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정양환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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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양환 기자입니다.

ray@donga.com

취재분야

2024-10-02~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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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처럼 만나는 국내 초기 걸작 서양화들

    서울 중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한은갤러리는 언제나 ‘살짝’ 아쉽다.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 탓에 장소가 협소하다. 한국 미술품을 1300여 점이나 소장했는데 시원하게 펼쳐놓을 공간이 없다. 5월 18일까지 열리는 ‘근·현대 유화 명품 30선’도 마찬가지다. 일단 20점을 먼저 선보이고, 다음 달 1일부터 10점을 교체 전시한다. 하지만 그 허기를 달랠 만큼 이번 전시 작품은 중량감이 크다. 조선미술전람회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했던 김인승(1910∼2001)의 ‘봄의 가락’, 심형구(1908∼1962)의 ‘수변’, 박항섭(1923∼1979)의 ‘포도원의 하루’처럼 자주 접하기 어려운 명작이 많다. 미술을 잘 몰라도 서양화풍에 영향을 받은 색채가 뚜렷한 당대 분위기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시작 가운데 박희만의 ‘비원의 부용정’, 안기풍의 ‘봄’, 고화흠의 ‘탁상’, 황추의 ‘저녁노을’, 곽연의 ‘과일이 있는 정물’, 김세용의 ‘설악산’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 무료. 02-759-4881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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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락 옆에 줄달린 손잡이 당기면 점화… 수초뒤 폭발

    윤봉길, 이봉창과 함께 ‘3의사’로 꼽히는 독립지사 구파 백정기(鷗波 白貞基·1896∼1934)가 육삼정 의거 때 지녔던 ‘도시락 폭탄’의 일제 외무성 원본 사진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는 윤 의사가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 투척한 폭탄과 동일한 것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상징성을 갖는 도시락 폭탄의 온전한 실체가 밝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육삼정 의거는 81년 전 오늘(1933년 3월 17일) 중국 상하이 음식점 육삼정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처치하려다 일제 헌병에 체포된 미완의 거사. 당시 일제가 백 의사 일행의 소지품을 찍은 사진을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의 김광만 PD(59)가 최근 일본에서 입수했다. 도시락 폭탄은 1932년 백범 김구가 의뢰해 만들어진 7개 중 하나. 그해 4월 29일 윤 의사 거사 뒤, 백범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나머지를 보내 백 의사가 쓰려 했다. 하지만 밀정 탓에 투척도 못하고 체포됐다. 그 바람에 지금껏 형태를 알 수 없던 도시락 폭탄의 실물을 사진으로 확인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발견으로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궁금증 하나가 풀렸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사진에는 폭탄의 점화장치가 뚜렷이 드러나 그간 추측만 가능했던 ‘작동 원리’도 최초로 확인됐다. 도시락 바깥으로 연결된 줄에 짧은 막대기 형태의 손잡이가 묶여 있다. 백범일지와 일본 외무성 사건기록에 따르면 윤 의사가 투척한 폭탄은 끈을 잡아당겨 점화시킨 뒤 던지면 폭발하게끔 만들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 PD는 “사료에서 묘사돼 의견이 분분했던 도시락 폭탄의 사용법을 사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김 PD는 육삼정 의거를 처음 보도한 당시 중국 신문 사료도 찾아냈다. 동아일보가 그해 11월 11일 국내에 보도하기 전, 일간지 신바오(新報)와 영자신문 ‘노스차이나 데일리뉴스(North China Daily News)’가 의거를 대서특필한 것. 특히 신바오는 의거 다음 날 “경찰이 총을 겨눴는데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목격한 종업원은 그들이 끌려가면서도 줄곧 태연하고 당당해 지금도 이상히 여겼다. 한 사람은 경찰이 손찌검을 해도 웃으며 주눅 들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육삼정 의거는 일본 외무성 문서만 남아 있는 상태라 제3자의 입장이 담긴 해외 사료의 발굴은 의의가 크다. 이번에 함께 입수한 백 의사와 이강훈 전 광복회장(1903∼2003), 독립운동가 원심창(1906∼1973)을 찍은 원본 사진을 보면 당당한 표정과 자세가 여실히 드러나 중국 측 보도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앞서 발굴된 일본 외무성 사료를 보면 이 전 광복회장이 일제 재판관에게 “불공대천의 원수에게 무엇을 호소하겠나. 재판하느라 수고했다”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한편 15일에는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에서 육삼정 의거 81주년을 맞아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와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가 주최한 기념식이 개최됐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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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日 명문대출신 니트족이 쓴 ‘빈둥빈둥 당당하게…’

    약 올랐다. 197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서른일곱. 근데 방 안에서 뒹굴며 하는 일 없는 인생에 만족하다니. 또 그걸 자랑이라고 높은 실업률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니트족(族)(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구직 노력 않는 실업 계층)’을 대변하는 책까지 냈다. 쯧쯧 혀 차는 소리도 들리지만, 부럽고 얄밉고 안쓰럽고 어이없다. 이 철없는 일본 놈팡이의 뇌 속엔 뭐가 들었을까. ―본명이 뭔가. 파(Pha)란 필명은 뭔 뜻인가. “미안하다. 실명을 밝힌 적 없다. 이름이란 자신과 타인, 사회적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다. 난 그 굴레에서 벗어나 실체 없이 살고 싶다. 파도 유령이나 혼령을 뜻하는 ‘팬텀(phantom)’에서 따왔다. 그저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교토(京都)대까지 나온 명문대생이 뭐 하는 건가. 직장도 3년 만에 때려치웠더라. “어릴 때부터 어디에 소속된 게 싫었다. 10대 땐 맘대로 살기엔 간이 작았다. 할 게 없어 공부했다.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대학도 회사도 버티기 힘들었다. 사람마다 적성이란 게 있으니까.” ―적성이 밥 먹여주나. 한국이면 ‘노력 없는 백수의 자기 옹호’라 비난받기 딱이다. “일본도 비슷하다. 어른들한테 혼 많이 난다. 반면 젊은 층은 공감하는 이가 꽤 된다. 일종의 세계관 차이인데…. 모두가 니트족이 되자는 소린 아니다. 일이 좋으면 일하고, 싫으면 관두잔 얘기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자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지금은 젊으니까 가능해 보인다. 나중에 당신들에게 들어갈 세금이 아깝다. “나도 세금 낸다. 인터넷 광고나 중고 책 판매로 쥐꼬리만큼 버니까. 나이 들면 도움 받아야 하는 건 다 똑같다. 생각이 다르다고 사회 구성원이 아닌가. 뭣보다 국가보다 사람이 먼저다. 적게 먹고 적게 싸겠다는데, 그 정도는 이해해주라.” ―그럴듯하지만 사회에 별 관심 없는 것 아닌가? 제3세계 청년이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인정한다. 세상사엔 흥미 없다. 의지를 가진 분들이 잘하면 좋겠다. 가난한 나라면 불가능하단 말도 맞다. 하지만 노동에 힘겨워하는 이들이 없길 바란다. 니트족이라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건 아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게 우리가 바라는 세계다.” ―정신 차려라. 우리가 사는 지구는 매일 전쟁과 갈등이 벌어진다. “그게 니트족의 사고방식 때문일까. 아니다. 더 일하고 더 돈 벌고 더 가지려는 욕심이 빚은 결과다. 현대 사회는 충분히 풍요롭다. 만족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 자신을 돌아보라. 어쩌면 그런 삶을 살지 못해 흥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맞다. 솔직히 배 아프다. 하지만 외톨이 삶이 부럽진 않다. “좋은 타협점이다. 각자의 인생에서 장점을 찾으면 된다. 책을 쓴 것도 나처럼 살라는 게 아니다. 행복을 찾는 길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는 거다. 옛날에도 은둔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존중해 줬듯이. 최소한 니트족은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는다. 가만있는 게 상책인 사람들, 세상에 참 많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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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로-신진화가 60여명 작품 한자리에

    명망 있는 원로작가부터 톡톡 튀는 신진작가까지 국내 화가 60여 명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미술축제가 열린다. 미술평론지 미술과비평(Art&Criticism)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15일부터 ‘제7회 A&C 아트페스티벌(ACAF)’을 개최한다. 2008년부터 시작된 이 페스티벌에는 올해 회화와 조각 사진 판화 영상미디어를 아우르는 미술작품 1000여 점이 출품된다. ACAF는 기본적으로 운영위원들이 심의를 통해 공모에 당선한 신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 하지만 구자승 김구림 김형대 김형근 민경갑 박석원 서승원 전뢰진 최종태처럼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화가도 대거 참여했다. 운영위원장인 홍석창 홍익대 명예교수(동양화)는 “한국 현대미술의 경향과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유명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참여 작가의 작품 가운데 특별히 엄선한 것을 골라 100만 원 이하에 판매한다. 배병호 미술과비평 대표는 “작가와 수집가들이 소통하며 미술시장의 저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26일까지. 02-2231-4459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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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19세기 지도에 동해를 ‘조선해’ 표기

    19세기 일본 학자가 동해를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한 세계지도 원본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경희대혜정박물관(관장 김혜정)은 1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1844년 일본 미쓰쿠리 쇼고(箕作省吾)가 프랑스 지도를 참조해 제작한 ‘신제여지전도(新製輿地全圖)’에 조선해라고 분명하게 표기돼 있다”고 밝혔다. 신제여지전도는 지난해 국가기록원이 영인본(影印本)을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2011년 몽골에서도 실물이 전시됐으나, 국내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지도는 22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세계 고지도로 보는 동해’에서 일반에 선보인다. 신제여지전도는 한반도를 조선이라 표기하고 동해를 조선해라고 썼다. 태평양은 ‘대동양(大東洋)’, 일본 동쪽 앞바다를 ‘대일본해(大日本海)’라고 기록해 동해가 일본해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김 관장은 “제3자는 물론이고 일본조차 동해가 우리 바다임을 인정한 실증자료”라고 설명했다. 동서양 지도 70여 점을 전시하는 특별전에는 조선해를 명시한 지도 원본이 여럿 나왔다. 1810년 일본 에도(江戶)막부 천문 담당 관리였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가 막부의 명을 받아 만든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도 동해를 조선해, 일본 동쪽을 대일본해라고 표기했다. 1853년 일본에서 제작한 ‘지구만국방도(地球萬國方圖)’도 마찬가지다. 1760년 프랑스에서 만든 ‘아시아전도(L'ASIE DRESS´EE)’도 동해를 ‘한국해(MER DE COR´EE)’로 표기했다. 이 밖에 1770년 신경준(1712∼1781)이 제작한 ‘함경도·경기도·강원도 지도’(보물 제1598호)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진 강원도 지도와 고대 그리스 천문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15∼16세기 다시 그린 세계지도도 만날 수 있다. 다음 달 6일까지. 2500∼5000원. 02-580-1657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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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금나라 황릉, 개성 고려 왕릉 벤치마킹 했다

    《 ‘중국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2010년 북한 학계와 연계해 개성 지역 고려 황릉을 직접 방문 연구했으며, 2012년 중국에서 현지 실태조사를 벌였다. 장 교수는 고려도 황제국을 자처했기에 왕릉 대신 황릉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봤다. 고려와 금은 능 위치를 선정하는 기준부터 송과 달랐다. 세 나라 모두 풍수사상을 바탕에 뒀으나 적용하는 방식이 달랐다. 고려 황릉은 북쪽은 산이 둘러싸 높고, 남쪽은 낮고 물이 흐르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요지에 조성됐다.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도 하는데, 과학적으로도 겨울철 차가운 북서풍을 막고 물 공급도 용이하단 장점을 지녔다. 금나라도 장풍득수의 기준을 적용했다. 다만 태양을 숭배하는 여진족 성향이 반영돼 동남쪽으로 15% 정도 방향이 틀어져 있다. 반면 송나라는 능묘의 하관이 대략 서쪽으로 향한다. 송 황가는 조(趙)씨인데 오행설(五行說)의 목(木), 서쪽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치도 산을 앞에 두고 물을 뒤에 두는 배수면산(背水面山)을 선호했다. 장 교수는 “고려와 금은 산자락에 능을 조성하는데 송은 평지를 선택했다는 점도 다르다”고 설명했다. 규모나 부대시설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고려와 금 황릉은 ‘검박함’을 기본으로 했다.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백성에게 부담이 없도록 간략한 절차를 미덕으로 여긴 까닭이다. 금은 여진족 시절 별다른 국장제도가 없다가 고려를 따라 작은 규모의 황릉을 조성했다. 행궁(行宮·왕이 임시로 머무는 거처)과 능실(陵室·제례를 지내는 건물) 정도만 세우는 것도 닮았다. 반면 송 황릉은 마치 또 다른 궁궐이라도 짓듯 여러 건물을 웅장하게 세웠다. 장례 기간도 두 나라는 한 달 정도인 데 비해, 송나라는 7개월이 넘게 걸리곤 했다. 뭣보다 황릉의 봉토(封土·무덤에 흙을 쌓는 것) 형태 자체가 달랐다. 고려와 금 황릉은 동그란 원형인데, 송나라는 중국 진한시대부터 이어진 네모난 장방형(長方形)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후 명·청시대가 되면 봉토가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바뀐다. 장 교수는 “고려와 금은 황릉 근처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는데, 송나라에는 없는 이 풍습 역시 명과 청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황릉 주변 석조물도 구분된다. 고려와 금나라는 문무석을 포함해 14∼16기를 배치했다. 송은 코끼리에 타조, 심지어 마부와 외국 사신까지 최대 64기나 세웠다. 두 나라는 문무석상 크기가 2m 안팎인데, 송나라는 4m 가까이 됐다. 석호(石虎)도 송은 1.9∼2.3m로 양국보다 2배 이상 컸다. 표현 양식도 고려와 금은 간결한 생김새에 친숙하고 해학적인 맛을 살린 데 반해, 송나라는 정교하고 구체적이나 엄숙하고 위압적이다. 장 교수는 이번 발표를 계기로 향후 고려와 금 황릉의 출토 유물, 두 나라 황릉이 조선과 후금(청)에 끼친 영향도 연구할 계획이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고려와 금이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이란 건 어느 정도 인지돼 왔으나 직접 능을 비교 연구한 건 신선한 충격”이라며 “민족의 정통성을 제고한다는 측면에서도 이번 논문은 큰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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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어오고… 쫓겨나고… 아파트의 빛과 그림자

    어떤 이에게 그곳은 꿈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절망이기도 했다. 혹자에겐 보금자리였으며, 다른 이에겐 터전을 빼앗는 괴물이었다.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그 모든 것이었다.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개최한 특별전 ‘아파트 인생’은 관람할수록 감정이 혼란스러워졌다. 슬쩍 미소가 머금어졌다가 한숨이 나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몄다가 괜스레 너털웃음이 나왔다. 마치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처럼. 광복 뒤 1957년 처음 일반 분양했던 서울 성북구 종암아파트 이후 본격적으로 아파트단지의 시대를 연 건 1962년 마포형무소 자리에 세워졌던 마포아파트였다. 6층 10개동으로 이뤄졌던 이 아파트는 수세식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를 갖춘 현대식 아파트를 표방했으나, 결과는 이도 저도 없는 어정쩡한 형태였다. 전시된 당시 살림살이를 보면 부엌엔 아궁이가 들어섰고, 창문은 창호지로 도배한 나무 창살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아파트는 서민이나 최하층 노동자가 사는 공간이란 인식이 강했다. 정부도 골격만 지어놓고 내부 공사는 입주자가 알아서 하란 식이었다고 한다. 정수인 학예연구사는 “당시 서울시는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아파트’를 마구 세웠다”며 “1969년 한 해에만 서울에 406개동의 아파트를 건설했다”고 설명했다. 1970년 무너진 마포 와우아파트는 공사 기간이 단 3개월이었다. 1971년은 아파트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해였다. 용산구 한강맨션아파트에 최초로 싱크대를 만들었고 중앙난방을 도입했다. 본보기집(모델하우스)을 처음 선보인 것도 이 아파트였다. 같은 해 건설된 12층짜리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들어선 아파트였다. 아파트는 삶을 바꾸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1970년대부터 쾌적한 삶을 보장하는 중산층의 상징물이 됐지만, 반대로 아파트 건설과 함께 기존 거주자들이 쫓겨나는 아픔을 양산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당시 철거민은 서울 전체 인구의 20%, 약 70만 명에 이르렀단다. 대대적인 철거민 운동을 촉발한 계기도 아파트였다. 전시에서 가장 아련한 공간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오랜 세월을 그곳에 보낸 이들의 옛 사진들이 벽에 붙어 있다. 1983년 입주한 이 아파트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겐 고향과도 같은 존재지만 조만간 재건축에 들어갈 예정. 정 학예사는 “스스로 아파트 키드라고 부르는 이들은 이제 곧 또 다른 의미의 ‘실향민’이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1978년 건립된 서초삼호아파트의 한 가구를 통째로 옮겨놓은 전시장도 인상적이다. 5월 6일까지. 무료. 02-724-027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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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수상한 맛, 황홀한 맛, 유쾌한 맛

    7일 시즌2가 시작된 tvN ‘꽃보다 할배’. 지난해 방영 때 이서진은 독특한 김치찌개를 어르신들에게 대접했다. 김치 대신 독일식 양배추 절임인 ‘사워크라우트(sauerkraut)’를 넣었는데 그 맛이 거의 흡사했던 것. 근데 실은 유럽에서 자취해본 이에게 이 요리법은 낯설지 않다. 사워크라우트와 소시지에 라면 수프를 넣고 끓이는 비법(?)으로 고향 음식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그런데 먹으면서도 신기했던 이 찌개 맛엔 숨겨진 역사가 있었다. 안성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부교수는 김치와 사워크라우트가 먼(어쩌면 가까운) 친척이었음을 소개한다. 고유한 전통음식이라 믿는 독일인에겐 미안하지만, 유럽을 휩쓴 몽골이 고려의 김치나 중국 김치 쏸차이(酸采)를 전파한 것이었다. 원래 사워크라우트도 ‘신맛 나는 채소 혹은 배추’라는 뜻. 독일 위키피디아도 가장 유사한 발효음식으로 한국 김치를 꼽는단다. 이 책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18세기학회에 소속된 학자 21명이 한 주제씩 맡아 썼다. 정민(한양대)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김시덕 이종묵 정병설 주경철(이상 서울대)…. 중량감 있으면서도 대중적 글쓰기에 능한 필진이 대거 참여했다. 일본18세기학회원인 오이시 가즈요시(大石和欣) 도쿄대 교수와 하시모토 지카코(橋本周子)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도 원고를 실었다. 한일 학자들이 힘을 모아 18세기 세계의 입맛을 두루두루 고찰한 셈이다. 왜 하필 18세기 음식문화에 주목했을까. 안 교수에 따르면 당시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고급스러운 음식이 대중화되고, 이국적 음식이 세계화되는 변화가 크게 일어난 시대”다. 또 저평가됐던 맛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중세의 금욕적 분위기를 벗고 대중적으로 욕망과 소비를 추구하는 문화가 발흥된 때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한 사워크라우트가 독일 민족음식으로 자리 잡고, 대항해시대가 절정기를 맞으며 선원들의 괴혈병 방지에 이 요리가 최고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18세기였다. 각 꼭지가 다 재밌지만, 역시 우리 음식을 다룬 글들에 눈길이 간다. 지금은 사시사철 먹는 복(鰒)은 18세기엔 봄철에만 먹는 서울 음식이었다. 봄이면 한강을 거슬러 복어 떼가 올라오는데 복사꽃이 지기 전(5월경)에 먹어야 참맛을 안다고 했다. 그 시절에도 중독 사고가 잦았는데, 사대부들조차 찬반으로 갈리어 논쟁을 벌였다. 참고로 ‘鰒’은 전복을 가리키는 한자어라 당시엔 ‘하돈(河豚)’, 물돼지라 불렀단다. 18세기 일본에서 유행한 조선 음식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도 음식도 아닌 ‘우육환(牛肉丸·쇠고기 환약)’이다. 16세기부터 메이지유신 때까지 일본은 종교적 이유로 쇠고기 식용을 금했다. 다만 약으로 복용하는 것만 허용했는데, 이게 한반도에서 제조법이 전해진 우육환이었다. 일종의 육포로 만든 알약인데, 역시 ‘원조’의 인기가 남달랐던지 (조선과 가까운) 쓰시마 섬에서 만들어 조선 우육환이라 광고해야 잘 팔렸다. ‘18세기의 맛’은 유쾌한 책이다. 필자마다 다소 차이가 있긴 해도 인터넷에 연재했던 이력 덕분인지 글이 쉽고 편하다. 18세기 음식이란 주제로 한정했는데도 이렇게 무궁무진한 얘깃거리가 있다는 점도 놀랍다. 아쉬운 점도 있다. 사료도 부족했을 테고 취향도 작용했겠지만 너무 한국이 속한 동북아시아와 유럽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태국 베트남 요리나, 잠깐 감자 편에서 언급할 뿐인 아메리카 대륙 음식도 소개했으면 좋았겠다. 겹치는 대목도 상당한데 영국을 네 차례 이상 다룬 건 좀 과하다. 어쨌든 책을 덮고 나니 쩝쩝 입맛 다셔지는 게 많다. 문득 정월 돼지날(亥日) 세 번에 걸쳐 담근다는 ‘삼해주(三亥酒)’에 복지리 한 사발이 확 당긴다. 카, 18세기라….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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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건 나와라 뚝딱” 남대문시장에 가면 한국사가 보인다

    ‘숭례문 앞 저자가 이른 새벽 열리어/칠패 사람들의 말소리 성 너머로 들려오네./바구니 들고 나간 계집종이 늦는 걸 보니/신선한 생선 몇 마리 구할 수 있겠구나.’(다산 정약용의 시 ‘춘일동천잡시’ 중) 서울 중구에 있는 남대문시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이다. 점포 약 1만 개가 밀집해 1700여 종의 상품을 취급하며, 하루 평균 이용객만 40만 명이 넘는다. 남대문시장엔 “고양이 뿔 빼고 다 있다”고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남대문시장’을 발간해 이 시장의 남다른 역사를 조명했다. 남대문(숭례문) 주변은 조선 건국 때부터 인근 종로 시전행랑(市廛行廊)의 영향으로 크고 작은 장이 섰다. 본격적으로 시장 공간이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다. 조선 후기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한양 장시(場市·정기시장)는 4곳. 현 종각 주변인 종루가상(鐘樓街上)과 종로4가 부근 이현(梨峴), 서소문 바깥 소의문외(昭義門外), 그리고 남대문의 칠패(七牌)였다. 칠패란 원래 왕을 호위하던 어영청 소속 군인을 일컫는 말. 이들 초소가 남대문 근처에 있어 남대문시장을 칠패장이라 불렀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소금과 자기, 볏짚이나 싸리, 대나무 제품과 젓갈류를 많이 취급했다. 난전(亂廛) 성향이 강했던 시장이 지금 위치에 정착한 건 1897년 도시근대화사업의 하나로 선혜청 창고 터에 창내장(倉內場)이란 시장을 만들면서부터다. 현 남대문시장 A동과 B동 사이쯤이다. 윤남률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매일 새벽에 열리던 아침시장(朝市)과 구분되는 근대적 상설시장이 최초로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개항 직후라 해외 상인도 몰렸는데 1907년 기준 조선인 50%, 일본인 30%, 중국인 20%로 구성됐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시장 규모 2위였던 동대문시장보다 거래액이 2.6배 이상 컸다. 융성하던 시장도 일제강점기는 비켜가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시장규칙’을 반포하면서 구식시장이라며 남대문시장의 해체를 시도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시장이 살아남은 건 친일파 덕분(?)이었다. 매국노 송병준(1858∼1925)이 운영하던 조선농업회사가 운영권을 따내며 허가 취소를 막은 것. 그 대신 엄청난 자릿세를 뜯어갔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일본인 전직 관료나 경제인이 관리하며 이권을 챙겼다. 광복 이후에도 고초는 이어졌다. 6·25전쟁과 1000여 점포가 전소한 1954년 대화재도 한몫했지만, 깡패조직 명동파의 지류였던 ‘엄복만파’가 상인들의 고혈을 짜냈다. 1922년생으로 알려진 엄복만은 대화재 때 전국에서 보낸 성금까지 착복할 정도였다. 1957년 서울시가 남대문시장상인연합회에 운영권을 이양하며 주먹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양키시장’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며 발전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뭐든 구할 수 있고, 단속반을 피해 잽싸게 치고 빠진다는 명성을 얻었다. 1967년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외국 언론이 (남대문시장을) ‘악마의 골목(devil's alley)’으로 번역해 소개했다”고 전했다. 월남한 실향민이 다수 정착해 ‘아바이시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1968년 남대문시장은 또다시 화재를 겪었지만 발 빠르게 회복하며 지금 모습으로 자리잡아갔다. 1980년대에는 주방용품 주단포목 공예품 골목이 형성되며 전문상가 중심 시장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윤 학예사는 “1990년대부터 외환위기와 동대문시장의 성장으로 부침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과 영향력을 지닌 남대문시장은 한국을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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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금하다! 겸재가 그린 인물화

    “선비가 태어나 부귀와 함께하다가 기록되지 못하기보다는 한 가지 기예로라도 이름이 나야 한다고 했으니 … 겸옹(謙翁)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그림으로 덮인 바 있으니 이를 아는 이가 없네.” 조선 영정조 때 문신 박사해(1711∼?)가 지은 ‘창암집(蒼巖集)’에 나오는 글이다. 여기서 겸옹은 겸재 정선(1676∼1759)을 말한다. 겸재는 한반도의 산세를 독자적 필치로 표출한 진경산수의 대가다. 국보 제216호인 ‘인왕제색도’나 제217호 ‘금강전도’를 비롯한 걸작 산수화를 숱하게 남겼다. 하지만 그가 인물화, 특히 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사(故事) 인물화도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겸재정선기념관이 최근 창간한 학술지 ‘겸재와 미술인문학 연구’에는 겸재의 인물화에 초점을 맞춘 논문 2편이 게재됐다. 송희경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와 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각각 ‘정선의 고사 인물화’ ‘겸재 정선의 인물화’를 통해 겸재의 인물화를 새로이 조명했다. 겸재가 고사 인물화를 즐겨 그린 데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 주위 환경이 크게 작용했다. 박사해가 안타까워했듯 겸재는 상당한 내공을 지닌 유학자였다. 그만큼 옛 선인들의 고사에 해박했으며 관심이 높았다. 게다가 북악산 기슭에서 태어난 겸재는 어릴 적 안동 김씨 명문가 문하를 드나들며 성리학과 시문을 배웠다. 송 교수는 “겸재는 정통 노론에 영향을 깊이 받아 주자학에 오래도록 심취했다”며 “친교를 맺은 사대부들의 요청이 잦았던 것도 고사 인물화를 많이 그린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겸재가 그린 역사적 인물은 참으로 다양하다. 공자가 제자들과 경전을 읽고 음악을 즐긴다는 내용인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와 제갈량이 와룡강에 은거했을 때를 담은 ‘초당춘수도(草堂春睡圖)’, 노자를 소재 삼은 ‘기우출관도(騎牛出關圖)’, 한나라 개국공신 장량을 그린 ‘야수소서도(夜授素書圖)’도 전해진다. 그 가운데 송대육현(宋代六賢·중국 송나라 여섯 명의 성리학자인 소옹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사마광)을 겸재는 가장 즐겨 그렸다. 특히 주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이·1033∼1107) 형제에 애착이 커 ‘부강정박도(溥江停泊圖)’ ‘방화수류도(訪華隨柳圖)’ ‘정문입설도(程門立雪圖)’를 포함해 관련 고사 인물도를 여러 점 그렸다. 겸재가 그린 인물화는 주로 자연을 배경으로 고사 속 인물을 배치하는 산수인물화였다. 당대 최신 중국 화단의 흐름을 꿰뚫고 있던 그는 문인화의 대표 격인 남종화(南宗畵)를 근간으로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수묵담채화를 펼쳤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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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단계 거쳐야 철커덕… 조선시대 자물쇠 지금보다 낫네

    순수한 우리말 ‘ㅱ므다(잠그다)’와 ‘쇠붙이’의 합성어인 자물쇠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됐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목가구나 건물을 함부로 열지 못하게 채워두는 장석(裝錫·장식이나 개폐용으로 부착하는 쇠붙이)의 일종으로, 선조들의 과학적 예술적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겼다. 국가지정문화재로는 리움이 소장한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보물 제777호 ‘금동 쇄금(鎖金·자물쇠)’과 경북 김천시 직지사에 있는 고려시대 ‘예천 한천사 자물쇠’(보물 제1141호)가 있다. 자물쇠는 일반적인 ‘ㄷ’자 형태의 대롱자물쇠를 비롯해 가운데가 둥그런 함박형, 동물 모양을 본뜬 물상(物象)형처럼 생김새에 따라 다양하다. 재료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는데, 고대에는 주로 철로 제작됐으나 조선 초·중기는 청동(구리와 주석 합금)이나 금도금을 한 금동으로 많이 만들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황동(구리와 아연 합금), 말기에는 백동(구리와 니켈 합금) 자물쇠가 유행했다. 지금이야 생체인식기술이 도입될 정도로 보안방지시스템이 발전했지만, 한반도의 자물쇠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전통자물쇠 전문가인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교육문화과장에 따르면 열쇠를 꽂아 돌리면 바로 열리는 단순한 것부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풀리는 복잡한 자물쇠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다단계 자물쇠는 경남 진주시 향토민속관(옛 태정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한 ‘백동 8단 비밀 자물쇠’다. 백동으로 만들어진 걸로 볼 때 조선 말기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 그대로 이 자물쇠는 8단계 작업을 거쳐야만 열린다. 일단 이 자물쇠 본체는 처음 보면 열쇠 구멍이 없다. 왼쪽 꽃무늬 광두정(廣頭釘·머리가 넓은 못)을 누르고 줏대를 민 다음 오른쪽 판을 180도 회전시켜야 철커덕 열쇠 구멍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대로는 열쇠가 들어가질 않고 자물쇠 밑면 광두정 하나를 다시 밀어 넣어야 열쇠 구멍이 마저 열린다. 구멍이 열렸다고 열쇠를 그냥 꽂는 것도 아니다. 일단 열쇠를 본체와 직각으로 만들어 끝에 ‘ㄱ’로 달린 부분만 안으로 감듯이 넣는다. 이후 열쇠를 돌려야 딱 걸리는 부분에서 쑥 들어가고, 다시 열쇠를 수평으로 90도 틀어서 천천히 밀면 그제야 고삐가 풀린다. 자물쇠 내부는 더 놀랍다. 본체를 해체해 보면 안쪽 아래 판은 배흘림 구조를 지녔는데, 가운데는 살짝 오목해서 스프링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오랫동안 사용해도 헐거워지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자물쇠 속 뭉치 역시 탄력을 부여해 열쇠를 뺐을 때 안쪽 장치가 원위치로 돌아가도록 세밀하게 조정돼 있다. 윤 과장은 “이런 복잡한 설계 구조를 지닌 자물쇠는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서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며 “정확한 합금 및 주조 기술을 지니지 않으면 제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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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 ‘전재국 컬렉션’ 경매… 김홍주그림 25점 눈길

    12일 K옥션이 개최하는 ‘전재국 미술품 컬렉션’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 마지막 경매다. 하지만 미술계는 그 역사적 상징성과 별개로 이번 경매에 관심이 크다. ‘꽃의 화가’ 김홍주 목원대 명예교수(69)의 작품이 대거 25점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작품은 신라호텔 로비에 걸린 꽃 그림(실제 제목은 모두 ‘무제’) 외엔 난도가 무척 높다. 특히 인물화 풍경화가 다수인 초·중기 작은 “이래서 화가들이 사랑한 화가구나”라며 머리를 긁적이게 만들었다. 대단한 듯한데 선뜻 좋단 소리는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를 낯선 독특함은 여운이 길었다. 한 관계자는 “전 씨가 김 교수의 시대별 작품을 이만큼 모은 걸 보면 미술관 설립을 꿈꿨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딴 건 어려워 그냥 넘겨도 꽃 그림 4점을 동시에 보는 황홀경은 놓치기 아깝다. 작품당 최소 추정가가 3000만 원이니 입맛만 다실 뿐이지만. 11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 전시장. 02-3479-8888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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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0년전 신비… 또 하나의 천마도 ‘햇빛’

    ‘하늘을 나는 말’ 경주 천마총의 또 다른 천마도가 발굴 41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3일 “최근 보존 처리를 완료한 ‘백화수피(白樺樹皮·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국보 제207호 천마도 장니(障泥·말다래) 1점과 죽제(竹製) 천마도 말다래 1점을 처음으로 일반에 선보인다”고 밝혔다. 천마도는 신라 회화로는 유일하게 남은 작품으로 천마총 부장품인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다. 말다래란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가죽이나 천, 나무껍질 장식을 말한다. 1973년 발굴 당시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는 모두 6개. 자작나무와 대나무, 칠기(漆器·옻칠한 나무)로 제작한 말다래가 각각 1쌍씩 존재했다. 이 중 국보로 지정된 백화수피 천마도 2점 중 상태가 온전했던 것만 공개됐다. 다른 백화수피 1점과 대나무 천마도 1점은 오랜 복원 과정을 거쳐 이번에 공개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대나무 1점과 칠기 1쌍은 훼손이 심각해 지금은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천마도에 숨겨진 비밀도 추가로 드러났다. 자작나무 천마도는 안장에 매다는 교구(교具·띠고리)가 있었던 사실이 확인돼 이를 복원했다. 대나무 천마도는 얇은 대나무살을 엮어 바탕을 만든 뒤 앞에 삼베로 짠 천을 댔다. 여기에 천마도의 세부적 문양을 크고 작은 금동 판을 조합해 장식했다는 것도 3차원(3D) 스캔과 X선 촬영을 통해 새로 찾아냈다. 박물관은 이러한 연구 성과와 함께 천마도 진품 3점을 함께 만날 수 있는 특별전 ‘천마, 다시 날다’를 18일부터 개최한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1차 전시는 18일부터 다음 달 6일까지 진행하며 2차(다음 달 29일∼5월 18일)와 3차(6월 3∼22일)로 나눠 제한 공개한다. 무료. 054-740-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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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호·모·쿠·킹·쿠·스

    “제가 한번 먹어보겠습니다.” 지난해 유행어라면 뭐가 있을까. 다양한 의견이 나오겠지만, 채널A 프로그램 ‘먹거리 X파일’을 진행하는 이영돈 PD의 한마디도 꽤나 회자됐다. 아울러 방송이 선정한 ‘착한 식당’은 방송 때마다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오르곤 했다. 개인적으로 착한 떡집에 혹해 전화를 걸었다가 몇 개월 뒤까지 주문이 찼다는 답에 절망했던 적도 있다. 어쩌면 이는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먹거리에 관심이 큰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뿐이다. TV 채널마다 근사한 맛집과 음식을 다루는 정보물을 틀지 않는 데가 없다. 심지어 요리 대결 서바이벌에 ‘먹방’이란 신조어도 자연스러워졌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토록 열망이 큰 풍조와는 어울리지 않게 직접 요리에 들이는 노력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책에 따르면 미국 가정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1960년대보다 절반 이상 줄어서 하루 평균 27분밖에 되질 않는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위를 둘러봐도 즉석식품이나 배달요리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인 저자는 줄기차게 음식문화를 다룬 책을 써온 인물. 특히 2008년 동아일보 올해의 책 10에 선정되기도 했던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세상)는 큰 화제를 모았다. 잡식성인 인간은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안전한 식탁을 마련했다고 믿었으나, 그 뒤에 가려진 ‘음식사슬’의 구조적 폐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저자가 이번엔 직접 요리에 뛰어들었다. 현대사회가 지닌 ‘요리의 역설(cooking paradox)’ 기저에 깔린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리 자체에선 멀어지면서 착한 음식에 대한 갈구는 커져가는 현실 속에서, 몸으로 요리를 겪어가며 그 본질을 탐구하려는 욕심이었다. 책에선 인류의 요리법을 4가지 요소로 구분한다. 고기나 생선을 굽는 ‘불’과 무언가를 담아 끓이거나 조리는 ‘물’, 서양인의 주식인 빵을 만드는 데 핵심인 ‘공기’, 그리고 저자가 차가운 불이라고 부르는 발효를 다룬 ‘흙’이다. 고대 서양에서 만물을 구성하는 4원소라고 믿었던 요소를 요리에 접목한 것이다. 저자는 1년 넘게 공들인 취재와 체험을 사회문화사에 비춰가며 쫄깃쫄깃하게 버무려놓는다. 예를 들어, 불은 인류가 가장 먼저 발견한 요리법이자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짓는 결정적 계기였다. 날것을 먹느라 소비하는 생체에너지와 시간을 줄여 문명의 발전에 투입할 여력을 얻었다. 또한 야외에서 함께 고기를 굽는 문화는 인류가 신께 제물을 바친 뒤 이를 나눠먹는 종교적 의례가 기원이다. 동물을 구워 그 영혼(연기)은 하늘에 바치고, 신이 허락한 잔해를 먹는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불은 인간이 신과 자연 가운데 위치하도록(맘껏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도록) 철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죄부가 됐다. 저자는 더 나아가 통돼지 바비큐 전문가를 찾아 직접 요리 현장을 겪어본다. 바비큐는 미국에서 남부 흑인문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전통 요리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먹는 고기는 대부분 잔인한 대량사육의 결과물이며, 숯이나 소스는 더이상 복합화학성분이 빠지지 않는다. 물론 최근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옛 방식’을 찾는 이가 늘고 있지만, 이는 비용과 시간이 갑절 이상 든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여전히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다소 냉소적으로 흘렀지만, 사실 이 책은 그 절망의 한계를 뛰어넘는 희망을 요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흙, 발효는 저자가 가장 깊이 끌린 요리법이다. 여러 난관이 있지만 인간은 직접 요리하는 ‘문화적 창조’를 통해 오감을 깨우고 자연이나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배운다고 자신했다. “(요리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신이 자연과 생생한 대화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일들은 발효에 참여한 살아있는 생물들과의 작업이다. … 우리가 성공을 거두려면 그러한 관계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특히 저자는 발효음식의 세계적 대표주자 ‘김치’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김치를 알려고 한국까지 찾아오는데, 이연희라는 분에게 김장을 배우며 요리가 지닌 본질을 깨닫는다. 이 씨는 “맥도널드 햄버거도 입맛은 있다. 하지만 한국인에겐 손맛이 더 중요하다”고 일러준다. 손맛이 뭔지 몰라 당황하던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되짚어가며 그 깊은 의미를 알아차린다. 음식에 들어가는 정성과 생각, 개성이 한데 버무려진 맛. 요리는 인간을 북돋우는 치료제였던 것이다. 거대산업과 현대문명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고민하는 이들이여. 얼른 주방에 들어가 요리하라. 인간은 호모 ‘요리’쿠스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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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승 선정때 성현들의 스토리텔링도 본다

    ‘높다란 뿔 하나가 창공에 꽂혀 있어/남쪽 땅 진압하는 그 기세 당당하네/두힐(전라 나주 지역 백제시대 지명)로 봉했던 곳 청해 안이 거기더냐.’(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시 ‘월출산 정상에 올라서·登月出山絶頂’에서) 전남 영암군에 있는 월출산은 예부터 영험한 기세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조선 지리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선 ‘작은 금강산’이라 불렀으며 정약용은 물론이고 기대승(1527∼1572) 이유원(1814∼1888) 등 여러 문인이 글을 남겼다. 특히 다산과 친분이 깊던 초의선사(1786∼1866)는 1812년 그린 ‘백운동도(白雲洞圖)’에서 월출산의 뾰족한 봉우리 생김새를 잘 표현했다. 문화재청은 최근 월출산처럼 충청 전라에서 역사적 향취가 담긴 장소를 모은 종합보고서 ‘고서화 고문헌 등에 나타난 명승자원 발굴조사’를 발표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은 그간 경관적 요소를 중시했으나 앞으론 옛 글과 그림의 흔적을 좇아 ‘인문학적인 스토리텔링’도 발굴해 선정 기준으로 삼겠다는 의도다. 이번 조사에서 월출산과 함께 뽑힌 우선지정대상 가운데 전북 부안군 봉래곡 직소폭포도 눈에 띈다. 구한말 우국지사 송병선(1836∼1905)은 직소폭포를 “설악산 구룡폭포나 개성 박연폭포와 비교해도 손색없다”고 극찬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이 소장한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우금암도(禹金巖圖)’에는 보이는 대로 담은 폭포 물결이 춤을 춘다. 이 밖에 △대전 동구 남간정사(南澗精舍) △충북 영동군 황간 한천팔경(寒泉八景) △전남 구례군 오산 사성암(四聖庵) 인근도 우선지정대상 명승 자원으로 선정됐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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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王 나들이용 접이식 의자 보셨나요

    지금까지 국내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왕의 나들이용 접이식 의자인 ‘용교의(龍交椅)’가 경매에 나왔다. 고미술품 경매사인 ㈜마이아트옥션은 26일 “다음 달 열릴 제12회 경매에 조선 왕이 야외에서 사용하던 용교의가 출품된다”고 밝혔다. 높이 108cm의 이 나무의자는 피나무 소재에 금색이 가미된 붉은색 주칠(朱漆)을 칠하고 금장식을 입힌 왕의 전용 의자. 왕세자는 흑칠(黑漆) 가구를 썼다. 등받이에는 네 발가락 용 한 쌍이 여의주를 감싼 문양판이 있으며, 바닥은 호피로 만들어졌다. 의자 다리는 X자로 교차를 이뤄 접을 수 있다. 조선 왕실 의자가 경매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용교의는 그동안 국내에선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용교의 하나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사한 유물도 조선 현종이 1669년 문신 이경석(1595∼1671)에게 하사한 궤(의자)밖에 없다. 김정민 마이아트옥션 경매사는 “출처는 밝힐 수 없으나 조선 왕실 후손 쪽과 관련 있다”며 “최저가 5억 원부터 경매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경매에는 역시 궁궐에서 사용하던 10폭 병풍그림 ‘요지연도(瑤池宴圖·360×149cm)’도 출품됐다. 도교 여신인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의 요지에서 열린 연회 모습을 담은 것으로 왕실의 번영과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지녔다. 지난해 6억6000만 원에 낙찰된 10폭 병풍그림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는 이 연회 장면의 일부를 그린 것이다. 현재 요지연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된 8폭 병풍을 비롯해 15점 정도가 전해진다. 경매 가격은 6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현재 심사정(1707∼1769)이 그린 ‘수하선인도(樹下仙人圖)’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보관함에 ‘단원 김홍도 필적’이라고 쓴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1393호인 리움 소장 ‘추성부도’와 다른 작품)’도 나왔다. 다음 달 6∼1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전시되며, 13일 오후 5시 같은 장소에서 경매가 이뤄진다. 02-735-9938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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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개성상인 복식부기 장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식 복식부기’인 19세기 ‘개성 복식부기 장부’가 등록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26일 “근대기 개성 지역에서 활동했던 박재도(朴在燾) 상인 집안의 회계 장부 14책과 다수의 관련 문서를 등록문화재 제587호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이 장부는 25년(1887∼1912년) 동안 거래한 내용 약 30만 건이 기재돼 있는 데다 현대적 회계 방식과 거의 일치하는 복식부기로 작성돼 있다. 후손인 박영진 씨가 소장한 이 문화재는 지난해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본보가 단독 보도하며 알려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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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화가가 그린 ‘無心하되 多心한’ 표정들

    아무리 제주라 해도 칼바람이 불었을 지난달, 강요배 작가(62)는 목탄 하나 손에 쥐고 삼성혈로 나섰다. 옷깃 여며가며 돌하르방 하나 쓱쓱. 담배 한 대 피우고 또 하나 뚝딱. 대정골 보성골 관덕정까지 넘나들며 한나절 만에 돌하르방 12점을 그렸다. “수십 년 마주쳤어도 직접 그려보니 그 기(氣)가 다릅디다. 소묘는 그런 날것의 싱싱함이 살아있죠.”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열린 개인전 ‘강요배 소묘 1985∼2014’엔 실제로 그런 활어회 같은 작품이 즐비하다. 모두 53점이 소개됐는데 “전시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스케치인지라 다소 투박한 것도 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민중화가로 명성을 얻은 작가의 내밀한 속내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어 꽤나 감칠맛이 났다. 특히 ‘해금강’ ‘만폭동’을 비롯해 1998년 방북 때 그렸다는 작품들은 빠듯한 일정이었다는데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2000년에 그렸다는 인물 소묘들은 당시 북한 주민을 만났던 기억을 되살려 작업한 것. 전체적으로 풍경이나 정물 작품들도 뛰어나지만, 돌하르방이나 인물 소묘에서 불거지는 ‘무심(無心)하되 다심(多心)한’ 표정들이 발길을 잡는다. 3월 30일까지. 02-720-1524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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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단신]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外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소장 임지현)는 제1회 ‘국경을 넘는 어린이·청소년 역사책’ 수상작으로 어린이 부문 대상 ‘우리 역사에 뿌리내린 외국인들’(해와나무)과 장려상 ‘제술관을 따라 하루하루 펼쳐보는 조선통신사 여행길’(그린북), 청소년 부문 장려상 ‘십대를 위한 동아시아사 교과서’(뜨인돌)를 선정했다. 초국적 역사 이해에 기여하고, 다문화사회에 걸맞은 공존의 윤리를 구현한 책에 주어지는 이 상의 시상식은 28일 오후 2시 서울 왕십리로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 6층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이귀영)은 조선의 왕실문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이달부터 운영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교과서 속 왕실유물’과 성인들이 궁중 수라상을 체험하는 ‘수라간 최고상궁’을 비롯한 38가지 프로그램이 1년 내내 운영된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gogung.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02-3701-7500}

    • 201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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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봉길 의사 “따뜻한 악수와 키스로 다시 만나자”

    “어머니의 하서(下書)를 봉독하오니 훈계하신 말씀, 전신에 소름이 끼치고 뼈끝까지 아르르해지며 이놈의 눈에도 때 아닌 낙숫물이 뚝뚝 (흐릅니다.) … 저는 우로(雨露)와 강산과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말씀대로 지금 귀성한다면 이 불초 봉길이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1930년 10월 중국 칭다오에서 보낸 편지에서) 아들은 조국산천 어머니의 근심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허나 “장구한 시일을 두고 과거사도 묵상했고 미래사도 암료(暗料·깊이 헤아리다)한” 결심을 어찌 바꾸겠는가. 이역만리 객지에서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스스로 택한 애국의 길을 의연히 걸어갔다. 1932년 4월 29일 일제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져 한민족 기개를 만방에 떨친 의사 매헌 윤봉길. 그에게 1931년 상하이로 가기 전 칭다오에서 1년은 그냥 흘려보낸 세월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를 다시금 다지고, 거리낌 없이 독립운동에 나서려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이번에 처음 정확한 이름이 밝혀진 일본인 나카하라 겐지로(中原兼次郞)가 운영하는 세탁소에 매헌이 취직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녔다. 1930년 3월 처음 집을 나섰을 땐 곧장 만주로 가 독립단에 뛰어들려 했으나, 망명길에 만난 김태식(金泰植)의 설득으로 이곳에서 일단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한시준 교수는 “일단 중국은 물론이고 국외 체류 자체가 생경한 윤 의사가 생전 처음 직장에 취직해 현지 분위기를 익히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돈을 모아야 할 이유도 있었다. 마음을 무겁게 했던 빚을 탕감해야 했다. 훗날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에게 전한 자필 이력서를 보면, 세탁소 월급을 모아 ‘월진회(月進會)’ 자금 50원을 갚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윤 의사는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농촌 계몽 운동 조직인 월진회 활동을 벌였는데, 망명 당시 이 회비를 무단으로 가져왔던 것. 독립운동이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매조지 하는 의사의 맑은 성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칭다오에서 윤 의사는 가족에게 편지 2통을 보냈다. 1930년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뒤 이듬해 상하이로 떠나기 직전 맏아들 종(淙)에게 서신을 부쳤다. 의사는 “종아! 너는 아비가 없음이 아니다. 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해 잠시적 역행이지 하년(何年) 세월로 영구적 전전이 아니다”며 “후일에 따뜻한 악수와 따뜻한 키스로 만나자”고 다독였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가 쓴 ‘자유의 불꽃을 목숨으로 피운 윤봉길’(역사공간)엔 의사의 인정어린 면모도 드러난다. 칭다오에서 알고 지낸 한일진(韓一眞)이란 친구가 미국행을 결심하자 수중에 있던 돈을 털어 여비로 건넸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뒷날 한일진은 미국에서 의거 소식을 듣고 “평생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며 의사의 고향집에 돈을 보냈다고 한다. 뭣보다 나카하라 세탁소의 실존이 확인되며 그간 미스터리였던 ‘어떻게 일제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훙커우 공원에 들어갔는가’의 해답을 찾는 일도 큰 진전을 이뤘다. 그간 윤 의사의 행사장 입장을 놓고 △중국 경비 회유 △비밀출구 잠입 △일본인 위장 △강행 돌파 등 여러 설이 분분했다. 하지만 이규창 선생은 회고록 ‘운명의 여진’에서 “(의사는) 세탁소 노부부를 부축하고 일본 국기를 들고 입장해 축하대 앞자리에 앉았다”며 “일본인 세탁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거사하기가 쉬웠던 것”이라고 전했다. 김광만 PD는 그간 연구가 미진했던 윤 의사의 칭다오 흔적을 찾으려 중국과 일본을 수차례 오갔다. 오랜 추적 끝에 지난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윤 의사가 이력서에서 언급한 나카하라 세탁소를 칭다오 업체명이 실린 1931년 ‘중국상공지도집성’에서 마침내 찾았다. 이를 기반으로 역시 처음 발굴한, 같은 해 찍은 일본 지도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서 위치를 확인했다. 김 PD는 “칭다오 현지에 갔더니 이미 다른 건축물이 들어섰지만 당시 도로가 그대로 남아 정확한 지점 확인이 가능했다”며 “우리 역사의 잔향이 밴 장소인 만큼 중국 정부와 협의해 표지석을 세우는 사업을 추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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