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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직후 홍명보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선수단의 맏형 홍명보의 말에는 뜻밖에 히딩크에 대한 반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히딩크가 비생산적 선후배 질서를 깼다는 평가에 대해 “원래부터 축구장에서 후배들은 종종 날 보고 ‘홍명보’ ‘홍명보’라고 불렀다. 그러나 축구장 밖에서는 선배들을 깍듯이 대하라고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이 원칙은 히딩크 감독이 오기 전과 후에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난 속으로 ‘이 사람은 선수는 해도 감독은 해선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히딩크는 단지 축구장에서 선후배 관계를 무시해도 좋다고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축구장 밖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홍명보는 그때나 지금이나 축구장 밖에서는 선배들을 깍듯이 대하라고만 후배들을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축구장 안에도 영향을 미쳤다. 축구장 안과 밖이 그렇게 명확히 갈리지 않는다. 그 미묘함을 모르는 사람이 감독을 잘할 수 없다. ▷축구를 해본 사람은 축구장 안은 실력만이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2002년 국가대표팀의 막내 박지성이 했던 역할을 이번에는 막내 손흥민이 했어야 하는데 할 수 없었다. 히딩크가 가까스로 마련해 놓은 ‘실력 축구’의 토대가 홍명보의 ‘의리 축구’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홍명보가 벤치에 죽치고 있었던 박주영을 믿었다는 것 자체가 요행을 바란 것이다. 게다가 박주영은 후배들이 어떻게 해보기 어려운 그라운드 안의 맏형이었다. ▷대한축구협회가 홍명보의 감독 유임을 결정했다. 홍명보는 히딩크에게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홍명보는 히딩크가 이동국을 자르듯이 박주영을 내치지 못했다. 히딩크처럼 박지성 송종국 같은 실력 있는 선수를 발굴할 줄도 몰랐다. ‘모 아니면 도’인 경기에서 히딩크는 수비수를 빼고 공격수를 넣는 강단으로 역전했지만 홍명보는 감독의 존재감을 느낄 만한 전략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알제리가 러시아보다 강팀인지를 몰랐다. 그런 감독이 이끄는 ‘의리 축구’ 시즌 2를 내년 1월 아시안컵 대회까지 봐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신문은 논평에서 출발했다. 최초의 신문은 일종의 정치적 팸플릿이었다. 그 신문을 읽고 커피하우스(영국) 살롱(프랑스) 만찬회(독일)에서 갑론을박한 것이 여론의 시작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고, 또 신문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사실 보도의 기능이 커지긴 했지만 논평은 여전히 신문의 본질로 남아 있다. TV와 달리 신문에서 논평이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다. ▷그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중앙일보 재직 시절 쓴 칼럼에 대해 사과함으로써 언론인 스스로 논평의 자유를 제한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관련 칼럼에서 “공인으로서의 행동이 적절치 못했다”고 쓴 데 대해 “유족들과 국민께 불편한 감정을 갖게 해드렸다면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해 “비자금 조성과 해외 재산 도피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고 쓴 데 대해선 “가족과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서운한 감정을 갖게 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사실 논란과 관련 없는 순전한 논평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논평은 비판이다. 비판받는 쪽은 서운하기 마련이다. 어느 사회도 자살에 호의적이지 않다. 이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범주의 논평일뿐더러 지극히 정상적인 논평이다. 그런데도 주필까지 지낸 사람이 ‘표현의 미숙함’ 운운하며 논지를 흐리는 것은 직필(直筆)을 곡필(曲筆)로 바꾸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 후보자가 유독 노·김 전 대통령 관련 칼럼에 대해서만 사과한 것은 친노계와 DJ계를 달래려는 제스처로 보인다. 그러나 칼럼니스트가 칼럼을 갖고 사과하면 칼럼도 사과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으로 내정된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문 후보자는 언론인으로서의 자기 삶도 부정한다”는 트윗을 날렸다. 분명한 의견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던 칼럼니스트가 다양한 견해를 조율하는 총리가 되는 길이 순탄치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학자의 글에는 날카로움이 있어야 한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당선자(성공회대 사회학 교수)의 글은 장황하고 절충적이어서 그런 맛이 없다. 그래도 그는 대체로 성실한 학자라는 평가는 받는 모양이다. 다만 이런 애티튜드(attitude)에 대한 평가 속에 ‘진보’라고만 막연히 알려진 그의 이데올로기는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조 교수는 저서 ‘동원된 근대화’(2010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스탈린 독재와 히틀러 독재는 독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동의를 창출하는 데 일정하게 성공했지만 박정희 체제는 ‘대단히 불안정한 독재’였다. …스탈린 독재나 히틀러 독재와는 달리 박정희 독재는 그렇게 광범한 동의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박정희 독재가 독재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20세기 인류사의 수치인 스탈린 독재나 히틀러 독재보다 더 독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스탈린 독재나 히틀러 독재보다 더 독재적인 시대를 산 사람들이 그 독재자의 딸을 지지해 대통령으로 만드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이 싫어도 현실이다. 조 교수는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책 ‘87년 체제론’(2009년)에 기고한 글에서 87년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정치적 기반을 이렇게 정리한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시장자유주의를 내적인 성격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자유주의 세력들의 적극적 분화가 나타나게 된다면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급진적 세력의 연합을 통한 국민적 전선을 재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조 교수는 자유주의가 기본적으로 시장자유주의여서 싫고, 자유주의 중의 사회적 자유주의는 단지 포섭 대상일 뿐이라고 한다. 그의 포지션은 일단 사회민주주의인 것처럼 보이는데 정확히는 급진적 세력과 연대하는 사민주의다. 이런 의미의 사민주의는 독일 사민당(SPD)에서도 오늘날 위험시되고 있다. 조 교수가 취한 정치적 노선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정확히 현실화됐는데 그것이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연대다. 조 교수는 함세웅 신부가 엮은 ‘곽노현 버리기’(2012년)라는 냉소적 제목의 책에 글 한 편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사전에 박명기 교수와 후보 단일화 대가로 금전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지는 않았다는 곽 씨의 주장을 ‘진심 어린 항변’이라고 표현하는 반면에 곽 씨를 단죄한 여론을 ‘상식화된 편견’이라고 비판한다. 곽 씨를 단죄한 여론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에서 다 나온 것이다. 함 신부를 매개로 해서 곽 씨와 조 교수 사이에 상식을 넘어서는 긴밀한 유대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임 진보 교육감들이 무상급식으로 포문을 열었듯이 이번 진보 교육감들은 자사고 폐지로 포문을 열었다. 선진국에서 어떻게 급식을 하는지 듣도 보도 못한 얼치기 교육감들이 전면 무상급식이 글로벌 스탠더드인 양 선전하고, 외국 생활 중 유학생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돈 한 푼 내지 않고 아이들을 키운 ‘빌어먹은’ 학자들이 그게 모두에게 적용되는 양 선전하는 통에 국민은 현혹됐다. 우리나라식의 자율형사립고 같은 학교는 선진국에 훨씬 더 많다. 나의 특파원 시절 경험으로 보면 선진국 중에서 평준화에 앞선다는 프랑스도 20% 이상의 초중고교 학생들이 사립학교에 다닌다. 좋은 공립학교에 가려면 좋은 학군에 살아야 하는데 그 비용에 비하면 사립고에 보내는 게 더 낫다. 나는 민족사관학교를 직접 취재한 적이 있고 용인외국어고의 소식도 지인으로부터 자주 전해 듣는다. 내 자식이 그 정도 수준은 못 돼서 유감이지만 정말 똑똑한 아이들이 있다. 제발 그런 아이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바로잡습니다] ◇10일자 A35면 ‘송평인 칼럼’ 중 ‘백기완 씨의 말처럼 박정희 시대는 3만 명이 괴로웠고 3000만 명이 행복했던 시대’라는 말을 백 씨는 한 적이 없다고 통일문제연구소 측이 알려왔습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의 1980년대는 서구의 1960년대처럼 격변의 시기였다. 오늘날의 젊은이가 1980년대를 연구한다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논쟁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름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하는 사회구성체론이다. 그 현실과 괴리한 현학성이 마치 중세 신학자들이 바늘 끝에 악마가 몇 마리 앉을 수 있는지를 놓고 벌이는 논쟁과 다를 바 없다. ▷쉽게 사회구조(social structure)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사회구성체라고 말하기 좋아하는 부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그런 번역어 자체가 현실과 괴리된 채 이론 논쟁만 하는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대중성, 즉 쉬운 걸 좋아하는 주사파들은 굳이 이런 어려운 말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무슨 심오한 사회과학을 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했던 민중민주(PD) 계열이 이런 말을 즐겨 사용했다. ▷스마트폰에 빠진 요새 10대들만 약어를 즐겨 쓰는 게 아니다. 1980년대 운동권도 그랬다. ‘사사방’은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생이었던 이진경 씨가 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말한다. ‘국독자론’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식반론’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신식국독자론’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약자다. 1985년 ‘창작과 비평’에 박현채 교수가 ‘국독자론’을 발표하고 ‘식반론’자들이 반박했다. 여기에 이 씨가 신식국독자론을 펼치며 두 이론의 빈약함을 비판했고 이후 변형된 국독자론, 변형된 식반론, 변형된 신식국독자론 등이 파생돼 나왔다.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본래도 생산적이지 못했지만 그마저 1990년대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수그러들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당선자는 이 논쟁을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이라는 제목 아래 4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무익함에 비해서는 너무도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다. 그것을 성실하다고 해야 할지,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는 독자들이 판단하시라. 아무튼 그 사람이 서울시교육감을 맡게 됐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둬야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안 이달고는 올 2월 프랑스 파리의 첫 여성 시장이 돼 화제가 된 인물이다. 프랑스 한인들은 파리에서도 특히 15구에 많이 사는데 이달고는 15구 구청장 후보로 여러 차례 출마했다. 내가 프랑스 특파원으로 있던 2008년 지방선거에도 이달고가 출마했다. 나도 집이 15구에 있어 집으로 배달된 선거 팸플릿에서 이달고의 이름을 자주 접했다. 그는 15구 구청장은 되지 못했지만 더 큰 파리 시장의 꿈을 이뤘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최초 여성 시장 리스트를 찾아보면 인구 100만 이상 도시에서는 올해 프랑스 파리 외에 2010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2009년 일본 요코하마와 불가리아 소피아, 2006년 이탈리아 밀라노와 폴란드 바르샤바, 2002년 그리스 아테네, 1988년 브라질 상파울루 등에서 첫 선출직 여성 시장이 나왔다. 한국은 여성 대통령이 나온 나라이지만 아직까지 여성 광역시장이나 도지사는 한 명도 없다. ▷기초단체장은 좀 다르다. 서울의 강남 3구(서초 강남 송파) 구청장을 다 여성이 차지했다. 재선인 신연희 강남구청장과 박춘희 송파구청장에 조은희 서초구청장 당선자가 가세했다. 양천구에서도 여성인 김수영 후보가 당선됐다. 부산의 김은숙 중구청장과 대구의 윤순영 중구청장이 첫 3선 여성 단체장이 됐고, 부산의 송숙희 사상구청장과 인천의 홍미영 부평구청장은 재선했다. 경기 과천에서는 신계용 후보가 최초 여성 시장이 됐다. 다만 농촌 지역의 군수에는 여성 당선자가 한 명도 없다. ▷1995년 지자체장 선거가 시작돼 전재희 씨가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경기 광명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여성 기초단체장은 2002년 2명, 2006년 3명, 2010년 6명에 이어 이번에 9명으로 조금씩 늘었다. 반면 여성 광역단체장은 제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광명시장에 이어 국회의원을 세 번 지낸 전 씨 정도면 광역단체장에 도전해볼 만도 했을 텐데 2012년 총선에서 떨어져 물러났다. 기초단체나 국회에서 탄탄하게 경력을 쌓은 여성들이 많아져야 여성 광역단체장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에서 대통령 부인은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부통령 부인은 세컨드레이디(second lady)다. 주(州)지사의 부인은 그 주의 퍼스트레이디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서울시장의 부인은 수도 서울의 퍼스트레이디다. 우리나라는 부통령이 없고 총리와 장관이라고 해봐야 선출직이 아니다. 선출직으로 따지면 서울시장 부인이 이 나라의 세컨드레이디라고도 할 수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부인 강난희 씨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본보 사진 자료를 찾아보니 강 씨는 2012년 10월 대선 투표일에 박 시장과 함께 투표하는 사진과 2012년 1월 적십자사 서울지사에서 봉사활동에 나선 사진이 있을 뿐이다. 시민들은 박 시장이 왜 미인 부인을 동반하고 다니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세간에서는 성형이니 어쩌니 말이 많지만 사실인지도 알 수 없고, 성형을 했다 하더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게 문제가 되는지도 알 수 없다.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의 경우 정 후보 본인보다 부인 김영명 씨가 좋아서 지지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김 씨는 이번 6·4지방선거를 앞두고 남편과의 거리 유세나 각종 봉사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홀로 다니는 박 시장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김 씨 역시 미인인 데다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딸로 미국 명문 웰즐리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다. 서민으로선 오히려 거부감이 갈 만도 한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늘 남편 옆에서 성실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퍼스트레이디는 어느 나라 법에서도 공적인 자리가 아니지만 사실상의 공인이다. 왜 그런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한 이불 속 베갯머리 권력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다. 박 시장이 오늘 6·4지방선거 사전투표를 할 때 부인 강 씨가 함께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이번 기회에 불필요한 논란이 싹 해소됐으면 좋겠다. 서울시의 퍼스트레이디라면 시민이 얼굴은 자주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해 변호사 개업 이후 열 달간 늘어난 재산 11억 원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밝혔다. 총리 자리를 얻기 위한 기부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좋은 뜻을 좋게 받아들여주면 감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후 기부’를 좋은 뜻으로 한다고 해서 전관예우나 과다 수임료 문제가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다. 논란을 피해 가려는 듯한 태도는 옳지 못하다. 안 후보자가 지금까지 기부한 4억5000만 원 중 3억 원도 순수하게만 보기 어렵다. 안 후보자는 정홍원 총리 사퇴론이 여당에서 공개 거론된 바로 다음 날인 지난달 24일 유니세프에 기부에 대해 문의했다. 기부를 한 5월 19일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날이고 총리 후보자 발표 사흘 전이었다. 정 총리 사퇴론이 나올 때부터 후임 물망에 올랐던 안 후보자가 자신의 내정 사실을 알고 인사검증과 인사청문회를 의식해 기부했다는 의혹을 받을 만하다. 안 후보자는 거절하기 힘든 지인이 아니면 형사사건과 대법원 상고사건을 수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한 대부업체 대표의 형사사건 상고심을 맡아 2심에서 유죄로 인정된 것을 무죄 취지로 승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사사건 상고심도 4건을 맡아 3건은 패소하고 1건은 승소했다. 대법원 사건은 승소 여부에 관계없이 수임료가 높다. 안 후보자는 월평균 2억 원 넘게 벌어들였다. 사법부의 전관예우 관행을 개혁해야 한다는 사회 움직임이 무색해지는 큰돈이다. 안 후보자는 서울 강남 개발 붐이 일던 1978∼85년 주소지를 서대문구 수색동에서 강남구 도곡동 압구정동 등으로 13차례 옮겼다. 강남과 강북을 오가며 7개월에 한 번꼴로 주소가 바뀌었다. 부인과 아들은 2001년과 2007년 따로 주소를 옮겼다가 다시 합쳤다. 위장전입을 의심할 수 있다. 안 후보자의 신고 재산에는 현금 수표가 5억1950만 원이나 된다. 왜 거액의 현금과 수표를 은행에 넣지 않고 보관했는지도 궁금하다. 안 후보자는 2006년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퇴임 후 변호사로 개업을 하더라도 자문 위주로 하고 구체적 사건은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전관예우로 의심받을 일은 아예 하지 않겠다는 그 말은 이제 허언(虛言)이 됐다. 박근혜 정부 첫 총리 후보자였던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이 낙마한 이유에는 7개월 7억 원 수임료도 들어 있다. 최고의 전관예우를 받았던 총리가 관피아 척결에 나서는 것을 국민이 어떻게 볼지 안 후보자의 고민이 따라야 할 것이다.}
예민함도 지나치면 병이다. 세월호 희생자 수를 일반 교통사고 사망자 수와 비교한 KBS 보도국장의 발언을 노조에 ‘고발한’ 과학재난부 기자, 보도국장이 어리석긴 했지만 사석에서 한 발언인데 옹호해주기는커녕 희생양으로 삼아 사표를 종용한 사장, 구조작업이 진행 중이니 해경 비판을 자제해 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조차 외압이라고 느끼는 보도국장, 모두 지나치게 예민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태도는 KBS의 회사 분위기, 즉 윗사람이 얘기를 하면 무슨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지 않나 의심하고 보는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KBS가 이렇게 각박해진 이유가 역대 정권의 언론 장악 시도 때문인지, 아니면 노조의 정권 길들이기 때문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지지하든 한 가지 전제는 공유하고 해결책을 추구한다. KBS는 예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어야 한다는 전제다. 하지만 KBS가 왜 이대로 계속돼야 하는지 난 의문이다. 공영방송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국가 재난 방송이다. KBS 역시 국가 재난 주관 방송사다. 하지만 이번에 세월호 참사 재난 보도에서 봤듯 KBS가 없다고 해서 누구도 알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고 느낄 것 같지 않다. 정보의 질을 따져 봐도 마찬가지다. KBS가 있다고 해서 더 나은 보도를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KBS가 없다고 해서 더 못한 보도를 접하게 될 것도 아니다. KBS는 과거 방송 개척 시대에 공영방송으로서 방송산업을 선도했다. 오늘날 KBS는 더이상 그런 역할을 맡을 필요도, 맡을 능력도 없다. SBS 등 지역 민영방송이 시작됐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 케이블 방송이 등장했으며, 모든 분야를 다루는 종합편성채널도 나왔다. 더구나 국민은 점차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더 많은 정보와 재미를 얻고 있다. KBS가 없어도 국민이 불편할 게 별로 없다. 물론 없어도 불편할 게 없는 것이 KBS만은 아니다.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KBS는 국민이 TV수상기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청료를 내야하는 유일한 방송이다. 나는 국내에서 출입처를 나갈 때는 잘 몰랐는데 해외에서 특파원을 하면서 KBS를 좀 더 잘 알 수 있었다. SBS에서는 경비 절감을 위해 취재기자만 특파원으로 나온다. 카메라기자는 현지에서 고용한다. KBS는 취재기자와 카메라기자가 함께 나오는 곳이 많다. 카메라기자 한 명 파견에 연봉 1억 원과 주거비 등을 합치면 한 해 3억 원가량의 비용이 든다. 그럼에도 현지어 구사능력이나 현지에 대한 정보는 연봉 수천만 원인 SBS 카메라기자에 훨씬 못 미친다. 감사원이 지난해 KBS 경영실태를 조사한 결과 1급 이상 직원 382명 가운데 보직 없는 사람이 열에 여섯 명꼴이다. 1급의 평균 연봉은 1억 1600만 원이 넘는다.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심의실 라디오센터 송신소 등에 필요인원 이상이 배치돼 시간을 보낸다. 이런 비효율적인 KBS에 우리는 꼬박꼬박 시청료를 냈다. 나도 좋아하는 KBS의 프로그램이 있다. KBS 제1FM 클래식 방송을 좋아하고, KBS 수신료 일부로 운영되는 EBS의 ‘한국기행’ 같은 교양물을 좋아한다. 그러나 ‘개그콘서트’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굳이 KBS에서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민간영역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민간영역에 넘겨줘야 한다. 그렇게 하고도 남는 것, 그것이 공영방송이 맡아야 할 고유한 영역이다. 공영방송의 뉴스는 건조(dry)해야 한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뉴스가 재미없을 정도로 건조하다. 기자들이 쓸데없는 데서 예민해져서 뉴스를 촉촉(wet)하게 만들려다 보니 국민이 동감하기 힘든 포인트에서 격렬한 불꽃을 튀기며 싸우는 것이다. 최근 KBS 내홍이 그렇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정정보도문본보 2014년 5월 27일자 A35면의 ‘KBS는 과연 필요한가’라는 제하의 ‘송평인 칼럼’ 중 세월호 사고를 교통사고와 비교한 KBS 전 보도국장의 발언을 ‘KBS 과학재난부 여기자’가 노조에 ‘고발’하였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으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5개월간 변호사로 벌어들인 수입이 무려 16억 원에 이른다. 하루 약 1000만 원씩을 번 셈이다. 안 후보자의 올해 수입은 파악되지 않아 계산하지 않은 것이 이 정도다. 그는 대검 중수부장, 서울고검장 등 검찰 고위직을 지낸 뒤 대법관을 6년 했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변호사지만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큰 수입이다. 전관예우(前官禮遇)를 받아본 변호사들조차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할 지경이다. 안 후보자는 2012년 7월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정확히 1년 후인 지난해 7월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2011년부터 시행된 개정 변호사법(일명 전관예우 금지법)에 의해 판검사는 최종 근무지에서 1년 동안 수임이 금지돼 있다. 요새 대법관 출신들은 퇴임 후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등으로 1년을 보낸 뒤 변호사 사무실을 여는 게 관행처럼 돼 있다. 전관예우는 단지 1년 늦춰졌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주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담화에서 국가를 개조한다는 각오로 민관 유착과 관피아를 척결하겠다고 밝혔다. 민관 유착의 원조가 다름 아닌 법조계 전관예우다. 이른바 관피아(관료+마피아)를 만든 행정 부처의 전관예우는 법조계의 전관예우를 흉내 낸 것이다. 안 후보자가 전관예우로 그 많은 수입을 벌어들인 것이라면 그가 민관 유착과 관피아 척결에 앞장설 총리로서 적임자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일단 안 후보자는 “거절하기 힘든 지인이 아니면 형사사건과 대법원 상고사건 수임을 하지 않았고 조세사건을 주로 맡았다”고 해명했다. 아직은 정확한 수임명세가 밝혀지지 않아 전관예우로 의심되는 수임 건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안 후보자는 16억 원 중 6억 원은 세금으로 내고 4억7000만 원은 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관예우는 사후뇌물죄에 해당한다는 엄한 시각도 있다. 전관예우로 번 돈이라면 기부했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국회 인사청문회가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 때인 2011년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는 민정수석비서관 출신인 데다 로펌 재직 시 월평균 1억 원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는 비판이 더해져 청문회 전에 자진 사퇴했다. 그 액수와 비교해 봐도 안 후보자의 수입은 과다한 것이다. 안 후보자는 2006년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전관예우에 대한 질문을 받고 “변호사들은 적절한 보수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고 답했다. 전관예우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안 후보자는 자신이 받은 보수가 적절한지부터 생각해보기 바란다.}
검찰이 전방위적인 민관(民官)유착 수사에 나선다. 김진태 검찰총장은 어제 검사장 회의에서 전국 지검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 민관유착 비리 수사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세월호 참사를 낳은 병폐로 민관유착을 지적하면서 관(官)피아(관료+마피아) 비리 척결이 국가 개조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검찰은 이미 해운 분야 전반에 걸쳐 민관유착을 파헤치고 있다. 검찰은 해양수산부 고위 관료 출신으로 2010∼2013년 한국해운조합 이사장을 지낸 이인수 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장의 횡령 혐의를 포착하고 출국금지 조치했다. 또 인천해양경찰서 해상안전과장으로 근무할 때 선주 모임에서 수백만 원 상당의 향응을 받고 여객선 승선 인원 초과를 눈감아준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장모 특공대장을 구속했다. 민관유착은 해운 분야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수십 년간 쌓인 병폐다. 해운 분야 민관유착이 세월호 침몰이라는 참사를 낳았다면 다른 곳곳에서 벌어지는 민관유착은 어떤 비극을 잉태하고 있을지 불안하다. 이번 대검 회의에서는 각종 인허가 규제, 정부 지원 보조금 비리, 대형 건설사업 발주 비리 등 온갖 분야에서의 민관유착 유형이 거론됐다. 전국에서 전 분야에 걸쳐 고위직뿐 아니라 중하위직 공무원까지를 모두 대상으로 하는 유례없는 반(反)부패 수사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민관유착 수사에서 검사도 예외일 순 없다. 부장검사가 내사 중인 기업 등으로부터 10억 원대의 뇌물을 받아 징역 7년을 선고받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민관유착 수사는 깊숙이 들어갈수록 관행과의 싸움이 된다. 과거 ‘떡값’이란 명목으로 사법처리를 모면했던 삼성 떡값 유의 사건도 되풀이돼선 안 된다. 관피아는 전관예우에서 출발한다. 전관예우로 말하자면 법조계가 가장 심하다. 법조계의 전관예우까지 손본다는 각오로 검찰은 수사에 임해야 한다. 수없이 부패 척결을 외쳤지만 민관유착이 여전히 문제라는 것은 그만큼 뿌리 뽑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피아에서 ‘(마)피아’를 떼내 관피아라는 용어 자체를 없애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그러나 국가 개조를 위한 수사라면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한다. 어떤 관행은 불법인 줄 알면서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 많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적폐가 됐다. 이번 수사가 바로 그 적폐를 털어내는 계기가 돼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석에서 자주 울었다. 감정이입을 잘하는 건 좋은데 지도자는 감정과 거리도 둘 줄 알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폭침 희생자 영결식장에서 눈물을 보였다. 참담한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국군통수권자의 위엄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어느 화장실 변기 위에서 ‘남자가 흘려서는 안 되는 것이 눈물만이 아니다’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중년 남자라면 다른 것도 흘려선 안 되지만 특히 눈물은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서구에서 평가받는 여성 리더의 자질도 남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불렸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의 대처로 불린다. 미국인도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의 대처이기를 바랐다. 힐러리는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강행군 도중 “머리 손질을 누가 도와주느냐”는 질문에 “쉽지 않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덕분에 지지율을 일시 만회하는 것 같았으나 대통령을 할 만큼 강인하지 않다는 인상을 줘 결국 패했다. ▷한국은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고 해서 칭찬은 고사하고 ‘아이를 안 키워봐서’ ‘감정이 메마른 얼음공주여서’ 그렇다느니 비난받는 나라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줄도 모르고 어른들의 잘못된 안내방송을 끝까지 믿고 기다리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안타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그것도 여성 대통령이 공석에서 울지 않은 게 대단하다고 여겼다. ▷박 대통령이 어제 결국 눈물을 보였다. 대국민담화 막판에 자신의 구명조끼마저 벗어주고 희생된 학생과 승무원 얘기를 하다 감정이 북받쳤나 보다. 여기에까지 박 대통령이 정치적 효과 만점의 눈물을 구사한 것이라느니, 한나라당 천막당사를 시작할 때도 그런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느니 분석하는 사람은 정나미가 떨어진다. 다만 지도자의 눈물에 야박한 나로선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대통령은 눈물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눈물 닦아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세월호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자기들이 살기 위해 승객을 버린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조타실에 있던 선장과 항해사 등은 배가 곧 전복될 것이 명확한 시점에 인근의 유조선은 직접 구조가 어렵고 해경 경비정 1척만 다가오는 것을 목격했다. 승객들은 선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객들이 일제히 퇴선할 경우 구조 순위가 밀릴 것을 우려해 자기들이 우선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다. 검찰은 어제 이준석 선장, 강원식 1등 항해사, 김영호 2등 항해사, 박기호 기관장을 살인죄 등으로 기소하는 등 선박직 승무원 15명 전원을 기소했다. 이 선장 등 4명은 자신들의 행위로 죽음의 위험에 놓인 승객에 대한 구호 의무를 다하지 않음(부작위)으로써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최초 구조 신고부터 선원들이 배를 빠져나갈 때까지 51분의 시간이 있었다. 검찰은 이 시간 동안 최소 7차례 승객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은 승객에게 퇴선을 지시하는 최소한의 구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대검 관계자는 “선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승객이 사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 선박 사고에서 검찰의 살인죄 기소는 두 번째다. 1970년 326명이 희생된 남영호 침몰 사고에서 선장이 살인죄로 기소됐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엔 세 번의 파도를 맞고 순식간에 배가 뒤집어져 선장이 승객을 구조할 시간이 없었다. 법원은 “배가 화물 과적이 심하긴 하지만 선장 스스로 그 배에 탔는데 살인의 고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세월호는 사고 후 배가 80도 이상 기울기까지 1시간 20분의 시간이 있었다. 배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고, 객실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통신수단도 있었다. 일부는 근무복까지 갈아입었다. 상황이 다르니 법원의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이 선장은 당시 판단력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강 항해사에게 회사와 연락을 취하도록 했고, 김 항해사에게는 객실에 연락해 선내 대기 안내방송을 하도록 지시했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로부터 승객 퇴선 준비 지시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듣지 않은 반면 박 기관장에게는 기관사들을 모아 퇴선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지금까지 수습된 사망자의 90% 이상이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대피 준비를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살릴 수도 있었던 승객은 죽든 말든 내버려두고 자기들 살 궁리만 했으니 살인 행위와 뭐가 다른가.}
검찰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게 16일 출석을 요구했다. 이에 앞서 검찰은 유 씨의 장남 대균, 차남 혁기, 장녀 섬나 씨 등을 소환했으나 모두 불응했다. 검찰은 어제 대균 씨의 서울 서초구 염곡동 자택에 강제 진입해 체포영장을 집행하려 했으나 행방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혁기 씨와 섬나 씨는 미국에 머물며 입국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이 제3국으로 이미 도피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검찰은 유 씨의 지시로 유 씨의 자녀들과 측근들이 계열사 자금을 빼돌린 혐의를 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무고한 인명 30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된 세월호 참사의 정점에는 청해진해운의 선장이나 선원, 직원들이 아니라 이들을 부리며 회삿돈을 빼먹은 유 씨 일가가 있다. 유 씨가 소속된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의 본산으로 알려진 금수원의 대표인 탤런트 전양자 씨 등 일부 측근은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유 씨 일가는 의혹이 부당하다면 검찰에서 밝히면 된다. 소환 자체를 거부할 어떤 명분도 없다. 유 씨 일가에서는 “우리 집안은 이미 전쟁을 치러 봤다”며 결전을 불사할 분위기마저 감돈다고 한다. 유 씨와 대균 씨는 구원파 신도들을 방패막이 삼아 금수원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어제와 그제 찾아간 경기 안성의 금수원에는 신도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접근을 막았다. 만약 두 사람이 신도들 뒤에 숨어 검찰 소환에 불응하는 것이라면 국민의 분노만 더욱 키울 뿐이다. 유 씨가 1991년 오대양 사건의 재수사로 검찰에 소환될 때 일부 신도는 언론사 등에 몰려다니며 거센 저항을 했다. 이번에도 청해진해운 계열사 관련자들이 대검찰청이나 인천지검으로 소환될 때마다 신도들이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언론 보도를 위축시키고 검찰 수사를 방해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놓인 유 씨는 탄압받는 종교 교주로 행세해 해외 여론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신흥 종교집단의 반발은 예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검찰은 신도들과의 불필요한 충돌로 수사의 초점이 흐려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검찰은 아직 유 씨 일가의 소재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답답하다. 해외에 머무는 혁기 씨와 섬나 씨에 대해서는 미국과의 사법공조로 이들의 국내 송환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쉽게 성사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단 국내에 잠적한 것으로 알려진 유 씨와 대균 씨에 대해 최대한 신속히 조사가 이뤄지도록 검찰이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배가 또 기울고 있어.” 세월호 침몰 당일 오전 10시 17분 세월호에 탑승한 안산 단원고 학생이 보낸 최후의 메시지다. 검경합동수사본부가 사고 전후 탑승객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분석해 그제 공개한 것이다. 학생은 그 시간 이후에도 부모에게 메시지를 보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이 세월호가 이승과 교신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보름쯤 전 공개된 오전 10시 17분의 또 다른 메시지를 기억한다. 그것도 단원고 학생이 보냈다.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는 다른 방송은 안 나와요”라는 내용이었다. 난 당시 한국일보 1면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간직하고 있다. ‘AM 10시 17분 마지막 카톡’이라는 글자 아래 배가 100도 가까이 기울어 이미 절반 넘게 잠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설명과 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화가 치밀어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다. 잔인한 4월이었다. 어른이란 게 부끄러운 4월이었다. 우리 속에 이준석 같은 무책임은 없는가, 우리 속에 유병언 같은 탐욕은 없는가, 우리 속에 해경 같은 무능함은 없는가 묻는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구나 자기 분야에서 조금씩은 이준석이고, 조금씩은 유병언이고, 조금씩은 해경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정도의 차이다. 그 차이가 합법과 불법을 가르고 도덕과 비도덕을 가른다.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으면 자학(自虐)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우리 모두 치료가 필요하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천민 자본주의적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라고 천민 자본주의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간 ‘한겨레21’은 이번 주 커버 사진에 ‘우리는 아직 세월호에 타고 있다’는 제목을 달았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없도록 하자는 반성의 차원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수사(修辭)로서나 통하는 말이다. 한 사회의 각 분야는 똑같은 정도로 합리적이지도, 똑같은 정도로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사회는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어디는 앞서가고 어디는 뒤처져 있다.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승무원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착륙 사고 당시 침착한 대응으로 인명 피해를 크게 줄여 칭찬을 받았다. 항공사는 정기적으로 실물크기 모형 비행기를 물 위에 띄워놓고 실제 비상 상황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한다. 1년에 안전교육비로 고작 54만 원을 지급한 청해진해운과는 다르다. 과거 사고에도 불구하고 해운회사처럼 뒤처진 곳이 있고 과거 사고에서 배워 항공사처럼 앞서 가는 곳도 있다. 그것이 우리가 희망을 갖는 근거다. 연안 여객선을 한 번이라도 타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뒤처진 교통수단인지를 느낄 것이다. 뭍에서 섬까지 한두 시간 가는 배만 있을 때는 그냥 넘어갔다고 치자. 수백 명의 승객과 수천 t의 화물을 싣고 1박 2일을 가는 배라면 더이상 우리가 아는 연안 여객선이 아니다. 카페리도 크루즈도 화물선도 아닌 것이 카페리와 크루즈와 화물선 역할을 다 하면서도 연안 여객선에 적용된 낡은 관행에 따라 취급된 것이 사고의 먼 원인이다. 큰 사고는 대개 새로운 것이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분노하라. 그러나 해결은 차가운 이성으로 추구해야 한다. 세월호가 도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물을 너무 넓게 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을뿐더러 잡아도 건져 올릴 수 없다. 지도자라면 어디가 앞서고 어디가 뒤처져 있는지 구별하고 뒤처진 곳에 그물을 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도 재야도 국가 개조를 얘기한다. 다 좋다. 그러나 디테일이 없다면 참사는 되풀이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나이지리아에서 한 여학교의 10대 여학생 276명이 지난달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 ‘보코하람’에 집단 납치됐다. 보코하람의 두목 셰카우가 인터넷으로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학교가 서구화 교육을 한다는 게 납치 이유다. 그는 여학생들을 강제로 결혼시키기 위해 시장에 내다 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는 물이 증발돼서 내리는 게 아니다’ ‘지구는 둥글지 않다’ 같은 걸 교리라고 내세운다. 창과 칼은 고사하고 돌도끼나 어울릴 것 같은 인간이 총을 들고 있다는 게 비극의 원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세네갈을 방문했을 때 부인 미셸 여사는 한 여학교를 찾았다. 그는 “아버지가 내 대학 학비를 대주기 위해 마다하지 않은 힘든 노동이 내가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공부한 동기가 됐고 결국 내 꿈을 이루게 했다”고 말했다. 검은 피부의 미셸이 검은 피부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환영받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미셸은 “여러분들은 전 세계의 여학생들을 위한 롤 모델”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미셸이 그들의 롤 모델이었다. ▷지난해 16세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하다가 탈레반에게 피격 당했다. 말랄라는 11세 때 탈레반의 여학교 폐쇄령에 저항하는 글을 영국 BBC를 통해 용감하게 공개한 후 탈레반의 표적이 됐다. 말랄라는 피격으로 두개골 일부와 왼쪽 청각을 잃었지만 유엔 총회에서 감동적인 연설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탈레반은 우리를 침묵시켰다고 생각할 겁니다. 틀렸습니다. 그들은 저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저는 똑같은 말랄라입니다. 저의 희망은 같습니다. 저의 꿈도 같습니다…극단주의자들은 책과 펜을 두려워합니다. 문맹 빈곤 테러에 맞서 싸우기 위해 펜과 책을 듭시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한 명의 아이, 한 명의 선생님, 하나의 펜, 한 권의 책이 세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랄라가 한 말이 바로 나이지리아 여학생들을 구하고 그들의 꿈을 되찾아 주기 위해 전 세계가 노력하고 있는 이유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세월호 사고 21일째인 어제 50대 민간 잠수사 이광욱 씨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선체에 로프를 매서 가이드라인을 설치하려고 오전 6시 6분경 입수했다가 11분 뒤 수심 24m 지점에서 통신이 끊겨 급히 구조됐으나 의식을 잃었다. 이 씨는 피로가 누적된 잠수사들을 대체하기 위해 이날 처음 입수했다가 변을 당했다. 30년 경력의 잠수사인 고인은 2인 1조로 잠수하는 수칙을 지키지 않고 혼자 입수했다. 해양경찰청 측은 실종자를 찾으러 수심 40m까지 내려갈 때는 2명이 함께 가지만 수심 20m대에서 가이드라인을 설치하는 작업은 관행적으로 혼자 입수한다고 밝혔다. 안전수칙을 어겨 참사가 일어난 세월호 현장에서 또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사고가 났다니 참담하다. 더구나 현장 바지선에 군의관이 있었다면 곧바로 긴급구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전 조치에 미흡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또 놓쳤으니, 우리는 불과 21일 전 참사에서 배운 점이 없단 말인가. 고인은 대를 이은 잠수사였다. 해경이 새로 모집한 민간 잠수사 중 한 명이었으나 잠수는 민간 구난 업체 언딘의 관할 아래 했다. 고인의 죽음을 놓고 해경과 언딘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못 볼 노릇이다. 세월호 수색 작업이 장기화하면서 잠수병을 호소하거나 부상을 입는 잠수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초대형 태풍을 뚫고 정전된 40층 건물에 들어가 휴대전화 조명 하나에 의지하면서 사람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한다. 잘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최악의 맹골수도에서 잠수사들은 자기 자식을 찾는 심정으로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때도 구조 활동을 벌이던 한주호 준위가 생명을 잃었다. 세월호의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잠수사들의 생명도 소중하다. 사고대책본부는 고군분투하는 잠수사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작업 여건을 개선하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회가 안전과 관련한 규제 강화에 나섰다. 국회는 해상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항로표지법 개정안, 수학여행 등 학생들의 단체 활동에 안전대책 수립을 의무화하는 법안 등을 의결했다. 규제 철폐를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안전 및 환경 관련 제품이 의무적으로 획득하도록 돼 있는 강제 인증은 더 심도 있는 검토를 거쳐야 한다”며 규제 완화 대상에서 빼겠다고 밝혔다. 정부 역시 안전 관련 규제는 지금처럼 놔두거나 더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안전을 위해 필요한 규제는 만들고 부족한 규제는 강화해야 한다. 한국해운조합이 선임하는 운항관리자들은 선박 화물의 적재한도 초과 여부, 비상훈련 실시 여부 등을 감시 감독한다. 세월호는 이런 사항이 대부분 지켜지지 않아 참사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현행 해운법에 따르면 운항관리자를 처벌할 수 없다. 법의 맹점(盲點)을 보완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규제 강화가 능사는 아니다. 세월호 참사는 규제가 미비해서라기보다는 있는 규제를 잘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측면이 크다. 국내 여객선은 열흘에 한 번 비상훈련을 하도록 돼 있다. 세월호는 이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비상훈련을 제대로 하도록 하고, 지키지 않을 경우 처벌 규정을 뒀다면 참사를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큰 사건만 터지면 정부 대책이 쏟아지고 규제 강화로 이어지는 것도 적폐(積弊)의 일종이다. 세월호 참사를 놓고 일각에서는 “규제 완화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관료들이 지키지도 못할 엉터리 규제를 잔뜩 만들어놓고 퇴임 후 협회 등으로 내려가 그 규제들을 활용해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행태가 문제의 본질이라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처럼 전관예우가 판치는 나라에서는 규제 강화에 앞서 정부 부처와 산하 단체의 유착 관계부터 없애야 한다. 안전 입법과 관련한 국회의 전문성도 의심스럽다. 현행 해운법으로 운항관리자를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은 국회가 2년 전 해운법을 개정하면서 운항관리자 처벌 조항을 부주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공무원은 규제 강화를 반기게 마련이다. 규제의 벽이 높아진 만큼 규제를 집행하는 공무원들의 재량과 권한도 커진다. 국회와 정부가 규제 강화에 골몰하다 보면 관료 개혁은 아예 손도 대지 못하고 물 건너갈 수 있다. 또 한 번의 졸속 규제가 아닌, 지킬 수 있는 제대로 된 규제를 만들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를 보고받고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 전화해 해경 특공대를 투입해 선실 구석구석을 뒤지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정확한 상황 보고에 기초한 지시는 아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럼에도 그것은 뭘 모르는 지시였다. 세월호는 선실 구석구석은 고사하고 선실 입구에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의지만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방법을 알아야 한다. 방법을 아는 사람만이 컨트롤타워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이 컨트롤타워가 될 수 없다. 총리도 장관도 될 수 없다. 재난 구조는 일반적 지식으로는 안 된다. 전문적인 기술적 지식이 필요하다. 대통령 총리 장관은 컨트롤타워를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면 되는 것이지 그들 스스로 컨트롤타워가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된다. 나는 1995년 같은 해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빌딩 폭파 사고를 둘 다 현장에서 취재했다. 두 사고의 컨트롤타워는 너무 달랐다. 삼풍백화점 사고의 컨트롤타워는 정치인 출신의 서울시장이었다. 사고 직후 무너진 백화점 지하로부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연기를 내버려두면 생존자가 질식사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시장은 물을 뿌리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연기가 더 많이 올라왔다. 전문가를 자처한 어떤 사람이 와서 소방거품을 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은 이번에 소방거품을 뿌리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또 다른 전문가가 달려와서는 소방거품은 생존자에게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시장은 누구 말이 옳은지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폭파 사고에서는 오클라호마시티 소방대장이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 9·11테러 당시 뉴욕 시 소방대장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 것과 똑같다. 그는 생존자 구출을 위해 생존자의 다리를 잘라야 하는 힘든 결정도 여러 차례 내렸다. 그는 구조 현장에 들어가고 나올 때가 기자들과 접촉하는 유일한 시간이었지만 언론을 통해 상황을 알리는데도 최선을 다했다. 며칠 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희생자 추도 예배가 인근에서 열렸다. 예배 참석자의 기립박수를 받은 것은 구조견을 앞세운 소방대원들이었다. 소방대장은 예배 때도 현장을 지키느라 오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 현장의 구조 컨트롤타워는 누구였는가. 애초 이것이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해경 장비기술국장이 나와서 브리핑하는 것을 보면서 해양경찰청장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최근에야 한 해군 대령에게 자문해 해양경찰청장이 지휘한다는 공식 설명이 나왔다. 그러나 김석균 청장의 이력을 보면 잠수 근처에도 가본 것 같지 않다. 그 역시 구조작업을 지원할 적임자인지는 모르지만 구조작업을 지휘할 적임자는 아니다. 해경청장에게 조언을 한다는 해군 대령이 25일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해난구조대(SSU) 대장이다. 그가 상황을 설명하자 구조작업을 비난하던 실종자 가족들이 비로소 신뢰를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컨트롤타워를 해야 한다면 그가 컨트롤타워여야 할 사람이다. 높은 사람이 컨트롤타워를 맡을수록 좋다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촌각을 다투는 재난 구조는 지휘체계를 초(超)단순화해야 한다. 실질적 컨트롤타워 위에 옥상옥(屋上屋)을 만들어놓으니까 선내 진입이 72시간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은 아닐까. 생환자는 아직 제로다. 구조대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본래부터 침몰한 배 속에 에어포켓도 생존자도 없었을 수 있다. 그러나 생존자가 있었으나 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은 최소한 남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에는 박 대통령부터 컨트롤타워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지휘와 지원도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어제 일본에 도착해 2박 3일의 방문 일정을 시작했다. 그의 일본 방문은 세 번째지만 국빈 방문은 처음이다. 일본 국빈 방문은 일왕 부부가 거처인 고쿄(皇居)에서 영접하는 환영행사, 일왕 부부와의 궁중 회견과 만찬, 일왕 부부가 국빈의 숙소로 나와 하는 작별인사 등 4가지를 포함한다. 이게 모두 이뤄지려면 국빈이 최소 2박 3일 일본에 머물러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빈이 아니어도 좋다며 1박 체류를 원했지만 일본의 끈질긴 외교적 노력으로 2박으로 결정됐다. ▷외교적 실리에 밝은 나라일수록 강대국에는 비굴하고 약소국에는 거만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1박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일왕이 직접 나서 동일본 대지진 때의 지원에 감사한다는 등의 이유를 붙여 국빈으로 대접하고 싶다고 전해 국빈 방문이 이뤄졌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부인 미셸 여사와 동행하지 않아 충분한 호의를 베풀지는 않았다. 미셸 여사의 불참에 일본에선 “무시당했다”는 불만도 나온다. ▷일본은 국빈 방문 비용도 철저히 따진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국빈 방문은 한 번에 약 2500만 엔(약 2억5000만 원)의 예산이 든다. 예산 문제로 국빈은 1년에 2번 정도밖에 초대할 수 없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 센카쿠(尖閣) 열도가 미일수호조약의 대상이라는 점을 공동문서로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관영 환추(環球)시보는 벌써 ‘일본은 미국의 정치적 첩(妾)’이라는 내용의 거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은 들인 돈 이상의 대가는 얻는 셈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 방문을 마치고 25일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중일 간 쟁점인 센카쿠 열도와는 달리, 한일 간 쟁점인 독도 문제는 의제에 오르지도 않는다. 미국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와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의 수정 시도에 비판적이지만 독도 문제에는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일본이 독도에 시비 거는 빌미를 제공한 데는 미국 책임도 없지 않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유감스러운 대목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그제 공개된 세월호와 진도연안해상교통관제센터(VTS)의 교신 내용은 이 배의 선장과 선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능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세월호가 오른쪽으로 급선회한 시각이 16일 오전 8시 48분. 8시 55분 제주VTS에 “배가 넘어간다”고 통보한 뒤 10시 45분 선체가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그들은 뱃사람으로서의 직업윤리는커녕 최소한의 양심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마저 저버린 모습이었다. 세월호는 출항 시 고정시켜 놓은 제주VTS와의 교신 채널을 진도VTS 해역에 들어서면 바꿔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아 최초 교신을 제주와 했다. 이 때문에 실질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진도VTS와의 교신이 12분이나 늦어졌다. 진도VTS는 세월호에 승객 탈출을 결정하라고 거듭 재촉했지만 세월호는 “구조대가 언제 오느냐” “탈출시키면 바로 구조가 되느냐”고만 되물었다. 진도VTS와 교신이 시작된 후 12분이 지났을 때 세월호는 이미 50도 이상 기운 것으로 나온다. 이 정도면 이미 절벽과 같은 기울기여서 사람이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힘든 상태다. 사고 직후부터 30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대형 참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게 아닌가. 선장 이준석 씨는 퇴선(탈출)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지만 교신 내용에선 그런 흔적이 없다. 승무원들이 워키토키를 통해 10여 차례 승객을 탈출시킬지 물었으나 답이 없었다고 한다. 통상 매뉴얼대로 ‘구명조끼를 입고 제자리에 앉아있으라’고 방송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배가 침몰할 무렵엔 해경만이 아니라 민간 어선 40여 척도 구조 활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내리기만 해도 살 수 있었다. 선장과 항해사 조타수 대부분은 사고 직후 가장 빨리 탈출할 수 있는 브리지에 올라가 있었다. 그들만 다니는 통로를 이용해 모두 탈출한 것도 모르고 순진한 학생들은 공포 속에서도 안내방송만 믿고 자리를 지키다 배와 함께 침몰했다. 이번 참사는 ‘모두의 잘못’이랄 수 없다. 이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때 선장이 배와 운명을 같이한 이후 이것이 ‘전통’이 됐지만 최근 2년 사이 이탈리아와 한국에서 선장이 승객들을 침몰선에 버려놓고 제일 먼저 달아난 일이 벌어졌다”며 “자랑스러운 국제적 전통을 깬 것이어서 해양 전문가들에게는 충격이다”라고 지적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 그 자체도 어처구니없지만 사고 이후 아무런 조치 없이 제 살기에만 급급했던 그들이 선장과 선원의 영혼을 지녔는지조차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