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윌리엄 태프트 미국 대통령은 특이하게도 대통령을 지낸 뒤 연방대법원장이 됐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 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태프트는 구한말 일본의 사실상 조선 속국화(屬國化)를 묵인한 가쓰라(桂)-태프트 밀약의 장본인이다. 대통령으로서는 별로였지만 대법원장은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에서 당시만 해도 의원이나 주지사 혹은 장관을 하다가 대법관이 되는 경우는 흔했다. ▷미국도 법원의 전문성이 강화돼 1975년 이후 임명된 대법관은 모두 연방항소법원(일종의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한 경험을 갖고 있다. 최근에 다시 예외가 생겼는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임명한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이다. 케이건은 하버드 로스쿨 최초의 여성 학장 출신으로 임명 당시 법무부 송무차관이었지만 법관 경력은 전혀 없다. 그러나 법조일원화가 된 미국은 법관이라도 검사 변호사 교수 관료 등 다양한 경력을 쌓는 경우가 많다. ▷양 대법원장은 최근 차한성 법원행정처장 후임 대법관으로 조희대 대구지법원장을 임명 제청했다. 법원행정처장은 재판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대법관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구성원 14명이 판사 출신 일색이다. 대법원은 양창수 대법관은 교수 출신이고, 박보영 대법관은 변호사 출신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양 대법관은 판사를 교수로 내보내 연구생활을 하게 한 뒤 다시 대법관으로 불러들인 대표적 인물이고, 박 대법관은 부장판사까지 17년간 판사 생활을 했다. 대법관 모두 법원의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대법원에 검사 몫 대법관 자리가 하나 있었으나 안대희 대법관 이후 공석이다. 검사도 법조 3륜(輪)을 구성하는 한 바퀴다. 사법연수원에서 가장 우수한 몇 명은 수료와 동시에 로펌으로 직행한다. 교수 중에도 우수한 인물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는 한번 판사가 되면 대체로 판사만 쭉 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 3명을 빼고는 모두 50대 후반의 서울대, 판사 출신 남성이다. 대법원 구성원을 보다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청나라 왕조는 외교란 걸 몰랐다. 변방 오랑캐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하사품을 주는 형식의 조공을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된통 당하고 국제무대로 끌려나와 근대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들과 하나씩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1882년 조선과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란 걸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영사 격인 진수당이 처음 파견됐다. 그가 머물기 위한 공관을 지은 곳이 오늘날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 자리다. ▷청 말에 실권자가 된 원세개는 조선에서 정치적 입지를 닦았다. 약관의 원세개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를 끌고 와, 김옥균이 일본을 업고 일으킨 정변을 진압하고 진수당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그를 당시 서울의 서양 외교관들은 총독이라고 불렀다. 원세개는 진수당이 지은 공관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10년간 머물렀다. 그곳을 지키는 청나라 병사의 횡포가 어찌나 심한지 앞길에는 낮에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중국대사관이 새로 지어져 그제 개관식을 했다. 그 자체로는 축하할 일이다. 대사관은 업무동 숙소동 등 두 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업무동은 10층, 숙소동은 24층이다. 주변에 나지막한 상가들만 밀집해 있어 이 고층의 건물은 매우 위압적으로 보인다. 외국 공관이라 도시 계획상의 건축 규제를 받지 않았다. 또 현대식 고층 건물의 꼭대기에 중국 전통식 기와 형태의 지붕을 얹어놓아 보기에 따라서는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준다. ▷프랑스 파리의 중국대사관은 옛 전통 석조건물에 입주해 있다. 영국 런던의 중국대사관은 영국 특유의 벽돌 건물 양식의 외관을 갖고 있다. 독일 베를린의 중국대사관은 본에서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신축됐지만 베를린의 전형적인 건물이다. 일본 도쿄의 중국대사관도 평범한 일본 관공서 모양이다. 미국 워싱턴의 중국대사관은 노출 콘크리트 건물 양식이어서 세련된 느낌을 준다. 한국의 중국대사관은 층고(層高)와 외관이 위압적이어서 구한말 원세개의 모습이 어른거린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여고생인 딸이 진중권의 책 ‘현대미학 강의’를 사 가지고 왔다. 학교 추천 도서란다. 그래서 훑어보다가 (진중권의 트위터식 표현을 빌리자면) 뿜었다.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책 ‘회화의 진실’은 다음과 같은 시적(詩的)인 말로 끝난다. ça vient de partir. ça revient de partir. ça vient de repartir. 진중권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것은 막 떠났다. 그것은 떠나기 위해 돌아왔다. 그것은 막 다시 떠났다. ▷올바른 번역은 이렇다. 그것은 막 떠났다. 그것은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것은 막 다시 떠났다. 여기서 그것(ça)은 유령을 뜻한다. 유령은 무덤으로 갔다가 돌아오는(revenir) 것이라고 해서 revenant이라고도 불린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허름한 구두 그림을 해설하면서 그림 자체에서는 알 수 없는 ‘대지와 농민의 정신’이라는 유령을 불러들이고, 데리다는 그 유령을 다시 떠나보내며 그림은 그림 자체로 보자고 권한다. ▷진중권의 대표작은 그가 그제 출간 20주년이라고 기자간담회까지 연 ‘미학 오디세이’다. 8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글솜씨는 있다. 스스로는 대학 시절 노동자 문화운동을 하면서 노동자를 상대로 글을 써본 경험이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노동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목사를 아버지로 둔 프티부르주아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교양물을 접해 본 사람 특유의 박람강기(博覽强記)는 글 읽기에 자극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한다. ▷‘미학 오디세이’ 이후의 그의 책이 비슷한 데가 많다. ‘미학 오디세이’는 1994년 1, 2권이 처음 나왔다. 3권은 10년 뒤인 2004년 나왔다. 3권에는 한 해 전에 낸 ‘현대미학 강의’의 상당 부분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유령 타령만 해도 하도 여러 책에 출몰해서 지겨울 정도다. 그는 현대 예술의 특징 중 하나로 복제를 들고 있는데 그가 쏟아내는 책들이 색깔만 살짝 바꾼 워홀의 실크스크린을 보는 것 같을 때가 종종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글렌데일 시에는 한국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것과 똑같은 위안부 소녀상이 하나 서 있다. 지난해 이 소녀상이 건립될 당시 한국 언론 못지않게 일본 언론도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동상에 흔들리는 일본계’라는 제목으로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본계보다 인구가 많은 한국계의 로비력은 증가하고 있고, 위안부에 대한 일본계의 의견은 분열돼 있다고 전했다. ▷‘위안부를 강요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일본 정부는 미국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지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 간 논란으로 묶어 두고 한국 측 주장은 무시하려는 전략이다. 미국 땅의 소녀상이 그 전략에 구멍을 냈다. 중국 정부는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기념물을 허용하기로 했다. 기념물은 표지석 설치에서 최근 동상 건립으로 격상됐다. 한국 측 주장이 제3국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본은 불안하다. ▷지난달 백악관 인터넷 청원 사이트에는 “일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소녀상을 철거해 달라”는 청원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이 청원에 지금까지 12만여 명이 지지 서명을 했다. 백악관 규정에 따르면 어떤 청원이든 10만 명 이상이 지지하면 관련 당국은 답변을 해야 한다. 이에 질세라 4일 ‘소녀상을 보호해 달라’는 반대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에 8일 현재 2만5000명이 지지 서명을 했다. ▷소녀상 건립을 주도한 한인단체 가주포럼은 “백악관 청원보다 글렌데일 시의원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시 공원에 어떤 조형물을 설치할지는 연방정부가 아니라 시 관할이다. 지난해 7월 9일 소녀상 건립을 결정하는 글렌데일 시의회 회의장에 다수의 일본계가 방청석을 차지하고 부결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녀상 건립안은 찬성 4 대 반대 1로 가결됐다. 누가 반대했는지 알 수 없으니 시의회(citycouncil@ci.glendale.ca.us)로 e메일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작가 김별아는 ‘가미가제 독고다이’라는 소설을 썼다. 독고다이는 특공대(特攻隊)의 일본어 발음을 들리는 대로 쓴 것이다. 작가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훈련 과정을 묘사하다가 이런 말을 내뱉는다. “쪽팔림은 수컷들의 숨이 붙어 있는 동안 끊임없이 그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쪽팔려서 차마 도망치지 못하고 쪽팔릴까 봐 벌벌 떨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던 인류 역사 속의 수많은 수컷들에게 위로와 동정을.” ▷돌아올 기름도 채우지 않고 자살 비행을 하는 가미카제 특공대는 현실에서는 누구에게나 거부되지만 상상 속에서는 집요하게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일본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를 다룬 ‘영원의 제로’라는 소설이 450만 부 이상 팔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해 세밑에 도쿄 롯폰기에서 영화를 본 뒤 기자들에게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극우 정치인 아베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한 해 마무리다. ▷영화는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누구나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며 기꺼이 자폭 공습에 뛰어들었다는 상투적 설정을 일단 거부한다. 주인공이 뛰어난 비행기술을 익히는 것은 오로지 살아 돌아가겠다는 열망 때문이다. 생환에 집착하는 그를 동료들은 비겁한 놈이라고 욕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투에서 매번 살아 돌아온다. 천재적 비행기술 덕분에 특공대 교관으로 살아남았던 그도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 결국 특공대에 편입돼 희생되고 만다. ▷영화는 충분히 수컷이 되지 못한 한 특공대원을 통해 전쟁의 광기에 희생되는 인간을 그린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인간에 초점이 맞춰짐으로써 일본인이 일으켰고, 그래서 일본인이 직시해야 할 전쟁에 대한 역사적 책임은 회피되는 것 같아 불편하다. 원작 소설을 쓴 햐쿠타 나오키는 난징 대학살을 부인하고 평화헌법도 부정한다. 아베 총리는 햐쿠타의 열렬한 팬이다. 정치의 아베는 문학의 햐쿠타를, 문학의 햐쿠타는 정치의 아베를 마케팅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북한 김정은의 장성택 처형을 정치학 이론이나 저널리즘적 접근으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장성택은 김정은에게 실질적 위협이 돼서 처형된 것일까. 오히려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간단히 제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 전개된 사태와 더 잘 맞아떨어진다. 장성택의 몇몇 심복이 처형되거나 망명하긴 했지만 장성택 라인은 대체로 건재하다. ‘위협-제거’라는 상투적 틀이 여기에 잘 적용되지 않는다. 공개체포 나흘 만의 전격적인 장성택 처형이 알려지자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을 드러낸 것이라느니 김정은 정권 붕괴의 서막(序幕)이라느니 하는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장성택 처형은 2인자 없는 김정은 유일 영도 체제의 완성을 알리는 것인지 모른다. 장성택이 스펙터클(spectacle)한 처형의 대상으로 뽑힌 것은 그가 백두혈통(김일성 가계) 내에서 차지한 애매모호한 위치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혈통에서 고모부와 이모부는 언제든지 배제될 수도, 포섭될 수도 있는 경계선상의 가족이다. 장성택은 이전에도 숙청됐다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장성택은 어린 김정은을 위해 김정일이 특별히 예비한 희생제물, 곧 처형되기 위해 만들어진 2인자였을 수 있다. 김정일은 죽기 전 여동생 김경희와 매제 장성택 그리고 후계자 김정은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으면 경희와 매제가 정은이를 돌봐라. 정은이 너도 믿을 것은 고모와 고모부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를 대하듯 고모와 고모부를 모셔라.” ‘건성건성 박수를 친 오만불손한’ 장성택은 이런 유훈이 없었다면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경희와 장성택을 돌려보낸 후 김정은만 몰래 따로 부른다. “장거리 미사일 시험과 3차 핵실험 준비를 해뒀다. 그걸로 너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라. 그리고 나의 탈상(脫喪) 전에 장성택을 죽여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수령임을 보여줘야 한다.” 중국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유훈을 돌에 새겨 황실 깊숙이 숨겨놓았다. 황제가 되는 사람만이 유훈을 볼 수 있었다. 그 석각처럼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남긴 비밀 유훈이 있었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김정은뿐이다. 그것을 저널리즘적으로 추적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니 익숙한 신화적 내러티브(narrative)에 따라 상상해볼 뿐이다. 갓 서른 김정은의 뒤에 공포정치의 달인 김정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유훈통치를 실행하고 있다. 현실과 이념에서 모두 정당성을 상실한 체제는 공포에 의해서만 지탱할 수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전(前)근대 시대 공포를 조장해 인민을 통치하는 방식의 하나인 잔인한 공개처형의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장성택의 처형은 정확히 말하면 공개되지는 않았다. 회의 도중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 장성택의 모습과 판결문 끝의 ‘판결은 즉시 집행되었다’는 말만 보였을 뿐이다. 때론 보이는 처형보다 보이지 않는 처형이 더 무섭다. 기관총으로 쏴 죽이고 화염방사기로 태워 없앴다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흉흉한 소문은 그 공포의 크기를 보여준다. 죽은 김정일과 산 김정은이 추구한 것은 신화적 공포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의 사우론이나 ‘해리 포터’의 볼트모트가 주는 것과 같은 절대 공포. 그러나 절대 공포의 순간을 만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조울증이 찾아온다. 더이상 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우월감은 뒤집으면 이제 모두가 날 두려워하기만 한다는 낭패감이 된다. 마식령 스키장 개장식에서 조증의 김정은을, 김정일 중앙추도대회에서는 울증의 김정은을 봤다. 김정은이 수령 수습을 마쳤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여야가 국가정보원 개혁 특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합의는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국정원의 자율 개혁 대신 국회에 의한 타율 개혁을 하겠다는 의미다. 댓글 사건으로 드러난 국정원 정치개입 악습을 확실하게 근절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다만 국가안보의 첨병인 정보기관을 다루는 만큼 정략을 벗어난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의 정보기관은 국내파트와 국외파트가 구별돼 있고 국내외 파트를 막론하고 정치개입을 단절한 지 오래다. 그러나 국정원은 민주화 이후에도 독재시대의 악습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국정원의 피해자였던 야당조차 집권한 이후에는 불법 도청 등의 유혹에 빠졌다. 특위는 국정원이 다시는 정치개입을 못하도록 국정원을 환골탈태시켜야 한다. 불법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거부한 내부고발자를 적극 보호하는 방안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민족이 둘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대북 정보전은 국외와 국내가 긴밀히 연결돼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국정원을 선진국형 정보기관으로 바꾸되 인터넷 세상의 국경 없는 심리전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특위가 논의해 올해 안에 입법화하기로 한 내용 중 불안한 대목도 적지 않다. 정보위 상설 상임위화는 국가안보기관이 야당 눈치만 보다가 할 일을 못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비밀열람권 보장도 정보위 속기록마저 인터넷에 유출되는 상황에서 걱정이 없지 않다. 사이버심리전 규제는 북한의 국경 없는 사이버 공작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까지 방해해서는 곤란하다. 국정원 개혁이 국정원을 무력화시키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법률안 처리권까지 갖고 있는 특위의 위원장 자리는 민주당에 돌아갔다. 다만 특위 위원은 여야 동수로 구성하기 때문에 여야 합의를 못하면 법률안 처리는 힘들 것이다. 여야가 어느 때보다도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이유다. 민주당은 특위 위원 임명에서부터 강경파를 배제하고 국가 이익을 우선시해야 한다. 새누리당도 현 국정원 체제를 옹호하지만 말고 선제적인 개혁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합의는 민주당이 당연히 해야 할 예산안 처리를 볼모로 삼아 이룬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면도 없지 않다. 그래도 특검보다는 특위가 미래지향적이다. 1년 가까이 정국을 교착시킨 국정원 댓글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에 맡기고 국정원 개혁을 위해 여야가 최선의 방안을 내놓길 바란다.}
검찰이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婚外子) 의혹을 받은 채모 군의 가족관계등록부 조회를 서울 서초구청 조이제 행정지원국장에게 부탁한 혐의로 청와대 조모 행정관을 곧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조 행정관이 누구의 부탁을 받고 채 군 가족부를 조회하려고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채 군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과정에 청와대 행정관이 직접 관련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대한 사안이다. 조 행정관은 6월 11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조 국장에게 채 군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본적지를 알려주면서 내용이 정확한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검찰이 국가정보원 댓글과 관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기 사흘 전이다. 당시 검찰 수장(首長)이던 채 전 총장은 9월 채 군이 혼외자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퇴했다.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은 채 군의 가족부 내용이나 출입국 기록 같은 구체적인 자료와 함께 제기됐다. 이 때문에 검찰 수사에 불만을 품은 외부기관이 채 전 총장을 ‘찍어내기’위해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거론됐다. 조 행정관은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 비서 세 명 중 한 명인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 밑에서 일하고 있다. 서울시 공무원 출신인 조 행정관은 청계천 복원사업팀장으로 근무하다 이명박 정부 초기 청와대로 옮겼고 2010∼2011년 대통령실 시설관리팀장을 맡았다. 지난해 4월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현 박근혜 정부에서 총무시설팀 총괄행정관을 맡고 있다. 청와대의 시설과 예산을 관리하는 조 행정관이 채 군의 신상정보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검찰은 조 행정관이 누구의 부탁을 받고 조회를 요청했는지 규명해야 할 것이다. 조 행정관의 배후를 예단하는 것은 성급하다. 조 행정관은 원 전 원장과 서울시에서 같이 근무한 적도 있고 조 국장 역시 원 전 원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두 사람이 함께 원 전 원장 측의 채 전 총장 ‘뒷조사’를 도왔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현 청와대 행정관이 국민의 사생활을 캐는 데 개입했다는 것은 국가 권력의 남용에 해당한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채 전 총장의 도덕성 여부와는 별개로 국가기관에 의한 국민의 사생활 침해는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일부 신부들의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미사 파문 이후 조계종 승려와 개신교 목사들도 잇따라 시국선언을 했다. 조계종에서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주도로 대통령의 대(對)국민 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앞으로 사퇴까지 주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개신교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가 주도해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조계종 실천불교승가회, 개신교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는 이른바 야권 원탁회의의 일원으로 민주당과 통합진보당 간 연대 성사에 앞장섰고 지난 대선에서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종교 조직이다. 이들의 시국선언이 천주교 조계종 개신교 전체의 의사 표시가 아니라는 것쯤은 국민들도 모르진 않는다.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고, 종교인들도 그에 대해 의견 표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누구보다도 신중하게 발언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 말고는 누구도 못하니까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태도로, 그것도 반대나 비판 일변도로 릴레이 하듯 시국선언을 이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종교 본연의 소명보다는 세속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성직자들은 그동안 정치 외에도 광우병 사태, 4대강 문제,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 진영 논리가 개입된 온갖 문제에 참견해왔다. 성직자들이 나서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잘못이 있으면 시정해 나갈 능력을 갖고 있다. 주민과 전문가들이 논의하면 될 일에 ‘생명사랑’이니 ‘생명평화’니 하는 애매모호한 구호를 앞세워 성직자가 끼어들면 타협은 요원해진다. 이번 주말에는 송전탑 건설 반대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으로 몰려갈 예정이다. 이를 주도하는 사람은 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다. 제주해군기지는 어렵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공사장 앞에서는 매일 천주교 신부와 수녀가 주도하는 생명평화미사라는 것이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국가적 쟁점 사업마다 종교인이 나서 제동을 거는 나라도 드물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종교까지 걱정을 해야 하는가. 종교는 세속의 일은 세속에 맡겨두고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지난번 칼럼에서 ‘표절 의혹 조국 박사논문 읽어보니’라는 제목으로 조국 서울대 형법 교수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박사학위 논문의 표절 의혹을 에둘러 다뤘다. 그 의혹은 애초 변희재 씨 측에서 제기한 것이지만 뒤늦게 논문을 본 나로서도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대는 버클리대 로스쿨의 소견을 바탕으로 표절 혐의가 없어 자체 조사에 착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서울대의 결정은 무책임한 것이다. 이번에는 에두르지 않고 표절의 증거를 제시하겠다. 조 교수의 논문은 형사소송의 증거배제 규칙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 독일 일본의 사례를 비교한다. 나는 변 씨 측이 다루지 않은 독일편을 꼼꼼히 읽었고 하버드대 크레이그 브래들리 교수의 논문 ‘독일에서의 증거배제 규칙’을 베껴 쓴 문장을 적지 않게 발견했다. 조 교수의 논문 206쪽 ‘the taking of spinal fluid from a suspect to determine his possible insanity, through generally authorized by Section 81a of StPO, was out of proportion to the misdemeanor charge against the suspect(혐의자의 정신이상 여부를 가리기 위한 척수액 추출은 독일 형사소송법 81a조가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바이지만 혐의자가 받고 있는 경죄 혐의와는 비례가 맞지 않는다)’는 기술 중 ‘Section 81a of StPO’라는 대목이 브래들리 논문에서 ‘the Code of Criminal Procedure’라고 되어 있는 것만 빼고는 두 논문의 기술이 똑같다. 다른 대목은 둘 다 독일 형사소송법을 뜻하며 이 문장은 사실상 29개 단어가 연속해서 일치한다. 그러나 조 교수는 독일어로 된 판결문을 직접 보고 정리한 것처럼 쓰고 있다. 베낀 문장을 일일이 거론하려면 이 칼럼으로는 부족하다. 조 교수는 본문과 각주에서 출처를 밝히고 브래들리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출처 없이 브래들리의 표현을 갖다 쓴다. 조 교수가 브래들리를 베낀 곳은 모두 독일 판결을 인용한 부분이다. 조 교수는 판결의 사실관계를 요약한 곳으로 다른 영어 번역이 어렵고 지도교수와의 협의하에 각주를 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지 서울대가 직접 조사하고 판단할 일이다. 독일어가 잘 안되니 영어 논문을 베끼는 것이다. 당연히 독일어 문헌 인용에도 의혹이 많다. 조 교수의 논문에서 각주에 인용된 독일어 논문은 12편이다. 12편 중 9편의 논문이 통째로 인용돼 있다. 이것은 각주라고 할 수 없다. 조 교수는 영어 논문을 인용할 때는 거의 인용한 쪽수를 밝혀준다. 왜 독일어 논문에서만 그렇지 않은 것일까. 논문을 실제 읽지 않고 인용했을 수 있다. 그가 독일어 논문의 저자를 모두 뎅커(Dencker)처럼 성만 쓰고 있거나 H. 오토(Otto)처럼 이름은 써도 이니셜로만 써 이런 의혹이 더 짙다. 조 교수는 영어와 일본어 문헌의 저자는 최소한 참고문헌에는 풀 네임을 써주고 있다. 조 교수는 독일어 논문 저자는 풀 네임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어 지도교수와의 협의하에 그렇게 통일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설득력이 있는지 서울대가 판단해야 한다. 조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 대해 버클리대가 “법학박사학위 과정의 높은 기준을 충족한다”는 의견을 보내왔다고 전했다. 조 교수에게 학위를 준 버클리대가 조 교수 논문을 문제 삼는 것은 이익상반(利益相反)의 측면이 있다. 조 교수 논문의 오류를 다 나열하지 못해 아쉬운데 그걸 보면 독자들은 버클리대가 학위 심사는 제대로 했나 의문을 가질 만하다. 이런 버클리대 말만 믿고 서울대가 자체 조사도 안 해 보고 사안을 종결했다. 공감할 수 있는 절차를 통해 표절 의혹이 해소된다면 조 교수에게도 좋을 것이다. 조 교수가 먼저 표절을 심사해 달라고 요청해보는 것은 어떨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통합진보당 오병윤 의원은 그제 국회 본회의 비교섭단체대표 발언에서 “법무부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에서 쓰는 말이기 때문에 북한을 추종한다고 하나 그것은 뉴딜 시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도 쓰던 말”이라고 주장했다. 오 의원은 그러면서 “미국도 북한을 추종했다는 말이냐”고 따졌다. 법무부가 헌법재판소에 통진당의 해산 심판을 청구하며 그 이유 중 하나로 통진당의 강령과 당헌이 김일성의 정치 노선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명시한 데 따른 반박이다. 오 의원은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의 출처로 1930년대 뉴딜 정책을 펼친 미국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언급했지만 잘못 안 것이다. 그보다 20여 년 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썼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원으로 두 차례 대통령을 한 뒤 1912년 정계에 복귀했으나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하자 새 정당을 만들었다. 그 당의 이름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진보당(Progressive Party)이다. 진보당은 기업 집중 규제, 노동 재해 보상 등 공화당에 비해 진보적인 정책을 표방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공화당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였다. 오 의원 자신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통진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공안 당국이 밝힌 RO(혁명조직) 녹취록에 따르면 홍순석 통진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출처를 ‘김일성 노작(勞作)’이라고 밝혔다. 홍 부위원장은 5월의 한 모임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그 뿌리가 있느냐. 사회주의를 에둘러서 얘기한 것 아니냐”는 참석자의 질문에 “진보적 민주주의의 어원(語源)이 어디로 가느냐면 수령님께서 (북한을) 건설할 때 ‘우리 사회는 진보적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라고 한 노작이 하나 있어”라고 답한 것으로 돼 있다. 북에서 ‘수령님’은 김일성, ‘장군님’은 김정일을 의미한다. 노작은 저서 담화 연설을 뜻한다. 통진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2011년 통진당 창당 직전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RO 조직원의 대화에서 드러났듯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비슷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말한다. 통진당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수령님’ ‘장군님’ 같은 말을 스스럼없이 쓰다가도 외부 사람들에게는 주사파가 아니라고 잡아뗀다. 국가보안법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오 의원도 억지로 미국 사례를 끌어대다 부정확하게 출처를 인용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오 의원의 발언은 통진당 사람들의 전형적인 둘러대기 물타기 전략일 뿐이다.}
검찰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무혐의 처리했다. 김 전 차관은 건설업자 윤중천 씨로부터 성접대를 받는 과정에서 여성들을 특수강간한 혐의를 받았다. 앞서 경찰은 김 전 차관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김 전 차관 등을 고소한 여성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혐의 처리했다. 이에 대해 피해 여성 중 한 명이 검경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며 울분을 토로했다. 30대 초반의 여성 A 씨는 20대 중반에 알게 된 윤 씨의 강요로 김 전 차관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A 씨는 “검찰이 조사 과정에서 성접대 여부는 거의 안 묻고 다른 피해자들과 말을 맞췄는지에 초점을 맞추더라”고 말했다. 물론 실체적 진실은 알 수 없는 상태다. 검찰은 A 씨가 고소한 내용보다 그가 윤 씨와 1년 반 이상 만남을 이어가며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려 한 점을 집중 추궁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윤 씨가 A 씨에게 성접대를 강요했다는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고 A 씨가 윤 씨로부터 원하던 도움을 받지 못하자 강간당했다고 무고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 듯하다. A 씨는 검찰 조사에서 충분히 진술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속상해 담당 검사에게 강간 혐의에 대한 진술을 정리해 편지로 보냈다고 한다. 검찰은 처음부터 김 전 차관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검찰은 경찰이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한 3월 김 전 차관에 대한 경찰의 출국금지 신청을 기각했다. 김 전 차관이 세 차례 소환을 거부하자 경찰이 신청한 체포영장도 기각했다. 결국 김 전 차관은 병을 핑계로 병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았다. 피해 여성은 재정 신청에 호소할 의사를 밝혔다. 재정 신청을 하면 법원이 수사 자료와 증거물을 살펴보고 기소 여부를 판단한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의 무혐의 처리가 뒤집히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최근 조국 서울대 형법 교수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 박사학위 논문을 읽었다. 물론 계기는 일각에서 제기한 표절 의혹 때문이다. 논문은 위법수집 증거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 독일 일본의 판례와 학설을 비교 분석한 것이다. 난 독일 편을 자세히 읽었는데 참고문헌과 각주에서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그가 인용한 독일어 문헌의 저자 중에 K. Rogal이란 이름이 있다. 문외한인 나는 인터넷을 뒤져 어렵게 그것이 클라우스 로갈(Klaus Rogall)임을 알아냈다. Rogal은 Rogall의 오기였다. 알고 보니 로갈은 위법증거 분야에서 꽤 알려진 학자였다. 그러나 조 교수는 논문에 다섯 군데 쓴 로갈을 모두 틀리게 썼다. 물론 실수로 Rogall을 Rogal로 쓸 수 있다. 이상한 것은 그가 독일어 문헌을 인용할 때는 극히 저명한 몇몇 학자를 빼고는 모두 뎅커(Dencker)처럼 성만 쓰거나 K. 로갈처럼 이름 부분을 이니셜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명은 각주에는 줄여 쓰더라도 참고문헌에는 풀 네임(full name)을 밝혀주는 것이 올바른 표기다. 조 교수는 영어와 일본 문헌의 저자는 모두 풀 네임을 써주고 있다. 독일 학자도 독일어가 아니라 영어로 쓴 문헌을 인용한 때는 반드시 풀 네임을 쓰고 있다. 유독 독일어로 쓴 독일 학자만 각주에도 참고문헌에도 풀 네임이 나오지 않는다. 각주 중에 ‘Dencker, VERWER-TUNGSVERBOTE IM STRAFPR-OZESS 10(1977)’이란 부분이 있다. ‘뎅커의 1977년 저서 ‘형사소송에서의 사용금지’의 10쪽에서 인용’이란 뜻이다. 영어 논문에서 쪽 표시는 ‘at 10’처럼 쓴다. 조 교수도 쪽수 앞에 통상 ‘at’을 다는데 여기선 달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독일인은 쪽을 표시할 때 S.10이나 약식으로 그냥 10으로 쓴다. 독일 책이니까 그렇게 각주를 달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참고문헌에는 저자, 책 이름, 발행연도만 쓰는데 이 책의 경우는 참고문헌에도 쪽수까지 함께 쓰여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실수가 ‘ERNST BELING, DEUTSCHES REICHSTRAFPRO-ZESSRECHT 32(1928)’에도 나타난다. 독일어 책이 아니라 독일어 논문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논문에서 이런 실수가 발견된다. 책을 읽을 때 참고문헌부터 보라는 얘기가 있다. 참고문헌을 보면 그 책의 수준이 드러난다. 참고문헌이 본문에 반영된 것이 각주다. 조 교수 논문의 각주와 참고문헌에는 여러 가지 오류가 있지만 여기선 체계적인 오류만 살펴봤다. 조 교수는 과거 표절에 관한 한 강연에서 ‘각주 절도’도 표절의 한 형태로 든 바 있다. 유독 독일어 문헌의 저서들에만 저자의 풀 네임이 없다는 것, 각주의 쪽수를 참고문헌에까지 그대로 옮긴 것은 조 교수가 직접 문헌을 보고 각주를 달았다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조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서 이 논문의 독일 편도 실은 영어 문헌에 크게 의존해 작성됐다고 느꼈다. 조 교수의 독일어는 이 논문을 쓸 당시에도 불안하다. 영어로 쓰인 논문이므로 독일어를 많이 표기한 것도 아닌데 독일어 오기가 많다. 그런데도 그는 독일의 판례를 직접 독일어 원문을 보고 인용한 것처럼 쓰고 있다. 사실 이 점이 이 논문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어느 나라든 판결문은 그 나라의 가장 어려운 문헌 중 하나다. 조 교수의 독일어 실력으로 독일 판결문을 직접 읽었다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 조 교수는 학자다. 조 교수가 정치인이나 연예인이었다면 그의 논문에 관심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조 교수에 대해서는 변희재 씨 측으로부터 제기된 표절 의혹도 있다. 그 의혹에도 일리가 있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엄격하게 조 교수의 박사논문을 심사해 봤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정부는 어제 국무회의 의결과 영국을 방문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격 결재를 거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통진당의 목적과 활동이 헌법의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정당해산 심판 청구는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헌재는 앞으로 내릴 결정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심판에 임해야 할 것이다. 통진당은 지난해 총선 비례대표 경선에서 부정이 드러나 당원 462명이 기소됐고 순차적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올해 8월에는 부정 경선에 의해 국회 비례대표가 된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혐의가 드러나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통진당이 2011년 12월 창당 이후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정당보조금과 선거보조금으로 챙긴 돈이 100억여 원이다. 다수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당해산의 심사 기준은 정당의 목적과 활동이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다. 헌재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모든 폭력적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와 자유 및 평등에 의거한 국민의 자기 결정을 토대로 하는 법치국가적 통치 질서’로 정의했다. 통진당 내에는 민주적 진보 세력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통진당은 부정 경선을 폭로하고 비판한 세력과 갈라서는 과정에서 당 스스로 부정 경선을 막을 의지가 없는 정당임을 드러냈다. 이석기 의원의 RO(혁명 조직)는 일당(一黨) 일인(一人) 독재국가인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여기에 가담해 우리나라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짰다. 이 정도면 통진당을 헌법의 테두리 안에 놓아둘지, 축출할지를 심판해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본다.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은 국가를 위협할 뿐 아니라 정당 제도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독일은 1952년 나치의 후신인 사회주의제국당과 1956년 독일공산당을 해산한 바 있다. 우리의 정당 제도는 정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나라가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려면 비민주적 정당은 해산할 수 있어야 한다. 헌재는 통진당 강령에만 매달리지 말고 실제 활동까지 포함해서 통진당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강령이 순화된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실체가 강령과 같은 것은 아니다. 민주적 기본질서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민주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까지 다양한 체제와 정책을 허용한다. 다만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한으로, 열린 사회에 주어진 자유를 이용해 북한과 같은 닫힌 사회를 만들려는 정당은 허용하지 않는다. 헌재는 심판 청구일부터 180일 이내에 결정을 내리도록 되어 있지만 강제 규정은 아니다. 그러나 헌재 결정이 늦어질 경우 내년 6·4지방선거에서 통진당이 후보를 낼 수 있으므로 가능한 한 그 전에 결정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통진당 해산심판 청구와 함께 정당 활동 정지 가처분 신청도 냈다. 해산 여부가 결정되기까지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그 사이에 위헌적 정당 활동을 막으려는 조치다. 조만간 헌재의 가처분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통진당 해산 문제로 인한 국론 분열을 막으려면 제1야당인 민주당이 통진당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이었다가 직무에서 배제된 윤석열 여주지청장은 어제 국정감사에 출석해 국정원 직원 트위터 글 수사를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에게 보고하고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 지검장은 보고가 아니라 통보였으며 결재도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를 떠나 수사팀장과 지검장이 얼굴을 붉히고 맞서는 부끄러운 모습이 요즘 검찰의 자화상이다. 둘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수사팀이 압수수색이나 국정원 직원 체포, 공소장 변경을 하며 지휘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검사는 판사와 달리 독립기관이 아니다. 검찰청법에 따르면 검사는 모든 사무에 대해 소속 상급자의 지휘·감독을 따라야 하며 이견이 있을 때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윤 지청장처럼 “(조 지검장을) 모시고 함께 사건을 끌고 나가기 어렵겠다”고 판단해 멋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롭게 드러난 국정원의 트위터 퍼나르기는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폄훼하는 내용이 많다. 이미 기소된 범죄의 입증에 결정적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 지검장이 ‘야당의 정치적 이용 가능성’이라는 이유를 들어 수사를 허가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검찰총장 후보군인 조 지검장이 청와대나 법무부의 눈치를 봤다는 의심을 살 만하다. 검찰은 윤 지청장이 조 지검장의 결재를 받지 않고 법원에 신청한 공소장 변경을 철회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윤 지청장을 직무에서 배제하긴 했지만 수사 결과까지 부인하긴 어렵다는 뜻으로 비친다. 검찰이 철회하지 않는 한 공소장 변경을 받아들일지는 법원이 결정한다. 다만 수사팀의 압수수색이나 체포가 국정원직원법이 규정한 국정원 통보 없이 이뤄진 것이어서 적법성 여부가 논란이 될 수 있다. 국정원의 심리전단 직원들은 지난해 대선 전 약 3개월간 트위터에 5만5689회의 정치적 글을 올린 새로운 혐의를 받고 있다. 기존 공소장에 나와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 댓글보다 15.1배나 많다. 국정원 직원들이 은밀한 곳에서 여론이나 조작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면 명백한 정치적 중립 위반이고 치졸한 짓이다. 트위터 글은 팔로(follow)하는 사람에게만 전달된다. 문제가 된 인터넷 댓글이나 트위터 글이 선거 결과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당 등 야권은 호재를 잡은 듯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도움 받은 꼴이 되고 있다는 청와대도 곤혹스러울 것이다. 여야는 이 문제를 정략적으로 다루기보다 국정원의 올바른 개혁 방향을 찾는 데 뜻을 모을 때다.}
검찰이 어제 국가정보원 정치·선거 개입 의혹 특별수사팀장인 윤석열 여주지청장을 수사팀에서 배제했다. 야당은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이은 ‘제2의 찍어내기’라며 반발하고 있다. 검찰은 전날 윤 팀장이 검찰 상부에 대한 보고와 국정원에 대한 통보 없이 국정원 직원들을 체포하고 압수수색을 실시해 문책성으로 직무 배제를 했다고 밝혔다. 윤 팀장은 국정원 직원 4명의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과 이들 중 3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팀장 전결로 처리했다. 이에 대해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정상적인 결재 라인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무 배제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윤 팀장은 연가(年暇)를 내는 것으로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국정원법은 수사기관이 직원에 대해 수사를 시작한 때와 종료한 때에는 지체 없이 국정원장에게 그 사실과 결과를 통보하도록 하고 있다. 국정원 직원들은 트위터에 정치·선거 관련 글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었다. 트위터를 통한 개입은 본래 공소장에는 없던 내용이다. 윤 팀장은 상부에 알리면 압수수색이나 체포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검사는 계통을 밟아 수사하고 부당한 지시가 있을 경우 이의를 제기해야지, 독단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검찰은 기관 통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국정원 측 항의를 받아들여 검찰 직원 3명을 당일 조사한 뒤 귀가시켰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수사 중에는 웬만한 이유로는 수사팀장을 바꿔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채 전 총장이 국정원 수사를 하다 청와대에 밉보여 혼외자(婚外子) 문제로 낙마했다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번 일도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을 둘러싸고 채 전 총장과 수사팀,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사이에 빚어졌던 갈등의 연장선에 있다. 새로운 혐의가 드러난 마당에 이번 직무 배제로 불필요한 의혹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원 전 원장은 법원에 기소돼 있지만 트위터를 통한 선거 개입은 새로운 혐의다. 검찰이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수사팀의 수사를 방해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모든 것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검찰의 수사 결과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검찰도 ‘정치 검찰’의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바로잡습니다]◇19일자 A27면 ‘검찰, 국정원…’ 제하의 사설 중 국정원 측 항의로 풀어준 사람은 ‘검찰 직원 3명’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 3명’입니다.}
한겨레신문의 첫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비판 기사를 보자. “교학사 교과서는 ‘연합국은 카이로선언(1943)으로 일본에게 항복을 요구하였으나’라고 했는데 여기서 카이로선언은 포츠담선언을 잘못 썼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역사문제연구소 등이 던져준 약 300건의 비판거리 중 이것이 가장 화끈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오류라고 주장한 바로 그 주장이 오류다. 카이로선언에는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이란 말이 들어 있다. 포츠담선언은 그 선언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이 신문은 또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령에 이어 조선민사령 부동산등기령 등을 반포해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했다”는 내용을 문제 삼으면서 조선민사령과 부동산등기령은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시행된 법령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렇지 않다. 오늘날 민법과 부동산등기법에 해당하는 조선민사령과 부동산등기령은 토지조사를 위해 절대 필요한 법령이었다. 다만 토지조사령(8월)과 조선민사령 부동산등기령(3월)의 선후 관계가 교과서에 잘못 기재돼 있다. 이 신문의 다음 날 사설은 교과서의 대표적 오류로 “3·1운동 직후 일본이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필수과목으로 배우게 했다”는 내용을 꼽았다. 교과서가 부속자료로 소개한 ‘(일제) 2차 조선교육령’에 ‘한국인에게 한국어 필수화’라고 쓴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필수화’의 ‘화’라는 표현이 틀렸다. 한국어는 1차 조선교육령 때부터 필수였고 2차 조선교육령에서도 필수였으며 3차 조선교육령이 반포된 1938년까지 계속 필수로 남아 있었다. 2차 교육령에서 교육 시수(時數)가 줄긴 했지만 3·1운동 직후에도 일본은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필수과목으로 배우게 했다. 교학사 교과서 비판에는 악의적인 비판도 많다. 그러나 정밀하지 못한 기술이 비판을 자초한 것도 사실이다. 트집 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이렇게 트집 잡힐 교과서를 써내다니 집필자들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도 수정 기한 내에 각고의 정신으로 완벽한 교과서를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토론이나 강연에 참석해 자기변명을 하기에 바쁘다. 마음 같아서는 교학사 교과서는 없던 것으로 하고 새 교과서 프로젝트를 기대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기존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그것으로 한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한국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교과서다. 올해 수능에서 한국사 선택비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될 정도다. 이런 실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사를 수능 필수화하기로 했다.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융탄폭격적 비판에서 한국 현대 사학계 내 수정주의 진영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확고한지 드러났다. 국민의 역사적 경험과 일치하는 상식적 교과서를 하나 끼워 넣는 작업이 이렇게 어렵다. 한국사 수능 필수화가 독이 든 사과임을 박 대통령도 이제는 깨달았기 바란다. 기존 교과서를 학교에서 필수로 배우는 것만으로도 해악은 충분히 크다. 그것을 달달 외워서 시험까지 보고 대학에 들어가라니 제정신인가. 기존 교과서가 문제 있다고 해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역사라는 것이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지 않으면 맥락조차 알기 어려운 과목이다. 그 분야에 흥미와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공부해 시험을 보면 된다. 나머지는 학교에서 필수로 배우는 것으로 족하다. 문이과 예체능계를 막론하고 국사를 필수로 시험 봐서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나라가 선진국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았다는 검찰 중간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해 4일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한마디로 대화록은 있고 NLL(북방한계선) 포기는 없었던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이 아니라 봉하 이지원에 남아 있는 사실을 놓고 대화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궤변이다. 봉하 이지원은 그 자체가 불법이다. 대통령기록물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가 관리한다. 그럼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시 청와대 이지원을 복사해 봉하마을 사저로 가져갔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이명박 정부의 반납 요구에도 응하지 않다가 불법 논란이 확산되자 마지못해 돌려줬다. 문 의원의 말은 마치 도둑이 훔친 보석이 도둑의 집에 있는데 무슨 문제냐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화록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국가기록원이라는 사실을 문 의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국정원이 대화록을 공개하자 그 내용에 의혹을 제기하며 국가기록원에 있는 대화록을 보자고 주장한 사람도 다름 아닌 문 의원 아닌가. 그러나 대화록이 아예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지도 않은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그는 2007년 3월부터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2008년 2월까지 대통령비서실장이었으며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어쨌든 대화록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책임 회피일 뿐이다. 문 의원은 국가기록원 대화록과 관련 부속 서류를 함께 보자고 제의할 때 “열람 결과 NLL 포기 발언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정계 은퇴의 전제는 대화록의 내용이지 대화록 존재 여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대화록의 내용이란 것도 직접 ‘포기’라는 말만 쓰지 않았을 뿐 국민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평화수역이란 기만적인 구상으로 사실상 NLL 포기 의사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노 전 대통령이 없는 지금 문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대리인 혹은 친노 세력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이기는커녕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궁지에서 벗어날 구실만 찾아서는 안 된다. 그러기엔 문 의원 본인이 그동안 잘못한 말이 너무 많다.}
법무부가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하고 채 총장의 사표 수리를 청와대에 건의했다. 청와대가 15일 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감찰을 계속하겠다고 밝힌 지 12일 만이다. 법무부가 발표한 진상조사 결과에서 새로운 내용은 채 총장이 대전고검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 채 총장 혼외자(婚外子) 의혹을 받는 아이의 어머니 임모 씨가 그의 집무실을 방문해 대면 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동안 언론이 제기한 의혹들을 확인한 것뿐이다. 법무부가 발표한 새로운 사실이 혼외자 의혹의 결정적 증거라고 볼 순 없지만 의혹에 의혹을 더한 것만은 틀림없다. 법무부는 감찰의 사전 단계인 진상 규명에서 “의혹을 사실로 볼 만한 정황을 다수 확보했다”고 밝히면서도 감찰에 들어가지는 않고 청와대에 사표 수리를 건의했다. 청와대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사표 수리를 안 한다고 해놓고는 사표 수리 수순으로 가고 있다. 정황증거를 사표 수리의 명분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법무부의 진상조사나 감찰을 통해 혼외자 의혹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검찰의 조속한 안정을 위해 사표 수리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채 총장의 사표가 수리되면 그는 사의 표명 당시 원했던 대로 공인(公人)에서 사인(私人)으로 돌아간다. 사인이 된다고 해서 검찰총장까지 지낸 사람이 자기 방어를 위해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 떳떳하다면 적극적으로 임 씨와 아이를 설득해 유전자 검사로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 그것이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으로 충격을 받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이제 새로운 총장감을 물색해 조속히 검찰을 안정시켜야 한다. 검찰총장 추천위원회 구성에서 국회 임명 동의 절차까지 두 달은 걸린다.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실종, 국정원 댓글,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등 검찰이 처리해야 할 중요한 현안이 산적해 있다. 연고나 이념을 떠나 검찰 조직 내에서 두루 신망이 높고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인물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바로잡습니다]◇본보 9월 28일자 A27면 채동욱 검찰총장 관련 사설에서 ‘채 총장이 서울고검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은 ‘채 총장이 대전고검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이 맞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이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는 최근 국가정보원 규탄 시국 선언에 나선 사제들의 움직임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훼손했는지는 격렬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주교가 국정원 규탄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면 그 발언은 사제와 신자에게 의견이 아니라 명령이 된다. 자신의 신념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속화한 근대 시민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현실정치에 종교적 신념이 개입하면 위험하다. 교회는 교회 일에나 신경 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교회가 세속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이상 불가피하게 속세의 권력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현대 가톨릭의 역사만 봐도 프랑스 교회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종교 사학(私學)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근대적 자유가 낳은 생명 경시 풍조, 즉 낙태 같은 문제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로 말하자면 천주교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주교급 이상이 모이는 자리에 가보면 한국의 모든 주교보다도 높은 신부가 한 명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바로 주한 교황청 대사다. 그는 아무리 젊어도 나이든 한국 주교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 주교 임명 제청권을 갖고 총독처럼 군림하는 주한 교황청 대사,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가진 천주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회는 제 생긴 모습을 보고 남 얘기를 해야 하는 법이다. 교회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반대편에 섬으로써 정의를 수호하기도 한다. 다수의 결정이 파괴할 수 있는 소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사명 중 하나다. 천주교 사제든 신자든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야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나 교회의 힘을 빌려 사제들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시국선언은 아무리 선의라 하더라도 종교와 정치의 긴장을 깰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군사 독재 시절 교회가 민주주의의 소도(蘇塗) 같은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당이 제 기능을 찾고 시민단체들이 생겨나면서 교회는 더이상 그런 역할을 맡을 필요가 없어졌다. 군사 독재 시절 정의구현사제단의 역할을 높이 사면서도 오늘날 그 집단이 점점 더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교회를 둘러싼 정치 환경이 변한 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가 얼마 전 천막농성 중인 김한길 민주당 대표를 방문해 “지난 대선은 원천 무효”라고 말했다. 대선 불복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는 김 대표를 순간 당황하게 만든 발언이었다. 함 신부를 볼 때마다 거추장스러운 신부의 옷을 벗고 차라리 정치인이 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민주주의라고 말하면 될 것을 민주주의와 친하지도 않은 성부나 성자나 성령을 들먹이면서 정의 운운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전임 보수파 교황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프란시스코 1세의 최근 강론 중 ‘훌륭한 가톨릭 신자는 정치에 개입한다’는 발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강론의 내용을 끝까지 읽어 보면 그 정치 개입이라는 것은 정치가들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사악한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좋은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최고의 정치 개입이라는 것, 이것이 강론의 결론이다.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에 참여한 사제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황의 말씀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