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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는 정치가 아니라 기술이다. 트로츠키가 없었다면 러시아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느 순간에 어느 방식으로 권력을 탈취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레닌이 혁명의 시기를 저울질하며 망설이는 동안 ‘쿠데타의 기술자’ 트로츠키는 핵심 시설을 장악하기 위해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그것이 너무 신속하고 정확해서 볼셰비키는 한동안 권력이 자기 수중에 들어온지도 몰랐다. 레닌마저도 24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이 책은 국가 전복의 기술, 즉 쿠데타의 기술에 관한 책이다. 공산주의 이념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은 이 책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혁명이든 뭐든 본질은 쿠데타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군주론’의 마키아벨리가 다시 살아나 러시아혁명을 분석한다는 느낌이 든다. 쿠데타(coup d'´etat)란 말의 원조는 프랑스다.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 최초의 근대적 쿠데타로 불린다. 나폴레옹 이래 쿠데타는 왕조 시대의 권력 찬탈과 달리 법의 준수와 법의 파기 사이에서 갈등한다. 프랑스혁명의 아들이기도 했던 나폴레옹도 공화국 법과 의회 절차를 준수하면서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환상에 빠졌다. 나폴레옹이 최종적 순간에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의회를 습격하긴 했지만 그 환상 때문에 애초의 권력 장악이라는 목표를 몇 차례나 물거품으로 만들 뻔했다. 나폴레옹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내란음모는 일종의 쿠데타 음모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유죄 여부는 법원이 판단할 것이지만 KT 혜화지사나 평택 물류기지 등을 특정해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쿠데타의 기술적 측면에 해당한다. 오늘날은 지하철에 앉아 ‘쿠데타의 기술’이라는 제목을 버젓이 가진 이 책을 읽어도 약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 아무도 잡아가지는 않지만 이 책이 1930년대 처음 나왔을 당시엔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금서 중의 금서가 됐다. 오늘날에도 트로츠키를 숭배하는 유럽의 극좌파는 자본주의 국가 전복을 꿈꾼다. 저자 쿠르치오 말라파르테(1898∼1957)는 마키아벨리의 먼 후예쯤 되는 이탈리아인이다. 그는 이 책으로 체포돼 3년간 섬 유배생활을 했다. 이탈리아 작가가 정치적 음모에 연루된 게 아니라 순전히 작품 때문에 처벌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저자 자신이 실제 음모가적 기질이 있어 이 책은 더 실감난다. 그는 일찍이 파시즘 운동을 추종했으나 무솔리니 정권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공산주의 운동에 경도됐지만 죽기 직전까지 공산당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책은 말라파르테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현대적 고전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볼프강 카프 등 보수파의 쿠데타 시도와 바우어 내각의 대응도 흥미로운 분석이다. 스페인 프랑코, 이탈리아 무솔리니, 독일 히틀러의 파시스트 쿠데타를 분석했다. 해박한 지식과 살아있는 경험이 결합돼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전남 진도 세월호 침몰 해역에서 잠수부들이 처음으로 바다에 잠겨 있는 배의 화물칸 문을 열고 안으로 진입했지만 아직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구조 작업을 통해 한 명이라도 살아온다면 그 한 명이 자기 자식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실종자 가족들은 사흘 밤낮을 현장에서 새웠다. 설령 자기 아이가 아니라도 꺼져가는 희망을 되살려준 데 대해 “살아있어서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오늘로 세월호 침몰 이후 나흘째로 접어든다. 만 사흘(72시간)을 넘기면 선체 내 에어포켓에 산소가 희박해져 사람이 호흡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고 한다. 잠수부들이 어제부터 선내에 산소를 주입하고 있지만 필요한 곳에 산소가 들어가는지는 알 수 없다. 침몰 이후 수면 밖으로 나와 있던 선수의 끝 부분이 물속으로 가라앉아 불안감을 더했다. 구조대는 공기 주머니를 부착해 선수를 인위적으로 띄우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자신하기는 이른 상황이다. 살아 있을지 모를 승객들이 추위와 어둠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다다를 시점이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다. 1분 1초가 급한 실종자 가족들은 직접 바닷속에 뛰어들어 구조에 나서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잠수부들도 잠도 못 자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잠수부가 실제 잠수해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한 번에 길어야 30분이 채 안 된다고 한다. 사고 해역은 조류가 빨라 잠수부들은 생명을 위협받는 악조건에서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초기에 사태를 근거 없이 낙관해 민군경(民軍警)을 막론하고 전국 최고의 잠수부들을 모으는 작업이 늦어졌다. 잠수부들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들을 하나로 엮어낼 수 있는 지휘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조 작업은 처음에는 해양경찰청장이 지휘하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해군참모총장이 지휘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바닷속 구조 작업은 정밀한 상호협력이 필수적인데도 지휘부가 허둥지둥대다 적절한 시기를 놓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고도 그렇지만 구조 작업 역시 후진국형이 아닌가. 실종자 가족들은 “제발 아이들을 살려내 달라”며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한 명의 생존자도 구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구조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침몰한 세월호 어딘가에는 어른들의 도움을 바라며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을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 상황에서는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다.}
이틀째 뼈 속을 파고드는 추운 바닷물에 잠겨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린 학생들이 느꼈을 죽음의 공포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아프다. 누군가는 기적처럼 살아오기를 전 국민이 간절히 기원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세월호 침몰 사고 해역을 방문하고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실종자 가족들을 만났다. 전날 정홍원 국무총리의 방문에 가족들이 터뜨렸던 울분은 ‘대통령이 내 자식 살려 달라’는 간절한 호소로 변했다. “정부가 이틀 동안 한 일이 뭐가 있느냐” “해상 구조하는 것을 못 봤다. 이게 국가냐” “우리가 속아도 너무 속았다”는 고함도 터져 나왔다. 박 대통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으로 책임질 사람은 엄벌토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구조 현황을 신속하게 알려주지 않으면 관계 장관이 모두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박 대통령이 강조하자 가족들은 비로소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이었다. 기존의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꿀 만큼 ‘국민 안전’을 국정 목표로 제시한 박 대통령이다. 그 정부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이기에 국민은 더 분노하는 것이다. 누가 저 어린 생명을 앗아갔는가. 정확한 사고 원인은 앞으로 조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이번 참사는 인재(人災)다. 3등 항해사 조타수가 굽은 협수로에서 뱃머리를 급격히 돌리는 바람에 사고가 일어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고 이후의 대응은 더 어처구니가 없다. 선장과 선원들과 선주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국민은 지금 정부를 한층 원망하고 있다. 이들을 감독하고 재난대처에 철저하라고 세금을 바치는 것이 아닌가. 사고가 난 16일 오전 9시 45분 강병규 안행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가동됐지만 숫자도 제대로 못 세느냐는 비난이 이어졌다. 참사가 발생한 지 만 하루가 지나도록 탑승객 수와 실종자 수가 계속 바뀌었다. 해운법은 여객선 승선자는 이름 연락처 등을 명시한 승선신고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정부가 제대로 관리 감독했다면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틀릴 수는 없다. 더구나 안행부는 대형사고 위험이 있는 유도선·여객선 안전관리 실태 점검 등 행락철 안전 집중관리대책을 공언하며 11일 보도자료까지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대책을 내놓은 지 5일 만에 여객선 침몰사고가 터졌다. 범정부 차원의 안전대책은 늘 그렇듯 탁상행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해양수산부는 사고 직후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설치하고도 오전 11시까지 “피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며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 초동단계부터 사고 대처에 적극적 선제적으로 나섰을 리 없다. 경기도교육청은 ‘학생 전원이 구조됐다’는 잘못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날려 학부모들을 안심시켰다가 뒤늦게 패닉에 빠지게 만들었다. 혼선이 계속되자 어제서야 전남 목포 서해지방해양경찰청에 정부사고대책본부를 꾸려 정 총리가 총괄에 나섰을 정도다. 교육부는 수학여행 안내지침에 수학여행 참여 인원을 ‘4학급 또는 150명 내외’로 정해 놓았다. 하지만 권고 수준에 불과해 지키는 학교가 드물다. 제주도나 해외 수학여행이 늘면서 학생들이 여객선이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빈도도 늘고 있으나 자동차에 대한 안전 매뉴얼만 있지 선박이나 비행기 등에 대한 지침은 없다. 그러고는 이번 사고가 나자 수학여행을 당분간 전면 보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도 전형적 뒷북 행정이다. 국제 여객선은 국제기구에서 한 달에 두세 번 비상훈련 점검을 하고 이 훈련에 응하지 않으면 아예 운항을 못하게 한다. 국내 여객선도 법에는 10일에 한 번 비상훈련을 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감독기관인 해수부와 해양경찰청이 제대로 감독을 안 하고, 선사(船社)들이 감독에 불응해도 처벌 규정이 없다. 세월호의 구명벌(천막처럼 퍼지는 구명보트)은 46개 가운데 1개만 펴졌고, 구명조끼도 270개로 승객 수보다 적은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배가 올해 2월 선박 정기 검사를 버젓이 통과했다.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켰는지, 검사 통과에 비리는 없었는지 의심스럽다. 1분 1초가 안타까운데 어제 기상 악화로 실종자 수색작업이 난항을 겪어 국민을 더욱 비통하게 만들고 있다. 추가 구조자가 이틀째 없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다. 1993년 292명을 희생시킨 서해훼리호 사고 이후 그런 후진국형 사고는 다시 없을 줄 알았다. 19세기 박제가는 ‘북학의’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배가 중국 배에 비해 얼마나 형편없는지 설명했다. 21세기 대한민국 조선업이 세계 1위에 올랐다지만 배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19세기에 머문 듯하다. 하드웨어는 발전했으나 이를 움직이는 사회 시스템과 국민의식은 발전하지 못했다. 그 대가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아이들이 치르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을 ‘안전 국치일(國恥日)’로 삼아, 이 부끄러운 나라를 미래세대에 물려주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기초선거 무공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새누리당은 공천을 하고 새정치연합은 하지 않는 불공정 게임이 될 경우 내부 반발이 얼마나 셀지도, 그것을 뚫고 나갈 역량을 스스로 갖추었는지도 가늠하지 못한 정치인이라면 성장 가능성이 의심스럽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을 면담하겠다고 청와대로 무작정 뚜벅뚜벅 찾아가는 꼴이라니 제1야당 대표로서의 정체성도 확립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돈키호테적 시도는 우리 정치판에서 약속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줬다. 안 대표가 말한 새 정치는 기초선거 무공천이 아니다. 그의 새 정치는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말한다. 단지 기초선거 무공천은 모든 정당이 약속한 것이니까 이것부터 실천하자는 의미였다.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이 쉬운 말귀를 어른들이 못 알아듣는 척 의도적인 왜곡이 난무했다. 옛 신문을 검색해 보시라. 기초선거 무공천은 공천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시도지사들이 맨 먼저 건의한 것이다. 그것을 거의 전 언론이 지지했고 모든 대선 후보가 받아들여 공약으로 내놓았다. 모두가 약속한 것이기에 가장 쉽게 실천될 줄 알았던 약속이 지방선거가 눈앞에 다가오자 도토리만 한 이익 앞에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혔다. 이것이 정치판의 파렴치한 모습이다. 새누리당의 최경환 원내대표는 기초선거 무공천은 ‘나쁜 약속’이라고 했다. 그의 보스인 박근혜 대통령 후보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지지했던 기초선거 무공천이 이제 와서 왜 나빠졌는지 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가 바보였던가. 백보 양보해 설혹 그것이 나쁜 약속이더라도 약속할 때와 이행할 때 사이에 중요한 사정(事情) 변경이 없는 한 약속은 지키는 것이 선이다. 그것이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약속의 의미이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약속의 의미다. 약속을 깬다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과하고 입 닥치는 것이다. 기초선거 무공천을 둘러싼 상황은 본래 새누리당이 먼저 약속을 저버리고 민주당도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것이었다. 때로는 새누리당이 먼저 약속을 깨고 때로는 민주당이 먼저 약속을 깨는 차이는 있지만 돌아가는 게 늘 그런 식이었다. 이런 판에 편승하면 새 정치와 모순 관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안 대표가 끼어들어 원칙대로 하자고 주장했을 때 언론조차도 익숙해져서 새삼 의제로 삼지도 않던 헌 정치의 모습이 새롭게 부각됐을 뿐이다. 독일 사민당(SPD)은 공약을 지키기 위해 주(州) 선거에 이기고도 정권을 포기한 적이 있다. 내가 유럽 특파원 때 있었던 일이라 잘 기억한다. 2008년 안드레아 입실란티 헤센 주 SPD 위원장은 좌파당과의 연정은 없다고 공약하고 주 선거에서 이겼다. 그러나 녹색당과만의 연정으로는 정부를 구성할 수 없자 좌파당과의 연정을 모색했다. 이에 다그마어 메츠거 등 헤센 주 SPD 의원 4명은 공약을 저버리는 일이라며 끝까지 좌파당과의 연정에 반대했다. 결국 SPD는 선거에 이겨 놓고도 의석수가 모자라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결국 재선거가 치러졌고 기민당(CDU)이 승리했다. 정당의 존재 목적은 집권이다. 메츠거 의원 등은 SPD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들을 살려준 것은 독일 국민이었다. 독일 국민은 입실란티 위원장이 좌파당과의 연정을 모색하자 SPD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추락한 신뢰도 때문에 입실란티 위원장을 지지한 강경파 쿠르트 베크 당수가 결국 물러났다. SPD는 다시 온건파 프란츠 뮌터페링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것이 지금 지그마어 가브리엘 체제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정치인이 약속을 지키게 만드는 것은 어디서나 깨어 있는 국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울산의 박모 씨(42)와 경북 칠곡의 임모 씨(36)에게 1심에서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울산에선 여덟 살배기 여자아이가 계모에게 갈비뼈가 14개나 부러질 만큼 맞아서 죽고, 칠곡에선 열두 살짜리 언니가 여덟 살인 동생을 죽였다는 죄를 계모 대신 뒤집어쓸 뻔했던 사건이다. 엄마, 엄마 부르며 울다가 죽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자식 가진 사람들은 가슴이 미어진다. 이런 국민의 정서에 비하면 두 계모에게 내려진 처벌은 턱없이 가볍다. 법조문과 양형기준에만 사로잡힌 판검사들이 두 계모의 극악한 죄질을 선고형량에 충분히 반영했는지 의문이다. 울산지검은 아이가 당한 폭행이 심하고, 폭행 직후 사망한 점 등을 고려해 계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이에 대해 울산지법이 “미필적으로나마 살인의 고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는 한다”면서도 살인죄 아닌 상해치사죄를 적용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아동학대는 일반 상해나 상해치사보다 엄하게 처벌할 필요성이 크고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된 점 등을 고려했다”는 판결 이유와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칠곡 계모에 대해 대구지검은 여덟 살인 A 양이 계모의 폭행 이틀 뒤 복막염으로 숨졌기 때문에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초 검찰은 “싸우다 때렸다”는 A 양 언니의 거짓 자백만 믿고 언니를 상해치사의 주범으로 기소했다. 계모에 대해서는 A 양을 ‘한 차례’ 때린 혐의로만 기소했다가 최근 법정 비공개 증인신문에서 수차례 발로 밟아 살해한 사실을 알아냈으니 부실 수사의 책임을 면키 어렵다. 선진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아동학대 사건의 경우, 성인이 살인 의도를 부인해도 살인죄가 인정되고, 대부분 무기징역형이 선고된다고 울산지검은 밝혔다. 방어 능력 없는 어린아이가 성인에게 폭행을 당할 때는 ‘죽을 수도 있다’고 예견할 수 있는데도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는 것은 국민의 법정서와 어긋난다. 법원은 아동학대 살인의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최근 ‘황제 노역’ 사건도 법조인들이 육법전서만 들여다보고 일당 5억 원이라는, 국민 법감정과 동떨어진 판결을 내려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특권 의식 속에 국민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판검사들은 구름 속에서 내려와야 한다. 아동학대가 더이상 집안일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것이 시급하듯, 법조계도 국민의 법감정을 제대로 알고 공감할 필요가 있다.}
작가 황석영은 8일 영국 런던 도서전에서 ‘문학과 역사’란 주제로 강연을 하다 이런 말을 했다. “난 사나운 마누라와 같이 사는 것처럼 늘 역사의 중압감에 눌려 살았고 그걸 작품으로 써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작가의 역사적 책임을 사나운 마누라와 같이 살기에 비유하는 것은 흔치 않다. 황석영이 실제 사나운 마누라를 겪어봐서 저런 말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황석영의 첫 번째 부인은 소설 ‘깃발’을 쓴 작가 홍희담이다. 이혼한 후에도 동지처럼 지낸 것을 보면 사나운 마누라 계열은 아닌 것 같다. 지금 같이 사는 여성은 황석영이 드라마 대본 ‘장길산’을 집필할 때 보조로 일하던 20년 연하의 방송작가다. 황석영은 이 방송작가 때문에 재미무용가 출신의 두 번째 부인과 이혼소송까지 갔다. 그의 사나운 마누라가 정확히 누구였든 사나운 마누라와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역사의 중압감에 비교하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처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달리 강의료도 받지 않고 가르쳤다. 돈도 벌어오지 않는 늙은 소크라테스에게 30년 이상 연하의 크산티페가 물세례를 퍼부은 걸 이해할 만하다. 누군가 소크라테스에게 아내에 대해 물었더니 “말을 타려면 거친 말을 타고 배우는 걸세. 그 여자를 견딜 수 있으면 천하에 견뎌내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사나운 마누라는 영어로 ‘shrewish wife’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말괄량이 길들이기(Taming of the Shrew)’는 ‘성질 사나운 여자 길들이기’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셰익스피어는 주인공 캐서린을 ‘크산티페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은 여자’라고 표현한다. 황석영의 사나운 마누라는 한반도의 반쪽인 북한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북쪽의 사나운 마누라와는 현실의 마누라와 달리 이혼할 수도 없다. 길들이기도 쉽지 않다. 분단국에서 사는 작가의 복잡한 심정을 토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경북 칠곡에서 계모 임모 씨(35)가 여덟 살 동생을 발로 차 죽게 한 것을 보고도 “내가 동생 인형을 뺏으려다 죽였다”고 거짓 자백했던 12세 여자 아이의 사연에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있다. 이 여자 아이는 “계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동생처럼 죽을지 몰라 무서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계모는 여자 아이의 동생이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방에 가뒀다. 갇힌 동생이 방문을 긁자 계모는 화가 나 동생을 발로 짓밟았다. 폭행을 당한 동생이 배가 아파 밥을 먹지 못하자 계모는 다시 발로 차고 밤새도록 벌을 세웠다. 동생은 결국 내장 파열로 사망했다. 아이는 변호인의 도움으로 계모와 떨어져 살게 되자 비로소 판사에게 “(계모를) 사형시켜 주세요”라는 편지를 썼다. 아이가 느꼈던 공포와 울분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학대는 학교 담임교사와 이웃 주민들까지 눈치 챌 정도로 심각했다. 아동보호기관의 상담사들이 신고를 받고 아이들을 직접 만났다. 그러나 아이들이 계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학대를 부인하는 말만 듣고 그냥 돌아갔다. 동생의 담임교사는 “신고까지 했는데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교사로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언니는 계모로부터 당한 학대를 경찰에 직접 신고한 적도 있었지만 보호를 받지 못했다. 아동보호기관과 경찰이 적절하게 대처했다면 막을 수도 있었던 죽음이어서 안타깝다. 지난해 울산에서는 계모 박모 씨(40)가 8세 여자 아이의 갈비뼈 16개를 부러뜨려 숨지게 한 ‘서현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아이가 포항에서 유치원에 다닐 때 유치원 교사가 아동보호기관에 신고했지만 이 기관은 엄마가 계모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반성문 한 장 받는 것으로 끝냈다. 아이가 울산으로 이사 간 후에는 그쪽 보호기관에 알려주지도 않았다. 울산 계모 사건을 계기로 일명 ‘서현이법’으로 불리는 ‘아동학대범죄 등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돼 9월 시행된다. 앞으로 아동학대 치사는 최대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법원의 새로운 아동학대 치사죄 양형기준은 최고 징역 9년밖에 되지 않는다. 아동은 자기방어 능력이 없다.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을 구해야 할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동 학대 사망은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법원의 양형기준을 일반 살인죄 수준으로 높일 필요가 있다.}
요즘은 속기학원도 찾기 힘들지만 우연히 ‘속기학원’ 간판을 볼 때마다 녹음을 할 수 있는데 왜 아직도 속기를 할까 궁금증이 든다. 속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귀를 스쳐 흘러가 버리는 음성보다는 종이에 고정된 문자가 활용도가 높다. 녹음을 해봐야 녹취록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 녹취록을 만드는 데 다시 속기사가 개입하므로 처음부터 속기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낫다. 디지털 시대에도 속기는 활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재판에는 공판조서란 게 있어서 재판 과정을 기록한다. 조서는 모든 진술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치 않다고 여겨지는 것은 빼고 요약하는 방식으로 작성된다. 그러다 보니 당사자가 말한 것과 다르게 기재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때 당사자는 정정을 요청할 수 있는데 그 근거가 모든 진술을 그대로 기록하는 속기록이다. 물론 속기사가 작성하는 속기록은 어디까지나 보조이고 법원사무관이 작성하는 조서가 중심이다. ▷속기의 역사는 녹음의 역사보다 훨씬 길다. 하지만 우리나라 형사소송에서는 그렇지 않다. 1995년부터 법정에 본격적으로 속기와 녹음이 도입됐다. 다만 최근까지는 녹음이 기술적으로 번잡해 속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정확하기로는 속기보다 녹음이다. 속기사도 사람인지라 실수로 빠뜨릴 수 있다. 속기사가 자기 검열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빼는 것도 있다. 가령 법관의 막말 같은 것이다. ▷꼭 법관의 막말을 가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과거보다 훨씬 예민해진 사건 당사자의 시비에 대비하는 데 녹음만 한 것은 없다. 대법원은 내년부터 전국 법원의 모든 재판과정을 녹음하도록 하는 법정녹음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지금은 법관의 판단에 의하거나 사건 당사자의 요청이 있을 때만 한다. 녹음과 속기는 선택적이어서 녹음을 하면 속기할 필요가 없다. 대법원은 아예 녹음된 자료로 공판조서를 대체해 조서 작성에 필요한 인력을 줄일 계획까지 갖고 있다. 문자 중심의 법정이 음성 중심의 법원으로 가는 가속페달을 밟았다는 느낌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헌법재판소의 야간 시위 금지 한정위헌 결정을 보면서 헌재의 월권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해가 진 후에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는 보다 유연하게 고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헌재는 이 법 조항을 무효화한 뒤 나머지는 국회에 맡기는 통상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고 스스로 ‘밤 12시 이후에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로 바꿔 적용하도록 했다. 보통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은 법조문이 불명확해 자의적 해석의 소지가 있고 그런 해석이 기본권을 침해할 때 내려진다. 그러나 야간 시위 금지 한정위헌 결정은 말만 한정위헌 결정이지 기존 한정위헌 결정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해가 진 후에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의 뜻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무슨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밤 12시로 바꾼 것은 법 조항의 해석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법 조항 자체를 변경한 것이나 다름없다. 즉 국민은 앞으로 ‘해가 진 후에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밤 12시 이후에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새겨들어야 한다. 헌재의 의도는 만약 일몰이 오후 6시이고 일출이 오전 6시라고 한다면 오후 6시부터 밤 12시까지 시위를 불허하는 것은 위헌이고 밤 12시부터 오전 6시까지 시위를 불허하는 것은 합헌이라는 것이다. 즉 집시법 10조는 위헌인 부분과 합헌인 부분이 모두 포함돼 있고 헌재는 위헌인 부분에 한정해 위헌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한정위헌 결정이 왜 문제인가 하면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야간 시위의 전면 금지가 위헌이어서 일부 허용하더라도 그 시간을 몇 시로 정해 허용할지는 국회의 권한이다. 국회는 그 시간을 오후 10시나 11시로, 혹은 오전 1시로 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헌재는 밤 12시 이전으로는 정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렸다. 밤 12시라는 시간이 자의적일 뿐 아니라 시간을 정해 야간 시위를 제한하는 방식 자체가 월권이다. 국회는 ‘해가 진 후에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를 ‘해가 진 후에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 다만 부득이한 경우 허용할 수 있다’는 식으로 단서를 추가해 시위를 허용할 수도 있다. 헌재가 국회에 준 재량이라고는 고작 밤 12시 이후 몇 시로 할지만 정하라는 것 정도다. 헌재는 단순한 위헌 결정을 해서 집시법 10조를 무효화하면 법 개정 전까지 야간 시위가 전면 허용되는 사태를 우려했기 때문에 한정위헌 결정을 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폭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시위는 현행법으로도 사전 차단할 수 있으므로 밤 12시까지는 시위를 허용해도 염려할 게 없다는 게 헌재의 논리다. 똑같이 시야가 제한되는 야간인데 밤 12시까지는 되고 그 이후는 안 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3명의 헌재 재판관들이 소수의견을 통해 주장했듯이 위헌 결정을 한다면 그냥 단순한 위헌 결정을 했어야 한다. 이번 결정이 특별히 문제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한정위헌 결정 자체가 법에 근거가 없는 꼼수다. 대법원은 한정위헌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본래 위헌법률심판은 법 조항 자체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지 법 조항의 해석에 대한 판단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한정위헌 결정은 법조문의 최종 해석권을 가진 대법원과 충돌한다. 꼼수를 내버려두니 헌재가 이제는 사실상 법조문을 변경해 국회 입법권까지 침해하고 있다. 헌재는 헌법 정신의 큰 틀을 제시하는 곳이다. 좁쌀영감처럼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는 것은 헌재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고작 재판관 9명에 불과한 헌재가 입법의 세부적인 것까지 결정해 지도하려 하지 말고 대의기관인 국회에 맡겨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시교육청에서 근무하는 장학관 친구를 한 달 전쯤 만났다. 올해부터 방과후 돌봄 교육을 초등 1, 2학년 희망자 모두에게 확대해야 하는데 예산이 모자라 다른 예산을 돌려 배정해야 할 처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각 교육청은 지난해부터 취학 전 아동 누리과정을 5세에서 3, 4세까지로 확대하느라 이미 많은 돈을 쓰고 있다. 이렇다 보니 교육청은 돈이 없어 학교시설을 제때 개선하지 못하고 비정규직 강사도 많이 해고했다. 올해는 명예퇴직을 원하는 교사들의 퇴직금을 줄 형편이 못돼 신임교사 발령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 누리과정과 돌봄 교육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으로 중앙정부가 도입한 것이다. 지자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똑같이 실시하는 것이다. 무상급식만 해도 지자체별로 결정한 것이고 예산도 지자체가 스스로 마련한다. 그러나 누리과정과 돌봄 교육은 중앙정부가 결정한 것이고 예산을 지자체에 지원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친구의 불만은 정부가 충분한 예산 지원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 공약을 실천한다는 생색만 내고 있다는 것이다. 뒷감당은 안중에도 없는 여야의 무상서비스 경쟁은 4년 전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 등 야권의 무상급식 공약에서 시작됐다. 이해찬 전 총리의 말처럼 이것은 보편적 복지를 팔기 위한 미끼 상품이었다. 그 미끼를 물어 누리과정 같은 전국적 서비스로 확대한 것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다. 그러나 무상급식이라는 첫 번째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서 누리과정 등 그 다음 단추가 모두 잘못 끼워지게 됐다. 무상급식과 일률적 누리과정 지원은 글로벌 관행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복지에서는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를 보자. 난 2009년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내면서 급식비로 1년에 약 500유로를 냈다. 내 소득은 중간 정도의 등급을 받았다. 최고 등급을 받으면 약 750유로를 내야 한다. 물론 최저 등급을 받으면 거의 내지 않는다. 프랑스의 급식비 구조는 빈곤층에는 매월 아동수당에다 무료에 가까운 급식을 제공하고, 중산층에는 매월 지급한 아동수당을 급식비로 대부분 환수해가고, 부유층에는 아동수당도 지급하지 않고 급식비도 모두 내게 하는 것이다. 교사는 급식비 청구서를 봉투에 담아 아이를 통해 학부모에게 전해주고, 학부모는 봉투에 수표를 넣어 아이를 통해 교사에게 보낸다. 차등적인 급식비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대부분의 프랑스 아이들은 상처를 받고 살아간다는 터무니없는 얘기가 된다. 이런 구조는 학교 급식만이 아니라 유치원과 어린이집 이용요금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나라는 초중학교에서 누구에게도 급식비를 받지 않는다. 누리과정 지원비는 올해 1인당 22만 원으로 누구에게나 똑같이 준다. 현실적으로는 이 돈으로 다 감당이 안 돼서 2016년까지 30만 원으로 올리도록 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정의에 따르면 부유층과 중산층에는 안 받던 급식비를 받고 빈곤층은 당장이라도 돈을 더 낼 필요 없이 누리과정을 다니게 하는 것이 옳다. 무상으로 돌봄 교육을 받던 초등 3학년 이상 차상위계층 학생들이 앞으로 돈을 내야 한다는 보도를 얼마 전에 봤다. 돌봄 교육을 초등 1, 2학년 희망자 모두에게로 확대하면서 예산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무상급식 도입 이후 첫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용감하고 책임 있는 지방선거 후보라면 잘못된 보편적 복지의 구조를 새로 설계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가 쳐부술 원수”라고 말했다. 어제는 “대통령이 왜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하느냐고 하는데 조금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불타는 애국심’과 ‘사생결단’을 강조했다. 관료사회의 지지부진한 규제 완화에 답답해하는 대통령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쳐부술 원수’라는 표현은 ‘미제(美帝)는 우리의 원쑤’라는 북한의 섬뜩한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인수위 시절 ‘손톱 밑 가시’에 규제를 비유해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쳐부술 원수’는 대통령에게 어울리는 격조 있는 표현은 아니다. 박 대통령의 말에서 갑자기 이질감을 느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5일 국무조정실 업무보고에서 “한 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어져 나갈 때까지 진도개 정신으로 업무를 추진하라”고 강조했다. 끝장을 볼 각오로 일하라는 뜻이겠지만 살벌한 표현이다. 재벌 총수가 사장단 회의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나 할까. 나랏일은 사기업의 일과 달리 공공성이 중요하다. 일을 하다가도 공공성에 어긋나면 돌아설 수 있어야 한다. 국가정보원의 증거 조작 의혹 사건도 진도개 정신으로만 달리다 벌어진 일일 수 있다. 뜻은 단호해도 여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하면 된다’는 휘호를 즐겨 썼다. 황무지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시절, 한국인을 하나로 모아준 강한 정신의 표현이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선거 유세 때 “당신 할 수 있어(You can do it)”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하면 된다’와 ‘당신 할 수 있어’라는 말은 같은 뜻이지만 후자가 현대인의 정서에 좀더 편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언어의 묘미다. 박 대통령은 절제되고도 적확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질을 보여줬다. 일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통일은 대박’이란 말은 청소년도 이해할 만큼 의미를 잘 전달한 표현이다. 대통령의 비유는 국민 사이에 회자되는 법이다. 박 대통령이 “규제는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몸이 죽는 암 덩어리”라고 말하자 민주당에서 곧바로 패러디해 “국정원이 나라의 암 덩어리”라고 받아쳤을 정도다. 대통령의 말에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무릎을 치게 할 정도의 통찰력이나 감각을 보여준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의 간첩 혐의 사건과 관련해 국가정보원의 협조자인 김모 씨가 유서를 쓰고 자살을 기도했다. 김 씨는 중국 싼허(三合)변방검사참(세관) 발행 문서를 위조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탈북자인 그는 중국 국적을 갖고 있는 점을 활용해 국정원으로부터 매월 월급을 받고 사안별로 사례비를 따로 받는 협조자로 활동했다. 국정원 측은 “위조인 줄 알았으면 김 씨의 신원을 밝혀 검찰 조사에 협조하도록 했겠느냐”며 위조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씨가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는 “가짜 서류 제작비 1000만 원을 국정원에서 받으라”는 내용이 있다. 정보기관은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해야 할 경우 외부인을 통해 해결하는 어두운 유혹에 빠지기 쉽다. 김 씨가 가져오는 서류가 가짜인 줄 알면서도 국정원에서 모른 체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씨가 위조한 것은 유 씨의 출입경 기록 ‘出(출국)-入(입국)-入-入’이 작업자의 착오일 가능성이 크다는 싼허변방검사참의 설명 자료였다. 이 기록은 유 씨의 변론을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법원에 제출했다. 출입경 기록이라면 출입이 번갈아 나와야 정상이다. 국정원이 제출한 유 씨의 출입경 기록에는 ‘出-入-出-入’으로 돼 있다. 어느 쪽의 출입경 기록이 맞는지와는 별도로, 김 씨의 싼허변방검사참 설명 자료는 위조로 밝혀졌다. 이번 사건은 한중 간 사법 공조 체제가 부실한 데도 원인이 있다. 중국 정부가 한국 사법기관의 요청에 출입경 기록만 확인해줘도 국정원에서 무리한 증거 수집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서 위조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다. 위조된 문서가 사법절차를 훼손하는 것을 국가기관이 방임했다면 국기문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국정원은 증거 조작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검찰은 국정원으로부터 송치 받은 사건을 검토해 법률 적용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고 기소해야 한다. 그런데도 검찰은 국정원이 넘겨주는 자료를 받아서 법원에 전달하는 우편배달부 역할을 하고 말았다. 검찰은 담당 검사의 직무 태만을 포함해 이번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유 씨는 남재준 국정원장 취임 직전에 간첩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위조문서는 유 씨가 지난해 8월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에 ‘남재준 국정원’이 항소심에 임하면서 제출된 것이다. 남 원장이 민주화 이후 첫 내란음모죄로 인정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을 적시에 처리한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국정원 개혁에 소극적이었다가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닌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남 원장이 증거 조작을 알고도 묵인했다면 물러나야 마땅하다. 몰랐다 해도 이에 상응하는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전 정권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이번 사건은 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야당과 협력해 국회의 국정원 개혁 논의에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국정원은 ‘셀프 개혁’이 제대로 안 된 것으로 드러난 이상 더 많은 민주적 통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안철수 의원을 얼마 전 어느 간담회 형식의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시도지사 후보 영입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가시적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면전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정치인으로서는 아직도 애송이처럼 보인다는 느낌을 밝혔다. 그러면서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김영삼의 3당 합당이나 김대중의 DJP연합 같은 신의 한 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었다. 그가 무슨 귀에 쏙 들어오는 답을 하지는 않았다. 2일 일요일 아침 전격적으로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함께 신당 창당을 발표할 때의 안 의원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안철수였다. 원칙대로만 하는, 그래서 수가 뻔히 드러나 보이는 모범생 정치의 안철수가 아니었다. 영어에 improbable(그럴 것 같지 않은)이란 단어가 있다. 그때 내 느낌이 꼭 그 단어와 같았다. 물론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상 밖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안철수는 그의 ‘정당주의적’ 멘토들이 충고한 대로 독자 신당을 준비했고 지방선거에 내보낼 거물급 인사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는 게 얼마 전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한밤 기자회견 해프닝에서 드러났다. 그 시점에서 안철수는 진짜 현실의 벽과 맞닥뜨렸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기업을 해본 사람이므로 전해 들은 현실과 직접 겪는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알 것이다. 안철수가 공들인 인물들이 무소속으로 나올지언정 민주당에도 새정치연합에도 속할 수 없다고 밝혔을 때 그는 지금 한국의 정치 현실은 독자적인 제3세력을 허용할 여지가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안철수 주변에 모인 멘토들은 말만 그럴듯했지 아무런 정치력도, 정치적 도전의지도 보이지 못했다.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불가능한 원칙을 추구하지 않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타개책을 모색했다는 것, 그것도 논란을 무릅쓴 타개책을 모색했다는 것이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정치인 안철수의 바뀐 모습이다. 제3지대에서의 신당 창당, 5 대 5 지분에 의한 신당 창당이 말로만 동등한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발표 하루 뒤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웃음꽃이 피었으나 새정치연합에서는 낙담 혹은 반발의 분위기가 전해졌다. 겨우 2석의 안철수 세력이 126석의 민주당 세력을 대등하게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새 정치의 포기, 헌 정치로 투항이라는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신당 창당 합의가 신의 한 수인지, 또 다른 애송이의 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안철수의 운명이 달린 한 수인 것은 틀림없다. 여기서 실패하면 안철수는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정치에 뛰어들면서 돌아갈 다리를 불살랐다고 말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승부를 제대로 건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승부를 걸어야 할 때 승부를 건 것만은 틀림없다. 리스크는 물론 독자 신당 추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그래서 그것을 벤처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벤처는 투기적인 것이다. 벤처가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안철수 측 송호창 의원의 표현대로 그것은 맨손으로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호랑이굴 밖에서 잡히지 않는 호랑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잡는다는 것도 진부하지만 사실이다. 그가 호랑이굴에 들어가 정치 개혁을 가로막는 호랑이를 잡아 내동댕이칠지, 아니면 지방선거 승리를 헌납해 호랑이 배나 불려주는 신세가 될지는 아직은 좀 더 지켜볼 여지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은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동조하는 러시아 수병들의 폭동을 다루고 있다. 당시 전함 포템킨은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1991년 옛 소련의 붕괴 이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구분하는 게 큰 의미가 없었다. 나는 파리 특파원 시절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모두 알고 지낸 적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러시아어로 의사를 소통했다. 우크라이나를 소(小)러시아, 벨라루스를 백(白)러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러시아에서 독립했다. 이후 두 나라에서 러시아보다는 서유럽에 접근하려는 흐름이 생겼다. 그 흐름은 우크라이나 쪽이 벨라루스보다 훨씬 더 강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사람이 65%인 데 반해 벨라루스에서는 벨라루스어를 쓰는 사람이 11.9%에 불과하다. 그 결과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계 지지를 등에 업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축출이라는 사태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과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것이 러시아가 예로부터 슬라브 문제에 개입하고 동유럽 쪽으로 영토를 확장해온 구실이다. 러시아는 지금 자국과 가장 가까웠던 우크라이나에서조차 거부당하고 있다. 러시아가 문학과 예술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정치도덕적 가치는 불신을 받았다. 헨리 키신저는 그의 책 ‘외교’에서 “미국의 가치가 미국을 비난하는 나라에서조차 받아들여진 것과 차이가 있다”고 썼다.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땅이긴 하지만 러시아계가 58.5%로 절반을 넘는다. 크림반도 남단에는 러시아 흑해 함대 기지인 세바스토폴 항도 있다.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우크라이나 어느 다른 지방보다 강하다. 이곳에서 러시아계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자치공화국 의회 건물을 점거해 ‘크림은 러시아’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러시아 국기도 게양했다. 러시아가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투입해 21세기판 크림전쟁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우려가 나온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김연아 선수가 소치 겨울올림픽 여자 피겨스케이팅 종목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국민 모두가 아쉬웠겠지만 누구보다 아쉬운 사람은 작별 선물로 국민에게 금메달을 선사하지 못한 김연아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상식 무대에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경쟁 선수에게 축하해주고 관중의 환호에 답했다. 아무나 보이기 힘든 모습이기에 더 아름다웠던 마무리였다. 국내외에서 판정 논란이 일고 있지만 김연아는 담담하다. 그는 “실수는 없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할 건 다 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김연아의 진짜 상대는 금메달을 딴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아니라 4년 전 밴쿠버 올림픽에서 사상 최고 점수를 기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건 자신이었다. 그가 이번에 누군가에게 졌다면 바로 4년 전 자신에게 진 것이다. 한동안 아이스링크를 떠났었고 부상에 시달렸다. 나이도 있었다. 하지만 김연아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것이 올림픽 정신이다. “한 달 중 컨디션이 좋은 날이 하루 있을까 말까 하다.”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가 일본 니혼TV에 털어놓은 김연아의 비밀 고백이다. 김연아는 이미 2010년 여자 피겨에서 한국인은 불가능하다는 금메달을 따 세계 피겨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김연아는 경기 직후 “밴쿠버 때는 금메달이 간절했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는 동기 부여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김연아를 다시 불러낸 것은 국민이었다. 그는 2011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단의 일원으로 나서 유치에 성공했고 2013년 소치 올림픽 출전권을 늘리기 위해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서 1등을 차지해 3장의 티켓을 따냈다. 그 덕분에 김해진 박소연 선수는 처음 올림픽에 도전해 2018년 평창 올림픽에 대비한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국민의 소리 없는 부름에 응해 준 김연아에게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 피겨 여자 싱글 경기는 겨울올림픽의 꽃이다. 자기 나라 선수가 출전하지 않아도 세계인이 TV로 지켜본다. 김연아는 우아하고 당당한 여왕다운 태도로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프랑스에서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여성을 ‘마리안’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마리안을 찾는다면 바로 김연아일 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이번에도 끝까지 분투한 당신. 앞으로도 귀감으로 남아 미래 세대가 당대의 자랑스러운 여성을 ‘우리 시대의 김연아’라고 부를 수 있기 바란다.}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가 열린 해에 나는 특파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마침 독일과 폴란드의 경기가 열려 편안한 저녁시간대에 TV로 지켜볼 수 있었다. 폴란드 태생의 독일 국가대표 선수 루카스 포돌스키가 폴란드를 상대로 2골을 넣어 독일의 2 대 0 승리를 이끌었다. 포돌스키는 골 세리머니도 생략하고 좋아하는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포돌스키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상상해봤다. 지난 주말 안현수 선수가 소치 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개인 1000m 경기에서 1위를 해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가족과 함께 지켜봤다. 아내와 애들도 그랬지만 나 역시 기분이 착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선수 때문에 우리 대표팀 선수가 1위를 놓친 것도, 메달권에서 벗어난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 선수도 잘하고 안 선수도 잘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안 선수의 역량이 러시아에서까지 인정받은 데 자부심을 느꼈을지 모른다. 사실 양궁이나 쇼트트랙은 한국인 코치가 외국에 많이 나가 있고 그들이 가르친 팀이 세계 대회에서 우리나라와 경쟁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바짝 쫓아올 때는 조바심도 나지만 넓게 봐서는 우리끼리의 경쟁 같은 느낌이 들어 흐뭇하기도 하다. 내가 착잡했던 것은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잘하는 사람을 쫓아낸 장면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어느 나라보다 많은 반칙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선수의 경기까지 망치는 우리 팀의 모습이 늘 깔끔하게 경기하면서도 이기는 안 선수의 모습과 대조되는 데다 바로 그런 안 선수가 우리 대표팀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안 선수가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빙판을 돌고 시상식에서 러시아 국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봤다. 나는 결코 ‘쿨’하게 축하해줄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포돌스키만 해도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2세 때 독일로 이주했다. 게다가 그의 친조부모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국적을 가졌다. 그들이 살았던 곳은 2차대전 전만 해도 독일 땅이었다. 포돌스키는 사실상 독일인이나 다름없었고 두 개의 국적에서 하나를 선택할 기로에서 독일을 조국으로 택한 것이다. 그런 그도 어디선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는 독일과 폴란드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다고 말했다. 하물며 안 선수야 어떻겠는가. 안 선수는 러시아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러시아어도 잘하지 못한다. 아무리 국경을 초월해 살아가는 세상이라지만 러시아는 그에게 진정한 조국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안 선수는 정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빙판에 키스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거기서 국가 대 국가라는 맥락을 완전히 떠난 어떤 순간을 목격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승리다. 조국은 그저 조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조국인가. 조국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꿈을 실현해 줄 때다. 한국 국적을 갖는다는 것이 오히려 안 선수의 꿈을 꺾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 즉 조국을 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가 흘린 눈물은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여자 친구에게, 부모에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빅토르 안은 우리에게 개인이 국가를 이기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였다. 지금은 낯선 풍경이지만 체육단체의 관료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군 면제나 상금 같은 경기 외 전리품이 남아있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파벌싸움이 벌어지고 승부조작이 일어나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빅토르 안을 보게 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윤지충은 어미가 죽었는데도 효건(孝巾)만 쓰고 상복(喪服)도 입지 않고 조문(弔問)도 받지 않았다. 신주(神主)는 불태우고 제사는 폐했다.” 조선 사회는 정조 15년(1791년) 전라도 진산군(지금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한 가난한 양반 집에서 일어난 이 ‘해괴한’ 사건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누가 봐도 명백한 천주교와 유교의 정면충돌이었다. 윤지충은 참수형을 당해 한국 천주교회사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그는 체포된 후 관아의 신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이는 집에 남을 수 없고 또 남아 있어야 할 영혼도 없습니다. 위패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저 나무토막에 불과합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들을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여겨 받들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자생 천주교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놀라울 뿐이다. ▷제사 금지는 중국에서 비롯됐다. 처음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관용적 선교 방침에 따라 제사를 금하지 않았다. 나중에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제사를 우상 숭배로 보기 시작했다. 오랜 논란 끝에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최종적으로 금령을 내렸다. 1790년 베이징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문의에 그 결정을 전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못 돼 제사 금지가 불러일으킨 기나긴 박해의 첫 희생자가 나왔다. ▷1874년 첫 한국천주교회사를 쓴 프랑스 신부 샤를 달레는 제사 금지에 대해 “조선 국민 모든 계층의 눈을 찌른 것”이라고 탄식했다. 교황청은 1939년에 가서야 제사를 허용했다. 지금까지의 시복시성은 모두 기해박해(1839년)와 그 이후의 순교자가 대상이었다. 한국 천주교 역사 연구의 대가였던 고 최석우 신부는 생전에 제사 금지의 희생자였던 신유박해(1801년)와 그 이전 순교자들을 현양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번 교황청의 시복 결정에 신유박해와 그 이전 순교자들이 대거 포함된 것은 천주교의 경사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영국의 위작(僞作) 화가 톰 키팅은 미술학교를 나와 그림 그리는 기술이 뛰어났지만 독창성은 없었다. 그는 렘브란트 고야 등 대화가들의 작품 2000여 점을 위작하다 영국 더타임스 미술전문기자의 끈질긴 추적에 꼬리가 잡히자 “내가 만든 위작으로 돈을 번 것은 화상들일 뿐, 내가 직접 위작을 판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위작임이 드러나면 가격이 폭락하는 게 보통인데 그의 위작은 오히려 수집가를 자극했다. 그가 사망하자 가격은 폭등했다. ▷청력 상실에도 클래식을 작곡해 현대의 베토벤으로 불린 한 일본 작곡가의 사기 행각이 드러났다. 사무라고치 마모루라는 이름의 이 작곡가는 곡의 구성과 이미지만 제안하고 나머지는 한 대학의 작곡전공 강사 니가키 다카시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 대리 작곡가의 항변이 키팅과 비슷하다. “18년 전 사무라고치로부터 오케스라트용 음악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곡을 제공했을 뿐이고, 사무라고치가 100% 자신의 작품이라고 세간에 발표했다.” ▷사무라고치가 18년 전 그에게 작곡을 부탁한 ‘교향곡 제1번 히로시마’는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누군가는 거기에 ‘이 음악이 좋다. 누가 썼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라는 댓글을 달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클리셰(상투적인 곡)의 연속일 뿐, 교향곡이라고 할 수 없다”고 달았다. 내 감상으로 말하자면 음…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다만 사무라고치가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지난해 요코하마에서 초연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그 곡을 치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궁금하다. ▷예술 분야의 사기는 묘한 데가 있다. 미국 영화감독 오슨 웰스는 헝가리 출신의 위작 화가 엘미르 드 호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진실과 거짓’을 만들었다. 거기 이런 대화가 나온다. 드 호리가 “모딜리아니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남긴 작품이 적습니다. 내가 몇 점 보탠다고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웰스는 이렇게 답한다.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비정(非情)하고 추한 도시의 느낌을 주는 곳 중 하나가 고가도로다. 자동차로 올라서자마자 빨리 내려가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빨리 달리는지도 모른다. 고가도로 아래도 마찬가지다. 그쪽 도로를 걷고 싶어서 걷는 사람은 없다. 햇볕은 잘 들지 않고 시야는 막혀 있다.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 짓긴 했지만 가능한 한 없애버리고 싶은 필요악이 도심의 고가도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도로는 1968년 준공된 서울 아현고가도로다. 서울시 공무원 출신의 학자 손정목 씨의 회고에 따르면 아현고가도로가 한창 건설되던 1967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미아리 고개∼청계천로∼신촌을 연결하는 동서 관통 고가도로 계획을 들고나왔다. 이것이 1971년 청계고가도로까지 지어진 계기다. 두 도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고가도로가 한국의 중앙대로인 세종로에 걸쳐 있는 모습이 부담스러운 데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청와대에서 보면 동서로 다 차량이 빠져나갈 수 있어 굳이 연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고가도로는 일반 도로와 달리 수명이 있다. 노후화하면 수리비가 늘어나 더이상 지탱할 수 없는 시점이 온다. 요즘은 도시 외곽이라면 몰라도 도심의 고가도로가 원활한 교통 소통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고가도로 위에서는 빨리 달릴 수 있어도 내려올 때에 다다르면 막히기 일쑤인 것이 도심의 교통이다. 실제 청계고가도로를 없앤 후에도 심각한 교통 혼란은 없었다. 고가도로를 없애자 상권은 미관과 함께 활기를 찾았다. ▷아현고가도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고가도로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멈춰 설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 거기 서서 서울을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서울시는 아현고가도로 철거 공사 시작에 앞서 8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시민들에게 고가도로를 개방하기로 했다. 자동차에 점령됐던 곳을 걷는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고가도로에서만 볼 수 있는 전망도 감상할 기회다. 최초의 고가도로를 역사 속으로 떠나보내는 이벤트로는 괜찮은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나는 태어나서 열 살 때까지 경북 경산군 반야월(현재는 대구)에 살았다. 그곳은 사과밭이 많았다. 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는 규칙 관념이 부족했는지 한번은 집에 가서 놀자는 친구 꼬임에 교실 창문으로 가방을 던져놓고 도망친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집은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사과밭의 저편 끝에 있었다. 아무튼 그 길을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돌아오는 내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두려움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많던 사과밭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지금 그곳은 아파트 천지로 바뀌었다. 반야월에서는 설이면 여러 집이 한데 모여 강정을 만들었다. 설을 앞두고 동네 구석에서는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뻥튀기 장사가 밥을 튀겨 내고 아이들은 귀를 막으면서도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강정은 튀밥을 엿으로 뭉쳐 만든다. 한겨울 찬 바깥마당에서 판을 만들어 그 속에 튀밥을 넣고 끓인 조청을 부을 때 수증기가 피어나고 주위에서 아주머니들이 두런두런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과자라는 게 거의 없던 시절, 막 굳어진 뒤 반듯하게 잘라낸 강정은 얼마나 맛있던지. 명절이면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에 가셨다. 전남 벌교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영천에 가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삼랑진에서 또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명절이라 기차 안은 통로까지 승객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힘들게 좌석을 구했어도 염치없이 마냥 앉아서만 갈 수 없어 어린 나도 자리를 양보할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 집은 읍내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했다. 나 또한 경상도 시골에서 건너왔지만 그런 시골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로서는 놀 친구가 없었다. 그땐 어려서 꼬막 맛도 잘 몰랐나 보다. 아버지야 늘 들뜬 마음으로 고향에 가셨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초중고교는 모두 서울에서 나왔다. 어릴 적 서울 아이가 내려오면 그 새침데기 같은 말투가 거슬려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고기”라고 놀리며 쫓아다녔다. 내가 바로 그 서울내기가 됐다. 지난해 말 ‘밴드’ 덕분에 연락이 닿아 30여 년 만에 고교 반창회를 했다. 대학에 올라가면서, 또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흩어져 연락이 끊긴 친구가 많았다. 모두들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오십을 넘긴 친구들이 여자들처럼 수다를 떨었다. 이름도 가물가물했지만 얼굴을 맞대고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담임선생님까지 모시고 머리가 벗어져 가는 제자들이 큰절을 올렸다. 시답지 않은 개인사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다. 내 또래에는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어도 아버지 고향을 쫓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따지면 내 고향은 벌교다. 굳이 명절에 고향에 간다면 삼촌 고모가 계신 벌교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반야월에 있다. 그리고 40년 넘게 서울에 살았다. 내가 돌아갈 고향은 어디인가. 아버지의 이농(離農) 세대는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고향이 그리웠고 명절마다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농 세대의 자식들은 최소한 두 개의 고향을 갖고 산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분산되고 고향 의식은 희미해진다. 따져보면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고향 의식이 희미해질수록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남이당가’ ‘우리가 남이유’의 의식도 함께 희미해진다. 내게 새 정치와 헌 정치를 가르는 기준을 하나 들라면 ‘우리가 남인가’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가 남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들고 싶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더 큰 우리를 만드는 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