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아프리카 둥둥섬의 왕위 계승자로 태어난 수사자 ‘라이언(Ryan)’. 자유로운 삶을 찾아 탈출한 그는 ‘곰’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둥근 얼굴, 일자 눈썹과 동그란 눈, 표정 없는 하얀 코를 가진 데다 수사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갈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카카오톡에서 최고의 히트상품은 라이언으로 대표되는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들이다. 이들은 모바일에서 기쁨과 슬픔, 유머의 감정을 표현하는 역할을 넘어 현실세계에서도 수많은 상품과 컬래버레이션(콜라보)하며 ‘핵인싸(최고 인기)’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무로 승진한 라이언 카카오프렌즈는 2012년 11월에 등장한 7개의 이모티콘 세트다. 잡종견 ‘프로도’, 가발 쓴 고양이 ‘네로’, 암수 동체 복숭아 ‘어피치’, 화가 나면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는 미친 오리 ‘튜브’, 향수병 걸린 두더지 ‘제이지’ 등이 그 주인공. 이들은 각자의 개성과 콤플렉스를 가진 캐릭터로서 많은 이들의 일상에 위로와 공감을 주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캐릭터 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외 캐릭터 선호도에서 카카오프렌즈는 2017년 ‘뽀로로’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고, 이후 지난해까지 3년 연속 1위를 지키고 있다. 카카오프렌즈 가운데 6개 캐릭터는 2000년대 초반 미니홈피 싸이월드에서 내놓은 이모티콘 ‘시니컬 토끼’로 유명했던 작가 호조(권순호)가 3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낸 작품이다. 다만 라이언은 2016년 카카오 크리에이티브 파트에서 직접 개발했다. 푸근하고 섬세한 성격에다 다른 캐릭터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맏형 이미지를 갖고 있다. 라이언을 활용해 만든 상품 브랜드인 ‘헬로! 라이언’은 첫선을 보이자마자 쿠션, 휴대전화 케이스, 우표 등이 완판 행진을 이어갔다. 이런 인기와 매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라이언은 카카오 내부에서 2016년 ‘라 상무님’이라는 직함으로 불렸고, 이듬해에는 ‘라 전무’로 승진까지 했다. 카카오프렌즈를 운영하는 카카오IX의 매출액은 지난해 1536억 원으로 3년 만에 배 이상 껑충 뛰었다. 카카오는 최근 10, 20대를 겨냥한 새로운 캐릭터인 ‘니니즈’를 내놓았다. 니니즈는 벌레라는 오해를 받지만 사실은 취업준비생 신분의 공룡인 ‘죠르디’ 등 7종의 동물 캐릭터다. 2019년 6월에는 진에어와 손잡고 ‘플라잉 니니즈’ 래핑 항공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 지구촌 젊은이를 끌어들이는 콜라보 카카오프렌즈는 모바일에서 벗어나 현실세계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비재뿐만 아니라 명품 브랜드업체나 금융·공공기관 등과도 콜라보를 하며 이색 상품들을 출시하고 있다. 카카오IX는 지난해부터 아이돌그룹 트와이스나 가수 강다니엘 등과 같은 한류 스타와도 활발하게 협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 2월에 선보인 ‘어피치 강다니엘 에디션’은 일주일 만에 1차 출시 제품 30종 대부분이 동났다. 2017년에는 루이비통이 서울에서 개최한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Volez, Voguez, Voyagez)’ 국제 순회 전시에서 콜라보 상품을 출시했다. 동서식품의 ‘맥심×카카오프렌즈 스페셜 패키지’ 한정판은 아메리카노에 익숙해져 있던 젊은층까지 끌어들여 화제가 됐다. 중국, 일본, 미국, 영국, 홍콩 등 해외 진출도 빨라지고 있다. 카카오IX는 2018년 일본 도쿄 오모테산도에 첫 글로벌 공식 매장 ‘어피치 오모테산도’와 ‘스튜디오 카카오프렌즈’를 열었다. 일본 매장은 개장 1개월 만에 35만여 명이 방문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카카오IX는 일본인이 설화에 나오는 영웅 ‘복숭아소년’(모모타로)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어피치’를 주력 캐릭터로 내세우고 있다. 복숭아 캐릭터의 인기에 한국관광공사는 어피치를 일본 신한류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한국관광홍보대사로 임명했다. 카카오IX 관계자는 “카카오프렌즈는 최근 ‘펀슈머’(fun+consumer의 합성어), ‘가잼비’(가격 대비 재미의 비율) 등의 ‘재미 추구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며 “현지 정서를 반영한 협업 전략으로 캐릭터 한류를 이끌어나가겠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가 만화, 게임, 여행, 레스토랑 등 다양한 컬래버레이션(콜라보) 전략으로 젊은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구찌는 올해 초 월트 디즈니 원조인 미키마우스와 콜라보한 운동화, 핸드백, 가죽 소품, 스카프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이번 ‘디즈니-구찌’ 콜라보 컬렉션은 2020년 쥐의 해를 기념하는 의미로 시작했다. 구찌는 지난해 기해년을 맞아 돼지 캐릭터 관련 상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달 12일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4관왕의 영예를 안고 귀국한 영화 ‘기생충’의 배우 박소담은 인천국제공항에서 귀여운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진 구찌 니트 패션으로 완성한 공항패션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찌는 2014년 무명 디자이너였던 알렉산드로 미켈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발탁한 이후로 새로운 전성기를 써나가고 있다. 이처럼 스트리트 패션, 구찌 게임, 여행앱 구찌플레이스 등 다양한 장르와 과감한 콜라보를 이어가며 밀레니얼 층에서도 핫한 브랜드로 떠올랐다. 12일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미슐랭 스리스타 셰프와 협업한 구찌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이러한 젊은층 공략으로 구찌는 매출의 60%가 30대 이하의 소비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중년용 명품으로 인식되던 구찌엔 몇 년 전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2018년부터 밀레니얼의 동물보호 니즈를 반영해 모피를 퇴출시킨 구찌는 이달 10일 유엔개발계획(UNDP)이 이끄는 ‘더 라이언즈 셰어 펀드’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동물이 브랜드 광고에 출연할 때마다 브랜드 언론 홍보 지출 비용의 0.5%를 자연, 생물 다양성, 기후 문제 해소를 위한 펀드 조성에 기부하는 운동이다. 구찌 최고경영자(CEO) 마르코 비자리는 “구찌의 컬렉션 중 많은 작품들이 자연과 야생동물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하는 만큼 멸종위기종과 자연 서식지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코카콜라 병은 깨진 조각만 봐도 코카콜라인 줄 알죠. 어둠 속에서도 만져보면 코카콜라 병이라는 걸 압니다. 제네시스도 언제나 밝게 빛나는 ‘두 줄(Two Line)’로 기억하게 될 겁니다.” 올해 1월 출시된 제네시스의 첫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GV80의 돌풍이 거세다. 12일 오전 경기 화성시 남양읍 현대·기아차기술연구소에서 만난 현대디자인센터장 이상엽 전무는 “럭셔리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라며 “자신감의 근원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이 전무는 벤틀리, GM, 폭스바겐 등 25년간 8개국에서 15개 브랜드 자동차의 스타일을 이끌어 온 스타 디자이너. 2016년 전격 영입돼 현대자동차와 제네시스의 디자인을 이끌고 있다. GV80은 그가 제네시스를 맡은 후 플랫폼부터 디자인한 첫 작품이다. 그는 100년이 넘은 전 세계 럭셔리 차 브랜드 시장에 새롭게 뛰어든 제네시스가 살아남으려면 “브랜드가 곧 디자인이라는 생각으로 임팩트 있게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GV80은 차 전면부의 두 줄로 된 쿼드램프가 보디와 후면 테일램프까지 이어져 2개의 선이 전체를 감싸는 형상이다. 그는 바로 이 ‘두 줄’이 제네시스의 독창적인 브랜드 아이콘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GV80의 디자인은 제네시스의 윙로고에서 나왔습니다. 엠블럼의 날개는 두 개의 줄이 됐고, 몸통은 전면부 중앙의 방패 모양 크레스트 그릴로 디자인됐습니다. 차의 라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밤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두 줄의 조명은 밤에도 제네시스를 확실히 인식하게 할 상징입니다.”제네시스는 현대차에서 2015년 프리미엄 고급 브랜드로 독립했다. 이 전무는 “현대차와 제네시스를 디자인할 때는 각각 옷도 캐릭터에 맞춰 갈아입고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나선다”고 말했다. “음식점에 비교한다면 현대차 브랜드는 연남동 골목의 개성 있는 맛집이고, 제네시스는 스타 셰프가 특별한 고유의 재료로 맛을 내는 미슐랭 식당입니다. 가격이 다르다고 어느 것이 더 맛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현대차는 대중적인 입맛을, 제네시스는 고급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럭셔리한 요리를 선보인다고 할 수 있죠.” 그는 세계 최고의 매력 도시인 서울의 곳곳을 다니며 제네시스 디자인의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제가 해외에서 25년을 살아왔는데 서울은 전혀 다른 도시가 됐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다고 할까요. 고궁 옆에 최첨단 현대 건물이 있고, 골목길에 가면 밤늦게까지 다양한 문화가 펼쳐지고, 삼성 LG 같은 하이테크 기업이 있는가 하면, 다도(茶道)와 명상을 즐기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이런 서울의 양면적인 캐릭터가 창의적 디자인의 원천입니다.” 그는 제네시스도 ‘우아한 역동성’이란 말로 설명했다. 제네시스의 루프라인은 뒤로 갈수록 부드럽게 떨어져 뒷모습이 귀부인처럼 우아하다. 반면 전면부의 그릴과 22인치 대구경 타이어휠은 파워풀한 임팩트를 느끼게 한다. 내부 공간은 장식을 최대한 절제한 한국적 ‘여백의 미(Beauty of White Space)’를 추구했다. “팔등신 모델에게는 어떤 옷을 입혀도 멋집니다. 어떤 디자인보다 차체의 비례와 구조의 아름다움이 럭셔리의 기본입니다. 또한 클래식 디자인이 되려면 시간의 테스트도 이겨내야 합니다. 신차일 때 번쩍번쩍 하는 것보다 5년, 10년이 지나 거리 한구석에 중고차로 서 있을 때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게 명차입니다.” 그는 자동차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한 나라의 정체성과 문화를 상징하는 도구라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샤넬 로고에는 파리(Paris)가, 영국의 버버리에는 런던(London)이란 글자가 쓰여 있지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에 오른 것처럼 제네시스도 언젠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가 되는 꿈을 꿉니다. 그때에 제네시스 윙로고 밑에 ‘서울(Seoul)’이란 글자가 새겨지겠죠.”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코카콜라 병은 깨진 조각만 봐도,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만져보면 코카콜라라는 걸 알죠. 제네시스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두 줄(Two Line)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두 줄의 헤드램프가 반짝이는 걸 보면 제네시스라는 걸 알 수 있게 하겠습니다.” 12일 오전 경기 화성시 남양읍 현대기아차기술연소에서 만난 현대디자인센터장 이상엽 전무는 “럭셔리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라며 “자신감의 근원은 바로 ‘자신이 누구냐’는 정체성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올해 1월 발표된 제네시스의 첫 번째 SUV인 GV80의 돌풍이 거세다. 이 차는 2016년 현대차와 제네시스 디자인센터를 이끌고 있는 이상엽 전무가 처음부터 끝까지 디자인한 첫 작품이다. 그는 벤틀리, GM, 폭스바겐 등 25년간 8개국 15개 브랜드 디자인을 맡아온 인물로 2016년부터 전격 영입돼 현대차와 제네시스의 디자인을 이끌고 있다. “전세계 명품 브랜드 차는 보통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어요. 제네시스라는 카 브랜드가 있건 없건 간에 전세계 럭셔리 카 마켓에는 전혀 지장이 없거든요. 신생 브랜드로서의 레거시를 쌓아갈 수 있는 방법은 브랜드가 곧 디자인이라는 생각으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디다스의 ‘세 줄’, 나이키의 ‘휘어진 호선’처럼 제네시스의 ‘두 줄’은 독창적인 브랜드 아이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차 전면부의 양쪽에 가느다란 두 줄로 된 쿼드램프는 측면 보조등(깜빡이등)과 후면등까지 같은 라인의 2개의 선이 이어져 GV80 전체를 감싸는 형상이다. “제네시스는 엠블램의 날개 형상을 통해서 디자인했어요. 그래서 굉장히 유니크하죠. 엠블럼의 몸통은 전면부 중앙의 크레스트 그릴로 장착됐고, 날개는 두 개의 줄로 형상화 됐어요. 차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밤에는 볼 수가 없잖아요. 전면, 바디, 후면까지 돌아가는 가느다란 두 줄의 조명에서 밤에도 제네시스를 확실히 인식하도록 했습니다.” 현대차는 쏘나타와 그랜저와 같은 대중적인 자동차 브랜드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왔다. 제네시스는 2015년 프리미엄 고급 브랜드로 독립했다. 그는 “현대차의 각 브랜드와 제네시스를 디자인 할 때는 마인드셋을 바꾸기 위해 의상까지 갈아입는다”고 소개했다. “현대차는 오래된 전통의 맛집, 또는 연남동 같은 곳에 있는 개성있고 세련된 맛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반면 제네시스는 스타 셰프가 만드는 미슐랭 식당이라 할 수 있어요. 가격 차이가 아니라 각자의 캐릭터가 있는 특별함이 있기 때문에 어디가 더 맛있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것이 저희 브랜드의 레거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영화상 4관왕을 수상한 데 대해 “꿈은 이뤄진다는 말을 실감하게 됐다”며 “제네시스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로서 세계 최고가 되는 꿈을 꾸고 싶다‘고 말했다. 이 전무는 ”샤넬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Paris‘가, 버버리엔 영국을 대표하는 ’London‘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며 ”제네시스에도 ’Seoul‘ 이란 글자가 새겨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자동차는 한 나라의 도시의 풍경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받는 문화적인 도구입니다. 제가 해외에서 26년 동안 살다가 들어왔는데, 서울은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됐더군요. 서울은 음과 양,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양면적인 캐릭터가 살아 숨쉬는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고궁과 현대건물, 번쩍이는 대로와 좁은 골목길, 하이테크 기술과 다도(茶道)와 같은 정적인문화가 공존하지요. 이런 양면적인 캐릭터는 디자인하는데 있어 엄청난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제네시스의 디자인도 ’우아한 역동성‘이란 양면적인 캐릭터로 설명했다. 전체적인 라인이 뒤로 갈수록 부드럽게 떨어져 클래식카의 우아함을 간직하면서도, 22인치 타이어휠은 나오는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한다. 그는 고급브랜드 카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아름다운 비례미‘와 ’타임리스(timeless)‘ 디자인을 꼽았다. “팔등신 모델에게는 어떤 옷을 입혀도 멋집니다. 디자인보다도 무엇보다 차체의 비례와 구조의 아름다움이 럭셔리의 기본입니다. 디자인이 클래식이 되려면 시간의 테스트를 이겨내야하죠. 새로 나왔을 때 번쩍번쩍하는 것보다 5년, 10년이 지나 중고차가 돼 길거리 한구석에 세워져 있어도 아름다움을 유지하는게 명차입니다. 앞으로 전기차, 자율주행차, 수소차 등 미래 모빌리티 사회가 올텐데 자동차 내부 디자인은 이제 운전자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해외 고급브랜드 차에서 근무할 때는 100년의 역사가 담긴 브랜드 바이블을 참고해서 디자인해야 했습니다. 신생 브랜드인 제네시스에도 똑같은 백과사전이 있는데 페이지가 다 비어 있죠. 디자인을 통해서 그 페이지를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것은 디자이너에게는 인생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이상엽 전무와의 일문일답. ―‘디자인 경영’을 내세운 현대차가 최근 국제적인 디자인 어워드를 휩쓸고 있는데…. “전세계의 고급차 브랜드는 대부분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브랜드의 레거시를 어떻게 유지하고 이어나갈까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다. 그러나 제네시스의 경우는 신생 브랜드인 만큼 디자인으로 브랜드의 방향성을 보여줘야 한다. 제네시스가 있건 없건 간에 전세계 럭셔리 카 마켓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신생 브랜드에서 디자인적인 임팩트가 없으면 브랜드 자체의 위상에 문제가 생긴다. ’디자인의 정체성‘이 곧 ’브랜드의 가치‘가 되는 작업이다. 제네시스는 우리만의 캐릭터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경쟁차 디자인을 참고하기보다는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을 깊이 연구하면서 디자인하기 때문에 좀더 브랜드적 차별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차가 럭셔리 차 시장에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는 굉장히 많다. 삼성도 있고, LG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통 럭셔리 브랜드를 꼽으라면 쉽지 않다. 제네시스는 자동차 럭셔리 브랜드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갖도록 하는 게 목표다. 가령 샤넬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고급 브랜드고, 버버리는 영국을 대표한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고급 브랜드에는 ’시대정신‘이 담겨야 한다. 그래서 럭셔리 브랜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의 베이스는 ’내가 누구냐‘라고 하는 아이덴티티다. 그래서 샤넬 로고를 보면 밑에 ’Paris‘라고 써 있고, 버버리 밑에는 ’London‘이라고 써 있다. 제네시스도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로서 로고 밑에 ’Seoul‘이라고 쓰여져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디자인하니까 우리만의 독창적이고 아이코닉한 캐릭터를 더 고민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GV80은 제네시스의 아이덴티티를 100% 디자인적으로 구현한 첫 번째 차라고 생각한다.” ―제네시스를 상징하는 두 줄(two line)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인가. “제네시스 브랜드가 출범할 때 윙로고를 보고 사람들이 애스턴마틴 비슷하다, 미니 닮았다, 크라이슬러 닮았다고 말했다. 저는 사실 날개달린 앰블럼이 굉장히 좋았다. 매우 큰 야심과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1930년대 레이싱 붐을 이루면서 많은 자동차 브랜드가 생겼다. 레이싱에서 승리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나이키 여신의 날개로 엠블럼을 표현했다. 럭셔리 브랜드가 윙로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승리에 대한 염원을 가진 도전정신을 모토로 내건다는 뜻이다. GV80은 제네시스 엠블럼을 변형시켜 디자인했다. 날개의 두 줄이 헤드램프가 됐고, 그릴은 엠블렘 중앙부분의 크레스트가 커진 것이다. 제네시스 외장은 전통차에서 보지 못한 불문율을 많이 가지고 있다. 보통 헤드램프는 두 눈이고, 그릴을 코모양을 연상시키도록 디자인한다. 그러나 제네시스의 헤드램프는 눈이 네 개다. 제네시스는 헤드램프의 앞에 두 줄 조명이 바디와 뒷면까지 돌아가기 때문에 낮뿐 아니라 밤에도 제네시스라는 것을 한 눈에 인식할 수 있다. 헤드램프를 슬림하게 두 줄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작은 윈도를 통해서 빛이 충분히 많이 나가야 하기 때문에 고난이도의 기술이 들어가야 한다.” ―GV80의 내부 인테리어 디자인의 특징은. “요즘 자동차는 테크놀로지가 내부로 많이 들어온다. 커넥티드 카, 자율주행,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등 많은 기능들이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인테리어가 상당히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제네시스는 내부 디자인에도 ’여백의 미(Beauty of White Space)‘를 컨셉으로 했다.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깨끗하고 편안한 가구가 있고, 기능들이 평소에는 숨겨져 있다가 필요할 때만 고객들에게 어필을 하도록 했다. 보통 밝은 색으로 인테리어를 할수록 더 럭셔리 차라고 이야기한다. 인테리어가 밝으면 다 보이기 때문에 숨길 데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제네시스 브랜드의 디자인은 어떤 차별성이 있나. “제네시스가 현대 브랜드 안에서 나왔지만, 레거시가 완전히 다르다. 현대차는 대중 브랜드, 제네시스는 럭셔리 브랜드로서 고객에게 어필해야 한다. 현대는 연남동에 있는 세련된 맛집, 을지로 골목의 오래된 설렁탕 같은 특별한 맛집이라면, 제네시스는 미슐랭 스타 셰프가 만드는 특별한 맛집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맛집마다 가격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특별한 맛이기 때문에 어떤 게 더 맛있다고 볼 수는 없다. 각자의 입맛과 캐릭터가 다른 것이다. 현대는 대중적인 입맛을 추구한다면, 제네시스는 아주 특별한 고유의 재료를 써서 만드는 럭셔리의 참맛을 내야 한다. 이 때문에 현대차와 제네시스를 디자인할 때는 마인드셋을 180도 바꾼다. 예를 들면 그날 입는 옷까지 다르게 입을 정도다. 제네시스를 디자인할 때는 심플한 슈트를 입는다면, 현대차는 차종별로 캐릭터와 스파이스가 다르니까 거기에 맞춰서 입는다.” ―한국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진 브랜드란 어떤 디자인을 말하는가. “한국적인 디자인이라고 해서 자동차에 태극무늬를 넣겠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디자인에 반영해야 한다. 제네시스 로고에 ’Seoul‘이라는 글자를 넣어야 한다고 했는데, 사실 서울만큼 매력적인 도시가 없는 것 같다. 제가 해외에서 26년 동안 살다가 들어왔는데 어렸을 때 살던 서울과 지금의 서울은 완전히 다른 도시다. 대중문화부터 고급문화까지 다양하게 공존하는 서울은 음과 양,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같은 캐릭터다. 고궁 앞에 완전히 현대적인 건물이 서 있고, 골목 구석구석마다 특별한 가게가 밤늦게까지 문을 연다. 삼성이나 엘지처럼 하이테크 컴퍼니가 있는 반면에, 다도(茶道)와 명상과 같은 조용한 분위기도 즐긴다. 이런 양면적인 캐릭터가 디자인하는 데 있어서 굉장한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제네시스의 모토인 ’역동적인 우아함‘도 양면성을 설명하는 말인가. “보통 자동차 중에는 역동적인 계열이 있고, 우아한 브랜드도 있다. 영국 차들은 대부분 우아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우리는 역동적이면서도 우아한 캐릭터라는 두 개의 소금과 설탕을 가지고 요리를 만들고 싶었다. 요즘엔 대부분 차량의 뒤쪽 라인이 올라가는 쐐기형 디자인이 많은데, 제네시스는 우아함을 강조하는 클래식카처럼 뒤로 갈수록 루프라인이 매끄럽게 떨어진다. 반면 사이드 윈도라인은 올라감으로써 역동성을 느끼게 했고, 22인치 대구경 타이어휠에서 나오는 파워풀함, 방패모양의 크레스트 그릴이 강렬한 임팩트를 던져준다.” ―럭셔리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럭셔리 브랜드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 자신감의 근원은 요란한 디자인 보다도 덜어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좋은 미슐랭 스타 셰프의 음식을 보면 재료의 캐릭터를 살려서 요리를 만들지 않는가. 그들은 조미료나 고춧가루를 한 주먹씩 퍼 넣지 않는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깨끗한 디자인, 사람이 봤을 때 부담스럽지 않은 디자인, 보면 볼수록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 그래서 차의 기본적인 비례와 구조의 아름다움에 신경을 많이 썼다. 팔등신 모델에게는 어떤 옷을 입혀도 멋지지 않는가. 현대가 후륜구동 차를 다른 브랜드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새로 나오는 제네시스 라인업에서는 후륜구동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비례를 추구했다. 보시는 것처럼 쫙쫙 뻗어 있다. 늦바람이 더 무섭다고 하듯이, 후륜구동을 가장 늦게 시작한 럭셔리 브랜드인 제네시스가 가장 완벽한 후륜구동을 구현하는 게 목표다.” ―디자인이 클래식이 되기 위한 조건은. “영속성(Timeless)이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아름다움과 특별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새로운 디자인은 시간의 테스트를 받게 돼 있다. 시간의 테스트에 오래 견딜 수 있는 것이 훌륭한 디자인다. 제네시스를 디자인할 때도 신차가 나왔을 때 삐까번쩍한 것도 중요하지만, 5년 10년이 지나 중고차가 돼서 길거리에 서 있을 때도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럭셔리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전기자동차, 자율주행차, 수소차 등 미래 자동차의 디자인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미래에는 혁신적인 자동차가 등장하는 모빌리티 사회가 될 것이다. 기술발전에 따라 자동차의 내부공간은 운전자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기차는 엔진이 앞에 없어도 되기 때문에 자동차의 형태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자율주행차로 운전대가 사라진다면 더욱 엄청난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차의 내부공간이 점점 커지면서 인테리어가 중요해진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구매할 때 아파트 외관보다는 내장의 평수를 더 중요시하고, 어떤 시설과 가구를 놓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자동차의 내장공간에서 어떻게하면 럭셔리한 삶의 경험을 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전통개념의 럭셔리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앞으로의 럭셔리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제네시스가 럭셔리 브랜드로서는 후발주자이지만 전기차, 수소차의 미래형 모빌리티 사회가 된다면 모든 전통있는 브랜드와 신생브랜드가 같은 선상에서 다시 출발하는 시대가 된다. 어려운 도전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다.” ―GM, 벤틀리, 폭스바겐 등 해외의 유명 자동차 회사에서 작업해왔는데, 현대에서 영입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영국 벤틀리를 비롯해 럭셔리 브랜드를 디자인할 때는 브랜드 바이블을 참고해야 했다. 100년의 역사 동안 나온 모든 차를 스펙하나하나까지 다 꿰고 있어야 한다. 내가 새롭게 디자인해서 벽에 붙이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질문이 ’저게 벤틀리인가?‘라는 말이다. 새롭게 출발하는 영 럭셔리 브랜드인 제네시스에도 똑같은 백과사전이 있는데 페이지가 다 비어 있다. 디자인을 통해서 그 페이지를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것은 디자이너에게는 인생의 기회(lifetime opportunity) 같은 거라고 믿고 있다. 전세계 많은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있는데, 이렇게 디자인을 하면서 브랜드를 적립해나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게다가 한국 브랜드가 아닌가.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BMW는 전조등에 엔젤아이라는 포뮬러가 있어서, 그 안에서 디자인을 해야하지만, 우리는 어떤 도전도 할 수 있다. 언제나 잘 되면 좋겠지만, 잘 안될 때도 있다. 그런 과정 자체도 역사의 한 단계가 될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더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재미가 있다.”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안녕하세요. 저는 SK이노베이션 ○○○입니다.” 서울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 있는 SK서린빌딩에서는 아침마다 자기소개 인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고정 좌석이 없어 매일 옆자리에 앉는 직원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 빌딩에서 일하고 있는 약 2200여 명의 직원들은 아침에 출근해 사내 앱인 ‘온 스페이스’에 접속해 그날 자신이 일할 자리를 예약한다. 1999년에 건축가 김종성의 설계로 지어진 이 빌딩은 미스 반데로에의 대표작 시그램빌딩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도심형 오피스 건물. 지난해 말 2년 간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내부공간을 공유오피스 형태로 완전 탈바꿈했다. 지난 5일 직접 가본 SK서린빌딩은 기자들이 현장에서 일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노트북 과 휴대폰을 들고 칸막이 없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다. 정해진 자리가 없기 때문에 각자 짐은 개인 사물함에 보관한다. 지주사인 SK주식회사를 비롯해 SK수펙스추구협의회, SK이노베이션 등 정유, 화학, 배터리 등 9개 계열사 직원들은 업무와 관계없이 5층에서 19층까지 어떤 자리에서도 일할 수 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사람을 만나는 걸 피하기 위해 사흘 이상 같은 층에 근무할 수 없다. “SK그룹이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기 위해 사무환경을 바꾼 것입니다. 기존 조직에서 팀원들끼리만 칸막이 안에서 소통하다보니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하고, 기존의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리모델링을 통해 직원들이 내 고정좌석은 없어졌지만, 반대로 회사 내의 모든 자리가 내가 예약할 수 있는 자리가 됐습니다. 부서간 벽 뿐 아니라 계열사를 넘어 ‘세렌디피적 만남’(우연한 만남)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탄생한거죠.”(정형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인프라TF 팀장) 이 회사의 오피스 디자인의 특징은 일과 휴식, 삶의 블렌딩이다. 건물은 크게 집중적으로 일하는 공간, 협업과 소통의 공간, 휴식공간으로 나뉜다. 20~22층은 공유할 수 있는 퍼블릭 공간이다. 카페, 회의실, 휘트니스 클럽, 안마휴게실, VR게임방, 다도실, LP감상실, 도서관 등이 마련돼 있다. 실제로 근무가 한창인 오후 3시인데도 휘트니스 클럽에서 상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운동하고 있는 직원들이 많았다. 첨단 안마의자가 설치돼 있는 10여개의 휴식룸도 꽉 차 있었다. 밀레니얼 세대가 커피전문점에서 공부하듯이 직원들은 창가든, 카페든, 영상 회의실이든 어디에서나 소통하고, 떠들고, 일했다. “누가 언제 출근하고, 퇴근하는지. 팀원이 근무시간에 몇층에서 어떻게 근무하고 있는지 팀장이나 동료직원들도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팀원들간에도 의사소통은 카톡이나 사내 메신저로 합니다. 더 이상 근태(근무태도)는 평가 대상이 아닙니다. 오로지 성과로서만 평가받을 뿐이죠.” (SK이노베이션 김우경 팀장) 이 건물에서는 더 이상 부장과 팀원이 T자형으로 앉는 테이블 배치를 찾아볼 수 없다. 탕비실과 정수기가 있던 공간은 커다란 카페로 확대돼 언제든지 커피와 음료수, 간식을 무료로 먹을 수 있다. 오전 7시~10사이에 자율적으로 출근한 직원들은 주 52시간 내에서 근무한 뒤 역시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퇴근한다. 이러한 근무환경의 변화에 밀레니얼 세대는 대환영이지만, 부팀장과 임원들은 약간 난감한 표정이다. 임원실의 크기가 대폭 줄어 각 층 구석에 배치됐고, 부팀장도 고정좌석이 없다. 더 이상 책상의 크기나 위치, 전망좋은 뷰에 따른 위계질서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각 층에 퍼져 일하고있는 팀원들을 소집해 점심이나 저녁에 우르르 나가 회식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대신 팀내 단합을 위해서는 가끔씩 사내에 마련돼 있는 음식을 직접 조리해 먹을 수 있는 다이닝키친이나 파티룸에서 피자나 치킨, 생맥주를 먹으며 간단하게 파티를 즐기는 문화로 바뀌었다. 자율좌석제로 바뀐 후 책상 주변에 쌓여 있던 개인 짐이 줄어들고, 출장이나 외근을 나가는 직원들의 자리가 비워지면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넓어지는 부수적인 효과도 생겼다. 사무실에서는 유선전화도 사라졌다. 직원들은 각자의 짐을 개인사물함에 넣고, 노트북 하나만 달랑들고 업무를 본다. 이러한 사무공간 혁신은 애자일(Agile) 조직으로의 개편과도 맞물려 있다. ‘민첩성’을 뜻하는 애자일 형태의 조직은 부서 간 경계를 허물고 소규모 팀을 구성해 업무를 수행한다. SK이노베이션은 팀장 직급을 없애고 대신 PL(Project Leader)이 단위 업무를 책임지고 수행하면서 부서를 넘어 유기적으로 협력하도록 했다. 정형진 PL은 “기존에는 조직개편이 벌어지면 대대적인 이사와 칸막이 공사가 벌어지곤 했는데, 이제는 조직을 수시로 키우고, 줄이고, 만들고, 없애더라도 물리적 공간에 어떤 변화도 필요 없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으로 확산되는 스마트 오피스…개인사물함 가구 인기 기존에 주로 IT스타트업 기업들이 입주하던 스마트오피스는 SK그룹 뿐 아니라 현대모비스, 동국제강, 유한킴벌리, KEB하나은행 본점, 농협 ‘NH디지털혁신캠퍼스’ 등 대기업 금융기업 공기업으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2015년부터 스마트오피스를 도입한 동국제강 직원들은 아침에 안면인식으로 출근 체크를 할 때 일할 좌석이 무작위로 배정된다. 정부 세종청사는 청사 3동 4층을 스마트 오피스로 꾸몄다. 사무환경 전문 기업 퍼시스도 서울 송파구 오금동 본사와 광화문 센터를 전시 쇼룸과 업무공간을 결합한 스마트 오피스로 변신시켰다. 고정된 좌석없는 사무실에는 다양한 형태의 좌석과 회의실이 구비돼 있다. 우선 본사의 ‘생각의 정원’과 광화문센터의 ‘워크 라운지’는 커피를 마시며 일하거나 고객과 상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칸막이가 쳐 있는 ‘포커스 존’, 팀단위 회의와 협업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존’, 오피스 내 전화통화 소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폰부스, 공용 사무용품과 복합기 등이 놓여 있는 ‘서포트 존’ 등 다양한 공간도 마련됐다. 직원들이 자율좌석제로 실제 일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무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2017년 퍼시스 광화문센터 오픈 이후 550여 개의 고객사가 방문했고, 이후 2018년, 2019년에는 800개 이상의 고객사와 2000명이 넘는 고객이 방문했다. 특히 대기업들이 공유오피스로 바꾸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퍼시스가 지난해 3월 출시한 개인 사물함 ‘스마트 워킹 스토리지(SWS)’도 인기다. 15인치 노트북과 개인 물품 수납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이 제품은 공유오피스의 필수품으로 지금까지 약 20억원 이상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퍼시스 광화문센터의 공도훈 씨는 “기업마다 조직변화와 사무환경 혁신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스마트 오피스로 변신하는 곳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인프라TF’ 팀장 정형진 PL 인터뷰 ―SK서린빌딩 사무공간 리모델링을 한 이유는. “SK그룹이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위해 제일 먼저 환경을 바꾼 것이다. 기존 조직에서는 팀원들이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있다보니까 뭔가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하고, 늘 하던 대로 하게 되고, 생각의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공유좌석제를 하다보니까 직원들이 내 지정자리는 없어졌지만, 반대로 회사의 모든 자리가 내 자리가 된 것이다. 예약해서 자리에 앉다보면 매일매일 새로운 조합의 사람들과 앉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고,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게 됐다.” ―다른 계열사나 타 부서의 직원들끼리 경계를 허물고 소통하는 것은 좋지만, 기존 팀원들끼리의 내부 커뮤니케이션은 어려워지지 않았는가. “맞다. 기존 팀원들끼리 모여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예전에 비교했을 때 팀원들끼리 함께 근무하면서, 다른 얘기도 하고 친목도 다지고 하던 시절보다는 관계가 약간 멀어진 건 사실이다. 반면 현재는 팀원들끼 분산돼 일하다보니 예전보다 업무를 지시하는 방식이 체계화됐다. 온라인과 모바일을 통해 좀더 명료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컨퍼런스 콜을 한다. 좀 더 집중적으로 효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비효율이 줄어들고,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신입사원에게는 팀 선배와 함께 일하면서 업무를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는가. “부서에 신입에게는 선배가 필요할 경우 옆자리를 예약해서 같이 일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하루 종일, 1년 내내 근처에 앉아서 일을 했다면, 지금은 그 기간이 훨씬 짧아졌다. 어차피 한 분야의 업무를 선배에게 도제식으로 훈련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신입사원도 다른 팀의 선배와 만나서 일할 수도 있고, 1인용 칸막이가 켜진 집중업무 공간에서 일할 수도 있고, 카페같은 공간에서 혼자 일할 수도 있다. 학교 다닐 때 스타벅스 같은 커피전문점에서 공부를 많이 해본 밀레니얼세대 직원들은 이렇게 일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친숙한 공간일 수 있다. 내게 맞는 매력적인 업무공간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데, 굳이 가둬둘 필요가 있을까.” ―임원이나 팀장들은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하는가. “물론 리더 분들에겐 쉽지않은 변화다. 부서장이 팀원들에게 ”오늘 술한잔 하자“고 하는 말은 많이 줄었다. 사실 그런 부분은 요즘 공유오피스와 상관없이 요즘 트렌드의 변화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다. 팀장이나 임원들도 구내식당에서 혼밥을 하거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경우도 많다. 기존 조직과의 회식은 줄어들었지만, 대신에 새로운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좀더 활발해졌다. 직원들이 상사의 눈치 안보는 수평적인 환경이 된 거다. 그런 면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사무실 공간의 변화가 수평적 조직문화를 가져온다는 뜻은? “우선 책상 크기나 위치에 의한 위계질서가 없어졌다. 과거에는 부장은 창가의 전망좋은 뷰를 가진 자리, 팀장은 파티션 있는 좌석에서 일했다. 그 밑에 팀원들은 T자 형태로 서열순서대로 앉아서 일했다. 공간에서부터 이런 위계질서가 명확한데, 그 안에서 어떻게 팀원과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가. 현재는 임원실도 크기가 현격하게 줄었고, 모여 있는 게 아니라 각 층으로 흩어져 있다. 또한 팀장들도 고정좌석이 없어 팀원들처럼 좌석을 매일 예약하고 앉아야 한다. 임원이나 팀장이 구성원들과 수평적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이야기하다보니 조직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SK그룹이 추구하는 ‘애자일(Agile)’ 조직개편과 사무환경 리모델링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구글, 아마존, 넷플릭스 등에서 하고 있는 ‘애자일 조직’이란 주어진 프로젝트나 태스크에 맞춰서 민첩하고, 유연하게 조직을 바꿀 수 있는 조직이다. 오늘은 이렇게 모이고, 내일은 다르게 모일 수 있는 조직이다. 과거에는 조직개편을 하게 되면, 부서이름도 바꿔야 하고, 칸막이를 조정하고, 이사를 가고, 임원실도 다시 만들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부서나 팀별 물리적 공간이 없으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임원실도 바뀌면 그냥 패드에 있는 이름만 바꿔 회의실로 전환하면 된다. 상황에 맞게 조직을 더 빨리 개편할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이 됐다. 조직을 수시로 만들고, 해체하는 데 환경적인 제약이 전혀 없다. 애자일 조직운영도 실제로 유연하게, 신속하게,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TF팀원이라고 해서 일주일 내내, 하루종일 모여서 일할 필요는 없다. 온라인, 모바일로 소통하고 필요하면 TF룸에서 모여서 일하기도 한다.” ―근무시간에 직원들이 헬스장, 안마실 등을 이용하는 데는 눈치보는 일이 전혀 없나. “전혀 없다. 사실 공간에서 자율이 주어진 만큼 개개인마다 프로페셔널이 되는 것 같다. 내 성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과거에는 상사 앞에서 일하는 척만 하거나, 눈치보면서 퇴근하지 못한다거나, 성과보다는 근면성실한 업무태도로 어필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흩어져서 일하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근무를 하는 시간과 장소, 태도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제 성과와 퍼포먼스로 승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내가 열심히 일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깐 휘트니스에서 운동할 수도 있고, 안마의자에서 쉴 수도 있다. 리더와 약속한 업무 데드라인을 지키고, 높은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런 부분들은 형식적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구성원들이 업무공간이 변화했다고 프리 라이딩(무임승차)하려는 사람은 없다. 리더 입장에서도 업무 데드라인이 하루 이틀 늦어지는 것은 한두번 용납이 되도, 이 사람이 매번 그런다면 경고를 하게 되고 평가에 반영을 하지 않겠는가. 자연스럽게 그런 부분들은 자정작용이 일어난다. 자율이 주어진 만큼 점점 더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인사, 행정, 재무팀과 같은 부서도 이동하면서 근무하나. “고정석이 필요한 업무도 있다. 재무, 인사팀 등 업무의 대부분이 사내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움직이면 구성원들이 불편하다. 필요한 일부 조직들은 최소화해서 고정석을 운영한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스캔하거나 웹문서, 모바일 형태로 저장해 클라우드에 올려서 공유한다. 관공서 제출용처럼 하드카피로 보관해야 하는 문서도 있으면 최소화해서 문서함에 보관한다. 나머지는 대부분은 자유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그런 서류들 때문에 움직임이 저해받지 않도록 많은 부분들을 보완해서 지원하고 있다.” ―공유오피스는 스타트업 기업들이 입주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으로서는 초유의 실험인데, 다른 기업은 어떤가. “SK서린빌딩을 리모델링하기 전에 2018년부터 그랑서울 건물에 임시로 4개층을 공유오피스로 똑같이 만들어 파일럿 테스트를 했었다. 이후 지금까지 공유오피스에서 일하는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우리 사무실을 수많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뿐 아니라 산업은행, 행정안전부 등 공기업과 관공서에서도 많이 찾아오고 있다. 이미 공유오피스를 하고 있는 다른 기업들도 많다. 그런데 회사마다 추구하는 목표가 조금씩 달라 형태도 다양하다. 대부분은 회사 건물 내에서 단일회사가 공유오피스를 하거나, 회사 내에서 일부 조직(영업부 등)에서만 한다거나, 임대공간의 효율화 측면에서 하거나, 비용절감을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SK서린빌딩은 SK그룹내 각각 독립된 9개 계열사가 입주해서 함께 일하고, 섞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업들과는 차별화된다. 회사들마다 공유오피스를 하는 목적이나, 범위와 규모에서 차이가 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스위스 출신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현대건축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가 왜 현대건축의 아버지로 불렸을까요? 그가 내세운 현대건축의 5원칙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건축물의 형태를 탄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가 밝힌 현대건축의 5원칙 중의 하나가 ‘수평띠 창’(La fen¤tre en bandeaux)입니다. 현대의 대부분의 건축물의 유리창은 대부분 가로로 긴 띠모양으로 된 창문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세의 고성이나 성당에서는 세로로 긴 수직창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1929년 ‘빌라 사보아’(Villa Savoye)를 지었을 때 건물의 사면을 둘러싼 수평으로 길게 연결된 창문은 당시로서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철근 콘크리트 혁명으로 가능하게 된 현대건축물의 수평지붕, 수평창은 무거움을 벗어던진 세련되고 날렵한 선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철근 콘크리트가 나오기 전의 건축물에서 지붕이나 창문은 뾰족한 모양이거나 아치형태였습니다. 벽돌이나 흙을 쌓아서 짓는 건축물에서 위는 무겁고, 아래가 뚫려 있는 문이나 창문 등이 수평일 경우 하중 때문에 무너져 내리기 쉽기 때문이죠. 활이나 무지개처럼 가운데가 높고 굽은 모양의 아치구조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위에서 누르는 힘을 잘 버티기 때문에 창문, 문, 다리와 터널 등에 활용됐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홍예교’(虹霓橋)로 불린 아치형 돌다리가 세워졌습니다. 전남 순천시 승주군 선암사 앞 계곡에는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승선교가 놓여 있습니다. 돌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신비한 모습입니다. 홍예교 가운데 있는 홍예종석은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돼 계곡을 향해 튀어나와 있습니다. 다리 아래로 홍예교의 반원이 물에 잠긴 그림자가 되어 위의 홍예교와 하나의 원을 이루어 그저 감탄스러운 자태를 뽐냅니다. 지난달 경상북도 문경새재길을 걷다가 조령1관문 보수공사 현장을 봤습니다. 아치형 문을 새로 쌓기 위해 반원형 나무틀을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더군요. 아치를 쌓을 때는 나무로 아치형태를 만들어놓고 쐐기 모양의 돌을 차곡차곡 맞대어 곡선모양으로 쌓아올립니다. 마지막 가장 높은 꼭대기 부분에 머릿돌인 종석(宗石)을 꼭 맞춰 끼워야 아치구조가 튼튼하게 완성됩니다. 이렇게 되면 밑에 있던 나무틀을 빼내어도 돌끼리 서로 맞대어 공중에 떠 있는 신기한 건축물이 탄생하는 것이죠. 이 때 가장 높은 곳에 끼워지는 종석을 영어로는 ‘키스톤(Key-stone)’이라고 부릅니다. 키스톤은 양쪽에 쌓아올려진 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상부에서 가해지는 하중을 양쪽으로 분산시켜 땅에 닿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돌입니다. 그래서 키스톤을 빼낸다면 아치구조는 단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야구에서도 내야수비의 핵심인 유격수와 2루수를 ‘키스톤 콤비’라고 부릅니다. 야구장의 반원형 내야의 가장 중앙 꼭대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수비에 구멍이 뚫리면 내야가 와르르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재능있는 유격수와 2루수가 콤비를 이뤄 더블플레이를 완성하는 장면은 늘 탄성을 자아냅니다. 키스톤은 아치형 구조물에서 가장 중요한 돌이기 때문에 다른 돌보다 더 크고, 화려한 장식이 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시를 산책하면서 보면 현대도시에도 아치형 구조물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근대문화재 건축물 뿐 아니라 현대건축물에도 미적인 감각을 살려서 아치형으로 짓기도 하죠. 가끔씩 길을 걷다가 아치형 구조물을 만나면 키스톤을 찾아서 사진을 찍는 것도 흥미로운 도시 산책법입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홍예의 정중앙에 설치된 홍예종석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용이 조각돼 있습니다. 이 홍예종석은 주변의 새하얀 돌들과는 좀 다른 누런 돌로 돼 있습니다. 광화문을 보수하면서 기존 부재를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이죠.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의 양쪽 정문 아치에는 이 학교의 상징인 ‘호랑이’ 모양이 조각된 종석이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파리와 로마에 있는 개선문, 다리의 아치 한가운데에는 화려한 조각장식이 돼 있는 키스톤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건물에는 아치형태의 창문 틀마다 흰색 종석이 박혀 있습니다. 옛 서울역사에 있는 창문에는 다른 돌보다 훨씬 커다란 흰색 키스톤이 박혀 있죠.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인 두 건물에서 흰색 종석은 레드와 화이트로 포인트를 주는 디자인적인 의미를 더합니다. 키스톤은 건축물의 전체 구조를 연결하고, 힘을 지탱해주는 가장 마지막 돌이자 정체성을 상징하는 돌입니다. 각 사람에게도 온 몸을 지탱해주고, 통일된 내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영혼의 키스톤이 있을 겁니다. 이 키스톤이 빠져나간다면 우리 몸과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내 영혼의 키스톤은 무엇일까. 마지막까지 나를 나답게 하고, 나를 지탱해주는 최후의 요소는 무엇일까. 이를 고민하고 찾아보는 것도 새해의 성찰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내 영혼의 키스톤을 발견했다면 잘 간직하고, 반짝반짝 빛나도록 매일매일 닦아주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급해요, 시간이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아트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할 수 있을까요?” 2016년 한류 박람회 참가를 앞둔 뷰티 화장품 기업이 KOTRA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그림 읽어주는 여자’ 한젬마 씨를 찾아왔다. 그가 가져온 제품 샘플에는 유명 한류스타 배우와 미키마우스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유명 스타와 캐릭터는 저작권료가 너무 비싸 사용할 수 없었다. 한 씨는 ‘명화(名畵)’에서 답을 찾았다. “화장품이나 가방을 제조하는 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반고흐 그림을 활용할 때는 저작권료가 비쌀 거라고 지레짐작하세요. 그런데 기업인들에게 사후 70년이 넘은 작가의 작품은 저작권료가 공짜라는 말을 해주면, 속된 말로 눈이 튀어나오게 좋아합니다.” 그는 이 회사에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비롯한 여성들의 초상화, 꽃그림 명화들을 추천해주었고, 케이스를 고급화한 이 화장품은 대박이 났다. 아트 컬래버레이션의 효과를 맛본 이 회사는 젊은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현대작가와의 협업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팝아트, 일러스트, 캐릭터 등으로 커버가 바뀔 때마다 선호 계층이 바뀌었다. 내용물은 바뀌지 않았지만 포장에 따라 20대 ‘젊은 언니 같은 느낌’에서 30, 40대 ‘청담동 며느리 같은 느낌’까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화장품으로 변신했다. “지금은 ‘콜라보(컬래버레이션)’라는 말이 대중화됐지만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생소했죠. 대기업은 사회공헌사업(CSR) 차원에서 예술을 후원하는 메세나를 했지만, 중소기업은 예술이란 단어만 나오면 큰돈이 들어가는 일인 줄 알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런데 아트를 활용해 기업이 수익을 얻고, 홍보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한 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작가, 칼럼니스트, 비즈니스 분야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왔다. 그의 인생 자체가 컬래버레이션이었던 셈. 그는 “대중들에겐 사랑받았지만 미술계 내부에서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며 “20년이 넘게 활동해오다 보니 예술과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자’로서의 정체성을 나 스스로도 찾게 됐다”고 말했다. 1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를 찾았을 때 흡사 철물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못과 경첩, 파이프, 플러그 등이 쌓여 있었다. 그는 1995년부터 연결 도구인 못, 지퍼, 경첩, 똑딱단추, 옷핀 등의 오브제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문’이 아닌 ‘경첩’과 같은 연결하는 인간으로서의 성찰이 담긴 작업이다. 작가로서 한 씨는 삼성주택문화관을 설계하고, 대웅제약에 ‘못사람’ 조형물을 설치하는 협업을 하기도 했다. 연결자로서의 재능이 가장 빛난 것은 2012년부터 5년간 KOTRA에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려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일을 맡았을 때이다. 이 경험을 그는 지난해 ‘아트 콜라보 수업’(비즈니스북스)이라는 책으로 출간했고, 책은 경제경영서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컬래버레이션은 루이뷔통과 일본의 현대미술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 앤디 워홀과 앱솔루트 보드카, 제프 쿤스와 BMW의 아트카, LG그룹의 명화 캠페인, 현대카드의 갤러리카드 등 국내외 명품 브랜드들이 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작업이다. 한 씨는 “KOTRA에 찾아온 기업과 함께 제품을 보면서 상담하다 보면 어떤 아티스트의 작품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현실의 삶과 미술을 연결해서 해설해왔던 덕분에 생긴 재능이다. 그는 유럽시장에 생들깨기름을 판매하려는 한 중소기업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을 라벨에 장식할 것을 추천했다. 서양인에게 익숙한 밀레의 명화는 오랜 전통과 신뢰감, 친환경 이미지를 주었고, 러시아 업체와 20만 달러어치 수출계약을 맺는 성과를 거뒀다. 두통약 펜잘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워 부인’ 초상화 그림으로 박스를 포장해 대박이 났고, 몸매 관리를 해주는 의료기기에는 앵그르의 비너스 그림을 새겨 넣어 국제박람회에서 바이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코카콜라, 루이뷔통, BMW,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들도 신진 아티스트와 협업한 ‘리미티드 에디션(한정판)’을 내놓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변화의 노력이죠. 리미티드 에디션은 희소성 때문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인기를 얻으면서 제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줍니다.” 한 씨는 “전동칫솔, 스팀다리미 등이 모두 이종 간의 교배로 탄생한 히트상품”이라며 “협업은 예상치 못한 이종 간에 이뤄질 때 효과가 배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새우깡 티셔츠’ ‘바나나맛우유 화장품’ ‘메로나 칫솔’과 같이 식품기업이 패션과 화장품과 같은 기상천외한 조합으로 협업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꼽은 컬래버레이션의 기본 원칙은 ‘수평적 동행’이다. 한쪽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콜라주’(오려 붙이기)가 될 뿐이며, 브랜드와 아티스트가 서로 윈윈하는 파트너 관계로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어야 협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18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팝가수 비욘세가 협업을 한 적이 있어요. 루브르박물관이 비욘세의 뮤직비디오를 찍게 허락한 것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나리자 그림에만 몰려드는 현상을 타개할 묘수가 됐어요. 비욘세는 세계적 명소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기회를 얻었고, 루브르는 비욘세가 촬영한 17점의 명화를 찾아 투어 하는 새로운 관람 동선을 홍보할 수 있게 됐죠. 1억9000만 회가 넘은 유튜브 조회수 덕분에 2018년 루브르는 처음으로 관람객 1000만 명을 넘겼습니다.” 한 씨는 앞으로 고령사회를 맞아 휠체어와 지팡이, 환자복에 패션을 도입한 ‘메디컬 컬래버레이션’을 구상 중이다. “아트는 소비가 아니라 치유의 역할도 합니다. 허리를 감싸주는 복대가 꼭 검은색이어야 할까요? 누구나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잠시 휠체어를 탈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환자복이나 휠체어에 감각적인 컬러와 패션이 접목된다면 우울해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급해요, 시간이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아트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할 수 있을까요?” 2016년 한류 박람회 참가를 앞둔 뷰티 화장품 기업이 KOTRA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그림 읽어주는 여자’ 한젬마 씨를 찾아왔다. 그가 가져 온 제품 샘플에는 유명 한류스타 배우와 미키마우스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유명스타와 캐릭터는 저작권료가 너무 비싸 사용할 수 없었다. 한 씨는 ‘명화(名畵)’에서 답을 찾았다. “화장품이나 가방을 제조하는 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반고흐 그림을 활용할 때는 저작권료가 비쌀 거라고 지레짐작하세요. 그런데 기업인들에게 사후 70년이 넘은 작가의 작품은 저작권료가 공짜라는 말을 해주면, 속된 말로 눈이 튀어나오게 좋아합니다.” 그는 이 회사에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비롯한 여성들의 초상화, 꽃그림 명화들을 추천해주었고, 케이스를 고급화한 이 화장품은 대박이 났다. 아트 컬래버레이션의 효과를 맛본 이 회사는 젊은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현대작가와의 협업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팝아트, 일러스트, 캐릭터 등으로 커버가 바뀔 때마다 선호 계층이 바뀌었다. 내용물은 바뀌지 않았지만 포장에 따라 20대 ‘젊은 언니 같은 느낌’에서 30, 40대 ‘청담동 며느리 같은 느낌’까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화장품으로 변신했다. “지금은 ‘콜라보(컬래버레이션)’라는 말이 대중화됐지만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생소했죠. 대기업은 사회공헌사업(CSR) 차원에서 예술을 후원하는 메세나를 했지만, 중소기업은 예술이란 단어만 나오면 큰돈이 들어가는 일인 줄 알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런데 아트를 활용해 기업이 수익을 얻고, 홍보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한 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작가, 칼럼니스트, 비즈니스 분야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왔다. 그의 인생 자체가 컬래버레이션이었던 셈. 그는 “대중들에겐 사랑받았지만 미술계 내부에서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며 “20년이 넘게 활동해오다보니 예술과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자’로서의 정체성을 나 스스로도 찾게 됐다”고 말했다. 1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를 찾았을 때 흡사 철물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못과 경첩, 파이프, 플러그 등이 쌓여 있었다. 그는 1995년부터 연결 도구인 못, 지퍼, 경첩, 똑딱단추, 옷핀 등의 오브제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문’이 아닌 ‘경첩’과 같은 연결하는 인간으로서의 성찰이 담긴 작업이다. 작가로서 한 씨는 삼성주택문화관을 설계하고, 대웅제약에 ‘못사람’ 조형물을 설치하는 협업을 하기도 했다. 연결자로서의 재능이 가장 빛난 것은 2012년부터 5년간 KOTRA에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려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일을 맡았을 때이다. 이 경험을 그는 지난해 ‘아트 콜라보 수업’(비즈니스북스)이라는 책으로 출간했고, 책은 경제경영서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컬래버레이션은 루이뷔통과 일본의 현대미술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 앤디 워홀과 앱솔루트 보드카, 제프 쿤스와 BMW의 아트카, LG그룹의 명화 캠페인, 현대카드의 갤러리카드 등 국내외 명품 브랜드들이 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작업이다. 한 씨는 “KOTRA에 찾아온 기업과 함께 제품을 보면서 상담하다 보면 어떤 아티스트의 작품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현실의 삶과 미술을 연결해서 해설해왔던 덕분에 생긴 재능이다. 그는 유럽시장에 생들깨기름을 판매하려는 한 중소기업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을 라벨에 장식할 것을 추천했다. 서양인에게 익숙한 밀레의 명화는 오랜 전통과 신뢰감, 친환경 이미지를 주었고, 러시아 업체와 20만 달러어치 수출계약을 맺는 성과를 거뒀다. 두통약 펜잘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 블로흐 바우어 부인’ 초상화 그림으로 박스를 포장해 대박이 났고, 몸매 관리를 해주는 의료기기에는 앵그르의 비너스 그림을 새겨 넣어 국제박람회에서 바이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코카콜라, 루이뷔통, BMW,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들도 신진 아티스트와 협업한 ‘리미티드 에디션(한정판)’을 내놓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변화의 노력이죠. 리미티드 에디션은 희소성 때문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인기를 얻으면서 제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줍니다.” 한 씨는 “전동칫솔, 스팀다리미 등이 모두 이종 간의 교배로 탄생한 히트상품”이라며 “협업은 예상치 못한 이종 간에 이뤄질 때 효과가 배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새우깡 티셔츠’ ‘바나나맛우유 화장품’ ‘메로나 칫솔’과 같이 식품기업이 패션과 화장품과 같은 기상천외한 조합으로 협업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꼽은 컬래버레이션의 기본 원칙은 ‘수평적 동행’이다. 한쪽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콜라주’(오려 붙이기)가 될 뿐이며, 브랜드와 아티스트가 서로 윈윈하는 파트너 관계로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어야 협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18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팝가수 비욘세가 협업을 한 적이 있어요. 루브르박물관이 비욘세의 뮤직비디오를 찍게 허락한 것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나리자 그림에만 몰려드는 현상을 타개할 묘수가 됐어요. 비욘세는 세계적 명소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기회를 얻었고, 루브르는 비욘세가 촬영한 17점의 명화를 찾아 투어 하는 새로운 관람 동선을 홍보할 수 있게 됐죠. 1억9000만 회가 넘은 유튜브 조회수 덕분에 2018년 루브르는 처음으로 관람객 1000만 명을 넘겼습니다.” 한 씨는 앞으로 고령사회를 맞아 휠체어와 지팡이, 환자복에 패션을 도입한 ‘메디컬 컬래버레이션’을 구상 중이다. “아트는 소비가 아니라 치유의 역할도 합니다. 허리를 감싸주는 복대가 꼭 검은색이어야 할까요? 누구나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잠시 휠체어를 탈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환자복이나 휠체어에 감각적인 컬러와 패션이 접목된다면 우울해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가족들이 함께하는 식탁은 치유를 받고,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잖아요. 매일 마주해야 하는 그릇에 어떤 그림을 그려 넣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새해 벽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광주요 매장에서 국내 최초의 ‘윈도페인팅 아티스트’ 나난(본명 강민정·41)을 만났다. 이곳에서는 나난 특유의 자연주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짙은 초록색 잎사귀와 하늘색 국화꽃을 그려 넣은 도자기 그릇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그는 도자기가 가마 속에 구워지면 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6차례나 테스트한 끝에 원하는 초록색을 찾아냈다고 했다. “과거에 선비가 우물가 아낙네에게 물을 청할 때 체할까 봐 잎사귀를 띄워 줬다잖아요? 국화는 서리가 내리는 날씨에도 꼿꼿하게 꽃을 피워냅니다. 험한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식탁에서만큼은 잎사귀를 띄워 줬던 사려 깊음, 국화의 강인함을 채우고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런 디자인을 하게 됐습니다.” 나난은 광주요뿐만 아니라 국내외 기업들과 활발하게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해온 대표적인 작가다. 대한항공, 록시땅, 신세계 SSG, 파스쿠찌, 스톤헨지 등 화장품, 패션, 유통기업까지 수많은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왔다. 서울예술대에서 광고창작을 전공한 나난은 1999년부터 스트리트 매거진 ‘런치박스’와 LG텔레콤에서 발행한 ‘카이’ 매거진에서 에디터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에서 출발한 그의 캔버스는 다양한 변신을 거듭했다. 먼저 유리창. 2004년에 친구 집 창문에 흰색 마커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밤중에 그렸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탄성이 흘러나왔다. 햇빛이 비친 그림자가 방바닥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냈던 것. 카피라이터였던 친구는 ‘윈도페인팅’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그는 국내 첫 윈도페인팅 아티스트로 활동하게 됐다. 그로부터 4개월 뒤에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유리창에 그림을 그렸고, 1년 뒤엔 뉴욕, 런던, 홍콩에서 윈도페인팅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역 공항철도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양쪽 유리벽 총 80m 구간은 가장 크고 긴 캔버스였다. 전 세계 대한항공 취항 도시의 풍경을 그린 이 작업은 꼬박 4박 5일이 걸렸고, 2013년에 ‘소비자가 뽑은 올해의 광고상’을 받았다. 프랑스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록시땅 본사에서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나난의 그림을 보고 연락이 왔다. “처음엔 스팸인 줄 알았다”는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프로방스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나난이 협업한 록시땅 핸드크림은 전 세계 면세점과 기내에 판매됐다. “엄마에게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제주도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 기내 구매도 했어요.” 그를 진정한 ‘효녀’로 느끼게 만들어준 작업은 2015년 신세계 SSG와의 협업이었다. 이번엔 캔버스가 노란색 배송차였다. “엄마는 아무리 비싼 화장품이나 명품 패션과 협업해도 브랜드를 잘 모르셨어요. 그런데 길을 가다가 노란색 배송차를 볼 때마다 ‘우리 딸이 한 작업’이라며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그는 우연히 자신의 서울 이태원 작업실 앞 계단 틈새에 피어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땅에 조그만 화분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른바 ‘나난 가드닝’ 프로젝트. 이번 캔버스는 시멘트 계단이었던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의 마을도시재생 사업의 매뉴얼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의 실험은 ‘롱롱타임플라워’로 이어졌다. 친구 결혼식 때 종이로 만든 꽃을 부케로 주었더니 “어머, 시들지 않는 꽃이네!”라며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전시에서 나난 꽃집을 열었다. 종이로 만든 꽃을 송이당 5000원에 팔아 관람객들이 자신만의 꽃다발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관람객 중 한 명이 암 투병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롱롱타임플라워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드린 사진을 보내주었어요. 병원에는 꽃을 사갈 수 없어 아쉬웠는데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셨다는 거예요. 또 생화 알레르기가 있던 아내에게 처음으로 꽃을 선물하고, 프러포즈를 했다는 사연도 감동적이었죠. 소통을 통해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 작가로서 행복했습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식탁은 치유를 받고,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잖아요. 매일 마주해야 하는 그릇에 어떤 그림을 그려 넣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새해 벽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광주요 매장에서 국내 최초의 ‘윈도 페인팅 아티스트’ 나난(41·본명 강민정)을 만났다. 이 곳에서는 나난 특유의 자연주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짙은 초록색 잎사귀와 하늘색 국화꽃을 그려 넣은 도자기 그릇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그는 도자기가 가마 속에 구워지면 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6차례나 테스트한 끝에 원하는 초록색을 찾아냈다고 했다. “과거에 선비가 우물가 아낙네에게 물을 청할 때 체할까봐 잎사귀를 띄워 줬다잖아요? 국화는 서리가 내리는 날씨에도 꼿꼿하게 꽃을 피워냅니다. 험한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식탁에서만큼은 잎사귀를 띄워 줬던 사려 깊음, 국화의 강인함을 채우고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런 디자인을 하게 됐습니다.” 나난은 광주요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기업들과 활발하게 콜라보레이션(협업)을 해온 대표적인 작가다. 항공, 록시땅, 신세계 SSG, 파스쿠찌, 스톤헨지 등 화장품, 패션, 유통기업까지 수많은 브랜드들과 협업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왔다. 서울예술대학에서 광고창작을 전공한 나난은 1999년부터 스트리트 매거진 ‘런치박스’와 LG텔레콤에서 발행한 ‘카이’ 매거진에서 에디터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에서 출발한 그의 캔버스는 다양한 변신을 거듭했다. 먼저 유리창. 2004년에 친구 집 창문에 흰색 마커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밤중에 그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탄성이 흘러나왔다. 햇빛이 비친 그림자가 방바닥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냈던 것. 카피라이터였던 친구는 ‘윈도 페인팅’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그는 국내 첫 윈도페인팅 아티스트로 활동하게 됐다. 그로부터 4개월 뒤에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유리창에 그림을 그렸고, 1년 뒤엔 뉴욕, 런던, 홍콩에서 윈도 페인팅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역 공항철도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양쪽 유리벽 총 80m 구간은 가장 크고 길었던 캔버스였다. 전 세계 대한항공 취항 도시의 풍경을 그린 이 작업은 꼬박 4박 5일이 걸렸고, 2013년에 ‘소비자가 뽑은 올해의 광고상’을 받았다. 프랑스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록시땅 본사에서도 SNS에 올라온 나난의 그림을 보고 연락이 왔다. “처음엔 스팸인 줄 알았다”는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프로방스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나난이 협업한 록시땅 핸드크림은 전 세계 면세점과 기내에 판매됐다. “엄마에게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제주도 가는 비행기 티켓도 끊어 기내 구매도 했어요.” 그를 진정한 ‘효녀’로 느끼게 만들어준 작업은 2015년 신세계 SSG와의 협업이었다. 이번엔 캔버스가 노란색 배송차였다. “엄마는 아무리 비싼 화장품이나 명품 패션과 협업해도 브랜드를 잘 모르셨어요. 그런데 길을 가다가 노란색 배송차를 볼 때마다 ‘우리 딸이 한 작업’이라며 세상에서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그는 우연히 자신의 이태원 작업실 앞 계단 틈새에 피어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땅에 조그만 화분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른바 ‘나난 가드닝’ 프로젝트. 이번 캔버스는 시멘트 계단이었던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의 마을도시재생 사업의 매뉴얼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고자하는 그의 실험은 ‘롱롱타임플라워’로 이어졌다. 친구 결혼식 때 종이로 만든 꽃을 부케로 주었더니 “어머, 시들지 않는 꽃이네!”라며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전시에서 나난 꽃집을 열었다. 종이로 만든 꽃을 한송이 당 5000원에 팔아 관람객들이 자신만의 꽃다발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관람객 중 한 명이 암 투병 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롱롱타임플라워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드린 사진을 보내주었어요. 병원에는 꽃을 사갈 수 없어 아쉬웠는데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셨다는 거예요. 또 생화 알레르기가 있던 아내에게 처음으로 꽃을 선물하고, 프로포즈를 했다는 사연도 감동적이었죠. 소통을 통해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 작가로서 행복했습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북유럽의 인테리어와 가구가 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됐냐고요? 화려한 장식보다는 기능을 우선시한 실용주의에 비결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같은 남유럽에서는 스타일을 중시했지만 스칸디나비아는 심플하면서도 편리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해 왔습니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웨덴의 디자인 그룹 ‘노트 디자인 스튜디오’의 설립 멤버이자 감각적인 공간 건축가로 유명한 다니엘 헥셰르(46). 그는 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 참석해 ‘하나로 모인 생각’을 주제로 북유럽 디자인 철학에 대해 강의했다. 헥셰르는 최근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1988년에 지어진 낡은 아파트를 리모델링하고 인테리어를 공개하는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보통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이 화이트나 그레이 등 심플한 색상이 주가 되는 것과는 달리, 그는 핑크와 블루 등 감각적인 색상을 믹스하고 다양한 소품을 활용해 경쾌하게 변신시켰다.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주거공간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한 셈이다. “인터넷을 통해 공개했는데 중국이나 브라질에서도 제 집을 봤다고 연락이 오더군요. 평소 고객 성향이나 예산상 제약 때문에 못했던 색채 표현이나 소재에 대한 실험을 맘껏 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입니다. 내 집이 어린 시절 갖고 놀던 공구박스나 실험연구소가 된 기분이었죠.” 보통 스칸디나비아에서 가구가 발전한 까닭에 대해서는 겨울철 추운 날씨에 실내생활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최근 유럽의 경제적 상황에 따른 해석도 추가했다. “원래 유럽에서 가구와 디자인은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가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런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래 지난 10년간 영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경제침체를 겪었어요. 이곳의 우수한 디자이너와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괜찮았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기업들과 앞다퉈 협업하면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됐죠.” 실제로 덴마크의 ‘무토’나 ‘헤이하우스’ 같은 디자인 브랜드는 ‘뉴(New) 노르딕’을 추구한다. 전통적으로 무채색 위주였던 북유럽 스타일 가구에서 벗어나 내추럴한 원색을 사용하기도 하고, 남유럽 스타일의 화려함을 가미하기도 한다. 헥셰르는 올해 5월에도 한국 기업과 디자인 협업을 논의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는 “한국은 도자기 같은 전통 공예품을 비롯해 케이팝, 패션 분야에서 슈퍼디자인 파워를 가진 국가”라며 “그런데 현대적인 가구, 인테리어, 생활용품 등에서 뚜렷한 디자인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한국인들이 가진 자신감과 정체성을 가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18명의 디자이너와 건축가 등으로 구성된 ‘노트 디자인 스튜디오’는 최고경영자(CEO) 없이 수평적으로 아이디어를 나누며 작업하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디자이너들 사이에는 수석, 시니어, 주니어, 인턴 같은 위계적 질서가 없다”며 “고참이라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인턴이 낸 아이디어가 더 좋은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보통 많은 건축·디자인 사무소 이름은 설립자 이름을 따서 짓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수십 명이 함께 협업을 통해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로젝트의 성공을 한 사람 이름으로 공을 돌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는 채용할 때 컴퓨터 기술보다 협업할 자세를 갖춘 사람을 먼저 뽑습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쌍천만 감독’에 오른 윤제균 감독(50)이 6년 만에 영화 촬영현장에 복귀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은 뮤지컬 영화 ‘영웅’이다. 내년 개봉 예정인 이 영화는 2009년 초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동명의 뮤지컬이 원작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 영화계에서 본격 뮤지컬 영화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러시아, 일본 등 해외 로케이션을 거쳐 강원 평창군 횡계리 인근에서 촬영 중인 윤 감독을 만났다. 》○ 이 시대의 영웅은 평범한 사람 “2012년 제가 운영하는 영화사 JK필름에서 ‘댄싱퀸’을 촬영할 때 배우 정성화 씨가 출연하던 뮤지컬 ‘영웅’을 보러 갔었어요. 큰 울림이 있어서 언젠가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국내에서는 생소한 뮤지컬 영화라서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해서 원작 뮤지컬을 영화 스크린에 맞게끔 창작을 했습니다.” ‘해운대’ ‘국제시장’ 등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재난과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 윤 감독의 장기는 이 영화에서도 발휘된다. 안 의사는 정성화 씨, 안 의사의 어머니이자 정신적 지주인 조마리아 역은 나문희 씨가 맡았다. ―현대사의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 고민은…. “영화적 상상력으로만 만든다면, 그 힘든 시기를 실제 지내오신 분들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거짓이 될 수 있다. 반면 고증에만 충실히 한다면 영화적 메리트가 없다. 현대사를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좀 더 가까운 내 이야기로 느낄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족에 대한 희생의 의미는 특별하다. 외국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6·25전쟁과 산업화 시대를 헤쳐 나온 아버지와 가족 이야기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은 이념 논란도 낳았는데…. “‘국제시장’이 개봉했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당신은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겪어온 현대사가 워낙 엄혹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 편, 네 편에 대해 너무 민감한 것 같다. 건강한 비평보다는 편 가르기가 먼저다. 이 작품이 독일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초청됐을 때는 달랐다. 외국인들은 이 작품을 이데올로기가 아닌 영화 자체로 감상을 하더라. 현지 관객들로부터 분단의 아픔과 유머가 섞인 휴먼드라마, 한국의 현대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웅’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젊은 세대는 산업화 시대의 용광로와 같았던 성장기에 살았던 아버지 세대에 비해 기회도 적고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 세대 간, 계층 간, 좌우 간 갈등이 벌어진다. 이 시대 필요한 영웅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다. 정치인은 정치를 잘해야 하고, 언론은 언론 본연의 비판을 잘해야 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 각자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영웅이고 애국자다.”○ “일장기말소사건 영화화 계획” ―올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만, 영화배급시장에서 디즈니에 1위를 빼앗기기도 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의 현주소는…. “한국 영화시장의 해외배급사 또는 대기업에 의한 독과점 문제는 늘 지적돼 온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생충’의 쾌거를 봤을 때 한국 영화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 세계에서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자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절반 가까이 되는 나라는 한국 외에는 찾기 어렵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창의성을 잃지 않는 감독들이 있어 희망이 있다.” ―우리 영화가 한 단계 발전하려면…. “한국영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천만 ‘대박 영화’보다는 30억∼40억 원의 제작비로 관객 300만∼400만 명이 드는 ‘중박 영화’가 꾸준히 나와야 한다. 블록버스터 작품은 소수의 검증된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를 쓸 수밖에 없다. 안전하게 가야 하기 때문에 도전할 수가 없다.” 현대사 인물에 관심이 많은 윤 감독은 JK필름에서 ‘손기정 영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던 사연도 들려줬다. “시나리오 자료를 준비하면서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해 조사하게 됐다. 1936년 8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전이 열리던 당시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사옥 앞에 조선 군중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군중들은 동아일보 편집국이 틀어놓은 라디오 생중계를 통해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메달 소식을 듣고 새벽 한 시까지 만세를 연창했다고 한다. 영화로 만들 때 이 장면을 꼭 재현해보고 싶다. 동아일보 100년 중에서도 일장기말소사건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가장 큰 라이벌은 신인감독” 윤 감독은 당초 광고회사를 다니다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한 달간 무급휴직을 해야 했다. 당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영화 ‘낭만자객’(2003년)으로 쓰디 쓴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는 2014년 ‘국제시장’을 촬영할 때 영화계에서 처음으로 전 스태프를 위한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다. “저도 영화계 현장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24시간 촬영, 2∼3주 연속 촬영 등 비인간적 대우가 너무 많았다. 당시 만들었던 표준계약서 내용은 3가지로 심플했다. △1주일에 한 번은 쉬자 △하루 12시간 이상은 찍지 말자. 그 이상 찍게 되면 추가수당을 주자 △촬영하다 다칠 수 있으니 4대 보험은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표준계약서를 쓰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물어보니까 인건비 추가수당으로 한 3억∼4억 원 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했다. 투자사와 의기투합해서 바꿨다. 그랬더니 촬영현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촬영 끝나고 저녁시간에 운동하고, 1주일에 하루는 쉬고, 밤 12시가 넘으면 초과수당을 두 배로 주니까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예산은 좀 늘었지만,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됐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제작할 때 지켜온 원칙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TV나 영화, 인터넷에는 무겁고, 잔인하고, 공포 가득한 콘텐츠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 것을 잘 만들 자신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장르도 아니다. 초기에는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같은 상업영화를 만들었는데,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보니 작품 선택의 기준이 신중해졌다.” 윤 감독의 스마트폰 메모장에는 깨알 메모들이 제목과 함께 분류돼 있다.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본 코믹한 사연, 사업 아이템, 신문에서 읽은 좋은 글귀 등 그때그때 떠오른 아이디어를 기록한 메모장이다. ―국내외에서 라이벌로 생각하는 감독이 있다면…. “가장 큰 라이벌은 ‘신인감독’이다. 아침마다 샤워하고, 밤에 세수할 때마다 생각한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인감독들 보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과연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동료들은 다 친구다.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봤기 때문에 라이벌 의식보다는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런데 정말 잘 찍는 신인감독들을 보면 겁난다. 영화는 한두 편 잘되면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도태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늘 준비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갈고닦는 수밖에 없다.” ―내년은 총선의 해다. 좌우, 세대 간 갈등이 우려가 되는데…. “‘내 안에 그놈’이라는 영화가 있다. 왕따를 당하던 뚱뚱한 고등학생과 엘리트 유부남 사장이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렸다. 영화 속 인물은 처지가 바뀌면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도 촬영할 때 감독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투자자의 입장, 스태프의 입장에서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방향을 찾게 된다. 정치하시는 분들도 국민 입장에서 역지사지하고, 여와 야, 노와 사가 서로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좀 유연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평창=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여기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생명이 중요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더해져 그들이 된다.” 위험천만한 세계의 무력분쟁 지역으로 파견됐던 이재헌 정형외과 전문의의 현장 이야기다. 그는 2015년 국경없는의사회(MSF) 회원이 된 후 2016년 4월에 요르단 람사에서 시리아 내전으로 팔다리가 터져나간 환자들을 만나고, 그해 7월에는 아이티 타바에서 매일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린 환자들을 수술했다. 2018년 6월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비무장 민간 시위대를 향한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쓰러진 사상자들을 치료했다. 의사들은 무력분쟁 지역으로 파견 갈 때마다 납치되거나,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사망 시 상속인을 지정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그의 일기에는 폭탄에 다리가 절단된 만삭의 17세 소녀 이야기 등 구호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겼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두껍고 검은 부리, 희고 동그란 눈. 귀여운 도도새가 정글 숲속에 숨어 있다. 울창한 나무 숲은 도시로 변하고 도도새는 넥타이와 양복바지 차림의 회사원이 된다. 정글처럼 복잡한 도시에서, 도도새는 또다시 길을 잃고 만다…. 아프리카 모리셔스섬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도도새’를 전문으로 그리는 작가 김선우(31·사진). 300여 년 전에 사라진 이 새를 찾기 위해 그는 2015년 진짜로 아프리카를 한 달간 다녀왔다. 그는 지난해 서울 을지로 조명 상가의 버스정류장에 밤마다 환하게 밝혀지는 도도새 그림을 그렸다. 또 한강의 마포대교 100m 구간에 국내의 멸종위기 새들과 함께 도도새를 그렸다. “도도새는 원래 날 수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모리셔스섬 천혜의 풍부한 먹이가 있는 자연환경에 익숙해지면서 날개가 퇴화했죠. 15세기에 이 새를 처음 발견한 포르투갈 선원들이 날지도 못하고, 도망도 가지 못하는 이 새를 바보라는 뜻의 ‘도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결국 1681년 마지막 도도새가 잡아 먹혀 멸종되고 말았죠.” 그는 날개를 잃어 멸종된 도도새의 사연을 인터넷에서 접한 뒤 “나 같은 현대인을 닮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이 되고 싶은 게 뭐냐고 하면 1등이 공무원이잖아요. 저도 작가 생활을 하면서 주변에서 ‘굶어 죽는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모두 사회가 정한 프레임과 기준에 무작정 자신의 삶을 맞춰 가면서 꿈을 너무나 쉽게 포기합니다. 새의 진정한 가치는 하늘을 경계 없이 날아다니는 자유인데 그걸 포기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날개의 깃털을 하나씩 뽑아내고 있는 것이죠.” 그의 도도새는 언제부턴가 사람의 몸통과 옷을 입기 시작했다. 명화 속의 장면을 도도새 얼굴로 패러디하고 새들이 ‘Save the DoDo’라고 쓰인 깃발을 흔드는 그림도 있다. 단순히 멸종위기 자연을 보호하자는 뜻도 되지만 ‘도도새’로 상징되는 자유와 꿈의 가치를 잃지 말자는 외침이기도 하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주류 경제학자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대침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주류 경제학 이론은 자산시장의 투기적 행태와 부적절한 정책 대응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했다. 경제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경제학계 외부자의 관점에서 역사적 실증적 측면에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한다. 저자는 1970년대 중반 이래 지난 수십 년간 주류 경제학을 지배해 온 이론에서 일곱 가지 주요 명제를 도출하고, 각각의 명제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본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수적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방임주의가 되고, 마치 자연과학의 일반이론이나 ‘이데올로기’로 숭상돼 왔다. 그러나 저자는 경제학은 매끈한 ‘과학’이 될 수 없으며 더러운 ‘현실’에 기반을 둔 실증과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공익법인 우리글진흥원(이사장 김광시)은 12일 서울 인사동 관훈클럽 신영기금회관에서 ‘2019 우리글 사랑 자치단체 대상’ 시상식을 가졌다. 김상호 경기 하남시장(사진)이 소통 부문 대상을 받았고 정순균 서울 강남구청장과 박일호 경남 밀양시장이 각각 문화와 관광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우리글 사랑 자치단체 대상’은 바르고 쉬운 공공 문장을 일선 행정에 구현한 자치단체에 주는 상으로 2013년 제정됐다. 올해 수상자는 각종 안내문과 홈페이지, 문화재 설명문을 알기 쉽고 정확한 글로 선보이고 공직자 국어 능력 향상에 애쓰는 등 공공문장 바로 쓰기에 모범을 보였다. 이 상은 ‘공공문장 바로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공익법인 (사)우리글진흥원에서 바르고 쉬운 공공언어 사용으로 소통을 촉진하고 국어 진흥에 애쓰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를 응원하기 위해 2013년 제정해 해마다 시상하는 상이다. ‘공공문장 바로쓰기 운동’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우리말글이 훼손되고 있는 가운데, 영향력이 큰 공공기관만이라도 공공언어 사용에서 전 국민의 모범이 되게 하자는 운동이다. 공공기관이 만드는 공문서 등을 사전 감수하고, 공직자 국어 능력 향상 교육을 실시하며, 잘못된 공공문장을 시민들이 바로잡도록 하고 있다. 전승훈 문화전문 기자raphy@donga.com}
《오렌지색 눈썹, 현란한 무늬가 새겨진 원피스, 그리고 볼에 연지곤지를 찍고, 모자를 쓴 여인이 나타났다. 총천연색 메이크업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의상은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러시아 인형처럼 보이려고 한 패션 콘셉트입니다. 그런데 오다가 친구가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전통 결혼식에서 쓰는 모자(족두리) 사진을 보내줬지 뭐예요. 너무 예뻐서 눈이 휘둥그레져 걷다가 그만 꽈당 넘어졌죠!” 》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18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강연회를 가진 베선 로라 우드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에르메스, 발렉스트라, 토리버치, 로젠탈, 페리에주에 등 글로벌 브랜드와 연이어 협업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는 화려한 컬러와 패턴을 조합한 쇼윈도와 가구, 가방과 주얼리까지 다양한 디자인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2014년 에르메스 윈도 프로젝트는 화가 앙리 루소의 정물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작품을 2D에서 3D로 바꿔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어요. 에르메스는 ‘노동의 과실’이라는 문구를 내걸 정도로 핸드메이드와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브랜드예요. 그런 정신이 담긴 오브제와 디스플레이 세트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토리버치와 협업한 카나페 시리즈는 ‘가짜 음식’을 테마로 만든 설치물이다. 치약을 짜놓은 듯 독특한 무늬로 디자인한 발렉스트라 가방에는 ‘여러 색이 레이어링된 나폴리 아이스크림과 1970년대 아버지의 넥타이, 여기에 약간의 민트 치약을 섞은 어딘가’라는 흥미로운 설명이 붙어 있다. 그는 “사람들은 자연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산업화도 추구하는 이중적인 발전을 해왔다. 저는 늘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럭셔리 브랜드가 흔히 주목하지 않은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영국 왕립예술학교 재학 시절부터 맨홀 뚜껑이나 래미네이트, 대리석, 벽돌처럼 일상의 사물을 관찰해서 패턴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왔다”는 설명이다. 또한 그는 “데이비드 호크니(영국 유명 화가)가 1980년대 중반 팩스 머신으로 출력한 패턴으로 작품을 만들었듯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나도 여러 도구에 도전해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복사기 위에 살라미(말린 햄)를 놓고 고기의 마블링을 수차례 반복해서 카피해 봤어요. 복사기의 채도를 조절해 빨강, 파랑, 초록 등 특정 색만 강조해서 복사하면 끊임없이 새로운 패턴이 나왔죠. 또 폐목재를 살펴보다 ‘갈색도 모두 같은 갈색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어요. 모든 사물에 접목된 ‘세컨더리 컬러(Secondary Colour)’를 탐구하면서 나만의 색채 조합을 찾게 됐습니다.” 그녀는 각국 여행에서 찾아낸 컬러와 패턴을 디자인에 활용하기도 한다. 멕시코 과달루페의 성모마리아 바실리카 성당 창문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영감을 받은 ‘과달루페 소파’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강남구 봉은사, 중구 을지로, 종로구 광장시장 등을 찾았다. “봉은사의 초록색 문과 빛바랜 살구빛 건물 색채가 너무 좋았어요. 재래시장에서 본 옷과 섬유, 건물 지붕, 을지로에서 본 파이프와 조명 등에서 무궁무진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몇 년 안에 한국 등 아시아에서 발견한 컬러와 패턴을 활용한 디자인 작품을 시도해 보겠습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오렌지색으로 칠한 눈썹, 현란한 무늬가 새겨진 원피스, 볼에는 연지곤지를 찍고 모자를 쓴 여인이 나타났다. 총천연색 메이컵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의상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러시아 인형처럼 보이려고 한 패션 콘셉트예요. 그런데 오다가 친구가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전통 결혼식에서 쓰는 모자(족두리) 사진을 보내줬지 뭐예요. 너무 예뻐서 눈이 휘둥그레져 걷다가 그만 꽈당 넘어졌죠!”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18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강연회를 가진 베단 로라우드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에르메스, 발렉스트라, 토리버치, 로젠탈, 페리에 주리 등 명품 브랜드와 연이어 협업을 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는 화려한 컬러와 패턴을 조합한 쇼윈도와 가구, 가방과 주얼리까지 다양한 디자인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2014년 에르메스 윈도 프로젝트는 화가 앙리 루소의 정물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작품을 2D에서 3D로 바꿔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어요. 에르메스는 ‘노동의 과실’이라는 문구를 내걸 정도로 핸드메이드와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브랜드예요. 그런 정신이 담긴 오브제와 디스플레이 세트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토리 버치와 협업한 카나페 시리즈는 ‘가짜 음식’을 테마로 만든 설치물이다. 치약을 짜놓은 듯한 독특한 무늬로 디자인 된 발렉스트라 가방에는 “여러 색이 레이어링된 나폴리 아이스크림과 1970년대 아버지의 넥타이, 여기에 약간의 민트 치약을 섞은 어딘가”라는 흥미로운 설명이 붙어 있다. “어릴 적부터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가짜 음식’을 갖고 잘 놀았어요. 진짜와 가짜가 모호한 가치를 지닌 물건에 항상 흥미를 갖고 있죠. 사람들은 자연을 좋아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산업화 개발을 추구해왔기 때문이죠. 저는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해요.” 그는 럭셔리 브랜드가 흔히 주목하지 않은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영국 왕립예술학교 재학시절부터 맨홀 뚜껑이나 라미네이트, 대리석, 벽돌처럼 일상의 사물을 관찰해서 패턴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왔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1980년대 중반 팩스 머신으로 출력한 패턴으로 작품을 만들었듯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나도 다양한 도구에 도전해왔다”고 말했다. “베니스에서 복사기 위에 살라미(말린 햄)를 놓고 고기의 마블링을 수차례 반복해서 카피해봤어요. 복사기의 채도를 조정해 빨강, 파랑, 초록 등 특정색만 강조해서 복사를 하게 되면 끊임없이 새로운 패턴이 나왔죠. 또 재활용 폐목재를 살펴보던 중 ‘갈색도 모두 같은 갈색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어요. 모든 사물에서 연관된 ‘세컨더리 컬러’(Secondary Colour)를 탐구하면서 나만의 색채 조합을 찾게 됐습니다.” 그는 영국 뿐 아니라 각국을 여행하던 도중 찾아낸 컬러와 패턴을 디자인에 활용하기도 한다.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 성당 창문의 스테인드글래스에서 영감을 받은 ‘과달루페 소파’가 대표적이다. 그는 “런던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린 작품과 멕시코 과달루페, 치아파스 등을 여행하면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보면 색깔과 스타일이 대조적이다. 다양한 작품들은 고유의 색깔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방문기간에도 강남구 코엑스 앞에 있는 사찰인 봉은사, 을지로 조명상가, 광장시장 등을 찾아 이방인에게는 신기하게만 보이는 풍경들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봉은사에 갔었을 때 스님들의 독경소리, 초록색 문과 빛바랜 살구빛 건물, 특이한 나무 조각들이 너무 좋았어요. 다음날에는 을지로와 광장시장 등을 걸으면서 사람들이 옷을 수선하고, 기계를 고치는 장면을 몇 시간 동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쳐다봤어요. 재래시장에서 본 옷과 천의 색상과 무늬, 건물 지붕, 파이프와 조명 등이 굉장히 특이해서 무궁무진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향후 몇 년 안에 한국 등 아시아에서 발견한 컬러와 패턴을 활용한 디자인 작품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법무법인 웅빈의 채정석(63) 대표변호사가 6일 중앙중·고등학교 교우회 정기총회에서 제 19대 중앙교우회장으로 선출됐다. 부장검사 출신인 채 변호사는 한화그룹 경영기획실 사장 법무실장, 법무법인 렉스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에이펙스 대표변호사를 거쳐 2014년부터 법무법인 웅빈의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별’ 속 남자는 비통한 얼굴로 한쪽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이렇게 심장을 마음과 연결짓는 은유는 우리 일상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1982년 12월 1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말기 심부전 환자이자 은퇴한 치과의사인 바니 클라크가 인류 최초로 인공심장을 이식받았을 때, 그와 서른아홉 해를 함께한 부인은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이가 여전히 저를 사랑할까요?” 미국 심장내과 의사인 저자는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기관인 심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대의학에서 중세, 현대의학에 이르기까지 ‘과학적인 심장’뿐 아니라 자신의 개인사를 비롯해 사회심리학적 의미의 ‘정서적 심장’까지 맛깔나게 풀어낸다. 살아 있는 심장은 쉬지 않는다. 다만 뛸 뿐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심장은 거의 30억 번을 박동한다. 박동할 때마다 심장은 피가 총길이 16만여 km에 이르는 혈관을 순환하도록 뿜어낸다. 일주일 동안 심장을 통과하는 혈액을 모으면 웬만한 집 뒷마당의 수영장쯤은 너끈히 채울 수 있을 정도. 오늘날 심장은 감정의 중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누가 뭐래도 심장은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대변한다. 조금만 슬퍼하고, 화를 내도 심장은 거침없이 두근댄다. 이 때문에 저자는 “심장은 삶과 죽음을 부여하는 동시에 ‘은유’를 끊임없이 부추겨왔다”고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 문장(紋章)에 그려진 심장은 충정과 용기의 상장이었다. 심장은 로맨틱한 사랑의 중심이기도 하다. 사랑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트 모양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모양은 성심(聖心), 즉 예수의 신성한 심장으로 믿어진다. 9·11테러 현장에서 응급의료진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심장질환의 사회심리적 요인도 잊지 않는다. 저자는 “심장은 일종의 펌프다. 그러나 감정적인 펌프다”라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슬픔은 극심한 심근 손상을 야기할 수 있다. 심장박동과 같은 무의식적 과정을 조절하는 신경은 괴로움을 감지해 비적응성 투쟁도피반응을 유발함으로써 혈관에 수축신호를 보내고 심장을 급속히 뛰게 하고 혈압을 상승시켜, 궁극적으로는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 “심장은 집과 같다. 방과 문이 있다.(…) 산소를 소진한 혈액은 우심방으로 돌아와 역류방지 장치를 통과한 뒤 우심실로 들어간다. 우심실은 혈액을 폐로 내보낸다. 산소를 충전한 혈액은 폐를 떠나 좌심방으로 들어가고, 또다시 역류방지장치를 거쳐 좌심실로 들어갔다가 대동맥을 통해 전신으로 내보내진다. 온몸을 흐른 혈액은 두 개의 대정맥에 모여 우심방으로 되돌아간다. 다시금 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혈액순환의 원리는 17세기 초반에야 비로소 확인됐다. 심장의 실체를 알기 위해 인류는 금기를 깨고 관찰을 감행해왔다. 누군가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려가며 탐구해온 결과 인공심장까지 개발하는 역사가 책에 담겼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가을,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던 장인어른의 심장박동수가 점점 줄어들던 순간이 떠올랐다. 결국 계기판에 ‘0’이라는 숫자가 떠오르고, 그래프가 일직선이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 책은 심장을 다룬 글이지만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던져준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