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정양환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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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양환 기자입니다.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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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기 없지만 아름다운 꽃… 조선 궁중채화展

    조선 왕실 연희나 의례를 장식하는 가화(假花·조화)인 ‘궁중채화(宮中綵花)’를 당시 모습으로 되살린 특별전 ‘아름다운 궁중채화’가 열린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이귀영)은 8일부터 서울 종로구 효자로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 기능보유자인 황수로 수로문화재단 이사장이 제작한 꽃 장식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순조(1790∼1834)가 즉위 30년과 40세 생신을 맞은 1829년 음력 2월에 효명세자(孝明世子·뒷날 익종 추존)가 창경궁에서 올린 잔치인 ‘기축년 진찬(進饌)’을 재현했다. 궁중채화는 주로 비단이나 모시를 이용해 꽃과 곤충을 사실적으로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예외적으로 여름철엔 빙화(氷花)로 제작하거나 때로 종이를 이용했단 기록도 있다. 이 가운데 윤회매(輪廻梅)는 밀랍 촛농으로 매화 꽃잎을 만들었는데, 왕실은 물론이고 문인사회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 관장은 “궁중채화는 황 이사장이 보유한 가지 하나밖에 전해지지 않아 왕실 기록이나 사료를 바탕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엔 프랑스 전통기법으로 꽃 장식을 만드는 장식예술가 브뤼노 르주롱의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다음 달 25일까지. 무료. 02-3701-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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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생한 현장감… 보도사진을 보는듯

    원로사진작가 윤주영 씨(86)의 개인전 ‘잔상(殘像)과 잠상(潛像)’이 9일부터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에서 열린다. 윤 작가는 문화공보부 장관(1971∼74년)과 민주공화당 대변인, 주칠레 대사,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언론인. 1979년 은퇴한 후로는 줄곧 작품 활동에 투신해왔다. 35년 동안 사진집 20권을 출간했고, 전시회도 32번 열었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180여 점을 엄선한 이번 전시는 특별히 이름 붙이진 않았지만 회고전 성격이 짙다. 크게 7가지 주제로 엮은 이번 전시 작품들은 보도사진을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이 물씬하다. 연작 ‘동토의 민들레’는 일제강점기 강제로 끌려가 러시아 사할린에 정착한 동포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탄광촌 사람들’ 시리즈는 한때 산업역군으로 대접받았으나 이제는 쇠락한 광원의 삶에 렌즈를 들이댔다. 윤 작가는 “이번 개인전은 머리와 가슴속에 살아 숨쉬는 잔상과 뇌리 속에만 남은 잠상을 형상화한다는 화두 아래 진행했다”며 “30여 년간 찍은 ‘자식 같은’ 사진을 정리하는 일은 즐겁고도 고마운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15일까지. 무료. 02-783-7930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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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귀영화의 모란… 이상향의 도화… 군자지도의 연꽃…

    ‘아침엔 천하 미녀가 술 취한 듯 붉고, 저녁엔 하늘 향기가 옷깃 적시듯 하네(國色朝감酒 天香夜染衣).’(중국 당나라 시인 이정봉의 ‘모란시’에서) 모란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봄꽃이다. 기원전 약용식물로 재배하기 시작해 수나라 양제(569∼618) 시절부터 관상용으로 유행했다. 뭣보다 늦은 봄 풍성하고 화려하게 피어나는 생김새 덕에 미녀나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인기를 끌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8길 한빛문화재단 화정박물관이 올해 처음으로 개최한 특별전 ‘사계화훼(四季花卉)’는 계절별 꽃과 나무를 소재 삼은 중국 청나라 유물을 선보이는 자리다. 세월 따라 향취를 전해주는 자연의 신비로움이 예술과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음을 살필 수 있다. 모란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화재(畵材)로도 많이 쓰였지만, 꽃병이나 찬합에도 자주 새겼다. 전시작 가운데 ‘자수 꽃무늬 여성 상의’나 ‘분채(粉彩·도자기에 입히는 채색) 꽃무늬 병’도 모란으로 장식했다. 수선화와 버드나무도 봄을 대표한다. 다만 수선화는 고고한 문인의 절개를, 버드나무는 풍류나 이별을 나타냈다는 점이 달랐다. 복숭아나무는 독특하게도 꽃과 열매의 의미가 바뀌었다. 4, 5월 피는 복숭아 꽃(복사꽃)은 이번에 전시된 작자 미상의 ‘도화원기(桃花源記)’처럼 영원한 이상향을 표상했다. 그런데 7, 8월 열리는 복숭아는 세속적 무병장수의 상징이다. 19세기 ‘삼성도(三星圖)’에서 수명을 관장하는 수성(壽星)이 손에 쥔 게 복숭아다. 여름 꽃인 연꽃은 진흙탕에서 꽃을 피워 ‘군자의 꽃’이라 칭송받는가 하면, 씨앗을 많이 맺어 민간에선 다산(多産)의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연화원앙도(蓮花鴛鴦圖)’는 부부 금실과 자손 번창을 바라는 속내가 담긴 것이다. 이 밖에 가을 국화와 겨울 소나무, 대나무를 그린 회화와 공예품까지 모두 62점의 유물이 전시된다. 모두 올해 1월 별세한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 수집한 작품들이다. 조희영 학예실장은 “꽃과 나무마다 지닌 상징성이 달라 이를 해석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12월 31일까지. 3000∼4000원. 02-2075-011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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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바다서 건져 올린 ‘중세 타임캡슐’

    섬마을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저 앞바다에 커다란 배가 잠들어 있다”고만 했다. 다들 잠깐 눈빛을 반짝였다가도 그러려니 곧 심드렁해졌다. 1975년 8월 20일, 한 고기 잡던 어부의 그물에 청자 화병이 걸려 올라오기 전까지는. 전남 신안군 증도(曾島) 서쪽 바다. 이젠 섬에 발굴기념비가 세워져 역사를 간직한 ‘신안 보물선 인양’은 국내는 물론 세계 고고학계의 대사건이었다. 이렇게 큰 배(전체 길이 34m)에 이리도 많은 유물(2만3502점)이 쏟아져 나온 일은 유례가 없었다. 배가 발굴되며 한국은 단박에 지구상에서 중국 송대와 원대 도자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됐다. 심지어 당시 국제경매시장에서 두 시대 도자기는 워낙 귀해 몸값이 엄청났는데, 신안선에서 ‘너무 많이’ 나오는 바람에 가격이 확 떨어졌단다. 하지만 발굴 당시 세상을 휩쓴 보물선 열풍은 이제 사그라졌다. 그 옛날 전설만 떠돌던 시절로 돌아간 듯 관심이 잦아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언론이야 썼던 기사 또 쓸 리 없다. 정부는 전문가 아니면 봐도 뭔 소린지 모를 보고서를 내놓았다. 신안선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 배를 통해 우리는 뭘 알 수 있는지 배울 기회는 점점 옅어졌다. 저자인 역사학자 서동인 씨와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 학예연구사는 그게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1976년 예비조사를 시작으로 1987년 마무리작업에 이르는 10년 넘는 세월, 누적인원 10만여 명이 투입됐던 발굴. 그리고 거기서 건져낸 알토란 같은 보물과 귀하디귀한 사료를 빛바랜 박제 취급하는 건 확실히 아쉽다. 김 학예사는 2일 전화통화에서 “1980년대 첫 공식보고서 출간 뒤 2006년 이를 업그레이드한 개정판이 나왔지만 아무래도 일반인은 접근도 이해도 어렵다”며 “신안선을 낱낱이 파헤치고 이를 둘러싼 당대의 이야기를 좀 더 편하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323년 음력 4월 중국 푸젠(福建) 성 취안저우(泉州)를 출항한 신안선은 저장(浙江) 성 원저우(溫州)를 거쳐 고려로 갔다. 허나 고려에 닿기 직전인지 아니면 들렀다 종착지 일본 후쿠오카(福岡)로 가던 중인지는 모르나, 수백 명의 꿈이 실렸던 배는 난파돼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발굴 당시는 기본 측량장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이후 문화재청) 지휘 아래 목숨 걸고 바다에 뛰어든 해군 잠수사의 촉에 의지해 유물을 건져 올렸다. 신안선이 품고 있던 보물은 실로 엄청났다. ‘청자 해태 모양 연적’과 ‘청자상감 구름 학 국화무늬 베개’ ‘청자상감 국화무늬 잔탁(盞托·찻잔 받침대)’ 같은 고려청자 7점을 비롯해 도자기가 2만여 점. 일본에서 주문한 향로와 등잔 같은 불교 의례용 금속제품도 700점이 넘는다. 주사위와 약재, 벼루와 맷돌, 빗과 저울 같은 생활용품도 나왔다. 신안선이 당시 세계 최대 교역국이었던 원제국과 고려 일본을 잇는 해양실크로드의 실체가 담긴 타임캡슐로 불리는 이유다. 배 밑바닥에선 중국 동전 약 800만 개와 껍질을 벗겨 적당히 자른 자단목(紫檀木) 1000여 편도 찾았다. 동전은 당시 유통되지 않던 걸 모아 일본에서 녹여 불상을 만들려던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 가나가와(神奈川) 현에 있는 청동불상‘가마쿠라 다이부스(鎌倉大佛)’는 송나라 동전과 성분분석 결과가 똑같이 나왔다. 자단목은 고위층 가구나 불교용품 제작용이었을 터. 흥미로운 건 이 목재에 한자는 물론 알파벳도 여럿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서역과 유럽 상인까지 상주하던 취안저우에서 취급되던 목재다 보니 표기방식도 국제적이었다. 신안선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던 두 저자의 소망(?)은 꽤나 이뤄진 듯하다.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고 세세한 설명이 가득하다. 신안선 발견과 유물 인양 과정부터 배에 실렸던 유물과 뒷얘기까지 씨줄 날줄로 엮이며 한 폭의 커다란 역사지도를 만들어냈다. 특히 당시 최고 교역물품인 차와 인삼을 소재로 백성 수탈의 역사를 되짚거나 찌꺼기만 남은 약재를 통해 인도의학이 불교와 함께 일본까지 흘러가는 과정을 기술한 대목은 잔향이 컸다. 신안선이란 그물을 당기다 보면 13세기 한중일의 문화사까지 끌려나온다. 다소 장황한 부분도 없지 않으나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신안선 침몰은 당시로선 많은 인명을 앗아간 불행이요 참화였다. 고려인 중국인 일본인 가릴 것 없이, 누군가는 피눈물로 목 놓아 불렀을 가족을 떠나보냈다. 허나 그 아픔이 자연에 안겼다 600여 년 만에 돌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외친다. 신안선은 아직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았노라고. 그 끝나지 않은 항해는 이제 우리가 짊어질 몫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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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보물이 아닌게 어색한 대어급 문화재들

    올 2월 ‘경주 이차돈 순교비’가 보물로 지정 예고되자 ‘왜 이제야…’라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국보급 문화재일 것 같은 유물 중엔 의외로 국가지정문화재가 아닌 것이 수두룩하다. 그동안 매매나 국외 반출 가능성이 높은 사찰, 대학, 개인 등 민간 소유 유물을 국보나 보물로 우선 지정해 왔기 때문이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은 관리 강화 차원에서 ‘이차돈 순교비’를 시작으로 박물관 소장 유물의 국가지정문화재 확대를 추진 중이다. 현재 1단계로 60여 건을 검토하고 2017년까지 수백 점으로 늘려갈 방침이다. 과연 어떤 ‘대어급 문화재’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까. 청과 박물관의 도움을 얻어 유력 후보를 미리 살펴봤다. 전남 나주 신촌리에서 발굴한 백제 금동관과 금동신발은 둘 다 국보, 보물로 손색없다. 옹관(甕棺·항아리 모양 관)에 들어있었는데, 은팔찌를 비롯한 장신구와 무기 농기구도 함께 나왔다. 경주 노서동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 명 청동그릇(호우)’ 역시 그동안 지정문화재가 아닌 게 어색하다. 바닥에 ‘415년 광개토대왕을 기념해 만든 그릇(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유물로는 ‘월지(月池) 금동 초 심지 가위(금동촉협·金銅燭鋏)’를 꼽을 수 있다. 흔히 안압지로 알려진 경주 월지에서 나온 이 유물은 이름 그대로 초 심지를 자르는 가위다. 손잡이에 새겨진 방울과 당초무늬가 아름답다. 1925년 경주 남산 장창골 석실에서 옮겨온 ‘장창골 석조미륵삼존불상’은 단단한 화강암 재질인데도 부드러운 온기가 배어나온다. ‘삼화령(三花嶺) 미륵삼존불’이라 불리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불화로는 ‘노영필 아미타구존도(魯英筆 阿彌陀九尊圖)’를 꼽을 수 있다. 고려청자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청자 상감 구름학무늬 매병’과 ‘청자 상감퇴화 풀꽃무늬 조롱박모양 주전자와 받침’도 유력하다. 이 매병은 뚜껑이 남아있는 드문 유물로 구름과 학의 여유로운 조화가 일품이다. 주전자의 퇴화(堆花)란 흑토와 백토를 물에 개서 그림 그리듯 문양을 그리는 기법을 일컫는다. 조선으로 넘어가면 회화가 푸짐하다. 중국 후난(湖南) 성 경치를 담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한반도 산수화의 대표적 소재다.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는 16세기 작자미상 작품으로 8폭 그림이 쌍으로 대칭을 이루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또 겸재 정선의 초기작인 ‘정선필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 楓嶽圖帖)’도 눈여겨볼 만하다. 태조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기 1년 전, 추종자 1만여 명과 금강산 비로봉에 모신 ‘이성계 발원 사리 갖춤’도 유력한 후보다. 사리를 봉안한 탑과 팔각당 모양의 그릇은 모두 은에다 금을 입히고 안쪽 은판에는 명문을 새겼다. 이를 넣은 청동, 백자그릇에도 글이 새겨졌다. 만들고 바친 시기와 참여 인사의 이름, 미륵을 기다린다는 발원이다. 그 민감한 시기에 불교성지인 금강산에 바쳐진 사리 갖춤은 무슨 뜻을 지녔을까. 조이영 lycho@donga.com·정양환 기자}

    • 201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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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호랑이 그림엔 화를 막고자 하는 염원 담겨

    “착하며 성스럽고 문무를 겸비하고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지혜롭고도 인자하며 엉큼스럽고 날래며 세차고 사납기가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연암 박지원의 소설 ‘호질’) 한국에서 호랑이 그림은 그 뿌리가 길고도 깊다. 선사시대의 울산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부터 고구려 고분벽화나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까지 여러 유적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엔 호랑이를 소재로 한 민화가 대량 제작됐다. 한국민화센터 주최로 지난달 28, 29일 경북 경주시에서 ‘경주민화포럼 2014-왜 다시 호랑이인가’가 열렸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이 ‘조선시대 호랑이 그림의 특징’을,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이 ‘한국의 호랑이 민화’를 발표했다. 미국 신시내티미술관의 중국계 큐레이터 허우메이 송은 ‘중국의 호랑이 그림’을 소개했다. 한국과 중국에선 호랑이가 정통 회화의 모티브임과 동시에 다양한 생활문화의 아이콘이었다. 대표적 사례가 호작도(虎鵲圖)다. 영물인 호랑이와 길조인 까치의 조합은 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인기 소재였다. 윤 관장은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대상으로 호랑이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화를 막아준다는 호랑이 그림은 종종 복을 집안에 불러들인다는 용 그림과 나란히 벽에 걸렸다. 중국에선 정치적 메시지로 쓰이기도 했다. 명나라는 ‘추우(騶虞)’라는 상상 속 호랑이가 인기였다. 추우는 시경에 ‘검은색 줄무늬에 몸보다 긴 꼬리를 지닌 상서로운 백호’로 등장한다. 송 큐레이터는 “영락제가 왕위 찬탈의 명분을 얻으려 태평성대에 출몰한다는 추우를 적극 ‘홍보’한 것이 계기”라고 말했다. 조선에서 호랑이 그림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는 문인화가 고운이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고운의 ‘백액대호’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호랑이 그림의 정형을 성립한 이는 단원 김홍도로, 그가 호랑이를 그리고 표암 강세황이 소나무를 그린 ‘송하맹호도’와 수월 임희지가 대나무를 친 ‘죽하맹호도’는 후세의 표준이 됐다. 이 관장은 “중국의 호랑이 그림이 형태보다 의미를 중시한 데 비해, 조선 호랑이 그림은 세밀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민화도 독특한 전통을 형성했다. 진짜 호랑이 가죽을 펼쳐놓은 듯 그린 호피도는 중국이나 일본에선 찾을 수 없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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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공산성 복구 과정… 백제시대 특유의 판축성벽 구조 확인

    지난해 9월 성벽 일부가 무너진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사적 제12호)에서 백제시대 축성 양식이 확인됐다. 공주대박물관은 1일 공산성 발굴 현장에서 “붕괴된 조선시대 돌로 쌓은 성벽 아래에서 흙을 시루떡 모양으로 다져 쌓는 백제시대 특유의 판축성벽(版築城壁)을 찾았다”고 밝혔다. 판축성벽 아랫부분에서는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기와편도 상당수 출토됐다. 공산성은 475년 백제가 공주(당시는 웅진)로 천도한 뒤 60여 년간 왕성 역할을 했던 웅진성으로 추정돼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개축한 석축 성벽이 들어서 있어 백제 성벽의 축조 시기나 양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남석 공주대박물관장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과 충남 부여군 부소산성에 이어 세 번째로 백제 판축성벽을 찾은 것”이라며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에서 양옆에 돌을 함께 올린 부소산성으로 석축기술이 발전하는 중간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공산성 판축성벽 발굴은 전화위복의 산물이다. 지난해 금강 옆 성벽이 무너졌을 당시 붕괴 원인을 놓고 논란이 거셌다. 4대강사업으로 아래쪽 강 토사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원래 암반이 많아 불안정하고 산사태가 잦았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붕괴 원인 규명을 위해 조사에 착수한 덕분에 백제 토성 일부를 이번에 찾은 것. 특히 튀어나온 암벽을 일부러 ‘ㄴ’자 모양으로 깎은 뒤 판축성벽을 쌓아올린 당시의 건축 기법도 함께 확인됐다.공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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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같은 유럽이 화폭속으로…

    중견화가 신홍직 화백(54)의 다채로운 유럽여행 경험이 작품으로 녹아든 개인전 ‘창, 안과 밖’이 2일부터 서울 종로구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신 화백은 2010년부터 간간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각지를 돌며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유럽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지난해 10월엔 크로아티아도 다녀왔다. 모든 작품이 명소를 소재로 삼진 않았건만, 거칠되 과감한 붓질을 따라 화려하되 청명한 분위기가 낯익은 듯 펼쳐진다. 다녀온 경험이 있는 도시라면 더욱더 유쾌한 추억이 떠오름 직하다. 특히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친퀘테레,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처럼 바다와 어우러진 도시의 풍광을 담은 작품들은 이국적 감성이 가득하다. 7일까지. 02-736-102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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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빙기 지난 지금 가장 긴장될 때” 봉분-지붕 등 꼼꼼히 살피며 체크

    27일 경기 양주시 장흥면 온릉(溫陵). 햇살은 따습다 못해 따가웠다. 아직 잔디는 푸른빛도 찾기 힘들건만. 단출한 봉분 앞 혼유석(魂遊石) 아랜 벌써 제비꽃이 피었다. 겨우 7일 만에 왕비에서 폐출된 단경왕후(端敬王后·1487∼1557)를 토닥이는 걸까. 봄기운은 이미 흠뻑 산자락에 내려앉았다. “정말 근사하죠? 한데 할 일이 태산이에요. 얼른 서두릅시다.” 조동진의 ‘제비꽃’ 한 소절 떠올릴 틈도 없이, 조선왕릉관리소의 최길섭 수리복원팀장은 어깨를 툭 쳤다. 괜스레 무안해 둘러보니 잠시 넋 놓은 건 혼자뿐이었다. 점검반은 벌써 정자각(丁字閣)으로, 능 뒤편으로 흩어져 체크하기 바빴다. 문화재청이 조선왕릉 일체 안전점검에 나선 게 이날로 6일째. 해빙기 사고 예방조사는 해마다 실시하는 정례사업이다. 하지만 올해는 좀 특별하다. 처음으로 민관합동점검을 실시해 대한건축학회나 산림보호협회와 같은 민간 전문가들도 참여했다. 허복수 조선왕릉 서부지구 관리소장은 “외부인사들이 기탄없이 의견을 내 도움이 크다”고 말했다. 추운 겨울이 지난 이맘때가 왕릉은 손이 많이 간다. 봉분은 얼음이 녹으며 구석구석 무너져 내렸다. 지붕 일부가 뭉개진 건조물도 눈에 띄었다. 먹을 게 없는 산짐승이 내려오는 것도 이 시기다. 실제로 최근 경기 여주시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은 멧돼지와 두더지 출몰로 골머리를 앓았다.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온릉에 동작 감지 센서가 달린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설치된 이유이기도 하다. 온릉을 거쳐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西五陵)과 서삼릉(西三陵)을 돈 이날 점검에선 다행히 산짐승 피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산사태 발생 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사방협회 경기지부의 김윤진 사무국장은 “왕릉이 대부분 산 구릉 ‘명당’에 위치해 큰 위험은 없지만, 배수로 시설에 대한 지속적 모니터링은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날 가장 많은 논의가 오고간 대목은 정자각의 안정성 문제였다. 한자 ‘고무래 정’을 닮은 정자각은 왕릉에 세우는 제례용 건축물. 글자 생김새대로 앞쪽으로 배례청(拜禮廳)이 튀어나온 구조라 무게중심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온릉은 물론이고 열아홉에 세상을 떠난 덕종(德宗)의 경릉(敬陵),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모셔진 순창원(順昌園)도 기둥이 기울거나 서까래가 휘었다. 김기주 한국기술교육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특히 조선 전기 건축물은 하중을 나눠주는 받침대가 부실한 면이 있어 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능(陵·왕과 왕비의 무덤) 40기를 비롯해 원(園·세자나 세자빈, 왕의 생모인 후궁의 무덤) 14기와 묘(墓·그 밖의 왕실 관련 인사의 무덤) 66기를 합치면 120기나 된다. 관리가 쉽지 않아 현재 43기만 일반 출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이번 점검을 계기로 나머지 왕릉도 차츰 개방할 방침이다. 김정남 조선왕릉관리소장은 “내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과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모셔진 영원(英園)을 시작으로 2019년까지 10기를 순차적으로 공개할 것”이라며 “소중한 문화재를 시민과 함께 가꾸고 지키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말했다.고양·양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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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오랑캐를 빼고 中原을 논하지말라

    ‘삼국지 10번 읽은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 마라.’ 삼국지는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다. 여기서 삼국지라면 연의(演義), 소설을 일컫는다. 유비 관우 장비 조운 조조 제갈량…. 이름만 거론해도 짜릿하다. 다만 많이 독파해도 깨치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 솔직히 스무 번 이상 읽었는데 지금도 얄팍하다고 혼이 난다. 한데 ‘삼국지 다음 이야기’의 저자는 이를 두고 혀를 찬다. “소설 삼국지를 아무리 많이 읽을지라도 정사 삼국지를 한 번 정독하느니만 못하다. 정사 삼국지를 여러 번 정독할지라도 남북조 시대의 역사를 곁들여 한 번 보느니만 못하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라 부르는 시기(221∼589)가 400년 가까이 되는데, 왜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위촉오 삼국시대만 주야장천 얘기하느냐는 지적이다. 맞는 얘기다. 세계사 시간에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를 기계처럼 외우기만 했다. 위가 조조 집안이 세운 나라라는 것도 까먹곤 했다. 세 나라가 피 터지게 싸웠는데 천하통일은 사마의 가문이 했다더라. 아, 역사 참 묘하다. 뇌 회로도 보통 거기서 멈췄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이는 중화사상이 짙게 깔린 선입견 때문이다. 남북조시대는 흉노나 선비 같은 북방민족이 활개를 쳤던 시기다. 한족 중심 역사관에선 배알이 꼴리기도 했겠지. 하지만 우리야 그럴 필요가 있나. 오히려 선비족은 같은 혈통의 친척 아닌가. 책 부제에 등장하는 ‘오랑캐’는 다름 아닌 우리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다. 자, 그러면 어디 그네들 말처럼 그 시대는 오랑캐 탓에 ‘혼란의 극(極)’만 펼쳐졌던 시절일까. 책을 읽다 보면 그런 기미도 꽤나 보인다. 뭔 놈의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는지. 암투와 전투는 끊이질 않는다. 후조(後趙)의 3대 황제 석호(石虎)는 ‘만세의 폭군’이란 호칭으로도 부족하다. 아무리 자기를 죽이려 했다지만, 아들을 칼로 저미고 눈과 혀를 뽑으며 영화 보듯 관람한다. 인과 잔인이 쉴 새 없이 뒤섞인다. 근데 이거…, 삼국지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 저자 말마따나 “중국은 사계절의 순환처럼 분열과 통일의 시대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는 앞선 춘추전국시대와 상당히 닮았다. 위진시대가 춘추라면, 남북조시대는 전국이랄까. 사상적으로도 유교와 불교 도교가 치열히 경쟁하면서도 상대의 장점을 받아들여 자양분으로 삼았다. 오랑캐는 결코 야만의 문화가 아니었다. “강건한 상무정신을 토대로 뛰어난 정치 군사 문화를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 이질적인 남북조 문화를 하나로 녹이려는 각 방면의 노력이 바로 ‘호한융합(胡漢融合·북방민족과 한족의 조화)’에 기초한 수·당의 통일로 이어졌다.” ‘숨겨진 보물’ 같은 영웅도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석호의 삼촌뻘인 후조 1대 황제 석륵(石勒)은 현재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지역에서 발연한 갈족(갈族)의 후예로 노비 출신이다. 글자를 몰라 책 한 권 읽지 못하지만, 많은 학교를 세워 금쪽같은 학자를 길러냈다. 역사를 거울삼아 친히 순행하며 백성을 살폈고, 조세는 위나라 이래 가장 가벼웠다. 본인은 멸시받는 오랑캐였으나 한족을 차별하지 않았다. 2권으로 이뤄진 만만찮은 분량이나 ‘삼국지 다음 이야기’는 읽는 기쁨이 쏠쏠하다. 줄곧 간웅으로 평가받았던 위나라 조조를 향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애정에서 시작해 수문제(隋 文帝)가 진(陳)을 멸망시킬 때까지 쉴 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간다. 문장도 간결하고 적확하다. 서사의 흐름이 단 한 차례도 늘어지지 않는 게 뭣보다 강점이다. 다만 이는 읽는 이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어쩔 땐 너무 획획 지나간다. 두세 쪽 읽는데 전투가 대여섯 번 벌어져 ‘잠깐, 누구랑 싸워 이겼다는 거야’ 하고 헷갈렸다. 이 책은 시오노 나나미 스타일과 딱 대척점에 서 있다. 사실 전달과 별개로, ‘로마인 이야기’는 중언부언 반복하는 대목이 잦다. 하지만 그만큼 친절하게 설명한다. 반면 이 책은 위 이후 ‘진남북조’ 300년가량을 2권에 모아서일까. 너무 짜서 물기가 마른 행주를 쥔 기분이다. 저자는 말한다. 중국사는 오랑캐 빼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실제로 그렇다. 따지고 보면, 위진남북조는 물론이고 요, 금, 원, 청도 북방민족이 세운 국가였다. 특히 이후 수와 당으로 이어지는 통일국가 시대는 ‘5호16국’ 시절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한족 중심에서 벗어나 새롭게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구나 우리 학자의 글로 만나는 행운을 놓치지 마시길. 중국, 참 ‘재밌는’ 나라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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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계종 전통사찰 942곳 전수조사

    조계종이 전국 전통사찰 942곳을 모두 조사한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혜일 스님은 26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사찰의 효율적 보존관리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올해부터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유물이나 새로 지어진 건축물과 주변 숲까지, 사찰을 구성하는 세부사항까지 모두 포함한다. 조계종은 올해 부산 및 경남 지역 141곳을 시작으로 총 40억∼50억 원을 들여 4년 동안 전국의 모든 전통사찰을 조사할 계획이다. 타 종단 소속 사찰도 함께 조사한다. 혜일 스님은 “그간 전통사찰의 현황 파악은커녕 조사 기준도 마련하지 못해 관리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며 “연말에 보고서를 발간해 적절한 보존관리 정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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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 하나… 기둥 하나… 고려가 숨 쉰다

    북한 개성은 고려 건국 이듬해인 919년부터 약 470년간 고려 왕조의 수도였다. 당시엔 ‘개경(開京)’ ‘송도(松都)’ ‘송경(松京)’으로 불렸다. 명실공히 불교문화의 중심이자 국내외 인재와 문물이 몰려드는 도시였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개성이 대변하는 고려의 문화와 전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펴낸 자료집 ‘개성의 문화유적’에는 이러한 역사적 향취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세계유산에 선정된 12개 유적군인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 △만월대 △개성 첨성대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릉 △7릉군 △명릉 △공민왕릉을 중심으로 북한 국보유적의 현재를 아울렀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개성 유적의 사진을 함께 실어 문화유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다. 고려의 수도답게 일단 궁궐터와 왕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만월대는 송악산 구릉지에 잡은 고려의 정궁(正宮) 터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회경전을 중심으로 높은 축대를 세워 기반을 닦은 모습은 당시 황제국을 천명한 웅기가 배어 있다. 박성진 학예연구사는 “만월대는 2007년부터 남북 공동발굴조사가 진행됐으나 2011년 이후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중단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태조 왕건(877∼943)과 신혜 왕후가 합장된 왕건왕릉(본명칭은 현릉·顯陵)은 943년 만수산 기슭에 조성됐다. 돌을 쌓아 방을 만든 석실분으로 내부에 매화와 청룡, 노송과 백호 벽화가 남아 있다. 공민왕(1330∼1374)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 공주(?∼1365)의 정릉으로 이뤄진 공민왕릉은 조선 왕릉의 모체로 평가받는 유적이나,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에 도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개성 하면 떠오르는 인물 포은 정몽주(1337∼1392). 그가 훗날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 일파에게 목숨을 잃은 선죽교도 빠뜨릴 수 없다. 선죽교는 본래 난간이 없었으나 18세기에 따로 설치했다. 박 연구사는 “개성 문화유적은 민족공동의 유산인 만큼 안정적인 교류협력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뭣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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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說 說 說 안중근 거사 촬영 필름… “러시아에 사본 있을 가능성”

    오늘(26일)은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사진)가 순국한 지 104주기 되는 날. 안 의사의 숭고한 희생은 2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한중정상회담에서 거론될 정도로 여전히 동북아 역사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최근 세간에선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동영상이 화제다. ‘안중근 동영상’은 과연 존재하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안중근 의사(1879∼1910)의 하얼빈 거사를 촬영한 필름은 과연 있는가.’ 최근 미국 잡지 버라이어티의 1909년 12월 6일자 기사가 발굴되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순간을 담았다는 ‘안중근 동영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 영화사가 프랑스 파리에서 판매에 나섰다는 내용의 기사인데, 이를 두고 여러 설(說)이 나온다. 진짜 존재하는지, 어디 있는지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수십 년째 이 필름을 쫓아온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 대표인 김광만 PD(59)의 도움을 얻어 전체 상황을 짚어봤다. 동영상을 언급한 자료는 의외로 적지 않다. 당시 일제의 전문(電文)과 신문기사, 러시아 기록물이 ‘이토 히로부미의 활동사진’을 여러 차례 거론했다. 대부분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동영상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건 1909년 10월 26일, 의거 당일이다. 하얼빈 일본 영사관은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에 “활동사진을 찍은 러시아 촬영기사를 임시 억류했다”며 어떻게 처리할지 묻는다. 다음 날 외무성 답신은 “내버려둬라”였다. 필름을 압수했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해 몸을 사린 것이다. 동영상을 찍은 러시아 촬영기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빅토르 코브체프’다. 그의 아들이 남긴 일기에 따르면 이토가 하얼빈에서 만난 러시아 장교단을 찍으러 갔다가 우연히 저격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공식 수행언론에는 끼지 못해 외곽에 자리 잡은 게 오히려 ‘역사의 현장’을 포착하는 행운이 됐다. 1910년 1월 7일 일본 시사신보는 “코브체프 씨가 도쿄에 왔다”며 그의 사진과 ‘하얼빈 무용담’을 실었다. 코브체프는 이 덕에 큰돈을 거머쥔다. 1909년 11월 18일 요리우리와 시사신보에 “치열한 경합 끝에 신문대행업체 ‘저팬 프레스 에이전시(JPA)’가 1만5000엔에 계약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으로 따지면 4억 원 가까운 거금이다. 동영상 내용과 관련해 요미우리신문(1910년 1월 6일자)에 재밌는 대목이 나온다. “(동영상을) 봤더니 당시 이토 공작을 수행한 고관들은 도망가고 숨기 바빴다. 필름이 공개되면 그간 용맹을 떠벌렸던 정치인들은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당시 도쿄의 한 영화관은 거사 장면이 쏙 빠진 ‘편집본’을 틀었고,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이후 필름은 더이상 사료에 등장하질 않는다. JPA의 사주였던 정치인 다노모키 게이치(賴母木桂吉)가 갖고 있었으나 종적이 묘연해졌다. 미국으로 이민 간 다노모키의 손자는 몇 년 전 김 PD와 만나 “1945년 도쿄 대공습 때 집이 전소돼 할아버지 소장품은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일본필름보관소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원본을 넘긴 1910년, 하얼빈 일본상인협회 기록에 “코브체프가 복사한 필름 1롤을 갖고 있다가 압수당했다”는 내용이 있다. 코브체프의 아들도 “아버지가 원본을 팔기 전 여러 벌을 복사해뒀다”고 밝혔다. JPA로선 코브체프에게 사기를 당한 셈인데, 덕분에 동영상은 다양한 갈래로 흩어져 살아남은 것이다. 다만, 최근 보도에서 언급된 파리 경매에 나왔다는 동영상은 프랑스 영화사 파테(Path´e) 소유가 됐지만 이토의 장례식을 담은 가짜로 밝혀졌다. 거사 당일 안 의사를 기모노 차림으로 그린 미국 뉴욕타임스(1910년 8월 14일자)의 삽화 역시 엉터리다. 의거 후 30분 뒤에 촬영했다는 시사신보(일본 신문)의 사진을 보면 안 의사는 양복 차림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동영상’의 행방을 놓고 한때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운영한 영화재단이 사들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건 러시아다. 코브체프 유물이 당시 소련 정부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김 PD는 “2000년대 중반 비밀루트를 통해 필름 목록을 확인했다”며 “구체적인 건 밝힐 수 없지만 하루빨리 한국이 찾아와야 할 보물”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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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미술품 66점 보러오세요”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이 12년 동안 수집한 아시아 미술품 66점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박물관은 25일 “올해 첫 기획전 ‘아시아미술 신(新)소장품’을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여기엔 중국 공예품과 일본 회화, 인도와 동남아시아 불교조각이 다수 포진해 있다. 중국 유물 가운데는 8세기 당나라 인물상과 후한시대(1∼3세기) 누각(樓閣) 모형이 있다. 높이 37.7cm로 도자기처럼 빚어낸 이 인물상은 남성 복식을 갖췄는데 복스러운 얼굴에 수염이 없고 입술은 화장한 듯 표현돼 있다. 130cm 높이의 누각 모형은 고인의 안식을 기원하는 부장품으로, 당시 건축물 구조를 가늠할 중요한 사료다. 인도 미술품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리스·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아 유럽적 향취가 짙은 간다라 미술과 달리, 지난해 박물관이 구입한 마투라의 보살부조상은 인도인 특유의 생김새를 살렸고 생기가 넘치는 표정을 지녔다. 6월 22일까지. 무료. 02-2077-9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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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열한 이산의 삶 고백

    일단 고해성사. 솔직히 ‘노바디(Nobody)’ 하면 원더걸스부터 떠오른다. 그런 깜냥이다 보니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의 ‘세마(SeMa) 골드―노바디’ 전은 좀 버거웠다. 야구로 치면 오승환의 묵직한 ‘돌직구’ 같다고 할까. 그만큼 재외 여성작가 3인은 ‘디아스포라(Diaspora·이산)’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아우르는 주제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민영순(61)과 윤진미 조숙진(54)은 모두 북미에서 오래 거주해온 작가들이다. 여성이자 소수자로서 바라보는 세상은 결코 봄 햇살처럼 밝지 않다.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했기에 무명(노바디)일 수밖에 없는 운명. 윤 작가가 캐나다 한인 67명의 증명사진(?)을 모은 작품 ‘67그룹(A Group of Sixty-Seven)’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찌릿하다. 캐나다는 1867년 연방이 설립됐고, 1967년 아시아계 이민을 허용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한국사를 관통하며 상처 입은 여성(그리고 이주노동자)을 주제로 삼은 민 작가나 죽음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파리하게 드러낸 조 작가의 작품도 다들 손에 땀이 찼다. 5월 18일까지. 무료. 02-2124-88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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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균열 논란 석굴암 본존불, 안녕하십니다”

    “석굴암 본존불에 있는 균열은 (붕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속적으로 점검이 잘 이뤄져왔고, 당장 긴급한 위험이 발생할 만한 요소도 없어 보입니다.” 해외의 저명한 문화유산 구조안전 전문가가 붕괴 가능성이 제기됐던 국보 제24호 석굴암 본존불상이 안정적이란 결론을 내렸다. 유네스코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의 건축유산 구조분석복원위원회 명예의장인 조르조 크로치 박사는 20, 21일 경주를 방문해 “사견을 전제로 본존불 미세균열은 우려할 수준이 아니다”라며 “한달 안에 이코모스 한국위원회에 공식 보고서를 제출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로치 박사는 피사의 사탑과 카프라 피라미드(이집트), 스트라스부르 대성당(프랑스) 복원에 참여했던 세계적인 건축물 구조안전 전문가. 1995년 석굴암의 세계유산 등재 때도 안전진단에 참여해 한국과 인연이 깊다. 함께 방한한 유네스코 자문위원인 클라우디오 마르고티니 박사는 이탈리아 환경보호연구소 소속으로 북한 고구려고분군 보존사업을 진행했다. 올해 초 문화재청의 석굴암 점검 데이터를 넘겨받은 두 학자는 20일 현장조사를 벌인 뒤 21일 국내 전문가들과 함께 비공개회의를 가졌다. 이코모스 측은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대외 인터뷰는 모두 사절했다. 회의에 참석한 김동욱 석굴암 구조안전점검단장(경기대 명예교수)은 “두 학자가 준비를 많이 해 꼼꼼하게 의견을 교환했다”며 “크로치 박사를 포함해 모두 본존불 붕괴는 부적절한 시나리오라는 데 공감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오히려 두 박사는 본존불보다 석굴 돔의 정밀한 체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일제강점기 시멘트를 바른 외벽의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이상헌 강원대 지질학과 교수는 “국내에서도 줄곧 지적해온 대목으로 일반적 수준을 넘는 우려는 아니다”며 “석굴암이 무너질 가능성은 현재 제로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안팎은 이번 유네스코 현장조사가 꼭 필요했는지 의문을 표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지난해 11월 제기된 석굴암 불상과 좌대 균열은 1970년대 전부터 존재한 게 대부분이었다. 문화재청도 1996년부터 지속적인 안전점검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정부의 해명에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유네스코에 ‘객관적 검증’까지 요청하게 된 것. 홍성걸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해외학자들이 이번 점검에 사용한 구조해석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개발했다”며 “과신도 금물이지만 국내 학계의 의견을 너무 신뢰하지 않는 것도 큰일”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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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잘 차려진 그 시절 ‘광고 한 상’

    잊을 만하면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사진이나 영상 편집본인데 ‘○○○의 하루’란 거다. 보통 당대의 스타 이영애 전지현 이효리가 주인공. 워낙 얼굴을 내미는 광고가 많아 그것만 엮어도 웬만한 일상을 커버한다는 얘기다. 최근엔 ‘응사의 하루’가 회자됐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흥행하자 출연진이 온갖 광고를 석권하고 있지 않은가. 웃자고 만들었으나 담긴 메시지는 은근하다. 인기에 기대 무더기로 찍어대는 광고에 거부감도 작용했겠다. 전지현 화장품 쓴다고 전지현 급 미모가 되는 것도 아니건만…. 그래도 우리는 혹하고 지갑을 연다. 이처럼 광고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생산과 소비의 음험한 순환을 세련되게 포장해 보여주는 계기판이다. 연세대 강사인 저자는 국문학 전공자이지만 근대문화, 특히 광고를 꾸준히 연구해왔다. 스스로도 “시를 공부하다 광고 연구로 변절한, 혹은 문학 연구 지형에서 꽤나 이탈한 학자”라 부른다. 광고와 같은 여러 매개체를 통해 자본주의 이전과 이후, 안과 밖이 규정하는 삶의 결을 찾는 게 관심사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초점을 맞춘 책은 당시 주로 신문 잡지에 실린 인쇄 광고를 통해 한국 소비사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자라났는지를 훑는다. 저자는 이를 출세와 교양 건강 섹스 애국이란 5개의 범주로 나눠 살폈다. 이들이 당대의 삶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일 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적 준거가 소비문화와 일으키는 상호작용이 지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출세’라는 키워드를 보자. 당시 광고에는 소비자를 부르는 새로운 호칭이 엄청났다. 당신을 비롯해 공(公), 피씨(彼氏·그분), 귀하, 신사숙녀 같은 말이 쏟아졌다. 이전까지 계집이나 아낙으로 부르다가 ‘여성’으로 호명한 것도 광고였다. 청년과 어린이란 말 역시 이때 생겼다. 물론 광고가 이런 용어를 창조한 건 아니나, 얼른 가져다 쓴 건 분명하다. 손님은 왕인데 뭐라고는 못 부를까. 여기엔 근대(혹은 자본)가 지향하는 함의가 명확하다. 조선사회에서 사대부나 들음직한 칭호가 불특정다수이긴 하나 모든 계층으로 확산됐다. 반상(班常)의 고하도 남녀 차별도 광고 속에서 무너져 내린다. ‘백보환’이란 약 광고의 “특별한 귀족 양반만 쓰던 비방 보약인데 현대에는 누구든지 자유로 쓸 수 있게 됐다”는 문구는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이는 또 다른 계급 서열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나팔 소리였다. 이제 모든 건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잣대가 된다. 1920∼30년대 학교와 학원, 수험서 광고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대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학교를 들어가거나 어떤 시험에 붙는다면 인생이 바뀔 것이라 유혹한다. 1935년 창간된 월간지 ‘조광(朝光)’의 ‘최신 중학 강의록’ 광고엔 “사회에 나와서 성공하는 것은 반드시 중학 졸업의 실력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라고 당대를 규정한다. 이처럼 광고가 지닌 근대의 이중성은 교양이나 건강, 심지어 애국에서도 엇비슷하게 드러난다. 재밌는 것은 책도 줄곧 지적하듯, 이런 양상이 꼭 근대만의 풍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출세를 놓고 봐도, 숱한 입시와 유학 광고가 지금은 사라졌던가. 근대도 중세라는 부모가 있듯이, 현대 그리고 21세기도 근대의 자양분을 먹고 자랐다. 당시에 형성된 사회적 가치관은 여전히 시대의 연장선에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든 학자답게 책은 한정식 한상을 제대로 차려냈다. 광고를 주로 삼았으나 문학과 예술을 적절히 인용하며 쫄깃하게 풀어내 읽는 즐거움이 푸짐하다. 다만 이런 스타일이 다 그렇듯 한 우물을 진득하게 파고드는 맛은 좀 아쉽다. 다 손이 가고 평균 이상인데 메인요리를 딱 꼽기는 애매하다고나 할까. 그래도 이런 밥상이 나중에도 생각나고 또 찾게 되리라. 우리가 자꾸만 근대를 되돌아보는 것처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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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식의 재구성]“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요즘은 항문질환을 잘 먹어 생기는 선진국형 질환, ‘부자병(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어른들이나 기억하는 추억이 됐지만, 봄날 배곯는 이에게 엉덩이가 찢기는 아픔은 과장이 아니었다. 워낙 먹질 못하다 보니 신진대사가 원활치 않았고, 변비로 인해 고통 받는 이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이런 춘궁을 견디는 대표적 구황식물 가운데 하나가 솔잎이었다. 김호 경인교육대 교수가 쓴 글 ‘굶주린 백성에게 솔잎을’에 따르면 멀건 미음으로 끼니를 때워 체력이 떨어진 백성에게 솔잎을 빻은 가루는 영양분을 공급하는 훌륭한 대체식품이었다. 중종 36년(1541년) 안위와 홍윤창이 간행한 ‘충주구황절요(忠州救荒切要)’도 “솔잎은 먹을 수 있으니 연명에 도움이 된다. 풀죽에 솔잎가루를 섞어 먹으면 (건강에도) 훨씬 좋다”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솔잎에 심각한 약점이 있었으니 변비 유발이었다. 맛도 텁텁하지만 ‘하도(下道)가 막혀 용변을 볼 수 없는’ 부작용이 빈번했다. 굶주리는 것도 속상한데 항문까지 탈이 났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충주구황절요는 “날콩을 여러 차례 씹어 삼키면 통한다”고 했지만, 솔잎 뜯어먹는 처지에 콩 구하는 일이 말처럼 쉬웠을 리 없다. 당대에도 솔잎 변비는 큰 고민거리였던지 해결책을 제시한 사료도 눈에 띈다. 명종 9년(1554년) 정부가 반포한 ‘구황촬요(救荒撮要)’에는 “구황엔 솔잎이 가장 좋지만 대변 막히는 걱정이 없으려면 느릅나무 껍질 즙을 먹어라”고 권장하는 대목이 나온다. 먹을 게 없어 나뭇잎을 뜯어먹는데, 그로 인한 질환을 멈추고자 또 다른 나무껍질까지 먹어야 했다. 이래저래 똥구멍이 찢어지는 아픔은 참으로 서럽고 애달팠다.참고 자료: ‘18세기의 맛’(문학동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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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어른들은 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했을까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 요즘은 항문질환을 잘 먹어 생기는 선진국 형 질환, '부자 병'이라 부른다. 하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어른들이나 기억하는 추억이 됐지만, 봄날 배곯는 이에게 엉덩이가 찢기는 아픔은 과장이 아니었다. 워낙 먹질 못하다보니 신진대사가 원활치 않았고, 변비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에 이런 춘궁을 견디는 대표적 구황작물 가운데 하나가 솔잎이었다. 김호 경인교육대 교수가 쓴 글 '굶주린 백성에게 솔잎을'에 따르면 멀건 미음으로 끼니를 때워 체력이 떨어진 백성에게 솔잎을 빻은 가루는 영양분을 공급하는 훌륭한 대체식품이었다. 중종 36년(1541년) 안위와 홍윤창이 간행한 '충주구황절요(忠州救荒切要)'도 "솔잎은 먹을 수 있으니 연명에 도움이 된다. 풀죽에 솔잎가루를 섞어 먹으면 (건강에도) 훨씬 좋다"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 솔잎에 심각한 약점이 있었으니 변비 유발이었다. 맛도 텁텁하지만 '하도(下道)가 막혀 용변을 볼 수 없는' 부작용이 빈번했다. 굶주리는 것도 속상한데 항문까지 탈이 났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충주구황절요는 "날콩을 여러 차례 씹어 삼키면 통한다"고 했지만, 솔잎 뜯어먹는 처지에 콩을 구하는 일이 말처럼 쉬웠을 리 없다. 당대에도 솔잎 변비는 큰 고민거리였던지 해결책을 제시한 사료도 눈에 띈다. 명종 9년(1554년) 정부가 반포한 '구황촬요(救荒撮要)'에는 "구황엔 솔잎이 가장 좋지만 대벽 막히는 걱정이 없으려면 느릅나무 껍질 즙을 먹어라"고 권장하는 대목이 나온다. 먹을 게 없어 나뭇잎을 뜯어먹는데, 그로 인한 질환을 멈추고자 또 다른 나무껍질까지 먹어야했다. 이래저래 똥구멍이 찢어지는 아픔은 참으로 서럽고 애달팠다. 참고자료='18세기의 맛'(문학동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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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처럼 만나는 국내 초기 걸작 서양화들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한은갤러리는 언제나 ‘살짝’ 아쉽다.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 탓에 장소가 협소하다. 한국 미술품을 1300여 점이나 소장했는데 시원하게 펼쳐놓을 공간이 없다. 5월 18일까지 열리는 ‘근·현대 유화 명품 30선’도 마찬가지다. 일단 20점을 먼저 선보이고, 다음 달 1일부터 10점을 교체 전시한다. 하지만 그 허기를 달랠 만큼 이번 전시 작품은 중량감이 크다. 조선미술전람회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했던 김인승(1910∼2001)의 ‘봄의 가락’, 심형구(1908∼1962)의 ‘수변’, 박항섭(1923∼1979)의 ‘포도원의 하루’처럼 자주 접하기 어려운 명작이 많다. 미술을 잘 몰라도 서양화풍에 영향을 받은 색채가 뚜렷한 당대 분위기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시작 가운데 박희만의 ‘비원의 부용정’, 안기풍의 ‘봄’, 고화흠의 ‘탁상’, 황추의 ‘저녁노을’, 곽연의 ‘과일이 있는 정물’, 김세용의 ‘설악산’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 무료. 02-759-4881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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