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이소연 기자

동아일보 편집부

구독 54

추천

안녕하세요. 이소연 기자입니다.

always99@donga.com

취재분야

2024-10-24~2024-11-23
문학/출판43%
문화 일반23%
미술10%
역사7%
사건·범죄7%
사회일반7%
연극3%
  • [책의 향기]소속도 처지도 다른 여성들, 묵묵히 함께하며 겪는 실패담

    특급 호텔 지하에는 음향, 음식, 조명을 도맡아 행사를 돕는 후방 부서 ‘백 오피스(Back Office)’가 있다. 화려한 행사가 열리는 호텔 라운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땀 냄새 나는 일터. 이곳에서 세 여성이 만난다. 육아휴직으로 승진 경쟁에서 밀린 호텔지배인 혜원과 소규모 행사기획사에서 일하는 강이, 대형 행사를 발주하는 대기업 대리 지영. 소속은 다르지만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는 이들은 에너지 대기업 ‘태형’의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행사 계약금만 10억 원. 이를 따내기 위해 호텔업계와 기획사는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다. 경쟁업체 직원을 비밀리에 스카우트하는 권모술수가 오가는 전장에서도 세 여성은 페어플레이를 고수한다. 경쟁자의 치명적 약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누설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성과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과정 역시 중요하다는 걸 백 오피스에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갑과 을의 관계를 떠나 ‘우리’가 되어 계약을 따낸 이들은 실수로 잘못 배송된 물품을 놓고 서로를 탓하는 대신 함께 해법을 찾는다. 하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해 찾은 해법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행사 당일 우려했던 사고가 터진다.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에서 이들은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원군이 되어준다. 첫 인사를 나누던 날 “나를 좀 도와 달라”며 악수를 건넨 지영의 손을 맞잡으며 혜원이 남긴 말처럼. “우리는 나보다 힘이 센 법이니까.” 세 여성의 도전은 끝내 실패하지만 그 끝이 쓸쓸하지만은 않다. 귀빈들이 모두 떠난 연회장에서 이들은 홀로 남겨져 있지 않다. 담담하게 ‘우리의 실패’를 함께 겪어낸다.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으면서.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최유안의 첫 장편소설이다. 38세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회사원으로 일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여러 동료와 함께 일궈냈던 작가의 경험이 책 속에 녹아 있다. 마지막 장에 ‘이 소설은 자기 일을 매 순간 조금씩 해 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진심의 응원’이라는 작가의 말이 담겼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1953년 한일회담 결렬시킨 ‘구보타 망언’ 한미관계 균열 이용한 日의 의도적 전략”

    1953년 제3차 한일회담을 결렬시킨 이른바 ‘구보타 망언’은 한미관계 균열을 이용한 일본 정부의 의도적 전략이었음이 확인됐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이 일본 외교문서를 묶어 펴낸 ‘한일회담 일본외교문서 상세목록집’에 따르면 1953년 6월 21일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는 “3차 한일회담을 고의로 지연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일한회담 무기 휴회안’을 작성했다. 실제로 문서 작성 후인 그해 10월 한일회담에서 구보타는 “일본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망언을 쏟아내 한일회담은 이후 5년간 중단됐다. 16장 분량의 휴회안 문서에서 구보타는 이승만의 1953년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을 계기로 한국 정부가 수세에 몰렸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승만 정부의 북조선 포로 2만5000명 석방으로 한국은 유엔에 반역하는 태도를 취하게 됐다. 이승만이 세계의 고아가 되려는 정책으로 지탄을 받아 머지않아 물러나게 될 것”이라며 “곧 몰락할 이승만과의 회담 속행은 재고해야 한다”고 썼다. 이승만 정부는 1953년 6월 18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풀어줘 한미관계가 삐걱댔다. 일본 정부가 이를 빌미로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가 2007년부터 10년간 공개한 한일회담 외교문서 약 6만 장 중 일부다. 2007년 첫 공개 당시 일본 정부는 문서의 핵심 부분을 먹칠한 채 제공했으나, 일본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정보공개재판 청구 끝에 원본 일부가 추가로 공개됐다. 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구보타 망언이 사견이라고 했으나 이번 문서를 통해 결렬 책임을 한국에 떠넘겨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이었음이 밝혀졌다”며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한인 학예사 설득에… 美미술관, 묘지석 반환

    “드디어 윤리적 결실을 맺었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는 임수아 씨(47·사진)가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그는 미술관이 소장 중인 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1646∼1718)의 묘지석(墓誌石·고인의 행적을 기록해 묘소에 묻는 돌판) 18점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2년 동안 현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후손들을 위해 윤리적 결단을 내려달라”는 임 씨의 설득에 묘지석은 분실된 지 28년 만인 8일 국내로 환수됐다. 해외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도난품이 아닌 한국 문화재를 대가 없이 돌려준 건 처음이다. 10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백토 위에 청화 안료로 글씨를 쓰고 불에 구운 이기하 묘지석은 영조 10년(1734년)에 제작됐다. 묘지석에는 고인이 생전 훈련대장과 공조판서를 역임했다는 행적이 담겨 있다. 이조좌랑을 지낸 문신 이덕수(1673∼1744)가 글씨를 썼다. 묘지석에는 조선시대 도자기술과 서체의 역사가 담겨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기하 묘지석은 1994년 한산 이씨 문중이 이기하의 묘를 이장한 후 관리하는 과정에서 분실됐다. 재단은 2015년부터 2년에 걸쳐 클리블랜드미술관 소장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묘지석을 찾아냈다. 그때부터 미술관에서 한국문화재 연구를 담당한 임 씨와의 물밑 접촉이 시작됐다. 그와 재단이 주고받은 e메일만 수백 통. 묘지석의 원소유자가 한산 이씨 문중임을 파악한 재단은 임 씨를 통해 미술관 측에 이를 알렸다. 미술관은 1998년 한 미국인으로부터 묘지석을 무상 기증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년 넘게 클리블랜드미술관에 소장된 유물을 반환받기까지 임 씨의 역할이 컸다. 묘지석을 잃어버린 후손들을 위해 윤리적 결정을 내리자는 그의 논리가 한몫했다. 윌리엄 그리스워드 클리블랜드미술관장은 “우리는 한국 동료들과 함께 오랜 시간 협력해왔고 재단이 이 사안을 우리에게 알렸을 때 모두가 함께 올바른 결과를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임 씨는 홍익대에서 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밟은 뒤 미국으로 건너 가 캔자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8년 만에 묘지석을 돌려받은 후손 이한석 씨(77)는 “미술관 역사의 일부가 된 묘지석을 돌려주기로 한 결정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 씨는 이기하의 묘소가 충남 예산군에 있는 점을 고려해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묘지석을 기증하기로 했다. 이기하 묘지석은 올해 4월 초 기증행사와 특별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日 ‘구보타 망언’은 한미관계 균열 노린 의도적 전략”

    1953년 3차 한일회담을 결렬시킨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망언’은 반공 포로 석방 문제로 악화된 한미관계를 이용해 한일회담을 무기 휴회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된 전략이었음이 확인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1953년 6월 21일 구보타가 작성한 극비 외교문서 ‘일한회담 무기 휴회안’을 분석한 결과 3차 회담 결렬 배경이 된 ‘구보타 망언’은 한일회담을 고의적으로 연기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이었다”고 10일 밝혔다. 구보타는 1953년 10월 열린 3차 한일회담에서 “일본의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망언을 했고, 이후 한일회담은 약 5년간 중단됐다. 그런데 해당 발언이 나오기 4개월 전 일본 외무성이 “이해득실을 검토한 결과 이번 회담은 무기 휴회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미 도출했다는 사실이 일본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진 것. 16매 분량의 해당 문서에는 “이승만 정부가 북조선 포로 2만5000명을 독단 석방하는 문제가 일어나 한국은 UN에 반역하는 태도를 취하게 됐다. 이승만이 세계의 고아가 되려는 정책을 취하며 세계의 지탄을 받고 머지않아 어쩔 수 없이 은퇴하게 될 것”이라며 “몰락하려는 이승만과의 회담 속행은 재고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승만 정부가 1953년 6월 18일 거제수용소에 있던 반공 포로를 석방하며 한·미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는 전략을 세웠다는 분석이다. 해당 문서는 일본 정부가 2007년부터 10년간 공개해온 한일회담 일본 외교문서 6만여 장 가운데 일부다. 2007년 첫 공개 당시 일본 정부는 문서의 핵심 부분을 먹칠한 채 제공했으나, 일본 시민단체 ‘일한회담 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의 지속적인 정보공개재판 청구 끝에 대체로 원본이 일부 공개되면서 일본 정부의 전략을 살펴볼 토대가 마련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 외교문서를 주제별로 엮어 해제한 ‘한일회담 일본외교문서 상세목록집 1~5권’(동북아역사재단)을 펴내며 이 같은 전말을 밝혀냈다. 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구보타 망언이 사견(私見)이라고 해명했으나, 결렬의 책임을 한국으로 전가시키면서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에 따른 발언이었다”며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철저하게 이용했다”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10
    • 좋아요
    • 코멘트
  • “운동권내 파시즘 성찰 않고 권력 쥔 與, 민주주의 위협”

    “진보 좌파는 한 발도 나아가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퇴보했습니다.” 군부독재에 맞서 정치 민주화를 이뤄낸 직후인 1990년대.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63)는 진보 좌파에 내재한 ‘파시즘’을 들여다봤다. 그는 1999년 계간 학술지 당대비평에 ‘우리 안의 파시즘’을 발표하며 “자신만이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와 결을 같이한다”고 일갈했다. 그로부터 23년. 임 교수는 ‘우리 안의 파시즘 2.0’(휴머니스트)을 11일 펴낸다. 신간에서 그는 “586세대 중심의 여권이 운동권 내부의 파시즘을 성찰하지 않은 채 권력을 쥔 탓에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썼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에서 4일 만난 그는 “1990년대만 해도 영수회담을 통해 협치가 이뤄졌다면 현 586세대 중심의 여권은 상대를 박멸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적 제노사이드’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 시절 반혁명주의자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한 스탈린식 행태를 체화한 이들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을 적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 그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발간한 20여 년 전에 비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청와대 국민청원을 거론하며 “입법기관마저 ‘패싱’하고 청와대가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고방식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마저 흔들고 있다”고 말했다. 진보의 독선은 여권 유력 인사들의 ‘내로남불’ 행태로 가시화됐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그는 신간에서 “586세대가 조국 사태를 전후해 보여준 실망스러운 정치행태는 혁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개인적 일탈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낡은 변혁전략의 업보”라고 썼다. 진보의 독선이 더 심화된 이유는 무얼까. 1990년대 정치권력의 주변부에 머물던 386세대는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2000년대 이후 집권여당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선(善)이라는 행태를 고수해 독선이 심해졌다고 임 교수는 지적했다. 책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위생 독재’에 대한 경고도 담겼다. 그는 “팬데믹이 부른 의학적 비상사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위생 독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만들어냈다”며 “여당은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이 ‘K방역’을 정치적 지렛대로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전환기에 ‘우리 안의 파시즘 2.0’을 내놓은 그가 ‘3.0’을 쓸 날이 또 올까. 그는 “그때는 더 이상 진보 좌파를 겨냥하지 않고 현재의 불평등한 경제 구조에서 사회적 약자를 차별할 위험을 내재한 보수의 능력주의를 들여다볼 것”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왜냐하면 그때가 되면 진보는 자멸할 테니까요.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파시즘을 성찰하지 않은 그들 자신 때문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국내 최초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 복간본 출간

    국내 최초의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 복간본(사진)이 최근 출간됐다. 사민필지는 고종의 밀사이자 미국 언어학자였던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가 1889년에 쓴 책. 구한말 근대화에 뒤처졌던 조선인들이 세계정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지난달 26일 헐버트 박사 탄생 159주년을 맞아 사민필지 복간본 500부를 발간했다고 6일 밝혔다. 이번 복간본은 현존하는 영인본 중 가장 오래된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소장본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조선 왕실 초청으로 국내 첫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해 이 책을 썼다. 사민필지 머리말에는 ‘천하만국이 마치 한 집안과 같아졌다. 세계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7, 8세가 되면 각국의 지도를 가르치고 있으니 조선도 이와 같아야 외국과의 교류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책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 등이 포함된 세계지도 9장이 들어 있다. 한글로만 쓰여 관련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헐버트 박사는 23세 때 한반도에 와서 평생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정부는 1950년 외국인 중 처음으로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첫 TV토론 시청률 39% ‘역대 2위’… 이르면 8일 2차 격돌

    “위기를 더 위기로 만드는 준비 안 된 후보.”(더불어민주당) “억지 궤변으로 일관한 얄팍한 언어유희.”(국민의힘) 4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측과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측은 전날 열린 첫 TV토론을 두고 상대방을 직격했다. 치열한 지지율 선두 다툼을 벌이는 두 후보가 처음 맞붙은 대결은 역대 대선 TV토론 사상 두 번째로 높은 39%의 시청률을 찍었다. 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누가 유능한 리더인지, 누가 준비된 대통령인지 여실히 보여준 토론이었다”고 자평했다. 이어 “그저 남이 이야기해주는 대로만 읊어대는, 벼락출세 후보가 맡을 수 있는 대통령 자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윤호중 원내대표도 윤 후보를 겨냥해 “새로울 것 하나 없이 네거티브에 집중했다”며 날을 세웠다. 반면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이날 CBS라디오에서 “기세 싸움에 있어서 확실히 검찰총장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줬다”며 “(이 후보는) 대장동으로 (토론이 흘러) 가면서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위축된 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김기현 원내대표도 이 후보를 두고 “답변을 회피하고 지도자다운 의연함 없이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고 비판했다. 지상파 방송 3사가 생중계한 TV토론 시청률 합계는 39%(전국 기준)로 집계됐다. 1997년 김대중·이인제·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TV토론(55.7%)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대선 TV토론 시청률을 기록한 것. 시청률 전문 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채널별 시청률은 KBS 1TV 19.5%, MBC 11.1%, SBS 8.4%였다. 한 미디어분석가는 “통상 월드컵 한국전이 열릴 때 지상파 3사 합계 시청률이 30%를 조금 넘는다”며 “올해 대선후보 토론은 이번이 처음인 데다 개최를 둘러싸고 진통이 커 오히려 언론 보도를 통해 방송 날짜와 시간이 널리 알려진 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미디어업계에서는 휴대전화, 컴퓨터를 이용하거나 다시 보기, 유튜브 등을 통해 본 이들까지 합산하면 실제 토론 시청자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했다. 후속 TV토론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가운데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하는 두 번째 토론이 이르면 8일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와 윤 후보는 물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일단 기자협회 주관 토론에 참석 의사를 밝혔다. 2차 토론에서 이 후보 측은 민생, 경제 정책을 앞세워 ‘유능 대 무능’의 구도를 이어간다는 전략이다. 윤 후보 측은 안정적 국정 운영 능력을 전략 포인트로 잡았다. 여기에 대장동 의혹에 이어 성남 FC 후원금 의혹, 이 후보의 부인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불법 유용 의혹 등 검증에 화력을 집중할 계획이다.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이윤태 기자 oldsport@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성녀’도 ‘광인’도 아닌… 목소리 내는 여성들의 기록

    “두려워 말고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일어서십시오.” 1376년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보낸 이는 사제나 수도사가 아닌 이탈리아 시에나 출신의 29세 수녀 카타리나. 교황권이 몰락해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긴 지 67년째, 카타리나는 로마로 귀환하기를 주저하는 교황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에 교황은 이듬해 ‘아비뇽 유폐’를 끝내고 로마로 귀환을 단행한다. 카타리나는 33세에 세상을 떠난 뒤 성녀로 추앙받으며 수많은 제단화에 그려졌다. 하지만 저자는 그녀가 성녀라기보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를 뛰어넘는 위대한 정치가였다고 말한다. 중세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남성 중심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중세 여성 3인의 생애를 조명한다. 이들은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체험한 ‘신비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글과 그림을 남겼다. 저자는 “종교의 틀을 거두고 보면 하느님의 계시라는 건 결국 통찰력이 뛰어난 당대 여성 자신의 발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들이 남긴 글에는 여성의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독일 중서부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힐데가르트(1098∼1179)는 꿈에서 체험한 신의 계시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 3권을 남겼다. 이 중 ‘쉬비아스(Scivias)’에서 그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여성 관점에서 풀어냈다. 아담이 타락한 원인을 이브의 유혹이 아닌 아담 스스로의 결함 때문으로 본 것. 회화 ‘교회의 세 위계’에서는 왕관을 쓴 거대한 여성이 인간 세상을 품은 모습을 그렸다. 성스러운 교회를 여성에 빗댄 것이다. 시에나 출신 안젤라(1248∼1309)는 요즘으로 치면 행위예술가였다. 42세 늦은 나이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예수의 시신을 관에 넣는 미사극을 보다 자신도 관에 들어가 시신 옆에 누워 입을 맞췄다. 혹자는 광인이라 일컬었지만 저자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심을 표현한 주체적 여성으로 그를 해석한다. 책은 남성 중심의 중세가 만들어낸 그늘도 보여준다. 카타리나가 33세에 세상을 떠난 건 금식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당대 성직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따라 스스로 고행을 했다. 카타리나는 죽음에 이르는 가학적 금식을 견디며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데 대한 사회적 비난을 잠재웠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교황청은 연약한 성녀의 이미지 속에 그를 가뒀다. 제단화 속 카타리나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다. 숨지기 두 달 전 출판을 위해 “내가 쓴 글을 모아 달라”고 당부한 당찬 여성은 사라졌다. 저자는 성녀라는 장막을 벗겨낸 후 이들이 세상에 남긴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힐데가르트는 44세에 첫 책 ‘쉬비아스’ 서문을 쓰며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하늘에서 내게 하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 높여 말하라 그리고 그것을 써라.” 어쩌면 그 음성은 자유롭게 뜻을 펼치고 싶었던 자신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더는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전통 나침반이 가리킨 가업 잇기 한평생 계승할 아들 위해 1000년 대추나무 준비”

    “국가가 이제 그만큼 했으면 쉬어도 된다고 인정해준 것 같아 고맙습니다.” 설을 앞둔 지난달 30일 전북 고창군 자택에서 만난 윤도장(輪圖匠·나침반 장인) 김종대 씨(88)는 “돈보다는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한평생을 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앞서 문화재청은 중요무형문화재 110호였던 그를 지난달 28일 명예보유자로 지정했다. 오랜 시간 전통장인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로운 퇴직을 하게 된 것. 그의 아들 희수 씨(61)가 아버지를 이어 지난해 12월 윤도장 보유자로 지정됐다. 아들까지 4대째 가업을 잇게 됐다. 김 씨 집안은 국내 유일의 윤도장이다. 종대 씨는 서너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아버지가 “가업을 이어 달라”고 유언을 남기자 23세 때 이를 받들기로 했다. 조선시대 때 제작된 윤도는 말 그대로 바퀴 모양처럼 생긴 풍수 나침반이다. 둥근 목판 위에 조각칼로 24방위(方位)와 음양오행(陰陽五行), 십이간지(十二干支)를 새겨 넣고 가운데 자침을 얹었다. 종대 씨가 나고 자란 고창 낙산마을에는 300년 전부터 윤도장들이 모여 살았다. 슬하에 다섯 남매를 둔 그는 가업만으로는 생계를 이을 수 없어 소 70여 마리를 길렀다. 그나마 1996년부터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에게 매달 지급되는 100만 원 안팎의 지원금이 보탬이 됐다. 대기업 차장을 지내며 고액 연봉을 받던 아들 희수 씨는 “이제 네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부름에 18년 전 귀향했다. 남들보다 늦은 40대에 윤도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웠지만 타고난 손재주로 대한민국전승공예 대전에서 수차례 입상했다. 종대 씨는 “둘째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게 돼 뿌듯하다”며 웃었다. 가업은 이제 5대째로 향하고 있다. 희수 씨는 “아버지가 ‘윤도 배우러 오라’고 매일 제게 전화하신 것처럼 이제는 제 아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고 했다. 종대 씨의 둘째아버지는 조카에게 조각칼을 남겼고, 그는 아들 희수 씨에게 체계화된 기술을 물려줬다. 희수 씨는 “이제는 내가 아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줘야 할 때”라며 기자를 창고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그의 아들도 충분히 쓸 만한 분량의 대추나무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가장 아래 있는 건 1000년 된 대추나무예요. 뒤늦게 윤도를 배울 아들을 위해 가장 좋은 재료를 미리 준비해뒀지요.”고창=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2-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호크니가 붙잡은 ‘봄의 전경’

    목은 휘고 등은 굽었지만 83세 노장(老將)의 시선은 꼿꼿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예술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2020년 봄이 시작될 무렵 들판에 책상을 놓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시선은 자신이 2019년부터 머문 프랑스 노르망디 시골마을 어귀에 심어진 겨울나무에 향했다.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무를 매일 들여다봤다. 나무는 매일 달라져 있었다. 가늘고 작은 이파리가 자라고 하얀 꽃봉오리가 피었다. 그는 매 순간을 아이패드에 그렸다. 수개월간 봄을 주제로 드로잉 120점을 남겼다. 팬데믹이 봄을 앗아간 그해, 호크니는 우리가 놓친 봄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이 책은 호크니와 절친한 영국의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2019년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주고받은 대화와 그림을 엮었다. 호크니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게이퍼드는 그의 말과 그림 속에서 호크니의 예술 철학을 풀어냈다. 게이퍼드는 “호크니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라고 말한다. 호크니는 매일 새로운 순간을 발견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2020년 4월 호크니는 10분 동안 비를 맞으며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관찰했다. 다르게 보기 위해서다. 그 후 약 1년간 수백 점에 이르는 나무를 그리고 나서야 그는 “내년 겨울나무는 조금 다르게 그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과 드로잉 실력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느낀 것이다. 사물은 다르게 보려는 자에게만 다르게 보이는 법. 어쩌면 매일 조금씩 나아지려는 태도가 그를 거장으로 만든 게 아닐까. 원제는 ‘Spring Cannot Be Cancelled(봄은 취소될 수 없다)’. 전염병이 전시는 취소시켰을지라도 예술에 대한 의지는 꺾을 수 없다. 백발 노장은 지금도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순간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설렘을 느낀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노장의 그림을 보며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아가려는 생의 의지를 배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공주 무령왕릉-왕릉원 고분서 ‘中 장인이 제작’ 쓰인 벽돌 발견

    무령왕릉 옆 백제 왕릉인 29호분에서 중국 남조(南朝) 장인의 제조 사실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됐다. 무령왕릉 등 백제 왕릉 조성 당시 중국 남조와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충남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29호분에서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건업 사람이 만들었다)’라고 쓰인 무덤 폐쇄용 벽돌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글자는 반으로 잘려진 연꽃무늬 벽돌 옆면에 새겨져 있었다. 건업은 420∼589년까지 중국 남조(南朝)의 송·제·양·진나라의 도읍이었다. 무덤 조성시기를 감안할 때 양(梁)나라 장인이 새긴 것으로 분석된다. 앞서 1933년 발굴 당시 6호분 벽돌에서도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혹은 양선이위사의(梁宣以爲師矣)로 해석되는 글자가 발견됐다. 글자가 흐릿해 학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양나라 사람이 와서 만들었다’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이번 29호분과 6호분이 무령왕릉과 나란히 맞붙어 있고, 셋 모두 석실분이 아닌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 지어진 사실이 주목된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512년에 제작된 사실이 새겨진 벽돌이 나왔다. 이에 따라 세 고분 모두 남조 영향을 받아 6세기 전엽에 지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정재윤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양나라 건업에서 온 기술자들이 벽돌을 제작하고 무덤을 축조한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 유물”이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국보 첫 경매… 아무도 감히 손들지 못했다

    간송미술관 소장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과 금동삼존불감(佛龕)이 27일 국보 중 처음으로 경매에 나왔지만 유찰됐다.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지킨 국보를 후손이 매매하는 데 대한 비판 여론이 일면서 개인 소장자들이 응찰을 포기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술품 경매업체 케이옥션은 이날 열린 경매에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소유의 국보 2점이 출품됐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매 시작가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32억 원, 금동삼존불감이 28억 원이었다. 이 중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은 조성 연대(563년)가 새겨져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유력한 구매자로 꼽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간 39억7000만 원으로 책정된 유물구입비의 한계 등을 감안해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세 차례 내부 검토를 거친 결과 박물관이 책정한 금액보다 경매 시작가가 더 높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낙찰가의 10%대에 이르는 경매 수수료를 별도로 지불해야 하는 것도 부담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관계자는 “국비를 사용하는 국가기관이 경매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그 자체로 가격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개인 소장자들의 경우 국보를 처음 경매시장에 내놓은 간송미술관에 대한 비판 여론에 부담감을 느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앞서 간송 측은 2018년 전성우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별세로 부과된 상속세를 해결할 방안이 마땅치 않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전인건 관장 등이 물려받은 국보, 보물 등 46점은 비과세 대상이다. 이 밖에 비지정문화재 1만여 점은 개인에서 재단으로 소유권을 이전해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에서는 간송 후손이 상속세조차 내지 않고 소유한 국보를 세금을 들여 사들여야 하느냐는 비판도 나왔다. 한 고고미술사 전공 교수는 “후손들이 간송의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간송 측 관계자는 “재단이 재정난에 시달리다 2020년 케이옥션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대출금을 갚을 현금이 없어 보물 2점에 이어 국보 2점까지 내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번 경매가 유찰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이 2년 전 간송 측이 내놓은 보물 2점처럼 직거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매에 비해 가격을 낮출 수 있고 수수료 부담도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2020년 5월 경매에서 유찰된 간송 보물 2점을 당초 케이옥션이 추정한 경매 시작가보다 적은 30억 원 미만에 구입했다. 문화재계에서는 박물관이 직거래에 나선다면 예산 제약을 고려할 때 국보 2점 중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구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불입상이 국내에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희소성이 있는 데다 ‘계미(癸未)년 11월에 제작됐다’는 명문이 새겨져 역사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경매 나온 간송미술관 국보 2점…아무도 손 들지 않았다

    간송미술관 소장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과 금동삼존불감(佛龕)이 27일 국보 중 처음으로 경매에 나왔지만 유찰됐다.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지킨 국보를 후손이 매매하는 데 대한 비판여론이 일면서 개인 소장자들이 응찰을 포기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술품 경매업체 케이옥션은 이날 열린 경매에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소유의 국보 2점이 출품됐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매 시작가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32억 원, 금동삼존불감 28억 원이었다. 이 중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은 조성 연대(563년)가 새겨져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유력한 구매자로 꼽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간 39억7000만 원으로 책정된 유물구입비의 한계 등을 감안해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세 차례 내부 검토를 거친 결과 박물관이 책정한 금액보다 경매 시작가가 더 높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낙찰가의 10%대에 이르는 경매 수수료를 별도로 지불해야하는 것도 부담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관계자는 “국비를 사용하는 국가기관이 경매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그 자체로 가격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개인 소장자들의 경우 국보를 처음 경매시장에 내놓은 간송미술관에 대한 비판 여론에 부담감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앞서 간송 측은 2018년 전성우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별세로 부과된 상속세를 해결할 방안이 마땅치 않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전인건 관장 등이 물려받은 국보, 보물 등 46점은 비과세 대상이다. 이밖에 비지정문화재 1만여 점은 개인에서 재단으로 소유권을 이전해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에서는 간송 후손이 상속세조차 내지 않고 소유한 국보를 세금을 들여 사들여야 하느냐는 비판도 나왔다. 한 고고미술사 전공 교수는 “후손들이 간송의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간송 측 관계자는 “재단이 재정난에 시달리다 2020년 케이옥션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대출금을 갚을 현금이 없어 보물 2점에 이어 국보 2점까지 내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번 경매가 유찰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이 2년 전 간송 측이 내놓은 보물 2점처럼 직거래를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매에 비해 가격을 낮출 수 있고 수수료 부담도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2020년 5월 경매에서 유찰된 간송 보물 2점을 당초 케이옥션이 추정한 경매 시작가보다 적은 30억 원 미만에 구입했다. 문화재계에서는 박물관이 직거래에 나선다면 예산제약을 고려할 때 국보 2점 중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구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불입상이 국내에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희소성이 있는데다, ‘계미(癸未)년 11월에 제작됐다’는 명문이 새겨져 역사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27
    • 좋아요
    • 코멘트
  • “백제 금동신발의 새는 국내 멸종된 따오기였다”

    백제시대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을 근거로 5세기 한반도에 천연기념물 ‘따오기’가 서식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앞서 다양한 동식물 고고학 연구를 통해 옛 한반도의 생태환경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생태계를 파악하면 이를 자원으로 활용한 사람들의 생활상도 추정할 수 있다. 김우열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 연구원은 최근 한국조류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2009년 전북 고창 봉덕리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의 봉황무늬가 따오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천연기념물 제198호인 따오기는 1979년 경기 파주에서 마지막 야생 개체가 발견됐다. 논문에 따르면 금동신발의 새 무늬는 고니, 기러기, 원앙 등 다른 금동유물들에 새겨진 무늬와 생태학적으로 다르다. 김 연구원은 “부리가 아래로 휘어져 있고 부리 크기가 머리에 비해 2, 3배가량 더 긴 점 등이 따오기와 유사하다”고 밝혔다. 금동신발에서 여러 개체가 쌍을 지은 것처럼 묘사된 것도 따오기의 생태 습성과 닮았다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어린 따오기로 보이는 새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 사실을 미뤄볼 때 따오기가 고대 한반도에서 번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따오기는 일제강점기 동요로 불리는 등 20세기 초까지도 우리에게 친숙한 철새였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이나 연산군일기에 이를 포획하거나 상납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엔 따오기 서식과 관련된 역사 기록은 전무하다. 김 연구원은 “현재 따오기 야생 복원사업이 이뤄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봉덕리 고분 유물은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단서”라며 “고고학과 생태학 협동 연구를 통해 따오기가 서식했던 시점을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동물 뼈도 생태환경 분석에 핵심 자료로 쓰이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4∼2007년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유적지에서 출토된 소, 말, 돼지 뼈에서 백제인들이 경작한 잡곡류 성분을 찾아냈다. 삼국시대에 소 등을 가축으로 사육한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출토된 쌀과 볍씨를 통해 농경이 이뤄진 시기를 가늠하는 식물 고고학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1976년 경기 여주 흔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0세기경 탄화미(炭化米·불에 탄 쌀)는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로 벼농사가 전래됐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됐다. 흔암리 탄화미가 일본에서 출토된 것에 비해 600년 이상 앞섰기 때문이다. 옛 화장실 유적도 생태환경과 식생활 분석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예컨대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측주(厠籌·대변을 본 뒤 사용한 뒤처리용 도구)는 백제인들이 채식과 물고기 위주의 식단을 즐겼음을 보여줬다. 육식성 기생충인 조충이 아닌 채식을 많이 하는 이들이 걸리는 회충 편충이 측주에서 주로 검출된 것. 이와 함께 민물고기에 많이 서식하는 간흡충이 발견돼 백제인들이 근처 하천인 금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섭취한 사실이 밝혀졌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불평등-소외 바꿔나가기 위해, 나는 내일도 연구자이고 싶다”

    “인문학 연구는 계속돼야만 해요. 많은 사람들에게 사유의 시간을 안겨주니까요. 금전적 보상이 뒤따르지 않아도 제가 계속해서 연구하려는 이유입니다.” 생계를 위해 틈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낮으로 아이를 돌보는 와중에 연구를 한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윤보라 씨(41)는 2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문학 연구자로 살아가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윤 씨를 포함해 2000년대 학계에 발을 디딘 30, 40대 젊은 인문사회학 연구자 10명이 ‘우리는 왜 연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한 책 ‘연구자의 탄생’(돌베개·사진)을 21일 펴냈다. 인문학이 위기를 맞은 건 오래된 일이다. 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이 통폐합되고, 대학에서 연구자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암울한 진단서가 날아오지만 이들은 “그럼에도 계속 연구해보겠다”고 말한다. 이들은 독립연구소를 만들어 학교 밖에서도 연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윤 씨는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을 밟고 있는 또래 연구자들과 2017년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를 만들었다. 연구소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월급은 한 푼도 없다. 오히려 세미나를 열기 위해 사비를 써야 한다. 윤 씨는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선후배 연구자들과 만나 공부해보자는 취지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 씨는 지난해 12월 연구소 동료 8명과 공동저자로 여성주의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페미니즘 교육은 가능한가’(교육공동체벗)라는 책을 펴냈다. 연세대 미디어문화연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천주희 씨(36)에게 연구는 곧 실천이다. 2016년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사이행성)라는 책을 통해 학자금대출 등 채무불이행 상태에 놓인 청년 빈곤 실태를 진단한 천 씨는 연구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회적 협동조합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에서 청년들의 재무 상담을 도운 것. 천 씨는 “내게 공부란 죽음과 불평등과 배제, 소외를 어떻게 해석하고 바꿔나가야 할지 삶과 생존을 위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하는 매개”라고 했다. 천 씨가 석·박사 과정을 거치며 받은 학자금 대출금은 약 1억5000만 원. 하지만 천 씨는 “내일도 연구자이고 싶다”고 말한다. 책 제목처럼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연구자는 계속 탄생하고 있다. 젊은 인문사회 연구자들의 원고를 엮은 돌베개 출판사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대학과 연구재단 밖으로 연구자의 외연이 확장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은 바다에서 시작됐다

    고대 그리스어로 ‘많은 섬들’을 뜻하는 폴리네시아에는 수천 개의 섬들이 드넓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져 있다. 바다는 이들을 고립시키는 장벽이었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바다는 오히려 길을 열어 섬들을 이어줬다는 것. 폴리네시아인은 카누로 항해하며 각자의 물건을 나눴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통가에서는 다른 섬에서 온 사람을 ‘카카이 메이 타히(바다에서 온 사람들)’라고 불렀다. 바다를 고향으로 여긴 통가인에게는 이웃 섬에서 온 이방인도 내 고향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바다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우리의 터전이었다. 전작 ‘대항해시대’(서울대출판부)에서 15세기 해양 세계사를 다룬 저자는 신간에서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인류사를 바다 관점에서 풀어냈다. 저자는 “근대에 이르러 서구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발견한 듯 바다를 소유로 삼으려고 했지만 바다는 먼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예부터 바다는 문명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기원전 3세기 인더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해상무역을 통해 긴밀히 교류했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규질암으로 0.86g과 13.7g 단위의 추를 만들었는데, 똑같은 추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발견됐다. 같은 도량형을 쓴다는 건 두 문명의 사회경제 체제가 서로 연결됐다는 증거. 아프리카 악기 실로폰이 동남아시아로 흘러가고, 인도네시아 악기 치터가 아프리카로 전해진 것도 바다를 통해서였다. 세계사의 결정적인 순간도 바다에서 비롯됐다.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하지 않았다면 제국으로 성장하는 건 불가능했다. 15세기 초 정화 함대가 인도양을 항해한 후 중국이 해양에서 손을 뗄 무렵, 유럽 열강들은 바다 건너 대륙으로 뻗어나갔다. 저자는 유럽이 해양 패권을 손에 쥔 15세기가 서구 중심의 근대로 바뀌는 전환점이 됐다고 말한다. 대항해시대 바다는 ‘제국의 것’이 된다. 대영제국은 바다 건너 도착한 아메리카 대륙과 이곳에 살던 원주민마저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겼다. 세계가 바닷길로 연결됐지만 오히려 지구는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선으로 나뉘었다. 1870년대 개발된 증기선은 범선으로 나흘이 걸리던 240km의 거리를 32시간으로 단축해 자본주의 세계화의 초석이 됐다. 문명에서 제국으로, 제국에서 자본으로 바다의 주인이 바뀐 역사를 조망하는 저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바다는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마치 제 것인 양 바다를 누벼온 인류에게 이제는 바다가 경고를 보내고 있다. 육지의 쓰레기가 바다로 떠밀려와 남한 면적의 15배가 넘는 쓰레기 섬을 이뤘다. 어선들의 남획으로 일부 어종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저자는 해저자원 개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재와 같은 약탈적 방식이 아니라 해양 환경과 공존하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바다가 강대국 간의 전장이 되는 상태를 피하려면 바다의 역사를 원래대로 복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표지에 큼지막하게 적힌 제목은 ‘바다인류’를 붙여 쓰지 않고, 바다라는 두 글자를 인류보다 위에 뒀다. 바다 위에 인간이 있는 게 아니라 바다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 인간이 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연암 박지원, 미완에 그쳤지만 동서양 사상의 소통 시도해”

    성리학의 한계에서 벗어나 서양사상과의 소통을 주장한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미완성 원고를 분석한 책이 나왔다. 김명호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69·사진)는 32년 만에 초판을 수정 증보한 ‘열하일기 연구’(돌베개)를 10일 펴냈다. 신간에는 초판에 빠진 연암의 ‘일신수필’ 서문에 대한 분석이 담겼다. 김 명예교수의 1990년 초판본은 연암 연구의 중심을 ‘허생전’ 등 소설에서 열하일기로 옮겼다는 평을 받았다. 1783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일신수필은 1780년 7월 중국으로 사행길에 오른 연암이 중국 랴오닝(遼寧)성 소흑산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9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글이다. 연암은 높은 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서문에 썼다. 약 800자로 쓴 이 글에는 “서양인은 거대한 선박을 타고 둥근 지구 저편에서 빙 돌아왔다”는 언급도 있다. 연암은 총 25편의 열하일기 중 13편에 서문을 붙였는데 유일하게 일신수필 서문만 완성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연암은 이 글에서 유학은 물론이고 불교와 서학까지 포용하는 논법을 구사했다”며 “비록 미완에 그쳤지만 동서양 사상의 소통을 시도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연암은 일신수필 서문에서 동양사상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을 풀어내는 문장을 끝으로 돌연 글을 멈춘다. 왜 그랬을까. 학계는 정조의 천주교 박해에 따른 부담감 때문으로 보고 있다. 김 교수는 “연암이 서양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의견을 계속 개진할 수 있었다면 조선이 근대화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국보 경매’ 2점 합쳐 60억 시작… 국립중앙박물관 구입예산은 39억

    간송미술관이 2020년 보물 두 점에 이어 최근 국보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과 국보 ‘금동삼존불감(佛龕)’을 경매에 내놓기로 하면서 그 향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보가 미술품 경매 시장에 나온 건 국내에서 처음이다. 문화재보호법상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는 해외로 반출할 수 없고 국내에서만 거래가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20년 보물 두 점을 사들였듯이 국보도 구매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물관은 예산 부족으로 경매에 선뜻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케이옥션이 27일 열리는 경매에 출품되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의 추정가는 32억∼45억 원, 금동삼존불감은 28억∼40억 원이다. 두 국보는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사들여 해외 반출을 막았던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이 생전 아꼈던 애장품으로도 꼽힌다. 간송미술관은 14일 입장문을 통해 “코로나19 사태로 문화예술계의 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되면서 재정적 압박이 커졌고 적절한 활로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며 “구조조정을 위해 소장품 매각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할 수밖에 없게 돼 송구한 마음이 크다”고 밝혔다. 케이옥션에 따르면 국보 두 점을 합한 거래 시작가는 최소 60억 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매 참여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박물관이 한 해 유물 구입비로 쓸 수 있는 예산은 39억 원에 그친다. 박물관 측은 “경매에 참여하더라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며 “국보에 책정된 가치가 적정한지,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학계에서는 박물관이 경매에 참여한다면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을 인수하는 데 유물 구입비를 모두 쓸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불입상이 국내에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희소성이 큰 데다 제작 연도까지 기록돼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기 때문이다.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에는 계미십일월(癸未十一月)에 제작했다는 명문(銘文·비석이나 기물에 새긴 글)이 새겨져 있어 563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매 시장에서 문화재는 관리하기가 쉽지 않아 개인이 소장하기 부담스럽고, 국가기관 중에선 국립중앙박물관만큼 유물 구입비를 책정해둔 곳이 없어 시작가가 높게 정해지면 유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실제 2020년 5월에도 간송미술관이 보물 ‘금동여래입상’과 보물 ‘금동보살입상’을 경매에 출품했지만 응찰자가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민간에서는 삼성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 외에 불상과 같은 문화재를 소장하는 박물관이 거의 없다”고 했다. 2020년처럼 경매가 유찰된 뒤 간송미술관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직접 거래해 적정 가격을 협의할 것이란 예측이 우세하다. 이 경우 경매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돼 박물관도 부담을 줄일 수 있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금동여래입상, 금동보살입상의 경매 시작가가 각각 15억 원씩 책정되자 적정하지 않다고 보고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박물관은 30억 원 미만을 주고 보물 두 점을 인수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1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성역이 된 민족 서사… 유대인 역사는 만들어졌다”

    1962년 가톨릭 수도사 슈무엘 루페이센은 자신을 “유대인으로 인정해 달라”고 이스라엘 대법원에 청원했다. 폴란드의 유대인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자신을 뼛속까지 유대인으로 여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맞서 싸운 그는 ‘민족의 땅’ 이스라엘에서 여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종전 후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 발목을 잡았다. 폴란드 시민권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에 온 그에게 대법원은 청원 수용 불가를 통보한다. 어머니가 유대 혈통이거나 자신이 유대교 신자이어야만 유대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저자는 유대 민족의 허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판결을 꼽는다. 루페이센은 평생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믿었지만 ‘민족 불명’이라는 신분증을 갖고 살아야 했다. 유대인으로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자기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도발적 주장을 내놓는다. 유대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조작됐다는 것. 이 책이 나오고 그는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공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동료 교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영국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가장 용감한 올해의 책”이라고 평한 이유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가계도 눈길을 끈다. 동유럽계 유대인이 쓰는 이디시어를 사용한 그의 아버지는 민족주의에 비판적인 공산주의자였다. 미국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이 근대 민족의 허구를 밝힌 ‘상상의 공동체’를 1991년 펴낸 후 관련된 비판적 분석이 이뤄졌지만 유대 민족에 대해선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세계 각지를 떠돈 2000년 디아스포라 역사와 나치의 잔혹한 탄압이 맞물려 일종의 성역이 구축됐기 때문이다. 이 서사가 무너지면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유대 국가를 세운 명분이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저자는 용기 있게 유대 민족의 허상을 폭로한다. 19세기 유대 역사학자들의 계보를 정리해 이들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신화를 역사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본토에서 추방당한 민족사를 상징하는 기원전 13세기 출애굽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한다.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이 유다 왕국을 점령한 데 이어 7세기 유대인을 강제 이주시킨 역사도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 시기 무슬림이 유대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자 소수파가 된 유대인이 스스로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땅을 찾아 떠났다는 것이다. 땅을 빼앗긴 민족이라는 장엄한 역사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이스라엘 사회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민족을 배척하고 ‘우리들만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유대 민족을 내세운 게 아니냐는 것. 저자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유대 국가로 여기는 한 이 나라는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스라엘에는 전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유대인을 비롯해 20%의 아랍인, 5%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유대 민족 개념을 해체하는 데 멈추지 않고 유대와 비(非)유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민족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지금의 세대가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새해 첫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경계 가자지구에서 폭격이 벌어졌다. 해묵은 민족, 종교 갈등을 넘어 새로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함께 만들자는 저자의 견해는 세대, 남녀, 빈부갈등 등으로 점철된 모든 나라에도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서울대교구 백신나눔 기금에… 교황 “진심 어린 감사” 서한 보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고통받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보내주신 백신 나눔 기금에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이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보낸 코로나19 ‘백신 나눔 운동’ 기금에 대해 전한 감사 서한이 10일 공개됐다. 교황은 지난해 12월 23일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같이 밝히며 “베풀어주신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서울대교구 모든 공동체에 영적 친밀감을 전한다”고 전했다. 앞서 같은 달 17일 서울대교구는 백신 나눔 운동으로 모금한 133만5000달러(약 16억 원)를 교황청에 전했다. 교구는 지난해 6월과 10월에도 각각 모금액 100만 달러(약 12억 원)를 보냈다. 교황청에 전해진 기금은 교황자선소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 2022-01-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