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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솟은 바위 사이로 파도 치는 바다의 풍경이 펼쳐진다. 서로 다른 곳에서 촬영한 두 장의 사진을 마치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것처럼 배치한 이순심 작가의 작품 ‘Connection #007’이다. 이 작가의 개인전 ‘관계-시공을 넘나드는 관계항’이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22에서 25일까지 열린다. 10년간 전국 각지를 돌며 바위 사진을 찍어온 이 작가는 “바위는 구름, 바람, 그리고 파도와 어우러져 자신들의 역사를 온몸으로 드러낸다”며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바위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전시에서는 18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이 작품들에 대해 “거대한 돌기둥 두 개 뒤로 펼쳐진 공간은 우주의 풍경 같다”고 했다.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울 중구 동국대박물관이 올해 개관 60주년을 맞아 11일부터 박물관 소장 성보(聖寶) 50여 점을 선보이는 특별전 ‘東國에 오신 부처님’을 연다. 이번 전시의 대표 유물은 ‘목조관음보살입상’(사진)이다. 높이 93.7cm 크기에 화려한 보관(寶冠)과 꽃 모양 귀걸이, 옷자락을 장식한 조선 불교 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이번 전시에선 보살상에서 나온 생금(生金)과 생은(生銀), 진주 등 복장(腹藏) 유물을 최초 공개한다. 복장 유물 가운데 초록 비단으로 만든 조성기(造成記)엔 붉은 글씨로 1620년을 뜻하는 ‘萬曆 四十八年(만력 48년)’이 적혀 있어 명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다. 임영애 동국대박물관장은 “값비싼 금과 진주 등 격 높은 복장 유물을 토대로 조선 왕실에서 제작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며 “문화재청과 함께 이 유물의 보물 지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구 용연사 영산회상도’도 선보인다. 불화 하단의 화기(畵記)에 1777년 용연사에서 제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775년 제작된 ‘통도사 영산회상도’를 그린 정총 등 승려 장인 11명이 함께 그린 불화 걸작이다. 이 밖에도 1637년 제작된 ‘목조아미타삼존불감’ 등 다채로운 불교 유물을 만날 수 있다. 12월 26일까지. 무료.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일제강점기, 문중(門中)과 함께 만주로 떠나온 여성들에게 한글은 기록할 수 있는 힘을 줬다. 이들이 쓴 ‘만주 망명 가사’는 조선 부녀자들이 한글로 남긴 문학 ‘내방가사(內房歌辭)’를 대표하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9일 한글날을 맞아 일제강점기 우리말로 독립 의지를 노래한 만주 망명 가사를 살펴봤다. “이내 몸도 슬프나 우리 의병 불쌍하다/배고프다 한들 먹을 수 없고 춥다 한들 춥다 할 수 없네/…엄동설한 찬바람에 잠을 잔들 잘 수 있나/동쪽 하늘 밝아지니 아침거리 걱정이라”(‘산새타령’ 중에서) 1923년 여성 독립운동가 윤희순 의사(1860∼1935)가 만주로 망명해 학당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이끌던 시절 지은 가사다. 1911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윤 의사는 랴오닝(遼寧)성 번시(本溪)시에 학당을 세웠다. 이곳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는 약 50명. 윤 의사는 자신의 안위보다 이들에게 먹일 한 끼 아침거리를 더 걱정했다. 타향에서 매일 아침 중국인의 집을 돌며 끼니를 구걸하는 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윤 의사는 중국인들에게 “우리가 목숨을 내걸고 일제와 싸울 테니, 당신들은 우리에게 끼니를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당당한 태도가 묻어나는 말이다. 고순희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논문 ‘만주 망명과 여성의 힘’에서 “‘산새타령’은 윤 의사가 만주에서 남편과 자식들을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항일 인재를 양성하고 앞장서서 이들을 거둬 먹인 독립운동의 실질적 지도자였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했다. “남녀가 평등하니/…법국(프랑스)의 나란 부인(롤랑 부인) 독립전쟁에 성공하고/…밝고 밝은 이 세상에 여인으로 태어나/이전 풍속을 지키다가 무슨 죄로 고생하겠나/…순풍 불어 환고국 하올 적에/그리운 부모 동생 악수할 것이니” 의성김씨 문중의 김문식과 혼인한 이호성 여사(1891∼1968)가 쓴 가사 ‘위모사’의 일부다. 만주로 떠나는 딸을 걱정하는 친정어머니에게 바친 글로, 타향에서의 삶에 대한 우려보다 남성과 동등하게 힘을 보태 독립할 그날에 대한 염원을 밝히는 등 독립을 향한 굳은 의지를 담았다. 최형우 대구한의대 교수(기초교양)는 논문 ‘근대 조선을 바라보는 이호성의 시선과 위모사에 담긴 여성 의식’에서 “여성에게 제한적 역할만 부여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일제강점기 민족으로서 해야 할 역할과 임무에 적극적이었던 여성의 모습을 이 가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가사는 만주 망명사(史)에서 소외돼 왔던 여성들의 심경과 그 역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상주 이상룡(1858∼1932)의 부인 김우락 여사(1854∼1933) 역시 가사로 만주에서의 삶을 기록했다. 1911년 10월 만주에 정착한 후 지은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가 대표적이다. 김 여사는 이 가사에서 “월국(越國) 의사 깊이 드니/철석같이 굳은 마음 누가 말릴까/…독립국권 쉬이 오려니/아무리 여자라도 이때 한번 쾌설해 보자”고 썼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여성으로서 힘을 보태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 이 글은 ‘독립운동가의 부인’으로만 알려졌던 김 여사의 목소리를 드러낸 결정적 사료로 꼽힌다. 정부는 이 사료를 바탕으로 2019년 김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강윤정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말로 지은 문학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고자 했던 여성들의 역사의식을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란 섬 한복판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들꽃 향기를 맡고, 유니콘의 뿔을 쓰다듬고, 거울을 갖고 노는 모습이 수놓아졌다. 프랑스 파리 클뤼니박물관이 소장한 중세 태피스트리(여러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연작이다. 총 6개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은 청각과 후각, 촉각, 시각, 미각의 체험을 상징한다. 가장 마지막 작품 속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내 유일한 욕망에게’라고 쓰인 천막 아래 서 있다. 우리 몸이 오감을 느낄 때 비로소 진정한 욕망에 도달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해석이다. 무감각, 무표정, 무욕…. 흔히 ‘서양 중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미술사 강사인 저자는 이 같은 시각에 반기를 든다. 중세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태피스트리 연작이 보여주듯 중세는 감각의 시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눈, 코, 입을 비롯한 감각기관뿐만 아니라 머리, 뼈, 심장, 손, 발 등 우리 몸을 둘러싼 중세 서구의 정치·사회·문화·예술사를 분석했다. 그중에서도 머리는 “중세의 몸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다”고 저자는 본다. 참수당한 성자의 머리는 신앙 그 자체이자 가장 확실한 교회의 재원(財源)이었던 것. 성자의 머리뼈를 확보한 교회엔 부유한 신자들이 각지에서 몰려와 헌금을 했다. 이 때문에 중세 유럽에선 순교자 세례 요한의 온전한 머리뼈를 모시고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참수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머리를 관리하는 일은 중세 성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순교자의 유해를 손에 넣을 형편이 안 되는 교회들은 중세 장인의 기술을 빌려 참수당한 머리를 연상하게 하는 모형을 장식하기에 이른다. 유럽 북부에선 성인 머리뼈를 상징하는 조각물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할 정도였다. 심장은 중세인에게 감정의 산실이었다. 1180년대 프랑스 시인 지로 드 보르넬은 한 사랑 시에서 “사랑은 그렇게 눈을 통해 심장을 얻네/눈은 심장의 정찰병이라서/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찾기 때문이지/심장이 품고 기뻐할 만한 것을”이라고 썼다. 이 시는 중세인이 눈을 통해 사랑의 대상을 찾고, 심장으로 사랑을 느낀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신을 향한 사랑도 심장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뾰족한 창에 찔린 심장을 묘사한 그림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뜻했다. 심장이 감정기관이라는 중세인의 인식은 오늘날 언어에서도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용기(courage)’는 심장을 뜻하는 옛 프랑스어 ‘coeur’, ‘우호적(cordial)’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심장을 뜻하는 ‘cordis’에서 비롯됐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저자는 “중세인에게 인체는 감각을 이용해 주위 세계와 접촉하는 매개체였고, 성(性)과 종교라는 상이한 정체성들이 불협화음을 빚는 무대였으며, 추악함과 고통부터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까지 여러 미학적 관념을 표현하는 화폭이기도 했다”고 썼다. 비단 중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64·사진)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5일(현지 시간) “말할 수 없는 것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을 썼다”고 밝혔다. 노르웨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역대 네 번째다. 1928년 소설가 시그리드 운세트가 수상한 후로는 95년 만이다. 노르웨이 해안도시 헤우게순에서 태어난 포세는 1983년 장편소설 ‘레드, 블랙’으로 데뷔했다. 1990년대 초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소설 ‘3부작’, ‘아침 그리고 저녁’을 비롯해 희곡, 시,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1990년대 중반 발표한 희곡 ‘이름’, ‘기타맨’, ‘가을날의 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포세의 작품은 전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올라 ‘인형의 집’을 쓴 헨리크 입센(1828∼1906) 다음으로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 꼽힌다. 2003년 프랑스 공로훈장, 2007년 스웨덴 한림원 북유럽 문학상 등을 받았다. 국내에는 ‘3부작’을 비롯해 ‘이름’, ‘기타맨’, ‘가을날의 꿈’, ‘보트하우스’ 등이 출간됐다. 상금은 1100만 크로나(약 13억5000만 원)다.“생존투쟁의 그늘 파고들어… 입센의 재림” 노벨문학상,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희곡-산문 넘나들며 작품 활동전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올려“죽음-가족 등 소재로 인간 본질 탐구”혼란이 넘치는 시대,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64)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5일(현지 시간) 선정된 포세는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끄는 극작가이자 소설가다. 스웨덴 한림원은 “포세의 작업은 노르웨이의 언어와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를 예술적 기교와 섞었고 인간의 불안과 양가성을 본질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이어 “오늘날 세계에서 작품이 가장 널리 공연되는 극작가 중 한 명이지만, 산문으로도 점점 더 인정받고 있다”고 밝혔다. 수상 소식을 들은 포세는 “벅차고 다소 겁이 난다”고 말했다. 극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건 영국의 해럴드 핀터(2005년) 이후 18년 만이다. 그는 희곡, 소설, 시, 에세이, 동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썼다. 한림원은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재림’이자 아일랜드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받는 포세가 희곡과 산문을 넘나들며 경계를 부쉈다는 점에 주목했다. 1959년 노르웨이 해안도시 헤우게순에서 태어난 포세는 하르당에르피오르에서 성장했다. 대학에서는 비교문예학을 전공했다. 1983년 소설 ‘레드, 블랙’으로 데뷔했고, 1994년 첫 희곡 ‘그리고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라’를 발표했다. 약 40편의 희곡은 전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올랐다. 희곡과 소설뿐만 아니라 시, 에세이, 동화는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그는 군더더기를 극도로 배제한 구성, 리얼리즘과 부조리주의 중간쯤에 있는 화법으로 유명하다. 매일 생존투쟁에서 체념하고 절망하는 인간이 등장하는 비극을 산문과 희곡을 넘나들며 선보였다. 대표적인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은 고독하고 황량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요한네스라는 이름의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고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풀어낸다. 연작소설집 ‘3부작’(새움)은 3편의 중편소설을 묶었다. 세상에 머물 자리가 없는 연인과 그들 사이에 태어난 한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가난하고 비루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본다. 동화 ‘오누이’(아이들판), 희곡 ‘가을날의 꿈 외’(지만지드라마) 등 여러 작품이 국내에 출간됐다. 이달 20일엔 빛을 사랑했지만 그늘진 인생을 살아야 했던 예술가의 일생을 그린 산문 ‘멜랑콜리아 I-II’(민음사)가 나온다. 포세는 한때 알코올중독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정민영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교수는 “죽음, 가족, 남녀관계 등 보편적 소재를 시적으로 깊게 다루는 작가”라며 “극단으로 치닫고 혼란스러워지는 시대에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고들었다는 점에 한림원이 주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는 “포세의 작품엔 눈 덮인 산과 호수 등 북유럽의 풍광과 감성이 탁월하게 담겨 있다”고 했다. 홍재웅 한국외대 스칸디나비아어학과 교수는 “평범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삶과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작가”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017∼2022년 중국 지린성 ‘구청춘(古城村) 2호 사원지’에서 발굴된 팔각형 유구가 “고구려의 불교 문화를 계승한 발해 팔각목탑지”라는 분석이 나왔다. 지금까지 팔각목탑지는 평양의 정릉사지(定陵寺址)를 비롯한 고구려 절터에서 주로 확인돼 왔다. 이 때문에 국내 학계에선 이 유적이 발해의 불교 문화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입증할 핵심 증거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유구는 지금까지 발굴을 통해 드러난 유일한 발해 목탑지다. 양은경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는 지난달 21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 고대 사원의 최신 발굴 성과 및 새로운 이해’에서 ‘발해 팔각건물지의 구조와 계통’을 발표하고 이같이 밝혔다. 구청춘 2호 사원지 발굴조사를 주도한 중국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에 따르면 이 유구는 한 변 길이 약 7m, 지름 약 20.3m 규모다. 평면이 8각형 구조로 조성된 이 유구의 기단은 토성혼축(土城混築) 방식으로 조성됐다. 이 방식은 강돌로 기단을 만든 뒤 흙을 쌓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축조 기법이다. 흙으로만 쌓아 올린 토축(土築) 기법으로 조성된 중국 당나라 건물지와는 구별된다. 양 교수는 “탑의 상단부가 소실돼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하단 기초부의 배치와 구조, 축조 기법만으로 고구려 팔각목탑지와의 유사성이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 역시 처음엔 이 팔각형 유구를 불전으로 봤으나, 지난해 발굴 성과 보고회에서 팔각목탑지로 수정했다. 팔각목탑지는 그동안 평양 일대의 정릉사지, 청암리사지, 상오리사지와 황해북도 토성리사지 등 5세기 후반∼6세기 조성된 고구려 절터에서 확인돼 왔다. 양 교수는 “같은 시기 조성된 것으로 조사된 중국 남북조의 절터에선 팔각목탑지가 나온 사례가 없고, 사각형 탑지만 출토됐다”며 “이를 토대로 구청춘 2호 사원지가 고구려의 불교 문화를 이어받은 발해의 사찰임을 유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부정하는 중국 측의 역사 인식에 반하는 해석이다. 이 절터는 발해 왕실과 관련된 격 높은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왕실 기와를 만들 때 쓰였던 녹유(綠釉·유약의 일종) 기법으로 제작된 기와와 일부 왕실급 불교 유물이 출토된 까닭이다. 사원지에서 서쪽으로 약 100m 거리엔 발해 시기 성으로 쓰였던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이, 동북쪽으로 4㎞ 거리엔 발해의 도성 팔련성(八連城)이 자리한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절터에선 팔각목탑지뿐 아니라 불전과 강당 등 8개 유구가 확인돼 발해 절터로는 최초로 가람의 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하트 모양이 뒤집한 것처럼 생긴 ‘연화문(연꽃무늬) 수막새’도 대거 나왔다. 이는 대표적인 발해 기와 양식으로 꼽혀 학계에선 이 유적을 발해 사찰로 본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를 불통(不通)의 상징으로 보여주면 영조와 정조가 보여주려 했던 소통의 역할이 부각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난달 21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올해 12월 8일 개막하는 영조(1694∼1776) 즉위 300주년 특별전 ‘탕탕평평: 글과 그림의 힘’에 전시 구성에 관해 한 시민이 이런 의견을 냈다. 전시 기획을 맡은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전시장에 사도세자(1735∼1762)의 죽음을 상징하는 뒤주를 놓을지 고민 중”이라고 하자 구체적인 맥락까지 제시한 것. 반대로 “전시와 결이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날 박물관은 시민 10명을 초청해 전시 프리뷰(사전 공개) 행사를 열었다. 아직 전시장이 모두 꾸려지기 전이지만, 박물관은 지난달 19일부터 5일간 시민 총 50명을 대상으로 전시 유물과 구성을 자료화면으로 설명하고 의견을 들었다. 박물관 직원들 사이에서만 이뤄지던 프리뷰를 일반 시민 대상으로 한 건 처음이다. 2시간 동안의 프리뷰를 마친 뒤 시민들은 다채로운 조언을 내놨다. 이날 행사는 그동안 박물관과 미술관이 공급자 중심으로 일반 시민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시를 해왔다는 자성에서 비롯됐다. 이 연구관은 “영·정조 시기 탕평(蕩平) 정치에 밑받침이 되는 왕의 글과 그림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자칫 난해해질 수 있다”며 “전시 구성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미리 받아 더 쉬운 전시를 만들려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 연구관은 “시민의 피드백을 최대한 반영해 모든 연령대를 아우르는 전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관람객의 의견을 반영해 이용자 중심 공간을 만들려는 노력은 미술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장애인의 의견을 듣는 것도 그중 하나다. 최근 서울 관악구 남서울미술관은 장애인 10여 명을 초청해 미술관 건물의 계단과 잔디, 비(非)장애인 중심의 설명문으로 인한 불편에 대해 의견을 듣고 미술관 입구에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는 경사로를 짓는 등 개선책을 내놨다. 내년 12월 완공되는 서서울미술관도 사전에 장애인 등을 초청해 워크숍을 열고 있다. 이성민 서울시 문화본부 학예연구사는 “다양한 계층이 이용하기 편하도록 기존 미술관의 한계를 분석해 개선하겠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마디가 튀어나와 삐뚤어진 나의 손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젊은 시절 쓰러진 남편을 돌보느라 아팠던 내 인생에 대한 열등감처럼…. 이젠 나의 손에게 잘못을 빕니다. 시인이자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손 덕분이었다고요.” 신달자 시인(80)은 한 손으로 다른 손의 마디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참 못생긴 손”이라면서도 오랜 세월을 거쳐 굵어진 손마디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따뜻했다. 자신에게 들이닥친 삶을 꿋꿋이 살아낸 노시인은 긴 세월 밥과 시를 지어온 자신의 손에게 용서를 구했다. 최근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문학사상)와 시선집 ‘저 거리의 암자’(문학사상)를 펴낸 신 시인을 문예지 ‘유심’ 사무실(서울 종로구)에서 지난달 25일 만났다. 내년이면 등단 60주년을 맞는 그는 17권의 시집을 냈고, 지난달 1일 재창간된 ‘유심’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책을 펴내며 지난 시간을 돌아본 그는 “자기 발로 계단 하나하나를 딛고 올라가야만 하는 것이 삶”이라며 “인생의 모든 고난이나 시련도 자기 발로 딛고 가야지 그냥 뛰어넘을 순 없었다”고 했다. “고통은 딛지 않고 훌쩍 날아가 버리고 싶었는데, 나는 날개가 없는 인간이라 결국 그 계단을 모두 딛고 지금 여기에 도달했다”는 것이 시인의 말이다. 1977년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찾아온 가장의 삶이 버거웠던 때도 있었다. 남편은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2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신 시인은 “남편과 딸 셋,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까지 좌우로 돌아봐도 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들 속에 살았다. 그땐 살아 있음이 부담스러워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시 ‘늙음에 대하여’엔 그 시절 처절했던 심경이 담겼다. “내 나이 농익은 삼십 대에는/생살을 좍 찢는 고통 때문에/나는 마술처럼 하얗게 늙고 싶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남긴 한마디가 그를 붙잡았다. 1978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던 신 시인의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아픈 사위를 돌보는 딸과 마지막으로 통화하기 위해 병원 내선으로 전화를 걸어 이런 유언을 남겼다. “그래도 니는 될 끼다.” 그는 “삶이라는 계단을 더는 오르고 싶지 않을 때마다 아주 먼 저승 같은 데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라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딸 셋을 키우고, 아픈 남편을 돌보고, 인천 요양병원에 친정아버지를 모시며 1992년 숙명여대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평택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되던 날 신 시인은 어머니 묘 앞에 ‘교수증’을 바쳤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우울증이 찾아왔던 때도 그를 살린 건 말 한마디였다. 그를 치료하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 “산에 가라”고 권한 것. 그는 “처음엔 귀찮았던 전화가 나중엔 고마웠다”며 “나의 불운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는 타인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두 발을 딛고 산에 오르자 생의 의지가 느껴졌다. ‘벼랑 위의 생’은 이 무렵 강원 정선 몰운대에 올라 죽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쓴 시다. “벼랑 위에 살다 벼랑 위에서/죽은 소나무는/내게/자신의 위태로운 평화를 보여주고 싶었나 봐”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 홀로 걸어 온 삶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쓰러질 때마다 나를 붙잡아준 이들이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최근 폐결절을 떼는 수술을 한 뒤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지만, 그는 “여전히 삶이란 계단을 더 오르고 싶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앞으로 몇 권의 시집을 더 낼 수 있을까요. 단 한 권의 시집이라도 내 발로 딛고 올라가 보겠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젊은 여성에게 이곳에서 당신이 꿈꾸는 호화스러움을 실현할 수 있다는 걸 아나요?” 1928년 2월 미국 뉴욕에 문을 연 여성 전용 호텔 바비즌이 내세운 광고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근로자이자 소비자로 부상한 여성들은 꿈과 직업을 찾기 위해 뉴욕으로 몰려왔다. 바비즌은 불편한 하숙집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을 원했던 신여성의 욕망을 반영한 산물이었다. 훗날 모나코 왕비가 된 미국 배우 그레이스 켈리(1929∼1982)가 바비즌의 대표적인 투숙객 중 한 명이다. 뉴욕 배서칼리지에서 국제학, 젠더, 언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1920년대부터 2005년까지 호텔 바비즌의 역사를 조명했다. 실제 호텔에 묵었던 당사자들과 호텔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당대 문헌과 기사를 종합해 생생한 이야기를 전했다. 바비즌은 대공황 때도 살아남았다. 숙박 가격을 낮춰 호화스러운 이미지를 덜어낸 대신 일자리를 찾는 젊은 여대생을 집중 공략한 마케팅이 성공을 거둔 것. 1934년 바비즌 광고엔 “젊은 여성을 위한 뉴욕 최고의 레지던스에서 성취에 대한 열정을 키우라”는 문구를 썼다. 한 비서학교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뉴욕에 몰려든 여성들을 위해 이 호텔 2개 층을 통째로 빌려 기숙사로 운영했다. 세계 최초의 모델 에이전시인 ‘파워스’ 역시 바비즌을 기숙사로 썼다. 일자리를 가진 여성은 ‘가장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했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내 일을 갖겠다는 여성의 꿈이 지켜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1960, 70년대 여성운동을 거치며 바비즌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여성이 일하고 술을 마시고 홀로 거주하는 일이 당연해지자 굳이 여성 전용 호텔을 찾을 필요가 적어진 것. ‘여성 전용’이란 수식어가 구시대의 전유물이 되면서 1972년경부터 객실 점유율이 급감했다. 1981년 여성 전용이란 정체성을 버린 바비즌은 2005년부터 부호들이 사는 콘도로 변모했다. 호텔의 흥망성쇠에 20세기 뉴욕의 여성사가 그대로 담겼다. 저자는 “바비즌은 당대 미국 여성에게 주어진 제한적 자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했다. 원제 ‘The Barbizon: The Hotel That Set Women Free(바비즌: 여성을 자유롭게 해준 호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523년 5월 7일 백제를 중흥시킨 무령왕(462∼523)이 세상을 떠났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554)은 554년 신라와 관산성(현 충북 옥천군)에서 벌어진 전투 중 고립된 아들을 구하러 적진으로 달려가다가 신라 복병에게 기습당해 전사했다. 잇단 두 왕의 죽음 이후에도 백제는 110여 년 더 이어졌다. 위태롭던 백제를 결속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국립공주박물관은 올해 무령왕 1500주기를 맞아 특별전 ‘1500년 전 백제 무령왕의 장례’(19일∼12월 10일)를 열고 국보 ‘무령왕 묘지석’ 등 697점을 선보인다. 국립부여박물관은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을 맞아 특별전 ‘백제금동대향로3.0―향을 사르다’(23일∼2024년 2월 12일)를 열고 국보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한 유물 30여 점을 전시한다.● 무령왕의 죽음, 황제처럼 예우하다공주박물관 특별전 입구는 ‘무령왕 묘지석’이 장식한다. 무령왕의 장례를 주관한 아들 성왕은 묘지석 중앙에 ‘崩(붕)’ 자를 새겼다. 통상 왕의 죽음은 ‘薨(훙)’이라고 기록되지만, 황제의 죽음을 표현하는 글자를 써 아버지를 높인 것이다. 김미경 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무령왕의 장례를 황제의 격식으로 치르며 자신의 위상까지 드높이고자 한 성왕의 의도”라고 설명했다. 최고 예우로 치러진 무령왕의 장례엔 유불선(儒佛仙)의 문화가 어우러졌다. 돈 1만 문(文)을 내고 신의 땅을 사들였음을 새긴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買地券·국보)’은 도교적인 장례문화에서 비롯됐다. 이 유물 뒷면에 꾸러미로 놓인 채 발견된 중국 화폐는 신의 땅을 산 값을 치른 부장품이다. 왕릉 무덤방을 가득 채운 벽돌엔 활짝 핀 연꽃무늬를 새겨 불교 문화를 반영했다. 삼국을 통틀어 연꽃무늬 벽돌만으로 무덤 내부를 장식한 건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던 성왕은 ‘3년상’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전시장 중앙에 진열된 무령왕릉 출토 국보 ‘금귀걸이’ ‘금동신발’ 등 부장 유물 10여 점과 ‘나무 널(목관)’은 화려했던 무령왕의 장례를 보여준다. 천장에 설치된 디지털 스크린에선 무령왕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 백제를 지켜주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백제인의 마음, 향으로 치유하다부여박물관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백제금동대향로는 당대 중국 향로와 비교해도 2배가 넘는 61.8cm 크기에 봉황과 연꽃 등 화려한 86개의 도상을 몸체에 장식했다. 6세기 중반∼7세기 초 백제 왕실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나현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향로는 6세기 중반 전쟁의 참패와 성왕의 죽음으로 상처 입은 백제인의 아픔을 치유한 문화 통치 도구”라고 설명했다. 전시엔 백제금동대향로뿐 아니라 최근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제 손잡이 향로’와 동남리 출토 ‘토제 향로’ 등 향로 유물 30여 점을 선보인다. 6세기 후반∼7세기 초 제작된 토제 향로는 향 문화가 왕실뿐 아니라 백제인의 일상에 뿌리내렸음을 뒷받침한다. 당대 금보다 비쌌던 향료를 백제 왕실이 중국에서 수입해 백성에게 베풀며 향 문화가 전파됐다고 추론한다. ‘향(香)’도 전시의 주인공이다. 전시장엔 삼국시대부터 약재로 쓰였던 ‘침향(沈香)’ 등을 조합한 향을 제작해 비치했다. ‘삼국사기’ 등 문헌에 나온 고대 향료 14가지도 선보여 향을 맡아볼 수 있게 했다. 약초 같은 냄새가 나는 향이 많다.공주·부여=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 파병에 대한 미국 측의 보상 조치를 약속한 ‘브라운각서’ 원본이 최초로 공개된다. 이 각서는 미국의 군사 원조를 받던 한국이 우리 군을 베트남전에 파병하며 상호의존적 한미동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은 상징적 사료로 꼽힌다.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2일 시작하는 특별전 ‘동행’에서 외교사료관이 소장해온 브라운각서 원본을 3주간 특별공개한다. 1966년 윈스럽 브라운 주한미국대사가 한국 정부에 전달한 이 문서의 정식 명칭은 ‘한국군 베트남 증파에 따른 미국에 대한 협조에 관한 주한미국대사 공식 서한’이다. 총 5장, 16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한국이 베트남전에 2차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대가로 미국이 군사 지원과 경제적 협조를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대월(對越) 수출을 지원하고 기타 경제 개발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적당한 경우, 1966년 중 1500만 달러의 신규 원자재용 차관을 제공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앞서 한국은 1965년 10, 11월 1차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함영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고 베트남전에 파병한 여러 국가 중 가장 많은 군인을 보낸 나라”라며 “브라운각서는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역할을 보여주는 핵심 문서”라고 설명했다. 전시에선 주한미군 의장대가 유엔사령부 내 기념행사 때 사용했던 ‘주한미군사 소장 성조기’ 등 한미동맹 70년사를 상징하는 자료 185건을 선보인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 미국 측 대표인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협정문에 서명할 때 사용한 책상과 6·25전쟁 이후 미국 미네소타대가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서울대에서 8년간 실시한 교육 원조 ‘미네소타 프로젝트 공식 서한’ 원본도 공개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문’(1953년)과 ‘정전협정문’은 복제본을 볼 수 있다. 한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부터 오늘날 한미 간 협력관계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 개막일엔 학술대회 ‘동맹 속의 냉전과 발전’도 열린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열리며 무료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의 왕권 계승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왕세자 집무실이었던 경복궁 ‘계조당(繼照堂)’이 6년간의 복원을 마치고 20일 공개된다. 1910년 일제 강점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되고 11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계조당은 1443년 세종(1397∼1450)이 왕세자였던 문종(1414∼1452)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계승해 비춘다’는 이름부터가 왕위 계승을 상징한다. 경복궁 동쪽에 자리 잡은 동궁(東宮) 권역의 일부분으로, 문종의 집무 공간으로 사용됐다. 신하가 왕세자에게 진찬(進饌·음식을 올리는 궁중 잔치)을 올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종 승하 뒤 건물을 헐었다가 경복궁 중건 뒤인 1891년 고종(1852∼1919)이 왕세자 순종(1874∼1926)을 위해 현재 위치에 새로 지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8년부터 ‘경복궁영건일기’ 등을 바탕으로 고종 때 지어진 계조당의 모습을 복원해 왔다. 복원된 계조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본당과 의례에 필요한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 등이다. 경복궁 관람객 누구나 사전 신청 없이 관람할 수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은 우리 박물관이 앞으로 한국실을 리모델링할 때 주요한 참고자료가 될 겁니다. 세계 여러 박물관들이 ‘사유의 방’을 참고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 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매우 강렬한 경험이었어요.”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약 1500점의 한국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로열온타리오박물관(ROM)의 밸러리 후아코 부관장(58·사진)은 14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올해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을 맞아 해외문화홍보원 초청으로 10일부터 엿새간 방한해 국내 박물관과 미술관 7곳을 살펴봤다. 그를 가장 사로잡은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 후아코 부관장은 “향기와 조명, 소리까지 조화시킨 전시 공간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한국 컬렉션을 어떻게 선보이고 활용할 것인가’는 ROM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ROM은 캐나다 박물관 중 유일하게 한국실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박물관과 비교해도 이른 편인 1999년 운영을 시작했다. 특히 ROM이 소장한 한국 컬렉션은 고려청자 조선백자뿐 아니라 ‘돌칼’을 비롯한 고고학 컬렉션으로도 유명하다. 후아코 부관장은 “한국 컬렉션 상당수는 19, 20세기 한국을 방문한 캐나다 선교사들이 기증한 유물”이라며 “이를 제대로 연구하고 보여주는 것은 캐나다와 한국의 오랜 교류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당장의 과제로 유물이 만들어진 시점부터 현재까지 소유권 변화 내력과 수집 정보를 추적하는 ‘출처 연구’를 꼽았다. 후아코 부관장은 “출처 연구는 현재 전 세계 박물관계에서 떠오르는 이슈”라며 “ROM 역시 전문 큐레이터가 유물의 이력을 추적하고 있다”고 했다. ROM이 지난해 11월 한국계 캐나다인인 권성연 큐레이터를 채용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ROM은 한국 컬렉션 전부를 데이터베이스(DB)화해 온라인에 공개하고 있으며, 2015년엔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실태 조사도 벌였다. 앞으로 한국 박물관과 전시 교류도 추진할 계획이다. 후아코 부관장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활옷 만개―조선왕실 여성 혼례복’을 ROM에서 선보이고 싶다”고 했다. 이날 이 전시를 살펴본 그는 “혼례복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공예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했다”며 “무엇보다 결혼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언어와 역사가 달라도 모든 이들에게 통할 것”이라고 했다. “긴 설명 필요 없이 ‘조선의 웨딩드레스’라고 하면 전 세계인이 바로 이해할 겁니다. ROM은 전 세계 박물관들과 많은 협업 전시를 선보여 왔습니다. 이젠 한국 박물관과의 협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21년 경남 함안 말이산고분군의 북쪽 지역과 75호분에서 약 2cm 크기 푸른색 ‘로만 글라스(Roman glass)’ 2점이 각각 발굴됐다. 고대 가야(1세기∼562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아라가야가 있던 말이산에서 로마제국에서 생산된 유리 제품이 처음 나온 것이다. 아라가야가 중국을 거쳐 서역과 교류했다는 걸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17일(현지 시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가야고분군’의 여러 면모를 살펴봤다.● “해상왕국 교류 보여줘”세계유산위원회는 가야고분군이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한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평가했다. 고분군은 연맹 형태로 추정되는 여러 가야 사이의 교류뿐 아니라 당대 다른 여러 나라들과의 다채로운 교류상을 보여준다. 대가야 권역의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삼엽문 환두대도(蔘葉文 環頭大刀·자루 머리에 삼 잎 모양 장식이 있는 칼)’는 신라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삼 잎 문양의 칼자루는 대부분 신라 유물에서 확인된 형태로 대가야가 신라와 군사동맹과 결혼동맹을 맺었음을 뒷받침한다.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 출토 청동 정(鼎)과 칠기로 만든 부채, 칼집은 한나라 유물로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준다. 말이산고분군 75호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연꽃잎무늬 청자그릇 1점(5세기 제작) 역시 아라가야가 당대 중국과 활발히 교류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영식 인제대 인문문화융합학부 교수는 2019년 논문에서 “가야국이 김해만을 항구로 해상왕국을 발전시키며 당대 선진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국립현충원 같은 역할” 학계에선 가야고분군이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강동석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2019년 논문에서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을 포함해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상류 권역에 존재하는 가야고분 115기의 고도를 모두 분석했다. 그 결과 전체 고분군의 71%가 구릉지(49%)와 산악지(22%) 등 고지대에 있다는 걸 밝혔다.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다른 가야고분군 6곳 역시 대체로 구릉 정상이나 산 능선 등 취락지보다 높은 고지대에 만들어졌다. 강 교수는 “가야고분군은 오늘날의 국립현충원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며 “군사·행정의 수장과 그 가문을 기림으로써 정치권력의 위상을 강조하고 집단의 공동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지대에 고분군을 조성한 것”이라고 추론했다.● “통합 관리 체계 구축해야” 이번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가야고분군은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까지 7곳이다. 국내 가야고분은 적어도 3000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가야고분군에 대한 관리를 체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등재를 결정하면서 고분군 내 민간 소유 부지와 완충구역을 확보해 안정적으로 보존하고, 고분군 7곳의 통합 관리 체계를 구축할 것을 권고했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고분군 관리·정비를 체계화하는 로드맵을 국가 주도로 구상해 가야고분군의 세계사적 의미를 드러내고 지켜야 한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설과 대보름,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 명절이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18일 “삼국시대 명절 문화가 성립해 고려시대 때 제도화된 이후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정 가치가 충분하다”며 이들 명절을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설과 대보름은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한 해를 기념하는 신년맞이 문화”라고 보고 1건으로 묶어 총 5건의 명절을 지정 예고했다. 추석은 우리 명절만의 고유성과 대표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동체 유산이다. 이재필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장은 “달 제사를 지내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의 추석은 조상 숭배 의례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동지 역시 중국과 일본에도 존재하지만, 우린 팥밥 등이 아닌 팥죽을 먹는다. 문화재청은 2015년 ‘아리랑’을 시작으로 온 국민이 함께 전승해 온 공동체의 생활관습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해 오고 있다. 이번에 5개 명절이 추가로 지정되면 총 21건의 국가무형문화유산 공동체 종목이 생기게 된다. 명절은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최종 지정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18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37회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언론·문화, 과학·기술 등 3개 부문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외부 전문가가 4명씩 참여해 6∼8월 3개월간 진행했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2023년 제37회 인촌상 수상자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습니다. ▽교육=이대봉 서울예술학원 이사장·참빛그룹 회장 ▽언론·문화=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과학·기술=최순원 미국 MIT 물리학과 교수 인촌상 운영위원회(위원장 김도연)는 올해 교육, 언론·문화, 인문·사회, 과학·기술 등 4개 부문에 대해 5월 1일부터 후보자를 접수해 8월 말까지 권위 있는 외부 전문가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3개 부문 수상자를 선정했습니다. 인문·사회 부문은 수상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을 설립하고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통해 인재를 양성한 인촌 김성수 선생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1987년부터 인촌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습니다. 시상식은 10월 11일 열릴 예정입니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1억 원과 메달을 각각 수여합니다.제37회 인촌상영광의 수상자들실력-인성 두루 갖춘 인재 육성…“세계적 예술인 배출이 나의 사명” 교육 이대봉 이사장 “사회를 발전시키면서 개인이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무엇보다도 교육의 힘을 강조했던 인촌 김성수 선생의 깊은 뜻이 담긴 상을 받게 돼 영광입니다.” 1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예고에서 만난 이대봉 서울예술학원 이사장(82·참빛그룹 회장)은 인촌상 수상 소감을 말한 뒤 한동안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국내 최고 수준의 연습실부터 학생들의 공연 기회를 넓히기 위해 본관 옆에 지은 서울아트센터까지, 어느 하나 이 이사장의 애정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2010년 서울예술학원을 인수하기 전까지 이 이사장은 약 40년을 기업인으로 살았다. 1975년 동아항공화물을 시작으로 물류, 에너지, 호텔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베트남까지 진출해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받았다.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건 36년 전 학교폭력으로 셋째 아들 대웅 군을 떠나보내면서다. 서울예고 2학년으로 촉망받는 성악도였던 아들은 선배들에게 맞아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가해자에 대한 울분을 삭이고 또 삭이면서, 대신 폭력 없는 학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1988년 만든 ‘이대웅음악장학회’가 시작이었다. 아들과 같은 꿈을 꾸는 후배들을 지원하기 위해 성악 콩쿠르를 개최하고, 유학비도 지원하고 있다. 음악도뿐 아니라 그룹이 진출한 중국의 독립운동가 자손, 베트남 소수민족 학생 등에게도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 올해까지 36년간 5만1000여 명에게 약 221억 원을 지원했다. 2010년엔 부실 운영으로 흔들리던 서울예술학원(서울예고, 예원학교) 재단을 인수했다. 아들은 떠났지만 아들이 사랑했던 학교가 더 망가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학생들의 교육 환경부터 개선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국내 최고 수준의 학교들을 직접 둘러본 뒤 일반 예고에선 기대하기 힘들었던 연습실을 만들었다. 이 이사장은 “예술교육을 열심히 뒷받침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예술인을 많이 배출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아들을 떠나보낸 뒤 이 이사장은 “폭력과 예술은 공존할 수 없다”는 소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신입생들은 입학 후 가장 먼저 학폭 예방 교육을 받는다. 밤늦게까지 연습에 여념이 없는 학생들에게 이 이사장은 늘 운동을 강조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듭니다. 거기서 좋은 예술도 나온다고 믿습니다. 실력뿐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예술인을 키워내고 싶습니다.”공적 194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진주농림고를 자퇴한 뒤, 부산과 서울에서 부두 하역, 탄피 수집, 물류 사업 등을 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75년 동아항공화물을 설립해 계열사 17곳을 가진 참빛그룹으로 키웠다. 2010년 서울예술학원을 인수한 뒤 지금까지 사재 약 550억 원을 출연했다. 5월엔 서울예고에 1084석 규모의 공연장(도암홀)을 갖춘 서울아트센터를 개관했다. 학교 인수 후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발레리나 박세은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하며 올해 개교 70주년을 맞은 서울예고를 국내 최고 예술 명문고로 키웠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매입 등 앞장… “문화 지키는 작은 씨앗 뿌릴 것” 언론·문화 김종규 이사장 “인촌 선생은 일제강점기 언론·교육·출판을 비롯해 우리의 문화를 지켜낸 수호자입니다. 선생의 뜻을 잇는 상을 여든이 넘은 제게 주신 까닭은 여생 동안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에 더욱 매진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의미겠지요.” 인촌상 언론·문화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84)이 말했다. 김 이사장은 “인촌 선생이 뿌린 문화의 씨앗이 지금까지 이어져 숲을 이뤘듯 나 역시 문화를 지키는 작은 씨앗들을 뿌릴 것”이라고 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십시일반 후원금을 보탠 회원들의 기금으로 문화유산을 지키는 특수법인이다. 김 이사장은 2007년 문화유산국민신탁 설립 당시 설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9년부터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을 돈 받고 할 수는 없다”며 무보수로 일한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2012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을 매입하는 등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첨병 역할을 해 왔다. 김 이사장은 “국가 예산으로 모든 문화유산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국민들이 보탠 돈이 우리 문화를 지켜 국격(國格)을 높이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계의 마당발’로 통하는 그는 박물관·출판·미술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인맥을 활용해 발로 뛰며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을 늘려 왔다. 2009년 취임 당시 약 300명이었던 회원 수는 현재 1만6000여 명에 이른다. 김 이사장은 “내가 바꾼 것은 단 하나, 월 1만 원 넘는 돈은 후원하지 못하도록 한 것뿐”이라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문화유산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인식을 심는 것이 돈보다 더 중요한 목표”라고 강조했다. 월 최고 후원금 액수를 1만 원으로 낮추자 회원 가입을 주저했던 이들이 선뜻 가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고려 현종 때 판각한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국보)을 비롯해 10만 점이 넘는 고문헌 등 문화유산을 수집했으며, 1990년 국내 처음으로 출판·인쇄 박물관인 삼성출판박물관을 설립해 이를 지켜왔다. 삼성출판사에서 이사 및 회장(1964∼2005년)으로 일하면서도 돈을 모으는 족족 거금을 들여 고문헌을 사들였다. 주변에선 “새 책을 팔아 왜 헌 책을 사느냐”며 만류했지만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책을 팔아 돈을 벌었으니, 이를 사회에 환원하려면 역시 책과 문화로 해야겠지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우리가 힘이 없을 때 지키지 못했던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을 멈추지 않겠습니다.”공적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서 지키고 가꾸며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헌신했다. “국력은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국격(國格)은 문화유산이 말해 주는 것으로 하루아침엔 안 된다”는 진단을 바탕으로 문화유산 지킴이로 헌신해 왔다. 1990년 국내 최초 출판·인쇄 박물관인 삼성(三省)출판박물관 설립을 주도했다. 박물관은 초조대장경 등 국보를 비롯한 문화재 10만여 점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2012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대한제국공사관 매입에 나서, 1910년 일제가 강제 매각한 지 102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양자과학 분야 석학 주목… “순수과학자로서 실용부문 기여하고 싶어” 과학·기술 최순원 교수 “아직 주니어(교수)인데 영예로운 상을 주셔서 영광입니다. 상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고 저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해 많은 기여를 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인촌상 과학·기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최순원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물리학 교수(36)는 “과학자로서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 큰 상을 받아 부담도 되지만 더욱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생각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2018년 하버드대에서 박사를 받고 2021년 MIT 교수로 부임한 최 교수는 양자과학 분야 석학으로 주목받는 세계적 인재로 꼽힌다. 양자시뮬레이션, 양자계측, 양자정보이론, 양자인공지능, 양자계산 및 알고리즘 개발 등 양자과학 전 분야에 걸친 연구 논문을 유력 학술지에 게재해 왔다.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게재된 논문 편수가 약 18편에 이른다. 최 교수는 특히 이론 물리학자로서 실험과 이론의 가교 역할을 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사 과정 중인 2017년 ‘시간 결정(Time Crystals)’을 세계 최초로 구현해 네이처지 표지를 장식한 공동 연구도 이론과 실험의 융합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시간 결정은 공간 속의 ‘결정체’가 일정한 패턴을 보이는 것처럼 시간에 따라 물질의 원자구조 등이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변화하는 물질을 말한다. 최 교수는 “움직임은 에너지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안정화해 동기화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다 안정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곧바로 연구제안서를 썼고, 동료였던 최준희 현 스탠퍼드대 교수가 실험으로 이를 구현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제안서 작성에서 첫 실험 데이터가 나오기까지 48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최 교수는 올해 초 양자 시뮬레이터의 오류 검증 방식을 개발해 관련 논문이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각각 실렸다. 양자 시뮬레이터는 특정 물질의 양자역학적 현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장비다. 최 교수는 시뮬레이터에서 양자현상을 고안할 때 오류를 검증할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해 상용화 시기를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 교수는 “100년 전 트랜지스터 연구자에게 컴퓨터가 어디에 쓰일지 물었다면 ‘회계장부 작성에 도움이 될 것’이란 정도로 답했을 것”이라며 “이미 양자과학은 컴퓨팅, 암호, 신약 등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고 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를 바꿀 것이다. 순수 과학자로서 새롭게 자연을 이해하고 실용 부문에도 기여하는 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공적 최순원 교수는 양자시뮬레이션, 양자계측, 양자인공지능, 양자계산 및 알고리즘 개발 등 양자과학기술 전 분야에 걸쳐 최첨단 연구 결과를 낸 세계적인 석학이다. 다이아몬드 인공 원자를 활용해 양자시뮬레이션으로 시간 결정(Time Crystals)을 구현하는 방법을 세계 최초로 고안했다. 양자 시뮬레이션이나 계산을 위해 중요한 ‘결맞음’이 깨지는 에러율을 효율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 최신 이론 개발과 동시에 이를 실험으로 구현하는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최 교수는 올해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신진연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37회 인촌상 심사위원 ▽교육 △위원장 김경성 전 서울교대 총장 △위원 김경회 명지대 석좌교수,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 신종호 서울대 교수 ▽언론·문화 △위원장 김영석 연세대 명예교수 △위원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문학평론가, 최맹호 전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한규섭 서울대 교수 ▽인문·사회 △위원장 김혜숙 전 이화여대 총장 △위원 구범진 서울대 교수, 김영민 서울대 교수,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과학·기술 △위원장 노정혜 서울대 명예교수 △위원 이긍원 고려대 교수, 천진우 연세대 교수, 한선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위원 박성민 기자 min@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고대 가야의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17일(현지 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제45차 회의에서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가야고분군은 1세기경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가야를 대표하는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등 7개 고분군으로 이뤄진 연속유산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가야고분군에 대해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가야고분군 출토 유물은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이 대등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때문에 학계에선 가야가 수평적 관계를 구축한 연맹체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로써 한국은 1995년 ‘석굴암 불국사’ 등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총 16건(문화유산 14건, 자연유산 2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가야고분군은 2013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올 5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심사·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렸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고대 가야의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1∼6세기 한반도 남부에 세력을 형성했던 고대 가야를 실증하는 증거로서 가야고분군의 역사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문화재청에 따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17일(현지 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제45차 회의에서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가야고분군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가야를 대표하는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등 7개 고분군으로 이뤄진 연속유산이다. 가야는 1세기경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유역 등에서 존속했던 ‘금관가야’ 등 6개 나라의 총칭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에 비해 현존하는 문헌 기록은 적지만, 곳곳의 고분군과 출토 유물을 통해 가야의 역사와 당대 문화상이 드러났다. 가야고분군 출토 유물은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이 대등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때문에 학계에선 가야가 수평적 관계를 구축한 연맹체제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앞서 5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심사·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는 가야고분군에 대해 ‘등재 권고’ 판정을 내리면서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증거란 점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치가 있다”고 봤다. 주변국과 공존하며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체계를 유지해온 점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핵심 증거란 점에서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 등재 기준을 충족했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1995년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총 16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약 10만 년 전 석기시대 주거지 흔적이 남아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블롬보스 동굴에선 빨강, 노랑, 주황, 갈색을 만드는 데 쓰이는 광물 ‘오커(Ochre)’가 발견됐다. 전복 껍데기와 그 굴곡에 딱 맞는 돌도 나왔는데, 껍데기 안쪽은 오커로 뒤덮여 붉은색을 띠었다. 곳곳엔 해면골질(海綿骨質·골수가 차 있는 뼈의 부분)이 으스러진 흔적도 있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동굴에서 살았던 옛 인류가 전복 껍데기 위에 동물 뼈에서 나온 골수 등 유기물을 얹은 뒤 오커를 돌로 갈아 물감을 만들었을 거라고 추론했다. 옛 인류가 만든 물질이 접착제였는지 물감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약 10만 년 전 인류가 어떤 의도에서든 다채로운 색을 만들었고, 이 색은 우리 세계를 다채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국 종합 월간지 ‘와이어드’ 선임 기자가 색과 함께 진화해온 인류사를 조명했다. 색의 역사는 문화, 예술만 발전시킨 게 아니다. 인류가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하던 때부터 안료는 최고의 무역 품목 중 하나였다. 과학기술 발전사에서도 색은 빼놓을 수 없다. 초음속 제트기와 인공 골반을 만드는 데 쓰이는 금속 티타늄은 현대의 기초 색으로 꼽히는 하얀색을 만드는 데 쓰이는 광물이다. 티타늄 원자 하나와 산소 원자 2개를 결합시켜 이산화티타늄을 만들어 낸 덕분에 석탄처럼 까만색이었던 티타늄이 하얀색을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었다. 저자는 문화 예술 경제 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가 만들어낸 색과 그 색이 불러온 변화를 담아냈다. 15세기 원근법의 탄생도 색의 진화와 함께 이뤄졌다. 이 무렵 화가와 색 제조업자들은 아마인유 등에 색소를 부착시키는 법을 깨달았다. 계란 노른자 대신 오일에 색소를 침착시키자 더 윤기 있는 페인트가 만들어진 것. 물감의 점도가 달라지자 겹겹으로 덧칠해도 뭉개지지 않는 선명한 색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물감의 발전 덕에 그림 속에 명암이 반영되면서 2차원 캔버스에 3차원 공간감이 더해졌다. 원근법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인간은 색을 만들고, 색은 인간 문명의 발전을 이끌어 냈다는 분석이다. 색은 광학(光學)의 발전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11세기 초 이집트의 과학자 알 하이탐은 색이 혼합될 수 있으며, 색이 지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팽이의 윗면을 여러 색으로 칠한 뒤 돌리는 실험을 통해 색의 혼합을 밝힌 것. 그는 또 물체가 강한 빛을 받으면 밝은 색으로 보이고, 어두워지면 바랜 색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관찰하며 빛과 색의 관련성을 알아차렸다. 저자는 아랍의 물리학자들이 동시대 서구의 학자들보다 정확하게 이를 밝혀낼 수 있었던 건 책을 화려한 색으로 치장하는 이슬람 전통 때문이었을 거라고 봤다. 당대 이슬람의 잉크 제작자들은 이미 일상에서 색을 혼합해 썼다. 저자는 인간이 색을 쓰는 이유에 대해 “자신들이 본 것 또는 상상한 것을 더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라며 “색을 사용했다는 건 새로운 지성이 완전히 꽃피었다는 뜻”이라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 모두는 ‘땅’이라는 같은 층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과시하듯 솟아있는 도심의 건물들 사이에서 낮은 땅의 조건에 순응하는 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높은 층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던 사람들이 이곳에선 주변을 우러러봅니다.” 1일 개막한 ‘제4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총감독 조병수 건축가(66)는 비엔날레의 일환으로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 녹지광장에 설계한 파빌리온 ‘땅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에 지층보다 낮은 1290㎡ 규모 저지대를 조성했다. 가장 낮은 자리엔 지름 16m의 연못을 냈고, 주위엔 작은 둔덕들을 만들어 낮은 땅을 감쌌다. 그는 “둔덕에 앉아 둘러보면 멀리 북악산 자락이 끊기지 않고 이 땅과 이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며 “자연과 주변을 배척하지 않고 자신을 낮춰 땅으로 스며드는 것이 바로 ‘땅의 건축’”이라고 했다. 서울 서초구 조병수건축연구소에서 12일 조 건축가를 만났다. 그는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 ‘땅의 도시, 땅의 건축’에 대해 “지난 100년간 경쟁하듯 쌓아올린 건축물들로 인해 끊어졌던 산길 물길 바람길을 다시 잇고 옛 선조들이 살았던 대로 땅에 스며드는 건축을 추구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청 앞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열리는 ‘서울 100년 마스터플랜 전시’는 그의 바람을 보여준다. ‘서울 그린 네트워크’라는 부제로 국내외 건축가 10여 명이 상상한 100년 뒤 서울의 설계도를 선보인 것으로, 한강을 비롯해 서울 도심 곳곳을 잇는 녹지를 구축하는 게 핵심이다. 박희찬(스튜디오 히치)의 설계도 ‘리버/그라운드: 한강 위의 새로운 땅’은 강남과 강북을 잇는 다리에 폭 500m에 이르는 녹지공원을 만들었다. 조 건축가는 “한강은 폭이 워낙 넓은 탓에 강남과 강북을 가로막는 경계가 됐지만 녹지 다리를 조성하면 한강이 산길과 물길, 땅의 길을 잇는 새로운 땅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건축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그는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100년을 내다본 마스터플랜을 미리 마련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이어 “서울 도심에 건물을 지을 때 1, 2층 높이를 비워 공공녹지로 조성할 경우 건폐율에 인센티브를 주는 식으로 민간의 자발적 녹지 조성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땅은 조 건축가의 건축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설계한 경기 양평군 수곡리의 ‘ㅁ자집’(2004년)과 ‘땅집’(2006년), 경남 거제도의 ‘지평집’(2019년)은 지평선에 스며들어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사는 방식이 우리를 만듭니다. 자기를 높이며 주변을 제압하는 공간에서 살아온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길러집니다. 자연은 물론이고 주변 경관을 배려하며 자신을 낮추는 ‘땅의 건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조 건축가) 이번 비엔날레는 열린송현 녹지광장과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서울시청 시민청 등에서 10월 29일까지 열린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