ 외 4편의 시까지 당선되면서 작가와 시인 자격까지 다 공식 획득했다. 김정애 국제PEN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운명 태어날 때 자기 운명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김정애 씨처럼 갑자기 운명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처절한 고통을 딛고 다시 부활한 사람은 많지 않다. 북한에선 ‘출신성분이 좋다, 나쁘다’를 ‘토대가 좋다, 나쁘다’라고 표현한다. 1968년 1월 2일 김 씨가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했을 때 그의 집은 토대가 매우 좋은 집이었다. 아버지 쪽도 좋았지만, 어머니 쪽은 피살자 가족으로 분류됐다. 6·25전쟁 때 가족이 국군이나 치안대에게 학살당한 사람을 피살자 가족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전쟁 직전 황해남도 연안군 보건부장 겸 군 병원 원장이었다. 남동생 두 명도 같은 병원에서 의사로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한동안 병원을 떠나지 못했던 아버지 3형제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국군에 의해 끌려갔다. 국군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두 동생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아버지의 시신은 없었지만, 북한은 3형제가 함께 살해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게 김씨의 외할아버지는 피살자가 된 것이다. 피살자 가족은 노동당이 맡아서 키워야 하는 대상이다. 김 씨의 어머니는 평양경공업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 견본관 식품실장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김 씨가 고등학교 졸업을 6개월 앞두고 김형직사범대학에 입학해 작가가 될 꿈을 꾸고 있던 때 갑자기 토대가 바뀌었다. 외할아버지가 피살된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월남했다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졸지에 김 씨는 반동가족에 해당하는 월남자 가족이 됐다. 월남자 가족은 대학에 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때부터 김 씨의 운명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갖 가난에 노출돼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김 씨는 한국에 온 뒤 북에 있을 때 그토록 저주했던 외할아버지부터 찾았다. 그런데 남쪽에는 외할아버지의 흔적도 없었다. 목격자라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 때문에 김 씨와 가족의 운명은 졸지에 바뀌었다. 바뀐 운명은 김 씨를 탈북 여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빠다를 먹던 아이 김 씨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했다. 아버지는 외화벌이 업체 소속으로 함경북도에 단 4대만 있는 15톤짜리 러시아제 트럭 운전수였다. 북한에서 물자를 나르는 운전수는 특권이 대단하다. 물류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씩 많은 짐을 날라주면 사례비가 두둑하다. 어머니가 다니는 도 견본관은 도에서 나오는 각종 상품을 분석해 유해성 여부를 판단한 뒤 생산허가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특히 식품실장은 도내에서 생산되는 식료품공장들의 당과류, 술, 장 등 모든 식품의 판매 승인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견본관 식품실 사람들은 샘플로 들어온 식품 실험을 마치면 폐기하지 않고 나눠가졌다. 이런 부모를 둔 덕분에 김 씨의 집은 동네에서 제일 잘 살았다. 집에 각종 육류와 당과류가 넘쳤다. 인민반 회의에 가면 “왜 정애네 집 뜨물(음식물 쓰레기)을 인민반장만 가져가냐”고 싸움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그의 집 뜨물엔 비계가 떠다녔다. 인민반장은 김 씨 집에 특혜를 주는 대신 그 뜨물을 받아다 돼지를 키웠다. 김 씨는 80년대 초반에 학교에 가기 전 밥을 ‘빠다(버터)’에 비벼 먹고 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식단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빠다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도 못할 때였다. 학교에서도 김 씨는 단연 인기였다. 월동 준비할 때면 아버지가 학교에 석탄 대여섯 트럭씩 싣고 왔다. 북한에선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어마어마한 후원이었다. 그 덕분에 김 씨는 학교에서 분단위원장, 초급단체 위원장 등의 학생 최고 간부를 맡아 부럼 없는 생활을 했다.● 문학소조원이 되다 13살 때 문학선생님이 불렀다. “정애야, 내가 좋은 곳에 추천해줄 테니 거기 가봐. 너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잘 할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이 추천한 곳은 도 작가동맹 작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작가 양성 프로그램인 문학소조였다. 글을 잘 쓰는 학생들을 선발해 각종 창작기법과 시, 소설, 수필, 수기, 기행문 등을 쓰는 창작기법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여기서 우수한 대상은 ‘전국글짓기현상응모전’에 출전하게 된다. 당선되면 도 작가동맹은 당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구조였다. 김 씨는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문학소조라고 불리는 작가 양성반에 갔다. 학교에선 2명, 구역(구)에선 모두 20명이 선발됐는데, 얼마 뒤엔 8명이 그만두고 12명만 남았다. 김 씨는 책 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부친은 출장 갔다올 때마다 새로 나온 책을 구해서 집에 가져왔는데, 그 덕분에 그는 북한에서 번역 출판된 외국소설은 거의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읽는 것과 직접 쓰는 것은 달랐다. 주제는 어떻게 잡고, 종자는 어떻게 만들며, 줄거리는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지 등의 이론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만두려 했지만, 부친이 말렸다. 문학소조 경력이면 작가를 양성하는 김형직사범대학 국문학부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방과 후엔 문학소조에 다니는 생활이 반복됐다. 몇 년 뒤엔 아예 몇 달씩 학교에 가지 않는 때도 있었다.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이 다가오면 12월부터 등록된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작품을 쓰게 했다. 가을엔 또 9월 9일 북한 건국절,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기념일을 맞아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김 씨는 점점 글 쓰는 기계가 되어갔다. 대신 수학과 물리 등 학교에서 배워주는 과목은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북한식 ‘문학급제’ 시험 북한에서 작가동맹 회원이 되려면 나름 기준이 엄격하다. 작가가 되기 전 거쳐야 하는 후보 작가가 되는 것부터 하늘의 별 따기였다. 김일성대나 김형직사범대 국문학과를 나오면 후보 작가로 인정해준다. 그러나 그런 대학에 가지 못한 일반인은 후보 작가가 되기 전 또 문학통신원 자격을 얻어야 한다. 문학통신원은 중앙지에 작품이 6번 실려야 한다. 문학통신원이 되면 월마다 글을 써서 내는 과제가 있다. 단편소설이나 시를 써서 인정받을 만한 출판 경력을 쌓아야 심사를 거쳐 후보 작가로 인정해준다. 작가가 됐다고 해서 별다른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후보 작가쯤 돼야 학교 선생이 되거나 출판사에 자리를 얻는다. 작가가 된다고 해도 처지가 크게 달라지진 않지만, 그 명예마저 잡겠다고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다. 북한은 당시 1년에 한 번씩 같은 날짜에 각 도에서 문학경연을 열었다. 김 씨처럼 학생 문학 소조원부터 문학통신원을 지망하는 군인, 대학생, 사무원, 노동자, 농민 등 어른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주어진 주제를 놓고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써서 우수작을 가려내는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흡사한 시스템이었다. 김 씨도 선발되어 중학생 자격으로 도 글짓기현상응모전(문학경연)에 나갔다. 이것도 원하면 누구나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문학소조에서 5명만 선발돼 내보냈다. ‘제철소에 대한 수필을 쓰시오’, ‘농장에 대한 기행문을 쓰시오’라는 식으로 주제가 나오면 참가자들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그동안 연습한대로 열심히 작품을 써내려갔다. 응모전에 참가한 김 씨는 번번히 입선하지 못했다. 사실 이런 문학경연도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 씨도 문학소조 시절 자기의 창작물을 뺏긴 적이 있다. 어느 날 학생잡지에 실린 시를 보니 제목과 단어 몇 개만 바뀌었을 뿐 분명 자신이 쓴 것인데, 발표자 이름은 높은 간부집 자식의 이름으로 돼 있었다. 그들을 가르치는 작가가 김 씨의 시를 빼돌려 간부에게 아부를 한 것이었다. 그때 그는 문학소조를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부모들이 하도 목표로 삼은 김형직사범대에 가려면 참아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물거품이 된 꿈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학교사가 되려던 김 씨의 꿈은 중학교 졸업을 반 년 앞두고 깨졌다. 신분 재조사에서 갑자기 외할아버지 신원이 피살자에서 월남자로 바뀌면서 그는 대학에 갈 수가 없게 됐다. 이런 성분이면 교사는 고사하고 유치원 선생도 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식품실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에 대해 그가 느낀 감정은 원망이 아니었다. 증오였다. 수령과 당을 찬양하는 글쓰기를 배우며 세뇌된 그에겐 북한 당국에 대한 원망이 조금도 없었다. 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정무원 돌격대에 자원 입대했다. 월남자 가족이라는 ‘죄’를 씻고 당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선 자신이 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돌격대에서 노동당원이 되는 것이 그의 새로운 목표였다. 그는 문학소조 경력을 인정받아 돌격대 직관원이 됐다. 직관원은 돌격대의 성과를 포스터로 크게 써서 속보로 알리는 자리였는데, 글도 잘 써야 했고 그림도 잘 그려야 했다. 그가 속한 돌격대는 이후엔 무산광산 광부주택, 청진 주재 러시아영사관 등의 도내 공공건설을 했다. 그러나 노동당에 입당하려는 꿈은 시간이 흐를수록 허망하게 느껴졌다. 돌격대에서 10년 넘게 일해 30세가 다 되도록 입당을 못한 노처녀가 부지기수였다. 절망한 그에게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농촌 출신 소대장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김일성의 접견자라고 자랑하며 자신과 결혼하면 출신성분이 바뀔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북한에선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몇 분 이상 만난 사람을 접견자라고 한다. 접견자가 되면 당국에서 혜택을 준다고 했다. 그때 김 씨는 여러 가지로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당의 꿈은 멀어지는데다, 출신성분이 바뀐 부모가 계속 싸워 가정적으로도 파탄지경에서 별거를 하고 있었다. 자포자기 심정이 된 그는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었고, 접견자 가족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을 세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살에 그는 가족이 반대하는 결혼을 선택했다.● 구박받던 도시 며느리 결혼 후 돌격대에서 제대하고, 시집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선택이 최악이었음을 깨달았다. 시집은 청진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이었는데, 그 집에는 70세 넘은 시어머니와 5세 정신연령의 지체장애 시형이 살았다. 집안에 낡은 세수수건조차 1개밖에 없었고, 양말은 10번씩 덧대 기워서 가죽 같은 것을 신고 다녔다. 쌀독은 바닥이 드러나 텅텅 비어 있었다. 접견자 가족이 되면 성분이 바뀐다는 말도 잘못 안 것이었다. 남편의 아버지가 오래 전에 현장시찰을 나온 김일성을 만나 따라다닌 것은 사실이었지만, 접견자 혜택은 장남에게만 부여됐다. 장남은 대학에 갈 수 있고, 간부도 될 수 있었다. 남편은 8형제 중 일곱째라 접견자 혜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시어머니의 지청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농촌에는 튼튼한 여자가 필요한데 어디서 불도 지필 줄 모르고, 잡초도 구분하지 못하는 가냘픈 어린 도시 여자를 데려왔냐며 늘 불만이었다. 자기 집은 접견자 집안인데, 며느리는 월남자 집안이라며 토대 타령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북한은 이혼을 잘 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극히 희박한 이혼이라는 것을 한다고 해도, 이혼녀의 신세는 병자호란 이후 환향녀 신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결혼 이후 남편은 돌격대를 따라 늘 외지를 나돌았다. 결혼 초기엔 평양시 광복거리 건설에 동원돼 1년에 한두 번씩 집에 왔다. 그런 와중에 딸이 태어났다. 뒤따라 아들도 태어났지만, 아플 때 약이 없어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얼마 안 돼 다시 아들이 태어났다. 집안을 먹여 살리는 것이 그의 몫이 됐다. 손에 피멍이 들도록 처음 해보는 농사일에 적응했다. 심지어 5세 지능의 시형을 씻기고 머리를 손질하고 수염을 밀어주는 것까지 그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도움도 받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직장에서 쫓겨난데 이어 아버지까지 간경변으로 쓰러져 운전기사를 그만뒀다. 그의 친정집도 급속히 가세가 기울어졌다. 가뜩이나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살고 있던 차에 1990년대 중반의 엄혹한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풀을 뜯어 먹었다. 잡초도 구분하지 못하던 그는 나중에 산에서 나는 모든 풀에 대해 전문가가 됐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이때 시형도 굶어죽었다. 정상적인 사람도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장애인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열 살을 갓 넘긴 딸이 엄마 품에 안기며 말했다. “엄마, 딱 한 번만이라도 밥을 실컷 먹고 싶어.”● 강 너머 마주친 신기한 세상 김 씨는 그런 삶을 더는 견딜 수가 없었고 탈북하기로 결심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도처에서 탈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시골에 사는 그도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엄마 구실 못하는 내가 살아서 무엇하랴. 꼭 중국에 가서 가족을 살리리라.” 김 씨는 딸과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집을 나섰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선을 찾아 중국으로 무사히 넘어가는데 성공했다. 김 씨는 중국 땅에 처음 들어서던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강을 넘으니 앞에 무연한 옥수수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비쩍 말라 이삭을 겨우 맺는 북한 옥수수에 비해 중국 옥수수는 크기도 두 배 이상 컸다. 한 그루에 그런 이삭이 두 개나 달렸다. 강을 넘느라 배가 고픈 그는 옥수수를 따려 했다. 그런데 중국에 오자마자 도둑이 되긴 싫었다. 주인을 찾아 밭을 헤맸지만, 그 큰 밭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북한 같으면 엉덩이만한 땅도 남이 훔쳐갈세라 가족들이 돌아가며 밤낮으로 경비를 섰는데, 중국은 그 큰 밭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옥수수 밭을 지나가니 이번엔 과수원이 펼쳐졌다. 사과, 배가 잔뜩 달린 가지가 땅에 늘어져 있었다. 땅에도 떨어진 과일이 가득했다. 신기하게도 과수원도 경비가 없었다. 그는 땅에 떨어진 과일을 주워먹었다. 강 하나를 두고 이렇게 판이하게 차이 나는 세상이 존재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런 땅을 옆에 두고 북에서 굶었던 시절이 너무나 억울했다. 아니, 너무 억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외딴집을 발견하고 도움을 구하러 들어갔다. 노부부가 살았다. 그를 보더니 “아이고, 딴 사람들은 온지 오랜데 왜 이제야 왔냐”고 했다. “아니, 처음 본 사람에게 왜 이리 잘해주지?” 그 땅에 사는 사람도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밥을 먹자마자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노부부가 그새 다시 밥상을 차려 내왔다. 상에서 돼지고기, 소고기가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너무 굶어서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김 씨는 밥상 아래에서 다리를 꼬집어봤다. 아픔이 느껴졌다. 현실이었다. 밥을 먹고 노부부가 거봉을 갖고 왔는데, 김 씨는 그렇게 큰 포도를 본 적이 없었다. “왜 장난감을 씻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부부가 그걸 뚝뚝 따서 입에 넣었다. “세상에 이런 과일도 있구나….”● 소원을 이룬 날 노부부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찾았다.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돼지축사나 건설현장, 농장 같은 곳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처음 탈북할 때는 돈을 벌어 돌아가려고 했지만, 중국에 와보니 그럴 생각이 없어졌다. 이렇게 배부르게 사는 나라가 있는데, 아이들도 이런 곳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뒤 그는 다시 북에 들어갔다. 남편은 굶어죽어도 혁명가를 부르다 죽을 위인이었다. 남편에게 탈북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아이들을 몰래 데리고 나와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직후 일하면서 안면을 익혔던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탈북 스토리를 알고 있던 사장은 산속 움막에 소머리 하나를 들고 왔다. 밥 한 번 실컷 먹는 게 소원이던 딸은 16살에 그날 처음으로 배를 채워봤다. 밥이 아닌 소고기로. 북한에 살 때 고기를 먹여본 적이 한 두 번은 있었지만, 가난한 살림에 기껏 한두 점이나 먹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소고기는 구경도 못했다. 김 씨는 아이들이 먹는 것을 보고 놀랐다. 삐쩍 마른 아이들이 끝이 없이 먹고 또 먹는 것이었다. 어디로 저 많은 고기가 사라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소머리 하나가 거의 사라질 즈음 마침내 아이들이 손을 멈췄다. “엄마, 지금 우리 목젖까지 고기가 찼어.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처음 먹어봐.”● 목사를 감동시킨 일기 아이들까지 데리고 연변에서 머무르기는 너무 위험했다. 김 씨는 2003년 청도로 이동했다. 거기서 또 일감을 찾아 닥치는 대로 일했다. 청도에선 한인 교회도 찾아갔다. 목사가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여러 가지로 도와도주었다. 농사도 짓고, 파출부도 하고 때론 돼지 300마리를 혼자 키우기도 했다.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어 좋았지만 늘 불안한 처지였다. 중국에서 김 씨는 북한에서 쓰던 ‘당정책 학습노트’만한 공책을 하나 구했다. 북한엔 당정책 교육 때 받아 적는 ‘당정책 학습록’이라는 A4 크기에 200매가 되는 두툼한 노트가 정해져 있다. 그 책에 짬이 날 때마다 자기 이야기를 적었다. 중국에서 경험한 놀라운 소감과 자신의 심정은 물론이고 틈틈이 수십 편의 자작시도 썼다. 북에 있을 때는 글쓰기가 그렇게 싫었는데, 왜 중국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하게 됐는지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몸에 밴 글쓰기 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매일 있었던 일을 기록하면서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달랬을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그렇게 2년 8개월 정도 살았을 때 탈북민들이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도 한국으로 떠나리라 생각했다. 브로커는 찾지 못했지만, 중국에서 불안하게 살기보단 위험해도 사막을 횡단해 몽골로 가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다. 떠나기 전날 그는 한인 목사에게 책을 맡겼다. 행여 탈출과정에 잡혀 북송되면 중국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적은 글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사상범, 정치범으로 낙인 찍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목사가 급히 그를 찾았다. “어제밤 우리 부부가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밤새 눈물만 흘렸습니다. 절대로 떠나지 마세요.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몽골은 위험하니 사흘만 기다려 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목사는 한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흘 뒤 청도로 돌아와 김 씨에게 휴대전화 하나와 1500위안을 건네주었다. “이제부터 이 전화에서 시키는 대로 가세요.” 목사는 한국으로 가는 브로커를 찾아온 것이었다. 김 씨의 일기에 감동한 목사는 이후에도 탈북민들을 계속 도왔다. 하지만 1년도 안 돼 추방됐다. 목사의 이름은 조관식이다. 전화로 브로커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김 씨 일가는 베트남으로 가서 태국 영사관에 들어갔다. 이들의 진입 소식은 한국 언론에까지 보도됐다. 그리고 2005년 6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처음 탈북했을 때 그는 한국은 한족이 사는 나라인줄로 알았다. 청도에 와서야 한국이 남조선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생소한 동포의 땅에 마침내 긴 여정의 닻을 내렸다. .●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다 김 씨 가족은 하나원을 거쳐 2005년 11월에 서울 노원구에 정착했다. 세 식구가 살기엔 작은 18평의 영구임대주택을 받았지만 전혀 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면 더운물이 나오고, 겨울에는 따뜻한 난방이 보장되는 그 집은 세 식구가 처음으로 가져본 안정된 공간이자 천국이었다. “이제 안정과 자유를 얻었으니 한 몸 다 바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하지만 그 자유를 마음대로 향유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북한에선 당국에서 시키는 일과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늘 고정돼 있었다. 창의적으로 살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해야 했다. 처음에는 밖에 나가기도 두려웠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또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으니 감옥이 따로 없었다. 김 씨는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갔다. 처음엔 동네 주변을 돌고, 다음엔 조금씩 거리에 나가봤다. 벼룩시장이라는 신문에서 직업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벼룩시장을 통해 교육비를 보장해준다는 미용학원에 등록해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또 교회를 통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탈북민 정착을 위해 운영하던 자유시민대학이라는 6개월 정착교육 과정도 알게 됐다. 그곳에서 6개월간 여러 정착교육을 마칠 때쯤 “장애인재활원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공지가 떴다. 하지만 자원하는 탈북민이 없었다. 김 씨가 손을 들었다. 북에서 지체장애 시형을 돌봤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애인재단의 재활교사로 첫 직업을 얻었고, 3년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그러는 과정에 인터넷을 사용하는 법도 알게 됐다. 컴퓨터로 타자를 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다시 솟아났다. 그러던 차에 탈북민이 운영하는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에서 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글도 쓰고, 또 자신이 경험한 한국을 북한에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2010년 자유북한방송 기자로 취직했다. 정식으로 글을 쓰는 직업을 얻게 된 것이다.● 작품 활동의 전성기 2011년 한국에선 국제PEN망명북한작가센터가 창립됐다. 국제PEN(PEN international)은 세계 작가들이 작품을 통한 문학의 발전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세계 작가 연맹이다. 현재 114개 국가에 144개의 PEN 센터가 설립되어 있다. 하지만 자유로운 글쓰기가 불가능한 중국과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에선 인권이 보장된다며 연맹 가입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 출신 문인들은 이 틈을 파고들어 망명북한펜센터를 만들고 국제PEN에 가입신청서를 냈는데, 가입국 만장일치로 144번째 가입단체로 승인됐다. 김 씨는 망명북한펜센터의 첫 총무를 맡았다. 세계 최대의 문인단체 임원이 되니 글을 쓰고 싶은 욕구는 더욱 넘쳐났다. 이후 김 씨의 작품 활동은 전성기를 맞았다. 대북라디오방송 기자를 하면서 짬짬이 창작의 의욕을 불태웠고, 2014년엔 한국소설가협회 제41회 소설 공모전에서 탈북 1호 등단 작가가 됐다. 2019년에는 서울시인협회에서 진행하는 제24회 추천 시인상 공모전에서 입상해 시인 등단의 꿈도 이뤘다. 2014년 쓴 단편소설 ‘소원’은 북한인권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둥지’ ‘북극성’도 출판했다. 단독 작품 활동과 별개로 여러 탈북 문인들과 한국 작가들과 공동으로 ‘국경을 넘는 그림자’ ‘금덩이 이야기’ ‘꼬리 없는 소’ ‘단군릉 이야기’ ‘원산에서 철원까지’ ‘신의주에서 개성까지’ 등 공동 소설집도 출판했다. 김 씨는 활발한 활동을 인정받아 2016년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으로 추대됐고, 지금까지 기자를 겸직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망명북한펜센터에는 현재 약 120여명의 탈북민 출신 회원들이 가입돼 있다. 망명북한펜센터는 1년에 한 번씩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문학지를 발행한다. 과거엔 문학지 발행에 정부의 지원이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두 번이나 예산 지원이 거절되는 바람에 김 씨는 사비를 들여 문학지를 발간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탈북 문인으로서 글을 남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통일이 언제 될지는 알 수가 없지만 우리가 느낀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고향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려면 지금부터 우리가 기록을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북방송 기자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도 제가 느낀 행복을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마, 쌀이 참 맛있지?” 김 씨와 함께 입국한 자녀들은 한국에 훌륭히 정착해 김 씨를 더욱 기쁘게 하고 있다. 딸은 서울 소재의 대학에서 방송문예창작학을 전공하고, 현재 정부 부처 소속 기자로 활동 중이다. 결혼해서 두 자녀를 낳았는데, 김 씨에게 손자들을 보는 낙을 더해주었다. 아들 역시 현재 건축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건축설계 과장으로 성장했다. 아들도 결혼해 자식을 낳았고, 지난해엔 자기 집도 장만했다. 김 씨의 가족은 지금도 자주 모인다. 그리고 푸짐한 밥상에 마주앉아 과거의 추억을 소환한다. “엄마, 우리 옛날 북한에 있을 때 잔디만 빼고 다 먹었지?” “그래, 독풀과 독버섯까지 오래 절였다가 독이 빠지면 먹곤 했지. 그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먹을 걸로 보였는데….” 딸은 한국에 온지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음식 맛을 음미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가 집중하는 맛은 밥이다. 습관처럼 “엄마, 이 밥은 쌀이 참 맛있지”라고 말할 때마다 김 씨는 “엄마, 딱 한 번만 밥을 실컷 먹고 싶어”라고 말하던 옛 모습이 떠올라 눈가에 눈물이 핑 돈다. “지금도 북한 어디인가 너처럼 말하는 애들이 있을 거야.” 그의 눈은 먼 북쪽 하늘 어딘가에 머문다. 마음 속 어디선가 뜨거운 무엇인가가 불끈 솟구친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세계적인 코로나 유행은 의도치 않게 사라진 사람을 찾아내는 기술을 발달시켰다. 어느 나라나 예외가 없다. 한국도 공항에서 사라진 코로나 확진자를 매우 빨리 찾아내게 됐다. 그런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이런 기술이 발전할수록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바로 탈북민들이다. 중국은 안면 인식 기술이 매우 발달한 국가이다. 코로나 확산 이전에 이미 1초 만에 13억 인구를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5년 전에 벌써 5만 명이 운집한 콘서트 현장에서 범죄자를 식별해 체포할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까지 그때보다 몇 배 많은 6억 대의 감시카메라가 전국에 설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몰래 거리를 다니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다. 수상한 사람을 포착하는 것은 사람의 몫도 아니다. 안면 인식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수상한 인물을 식별해 골라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탈북민이다. 코로나가 끝나 다른 성으로 이동이 가능해진 뒤 중국에서 이동하던 탈북민들이 무더기로 체포되고 있다. 중국은 북한과의 국경은 물론이고 동남아 국경에도 사람이 넘기 불가능한 철조망을 설치해 놓았다. 철조망 주변에 접근만 해도 감시카메라가 이들을 지켜본다. 철조망을 넘기도, 중국 내 이동도 어려워지면서 사실상 탈북도 불가능해졌다. 지금은 오히려 북한에서 몰래 이동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하다. 북한에선 검문에 걸리면 적당히 둘러대고, 뇌물을 주면 빠져나갈 수 있지만 중국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중국이 이달 1일부터 강력한 반간첩법까지 시행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을 파악한 데 이어 처벌까지 강화하는 것이다. 이젠 탈북민을 돕는 활동가들은 물론이고 탈북민에게 도움을 준 시민들도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탈북민에 대한 어떠한 동정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중국에 들어갔던 한국 거주 탈북민이 체포돼 구금됐다. 반간첩법은 ‘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를 신고한 경우’ 최대 10만 위안(약 1800만 원)의 포상금까지 준다. 2017년 4월부터 1년 동안 중국 베이징(北京)에서만 5000건의 간첩 신고가 들어왔다고 알려졌는데, 앞으로 전국에서 탈북민에 대한 신고가 빗발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의 피해가 탈북민에게만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중국에는 10만 명 가까운 북한 주민들이 무역일꾼이나 근로자 등의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비자는 대개 만기가 끝난 상태다. 북한이 최근 북-중 국경을 슬슬 개방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들도 조만간 북한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외부의 문물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북한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를 잘 알 수밖에 없다. 가족만 아니라면 누구나 탈북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용감한 사람들은 북한에 들어가기 전에 탈북이란 결단을 내리려 한다. 그런데 감시카메라와 반간첩법 때문에 이제 움직일 수가 없다. 일행 중에 사라진 사람이 발생했다고 중국 공안에 신고하면 곧바로 잡아내기 때문이다. 탈북한 뒤 최대한 빨리 중국을 벗어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수인데, 도운 사람도 곧바로 잡힌다. 중국의 감시카메라를 어떻게 피할 것이냐가 탈북에 있어 관건인데, 현재로는 누구도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많은 시간을 들여 거리를 배회해도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를 찾기 어려운데, 지리도 모르는 사람이 도망을 치면 바로 카메라에 걸린다. 풍부한 인력을 자랑하는 중국은 실종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 숱한 경찰 인력이 사건 해결에 매달린다. 중국은 예전부터 한국행을 시도했던 탈북민은 빨간 도장을 찍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북송시켰다. 북한 보위부는 탈북민을 넘겨받을 때 한국행 시도자를 바로 알 수 있다. 빨간 도장만 없어도 중국 내 행적을 거짓말로 둘러댈 수 있는데, 중국이 체포된 위치와 동기, 함께 체포된 사람들까지 다 파악해 북한에 알려주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고 죽게 된다. 중국은 이런 식으로 탈북민 살해의 도우미 노릇을 해왔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그린 빅브러더 사회는 그의 예상보다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 중국에서 구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만드는 피해의 범위는 자국민들에게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날 현실이 보여주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서울 강서구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 강윤철. 그의 경력은 특이하다. 북한 호위사령부 경보대대 군인 출신이다. 평양에서 김 씨 일가의 안전을 지키던 그는 지금은 30명의 대원을 이끌고 저녁에 2~3시간씩 순찰을 하며 서울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강서구 의용소방대 대원으로 각종 소화기 점검을 도맡아하고 있다. 동 주민자치회 회원도 겸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자원봉사다. 그의 실제 직업은 공공기관 차량 담당 공무원이다. 호위사령부 군인 출신인 강 씨가 15명을 데리고 한국까지 탈북해 오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태어난 세상 강 씨는 1983년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집안과 출신 성분은 매우 좋았다. 할아버지 형제 중 한 명은 북한에서 최상위 출신 성분인 항일 열사였다. 외가도 좋았다. 양강도 풍산 혁명박물관에 가면 강 씨의 친가나 외가 가족사진이 많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안에는 중앙당 고위 간부로 있는 친척도 많았다. 부친의 이모부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산하의 주체사상연구소 책임간부였다. 황 전 비서와 가장 많이 싸웠다는 이유로 망명 사건이 있은 후에도 건재했다. 큰 외삼촌은 해군대학 학장이었고, 다른 외삼촌 한 명도 도당 책임비서 사위였다. 강 씨의 할아버지는 은행 지배인, 아버지는 군수공장 휴양소 소장을 지냈다. 이런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고난의 행군은 그의 집안을 빗겨가지 않았다. 전적으로 국가 배급에 의존해 살았던 그의 집도 쌀이 떨어졌다. 어머니가 잘 사는 친척집을 다니며 쌀을 구해 집으로 가져왔다. 어린 강 씨도 가끔 어머니와 함께 쌀 구하러 갔는데, 이 과정에서 역전에 뒹구는 시신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는 기억은 역전에서 강도를 당했던 일이다. 엄마와 길을 떠난 어느 날 다리에 배낭끈을 묶고 대합실 의자에서 잠깐 잠이 든 사이 누군가 끈을 자르고 도시락 등이 든 배낭을 훔쳐간 것이다. 망연자실해 있는데 어떤 남자가 잃어버린 배낭을 메고 앞으로 왔다갔다 했다. 엄마와 함께 벌떡 일어나 배낭을 찾으러 가려는 찰나 옆에 앉아 있던 낯선 사람이 이들을 잡았다. “저건 일부러 저러는 거다. 배낭 찾아 열어보면 너네 짐은 이미 없다. 그럼 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도둑 누명을 씌웠다고 끌고 가 때리고 옷까지 다 벗겨간다.” 그 말을 듣고 관찰해보니 패거리로 보이는 일행 여럿이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자기 배낭을 보고도 찾지 못한 것이다. 열차가 도착해 좁은 개찰구로 나가며 아수라장이 됐을 때, 아까 배낭을 훔쳐간 일당들이 이번엔 이쪽으로 옮겨왔다. 강 씨 눈앞에 있는 한 여인의 배낭 바닥을 면도칼로 쫙 긋자 통강냉이가 쏟아져 내렸다. 다른 강도가 마대를 받쳐 들고 잽싸게 그걸 담았다. 강 씨가 놀라 여인에게 알려주려 소리치려는 순간 엄마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도둑 무리는 이들 모자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이날의 기억은 강 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구나.”● 윤이상 특각 호위대원 출신 성분이 좋은 강 씨는 2002년 호위사령부에 입대했다. 2000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2년 군사전문학교를 더 다녔다. 군사전문학교는 군 입대 경력으로 쳐주기 때문에 힘 있는 집은 자식을 2년 더 끼고 있다가 군에 보낸다. 17살에 입대해 군에서 배를 곯는 것과 19살에 입대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2년만 집에서 더 잘 먹여도 키가 쑥쑥 자란다. 엄마는 아들을 해군에 보내고 싶어 했다. 외삼촌이 해군학장으로 있으니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평양에서 살고 싶어 호위사령부를 지망했다. 엄마는 아들이 떠날 때 “그래도 평양에 가면 나무를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며 안심했다. 양강도에 주둔하는 군인들은 나무를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강 씨는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첫 날 목이 가느다란 군인들이 큰 통나무를 메고 나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평양의 호위사령부도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화목으로 썼다. 군사전문학교를 졸업한 덕분에 신병교육은 속성으로 마쳤다. 이후 호위사령부(963군부대) 642여단 2대대 소속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가 맡은 첫 임무는 평양 근교의 특각(초대소)들을 경비하는 일이었다. 그의 중대 경비 대상은 윤이상각과 노로돔 시하누크각이었다. 북한은 김일성과 친분을 가지고 북한을 수시로 드나든 한국 출신의 음악가 윤이상과 실각한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를 위해 경치 좋은 곳에 전용별장을 특별히 지어줬다. 풍광 좋은 호수를 끼고 이런 특각들이 멀찍멀찍 자리 잡고 있었다. 관리인도 따로 있었고, 호위사령부에 뽑아온 수백 명의 젊은 청년들이 외부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별장 경호를 했다. 가끔 오는 윤이상의 아내에게서 간식을 얻어먹었다는 구대원들의 경험담을 듣기도 했지만, 강 씨가 경비 설 때는 이 특각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수백 명이 빈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몇 달 있지 못했다. 여단에 새로 창설한 경보대대로 옮겨갔던 것이다.● 군기 빠진 호위사령부 새 중대에 옮겨간 첫 날 아침 점검 시간부터 경악했다. 중대 병사 중 최고 직책인 사관장이 새 소대장이 왔다며 다 나오라고 소리쳤는데도 분대장들이 하나같이 아프다고 나오지 않았다. 한 병사를 보냈더니 좀 있다가 수염이 꺼먼 1분대장이 군복을 잘라 셀프로 만든 반바지에 슬리퍼처럼 변한 군화를 질질 끌고 나왔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의 그의 손에는 권투 글러브 2개가 들려있었는데, 글러브 하나를 사관장 앞에 던지더니 “오늘 점검은 너랑 나랑 한판 해서 결판내자”고 소리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분대장들은 입대 13년차였고, 사관장은 11년차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군 병력 충원이 제대로 되지 않자 김정일은 북한군 복무 기간을 10년에서 13년으로 올렸다. 복무 기간을 마치고도 3년을 더 근무하게 된 군인들의 분노 앞에선 어떤 군기도 먹히지 않았다. 아침 점검을 해도 분대장들은 침대에 누워 나오지 않았고, 훈련에도 불참했다. 김정일을 지키는 정예부대라는 호위사령부의 군기가 그랬다. 그런 속에서도 강 씨는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천리 행군’, ‘2천리 행군’ 등을 거치며 군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의 군 복무는 5년 만에 중단됐다. 가을 농촌지원 때 감기 기운이 있어 아스피린을 먹었는데, 갑자기 배가 참을 수 없이 아파오더니 정신을 잃을 지경까지 됐다. 호위사령부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했다. 아스피린이 위궤양이 있는 자리에 붙었다며 위를 잘라냈다. 그리곤 이런 상태로는 군 복무를 더 할 수 없다며 감정제대(의가사제대)를 시켜 집으로 보냈다.● 김정은 전용 전화선 관리원 집에 돌아와 얻은 직장은 ‘921호 관리소’ 산하 75호 중계소였다. 이곳은 김정일의 전용 전화선을 관리하는 것이 임무였다. 북한은 전국에 김정일을 위한 전화선을 따로 묻고 관리했다. 혜산의 75호 중계소에만 25명이 근무했다. 김 씨 일가의 전화선 하나를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인력이 낭비되는 것이다. 전화선뿐만 아니라 김 씨 일가만 다닐 수 있는 전용도로, 비행장 등도 전국에 만들어졌다. 강 씨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집도 강제 철거됐다. 김정일 전용 ‘1호 도로’를 건설해야 하는 구간에 있다는 이유였다. 921호는 좋은 직장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배급을 꼬박꼬박 줬고, 각종 사회동원에도 빠졌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8㎞ 담당 구간을 순찰하는 것이었다. 전화선은 땅속 1.5~3m 깊이에 묻혀 있었는데 누가 판 흔적은 없는지, 장마 때문에 흙이 유실된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이 일은 너무 무료했고,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강 씨는 2008년 혜산예술극장 보위대로 이직했다. 시내 깨끗한 곳에서 근무할 수 있고, 밤에 근무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자기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혜산예술극장은 1999년에 화재로 전소된 뒤 새로 지은 신축 건물이었다. 반동들이 노린다며 예술극장 하나에도 보위대 겸 소방대 명목으로 20여명이 근무했다. 온 나라에 인력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보위대는 원래 총을 들고 경비를 서야 한다. 하지만 예술극장만은 무기를 메고 경비를 서지 않았다. 예술인들이 무기를 보면 공포를 느껴 기량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군에 갔다 돌아오니 그새 혜산도 많이 변했다.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학교 동창들도 돈 있고 권력 있는 친구들끼리만 어울려 다녔다. 돈을 벌어야 했다.● 목숨 내건 동 장사 마침 그때 친구의 형이 동 장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동은 국가전략물자로 구분되기 때문에 밀수하다 걸리면 총살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남는 돈이 많았다. 당시 함흥에서 적동은 1㎏에 6위안, 황동은 4위안에 거래됐는데 혜산까지 가져오면 적동은 12위안, 황동은 10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친구 형은 아빠가 철도 경무부 간부였다. 철도 경무부는 여행하는 군인들을 단속하는 철도 헌병대라고 할 수 있다. 강 씨가 단속에 걸리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기차에 탈 때 군복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철도 경무부가 군인 단속을 맡았기 때문에, 민간인들을 담당하는 안전원들은 군인을 단속할 수 없다. 뇌물을 미리 받은 경무원도 이들을 단속하지 않았으니 무사통과가 가능했다. 동을 가지고 혜산역에 내리면 경무원이 압수 물품이라며 기차에서 직접 내려 경무부 창고에 넣었다가 밤에 돌려주었다. 그렇다고 위험 부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함흥의 거래처 동 장사꾼들이었다. 강 씨가 처음 함흥에 가서 만난 동 장사꾼은 이들을 자기 집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강 씨는 지하실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각종 동이 5톤 가량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동으로 만든 부품도 있고, 전화선도 있고, 그릇도 있었다. ‘충성의 꼬마계획’ 과제를 통째로 그 지하실에 옮겨온 듯 싶었다. 북한은 학생들에게 매년 1인당 폐동 몇 ㎏, 폐철 몇 ㎏, 토끼가족 몇 개 하는 식으로 과제를 준다. 이것을 충성의 꼬마계획이라고 부른다. 선생들이 학생들을 끊임없이 닦달질해 받아내면 간부들이 그걸 빼내서 동 장사꾼들에게 팔아먹는 것이다. 강 씨와 형 친구는 지하실에서 하루 종일 교대로 함마를 휘둘렀다. 모양이 다른 동 쪼가리들을 두드려 40~45㎏짜리 네모 모양으로 압착한 뒤 그걸 박스에 담았다. 둘이 보통 두 박스, 80~90㎏를 나른다. 한 번 거래한 집은 다시 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원칙이었다. 동 장사꾼은 동을 팔아먹은 뒤 뇌물을 준 안전원을 시켜 이들을 잡게 한다. 안전원은 뇌물 먹어 좋고, 불법 동 밀수꾼을 잡아 실적도 올려 좋다. 동 장사꾼은 동을 다시 돌려받아 다른 곳에 판다. 이런 사기 수법을 북한에선 ‘창 맞는다’고 한다. 강 씨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똑같은 박스 4개를 준비한 뒤 작업을 마치자마자 미리 현지에서 섭외한 두 명에게 진짜 동 박스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가짜 박스를 자전거에 싣고 출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전원이 추격해 오더니 이들을 잡았다. 박스를 여니 다른 물건만 나왔다. 안전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만 위안짜리 철도 안전원 동을 날라 오는 일은 1년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그들의 뒤를 봐주던 경무원들이 다른 사건에 휘말려 하나둘 사법처리가 됐다. 1년을 날라보니 뇌물이 많이 들어 생각보다 남는 것도 없었다. 소속 기관이 각기 다른 단속원들의 통제도 점점 심해졌다. 당시엔 정복을 입는 자리도 돈만 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 철도 안전원이 제일 비쌌다. 각종 불법 이송을 눈감아주고 뇌물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자리여서 2만 위안을 뇌물로 줘야 했다. 단점은 자주 중앙 검열에 적발돼 수명이 길진 않았다. 혜산 안전부 소속 기동타격대에 입대하려면 1만 위안을 뇌물로 줘야 했다. 기동타격대는 폭동에 대비해 만든 조직인데, 역전을 포위하고 물건을 뺏는 일도 했다. 이들에게 잡히면 물건의 절반을 내놓아야 했다. 안전원(경찰)은 5000위안이었고, 보위부는 가격이 제일 싼데 2000~3000위안만 뇌물을 주어도 입대가 가능했다. 정치범을 잡는 조직이다 보니 뇌물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정치범을 잡아도, 이런 죄는 뇌물을 받고 석방을 시킬 수도 없었다. 물론 보위부 반탐과는 밀수꾼을 잡기 때문에 이런 곳에 들어가면 엄청난 돈을 챙길 수 있지만, 이런 곳은 워낙 힘 센 사람들이 선점하고 있어 뇌물로 살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입대할 때 들인 뇌물을 뽑으려고 쌍심지를 켜다보니 점점 동 운반도 위험부담이 너무 커졌다. 동을 날라와 밀수꾼들에게 넘기다보니 언제부턴가 밀수하는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강 씨는 밀수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데 혜산은 이미 그가 낄 데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밀수망이 형성돼 있었다. 그는 혜산 아래에 붙은 김형직군으로 갔다.● ‘종합 예술’ 밀수에 뛰어들다 김형직군에서 그는 물건을 받아 중국에 넘겼다. 북한에서 밀수는 종합 예술에 비유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밀수를 위해선 물건을 날라 오는 철도 안전원, 기관사 등을 포섭해야 하고 단속 통제를 담당한 보위부, 안전부에도 연줄이 깊어야 한다. 또 국경경비대 장교들을 장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방들에게도 신뢰를 얻어야 한다. 물론 그의 포섭 대상인 직업도 살기가 만만치는 않다. 특히 신뢰할 수 있고 배신하지 않는 밀수선을 몇 개 아는냐에 따라 받는 뇌물 액수가 달라진다. 국경경비대 장교는 중국 대방 2~3개는 확보해야 밀수꾼들에게서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강 씨가 처음 한 일은 기름개구리 등 농수산물을 받아 넘기고 쓰던 마대를 받아오는 일이었다. 이미 사용한 사료마대, 비료마대 등을 몇 만개씩 중국에서 받아왔다. 이걸 다 씻어서 북한 내륙으로 들여보내면 장마당에서 잘 팔렸다. 물건을 넘겨 보내는 양에 따라 중국 대방은 보너스도 주었다. 밤에 배로 1톤가량 넘기면 자전거 한 대 정도가 보너스로 왔다. 강 씨는 이 일을 2년 정도 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어느 날 중앙당에서 국경경비대에 집중 검열을 나왔는데, 그 시기엔 밀수를 할 수 없었다. 그걸 계기로 그는 혜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언제까지 직장을 다니지 않을 수가 없어 혜산광산 보위대로 옮겨가려고 생각했다. 혜산광산 보위대 입대는 2000~3000위안짜리였다. 당시 혜산광산에선 아연 등 희귀광물들이 생산됐는데 노동자들은 이걸 품에 차고 나온다. 비싼 것을 차고 나오면 50위안도 벌 수 있었다. 이걸 잡는 것이 보위대였다. 물론 뇌물을 받고 눈감아줄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사람을 잡아내는 것도 할 짓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위대는 직접 광산 안에 들어가 싸게 희귀광물을 사서 밀수꾼들에게 비싸게 넘겼다. 자신들이 경비를 책임졌기 때문에 광산에서 갖고 나오다 단속될 염려는 없었다. 보위대도 총을 드는 직업인지라 신원조회가 필요하다. 북한에서 신원조회는 전산조회로 하지 않는다. 사람이 전국을 돌면서 서류에 기입된 8촌까지 직접 찾아가 행적을 파악해 갖고 온다. 그러다 보니 신원조회에만 보통 반년 이상 걸린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신원조회 기간은 훨씬 더 길어진다.● 중국의 북한 벌목공들 보위대에 서류를 제출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가 중국에 돈벌러 가자고 제안했다. 중국에 넘어가 들쭉을 따도 되고, 통나무 한 대를 날라도 1위안씩 받는데 하루에 50위안 넘게 받는다고 했다. 2013년경에는 북한 사람들이 들쭉을 따러 중국에 우르르 넘어가던 때였다. 친구 2명을 따라 삼지연군에 가니 딴 세상이었다. 매일 밤 압록강 바로 옆 동네 주민 수십 명이 국경경비대에게 뇌물을 주고 강을 넘었다. 경비대 군인들이 와서 먹고 자는 집은 뇌물을 주지 않고 중국에 출퇴근하듯 넘어갔다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둘쭉철에 눈을 감아준 대가로 경비대원은 1년 내내 민가에 드나들며 배고프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중국에 가는 일행들은 바케쯔(양동이)를 등에 거꾸로 메고 줄을 지어 강을 건넌다. 거꾸로 멘 이유는 강에서 넘어지면 양동이에 물이 차면서 손 쓸 틈이 없이 하류로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건너간 사람들은 며칠 산에서 살면서 들쭉을 따서 도로에서 기다리는 중국 상인에게 판 뒤 다시 북한으로 넘어왔다. 들쭉 1㎏을 따면 5위안을 벌었다. 강 씨 일행 3명은 이틀 동안 들쭉을 따서 80위안을 벌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벌이에 성이 차지 않아 주변 벌목장을 찾아갔다. 벌목장에 가니 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간 작업장에는 한족 로반(사장) 1명에 북한 사람 17명이 있었다. 북한 사람 20~30명 규모의 그런 작업장이 백두산 기슭에 셀 수 없이 많다고 했다. 강 씨는 그렇게 많은 북한 사람들이 넘어와 일을 하는 줄 몰랐다. 움막에 합세하니 거긴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CD가 가득 쌓여 있었다. 다 돈을 주고 사온 것이라 했다. 벽에 붙여놓은 라디오에선 한국 방송이 24시간 나왔다.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단속 공포 없이 편하게 누워 한국 영화를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갔을 때는 벌목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산에 올라가 작은 나무를 베어내는 일을 했다. 하루 일당이 30위안쯤 됐다. 그런데 그게 다 자기 돈은 아니었다. 밥 한 끼에 5위안씩 공제했다. 비 오는 등 날씨가 험해 일을 나가지 못하면 식대만 하루에 15위안씩 깎였다. 작업복이나 장비도 자기 돈으로 사야 했고, 고기나 술을 먹으려면 돈을 모아 추가로 내야 했다. 먹을 것은 한족 로반이 날라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산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로반은 관리를 위탁받은 사람이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엔 벌목을 시작했다. 벌목을 하고, 말과 소, 트럭을 이용해 통나무를 산에서 끌어내려 온 뒤 4m 길이로 다듬고 자르는 작업이었다. 이때는 40위안을 받았다. 몇 달 지나고 보니 로반은 관리만 하면서도 일당은 200위안씩 받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강 씨는 이것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반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는 일당을 50위안으로 올릴 것. 둘째는 아파서 일 나가지 못하면 식대를 떼지 말 것을 요구했다. “돈을 벌려고 온 사람이 식대가 깎이면서도 꾀병을 앓겠나. 정말 아프니까 못 나가는데, 식대까지 떼는 것은 너무하다.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갈 데도 많은데 딴 데 가서 일하겠다.” 결국 로반이 조건을 다 들어주었다. 강 씨는 주변 작업장에 자신들이 얻은 성과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300~400명이나 되는 그 지역 북한 노동자들이 다 일당을 높게 받았다. 사실상 노조가 생긴 것과 마찬가지 효과였다. 그런 리더십 덕분에 강 씨는 얼마쯤 지나 작업장 책임자로 추대됐다. 책임자는 로반과 만나 하루 과제를 받고 또 노동자들과 로반 사이 협상도 담당하는 자리였다. 물론 책임자라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당을 받으려면 그도 일을 해야 했다. 그가 책임자로 있을 때 가끔 공안 단속에 걸리는 작업장도 생겼다. 강 씨는 또 발 벗고 나섰다. “꺼내려면 수천 위안의 뇌물이 든다는데, 우리 모아서 도와줍시다. 우리가 잡히는 경우도 있을 것 아닙니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게 최선이죠.” 점점 그 구역 내에서 강 씨의 권위가 올라갔고 따르는 동생들도 생겼다. ● 돈으로 목숨을 사는 세상 강 씨는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친구들과 함께 다시 압록강을 넘었다. 번 돈을 집에 갖다 주기 위해서였다. 매달 평균 800~1000위안씩 모았으니 액수가 꽤 됐다. 집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다시 중국에 넘어왔다. 벌목장의 생활은 너무 좋았다. 북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여기가 북한인지 중국인지 실감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고기도 먹을 수 있었고, 눈치 보지 않고 한국 영화도 보고, 마음 놓고 오락회도 열 수 있었다. 보위대에 가서 조직생활을 하기보단 중국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벌고, 오고를 반복하다가 끝내 보위부에 체포됐다. 누군가 그가 중국에서 일한다고 신고했다. 잡히니 “한국 사람은 만났나. 교회엔 갔나. 한국 방송을 들었나”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보위부는 이미 중국 작업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옥에서 한 달을 버틴 끝에 가족이 큰 뇌물을 주어 석방될 수 있었다. 감옥에 있는 기간 체포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한 젊은 남성은 일곱 가족, 수십 명을 한국까지 가도록 도와준 죄로 체포됐다. 이를 ‘유도안내죄’라고 했다. 한 명을 넘기는데 1만2000위안씩 받았는데, 경비대에 5000위안씩 뇌물을 주고 본인은 7000위안씩 받았다고 한다. 그 돈으로 6살 아들을 예술학원에 보내 영재로 키울 꿈을 꾸던 남성이었다. “남들은 그렇게 많이 한국에 보내면서 왜 본인은 가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조국을 배반하진 않겠다”고 대답했다. 진심인지, 강 씨를 믿지 못해 그런지 알 수는 없었다. “몇 년 형을 받을 것 같냐”고 물으니 “20~30년 받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얼음이라고 불리는 필로폰 2㎏과 사람 3명을 중국에 넘기려다 체포됐다. 마약 밀수는 중범죄이지만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있었는지 보위부 고위직을 움직여 1년 형만 받고 교화소에 갔다고 했다. 돈만 있으면 죽지 않는 세상이었다. 감옥에서 나오니 보위원이 매일 찾아와 감시했다. 체포되는 바람에 보위대 입대도 무산됐다. 결국 그는 중국으로 다시 가서 돌아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15년 9월 그는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15명을 이끌고 탈북하다 벌목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한국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상대하는 중국 로반들이 북한 노동자들을 통해 기회만 되면 말을 열심히 배우는 모습이었다. 한국에 가서 벌면 한 달에 1만 위안 이상 번다며 가족이 다 갔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중국인들은 “너희들은 한국에 얼마든지 갈 수 있고, 국적도 주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한 달에 1000위안도 벌기 힘든 처지의 강 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국을 상상했다. 그런데 가족들 때문에 용단을 내리진 못했다. 다시 북한으로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강을 건넌 뒤엔 한국으로 못 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마침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먼저 탈북해 중국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여인이었는데, 가끔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벌목장에 전화해서 좀 보내달라고 했던 인연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1년쯤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전화가 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 왔다며 오는 선도 알려주겠다고 했다. 강 씨는 벌목장에서 한국에 먼저 간 탈북민이 출연하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그들의 북한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가는 길까지 소개받으니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3년 동안 일하면서 친해졌던 동생들부터 찾아다녔다. 이런 이야기는 전화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다른 작업장을 가다가 얼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반나절 넘게 아무리 가도 작업장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밤에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렇게 죽는가 싶었는데, 마침 그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일행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모은 일행이 15명이나 됐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한국에 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륙에 엄청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가지 않겠나. 거기 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벌목장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말은 엄청난 힘을 가진다. 그만큼 다치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분 때문에 중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정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거 맞나? 그런데 형은 가나?” “응, 나도 간다. 단 조건이 있다. 거긴 한번 가면 북한 고향으론 다신 못 간다.” 그가 속내를 터놓았던 15명 모두가 따라나섰다. 심양에 도착해서야 강 씨는 “사실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절반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고, 나머지도 놀란 눈치지만 계속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심양에서 딱 한 명이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북한에 가서 조카를 데리고 같이 가야지 혼자는 못 간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잡혀서 교화소에 갔다고 했다. 한국에 간 탈북 여성이 소개한 한국행 선은 교회가 주선하는 루트였다. 브로커 비용은 받지 않는 대신 중국에서 성경 공부를 3개월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15명은 여러 처소에 나눠서 성경을 공부했다. 한국에 보내준다는데 못할 일이 없었다.● 꿈을 이뤄가는 삶 강 씨는 2016년 5월 마침내 일행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 스스로 자신과의 약속을 하나 만들었다. “한국에 가면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벌목장에선 담배가 없이 살 수가 없었지만, 담배 끊을 각오도 없이 한국에서 첫 시작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해 10월 그는 서울 강서구에 임대주택을 받고 하나원을 졸업했다. 서울에 가겠다는 희망자들이 많아 추첨을 해야 했는데 운 좋게도 그는 당첨됐다. 그는 북에 있을 때부터 수도에 가보고 싶어 외삼촌이 해군대학 총장으로 있었음에도 해군을 마다하고 호위사령부로 갔다. 서울에 와서도 꼭 수도에서 살고 싶었는데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고향의 부모는 추운 겨울에 압록강에 물을 길으려 다니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울음을 참기 어려웠다. 뜨거운 난방을 틀어놓고는 찬 바람이 마구 스며드는 벌목장의 움막이 생각나 또 울었다. 세탁기를 돌리며 얼음을 깨고 옷을 빨던 과거가 생각나 또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어떻게 온 땅인데, 최선을 다해 살아야 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정착한 직후 다른 동생들과 함께 막노동 현장을 누비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런데 몸이 편해져서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얼마 안 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통나무를 메고 나르던 몸이 눈에 띄게 여위어갔다. 강 씨는 1년 반이나 병원을 다녔다. 2018년에야 어느 정도 몸이 회복돼 광명에 있는 한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월 150만 원을 받고 회사 출퇴근 차량 운전을 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운전 실력을 키웠다. 2020년 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1톤짜리 용달 트럭을 샀다. 개인 용달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이 안정적이진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틈틈이 안정적인 직장을 찾았다. 여러 곳에 지원서를 냈는데 올해 초에 마침내 강서구시설관리공단에 운전기사 겸 차량 담당 정규직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월급은 200만 원으로 개인용달 때보다는 많이 적지만 공공기관에서 60세까지 일할 수 있다는 안정성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조건을 더 높이 샀다. 서울에서 그는 고향 출신의 여성과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도 둘을 키우면서 북한에서 배인 가부장적인 습관을 내려놓고,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빠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에 가서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고 있습니다. 서울에 살고 싶은 소원도 이뤘고,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원도 이뤘습니다. 공공기관에 취직한 것도 돈보다는 행복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더 가치를 두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의 저녁은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퇴근 후 2~3시간씩 동네 순찰을 돈다.● 봉사로 기여하는 삶 그는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 좋다. 그가 경험한 한국은 본인이 노력한 것만큼 삶의 질이 결정되는 행복한 사회였다. 자신에게 이런 삶을 선물한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각종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몸밖에 없으니, 몸으로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서울에 자리를 잡은 지 3개월 뒤부터 동네 자율방범대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막노동을 하면서 주 3회씩 저녁마다 2~3시간 순찰을 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 씨는 지금까지 7년 동안 꼬박꼬박 자기 역할을 해왔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지난해부터는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으로 추대됐다. 그뿐만 아니라 강서구 의용소방대에도 가입해 4년째 소화기 점검과 같은 일을 돕고 있고 동 주민자치회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면서도 강 씨는 자신이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정말 인품이 훌륭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정착도 더 빨리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처럼 한국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탈북민은 동네에서 봉사를 하면서 지역 사회에 녹아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지역봉사 활동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탈북민들을 돕고 어울리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지난해 말까지 북한군 출신 탈북민 단체인 숭의동지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지금도 주말마다 강서구에서 탈북한 사람들끼리 모여 족구 동호회 활동을 하며 화합을 다지고 있다. “통일이 언제 될지는 모릅니다. 저는 통일로 가는 과정에 주춧돌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좀 더 욕심을 내면 이 땅에 처음 온 탈북민들에게 열심히 사는 본보기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통일이 오면 고향에 가서 남과 북의 화합을 위한 중재자 역할도 하고 싶습니다. 거창하게 살고 싶진 않지만, 열심히 사는 오늘이 모여 더 나은 내일이 되고, 계속 발전해가는 저라면 내일에는 더 큰 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들은 평생 겪지 못할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지만 강 씨는 이제 겨우 40세이다. 그의 인생 후반전은 어떤 삶의 스토리들로 채워지게 될까.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국내외 청년 300여명이 5일부터 2박3일간 북한 접경지역인 경기도 파주시에 모여 현 정부의 통일 비전과 안보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행사를 진행한다. 정전 70주년과 한미동맹 70주년을 계기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가 주관해 열리는 이 행사에는 민주평통의 국내 및 해외 청년자문 위원들이 참가한다.눈길을 끄는 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2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내세우며 통일부의 역할 변화를 주문한 직후 대통령 직속의 자문기구인 민주평통이 재빠르게 변화된 정책 기조에 발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 통일로 한 걸음 2023’이라고 명명된 이 행사에선 북한 인권 증진, 청년 안보의식 고취 등이 주요 토론 주제로 다뤄진다. 초청 기조강연 연사로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이 초대된 것도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전임 정권 시기 민주평통은 종전 70주년을 맞아 ‘한반도 정전 평화 캠페인’을 주요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지만, 윤 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기조는 사실상 폐기됐다. 특히 지난해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동기인 석동현 변호사가 사무처장으로 부임한 이후 민주평통은 다양한 방면에서 변화를 추구해왔다. 이번 윤 대통령의 ‘변화 주문’ 이후 통일부의 기조도 기존의 대화·교류 역할에서 한반도 번영과 북한인권 중시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왕효근 민주평통 청년부의장은 “‘청년! 통일로 한 걸음 2023’에 참가한 청년들은 열쇠전망대, 백마고지 등 분단현장 답사와 한반도통일미래센터 통일미래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통일과 안보에 대한 실천 의지를 다지는 시간도 갖는다”며 “미래를 떠맡아야 할 청년들이 통일과 안보, 북한 인권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행사 마지막 날에 채택될 예정인 ‘청년 통일·안보 활동방안 결의문’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주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중요하게 부각될 예정이다. 또 “북녘 동포들의 인권 증진이 한반도에 사는 모든 이들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는 일임을 인식하고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에 동참한다”는 선언도 함께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안녕하세요. 저는 북에서 온 권봄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동네에선 ‘패션여왕’이었어요. 학교에서 교복을 제일 먼저 고쳐 입은 사람이 바로 저였다니까요. 그런데 옷을 고칠 때마다 비판무대에 오르고, 강제노동까지 하고 너무 고초를 많이 겪었어요. 하지만 전 굴복하지 않았어요. 마침내 학교도 저에게만 예외를 인정하고 포기할 정도였답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 생각해보니 북한이란 곳은 저에게 너무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탈북했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제가 원하는 바로 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국군포로의 손녀 저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그 해에 북한의 북부 국경 한 소도시에서 태어났어요. 태어나보니, 저의 출신성분은 아주 꽝이던데요. 제가 국군포로의 손녀였던 것이죠. 할아버지는 충북 제천에서 살다가 1951년 국군 8사단에 입대해 백마고지 전투, 금화지구 전투 등에서 용감히 싸웠다고 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한 달 전에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북한은 할아버지와 같은 국군포로들을 북부 지방의 탄광에 보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얼굴도 몰라요. 1970년대 말에 탄광에서 탄차 사고로 사망했다고 해요. 포로들은 언제 죽어도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는 북한에서 제대로 된 직장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반동의 아들인데다, 아빠 친척들은 다 남쪽에 살고 있으니 어려서부터 주먹을 쓰면서 방황했나 봅니다. 하지만 제가 태어나보니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부자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엄마가 일찍 장사를 시작해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죠. 엄마의 친척들이 중국에 많았는데, 거기서 물건을 가져다 북한에서 팔았어요. 엄마는 아버지가 싸울 때 돌려차기 하는 모습에 반했다고 하네요. 흐흐. 엄마는 키가 작았는데, 아빠는 키도 훤칠하고 잘 생겼는데다 돌려차기까지 기막히게 잘 했나 봅니다. 결혼한 이후에도 아빠는 안 좋은 성분 때문에 주로 집안일을 하고, 대신 엄마가 밖에 나가 장사를 했어요. 저는 7살에 인민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이전 기억은 별로 나지 않아요. 두 가지는 아직 생생한데, 하나는 유치원에서 신발을 계속 잃어버렸어요. 제가 우리 유치원에서 제일 좋은 신발을 신었는데, 누가 자꾸 훔쳐가 팔았던 거죠. 그리고 어느 날 장마당 앞을 지나다 바닥에 갓난아기가 버려진 것을 보고 데려가자고 엄마에게 떼를 썼던 기억이 나요. 그때 병원이랑 장마당에 아이를 버리고 가는 일들이 종종 있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사람들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엄마가 장사를 잘 한 덕분에 집에 없는 게 없었고, 밥투정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2001년에 인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제가 그때 학년에서 키가 제일 컸어요. 그래서 무용소조에 뽑혀서 춤을 추었어요. 4학년 때엔 선생님과 다른 아이 2명과 함께 평양 무용축전에도 갔어요. TV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평양에 도착해서 어느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부터 온 몸이 다 새까맣게 됐어요. 살펴보니 이불을 언제 빨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더러웠어요. 선생님이 기겁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여관 주변 개인집에 돈을 더 주면서 숙박했어요. 그런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밥을 너무 조금만 줘서 배고프다고 선생님께 일러 선생님과 집주인이 대판 싸우는 웃픈 해프닝도 있었어요. 그때 축전 기간 한 달 반을 평양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옥류관도 가보고 놀이동산도 갈 수 있어 좋았는데, 아쉽게 등수에는 들지 못했어요.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고, 추억이라 생각해요. 중학교 올라가서도 저는 무용소조란 이유로 농촌동원도 가지 않았고, 보름동안 군사훈련을 받는 붉은 청년근위대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학생소년회관에서 15살까지 계속 춤을 췄는데, 그 덕은 요즘 좀 봅니다. 패션 콘텐츠를 다루려고 만든 유튜브에 요즘 댄스 챌린지 영상을 올리고 있거든요. 구독자는 아직 많지 않지만, ‘봄패션TV’를 찾아보면 제가 춤을 추는 영상이 많아요. 어릴 적 배운 춤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네요.● 한국 패션에 빠지다 저는 중학교 때 안 본 한국 드라마가 없는 것 같아요. 집이 잘 살았다고 했잖아요. 동네에서 DVD 플레이어를 제일 먼저 산 것도 우리 집이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 CD를 구하면 우리 집에 다들 보려 왔던 기억이 나요. 창문은 불빛이 새나가지 못하게 늘 담요로 가려져 있었고요. 제가 열 살 때인가 한번 단속에 걸리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봤어요. 단속받던 때의 일은 충격이었어요. 안전원이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와서 엄마를 마구 때렸거든요. 엄마가 매를 맞는 걸 보면서 어린 저는 무서워서 그냥 울 수밖에 없었어요. 아침 저녁으로 한국 드라마만 보다 보니 그만 제가 사는 세계의 기준이 한국이 돼버렸어요. 한국 배우들의 옷과 패션에 늘 관심이 갔어요. 몸은 북한에 있지만, 마음과 생각은 북한 밖에 늘 머물러 있었어요. 13살 때인가 교복을 받았는데, 너무 치마가 길어요. 그래서 치마를 다 뜯어서 몸에 맞게 짧게 고쳐 입고 학교에 갔는데 난리가 난거죠. 학교에서 교복 고쳐 입고 온 학생이 제가 처음이라는 거예요. 그날 엄청 욕을 먹고 학교 청소를 저녁 늦게까지 해야 했어요. 그런데 반발심이 생기더라고요. 큰 걸 내 몸에 맞게 고쳤을 뿐인데 그게 왜 이리 야단맞을 일인가 싶었어요. 사춘기까지 찾아오니 반항심이 더 커졌죠. 학교에서 머리를 제일 기른 것도, 손톱을 기르고 매니큐어를 처음 바른 것도, 귀걸이 하느라 귀에 구멍을 뚫은 것도 저였어요. 다 제가 선구자였어요. 하하. 제가 하는 건 다 한국 드라마에서 본 것이었죠. 우리 학교에서 제가 인기 짱이었어요. 남학생들이 계속 쫓아다녔고, 여학생들도 저를 부럽게 쳐다봤어요. 그들은 용기가 없으니 주는 교복을 그대로 입고 다니는 거죠. 대신 대가는 컸죠. 학교에서 제일 많이 욕을 먹고, 길거리 걸어가도 규찰대가 가만 두지 않았어요. 잡혀가서 욕을 먹고 청소하는 게 일상이었죠. 그때마다 학교에 안 간다고 선포했어요. 몇 년 뒤엔 학교에서도 포기했죠. 선생님이 찾아와서 너만 머리 기르는 것을 특별히 허락할 테니 학교에선 머리를 묶고 다니란 조건을 내걸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잠 들 때였어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여주인공들이 입은 저 옷을 내가 입으면 어떨까. 너무 행복할거야’ 이런 상상을 하면서 잠들었거든요. ‘북한은 왜 이리 개성이 없는 곳일까, 한국은 누구나 예쁜 옷들을 입을 수 있는데 왜 북한은 예쁜 옷을 입을 자유도 없을까’하고 원망도 많이 했고요. 제가 왜 패션에 이렇게 집착했는지 생각해보면 그건 유전인 것 같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한 겨울에도 롱코트에 롱부츠를 신고 거리를 다니는 멋쟁이였어요. 엄마는 무슨 옷을 사면 늘 ‘어떻게 하면 이 옷을 북에 없는 스타일로 만들까’ 그런 고민을 했고, 뜯어 고치는 것이 취미였어요. 저도 어렸을 때 엄마가 카라가 있는 옷을 사와서 뜯어낸 뒤 다시 만들어낸 옷을 입고 다녔고요. 한국 드라마와 패션 감각이 남달랐던 엄마 덕분에 저도 크면 무조건 옷을 만드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북한에선 제 패션에 대한 열정과 자유가 너무나 통제되고, 늘 비판 대상이었죠. 학교를 졸업하면 무조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자유로운 세상으로 가서 저만의 옷을 마음 껏 만들고 싶었어요.●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탈북 2011년 마침내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때가 17살이었죠. 졸업해서 몇 달 뒤에 저는 탈북했지요. 부모님도 제가 한국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 갈지는 몰랐어요. 우리 동네엔 중국으로 몰래 사람을 넘겨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는 부모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어요. 말하면 못가게 했을 겁니다. 저는 두만강을 넘어 연길 친척집에 찾아갔어요. 거기서 한국에 보내달라고 했지요. 한국행 선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거의 1년을 기다렸거든요. 연길은 참 큰 도시였어요. 도로가 뻥 뚫리고 차도 참 많았죠. 연길에 가서 바나나가 노란 색이란 것을 처음 알았어요. 북한 장마당에도 바나나를 팔긴 했는데 다 새까만 색이었거든요. 연길 사람들의 패션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제 눈높이가 한국에 맞춰져 있어서 그랬나 봐요. 그러다가도 가끔 길거리에서 멋있게 입고 다니는 아가씨들을 보면 ‘그래 이 정도는 입고 다녀야 패션스타지’하는 생각을 했죠. 2012년에 드디어 한국으로 떠났어요. 일행은 8명이었는데 동남아에 와서 산을 넘을 때면 제가 앞장섰어요. 무용을 해서인지 체력이 좋은 편이거든요. 그런데 산에 갈 때도 저는 패션이 중요해요. 한국에 와서 산행을 종종 하는데, 저번 겨울에 관악산에도 가죽 재킷에 요가 바지를 입고, 롱부츠를 신고 올라갔거든요. 하하. 등산화가 예쁘지 않아서 안 신어요. 이 정도면 정말 패션에 미친 것이 맞겠죠. 태국 감옥에 몇 달 있다가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2012년 9월에 왔고, 2013년 1월 마침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고 사회에 나왔어요. ● 디자인 전공 대학에 입학하다 사회에 나왔는데 저는 어려서인지 집을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서울에 있는, 먼저 탈북해 살고 있는 엄마 친구네 집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한 반 년 살다가 쫓겨났어요. 제가 철이 너무 없었거든요. 멋 부리고, 이모 화장품 잔뜩 바르고 외출할 생각이나 했지, 청소할 줄도, 밥을 할 줄도 몰랐어요. 이모가 ‘너 이렇게 살면 절대 철이 들지 않는다. 나가 혼자 살면서 사회를 경험해보라’고 하더군요. 돈이 없으니 금천구에 8평짜리 반지하방을 월세로 얻었는데 너무 눈물이 났어요. 집이 작아서 변기 위에서 샤워해야 했죠. 그런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여기서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혼자 살 때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할아버지가 포로가 될 때 나이가 20살 때인가 됐거든요. ‘그 어린 나이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고향과 제일 멀리 떨어진 북단의 탄광으로 끌려 와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반동분자 성분에다가 탄광의 가장 위험한 막장에서 다시 갈 수 없는 고향과 보고 싶은 가족을 그리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군에 입대하던 때 나이와 비슷한 나이에 저는 홀로 북에서 남으로 와서 다시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고 있잖아요. 하지만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았던 할아버지에 비하면 저의 삶은 너무나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저 자신이 너무 철이 없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독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대안학교에 입학해 기숙사에 들어갔어요. 목표를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로 높게 잡았는데, 그동안 공부를 많이 못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했어요.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에 갈 수도 있었지만, ‘패션계의 여왕’이 되려면 이왕 제대로 공부하고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4년 가까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다녔어요. 1년은 미술학원에서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웠고요. 지금 돌아보면 그때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참 무섭게 저를 잘 잡아주어서 고마워요. 2017년에 마침내 홍익대 미술대학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어요. 실기 시험 때 작가의 그림을 내걸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험이 인상적이었어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고, 나는 왜 이 그림을 이렇게 각색했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창의력과 이해력을 보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런 것은 자신이 있어요. 대학에 가서도 공부는 어렵지 않았어요. 저는 패션에 살고 죽는 아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죠. 교수님의 칭찬에 살고, 질타에 울면서 대학을 다녔어요. ‘네 작품이 창의적이다’고 칭찬 받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고요, ‘작품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식의 평가를 받으면 온 밤 자지 않고 ‘문제점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다니다 보니 전공과목은 올 A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공만 집중적으로 공부했더니 교양과목 성적은 좀 별로예요. 묻지 마세요. 대학 다니면서 저는 탈북민이란 얘기를 절대 하지 않았어요. 가까운 친구들도 제가 충북 제천 출신인 줄로 알아요. 할아버지 고향이 제천이거든요.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춤 쪽으로 가려다가 안 돼서 공부하러 왔다’고 둘러댔어요. 이 기사 나가면 다들 놀랄 걸 생각하니 걱정이예요. 사정이 있었던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탈북민임을 숨기고 살다보니 장학금은 하나도 받지 못했어요. 대신 많은 알바를 뛰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고생했어요.● 회사에서 배운 술의 쓴 맛 저는 2022년 2월에 졸업했는데, 재학 중에 조기 취직해서 올해로 3년차가 되었어요. 처음 동대문에 있는 중소기업 디자이너로 들어갔는데, 1년 버티고 나왔어요. 여초 직장이라 그런지 군기가 엄청 센데, 제가 막내라 온갖 잡다한 일들은 다 제 몫이었죠. 술의 쓴 맛을 회사에 들어가 처음 알았어요. 대학 때는 술을 아예 마실 줄도 모르지만, 알바로 돈을 벌다 보니 술 살 돈이 아까워서 사 마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 하루는 퇴근하면서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들어가 딱 한 잔하고 정신 잃고 잠들었답니다. 하하. 회사 생활은 대학 때와 전혀 달랐어요. 대학 다닐 때 저는 내내 삶이 신나고 늘 행복했어요. 제가 직접 피팅을 하고 옷을 만드는 걸 상상만 해도 그렇게 신날 수 없고, 세상에 없는 나만의 옷이 완성됐을 때를 생각하면 행복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요. 3학년 때 저는 제 패션이 가야 할 방향과 가치관을 정했어요. ‘패션에 역사를 입히자’고 결심한 거죠. 저는 이 땅에서 이방인처럼 살고 있지만, 역사는 남과 북이 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국의 역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발전시키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말이 거창해서 이해가 되지 않으시죠. 심플하게 말하면 그냥 전통의상에 현대를 입히는 것이 제 패션의 철학입니다. 좀 더 짧게 말하면 퓨전 한복이죠. 한복을 모티브로 해서 그 요소들을 현대 의상에 구현하는 겁니다. 한복은 전 세계가 아는 옷이긴 하지만, 일상에서 입고 다니기엔 거추장스러워서 잘 입지는 않죠. 저는 일상에서 입고 다니는 간편한 한복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니 꿈이 다 뭐예요. 늘 욕을 먹고 수습하느라 밤을 새고,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것처럼, 신입 회사원 생활이 이런 거구나’를 뼈저리게 배웠죠. 1년쯤 일하다가 다른 중소기업에 경력직 정직원으로 이직했습니다. 지금 2년째 일하고 있는데, 이 회사는 첫 직장보다 좀 더 큰 중견기업입니다. 자체 브랜드도 3개나 있고요. 저는 그중 한 브랜드의 패션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마케팅도 담당하고 있어 좀 바쁘지만, 나름 재밌게 잘 다니고 있어요. 저는 한국에 와서 거의 10년 만에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이뤘답니다. ● 탈북 디자이너의 소원 지난달 중순에 저는 홍대와 사당, 성신여대 사거리에서 3일 동안 그림판을 들고 서 있었어요. 왜냐면요. 제가 제 브랜드를 내건 첫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브랜드는 제 이름 첫 글자를 따서 ‘GB‘로 지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과정은 아이디어와 디자이너 경험을 쌓는 과정이었고, 이젠 드디어 그걸 다 녹여서 세상에 처음 제 작품을 공개하는거죠. 길거리에서 이 옷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많은 분들이 좋은 평가를 남겨주었어요. ‘독특하고 기발하다, 편안해 보인다, 참신하다’ 등 이런 평가를 받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저는 제 작품을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 올렸어요. 제가 직접 모델로 나섰고요. 이건 제게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아 너무 고민입니다. 이달 7일까지 목표 금액을 300만 원으로 세웠는데, 지금까지 목표의 8%밖에 달성하지 못했어요. 한 벌이 12만8000원이고, 커플 세트가 25만6000원인데, 지금 딱 한 세트만 팔렸어요. 15세트는 팔아야 하는데 큰 일이예요. 기자님, 제 작품 사이트 꼭 좀 소개시켜 줄 거죠?(※권봄 디자이너 작품 링크 → ) 저는 퓨전 한복이 대중화됐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역사가 담긴 한복은 지금 너무 한복스럽게, 딱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요. 저는 한복적인 요소를 담은 옷을 창작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퓨전한복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면 꼭 판문점에서 ‘통일 패션쇼’를 열거에요. 남과 북의 모델을 써서요.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해요. 그런 날이 꼭 오겠죠? 그리고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고향에 묻힌 할아버지 유해를 고향에 모셔오고 싶어요. 남쪽에 와서 할아버지 자료를 보니 전사자로는 기록돼 있는데, 현충원엔 묘가 없어요. 할아버지 묘비 앞에서 ‘할아버지가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덕분에 손녀가 꿈을 이뤘어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 꿈이 너무 거창한가요. 사실 소박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도 또 있어요. 그게 뭐냐면 유재석, 조세호 씨에게 제가 만든 세계에서 유일한 디자인의 한복 정장을 선물하고 싶어요. 제가 유키즈 광팬이거든요.”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정황근, 이하 농식품부)는 26일 ‘2023-2032 농업생산기반 정비계획(이하 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안전하고 편리한 농업생산 기반정비 지원을 위한 복합영농, 물 이용, 물 안전, 물 환경 등 4대 분야 세부 추진과제를 발표했다. 정비계획은 ‘농어촌정비법’ 제7조에 따라 10년마다 수립하는 법정계획이다. 쌀 수급 불균형 해소, 논에 타 작물 재배 확대, 스마트팜 확산, 디지털화 등 농정방향 전환과 기후변화 위기와 같은 대내외 여건 변화에 맞추어 수립된다. 복합영농 기반 구축을 위해선 밭작물 재배지역 배수개선 대상지를 현행 30만3000㏊에서 32만 ㏊로 늘리고, 2027년까지 농경지 침수위험 지도도 제작할 예정이다. 간척지에 쌀 이외 다양한 작물 재배를 유도하기 위해 2023년부터 타 작물 재배구역 단지를 지정 운영하고 새만금 농생명용지는 2025년까지 세부적인 활용계획을 수립해 첨단영농이 가능한 기반으로 조성해 나간다. 물이용의 효율화를 위해선 한국농어촌공사가 관리하는 전체 수로 10만4000㎞에 대해 내년까지 디지털 계통도를 작성하며, 수리시설물의 원격 자동 제어 관리를 도입한다. 수위계, 유속계 등 저수지 용수공급량 계측장치도 현재 1470개소에서 2032년까지 2148개소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물 안전 확보를 위해서는 제방 붕괴 시 하류 피해 위험이 높은 500만 t 이상 대규모 저수지를 2025년까지 재정비하는 등 모든 규모의 저수지들의 재해 대응 능력을 높여 나간다. 저수지, 방조제, 양배수장 등이 지진에도 끄떡 없도록 재구축과 시설물 보강 등을 2030년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물 환경 개선 분야에서는 전국 주요 975개 저수지 및 담수호에 대한 수질측정망 조사 횟수를 연 4회에서 7회로 확대해 수질 안전성을 더 촘촘히 확인한다. 수질조사 결과를 반영해 인공습지, 침강지 설치 등 저수지 수질개선사업 대상지를 현재 50개소에서 2032년까지 113개소로 확대한다. 이밖에 수로 생태 블록 설치, 야생동물의 추락과 익사 방지를 위한 경사로와 탈출로도 지속적으로 정비하게 된다. 김정희 농식품부 식량정책실장은 26일 “기후변화 위기와 쌀 수급 불균형 해소, 스마트팜 확산, 디지털화와 같은 농정방향 전환에 맞추어 미래 농업생산 기반 마련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과거에 논은 주로 쌀을 생산했으나 최근에는 시설원예나 밭작물 재배가 늘고 있다”며 “논에 스마트팜이 들어오고 다양한 작물 재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배수시설 확충이 제일 중요하며, 시설원예나 밭작물에 맞는 맞춤형 용수 공급도 새롭게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중장기 대책은 기후변화 위기와 쌀생산 중심에서 다양한 작물로 전환하는 농업환경 변화에 부응한 대책”이라며 “농업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영농할 수 있도록 기반을 정비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김정은은 지난달 31일 정찰위성 발사 실패를 또 부하들 탓으로 돌렸다. 지난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8차 전원회의에선 “최근의 가장 엄중한 결함은 우주개발 부문에서 중대한 전략적 사업인 군사정찰위성 발사에서 실패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위성 발사 준비 사업을 책임지고 추진한 일꾼들의 무책임성이 신랄하게 비판됐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회의장에 인상을 잔뜩 쓰고 앉아 있었다. 사진을 엄선해서 공개했을 텐데도 웃는 표정은 없었다. 얼굴은 심하게 붓고 눈 주위엔 짙은 다크서클이, 왼쪽 볼에는 큰 뾰루지가 생겼다. 요즘 심기가 내내 불편하다는 방증이다. 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연설을 하지 않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쯤 되면 회의장 분위기는 안 봐도 뻔하다. 참석자들은 숨소리도 못 내고 있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무책임하다고 추궁당한 간부들을 끌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이번 실패는 그냥 폭발로 끝난 것도 아니고 2단 로켓을 한국에 헌납한 치욕스러운 실패이기도 하다. 정찰위성 발사 실패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책임 소재를 어떻게 따질지가 제일 궁금했다. 김정은이 용서해 주는 결말도 살짝 기대했다. 기술과 경험을 갖고 있는 간부들을 처벌하면 북한의 위성 개발은 그만큼 후퇴한다. 새로 임명된 후임들은 더 위축돼 제대로 일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오히려 격려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번에도 충성심이 부족한 간부들의 무책임성이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건 담당자들의 충성심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무책임해서도 아니다. 정찰위성 발사가 실패할 줄은 서울에 앉아있는 나도 예측할 수 있었다. 지난달 15일 칼럼에서 “흑연전극 하나 못 만들면서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정찰위성을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냐”며 “과학기술 분야를 시간을 정한 내기처럼 호언장담하며 접근하는 태도에 한숨이 나온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은 때려죽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는 교훈을 배우길 바란다”고 썼다. 정찰위성은 지금까지 북한이 시도한 과학기술적 도전 중에서 가장 고난도에 속한다. 정확한 고도에서 정확한 힘과 각도로 위성을 분리시켜야 하는 위성 발사체는 대륙간탄도미사일보다 훨씬 더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다. 반도체 강대국인 한국도 위성을 궤도에 안착시키는 데 12년 3개월이 걸렸다. 지난달 성공한 국산 발사체 누리호를 궤도에 안착시키는 데 300개가 넘는 내로라하는 기업이 참가했다. 자동차 한 대에 부품이 2만 개 들어가고, 항공기 한 대에 부품이 20만 개가 들어간다. 누리호에는 무려 37만 개가 들어갔다. 한국은 세계적인 현대차도 있고, 세계 8번째로 초음속 전투기도 개발한 나라이지만 위성 발사 로켓은 지난달에 완성시켰다. 여러 차례 발사체 엔진이 폭발했고, 엔진 설계만 20번 넘게 바꾸었고, 엔진 연소 실험은 184번이나 거쳤다. 북한은 승용차도 자체로 만들지 못하고, 항공기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엔진 연소 실험을 어쩌다 한 것을 신문에 대서특필하며 자랑하는 북한이 위성을 단번에 성공시키지 못했다고 실무자들을 처벌하니 참 황당하다. 사실 처벌의 1순위는 김정은, 김여정 오누이임을 그 자리에 참가한 간부들은 다 알고 있다. 발단은 지난해 12월 20일 김여정이 정찰위성 개발을 헐뜯는다고 한국을 향해 막말 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라고 호언장담한 데서 시작됐다. 발사를 약속한 4월이 되자 김정은은 국가우주개발국에 찾아가 비상설 위성발사 준비위원회를 만들게 하고 계획된 시일 내에 발사하라고 지시했다. 기한에 쫓겨 발사한 위성은 결국 실패했다. 북한은 위성을 이른 시일 안에 재발사한다고 밝혔지만, 성공 가능성이 이번이라고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간부들을 거듭 처벌하고, 없는 외화를 탕진해 넣어봐야 자존심만 점점 더 구겨질 것이다. 위성은 북한이 호언장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정찰위성 실패를 통해 북한이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은 하겠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교훈이다. 역사를 훑어보고, 주변을 둘러봐도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남 탓만 하는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달 초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탈북화가 심수진 전시회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이 열렸다. 지금까지 탈북민 사회에서 심수진이란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어떤 작가인지 궁금해서 찾아가봤다.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뭔가 색다름이 확 와 닿았다. 작품들을 둘러보며 그 색다름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건 섬세함이었다. 미술을 잘 모르지만, 종종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회들을 관람하면서 현대 미술에서 사라져가는 섬세함에 늘 아쉬웠고 목마름을 느꼈다. 작가 심수진의 작품들에는 칼끝의 섬세함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단풍나무잎 하나를 놓고 한 달 동안 칼질을 하며 작품을 완성한다. 그의 작품들은 방식과 재료를 가리지 않았다. 유화도 있고 수채화, 아크릴화에 심지어 도자기도 있었다. 재료도 낙엽뿐만 아니라 모래, 보리대 등 다양했다. 하지만 작품들에 들어있는 공통된 특징은 섬세함이었다. 어떤 인내가 배어있어야 이런 작품 창작이 가능할까. 그는 왜 한국에 와서 작가의 길을 택했을까. 많은 궁금함을 안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자유의 땅을 밟기까지 그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중국에서 북송되는 과정에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피투성이가 돼 정신을 잃었던 순간도 있었다. 자유의 땅이라 믿고 필사적으로 찾아왔지만, 그에겐 육체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불과 3년 전까지 그녀는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였다. 이 땅에 ‘작가 심수진’이란 이름으로 삶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절박함이 그녀의 작품에 녹아있었다. 그는 어떤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을까.● 서예 재능을 타고난 소녀 심수진은 1978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평범한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기계공장 선반공이었고, 어머니는 상점 판매원이었다. 1995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삶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달랐던 점은 학교에서 글씨를 제일 잘 썼다는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사범대학 미술학부에서 서예를 전공한 학교 사로청지도원이었다. 학생들이 쓴 글 중에서 범상치 않은 글씨체를 발견한 여성 지도원은 14살 수진을 지도원방에 불렀다. 그러더니 붓으로 글씨를 써보게 했다. “내가 볼 때 너는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이제부터 내가 서예를 가르쳐줄 건데, 배워볼 생각이 있어?” 수진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3살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계모 밑에서 사는 수진에게 서예는 너무나 호기심이 가득한 새로운 세계였다. 그때부터 사로청지도원은 수업이 끝나면 수진을 불러 서예를 가르쳤다. 농촌동원과 화목동원에서도 빼주고, 토끼가족이니, 폐동이니 등을 내야 하는 ‘꼬마과제’도 전부 면제해주었다. 대신 수진은 학교 벽보를 도맡아 만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재미있었다. 졸업반에 올라가선 교장에게 발탁돼 김일성 생일 등 명절 때마다 학교에서 중앙에 올려 보내는 ‘충성의 편지’나 학생기록자료 등을 써야 했다. 졸업할 때까지 학교의 각종 필사와 붓글씨는 전부 그의 몫이었다. 1995년 졸업과 동시에 그는 속도전청년돌격대에 입대했다. 한시라도 빨리 계모의 손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속도전청년돌격대 9여단에 들어갔는데 당시 부대는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원래 속도전청년돌격대는 건설을 도맡아하는 부대였는데, 당시엔 고난의 행군 시기라 자재가 없어 건설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농촌에 보낸 것이다. 고난의 행군으로 도처에서 아사자가 나오면서 사회의 기강은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졌다. 속도전청년돌격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1년쯤 지나니 그와 함께 단천시에서 입대한 대원 20명 중 18명이 도망갔다. 각종 핑계를 내걸고 집에 갔다가 복귀하지 않은 것인데, 기차를 타고 며칠씩 걸려 집에 찾으러 가도 부모들이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인 때였다. 수진도 저녁에 열린 생활총화 시간에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평양 친척집으로 도망갔다. 거기서 여비를 빌려 집으로 갔는데 계모는 당장 부대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함북 청진에 사는 외삼촌 집에 가서 머물며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과를 파는 장사를 하다가 나중엔 동 장사를 시작했다. 동을 사서 혜산에 들여가면 산 가격의 두 배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 다시 중국산 담배를 사서 나오면 또 두 배가 떨어졌다. 대신 동은 잘못 걸리면 사형까지 처하는 국가 전략 자산이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다닐 때 목숨을 걸어야 했다. 혜산역에 내리면 사람들이 검열을 피해 나가기 위해 3m나 되는 담장에 새까맣게 매달렸다.● 18세에 인신매매범에게 걸려들다 그의 탈북은 우연히 이뤄졌다. 인신매매범의 마수에 걸린 것이다. 1996년 11월 그는 열흘 넘게 혜산역에서 노숙을 하는 신세가 됐다. 동을 팔고 담배를 사서 돌아가려는데, 전기가 없어 기차가 열흘째 오진 않았다. 할 수 없이 담배를 다시 팔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행색도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어떤 아줌마가 그에게 다가왔다. 산에 벌목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을 석 달쯤 해주면 큰 돈을 만지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제안도 솔깃했지만, 돈도 떨어져가는 터라 당장 밥을 먹는 것이 급했다. 그녀를 따라 어떤 집에 가니 중국산 쌀이 무려 다섯 포대나 쌓여있었다. 당시에 그 정도 쌀을 갖고 있는 집은 드물었다. 저녁이 되니 인근 국경 경비대원들이 몰려와 밥을 먹고 갔다. 알고 보니 벌목이 아니라 밀수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다.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 갔고 이들을 봐주는 군인들도 밥을 먹고 갔다. 이 집에서 한달쯤 일했을 때, 그 아줌마가 또 제안했다. 강을 건너가 물건을 좀 받아갖고 오라는 것. 저녁마다 압록강을 넘어가고 넘어오는 사람들을 봤던 터라 수진은 돈을 많이 준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녀와 함께 다른 여성 두 명도 함께 강을 넘었다. 강을 건너니 중국에서 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물건을 실으러 가야 된다며 이들을 싣고 몇 시간을 달려 어느 집에 내려놓았다. 집은 컸는데 담장 위엔 철조망을 쳐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집 주인이 나오더니 처음에는 물건이 오려면 기다려야 한다며 먹을 것도 풍족하게 주고 새 옷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지린(吉林) 성 퉁화(通化) 시에 소속된 메이화구(梅河口) 시였다. 연변과는 차로 열 시간 넘게 떨어진 곳이었고, 장백에서도 차로 남쪽으로 몇 시간 와야 하는 곳으로, 북한 자강도 만포시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며칠쯤 지나 북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철조망을 친 집을 벗어나 도망가도 주변이 온통 한족이라 나가자마자 잡힐 것이 뻔했다. 보름쯤 지났을 때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주인은 저 남자를 따라가 밥을 해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고, 집에 돈도 보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집에 보내달라고 하자 “너를 데려오느라 돈을 많이 써서 보낼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수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생지옥처럼 변한 북한에 남은 미련도 없었다. 중국에 와서 지내보니 먹을 것도 풍족하고 살 만한 세상이었다. 남들은 돈을 써서 넘어오기도 힘든데,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중국에서 결혼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춘의 첫 탈북 여성 1997년 1월에 남자를 따라가보니 장춘이었다. 그를 산 남자는 일본뇌염 후유증으로 짜증을 달고 사는 30세 조선족이었다. 그는 장가가기 위해 4000위안을 내고 수진을 샀다. 당시 4000위안이면 500달러 정도 됐다. 북한 아줌마가 그들을 얼마나 팔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 처녀들은 단돈 100달러에 팔렸다. 1999년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영화 ‘쉬리’에서 북한군 특수 8군단 소좌 박무영(최민식 역)은 국정원 요원 중원(한석규 역)에게 침을 튀기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 순간에도 우리 북녘의 인민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 나무껍데기에 풀뿌리도 모자라서 이젠 흙까지 파먹고 있어. 새파란 우리 인민의 아들딸들이 국경 넘어 매춘부에 그것도 단돈 100달러에 개 팔리듯 팔리고 있어. 굶어죽은 지 새끼의 인육마저 뜯어먹는 그 에미, 그 애비를 너는 본 적이 있어?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그걸 알 리 없지.” 기자는 탈북해 연변에 숨어있던 2000년에 그 영화를 봤다. 북한 여성들이 단돈 100달러에 팔려 다니는 현장에서 내가 느꼈던 울분과 분노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여성들 속에 심수진도 있었다. 수진은 한국에 온 뒤 자신을 팔았던 북한 아줌마가 한국에 와서 탈북민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녀를 보자 마음속 감정이 복잡해졌다. 거짓말하고 자신을 팔아먹은 것은 용서하기 힘들었지만, 한편으로 저 여자 때문에 내가 목숨을 건져 한국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 아줌마를 용서하기로 했다. 수진은 장춘에 팔려온 첫 북한 여성이었다. 1년쯤 지나니 여기저기서 북한 여성들이 하나둘 장춘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난 2007년 그가 살던 마을에는 탈북 여성이 20명이 넘게 시집와서 살았다. 하지만 수진이 한국에 먼저 온 뒤 친했던 사람에게 한국행 루트를 알려주자 몇 명씩 줄 지어 한국으로 왔다. 얼마쯤 지나니 그 마을의 탈북 여성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런 일은 중국 지린 성이나 흑룡강 성의 수많은 마을에서 벌어졌다. 중국 조선족들은 탈북 여성들을 “갈데없는 거지같은 신세를 걷어주고 먹여 살렸더니 애까지 낳고는 다 달아나는 배은망덕한 여자들”이라고 욕한다. 하지만 탈북 여성들은 아무리 애를 낳고 살았다고 해도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처지에서 불안에 떨어야 했고, 원치 않은 남자에게 팔려와 온갖 학대를 감내하고 살아야 했다. 한국에 온다는 것은 그들에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조선족들이 입장을 바꾸어 그들의 처지라고 해도 도망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진은 수많은 탈북여성들의 삶을 대표하는 표본이기도 했다. 팔려와 1년쯤 살게 되니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나자 감시도 약해지고 밖에 나가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 그는 장춘 시내에서 호텔과 식당을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월급날이면 시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업고 나타나 돈을 받아갔다. 씨받이 역할을 마쳤으니 그 다음은 아들을 인질로 잡힌 돈 버는 노예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다 수많은 탈북민이 경험했던 북송의 위기가 수진에게 찾아왔다. 2001년 식당에서 일하던 때 갑자기 공안이 찾아와 그를 체포했다. 그는 장춘에서 체포된 탈북민 4명과 함께 북송 기차에 탔다. 기차를 타니 멀미가 심했다. 그는 수시로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하도 여러 번 화장실을 들락거리니 호송원들이 그녀의 수갑을 벗겨주었다. 중국 기차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설마 24세 여성이 도망을 칠까 방심한 것이었다. 수진은 죽더라도 북한에 다시 돌아가기 싫었다. 지금 탈출하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인생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새벽 5시가 지나자 호송원들도 꾸벅꾸벅 잠을 자기 시작했다. 수진이 앉은 좌석의 창문 쪽 자리엔 평범한 조선족 남성 둘이 앉아있었다. 그는 남성들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북한으로 끌려가는 탈북 여성입니다. 제가 이제 가면 살아올 것 같지 못합니다. 제발 부탁인데, 창문만 좀 올려주십시오.” 하도 부탁하니 창문 옆에 앉은 남성들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슬그머니 창문을 올려주었다. 수진은 순식간에 창문을 넘어 기차 밖에 매달렸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때까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어느 집 문 앞에 누워있었다. 얼굴과 온몸이 피투성이었다. 옷도 다 찢어졌다. 자신이 어떻게 민가의 문 앞에 누워있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짐작으론 누군가 선로 옆에 쓰러진 여성을 보고 마을로 데려다놓고 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동네 미용실을 찾아 들어갔다. 깜짝 놀란 여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여주인은 긁힌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옷도 새로 가져다주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연길이라고 했다. 그는 장춘의 남편에게 전화했다. 수진은 남편이 전화 속에서 내뱉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잡혀간 줄 알았는데, 또 전화 온 걸 보니 갈 데가 없네….” 수진은 이제 돌아가면 무조건 집을 뜨리라고 결심했다. 장춘에서 시누이가 찾아왔다.● 베이징의 북한 작품 가이드 장춘에 돌아와 얼마쯤 있으니 남편이 돈 벌어온다며 고기잡이 어선을 타러 갔다. 그는 시집에 “북한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뒤 산둥(山東) 성으로 갔다. 같은 마을에 살던 탈북 여성 한 명이 그쪽으로 가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산둥에 간 그는 한국 회사에서 식모 자리를 얻었다. 한국인 직원 50명과 일본인 10여명이 일하는 큰 회사였다. 거기서 2년 동안 일하다가 2004년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베이징에선 북한 예술작품을 파는 회사에 취직했다. 사장은 조선족이었는데 북한에서 그림과 수예, 보석화를 받아다가 한국인들에게 팔았다. 수진은 전시장을 찾아온 한국 관광객들에게 북한 작품을 설명하는 일을 맡았다. 한국인들은 그를 조선족 가이드로 알았다. 그림을 좋아하는 그에겐 너무 적성이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오래하지 못했다. 하루는 북한대사관에서 찾아와 그림 판매 실태를 파악하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북한 외교관들을 본 순간 수진은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곧바로 사표를 낸 수진은 베이징에서 한국인 가정집들을 다니면서 밥과 청소를 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하루에 세 가정을 찾아갔다. 한국 가정과의 만남은 그에게 한국에 대한 동경을 키워주었다. “한국 외교관 가정과 LG 현지 직원 가정 등을 다녔는데 모두가 신사다웠습니다. 물론 잘 사는 집도 있고 못 사는 집도 있었지만, 모두 매너가 좋았습니다.” 한국 외교관의 부인은 미인이었는데, 비밀 유지 차원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남편하고는 말하지 못하게 철저히 차단했던 것이 기억이 남는다. 하지만 베이징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외지인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다. 그는 한국에 가기로 결심하고 2007년 초 한국행 루트를 찾은 뒤 길을 나섰다. 동남아를 통해 한국에 오는 과정은 다른 탈북민들과 똑같았다. “태국 감옥에 들어가니 중국에서 결혼했던 여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한국에 가면 중국 남편과 아이들을 데려오겠다’고 말을 하더군요. 저는 한국 가정을 2년 가까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정작 가봐라. 가면 눈이 높아져 절대 중국 남자 데려오지 않는다. 데려오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했어요. 실제로 중국 남편을 데려온 탈북 여성들은 많지 않지요.”● 한국에서 시작한 작가의 삶 2007년 2월 수진은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기관에서 담당 조사관이 그가 쓴 한자 이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다른 중국어도 써보게 하더니 “탈북 이후에 중국어를 배운 사람은 절대 이렇게 쓸 수가 없다. 중국에서 태어나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고선 이렇게 예쁘게 한자를 쓰기 힘들다”고 했다. 덕분에 위장 탈북민으로 오해받아 조사를 좀 더 받기도 했다. 그해 8월 그는 평택에 임대주택을 받고 한국 사회에 정착했다. 3개월 뒤 전자부품 제작 회사에 검사원으로도 취직했고, 하나원과 연계된 대학인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에 디자인 전공으로 입학도 했다. 모든 게 잘 풀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인 2010년부터 각종 병마가 그를 괴롭혔다. 밥을 챙겨먹지 않고 열심히 일했더니 위궤양으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거기에 심각한 간경화까지 겹쳤다. 더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중증장애인 진단까지 받게 되니 우울증도 찾아왔다. 그는 점점 삶의 희망을 포기해갔다. 그는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남은 인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경험한 충북 옥천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2010년 옥천으로 내려갔고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현지 문화센터에 등록해 도자기 체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은 거기서도 빚을 발했다. 선생과 수강생 모두가 어디서 전문적으로 배웠냐고 물었다. 아무리 처음 해보는 것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도자기를 빚으면서 그는 난생 처음 편안함을 느꼈다. 온 정신을 집중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나중에 재료비가 들지 않는 작품을 생각하다가 낙엽을 재료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단풍나무잎을 주어와 칼로 그림을 새기다보면 온갖 시름이 잊혀졌다. 작품 창작은 그에게 삶의 끈이 되었다. 6년을 그렇게 흘려 보냈다. 도자기와 판화로 입문했지만 그림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한 시도 떠나지 않았다. 2016년 몸이 어느 정도 좋아지자 서울디지털대 회화과에 입학해 2018년 차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모래를 재료로 하는 보석화에 빠졌다. 모래에 150가지 색을 입혀 작품을 창작했다. 2018년엔 보릿대를 주워와 작품을 만들었다. 2017년 수진은 제7회 대한민국서화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해 은상을 받았다. 이 일은 그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2018년 국제현대미술대전 은상, 대한민국창작미술대전 동상 등 출품작들마다 좋은 평가를 받게 되자 그는 한국미술협회와 한국서화협회에 정회원으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받은 상만 10여개가 넘는다. 작가 심수진을 키운 것은 타고난 재능과 끈질긴 몰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가 받쳐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건강은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한나절 동안 작업을 하면 한나절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일이 반복됐다. 2020년이 되니 병원에서도 간경화를 더는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상 시한부 판정이었다. 남은 것은 간 이식밖에 없었다. 간 기증자를 찾기는 너무 어려웠다. 이때 아들이 엄마에게 간을 떼어주겠다고 나섰다. 물론 아들도 쉽게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아들은 2015년 17세 때 한국에 왔다. 엄마와 살겠다고 중국을 떠나온 것이었다. 원치 않은 결혼과 출산을 거쳐 태어난 아들이고 오랫동안 엄마와 떨어져 자란 아들이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닌 아들은 국적을 결정할 순간이 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 국적을 얻으려면 군대에 갔다와야 했다. 수진이 “앞으로 엄마와 계속 같이 살려면 군에 갔다오는 길밖에 없다”고 하자 아들은 “엄마 고향 사람들에게 총 겨누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아들은 결국 한국 국적을 선택했고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 근무한 뒤 만기 전역했다. 전역한 날 아들은 수진에게 “군 복무가 별거 아니었어요. 괜히 많이 고민했네. 갔다 오길 잘했어요”라고 했다. 군에 다녀온 뒤로 아들은 많이 달라졌다. 돈을 아껴 쓰려고 하고, 소소한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는다. 올해 2월엔 지방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취직을 준비 중이다. 아들이 군 복무를 하던 2020년 수진은 쓰러졌다. 몇 달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네가 엄마를 좀 살려줘야겠다. 나는 13살에 엄마를 잃고 살았는데, 지금 엄마가 되고 보니 아들이 장가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형제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엄마는 꿈을 다 이루지 못했다. 네가 엄마의 꿈을 이루게 좀 도와주렴.” 아무리 아들이지만 어릴 때 두고 온 터라 그럴 말을 할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엄마는 왜 나를 계속 힘들게 하냐”고 푸념도 했지만 결국 어머니를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떼어낸 아들의 간 60%가 수진에게 이식됐다. 이제 수진은 아들의 간으로 남은 일생을 살아야 한다. 간 이식 후 건강은 뚜렷하게 좋아졌다. 피부도 좋아지고 식성도 달라지고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았다. 피곤한 것도 많이 사라졌다. 이젠 살만해졌다. 아들을 볼 때마다 수진은 “내가 살려고 너를 낳았구나”라는 생각이 늘 든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새로 얻은 목숨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값있게 쓰고 싶다. 화가 심수진의 한계가 어디인지 끝까지 가보고 싶기도 하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여전히 값싼 재료를 구해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지만, 그건 지금 느끼는 행복에 비해선 큰 고민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북에서 19년, 중국에서 10년, 한국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건강이 나쁜 사람이 북한이나 중국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었겠습니까. 한국의 복지제도가 너무 잘 돼 있어서 저같은 사람이 지금까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사는 매일 매일이 저에게 찾아온 선물 같습니다. 그리고 이젠 꿈도 펼칠 수 있게 됐습니다.” 2023년 6월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회는 탈북작가 심수진을 알리는 첫 개인전이기도 했다. 그는 이달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열리는 신라호텔 ‘2023 그랜드 아트페어’ 초대전에도 참가한다. “지금까지 저는 어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밖으로 나와 빛을 보려 합니다. 새 생명도 얻고 내 꿈도 펼칠 수 있는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아서 꼭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그의 첫 전시회 타이틀 ‘자유의 땅에서 내 꿈의 여행’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의 여행은 이제 시작됐다. 전시회는 작가 심수진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 여행길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나는 전시회장을 떠났다.심수진 작가의 작품들을 기록한 유튜브 링크 →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97년 6월 어느 아침. 남루한 행색의 14세 소년이 풀밭을 헤치며 두만강 기슭을 헤매고 있었다. 울먹이며 삼촌을 애타게 불렀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간밤 소년은 30대 후반의 외삼촌과 함께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손을 꽉 잡고 강물을 헤쳤지만, 비 온 뒤의 두만강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물살이 셌다. 어느새 둘은 손을 놓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바닷가에서 자라 수영에 자신 있었지만, 발아래서 돌이 굴러가는 급물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작정 손을 휘저으며 버틸 뿐이었다. 어느 순간 소년은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옆에서 “어푸, 어푸”하는 외삼촌의 비명을 들은 것도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강기슭에서 눈을 떴다.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강 건너편을 보니 북한이었다. 저녁 8시에 두만강에 뛰어들었는데 간밤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정신이 돌아오자 소년은 외삼촌을 찾기 시작했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두만강 기슭을 오르내리며 몇 시간째. 하지만 끝내 외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시신도 없이 사라진 외삼촌을 찾으며 소년은 홀로 앉아 엉엉 울었다. 22년이 흐른 2019년. 소년은 대한민국에서 탈북민 1호 변호사가 됐다. 북한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중국에서 소년공으로 일하며 “하나님, 저에게 제발 공부할 기회를 주세요”라고 애타게 기도했던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고 20세에 영어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떤 역경도 그를 주저앉히진 못했다. 법무법인 이래의 이영현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두만강에서 외삼촌을 잃다 이영현은 198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걸어서 몇 시간 떨어져 있는 작은 어촌마을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산협동조합 어부였고, 어머니는 협동농장 농민이었다. 부친은 너무 일찍 돌아가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인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막 올라갈 무렵, 북한엔 엄혹한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농민인 어머니가 혼자 세 아들을 벌어 먹여야 했다. 노쇠한 시어머니도 한 집에서 살았다. 배급이 끊어지자 영현의 형제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어머니를 도와 먹고 살기 위해 뭐든 다 했다. 영현도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왔고, 나무껍질을 벗겨왔다. 그래도 하루 한 끼 풀죽도 먹기 힘들었다. 나이든 할머니부터 쓰러졌다. 먹지 못해 힘없이 누워 있던 할머니는 고난의 행군 첫 해인 1995년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듬해엔 같은 마을에 살던 삼촌도 굶어죽었다. 굶어 죽어가도 아무 대책이 없었던 마을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영현의 가족에겐 믿을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어머니 친척들이 중국에 있었던 것이다. 1997년 6월 인근에 살던 외삼촌이 집에 찾아와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14살 영현을 딸려 보냈다. “삼촌 따라가서 꼭 쌀 한 배낭이라도 메고 와.” 둘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기차를 타고 며칠 고생한 끝에 마침내 두만강 옆인 한반도 최북단 함북 온성에 도착했다. 친척들의 전화번호를 모르니 국경에 가서 중국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강을 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돈이 없어 국경경비대를 매수할 수도 없었다. 30대 후반의 외삼촌은 어느 날 영현을 데리고 두만강 옆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어디로 건너가면 좋을지 정찰하기 시작했다. 1997년은 국경경비대도 많지 않았던 터라 도강할 장소가 몇 군데 눈에 들어왔다. 외삼촌이 택한 곳은 두만강 폭이 50m 정도 되는 훈춘 맞은편의 어느 야산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큰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하지만 강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도로에서 보니 물살이 얼마나 센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어둠이 내리자 외삼촌과 영현은 봐두었던 도강지점으로 이동했다. 어둠 속에서 본 두만강은 유유히 흘러갈 뿐이었다. 어촌마을에서 자란 영현은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놀아 물이 두렵지 않았고, 수영에도 자신이 있었다. 외삼촌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손을 잡고 강에 들어갔다. 멀리 강 하구에 보이는 중국 마을이 이들의 목표였다. 떠내려가더라도 앞으로만 헤엄쳐 간다면 마을 근처에선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장마 뒤의 강물은 바다와 전혀 달랐다. 허리까지 들어가자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놓치고 말았다. 이젠 계획한 대로 앞으로 헤엄쳐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런 물살에선 헤엄도 제대로 칠 수가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어두운 두만강에서 영현은 외삼촌을 잃어버렸지만 약속한대로 중국을 향해 무작정 헤엄쳐 나가다가 정신을 잃었다.● 소년을 구해준 조선족 부부 아침에 정신을 차린 영현은 두만강 상류를 향해 걸었다. 삼촌은 자기보다 더 빨리 기슭에 도착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올라가도 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서너 시간을 걸어갔을 때 눈앞에 중국 마을이 나타났다. 간밤 목표로 삼았던 그 마을이었다. 마을이 보이자 소년은 그제야 자신이 처한 현실이 서서히 실감나기 시작했다. “삼촌은 죽었구나. 이제 어떻게 할까. 마을에서 쌀 한 배낭을 구걸해 집으로 돌아갈까.” 집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런데 두만강을 보니 다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소년은 마을로 들어가 어느 집 문을 두드렸다. “저는 조선에서 왔는데, 삼촌은 강을 넘어오다가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그러니 밥 한 그릇만 좀 주세요.” 중년의 부부가 내다보더니 혀를 찼다. “이틀 전에도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 도와주었는데 또 왔구나. 일단 들어와라.” 영현은 집에 들어갔다. 주는 밥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부부는 또 한 공기를 퍼주었다. 또 먹었다. 그렇게 서너 공기를 먹고 나니 밥이 없었다. “우리는 밭에 일하러 가야 해. 너는 집에서 씻고 쉬어라.” 훈춘의 조선족 농부 부부는 너무 친절했다. 영현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처음 본 애한테 밥도 주고, 문도 잠그지 않고 나가다니….” 강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밥을 몇 공기나 먹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부엌에 나가 보니 누룽지가 보였다. 그는 그것도 다 먹었다. 저녁에 돌아온 부부는 “어린 애가 어떻게 이걸 다 먹었냐”고 깜짝 놀랐다. 그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조선족 부부는 친척을 찾는 것도 도와주었다. 소년은 외삼촌이 오면서 중국 친척들의 이름과 사는 지역을 이야기해주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걸 토대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해당 지역 친척과 같은 이름의 전화번호에 무작정 전화를 해봤는데 이것이 성공했다. 찾아낸 친척은 길림에서 살았는데, 고위직이었다. 친척은 “내가 고위직이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기 때문에 북에서 월경한 아이를 데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친척인데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어 네가 지낼 곳을 찾아주겠다”고 말했다. 친척이 알려준 주소로 가니 훈춘의 어느 농촌마을이었다. 친척은 탈북 아이들을 돌보는 조선족 전도사를 수소문해냈던 것이다. 전도사는 소년을 보고 다시 어딘가에 연락했다. 한 남자가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남자는 조선족 집사였는데, 북에서 온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참이었다. 남자를 따라 나섰다. 기차를 타고 멀리 멀리 따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도착한 곳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인 허베이(河北) 성 친황다오(秦皇島)였다.● 학교 벽에 매달린 14세 소년공 집사를 따라 시내 변두리의 집에 들어가니 한눈에 봐도 가난해 보였다. 그리고 집사에겐 그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 두 명이 더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 부인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상의 없이 아이를 데려오면 어떻게 해?” 집사는 못들은 척 대꾸를 하지 않았다. 며칠 뒤 그는 소년을 데리고 파출소에 갔다. 공안들에게 “연변에 살던 친척집 아이가 고아가 돼 데리고 왔다”고 신고하자 그들은 알았다고 끄덕였다. 아직 탈북자가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한 동네였던 것이다. 집사는 며칠 있다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어린 애가 무슨 밥을 그리 먹냐”는 부인의 타박이 더 심해졌다. 그렇게 한달쯤 눈칫밥을 먹던 영현은 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 집과 가깝게 지내는 친구 중에 페인트칠을 위주로 하는 인테리어 업자 한족이 있었는데, 그가 영현을 보자 데리고 다니며 일을 배워주겠다고 한 것이다. 집사 부인이 다 낡았지만 그래도 굴러가는 자전거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영현은 그 자전거를 타고 업자를 따라다녔다. 아침 7시에 집을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됐다. 당시 중국에서 국수 한 그릇이 2위안이었는데, 영현은 8위안을 하루 일당으로 받아왔다. 번 돈은 모두 집사 부인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밥도 많이 주고 그때부터 “아들, 아들”하며 살갑게 대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 영현은 2000년까지 3년 남짓 살았다. 가끔 학교 외벽 페인트칠을 할 때도 있었다. 밧줄을 타고 벽에 매달려 페인트칠을 하던 10대 중반의 영현은 교실 안에서 교과서를 읽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울먹이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도 공부할 기회를 주세요.”● 다시 찾아간 연변 조선족 집사가 영현을 데리고 온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하루는 그가 베이징에 가자며 영현을 데리고 나섰다. 베이징에서 만난 사람은 미국 국적의 한인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피터은(본명 은춘표)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그는 미국의 한 한인교회 장로로 있다가 조선족 선교를 하러 중국에 왔다. 하지만 대량 탈북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그가 아는 조선족 집사가 탈북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자 한번 보자고 한 것이다. 베이징에 간 영현은 일주일 정도 은 선교사와 머물며 성경 공부를 했다. 돌아갈 때는 용돈도 넉넉히 주었는데 그 돈은 집사 부인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선교사는 집사에게 영현의 중국 호적을 사라고 5000위안도 주었다. 당시엔 중국에서 2년 가까이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그 돈도 집사가 다 착복했다. 영현을 집에 데려온 것은 미국이나 한국 선교사들에게 내세워 앵벌이를 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영현은 1년에 한두 번 베이징으로 가 머물며 한인 선교사와 친해졌다. 2000년경이 되자 은 선교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연변에 머물며 박사 신분으로 바꾸어 탈북민 사역에 매진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1호 탈북 소년인 영현을 편법을 써서 단둥에 있는 조선족 학교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호구도 없이 임시로 들어간 학교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두 달쯤 지나자 학교 선생들이 영현을 의심하면서 호구를 제출하라고 닥달질하기 시작했다. 더 버틸 수는 없었다. 영현은 야반도주하듯이 단둥을 떠나 연변에 자리 잡은 은 선교사에게 찾아갔다.● 하늘이 도운 한국행 은 선교사는 수많은 탈북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변 지역의 어느 깊은 산중에 탈북민 정착촌을 만들었다. 탈북민들은 산을 개간해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웠다. 갑자기 외진 산골짜기에 사람들이 모여 사니 신고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을은 공안에 적발돼 얼마 유지되지 못했다. 은 선교사는 연변의 농촌에 기술학교도 만들었다. 중국 애들도 공부를 했지만, 탈북민 아이들도 그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다. 탈북민 아이들은 농촌에 있는 주택에서 은 선교사와 함께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영현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2002년 3월 탈북민 25명이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집단 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조용히 숨어살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 25명 중에는 은 선교사와 한 집에서 살던 소녀도 있었다. 스페인 대사관 진입 사건은 중국에서 큰 뉴스로 다뤄졌다. TV에서 대사관 진입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자, 동네 주민이 알아봤다. “저 여자애는 여기서 살며 학교 다니던 애였는데 탈북한 애였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이들은 공포에 떨었다. 같이 살던 아이들이 갑자기 하나둘 사라졌다. 며칠 지나니 영현이 살던 집에 남아있는 애들은 3명뿐이었다. 은 선교사도 심각성을 알았다. 그는 어느 조선족 집사에게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낼 수 있는 길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족 집사는 몽골 국경까지 사전답사한 뒤 돌아왔다. 4월 20일에 한국으로 떠나기로 날짜가 정해졌다. 하지만 집사가 강경했다. 여기서 더 머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지체없이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 받아들여져 아이들은 19일에 집을 나섰다. 25살 여성과 19살 영현, 14살 소년이 한 팀이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내몽골 도시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연변에서 들려온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중무장한 공안 100여명이 트럭 여러 대에 나눠 타고 그들의 은신처를 급습했다는 것이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체포됐다. 은 선교사도 함께 체포돼 50일 넘게 조사를 받은 뒤 미국으로 추방됐다. 이후 그는 중국에 다시 가지 못했다. 조선족 집사는 이들을 국경까지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별 하나를 가리키며, 저쪽으로 계속 가면 몽골이니 쉬지 말고 걸으라고 했다. 며칠 전에도 그는 탈북민 몇 명을 넘겨 보냈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그들이 호텔 앞에 서 있었다고 했다. 그들도 나름 밤새 걷고 걸었는데, 아침이 돼 보니 다시 떠난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사막에선 방향을 가늠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영현의 일행은 다시 알려준 방향으로 걷고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니 철조망이 나왔다. 바닥을 파고 통과했다. 그런데 한참 걸어가니 또 철조망이 나타났다. 철조망을 한 번만 넘을 줄 알았던 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철조망도 어찌어찌해서 통과해 걷는데 또 철조망이 나타났다. 밤새 이들이 땅을 파거나 기둥을 잡고 넘어간 철조망은 대략 10여개나 됐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철조망도 더는 나타나지 않을 때쯤 날이 밝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 마을이 보였다. 가서 살펴보니 중국어를 쓰지 않았다. 몽골에 온 것이다. 그 마을에 좀 머물러 있으니 몽골 수비대 여럿이 나타나 총을 겨누며 안대를 씌웠다. 차를 타고 간 곳은 변방 수비대 병영이었다. 이곳에서 열흘 정도 조사를 받고 울란바토르행 기차에 올랐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한 날이 2002년 5월 17일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공부할 기회 8월 하나원을 졸업한 영현은 무연고 청소년으로 분류돼 임대주택은 받지 못하고 천안에 있는 무연고 청소년 쉼터로 가게 됐다. 가보니 교회 하나만 달랑 있고, 함께 간 탈북 청소년들이 머물 숙소도 없었다. 대량 탈북을 처음 경험해 본 정부는 그때까지도 체계적인 청소년 정착 시스템을 마련해놓고 있지 못했다. 탈북 아이들은 받겠다는 곳만 있으면 현장 답사도 없이 무작정 보내다 보니 살 집도 없는 곳에 보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현은 다른 애들과 함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소년공으로 살았던 것이 도움이 됐다. 벽돌을 나르고 쌓고 겨우 몸을 누울 공간을 만들었지만 이곳에 오래 있진 않았다. 6개월 뒤 그는 2002년 개교한 기독교 대안 특성화학교인 지구촌고등학교에 입학해 부산으로 옮겨갔다. 지구촌고등학교는 2020년 폐교를 했는데, 운영기간 탈북민 사회의 우수한 청년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영현은 그렇게 바랐던 공부할 기회를 드디어 얻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북한에서 생존을 위해 학업을 그만들 수밖에 없었던 영현은 영어 알파벳도 잘 몰랐다. 수학 등 기초 과목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부가 힘에 부칠 때면 중국 학교의 외벽에서 밧줄에 매달려 “공부할 기회를 달라”며 부르짖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2년 동안 죽으라고 공부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5년 연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의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을 찾아 탈북했던 어머니와 형제가 북송됐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한국에 와서 고향에 사람을 보냈지만, 찾지 못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죽었는지, 아니면 수용소로 끌려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지금도 그는 북송된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영현은 법조인이 돼 억울한 탈북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세부터 공부를 시작한 그가 연세대 법대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번뿐인 배울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면 도서관에서 열흘 남짓 먹고 자며 살았다. 그래도 첫 학기는 평균 C 학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과연 졸업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들었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방학 때 삭발하고 산에 들어가 공부만 한 적도 있었다. 노력하는 그에게 기회도 찾아왔다. 졸업할 즈음 로스쿨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2011년 영현은 대학을 졸업하고 경북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대학 기간 1년은 영어를 익히기 위해 한인 선교사가 사는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했고, 또 1년은 로스쿨에 합격하기 위해 재수를 하다보니 대학 졸업에 6년이 걸렸다.● 탈북 1호 변호사의 꿈 로스쿨 역시 쉽지 않았다. 경북대는 지방대이긴 하지만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라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의 동기들은 대다수가 SKY 출신의 ‘학점기계’들이었다.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3년 과정을 4년 동안 마치고 2015년 드디어 변호사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 시험은 낙방이었다. 로스쿨 제도가 생겨 2012년에 치른 첫 시험에서 변호사 시험 합격률은 87%를 기록했지만 해가 갈수록 그 비율이 떨어졌다. 2015년엔 61%가 합격했다. 그는 떨어진 39%에 들었다. 이듬해 또 도전했다. 시험 기회는 다섯 번 부여된다. 이듬해 합격률은 55%로 더 떨어졌다. 그는 또 떨어졌다. 그렇게 연거푸 네 번을 낙방했다. 그러는 사이 합격률은 51%, 49%로 계속 낮아졌다. 2019년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이제 통과하지 못하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바쳤던 15년의 세월이 허무하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어느덧 영현도 36세의 청년이 돼 있었다.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날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공원을 정처 없이 걸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떨어졌지만, 그는 자신이 변호사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되는 과정이 참 많이 힘들지만, 죽음도 넘겼는데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변호사시험 준비를 하는 내내 눈이 닿는 모든 곳에 ‘합격’이란 글을 써서 붙였다. 휴대전화 알람음도 ‘합격’이었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늘 ‘합격’만 머리에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니 만감이 교차했고, 심장이 떨렸다. 합격자 발표가 뜬 시각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는 ‘변호사 시험 합격’이라는 글자가 보이자 두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만세’를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4전5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탈북민 출신 최초의 변호사가 됐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하지만 다 거절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고개를 넘으면 다른 고개가 또 다가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득한 그였다. 변호사 생활이란 새로운 고개를 들뜨지 말고 초심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한 중견 로펌에서 실무 수습과정을 마친 뒤 그는 여러 로펌을 거쳐 현재는 법무법인 이래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여느 변호사들처럼 그 역시 형사, 민사, 가사, 보험 등 여러 분야를 다뤄야 한다. 그의 방은 밤늦게까지 불이 켜 있다. 그는 바쁜 변호사업무를 하면서도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특별위원회와 북한이탈주민법률지원위원회 등에 가입해 북한인권과 탈북민 정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대한변협 인권재단의 사무총장직도 수행하면서 탈북민들에 대한 법률상담과 법률교육 관련 사업을 직접 기획하고 진행한다. 그 외에도 여러 북한인권 관련 기관이나 단체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는 인류보편적 가치인 북한인권을 개선하고, 먼저 온 통일인 탈북민들이 한국사회에서 잘 정착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탈북민 변호사로서 그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소명의식은 늘 운명처럼 새겨져 있다. 그는 시대가 부르는 날이 온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고 절실하게 북한주민과 탈북민을 위해 나설 의지와 각오를 깊은 곳에 품고 살고 있다. “만약 내일이라도 북한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저는 주저없이 가겠습니다. 지금 북한 체제에 부역하던 사람들을 법조인으로 재교육시켜 쓸 순 없습니다. 법조인이 없는 공백의 상태가 올 것인데, 새로운 법질서를 이식하는 과정도 겪어야 합니다. 북한 2000만 동포 중 자유민주주의 세상에서 제일 먼저 법조인이 된 제가 당연히 주춧돌이 돼야 할 겁니다. 그게 쌀 한 배낭을 지고 오려고 두만강을 건넌 제게 분단의 조국이 짊어지게 한 운명이 아닐까요.”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어투는 단호했다. 변호사 이영현은 공부가 만들어낸 법조인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법조인이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요즘 중국 다롄(大連)과 단둥(丹東)항에는 안남미 등 식량 포대들이 잔뜩 쌓여 있다고 한다. 식량을 주문한 북한이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서이다. 작년 10월부터 북한은 많은 식량을 중국에서 사갔다. 중국 세관에 따르면 올해 3월까지 6개월간 북한의 식량 수입액은 6723만 달러로 월평균 1120만 달러였다. 코로나 이전인 2018년 한 해 식량 수입액이 2260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내부 식량 사정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월부터 식량 수입이 급감했다. 4월 585만 달러로, 3월 2176만 달러에 비해 73% 급락했다. 5월부터는 식량이 항구에 묶이기 시작했다.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최근 북한의 식량 가격은 최근 5년 내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서민들의 주식인 옥수수는 코로나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싸졌다. 굶주리는 가정과 꽃제비도 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식량 수입이 늘어나야 정상인데 주문했던 식량도 대금을 치르지 못한다는 것은 외화가 고갈됐다는 증거다. 외화가 없으면 북한의 선택은 두 가지다. 빚지거나 뭘 팔아 버는 것이다. 북한은 빚지는 데는 선수다. 작년 10월 무역이 재개된 이래 북한은 매달 1억 달러가 넘는 대중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올해 1∼4월 월평균 무역적자는 약 1억3000만 달러였다. 북-중 무역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한 1998년부터 올해 4월까지 북한의 대중 무역 누적 적자액은 193억8068만 달러나 된다. 그런데 빚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중국이라고 무작정 북한에 퍼주진 않는다. 중국이 허용하는 적자 범위를 넘어서면 돈을 주고 사와야 한다. 2017년 유엔의 대북제재로 북한 수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광물, 수산물, 섬유제품 수출이 금지된 뒤 북한이 외화를 벌 방법은 극히 제한됐다. 3월 북한의 대중 수출액은 2055만 달러였는데, 이 중 가발과 인조속눈썹 제품이 796만 달러로 39%를 차지했다. 식량을 사올 돈도 없으면서 김정은은 요즘 정찰위성을 여러 개 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정찰위성 발사에는 막대한 돈이 든다. 한국이 내년까지 정찰위성 5기를 발사하는 데 들이는 예산은 약 10억 달러다. 북한은 인건비가 사실상 공짜이긴 하지만, 반도체 등 위성 발사에 드는 거의 모든 부품은 사와야 한다. 속눈썹 따위나 팔아서 충당할 수 없는 금액이다. 이런 데 쓰는 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공식 무역통계에 잡히지 않는 북한의 비자금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에 머무는 인력이다. 근로자의 경우 유엔 제재 이후 상당수 귀국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1인당 상납액이 크진 않다. 하지만 정보기술(IT) 종사자들은 얘기가 다르다. 현재 중국에서 얼마나 많은 북한 정보기술자들이 활동 중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수천 명인 것은 확실하다. 2017년 313총국(옛 조선컴퓨터센터)이 중국에서 1000만 달러를 벌어 당 자금으로 바치자 김정은은 노동당과 무력부, 보안성, 보위성 등 각급 내각 기관에도 중국에 IT 인력을 파견해 돈을 벌어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코로나가 발발하기 전에 기존보다 5, 6배 많은 IT 인력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5∼7명 규모로 중국 대도시의 아파트에 은신해 활동한다. 해킹과 가상화폐 탈취 등 온갖 불법 활동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 김정은의 주머니로 송금한다. 지난해 5월부터 북한 내에서 코로나가 대유행해 더는 강력한 봉쇄를 할 필요가 없음에도 김정은은 지금까지 1년 넘게 해외 교류를 차단했다. 그래서 코로나는 구실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IT로 벌어들이는 돈줄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의 북한 IT 인력은 모두 체류 기간이 만료돼 국경 봉쇄가 풀리면 귀국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는 중국이 귀국했던 인력이 다시 올 경우 받아줄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에겐 국경 봉쇄 해제는 가장 큰 돈줄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쌀 사올 돈도 떨어졌는데 마냥 봉쇄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민들은 하루빨리 국경이 개방돼 중국과 무역이 재개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김정은이 굶주려 아우성치는 인민의 분노를 언제까지 감당하며 버틸 수 있을지 주목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삼성증권에서 계좌 잔액을 1억 원 이상 유지하고, 주 거래를 디지털로만 하는 고객이 2019년 말 3만8197명에서 2022년 말 약 22만5000명으로 3년간 5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들의 평균 자산도 2019년 1억6500만 원에서 2022년 말 4억3000만 원으로 증가했으며 평균연령은 51세에서 45.6세로 낮아졌다. 엄지족이면서도 고액 자산가인 사람들을 증권가에선 ‘디지털 부유층’이라고 부른다. 삼성증권은 달라지는 환경에 발맞춰 디지털 부유층을 겨냥한 ‘S.Lounge’를 지난해 출범시킨 데 이어 고객들의 수요에 맞춘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S.Lounge는 삼성증권(S)이 투자 관련 정보, 상담 등을 프라이빗한 공간(라운지)에서 제공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S.Lounge는 투자정보라운지, 세미나라운지, 컨설팅라운지 등 3개의 대표 메뉴를 중심으로 휴먼터치와 자동화된 투자정보를 제공하는 하이브리드 서비스도 제공한다. 투자정보라운지를 통해 제공하는 ‘리서치톡’과 ‘리포트 플러스’는 고객들의 이용률이 특히 높다. 이 서비스는 이용자가 받고 싶은 정보 유형을 선택하면 관련 애널리스트가 작성한 코멘트나 리포트를 고객에게 휴대전화 팝업 메시지로 실시간 제공해주는 기능이다. 세미나 라운지는 실시간 웹세미나를 열어 삼성증권 애널리스트와 전문가뿐만 아니라 자산운용사 대표 매니저 등이 직접 출연해 국내외 주식이나 금융상품과 관련된 주요 이슈를 주제로 설명하고 질의응답도 받는다. 웹세미나는 평균 월 2, 3회 개최하고 있는데 서비스 안내 당일 신청 고객이 평균 400명 이상을 기록한다. 컨설팅라운지는 디지털 고액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PB가 직접 유선으로 투자 상담과 업무처리를 원스톱으로 진행할 수 있게 도와준다. 삼성증권 디지털자산관리본부에는 경력 10년 이상의 디지털PB가 100명 넘게 있다. 오현석 삼성증권 디지털자산관리본부장은 “디지털 부유층 고객들은 투자와 관련해 셀프학습을 많이 한 상태라 많은 양의 정보를 짧은 시간에 비대면 컨설팅을 통해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의 니즈에 부합하기 위해 디지털PB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증권은 이 밖에도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주식 등 개인별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제공하는 디지털자산관리 서비스인 ‘굴링’, 연금자산 관리 서비스인 ‘연금S톡’을 제공해 초개인화 시대의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또 삼성증권 애널리스트의 모습과 음성을 인공지능(AI) 기술로 학습시켜 만든 가상인간인 ‘버추얼 애널리스트’를 업계 최초로 개발해 유튜브를 통한 국내외 시황 콘텐츠로 투자정보의 적시성을 높이며 디지털자산관리 서비스를 한층 고도화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깜깜한 어둠. 흰눈 덮인 압록강에 10~15명의 밀수꾼 무리가 나타났다. 금속이 든 60㎏짜리 마대를 메고 앞장선 밀수꾼 두목은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이름 박윤희. 13살에 북한군 호위사령부에 입대해 국가대표 바이애슬론 선수로 활약했던 노동당원. 현직은 보천보혁명박물관 관리원. 비공식 생업은 밀수꾼 두목. 그에게 40㎏ 마대는 책가방이었고, 60㎏짜리는 일상이었다. 90㎏짜리를 메고 압록강을 넘은 적도 있었다. 밀수를 하다가 3번씩이나 체포돼 노동단련대에 가면서도 고향을 지킨다고 버티던 그는 결국 2013년 설날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김정일 친위부대인 974부대를 제대한 남동생도 누나와 함께 강을 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박 씨는 한국 생활이 너무나 행복하다며 웃음을 달고 산다. 서울에 오기까지 박 씨의 삶은 다른 탈북민들과는 같은 듯 달랐다.● 삼지연의 소녀 스키선수 박윤희 씨는 1979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은 없다. 2살 때 아버지를 따라 양강도 삼지연군(현재 삼지연시로 승격)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부친은 사회안전성 답사관리소에서 일했다. 안전원(경찰) 군복을 입고 있어 어딜 가나 폼은 났지만, 윤희가 태어나서부터 그가 군을 제대하던 2004년까지 25년 동안 상위(중위와 대위 사이)만 달고 있었다. 답사관리소 편제가 그랬다. 그래도 부친은 “이만한 직업이 없다”며 승진도 못하는 자리를 고집했다. 답사관리소는 전국 안전원들이 정기적으로 하는 혁명전적지 답사를 위해 존재하는 여관 개념의 답사숙영소를 3개 운영했다. 윤희의 부친은 왕재산과 보천군, 삼지연에 있는 답사숙영소를 몇 년에 한번씩 옮기며 순환 근무를 했는데, 권력을 가진 안전원들을 먹이고 재우는 곳에서 근무하다보니 집에 먹을 것이 풍족했다. 윤희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다. 고난의 행군도 몰랐다. 집에는 쌀과 기름이 넉넉했다. 부친은 과일과 동태 따위의 부식물도 자주 가져왔다. 배급표가 있어도 배급을 타지 못하는 학교 선생들이 집에 찾아왔다. 그러면 부친이 무용지물이 될 뻔한 배급표를 답사숙영소 식량으로 바꿔주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윤희의 위신도 높아졌다. 인민학교를 다니던 10살 때 윤희는 삼지연학생소년궁전에서 스키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식령에도 스키장이 생겼지만, 당시 북한 전역에 경기를 할만한 스키장은 삼지연 베개봉스키장 밖에 없었다. 스키 선수를 키우는 곳도 삼지연과 장진, 랑림 등 몇 개 지역밖에 없었다. 동계 경기 대회 시즌이 오면 전국에 있는 스키선수들이 다 삼지연으로 몰려왔다. 어린 윤희는 이들이 타는 스키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부친에게 졸라 학생소년궁전 스키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윤희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몇 년 만에 소년궁전 에이스 스키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전문 체육단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해야겠다는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에서 스키부가 있는 선수단은 호위사령부 산하의 체육단인 이명수체육단밖에 없었다. 이명수는 백두산 천지물이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인데 삼지연에 있었다. 항일빨치산들의 전적지가 있다고 해서, 북한에선 성스러운 곳으로 꼽히는 개울이고 체육단 이름도 그걸 따서 지은 것이다. 부친은 윤희가 14살 되던 때 삼지연에 훈련하려 왔던 이명수체육단 코치들에게 찾아가 우리 딸을 선수로 뽑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코치가 윤희를 부르더니 스키를 타고 훈련장을 몇 바퀴 돌아보게 했다. 그러더니 실력이 뛰어나다고 뽑아가겠다고 했다. 당시 북한에선 스키를 타는 선수 자체가 많지 않았지만, 어떤 선수를 키우느냐에 따라 코치의 성과도 좌우되기 때문에 아무나 받아주지도 않았다.● 바이애슬론 국가대표가 되다 이명수체육단은 호위사령부 소속이기 때문에 이곳에 입단하는 것은 곧 군 입대와 같다. 입대 선서도 한다. 윤희는 소년단넥타이를 매고 다니던 14살 때 이명수체육단 선수로 입단했고, 동시에 군 경력도 시작됐다. 체육단 선수들에겐 군복이 지급됐지만, 시내로 나갈 때는 사복을 입어도 무방했다. 윤희는 오전에는 학교에 다니고, 오후엔 훈련을 했다. 평양 용성 구역 건지리에 있는 이명수체육단에는 축구, 마라톤, 스키 세 가지 종목에 300여명의 선수가 있었다. 스키 선수들은 1년 중 절반은 평양에 있었지만, 겨울 시즌 6개월은 늘 삼지연에 전지훈련을 나갔다. 11월부터 훈련을 시작해 국내 대회를 준비하는데, 이듬해 2월 백두산상 체육대회, 3월 공화국선수권대회, 4월 만경대상 경기대회를 치러야 한다. 대회에서 우승해봐야 공화국선수권 대회만 상품이 있을 뿐 아무런 경제적 보상은 없었다. 윤희는 선수단에 입단한지 2년 뒤인 1995년 공화국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다. 동시에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선택한 종목은 바이애슬론이었다. 사격 훈련할 때엔 수백 발씩 총 쏘는 날도 있었는데, 하루는 700발을 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빛이 바랬다. 1990년대 중반은 북한 체육이 가장 암흑기를 걷던 때이기도 했다. 1991년 8월 북한 유도 국가대표 이창수가 스페인 바르셀로나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가 귀국 도중 탈북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격노한 김정일은 2년 동안 북한 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를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많은 쟁쟁한 선수들이 선수 생활을 접고 은퇴했다. 1991년 영국 셰필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했던 리듬체조 선수 이경희도 이때 선수생활을 은퇴했고, 2007년 탈북해 한국에 왔다. 국제대회 참가 규정이 풀리나 싶었는데 이번엔 김일성이 사망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갑자기 ‘유훈관철’이라는 말이 생겨나더니 체육계에도 여파가 밀려왔다. 김정일이 “국제대회에 나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훈관철을 못한 것이니, 그렇게 나라 돈을 탕진할 바에는 3년 동안 내보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에 돈이 없으니 등수에 들 수 있는 사람만 엄격하게 구별해 내보내라는 지시였다. 윤희가 선택한 바이애슬론은 국제대회 메달권과 거리가 멀었다. 윤희는 국제대회에 나간 경험이 있는 나이 많은 선배 언니가 해줬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국제대회에 나가 우리 선수들이 메달을 따는 건 불가능해. 오르막은 어떻게 악으로 깡으로 따라 붙을 수 있지만 내리막과 평지에 들어서면 거리가 쭉쭉 벌어져. 유럽 선수들은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고, 힘도 좋아서 우리가 그 체력을 따라갈 수가 없어.” 게다가 장비도 차이가 컸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사용하는 스키는 러시아제 등 그나마 수입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서구권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사용하는 장비와는 질적 격차가 심했다. 좋지도 못한 스키도 수입제 중요 장비라고 선수들은 끔찍하게 아끼며 탔다.● 호위사령부 여성 대원 선수단에선 기록을 매우 중시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기록이 좋은 사람은 1조, 기록이 떨어지면 2조에 속했다. 항상 함께 훈련하던 친구라도 기록 측정이 끝나면 식사칸부터 달라졌다. 1조는 이밥에 고기를 풍족하게 먹였지만, 2조는 고기는 언감생심 구경도 못하고 시래기 국을 먹었다. 시래기 국을 먹다가 고기 먹는 1조를 제치고 올라간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2조에 속하면 훈련할 때 1조의 장비도 들어주어야 했다. 국가대표급 기록을 갖고 있던 윤희는 1996년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고 일주일 동안 입원하게 됐다. 입원생활은 너무나 편안하고 달콤했다. 침상에 누워 지나온 날을 돌아보니, 언제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오직 훈련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듯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달려왔는데, 그렇게 훈련해봐야 국제대회에도 못나가는 신세가 처량했다. 그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퇴원한 뒤 그의 기록은 자꾸 떨어지더니 그해 급기야 2조로 밀려났다. 국가대표 자격도 박탈됐다. 2조에 가서 다른 선수들의 장비까지 들어주는 처지가 되니 더 서글펐다. 그렇게 살다보니 선수 생활을 더 할 욕구도 사라졌다. 은퇴를 결심했다. 이럴 바엔 일반 부대에 가서 노동당에 입당이라도 한 뒤 집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선수단 간부들을 찾아가 졸랐다. 간부들도 처음엔 안 된다고 하더니 그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 윤희의 경우는 14살에 이미 군에 입대한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일반 부대에 갈 때 새로 입대로 취급하지 않고 조동으로 처리한다. 그가 속한 체육단이 김 씨 패밀리를 경호하는 부대인 호위사령부(963군부대) 소속이기 때문에, 그는 1998년에 963군부대 967기갑여단 산하 고사기관총 여성중대로 옮겨갔다. 기갑여단 산하에 여성 중대가 2개가 있는데, 이들은 평양 삼석구역에 주둔하면서 금수산기념궁전 등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얼음물로 목욕하는 중대 윤희네 중대엔 14.5㎜ 4신 고사총 12정이 있었다. 6명으로 구성된 분대가 기관총 1정을 맡았다. 그 외 지휘소대, 남성들로 구성된 견인차 운전수 10여명이 중대에 소속돼 있었다. 그는 일반 부대에 가자마자 죽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해도 선수단은 그래도 배는 곯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간 중대에서는 옥수수를 통으로 삶았고, 토끼풀을 반찬으로 먹었다. 그마저도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열악하다곤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체육단보다는 일반 부대에 있어야 노동당에 입당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티기로 했다. 부대에 간지 일주일 만에 덜컥 무좀에 걸렸다. 신고 간 신발을 고참들에게 빼앗기고 누가 신던 낡은 운동화를 받았는데, 새벽 4시부터 기상해 잠잘 때까지 농사일을 시켜 신발을 벗을 틈이 없었다. 경계근무를 서고 들어가면 부업 농사일이 기다리고, 그걸 끝내고 돌아오면 또 당직이 기다렸다. 선수단에서 그 혹독한 훈련을 견딘 그였지만, 일반 부대 생활은 다른 차원의 악몽이었다. 부대에 전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다. 김 씨 일가를 경호하기 위해 출신성분까지 보고 특별히 선발한 부대인 호위사령부가 사정이 그랬으니 그때 다른 부대의 상황은 더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호위사령부라고 다른 부대와 구별되는 점은 총을 매년 30발은 쏘게 했다는 것이다. 윤희는 한국에 와서 군인들이 사격을 한 뒤 탄피를 엄격하게 수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북한군은 탄피를 수거하지 않는다. 호위사령부는 또 여성들에겐 종이로 된 생리대도 공급했는데, 일반 부대엔 없는 것이었다. 중대에 목욕탕이 있긴 했지만, 여름에 부업농사가 한창일 때엔 일주일에 주말 한번이나 목욕을 할 시간을 주었다. 저녁에 씻는 시간이 주어지지만, 손이 빠른 여대원들이나 발까지 씻을 수 있지, 손이 느리면 신발을 벗다가 병실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겨울은 더 열악했다. 전기가 오지 않아 목욕탕 물을 덥히지 못할 때가 비일비재했는데, 주말에 전기가 오지 않으면 욕조의 얼음을 까고 목욕을 시켰다. 얼음물을 몸에 붓기 전 대원들은 마찰열을 만들어 몸을 예열하기 위해 서로 몸을 열심히 비벼댔다.● 하이힐 신은 호위사령부 여대원들 윤희가 기관총 중대에 옮겨가기 직전인 1997년 김정일은 급작스럽게 북한군 복무기간을 10년에서 13년으로 늘이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점점 부족해지는 병력 숫자를 그런 식으로 보충하려 한 것이다. 여성도 7년 복무기간이 10년으로 늘었다. 제대해 집에 갈 날만 기다리던 병사들에겐 청천병력 같은 지시였다. 아무리 장군님 지시라고 해도 이 지시에는 모두가 부글부글 끓었다. 윤희가 부대에 갔을 때는 군기가 말이 아니었다. 17살에 입대해 7년 복무를 채운 여대원들은 거의 부대 규율 생활을 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사복에 파마머리, 하이힐을 신고 평양 시내에 나가 연애를 하는 게 일상이 됐다. 당시 북한에선 여성의 결혼 적정 연령을 24세쯤으로 보았고, 27세면 노처녀라고 잘 거들떠보지도 않을 때였다. 그러니 제대하기 전에 남자를 잡아야 한다는 다급함에 누구나 초조해졌던 것. 남자 부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만 30세에 제대해 집에 가서 언제 여자를 소개받고, 연애하고 애를 낳느냐는 자조가 부대를 휩쓸고, 나이든 고참들은 주둔지 인근에 나가 여성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제대할 때 아이를 안고 간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어느 부대를 막론하고 주둔지 인근에 처갓집을 만들고 거기에 박혀 사는 대원들이 속출했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 전체의 군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풀어졌다. 몇 년 뒤 김정은은 복무기간 연장의 부작용을 인식하고 제대 정년을 원상복귀시켰다. 군기가 떨어지면서 부대에선 과거에 없던 사건들도 자주 터져 시끄러웠다. 윤희는 중대에서 한 번은 총알이 사라져 일주일 동안 잠을 못자고 벌을 선 적이 있었다. 김정일을 경호하는 부대에서 총탄이 없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사 내려온 젊은 보위부 조사관은 중대원들을 병실에 가두고 차렷 자세를 취하게 한 뒤 총알을 빼간 사람이 나올 때까지 자지 못하게 했다. 서서 졸다가 쓰러지는 대원들이 속출했다. 일주일쯤 지나서 나이든 보위부 사람이 나타나더니 젊은 조사관을 향해 “이렇게 병실에 세워두면 총탄을 몰래 꺼내놓고 싶어도 어떻게 꺼내놓겠냐. 나가서 총알을 찾게 해야지”라고 선심 쓰듯 말했다. 온 중대를 총알을 찾으라고 산에 달라붙게 했는데 저녁에 사라진 총알이 한 병사의 탄창주머니에서 나왔다. 공교롭게도 그 병사와 윤희는 한 근무조였는데, 이후 윤희가 총알을 훈친 사람으로 오인 받아 며칠 동안 각종 조사를 받으며 감옥에 갈 뻔했다. 다행히 중대장과 소대장이 “이 대원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적극 보증해줘 풀려날 수 있었다. 몇 년 뒤에도 총알 분실 사건은 또 터졌다. 이때는 하루 만에 총알을 찾아 중대장 선에서 몰래 사건을 덮었다. 당시 부소대장이던 윤희는 중대장 방에 갔다가 잘못을 고백하는 진술서를 우연히 보고 매우 놀랐다. 중대에서 가장 말이 없고 내성적이던 대원이 훔쳤던 것이다. 고참이 근무시간에 졸았다고 한 시간 더 연장 근무를 세우자 분노한 대원이 고참을 혼내주려고 총알을 뽑아 숨겼던 것이다. 그는 진술서를 훔쳐보면서 그래도 총알을 훔친 게 총을 난사한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윤희는 고사총부대에서 4년을 복무하고 2002년 제대했다. 1993년에 어린 나이에 입대한 것을 감안하면 꼬박 10년을 호위사령부 소속으로 지낸 것이다. 제대하면서 노동당에도 입당했다.● 밀수조직을 이끄는 노동당원 제대한 윤희는 가족이 사는 양강도 보천군에 돌아왔다. 국가에서 그에게 임명한 직업은 보천군혁명박물관 관리원이었다. 북한은 1937년에 김일성이 국내 진공 전투를 벌였다고 선전하는 보천보를 거대한 사적지로 만들어놨다. 당시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고 백두산 답사를 가는 사람들이 들러 견학하게 했다. 보천보전투는 실제로는 김일성부대 참모장인 왕작주가 인솔한 부대가 진행한 전투이고, 당시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사 조작의 달인인 북한은 김일성이 보천보전투 이후 인민들을 모아놓고 조국 광복의 희망을 심어주는 연설을 했다면서 동상과 건물, 박물관 등으로 거대한 ‘혁명신앙구역’으로 만들었다. 박물관에서 그는 청소하고 먼지를 닦는 등의 허드레 일을 했다. 보천군에선 이런 자리도 여성들에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는 호위사령부 출신에 당원이라 가능했다. 보통 여성들은 농사를 짓거나 돌격대에 나가 험한 육체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북한 어디가나 그랬듯이 혁명박물관 관리원이라고 배급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선 장사를 해야 했는데, 윤희는 처음에 비닐포대를 농촌에 파는 일을 했다. 농촌에선 포대가 귀했는데, 이걸 봄에 가져다주고 가을에 옥수수 등 곡식을 받아와 팔았다.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겨우 풀칠하는 정도였다. 반면 압록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중국과 밀수하는 사람들은 꽤 잘 살았다. 그도 언제부터인가 밀수를 하기 시작했다. 폐철, 귀금속, 산열매 등을 닥치는 대로 메고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에 팔았다. 돌아올 때는 쌀이나 사카린 등을 받아와 장마당에서 팔았다. 밀수할 때는 국경경비대에 뇌물을 주는데, 이들은 눈감아주는 인원수에 맞춰 돈을 받아갔다. 뇌물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려면 한 사람당 메고 가는 양을 늘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40㎏ 정도 메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보통 60㎏을 메고 압록강을 건넌다. 한 번은 욕심을 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메고 가 중국에서 무게를 재보니 저울에 90㎏이 찍히기도 했다. 압록강을 건널 때 언제 잡힐지 모르니 초인간적인 힘이 나오는 것이다. 점점 윤희 옆에 사람들이 붙기 시작했다. 많을 때는 10~15명을 모아 짐을 메고 한꺼번에 강을 넘기도 했다. 그가 밀수조직의 두목 격이 된 것은 부친이 안전원이라 권력 기관에서 함부로 못했던 이유가 컸다. 그는 2013년 탈북할 때까지 밀수를 하다가 세 번 잡혔다. 경비대에 뇌물을 주면 잡힐 일이 없었지만, 체포된 세 번은 모두 뇌물 주는 돈이 아까워 국경경비대가 자리 비운 틈을 노리다가 잡힌 것이다. 하지만 노동단련대로 가서 대개 나흘 정도 있다가 나왔다. 아버지가 안전원이라 다들 봐줬던 것이다. 보천군은 국경 옆이라 밀수를 하지 말라는 강연이 참 많았다. 밀수 근절 회의에 참가하면 그는 속으로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실은 그 회의를 주재하는 당 세포비서도 밀수로 먹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를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회의는 열리고, 참가자들은 가면을 쓴 채 남의 일인 듯 당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면 또 밀수하러 갔다.● 친위부대 출신 남동생과 탈북 밀수를 하면서 그는 중국이 잘 사는 곳임을 눈으로 보게 됐다. “윤희야, 중국이나 남조선에 가면 다들 잘 산다고 하더라. 같이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너나 가서 잘 살아. 난 여기서 살 거야”라고 대답했다. 호위사령부에서 받은 세뇌와 당원이라는 생각이 생각보다 오래 그의 머리 속에 잠재돼 있었다. 그가 막상 북한을 뜬 것은 2009년에 시작한 결혼생활이 몇 년 못 가 실패로 끝난 뒤였다. 깊은 좌절감에 낙담해 있을 때 한국에 먼저 간 친구와 전화를 하게 됐다. “윤희야, 남조선에는 색텔레비(컬러TV)와 비디오가 쓰레기장에 가득해.” 그 말이 귀에 박혔다. 잘 산다는 것은 알았지만, 북한에서 부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가전제품인 색텔레비가 쓰레기로 버려진다고. 상상해보니 남조선은 얼마나 잘 사는지 알 것 같았다. 북에서 이혼녀라는 굴레를 쓰고 살기보단 남조선에 가서 새 삶을 살아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그가 탈북할 결심을 남동생에게 말하자, 동생은 그런 위험한 길에 혼자 어떻게 가겠냐며 자신이 보호자로 따라가겠다고 자처했다. 남동생은 김정일 친위부대인 974부대에 근무하고 제대했다. 동생이 걸어온 길도 누나와 비슷했다. 15살 때부터 스키를 탔고, 군에 입대할 때엔 5과로 뽑혀 김정일 경호부대에 갔다. 11년을 복무하고 2007년 제대했는데 이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974부대는 제대할 때 원하는 대학에 보내주든가, 원하는 좋은 직장에 넣어준다. 하지만 제대한 뒤 결혼한 아내의 친척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어 그는 결국 전문대학을 졸업할 수밖에 없었다. 11년 동안 가장 철저한 세뇌를 받는 부대에 근무했어도 동생의 충성심은 누나보다 빨리 사라졌다. 둘은 몇 달 동안 탈북할 준비를 했다. 한국에 있는 지인을 통해 탈북 브로커와 연결됐다. 2013년 1월 2일 윤희는 가족까지 동반한 남동생과 함께 탈북길에 올랐다. 압록강을 넘어가느라 젖은 상태에서 브로커의 차를 7시간 기다리며 얼어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이동이 순조로웠다. 탈북한 지 보름 만에 이들은 동남아로 넘어갔고, 2월 15일 한국에 입국했다. 탈북 후 한달 반 만에 한국에 입국한 것은 탈북민 사이에선 ‘직행’이라고 불리는 아주 부러운 케이스이다. 입국한 뒤 조사기관과 하나원을 거쳐 그해 8월 청주에 정착했다.● “한국군이 훨씬 강합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한국에서의 10년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그렇게 큰 어려움이나 감동적인 사연도 없이 너무 빠르게 시간이 지났다”고 회상했다. 청주에 정착한 지 한 달 만에 돼지막창 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 일이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숱한 고생을 겪고 온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청주에 있다 얼마 안 돼 취직센터를 통해 고속도로 톨게이트 직원으로 취직해 5년을 일했다. 집에서 톨게이트까지 출근하는데 버스로 2시간이나 걸렸지만, 그는 5년 동안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버텼다. “하나원에 있을 때 탈북민들은 사회에 나가면 3년 동안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제대로 정착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3년은 어떻게든 한 직장에서 버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5년이 됐습니다.” 톨게이트 직원 월급은 많지 않았다. 월 170만 원을 받아 이중 100만 원은 무조건 저축했다. 그는 첫 월급으로 9만 원짜리 빨간 패딩을 사 입었을 때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2019년 광주에 호프집을 차렸는데 이듬해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2021년 문을 닫아야 했다. 남들은 크게 좌절할 법도 하지만, 북한군에서 10년 단련된 그는 씩씩했다. “나만 망한 것도 아니고,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서비스 업종에 종사했다. 그런 일을 하면서 배운 교훈도 심플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똑같아요. 여기도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세상 어디에 그런 인간들이 없는 데가 있나요. 어딜 가든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지금 스트레스 받을 시간에 즐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호프집을 접은 뒤 그는 지난해에 광명으로 이사를 왔다. 수도권에 가면 좀 더 좋은 취직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호위사령부 여성 군인 출신이라는 드문 경력 때문에 군부대에 안보강연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부르는 곳이 점점 많아져서 강연이 주수입원이 됐다. 한국 군인들은 정신력이 약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직접 찾아가 만나보니 정신력에 있어서도 북한군을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군은 오직 수령결사정신으로만 세뇌돼 살잖아요. 그런데 제가 만나본 군인들은 조국과 국민, 가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었어요. 그게 맞죠. 보지도 못한 수령을 어떻게 목숨 걸고 지킵니까.” 올해 5월 그는 탈북민으로 구성된 ‘평양초롱꽃예술단’ 대표로 임명됐다. 이 예술단은 공연으로 먹고 사는 다른 예술단과는 다르게 운영된다. 12명의 단원들은 모두 자기 직업이 있고, 주말에 모여 연습을 한다. 일종의 취미활동인 셈이다. 그러다가 가끔 공연해달라는 요청이 오면 차에 장비를 싣고 달려간다. 아직은 한국에 와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돈을 크게 벌지도 못하지만 윤희는 한국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다. “북한에선 잘 살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어려서부터 피나게 연습해 국가대표도 됐고, 당원이 되려고 얼음물로 목욕하며 4년을 버텼어요. 제대 뒤에도 밀수 마대를 메고 국경을 넘나들었고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고난만 이어지지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제일 좋은 점은 노력한 만큼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좋은 세상에서 제가 적게 벌면 적게 노력한 탓이니, 못 산다고 불평하거나 누굴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그를 보니 이런 낙천적인 정신은 타고 난 것인지, 아니면 오랜 군 생활이 길러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점은 10년, 20년 뒤 박윤희 씨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산다고 해도 탈북해 한국에 온 것에 더 큰 만족을 느끼며, 여전히 웃으며 씩씩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에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평양에 가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수립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는 들러리만 설 것이라는 여론을 향해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의가 없지 않으나,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만약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미소 양군 철수, 남북 요인 회담,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 같은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했는데도 가지 않으면 그 또한 북한에 명분을 주는 일이다. 김구는 “이대로 가면 조국은 분단되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며 2년 뒤 일어날 동족 상잔의 비극까지 예언했다. 그러나 평양에 간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겐 역사를 바꿀 힘이 없었다. 강대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이상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 껍데기를 붙잡고 있다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코너로 몰린 것이다. 역사는 냉정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통일은 한쪽이 사라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으로도 소멸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지금도 분단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이런 교훈을 배우기나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우리는 이룰 수 없는 이상을 통일방안으로 내세우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약 30년 전에 발표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노예제, 봉건제, 군국주의, 독재, 세습 등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했던 온갖 나쁜 것들만 모아 만든 듯한 돌연변이 북한과 협상을 통해 합쳐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북한이 수용할 리 없고, 우리는 더욱 그럴 수 없다. 통일은 과거나 지금이나 한쪽이 소멸돼야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게 개인적 소신이다.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어느 영역에 있어서든 북한과 비교 불가할 정도로 강하다. 북한에게 배워야 할 것은 없다. 통일은 사실상 흡수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시점은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는 때이다. 그것이 바로 냉혹한 역사가 앞으로 보여줄 필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통일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이건 우리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통일을 연구하는 공식 조직은 통일연구원이다. 박사급 연구원 40명에 석사급 보조연구원 20명이 있다. 그런데 이런 통일연구원이 있음에도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통일부에 ‘통일미래기획위원회’를 또 출범시켰다. 위원회는 ‘중장기 통일구상과 전략방향 정립’을 목표로 ‘신통일미래구상’ 초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런 것이야 말로 통일연구원이 해야 하는 일이다. 위원회의 출범은 통일연구원에 사실상 사망 판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지금의 통일연구원에 신통일미래구상 설계를 맡겨도 될까. 통일연구원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동안 정규직 탈북민 연구원은 없었다. 탈북민 박사는 수십 명이나 되지만, 대다수는 통일연구원에서 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거기는 우리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끌어주며 존재하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연구하는 곳이라면서 ‘먼저 온 통일’이라는 사탕발림 간판을 하사받은 탈북민은 한 명도 없다. 공채로 뽑힌 박사급 인력들의 역량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통일연구원은 보고서 잘 만들고 영어 잘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북한을 꿰뚫어보고 현실적 대책을 만드는 것이 본질인 곳이다. 실현 가능성 제로인 평화통일 판타지 보고서보다는 굳이 박사가 아니라도 몸으로 북한을 체험한 탈북민의 시각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마침 통일연구원은 내달 윤석열 정부 들어 첫 원장을 맞이한다. 부디 실질적인 통일 연구 중심이라는 본질적 역할을 회복하는 첫 단추가 되길 기대한다. 75년 전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추종하다가 진퇴양난의 수모를 당하는 생생한 본보기를 보여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함경북도 온성탄광에는 전국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온탄 6부자’가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 다섯 명이 당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탄광으로 자원해 열심히 일한다고 북한 매체가 붙여준 이름이다. 북한 선전 매체에 수시로 소개됐고, 집에는 훈장이 넘쳐났고, 명절 때마다 노동당 간부가 찾아와 김일성의 선물이라며 술과 과일 따위를 건네주었다.하지만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던 1990년대 중반 엄혹한 ‘고난의 행군’ 시절, 온탄 6부자가 충성을 다 했던 지도자는 식량을 주지 않았다.아버지가 1996년 굶어 사망하고, 첫째와 셋째 아들 역시 먹지 못해 죽었다. 특히 셋째 가족은 큰딸 하나를 남겨두고, 아내와 작은 딸마저 죽었다. 넷째 아들은 탈북했다.사실 이 집안에서 탄광에서 일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첫째 자식은 딸이었고, 그 역시 탄광에서 일했는데 북한 당국은 작명이 부담스러웠는지 딸은 빼고 ‘6부자’만 내세웠다. 딸 역시 탄광에서 일하다가 탄차 와이어가 끊어져 수십 명이 죽은 대형사고 때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됐다.가족을 살리기 위해 돈을 벌려 중국으로 넘어갔던 넷째 아들은 제 발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조국을 반역했다는 이유로 강제 ‘노동단련대’에 끌려갔다가 모진 고초를 당한 뒤 가까스로 석방됐다. 그는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껴 온 가족과 동네 사람까지 11명이나 데리고 탈북했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 강을 건넜던 12살짜리 아들은 16년 뒤 한국의 음악방송 ‘Mnet’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3’에 출연해 신랄한 가사로 북한 지도부를 비판했다.“거기 있는 리설주가 조국의 어머니. But she is not my 어머니. 내 어머니가 아오지에서 얻은 건 결핵. 땅굴 판 돈 착취해서 만든 것은 핵. 배때지에 살이나 빼. 난 두렵지 않아 공개처형. 그래서 여기 나왔다 공개오디션.”그때 그는 탈북래퍼 강춘혁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그의 실제 직업은 홍익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였다.모든 탈북민이 각자의 기막힌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듯이, 북한의 최북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화가로 살기까지 강 씨의 인생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엔화로 살았던 ‘온탄 6부자’1986년 강춘혁이 온성에서 태어났을 때 그의 집은 마을에서 제일 잘 살았다. 그땐 누구도 몰랐다. 10년 뒤 어떤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을….춘혁의 아버지는 온탄 6부자 중 넷째였다. 탄광 선전대에 속한 아버지는 트럼펫을 불었다. 아침 일찍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 일하러 나오는 사람들을 위해 선전 가요를 연주했다. 그렇다고 악기만 연주한 것은 아니다. 연주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탄광에 들어가 석탄을 캤다. 춘혁의 어머니 역시 아버지처럼 선전대에 속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정식 근무시간엔 탄광 노동자로 일했다.하지만 강 씨 집안이 잘 산 것은 열심히 일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춘혁의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던 사람이었다. 할머니 역시 한국 태생이지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거기서 둘이 만났다.차별 받는 일본 땅에서 살며 늘 조국이 그리워 돌아오려 했지만, 해방이 돼도 오는 길은 막혀 있었다. 그러다가 북한이 먼저 재일동포 귀국사업을 벌였다. 춘혁의 할아버지는 1960년 자식들을 데리고 주저 없이 북한으로 가는 ‘만경봉호’에 올랐다. 그때 춘혁의 부친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북한으로 돌아온 이들은 평양에 살 수도 있었지만, 먼저 귀국한 작은 할아버지가 온성에 살게 되면서 그들도 온성을 거주지로 선택했다.북한 생활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배급해 의존해 먹고 사는데 급급했을 뿐, 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일본에 남았던 형제들이 훨씬 더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에 살던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쪽 친척들은 1970년대부터 북한에 형님을 보러오면서 수시로 엔화를 들고 왔다.그 덕분에 춘혁의 집은 1990년대 초반까지는 탄광 마을에서 최고의 부자집이 됐다. 큰 기와집에서 살면서 탄광마을에선 매우 드문 천연색 TV는 물론 각종 가전제품을 다 갖추고 살았다. 작은 할아버지는 1980년대 평양에 와서 도로도 깔아주었다. 평양역 앞에서 김일성광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북한에서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구간이다. 대충 삽으로 땅을 파고 돌을 넣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던 북한은 그때 일본 기술자들이 와서 도로를 까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고 지금도 그때 이야기가 전해진다.자갈도 딱 정해진 규격이 아니면 안 쓰고, 그 자갈을 물로 씻어 깔고, 자로 두께를 재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공했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다른 도로들은 건설되고 몇 년만 지나면 움푹움푹 패이지만, 평양역-김일성광장 구간은 지금도 끄떡없이 유지된다.그런데 1992년 11월 북한과 일본의 수교 교섭이 중단되고, 일본이 납치 일본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강 씨네 집을 찾던 친척들도 더는 오지 못하게 됐다. 돈도 들어오지 못했다. 늘 일본에서 돈이 올 줄 알고 저축하지 않고 살던 춘혁의 집은 형편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찾아온 고난의 행군으로 탄광도 문을 닫게 됐다.● 11명이 함께 떠난 탈북길1994년의 고난의 행군을 사람들은 배급이 중단돼 굶어죽던 시절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 쌀만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기도 끊겨 늘 정전 상태에서 살았고, 땔감도 없어 떨면서 살았다.배고프니 탄광에 일하려 못나가고, 탄광이 가동 중단되니 석탄이 없고, 석탄이 없으니 화력발전소가 돌아가지 못하고, 발전소가 멎으니 비료 생산도 못하는 식의 악순환이 이어지게 됐다. 탄광에 전기가 오지 않아 1년쯤 방치하니, 온성탄광의 모든 갱도들이 물에 잠겼다. 탄광이나 광산은 양수기로 수시로 지하수를 퍼내야 하는데, 전기가 없어 양수기를 가동할 수 없으니 탄광 자체가 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침수된 갱은 설사 물을 퍼내도 동발이 다 썩기 때문에 다시 사용하기 불가능해지게 된다. 온성탄광은 1996년에 공식적으로 운영 중단을 선포했다.탄광에 일하러 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산에 올랐다. 나무를 베어 소토지(개인 경작밭)를 일구었다. 하지만 산의 경작지도 한정돼 있었다. 산을 개간하지 못한 사람들은 배운 것이 석탄 캐는 것밖에 없는지라 각자 수직갱을 파서 석탄을 캐서 팔았다.곡괭이와 삽으로 탄맥이 나올 때까지 지상에서 수십m 깊이의 수직굴을 파고 들어간 뒤 석탄을 양동이로 퍼올렸다. 그렇게 원시적으로 캔 석탄을 시장에 팔아 옥수수와 바꾸었다. 탄광 가동이 중단된 뒤 온성탄광 일대에는 이런 수직갱도가 수없이 많았다.하지만 1997년 봄이 되자 땅이 녹으면서 곳곳에서 개인 갱도들이 무너졌다. 또 숱한 사람들이 석탄 캐려 들어갔다가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석탄 채굴도 할 형편이 못 되자 춘혁의 아버지는 밀수에 손을 댔다. 도 소재지인 청진에 나가 마른 생선이나 해삼, 개구리기름 등을 닥치는 대로 들여와 중국에 몰래 팔았다. 하지만 그걸로 대가족이 먹고 살기엔 역부족이었다.그렇게 살던 어느 날 춘혁의 부친은 직접 돈을 벌어오겠다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마을에는 황해도 쪽에 장사하러 떠났다고 소문을 냈다. 춘혁이 살던 온성탄광노동자구(온탄구)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 도문이다. 중국에 건너간 부친은 어느 국수공장에 취직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춘혁의 집에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노동단련대에 잡혀있다는 것이다.뜻밖의 소리에 달려가 보니 중국에 있을 줄 알았던 부친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허약환자가 돼있었다. 알고 보니 도문에서 강 건너 마을을 건너다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던 부친은 어느 날 술김에 집에 간다고 다시 두만강을 넘어왔다. 그런데 강을 건너와서 경비대에 체포됐고, 노동단련대로 끌려갔다. 춘혁의 집은 없는 돈을 빡빡 끌어 모아 뇌물을 줘서 부친을 병보석으로 꺼내왔다.집에 와서 몸을 추스르던 부친은 어느 날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 수 없다”며 온 가족과 함께 탈북 길에 올랐다. 12살 밖에 안 된 춘혁에겐 선택권이 없었다.1998년 3월 9일 중국으로 탈북하던 날을 춘혁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모았는지 춘혁의 가족 세 명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11명이 새벽 일찍 길을 떠났다. 가끔 마주친 마을 사람들이 “춘혁이 아버지 어딜 가오”라고 물으면 “저기 아래 남양 장마당에 갖고 올 것이 있어 가오”라고 대답하며 태연하게 걸어갔다.그렇게 두만강 옆의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경비대가 아침밥을 먹느라 근무초소를 비운 새벽 6시쯤 일행은 한꺼번에 두만강으로 뛰어들었다. 아직도 강엔 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수영도 제대로 못하는 춘혁은 아버지 덕분에 빠져죽지 않고 강을 넘을 수 있었다.중국 땅에 도착해 도로에 올라섰는데 이번엔 10분도 안 돼 공안차가 나타났다.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산으로 뛰어올랐다. 차를 타고 온 두 명의 공안원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체포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산 아래서 고함을 지르다 다시 사라졌다.산 위에서 11명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어차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면 잡힐 게 뻔했다. 춘혁은 그때 헤어진 마을 사람 중 아직 한국에 온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춘혁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얼마 전까지 다니던 도문의 국수공장으로 다시 찾아갔다. 거기서 얼마쯤 머물렀지만, 국경 바로 옆 도문은 검문검색이 삼엄해 세 명이 오래 머물 곳은 못됐다.이때 이들에게 조선족 브로커가 접근했다. 흑룡강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한시라도 도문을 뜨고 싶었던 이들은 흑룡강의 어느 깊은 산골에 인력으로 팔려갔다.식구가 처음 간 곳은 버섯을 재배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은 ‘뱀산’이라고 불렸다. 습도가 높아 주변 산에 올라가면 온통 뱀 천지였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마당 곳곳에 뱀들이 기어 다녔다. 그곳 개들은 뱀을 잡아먹고 살았는데, 가끔 독사라도 만나면 개 얼굴이 팅팅 부었다. 돼지는 독사도 상관없이 잘 씹어 먹었다.춘혁은 자신도 놀지만 말고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 산에 올라가 뱀을 잡아 돼지 키우는 마을 한족 노인들에게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뱀을 수십 마리 잡아 마대에 메고 한족 노인의 집에 찾아가 돼지우리에 쏟아줬다. 그런 12살 아이를 노인들은 점점 예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중국어도 가르쳐 주었다.뱀산에는 오래 살진 않았다. 1999년 춘혁의 부친은 흑룡강 한 도시의 양꼬치 식당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월급은 절반 받는 대신 춘혁을 학교에 보내주는 조건이었다. 그곳에 좀 정착할까 싶었는데 어느 날 이들의 신분을 알아본 사람들이 가족을 딴 곳에 팔아먹을 꿍꿍이를 하는 것을 알고 다시 야반도주했다. 이들이 간 곳은 먼저 탈북한 춘혁의 외사촌(고모 아들)이 정착한 연변 왕청의 한 목재공장이었다.● 뱀산에서 그림 그리던 소년춘혁은 중국에 숨어 사는 동안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학교에 다닐 때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중국에 와서도 혼자 있을 때마다 그는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뱀을 잡으려 산에 올랐다가도 멋진 풍경에 반해 그걸 종이에 옮기느라 몇 시간 보내기도 했다. 그림은 불안한 신분으로 사는 춘혁의 유일한 도피처였다.그런데 왕청에 와서 그림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중국엔 한국 아이돌 바람이 불었는데, 아이돌 사진을 그대로 종이에 그려 문구점에 팔면 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아이돌 그림은 얼마쯤 지나 다시 연변에서 유행하던 호랑이 그림으로 바뀌었다.며칠 동안 칠판만한 크기의 종이에 호랑이를 그려 가져가면 1500~2000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목재공장에서 일해서 받는 월급은 700위안이었다.그림을 팔아 처음 큰 돈을 만진 날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더니 어머니는 아들이 어디서 돈을 훔쳐온 줄 알고 혼을 내려 했다. 사실을 말했더니 어머니는 갑자기 안색이 확 펴지면서 계속 그림을 그려 팔라며 기뻐했다. 춘혁은 드디어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 듯해 기뻤다.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나 재미있는 골 안에 호랑이 나타난다는 속담처럼 그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2001년 어느 새벽 갑자기 공안이 문을 따고 집에 들이닥쳤다. 춘혁은 부모와 함께 중국 감옥에 끌려갔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공안이 차에 이들을 태웠다. 북송길에 오른 줄 알고 사색이 됐지만 그 공안은 어느 외진 곳에 차를 세우더니 모두 내리라고 했다. 어리둥절 내렸더니 빨리 가고 싶은 곳에 가라고 손짓했다.떠나면 등에 총을 쏘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 겁에 질렸는데 공안이 먼저 차를 타고 가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체포되지 않은 사촌형이 6000위안이라는 거금을 뇌물로 주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춘혁의 가족은 북송을 면했다.● 가족의 운명을 걸머쥔 3국행석방은 됐지만 더는 무서워 살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때에는 방법을 몰랐다. 그때 베트남에 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소문이 연변에 돌았다.가족 회의를 열었다. 결과 15살의 춘혁과 26살의 사촌형이 먼저 길을 떠나 한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촌형은 문구점에 가서 중국 지도 한 부와 세계 지도 한 부를 샀다.베이징을 거쳐 쿤밍까지, 그리고 쿤밍에서 베트남 국경마을까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국에서 이미 3년을 산 춘혁은 중국어도 꽤 유창하게 했다.2001년 6월 장맛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춘혁과 사촌형은 국경을 넘기 위해 산에 올랐다. 비 소리가 요란해 남부 국경을 지키는 경비대에게 발각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으로 떠났지만, 장대비를 뚫고 산을 오르내리니 금방 지쳤다. 죽을힘을 다해 수풀이 울창한 산을 타고 가다보니 멀리 마을이 보였다. 내려가 보니 중국어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드디어 베트남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이들은 하루 넘게 마을과 연결된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 마침내 한 도시에 도착했는데, 거기엔 한국어로 간판이 씌어진 식당이 있었다. 들어가 도와달라고 하자 이들은 가까운 한국 영사관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어느 건물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자 관계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나오더니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 왔냐”며 놀랐다. 영사관 건물 밖에서 북한 관계자들이 탈북자를 잡으려고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영사관 사람은 “우리는 한국에 보내줄 방법이 없다. 이왕 고생한 김에 캄보디아에 가면 한국으로 가게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국경도시까지 버스표를 끊어 주었다.버스를 타고 국경도시에 가니 캄보디아까지 오토바이로 태워다 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에게 캄보디아로 가자고 했는데, 무슨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오토바이 배달부가 이들을 베트남 군부대로 데리고 갔다.베트남 장교가 중국어 통역을 불러 이들을 취조하려고 하자 춘혁은 한국어로 대답했다. 통역이 “이 사람들 한국 사람들 같다고”고 하자 그 장교는 한참을 수소문해 이번엔 한국어 통역을 불렀다. 춘혁은 이번엔 중국어로 말했다. 그러자 그 통역은 “이 사람들은 중국인들”이라며 돌아갔다. 빨리 퇴근해야 되는데, 끌려온 두 청년이 협조를 하지 않자 짜증이 난 장교는 주머니를 뒤져 돈을 빼앗더니 가라고 했다. 포상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군부대 정문에 있던 오토바이 배달부는 이들이 석방된 것을 보자 군소리 없이 캄보디아로 데리고 갔다. 막상 가보니 자그마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캄보디아였다.캄보디아에 내리자마자 이번엔 캄보디아 군인들이 오더니 시계와 신발까지 다 빼앗고 장교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감금된 지 하루가 지나자 그 장교가 이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가더니 잘 먹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곤 프놈펜으로 데려다주겠다며 이들을 차에 태웠다. 한참 차를 타고 달렸는데 차가 어느 제방에 멈춰서더니 이들을 내리라고 했다. 맞은편에 다른 차가 와 있었는데 거기서 내린 사람이 장교에게 돈 봉투를 건네주었다. 장교는 사라지고 이들은 그 사람의 차를 탔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큰 독채 집이었는데, 그곳에 가니 탈북민 10여명이 먼저 있었다.처음엔 이곳이 수감시설인줄 알았는데 먼저 있던 탈북민들이 “잘 왔다“고 환영해주어 이곳이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피난처임을 알았다. 그를 데라고 온 사람이 이곳 피난처를 운영하는 서 모 목사였다.이곳에서 춘혁은 3개월을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벽에 큰 기독교 관련 그림을 그려주니 목사가 크게 기뻐하며 중국에 선이 있으니 부모님도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3개월 뒤 춘혁의 부모가 무사히 캄보디아까지 도착해 함께 한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목사는 피난처에 머무는 탈북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성폭력을 저질러 문제가 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에서 찾아온 방황2001년 8월 30일 춘혁은 부모님과 함께 인천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미래가 창창한 16세 소년이었다.그해 12월 말에 하나원을 나올 때 가족은 경남 밀양에 집을 받았다. 서울에 가고 싶었지만, 하나원에 배정된 서울 임대주택은 3채에 불과했다. 7대1의 경쟁에서 떨어진 사람은 지방 대도시도 아닌 소도시에 가야 했다.그때 밀양엔 탈북민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중학교 2학년에 입학했는데, 주변에 소문이 나서 춘혁에게 와서 시비 거는 애들이 많았다.어느 날 고등학생들이 몰려와서 “너 18살인데 왜 중2냐”고 놀리는 바람에 춘혁은 대판 싸우고 퇴학당했다. 다시 학교에 다닐 생각도 없어졌다.2002년 말 가족은 서울 노원으로 이사 왔다. 얼마 뒤 부모님이 이혼을 하는 바람에 춘혁은 집을 나와 친구의 집에서 살았다. 어렵게 자유의 땅을 찾아왔지만, 부모님은 이혼을 택했고, 오래 살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2013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갔고, 아버지도 재작년에 병으로 돌아갔다.서울에 올라온 뒤 7년 동안 춘혁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방황의 시기였다. 북한과 중국에선 먹고 사는 것, 안전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는데, 그게 다 충족되자 그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건설현장에 가서 나이를 속이고 일을 했고, 배달도 했다. 그림과도 점점 멀어졌다.2009년쯤 되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했던 친구들도 대학 학점이나 취직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보니 점점 말도 통하지 않았다.친구들도 “그림을 잘 그리니 미대에 가면 되겠다”며 적극 부추겼다. 춘혁은 방황의 시기를 접고 공부에 매달렸다. 중고등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홍익대 미대에 원서를 넣었다.일반적인 대학들은 탈북민을 특별전형으로 뽑아주지만 홍익대는 그렇지 않았다. 실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입학할 수 없었다.시험장에 들어갔을 때 춘혁은 잠시 멍했다. 시험장 구석에 커피잔, 주전자, 배트민턴채, 공 등을 쏟아놓고 4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게 했다. 다른 수험생들이 열심히 그리는 것을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부랴부랴 따라 그렸다.“다 그려놓고 보니 제 그림만 이상해 보였어요. 다른 애들은 다 미술학원에서 배운 방식대로 그렸는데, 저는 그런 시험 방식도 모르고 시험장에 들어갔거든요.”결과는 합격. 4대1의 경쟁을 뚫고 11학번 합격생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대학 기간도 생각과는 달랐다. 대학에 가면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워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재료 개념이나 기법, 방향성 등 이론만 많았다. 연필과 색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다가 유화를 그리는 법도 대학에서 배웠다.그럼에도 다 미술 관련 새로운 이야기라 재미는 있었다. 첫 학기에 춘혁은 90여명 동창생 중 중간 정도의 학점을 받았다. 자신감이 생겼다.2016년 미대를 졸업했다.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출품한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For the freedom’이라는 제목의 앨범이었다. 세상은 그를 화가가 아니라 탈북 래퍼라고 불렀다.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탈북 래퍼의 탄생그가 대학을 다니던 2014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이 좀 보자는 연락을 해왔다. 알고 보니 ‘쇼미더머니’ 측에서 시즌3의 흥행을 위해 탈북민을 한 명 선정해 넣고 싶다고 연락이 왔는데, 김 국장 보기엔 강춘혁이 적임자로 보였던 것이다. 과거 어느 회식이 끝나고 노래방에 갔을 때 춘혁이 힙합 스타일의 노래를 잘 불렀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춘혁도 힙합이 싫지는 않았지만, 대학 생활에 집중하느라 예능프로그램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탈북한 친구 두 명을 소개시켜 주었다.얼마쯤 지났을 때 쇼미더머니3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가수 양동근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개시켜준 친구들이 랩 훈련을 받던 중 갑자기 TV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는 것. 처음에 그냥 랩을 배우는 줄 알았다가 얼굴이 공개되면 북한에 사는 가족 등이 피해를 볼까봐 숨어버린 것이다.그들을 소개시킨 춘혁도 난처해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럼 내가 나간다고 했다. 이 일은 춘혁이 북한 인권을 알리는 사명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랩을 하면서 춘혁은 “그림은 전시회장에 한정되지만, 힙합이나 랩은 티비와 유튜브에 올라 전 세계가 볼 수 있으니 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춘혁의 쇼미더머니3 출연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언론에서 탈북 래퍼가 나왔다고 기사가 쏟아졌다. 그가 랩을 부르는 모습이 담긴 유튜브도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다.학교에서도 홍보가 되니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TV에 출연한 뒤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과거엔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후엔 대학 구내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내친 김에 졸업과 함께 앨범도 냈다. 하지만 이후엔 전업이 화가인데, 래퍼로 너무 알려지는 것이 싫어 그림에만 전념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음악 관련 요청은 점점 멀리했다.● 배고픈 ‘북한 인권’ 화가의 길졸업과 동시에 그는 전문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주변에서 다들 말렸다.미대를 나와도 다들 회사에 취직한다거나 미술 선생님이 되는 등 생업에 뛰어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의 학번에서도 배고프고, 언제 뜰지도 모르는 작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춘혁도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고픈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한국에 오기 전까진 먹고 살기 위해 급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쌀과 물이 다 있는데, 또 그런 삶을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제가 북에서 태어나 한국에 와서 미술을 전공한 것에 대한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북한에서 아직 고생하는 친구들을 위해 저는 그림으로 북한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전업 화가의 길은 예상했던 것처럼 배고픈 길이었다.재료비를 벌기 위해 다시 공사판에 나가 일을 했다. 돈을 벌면 재료를 사다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팔렸다고 해도 재료를 다시 사면 끝이었다.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북한 인권을 고발한 작품은 어딜 가나 외면당했다.“2018년 광주비엔날레 아트페어에 출품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만수대창작사 전시회가 열린다고 제 출품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국가 지원금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기저기 출품이 취소되니 너무 힘들었습니다.”이 시절 그는 사람들이 무서운 생각이 들어 6개월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술만 마신 적도 있다고 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망명할 생각도 있었다. 특히 유럽은 예술가들에 대한 망명 허용에 관대하다.하지만 그는 끝내 남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니 남은 것이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 3월엔 KBS 2TV ‘노머니 노아트’라는 프로그램에서도 그를 불러주었다.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이 프로그램에 출품한 작품은 720만 원에 팔렸다. 전체 출연자 8명 중 그의 그림이 제일 먼저 팔린 것이다.그리고 여기저기 북한 인권을 주제로 한 삽화를 그려 달라, 웹툰을 그려달라는 등의 제안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요청을 받고 열심히 일해도 아직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강춘혁이 존재하는 이유강 씨는 지금까지 그린 그림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정체성의 혼돈’을 꼽았다. 이 작품은 전시만 하고 가격을 매긴 적이 없다.작품에는 부스러져가는 얼굴에 슬픈 표정을 한 남성의 얼굴이 담겨있다. 한쪽 눈에는 태극기가, 다른 쪽 눈에는 인공기가 담겨있다. 춘혁은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탈북민의 자화상을 담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탈북민은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 구원해야 할 것들이 북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통일은 이런 기억을 안고 있는 우리 세대에서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조금 덜 먹고 힘들더라도 자식들에게 짐을 물려주지 말고, 우리 세대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믿습니다.”그게 가난한 화가 강춘혁이 이 땅에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화가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떠올 때마다 2015년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2차 북한인권주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당시 현지에선 탈북화가 선무 씨와 강춘혁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고 법학대학에서 북한 인권 관련 토론회도 열렸다. 토론회가 열리고 춘혁의 발언이 시작되는 순간 갑자기 문을 차고 북한 영사관 직원 십여 명이 들이닥쳤다.그림 전시회 때부터 주변을 빙빙 돌며 “너네 일정을 다 아니 조심하라”고 협박하던 북한 외교관들이 급기야 토론회 현장에 쳐들어온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욕을 퍼부으며 들어오는 그들을 향해 춘혁도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인도네시아 경찰들이 급히 출동해 북한 외교관들을 끌고 나갔다.“그때 솔직히 순간적으로 겁도 났고, 또 흥분도 됐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 그림이 위협이 되는구나, 내가 존재감이 있고 북한이 두려워하는 의미가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북한인권주간 행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북한 외교관들이 북한에 소환됐다고 하더군요.”김정은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 인민이 자유를 찾는 날까지 그림으로 북한 인권을 고발하겠다는 강 씨의 결심은 단단하다.“저도 화가인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북한 인민들이 독재 하에서 신음하는 한 저는 그림으로 그들의 신음과 고통을 고발할 겁니다. 나중에 북한에 좋은 세상이 오면, 저는 캔버스를 들고 북한의 아름다운 곳들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마음껏 그릴 겁니다. 그날이 빨리 오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화가 강춘혁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