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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예쁜 샛노란 산국(山菊)이 꽃망울을 확 터뜨렸다. 감나무 아래 흙에는 잘 익은 단감이 떨어져 주황색 물감으로 색칠을 해놓았다. 작살나무엔 진주구슬 같은 보랏빛 열매가, 산사나무엔 붉은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동 ‘최순우 옛집’의 툇마루에서 바라본 뒤뜰엔 가을색이 완연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선생(1914∼1984·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작고하실 때까지 돌과 나무를 가꾸며 살았던 운치 있는 한옥이다. 오랜 향나무와 노송이 서 있는 앞마당과 사랑채를 지나면 이 집의 백미인 뒤뜰이 나타난다. 참나무 산수유 모과 목련 매화 등 고인이 직접 가꿨던 나무와 화초 사이로 문인석과 이지러진 돌확,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긴 괴석, 해학적인 얼굴의 벅수까지…. 대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달빛을 감상하고,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사색할 수 있는 선비의 정원이다. 이날 ‘혜곡의 뜰’ 강의를 한 안선영 생명다양성재단 책임연구원은 “전통한옥의 정원은 ‘차경(借景)’이란 표현을 쓴다. 1930년대 지어진 근대한옥이지만 최순우 옛집은 주변의 산과 나무의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온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말했다. “최순우 옛집이 귀한 이유는 정원에 도토리나무가 있다는 겁니다. 원래 정원엔 비싸고 귀한 나무를 심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참나무를 잘 심지 않아요. 최 선생은 진달래 소나무 대나무 머위 벌개미취 옥잠화 같은 우리 산하에서 자라는 친근하고 소박한 나무와 꽃, 풀을 심고 키우며 정원을 즐기셨습니다.” 실제로 뒤뜰 가득히 노랗게 물들이는 들국화는 1960년대 초반 최 선생이 전남 강진에서 고려청자 가마터를 발굴할 때 길가에서 한두 그루 캐온 것이 퍼진 것이라고 한다. 매화나무는 1979년 도예가 노경조 씨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인사차 들렀을 때 최 선생과 함께 종로 화훼시장에서 사서 심은 것이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사연이 가득하다.선생이 직접 쓴 ‘두문즉시심산(杜門卽時深山·문을 닫으면 이곳이 깊은 산중)’이란 현판처럼 집 안 마당에 들어서면 도심의 소음이 딱 끊기고 고요한 세상으로 순간 이동한 느낌을 받는다. 사방탁자, 문갑 등으로 정갈하게 꾸며 있는 안채 사랑채는 조선시대 가난한 선비가 살았던 집처럼 작지만 결코 모자라지도 않는 공간이다. 이 집은 선생의 사후에 매각돼 빌라로 재건축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2004년 4월 시민들과 지인들이 모금 운동을 통해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문화유산 1호’로 일반에 공개했다. 이 집에는 요즘 툇마루에 앉아 조용히 가을을 즐기고 가는 시민들이 많다. 9일에는 뒤뜰에서 리코더 연주로 ‘음악이 꽃피는 한옥’ 콘서트가 열렸고, 안채와 사랑채에서는 11월 16일까지 김종학 화백 수집가구 전시회가 열린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작고 예쁜 샛노란 산국(山菊)이 꽃망울을 확 터뜨렸다. 감나무 아래 흙에는 잘 익은 단감이 뚝뚝 떨어져 주황색 물감 색칠을 해놓았다. 작살나무엔 진주구슬 같은 보랏빛 열매가, 산사나무엔 꽃사과처럼 빠알간 산사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성북동 ‘최순우 옛집’의 사랑채 툇마루에서 바라본 뒤뜰엔 가을색이 완연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4~1984·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선생이 작고하실 때까지 돌과 나무를 가꾸며 살았던 운치있는 한옥이다.오랜 향나무와 노송이 서 있는 앞마당과 사랑채를 지나면 이 집의 백미인 뒤뜰이 나타난다. 참나무, 산수유, 모과, 목련, 매화 등 최 선생이 직접 가꿨던 나무와 화초 사이로 물이 담긴 돌확, 비바람에 씻겨 괴괴한 풍모를 자랑하는 괴석, 해학적인 얼굴의 벅수와 문인석까지…. 툇마루에서 달빛과 눈내리는 모습을 감상하고, 꽃이 피고 낙엽이 떨어지는 풍경을 사색할 수 있는 선비의 정원이다. 이날 ‘혜곡의 뜰’ 강의에 나선 안선영 생명다양성재단 책임연구원은 “우리나라 전통한옥의 정원은 자연의 경치를 빌려온다는 ‘차경(借景)’이란 표현을 쓴다. 1930년대 지어진 근대한옥이지만, 최순우 옛집은 주변의 자연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말했다. “최순우 옛집이 귀한 이유는 정원에 도토리 나무가 있다는 겁니다. 원래 정원엔 비싸고 귀한 나무를 심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참나무를 잘 심지 않아요. 최 선생은 진달래, 소나무, 대나무, 머위, 벌개미취, 옥잠화 같은 우리 산하에서 자라는 친근하고 소박한 나무와 꽃, 풀을 심고 키우며 정원을 즐기셨습니다.” 실제로 뒤뜰 가득히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이는 들국화는 1960년대 초반 최 선생이 강진에서 고려청자 가마터를 발굴할 때 길가에서 몇 그루 캐온 것이 퍼진 것이라고 한다. 매화나무는 1979년 도예가 노경조 씨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인사차 들렀을 때 최 선생과 함께 종로 화훼시장에서 함께 사서 심은 것이라 한다. 나무와 꽃들마다 주변 사람들과 교유했던 사연이 가득하다. 선생이 직접 쓴 ‘두문즉시심산(杜門卽時深山·문을 닫으면 이곳이 깊은 산중)’이란 현판처럼 집 안 마당에 들어서면 도심의 소음이 딱 끊기고 고요한 세상으로 순간이동한 느낌을 받는다. 사방탁자, 문갑 등으로 정갈하게 꾸며 있는 안채와 사랑채는 조선시대 가난한 선비가 살았던 집처럼 남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는 공간이다. 이 집은 선생의 사후에 매각돼 빌라로 재건축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2004년 4월 시민들과 지인들이 모금 운동을 통해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문화유산 1호’로 일반에 공개됐다. 뒤뜰에서 매달 ‘음악이 꽃피는 한옥’ 콘서트가 열리는가 하면, 안방과 사랑채에서는 현재 김종학 화백 수집가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안 연구원은 강의를 마치면서 참석한 시민들에게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단풍’이란 시를 건네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읽어보라는 당부였다. “가을은 노을을 잘라내어 옅은 색 짙은 색 붉은 천을 만들고 서슬 퍼런 서리는 웬 정이 많은지 끝도 없이 솜씨를 보인다. 저무는 낙조 아래로 점점이 불에 타오르고 이 산 저 산 속에 층층이 화폭이 펼쳐진다. 몇 줄의 사연은 심사를 구슬프게 만들며 이런저런 시름 끌고 저녁 바람에 떨어진다. 깊어가는 가을 향해 조락을 원망하지 말자. 봄바람은 또 시든 풀숲에서 풀을 엮고 있을 게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학창 시절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 자주 갔다. 대부분 시험공부 하러 갔지만, 가끔씩 소설이나 역사책을 빌려 보곤 했다. 책의 뒷면에 있는 대출카드에 반납기일 도장이 찍힐 때, 앞에 빌려 본 사람들과 비밀을 나누는 듯한 느낌을 갖곤 했다. 파리 특파원 시절, 아이와 함께 자주 찾았던 파리 한국문화원 도서관에서 한국어로 된 동화책과 만화책을 빌려 품에 가득 안고 나오던 아이의 환한 미소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워싱턴포스트가 ‘국보’라고 일컬을 정도로 논픽션의 대가인 수전 올리언은 “나를 키운 것은 도서관이었다”고 단언했다. “도서관은 내게 자율권이 주어졌던 최초의 장소였다. 상점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과 엄마가 사주고 싶어 하는 것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벌어질 게 뻔했다. 반면 도서관에서는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원하는 것을 뭐든 가질 수 있었다.” 올리언은 로스앤젤레스 중앙도서관을 찾았다가 “아직도 책에서 연기 냄새가 난다”는 운영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1986년 4월 29일 미국 공공도서관 역사상 가장 큰 참사로 기록된 7시간 반 동안의 도서관 화재로 총 40만 권의 책이 불길 속에 사라졌고, 70만 권이 연기나 물에 심각하게 훼손됐다. 그는 인류의 기억과 지식이 담긴 도서관의 책이 모두 사라졌을 때 재 냄새가 가득했던 비통한 현장을 추적한다. 이 책은 방화 용의자인 금발의 배우 해리 피크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불타 버린 도서관의 책을 어떻게 다시 살려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불에서 살아남은 70만 권의 책들은 선반에서 떨어져 무더기로 쌓여 있거나 꽂혀 있어도 끈적끈적했다. 책 보존 전문가는 책들을 신속하게 옮겨 냉동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불을 끌 때 뿌린 물 때문에 곰팡이 포자가 활성화되면 48시간 내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책에 곰팡이가 피면 손을 쓸 수가 없다.” 다음 날 아침. 20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도서관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사흘간 연기 자욱한 건물 안에서 문 밖까지 손에서 손으로 책을 전해 날랐다. 물에 젖고 연기에 그을린 책들은 냉장 트럭에 실려 섭씨 영하 56도의 창고로 보내졌다. “이 긴급한 순간은 로스앤젤레스 시민들로 살아 있는 도서관을 이룬 것 같았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시민들은 공유된 지식을 보호하고 전달하는 체계, 서로를 위해 우리 스스로 지식을 보존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도서관들이 매일 하는 일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은 도서관이 잃은 책들을 다시 채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구하자’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냉동한 지 2년이 지난 책들은 항공우주 제조업체 맥도널 더글러스로 보내져 우주 시뮬레이션실에서 기압과 온도를 극단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과정을 통해 수분을 제거했다. 마침내 1993년 도서관은 재개관했다. 역사적으로도 화재로 사라진 도서관이 적지 않다. 서기 640년 이슬람교도의 이집트 침략 당시 화재로 사라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대표적이다. 저자의 탐사 취재를 읽다 보면 책과 도서관이 ‘생명을 가진 유기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세네갈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표현할 때 ‘그녀의 도서관이 불탔다’고 말한다. 개인의 의식은 한 사람의 삶을 담아낸 도서관이다. 다른 누구와도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 죽으면 불타 사라지는 무엇이다. 하지만 그 내면의 컬렉션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이나 이야기로 세상과 공유할 수 있다면 그 무언가는 생명을 얻게 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한 사내가 옷에 검정 잉크를 묻힌 채 바닥을 구르고 있다. 이어 장미꽃에 분홍색 페인트를 묻혀 천에 글씨를 쓴다. 그리고 천으로 몸을 둘둘 감싸고 또 구른다. 세상과의 완전한 고립. 겨우 일어선 그의 몸엔 검은색, 분홍색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었다. 그는 관람객들에게 두 팔을 벌려 다가선다. “Hug me(안아주세요).” 그러나 10여 분이 흘러도 그를 안아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다. 그런 그를 옆에 있던 무용수가 살포시 안아 준다…. 》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개막식. 사진작가이자 행위예술가인 고상우 씨(40)의 퍼포먼스 주제는 ‘외로움’. 고독에 몸부림치던 사내의 옷에는 물감이 묻어 있었고, 오프닝에 참석한 관람객 중 그를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안아줄 때 퍼포먼스를 끝내려 했어요. 다 끝난 후에 남녀 2명이 저를 안아주려고 막 재킷을 벗고 나오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예정된 10분이 너무 짧아 아쉬웠죠. 만일 옷이 깨끗했다면 좀 더 빨리 허그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미국 시카고예술학교를 졸업한 고 씨는 22세에 뉴욕 최대 아트페어인 아머리쇼에 참가하는 등 일찌감치 미 현대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1월에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개막식에서도 ‘평화’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할 예정이다. 그는 퍼포먼스 도중에 자신의 얼굴이나 모델의 몸에 하트나 꽃을 그려 넣으면서 사진촬영을 한다. 자신의 얼굴에 Love(이마), Speak(입), Believe(목) 등의 글씨를 쓰고 촬영한 작품은 뉴욕 갤러리에서 팝스타 마돈나가 소장해 유명해졌다. 그는 “행위예술은 반쯤 미치지 않으면 그냥은 할 수가 없다. 200∼300명의 관람객에게 둘러싸인 채 하다 보면 때로는 감정 컨트롤이 어려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사진 속 사람 얼굴은 온통 푸른색이다. 색상이 반전(反轉)된 필름을 그대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푸른색 사진예술의 선구자’라는 칭호가 따라다닌다. 그는 “대학 시절 처음 암실에서 필름 속 내 얼굴을 봤을 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며 “유령처럼 파란색 얼굴이 비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사진 안에서는 인종이든 성이든, 모든 경계선이 무너진다. 동양인의 노란색 피부는 푸른색으로, 흑인은 흰색으로, 백인은 검은색으로 반전된다. 그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반전시키고, 현실에서 환상으로 전도시킨다는 것이 제 첫 작업의 타이틀이었다”고 말했다. 고 씨는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 사진을 직접 찍고, 디지털로 채색해 하이퍼리얼(hyperreal) 작품을 만드는 작업이다. 16∼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열리는 ‘고상우―경계의 확장’에서는 ‘피에로 사자’, 곰의 ‘겨울잠’, 코끼리의 ‘키스’, 호랑이의 ‘운명’ 같은 신작들을 전시한다. 그의 사진 속 사자와 호랑이의 노란색 털도 반전시켜 푸른색 피부가 됐다. 그의 ‘푸른색 피에로 사자’는 압도적인 눈빛과 분홍색 하트 모양이 신선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하트는 새로운 심장과 생명을 상징한다. 사진을 엄청나게 확대한 후 디지털 페인팅으로 세밀하게 채색하기 때문에 사자의 눈동자 속 홍채를 그리는 데만도 1주일 이상 걸린다고. 그는 “도심 빌딩이나 운동장, 동물원 등에서도 전시해 사람들 마음에 호소하고 싶어 극사실적인 채색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한 사내가 옷에 검정 잉크를 묻힌 채 바닥을 구르고 있다. 이어 장미꽃에 분홍색 페인트를 묻혀 천에 글씨를 쓴다. 그리고 천으로 몸을 둘둘 감싸고 또 구른다. 세상과의 완전한 고립. 겨우 일어선 그의 몸엔 검정색, 분홍색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었다. 그는 관람객들에게 두 팔을 벌려 다가선다. “Hug me”(안아주세요). 그러나 10여분이 흘러도 그를 안아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다. 그런 그를 옆에 있던 무용수가 살포시 안아 준다….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KIAF 개막식. 사진작가이자 행위예술가인 고상우(40) 씨의 퍼포먼스 주제는 ‘외로움’. 고독에 몸부림치던 사내의 옷에는 물감이 묻어 있었고, 오프닝에 참석한 관람객 중 그를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한명이라도 안아줄 때 퍼포먼스를 끝내려 했어요. 다 끝난 후에 남녀 2명이 저를 안아주려고 막 재킷을 벗고 나오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예정된 10분이 너무 짧아 아쉬웠죠. 만일 옷이 깨끗했다면, 허그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미국 시카고예술학교를 졸업한 고 씨는 22살에 뉴욕 최대 아트페어인 아모리쇼에 참가하는 등 일찌감치 퍼포먼스 사진작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1월에 열리는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 개막식에서도 ‘평화’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할 예정이다. 그는 퍼포먼스 도중에 자신의 얼굴이나 모델의 몸에 하트나 꽃을 그려 넣으면서 사진촬영을 한다. 자신의 얼굴에 Love(이마), Speak(입), Believe(목) 등의 글씨를 쓰고 촬영한 작품은 뉴욕 갤러리에서 팝스타 마돈나가 소장해 유명세를 탔다. 그는 “행위예술은 반쯤 미치지 않으면 그냥은 할 수가 없다”며 “무대 위가 아니라 200~300명의 관람객에게 가까이 둘러싸인 채 하다보면 때로는 감정 컨트롤이 어려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사진 속 사람 얼굴은 온통 푸른색이다. 색상이 반전(反轉)된 필름을 그대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에겐 ‘푸른색 사진예술의 선구자’라는 칭호가 따라다닌다. “대학시절 처음 암실에서 필름 속 내 얼굴을 봤을 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죠. 유령처럼 파란색 얼굴이 비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인물사진을 푸른색 그대로 현상했다가, 교수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며 혼도 많이 났지요.” 그의 사진 안에서는 인종이든 성이든, 모든 경계선이 무너진다. 동양인의 노란색 피부는 푸른색으로, 흑인은 흰색으로, 백인은 검은색으로 반전된다. 검은색, 흰색의 무채색보다는 푸른색이 더 환상적이기 때문에 그는 동양인 모델과 작업을 즐겨왔다. 그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반전시키고, 현실에서 환상으로 전도시킨다는 것이 제 첫 작업의 타이틀이었다”고 말했다. 고 씨는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을 직접 사진 찍고, 디지털로 채색해 하이퍼리얼(hyperreal) 작품을 만드는 작업이다. 16~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열리는 ‘고상우-경계의 확장’ 전시회에서는 바디페인팅 퍼포먼스 촬영 작품 외에도 ‘피에로 사자’, 곰의 ‘겨울잠’, 코끼리의 ‘키스’, 호랑이의 ‘운명’과 같은 신작들이 전시된다. 그는 몇 주 동안 동물원에 머물며 촬영했다. 사자와 호랑이의 노란색 털도 반전시키면 푸른색 피부가 됐다. 그의 ‘푸른색 피에로 사자’는 압도적인 눈빛과 분홍색 하트모양이 신선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사진을 촬영 뒤 5GB까지 용량을 늘려 디지털 페인팅으로 세밀하게 채색한다. 사자의 눈동자 속 홍채를 그리는 데만도 1주일 이상 걸리고, 한 작품 당 3~4개월씩 걸릴 정도로 공을 들이는 작업이다. 분홍색 하트는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에게 새로운 심장과 생명을 준다는 상징이다. 그는 “도심의 대형 빌딩이나 운동장, 동물원 등에서도 전시해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고 싶어 극사실적인 채색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전승훈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요즘 외국 유명인사들도 한글로 디자인한 티셔츠를 잘 입고 다닙니다. 한글이 굉장히 기호적이고, 형태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오히려 인터넷으로 그런 사진을 보면 코믹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영문이 아닌 한글로 디자인한 티셔츠를 어색해하죠.” 5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 284’(옛 서울역사)에서 개막한 ‘2019 타이포잔치: 제6회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서 만난 진달래, 박우혁 예술감독은 “한글이야말로 글자로 패턴을 만든다든가, 모양을 만드는 타이포 디자인을 위해 탄생한 문자”라고 강조했다. 6회째를 맞는 이 전시회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최봉현)이 주관하는 국내 최대 타이포그래피 전시회. 올해는 ‘타이포그래피와 사물’을 주제로 전 세계 22개국, 127개 팀 작가들이 6개 섹션(만화경, 다면체, 시계, 모서리, 잡동사니, 사물들)에 다양하고 기발한 타이포그래피 작품을 출품했다. 전시장에는 글자와 숫자를 디자인으로 활용한 옷걸이, 가구, 문구, 액세서리, 장난감 등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흥미로운 물건들이 가득하다. 또한 각국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활자의 숲’ ‘활자의 터널’이 있고, 서체 디자인이 굵기에 따라 형태가 자동으로 변화되는 ‘배리어블 폰트’ 신기술이 마치 춤추는 듯한 영상처럼 펼쳐진다. 가장 인상적인 전시는 ‘만화경’ 섹션. 3면이 거울인 원통 속에 색종이나 셀룰로이드를 집어넣은 만화경을 움직이면 천변만화하는 아름다운 형태를 볼 수 있듯이, 점 선 면의 요소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다채롭게 변화하는 타이포그래피 작품을 소개한다. “타이포그래피의 핵심은 ‘조합’입니다. 기본적인 알파벳 20∼30개를 이리저리 조합해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죠. 활자에서 활은 ‘살 활(活)’입니다. 서로 떼어진 글자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죠. 이렇게 자음과 모음이 건축적으로 아름답게 쌓이고, 해체되고, 다시 모이는 글자는 한글이 대표적입니다.” 박 감독은 “한글은 자모를 만들 때도 기본적인 것을 만들고, 다시 조합하고 변형해서 만들었다”며 “예를 들어 ‘ㄲ’은 ‘ㄱ’을 두 개 붙인 것이고, ‘ㅋ’은 ‘ㄱ’에 가로획을 덧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면 ‘모아서 쓴다’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렇듯 사용 매뉴얼까지 완벽하게 나와 있는 언어는 세계적으로 드물다”고 강조했다. 다음 달 3일까지 무료 관람. 이달 9, 19일 오후 2시에는 전시에 참가한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들이 나오는 토크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인 저자가 1989년부터 2013년까지 25년간 쓴 예술 에세이다. “미술을 보는 눈이 번쩍 뜨였다”는 독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저자는 예술가들의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까지 상세하고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사실주의의 대가 쿠르베는 모든 프랑스 여자가 자신을 택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다 시골 처녀에게 거절당한 나르시시스트였다. 드가는 여성을 혐오한다는 혹독한 오해를 받은 반면, 보나르는 한 여인의 모습을 385점이나 그린 지독한 사랑의 상징이 됐다. 마네는 모델에게 생동감 있게 움직이라고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세잔은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 치다 화가 나면 붓을 내팽개치고 화실을 뛰쳐나갔다. 뻔한 비평 대신 주인공들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가슴 뛰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에서 동대문으로 넘어가는 첫 동네. 한양도성의 고즈넉한 풍경과 숲이 어우러진 동네에 ‘세로로(SERORO)’라는 이름의 흰색 건물이 올봄에 들어섰다. 33m²(약 10평)에 불과한 땅에 5개 층을 위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협소주택이다. 신혼부부인 최민욱 씨(39·스몰러건축 소장)와 정아영 씨(34·와인 강사)는 올해 3월 결혼하면서 이 집을 짓고 입주했다. 사무실이 대학로인 남편은 서울 성곽과 낙산공원을 넘어 걸어서 출퇴근한다. 이 집은 층마다 1개의 방이 블록처럼 수직으로 쌓여 있는 형태다. 1층은 필로티 주차장, 2층은 서재 겸 작업실, 3층은 주방과 거실, 4층은 침실, 5층은 옷방과 욕실로 구성돼 있다. 2, 3층은 주로 일하거나 식사하고, 손님을 맞는 공간이고, 4, 5층은 사생활 공간이다. 최 소장은 “낮과 밤 시간대의 동선을 철저히 고려해 설계함으로써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할 일을 최소화했다”고 말했다. 각 층의 방은 불과 16.5m²(약 5평) 규모. 그러나 실제로 보면 답답하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숲 방향으로 2개 면에 걸쳐 시원하게 뚫린 창문 때문. 창 밖의 숲에는 비가 내리고, 단풍이 들고, 눈이 내리고, 딱따구리와 족제비가 나타나기도 한다. 도로와 접한 2개 면은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창문을 최대한 절제했다. 최 소장은 “이사 후 창 밖을 보며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며 “서울로 귀농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가 협소주택을 짓기로 마음먹은 건 5년 전. 친구가 서울 강동구에서 4억 원에 오피스텔 전세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다. 그는 아내와 “대출금에 치이느니 차라리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집을 짓자”고 의기투합했다. 이후 강남의 자투리땅, 강북의 산동네까지 다 뒤졌다. 드디어 대학로 사무실 인근 창신동에서 땅을 찾았다. 1930년대에 지어진 폐가였다. 지붕은 무너지고, 들고양이들의 아지트였던 이 땅을 3.3m²당 1000만 원씩 1억 원을 주고 샀다. 공사비 1억7000만 원으로 총비용은 2억7000만 원이 들었다. 서울에서 웬만한 전세도 얻기 힘든 돈이다. 그는 1년 동안 설계를 다듬으며 고심했다. 냉장고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의 크기를 미리 정해 놓고 벽체를 설계했다. 단열재는 콘크리트 외부에 시공했다. “협소주택에서는 1∼2cm도 아쉬운데, 단열재를 외부에 시공하면 단열효과도 크고, 평균 10cm 정도의 공간이 더 커진다.” 그가 새 집을 짓기 시작하자 동네사람들은 환영했다. 보기 흉했던 폐가가 ‘귀여운’ 새 건물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고 따뜻한 응원을 보낸 것이다.○ “세상에 나쁜 땅은 없다”… 얇디얇은 집 올해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한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얇디얇은 집’은 “집이란 어떤 공간에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상식을 깬 곳”이라는 평가를 받은 곳이다. 입구 쪽 폭이 1.4∼2m에 불과한 땅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반면 측면의 길이는 20m에 이른다. 그야말로 책을 한 권 세워놓은 것처럼 얇고 길쭉한 집이다. 이 집은 영상 촬영과 편집을 하는 두 부부가 같이 산다. 1층과 지하는 작업실, 2층은 거실과 부엌, 3층은 침실과 자녀방, 4층에는 지붕 테라스와 옥탑방이 있다. 복도처럼 길쭉한 집 공간이 좁게 느껴지지 않도록 화장실 욕실을 빼고는 벽이나 문을 만들지 않았다. 원래 이곳은 경부고속도로 주변 완충녹지를 만들고 남은 서울시 땅이었다. 공공부지 매각을 통해 민간에 팔렸지만 여러 건축설계사무소에서도 집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고 손을 들었던 곳이다. “서울에서 집 짓기 좋은 땅은 이미 집이 다 들어섰다고 보면 됩니다. 좁고 길거나, 도로변 삼각형 모양의 비정형적인 필지만 남았죠. 그러나 세상에 나쁜 땅은 없습니다. 땅의 컨디션을 잘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개성 넘치고 가치 있는 건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신민재 AnL스튜디오 소장)○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작은 집의 혁명’ 1인 가구가 늘고 부동산 가격이 치솟으면서 주택담보대출에 시달리는 밀레니얼 세대들 사이에서 삶을 다운사이징하는 작은 집 열풍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큰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미국에서도 타이니 하우스(협소주택)는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협소주택 사진은 예쁘면서도, 친환경적이고, 미니멀한 라이프스타일로 각광받는다. 미국에서는 2017년 타이니 하우스 판매량이 67%나 증가했다. 한 채의 평균 가격은 4만6300달러(약 5500만 원). 협소주택에 사는 이들의 68%는 주택담보대출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내 집 마련이 가장 어려운 도시로 알려진 홍콩에서는 대형 콘크리트 수도관으로 만든 협소주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홍콩의 건축사무소 ‘제임스 로 사이버텍처’가 만든 ‘오포드 튜브 하우스(OPod Tube House)’. 지름 2.5m, 길이 2.6m짜리 수도관 2개를 연결해 지은 이 집의 내부 면적은 약 9.3m²(약 2.8평). 여러 개를 쌓아올려 아파트형 타운을 만들 수도 있으며, 빌딩 틈새나 다리 밑 같은 사각지대에도 설치가 가능하다. 한 채 건설 비용은 약 1700만 원, 월 47만 원에 임대한다. 넷플릭스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Tiny House Nation(도전! 협소주택)’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랜드 피아노는 꼭 있어야 해요” “큰 오븐이 필요해요”와 같은 출연자들의 요구를 실현시켜 주는 갖가지 아이디어가 펼쳐진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이렇게 좁은 땅에 어떻게 집을 짓지?” “한 두 사람 살기엔 이 정도면 충분해!”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부동산 가격이 치솟으면서 자투리 땅을 활용한 개성있는 작은 집 짓기가 트렌드로 떠올랐다. 넷플릭스에서도 리얼리티쇼 ‘Tiny House Nation’(도전! 협소주택)이 큰 인기를 끌면서 미니멀한 삶을 꿈꾸는 협소주택 열풍은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에서 동대문으로 넘어가는 첫 동네. 한양도성의 고즈넉한 풍경과 숲이 어우러진 동네에 ‘세로로(SERORO)’라는 이름의 흰색 건물이 올 봄에 들어섰다. 33㎡(10평)에 불과한 땅에 5개 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협소주택이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신혼부부인 최민욱 씨(39·스몰러건축 소장)와 정아영 씨(34·와인강사) 부부. 이들은 올해 3월 결혼하면서 이 집을 짓고 입주했다. 남편의 사무실은 대학로. 서울성곽을 따라 낙산공원을 걸어서 넘어 출퇴근을 한다. 야경이 멋진 핫플레이스 데이트코스가 통근길인 셈이다. 대부분의 집은 여러 개의 방들이 수평으로 놓여 있게 마련. 그러나 이 집은 침실과 거실, 주방 등이 블록처럼 수직으로 쌓여 있는 형태다. 필로티 주차장인 1층에서 올라가면 2층은 서재 겸 작업실, 3층은 주방과 거실, 4층은 침실, 5층은 옷방과 욕실로 구성돼 있다. 2,3층은 주로 일하거나 식사하고, 손님을 맞는 공간이고, 4,5층은 사생활 공간이다. 2층 작업실에서는 남편이 설계업무를 하거나, 아내가 와인강의 준비를 하는 등 집이 일터가 되기도 한다. 각 층에 있는 방은 불과 16.5㎡(5평)에 불과하다. 사용하는 공간이 4개 층이니 총 20평짜리 집이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서 보면 답답하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숲과 마을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때문이다. 2개면으로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비가 올 때 빗소리와 흙냄새, 나무향기가 퍼지고,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숲에 눈 내리는 모습이 창밖으로 펼쳐진다. 또한 딱따구리와 족제비와 같은 온갖 새들과 동물도 나타난다. 반면 도로와 접한 2개면은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창문을 최대한 절제했다. “이사 후 창 밖을 보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3층 주방에서 마주보고 커피를 마실 때면 경치 좋은 카페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저녁엔 집 근처 서울성곽과 낙산공원으로 산책을 가죠. 우리 부부는 ‘서울로 귀농한 느낌’이라고 말해요.” 협소주택의 가장 좁고 높은 집을 오르락내리락하려면 무릎이 아프지 않을까? 최 씨는 “낮과 밤 시간대의 동선을 철저히 고려해 설계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내려오면 주로 밑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최 씨는 이 땅을 3.3㎡당 1000만 원씩 1억 원을 주고 샀다. 공사비는 1억7000만원으로 총 2억7000만 원이 들었다. 그가 협소주택을 지으려고 마음먹은 것은 5년 전. 친구가 서울 강동구에서 오피스텔을 구하려고 하는데 4억 원에 전세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결혼하기로 약속한 여자친구와 함께 “대출금에 치이느니 차라리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집을 짓자”며 의기투합했다. 경기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최 씨는 통근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서울에서 집 지을만한 땅을 찾아다녔다. 가격이 저렴해보이는 곳은 강남의 자투리땅, 강북의 산동네까지 다 뒤졌다. 드디어 대학로 사무실과 가까운 창신동에서 땅을 찾았다. 1930년대에 지어진 폐가였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지붕은 무너지고, 들고양이들의 아지트였던 곳이었다. “집을 내놓은 지도 꽤 오래됐는데 아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부동산에서도 ‘거기는 집을 못 짓는 땅’이라고 했어요. 과연 10평의 땅에 집을 지을 수 있을지 저도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제가 설계했던 빌딩의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있는 공간보다도 작은 크기였지요.” 그는 1년 동안 설계를 다듬으며 고심했다. 그가 이 곳에 새 집을 짓기 시작하자 동네사람들은 환영했다. 보기 흉했던 폐가가 ‘귀여운’ 새 건물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고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보낸 것이다. ●“세상에 나쁜 땅은 없다”… 얇디얇은 집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얇디얇은 집’은 올해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했다. “집이란 어떤 공간에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상식을 깬 곳”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입구 쪽 폭이 1.4~2m에 불과한 땅에 지하1층, 지상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반면 높이는 20m에 이른다. 그야말로 책을 한 권 세워놓은 것처럼 얇고 길쭉한 집이다. 이 집은 영상촬영과 편집을 하는 두 부부가 산다. 1층과 지하는 작업실이고, 2층은 거실과 부엌, 3층은 침실과 자녀방, 4층에는 지붕 테라스와 옥탑방이 있다. 1개 층의 건평이 대략 33㎡(10평) 정도다. 원래 이 땅은 경부고속도로 소음을 막기 위한 완충녹지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땅이었다. 서울시 소유였지만 공공부지로는 활용하지 못해 일반에 매각했다. 여러 번 유찰된 끝에 5~6년 전에 주변 시세의 절반가격에 낙찰됐다. 이 땅을 구입한 매수자는 집을 짓기 위해 여러 설계사무소를 다녀봤지만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그러다 지금의 주인이 다시 사들여 AnL스튜디오에게 맡겨 집을 지었다. “서울에서 집짓기 좋은 땅은 이미 집이 다 들어섰다고 보면 됩니다. 공공이든 민간이 갖고 있는 땅이든 좁고 길거나, 도로변 모퉁이 삼각형 모양의 비정형적인 필지만 남았죠. 요즘에는 이런 자투리땅을 매입해 지은 개성 있는 집들이 단조로운 도시풍경을 바꾸고 있습니다.”(신민재 AnL스튜디오 소장) 이 집은 각 층이 복도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집을 좁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화장실이나 욕실을 빼고는 칸막이나 문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또한 고속도로 완충녹지를 향해 커다란 창문을 만들어 자연을 감상하게 했다. 창신동 ‘세로로’ 집이나 잠원동 ‘얇디얇은 집’은 창문을 통해 숲과 공원의 풍경을 끌어들여 집이 넓게 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협소주택의 평당 공사비는 보통주택에 비해 1.5배 이상 든다. 같은 면적이라도 층층이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신 소장은 “세상에 나쁜 땅은 없다. 땅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나쁜 땅인가. 작지만 그 땅의 컨디션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면 건물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말했다. ●협소주택에 산다는 것 작은 집에 산다는 것은 미니멀 라이프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가구나 물건들을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협소주택에 살기 위해서는 그동안 갖고 있던 살림살이를 버리고, 비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넷플릭스의 ‘Tiny House Nation’에서도 진행자인 존과 잭은 협소주택에 살고 싶어 하는 의뢰인에게 먼저 짐을 줄이는 교육을 시킨다.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협소주택으로 이사하려는 이유는 평생 모기지(주택담보대출)를 갚으며 살기 싫어서, 자녀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 청소 등 집안 관리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등 다양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큰 집에서 살다가 16.5~33㎡의 집으로 옮길 때는 준비가 필요하다. 작은 집에 더블사이즈 침대, 쇼파, 책상, 주방, 화장실까지 집어넣는 신기에 가까운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대방출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사람들의 요구는 끝이 없다. “큰 오븐이 있어야 해요” “턴테이블은 꼭 갖고 가야해요”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가야 해요”…. 창신동 ‘세로로’ 주택을 지은 최 소장은 가구 크기까지 미리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다. 장롱과 냉장고와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의 크기를 미리 정해놓고 집 내부 벽체를 설계했다. 또한 가구가 들어올 수 있도록 창틀까지 한꺼번에 양쪽으로 열리는 대형 창문을 설치했다. 그는 “협소주택을 지을 때는 가구 크기는 물론 가구가 들어올 방식까지 계획하지 않으면 창문이나 유리를 뜯어내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또한 단열재를 콘크리트 외부에 붙여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게 만들었다. 그는 “협소주택에서는 1,2cm도 아쉬운데, 단열재를 외부에 시공하면 단열효과도 더 크고, 평균 10cm 정도의 공간이 더 커지는 효과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잠원동 ‘얇디얇은 집’에도 좁고 길쭉한 땅의 모양 때문에 시중에 판매하는 가구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공간에 맞춰 가구와 주방기구를 붙박이식으로 제작해 설치했다. 다행히 거주하는 부부는 원래 가구나 짐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 이사 올 때 옷가지 정도만 싸들고 왔다고 한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작은 집의 혁명’ 홍콩에서는 대형 콘크리트 수도관으로 만들어진 협소주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홍콩의 건축사무소 ‘제임스 로 사이버텍처’가 만든 ‘오포드 튜브 하우스(OPod Tube House)’다. 홍콩은 세계의 주요 도시 중에서 내집 마련이 가장 어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일자리를 찾아 홍콩으로 몰려든 청년들은 살인적인 집값 때문에 내집 마련의 꿈은 꿀 수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과잉생산으로 빈터에 방치된 대형 콘크리트 수도관을 주거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지름 2.5m, 길이 2.6m짜리 2개의 수도관을 연결해 지은 이 집의 내부 면적은 9.29㎡(약 2.8평)로 1~2인이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크기다. 2017년 말 모델이 공개된 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오포드 튜브 하우스는 창문은 따로 없고 전면의 통유리 출입문이 창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식 원목 바닥으로 꾸며진 내부는 안락하며 다양한 선반들을 설치해 물건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소파 겸용 침대는 접이식으로 벽면에 장착돼 있으며, 냉장고, 전자레인지, 옷걸이, 가방 등 대형 물건들도 모두 맨 하단의 대형 선반 위에 올려놓고 사용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여러 개를 쌓아올려 아파트형 타운을 만들 수도 있으며, 빌딩 사이 공터나 다리 밑과 같은 사각지대에도 설치가 가능하다. 한 채 건설비용은 약 1700만 원인데, 비슷한 부동산 시세의 20%인 월 47만 원에 임대한다. ‘큰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미국에서도 삶을 다운사이징하기 위한 타이니 하우스(협소주택) 열풍이 거세다. 협소주택은 소셜미디어에서 질투심을 유발하는 인기 아이템이다. 인스타그램에서는 협소주택을 찍은 사진이 그림처럼 예쁘면서도,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친환경적이고, 미니멀한 라이프스타일로 각광받는다. 한편 협소주택은 경제적 불평등, 엄청난 학자금 대출금에 시달리는 밀레니얼 세대의 불행을 상징하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2017년에만 협소주택 판매량이 67%나 증가했다. 협소주택의 평균가격은 4만6300달러. 협소주택을 가진 이들의 68%는 주택담보대출(모기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협소주택에 사는 사람의 89%가 평균적인 미국인들보다 더 적은 신용카드 빚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올해 3월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신축된 새문안교회가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에서 14일 열리는 ‘2019 아키텍처 마스터 프라이즈(AMP)’의 건축설계 분야 문화건축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새문안교회는 최동규 건축사(서인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와 이은석 경희대 교수가 10년 가까이 공동으로 설계 프로젝트를 맡아왔다. 198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국제디자인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전문 기업 파르마니그룹에 의해 제정된 AMP는 매년 전 세계의 혁신적인 건축 프로젝트를 선정해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올해는 건축설계, 인테리어 디자인, 조경 분야 등 42개 분야에 68개국 1000개 이상의 후보작이 출품됐다. 최동규 건축사와 함께 프로젝트를 공동진행해 온 이 교수와 1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13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한국 개신교회가 세계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됐다”며 “이제 교회 건축에서도 한국적 가치를 보여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교회 건물로 국제적 건축상을 받는 경우는 드문데…. “이번 수상작 중 교회 건축은 유일하다. 요즘엔 한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교회를 많이 짓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회 건축은 뾰족탑이 있는 서양의 고딕 스타일만 흉내 내왔다. 형태보다는 공간, 채움보다는 비움을 통해 한국적인 교회 건축의 가치를 표현하려 했다.” ―‘무창(無窓)의 건축’으로 유명한데, 이번에도 절제된 창이 인상적이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목사가 1886년에 세운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다. 한국 개신교회의 어머니 교회로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부드러운 곡선 벽면으로 형상화했다. 교회 앞마당에서 올려다보면 하늘로 열려있는 문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면의 작은 창문들은 밤이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은하수처럼 반짝이는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광화문 쪽에 설치된 전면 유리창에는 자세히 보면 십자가 문양이 숨겨져 있다.” 새문안교회의 베이지색으로 보이는 돌은 화강암의 일종인 중국산 사비석이다. 돌 사이에 낀 철분에 녹이 슬면 전체적으로 발그스름한 베이지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이 교수는 “돌마다 색깔이 달라 저렴한 재료이지만, 잘 섞어서 쓰면 고상하고 역사성 있는 건물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예배당 본당을 지을 때 고려한 점은 무엇인가. “현대의 개신교회는 너무 극장식이다. 스크린에서 화면이 나오고, 대형 스피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개신교회가 원래의 경건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피커를 안으로 감췄고 화면은 없앴다. 작곡가 홍난파, 김동진이 새문안교회 성가대 지휘자를 맡았을 정도로 음악적 전통이 강해 전자오르간 대신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1층에 위치한 ‘새문안홀’은 1972년에 지어 50년 가까이 썼던 기존 예배당의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 한옥창문 무늬 장식 등을 그대로 복원해 옛 기억도 잊지 않았다. 이 홀과 1층 로비, 외부 광장은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개방되고 새문안로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예로부터 교회는 도시생활의 중심 공간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사회적 기능을 잃어버렸다”며 “새 교회를 지으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공공성 회복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수많은 교회 건물을 설계해 온 교회 건축 전문가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주경기장 인근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초대형 원형 건축물인 ‘천년의 문’ 설계 공모(2000년)에서 1등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첫 카탈로그 표지에는 고딕성당이 그려져 있습니다. 건축을 통해 과학, 회화, 음악 등 모든 예술을 통합하자는 뜻이었죠. 현대건축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데 집중하는데 교회 건축가는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인 것을 포괄하는 복합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점에서 행복합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13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한국 개신교회가 세계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됐습니다. 이제 건축에서도 한국적 가치를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올해 3월 신축된 새문안교회 설계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은석 경희대 교수(57)가 말했다. 새문안교회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14일 열리는 ‘2019 건축 마스터상(AMP)’의 건축설계분야 문화건축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1985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국제디자인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전문기업 파르마니 그룹에 의해 제정된 AMP는 매년 전 세계의 혁신적인 건축 프로젝트를 선정해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올해는 건축설계, 인테리어 디자인, 조경분야 등 42개 분야에 68개국 1000개 이상의 후보작이 출품됐다. 이 교수는 서인종합건축사사무소(대표 최동규)와 10년 가까이 새문안교회 설계프로젝트를 맡았다. 1일 이 교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교회 건물로 국제적 건축상을 받는 경우는 드문데…. “이번 수상작 중 교회 건축은 유일하다. 요즘엔 한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교회를 많이 짓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회건축은 뾰족탑이 있는 서양의 고딕스타일만 흉내내왔다. 형태보다는 공간, 채움보다는 비움을 통해 한국적인 교회건축의 가치를 표현하려 했다.”―‘무창(無窓)의 건축’으로 유명한데, 이번에도 절제된 창이 인상적이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목사가 1886년에 세운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다. 한국 개신교회의 어머니 교회로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부드러운 곡선 벽면으로 형상화했다. 교회 앞마당에서 올려다보면 하늘로 열려있는 문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면의 작은 창문들은 밤이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은하수처럼 반짝이는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광화문 쪽에 설치된 전면 유리창에는 자세히 보면 십자가 문양이 숨겨져 있다.” 새문안교회의 베이지색으로 보이는 돌은 화강암의 일종인 중국산 사비석이다. 돌 사이에 낀 철분에 녹이 슬면 전체적으로 발그스름한 베이지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이 교수는 “돌마다 색깔이 달라 저렴한 재료이지만, 잘 섞어서 쓰면 고상하고 역사성 있는 건물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예배당 본당을 지을 때 고려한 점은 무엇인가. “현대의 개신교회는 너무 극장식이다. 스크린에서 화면이 나오고, 대형 스피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개신교회가 원래의 경건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피커를 안으로 감췄고 화면은 없앴다. 작곡가 홍난파, 김동진이 새문안교회 성가대 지휘자를 맡았을 정도로 음악적 전통이 강해 전자오르간 대신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1층에 위치한 ‘새문안홀’은 1972년에 지어 50년 가까이 썼던 기존 예배당의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 한옥창문 무늬장식 등을 그대로 복원해 옛 기억도 잊지 않았다. 이 홀과 1층 로비, 외부 광장은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개방되고 종로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예로부터 교회는 도시생활의 중심 공간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사회적 기능을 잃어버렸다”며 “새 교회를 지으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공공성 회복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수많은 교회건물을 설계해 온 교회건축 전문가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주경기장 인근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초대형 원형 건축물인 ‘천년의 문’ 공모설계(2000년)에서 1등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첫 카탈로그 표지에는 고딕성당이 그려져 있습니다. 건축을 통해 과학, 회화, 음악 등 모든 예술을 통합하자는 뜻이었죠. 현대건축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데 집중하는데 교회 건축가는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인 것을 포괄하는 복합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점에서 행복합니다.”}
“‘붉다’라는 글자 하나만 가지고/온갖 꽃 통틀어 말하지 마라/꽃술도 많고 적은 차이 있으니/세심하게 하나하나 보아야 하리.”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나 신분차별을 겪었고, 봉건주의 인습에서 벗어나려 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1750∼1805). 그는 시와 그림으로 고독을 달래던 천생 예술가였다. 그가 남긴 ‘연평초령의모도’는 청나라에 저항한 명의 장수 정성공의 어릴 적을 그린 그림이다. 청의 선진 문물과 풍속을 소개한 ‘북학의’로 유명한 박제가가 청에 저항하던 인물을 그린 미스터리한 그림이다. 과연 이 그림의 진짜 작가는 누구일까. 저자는 ‘연평초령의모도’의 비밀 이야기를 좇아 20년 가까이 한국과 중국, 일본을 오간다. 갑갑한 조선에 몸담았으되 국경 없이 예술가들과 연대하며 더 넓은 세상을 꿈꿨던 자유인 박제가의 마음을 훑는 인문 기행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기계로 번역하고 평가한 결과가 28일 서울 중구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열리는 한국번역학회(회장 김순영 동국대 교수)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소개된다. 인공지능(AI)·데이터 전문 기업 솔트룩스 파트너스, 기계번역 전문기업 시스트란, 유명우 한국번역연구원 원장, 최병현 한국고전번역세계화 연구소 소장 등은 이날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 및 ‘정조실록’을 기계번역을 통해 영어로 옮긴 결과를 공개한다. 향후 AI를 활용한 다앙¤ 고전 번역 방향도 제시하기로 했다. 유명우 원장은 “AI를 통한 한국 고전 번역은 한국에서 서두르지 않으면 다른 국가에 주도권을 뺏길 가능성이 높다. 인문학과 IT의 결합이란 측면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이영훈 고려대 교수가 ‘한국 번역학사, 새로운 20년을 준비하며’를 주제로 발표한다. 이 외 문학번역, 문화용어, 번역윤리 등 번역에 관한 다양한 세부 특강도 마련된다. 전승훈 문화전문 기자 raphy@donga.com}
영화제작자인 심재명 명필름 대표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심 대표는 음식물을 감쌌던 종이와 비닐, 플라스틱 용기 등을 수돗가에서 수세미로 닦은 다음 재활용품 수집함에 넣었다. 그는 “음식물이 묻으면 재활용을 할 수 없다는 보도를 본 뒤 이런 실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이 책에 따르면 이 같은 ‘가정폐기물 재활용’ 노력만으로도 연간 2.77기가톤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이 책을 쓰고 엮은 세계적 환경운동가이자 기업가인 호컨은 2001년부터 기후환경 분야 전문가들을 만날 때마다 “지구온난화를 막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뭘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늘 같았다. “그런 목록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기후변화를 야단스럽게 경고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게임은 끝났다’는 패배적 인식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무렵. 저자는 ‘드로다운(drawdown)’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로 결심한다. 드로다운은 기후 용어로 온실가스가 최고조에 이른 뒤 매년 감소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말한다. 호컨은 각국의 과학자들, 공공 정책 전문가들에게 호소문을 보내 70명의 연구진으로 구성한 ‘프로젝트 드로다운’을 결성했다. 이들은 에너지, 식량, 여성 문제, 건축, 도시계획, 토지이용, 교통체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포괄적인 기후변화에 대한 행동대책 100가지를 집대성했다. 이들은 2050년까지 달성 가능한 온실가스 배출 저감 효과, 잠재적 비용까지 산출했다. 일례로 음식물 쓰레기를 최소화함으로써 우리는 2050년까지 70.53기가톤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피할 수 있다. 채식 위주의 식단은 66.11기가톤의 배출을 줄인다. 여학생 교육과 가족계획은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극적인 효과를 발휘해 각각 59.60기가톤을 절감한다. 1기가톤이란 40만 개에 이르는 올림픽 규격 수영장에 물을 채우는 양과 같은 규모. 2016년 한 해 동안 세계가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총량은 36기가톤으로, 1440만 개의 수영장을 가득 채울 양이다. 건물 옥상 녹화하기, 승차공유, 전기자전거, 미생물 농업 등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이들 솔루션이 제시하는 감축량은 이를 훨씬 뛰어넘는다. “세계 탄소배출량의 약 2.4∼4.6%가 해양 생물체에 의해 포집되고 격리된다. ‘푸른 탄소’ 습지 생태계가 퇴화되거나 파괴될 때 단순히 탄소 흡수 과정이 멈추는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연안습지는 오랫동안 격리된 대량의 탄소를 내뿜는 무시무시한 방출원이 되는 것이다. 연안습지를 보호함으로써 15기가톤의 탄소를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공기 중에 방출된다면 약 53기가톤 이상의 이산화탄소에 상당하는 양이다.” 기후변화는 그동안 과학적 논쟁, 종교적 미신, 정치적 올바름 논란으로 치부돼 왔다. 아니면 재난영화나 호러물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공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책은 무력감을 딛고 치밀한 계획과 행동, 실천만이 기후변화를 되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서울은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유럽, 미국 등 선진국 도시들에도 배울 것을 던져주는 실험적인 도시입니다. 높은 밀도로, 전례 없이 초고속으로 발전해 온 서울의 경험은 선진국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7일 개막한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해외총감독을 맡은 프란시스코 사닌 미국 시러큐스대 건축과 교수(64)의 평가다. 그는 8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왜 집합도시(Collective City)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집합도시 공간으로 을지로와 광장시장을 꼽았다. 특히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1960년대 말 지은 세운상가에 대해 “정말 어메이징하다. 서울이 세계의 다른 도시들에 영감과 교훈을 던져준 대표적 건축물”이라고 했다. “세운상가는 고층빌딩을 옆으로 눕혀서 시장과 식당, 가게 등을 배치하고, 위에는 주거용 고층빌딩을 세운 최초의 주상복합 프로젝트였습니다. 도심의 거대 복합공간(Mega Structure)은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는 아이디어만 있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먼저 실현됐던 독특한 실험이었습니다.” 세운상가는 을지로와 주변 시장을 변화시켰고, 결국에는 시장이 세운상가 전체를 변화시켰다고 봤다. 그 결과 매우 집합적인 도시와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지닌 복합공간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사닌 교수는 200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공동감독을 맡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의 도시건축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세계적인 학자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의 주제는 ‘방의 도시(City of Bang)’였다. “한국의 도시는 노래방, 찜질방, PC방처럼 집 안의 방이 사회적으로 터져 나와 도시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한국 아파트는 부(富)의 상징이지만 소외감, 공동체 생활의 실종 같은 부작용을 드러냈습니다. 고밀도화된 아파트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사적인 네트워크 공간을 갖고 싶은 심리 때문에 수많은 방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는 세운상가 주변 을지로 등 도심 재개발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집합도시는 돈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인 섬유질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주변 시장과 골목길을 없애고 건물만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영국 런던, 중국 베이징 등 수많은 도시들이 도심의 역사, 뿌리, 기억을 다 지우고 무너뜨린 후 뒤늦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해질 녘 국회의사당의 둥근 초록색 돔에 조명이 켜진다. 국회 정문 왼쪽에 새롭게 들어선 수소충전소 건물의 반투명 유리 틈새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주유소 하면 떠오르는 빨강, 노랑, 초록의 형형색색 로고와 가격을 홍보하는 숫자들…. 그러나 국회 수소충전소에는 새하얀 캐노피(지붕 덮개) 말고는 어떤 외부 장식도 찾아볼 수 없다. 10일 개소식을 하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수소충전소는 세계 최초로 국회에 들어서는 수소충전소다. ‘규제 샌드박스’ 1호 사업으로 승인된 뒤 5월 말 착공해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친 서울 내 첫 번째 상업용 수소충전소이기도 하다. 국회 수소충전소는 단순하고 깔끔한 미니멀리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수소탱크를 저장하는 메인 건물에는 두꺼운 철근콘크리트를 썼고, 건물 외벽은 저탄소 친환경 소재인 유글라스(U-glass)로 감쌌다. 반투명한 재질의 유글라스는 밤에 조명이 켜지면 부드러운 흰색을 뿜어낸다.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임재용 OCA 대표는 “안전을 고려한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가볍고 경쾌한 디자인을 통해 맑고 깨끗한 청정 수소에너지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기충전소, 수소충전소…. 장기적으로 화석 에너지를 친환경 에너지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함에 따라 국내 주유소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주유소 업계가 정점을 이뤘던 2010년 12월 말 전국의 영업 주유소는 총 1만2691곳. 이후 해마다 주유소가 줄어들어 2010년과 비교하면 1100곳 이상 문을 닫았다. 도심 주유소는 대로변의 좋은 위치에다 부지도 300∼400평(약 990∼1300m²)으로 넓어 오피스텔이나 상가 건물로 신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대를 이어 주유소를 운영해온 경우에는 주유소를 포기하지 않고, 1층 주유소 지붕 위에 건물을 짓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서울 중구 장충단로의 서울석유 사옥은 한국 1세대 건축가 고 김수근의 작품인 경동교회 건물 바로 옆에 있다. 1, 2층 주유소 위에 새로 올린 정방형 건물은 얇은 회색 철망이 씌워져 있다. 이 건물 내부 계단에서는 경동교회를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붉은 벽돌과 담쟁이 넝쿨로 둘러싸인 경동교회가 무거운 침묵이라면, 건물 6, 7층에 사선형으로 유리관을 박아 외부와 내부를 개방한 이 건물은 공중에 떠 있는 듯 가벼운 느낌의 건축물로 어우러진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입구 교차로에 있는 한유그룹 사옥은 1, 2층에 자리 잡은 셀프 주유소 위로 주변을 압도하는 스케일의 건물이 올라가 있다. 시시각각 음영을 달리하는 유리창이 돋보이는 데다, 심장부에 사각형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도 많다. 건물 앞뒤의 풍경을 소통하게 하는 구멍에는 서로 다른 각도로 구름다리가 엇갈린다. 건물 내부 구름다리는 관악산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대이기도 하다. 주유소는 이제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세차도 하며, 식사를 해결하는 도시 속 새로운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교육개발원입구 사거리의 SK주유소 건물은 회오리치듯 사선 띠가 3층부터 둘러싸고 있어 행인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1층에 주유소와 드라이브 스루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섰고, 상부 층은 사무실 식당 갤러리 등으로 사용하는 복합 문화공간이 됐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해질녘. 국회의사당의 둥근 초록색 돔에 조명이 켜진다. 국회 정문 왼쪽에 새롭게 들어선 수소충전소 건물의 반투명 유리 틈새로 은은한 하얀 불빛이 새어나온다. 주유소하면 떠오르는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의 형형색색 로고와 가격을 홍보하는 숫자들…. 그러나 국회 수소충전소에는 새하얀 캐노피(지붕 덮개) 말고는 어떤 외부장식도 찾아볼 수 없다. 10일 개소식을 갖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수소충전소는 세계 최초로 국회에 들어서는 수소충전소다. ‘규제 샌드박스’ 1호 사업으로 승인된 뒤 5월말 착공해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친 서울 내 첫 번째 상업용 수소충전소다. 국회 수소충전소는 단순하고 깔끔한 미니멀리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수소탱크를 저장하는 메인 빌딩은 두꺼운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고, 건물 외피는 저탄소 친환경 소재인 유글래스(U-glass)로 감쌌다. 반투명한 재질의 유글래스는 밤에 조명이 켜지면 부드러운 흰색을 뿜어낸다.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임재용 OCA대표는 “안전을 고려한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가볍고 경쾌한 디자인을 통해 맑고 깨끗한 청정 수소에너지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기충전소, 수소충전소…. 장기적으로 화석에너지를 친환경에너지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함에 따라 국내 주유소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주유소 업계가 정점을 이뤘던 2010년 12월 말 전국 영업 주유소는 총 1만2691곳. 이후 해마다 주유소는 줄어들어 2010년과 비교하면 1100곳 이상 문을 닫았다. 도심 주유소는 대로변의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는데도 300~400평가량의 넓은 부지를 갖고 있어 오피스텔이나 상가 건물로 신축하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나 대를 이어 주유소를 운영해온 경우에는 주유소를 포기하지 않고, 1층 주유소 지붕 위에 건물을 짓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서울 중구 장충단로의 서울석유사옥은 한국 1세대 건축가 고(故) 김수근의 작품인 경동교회 건물 바로 옆에 있다. 1, 2층에 주유소 위에 새로 올린 정방형 건물은 얇은 회색 철망이 씌워져 있다. 이 건물 내부 계단에서는 경동교회를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붉은 벽돌과 담쟁이 넝쿨로 둘러싸인 경동교회가 무거운 침묵이라면, 건물 6~7층에 사선 형으로 유리관을 박아 외부와 내부를 개방한 이 건물은 공중에 떠 있는 듯 가벼운 느낌의 건축물로 어우러진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입구 교차로에 있는 한유그룹 사옥은 1~2층에 자리 잡은 셀프 주유소 위로 주변을 압도하는 스케일의 건물이 올라가 있다. 시시각각 음영을 달리하는 유리창이 돋보이는데다, 심장부에 사각형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건물 앞뒤의 풍경을 소통하게 하는 구멍에는 서로 다른 각도로 구름다리가 엇갈린다. 건물 내부 구름다리는 관악산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대이기도 하다. 주유소는 이제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세차도 하며, 식사를 해결하는 도시 속 새로운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교육개발원 입구사거리에 있는 SK주유소 건물은 회오리치듯 사선 띠가 3층 위부터 올려져 행인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1층에 주유소와 패스트푸드 드라이브 스루가 들어섰고, 상부 층은 사무실 식당 갤러리 등으로 사용하는 복합문화공간이 됐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끔찍한 폭력의 실재를 견디기 위해 여성들은 눈을 돌려버린다. 스탠드 불빛만 노려보거나 벽에 걸린 그림만 보고 있기도 한다. 아니면 눈을 감아버린다. 이는 곧 여성들이 강간범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할 수 있고, 범인이 입은 옷 방 시간 주변 환경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거짓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는 범죄다. 성폭력을 당했다고 말하는 순간, 수사기관부터 주변 지인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사람이 한 번쯤 피해자의 말을 의심한다. 그래서 성폭력은 강력범죄 가운데 신고율이 가장 낮은 범죄다. 설령 재판까지 가더라도 피해자는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법정에서 자신이 당한 성폭력의 세부사항을 공개해야 하며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는 범인을 보며 증언해야 한다. 이 책은 2008년 8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임대아파트에 홀로 사는 18세 여성 마리가 침입자에게 강간당한 사건을 추적한 탐사보도 르포르타주다. 당시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피해자의 반복 진술 사이에서 사소한 모순을 의심했다. 결국 마리는 협박에 가까운 경찰들의 취조에 겁에 질려 진술을 철회했고, 허위 신고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약 3년 뒤. 타 지역에서 연쇄강간 행각을 벌이던 진범이 잡히고 나서야 마리의 강간 신고가 사실이었음이 밝혀진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들은 방대한 서면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수사의 중심에는 갤브레이스와 헨더샷이라는 두 여성 형사가 있었다. 그들은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보통 경찰들이 걸리기 쉬운 ‘피해자다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갤브레이스는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지도 의심하지도 않고, 우선 경청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탐사보도는 마치 추리소설처럼 흡인력 있게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성인지 감수성’ ‘2차 가해’ 등이 이슈가 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건축가들은 의자를 디자인하길 좋아한다. 하중을 받치는 구조물이면서도, 미적인 디자인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건축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전에는 의자를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재료로 나무와 천이 전부였다. 그러나 20세기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는 혁신적인 재료를 쓴 의자가 등장했다. 바로 속이 빈 강철관이었다. 강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유연함까지 갖춘 의자는 디자인 혁신을 불러왔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쓰이던 캔틸레버(Cantilever·외팔보) 건축공법을 적용한 의자도 등장했다. 한글로 ‘ㄷ’ 자를 연상시키는 캔틸레버 의자는 ‘뒷다리 없는 의자’로도 안정적으로 떠받칠 수 있어서 공중에 뜬 것처럼 가볍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더 이상 의자에는 다리가 4개 또는 3개가 필요하지 않았다. 올해는 디자인 혁명의 아이콘, 인류 첫 창조학교로 불리는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맞는 해. 29일 다큐멘터리 영화 ‘바우하우스’가 개봉하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금호미술관과 2019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경기 양주시 조명박물관에서 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금호미술관 30주년 기념 특별전인 ‘바우하우스와 현대생활’은 1920년대 바우하우스의 오리지널 디자인 60여 점을 볼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다. 우선 마르셀 브로이어의 초기 ‘캔틸레버 의자’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우아한 곡선이 가미된 ‘캔틸레버 의자’, ‘바르셀로나 체어’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페터 켈러의 ‘칸딘스키 콘셉트의 요람’은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추상미술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하학적 도형과 색채감이 돋보인다. 바우하우스의 금속 공방장으로 활동했던 마리아네 브란트의 반구형 금속 ‘재떨이’와 탁상시계는 지금 봐도 세련된 디자인이다. 빌헬름 바겐펠터의 오리지널 빈티지 ‘주전자’(1929년)는 현대에도 널리 쓰이는 디자인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놀랍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약 14년 동안 독일에서 지속됐던 예술학교.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더 나은 생활을 꿈꿨으며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시도해 산업시대를 내다본 대량생산을 모색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철학으로 단순하지만 기능에 충실한 명품 디자인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다. 영화 ‘바우하우스’는 바우하우스에서 벌어졌던 학생들의 공연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과 배움의 즐거움, 천재들의 협업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받은 현대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애플, 이케아, 무인양품을 꼽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덴마크의 공간 디자이너 로잔 보슈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교실 없는 학교’, 베를린 건축가 판보 레멘첼의 ‘미니하우스 프로젝트’, 남미 슬럼가를 바꾸는 공공기반시설 건축 프로젝트 등 삶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에 담긴 바우하우스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다음 달 7일 개막하는 ‘2019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는 주한 독일문화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은 ‘Imaginista’ 전시가 열린다. 바우하우스 창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바우하우스 데사우의 축소모형인 ‘타이니 바우하우스’ 구조물이 설치되고, 지난 100년 동안 바우하우스 철학이 세계 각국으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살펴본다. 또한 크리에이터 14명이 바우하우스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도 선보인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건축가들은 의자를 디자인하길 좋아한다. 하중을 받치는 구조물이면서도, 미적인 디자인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건축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이전, 의자를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재료는 나무와 천이 전부였다. 그러나 20세기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는 혁신적인 재료를 쓴 의자가 등장했다. 바로 속이 빈 강철관이었다. 강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유연함까지 갖춘 의자는 디자인 혁신을 불러왔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쓰이던 캔틸레버(Cantilever·외팔보) 건축공법을 적용한 의자도 등장했다. 한글로 ‘ㄷ’자를 연상시키는 캔틸레버 의자는 ‘뒷다리 없는 의자’로도 안정적으로 떠받혀서 공중에 뜬 것처럼 가볍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더 이상 의자에는 다리가 4개 또는 3개가 필요하지 않았다. 올해는 디자인 혁명의 아이콘, 인류 첫 창조학교로 불리는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맞는 해. 29일 다큐멘터리 영화 ‘바우하우스’가 개봉하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금호미술관과 2019광주디자인비엔날레, 경기 양주시 조명박물관에서 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금호미술관 30주년 기념 특별전인 ‘바우하우스와 현대생활’에서는 1920년대 바우하우스의 오리지널 디자인 60여 점을 볼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다. 우선 마르셀 브로이어의 초기 ‘캔틸레버 의자’와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우아한 곡선이 가미된 ‘캔틸레버 의자’와 ‘바르셀로나 체어’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페터 켈러의 ‘칸딘스키 컨셉트의 요람’은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추상미술 선구자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하학적 도형과 색채감이 돋보인다. 바우하우스의 금속 공방장으로 활동했던 마리안느 브란트의 반구형 금속 ‘재떨이’와 탁상시계는 지금 봐도 세련된 디자인이다. 빌헬름 바겐펠터의 오리지널 빈티지 ‘주전자’(1929년)는 현대에도 널리 쓰이는 디자인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놀랍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약 14년 동안 독일에서 지속됐던 예술학교.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더 나은 생활을 꿈꿨으며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시도해 산업시대를 내다본 대량생산을 모색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철학으로 단순하지만 기능에 충실한 명품 디자인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다. 영화 ‘바우하우스’는 바우하우스에서 벌여졌던 학생들의 공연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과 배움의 즐거움, 천재들의 협업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바우하우스에게 영향을 받은 현대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애플, 이케아, 무인양품을 꼽는다. 여기에 더 나아가 덴마크의 공간 디자이너 로잔 보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교실 없는 학교’, 베를린 건축가 반 보 레-멘첼의 ‘미니하우스 프로젝트’, 남미 슬럼가를 바꾸는 공공기반시설 건축 프로젝트 등 삶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에 담긴 바우하우스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다음달 7일 개막하는 ‘2019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는 주한독일문화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은 ‘Imaginista’ 전시가 열린다. 바우하우스 창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바우하우스 데사우의 축소모형인 ‘타이니 바우하우스’ 구조물이 설치되고, 지난 100년 동안 바우하우스 철학이 세계 각국으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살펴본다. 또한 14명의 크리에이터들이 바우하우스의 현대적 의미를 재해석한 작품도 선보인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