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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보셨나요? 전 그 영화가 ‘건축의 호러’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함께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게 굉장히 큰 공포잖아요.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자발적인 커뮤니티를 꾸렸을 때 공포감을 덜고,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건축가 송멜로디)○ 나무를 닮은 집, 트리하우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트리하우스’(72가구)는 그야말로 나무를 닮은 집이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각 가구들을 겹겹이 쌓아올렸고, 모든 가구가 중앙 정원과 연결돼 있다. 이 건물은 10월 스페인 빌바오에서 열린 ‘2019 건축 마스터상(AMP)’을 수상했고, 영국 디자인매거진이 선정하는 ‘2019 Dezeen Awards’의 세계 톱5 주거 프로젝트로 뽑히기도 했다. 예일대 건축대학원에서 ‘코(Co)리빙 건축’을 전공한 송멜로디 씨(29)는 “고시원으로 상징되는 공유주택에 대한 기존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법률적으로 고시원은 무조건 부엌 등 공유 공간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고시원에는 사회적인 낙인이 존재해요. 하루빨리 성공해서 탈출해야 되는 공간, 옆방에 있는 사람은 ‘귀신’ 같은 존재이고…. 따뜻한 커뮤니티 공간이 되려면 무엇보다 햇빛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의 세운상가를 모티브로 한 중정에는 삼면의 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입주자들은 공간의 심장과도 같은 중정에서 커피를 마시고, 일하고, 함께 요리하고, 식사하고, 요가를 한다. 지하주차장에는 차량 공유 서비스가 있어 시간당 7000원 정도에 테슬라, 벤츠, BMW 등 고급 수입차도 빌릴 수 있다. 3개월 기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는 130만∼140만 원대다.○ 엘리베이터가 마을버스인 ‘유니언타운’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2호선 당산역 부근의 ‘유니언타운’은 30년 넘은 9층짜리 직업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복합생활공간이다. 이 건물에 들어서면 마을버스처럼 디자인된 엘리베이터가 반긴다. 4, 5층 공유 오피스, 6∼8층 주거시설 외에도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가는 행선지가 표시돼 있다. 입주자들이 말하는 가장 큰 이점은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인맥과 경험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다. 당산철교와 한강의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9층 루프톱에서는 핼러윈 파티, 콘서트, 독서모임, 영화 상영과 같은 소모임이 펼쳐진다. 2층 영어 커뮤니티 카페에서는 수다를 떨며 드라마나 퀴즈를 통해 영어를 배우는 ‘소셜(Social) 러닝’이 이뤄지고, 지하 1층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입주자들이 GX(그룹운동)를 하거나, 한강변을 함께 달리기도 한다.입주자가 대부분 20, 30대인 이 건물은 전체가 청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공간이다. 3층에 있는 6개의 공유 주방에는 창업을 꿈꾸는 셰프들이 입주해 있다. 이곳은 ‘먹방’을 찍는 유튜버들의 인기 촬영 장소다. 입주자인 박재성 씨는 ‘금빛행성32 파크’라는 캐릭터를 개발하는 디자이너. 그는 “공유 오피스에 입주한 다른 스타트업 대표들과 로고 디자인, 해외 진출 등에서 수많은 협업을 하고 있다”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외국인 친구도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소중한 네트워크 공간”이라고 말했다. 유니언타운은 주거에는 보증금 없이 월 80만 원, 공유 오피스는 월 25만 원이 든다. 이 건물을 만든 유니언플레이스의 이장호 대표는 “경리단길 등 맛집 위주의 도심 재생은 핫플레이스로 떴다가 식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해 일과 주거, 공부, 운동, 사교를 함께 하는 수직형 마을을 세우는 것은 새로운 도심 재생 모델”이라고 말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영화 ‘기생충’ 보셨나요? 전 그 영화가 ‘건축의 호러’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함께 공간을 사용하지만 그게 누군지 모른다는게 굉장히 큰 공포잖아요.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을 모른다는 익명의 공포가 있잖아요. 자발적인 커뮤니티를 꾸렸을 때 그 공포감을 덜고, 조금 더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건축가 송 멜로디) ●나무를 닮은 집, 트리하우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트리 하우스’는 그야말로 나무를 닮은 집이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각 세대들이 겹겹이 쌓아올렸고, 전체 건물이 하나의 집처럼 모든 세대가 중앙 정원과 연결돼 있다. 이 건물은 지난 10월 스페인 빌바오에서 열린 ‘2019 건축 마스터상(AMP)’에서 주거건축 부문상을 수상했고, 영국 디자인매거진에서 선정하는 ‘2019 Dezeen Awards’의 세계 톱5 주거 프로젝트로 뽑히기도 했다. 이 건물은 예일대 건축대학원에서 ‘코(Co)리빙 건축’을 전공한 송 멜로디 씨(29)가 설계했다. 그는 “고시원으로 상징되는 공유주택에 대한 기존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법률적으로 고시원은 무조건 공유하는 공간들이 있어야 해요. 부엌도 공유해야 하고, 거실도 있어야 하고…. 그런데 고시원에는 사회적인 낙인(stigma)이 존재해요. 하루 빨리 성공해서 탈출해야 되는 공간, 옆방에 있는 사람은 ‘귀신’같은 익명의 존재고…. 따뜻한 커뮤니티 공간이 되려면 무엇보다 햇빛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의 세운상가를 모티브로 한 중정에는 천장과 삼면의 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모든 입주자들은 중정을 거쳐 개인방으로 가기 때문에 커뮤니티 공간의 심장과도 같은 부분이다. 입주자들은 중정에서 일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함께 요리하고, 식사를 하고, 매트리스를 깔고 요가를 한다.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옥상 정원과 애완견 파크도 공유하공, 지하주차장에서는 스타트업 ‘네이비’가 제공하는 차량 공유서비스가 있어 시간당 6000~7000원 정도에 테슬라 벤츠 BMW 등 고급 수입차를 빌릴 수 있다. 총 72세대가 입주해 있는 주거공간은 모두 개인실. 면적은 16㎡(5평) 정도로 작지만, 천장 높이가 3m인데다 복층구조로 돼 있어 공간감이 널찍하다. 3개월 기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는 130만~140만 원대. 착한 가격은 아니지만 청소와 빨래 서비스를 해주는데다, 다양한 시설과 혜택을 등을 공유할 수 있어 객실이 비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엘리베이터가 마을버스인 ‘유니언 타운’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2호선 당산역 앞에 있는 ‘유니언타운’(union town)은 올해 4월에 오픈한 복합생활문화공간이다. 30년 넘은 9층짜리 현대직업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 건물에 들어서면 마을버스처럼 디자인된 엘리베이터가 반긴다. 4~5층 공유 오피스, 6~8층 주거시설 등으로 가는 행선지가 표시돼 있다. 입주자들이 말하는 가장 큰 이점은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인맥과 경험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비결은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이다. 당산철교와 한강의 야경을 볼 수 있는 멋진 뷰를 가진 9층 루프탑에서는 입주자들이 모여 핼러윈 파티, 콘서트, 독서모임, 영화상영, 필라테스와 같은 소모임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2층 영어 커뮤니티 카페에서는 게임이나 드라마에 대해 수다를 떨며 영어를 배우는 ‘소셜(Social) 러닝’이 이뤄지고, 입주자에겐 무료인 지하 1층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회원들이 함께 GX를 하거나, 아예 한강변을 함께 달리기도 한다. 입주자의 90% 이상이 20~30대인 이 건물은 전체가 청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공간이다. 3층에 있는 6개의 공유주방에는 창업을 꿈꾸는 셰프들이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배달음식, 푸드트럭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셰프들이 건물 1층에 고기집을 직접 창업하기도 했다. 공유주방에서는 일반을 대상으로 한 쿠킹클래스도 열리고, 먹방을 찍는 유튜버들의 인기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4~5층 공유 오피스에 입주해 있는 사람들은 디자이너, 프로듀서 등 프리랜서들이 많다. 월 25만 원에 책상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6~8층 코리빙 하우스에는 K팝 문화를 체험하러 온 외국인들도 많다. 9층 루프탑에서 펼쳐지는 각종 파티와 헬스장, 카페에서 자연스럽게 외국의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목격된다. ‘금빛행성32 파크’라는 캐릭터를 개발하는 디자이너 박재성 씨는 공유 주거와 오피스에 입주한 스타트업 대표들과 로고 디자인 등 수많은 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외부 손님이 올 경우 회의실에서 미팅을 하고, 공유키친에서 셰프들이 해주는 요리로 점심식사를 한다. 박 씨는 “1년간 준비해온 책의 출판기념회를 9층 루프탑에서 할 예정”이라며 “홀로 일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주고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 건물을 운영하는 유니언플레이스의 직원은 48명. 이장호 대표(44)를 제외하고는 90% 이상이 20대다. 이 대표는 노후화된 중소형 건물을 활용한 새로운 도시재생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공유 주택과 공유 오피스와 같은 부동산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졸업할 때 즈음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벗어날 때였다. 당시 외국계 자본이 들어와 국내 부동산을 헐값이 사들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동산에 간접투자하는 리츠 펀드도 생겨났다. 그런 상황에서 부동산 펀드 매니저에 관심을 갖게 됐다. 리츠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부동산을 매입하고, 잘 활용해서 수익을 나눌 수 있다. 부동산 투자 수익을 누군가가 독점하지 않는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부동산의 민주화’ 개념으로 다가왔다. 이걸 직업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 4학년 때부터 공부모임에 쫓아다녔다. 첫 직장인 KB부동산신탁이었다. 리츠관련 업무를 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부동산 금융을 더 공부했다. 귀국 후에도 부동산 투자 펀드 일을 계속해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40대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고민이 많았다. 3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했다.” ―창업 이후 부동산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바뀌었나. “금융권 회사에 있을 때 투자했던 것은 대부분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창업 이후에는 골목상권에 있는 중소형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국내 도시가 오래되다보니 건물이 노후화하고, 건물주도 고령화돼 빛을 잃어가는 중소형빌딩이 많다. 노후화된 도시형 빌딩을 운영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하고 싶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어떤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가지고 부동산을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도시형 빌딩을 재생하는 솔루션은? “요즘 경리단길이나 삼청동, 익선동 등 서울에서의 도시재생은 리테일 식당 위주로 이뤄지다보니, 핫플레이스로 확 떴다가 금방 트렌디하게 유행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류의 도시재생 보다는, 일도 하고, 주거도 하고, 공부도 운동도, 먹거리도 함께 즐기고, 외국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공간의 매력도가 높아지고, 지역의 상권도 살아나고, 그렇게 지역이 선순환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조금 어렵지만 ‘복합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공유오피스, 공유주거 등 단일 목적의 공간으로 규모의 경제를 키우기보다는, 한 공간에 많은 스토리를 담아내는 생활밀착형의 복합공간을 수직적으로 만들어서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고, 시너지를 이뤄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각 분야의 젊은 친구들이 모여서 직접 컨텐츠를 개발하고 기획했다. 창업을 꿈꾸는 셰프들이 F&B 공유주방과 식당을 운영하고, 커피와 제빵에 관심있는 친구들이 1층에 베이커리 카페를 만드는 식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컨텐츠를 만들고, 집합체로 복합공간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 도시재생을 통해 지역도 살리고, 청년들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팅도 할 수 있는 모델이다.” ―이 건물은 원래 어떤 빌딩이었나. “원래 30년 된 현대직업학교 건물이었다. 노후화가 많이 진행된 건물을 펀드를 통해 매입해서 리모델링했다. 건물은 코람코 자산운용이 펀드를 만들어 매입했고, 유니언플레이스가 임차해 운영하고 있다. 30년 된 건물이다 보니까 저희가 원하는 목적과 기능에 맞춰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리모델링 컨셉트는 복합생활공간이다. 물론 문화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첫 번째로 생각했던 것은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시신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저자는 평생 2만 구 이상의 시신을 부검하고, 헝거퍼드 대학살, 9·11테러, 발리 폭탄 테러 등 굵직한 사건들에 참여한 영국 최고의 법의학자. 그는 죽음 앞에서 가장 냉정해야 하는 사람이다. 법의관은 죽은 자들의 의사다. 시신을 통해 살인사건을 재구성하고,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그래서 법의관들은 누구의 죽음이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법의관이 흔들리면 피고인은 저지르지 않은 일로 유죄 판결을 받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도 사건의 진실이다. 30년간 숱한 죽음 앞에서 냉철했던 그도 2016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사고 현장에서 몇 달 동안 인체 조직과 뼈를 찾는 작업을 한 인류학자는 비행공포증이 생겼다.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몸 곳곳에, 팔다리에까지 자기 이름을 써넣을 정도였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팔다리가 절단되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이 책에는 법의학자가 되기까지의 수련 과정,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낸 사연, 테러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고통까지 생생한 문체로 담겨 있다. 2018년 영국 ‘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건축물의 첫인상은 창(窓)에서 시작된다. 창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건물의 표정이 확 달라진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삶의 풍경, 창에 비친 하늘과 구름, 창을 통해 비치는 내부의 모습…. 현대 도시 건축물의 창을 주제로 한 사진전 ‘전지적 창견시점 Ⅱ’가 19일 서울 마포구 동교로 이건하우스 갤러리에서 개막했다. 건축사진 작가 5명이 서울 을지로, 용산, 중림동, 제기동 등에서 창과 삶이 서로에게 개입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 30여 점이 전시된다. ‘전지적 창견시점’의 ‘전’은 건축과 도시의 터전인 땅을 의미함과 동시에 창과 유사한 모양을 띠고 있는 ‘밭 전(田)’ 자에서 따왔다. 필름카메라로 찍는 건축여행가인 김예슬 작가는 원래 유리로 안팎을 소통해주던 창문에 간판이 붙고, 불투명하게 되면서 벽처럼 변해가는 창의 ‘삶과 죽음의 연대기’를 들려준다. 작가 이한울은 강남과 제기동 두 지역 상권에서 세대 간, 지역 간 차이를 보여주는 창문을 조명한다. 작가 구의진은 종교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인간의 염원에 빗대어 표현한 작업을 공개하고, 프리랜서 사진가 김원은 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평범한 도시인들의 삶을 그렸다.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준석 작가는 서로를 왜곡된 얼굴로 비추는 창들의 사진을 프레임 속에 회화적으로 담아냈다. 전시에 참여한 건축사진 그룹 ‘KAP’ 작가들은 건축과 디자인, 영화연출 등 다양한 전공자 출신이다. 이들은 거대한 표면이나 공간으로 압도하는 건축사진 대신 미시적인 시각에서 도시 풍경에 접근한다. 김예슬 작가는 “창은 은유적으로 ‘꿈’을 상징하기도 하며, 건축할 때도 가장 신중히 공을 들이는 요소”라며 “사진을 통해 낯설게 바라본 도시는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다”고 말했다. 29일까지. 무료.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바이올린은 흔히 300∼400년 전에 이탈리아 북부 크레모나 지역에서 제작한 장인들의 악기를 최고로 꼽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는 명품 악기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탈리아 명품 고(古)악기 복원 및 제작, 감정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플로리안 레온하르트(56)가 14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 왕실이 소유했던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에든버러 공작(The Duke of Edinburgh)’과 1727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등 고악기 4대도 들고 왔다. 개당 최소 1000만 달러(약 116억 원) 이상 가치를 지닌 명품이다. 영국 런던에 이는 고악기 복원 및 제조공방에서 30년 넘게 일해왔으며 '플로리안 레온하르드 화인 바이올린'사 대표인 그는 고악기 전문 딜러이자 감정 분야 권위자다. 그는 막심 벤게로프,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니콜라 베네데티 같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금호문화재단 등 음악 관련 단체의 악기 구입을 조언해 왔다. 그는 이번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컬렉터들에게 조언해주기 위해 아시아를 방문했다. ―‘에든버러 공작’은 어떤 악기인가. “스트라디바리가 1724년에 한 독일 백작의 주문으로 만든 바이올린이다. 이후 영국 왕실에 팔렸고, 1880년대 빅토리아 여왕이 아들인 알프레드 왕자(에든버러 공작)에게 줬다. ‘로열 피들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알프레드 왕자는 영국 해군 제독으로 근무할 때 선상이나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 신문에 자주 실렸다.” 이후 이 바이올린은 미국으로 팔려나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됐다. 그런데 프리츠 크라이슬러, 외젠 이자이, 미샤 엘먼, 야샤 하이페츠 등 당시 유명 연주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위대한 악기가 있어야 할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콘서트장”이란 주장이었다. 법적 소송 끝에 박물관은 소유권을 포기했고, 이후 이 바이올린은 연주 악기로 활용돼왔다. ―왜 명품 고악기는 박물관에 있어선 안 되는가. “지난 200∼300년 동안 세계 최고 연주자들이 사운드를 체크하면서 최고가 될 때까지 수정하고, 튜닝해온 악기는 소리가 좋을 수밖에 없다. 바이올린은 더 많이 사용할수록 나무의 떨림을 통한 파동의 진폭이 좋아진다. 연주자가 모든 부분을 만져주고, 눌러주고, 마사지해줄 때 바이올린은 좋은 바이브레이션에 대한 메모리를 만들어낸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의 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스트라디바디는 아름답고 화려한 외형에 따뜻하고, 깊이 있고, 다채로운 컬러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과르네리 델 제수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강력한 파워를 뿜어내기 때문에 개성 있는 연주자들이 선호한다. 반면 스트라디바리는 훨씬 더 예민해서 살살 달래가며 조심스럽게 연주해야 한다. F1 레이싱카를 운전하는 드라이버처럼 최상의 숙련도가 필요하다. 만일 재능 없는 운전자가 F1 카를 몬다면 빙글 돌다가 벽에 충돌하고 말 것이다.” ―세계적으로 고악기 시장의 규모는…. “연간 40억 달러(약 4조6740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현재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고악기는 3000개 정도만 남아 있다. 희소성 때문에 가치는 계속 오른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주식시장은 폭락해도 스트라디바리 가격은 10% 이상 올랐다. 물론 가짜도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100만 달러 이상 바이올린 가운데 10분의 1은 가짜로 봐야 한다.” 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그는 22세 때부터 런던의 바이올린 복원 공방에서 일했다. 이후 30여 년간 이탈리아 고악기를 복원하고, 제작하고, 책도 펴냈다. 세계적인 고악기 감정 전문가로도 활동하는 그에게는 ‘셜록 홈스’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가짜 바이올린을 밝혀내는 일은 홈스가 범죄 현장에서 수사하는 것과 똑같아요.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핏자국을 조사하고, 알리바이를 검증하듯이 바이올린을 보면서 증거를 찾습니다. 바이올린을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스캔해서 목재의 세포까지 검사하고, 접착제와 안료까지 정밀 조사하죠. 이러한 흔적과 디테일을 조사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배제해 나갑니다.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죠.” 2003년 이후 한국을 자주 찾은 그는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린 전시회에서 15세 연주자가 명품 악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던지 깜짝 놀랐다”며 “글로벌 음악재단에서 악기를 구입해 젊은 연주자에게 대여하는 사업이 더욱 확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바이올린은 흔히 300~400년 전에 이탈리아 북부의 크레모나 지역에서 제작된 장인들의 악기를 최고로 꼽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델 제수는 명품 악기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탈리아 명품 고(古)악기 복원 및 제작, 감정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플로리안 레온하드(56)가 14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 왕실이 소유했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에든버러 공작’(The Duke of Edinburgh)과 1727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등 4대의 고악기도 함께 들고 왔다. 개당 최소 1000만 달러(약 116억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명품이다. 영국 런던에 있는 고악기 복원 및 제조공방인 ‘W.E Hill & Sons’에서 30년 넘게 일해 온 그는 고악기 전문 딜러이자 감정분야 권위자다. 그는 막심 벵게로프, 레오니다드 카바코스, 니콜라 베네데티와 같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금호문화재단 등 음악관련 단체의 악기 구입을 자문해왔다. 그는 이번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의 컬렉터들에게 자문해주기 위해 아시아를 방문했다. ―‘에딘버러 공작’은 어떤 악기인가. “스트라디바리가 1724년에 독일의 한 백작의 주문으로 만든 바이올린이다. 이후 영국 왕실에 팔렸고, 1880년대 즈음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 왕자(에든버러 공작)에게 주었다. ‘로열 피들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앨버트 왕자는 영국 해군 제독으로 근무할 때 선상이나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 신문에 자주 실렸다.” 이후 이 바이올린은 미국으로 팔려나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됐다. 그런데 프리츠 크라이슬러, 외젠느 이자이, 미샤 엘만, 야샤 하이페츠 등 당시 유명 연주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위대한 악기가 있어야 할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콘서트장”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법적 소송 끝에 박물관은 소유권을 포기하게 됐고, 이후 이 바이올린은 연주악기로 활용돼왔다. ―왜 명품 고악기는 박물관에 있어선 안 되는가. “지난 200~300년 동안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사운드를 체크하면서 최고가 될 때까지 수정하고, 튜닝해온 악기는 소리가 좋을 수밖에 없다. 바이올린은 더 많이 사용될수록 나무의 떨림을 통한 파동의 진폭이 좋아진다. 연주자가 모든 부분을 만져주고, 눌러주고, 마사지해줄 때 바이올린은 좋은 바이브레이션에 대한 메모리를 만들어낸다.”―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의 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스트라디바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외형에, 따뜻하고 깊이 있고 다채로운 컬러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과르네리 델 제수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강력한 파워를 뿜어내기 때문에 개성있는 연주자들이 선호한다. 반면 스트라디바리는 훨씬 더 예민하기 때문에 살살 달래가며 조심스럽게 연주해야 한다. F1 레이싱 카를 운전하는 드라이버처럼 최상의 숙련도가 필요하다. 만일 재능 없는 운전자가 F1 카를 몬다면 빙글 돌다가 벽에 충돌하고 말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개성이 각기 다른 두 악기를 비교한 평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노래를 부르고, 과르네리는 말을 한다”(바딤 레핀)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아무리 슬퍼도 너무 고고해서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는 귀족이라면, 과르네리는 울고 싶을 때 땅바닥에 탁 퍼져 앉아서 통곡할 수 있는 솔직하고 겸손한 농부와 같아 인생의 맛이 묻어 있다.”(정경화)―세계적으로 고악기 거래 시장의 규모는 얼마인가. “연간 약 4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현재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고악기는 약 3000개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다. 희소성 때문에 가치는 계속 오른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주식시장은 폭락해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가격은 10% 이상 올랐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한 바이올린 중 1721년산 ‘레이디 블런트(Lady Blunt)’라는 별명이 붙은 작품은 2011년 경매 당시 980만 8000파운드(당시 한화로 약 172억 원)에 팔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또한 1741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비외탕(Vieuxtemps)’은 옥션에서 1600만 달러(약 179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레온하드는 22살 때부터 런던에서 바이올린 복원 공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30여 년 간 이탈리아 고악기를 복원하고, 제작하고, 책도 펴냈다. 세계적인 고악기 감정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는 ‘셜록 홈즈’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그는 “악기 시장에서 100만 달러 이상의 바이올린 중 10분의 1은 가짜로 봐야 한다”며 주의를 상기시켰다. “가짜 바이올린을 밝혀내는 일은 셜록 홈즈가 범죄현장에서 수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돋보기를 들여다보면서 핏자국을 조사하고, 알리바이를 검증하듯이 나도 바이올린을 보면서 증거를 찾죠. 바이올린을 CT촬영으로 스캔 해서 목재의 세포까지 검사하고, 접착제와 안료까지 정밀 조사합니다. 이러한 흔적과 디테일을 조사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배제해나갑니다. 결국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죠. 진짜냐, 가짜냐.” ―새로운 악기를 제작할 때 고려하는 점은 무엇인가. “런던에 있는 나의 작업장은 복원 전문가들에게 파라다이스다. 전 세계의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가 모든 이 워크숍을 거쳐 수리되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고악기들을 복원하면서 뚜껑을 열어보고, 틈을 메우고, 목재를 분석하면서 모든 것을 조사하고, 터치하고, 느끼고, 기록해왔다. 이렇게 최고의 악기를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경험이 내 손과 머리에 쌓여 있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가 고악기 복원과 새로운 악기 제작에도 적용된다. 악기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그러한 장점을 종합하고 단점을 보완한 악기를 만들어낸다. 우리 공방에서 만들어낸 현대 악기의 경우 가격이 6만 달러 정도 한다.” 2003년 이후 한국을 자주 찾아 온 그는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린 전시회에서 15살짜리 연주자가 명품 악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연주하던지 깜짝 놀랐다”며 “글로벌 음악재단에서 악기를 구입해 젊은 연주자들에게 대여해주는 사업이 더욱 확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요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공정’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특권계층의 반칙 행위에 대한 시선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정치권과 상류층에서 무심코 튀어나오는 특권의식에 찬 민감한 발언은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책은 미국 사회 엘리트 계층의 구조 변동을 다룬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교수의 역작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엘리트의 성격은 변화하고 있다. 구(舊)엘리트들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자기들끼리만 폐쇄적으로 특권의식을 나눴다면, 신(新)엘리트들은 기회의 평등과 능력주의를 신봉한다. 이들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밤새 노력해 꽃피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것만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특권의식과는 다른, 신엘리트들의 ‘특권(Privilege)’이다. 신엘리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더 구엘리트들의 특권의식에 반대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다. 자기들이 실험실에서 밤잠을 설치며 갖은 노력 끝에 써낸 논문 한 편으로 올라온 사다리를 특권의식을 가진 구엘리트들은 그들만의 폐쇄적인 네트워크와 자원을 동원해 손쉽게 한번에 올라가 버리기 때문이다. 신엘리트들에게 자신들의 특권은 ‘고난과 역경’의 산물이지만, 구엘리트들은 ‘특권의식’에 의한 반칙이기에 이들은 하층보다 구엘리트들을 더 경멸하고 분노한다. 그렇다면 신엘리트들의 ‘특권’은 구엘리트보다 과연 더 공정할 것인가? 저자는 이러한 질문을 품고 미국 사회 최고 엘리트의 산실인 명문 기숙사립학교 세인트폴 스쿨에서 1년간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과 교사들을 관찰한다. 연구 결과는 비관적이다. 미국 뉴햄프셔주 콩코드에 위치한 세인트폴 스쿨의 연간 학비는 4만 달러(약 4680만 원), 학생 1인당 책정된 학교 예산은 8만 달러로 부유층이 다니는 학교다. 이 학교 졸업생이기도 한 저자는 학교의 인종·계급적 다양성이 증가했지만, 부의 세습은 더욱 심화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학교의 신엘리트들은 오페라와 랩 음악을 동시에 즐기고,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기사식당에서도 편하게 어울린다. 위아래 계층과 편안하게 소통하는 이러한 능력은 단순히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싼’ 경험을 통해 몸 자체에 체화돼야 한다. 저자는 세인트폴 스쿨이 ‘다른 학교가 분노할 만큼’ 높은 아이비리그 합격률을 유지하는 비결도 폭로한다. 이 학교는 엄청난 재원을 통해 모든 학생들을 어느 분야에서든 톱으로 만들어낸다. 단 500명의 학생들에게 주어진 수백 개의 동아리들과 수많은 교과목들은 거의 무수한 선택지를 제공하며, 모든 학생이 어느 한 곳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조직돼 있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이비리그 대학들과의 오랜 연줄. 학교 입시 담당자들은 입학 시즌이면 “열심히 전화를 돌린다”. 이처럼 모두를 우등생으로 만들어 낸 뒤 각 대학의 구미에 맞는 애들을 짝짓기 하는 것이 그들의 비결이다. 이 책은 학생들의 기숙사 신고식, 수업시간의 풍경 등을 생생히 담아 소설책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기회와 과정은 공정해졌다고 하는데, 왜 사회이동은 더욱 줄고 불평등은 심화될까. 신엘리트들은 “능력 때문이지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 아니야. 너희의 실패는 너희가 이런 사회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불평등은 더 이상 성, 인종, 계급과 같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 능력의 문제로 치부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민주적 불평등’이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꽃술은 공간 안의 모든 것을 판다. 심지어 이미지와 텍스트,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까지도….”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의 오래된 2층 주택을 개조한 ‘꽃술(kkotssul)’. 지난달 문을 연 이 공간은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가구와 소품을 직접 만지고, 앉고, 체험할 수 있는 ‘디자인 바(bar)’다. 꽃술은 10여 개 팀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만든 공간이다. 1층 입구에 들어서면 핑크색 유리창을 통과한 빛에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섬유로프를 이용한 엄윤나의 설치 작업 ‘Pagoda of Invisible Value’, 티엘 디자인 스튜디오의 샹들리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과 디자인이 같은 곽철안의 의자가 놓여 있다. 계단에는 크림색 콘크리트에 투명한 아크릴이 조약돌처럼 박힌 랩크리트(lab.crete)의 상판으로 장식돼 있다. 이어지는 2층에는 한국의 자생식물 정원을 연구해 온 ‘플로시스’가 디자인한 정원, 염색한 한지와 레진으로 몽환적인 가구를 만드는 손상우의 ‘Kiri’ 의자와 테이블, 젊은 목수 김지원이 만든 테이블과 낚시용품을 이용해 만든 모빌도 설치돼 있다. 이처럼 꽃술에선 국공립 미술관이나 국내외 유명 갤러리에서 볼 수 있었던 디자인 작품을 만지거나 사용할 수 있다. 주인 이미혜 씨는 “10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가방도 들고 다니는데 그보다 훨씬 저렴한 가구 작품을 굳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먹고 즐기며 감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상 속 디자인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매장 내의 모든 디자인 작품은 이 씨가 구입한 소장품이다. 손님이 원하면 작가가 만든 똑같은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꽃술에서는 이렇게 가구뿐 아니라 주방과 문손잡이, 계단, 식물 한 포기까지 매장 내의 모든 제품을 판매한다. 손님들은 국내 양조장에서 생산된 전통 술인 ‘세시주’를 마시며 디자인을 즐긴다. 음식을 싣고 오는 트롤리도 역시 판매하는 상품 중 하나다. 꽃술 옥상에는 배롱나무와 자엽안개나무를 비롯한 한국 식물을 가득 심었다. 옥상에서는 팝업 전시와 영화 상영, 다양한 공예 수업 등의 프로그램도 이어진다. 잡지사 기자 출신인 이 씨는 디자이너의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과 사진, 텍스트를 기록해 온·오프라인으로 소개한다. 그는 “매년 공간을 리뉴얼하면서 시즌별로 작가 리스트를 포함해 디스플레이와 판매 작품도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50대 남성 이발사인 박모 씨. 그는 오른팔과 다리에 마비 증상이 있어 중풍 치료로 유명한 병원에 간다. 병원에서는 양의가 자기공명영상(MRI)과 심전도, 혈액 검사를 한 뒤 고혈압과 뇌경색 진단을 내린다. 혈전용해제와 항혈소판응고제가 처방된다. 옆에 있던 한의사가 맥을 짚어보고, 혀를 내밀라고 하면서 설진을 한다. 그에겐 태음인 체질에 맞는 한약이 처방된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한방과 양방 전문의 협진센터 모습이다. 20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미신으로 치부됐던 한의학이 현대의학을 받아들여 ‘혼종(하이브리드) 의료문화’를 탄생시키며 생명력을 키워가고 있는 현장이다. 요즘 한의사는 엑스레이를 활용하고, 실험실에서 연구해 세계 유수 과학지에 실리는 영어 논문을 쓴다. 기업들은 앞다퉈 한방화장품, 천연물 신약을 내놓는다. 세계 전통의학에서 한의학만큼 성공적인 사례는 드물다. 이 책은 사회학자인 저자가 대학원생 시절부터 한의학 실험실 관찰을 시작해 20년간 ‘한의학 근대화’ 과정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한의학의 과학화라는 창을 통해 한국 사회의 ‘근대성’과 ‘권력’을 설명한다. “근대는 한국인들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낳았다. 한국 근대의 아버지는 서구이고, 우리는 거세당할 위협을 느끼며 서구가 제시한 사회모델과 질서 체계를 따라가야 한다는 집단적 억압에 시달려 왔다.” 그는 ‘근대-전통’, ‘서구-비(非)서구’, ‘과학-전통지식’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도전하며 “비서구에서 창조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실제로 한의학은 양의학(과학)과 충돌해 왔지만 끊임없이 이들과의 하이브리드화를 통해 확장됐고, 국가와의 싸움과 타협을 통해 자신들의 인프라 권력을 성장시켜 왔다. 실제로 한의학은 구한말까지 국왕과 왕실에 대한 의료 활동을 담당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식민화의 대상이 된다. 1914년 일제의 근대적 의사면허 제도가 도입되고, 한의사는 의생으로 격하된다. 한의학은 일제에 의해 ‘미개와 후진을 상징하는 소재’가 됐다. 광복 이후에 1951년 의료법 개정으로 양·한방 이원 의료체계가 탄생했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양의학과 갈등을 겪었다. 1990년대 한약 분쟁이 대표적이다. 한약 분쟁을 계기로 한의학계는 역설적으로 과학적 전환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이후 정부와의 투쟁 속에서 한의약정책관, 한방전문의 제도, 한의약육성법 제정, 국립대 한의학과 설치, 양·한방 협진 의료 체계 법제화 등 정치적 권력을 크게 확장해 왔다. 저자가 이 책에서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의학이 아니라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 근대화론 논쟁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동양의 정신, 서양의 물질’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으며, 모든 사안을 ‘일관된 전체’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의학의 근대화는 통일적 전체가 아니라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들, 공격적인 한의사 집단의 정치력, 한의학과 양의학의 혼종성 등 ‘비통일적 세트(set)들’의 확장과 변화다. 통일적 전체로 근대를 이해하는 것은 ‘전부 아니면 무(無)’라는 조급하고 과격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비통일적 세트들’로서의 근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행위자들의 자율성과 창조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근대는 끊임없이 확장 가능한 행위자들의 열린 기획이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올해 7월 28일 높은 회색빛 철제 울타리가 세워져 있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 장벽에서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비극의 온상이 됐던 장벽에 분홍색 시소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이 시소를 타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의 아이들이 국경에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울타리 틈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소통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사람은 미국 건축가인 로널드 라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48). 2009년 ‘건축으로서의 국경’이란 책과 TED강의에서 ‘양국적 시소’라는 개념을 내놓아 주목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3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SDF 2019’ 강연을 위해 방한했다. 30일 본보와 인터뷰한 라엘 교수는 시소를 설치한 이유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장벽을 더 많이 세우겠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민자 문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건축된 장벽의 허무함을 드러내기 위해 창의적인 디자인과 놀이를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소는 한쪽의 행위가 반대쪽에 직접적인 결과로 미칠 수 있다는 인식을 어른과 아이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시소는 나와 상대방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에 대한 관용이 있어야 함께 탈 수 있습니다. 시소를 통해 평등과 불평등,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라엘 교수는 2009년부터 10년 동안 국경 장벽에서 즐거움과 재미, 화합으로 가득 찬 건축적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현실화하는 데 힘써 왔다. 장벽을 넘어갔다가 되돌아오는 그네를 설치하고, 장벽을 네트로 삼는 배구 경기장을 만들었다. 장벽 틈을 사이에 두고 양국 주민들끼리 식사를 함께 나누고 장벽 주변에서 연주회를 열고 영화를 감상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에게 군사적 긴장도가 훨씬 높고 폭도 넓은 한반도 비무장지대(DMZ)의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물었다. “멕시코 장벽이 원래 하나였는데 두 겹이 된 곳이 있습니다. 두 겹이 되다 보니 담 너머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져 멀리서 수화를 하고, 망원경으로 보고 영어와 스페인어로 통역하며 의사소통을 한 적이 있습니다. DMZ는 장벽 탓에 역설적으로 자연환경이 잘 보전돼 있습니다. 남북한이 함께 자연환경 보호와 연구를 협력하면서 장벽의 긴장을 완화한다면 결국엔 허물 수도 있지 않을까요?”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서울 종로구 중앙고에 기형도 시인(1960∼1989)의 ‘빈집’이 새겨진 시비(詩碑)가 29일 세워졌다. 옆에는 기형도문학관 명예관장인 누나 기향도 씨. 이날 열린 제막식에는 시인과 연세문학회에서 함께 활동한 성석제 소설가를 비롯해 김종필 중앙고 교장, 김주선 중앙교우회 사무총장, 시인의 고교 친구인 중앙고 70회 졸업생들이 참석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요절한 시인 기형도(1960~1989)의 ‘빈집’이 새겨진 시비(詩碑)가 29일 고인의 모교인 서울 종로구 중앙고 교정에 세워졌다. 이날 열린 제막식에서 중앙고 후배인 문예반 학생들이 시 ‘빈집’을 낭독했고, 대학시절 연세문학회에서 시인과 함께 활동하며 글벗으로 우정을 나눴던 성석제 소설가가 ‘기형도의 청년시절’을 강연했다. 성 작가는 “기형도는 대학시절부터 이미 완성된 시 세계를 갖고 있었다”며 “긴 세월 동안 기형도라는 이름이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를 다시 읽는 우리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기형도문학관의 명예관장인 시인의 친누나 기향도 씨와 김종필 중앙고 교장, 김주선 중앙교우회 사무총장, 시인의 고교친구인 중앙고 70회 졸업생들이 참석했다. 1985년 ‘안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기형도 시인은 ‘입 속의 검은 잎’, ‘질투는 나의 힘’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건축은 외교다. 대사관 건축엔 동서양 문화가 절묘하게 담겨 있다. 디자인과 설계, 나무와 돌, 인테리어와 가구까지…. 본국과 주재국 간의 팽팽한 긴장과 협력이 느껴진다. 그래서 대사관 건축 탐방은 무척 흥미롭다. 지난달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와 ‘오픈하우스서울’이 평소 닫혀 있는 대사관을 개방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인터넷 신청이 1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였다. ○ 한옥을 재해석한 외교공관 주한 프랑스, 스위스, 미국대사관은 한옥을 재해석한 건축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선다. 서울 서대문구 합동에 있는 프랑스대사관은 프랑스에서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였던 김중업의 대표작이다. 1962년 완공한 프랑스대사관의 핵심은 한국적 선이 살아있는 지붕이다. 업무동의 지붕이 날아갈 듯 가볍게 하늘로 치솟았다면, 대사관저 지붕은 웅장하게 내려앉는다. 지붕은 단 4개의 기둥이 떠받들고, 두 개의 건물은 부드러운 곡선의 가교로 이어진다. 정원을 부채꼴처럼 둘러싸고 있는 건축물은 마치 노래하고 군무를 추는 듯 경쾌하다. 외벽에는 김종학 윤명로 화가가 만든 모자이크로, 내부에는 앙리 마티스와 이응로 화백 등 양국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돼 있다. 특히 다이닝룸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눈길을 끈다. 필립 르포르 주한 프랑스대사는 “식탁 위 대동여지도는 프랑스식 테이블을 한국적인 영혼이 보호하고 있는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스위스 정부는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서 45년간 사용했던 낡은 건물을 허물고 지난해 새 대사관을 완공했다. 스위스 출신 건축가는 설계 전 부석사, 소수서원 등을 답사한 뒤 ‘ㄷ’자 한옥 형태의 건물을 지었다. 목재 대들보와 기둥으로 한옥 특유의 켜켜이 반복되는 공간감과 리듬감을, 격자무늬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즐거움을 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대사 집무실이었다. 창 밖으로 돈의문 마을 뒤편 한양도성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멋진 뷰를 가졌다. 또한 중정에 설치된 지붕부터 바닥까지 쇠사슬로 연결해 빗물을 받는 스위스 예술가의 설치작품 ‘워터커넥션’도 재미와 감동을 준다. 빗물은 지하탱크로 모아서 정수한 뒤 화장실과 난방에 활용한다. ○ ‘미스터 션샤인’이 근무했던 옛 미국 공사관 정동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에 들어선 순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떠올랐다. 미 공사대리 유진 초이(이병헌)가 근무했을 법했던 옛 공사관 건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한옥은 1884년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외국 공사관 건물이었다. 이 건물 뒤쪽으로 가면 1974년 신축한 미 대사관저가 나온다. 당시 필립 하비브 대사의 이름을 따 ‘하비브하우스’로 불린다. 잔디밭에 있는 해태 석상 중간에는 작고 귀여운 고양이 석상이 놓여져 있다. 해리스 대사 부부가 고양이를 좋아해 구해 놓은 앙증맞은 석상이다. 서까래와 기둥은 미국에서 가져온 더글러스전나무로 만들었고, 전통장인이 구운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관저 안뜰 가운데에는 경주 포석정 수로를 본뜬 연못도 있다. 덕수궁 옆에 1892년 지어진 영국대사관저는 개화기 대사관 가운데 현재까지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는 유일한 곳이다. 빅토리아풍 건물인 대사관저로 들어서면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경북 안동 방문 사진도 걸려 있다. 대사관의 ‘서프라이즈’ 공간은 지하에 설치된 영국식 펍 ‘브로턴 바’다. 매주 금요일 밤 주한 외교관들의 사교 공간으로, 대사관 직원들이 자원봉사로 바텐딩을 한다. 닉 메타 부대사는 “주한 대사관 중 바가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고 자랑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주한 이집트대사관은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은 듯한 형태다. 설계자인 건축가 장윤규는 이 건물을 ‘떠 있는 돌’에 은유했다. 돌은 바로 이집트 문명을 다시 재발견하게 한 로제타스톤. 대사관 외벽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고, 내부 1층 로비는 이집트 신전처럼 꾸며져 있다. 장 건축가는 “돌이 자유롭게 떠 있다는 것은 신화적인 상상”이라며 “건물 전체를 상형문자로 뒤덮어 돌이라는 물성(物性)을 제거하고 문자와 기호만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건축은 외교다. 대사관 건축엔 동서양 문화가 절묘하게 담겨 있다. 디자인과 설계, 나무와 돌, 인테리어와 가구까지…. 본국과 주재국 간의 팽팽한 긴장과 협력이 느껴진다. 그래서 대사관 건축 탐방은 무척 흥미롭다. 지난달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와 ‘오픈하우스서울 2019’가 평소 들어가 볼 수 없는 대사관을 탐방하는 특별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인터넷 신청이 1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였다. ●‘한옥의 재해석’ 프랑스, 스위스 대사관 서울 서대문구 합동에 있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은 김중업의 대표작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제자로 함께 일했던 1세대 건축가. 1962년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완공한 프랑스대사관의 핵심은 지붕이다. 김중업은 한국적 건축의 특징을 바로 지붕에서 찾았다. 대사관 업무동의 지붕은 날아갈 듯 가볍게 하늘로 치솟았다면, 대사관저 지붕은 웅장하게 내리누른 형상이다. 거대한 지붕이 단 4개의 기둥으로 떠받들어지고, 두 개의 건물을 부드러운 곡선의 가교가 이어준다. 중앙 정원을 두고 부채꼴처럼 둘러싼 건축물은 마치 노래하고 군무를 추는 듯 경쾌한 형상이다. 대사관저 외벽에는 김종학·윤명로 화가가 만든 모자이크가, 내부에는 앙리 마티스와 이응로 화백 등 양국 예술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특히 다이닝룸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눈길을 끈다. 필립 르포르 주한프랑스대사는 “식탁 위 대동여지도 장식은 프랑스식 테이블을 한국적인 영혼이 보호하고 있는 상징적인 모습”이라며 “대사관은 한국과 프랑스의 정신을 담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스위스 정부는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서 45년간 사용했던 낡은 건물을 허물고 2017년 새 대사관을 지었다. 주변에 고층아파트가 즐비하지만, 주한스위스대사관은 낮은 한옥 형태의 건물을 지었다. 원래 땅의 능선을 따라 3층이던 건물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면서 1층으로 점차 낮아진다. 스위스 건축회사는 설계 전 부석사, 소수서원 등 전통한옥을 답사했다고 한다. 목재 대들보와 기둥이 보이는 내부는 한옥 특유의 켜켜이 반복되는 공간감과 리듬감, 격자무늬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즐거움을 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대사 집무실에서 바라본 창 밖 풍경이었다. 돈의문 마을 뒤편 한양도성이 창문 가득히 눈에 들어왔다. 또한 중정에 설치된 빗물받이용 설치작품인 ‘워터커넥션’도 재미와 감동을 준다. 지붕에서 바닥까지 쇠사슬로 연결해 스위스에서 가져온 돌에 묶었고, 바닥에 파인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했다. 스위스 예술가 레나 마리아 튀링의 작품으로 비가 올 때 빗물 떨어지는 소리와 모습에 취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조형물이다. 빗물은 지하탱크로 모아서 정수한 뒤 화장실과 난방에 활용한다. 또한 지열과 태양열을 이용해 대사관에서 쓰는 모든 냉방과 난방, 전기를 자급자족하는 친환경 건물이기도 하다. ●‘미스터 션샤인’이 근무했던 옛 미국 공사관 정동에 자리 잡은 미국 대사관저에 들어선 순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떠올랐다. 미 공사대리 유진 초이(이병헌)가 근무하던 옛 공사관 별관 건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옛 미국공사관은 1884년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외국 공사관 건물이었다. 드라마의 실제 촬영지는 충북 청주시 ‘운보의 집’이지만, 한옥과 나무가 어우러진 분위기는 무척 흡사한 느낌이었다. 옛 미국공사관 뒤쪽으로 가면 1974년 신축한 미 대사관저가 나온다. 당시 건물을 지은 필립 하비브 대사의 이름을 따 ‘하비브하우스’로 불린다. 건축가이자 민속학자인 조자용이 설계하고, 전통목조건축 대가인 신영훈과 인간문화재 이광규 대목장 등이 참여했다. 미국 오리건 주와 테네시 주에서 자라는 더글러스전나무로 서까래와 기둥을 만들었고, 전통 기와 장인이 만든 기와로 지붕을 만들었다. 잔디밭에는 해태 석상 중간에 작고 귀여운 고양이 석상이 눈길을 끈다. 해리스 대사 부부가 고양이를 좋아해 구해놓은 앙증맞은 석상이다. 대사관저의 리셉션 실에 있는 벽난로 굴뚝에는 ‘녕(寧·편안할 녕)’ 자가 새겨져 있다. 관저 안뜰 한가운데에는 경주 포석정 수로를 본뜬 연못도 있다. 미국 대사관의 직원은 “포석정 모양 수로에서 술잔을 한번 띄워놓아 보았더니 잘 흘러가지는 않았다. 물고기를 기르는 관상용 연못”이라고 귀띔했다.●독특한 자국 문화를 살린 영국, 이집트 대사관 덕수궁 옆에 있는 영국대사관저는 1892년에 지어진 건물로 개화기 대사관 가운데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사용하는 유일한 외교공관이다. 빅토리아풍 빨간 벽돌 건물인 대사관저로 들어서면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경북 안동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과 기념품들이 전시돼있다. 신축한 건물 지하에는 주한외교관들의 사교공간인 영국식 펍 ‘브로턴 바’가 있다. 1797년 한반도에 도착한 첫 번째 영국인 선장 윌리엄 브로턴 대위를 기념하는 바다. 매주 금요일 밤 운영하는 회원제 술집으로, 닉 메타 부대사 등 대사관 직원들이 자원봉사로 바텐딩을 한다. 메타 부대사는 “한국에 있는 대사관 중 바가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며 “서울 최고의 진(gin)과 위스키 컬렉션을 갖춘 곳”이라고 자랑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주한이집트대사관은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은 듯한 형태다. 이집트 대사관을 설계한 건축가 장윤규는 건축물을 ‘떠있는 돌(floating stone)’에서 은유했다고 한다. 돌은 바로 이집트문명을 다시 재발견하게 한 로제타스톤. 대사관 외벽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건물 내부 1층 로비는 이집트 신전처럼 꾸며져 있다. 장윤규 건축가는 “돌이 자유롭게 떠 있다는 것은 신화적인 상상”이라며 “원래 계획은 건물 전체를 상형문자로 뒤덮어 돌이라는 물성(物性)을 제거하고 문자와 기호만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 기자raphy@donga.com}
검은색 코트를 입은 사내가 서 있다. 그 앞에 검정 비닐봉지가 바람에 흩날린다. 비닐은 르코르뷔지에의 유명 건축물인 프랑스 롱샹성당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 피사의 사탑,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으로도 흘러간다. 사내의 얼굴에서 출발한 드론의 카메라는 검정 비닐을 쫓아가다가 세계의 랜드마크 건축물을 천천히 밑에서 위로 훑으며 치솟는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마을과 도시, 지구는 둥그렇게 원이 된다…. 13년째 검고 흰 비닐봉지와 함께 세계 각국의 자연과 건축물을 촬영하며 여행하는 사내가 있다. 퍼포먼스,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 온 작가 이경호(52·사진). 유튜브에 공개된 그의 영상은 우리가 사는 도시와 건축물, 지구를 색다른 차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프랑스 유학 시절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2006년 우연히 비닐봉지가 선풍기 바람에 날리는 모습에 매료됐다고 한다. 이후 경북 경주, 비무장지대(DMZ)와 같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봉다리의 비행’을 담은 ‘Some Where’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는 “마치 일기장을 적는 것처럼 가는 곳마다 도시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현지에서 썼던 흰색, 검은색, 노란색 비닐봉지를 날리며 촬영했다. 구속 없이 자유로운 ‘봉다리의 여행’에는 짙은 허무주의도 배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봉다리는 2009년부터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생태 사상가 토머스 베리(1914∼2009) 연구 모임인 ‘지구와 사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봉다리는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 ‘검은 석유덩어리’를 상징하게 됐다. 그는 2, 3년 전부터는 드론을 활용해 검은 봉다리의 비행을 좇고 있다. 알프스산맥의 빙하가 녹는 산골,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기에 처한 태평양의 마을에도 봉다리는 날아다닌다. 드론 촬영 영상은 작은 비닐봉지에서 출발해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 지구적인 모습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시각적 충격을 더한다. 그는 “두렵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더욱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환경 파괴의 주범인 비닐봉지를 ‘생태운동’의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막한 ‘세종 카운터웨이브’ 전시에서 신작 ‘흑 백’을 선보였다.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선풍기 바람에 검은색, 흰색 비닐봉지 수십 개가 끊임없이 유영하는 작품이다. 전시 장소인 광화문의 장소성에 주목한 작품으로, 흑백의 봉다리는 촛불과 태극기 시위가 벌어지는 광화문광장의 좌우, 남북, 계층 간의 분노와 대립을 풍자하는 상징이다. 이 작가는 “자유롭게 섞이며 날아다니는 봉다리를 보며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고, 사람뿐 아니라 자연과 동물까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12월 15일까지.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검은색 코트를 입은 사내가 서 있다. 그 앞에 검정 비닐 봉지가 바람에 흩날린다. 비닐 은 르코르뷔지에의 유명 건축물인 프랑스 롱샹성당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피사의 사탑,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으로도 흘러간다. 사내의 얼굴에서 출발한 드론의 카메라는 검정 비닐을 쫓아가다가 세계의 랜드마크 건축물을 천천히 밑에서 위로 훑으며 치솟는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마을과 도시, 지구는 둥그렇게 원이 된다…. 13년째 검고 흰 비닐봉지와 함께 세계 각국의 자연과 건축물을 촬영하며 여행하는 사내가 있다. 퍼포먼스,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 온 작가 이경호. 유튜브에 공개돼 있는 그의 영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건축물, 지구를 색다른 차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프랑스 유학시절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2006년 우연히 비닐봉지가 선풍기 바람에 날리는 모습에 매료됐다고 한다. 이후 경주, DMZ와 같은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봉다리의 비행’을 담은 ‘Some Where’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는 “마치 일기장을 적는 것처럼 가는 곳마다 도시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현지에서 썼던 흰색, 검은색, 노란색 비닐 봉지를 날리며 촬영했다. 구속없이 자유로운 ‘봉다리의 여행’에는 짙은 허무주의도 배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봉다리는 2009년부터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생태 사상가 토마스 베리(1914~2009) 연구모임인 ‘지구와 사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봉다리는 이제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 ‘검은 석유덩어리’를 상징하게 됐다. 그는 2~3년전부터는 드론을 활용해 검은 봉다리의 비행을 좇고 있다. 알프스산의 빙하가 녹는 산골,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위기에 처한 태평양의 마을에도 봉다리는 날아다닌다. 드론 촬영 영상은 작은 비닐봉지에서 출발해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지구적인 모습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시각적 충격을 더한다. 그는 “두렵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더욱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환경 파괴의 주범인 비닐봉지를 ‘생태운동’의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막한 ‘세종 카운터웨이브’ 전시에서 신작 ‘흑 백’을 선보였다.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선풍기 바람에 검은색, 흰색 비닐봉지 수십 개가 끊임없이 유영하는 작품이다. 전시장소인 광화문의 장소성에 주목한 작품으로, 흑백의 봉다리는 촛불과 태극기 시위가 벌어지는 광화문 광장의 좌우, 남북, 계층 간의 분노와 대립을 풍자하는 상징이다. 이 작가는 “자유롭게 섞이며 날아다니는 봉다리를 보며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고, 사람 뿐 아니라 자연과 동물까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12월15일까지.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360도 탁 트인 전망. 북한산과 종묘, 남산타워, 광화문의 고층빌딩 숲까지…. 세운상가 9층 전망대와 세운상가 3층과 대림상가를 잇는 공중 보행교는 요즘 가장 떠오르는 곳이다. ‘을지로 루프톱’으로 불리는 이곳엔 해질 녘이면 연인들이 몰려든다. 가장 아름다운 청계천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인 데다 다전식당, 호랑이 카페 등 야외에 테이블을 내놓는 ‘힙한’ 가게들이 성업 중이기 때문이다. 을지로에 들어선 가게들은 대개 크고 특별한 간판을 내걸지 않는다. 작은 입간판을 내놓거나, 계단 한쪽에 붙은 포스터가 간판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숨어 있는 을지로의 명소를 공공미술과 디자인으로 해석해 좀 더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을지로3가 프로젝트’가 주목받고 있다. 1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역 지하보행로에는 70여 m에 이르는 구간에 ‘을지로 사이’가 오픈했다. 신한카드와 서울교통공사, 굿네이버스가 함께 만든 문화예술 전시공간으로, 세운상가의 장인들과 을지로의 핫한 가게들의 이야기가 예술작품으로 전시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계탑 광장. 파리, 런던, 베이징, 뉴욕 등 세계 주요 도시의 시간을 보여주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계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을지로를 상징하는 듯하다. ‘메이드인을지로’ 섹션에서는 세운상가 기술장인들의 작업물이 아트워크로 전시됐다.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다다익선’ TV제작에 참여했던 이정성 엔지니어, 50여 년간 3대에 걸쳐 경찰관과 소방관용 특수조끼를 만들어 온 이종훈 장인, 게임기를 만들다 화폐교환기를 발명한 주승문 장인…. 을지로에서 생산되는 부품과 공구, 인쇄기와 타일도기, 조명기구 등도 지역 디자이너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소상공인과 장인, 예술가를 연결시키는 ‘을지로3가 프로젝트’는 2년 전부터 시작됐다. 신한카드 본사가 을지로로 옮겨오면서 지역의 중소상공인 가맹점과 상생프로젝트를 펼친 것. 기업이 도심재생을 통해 사회공헌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문 시도였다. 올해 3월에는 어두운 골목길에 있던 낙후된 서울시립청소년센터를 지역과 사람, 문화를 잇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단장했다. 이곳에서는 을지로를 다룬 독립출판물, 전문매거진, 영상 콘텐츠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고강석 신한카드 브랜드기획팀 부부장은 “을지로 고유의 지역 문화와 자산을 활용하는 공공디자인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라고 설명했다. 16일부터는 을지로 12곳의 가게와 예술가들이 협업하는 팝업 전시인 ‘을지로 아트위크’도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 허준 선생이 환자를 치료하던 ‘혜민서’ 자리에서 운영 중인 ‘커피 한약방’에서는 전통민화가 김제민 작가의 ‘향기약방’ 전시가 열리고 있다. 벽에 걸려 있는 아티스트 부채로 마치 한약을 달이듯 정성껏 커피를 식혀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혜민당’에서는 디저트를 풍경으로 담은 조은아 작가의 이색적인 동양화, 그리고 동양화를 닮은 특이한 디저트를 만날 수 있다. ‘그랑블루’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한 함영훈 작가의 ‘LOVE’가 전시되고, 세운상가 ‘호랑이 카페’에는 카프카의 이방인 등 문학작품을 재해석한 문신기 작가의 그림이 전시된다. 12곳의 가게에서는 취향에 따라 을지로를 즐길 수 있는 ‘을지로 컬처맵’을 나눠준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360도 탁 트인 전망. 북한산과 종묘, 남산타워, 광화문의 고층빌딩 숲까지…. 세운상가 9층 전망대와 세운상가 3층과 대림상가를 잇는 공중 보행교는 요즘 가장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다. ‘을지로 루프탑’으로 불리는 이 곳엔 해질녘이면 데이트족들이 몰려든다. 가장 아름다운 청계천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인데다, 다전식당, 호랑이카페 등 야외에 테이블을 내놓는 힙한 가게들이 성업 중이기 때문이다. 을지로에 들어선 가게들은 대게 특별한 간판을 내걸지 않는다. 작은 입간판을 내놓거나, 계단 한 켠에 붙은 포스터가 간판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숨어 있는 을지로의 명소를 공공미술과 디자인으로 해석해 좀더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을지로3가 프로젝트’가 주목받고 있다. ● 을지로3가역 문화예술 전시공간 ‘을지로 사이’지난 1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역 지하보행로에는 70여m에 이르는 구간에 ‘을지로 사이’가 오픈했다. 신한카드와 서울교통공사, 굿네이버스가 함께 만든 문화예술 전시공간으로, 세운상가의 장인들과 을지로의 핫한 가게들의 이야기가 예술작품으로 전시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계탑 광장. 파리, 런던, 베이징, 뉴욕 등 세계 주요도시의 시간을 보여주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계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을지로를 상징하는 듯하다. ‘메이드인을지로’ 섹션에서는 세운상가의 기술장인들의 작업물이 아트워크로 전시됐다.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다다익선’ TV제작에 참여했던 이정성 엔지니어, 50여년간 3대에 걸쳐 경찰관과 소방관용 특수조끼를 만들어 온 이종훈 장인, 게임기를 만들다 화폐교환기를 발명한 주승문 장인…. 을지로에서 생산되는 부품과 공구, 인쇄기와 타일도기, 조명기구 등도 지역 디자이너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을지로를 이용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을지로를 관찰하는 작가들도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 곳만의 ‘을지로다운’ 이야기를 지역 스튜디오 ‘망우삼림’의 윤병주 작가의 눈으로 담은 갤러리도 마련됐다. 을지로3가역 12번 출구 앞에 마련된 ‘을지로 컬쳐존’에서는 독립출판물, 전문매거진, 영상팀의 특별 콘텐츠를 한 곳에서 관람할 수 있으며, 을지로를 취향대로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하는 지도인 ‘을지로 컬처맵’도 디지털로 감상할 수 있다. ● 디자인과 예술을 통한 도심재생 프로젝트 소상공인과 장인, 예술가를 연결시키는 ‘을지로3가 프로젝트’는 2년 전부터 시작됐다. 신한카드가 본사를 을지로로 옮겨오면서 지역의 중소상공인 가맹점과 상생프로젝트를 펼친 것. 기업이 도심재생을 통해 사회공헌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문 시도였다. 올해 3월에는 어두운 골목길에 있던 낙후된 서울시립청소년센터를 지역과 사람, 문화를 잇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단장했다. 이곳에서는 을지로를 다룬 독립출판물, 전문매거진, 영상 콘텐츠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고강석 신한카드 브랜드기획팀 부부장은 “을지로 고유의 지역 문화와 자산을 활용하는 공공디자인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라고 설명했다. 16일부터는 을지로 12곳의 가게와 예술가들이 협업하는 팝업 전시인 ‘을지로 아트위크’도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 허준 선생이 환자를 치료하던 ‘혜민서’ 자리에서 운영 중인 ‘커피 한약방’에서는 전통민화가 김제민 작가의 ‘향기약방’ 전시가 열리고 있다. 벽에 걸려 있는 아티스트 부채로 마치 한약을 달이듯 정성껏 커피를 식혀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혜민당’에서는 디저트를 풍경으로 담은 조은아 작가의 이색적인 동양화, 그리고 동양화를 닮은 특이한 디저트를 만날 수 있다. ‘그랑블루’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한 함영훈 작가의 미디어아트 ‘LOVE’가 전시되고, 카페 ‘녁’에서는 김건주 작가가 가게의 벽과 유리창을 숲으로 변신시켰다. 숲 속 동물을 담은 일러스트 공간과 아트같은 푸드 플레이팅을 경험할 수 있다. 아티스트들의 영감의 성지로 유명한 ‘호텔수선화’에서는 다양한 감각의 비주얼 쇼가 열리고, 세운상가 ‘호랑이 카페’에서는 문신기 작가가 카프카의 ‘이방인’ 등 문학을 재해석한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또한 ‘챔프커피’에는 잭슨심 작가의 ‘아임챔피언, 킹콩!’ 작품 감상과 함께 응원메시지를 담은 킹콩 스탬프도 가져갈 수 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로 우리 사회는 반으로 갈라졌다. 서초동과 광화문. 진영논리로 둘러싸인 채 각자 목소리를 높인다. 심지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사랑의 해방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저자는 정치에서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책에서 호소한다. 분노, 두려움, 공감, 혐오, 시기심, 죄책감, 비애, 사랑…. 그러나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 ‘감정’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저자는 법, 철학, 문학, 오페라, 건축, 동물학 등을 넘나들며 감정이 어떻게 공적 영역을 지배하는지를 분석한다. 그중 ‘혐오’ 부분이 가장 눈에 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공동체는 늘 경쟁적인 서열 매김이 일어난다. 복종의 핵심 장치는 혐오였다. 혐오의 ‘1차적 대상’은 땀, 오줌, 배설물, 정액, 피 등 동물적 특성을 상기시키는 신체 분비물. 오염을 피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투사적 혐오’는 사회적이다. 머릿속에서 ‘더 동물적’이라고 덧씌운 하위계층을 만들어내 배제하고, 낙인찍는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정치는 박애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군주에 대한 두려움, 복종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이 한데 뭉칠 수 없었다. 시민들은 서로 협력해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생각해내야 했다. …혐오는 어떤 집단들에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그들을 동물로 그린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상상적 연결을 부추기는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정의를 위해 중요하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일제강점기 3·1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펼쳐졌던 ‘6·10만세운동’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15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동화빌딩 별관에서 열렸다.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된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전 주일대사)는 인사말에서 “6·10만세운동은 온 국민이 정치적 성향과 사상을 뛰어넘어 뭉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며 “100주년을 앞두고 사단법인 창립을 통해 통합의 정신을 되살리려 한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학술심포지엄, 100주년 운동사 발간, 종로3가역 테마역 조성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사에는 박찬승(한양대) 장석흥 교수(국민대), 6·10만세운동 유공자 유족인 이원정 곽준 선생, 유영환 ㈜효성 전무, 김종필 중앙고 교장,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 이승철 전 고려대 기금교수, 감사에 김재호 바른 법무법인 대표가 뽑혔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순종 인산일에 중앙고보, 연희전문 등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해 벌였던 만세시위로,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함께 국내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이날 총회에는 양봉진 전 현대자원개발 사장, 김주윤 전 흥국생명 사장, 유종성 가천대 교수(전 경실련 사무총장), 유족인 권옥희 김원진 선생 등 32명이 창립회원으로 참석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