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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8회째를 맞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가 11일간의 영화 축제를 시작했다. 17일 경기 부천시 원미구 부천체육관에서 열린 개막식으로 문을 연 PiFan은 48개국 210편(장편 123편, 단편 87편)의 다양한 영화를 선보인다. 개막작으로는 독일 감독 막시밀리언 엘렌바인이 연출한 ‘스테레오’가 상영됐다. 갱스터 장르를 기본 줄기로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올해는 다양한 기획전도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거대 괴수 고지라 탄생 60주년을 맞아 마련된 ‘괴수대백과: 고지라 60주년’과 아르헨티나국립영화연구소의 후원을 받아 남미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살핀 ‘낯선 환상, 금지된 욕망의 대륙: 라틴 아메리카’가 열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과 중국 베이징영화학교가 2005년부터 공동으로 단편영화 제작사업을 지속해온 결과물인 ‘한중 10년의 동행: 합작영화 10주년 작품전’도 만날 수 있다. 폐막작은 2007년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을 연출했던 이권 감독의 신작 ‘내 연애의 기억’(송새벽 강예원 주연)이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pifan.com)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3일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를 보는 관객은 어쩌면 이렇게 되뇔지도 모르겠다. “정말 개…, 아니 용(龍)판이구먼.”이 영화는 개체 수만 놓고 보면 ‘드래건 계의 오승환(끝판왕)’이다. 용이 한 1000마리쯤 날아다닌다. 날개가 넷이거나 얼음을 뿜는 등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최근 드래건은 영화나 TV의 인기 소재다. 지난달 시즌4가 종영한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영화채널 스크린)에는 무럭무럭 커가는 용 세 마리가 나왔다. 내년 시즌5로 돌아온다. 지난해 12월 영화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위용을 드러낸 거룡 스마우그(Smaug)도 올해 말 ‘호빗: 다섯 군대의 전투’로 다시 만난다. 현재 누적 관객 약 500만 명인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엔 로봇 공룡(恐龍)이 나온다.(서양 신화의 드래건은 공룡이 기원이란 학설도 있다.)흥미로운 건 같은 용이라도 작품마다 해석 방식이 다르단 점이다. 서구 중세의 ‘전통적(orthodox)’인 드래건부터 오히려 동양사상에 어울리거나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용도 있다. 동서양 신화에 해박한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의 도움말과 영국학자 칼 슈커가 쓴 ‘드래건의 자연사’(1995년)를 통해 21세기 미디어 속 서양 용을 살펴봤다. 》 ▼ ‘호빗’ 스마우그 ▼탐욕과 파괴의 화신… 중세적 세계관 반영지난해 영화 ‘호빗’에서 분노에 가득 차 성을 뛰쳐나간 스마우그. 올해 말 선보일 영화에서 제대로 분탕질을 선보일 이 드래건은 전형적인 서구문화 용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용=악한 괴물’ 설정은 유럽 중세시대에 자리 잡은 개념이다. 드래건은 고대 그리스어 ‘드라콘’에서 유래했는데, 주로 커다란 뱀을 지칭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뱀은 인간에게 원죄를 떠안긴 장본인. 때문에 성화에는 성모가 용을 발로 밟고 있는 묘사가 잦다. 스마우그가 황금에 대한 탐욕이 남다르며, 매우 포악하고 교활한 성격을 지닌 것에도 이런 의식이 깔려 있다. 머리 하나가 사람 몇 배나 되는 스마우그의 엄청난 덩치도 전통이 깊다. 로마시대 작가인 클라우디우스 아엘리아누스는 저서 ‘동물의 본성’에서 “용은 최대 180피트(약 55m)까지 자란다”고 묘사했다. 수명도 1만5000∼2만 년이다. 사료에 최초로 등장하는 드래건은 어떤 모습일까. 학자들은 기원전 2000년 전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괴물 훔바바(humbaba)를 용의 원류로 친다. 입으로 불과 독을 내뿜고 꼬리가 뱀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거인의 형상이었다. 공룡 등에 박쥐 날개가 달린 익숙한 생김새는 영문학 최초 서사시인 ‘베어울프(Beowulf·8세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영웅 베어울프가 화룡(火龍)을 무찌르는 대결구도 역시 등장한다. ▼ ‘왕좌의 게임’ 드로곤 ▼왕을 상징하는 매개체… 동양적 용에 가까워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대너리스 공주(에밀리아 클라크)는 칠왕국을 다스렸던 타르가르옌 왕조의 적통. 하지만 반란으로 나라를 뺏긴 뒤 이국에서 떠도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다. 막다른 길에 몰린 공주에게 부활의 명분을 선사하는 존재가 바로 용이다. 불 속에서 품은 알에서 드로곤(Drogon) 등 3마리의 드래건이 깨어남으로써 공주는 ‘용의 어머니’로 여왕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용은 서양보다 동양적 정서에 부합한다. 동양 용은 고대 인도신화에서 출발해 동북아시아에서 꽃피는데, 제왕의 권력을 나타내는 피조물이었다. 특히 농업과 어업이 중요했던 한국과 중국에서 용은 기후를 다스리는 존재로 추앙받았다. ‘왕좌의 게임’에서 드래건이 몇백 년 동안 나타나질 않자 사람들은 미신으로 치부하거나, 이미 멸종했다고 여기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용의 실존 여부를 놓고 조정에서 격론이 벌어진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세종 18년(1436년) 제주 안무사로부터 ‘용 다섯 마리가 승천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 천 관장은 “이 보고를 두고 대소 신료가 4년이나 논쟁을 벌였지만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특이한 건 만사를 과학적으로 봤던 실학자 이수광(1563∼1628)과 이익(1681∼1763)도 각각 전북 익산과 경기 포천에서 용을 직접 봤다는 글을 남겼다. ▼ ‘드래곤 길들이기2’ 투슬리스 ▼인간을 지키는 든든한 존재… 바이킹 시대에 부합1편에 이어 주인공 히컵의 다정한 벗인 드래건 투슬리스(Toothless)는 애매한 존재다. 하늘을 날고 불을 뿜는 용은 확실한데, 전통적인 드래건과는 다르다. 딱 타기 좋은 말만 한 크기에 혀로 주인을 핥는 강아지나 할 법한 행동을 한다. 해맑은 눈망울을 보라. 실제로 많은 관객들이 1편을 보고 나서 “애견이 떠올라 뭉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영화에서 드래건은 괴수보단 반려동물에 가깝다. 이런 ‘하이브리드(hybrid·혼종)’ 드래건은 분명 미국 할리우드의 상업적 의도가 작용했을 터.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다지 틀린 건 아니다. 중세 이전 드래건은 예상보다 긍정적이고 친근하게 그려진 경우가 적지 않다. 학계에선 용에 대한 개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 때부터 이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초기엔 드래건에 대한 선악의 잣대가 엇갈렸다.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유럽 상당수 지역에선 인간의 재물을 지켜주는 착한 동물로 여겼다. 영화 속 히컵의 종족인 ‘바이킹’이 대표적이다. 8∼10세기에 바다를 주름잡았던 노르만족은 배에 용 그림을 새기곤 했다. 거친 날씨와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수(神獸)로 믿었기 때문이다. 천 관장은 “종교적 세계관에 자연을 인간의 정복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겹치며 용을 무찔러야 할 상대로 보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올여름, 사상 초유의 스크린 대전이 펼쳐진다. ‘7말 8초’ 극장가는 전쟁터. 지난해 이 무렵엔 하루 평균 100만 명의 관객이 몰렸다. 올해는 한국 영화 대작 4편이 맞붙는다. 23일 ‘군도: 민란의 시대’(쇼박스)를 시작으로 ‘명량’(30일·CJ E&M), ‘해적: 바다로 간 산적’(8월 6일·롯데엔터테인먼트), ‘해무’(8월 13일·뉴)가 일주일 간격으로 속속 개봉한다. 편당 총제작비만 해도 100억∼200억 원 선. 국내 4대 배급사의 대작들이 한꺼번에 몰린 건 극히 드문 일. 영화계에선 ‘600억 대전’이라고 부른다. ‘갑오년 대첩’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 관계자들은 “잠을 못 잔다” “입이 쩍쩍 마른다”고 하소연이지만 팬들의 마음은 설레기만 한다. 동아일보 영화담당 기자가 4편을 시리즈로 관전평을 나누고, 전문가들의 평을 미리 구했다. 먼저 포문을 여는 윤종빈 감독, 하정우 강동원 주연의 영화 ‘군도…’를 만나보자. 》▽정양환=이건 뭐, 조선 철종 시대 민란이 배경인데 서부영화 ‘장고’(1966년)잖아. 음악부터 웨스턴 분위기를 제대로 내던데? 돌무치(하정우)의 쌍칼은 쌍권총이 떠올랐어. ▽구가인=백정인 돌무치가 세도가 조윤(강동원)에게 가족을 잃고 군도에 합류해 복수하는 구조가 딱 그래. 원래 윤종빈 감독이 시대물에 장르적 특성을 잘 입히는 감독 아닌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년)도 1980년대를 갱스터물로 해석했으니까. ▽정=순 제작비만 135억 원 들였다더니 때깔이 좋더군. 영화가 예상보단 무겁지 않고 편안했어. ▽구=예고편 속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란 말에 낚였네. 선이 분명한 오락영화지. 스타 캐스팅, 적절하게 웃기고 볼거리 풍부. 다만 윤 감독 팬으로선 아쉽다는. 이번엔 그저 가볍기만 해. ▽정=이성민 조진웅 김성균 마동석…. 조연도 화려했어. 거의 ‘어벤져스’ 수준. 힘센 마동석이 ‘헐크’라면 수다스러운 조진웅이 ‘아이언맨’? 홍일점 윤지혜가 ‘블랙 위도우’, 하정우는 ‘캡틴 아메리카’. ▽구=근데 출연진이 왜 이리 많아. 몇몇 캐릭터는 사연이 꽤 있어 보이는데, 영화에선 무척 단편적이야. 편집에서 많이 잘린 게 아닐까. ▽정=아니지! 등장인물 다 챙기면 산만해지잖아. 돌무치와 조윤이 중심을 잡아줘 명쾌하던데. ▽구=연기는 좋은데, 사투리는 영…. 배경이 전남 나주인데 강동원은 부산 사투리 못 고친 서울사람이야. 감독이 부산 출신이라 전라도 사투리에 약한가 봐. 차라리 그냥 표준어로 밀든지. ▽정=하정우는 괜찮지 않았나? 물론 돌무치는 백정인데 아주 무지렁이 같진 않았어. 하정우란 배우의 아우라 때문인가. ▽구=두 배우의 머리 크기 차이를 좀 걱정했는데…. ▽정=별 걱정 다 한다. ▽구=예상외로 화면에선 그다지 차이가 없어 감독의 배려심(?)을 느꼈다고나 할까. 강동원이 하정우에 밀릴 줄 알았더니 전∼혀. 장검을 휘두르는 강동원은, 아! 나쁜 놈인데도 진짜 아름답지 아니한가! ▽정=머리 풀어헤친 강동원은 남자가 봐도 예쁘더라. 그때 깨달았지. 아, 그가 숨은 여자 주인공이었구나. 난 그래도 강동원보단 하정우가 갑. 우수어린 눈빛보단 굵직한 카리스마지. ▽구=액션은? 단조롭진 않던데. 칼싸움에 총싸움까지 이어지고. 떼로 말 타고 질주하는 장면은 음악이랑 어우러져 꽤 멋졌어. ▽정=와이어도 안 쓰고 색다른 액션을 보여주려는 노력은 높이 살 만. 허나 ‘와호장룡’(2000년) ‘짝패’(2006년)처럼 신선하진 않았어. ▽구=액션과 코미디가 섞이다 보니 그런 거 아닐까. B급 개그를 자주 시도하던데. ▽정=웬 걸. ‘하정우 18세’ 설정은 빵 터졌는데 그 외엔 피식 정도? 성우 내레이션은 키치(의도적으로 통속성 추구 기법) 분위기를 내려 했으나 효과는 그다지…. 기대가 너무 컸나. 올여름 대전의 압도적 강자란 느낌은 일단 보류. 남은 작품을 봐야 할 듯. ▽구=그래도 500만 명은 넘기지 않을까. 하정우 강동원, 그것만으로도 당기잖아. ▼영화평론가 기자 한 줄 평과 별점▼ (★ 다섯 개 만점)강유정 하정우 강동원은 있는데 윤종빈은 없다 ★★★김봉석 오락 활극으로서는 성공, 다만 윤종빈 전작에 비교하면 너무 전형적 ★★★☆ 정지욱 김치 웨스턴의 새로운 창조라고 할까 ★★★☆이해리(스포츠동아 기자) 카페인 과다복용의 짜릿한 효과 ★★★★☆구가인 comedy9@donga.com·정양환 기자}
빌 브라이슨, 그가 돌아왔다. 뭐 다른 말이 필요한가? 막상 쓰고 보니 오글거린다. 찾아 보니 이 아저씨도 언제부턴가 1년에 한두 권씩 국내에 책이 나왔다. 히가시노 게이고 수준은 아니지만 살짝 선도는 떨어지네. 그래도 저자가 상당한 고정 팬을 확보한 데는 이유가 있다. 글이 재밌으니까. 대체로 그의 책은 두 종류로 나뉜다. 여행기 혹은 역사·과학을 넘나드는 잡다한(?) 평설. 개인적으로 여행기가 더 탁월한 듯한데, 이번 책은 후자 쪽이다. 1927년 미국은 책의 부제처럼 ‘꿈과 황금시대’를 만끽하던 시절이었다. 세계 물자 총생산량의 42%를 담당했으며 금 보유량이 나머지 나라들의 보유 총량과 맞먹었다. 말 그대로 세계 유일한 초강대국이었다. 흥겨운 재즈 리듬이 어울리던 당대의 번영을 저자는 유쾌한 필치로 따라잡는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브라이슨이 아니지. 그 흥청망청한 낙관주의 속에 감춰진 불안도 예리하게 짚어낸다. 그해 8월 사회적 편견 속에 억울하게 사형당한 이탈리아계 이민자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그 대표적 사례였다. 저자에 익숙하다면 또 한 번 즐거운 경험이 되겠지만 사실 내용은 좀 거리감이 있다. 영미에선 낯익은지 몰라도, 우리로선 다소 생경한 풍경이 잦다. 겨우 서너 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우리 관심 밖의 시시콜콜한 내용도 있다. 책을 덮고 나니, 문득 1927년 한반도가 궁금해졌다. 일제강점기니 흥겨울 리 만무할 터. 역시 그해 일제는 광화문을 해체하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브라이슨이 한반도에 돋보기를 들이밀었다면 어떤 글이 나왔을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그놈의 학교엔 17년째 귀신이 산다. 2일 개봉한 영화 ‘소녀괴담’은 ‘여고괴담’(1998년)의 DNA를 물려받았다. 제목이나 설정도 그렇고 오마주다 싶은 장면도 눈에 띈다. ‘학원 공포물’의 계보를 제대로 이었다. 흥행도 괜찮다. 8일 영화진흥위원회 기준 약 34만 명이 관람했다. 여고괴담이 그해 한국영화 흥행 2위(150만여 명)였던 수준은 아니라도, 대작 틈바구니에서 나름 선전. 여고생 귀신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의 월계관을 내려놓지 않았다. 영화 속 등장인물과 같은 나이대인 여고생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여고괴담이 개봉했을 때 고2였던 주부 이성혜 씨(34)와 고3이던 전문직 여성 A 씨(35), 4일 서울 용산구의 한 영화관에서 소녀괴담을 본 여고 1학년생(16) 2명을 만났다. △이 씨=여고괴담이 학교 현실을 반영했다? 꽥꽥 소리 지른 기억뿐인데…. 나중에 그런 면도 있구나 알게 됐지. 공포영화 보며 뭘 찾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일단 무서워야지. △여고생 B 양=헐, 대박(이 말을 거의 문장마다 사용). 시간 때우려 봤어요. 별 ‘쇽(쇼킹)’하지도 않던데. 그냥, 강하늘 짱! 김정태는 쩔어요(웃겼단 뜻이라고). 하긴 왕따는 어디나 있죠. 근데 고딩은 아니고 초딩, 중딩 때 난리죠. 지금은 서로 관심 없고 바쁘니까. 서너 명씩 베프(가장 친한 친구) 먹고, 딴 애들은 띄엄띄엄 보죠. 서로가 따 시킨다고나 할까. △A 씨=여고괴담엔 변태 선생 나오잖아. 어느 학교나 1명씩 있었어. 우린 체육선생. 애들 지각하면 양동이에 물 떠와선 양말 벗고 발 씻으라 그랬어. 그걸 지긋이 바라보는 거야. 아, 지금 생각해도 짜증난다. 옆 학교엔 그렇게 허리 꼬집는 선생이 있었대. △여고생 C 양=헐, 대박. 그걸 왜 참아요? 폰카로 찍어 웹에 올려버리지. 요즘엔 그런 쌤 없는 듯. 물론 찌질 쌤은 있는데, 안 엉키면 됨. 그래도 예쁘면 좀 대접받죠. 대신 조심해야 돼요. 나대면 일진들이 밟거든. △이 씨=그땐 참는 게 당연한 줄 알았지. 학생주임도 꼭 자는 애 깨울 때 손등으로 뺨을 쓰윽 비볐어. 여고괴담에서 귓불 만지는 장면에서 그 선생이 떠올랐어. 대신 우리 땐 왕따는 심하지 않았지. 없진 않고, 너무 잘난 척하면 반에서 은근히 따돌림 당했지.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철없었네. △C 양=영화처럼 여자 일진이 남자애 때리고, 남짱이 여학생 빵셔틀 괴롭히는 건 어색해요. 교실에선 남자 여자는 서로 안 건드려요. 급 떨어지게…. 재수 없게 구는 남짱 여친은 있어요. 칠판에 ‘누구누구 잤다’고 쓰는 거? 어유, 애들인가. △이 씨=공학 다녔는데, 학교 커플은 그때도 있었지. 근데 상급생 오빠랑 사귀는 경우가 많았어. 대학생 만나는 애들도 드문드문 있었고. △A 씨=성적, 가정형편이 잣대인 분위기는 확실히 있었어. 그건 여고괴담이 잘 담았어. 그때 그래서 어디 단체가 항의도 했을걸.(한국교총이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뭐가 바뀐 거 같진 않은데. △C 양=지금도 비슷하죠. 누구네 집 딸내미는 쌤도 터치 못함. 빽이 짱이죠. 글고 얘(B 양)는 강하늘 좋다는데, 영화처럼 귀신 보는 애라면 깨요. 어릴 땐 분신사바니 뭐니 유행했지만. 빨간 마스크도 언제 적 얘긴데, 요샌 동네 아저씨가 더 무서워. △B 양=근데 왜 공포영화 보냐구요? 여름에 쌩하잖아요. 그럼, 배트맨은요? 초인이나 귀신이나.정양환 기자 ray@donga.com}
700년의 세월을 품은 고려 관음보살이 머나먼 미국 땅에서 확인됐다. 고려불화는 전 세계에 160여 점밖에 알려지지 않아 국제 경매시장에서도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가치가 높다. 미국의 유명 미술대학으로 꼽히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의 미술관이 희귀한 고려불화 1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은 몇 년 전부터 조금씩 퍼졌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 고미술상을 통해 이 작품을 입수한 미술관 측은 처음엔 ‘수준 높은 중국불화’로 여겼다. 하지만 아시아 예술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심스레 고려불화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 불화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2년 전쯤 찾아왔다. 미술관과 친분이 깊던 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가 직접 이 작품을 볼 기회를 얻었다. 조 교수는 “예술적 가치도 탁월했지만 기존에 익숙한 ‘반가좌 수월관음도’와 다른 결가부좌를 튼 도상에 깜짝 놀랐다”며 “초특급 고려불화임을 직감하고 국내 최고 권위자인 정우택 동국대 교수에게 의뢰하라고 미술관에 조언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정 교수는 지난해 미 워싱턴에 있는 프리어 미술관의 연락을 받았다. 한국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미국 내 고려불화 데이터베이스 구축’ 프로젝트를 시행하니 주 연구자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온 것. 올해 초 정 교수는 로드아일랜드로 가 ‘결가부좌 수월관음도’를 만났다. 정 교수는 “고려불화 중에서도 수월관음도는 약 46점만 알려졌는데 대부분 반가좌 형태이고 결가부좌는 일본 오카야마(岡山) 현의 조라쿠지(長樂寺) 소장품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딱 2점밖에 없는 것”이라며 “RISD가 소장한 작품은 보존 상태도 좋고 예술성도 탁월한 명품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번에 세 번째로 확인된 ‘결가부좌 수월관음도’는 희귀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예술적 완성도 역시 빼어난 작품이다. 은은하게 밴 관음의 미소는 물론이고 전체 색감이 조화롭고 묘사도 세련됐다. 정 교수는 “기존의 고려불화와 비교해도 종교적 성취와 예술성 감흥을 함께 풍기는 걸작”이라고 평했다. 이 외에도 문화재청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또 다른 국보급 고려불화가 2점이 더 발굴됐다. 미 보스턴 미술관이 1911년에 구입한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반가좌 수월관음도’(1929년 구입)의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 두 작품 모두 14세기 중반과 후반 고려불화의 전형적인 양식이 훌륭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그간 고려불화는 일본에 130여 점, 한국과 미국에 10여 점씩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미국에서 더 많은 고려불화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프리어 미술관은 내년 말 이 프로젝트의 성과를 인터넷을 통해 전면 공개할 방침이다.:: 결가부좌와 반가좌 ::결가부좌는 흔히 말하는 양반 다리처럼 양다리를 함께 접고 앉은 자세를 가리킨다. 반가좌는 한쪽 다리는 접고 다른 쪽 다리는 내리는 자세다. 결가부좌는 주로 부처가 취하는 자세로, 관음보살은 대부분 반가좌를 한 경우가 많다. 관음보살이 결가부좌를 튼 불화나 불상은 매우 희귀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혹성탈출-반격의 서막’ 같은 영화는 소개하기가 애매하다. 일단 반전을 기대할 수 없다. 1968년 원작을 기억하는 이라면 이미 물에 잠긴 자유의 여신상까지 본 터. 그 프리퀄(전편보다 앞선 이야기)인 2011년 작 ‘진화의 시작’에서 이어진 내용이니…. 그래, 원숭이들이 갑이다. 인류를 재앙에 빠뜨린 바이러스가 창궐한 지 10년. 그간 유인원(ape)들은 집단사회를 건설했다. 1편에서 그들을 이끌고 숲으로 향했던 주인공 시저는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하지만 평화롭던 유인원 사회는 2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인간들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끝장난 줄 알았던 인류가 일부나마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살아남았던 것. 삶을 재건하고 싶은 그들에겐 전기가 필요하고, 유인원이 지배하는 산속의 댐이 유일한 희망이다. 4년 만에 돌아온 혹성탈출은 스케일 자체가 확 달라졌다. 인간 틈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던 유인원들이 이젠 독자적인 거대 세력을 구축했다. 이제 대등한 입장의 ‘사회 대 사회’가 부딪치니, 말 그대로 문명의 충돌이자 전쟁이다. 하지만 영화는 인류와 유인원의 투쟁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생존 자체가 급선무인 인류보다 원시 수준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유인원의 진화가 중심 얼개다. 생존 앞에 일치단결했던 유인원들이 이젠 분열과 갈등을 겪으며 역사를 건설하는 과정에 들어서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시저의 한마디는 뜨끔할 정도로 전율스럽다. “난 항상 유인원이 인간보다 나은 존재라 여겼어. 그런데 우린 인간과 너무나 닮았어.” 최소한 이 영화에선 ‘에이프(ape)’를 ‘유인원(類人猿)’이라고 해석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그들의 눈에 인간은 ‘에이프를 닮은 동물들’일 뿐이다. 언젠간 나올 3편에선 정말 감정적으론 불편한 ‘인류의 종말’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참, 혹성탈출은 원래 16일로 예정됐던 개봉 날짜를 10일로 앞당겼다. 이 때문에 영화계에선 변칙 개봉이라며 성토의 목소리가 높다. 흠, ‘신뢰’를 금쪽처럼 여기는 시저는 이런 상황 마뜩지 않을 텐데. 12세 관람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관 스크린이 한국에 생겼다. 롯데시네마는 3일 “서울 송파구 제2롯데월드의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영화관에 만든 ‘수퍼플렉스G’ 스크린이 세계 최대 크기를 인정받아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됐다”고 밝혔다. 이 스크린은 가로세로 34×13.8m 규모로, 이날 잭 블록뱅크 기네스 기록심판관이 직접 공식인증서를 전달했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이 스크린은 가로로 사람이 팔을 뻗고 서면 34명이 모여야 가득 찰 정도의 크기. 이 때문에 설치하는 데에만 6개월 이상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시네마 측은 “측면에선 보기 부담스럽지 않으냐고 우려하는데, 어느 관람석에서 봐도 관객들이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균일한 밝기와 화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관객들이 언제부터 이 스크린에서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개관 허가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본격적인 상영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다음 주면 6·25전쟁이 발발한 지 어언 64년이 된다. 해마다 이쯤엔 관련 서적이 상례처럼 쏟아지는데, 올해는 전쟁을 직접 치른 군인들의 회고록이 많다.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당시 현장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이강화 장군(준장 예편)의 ‘대한민국 공군의 이름으로’(플래닛미디어)와 1950년 11∼12월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국 해병의 실화를 담은 ‘폭스 중대의 최후의 결전’(진한M&B)도 눈에 띈다. 그 가운데 ‘어느 서울대…’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군인(?)의 이야기다. 저자인 고 김형갑 전 캐나다 매니토바대 교수는 1930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서울대에 다니다 남침한 북한군에 강제 징집돼 ‘인민해방군’이 됐다. 낙동강 전선부터 두만강까지 이리저리 끌려 다녔으나 1952년 4월 원산에서 조각배를 타고 탈출해 다시 남한으로 돌아왔다. 휴전 이후인 1958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평생 타향살이를 했다. 이 책은 원래 출판을 염두에 뒀던 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유족들이 우연히 발견한 글을 정리해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장이 다소 거칠고 분량도 짤막하다. 하지만 그런 약점이 이 글이 지닌 묵직한 힘을 가리진 않는다. 억울한 심정에 분노하거나 염세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건만, 자신이 겪은 전쟁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전달한다. 저자는 육체적 고통도 컸지만 정신적 힘겨움이 더 버거웠던 듯하다. 하루 종일 행군과 사역을 한 뒤 지친 몸으로 매일매일 북한의 사상수업을 받는 일은 가혹한 고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거나 실수하면 곧장 자아비판을 벌여야 하는 상황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건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한 남한에서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고초를 겪긴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꿈에 그리던 복학도 인민군이었단 이유로 좌절됐다. 저자는 1993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뒤늦게 2012년 모교인 서울대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사실 고인은 당시로선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무작정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긴 했어도, 줄곧 후방 작업에만 투입돼 총부리를 겨누고 누군가의 목숨을 앗는 비극은 겪질 않았다. 수많은 미 함대와 공군의 포격을 겪었지만 크게 다친 적도 없었다. 본인도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꿈 많던 스무 살 젊은이에게 파리 목숨처럼 취급받으며 세상의 강압에 휩쓸렸던 시간은 이후 평생의 낙인으로 남았다. 그리고 6·25전쟁은 지금도 휴전 중이다. 어떤 거창한 명분을 내걸건 피눈물을 쏟은 건 민초들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별다른 설명 없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여행기’라고 하면, 요즘 관심 가질 이가 많지 않을 성싶다. 여행기가 줄기차게 나온 지 오래되다 보니 별의별 주제를 다룬 책이 많다. 최근엔 음식 관련 기행문이 서점에서 꽤나 눈에 띈다. 이 책처럼 미술 관련 서적도 기존에 없었던 건 아니다. 세계적 미술관을 꼼꼼하게 정리해놓은 책도 상당하다. 하지만 제목처럼 저자는 인상파 화가들이 붓을 들었던 ‘빛이 그린 풍경’ 현장을 직접 찾으며 얻은 소회를 정보와 함께 엮었다. 일종의 ‘하이브리드’ 여행서인 셈이다. 이화여대 장식미술과를 나와 오랫동안 출판·잡지계에 몸담았던 저자는 2006년부터 여행 작가로 나섰다. 하지만 주로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던 종전 스타일과 달리, 인상파 화가에 초점을 맞춘 이번 여행은 “한 시대를 뜨겁게 달궜던 화가들의 꿈과 열정이 새삼 인생 속으로 쑥 들어오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실제로 책 속에도 사진과 그림이 함께 등장하는, 클로드 모네(1840∼1926)가 그린 작품 ‘에트르타의 석양’과 똑같은 시점의 해변에 서 있는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감흥일 것이다. 다양한 정보를 버무렸음에도 신변잡기적(?) 기조를 유지하는 문체도 맘에 든다. 이런 류의 책들은 너무 전문 지식에 얽매이다 에세이인지 논문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경우가 잦다. 여행이란 어떤 목적을 지녔건 느긋한 여유가 넘쳐야 제맛이니까. 물론 작업하는 작가야 발에 땀이 나도록 고생했겠지만. 문득 모네가 수련 연작을 탄생시킨 프랑스 지베르니 정원의 연못가에 앉아 딱 한나절만 뒹굴뒹굴하고 싶다. 여행기는 이래서 요물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제135호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申潤福筆風俗圖畵帖·일명 혜원전신첩)’의 30여 그림 가운데는 ‘쌍검대무(雙劍對舞)’란 작품이 있다. 7명으로 구성된 악공의 연주에 맞춰, 화려한 복장을 한 무희 2명이 멋들어지게 칼춤을 춘다. 그리고 왼쪽 위엔 한눈에도 돈푼깨나 있음 직한 무리가 느긋하게 이를 감상한다. 혜원 신윤복(1758∼?)이 그린 이 그림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지만 생각을 가다듬어 보면 살짝 의문이 든다. 담박한 유교문화를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 이 ‘흥청망청한’ 그림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을까. 기생을 끼고 앉아 유희를 즐기는 모양새가 그리 교훈적이지도 않건만. 》풍속화 연구가인 이중희 계명대 미술대 교수(64)는 최근 펴낸 연구서 ‘풍속화란 무엇인가’(눈빛)에서 이를 “동북아시아 봉건사회 해체기에 등장하는 주류사회에 대항하는 여항문화(閭巷文化·중인 계층 중심의 문화)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18, 19세기 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계층이 기존 지배계급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풍속화를 비롯한 판소리, 방각본소설(坊刻本小說·조선 후기 상업문학)이란 설명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쌍검대무를 보면 색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연회를 즐기는 집단이 사대부라면, 이 작품은 앞에선 청빈탈속을 외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양반네의 이중적 태도를 비꼬는 속내가 담겼다. 반면 돈 많은 중인 계층이라면, 기존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문화를 향유하는 ‘부르주아의 생활’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복장만으로 구별하긴 애매하지만 어느 쪽이어도 기득권과 차별화된 문화적 양상이다. 이 교수는 특히 풍속화가 만개한 시점에 주목했다. 한국 회화사에서 ‘풍속화 시대’는 김홍도(1745∼1806?), 신윤복, 김득신(1754∼1822)이 활약한 시대를 일컫는다. 영조, 정조, 순조가 재위했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해당한다. 이 교수는 “정신적인 면을 중시했던 산수화나 인물화 중심 화풍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 자체를 들여다보는 풍속화의 등장은 봉건시대의 논리가 한계에 봉착하던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이는 조선만의 상황도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인 17∼19세기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繪)’가 유행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사실 일본에서 세속화는 이미 10세기부터 출현했으나 에도(江戶·도쿄의 옛 이름)를 중심으로 꽃핀 화려한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는 18세기 후반부터 번성했다. 역시 상위 계층인 사무라이 문화의 엄격함과는 동떨어진 유흥과 생활밀착형 소재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조선 풍속화와 일본 우키요에는 지향점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풍속화는 당대에 문인화보다 저평가를 받긴 했어도 비영리적 ‘순수 예술’이었다. 하지만 우키요에는 주로 유명 유곽이나 관광지를 소개하는 목적을 지닌 철저히 상업적 작품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이토록 ‘돈냄새 풍기는’ 그림들이 19, 20세기 ‘자포니즘(Japonism·일본풍)’의 첨병이 돼 서양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단 점이다. 이 교수는 “양국 풍속화에는 경제 활황 속에서 자라난 시대적 비판의식과 비지배 계급도 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단 자신감이 깔려 있다”고 해석했다. 풍속화는 동북아에서 새로이 솟아오르는 ‘근대의 여명’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것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목탄화가’ 이재삼 화백(54)의 개인전 ‘달빛-물에 비치다’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6길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개최됐다. 20년 넘게 목탄화에 천착해온 이 화백은 그간 대나무나 소나무 매화와 같은 한국화에 주로 쓰는 소재를 선택해 한국적 정서를 담았다. 이번에 선보인 ‘물에 비친 달’ 수중월(水中月) 역시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고유의 감수성을 건드린다. 달빛이란 제목이 붙은 작품들은 하나같이 대형 캔버스 위에서 압도적이면서도 은은한 정취를 자아낸다. 다소 정적일 수밖에 없는 흑백 톤임에도 감출 수 없는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묘사 자체도 멋들어지지만 전체적 분위기에서 물씬 풍기는 향취가 매혹적이다. 작가는 “이전 작품들이 산문적인 언어였다면 이번 작품들은 시적인 언어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7월 2일까지. 02-725-102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하루는 전투를 독려하다 적의 유탄에 왼쪽 어깨를 맞아 피가 팔꿈치까지 흘렀다. 그러나 장군은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전투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칼로 살을 찢고 탄환을 뽑았다. 탄환이 몇 치나 파고들어가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모두 낯빛이 변했다. 그러나 그는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 중국에서 신으로까지 모시는 촉나라 맹장 관우라도 환생한 걸까. 팔 수술을 화타에게 맡기고 바둑을 두던 장면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19세기 중반 간행된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 묘사된 이 대단한 장수는 바로 ‘성웅’ 이순신(1545∼1598)이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최근 출간한 연구서 ‘그림이 된 임진왜란’(학고재)에서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7∼19세기에 일본이 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옛 문헌을 통해 살폈다. 물론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한 수작이 주류지만, 적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에겐 엄청난 존경을 표시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충무공이었다. 장군의 의연함을 칭송한 글과 함께 조선정벌기에 실린 삽화는 이런 일본인의 시각을 여실히 드러냈다. 일본풍이 역력한 그림이나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뱃머리에 선 충무공은 위풍당당했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음에도, 오른손으론 장검을 굳게 잡은 채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충무공에 대한 존경은 다른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승려 세이키(姓貴)가 1705년 펴낸 ‘조선군기대전(朝鮮軍記大全)’과 같은 해 바바 신이(馬場信意)라는 작가가 쓴 ‘조선태평기(朝鮮太平記)’는 장군을 아예 ‘영웅’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는 일본과 대적한 조선과 명나라 인물 가운데 유일한 경우다. 김 교수는 “충무공만큼은 영웅이나 ‘불패의 장군’이라 부르며 일본도 한 수 접고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1800년 당대 인기 작가 아키자토 리토(秋里籬島)가 쓴 ‘에혼 조선군기(繪本 朝鮮軍記)’나 19세기 베스트셀러였던 ‘에혼 다이코기(繪本 太閤記)’는 충무공이 이끈 조선 수군의 용맹함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목판 삽화를 보면 일본 수군이 크게 패하는 장면도 나온다. 두 책 모두 당시 서민이 즐겼던 ‘가벼운 역사평전’인지라 과장이나 왜곡이 있을 법도 한데 사실관계를 상당히 정확하게 전달했다. 김 교수는 일본이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된 배경으로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집필한 ‘징비록(懲毖錄)’의 공이 큰 것으로 분석했다. 일본은 왜란 직후만 해도 일방적인 승리로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징비록을 번역한 ‘조선징비록’이 1695년 교토에서 출간된 이래 상대방의 성과나 인물도 조금씩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본은 이순신 외에 진주성전투의 김시민 장군(1554∼1592)이나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가토 기요마사와 맞섰던 무장 한극함(?∼1593)과 같은 인물도 상당히 우호적으로 그렸다. 김 교수는 “물론 이런 대단한 상대를 이겼다는 우월감이 깔렸긴 해도, 적일지언정 용맹한 장수에겐 존경을 표하는 일본의 ‘무(武) 숭배문화’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번 저서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일본 고문헌의 삽화 300여 점도 국내에 처음 선보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발상을 바꿔 보자. 우리 꼭 그렇게 야외로 나가야 하는가. TV를 틀거나 신문을 펼치면 온통 아웃도어 제품 광고뿐이다. 주말이면 산과 들에 넘쳐나는 사람들. 야영장은 몇 주 전이라도 예약이 쉽지 않다. 굳이 뭐 이렇게까지…. 아무리 툴툴대도 저자의 반응은 단호하리라. 그래도 가자. 영국 소설가이자 방송인인 저자는 지금도 1년에 한 달 이상은 부인과 함께 세 아이를 모두 데리고(진짜로?) 캠핑을 떠난다. 최소한 와이프한테 주말에 애랑 좀 놀아주란 구박은 받지 않겠구먼. 근데 솔직히 책을 읽다 보면, 살짝 노홍철이 눈앞에서 아물거린다. 이 부부, 신혼 때부터 무거운 배낭을 몇 개씩 짊어진 채 자동차도 없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캠핑을 다녔단다. 심지어 유모차에 공갈 젖꼭지를 입에 문 애까지 질질 끌고서. 남의 일에 신경 안 쓰는 서양인도 그들만은 정말 이해가 안 됐나 보다. 매번 승객에게 “뭐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 심지어 어쭙잖게 캠핑길에 올랐다가 자신과 아내는 돼지 독감에 걸려 밤새 구토하고, 애들도 울다 지쳐 녹초가 된 경험도 있다. 다시 한번 묻자. 뭐 이렇게까지…. “캠핑은 주의하고 깨어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칙칙하고 몽롱한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내가 누구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더 확연히 바라보게 만든다. 자연 속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일상으로 복귀할 때면, 문명은 필연적인 것이자 당연한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저자가 볼 때 현대인은 ‘지평선 결핍’으로 병든 상태다. 도시와 첨단문명이란 초콜릿의 단맛에 길들여져 허리와 뇌에 군살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인류가 동물과 갈라지기 전, 아니 지구의 지배자가 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인간은 자연 속에서 생존법을 배워 왔다. 지금도 유목민은 광야를 떠돌며 천막생활을 영위하지 않나. 캠핑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에 가장 부합하는 생활방식일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무조건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모험과 낭만이란 겉멋에 취해 함부로 나섰다가 후회만 잔뜩 쌓이기도 한다. 텐트를 붙잡고 몇 시간을 끙끙거리다 ‘내가 지금 여길 왜 왔나’ 짜증만 솟구친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다 챙기다 보면, 그 고치기 힘들단 ‘장비 병’에 걸려 알토란 같은 쌈짓돈을 날리기 일쑤다. 그런데도 갈수록 캠핑족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저자에 따르면 캠핑의 역사 자체에 그 해답이 숨어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서구에서 각광받은 캠핑은 도시 생활의 무력함과 허약함을 보충해주는 멀티 비타민이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야생은 줄곧 희미해져 가는 개인의 존재감을 일깨우는 최소한의 도움닫기였다. ‘캠핑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 여행가 토머스 H 홀딩(1844∼1930·현대적 텐트를 만든 이기도 하다)은 “우리 내면에서 야만적인 요소가 모조리 다 순화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참 재밌다. ‘나를 부르는 숲’을 쓴 유쾌한 여행 작가 빌 브라이슨의 가족 캠핑 버전을 마주한 기분이랄까. 꽤나 멋들어진 개그 감각을 지닌 데다, 별것 아닌 듯한 거리도 깊게 파고들어 역사와 배경을 헤집는 수작이 보통 아니다. 개인적으로 아직 브라이슨의 내공까진 아니라고 우기고 싶지만, 이만한 글 솜씨를 지닌 작가를 만나 너무 반갑다. 밤하늘 별빛이 쏟아지는 야외에서 랜턴 불빛에 비춰가며 읽을거리를 찾는 이에겐 특별히 더 추천하고 싶다. 물론 지금 간 캠핑이 그렇게 여유를 즐길 만큼 편안할 때 얘기겠지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세상을 바꾸는 씨드슈테판 쉬르 외 지음·유영미 옮김/232쪽·1만6800원·프롬북스건축 디자인 예술 로봇학 교육 등 9개 분야에서 모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가치를 찾은 혁신가들, 즉 ‘이노베이션 스턴트맨’ 9명을 소개했다. 친환경 일회용 변기 ‘피푸’를 개발한 안데르 빌헬손, 주민이 참여하는 협동조합형 ‘피플스 슈퍼마켓’을 만든 아더 도슨, 아프리카인들이 프로그래머를 고용하지 않고도 쉽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수 있는 개방형 데이터 키트를 고안한 요 애노콰 등 인간 중심의 따뜻한 혁신을 꿈꾼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일이 반드시 국가나 기업, 단체일 필요가 없다는 깨우침을 준다. 왜 로봇의 도덕인가웬델 월러치 외 지음·노태복 옮김/448쪽·2만1000원·메디치영화 ‘터미네이터’에서는 인공지능 컴퓨터 ‘스카이넷’이 세상을 멸망시킨다. 현실 세계에서도 인간 없이 스스로 판단하는 인공지능 연구는 크게 발전하고 있다. 예일대 생명윤리센터 소속 윤리학자와 인디애나대 인지과학 교수가 공동 집필한 이 책은 로봇을 비롯해 모든 지능적 기계에 지침이 될 윤리적 규칙을 설명한다. 공상과학소설부터 첨단 로봇공학 연구 결과까지 다양한 자료를 들어가며 로봇의 도덕에 관한 연구가 현 시점에서 왜 필요하고, 기술적으로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중앙유라시아 세계사크리스토퍼 백위드 지음·이강한 류형식 옮김/820쪽·4만2000원·소와당미국 인디애나대 중앙유라시아학과 교수인 저자가 유럽과 아시아를 통합한 세계사를 수십 년 동안 연구한 결과물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유럽과 아시아에 세워진 문명은 얼핏 전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뿌리를 자양분 삼아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는 것. 특히 저자는 유라시아 세계사에 한국과 일본사도 비중 있게 포함시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전차와 무역 같은 키워드를 통해 전체 틀을 풀어내 설득력도 상당하다. 미국출판협회(AAP)가 ‘세계사·전기 부문’에서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경제학자의 영광과 패배히가시타니 사토니 지음·신현호 옮김/416쪽·1만6000원·부키부제는 ‘케인스에서 크루그먼까지 현대 경제학자 14명의 결정적 순간’. 20세기 주요 경제학자들의 인생과 대표 이론, 영광과 패배의 순간을 추렸다. 일본의 경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현대 경제학의 토대를 쌓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만 90쪽가량을 할애했다. 이어 영국에서 시작된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인 미국의 케인스주의자들, 케인스 경제학을 비판하며 융성한 통화주의자와 신고전학파 학자들을 다룬다. 케인스 경제학에서 미국의 경제학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면서도 사상의 독자성을 유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출신 경제학자들, 신케인스주의자들의 고투까지 그렸다.}
천경자 화백(90·사진)이 받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수당의 지급이 중단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천 화백은 1998년 섬유공예가인 맏딸 이혜선 씨(69)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거동이 힘든 상태로 알려졌을 뿐 가족 외에는 직접 만난 사람이 거의 없어 천 화백의 상태를 놓고 온갖 소문만 무성했다. 예술원은 11일 “예술원 회원(현재 21명)은 월 180만 원씩 수당을 받는데, 천 화백의 경우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올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예술원 관계자는 “천 화백이 거주하는 뉴욕의 총영사관에도 확인을 부탁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예술원 측에서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자 이 씨는 어머니의 회원 탈퇴를 요청했다. 이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사퇴서를 낸 것은 사실이며 이와 관련해 청와대, 국무총리실 등에 민원을 냈는데 연락이 없다”며 “아픈 어머니와 나뿐인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아팠다, 죽었다 별 소문이 다 날 수 있지만 본인과 보호자가 아닌 사람에게 환자 상태를 알려주는 것은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투병 중인 천 화백을 모시고 있는 그는 “어머니의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묻기도 하지만 그런 걸 왜 우리가 밝혀야 하나. 가족이 아팠을 때 남에게 시시콜콜 말하거나 보이기 싫은 게 당연하지 않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예술원이 어떻게 하든 신경 안 쓰겠다”며 “그저 어머니가 옆에 계신 것으로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천 화백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해 말 예술원 개원 60주년 전시 ‘어제와 오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예술원에 따르면 이 씨는 ‘미인도’ 위작 시비와 관련된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전시에 작품을 낼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4월 개막한 전시에는 예술원이 소장한 천 화백의 작품 2점이 걸렸다. 예술원의 윤명로 미술분과위원장(화가)은 “탈퇴 요청이 천 화백 본인 의사인지 확인되지 않은 데다 회원 가입과 탈퇴는 총회 인준을 받아야 할 사항인 만큼 천 화백의 회원 자격은 유효하다”고 말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0여 점을 기증해 미술관 2층에 ‘천경자 상설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지난해 초 한국을 방문한 이 씨는 ‘관리 소홀’ 등을 이유로 기증 작품의 반환을 서울시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미석 mskoh119@donga.com·정양환 기자}
한국 정부가 이달 말 몽골에서 공동 개최하는 무형유산보호 협력회의에 북한 정부 기구가 처음으로 참석한다. 유네스코아태무형유산센터(사무총장 이삼열·이하 아태센터)는 10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30일∼7월 1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아태센터와 유네스코 베이징사무소, 몽골 교육문화부 주최로 열리는 ‘동북아시아 무형유산 네트워크와 정보교류 강화 협력회의’에 북한이 참가 의사를 밝혀왔다”고 발표했다. 한국 정부기관이 주최하는 무형유산 관련 국제회의에 북한이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회의에는 북한 무형유산보호청의 노철수 차장을 비롯해 관계자 6명이 참석한다. 지난해 신설된 무형유산보호청은 한국 문화재청과 동급 기관으로, 노 차장은 국장급 이상 고위급 인사다. 북한은 2008년 11월 세계에서 105번째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에 가입했으며, 아태센터와 베이징사무소의 지속적 요청으로 아태 지역 회의에 처음 참가하게 됐다. 한국은 2003년 발표된 보호협약에 2005년 2월 세계 11번째로 가입했다. 이번 협력회의는 동북아 지역 무형유산보호를 위한 공공협력사업 발굴을 목적으로 마련된 자리다. 인도네시아와 인도 국제전문가도 참여해 사업 발굴 가능성을 높일 예정이다. 이 총장은 “북한 무형유산의 현황을 파악할 기회를 얻는 한편, 무형유산을 매개로 북한과 교류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아태센터는 2009년 유네스코 제35차 총회에서 공식 승인받은 뒤 2011년 문화재청 산하 특수법인으로 설립된 국내 유일의 문화 관련 국제기구다. 국제·국내법에 따라 ‘유네스코 카테고리2 기구’로 세워진 센터는 유네스코가 직접 관리하는 카테고리1 기구와 달리 설립 회원국이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아태센터는 한국 중국 일본이 각각 △정보와 네트워킹 △훈련 △연구로 기능을 분담해 공동 협력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아태센터는 26∼28일 전북 전주시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세계 30여 개국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 200여 명이 참석하는 ‘2014 무형유산 NGO(비정부기구) 국제회의’도 개최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적 제408호인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 발굴 조사 25주년을 기념한 국제학술심포지엄 ‘동아시아 고대 도성과 익산 왕궁리 유적’이 11일까지 열린다. 이 심포지엄은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전북 익산시가 주최하는 행사로 한국 중국 일본 학자 20여 명이 참여했다. 10일 한중일 동아시아 도성제도와 도성조사연구의 방법론에 이어 11일에는 ‘고대도성조사의 연구 성과와 보존복원’에 대해 다룬다. 1989년 발굴 조사가 시작된 익산 왕궁리 유적은 마한의 도읍에서 출발해 백제 무왕이나 후백제 견훤 시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유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해까지 성벽과 내부조사가 마무리되며 정원과 후원, 화장실과 같은 다양한 시설의 면모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현재 궁성 외곽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 궁성의 복원 정비도 추진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충무공의 장검은 조선 환도를 기본으로 외래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결합돼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칼이다.” 보물 제326호로 지정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장검 2자루는 어쩌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칼이다. 조선 도검 자체가 드물게 남은 데다 왜란의 풍파에서 조국을 수호했다는 상징성까지 더해져 민족의 가슴에 자긍심으로 자리 잡았다. 실물은 아니지만, 서울 광화문에 선 장군 동상의 허리춤을 줄곧 지켜와 대중에게 익숙하다. 》올해는 1594년 장검이 제작된 지 7주갑(周甲), 420주년을 맞는 해. 하지만 국민적 사랑을 받는 보물임에도 실체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세간에 여러 설이 난무하며 오해받는 대목이 많다. 그런데 최근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가 펴낸 전시도록 ‘겨레를 살린 두 자루 칼, 충무공 장검(8월 31일까지)’에 실린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의 ‘이 충무공 장검 분석―성웅의 칼, 그 속설과 실체’를 보면 그간의 궁금증을 상당히 풀 수 있다. 먼저 충무공 장검이 일본도란 시각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필요에 의해 일본도 양식을 일부 받아들였을 뿐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200년이 넘는 평화 시기를 보냈다. 이 때문에 오랜 전란을 겪은 일본처럼 도검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짧고 가는 칼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맞붙자 우수한 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길고 강한 일본도의 칼날을 수용한 것이다. 이 관장은 “왜군이 조총을 앞세워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해 조선도 조총을 생산해 맞선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당시 의병장 곽재우(1552∼1617)와 권응수(1546∼1608)의 장검도 일본도의 칼날을 본떴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검이 우리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다른 양식은 대부분 조선식이기 때문이다. 칼자루와 칼집 형태, 장식이나 입사문양, 가죽 끈도 모두 한반도에서 자생했거나 오래전 중국에서 건너와 토착화한 방식이다. 흔히 장검 자체가 휜 것을 두고 “전통 도검은 직선적 형태뿐”이라 주장하는데, 고려 기록에 이미 곡도(曲刀)가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 충무공 동상의 장검도 풀 오해가 있다. 한때 일본도를 차고 있다는 논란이 컸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관장은 “일본 전문가들도 자국의 가타나(刀)와 관련 없다고 확언했다”고 말했다. 동상의 칼은 일본도를 흉내 낸 조선식이 맞다. 다만 원본과 비례도 맞지 않고 장식 크기나 간격도 왜곡됐다. 고증이 부족한 ‘졸작’인 건 분명하지만, 일본도는 아니다. 충무공의 장검은 2자루가 각각 197.2cm와 196.8cm(무게 약 4.3kg)에 이른다. 그래서 자신의 키보다 큰 칼을 휘두르는 장군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이 관장은 “이 칼들은 실전이 아닌 의장용”이라고 설명했다. 일단 칼날에 격검흔(擊劍痕·검이 부딪친 흔적)이 없다. 게다가 조선후기 문신 박종경(1765∼1817)이 지은 ‘원융검기(元戎劒記)’에 “공이 실제 사용한 검은 쌍룡검(雙龍劒)”이란 문구가 나온다. 쌍룡검은 양날을 쓰는 검으로 길이가 90∼100cm로 추정된다. 의전 목적이었다고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과학적 분석 결과 충무공 장검은 열처리 흔적이 확인됐으며, 오랜 세월에도 부식이 현저히 낮다. 잡 성분이 섞이지 않은 양질의 쇠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담금질했단 뜻이다. 이 관장은 “충무공 장검은 조선의 수준 높은 제철 기술과 공예 문화를 바탕으로 적의 무기 양식마저 우리 것으로 받아들인 특급 명품”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4일 저녁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배우성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의 목소리는 왠지 편안한 야구중계 해설자 같았다. 극적 순간에도 흥분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정세를 분석하는 느낌이랄까. 그가 이번에 펴낸 ‘조선과 중화’(돌베개)가 ‘중화(中華·중국 중심의 세계관)’를 대하는 입장도 그랬다. 껄끄러운 주제인데도 배 교수는 “당대에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반적으로 중화주의는 사대주의의 원류라고 탐탁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일단 주의부터 떼자. 주의라고 하면 하나의 학설이나 이론으로 한계가 지어진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대한제국까지 이어진 중화는 당시 한반도를 관통하는 주류적 세계관이자 사고방식이었다. 그 시대에 중화가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지 차분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왠지 중화에 대한 옹호론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그런 우려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리 받아들이는 건 정말 이 책을 오독하는 거다. 우리는 역사의 인과관계를 따질 때 너무 몇몇 현상만 과장하거나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디 세상일이 그런가. 마찬가지로 중화도 동전의 양면, 아니 수십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겐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물론 우리로선 아쉬운 점도 있다. 좀더 넓은 세계관과 현실인식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과 똑같은 가정이다. 삼국인 모두가 그저 치열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중화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는 사례를 꼽는다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주의에 입각해 중화주의를 노예적 사상으로 비판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학자 이종휘(1731∼1797)만은 ‘요동회복론’을 내세워 단군과 고대사를 자주적으로 이해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요동회복론은 중화적 시각의 산물이었다. 오랑캐(만주족)로부터 중화의 본산 명나라와 계승자인 조선을 지키자는 인식이었다. 중화를 예속적 가치로 판단하는 것도, 여기서 자주나 민족을 읽어내려 하는 것도 이분법적인 접근법이다.” ―역사에 함부로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나. “후대에선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중화가 마뜩잖은 점이 많은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색안경을 벗고 다가가되 최소한의 냉정한 거리는 유지하는 게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이라고 봤다. 옹호나 비판하기에 앞서 중화란 세계관이 만들어낸 궤적에 주목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 다음으로 요즘 관심을 갖는 주제는 ‘사대(事大)’다. 사대는 주체성 없이 대국을 섬긴 굴욕적 외교일까, 대륙의 압력에서 나름 생존의 길을 모색한 방식일까. 이 역시 판단은 좀 미뤄두고 역사 자체를 읽으려 한다. 중화도 마찬가지지만 사대 역시 무 자르듯 이야기할 수 없다. 역사란 인간의 삶이다. 세상은 다양하고 복잡한 변수가 뒤섞여 이뤄지는 것 아닌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