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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욱 검찰총장이 어제 ‘혼외자(婚外子)’ 의혹을 제기한 조선일보를 상대로 정정 보도 청구소송을 냈다.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 이후 18일 만이고, 조선일보가 정정 보도를 거부한 지 15일 만이다. 채 총장의 소송 제기는 늦었지만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본다. 채 총장은 “법 절차에 따라 유전자(DNA) 검사를 포함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신속히 진실이 규명되도록 할 것”이라며 조선일보가 지목한 혼외자와 그 어머니 임모 씨 측에도 이른 시일 내에 유전자 검사에 응해줄 것을 부탁했다. 유전자 검사는 진실을 정확하게 밝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유전자 검사는 소송으로도 강제할 수 없고, 임 씨가 아이의 법률 대리인으로서 동의해야 가능하다. 임 씨는 언론사에 보낸 편지에서 아이가 채 총장의 아이로 알려지기까지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전자 검사에 적극 협조해 채 총장이 받고 있는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 도리다. 채 총장의 소송 제기가 일종의 지연책이 아니기를 바란다. 정정 보도 청구소송은 판결이 나는 데까지 1년 정도가 걸린다. 채 총장의 소송은 시간이 경과해 국민의 관심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일 뿐, 임 씨가 유전자 검사에 동의하지 않아 진실을 가리지 못한 채 끝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검찰총장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소송에서도 진정한 진상 규명 의지를 보여야 한다. 채 총장은 어제 사퇴 의사를 다시 밝혔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야권이 채 총장의 사퇴에 정치적 의혹을 제기하자 채 총장의 사표를 반려하고 진상 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진상 조사에는 강제 수사권이 없어 의혹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어렵다. 채 총장의 말처럼 이미 논란이 지나치게 확산돼 설령 그가 억울한 것으로 밝혀진다고 해도 검찰총장으로 복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채 총장이 의혹 해소를 위한 소송을 제기한 이상 정부는 이쯤에서 진상 조사를 접고 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검찰총장의 부재(不在) 상태가 장기화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지금 당장 추천위원회를 가동해 검찰총장 후보를 뽑고 국회의 청문 절차를 거쳐 정식 임명한다고 해도 두 달이 넘게 걸린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사건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수사가 여러 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청와대는 서둘러 검찰 조직을 안정시키고 정상화해야 한다.}
일본의 근대화는 남쪽에서 들고일어나 중앙의 에도(江戶·현재의 도쿄) 막부를 타도한 뒤 이뤄진 것이다. 막부 타도에 앞장선 것은 조슈(長州) 번과 사쓰마(薩摩) 번. 조슈 번은 혼슈(本州)의 최남단으로 야마구치(山口) 현 일대다. 사쓰마 번은 규슈(九州)의 가고시마(鹿兒島) 현 일대다. 일본 근대화의 유산도 규슈와 야마구치 현에 많이 퍼져 있다. 일본 정부는 규슈와 야마구치 현의 근대화 산업유산 28개를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이 가운데 야하타(八幡) 제철소와 나가사키(長崎) 조선소가 가장 유명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도 메이지(明治) 시대의 대표적 공업시설로 거론된다. 야하타 제철소는 신일본제철에 의해, 나가사키 조선소는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에 의해 현재도 가동되고 있다. 나가사키 항 남서쪽의 인공섬 하시마(端島)에는 해저 석탄을 캐는 탄광이 있었다. 나가사키 조선소와 함께 미쓰비시의 소유였다. ▷나가사키 조선소와 하시마 탄광은 징용으로 끌려간 우리 국민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 4700여 명이 징용돼 군함을 건조했다. 이 중 1600명은 1945년 8월 원폭 투하 때 숨졌다. ‘감옥섬’으로 불리던 하시마 탄광에서는 해저 1000m까지 내려가는 갱도에서 하루 12시간씩 강제노동을 했다. 견디지 못해 탈출하다 익사한 사람을 포함해 한국인 122명이 사망했다. 한국 외교부는 일본 정부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기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은 규슈·야마구치 현의 근대화 산업유산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면서 ‘비(非)서양세계에서 근대화의 선구’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서양의 근대화에도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라는 어두운 면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민 사이의 일이다. 일본의 근대화에는 일본인에 의한 한국인과 중국인 착취라는 어두운 면이 있다. 일본은 이웃 국가에 끼친 고통에 대해 한마디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술집 여주인 Y 씨와 사이에 혼외(婚外) 자식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채동욱 검찰총장이 전격 사퇴했다. 어제 법무부가 채 총장에 대한 감찰에 착수했다고 밝힌 직후다. 채 총장은 부산에서 근무하던 시절 만난 Y 씨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에도 ‘사실무근’임을 강조하며 완강하게 버텼지만 법무부가 감찰 착수를 발표한 지 1시간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물러나면서도 혼외 자식에 대한 보도는 사실무근임을 거듭 주장했다. 법무부는 “국가의 중요한 사정기관 책임자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지속되는 것은 검찰에 대한 국민 신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감찰 착수 배경을 밝혔다. 법무부가 채 총장에게 혼외 아들이 있다는 조선일보의 보도 이후 논란이 1주일가량 지속됐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귀국한 지 이틀 만에 감찰 착수를 발표하자 채 총장은 물러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가 자리에 계속 있더라도 ‘식물 검찰총장’이 되기 쉬웠을 것이다. 채 총장은 설혹 혼외 자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감찰 대상에 해당한다. 채 총장과 알고 지낸 Y 씨는 언론사에 보낸 편지에서 채 총장이 자기 아이의 아버지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채 총장이 1999년 부산지검 동부지청 검사로 있던 시절부터 오랜 기간 알고 지냈으며 아이 학적부에 아버지 이름을 ‘채동욱’이라고 올리고, 자기 식구들에게까지 채 총장이 아이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채 총장도 부인하지 않았다. 검찰총장이 이런 논란에 휩싸여 있으면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어렵고 검찰 조직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법무부가 감찰 착수를 발표하기 하루 전에 채 총장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과는 별도로 유전자 검사 실시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신속한 의혹 해소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했다. 유전자 검사는 Y 씨가 동의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채 총장의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 Y 씨가 동의하더라도 현재 아들이 미국 체류 중이어서 언제 성사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청와대는 국가정보원의 댓글 수사 등과 관련해 채 총장과 갈등을 빚는 분위기였다. 특히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자 청와대의 분노가 컸다고 한다. 야권은 이를 박근혜 대통령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고 있다. 얼마 전 청와대 개편 인사 때 경질됐던 곽상도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해서도 검찰을 장악하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야당은 법무부의 감찰 착수에 대해 “채 총장의 사퇴를 강요하기 위한 정치적 압박”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채 총장이 법무부의 감찰 착수에 즉각 사의를 표명한 것은 직전의 강경한 태도에 비추어 떳떳해 보이지 않는다. 채 총장은 사의 표명으로 공직자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사인(私人)인 그에게 혼외 자식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는 사퇴문에서 정정보도 청구 소송이나 유전자 검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혼외 자식 논란도 유야무야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 속에서 진실 공방이 벌어졌던 이 사건이 흐지부지 끝난다면 허망하다. 만약 검찰총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언론의 보도 내용이 사실인데도 언론사가 결정적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부인했다면 뻔뻔스러운 처신이다. 또한 언론사는 정황 증거만으로 혼외 자식이 있다는 단정적인 보도를 했다면 무책임하다. 채 총장은 사퇴문에서 ‘근거 없는 의혹 제기로 공직자의 양심적인 직무 수행을 어렵게 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가 진정 진실 규명을 원한다면 국민에게 약속했던 정정보도 청구 소송과 유전자 검사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는 총장추천위원회를 거친 최초의 검찰총장이다. 이명박 청와대의 인사 검증과 국회의 인사청문회도 거쳤다. 그럼에도 Y 씨는 어떤 검증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의 법무부가 추천한 총장 후보를 처음부터 마뜩하지 않게 여겼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새 총장으로 정권의 검찰 장악력을 높일 수 있는 인물을 고를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러나 검찰은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청와대는 검증 시스템의 강화와 함께 신망이 높은 검찰총장을 임명해 흐트러진 검찰 조직을 안정시켜야 한다.}
정지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는 천안함 사건의 민군합동조사위원회 결론에 의문을 제기한 영화다. 백낙청 씨의 창비가 낸 책 ‘천안함을 묻는다’의 영화판이라고나 할까. 개봉 첫날인 5일과 이튿날인 6일 164회 상영에 2550명이 봤다. 한 회 15.5명꼴. 메가박스가 7일부터 자신의 영화관에서 상영을 중단하면서 관객은 다시 그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메가박스는 이틀 만의 상영 중단 이유를 기대 이하의 관객수가 아니라 ‘일부 단체의 항의와 시위 예고로 관객의 안전을 보호할 수 없어서’라고 밝혔다. 영화 상영 지지 측과 반대 측은 모두 메가박스가 밝힌 이유가 못마땅하다는 눈치다. 지지 측은 영화관이 위협을 느꼈다면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는 것이 순서인데 경찰에 보호 요청도 하지 않고 돌연 상영을 중단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메가박스가 ‘높은 곳’에서 모종의 압력을 받았다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반대 측은 영화관이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어 상영을 중단하고도 외부 압력을 핑계 삼는 바람에 불필요한 논란을 빚고 있다고 주장한다.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에 앞서 천안함 사고 유족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기각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다. 그렇다고 법원의 결정이 이 영화의 상영이 우리 사회에 유해하다고 보는 사람들의 시위나 항의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시위와 항의를 넘어서는 위협을 했다면 협박이 된다. 그런 위협이 있었다면 메가박스는 공개하는 것이 옳다. ▷메가박스 CJ 롯데시네마를 국내 3대 영화배급사라고 부른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영화 상영 전부터 사회적 논란으로 화제가 된 작품인데도 CJ와 롯데시네마는 상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수익성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메가박스만 수익성 판단을 잘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메가박스 같은 상업적인 영화배급사가 한 회 20명도 안 드는 영화를,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시위까지 감수하며 상영하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무리 아닌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어 사보타주(sabotage)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노동자의 태업(怠業)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사보타주는 태업과 다르다. 내가 사보타주란 말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알게 된 것은 프랑스 특파원 시절 TV에서 TGV 선로를 누군가 훼손해 열차 탈선의 위험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다. 뉴스는 일부 극좌적인 철도 노조원의 반발이 여론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사보타주에까지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사보타주는 시설 파괴행위다. 태업은 프랑스어로 그레브 페를레(gr`eve perl´ee), 영어로 슬로다운(slowdown)이라고 한다. 사보타주를 하기 위해서는 산업의 구조나 설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보타주는 애초 노동자들의 저항 수단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사보타주 같은 과격한 수단은 일상적 노동쟁의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혁명의 성격을 띠고 군사적으로 전화(轉化)할 때 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도 해방 정국에서 이런 사보타주가 종종 있었다. 남로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사보타주였다. 6·25전쟁이 끝난 뒤 남로당 세력이 사라지고 사보타주란 말도 언론에서 거의 보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국가시설 파괴를 모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말이 사보타주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이 의원 측 지하조직이 파괴 목표로 삼았다는 통신시설 중에 KT 혜화지사가 포함돼 있다. KT 혜화지사가 서울 곳곳에 있는 다른 KT 지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통신 소비자들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나도 처음 알았지만 KT 혜화지사는 인터넷이 해외로 연결되는 관문과 같은 곳이라고 한다. 이곳이 타격을 입으면 원활한 인터넷 이용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 의원 측 지하조직은 또 경기 평택물류기지도 파괴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가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들어오는지는 잘 모르고 알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평택물류기지는 수도권에 석유와 가스를 공급하는 주요 물류기지라고 한다. 철도에 대한 사보타주는 사보타주의 전형과 같은 것이어서 누구나 금방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철도의 어느 지점을 타격할 것인지는 그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KT 혜화지사와 평택물류기지는 통신과 물류 산업을 잘 알지 못하면 특정하기 어려운 곳이다. 사보타주는 테러와 다르다. 사보타주의 1차적 목표는 인명 손상이 아니라 시설 파괴다. 시설 파괴 과정에서 인명이 손상되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설 파괴를 통해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다. 유럽 국가에서 사보타주는 허무주의적인 극좌파 노동운동가나 철없는 환경원리주의자들이나 저지르는 짓으로 여겨진다. 사보타주를 위한 사보타주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적성국인 북한과 대치하는 나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북한은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킬 처지나 상황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전시를 위한 작전계획은 갖고 있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그 주변 계획에는 남한에서의 사보타주 계획도 들어 있을 것이다. 사보타주 계획도 당장 실행에 옮기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상황 변화에 맞춰 계속 고쳐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북한을 위해 그런 작업을 남한에서 하고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나로서는 국정원의 이 의원 측에 대한 혐의가 이 의원 주장대로 국정원의 상상력에 의한 날조인지 어떤지 현재로선 판단할 능력이나 정보가 없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국회의 정보력을 이용해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혼란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목표를 골라낸 후 그 목표들을 파괴할 실행 계획을 짠다는 것은 그것이 설혹 상상이라 하더라도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어느 때보다 깊숙이 여러 산업 부문과 국가기관에 침투해 있는 지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위험을 환기시켜 줬다고나 할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경남 합천 해인사, 경남 양산 통도사, 전남 순천 송광사를 3보(三寶) 사찰이라 부른다. 이 중 해인사는 부처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불(佛) 법(法) 승(僧) 3보 중 법보 사찰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에 천도하고 있던 무신 정권이 강화도 선원사에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만든 것이라고 교과서에 나온다. 그러나 대장도감은 인천 강화도가 아니라 경남 남해에 있었다는 증거가 새로 제시됐다. ▷기존 강화 제작설은 ‘조선 태조가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선원사는 1245년에 창건됐고 이때는 대장경 판각이 90% 이상 완료된 시점이라 강화 제작설은 의심을 받았다. 이후 강화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남해에 분사(分司) 대장도감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새로운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불교서지학자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2010년 “대장도감 판본과 분사 대장도감 판본을 조사해 본 결과 두 곳은 동일한 장소였고 그것이 남해였다”고 주장했고 본보는 이를 최초로 기사화했다. ▷박 원장은 27일 남해군에서 열리는 한 세미나에서 판본 전체를 일일이 조사한 종합 결과를 제시한다. 대장경 각 권의 끝에는 간행 기록이 나와 있다. 간행 기록에 분사 대장도감이라고 된 것은 모두 500권이다. 이 중 473권의 목판이 ‘대장도감’이라고 된 네 글자를 파내고 새로 ‘분사 대장도감’이란 여섯 글자를 다시 새겨 끼워 넣었다. 대장도감과 분사 대장도감은 같은 장소였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선원사는 대장경이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성 서문 밖 판당에 옮겼다가 조선 초 해인사로 다시 옮길 때 거쳤던 경유지일 가능성이 높다. ▷팔만대장경은 경주, 서울 종묘와 함께 1995년 우리 문화유산으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다. 동양에서 만들어진 20여 종의 대장경 가운데 으뜸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귀중한 유산에 대해 역사학계가 그동안 기초적인 사실 조사마저도 너무 안이하게 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0일 뮌헨 인근 다하우의 옛 나치 강제수용소를 찾아 고개를 숙이고 “깊은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사죄했다. 현직 독일 총리로 이곳을 방문한 것은 메르켈 총리가 처음이다. 다하우 수용소는 나치가 세운 첫 강제수용소로 다른 수용소의 모델이 됐다. 역시 나치가 세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가스실을 설치하진 않았지만 비인간적 대우와 열악한 위생환경으로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 등 3만여 명이 이곳에서 사망했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독일인 대부분이 대학살에 눈을 감았고 나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이번 방문은) 역사와 현재의 다리가 돼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BBC방송은 메르켈 총리가 짧지만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고 평가했다. 일본 패전일인 15일 ‘전몰자 추도식’에서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았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일본도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또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이래 역대 일본 총리들은 전몰자 추도식에서 가해 책임을 빼놓지 않고 언급해 왔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이번 추도사에서 그런 대목을 빼 버려 국내외의 비난을 자초했다. 독일이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가 되고 위기의 EU 경제를 견인하는 국가가 된 것은 자신이 저지른 전쟁을 철저히 반성했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폴란드 방문 때 1943년 나치의 점령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가 희생된 바르샤바 게토 지구의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어 전 세계를 가슴 뭉클하게 했다. 그만이 아니라 전후 독일 총리와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과와 반성을 표했다. 독일이 한두 번 사과에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도 계속 사과하는 것은 국내적으로 나치의 후계자를 자임하는 극우파의 계속되는 준동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다. 메르켈 총리도 다하우 수용소에서 극우파에게 경고를 보냈다. 아베 총리와 각료들은 역사적 퇴행을 막기보다 오히려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바로 이것이 지금 독일과 일본의 차이다.}
국가정보원 정치·선거 개입과 경찰 수사 축소 의혹을 수사한 검찰이 경찰 사이버범죄수사대의 폐쇄회로(CC)TV 녹취록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기소할 때 공개한 자료다. 검찰이 기소와 동시에 CCTV 녹취록 같은 증거자료를 언론에 공개한 것도 부적절했지만, 그마저 일부가 왜곡됐다니 실망스럽다. 6월 14일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공개한 자료 중 ‘국정원 직원 노트북에서 선거 관련 글 확인’이란 부분에는 경찰 분석관이 “저는 이번에 박근혜 찍습니다”라며 누군가의 댓글을 읽는 대목이 있다. 실제 동영상을 확인해 보면 이 댓글은 국정원 직원이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검찰은 “국정원 직원이 그 댓글을 썼다고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노트북의 소유자인 국정원 직원이 작성한 댓글을 분석관이 읽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또 검찰 자료에는 경찰 분석관이 “대박, 노다지를 발견했다”고 말하며 선거 관련 글을 상당수 확인한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실제 동영상에는 이어 ‘다 북한 핵실험 이런 글들밖에 없다. 문제는 이게 그 북한 쪽이 아니라 선거 관련된 게 있느냐는 거지’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검찰 자료는 ‘북한 로켓 관련 글들… 선거 관련된 것은 확인해 봐야…”라고 모호하게 처리했고 “이거는 언론보도에는 안 나가야 할 거 아냐”라는 말로 이어져 오해를 샀다. 동영상이란 것이 어느 부분을 잘라서 어디다 갖다 붙이느냐에 따라 받는 인상이 달라지거나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16일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국회 국정조사에서 김 전 청장의 축소 수사 의혹을 추궁하면서 경찰 분석관들이 “다 갈아 버려” “예, 다 갈아 버릴게요, 싹 다”라고 대화하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마치 자료 은폐를 공모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확인 결과 “다 갈아 버려” 앞에는 “쓸데없는 것들”이란 말이 있었다. 검찰 기소대로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 선거 개입에 해당되는지, 경찰의 축소 수사가 있었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일이다. 다만 검찰이 왜곡 논란을 빚을 만한 자료를 공개한 책임은 가볍지 않다. 검찰은 “요약 정리 과정에서 일부 누락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흐름은 공소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변명했다. 안이한 인식이다. 큰 흐름과 상관없이 왜곡된 녹취록은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수사의 최후 보루인 검찰마저 ‘짜깁기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해발 4810m의 몽블랑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프랑스어로 ‘하얀 산(Mont Blanc)’이란 뜻이다. 멀리서 보면 너무나 아름다워 ‘하얀 여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몽블랑의 산봉우리들을 변형된 육각형 모양의 하얀 별로 형상화해 로고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독일제 고가 만년필 몽블랑이다. ▷조지프 필 전 주한 미8군 사령관(중장)이 2008∼2011년 한국 근무 당시 한국인으로부터 고가의 선물을 받고도 신고하지 않은 사실이 미 국방부 감사에서 적발됐다. 그 선물 중에 우리 돈으로 160만 원이 넘는 도금한 몽블랑 만년필 ‘몽블랑 마이스터슈튀크 클라시크’도 들어 있었다. 필 전 사령관은 “오랫동안 사귄 한국인 친구로부터 선의로 선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조사관들은 한국인 친구가 영어를 못하고 둘이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했다는 점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 전 사령관은 한국 근무 이후 1년 가까이 보직이 없었고 지난해 계급이 한 단계 강등된 소장으로 전역했다. ▷한국에서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 제정안이 지난달 30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몽블랑 만년필은 김영란법으로 말하자면 100만 원 이상 금품에 해당한다. 김영란법 원안은 직무와 관련 없어도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을 받은 공직자는 모두 형사처벌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직무와 관련 없이 금품을 받으면 과태료를 물도록 하는 데 그쳤다. 원안보다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과태료를 문 공무원은 옷을 벗어야 하니까 크게 후퇴한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한국처럼 뇌물과 선물 사이에 명절 떡값, 전별금, 휴가비, 향응 등 외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다양한 개념을 가진 나라도 보기 드물 것이다. 모두 공무원이 돈을 받고도 직무와 관련이 없다고 우기면서 만들어진 말들이다. 김영란법은 공무원 사회에 더는 선물과 뇌물 사이의 중간지대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선물과 뇌물 사이의 기준점을 100만 원으로 일률적으로 정해 단순 무식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부패를 없앨 수 없는 지경에 온 우리의 처지가 씁쓸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사를 시험 평가 기준에 넣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교육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 말은 실은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입시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국어 영어 수학은 수능 필수 과목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그렇지 않다. 대학과 전공에 따라서는 국어 영어 수학 중 일부를 보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국사만 수능 필수 과목으로 만든다는 것이 적절한가. 대학입시는 자율화로 가고 있다. 대학은 원하면 국사 수능 점수를 요구할 수 있다. 서울대가 그렇다. 더 많은 대학이 원하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서울대도 국사 때문에 우수한 학생을 뺏기고 있다고 여겼는지 국사를 필수 과목에서 제외하려 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대통령의 말이 나오자 없던 일로 했다. 대학입시 과목에 넣어야만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단순하다. 고교 사회탐구 과목은 현행 교육과정에서 원칙적으로 모두 선택과목인데 국사만 필수과목으로 바뀌었다. 물론 국사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굳이 국사 교육을 더 강화하려면 교육시간을 늘리면 된다. 국사를 반드시 배워야 하니까 시험을 치고 그 결과는 내신에 반영된다. 수능만 평가라는 생각은 내신을 중시해 입시에 반영하도록 한 교육 이념과도 맞지 않다. 국사의 수능 필수화는 애당초 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해버렸으니 교육부는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라는 해괴한 발상이 나왔다. 수능일 전에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라는 것을 봐서 ‘통과’와 ‘비통과’만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시험을 따로 운영한다는 것도 번잡한 일이지만 언어능력평가시험도 아니고 역사능력평가시험이라니 외국 언론의 토픽감이다. 수능이든 내신이든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이든 시험을 봐야 국사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잘못됐다. 국사를 포함해 모든 역사 교육은 암기 과목이 되는 순간 실패하도록 돼 있다. 프랑스 파리 특파원 시절에 한 영국인 강사가 프랑스인 청중에게 자기 나라 국사 교육을 한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사는 “요새 아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잘 모른다”며 “히틀러가 화가인 줄 아는 아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우리와 달랐다. 그는 “영국의 교육이 맥락에 대한 지식 없이 선다형 문제에 답하기 위해 이뤄지고 있어 그렇다”면서 프랑스식 논술형 문제에 부러움을 표시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고교시절 선생님이 있다. 국사는 아니고 세계사 선생님이었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1980년 무렵의 서울 변두리 공립학교는 엉망이었다. 학생들은 머리 기르게 해달라고 학교 유리창을 부수고 다녔다. 교사들도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자습을 시키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도 간혹 세계사 선생님이 들어와 들려주신 강의가 잊혀지지 않는다. 주군과 봉신의 계약관계를 중심으로 한 중세 봉건제에 대한 설명, 중세와 프랑스혁명 사이에 낀 절대주의 시대의 의미,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 조공무역의 의미를 그때 들었다. 시험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후에 역사를 더 잘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는 비록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국사 시험을 본 세대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국사로 평가받길 원하지 않는다. 일본 국사교과서는 왜의 가야 지배를 가르치고 중국 국사교과서는 조선을 속국처럼 표현한다. 우리 국사교과서가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다.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든 초중고교의 국사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교묘하게 사실에 눈감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 국가의 일원으로 사는 이상 국사를 배우지 않을 권리까지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사로 평가받지 않을 권리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로니컬하지만 진정한 국사는 고교를 벗어나야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남성 인권단체인 ‘남성연대’의 성재기 대표가 서울 마포대교에서 한강으로 투신해 실종됐다. 성 대표는 투신하기 전날 남성연대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남성연대를 후원해 줄 것을 호소하며 투신을 예고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퍼포먼스를 하려다 자살극으로 종결된 셈이다. 성 대표의 투신 예고문을 읽어 보면 자살 퍼포먼스를 넘어 실제로 자살할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불분명하다. 투신하기 전 트위터에는 “살아 나올 자신이 있다”는 글을 올리고, 투신 직전에 수심 등을 살폈고 수상안전 강사도 대기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제가 잘못되면 다음 2대 남성연대 대표는 사무처장이 이어받습니다” “저희의 구차한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부디 기억해 주십시오” 같은 글은 사망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죽음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런 만용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나오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성 대표의 투신 현장에는 남성연대 회원들과 KBS 기자들이 있었다. 그가 의도한 자살 퍼포먼스는 언론 노출을 전제로 한 것이다. 투신 인증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려고 한 남성연대 회원들과, 취재하러 나온 KBS 기자들은 그의 퍼포먼스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KBS 기자들은 생명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언론의 취재 준칙을 지키지 않았다. 당시 한강은 오랜 장마로 수량이 많고 물살이 거세 투신한 후 헤엄쳐 나오기에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KBS 측은 투신하기 전과 뒤에 두 차례 신고를 했다고 해명했고 촬영한 영상을 방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찰과 구조대가 출동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살을 막기보다 취재를 앞세운 태도는 어떤 변명도 통하기 어렵다. 성 대표의 남성연대는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차별받고 있다는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하며 여성가족부 폐지와 군 가산점제 부활 등을 주장해 온 단체다. 여성단체들과는 달리 정부의 후원을 받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대신 2억 원이 넘는 빚에 시달렸다. 그의 자살 퍼포먼스는 사회적인 관심을 끌어 후원금을 모으려는 의도로 기획됐다. 문제 해결을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생명을 이용하는 어떤 시도도 우리 사회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충남 태안군 안면도 해수욕장에서 해병대 훈련을 모방한 극기 훈련 캠프에 참가했던 공주대사범대부설고 남학생 5명이 물에 빠져 숨졌다. 학생들이 90명씩 2개조로 래프팅 훈련을 받던 중 구명조끼를 훈련조에 벗어준 휴식조가 교관의 지시에 따라 물놀이를 하러 바다에 들어갔다가 파도에 휩쓸렸다. 당시 휴식조의 교관은 2명뿐이고 인솔교사는 없었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안전 불감증이 낳은 부끄러운 사고다. 사고를 낸 캠프는 ‘해병대 리더십교육센터’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해병대와는 무관한 곳이다. 극기 훈련이 인기를 얻자 한 곳뿐인 진짜 해병대 캠프를 모방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짝퉁 해병대 캠프 중 하나다. 이런 캠프들은 지방자치단체에 등록만 하면 영업이 가능하다. 여성가족부가 청소년 체험활동 인증이라는 것을 내주기는 하지만 추천할 만한 곳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지난해 7월에는 무인도 체험을 갔던 경남 김해의 대안학교 학생 2명도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여름방학이 시작됐는데 자녀를 캠프에 보내는 학부모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교육부는 최근 청소년 캠프 사고가 잇따르자 학교에 인증 체험캠프를 이용하도록 당부해 왔다. 사고를 낸 태안의 캠프는 지난해 10월 등록을 마친 신생 업체로 인증은 받지 못했다. 교육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미(未)인증 업체를 선정한 학교 측도 책임이 크다. 사고가 난 곳은 물살이 세서 노를 이용한 보트훈련만 할 수 있고 수영은 할 수 없는 곳이다. 지역 주민은 평소 그곳에서 캠프 훈련을 하는 것을 걱정했다는데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태안해양경찰도 제 역할을 못했다. 청소년 캠프의 일탈은 심각한 수준이다. 어느 미등록 국토순례 행사 운영자는 2005년과 지난해 참가 학생들을 폭행 또는 성추행해 물의를 빚고도 올해 다시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사고는 어른들이 기본적인 안전수칙만 지켰어도 막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더욱 안타깝다. 정부 지방자치단체 교육청 경찰은 난립한 캠프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더이상 생때같은 자식을 부모 가슴에 묻어서는 안 된다.}
우파 인터넷 논객 변희재 씨가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의 석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했을 때 두 가지를 생각했다. 변 씨의 말은 맞는 게 반이고, 틀린 게 반이니까 직접 확인해봐야겠다는 것과 박사학위 논문은 몰라도 석사학위 논문까지 표절시비를 하는 것은 심하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직접 확인을 해봤고 이 표절은 좀 심각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조 교수는 1989년 서울대 법대 대학원에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형법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에서 학과 선배였던 김도균 씨(현 서울대 법대 교수)가 그 전해 한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에서 8문장 342자, 즉 논문 한 쪽의 절반 분량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베꼈다. 그런데도 조 교수는 각주(脚註)에 독일어 원서에서 직접 인용한 것처럼 쓰고 있다. 조 교수는 “인용된 문헌은 내가 직접 읽은 것이기에 (김 교수의) 논문을 재인용하지 않고 원문을 직접 번역했다. …정밀하게 비교해 보면 인용된 외국 문헌의 문장의 배치나 번역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해명대로 정밀하게 비교해 보니 논문 한 쪽의 절반 분량이 토씨 하나 차이 없이 똑같았다. 이런 식의 거짓말을 해명이라고 하다니 세상이 엄한지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그 독일어 원서 ‘사회주의 법 입문(Einf¨uhrung in das sozialisti-sche Recht)’을 구해서 읽어 봤다. 김 교수의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상당히 자의적인 의역이다. 가령 첫 문장인 “스투치카는 소유관계 및 이로부터 파생되고 이와 연관되어 있는 교환관계를 법률관계로 보고 있다”만 봐도 원문의 상품교환(Warenaustausch)을 교환관계로, 법의 구체적 형식(konkrete Form des Rechtes)을 법률관계라고 번역했다. 조 교수가 직접 번역했다면 절대로 김 교수가 번역한 것과 똑같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책을 서울대 법대 도서관에서 구해 봤다. 책의 뒷장에는 낡은 열람자 명단 카드가 남아 있는데 조국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조 교수가 논문을 쓰면서 1988년에 이 책을 빌린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책을 읽었다는 증거인가. 그렇지 않다. 책을 빌려놓고도 남의 번역을 갖다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독일어 원서를 혼자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그가 자기 논문에서 독일어를 쓴 곳은 5곳에 불과하다. 몇 자 안 되는데도 자연사를 Naturgeschichte 대신 Naturgeschite로 쓰고, 법철학을 Rechtsphilosophie 대신 Rechtphisophie로 쓰는 등 2군데가 틀렸다. 독일어를 조금만 알아도 틀릴 수 없는 철자다. 반면 영어는 훨씬 많은 곳에 사용했는데도 틀린 걸 찾을 수 없었다. 꼼꼼하지 않아 일어난 실수가 아니라 그가 독일어에 서툴다는 증거다. 서울대는 조 교수의 표절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변 씨의 주장에 따르면 조 교수 석사학위 논문에는 일본어와 영어 원서의 재인용 표절 의혹이 훨씬 많다. 지켜보는 눈이 많다. 서울대는 원서와 번역서를 일일이 대조해 표절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밝혀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으나 난 우리나라에서 석사학위 논문이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 논문 쓰는 법을 한번 연습해 보는 과정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도 기본은 자기 의견을 전개하는 곳과 남의 글을 인용하는 곳을 구분하는 것이다. 또 남의 글도 원서에서 인용한 것인지, 번역서에서 인용한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 나도 석사학위 논문은 써봤다. 그래서 석사과정 학생들이 번역서에서 인용하면서 원서에서 인용한 것처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유혹에 빠져 실수를 했다면 솔직히 시인하고 반성하면 된다. 석사학위 논문이라면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고 본다. 공부가 업(業)이 아닌 연예인조차도 석사학위 논문 표절이 드러나면 사과하는데 조 교수는 반성은커녕 시인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역대 국정원장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개인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그제 서울중앙지법 김우수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황보연 전 황보건설 대표로부터 청탁과 함께 1억6000여만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원 씨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가 국정원으로 바뀐 이후 원 씨 이전까지 8명의 원장 중 5명이 검찰 조사를 받거나 사법 처리됐지만 모두 불법감청 등 권한 남용 때문이었지 개인 비리는 아니었다. 원 씨는 2009∼2010년 홈플러스의 인천 무의도 연수원 인허가 과정에서 황 전 대표를 위해 산림청에 청탁을 해주고 대가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연수원이 들어선 무의도 땅은 산림청 소유의 국유지였다. 산림청은 국유림과 자연경관 훼손 우려 등을 이유로 허가를 반대했으나 9개월 만에 의견을 바꿔 찬성했다. 이승한 홈플러스 총괄회장은 당시 정광수 산림청장에게 연수원 설립에 대해 직접 공사개요를 설명했다. 검찰은 이 과정에 원 씨가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首長)이 건설업자의 청탁을 들어주고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은 국정원 전체의 불명예다. 원 씨는 이미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앞두고 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도 받아야 한다. 원 씨의 구속 사유인 개인 비리는 국정원 댓글 사건과는 별개다. 야당 일각의 주장처럼 수십 건의 정치적 댓글로 대선 판도를 바꿀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국정원장과 국정원이 어디까지 정치에 개입했는지 개인 비리와는 별개로 국민은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원 씨는 황 전 대표와 서울시 공무원 시절 알게 돼 10년 넘게 호형호제(呼兄呼弟)할 정도로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국정원장 시절에도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다니고 골프도 쳤다고 하니 누가 봐도 떳떳하지 않은 처신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도 정보 분야의 아마추어인 원 씨가 국가 안보와 정권 수호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국정원을 운영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도 있다. 국정원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원 전 원장과 그를 임명한 이 전 대통령이 누구보다 먼저 통렬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시인 신경림은 ‘시인을 찾아서 2’란 책의 안도현 편에서 그의 시가 읽히는 이유를 ‘작고 하찮은 것에 대한 애착’이라고 요약했다. 그런 시인이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돼 마치 불우국비시(不憂國非詩), 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자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안도현이 최근 트위터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 나 같은 시인 하나 시 안 써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는 글을 올렸다. 황당한 절필 선언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인 것과 자신이 시를 쓰고 안 쓰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고, ‘나 같은 시인 하나 시 안 써도’는 ‘나 같은 시인 하나 시 안 써서’로 딱 한 자만 고쳐주고 싶다. ‘다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는 대목은 나이 오십을 넘긴 시인이 아이들처럼 두고보자는 것 같아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공지영이 이런 데 빠지면 공지영이 아니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때도 시를 썼던 안도현 그때도 검찰에는 끌려가진 않았다. 이제 검찰 다녀온 시인의 시를 잃는다. 너무 아프다”는 트윗을 올렸다. 그러나 안도현은 시를 써서 검찰에 불려간 게 아니다.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 시절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의 유묵을 훔쳤다는 뉘앙스의 글을 17차례나 올려 허위비방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시인도 시인이기 전에 법을 지켜야 하는 공민(公民)이다. ▷대선 기간 안도현에게 시인의 언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허위비방 트윗에는 ‘박근혜 후보님, 혹시라도 이 기회에 국가에 돌려주실 생각은 없는지요’ ‘박근혜 후보는 본 적도 없다고 잡아떼면 끝인가요’ 등의 글을 올렸다. 다른 정치인들에게 ‘뻘짓 그만하시고’ ‘개콘(개그콘서트)보다 못한 찌질이’라는 표현도 썼다. 시심(詩心)이란 게 순정(純情)과 비슷해서 잃으면 되찾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정치 참여를 걱정했던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펑유란(馮友蘭)이 1934년 완성한 ‘중국철학사’는 중국인이 쓴 최초의 중국 철학사다. 그는 1948년 미국 대학의 방문교수로 있으면서 강의 교재로 쓰기 위해 영어로 된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라는 책을 새로 펴냈다. 내가 대학 교양과정에서 중국철학을 배울 때 교재도 이 영어책이었다. 그의 ‘중국철학사’는 1983년 영어로 완역돼 중국 철학사의 표준서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5월 ‘월간에세이’에 기고한 ‘내 삶의 등대가 되었던 동양철학과의 만남’이라는 글에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던 시절 내 삶의 한 구석에 들어와 인생의 큰 스승으로 남은 것이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라며 “논리와 논증을 중시하는 서양철학과는 달리 동양철학에는 바르게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와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 나갈 지혜의 가르침이 녹아 있었다”고 썼다. 박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중국에서 출판된 책 ‘박근혜 일기’에 이런 내용이 실리면서 중국 언론에서 화제가 됐다. ▷장즈쥔(張志君)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 주임이 올 1월 박 대통령 당선 축하 특사로 왔을 때 꺼낸 첫말이 “펑유란은 제 스승입니다”였다. 장 주임이 베이징(北京)대학을 다닌 1970년대 펑유란은 교수로 있었다. 펑유란은 1949년 장제스(蔣介石)가 대만으로 도망가면서 함께 가자고 요청했지만 뿌리쳤다. 그 대신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과거 봉건철학을 강의하고 국민당을 도왔다. 현재 나는 사상을 개조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는 편지를 썼다. 마오쩌둥은 그를 베이징대에 복귀시켰다. ▷박 대통령은 수첩공주란 별명답게 ‘중국철학사’에서 맘에 드는 글귀들도 기록해뒀던 모양이다. 그는 얼마 전 기자 간담회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니 ‘이거 내가 실천하고 있는 거잖아’라고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 글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깊은 방안에 앉아 있더라도 마음은 네거리를 다니듯 조심하고, 작은 뜻을 베풀더라도 여섯 필의 말을 부리듯 조심하면 모든 허물을 면할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민의 알 권리를 외쳐 온 사람들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에 대해선 유독 국민의 모를 의무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입만 열면 국가안보에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한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사람이다. 그런 이들이 지금 ‘국익 훼손’이라는 명백하지도 현존하지도 않는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를 부인하고 있다. 국가의 일은 개인의 일과 달리 공개가 원칙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알 권리라는 측면에서 공공기록물관리법과 달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NLL 대화록은 공공 기록물로도, 대통령 기록물로도 볼 수 있다. 두 가지로 다 볼 여지가 있을 경우 알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공공 기록물로 볼 것이고, 국민이 아는 게 두려운 사람은 대통령 기록물로 볼 것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한번 어떤 자료를 비공개로 지정하면 이를 열람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만들어놓았다. 미국의 대통령기록물법(Presidential Records Act)은 비공개로 지정되더라도 의회나 현직 대통령이 요구할 경우 달리 그 내용을 알 방법이 없다면 관리책임자가 이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은 현직 대통령이 참고하려고 해도 아예 볼 수 없게 해놓고, 국회도 3분의 2의 정족수로 의결해야 볼 수 있게 해놓았다. 공개는 고사하고 열람하는 데만 헌법 개정 정족수가 필요하니 볼 생각조차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NLL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다”는 말을 했다. 표절 좀 하자면 대통령 지정 기록물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다. 비밀로 지정하는 것은 좋은데 필요할 때는 볼 수 있는 길도 열어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니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몹쓸 법인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NLL 대화록 논란에 먼저 ‘까자(공개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전임 대통령 스스로도 열람은 할 수 있지만 공개는 못하는 게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다. 비밀 물신(物神)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밀은 사람이 정한다. 그런데도 원래부터 비밀이어서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비밀에 종속되는 현상을 물신주의라고 부른다. 정상회담 회의록이라고 영원한 비밀은 아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따라도 15년 뒤에는 공개된다. 물론 2007년 정상회담은 5년여가 지났을 뿐이지만 그 사이 회담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사망했다. 앞으로 크게 달라질 상황은 없다. 그렇다면 15년에 집착하지 말고 유연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국가정보원은 NLL 대화록을 공공기록물관리법에 따라 비밀에서 해제하고 공개했다. 국정원장은 이를 비밀에서 해제할 정당한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략적 의도도 없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 권리의 편에 서는 사람이라면 NLL 대화록의 공개 자체를 비판할 수 없다. 대선은 끝났고 국민은 대선 기간에 초관심사였던 NLL 대화록에 대해 되도록 많은 것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등은 2007년 정상회담에서 NLL 관련 논의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공개된 대화록을 보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노 전 대통령의 말처럼 NLL이 괴물이 돼서는 안 된다. 세계 역사에 땅을 주고 평화를 산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사실상의 영토선으로 인식되고 있는 NLL을 무력화하려는 주장을 하려면 국민에게 동의를 얻었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은 대화록이 공개되지 않았어도 그간의 발언과 행적으로 다 미뤄 알고 있던 것이다. 그걸 굳이 비밀의 문 뒤에 애써 숨겨야 정치적으로 연명할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은 그제 국무회의에서 “전직 대통령 추징금 문제는 과거 10년 이상 쌓여온 일인데도 역대 정부가 해결 못하고 이제야 새 정부가 의지를 갖고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에 대한 강력한 환수 의지를 밝힌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672억 원의 추징 시효는 10월에 끝난다. 검찰이 추가로 추징해서 시효를 연장하지 못한다면 은닉 재산은 고스란히 전 전 대통령과 그 가족의 몫이 된다. 검찰은 지난달 은닉 재산을 찾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전담팀까지 꾸렸으나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발언까지 나왔으니 검찰과 국세청이 더 분발해야 할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의 장남인 전재국 씨는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고 아랍은행과 거래한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역외(域外) 탈세 혐의 등에 관한 조사가 뒤따라야 한다. 그는 지난해 매출 440억 원을 올린 출판사를 보유하고 있다. 차남인 전재용 씨는 서울 서소문의 빌딩 5채를 200여억 원을 주고 매입해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재산을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쌓았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야당은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하고 있다. 법안 가운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노역형에 처한다’ ‘가족이 재산형성 과정을 입증하지 못하면 추징금을 내야 한다’ 등의 조항은 위헌의 소지가 있다. 다만 추징 시효를 연장하는 것은 여야가 합의하게 되면 가능해 보인다. 대법원은 1997년 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205억 원,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629억 원의 추징금을 확정했다. 이후 15년 동안 정부는 노 전 대통령 추징금에 대해서는 약 90% 수준까지 환수했으나 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5% 정도밖에 환수하지 못했다. 전 전 대통령이 더 지능적으로 불법 재산을 숨겼기 때문이겠지만 과거 정권에서 검찰이 적극적으로 은닉 재산을 찾지 않은 탓도 있다. 박 대통령은 “새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것은 난센스적인 일이다.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는 말도 했다. 이 발언은 박 대통령이 추징금 환수에서 역대 정권과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정부를 상대로 책임을 떠넘기는 일에 불과하다. 누구도 부정한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것을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라도 두 전 대통령의 은닉 재산을 끝까지 찾아내 환수해야 한다.}
국가정보원 정치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국정원법과 함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하기로 결정했다. 공직선거법 적용 여부는 수사 막바지에 관심을 끌었던 쟁점이다. 국정원 수사는 이제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게 됐지만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우선 검찰의 태도다. 국정원 수사는 채동욱 검찰총장 체제의 진로를 가늠해볼 수 있는 제1호 수사였다. 명예회복을 원하는 검찰은 원 전 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과 구속 기소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경우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흠집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권부와 여권으로부터 제기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권부와 여권이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유불리를 따져 검찰에 영향을 주려 한 것은 잘못이다. 검찰도 그런 분위기에 흔들려 법리 검토를 구실로 원 전 원장의 사법 처리를 미룸으로써 권위와 신뢰에 상처를 입었다. 검찰이 공직선거법을 적용하되 불구속하기로 한 것은 청와대와 여야의 눈치를 본 타협안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검찰은 지난달 가수 은지원 씨가 박 대통령과 고 최태민 목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허위 사실을 자신의 트위터에 10여 차례 올린 혐의로 나모 씨를 구속 기소한 바 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검찰의 수사대로 국정원장 같은 권력기관장이 여당 후보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선거 과정에 개입했다면 나 씨보다는 무겁게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불구속 기소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검찰이 법리 검토를 정확히 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원 전 원장이 선거법 위반을 의식하고 그로 인한 사법 처리까지 감수하면서 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힘을 쓸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원 전 원장 측은 변호사를 통해 검찰의 선거법 적용에 대해 “전혀 사실과 다르다”며 즉각 반발했다.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수사 과정에서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 말라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다느니, 곽상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검찰에 전화를 했다느니 하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도 흘러나왔다. 민주당은 이를 근거로 검찰을 압박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검찰이 적용 혐의와 기소 여부를 밝히기도 전에 황 장관 해임 결의안을 제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황 장관의 수사 개입을 문제 삼는 민주당이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순이다.}
법원이 위증죄에 대해 잇달아 징역형을 선고했다. 어제 서울북부지법은 폭행사건에서 손님에게 맥주잔에 맞고도 법정에서 맞은 적이 없다고 한 유흥업소 종업원 이모 씨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법원은 이 씨가 턱뼈가 부러진 피해자이지만 위증으로 법원 판단을 왜곡하려 한 점을 엄벌 이유로 들었다. 지난달 부산지법은 구치소에서 함께 복역했던 박모 씨에게 “내 절도죄를 뒤집어쓰면 2000만 원을 주겠다”며 거짓 증언을 부탁한 양모 씨에게 위증교사죄로 징역 10개월을, 박 씨에게는 위증죄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법정에서 위증이 만연하는 것은 위증은 큰 죄가 아니라는 인식이 강해서다. 미국 법원은 위증을 중죄(felony)로 다룬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 도청을 사주한 것도 문제였지만 위증 때문에 더 궁지에 몰렸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성추문 사건에서 위증한 탓에 변론이 가능한 변호사 명단에서 제외됐다. 리크게이트에 연루된 루이스 리비 전 딕 체니 부통령비서실장은 진실을 감추려는 몇 마디 말 때문에 징역 30개월을 선고받았다. 위증에 대한 처벌 수위도 높여야 한다. 일본은 위증을 하면 3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벌금형은 아예 없다. 우리나라는 벌금형 혹은 징역 5년형까지 처벌하도록 되어 있지만 위증죄 사건의 1심 선고 결과는 집행유예 이하 선고율이 80% 안팎이다. 처벌이 가벼우니 부탁이나 대가를 받고 위증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법정 진술을 바탕으로 유무죄를 가리는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되면서 수사기관에서 인정된 사실이 법원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고도 재판은 과거처럼 느슨하게 진행하면 피고인과 증인이 입을 맞춰 위증할 여지가 커진다. 집중 심리제를 강화해 위증과 위증의 유혹을 차단해야 한다. 위증은 반드시 처벌되며 냉혹한 결과가 기다린다는 인식이 정착돼야 사법 정의가 바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